9화. 패

9화. 패

낙영거에 돌아온 온유는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옷을 갈아입고 보주를 데리고 다시금 온부를 나섰다.

두 사람은 온부의 마차를 타지 않고 따로 마차를 한 대 빌렸다.

“천금방(千金坊)으로 가죠.”

천금방은 도성 최대의 도박장이었다. 매일 도박꾼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그래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천금방 문밖 담장 근처에서 한 소년이 몇 명의 사람에게 에워싸여 울면서 빌고 있었다.

도박장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지만 소년 쪽을 쳐다보는 이는 하나도 없어, 이런 광경이 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왼손 새끼손가락을 자를까요? 아니면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자를까요?”

소년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여 눈물범벅이 되었다.

“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희 아버지가 곧 돈을 가져오실 겁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뎁쇼?”

“금방, 금방 오실 겁니다…….”

“지난번에 그쪽 아버님이 돈을 갚아 주면서 앞으로는 내놓은 자식 취급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처…… 천륜을 어찌 그리 쉽게 끊겠습니까? 저희 아버지에게 아들이라고는 저 하나이니 조금만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소년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때 누군가가 두목에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두목은 한쪽을 슬쩍 보더니 차갑게 웃었다.

“일단 손가락부터 하나 잘라라!”

두목의 명령을 받은 왈패는 소년의 왼손을 담장을 향해 꽉 누르고 칼을 꺼내 들었다.

“멈추시오!”

온평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아이고, 온 어르신! 시간을 딱 맞춰 오셨군요. 하마터면 아드님 손가락이 떨어질 뻔했지 뭡니까!”

“아, 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이게 무슨 짓이오! 하늘과 국법이 무섭지도 않소?”

온평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싹수가 노란 아들 때문에 화가 났고, 하나뿐인 아들을 윽박지르는 왈패들 때문에 울화가 솟구쳤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빚을 졌으면 갚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아드님이 갚지 않아 이렇게 험악해진 것 아닙니까? 그럼 차라리 관아에 가서 따질까요?”

온평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돈을 갚지 않고서는 오늘의 이 낭패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비록 시랑부의 집사라고는 해도 상대는 도성에 버젓이 도박장을 차리고 수년째 멀쩡히 운영 중인 왈패 두목이었다. 분명 든든한 뒷배가 있을 것이었다. 괜히 일을 키웠다간 노야께 질책이나 듣기 십상이었다.

“모두 얼마요?”

두목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백 냥이나 된다는 말이오?”

온평은 돈이 아까워 부들부들하면서도 허리춤에서 전대를 꺼내려고 했다.

백 냥 정도면 원래 그에게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놈 때문에 밑 빠진 독처럼 돈이 줄줄 새니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은 백 냥이 아니라 단 한 냥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두목은 싸늘하게 웃었다.

“어르신은 농담도 잘하십니다. 천 냥입니다! 한 냥만 부족해도 아드님 손가락은 우리가 가져가야겠습니다.”

“뭐라고 했소?”

온평의 안색이 당장에 변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이런 날강도보다 더한 놈들!”

두목은 호인 같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어르신, 고정하십시오. 화를 낸다고 뭐가 해결됩니까?”

누군가가 뒤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강도질보다 이게 얼마나 돈 벌기 쉬운데.”

이 말을 들은 온평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난…… 그만한 돈은 없소.”

“없다고요?”

두목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가 귀신 같은 얼굴로 말했다.

“뭐 해? 일단 손가락 하나 잘라!”

부하가 대답하고 칼을 높이 들어 휘둘렀다.

“으악!”

“잠깐!”

소년의 비명과 온평의 고함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소년은 담장에 비스듬히 기댄 채 천천히 흘러내리듯 주저앉았다.

온평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갔다.

“운아, 괜찮으냐?”

온운(溫雲)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네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온평이 길길이 뛰며 소리쳤다.

두목이 웃었다.

“어르신, 어찌 그리 성급하십니까? 아드님은 놀라서 기절했을 뿐입니다.”

온평은 순간 멍했다가 허둥지둥 아들 온운의 손을 살폈다. 왼손과 오른손 모두 아무런 상처가 없는 걸 보고 다시 아들이 기대고 있던 담장을 바라봤다.

칼에 패인 깊은 흠집만 하나 있을 뿐 핏자국은 없는 담장이 그를 비웃듯 서 있었다.

커다란 칼을 들고 있던 왈패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르신께서 이렇게 아드님을 아끼시니 은화 몇 냥에 벌벌 떨진 않으시겠군요.”

“은화 몇 냥이라니! 무려 천 냥이지 않소!”

아들이 빚진 돈을 생각하자 너무 놀라 가출했던 온평의 혼백이 다시 돌아왔다.

두목은 그런 그에게 가깝게 다가왔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띠지 않았다.

“오늘은 한번 봐 드린 겁니다. 다음에는 칼이 애꿎은 담장만 찌르지 않을 거예요. 생각 잘하십시오. 돈을 내놓을 건지, 아니면 아들의 손가락을 내놓을 건지 말입니다.”

“조…… 조금만 깎아 주실 수 없을까요?”

온평은 상대가 평범한 왈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다.

손가락 하나 없다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중에 노야께서 무슨 일이냐고 묻기라도 하시면?

그랬다간 밑 빠진 독 같은 아들의 도박 빚을 갚기 위해 한 짓이 다 들통날 수 있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온평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당장 그렇게 많은 은화를 구할 길이 없으니 시일을 좀 넉넉히 주시면…….”

“며칠이나 말입니까?”

두목이 바로 물었다.

“보름만 주면…….”

두목의 안색이 일그러지는 걸 본 온평은 즉시 말을 바꿨다.

“여, 열흘! 열흘만 주십시오.”

두목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사흘 드리죠. 그때까지 은자를 가지고 와서 아드님을 데려가십시오.”

“사흘은 너무 촉박합니다.”

“그건 어르신이 알아서 할 일이죠.”

두목은 부하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도련님을 모셔라.”

온평의 안색이 일변했다.

“도대체 내 아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두목이 가볍게 웃었다.

“어르신,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사흘 동안은 아드님이 무사할 테니 말입니다.”

아들이 왈패 몇 명에게 끌려가는 걸 보면서 온평의 안색은 몇 번이고 바뀌었다. 그새 몇 살은 늙은 것 같았다.

“그럼 서두르십시오.”

두목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후 뒷짐을 지고 가버렸다.

온평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두 다리를 이끌고 온부로 돌아갔다.

천 냥이라니…….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한단 말인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온평은 깜짝 놀라 눈을 들어 자신을 막아선 이가 누군지 바라봤다.

“보주, 자네가 어찌!?”

“저희 아가씨께서 저기 앞 찻집에서 집사를 기다리고 계세요.”

보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온평은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다가 허둥지둥 보주의 뒤를 따랐다.

“둘째 아가씨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신단 말인가?”

보주는 천금방 쪽을 힐끗 보더니 무표정하게 말했다.

“전 몰라요. 아가씨께서 찾으시니 가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온평은 보주의 반응을 보고 즉시 마음이 불안해졌다.

둘째 아가씨께서 운이 그 녀석이 도박장에서 큰 빚을 진 걸 아신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온평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비틀비틀 보주를 따라 걸어 온유가 기다리는 찻집에 도착했다.

별실에서는 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턱을 괸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온평 집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온평이 다가가 예를 갖췄다.

“둘째 아가씨, 무슨 일로 소인을 찾으셨는지요?”

담담한 눈빛으로 온평을 한참 바라보던 온유는 자신의 시선에 온평이 불안해질 때쯤 싱긋 웃었다.

“온 집사가 오늘 왜 그렇게 허겁지겁 서두르나 했는데, 도박장에 사람을 구하러 갔더라고.”

온평은 안색이 일변하여 깜짝 놀란 얼굴로 온유를 바라봤다.

둘째 아가씨가 자신을 불렀다는 이야기에 도박장에서의 일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추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노야를 모시던 시동 출신이었다. 온부에서 유일하게 노야를 따라 도성에 온 하인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인조차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둘째 아가씨는 지금 어쩌자는 거지……?

온유는 찻잔을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 온평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온평은 영문을 몰라 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아가씨, 소인은 아직 돌아가서 처리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만…….”

온유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가볍게 웃었다.

“돌아가서 돈을 마련하려고?”

온평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사흘 안에 천 냥을 구하려면 쉽지 않겠던데?”

“두…… 둘째 아가씨,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몰라도 다 헛소문입니다.”

온유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보주야.”

보주가 기다렸다는 듯 소매에 손을 넣어 은표 한 뭉치를 꺼내 온평에게 내밀었다.

온평은 은표를 받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 이게 무슨 뜻이십니까?”

“보주, 너는 문밖을 지켜.”

보주가 묵묵히 밖으로 나간 다음 온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온 집사, 우선 아버지가 부탁한 일부터 얘기해 볼까?”

온평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 그게 무슨…….”

온유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온 집사에게 시킨 거짓말 말이야. 과거를 보러 오기 전에 이미 친척 누이와 혼인을 올렸다는 거짓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한마디에 온평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온유는 서두르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온평은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 어디서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으셨는지 몰라도…….”

온유의 낯빛이 확 굳어졌다.

“충고 한마디 할게. 먼저 은자 천 냥을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온평은 누군가에게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둘째 아가씨가 어떻게 그 일을 안 거지? 게다가 노야가 나에게 당부하신 일까지 다 알다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소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옛말에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고 했어. 온 집사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해?”

온평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미모의 소녀가 자신을 무섭게 다그치고 있었다.

이건 정말 귀신이 곡할 일이야!

“아, 아가씨 생각은 어떻습니까?”

도박장에서 협박당한 데다가 평소와 너무도 다른 온유의 추궁까지 당하니, 평소에는 쉽게 당황하지 않는 성격인 온평도 안절부절못했다.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온 집사 생각이 궁금한 거지.”

온유는 무표정하게 온평을 바라봤다.

“온 집사는 그 은표를 받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사실을 말할 거야? 아니면 나쁜 일을 도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사흘 뒤에 온운의 시체를 볼 생각이야?”

“시체라니요!?”

온 집사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온유는 손을 들어 머리에 꽂은 복숭아꽃 모양으로 장식한 금비녀를 만지며 살포시 웃었다.

“돈으로 못 할 일이 없다고 하잖아? 천 냥 때문에 사람 손가락을 자르는 작자들이니, 만 냥을 주면…… 목숨 끊는 걸 마다하겠어?”

“아, 아가씨! 어찌…….”

온유는 정색한 표정으로 비녀를 빼서 탁자를 내리쳤다.

“온 집사도 알겠지만, 나에게 만 냥은 큰돈도 아냐. 아! 그러고 보니 난 온 집사의 비밀을 한 가지 더 알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