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노부인
눈 깜짝할 사이 시간이 지나 그날이 되었다.
날씨가 좋아 창문을 활짝 열었다. 청량한 바람이 은은한 꽃향기를 싣고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임 씨는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딸들을 보자 눈이 즐거웠다.
“너희 말대로 이렇게 좋은 날 집에만 있기는 아쉽지. 다녀오너라. 은자는 넉넉하니?”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준비해 뒀어요.”
환하게 웃는 어머니를 보며 온선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차마 겉으로는 티를 내지 못했다. 특히 온여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네가 동생을 좀 잘 챙기고.”
임 씨는 지나가는 말처럼 당부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딸들이 좀 걱정됐다.
장녀 온선은 진중하고 차녀 온유는 영리했다. 남들은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한 걸 아쉬워했지만 그녀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온선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올린 뒤 동생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딸들이 나가자마자 온여귀가 몸을 일으켰다.
“노야, 출타하시려고요?”
“그렇소.”
온여귀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오늘은 쉬는 날이잖아요? 뭣 때문에 이렇게 일찍 출타하시려고요?”
돌아보는 온여귀 눈 속에는 짜증이 숨어 있었다.
“볼일이 있소.”
임 씨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너무 바쁘신 것 아닌가요? 상의드릴 일도 있는데 말할 틈도 없네요.”
“뭔데 그러시오?”
온여귀가 건성으로 물었다.
그의 눈에 임 씨는 온종일 어떻게 돈을 쓸까 아니면 두 딸아이를 어떻게 꾸밀까 하는 생각뿐인 여인이었다. 그런 임 씨가 무슨 대단한 일을 상의하자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일단 앉아서 얘기 좀 해요.”
임 씨는 속으로 괜히 살짝 짜증이 났다.
아무래도 남편이 변한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느냐고 하면 딱 짚어 내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자리에 앉은 온여귀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말해 보시오. 무슨 일이오?”
임 씨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공연히 심란해진 마음을 가라앉혔다.
“얼마 전 정왕부에서 들어온 혼담 덕분에 선아 혼인 문제에 너무 여유를 부렸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벌써 열여덟이니 이제 혼사를 생각해야죠.”
사실 이 년 전에도 임 씨는 온여귀와 큰딸 온선의 혼사에 관해 상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견이 갈렸다.
임 씨 생각에는 정수가 괜찮은 사윗감 같았다. 온선과 나이도 서로 잘 맞고 그의 출신 내력과 됨됨이도 잘 아니, 두 아이가 서로 뜻이 맞으면 혼인을 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온여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들 보기에 훌륭한 사윗감을 원했다. 고관대작 집안의 공자 중 하나를 골라야만 큰딸에게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한참 동안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 노장군이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지금까지 미뤄진 것이다.
온여귀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일어섰다.
“난 긴한 일이 있으니 선아의 혼사에 관해서는 나중에 얘기합시다.”
“노야…….”
온여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 밖으로 사라지는 걸 두 눈 멀뚱히 뜨고 보던 임 씨는 식은 찻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영 속이 답답했다.
* * *
온유와 온선은 온부를 나서자마자 바로 장군부로 향했다.
노부인은 두 손녀가 왔다는 하인의 말을 듣고 반가우면서도 의아해했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냐? 너희 아침은 먹은 게냐?”
노부인은 한 손에 손녀 하나씩을 잡고 웃으며 물었다.
온선은 좌우를 슬쩍 살폈다.
“외할머니, 저희가 할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외손녀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본 노부인은 턱짓으로 방 안에서 시중을 들던 이들을 내보냈다.
금세 다들 물러가고 외할머니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시녀 하나만 남았다.
“이제 말해 보렴. 무슨 일인데 그러니?”
노부인은 진지하게 들을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심각한 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꽃다운 나이인 만큼 외손녀들에게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상사병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외할머니, 신의가 처방한 약은 잘 드시고 계시죠?”
온선이 묻자,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거나 화를 내지는 마세요.”
온선은 여전히 노부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실 수 있게 말했다.
노부인은 순간 어리둥절해서 큰손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또 작은손녀를 바라봤다.
온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할머니의 눈을 마주 봤다.
“외할머니는 분명 화가 나실 거예요. 저희 둘은 혹시라도 외할머니가 홧김에 몸이 상하실까 한참 고민하다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노부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차분하게 말했다.
“알겠으니 이제 말해 보거라. 너희 둘 중 누구의 일이냐?”
설마 사랑하는 손녀 중 하나가 어떤 썩을 놈과 선을 넘었나?
화내지 말자. 화를 내면 안 돼. 우리 손녀 일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편들어 줘야지.
산짐승처럼 자란 딸이 굳이 과거에 급제한 서생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지 않았던가.
“잠깐 기다려라. 이 할미가 차 먼저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들으마.”
노부인은 늙은 시녀가 건넨 찻잔의 물을 반쯤 마시고 나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자, 이제 말해 보렴. 이 할미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너희 편이다.”
그러자 온선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지난 일 년 동안 어머니와 자주 다투셨어요.”
“둘이 말다툼을 한다고?”
노부인은 속으로 한숨을 돌렸다.
딸과 사위가 화목하지 않은 것도 걱정거리이기는 하지만, 원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니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말다툼이 아니에요, 외할머니.”
온선이 다시 한번 외할머니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뜸을 들였다.
노부인이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설마 손찌검을 한 것이냐!”
완청(婉晴)이 그 아이가 아무리 어린 시절 말괄량이였다고 한들, 설마하니 사위를 때린 건 아니겠지?
온선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제야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가…… 바깥에 딴살림을 차렸어요.”
“뭐라고!?”
노부인은 안색이 돌변해 탁자를 쾅 소리가 나도록 후려치며 일어났다.
“외할머니, 고정하세요!”
노부인의 몸이 살짝 휘청이자 온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노부인은 천천히 자리에 앉아 두 자매를 한참 응시했다.
“구체적으로 뭐가 어찌 된 건지 이 할미에게 말해 줄 수 있느냐?”
온선은 온유를 힐끗 보고 말했다.
“저희도 우연히 알게 됐어요…….”
노부인은 얼굴 가득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 돼지만도 못한 놈! 어찌 그런 놈인 걸 몰라봤을까?”
온유는 외할머니의 옷소매를 꼭 잡고 차분하게 말했다.
“화내시면 안 돼요. 외할머니가 화를 참지 못하고 몸이 상한다면 저와 언니는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겠어요?”
노부인은 나이가 들어 거칠어진 손을 뻗어 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아야, 이 할미는 정정하니 걱정 말거라.”
온유와 온선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처음 진상을 알았을 때가 가장 고비였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그 충격을 견뎌내신 것 같았다.
“그 여자와 두 자녀는 마화 골목에 살아요.”
노부인은 몸을 일으켜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가자. 이 할미가 직접 그곳에 가 봐야겠다!”
* * *
마화 골목은 여의방 거리에 있는 골목으로, 놀랍게도 장군부에서 멀지 않았다.
노부인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화가 났다.
시간을 따져 보니 그 썩을 놈이 완청이와 혼인을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딴살림을 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장군부 근처였다니, 자신과 돌아가신 노장군을 업신여긴 것 아닌가!
“그 세 사람은 온종일 집에 있느냐?”
마차 안에서 노부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온선이 대답했다.
“상 씨와 그 딸은 대부분 집에 있고, 아들 상휘는 학당에서 글공부하다가 저녁에야 돌아와요.”
노부인은 지팡이를 꼭 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거운 가운데,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섰다.
온선과 온유가 먼저 내린 다음 손을 뻗어 외할머니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부인은 두 손녀의 손을 잡지 않고 마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가자꾸나.”
외할머니의 빠르고 힘이 넘치는 걸음걸이를 본 두 자매는 다시 자신들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서로 눈길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긴장감이 단숨에 풀리는 걸 느꼈다.
“저 골목의 세 번째 집이냐?”
온선이 그렇다고 했다.
“너희 아비는 보통 언제쯤 이곳에 오더냐?”
“제가 며칠 지켜봤는데, 아버지가 이곳에 온 건 딱 한 번 봤어요.”
노부인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운이 좋은 셈이로구나.”
노부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본 온선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온여귀가 평소와 같은 옷차림으로 허겁지겁 마화 골목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외할머니가 이곳에 오자마자 아버지가 저 집에 드나드는 걸 보시게 되다니!
노부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골목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담장은 그리 높지 않구나. 취향(翠香)이 네가 안쪽 상황을 좀 살펴보고 오너라.”
취향이라고 불린 이는 노부인을 모시는 시녀로 이미 마흔이 넘었다. 그녀는 알겠다고 답하고 골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담장 너머를 훔쳐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부인, 온 노야가 세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중입니다.”
“그 셋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느냐?”
“여자는 서른 남짓 되어 보였고, 그 아들은 큰아가씨와, 딸은 둘째 아가씨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습니다.”
노부인은 골목 입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응시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운이 나쁘지 않구나. 저 집 식구들이 빠짐없이 있다니 말이야.”
온여귀가 딴살림을 차린 것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었다면, 자기 딸이 고른 사위이고, 손녀들도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니 어느 선까지는 눈감아 줄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딴살림을 차린 여자의 나이와 그 자식들의 나이를 보니 다른 길은 없었다. 저런 배은망덕한 놈과는 철저하게 연을 끊어야 한다! 하지만 깔끔하게 의절하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저 썩을 놈이 자신의 딸과 혼인할 때 맘속에는 다른 여자를 품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내 딸이 이런 대접을 받을 수는 없지!
한편,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깨닫지 못한 온여귀는 여인과 두 자식을 데리고 마화 골목을 빠져나와 길가에 서 있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온선은 그제야 그 마차를 자세히 보고 순간 안색이 변했다. 그건 놀랍게도 온부의 마차였다! 설마 아버지가 바로 오늘 저들을 온부로 들이려 했던 걸까?
노부인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뛰쳐나갔다.
“외할머니!”
놀란 온선이 동생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바로 따라갔다.
노부인은 잰걸음으로 온여귀에게 달려가 지팡이를 들어 냅다 내리쳤다.
“이런 썩을 놈, 감히 내 딸 몰래 딴살림을 차려? 오늘 내 손에 죽어 봐라!”
온여귀가 어디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설사 예상했다고 해도 평생 문관으로 살아와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온여귀는 한때 산적 두목의 부인이었던 노부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팡이는 야무지게 온여귀의 구석구석에 내리꽂혔고, 온여귀는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그 비명이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점포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가던 행인들도 멈춰 서서 구경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이 구경꾼들로 가득 채워졌다.
“누구신데 이러십니까? 저희 아버지에게 무슨 짓이에요!?”
온여귀를 따르던 소년이 손을 뻗어 노부인의 지팡이를 잡았다.
그러자 어느새 노부인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온유가 소년의 오금을 걷어찼다.
소년은 다리가 풀려 휘청하더니 땅바닥에 엎어졌다.
“휘아야!”
“오라버니!”
상 씨와 상청의 아름다운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둘은 상휘를 부축해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