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달빛 아래

11화. 달빛 아래

온여생은 두려우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자신이 술김에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을 창문 가까이 대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헛것을 봤나?

온여생이 한숨을 돌리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방 안에서 쿵 하고 뭔가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그는 머릿속이 하얘져 앞뒤 가리지 않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허둥지둥 등불을 켜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온여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술기운이 싹 가시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우리 아들이 설마 귀신한테 해코지를 당한 건 아니겠지?

안 돼! 우리 봉이를 찾아야 해!

온여생 부자가 온부에 왔을 때 과거를 준비해야 하는 온봉을 위해, 온여귀는 집사에게 명하여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작은 뜰이 달린 가장 조용한 거처를 내주었다.

둥근 문 하나만 지나면 바로 꽃나무가 가득한 정원이었다.

온여생은 몇 걸음을 내달려 정원에 도착했다.

운치 있는 정원에는 온통 꽃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기 어려웠다.

온여생은 꽃나무 숲을 빙 돌아가다가 순간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저 앞 나무 아래 하얀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것이다.

온여생은 깜짝 놀라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술을 마신 사람 같지 않은 재빠른 동작이었다.

그는 숨을 꾹 참고 조심스레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하얀 그림자는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온여생은 눈을 비비고 희미한 달빛을 빌려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그것은 흰옷을 입은 소녀였다.

소녀는 나무 위에 앉아 두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아삭아삭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저건…….

온여생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둘째 아닌가?

온여생은 온부에서 한 달 남짓 머물렀기 때문에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청량한 달빛 아래 나무 위에 앉아 즐겁게 뭔가를 먹고 있는 소녀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하지만 그걸 직접 보고 있는 온여생은 모골이 송연했다.

이 시간에 나무 위에 올라가서 뭘 먹는 거야? 정상적인 대갓집 규수에겐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벙어리이던 둘째가 갑자기 말을 한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귀신이 들린 건 아닐까?

사르륵…….

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온여생은 너무 놀라 뒤로 몸을 숨겼다.

한 푸른 옷을 입은 시녀가 다가와 나무 위의 소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달빛을 충분히 쐬셨으면 이제 돌아가시죠.”

헉……. 온여생은 놀라서 숨을 들이마시다가 자기 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달빛을 쐐? 일월정화를 흡수한다는 건가!?

“가자!”

희미한 어둠 속에서 흰옷을 입은 소녀의 목소리는 유달리 신비로웠다.

두 소녀는 온여생이 숨어 있는 쪽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온여생은 풀숲에 숨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졌을 때 푸른 옷의 시녀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아가씨, 잠시만요. 입가에 뭐가 묻으셨어요.”

흰옷 소녀는 손에 든 것을 한 입 베어 물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밤이라 볼 사람도 없는데, 뭐. 돌아가서 닦아도 돼.”

두 사람이 멀어지고 나서야 온여생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둘째가 먹던 건……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온여생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는 온몸에서 힘이 빠진 듯 호흡도 가쁘게 쉬었다.

하늘의 달이 구름 뒤로 숨자, 더욱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온여생은 겨우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럴 수가……. 둘째가 사람을 먹는 요괴였다니!

온여생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한참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우리 아들!

설마 우리 봉이가 잡아먹힌 건 아니겠지?

온봉의 처소에서 본 그림자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떠오르자 온여생은 끄윽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바람에 창밖 넓은 파초 잎사귀가 흔들리며 창틀을 가볍게 두들겼다.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던 온여생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밤새 뜬눈으로 밤을 새운 온여생은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아들의 처소로 향했다.

아들의 처소는 텅 비어 있었다. 아들도, 온부에서 아들에게 붙여 준 시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아!”

온여생이 문을 두들기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팔노야, 왜 그러십니까?”

여인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청소를 맡은 시녀임을 알아본 온여생이 입을 열었다.

“너희 둘째 아가씨는…….”

그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요괴다!”라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둘째가 내가 목격했다는 걸 알면 안 돼. 알게 되면 나도 잡아먹으려고 할 게다!

어떡하지?

어떡해?

온여생은 제자리를 몇 바퀴 돌다가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종제에게 알려야 해!

벌에 쏘인 놈처럼 달려가는 온여생을 보며 청소하던 시녀는 입술을 실쭉거렸다.

법도도 모르는 가난뱅이 주제에.

* * *

이때 온여귀는 이미 조회에 참석하러 입궁한 후였다. 온여생은 허탕만 치고 온여귀가 일하는 관아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찾아가서 기다렸다.

온여귀는 퇴청 후 종형(*從兄: 사촌 형)이 와서 기다린다는 보고를 들었다.

온여귀는 단 한 번도 온여생을 중시한 적이 없었다. 그저 체면을 따지는 사람이었기에 고향에서의 명성을 감안해서 종형의 체면치레만 해 주는 정도였다. 그래서 공공연한 자리에서 만나 자신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형님이 이곳까지 오다니 무슨 급한 일이 있습니까?”

온여귀는 애써 웃는 얼굴로 물었다.

온여생은 좌우를 슬쩍 살피더니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였다.

온여귀가 눈썹을 찌푸렸다.

종형이 창백한 얼굴로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주저하자 분명 작은 일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차분히 말했다.

“자, 이제 아무도 없으니 무슨 일인지 편히 말씀하십시오.”

온여생은 문 쪽을 슬쩍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가 듣지는 않겠지?”

“걱정 마십시오. 그럴 리 없습니다.”

온여생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우야, 아우의 막내딸이 요괴임이 분명하네!”

“뭐라고요?”

온여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아우의 막내 유아 그 아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란 말이네!”

온여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낯빛이 착 가라앉았다.

“형님…… 잠이 덜 깨신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린가? 난 어제 밤을 꼬박 새웠네!”

온여귀가 믿지 않자 온여생은 애가 타서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말했다.

“내가 직접 봤다니까! 자네 막내딸이 사람 손가락을 씹고 있었어! 사람의 손가락 말일세!”

온여귀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형님, 편찮으신 것 같으니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일단 그 얘긴 그만하시지요.”

온여생은 벌떡 일어나 조바심에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열째 아우야, 내가 거짓부렁이라도 말하는 줄 아느냐? 어젯밤에 정원에서 내가 직접 보았단 말일세!”

“여덟째 형님, 한밤중에 정원에서 뭘 하신 겁니까?”

온여귀의 말투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온여생의 말 때문에 짜증이 난 게 분명했다.

“난 어젯밤에 술 한잔 걸치고 봉이를 보러 갔었네. 그런데 방 안에서 웬 그림자가 움직였는데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더군. 봉이가 걱정되어서 찾아 나섰다가 정원에서 자네 막내딸이 사람 손가락을…….”

쾅!

온여귀는 더는 참으려야 참을 수 없어 탁자를 내리쳤다.

“형님! 분명히 술에 취해 헛것을 보셨군요. 아직도 술주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우야……, 왜 내 말을 안 믿는 것이냐?”

온여생은 급한 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요괴와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열째 아우는 그 요괴의 아비이니 그래도 요괴를 굴복시킬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뭘 믿으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조정대관인 저의 자식이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라는 걸 믿으라고요?”

온여귀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종형을 몰아붙였다. 더 이상 온화한 가면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에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를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저 말이 만에 하나 정말이라고 해도 남들 귀에 들어가면 안 될 일이었다.

이미 온여귀는 종형에게 진저리가 났다.

촌구석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녀자들처럼 귀신 타령이나 하다니!

사실 종형이 귀신을 믿든 말든 그와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를 끌어들이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맹세코 헛것을 본 게 아니네. 내 말이 거짓이라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네!”

종형이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자 온여귀는 화가 난 나머지 혐오감까지 들어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

“마침 지금 처리할 공무가 많지 않으니 형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죠.”

그 속을 모르는 온여생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온부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마침 시동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던 한 청년을 발견했다.

청년도 두 사람을 보더니 공수하며 예를 올렸다.

“아버지, 숙부님.”

온여귀는 눈살을 찌푸리며 온여생을 힐끗 보았다.

온여생은 크게 놀라 청년을 가리키며 물었다.

“봉아, 너…… 너 별일 없었느냐?”

온봉은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밤에 외박을 했습니다.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어디를 갔다 온 게냐?”

온여생은 놀란 마음에 대문 밖이라는 것도 잊고 큰 소리로 물었다.

“소자…….”

온여귀가 냉담하게 온봉의 말을 끊었다.

“여덟째 형님, 봉이에게 묻고 싶은 건 들어가서 물으십시오. 관아를 계속 비워 둘 수 없으니 전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아우야, 열째 아우야…….”

온여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오르는 걸 보고 온봉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숙부님이 왜 저러십니까?”

늘 온화하던 숙부가 냉담하게 돌아서는 모습이 이상했던 것이다.

“어젯밤 도대체 어디를 갔던 게냐?”

온여생이 벌컥 화를 내며 물었다.

온봉이 온여생을 집 안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아버지,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두 사람은 대문을 들어서서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임 씨가 두 딸을 데리고 나오는 걸 마주쳤다.

온여생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멈춰 자기도 모르게 온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온유는 그와 마주 보며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온여생은 부들부들 떨며 허둥지둥 시선을 거뒀다.

“아주버님, 봉이와 함께 외출했다 돌아오십니까?”

임 씨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임 씨는 단순한 성격이었다. 남편의 종형이니 상대가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서운하지 않게 잘 대접하는 게 당연했다.

온여생은 참지 못하고 다시 온유를 슬쩍 쳐다보려고 했으나 다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임 씨를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임 씨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주버님 눈가에 경련이 있으시네요. 의원을 불러 진맥을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그럴 필요 없어.”

온여생은 급히 사양하며 도망치듯 처소로 돌아왔다.

“아버지, 오늘 좀 이상하신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들의 물음에 온여생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물었다.

“넌 어제 왜 돌아오지 않은 게냐?”

“친우와 술을 마시다가 조금 과하여 그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습니다.”

“그럼 네 시동이라도 돌려보내 전갈을 했어야지!”

온봉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시동을 힐끗 보고 말했다.

“청풍(聽風) 이 녀석은 취한 절 챙겨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애가 전갈을 전하러 간 사이, 친우 집 하인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데 좀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봉이 너 불량한 친우를 사귀면 아니 된…….”

“상서부 공자였습니다.”

“상서부? 그럼 괜찮구나. 하지만 어젯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다.”

온여생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혹시 내가 정말 헛것을 본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