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순박한 사람

19화. 순박한 사람

“비켜라! 비켜! 거기 무슨 일이냐?”

그때, 관병들이 달려와 구경꾼들을 밀어내며 길을 만들었다.

“누가 길을 막고 싸움박질하는가.”

그중 앞장서던 군관이 호통을 치다가 중년 남자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는 노부인을 보고 말을 멈췄다.

만약 어느 집 어머니가 아들을 혼내는 거라면 집안일이니 나서기 그랬다.

관병들이 왔지만 노부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온여귀를 두들겨 팰 뿐이었다.

맞고 있는 아버지가 걱정된 상휘가 소리쳤다.

“군관 어르신,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주십시오. 저러다 맞아 죽겠습니다.”

온유도 저 정도면 맞을 만큼 맞았다는 생각에 한 걸음 나아가 노부인을 말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외할머니, 이제 좀 쉬세요. 이러시다 몸 상하시겠어요.”

노부인도 정말 때려죽이지는 못할 걸 알았기에 못 이기는 척 매타작을 멈췄다.

“……온 대인!?”

군관은 그제야 온여귀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노부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 장군부의 노부인이시잖아!

“부끄러운 꼴을 보였네.”

온여귀는 두 손을 맞잡고 군관에게 인사를 한 다음 노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투는 여전히 공손했다.

“이 사위도 장모님 마음이 어떠실지 잘 압니다. 다만 제가 한 말은 구구절절 사실이고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노부인이 차갑게 웃었다.

“네놈이 노장군이 안 계신다고 그분에게 똥물을 뿌리려고 하는구나!”

온여귀는 차분히 읍을 올렸다.

“장모님이 믿지 못하시겠다면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을 불러 물어보시지요.”

상황을 아는 사람?

방관자들은 본시 근거도 없이 약자의 편이 되기 쉬웠다.

스무 해 전이면 임 노장군은 위세가 대단한 정국공이었고, 온여귀는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한미한 가문 출신의 진사였다.

국공의 여식이 젊고 잘생긴 진사에게 반해 국공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그로 하여금 본처를 버리게 했다는 것은 이야기책에나 나올 것 같은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구경꾼들의 마음은 이미 온여귀의 주장에 좀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상황을 아는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하자 더욱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누구냐?”

노부인이 매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와 노장군은 평생을 함께한 사이였다. 노장군이 불같은 성격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본처를 버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장모님도 아실 겁니다. 얼마 전 고향에 사는 종형이 오는 봄 회시를 보는 아들을 위해 함께 상경했지요. 그래서 종형은 지금 마침 온부에 머물고 있습니다.”

온여귀의 안색은 갈수록 차분해졌다.

“제가 친척 누이와 혼인한 건 고향에서는 다 아는 사실입니다. 종형을 불러 물으면 진상이 명백해지겠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 노부인의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온유는 온여귀의 말에 마음이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아버지는 역시 조금도 양심에 찔려 하지 않는구나.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겠지.

온가촌은 도성에서 먼 곳이었다. 오가는 데 족히 두 달은 걸릴 거리였다. 그러니 힘들게 사실을 확인할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누가 확인하러 간다고 해도 온가촌은 외부인에게 폐쇄적이고 친족 편을 드는 마을이었다. 게다가 여러 해 동안 벼락출세한 아버지의 덕을 톡톡히 봤으니 누가 사실을 말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꺼릴 게 없다고 해도 자신의 양심이 있다면 어찌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처자식을 궁지로 몰 수 있겠는가?

전생에 외할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녀와 언니의 인생도 그로써 크게 틀어지고 말았다.

온유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지만 표정은 더욱 담담해졌다.

온유가 냉정한 데 비해 온선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린 것을 미리 알았다고는 해도 온선은 지난 십팔 년 동안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자란 소녀였다. 그런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할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니 온선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한 말이 사실이라곤 믿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사실이면 어쩌나 걱정했다.

만에 하나 정말 아버지 말이 맞는다면 어머니는 어떡하지?

그리고 자신과 동생은 또 어쩌지?

온선은 떨리는 손으로 온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자신은 어떤 결과이든 간에 동생을 지켜 줄 것이다!

온선의 두려움을 느낀 온유는 오히려 언니의 손을 꼭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버지 말은 거짓말이야.”

온선의 동공이 순간 오그라들며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온선은 동생의 확신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랐지만 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하기야, 아버지를 진작부터 의심하던 유아가 어머니와 자기들 자매를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아버지를 갑자기 믿을 리는 없었다.

이건 고민할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동생의 손을 꼭 쥐고 있자, 온선의 마음이 순간 차분해졌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건 혹시라도 정말 외할아버지가 떳떳하지 못한 수단으로 아버지를 핍박한 것이라면, 그래서 어머니의 정실부인 자리가 처음부터 남의 것을 빼앗은 거면 어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럼 자신과 동생의 출생 자체가 오히려 저 여자에게 불합리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이라면 무서울 것이 뭐가 있는가?

아버지가 세상 사람을 다 속여도 양심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좋다! 네 종형을 찾아가서 영문을 물어보자!”

노부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망설임 없이 몰아붙였다.

하지만 온여귀는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그가 걱정하던 한 가지는 노부인이 자신의 주장을 다 무시하고 그냥 입궁하여 태후 면전에서 울고불고 하소연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장모는 예상대로 움직였다. 갑자기 죽은 장인을 끌어들인 것에 화가 나선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온 것이다.

노부인은 마차도 타지 않고 앞장서서 온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몇 걸음 떼다가 소리쳤다.

“완청아, 뭘 멍하니 있느냐. 어서 와서 이 늙은 어미 좀 부축해라!”

아직도 멍하니 있던 임 씨는 무의식중에 어머니를 쫓아가다가 급한 마음에 넘어질 뻔했다.

노부인이 딸에게 손을 뻗으며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가자!”

모든 게 혼란스럽던 임 씨는 눈빛이 조금 되살아났고 노부인의 팔을 부축했다.

노부인과 사람들이 온부로 향하는 걸 보고 구경꾼들도 대부분 망설임 없이 그 뒤를 쫓았다.

한참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그 결과를 모르게 되는 것만큼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봐야지.

조금 전까지 꽉 막혔던 길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그 자리엔 질서를 유지하러 분주히 움직이는 관병만이 남았다.

“군관 대인, 우리는 어찌합니까?”

군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쉬운 마음을 간신히 참고 말했다.

“순찰이나 계속하자.”

어찌 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만에 하나 양쪽이 치고받기라도 하면 군관인 자신은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었다.

한쪽은 공신 가문 장군부였고, 한쪽은 병부시랑 온부였다. 까딱 잘못 처리하면 크게 경을 칠 것이었다. 불에 데어 봐야 뜨거운 줄 아는 건 아니니 하던 순찰이나 하기로 한 것이다.

* * *

온부는 여의방에서 멀지 않았다.

집사 온평이 일어난 소동에 관해 듣고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노야, 이게 무슨…….”

온여귀는 온평의 호들갑을 무시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팔노야는 지금 안에 계시느냐?”

온평은 노부인을 위시한 모두를 슬쩍 본 다음 숨겨 둔 패를 꺼낼 때가 되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혹시라도 얼굴에 티가 날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팔노야께선 아침 일찍 나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같다’고?”

온여귀는 집사의 대답이 너무도 못마땅했지만, 그보다도 온여생에게 더 화가 났다.

아침에 일부러 사람을 보내 오늘은 외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도대체 어딜 간 것인가?

“소인이 당장 가서 문지기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온평은 문지기에게 묻고 나서 허겁지겁 돌아와 확실하게 말했다.

“팔노야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온여귀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당장 사람을 보내 팔노야를 찾아오너라.”

구경하러 쫓아온 사람들은 안달이 났다.

증인이 집에 없다니! 기다린다고 저들이 온부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우리의 구경은 거기서 끝나버리는 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온여귀가 입을 열었다.

“장모님, 일단 안에 들어가 잠시 쉬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온선도 나서서 말했다.

“외할머니, 당숙이 언제 올지 모르니 일단 들어가세요. 제가 차를 내올게요.”

온선은 차가운 눈빛으로 따라온 구경꾼들을 돌아봤다. 저들은 대부분 아버지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당숙은 아버지의 친척이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버지의 말에 맞장구를 칠 가능성이 컸다.

당숙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말이 맞는다고 하면 어머니 쪽이 불리해질 것이었다.

노부인도 외손녀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온선은 한숨을 돌리고 서둘러 노부인의 팔을 부축했다.

바로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쭈뼛쭈뼛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우야…….”

온여귀는 온여생을 보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덟째 형님, 어디 가셨던 겁니까?”

“무슨 일 있는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온여생은 눈을 반짝하고 자기도 모르게 온유 쪽을 힐끔 봤다.

곁눈질로 본 조카딸은 무표정하게 그를 마주 봤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온여생은 심장이 움찔해서 하마터면 두 손으로 눈을 가릴 뻔했다.

이 밝은 대낮에도 돌아다니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도 나서다니. 저 요괴는 사람을 정말 꼼짝 못 하게 몰아붙이는구나!

온여귀는 얼어붙은 종형을 보고도 그가 공포에 질린 줄은 몰랐다. 그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말주변이 없고 공식 석상에 나선 적이 없는 시골뜨기인 게 티가 났다. 그래서 온여귀는 오히려 사람들이 이 종형의 말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모님, 고향에서 올라온 제 종형입니다. 심성이 순박한 사람이니 뭐든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의 눈길이 온여생에게 옮겨갔다.

“온여귀의 종형 되는 사람이오?”

“네, 네…….”

“그럼 온여귀가 혼인한 게 언제인지 기억하오?”

노부인에게 향했던 온여생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온유를 향했다. 소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머물러 있는 걸 보자 즉시 오금이 저려 허겁지겁 시선을 거두고 이번에는 임 씨를 바라봤다. 구경꾼들 눈에는 두리번대는 것이 그야말로 어리숙한 시골뜨기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우의 혼인한 날이야 저보다 제수씨가 더 잘 알지요.”

‘순박한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