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序)
밤이 깊은 장춘가(長春街)는 한산하고 썰렁하기만 했다. 몇몇 점포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희미한 등롱 불빛만이 지붕과 길가에 쌓인 눈에 따뜻한 기운을 살짝 덮어 주고 있었다.
온유(溫惟)는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가리고, 쌓인 눈이 녹지 않은 청석판 길을 유연하고 날렵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몇 걸음 가다가 멈춰 서더니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연지와 분을 파는 가게 옆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좁고 깊은 골목 안은 사람 마음을 불안하게 할 정도로 조용했다. 온유는 한 집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문은 처음 한 번 두드리자마자 바로 열렸다.
문 안에서 나타난 여자는 놀란 눈으로 온유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온유를 방 안까지 끌고 들어간 여자는 온유를 향해 쓰러지듯 엎드려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흑흑…… 둘째 아가씨, 아가씨가 이렇게 살아 계실 줄 생각도 못 했어요!”
온유는 속눈썹을 가볍게 떨면서도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소매에서 곱게 접은 종이 하나를 꺼내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가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받아 들고 촛불에 가까이 비춰 봤다.
[연향(蓮香)아, 언니는 어떻게 죽은 거야?]
연향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둘째 아가씨, 큰아가씨는…….”
온유는 입술을 깨물며 다급한 마음을 참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쪽지의 질문을 다시 가리켰다.
도성에 사는 사람들 중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시랑부(侍郎府) 온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가 태어날 때부터 말을 못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연향은 허둥지둥 눈물을 닦고 입을 열었다.
“그날 아가씨는 노야(*老爺: 어르신, 나리 등 사내를 높여 부르는 말)와 함께 출타했다가 저녁때야 돌아오셨어요. 그리고 내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셨죠. 그날 밤 소하(小荷)가 잠에서 깼다가 아가씨가 목을 매신 걸 발견했습니다……. 낮에 아가씨를 모셨던 소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추궁했더니 소하가 하는 말이…….”
온유는 연향을 응시하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향은 창백한 낯빛으로 심호흡을 하더니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소하가 하는 말이…… 아가씨께서 다른 사내에게 희롱을 당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온유는 두 손을 탁자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었다. 산을 허물고 바다를 뒤집을 만한 분노를 겨우 억누른 온유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가리키고 다시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연향은 바로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종이와 먹물이 없어서 망설이던 연향은 입술연지를 꺼냈다.
온유는 손가락 끝에 연지를 묻혀 탁자 위에 글씨를 썼다.
[그게 누구지?]
연향은 고개를 가로젓고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하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얼굴도 보지 못했다고요. 다만 노야의 반응으로 볼 때, 그 사내는 평범한 신분이 아닐 것 같다고 했어요……. 아가씨의 자진이 알려진 다음, 소하는 그날 새벽 아가씨 뒤를 따라갔어요. 하지만 전 소하가 자진한 게 아니라 입막음을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그래서 혼란한 틈을 타 백작부(伯爵府)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이름을 감추고 장춘가에 숨어 살았지요…….”
온유의 가슴이 분노로 들썩였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같이 괴로웠다.
삼 년 전, 그녀는 아버지와 계모의 비열한 계획을 눈치채고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던 집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이미 시집가서 잘 살 줄 알았던 언니가 자신과 비슷한 일을 당했을 줄이야.
“그런데 삼 년 전 온부(溫府)에서 온 연락으로는 둘째 아가씨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죠?”
온유는 입술연지를 찍어 탁자에 글씨를 썼다.
[나를 노리는 자가 있어 몸을 피한 거야.]
연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그때 회임 중이던 아가씨는 둘째 아가씨 소식에 너무도 상심해서 결국 아기씨를 잃으셨어요. 처음에는 아가씨에게 자상하던 노야도 그 후로는 점점 아가씨에게 쌀쌀맞게 대하셨죠…….”
온유는 꼼짝도 안 하고 연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탁자 위 촛대에 촛농이 넘칠 때가 되어서야 떠나려고 방을 나섰다.
“어디 가시려고요?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계세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연향은 떠나려는 온유를 따라나서며 말했다.
온유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말을 못 하니 자세한 설명은 하지 못하고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엔 작은 눈송이가 섞여 있었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연향에게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라고 한 다음 빠른 걸음으로 그 골목을 떠났다.
골목을 나서자 바람이 더 거세졌다. 바람을 맞은 얼굴이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온유는 그런 매서운 추위도 느끼지 못하고 잰걸음으로 한 방향을 향해 걸었다.
바람이 귓가에서 울부짖었고, 극도의 추위는 그녀의 감각을 얼어붙게 했다. 그 순간 그녀는 급히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를 노리고 날아든 작은 비도가 등에 박히고 말았다.
온유는 허겁지겁 고개를 돌려 상대를 찾았다.
눈보라 속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온유는 그 사람을 자세히 볼 여유 없이 비틀거리며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성으로 도망쳐 온 것은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절대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맞은편에서 다가왔다. 눈에 비친 달빛에 그의 손에 들린 장도가 시퍼렇게 빛났다.
그야말로 앞에는 늑대, 뒤에는 호랑이인 상황이었다.
온유는 한 걸음 물러섰다가 비수를 들어 복면한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도망갈 수 없다면 하나라도 저승길 동무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순간 피비린내가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그녀는 한 사람의 품에 떨어졌다.
복면한 남자가 온유를 껴안은 채 눈밭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등에는 어느새 비도가 꽂혀 있었다.
온유는 너무 놀라 입을 벌렸다. 순간 생각도 멈췄다.
앞뒤에서 길을 막고 자신을 매복 공격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가 나 대신 칼을 맞아?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틈도 없었다.
복면 남자는 힘겹게 그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어느새 뒤를 쫓던 사람이 두 사람 근처까지 도달한 뒤였다.
장검이 허공을 가로질러 복면 남자의 등을 찔렀다. 그리고 그 검은 멈추지 않고 온유의 심장까지 찔러 들어갔다.
뜨거운 피가 눈밭에 뿌려지면서 새빨간 매화꽃이 한 송이 한 송이씩 피어올랐다.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온유는 힘겹게 눈을 뜨며 자기 위에 쓰러진 남자를 보려고 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두 눈밖에 볼 수 없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어둠이 내려앉았다. 온유의 입술이 살짝 들썩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하얀 눈밭 위 붉은 피 웅덩이 위에 쓰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굵어진 눈발은 금세 두 사람의 온몸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