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다르다

2화. 다르다

온유는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곧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 흑옥같이 빛나는 눈동자에 당황함이 가득했다.

온유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지?

어라……, 아래라고!?

온유의 눈길이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향했다.

푸른 비단 치맛자락에 수놓인 노란 개나리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앞으로 내민 발의 담황색 신발 코끝은 허공에 떠 있었다.

이 상황은…….

온유는 다시 소년을 바라봤다. 순간 한 줄기 번개가 머릿속 혼돈을 날려 버리듯 때리며 갑자기 상대방이 누구인지 떠올랐다.

정왕부(靖王府) 세자, 기삭(祁爍)!

온유는 거의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극심한 현기증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기삭은 앞으로 성큼 나서며 두 팔을 벌려 담장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받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잘생긴 얼굴, 얇은 비단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팔과 다리. 온유의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졌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입이 열렸다.

“이게 뭐야!”

기삭은 크게 놀란 눈빛이었다.

“말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온유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전…….”

짧은 한마디를 뱉다 말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때 커다란 고함이 들렸다.

“세자!”

기삭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그는 입을 막고 흐느끼던 소녀를 살짝 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기삭의 시동인 장순(長順)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날듯이 달려왔다.

“세자, 괜찮으십니까?”

“거, 호들갑 좀 떨지 말거라.”

기삭은 자신의 시동을 가볍게 꾸짖고 나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온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온 이소저(二小姐), 제가 다시 위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계절이었다. 소년의 길고 섬세한 손은 관옥같이 하얗게 빛났다.

온유는 그 손을 응시하면서도 아직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웅얼거렸다.

“이게 아닌데…….”

기삭의 눈에는 의혹이 감돌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너는 온유잖아?!”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담장 밑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화려한 옷차림의 소녀 몇 명이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온유와 기삭 쪽으로 걸어왔다.

“큰오라버니, 이게 무슨 일이죠?”

우두머리 격인 노란 옷 소녀의 시선이 기삭과 온유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아리따운 얼굴에 떠오른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바로 기삭의 모비가 낳은 정왕부의 소군주 기경(祁瓊)이었다. 즉 기삭의 친동생이었다.

“그야 뻔하죠. 분명히 온유가 몰래 담을 넘어와 세자를 훔쳐보다가 들킨 거예요!”

아까 가장 먼저 입을 연 소녀가 소군주 기경 옆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온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유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경멸의 눈초리,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 그리고 눈부시게 화려한 빨간색 치마.

꿈인가?

이 꿈은 분명히 삼 년 전의 상황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상을 치렀었는데, 때마침 정왕비의 생신연이 열렸다. 아버지는 원래 그녀와 큰언니를 데리고 가기로 했지만 결국 언니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말도 못 하는 그녀를 데리고 가 봐야 남들의 구경거리만 될 뿐이라는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화가 나 아버지와 말다툼을 했고, 그녀는 어머니를 말리기 위해 정왕부에 가기 싫다고 했다.

그러나 가지 못하는 것과 가기 싫은 것이 어떻게 같겠는가?

외할아버지 생전에는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그가 어떻게든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말을 못 하는 외손녀가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진 그녀는 혼자서 장군부로 갔다.

그런데 때마침 장군부는 정왕부와 담장이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정왕부 쪽으로 가는 담장을 기어올랐다.

그런데 정왕부 세자가 그 담장 맞은편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둘이 그렇게 마주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너무 당황해서 그랬는지 불운이 닥쳐서 그랬는지, 그녀는 순간 현기증이 나서 담장에서 떨어졌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더라?

기삭을 향한 온유의 눈빛에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그때는 지금과 달랐다.

그때는 분명히 세자가 땅에 떨어진 그녀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가 버렸다.

사실 그녀는 무공을 조금 익혔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몰래 다시 담장을 넘어가면 그만이었지만 떨어질 때 발목을 삔 바람에 쉽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지체된 결과 산책을 하던 소군주 일행의 눈에 띄고 말았다.

무녕후부(武宁候府) 이소저 당미(唐薇)가 신랄하게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곧 정왕부에 있던 모두가 온가 이소저 온유가 ‘몰래 담장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달랐다. 세자는 손을 뻗어 떨어지는 그녀를 받았고 다시 담장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그때 세자가 도와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온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꿈속인 지금의 상황이 삼 년 전 현실보다 더 막장이었다.

그때는 세자가 그냥 먼저 지나간 덕분에 소문의 내용이 그저 제멋대로고 법도를 모르는 규수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세자의 품속으로 떨어졌으니…….

“사실은 말이다…….”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온유의 귀를 파고들었다.

“조금 전에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꼈어. 하필 장순 녀석도 멀리 있어서 내가 도와달라고 소리를 쳤지. 그런데 담장 너머에 있던 온 이소저가 우연히 그 소리를 들은 것이다…….”

기삭의 해명을 들은 소군주 기경의 안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기경은 온유를 향해 물었다.

“온 이소저, 그랬던 건가요?”

온유는 기삭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기경이 환한 얼굴로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맞습니다!”라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그 한마디가 마치 날벼락처럼 그곳에 있던 모두를 대경실색하게 했다.

“너, 네가…… 말을 할 수 있다고?!”

손가락을 뻗어 온유를 가리킨 당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소군주 기경은 자기도 모르게 온유를 향해 다가갔다.

“온 이소저, 어떻게…….”

장군부는 온유의 외가였다. 온유는 어릴 때 대부분의 시간을 장군부에서 지냈기 때문에 기경과도 소싯적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경아, 온 소저는 부상이 있는 것 같으니 일단 돌아가게 하는 게 좋겠어.”

기경의 생각에도 한 사람을 둘러싸고 구경하는 모양새는 좋지 않았다. 그녀는 시녀에게 눈짓을 보내 온유를 나가는 문으로 안내하게 했다.

시녀가 앞으로 나서서 온유를 부축했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온유는 갑자기 두 다리에서 힘이 풀림을 느꼈다. 게다가 심한 발목 통증에 식은땀을 쏟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치마 아래 드러난 담황색 신발을 보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꿈에서 발목을 삐었는데 왜 이렇게 아파!?

하지만 꿈인 건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온 이소저, 괜찮아요?”

기경이 물었다.

온유는 그녀를 보다가 다시 기삭을 봤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입에 넣고 힘껏 물었다.

백옥 같은 손등에서 피가 흘러 입술을 빨갛게 물들였다.

경악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특히 당미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온유, 너…… 너 미쳤구나!”

놀라고, 겁먹고, 걱정하는 다양한 시선들 속에서 온유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말 미쳤나 봐…….

온유는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유아야, 너 괜찮아?”

그때 소군주 기경에게 전갈을 받은 온유의 언니 온선(溫嬋)이 달려왔다.

눈물에 앞이 흐려진 온유는 겨우 언니 얼굴을 알아보고 그녀의 품에 안겼다.

“언니, 나 이제 말할 수 있어…….”

온유는 제일 그럴싸한 이유를 대고 나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울음이 쏟아진 가장 큰 이유는 자신도 살아 있고 언니도 살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비참한 결말을 막아 낼 시간이 있었다!

“너 정말 말을 하는구나?! 잘됐어! 정말 잘됐어…….”

온선은 너무 큰 기쁨에 사로잡혀 횡설수설하다시피 했다.

그때, 기경이 가벼운 헛기침으로 자매의 기쁨을 끊었다.

“온 대소저(大小姐), 이소저가 발을 삔 것 같으니 일단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온선은 황급히 눈물을 닦고 나서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럼 전 동생을 데리고 먼저 돌아갈게요. 군주, 감사합니다.”

온선은 그제야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유아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니?”

소군주 기경은 자기 오라버니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기삭이 말한 대로 앞뒤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때 기삭이 두 자매를 향해 포권을 한 뒤 말했다.

“저 때문에 이소저가 괜한 의심을 살 뻔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누구라도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면 똑같이 했을 겁니다.”

온선은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상대가 말한 이유에 수긍했다. 그리고 데리고 온 시녀와 함께 온유를 부축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흥, 난 도저히 못 믿겠어요. 분명…….”

당미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종알거렸다. 하지만 세자가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 보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꾹 눌러 담았다.

온유는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시선이 여러 번 기삭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꿈이 아니라면…… 정말 삼 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라면…… 정왕부 세자의 반응이 왜 달라진 거지?

* * *

온유는 복잡한 마음으로 언니를 따라 장군부로 향했다.

장군부는 정왕부 바로 옆이니 온유의 집인 온부보다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온유가 다쳤다는 소식에 외할머니가 허둥지둥 나왔다.

“유아야, 발목은 괜찮은 것이냐?”

온유는 다급한 표정의 노부인을 보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외할머니…….”

온유의 목소리에 모두가 너무 놀라 멍해졌다.

노부인은 어안이 벙벙해하다가 온유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손녀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연달아 쓰다듬었다.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는 눈치였다.

“유아야, 우리 유아야…….”

사랑하는 손녀가 말을 못 한다는 사실은 늘 그녀의 가슴을 커다란 바윗덩어리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외할머니, 저 이제 말할 수 있어요.”

온유는 눈물범벅인 채로 환하게 웃었다. 시선은 외할머니에게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다시 외할머니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했다. 원래대로라면 외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외할머니는 바로 아버지 때문에 화병이 나서 돌아가셨다.

“선아야, 네 어미와 아비는 유아의 말문이 트였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래! 넌 오늘 네 어미와 함께 정왕부를 방문했지?”

노부인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중에야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아 너는 우리 집에 있지 않았느냐? 어떻게 언니와 함께 밖에서 돌아온 것이야?”

여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외할머니를 보며 온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유아가 담장을 넘어 정왕부에 들어갔어요.”

노부인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온유를 바라보았다.

“유아, 네 장난기는 이 할미를 빼닮았구나.”

온선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은 외할머니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기에 솔직하게 얘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