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태후
한편, 온평은 상 씨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몰래 감탄했다.
저 부인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로구나. 하긴, 그러니 열아홉도 안 된 어린 나이에 노야가 도성의 명문가 규수인 부인과 혼인했다는 소문을 듣고도 봇짐 하나 들고 이 먼 도성까지 찾아왔겠지.
온여귀의 심복이던 온평은 상 씨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상 씨의 어머니는 온여귀의 고모로, 어린 나이에 부잣집에 시집갔다.
물론 온가촌 같은 마을에서 ‘부잣집’이라고 해 봐야 전답이 조금 있고 농번기에는 일꾼을 몇 명 고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 도성의 부잣집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그래도 나름대로 유복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 씨가 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후에 온여귀의 부모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온여귀는 그때 이미 남다른 총명함을 보였기에 글공부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부모가 남긴 가산으로 글공부를 했지만 얼마 못 가 그것도 동이 났다. 온여귀의 고모인 상 씨의 어머니는 자신의 혼수와 시댁에서 가지고 온 약간의 재물을 팔아 가며 조카의 글공부를 뒷바라지했다.
온여귀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욱 글공부에 매진하여 원시에 합격해서 수재(秀才)가 되었고, 이후 향시에도 합격하여 거인(舉人)이 되었다. 그리고 회시에 참가하러 도성으로 떠났다.
그와 사사로이 혼인을 언약한 상 씨는 그가 금의환향하여 자신과 혼인을 올릴 날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온여귀가 도성에서 다른 여자와 혼인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 씨는 온가촌에서 사라졌다. 자기 어머니에게 서신 한 통만 남기고.
훗날 상 씨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상 씨는 그 궁벽한 온가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튼, 상 씨 세 가족이 사라지자 방금까지 떠들썩하던 구경의 중심에는 온평과 온여생 두 사람만 남았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지만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한편 온유와 노부인은 이미 황궁에 도착해 있었다.
알현을 기다리면서 노부인이 온유에게 물었다.
“유아야, 긴장되느냐?”
온유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있으니 조금도 긴장되지 않아요.”
앞으로도 쉽지 않은 위험한 일이 많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날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아버지가 숨겨 둔 패를 꺼내는 그날이 왔지만, 외할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 이곳 황궁까지 태후를 뵈러 온 것이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정말로 다른 결과를 얻었다.
“노부인, 태후마마께서 들라 하십니다.”
내시 하나가 나와 말을 전했다.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지팡이에 의지해 힘들어 보이는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온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외할머니의 다리가 왜……? 조금 전만 해도 걸음걸이가 빠르고 힘이 넘치셨는데?
이때 노부인이 온유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아야, 어서 이 할미를 부축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온유는 속으로 몰래 감탄하며 얼른 다가가 노부인을 부축했다.
태후는 탑상(*榻牀: 옛 중국에서, 잠깐 쉴 때 쓰던 긴 의자 형태의 평상형 침대)에 편하게 기대앉아 있다가 노부인이 방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못 본 지 일 년이 좀 넘은 것 같은데, 자네 몸이……?”
노부인은 한눈에 봐도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것이 오늘내일하는 사람 같았다.
노부인이 예를 올린 다음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탄식했다.
“태후마마, 노신(老身)은 이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니 몸이 어찌 예전 같겠습니까. 가슴에 통증까지 일어 얼마 전에는 의원까지 청했습니다. 송구스럽게도 제가 오늘 마마를 뵙고자 한 것은…… 태후마마께서 이 불쌍한 과부와 고아 대신 처분을 내려 주시길 청하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태후는 웃고 말았다.
임 노장군이 세상을 뜨기는 했지만, 환갑이 다 된 나이였다. 게다가 노부인의 외손녀들도 벌써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 ‘과부와 고아’라는 표현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태후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만 얼굴에는 이내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는가?”
노부인은 금세 울음을 멈추고 지팡이를 꼭 쥔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완청이 그 아이가 온여귀에게 시집가겠다고 난리를 피울 때, 저는 그리 탐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태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 자신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둘째 아들이 군사를 이끌고 와 도성을 점령했을 때, 태후는 둘째 아들의 소행에 화가 나 얼굴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조정 중신이 둘째 아들의 즉위에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좋지 않아 결국 둘째 아들의 편을 들지 않았던가?
물론 큰아들도 아꼈지만, 큰아들은 실종되어 생사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제위를 계속 비워 둘 수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다른 황친에게 넘길 수도 없었다. 아무리 둘째의 소행이 미워도 친자식 아닌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태후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제 생각에 온여귀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니 우리 집안의 덕을 본다면 완청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도 유분수이지, 그자가 딴살림을 차리고 있던 데다 그 식솔을 집안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태후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전혀 놀라지 않았다.
노부인이 오랜만에 찾아온 것도 그렇고, ‘과부와 고아’를 운운하더니 온여귀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온여귀에게 여자 문제가 있다는 건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노부인의 노여움에도 그다지 공감할 수 없었다.
태후가 된 이후로 얼마나 많은 미녀들이 선황 곁에 있었는데, 사위가 딴살림 하나 차린 게 무슨 눈물 섞인 하소연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고…….
임완청 그 아이는 외동이라 너무 응석받이로 자랐어.
태후는 임씨 가문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임 노장군은 선황께서 천하를 차지할 때 곁에서 따르던 심복이었고, 임 노부인도 남편을 따라 전쟁터에 나서곤 했다. 태후는 홀로 남은 어린 완청이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때 임완청은 열 살 정도였는데, 태후는 말괄량이 같은 그녀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태후가 임완청을 챙겼던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될 것이다.
“마마, 하마터면 노신을 다시는 보지 못하실 뻔했습니다.”
태후는 헛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무 조바심 내지 말게. 자고로 사내들이란…….”
태후가 위로의 말을 하려고 하는데 노부인이 그 말을 끊었다.
“노신이 보니, 그 여자와의 사이에 선아보다도 나이가 많은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숨이 넘어갈 뻔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번에는 태후도 정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자네 큰손녀보다 나이가 많다고?”
그렇다면 임완청과 온여귀가 혼인을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미 딴살림을 차렸단 것 아닌가?
그럼 저이가 화가 날 만도 하군.
이건 단순히 장군부의 체면 문제가 아니었다. 온여귀가 임완청에게 보여 준 사랑 자체가 거짓이라는 소리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노부인이 어찌 차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어쩌겠나? 애초에 누가 완청이에게 먼저 반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원래 애정을 갈구한 쪽이 손해 보기 마련 아닌가?”
노여움으로 가득하던 노부인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게 다였으면 노신이 어찌 태후마마까지 찾아왔겠습니까? 온여귀 그자가 감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먼저 간 노장군이 자신을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완청이와 혼인을 한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태후는 아무 말 없이 노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온 집사가 자기 주인의 말이 틀렸다고 부인한 대목까지 이야기하던 노부인이 그때 심정을 토로했다.
“다행히 그 두 사람이 됨됨이가 바른 덕에 그자를 도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죽은 노장군이 씻을 수 없는 누명을 쓸 뻔했습니다.”
노부인의 눈은 어느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금수만도 못한 놈이 자그마치 이십 년을 속였습니다. 그러다 노장군이 세상을 떠나고 사고무친의 ‘과부와 고아’만 남게 되자 이빨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마, 노신은 늙고 힘도 없습니다. 부디 태후마마께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노부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던 태후는 자신의 경우를 떠올렸다.
선황의 곁에서 총애를 다투던 후궁들도 감히 황후인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는 못했다. 태후 자신은 선황이 천하를 다툴 때부터 내조한 조강지처였기에 선황이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또 그 자리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선황이 붕어하고 나자 남편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잃어 어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임 노부인이 느꼈을 것과는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눈가가 빨갛게 번진 노부인을 보며 태후의 굳게 닫혔던 가슴 속 사소한 옛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말은 사소하다고 했지만, 임 노장군이 선황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할 때 쌓였던 두 여인의 정은 절대 사소하지 않았다.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감이 가득하던 그 시절, 태후와 임 노부인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었다.
물론 선황을 모시던 이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태후가 그들의 부인과도 가까운 사이였던 건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벌써 스무 해의 세월이 지났고, 그 세월 속에서 대주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의 마음은 점점 무뎌졌다. 과거의 순수했던 감정은 어느새 희미하게 변했다.
하지만 오늘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자 태후의 마음이 움직였다.
“어찌 그런 일이…….”
태후는 탄식하고 노부인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뭘 도와주면 좋겠나?”
노부인은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온여귀는 죽은 노장군을 모욕하고 저는 그자로 인해 화병으로 죽을 뻔했습니다. 저희 임씨 가문은 그자와 의절하겠습니다. 그런 몹쓸 놈과는 어떤 관계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의절이라.
태후는 노부인의 결정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까지 됐으니 이제 한솥밥을 먹는 식구로 남을 수야 없겠지.”
“외손녀 둘도 임씨 가문으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런 승냥이 같은 심보의 아비를 따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부인이 이어서 말했다.
이것이 그녀가 입궁하여 태후를 알현한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녀는 그 금수만도 못한 놈과 두 외손녀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태후를 찾아와 그 처분에 따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온여귀의 벼슬을 뗄지 말지 논하는 건 조정의 어사와 언관들이 할 일이었다.
온여귀에게 이렇게 큰 흠집이 생겼으니 동기가 어찌 되었건 누군가는 나서서 그를 탄핵하려 할 것이었다.
태후는 그제야 조용히 노부인의 뒤에 서 있는 소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소녀는 깨끗한 흰옷과 녹색 치마를 입었고,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올린 상태였다.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남다른 청초함이 돋보였다.
“저 아이가 유아인가?”
태후는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온유는 무릎을 굽혀 예를 올리며 그렇다고 답했다.
태후는 자기도 모르게 온유를 유심히 살핀 다음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가(*哀家: 옛 중국에서 황태후가 자신을 일컫는 말)도 자네 둘째 손녀가 말문이 틔었다는 소문은 진작에 들었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이리 보니 참으로 놀랍군.”
태후는 다시 한번 노부인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네의 이 둘째 손녀는 흠잡을 데가 없는데 딱 하나 말을 못 하는 게 안타까웠지. 이제 말문도 틔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나. 앞으로 다 잘될 것이네.”
“모두가 태후마마의 은혜입니다.”
노부인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다 잘될 것이라는 태후의 말은 단순히 유아의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태후가 온여귀와 임씨 집안의 절연을 책임져 주겠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