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가슴앓이

12화. 가슴앓이

크고 화려한 마차 안, 임 씨는 마차 안 서랍에 가득 담긴 밀전과(*꿀에 절인 과일)를 딸들에게 내주고 있었다.

온선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어머니, 곧 외가에 도착할 텐데요.”

“너희 외가에 도착하면 이런 건 못 먹지 않으냐.”

임 씨는 꿀에 절인 대추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의원 말이 너희 외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단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너희 외할머니는 단 걸 좋아하시잖니…….”

외할머니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보며 온유와 온선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평온한 날도 이제 곧 끝장날 것이었다.

온유가 매실을 세 개째 먹었을 때, 마차는 이미 장군부 앞에 도착했다.

세 모녀는 마차에서 내렸다. 온선과 온유는 임 씨를 양쪽에서 부축해서 장군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임 씨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정왕부 쪽을 가리키며 희한한 듯 말했다.

“저 노인분은 누구이시길래 정왕부가 대문을 활짝 열고 맞이하는 걸까?”

온유도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어머니, 언니와 함께 외가에 왔을 때는 정왕부가 손님을 맞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그 일을 당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방비야, 정왕부에 오신 분이 누군지 좀 알아보고 오너라.”

임 씨의 말을 들은 온선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뭘 그런 걸 알아보려고 하세요.”

남의 일을 궁금해하는 어머니의 성격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

“좀 알아보는 게 뭐 어때서 그러니. 이 어미는 궁금한 건 못 참는 거 잘 알면서.”

온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온유를 바라봤다.

온유는 웃기만 했다.

“나도 궁금하긴 해.”

“…….”

결국 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었다.

* * *

임 씨는 여종에게 소식을 알아보라고 한 다음 두 딸을 데리고 노부인을 만나러 갔다.

어차피 딸이 가까이 살며 자주 왔기 때문에 노부인은 특별히 준비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자주 봐도 딸과 외손녀들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어머니, 요즘 잠은 잘 주무세요?”

“그럼, 그럼.”

노부인은 딸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하면서 온유의 손을 잡았다.

“유아야, 발목이 아프진 않니?”

“걱정 마세요, 외할머니. 벌써 다 나은걸요.”

“그럼 됐다.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높은 데 올라가지 말고.”

노부인은 웃는 얼굴로 신신당부하면서도 온유를 이리저리 살폈다.

우리 유아가 이 할미를 부르는 목소리가 참 곱구나.

임 씨는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농을 던졌다.

“어머니, 뭘 그리 뚫어지게 보세요? 우리 유아 닳겠어요.”

노부인은 임 씨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참, 내 외손녀 보는 것도 너한테서 허락받아야 하니?”

“저는 그런 눈빛으로 보신 적 없잖아요?”

노부인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넌 어릴 때부터 이 어미 속만 뒤집었잖니? 선아와 유아같이 착하지 않았지.”

옛날에 남편은 산적 두목이었고 자신은 두목의 아내였다. 딸은 온종일 산을 헤집고 다니면서 가끔은 산적 질에도 가담했다.

하지만 난세가 시작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남편은 개국 공신 정국공이 되었으며 자신은 국공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말괄량이 딸은 명문가의 규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문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세족과 다르다는 걸 잊지 않았다. 딸도 다른 집 규수와 달랐다.

그런 딸이 자라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딸은 뜻밖에도 웬 막 회시에 급제한 서생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와 남편은 원래 딸을 무장 가문에 시집 보낼 생각이었지만 딸이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가 생겼으니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사위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그렇게 가풍이 엄격하지 않았다. 덕분에 딸은 원래 성격대로 편하게 지냈다.

사위의 또 한 가지 장점은 외모가 준수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꽃처럼 예쁜 외손녀들도 둘이나 얻었다.

딸과 사위는 서로를 존중하며 잘 지냈고, 사랑스러운 손녀도 둘이나 낳았으니 노부인이 처음에 가졌던 일말의 걱정도 진작에 깨끗이 사라졌다.

조손 삼 대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임 씨가 ‘임무’를 맡겼던 시녀 방비가 돌아왔다.

“누가 온 거라고 하더냐?”

임 씨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노부인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뭘 묻는 것이냐?”

임 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 마차에서 내리는데 정왕부의 대문이 활짝 열려 있더라고요. 보니까 옷차림이 평범하고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네가 안내를 받아 들어가고 있었고요. 그 노인네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방비를 보내 알아보라고 했어요.”

왕공귀족의 집은 아무에게나 대문을 활짝 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쪽문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

“네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노부인이 못 말리겠다는 듯 말했다.

임 씨는 온유를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얘가 궁금해하더라고요.”

갑자기 불똥이 튄 온유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부인은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아는 아직 어리잖니. 궁금한 게 많을 나이이지.”

임 씨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방비에게 눈짓했다.

방비가 허둥지둥 고했다.

“정왕부가 정왕세자를 위해 명의를 모셔 온 것이라고 합니다.”

임 씨 순간 관심이 커졌다.

“정왕부 세자가 왜? 어디가 아프다고 하더냐?”

“얼마 전 가슴에 통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슴 통증에 용하다는 명의를 멀리 외지에서 불러왔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임 씨는 벌컥 화를 냈다.

“정왕부는 너무하는구나!”

노부인은 임 씨를 흘겨보며 말했다.

“자식이 아파서 의원을 부르는 건 당연지사이거늘, 뭐가 너무했다는 것이냐?”

“어머니는 몰라서 그러세요…….”

임 씨가 입을 막 열려다가 문득 큰딸이 같이 있는 게 생각났다.

“뭘 모른단 말이냐?”

임 씨는 자신은 직설적인 성격이지만 큰딸은 말수가 적어 어디 가서 소문낼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정왕부에서 제 의향을 떠봤거든요. 우리 유아를 정왕세자와 혼인시키는 게 어떻냐고요.”

“정왕세자가 우리 유아와 혼인하겠다고?”

노부인은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우리 집안과 혼인을 하겠다면, 왜 선아가 아니고?”

온선은 온유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아 딱 혼기였다.

온선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임 씨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지금 누구에게 혼담을 넣었는지보다 중요한 건 정왕부의 속셈이에요. 이건 좀 아니잖아요. 병약한 아들을 우리 딸과 맺으려고 하다뇨!”

“그건 좀 너무했구나.”

노부인은 머릿속으로 이미 빠르게 정왕세자의 생김새와 허우대 그리고 성격까지 되짚으면서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정왕세자가 몸이 약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가슴에 병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임 씨가 맞장구쳤다.

“그러니까요. 사실 처음에는 솔깃했지만 다행히 유아가 그 점을 말하더라고요. 유아가 세심하게 살펴서 다행이죠. 정왕세자가 가슴에 병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온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난 정왕세자가 그런 병이 있는 건 몰랐는데…….

정왕부 세자가 정말 아픈 건가?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얼마 뒤 정왕세자는 먼 길을 떠난다. 정말 의원까지 청할 정도로 아팠다면, 정왕비가 아들이 말을 몰고 배를 타야 하는 먼 길을 가는 걸 허락했을까?

아니면 그 신의가 정말 용해서 단숨에 정왕세자의 병을 고친 건가?

그렇다면……. 온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전생에 외할머니는 울화 때문에 심장이 상해 돌아가셨다. 어쩌면 처음부터 심장이 안 좋으셨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명의를 불러 진맥을 하는 게 나쁠 것 없었다.

온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임 씨가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도 얼마 전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 적 있잖아요? 마침 정왕부에 명의가 왔다고 하니, 그 명의가 세자를 치료하고 나면 장군부로 청해서 진맥을 좀 받으세요.”

노부인은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필요 없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고장 나기 마련이야. 가슴 좀 답답한 게 뭐 대수라고. 전에도 몇 번 의원에게 보였는데 별말 없었다.”

그때 손 하나가 노부인의 소매를 꼭 잡았다.

“외할머니, 그래도 그쪽에 용한 명의라고 하니까 한번 불러 보세요.”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소녀가 고개를 들고 촉촉하게 빛나는 눈망울에 걱정과 간절함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노부인은 순간 마음이 약해져 그러기로 했다.

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해서 원래도 다른 소녀들보다 예민한 편이었다. 그런 외손녀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임 씨는 자기 어머니가 외손녀 말에는 끔뻑 죽는 걸 보고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정왕부에서 그 명의를 특별히 모셔 온 만큼 직접 가서 정왕비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명의는 정왕부 세자 기삭을 진맥하고 있었다.

“신의, 우리 아들은 좀 어떻소?”

“흐음…….”

주 의원은 침음을 흘리며 기삭을 바라봤다.

기삭은 묵묵히 그를 마주 봤다.

주 의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자 정왕비는 애가 탔다.

“신의, 난 괜찮으니 편히 말하게. 설마 우리 아들이…….”

안 돼! 그녀는 혼절할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정왕이 무너질 것 같은 정왕비를 서둘러 부축한 다음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의께선 좀 더 자세히 보시게. 우리 삭이는…… 무사하겠지?”

기삭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공기 속에서 주 의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세자의 가슴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정왕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큰 문제가 없다니……. 그럼 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겐가?”

주 의원은 다시 한번 기삭을 한참 바라봤다.

소년은 결백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노부는 그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느라 진단을 쉽게 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잘됐소. 참으로 잘됐어.”

정왕비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하지만 가슴에 병이 있다면 아무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방심할 수 없는 것 아니오? 신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치료할 생각이오?”

주 의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왕비께서 마음 쓰시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가슴의 병은 대부분 걱정이 많아 생깁니다. 제가 처방을 할 터이니 그 처방대로 약을 드시고, 또 뜻대로 안 된 일이 있다면 그걸 해결하십시오. 마음이 편해지면 다 나으실 겁니다.”

“뜻대로 안 된 일……?”

정왕비는 감을 잡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술은 전혀 몰랐지만 아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방법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