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화근

8화. 화근

진보각과 가까운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뭔가를 둘러싸고 구경 중이었다. 안쪽에서는 꽹과리 소리와 함께 떠들썩한 갈채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건 큰 칼을 들고 춤을 추는 한 소년이었다.

열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다부진 체격으로 날렵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생김새도 준수한 것이 저잣거리에서 재주를 파는 자 같지 않았다.

온유는 소년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칼, 창 그리고 봉을 다루는 것을 한참 봤다. 왜 그랬더라?

설마 저 소년이 잘생겨서 그랬던 건 아니었겠지?

자신은 남자의 외모에 혹하는 여자가 아니다.

“멋지다!”

다시 한번 갈채가 터져 나오자 소년은 춤을 멈췄다. 소년 옆의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꽹과리를 뒤집은 채 한 바퀴 돌면서 구경꾼들에게서 구경 값을 걷었다.

구리로 만든 꽹과리에 동전이 떨어지면서 땡그랑 소리를 냈다. 노인이 온유가 있는 곳에 오기도 전에 구경꾼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저건 금화잖아!”

“구경 값으로 동전이 아니라 금화를 냈어?!”

보통 시장에서 거래할 때 쓰는 돈은 동전이었다. 평소에는 은화도 볼 일이 많지 않았으니 금화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정말 금화인지 하는 호기심 때문에 노인이 서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전생에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쓰고 있던 너울이 떨어졌다. 아마 곧 그 상황이 벌어질 것이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보주는 온유 쪽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그녀를 밖으로 빼내려고 했다.

그때 온유가 빙그르르 돌아섰다.

순간 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스쳐 지나다가 그녀의 너울에 부딪혔다.

너울이 바닥에 떨어졌고 누군가의 발에 밟혔다.

보주는 깜짝 놀라 굳은 얼굴로 온유를 보호하며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아가씨,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난 괜찮다.”

온유는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서 정리했다.

“아가씨, 진보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 조금 더 보자.”

온유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전생에는 바로 진보각으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과연 어떤 일이 발생할까?

공연하던 노인과 소년은 금화를 손에 넣자 곧 무대를 정리하고 사라졌다. 구경꾼들도 한둘씩 흩어졌다.

사람으로 북적이던 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썰렁하게 변했다. 땅바닥에 너울만 덜렁 남아 있었다.

“아가씨, 제가 가서 너울을 주워 올게요.”

온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생의 화근은 혹시 땅바닥에 떨어진 저 너울에서 시작된 것이었을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의 눈에 비단옷을 입은 청년이 원립이 떨어진 곳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너울을 집어 들고 온유를 향해 다가왔다.

온유는 입술을 꼭 깨물고 너무 놀라 호흡이 가빠지는 걸 참으려고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보주가 주인의 앞을 가로막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비단옷을 입은 청년을 따르던 두 명의 호위가 즉시 앞으로 나서더니 보주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그건 우리 아가씨 너울입니다!”

보주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비단옷을 입은 청년은 온유를 슬쩍 보더니 보주에게 너울을 건넨 다음 가볍게 웃었다.

“너희 아가씨께 돌려드리마. 또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시라고 하고.”

보주는 너울을 받아 들고 온유의 곁으로 돌아왔다.

온유는 무표정하게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진보각으로 향했다.

비단옷을 입은 청년은 진보각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오만한 소녀로군. 왕귀(王貴)야, 나중에 저 집 아가씨에 대해 조사 좀 해오너라.”

“예.”

* * *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진보각에 들어선 온유의 두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 고여 있었다.

따뜻한 봄날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얼음 굴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까지 차갑게 굳어 버렸다.

태자야! 그자는 바로 태자였어!

태안제는 자식이 많지 않았다. 건강하게 성장한 황자는 오직 두 명뿐이었다. 하나는 당금의 태자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황자 위왕(魏王)이었다.

태자는 죽은 선 황후 소생이었으므로 적장자로서 제위 후계자의 지위가 공고했다.

위왕의 생모는 비(妃)로서 후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궁녀 출신이었다. 지금의 높은 자리를 얻은 것도 황자를 낳은 덕분이 컸다.

하지만 태안제가 태자를 각별히 아꼈기에 위왕의 지위는 태자에 비해 크게 뒤처졌다.

극도로 경악했던 온유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그래도 자식이었다. 또한 아버지는 시랑으로 조정 대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딸자식을 남에게 노리개로 넘기려고 했으니……. 상대의 신분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벙어리였다. 솔직히 같은 수준의 가문에 시집 보내기는커녕 급이 떨어지는 집안에 시집을 보내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분이 낮은 자에게 시집을 보내는 건 처음부터 딸의 행복에 별 관심이 없던 아비에게는 득보다 실이 큰 짓이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그냥 집에 두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온부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태자의 눈에 들었다. 아버지로선 주군이 될 태자의 환심을 살 기회가 왔는데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았겠는가?

아버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십 년 동안 부부의 연을 이어 온 조강지처를 사지에 몰아넣은 냉혈한이었다.

태자……. 그녀의 원수 중 하나는 바로 태자였다.

후계자의 자리가 위태로운 태자가 아니라, 모든 이의 눈에 확고부동한 차기 황제 말이다.

그런 그에게 복수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진배없을 것이다.

온유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섬섬옥수를 응시했다.

“유아야, 어디 불편하니?”

딸의 조금 창백한 안색을 발견한 임 씨가 관심 어린 말을 건넸다.

온유는 싱긋 웃었다.

“아픈 데 없어요. 어머니는 다 골랐어요?”

임 씨는 탁자 위에 가득한 반짝이는 장신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 포장해 주게.”

여행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바로 포장해서 온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물건이 그리 많지도 않으니 바로 가지고 가겠네.”

여행수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장신구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석함 몇 개를 직접 들고 임 씨를 마차까지 배웅했다.

“부인, 다음에 새 물건이 들어오면 온부로 가져가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럴 것 없네. 물건도 볼 겸 나들이하는 게 재미있으니 말이야.”

임 씨는 마차에 올라 향나무로 만든 보석함 하나를 온유에게 건넸다.

“마음에 드는지 한번 보거라.”

상자를 연 온유는 상자 가득 담긴 반짝반짝 빛나는 장신구에 하마터면 눈이 멀 뻔했다.

그녀는 문득 전생에 집을 나와 도망 다니던 고생길이 떠올라 눈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보석함에 담긴 것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신구가 아니라 그저 금화, 은화였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너무 좋아요.”

온유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어머니 안목은 역시 대단해요.”

입가에 미소가 걸린 임 씨는 비슷한 크기의 보석함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 보석함은 네 언니 거야.”

임 씨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머니로서 마음이 뿌듯했다. 딸이 자신이 준 선물을 마음에 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임 씨는 두 자매에게 한결같은 어머니였다. 그리고 또 아버지에게 일편단심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짓밟혔다.

온유는 임 씨의 팔을 감싸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머니, 언니도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임 씨는 입을 오므리고 살포시 웃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늘이 우리 유아가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야. 이 어미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여한이 없…….”

순간 온유가 임 씨의 말을 잘랐다.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도 행복해야죠!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차라리 난 벙어리로 사는 게 낫겠어요.”

“너도 참…….”

임 씨는 목이 멘 채 눈가를 훔쳤다.

온부에 돌아온 다음 온유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보석함을 품에 안고 말했다.

“어머니, 전 먼저 낙영거로 갈게요.”

“돌아가서 좀 쉬렴. 상자는 무거우니 보주에게 들라 하고.”

“아뇨. 어머니 선물인데 제가 직접 들고 갈래요.”

온유는 임 씨에게 인사를 한 뒤 서두르지도 꾸물거리지도 않는 걸음으로 낙영거로 향했다. 그런데 본채 문을 나서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온부의 집사 온평(溫平)과 마주쳤다.

온평은 급한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허둥지둥 달려오다가 하마터면 온유와 부딪힐 뻔했다.

온유가 놀라서 손이 ‘미끄러졌는지’ 품에 안고 있던 상자가 땅에 떨어졌다.

장신구가 가득 들어 있던 보석함이 떨어지자 장신구와 보석이 쏟아져 햇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온평은 마당 한구석이 금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눈을 멍하니 떴다.

보주가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온 집사님! 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죠? 아가씨와 부딪쳤다가 아가씨께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온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온유에게 사과했다.

“소인이 정신이 없어서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온유는 바닥에 쏟아진 장신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온평을 바라봤다.

“온 집사, 무슨 일이지?”

“그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온평은 고개를 숙인 채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널린 보석에 시선이 꽂혔다.

“그럼 어서 가 보거라.”

온유는 아무런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아가씨,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평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온유는 온평이 허겁지겁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하며 눈빛이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온평은 아버지의 시동 출신으로, 바로 전생에 아버지를 위해 증언을 했던 자였다.

이십 년이 지나 어린 시동은 중년에 접어드는 집사가 되어 있었다. 온부에서 꽤나 잘나가는 인물이었다.

저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분명 오늘도 또 도박장에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보주는 땅바닥에 흩어진 장신구를 주워 담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다행히 망가진 것은 없어요.”

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낙영거로 돌아가자.”

사실 보석함은 온평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떨군 것이었다.

그리고 온평의 반응을 보니 효과가 확실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