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초승달 밤
주 의원의 안색을 살피던 온유가 물었다.
“신의께서는 왜 그러시죠?”
“아, 아닙니다. 하려던 말씀 계속하십시오.”
“정왕세자의 병은…….”
주 의원의 눈썹이 올라가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소녀가 어찌 세자의 병에 대해 물으려는 거지!?
“정왕세자의 병은 심각한 수준인가요?”
“아닙니다! 심각하지 않습니다.”
주 의원은 억지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럼 신의께선 정왕세자의 병증이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주 의원은 온유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환자의 병증에 관해서는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온유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외할머니는 늘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가슴에 병이 있다고 하고, 또 정왕세자도 그렇다고 하니 그냥 좀 알아보고 싶어서요.”
주 의원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했다.
“가슴에 통증이 이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노부인의 경우와 정왕세자의 경우는 전혀 다르지요.”
“그럼 정왕세자는 한창나이인데 어쩌다 병을 얻은 건가요?”
온유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세자의 경우는…….”
주 의원은 눈처럼 새하얀 수염을 잠시 쓰다듬으며 뜸을 들였다.
“아마도 갑자기 놀라는 바람에…….”
온유는 낯빛이 살짝 변했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정왕세자의 병은 정말 그녀가 놀라게 한 것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전생의 경우 그녀는 그냥 땅으로 떨어졌고, 정왕세자는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왕세자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받으려고 했고, 결국 그녀는 정왕세자 위에 떨어져 세자가 쓰러지고 말았다.
은혜와 원수를 명확히 하는 것은 온유가 생각하는 처세의 기본이었다. 신의에게서 확답을 듣자 더는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심장에 병이 생겼다는 건 결코 사소한 문제일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왕세자가 이 일로 인해…….
온유는 고민에 빠져 뺨을 쓰다듬었다.
이건 사람 목숨을 빚진 것 아닌가!
어린 소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걸 보고 주 의원은 양심이 찔려 허둥지둥 보충했다.
“정왕세자의 병증은 가벼운 편이니 평소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
“신의께 한 가지 더 여쭐게요. 정왕세자의 병은 완쾌될 수 있는 건가요?”
가슴의 속병은 다른 질병과 달리 당장은 괜찮아도 늘 위험한 것이었다.
“그게…….”
주 의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세자께 달렸습니다.”
온유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
.
.
마차를 타고 온부로 돌아오는 내내 온유는 표정이 어두웠다.
온선은 그런 동생을 보고 자상하게 물었다.
“유아야, 너 무슨 걱정이 있니?”
밀전과를 씹으며 어머니 생각을 하던 임 씨도 온선의 말에 그녀를 바라봤다.
온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어머니와 언니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큰 마음의 빚을 졌다면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그 소리를 들은 온선은 순간 멍했다.
유아는 아버지가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어머니에게 잘못한 걸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임 씨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상대가 만족할 정도로 돈을 넉넉히 챙겨 주면 되지 않겠니? 너는 돈이 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물건이란다.”
“하지만 상대방도 돈이 부족하지 않다면요?”
온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유아는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 일을 말하는 거야.
돈이 부족하지 않으면 어쩌냐는 질문에 임 씨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손에 든 밀전과를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다 가졌을 리는 없어. 그럼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게 뭔지 알아내서 그걸 채워 주는 게 좋겠지.”
부족한 걸 채워 준다?
머릿속에 미소를 띤 소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온유는 자기도 모르게 정왕부가 혼담을 제안했던 걸 떠올렸다.
정왕세자에게 필요한 건 아내가 될 사람인가…….
하지만 그건 안 돼!
“유아야, 괜찮니?”
온유는 엉뚱한 생각을 날려 버리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곰곰이 하니? 유아 네가 누구에게 신세를 진 거야?”
온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책임을 질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저 자신을 배상금으로 지불할 생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왕세자도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았다. 적어도 전생에는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녀는 과거로 회귀하여 전생의 일을 만회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자신의 일을 먼저 깔끔하게 해결한 다음이라면 정왕세자가 멸문지화를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과실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는 셈 아니겠는가?
그리고 누가 뭐래도 정왕세자 탓도 있었다. 그 정도에 놀라 심장에 탈이 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온유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오히려 참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 * *
세 모녀가 온부로 돌아왔을 때, 집사 온평이 정원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온 집사, 왜 그러는가?”
임 씨가 멈춰서 물었다.
온평은 초조한 기색을 거두고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이 주머니를 하나 잃어버려서…….”
“안에 은자가 많이 들었는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그 주머니가 소인의 아들놈이 선물한 물건인지라.”
그는 말을 하면서 온유를 슬쩍 바라봤다.
“그런가? 그럼 찬찬히 찾아보게.”
임 씨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다음 두 자매를 데리고 가던 길을 갔다.
온평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온유가 담담하게 말했다.
“온 집사, 정원도 한번 찾아봐. 어제 정원에서 온 집사를 봤던 것 같은데?”
온평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둘째 아가씨, 소인 그럼 정원에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임 씨를 따라갔다.
임 씨는 본채에 돌아갔고, 두 자매는 처소 쪽을 향해 함께 걸었다. 갈림길에서 온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아야, 내일 계획대로 외할머니 뵈러 갈 거야? 외할머니가 심장에 병이 있는 걸 알고 나니 그 일을 알게 되시면 쓰러지실까 봐 겁 나.”
“그럼 우리 모레 가는 걸로 하자.”
모레…… 바로 아버지가 먼저 일을 벌인 날이다.
아버지는 마화 골목에 가서 숨겨 뒀던 세 사람을 다짜고짜 온부로 데리고 온다.
온선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모레나 내일이나 별 차이 없을 것 같은데.”
“언니, 너무 걱정 마. 내가 오늘 따로 신의에게 물어봤는데, 외할머니가 그 금향환만 제때 드시면 별 탈 없으실 거라고 했어. 오늘하고 내일 이틀간 약을 드시면 조금 나아지실 거야. 그리고 모레 가서 말씀드릴 때도 마음의 준비를 하실 수 있게 하고, 또 우리가 옆에서 다독여 드리면 별일 없을 거야.”
“하지만 심장에 병증이 있을 때, 충격받으시면 안 될 텐데…….”
온선이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말했다.
의원이 괜찮을 거라고 했다고 해도 만에 하나 충격을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언니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 아버지는 머지않아 그 세 사람을 공개적으로 집에 들이고 말 거야.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일을 벌이면 더 충격을 받으실걸. 차라리 우리가 먼저 말하는 게 더 나아.”
온선은 동생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침음성을 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난 그럼 낙영거로 갈게.”
그러자 온선이 온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언니, 또 왜 그러는데?”
온선의 표정은 복잡했다.
“유아야, 넌 혹시…… 아버지가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돌아왔으면 하니?”
온유는 순간 멍해졌다.
아버지가 죄를 뉘우쳐?
아버지가 벼락을 맞는 걸 바라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동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선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상휘라는 그…… 사람이 나보다도 나이가 많았으니 아버지에게 기대를 품으면 안 될 것 같아. 우린 어머니를 챙겨야지. 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언니, 걱정 마. 나도 잘 알아.”
“그럼 우리 둘 다 일단 돌아가서 푹 쉬자.”
온선과 헤어진 뒤, 온유는 발길을 돌려 정원으로 향했다.
온부의 정원은 장군부의 것보다 많이 작았기에 온유는 한눈에 온평이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의 곁을 지나 가산(假山)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온평은 사람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피더니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온 집사, 무슨 일이야?”
가산에 기댄 온유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온평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했다.
“둘째 아가씨,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온유는 바닥에 엎드린 그를 내려다보면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째 아가씨, 제발 저희 운이를 살려 주십시오! 소인 앞으로 아가씨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소녀의 아무런 동요도 없는 목소리가 그의 머리통 위에서 들렸다.
“아들을 살리라고 온 집사에게 천 냥을 줬었잖아?”
온평은 고개를 들고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썩을 놈이…… 그 썩을 놈이…….”
“온 집사, 천천히 말해 봐.”
온평은 주먹을 들어 힘껏 땅을 내려치더니 목놓아 울었다.
“소인이 어제 둘째 아가씨가 주신 은표를 받고 생각하기를, 적어도 그 썩을 놈이 하루는 고생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바로 구해 주면 소인이 은자를 쉽게 구했다고 착각할까 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그놈을 데려오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온평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인이 그 은표를 도박장 왈패들에게 넘겼는데도 놈들이 자식 놈을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돈만 받고 입을 씻으려고 한 건가?”
“그놈들 말이, 아들놈이 잡혀 있으면서 심심하다고 또 도박을 했답니다. 그 썩을 놈이 오백 냥을 또 빚졌답니다!”
온평은 얼굴이 납빛이 되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들이 정말 철이 없네.”
소녀는 유감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입가에는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이 유감스러운 결과는 전생에서도 똑같았기에 예상했던 것이었다.
전생에서는 이날 온 집사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때도 얼굴이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중에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모르지만, 십중팔구는 아버지에게 손을 벌렸을 터다.
그리고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흔쾌히 천 냥을 주었다.
천 냥을 떡밥으로 뿌렸으니 온평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녀가 된 것이다.
“둘째 아가씨, 제발 소인을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그놈들이 이번에도 돈을 다 갚지 못하면 자식 놈의 손목을 자르겠다고 했습니다요!”
“기한은?”
“이레를 줬습니다. 이레 안에 반드시 다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온평은 말을 하다 말고 자기 뺨을 후려갈겼다.
뭐에 홀려서 운이 녀석에게 호된 맛을 보여 못된 버릇을 고쳐 놓으려고 했을까. 진작에 돈을 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둘째 아가씨에게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이레라…….”
온유는 말하다 말고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 정도면 문제없어. 이레 뒤 나에게 와서 은자를 받아 가.”
“둘째 아가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온평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럴 필요 없어. 난 온 집사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돕는 거니까.”
온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낙영거를 향해 걸어갔다.
온평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 순간 확실해졌다. 둘째 아가씨를 제외하면 자신에게 남은 길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온유가 자신의 처소인 낙영거에 도착하자 보주가 꽃차를 올렸다.
온유는 찻잔을 받아 호로록 마시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어.”
보주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아가씨만 따르면 소인,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럼 미리 채비를 좀 해 둬. 오늘 밤에 당숙을 만나야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