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제24화
24화. 크레이지 갱 윔블던
이혁은 목이 메어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물론 팬들은 공을 오래 소유하는 걸 좋아하죠. 공격적으로 임하는 것도 좋아하고. 하지만 전 아닙니다. 전 결과만 봅니다. 골을 얼마나 예술적으로 넣나, 상대를 얼마나 압도했느냐,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결과가 필요한 때에요.”
워커는 정신을 차리고 반론했다.
“로니, 당신은 너무 극단적이에요. 점유율 축구를 너무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제 말은 승리할 수 없다면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최근 두 경기를 봐요. 우리는 점유율을 얻었지만 승리하지 못했어요. 축구의 최종 목적은 득점하여 승리하는 것인데 점유율을 대량 득점으로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코번트리와의 경기에서 넣은 한 골 역시 역습에 가까웠죠. 그 반대로 다시 공격하는 과정 중에 생긴 수비 부실로 동점 골을 허용하고 말았고요. 제가 추구하는 축구는 간단합니다. 오로지 결과 중시! 데비, 아무래도 훈련 방식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골을 넣을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골을 덜 먹을 것인지 고민해야 해요. 단지 점유율을 늘리기 위한 훈련은 의미가 없습니다.”
번스는 옆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이때, 술집 입구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이혁이 돌아보니 마이클 무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혁이 일어서자 워커가 그를 말렸다.
“뭘 하려고 그래요?”
“저 사람들은 절 미워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의 의견도 구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이혁이 술잔을 들고 마이클 무리 앞으로 갔다.
뚱뚱한 남자가 이혁을 먼저 발견했다. 그가 소리쳤다.
“아니, 감독님 아냐? 여긴 또 왜 왔지? 감독직 잘리고 여기서 일하기라도 하는 건가?”
딱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너랑 다툴 생각 없거든? 그냥 뭐 좀 물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내가 그 대답을 왜 해줘야 하지?”
“해주고 안 해주고는 네 맘인데, 일단 물어보지. 축구팬으로서 너희는 어떤 경기가 가장 재밌지?”
마이클의 친구들은 서로를 보며 이혁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어리둥절해했다.
“당연히 재미있는 경기지”
그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어떤 경기가 재밌는 경기냐는 건데…….”
“다득점, 멋진 연계 플레이, 화려한 돌파!”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만약 그런 걸 다 보여주면서 패하면?”
이혁이 반문했다.
그러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혁은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었다.
“만약 팀이 그 좋아하는 화려한 플레이를 펼쳤는데 그 경기에서 패했다면, 그래도 좋아할 건가? 너희는 주말마다 경기장에 가서 응원하잖아, 왜 그러는 거지?”
“왜냐하면 우린 축구를 좋아하고 포레스트를 사랑하니까.”
뚱뚱한 남자가 대답했다.
“그럼 전에 팀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때, 너희는 왜 야유했지?”
“성적이 안 좋았으니까 야유를 보낸 거지!”
뚱뚱한 남자는 당신 탓이라는 듯 이혁을 가리켰다.
번스는 옆에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가 보기에 뚱뚱한 남자는 이혁에게 말리고 있었다.
“팀을 사랑하기 때문에 응원하는 것이라면 성적과는 관계없이 계속 응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에 뚱뚱한 남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거봐, 이상하지 않나? 다소 다른 점이 있긴 하지만, 팬이나 감독이나 원하는 건 결국 같아. 그건 바로 승리지.”
이혁은 좀 취한 듯 보였다. 그는 팬들이 자신의 축구 철학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너희는 포레스트를 사랑해,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 매일 패배하는 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는 팬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난 패배가 싫다. 난 팀이 매 경기 승리했으면 좋겠어!”
이혁은 목소리를 낮추고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다시 한번 묻지. 당신들은 어떤 경기를 보고 싶은 거지?”
마이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뭘 그런 뻔한 질문을! 로니 선생, 우린 당연히 승리하는 경기가 보고 싶지. 계속 승리해서 이번 시즌이 끝나면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는 걸 보고 싶고, 그 다음에도 계속 승리해서 그 망할 리그 우승을 하는 걸 보고 싶어!”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이혁은 마이클을 보며 씩 웃었다.
“맞아요, 승리! 우승! 저는 이런 축구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팀을 이끄는 이상 저는 이기는 축구를 구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해 그리고 우승을 위해 말입니다! 승리하지 못하는 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승리하지 못하는 감독은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맞다!”
한 사람이 술잔을 들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그 망할 승리와 우승을 보고 싶다!”
이 말은 팬들의 열정에 불을 질렀다.
이혁이 빠르게 잔을 들었다.
“승리를 위해 건배!”
“승리를 위해!”
“빌어먹을 승리를 위해!”
“건배!”
사람들은 일제히 술잔을 위로 들었다. 그들은 별 이유도 없이 환호하며 광분했다. 다들 물을 마시듯 술을 마셨다. 마치 술집에 있는 모든 술을 다 마실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보고 워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졌습니다. 로니, 전 당신의 철학을 믿을 겁니다. 우리 함께 포레스트를 승리하는 팀으로 만들어 봅시다.”
그 말에 이혁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번스를 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이었다.
“로니, 음, 뭐 저도 그래요. 팀이 패배하는 건 보고 싶지 않네요.”
“알겠어요, 케니, 데비, 모두 고마워요.”
“이래 놓고 만약 연패한다면 여기 사람들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걸요?”
번스가 웃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번스는 이혁의 가슴을 툭 쳤다.
“잘해봐요, 로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혁은 팬들의 기대가 매우 크며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다음 시즌 우리는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할 겁니다. 그때는 제가 한 잔 사도록 하죠.”
* * *
이적시장 마감이 고작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포레스트는 선수 한 명을 이적시켜 보냈다. 그는 잭 레스터로, 아직 계약기간이 1년 더 남아 있었으나, 그는 이미 노팅엄 포레스트를 떠날 생각이어서 클럽과 계약 연장 논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해서 노팅엄도 그를 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퍼가 오는 팀이 별로 없었지만 FA컵 경기에서 레스터가 굉장히 멋진 터닝 발리슛을 성공시킨 후, 그를 주목하는 팀이 많아졌다. 4팀 정도가 오퍼를 했고 최종적으로 그는 이적료 30만 파운드를 제시한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팀을 옮겼다.
레스터의 이탈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혁은 이 선수가 팀을 떠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사전에 이적을 희망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덕분에 클럽에서는 수습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30만 파운드는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막 재정 위기에서 벗어난 포레스트에게는 귀중한 돈이었다.
아무튼 레스터와는 아름다운 이별을 한 셈이다. 그의 이탈은 오히려 이혁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레스터, 헤어우드, 존스 세 사람의 실력은 비슷비슷했다. 두 사람이 선발이면 한 명은 벤치를 지켜야 한다. 폴 하트는 이 셋을 어떻게 기용해야 할지를 두고 항상 골치 아파했는데 그 문제가 어쨌든 이제는 사라진 것이다.
라인업을 구상하면서 이혁은 매튜 루이스를 선발에서 제외시켰다. 그는 오른쪽 수비수 역할을 잘하지 못했다. 코번트리전에서 그를 좀 더 일찍 교체시켰더라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혁은 20살의 아일랜드 선수인 존 톰슨이 그 자리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드로잉 능력이 약점이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크게 떨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드로잉이야 다른 선수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고 점프력이 좋아 때로는 중앙 수비수로도 기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 미드필드 라인까지 올려도 활용이 가능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그 외 다른 포지션은 변경하지 않았다.
훈련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혁은 미드필드 선수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워커와 보이어가 각각 한 그룹씩 맡아서 패스 훈련을 진행했다. 5번의 패스로 경기장 중앙에서 패널티 에어리어까지 도달하는 훈련이었다. 이게 바로 이번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훈련을 관찰하며 문제점을 발견했고 해결 방안을 고민했다. 그는 선수들이 일주일 안에 그의 새로운 전술을 완벽히 소화해 내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건 욕심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변화라도 있기를 원했다.
2월 1일, 디비전 1 30라운드 경기. 노팅엄 포레스트는 윔블던 FC를 맞이한다. 이혁은 이번 경기에서 조금의 변화라도 발견하고 싶었고 꼭 승리하여 자신의 철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패배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지만 승리는 모든 것을 구제한다는 것을 이혁은 잘 알고 있었다.
* * *
윔블던 FC는 현재 디비전 1에서 29라운드 승점 35점으로 17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과거 크레이지 갱으로 불리며 연이은 승격 행진을 벌이던 때의 파괴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팀은 이번 시즌에 97년간 머물렀던 윔블던을 떠나 런던 북부에 위치한 위성 도시 밀턴 케인즈로 이전했다. 두 시즌 후에는 팀명도 밀턴 케인즈 돈스로 바꿔야 했다.
윔블던 FC가 떠난 자리는 AFC 윔블던이 대체했다. 이 팀은 윔블던 FC의 서포터들이 스스로 창단한 아마추어 팀이다. 그들은 윔블던의 엠블럼과 유니폼을 그대로 계승했다.
윔블던 FC가 하락세를 타는 것은 연고지를 옮긴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최근 4경기 연속 무승부를 기록 중이었다.
“윔블던은 그래도 한 방이 있는 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 동안의 훈련이 성과가 있었는지를 알아보기에 더욱 좋지.”
경기 전 라커룸에서 이혁은 선수들을 독려했다.
“명심해. 속도, 간결함, 다이렉트 패스, 효율성! 내가 우리 팀에 요구하는 것은 이 네 가지뿐이다. 자! 이제 가자!”
출전 금지는 이제 풀렸다. 이혁은 다시 벤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포레스트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나오자 팬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혁은 워커에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연승만 한다면 이보다 더 큰 환호성을 듣겠죠?”
“연승이 어디 쉽나요, 감독님.”
워커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맞아요. 어려운 도전이죠.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혁은 팬들과 함께 입장하고 있는 선수들을 향해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 * *
전반전 20분, 포레스트는 이혁이 요구한 대로 경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점유율을 중시하며 플레이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해설자 존 모트슨은 곧 이를 눈치챘다.
“오늘 포레스트의 전술이 약간 이상하네요. 낯설다고 할까요? 선수들은 그대로인데 뭔가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를 하네요.”
노팅엄 포레스트는 원래부터 점유율 축구로 유명했다. 그런데 오늘의 플레이는 확실히 전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반전 25분, 양 팀의 점유율이 전광판에 표시되었다. 54%대 46%로 원정팀인 윔블던 FC가 노팅엄 포레스트를 앞섰다.
“정말 이상하네요. 포레스트의 볼 점유율이 이상할 정도로 낮네요. 저번 경기에서는 64%였는데요.”
수비 후 역습, 이 전술은 이혁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수비를 하다 공을 잡으면 빠르게 위로 치고 올라갔는데 문제는 공을 쉽게 뺏긴다는 것이었다. 미드필더가 공격수에게 연결해 주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겼다.
그러면 상대편이 공을 뺏고 역공을 시작했다. 다행히 마이클 도슨이 위기 때마다 활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