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필드의 마법사

제13화

13화. 기자회견

이혁은 선수 교체를 한 번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몸을 풀고 있던 데이비드 요한슨을 불러 레스터의 자리로 가라고 지시했다. 헤어우드와 함께 웨스트햄의 수비를 무너뜨리라는 의도였다.

부심이 전광판을 들었다. 요한슨과 레스터의 선수 교체였다. 레스터가 경기장 가장자리로 나왔을 때, 이혁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잘했어! 이제 라커룸에 가서 샤워라도 해.”

레스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경기를 끝까지 보고 싶어요.”

“그래, 여기 있어.”

이혁은 여전히 이 경기를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관중석에서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는 팬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열심히 달리는 선수들, 또 그를 지지해 주는 데비 워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아직 낙관적이었다.

요한슨이라는 교체 카드는 좋은 선택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그는 경기장에 들어선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완벽한 기회를 잡아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슈팅은 약간 옆으로 치우쳐 있었다.

공은 골대에 맞고 튕겨 나왔다. 팬들의 거대한 탄식성 발언이 흘러 나왔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만약 이 골이 들어갔더라면 여세를 몰아 웨스트햄을 몰아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노팅엄 포레스트의 팬들은 이 밤에 승리를 축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혁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전광판에 표시된 시간을 보았다. 이제 3분 가량 남아 있었다. 인저리 타임을 최대 5분이라고 잡아도 고작 8분이다. 8분 만에 두 골이라…….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그는 무효화 된 골을 생각했다. 그게 인정받았다면 한 골만 필요했을 것이다. 이혁이 겨우 화를 참고 있을 때, 노팅엄 포레스트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앤디 레이드가 다시금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달렸고 요한슨이 호흡을 맞췄다. 그는 패널티 에어리어에서 패스를 받았다.

바로 슛! 공은 빠르게 골대 안으로 날아들었다!

철~썩

하지만 노팅엄 포레스트 팬들이 환호를 지르기도 전에 부심은 깃발을 들었다. 요한슨이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요한슨은 이 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심에게 다가가서 이게 왜 오프사이드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주심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도 모두 주심에게 달려가 의문을 표하고 관중석에서는 거대한 야유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혁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워커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감독님,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요.”

이혁은 아직도 주심과 논쟁을 벌이는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워커, 이번 경기는 못 이겨요……. 다른 모든 게 완벽했는데! 심판이 이러니 달리 방법이 없네요.”

그는 낙담한 듯 머리를 양팔로 감쌌다.

정말 모든 게 완벽했다. 후반 들어 선수들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고 맞춤 전략은 족족 통했다. 하지만 그가 심판을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축구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이고 오늘은 그가 당하는 쪽일 뿐이었다.

* * *

주심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로드 글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경기는 결국 2:3으로 끝났다. 노팅엄 포레스트가 홈에서 프리미어 리그의 웨스트햄에게 진 것이다.

주심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을 때, 노팅엄 포레스트 선수들은 모두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도슨은 눈에 눈물이 맺혀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당연히 가져가야 할 승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던 글렌은 이혁을 찾아가 악수를 청하며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눌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두리번거려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워커는 선수들을 위로하다가 상대 감독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이혁을 발견하곤 그를 불렀다.

“감독님, 어디 가세요?”

“집에요.”

“아직 상대 감독하고 악수도 안 하셨잖아요.”

“코치님이 대신해서 해주세요.”

이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하지만 기자회견이 있는데! 그것까지 제가 대신할 수는 없어요.”

이혁은 걸음을 멈추고 워커를 보았다.

“알았어요, 갈게요.”

그는 바로 기자회견장으로 갔다. 현장에는 설치된 카메라 몇 대 빼고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회자는 이혁이 이렇게 일찍 도착한 것에 대해 다소 의아해하는 듯했다.

“제가 너무 빨리 왔나요?”

“그렇습니다. 아직 기자들은 선수들을 취재하고 있거든요.”

이혁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곳을 찾아 거기에 앉았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군요.”

사회자는 그러라고 했다. 이혁은 회견실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최소 반 년간은 이런 자리에 자주 나와야 할 것이다. 자신의 말이 그대로 매체로 전달되고 기자들은 이를 활자로 옮긴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혁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불가항력에 의해 패배를 당한 것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에 빠져있었고 사람들은 회견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기자였다. 옆에 만들어진 상대 팀 감독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이런 망할 글렌 같으니라고……. 날 기다리게 해?’

이혁은 마이크를 두드렸다. 마이크가 울리는 소리에 기자들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빨리 물어보시죠.”

이혁은 사회자를 무시하고 자기가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사회자를 보았다. 그는 한쪽이 먼저 취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시작해도 됩니다.”

그제야 기자들은 하나 둘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후반전, 노팅엄 포레스트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기자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장 궁금해했다.

“그건 뭐, 간단합니다. 하프 타임에 팬들을 라커룸으로 불러들였거든요.”

라커룸이 어떤 곳인지 기자들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거기는 기자들조차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팀에게는 일종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다. 놀라운 발언에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사회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려 하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이혁은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탕!

그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혁은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라커룸은 아주 신비스러운 곳이죠. 하지만 저에게는 아닙니다. 그뿐이에요. 이제 라커룸에 관한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다음 질문?”

그는 귀찮은 듯 시계를 보았다. 이미 10분이 지났고 로드 글렌은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이혁의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다.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도 질문을 던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감독은 아무래도 성격이 썩 좋지 않은 듯했다. 어느 감독도 매체에 이렇게까지 불친절하지는 않았다. 정말 거물급 감독, 이를테면 알렉스 퍼거슨 정도가 아닌 이상 감독들은 대개 기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로니 감독님, 저는 노팅엄 일보의 기자 피어스 브로스넌이라고 합니다. 후반전에 두 골이 무효 처리되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가장 적합한 전술적 안배를 했고 가장 뛰어난 선수들을 배치했어요. 전 이번 경기에서 우리가 승리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불가항력적 요인이 우리를 방해했으니까요. 지금 제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는 이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혁이 자답했다.

“솔직히 말해 그냥 농락당했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술렁술렁, 기자들은 당황한 것 같았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물어봤다.

“방금 농락이라고 하신 건가요?”

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농락이요. 아무 문제도 없는 골이 무효가 되었는데 그게 농락당한 게 아니고 뭡니까?”

사회자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감독님, 뒷일을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게…….”

이혁은 그를 한 번 쳐다봤다.

“상관없어요.”

그는 기자들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말한 대로, 한 자도 빼지 말고 그대로 쓰세요. 난 상관없으니까. 그럼 이만!”

그는 마이크를 내려놓고 단상에서 내려갔다. 마침 글렌이 들어 오고 있었다. 그는 라커룸에서 한바탕 승리를 축하하고 온 듯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혁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 아래서 악수를 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챔피언십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에요.”

이혁은 낮은 음성으로 말한 뒤, 몸을 돌려 회견실을 빠져나갔다. 글렌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무례한 상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이가 없는 듯 이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혁은 단지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다. 이번 시즌이 끝난 후, 웨스트햄은 정말 2부 리그로 떨어진다. 시즌이 끝나고 웨스트햄이 강등되면 아마 글렌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이혁은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선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오늘 경기는 마음에 담아두지 마. 정말 잘했어.”

그러나 선수들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비록 경기는 졌고 기분은 더럽지만……. 어쩔 수 없잖아.”

사실 이혁도 자기 말이 설득력이 없으며 이렇게 말한다 해도 선수들의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혁은 숨을 들이마시고 큰 소리로 말했다.

“좋아! 진 건 진 거야. 어떻게 졌건 간에 진 건 진 거지. 하지만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해도 그 망할 심판이 점수를 고쳐주거나 하진 않는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다음 경기지. 이번에 졌으니 다음에는 꼭 이겨야지! 자, 이제 해산!”

* * *

선수들이 모두 버스에 탑승했다. 주차장 주위에는 팬들이 모여 그들이 후반전에 보여준 플레이에 대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선수들도 차츰 미소를 되찾았다. 이제는 그 누구도 이혁에게 야유를 하지 않았다.

이혁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이클과 그 무리를 발견했다. 마이클이 사주는 술을 얻어먹지 못한다니 애석한 일이었다.

그는 순간 차에 두 자리가 남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명의 코치인 데비 워커와 이안 보이어가 타지 않았던 것이다.

이혁은 기사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그들을 찾으러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역시 그 둘은 라커룸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보이어는 벽에 기대 차분히 워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워커는 분노가 담긴 시선으로 보이어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있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보이어가 입을 열었다.

“날 보자고 했던 건 눈싸움을 하기 위해서였나?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먼저 가보도록 하지.”

“제가 좋아했던 그 이안 보이어는 어디로 갔습니까? 제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 이안 보이어요!”

워커가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지만, 난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모르긴요! 팀이 엉망진창일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죠? 우리 모두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 어디에 있었냐고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가 모를 줄 압니까? 당신은 그냥 로니 감독이 잘 되는게 싫은 겁니다. 폴 하트 전 감독님도 당신을 본다면……”

보이어는 그의 말에 분노한 듯 몸을 떨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워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물론 그가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의 레전드였고 은퇴한 뒤로도 쭉 팀을 위해 헌신했다. 하트가 물러났으니 당연히 차기 감독은 자기 차지라고 생각할 만 했다. 그런데 로니가 어디선가 굴러들어 왔으니 그를 질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워커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있었어도 그것을 용납하지는 못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쉰 뒤, 보이어를 내버려두고 라커룸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오자마자 본 것은 문틈으로 엿보고 있는 로니 감독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감독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이혁이 재빨리 워커의 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