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필드의 마법사

제5화

5화. 첫 훈련

“지는 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패배를 경험하지 않는 감독은 없으니까요.”

화제는 어제 경기에 관한 것으로 넘어갔다. 이것은 이혁이 감독에 대해 생각하는 진심이었다. 그는 축구의 팬으로써 질 땐 지더라도 선수들의 기량을 모두 펼치게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명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다가 이길 수 있는 경기까지 진다면 당연히 팬들에게 욕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스는 그것을 오해하고 그를 위로했다.

“유스팀에서 계속 잘해왔잖아요. 당신의 능력은 이미 증명됐으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비록 오해였지만 그는 어젯밤 술집에서 자신을 놀려댔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자신을 비웃은 것은 자기 선수와 부딪혀 다쳤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게 아니라 경기에서 진 탓이었다. 감독은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경기에서 진다면 사람들의 욕을 들어야 하고 비웃음과 무시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번스, 무슨 말인지는 알아요. 하지만 전, 실패가 정말 뼈저리게 아프군요…….”

이혁은 앞에 놓인 술을 단번에 털어 넣었다. 사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취했다.

번스는 더 이상 술을 따라주지 않았다.

“저 역시 실패를 겪어 봤습니다. 어느 누구도 실패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지는 못해요. 하지만 세상에는 피해 갈 수 없는 일,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1군 팀은 유스팀과는 달라요. 이번 시즌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는 않을 거예요. 준비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다음 시즌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시 중단되었다. 손님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번스! 아직 오픈 안 했어요?”

“흠, 벌써 시간이 됐군. 이제 오픈을 해야겠군요.”

번스는 불을 켠 뒤, 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들어오세요!”

이혁은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번스가 그를 손수 배웅했다.

“감독님, 훈련 방법 같은 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코치진에게 일을 잠시 맡기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만요.”

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데겔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온정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번스.”

번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리고 어제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 사람들도 다 노팅엄 포레스트의 오랜 팬들이에요. 요즘 팀 성적이 좋지 않아 속상해서 그러는 것이니……. 아마 다음 경기에서는 그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혁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당신도요, 번스…….”

이혁은 번스를 향해 손을 흔든 뒤 몸을 돌려 길을 걸어갔다.

그는 취한 사람답지 않게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혁의 머릿속에는 번스가 제시한 방법이 계속 떠올랐다.

“코치에게 맡기라고……? 꽤나 좋은 방법인데?”

노팅엄의 겨울 아침은 비교적 늦게 밝아지는 편이다. 하지만 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노팅엄은 오래됐으면서도 젊은 도시였기 때문에 맨체스터나 리버풀 등 우중충한 공업 도시와는 달리 곳곳마다 활기가 넘쳤다.

이혁은 하품을 하며 길을 걸어갔다. 이혁은 절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망할 일정표에 적힌 것처럼 아침 6시 반이 되자 거짓말처럼 눈이 떠졌고 아무리 다시 자려고 노력해도 잠들 수 없었다. 그는 아침 조깅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혁은 평생 살면서 군대에 있을 때 빼고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침대 위에서 7시까지 멍하니 누워 있다가 아침을 먹고 7시 40분까지 다시 멍하니 있다가 조금 일찍 출근하기로 결정했다.

약 20분 정도가 지나자 훈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훈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확실히 8시 3분이었다.

그는 경비원인 이안 맥날에게 가서 물었다.

“왜 8시인데 아무도 없습니까?”

“아직 훈련을 시작할 시간이 아닌데요.”

“아, 음……. 훈련은 몇 시부터 시작하죠?”

이혁은 아픈 티를 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얼굴을 찡그렸다.

“아홉 시부터 시작합니다.”

맥날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이혁을 쳐다보았다. 남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는 맥날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좀 일찍 온 거군요.”

“네, 그렇죠…….”

맥날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혁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맥날이 소리쳤다.

“감독님! 사무실은 왼쪽입니다. 거기 세 번째,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이요.”

맥날 역시 이혁이 머리를 다쳐 이상이 생긴 것을 아는 모양이다. 이혁은 고개를 돌려 경비원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맥날, 하지만 저도 알고 있었어요.”

확실히 그는 사무실이 어딘지 알고 있다. 로니의 기억들이 그의 뇌리에서 떠다니고 있기 때문에 비록 처음 와보는 곳이라고는 하나 매우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방이 밝아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암홍색의 커다란 책상이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한 대와 연필꽂이, 그리고 전화기 하나,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책상 뒤에는 아주 편해 보이는 의자가 있었다. 책상과 의자는 모두 오래돼 보였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은 뒤, 사무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내가 축구 감독이 됐다니, 이걸 대체 누가 믿을까?’

이혁은 저 멀리 보이는 훈련장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았다. 앞으로 우승컵을 손에 쥐고 팀을 승격시키며 유명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모든 게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그는 훈련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고 자기 팀이 어떤 팀인지, 어떤 선수들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며칠 전 일로 웃음거리가 된 자신을 선수들이 어떻게 대할지도 걱정이 되었다.

이제 그는 약간 혼이 빠진 상태로 훈련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감독이라는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경험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자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혁은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누가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그는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다. 그들이 다 들어오자 꽤 넓어 보이던 사무실이 순식간에 북적거렸다.

“당신들은…….”

이혁은 머리를 문지르며 그들을 쳐다봤다.

그날 이혁에게 경기 지휘를 하라고 했던 그 젊은 남자가 이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로니 감독님, 구단주께서 코치진들을 다시 한번 소개시켜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이혁은 그 말을 하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몇몇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록 그런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이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이제 곧 훈련 시간이군요. 훈련을 시작하세요.”

사람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 젊은 남자는 자리에 남아 있었다. 마지막 사람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이혁은 사무실의 문을 닫고는 그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데비, 당신이 날 위해 이런 일을 한 것은 알겠지만 좀 난처하군요.”

데비 워커는 의외의 대답을 들은 듯 반문했다.

“왜 입니까?”

“전 이 팀의 감독이에요. 권위를 지켜야 하죠.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절 정신병자 보듯 비웃고 또는 동정하는 것도 이제는 신물이 나요. 계속 이런 식이라면 제가 어떻게 팀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간단한 것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감독의 말을 따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코치님을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저들은…….”

이혁은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들은 모두 절 우습게 보고 있어요. 코치님이 절 도와줘야 합니다.”

데비 워커는 저번 시즌을 마친 뒤, 은퇴를 선언했다. 올해 37세인 그는 1군 팀의 코치가 되었다. 그건 로니의 은사인 폴 하트가 그를 거둬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워커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트가 사직을 하고 그가 가장 신임하던 로니가 감독이 되자 그는 로니를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를 보필할 결심을 했다.

로니가 성공해야만 하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이 된다. 또한 로니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그는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코치로서 명성도 별로 없었다. 로니를 따라다니며 경험을 쌓는 게 가장 좋은 길이었다.

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요즘 제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가끔 해야 할 일이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코치님이 저를 매우 훌륭하게 보조해주고 있긴 하지만, 더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워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혁에게 물었다.

“그럼 오늘의 훈련은 어떻게…….”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그 말에 워커는 매우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평소대로 훈련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우리는 손발을 잘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이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워커가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서글프다는 듯이 물었다.

“왜 이게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다 팀을 살리기 위한 것 아닙니까? 훈련을 시작하면 코치님께 모든 걸 맡기겠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아홉 시가 다 되어 가는군요. 갑시다.”

워커는 이혁이 훈련 시간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그가 다소 회복됐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약간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이혁은 모두가 방을 나간 뒤에야 비로소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이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었다. 겨우 들키지 않고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창문 밖을 쳐다보니 아까까지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잔디 관리원들은 훈련장으로 나와 오늘의 잔디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첫 훈련이 눈앞에 다가왔다.

* * *

선수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훈련 일정에 따라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모두 훈련장 밖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감독에게로 쏠려있었다. 선수들은 훈련을 하면서도 자꾸 그를 힐끔거렸다.

또한 선수들뿐 아니라 코치들 역시 호기심을 감출 수 없는 듯했다.

그들의 감독인 로니의 현재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할 만 했다.

이혁은 커다란 선글라스를 썼고 검은 상의와 어두운 색의 바지, 그리고 까만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훈련장 밖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매우 음침해 보였다.

워커마저 로니 감독이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예전의 로니는 항상 편한 운동복을 입고 선수들과 같이 뛰며 훈련을 하던 감독이었다.

뭐, 지금의 모습이 더 감독다워 보이기는 했다. 오늘은 로니가 훈련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가 직접 선수들과 함께 구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