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필드의 마법사

제11화

11화. 승리를 위해서(하)

마이클 캐릭과 에두아르 시세.

그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뚫고 수비 라인까지 올라가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이혁은 아예 그들과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조 콜이나 리 보이어가 공을 받으면 최소 한 명, 보통 두 명의 선수들이 그들을 압박하여 공을 빼앗았다. 빼앗지 못하더라도 그런 공은 멀리 차여져 아웃 선언이 되었고, 그대로 노팅엄 포레스트의 공이 되었다.

그러면 도슨 등이 롱패스를 날려 공격의 물꼬를 이어갔다. 롱패스에 의한 역습은 이미 한 번 당했기 때문에 웨스트햄의 수비라인은 당연히 뒤로 당겨졌다. 이는 미드필더가 커버해야 할 공간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넓은 공간은 리그 최상위의 미드필더들에게 조차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혁은 이런 모든 걸 계산하고 작전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술적인 플레이에 능한 웨스트햄을 상대로 같은 플레이를 한다면 질 수밖에 없다. 섬세함에는 투박함으로 맞선다. 그것이 이혁이 택한 이번 경기의 전술이었다. 이것이 잘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이는 또한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축구 스타일이기도 했다. 이혁은 노팅엄 포레스트가 이런 플레이에 강점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두 명의 공격수를 믿기 때문이었다. 잭 레스터는 골 결정력이 있는 선수였고 아직까지 별다른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말론 헤어우드는 180cm의 키에 몹시 건장하고 기술도 뛰어났다.

그는 슛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그런 거구가 경기장을 누비기만 해도 상대방에게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이 전술은 잘 먹히고 있었다. 압박하여 공을 따내고, 바로 상대 진영으로 롱패스를 날리는 방식을 반복하니 몇몇 웨스트햄 선수들은 별로 할 일이 없을 지경이었다. 전반전에는 비교적 바쁘게 뛰어다녔던 데포는 지금 천천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백전노장인 디카니오 역시 데포와 함께 본의 아니게 한가한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디카니오는 경기 전부터 약간의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로드 글렌은 그를 관리할 겸, 그리고 경기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교체 카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뺀다면 누구를 넣어야 할까? 로드 글렌은 벤치를 훑어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그는 얼른 경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본 것은 노팅엄 포레스트의 18번 선수가 빠르게 골대로 돌진하는 모습이었다. 앤디 레이드가 패스한 공이 그의 발아래에 있었다. 오프사이드도 아니었다!

“이런 망할, 저런 실수를 하다니……!”

그는 방금 경기장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 콜이 공을 가지고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상대 팀 선수 개러스 윌리엄스에게 공을 뺏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반대편에 있던 앤디 레이드에게 패스했고 앤디는 긴 패스로 말론 헤어우드에게 보내 한 방에 수비진을 무너뜨렸다.

이혁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앉아서 지켜볼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묵묵히 뒤를 봐주는 얌전한 감독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헤어우드……. 슛을 잘 못 하는 건 알지만, 이번에 못 넣는다면 2군으로 내려갈 줄 알아!’

이혁은 이를 꽉 물고 다짐했다.

* * *

조용한 빌보르데 훈련장의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 옆에 위치한 작은 경비실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 사이로 중계하는 해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헤어우드 선수는 과연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까요? 슛! 아! 골입니다!”

덜컥!

경비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맥날이 안에서 튀어나와 두 손을 크게 들고 외쳤다.

“골이다! 골!”

같은 시각, 시티 그라운드의 2만 7천 명 노팅엄 포레스트의 팬들도 역시 크게 외치고 있었다.

“골! 포레스트! 포레스트! 와아아아아!”

* * *

관중석은 물이 끓는 듯 소란스러웠다. 첫 골이 들어갔을 때보다 더욱 큰 술렁거림이 시티 그라운드를 온통 뒤덮었다.

헤어우드는 골을 넣자마자 관중석 쪽으로 달려갔다. 팬들은 그에게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냈다. 곧 그는 뒤에서 달려온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혁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데비 워커와 얼싸안았다. 이건 정말 손에 땀을 쥐는 후반 15분이었다. 선수들은 생각보다 훨씬 잘해줬고 그가 겨우 급조한 전술은 통하고야 말았다.

이제 한 점 차이! 역전도 불가능하지 않은 점수 차였다.

“감독님, 정말 대단해요! 최고입니다! 저는 정말 서있는 게 힘들 정도에요!”

워커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저도요!”

이혁 역시 벅차오르는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기분을 남김없이 분출하며 소리를 질렀다.

중계석에서는 물결치는 관중석과 코치와 부둥켜안고 있는 로니 감독 모두가 아주 잘 보였다. 존 모트슨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 믿을 수 없는 후반입니다! 하프 타임을 지나더니 노팅엄 포레스트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벌써 두 골이나 넣고 웨스트햄을 씹어먹을 것 같은 투지를 내뿜고 있군요! 도대체 하프 타임에 감독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요? 경기가 끝나면 모든 사람이 이걸 궁금해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에 집중해야 할 때죠! 노팅엄 포레스트가 과연 역전승을 거둘 수 있을지! 과연 기적이 일어날지 지켜봅시다.”

* * *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관중석의 열기 또한 다소 줄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곧바로 시티 그라운드의 상공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세계는 우리 손안에 있지! 우리는 최강의 축구팀! 승리는 우리의 것!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네! 세계가 우리 손안에 있기 때문이지!”

선수들은 정말 자신들이 홈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전부 자신들을 응원하고 있었고,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팬들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홈경기 승률이 유난히 좋은 팀들이 존재할까? 이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많지만 역시 '팬'이라는 환경의 탓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노팅엄 포레스트처럼 골수 팬덤이 두터운 팀이 그 주체라면 말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포레스트 선수들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그런 홈의 느낌을 느꼈다.

팬들의 열띤 응원 속에서 노팅엄 포레스트는 다시 공세를 시작했고 웨스트햄은 역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로드 글렌은 고개를 돌려 벤치를 보고서야 게리 브런이 아직도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브런! 왜 아직도 여기에 있지? 가서 몸을 풀어두라고 했잖아!”

게리 브런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려다가 지금은 그런 데에 기운을 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바로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웨스트햄 벤치에서 일어난 변화는 이혁의 이목을 끌었다. 몸을 풀러 내려가는 선수는 이혁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워커에게 물었다.

“저 선수는 누구죠?”

워커는 잠시 살펴본 뒤, 이혁에게 말했다.

“게리 브런입니다. 아일랜드의 국가대표 수비수인데, 수비 능력이 출중하죠.”

“웨스트햄이 경기를 포기했나 보군요, 이 타이밍에 수비를 강화하다니……. 제스에게 몸 그만 풀고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그 말에 워커는 몸을 일으켜 이안 제스를 큰 소리로 불렀다.

수비 강화, 이혁이 바라던 바대로 웨스트햄이 움직여주고 있었다. 만약 글렌이 선수들에게 더욱 공세로 나서라고 지시했더라면 이 경기를 뒤집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수비에 집중한다면 경기를 풀어나가기는 더욱 쉬워진다.

수비는 수비에 불과할 뿐이다. 수비만 하는 것으로 이길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격하는 쪽에 유리해지며 한 번의 실수를 파고들면 충분히 골을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31세의 전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이안 제스는 프리킥을 아주 잘 찼다. 그는 A매치에서 프리킥 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이혁은 경기 전날, 훈련 시간에 그의 뛰어난 프리킥 실력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이혁이 지금 당장 전술적으로 활용 가능한 감독으로서의 유일한 역량이기도 했다.

이혁은 남은 시간, 프리킥까지 이용해 웨스트햄을 공략하기로 했다. 상대 진영에서 반칙을 얻어낸다면 프리킥을 통한 득점을 노려볼 수 있었다.

워커가 제스를 부르러 간 사이, 이혁은 경기장을 살펴보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선수는 앤디 레이드였고 그 옆에 천재 미드필더라고 불리는 리 보이어가 서 있었다.

그를 보자 이혁은 웨스트햄의 약점을 하나 더 발견한 것 같았다. 리 보이어는 천재가 맞았다. 하지만 이 천재의 성격은 좀 많이 심각했다. 모두가 그는 괴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체에서는 그를 대놓고 인간말종이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그는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다. 동료 선수와 함께 아시아계 학생을 폭행한 죄로 법정에 서기도 했고, 경기장에서 상대 선수의 얼굴을 차기도 했다. 자기 여자 친구가 인도계라는 이유로 그녀를 원숭이라고 놀린 일도 있었다.

이중 몇 가지는 2003년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혁은 보이어가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보고 있었다. 한 순간의 충동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하기에는 너무 빈도가 잦았다. 그 점을 이용한다면 웨스트햄을 다시 한 번 위기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웨스트햄에서 선수를 교체했다. 글렌 로드는 게리 브런을 투입하고 디카니오를 불러들였다. 그때를 틈타, 이혁은 앤디 레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리 보이어를 주시해.”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등진 채 서 있는 리 보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기 내내 지켜보고 있는데요.”

“아니, 그냥 보는 것 말고. 보이어가 공을 받기만 하면 괴롭히고, 필요하다면 들키지 않게 반칙을 해도 돼. 말을 걸어서 자극해도 좋고. 어쨌든 화를 내게 하라는 거야, 알겠지?”

앤디는 놀란 눈으로 이혁을 보았다.

“예전에 감독님은 그런 식의 플레이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었는데…….”

“그땐 네가 어릴 때니까 그랬지…. 지금은 다 컸고 프로 선수니까 괜찮아!”

이혁은 가볍게 그의 말을 넘겼다.

“프로 축구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골을 많이 넣는 것?”

“승리야! 승리가 없는 축구는 실패한 축구다. 자 그럼 승리를 위해서 보이어를 경기장 밖으로 쫓아내 버려!”

앤디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이혁은 손으로 목을 긋는 동작을 하며 그가 해야 할 일을 일깨웠다. 그것을 보자 앤디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알던 로니 감독이 맞는 건가?

“고민 따위는 하지 마, 앤디! 우리는 그저 이기기만 하면 돼!”

“네, 해보겠습니다!”

이혁이 벤치로 돌아오자 거기에는 이미 제스가 유니폼 차림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제스, 만약 프리킥 찬스가 나온다면 모두 네가 차도록 해. 그걸로 골을 만들어 보는 거야, 알겠지?”

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독님,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혁은 제스를 격려한 뒤, 그를 데리고 갔다. 부심이 선수 교체 표지판을 들었다. 16번 오건 팝이 밖으로 나오고 22번 이안 제스가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양 팀이 선수 교체를 마치자 경기의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관중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앤디 레이드와 리 보이어 사이의 대치였다. 사실 대치보다는 충돌이라는 말이 더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