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업화의 마법사 (2)
쩌적, 쩌저적...!
내 주변을 감싼 얼음의 장벽이 깨지고, 동시에 녹아내리면서 무너져 내린다.
조금 전에 일어난 폭발로부터 물의 보옥이 나를 수호하기 위해서 권능을 발휘한 것이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 권능이 한계에 다다라, 권능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됩니다.]
늘 내 주변을 맴돌던 물의 보옥의 권능이 단번에 사라졌다.
'단지 스친 것만으로 물의 보옥의 힘이 비활성화될 정도라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파괴력.
만약 물의 보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허약한 내 육체는 폭발 근처에서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흔적도 없이 잿가루가 되었으리라.
'에드릭과 알리시아는?'
그에 대한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자욱하게 일어난 폭연이 잠시 걷히면서 주변의 시야가 드러났다.
"콜록! 콜록!"
내 옆에 있던 알리시아가 기침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물의 보옥의 권능이 완충지대가 된 것인지, 알리시아 또한 검은 숯 검댕이 좀 묻었을 뿐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에드릭 또한 조금 전의 기습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데 성공했는지, 전신이 그을린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난 괜찮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괜찮음과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일단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만약 이번 공격으로 최대 전력인 에드릭이 죽거나 전투 불능이 되었다면, 나와 알리시아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디서 온 공격입니까?"
내 물음에 에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파악하지 못했네."
에드릭 정도 되는 실력자가 공격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라....
상황을 파악한다.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에드릭 역시도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중거리 이상 저격 마법 혹은 함정 마법이라고 보는 게 옳다.'
'보통 저격 마법이나 함정 마법은 정면에서 쓰는 마법보다 파괴력이 약한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제약에도 불과하고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이 모든 조건 속에서 자연스레 도출되는 결론.
"후퇴해야 합니다."
에드릭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바지만, 상대가 우리를 곱게 보내 줄지는 의문이군."
에드릭 또한 상대의 강함을 알아차린 듯했으나, 애석하게도 그 선택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피하게!"
콰아아앙!!!───
재차 이어진 폭격.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에드릭은 한발 빠르게 상대의 공격을 알아차렸고, 덕분에 나 또한 가까스로 반응할 수 있었다.
꾸득, 꾸드득....
하이마의 저주가 더욱더 강하게 발동하며 전신의 핏줄이 일어났다.
물의 보옥의 권능이 멈춘 지금 시점에서 건강에 그리 좋은 행위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들 괜찮나?!"
에드릭의 목소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물게 다급함이 느껴졌다.
평소 세상만사 태평해 보이던 에드릭 역시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괜찮습니다, 일단은."
"그것참 애매한 표현이군! 방법이 있겠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없습니다."
쿠우우우웅!!!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다시금 쏟아진 폭격이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발치를 스쳐 지나갔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우리는 상대의 정체는커녕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건만, 상대는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서 안전한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대로는 얼마 못 버텨.'
강력한 마법에는 강력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걸 믿고서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수만은 없다.
상대의 한계가 언제 찾아올지 함부로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의 세계에서 대가란,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었으니.
내가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간단했다.
공정의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악질인 악마가 바로 업화의 악마였고, 업화의 마법사는 바로 그 업화의 악마의 계약자였으니.
"대장님!"
"방법이 있나?"
"예. 둘로 나뉘어서 흩어져야 합니다. 뭉쳐 있어 봤자 상대에게 좋은 과녁판이 되어 줄 뿐입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군! 그다음은 뭔가?"
"가급적이면 대장님께서 요란하게 날뛰어 주셨으면 합니다."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나보고 미끼가 되라는 건가?"
"제가 해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니, 내가 하지. 부하에게 그런 걸 시킬 정도로 매몰찬 상관은 아니라서 말일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드릭 또한 미끼 역할의 적임자가 자신임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나나 알리사아가 날뛴다고 해 봐야,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업화의 제물이 될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그러면 먼저 가겠네."
그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에드릭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어느덧 저 멀리에서 나타났다.
알고는 있었지만 엄청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저런 속도는 그것 자체로도 어떤 존재감을 발산하기에 충분했다.
콰아아아앙!!!
에드릭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기 무섭게 에드릭이 있던 자리에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괜찮은 건가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으니.
"믿어야지, 강한 사람이니."
알리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나와 알리시아는 에드릭이 향한 곳의 반대편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만, 요란한 에드릭과는 반대로 가능한 조용하게 이동했다.
혹시라도 상대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곤란했으니까.
쿵!
쿠우우웅──!!!
거리가 제법 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의 진동과 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터지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잠깐이지만 보였다.'
멀찍이 떨어지고 나서야 폭격이 어디에서 쏟아지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마법이 발산된 위치와 포격이 도착한 위치를 생각하면... 저쪽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에드릭이 날뛰면서 미끼를 자청하는 사이, 폭격을 퍼붓고 있는 마법사의 뒤를 잡는 것.
"이쪽."
폭격의 진원지로 향해 갈수록 매연이 더욱더 짙어졌다.
방향을 정확히 잡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광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이 하늘을 밝게 물들이며, 어두운 밤을 찢고 나아간다.
불꽃의 끈질기고 찬란한 광채가 건물과 나무, 길가의 작은 가게를 휘감았다.
불길은 고요함과 함께 활활 타오르며, 연기와 잿빛 구름을 뿜어내어 하늘을 덮었다.
그리고 우리는 보았다.
모든 게 불타오르고 있는 광경을.
"흐음."
그리고 보았다.
타오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고고히 내려다보는 업화의 주인을.
* * *
알리시아의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꽃들이 비친다.
푸른색 배경에 불꽃들이 어우러지는 그 광경은 어느덧 알리시아를 과거의 한 장소로 이끌었다.
과거의 기억.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기억.
「"이단자를 처단하라!"」
눈동자 속에 비친 기억 속 그녀는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었다.
이교도와 이단자들을 징벌하는 자들.
그렇기에 신의 뜻을 따라서,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징벌했다.
그날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의 뜻을 따르고자 했고, 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을 징벌하고자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오만한 이단자여, 순순히 신의 뜻에 따를지어다!"」
그러나 이번에 마주하게 된 이단자는 이제껏 상대해 왔던 이단자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오늘은... 태울 게 많네?"」
업화의 주인은 입이 귀까지 걸리는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로 업화를 마치 제 수족처럼 부렸다.
「"피해! 불의 마법이다!"」
광기의 불꽃은 삽시간에 주변에 있는 모든 걸 집어삼켰다.
「"불, 불 좀 꺼 줘!"」
「"꺄아아아악...!"」
「"아파, 아파아──!"」
그녀의 친구, 그녀의 가족, 그녀의 동료, 그녀의 모든 것.
「"알리시아."」
전우이자 동료,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이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살아."」
업화가 모든 걸 덮쳤다.
"으, 아으아...!"
알리시아는 여전히 기억한다.
그날 보았던 업화의 주인이 지었던 입이 귀에 걸려 있던 기괴한 미소를.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업화의 주인은, 그날과 같은 미소를 걸친 채로 그녀를 마주했다.
"태울 게, 더 생겼네?"
그때와 같은 목소리로, 단어로.
알리시아의 영혼을 마음껏 유린하고, 갈가리 찢어발기듯이 그렇게 말했다.
"마법... 사...!"
감히 말로 표현되지 않는 분노와 증오가 알리시아를 감쌌다.
"마법사마법사마법사마법사마법사마법사마법사마법사...!!"
알리시아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대로 과거 속에 갇혔다.
에드릭의 경고는 더 이상 알리시아에게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서, 알리시아는 그날 자매들과 함께 죽지 않고서 살아왔던 것이었으니까.
"마법사아아아──!!!"
절규와 절망이 뒤섞인 외침이 울려 퍼지며 알리시아의 몸이 그대로 쏘아졌다.
* * *
알리시아가 업화의 마법사를 향해서 달려 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돌발 행동이라면 돌발 행동이었으나, 솔직히 나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 상정했던 일이었다.
아니, 이번 임무 내내 알리시아가 보였던 반응을 생각한다면 예측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상대는 지금 알리시아에게 모든 신경이 쏠렸다.'
거기에 더해서 어딘가에서 한창 이목을 끌고 있을 최위험 인물인 에드릭 역시도 멈추지 않고 견제하고 있을 테니, 상대적으로 이 중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나에 대한 집중도는 낮아졌을 터.
'사각을 노린다.'
물론 저 마법사에게 단순히 오감 말고도 탐지 방법이 있다는 건 이미 파악이 된 바지만, 인간인 이상 한계는 있을 터.
그렇기에 내가 노리는 사각은 시야의 사각이라기보다는 정신의 사각이라 볼 수 있었다.
'일단 총이 발사되고 나면 마법사의 시선은 나에게 옮겨 올 수밖에 없다.'
가능하다면 초탄에 적을 제압하되,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지닌 모든 화력을 단번에 쏟아 넣어야 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죽을 테니.
"마법사아아아아───!!!"
다행히도 알리시아가 악을 쓰면서 마법사에게 달려든 덕분에 내가 마법사의 배후를 잡는 건 쉬웠다.
화르륵!
삽시간에 일어난 업화가 알리시아를 덮친다.
알리시아는 몸이 그을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서 어떻게든 마법사를 베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이번 잿더미는 재밌구나."
마법사는 마치 조롱하듯이 말하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와 함께 일어난 업화가 알리시아를 계속해서 덮쳤고, 알리시아의 검은 허공은 갈랐다.
"끄윽, 끄아아...!"
비명, 절규, 절망.
그 모든 게 뒤섞인 채로 알리시아는 업화의 마법사에게 농락당했다.
그만큼 둘 사이의 실력 차이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왔다.'
단 한 번의 기회.
특별히 어떤 작전을 미리 짜 놓거나 한 건 아니다.
다만, 제4 특무대로서 함께해 왔던 세월이 알리시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느끼게 했을 뿐.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내가 마법사의 배후를 잡기 무섭게 알리시아의 손에서 마법이 발동됐다.
징벌 교단 이단 심문관의 마법이.
삐이이이이이───
찬란하게 쏟아진 빛이 일대를 뒤덮고, 순간적으로 일대의 모든 시각과 청각을 차단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마법이다 보니 나 또한 그 마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미리 눈을 가려 뒀던 탓에 시야만큼은 확보할 수 있었다.
철컥─
기회는 주어졌다.
남은 건,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
타아아아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날아간 총알이 업화의 주인을 향해서 쏘아졌다.
35화 업화의 마법사 (3)
모든 게 완벽했다.
적과 마주하기 무섭게 더없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적의 의식을 다른 곳으로 유인했고, 그 틈을 타서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자신 또한 있었다.
공정의 세계에 아무리 많고 많은 괴물들이 있다고는 해도, 인간인 이상 머리에 총을 맞고도 살아남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후에 일어난 일은 내가 기대했던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화르르륵──!
갑작스레 일어난 업화의 장벽.
그것이 마치 제 주인을 감싸듯이 마법사의 배후를 막아선 것이다.
프스스....
당연하게도 날아간 총알은 마법사에게 닿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재미있는 잔재주로다."
그와 함께 내 존재를 알아차린 업화의 주인이 나를 보며 웃었다.
입이 귀에까지 걸리는 듯한 기괴한 미소 속에서 전신에 옅은 화상을 입고 있는 알리시아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마법, 사...!"
알리시아는 전신의 그을린 화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다시금 업화의 마법사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마법사아아아──!"
마치 자신의 목숨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구나. 그 또한 덧없이 사라질 것들의 아름다움이겠지."
마법사의 작은 손짓과 함께 업화가 치솟는다.
단지 스치는 것만으로도 나나 알리시아 따위는 단번에 잿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위협적인 업화가.
콰콰콰!!
"피해!"
나와 알리시아는 동시에 가까스로 몸을 날려서 업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업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쾅!
콰콰쾅!!
업화가 연신 쏟아지면서 나와 알리시아는 피하기에 급급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함께 업화에 휩쓸릴 게 뻔했기에 내가 외쳤다.
"흩어져!"
"...읏!"
다행히 알리시아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는지 나와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화르륵!
내가 내달리기 무섭게 그 자리마다 업화가 치솟으며 일대를 불태웠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
"잘 피하네? 그러면 이것도 피해 볼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또한 불행에 불과할까.
업화의 마법사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나와 알리시아를 통째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만에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이 우리를 몰았다.
"더, 더, 더! 힘없이 떨어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태우는 불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이 모든 과정이 즐겁다는 듯한 업화의 마법사의 모습에 알리시아가 비명인지 오열인지 모를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마법사아아아──!!!"
어쨌거나 그 덕분에 나는 이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기습은 완벽했어. 하지만 실패했다. 어째서지?'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해석한다.
이는 내가 공정의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고, 나는 곧 그에 대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의식하고 막은 게 아니다. 이건 마법이 자동으로 발동한 거다.'
즉, 이건 마법사가 반응해서 방어 마법을 펼쳤다기보다는 특정 마법이 위험을 감지하고는 자동적으로 펼쳐졌다고 보는 게 옳았다.
내가 알기에 그런 마법은 하나뿐.
'자율 방어 마법이군.'
나는 콜트 패리슨을 들었다.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알리시아는 지금도 업화의 마법사에게 사실상 농락당하다시피 당하고 있었고, 만약 이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의 최후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타앙!
탕! 탕탕!
나는 가설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 몇 번 방아쇠를 더 당겼으나, 애석하게도 콜트 패리슨의 총알은 다시금 일어난 업화의 장벽 앞에서 힘없이 녹아내렸다.
가설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끄윽!"
알리시아 또한 갑작스레 일어난 업화에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렸다.
날아가는 총알조차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다니... 만약 알리시아가 저것에 노출되었다면 단번에 잿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자율 방어 마법으로 저 정도 수준이라....'
강력한 마법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업화의 마법사는 그런 법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장거리 저격 마법은 물론이고, 자율 방어 마법까지도 사용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더럽게도 많이 태웠나 보군.'
업화의 악마는 공정의 세계에 있는 악마 중에서도 특히나 질이 나쁜 악마에 속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업화의 악마가 마법의 대가로 요구하는 것은 마법사 본인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업화의 악마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자 한다.
그렇기에 업화의 마법사들이 지니는 가장 강력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업화로 불태운다는 것이다.
곧, 지금 눈앞에 있는 업화의 마법사가 강력한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난사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생명을 불태워 왔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했다.
'용케 지금까지 살아 있었군.'
보통 일반적인 상황에서 업화의 마법사들의 생존율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업화의 악마가 요구하는 대가는 어찌 보면 마법사 본인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에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결과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대신 마법의 대가로 바친다는 건, 곧 마법사 본인이 좋든 싫든 학살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실제로 내가 공정의 세계를 플레이 했던 당시, 업화의 마법사들은 한번 나타날 때마다 대륙을 들썩이게 만들고는 빠르게 토벌되었다.
태생적인 특성 탓에 업화의 마법사의 존재 자체가 광역 어그로를 끄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런 업화의 마법사가 저 정도로 성장할 때까지 살아남았다라....'
그에 대한 원인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 라크나 대륙에는 업화의 마법사 따위가 날뛰어도 그 어떤 신경도 못 쓸 정도로 큰일이 있었으니.
바로, 멸망룡의 출현이 말이다.
돌고 돌아서 또 멸망룡인가 싶었지만, 애초에 멸망룡쯤 되는 존재가 남긴 여파가 가벼울 리가 만무했다.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겠지.'
중요한 건 지금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나와 알리시아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점이었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마법의 대가가 바닥날 때까지 소모전을 하는 거겠지만, 놈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건대 승산은 낮다.'
그러는 와중에도 알리시아의 몸에 달라붙은 불꽃들이 마치 벌레들처럼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몸을 갉아먹는다.
의도적으로 화력을 조정했기에 저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끄으윽...!"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쓰러지지 않았다.
대체 저 업화의 마법사와 알리시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알리시아가 저렇게 악을 쓰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나마 에드릭이 합류한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업화의 마법사가 맺는 수인들에서 몇 가지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와 알리시아만을 상대할 거라면 저런 복잡한 수인들은 필요 없다. 그렇다면....'
즉, 지금 업화의 마법사는 어딘가에서 이목을 끌고 있을 에드릭을 향한 폭격 역시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얼핏 보면 그저 공정의 세계에 있는 흔한 광마법사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가장 위협이 될 존재인 에드릭을 상당한 여력을 투자하면서까지 싸움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이대로면 얼마 못 버텨.'
탕!
타타탕!!
발악하듯이 콜트 패리슨의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지만, 역시나 마법사에게서 일어난 업화의 장벽이 총알들을 막아 냈다.
콜트 패리슨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설령 비장의 무기인 더블 배럴 샷건을 꺼내 든다 한들 변하는 건 없을 터.
"아련한 자들의 발버둥이란... 이 얼마나 황홀한가."
마법사의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느덧 사방에 불꽃이 가득 차올랐다.
마치 온 세상이 화염으로 물든 것처럼 업화가 연달아 치솟으면서 나 또한 도망칠 장소가 점차 줄어든 것이다.
직접적으로 업화에 그을린 적도 없었건만, 주변의 열기에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전신의 피부는 화상을 입어서 붉게 달아올랐다.
만약 물의 보옥이나 화염 내성 특성이 없었더라면 진작 탈진해서 쓰러졌을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다.
'나나 알리시아나 둘 다 한계다.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 못해.'
'상대의 마법의 한계는 파악 불가.'
'가장 강력한 전력인 에드릭의 지원은 현실적으로 바라기 어렵다.'
하나하나가 이 상황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사실들뿐이었으나,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허리춤에 달아 놓은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어루만졌다.
'결국 이 방법뿐인가.'
가능하다면 이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나에게도 방법이 없었다.
"마법... 사아...."
악을 쓰며 마법사에게 달려들던 알리시아의 전신이 어느덧 새까맣게 그을렸다.
지금껏 그녀를 지탱하던 증오와 분노라는 원동력조차,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갉아먹듯이 태우는 불꽃을 감당하지는 못했다.
"이제 지겹군."
지금껏 연신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던 마법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제 가거라, 아련하고 가련한 재야."
"죽여, 버릴 거야...."
알리시아는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곧이어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아아...!"
업화의 불길이 알리시아를 덮친다.
이제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장 업화의 마법사를 향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련한 재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는구나! 좋다! 오너라!"
모든 마법사는 자신과 계약한 악마와 연결되어 있다.
아니, 애초에 그렇기에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바꿔 말하자면, 지금 이곳에 업화의 악마가 존재한다는 뜻과도 같았다.
촤악!
샐러맨더의 송곳니에 의해서 그어진 손바닥에서 피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하이마의 저주를 이용해서 의도적으로 혈류속도를 높인 것이었다.
부작용이 엄청난 사용 방법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푸슈욱...!
내가 흩뿌린 피를 따라서 허공에 육망성이 그려진다.
굳이 거창하게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 같은 걸 치를 필요도 없었다.
업화의 악마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존재하고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쿠구구구구...!
흩날리는 피에 그려진 육망성에서 업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구나!"
그제야 내가 하려는 일을 알아차린 업화의 마법사가 웃음기를 싹 거둔 채로 나를 향해서 업화를 일으켰다.
업화가, 나를 향해 온다.
쿠구구구구구!!!──
나도 안다.
지금 내가 저 마법에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잿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 그대로 소멸할 거라는 걸.
하지만 말이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선전수적순패(旋轉水的盾牌)'를 전개합니다.]
이제 막 제 권능을 되찾은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수류의 방패가 나를 막아섰다.
얼음이 아닌, 회천하는 물.
업화의 마법이 만들어 낸 지금의 환경이, 이제껏 혹한의 냉기에 의해서 봉인되어 있었던 물의 보옥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 낸 것이다.
푸슈욱...!
일부나마 제 권능을 되찾은 물의 보옥의 힘은 업화의 마법사의 마법마저도 막아 냈다.
그 틈은 나에게 있어서 시간을 벌어 주기에 충분했다.
바로, 악마를 불러낼 시간을.
"계약 선언."
나지막이 읊조린 주언과 함께.
"업화만개(業火萬丈)."
세상이 멈췄다.
36화 업화의 마법사 (4)
지독할 정도의 적막감이 돈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시간을 멈춘 게 아니다.
단지, 의식을 쪼개고 쪼개서 이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지게 했을 뿐이지.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일단은 개념 자체가 그렇다는 소리다.
스스스....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세상 속에서 오직 업화만이 조금씩 움직이며 주변의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업화만개(業火滿開).
얼핏 보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게 불타는 것 같은 광경이었으나, 타오르는 업화는 주변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태우지 않았다.
단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
나는 저것을 무어라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고오오오오──
업화의 악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업화라는 개념 혹은 그 자체인 존재.
그것이 존재를 드러냈다.
우우, 우우우우──
파르르....
주변의 업화가 마치 자신들의 주인을 경배하듯이 부르르 떨었다.
우스운 광경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업화는, 어찌 보면 업화의 악마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니.
스멀, 스멀....
사방에 일어난 업화들이 나를 향해서 스멀스멀 기어 온다.
불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뱀 같은 모양새였다.
[태고의 본질 중 하나를 마주하였습니다!]
[태고의 마(魔)가 당신의 본질에 침입합니다.]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마(魔)에게 대항합니다!]
'역시.'
본래였다면 레벨이 고작 2에 불과한 나는 악마의 존재를 마주한 순간 정신 자체가 붕괴했어야 한다.
까마득한 태고의 본질.
그것이 악마였고, 그 존재는 범인(凡人)이 감히 감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멸망 유예자의 정신은 악마의 존재를 마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했다.
뭐... 엄밀히 따지면 애초에 멸망 유예자 자체가 마(魔)의 대척점에 선 존재였으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화르륵...!
곧이어서 타오르는 불로 만들어진 천칭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매번 모습은 다를지언정 저것을 무어라 부르는지는 알고 있었다.
'공정의 천칭.'
저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가장 거대한 신비 중 하나이자, 동시에 이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정의 천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약은 설령 악마라 할지라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으니.
[황금률의 계약을 시작합니다.]
[계약의 대가를 제시하십시오.]
끼이익──!
불로 만들어진 천칭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칭은 분명하게 소리를 내면서 기울었다.
내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계약의 대가가 부족합니다.]
[계약의 균형을 맞추십시오.]
우스운 일이다.
애초에 나는 아무런 대가를 제시한 적도 없었건만, 업화의 악마가 멋대로 먼저 계산서를 내민 것이다.
그렇기에 악마와의 계약은 공정하면서도 동시에 공정하지 못하다.
애초에 한낱 인간이 악마와 같은 위치에 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보통은 이럴 때 악마가 제시한 대가를 억지로 이쪽에서 채워 넣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들까지도 계약의 대가로 치르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도 담보로 걸어서 말이다.
'악마가 원하는 대로 말이지.'
당연하지만, 나는 저런 말도 안 되는 거래에 응해 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 거래에서 원하는 건 세상을 불태울 수 있는 거창한 마법 따위가 아니었으니.
'이 계약의 천칭을 바꾸려면, 악마가 내건 계약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본래였다면 그걸 알아내는 과정은 무척이나 지루하고 까다롭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업화의 악마가 첫 번째 계약에서 내걸 마법과 조건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업화의 악마가 첫 번째 계약에서 내걸 마법은 업화를 일으키는 마법. 그리고 마법의 대가는 업화의 마법을 일으키는 것에 비례한 생명을 태우는 것.'
그 생명이 자신의 것이든 혹은 타인의 것이든 관계없다.
업화의 악마에게 있어서 타오르는 잿더미는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으니.
괜히 업화의 악마와 계약한 마법사들이 전통적으로 온갖 어그로를 끌다가 토벌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천칭의 계약을 거절한다."
그에 업화가 들썩였다.
많은 이가 악마의 존재에 압도되어서 감히 계약을 거절하지 못하지만, 공정의 천칭에 올려진 대가를 거절하는 것 역시도 공정한 계약의 기본적인 권리다.
물론 이 권리를 내세우는 게 지금처럼 마냥 쉬운 건 아니다.
때로는, 지극히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조차도 힘든 법이었으니.
특히 그게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상대로라면 더욱더 그랬다.
만약 내가 멸망 유예자가 아니었더라면 나조차도 감히 내세우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황금률의 계약에 따라, 새로운 계약 요청을 선언한다."
끼긱, 끼드득....
끼르르륵...!
업화가, 불꽃들이 마치 춤을 추듯이 웃으면서 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돈다.
업화의 악마는 지금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괜찮은 유희거리라도 발견한 듯이.
끼긱, 끼기긱....
그와 함께 천칭이 조금씩 나에게로 수평이 맞춰지고 있다.
내가 공정의 천칭 위에 올려놓을 대가가 줄어들고 있다는 뜻.
대가가 줄어든다는 건 곧 업화의 악마가 나에게 건네는 마법의 위력이나 범위 역시도 낮아진다는 걸 의미했으나,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업화의 마법사가 되어서 세상을 불태우는 것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끼이익....
마침내 천칭이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천칭은 내 반대쪽으로 살며시 기울어져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나는 천칭 위에 그 어떤 대가도 올리지 않았으니까.
이제, 내가 천칭 위에 무언가를 올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치러야 할 대가를.
'흐음....'
천칭의 기울기를 보니, 이쯤에서 업화의 마법사와 계약을 하더라도 그리 큰 위험부담 없이 업화의 마법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치러야 할 대가가 약해진 만큼 마법의 위력 역시도 덩달아 약해지겠지만, 보편적으로 큰 마법들이 지니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계약을 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위험을 무릅쓰고서 업화의 악마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악마에게 대가 따위를 치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계약에 있어서, 공정의 천칭 위에는 올리는 게 적을수록 얻는 것 또한 적다.
그 말을 바꿔서 말하자면, 반대쪽 천칭에 올라가는 게 적어지고 조건이 까다롭고 많아질수록 내가 치러야 할 대가 역시도 극단적으로 줄어든다는 소리다.
나는 그걸 위한 조건 중 하나를 이미 지니고 있었다.
스르릉....
나는 허리춤에 매여 있는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뽑아 들고는 그것을 공정의 천칭 위에 올렸다.
샐러맨더의 송곳니는 자체적으로 화염 속성을 품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업화를 일으키는 것과 이미 화염 속성을 지닌 물건을 매개체로 삼아서 업화를 일으키는 것.
그중 무엇이 더 쉬운 일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즉,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업화의 악마와의 계약의 매개체로 삼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마법에 대한 대가는 비약적으로 줄어든다는 소리다.
끼이익....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칭은 여전히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직 이것을 통해서 어떤 계약을 맺을지 구체적으로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선언한다. 황금률의 계약에 따라, 계약의 대상을 천칭 위에 올려진 매개체로 한정하는 제약을 더한다."
즉, 나는 업화의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매개체인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통해야만 한다.
이건 그런 제약이었다.
끼이익....
천칭에 매단 조건을 바꾸기 무섭게 천칭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을 계약자 본인이 아닌 천칭 위에 놓인 매개체로 한정한다는 건 그만큼 큰 제약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때 필요한 제약이 크면 클수록, 그 대가는 적어진다.
바로 지금처럼.
[계약에 제약을 추가하였습니다.]
[제약─계약의 대상을 매개체, '샐러맨더의 송곳니'로 한정한다.]
끼이이─
천칭의 기울기는 이제 놀라울 정도로 수평에 가까워졌다.
'이 정도면, 이대로 계약을 진행하더라도 내가 치를 대가는 기껏해야 마법을 쓸 때마다 동물 몇 마리를 산 채로 태워 죽여야 하는 정도겠지.'
악명이 자자한 업화의 마법치고는 사실상 대가가 없는 수준.
하지만 이미 충분히 마법의 대가가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조건을 쌓고, 제약을 더하고.
그것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 점점 줄어드는 법이었으니.
"선언한다. 황금률 계약에 의거하여, 계약의 대가에 제약을 더하겠다."
그렇다면 어떤 제약을 더할 것인가.
그 또한 정해져 있었다.
"계약을 통한 마법의 효과를 업화의 발생이 아닌 통제로 제약한다."
스스로 새로이 업화를 일으키는 대신, 매개체에 깃들거나 맞닿은 업화를 통제할 뿐.
이것이 내가 이번 계약에서 새로 더할 제약이었다.
[계약에 제약을 추가하였습니다.]
[제약─업화의 발생을 제약한다. 단, 매개체를 통해서 업화를 통제하는 것은 가능하다.]
업화의 마법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닌, 그저 매개체에 깃들 업화나 닿은 마법을 조종하는 것.
이것으로 내가 업화의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치러야 할 대가는 극단적이다 못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면....'
첫 번째 조건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매개체─샐러맨더의 송곳니로 한정했다.
두 번째 조건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본래 매개체에 깃든 업화의 힘을 이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으로 제약했다.
마법의 사용에 있어서 무수한 제약을 더한 만큼, 이로써 계약에 필요한 대가는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이 정도라면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을 대신해서 태워도 되는 수준이겠지.'
그 정도면 사실상 마법의 대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끼이이...!
그와 함께 천칭이 완전한 수평을 이루게 되었다.
마침내, 황금률로 이루어진 공정한 계약이 성립이 된 것이다.
[위대한 황금률의 법칙에 따라서 공정의 천칭이 완전한 수평을 이루었습니다.]
사방에 펼쳐져 있는 업화가 들썩인다.
마치 이 계약을 축복하듯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시시하게 끝낼 수는 없지.'
나는 이 계약의 마지막 제약을 부여하기 위해서 입술을 열었다.
마법의 대가가 '없는 것과 같은 것'과 '없는 건' 전혀 다르다.
아무리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 적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0과 1의 차이였으니까.
'마지막 제약을 더한다.'
공정의 천칭에 올리는 제약과 조건이 크면 클수록 자연스레 계약의 대가는 작아진다.
그렇다면 특정 제약을 통해서 마법의 대가를 완전히 제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정답은 가능하다이다.
"선언한다."
그와 함께 공정의 천칭이 찌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계약의 매개체를 이 계약의 증거로 삼으며, 매개체가 손실될 시 계약자의 생명을 바친다."
[계약에 제약을 추가하였습니다.]
[제약─계약의 매개체인 '샐러맨더의 송곳니' 소실 시, 사망.]
마지막으로 선언한 제약으로 인해서 천칭이 나에게로 완전히 기울었다.
조금 전에 간신히 수평을 되찾았던 공정의 천칭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생명을 담보로 건 제약은 그만큼 거대한 것이었고, 설령 그 가능성이 하염없이 낮다 하더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본래였다면 천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반대쪽에서 무언가를 더 얹어야만 했으나, 내가 이미 선언한 제약 때문에 반대쪽 천칭에는 무언가를 더 얹을 수 없다.
[제약─계약의 대상을 매개체, '샐러맨더의 송곳니'로 한정한다.]
[제약─마법의 발생을 제약한다. 단, 매개체를 통해서 마법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하다.]
[제약─계약의 매개체인 '샐러맨더의 송곳니' 소실 시, 사망.]
곧, 반대쪽 천칭에서 줄일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업화의 악마가 이번 계약을 통해서 받았어야 할 대가.
그래, 본래였다면 내가 업화의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업화의 악마에게 지불했어야 할 그 대가 말이다.
내가 내건 생명의 제약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업화의 악마가 당연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할 권리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업화의 악마는 내게서 그 무엇도 얻어 갈 수 없다.
그것이, 공정한 계약이었으니까.
[계약의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황금률의 계약에 따라, 공정의 천칭 위에 놓인 계약을 변경합니다.]
끼이이익───!
업화로 이루어진 공정의 천칭이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부르르 떨었다.
만약 심약한 이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지레 겁을 집어먹고서 계약의 조건을 바꿀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자, 어쩔 거냐.'
이제 업화의 악마가 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였다.
황금률에 의해서 지켜진 이 계약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이 계약을 억지로 파투 낼 것인지.
업화의 악마의 대답은 간결했다.
쿠구구구구...!
무너져 있던 천칭의 수평이 다시금 균형을 찾기 시작한다.
업화의 악마가 기울어진 공정의 천칭을 다시금 수평으로 맞추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을지야 뻔했다.
업화의 악마가 천칭에 올려놓을 수 있는 건, 역설적이게도 본래였다면 받아야 했을 대가를 억지로 내려놓는 것뿐이었으니.
[공정의 천칭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공정한 계약이 집행됩니다.]
업화의 악마가 이 계약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공정의 천칭을 통해서 성사된 계약은 무를 수 없다.
황금률의 계약이야말로 이 세계의 가장 거대한 신비였고, 이것을 거스르는 건 악마 또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화르륵!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곧이어서 업화로 만들어진 공정의 천칭을 중심으로 불꽃이 치솟았다.
푸른빛, 주황빛, 붉은빛, 하얀빛.
온도를 짐작할 수 없는 불꽃들이 어지럽게 어우러지더니, 이윽고 공정의 천칭 위에 놓여 있는 샐러맨더의 송곳니에게로 깃들었다.
[공정한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공정한 계약에 따라서, '업화의 악마'의 권능이 계약의 매개체인 '샐러맨더의 송곳니'에 부여됩니다.]
샐러맨더의 송곳니에 깃든 업화가 꺼지지 않고서 그대로 샐러맨더의 송곳니 안에 스며들었다.
['샐러맨더의 송곳니'가 '업화의 송곳니'로 변화합니다!]
────────────
[업화의 송곳니]
분류 : 무기
등급 : 전설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가공해서 만든 단검.
업화의 악마와의 계약의 증표로서, 업화를 다룰 수 있는 권능이 깃들어 있다.
────────────
'호오....'
본래 샐러맨더의 송곳니의 등급은 희귀 등급이었으나, 이번 계약을 통해서 업화의 힘이 깃들며 무려 두 단계 위인 전설 단계로 승급했다.
단순히 업화를 다룰 수 있는 마법이 새겨진 것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무기 자체의 성능이 월등히 올라간 것이다.
만약 다른 무기였다면 이 정도의 시너지를 발휘하지는 않았겠지만, 샐러맨더의 송곳니 자체가 본래 화염 속성을 품고 있던 무기였다 보니 이런 기적 같은 스펙 상승이 가능했다.
'애초에 이걸 노린 거지만.'
이로써 나는 업화의 마법에 대적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넣었다.
그것도 그 어떤 대가조차 치르지 않고서 얻어 낸 성과였다.
'물론 대가 이상의 리스크가 있긴 하지만 말이지.'
앞선 두 가지의 제약은 마법의 위력을 한정 짓는 제약이었으나, 마지막 세 번째 제약은 나에게 직접적인 리스크로 다가오는 제약이었다.
[제약─계약의 매개체인 '샐러맨더의 송곳니' 소실 시, 사망.]
그러나 그 리스크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그 어떤 대가도 내어놓지 않았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마어마한 일이었으니.
'그러면....'
애석하게도 나에게 더 이상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사고의 속도가 점차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게 그거였다.
화르륵!─
이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영원의 업화가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세상의 색깔이 다시금 내가 알고 있는 색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장소.
동시에 내가 있어야 할 장소로.
37화 업화의 마법사 (5)
알리시아에게는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찾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가져간 이.
그렇기에 자신 또한 모든 걸 뺏어 와야만 하는 이.
"마법, 사...."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법사에게 모든 걸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그 마법사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아니,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 마법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주로 활동하는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그 마법사가 업화를 수족처럼 부렸다는 것뿐.
그렇기에 알리시아는 마법사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이단 심문관의 과업마저도 내팽개친 채로, 자신의 모든 걸 앗아 간 마법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걸 바쳤다.
그러나 좀처럼 꼬리는 잡히지 않았고, 알리시아는 점차 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에 스스로 잠식되어 갔다.
"죽여, 버릴 거야...."
그럴 때마다 알리시아는 신이 아닌 악마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계약을... 바라는가?]
물론 알고 있다.
저건 환청에 불과하다는 걸.
아니, 그래야만 했다.
"우왓? 뭐야?"
"미친 여자인가 봐...."
자신을 돌보지도 않은 채로 제국 곳곳을 배회하고, 또 배회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우연히 겨울성 크로이츠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은.
"자네, 그 이야기 아는가?"
"무슨 이야기?"
처음에는 어디에나 있는 시답잖은 이야기로 듣고 넘기려고 했다.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얼마 전에 화형당했다고 알려졌던 마법사 기억나나? 그, 예전에 광장에서 이단 심문관들한테 잡혀갔던."
그들의 입에서 마법사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응? 아! 기억났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뭔가? 마법사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그 마법사가 겨울성에 있다고 하네."
"뭐, 뭐? 그게 진짠가?"
"내가 허튼소리 하는 것 봤나? 이번에 페가수스 상단의 상행에 따라갔던 내 친구가 봤다고 하더군."
"잠깐, 그것보다 페가수스 상단이 겨울성에는 왜?"
"몰랐나? 페가수스 상단은 정기적으로 겨울성행의 상행을 꾸리네. 겨울성만큼 돈이 되는 곳이 흔치 않지 않나?"
"으음... 그것도 그렇군. 그건 그렇고 마법사를 봤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죽은 마법사가 겨울성에 어떻게 있어?"
"죽지 않았던 거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리시아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마법사의 단서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았다니? 조금 전에 화형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보았나? 그 마법사가 화형을 당하는 걸?"
"그야... 못 봤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가 겨울성에 있다는 게 말이 되나? 교단이 가만히 있겠어?"
"하지만 가만히 있지. 그게 뭘 의미하겠나?"
사내가 덧붙였다.
"겨울성이 어딘가?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 아닌가? 모두가 기피하는 곳에 어떤 병사가 자진해서 입대하겠나?"
"원해서 가나? 끌려가는 거지."
"이 사람 참. 그렇게 끌려간 병사들이 제대로 싸우기나 하겠는가? 그런데도 아직도 마경과의 전선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가 뭐겠나? 제국과 징벌 교단이 거래를 한 거지, 제국은 교단에 여러 특혜를 봐주고, 대신 이단 심문 과정에서 포박한 마법사들을 징집하는."
"지금 설마 겨울성에서 마법사들을 군인으로 징집한다는 소리인가? 큰일 날 소리를!"
알리시아 또한 사내와 같은 심정이었다.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었다.
알리시아는 마음 같아서는 신성모독으로 저들을 즉결 집행 하고 싶었으나,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실제로 알리시아 역시도 이단 심문 과정에서 심문을 하던 마법사가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이송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알리시아는 문득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궁금해졌다.
그 많던 마법사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혹시, 저들의 말마따나 정말로 겨울성으로 향한 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겨울성에 그 마법사가....'
그때부터였다.
알리시아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겨울성으로 향하기 위해서 스스로 죄인 신분이 된 것은.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사들이 강제로 징집된다는 겨울성이라면, 혹시라도 그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소문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겨울성에서는 은밀히 징벌 교단에 의해 사로잡힌 마법사들을 징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징벌 교단의 부정에 대해서 분노할 감정은 이미 알리시아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마법사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뿐.
오직 그것만이 알리시아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그렇게 알리시아는 겨울성으로 향하는 죄수 호송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다가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벨 블랙우드.
처음에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였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켜보기 시작했으나, 이윽고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용하는 마법의 성질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벨 블랙우드에 대한 관심 역시도 그쯤에서 끝이었어야 했건만, 이번에는 다른 부분에서 그녀의 이목을 끌었다.
바로 상식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성장 속도였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었으나, 날이 갈수록 신체 능력이 월등히 발전하는 벨 블랙우드를 보고 있으니 알리시아는 싫어도 어떤 호기심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였다.
어느날 벨 블랙우드에게서 달짝찌근한 냄새가 났고, 이끌리듯이 가다 보니 그곳에서 벨 블랙우드가 육포를 뜯고 있었다.
벨 블랙우드는 기꺼이 알리시아에게 육포를 건넸다.
지난 세월 동안 수도원에서의 밋밋한 식사와 겨울성에서의 식사만 먹고 살았던 알리시아에게 있어서 육포의 맛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렇기에 벨 블랙우드에 대한 평가 역시도 조금 바꿀 수밖에 없었다.
'...뭐, 나쁘지 않은 사람이네.'
겨울성에서의 일상은 쉽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마치 이곳의 타성에 젖어 들 듯이.
그러다가 하마터면 자신의 목적을 잠시 잃어버릴 뻔도 했지만, 알리시아는 잊지 않았다.
「"아파아아! 아파아아!"」
「"물! 물! 누가 불 좀 꺼 줘어...!"」
그들이 내질렀던 비명과 절규. 그리고 여전히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증오와 슬픔의 모든 감정을 말이다.
그렇게 일상이 이어지던 도중, 새로운 임무가 제4 특무대를 찾아왔다.
"어떤 임무입니까? 마수 토벌입니까?"
"토벌은 맞지만, 마수는 아닐세. 우리는 마법사를 토벌할 걸세."
마법사 토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알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이.
어쩌면, 그 마법사가 내가 찾고 있는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에서 제4 특무대를 맞이한 건 어딘가에서 쏘아지는 업화였다.
업화의 마법사.
자신의 모든 걸 불태우고 앗아 간 이.
알리시아는 마침내 그 마법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알리시아는 이제껏 메말랐던 증오와 분노가 다시금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움직였다.
그 어떤 대가를 바쳐서라도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서,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달려들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업화의 마법사는 강해도 너무나도 강했고, 알리시아는 물론이고 벨 블랙우드와 에드릭조차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포기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그녀의 삶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
사방에서 업화가 쏟아진다.
감히 피할 수조차 없는 반경으로 좁혀 드는 업화를 맞으면서도 알리시아는 꿋꿋이 나아갔다.
"마법, 사──!"
전신이 불타고, 업화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의 전신을 갉아먹어도 알리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끝내 알리시아의 검은 업화의 마법사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검을 내지르고 찌르려고 할 때마다 앞에서 치솟는 업화는 끔찍할 정도로 마법사를 보호했다.
모든 마법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 마법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거대한 대가를 요구하기에, 이 정도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마법사는 알리시아로서도 금시초문이었다.
마법사가 밉다.
마법사를 죽이고 싶다.
마법사를....
알리시아가 끊임없이 증오를 곱씹으며 악을 내질렀다.
"으아, 으아아아──!"
하지만 닿지 않았다.
마법사가 밉고 죽이고 싶었으나, 그보다 더욱더 용서할 수 없는 건 그토록 씹어 삼키고 싶었던 이를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이었다.
"우, 우으우...."
절규, 절망, 비탄, 증오, 분노.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서 알리시아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로 흘러나왔다.
"우으아아아아...!!"
"더, 더, 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증오와 비탄의 교향곡인가!"
마법사가 광기에 잔뜩 젖은 채로 광소를 터트렸다.
"아, 아으아...."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은 알리시아가 입을 뻐금거리며 간절히 빌었다.
한때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존재에게 말이다.
신이시여.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 징벌의 여신이시여.
단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부디 이 순간, 당신의 기적을 저에게 보여 주시길....
애석하게도 알리시아에게 찾아온 건 신의 기적이 아닌, 마법사가 흩뿌린 업화의 조각이었다.
신은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이 붉게 물든다.
모든 것이, 붉게 물든다.
"미안, 미안...."
최후의 순간에 알리시아는 자신의 전우이자 동료, 가족이자 친구였던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사죄했다.
미약한 자신의 힘이 너무나도 미안해서, 알리시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눈을 감지 못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여긴 그 순간.
화르륵──!
알리시아는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 말 그대로, 그것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촤악─!
대체 언제 자신의 앞에 도착한 건지는 몰라도, 어느새 나타난 벨 블랙우드가 업화를 막아선 것이다.
그것도, 손에 쥔 단검으로 업화를 베어 가르며 말이다.
"어떻, 게...?"
그 광경을 지켜본 알리시아는 현실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단검으로 업화를 벤다?
그것도 저 업화의 마법사가 부리는 업화를?
알리시아는 벨 블랙우드의 검술 실력을 잘 알고 있었고, 벨 블랙우드의 검술이 절대로 화염을 가를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이건 기적이었다.
신이 아닌, 벨 블랙우드의 손에서 피어난 기적 말이다.
"흠."
벨 블랙우드가 단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법사가 쏟아 낸 업화가 말 그대로 베였다.
그렇게 차례차례 업화들을 베어 가른 벨 블랙우드는 어느덧 마법사의 코앞까지 닿았다.
"조심─"
업화의 마법사는 자신을 보호하는 아주 강력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알리시아 또한 그 업화의 장막에 가로막혀서 이제껏 마법사에게 그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한 것 아닌가?
그러나 벨 블랙우드는 그 업화의 장막 역시도 비웃듯이 단검으로 베어 갈랐다.
촤악!
지금껏 업화의 장막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던 마법사의 모습이, 처음으로 그대로 드러났다.
"반갑다, 이 새끼야."
곧이어서 벨 블랙우드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그려지며, 왼손에서 푸른 빛무리가 일어났다.
일찍이 벨 블랙우드가 숱하게 펼쳐 왔던 마법의 위력을, 알리시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철컥─
익숙한 쇳소리와 함께.
콰아아아앙!!!───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38화 업화의 마법사 (6)
세상의 색깔이 다시금 제 색깔을 찾기 무섭게 사방에서 나를 향해서 업화가 덮쳐 왔다.
콰콰콰콰!!!──
사방에서 붉은빛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스윽-
업화의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서 새로이 변모한 샐러맨더의 송곳니, 아니 업화의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업화의 송곳니에 부여된 마법의 힘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마법의 대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만큼 지닌 능력 자체는 별 볼 일 없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만큼은 예외였다.
날에 닿은 부분에 한정해서 업화를 통제할 수 있는 마법.
업화의 송곳니에는 그것이 깃들어 있었고, 그것은 곧 무적과도 같던 업화의 마법사에게 대항할 수단이 생겼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거창한 기술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단지, 본능에 몸을 맡긴 채로 움직일 뿐.
화르륵!─
업화의 송곳니가 내 손에서 휘둘러지기 무섭게 나를 향해서 덮쳐 오던 화염들이 업화의 송곳니에게로 말 그대로 빨려 들어왔다.
휘우우웅!─
넘실대는 불꽃들이 내 손에 쥐인 업화의 송곳니 위에서 춤을 춘다.
업화를 통해서 모든 공격과 방어를 해내는 마법사를 상대함에 있어서 나는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를 동시에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존 검술이라 명명된 검술이 마구잡이로 펼쳐지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업화를 베어 갈랐다.
콰콰콰콰!──
그럴수록 업화가 더욱더 거칠게 나를 향해서 치솟았으나, 거리낄 건 없었다.
이제 이 업화는 나에게 있어서 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으니.
'보인다.'
업화의 송곳니를 휘두를 때마다 이제껏 절대로 닿지 못할 것만 같았던 업화의 마법사로 향하는 길이 조금씩 드러났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덮쳐 오는 업화를 베고, 또 베면서.
그렇게 나아간 나는 마침내 알리시아를 덮치려던 업화를 베어 넘기면서 마법사 앞에 섰다.
"어떻, 게...?"
알리시아의 의문에 일일이 대답을 해 줄 여유는 없었다.
여전히 적은 앞에 있었다.
"흠."
콰콰콰콰!
다시금 업화가 뻗어 온다.
나 또한 업화의 송곳니를 다잡으면서 업화의 마법사를 마주했다.
업화를 가르고, 나아간다.
"조심─"
그와 함께 지금껏 지긋지긋할 정도로 집요하게 업화의 마법사를 지켜 내던 불의 장벽이 갈라졌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반갑다, 이 새끼야."
업화의 송곳니는 업화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들을 대부분 방어하고 또한 놈의 방어를 무력화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근접 무기인 한계 탓에 유용한 공격 수단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새삼스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는 늘 함께했던 든든한 친구가 존재했으니까.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손에 쥐인 B686 더블 배럴 샷건이 위풍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해야 할 건, 그저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이었으니.
콰아아앙!──
B686 더블 배럴 샷건의 굉음은 흡사 폭탄이 터지는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무리 마법사라 할지라도, 그 어떤 마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샷건에 머리를 맞으면 무사하지 못할 터.
휘유우우웅....
자욱하게 일어난 폭연이 지나간 후, 이윽고 드러난 광경은 나로서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건....'
분명히 날아갔을 터인 얼굴 반쪽이 화염으로 넘실댄다.
얼굴 반쪽이 불타고 있다거나 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업화로 변화해 버린 것이다.
"끄윽, 끄으윽...!"
얼굴 반쪽이 말 그대로 업화로 변모한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마법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었다.
나는 저런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마법을 무어라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마화(魔化).'
그 이름 그대로 신체 혹은 다른 무언가를 마법 그 자체로 바꾸는 마법을 말한다.
저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금술(禁術)에 가깝다.
아니, 설사 사용한다 하더라도 마화는 상상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만큼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마법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화(魔化)를 통해서 마법의 형태로 변해 버린 신체는,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시간을 주지 않는다.'
비록 회심의 일격은 예상치 못한 마화로 인해서 빗나갔지만, 여전히 상황을 쥐고 있는 건 나다.
철컥─
나는 더블 배럴 샷건을 열어 젖힌 후에 곧장 총알을 장전하고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감히, 감히...!"
화르륵!!!
이제까지와는 감히 비교되지 않는 막대한 수준의 업화가 사방에서 덮쳐 왔다.
"재로 화해 사라지거라!"
거기에 더해서 마법사가 노린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알리시아.'
이대로 마법사를 쫓아서 잡느냐, 아니면 알리시아를 돕느냐.
사실 이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어차피 이 싸움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렇다면 아군의 손실을 줄이는 게 상식이었으니까.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흉용적파도(洶涌的波濤)'를 전개합니다.]
물의 보옥에서 뻗어 나간 파도의 물결이 알리시아를 덮치려던 업화에 맞섰다.
푸콰앙!
물의 파도와 업화가 맞부딪치며 사방에 수증기가 비산했다.
그 틈에 얼굴의 절반을 마화로 인해서 잃어버린 마법사가 마구잡이로 일대에 업화를 일으키며 어느덧 저 멀리로 가 있었다.
상황을 깨닫고는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치려는 속셈이었다.
"쫓아야, 해...."
알리시아가 비틀대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지금, 잡아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그게 무슨...."
알리시아는 물론이고 지금 도망치고 있는 업화의 마법사 또한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잠시 망각했다.
지금껏 업화의 마법사가 가장 견제하고, 이 자리에 합류하는 것을 막고 있었던 이가 누구였는지.
푸욱!─
업화의 마법사의 가슴을 뚫고 나온 한 자루의 검신.
그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야 뻔했다.
제4 특무대장 에드릭.
바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대장이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나?"
나지막이 읊조리는 에드릭의 목소리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내 귓가에도 똑똑히 들렸다.
"커헉!"
어느새 마법사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드릭이 사나운 미소를 지으면서 칼날을 비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껏 업화의 마법사는 상당 부분의 집중력과 마법을 에드릭이 접근하지 못하는 데 할애했다.
그만큼 에드릭의 존재를 위협적으로 여겼다는 뜻이고, 그걸 해내지 못한 순간 이러한 결과는 어찌 보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끄아아...!"
업화의 마법사가 다급히 수인을 맺으면서 마법을 일으키려 했으나, 에드릭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오, 이런. 그렇게는 안 되지."
마법사의 가슴에 꽂힌 검이 마구잡이로 비틀리면서 마법사의 가슴을 헤집었다.
마화(魔化)는 사용하지 못했다.
애초에 마화라는 마법 자체가 그리 간단하게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칼날이 파고든 가슴을 마화시켰다가는 아무리 마법사라도 자살이나 다름없다.
"묻고 싶은 게 참 많지만... 그럴만한 여유를 줄 친구는 아닌 것 같군."
에드릭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러니, 죽게."
촤아악!
마법사의 가슴을 꿰뚫은 에드릭의 검이 그대로 마법사의 반신을 베어 갈랐다.
쿵.
온갖 업화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던, 상상 이상의 난적이었던 업화의 마법사는 그렇게 상반신이 잘려 나간 채로 힘없이 떨어졌다.
머리에 총을 맞고도 머리 전체를 마화시켜서 살아남은 존재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살아남지는 못할 터.
그토록 엄청난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난사하던 마법사치고는 초라한 최후였으나, 업화를 부리던 마법사들은 대부분 이것보다도 못한 최후를 맞이할 때가 많았다.
업화의 악마와 계약한다는 건, 어찌 보면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홀로 세상을 이겨 낼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대가 역시도 언젠가 반드시 치러야만 하지.'
황금률의 법칙에 의한 공정의 계약은 설령 계약자가 죽더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바로 지금처럼.
"음?"
무언가 이상을 느낀 에드릭이 다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화르륵!
그와 함께 업화의 마법사의 시체가 어디선가 일어난 업화에 의해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미처 다 치르지 못했던 대가를 마저 치르기 위해서.
죽음조차도 악마와 계약을 맺은 마법사에게는 안식이 될 수 없었다.
[타오르는 업화, '업화의 마법사 아그니'를 처치하였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성사했습니다.]
[업화의 악마가 당신의 존재를 주시할 것입니다.]
.
.
.
[업화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특성, '화염 내성(D)'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UP)]
['화염 내성(D)' → '화염 내성(C)']
.
.
.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정신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정신력이 상승합니다. (+1)]
[3 → 4]
특성의 등급 상승에 더불어서 정신력 능력치의 상승.
그만큼 이번 싸움은 절대로 쉽지 않았다.
만약 단 한 번의 실수라도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로.
"...과연."
타오르고 있는 마법사의 시체를 바라보며 에드릭이 짧게 침음했다.
"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알리시아가 간신히 지탱하던 중심을 잃고서 그대로 쓰러졌다.
그에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속도로 날아온 에드릭이 알리시아를 부축했다.
"자네, 괜찮나?"
"괜찮...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무슨. 화상과 부상이 모두 심각하군. 응급조치 정도로는 안 되겠어. 조속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네."
그 말대로 알리시아의 화상과 부상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당장 죽지 않고서 살아 있는 게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러나 그러한 에드릭의 말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꿋꿋이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요...."
"내 말 못 들었나? 자네는 치료를 받아야 하네. 어서 돌아가야 해."
"잠깐이면, 되니까...."
에드릭의 만류를 뿌리친 알리시아는 멍하니 업화의 마법사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를 휘감았던 업화는 삽시간에 마법사의 시체를 모조리 태워 버렸고, 마법사의 시체는 잿가루조차 남기지 못한 채 흩날렸다.
[다음에는, 꼭....]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왠지 업화의 악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악마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존재였으니.
"아...."
알리시아는 흩날리는 연기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조금씩 흐느끼더니, 이내 그 소리가 점차 커졌다.
"우윽, 우우욱...."
알리시아는 억지로 참으려는 것 같았으나, 참지 못했다.
이제껏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알리시아였기에, 그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강건했던 알리시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흐끅, 흐끄윽...."
더 이상 감정을 참지 못한 알리시아가 오열했다.
"우으아...!"
그 울음이 너무나도 구슬퍼서, 나와 에드릭은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39화 업화의 마법사 (7)
마침내 업화의 마법사 토벌이 마무리되었다.
대체 업화의 마법사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공격을 가한 건지는 모른다.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이다.
'역시 없군.'
혹시나 마법사가 있던 자리에 뭐라도 남았나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남아 있는 건 새까맣게 그을린 검은 재뿐이었다.
업화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글렀다는 소리.
'그나마 마법사의 이름이 아그니라는 사실 정도를 알아낸 게 성과라면 성과인가.'
뭐... 그에 대해서는 익명 게시판을 통해서 슬쩍 알아보면 될 터.
임무이기는 했어도 썩 얻은 게 많지는 않았지만, 아까워할 필요는 없었다.
어찌 보면 이번 토벌에서 나는 이미 매우 큰 것을 얻었으니까.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얻은 시점에 업화의 마법사를 만나다니... 운이 좋았어.'
만약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얻지 못한 채로 업화의 마법사를 만났거나, 업화의 마법사가 아닌 다른 마법사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번처럼 큰 피해 없이 마법사를 상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어찌 보면 마화(魔化)까지 사용할 수 있는 마화의 마법사를 적으로 상대하게 된 것 자체가 매우 큰 불운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원래 이 빌어먹을 세계가 온갖 불운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고생했네. 자네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임무는 성공하지 못했을 거네. 특히 벨 자네는... 아주 특별하군.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군인다운 발언, 아주 훌륭하군. 쉬운 임무가 아니었던 만큼 자네들에게는 별도의 포상이 주어질 거네."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기에 앞서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대장님."
"말하게."
"원래 특무대에게 이런 임무가 자주 주어집니까?"
껄껄 웃던 에드릭의 표정이 조금 어색한 웃음으로 변했다.
이번 임무는 고작 세 명밖에 남지 않은 제4 특무대에게 맡기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위험성이 높은 임무였다.
아니, 사실상 실패하는 게 당연할 정도의 임무.
과연 겨울성에서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채로 이 임무를 맡겼을까?
글쎄... 겨울성의 정보력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는 않지. 최근 들어서 잦아지는군."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여전히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으나, 나는 굳이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때로 지나친 호기심은 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
"그러면 가지."
"예."
나는 그대로 기절한 알리시아를 말 위에 태웠다.
한바탕 오열을 하고 나니, 더는 몸이 버티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
비록 알리시아의 상태가 심각하기는 했어도, 에드릭 몰래 야금야금 물의 보옥의 권능을 발휘했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을 터였다.
'아마 겨울성에 도착할 때쯤이면 전부 회복되겠지.'
현재 물의 보옥은 일시적으로 물의 보옥에 깃들어 있던 냉기를 몰아내고 본래의 권능 중 일부를 되찾았다.
업화의 마법사가 마구잡이로 펼쳐 내던 업화들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냉기가 약화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내가 항상 지니고 있는 업화의 송곳니의 존재 역시도 물의 보옥의 봉인을 약화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당분간은 제 권능을 발휘할 터.
그렇게 겨울성으로 복귀를 하려던 찰나, 에드릭이 멈췄다.
"벨, 알리시아를 부탁하지."
"대장님은요?"
"나는 잠깐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 말이야. 둘이서도 충분히 복귀할 수 있겠지?"
이대로 내가 탈영을 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은 그렇게 말했다.
하물며 우리는 현재 겨울성의 남쪽인 블레이크 남작령 인근까지 와 있는 데다가 말까지 있다.
내가 어차피 탈영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꿰뚫어 본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드릭은 그렇게 말했다.
"충분합니다."
"그러면 부탁하겠네. 크로이츠에서 보자고."
에드릭은 그렇게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려서 남쪽으로 향했다.
대체 남쪽에 무슨 볼일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나는 왠지 그 일이 이번에 우리가 토벌한 마법사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릭이 떠나간 후, 나는 잠시 남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아직은 겨울성에서 할 일이 남았다.
* * *
밤의 손님은 환영받지 못한다.
하물며 그것이 초대받지 않고서 불시에 찾아온 불청객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지금 블레이크 남작의 저택에 찾아온 불청객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웬 놈이냐."
이상한 낌새에 잠에서 깬 블레이크 남작이 침대맡에 있는 검을 꺼내 들고는 간밤의 불청객을 마주했다.
불청객의 모습은 밤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로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불청객이 범상치 않은 자라는 건 검술에 그리 능하지 않은 블레이크 남작 역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경비를 부르지 않는가. 무의미한 희생을 늘리지 않는 건 꽤 현명한 선택이지."
"웬 놈이냐고 물었다."
블레이크 백작이 으르렁대며 검을 겨누었으나, 불청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하단 말이지.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아. 모든 행위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니까. 하지만 그 정도의 마법사가 하필이면 그런 곳에서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갑작스레 공격한다? 앞뒤가 맞지 않지."
곧이어 불청객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의도적으로 겨울성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작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함정 말일세. 이번 임무를 요청한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 모습을 본 블레이크 남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불청객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당신은 죽었잖아!"
"유감이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네."
"대체 어떻게...."
"질문은 받지 않겠네. 자네가 그럴 처지도 아닐 테고."
한밤중의 불청객으로 블레이크 남작가를 방문한 에드릭이 비릿하게 웃었다.
조금 전의 반응으로 이 모든 내막이 단번에 읽혔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싶더니, 역시 자네의 수작이었나? 졸렬한 방식이 딱 자네답더군."
"...그게 무슨 말이요?"
"굳이 시치미 뗄 필요는 없네. 왜, 그렇게 하면 겨울성을 넘어서 블레이크 남작령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을 것 같던가?"
"오, 오해요!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와는 관계없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니까."
스르릉....
에드릭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이 달빛에 비쳐서 번뜩였다.
오늘따라 달이 유달리 밝아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드릭의 검신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자네 따위가 설마 그 정도의 마법사를 부릴 리는 없고... 누군가, 자네에게 접근한 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통 그럴 만한 자가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지."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음, 생각나지 않는다면 내가 생각나게 해 주지.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그런 쪽으로는 꽤 재주가 있거든."
에드릭의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블레이크 남작의 복부에 꽂혔다.
"컥, 커허헉...!"
"아픈가? 고통이 오랜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어야 할 걸세."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
빠각!
"끄흐아아아!"
그야말로 섬광처럼 움직인 에드릭의 발길질이 단번에 블레이크 남작의 정강이를 부쉈다.
다리뼈가 완전히 부서진 채로 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블레이크 남작이 쓰러진 채로 흐느꼈다.
"이제 기억이 나는가?"
"나는 모르...."
"이런, 자네가 그토록 오랜 친우를 만나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네. 내 도와주지."
빠각!
빠가각─!
에드릭의 발길질과 함께 블레이크 남작의 다리가 완전히 아작 났다.
"끄윽, 끄으윽.... 거기, 밖에 누구 없느...."
"현명함을 잃었군. 처음에 경비를 부르지 않은 건 의미 없는 희생을 피하기 위함이지 않았나?"
조롱 섞인 에드릭의 말이 블레이크 남작에게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말하게, 대체 누구인가? 아, 말할 생각이 없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네. 나도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
블레이크 남작은 알고 있었다.
에드릭이라는 사내가 어떤 인물인지.
애초에 블레이크 남작에게 선택지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화, 황혼 악단! 자신들이 황혼 악단이라고 했소!"
"황혼 악단?"
에드릭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황혼 악단이라니... 에드릭으로서는 금시초문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황혼 악단이라는 자들이 접촉해서 이런 제안을 해 온 건가? 겨울성을 약화할 기회라고?"
"끄으으... 서, 설사 그런들! 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개입한다는 거요? 이건 크로이츠와 블레이크의 일이요!"
블레이크 남작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악에 받쳐서 외쳤다.
"아니지, 아니지. 이건 단순히 겨울성의 일만이 아닐세. 내 일이기도 하지."
"그게 무슨...."
곧,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블레이크 남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블레이크 남작은 눈앞에 있는 사내를 알고 있다.
이자가 얼마나 두려운 자인지, 또한 얼마나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자인지.
에드릭이 더없이 사납게 웃었다.
"선대 변경백께서는 내 은인이셨지.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걸 내가 참을 수 있겠나?"
"모, 몰랐소! 겨울성에 당신 같은 자가 있는 줄은 몰랐다고!"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원래 세상사라는 게 불합리한 법이라네."
"사, 살려─"
번뜩인 섬광과 함께 블레이크 남작의 마지막 애원은 유언이 되었다.
피로 물든 검신이 달빛에 비쳐서 유달리 붉게 보였다.
무려 귀족 살해라는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에게서는 그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황혼 악단이라...."
블레이크 남작은 영악한 자이기는 했어도 웬만한 확신이 없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정도의 담은 없는 사내다.
실제로도 이번 임무에서 마주한 업화의 마법사는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만약 벨 블랙우드의 불가해(不可解)한 활약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임무는 실패뿐만 아니라 제4 특무대의 전멸이라는 결과까지도 맞이할 수도 있었을 정도로.
그 영악한 블레이크 남작이 어울리지 않게 확신을 가질 만도 했다는 소리다.
'혹은 황혼 악단에게 모종의 위협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
블레이크 남작은 소심한 성격과는 달리 늘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는 야욕 또한 있는 사내였으니 말이다.
"흠."
황혼 악단이 무얼 하는 자들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겨울성에 위협이 되는 자들이라는 건 분명했다.
사라진 멸망룡.
최근 등장한 변종의 존재.
잦아진 마수들의 출몰.
황혼 악단.
근래에 들어서 겨울성에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마치 어떤 징조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다가... 벨 블랙우드 역시도.'
지금껏 벨 블랙우드에 대해서 지켜보았던 에드릭은 그가 범상치 않은 마법사라는 걸 안다.
대체 벨 블랙우드 정도 되는 마법사가 어떤 연유로 겨울성으로 끌려오는 죄수의 신세가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름지기 수상한 자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는 게 오히려 안전한 법.
그렇기에 에드릭은 이제까지처럼 제4 특무대장으로서 있을 것이다.
다만, 에드릭에게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면 딱 하나뿐이었다.
"말년 편하게 보내기에는 글렀군."
아무래도 은퇴는 당분간 미뤄 두어야 할 것 같다.
* * *
따스하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건지 모를 따스함이 신체 곳곳을 누비며 화상으로 인해서 뜨거웠던 몸을 식혀 주었다.
달그락, 달그락....
적막한 밤길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알리시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비친 이의 모습은 다름 아닌 벨 블랙우드였다.
"...아."
잠시 멍하니 벨 블랙우드의 얼굴을 바라보던 알리시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일어났나."
"어떻게... 된 거죠?"
"전부 끝났다. 마법사는 죽었어."
여전한 전신의 일그러진 화상.
어째서인지 기억 속보다는 꽤 많이 옅어진 데다가 고통도 생각보다 적었지만, 그제야 알리시아는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이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끝난 건가요?"
"그래."
업화의 마법사가 죽었다.
알리시아가 모든 걸 걸고서 죽이고자 했던 바로 그 마법사가.
마침내 업화의 마법사를 마주했을 때, 알리시아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걸고서 처절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끝내 닿지 못했고, 절망 속에서 모든 게 끝났다고 여긴 순간에 벨 블랙우드가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건지는 몰라도, 벨 블랙우드는 업화의 마법사가 펼쳐 내던 업화의 장벽을 너무나도 쉽게 허물었다.
그리고 나타난 에드릭까지.
알리시아가 모든 것을 걸고서 찾아다녔던 업화의 마법사는 이제 죽은 것이다.
비록 죽인 건 에드릭이지만, 사실상 그 상황까지 몰고 간 건 벨 블랙우드였다.
"정말로...."
정말로, 모든 게 끝났다.
그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한 알리시아는 다시금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울지 말자. 웃자.
지금은 웃어야 할 때니까.
"...고마워요."
"새삼스레."
벨 블랙우드가 가볍게 웃었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알리시아는 왜인지 모르게 그 미소에 구원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업화의 마법사에게 모든 걸 잃었던 날, 알리시아는 다짐했다.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마법사를 죽이겠노라고.
그리고 오늘 알리시아는 또다시 다짐했다.
내 남은 모든 삶을 당신에게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40화 복귀
자연의 미궁이 만들어 낸 깊은 숲의 끝자락, 차양 하는 나무들이 담긴 어두운 숲속.
누군가는 이곳을 마경(魔境)이라 부를 것이고, 또 누군가는 영원의 수해(樹海)라 부를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감히 발걸음 않는 장소에 먼저 와 있던 여인이 방문자를 맞이했다.
"늦었네?"
"일이 있었다."
"일? 무슨 일?"
"아그니가 당했다."
"결국 그렇게 됐어? 아무튼 업화의 계약자들은 너무 설친다니까. 자제 같은 게 안 되나?"
"숙명 같은 거니까."
"헹. 숙명은 무슨."
여인, 베아트리체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서, 아그니를 죽인 건 누구야? 어디서 군대라도 나섰나?"
"아니, 다섯도 안 되는 인원이었다고 하더군."
"...뭐?"
베아트리체는 업화의 마법사 아그니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비록 성격상 잘 맞지는 않았어도, 마화의 경지에 이른 아그니가 지닌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 그런 아그니를 고작 다섯도 안 되는 인원으로 죽였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데, 그 다섯이?"
"정확히는 셋이다. 겨울성에서 파견한 특무대라고 하는 것 같더군."
"특무대? 그게 뭔데? 겨울성에 그렇게 대단한 부대가 있었어?"
베아트리체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고작 세 명의 인원으로 마화의 마법사를 죽일 수 있는 전력과 그러한 부대를 운용하는 겨울성의 저력.
이는 앞으로 악단의 계획에 있어서 방해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겨울성이 그 정도였을 줄이야.... 이러면 우선순위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니야?"
"겨울성의 모든 특무대가 그런 건 아니다. 그 특무대가 특별했던 거지. 듣기로는 그곳에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가 있다더군."
"벼락? 설마 뇌명의 계약자가 있다는 거야?"
뇌명의 계약자는 매우 진귀하다.
세계 곳곳을 누벼 온 베아트리체조차도 몇 보지 못했을 정도로.
거기에 더해서 지금껏 나타났던 뇌명의 계약자들은 하나같이 특별했던 이들이었으니, 베아트리체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말로 뇌명의 계약자가 맞는다면 어쩔 거야?"
"일단 한번 만나 봐야겠지."
"네가 직접 움직이다니, 별일이네. 그 뇌명의 계약자가 꽤 신경이 쓰이나 봐?"
베아트리체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의 사내, 데미안은 지금껏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해 왔던 베아트리체조차도 그 의중을 도통 알 수 없는 사내다.
그런 이가 직접 움직이겠다라....
아무래도 데미안 역시도 이번에 나타난 뇌명의 계약자를 상당히 신경을 쓰는 듯했다.
"판단해야 하니까."
"무슨 판단?"
어둠 속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살려 둘 가치가 있는지."
* * *
업화의 마법사 토벌이 끝난 뒤.
겨울성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역시나 익명 게시판을 켜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이번에 우리가 상대한 업화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다행히도 익명 게시판에서 우리가 토벌한 업화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업화의 마법사라는 존재의 특성상 행적이 화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끊임없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걸 불태우며 살아가는 마법사.
그게 바로 업화의 마법사였으니까.
-방랑하는방랑자 : 요즘 업화 계약자 놈들 왜 이렇게 설치냐? 척살령 같은 거 안 들어감?
방랑하는방랑자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유저였지만, 이전에 익명 게시판에서 활동하던 유저였는지 꽤 적지 않은 댓글이 달렸다.
-개꿀딱 : 오 방랑, 살아 있었네.
-마법사114 : ? 요즘 업화 놈들 다시 설침?
-구사다 : 하긴, 걔네 요즘 좀 잠잠하긴 하더라. 다시 설칠 때 되긴 함.
-익명54 : 아오 업화시치.
-김수박 : 요즘 잠잠하다 했다 ㅋ
-익명64 : 단장햄 계신가? 업화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지 않음?
-지하 : 당사자들이 알아서들 하겠지.
나는 방랑하는방랑자가 작성한 최신 글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곧이어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게시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랑하는방랑자 : 이번에 나타난 업화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 공유한다.txt
──────────────
최근에 업화의 마법사가 활동하고 있다고 해서 나름대로 조사해 봤음.
1. 원래 남쪽 사막에서 활동하던 마법사 같다. 행적이 그쯤부터 시작함. 정확하지는 않으니 알고 있는 사람 있다면 제보 바람.
2. 몇 번인가 상당한 규모의 토벌대도 꾸려졌는데 전부 살해당함. 최소 마화급 이상의 마법사인 듯. 어쩌면 마성급일 수도 있으니 혹시 근처에 있으면 주의 바람.
3.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데, 아무래도 복마전 출신인 듯하다.
──────────────
게시 글에 있는 정보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의미가 있는 정보들이었다.
마화급 이상의 마법사라는 정보는 내가 마주한 마법사가 이 게시 글이 언급하는 마법사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교차 검증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복마전 출신일 수도 있다는 정보까지 던져 주었다.
-응애나애기뉴비 : 최소 마화급임? ㅁㅊ네.
-김수박 : 그러면 진짜 위험한 거 아닌가? 마화급이면 앵간한 놈들 다 접근도 못 하고 녹을 텐데.
-익명394 : 여기에도 복마전 출신 몇 명 있지 않나? 그 사람들이 알 수도 있겠네.
└참새 : 복마전 출신이 자기 닉을 깔 리가...
└얼굴다탔어 : ㄹㅇ ㅋㅋ
-익명55 : 겨울성에 있는 사람들 튀어야 할듯? 자신 있으면 가서 직접 썰든가.
마화의 마법사.
복마전.
단지 그뿐인 정보였으나, 그 이름들이 품고 있는 의미가 의미인 만큼 익명 게시판 유저들이 술렁거렸다.
그만큼 마화의 마법사와 복마전이라는 이름이 지니는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
'복마전이라....'
왜일까.
지금 황혼 악단이 떠오르는 건.
물론 황혼 악단 자체가 복마전에 있는 무수한 세력 중에서도 유독 나와 악연이 깊기는 했으나,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 나는 황혼 악단이 지닌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지닌 사상, 목적 그리고 그걸 실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그 모든 걸 말이다.
이들은 알고 있을까.
만약 황혼 악단이 나를 넘어서 단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갔다면, 지금 사라진 건 멸망룡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일단은 업화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걸로 만족해야겠지.'
그렇게 익명 게시판을 끄려던 순간, 단번에 내 이목을 잡아끄는 게시 글이 보였다.
-가을남자추 : X발 이 동네 난리 났네. 블레이크 남작 죽음.
──────────────
이번에 볼일 있어서 잠깐 블레이크령 들렸다가 그대로 갇혔다 ㅅㅂ
지금 뭐 신원 조회 하고 다닌다던데 나 외부인인데 어쩌냐? 걍 ㅈ 같다.
──────────────
-꺄르르 : ?
-기사단장임 : 흠...
-익명651 : ㄹㅇ? 귀족이 죽음?
-가을남자추 : ㅇㅇ 그래서 다 통제되고 난리도 아니다 하... X발 분위기 이상할 때 진작 런했어야 했는데.
-익명651 : 왜 죽음?
-가을남자추 : 몰라. 난리치는 거 보니까 누가 죽였다는 거 같은데... 아무튼 바쁘니까 나중에 댓담.
블레이크 남작의 죽음.
무려 귀족이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에드릭은 말했다.
업화의 마법사의 토벌 요청은 블레이크 남작가에게서 이루어진 요청이라고.
그런데 이 시점에 블레이크 남작이 죽었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것도 피살이라....'
이것이 우연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업화의 마법사와 블레이크 남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군.'
왠지 에드릭이라면 블레이크 남작의 죽음은 물론 이번에 마주한 업화의 마법사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물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나는 충분히 수상한 입장일 텐데 그 이상 수상함을 더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블레이크 남작이나 업화의 마법사에 대해서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당장은 같은 제4 특무대라는 입장이기는 했어도, 에드릭은 수상한 자였으니까.
'그러면....'
일단 익명 게시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었다.
남은 건, 할 일을 하는 것뿐.
'일단은 강해져야겠지.'
강해진다.
최소한의 힘이 있어야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대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 *
다시금 시작된 일상 속에서 한 가지 작은 변화들이 몇 가지 생겼다.
첫 번째는 겨울성 내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조금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저자가 그자인가, 이번에 업화의 마법사를 잡았다는."
"맞는 것 같군.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역시 에드릭 경이 이끄는 부대답군."
"듣기로는 벼락을 다룬다지?"
"말하기를 우레의 마법사라고 하던데."
"과연...."
대체 소문이 어디서 난 건지는 몰라도 부쩍 겨울성 내에서 나를 알아보는 자들이 늘어났다.
"...호오, 저자가 그 소문의 우레의 마법사인가."
"대장, 저희 부대로 초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는 에드릭 경을 모르나 보군. 어디 가서 말 조심 하게."
...왠지 이상한 별명도 하나 생긴 것 같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부쩍 내 옆에 알리시아가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왜?"
"네?"
"아니... 너무 가까이 오길래.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그러면 안 되나요?"
나를 올려다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알리시아의 모습은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 세계 온 뒤로 처음으로 이성이 아닌 감성의 판단을 내렸다.
"...안 될 건 없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디 가요?"
"같이 가요!"
"저, 저도!"
알리시아 같은 미녀의 관심을 받는 게 기분이 나쁜 일은 아니었으나, 하도 따라붙다 보니 솔직히 말해서 조금 귀찮을 때가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익명 게시판을 볼 때면 아예 슬쩍 알리시아를 떨어뜨려 놓는 게 일상이 됐을 정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가 익명 게시판을 살피는 모습은 굉장히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막사로 돌아오면 우수에 젖은 채로 나를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눈동자를 보고서는 미묘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얘 왜 이래?'
하나씩, 하나씩.
점차 주변의 환경이 변해 간다.
변화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지금껏 제4 특무대에서 자리를 비웠던 콘란과 알비노가 오랜 의무대 생활을 끝내고서 드디어 막사로 돌아온 것이다.
"여어, 잘들 있었나?"
"여긴 여전하군."
특히 알비노 같은 경우는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꽤 멀쩡한 것 같았다.
뭐... 마법의 대가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걸 테지만, 굳이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살아들 있었네."
"하하! 말하는 본새하고는.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좋군. 의무대는 영 심심해서 말이지."
"큰 임무가 있었다고 들었다. 업화의 마법사를 만났다고 들었는데 용케도 살아 돌아왔군."
아무래도 알비노 또한 이번에 있었던 업화의 마법사 토벌 임무에 대한 소식을 에드릭에게 들은 듯했다.
"운이 좋았지."
"...흥, 네놈 정도 되는 마법사한테 운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업화의 마법사가 운이 나빴다면 나빴겠지."
대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 건지는 몰라도 알비노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상당히 나를 고평가하는 모양.
'실상은 그냥 2레벨 쪼렙이지만.'
물론 보통의 2레벨이 가지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걸 가졌으니 단순히 그렇게 보기에는 어렵긴 했지만, 일단 객관적인 수치 자체가 2레벨인 것도 사실.
아마 단순 레벨로 따지면 콘란이나 알비노가 나보다 더 레벨이 높지 않을까.
'뭐, 공정의 세계가 레벨이 전부는 아니지만.'
실제로 공정의 세계에서 6레벨 이상으로 평가받는 마화의 마법사 역시도 나에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마무리를 한 게 에드릭이라지만, 사실상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2레벨 수준에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다.
내가 겨울성을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겨울성에 남은 이유 중 하나 역시도 바로 소위 말하는 폭업을 위해서였으니까.
겨울성은 공정의 세계 내에서도 상당한 고레벨 지역에 속했고, 그에 따라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 역시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업화의 마법사와의 전투가 꽤 격렬했다고 들었는데 다들 멀쩡하군."
알비노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물론 알리시아 또한 겨울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물의 보옥에 의해서 모든 치료가 끝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서."
"저도요."
그때 갑작스레 끼어든 알리시아의 말에 콘란과 알비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하긴, 이제까지의 알리시아를 생각한다면 저 변화가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했다.
지금까지의 알리시아는 늘 어둠에 젖어 있듯이 그저 제4 특무대 내에서 고요히 있을 뿐이었으니.
알비노와 콘란의 묘한 시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릭이 언제나 같은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막사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일세. 대장으로서 기쁘기 그지없군."
"임무입니까?"
에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최근에 그런 임무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부려 먹겠나?"
에드릭이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당연히 훈련일세."
"...그게 그것 아닙니까?"
"전혀 다르지. 다들 뭐 하나? 어서들 준비 안 하고."
알비노와 콘란이 막사로 돌아오기 무섭게 다시금 훈련이 시작됐다.
* * *
"선착순 한 명."
다시금 시작된 에드릭의 무식할 정도의 선착순 체력 훈련.
새삼스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제 알비노는 물론이고 콘란을 넘어서 알리시아의 바로 뒤에서 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꼴찌를 할 일은 없다는 소리.
이번 일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내 육체 능력 자체가 향상되지는 않았지만, 샐러맨더의 송곳니가 업화의 송곳니로 변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물의 보옥의 봉인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물의 보옥은 회복과 지구력을 향상시키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전력 질주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후욱, 훅! 뭐 저런...!"
"아서라, 덩치. 이만 포기해. 저놈은 숫제 괴물이야. 곧 저 여자도 따라잡을걸?"
뒤에서 콘란의 악에 찬 목소리와 어딘가 체념이 느껴지는 알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앞에 있는 알리시아를 응시하며 계속해서 달리기를 이어 나갔다.
더 강해진다.
오직 그 하나의 일념만으로 달리고 또 달리면서 체력을 단련했다.
그 덕분인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단단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테고.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다들 고생했네. 그리고 벨과 알리시아는 나 좀 보지."
에드릭이 한참 숨을 몰아쉬면서 쉬고 있는 나와 알리시아에게 다가왔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에드릭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별건 아니고, 저번 토벌 임무에 대한 포상이 정해졌네."
41화 불청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