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EP-40 기사들의 봄(7)
전사의 창술은 변화무쌍했다.
화아악!
때론 맹금류의 발톱처럼 순식간에 사냥감을 낚아챈다.
콰직!
또 다르게는 맹수의 송곳니처럼 상대를 물어뜯는다.
휘이익!
허나 어느새 파충류의 그것처럼 창은 채찍처럼 변화한다.
창이란 이름만 가졌을 뿐, 그의 창은 검이나 채찍, 방패나 도검의 역할을 수행해냈다.
저토록 자연스러운 변화가 가능할 수 있는가 싶은 솜씨였고, 가히 창술에 있어서만큼은 일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병지왕(百兵之王).
여전히 검과 창을 두고 어느 쪽이 최고의 병기인지 의견이 갈리지만, 현재의 모습만 본다면 창이야말로 으뜸이라 하리라.
허나 이것은 오로지 저 사내가 창을 들었기에 이런 평가가 가능한 걸 것이다.
만병대가의 잠재력을 가진 기사가 다른 무기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창에 모든 재능을 녹여냈기에 가능한 모습.
본인을 신창(神槍)이라 소개해도 무방한 위용이다.
파지지직!
허나 전사는 마냥 창술만 입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살기를 투기력으로 변형시킨 [적색투기]는 닿기만 해도 살갗을 찢어버리는 날카로움과 바위를 분쇄해버릴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바.
강하다.
압도적이다.
이를 직접 겪은 마탑의 마법사들은 더는 녹청머리의 전사를 경시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무엇보다 위협적이게 바라볼 뿐.
한데 그런 전사를 밀치며 다가온 사내가 있다.
열두 기체의 청동 거인을 고철로 만들어버린 기사.
그 기사가….
"너 싸움은 잘하는 주제에 주문쟁이 상대하는 법을 좀 모르네. 너무 비효율적으로 싸운다, 너."
뜬금 훈수를 두기 시작했고, 전사의 얼굴에는 마법사들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불쾌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누구나 떠들 수 있겠지."
"그건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는군."
"맞는 말이니까."
"...."
입으로 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맞다.
이를 곧장 인정하는 괴력의 기사는.
"내가 아무한테나 노하우 안 알려주는데, 특별히 보여준다."
"?"
"일단 뒤에 있어봐, 나만한 일타강사도 없을 테니까."
"…?"
─라크 드 듀론이 이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은 그가 전투에 돌입한 지 3분도 지나지 않아 대마법사의 멱을 따는 것을 목격한 후였다.
그는 정녕 마법사 사냥에 일타강사가 맞음을 몸소 증명했다.
*
*
*
…마탑의 마법사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은 자존심이 세고, 마탑에는 자신들의 연구 자료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다.
웬만한 상대라면 상대할 법도 하지만, 마탑에 쳐들어온 침입자들은 엄청난 강자가 아닐 수 없었다.
정녕 같은 사람인지 의심마저 드는 전사들.
"청동 거인이 모두 박살 나다니, 인간이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빨리 도망이나 가자고."
"한데 이대로 도망가도 되겠나? '탑주'께서 용서하지 않을 텐데…."
움찔!
"어, 어쩔 수 없잖아, 우리도 살아야지."
일순 몸을 흠칫하는 마법사들이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마법사란 인종은 개인주의적인 생명체다.
그들은 홀로 완전해지길 원하며, 타고나길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타고나니 말이다.
한데 그런 이기주의적인 그들이 마탑에 속해 있는 이유는 연구 시설이 좋고, '연구재료'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연구 자금도 아주 넉넉하고.
…허나, 자신들의 목숨에 경각이 온다면 그때부터는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이 있다.
힘을 합쳐 적을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게 당연한 원리일 테지만, 그들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기에.
그들이 원하는 건 개인의 영달이며, 발전이고 연구이니까.
더욱 높은 경지에 다다를 실마리를 얻어내는 것.
그들은 이를 위해 마탑에 소속된 것이지, 마탑을 위해 목숨을 걸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래도 이건 챙겨가자고. 이 아티팩트면 4년 치 연구비는 되겠지."
"호오, 그럼 난 이걸 챙기도록 하지."
"스읍, 좋은 지팡이는 없나?"
어느새 좀도둑으로 진화한 마법사들은 마탑의 재산을 건드리고 있었다.
시중에 나오면 천문학적인 액수를 자랑할 아티팩트를 비롯한 마법적 물품 등을 말이다.
돈을 물처럼 쓰며, 경제적 관념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 이 정도는 있어야 앞으로의 삶도 윤택하게….
"그럼 안 되지."
푸슉!
"스읍, 하여튼 우리 동포들은 못 말려. 소속감이란 것이 없으니, 원."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동포'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정작 그조차도 어릴 적에는 소속감이란 것이 없었으니까.
허나,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감히 '나의 재산'을 건드려선 안 될 일이지."
그래, 동포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마법사에게 있어 연구 자료든 아티팩트이건, 개인의 물품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사실을.
…뭐, 만약 상대가 마법계의 새로운 격변을 몰고 올 천재라면 투자할 의지가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고선 감히 마법사 개인의 재산을 건드려선 안 될 일이다.
하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마. 그래도 동포이니 특별히 고통 없이 보내준 거니까."
그는 머리가 토마토처럼 터져나간 동포들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자비로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감히 그의 것을 훔치려 했는데, 바로 죽음을 선사했으니까.
그는 그렇게 웃음을 보이며 다시금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호오, 확실히 다른 동포들이 힘겨워할 만하군."
그는 늙은이들과 싸우는 전사를 흥미롭게 보았다.
아주 재미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그래서일까, 그는.
"좀 더 구경하지, 뭐."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들의 싸움을 좀 더 '관람'하고 싶었기에.
* * *
-만약 아카데미 과목 중 [마법사를 죽이는 법]이란 과목이 개설된다면 틀림없이 교수로 초청받아야 할 전문가가 '저기' 있었다.
[이놈! 대체 무어냐, 주문을 모두 튕겨낸다!]
[안티 스펠이라도 두르고 있는 것인가!?]
[떠들지 말고, 얼른 공격하시오!! 저 괴물이 온다!!]
[구름이여 모여라, 더욱 힘차게! 더욱 강렬하게-!!]
다섯 명, 아니 이제 네 명이 된 대마법사가 기겁하며 주문을 외운다.
일상적인 '언어'가 이미 '주문'과 다를 것이 없는 대마법사들이다.
입을 열 때마다 평범한 범인은 주문의 영향을 받으며 그대로 무릎 꿇거나 심하면 절명하는 것이 상식이다.
한데 저 '괴물'은…!
[…주문이 통하지, 아니 찢어버리고 있다니…,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콰직!
[끔찍하게도 꿈이 아니군….]
주륵….
언제 날아온 건지 모를 권압이 코를 스쳤고, 대마법사는 코피를 흘렸다.
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대마법사는 자신의 모습이 흉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마냥 질린 모습을 지었다.
* * *
이한은 창잡이와 교대했다.
불만스러워하는 녀석이었고, 이한도 타인의 전투에 끼어드는 경우 없는 놈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주문쟁이를 상대하는 게 약간 어설프네, 초보야, 초보.'
주문쟁이와 많이 싸워보지 않은 티가 물씬 난다.
더럽게 잘 싸우는 건 사실이지만, 이한으로선 훈수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름 마법사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리는 그이기에 더더욱…!
하여.
"주문을 왜 그대로 맞고 있냐? 적절히 쳐내야지…."
그는 주문쟁이와 싸우는 100가지 방법 중 기본적인 네 가지를 알려주기로 했다.
레슨.1
주문 패링이다.
콰직!
주문이란 건 무당이 살을 날리는 것과 같다.
허나 살이란 건 자칫 잘못 날리거나 실패하면 주문을 시전한 자에게 그대로 되돌아가는 법.
하니, 주문이 날아온다면 이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튕겨내면 자동적으로 패링을 하는 게 된다.
퍼억!
"크어어억!"
그래, 지금처럼 말이다.
약간의 요령이 필요한 방식이지만, 저놈은 특별한 눈이 있다.
그러니 익히는 데는 별 문제 없을 터.
레슨.2
"간단한 암기술을 익혀두거나 원거리 타격술을 쓰면 좋을 거다. 날릴 땐 머리나 입, 아니면 심장 순으로 날리는 게 최고고."
퍼걱!
이한의 손에 잡히는 모든 게 암기가 됐다.
탄지공.
조약돌이나 유리 조각이든 좋으니 요령 좋게 날리는 것이다.
표창을 날리듯이.
뭐, 이런 것도 없으면 백보신권이나 격산타우와 같은 기술을 익혀둘 필요가 있지만.
퍼걱!
…명중이다.
레슨.3
콰르르릉!
"저런 놈들은 약간 골치 아픈 부류지."
가끔 주문쟁이 중 저렇게 거창한 마법을 쓰는 놈들이 있다.
소위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놈들이.
앞서 얘기한 가르침대로 하면 웬만한 주문쟁이는 사냥하는 게 쉽지만, 저런 경우에는 언급한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숙련자 코스였고, 이런 경우에는.
"끈질기게 칼질을 해야지, 뭐. 한마디로 노가다가 필요한 과정인 거야."
파앗!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강한 주문쟁이의 자잘한 주문은 튕겨내고, 튕겨낼 수 없는 규모라면….
쿠우우웅!
'…견뎌야지.'
몸으로 견뎌내고 돌파한다.
피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건 안 된다.
방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강한 주문쟁이와의 싸움에서 한번 물러나거나 버티기만 하면 무조건 당하기에.
설령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좀 부러질지언정 돌파해서 한 방을 노리는 것이 활로를 여는 유일한 길인 바.
콰지직!
쿠드드득...!
육참골단.
살과 뼈를 내주며 앞으로 나아가.
서걱!!
강한 주문쟁이에게 일단 타격을 입힌다.
[끄으윽!]
...지금처럼 가슴팍만 베인 거면 좀 손해이긴 하지만.
"쯧!"
이한은 혀를 찼다.
나름 멋지게 시범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상대하기 까다롭다.
역시 늙은 주문쟁이들은 끈질기다.
…이한은 민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뒷걸음질 쳤다.
레슨.4
주문쟁이와 싸움이 약간 불리해졌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라, 또한 도망치는 게 수치라고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몸을 빼고 다시금 기회를 노려라. 어차피 주문쟁이한테 명예니 기사도니 하는 걸 따지는 게 압도적인 손해니까.
이한은 그렇게 마지막 가르침까지 몸소 시범을 보인 후, 나름 자신의 강의를 보고 있던 임시 학생의 곁으로 돌아왔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크흠, 민망하구먼. 겨우 한 놈밖에 지옥으로 못 보냈네."
"...."
"어쨌든, 그래도 나름 압축해서 가르쳐준 거다. 잘 써먹어."
"…대체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군."
"이만한 훌륭한 강의가 어디 있다고, 불만이 많은 녀석이네."
"…허!"
녀석이 어처구니없다며 그를 불경스럽게 쳐다보았다.
* * *
…라크 드 듀론의 무용(武勇)은 갈라하드 내에서도 압도적이다.
그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건 그가 그림자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실력을 숨겼기 때문일 터.
그가 공식선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갈라하드가 지배하는 강줄기를 습격한 수적 무리 72함선의 등장 때문이었고, '흉랑'의 이름을 세간에 처음 알린 50함선 단독 격파란 업적 때문이었다.
- 저게 갈라하드의 다음 단장감인가?
- 쿠린 단장은 좋겠군. 저토록 걸물이 후배로 있으니, 안심하고 은퇴하시겠어.
- 그래도 살벌하군. 수적이라고 하나, 한 사람도 안 남기고 모두 처벌하다니.
- 더욱 소름돋는 점이 뭔지 아나? 수적 전원이 일격에 죽었다는 게야. 수적 중에는 용병이나 전사로 이름을 날리던 자들도 있던데, 그런 자들조차 일격으로 꿰뚫었다더군.
- 막시무스 경이 처음 모습을 보일 때가 생각나는 위용이야, 허허.
갈라하드의 자랑 [청록일각수 기사단]의 다음 단장으로 유력하며 그 무력은 북부의 막시무스와 비견되며 창의 귀신이나 '신창(神槍)'으로도 불리는 남자.
이름과 성조차 블레이크 공작이 직접 하사하는 것으로 원래 가진 이름은 잃었으나 그건 그에게 영광일 뿐이었다.
별 미련도 없기도 했고.
어쨌든 라크 드 듀론이란 사내는 늘 타인을 감탄하게 하지 놀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히 살길 바랐던 여동생이 기사가 됐을 때도 '어리석은 것, 시집이나 얼른 갈 것이지, 무슨 기사인지….'(말하고 곧장 쌍욕을 세 시간 넘게 먹었다) 차갑게 말하며 덤덤하게 반응했을 정도였고.
막시무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과연 죽일 수 있을까, 없을까?'를 따질 뿐.
그가 놀라는 일은 극히 드물다 못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나마 주군인 블레이크의 일에는 반응을 하지만, 그건 놀라움보단 흥분이나 격정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하여 라크 드 듀론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무뢰배 녀석 주제에….'
저런 놈에게 감탄을 느껴야 하다니….
굴욕적이기 그지없는 순간이었고, 라크는 눈가에 경련마저 일어날 지경이었다.
허나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서걱!
─놈은 정말 잘 싸웠다.
마치.
'…밥 먹고 마법사만 죽이고 다닌 건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나 가르침은 엉망이란 것이 라크의 확신이었다.
주문을 패링하는 말도 안 되는 행위부터 시작하여, 보이지 않는 타격을 멀리까지 전달하는 수법이나 조약돌과 유리조각을 손가락에 끼워 머스켓처럼 쏘는 것까지.
저런 건 갈라하드의 기사들조차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라크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조금은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허나 나머지 하나.
'인간이 아니라 도마뱀이었나.'
뼈를 내주고 살을 내준 것이 언제였냐는 듯, 벌써 회복세를 보이는 무뢰배의 몸이 가장 비정상적일 수가 없었다.
라크는 확신했다.
이 무뢰배는 적이 된다면 기필코 죽여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는다면….
'가장 위험한 적이 될 테니.'
라크 드 듀론은 저기 하늘 위에서 여전히 기상을 조작하는 대마법사들보다 이 기사 한 명이 더욱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
"…거슬리게 진짜."
"...크흠."
자신의 눈길을 눈치챈 것일까.
약간 무안해지는 상황이다.
그래도 지금은 같은 편인데, 적으로 여기려고 하다니, 이는 실수가 맞았고.
라크는 드물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려 했-.
"-어이, 거기. 언제까지 구경할 셈이지?"
후욱!
──라크의 창이 기민하게 움직이며 뻗어나갔다.
이한이 지목한 곳으로 향해 곧장 강한 일격을 날린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쿵!
…자신이 날린 일격은 손쉽게 막히고 말았다.
라크는 눈을 부릅떴고, 자신의 일격을 부드럽게 와해한 상대를 보며 동공이 흔들렸다.
"이런, 들키고 말았나?"
그가, '소년'이 개구쟁이와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
"그보다 놀랍군. 이 정도 일격이면 펜타 스펠, 아니 헥사 스펠급 위력이야. 엄청난 투기력이야, 하하."
"...아이?"
라크는 제 일격이 손쉽게 막혔다는 사실보단 그 일격을 막은 것이 겨우 열다섯밖에 안 되었을 법한 아이에게 막혔다는 상황이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더욱 믿기 힘든 발언은….
[타, 탑주!]
[왜 이제야 왔소!!]
[또 늦장을 부렸군….]
...대마법사들이 소년을 호칭하는 이름.
탑주.
그 말은 즉.
"날 처음 보는 사람은 믿지 않긴 하더라고. 반가워, '마탑주 튜르'라고 해."
마탑주 튜르.
…그 이름을 안다.
튜르 드 세이건.
비록 마법사에 대해 모르는 기사조차 알 수밖에 없는 이름.
그도 그럴 게 저 이름은 역사서에도 나오니까.
저자는....
"400년을 산 대마법사…."
"정확히는 453년을 살았어. 빌어먹게도 오래 살았지? 하하!!"
"...."
라크와 이한은 웃지 않았다.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마냥 식은땀을 흘릴 뿐.
그들은 확신했다.
눈앞에 선 이자의 힘은….
"레슨.5다…."
"...."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튀자. 저건 못 이겨."
"…네놈은 명예도 없나?"
"주문쟁이한테 명예 지켜서 어디다 써먹으라고?"
"...."
"그래서, 안 튈 거냐?"
"…흥."
…이놈은 일타강사가 맞다고 인정하고 마는 라크였다.
실용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기에.
#173 EP-40 기사들의 봄(8)
…겉보기엔 그저 평범했다.
아직 2차 성징도 덜 왔을 법한 갈색머리의 미소년은 청량하게 웃고 있다.
아마 전생의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얼굴만으로도 인기 있을 아이돌이나 배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허나 두 남자의 시선에는 소년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겨를조차 없었다.
대마법사처럼 비범한 기운을 풍기는 것도 아닌 평범할 뿐인 분위기였으나, 두 기사는 저것이 저 마법사가 본인의 기운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에 기운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본의는 아니지만, 이한은 자신의 기운을 완전히 장악한 이를 둘 정도 본 적 있다.
한 명은 집사놀이 하시는 노인이요, 또 한 명은 기사단에서 한량처럼 불량하게 놀고 다니는 아저씨였다.
둘 모두 겉만 보면 마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 따름이었지만, 이한은 안다.
그 두 노인이 어느 정도로 괴물인지.
무림으로 따지면 반박귀진(返樸歸眞)이나 노화순청(爐火純靑) 등으로 불리는 경지.
제 기운을 모두 감추고 사는 영물 같은 인간들.
아니, '같은'이 아니라 정녕 영물이 되어버린 인간들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 저 소년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기에 도리어 무서웠으며, 도무지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초인.
인지를 뛰어넘고, 수천, 아니 수억 명 중 한 명 꼴로 겨우 나온다는 초월자.
어떠한 경계를 깨고 기어이 인간의 형상을 가졌을 뿐인 존재.
저것과 싸운다?
그건 이미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이한과 라크는….
파앗!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며 전력으로 뛰었다.
순간 최대 시속이 200km를 자랑하는 기사들이 전속력으로 도망가자 한순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점차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그들은 마탑과 순식간에 멀어지며 어느새 마탑은 작은 점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빨랐고, 얼마나 전력으로 달렸는지 알려주는 방증이 아닐 수 없으나….
"-에이, 그럼 안 되지."
[짜악!]
"…."
"…."
...마탑과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도망갔던 두 기사들은 어느새 다시금 '마탑이 있는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도망갔던 일이 없던 일이 된 것처럼.
"…공간 이동인가?"
"공간 절단도 있군."
허나 기사는 당황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궁리했고, 호흡을 금세 가다듬었다.
그러며.
"우리 얼마나 이동했었냐?"
"대략 9마일 반경이었다."
"염병할 마일!"
"…왜 화를 내지?"
트러블이 약간 있긴 했지만, 대략적인 거리를 가늠하며 다시금 그들을 이 자리로 불러들인 소년을, 아니 400년 묵은 '노괴'를 보았다.
"그 공간 마법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면 어디까지 도망가야 하냐?"
"흠, 그걸 나에게 묻는다고?"
"대답 안 해줘도 상관은 없고."
"…하하!"
튜르 드 세이건은 뜬금 유쾌하게 웃었다.
"아니! 답해줄게! 약 100km 반경에만 있다면 내 공간 마법은 어디든 닿아. 그러니까 도망갈 방법은 없을걸? 너희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한."
"…그렇군."
이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말에는 한 치의 거짓말도 없음을 인정하듯이.
평소 주문쟁이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하며, 주문쟁이의 말은 그 무엇이건 믿지 않는 이한이지만, 지금만큼은 믿었다.
놈은 평범한 주문쟁이가 아니라, '초인'이었으니까.
나름 초인이란 양반을 많이 겪은 이한으로선 초인의 심리나 정신 상태에 대해 잘 알았고, 그들이 거짓말을 잘 하지 않음을 안다.
왜 확신할 수 있느냐고?
간단하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양반들이 거짓말을 왜 하겠어?'
권력도 금력도 아닌, 오로지 '힘'을 가진 이들.
허나 그 압도적인 힘이야말로 초인을 증명하는 권력이자 금력인 바.
얼마든지 세상을 오시할 이가 거짓 따위를 왜 내뱉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남자는.
"있잖아, 우리 대화를 좀 하자. 나, 너희가 너무 궁금하거든!"
"...."
"그래, 너희도 좋지?"
선택권 따윈 없는 일방적인 '통보'를 갈길 따름이었다.
불쾌하게 그지없는….
* * *
[기다리시오, 탑주! 저들을 당장 징치해야지, 대화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것이요, 탑주!!]
[이래선 안 됩니다!]
[크으윽!]
대마법사들이 불만을 토해냈다.
원래는 다섯 명이었던 마탑의 대마법사들 중 한 명은 죽고, 또 한 명은 가슴팍이 베여 고통을 호소했으며, 어떤 이는 외팔이가 된 분노를 터트렸다.
그뿐인가?
[죽은 동포들을 보십시오! 마탑의 꼴을 보란 말입니다!]
많은 마법사들이 죽었다.
이 모든 게 저 침입자들이 마탑을 파괴하고, 그들을 공격하였기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여전히 살아 있는 마법사는 많고, 마탑의 재건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탑주가 있는 한.
허나 그건 그거고, 입은 피해는 피해다.
저들은 단죄해야 함이 옳은 바였고, 그것이 마탑을 이끄는 수장이 보여야 할 모범적인 자세였다.
…분명 그러는 것이 상식적일 터이나.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
"많이 컸네? 나한테 불만을 보이고, 흐흐."
[…죄,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
"하하."
…마법사들은 소년의 개구쟁이 같은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전혀 흐뭇하지 않았다.
도리어 창백하게 표정이 질리며 그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한동안 얼굴을 보지 않아 잊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탑주는….
"…사과할 거면서 왜 불만을 보인 거야? 기분 나쁘게-."
쿠드드드득!
탑주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마탑 최고의 광인(狂人)이었다.
[크으윽!]
[타, 탑주! 저, 저희가 허언을 내뱉었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죄, 죄송합니다, 죄송….]
[아아악!]
그들을 덮치는 것은 마력이 아니었다.
의념(疑念).
기분 나쁘다는 생각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것으로 그 의지가 그대로 그들을 압박하는 공격이 되는 것이다.
죽이고자 생각한다면 죽이고, 파괴하자고 하면 파괴가 가능하다.
하여 결코 거슬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이 대마법사라 불릴지언정 절대로.
천적 앞에 선 먹잇감처럼 마법사들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 감히 눈을 마주치기가 무서워서….
"한심하네, 정말."
하!
소년은 언제 화를 냈냐며 유쾌하게 웃었다.
다시금 싱그럽게.
그리고는.
"그런 의미에서 너흰 정말 신기해!"
기사들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분명 그의 의념에 노출되었음에도 멀쩡한 두 명의 기사를 향해.
다만 관심의 대상이 된 두 기사는 그저.
"저 새끼 뭐래?"
"모르겠군. 너무 오래 살아 뇌가 고장이 난 것이겠지."
"아, 그런가?"
대놓고 '별 미친놈을 다 본다'는 불경스러운 시선을 보내었다.
"푸하하하하!"
소년은 우렁차게 웃었다.
배꼽이 빠질 것 같다는 듯이.
허공을 헤엄치듯 자연스럽게 구르기까지 하는 소년은 저들의 모욕적인 발언에도 별달리 불쾌하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 나사가 풀려, 아니 창을 든 기사의 말대로 어딘가 고장이 난 것이 분명한 모습.
허나 소년, 튜르 드 세이건은 이리 말할 것이다.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니라, 탐구심이 지나치게 왕성한 것뿐이라고.
하여 지금처럼 새롭게 겪는 신선함에 열중할 뿐이라고.
"있잖아, 그거 알아?"
그는 어느 순간 웃음을 멈추며 그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떠들었다.
"너희의 힘은 말이야, 저기 저 늙은 애들과 다를 게 없어. 아니, 오히려 에너지의 총량만 보면 저 늙은 애들이 더 많을 거야."
늙은 애들…, 대마법사를 가리키는 호칭이었고, 튜르 드 세이건은 기사들과 대마법사들의 수준을 일목요연하게 평가했다.
"가끔 너희처럼 강한 전사들을 본 적이 있어. 흔히 [영웅]이나 [마인]이라 불리는 녀석들이지. 그중에 가끔 쓸 만한 애들이 나와. 너희랑 비슷할 정도로 강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지."
그래, 가끔 있다.
대마법사와 맞먹는 '에너지'를 가진 이들이.
마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보통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아우라].
혹은 생명력이라 불리는 힘.
기사들은 투기력이니 뭐니 하지만, 그에겐 그런 것보다 아우라란 호칭이 더욱 편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두 기사의 아우라는 대마법사들에 비하면 약간 떨어지는 수준이다.
아무렴, 젊은 그들이 못해도 백 년가량을 살았을 이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허나, 저들은 비록 아우라의 총량이 떨어지지만, 대마법사조차 가지지 못한 어떠한 '특별함'이 있었다.
영웅이나 마인 중에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이들이 간혹 가지는 특별함.
다름 아닌,
"근데 말이야, …너희처럼 '영혼까지 단련한 영웅들'은 드물거든."
...[영혼의 강함]을 말이다.
"목숨을 몇 번이고 내놓는 전투나 수련, 혹은 거대한 시련을 맞이하고도 살아남는 이들이지. 그런 놈들은 같은 수준에 있는 영웅이나 마인을 만나더라도 상당한 격차를 보이며 승리를 쟁취하지. 저기 늙은 애들이나 마탑을 압도한 것처럼."
분명히 말하지만, 마탑은 약하지 않다.
도리어 그가 말한 대로 기사들과 비슷한 에너지의 총량을 가진 이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열두 대의 청동 거인과 다섯 명의 대마법사들만 지칭하는 게 아니다.
이밖에도 '여섯 개'가 더 있었으니까.
허나….
"그 숨겨진 여섯이 나서도 너희를 이기진 못할 거야. 너희의 강함은 단순히 에너지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너희는 '극복하는 법'을 알고, '이기는 법'을 알아. 그러니 우리 애들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소년은 순순히 인정했다.
저들을 마탑은 이기지 못한다고.
허나 그렇다고 해서 소년은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당장 마법사들이 죽어나간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마탑이 부숴진 것도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겐 그 모든 게 '사소한 일이었고, 당연한 과정'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소년이 유일하게 참지 못하는 게 있다.
이는 오래 전부터 소년이 가진 불치병이었으나, 이 불치병이 있었기에 소년은 위대한 경지까지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해서 소년은 그 탐구심을 발휘하며 흥미를 유발하는 강한 영혼을 가진 두 기사를 향해 물었다.
"있잖아, …너희의 육체와 영혼을 해부하고 싶거든? 그러니 허락해줄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병', 그것이 튜르 드 세이건이 가진 불치병의 병명이었다.
"아, 물론 허락해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허락 안 해도 어차피 '할 거니까' 그러니 미리 사과할게."
"...."
"아하하!"
소년은 유쾌하게 웃었다.
흥미로운 [희귀 재료]를 발견한 것이 그 무엇보다 기쁘다는 듯이 말이-.
"─다 떠들었냐."
"…응?"
"다 떠들었냐고, 이 싸패 새끼야."
"...."
"혼잣말 더럽게 많이 하네."
우득, 우드득!
이한은 몸을 풀었다.
저놈이 혼자 떠든 덕분에 어느 정도 몸이 회복세를 보이는 중이었고, 이는 그만이 아니라 창잡이, 아니 라크도 마찬가지였다.
푸욱!
이한은 곧장 포션 두 개를 꺼내 주사처럼 혈관에 직접적으로 흘려 넣었다.
포션 도핑.
전날 귀왕과의 전투에서 시도한 미친 방식을 오늘 또 저지르고 만다.
부작용은 있겠으나, 설령 그렇다 해도.
"너는 뭐 없냐?"
"…고전적인 방식이군."
"오."
목숨을 건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언들 못 할까.
꿀꺽!
라크는 알약 같은 걸 꺼내 삼켰다.
그것도 한꺼번에 다섯 개를.
"…위험한 짓을 하네."
"네놈만 할까."
느낌상 한 개만 먹어도 위험해 보이는 알약으로 보이는데, 그걸 다섯 개나 처먹고 있는 걸 보니 이놈도 상당히 지기 싫어하는 놈인 것 같다.
허나 이한은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건 스포츠가 아니지.'
스포츠에서 도핑은 불법이다.
그건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자세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려는 건 규칙과 암묵적 규율이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오로지 산 자와 죽은 자만이 남을 죽고 죽이는 전투에 불과할 뿐.
그러니 비겁이나 반칙 따윈 없다.
그렇게….
"누가 해부되는지 해보자, 빌어먹을 주문쟁이야."
두 기사는 지금 이 순간 힘을 합쳤다.
인류사가 말해주듯 강자를 상대하는 방식은 '다구리'가 정석임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이기에.
실패하면 죽음, 성공하면 생존.
그리고 기사들의 뇌리에는 실패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174 EP-41 심장이 뛸 때까지(1)
전투의 시작을 알린 건 이한의 사자후였다.
[━━!]
후우우웅-!
일순 눈보라조차 하늘로 치솟게 하는 기백의 울림은 지금껏 이한이 내뱉은 어떠한 사자후보다 강렬하면서도 우렁찼다.
여타의 마법사는 고막이 찢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망치가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고, 기절하는 자가 속출했다.
최대 음량의 사자후가 가진 위력이었다.
하지만.
"왜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거지? 알 수가 없네…?"
사자후에 직격 당했음에도 평온하기 그지없는 튜르였고, 튜르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고통 없이 해부해줄 텐데, 왜 일부러 고통스러워하려고 하는 거야?"
콰직!
튜르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땅이 파이고, 바람이 갈라지며 이한과 라크를 덮쳤다.
쿠구구궁!
그들을 덮치는 막대한 질량의 압박.
이건 뭐 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방팔방에서 덮쳐오는 압박감이 미친 듯이 그들을 짓누르는지라.
"'원근조작(遠近操作)'이야. 내 시야가 보는 3차원의 공간을 다루는 거지. 제법 재밌어."
쿠구구궁!!
튜르는 친절했다.
그들이 당하는 공격이 뭔지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으니까.
원근.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야가 닿는 전체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를 조작한다는 건 그야말로 상상을 실현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한 번쯤 멀리 있고 닿을 수 없는 산이나 구름을 손으로 잡아보거나 툭 치려고 시도해보지만, 이것이 불가능한 허상임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능한 행위가.
"자, 옆으로 친다."
튜르는 가능했다.
대해와 같은 마력을 가지며, 400년을 넘는 시간 동안 무수한 마법을 연구한 사내에게 있어 마법이란 이제 '주문'으로 발동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튜르의 상상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그것이 곧 그의 '마법'이었기에.
누군가 보았다면 신이 강림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적 같은 광경이 아닐 수 없으나….
서걱!
"어?"
튜르는 곧 자신이 신이 아님을 증명해야만 했다.
…손바닥에 '작은 생채기'가 났다.
"아무리 괴물일지언정 3차원의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촉매는 필요할 터. 놈의 손이나 눈이 촉매로 작동할 확률이 높은 것이겠지."
"그럼 베면 그만이란 거네."
"단순히 생각하자면, …그런 것이겠지."
두 기사는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질량을 향해 날붙이를 겨누었다.
보이지도 않는 막대한 질량 앞에서 사람은 아연실색하고, 자포자기하며 모든 걸 포기할 만도 하지만, 두 기사의 사전에 포기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덮쳐오는 질량을 향해 칼침을 놓고, 창을 휘둘렀지.
"…진짜 재밌는 실험체네."
튜르는 자신의 손바닥에 생채기가 난 것보다, 그들의 저항이 더 흥미로운 듯했다.
이걸 처음 겪는 이들은 다 포기하던데, 역시 영혼이 담금질된 전사들은 달랐다.
오히려 반격을 가하다니….
이를 보며.
"이것도 버티려나?"
후욱!
튜르는 박수를 치는 자세로 그대로 두 손바닥을 맞부딪히려 했다.
그리고 그가 보는 시야 속에는 기사들이 있었고, 이를 피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인간은 개미처럼 짓눌릴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도망갈 곳도 없다.
그의 시야가 담는 곳 주변에 모두 함정을 설치했으니까.
피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멈칫.
"…어라?"
튜르는 눈을 끔뻑였다.
그도 그럴 게.
꾸드드득!
"막았어?"
튜르의 손바닥은 맞닿지 못했다.
아니, 맞닿을 수가 없었다.
심상치 않은 저항이 그의 박수를 막고 있었기에.
"끄으으윽-!"
이한, 그가 힘으로 튜르의 박수를 견뎌냈다.
우드드득!
과연 도핑의 힘은 위대했다.
지금처럼 막대한 힘이, 그러니까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거대 유압 프레스의 압력을 힘으로 견뎌낸 셈이다.
허나 이한은 견뎌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대로….
꽈드득-!
최대 악력을 쏟아 부었다.
"…와."
튜르의 손바닥에는 생채기만이 아니라, 살이 파인 것 같은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고, 튜르는 신기한 마음에 다시금 실험을 하듯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는.
쿵!
그대로 주먹을 내리찍었다.
실상 바로 위에서 바위가 떨어진 위력과 다를 바 없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콰득!
"이것도 막네?"
이한은 두 팔을 교차하며 일격을 막았다.
비록 땅이 들썩이며 그대로 크레이터 같은 것이 생겨났고, 이한의 무릎과 발목의 무언가가 파열되는 소리가 났으나, 기어이 막아낸 것이다.
튜르는 신기함을 느꼈다.
웬만하면 상처를 입을 일도 없는 것이 맞지만, 원근 조작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하는 전사는 400년 생애에서도 처음 보았기에.
신선하다.
튜르가 느낀 감상이었고, 흥이 오르며.
"어디, 이것도 막으려나?"
튜르는 마구잡이로 주먹과 손을 놀렸다.
때론 주먹이나 손바닥을 휘저었고, 또 때론 입김을 불며 강한 바람을 불었다.
또는 주먹을 움켜쥐듯이 쥐기도 했고, 강한 입김을 불기도 했다.
콰지지직!
콰과과광!
그럴 때마다 땅이 뒤흔들리며 지반이 무너질 듯 들썩였다.
"아아아악!"
"도, 도망쳐...!"
"탑, 탑주님?!!"
하등 장난처럼 보이는 동작에 의해 일어나는 천재지변이었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 충격에 휘말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거나, 충격의 여파에 의해 피를 토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허나 튜르의 귀에는 저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실험체가, 아니 '새로운 장난감'이 얼마나 잘 버티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지.
아니나 다를까.
퍼억!
콰직!
이한은 이 모든 것을 막아냈다.
주먹이 날아오고 손바닥이 그를 치려고 할 때마다 적절히 칼을 꺼내며 베거나, 그도 아니면 걷어찬다.
도핑 덕분인지 무릎이나 발목의 부상조차 빠르게 회복하는 그였고, 그는 점차 다치는 속도보다 튜르의 공격에 반응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
조금의 실수가 커다란 재앙으로 다가오기에 이한은 제대로 숨을 몰아쉴 시간도 없이 그대로 미치도록 몸을 굴렸다.
때리고, 쳐내고, 막아내고.
이 세 가지를 실수 없이 해내는 이한의 모습은 '처절한' 것이었다.
"아아아아아!!"
그나마 기합을 넣듯 함성을 내지르는 그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투쟁.
목숨을 건 투쟁.
움직임 하나하나에게 느껴지는 처절함과 치열함이 그대로 느껴졌고, 이한은 조금씩이지만 앞으로 나아갔다.
살기 위해, 그는 튜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고, 그의 육체는 이한의 의지에 호응하며 점차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없이 작지만 위대한 걸음.
튜르와 이한 사이의 거리는 약 이백 보.
물론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피가 쏟아지고, 그대로 뼈에 금이 오길 반복했으나 이한은 기어이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섬을 모르는 기사.
뒷걸음질 치는 법을 모르는 것과 같은 그 모습은 그야말로 거북이(Turtle).
기사가 되고 처음 성을 받을 때 아무렇게나 지은 성이었지만, 지금의 이한을 보자면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알맞은 성을 지었음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푸하하하! 뭐야, 저게!"
누군가는 이한의 처절함에 감흥하며 감탄을 터트릴 만도 하지만, 튜르는 웃었다.
마치 '진심으로 내게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며 비웃는 것 같은 작태.
튜르는 갑자기….
"네가 절망하는 게 보고 싶어졌어."
잔혹한 개구쟁이처럼 다른 손동작을 보였다.
휘익.
튜르의 손바닥이 일순 모래를 퍼내는 것 같은 손동작을 취하는 순간,
쿠구구구구궁!
...대지가 뒤집어졌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항이 펼쳐졌고, 기어이 튜르의 손이 가볍게 뒤집어졌을 땐.
...…!!
이한의 몸은 깊고도 깊은 땅속으로 떨어지며 그대로 나뒹굴고 말았다.
"…괴물 새끼가."
이한은 자신을 덮치는 대량의 토사(土砂)와 눈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촤아아아악!
- 대지 뒤집기.
한 명의 마법사가 이루어낸 광경이라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끔찍한 힘이 아닐 수 없다.
허나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땅이 뒤집히며 그대로 이한 또한 같이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대량의 토사와 눈에 그대로 묻혀버린 것도 묻혀버린 것이지만, 튜르는 확인사살을 하듯 거침없이 손바닥과 주먹을 연달아 땅을 두들겼다.
쾅! 콰아앙!
이래도 안 망가져? 이래도-? …마치 호기심을 풀기 위한 아이의 장난과 같은 모습.
희귀한 실험체를 보았다고 기뻐하던 건 언제고, 벌써부터 이토록 망가트리고 있는 것이 공포와 다름없는 바.
왜 그가 마탑 최고의 광인이라 불리는지 알만한 대목이었다.
그렇기에.
푸화아악!
주륵….
"아, 네가 있었지, 참."
너무 하나의 '장난감'만 가지고 노느라, 또 다른 장난감이 있음을 잊고 있던 튜르는 자신의 뺨에 피가 흐르는 것에도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설령 피를 흘릴지언정,
스윽.
"다 나았네?"
"...."
"쳇, 반응이 재미없어."
"...."
"흠, 근데 네 친구가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걱정이 되지 않아? 보통 저런 곳에 깔리면 죽기 마련인데?"
"…친구가 아니다."
"그랬어? 난 친한 사인 줄."
후욱!
"대화나 좀 하지…."
튜르의 의견은 알 바가 아닌지, 라크의 창격은 쉴 틈 없이 쏘아졌다.
탱커가 몸빵을 혼신의 힘으로 해줬다면, 딜러의 역할은 몬스터의 목을 꿰뚫는 것이었기에.
#175 EP-41 심장이 뛸 때까지(2)
이한은 끝까지 잘해주었다.
방패막이가 되어 그가 이 자리에 몰래 올 수 있도록 끝까지 튜르의 관심을 끌어준 것이며, [최고의 탱커]가 뭔지 보여줬다.
그러니 그가 할 일은 그를 이 자리까지 데려다 준 탱커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딜러]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훅.
후욱!
후우우우욱-!
창이 뻗어간다.
점차 더욱 빨라지는 창격(槍擊)이었고, 분명 홀로 창을 내지르고 있을 터인데, 마치 여러 사람이 창을 동시에 내지르고 있는 듯한 착시현상마저 드는 노도의 창격이었다.
그 정도로 라크 드 듀란의 창은 빨랐고, 정확했으며 매서웠다.
- 1인 팔랑크스.
그는 홀로 장창 보병대의 역할을 수행해내는 업적을 이룩해냈다.
슈욱, 슈우우욱!
"…분신?"
라크의 몸이 서서히 나뉜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면 잔영이 계속해서 남았고, 그 잔영은 점차 선명한 윤곽을 그리더니 다섯 명으로 불어났다.
분신 마법을 쓴 것도 아니고, 단순히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분신을 만들다니….
"훌륭해…!"
감탄이 절로 나오고 만다.
방금 전 모든 걸 방어하며 부숴버리던 기사 또한 훌륭했지만, 그의 신기에 닿은 기예도 충분히 대단하다는 듯이 튜르는 손뼉을 쳤다.
"─!"
까득!
다만 칭찬 받는 이는 전혀 반갑지 않았고, 라크는 이를 악물었다.
초 단위로 내지르는 수십 번의 창격이 조금도 튜르의 마력 역장을 꿰뚫지 못했기에.
신비를 기술로 승화시킨 [제3의 눈]을 통해 분명 마력 역장의 빈틈을 쉴 틈도 없이 노리고 있으나 라크의 창은 마치 허상을 쫒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군, 뚫는 족족 순식간에 역장이 복구되는 건가?'
역장을 뚫더라도 그 역장이 복구되는 순간이 너무 빨라 미처 뚫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라크는 그렇게 판단하며 강한 일격의 필요성을 직감했다.
후욱!
찰나의 순간 창을 뒤로 빼며 라크는 강대한 살기를 집약시켰다.
적색투기를 압축시키며 그대로 기운으로 전환한 것이고, 이 과정까지 걸린 시간은 0.2초도 되지 않는 바.
- 흉랑의 송곳니.
화아아악!
강대한 기운을 머금은 창날은 거대한 진정 송곳 형태의 기운을 머금었다.
이한이 검강을 사용했다면, 저것은 적색으로 부른 적강(赤罡)이라 할 만 했다.
적색창강.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라크의 최대 일격이 튜르의 역장에 작열했다.
화아아아악!
일순 공기 중의 흐름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일격이었고, 주변 일대가 진공 상태가 되었다.
창날이 대기를 꿰뚫으며 산소마저 태워버린 것이었다.
설령 초인이라 할지라도 쉽게 볼 수 없는 일격이었으나….
쿠웅──!
…불안한 울림이 퍼지며 라크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얇기 얇은 역장을 때리는 게 아니라, 마치 거대한 바위산을 그대로 때리는 듯한 울림.
그리고 실제로 라크가 때린 것은….
"-대단하네, 하지만 좀 느렸어. 0.2초가 아니라, 0.05초 만에 준비를 끝냈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날 못 잡아."
진정으로 거대한 빙벽(氷壁)이었다.
튜르의 마법이 만들어낸 거대한 빙벽은 두껍고도 높았다.
가히 성벽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후두두둑…!
다만 빙벽은 라크의 창격을 맞으며 그대로 산산이 파괴되고 있었으나, 라크는 그게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가 노린 건 빙벽 따위가 아니라, 괴물의 목이었기에.
"…메모라이즈."
"맞아. 마법사들은 언제든 주문을 준비해두고 있거든, 그리고 난 딱히 그럴 필요가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 내 몸 주위로 방어 마법을 약 41,514개를 펼쳐놓은 상태거든, 아쉽게 됐네, 헤헤."
"...."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했잖아. 어차피 너희가 하는 건 불가능에 도전하는 행위에 불과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결과는 처음부터 뻔한 것이었다.
한데도 대항하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다며 튜르는 고개를 저었다.
후욱!
"또 하네?"
무의미한 짓에 불과한데.
스윽.
가까운 거리일지언정 원근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한 바.
튜르의 손이 움직이며 그대로 라크를 후려쳤다.
푸욱!
"…아프네."
그러나 역시 너무 많이 보인 것일까.
자신의 손에는 방금 전 입은 상처보다 더욱 큰 상처가 났고, 튜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일격을 날리는 저 기사가 지독한 걸지도 몰랐고.
다만.
스륵.
"별 의미는 없지만."
튜르의 상처는 빠르게 복구됐다.
"상처 없는 승리네."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의미는 없다.
이를 보여주는 모습이었고, 튜르는 무의미한 발악을 그만했으면 싶었지만.
"...."
"…또 일어서?"
…라크는 일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가 있었음에도.
"왜 저러는 걸까?"
정말 의문이라며 튜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기지 못할 상대를 봤고, 도망조차 못 간다면 그냥 포기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한데도 전의를 불태운다.
하등 쓸모없게.
하여튼.
"어느 시대가 됐건 기사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해할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그였다.
"-네놈 따위가 알 리가 없겠지."
"응?"
…그가 대화를 걸어도 무시로 일관하던 기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주르륵!
피를 연신 흘려대면서도 고요한 눈동자를 지은 그가 덤덤히 말했다.
"세상이 모두 장난감처럼 보이는 네놈에겐, 생명조차 하등 무가치하게 여기는 네놈이 무얼 알까."
"??"
"지금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겠지. 우리가 싸우는 이유를, 우리가 네놈을 경멸하는 이유를 말이다."
"…이유가 있어?"
진심으로 의문이라며 호기심을 드러내는 튜르였고, 라크는 극도의 경멸과 혐오를 담아 놈을 보았다.
정말 끔찍한 놈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저렇게 죄의식 한 점 없을 수 있을까.
라크는 작은 격정을 억누르며 튜르의, 아니 '마탑의 죄'를 입에 담았다.
"─네놈들이, 이 [10년의 겨울]을 '일부러'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요정의 분노.
마탑과 제국이 요정에게 분노를 사는 것으로 인해 이 끔찍한 죽음의 계절이 10년이 넘도록 유지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그도 그럴 게.
"요정은 저주를 내리지 않았다지?"
...요정은 사실 저주를 내린 적이 없으니까.
하니 이 겨울을 유지하는 건 다름 아닌…!
"아아, 그거? 뭐, 별거라고. 근데 누구한테 들었어? 그거 아는 녀석들은 얼마 없을 텐데?"
저들의 소행이었지.
10년의 겨울을 가지고 와, 제국민 중 1/3이 동사(凍死)와 배고픔으로 인해 죽었음에도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튜르였고, 이는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그게 왜 잘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그래서 콜로니 만들어줬잖아? 그럼 된 거지, 뭐!"
튜르는 거리낌 없이 웃었다.
"...."
…라크는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왜 무뢰배 녀석이 마법사를 주문쟁이라 부르며, 그들을 혐오하는지.
'이러니 혐오할 수밖에.'
끔찍한 자들이다.
아니, 끔찍한 생명체다.
조금의 죄의식도 없으며, 자신들이 하는 일이 모두 옳다 여기고 있다.
'이놈들은 마물이다!'
인간의 천적.
공존할 수 없는 괴물.
그리고 기사는 이러한 마물을 죽이고 힘없는 자들을 지키는 자였다.
그리고 그는, …아니.
"우리는 기사다. 안 그런가?"
약자를 위해 무기를 드는.
쿠우웅-!
땅이 들썩인다.
점차 소리는 더욱 거대해졌으며, 땅의 들썩임 또한 점차 커져만 갔다.
그렇게 어느 순간.
푸화아악!
땅속에서 사람의 손이 뻗어 나왔다.
"하아…!"
땅속에 묻혔으나, 도리어 그 땅을 파헤치고 나타난 인간 같지 않은 맹수가 포효하듯 숨을 몰아쉬었다.
"뒈질 뻔했네…."
"늦었다."
"…죽을 뻔한 건 난데, 넌 왜 다 죽어가냐?"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끄도록."
"…그, 그래."
아닌 것 같은데….
낮은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이한은 점차 몸을 일으켰고, 상황을 분석했다.
"…여전히 최악이네."
여전히 멀쩡한 싸패 주문쟁이가 보였고, 자신이 땅을 파헤치고 등장하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다.
웃긴 놈이다.
'겨우' 이런 일로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그 아저씨랑 스파링을 몇 번이나 했는데.'
초인이랑 스파링을 무려 백 번이 넘도록 했다.
물론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싸움은 그 아저씨와의 스파링에 비하면 가벼운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주문쟁이 새끼는 적어도….
"야, 눈치챘냐?"
"…어느 정도는."
"그렇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가 보네."
알 수 없는 의미의 대화.
허나 뜻은 통하고 있다.
"저놈, 우리 왕국 괴물 영감님들보다 약해."
그들이 아는 초인보다 한 끗 뒤떨어지고 있었으니까.
"…그 영감들에 혹시 전하도 끼어 있나?"
"당연히."
"…불경한 놈."
"지도 동의하고 있으면서."
"...."
그래, 저 주문쟁이는 확실히 강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괴물임은 사실이지만.
무어랄까….
딱 상상한 수준의 강함?
넘치거나 모자람은 없는 딱 '초인의 평균' 수준이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괴물임은 맞지만, 두 기사는 그 차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격차를 만드는지 안다.
하여.
"죽일 수 있다는 거지."
뭐, 그러기 위해선.
"찔끔찔끔한 한 방이 아니라, 큰 한 방이 필요하다는 거고."
"…어려운 일이군."
방금 전에도 커다란 일격이 가볍게 막힌 라크였다.
아무리 강한 한 방을 준비하더라도 저 괴물의 주위에 펼쳐진 역장과 방어 마법을 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못해도 저 모든 걸 꿰뚫을 강력한 힘이 필요했으나, 아쉽게도 그들에겐 그만한 힘을 낼 법한 위력적인 기술이 적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여유롭게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고.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인간 두더지처럼 땅 파면서 생각해봤거든."
"무엇을."
"저놈을 이길 방법."
"…있었나."
"다 확실한 방법은 아니야. 그래도…, 시도는 해볼 수 있지."
"...무엇을 하면 되지."
눈치가 빠른 놈과의 대화는 이래서 좋았다.
라크는 이한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임을 바로 알았고, 자신이 무얼 하면 되냐고 물었다.
하여.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
그는 되물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냐고.
"-전부."
그러한 물음에 라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자식, 낭만 있네."
아쉽게도 연초에다 불만 붙이면 좋을 타이밍이지만, 안타깝게도 두 남자 모두가 비흡연자였고, 연초를 물 시간도 없었다.
대신 덤덤히 칼과 도끼를, 창을 챙기며 발걸음을 내밀었다.
컨디션은 최악.
부상조차 제법 심하다.
그래도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쿵! 쿠웅!
뜨겁게 뛰는 심장 덕분이리라.
그 어느 때보다 주인의 의지를 읽으며 강하게 요동치는 심장이 말한다.
싸우라고─.
#176 EP-41 심장이 뛸 때까지(3)
- 튜르,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아! 인간의 마음을 모르며 그저 본능대로 사는 철없는 아이와 같은 광인아! 나는 후회한다!! 너 같은 마물을 제자로 들인 것을...!
"...갑자기 이게 왜 생각나지?"
튜르는 눈을 끔뻑였다.
건망증이 심한 그는 쓸모없는 기억은 되도록 빠르게 마법으로 '삭제'하는 편이었다.
기억이 남기는 감정이 불필요하다 판단 내렸기에.
한데 지금, 분명 삭제했다고 여긴 어느 기억이 떠오른다.
그가 스승을 죽인 날이자, 마탑주가 된 400년 전의 일이….
-그리고 스승이 남긴 저주나 다름없던 유언을.
"흐음, 이상한 일이네…?"
튜르는 볼을 긁적였다.
이러한 현상은 또 처음이라.
해서.
"연구해야지!"
또 다른 연구거리가 생겼음이 기쁘다.
뇌에 대한 연구를 다시 진행해봐야겠다.
튜르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중.
저벅, 저벅.
"작전 회의는 이제 끝난 거야?"
그에게 다가오는 두 장난감이 보인다.
어느새 떠오른 기억은 뒷전이고 장난감들에게 열중하는 튜르는 해맑게 웃었다.
저 장난감들이 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줄 것인지 기대가 되어.
"또 무식하게 칼이나 창을 쓸 건 아니지? 미안한데 그건 이제 질렸어. 다른 방식으로 해봐."
기다려 줄 테니까.
튜르는 얼마든지 해보라며 두 팔을 활짝 폈다.
그들을 무시하다 못해 작정하고 깔보는 행태.
적으로조차 보지 않는다.
하염없이 약하고 볼품없는 쥐새끼로 본다는 게 정확할 터.
어떤 기사라도 모욕적이며 분노를 불태울 발언이 아닐 수 없으나.
"-그래? 그럼 우리가 준비하는 걸 기다려주겠다고 맹세할 거냐?"
"…응?"
"왜, 이제 와서 무르게?"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더할 나위 없을 모욕에도 그들은 여상스러웠다.
예상과 달리.
조금은 당황스러운 튜르였지만,
"그래, 해봐! 얼마든지!"
당황은 빠르게 사라지며 그는 거리낌 없는 태도로 허락했다.
하찮은 미물이 해봤자 무얼 하겠냐는 무시.
오만한 작태지만, 그는 오만해도 될 힘이 있다.
하니 저건 오만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어떤 방식을 쓸지라도 저들이 자길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튜르는 무엇이든 해보라 도리어 종용했다.
그를 즐겁게 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
"...."
두 기사는 자신들의 취급에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허나 겉만 그럴 뿐, 눈에서 열화가 일렁거렸다.
언제라도 타오를 듯한 뜨거운 분노의 열기.
후우우욱!
그들의 뜨거운 기세는 설원을 녹이고 눈보라마저 빗방울로 만드는 이적을 보였다.
분노로 인해 어느새 체온마저 상승하는 그들은.
"시작한다."
"알았다."
자신들이 할 일을 시작했다.
푸욱!
콰직!
…어?
튜르는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왜, 왜 너희끼리 싸워?"
두 남자가 뜬금 서로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을 보며 튜르는 기겁했다.
녹청머리의 기사는 뜬금 자신의 창에 달린 창날을 뽑아 덩치가 큰 기사의 날갯죽지 부위를 찔렀고, 덩치가 큰 기사는 녹청머리 기사의 가슴 정중앙을 강하게 후려쳤다.
'…내부분열인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400년을 넘게 산 대마법사조차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이 빠진 그가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훅!
"!"
그는 곧 다시금 생소한, 아니 대마법사가 된 이후로 느껴본 적 없는 어떠한 감각을 느끼게 됐다.
서늘함이란....
* * *
쿵, 쿠웅, 쿠웅, 쿠우웅.
심장의 고동이 거대한 북소리처럼 귓가를 울린다.
어떠한, 생경하면서도 강렬한 흐름이 온몸을 뒤덮으며 체내의 울림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이한은 날갯죽지를 통해 전해지는 강렬한 기운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사납다, 아니 거칠기 그지없다.
그의 체내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기운이다.
이게 투기력!
화르르륵!
단순한 투기력이 아니다.
무려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자이자 이한 그조차 승리를 장담 못 하는 기사의 투기력이었지.
거기다 적색투기라 불리는 이질적인 기운마저 있는지라 이한의 몸은 미치도록 떨렸다.
몸 내부를 파괴할 듯한 미친 기운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했기에!
뿌드드득!!
반대로 라크는 라크대로 고통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이한의 전력이 담긴 경이 그대로 라크의 육체를 강제로 파괴하고 다시 조립하는 끔찍한 감각이다!
분근착골의 고통과 맞먹을 터였으나, 라크는 그 고통을 의지력만으로 참았다.
두 기사가 고통을 느낀 시간은 3분이 넘지 않았지만, 그 3분은 3시간으로 체감되는 어마어마한 격통을 선사하는 바.
서로가 압축된 힘을 그냥 생으로 참는 것이었고, 생니를 모조리 뽑히는 고통을 초단위로 참는 인내력을 발휘했다.
인고의 시간.
서로가 원래는 길어도 반년, 짧게는 석 달은 두고 차근차근 익혀야 하는 과정을 건너뛰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설령 살더라도 수명은 줄고 말리라.
그 정도로 그들은 전부를 걸었기에.
그리고 전부를 건 두 기사는.
"…다시는 사양하고 싶다, 이런 미친 짓."
"…동감이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죽음의 귀로에서 복귀했다.
만약 서로가 조금이라도 실수했다면, 그들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떨어졌다면 죽었으리라.
한데도 산 것은 그들이 우수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한쪽은 미치도록 몸을 단련하여 강철과 같은 몸을 손에 넣은 기사이며.
한쪽은 재능으로 따지면 누구도 비견할 길이 없는 기사였으니.
그래서 가능한 도박이었고, 그들은 성공했다.
"이거 얼마나 가냐?"
"대략 15분."
"…짧네."
"나는 얼마나 가지."
"20분?"
"...."
"뭐, 넌 처음이니까. 난 우리 애들한테 해본 경험이 있어서 가능한 거야."
"…갑자기 네놈의 밑에서 배우는 제자들이 불쌍해지는군."
둘은 제 수명이 줄었음을 알았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의 '현재'와 '지금'만을 바라볼 뿐.
그런 그들에게.
"...너희, 미쳤구나?"
미친놈한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튜르는 경악 어린 시선을 주었다.
놀라움.
실실 쪼개기만 하던 광인이 처음으로 정색하며 진지한 시선을 준 것이었다.
"처음에는 왜 그런 이상행동을 했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네! 서로의 힘을, '세월'을 공유한 거구나!"
튜르는 이해했다.
마법사이기에 더욱 이해하기 쉬웠다.
마법사에게 스승의 유무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스승이 죽을 때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스승의 재산이나 연구 성과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닌 스승의 '마력'이야말로 마법사가 스승에게서 물려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재산이었다.
마력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마력을 살찌우는 행위가 아닌, 스승이 평생토록 쌓은 마력의 흐름을, 그러니까 경험을 간접적으로 몸에 각인하는 행위다.
세월의 공유이자 더 높은 경지로 가기 위한 발판.
뭐, 제 마력을 물려주고 나면 당사자는 죽는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긴 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제 마력을 물려주는 행위는 사장되는 판이었고, 마력을 물려받고 싶다면,
…죽여야지. 제 손으로.
튜르가 스승을 죽인 이유기도 하다.
감히 자신이 원하는데도 마력을 물려주기 싫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죽어야지.
한데 설마 그러한 행위가….
"기사들도 가능했구나…!"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는 튜르였으나, 두 기사는 그를 경멸했다.
"우리가 주문쟁이 같은 미친 새끼들인 줄 아냐."
"지랄하고 자빠졌군."
"…너무하네, 너희."
자신에 대한 취급이 너무하다며 울상을 짓는 튜르였으나, 두 기사는 코웃음만 쳤다.
역겨울 뿐이란 듯.
또한.
"우리가 한 건 너희가 하는 그런 역겨운 게 아니다, 이 썩을 마물아."
격체전공(隔體傳功)이라는 수법이 있다.
원리 자체는 스승이 자신의 내공을 물려주는 행위이며, 이로 인해 제자는 더욱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튜르가 말하는 마력의 대물림과 비슷하지만, 그들이 한 것은 그저 격체전공에서 힌트를 얻은 행위에 불과하다.
그건….
"그건!?"
"궁금하면 몸으로 직접 겪어봐."
"에이, 너무하네."
"...."
"…흐흐, 농담이야. 얼마든지 해봐."
튜르는 그 무엇을 하건 상관없다며 다시금 양팔을 펼쳤고, 이한과 라크는.
"언제까지 웃는지 보자."
기꺼이 보여주기로 했다.
그렇게.
퍼어어어억!
"…어어?"
...튜르는 다음 순간 아픔을 느꼈다.
"드디어 한 대 제대로 때려보네…."
이한은 느껴지는 손맛에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냥 주문쟁이도 아닌 가장 썩은 주문쟁이를 때리는 것은 스트레스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후우욱!
"천 대만 더 때리자, 이 미친 괴물아."
한 대로 만족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 * *
…역장과 메모라이즈가 반응하지 않았다?
'왜지?'
튜르는 자신의 역장과 방어 마법이 펼쳐지지 않은 것에 의문을 느꼈다.
대마법사가 된 이후 처음 있는, 아니 4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처음 겪는 일이다.
약간만, 10분만 주어진다면 대략 원인을 알아내고 해결해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콰아아앙!
…기사들은 기다려줄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파아아아악!
이한은 원래도 육중한 몸뚱어리와 다르게 빠르고 기민한 기사였다.
허나 지금 이한이 질주하는 속도는 전날과 비교도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다.
바람처럼 움직인다는 것이 이러할까, 폭발적인 돌진이 아닐 수 없었고 이한은 자신조차 주체할 수 없는 힘에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이게 투기법인가, 미쳤네, 이거!'
투기법.
투기력을 체내에서 폭발시켜 그 폭발력을 힘으로 삼는 수법.
이한은 왜 투기법이 기사들이 익히는 필수적인 기술이며, 현재까지도 최고로 취급받는지 이제야 몸소 깨달았다.
'이만한 폭발력을 쓰는 거니까! 강할 수밖에!'
최대 수십 배에서 수백 배.
이 폭발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의 신체능력은 그 정도로 증폭할 수 있으리라.
허나 조절하지 않는다면 이 폭발력에 의해 몸이 붕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닐 수 없었으나, 이한은 지금 줄에서 떨어지건 말건 상관없이 전력으로 투기법을 운용했다.
다른 누구의 투기법도 아닌 갈라하드 최고의 기사의 투기법과 천살성의 기운마저 함께 운영한다.
원래는 다루지 못하는 것이 정상적이지만, 이한의 비정상적으로 단단한 몸뚱어리는 그 힘을 견뎌내는 게 가능하게 해주었다.
콰과과과과과광-!
차원이 다른 위력을 자랑하는 격산타우가 비처럼 쏟아진다.
주체할 수 없는 힘 탓에 격산타우의 범위는 점차 넓어졌고, 마탑 전체를 후려쳤다.
멀리서 그들의 전투를 구경하던 마법사들은 아예….
"끄아아악!"
"사, 살려…!"
퍼걱!
…곤죽이 되어갈 따름.
그리고 이를 정면에서 받아내는 튜르의 경우에는.
퍼어어억!
"또…?"
다시금 자신의 역장을 뚫고 일격을 맞은 것에 얼을 타는 중이었다.
주르륵….
아무리 초월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육체가 연약한 마법사가 받아내기엔 전혀 가볍지 않은 일격.
웬만한 마법사였다면 맞는 즉시 죽었을 것이다.
육체 개조를 통해 몸의 내구도가 철과 같은 강도를 자랑하기에 무사한 것뿐.
이를 계속 맞는다면 튜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 없으리라.
'막아야….'
간만에 방어 주문을 직접 하기 위해 영창을 내뱉으려 하는 튜르였으나, 안타깝게도.
"-무뢰배 녀석, 이토록 좋은 걸 익히고 있었군."
꾸드득!
그를 노리는 사냥꾼은 한 명이 아니었다.
라크, 그가 두 개의 짧은 단봉을 양손에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창날이 사라져 봉만이 남은 것을 그대로 분리한 것이었고, 그는 그대로….
후우우욱!
양손의 단봉을 미치도록 빠르게 휘두르며 튜르를 격타했다.
[칼리 아르니스]를 연상케 하는 무차별적인 타격.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역장이 찌그러진다.
메모라이즈로 펼친 방어마법이 나올 때마다 족족 모두 파괴되며 분쇄되었고, 라크의 단봉에 적색투기는 휘둘러질 때마다 더욱 거대하고 진해지며, 어느 순간 타오르듯 열기를 뿜어냈다.
화르르르륵!
타고나길 천살성이란 비정상적인 에너지를 품은 기사는 단 한 번도 전력으로 자신의 기운을 세상에 풀어놓은 적이 없다.
이 기운은 타인을 해칠 뿐만 아니라, 숙주조차 해치는 양날의 칼과 같으니.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금강.
그것도 이한이 무수한 노력 끝에 닿은 성과가 그의 몸에 그대로 녹아 있었기에.
이한의 강렬한 경이 라크의 체내를 보호하며 강화시키는 지금만큼은 천살성의 살기는 그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기운이 아니라, 그의 명령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목줄을 찬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다만 이 기운을 지나치게 많이 쓸 경우 살의가 뇌를 침범하여 그가 살인귀로 변모할 부작용도 있었으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라크는 이 괴물을 죽이기 위해선 자신 또한 괴물이 되어야 함을 안다.
평생토록 증오한 기운이지만, 지금만큼은 이 증오스러운 기운이 필요했다.
화르르륵!!
홍염(紅焰).
라크의 적색투기는 기어이 불꽃이 되었다.
천살성이란 장작을 재료삼아 불타오르는 불꽃은 점차 그의 온몸을 집어삼켰고, 라크의 몸은 붉게 물들어갔다.
홍익, 아니 홍염인간이 되어가는 라크의 단봉이었고, 그의 힘과 속도, 그리고 홍염은 기어이….
꽈지지직!
역장을 녹이며, 그대로 박살내었다.
"...하, 재밌네."
튜르는 자신을 덮치는 홍염을 보면서도 즐겁게 웃었다.
대마법사는 4세기가 넘은 오늘에 이르러야 처음으로 목숨의 위기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흥겨웠다.
'그렇구나, 이게 바로…!'
'사투(死鬪)'란 것이었다.
#177 EP-41 심장이 뛸 때까지(4)
"…저 녀석은 왜 갑자기 변신을 하냐?"
이한은 불꽃을 두른 채 미친 듯이 괴물 주문쟁이에게 달려드는 라크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혀를 차고 말았다.
언뜻 강력하지만 저것이 하루살이의 전투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저건 몸이 못 버텨.'
비록 이한의 경으로 강제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육체를 가지게 되긴 했지만, 저토록 난폭한 기운을 계속 견딜 수는 없으리라.
언제 자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허나 이한은 녀석을 걱정하기보다 더욱 빠르게, 더욱 힘차게 주먹을 날릴 따름이었다.
지금은 목숨보다 이기는 것이 더욱 간절하였으니까!
퍼버버버버벅!!
"끄아아악!"
"그, 그만…!"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울리는 것 같았으나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이한이 이토록 무질석적이고 광범위적인 권격을 날리는 건 단순히 다른 주문쟁이를 사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권격이 증가할수록 그 권격은 공간을 점령하고, 무수한 탄환의 궤적을 만들어내는 바.
상대뿐만 아니라 이한조차 읽을 수 없는 일격들이 전 사방에서 괴물을 때리며 추측할 수 없는 궤적을 만드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궤적을 그리는 권격 중에는,
퍼억!
적의나 살의조차 담기지 않고, 그저 의지만이 담긴 일격을 섞여 있으니!
아라한의 주먹.
- 아라한신권!
전날 후작을 상대하며 깨우친 깨달음의 무학.
그래, 이것이 바로 주문쟁이 녀석의 마법과 마찬가지로 '의념의 개념'을 가진 힘이었다.
물론 주문쟁이가 쓰는 것처럼 자연스럽지도 강력하진 않지만, 지금만큼은 절대 그의 일격을 막을 수 없을 터.
허나,
지끈!
…이한은 아라한신권을 오래 쓸 것이 못 된다고 판단했다.
이건 아직 그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란 듯, 쓰면 쓸수록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주르륵!
이한은 어느새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을 정신도 없다며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저 괴물이 무얼 할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 백보신권!
그저 단순한 백보신권이 아닌 아라한신권의 깨달음이 담긴 백보신권을 뻗어내며 이한은 이를 악물었다.
이거라면 분명히 놈의 머리통을 날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천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다음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쏟아졌다.
단순히 한 줄기의 벼락이 아니라 비처럼 쏟아지는, 초 단위로 수백 번의 번개가 하늘에서 쏟아지며 마구잡이로 모든 것을 휩쓸었다.
"타, 탑주...!!!"
그 벼락에 의해 늙은 주문쟁이 한 마리가 죽었다.
이한에게 가슴팍이 베였던 놈이다.
안 그래도 상처가 심했는데, 수백 번씩 요동치는 번개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후우우욱...!
그리고 번개의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게 지워져 있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천벌.
마법사의 주문은 언어를 현실로 구현하는 수단이고, 주문이 긴 이유는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해 최대한 리스크를 없애기 위함이다.
한데 튜르는 직관적이다 못해 신의 권능이라 할 수 있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 여파는 보다시피 압도적이었으나.
"쿨럭…."
튜르 본인에게도 상처를 남기며 그는 처음으로 피를 토했다.
아무리 그라 해도 이만한 짓을 저지르고 리스크가 없을 수가 있나.
당연한 결과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고, 튜르가 저들을 적으로 인정한다는 뜻도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400년을 산 대마법사.
그러니.
"…역시, 이 정도로는 무리려나?"
휘이이익.
원래는 작은 언덕이 있던 땅은 번개에 직격당하며 허허벌판이 되었으나, 언덕마저 평지로 만든 번개조차 저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살아있냐?"
"아직은."
두 기사는 새까만 재를 묻히고 있었고, 화상도 심했으나 여전히 무사했다.
"끈질겨, 진짜."
튜르는 이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와 처음으로 사투를 벌이는 자들인데, 겨우 이 정도로 죽을 리가 있으랴.
그러니.
"이제 더는 기다려주지 않을 거야."
조금 전과 같은 기다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하는 그였다.
기사들을 인정하기에, 저들이 위협임을 충분히 판단했기에 내린 결론이었고 튜르는 그렇게.
휘익!
손을 휘저었다.
파아아앗!
원근조작.
세상의 이치를 뒤흔드는 대마법사의 독자적인 마법이 펼쳐지며 땅이 흔들리고 바람이 갈라지며 막대한 질량의 충격파가 기사들을 덮쳤다.
조금 전만 해도 압도적이었고, 그들은 막는 것에 급급할 뿐, 속수무책이 아닐 수 없는 힘이었지만.
푸직!!
"…이것도 이제 함부로 쓰면 안 되겠는데."
튜르의 손가락이 뒤로 꺾여갔다.
공격하려다가 도리어 그가 다친 것이었고, 튜르는 부러진 손가락을 회복시켰다.
-무한 재생.
신비를 품은 신조(神鳥), [불사조]가 품었다고 알려진 신비를 흉내낸 마법.
설령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그는 무한히 회복하는 게 가능했다.
하여 다치는 것이 상관없다고 느끼는 튜르였으나.
욱씬!
"...통증이 남아 있다?"
결국 이는 오리지널이 아닌, 카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마법은 완전하지 않았다.
…아니, 정정하자면 원래는 완전한 마법이라 여겼는데, 오늘 처음으로 이 마법의 최대 허용량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콰직!
콰드드득!
그들의 맹공이 이어질수록, 원근 조작이 공략될수록 튜르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다.
처음 저들이 예상한 대로 원근 조작의 촉매가 되는 건 결국 튜르의 팔과 눈이다.
허나 촉매를 들킨다 하더라도 원래 상관은 없다.
어차피 알아봤자 공략불가였으니까.
누가 이 방대한 질량과 마력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한데 지금, 그 상식이 깨졌으며, 기어이 원근 조작이 공략되고 있다.
웬만한 마법사라면 자신의 마법이 공략당한 것에 경악하며 절망을 느낄 법도 하지만.
"흐!"
튜르는 광기 어린 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위기가, 상처가 너무나 오랜만이었기에.
어딘지 모를 위기감이 점차 그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했고, 점차 호흡이 빨라지는 것에 튜르는 짜릿함마저 느꼈다.
공허하고도 항상 나른하고도 반복적이기만 했던 수백 년의 삶.
그 삶에서 찾아온 자극은 그야말로 뇌내 도파민을 자극하는 마약이나 다름없었기에.
'아니, 마약 따위랑 비교도 안 돼!'
이미 마약에 50년 정도 찌들어져봤던 튜르로선 지금 이 사투가 마약과는 비교해선 안 되는 흥분되는 순간임을 확신했다.
무어랄까.
이토록 피를 튀기고 몸이 망가지며, 심장이 급박하게 뛰는 이 상황 자체가-.
'난 살아있구나!'
튜르로 하여금 생기를 느끼게 해주었기에.
짜릿한 도파민이었다.
"…조금만 더, ─더 즐겁게 해줘!"
다음 순간 튜르의 대해와 같은 마력이 용솟음쳤고,
쿠르르르르릉!!
─용오름이 강림했다.
* * *
쿠르르르릉!
"또 이거냐…."
대지 뒤집기.
이한을 속수무책으로 만든 재해가 다시금 그를 덮치고 있었다.
방금 전보다 더욱 거대한 토사가 뒤집히는 것이었고, 저걸 뚫을 수나 있을까 아찔하기 그지없는 모습.
이것만 해도 아찔하기 그지없는데….
구오오오!
저 괴물은 이게 끝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기어이 미친 것을 소환해냈다.
늙은 주문쟁이들이 소환했던 태풍을 조작하여 거대한 용오름을 형성한 것이다.
바다도 아닌데 용오름이 튀어나오고, 땅덩어리가 뒤집히는 미친 재해의 현장.
누군가는 혼절하고도 남을 상황일 터이나….
"...."
이상하도록 이한은 무덤덤했다.
이는 자포자기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될 것 같은데?'
이한은 덮쳐오는 대지와 용오름을 가늠했고, '상대할 수 있다'는 결괏값을 도출해냈다.
다른 이가 봤다면 혹시 머리가 망가진 것이 아니냐며 악담을 늘어놓을 테지만, 이는 지극히 냉정한 판단이었다.
그도 그럴 게.
화아아악!
이한은 지금 자신의 체내를 휘젓는 강력한 투기력으로 '과감한 행위'를 할 수 있다 확신하고 있었기에.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았던 행위일지라도, 투기법을 쓸 수 있는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이한의 몸 주위에서 강렬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이건 마공(魔功)이다.'
웃기게도 이 상황이 되어도 이한은 투기법이 무엇인지 분석했고, 투기법이 무엇인지 정의 내렸다.
마공.
그래, 투기법은 무협지에 등장하는 마공과 몹시 흡사했다.
사납고도 거칠며, 숙주를 위협하려 한다.
대신 강대한 힘을 주는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힘.
하여 이것은 마공이 맞다.
반대로 또 우습게도 이한이 익힌 경은 '정공(正功)'이다.
차근차근 힘을 키우는 것으로 힘을 늘렸고, 그릇을 안정화하는 데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재능 없는 자가 노력과 근성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게 해주며, 기어이 투기법을 익힌 이들과도 나란히 하게 해주는 기법.
비록 투기법에 비하면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럼에도 안정적인 힘일 터.
불가의 역근경이나 도교에 나오는 선인무도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正道)의 방식이다.
투기법과 비교하니 이런 생각은 더욱 확실하게 굳혀진다.
투기법은 인간의 자연적인 힘을 이끌어내어 성장하는 게 아닌, 이런 강렬한 기운을, 생명력을 연료삼아 불태우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한은.
'그렇구나, 내 안에는 이렇게 강렬한 생명력이 있었구나….'
제 안에 그 누구보다 방대한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라크가 나눠 준 대량의 적색투기마저 잡아먹을 것 같은 기운.
그리고 이 기운이야말로 이한이 노력한 '역사'이자 '삶'을 보여주는 증거와 같았다.
치열하게 살았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쏟아 부으며 노력한 나날의 성과이기도 하는 바.
'노력하길 잘했어.'
이한은 그동안의 세월이 무의미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 몹시도 기뻤고, '왜 이제야 부르냐?'며 웅크린 몸을 일으키는 기운을, '나의 투기력'을 폭발시켰다.
고오오오-!
투기법의 흐름은 이미 문신을 새기듯 혈관과 신경, 근육과 뼈 곳곳에 새겨졌으니, 이한이 자신의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수월했다.
화아악!
정파의 후기지수가 마공을 익히다니, 참으로 도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어쩌겠는가?
강호의 동도들을 위협할 사교의 교주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면 안 될 노릇…-.
"…누굴 닮아서 이렇게 미친 거지…?"
그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기운은 마공을 연상케 하는 투기법이 몹시도 마음에 안 드는지 자신에게 괴상한 논리를 주장했다.
아니, 아무리 그동안 자신이 무협지에 힌트를 얻어서 기술을 썼다고 해도 진짜로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왜 이놈의 기운 덩어리는 편식하듯 투기법을 아니꼽게 대하는 걸까?
귀찮은 녀석이다, 주인이 대체 누구기에….
'아, 나구나.'
자신을 닮아서 이토록 괴상한 성향을 보이는 것일까?
이한은 이러한 상황에 실실 웃었다.
그동안의 업보가 이런 걸까 싶어서.
허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비록 기운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뭐하냐, 주문쟁이 족쳐야지.'
꿈틀!
그를 닮았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화아아악!
…주문쟁이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한의 몸에서 강렬한 힘의 파동이 발산됐고, 그를 덮치는 토사의 해일은-.
쩌저저저적!
그와 닿는 족족 모조리 폭사했다.
우우우웅.
대량의 투기력이 발산되고, 이를 압축하듯 둥근 원을 그리며 이한을 감싼다.
마법사들의 마력 역장을 보는 듯한 기운이었으나, 이는 방어의 목적보다 공격을 모조리 튕겨내고 소멸시킬 요량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기본적인 베이스는 투기력이며, 힘의 결집 구조는 검강의 원리와 같으니.
강기 무학.
이름하야-.
"─호신강기(護身罡氣)."
#178 EP-41 심장이 뛸 때까지(5)
…검강을 몸에 두른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권사와 같은 맨몸으로 싸우는 무투가가 적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검기와 같은 힘을 몸에 두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 밀도를 사람의 연약한 피부로는 감당하기 버거우니까.
해서 주먹이나 발에 기운을 두른다는 건 상상이나 하는 것이지 실천해서 안 된다.
그대로 몸이 녹거나 파열될 우려가 있으니까.
허나 이한의 몸은.
화아아아악!
- 내 몸이 웬만한 갑옷이나 대검보다 튼튼하잖아? 그러니까 상관없지!
제 몸이 가진 내구력을 믿기에, 해서 이한은 망설임없이 호신강기를 시도했고, 그대로…!
콰앙!
돌진했다.
그를 위협하며 뒤덮으려는 토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파지지직!
그와 부딪칠 때마다 다 깎여나갔으니까.
아니, 증발해 간다는 게 맞는 표현일 터.
까드드드득!
나아간다.
감히 이 정도로는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음을 몸소 증명하듯.
분쇄하고 깨부순다!
조금의 망설임 없이, 피하는 것조차 없는 돌진.
고오오오오오!!
허나 그를 노리는 건 뒤집히는 대지만이 아닌, 용솟음치는 용오름도 있는바.
바닷물 대신 눈을 휘감으며 일대 전체를 휩쓰는 토네이도.
저것에 부딪친다면 아무리 호신강기를 두른 이한이라도 날아가는 게 상식…-.
'안 날아간다!'
이한은 자신의 호신강기를, 제 노력의 결정체를 믿었다.
비록 그가 저 거대한 용오름을 날려버리거나 없앨 수 있다고 오만하게 말하진 않겠다.
아직 그는 부족한 면이 많으니까.
허나 감히 말하건대, 그의 힘은…!
━━!
"뚜, 뚫었어…?"
천둥 벼락에서 용케 살아남은 어느 마법사의 아연실색한 읊조림.
증오스럽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적임에도 불구하고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기사가 기어이 용오름을 돌파했다.
비록 용오름을 없애버리지는 못했으나, 그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날아가지 않고, 기어이 용오름을 뚫어낸 것이다.
대자연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육체가 가진 잠재력만으로 말이다.
이겨낸 것이 아닌 토네이도를 '극복'해낸 기사.
무훈시가 만들어지더라도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업적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허나 이한은 자신이 용오름을 극복해냈건, 역사에 남을 무훈시를 이룬 것에도 크게 관심이 없이 그저 이를 악문 채 무섭도록 질주했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업적을 쌓았다는 사실이 아닌, 드디어 목표했던 괴물과 대면했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파자지지직!
이한이 도끼를 불끈 쥐며 하늘 높이 뛰었고,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듯 몸을 앞으로 회전시키며 도끼의 위력을 더해갔고.
"-닿는다."
의지를 표명하며 괴물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쿠우우웅!
숭겅!
그리고 그의 의지는 기어이 '괴물의 팔'을 날려버렸다.
* * *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어? …어…어어...어?"
사람은 현실감이 없는 일을 겪으면 바보가 되듯이 언어능력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마탑의 마법사들은 지금 한없이 언어능력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지금 일어난 일이 믿을 수가 없어서.
"마, 마탑주님의 파, 팔이!?"
"자, 잘렸다고…?"
"…이, 이건 꿈이야, 이, 이게 꿈이 아닐 리가 없어-."
패닉의 전조.
그들은 머리를 쥐어뜯었고, 눈마저 충혈 되었다.
비록 튜르는 광인이고, 그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자이며, 한 단체의 수장으로도 실격인 자였다.
허나 그는 대마법사다.
그것도 무려 지난 4세기 동안 중앙 대륙의 정점으로 위치하던 대마법사란 말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마법사들의 왕이었고, 마탑에선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한데 그런 그의 팔이 잘렸다.
신성모독이자, 국가의 몰락을 두 눈으로 목도한 국민이 된 기분이 이럴까?
아니,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몰랐다.
마법사들이 현실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튜르 드 세이건'이다.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숨 쉬듯 펼치는 마법의 왕이란 말이다!
한데 그런 마법의 왕이 다쳤다.
…아니, 팔을 잃었다.
마법의 왕이 팔이 잘렸다는 건 있어서도 안 되고, 발생해서도 안 되는 현상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신도들이 패닉에 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일 따름일 터.
…정작.
"대단하네, 정말. 이런 위기는 또 처음이야!"
팔이 잘린 마법사들의 왕이자 신은 자신의 잘린 팔을 보고도 그저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통증을 참기 힘들 터인데.
"아, 예전에 내 몸을 여러모로 개조한지라 고통을 못 느껴. 느껴도 살짝 간지럽거나 따가운 정도? 그러니 난 진짜 위험한 게 맞아. 재생도 안 되네, 이거, 하하! …흠, 그 파괴적인 기운이 내 팔에 스며들었기 때문일까? 골치 아프네…."
팔이 잘려나갔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그저 이 상황을 신기하게만 받아들이는 튜르의 모습은 언뜻 보면 현기마저 느껴졌다.
허나 튜르를 상대하는 기사는 안다.
"너무 미쳐서 현실감마저 없나 보지?"
"그건 맞아. 400년을 살다 보면 감정이나 기억, 감각 같은 게 모조리 다 고장 나거든. 그거 알아? 내 몸 대부분을 이루는 것 중 원래 '내 것'이 거의 없어. 뇌만 빼고 싹 다 이식한 게 대부분이지! 덕분에 약간 부작용으로 어려진 것도 있지만!"
"...."
"응? 왜 그런 눈으로 봐?"
"...."
"에이, 대화나 좀 하지."
…저건 현기가 감도는 게 아닌, 이미 '인간이 아니기에' 저리 반응한다는 것을.
콰앙!
기사는, 이한은 이 괴물과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타인의 육체를 탐한 주제에 이를 자랑하는 놈과 무슨 대화를 할까?
필요성이 없다. 그러니 대화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놈의 몸을 썰어야 한다.
가능하면-.
'머리와 목!'
둘 중 하나를 완전히 곤죽이 나도록 으깨버릴 작정이었다.
재생조차 하지 못하도록.
이한은 다시금 달려들었다.
호신강기.
기어이 괴물의 마력 역장을 꿰뚫은 최강의 방패이자 창이 다시금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그대로 쏘아지는 이한이 다시금 도끼를 치켜들며 나무 장작을 패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목표하는 것은 머리!
이번에야말로 팔이 아닌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하여.
다만….
[나를 지켜].
쿠웅! -하는 강한 울림과 함께 이한의 공격은 막혀야 했다.
"…어처구니가 없네, 혼자 백 개를 뚫는다고?"
수백 개가 넘는 방어마법이 동시에 그를 막아섰으며, 이한의 주위로 거대한 [미궁] 같은 것이 생성됐다.
촤르르르륵!
대략 수만 개의 방어마법을 메모라이즈 해놓은 튜르의 방어 마법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며 이질적인 현상을 일으켰고, 기어이 미궁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무수한 함정과 방어마법이 섞여, 빠져나가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감옥.
고대 신화에 나올 법한, 저주 받은 왕자 미노타우로스를 봉인해놓은 다이달로스의 미궁이 이러하지 않을까 싶었다.
"너는 너무 위험해."
튜르는 더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미 원근 조작은 공략된 상태이며, 여타의 강력한 마법을 쓸지언정 저 기사를 쓰러트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니, 튜르는 선택했다.
"널 봉인할 거야."
후욱!
튜르는 자신의 몸에 펼쳐진 수만 개의 방어마법을 모조리 다 미궁에다 집어넣었다.
저 위험한 기사와 대치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으며, 이렇듯 봉인해버리는 게 맞았으니까.
"자멸하도록 해."
아무리 강할지라도 수만 개의 방어마법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미궁을 홀로 돌파할 수는 없다.
튜르가 살아있는 한 미궁의 마법은 계속 복구될 터이며, 그런 이상 빠져나오는 것도 요원한 일일 테지.
말 그대로 봉인(封印).
"아쉽네, 원래 이 수법은 귀왕을 잡기 위해 준비한 건데…."
천 년을 산 트롤의 왕.
[마왕급 마물]을 붙잡아 실험체로 삼기 위해 만든 비장의 한 수.
허나 안타깝게도 트롤의 왕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넌 이제 어쩔 거야?"
"...."
"흐음, 뭘 하나 싶었더니, 늙은 애들을 다 죽였구나? 악취미다, 흐흐."
"내 앞을 가로막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뚝, 뚜욱.
라크의 단봉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피가 아닌, 그가 때려죽인 세 명의 마법사.
정확히는 대마법사란 호칭으로 불리는 이들의 피였다.
이한이 튜르와 대적하는 동안 끼어들지 못하도록 막으려 용을 쓰던 그들이었지만, 홍염에 둘러싸인 라크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고, 라크는 홀로 대마법사 세 명을 지워버린 위업을 보였다.
이로써 마탑의 다섯 명밖에 없던 대마법사가 오늘 이 시점으로 모두 생을 마감한 순간.
"흐음…."
튜르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천공의 성은 붕괴.
마탑의 수호신인 청동 거인들도 전멸.
대마법사를 포함한 마탑의 마법사들 85% 이상이 사망.
실상 마탑은 궤멸한 수준이었다.
허나.
"어휴, 이거 다 언제 복구하지?"
튜르는 조금 귀찮아 할 뿐, 앞서 언급한 피해를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뭐, 한 3년만 제국을 쥐어짜면 되겠지."
"...."
자신이 있는 한 마탑은 얼마든지 다시 복구될 것이며, 전성기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있으리란 확신.
그것이 튜르에겐 있었다.
또한 마탑 안에 잠들어 있는 막대한 재산들.
금이나 보석 같은 물질적 재산이 아닌,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지적 재산들'이야말로 마탑이 가진 압도적인 이점이자 최고의 자산인 바.
저것만 있다면 마법사들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마법사가 본능적으로 금단의 지식을 원하는 한 마법사란 인종은 마탑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으니까.
"너만 처리하고 한동안 일만 해야겠다, 어휴, 내 팔자야.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원."
"…지랄하지 마라."
"헤헤, 약간 늙은 것처럼 말해봤어, 어때? 연기 잘하지?"
"...."
"에이, 그만하자 우리. 너도 위협스러운 건 아는데, 너도 내 목은 못 가져가. 기껏해야 눈이나 팔 정도?"
다시금 자세를 잡아가는 라크였고, 튜르는 손사래를 쳤다.
더는 저들을 얕잡아 보지 않는다.
특히 저 붉은 '홍염'을 말이다.
저거라면 자신의 마력 역장을 다 때려 부술 수 있긴 할 테지만, 그래봤자 자신을 죽일 수는 없다.
자신에겐 아직도 수천 가지 이상의 마법이 남아 있으니까.
'뭐, 저 기사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수법은 기껏해야 다섯 개밖에 없지만.'
이를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기사들에게 이토록 몰리다니 말이다.
"나도 이제 퇴물이 되어가나 보네, 흐흐."
누군가에겐 자조적인 발언이겠지만, 라크는 안다.
저것이 그냥 해보는 소리란 것을.
그 증거로 놈은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는.
"너희들, <팬드래건의 기사>지?"
그들의 정체를 추측, 아니 확신해갔다.
"아니다, 무조건 팬드래건이겠지. 현 시대에서 아직도 이만한 수준의 기사를 보유할 수 있는 건 그 팬드래건 뿐일 테니까. 신비가 넘치고, 용과 요정의 사랑을 받는 왕국. 하아, 정말 부러워. 제국이나 다른 대륙은 모두 신비에게 미움을 받는데 말이야."
팬드래건.
그들의 이름은 400년 전부터 유명했고, 항상 강한 기사들을 보유했다.
제국이 몇 번이고 정복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패배한 적이 몇 번이던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패배의 원인에는….
"현 시대에도 아직 오러 유저가 있지? 그 인지를 초월한 초인이 말이야? …대단한 일이야. 어떻게 '그런 생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더 신기한 건 대륙의 역사에서 팬드래건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오러 유저가 나왔다는 점이겠지. 참 신기해."
"...."
"만약 오러 유저가 중앙 대륙의 '신들'에게 미움 받지만 않았다면 몇 번이건 내 목을 노렸겠지. 그런 걸 생각하면 신들도 가끔은 쓸모가 있는 것 같아."
크흐흐, 어딘지 비릿함마저 담긴 웃음을 내뱉으며 튜르는 라크를 보았다.
"응, 결정했다! 너는 아까 전에는 그냥 보내려고 했는데, 정정할게! 너희는 그냥 죽일 거야. 너희는 너무 위험하거든. 그리고 제국한테 명령해서 팬드래건과 전쟁을 벌이라고 할 거야. 그렇게 한 다음 팬드래건의 기사들을 왕창 노예로 잡아오는 거지! 그 중에 분명 너희와 같은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 있을 거야, 분명."
튜르의 눈에는 보였다.
이한과 라크라 불리는 기사들은 현재 오러 유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자격을 얻은 이들 중 한 명임을.
물론 그래봤자 수십 가지가 넘는 조건 중 두세 개만 겨우 충족한 수준이지만.
허나 그 두세 개를 얻었을 뿐인 자들이 그에게 이만한 타격을 주었으니, 충분히 위험한 것은 맞다.
그러니 조금 덜 위험하고, 그저 잠재력을 가졌을 뿐인 이들을 노예로 가지고 오는 게 더욱 안전한 일일 터.
괜히 오늘처럼 놀려다가 이런 일이 다시 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안 되는 일이지 않겠는가?
"끔찍하지 않아? 너희 때문에 팬드래건과 제국은 전쟁이 벌어지는 거야! 물론 이길 수는 없겠지. 오러 유저가 있으니까, 하하!"
그래도 타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며, 튜르는 원하는 물건을, 실험체를 마음껏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목적은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이루어진 거다.
튜르는 훗날을 기대하며 웃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마음껏 기대하…-.
"-귀왕이 죽은 것을 아나."
"…응?"
"역시 모르는군. 마탑에서 얼마나 안 기어나온 것인지 알만한 대목이군. 바퀴벌레 같은 것."
"뭐가 죽어...?"
튜르는 약간 웃음을 잃었고,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자신이 들은 게 사실인가 싶어서.
허나 라크는 사실만을 언급했다.
"죽었다. 네놈이 봉인해놓은 저 기사에게."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 기사의 강함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한들 귀왕을 죽일 정도는 아니다.
귀왕을 죽이고 싶다면 세포 한 조각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사멸시켜야만 가능할 터.
그리고 저 기사에게 그런 재주가 없어 보였다.
한데 어떻게…?
톡톡.
"무력만이 기사의 힘이 아니지."
"??"
라크는 머리를 두들겼다.
그래, 분명 기사에게 있어 본신의 무력은 중요하다.
검을 잘 쓰고, 싸우기도 잘 싸워야 하며, 인간 병기와 같은 면모를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허나 기사의 근본은 군인이며, 전장을 지휘하는 지휘관급 계급일지니.
그렇기에 지병이 있어 전투력은 전무하지만, 책략만으로 기사가 된 이들도 가끔은 있을 따름.
그리고, 이 말이 의미하는 건 기사라고 칭하는 자는 머리도 어느 정도 굴리는 자란 의미였다.
"저 무뢰배가 생긴 것은 저래도 영악한 놈이지."
귀왕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한 것만 해도 최대한 자신이 유리한 환경에서 전투를 치르며, 지원군이 올 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사수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맙다, 끝까지 오만해줘서. 끝까지 우리를 무시해줘서."
"…?"
라크는 처음으로 튜르에게 경멸이 아닌 고마움을 표현했고, 튜르는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잠시 고심하려 했으나-.
[-꺄하하!]
"...."
…그는 곧 왜 라크는 고마움을 표현했는지 알고 말았다.
화라락.
오로라를 흘리고 다니는….
어떠한 소녀가 어여쁜 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튜르는 눈을 부릅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꺄하하!]
'요정'이 웃고 있었다.
"-무뢰배는 이 작전을 성동격서(聲東擊西)라고 하더군."
라크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그려졌다.
봉인되어 있던 '봄의 요정'이 강림했기에.
'그들'이 해낸 것이다.
*
*
*
파스스스슥….
"저, 저 죽을 것 같아요…."
"...."
"고, 공자님? 도, 돌아가신 거 아니죠?"
"...안 죽었다."
얼마나 치열한 격전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듯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2남1녀와 골렘을 비롯한 쓰러진 마법사들이 보였다.
허나 여전히 서있는 건 기사의 제자들이었고, 패배한 것은 마법사들이었으니.
마탑의 중추가 그렇게 파괴되었고, 세 사람은 손을 들 힘도 없다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땀과 피, 먼지로 가득 덮인 그들은 찝찝함과 아픔을 느꼈으나….
"교관님한테 혼날 일은 없겠네요."
"그건 그렇군."
"헤헤, 칭찬해주시려나?"
만족감 섞인 표정으로 시원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땅에는 다시금 봄이 찾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