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유사 야만인들
후우웅.
영주성의 옥상에서 출발한 그리핀이 대장간에 내려섰다.
까앙, 까앙!
늘 비슷한 소리와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대장간에서 에르미스를 찾았다.
"난쟁이, 가자!"
"아니,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어딜 가냐?"
"펫 잡으러 가야지."
"아이구! 그놈의 펫! 이제 돈도 많이 벌 텐데 그냥 영약을 돈 주고 사라."
"음?"
철두가 손뼉을 쳤다.
"오!"
그 방법이 있었구만.
"...부자들이 더하군. 더해."
"후후, 너도 10%나 먹지 않나?"
"난 장비 강화에 써야지."
"장비 강화에도 마석이 쓰이나?"
"당연한 말 아닌가? 거기에 마법 부여까지 하면 더 많은 마석이 쓰이지."
"오호."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다음에 드워프 주술사도 하나 잡아 와야겠군."
"...자네 머리를 한번 열어보고 싶군."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납치와 노역을 저리 쉽게 입에 담는가?
"후후후, 안 갈 거면 놔두고 간다."
"끙, 가야지."
에르미스가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때 대장간 안에서 장소철이 헐레벌떡 튀어나왔다.
"영주님!"
"오, 소철이."
"이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뭔가?"
"몸에 맞게 새로 장비들을 짜봤습니다."
가죽으로 된 허리벨트와 대거가 주렁주렁 꽂힌 대거벨트다.
"후후, 다시 몸이 커지면 맞추면 되는데 뭐 하러 만들었나?"
"그때가 되면 또 새로 맞춰야지요. 차보십시오."
철두는 장소철의 도움을 받아 허리벨트를 두르고 대거 벨트를 X자로 교차해 어깨에 둘러메 다시 허리벨트의 앞뒤에 연결했다.
대거벨트가 젖꼭지를 가려 조금 간지러운 느낌이었으나 딱 안성맞춤이다.
멜빵 같은 대거벨트에 꽂힌 투척 단검이 12자루.
철두는 내친김에 인벤토리를 무기고 삼아 넣어두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보르탱 남작의 기사를 처치하고 받은 롱소드를 허리춤에 차고, 주머니에 긴급하게 쓰일 투척용 도끼 네 자루도 걸었다.
새벽 어스름과 할배검은 투 핸디드 소드라 차고 다니려면 등 뒤에 메야 했기에 번거로워 인벤토리에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긴급한 상황에서는 벨트에 차고 있나, 인벤토리에 넣어두나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익숙함의 영역인지라, 다시 벨트를 차고 검을 달고 나니 묵직한 무게감이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몸이 얄쌍해져 안 그래도 신경 쓰였는데 잘됐군. 어때? 좀 위협적으로 보이는가?"
"...변태처럼 보이네만."
에르미스는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몸이 얄쌍해? 어디가?
날씬은커녕, 탄탄한 육체였다.
미궁에서 보았을 때가 너무 근육 돼지였던 것일 뿐, 오히려 지금 모습이 더 군더더기 없는 탄탄한 몸매다.
'신체의 재구성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몸을 갖춰 주거늘....'
어째서 자칭 멸치라 칭하며 폭식을 해대는지 모를 일이다.
"후후, 위협적으로 보인단 소리군."
"...."
말을 말자.
바지만 달랑 입고, 웃통을 까고 가죽 벨트 두 줄만 차고 다니는 바바리안을 보고 사람들은 뭐라 생각할까?
아. 저놈 참 바바리안 같구나, 할까?
바바리안 타투도 없는....
"음? 헌데 넌 어째서 타투가 없나?"
그러고 보니 의문이다.
에르미스가 강철두를 처음에 인간으로 생각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바바리안 전사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바바리안 타투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전사로서의 표식이니까.
"아픈 곳을 찌르는군. 타기나 해라."
철두가 훌쩍 오식이 등 뒤에 올라탔고, 에르미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말 타고 가세."
"말 타고 가기엔 멀다. 어서 타라."
"젠장."
마음 같아서는 혼자 가라고 하고 싶지만, 연락책으로서의 임무를 저버릴 수는 없다.
휘이이잉.
북쪽을 향해 나아가길 얼마 만에 맵이 바뀌었다.
N344.
본래 나트롱 남작의 영역이었지만, 이제 그의 영지는 북쪽에 한정될 뿐이다. 하늘산 남부는 아이언헤드령.
그 영지 위를 날아가는데 에르미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으으, 근데 마석 창고는 안 짓나?"
"음? 따로 창고를 지어야 하나?"
"당연한 것 아닌가? 마석을 그냥 창고에 보관할 셈이었나?"
"그럼?"
"허! 마석은 그대로 두면 에너지가 소모되네. 아주 미량이긴 하지만 장기 보관하면 무시 못 할 양이야."
"음, 진짜 배터리 같은 놈이군."
"모아 둘수록 소실이 줄어드니, 마석끼리는 따로 보관해 모아 두는 게 상식일세."
"그걸 왜 이제 말하나?"
"끄응...."
벌써 맵을 지나버렸다.
다시 돌아가서 말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급한 일은 아니다.
"후후, 갔다 와서 해도 된다."
"그렇지. 뭐, 광산이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뚝딱 개발되는 건 아니니 말일세."
"빨리 갔다 오자."
"어어어?"
후우우웅.
오식이가 급히 속도를 올렸고, 에르미스가 비명질렀다.
"으으으. 천천히 가세, 천천히!"
"후후후."
쭉 이어지던 날갯짓은 오식이의 체력이 0으로 수렴하며 곧 끝났다.
후우웅. 털석!
"우웨에에."
에르미스가 멀미하는 사이, 철두는 소나따를 꺼내 탔다.
탈것을 번갈아 가며 이동하려는 철두의 의도에 에르미스가 기함했다.
"으으으, 쉬엄쉬엄 가도 되는 일 아닌가?"
"후후, 빨리할 수 있는데 굳이 느리게 할 필요도 없지."
"으으, 바바리안은 다 너처럼 성격이 급한가?"
"음?"
철두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라,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 보았던 부족의 전사들이나 주술사, 늙은이들은 어딘가 느긋한 면이 더 많았다.
"후후, 이건 한국인 종특이다."
"혼란하다 혼란해."
에르미스는 혀를 차면서도 혼종 바바리안의 뜻에 따라 탈것을 소환했다.
파팟.
"그건 뭐냐?"
"땅지네다."
"신기하게 생겼군."
"이래 봬도 빠르니 걱정 마라."
에르미스가 소환한 땅지네는 거대한 덩치의 지네였는데 다리가 무수히 많이 달려 있었다.
등에는 길쭉한 몸에 맞게 긴 안장이 달려 있었는데 좌석이 다섯 개나 되어 꼭 롤러코스터 좌석처럼 보였다.
"가자!"
"갑세!"
소나따가 투레질하며 출발했고, 땅지네도 수십 쌍의 발을 놀리며 부지런히 나아갔다.
"오, 꽤 빠르군?"
"빠르기만 할까? 흔들림도 없지."
말 그대로 수십 쌍의 발이 움직이는 땅지네의 등 위는 흔들림 없는 편안함을 제공해, 과연 멀미 드워프에게 딱 들어맞는 탈것이었다.
"헌데 이 길은 흔치 않은 직선로구만."
"후후, 내가 만든 거다."
"음? 자네가?"
"그래."
본디 신서울과 한양까지의 통행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포탈이 닫히고 한양과 신서울이 독자노선을 타기 시작하며 폐기된 프로젝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김진태는 아이언헤드령 옆의 이동 마법진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대도로를 계획했다. 이 도로도 그중의 하나다.
뉴아 요새에서 쭉 북쪽으로 나아가면 나오는 '노론 마을'. 거기서 북으로 향하면 나트롱 백작령이고, 동으로 향하면 아이언헤드령의 20개 마을이 나온다.
노론 마을까지 합쳐 21개의 마을이 아이언헤드령에 속하게 된바, 가도도 새롭게 정비되었다.
노론 마을을 두르고 있던 목책을 석벽으로 바꾸며 요새화하고, 남부 마을 중심 마을이랄 수 있는 벨로타 마을도 더욱 규모를 키웠다.
노론 마을에서 벨로타 마을까지 일직선의 길이 놓여 있고, 거기서 다시 부속 마을 격인 19개 마을로 향하는 가도가 정비되어 있었다.
N344 맵의 아이언헤드령은 노론, 벨로타 2개의 거점 마을과 19개의 작은 농경 마을로 이뤄졌다.
"허, 길이란 것이 마차나 다니면 족한 것을,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이게 과해?"
"하루에 다녀봐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닌다고, 길마다 이리 돌을 깔아 두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일세. 낭비야, 낭비."
지금 말을 달리는 길은 비가 와도 진창이 되지 않는 돌로 이뤄진 도로다.
지구에서 나고 자란 철두의 상식에서는 아스팔트 도로에 비해 조잡한 블록 도로이지만 에르미스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었다.
"과하지 않다.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쉽게 오고 갈 게 아니냐?"
"쯧, 농사짓는 마을 사람들끼리 교류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으려고? 추수기 때 식량 나르는 게 전부일 텐데 말이야."
"후후후."
철두는 그저 웃었다.
마을을 발전시키고 규모를 키우기 위해선 일단 인프라가 있어야 하고, 교통망 건설은 가장 기초적인 터 닦기일진대, 이건 어디까지나 지구인의 상식일 뿐이다.
"우리 진태가 알아서 다 한다."
"그 젊은 시종장 말인가? 그대의 친우라지?"
"맞다."
"흐흐, 자네 눈빛을 보니 단단히 신뢰하는 모양이군."
"물론. 진태는 내게 형제와 같다."
"흐으, 내게도 그런 형제가 있었지."
"죽었나?"
"거참, 감성이 메마른 바바리안이구만."
에르미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살아있다네. 남보다 못한 이들이라 그렇지."
"후후, 콩가루 집안이군."
"뭐? 하하하하하!"
이제 제법 면전에 퍼부어주는 직설적인 바바리안의 화법에 익숙해졌다 생각했건만....
"크크크, 맞아. 콩가루지."
에르미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웃었다.
"후, 자네 덕에 조금 울화가 풀리는군."
"후후후."
"궁금하지는 않은가?"
"뭐가?"
"우리 집안 형제들 사이가 왜 틀어졌는지 말이야."
"남의 집 집안사 따위 관심 없다."
"크크큭, 하하하하! 걸물이야. 자네는 정말 걸물일세!"
입이 뚫린 대로 말하는 이란 바로 강철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이 상처가 될 법도 하나, 가식 없고 악의 없음을 알기에 외려 묘한 위안이 된다.
"흐흐, 그럼 이 길 끝엔 마을인가?"
"아니다."
"그럼?"
"후후, 경계 지역 호수까지 이어진다."
그 호수 너머로 가면 D772 맵이다.
"거긴 사막이기도 하고, 내 영지도 아니라 길이 없다. 또 날아가야 하니 단단히 마음먹어라."
"으으으음."
또 그리핀 위에 타야 한다는 생각이 얼굴이 어두워지는 에르미스였다.
*
신서울 맵.
C442의 맵은 N4420으로 바뀌었다.
바뀐 것은 숫자 하나와 맵의 첫 글자 하나였지만, 변화의 여파는 엄청났다.
휘이이이잉.
여태 C넘버링 맵에는 없었던 사계절이 찾아왔으며, 완연한 가을을 지나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여기저기서 불어닥쳤다.
노바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겨울.
N4420의 신서울과 여러 부속 마을 중에, 7번 개척마을은 보호의 나무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농업보다는 여행객과 주변 사냥을 위한 사냥꾼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마을이었다.
자연히 농부의 집보다 주막이 더 많고, 무기를 손질해주는 대장간도 몇 개 있었고, 이것저것 보급품이 잡화 따위를 파는 상점들도 많았다.
그런 7번 개척마을에 수십 일 전부터 주막 3개를 통째로 빌려 쓰고 있는 단체가 있었다. 다름 아닌 구정욱의 공격대 210인이다.
"흐흐흐, 다 됐다."
구정욱은 널따란 주막 마당에 모인 대원들을 자랑스런 눈빛으로 훑었다. 모두 누구를 따라 했는지 웃통을 벗어젖힌 모습이었는데, 초겨울의 찬바람도 그들을 떨게 만들지 못했다.
"드디어 우리 부대는 거인의 부대로 거듭났다."
"우오오오오!"
"이제 복귀다!"
"우오오오!"
웃통 깐 전사 210명이 환호했다.
긴 여정 끝에 드디어 210명 전원이 오우거의 특성석을 2개씩.
'거인의 힘'과 '거인의 표피' 2개의 특성을 개화 완료했다.
"이제 돌아가자!"
"우오오오!"
누군가를 과하게 동경한 사내와 그를 따르는 대원들로 이뤄진 거인 부대가 복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231화 신서울의 대립
강철두는 N344 맵의 북서쪽 경계, 호수에서부터 그리핀을 타고 날아올라 사막맵을 지나쳤다.
중간에 한 번 내려 체력을 회복하고는 다시 날아 나아가니 곧 신서울 맵에 진입했다.
"우웁, 저기 호수가 있군."
"후후, 저기가 용 호수다. 용 각질을 얻은 곳이지."
사막 맵을 사이에 두고 신서울과 아이언헤드령은 서로 호수가 하나씩 이정표처럼 자리했다.
철두는 용 호수에 그리핀을 내렸다.
초소 같은 것에 병력이 주둔 중이었는데, 그리핀을 처음 보는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다행히 그리핀 위에 사람이 타고 있어, 몬스터로 여기고 당장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여기는 신서울 구역입니다.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강철두다."
"어어? 강철두 님?"
노바에 자리 잡은 고인물 중에 강철두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본 적이 없어도 그 이름은 다들 들어서 알음알음 알고 있다.
"한양의 강철두 님이 맞습니까?"
정확히는 그 한양도 아이언헤드령의 소속이지만, 철두는 구태여 따져 묻지 않았다.
"맞다. 너는 누구냐?"
"저는 노바군 3군단 소속 박제하 중위입니다."
"3군단?"
"넵."
철두가 알기로 노바군은 신서울의 본부와 한양의 1군단이 전부다.
"아! 2군단과 3군단이 신설되었습니다. 3군단은 남동부의 전선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전선? 어디와?"
"아미르 왕국과의 국경 전선입니다."
"흐음."
철두가 턱을 쓰다듬었다.
지리상 맞긴 했다.
아이언헤드도 동쪽에 녀석들과 국경이 형성되어있는데, 그 영토가 북쪽까지 뻗어 있어 신서울에도 닿아있는 모양이다.
"3군단장이 누구냐?"
"김춘배 사령관입니다."
"음? 누구?"
"김춘배 중장님입니다."
"허, 마적단 김춘배?"
"네. 어어, 옛날에 그런 전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는 이름에 철두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복귀한 것도 놀라운데 별을 3개나 단 장군이 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좋아. 그럼 공격대의 위치를 알고 있나?"
"공격대요?"
"구정욱의 부대 말이야."
"아! 7번 개척마을에 주둔 중인 것으로 압니다."
구정욱의 공격대는 몇 달 전에 신서울에 온 뒤로 계속 7번 마을에 주둔 중이었다. 위험한 오우거 사냥을 반복해주며, 보호의 나무 주변 숲의 몬스터 씨를 말려주니 신서울 입장에서는 이로움이 많았다.
"그래. 고맙다."
"아, 아닙니다. 그보다 한양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무슨 상황?"
"나트롱 백작과의 전선이 순조롭다고 들었습니다."
"종전되었다."
"아!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박제하 중위는 눈치가 빨랐다.
이겼으니까 그 대장인 강철두가 여기 와 있겠지.
"신서울은 어떠냐?"
"어.... 잘 모르겠습니다."
어딘가 곤혹스러워하는 듯한 그를 보며 철두가 피식 웃었다.
"임운진이 대장인가?"
"아! 그렇습니다."
신서울의 권력은 아직 노바군 참모총장 임운진이 가진 모양이다.
힘의 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이곳 노바에서 고인물들의 충성을 받아낼 수 있을지는 오로지 그의 능력에 달린 것이었는데.
직책만 높은 초보 노비스가 아직도 그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수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신서울의 인재를 빼 가는 일은 임운진과 잘 이야기해보면 될 것 같고, 일단 집 나간 부하 녀석을 찾으러 가야겠다.
"그럼 수고하게."
"넵. 충성."
습관처럼 경례했으나 박제하 중위는 철두가 훌쩍 떠나가자 이게 맞나 싶었다. 그의 옆에 있던 하사도 궁금해 물었다.
"강철두면 우리 노바군하고는 상관없지 않나요?"
"어.... 아마?"
박제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방금은 산에서 호랑이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러내지 않아도 위세가 대단했고 절로 내뿜어지는 위압감에 잔뜩 가슴 졸였던 그였다.
"그러네. 상관도 아니네...."
그가 알기로 아이언헤드 용병대는 노바군과 협력하는 관계일 뿐, 군에 편입된 단체는 아니다.
포탈의 단절로, 신서울과 한양의 소식이 끊어졌다.
최신 소식이라고 할 만한 것도 구정욱의 공격대가 신서울에 등장하며 전해진 몇 가지 소식들뿐이었으니....
"경계나 잘 서자고."
"넵."
용 호수 인근은 D722 지역과 접해있다.
사막 맵은 딱히 영지로 삼은 세력이 없어 이곳 초소는 후방에 속했다.
국지전이 벌어지는 국경은 동쪽으로 조금 더 가야 나온다. 하지만 아미르 왕국군이 언제든 사막 맵을 우회해 들이닥칠 수도 있으니 경계를 게을리할 수가 없다.
*
구정욱이 이끄는 공격대는 거인의 부대로 거듭났다.
거인의 힘과 거인의 표피.
피부는 오우거처럼 튼튼해 어지간한 활은 박히지도 않는 수준이라 무거운 갑옷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최신 강철두 패션을 따라 하기 위해 웃통을 아예 벗고 다니는 자들이 부지기수라 야만인 부대를 보는 듯했다.
그들은 가벼워진 본인의 갑옷 무게만큼 마갑에 투자했는데, 튼튼하고 두꺼운 마갑을 두른 돌격마들은 이제 어지간한 화살 공격이나 창진은 그냥 돌파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대장, 철이 부족하다는뎁쇼."
"맞습니다. 대장. 그냥 돌아가서 맞추면 되는 거 아니오?"
"흐흐, 여기서 맞춰 가야 중기병 돌파 전술도 연습할 게 아니냐?"
구정욱은 공격대의 이름에 걸맞게, 부대를 중갑 기병대로 변경하기 위해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유격대가 거의 경기병 전술에 능한 놈들이라 그들과는 차별을 두고 싶었다.
"복귀하는 날 딱 보여줘야 할 거 아니냐!"
아이언헤드성에서 마갑을 맞춰도 되지만, 그것보다 아예 번쩍번쩍하게 변한 중기병대를 이끌고 복귀하면 더욱 멋이 나지 않겠는가?
더욱이 마갑에는 엄청난 양의 철이 들어가니, 괜히 성의 자원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이곳 신서울에서 맞춰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주화라면 그간 무한 사냥이나 다름없는 강행군으로 인해 쌓이고 쌓였으니 말이다.
"별수 없군. 이참에 신서울에 가서 무장을 한다."
"오! 복귀전에 고향 구경이군요."
구정욱은 본디 신서울 7공격대 소령 출신.
그를 따라 전역하고 따른 이들이 현재의 공격대에 많이 속해있어 7공격대에게 신서울은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서울의 공방 거리는 유명했고, 그중에서도 영호 공방처럼 유명하고 실력 좋은 곳도 있으니, 이왕 외유가 길어진 김에, 한 보름 푹 머무르며 무장을 마치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그러자! 모두 신서울로 갈 채비를 해라."
7번 개척마을에도 대장간이 있긴 하지만 생산보다는 수리가 주력이라, 아무리 쇠를 구해와도 210벌이나 되는 마갑을 만들어내기에는 대장장이 인력이 달렸다.
막 채비를 마치고 출발하려는데 공교롭게도 하늘에서 그리핀 하나가 내려왔다.
"엇?"
"저거 그리핀 아닙니까?"
"대장! 영주님이 오는 것 같은뎁쇼?"
"헉, 보고 없이 너무 오래 있어서 혼나는 거 아닙니까?"
"아, 조졌네. 영주님 빡 돌면 뒈지는데...."
오우거의 특성석을 섭취하며 그 성격도 오우거와 같이 변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약한 적들 앞에서는 패왕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지만, 강한 적을 마주하면 맞서 싸우기보다 도망치기를 즐기는 오우거와 같다.
강약약강의 전형!
공격대 전원은 최상위 포식자 강철두의 등장에 모두가 찔끔해 벌벌 떨었다. 그들은 오로지 구정욱만 쳐다보고 있었다.
구정욱은 오우거 특성석 2개를 먹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무려 흑색부를 이용해 특성석 2개를 추가로 흡수했다.
지난날 강철두가 그랬던 것처럼 거인의 힘과 거인의 표피를 거인의 위상과 거인의 가호로 진화시킨 그였다.
하지만 구정욱은 강철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몸이 떨렸다. 이것은 DNA에 각인된 것과 같은 본능이었다.
생존을 위한 오우거의 본능이 이러할까?
숲을 호령하는 오우거를 능가하는 괴물의 출현.
'시벌, 아직도 이만한 격차가 난다고?'
구정욱은 본능적인 두려움과 복종심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구 씨!"
"여, 영주님을 뵙습니다."
"왜 이렇게 안 돌아오냐?"
쳇, 역시 질책하기 위함인가?
털썩.
구정욱은 개기지 않았다.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는 넙죽 엎드렸다.
대장의 행동에 공격대 전원이 도미노처럼 바닥에 엎드렸다.
오우거의 특성석을 먹지 않았을 때와 달리, 먹고 나서의 이들은 포식자의 감을 갖추게 되었다.
짐승의 감각만큼이나 예민한 적아의 수준 파악이 그들을 마치 호랑이 앞의 들개로 만들었다.
숙일 때 시원하게 숙여야 한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죄송합니다. 애들 전부 특성석 먹이려다 보니 욕심이 과했습니다."
철두가 슬쩍 웃었다.
"다 먹였냐?"
"그렇습니다."
"후후, 좋아."
칭찬하셨어!
엎드려있는 구정욱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너, 무기술 중에 가장 높은 게 얼마냐?"
"검술이 레벨 2입니다."
"베테랑이네."
레벨 3인 달인 수준에도 못 미친다.
철두의 얼굴에 언뜻 실망이 스쳤다.
"뭐, 어쨌든 좋아. 다 먹였으면 볼일 다 본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나랑 일 하나 하자."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몬스터 한 마리 길들여야 하고, 여기 온 김에 연구소장이 연구원들 좀 데려다 달라는데 말이야...."
철두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구정욱은 쾌재를 불렀다. 벌떡 일어선 그가 가슴을 탕탕 쳤다.
"제가 신서울에 가서 인원을 모집하겠습니다."
"어? 그럴래? 그럼 나 몬스터 하나만 잡고 바로 신서울로 갈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근데 청이 있사온데...."
"어, 뭔데?"
구정욱이 조심스럽게 부대 개편에 대해 논했다.
"...해서 마갑이 많이 필요합니다. 공방 거리에 대장간이 많으니 신서울에서 마련하는 게 시일도 단축시키고 좋을 듯하여...."
"어, 그렇게 해."
"헙! 감사합니다. 아울러 신병 좀 모집해도 되겠습니까?"
"신병?"
"신서울에 아직도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구와도 단절됐으니, 아예 아이언헤드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 하는 베테랑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
구정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신서울 지금 개판입니다."
철두의 귀가 솔깃해졌다.
"어떻게?"
"흐흐, 임운진 총장이 아직 대가리긴 한데 골때립니다."
신서울의 인구가 6만 7천이다.
집계되지 않은 주변 지역의 모험가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7만 명에 육박하는데....
"거기에 노바군 신병이 1만 명이 넘고, 그냥 유입된 시민들이 4만이 넘습니다."
한양의 경우처럼 선거를 위해 들어온 갓 노비스가 된 팔팔한 뉴비가 무려 4만 명이다.
"흐흐, 그 밥버러지들 대장이 인구수 믿고 대통령 선거하자고 날뛰고 있습니다."
"호, 누가?"
"야당 대표하던 이형택이라고 있습니다. 한양시장 선거 나온다던 이기택이 형 있잖습니까?"
"오!"
철두도 들어본 인물이다.
"흐흐, 아무튼 임운진 총장도 그놈 싹 모가지 쳐버리고 싶은데. 아, 또 그 양반이 어떻게 했는지 김춘배를 끌어들였습니다."
"오!"
"아무튼 지금 신서울이 반으로 쪼개져서 대립하는 분위긴데, 이거 잘 파고들면 이득 볼 게 있지 않겠습니까?"
솔깃한 이야기다.
헌데, 어째 말하는 구정욱의 뉘앙스와 능글맞은 웃음이 삥 뜯는 양아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우리가 그냥 접수할까요? 영주님. 흐흐."
"...."
과묵하고 충실하던 군인은 어찌하여 이리도 변했는가.
232화 리더의 자격
신서울의 관청.
사또가 머무르며 정무를 보던 그곳은 현재 노바군 본부로 기능하고 있었다.
"젠장할 새끼!"
노바군 참모총장 임운진은 이를 갈았다.
관청 밖에 운집한 시위꾼들의 함성 소리가 담을 넘어 임운진의 귀에까지 들렸다.
[군부독재 타도!]
[공명정대한 보궐선거 즉시 시행하라!]
[신서울 시장 선거 즉각 시행하라!]
하루가 멀다 하고 관청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시위하고 있었다.
강제로 해산도 해봤지만, 오히려 들불처럼 더 시위가 번질 뿐이니 이제는 그저 내버려 두는 중이다.
"후, 망할 새끼."
이형택이 문제다.
야당 의원 이형택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인답게 세를 이용할 줄 알았다.
지금 신서울의 파벌은 크게 보면 둘이요, 더 세세하게 보면 다시 거기서 갈라져 다섯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임운진이 참모총장으로 있는 군단 세력과 이형택이 구심점이 된 시민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
군단 세력은 또 여기서 본디 신서울에 자리 잡고 있던 고참병들과 새롭게 유입된 신병들로 그 계파가 갈렸다.
고참병은 그 수가 적었으나 가진 무력이 월등했고, 신병은 대부분 초보 노비스였으나 그 수가 1만이 넘었다.
지금 노바군 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임운진은 노바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초보 노비스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 직책은 가장 높은바, 그가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를 따르는 장교들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도 모두 초보 노비스였다.
고참병들은 모두 노바군 소속의 군인이기는 하나, 부임지가 노바고 이곳에서 생활한 것이 적게는 2년에서 많게는 전부 10년이 넘다 보니 사고방식이 보통의 군인들과는 다른 게 있었다.
'강한 놈이 진리다.'
국방부가 철저히 계급에 의해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면, 노바는 강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판이다.
지난날 이은영이 고작 소령 계급이었지만 소장인 박준필에게도 대거리하고, 안하무인으로 명령을 어기는 일이 많아도 그러려니 하는 풍토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임운진은 부임 첫날부터 노바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을 국방부 산하 노바군의 군인으로서 대했으니....
갓 부임한 신임소위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원사나 상사를 막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부터 삐걱거리던 관계가 최근까지도 수습되지 않고 있었으니, 임운진 참모총장은 노바군을 온전히 장악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만 따르고 있을 뿐, 어떤 계기만 있다면 틀어질 요인이 충분했다.
군단 세력이 고인물과 초보 노비스로 그 세력이 어긋나 있다면, 시민 세력은 또 다르다.
파주 포탈의 특성상 수도권에 인접해 있어 포탈 개방 이후 가장 많은 초보 노비스들이 넘어왔는데, 그 분포가 다양했다.
그간 엉덩이 무겁게 뭉그적거리던 각계분야의 교수나, 엘리트 학자들, 연구원들, 정치인들, 기업가, 기술자 등 다양한 기득권 계층이 있는가 하면, 그저 선거를 위해 몰려온 시민들도 다수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많은 지지자들이 넘어왔는데, 포탈은 너무나 예고 없이 사라졌던지라, 그날 노바에 넘어와 있었던 의원은 야당 의원 세 명이 전부였다.
야당 대표 이기택은 시민 세력을 빠르게 하나로 뭉치게 했다.
위기 상황에 여당 야당 따질 때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군부독재 정부가 들어설 판이다.
총이 존재하는 지구와 같이 모두가 평등하게 한 발에 목숨을 잃는 세상이 아니다.
개인의 힘에 차등이 있는 세상에서, 공평한 투표권을 갖는 민주주의는 비정상적인 정치개념이다.
아직.
아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현대의 의식을 벗어나지 않은 지금.
바로 지금만이 기회였으니.
"시장 선거! 속개하라!"
행정부를 재건하고 시민을 대표하는 자가 권력을 잡을 유일한 골든 타임인 셈이다.
이기택의 의견에 동조하며 지지하는 시민 세력이 4만 명이다.
신서울 인구가 6만 7천이니, 과반이 넘는 인구를 생각했을 때, 선거가 치러지면 당선될 자가 누군지는 뻔했다.
시민파의 유일한 문제는 구성원 대부분이 초보 노비스여서 인구수를 제하면 가진바 무력이 일천하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등장한 것이 전직 마적단 김춘배 일당이었다. 이형택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들을 시민 세력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시민파도 자세히 보면 두 세력이다.
어디서 세력을 불려왔는지 300명의 기마대와 함께 출현한 김춘배와 이기택의 지지 세력이 그 둘이다.
그리고 남은 한 세력이 있었으니.
신서울에 오래도록 터전을 잡고 살아온 민간인들이다.
이들은 지구와 포탈로 자유로이 통행이 가능할 때에도 노바에 터전을 이루고 살던 이들이다.
대장장이, 목수, 요리사 등의 장사꾼들과 모험가 사냥꾼 농부, 용병 등 다양한 직업군들이 포함되어있었다.
소속이 군인이 아닐 뿐이지 가진바 무력도 무시 못 할 수준의 고인물들인지라 군단파도 시민파도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이기는 놈이 우리 편이지.'
적자생존의 노바에서 강력함은 그 자체로 훌륭한 리더십이 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선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으며, 군단파도 휘어잡지 못하는 임운진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저 사태를 관망하며 지켜보기만 하니 이들은 사실상 중도다. 누가 권력을 잡든지 하등 상관없고 그저 그들의 생업이 더 중한 이들이다.
누가 되든 신서울만 잘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노바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야 하고 말이다.
신서울은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군단파와 시민파가 대립하고 있으나, 자세히 보면 중도파의 관망 속에서 시민파도 둘로, 군단파도 둘로 갈등하고 있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단순해서, 임운진도 이형택도 갓 노바에 발을 들인 초보 노비스, 노바 세계에서는 아주 평범한 범인이라는 것이 원인이다.
리더로서 나서기엔 너무나 연약한 존재.
노바에서의 권력은 직책이 아닌 힘에 기반하기에, 이들의 자리는 위태로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실제로 제일 강자인 시민파의 김춘배와 군단파의 제1 특임대 김도진 대령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
공격대가 신서울로 떠났다.
"너는 왜 안 가냐?"
"흐흐, 영주님 모셔야죠."
"좁은데."
"발톱에 매달려서라도 따르겠습니다."
철두는 하는 수 없이 구정욱을 그리핀 위에 태웠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봐라."
"아, 신서울이요?"
"그래. 3군단장이 김춘배던데?"
"아, 그거요."
구정욱은 돌아가는 상황이 재밌는지 맛깔나게 이야기를 풀었다.
"임운진도 김도진 특임대장한테 인망이 모이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더라고요."
그 와중에 외부의 적이 출현했다.
신서울 맵의 북쪽에 맞닿은 J189 지역에 렙틸인들이 꾸준히 증가하더니 수시로 N4220 맵을 약탈하러 오는바, 2군단을 신설해 북쪽 국경을 맡겨버렸다.
"그럼 3군단은?"
"아, 그러고 얼마 안 가서 이번에는 동남쪽 맵에서 아미르 왕국군이 출몰하지 뭡니까? 이형택이 이때다 싶어서 김춘배를 중용해야 하니 마니 지랄을 해대는데, 흐흐."
결국 김춘배도 군으로 정식 편입시켜 3군단을 조직해 동남쪽 국경을 맡겨버렸다.
"아 구실은 힘 맞추기인데, 제가 볼 땐 이기택도 김춘배가 부담스러운 거거든요?"
"흐흐, 이거 능력 있는 부하를 그냥 국경에 짬 시킨 거구만."
"아, 거 드워프 양반이 제대로 맞췄네."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받아쳐 주는 에르미스의 대꾸에 구정욱이 히죽 웃었다.
"둘 다 고인물들 끌어안으려고 했는데, 슬슬 본인보다 인기 많아지니 외부로 쳐내버리고 병신들끼리 승부 보자는 거죠, 뭐."
"...구 씨. 많이 변했군."
"흐흐, 제가요?"
"상관이지 않았나?"
"제 상관은 영주님이시죠. 흐흐."
"...."
"아, 그리고 임운진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계급만 믿고 설치는 게 이리될 줄 알았습니다."
제1 특임대장 김도진은 2군 사령관이 되었고, 마적단 두목 김춘배는 3군 사령관이 되었다.
편제상 한양 사또 박준필이 1군단장이니, 구색은 맞았다.
지금 신서울은 알맹이 없이 쭉정이끼리 서로 왕좌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뭐가?"
"아, 고인물 베테랑들은 죄다 2군 3군에 배속되어 국경 지키고 있고, 신서울을 지키고 선 군인들이라 봐야 죄다 초보 노비스인데,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습니다."
"...."
"흐흐, 민간인들도 어디 신서울에만 몰려 삽니까? 새로 생긴 개척마을이 한두 개가 아니고, 장사하랴 사냥하랴 떠돌아다니는 이들도 많아서, 끽해야 5천 될까 말까입니다."
"...."
"그리고 솔까, 그들이야 어차피 난리가 나도 나서지 않을 거니 적으로 칠 것도 없지요. 아니, 영주님이 신서울 잡수시면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할걸요?"
"구 씨."
"예에."
"쯧쯧."
철두는 혀를 찼다.
"굳이 신서울을 탐낼 필요가 뭐가 있냐?"
"예?"
철두는 가만히 생각했다.
신서울에 그가 탐낼 자원이 뭐가 있을까?
이미 이룩한 도시?
지키기 힘든 짐일 뿐이다.
이동 마법진이라도 근처에 있으면 모를까, 아이언헤드 성에서 오고 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영지다.
신서울맵의 농경지?
매력적이지 않다. 개간하지 않은 땅은 아이언헤드령에도 많다.
괜히 성이나, 땅을 탐내 지켜내야 할 영토를 늘리는 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신서울보다는 차라리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바로 근처나 다름없는 마이클시티나 사쿠라시티가 더 나을 터다.
"내가 탐나는 건 인재뿐이다."
"으음, 아까 말한 연구원들 말이군요."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필요하면 얻어서 가면 되지. 굳이 점령할 필요가 없다."
점령전 따위는 아이언헤드령의 정책과 맞지 않다.
필요하면 약탈할 뿐이다.
어쩌다 보니 얻어버린 N344 지역의 21개 마을과 제국민들만으로도 군식구로서는 차고 넘친다.
부족민이 많을수록 많이 먹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바쁘게 곡식을 추수해야 하니 번거로울 따름이다.
"괜히 남의 땅에 욕심내지 말고 인재나 모아가자."
"넵! 영주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구정욱이 냉큼 견해를 바꿨다.
신서울 따위야 어찌 되든 알게 뭔가.
휘이이잉.
맵이 바뀌며 갑작스럽게 후끈한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어우."
"흐으으."
갑작스럽게 훅 낮아진 기온에 에르미스와 구정욱은 순간 닭살이 쭉 돋아났다. 하지만 철두는 냉기 내성 탓인지 조금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쌀쌀한 정도?
철두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방한옷을 꺼내 입는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후후후."
하남자들이군.
이제 아울베어를 찾아볼까?
그리핀이 온통 새하얀 눈밭 위를 날았다. 철두의 시선은 저 멀리 보이는 설산에 가 있었다.
233화 불난 집
집채만 한 덩치는 분명 곰을 닮아 있었으나, 그 머리는 부엉이의 그것과 같았다.
"부우우우!"
괴상한 소리를 내는 부리를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뻐어어억!
이놈 대가리 튼튼한 거 봐라?
"후후."
마음에 든다.
"그만 항복해라!"
"부우우웅!"
기개가 남다른 놈이군.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 우승이라도 노려볼 수 있지.
뻐억, 뻐억!
철두는 곰 같은 녀석의 사지를 분질러버리고는 사정없이 뺨따구를 갈기기 시작했다.
뻑뻑!
"후후, 항복할 때까지다!"
"부웨에에에!"
아울베어가 울부짖었으나 철두는 멈추지 않았다.
"처, 철두. 그러다 죽겠네."
"상관없다."
정말 상관없다.
펫이 되어도 좋고, 그저 주화만 남겨도 괜찮다.
헛수고한 셈이 되지만, 이 정도에 죽을 녀석이면 애초에 우승도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다.
철두의 목적은 '아울베어'가 아니라, 펫 대회에서 우승할 '강력한 펫'이다.
"아니, 누가 펫을 그리 무식하게 길들이는가? 충분히 교감하고 친밀도를 쌓아 천천히 마음을 열게 해야 하는 법이거늘."
"시간 낭비다."
"어허! 대체로 성격 있는 녀석들은 그리 힘으로 다룬다고 해서 굴복하지 않는다네. 시간 낭비는 철두 자네가 하고 있어."
"부우우...."
"어어? 저 숨 넘어간다."
철두는 서둘러 여신의 눈물을 꺼냈다.
"여신! 내 펫이 될 녀석이다. 치료해달라!"
철두의 정성스러운 기도가 닿아 여신의 기적이 일어났다.
파파팟.
"꾸오오오오!"
빛과 함께 말끔히 체력을 회복하고 상처가 전부 나은 아울베어가 포효했으나 다시 철두의 손아귀에 팔이 꺾이고, 다리가 부러졌다.
"부에에에!"
"안 되겠다. 꾸이. 치료해라."
"꾸이, 꾸이."
철두의 손등에 붙어있던 푸른 슬라임이 아울베어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지속 힐을 넣기 시작했다.
퍼퍽 퍼퍽!
"쯧쯧, 백날을 해봐라. 펫은 그렇게 길들이는 게 아니라니까."
에르미스는 혀를 차고 텐트를 꾸려 쏙 들어가 버렸다. 겨울 맵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환경이다.
퍼퍼퍼퍽!
구정욱은 한동안 강철두의 아울베어 구타를 구경하다가 도끼를 들고 수련을 시작했다.
가장 손에 익은 건 검이지만, 거인의 특성도 얻었고, 동경하는 강철두의 영향도 있는지라 도끼를 수련 중이다.
도끼 숙련이 벌써 레벨 2.
후우우웅, 후우웅!
레벨 3. 달인의 경지는 아직 멀었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그 경지에 도달하리라.
돌격 기병의 선두에 설 때는 창을 들겠지만, 그 이후 적진에 돌입해서는 이 도끼로 단단한 진형을 깨뜨리리라.
후우우웅.
세 사람은 각자의 일에 심취했고, 3일이 흘렀다.
퍼퍼퍽.
"부으으으...."
철두는 벌써 여신의 눈물을 10번이나 다 써버렸다. 치료 효과를 주는 파란 슬라임 꾸이의 힘도 이제는 효과가 없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아울베어를 치료할 수단이 이제 없다.
"쳇, 포션이 없군."
"쯧. 내게 있긴 하지만, 헛수고에 빌려줄 수는 없네."
에르미스의 냉정한 말에 철두는 하는 수 없이 아울베어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묻지. 나를 따를 테냐?"
"부에에."
파파팟.
<아울베어가 복종 중입니다.>
<피폐해진 정신은 많은 양의 주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화 278개로 대상을 길들이시겠습니까?>
"오! 좋다."
파팟!
곧 아울베어가 빛으로 화해 철두에게 스며들었다. 그의 팔뚝에 비어있던 동그라미에 부리를 가진 포효하는 곰 문신이 새겨졌다.
"허, 이게 된다고?"
에르미스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아울베어는 잘 마주치기 힘든 몬스터이기도 하고, 포악한 놈이다. 어지간한 성질의 몬스터는 죽으면 죽었지, 복종하는 법이 없었는데....
"네 이름은 새곰이다."
<새곰>
종 : 아울베어
등급 : S-
생명 : 0.001%
마나 : 12%
체력 : 0%
특성 : 강골, 포식
기술 : 활강, 포착, 강타
그리핀 오식이의 A+보다 더 높은 등급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술도 하나가 더 늘었다.
"허! 정말 길들였군."
"후후후. 패면 다 된다."
"하, 보통 그렇게 길들이는 게.... 뭐, 눈앞에서 직접 봤으니 할 말이 없군."
에르미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째 길들인 펫이 전부 상체는 새고 하체는 포유류인가."
"후후, 새곰이는 날긴 무리다."
버젓이 기술에 활강이 있지만, 비행을 기대하긴 무리다. 몸의 생김새부터가 상체가 조류라지만, 영락없이 부엉이를 닮은 머리통만 빼면 사실 반반이다.
어깨와 팔이 곰의 앞발에 깃털이 달린 수준이라, 날개라 하기에도 애매했고, 포유류의 다리라 하기에도 애매한 모습이다.
아마 활강은 깃털 달린 우악스런 앞발로 하는 모양이다.
다만 등급이 S-는 되어주니, 전투력에서는 그리핀을 능가하는 것을 기대해 봄직하다.
이기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겠지.
잭이 조사 중인 펜리르의 자취가 대회 이전에 발견되면 출전 펫을 달리하면 된다.
"이제 돌아가자."
"좋습니다!"
구정욱이 씩씩하게 대답했고, 철두는 궁금하여 성취를 물었다.
"도끼 얼마냐?"
"레벨 2입니다."
"아직?"
"...예에."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든 구정욱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철두의 음성에 실린 실망감이 심상찮다.
"돌아가면 내가 한번 봐주지."
"헙, 감사합니다."
소환된 오식이가 날개를 활짝 펴고, 신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다.
*
"신서울에서 사고 치지 말고, 마갑 제작 의뢰만 맡기고 얌전히 기다려라."
공격대가 신서울로 향하기 전 대장 구정욱은 잔소리를 단단히 했다.
공격대 209인은 부대장 박찬수의 지휘아래 신서울에 입성했다.
"엇? 박찬수 대위님 아니십니까?"
"이 중사 아냐?"
"하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하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209명이야."
"통행료 인당 10주화씩입니다."
"왜 그렇게 올랐어?"
"저야 모르죠. 까라며 까는 거지."
"쳇. 여깄어."
"하하, 어디 묵으십니까? 이따 한잔 어떠세요?"
"좋지. 제일 주막에 갈 거니까. 근무 끝나면 찾아와."
"넵. 노파심에 하는 이야긴데, 도시가 좀 어수선합니다. 괜히 얽히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새끼! 알았어."
"넵, 충성."
"나 전역했어! 아저씨야, 인마."
"헤헤, 살펴가십시오."
공격대에 예비역들이 박찬수 외에도 다수 있다.
그들은 신서울에 오자 한껏 들뜬 기분이었는데, 여기에 그들의 지인들이 많아서다.
친구나 다름없었던 선후임들, 그리고 가깝게 지내던 상인들 말이다.
공격대는 한양에서 가장 큰 제일 주막에 자리를 잡았다.
"하이고! 이게 누구래?"
"어? 아주머니 제일 주막 장사하세요?"
"이거 왜 이래? 당연히 하지. 언니들이 싸게 넘겨주고 갔어. 호호, 다 기다려봐."
신성루의 7 공격대에 복무할 때도 근무 후에 국밥에 탁주 한잔하러 올 때면 늘 오던 곳이라, 일하던 아주머니들도 모두 낯이 익었다.
제일 주막 주인은 미리 묵고 있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주막 전체를 비워 공격대가 머무르게 했다.
"점심 먹게 상 좀 봐주세요. 술도 한잔하게."
"이잉. 근데 요즘 술값이 좀 비싼데 괜찮겠어?"
"비싸요?"
"먹을 곡식도 귀한 마당이라 술 빚는 데 쓸 쌀도 아끼는 게지."
"그래도 주세요."
"아따! 통도 크네. 알겠어. 알아서 상 봐줄 테니 들어가서 쉬고 있어."
제일 주막에 머무르는 209명의 공격대는 큰 손이다. 이미 그들이 7 개척마을에서 사냥 중인 것은 신서울의 발 빠른 장사치들도 아는 사실이다.
사냥해서 버는 돈이 많으니, 씀씀이도 크다.
주막 마당의 평상마다 술상이 차려지고, 공격대원들은 오랜만에 긴장을 풀었다. 무식한 공격대장 구정욱도 없으니, 오늘만큼은 좀 편하게 먹어볼 작정이다.
상을 다 내어온 제일 주막 사장은 박찬수의 상 앞에 앉더니 은근히 물어왔다.
"한양은 요즘 사정이 어떻대?"
"한양 사정이요? 똑같죠. 포탈 끊기고 지구랑 연락 안 되니까요."
"거기도 좀 분위기 심상찮은가?"
"분위기요?"
박찬수는 신서울의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 알았으나, 모르는 척 물었다.
"아, 거 왜 있잖아. 시장 선거니 뭐니 말 없는가?'
"한양이야 박준필 중장님이 꽉 잡고 있죠."
"이잉! 그 양반이면 뭐 알 만하지."
주막 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은 이제 철두성 따르기로 했어요."
"허! 소문이 참말인갑네."
"소문이요?"
"거 강철두 그분이 아예 나라 세웠다는 소문이 있어."
박찬수는 피식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죠."
"거, 좀 자세히 이야기 해주면 안 되는갑?"
"어떤 이야기요?"
"거기 생활이나 상황이나 뭐 그런 거 말이여."
"으음."
박찬수가 주막 사장 표정을 살피니, 어쩐지 그녀의 얼굴에서 신서울을 떠날 조짐이 보였다.
그래서 슬쩍 떠봤다.
"신서울이 많이 위태한가 봐요?"
주막 사장은 괜히 주변을 살피더니 말했다.
"자네만 알고 있어. 지금 어지간한 상인들은 죄다 마음이 떴구만."
"마음이 떠요?"
"몬스터들 나오는 게 시원찮아서 요즘 돈줄이 말랐어."
신서울의 주요 산업 동력이던 리자드맨 늪지에서의 청동 채굴과 오봉산에서의 철재 채굴도 이제 거의 끝물이다.
자원의 고갈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화폐인 주화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 보니까 돈줄이 말랐어. 군단파니 시민파니 지금이야 싸우고 있으니까 덜한디, 하나가 이겨봐. 거덜난 곳간 채우자고 할 건데. 누구 돈을 뺏겠어?"
"으음."
"신서울에서 가장 주화 많이 가진 게 어디겠어? 죄다 오래전부터 장사하던 우덜 같은 사람들이제."
중립을 선언하고 있는 여러 장인들과 상인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줄 방패를 원하고 있었다.
"이주하시게요?"
"후회하는 이들이 많어. 죄다 사또 따라 청주 내려갈 때, 그 양반들은 왜 여기 집도 가게도 버리고 가나 싶었는데, 이제와 보니 현명한 거여."
그들의 선견지명이 옳았다.
"우리도 강철두 영주 밑으로 가면 안 되겠나?"
"우리라면 누구요?"
"거 신서울 상인회 말일세. 회장이 영호 공방 최영호 그치니께. 거기 한번 가보더라고."
안 그래도 마갑 생산 의뢰를 위해 가야 한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이잉! 그래도 자네, 이렇게 대단한 부대의 대장 아닌가?"
"부대장이에요."
"아무렴. 아무 인연도 없는 것보다 자네같이 끗발 있는 사람이 말해주는 게 낫지."
박찬수는 슬쩍 웃었다.
"안 그래도 영주님이 곧 오실 겁니다."
"이잉? 어딜 와?"
"지금 근처에 와 계세요. 영주님 오시면 그때 상인회에서 한번 말씀해보세요."
"오! 희소식이여. 알겠어."
주막 사장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박찬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신서울에 자리 잡고 있던 상인들과 장인들이다. 고인물답게 기본 전투력도 갖추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시를 이룩한 그들의 기술력이 더 값질 터.
'데려가실 것 같긴 한데.'
영주님 의중이야 모르겠다.
워낙에 독특하신 분이라.
"계시오!"
그때 주막 밖이 소란하더니 일단의 사람이 들어왔는데 박찬수도 아는 이였다.
"여기 부대장이 누군가?"
잔뜩 고압적인 음성의 사내는.
노바군 참모총장 임운진이었다.
"접니다."
박찬수가 일어섰고, 임운진의 눈썹이 휘었다.
"옛 상관을 보고 경례도 없는가?"
"저 민간인인데요."
"예비역이지."
"...."
박찬수의 표정이 삐딱해졌다.
'이것 봐라?'
박찬수 그도, 오우거의 특성석 2개를 섭취한 이다.
"아저씨. 용건이 뭐요?"
234화 기둥뿌리
"뭐, 뭐?"
임운진은 너무 황당해 본인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귀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자, 자네 지금 아저씨라 했나?"
"아저씨죠."
그때 임운진의 옆에 있던 자가 나섰다.
군모에는 별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이봐! 박찬수 대위!"
"어휴, 전역한 지가 언젠데."
"허! 자네 예비역이야! 예비역 몰라?"
"이보쇼. 별 두 개 아저씨."
"뭐, 뭐?"
"예비역이 뭐 어쨌다고?"
"허! 예비병력으로서 전시에 자네는...."
"아, 됐고!"
"이익!"
박찬수가 말을 끊었다.
"용건이 뭡니까? 뭐, 전역한 애들 다시 징집이라도 하시게요?"
"...."
이런 모욕을 당할 줄은 몰랐던지라 임운진 대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와 함께 온 이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개중에 호위로 따라온 자들만이 식은땀을 흘렸다.
'좆됐다.'
호위가 10명.
상대는 209명의 병력.
숫자도 문제지만 그 수준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제발 대장이 계급을 앞세워 더 압박하지 않기를 바랐다.
상대는 그 말마따나 예비역이지 않은가?
"총장님은 돌아가시지요. 제가 잘 타일러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작전참모장 강성태 소장이 말했으나, 박찬수가 즉시 이죽거리며 끼어들었다.
"돌아가지 말고 당사자가 이야기해보쇼."
"어허!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자네가 참모총장님과 대면할 짬이 된다 생각하나!"
"지랄, 전역했다니까 짬 타령은."
"뭐, 뭐?"
강성태는 푸들푸들 떨다 못해 얼굴이 시뻘게졌다. 가만히 두면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다.
기가 막힌 건 군부의 인물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공격대의 그 누구도 박찬수를 말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저리 건방을 떨고 있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언행을 말릴 생각을 안 하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실실 쪼개?'
아니, 이제 와 둘러보니 아예 대놓고 비웃고 있다.
이자들이 전부 미친 자들인가?
더러 익숙한 얼굴을 보면 군에서 나간 이들도 대다수인데.
"자네들 후회하지 않겠나?"
"안 하지."
"...."
박찬수의 즉답에 강성태 참모장은 할 말이 궁색해졌다. 이리도 강경하게 나올 줄이야.
대화를 해보기도 전에 척을 지게 생겼다.
"물러서시게."
임운진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 용건을 말하지."
"말해보쇼."
"...."
저 건방진 주둥이를 한 대 때리고 싶었으나, 그럴 경우 파탄뿐이다.
"보고받기로 강철두 군이 신서울에 왔다 들었네."
용 호수에 주둔 중인 3군단의 초소에서 올라온 보고다. 보고 체계가 있다 보니 조금 늦게 도착한 소식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의 휘하인 공격대가 신서울에 입성했기에 곧장 찾아온 참이다.
"뭐? 군? 구우우운?"
여기저기 평상에 걸터앉아 탁주를 마시거나 국밥을 후루룩 먹던 공격대원들도 표정이 굳었다. 모두의 시선이 임운진에게로 모이니, 그 압박감이 대단했다.
"영주님이 네 친구더냐?"
"...."
209명의 공격대 전원이.
스멀스멀 살기를 피워 올렸다.
전원 오우거의 특성석 2개를 흡수한 자들.
부대장 몇은 흑색부까지 이용해 추가로 흡수한 자들도 있다.
성격이 포악하고 인내심이 크지 않으며, 졸렬한 오우거의 심성에 물든 자들.
"얘들아! 여기 초보 노비스가 우리 영주님을 모욕하신다!"
처처척!
평상마다 앉아있던 공격대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우르르 일어서며 살기를 피워올리니, 주변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임운진의 얼굴은 거무죽죽해졌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저들이 정말 손을 쓸 것 같았다.
"...사과하지. 내 실언했네."
"...."
박찬수는 대꾸 없이 임운진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후, 이리된 마당에 더 대화하기는 글렀군. 내 다시 오겠네."
"구 대장이 이 자리에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쇼."
인내력 따위 오우거의 특성석을 먹으며 토해내 버린, 구정욱이 여기 있었다면 지금쯤 임운진의 머리통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가지."
"네, 총장님."
당당하게 주막에 들어왔던 그들은 혼비백산해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는 박찬수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지랄, 초보 노비스끼리 소꿉장난은."
"와하하하하!"
박찬수와 공격대의 비웃음이 거리를 가득 채웠으나 임운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뭐라 항변할 것인가.
'감히! 감히!'
파란만장한 군 생활에서 이토록 치욕스러운 적이 없었다.
"총장님! 제가 따끔하게 혼을 내놓겠습니다."
"맞습니다. 이는 하극상입니다! 제아무리 전역했다 해도 당장 예비역의 신분을 벗는 게 아닐진대."
부하들이 더 열을 내자, 임운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매섭다.
"어떻게?"
"예?"
"지금 정예들은 죄다 2군단 3군단에 뺏겼는데 어떻게 말인가?"
"...추, 추방하면 되지 않습니까?"
"...."
"죄송합니다."
임운진이 노려보자 참모장이 고개를 숙였다.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행정력이 무슨 소용인가?
나가란다고 순순히 따를 자들도 아닌 듯 보였는데.
관청으로 돌아온 참모총장은 분이 풀리지 않았으나,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우."
아쉬운 건 그다.
노바 군의 초대 참모총장으로 부임할 때만 하더라도 승승장구를 기대했는데, 이토록 이른 시간에 지구와 단절될지는 몰랐다.
노바군을 온전히 접수하기도 전에 일이 벌어져 버렸고, 지금으로서는 힘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없다.
그 힘이 임운진에게 없었으니까.
"총장님. 3 공격대 양승진 대령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끼이익.
"충성!"
"어, 앉지."
양승진 대령이 임운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네가 구정욱이랑 동기랬지?"
"그렇습니다."
본디 둘 다 소령이었다.
구정욱은 한양으로 가버렸고, 양승진은 그간 2계급이나 진급해 대령이 되었다.
임운진이 가진 힘은 군대라는 시스템과 그 임명 권한뿐인지라, 고참 병사들을 다독이기 위해 대거 진급이라는 설탕을 남발했다.
"그 구정욱이 부대가 신서울에 와 있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박찬수라고 아나?"
"예의 바르고 싹싹한 후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임운진이 흠칫 놀랐다.
"예의가 발라?"
얼마나 발라버렸기에 그따구지.
"예에."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군. 그놈들이 소속을 1군단이 아닌 아이언헤드령의 공격대로 고집하고 있어."
"...."
"들은 말이 있나?"
"...1군단 전체가 아이언헤드령의 밑으로 배속되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군."
임운진이 눈을 감았다.
이로써 노바군 1군단은 사실상 독립했다고 봐야 했다. 거리가 멀어지니 명령을 내리기도, 그것을 따르기도 기대키 어려웠는데, 이제는 아예 남이 되어버렸다.
"후, 자네가 그 박찬수 대위를 좀 만나보겠나?"
"만나는 보겠지만, 용건이 무엇인지요?"
임운진은 속에 여러 말이 맴돌았으나, 고르고 골라냈다.
이제 한양의 1군단을 노바군 소속으로 여길 수 없다.
그리고, 강철두를 대한민국 정부와 계약 맺은 용병대로 여길 수도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없다.
"강철두와의 회담을 주선해주게."
"...알겠습니다."
임운진에게는 치적이 필요하다.
그도 이제 슬슬 느끼고 있다.
사람들의 불안을.
시민들에게 신서울이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가진 힘을 내보이든가.
힘을 가진 자와의 동맹을 하든가.
"으음."
시민파 이형택은 어차피 안 될 패다.
그가 부르짖는 건 독재를 막고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겠다는 건데, 어불성설이다.
인기 투표 따위로 선장을 정할 때가 아니다.
주변에 승냥이들만 가득한데 말이다.
*
신서울 상인회.
이들은 본디 경쟁 관계의 상인들이었으나, 사또 박준필이 떠나고 나서는 외려 끈끈해져 회를 결성할 정도가 되었다.
이들의 연대를 이끌어낸 것은 위기의식.
"참말로 그리 말했단가?"
"내 똑똑히 들었슈."
"회장님. 뭐 할 말 없다요? 박찬수 대장하고 만났지 않소?"
상인회 회장 최영호는 헛기침을 하곤 나섰다.
호롱불 하나 두고, 몰려 앉은 서른쯤 되는 인원을 보며 입술을 뗐다.
"임운진은 안 돼."
"하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앉았소."
"우리도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야."
"아니, 그래서 시방 그 결단이 뭐요?"
최영호는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이미 답이 정해졌음을 알고 있었다.
신서울에서 이룩한 모든 것이 아깝긴 하지만, 목숨보다 더 중할까? 언제든 지구로 도망칠 수 있는 포탈이 사라진 마당에, 가장 안전한 땅을 찾아 정착하고 싶은 건 고인물들도 매한가지다.
"나는 한양으로 갈 거여."
"시방, 회장이 가면 다 가지."
"나도."
"어허, 조용히들 해. 지금 투표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최영호가 다들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같은 마음일 거여. 신서울은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도 않아."
떠나는 건 기정사실이다.
"문제는 우리를 받아 줄지여."
"아닛! 우리가 그래도 한가락 하는 양반들이 대부분인데 설마 안 받아 줄라고요?"
"맞소! 재물을 원하면 돈을 내면 되고, 기술을 원하면 기술을 제공해줄 것인데, 영주님이 안 받아줄 이유가 있소?"
"으으으음."
최영호는 침음을 삼키곤, 박찬수와의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풀어냈다.
"아이언헤드성은 이미 장인이고 기술자고 넘쳐난다더라. 그리고 상인들도 아주 국적 가리지 않고 이미 자리를 잡았다더라고."
"...."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지만, 우린 이미 뒤처졌어. 들어보니 그렇더라고...."
최영호는 인정하기 싫지만, 신서울 제일가는 대장장이 타이틀도 색이 바랜 것을 느꼈다.
분하지만, 강철두를 따라간 장소철은 장인의 길을 걷는 진짜 장인이 되었단다.
드워프에게 기술까지 전수받는다고....
"회장님.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간단 말이오?"
"영주님이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안 받아줄라는교?"
최영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솔직히 인연이 있긴 한데, 여기서 영주님하고 친교라도 나눈 사람 손들어 봐."
최영호의 말에 아무도 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튼 내 말은 우리가 뻐길 때가 아니라는 거여. 다들 마음의 준비하고, 뭐든 내놓을 각오도 해."
"재산이나 처분해야 쓰것네."
"이거, 거기 옮겨서 비렁뱅이처럼 살 거면 굳이 갈 필요가 있는가?"
"아니, 여기서 앉아 죽느니, 가는 게 낫지."
가니 마니로 의견이 갈려 목소리가 높아지자 최영호가 주의를 줬다.
"다들 조용혀. 가든 말든 자유여. 내 말은 갈 사람들은 뭐든 내놓겠다는 각오로 매력 어필을 하란 거여. 협상은 내가 해볼 텐게."
"하이고, 나는 무조건 갈 테니까. 회장님만 믿소."
"그래서 영주님은 언제 오신다요?"
"들어보니 조만간이야. 어디 짐승 하나 잡으러 갔는데 금방 오실 겨."
"이거 시간이 없구만. 알겠소."
신서울 상인회 회의가 파하고, 마음에 확신이 선 회원들은 부랴부랴 가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일 후.
모두가 기다리는 차에, 강철두가 신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235화 빼먹기
신서울 상공에 그리핀이 나타났다.
"이야, 사람 많네."
"원래 여긴 사람이 적었나?"
에르미스의 의문에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었지."
"영주님이 계실 때보다 두 배는 더 많아졌습니다."
구정욱의 첨언에 에르미스가 혀를 내둘렀다.
"근래 갑자기 도시가 커진 것 치곤 길이 깔끔하군."
철두가 성의 북쪽을 가리켰다.
"저기 동서대로 기준으로 남쪽만 번성했지, 북쪽은 거의 공터였어. 저기 밭도 더 넓었고. 지금은 건물이 더 많네."
"자네 동족들은 도로에 환장한 것 같군. 집 짓기도 전에 도로부터 만들다니 말이야."
"후후, 그렇지."
철두는 웃었고, 구정욱도 웃었다.
지구인들이 그런 경향이 좀 있다.
아니, 한국인들이라고 해야 하나?
"전에 본 도시 간의 도로도 그렇고, 이용하지도 않는 도로에 그리 공을 들이는 인간들은 처음이야."
"후후, 그게 다 인프라 공사다."
"흠, 난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하지 마라."
"흐, 알겠으니 이제 내려가세. 이 지긋지긋한 멀미에 또 안장에 토하기 전에 말이야."
에르미스의 투정에 철두가 고도를 내렸다.
곧바로 도시로 진입할까 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성밖에 내렸다.
내리고 보니 동문이다.
동쪽으로 쭉 가면 놀 숲이 있고, 그 너머에 오봉산이 있다. 신서울 지역의 가장 큰 개척마을도 거기 있고 말이다.
"추억 돋는군."
본디 거기를 점거하고 있던 산채를 철두가 탈환했으니, 강철두의 명성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게 모두 그 사건 때문이었다.
"가시지요."
"그러자."
구정욱의 에스코트로 동문에 접근했다.
"헙! 충성!"
"배 상사, 왜 외부인에게 경례하고 그러나."
"예? 아! 하, 하지만."
"흐흐, 농이야. 통행료가 얼만가?"
"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바로 관청으로 모시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누가?"
"예? 참모총장님 특별지시입니다."
"흐흐, 오란다고 가야 해?"
"예에?"
지나치게 당황하는 배 상사를 뒤로하고, 구정욱이 뒤로 돌아 건방진 자세를 고치며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어디로 향하시겠습니까?"
"애들 만나러 가야지."
"예에."
거만한 표정으로 배 상사를 바라봤다.
"우리 애들 어디에 묵고 있나?"
"제일 주막입니다."
"그래, 수고해. 그리고 통행세 얼만가?"
"인당 10주화입니다."
"여기!"
"...넵."
배 상사가 30개의 주화를 받고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참모총장님께는 뭐라 전하면 좋을는지요?"
"내가 자네 상사도 아닌데 왜 묻나?"
"예?"
"자네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영주님."
철두 일행이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배준영 상사는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시발, 좆됐다."
뭐라 말한단 말인가?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와, 구 소령님 성격이 확 변했습니다. 7 공격대 이끌 때는 안 그러셨던 것 같은데...."
"끄응, 몰라. 시발. 일단 보고하고 와."
"예? 제가 말입니까?"
"그럼 시발, 내가 가리?"
욕먹을 게 뻔한데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배준영 상사의 보챔에 후임 하사관이 똥 씹은 얼굴로 노바군 본부 관청으로 향했다.
국방부 시계는 오늘도 돌아가고, 군대는 여전했다.
"이야, 진태랑 국밥 먹던 곳인데."
"흐흐, 여기가 맛이 제일 좋지요."
"오! 대장 오셨수?"
"헙, 영주님도 오셨다!"
"야야, 다들 나와. 영주님 오셨다."
구정욱에게는 조금 무례한 공격대 대원들이었지만, 강철두의 등장에 주변 공기에 긴장감이 돌았다.
"됐다. 밥이나 먹자."
"넵."
철두와 에르미스가 상에 걸터앉았고, 곧 주막 이모가 상을 내어왔다.
"하이고, 영주님. 꼭 뵙고 싶었습니다요."
"음? 나를요?"
"예에."
"왜요?"
"그것이. 우리도 저쪽 한양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을까 혀서요."
"가면 되지."
"참말입니까?"
철두는 뭐 대수로운 일이라도 되는 듯 호들갑 떠는 주막 사장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거긴 준필이가 다스리는 땅인데 왜 나한테 그래?"
"소문으로 듣기론 아이언헤드 영지가 다 먹었다던디요?"
"그건 그렇지."
철두의 긍정에 주막 사장이 감탄했다.
"참말이구만요. 그럼 당연히 영주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혀서 물어봤지요."
철두가 피식 웃었다.
"아이언헤드 성은 진태한테 묻고, 한양은 준필이한테 물으면 돼요."
"감사합니다요. 감사합니다."
주막 사장이 부리나케 인사 후 상을 내어주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후후, 먹어봐라. 이게 지구의 소울 푸드다."
정확히는 지구의 작은 반도 나라 한국의 소울 푸드지만, 철두는 사소한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후루룹. 으음. 평범한 고깃국이군."
"후후, 너는 지금 천만 국밥충을 멸시하는 소리를 하는군."
"그건 무슨 몬스터인가?"
"유머 감각이 떨어지는 난쟁이군."
"내 난쟁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에르미스가 버럭 역정을 냈으나 철두는 그저 실실 웃을 뿐이었다.
"후후, 밥이나 먹어라. 후루루룹. 으음?"
철두는 국밥을 한 그릇 먹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마, 맛이!"
"맛이 왜?"
"맛이 없어!"
"...."
에르미스는 이 제멋대로의 지구 출신 바바리안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치고 한없이 가벼운 것이, 장단을 맞춰주는 데도 한계를 느꼈다.
"맛만 좋구만 왜 개소리냐?"
"이 맛이 아니야."
철두가 어딘가 밍밍한 국밥 맛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구정욱이 말했다.
"식재료야, 아이언헤드 성을 따라올 데가 있겠습니까?"
"아! 마늘이 없었군."
"예? 마늘이요?"
외유가 길었던 구정욱은 아직도 마늘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래, 마늘. 마늘이 개발되었다."
"허!"
유레카다.
마늘이라니!
한식에 안 들어가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든 식재료다.
"후후, 신서울에 온 것도 엘리트 연구원들을 데려가려고 온 거다. 식물 종자 연구에 인력이 부족하다더군."
"허, 종자 연구라면 다른 식재료도 개발 중입니까?"
"고추가 거의 다 된 것 같더군."
"허어억. 고추!"
구정욱이 놀란 만큼, 안 듣는 척 주변 마루에 앉아있던 공격대 대원들도 깜짝 놀랐다.
아이언헤드 성을 떠나온 지 몇 달 되지 않았건만, 그새 성은 또 많은 발전을 이룩한 모양이다.
"제가 보쌈해오겠습니다!"
"김 박사고 이 박사고 저한테 맡기십쇼!"
오우거 특성석을 공통으로 활성화한 성급하고 포악한 오우거 부대 아니랄까 봐, 공격대원들이 앞다퉈 나섰다.
"후후, 강제로 데려갈 수는 없지. 지원자를 받을 거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지원하게 만들겠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열성적인 대원들이 지원을 자처하는데, 볼일을 보러 나갔던 공격대 부대장 박찬수가 돌아왔다.
"어? 충! 영주님 오셨습니까?"
"그래."
"대장님도 오셨습니까?"
"오냐."
박찬수는 슬그머니 상 옆에 앉았다.
"밥 먹었나?"
"아직 식전입니다."
"한 그릇 해라."
"예, 영주님."
박찬수는 격의 없는 영주님의 은혜에 고개를 숙이곤 국밥을 한 그릇 더 주문했다. 곧 국밥과 함께 삶은 닭고기가 내어져 왔다.
"사장님이 서비스로 내어주시랍니다."
"후후, 잘 먹겠다."
백숙을 쭉 찢어 먹은 철두는 문득 공격대원들이 마늘 구경을 아직 못해본 것이 생각나 놀렸다.
"후후, 며칠 전에 먹은 마늘 치킨이 생각나는군."
"허억, 마늘 치킨이요?"
마늘을 처음 들은 박찬수가 유달리 놀랐는데, 철두는 더 신이 나서 놀렸다.
"기름 많이 나는 콩도 발견되어서 이제 튀김도 흔해졌지."
"허억!"
박찬수만이 아니라 공격대 전원이 빨리 아이언헤드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노바에서의 먹거리는 크게 다양하지 않아, 고기나, 뼈 넣고 끓인 국밥이나, 죽 정도가 전부였다.
매번 삶은 고기만 먹던 터라, 치킨 정도만 해도 눈이 돌아갈 만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치킨 맛을 모르는 놈은 하나도 없었고, 침을 줄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보리도 꽤 많이 비축되어서 맥주도 주조 중이지."
"허어어억."
치킨에 맥주라니!
공격대원들이 의욕이 불타는 그때, 주막 밖에 일단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모두가 같은 복색의 그들은 노바군 본단의 장교들로, 그들 무리에서 곧 아는 얼굴이 등장했다.
"다시 보는군. 아이언헤드 영주라고 불러야 하겠지?"
"음? 구면인데?"
철두는 상대의 낯이 익었다.
하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이는 아니었기에 이름은 몰랐다.
"...."
당사자가 당황하는데 그 옆에 참모장이 나섰다.
"이분은 임운진 참모총장님이다. 전에 보지 않았나?"
"아! 박준필이 후임."
철두가 처음 자리 잡은 둔영을 비싸게 팔아먹은 자였다.
"후임이 아니라!"
"됐네."
임운진이 괜히 대화를 망치려는 참모장을 뒤로하고는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앉아도 되겠는가?"
"용건이 있어서 왔겠지. 앉아라."
"...알겠네."
다 내려놓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도 지구의 제도와 사회에 익숙한 임운진에게는 강철두의 당연하다는 듯한 반말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참 만나기 힘든 사람이구만."
"후후, 왜 보자고 했나?"
"...따로 이야기하고 싶네."
임운진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이런 공개된 자리에서 다룰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쩌면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약한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때 박찬수 부대장이 나섰다.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영주님."
"좋다. 따라 들어와라."
"으음, 알겠네."
임운진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철두의 하대가 불편했지만,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철두와 임운진이 막 주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불쑥 한사람이 더 끼어들었다.
"그 대화에 나도 끼어야겠네!"
"음?"
"어?"
임운진에게는 곤란한 인물이고, 철두에게는 흰머리 노인일 뿐이었다.
"너는 누구냐?"
"...."
대뜸 반말로 물어오는 철두의 언행에 이기택은 한순간 멍해졌으나, 노회한 정치인답게 금방 신색을 찾았다.
"허허, 이기택 의원이라고 아나?"
"모르지."
"자네를 한번 만난 적이 있네. 입당 제의를 하기 위해서."
"아! 그때 그놈?"
대뜸 찾아온 녀석의 경호원을 좀 두들겨 팼더니, 알아서 겁먹고 도망친 놈이다.
"그때 본 이기택 의원의 형일세."
"후후, 동생의 복수를 하러 왔나?"
"...."
대체 동생 놈은 강철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냥 입당 제의를 했고, 정중히 거절했다던데?'
이형택은 일단 웃었다.
"하하하, 복수는 무슨. 나는 그리 쪼잔한 사람이 아닐세."
"음. 알겠다."
"그럼, 나도 들어가지."
"왜?"
"아니, 여태 말하지 않았나? 나 이형택일세."
"그게 왜?"
"...."
철두는 이형택을 보며 분명히 말했다.
"나는 여기 지도자와 독대하기로 했다. 늙은이는 빠져라."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끼어야 하네."
철두가 인상을 팍 썼다.
할아버지와의 약속이 있어 한 번 거스르는 녀석은 봐주지만, 이 정도면 한 대 쳐도 괜찮은 게 아닐까?
"왜냐면 아직 신서울의 지도자는 정해지지 않았네."
"...?"
임운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236화 예정된 반란
임운진이 바란 밀실 회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철두는 평상에 걸터앉아, 새로 내어온 술상을 두었다. 그 앞에는 임운진과 이형택이 앉아 기묘한 삼자대면이 이뤄졌다.
"할 말 해라."
"...."
"...."
임운진도 이기택도 어색한 침묵만 이어갈 뿐, 누구 하나 먼저 말문을 열지 못했다.
평상 주위로 구경꾼들이 가득하다.
공격대는 물론, 임운진과 함께 온 군인들, 이형택과 함께 온 시민파의 정치당원들, 그리고 주막 사장의 부름에 몰려온 상인회, 그냥 구경 온 시민들까지 모여, 제일 주막 주변은 인파로 가득했다.
"왜 말을 하러 와서 말을 안 하나?"
철두도 만만한 인물은 아닌지라, 그들의 침묵에 역정을 냈다.
"할 말이 없으면 다들 가라! 괜히 입맛 버리게 하지 말고."
그리 말하곤 철두가 젓가락을 드니,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주막 안에 들어가서 긴히 이야기하는 건 어떤가?"
이형택의 제안에 철두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소인배와는 상대할 생각이 없다."
"...."
이제 여기서 제 의중을 드러내지 못하면 영락없이 소인배가 될 처지에, 이형택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젊은 놈이 심계가 대단하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새파랗게 어린놈이 영주님 자리에 앉더니, 정치적 술수가 대단해졌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싹수 있는 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형택은 지금 강철두와 초면이니까.
"제대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나 이형택이 무조건 이기네."
"허튼소리!"
"우적, 우적."
철두는 닭고기를 씹으며 둘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를 지지해주게.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네."
"흥! 지금 신서울의 수장은 나다!"
"임시지!"
"아니다!"
"허, 대놓고 독재를 선언하는군."
"후루루룹."
철두는 불편하지도 않은지 음식을 야금야금 먹었고, 두 사람은 한참 싸우다가 철두를 보았다.
"독재 정부를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이 늙은이는 치우고, 나와 협상하면 되오!"
철두가 곡주를 벌컥 마시곤 입을 닦으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신서울에 사또가 없다는 소리군."
"내 말이 그 말일세! 아직 정해지기 전이야!"
이형택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임운진은 상대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그럼 나도 사또 선거에 나가도 되는 건가?"
"음?"
"흠?"
철두의 그 한마디에 이형택의 표정도 덜컥 굳었고, 임운진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오오오! 그리만 해준다면 나는 무조건 영주님을 뽑겠소!"
"나도요!"
그때 구경하던 군중들 사이에서 열렬한 호응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노바에서 꽤 오래도록 지내온 고인물들이었는데, 그들은 노바의 섭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다.
제대로 된 지도자가 필요하다.
선거?
다수의 의견을 수렴한 지도자를 선출할 수는 있지만, 꼭 그가 최선이라는 보장은 없다.
주변에 적들이 들끓는데,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
바라마지않은 상황이다.
특히나 상인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없다.
신서울을 강철두가 다스리게 되면, 굳이 터전을 버리고 갈 필요도 없다. 여태 그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출마하기만 하면 선거운동 자원봉사는 물론이고 가산을 보태서라도 강철두의 선거운동을 지원할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 그건...."
"여, 영주는 아이언헤드의 영주시지 않소?"
"그게 왜?"
"신서울의 사람도 아닌데, 신서울의 시장 선거는 조금 말이 안 되지 않소?"
이형택의 말에 상인회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개소리!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자격이 있지!"
"맞소! 대한민국을 계승하는 우두머리 뽑는 자리에 신서울 출신은 무슨!"
"그러면 당신네들이 무슨 신서울 출신이야! 다들 노바에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아놓고!"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이형택은 이거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운진도 영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후후후, 농담이다."
"아!"
"헙!"
누렇게 뜬 이형택과 임운진의 얼굴은 몇 분 사이 몇 년은 늙은 듯 초췌해졌다.
"아닛! 영주님. 어째서입니까? 출마해주십시오!"
"음? 영호?"
"맞네! 나요, 최영호! 기억하는구만!"
"후후, 기억하다마다."
철두가 처음으로 연을 맺은 대장장이인데 잊을 리가 있나.
"자네만 시장으로 나온다면 이 신서울 7만 인구도 더는 걱정이 없네! 부디 우리 신서울을 버리지 말아주게."
"버리는 게 아니다."
"허, 허면?"
"난 아이언헤드의 영주다. 신서울에 머무를 수 없다."
어느 영주가 본성을 비우겠나?
"허, 허면! 자네를 따라가게 해주게!"
"후후, 이사 오고 싶으면 와라."
"참말인가?"
최영호가 반색했다.
주막 사장의 말대로 강철두가 너무나 쉽게 허락해서다.
"공격대 마갑 제조만 끝나면 우리는 아이언헤드성으로 돌아간다. 그때 데려가 주마."
"알겠네! 고맙네! 고마워!"
최영호가 거의 만세를 부를 기세로 기뻐했고, 상인회 회원들은 물론 오래도록 신서울에 몸담은 시민들 중심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나도 간다!"
"나도!"
"이참에 가야지!"
"기회가 왔는데 안 가면 병신이지!"
선배랄 수 있는 고인물들이 그러하니, 노바에 발을 디딘 지 몇 달 되지 않은 노비스들도 동요했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 들어오다시피 한 이들도 분위기에 휩쓸리니 주막 전체가 요동쳤다.
"이, 이 무슨 짓이오!"
"왜?"
"허, 어찌 시민들을 함부로 뺏어간단 말이오?"
임운진의 말에 철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뺏어? 온다잖아."
"이익."
"막게?"
철두의 그 한마디에, 여태 가만히 있던 구정욱을 위시한 공격대가 기세를 피워올렸다.
삽시간에 변하는 날카로운 분위기로 인해 주변이 고요해졌고, 덩달아 군인들이 긴장했다.
와중에 구정욱이 나서서 철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흡사 군주 앞의 기사와 같아, 많은 이들이 낯설어하면서도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영주님. 이참에 연구원들의 문제도 매듭지으시지요."
"맞아."
철두는 임운진과 이형택을 보며 말했다.
"여기에 식물 연구하던 연구원들 있지? 지원자들은 내가 데려갈 거야."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다."
철두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그 부하들이 무게를 잡으니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여긴 아직 정부도 없는데, 내가 대한민국 국민들 데려간다는데 누가 막지?"
철두가 임운진을 보았다.
"네가?"
"...."
이번에는 이형택을 보았다.
"아님 할배가?"
"...."
철두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의사를 전했다.
"막는 순간, 신서울은 나의 적이다."
"무, 무슨!"
"적을 약탈하고, 노예를 전리품으로 취하는 건 당연한 일."
"...!"
철두의 말에 임운진과 이형택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같은 한국 출신끼리 서로 적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
"...."
"그만 가봐."
철두는 할 말을 다 했다.
알아서 찾아온 덕분에 밥 먹고 관청에 갈 수고를 줄였다.
지금 신서울의 임시 수장이 누구고, 선거가 어떻고 간에 신경 쓸 따름이 아니다.
통제하지 못한 시민들이 이탈하는데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알아서 데려갈 거다.
막는 순간... 철두는 몰라도 구정욱은 깡패가 될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
*
굴욕적이며 치욕적인 삼자대면을 마치고 난 뒤, 임운진과 이형택은 서로 의견을 모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강철두를 치자!
그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쪽수에 장사 없는 법이다.
순진한 초보 노비스 이형택과 임운진은 그리 생각했다.
둘은 각자 친시민파인 3군단과 군단파의 2군단으로 소식을 전했다.
3군단장 김춘배는 전령을 노려보며 물었다.
"다시 말해라."
"긴밀한 작전이 필요하니, 부대 절반을 이끌고 복귀하셔야 합니다."
"무슨 작전?"
"그것은 기밀입니다."
김춘배는 고소를 머금었다.
"물러가 있어라."
"예에."
전령으로 온 대위가 물러나고, 곧 김춘배의 참모들이 들어왔다. 신서울의 군인 상사 김춘배이던 시절부터 그를 따르던 부하들이다.
불명예 탈영병이 되어 마적단을 꾸려 활동하다가 이제는 다시 신서울의 군인이 되어 3군단의 중추가 되었으니, 모두 금의환향한 셈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죽으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김춘배는 부하의 말에 씁쓸히 웃었다.
강철두가 출현한 것을 가장 먼저 보고한 것이 3군단이다. 기밀을 들먹이며 부대 절반을 소환하는 저의를 안 봐도 알 만했다.
"무슨 트러블인지 캐봐."
"이미 소식 물고 오고 있을 겁니다."
아미르 왕국과의 국경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 하여, 신서울을 향한 눈과 귀를 닫은 게 아니다.
심어 놓은 정보원이 이미 정보를 물고 오고 있을 터.
"전령도 구슬려봐."
"에이, 이미 사람 붙였죠. 지금쯤 술 한잔하고 있을 겁니다."
역시, 일을 잘하는 부하다.
"근데 단장님. 아니, 사령관님."
아직 마적단이던 시절의 호칭이 습관처럼 남아있는 심복이다.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기회 아닙니까?"
"무슨 기회?"
강철두와 신서울 간에 무언가 트러블이 생긴 게 분명했다. 신서울에서 병력을 소집했다는 것은 적이 생겼다는 의미인데, 그 대상을 강철두 말고 떠올릴 자가 없었다.
군단을 소집할 정도면 그 정도 인물은 되어야 할 테니.
"그 상징성이 있지 않습니까? 강철두를 이기면, 단장님... 사령관님이 신서울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
김춘배는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
"아니, 어째서입니까? 이미 단장님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예?"
"이르러보니 알겠더군."
김춘배는 자신이 있었다.
3군단 전체가 자신에게 덤벼도 이길 자신이....
노바의 세상에서 절대 강자 앞에 숫자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지금 신서울은 리더를 원하고 있고, 강철두를 잡으면 그 실력 증명은 확실하겠지만....
"그 괴물이 얼마나 강해졌을지 상상할 수 없네."
"...트라우마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발전하는 동안 그가 정체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우스워."
히어로가 된 김춘배는 무한결투장을 오가며 강철두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다.
대충 소문으로만 정보를 종합해도, 강철두의 신위는 결코 얕잡아볼 것이 못 된다.
"그건 그렇습니다."
부하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소식도 필요 없겠군. 3군단은 아미르 왕국과의 국지전 때문에 병력을 뺄 여력이 없겠어."
"예에, 내일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시민파에 가까운 3군단이 소집에 불응하는 가운데, 군단파의 고인물들이 떨어져 나간 2군단의 절반은 신서울로 들어섰다.
박준필 부임 당시, 1 특임대장 김도진 대령은 묵묵한 군인의 표상이었다.
2 특임대장 정윤승 중령이 대 놓고 박준필 파벌인 것에 비해, 김도진은 파벌 없는 자였다.
오로지 상관의 명에 충실하고,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명령 외의 파벌이니 정치니 하는 것은 관심도 없었다.
조선제일검이 사라지고, 랭커들이 줄줄이 이탈한 가운데 김도진 대령은 신서울 최강자가 되었다.
묵묵히 노력한 결실이 닿았는지 히어로도 되었고, 무한결투장을 통한 성장으로 그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임운진의 부임 이후, 알음알음 노바에 오래 복무한 고참병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가장 강한 사람인 김도진을 중심으로 뭉쳐졌다.
평생을 파벌을 멀리한 자가 파벌의 중심이 되었다.
김도진을 부담스러워한 임운진은 그를 2계급 특진해 소장으로 임명해 2군단을 신설, 북쪽의 렙틸족이 자주 출몰하는 국경에 주둔케 했다.
그는 명령에 충실히 따랐고, 이번에도 명령에 따라 신서울에 입성했다.
"충성! 기밀 작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별 2개 장군이 되어버린 그를 보며 임운진은 좀 더 그에게 마음 써 아예 내 사람으로 끌어들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밀쳐낸 것이 후회되었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이토록 참군인인데 말이다.
"자네, 강철두를 이길 수 있겠나?"
"...."
임운진의 말에 김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왜. 자신 없나?"
"하아...."
"음? 자네 지금 한숨 쉬었나?"
결국 이리되고 마는가?
"그를 베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네."
"그렇다면 벨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자네는 참 군...."
너를.
스컹. 덜컹.
임운진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237화 봉신 기사의 장원
신서울 게시판 여기저기에 모집 글이 붙었다.
신서울은 아직 한양이나 아이언헤드 성처럼 노바의 세계가 인정하는 마을은 아닌지라, 시스템적인 편의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노바의 시스템상 신서울은 여전히 마을이나 도시가 아니라, 그저 노비스들이 뭉쳐 모여 사는 집단일 뿐이다.
연구원의 모집은 그나마 예의 바르고 사회적이며 덜 거친 박찬수가 맡았다.
"자기가 사회에 있을 때 농업이나 이쪽을 전공했다, 거수!"
차차착.
여기저기서 많은 이들이 손을 들었다.
"어어, 거기 뭐 했슈?"
"한국대 낙농학과 교수였습니다."
"쓰읍, 한국대라."
"한국 최, 최고 대학이오!"
"음, 일단 이쪽으로. 어, 거기 손든 사람 뭐 했슈?"
"경산에서 농사지었구마잉."
"오오! 뭐 했어요?"
"과수원도 하고 이것저것 밭떼기도 많이 했지라. 나가 영농후계자였소."
"오케이. 통과 이쪽으로 오슈."
면접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비단 농업 관련 연구원들만 모집한 것은 아니었다.
"청송대 축산학과 교수요!"
"오! 귀한 지방대 인재시구만. 이쪽으로 오슈."
축산, 곤충, 스마트팜, 사료 등등 온갖 분야의 연구원들이 나타났고, 박찬수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두 뽑았다.
"기계과 교수요! 나도 데려가 주시오."
"으으음, 아저씨는 다음에 오쇼."
"나는 컴퓨터 공학과요."
"어, 백수시고."
"금형 만졌소! 선반 기계도 만들어낼 수 있소!"
"으음, 씁, 이쪽으로 오쇼."
"가, 감사합니다."
이제는 식물 동물 연구와는 상관없는 연구원들까지 뽑다 보니 인원이 50명 가까이 되어버렸다.
"자, 다들 집안 정리하시고, 가족들 잘 데리고 약속한 날에 나오시면 됩니다."
"예에."
"알겠습니다."
박찬수는 선별 인원의 방명록을 들고 보고를 위해 강철두를 찾아갔다.
"이게 전부냐?"
"네? 더 뽑을까요?"
"음, 다시 오기 힘드니 데려갈 때 많이 데려가자."
"넵, 알겠습니다. 허면 분야 가리지 않고 지원자들 추가로 다 모집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어차피 이동하려면 한 번에 하는 게 낫다.
고인물들이야 어차피 줄줄이 달고 다녀봐야 알아서 천막 치고 다 할 테고, 노바에 입장하고 한 번도 신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초보 노비스들이 문제다.
가는 길에 가르치고 하다 보면 행군 정도야 어렵지 않게 하겠지.
아직 초보 노비스 중에서는 말을 길들이지 않은 이들도 있어, 경로는 보호의 나무에 들렀다가 용 호수를 향하기로 하였다.
거기서 사막만 건너면 아이언헤드령이다.
가산을 정리하는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무려 일주일이나.
헌데 사흘쯤 지났을 때 일이 터졌다.
"나도 데려가시오!"
"나도요!"
갑작스레 지원자가 급증하는가 하면....
"으음, 나는 일단 더 머물러 보리다."
"나도 그래. 그래도 김도진 중장이면 믿을 만하지."
"차라리 나아."
떠나기로 한 고인물들 중에 남는 자들도 있었다.
"영주님! 변고가 생겼습니다."
"무슨 변고?"
벌써 며칠째 제일 주막에서 에르미스랑 농담 따먹기나 하며 놀고 있던 강철두는 급한 보고를 받았다.
"쿠데타입니다. 2군단장 김도진 소장이 지금 관청을 접수했답니다."
"그게 왜?"
"예에?"
"어차피 임운진보다 김도진이 더 세잖아?"
"그, 그렇죠?"
철두의 시큰둥한 반응에 소식을 전한 공격대원이 뻘쭘해졌다.
"원래 무리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족장을 하는 거다. 아니면 가장 강한 전사의 지지를 받든가."
그 정도 지지를 받으려면 부족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워야 하고, 전사들이 인정할 정도로 지혜로운 족장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철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본디 신서울에서 가장 강한 자는 본디 대한민국 정부의 무한 지원을 받는 자였겠지만, 그 연결점이 끊어졌으니 자연스럽게 권력이 이동하는 거다.
임운진은 그 계급 빼고는 탁월한 것이 없는 자였다.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음? 뭘?"
"그, 쿠데타 세력하고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
"그냥 놔두면 되지."
"아, 알겠습니다."
신서울 전체가 요동쳤다.
북쪽의 렙틸족들이 출몰하는 국경에서 철수한 2군단이 신서울을 장악했다.
임운진과 그의 파벌 장교들이 줄줄이 목이 잘렸다는 흉흉한 소식이 성내를 가득 채웠다.
그 처사에 초보 노비스들은 잔혹하다며 벌벌 떨었고, 고인물들은 오히려 단호한 일 처리에 안심했다.
'김도진 소장이면 믿을 만하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말들이 오갔다.
반란에 성공하여 신서울을 장악한 김도진은 가장 먼저 제일 주막으로 향했다.
"아이언헤드 영주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김도진은 공손했고, 구정욱은 옛 선배 장교를 보며 실실 웃었다.
속으로는 계속해서 실력을 가늠했다.
이길 수 있을까? 이길까?
김도진은 제법 정리된 기도를 흘렸다.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온 강철두는 그를 보며 대뜸 물었다.
"너, 가장 높은 무기술 레벨이 얼마냐?"
"5레벨이옵니다."
"후후."
철두가 희게 웃었다.
녀석, 소드마스터였군.
어쩐지 제법 기도가 섰더라.
이 공간에서 철두와 에르미스를 제하면 김도진을 이길 자가 없다.
슬쩍 웃는 철두를 보며 김도진은 마음을 굳혔다.
'위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위다.
대항할 수 없는 자다.
노바에 강철두란 이름이 슬며시 퍼진 이후부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그다.
이제는 너무 커져 저 높은 하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자다.
김도진은 강철두의 앞에 다다라 대뜸 절하듯 엎드렸다.
"영주님께 청이 있사옵니다."
"무슨 청?"
"신서울을 가여이 여겨주시옵소서."
"무슨 뜻이냐?"
"신서울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외면하지 말아주시옵소서."
"호오."
철두는 턱을 쓰다듬었다.
"대가는?"
"충성을 다 하겠나이다."
"맹세해?"
"맹세하나이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게 있었지."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서약의 검을 꺼냈다.
"꿇어라."
김도진이 자세를 고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철두는 서약의 검에 딸린 기술 '기사 서임'을 발동했다.
"너는 나의 기사가 되겠느냐?"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나의 기사로 삼겠다."
파파팟.
<아이언헤드 가문이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첫 봉신 기사 '김도진'을 얻었습니다.>
알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봉신 기사에게 장원을 할당해 주십시오.>
언제나 그렇듯 노바의 새로운 지식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철두는 눈앞에 뜬 시뮬레이션 지도를 보며 영토를 할당했다.
바로 딛고 선 땅.
<'신서울'을 기사 '김도진'의 장원으로 하사합니다.>
처음으로 얻은 봉건 신하에게 첫 영토가 불허되었다.
"헛!"
김도진은 눈앞에 뜬 세력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밥이나 먹고 가라."
"예에."
김도진이 얼떨결에 자리에 앉자 구정욱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여, 영주님."
"어, 너도 밥 먹자."
"어째서입니까?"
"뭐가?"
"제가 뭐가 못나서 기사로 삼아주지 않으십니까?"
"너도 장원이나 다스리게?"
"예?"
"공격대는 어쩌고?"
"예?"
"뭐, 원하면 마을 하나 봉토로 줄게."
"...아닙니다. 저는 영주님의 충실한 검이 되겠습니다."
철두는 슬쩍 웃고 말았다.
"술 한잔하자."
"예에."
철두는 김도진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왜 절했냐?"
"...그저 제 한 몸 희생해 얄팍한 동맹이라도 체결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후후."
김도진은 말주변이 없는 자다.
그저 속내를 거짓 없이 밝히니, 철두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레벨 5의 초인의 경지인 소드마스터 아닌가?
절로 호감이 드는 이다.
신서울을 직접 다스리는 것도 아니고, 대신 다스릴 놈을 두고 간접적으로 지켜주는 거야 뭐가 어렵겠는가?
"영약은 어디서 구했나?"
"렙틸인들과의 전투에서 우연한 기회에 노획했습니다."
"으음."
철두는 김도진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적잖은 친분을 쌓았다.
신서울을 장악한 김도진이 강철두의 아이언헤드령 휘하로 들어간 것을 공표하자, 고인물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대거 이주할 것처럼 굴던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이주를 포기하는 바람에, 약속의 날이 되어 신서울을 떠나기로 한 고인물들은 40명 수준이었다.
철두가 지켜준다는데, 굳이 이룩해놓은 터전을 버리긴 아까웠다.
초보 노비스는 그보다 더 많았는데, 나름 스카웃해서 모셔가는 것이라 대우가 나쁘지 않았다.
본래 그들의 전공을 살려 제대로 된 연구를 해보려고 해도, 여러모로 자원이 몰리는 아이언헤드성이 더 조건이 나았다.
연구원이 150명 수준이고, 그에 딸린 가족들까지 450명의 대인원이 이주하기로 했다.
고인물들까지 합쳐서 거의 500명에 육박하는 민간인들.
호위는 210명의 공격대원들.
"정욱이."
"네, 영주님."
"애들 데리고 조심히 가라."
"네, 알겠습니다."
철두는 에르미스와 함께 그리핀 오식이를 타고 동남쪽으로 향했다.
3군단이 주둔 중인 사령부였다.
*
아미르 왕국에는 왕국령 외에 큰 세력을 가진 제후가 넷 있었는데,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건 북쪽의 더스트 후작이었다.
더스트 후작령인 N352 맵은 아미르 왕국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N352의 서쪽은 사막, 북서는 초보자 안개, 북쪽은 오크들의 왕국과의 국경지였다.
본디 북쪽의 오크와의 분쟁지역만 관장하면 되었는데, 몇 해 전 갑작스럽게 북서쪽의 초보자 안개 구역이 걷히고 지구인들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새롭게 나타난 이곳의 국경을 책임지는 건 더스트 후작의 충실한 검 나세르 남작.
나세르 남작은 가문의 기사 20과 영지병 2천을 이끌고 이곳 국경에 주둔하며 조금씩 조금씩 간을 보고 있었다.
"남작님! 적의 허실은 진즉에 파악이 끝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남쪽 전선에서는 연일 승전보를 올리고 있는데, 우리도 더는 소극적인 방어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미를 왕국은 지금 지구인 무리 둘과 대치 중인데, 지금 코앞의 전장인 신서울의 무리가 하나고, 저 아래 남쪽 국경지의 아이언헤드령과 맞닿은 전장이 둘이다.
아래 남쪽 전장은 야만인 무리처럼 수시로 침범하는 지구인들을 연일 격퇴하며 노예로 삼고, 그 장사를 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으으음."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승전보가 전해지면, 중앙귀족들도 관심을 가질 터. 지원 병력을 더 받아내면 신서울의 도시도 충분히 넘볼 만합니다."
그간 서로 국경을 맞대고 한 대씩 주고받는 국지전 형식의 전투만 치렀다.
"출전해야 하옵니다."
"대회전 한 번이면 국경의 적들은 쓸려나갈 것입니다."
그간 소극적인 전투에 좀이 쑤시는지 기사들이 아우성이었다.
"그만, 그만."
"...."
나세르 남작은 봉신 기사들의 불만을 더는 무마시키기 어려움을 진즉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더스트 후작님께 청을 한 지 꽤 되었다. 그 답신이 오고 있으니 경들은 그리 재촉하지 말라."
"오! 지원 병력이 오는 것입니까?"
나세르 남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핀 기사단 다섯과 마법사들이 지원 병력으로 온다."
"오오오오!"
최근 착안한 전술을 생각하면 하늘에서 퍼붓는 마법 공격은 적진을 붕괴시키기 안성맞춤인 전력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리핀 기사 다섯이 나세르 남작이 주둔하는 군영에 도착했다. 나세르 남작은 병사들을 하루 배불리 먹인 후에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238화 돌고 돌아 부하
"사령관님! 아미르 왕국군이 진군하고 있습니다."
정찰 장교의 보고에 김춘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이 씨가 되었군."
아미르 왕국군을 핑계로 신서울로 철수하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진짜 대규모 진격을 해왔다.
"초소마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모두 집결하라 이르게."
"예! 사령관."
3군단이 분주해졌다.
3군단의 주력부대는 모두 김춘배가 이끌고 온 마적단.
최초 김춘배를 따르던 10인의 마적단은 이후에 300명까지 불어났는데, 그중에는 모험가 출신의 지구인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이 제국인이었다.
김춘배는 제국의 화전민 마을을 들러 약탈하고 징집하는 것으로 마적단의 세를 불렸다.
마적단은 거의 범죄자 집단이나 다름없지만, 그 전투력은 쓸 만하여 3군단의 중추 부대가 되기 충분했다.
시민파의 지지를 받는 3군단의 일반병들은 대부분이 초보 노비스 출신의 병력들이다.
그 수가 3000명에 이르지만, 노바의 세계에서는 신병이나 다를 바 없어 전력에 큰 보탬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김춘배는 이들에게 장창진만을 가르쳤다.
약한 다수가 수의 우위를 두고 펼치는 진법 중에 고슴도치 장창진만 한 게 없다.
여기저기 넓은 동남쪽의 국경지대의 초소에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집결하자 주력부대 300명, 신병 2500명의 대규모 부대가 만들어졌다.
척후에 의해 적의 진격 소식이 들린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계속된 척후로 적의 위치를 가늠해보면, 내일 점심쯤엔 적과 조우하게 될 터다.
마적단 출신의 정예부대를 중심으로 대군이 진군했다.
대군이 진군하는 동안 계속해서 척후가 오가며 적과의 거리나 다른 유격부대나 별동대가 없는지 수시로 체크했다.
얕은 동산에 오른 그들은 곧 적과 조우했다. 적들도 반대편 고지를 점하고 진을 꾸리고 있었다.
"여기에 군영을 꾸린다!"
"예, 사령관님!"
양쪽 구릉에 진영이 꾸려졌다.
거리는 3킬로미터 정도.
말을 달리면 금방이지만, 중간 지대가 푹 꺼진 얕은 골짜기라 내리막을 내렸다가 다시 고지를 올라야 하니, 먼저 공격하는 쪽이 지형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했다.
"척후!"
"네, 사령관!"
"적 병과를 살펴라."
"네!"
"주변 지형에 다른 매복 부대가 없는지도 살펴라."
"네, 알겠습니다!"
부지런히 척후를 돌리는 사이 군진이 완성되고, 저녁이 되었다.
김춘배와 장교들은 적 군영을 살피며, 그들의 여유로움을 보고 당장 전투가 일어나진 않으리라 판단했다.
"저녁 식사 보급하라!"
"네! 사령관님."
여기저기 솥이 걸리고 석식이 보급되었다.
김춘배는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날짐승 다섯이 다가오고 있었다.
"궁병! 궁병!"
"헛! 하늘이다!"
저녁노을도 저문 땅거미 진 시간대였는지라, 시야 극히 좁아져 미처 파악하질 못했다.
이미 군진의 상공에 다다른 그리핀을 향해 우수수 화살을 날렸으나, 그리핀은 아슬하게 화살이 닿지 않을 정도의 고도만을 유지했다.
"사령관님! 어찌합니까?"
"...."
장교의 물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뭇한 하늘 위를 나르는 그리핀 다섯 마리.
그 위에 둘씩 짝지어 사람이 타고 있다.
뒤에 매달린 자들의 지팡이에 빛이 흘러나오자 김춘배가 기겁해 소리 질렀다.
"방패! 은폐하라!"
"은폐!"
숙련병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몸이 반응하듯 여기저기 흩어져 방패나 나무판자 따위를 들어 올렸다.
화르르륵.
다섯 개의 불덩이가 날아왔다.
콰앙.
"끄아아아악!"
"크억!"
"불, 불이야!"
여기저기서 비명과 혼란이 난무했다.
고작 다섯 개의 불덩이지만 사망자도 나왔고, 여기저기 나무로 꾸려진 진채와 천막에 불이 붙었다.
화르르르륵. 콰앙!
2차 불덩이가 날아오고, 병사들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분대별로 움직여!"
"방패로 은폐!"
"궁수들 대응 사격!"
쇄애애액.
날아간 화살은 그리핀에게 닿지 않았으나, 마법사들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흐트러트리기 위해 꾸준히 발사했다.
여기저기 혼란한 와중에 적은 진채를 다 태울 기세로 불덩이를 날려댔다.
"젠장!"
김춘배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아군 진영에 마법사라도 있으면 방어막이라도 펼치겠건만, 귀한 마법 전력은 전무했다.
마적부대의 정예병들 중에도 마법사는 아예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김춘배는 투창을 하나 쥐곤, 신중하게 적을 노리고 몸을 홱 돌리며 쏘아냈다.
쇄애애애액!
위협적으로 날아간 투창의 궤적을 보며 김춘배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하지만 그리핀의 앞에 탄 기수가 허수아비는 아닌지라, 사신의 낫 같은 긴 삭을 휘둘러 투창을 튕겨내 버렸다.
저 정도 반응과 동체시력이라면 분명 기사다.
고작 그리핀 다섯.
그 위에 올라탄 기사 다섯과 마법사 다섯으로 인해, 이제 막 꾸린 군영이 무차별적으로 유린당했다.
화르르르륵.
대응 방법이 없으니, 김춘배는 결국 군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라!"
"집결! 집결하라!"
"분대별로 후퇴! 물러난다!"
후퇴 명령에 너 나 할 것 없이 군영을 버리고 물러났다. 오합지졸처럼 물러난 병력을 따라 불덩이가 날아들었으나 그 명중률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그리핀 다섯이 방향을 꺾어 되돌아가자, 김춘배는 군을 추슬렀다.
"피해 보고! 신병 112명 전사. 마적부대 2명 전사."
그을린 화상 따위의 부상병은 집계하지도 못했다. 여기저기 붉게 피부가 달아오른 자들이 부지기수다.
그나마 사망자가 적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시발."
낭패다.
제대로 된 전투도 아니고 일방적인 폭격으로 인해 보급품의 유실이 크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곤두박질친 사기다.
이들의 주력 전술은 단단한 창진과, 주격 부대인 마적단을 이용한 기병 돌격뿐.
하늘에서부터 퍼붓는 공군 전력에 대한 대응 수단이 없다.
"사령관님! 어찌합니까?"
"...."
김춘배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물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까지?"
"예?"
"신서울에도 마법사는 없네."
"그, 그치만. 이대로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가만히 눈을 감은 김춘배는 생각을 정리했다.
계속 군을 물려봐야 결국 신서울이다.
신서울마저 버리고 떠날 것인가?
마땅한 대응 수단도 없이 신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꼴을 보는 것도 우습다.
"지금 쳐야 한다."
적이 물러갔다.
마법사라고 무한정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마력의 양이 정해져 있으니....
지금이 적기다.
"그치만 지금은 무리입니다!"
사기가 말이 아니다.
지휘관의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손발이 되어주는 병력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젠장! 어쨌든 다시 군영을 탈환한다."
"...알겠습니다."
"진군하라!"
오합지졸처럼 쫓겨난 병력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막사에, 식량에, 대부분의 보급품을 저 언덕 위의 진채에 두고 왔으니, 이대로 영영 후퇴할 게 아니라면 돌아가 정비하는 게 마땅하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환자처럼 움직인 병력이 다시 진영 위에 다다르니, 깜깜한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많았다.
반대편 언덕의 적 진영은 고요한 것이 편히 휴식하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으나, 아군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불을 꺼라!"
"목재를 비스듬히 세워 지붕을 보강하라!"
"땅을 파라! 참호를 만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야 하는 법.
마법 공격에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으니, 지형을 이용해 극복하려 했다.
파이어볼은 그리 큰 범위공격은 아닌지라, 잘 은폐해 숨기만 하면 화재 외의 큰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진지의 보강이 마무리될 때쯤이 되니,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제 좀 교대로 쉬어 보려는데, 적진에서 요란한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
"와아아아아!"
곧 요란한 함성과 함께 적 언덕에서 기마대가 새카맣게 몰려 내려왔다.
"맙소사!"
"끝이야!"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하면, 체력을 회복할 길이 없고, 정신력이 고갈되어 마음도 약해진다.
야습과 함께 밤새 시달린 와중에 동이 트자마자 적진에서 사기 충만한 적 기병대가 새카맣게 몰려오니, 싸움이 나기도 전에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핀이다!"
설상가상 어젯밤에 그들을 괴롭힌 그리핀들이 하늘 위에 떠올랐다.
"후, 후퇴해야 합니다. 사령관!"
쫘악!
"허억!"
"지금 후퇴를 명령해 병력을 몰살시킬 셈이냐!"
장교들마저 전의를 상실해 싸워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후퇴를 종용하니, 김춘배는 눈을 감았다.
"...젠장."
그가 3군단을 책임진 지 고작해야 한 달 보름.
그 휘하의 마적단 출신 300명이야 충분히 정예화되었지만, 신병들의 교육이 아직 일천하다.
군심을 다스리기엔 너무 시간이 부족하고 적 기마대의 창칼은 너무 가까이 다가왔으니.
"진영을 갖춰 군을 물린다. 적의 예봉은 마적부대가 막는다."
김춘배의 명령이 떨어졌다.
"집결!"
"진을 꾸려라!"
"모여!"
"다들 모여라!"
급하게 명령이 전달되고 마적부대가 집결했다.
그 수가 100여 기에 이르자 김춘배는 출진을 명했다. 더 늦었다간 적 기마대가 오르막에 오른 뒤가 될 터.
지금 들이쳐야 한다.
"가즈아!"
"공겨어어억!"
두두두두두.
마적부대 100기가 언덕을 내려가 적의 기마대 선봉과 부딪혔다.
콰앙!
말이 서로 달리던 와중에 충돌한 이들은 공격 수비 따질 것 없이 낙마해 전사자가 속출했다.
곧 적아의 구분 없이 병력들이 어우러지니, 혼전 와중에 쓸려나가는 건 신병들뿐이었다.
"크아아악!"
설상가상으로 하늘에 있던 그리핀들이 낙하했다.
쿠웅, 쿠우웅!
여기저기서 그리핀들이 고도를 낮추다가 이내 바닥에 처박혔다.
"어?"
무언가 공격을 위해 내려섰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투박한 착지.
아니, 충돌.
"아이언헤드다!"
김춘배가 서둘러 고개를 위로 꺾었다.
다섯 마리의 그리핀이 땅에 고꾸라졌는데, 하늘 위에 여전히 한 마리의 그리핀이 활공하고 있다.
그 가슴에 새겨진 문장이 낯이 익었다.
두 자루의 도끼가 교차한 그림.
"강철두다!"
김춘배는 갑자기 등장한 그의 의중이 궁금했으나,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전장의 상황이라 힘껏 소리쳤다.
"우군이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원군이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이는 하한가가 상한가로 바뀐 것만큼이나 극적인 변화였다.
후우우우웅!
김춘배의 마적부대와 적의 기마부대가 뒤엉킨 그곳에 오식이가 내려앉았다.
훌쩍 뛰어내린 철두의 손에는 두 개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새벽 어스름과 할아버지.
두 개의 검을 쥔 철두가 적 기병대의 후방에 떨어져 내리더니 맹렬히 회전했다.
파파파팟.
소드마스터의 상징과 같은 빛의 칼날이 믹서기처럼 회전했다. 순식간에 적 후방이 초토화되며 말 사람 할 것 없이 모조리 갈려 나갔다.
몇이나 죽었을까?
고작 한 호흡 만에 주변의 모든 것이 썰려 나가,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전장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어질러진 살덩이와 핏물이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파파팟.
개중에 기사들이 많은지 여기저기서 전리품만 남기고 시체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
학주가 찾아온 야간 자율학습장 마냥, 조용한 적막이 전장에 가득했다. 철두는 거기서 두리번거리다 구면의 사내를 마주했다.
"김춘배!"
강철두의 고함만이 전장에 또렷했다.
"...예."
"아직도 내 부하가 될 생각이 없나!"
"...."
김춘배는 강철두가 어지간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터무니없는 실력 앞에 미쳤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그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는 것이, 내심으로 그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이 죄스러울 정도의 경외감이 김춘배를 강타했다.
"따르겠습니다."
"후후."
철두가 소나따를 소환해 그 위에 올라탔다.
"따르라."
"네!"
철두가 선두에 달리니, 살아남은 마적단들이 홀린 듯 그 뒤에 말을 달렸다.
목표는 언덕 위 적 군영이었다.
239화 가라, 춘배!
두두두두두.
전장의 상황이 반전되는 데는 단 한 명의 합류로 충분했다. 아니, 둘의 합류로 공수가 완벽해졌다.
"어이, 자네들. 저놈들은 생포해! 죽이지 마!"
"어어? 예. 근데 누구신지...."
"아이언헤드 친구다!"
"아, 예에."
드워프 에르미스의 지시에 손발이 잘려 나간 기사들이 두들겨 맞다가 포박되고,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었다.
에르미스는 빠르게 혼전 중인 전장을 정리하더니,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려, 아군 진영에 적이 없게 만들었다.
에르미스의 압도적인 무력과 적재적소의 명령에 장교들은 홀린 듯 따랐다.
"모두 포박했습니다."
"잘했다."
"이제 뭘 하면 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예?"
"나는 이방인이야. 여긴 자네들 군대 아닌가?"
"아!"
장교들이 집단 최면이라도 깨어난 듯 외쳤으나, 내심으론 에르미스가 지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마적단의 정예가 죄다 저기 앞서가는 강철두를 따라가 버려, 고참병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었다.
"클클, 다들 구경이나 해."
"아, 네."
"진영을 수습해라!"
"부상자들을 옮겨!"
장교들이 분주히 오가며 전장을 정리하는 사이 강철두의 소나따는 언덕 위를 오르고 있었다.
그 뒤에 200기의 마적부대가 함께였다.
두두두두두.
그들은 거대한 무쇠 얼룩말을 따르며 알 수 없는 고양감에 몸을 떨었다.
아직도 끔찍하며 아름다운 핏빛 소용돌이가 눈에 선하다.
괴물.
사람 같지도 않은 자가 지금 그들을 이끌고 있다.
짧은 기마 돌격 동안 죽거나 부상당해 이탈한 자들이 3할이 넘었지만, 지금 강철두의 뒤를 따르는 200명의 마적부대원들은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질 것 같지 않다.'
홰애애애액.
적 진영에서 쏘아 보낸 화살이 새카맣게 몰려 하늘을 가렸다.
"후후후."
선두에서 무쇠 얼룩말을 탄 초인이 그저 웃더니, 미친 바람이 불어와 화살들을 역으로 하늘로 날려 보냈다.
파바바바박!
날아간 화살은 김 여사보다 더 우아한 유턴 실력으로 쏘아 보낸 자들을 향해 되돌아갔다.
"크아아악!"
"으아악!"
적 기병 200기가 돌격해오는데, 누가 화살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겠나?
방패는커녕 두 손으로 쥐어야 하는 긴 창을 들고 앞 열을 이루던 병사들이 화살 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긴다.'
한층 더 생각이 공고해진다.
어찌 질 수가 있으랴?
칼 두 자루로 미친 듯이 적을 도륙한 자가, 신비로운 마술마저 부리는데 이 전장에서 어찌 패배가 있으랴.
"돌입한다!"
"충!"
김춘배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곤, 어쩐지 편안해진 마음에 피식 웃었다.
'애당초 깜냥이 아녔던 거지.'
신서울의 김 상사는 정부의 뜻에 반해 스스로 탈영병이 되었다. 그리고 마적단의 두목이 되었고, 그 세를 불려 다시 금의환향했다.
지구와 단절된 위태로운 신서울을 차근차근 그가 집어삼킬 차례였다.
정보에 둔감한 그들과는 다르게, 애당초 모험과 정보에 유난히 집착한 김춘배는 노바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월등했으니까.
허나, 부질없다.
한 부대를 넘어, 일군을 이끌어봤으나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했다.
주제 넘는 짓이었다.
어쩌다 다시 나타난 괴물같은 사내를 따르기로 결정하니, 이리도 마음이 편안하고 용기로 가슴이 충만해질 줄이야.
"추우우웅!"
김춘배의 선창을 들었음인지, 그 후열의 기병들에게 전염되듯 구호가 울려 퍼졌다.
긴 꼬리를 남긴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마대 선두의 무쇠 얼룩말은 적 진영에 닿았다.
촤아아악.
그의 손에 들린 두 자루 검이 지나는 곳마다 태풍에 떨어지는 과수처럼 목과 사지가 날아오르니, 참으로 잔인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촤아아악.
기마 돌격이 멈추면 그때부터 기마대의 위력은 반감하고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선두에 선 이가 제집처럼 헤집으며 나아가니 그 뒤를 따르는 기병들은 그저 무기를 한두 번씩 휘저으며 따르기만 하면 적 진영이 벌어졌다.
"마, 막아라!"
나세르 남작은 지금 이 순간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어제는 지원 나온 그리핀 기사단 다섯과 이른 승전의 축배마저 들었다.
앞으로 신서울을 약탈해 수많은 노예를 얻어 농지를 늘릴 생각에 전리품 배분마저 약속했다.
'이럴 수가.'
그리핀.
아미르 왕국이 그간 사력을 다해 연구한 그리핀 부대 양성이었다.
야생의 그리핀은 길들이기도 어렵기에, 대륙을 다 뒤져도 그리핀 라이더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그리핀 라이더를 아미르 왕국은 기사단으로 양성할 정도로 테이밍에 성공했다.
온순한 그리핀을 브리딩하고 브리딩해, 결국 준 가축화까지 성공한 그들이다.
분명, 아미르 왕국의 주요 전략자산이지만, 한 마리를 야인 영주가 가져간 것은 알고 있다.
그것으로 시비가 붙어 전쟁 중인 것이 남부 전선의 아이언헤드인데....
"왜, 왜 여기에?"
나세르 남작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이언헤드에게 왕국의 3검, 나룬 백작이 당한 것은 이미 전해질 대로 전해진 소식이다.
나세르 남작도 소드마스터이지만 나룬 백작과는 그 격차가 큰데, 지금 강철두를 마주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미친 얼룩말을 타고 일직선으로 오고 있다.
"도, 도망쳐라!"
"예? 남작님!"
나세르 남작은 패닉이라도 온 사람처럼 미친 듯이 후방으로 도망쳤고 강철두는 허리춤의 투척도끼를 하나 빼 들어 곧장 날려버렸다.
후우우우웅, 차앙!
나세르 남작도 영 쭉정이는 아닌지라, 날아오는 투척도끼의 기척을 느끼고 빠르게 검을 쳐내 막아냈다.
"남작님! 도망치시면 안 됩니다!"
"맞습니다!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 말하는 기사들은 나세르 남작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었다.
"늬들이 싸워라! 가서 막아!"
"저희는 남작님을 모셔야지요."
"이 개새끼들아. 가서 막아!"
"같이 가야지요!"
이 시발놈들.
말을 해도 들어 먹질 않는다.
나세르 남작이 말고삐를 챘다.
생각해보니 적은 말이 아니라 그리핀을 가지고 있는데 죽자사자 도망쳐봐야 놈의 손바닥 안이다.
"전원 합공한다!"
"예!"
나세르 남작의 주위에 아직 7명의 기사가 있다.
여기에 소드마스터는 나세르 남작이 유일하지만, 이 정도 전력이면 맞서 싸워볼 만하지 않을까?
"후후후, 적장이구나!"
"이노오오옴!"
철두는 소나따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그의 오른손에 들린 할배검이 휘둘러졌다.
까아앙!
빛에 휩싸인 검끼리 부딪치며 어느 하나가 잘리거나 부러지는 건 면했지만, 검을 쥔 자의 힘이 워낙 차이가 컸다.
커억!
나세르 남작이 낙마했다.
"남작님!"
쇄애애애액!
기사들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철두의 두 손에 들린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하나씩 그 생명이 꺼졌으니.
털썩.
일곱 번의 칼질에 일곱의 기사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전리품을 보지도 않고 철두가 고삐를 채곤 기수를 돌렸다.
적장이 후방으로 도망치느라, 이미 적 군진은 돌파한 지 오래고, 주변에 적병은 없다.
히이이이잉.
"허어억, 허어억."
여기저기서 말을 다독이며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적단은 믿을 수 없는 신위를 보여주는 강철두의 신위에 고양감이 가득했다.
"춘배!"
"네, 영주님."
김춘배는 이제 아예 욕심을 다 내려놓고 씩씩하게 답했다.
"처리해라."
"네!"
김춘배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나세르 남작에게 다가갔다.
"으으으으."
그는 단 한 번의 공수 교환으로 이미 속이 진탕되어 피를 한 움큼 뱉어낸 뒤였는데, 눈빛엔 마지막을 직감한 독기가 감돌았다.
"시발, 와라."
갈 때 가더라도 몇 놈은 더 죽이고 가리라.
고된 부활의 길을 걷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부활이야 할 테니까.
쇄애애액.
마지막 마력을 쥐어 짜낸 검기가 화려하게 검을 장식했다. 나세르 남작의 대시를 김춘배는 그저 묵묵히 막아냈다.
까앙.
"어, 어째서!"
"너만 검기 쓰냐."
김춘배의 검에도 검기가 넘실거리며 맺혀 있었다.
쇄애애액, 터억!
연이어 휘두른 검이 나세르의 목을 훑고 지나갔고, 적장이 죽었다.
"적장을 처리했습니다."
"잘했다."
"...."
김춘배는 묘한 기분이었다.
보고를 올리고, 칭찬을 받고....
'왜 뿌듯하지?'
수직 조직의 군대 문화는 더는 내게 맞지 않다고 여겼는데.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상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그 부조리함이 헛구역질 나도록 싫었는데.
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냐?
'이분이라면 허튼 명은 안 하실 터.'
애써 이유를 찾아보지만, 이미 굴복해버린 마음에 어떤 핑계를 대어본들 공허한 자존심 챙기기였다.
"반전, 따르라!"
"충!"
"추우우우웅!"
김춘배가 크게 소리치곤 나는 듯 다시 말에 올라타 강철두의 뒤를 쫓았다.
이미 진영 한가운데가 돌파된 적들은 기사 전력마저 모조리 죽어 나가 고참병들의 지휘 아래 벌벌 떨며 겨우 창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항복하면 살 것이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죽이지 않겠다!"
철두의 말에 기병대가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돌진하니 몇몇 창병진 빼고는 모조리 창을 버리고 투항했다.
"춘배."
"네! 영주님!"
"정리해라."
"넵!"
강철두는 전장 정리를 맡기곤 에르미스를 찾았다.
"오! 활약 잘 보았네. 묠니르를 쓰지도 않고 잘도 싸우더군."
"후후, 전사는 장비를 가리지 않는다."
"허, 참."
에르미스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전사 운운해도, 조금만 상황이 불리했으면 묠니르를 꺼냈을 철두다.
이제는 강철두란 바바리안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 같아 에르미스는 그저 웃고 말았다.
"말한 대로 여기 잡아두었네. 한 놈은 죽었어."
"후후, 아깝군."
철두가 다가가 포로를 살폈다.
갑옷이고 장비고 홀딱 벗겨져 꽁꽁 묶인 기사가 넷, 마법사가 다섯이다.
"그리핀 한 마리 날렸군."
"별수 없는 일이지."
정신을 차린 포로가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흥! 아무리 고문하고 설득해도 소용없다! 절대 네놈에게 그리핀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후후후."
철두는 그저 오른손을 내밀었다.
"꾸이."
전령 꾸이가 그리핀 기사에게 찰싹 달라붙으니, 곧 그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후후후."
퍼퍼퍼퍽. 퍼퍽!
스컥, 스컥!
철두는 패고 자르고 붙이고를 한참 이어가다가 끝내 목숨이 간당간당한 기사를 보며 쪼그려 앉았다.
뿅!
포션을 따고 병을 입에 물려 주었다.
"꾸르르륵, 마츠지, 꾸르륵."
억지로 포션을 먹은 기사는 회복했고, 철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하루 종일 할 수 있어."
"...."
"후후후."
퍼버버벅.
동이 터오르며 시작된 전장은 금세 끝났으나, 고문을 빙자한 구타는 점심 무렵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드, 드리겠소."
"후후, 잘 쓰지."
철두는 그리핀을 양도받았다.
고문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나머지 세 기사들은,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그리핀을 양도했다.
"좋아. 이제 인벤토리에 든 걸 모두 내어놓는 놈은 그대로 풀어줄 것이고, 아닌 놈은 죽인다."
"내, 내어놓겠소."
"나도!"
철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인벤토리를 싹 비운 기사들을 정말 풀어줬다. 그리핀 기사단원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서둘러 말을 타고 도망치는데, 철두는 정말 추격하지 않았다.
"자, 이제 너희는 내게 마나의 맹세를 해라."
"저, 저는 이미 마나의 맹세를 했습니다."
마법사 중의 하나가 소신 발언을 했지만.
콰직!
철두의 주먹이 마법사의 머리를 터트려버렸다.
"히엑!"
"나머지는?"
"매, 맹세하겠습니다!"
마법사 넷이 순조롭게 부하가 되었다.
구경하던 마적부대들은 모두가 핼쑥한 얼굴로 침묵했다. 절반은 범죄자나 다름없는 집단이지만, 철두 같이 흉악한 자는 처음 보는 그들이었다.
240화 퀘스트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