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신화
"신께 이 무구를 바치옵니다!"
대가로 소원을 바라거나, 무언가 요구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쿠찌가 큰 소리로 외치며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니 거대한 검이었다.
하지만 이미 산처럼 커진 화염 거인 수르트에게는 이쑤시개로 보일 정도로 작은 검이었다.
드워프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 쿠찌가 칠 주야를 두드려 완성한 검이다.
마법 부여까지 아낌없이 들어갔으며, 강화의 망치로 강화까지 끝마쳤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으니....
[....]
거대한 화염 거인 수르트가 손을 뻗자 검이 이끌리듯 부유해 날아갔다.
츠츠츠츳.
검이 불타기 시작했다.
점점 흐물흐물해지며 녹아 없어지는 검을 보며 쿠찌가 탄식했다.
"아...."
하지만 이내 녹아내리던 검이 활활 타올랐다.
화르르르륵!
거대한 불길이 되어 타오른 검은 끝없이 커져, 산처럼 거대한 화염 거인이 들기에도 안성맞춤인 거검으로 거듭났으니.
파팟!
거대해진 검이 번쩍하더니, 이내 수르트가 번쩍였고, 그 빛무리는 그대로 낙하해 쿠찌를 강타했다.
슈슈슈슈슉!
"아아아아!"
쿠찌의 몸에 광명이 깃들었다.
신의 무기를 빚은 장인.
성물로 거듭난 무기를 빚은 장인에게 신이 직접 물으니.
[이 검의 이름이 무엇이냐?]
"레바테인이라 불러주소서."
[이 검으로 내가 무엇을 하길 바라느냐?]
쿠찌는 잠깐 망설였다.
파괴와 살육의 신에게 어찌 구원과 재건을 바랄까?
이미 거절당한 청을 다시 뱉는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았다.
"노바의 신에게 제타를 멸한 죄를 물어 주소서."
[너의 청은 이루어질지어다. 위대한 장인이여.]
"아아."
쿠찌가 고개를 처박고 몸을 떨었다.
그의 몸에 깃든 광휘가 서서히 사라지자 철두는 지체하지 않고 그의 몸을 들쳐업고 뛰었다.
"가자고!"
타타탓!
네 사람이 황급히 멀어졌다.
산을 내려가야 한다.
수르트가 거인화하며 달라붙은 용암과 화염은 모두 산 정상을 가득 채운 용암 분지에서 비롯된바, 거대한 화산이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내려주시게."
철두가 달리는 와중에 쿠찌를 던지자, 정신 차린 쿠찌가 가뿐하게 착지했다.
탓.
"최초의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자네가 우리를 이끌게."
"뭘?"
"미션을 포기할지, 완수할지 말일세."
"당연히 완료해야지."
"그럼 저리로 가세나."
쿠찌가 가리킨 곳은 다섯 개의 화산이 둘러싼 분지 바깥이었다.
그곳에 그나마 사람들이 살 만한 땅이 있고, 또 미션의 주요 목적인 버려진 베이스캠프들이 있다.
타타탓!
화염졸개 마을이고 나발이고 그들도 요동치는 화산 분출과 지진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냥이고 나발이고 신이 일으킨 재해 앞에 서로 생존이 우선이라 다들 화산에서 멀어지기 바빴다.
한참을 달린 끝에, 얼기설기 바위로 쌓인 성이 나타났다.
지금 위치한 지대가 높다 보니 바위 무더기 뒤가 훤히 보였는데, 화염졸개 마을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건축물들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사람의 손을 탄 요새다.
비탈길을 나는 듯이 달려 내려갔다.
화산지대를 벗어나니 매캐한 유독가스로 가득 찼던 하늘도 조금 개었다.
"다 왔다! 아르엘라!"
"알았어!"
파파팟.
"끼아아아아!"
두 마리의 그리핀이 소환되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철두는 쿠찌를 들고 오식이 위에 올라타 오랜만에 시원한 비행을 했다.
"으으."
"후후, 멀미가 난쟁이 종특이냐?"
"시끄럽고 비행이나 하게."
달리기가 아무리 빠른들 날아가는 것만 할까.
순식간에 요새가 가까워졌다.
성벽처럼 쌓은 돌무더기를 지나 안쪽에 착지했다.
<베이스캠프 복구율 97%>
"루이비숑! 저 성벽을 보수하게나!"
"네."
쿠찌와 루이비숑은 성에 들자마자 각자 알아서 움직였다. 드워프는 기사나 주술사나 공통적으로 장인이며 뛰어난 건축가인지라, 한눈에 요새의 상태를 파악하고 미진한 부분을 보수했다.
철두는 가장 높은 바위에 올라 화산을 보았다.
쿠르르르릉.
여전히 땅은 흔들리고 화산에서 분출된 연기가 자욱하다.
그리고 천천히 흘러오는 용암을 보았다.
요새의 위치는 절묘했는데, 불길의 강으로 향하는 등산로 초입에 불룩 튀어나온 지대였다.
용암이 여기까지 흐른다 하더라도 양옆으로 흐르지, 지대가 높은 요새까지는 닿지 않을성싶었다.
"무슨 생각을 해?"
"흐음, 이 베이스캠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싶어서."
"으음."
철두의 궁금증에 아르엘라도 고민을 함께했다.
분지형 화산지대 불길의 강을 중심으로 이런 요새들이 빙 둘러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몇 개나 될까?
"요새니까, 저기 몬스터들을 막으려는 거 아닐까?"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수비형 요새 같지는 않은데?"
애당초 미션 퀘스트도 베이스캠프의 정상화.
"쳐들어가는 쪽이겠지."
불길의 강을 향해.
공격을 위한 전초기지.
무엇을 공략하기 위함인가?
쿠어어어어.
저기 화산지대 위에 불타는 거인이 보인다.
웅크린 화산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듯 웅장하고 거대하며, 경이적이다.
몬스터라는 생각보다는 재해, 재앙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은 존재.
"으음.... 신?"
"후후, 공략하려면 저놈뿐이긴 하지."
철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바의 퀘스트가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다음번에 다시 불길의 강이 미궁으로 나타나면, 그때의 히어로 미션은 신을 사냥하는 것이지 않을까?
노바의 의중에 따라.
"바둑알이 된 기분이군."
"바둑알?"
"장기말 말이다."
"장기말?"
철두가 인상을 썼다.
소통의 팔찌는 획기적인 번역기구이긴 하지만, 이토록 한 번씩 소통의 오류를 일으킨다.
"전장의 병사들 말이다. 노바가 장군인 셈이지."
"아아!"
아르엘라가 그제야 알아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시하는 대로 행하는 기분이긴 하지."
"너도 퀘스트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나?"
강철두는 퀘스트 연구자 김춘배의 말이 생각나 물었다.
아르엘라는 강철두를 돌아보며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무슨 그런 멍청한 질문이야? 당연한 일이잖아."
"어?"
"세계마다 의지가 있는 건 당연하잖아? 노바라고 다를 것 같아?"
"...."
"너 발할라 출신 맞냐?"
"그건 그냥 신이 아니냐?"
"허, 신이 뭐라고 생각해?"
"음?"
철두에게는 조금 생소한 질문이었다.
신이 뭐냐니.
"신이 신이지."
"하, 행성의 의지가 신이야."
"...?"
"지구에서 너무 오래 살았나 봐. 지구에는 신이 없다고 했지?"
"있긴 있다. 아니, 종교만 있는 건가...."
"제타처럼 실체가 없다 해도 신은 신이야."
"...."
"발할라도 그렇잖아."
발할라 행성의 발할라도 그렇다.
관념적 신이다.
아니, 이상향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요정에겐 구도자이며, 바바리안에겐 닮고자 하는 이상향이었으며, 제국인들에겐 세상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제타의 신은 적극적이군."
"그런 셈이지."
발할라의 신도, 지구의 신도 방향만 가르쳐 줄 뿐, 직접 행하는 건 신이 아닌 사람이다.
행성을 보살피는 것이 신이든 인간이든, 군중의 의지거나, 신의 의지거나....
"확실한 건 제타는 이제 움직이는 거군."
"지구도 움직이고 있잖아."
"...?"
"고구려."
"그건 국가다."
"...."
아르엘라가 묘하게 철두를 보았다.
"정점에 이른 왕은 결국 신이 되려 하지."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된다는 거냐?"
"왜 안 돼? 쿠어스가 그런데."
쿠어스의 성지에서 그 결과물을 보았다.
인간이었으나 드래곤을 잡고 신이 된 자.
"지구에는 없어? 신이 된 인간."
"...있긴 하지."
아르엘라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메마른 슬픔이 가득했으니.
'신이 되어야 종을 구할 수 있으니.'
그것이 공주의 의무이자 태생의 이유.
그 순간만을 바라고 있지만, 또 이 단순한 바바리안과 함께하다 보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미루고 싶어지기도 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지구의 예비 신."
"흥. 난 발할라 출신이다."
"그럴까?"
"무슨 소리냐?"
"넌 지구 채널 소속이니까."
"소속은 지구지만 내 상태창의 출신은 발할라다."
"그건 노바의 뜻이고. 네 뜻은 어때?"
"...?"
강철두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나열해 적어놓은 상태창은 아무런 의심 없이 진실로 받아들일 만했다.
발할라 태생인 것도 맞았고, 지구의 소속인 것도 맞았다.
"나는...."
철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누구로 정의할 것인가?
스스로 답을 내리자니 쉬이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혼자 생각해. 네겐 아직 시간이 많아."
100년을 산 아르엘라다.
스스로 존재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모든 성장기의 존재들이 겪는 성장통이다.
요정은 쫓기며 살아온 바바리안의 뒤늦은 사춘기를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이봐! 다 되었네! 이리로 오시게!"
"흠, 가자고. 꼬마 신랑."
"흥, 누가 꼬마라는 거냐."
아르엘라는 덩치만 큰 강철두와 함께 요새 중앙으로 향했고, 그곳엔 복구율 100%와 함께 생성된 포탈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션 완료!>
<점수를 정산합니다.>
<9211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서울역 미궁보다 훨씬 높은 점수다.
좋은 상자만 얻어걸리면 높은 보상을 기대해봄직하다.
"오래 걸렸군."
미궁에 입장한 지 7일하고도 몇 시간이 지났다.
노바의 시간은 700~800일 사이가 지났을 터.
"얼른 가자고."
"아, 포인트를 양도해주겠네. 나와 루이비숑은 곧장 돌아갈 셈이야. 한시라도 빨리 국왕께 보고하는 게 우선일세."
"후후, 나야 고맙지."
공짜로 포인트를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3281점을 양도받았습니다.>
<2872점을 양도받았습니다.>
쿠찌와 루이비숑이 모두 철두에게 점수를 몰아줬다.
"고생했네. 먼저 가서 성대한 연회를 열고 기다리겠네."
"후후, 알겠다. 조만간 다시 보지."
보상동굴은 그나마 노바와 시간 차가 10배밖에 나지 않는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곧 해후하게 될 터다.
파팟.
네 사람이 포탈을 탔으나, 보상동굴에 도착한 건 강철두와 아르엘라 둘이었다.
차원이동 특유의 울렁거림이 가시며 어두운 동굴이 나타났다.
중앙에 불을 밝히고 있는 평화의 모닥불은 두 번째지만 익숙한 느낌마저 든다. 전과 비슷한 모습의 보상동굴 시작 지점이다.
"음?"
"어?"
철두는 미궁에서 7일이 넘는 시간을 보내다 왔기에 보상동굴의 시작 지점에 아직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모닥불을 보며 조용히 불멍 중이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엔 반가움과 성취감이 함께였는데, 누가 보더라도 철두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새였다.
"아는 사람이야?"
"그렇다."
아르엘라의 물음에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여가 왜 있냐?"
"크윽."
오래도록 기다린 사내가 격정에 찬 얼굴로 덥석 엎드렸다.
"제자 사토 키요시! 스승님께 죄를 청하나이다!"
"...?"
사토 키요시.
일본의 최고 기대주였던 노비스는 철두와의 대련 몇 번에 감화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였었다.
"...제자로 받은 적은 없지만, 무슨 죄?"
"크윽, 사쿠라시티의 그릇된 선택을 막지 못했나이다!"
철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사토 키요시는 분한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281화 복귀
사토 키요시는 담담히 사쿠라시티의 길지 않은 역사를 읊었다.
지구와 단절된 뒤의 혼란, 독자적인 정권의 수립, 그리고 초보자 보호 안개가 걷히며 제국 마을과 소통하기까지.
"그때부터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해왔으나, 늘 아이언헤드의 소식이 들려오니,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부류가 늘어났습니다."
사쿠라시티는 제국과 교류하며 엄청나게 발전하는 것 같은데, 이웃은 제국과 전쟁하며 더욱 빠르게 발전하니 자연스레 비교가 되었다.
열등감이 유발한 질투는 좋은 통제의 수단으로 쓸 수도 있는바, 알게 모르게 혐한 분위기가 퍼지더니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특전대 대장 사토 키요시는 대표적인 친한파.
강철두와 대련에서 진 이후로 그를 추앙하며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스승으로 말하고 다녔기에 좋은 표적이 되었다.
이를 배알 없다 여긴 특전대 부대장 료는 대표적인 혐한파로, 사쿠라시티의 대승적인 분위기에 따라 특전대의 지휘권도 료에게 넘어가 버렸다.
"그저 사무라이로서 사쿠라시티의 수호에 견마지로를 다해 왔으나, 이는 명백한 실책이었습니다."
백의종군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개인의 수련과 도시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한다는 생각이었으나, 그런 외톨이적 행보가 그를 정계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제국과의 교류로 날개를 달고 발전한 도시는 마침내 일본의 정신을 계승하며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정권에 사토 키요시의 자리는 없었다.
"특전대를 장악한 료와 툴룬 공작가의 파견 행정관과 귀족들이 연합하여 막부를 수립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특전대장 료의 막부였으나,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툴룬 공작가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늘 아이언헤드를 비교하며 그들을 이겨야 한다며 경쟁심을 부추긴 끝에, 시티의 군중심리도 점차 기울어 이제는 전쟁 여론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강철두의 강함과 과감함을 직접 겪어본 사토 키요시는 깜짝 놀라 뒤늦게 말리려 들었으나, 그의 발언력은 이미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적 사토 키요시냐.'
'그는 강철두에게 패배 후 꼬리를 말고 겁먹은 개나 다름없다.'
'그는 우리 일본인을 이끌 자격이 되지 못한다.'
여론은 차가웠고, 사토 키요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아이언헤드 성으로 갔으나 스승님께서 부재중이셨습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할 것 같아 막아보려 했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중과부적. 미궁이 열리며 혹시나 스승님을 뵐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철두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는 전쟁을 막고자 하는 거냐?"
"제자가 미궁에 들어온 지 벌써 수일이 흘렀으니, 노바에서는 이미 전쟁이 발발했을 것입니다."
"그럼 뭐 때문에 여기 온 거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옵니다."
"...?"
사토 키요시가 석고대죄하듯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스승님의 노여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이 제자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었나이다."
"...."
철두가 황당한 얼굴로 사토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나더러 덜 화내라고 이리 온 것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나보고 화내지 말고 참으란 소리냐?"
"제자가 어찌 감히 스승님에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만, 노여움을 조금만 거두어 주시옵소서."
"전쟁은 저들이 일으켰는데, 나더러 참으라?"
사토 키요시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료의 막부는 야욕에 눈이 멀었습니다. 툴룬 공작가 또한 교활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오나 막부에 속한 일본인들은 그저 위정자들의 정치에 휘둘린 것이오니, 부디 이들에게는 갱생의 기회를 주시옵소서."
"...."
철두는 가만히 사토를 내려다보았다.
진정으로 일본을 사랑하고 위하는 무사 사토 키요시는 이대로 일본이 전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료의 막부는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형국이라, 당장 전시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여기 눈앞의 스승님께서 고구려로 돌아가는 날이 사쿠라시티에 사망 선고를 내리는 날이 될 것이다.
사토 키요시가 막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부디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청하나이다."
"내가 학살이라도 할 줄 알았더냐?"
"...."
사토 키요시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전쟁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지금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도 모른다.
그저 판단하기로 전쟁에서 사토가 할 수 있는 일보다, 강철두를 진정시키는 것이 보다 많은 일본인을 구원할 수 있다 판단했을 따름이다.
"후후, 난 학살자가 아니다."
이미 할아버지 강용철과 그리 약조한 바가 있다.
멋모르고 덤벼드는 이는 한 번은 봐주기로.
두 번째는 가차 없을지언정.
"전투에 나섰다면 모르겠으나, 생업에 종사하는 일본인을 학살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
철두의 확답에 사토 키요시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스승님의 자비로움에 제자 거듭 감사함을 전합니다."
쿵, 쿵, 쿵.
아예 머리까지 찧으며 사토가 외쳤다.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사오니, 부디 저를 밭 가는 소처럼, 집 지키는 개처럼 쓰시옵소서. 물지 않으며, 짖지 않으며 평생을 봉사하겠나이다."
사토는 진심이었다.
사랑하는 조국 일본.
아니, 내 나라 출신의 이웃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이 한 몸 희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너, 무기술 레벨 가장 높은 게 몇이냐?"
"검 숙련으로 현재 4레벨이옵니다."
"오, 명인지경. 그럼 소드마스터냐?"
"아직 연이 닿지 못해 검기를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그 닿지 못한 연이 권력이겠지.
이미 사쿠라시티의 료 막부에서 사토 키요시의 자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후후, 좋다. 네가 날 따르기로 했으니 이번 보상동굴에서 영물이 나오면 네게 주마."
"헙! 가, 감사하옵니다. 하오나, 바로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으시는지요?"
"나 없다고 당장 무너질 나라가 아니다."
철두는 부하와 이웃들을 믿었다.
특히나 에그니스가 보살펴 준다면 툴룬 공작가의 원조를 입은 료 막부라 하더라도 쉬이 무너지진 않으리라.
아니, 이미 전쟁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괜찮겠어? 걱정되지 않아?"
"후후후."
아르엘라의 물음에 철두는 씩 웃었다.
"언제까지 내가 보살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고구려도 자립해야지."
"허, 참. 무슨 자식 키우듯 이야기하네."
"후후, 다를 것 없다."
고구려는 태생이 여러 군중이 모이고 규합되어 연합체를 이룬 것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자가 무리를 모아 터전을 일군 것이기에 그러했다.
"일단 가자."
"하잇!"
"그러자고."
세 사람이 보상 동굴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
고구려 수도, 아이언헤드 성.
재상 김진태는 집무실보다 신설된 정보청에 있는 일이 더욱 많았다.
처음엔 두세 가지 신호만 주고받던 통신망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글자를 주고받으니 고구려 국토에서 올라오는 정보는 아주 작은 시간 차로 모두 정보청 본단에 모이게 되어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하늘산 북쪽을 우회한 적의 별동대로 호수마을이 기습당했습니다."
"문경 성의 예비대를 그쪽으로 돌리세요."
"넵, 즉시 지시하겠습니다."
"마법진을 통해 료 막부의 인물로 추정되는 병사 300인의 이동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동마법진은 전선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평화의 땅이었는데, 이는 노바의 오랜 전통에서 기반하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마법진에서 전투가 벌어져 마법진이 파괴되면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손실로, 그 맵의 가치는 현저히 낮아진다.
테러가 아닌 이상, 이는 공격하는 측도 수비하는 측도 누구도 바라지 않는 상황이기에 이동마법진 반경 5킬로미터 정도까지는 약속된 정전구역이다.
료 막부도, 고구려도 이동마법진을 통한 병력의 충원을 받고 있다.
"보고! 드워프로 보이는 200여 명이 마법진에 등장, 곧장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군! 정중히 모시도록 마중 병력을 보내라."
"넵."
명령은 즉시 통신망을 통해 전방 전선으로 향한다.
그때 정보청장 잭이 다가와 김진태를 조용히 불렀다.
"재상 각하, 긴급히 보고드릴 건이 있습니다."
"으음, 이리 오시죠."
김진태와 잭이 회의실로 향했다.
잭의 표정이 좋지 못했기에 나쁜 소식임을 확신한 김진태가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아미르 왕국의 내전이 곧 종식될 것 같습니다."
"다음 정권은 어딥니까?"
"다행스럽게도 아미르 왕가가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아미르 왕가가 다른 제후들을 누르고 권력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저들이 약조를 지킬까요?"
"대왕이 돌아오셔서 건재함을 보이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아미르 왕가는 고구려와 굴욕적인 정전 협상을 했다. 매년 막대한 재물을 고구려에 바치기로 했으나 내전을 핑계로 여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첩보에 의하면 툴룬 공작가의 사람이 아미르 왕국에서 모습을 보였다 합니다."
"정말 나쁜 소식이네요."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정전 협상을 따르는 대신, 다시 싸우기로 마음먹는다면 고구려로서는 정말 골치 아픈 일이다.
위아래로 길쭉한 영토의 고구려다.
대부분 전선은 남서에 집중되고 있는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북쪽의 신서울과 일산 성, 문경 성에서 많은 병력이 차출되어 전선에 투입된 상태였다.
여기서 아미르 왕국과 전투가 벌어진다면 고구려의 허리 부분 동쪽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는 것이니, 병력이 태부족이다.
"후우, 병력의 여유가 있겠습니까?"
"스탯석의 여유가 없습니다."
고구려는 병력의 열세를 이기기 위해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스탯석을 아낌없이 풀어 병력의 정예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드워프 왕국의 엄청난 지원에 힘입어 말단 병사들도 질 좋은 갑옷과 무기로 무장했다.
거기에 아리아 교단의 대사제 강용철과 사제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해, 병사들의 사망률을 압도적으로 낮췄다.
하지만 적들은 어디서 병력을 찍어내기라도 하는 듯 막대한 양의 물량 공세를 하니, 모든 전선이 피로 누적으로 한계상황이었다.
특히나 골치 아픈 것은 가미카제 공격.
적들은 그들을 '닌자'로 부르며 영웅시하지만, 아군 입장에서는 영 성가신 테러범들이었다.
10명 이하의 소수로 이뤄진 적의 별동대가 아군 영토에 잠입, 주요시설을 파괴, 국민들을 살해 후 시체를 전시해 불안감을 부추기기 일쑤였다.
작년 완성되어 고구려 국토의 허리나 다름없는 기찻길도 무차별적인 테러로 운행에 영 어려운 점이 많았다.
어찌 되었든 영 좋지 못한 상황에서 아미르 왕국의 참전 가능성을 떠올리자 김진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아, 좋은 수가 없겠습니까?"
"아미르 왕국과의 협상은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같은 제국령인 툴룬 공작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는 게 그들에게 더욱 이득이니까.
"우리도 우군을 끌어들여야 하옵니다."
"어디서 우군을...."
탕, 탕!
그때 회의실 문을 급하게 두드린 자가 있어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의 드워프, 에르미스였다.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벌컥 문을 열어젖히더니 소리쳤다.
"돌아왔네!"
"예?"
뜬금없는 소리에 되물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김진태의 얼굴을 보며 에르미스가 재차 소리쳤다.
"미궁 탐사대가 복귀했어! 며칠 내로 자네들의 대왕도 돌아올 걸세!"
"...!"
김진태의 얼굴이 격정으로 흔들렸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지난 2년간 얼마나 힘들었는가.
이 빌어먹을 새끼.
얼른 돌아와라.
282화 전쟁의 이유
"언젠가요?"
"하하,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 다만 보상동굴에 들어갔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겨우 10배 아닌가?"
보상동굴에서의 하루는 노바에서 10일.
철두가 얼마나 헤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만간 돌아오는 것만은 확실하다.
"희소식이네요."
"허허허, 그렇지."
김진태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헌데 듣기로 자네 대왕이 막대한 포인트를 들고 갔다고 하니, 상자를 찾아 그 점수를 다 쓰고 오려면 꽤 시일이 걸릴지도 몰라."
"그래도 조만간이에요."
보상동굴에서 3일을 허비한들, 고작해야 30일이다.
한 달.
지난 2년에 비하면 찰나나 다름없는 시간이다.
더욱이 전선의 상황이 한계나 다름없었는데, 곧 게임체인저가 등장할 상황이니 여태 유지하던 전략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장기전을 생각하고 아껴두었던 예비대의 병력을 대거 투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 좋은 소식이 또 있네."
"어떤 건가요?"
"자네 대왕이 일을 잘 마무리해준 덕에, 우리 국왕께서 결단하셨네."
"...?"
"그건 바로...."
에르미스는 일부러 말을 끌었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대감에 가득 찬 김진태의 표정을 즐겼다.
"어떤 결단이요?"
"하하하, 바로 우리 왕국은 앞으로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구축하기로 했네."
"그 말씀은?"
"지금처럼 간접적인 지원이 아니라 직접적인 병력을 투사하기로 했어! 이미 기사단 200명이 출발했다고 연락받았네."
"아! 그럼 아까 이동마법진으로 도착한 드워프들이 기사단이었군요!"
김진태가 반색했다.
여느 때처럼 교대하러 온 드워프 장인들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전투 병력이었다.
"흐흐흐, 뭔가 착각하고 있군. 이미 전선 각지에서 무구 수리를 돌봐주는 장인들도 모두 뛰어난 전사들이라네."
"헛."
"하나하나가 기사 전력이지. 주술사들도 여럿이니 그들이 한 손을 보태면 전선은 금방 회복할 걸세."
김진태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 파견 나와 있는 드워프의 숫자만 해도 2000이 넘었다.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지 물으니, 대왕 강철두가 드워프 왕국의 일을 돕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철두는 부재중이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전선에 미치고 있었다.
"이러면 철두 오기 전에 상황을 뒤집어 보죠."
"흐흐, 좋은 생각일세!"
에르미스도 자신만만했다.
지난 2년간 강철두가 미궁에 가 있는 사이 적극적으로 국왕을 설득해 지원을 받아낸 에르미스다.
마법 문명과 지구의 기계문명 테크트리를 탄 고구려는 드워프라는 장인을 만나자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나갔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사람들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었고, 연구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인류의 발전은 전쟁의 역사라 했던가?
료 막부와 고구려의 전쟁 동안 이룩한 마법과 기계문명의 합치는 눈부실 정도였다.
모르긴 몰라도 철두가 돌아오면 꽤나 놀랄 터다.
"우리끼리 전쟁을 끝내봅시다!"
철두의 복귀는 30일로 예상된다.
김진태는 최대 복귀 기간을 60일로 상정하고 전략에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
사쿠라시티.
료 막부의 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성이 오갔다.
쾅!
"조센징 놈들이 갑자기 왜 이리 발악을 하는 게야?"
테이블을 내려친 료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쇼, 쇼군. 최후의 발악이 아닐는지요? 노여워 마소서."
"칙쇼! 닌자들의 첩보는 아직인가?"
"정확한 거래는 아직 모르겠으나, 드워프 왕국과 고구려의 결속은 꽤 단단해 보이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알아내라는 게 아니냐!"
"죄송합니다."
"칙쇼!"
고구려의 대대적인 반격은 드워프들의 참전이 기점이었다.
무엇을 대가로 구워삶았는지, 그전까지만 해도 무기를 손봐주거나 갑옷을 만들어주는 지원만을 일삼던 드워프 일족이 직접 전장으로 나섰다.
료 막부는 그들의 거래 내역을 수집해, 역으로 제안해 드워프 왕국을 전장에서 이탈시키려 했으나 닌자들의 첩보에도 정확한 내막이 밝혀지지 않았다.
벌써 드워프 왕국이 위치한 M44 맵으로 사절단을 여러 번 파견했으나, 그들은 고구려와의 동맹이 굳건하다며 사신으로 대접, 정중히 돌려보냈다.
"칙쇼!"
료는 사무라이 갑옷으로 무장한 부하들을 보면서도 온 신경은 구석에 자리한 제국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룬드 툴룬.
툴룬 공작가의 장자이자, 료 막부를 원조하는 툴룬 공작 가문의 책임자.
사실상 툴룬 공작가에서 지원하는 막대한 병력과 물자, 그 모든 것이 아룬드 툴룬의 의중에 따라 달라진다.
쇼군인 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다.
실상 그에게 비책을 바라고 있으나, 음흉한 놈이 그저 웃기만 하고 있기에 부하들을 다그치는 척하며 압박을 가해본다.
"쇼군은 진정하시지요."
작전이 통했음인가?
아룬드 툴룬이 특유의 권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하잇! 이웃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괜찮아요."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자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괴물을 잡기 위해 아끼고 아끼던 비장의 수가 있으니, 이번에 난쟁이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미리 쓰도록 하지요."
"그리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료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속으로 이죽거렸다.
진즉에 툴룬 가의 전력을 투입했다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전쟁도 아니었다.
"후후, 그리고 아미르 왕국도 함께하기로 한 바, 그들이 동쪽에서, 그리고 나트롱 백작군이 북서에서 밀고 내려오면 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겁니다."
길쭉한 지형의 고구려를 사방에서 압박하는 모양새다.
"그 괴물이 돌아오기 전에 절망을 안겨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총공세에 나서도록 하세요."
"...하잇.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료는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숫제 상관처럼 구는 아룬드 툴룬의 행태가 영 거슬렸다.
그럴수록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총공세와 함께 툴룬 가의 검이 적들을 추수하듯 쓸어버릴 겁니다."
"하잇! 영면하신 판단입니다."
"고구려에 두 발로 살아있는 건 모조리 죽이도록 하세요."
"이를 말입니까."
"그 괴물이 돌아와 절망할 모습이 훤히 그려지는군요. 후후."
아룬드 툴룬이 웃으며 자리를 나섰다.
그를 따라 그림자 같은 호위기사들도 나서자 지휘 막사에는 료 막부의 인물들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건방진!"
"쇼군! 저 오만방자한 샌님의 행태를 언제까지 용인해주실 겁니까?"
"어이, 다들 진정해라."
쇼군 료는 부하들의 역정을 들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큰 나무 아래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함일 뿐이다."
"크으, 쇼군."
"대일본제국의 욱일승천을 위해, 나는 더한 굴욕도 마땅히 감내할 뿐이다."
"큭, 막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쇼군의 담대함과 인내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요시."
쇼군 료는 그저 담담히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
아룬드 툴룬의 뒤를 따르던 호위 기사가 넌지시 물었다.
"공자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그는 쉬이 내보일 전력이 아닙니다. 공작 전하께서도 오직 강철두를 잡기 위해서만 그 쓰임을 잠깐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흐흐, 아버지는 대외적인 시선을 너무 신경 쓰시지."
숨겨진 전력은 쉬이 내보낼 것이 아니다.
툴룬 공작가에는 위대한 검사가 둘 있는데.
첫 번째가 툴룬 공작 본인이고, 두 번째가 기사단장 아이반 경이다.
아이반은 전쟁 초기부터 참전했으나, 고구려에도 엘프 검사가 위대한 경지에 이르러 있기에 그의 대척 무기로 쓰임을 할 뿐이었다.
각 진영에 위대한 검사가 한 명씩.
두 사람은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무승부에 그쳤다.
서로 무게추가 맞기도 했으나, 에그니스로서는 그저 고구려를 지키면 족했고, 아이반으로서도 료 막부와 고구려의 전쟁에 우군으로 참여했을 따름이라 소극적이었다.
명예나 기사도를 위해 목숨을 걸 전장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툴룬 공작 본인이 출격하는 것은 모양새가 맞지 않았다.
그리되면 전쟁은 료 막부와 고구려의 전쟁이 아니라, 툴룬 가와 고구려의 전쟁으로 변모한다.
"아버지도 '그'를 내보내기에 이번 전장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셨을 게야."
"하지만, 혹여 불명예라도 얻게 될까 저어됩니다."
아룬드 툴룬은 계속 딴죽을 거는 기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소식에 의하면 미궁에 나섰던 난쟁이들이 돌아왔어. 이는 조만간 강철두도 돌아온다는 소리지. 우리는 시기적절하게 숨겨진 패를 까는 것이다."
그저 조금 더 일찍 전력을 내보이는 것뿐이다.
"그리되면 그를 감추기가 어렵...."
"허어!"
아룬드 툴룬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출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내보이는 게야. 흑마법사 '제롬'은 우리 툴룬 가에서 키운 전략 병기가 아니라, 료 막부의 사람이 될 테니까."
"아아!"
기사가 그제야 납득이 가는 얼굴을 했다.
뒤늦게 얼굴이 벌게진 그가 넙죽 사과했다.
"공자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불충을 벌해주십시오."
"끌끌, 어디 그게 불충이겠나? 전부 우리 툴룬 공작가의 명예를 걱정한 것을."
"헛,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 개가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랐으니 이제 잡아먹어야지."
아룬드 툴룬은 료 막부가 애초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왕 행세를 하는 쇼군 료의 검은 속내가 훤히 보일 때마다 욕지기가 나오려는 걸 참아야 할 정도다.
배를 드러내고 복종을 내보이는 개새끼처럼 굴지만, 주인이 빈틈만 보이면 목을 물어뜯을 배은망덕한 개다.
욕심만 그득한 그런 놈은 수하로 거느리느니, 적절한 장작으로 쓰는 게 낫다.
흑마법사 제롬은 이번 전쟁으로 화려하게 이름을 알리게 될 터다.
'기다려라. 시발 새끼.'
아룬드 툴룬은 '저주 내성'을 얻기 위해 갔던 잊혀진 도시에서의 모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어차피 흑마법사 제롬을 위해 죽고 죽이고 악다구니 쓰는 전장이 필요하긴 했지만, 굳이 고구려를 지목해 싸움을 부추긴 것에는 그때의 일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흐흐흐, 성물의 주인이면 제 놈이 어쩔 거야?"
저주 내성이 생겼기에 겨우 대면할 수 있을 정도로, 제롬은 지금 흑마법사로서의 위상이 하늘 높이 닿아 있었다.
그라면 성물의 주인이고 나발이고 소용없다.
곧 이 땅에 어둠과 죽음, 비통함만이 가득 채워질 것이니....
*
어두운 동굴.
제단처럼 생긴 돌 위에 정좌한 채 앉아있는 사내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겨우 입술만 보였다.
"...."
츠츠츠츠.
그가 앉은 제단으로 어둠뿐인 무형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어두운 감정에서 파생되는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흑마법사에게 전장은 천연 마석광산이나 다름없다.
전투가 치열하면 할수록, 잔혹하고 처절하면 할수록 더욱 좋다.
두려움, 고통, 절규, 후회, 분노, 짜증, 역겨움, 불안, 우울....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마력이 되어 그를 충만하게 채운다.
벌써 2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은 벽에 부닥친 흑마법사의 한계를 넘어 한층 더 진일보시켰다.
"후우우우."
검은 마력이 넘실거리며 그의 코를 통해 들고 나선다. 그가 눈을 뜨자 덮여진 로브 사이로 붉은 안광이 스며 나온다.
"때가 되었구나."
그가 몸을 일으키자 스위치가 켜지듯 어두운 동굴 곳곳에서 붉은 안광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283화 흑마술
드워프 왕국과의 혈맹 체결.
그들의 적극적인 병력 지원에 힘입어 모든 전장은 변혁을 맞이했다.
긴 전선을 형성하며 서로 산발적인 교전만 벌이던 가운데, 고구려가 먼저 치고 나갔다.
"돌격하라!"
빼앗긴 뉴아 요새를 되찾아야 한다.
이동마법진 서쪽에 자리 잡아버린 사쿠라시티의 전진기지와 나트롱 백작의 연합을 견제할 수 있는 요새다.
개전 초기 뺏긴 요새를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었기에, 전쟁의 판도를 바꿀 시작점으로서의 상징도 있었다.
"와아아아!"
"요새를 탈환하라!"
노바의 싸움에서 병력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이 정예병의 유무다.
상위 노비스면 좋고, 그보다 위의 기사(랭커)급이면 더 좋다. 아예 상위기사(히어로)의 참전이면 금상첨화.
그런 의미에서 히어로로만 이뤄진 200명의 드워프 왕국 최정예 기사단의 투입은 전세를 뒤집기 충분했다.
대대적인 공략에 뉴아 요새가 함락되었다.
그간 작은 성 수준이던 뉴아 요새를 아예 요새 도시로 발전시켜버린 료 막부다.
고구려는 뉴아 요새를 새로운 전장의 핵심지로 삼고, 북쪽으로 나트롱 백작을 압박했다.
료 막부의 전진기지에는 툴룬 공작가의 위대한 검사 아이반이 자리하고 있기에 쉽사리 공략하기 어렵다.
아이반에 대적할 만한 적수는 현재 에그니스뿐인데, 그도 고구려를 수비하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이리스 후작령도 제국령인바, 외교적 압박이 가해지면 아예 전투에서 이탈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곧장 서남으로 진격해야 합니다."
그쪽에 료 막부의 전진기지인 에도 성이 있다.
에도 성은 이미 마을 수준을 넘어 작은 도시라 부를 정도로 번성했는데, 주둔군이 많고 이미 이주해온 주민들도 많았다.
N6140 맵은 현재 동쪽을 고구려, 서쪽을 료 막부가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에도성 서쪽의 광활한 영토를 마치 제 땅처럼 경작하고 도로를 깔고 추가적인 개척마을도 건설하고 있었다.
"거긴 아이반이 있습니다. 신중해야 해요."
"우리에게도 에그니스 경이 있지 않습니까?"
"수비에서는 몰라도 그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맡기기엔 부담이 큽니다. 그의 소속인 아이리스 후작령도 어쨌든 제국령이니까요."
지난 전쟁 동안 수차례 툴룬 공작가에서 아이리스 후작령을 압박했으나, 그들은 에그니스를 떠돌이 엘프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허, 어차피 우기면 되는 일 아닙니까? 한 번만 도움을 청합시다."
"지면요?"
"설마 그러기야...."
"굳이 불확실한 패를 까지 맙시다. 어차피 곧 대왕께서 복귀하실 터이니."
"끄음, 그도 그렇소."
강철두가 수십 일 이내에 돌아온다.
굳이 전력이 비등비등한 아이반과 에그니스를 싸움 붙여 혹여라도 패배하게 되면 여간 낭패가 아니다.
"그럼 북쪽뿐이군요."
"나트롱 백작을 칩시다."
"건방진 놈들이오. 정전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여기고 이리 대뜸 참전하다니."
"어차피 그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요."
이미 파탄 나버린 관계다.
힘의 차이가 명백하기에 맺은 정전협정이었지만, 제국의 다른 귀족이 끼어들었으니 당연하게도 나트롱 백작은 적 진영에 합류했다.
"진군하죠."
"소장이 선봉에 서겠습니다."
언제나처럼 공격대장 구정욱이 나섰다.
"공격대가 주력군으로, 유격대와 특작대가 우회 기동, 적들을 타격하는 것으로 합세."
"예, 장군."
전선의 일선 사령관은 박준필.
국무총리로 고구려의 넘버3인 그는 군 통솔에 있어서는 따라갈 자가 없다.
재상 김진태가 아이언헤드 성에서 첩보와 정보, 분석에 치중한다면, 박준필은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장을 지휘했다.
"문제는 아미르 왕국입니다. 문경 성을 더는 후방으로 취급할 수 없지 않습니까?"
"거긴 마적대와 별동대를 투입합시다."
마적대 김춘배와 별동대 제임스라면 아미르 왕국의 공세를 일차적이나마 막아낼 만하다.
지금 다시 탈환한 뉴아 요새는 나머지 병력들과 드워프 기사단이 주둔하며 료 막부의 에도성을 견제하기로 하였다.
주요 작전이 수립되고 세부 작전이 나뉘며 일선 부대에 명령이 하달되어 진군이 시작되었다.
뉴아 요새를 탈환한 지 5일 만이다.
천천히 북진하는 고구려의 병력에 나트롱 백작군이 슬슬 밀려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후방에 들이친 유격대와 특작대가 활개 치니, 전방의 전선이 급격히 무너졌다.
진군 10일 차,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고구려의 군세가 주춤했다.
"크하하하! 나 지르골이 돌아왔도다!"
운이 나쁘게도 죽었던 지르골이 부활해 돌아왔다. 더 나쁜 소식은 우로사 남작도 부활했다는 첩보였다.
나트롱 백작령에 정예병력들이 합류하며 전선이 고착화, 설상가상으로 아미르 왕국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어 문경 성에도 전운이 감돌았다.
신서울을 비롯한 고구려 북방을 책임지고 있는 어림군 사령관 김도진이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 일산 성에서 주둔, 아미르 왕국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뉴아 요새를 재탈환하기 위해 에도성에서 병력이 출진해 진을 쳤으나, 그들의 공격은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다.
요란하기만 하지 필사의 각오가 없어 보이는 것이, 뉴아 요새를 함락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병력을 잡아두는 데에 그 속뜻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허술한 숫자의 병력도 아닌지라, 뻔히 적의 계략이 보임에도 뉴아 요새의 병력을 뺄 수가 없었다.
고구려의 영토 좌우로 전선이 다시 형성되려는 가운데, 비통한 소식은 남쪽에서부터 전해져왔다.
"보고! 용전 마을에 적 출현! 사망자 다수 발생, 한양수비대 정윤승 대장이 지원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한양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용전 마을은 고구려 소속은 아니지만 거의 우방에 가까운 이웃이다.
용전 그룹에서 세운 마을이라 같은 나라 사람이기도 했고, 위치도 가까우며 딱히 척진 일도 없어 두루두루 교류하고 지내고 있다.
별달리 복속을 청해오지도 않았고, 굳이 정복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마을도 아니기에 속국 아닌 속국 개념으로 붙은 이웃이었다.
"허! 료 막부의 병력인가? 혹시 닌자들인가?"
료 막부에서 용전 마을을 치려면 남쪽으로 크게 우회해 꽤 넓은 한강을 건너야 한다.
다수의 병력을 도강하기에는 무리지만, 정예병력에게는 그 정도 강은 장애물도 아니다.
특히나 닌자라 이름 불리는 특수병력들은 전장 내내 후방을 괴롭힌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아, 아닙니다. 생존 피난민들의 증언으론 좀비 사태가 터진 것 같습니다."
보고를 듣던 김진태가 흠칫 놀랐다.
좀비라니.
미궁으로 변해버린 지금 지구에 닥친 재앙이 아닌가?
좀비가 노바에서 존재한다 하여 이상할 건 없다.
"골치 아프네. 일단은... 친위대를 보내도록 하죠."
"넵! 바로 출진 명령 전달하겠습니다."
남은 예비대가 그것뿐이다.
수도를 지키는 수비대와 친위대 중에 그나마 외부로 돌릴 만한 건 이은영의 친위대.
독립부대 중에 숫자는 가장 적지만 그 지닌 바 정예함은 최고였기에, 한양의 사정을 수습하기 충분하리라.
"소신이 함께 가겠나이다!"
"연구소장이?"
연구소장이자 마법사들의 수장 르망이 나서자 의아해 물었다.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짐작하건대 이는 흑마술이옵니다. 마법사들이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으음. 그렇게 하세요."
이내 한양수비대를 도울 구원군이 편성되니, 친위대를 주력으로 마법사 20명이 함께였다.
급히 용전 마을 구원군이 꾸려지고 한양으로 파견되었다.
아이언헤드 성과 남쪽의 한양까지는 하루 거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
금방 도착한 지원군은 강 건너 보이는 참상에 충격에 빠졌다.
"찔러!"
"물러서지 마라!"
"키에에에!"
한양수비대는 용전 마을과 이어지는 석조 다리 위에서 악전고투를 펼치고 있었다.
"키에에에!"
방패진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덤벼드는 저것들은 흔히 떠올리는 좀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팔다리 하나씩 없는 것은 예사였고, 머리통이 깨져 피가 줄줄 흐르는 놈, 배가 찢어져 내장이 줄줄 흐르는 놈도 있다.
죽었음이 분명한 몰골을 한 채로 살아있는 것들보다 더욱 정열적인 움직임으로 덤벼드니, 강함과 약함 이전에 기가 질리는 풍광이었다.
"으으. 정 대장님."
"후우, 친위대장 오셨소?"
"전황은요?"
"보시다시피 막아내고 있긴 한데 구원은 그른 것 같소."
정윤승이 전방을 가리켰다.
한양으로 접근하기 위해 석조 다리로 몰려든 좀비들이 절반, 저 멀리 보이는 용전 마을에 뭉쳐있는 좀비들이 반이었다.
"숫자를 헤아려보면 거의 대부분이 좀비로 변한 것 같소."
"마을에 아직 저 숫자가 모여있는 걸 보면 생존자가 있는 모양인데요?"
"생존자들을 구하고자 우리 병력을 희생할 수는 없소."
정윤승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니, 후방에 늘어선 시체들 중에 온전치 못한 모습의 시체들이 여럿이었다.
"무슨 경로로 감염되는 건지 모르겠소."
좀비들의 전투력이 문제가 아니다.
싸우던 아군 병력이 감염이 되었고, 좀비로 변한 것이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데 생존자 몇을 구하고자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용전 마을로 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저주 저항으로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까진 알아냈소."
정윤승의 말마따나 지금 전방에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좀비들을 막아 세우고 하나하나 처치하고 있는 이들은 전부 저주 저항을 가진 이들이다.
오봉산 버려진 용의 둥지 던전에서 저주 저항을 쉽게 얻을 수 있기에, 신서울 출신의 병력들이나 고구려의 병력들은 거의 패시브처럼 가지고 있는 기술이다.
다만 한양의 시민들은 그렇지 않은지라, 정윤승은 굳이 공성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좀비 떼를 막아내고 있었다.
좀비 한둘만 한양시에 들여보내더라도 시민들이 감염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시체와 좀비들을 관찰하던 르망이 소리쳤다.
"맞습니다! 이건 저주입니다. 흑마법이지요! 저주 저항이나, 신성 물품으로 대응이 가능합니다."
르망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흑마법사가 활약한 기록은 언제나 역사서에 남았는데, 그 말은 역사서에 남을 정도로 흑마법사들이 일으킨 재앙과 파급이 컸기 때문이다.
"제가 가죠. 몰랐으면 모르되, 사람이 살아있는데 구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요."
고구려의 병사들은 통과의례처럼 수호의 나무에 가서 탈것 퀘스트를 받아 말을 길들이는 것과, 오봉산의 오크 던전에 들러 저주 저항을 얻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친위대 또한 모두 저주 저항은 가지고 있으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마력은 천차만별인 바, 마력이 높은 이들로 빠르게 별동대를 꾸렸다.
"한양수비대의 병력도 차출하겠소."
추리고 보니 60명이나 되는 병력이 꾸려졌다.
마력 포션을 급히 보급하고, 준비가 되자 석조 다리 위에서 진군을 시작했다.
"생존자를 구하러 간다! 모두 나를 따르라!"
"대장님을 따르라!"
"조선제일검이 나가신다!"
"와아아아!"
이은영을 선봉으로 쐐기진이 형성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좀비들의 전투력은 형편없어, 저주가 옮겨붙는 것만 조심하면 오크를 사냥하는 것보다도 쉬웠다.
오히려 곤혹스러운 것은 저들의 생김새가 너무나 친숙한 이웃이라는 것과, 괴기스러울 정도로 포악한 성정과 냄새 따위였다.
전투가 힘겨운 것보다 구토를 참는 것이 더욱 고되다.
촤아아악!
검기 또한 마력을 대량 소모하는지라, 최대한 오래도록 저주 저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순간에만 검기를 잠깐씩 쓰며 길을 뚫었다.
지옥철에 모여든 군중보다 더욱 오밀조밀하게 밀집한 좀비 떼가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284화 구울
"키에에에!"
쇄액, 퍽! 퍽!
싸우다 보니 요령이 생긴다.
괜히 뼈에 칼이 걸려 붙잡히느니 둔기가 낫다.
"대가리를 깨!"
"뚝배기가 약점이다!"
좀비는 배에 칼을 쑤셔도 여전히 악다구니를 썼지만, 머리통이 깨지면 얌전히 쓰러졌다.
머리통의 내구성은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이은영은 병력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크아아!"
"막아! 뚫리면 죽는다! 막아!"
"으아아아!"
용전 마을이 가까워지니 싸움 소리가 치열하게 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생존자가 많아 보였다.
병력이 뚫은 길을 따라 마법사들이 전진했다.
마력이 약해 유지 시간이 길진 않으나 저주저항을 가진 병력들이 그들을 호위하듯 앞으로 착착 행군했다.
콰콰쾅!
마법사들이 날린 화염 마법이 용전 마을 곳곳에 작렬하니 뭉쳐있던 좀비들이 여기저기 터져나가고, 마을에 불이 불었다.
쾅, 쾅!
"크에에에에!"
"끄에에!"
화염 공격에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는 좀비들의 행태를 보니 불이 약점인 모양이다.
이은영이 뒤를 돌아보니 르망의 믿음직한 얼굴이 보인다. 아부가 심한 인물이라 그렇지, 능력이 모자란 이는 아니다.
화르르륵, 콰앙!
연이어 날아오는 화염 마법이 마을 전체를 태워버릴 듯 작렬하자 이은영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빠르게 돌파한다. 생존자 구출이 먼저다."
굳이 좀비 대가리를 하나하나 깨서 죽일 필요는 없다. 그전에 마력이 고갈되면 저주 저항이 풀린다.
퍼퍼퍼퍽!
그동안 용전 마을도 발전을 거듭해 제법 그럴듯한 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자원의 차이가 있어 자그마한 내성은 석조로 쌓인 반면, 외성은 아직도 목책을 두른 성이었다.
허물어져 없다시피 한 목책을 넘어 좀비로 가득 채운 거리를 뚫고 내성에 닿았다.
"구원하러 왔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내성 안에서 사투 중인 생존자들은 생각보다 일사불란했는데, 마을의 지휘계통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모양새였다.
끼이이이!
성문이 열리자 이은영은 휘하 병력들부터 차례로 들어가게 시켰다.
"천천히 들어가라! 방어진을 꾸린다!"
이제는 내성 성문 앞에서 진형을 꾸리고 성문에 가까운 자들부터 하나씩 안으로 들어갔다.
이은영이 가장 마지막에 남아 몰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검기가 깃든 검을 크게 한번 휘둘렀다.
촤아아악!
칼질 한 번에 수십의 좀비들이 절단되어 쓰러졌고, 그사이 이은영은 성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닫아!"
"밀어! 빨리 밀어!"
끼이이이, 쿠우웅!
성문이 다시 닫혔다.
둘러보니 여기저기 주저앉은 부하들이 마력포션 따위를 꺼내 마시며 한숨 돌리고 있었다.
"이탈자 거수."
"없습니다!"
"없는 것 같습니다."
눈치 빠른 친위대 부대원 하나가 재빨리 숫자를 세더니 보고했다.
"전원 무사합니다."
"쉬어. 다시 뚫고 나가야 하니 체력 비축해!"
"네, 대장님."
이은영이 고개를 돌려보니 성벽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던 덩치 큰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은영의 앞에 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용전 마을 수비대장 이덕근입니다."
"고구려 친위대 대장 이은영입니다."
"아유, 잘 압니다요. 신서울에 계실 때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생존자가 몇이죠?"
"300명이 조금 넘습니다."
"스킬로 저주 저항이 있는 자들은요?"
"저주 저항은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
"저주 저항이나 내성이 있으면 감염이 안 됩니다. 아니면 신성력이 깃든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든가요."
"헛! 그런!"
같은 전황이라도 정윤승은 파악해냈으나 용전 마을 이덕근은 듣고서야 깨우쳤다.
이들이 아직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내성의 방벽이 높아서일 뿐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창문은 모조리 못질해 막아버리고, 성벽이나 탑 위에 오른 병사들이 긴 창을 이용해 좀비들을 오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덕근이 망루 위에서 지휘 중인 간부를 하나 불렀다.
"양구야!"
"네, 대장."
"얼른 저주 저항이나 내성 가진 애들 파악해라!"
"예, 대장."
얼른 명령을 전달하곤 이덕근이 곤란한 듯 굽신거렸다.
"있긴 하겠지만 저항 계통 기술 가진 애들이 많진 않을 겁니다요."
"으음."
이은영은 그 말에 탈출에 대한 계획을 점검했다. 생존자 모두가 저주 저항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대로 길을 열어 후퇴하면 될 일이다.
헌데 그것이 안 되니....
"별수 없죠. 섬멸로 갑니다."
생존자들을 대피시키다가 좀비에게 감염될 바에야, 안전한 내성에 두고 밖의 좀비들을 모두 해치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다들 마력 채웠나?"
"네, 대장!"
"일단 대기해. 르망하고 작전 짜고 올 테니."
이은영은 그리핀을 소환해 훌쩍 날아올랐다.
위에서 보니 전황이 더 잘 보인다.
"생각보다 금방 잡겠어."
화염이 정말 약점인지 불탄 좀비들은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지니, 목조건물이 많은 용전 마을의 환경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일이 쉬울 것 같다.
이은영은 후방의 마법사 부대에 도착해 빠르게 의견을 전했고, 즉각적인 작전이 나왔다.
"모조리 태워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제가 함께 내성에 가서 방어막을 펼치겠습니다. 연기나 화염이 침범하지 못할 겁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이은영이 마법사 다섯을 수송해 내성으로 들어가 화염에 대비했다.
곧 무차별적인 마법이 난사되고, 용전 마을 전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병력은 이따금 구역을 벗어나려는 좀비를 사냥해 잡는 데 주력했다.
이은영은 그리핀을 타고 올라 한양 쪽이나, 다른 구역으로 빠져나간 좀비가 없는지 정찰했다.
아직도 정확한 예방이나 감염력이나 감염 이유 따위를 모르니, 한 마리의 좀비도 활동하게 남겨 둘 수 없었다.
꼬박 하루를 타오른 용전 마을은 검은 숯덩이 그 자체였다. 내성만이 유일하게 멀쩡했으나 외벽은 검게 그을려 꼭 몬스터가 사는 던전 같이 흉흉했다.
"...아이고, 내 집."
"흐으으윽. 어무이."
살아남은 300여 명의 사람들은 생존이 기쁘면서도, 여유와 함께 찾아온 상실감과 슬픔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후우, 도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돕고 살아야죠."
"아닙니다. 큰 빚을 졌습니다."
생김새와는 다르게 깍듯한 이덕근을 보며 이은영이 피식 웃었다.
"천천히 갚으시든가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합니다. 의견을 모아봐야겠지만, 우리 용전 마을 생존자들이 고구려에 의탁해도 되겠습니까?"
이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안 되겠어요?"
"허,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 몸이 닳을 때까지 고구려에 충성해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덕근은 어차피 대왕 강철두에게 갚을 은혜가 있었다.
용전 그룹과의 계약과 그간에 정 붙은 사람들 때문에 어쩌다 보니 수비대장 직책까지 떠맡아 지냈으나, 이제 그것도 끝이다.
용전 마을 시장으로 있던 최무훈 상무도 좀비로 변해 죽어버렸고,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피땀으로 이룩한 마을은 검은 숯덩이가 되었으니, 살길을 찾자면 고구려에 의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좀비 사태라니."
"기다려 보십시오. 목격자가 있습니다."
이덕근은 곧 병사 하나를 데려왔는데, 그가 악몽 같던 어제의 일을 더듬더듬 기억해냈다.
"새벽쯤이었습니다. 망루에 올라 경계 중이었는데, 누군가 희끗한 검은 말을 타고 날아오지 않겠습니까?"
"말이 날아요?"
"검은데 희끗해요?"
"예에. 그랬습니다."
검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날아온 검은 로브의 사내는 대뜸 무어라 외치며 지팡이를 휘두르니 남문에 붉은빛이 쏘아졌다.
"하도 수상쩍어 보고하러 다녀오니 남문에 비명이 연달아 들리는디.... 그때부터 그 사달이 나고 말았죠."
좀비의 자세한 발생 원리는 모르겠지만 용의자는 특정되었다.
검은 로브에 검은 말을 타고 날아다니는 자.
묵묵히 듣고 있던 르망이 의견을 보탰다.
"흑마술입니다. 개중에서도 시체를 일으키는 구울 마법이지요."
"좀비가 아니라요?"
"예? 좀비가 무엇입니까? 아무튼 구울은 걸어 다니는 시체이온데, 살아있는 것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하고 입이나 손톱으로 상처를 내 저주를 옮기는 녀석입니다."
"그게 좀비예요."
"으음, 지구에서는 구울을 좀비라고 부르는 모양이군요."
이은영이 괜히 소통의 팔찌를 매만지다가 물었다.
"구울에 대해 더 아는 것 없어요?"
"이놈들은 죽음에 이른 직후에 가장 활동적이며, 이후로는 점차 힘이 빠집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에너지가 차츰 없어지며 느려지지요. 그러다가 백골이 되면 스켈레톤이 되는 겁니다."
"시체도 감염이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체는 말 그대로 시체지요. 죽은 놈은 화장하면 스켈레톤이 되지 않고 그대로 성불합니다."
이은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돌아가죠. 수습은...."
"제가 하겠습니다."
"정 대장님이 고생해주세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한양 수비대 정윤승 대장이 나서서 불탄 용전 마을의 시체들을 수습해 화장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용전 마을 생존자들도 일단은 한양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남아서 연구하기를 자처한 마법사 셋을 제외하고는, 친위대를 비롯해 파견 나온 병력들은 모두 아이언헤드 성으로 복귀했다.
이은영은 곧장 재상 김진태를 만났다.
이미 전령을 통한 서면보고를 마쳤지만, 파견 지휘관으로서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잘 왔습니다!"
"네?"
김진태는 이은영을 굉장히 반겼다.
"무슨 일이죠?"
"또 좀비 사태입니다. 아니, 구울이죠."
상황이 급한지 김진태가 서둘러 홀로그램 맵을 열어 하늘산 인근 마을을 가리켰다.
"코리잔 마을이 전멸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병력들만 겨우 빠져나왔어요."
"허!"
마을 사람들이 전부 구울로 변해버렸다.
그나마 고구려 병력들은 전부 저주저항을 가지고 있기에 전멸을 면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 동시다발적으로 구울들이 준동했습니다."
"검은 로브에 검은 말. 그놈을 찾아야 해요."
"그건 에그니스 경이 갔습니다."
"네?"
에그니스는 감추고 있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전쟁 무기다. 괜히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본진에 대기하며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더 위협적인 존재다.
괜히 어느 한 전장에 모습을 보이면, 적 진영에 있는 아이반이 다른 전장에 나타나 활약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아이반이 고구려의 수도인 아이언헤드 성에 나타나 휘젓고 갈 수도 있는 일이다.
"에그니스 경이 지금 블랙 그 새끼 쫓으러 N344 전선에 갔습니다. 친위대장님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수도를 지켜야 합니다."
위대한 검사는 그 레벨이 다르다.
아이반이 쳐들어오면 대책이 없다.
"후, 최선을 다해보죠."
"친위대장만 믿겠습니다."
이은영은 오랜만에 부담과 긴장감이 몸을 옥죄는 느낌을 받았다.
'버틸 수 있을까?'
만약.
정말 만약, 아이반이 수도 아이언헤드 성을 노리고 쳐들어오면 에그니스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병영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찾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병영에 도착한 이은영은 수련실에서 스스로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
불안하고 조급해 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실력이 늘도록 정진하는 것이 그녀의 소임.
조용히 명상에 빠져들던 그녀는 해질녘이 되자 전령을 통해 무한 결투장으로 향했다.
285화 귀환
해질녘 무한결투장에 입장한 이은영은 일몰과 함께 돌아왔다.
파팟.
불과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으나, 무한결투장에서 보내고 온 시간은 무려 16시간.
입장과 퇴장 때의 눈빛이 다른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후우."
결투장에서는 랭킹이 오를수록 강자와 매칭된다. 고수와의 싸움은 그녀를 점점 더 날카롭게 벼렸다.
무한결투장에서의 훈련이 압도적으로 효율이 좋지만, 노바에서의 훈련도 빼먹을 수 없다.
그녀 본인의 전투력 증진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부하들의 실력 향상도 중요하다.
'가르치다 배우는 게 많기도 하고.'
그녀는 무한결투장에서의 죽음으로 인해 한껏 예민해지고 과격해진 마음을 가라앉히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병영 훈련장 구석, 친위대의 검술 수련장에서 저마다 대련이나 훈련 중이던 대원들이 꾸벅 인사를 해왔다.
"호호, 대장님 오셨습니까."
기용수의 어머니 박순자도 맑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며 요즘은 매일 병영에 나와서 대원들과 훈련 중인 그녀다.
누구보다도 본인의 검술 성취를 즐기기도 했고, 이제는 역으로 병사들의 대련 상대가 되어주며 재능기부를 하는 중이다.
"오늘도 고생하시네요. 어머니."
"하이고, 아입니다. 나라가 전쟁 중인데 장병들 생각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녀가 소드마스터가 된 지 벌써 2년이다.
그동안 그녀는 실력이 일취월장해, 이제는 이은영마저도 쉬이 승부를 보기 어려운 강자가 되었다.
한때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던 눈부신 재능의 검사와 환갑이 넘어 처음 검을 잡은 늦깎이 검술 천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자 좋은 상대가 되어주었다.
"다들 집중."
"넵."
군기가 바짝 든 친위대 85인을 보며 이은영은 뿌듯함을 느꼈다.
전쟁의 살육과 파괴는 문명을 퇴보시키기도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오준환과 기용수, 최준섭, 구정욱, 제임스 등 독립부대의 모두가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부대원들 중에서도 몇몇이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성과가 좋은 것은 친위대였는데, 일반대원들 중에서만 벌써 4명이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애당초 친위대는 당장의 전투력보다도, 충성심과 재능, 성장 가능성만을 두고 대원을 선별했기에 이제야 그 성과가 나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전쟁이라는 실전 상황은 고구려의 전 병력의 정예화를 가져왔다.
이는 강용철이라는 든든한 대사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은영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 친위대는 전원이 5분 대기에 들어간다."
"네, 알겠습니다!"
원래도 친위대의 임무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언헤드 성의 수비 핵심이자, 언제든 불리한 전장으로 파견 가는 부대가 친위대다.
특히나 지난 2년간 고구려의 수호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 엘프 검사 에그니스의 부재중엔 언제나 친위대가 바짝 긴장하며 대기했다.
간간이 보내는 적 '닌자 부대'의 테러는 민관을 가리지 않고 퍼부어지기에, 초동대처가 빨라야만 피해를 줄일 수가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선 아이반의 침입까지 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
아이반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친위대원들의 얼굴에 대번 긴장이 가득해졌다.
자살 특공대인 닌자 부대는 그 은밀함에 강점이 있지, 무력마저 높은 건 아니라 발견만 하면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반은 다르다.
고구려의 수호신이 에그니스이듯, 맵에 자리 잡은 적의 전진기지의 수호신이 아이반이었다.
그가 에도성의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위해 아이언헤드 성을 찾는다면, 에그니스가 아니면 사실 대응 수단이 없다.
"우리가 에그니스 경의 빈 자리를 메워야 한다."
"...."
"뭐야? 다들 목숨이 두려운가!"
"아닙니다!"
"다들 마음 단단히 먹고, 각오를 새겨둬라."
이은영이 흉갑을 탕탕 쳤다.
"노바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고난이 있긴 하겠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헌데 돌아올 집이 없으면?"
이은영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박순자에게 쏠렸다.
부활의 산증인!
모두의 시선에 열망과 존경이 가득하자 박순자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들, 우리 이제 큰일이구나.'
한번 타이밍을 놓친 해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졌다.
이거 한번 죽어서 부활해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큰일이네.
"돌아올 집이 있으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내 한목숨 살려본들 고구려가 망하면 갈 곳이 없다!"
"맞습니다!"
"죽어도 지키겠습니다!"
"아이반이든 뭐든 두렵지 않습니다!"
이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 수련은 합격술이다."
절대 강자를 두고 다수가 힘을 합치는 전술.
"어머니, 같이 좀 도와주시죠."
"그러죠."
박순자와 이은영이 '아이반' 역할을 하고 나머지 85명의 대원들이 합격 전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훈련하길 나흘.
재상 김진태의 급한 소집령이 떨어졌다.
"친위대장님! 재상 각하의 호출입니다!"
"알겠다."
재상의 집무실로 달려가 보니 심각한 얼굴의 강용철이 함께였다.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던 김진태가 이은영의 등장에 반색했다.
"친위대장!"
"무슨 일이십니까?"
"에그니스 경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예?"
이은영이 깜짝 놀랐다.
나트롱 백작령과 인접한 전선에 흑마법사가 나타나 출동한 에그니스다. 그런데 그가 다쳤다면....
"아이반이 거기 나타났습니까?"
"아니요."
"...."
더 심각한 문제다.
아이반의 등장도 아닌데 에그니스가 중상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면, 이는 적에게 '위대한' 급의 전력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니까.
하나를 수비, 하나를 공격에만 투자해도 고구려로서는 막을 패가 없다.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시고, 일단 친위대에서 할아버지를 호위, 서부 전선까지 가주셔야겠습니다."
"수도는요?"
"순자 어머니와 나머지 친위대원들을 믿어야지요."
"...."
닌자 부대의 테러 정도야 그걸로 가능하겠지만, 아이반이 출몰하면 낭패다.
하지만 이은영도 김진태도 누구 하나 그 가정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일어나서는 안 될 최악의 상황이기에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경해서다.
"그런데 대사제님이 파견 가기보다는 에그니스 경을 후방으로 모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에그니스 경이 그 정도 상태가 아닙니다."
"아!"
고구려의 핵심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 강용철이다.
아리아 여신의 대사제 강용철이 아니었다면 고구려는 이번 전쟁을 여기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거란 건 아군도 알고 적군도 안다.
그래서 닌자들의 암살 표적 1위가 강용철이다.
"그래서 친위대장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그리핀 타고 빠르게 다녀와 주십시오."
"괜찮을까요?"
"방금 결정된 일입니다. 활동 중인 닌자들 첩보망에 걸려서 적이 무슨 짓을 할 때쯤이면 이미 되돌아오시는 중이지 않겠습니까?"
에그니스가 가 있는 서부 전선까지는 그리핀을 타고 날아가면 한나절이면 가능한 거리다.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네, 사정이 급하니 서둘러 주십시오."
"어서 가입시더."
곧장 집무실 위로 올라가 영주성 옥상에서 그리핀이 소환되었고, 이은영과 강용철이 서부로 떠났다.
그리고 아이언헤드 성에서 잠입하고 있던 닌자의 눈에 떠나는 그리핀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본인 상가 거리에 들어서서 어느 좌판 앞에 멈춰 섰다.
"김치 있소?"
"어허, 만둣집에서 김치를 찾소?"
"그럼 스시는 있소?"
"허, 저 집 202호요."
닌자가 고개를 끄덕하더니 가르쳐준 여관으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스시 같은 건 팔지 않는 여관집이다.
"어서 옵쇼."
"...."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숙박?"
"아, 일행이 있소."
닌자는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202호 문을 두드렸다.
"누구쇼?"
"김치가 없더라고. 스시나 하나 먹으러 왔지."
끼이익.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네 명의 사내가 있었다.
모두 닌자들로 막부를 위해 희생한다는 각오를 마친 자들이다.
"그리핀이 날았다. 방향이 서쪽이야."
"전령 아냐?"
"그럼 보고하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핀이 뜬 곳이 영주성이야."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확실해?"
"네, 조장."
"영주성에서 두 명이 서쪽으로...."
"에도성에 보고 하무니까?"
"아니, 기다려봐."
조장은 생각하더니 이내 지시를 내렸다.
"너."
"하잇."
"영주성에 가 강용철이 있는지 살펴라."
"하잇!"
"있으면 붉은색, 없으면 푸른색 폭죽이다."
"하잇, 알겠습니다."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탈출이나 생존 따위는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목숨을 바칠 만한 정보며, 첩보다.
"강용철의 존재가 확인되는 즉시 에도성에 알려라."
"하잇!"
잠입이나 첩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파견 나와 있는 첩보조에서 가장 엘리트 닌자이지만, 폭죽을 쏴 정보를 전한 것은 꼬박 6시간이 지나서였다.
'푸른색이다!'
강용철이 없다.
조장이 눈을 빛냈다.
"엘프가 중상을 입었다더니, 치료하러 간 것임이 틀림없다!"
기회다.
서쪽 전선에서 강용철을 잡을 기회가 아닌가?
"즉시 에도성에 알려라."
"하잇!"
닌자 둘이 아이언헤드 성을 빠져나가 보고했고, 즉시 하나가 돌아왔다.
"조장!"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왜?"
"오신답니다."
"뭐가?"
"툴룬 공작령의 기사단장 아이반 경께서 기사단을 이끌고 오신다무니다."
"...!"
에도성에서는 전장에 전력을 투사해 강용철을 잡기보다, 그가 비어버린 아이언헤드 성을 털어먹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그가 없으면 생존율이 터무니없이 낮아진다.'
괜히 서부 전선에서 그를 쫓다가 허탕을 치느니, 기적의 치료사가 사라진 성을 털어먹는 게 타당한 이치.
더군다나 전령으로 간 닌자가 이 작전을 알고 돌아왔다는 것은 추가적인 지시가 있다는 말.
잔뼈가 굵은 조장으로서 그 명령을 유추해내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고구려의 핵심 인물들의 소재를 묻더냐?"
"헙, 그렇습니다."
조장이 눈을 빛냈다.
이 고구려의 수도도 끝이구나.
"너! 고구려 핵심 인사들의 몽타주를 들고 와라. 너는 지도를 가져와라."
"하잇!"
"하!"
아이언헤드 성에 곧 피바람이 불 듯했다.
*
미궁 보상동굴.
꼬박 3일이 지났다.
벌써 노바에서는 30일이 흘렀을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저, 저, 정말 이것을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약속했잖아."
"하, 하지만 처, 천년급의 영물이 아닙니까."
"뭐, 먹고 튈 거야?"
"헛, 아닙니다."
"부하한테 주는 건데 아까울 것도 없지."
"허엇!"
사토 키요시가 넙죽 엎드렸다.
"이 은혜 천 배, 만 배 갚겠습니다."
"후후, 그렇게 해라."
철두의 웃음은 푸근했다.
지난 미궁에서 무려 황금 상자에서 까서 얻은 게 천년급 영약이다.
그런 걸 이번에 사토에게 줬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다.
어차피 얻어봐야 부하에게 줄 것이기도 했고.
"후후후."
천년급 영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어 버렸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지난 3일이 값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바가 또 걱정 안 되는 건 아니다.
'믿는다. 진태.'
친구와 부하들을 믿는 건 믿는 거고, 걱정은 걱정.
할 일은 다 마쳤으니 서둘러 돌아갈 차례다.
파팟.
미궁을 나선 그들을 맞이한 건 M44 미궁 입구에서 주둔 중인 드워프 부대였다.
"헛! 고구려 대왕이여! 서둘러 돌아가셔야겠소."
"음? 급한 일이냐?"
"그대의 성이 침략당했다는 소식에 드워프 왕국 최강 전사 구찌 경이 급히 가셨소."
"흠."
철두가 인상을 팍 쓰곤 그리핀 오식이를 소환했다.
누구 하나 무사하지 못하기만 해봐라.
싸움 붙은 놈들이 어디였지? 일본 놈들하고 돌룬인가? 아무튼 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286화 습격
고구려 수도 아이언헤드 성.
일몰 후 1시간이 지난 시간.
"크아아아!"
"막아라!"
채채챙.
"빠르게 치고 간다!"
"예!"
소란은 아이언헤드 성 서문에서 시작되었다.
수비 병력이 50명이나 되었지만 적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니, 버티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툴룬기사단장 아이반과 20명의 정예기사들.
그들 하나하나가 소드마스터의 전력이었다.
그들이 요란하게 입장하자 얼굴 전체를 복면으로 가린 닌자 다섯이 나타났다.
"기사단장 아이반 경을 뵙습니다."
"료 막부의 첩보조인가?"
"그렇습니다."
"다섯이군. 조를 나눈다."
아이반은 닌자들의 수에 맞춰 암살조를 나눴다.
5인 1조로 4개 조가 만들어지고, 아이반은 혼자서 하나의 조를 맡았다.
눈치 빠른 닌자 조장이 닌자들에게 몽타주를 나눴다. 구획에 따라 나눈 것이다.
"모조리 쓸어버린 후에 내성에 모인다."
"넵!"
다섯 무리가 각자 지역으로 흩어졌다.
아이언헤드 성은 툴룬 공작성에 비해서도 결코 작지 않은 도시였고, 외성은 방대했다.
그들은 요주의 인물들을 척살하기 위해 빠르게 목표 지점으로 향했으나.
"헛! 비었습니다."
길 안내를 맡은 닌자는 당황했다.
방금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도 남지 않은 이 집은 대장장이 장소철의 집.
"다음 타깃으로 안내해라."
"하잇!"
기사는 개의치 않고 다음 타깃을 찾아 움직였다. 닌자는 빠르게 가장 가까운 집을 찾았다.
농림부문의 선임 연구원 김춘식의 집.
쾅!
"헛! 이곳도 비었습니다."
"...장난하는 건가?"
"아닙니다! 전시상황이라 아직 퇴근을 안 한 것일 수도...."
"가족도 없단 말인가?"
"그것이...."
변명할 여지가 없다.
김춘식 교수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홀로 사는 집도 아니고, 고구려에서는 귀족 대접을 받는 이였는지라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들도 있을 텐데 없었다.
두 집 모두 야반도주라도 한 듯 휑했으니, 이는 누가 보더라도 정보가 샌 것임이 틀림없다.
"정보가 엉망이군."
"...."
"망순 경, 됐으니 다음 타깃으로 가지. 거기도 비었으면 곧장 내성 집결하면 될 듯하네."
어차피 진짜 핵심 인물들은 내성에 기거한다.
그들만 처리해도 이득이다.
에그니스와 강용철 두 존재가 모두 아이언헤드 성을 비운 이때, 최대한 타격을 주고 돌아가야 한다.
타탓!
"쳇, 비었군."
"내성으로 집결합시다."
외성은 넓다.
도시를 전부 뒤져 술래잡기를 하느니 내성의 인물들을 쓸어버리는 게 낫다.
하다못해 시설 파괴라도 하고 가야지.
"히이이잉!"
적진 한가운데서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병사들은 괴한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크억!"
"끄아!"
창을 들고 용감하게 막아서 봐야 단칼에 죽을 뿐이었다.
데에에엥! 데에에엥!
성의 여기저기서 종이 울리며 위기를 알렸고, 주민들은 집 안으로 꽁꽁 숨어들었다.
두두두두.
말을 달려 내성으로 향하니, 가는 길목에 거마창들이 여럿이고 방어 타워도 활성화되어 위험한 스파크를 뿜어대고 있었다.
치지지직.
다른 조에서 이미 도착했으나 그들도 방어 타워 때문에 섣불리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반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20명의 기사들이 내성 정문 앞에 모인 뒤였다.
"모두 허탕인가?"
"그렇습니다."
아이반이 슬쩍 닌자 조장을 보았다.
"면목이 없습니다."
"...추후에 죄를 묻지."
료 막부와 툴룬 공작가는 연합군이지만, 아이반은 닌자 조장을 숫제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
아이반이 다가서니 내성벽 위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쇄애애애액!
"흥."
까아아앙!
벼락같이 빼낸 검이 화살을 쳐냈으나 생각 이상의 굉음이 들려왔다.
"적에게 보우 마스터가 있습니다. 저놈의 저격 솜씨가 제법이라 방어 타워를 부수러 가기 어렵습니다."
파지지지직.
고개를 들어보니 내성의 일정 간격마다 불쑥 솟은 타워의 중심에 푸른 전류가 스파크처럼 튀기고 있었다.
무리해서 벽을 넘거나 공중에서 습격하거나, 일정 이상 내성에 접근하기만 해도 전격이 덮칠 것이다.
물론 소드마스터에게 있어 저것이 파괴 불가능한 난관이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변명은 그게 전부인가?"
"...."
아이반이 싸늘한 눈빛으로 스물이나 되는 기사단원을 보았다.
기사단 전력의 상위 20인이다.
전원이 소드마스터이나, 기교가 높다 하여 용기와 투지마저 그에 따라가진 못했다.
평화는 전사를 안주하고 만족하게 만들며 겁쟁이로 만든다. 전쟁의 독기는 겁쟁이를 용사로 만들어 내지만 희생도 따르니....
"뚫어라."
"넵!"
20인의 기사단이 전원 앞으로 돌진했다.
그래도 지난 2년간 전쟁이 이들에게 좋은 튜토리얼이 되어주었다.
파지지지직!
그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자 방어 타워에서 전격이 요동쳤다. 하지만 하나에 집중되지 않고 스무 갈래로 갈라진 전격은 그 충격이 약화되었고.
쾅, 콰앙!
줄줄이 검기 두른 검을 휘두르는 그들에 의해 방어 타워도, 성문도 대미지를 입어 갔다.
쐐애애액, 콰직!
"끄윽!"
공격에 정신 팔린 소드마스터 하나가 날아온 화살에 목이 꿰뚫려 즉사했다.
파팟.
기사답게 시체가 사라지며 전리품이 남았다.
성문 위의 수비대장 기용수는 신중히, 신중히 화살을 메겼다.
'시발.'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소드마스터만 스물이라니.
더군다나 저기 뒤에서 가만히 서 있는 저놈은 요주의 인물 '아이반'이 틀림없다.
저자를 죽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아까 쏘아본 화살로 이미 견적이 나왔다.
'괜한 화살 낭비다.'
저자는 막아 낼 수 없다.
방어 타워가 버텨주는 한에서 최대한 적 소드마스터의 숫자를 줄이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투두두두둑!
성루에 늘어선 수비대원들이 쉴 새 없이 활을 쐈다. 이 화살이 적에게 유효 타격을 주지 못하리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대장 기용수가 쏘아 보내는 화살을 위장하는 역할만 해도 충분하다.
쐐애애액, 콰작!
그래, 두 명째.
기용수가 세 번째 살을 매겼다.
츠츠츳.
궁술 레벨 5.
무려 보우 마스터로 거듭난 그는 화살에 검기를 담을 수 있었다. 그 가공할 위력의 화살이 세 번째 먹잇감을 향해 날아갔다.
쇄애애액, 팅!
"어림없다!"
"젠장!"
이번 놈은 아예 대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성문의 오른쪽에 있는 방어 타워가 영 좋지 못한 소리를 냈다.
꾸르르릉.
푸른 전격이 점멸하더니 이내 빛을 잃고 사라졌다.
그곳을 향해 소드마스터 둘이 성벽을 밟고 뛰어올라 난입했다.
"후퇴!"
기용수의 명령에 궁수들이 재빨리 후퇴했으나, 적 기사 둘은 성난 황소처럼 성벽 위를 무질서하게 쓸어갔다.
"끄아악."
"크헉!"
쐐애애액! 콰직!
그나마 난전 중에 한 발 더 날린 화살이 적 기사 하나를 더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여전히 생존 중인 적 기사는 17명.
거기에 아직 가장 골치 아픈 아이반이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끼이이익.
소드마스터들이 검기를 줄줄이 내뿜는 검으로 내려치는데 성문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
부서지다시피 생긴 틈으로 파고들어 도륙하니, 곧 성문이 기울어지며 틈을 내보였다.
끼이이익.
아이반은 그제야 걸어갔다.
부하 셋 전사로 얻은 것은 적 방어탑 두 대와 성문 공략.
독기 가득한 부하들이 밀고 들어가고, 곧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이질적인 굉음이 잔뜩 울려 퍼졌다.
쾅, 쾅!
성문을 통해 나아가니, 적 기사들도 대거 몰려있었다. 개중에는 소드마스터로 보이는 이들도 심심찮게 보이는바.
"쥐새끼들이 여기 다 있었군."
아이반이 히죽 웃었다.
어차피 레벨 6의 위대한 경지에 이른 그에게 소드마스터나 기사나 거기서 거기다.
일반 기사는 그저 썰려 나갈 허수아비나 다름없고, 소드마스터라 하여도 몇 번 더 버티는 정도다.
"물러서라."
차창!
아이반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나 한 줄로 쭉 늘어섰다.
스릉, 촤아아앙!
아이반의 검에서 검강이 솟구쳤다.
검보다 두 배는 더 길어진 검은 거인이 차고 다니면 딱 맞겠다 싶을 정도의 검이었다.
"차압!"
아이반을 향해 친위대의 소드마스터 셋이 나섰다. 합격술의 연습은 충분하다.
쇄애애액, 쾅! 쾅!
"끄아아!"
그러나 아이반의 앞을 가로막은 친위대는 엄청난 힘에 튕기듯 날아가 버렸다.
서컥!
그 옆에 있던 친위대원이 휘두른 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어느새 휘둘러진 아이반의 검이 그의 손목을 잘라냈다.
"크헉!"
그나마 재빠르게 판단해 뒤로 몸을 던지듯 피한 덕에 후속타를 아슬하게 벗어나 목숨을 구제할 수 있었다.
콰직!
나머지 친위대원은 연달아 다섯 번의 공격을 막아 냈으나.
콰직!
"끄으으으."
가장 실력이 좋았기에 가장 많은 합을 나눈 그가 가장 먼저 죽어버렸다.
아이반이 친위대원의 가슴에 찔러넣은 검을 빼 들었다.
츠아앙!
"용식이!"
"부대장님!"
하나가 죽고 둘이 전투 불능이 되어버렸다.
대장 이은영이 부재중인 지금, 친위대의 가장 강력한 셋이 한 번에 무력화되어버렸다.
"쓸어라."
"넵!"
아이반의 명령에 친위대원들이 다시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흐음."
아이반이 그 숫자를 세어보니 서른 남짓.
모두 기사급이다.
아까 성벽 위에서 화살을 날리던 병사들을 더 해보았으나 고작 100명도 안 된다.
더군다나 내성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기척 또한 터무니없이 적다.
"쯧, 정보가 샜군."
최소한의 결사대만 내성에 남겨두고 유인한 다음, 모든 인물들을 도시에 숨겼다.
"기사단 전원. 성내의 모든 시설을 모조리 파괴하라!"
"넵!"
화르르륵.
기사들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기름이나 화염구를 날리는 아티팩트 등을 꺼내 여기저기 난사했다.
아이반은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 내성의 영주성으로 향했다. 닌자 다섯이 그를 호종하듯 뒤따랐다.
"모조리 불 질러라."
닌자들은 여기저기 불을 밝힌 횃불들로 불을 지르며 뒤따랐다.
영주성의 1층 홀로 들어선 아이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호오! 네년이 그 조선제일검이겠군."
"...."
박순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검만을 들이밀 뿐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그녀가 죽는 날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잘되었다.'
아들의 거짓말로 시작되어 부활절 행사까지 해버린 그녀다. 이참에 정말 죽어서 다시 부활하잔 심정으로 그녀는 각오를 다졌다.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시켜야 한다.
영주성의 내부는 현재 종합정보실로 쓰이고 있다. 재상 김진태도 아직 피신하지 못했으며, 중요한 정보도 아직 처리하지 못했다.
10분.
그 정도의 시간만 벌어도 충분하다.
"헛! 저 여인은 조선제일검이 아니무니다."
닌자 조장의 말에 아이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 정도의 실력자인데 친위대장 이은영이 아니라고?
"하잇! 저 여인은 고구려의 부녀회장입니다."
"부녀회장?"
"대모로 불리며, 대왕의 양모입니다. 중년 여성들로 이뤄진 검술 집단 부녀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물이었군."
더 망설일 것이 무엇이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고구려의 모든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대왕 강철두의 양모라면 주요 인물.
'그럼 강용철과 함께 그리핀을 탄 자가 이은영이겠군.'
고구려에서 무력으로 치면 넘버 2가 이은영이다. 그런 그녀가 아이언헤드 성의 습격 소식을 들으면 서둘러 귀환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운이 좋으면 서둘러 돌아올 이은영과 강용철까지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깐 어울려 주지."
잠시 시간도 기다릴 겸, 아이반은 그저 검기만 두른 검으로 박순자에게 다가섰다.
어디 고구려의 검식은 어떠한지 구경이나 해볼까?
287화 불타는 성
아이언헤드성 영주성 4층 집무실.
김진태는 본디 강철두의 것이었던 상석 옥좌에 앉아 눈을 감고 기다렸다.
"시발."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왔다.
솔직히 쫄린다.
하지만 도망칠 순 없었다.
아침 무렵 닌자 하나가 난입해 푸른 폭죽을 쏘아 올릴 때부터 느낌이 싸했다.
'할아버지랑 친위대장이 떠나자마자 바로?'
누가 보더라도 찝찝한 상황이다.
'할아버지를 노리려고? 아니면 여기?'
모두 가능성이 있다.
강용철을 암살하기에도 적기고, 아이언헤드 성을 침략하기에도 지금이 가장 적합한 때이다.
김진태는 혹시 몰라 빠르게 사람들을 소집해 소식을 알렸다.
"모두 내성을 비우고 나가세요. 집으로도 돌아가지 말고 다른 민가에 의탁해 하루 지내도록 하세요."
"정말 만약, 내성이 텅 비어버린다면 적의 칼은 민간을 향할 겁니다."
"맞습니다. 누군가는 내성에서 침입자들을 저지해야 합니다. 친위대가 남겠습니다."
"헛! 남는다면 나 수비대장이 남는 게 맞습니다."
"아들을 두고 어미가 어찌 피해 있겠습니까? 제가 고구려의 은혜를 받은 것은 이럴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니, 제가 남겠습니다."
너도나도 자처하여 남다 보니, 고구려 재상으로서 김진태도 떠날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만약 있을지도 모를 적의 습격을 대비해 결사대를 꾸리세요.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헛, 그럴 필요야 있겠습니까? 재상은 몸을 피하시지요."
"습격을 한다면 분명 성과가 있어야 돌아갈 터. 제 목 정도는 주어야 민간의 피해가 최소화되지 않겠습니까?"
서로가 남겠다고 우기는 끝에 회의가 길어졌지만 결국 인선이 갈렸다.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하기 위해 오늘 하루 내성은 조용했다.
고집쟁이들만 남은 내성.
김진태는 감았던 눈을 떴다.
"두 분도 이제 떠나시지요. 괜히 아까운 목숨 보탤 필요 없습니다."
"소녀는 이 성과 운명을 함께하오니, 괘념치 마십시오."
성내의 모든 사용인을 총괄하는 관리인단의 엘리스는 보통 고집쟁이가 아니었다.
"어휴, 진짜 고집도...."
"재상 각하 또한 같지 않으십니까."
"어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위기 속에 귀한 마음이 피어난다더니, 그간 알게 모르게 신경 쓰던 두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클클, 좋을 때야. 전쟁에도 사랑은 피어난다더니."
"에르미스 경이라도 가세요. 공연히 여기서 죽어봐야 누가 알아준답니까?"
"우리 종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네."
드워프 에르미스는 껄껄 웃었다.
"위대한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벼이 행동해서는 안 되지. 내 철두에게 이미 고구려를 대신 지켜주겠노라 선언했는데, 지금에서야 어찌 꽁지를 내빼겠나?"
"끄음."
"거기에 연락받을 이도 하나 있어야지."
드워프들은 와이피석으로 만들어진 호리병으로 서로 통신한다. 아까 서문이 시끄러울 때 이미 드워프 왕국에 소식을 알렸으니, 잘하면 큰 피해 없이 이 아이언헤드 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원군이 오면 살 것이고, 오지 않으면 죽겠지."
"제발 왔으면 좋겠네요."
이미 드워프들은 고구려를 위해 동맹이 아니라 혈맹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의리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또 고구려가 위기에 처했는데, 드워프 왕국에서 지원군이 온다면 정말 큰 은혜를 입게 되는 셈이다.
그때 회의실로 중년 여인 박순자가 들어섰다.
"적들이 내성 앞에 집결했어요."
"후, 결국 이렇게 됐네요."
네 사람은 사망일을 받아 놓은 시한부의 심정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제가 1층에서 최대한 막아볼게요."
"부질없습니다."
박순자가 웃으며 내려갔다.
"세상에 부질없는 일이 어딨나요? 1초라도 버텨봐야지요."
그런 그녀가 떠나고 아래에서 검명이 들려오자 에르미스가 벌떡 일어섰다.
"흐흐, 나도 먼저 가지."
에르미스가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의외로 박순자는 아직도 죽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아이반.'
습격한 자가 아이반 단장이다.
에그니스가 아니면 대항할 자가 없는 전략 병기.
위대한 검사.
헌데 박순자가 대등하게 검을 주고받고 있으니.
'가지고 놀고 있군.'
에르미스는 나서지 못했다.
그가 나서는 순간 아이반의 유희는 끝이 날 터.
둘이서 합격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금 박순자 홀로 싸우는 게 시간을 더욱 끄는 일이니.
'제발 국왕이시여. 제대로 된 병력을 좀 보내주시오.'
신화급 무기를 신에게 진상해, 위대한 장인이자 전사로 거듭난 쿠찌 경이라면.
에르미스가 간절히 바라며 초조하게 칼싸움을 지켜보았다.
채채챙.
박순자는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차앙, 쾅, 쾅!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검기를 두른 검끼리 부딪힐 때마다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흡수한계가 50개를 넘은 그녀의 마력 스탯이 아니었다면 여즉 버티지도 못했으리라.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는 가운데 박순자는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으니.
'조금만 더. 조금만.'
아까부터 뭔가 간질간질한 것이 잡힐 듯 말 듯한 기분이었다.
어두컴컴하던 방 안에 옅은 빛이 스며들어와 이제야 어렴풋이 방 안이 보이는 기분.
채채챙!
적당히 어울려줄 생각으로 검을 주고받던 아이반은 조금 기분이 묘했다.
'엄청난 재능이다.'
실시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아이반 평생 검을 잡은 지 50년.
이토록 눈부신 재능을 본 적이 없다.
상대도 결코 젊지 않아 보이는 나이건만, 어찌 말년에 이르러 이토록 순수하게 발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찬란한 재능에 아이반은 저도 모르게 흥을 냈다. 집중하느라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캐치하는 게 늦었다.
카앙!
검을 떨쳐낸 아이반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일격을 받아낸 박순자는 여섯 걸음이나 후퇴한 끝에 멈춰서서 탄식했다.
"아아!"
"쯧, 적인 게 아쉬울 지경이군."
아이반은 깨달음에 빠져든 박순자를 보며 다가갔다. 일변한 그의 분위기에 에르미스가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어엇? 대모, 정신 차리시오!"
도끼를 빼어 들고 박순자의 곁에 섰다.
합격이라도 펼치고 싶었으나, 박순자의 얼굴은 넋이 나간 표정이다.
"젠장. 흐랴아아!"
하는 수 없이 에르미스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드워프의 그것. 소통의 팔찌를 거칠 것도 없이 귀에 박히는 제타 행성 드워프의 언어다.
'쿠찌 경이 왔다.'
적 소드마스터들의 합격에 길이 막힌 듯싶지만 뚫어내실 거다.
그사이 이놈만 막아서면.
쾅, 콰앙!
"흐읍!"
"난쟁이 놈이 제법이구나."
유희는 끝났다.
예상대로 고구려의 원군이 왔다.
밖에서 소란을 떠는 게 이은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이렇게 차례로 하나씩 죽이고 빠져나가면 고구려로서는 상당한 타격을 입는 셈.
쇄애애액, 쾅!
검강을 두른 검격이 날아옴에도 에르미스는 도끼를 요리조리 움직여 방어에 치중하며 용케도 막아냈다.
촤아악.
"끄아아!"
잘려버린 오른손이 도끼를 쥔 채 허공을 뒹굴다 바닥을 굴렀다.
"흐으읍."
핏발선 눈을 부릅뜬 에르미스가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꺼내 왼손에 쥐었다.
"호오."
"흐흐, 덤벼라."
"훌륭하구나."
내 부하들이 저런 투지를 본받으면 좋으련만.
아이반이 한 발 나서며 검을 내지르려 했으나 방해꾼이 나타났다.
"으랴아아아아!"
촤앙!
고운 미성이 들려온다 싶더니, 창문을 깨고 난입한 타투의 엘프 전사가 에르미스의 곁에 섰다.
"귀쟁이!"
"난쟁이, 손모가지 뭐냐?"
"크흐흐흐흐, 되었군. 약속을 지켰어."
"뭔 소리냐?"
아르엘라가 영문을 몰라 하자 에그니스는 망치를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피가 철철 나는 왼손에 포션까지 붓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어이가 없군. 그대는 아이리스 후작령의 기사단장이 아닌가?"
제국령 중 하나인 아이리스 후작령은 엘프들이 워낙 많아 제국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하늘이 내린 미모를 자랑하는 기사단장 아르엘라는 유명한 편.
툴룬 공작가의 기사단장이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날 알아?"
"몰라볼 리가. 이거이거 그리 발뺌하더니, 이제는 아이리스 후작령이 이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뭔 개소리야."
"...?"
"여기가 내 왕국인데."
"허허, 허허허허허!"
아이반이 광소했다.
"정말이었군. 소문이 사실이었어!"
2년 전에 그런 루머가 있긴 했다.
고구려의 대왕과 아이리스 후작령의 기사단장이 약혼을 했니 마니 하는 소문 말이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이 미궁으로 사라진 덕에 잊혀졌지만.
"그래서 에그니스 그 녀석이 여기 주둔하고 있었군!"
"뭐? 이제 와서 깨달은 척하면 어쩔 건데?"
"흐흐흐."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엘프 노예들이 대거 전리품이 되겠군."
"...기분 나쁜 새끼네."
"밖은 정리가 된 것 같군."
어느새 소란스럽던 외부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정리가 됐겠지."
"...?"
"내가 혼자 왔겠냐?"
"...?"
아이반이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영주성 정문이 열리며 덩치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화가 가득해 보였다.
"너냐? 우리 집에 불 지른 게?"
"...넌 또 뭐냐?"
아이반은 슬슬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부하들이 전멸한 모양이었다.
'멍청한 것들.'
스스로를 탓하는 말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함정을 판 것인가?"
"...?"
"역시 그렇군. 보기 좋게 당했어."
"무슨 개소리냐?"
불 질렀냐니까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툴룬 사람이냐? 료 막부 사람이냐?"
철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아이반을 향해 다가왔다.
"고구려 대왕 강철두. 성물 묠니르의 주인이라지?"
"일본말은 아니군."
"크크,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툴룬이겠어."
"나를 잡기 위해 이리도 치밀한 함정을 파고 있을 줄이야."
그때 계단에서 뛰어 내려오는 자가 있었으니, 김진태와 엘리스였다.
"철두야!"
"오, 진태."
아이반의 고개가 전방과 후방으로 빠르게 오고 갔다.
"그렇군."
저 별 볼 일 없는 자.
겨우 말단 기사 정도의 수준에 불과 한 자.
고구려의 재상이라고 했나?
"저놈이군. 심계가 깊은 모사꾼이었군. 간교하고도 치밀하구나."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계속 걸어온 철두는 아이반의 앞에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겨우 3미터.
스릉.
철두가 명검 '할아버지'를 꺼내 들었다.
"흐흐흐."
아이반이 반쯤 미친 듯 웃었다.
너무 완벽한 기회라는 생각에 속아 넘어가 함정에 빠졌지만, 곱게 죽어주진 않겠다.
적어도....
"모사꾼은 길동무로 삼아주마!"
파팟!
아이반이 철두에게서 등을 돌리고 김진태를 향해 쇄도했다.
"음?"
철두가 서둘러 검을 휘둘렀으나 짧다.
등에 큰 상처를 남겼으나, 아이반은 여전히 대시중.
"헛!"
김진태는 주마등을 보았다.
"안돼!"
엘리스는 부질없음을 알지만, 아니 그런 생각 따위는 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김진태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쇄애애애액!
히죽 웃는 아이반의 얼굴이 확 가까워지고, 위협적인 검강이 맺힌 그의 검이 김진태의 목을 가르기 위해 궤적을 그렸다.
콰앙!
그리고 검강에 가로막혔다.
"너! 너는!"
아이반이 경악했다.
"...좋은 가르침이었어요."
중년 여인 박순자의 검에 맺힌 백색의 검강이 아이반의 목을 훑었다.
촤악.
288화 흑마법사 제롬
화르르륵.
"물! 빨리빨리!"
촤아아악, 화르르륵.
아이언헤드 성은 화재 진압이 한창이었다.
피신해있던 내성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으며, 마찬가지로 부활이 불가능해 피신시켰던 병사들도 돌아왔다.
"친위대 보고, 부대자 김용식 외 31인 사망."
"수비대 보고드립니다. 51명 사망, 62명 부상입니다."
대사제 강용철은 없지만, 아리아 교단의 사제들은 있었기에 그들이 복귀하자 부상자들은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철두야. 너는 할아버지 모시고 와. 아니, 아예 거기 좀 정리하고 와."
"알겠다. 고생해라, 진태."
"그래! 어머니도 계시니까 이제 괜찮아."
"흐음, 네가 잘 위로해 드려라."
"후, 알겠어."
박순자가 위대한 검사가 되었다.
레벨 6.
고구려에서는 강철두에 이은 두 번째로 위대한 경지에 이른 그녀다.
그런 그녀가 울고 있다.
"끄윽, 끄으윽. 용수야아아."
화살통을 붙잡고 울고 있다.
이번 전란에서 죽은 기용수가 남긴 것은 인벤토리에 들어있던 예비 화살통.
유품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것만을 남기고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망해버린 친위대의 시체 또한 마찬가지다.
수비대 병사들 중 일부.
17명의 시신만이 남았다.
아직 랭커에 들지 못한 이들.
화재가 진압되고, 부활의 기회도 받지 못한 그들을 위해 간소한 장례가 거행되었다.
지난 2년 동안 아이언헤드 성이 닌자들의 테러에 당한 일은 비일비재했으나, 내성이 불탄 경우는 처음인지라 주민들의 동요도 있었다.
<대왕 강철두가 돌아왔다.>
김진태는 그런 주민들의 불안을 세력창을 통해 고구려 전역에 공지사항을 날리며 잠재웠다.
다음 날이 밝은 고구려는 그리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들 대왕의 복귀에 이제 전쟁은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아이언헤드 성에서 가장 어두운 분위기의 장소를 꼽자면 기용수의 집.
"하이고, 성님. 힘 좀 내소."
"암요, 용수도 어매 따라서 금방 부활할 거고만요."
"영 죽은 것도 아닌디, 기운 좀 내드라고!"
허리춤에 칼 하나씩은 찬 부녀회의 동생들이 박순자를 위로했으나 귀로 들리지도 않았다.
박순자의 위상은 본래도 대단했지만, 이제는 더욱 높아졌다. 강철두에 이은 두 번째 위대한 검사.
고구려에 귀하디귀한 인물이 되어버린지라 재상 김진태가 직접 행차해 위로할 정도였다.
넋이 나간 얼굴의 기용수 어머니 박순자는 한참을 김진태를 안고 울었다.
아들이 죽은 게 제 탓만 같았다.
꼭 벌을 받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
"...재상님이요."
"네."
"고백할 게 있습니다."
"알아요."
"...."
"아무 말 마세요."
"우째 그란단 말입니까? 이게 다 세상을 속여먹어 벌을 받는 게 아니겠습니까? 끄으윽."
박순자가 꺼이꺼이 울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도 자식은 자식이고, 나이 환갑이 넘어도 어머니는 어머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본인보다 먼저 죽는 것을 원할까?
"용수 형은 돌아올 거예요."
"언제. 언제 돌아온단 말입니까? 끄흐으으윽."
부활이야 하겠지.
그게 언제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수년이 걸릴지, 수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애당초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박순자도 모르고 있다.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말하세요."
"툴룬. 그놈들 찢어발기는데 저를 써주이소."
"...."
김진태는 박순자의 눈빛을 보곤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복수라는 동력이라도 주지 않으면 이대로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아 결국 승낙했다.
"약속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상님. 대왕님께도...."
"철두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
"굳이 알리지 마세요."
여태 김진태가 모른 척한 것도 강철두가 굳이 몰랐기 때문이다.
애당초 박준필과 기용수가 임무 탓에 두 사람에게 접근할 때부터 거짓말인지 눈치챈 김진태다.
산적 두목 장호철에게 기용수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은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못난 모습 보였습니다. 불러주실 때만 기다리겠습니다."
박순자는 더는 울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을 갈무리한 눈빛은 점점 깊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후우."
기용수의 집을 나선 김진태는 영주성으로 향했다.
"쿠찌 경.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맹국끼리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쿠찌의 겸양의 말에 김진태가 거듭 감사를 표했다. 고구려의 재상으로서 할 일이 참 많았다.
*
고구려는 뉴아 요새를 되찾고, 부대 개편을 마친 뒤 파죽지세로 나트롱 백작령을 향해 진군했다.
쭉쭉 나아가던 군대가 다시 후퇴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흑마법사 제롬의 출현 때문이었다.
그는 전장에 내려온 사신과 같았다.
백작군, 고구려군 가리지 않았다.
"구륵, 구르륵."
"끄르륵."
팔다리 잘린 병사들이 다시 일어섰으며, 내장을 줄줄 흘리는 시체도 다시 두 발을 딛고 섰다.
대규모 좀비 부대의 출현에 전장은 혼란 그 자체가 되었다.
"끄아아! 아군이야! 아군이라고!"
"저리 가! 가!"
좀비들은 산 자를 향한 증오와 적개심이 대단해 전장의 피아를 가리지 않고 물어뜯었으며, 죽은 시체는 다시 좀비가 되었다.
때아닌 좀비의 저주에 고구려군도 후퇴하고, 나트롱 백작군도 후퇴했다.
"시발, 진짜 좀비네."
"다들 당황하지 마라! 저주 저항만 있으면 된다!"
의외로 고구려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차근차근 후퇴해 병력을 보존했으나, 나트롱 백작군은 아니었다.
부활해 다시 이번에 전장에 나선 우로사 남작은 잔뜩 화가 났다.
듣기로 흑마법사는 툴룬 공작가의 인물이라 했는데, 어찌하여 구울들이 나트롱 백작군을 공격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 길을 뚫어라! 내 따져 묻겠다."
"네, 남작!"
날개도 없건만 허공을 딛고 선 검은 유령마를 탄 검은 로브의 사내.
우로사 남작은 흑마법사 아니랄까 봐 음침하게 생긴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나트롱 백작 각하의 봉신 우로사 남작이다!"
"...."
본인 소개를 했음에도 아무런 대꾸도 없는 흑마법사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대는 당장 저 구울들의 공격을 멈추라!"
우로사 남작의 호통에 검은 로브가 천천히 움직였다. 두꺼운 로브가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어 겨우 보이는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저주는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허!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요!"
"...."
"당장 저 구울 무리를 통제하지 않으면 내 가만히 있지 않으리다!"
"...후후후."
낮게 웃는 소리가 거슬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뉘앙스에 우로사 남작이 폭발했다.
"그대! 툴룬 공작 전하를 믿고 이리 안하무인으로 구는가? 툴룬 가나 나트롱 가나 전부 제국의 일원. 이는 황...."
콰직!
우로사 남작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허윽, 허윽."
검은 암흑으로 만들어진 창이 우로사 남작의 배를 뚫고 바닥에 박혔다.
남작의 호위기사 리에나는 당장 검을 뽑아 들고 흑마법사 제롬에게 덤벼들었다.
주종 계약을 맺은 그녀는 우로사 남작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이번에 어떻게 부활했는데 다시 그 지옥으로 간단 말인가?
"이노오옴!"
쇄애애액, 쩌엉!
검은 막에 가로막혔다.
'방어 마법으로 검기를?'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흔한 일도 아니다.
대체 얼마나 고위급 마법사기에?
촤르르륵.
"끄윽."
리에나가 후속타를 날리기도 전에 바닥에서 돋아난 검은 기운들이 촉수가 휘감듯 리에나를 낚아챘다.
꽈드드드득.
"끄아아아!"
밧줄에 꽁꽁 묶인 듯 허공에 매달린 리에나는 압사할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무려 레벨 5.
초인지경의 기사가 말이다.
"...적당한 재료로군."
투레질한 유령마가 허공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더니 리에나의 근처에 다다랐다. 제롬이 손을 뻗었다.
태양을 본 적은 있을까 싶은 흰 피부는 검은 옷과 검은 로브로 인해 창백해 보일 지경이었다.
"으윽. 무, 무슨."
제롬의 손아귀가 다가오자 리에나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표출했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마에 손아귀가 닿자.
파스스스스.
희끗한 무언가가 제롬의 손아귀에 딸려 뽑혀 나왔다. 초점이 사라진 리에나의 몸은 순식간에 마르며 쪼그라들기 시작했는데, 10초도 지나지 않아 마른 미라가 되어버렸다.
투둑.
검은 촉수가 사라지며 생명이 다한 그녀의 미라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죽음은 곧 또 다른 시작이라 그녀의 시체는 전리품을 남기고 사라져야 하건만... 미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투둑, 투둑.
하늘을 딛고 내려선 유령마가 대지를 밟았다.
제롬은 훌쩍 뛰어내리더니 천천히 걸어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우로사 남작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나는 툴룬 공작의 개가 아니다."
"...흐윽, 흐으."
검은 창에 관통당해 대꾸하기는커녕 숨 쉬는 것조차 힘들다.
"너의 영혼도 거둬가마."
제롬의 손이 우로사 남작의 훤한 이마에 닿자, 마찬가지로 희끗한 무언가가 뽑히며 그의 몸은 마른 미라가 되어버렸다.
"...."
제롬이 유령마에 올라탔다.
유령마가 계단을 딛고 오르듯 천천히 허공을 오르니, 멀지 않은 전장의 현장에서 구울들이 막 포식을 끝내고 있었다.
눈치 빠르게 저만치 멀어져 버린 고구려 군은 구울의 발걸음으로 쫓기 힘들다.
"끄아아!"
"막아! 밀어내!"
"진형을 유지해라!
우로사 남작군에는 하급 지휘관이 여럿 남아 있었다.
유령마를 타고 전장이 훤히 보이는 앞으로 다가선 제롬은 그들을 모조리 창에 꿰어버렸다.
"끄아아아!"
꼬챙이로 꿰어 훑어 먹듯, 그들의 영혼을 모조리 갈취했다.
하급 지휘관마저 잃어버린 병사들의 운명은 당연하게도 구울에게 찢겨 죽든가, 마찬가지로 구울이 되든가 둘 중 하나였다.
"꾸르르르."
마지막 생존자마저 죽음을 맞이하자 구울들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코를 벌름거리며 본능에 따라 살아있는 자를 찾아 움직이려는 그들을 향해 제롬이 손을 뻗었다.
"검은 태양이 그대들을 인도할지니."
파아앗!
제롬이 만세 하듯 들어 올린 두 손바닥 위에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그어어어."
검은 태양이 구울들을 비추자 그들의 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고 증발되어 쓰러진 구울들이 백골이 되어 하나둘 몸을 일으키니....
[키이이이!]
[크이이이이!]
스켈레톤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를 찾아 주워 정돈하자 순식간에 부대가 꾸려졌다.
제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골격이 크고 탄탄해 보이는 놈들을 골라 수집한 영혼을 하나씩 주입했다.
[크오오!]
그러자 평이한 스켈레톤보다 더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들이 탄생했다.
적어도 영혼이 가진 생전의 파워보다는 족히 1.5배는 더 강력해진 그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백골이 검게 변해버리며 안구 대신 자리한 붉은 눈빛이 이글거리는 스켈레톤.
"불사의 군단장이여."
[...주인께 경배를.]
검은 스켈레톤이 기사가 군주에게 예를 올리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데스나이트의 재료가 되는 소드마스터의 영혼을 고작 하나만 얻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쉬울 건 없다.
이제 시작이니.
"나의 군대여. 세상에 어둠을 선사하리라!"
제롬의 말에 복창하듯 무장한 스켈레톤 2천여 기가 각자 무기나 방패를 들고 부닥치며 소리 질렀다.
불사의 군대가 남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289화 불사의 군대
구울은 노바에 존재하는 몬스터다.
보통은 제대로 매장하지 않은 시체를 그늘진 숲이나 협곡 등에 버리면 가끔 살아나 움직이는데, 그것이 구울이다.
이놈들은 대부분 음지를 좋아하기에 어두운 숲이나 동굴에 살고, 태양을 기피한다.
더군다나 불에 취약해, 물리는 것만 조심하면 그리 어려운 사냥감도 아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울은 어차피 마주친다 해도 한 마리, 두 마리 수준이니까.
후퇴한 고구려군은 화공으로 구울 부대를 격퇴하려는 작전을 짰으나,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밤사이 구울은 온데간데없고 무장한 뼈다귀들이 진군해왔다.
이들은 저주를 옮기지 않아 비교적 상대할만했으나, 두개골을 부수기 전까지 죽여도 죽지 않는 스켈레톤도 만만한 적은 아니었다.
연신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3일째엔, 국경인 노론 마을까지 물러서고 말았다.
"결국 흑마법사를 잡아야 끝납니다."
"데스나이트도 골치 아픕니다."
"대원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안 좋은 전망뿐이다.
적은 죽여도 죽여도 시체만 있으면 병력 수급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시체도 대부분 죽은 고구려 군인들인지라 사기도 저하되었다.
벌써 3천이나 불어버린 뼈다귀 부대는 실상 흑마법사만 처치하면 아무것도 아닌 부대다.
해결 방법은 알고 있으나, 수단이 없다.
흑마법사 곁에는 소드마스터 급의 데스나이트 하나가 호위 중인데, 그놈만 해도 지금 고구려군에서 상대할 만한 이가 없었다.
지난 2년간의 전쟁에서 급성장하여 소드마스터가 되어버린 구정욱, 최준섭, 오준환으로서도 그 데스나이트 하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빌어먹을 놈만 사라지면 뼈다귀 부대야 단번에 쓸어버릴 텐데...."
흑마법사는 유령마를 타고 고구려의 영토를 무차별 테러했다.
용전 마을을 시작으로 북부에 나타나기도 하고, 동부에 나타나기도 했다. 서부의 전선에 나타나고부터는 어쩐 일인지 떠나지 않고 해골 부대의 수를 늘리고만 있으니....
요주의 적이 한 전장에 머무르는 것이 재앙이면서도 기회가 되었으니, 흑마법사를 격살하기 위해 아이언헤드 성에 머무르고 있던 에그니스가 출격했다.
고구려 군은 이내 흑마법사가 격살되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격대, 공격대, 특작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돌격이 있었고, 에그니스는 흑마법사를 상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흑마법사를 부상 입혔으나, 그것은 에그니스도 마찬가지.
겨우 에그니스를 수습해 후퇴하고 보니, 병력의 20%는 손실을 보고 말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랭커 급인 그들이 죽으면 시체를 남기지 않아야 하지만....
미라처럼 말라버린 이들이 다시 데스나이트로 변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후퇴한 고구려군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쳤고, 에그니스의 부상은 깊었다.
"내가 눈을 뜰 때까지 절대 내 몸에 손을 대지 마시오."
안색이 파리한 에그니스는 그 말을 남기고 동면에 빠지듯 눈 감았으며, 박준필은 부득이 수도에 지원을 요청했다.
에그니스의 부상 소식을 알린 지 5시간 만에 도착한 강용철은 가만히 누운 그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다들 저리 비키라."
강용철이 에그니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그니스 경께서 아무도 자신을 만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랬겄지."
강용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눈에 봐도 에그니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죽어가고 있다.'
무슨 저주에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실시간으로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건장했던 엘프 검사의 볼이 움푹 파여 홀쭉해져 있었다.
팔다리도 가늘어져 있다.
모두가 저주의 영향이다.
"여신이요. 여 불쌍한 엘프 하나 살려주이소."
강용철이 진심을 다해 기도하며 에그니스에게 신성력을 퍼부었다.
위이이이잉!
눈부신 광휘가 휘몰아쳤으나, 강용철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으음, 이거 클났데이."
빠르게 빠져나가던 생명력이 아주 느리게 닳기 시작했으나, 다시 차오르지는 않았다.
콸콸 쏟아지던 수도꼭지를 한두 방울씩 떨어지게 잠근 수준이 전부였다.
아리아 여신의 대사제가 온 힘을 쏟았음에도 겨우 그 정도였다.
저주는 여전히 풀리지도 않았으니....
"이거 저주 건 놈을 직이삐야 된다. 내는 저승 가는 길 붙잡아두는 게 다다!"
강용철이 신성력을 유지하며 해법을 내놓았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방법.
최강 검사 에그니스가 저리되었는데 누가 있어 흑마법사를 처치하겠나?
알게 모르게 시선이 이은영에게로 모였는데, 그녀는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
표정 변화가 없어서 그렇지, 이은영은 속으로 열이 뻗치는 기분이었다. 부하들의 기대에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심함에 분노가 일었다.
'내가 했어야 했어.'
조선제일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강철두에 이은 고구려 제2인자?
허울뿐이다.
이은영이 스스로의 한심함과 모자람에 자학하고 있을 때, 박준필이 그 기색을 알곤 불렀다.
"친위대장."
"네, 사령관님."
박준필은 고구려 국무총리지만 전시인 지금은 야전사령관의 자격으로 이곳에 있다.
"두 사람을 잘 지켜주게. 자네만 믿겠어."
"알겠습니다."
"우린 나가지."
박준필이 다른 이들을 모두 물렸다.
막사엔 이은영, 강용철, 그리고 에그니스만 남게 되었다.
"...혹, 신성 마법으로 축복을 받고 싸우면 흑마법사를 제압할 수 있을까요?"
이은영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툭 던지듯 물었다.
"생각 마이소. 이거 저주가 보통이 아닌 거 보이 내가 가진 축복으로도 어림도 없어 보이니까네."
"...네, 알겠습니다."
이은영이 입술을 깨물곤 그저 조용히 속을 삭였다.
사람들의 염려가 느껴졌다.
도전을 거세당한 기분이다.
승리가 확실시되는 전장에만 내보이는 검이 되었다.
온실 속의 화초가 된 기분이다.
이은영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분에 따라 본분을 잊진 않았다.
지금은 오직 명령만.
두 사람을 지키는 일에만 모든 신경을 몰두할 뿐이다.
*
불사의 군대 본진.
데스나이트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제롬은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크크크큭."
부상이 심하지만 상관없다.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겼다. 크하하하!"
위대한 경지에 이른 검사다.
이 빈약한 전력으로 그 위대한 검사에게 결국 죽음의 저주를 거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 엘프 검사는 시한부나 다름없었고, 죽은 영혼은 내게 귀속될 것이다.
"흐흐흐흐."
지난 2년간 전쟁터를 전전하며 모은 부정한 마력의 절반을 소모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무려 위대한 검사.
곧 그 영혼을 손에 넣게 되니.
그 빛나는 재료로 만들어질 데스나이트는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죽음의 기사가 보통 영혼의 격보다 1.5배는 더 강하니, 아마 적수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전쟁터엔 재료가 넘쳐난다.
더군다나 그가 노리는 재료는 아직 하나가 남았으니.
'아이반.'
기사단장 아이반마저 데스나이트로 만들어대면 무쌍의 칼날 두 개를 쥐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구려의 대왕?
그가 성물의 주인이든 뭐든 상관없다.
놈을 제거할 비장의 수는 이미 마련해뒀으니까.
츠츠츳.
그를 감싸고 있던 검은 젤리 같은 것들이 스르륵 흡수되듯 사라졌다. 검에 의해 절반이나 갈렸던 허리와 움푹 파여 너덜거리던 어깨는 멀쩡히 돌아왔다.
워낙 많은 마력의 사용으로 탈력감과 상실감이 들긴 하지만, 이는 곧 다시 채워질 터다.
놈이 죽음의 저주를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루? 이틀?'
길지 않으리라.
놈의 영혼을 회수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산 자들을 유린할 것이다.
파괴와 고통, 절망, 상실, 분노....
죽음의 악다구니 속에서 뱉어내는 그 모든 감정들이 어둠의 마력이 되어 그의 마나홀을 채워 줄 터다.
타닥.
[끼릭 끼릭!]
"음?"
해골 병사들이 움직이며 소란스러운 그 끝에 백마를 타고 접근하는 이가 있었다.
"...?"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하다.
"고구려 대왕?"
저것이 성물의 주인이라는 고구려 대왕인가?
에그니스보다 월등히 강력한 적이지 않나?
흑마법사 제롬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물들었다.
다그닥, 다그닥.
백마는 멈추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고, 제롬은 해골 병사들로 하여금 물러나 길을 트게 했다.
그와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꺼낸 아이템을 만지작거렸다.
'오히려 잘되었다.'
놈을 잡을 수단이 없었다면 애당초 고구려와 료 막부의 전쟁을 자신의 데뷔 무대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더 다가와라. 더.'
제롬의 주변에 포진한 데스나이트들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워어, 워어."
해골 병사들만 해도 3천, 데스나이트가 60기다.
거기에 더해 리에나의 영혼으로 만든 데스나이트는 무려 마스터 급의 군단장이다.
이런 병력의 군진 한가운데 홀로 말을 몰아 온 사내의 얼굴엔 긴장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잡티 하나 없는 백마는 누가 보더라도 명마로 보였고, 달랑 검 한 자루 허리춤에 찬 금발의 남자는 귀족가의 도련님 같은 모습이었다.
"읏차."
사내는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갑옷 대신 귀족의 평복을 입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얼굴이 받쳐줘야 하는바, 사내의 타고난 얼굴이 그를 귀공자로 만들어냈다.
사내를 보며 제롬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었던 고구려 대왕의 생김새와는 너무 달라서였다.
특히나 거무튀튀한 허리춤의 검이 더욱 신경을 잡아끌고 있었다. 화려한 복색과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수수한 검이다.
"...누구냐?"
"말하면 알고?"
"...."
사내는 가타부타 말없이 검을 빼 들었다.
스릉.
거무튀튀한 검집을 빠져나온 칼날은 시퍼런 예기를 내뿜고 있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소름끼치는 날카로움이 전해졌다.
제롬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기회를 노렸다.
"품에 감춘 건 리치왕의 단검인가?"
"...!"
"그렇군."
금발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악의 종자가 대가리를 들이밀었군."
"...너는 누구냐!"
제롬이 소리쳤으나 사내는 히죽 웃었다.
"노바에서 날 모르는 게 병신이지."
"...!"
제롬의 눈이 커졌다.
턱이 덜덜 떨린다.
"...화, 황제가 왜?"
두문불출하는 황제다.
황궁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많으니, 사실상 제국은 궁중백에 의해 통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자가 대관절 여기에 갑자기 왜?
"흑마술은 노바의 질서를 어지럽히니까."
"...?"
스컥!
언제 움직였는지 보지도 못했다.
검기? 검강?
보지도 못했다.
아니, 쓰이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쩌어엉!
뒤이어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음과 함께 데스나이트들이 허리가 양단되어 비스듬히 쓰러졌다.
사정은 흑마법사 제롬도 다르지 않았으니.
기우뚱 무너진 그의 몸이 검은 연기로 화해 흩어졌다.
"으으음."
스릉.
황제의 검 듀렌달을 검집에 집어넣은 그가 사라진 제롬이 있던 자리로 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이거 하나 믿고 나대다니."
리치왕의 단검.
성물이 아니지만, 성물에 대항할 수 있는 전설의 무기.
쇄애애애액.
그때 바람과 함께 하늘에서 거구의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거대한 덩치.
윗옷 따위는 입지 않았으나 젖꼭지를 아슬하게 가리는 엑스자 대거 벨트를 찬 사내.
강철두가 황제를 노려봤다.
"후후, 네가 흑마법사냐?"
"...."
황제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키에에에.]
두 동강 난 해골들이 소멸하지 않고 다시 재조립되고 있었다.
금발의 사내, 황제가 한숨 쉬었다.
"역시 본체가 아니네."
교활한 흑마법사 놈.
아직 목숨이 붙어있다.
"무슨 소리냐?"
영문을 알 길 없는 철두의 물음에 황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290화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