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320

310화 심청이

철두와 아르엘라는 시원한 방에서 잠을 청했다.

얇은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벽은 시야만 차단될 뿐, 방음에 있어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힘 좋은 바바리안과 요정의 고운 목소리에 마을의 밤이 길었다.

아침이 되자 철두는 방 앞에 차려진 조식 바구니를 챙겼다.

오늘부터 안식주라 일주일간 일하지 않는다 하여 어젯밤 놓아둔 것이다.

"으음, 밤새 식은 것치고는 맛있군."

"그러게."

마당에 차려진 식탁에 앉아 먹고 있으니 그리 높지 않은 담장 너머로 오가는 구경꾼들이 많다.

"흠, 흠."

철두가 시선을 보내자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는데 괜히 머쓱한지 헛기침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개중에 안면이 있는 자가 있어 철두가 손들어 흔들며 불렀다.

"어이, 단켈!"

"왜, 왜 부르쇼?"

쭈뼛거리면서도 부른다고 또 냉큼 다가오는 단켈의 두 볼은 발갛게 익어 있었다. 곁눈질로 아르엘라를 힐끔힐끔 보기도 했다.

"촌장 집이 어디냐?"

"오늘부터 안식절이라 나는 자경단이 아니오."

"꼭 자경단만 길잡이 하냐?"

"어?"

"그냥 길 안내해주는 게 일 안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듣고 보니 그렇소."

"후후, 가자. 앞장서라."

철두가 바구니에 든 빵을 입으로 가득 욱여넣었다. 압축된 스펀지처럼 들어가는 빵은 부드럽고 맛있었다.

입안의 공간이 남아있긴 하지만, 마지막 한 덩이는 당연하다는 듯 아르엘라에게 주고는 단켈을 재촉했다.

"저기 저 집이오."

"후후, 고맙다."

자연스럽게 주화 주머니에서 주화를 꺼냈던 철두가 아차 했다.

"아, 일이 아니지. 호의에 고맙네. 후후."

"그, 그.... 끄응, 별거 아니오."

철두가 어깨를 두드려주자 단켈이 인상을 구기면서도 물러났다.

탕, 탕!

"이보시오. 촌장."

마을의 집은 예나의 여관과 별다를 바 없어 굳이 노크 따위는 필요치 않아 보였으나, 철두는 나무 기둥을 치곤 소리쳤다.

끼이익.

곧 문이 열리려 등 굽은 노인이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인가?"

"엘리아 신께 기부해도 되겠나?"

"...."

촌장은 가만히 철두와 아르엘라를 보다 말문을 열었다.

"내가 무어라고 신께 공양하는 걸 하라 마라 하겠나? 알아서들 하게."

"후후, 말이 통하는 노인네군."

목적을 달성한 철두가 막 나서려는데 촌장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이보오."

"말해라. 촌장."

"그대 같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 오아시스를 찾은 겐가?"

"증오의 억류지에 가는 길에 들렀을 뿐이다."

"...."

철두의 말에 촌장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철두의 눈썹이 꿈틀했다.

"서서 죽은 건가?"

"철두, 그냥 고민 중인 거잖아?"

"후후, 농담이다."

아르엘라의 핀잔에 철두가 그저 웃었다.

질문에 답을 했는데 뒷말이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바바리안의 인내심에 대한 연구라도 하는 건가?

철두가 막 다시 재촉하려 할 때 촌장의 입이 열렸다.

"그대 정도의 외부인이 마을을 찾는 건 백에 아흔아홉은 증오의 억류지 때문이지."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궁니르가 봉인된 증오의 억류지가 아니면 굳이 이 사막을 찾을 이유가 없다.

"당연한 걸 왜 묻나?"

"혹시나 해서 물었을 뿐이네."

"...?"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늙은 촌장은 정말 바바리안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인가?

"용의 전설에 대해 아는가?"

"...자꾸 묻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번에 해라."

무뚝뚝하기만 하던 촌장은 그답지 않게 슬며시 미소 지었다.

"사막 어딘가에 용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군."

"어디서?"

"모르네."

철두가 참지 못하고 촌장의 멱살을 쥐려다가 아르엘라에게 제지당했다.

"좀."

"으으, 영감. 알지도 모르는 뜬 소문을 왜 지껄이냐?"

"용의 흔적을 쫓는 이들이 종종 여기 오아시스를 찾는다네. 아주 위험한 이들이지."

"그래서?"

"하루빨리 용을 찾아 그런 이들이 사라지거나... 그대 같은 이들이 해치워주길 바라서지."

"후후, 그렇게 말하니 얼마나 속 시원하냐?"

"...."

철두가 싱긋 웃었다.

"그놈들을 해치워달라는 게 아니냐?"

"그랬으면 하지만 그대만 한 전사에게 의뢰할 대가가 없다네. 희망 사항이지."

"흐흐흐, 이 노인네. 날 차도살인지계로 쓰다니."

"철두,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해하는 아르엘라에게 고졸 바바리안의 지식을 뽐내주었다.

"공짜로 날 이용해서 적을 제거하겠다는 거다."

"허, 그렇게 안 봤는데."

아르엘라가 노려보자 촌장의 등이 더욱 굽어졌다.

"못 들은 것으로 하시게나."

"후후, 마주치면 묵사발 내주지. 그놈들 이름이 뭐냐?"

"지옥의 사신단이라네."

"이름 한번 거창한 놈들이군. 뭐 하는 놈들이냐?"

"악마의 힘을 다루는 이들이지."

"...?"

철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흑마법사들이냐?"

"그렇다네."

흑마법사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황제 녀석이 생각났다.

제국 산하의 제후들이 흑마법사와 결탁하는 것은 그리도 싫어하면서, 흑마법사들이 단체까지 이뤄 이렇게 버젓이 활동하는 건 또 왜 놔두나 싶었다.

"후후, 기억하지. 가자."

"알겠어."

밤새 마을 사람들을 잠 못 들게 했던 부부가 숲 쪽으로 향하자, 촌장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주저앉았다.

"아버지!"

"괜찮다."

집 안에 있던 아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부축했다. 촌장의 시선은 숲을 향해 한참 동안 머물렀다.

"아버지, 저 부부가 대체 누구기에 그리도 조심하시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예?"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늙어가는 육신에 노안이 든 눈은 뿌옇지만, 저 바바리안에게서는 광채가 난다.

직설적이긴 하지만 선한 사람 같으니,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기도나 올리러 가자꾸나."

"예, 아버지."

아들이 촌장을 부축해 바바리안이 사라진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오아시스를 향해 가자면 그 주변에 자리한 숲을 통과해야 하는데, 숲에도 얼기설기 집들이 많았다.

오히려 숲 밖에 지어진 집들보다 숲 안쪽에 지어진 집들이 더 많았다.

오아시스에 정착하여 살려면 물가부터 자리를 잡았을 터이니, 오히려 지나치는 이곳이 마을 중심부인 셈이다.

안식절을 맞아 오아시스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방향을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저 힐끔거리는 사람들을 쫓아가다 보니 숲이 끝나고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물가에는 먹이에 달라붙은 개미 떼처럼 사람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물가에 서서 저마다 동전을 던지며 기도하고 있었다.

철두와 아르엘라도 빈 공간을 찾아 물가에 서서 주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화를 꺼내 던졌다.

퐁!

<엘리아의 성소에 주화 1개를 기부했습니다.>

<엘라아의 힘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성소 주변이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철두와 아르엘라는 주화를 던지곤 주변 사람들이 그러하듯 합장하여 꾸벅 고개 숙이며 기도했다.

"뭐 빌었나?"

"묻지 마."

"후후, 나 먼저 가르쳐 주마. 난 궁니르를 얻게 해달라고 했다."

"...."

"뭘 빌었냐니까?"

철두의 채근에 아르엘라가 조막만 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 건 내게 빌어야지."

"...닥쳐, 좀."

"후후, 번식은 자연스레 이뤄지기 마련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말을 잇던 철두의 표정이 덜컥 굳었다.

"설마 아직도 희생이니 뭐니를 생각하는 거냐?"

그래서 이리도 조급한 것이냐?

"...아니야."

"...."

아르엘라의 늦은 대꾸가 충분한 답이 되어 철두의 입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꼭 궁니르를 얻겠다. 그래서 뭐든 쳐부숴 주마. 세계수도 내가 심어주마! 그러니 너는 혹시나 하는 그딴 생각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알겠어."

철두는 괜히 발을 툭 차고는 호수를 노려봤다.

"흥, 그나저나 정말 성소가 아무런 축복도 안 해주는군."

"성소 주변이 풍요로워진다잖아?"

"이기적인 성소군."

철두가 냉소하며 돌아서려는데, 언제 이렇게 몰렸는지 사람들이 많았다.

"어엇, 밀지 마시오. 큰일 날 뻔하지 않았소?"

"세게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무슨 큰일이냐?"

"어유, 빠질 뻔하지 않았소?"

"그게 왜?"

"아니, 제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멍청이가 어딨단 말이오?"

사내는 그리 말하곤 멀찍이 돌아 다른 빈 공간으로 가 주화를 던졌다.

철두와 아르엘라의 시선이 부딪혔다.

"하지 마."

"궁금하다."

"...."

아르엘라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기다려봐."

아르엘라가 옆에서 기도 중인 조금 나이 많아 보이는 이에게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예에."

"혹시 안식절에 호수에 직접 들어간 사람이 있나요?"

"어유, 종종 사고가 나긴 하지만 누가 직접 들어간답니까."

"그럼 사고로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들 신에게 공양되었겠지요."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요?"

"저 주화들이 녹아 사라지듯이 그렇게 사라졌습니다요."

퐁, 퐁!

사람들이 던지는 주화를 보니 모두 호수에 닿아 옅은 빛이 되어 물에 녹듯 사라졌다.

아르엘라가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다들 죽, 뭐하냐!"

"후후, 이것 봐라. 문제없다."

철두가 호수에 손가락 하나를 담그고 있었다.

"아무런 메시지도 안 뜬다."

"손 빼!"

빼긴커녕 팔목까지 다 담가버린 철두를 보곤 아르엘라는 기겁했다.

"뭐하는거야!"

"흐음, 아직인가?"

철두가 아예 호수에 발을 담갔다.

아르엘라가 기겁하곤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확인해봐야 하지 않나?"

"무모해!"

"사라질 것 같으면 얼른 나오면 된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빨리 갔다 오겠다."

철두가 아르엘라의 손을 뿌리치고 호숫가를 한 걸음 걸었다. 수심이 그리 깊지 않아 세 발짝 나아갔으나 겨우 허벅지까지 오는 수위였다.

"아직인가?"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저 기분 좋은 청량감이 들 뿐이다.

이것은 무모함이 아니다.

그저 물에 들어왔을 뿐인데, 어머니의 품이 안긴 듯 마음에 평화가 휘몰아친다.

이건 저주도 아니다.

저주 면역을 가진 철두는 그 정도 구분은 할 수 있었다.

이 호수가 부르고 있다.

나를.

풍덩!

철두가 아예 다이빙하듯 앞으로 쑥 들어갔다.

그와 함께 철두의 몸이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파팟.

"강철두!"

아르엘라의 경악성이 호수를 가득 메웠다.

놀란 사람들의 이목이 모였다.

그들도 똑똑히 보았다.

안식절에 호수에 스스로를 공양한 미친 인간을.

모두의 시선이 과부가 되어버린 아르엘라를 힐끔거렸다.

"이 멍청아! 바보야! 개새끼야!"

사람들의 기도 소리도 멈춘 호숫가에 아르엘라의 비명과 같은 절규가 가득했다.

"흐으, 에이든...."

아르엘라는 절규하면서도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청량감과 기분 좋음에 반가움과 즐거움, 고양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눈앞에서 남편을 잃었건만,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이런 기분이 들다니?

"아!"

이것은 제 기분이 아니다.

마음이 연결된 그의 소울메이트가 느끼는 감정.

아르엘라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서둘러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상 세계로 들어갔다.

311화 물의 정령왕

검은 숲.

아르엘라는 심상 공간에서 눈을 뜨자마자 경이로운 광경을 목도했다.

쏴아아아아!

"허업!"

메마른 언덕.

아니, 이걸 메마른 언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덕 위의 골짜기부터 시작된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들끼리 부딪치며 반짝이는 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흘러내린 물줄기가 검은 숲과 메마른 언덕 사이의 경계를 타고 흘렀다.

두 심상 공간 사이를 가르는 강이 생겨나 있었다.

"아!"

멍청하게 폭포를 구경할 때가 아니다.

서둘러 경계를 향해 달려갔다.

"막혔어!"

심상 공간을 나누는 결계가 벽이 되어 물줄기가 옆으로 옆으로 흘렀다.

마치 깨끗한 유리 너머의 수족관을 보는 것 같았다.

타탓!

얼른 두 심상 공간이 이어진 구멍으로 향했다.

콸콸.

주먹만 한 구멍에서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다잔!"

"물이다."

미리 와있던 카다잔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수족관에 구멍이 뚫린 듯 어깨높이의 구멍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볼품없는 수량이지만 그 물이 검은 숲을 적시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질퍽해진 땅을 밟았다.

그녀의 마음속 공간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진흙의 감촉이다.

늘 딱딱하고 죽어있는 검은 숲이었으니까.

"에이든은?"

"없다."

"아!"

생각해보니 두 사람은 마음이 연결된 이후 매번 함께 심상 공간에 들어왔지, 이렇게 혼자서 진입한 건 처음이었다.

"에이든!"

"저길 봐라!"

카다잔이 폭포가 떨어지는 메마른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검은 숲이 온통 죽어버려 색이 없는 나무들로 숲을 이뤘다면, 저쪽 메마른 언덕은 살아있는 식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흔한 풀잎조차 없는 그곳에 유일하게 뿌리를 내린 것은 나무 한 그루였다.

'원래 죽은 나무였는데, 가지 하나가 돋아나며 싹이 폈어.'

에이든이 자랑스레 말하던 그 나무.

필시 그 나무이리라.

저 언덕 위 폭포 위로 높디 자라나 버린 나무의 정체가 말이다. 언덕에 가려져 겨우 끄트머리의 잎사귀만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크기를 짐작게 했다.

"저, 점점 자라고 있어!"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카다잔의 말에 대답할 말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경황이 없기론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

드드드드.

메마른 언덕 너머 나무의 성장은 끝난 게 아니었다. 검은 숲까지 전해질 정도로 땅이 요동쳤다.

"뿌, 뿌리가 자라고 있어!"

"이게 대체...."

거대한 나무가 철두의 마음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내 진동이 멈추자 아르엘라는 마른세수를 하곤 카다잔에게 말했다.

"엘리아의 성소라는 호수에 에이든이 헤엄쳐 들어갔어. 그 이후 빛에 휩싸여 사라졌고, 난 바로 여기 들어와 본 거야."

"흐음. 엘리아라면 고대의 요정이 아니냐?"

"정령왕이지."

"발할라 신의 요정 중 하나지."

"...."

본디 종교란 것이 경전이 하나라도 해석에 따라 그 계파가 나뉘기 마련이다.

바바리안과 요정족이 그러했으니, 보는 관점도 달랐다.

바바리안은 발할라를.

요정족은 태초의 그 요정들을 숭배하니까.

"어쨌든 에이든이 무사한가 봐!"

"당연하지. 내 아들은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니다."

그리 말하는 카다잔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자식 잃을까 봐 식겁했다가 겨우 평온을 찾은 표정이었다.

"에- 이- 든!"

"그렇게 불러본들 들릴 리가 없다."

그게 됐으면 카다잔이 부를 때마다 아르엘라가 알아차렸겠지.

"대- 답- 해!"

아르엘라는 그저 호수에 뛰어든 강철두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흥,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카다잔이 냉소했으나 아르엘라는 간절히 외쳤다.

제발 무사하다고 말해줘.

그런 그녀의 마음이 닿았을까?

마음속에서 외쳐 부른 답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후 후 후.]

우렁차게 울리는 천둥소리와 같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자세를 낮춘 두 사람이다.

[난 무 사 하 다.]

"하아! 걱정했잖아!"

아르엘라는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저 너머 메마른 언덕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음에, 철두가 무사한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소리까지 들으니 안심이었다.

"혼자 무슨 소리냐?"

"이 목소리가 안 들려?"

"무슨 목소리? 이 천둥소리 말이냐?"

똑같은 소리건만 아르엘라에게는 들리는 철두의 목소리가 카다잔에게는 그저 쿵쾅거리는 소리와 같이 들렸다.

"허, 나만 들을 수 있나 봐."

"...?"

이 묘한 승리감은 뭐지?

아르엘라는 걱정했던 철두의 안위가 확인되자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가야겠어. 카다잔."

"그렇게 해라."

아르엘라가 마음속 눈을 감았고.

호숫가에 정좌해있던 아르엘라가 눈을 떴다.

"오오오오오!"

오감이 돌아오며 가장 먼저 사람들의 경탄 소리가 가득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호수 중심에 빛이 가득했다.

"아!"

아르엘라도 주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절로 경탄성이 나왔다.

경이로운 광경이다.

호수의 표면에서 시작된 빛이 하늘로 올라가 가운데 뭉쳤다. 증발하는 수증기처럼 피어올라 한 점으로 모였는데, 그 올올이 모두 성스러운 빛을 흘리고 있어 이목을 잡아끌었다.

범인의 시력을 아득히 초월한 아르엘라의 시선이 빛이 모이는 점에 닿았다.

"...철두."

빛으로 변해 사라졌던 강철두는 다시 빛에서 돌아와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빛의 구름에 누워 그저 망중한을 즐기는 것 같았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철두는 대뜸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하나 꺼냈는데, 다름 아닌 묠니르였다.

쓰아아앗!

올올이 올라서던 빛무리가 모조리 망치로 빨려 들어갔다. 모든 빛이 몰려든 망치가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쯔즈즈즛!

영 불길한 소리와 함께 묠니르가 하얗게 질리더니, 굉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꾸어엉!

오아시스의 물이 요동치고 사막의 먼지가 피어오를 정도의 충격파가 번졌다.

"으억!"

"여기 잡아!"

멍하니 구경하던 사람들이 나자빠질 정도의 충격파다.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눈을 가리던 사람들이 다시 손을 내렸을 땐 천천히 아래로 하강하는 철두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에서 신이 강림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호수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전처럼 빠지는 물에 풍덩 빠지는 일은 없었다.

찰랑.

그는 수면 위를 걸었다.

위풍당당하게 걷는 그의 걸음마다 호수표면에 동심원이 일었다.

그는 아르엘라를 향해 쭉쭉 걸어왔고, 아르엘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더니, 철두가 다가옴에 따라 엎드려 절했다.

자박!

물 위를 걸어온 철두가 마침내 땅을 밟았다.

아르엘라 앞에 멈춰선 그가 웃었다.

"후후후."

"...어떻게 된 거야?"

"엘리아를 만났다."

"...!"

아르엘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묠니르는?"

"묠니르?"

"부서졌잖아."

"후후, 아니다."

철두가 손을 허공에 뻗었다.

촤르르륵!

호수의 물이 한 뭉텅이 떠올려져 철두가 내뻗은 손으로 향하더니 저들끼리 뭉쳐 망치의 형상으로 변했다.

츠츳, 쩡!

형태만 망치가 된 게 아니다.

형이 잡히니, 본래의 회색 빛깔의 쇠로 변해 진짜 묠니르가 되어 그의 손에 잡혔다.

"이제 인벤토리에 안 넣고 다녀도 된다."

"...이게 대체."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나 많다.

"신이시여."

"엘리아 신이시여."

"오아시스를 버리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숫제 강철두를 신 취급하며 엎드려 비는 사람들의 말이 동심원 퍼져나가듯 번졌다.

"나는 신이 아니다!"

철두의 음성에 사람들이 움찔 놀라며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이 사막의 저주는 끝내주지."

파팟!

철두가 오식이를 소환했다.

"타라! 가면서 이야기하자."

"알겠어!"

아르엘라가 훌쩍 뛰어올라 철두의 허리춤을 껴안았다.

후우웅!

오식이가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랐다.

"허어어!"

철두가 사라진 하늘로 쳐다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퐁당

"헉! 안식절이 끝났다!"

"정말이야! 축복이 되지 않아!"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호수에 던진 주화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더 이상 오아시스와 이 일대를 비옥하게 해줄 신적인 존재는 없다.

"초, 촌장! 이거 이러다 이 오아시스도 말라 버리는 거 아닙니까?"

"큰일입니다! 전례 없는 일이라구요!"

"촌장!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등 굽은 노인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채근을 이해한다.

변화에 대한 불안이 큰 것이다.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

"허어!"

"망했네, 망했어. 신이 떠났으니 이제 이 땅도 죽을 거라고!"

"증오의 억류지가 코앞인데, 더는 여기도 미래가 없지."

"믿어보자구! 안식절이 그저 빠르게 끝난 걸 수도 있으니까."

화를 내는 사람, 자포자기한 사람, 희망을 가지는 사람,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여러 군상들을 보며 등 굽은 촌장은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고 벌써 저만치 멀리 가버린 그리핀 꽁무니를 보았다.

'저주를 끝낸다라....'

그가 증오의 억류지에 볼일이 있음을 안다.

그저 위대한 전사 정도로 보았더니, 더한 걸물이었다.

성물 묠니르의 주인이라니....

*

후우우웅.

힘찬 날갯짓으로 날아가는 오식이의 등 위에 부부가 타고 있었다.

"엘리아를 만났다는 거야?"

"사념이었다. 복제판 같은 거지."

"정령에겐 같은 거야! 다르지 않아."

아르엘라는 잔뜩 흥분했다.

강철두가 정말 물의 정령왕 엘리아와 조우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후후, 묠니르를 줬다."

"...왜?"

"달라더라."

"...."

아르엘라는 인상을 팍 구겼다가 다시금 의아해 물었다. 지금 철두의 손에 쥐어진 건 여전히 묠니르다.

"이건 뭐야, 그럼?"

"묠니르지."

"말장난하지 말고!"

"후후후."

철두가 묠니르를 오식이 등 위로 던지자 쇠망치는 물방울로 화해 이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휘감는 회오리 같은 옷을 걸친 푸른빛 여인의 형태였다. 그 크기가 꼬마 정도 크기였다.

"묠니르와 엘리아가 합쳐졌다."

"...."

아르엘라가 입을 딱 벌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보는 대로다. 성물을 품어 엘리아는 격을 찾았다."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래서 지금 물의 정령왕이랑 계약했다는 거야?"

철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늘 그렇듯 우리는 친구일 뿐이다."

"...?"

아르엘라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물총을 쏘며 장난치는 엘리아와 강철두의 모습이 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에 격의가 없어 보인다.

"설마! 널 따라다니던!"

"후후후."

철두의 웃음이 긍정을 표하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얘가 걔다."

"...!"

철두가 뒤로 턱짓하며 엘리아에게 말했다.

"그때 봤지? 내 마누라다."

엘리아가 까르르 웃으며 손을 둥글게 말아 머리에 가져다 대며 하트를 만들어냈다.

아르엘라는 정신없는 와중에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 강철두는 본디 4대 정령 모두와 친구였다.

"서, 설마! 다른 정령...님들도?"

철두가 씨익 웃었다.

"왜, 아니겠나?"

철두는 철두대로 기분이 좋았다.

사라졌던 친구들을 다시 만날 방법이 생겼으니 말이다.

312화 증오의 억류지

철두는 저 멀리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본디 실체 없는 악령이 시야에 보일 정도로 뭉쳐있는 곳이다.

"기분 나쁜 곳이군."

"으음."

"괜찮나?"

"괜찮아."

"저주는 아닌데?"

"차라리 저주였으면 나았겠어."

저주 내성으로 어찌 해볼 수라도 있으니 말이다.

아르엘라의 표정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저주가 아닌 악령들이 뭉쳐져 내뿜는 기세와 죽음의 기운에 압도된 것이다.

"저기서 정비하고 가자."

"으으, 그래."

철두가 오식이를 내려 앉혔다.

고도를 낮추자 지평선 너머로 보이던 검은 연기 같은 것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르엘라의 안색도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굽이치는 모래 언덕 아래 착지해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난 메마른 언덕에 들어가 봐야겠다."

"깜짝 놀랄걸?"

바로 오아시스를 떠나오느라 심상 공간에 아직 가보지 못한 강철두다.

마음속에 충만한 이 생명의 기운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

"후후, 가자."

철두가 눈을 감았고, 아르엘라도 따라 눈을 감았다.

파팟.

메마른 언덕.

이제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갈 정도 나이의 에이든이 눈을 떴다.

"허!"

변성기가 오려 하는 갈라진 목소리가 감탄사를 냈다.

메마른 언덕은 본디 볼품없는 황무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한쪽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지대와 그 아래는 절벽으로 이뤄진 단순한 공간이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철두의 마음이 자라며 그 나무에 작은 싹이 하나 나 있던 것을 기억한다.

"허허."

철두가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키가 자랄 때마다 칼집으로 그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다.

"이제 키 높이 자로는 못 쓰겠네."

나무다.

죽은 나무가 아니라 살아있는 나무다.

돋아난 그 한줄기 싹이 이리도 커졌는지, 아니면 새롭게 자라난 나무인지 알 길이 없지만 거대한 나무가 무성한 가지를 내뿜으며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턱, 턱.

단단하고 굳센 기둥을 쳐봤다.

마치 단단하게 뿌리내린 자신의 신념과 같아 마음에 들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 신념에 의한 결과물일지도.

쏴아아아.

커다란 나무 옆으로 강이 흐른다.

그 강이 삐죽 솟은 언덕 옆의 골짜기를 향해 나아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검은 숲 쪽이군."

아르엘라의 심상 공간 쪽으로 흐른다.

에이든은 고개를 돌려 수원지 쪽을 바라보았다.

언덕과는 반대되는 곳.

"허, 참. 물이 거꾸로 흐르는군."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이곳은 중력에 지배받는 행성이 아니라 심상 공간.

마음 가는 대로 물이 흐르는 것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물이 흘러오는 쪽으로 향했다.

수원지가 가까워질수록 에이든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부족 쪽이잖아."

에이든이 나고 자란 곳.

아버지 카다잔과 어머니 이블린이 몸담았던 부족.

8살 이전의 추억이 서린 곳.

심상 공간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한 번도 발걸음하지도, 눈길을 주지도 않았던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걸음은 느렸고, 시선은 바빴다.

'자주 놀던 바위군.'

어렸을 때 자주 놀던 바위를 만졌다.

그 옆엔 부족의 꼬마 아이들과 어울려 전쟁놀이하던 언덕이 두 개.

그 길을 따라 쭉 가면 높이선 장대와 거기에 매달린 해골들.

우리 부족의 호전성과 강함을 나타내는 전리품들.

마음속에 남은 공간이 이리도 세세한 것에 에이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잊지 않았다.

외면했을 뿐.

나부끼는 부족 깃발 너머 부족민들의 집이 보인다. 임시로 처진 텐트 같은 집들은 하급 전사들의 것이다.

부족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

그리고 흙과 나무로 지어진 집들은 숙련된 바바리안 전사들의 것.

에이든의 집은 저쪽이다.

정확히는 부족 최강 전사 카다잔의 집이다.

집으로 발걸음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애당초 여기에 온 것은 추억팔이 따위를 위한 행차가 아니다.

쏴아아아!

에이든의 시선이 수원지를 찾았다.

부족 전사들의 집이 아니다.

부족의 중심지.

늙은 부족장과 전사들, 주술사들이 제를 지내거나 죄인의 처형, 혹은 회의를 할 때 모이는 성지다.

쏴아아악!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성지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부족은 절벽에 가까운 바위산 근처에 있었는데, 성지는 바로 그런 바위산에 있었다.

바위산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선 앞에 널찍하고 단단한 암석이 있다.

100명이 올라가도 될 정도로 널찍한 바위는 훌륭한 무대가 되어주어, 부족 내에서의 전사들이 결투 장소로도 쓰이는 신성한 공간이다.

타탓.

에이든이 훌쩍 뛰어올라 널찍한 바위 위에 올랐다.

쏴아아아!

고개를 들어 바위산을 보았다.

삐죽 솟은 바위산은 손가락을 펼친 듯 다섯 개의 봉우리로 되어있었는데, 물은 그 세 번째 봉우리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에이든은 다섯 봉우리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나머지 세 봉우리에도 내 친구들이 잠들어 있겠지.

그들을 깨울 방법도 명확해졌다.

"가운데는 발할라겠지."

에이든의 부족은 모든 바바리안 부족이 그렇듯 발할라의 의지와 용기를 가장 신성시 여기며 숭배했다.

그런 발할라의 바위 곁으로 이미 요정의 바위가 넷이나 있었던바.

우리 부족은 요정을 함께 숭배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와중에 요정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작은 바바리안을 저주받은 존재로 낙인찍어 버렸으니.

"멍청한 부족장."

그로 인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었다.

"후우!"

깊게 숨을 뱉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다시 시선을 세 번째 봉우리로 옮기니, 그 정상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는 묠니르가 허공에 떠 있었다.

"엘리아!"

촤르륵.

묠니르가 물줄기가 되어 쏘아지듯 에이든에게 다가와 형체화했다.

까르르르륵.

물거품을 내며 웃는 엘리아의 마음이 전해진다.

[반가워!]

"저기 다른 친구들이 잠들어 있는 것 맞지?"

[맞아, 힘을 다했어. 하지만 너라면 다시 깨울 수 있을 거야!]

당연한 소리다.

나라면 할 수 있지.

소년태를 벗은 바바리안 에이든이 씩 웃었다.

"흐흐, 가자. 해볼 게 있어."

[응! 좋아!]

에이든이 신성한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강에 몸을 던졌다.

촤아악!

서프보드를 타듯 물 위를 타고 시원하게 질주했다. 오르막을 오르는 물줄기를 따라 쭉쭉 나아가던 몸이 폭포를 만나 공중에 붕 떠올랐다.

검은 숲이 한눈에 보인다.

정말 광활하고 넓은 숲이다.

요정족 공주다운 심상 공간.

실로 요정왕이라도 품어낼 공간이다.

"엘리아, 어때 보여?"

[좋아!]

에이든이 피식 웃으며 물에 풍덩 빠졌다.

물속에 쑥 잠겼다가 훌쩍 뛰어오르니 날듯이 솟구친 몸이 물 밖으로 나와 검은 숲을 향해 돌진했으나.

터엉!

차원벽은 여전히 에이든의 출입을 허락지 않았다.

"구멍이.... 저깄다."

구멍 찾기는 쉽다.

그 주변 검은 숲의 나무들은 더 이상 검지 않았으니까. 본래의 찬란한 초록빛을 찾은 그 숲에 이제는 익숙한 카다잔과 아르엘라가 서 있었다.

"아버지!"

"에이든!"

소리쳐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물에 잠긴 듯 먹먹하다.

아닌 게 아니라 구멍이 정말 물에 잠겼다.

수도꼭지처럼 검은 숲을 향해 쉴 새 없이 물줄기를 뿜고 있다.

"엘리아, 치워봐."

까르르륵.

엘리아가 물거품이 되어 물을 헤집자 구멍 주변으로 물이 물러가며 공간을 만들어 냈다.

"아르엘라! 아버지!"

"에이든, 무사하구나!"

"에이든!"

"당연하죠."

에이든이 주먹만 한 구멍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엘리아, 이 구멍 더 크게 만들 수 있어?"

[혼자서 못 해. 다른 친구들이 있어야 해.]

"그런데 처음엔 손가락만 하던 게 이렇게 커졌는데?"

[그건 우리가 한 게 아니야.]

"그럼?"

[네가 한 거야.]

"내가?"

에이든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꼬마에서 소년을 넘어선 나이가 된 것뿐이다.

"마음이 자라서?"

[맞아. 맞아!]

"알겠어. 고마워, 엘리아."

[응! 응!]

뭐가 그리 신났는지 물개 모습으로 변했다가, 돌고래로 변했다가 가지 각양의 모습으로 변해 헤엄치는 그를 뒤로하고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요. 곧 아버지를 모실게요."

에이든의 해맑은 말에 카다잔이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난 가지 않는다."

"뭐라고요?"

에이든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음색엔 분노마저 서렸는데, 사춘기 특유의 아집도 함께였다. 내가 아버지를 이렇게나 생각하고 노력하는데 그게 싫다고?

"에이든!"

"...?"

카다잔의 박력에 에이든이 움찔했다.

"전사의 격에 어울리는 선조가 있다."

"아버지는 위대한 전사예요!"

"너 또한 그렇지."

이미 위대한 전사가 되어버린 강철두를 보살필 선조의 혼령이 누가 있을까?

"나는 자격이 없다. 널 아들로 둔 것으로 이미 내 소임은 다 했다!"

위대한 전사를 낳았으니 되었다.

하지만, 그의 뜻을 확인한 에이든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날 반쪽짜리 바바리안으로 만들 셈이에요?"

"나보다 더 뛰어난 선조의 혼을 찾아라!"

"어디서요?"

에이든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죽으면 선조는커녕 망할 결투장에서 구르다가 부활하는 게 이 세상인데 어디서 혼을 구해요? 여긴 죽음 따윈 없는 세상이라고요!"

카다잔은 묵묵히 에이든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곤 그의 흥분이 조금 가실 때까지 기다려 확신을 담아 말했다.

"있다."

"어디요!"

"발할라로 가라."

"...?"

"그곳에 너를 이끌 선조가 있을 것이다."

"...!"

에이든의 눈빛이 흔들렸다.

*

사라라락.

불어온 바람이 사구의 모래를 흩날렸다.

균형이 무너진 모래 언덕이 무너져 새로운 모양의 언덕이 만들어졌다.

"철두."

"...."

조금 멍하던 강철두는 두 손을 들어 제 뺨을 후려쳤다.

쫘악, 쫙!

갑작스런 박력에 아르엘라가 움찔 놀랐다.

볼이 벌게진 철두는 그런 그녀를 보곤 씩 웃었다.

"문제없다."

"허."

"차근차근 할 일을 할 뿐이다."

아르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후후, 가자. 궁니르를 얻을 때다."

궁니르만이 아니다.

듀렌달?

그것도 뺏어주마.

잠들어버린 친구들을 깨우는 건 강철두의 숙명과도 같게 변했다.

벌떡 일어선 철두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

"왜? 왜?"

"모자라다."

"뭐가?"

"성물이 3개 아니냐?"

"그게 왜?"

"하나가 더 필요하다."

"...."

아르엘라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일단 궁니르부터 얻고 생각하는 게 어때?"

"후후후. 역시 그렇지?"

눈앞의 일만 생각하자고 마음먹어놓고 벌써 오지도 않은 미래 따위를 걱정하다니.

바바리안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세상에 정체가 공개된 게 셋뿐이지만 성물은 수없이 많아."

세상에 존재하는 신들의 수만큼이나....

"가자! 아르엘라!"

"좋아!"

바바리안 요정 부부가 다시 그리핀을 타고, 검은 연기 같은 악령들이 드글거리는 증오의 억류지를 향해 날았다.

313화 궁니르

"끼아아아!"

증오의 억류지에 가까워지자 오식이가 난동을 부렸다.

"더는 무리군. 내려줘라."

"키아아!"

오식이는 냉큼 하강해 모래 위에 착지했다.

먼지 바람이 가시기도 전에 냉큼 역소환되어버린 오식이를 보며 철두가 피식 웃었다.

"걸어가야겠군."

"으응."

아르엘라도 오식이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증오의 억류지.

궁니르에 죽은 이들의 증오와 원한이 고스란히 개방되어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이곳, 사막의 중심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철두와 아르엘라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었으며, 곧 모래 언덕에서 증오의 억류지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피라미드 같군."

"피라미드?"

"지구에 저것과 비슷한 형태의 유적지가 있다."

고졸 바바리안의 지식을 뽐내곤, 아르엘라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악령들의 사념이 강해져 아르엘라는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술에 취한 듯 비틀비틀거렸다.

철두의 손을 잡고 반쯤 부축받다시피 피라미드의 근처까지 온 아르엘라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괜찮나?"

"어, 어어?"

"문제 있군."

철두는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아르엘라를 보곤 손바닥을 펼쳤다.

따귀를 올려붙여 차려질 정신이었으면 진즉 했다.

"엘리아."

스스스.

철두의 부름에도 건조한 사막은 어떠한 응답도 없었다.

"아예 메말랐군."

하는 수 없이 인벤토리에서 수통 하나를 꺼내 허공에 뿌렸다.

촤르륵.

내뿜어진 물줄기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저들끼리 뭉쳐지더니 망치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철두는 손에 촥 감기는 회색 망치를 아르엘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헉!"

망치를 쥐여주자 아르엘라는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어디야? 뭐야? 여긴?"

"정신이 드나?"

"어? 그래."

아르엘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식이에서 내려 철두와 함께 걷다가 기억을 잃은 모양이다. 더듬더듬 기억이 나다 안 나다 하는 것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또렷하니, 이는 전부 묠니르가 내뿜는 기운 때문이었다.

"엇!"

그러고 보니 묠니르를 내가 쥐고 있어?

"이걸 어떻게 내가 들고 있지?"

"후후,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하는데 다루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

아르엘라는 심장이 세차게 뛰었으나 이내 묠니르에서 전해지는 고고한 기운과 감정에 식겁했다.

감히 날 휘두르지 마라, 경고하는 것 같았다.

허락된 것은 딱 쥐고 있는 정도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다룰 수는 없는 것 같은데?"

아르엘라가 망치를 들고 휘이 휘둘러봤으나 정말 망치 그 이상의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확실히 악령들이 내뿜는 죽음의 기운과 원한, 지독한 증오는 아르엘라에게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았다.

"정신은 차렸나?"

"응,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넌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가 뭐냐? 후후."

철두가 여태 멀쩡한 것은 정말 묠니르 때문이 아니었던 듯,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들어가자."

"응."

입구를 찾는 건 쉬웠다.

악령의 증오와 원한이 시각화되어 옅은 검은 기운이 굴뚝에서 피어난 연기처럼 내뿜어지고 있었다.

둘은 피라미드의 하단에서 피어나는 그 검은 기운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타탓.

사막도 건조하지만, 피라미드 안은 차원이 다른 건조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벽과 바닥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먼지를 피워올렸다.

다행히 좁은 입구에 비해 통로는 점차 가면 갈수록 넓어졌다.

구조도 단순해, 피라미드처럼 생긴 네 귀퉁이에서 시작된 입구가 중간의 지점에서 만나는 형태였다.

길지 않은 통로가 끝나자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제법 넓은 천장과 바닥엔 검은 기운이 가득했는데, 꼭 새벽에 낀 안개와 같았다.

"이게 단가?"

"그래 보여."

위에 낀 검은 기운은 옅고, 바닥에 깔린 기운은 보다 검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바닥에 깔린 검은 기운이 증발하듯 위로 올라가고, 또 그 옅어진 기운들은 네 통로를 향해 밖으로 빠져나가는 형태였다.

"저게 다 악령일까?"

"모르지. 그냥 연기일지도."

그냥 연기일 리가 없지만 철두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곳에 궁니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러 왔다.

"아무래도 저기 있는 것 같다."

"그래 보여."

철두가 바닥에 잔뜩 깔린 검은 강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그곳에 용솟음치듯 검은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떻게 가지?"

아르엘라의 물음에 철두는 몸소 방법을 보여주었다.

"걸어가지."

쏴아아아!

철두가 한 걸음 내딛자 검은 기운들이 슥 물러났다. 통로에서 딛고 선 곳보다 지대가 낮아 보였다.

"와우."

아르엘라가 깡총 뛰어 철두의 곁에 내려섰다.

두 사람은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고, 검은 기운들은 그들의 걸음에 슬며시 밀려났다가 다시금 뒤에서 뭉쳤다.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철두와 아르엘라의 주변 공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검은 기운들로 가득 찼다.

앞뒤 옆이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차단되었으나, 철두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운석의 분화구처럼 중심부가 가장 낮은 형태 같았기에, 일단 내리막을 향해 차츰 나아갔다.

아르엘라는 바짝 긴장했다.

노바에 알려진 성물 가운데 가장 흉악한 전설을 가진 성물이 이 앞에 있다. 설렘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 손에 들린 묠니르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이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했으리라.

"여기다."

"엇!"

철두가 걸음을 멈췄고, 뒤따르던 아르엘라가 그의 등에 부딪혔다.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니 궁니르가 모습을 보였다.

바닥에 무심하게 꽂혀있는 막대기.

검은 기운이 진득한 수액처럼 뿜어져 나와 흐르고 있어 재질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궁니르다.'

저 거뭇한 막대기는 보자마자 정체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노바의 신과 싸워 호각세를 이뤘다는 행성의 신이 쓰던 성물.

그 성물에 의해 죽은 자들의 원한과 증오가 모여 만든 이곳.

철두가 성큼 다가섰고, 아르엘라가 뒤에서 허리춤을 잡았다.

"잠깐!"

"왜?"

"저기 봐."

아르엘라가 가리킨 바닥을 보니 무어라 글귀가 쓰여 있었다.

"무슨 글자냐?"

소통의 팔찌가 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의지에 의한 언어를 소통케 해줄 뿐이니, 처음 보는 종류의 문자를 해석하는 데는 재주가 없다.

"나도 모르는 글자야. 어? 저기!"

글귀는 하나가 아니었다.

뜻을 모를 뿐이지, 필체도 다르고 형식도 다른 글귀들이 군데군데 쓰여 있었는데 그중에 아르엘라도 아는 글자가 있었다.

두 사람이 그쪽으로 다가서니 검은 기운이 부드럽게 밀려나며 하나의 문장이 보였다.

"제국어야."

"지금 제국?"

"맞아."

[애석하게도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

제국의 문자로 적힌 글자.

"누굴까?"

"훗, 누구겠나?"

철두는 담담하게 적힌 문자의 주인을 알 것 같았다.

"황제가 다녀갔군."

"...그렇겠지."

지금의 제국이 노바에 정착한 지 오백 년이다.

행성 제타, 그리고 행성 발할라가 노바에 연결되기 이전부터 제국으로 군림하던 곳이다.

"다녀갔을 법해."

"후후후."

묠니르와 궁니르의 위치는 딱히 숨겨진 것도 없이 널리 알려진 성물이라, 제국 황제가 여태 찾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일이다.

"후후후."

"아까부터 왜 계속 기분 나쁘게 웃어?"

"저놈이 쓴 글을 봐라."

[애석하게도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

"후후, 결국 궁니르를 못 쥐고 떠난 게 아니냐?"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잖아."

철두가 히죽 웃었다.

"난 다르다."

"...."

아르엘라는 감히 위험하다거나, 신중하자는 의견을 뱉을 수 없었다.

자신감 넘치는 남편을 말리는 대신,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나만 믿어.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들고 튀어줄게."

"훗, 알겠다."

철두는 고개를 주억거리곤 궁니르 앞에 섰다.

검은 기운들이 기회를 노리는 뱀처럼 철두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느껴진다.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그것들이 철두와 아르엘라의 주변을 맴돌고만 있었지만.

척.

철두가 궁니르를 잡는 순간.

끼에에아아아!

소름 끼치는 비명성과 함께 검은 기운들이 환풍기에 빨려 들어가는 연기처럼 모조리 궁니르에 모여들었다.

쏴아아아악!

한순간에 모여든 검은 기운이 막대기에 전부 모였다. 그것을 잡고 선 철두가 눈을 부릅떴다가, 천천히 감았다.

드드드득.

창대를 잡은 손에 힘줄이 불거진다.

끼기기기긱!

흔들리는 궁니르의 창대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떨렸다.

"아아!"

아르엘라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사라진 검은 연기로 인해 텅 빈 피라미드 내부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둥근 천장과, 마찬가지로 둥근 바닥.

구체 형태의 공간이다.

매끈하고 인위적인 이 공동이 아르엘라의 시선을 빼앗았다.

'누가 만들었을까?'

인간들이?

아니면, 대결에서 이겼다는 노바의 신이?

"으드드득."

"아!"

이 갈리는 소리에 아르엘라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철두는 여전히 궁니르의 창대를 쥐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창날을 뒤덮고 석유처럼 끈적한 검은 것들이 철두의 팔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는 것 정도.

저걸 어쩌지?

묠니르의 힘이라면 어떻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르엘라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손에 들린 묠니르가 휙 하고 철두에게서 멀어졌다. 꼭 붙들고 있던 아르엘라의 신형도 덩달아 하늘을 나는 듯 딸려가 멀어졌다.

도와주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에 아르엘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으으으."

고통에 신음하는 철두의 몸은 여기저기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얼마나 몸에 힘을 주고 있는 거야.

푸시시시시.

온몸에 열까지 나는 듯 배어난 땀이 곧바로 증발하여 수증기를 피워올릴 정도다.

아르엘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처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위대한 바바리안.

고구려의 대왕.

요정족의 미래까지도 책임지겠다는 상대.

그 호언장담에 너무 쉽게 기댄 자신에 대한 혐오마저 들었다.

공주의 희생이니 종족의 운명이니 떠들었으나, 내내 무서워 발버둥 치던 아이와 다를 바 없음에 자책이 밀려왔다.

모든 것을 각오했다고 착각한 요정족 공주가, 무엇도 잃지 않기 위해 강해지는 것만 생각하는 바바리안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힘내."

쥐어짜듯 흘러나온 목소리와 저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뿐이었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내가 왜 이러지?'

문득 당연하게도 자책이라 여긴 이 대책 없는 슬픔과 우울이 정말 내 감정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깊고 깊은 후회와 슬픔, 두려움, 고통, 절망.... 이어지는 분노, 복수, 증오....

"아!"

이것은 나의 감정이 아니다.

아르엘라는 서둘러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파팟.

감겨 있던 마음속 눈이 뜨이며 끔찍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끼아아아아아-

물에 먹힌 듯 먹먹한 소리에 이제는 당연하게도 심상 공간이 연결된 구멍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선 카다잔이 걱정스런 얼굴로 메마른 언덕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아-

실체화된 검은 악령들이 하늘에 가득하다.

그 수가....

"맙소사."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메마른 언덕의 끝에 선 에이든은 그런 악령들을 노려보며 때려잡고 있었다.

314화 땅의 정령왕

"으으윽!"

에이든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키에에에!"

검은 악령은 유령의 모습인 것도 있었고, 살아생전 모습인지 사람의 형태를 갖춘 놈도 있었다.

색이 다를 뿐 이렇게 보니 강림한 선조의 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놈들이다.

"이놈들!"

감히 제멋대로 남의 심상 공간에 쳐들어오다니.

무엄하다!

쇄애애액!

"끼에에!"

검에 잘려 나간 악령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이 녀석들!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다치게 하지 못한다.

얼른 나의 심상에서 썩 꺼져라!

에이든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사이, 아르엘라와 카다잔은 그저 쳐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심상 공간의 통로는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좁았고, 그마저도 물이 콸콸 새어 나와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쇄애액, 파앗!

에이든의 검술이 경지에 다다라 정신없이 악령들을 제거했으나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회색 하늘에는 온통 시커먼 악령들뿐이다.

그놈들의 붉은 안광이 마치 비처럼 내렸다가 부유하길 반복했다.

에이든은 무아지경에 이르러 검을 휘두르면서도 이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쉴 새 없는 악령들의 공격에 에이든의 마음이 먼저 지칠 것 같았다.

'대장 녀석 어딨어?'

분명 있을 터다.

가장 강력한 악령 혹은, 이놈들을 조종하는 녀석이라도.

쇄액, 쇅!

에이든은 체력을 안배하며 언덕에서 악령들을 살폈다.

흐물흐물한 유령 같은 녀석들은 잔챙이 수준이라 칼질 한 번에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검은색에 붉은 안광을 가졌으며 생전의 모습을 갖춘 놈들은 제법 강한 녀석들이다.

쇄애애액, 카앙! 캉!

놈들이 내지른 검과 검이 쉴 새 없이 부딪힌다.

칼질 한두 번으로 해치울 정도로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못해도 수백 이상.

에이든의 시선이 빠르게 그것들을 훑다가 어느 한 녀석에게 멈췄다.

'저놈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모든 악령들이 어려워하며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긴 창을 쥔 사내.

작은 오우거라 해도 좋을 정도로 키가 큰 자였는데, 투구에 달린 두 개의 뿔은 사슴의 그것처럼 하늘 높이 솟아있어 키를 더욱 크게 보이게 만들었다.

녀석도 에이든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심판관이라도 되는 양 에이든을 관찰하듯 노려보고 있다.

"이익!"

그 오만한 꼴에 화가 치민다.

이곳은 내 마음이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는 내 공간이다.

감히 주인인 척하지 마라!

"하아아압!"

꾸르르릉!

에이든이 검을 휘두르자 주변에 몰려있던 악령들이 무참히 베였다. 주변 땅이 그에 공명하듯 지진이 났다.

가만히 창을 쥐고 있던 사슴뿔 사내가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슬쩍 봤다.

"건드리지 마라!"

감히, 내 나무를!

쇄애애액!

에이든의 신형이 화살이라도 된 듯 언덕 아래를 향해 쏘아졌고, 창을 쥔 사슴뿔 악령은 자세를 낮추고 두 손으로 창을 잡고 창두를 내밀었다.

날다람쥐처럼 달려오는 에이든은 단번에 악령을 꿰뚫을 작정이었다.

'어림없다.'

에이든이 날린 검격과 창날이 서로 맞부딪혔다.

창날을 옆으로 쳐내고, 단번에 창의 거리 안으로 들어가 사슴뿔 악령을 벨 생각이었으나.

쾅!

"크읏!"

달려와 내지른 검과 가만히 있다가 옆으로 휘둘러진 창이 부딪혔는데, 날아간 건 에이든이었다.

한참이나 날아가 바닥을 구른 에이든이 튕기듯 일어나 자세를 잡고 나무쪽을 보았으나 악령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오싹한 기분에 올려다보니 거구의 사슴뿔 악령이 창대를 몽둥이처럼 휘둘러 내려치고 있었다.

콰앙!

겨우 굴러 피했으나 뒤이어 날아온 발차기는 차마 피하지 못했다.

콰직!

"크읏."

에이든도 만만찮은 이는 아닌지라 악령의 다리를 베었으나, 연기처럼 흩어진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콰직, 캉, 쇄애액!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며 여덟 번의 공방이 오고 갔다. 전투의 행방은 누가 보더라도 에이든의 열세.

'이대론 안 돼!'

판세의 불리함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건 에이든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하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놈은 진짜다.

정말 강력한 놈이다.

엘리아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다.

엘리아는 지금 아르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쾅!

생각과는 별개로 공방은 이어졌고, 놀랍게도 위대한 경지에 이른 에이든의 검술로도 사슴뿔 악령의 창술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놀랍도록 강맹하며 부드럽고 종잡을 수 없는 창술이다.

퍼억!

"큿!"

검을 놓친 에이든이 악령의 발에 차여 날아가 바위에 부딪혔다.

쿠웅!

"커헉!"

에이든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으나 여전히 눈빛은 사납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천천히 다가온 사슴뿔 악령은 에이든의 눈을 보면서 기껍게 웃었다. 연신 무표정하기만 하던 녀석이 보인 첫 표정 변화.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저놈의 여유가 얄밉지만, 결과가 이미 그러하다.

'잠깐의 빈틈이라도.'

에이든의 손에 장검이 다시 생겨났다.

이곳은 그의 마음속 공간.

이 정도 창조력은 이제 당연한 수준이다.

쇄애애액!

사슴뿔 악령의 창이 여태 겪어본 적 없는 스피드로 내질러졌다. 창을 쥔 녀석의 손이 움찔하는 것 같았는데, 벌써 뾰족한 창날이 한 치 앞이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있으나, 시간상 못해도 눈 옆이 꿰뚫릴 것 같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천천히 다가오는 창날만큼이나 피하려는 에이든의 머리도 느리기만 했다.

'늦었어!'

재빨리 다음 수를 생각해내는 에이든의 눈앞에 불쑥 시야가 어두워졌다.

쾅!

"큿!"

폭발음과 함께 창날이 눈앞에서 멈췄다.

불쑥 솟은 땅이 방패처럼 창을 막아냈다.

에이든이 바닥을 굴러 피하니, 흙더미에 파묻힌 창날이 재차 노리고 찔러 들어왔으나.

푸확!

내질러지는 창의 경로상에 땅이 솟아나더니 창을 막아냈다.

파악, 팍!

에이든은 재주넘기 하듯 뒤로 뒤로 물러났고, 사슴뿔 악령은 계속해서 창을 내질렀으나 흙무더기만 찔러댈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흙이 점점 더 단단해지며, 악령의 창은 조금씩 느려졌다.

'빈틈!'

쇄애액, 촤악!

에이든의 공격이 먹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가 각성한 게 아니라 악령의 속도가 느려졌다. 힘도 전보다 못했다.

'뺏기고 있다.'

그 변화를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령의 창이 흙을 쑤실 때마다 악령의 기운이 뭉텅뭉텅 줄어들고 있었다.

파악!

다시 내질러진 창이 솟아난 흙더미에 막혔다.

쇄애애액!

그 찰나의 틈에 에이든이 대시해 악령의 목을 노렸다. 그는 창을 빼내려 했으나, 단단하게 물어버린 흙더미는 창을 놓아주지 않았다.

콰직!

에이든의 검이 악령의 목을 날렸다.

"키에에에!"

끔찍한 소리와 함께 악령의 목이 달아났다.

검은 형체가 흩어져 사라졌으나, 솟아난 흙무더기에 꽂힌 창은 그대로다.

"키아아아!"

여전히 하늘에 악령들이 가득한 가운데 에이든이 서둘러 창을 쥐었다.

부르르르.

팔뚝 정도 굵기에 긴 장대 같던 창을 에이든이 쥐자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

창은 점점 더 줄어들더니 어깨 정도 높이까지 오는 투창 정도의 길이가 되었다.

파사삭.

흙무더기가 무너졌다.

여기저기 솟아오른 흙도 마찬가지.

"키아아아!"

하늘에 가득 찬 악령들이 날뛰더니 창을 쥔 에이든을 향해 무차별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차례로 덤벼들던 놈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한점으로 모여든다.

에이든은 자세를 낮춰 긴장하며 창을 들었으나, 악령은 관심도 없다는 듯 창날을 향해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심상 공간을 가득 채운 악령들이 거짓말처럼 창 한 자루에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읏."

창날이 검게 물들자, 이내 지독한 허무와 분노가 치솟았다. 에이든의 눈이 시뻘게졌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요물이구나.

에이든이 사력을 다해 버티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포근한 기운들이 날아와 창날에 모이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더러운 기분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악령의 기운들이 흙의 포근한 기운에 가려지더니 창날의 색이 차츰 돌아왔다.

나무 본연의 색 같기도 했고, 질 좋은 황토의 색 같기도 했다.

"후우우우."

이제 진짜 끝인가?

에이든이 긴 한숨을 내쉬며 혹시 모를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갑자기 창날이 빛나기 시작했다.

옅은 빛에 휩싸인 그것은 갑자기 모래로 변해 스르륵 손을 타고 흘렀다.

철두는 그저 그것을 지켜보았다.

눈빛에 불안함은 없다.

흘러내린 모래는 스며들듯 땅에 닿았고, 철두의 시선은 신성한 바위 쪽을 향했다.

타탓.

조용해진 심상 공간 메마른 언덕을 달렸다.

신성한 바위에 올라 뾰족하게 솟은 다섯 봉우리의 바위산을 보았다.

가장 왼쪽의 봉우리의 정상에 은은하게 빛나는 나무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봉우리에는 묠니르가 빛나고 있다.

철두가 씩 웃었다.

"궁니르. 아니.... 넌 이름이 뭐냐?"

땅의 정령왕이여.

파파팟!

궁니르를 감싼 빛이 터져나가더니 다시 모래로 변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신성한 바위 한쪽의 흙구덩이가 들썩하더니, 인영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에이든의 허리춤 되는 정도의 키.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긴 수염에 비해 머리카락은 한 올도 없다.

거적때기 같은 황토색 옷을 걸친 모습.

[그라스.]

"반가워."

[나 또한.]

그라스가 부드럽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까닥했다.

드드드드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라스를 중심으로 주변 토지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메마른 언덕의 건조한 황무지가 질 좋은 토양으로 변했다.

쿠쿠쿠쿠!

언덕의 초입에 높이 자란 나무가 다시 그 키를 키우기 시작했다.

쭉쭉 자라난 나무의 키가 반 배는 더 커지고, 무성한 가지가 더욱 큰 그늘을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지만, 끝없이 자란 뿌리가 연신 땅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지진이 멈추자 철두는 마음의 눈을 감았다.

파팟.

"후우우우!"

번쩍 눈을 뜨자마자 길게 숨을 뱉었다.

마음속의 치열한 싸움과는 별개로 그의 몸은 오래도록 숨을 참은 채 굳어있었다.

폐가 바쁘게 움직이며 빠르게 산소를 공급했다.

잠깐 어질하던 시야가 돌아오자 검은 연기가 모조리 사라진 공동의 모습이 보였다.

"철두!"

심상 공간을 나온 아르엘라가 강철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흐흑."

"음?"

철두의 등에 딱지처럼 매달린 아르엘라가 펑펑 울었다.

"후후, 다 끝났다."

철두가 손을 뻗었다.

스스스슥.

철두의 손에 따라 바닥에 흩어져있던 모래 알갱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흩날려 손아귀에 쥐어졌다.

파팟.

은은한 빛과 함께 투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후후."

철두가 창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두 번째 성물을 손에 넣었다.

기절한 두 번째 친구도 깨웠고.

"가자, 아엘."

"응?"

"가자고."

"아니, 그거 말고...."

"아엘?"

"아."

철두의 줄임말에 아르엘라는 상황도 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볼이 괜히 발그레해졌다.

이름을 줄여 애칭으로 부르는 건 대개 연인 사이에서나 가족 간에나 쓰이니까.

'가족 맞잖아. 연인도 맞고.'

무뚝뚝하기만 한 줄 알았던 강철두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라 당황스러우면서도 부끄러운 아르엘라였다.

"후후, 길어서 줄였다."

"...?"

"가자, 아엘."

철두가 아르엘라를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이제 고구려로 돌아갈 때다.

315화 지옥의 사신단

증오의 억류지.

궁니르로 인해 가득 찼던 증오와 원한이 생명의 기운을 죽여 들판을 황무지로, 또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지형이다.

긴 세월 동안 마르고 건조해져 사막이 되어버렸는데, 궁니르가 사라졌다고 하여 당장에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이 사막에 다시 초목이 피는 건 못해도 수백 년, 길면 수천 년이 지나야 할 터다.

"무너뜨릴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흠, 하긴."

철두가 피라미드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증오의 진원지였으나, 그 핵심인 궁니르를 회수한 이상 이 피라미드는 석조구조물일 뿐이다.

이 또한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터이니 파괴하지는 않기로 했다.

"아엘. 오아시스에 들렀다가 가자."

"오아시스? 왜?"

"도움을 받았으니 축복 정도는 해줘야지."

"허, 기특하네."

"난 원래 이렇다."

원한은 10배로!

은혜는 2배로!

오식이를 타고 당장 남쪽으로 향했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가득하던 원념과 사기는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쇄애애액.

오식이도 비실비실하던 오식이가 아니다.

활짝 날개를 펼친 그리핀이 힘차게 날갯짓한 지 두어 시간 만에 오아시스가 시야에 담기기 시작했다.

"음?"

점점 가까워지는 오아시스의 모습에 철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잔치라도 열렸나?"

오아시스의 마을 이곳저곳에 뭉게뭉게 연기가 가득하다.

"바보야. 누가 봐도 약탈당하는 거잖아."

"흠."

내심 잔치라도 열렸으면 했으나, 밥 짓는 연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오식이를 재촉해 속도를 높였다.

*

머나먼 오아시스.

동서남북 어딜 가나 끝없는 사막이 이어져 있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이곳에는 여덟 개나 되는 마을이 있다.

지형의 특수성 탓에 외부의 침략 따위를 대비한 목책이나 망루 따위도 없으며 마을 간의 경계도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오아시스 주변에 자리 잡은 여덟 개 가문이 시초가 되어, 그 명맥을 이어오다 보니 지배자 계층이나 다름없는 촌장 8명이 있어 그리 부를 뿐이다.

그 여덟 명의 촌장이 한데 모여 등 굽은 촌장을 나무라고 있었다.

"함부로 외부인을 들이는 게 말이 되는 겐가?"

"어허, 이 일을 어이할꼬."

"안식의 행사가 하루 만에 끝나버렸어."

본디 1년에 한 번 있는 이 축제는 일주일간 이어진다.

딱 일주일.

오아시스는 외부의 제물을 받아들였으며, 그 일주일의 축복으로 이 일대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외부와의 상거래보다는 자급자족으로 공동체를 꾸려온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이것은 영 불안한 일이었다.

고작 하루 치 축복으로 다음 해까지 이곳이 풍요로워질까?

"더 큰 문제는 그게 아니야! 다들 보지 않았나? 신이 떠났어!"

"아닐지도 모르지."

"어허, 그 옹이구멍 같은 눈으로는 안 보이던가?"

촌장들의 걱정은 괜한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번의 안식 축제가 그저 일찍 끝난 것인지, 신이 떠나 이제 다시는 축복받을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는 거다.

언제나 그렇듯 신은 명쾌한 답을 내려주지 않았으며, 고민과 걱정은 늘 남은 자들의 것이 되었다.

"이 땅이 버려졌어."

"어허, 내년까지는 기다려 봐야지."

"오아시스의 물도 금세 말라버릴걸세."

"허어, 이 성질 급한 사람. 저 호수 같은 물이 당장에 말라버릴 일은 없대두."

당장 의견이 갈렸다.

오아시스의 존재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기에 민감한 것도 당연했다.

"자네 왜 계속 말이 없나?"

"맞아. 이게 다 자네가 외부인들을 들여서 그런 것 아닌가?"

촌장들의 추궁에 등 굽은 노인은 허허롭게 웃었다.

"허락한다고 머물고, 불허한다고 떠날 자들인가? 어디, 이 오아시스를 찾는 이들이 그런 자들이었나?"

"...그래도 안식의 축제에는 멀리했어야지."

"허허, 그런 자네는 작년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았고?"

"...그, 그때는 아무 문제 없지 않았나?"

"허허허."

등 굽은 노인은 그저 웃었다.

촌장들이 답 없는 문제를 풀지 못해 출제자를 나무라고 있을 때, 마을 자경단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마론 마을에 그놈들이 나타났습니다!"

"뭣이?"

오아시스 서쪽에 자리 잡은 마론 마을 촌장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놈들 누구?"

"지, 지옥의 사신단이 들이닥쳤습니다."

"음, 재수 없는 자식들이 또 기어들어 왔군."

마론 마을 촌장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놈들은 몇 달 전부터 이곳 사막에 흘러들어와 이따금씩 마을에 들러 휴식하거나 식량 따위를 보급해가는 놈들이었다.

문제는 그 방식이 거래가 아니라 강탈이라는 것이다. 제집처럼 며칠 머무르며 지내기 일쑤였고, 값을 제대로 치르는 경우도 없다.

그저 당하는 마을 입장에서는 재수 없다 여기고 그들이 하루빨리 떠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최근 머나먼 오아시스의 가장 골치 아픈 손님들이 그들이다.

"재수 없는 자식들. 빨리 꺼졌으면 좋겠군."

"아, 아닙니다! 놈들이 지금 마을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고 있습니다!"

"뭣이?"

마론 마을 촌장은 물론 나머지 이들도 깜짝 놀랐다. 놈들이 무도하고 포악하긴 해도 그나마 사막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휴식하고 보급할 공간이 되어주는 이곳 오아시스를 파괴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놈들이 저리 변한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이럴 때가 아닐세! 얼른 마을 장정들을 모아 가세!"

"그러자고!"

마을 촌장들을 중심으로 자경단원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옥의 사신단은 아예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작정한 듯 날뛰었으며, 마을 곳곳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아이들과 여자, 노인들을 재빨리 반대편 동쪽 마을로 보내고, 아버지와 아들들로 이뤄진 마을 자경단원들이 저마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마론 마을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의 사신단이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 목격하고 말았다.

불타는 마을.

여기저기 시뻘건 피와 함께 널브러진 시체들.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걸어 다니는 시체, 아예 백골이 되었으나 피처럼 빨간 안광과 함께 거리를 활보하는 스켈레톤.

붉은 눈의 까마귀 떼.

지옥이었다.

"마지막 보급이다. 최대한 많은 시체를 확보해라."

"더 이상 가치가 없다. 모조리 불태워라."

지옥의 사신단은 100여 명이 넘는 마법사 단체였는데, 그중 리더 무리로 보이는 인들은 저기 유령마를 탄 세 명의 사람들이다.

소름 끼치는 행색의 유령마의 등에 탄 검은 로브의 사내들.

그들의 명에 따라 지옥의 사신단들이 마을 여기저기를 오가며 불을 지르고, 시체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구어어어."

"키에에에!"

그렇게 일어난 구울과 스켈레톤들은 또다시 산 자들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살육과 비명, 죽음과 방화가 빠르게 전염병처럼 번졌다.

"후, 후퇴다!"

"도망쳐라! 얼른!"

자경대원들을 이끌던 대장 중 하나가 소리치자 너 나 할 것 없이 빠르게 후퇴했다.

벗어나야 한다.

이 오아시스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만이 살길이다.

"어서! 도망쳐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라!"

"마, 마을에 들러 음식을 챙겨야 합니다."

"그럴 시간이 어딨어! 얼른 달려!"

"이대로 사막으로 도망쳐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고요!"

"그래도 달려 병신아!"

고양이 떼에 쫓기는 쥐 떼처럼 허겁지겁 달리는 자경대원들 위로 소름 끼치는 붉은 눈을 가진 까마귀 떼가 날았다.

까아악- 까아악-

놈들은 충실한 감시자가 되어 이리저리 숲길을 달리는 자경대원들을 쫓았다. 자경대원들이 동쪽에 닿아 제 어미와, 부인과, 늙은 아비와 조우했을 때에는 하늘에 날아오른 까마귀 떼가 수십이나 되었다.

"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다 죽였어요! 다 죽이고 있다고요!"

"허, 당장 사막으로 떠나는 게 말이 되는가?"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고요!"

"여기 있으면 무조건 죽어요! 죽든 살든 도망쳐야 합니다!"

자경대원들의 간절한 설득에는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고, 동조하는 이들이 서둘러 짐을 꾸려 발을 뗐다.

화르르륵.

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그 불길이 동쪽에 닿기도 전에 모든 사람들이 줄지어 나섰다.

마음 급한 이들은 모래에 발이 푹푹 꺼지는 사막을 달려서 도망쳤고, 미련이 가득한 이들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허어! 마을이...."

"어머니, 불이 문제가 아녜요. 빨리 오세요."

불은 재앙도 아니다.

"허억, 저, 저게 뭐냐?"

"으아악, 언데드다!"

벌써 동쪽 숲에 다다른 죽은 자들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어기적거리면서도 달리는 시체들과 가벼운 몸놀림의 해골들이 피난 행렬의 끝자락에 닿았다.

"으아악!"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질서 없이 도망쳤고, 언데드들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사냥하기 위해 덮쳤다.

촤아아악!

"크억!"

걸음이 느린 이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그들의 가족들이 악다구니 쓰며 창을 들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구울의 배에 창을 쑤셨으나,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더욱 앞으로 파고들며 피 묻은 손을 휘둘렀다.

"오, 신이시여!"

"흐윽, 저희를 버리지 마소서!"

안식절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절망의 순간, 개인의 노력으로 무엇도 나아질 수 없다는 깨달음의 순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신을 찾았다.

신은 늘 그렇듯 시련 앞에 응답이 없었으나.

"후후후."

저 하늘 위에 태양을 등진 그리핀 하나가 맹렬히 하강하고 있었다.

콰직!

땅이 메다꽂히다시피 한 그리핀이 구울 세 마리를 짓이긴 채 포효했다.

"끼아아아!"

그리핀의 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우악스럽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덩치의 사내와 매끈한 피부에 온통 타투 투성이인 귀가 뾰족하고 큰 여인이었다.

"새곰아."

"구오오!"

강철두는 아울베어마저 소환한 채 아르엘라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사람들을 챙겨라."

"알았어!"

강철두는 그 길로 훌쩍 그리핀 위에 올라타 오아시스를 향해 날아갔고, 새곰과 함께 남은 아르엘라는 구울과 스켈레톤들을 무자비하게 사냥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콰직!

연약한 신체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도끼를 든 엘프 전사가 날뛰자 구울들은 순식간에 두 토막이 나 쓰러졌다.

사람들은 피난하길 멈추고 아르엘라에게 다가왔다.

"시, 신이시여."

"고, 고맙습니다."

"흐흐흐흑."

누군가는 신을 찾았고, 누군가는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타는 오아시스의 숲을 바라보며 터전을 잃어버린 현실에 절망했다.

동쪽 마을에서 시작된 화마는 벌써 숲을 절반 넘게 태우고 있었다.

방금 내려온 저들이 지옥의 사신단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다시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꾸르르르릉!

그때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하늘로 향했다.

꾸르르르릉!

연신 천둥소리를 내며 번쩍이는 뇌전이 치고 있으니, 저기 오아시스 위에 떠 있는 그리핀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콰아아앙!

그리핀에게서, 정확히는 그 위에 올라탄 철두가 휘두른 묠니르에서 시작된 뇌전이 숲 여기저기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그와 함께 오아시스 위에 먹구름이 맺히더니 이내 세찬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구름은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갔고, 불이 난 오아시스의 숲은 물론, 그 주변의 사막 일대까지 축축이 젖게 했다.

"와아!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 하늘에서 물이 떨어져요."

"...모, 모르겠구나."

"에, 엘리아 님의 축복이다! 분명해!"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자들.

난생처음 목도한 비에 너 나 할 것 없이 젖은 모래에 고개를 조아리고 기도했다.

316화 궁극의 창

쾅, 콰앙!

지상에 내리꽂힌 번개가 구울을 터트린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의 스켈레톤들을 휘감았다.

파지지직!

그러고도 여력이 남은 번갯불이 숲의 나무들에 직격하며 불을 피워냈다.

쾅, 콰아앙!

"끄어어!"

"방어막을 펼쳐라!"

오아시스 인근의 모든 사람들이 피난했기에 숲에 남은 이들은 지옥의 사신단뿐이었다.

강철두는 그리핀 위에 올라탄 채 무차별적으로 뇌전을 뿌렸다. 덩달아 거세진 화염에 묠니르를 높이 치켜들었다.

"엘리아!"

꾸르르르릉!

검은 구름들이 몰려들어 세찬 빗줄기를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불이 꺼지며 낸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숲은 꼭 죽음의 안개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빗방울이 굵어지며 거세게 일었던 불길이 순식간에 잡혔다. 와중에 검은 방어막이 펼쳐진 상공을 활공했다.

거뭇한 방어막 안에 얼핏 해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저마다 흑색 로브를 두른 것이 같은 단체의 사람들 같았다.

"후후, 다 모였군."

철두가 그리핀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슈우우우우, 콰앙!

거뭇한 보호막 위에 착지하자 충돌음과 함께 보호막이 흔들렸으나 깨지진 않았다.

돔처럼 생긴 보호막 천장에서 철두가 쪼그려 앉아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저마다 긴장한 얼굴의 흑마법사들이 가득한데 유령마에 올라탄 흑마법사도 셋이나 된다.

"제롬 같은 놈 셋에 잔챙이 수십."

철두가 다시 일어서서 묠니르를 들었다.

이 보호막이 얼마나 버틸까?

슈아아아, 까앙! 까앙!

묠니르가 부딪힐 때마다 위태로운 소리를 내던 보호막은 다섯 번을 견디지 못했다.

콰직!

영 좋지 못한 소리와 함께 판판이 깨져나간 보호막과 함께 철두가 떨어져 내렸다.

퍼억.

발치에 있던 흑마법사 하나가 철두의 무릎에 맞아 머리가 깨져나갔다.

"...."

수십 쌍의 눈동자가 철두 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철두는 그들을 훑어보며 씩 웃었다.

"네놈들이 지옥의 머시기냐?"

"...."

철두의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연스레 시선이 유령마에 올라탄 세 명의 사람에게로 향했다.

"네놈들이 대장이냐?"

"...."

그들의 침묵에 철두의 눈썹이 구겨졌다.

"벙어리야?"

"...성물 묠니르의 주인. 아이언헤드!"

"나 유명하네."

그 망할 놈의 사기꾼 하피 녀석. 신문 넣어주지도 않으면서, 다른 데는 신문을 잘도 뿌리고 다닌 모양이다.

"떠나라. 충돌하지 않겠다."

"...?"

철두는 그들의 말을 퍼뜩 이해하지 못했다.

범을 앞에 두고 물러나라 말하는 토끼는 세상에 없으니까.

"뭐? 흐흐흐흐."

이거 재밌는 놈들이네.

"덤벼라. 모두 죽여주마."

죽일 이유는 너무 많아 늘어놓기도 힘들다.

철두가 묠니르를 들어 올렸다.

위이이이잉!

마력을 한껏 빨아당기며 묠니르가 진동했다.

"내가 남겠다."

"...."

"...."

유령마를 탄 사내 하나가 나섰다.

"놈을 묶어라."

"옛!"

유령마 사내의 명령에 흑마법사들이 저마다 손을 뻗어 철두를 향해 기분 나쁜 마력의 덩어리를 던져댔다.

쾅! 철썩!

어떤 것은 터졌고, 어떤 것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올가미처럼 옭아매는 것들도 있었고, 불처럼 화끈하게 타올라 시야를 어지럽히는 녀석도 있었다.

수십 발의 흑마법이 난사되었고, 철두는 그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몸을 내빼는 흑마법사 둘이 보였다.

유령마를 타고 있던 이들 중 두 사람이 재빨리 등을 보이고 도망치고 있었다.

"어딜!"

묠니르를 쥐지 않은 왼손을 뻗자 모래가 바람결에 날려와 손아귀에 뭉쳐졌다.

그것을 움켜쥐자 어느새 투창이 들려 있었다.

"흡!"

쇄애애애액!

냅다 던진 투창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흑마법사들이 뒤늦게 위기감을 느끼고 반응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콰직!

반사적으로 펼친 보호막을 찢고 틀어박힌 투창이 흑마법사 하나를 낙마시켰다.

푸스스스.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지는 녀석을 뒤로하고 함께 도망치던 녀석은 그대로 꽁무니를 빼버렸다. 멀어지는 녀석을 보는 철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딜 한눈을 파는 거냐!"

그때 유령마에 타고 있던 사내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파파팟.

검은 막대기 같은 것들은 뼈였는데, 그것에 검은빛이 휩싸이더니 이내 갑옷 입은 해골, 데스나이트가 되었다.

[마스터의 명에 따라!]

데스나이트들이 달려들자 철두는 묠니르를 크게 들었다가 바닥에 이내 내리쳤다.

콰아아앙! 파지지직!

지면을 치는 충격에 큰 지진이 난 듯 주변이 흔들렸고, 그와 함께 퍼져나간 전격의 충격이 모두를 강타했다.

철두를 귀찮게 하던 잔잔한 흑마법들도 모조리 풀려나가는 순간.

"노오옴! 끝이다!"

흑마법사가 단검이라기엔 조금 긴 칼을 들고 짓쳐 들었다.

"흥, 허술하군."

철두는 망치를 들고 그것을 막았으나, 오히려 흑마법사는 히죽 웃었다.

"크크크큭."

"...?"

철두는 의아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회심의 일격이 수포로 돌아가 정신이 나갔다기엔 저놈의 웃음이 순수한 기쁨의 기색이라 궁금했다.

"왜 웃냐?"

"크크큭, 오만한 자로구나! 네놈은 이제 성물이 봉인되었으니 죽은 목숨이로다!"

"...?"

철두가 손에 쥔 묠니르를 보았다.

마력을 흘려보냈으나.

<리치왕의 사념이 마력을 흡수합니다.>

묠니르에게 가야 할 마력이 묘한 데 흘러 들어갔다. 공기 중에 흩어지듯 사라져버린 느낌.

"허!"

"크크큭, 당황스러우냐?"

"...."

철두는 뚱한 얼굴로 녀석을 보았다.

흑마법사의 리더는 승기를 잡았다 생각했는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그가 단검을 빼어 들더니 자랑스레 말했다.

"신의 무기인 성물을 억압하는 힘. 이것이 죽음으로써 신의 길을 걷는 리치왕의 단검이다!"

"허."

철두의 콧방귀를 흑마법사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이제 네놈은 성물을 잃었으니, 그저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철두가 묠니르를 놓았다.

파스스.

묠니르가 바닥에 부딪히며 깨져 물방울로 화해 사라졌다.

스르릉!

대신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명검 '할아버지'와 '새벽 어스름'.

본디 양손검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을 쌍검처럼 쥐곤 고개를 까닥했다.

"망치가 없으면 검을 쓰면 된다."

"크하하하하하!"

흑마법사는 과하게 웃어젖혔다.

훌쩍 뒤로 한 발 물러난 녀석이 인벤토리에서 다시 검은색 뼈들을 흩뿌렸다.

츠츠츳.

소환된 데스나이트만 9기.

그리고 묠니르의 전격 공격에 맞고도 살아남은 흑마법사가 대충 십여 명 된다.

"나서라! 정점에 이른 죽음의 기사들이여!"

[마스터의 명대로!]

뼈다귀 리필이 알찬 놈이다.

아홉 마리의 데스나이트들이 들어 올린 검마다 검은 검기가 맺혀있었다.

성물을 봉인하고 보면 과연 쉬이여길 녀석들은 아니었다. 그놈들 중 한 놈은 검강을 내뿜고 있었다.

위대한 검사의 경지.

지금 철두와 동급이다.

"같은 레벨도 급이 있다."

철두가 쥔 명검 두 자루에 검강이 피어올랐다.

츠아앙!

"소용돌이!"

훼에에에엑, 콰콰쾅!

두 검을 쥔 철두의 신형이 맹렬히 회전하며 주변을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식겁하고 몸을 피해낸 마법사들은 몇 놈이 살았으나 나머지와 데스나이트들은 모조리 분쇄되어 쓰러졌다.

휘이이익.

"후우우."

회전을 멈춘 철두가 흑마법사를 보았다.

그 녀석은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크크크큭, 네놈의 마력은 무한이 아닐 터."

"...?"

"허나, 이곳은 고통과 절망, 죽음이 가득하구나."

츠츠츳.

흑마법사의 손짓에 따라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뽑아낸 검은 마력이 에너지가 되어, 흩어진 데스나이트의 뼈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멀쩡히 재생한 9기의 데스나이트를 보며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괜히 언데드가 아니지."

철두는 깔끔하게 인정하고 두 검을 땅에 푹 꽂아 놓고는 빈손이 되었다. 그 모습에 흑마법사가 히죽 웃었다.

"포기냐? 크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신나는지 한참을 웃은 녀석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욕심과 집착이 가득한 눈은 애정마저 담아 철두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리도 훌륭한 재료를 쥐게 되다니. 실로 죽음의 가호가 함께 하도다!"

"...."

"최후의 날 앞에 죽음께서 내게 선물을 내리시는구나."

"지랄을 해라."

"크크큭, 곱게 나의 기사가 되어라."

철두가 피식 웃으며 바닥의 모래를 쥐었다.

모래를 재료로 투창을 소환하고, 동료를 해치운 것을 보았기에 흑마법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멀어졌다.

"허, 방비하라!"

데스나이트 셋이 흑마법사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이미 투창 자세를 취한 철두는 창을 던져냈으니.

슈아아악.

투창은 흑마법사 앞을 가로막은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깨부수고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철두가 준비한 최후의 수가 날아간 듯하자, 흑마법사는 이제 정말 승리했음을 장담했다.

"크크큭, 이제 저 녀석을 끝장내...."

콰직!

그 순간 등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충격과 함께, 그의 몸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에이톤 트럭에 맞은 듯 앞으로 붕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공교롭게도 그 위치는 철두의 바로 앞이었다.

"...끄으으으, 어, 어...떻게?"

"목표는 무조건 맞춘다는 궁극의 창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나?"

콰직.

철두가 놈의 등에 박힌 창을 꺼내 쥐었다.

바닥에 깔린 채 힘들게 고개를 올려다보고 있던 흑마법사의 눈에 투창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지극히 평범한 투창이다.

하지만, 그 설명을 듣는 순간.

그리고 이곳이 어딘지 알게 된 순간.

저 평범한 창은 귀물, 아니....

신이 쓰던 전설의 무기.

성물이 되었다.

쓰아아아아.

궁니르에 맞아 골통이 깨진 데스나이트의 원혼이 연기가 되어 투창에 이끌리듯 다가와 흡수되어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당대에 성물의 주인이 둘이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황제와 아이언헤드.

헌데, 한 명이 성물을 두 개나 쓰고 있다는 건 더욱더 놀라운 일이니.

쇄애애액!

콰지지직!

철두가 장난스럽게 던진 투창이 데스나이트의 머리통을 차례로 깨부수더니, 여태 살아있던 흑마법사의 머리통도 꿰어냈다.

휘릭.

일을 마치고 철두의 손에 다시 돌아온 투창을 향해 죽은 자들의 원혼이 몰려들었다.

이것들은 다시 오랜 세월을 지나 증오만 남게 되겠지.

"크크큭, 운명의 장난이로고."

"...? 죽을 때까지 혀가 길구나."

철두는 바닥에 깔린 흑마법사의 머리통을 찧었다.

콰직!

츠츠츠츳.

검은 연기로 변한 그의 몸체가 궁니르에게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흩어졌다.

"흐음, 기사급 이상은 안 되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저기 시체가 남은 흑마법사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실험 삼아 기사급 되는 이를 죽여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곧 기회가 오겠지.'

앞으로 많은 전장이 기다리고 있으니, 궁니르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가면 된다.

"철두!"

불이 완전히 꺼진 숲을 달려온 아르엘라는 철두의 품에 덥석 안겼다.

"괜찮지?"

"후후, 당연하지."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보며 아르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해치운 거야?"

"아니, 한 놈이 도망쳤다."

"놓친 거야?"

아르엘라의 말에 철두가 씩 웃었다.

"그럴 리가."

놓친 게 아니라 놓아준 거다.

지옥의 사신단인지 뭔지 뿌리를 뽑아 놓아야 오아시스가 안전하지 않겠나?

"그라스가 쫓고 있다."

놈이 어딜 가든, 땅의 정령왕 그라스의 감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317화 사신

쏴아아아아!

세찬 빗줄기가 끝없이 내렸다.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기세의 빗물은 오아시스 주변 사막을 적시다 못해 조금씩 물길을 만들어 흘렀다.

"어어? 물이 움직여요!"

"사막이 물을 뱉어요!"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구경했다.

그들에게 물은 오아시스에 고인 물이며, 호수가 전부였다. 비를 처음 보았을뿐더러, 강이나 개울을 본 적도 없었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허어, 맙소사!"

"모래가 어찌 물을 먹지 않고...."

그들에게 모래는 물을 앗아가는 땅이었다.

물을 끝없이 퍼다 부어도 땅에 흡수되고, 뜨거운 태양 빛에 금세 증발해버리는 게 사막이다.

그들은 이 기현상에, 그치지 않는 비를 경이롭게 보았다.

"어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무, 물러섭시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검게 몰려든 먹구름은 충분히 위압적인 모습이었고, 본능적인 경외와 두려움이 들게 했다.

먹구름은 점점 더 커지며, 비를 쏟아내는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여기저기 모래가 잠기며 골을 타고 흐른 물줄기가 웅덩이에 고였다.

비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피난하던 길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비구름의 중심은 여전히 오아시스 위에 있으니, 지금 얼마나 넓은 반경으로 비가 내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코앞에는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뒤로는 또 끝없는 사막이 이어져 있으니, 세상이 둘로 갈라진 것만 같았다.

쏴아아아!

호기심 강한 이들은 커튼처럼 둘러진 비의 장막에 손을 대보거나 몸을 던져보았다가 홀딱 젖기도 했다.

끝모르고 내리던 비에 사막이 노한 것일까?

꾸르르르릉.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억, 다들 조심해라!"

"물러나라! 모래지옥이야! 어서 이리 와."

사막은 평평하지 않다.

높은 모래 언덕이 있고, 언덕이 만나는 곳에 골이 있기 마련이다.

땅이 흔들릴 때 그런 모래 언덕의 경계면에서 잘못 미끄러졌다간 흘러내린 모래더미에 금세 파묻혀버릴 수도 있다.

다들 제 몸을 간수하고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느라 비가 내리는 오아시스 쪽을 보지 못했다.

흔들리던 땅이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는데, 세찬 비가 내리는 땅이 변해 있었다.

"맙소사! 흙이야!"

물을 잔뜩 머금은 모래가 지진과 함께 이리저리 섞이더니 지하 깊은 곳의 땅이 뒤집혀 흙이 지표까지 드러났다.

마침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차츰 줄어들어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오, 신이시여!"

"...허어."

사람들은 탄식하거나 신을 찾는 것 외에 더는 표현할 말을 잃었다.

딛고 선 땅은 여전히 사막이건만, 경계가 지듯 비가 내린 땅은 온통 축축한 흙 지반이었다.

수천 개가 넘는 웅덩이가 생겨났고, 높은 웅덩이의 물이 낮은 웅덩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어지러이 엮여 있었다.

그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기존 오아시스의 수백 배에 달할 정도였다.

슈아아아아.

경탄해 마지않는 사람들 앞에 그리핀 한 마리가 착지했다.

"시, 신이시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감히 강철두와 아르엘라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엎드려 절했다.

오아시스 주변 여덟 개의 마을에서 피난한 사람들이다. 얼추 세어보아도 2천은 넘는 숫자.

철두가 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나는 신이 아니다."

"어이구."

천둥 같은 소리에 가까이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증오의 사원은 이제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그들의 환호가 잦아지길 기다리다가 말했다.

"나무를 심고 숲을 키워라. 농사를 지어도 좋다. 충분한 터전이 되어 줄 것이다."

머나먼 오아시스의 신을 거둬가는 마음의 빚은 이것으로 털었다. 엘리아에게 물어본바, 머나먼 오아시스에는 여전히 엘리아가 사념을 남겨 두었다.

이 성소는 여전히 작동하며 내년이면 다시 제물을 받아 마르지 않는 물을 유지할 것이다.

"간다. 잘 살아라."

휘릭.

그 말과 함께 철두가 그리핀 위에 훌쩍 올라타자 등 굽은 노인이 황급히 일어나 물었다.

"은인이시여! 이름을 알려주소서!"

철두는 잠깐 그를 마주 보다가 씩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다!"

후우우웅.

그 말을 끝으로 그리핀이 도약하며 날갯짓 서너 번에 벌써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강철두 님의 은총이시다!"

"강철두 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셨다."

"신탁이다! 숲을 가꿔라!"

"농사를 지어라! 사막을 먹어 치워 버리자!"

증오의 사원은 사라졌다.

더는 땅의 정기가 죽어 사막화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다.

"신의 은총이다!"

"강철두 신 만세!"

사람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철두와 아르엘라는 북쪽으로 날아갔다.

"후우우."

철두의 긴 한숨에 뒤에 타고 있던 아르엘라가 단단하고 넓은 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후후, 별거 아니다. 하루 자고 나면 그만이다."

물의 정령왕 엘리아와 땅의 정령왕 그라스가 힘을 발휘하기 위한 에너지원은 강철두의 마력에서 기반한다.

메마른 땅을 적시고, 모래를 뒤엎어 비옥한 토질을 끌어냈다.

굉장히 많은 마력을 소모했고, 지금 철두는 마력이 모조리 고갈된 상태다.

이 상태로 도망친 흑마법사를 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는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만 남은 증오의 사원에서 하룻밤을 지낼 생각이다.

어차피 도망친 흑마법사 놈이 서북쪽으로 달아났기에, 그놈을 쫓기 위한 중간 기착지 정도 되는 셈이다.

두 사람은 곧 피라미드에 도착했고, 전에 비해 황량하기만 한 건물 안에 들어가 불을 피우고 텐트를 쳤다.

무리한 강철두를 대신해 냄비를 걸고 스튜를 끓인 아르엘라가 그릇을 건넸다.

"후루루룩."

"어때?"

"밍밍하군."

"...."

"고기 없나?"

정직한 바바리안의 시식평에 아르엘라는 고기를 뭉텅이로 썰어 넣었다.

"먹어봐."

"...?"

방금 고기 넣었는데?

"아직 고기가 고루 익지 않았다."

"그냥 먹어."

"후후. 너는 그냥 요리하지 마라."

정직한 바바리안 신랑의 팩트에 아르엘라가 굳었고, 철두는 불가로 다가와 국자로 스튜를 저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엘라가 물었다.

"하나 물어봐도 돼?"

"물어봐라."

"근데 왜 카다잔의 아들 에이든이 아니라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야?"

"...."

철두는 그저 말없이 스튜를 계속 뒤적거리며 저었다. 아르엘라는 가만히 기다려주었고, 철두는 긴 침묵 끝에 이야기했다.

"나는 바바리안이지만 지구에서 자랐다."

"...."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기에 아르엘라는 기다려주었고, 강철두의 말이 이어졌다.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나는 바바리안인가, 지구인인가."

"혈통은 바꿀 수 없어."

"맞다."

강철두가 주억거렸다.

개로 길러진 맹수가 자연에 돌아가 어렵지 않게 적응하는 것처럼, 지구에서 자란 바바리안은 야생의 세계 노바에 오자마자 야성을 되찾았다.

"내 몸속에 흐르는 피는 어찌할 수 없으나, 전사는 증명하는 자며, 스스로를 정의하는 자다."

"...."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삶을 배웠으며, 약한 자를 불쌍하게 보는 법을 배웠다.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

강철두의 음색에는 확신과 애정이 가득했다.

"나는 지구 출신의 바바리안. 강용철의 손자 강철두다."

스스로를 그리 정의했다.

아르엘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그런 거구나."

"뭐가 말이냐?"

"네가 발할라 채널이 아니라 지구 채널인 이유 말이야."

"으음."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혈통은 바바리안이지만, 확실히 나는 지구인이다."

"알겠어."

지구의 유일한 바바리안, 한국에 뿌리내린 강씨 혈통의 시작은 강철두가 되리라.

"우리 아이도 지구인이겠네."

"음? 아이가 생겼나?"

"아직 모르지."

"후후, 얼른 먹자. 할 일이 많다."

"에잉."

부부는 스튜를 빠르게 먹어 치우고 텐트에 들어가 일찍 잠을 청했다. 아이를 만드는 일은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이면 마력이 충분히 회복되리라.

*

흑마법사 제인을 태운 유령마가 미친 듯이 달렸다.

쇄애애애액.

유령마의 걸음은 하늘을 밟고 날았으며, 말발굽 소리보다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을 남겼다.

한참을 달려 어둑한 시간이 되어서야 사막 지형 중에 바위가 불쑥 솟아오른 곳이 보였다.

서둘러 유령마를 몰아 바위로 다가서니 모래에 파묻히다시피 한 작은 동굴 입구가 나왔다.

츠츠츠츠.

유령마를 역소환한 제인은 좁은 통로를 한참 기었다. 모래가 덕지덕지 묻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헉, 헉."

원체 마음이 다급하다 보니 숨이 차올랐다.

먼지를 마시며 기어가다 보니 이내 다리를 펼 만할 정도로 천장이 높아졌다.

등 굽은 노인처럼 허리를 숙이고 종종 걷다 보니 차츰 천장이 높아져, 이내 온전히 서서 달릴 정도가 되었다.

"헉, 헉."

마음이 다급하니 걸음걸이마저 조급해졌다.

한참 뛰어가니 드문드문 빛을 밝히는 마석이 박힌 인위적인 통로의 모습이 나왔다. 누가 봐도 사람이 만들었을 법한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날다시피 계단을 뛰어 내려간 제인은 마침내 목표로 했던 거대한 공간에 도착했다.

드래곤의 레어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동혈.

여기저기 은은하게 빛을 내는 마석이 비추는 동혈의 중심에 높이 세워진 옥좌.

이 던전의 주인이자, 경배해 마지않는 그의 신.

"나의 죽음, 나의 어둠, 당신의 종이 경배합니다."

제인이 공손한 자세로 오체투지 하였다.

그녀의 몸은 목소리와 함께 잘게 떨리고 있었다. 등줄기에는 축축할 정도로 땀이 가득하다.

뛰어와서 흘린 땀보다 지금 이 순간 긴장으로 인해 흐르는 땀이 더 많았다.

모든 감각이 오롯이 그의 신을 향해있다.

특히나 예민한 청각에 한껏 집중하니.

스륵.

높이 솟은 기둥 위 옥좌에 앉은 검은 로브의 덩치 큰 존재가 일어섰다.

그 키가 얼마나 큰지 거대한 오우거와 같았고, 안광은 형형한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 하나에는 거대하고 길쭉한 낫이 구부러진 낫이 들려 있었고, 커다란 방패가 들려 있었다.

방패는 누가 보더라도 기괴하고 오싹한 모습이었는데, 사람의 뼈가 얼기설기 이어져 만들어진 뼈 방패였다.

방패 앞면에 자리한 4개의 두개골이 인상적인데, 그중 셋이 검게 변해 있었고 백골은 하나뿐이었다.

이색적인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의 손 또한 뼈밖에 없는 해골이었다.

죽음 그 자체가 신이 된다면 이러할까?

고통.

그리고 죽음.

그저 리치라 부르기엔 너무나 광오한 존재.

사신의 턱뼈가 움찔했다.

[...또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가 내뱉는 으르렁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엎드려있는 제인이 더욱 몸을 떨었다.

스억!

사신의 낫이 휘둘러지니 제인의 곁에 있던 바닥이 움푹 파였다.

파직!

제인이 깜짝 놀라 곁눈질하니 흙색의 작은 정령 하나가 방금의 공격에 맞아 사라지는 게 보였다.

'미행이 붙었어!'

깜짝 놀란 제인이 감히 용서를 빌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사신이 방패를 들어 올리자 해골에서 검은빛이 모조리 뽑혀 나와 다시 하얀 해골 방패가 되었다.

검은 빛무리는 세 덩이로 뭉쳐져 제인의 옆에서 형체가 만들어졌는데, 놀랍게도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이었다.

파파팟.

그들은 하나같이 제인과 같이 머리를 땅에 찧고 엎드려 명을 기다렸다.

[...서둘러 ...용을 찾아라....]

죽음이 명하니, 추종자들이 던전을 나섰다.

318화 치의 형제단

"...!"

곤히 잠들었던 철두가 벌떡 일어섰다.

그 탓에 아르엘라도 잠에서 깼다.

"음?"

"그라스!"

철두와 항상 함께하던 정령 친구들은 힘을 잃었다. 그들이 성물을 매개로 다시 옛 이름을 찾았으나, 소환에 있어 제약이 따랐으니.

스아아아.

텐트 밖에서 모래 알갱이들이 날아와 길쭉한 형태가 되더니, 이내 투창의 모습으로 변했다.

철두가 그것을 쥐자, 내면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들켰다.]

"나도 알아."

정령 친구들이 자리한 것은 철두의 내면 심상 세계. 미약하다 해도 그들이 타격 입었는데, 철두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잠에서 깬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떤 놈이야?"

[직접 봐라.]

철두의 의식 속에 그라스의 분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게 떠올랐다.

"대왕 리치인가? 흐음."

"리치라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아르엘라가 물어왔다.

"그라스의 미행이 들켰어. 던전 같은데 그곳 보스가 리치인 것 같다. 그놈이 흑마법사들 대장 같다."

"지금 쫓아야 하는 것 아니야?"

미행이 들켰다면 그들이 언제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 알 수 없었다.

[입구를 감시 중이다. 그럴 필요 없.... 지금 놈들이 나섰다.]

"어디로?"

[모르지.]

"으음."

철두가 고심했다.

던전에 그대로 남아있는 리치를 찾아가는 게 맞는 건지, 지금 밖으로 나섰다는 흑마법사 네 놈을 찾으러 가는 게 맞는 건지....

"공유해봐."

[알겠다.]

직접 본 것처럼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좁은 바위틈을 기어서 나오느라 머리에 덮어쓴 후드가 흐트러져있어 그들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역시 그놈들이군."

한 놈은 어제 철두의 손에 확실히 죽은 녀석이다.

셋 중 하나는 도망친 놈일 테고, 하나는 궁니르를 던져 죽였기에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한 놈이 어디서 본 얼굴인데...."

[고구려를 공격하던 놈이다.]

"뭐? 이 새끼가 제롬이야?"

철두는 제롬과 대면한 적이 없다.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황제가 그놈을 죽여버린 이후니까.

"허, 넌 어떻게 알아?"

[놈이 황제에게 죽는 걸 보았지.]

그때는 분명히 모든 정령들이 사라졌을 때다.

"계속 주변을 떠돈 거야?"

[우린 자유롭지. 제한적이긴 하지만.]

철두의 심상 공간에 똬리를 틀었기에 멀리 벗어나진 못하지만, 정령은 그 거리 안에서는 자유로운 존재다.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바람과 불의 정령도 지금 이 주변에 떠돈다고 생각하니 철두는 픽 웃음이 났다.

볼 수 없고 당장 만날 수 없다 해도 친구들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아엘, 가자."

"그래."

두 사람은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결정했어?"

"물론."

거대한 리치가 있는 던전으로 향할지, 부리나케 던전을 빠져나온 흑마법사 놈들을 쫓아갈지.

"놈들을 쫓아간다."

"...? 그놈들은 어차피 죽여도 또 살아날 거잖아? 그 리치를 잡는 게 낫지 않아?"

척 봐도 던전 안에 그들이 부활하는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게 틀림없지만, 철두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아니, 놈들을 다시 죽이고 던전을 찾아도 늦지 않는다."

"...굳이 둘러 갈 필요 있어?"

"흑마법사 놈들이 또 무슨 패악을 부릴지 모르지 않나?"

"...아!"

아르엘라의 입이 벌어졌다.

효율만을 중시한 자신의 생각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새삼 강철두가 크게 보였다.

이런 사람이구나.

"분명 언데드를 수급하려 할 거다. 그놈들을 죽이고 던전으로 간다."

언데드의 재료가 되는 것이라면 시체다.

시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하고 말이다.

"알겠어."

대답하는 아르엘라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존경심마저 피어오른 그녀다.

"안내해라."

철두가 손에 궁니르를 던지자 그것이 다시 모래 알갱이로 변하더니, 뭉쳐져 키 작은 노인네의 모습을 했다.

[동쪽이다.]

짐을 정리한 두 사람은 그리핀에 올라탔다.

후우우웅!

힘찬 날갯짓과 함께 사막의 동쪽을 향해 그리핀이 날아올랐다.

*

쇄애애애액!

허공을 질주하는 4기의 유령마는 아무도 저 아래 모래 알갱이 속에 숨어 미행하는 존재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정령이란 자연 그대로의 이름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정령 친화력이 대단한 사람이거나 감각이 아주 뛰어난 자가 아니면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제인, 어떻게 된 거냐?"

"보면 몰라? 좆된 거지."

"하아, 그 개자식 때문에 일이 꼬였어."

그간 알음알음 준비하던 모든 게 날아가 버렸다.

저마다 데리고 있던 제자들은 모조리 죽임당했고, 인벤토리에 있는 죽음의 기사도 손실을 입었다.

세상에 드러내놓고 키울 만한 세력이 아닌지라, 이만한 단체를 키우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새로운 데스나이트를 수급하기 위해 조심스레 외유에 나섰던 제롬도 실패로 돌아왔고....

"결국 또 이렇게 넷이 남았군."

"예전의 우리가 아니지."

리치왕의 권속이 된 지 수백 년.

그때에 비해 지금 그들의 수준은 대마법사라 불러도 이상치 않을 수준까지 발전했으니.

"모두 조용히 해라."

가장 앞서 말을 달리던 사내. 제로가 주의를 줬다. 그는 강철두에게 처참히 죽은 사내로,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눈이 시뻘게질 정도다.

분노만큼이나 두려움과 상대에 대한 경계심도 가득했다.

"아직 이 사막에 아이언헤드가 있다."

"허어, 좀 떠든다고 그놈이 듣기를 하나? 너무 쫄아 있는 거 아냐?"

제로가 사내 제노를 째려봤다.

"녀석은 성물을 두 개나 가졌다. 경시할 상대가 아니다."

"알겠수."

"우리의 역할은 무사히 강림 의식을 마치는 거다."

"걱정 마."

제로, 제노, 제롬, 제인.

리치왕의 권속이 되어버린 고위급 흑마법사 넷이 용을 찾아 빠르게 이동했다.

모든 게 끝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이 속박의 끝도 이제 코앞이다.

용의 흔적도 거의 찾았으니, 이제 그 앞에서 리치왕을 강림시키기만 하면 된다.

4기의 유령마가 빠르게 질주했다.

*

굽이치는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진 사막.

쌍봉낙타 9마리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대장, 이 근처야."

"확실해?"

"어, 느껴져. 이 아래야."

치의 형제단 대장 랑통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이 근처다. 지옥 사신단이 한눈 팔린 사이 빠르게 찾아야 해."

"어서 흩어져! 오늘 안에 끝내야 해."

"입구를 찾으랍신다."

"클클, 누가 먼저 찾나 내기하자고."

치의 형제단이 흩어져 지하에 있을 공간에 대한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 아래 그들이 찾던 공간이 있다.

살아있는 드래곤의 둥지.

여길 찾기 위해 용의 신비를 찾는 퀘스트만 17개를 수행했다. 그 기간이 꼬박 33년.

기나긴 세월과 노력, 희생에 대한 보답을 받을 때가 다가왔다.

그 생각에 대장 랑통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후우."

"뭐야? 이제 와서 쫄리는 거야?"

"쫄리긴."

부대장 우샤의 말에 랑통이 피식 웃었다.

"먼저 간 일족의 형제들을 생각했다."

"으음."

우샤의 표정도 굳었다.

용의 자취를 쫓으며 너무 많은 희생을 치러왔다.

"이게 맞는 길이겠지?"

"...."

우샤의 말에 랑통이 쉬이 대꾸하지 못했다.

일족의 생존을 위해 용의 자취를 쫓아왔다.

유일한 길이 이것이라 생각하고 걸어왔는데, 이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늘 대장인 랑통을 괴롭혔다.

그는 지금도 그런 불안이 있었으나, 대장으로서, 일족을 이끄는 자로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확실해."

"역시."

우샤가 밝게 웃었다.

"얼른 끝내자. 그 지긋지긋한 놈들이 냄새 맡고 오면 골치 아파져."

지옥의 사신단.

녀석들은 용의 자취를 쫓는 퀘스트 와중에 만난 질긴 악연이었다.

같은 보물을 두고 레이스하는 경쟁자.

이곳 사막에 들어서서는 지독한 눈치싸움이 이어졌다.

치의 형제단은 용의 둥지의 위치를 대략 알고 있었고, 지옥의 사신단은 그들 나름의 탐색을 진행하며 꾸준히 치의 형제단을 감시했다.

서로가 애먼 곳만 뒤지며 블러핑하던 3개월.

아이언헤드가 등장하며 궁니르를 얻더니, 오아시스에서 지옥의 사신단과 충돌했다.

그것을 알아채자마자 치의 형제단은 재빨리 이곳에 와 진짜 퀘스트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찾았다!"

대원 하나의 말에 치의 형제단이 재빨리 모였다.

모래지옥처럼 푹 꺼진 모래가 끝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모래가 빨려 들어가는 걸 멈추고 보니 네모난 구멍이 드러났다.

랄통이 용감하게 비탈을 내려갔다.

촤르르륵. 타탁.

걸음마다 모래가 추가로 무너져 내리며 함께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르르륵.

인벤토리에서 횃불을 꺼내 불을 밝혔다.

흘러내린 모래가 바닥에 작은 언덕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네모난 구멍이 난 천장 위에 그의 형제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모래를 헤치며 바닥을 짚고 섰다.

네모반듯한 통로다.

천장 높이는 사람 세 배쯤은 되었고, 옆으로는 마차가 지나도 이상치 않을 정도로 넓었다.

<잊혀진 용의 둥지를 발견했습니다.>

<월드맵에 용의 자취가 표시됩니다.>

'됐다.'

랑통은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치열했던 지난 삶을 보상받을 순간이 왔다.

파팟.

랑통의 월드맵에 용의 위치가 특정되었다.

여기서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하는 지하 깊숙한 곳.

"다들 내려와! 제대로 찾았어."

"오우!"

촤르르르륵.

천장에서 모래가 떨어져 내리며 동료들이 하나둘 내려왔다.

그들도 갱신되는 퀘스트 창을 보며 환호했다.

"드디어!"

"시발, 드래곤을 드디어 만나는군."

"크으, 됐다. 됐어."

치의 형제단이 저마다 환호했다.

대장 랑통이 그들을 한데 모았다.

"다들 모여봐."

기쁜 건 그도 마찬가지지만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기엔 이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목표를 목전에 두고 방심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자. 축배는 드래곤을 잡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대장 말이 맞아."

"좋아! 준비됐어."

"나도!"

"진격 명령만 하라고 대장!"

여전히 미소 가득하지만 결연한 눈빛의 대원들을 보며 랑통이 씩 웃었다.

"기도하고 가자."

"좋아."

아홉 명의 사람이 둥글게 모여 섰다.

대장 랑통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영신 치여! 당신의 자손을 보살피소서!"

"보살피소서!"

기도하는 그들의 소리가 컸을까?

드드드드.

통로 한쪽에서 이질적인 소음과 함께 거대한 석조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랑통이 그것을 보며 비죽 웃었다.

"가자, 형제들."

"우오!"

달려 나가는 랑통의 귀가 길쭉해지며 주둥이가 비죽 튀어나왔다.

억센 손아귀는 마디가 굵어지며, 손톱은 칼날처럼 단단하고 길어졌다.

손등엔 털이 수북하게 자라나기 시작했는데, 비단 손등뿐만이 아닌 모든 피부에서 털이 자라났다.

투두두둑.

덩치도 더욱 커지며 입고 있던 셔츠가 팽팽해지다 못해, 결국 찢어지며 덥수룩한 털로 뒤덮인 상체를 드러냈다.

"크르르르."

호랑이의 그것처럼 툭 튀어나온 주둥이에서 위협적인 소리가 흘렀다.

콰앙!

힘차게 휘두른 앞발에 거대한 석조 골렘이 단번에 산산조각 났다.

"따르라."

"우오!"

수인종.

호랑이 인간을 뒤로, 늑대, 여우, 토끼, 두더지 등.... 다양한 반인반수 종이 뒤따랐다.

일족의 영신.

'치'를 위하여!

319화 리치왕

하늘을 내달린 유령마들이 사구 위에 내려섰다.

그 발길질에 비탈을 타고 미끄러진 모래가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갔다.

"여기군."

"좋아. 가자."

흑마법사 넷이 유령마를 역소환하고는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그들이 딛고 섰던 자리에 모래 뭉치가 불룩 올라오더니 작은 꼬마 정령의 모습을 했다.

쪼로로.

흙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으나 비탈면의 모래가 무너지기는커녕, 흙먼지 하나 나지 않았다.

달리던 모래 정령이 다리부터 차츰 무너져 내리더니 이내 모래 뭉치에 동화되어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동쪽에 떠오른 해가 점점 높아져 하늘 가장 높은 곳에 걸린 시간.

"끼아아아!"

그리핀 오식이가 길게 포효하며 네모난 구멍 위에서 활공했다.

"저기군."

"척 봐도 수상해."

그리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모래지옥처럼 움푹 파인 구멍은 오늘 세 번째 방문객을 맞이했다.

촤르르르.

모래를 타고 미끄러져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간 철두와 아르엘라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보며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잊혀진 용의 둥지를 발견했습니다.>

<월드맵에 용의 자취가 표시됩니다.>

"여기군."

"맞네."

철두는 벌써 몇 번이나 용의 신비를 마주했다.

저주 내성 특성도 그렇게 얻었고, 전령 꾸이가 가진 회복력도 그렇게 얻었다.

"후후, 여기도 뭔가 주겠군."

은근히 기대감이 들었다.

"어디로 갈 거야?"

들어온 입구가 복도의 구멍 난 천장이라 양쪽으로 갈림길이 난 셈이다.

"저쪽이다. 그라스가 아직 미행 중이다."

"오, 편하네."

"후후, 너도 곧 정령을 갖게 될 거다."

"하하, 그래."

철두의 투박한 위로에 아르엘라가 웃었다.

철두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의외의 면을 많이 보게 된다.

단순한 행동에 깊은 뜻이 있기도 하고, 위압적인 덩치에 반해 속이 여리기도 하고 말이다.

요정족 공주로서 바바리안 종족에 대한 좋지 못한 선입견이 가득했던 예전이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생각이다.

고정관념과 색안경을 걷자 종족이 아닌 사람이 보였다.

"가자."

"조심히 따라와라."

"후훗, 알겠어!"

아르엘라가 폴짝 뛰어 강철두의 등에 붙었다.

"걷기 힘들다. 떨어져라."

"흐흐."

아르엘라의 장난에 강철두가 피식 웃고는 업다시피 하여 복도를 거닐었다.

전에 비해 부쩍 장난기가 많아진 아르엘라지만, 위급한 순간이 오면 알아서 제 몫을 할 전사다.

바바리안과 요정 부부는 그라스의 미행을 따라 한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용의 신비가 있는 이 던전은 미로처럼 길이 만나고 이어지길 반복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타고 잘 내려가다가 다시 오르는 길도 있었고, 중간중간 의미를 알 수 없는 공동과 갈림길도 여럿이었다.

미로 그 자체인 던전이지만 철두는 길을 잃지 않았다. 이곳저곳 탐색할 필요도 없었다.

흑마법사들은 던전을 탐사하듯 넷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길 반복하며 점점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라스의 분신이 넷으로 갈려 그들 모두를 미행했다.

알아서 탐사를 대신해준 덕분에 가보지 않은 곳도 월드맵의 지도가 밝혀져 있었다.

정답지를 들고 문제를 푸는 것과 같아, 두 사람의 걸음은 산책을 나온 듯 여유로웠다.

"개미굴 같군."

"그러게. 왜 이리 복잡하게 만들었지? 여기 함정도 있네."

"전투 흔적도 여럿이다."

"편하게 다 치워주네."

"후후."

그 말 그대로 편하긴 했다.

흑마법사들이 고생하며 던전의 함정을 파훼하고, 지키고 선 가디언들을 해치우며 나아간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탐사하며 내려가는 이들을 그저 뒤쫓아 가는 것뿐이라 따라잡는 건 금방이었다.

"슬슬 가까워진다. 기척을 숨기자."

"알겠어."

철두와 아르엘라가 의식해서 조심히 걷자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땅의 정령왕 그라스가 불쑥 나와 도와주니 미세한 소리마저 자취를 감췄다.

철두가 조심스레 아르엘라에게 속삭였다.

"다른 놈들이 더 있다."

"가디언?"

"가디언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싸우고 있다."

"그냥 전부 처치하고 가자."

어차피 흑마법사들을 해치우려고 온 길이다.

온 김에 용의 신비도 얻을 셈이지만, 어쨌든 흑마법사 놈들은 처치해야 할 일.

"후후, 좋다. 가자."

"준비됐어!"

철두는 쌍검을, 아르엘라는 도끼를 꺼내 들었다.

이제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이 달려 나가 모퉁이를 돌았다.

제법 넓은 공간이다.

아니, 이곳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가장 넓은 공간.

개미굴처럼 여기저기 뚫린 통로가 여럿인 공동에서 흑마법사들이 짐승과 싸우고 있었다.

"음? 저놈들 두 발로 걷는데?"

"수인족이야."

"수인족?"

철두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종족이다.

걸어 다니는 짐승이라니....

굉장한 녀석들이군.

쇄애애액, 쾅, 쾅!

흑마법사들은 고작 넷이지만, 그들이 불러낸 데스나이트가 18기에 달했다.

18명의 소드마스터와 네 명의 대마법사 전력이면 군단이라 할만한 전력이다.

"잘 싸우는데?"

"그래도 수가 너무 부족해. 곧 밀릴 거야."

아르엘라의 평가가 정확했다.

수인족은 고작 넷.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일방적일 정도로 수비에 치중하며 버티고 있지만 미래가 없어 보였다.

"후후후, 일단 죽이고 시작하자."

수인족이 이곳 용의 신비를 지키는 가디언인지, 그저 몬스터인지 모르겠으나 흑마법사는 명확한 적이다.

철두의 검에 검기가 불쑥 솟았다.

쯔아아앙!

거대한 두 개의 검강.

그 기세에 전장에 집중하던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히이익!"

흑마법사 제로가 기겁했고, 그의 동료들도 영 표정이 좋지 못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저 빌어먹을 짐승 새끼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는데, 고작 네 마리 남았는데....

"후후후."

저 빌어먹을 놈이 성물 궁니르를 꺼내 들었다.

던지는 순간 무조건 목표를 맞추는 궁극의 창이다.

피할 수 없으며, 막을 수도 없다.

"도, 도망쳐라!"

제로의 판단은 신속했고, 흑마법사들은 재빨리 가장 가까운 통로로 쏙 하니 들어가 버렸다.

츠츠츳.

그들의 권속인 데스나이트는 역소환되어 검은 연기로 흩어졌고, 거대한 공동에 남은 것은 피투성이가 된 네 명의 수인족뿐이다.

"...."

철두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경계하면서도 연신 뒤를 힐끗거렸는데,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다섯의 인영이 있었다.

호랑이 수인이 철두와 시선을 맞췄다.

"고구려 대왕께 청컨대, 부디 칼을 거둬 주시오."

"후후, 이제 지나가는 호랑이도 내가 누군지 아는군."

철두가 자신의 유명세에 웃자 호랑이 수인이 결심한 듯 변신을 시작했다.

모습이 변하는 것이니 변신이 맞겠으나, 털이 빠지며 덩치가 줄어들고 비틀거리는 꼴이 꼭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애처로웠다.

푸시시시시.

윗옷은 헐벗다시피 하여 넝마가 되어 허리춤에 매달려있고, 바지도 여기저기 찢기고 해져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철두는 그 모습을 보며 팬티는 과연 찢어졌을까 궁금하였으나 물어볼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는 수인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사람 같은 모습의 사내는 비틀거리더니 털썩 무릎 꿇었다.

"치의 형제단을 이끌고 있는 랑통이라 합니다."

"익숙한 얼굴이군."

"오아시스에서 뵈었지요."

"아! 그때 그놈이군. 1주화에 정보를 팔았지."

"...."

정보를 판 게 아니라 그저 물었으니 답해주었고, 팁으로 1주화를 챙겨준 건 강철두였다.

"후후, 좋다. 동료를 돌봐라."

츠츳.

철두가 검에서 검강을 거둬들였다.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랑통이 뒤돌아 빠르게 명령했다.

"우샤, 타로 놈들을 경계해라."

"네, 대장!"

토끼 인간 우샤와 늑대 인간 타로도 여기저기 상처 입었으나, 눈빛만큼은 여전했다.

그들은 흑마법사가 도망친 구멍을 향해 경계하면서도 힐끗힐끗 강철두를 보았다.

친구가 적이 되는 경우도 잦은데,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고구려 대왕이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이곳은 용의 둥지가 아닌가?

보물을 앞에 두고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잠정적인 이 평화가 언제 깨어질지 불안했다.

"루소, 이리 와라."

"알겠어, 대장."

랑통의 말에 코에 삐죽한 뿔을 가진 들소 인간이 변신을 풀며 탈력감에 비틀거리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장의 곁으로 갔다.

누워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은 모두 변신이 풀려 있었다.

"낙스는 죽었어...."

"테르트도 숨을 거뒀다."

그들은 빠르게 동료들을 살폈고, 하나하나 죽음을 확인하자 절망감이 차올랐다.

"쿨럭!"

"나초 정신이 들어?"

"으으, 대장...."

"나초! 나초!"

쓰러진 다섯 중에 그나마 의식이 남은 건 나초뿐인데, 방금 눈을 뒤집고 몸이 축 늘어졌다.

뿅! 치이이익!

서둘러 꺼낸 포션을 들이부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빠르게 낫기 시작했으나 이미 멎어버린 나초의 심장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틀렸어, 대장."

"빌어먹을...."

분통을 터트린 랑통은 갑작스레 옆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깜짝 놀랐다. 강철두가 인상을 잔뜩 쓴 채 걸어오고 있었다.

토끼 인간 우샤가 재빨리 강철두의 앞을 가로막았다. 더 접근하면 공격도 불사할 기세였다.

"다가오지 마!"

"비켜라."

철두가 멈출 기색이 없자 우샤가 킥을 날렸으나 철두는 그것을 가볍게 잡아 저 멀리 던져버렸다.

쇄애애액, 콰앙!

"끄윽."

벽에 처박힌 우샤를 뒤로하고 랑통의 앞까지 다가선 철두가 명했다.

"비켜라."

"...무슨 뜻이오?"

"살릴 수 있는 놈은 살려야지."

"...?"

철두는 랑통이 말리든 말든 숨을 멈춘 나초의 앞에 쪼그려 앉아 가슴에 손을 얹고 꾹꾹 눌렀다.

"무, 무슨 짓이냐!"

"가만있어."

"대장! 하지만 나초를!"

"그만! 일단 지켜봐."

동료의 시신을 훼손하려는 강철두에게 달려들려는 루소를 랑통이 막아섰다.

랑통은 가만히 철두를 지켜보았다.

쿵, 쿵.

"쿨럭!"

숨을 쉬지 않던 나초가 기침하자 루소와 랑통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우샤도, 여전히 경계 중이지만 뒤로 힐끗힐끗 온 정신이 팔려있는 타로도 깜짝 놀랐다.

철두는 나초의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자마자 목에 걸린 펜던트를 쥐었다.

"여신! 이 녀석을 살려줘라!"

철두의 간곡하고 진심 어린 기도가 닿아 펜던트가 빛을 내더니 나초의 몸을 휘감았다.

하얗게 질려있던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더니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이 안정되며 나초가 눈을 떴다.

"으으, 누구? 으, 대장."

나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철두를 보곤 의아해하다가 그 옆에 선 동료들을 보곤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래 전투 중이었지!

지옥의 사신단 놈들!

어?

어디 갔지?

이겼나?

의문이 가득한 나초를 뒤로하고 랑통은 철두의 앞에 무릎 꿇었다.

"고구려의 대왕이여,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다른 동료들도 살펴봐 주십시오!"

랑통의 눈빛은 간절하고 절박했으나 철두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죽은 놈은 살릴 수 없다."

"아!"

수인들이 모두 탄식해 마지않는데, 흑마법사들이 도망쳤던 통로가 흔들거리더니, 압도적인 존재감의 해골이 기어 나왔다.

[...죽음 앞에 경배하라!]

거대한 해골.

리치왕이 손수 강림했다.

320화 신격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