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330

320화 신격화

강철두의 등장과 함께 부리나케 도망치던 흑마법사들이 긴 통로를 지나 작은 공동에 도착했다.

"허억, 잠깐 멈춰라!"

"제로! 해보지도 않고 도망치는 게 맞아?"

"무슨 멍청한 소리냐?"

"우리가 넷이나 모였는데 그놈 하나 감당하지 못할까? 그분의 단검도 우리에게 있지 않나?"

"녀석은 성물이 두 개다."

"여길 보라고! 지하야. 그 녀석도 다 같이 생매장당할 게 아니라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할 거야."

성물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지하 깊숙한 이곳에서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그만! 멍청한 소리들 하지 마라!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죽는다면 강림 마법을 시행하지도 못한다!"

"...."

제로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역할은 용을 찾는 것과 그 전에 리치왕을 강림하는 것.

"우린 고작해야 길잡이일 뿐이다. 본분을 잊지 마라, 제롬."

"알겠다."

제로는 나머지 둘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

"여기서 강림 의식을 진행한다."

"...그치만 용도 아직 못 찾았잖아?"

"그 문 너머에 분명 용이 있다. 우리는 소임을 다했다."

"그, 그치만 그분께 또 혼나고 말 거다."

제인이 벌벌 떨며 말하자 제로는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어쩌자는 거냐? 그렇다고 우리가 저놈을 해치우자는 거냐? 저놈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강림 마법을 시행하겠다."

"알았어...."

흑마법사들이 작은 공동에 넓게 섰다.

사방에 자리 잡은 그들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중얼중얼 이어지는 주문과 함께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온 검은 아지랑이가 마법진을 그려냈다.

네 꼭짓점을 기준으로 사각형이 만들어지더니, 이내 여러 개의 선과 곡선이 빼곡하게 그려져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파파팟.

그 검은 마법진이 피처럼 붉어지는 순간, 그 핏빛이 진 위에 뭉쳐져 거대한 해골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해골이 등장하더니 낡은 로브가 그 위에 입혀지고, 거대한 낫과 방패가 손아귀에 쥐어졌다.

쿠우웅.

""나의 죽음, 나의 어둠, 당신의 종이 경배합니다.""

[....]

납작 엎드려 절하는 흑마법사들을 휘이 둘러본 리치왕이 물었다.

[용은 어디 있나?]

제롬이 재빨리 나서 그들이 도망쳤던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저쪽에 용의 거처가 있습니다. 그 앞에 아이언헤드가 나타나 부득이 여기서 강림 의식을 진행하고 말았습니다."

리치왕이 사신의 낫을 제로에게 겨눴다.

츠츠츠츳.

무형의 검은 기운이 다가와 제로의 귀로 쏙 들어가니 그가 발작하며 몸을 비틀었다.

"끄아아아아!"

[...길을 열어라.]

리치왕의 명에 엎드려 떨고 있던 제인과 제롬, 제노가 서둘러 일어나 도망쳤던 동굴을 향해 다시 들어갔다.

"끄으으, 명을 따릅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제로마저 쉽게 움직이지 않는 몸을 기다시피 통로로 사라지자, 리치왕이 천천히 그곳으로 이동했다.

[....]

통로는 인간이 지나다니기엔 넓었으나 리치왕의 키에는 작은 굴이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서야 그 입구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나아가는 리치왕의 눈두덩이에서 섬광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감히, 신격화를 앞둔 내게 이런 굴욕을 주다니.

*

랑통은 빠르게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도망친 흑마법사 놈들은 시체를 유린하는 데는 도가 튼 놈들이다. 동료들을 욕보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살아남은 치의 형제단은 고작 다섯.

"고구려 대왕이여,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별거 아니다."

철두는 대충 겸양을 전하는데 흑마법사들이 돌아왔다.

[...죽음 앞에 경배하라!]

동굴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도망쳤던 흑마법사들이 쏙 나오더니, 뒤이어 거대한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이제 끝이다!"

"죽음 앞에 거스를 수 있는 자! 존재하지 않는다!"

"어서 무릎을 꿇어라!"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그들을 보며 철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뭐야, 이 새끼들?"

미친 듯이 도망치더니 의기양양하게 나타난 꼴이 우습다. 울면서 집에 간 꼬마가 삼촌을 불러 돌아온 꼴이었다.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수통을 꺼내 뚜껑을 따고 허리춤에 걸었다.

차르르르.

철두가 오른손을 펴자 수통에서 물줄기가 쑥 솟아나 철두의 손아귀에 착 감기는 망치가 되었다.

휘이이이.

왼손을 펼치니 바닥에 나부끼는 모래 먼지들이 날아와 기다란 투창이 만들어졌다.

대번에 성물 두 개를 잡아챈 철두를 보며 흑마법사 제노가 이죽거렸다.

"멍청한 녀석! 이곳을 다 무너뜨릴 셈이냐? 생매장당해도 우리 신께서는 불사이시니, 결국 지는 건 네놈이 될 게다!"

"병신인가?"

철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투창을 그놈을 향해 던졌다.

쇄애애액, 콰직!

"끄읏."

투창에 목이 꿰뚫린 제노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러자 그 시체가 검은 연기로 화해 리치왕이 들고 있는 허연 방패로 날아갔다.

방패 앞면에는 4개의 두개골이 돋아나 있었고 방패 몸체는 얼기설기 엮인 뼈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검게 물들어 버렸다.

"오! 그게 라이프베슬이었군."

철두는 이미 하프리치 라이언 백작을 상대해본 전적이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죽지도 않고 계속해서 부활하는 데 어떤 방법이 있었나 했더니, 리치왕의 보물이 그 기능을 하는 것 같았다.

[네놈들은 조무래기를 치워라.]

"신의 뜻대로!"

흑마법사들이 대답과 함께 데스나이트를 소환하며 철두를 빙 둘러 수인들과 아르엘라에게 접근했다.

수인들은 이미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정비를 마쳤고, 아르엘라도 보통의 전사보다는 월등하기에 조금의 걱정도 없었다.

철두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리치왕만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저놈이 대장이다.

저놈만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바.

파팟.

철두가 손을 뻗자, 제노를 해치우고 벽에 틀어박힌 투창이 자동으로 날아와 손아귀에 잡혔다.

"이야, 배달 와서 고맙다 야."

[건방진 녀석이로구나.]

철두는 씩 웃으며 투창 궁니르를 던졌다.

쇄애액, 콰직!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막아낸 리치왕이 으르렁거렸다.

[성물을 쥐었다고 신이라도 된 듯 건방이구나!]

"흐흐, 넌 죽은 놈이 뭐 신이라도 된 듯 지랄이냐?"

파스스스.

철두가 던진 투창이 공교롭게도 리치왕이 든 방패의 두개골 하나를 깨부숴 놓았다.

"끄어어어, 나의 신이시여...."

선조의 혼을 강림한 아르엘라와 싸우고 있던 제롬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여기저기 검게 변한 그의 육체가 쓰러졌다.

라이프베슬이 부서지며 진정한 죽음을 맞이해버린 그를 힐끗 뒤돌아본 철두가 씩 웃었다.

"세 놈 남았네."

[....]

리치왕은 사신의 낫을 치켜올려 궁니르를 찧었다.

<리치왕의 사념이 마력을 흡수합니다.>

궁니르를 유지하고 있던 마력이 고스란히 리치왕에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파스스.

철두가 지체 없이 마력을 끊어버리자 궁니르가 모래 한 줌으로 변해 흩어졌다. 빈손을 허공에 내미니, 곧 바닥의 흙먼지가 뭉쳐 새로운 투창이 되었다.

"어쩌냐? 무한 리필인데."

[...건방진.]

쇄애애액. 콰직!

철두가 던진 창이 다시 방패를 노리고 날아가 틀어박혔고, 백발백중의 투창 궁니르는 또다시 두개골 하나를 부숴버렸다.

"끄어어, 신이시여!"

이제 막 통로를 나와 비틀거리던 제로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쇄애액.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리치왕이 손수 앞으로 나서며 사신의 낫을 휘둘러왔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죽음을 선고하는 사신의 낫은 망치 앞에 가로막혔다.

콰앙!

거대한 충격파에 공동이 진동하며 울렸으나, 신격을 눈앞에 둔 두 존재의 충돌은 연이어 이어졌다.

철두가 묠니르를 들어 수비하고, 궁니르를 반복해서 내던지니, 마침내 리치왕의 방패의 모든 해골이 깨져나가며 흑마법사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상대할 적이 사라진 수인들과 아르엘라는 최대한 멀찍이 피해 철두의 싸움이 끝나길 기다렸다.

[감히! 가아암히이이이!]

리치왕은 거대한 낫을 쉴 새 없이 휘둘렀다.

맞기만 하면 확정 죽음 '선고'에 걸리는 어마어마한 무기다. 허나, 그 한대를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콰앙!

그사이 철두가 궁니르를 회수하고 내던지길 몇 번, 궁극의 창은 아무렇게나 내던져도 굽이굽이 비행하다 결국엔 목표에 들어맞고 마니.

콰직!

리치왕의 두개골이 깨어지며 마침내 그의 신형이 허물어지듯 사라졌다.

파스스스스.

검게 변해 사라지는 그 녀석을 보며 철두는 직감했다.

"결국 한 번은 가야 하네."

배달해줬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 녀석도 라이프베슬이 있을 테고 그건 놈의 던전에 있을 것이니, 귀찮더라도 던전에 한 번은 들러야 했다.

고요해진 공동을 가로질러 아르엘라가 뛰어와 안겼다.

"잘했어!"

"후후."

해후하는 두 부부 곁으로 수인들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승리에도 표정이 밝지 않은 건 이곳이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 용의 둥지였기 때문이다.

수인들이 힐끗거리는 시선을 따라가니, 거대한 공동의 한쪽 벽에 커다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철두는 바바리안식 직진 화법을 보여주었다.

"저기에 용이 있나?"

"...."

철두가 용을 언급하자 랑통을 비롯해 모두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 변화를 이해 못 할 강철두가 아니다.

"후후, 경쟁자다 이거냐?"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어찌 상대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형제 나초를 살려 주었는데 어찌 반목하겠습니까?"

"대장!"

랑통의 말에 그 형제들이 깜짝 놀라 나섰다.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간 고통의 시간을 무엇 때문에 견디었단 말인가?

랑통이 흥분한 부하들을 말리고 앞으로 나섰다.

"다만! 청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대왕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용을 사냥한 업적이겠지요."

"...?"

"모든 수인의 아버지 '치'를 신으로 모시는 우리 일족에게 꼭 필요로 한 보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용의 내단입니다. 부디, 부디 넓게 아량을 베푸시어 용의 내단을 양보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랑통은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이 방법뿐이다.'

랑통도 일족의 염원을 져버릴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뒤통수를 쳐서라도 용의 내단을 얻어야 한다. 허나, 상대는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다.

'기습한다고 당할 자가 아니다.'

더욱이 은인을 기습하는 것도 너무 염치없는 짓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바짝 엎드려 부탁드려 보는 것뿐.

랑통으로서는 그저 해볼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내민 것뿐이다.

용의 사냥이 중요한 이에게 어쩌면 용의 내단은 쉬이 내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도 모르니까.

"후후후."

"...."

철두가 웃자 랑통을 비롯해 수인들이 바짝 긴장했다.

"내가 바라는 게 왜 용을 사냥한 업적이냐?"

"그것이 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 아니옵니까?"

"내가 왜 신이 되고자 한단 말이냐?"

"모든 왕의 염원이 아닙니까?"

"후후후."

"...?"

랑통은 철두의 웃음에 섞인 호기심과 장난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음색만으로는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워 안색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태초로 모든 인간사 권력은 왕에게 모이고, 신격화되어 우상이 되기 마련이다.

인세에 이룩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대개 바라는 건 영생과 불로, 인간의 틀을 깨고 신이 되고자 하는 건 자연스런 욕망이자 순리다.

"나는 그냥 흑마법사들을 해치우러 왔을 뿐이다."

"...!"

철두의 말에 랑통을 비롯한 수인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 모습에 철두가 고소를 머금었다.

'백년급은 당연히 아니고, 천년급 이상.... 어쩌면 만년급 영약이다.'

그런 대단한 보물을 거저 달라고 하는 이 짐승무리가 재밌다.

속담에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수인들의 청이 그에 딱 들어맞는지라, 과연 짐승이라 할 만했다.

"용의 내단이라.... 그걸 주면 너는 뭐를 줄 테냐?"

철두의 말에 수인들이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321화 잊힌 용

단체로 시무룩한 모습에 철두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흑마법사, 데스나이트와 교전이 막 끝난 참이라 아직 변신을 풀고 있지 않은 그들이다.

저마다 꼬리까지 축 처져있다.

입이 툭 튀어나온 동물의 얼굴과 같은데 저리 다양한 표정이 있으니, 신기하기도 했다.

이내 고심하던 호랑이 인간 랑통이 결심이 선 듯 결연한 얼굴이 되었다.

"뭐든 드릴 수 있습니다."

"내 부하가 돼라."

"...."

철두의 말에 랑통을 비롯해 다섯 수인이 털을 바짝 세웠다. 그 모습이 꼭 무방비로 걷다 뱀이라도 밟은 듯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본능적인 거부반응.

"...노예가 되란 말입니까?"

랑통의 말에 수인들의 반응이 더욱 격해졌다.

수인종에게 노예가 되라는 말은 역린과도 같았다.

그 격한 반응에 철두가 씩 웃으며 여전히 손에 쥐어진 망치를 슬쩍 까닥였다.

"왜? 싫으냐?"

"...노예로 살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대가리가 깨지는 게 낫습니다."

"크르르르."

랑통의 말에 늑대인간 타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후후, 좋다. 그럼 덤벼라."

철두가 기꺼워하며 전투할 의향을 비치자 수인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랑통은 엎드린 채 굳어 일어날 생각도 못 했다.

그들이 여태 애를 먹던 흑마법사들을 어린애 취급하며, 그 수장인 리치왕을 단번에 해치운 사내다.

모르긴 몰라도 저 망치에 다섯 수인이 피떡이 되어 쓰러지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으리라.

"철두, 장난은 그만 쳐."

"후후후."

아르엘라가 철두의 옆에서며 그를 핀잔했다.

"나는 고구려 국왕의 왕비이자, 노바의 요정족의 공주다."

"...!"

아르엘라가 정체를 밝히자 수인들이 깜짝 놀랐다.

꼬리가 바짝 서는 모습이 귀엽다.

"요정의 공주께서 어찌 인간과 짝을 맺었습니까?"

랑통이 아는 바는 강철두가 성물 묠니르의 주인이며 고구려의 국왕이라는 것 정도다. 몇 해 전 우연히 본 하피 신문에서 얻은 정보는 그게 전부다.

"나를 모욕하는군. 나는 인간이 아니라 바바리안이다."

"...!"

더욱 놀라운 소리다.

바바리안 타투 하나 없는 자가 바바리안을 칭하다니. 그 말이 진실이면 바바리안이 인간 왕국의 우두머리라는 소리가 아닌가?

더욱이 왕비로 요정족의 공주를 맞이했으니, 고구려라는 나라는 요상하기 그지없다.

그런 나라의 왕비가 말하고 있었다.

"대왕의 뜻은 그대들이 고구려의 국민이 되라는 의미예요."

"...우리더러 국민이 되란 말입니까?"

랑통을 비롯한 수인들의 꼬리가 흔들렸다.

참 알기 쉬운 종족이다.

"우리를 품겠다는 말입니까?"

"대왕의 부하 되란 의미는 그런 겁니다."

"...."

"부하의 성장을 외면하는 이가 아니니, 용의 내단이라 한들 부하에겐 아낌없이 베풀 분입니다."

"...!"

수인들의 꼬리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토끼 인간 우샤의 꼬리는 쉴 새 없이 진동했다.

"...대왕께 치의 형제단 랑통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어라."

"수인은 많은 시간 동안 나라 없이, 구심 없이 그저 타국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습니다."

어디 수인만 그러할까?

같은 종끼리 모여 국가를 이룬 것은 오직 소수의 종족만이 누리는 호사다.

노바에서는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종족인 인간이 대표적이었고, 드워프가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요정 또한 국가가 없다.

아이리스 후작령에 모여 제국령의 일원으로 행세하며 뒤로는 공주를 모시는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이다.

바바리안 또한 그들만의 나라가 없으며, 여기저기 다른 국가에 소속되어 있거나, 떠돌이 용병으로 살 뿐이다.

렙틸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단일 부족을 이루고 있긴 하나 국가라 하기에는 초라한 정도이며,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여전히 부족 수준의 무리를 이룰 뿐이다.

"지난 수십 년 세월 치의 형제단은 노예로 잡혀 부림받는 동료들을 구하여 식구를 늘려왔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러하다.

수인은 본디 무리를 이루지 않거나, 소규모 무리를 이뤄 살아가다 보니 사냥당하기 쉬웠다.

사로잡혀 노예가 된 이들도 있고, 태어나보니 어미가 노예라 노예로 길러진 이들도 있었다.

랑통에 의해 하나둘 구함 받으며 치의 형제단이 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다.

"용의 내단. 평생토록 그것을 찾아왔습니다. 내단을 바쳐 '치'의 영령을 받아, 수인의 구심이 되길 바랐사옵니다."

"그냥 뜻있는 이들끼리 나라를 만들면 될 거 아니냐?"

"제 주제는 구심이 되지 못합니다."

수인은 그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삶의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호랑이 수인은 본디 무리를 이루지 않으며, 성년이 되면 분가하여 새로이 영역을 구축하는 게 섭리다.

늑대 수인은 무리를 이루긴 하나 많아 봐야 그 수가 스물 남짓이다.

토끼, 들소, 여우, 두더지, 거북이, 개, 닭, 고양이, 사슴, 말....

수없이 많은 종이 뒤섞여 수인종으로 통칭하지만, 애당초 세분화하면 종족이 다른 이들끼리 화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태 노예로 부림받는 수많은 수인을 구해주었으나, 저의 뜻에 공감하여 치의 형제단에 든 것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저들끼리 무리를 이루거나 개인적으로 살았으며, 그렇게 다시 잡히면 노예로 부려지는 것이다.

랑통은 답답하고 비통했으나, 따르지 않는 이들을 억지로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제로 붙잡자면 그 또한 제 손으로 노예로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지라 의미가 없지요."

"치 뭐시기는 괜찮나?"

"치는 우리 고향 행성 루나의 신입니다. 그분의 영령이라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로부터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데는 종교만 한 것이 없다. 인종, 민족, 국가를 초월해 하나로 엮어낼 수 있으니 랑통이 이리 애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용을 잡으면 신이 된다는데 어째서 신이 될 생각은 없냐?"

"대왕께서 신이 되고자 함에 흥미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 의지는 노바의 수인들에게 있지, 저 스스로 천상에 나아감은 조금의 욕심도 없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내 네게 용의 내단을 주마."

"...!"

호랑이 수인의 몸이 덜덜 떨렸다.

기쁜지 꼬리가 바짝 섰다.

"대신 너희 모두를 고구려의 국민으로 삼겠다. 고구려의 그늘 아래 일족을 이뤄라!"

"...가, 감사합니다."

랑통이 넙죽 절을 했다.

다른 수인들도 그를 따라 절하니, 단번에 수인 다섯이 고구려 국민이 되었다.

"휘장을 바쳐라."

"휘장이 없습니다."

"용케도 단을 이끌었군."

치의 형제단은 뜯어볼수록 주먹구구식인지라, 휘장도 없이 용케 수십 년 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 뜻과 의기만으로 끈끈한 형제애를 만들어냈으니 어찌 보면 더 대단하다 하겠다.

"너희를 용호대로 하겠다. 꼭 용을 잡아 네 일족들을 모두 구하라."

"감사드립니다. 대왕."

<용호대가 신설되었습니다.>

철두는 용호대의 깃을 내어주며 결사대와 마찬가지로 왕의 직속부대로 삼았다.

"그럼 용을 잡으러 가보자."

철두가 거대한 문 앞에 서자 이제 용호대가 된 다섯 수인이 털을 바짝 세우며 나섰다.

철두의 뒤로 아르엘라와 이제 용호대가 된 다섯 수인이 뒤따랐다.

문 앞에 선 철두가 두 손을 짚고는 힘껏 밀어보았다.

"흐으읍."

끼이이이-

거대한 문이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철두는 손과 목에 굵은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줬으나 문은 아주 조금만 열릴 따름이었다.

쿠구구구궁.

그래도 조금씩 움직이긴 하는지라 사람 하나 통과할 정도가 되자 그만두었다.

"가자."

"예, 대왕!"

당당하게 나선 것치고는 조금 모양새가 빠졌으나 그에 신경 쓸 철두도 아니고, 용호대도 그런 것 따위 문제 삼지 않았다.

문을 비집고 들어가니 캄캄한 실내가 들어왔다.

던전 전체에 은은한 조명석이 박혀있는 밖의 거대한 공동이나 복도와 다르게 아무것도 없는 이곳의 유일한 광원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뿐이었다.

쿠쿠쿠쿵!

그마저도 제 스스로 다시 움직여 조개가 입 다물듯 문이 닫혀버리니 완연한 어둠뿐이었다.

아무리 밤눈이 밝을지라도 미세한 빛이라도 있어야 사물의 분간이 가능할진대, 이곳엔 정말 조금의 빛도 없었다.

"횃불을 밝혀라."

"알았어, 대장."

랑통이 습관처럼 명하자 수인들이 인벤토리에서 횃불을 꺼내 불을 밝혔다.

화르륵.

작은 빛이 대번에 횃불로 옮겨붙으며 주변을 밝혔다.

"...."

횃불로 환하게 밝히기엔 역부족인 공간이었으나, 적어도 여기 있는 이들 중에 눈앞에 사물을 못 보는 이는 없었다.

"후후후, 꽝이군."

철두는 눈앞에 거대한 드래곤.

아니, 드래곤의 사체를 보며 웃었다.

"아아...."

호랑이 수인이 쪼그라들었다.

주둥이가 짧아지고 귀가 작아지며, 몸을 뒤덮은 털이 줄어들었다.

꺾여버린 전투 의지에 변신이 풀려버렸다.

철두는 뒤돌아 절망 어린 표정의 랑통을 보더니 턱짓했다.

"사체라도 내단은 있을지 모르니 찾아봐라."

"헛!"

과연 맞는 말이다.

흐리멍덩해지던 랑통의 눈에 다시 불길이 일렁거렸다.

꽈드드득.

뼈 마찰음이 들리더니 다시 호랑이로 변신한 랑통이 서둘러 거대한 동산 같은 드래곤의 사체 위로 뛰어올랐다.

다른 수인들도 뒤따르자 자리에 남은 것은 철두와 아르엘라뿐이다. 횃불을 쥔 아르엘라가 물었다.

"맵의 좌표는 여기야."

월드맵에 찍혔던 용의 자취는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런 용의 신비도 없을 리가 없다. 찾아보자."

"그래."

철두와 아르엘라는 사체를 내버려 두고 공간을 살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공동은 그저 용의 침실인지 아무런 물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쪽에 창살이야."

"뭘 가둬둔 거지?"

한쪽 벽에 움푹하게 들어간 지형마다 창살이 막혀 있었다. 세월의 흔적인지 여기저기 부식되고 부서진 창살로 인해 안에 무엇을 가뒀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감옥 같은 공간이 한쪽 벽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어, 수십 개가 넘었다.

"위도 살펴보자."

위로도 층층이 감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형태가 꼭 아파트와 같았다.

철두가 그리핀까지 소환해 위를 하나씩 살펴봤다.

녹슨 쇠창살이 이리저리 휘고 부서져 있는 가운데 무사한 쇠창살을 찾아냈다.

가장 높은 곳.

같은 층에 감옥은 이곳이 유일하다.

창살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아직도 윤이 반질반질하다.

"맙소사, 오르하르콘이야."

"그게 뭐냐?"

"신의 금속이야!"

아르엘라가 깜짝 놀라 했고, 철두는 창살보다 그 안에 든 백골에 더욱 눈길이 갔다. 백골은 용의 신비를 발견할 때면 늘 그렇듯 옅은 빛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핀 오식이가 그 아래층 쇠창살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머리를 치켜들자, 오르하르콘 창살과 높이가 맞았다.

"철두. 그게 진짜 오르하르콘이라면 소용없는 짓이야. 신이 아니면 녹일 수도 부술 수도 없는 금속이라고."

"그런 걸 어째서 잘 아는 거냐?"

"오르하르콘 검을 봤으니까."

"흐음. 해봐야 알지."

철두가 오식이 머리 위에 올라가 창살을 잡았다.

<창조주의 편린이 염원합니다.>

<용의 반격에 대비하세요.>

철두의 눈앞에 새로운 형태의 퀘스트가 떠올랐다.

322화 신의 편린

오르하르콘 창살을 쥔 철두의 눈앞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노바를 위하여!>

열쇠를 쥔 자에게 의무 또한 주어지니, 당신은 노바의 안정화에 기여해야 합니다.

노바는 종말에 처한 많은 세계의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죽음도 질병도 없는 유토피아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노바의 에너지는 끝없이 성장해야 하며, 하나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이를 방해하는 세계의 파편화를 경계하십시오.

끝없이 미궁을 탐사해 노바의 엔트로피를 높이십시오. 정예 병력을 길러 언젠가 다가올 용과의 전쟁을 대비하십시오.

목표 : 흑마법 말살, 세계의 파편화 저지, 미궁 탐사

보상 : 단계적으로 보상

"뭐야?"

철두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용의 신비니, 뭐니 한참 떠들어대더니 뭐 이런 퀘스트가 다 있나?

"왜 그래?"

"아엘, 퀘스트가 안 떴나?"

"안 떴어."

철두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퀘스트를 읽어보았다.

"성물이 키군."

"응?"

"성물을 쥐고 있어야만 뜨는 모양이다."

"아!"

철두는 아르엘라에게 퀘스트 내용을 찬찬히 읽어주었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엘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철두. 이거 혹시 황제도...."

"그렇겠지. 굳이 제 스스로 나서서 흑마법사들을 처치하고 다니는 이유가 뭐겠나?"

"...."

한참 고심하던 아르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편화.... 이거, 드워프들이 정말 제타 행성을 독립시키면 어떻게 될까?"

"으음, 황제 녀석이 나서겠군."

"...."

아르엘라는 가만히 철두를 보았다.

"너는?"

"나?"

철두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제타 행성 출신 드워프 에르미스는 개인적으로 친구이며, 그 일족 드워프들의 나라는 고구려의 동맹국이다.

"이 퀘스트는 노바의 의지지, 내 뜻이 아니다."

아르엘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나머지 두 개는 계속 할 거잖아?"

목표 중 '세계의 파편화 저지'는 어찌할지 몰라도, 미궁 탐사와 흑마법 말살은 철두에게 있어 지금도 하는 일이었다.

"리치왕 녀석을 죽이면 보상이 있겠군."

"그렇겠지. 그런데 열쇠가 성물이라면, 이 퀘스트는 지금 황제와 너만 받았겠네."

"후후, 또 모르지. 다른 성물이 있을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어."

세상에 밝혀지고 진위 여부가 확인된 성물이 셋뿐이어서 그렇지, 기록상에만 존재하는 성물과 기록에도 존재치 않는 숨겨진 성물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려진 것보다 아직 미지로 남은 것이 많은 노바의 세계를 생각하면 벌써 성물을 지닌 주인들이나, 숨겨진 성물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성물을 쥐고 있다고 모두가 이 퀘스트를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높아."

아르엘라가 차분히 설명했다.

"성물은 신의 힘을 다루게 해줘. 신의 힘을 손에 쥔 인간이 뭘 하겠어? 분명 신이 되려 할 거야. 그러자면 용을 찾아야 하고."

리치왕이 그러했고, 경우는 다르지만 치의 형제단이 그랬다. 황제도 신이 되기 위해 용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용 사냥에 성공해, 신으로서 천상으로 올라간 쿠어스 신처럼 말이다.

권력과 힘을 쥔 모든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결국 신격화를 넘어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겠군. 드워프 놈들 골치 아프겠어."

성물을 쥐고 이 퀘스트를 받은 놈들이라면 분명 노바의 세계가 쪼개지는 걸 원치 않을 터다.

그리고 끝없이 미궁 탐사를 독려하는 것은 노바의 세계를 더욱 크게 높이는 일이다.

엔트로피?

뭔지 모르겠으나 세계가 더 커진다는 의미.

"전쟁을 독려하는 이유도 알겠어."

"군대를 강하게 만드니까."

특히 랭커. 흔히 기사급이라 부르는 이들은 죽음이 없다. 그들은 죽으면 무한결투장에서 미니언으로 활동하며 포인트를 모아 다시 부활한다.

전쟁이 국력을 소모하고 민간인들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지라도 결국 군대는 강해진다.

그렇게 강해진 정예 병력은 죽지 않고 돌아온다.

세세하게 쪼개진 영지, 나라, 크게는 제국까지.

전쟁으로 인한 소모적인 활동이 크게 보면 노바 전체의 전력을 늘리는 일이다.

"황제가 제국을 저리 다스리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가."

아르엘라의 말에 철두가 비죽 웃었다.

"그것이 전부라면 놈은 꼭두각시다."

"응?"

"중요한 건 노바의 의지다."

철두는 다시 한번 퀘스트를 보았다.

"기분이 나쁘군."

"왜?"

"이놈에게 놀아난 기분이다."

최초의 퀘스트 종말 시험부터 그러했다.

노바로의 이주를 독려, 정착시키더니 노바의 세계를 탐험하라고 던져주었다.

야생에 내던져진 이들 중에 특출난 이들은 나라를 세우고 서로 전쟁하며 더욱 큰 권력을 갖기 위해 애썼다.

철두처럼 선택받은 이들은 성물과 인연이 이어졌고, 이제는 그 의무를 다하라고 하고 있다.

"날 개 취급하는 게 아주 기분이 나쁘다."

언제부터 노바의 강철두였나?

난 발할라 태생이자, 지구 출신의 바바리안 강철두다!

"철두. 어쩌면 넌 아주 예외적인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신 행성 출신이 이렇게 빠르게 성물을 획득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니까."

지구 이전의 행성 발할라, 그리고 그 이전의 제타.

두 행성 출신도 성물을 획득한 적이 없는데 최근 흡수된 행성 지구 출신이 무려 성물 두 개를 쥐고, 이 퀘스트를 얻어버렸다.

애당초 철두가 지금 이토록 거부감이 드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여기까지 성장해, 정체성이 모호한 탓이다.

노바에서 나고 자란 이가 이 퀘스트를 받았다면.

고향 행성 노바를 지키기 위해 충실히 따랐을 테니까.

지구 출신의 바바리안 강철두에게 이 퀘스트는 어쩐지 강제하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돌아가서 춘배랑 한번 의논해봐야겠군."

퀘스트 연구에 있어 인생을 내던진 김춘배라면 지금 이 퀘스트를 분석하기 아주 좋아할 터다.

"우선 이것부터 가져가자."

"성물로 해체가 될까?"

"후후후. 신만이 다룰 수 있다면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철두는 허리춤의 수통 뚜껑을 열고 빈손을 뻗어 묠니르를 소환했다.

"엘리아. 이거 끊을 수 있겠어?"

[물론이지.]

성물 묠니르.

그것을 기반 삼아 헌신한 정령왕 엘리아가 신의 금속 오르하르콘 창살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그 끝이 부식하듯 녹기 시작했다.

"맙소사."

놀라는 아르엘라를 뒤로하고 철두는 단단한 벽에도 깊숙이 틀어박혀 있는 오르하르콘을 채굴하듯 모조리 뜯어내 인벤토리에 넣었다.

"후후, 득템이군."

이것을 재료로 무기나 다른 아이템으로 가공하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철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불의 정령왕이라면 이 금속도 충분히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귀한 재료를 얻었다.

득템과 별개로 철두는 이제 입구를 내준 감옥 안으로 들어서서 백골을 살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철두가 백골을 툭 건드렸을 때였다.

파파팟.

백골이 빛으로 화해 철두에게 쑥 하고 흡수되고 말았다.

<창조주의 편린을 획득합니다.>

<신화의 길>

궁극에 다다른 영웅이 신격을 마주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신화로 기억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으로 거듭나기 위한 길로 나아가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영웅의 길이 끝났다.

철두는 조금 고민했으나 결정을 망설이진 않았다.

<인세의 영웅이 마침내 반신으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신화가 시작됩니다.>

<특성 '반신의 육체'를 획득합니다.>

<등급 '국왕'이 '반신'으로 변경됩니다.>

"으으음."

철두는 온몸을 휘감는 나른한 기분과 뇌리에 파고든 새로운 정보에 움찔 몸을 떨었다.

술에 취해 가만히 누워 세상 위에 부유하는 기분이다.

노바의 시스템이 언제나 그러하듯 이 새로운 지식은 불현듯 뇌리에 박혔다.

연달아 떠오른 메시지가 마지막 선택을 앞두고 있었다.

<영웅의 전령이 반신의 권속으로 거듭나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 알고 있다.

반신이 되자마자 깨달아버렸으니까.

'비룡 형태면 좋지.'

알에서 부화시킨 비룡 삐약이는 이따금 소환하긴 하지만, 성장하려면 아직 한참의 세월이 남았다.

츠츠츳.

슬라임 형태의 꾸이가 이내 비룡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늘씬하고 긴 몸체에 커다란 날개.

새까만 비룡의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앙증맞게 돋아났다.

"크아아아."

변신을 마친 꾸이가 제 딴에 위협적인 포효를 했으나 새끼강아지 정도의 크기인지라 귀엽기만 했다.

<무한결투장의 입장 자격을 상실합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무한결투장에서 아웅다웅해봐야 더 이상 철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전무하다.

<종말의 전장 입장 자격을 얻었습니다.>

"...!"

철두는 본능적으로 입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현재 종말의 전장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쉽게도 무한결투장과는 다른 형태였다.

이름부터가 '결투장'이 아니라 '전장'이다.

뭔가 훈련에서 실전으로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들었으나, 중요한 것은 저곳에서 더욱 강한 강자들과 조우할 가능성이었다.

강자와의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 바바리안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후우우우."

"철두! 이제 괜찮은 거야?"

"음? 당연하지."

"허! 너 한참 동안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어."

"그래?"

반신으로 거듭나는 사이 외부에서도 변화가 보였나 보다.

"아엘."

"말해."

걱정 가득한 눈빛의 아르엘라를 보며 철두가 웃었다.

"후후, 나 반신이 된 것 같다."

"...! 저건 뭐야?"

"내 권속이다. 앞으로 저놈을 타고 다닐 거다."

"너무 작잖아?"

철두의 옆에 쪼그려 앉아있다가 큰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 검은 비룡은 지나치게 귀엽고 작았다.

"신의 권속이다. 크기 따위야 마음대로 변할 수 있지."

그리핀이 헬기라면 비룡은 비행기나 다름없다.

이제 전보다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날아다닐 터였다.

아니, 보통의 비룡도 아니고 신의 권속이니 더 빠를지도 몰랐다.

"...어쨌든 정말 괜찮은 거지?"

"안 괜찮을 이유가 뭐냐?"

"하아, 괜찮으면 됐어."

철두는 해골을 만진 순간부터 갑자기 황금빛 광채에 휩싸여 온몸을 떨어댔다.

남이라도 놀랄 텐데 남편이 그러고 있으니 식겁한 아르엘라였다.

"근데, 그럼 아까 그 해골이 반신이라는 거야?"

"아니, 창조주의 편린이라고 했다."

"...허, 점점 이거 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아르엘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두는 새로 얻은 특성도 자랑했다.

"반신이 되며 스탯 흡수한계도 사라졌다."

"정말, 끝없이 강해지는구나."

"후후후."

아르엘라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끝없이 강해진다.

그것이야말로 철두가 원하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던가.

강철두의 신화는 이제 시작이다.

"대왕!"

그때 저 아래에 용의 사체를 탐색하던 용호대의 수인들도 일을 마쳤는지 철두를 찾았다.

훌쩍 뛰어 내려가니 침울한 얼굴의 랑통이 보고했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소용없습니다. 심장을 꺼내긴커녕, 비늘 한 장도 뜯어낼 수가 없습니다."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심 그리되지 않을까 짐작했다.

쿠어스의 성지에 있던 용의 사체 또한 마치 차원이 격리된 것처럼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비켜봐라."

철두는 용을 한참 바라보며 탐색 스킬을 시전했다.

상당량의 마력이 빠져나간 뒤에야 용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낙오된 드래곤의 사체>

상처 입은 용은 던전을 구축하고 은신했다.

다음 용의 진격에 합류하려 했으나, 오래도록 소식이 없다. 하나둘, 켜켜이 쌓인 역사가 빛바랠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도 용의 진격은 없었다.

잊혀진 드래곤은 영혼이나마 신계로 나아가길 희망하며 영면했다.

<용의 신비를 발견하였습니다.>

<용은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월드맵에 용의 안식처가 표시됩니다.>

323화 반신

파팟.

벌써 두 번째다.

쿠어스 신의 성지에서 보았던 용의 사체에 이어, 월드맵에 새로운 용의 안식처가 표시되었다.

"랑통."

"예, 대왕."

"실망하지 마라. 곧 용이라면 실컷 잡을 수 있을 테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랑통을 비롯한 수인들 모두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여태 그들이 용의 신비를 찾아 떠돈 것만 한세월이다.

용의 신비는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지지 않고서야 쉬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그 신비를 차례로 따라오더라도 결과가 이러한 상황이다.

헌데, 용을 사냥한다니.

있어야 사냥할 것이 아닌가?

"곧 용들이 대거 모여 노바를 공격할 것이다."

"...?"

랑통이 깜짝 놀랐다.

"용들이 말입니까?"

"그래. 머지않았으니 실력을 키우고 대비하여 놈들을 해치우면 될 일이다."

"예에, 대왕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랑통이 공손히 대꾸하자, 용호대의 다른 수인들도 넙죽 고개를 숙였다. 슬쩍 눈을 내리깔고는 어쩐지 맹수 앞의 하룻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지라 철두가 궁금해 물었다.

"뭘 그리 눈치 보느냐?"

"대, 대왕의 존재가 더없이 크게 느껴져... 조, 조심스러울 따름입니다."

"감이 좋은 녀석들이군."

호랑이 인간, 늑대 인간, 토끼 인간, 들소 인간, 고양이 인간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치 볼 것 없다. 나는 반신이 됐을 뿐이다."

"허억!"

수인들이 모두 깜짝 놀랐는데, 그중 랑통이 가장 충격을 받았다.

애초에 용의 심장을 가지려는 목적은 치의 영령을 받아들일 육체를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궁극적으로 반신의 경지야말로 랑통이 바라마지않는 목표였다. 그 정도는 되어야 제각각 종이 다른 수인들의 구심점이 되어줄 터였다.

지금 고구려 대왕 앞에 절로 위축되고 경외심이 드는 자신들처럼 말이다.

"따르라. 나가야겠다."

"예, 대왕."

드래곤의 사체가 눈앞에 있다 한들, 보이기만 할 뿐 타차원에 존재하는 것과 같아 만질 수도, 해체할 수도 없었다.

꿈쩍하지 않는 그것을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던전을 나와보니 깜깜한 밤이었다.

용호대는 진즉 변신을 풀고 사람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사막 지형에 대비한 둘둘 말린 천 같은 옷을 꺼내입고 낙타를 소환하려 했다.

"그리핀을 줄 테니 타고 와라."

"어디로 향하면 되겠습니까?"

"아까 도망친 리치왕을 해치우러 간다."

"헉! 놈들의 본거지를 아십니까?"

철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인들이 놀라워했다.

"천천히 따라와라."

"예, 대왕."

철두는 그리 말하곤 어깨 위에 조그맣게 웅크려 있던 꾸이를 변신케 했다.

"까아아아!"

하품하듯 포효한 검은 비룡이 하늘로 훌쩍 날아올라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신의 권속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더니, 지난날 시장에서 보아온 비룡보다 두 배는 더 큰 모습이 되었다.

"...그리핀보다도 훨씬 크군."

그리핀이 두 사람 정도 태우기 적당하다면, 꾸이는 서넛이 타도 가뿐히 날아오를 정도의 덩치를 자랑했다.

"아엘, 네 그리핀도 줘버려라."

"알았어."

그리핀 두 마리를 분양해버리곤 철두와 아르엘라는 꾸이 위에 올라타 날아올랐다.

후우우웅.

거대한 뒷발로 가뿐히 뛰어올라 거대한 날개를 몇 번 휘두르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허어! 비룡이 꼭 드래곤 같지 않은가?"

"대, 대장. 우리도 얼른 따라가자."

수인들이 허둥지둥 그리핀을 소환해 둘 셋씩 나눠탔다. 벌써 손톱만큼 작아진 검은 비룡을 따라 날아가고 있으니, 꼭 독수리를 쫓는 비둘기 신세로 전락한 것 같았다.

"대장. 우리 정말 고구려 소속이 된 거야?"

"그래."

"정말일까? 곧 용들을 사냥할 수 있다는 이야기 말이야."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랑통은 진지한 얼굴로 뒤에 탄 우샤에게 말했다.

"수인들을 결집시키는 것에만 뜻을 둔다면... 어쩌면 용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좋은 거 아냐?"

"...그렇지."

랑통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의 소망은 정말 수인의 결집에 있었나?'

그것이라면 꼭 그가 구심점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종이 다르다 한들, 강철두라면 수인들도 마땅히 따를 법한 이다.

바바리안을 따르는 수인이 아니라, 반신을 따르는 수인이 될 테니까.

'아니면, 난 그저 치의 영령이 되려 했던가?'

랑통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스스로 해답을 내리기 싫다.

국민들을 위해 왕이 되려 했음인가, 왕이 되기 위해 국민들을 필요로 했던 것인가.

쉬이 대꾸하기도, 정의 내리기도 어려운 감정이 랑통을 힘들게 했다.

"엇! 빨리 가자. 놓치겠어!"

"꼭 잡아라."

우샤의 호통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비되지 않은 감정을 속으로 밀어 넣고 그리핀의 고삐를 쥐었다.

쇄애애액.

별빛이 가득한 사막.

다섯 수인을 태운 두 마리의 그리핀이 바삐 날갯짓하며 날아갔다.

*

던전 최하층.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과 같은 곳에 거대한 검은 몽둥이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거무튀튀한 몽둥이는 어느 순간 진동하며 몸을 떨더니, 물에 넣은 먹물처럼 서서히 검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빨려 들어가듯 어느 한 지점에 뭉치니, 곧 리치왕의 본체가 만들어졌다.

[...감히. 성물 따위를 든 놈에게.]

의식을 찾은 리치왕은 분노했다.

성물이 대단한 것은 맞다.

하지만 고작해야 신의 무기가 아닌가?

그에 반해 리치왕은 이미 반신의 경지에 접어든 존재.

격이 다른데, 고작 템빨에 밀려 이리 고전하다니.

아무리 그것이 소환된 분신 개체라 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고약한 놈들. 내 반드시!]

복수의 시간이 그리 멀지 않을 터다.

녀석은 이 던전의 위치를 알고 있다.

그 성급한 바바리안의 성정을 생각하면 당장 이리로 올 수도....

[드래곤!]

아차 싶었다.

녀석이 드래곤을 손에 넣었다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드래곤은 신계로 나가는 유일한 길.

그것을 사냥해야지만, 이 반신 리치왕이 신계로 올라 진정한 신으로 거듭날 지어니!

자연스레 시선이 몽둥이에 닿았다.

무수히 많은 피를 머금어 검게 변해버린 검은 몽둥이. 그의 라이프베슬이자 상징.

던전을 구축하는 핵심이 저 몽둥이다.

저것과 함께라면 진정한 반신으로서 위용을 펼칠 것이나, 저것이 부서지면 리치왕의 존재는 사라지는 것과 같다.

[....]

빌어먹을.

리치왕은 고심했다.

묠니르와 궁니르를 지닌 그 고약한 녀석이 드래곤을 사냥해 신계로 훌쩍 가버리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드래곤을 찾아 헤맨 세월이 수백 년이다.

알음알음 키워온 페밀리어 흑마법사들도 모조리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몽둥이를 쥐고, 던전을 나서는 순간 세상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니....

[고약한 선택이로다!]

골라야 한다.

지금 당장 저 몽둥이를 들고 용을 찾아가 바바리안 녀석을 죽이고, 용도 죽이고 신계로 올라갈지.

용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으니, 괜히 허탕 치지 말고 다시 페밀리어를 키워 다음 용을 수색하는 지난한 세월을 기다릴지.

[...불확실성에 모두를 내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정을 내렸다.

그때 뒤에서 소름 끼치는 음색이 들려왔으니.

"와, 이 새끼 존나 하남자네."

[...!]

리치왕이 깜짝 놀랐다.

이제 막 재구성을 끝낸 참이라 할지라도, 여기 던전 최중심부까지 침입자가 들어오도록 눈치채지 못했다니?

이 쓸모없는 흑마법사 놈들을....

아, 다 죽었구나.

[네 녀석이 어찌!]

리치왕의 붉은 안광이 흔들렸으나 곧 상황을 깨닫고는 광소했다.

[크하하하, 네 녀석은 용을 당해내지 못했구나!]

신계로 나아갔을 녀석이 여기 있음은 용 사냥에 실패했다는 소리.

"아, 용. 이미 죽었더라. 허탕이야."

[크크큭, 네놈은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왔구나.]

"너, 나한테 안 되잖아?"

[크하하하하!]

리치왕이 제단에 올려진 검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츠츠츠츳.

소름 끼치게 기분 나쁜 검은 연기가 그에게 스며들며 번들거리던 뼈가 검어졌다.

몽둥이는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처럼 점점 작아지더니 종래에는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그하하하하!]

검은 뼈로 변한 리치왕이 광소했다.

넘치는 힘!

가득한 마력!

신이 된 기분이다.

아니, 영생을 위해 분리해 두었던 신격을 흡수함으로써, 진정으로 반신으로 거듭났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리치왕이 든 사신의 낫이 철두를 노리고 공간을 갈랐다.

베어버린 모든 것에게 예외 없이 죽음의 선고를 내리는 이 무기는 한낱 인간 따위가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성물?

대단하다지만, 신이 휘두르는 무기가 곧 성물이니.

카앙!

[...!]

철두가 사신의 낫을 막아냈다.

명검 할아버지와 새벽어스름이 검강에 휩싸여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흐흐흐."

[이럴 수가!]

소드마스터?

그런 건 상관없다.

검기나 검강 따위로 막아낼 만한 공격이 아니지 않은가?

개미가 아무리 대단한 턱심을 가지고 있고,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밟히면 죽기 마련이다.

엄연히 체급 차가 존재하고 신과 인간의 차이는 개미와 인간보다 더욱 크니.

인간의 발길을 개미가 더듬이로 막아 세운 꼴이나 다름없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반신 뭐?"

[...!]

철두는 두 자루 명검을 들고 리치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쇄애애애액, 카앙! 캉!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검격이 사신의 낫과 부딪히며 던전 안을 떨어 울렸다.

[어,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나와 대등히 싸울 수 있다는 거냐?]

"반신이 아니라 병신이네?"

카카카캉!

사신의 낫은 하나고 철두가 든 검은 두 개니.

이따금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리치왕은 상처를 입었다.

"소용돌이!"

콰카카카캉!

강철두가 검강이 솟아난 두 자루 검을 들고 휘몰아쳐 버리니, 번쩍거리는 번개로 이뤄진 허리케인이 거구의 리치왕을 덮치는 것 같았다.

[끄어어! 어째서어!]

파스스스스스.

뼈가 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는데 버텨낼 재간이 없다.

스스스.

격렬히 회전하던 철두가 바닥을 딛고 서니, 여기저기 부서진 뼈 파편만이 튈 뿐이었다.

츠츠츳!

이윽고 그 뼈 파편들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라이프베슬과 합체한 덕에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기사들이 죽을 때 내는 빛과 유사한 빛을 냈다.

<노바를 위하여!>

<흑마법 말살에 기여했습니다.>

<죽음의 순환을 경직시키는 흑마법은 노바의 큰 골칫거리입니다.>

<당신의 업적에 대한 보상을 지급합니다.>

<업적 포인트 421을 획득합니다.>

업적 포인트를 획득하자마자 철두는 이것에 대한 사용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허, 스탯 포인트구만."

더불어, 반신이 되어버린 철두의 신체는 더 이상 스탯석으로 향상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실상 성장 한계가 끝난 스탯의 상승은 이제 오롯이 업적 포인트에 기대게 된 셈이다.

새삼 황제 녀석이 그토록 흑마법사들을 찾아다닌 이유도 납득이 갔다.

324화 고구려 확장

"허억, 여기가 리치왕의 던전입니까?"

"그래. 값나가는 건 모조리 챙겨라."

"예, 대왕."

철두는 던전 탐색에 일일이 힘을 쓰지 않았다.

땅의 정령왕 그라스가 벌써 모든 던전을 둘러보았고, 보물의 위치는 모조리 파악을 마쳤다. 짐을 직접 나를 수인들의 길잡이만 해줘도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사이 철두는 아르엘라와 함께 최하층 지하에서 올라와 던전의 중심이랄 수 있는 옥좌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높은 탑처럼 솟아오른 땅 위에 덩그러니 놓인 거대한 의자.

<주인 없는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해당 던전을 소유하시겠습니까?>

던전의 주인인 리치왕도 사라졌고, 그 부하나 몬스터들도 존재하지 않는 던전이다.

"필요 없어."

굳이 이곳을 영역으로 선포한들 이동마법진도 없는 이곳에 오고 가는 게 더 힘들다.

바다와 같이 넓은 사막의 가운데 있어 활용 가치 또한 떨어진다.

"어때 보여?"

"별거 없어. 그냥 빈집이지."

"신기하네. 노바에 배척받는 흑마법이 어떻게 노바의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을까?"

"모르지."

철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복잡하게 생각해본들 해답 없는 문제에 끙끙 앓는 건 멍청이들만 하는 짓이다.

고졸 바바리안은 의미 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아."

던전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통로나 방들의 석재들이 모두 구축한 지 크게 오래되진 않아 보였다.

"그럼 따로 본거지가 있다는 소린데?"

"그렇겠지."

리치왕이 모든 일의 원흉이고, 그를 잡아 죽였다 하더라도 흑마법사들의 명맥을 끊어놓았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흑마법사 4인방이 있고, 또 그들이 키운 제자들과 지옥의 사신단이 수십 수백일지 알 수 없다.

머리를 비롯한 간부들을 모조리 말살했으나, 다단계처럼 퍼져나간 흑마법사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터다.

"잡아야 하지 않아?"

"후후, 황제 녀석처럼 말이냐?"

철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업적 포인트가 중하다고 내 나라를 등한시할 수는 없다."

황제의 제국은 이미 정점에 이르러 도전자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오히려 제국에 분쟁이 생기고 여기저기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는 황제로서는 국정을 내팽개치고 돌아다니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철두는 다르다.

그가 고구려를 외면하면 이 나라는 오래 존속하지 못한다. 고구려는 꼭 철두가 필요하다.

이 나라는 지금 정복국가로서 제국에 도전하는 입장.

"어차피 고구려는 계속해서 전쟁하게 될 운명이다."

끝없는 전쟁.

소모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기사 전력은 노바 전체의 전투력을 향상시킬 것이다.

전쟁 와중에 발전되는 마법과 과학의 발전은 또 성과로 남게 될 터.

제국을 내버려 둬도 되는 황제와 다르게, 철두는 고구려를 이끌어야 한다.

"모두 다 차지하고서라도 내 나라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그렇긴 해."

아르엘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요정족들의 나라 아이리스 후작령은 고구려의 일원이 되었다. 일족의 미래도 이미 고구려와 운명을 함께 하는바, 철두의 결정은 기꺼운 일이다.

모두를 지키며 전쟁을 키우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노바를 위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 모았습니다. 대왕!"

"후후, 수고했다."

수인들이 옮겨놓은 전리품이 한가득했다.

기본적인 생활물자 따위가 많았고, 마석 몇 개와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아티팩트 따위가 많았다.

철두는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수레를 꺼내 물건들을 빼곡하게 담았다. 인벤토리의 1칸에 수납 가능한 물품은 오직 개인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다.

철두의 힘이야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했기에 무더기로 쌓인 수레를 어렵지 않게 수납했다.

흑마법사들이 식량 따위로 쓰는 보급품들이 무슨 쓰임이 있을까 싶지만, 그 곡식 알갱이나 씨앗, 과일 따위는 농업 연구소에 가져가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이제 돌아가자."

"응."

제법 길었던 외유를 끝낼 때다.

던전을 나선 철두는 어깨 위에 웅크려 자고 있는 꾸이를 깨웠다.

"가자. 다 태울 수 있지?"

"크르르르르."

거대하게 변한 검은 비룡은 수인들을 보며 기분 나쁜 듯 울부짖었다.

"으으."

수인들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는데, 철두는 꾸이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했다.

"다 태우고 가. 그리핀 타면 느려."

꾸이의 속도가 원체 빨라 근거리면 모르겠으나 장거리는 너무 차이가 벌어져 힘들다.

이 사막은 어찌나 넓은지, 그리핀을 타고 가장 가까운 이동마법진까지 쉬지 않고 날아도 나흘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꾸이의 속도라면 하루면 충분하다.

"대, 대왕. 덩치가 문제라면 줄일 수 있습니다."

"음? 어떻게?"

"잠시...."

사람 형태의 다섯 수인은 걸치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버리더니 변신을 하기 시작했다.

푸시시시.

엄청난 고열이 나는지 저마다 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덩치가 커지는 게 아니라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변신은 변신인데 수인화라기보다는 동물화에 가까운 형태였다.

"귀, 귀여워."

아르엘라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작은 토끼와 고양이, 그리고 조금 큰 개정도 덩치의 늑대와 대형견 정도 크기의 호랑이, 그보다 좀 더 큰 크기의 들소.

"...왜 이렇게 작냐?"

동물화로 변신이 가능한 건 그렇다 치고, 이들의 크기가 지나치게 작았다. 본디 호랑이나 들소는 덩치가 크지 않았던가?

"대왕, 그것은 우리들의 나이가 어려서 그렇습니다."

"...몇 살이냐?"

"서른입니다."

"그 정도면 어른 아니냐?"

"수명대로 장수하는 경우가 없어서 그렇지, 수인종들은 꽤 오래 삽니다."

고작 허리춤 정도까지 오는 호랑이가 앉은 자세로 또박또박 말하고 있으니 그 꼴이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흠, 좋다. 기다려봐라."

철두는 그리핀들에 사용하는 안장을 대충 개조해 꾸이의 등에 매달았다. 본디 짐을 실어 다니던 칸에 다섯 동물들이 옹기종기 모이니 아르엘라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귀여워."

"...그, 그리 계속 보시면 부담스럽습니다."

"호호호."

아르엘라의 눈에는 쫑알거리는 어린 호랑이의 모습이 영 귀엽게만 보였다.

철두와 아르엘라 다섯 동물들은 사막을 빠른 속도로 날아 사막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고구려 수도 아이언헤드 성.

재상의 집무실에 국무총리 박준필이 찾아왔다.

"재상 각하. 바쁘십니까?"

"아, 총리님. 어서 오세요."

"허허, 차 한잔하시지요."

"하, 그러죠."

김진태는 홀로그램 맵을 닫았다.

고구려의 세력은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었고, 이제 이 맵 저 맵 사방에 영토가 있으니, 살피고 설정해야 할 게 더욱 많았다.

세력창은 점차 더 세분화되어 조정하고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쉬엄쉬엄하십시오. 그러다 탈 나십니다."

"하하, 그럴 수야 있나요. 그래도 이것 때문에 이리 관리하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허허, 그렇지요. 이 시스템이 있어 소수의 인원으로 국가경영이 가능합지요."

세력창으로 인한 자동 징수나 세금 설정, 전체 공지 등등 무수히 많은 자동 기능이 없었다면 국가경영을 위해 필요한 공무원의 숫자는 지금보다 수십 배는 많았어야 할 터다.

더욱이 그들을 하나하나 교육하고 행정업무에 배치하고, 다시 또 그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찰하고 비리를 감시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또 인력이 필요하다.

실시간으로 아군 영토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홀로그램 맵과, 세력창이 없었으면 김진태는 진즉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터다.

"대왕께서는 어찌 따로 연락이 있었습니까?"

"에휴, 없죠."

"허허허, 이거 원."

김진태의 한숨에 박준필이 허허롭게 웃었다.

"이거 이러다 또 외유가 길어지는 건...."

"아유, 총리님. 말이 씨가 돼요. 그런 말 마세요."

"허허허."

김진태가 기겁하고 말렸다.

잠깐 아이리스 후작령에 다녀온다던 강철두가 드워프와 엮여 미궁에 다녀오며 2년이나 뒤에 귀환한 전력이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감감무소식인 철두의 행적에 괜스레 불안해지는 둘이었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겠죠?"

"허허허, 제가 찾아온 이유가 그겁니다."

"에휴."

고구려의 넘버 2와 3는 혹여라도 대왕의 외유가 길어질 때를 대비해 가장 급한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개경이 제일 문제예요. 다른 전장은 순조로운데, 여긴 애초에 대왕의 출정을 염두에 뒀던 곳이니까요."

"그렇지요. 그 공백을 친위대로 메꾸는 건 어떻습니까?"

친위대를 이르는 말이지만 정확히는 위대한 소드마스터로 거듭난 친위대 소속 박순자를 염두에 둔 말이다.

"외부 전장이 급하다고 집을 비워둘 수는 없지요."

"흐음, 결사대는 어떻습니까?"

"지르골이 문제예요."

"사토와 함께하니 어느 정도는 제어가 되지 않을까요?"

대왕의 직속 결사대는 둘.

사토 키요시와 바바리안 지르골이다.

"에휴, 안 돼요. 혹여라도 개경에서 사고라도 치면 분란을 걷잡을 수 없어요."

이미 결사대를 호위 삼아 개경에 다녀온 김진태다.

이석개가 투항하여 개경 전체가 고구려의 직할령으로 삼게 되었으나, 그에 불만을 품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눈치 빠른 김진태는 개경을 다녀오며 그 분위기를 단박에 알았다. 더욱이 강철두 없는 결사대는 전장에 데리고 가는 게 아니다.

'피를 보면 분명 이성을 잃을 거야.'

특히나 지르골이 문제다.

피로 목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바바리안 지르골의 잔혹성과 조급함은 분명 개경을 분열시킬 촉매가 될 터다.

"어렵군요. 이석개 대장은 보름의 시간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벌써 철두가 떠난 지 12일이 지났다.

고작 3일 남았는데, 철두가 돌아오지 않으면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

개경과 반목하고 있는 쿠하루 왕국이 대대적으로 병력을 결집하며 전운이 고조되자, 개경의 민심도 영 불안해졌다.

인민이 이룩한 도시를 남조선 출신의 나라 고구려에 넙죽 내다 바친 이석개의 행동을 비난하는 자들도 많아졌다.

개경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이석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단은 대규모 식량 수송부터 문제없이 진행하죠."

"그리하지요. 허나, 대왕을 대신할 지원 병력은 어찌하렵니까?"

"...마적대와 별동대를 부르죠."

뿔뿔이 흩어져 정복 활동에 나선 군대 중에 막 도시 정벌을 마치고 여유 있는 부대는 마적대의 김춘배와 별동대의 제임스 둘뿐이다.

대왕을 보내는 것보다 전력은 형편없어졌지만, 어쨌든 보이는 규모 면에서는 대규모 파견이 될 테니, 이석개의 정치력에 힘을 실어줄 만한 일이었다.

"허허, 제일 좋은 건 대왕께서 하루빨리 복귀하시는 것인데...."

"그러게요. 처갓집만 갔다 하면 이렇게 늦네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나, 두 사람의 얼굴에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지난 2년간 대왕 없이 고구려를 잘 지켜낸 두 사람의 경험과 유대는 이제 믿음과 신뢰가 되어 고구려를 떠받치고 있었다.

재상의 집무실 바로 옆에 붙은 정보청의 청장은 절차 없이 재상을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고구려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통신망을 구축한 뒤로, 긴급히 보고할 일이 많아서 시행한 조치다.

"각하! 보고드립니다. 이동마법진을 통해 방금 대왕님이 복귀하였음을 알립니다."

"...!"

김진태와 박준필이 깜짝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허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유, 진짜! 다음에 처가 간다고 하면 나도 따라가야겠어요."

고구려에 대왕이 돌아왔다.

325화 개경

한때 차원개발에 가장 높은 성과를 보인 두 국가가 있었으니, 북한과 중국이다.

종말시험을 치른 북한 주민에게 고블린은 흉악한 몬스터가 아니라 걸어다니는 식량으로 보였다.

"간나새끼! 쪼깐한 게 어디서 바락바락 대드니!"

"허! 이 잡놈의 새끼. 고기는 사라지고 먹지도 못하는 금덩이를 뱉어쌌네!"

노비스가 된 그들은 포탈을 통해 가기 전 벌어들인 퀘스트 주화를 쓰면서 쾌재를 불렀다.

"이야, 이거이 옷감이 참 좋타!"

"여기 끈하고 가죽 보라우."

초보자 옷 따위와 재료템에 불과한 잡템만 파는 고블린 상인이지만, 인민들에게는 만물상처럼 보였다.

반팔에 반바지.

초보자 옷 세트를 입고 야생의 노바에 내던져진 북한 주민들의 적응력은 놀라우리만치 대단했다.

"이야, 요고이 맛도 좋고 영양도 좋타야!"

"내래 오늘 늑대고기로 배 터지게 해줄 테니 딱 기다리라우."

민둥산에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고향 땅에 비해, 노바는 땅만 파면 무고구마가 나오고, 사냥할 짐승도 널린 별천지였다.

땔감도 여기저기 널려있고, 사냥감도 많으며, 농사는 짓는 족족 작물이 쑥쑥 자랄 정도로 땅이 비옥했다.

"히야, 여기래 천국이나 다름없시야!"

"내래 다음번 순환 때 고향에 남은 가족들 동무들 다 데려올란다야!"

종말시험을 통해 노바로 흘러들어간 주민들은 딱히 지구로 복귀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북한 땅보다 노바다가 더욱 살시 좋은 곳이었다.

놀라운 적응력과 독기, 생존력으로 인해 인민들의 차원개발은 탄력을 받았고, 북한 정권은 가려 뽑은 인민군을 다음 순번의 종말시험 때마다 노바로 밀어 넣었다.

특수부대 대좌 출신 이석개는 그렇게 노바에 발을 디뎠고, 끝없는 사냥과 스탯석을 흡수하며 북한 노바군을 이끄는 장군까지 되었다.

이석개는 노바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흥얼거리며 농사짓는 주민을.

사냥에 성공해 고기를 맛보기라도 하는 날이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주민을.

이웃의 감시보다 서로 나누는 행복을.

물자가 풍부하니, 주민들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보다 희망과 기대감이 가득한 그들을 보며 이석개는 고뇌했다.

지구와 노바.

달라진 게 무엇이란 말인가?

있다면, 총기의 부재와 당 지도부의 느슨한 관리뿐이다.

당에 대한 충성만이 미제의 더러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타파하고, 인민을 배불리 풍족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긴 그의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장군 동무! 이것 좀 드셔 보시라우."

"어허, 이것부터 드셔 보시라우. 고깃국에 고기가 아주 듬뿍입네다."

지구의 북한이었다면 혹여 책잡힐까 봐 말 걸기도 무서워하던 인민군을 향해 저리 스스럼 없이 다가왔다.

노바에서는 인민군과 부역하기 위해 딸려온 많은 주민들 사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역할이 모호해졌다.

함께 사냥하고, 함께 농사지으며, 함께 탐험했다.

한정된 공간을 두고 다투기보다 드넓은 미개척지를 탐사하는 게 백번 낫다.

노바를 향해 인민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었으나, 넓은 땅은 그것을 모두 수용하고도 남았다.

C279 지역은 그렇게 수많은 개척도시를 만들어냈고, 어딜 가나 열심히 농사짓는 주민들로 넘쳐났다.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미제의 제재와 탄압도 없고, 당의 수탈도 없다. 나는 마침내 뜻이 섰으니, 결행에 나서 인민들을 구제하겠다."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지구에서의 1년은 노바에서 5년.

오래도록 이석개를 따른 노바의 인민군들은 그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지구로 돌아간 이석개가 소수 정예를 데리고 주석궁에 침투했다.

"인민의 고혈을 빨아 호의호식하는 돼지들을 모조리 즉살하라!"

스탯석과 능력석으로 인해 이미 탈인간의 경지에 이른 노바개척단은 어렵지 않게 혁명에 성공했고, 그들은 전 북한에 알렸다.

"노바로 오라! 나 이석개가 그곳에 고려를 세워 이끌 테니, 배고픔도 착취도 없는 새 나라가 될 것이다! 모두 노바로 오라!"

이석개의 혁명은 단번에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과 정부를 이끄는 것은 영 별개의 문제였다.

모든 인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따르면 좋았겠으나, 지방의 군벌들이 일어나 인민들을 통제하며 쪼개지기 시작했다.

이석개는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주민들을 노바로 이주시켰다.

C279 맵의 가장 큰 마을을 개경이라 칭하고, 지구로부터 넘어오는 인민들로 인해 그 주민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는 발전을 거듭해나갔고, 맵의 파수꾼을 쓰러트리고 탐험을 시작했다.

<파수꾼을 쓰러트렸습니다.>

<이제 해당 지역은 새로운 주민을 받아들입니다.>

<새로운 지역으로의 탐험을 시작하세요.>

보다 더 많은 인민들을 받아들일 땅이 지천에 깔렸고, 북한 주민들의 적응력은 놀라웠다.

그들이 고려라는 이름으로 뭉쳐 초기 국가의 형태로 세를 이루며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다.

와중에 이동 포탈망도 발견되고, 세계로 향하는 그들의 눈과 귀가 다른 개척마을의 소식도 전해왔다.

"노바에 제국이 있고 수많은 왕국이 있는데, 그들과 충돌한 마을 중에 남은 곳이 없습니다."

"이미 흡수되어 제국이 되거나 왕국이 된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 고려처럼 근본을 지킨 곳은 몇 없사온데, 와중에 노바의 왕국과 전쟁 중인 곳이 하나 있는데 아이언헤드라 합니다."

"아이언헤드?"

"남조선 출신들이 세운 영지랍니다."

슬슬 아이언헤드라는 이름이 들려오더니, 이내 그들의 이름이 자주 들려왔다.

"남조선 출신들이 고구려를 개국했습니다!"

"그 영토가 어찌나 큰지 맵이 4개가 넘고, 왕국인과 제국인을 역으로 주민으로 거느리고 있답니다."

"우리도 고구려처럼 확장해야겠다!"

지구와 단절된 뒤 처음 생긴 맵의 사계절의 겨울도 잘 넘긴 고려의 무리는 사방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쿠하루 왕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간나새끼들! 고려 장군 이석개가 여기 있다!"

이석개를 중심으로 역전의 용사로 거듭난 고려의 무사들이 쿠하루 왕국을 약탈에 성공해, 고려의 성장에 날개를 단듯했다.

"고구려가 한다면 우리도 한다 이거야!"

"쿠하루를 잡아먹고 진정한 고려로 개국을 선포하겠다!"

스스로 장군이라 칭해온 이석개는 쿠하루 왕국을 제물삼아 왕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쿠하루 왕국이 당한 것은 불시의 기습이라 그렇지, 그들이 국력을 투사하자 영 다른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쿠하루 왕국과 고려의 국경이 하루가 멀다 하고 뒤로 밀리며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 번 이기면 다섯 번 지기를 반복하니, 인민들의 피와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와중에 고구려는 왜놈 출신들이 만든 막부와 제국의 연합군을 맞이해 전쟁 와중이었다.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고통스런 전쟁을 이어가는 와중에 고구려의 승전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는 이미 쿠하루 왕국에 밀려 본토인 N2790 맵도 삼분지 일은 빼앗긴 뒤였다.

"고구려의 사신이 왔습니다!"

와중에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의 사신이 발길이 닿는 모든 지구인 출신 마을에 같은 뜻을 전했다.

"귀의하면 우대할 것이나, 거부하면 정복의 철퇴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고려의 여러 장군들과 무사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저, 저 쳐 죽일 놈을 보았나!"

"장군! 저 간나새끼 대가리를 까부수지요!"

"명만 하시라우! 내래 저놈을 단칼에 쳐 죽이겠시오!"

이석개는 흥분한 장군들을 보며 과거를 되뇌었다.

그를 따라 혁명을 결행했던 이들은 고려군의 주축 장군들이 되었다.

그간의 전쟁으로 눈에 독기가 가득한 이들을 보며 물었다.

"우리가 왜 혁명했는지 기억나는 이가 있는가?"

"장군, 그게 대관절 무슨 말입네까?"

"왜긴 왭니까! 다 살려고 하는 게지!"

저마다 한마디씩 뱉는 이들의 얼굴은 어딘가 불편했다. 모두가 결행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을 위해서였지."

"...."

인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좋아서.

"...가끔 내가 그 돼지들과 다를 게 뭔가 싶네."

이석개가 회한했다.

인민을 위해서 부르짖으며, 제 잇속만 챙겨온 당 지도부들과 자신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고려의 주민들은 지금 어떠한가?"

"...."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몇 해 동안 이어진 전쟁은 주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고려는 지금 그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었다. 아니, 겨우 버티고 있었다.

"내 식탁엔 언젠가부터 삼시 세끼 고기가 올라오지. 헌데, 우리 주민들은 어떠한가?"

"...장군! 그야 장군께서는 힘을 써야 하니 당연히...."

"그만! 고만하라우!"

이석개가 호통치자 고려 관청이 조용해졌다.

"동무들. 심사숙고해보자고."

"예, 장군."

지지부진하지만 계속해서 밀리는 전장.

한계에 다다른 주민들.

수장인 이석개의 심경변화.

모든 것이 맞물려, 고려는 삐걱대던 수레의 바퀴가 빠져버린 듯 기우뚱했다.

"내래 장군을 여직 따랐지만, 이번 결정만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남조선 출신 나라에 우리 개경을 들어다 받치자니! 이 무슨 끔찍한 소리요!"

"내 말하지 않았나? 쿠하루 왕국에 집어 먹히든, 고구려에 집어 먹히든 둘 중 하나지 않은가?"

고구려의 선전포고가 날아든 상황이다.

정복당하든, 스스로 귀의하든 두 가지 선택지뿐.

"끝까지 싸워야지비!"

"무엇을 위해서?"

"인민을 위해서!"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우!"

고려 지도부는 달아오른 주전자처럼 몇 날 며칠을 시끄럽게 보냈고, 결국에는 이석개의 뜻에 따라 고구려에 귀의하기로 잠정 결론이 나 버렸다.

하지만 겨우 봉합한 유리 조각처럼 위태로웠다.

쿠하루 왕국에서 이를 또 어찌 알았는지, 고구려의 원조군이 합류하기 전에 고려를 끝장낼 기세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탓에 다섯 개의 개척마을이 더 초토화되고, 겨우 마련된 전선이 속절없이 뒤로 밀려 개경성이 마침내 포위되고 말았다.

새까맣게 몰려든 쿠하루 왕국의 군대가 개경의 전방위를 포위하자 고려의 지도부는 다시 한번 시끄럽게 들끓었다.

"장군! 내 장군을 여직 믿고 따랐으나, 이번만은 장군이 틀렸시오!"

"...."

"믿을 놈이 따로 있지, 남조선 아새끼들을 믿어서리 이 사달이 났단 말이오!"

"아직 시일이 남았다."

그들이 출정하기로 약속한 시일은 보름.

"허! 벌써 열흘이 지났시오! 아직도 남조선 아새끼들 허풍을 믿고 있소?"

혁명동지들이 이석개를 압박하고 나섰다.

쿠하루 왕국군은 개경을 에워쌌고, 개경을 들어다 받쳤으나 고구려의 원조군은 감감무소식이다.

성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임자에게 원망하는 것뿐인지라.

"내래 직접 본 고구려 대왕은 허튼말할 자가 아닐세. 동무들은 나를 믿고 조금만 더 버텨달라."

"허, 내래 몰래 성문을 열어재낄려는 병사 스물을 참하고 오는 길이오. 군심이 이미 돌아서기 일보직전이오."

고려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이미 쿠하루 왕국에 포섭된 세작들이 활동하며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민심이 크게 흔들려 거리에서 이석개를 비방하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니, 군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석개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때에, 천둥과 함께 하늘에서 검은 용이 내려왔다.

326화 자연재해

개경이 자리 잡은 N2790 맵은 지리적 여건이 나쁘지 않았다. 굽이쳐 흐르는 거대한 강 하나와 지류 수십 개가 맵 전역에 농수를 대고 있어 농사를 짓기에 아주 적합했다.

서쪽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쿠하루 왕국이 단번에 고려를 집어삼키지 못한 것도 이 수많은 강의 존재 때문이었다.

쿠하루 왕국도 고려도 공군 전력은 없었고, 강을 따라 방비하며 적의 도강을 늦추고 방해하기만 해도 전선 유지에 큰 도움이 됐다.

지리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차츰차츰 전선을 밀고 들어온 건 빌어먹을 마법사들 덕이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을 터득하긴 했으나, 그것도 부대에 한두 명 있는 마법사를 상대할 때뿐이었다.

쿠하루 왕국과 고려의 전쟁이 2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포섭한 첩보원들이 상당했는데, 고구려의 개입을 왕국은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제국을 향한 야욕과 정복을 천명한 고구려다.

이미 그에게 대패하여 흡수된 나트롱 백작 가문과 아미르 왕국, 그리고 파괴되어 버린 료 막부와 툴룬 공작 가문의 비사는 알 만한 자들은 다 아는 소식이다.

고려가 그런 고구려에 신속한다는 소식에 쿠하루 왕국은 국력을 모조리 투입했다. 왕궁의 마법사들을 거의 전부 파견했으며, 왕궁기사단과 중앙군 2만을 파견했다.

소집에 시일이 걸리는 제후들의 영지병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즉시 투입 가능한 왕궁의 모든 전력을 파견한 것이다.

개경의 비옥한 농토도 탐나지만 진정 탐나는 건 엄청난 인구다. 개경에 몰린 인구는 물경 40만.

줍기만 하면 그들이 모두 노예고 노동력이다.

쿠하루 왕국의 총사령관 비토 후작은 개경 성의 포위를 마친 각 부대의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각하! 저 좁은 성에 못 해도 20만은 있다 하니, 포로 수송에만 해도 애를 먹겠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마음을 놓지 마라."

"옛, 각하!"

이미 승리한 듯 실언한 지휘관을 혼냈으나, 비토 후작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지난 전쟁 동안 포로로 잡은 이들만 해도 수만이 넘는다. 또 와중에 사살한 적군의 수는 오죽 많겠나?

최근 총공세로 꾸역꾸역 피난한 고려의 국민들이 모조리 저 개경 성에 모여있다. 첩보를 통하기론 집집마다 피난민들을 나눠 수용해 발 뻗고 잘 수 없을 정도라 했다.

수용인원을 초과한 개경 성의 식량과 물은 금방 동이 날 터이니, 며칠만 버티면 저들 스스로 성문을 열어젖힐 것이나....

"고구려의 참전이 문제다."

왕국군은 진군 열흘 만에 개경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쿠하루 왕국의 총사령관 비토 후작은 그 누구보다 첩보와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아는 이다. 개경의 정보도 중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건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소식은 없는가?"

"예에, 아직 아무런 병력도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동마법진은?"

"철저히 감시 중입니다. 적군의 낌새가 보이면 즉시 연락하기로 하였습니다."

비토 후작이 안심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으음."

굳이 공성전으로 아까운 희생을 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놈의 고구려가 계속 신경 쓰인다.

눈앞의 개경 성에서 얻게 될 노예가 물경 20만. 동쪽에 아직 점령하지 못한 마을들에서 또 수만은 되는 노예를 수급하게 될 터이니, 조금의 병력 손실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3일 후 총공세다."

"예, 각하!"

"그동안 적의 허실을 탐하여 보아라."

"예! 각하!"

지휘관들이 각자의 부대에 흩어져 개경 성에 대한 탐색전에 들어갔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드디어 약속된 총공세 날이 다가왔다.

"동문의 병력이 회유에 응하는 듯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회유책은 되었다."

성문을 열어봐야 시가전에 시간만 소모될 뿐이다.

쥐를 독 안에 가둬 두었으니, 불을 질러 스스로 뛰쳐나오게 해야 한다.

"마법사들을 모두 모아라. 남문을 주력으로 하고, 나머지는 전부 포위를 강화, 항복하는 적을 받아주어라."

"예, 각하."

쿠하루 왕궁 마탑 마법사의 거의 전부가 이번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 수가 80명에 이르렀는데, 그들의 수장 애드 백작이 나서서 브리핑했다.

"지금 모인 마법사 전력이면 저 성을 불바다로 만들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으나, 그리해서는 노예가 상하게 되겠지요."

"좋은 수가 있는가? 애드 백작."

"예에, 제가 주도하고 여기 모인 이들이 힘을 한데 모으면 작은 운석 하나 끌어올 정도는 됩니다."

"허, 운석 낙하 마법 말인가?"

비토 후작이 깜짝 놀랐다.

"차라리 불을 지르는 게 낫지, 아까운 인력을 전부 피떡으로 만들 셈인가?"

"하하하, 각하께서는 염려 놓으시지요."

애드 백작이 웃으며 개경 성을 가리켰다.

"운석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저 안쪽의 개경 성에 한할 것입니다. 그것을 아우르는 이 큰 도시를 보십시오. 대부분이 목조와 흙집입니다."

"으음?"

"지진으로 인한 사상자는 적을 것이며, 그 공포는 아주 클 것입니다."

"오호라!"

밀집해서 들어가 있다곤 하나 무려 20만을 수용한 도시다. 그 면적이 결코 작다 할 수준은 아니니, 위력을 조절할 수만 있다면 지금 상황에 딱 적합한 마법이었다.

"위력을 잘 조절할 수 있겠는가?"

"염려 마십시오."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는가?"

"지금부터 준비하면 5시간이면 족합니다."

가늠해보자면 오후의 중간쯤 되는 시간이다.

"좋네. 실행하게."

"그리합지요."

애드 백작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나아가 마법사들을 소집해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에헤이, 거기! 선 삐뚤어졌다."

"이 멍청한 자식아! 아군 머리 위에 떨어트릴 셈이냐?"

애드 백작의 진두지휘는 1시간이나 이어졌고, 마법진의 세세한 조정에 또다시 1시간이 더 걸렸다.

츠츠츳.

본격적으로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80명의 마법사가 마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운석 낙하는 그 계산이 어렵지, 그 파괴력만 놓고 보자면 대단히 가성비가 있는 마법이다.

소모되는 마력이 적은 게 아니나, 그 위력은 마력의 몇 곱절 값은 하기에 실현될 때마다 역사에 남을 만한 마법인 것이다.

"사령관 각하! 1시간 정도 더 지연될 것 같다고 합니다."

마법을 주관하며 마력을 조정하는 애드 백작을 대신해 그 심부름꾼이 와서 지체된 시간을 알려주었다.

"알겠네."

어차피 해지기 전에는 운석이 떨어질 터다.

그 한 방에 개경의 본성이 무너지고 놀란 사람들이 여기저기 뛰쳐나올 것이다.

포위한 쿠하루 왕국군은 그물이 되어 널뛰는 물고기를 쓸어 담듯 포로를 잡으면 그만이다.

시간이 흘러 점심이 넘어가자 비토 후작은 병력들을 교대로 배불리 먹인 뒤 슬슬 준비하기 시작했다.

"병력들을 정비하라."

"예, 각하."

마법 한 방에 모든 게 결정될 것이긴 하나, 괜한 방심으로 병력의 손실을 볼 필요야 없다.

곧 애드 백작이 마력 탈진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령관을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몹시 지쳐 보였지만 자신감이 가득해, 마법이 성공적으로 실현되었음이 분명했다.

"한 시간 뒤면 운석이 충돌할 것입니다."

"수고했네. 많이 지쳐 보이는군. 이만 물러가 쉬시게나."

"예에, 각하."

운석을 성공적으로 끌어왔다.

모든 계산이 맞아떨어졌으니, 운석은 예정대로 개경 성에 떨어질 터다. 더 이상 마법사들이 개입할 부분은 없다.

마력을 죄다 소모해 여기저기 기절하는 마법사들도 있었으나 어쨌든 성공이다.

고생한 마법사들이 그들의 호화로운 막사로 물러나 쉬는 동안 병력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지휘관들의 연설과 군악대의 연주 소리가 전장을 가득 채웠다.

쿠르르르릉!

하늘에는 점점 구름이 모여들었다. 이내 거뭇해진 구름이 번쩍하더니 천둥소리를 냈다.

꾸아아앙!

번개가 번쩍번쩍 치며 천둥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우니 병사들이 환호했다.

"우와아아아!"

사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령관 비토 후작도 슬며시 웃었다.

"마법 한번 요란하군."

이제 한 10분 정도 남았는가?

알려준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는데, 애드 백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 사령관 각하!"

"오, 그래. 애드 백작. 좀 쉬었는가?"

아까보다 혈색은 괜찮아 보이는 애드 백작의 얼굴은 당황으로 가득했다.

"뭐,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음? 무슨 말인가?"

"누, 누군가 마법을 부리고 있습니다."

"음?"

비토 후작의 시선이 마법사들의 막사로 향했다.

"어디에? 여기 마법사는 자네들이 전부야."

"하오나!"

"허허, 고려에는 마법사가 없네. 그들이 마법사까지 보유했다면 애당초 진격에 애를 먹었겠지."

"하지만 이는 분명 마법이옵니다! 마, 마력이...."

애드 백작은 몸을 덜덜 떨었다.

"어, 엄청난 수준입니다."

"허, 그런 엄청난 마법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가...."

비토 후작은 말하다 말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고려에 마법사를 파견할 정도의 세력이라면.

"각하! 긴급입니다. 이동마법진에 주둔 중이던 바로트 경과 병력 10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뭐라? 언제더냐? 아니! 전령은 어디 있나?"

"저기에."

말하는 와중에 병사들이 동요했다.

비토 후작이 새까맣게 주둔 중인 아군 병력들을 보았다. 하늘을 가리키며 놀란 얼굴로 떠드는 병사들의 얼굴이 생생하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비토 후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게 무슨!"

새까맣게 큰 짐승이 날아다니고 있다.

영락없는 비룡의 생김새였으나, 그 크기가 족히 두세 배는 더 컸다.

그 비룡의 몸체 위에 번쩍이는 번개가 모여들고 있었다.

꽈르르릉!

번쩍하더니, 그 번개 줄기가 그대로 주둔 중인 병력들을 향해 투사되었다.

쾅, 콰쾅!

파지지지직!

"끄어어어어!"

번개 줄기가 지면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고려성 위에서 시작된 번개가 사방을 아우르며 떨어져 내렸다.

마치 신이 있어 개경 성을 보호하는 절대 방어마법을 펼친 것 같았다.

"끄아아아!"

"사, 사령관! 명령을!"

"애드 백자아악!"

비토 후작이 악다구니를 쓰며 애드 백작을 찾았다. 마법이라면, 마법사인 그가 잘 알 것이다.

"방어마법을 펼칠 수 있겠는가?"

"무, 무립니다! 막아봤자 한정된 지역뿐입니다!"

80명의 마법사가 전부 이 근처에 몰려있다.

막아봐야 지휘부 정도만 보호할 정도.

개경 성을 포위한 저 많은 병력은 무방비하게 번개에 노출되고 있었다.

"전 병력 후퇴하라!"

서둘러 판단을 마친 비토 후작이 명했다.

자연재해에 맞서는 인간은 없다.

저것이 마법이라 해도, 막을 수 없으면 재해나 다름없다.

"후퇴하라!"

"진을 물려라!"

빠르게 퍼져나간 후퇴 명령에 병사들이 오합지졸처럼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얼마 못 가 막혀버리고 말았으니.

쿠쿠쿠쿠쿠쿵.

"어어어어?"

땅이 흔들거리며 지진이 일어나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인데, 눈앞의 땅이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엇!"

"사령관 각하!"

갈라진 땅으로 인해 말이 기우뚱 넘어져 낙마한 비토 후작을 부관이 서둘러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이게 대체!"

본디 평평한 평지가 불쑥 솟아나 오르막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지금 비토 후작의 앞만이 아니라, 사방이 그러했으니.

"...이게 대체."

개경성과 아울러 형성된 거대한 도시.

그것을 포위한 수많은 쿠하루 왕국군.

그리고 그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언덕이 솟구쳤다.

경사가 직각에 가깝게 솟아버린 벽은 땅이 흔들리는 지금 도무지 인력으로 어찌해볼 난관이 아니었다.

둥글게 포위하듯 자라난 언덕이 마치 고기를 포위해 들어 올리는 채망과 같았다.

"허어...."

비토 후작이 탄식했다.

망연자실한 그의 눈에, 개경 성 하늘의 검은 비룡이 들어왔다.

"...그가 오고 말았구나."

지구인 중 가장 유명한 사내.

성물 묠니르의 주인이자 고구려를 개국해 제국에 도전하는 자.

그토록 꺼리던 강철두가 전장에 나타나 버렸다.

327화 강림

말간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더니 어둑해지며 천둥번개가 휘몰아쳤다.

심상찮은 조짐에 밖으로 나와 본 이석개는 기함했다.

"가, 강철두 대왕이다."

하늘에 선회 중인 검은 용을 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강철두다. 불과 열흘 전 보았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약속대로 개경성에 강철두가 지원을 왔다.

쿠하루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허어! 저, 저!"

꽈르르릉!

번개 줄기가 바닥으로 내리꽂힐 때마다 개경 성을 포위 중인 쿠하루 왕국군 진영이 엉망이 되었다. 뻗어나간 전류가 병사들을 기절시키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혼비백산해 도망치려던 병사들은 솟아오른 토벽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번개에 맞아 쓰러졌다.

하늘이 노하고, 땅이 뒤집어지는 상황이 지금과 딱 들어맞았다.

"이, 이게 대체...."

"허, 이게 정말 사람의 조화요?"

개경성의 병사들도 주민들도 놀라워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힘을 다루는 존재에 대한 경외와 더불어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어이쿠, 신이 노했어! 신이 노한 거야!"

"이러다 사달이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재난이 달리 재난인가?

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힘이 개경성에 향하게 되면 어찌할 텐가? 막을 수 없다.

개경성의 주민들이, 그리고 성벽에 빼곡 오른 병사들이 넋 놓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와중에 이석개가 소리쳤다.

"되었다! 고구려 대왕께서 납시었다!"

이석개는 너무 기뻐 소리를 질렀다.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과 더욱 큰 의무감이 옅어지는 기분이다. 그를 압박하던 스트레스가 뭉텅 썰려 나간다.

"우리 개경은 이제 살았다!"

고려의 건국은 물건너갔지만 상관없다.

장군들의 표정이 밝았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큰 일을 하나는 넘은 셈이다.

"다, 다행입니다. 장군."

"하, 하지만 장군. 이게 정말 맞는 일이옵니까?"

늘 그렇듯 앞서 생각하는 자들은 있었고, 전후에 대해 벌써 걱정하는 이가 있었다.

"말하라."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긴 하나, 본디 전쟁에 나서 고생이 없으면 공도 없습니다."

"리정식 동무!"

"네, 장군."

이석개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국정 운영에 있어 남조선 출신들의...."

빠악.

"크읏!"

이석개가 리정식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동무. 똑똑히 들으라우."

"네, 장군."

"이미 넘어갔시야. 내래 열흘 전 저 고구려 강철두 대왕을 알현하며 개경성을 들어다 바치고 오는 길이다 이 말이야."

"...."

이석개의 말에 지휘관들이 술렁였다.

내심 짐작하고 있는 부관들도 있었고, 아예 금시초문인 듯 놀라는 이도 있었다.

"그, 그저 연합을 하는 것 아니었습네까?"

"그건 멍청한 선택이지."

이석개는 이참에 잘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실상 즉흥적인 결정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 강철두의 신위를 목격하니 새삼 잘한 결정이었다.

"제후국으로 들어가는 건 제 스스로 급을 낮추는 일이다. 우리는 고구려의 국민으로 살 것이다."

"...."

이석개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의 리종성을 보며 물었다.

"왜? 이해가 아니되나?"

"...."

"말해보라. 탓하지 않갔어."

"남조선 출신 고구려가 우리를 귀히 쓸 리가 없잖습니까? 어차피 노예 취급받으며 살 것이라면 저기 쿠하루 왕국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뭡니까?"

이석개가 씩 웃었다.

"동무. 착각하는 게 있어야."

"뭡니까?"

여전히 기가 꺾이지 않은 리종성을 지켜보던 이석개가 주변을 휘이 둘러봤다.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고구려에 아예 흡수되듯 복속을 청한 이석개의 독단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상당수다.

"다들 저 밖에 보라우."

"...."

"저 펄떡이는 쿠하루 새끼들을 똑똑히 보라우!"

지휘관들이 아예 와해되어 방패며 무기며 내팽개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쿠하루 왕국군을 보며 침을 삼켰다.

저것은 전쟁이 아니다.

번개를 상대로 싸우는 병사는 없다.

그저 이 재난이 그치길 바라는 나약한 인간들뿐이다.

"동무들은 착각하고 있다! 선택? 개경에 선택지는 없었다!"

"...."

"고구려에 대항하던 왜놈들이 어찌 됐는지 그 본보기를 봤으면 이리 말하지 못한단 말이다."

고구려는 지구 출신들이 모여 마을이나 도시를 이룬 모두에게 정복을 천명했다.

선택지는 오로지 둘뿐.

귀의하든가, 정복당하든가.

그 첫 번째 희생양인 료 막부의 사쿠라시티가 어찌 되었는지 보아온 여러 마을들이 스스로 귀의를 청했다.

"생존이야! 다들 머리가 안 돌아가나? 생각해 보라우! 우리가 뭘 할 수 있간? 쿠하루 왕국에 항복? 그다음은? 동무들은 저 번개 줄기 앞에서 쿠하루 왕국을 위해 고구려와 싸울 셈인가?"

"...."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말이야! 기왕이면 제후보다 고구려의 국민이 되는 길이 더욱 이로운 걸 왜 모른단 말인가?"

이석개는 답답했다.

애당초 피해갈 수 없는 선전포고를 한 건 고구려다.

숙이기로 했으면 시원하게 숙이고 들어가자는 게 이석개의 생각이었다.

"내래 포기한 건 이 개경에 대한 지배권이야! 인민을 위한 결정이었다 이말이야! 동무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면 어쩐단 말인가?"

"...."

이석개의 독단으로 고구려의 직할령이 되어버린 고려다. 제후로서 인정받지 못해 독자적인 자치권을 상실했다.

"내래 그토록 경멸하던 당 지도부와 같이 될 수는 없었다 이 말이야."

지배권을 위해 인민의 고혈을 빨던 그놈들과 같아질 수는 없었다.

모든 결정은 개경성의 주민들을 위해서 내린 것이다.

고구려 소속 제후 개경 영지의 영민이 아닌, 고구려의 국민으로서 대우받으며 살 수 있게 된 거다.

그로 인해 포기한 건 제후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석개의 신분이 그저 고구려 국민이 된 것뿐이다.

"동무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애당초 우리의 혁명의지를 생각해보라우."

"...."

"우리가 참으로 원한 게 권력과 부귀영화였나?"

"아닙네다."

"...이미 너무 많은 인민들이 죽었어. 지금부터라도 그러지 말자구."

"장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석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되었다.

제후국이 되었으면 자신을 중심으로 개경성의 지배계층이 될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며 고구려 국민으로서 살게 된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군권은 여전했으며, 고구려 대왕으로부터 직접 전장에 세워줄 것을 약속받았다.

공을 세워 출세할 기회는 이제부터라는 소리다.

"어어? 저, 저게 뭡니까?"

"어어?"

먹구름이 몰려와 어둡게 변한 하늘이 대관절 호나히 빛나기 시작했다. 번쩍이며 밝은 빛과 함께 긴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그것은 불행하게도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멍하니 구경하길 몇 초.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던 운석이 하늘에서 쾅 하고 터져버렸다.

엄청난 굉음과 빛, 그리고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쿠우우웅.

철두가 일으킨 토벽으로 인한 지진에도 견딘 건물들이, 이번 충격파는 이기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약하게 쌓아 올린 성벽도 무너졌고, 여기저기 날아간 사람들과 가재도구들로 풍비박산이 났다.

성벽 위에서 경계하던 병사들은 몸을 지탱할 것이 없어 아래로 떨어져 부상당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아수라장에 개경성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내 다리! 깔렸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라니!"

이석개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개경성 바로 위에서 터진 충격파에 성내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다행히도 운석이 하늘에서 터져 이 정도지, 이것이 직격했다면... 그 결과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푸스스스.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용은 멀쩡하다.

그 위에 탄 강철두도 이상없다.

"다들 군을 수습하라우!"

"종성이!"

"예, 장군."

"주민들 구조에 만전을 기하라우!"

"예, 장군!"

"대철이, 상두! 나를 따라오라우."

"예, 장군."

이석개는 개경의 정예병력인 혁명전사들을 이끌고 성밖으로 향했다.

*

푸스스스스.

강철두는 번쩍이며 다가오는 운석을 보자마자 묠니르를 휘둘러 그것을 깨부숴버렸다.

"흐으음."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강철두의 시선이 적진을 훑었다. 화려한 갑옷을 걸친 이들이 몰려 있는 곳에 마력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유독 그곳만 번개로 인한 피해가 적었는데, 마법사들이 보호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저기가 지휘부군."

철두가 검은 비룡 꾸이의 목을 두드렸다.

"저기로 가자."

"끼아아아!"

쐐애애액.

제자리 비행하고 있던 꾸이가 날개를 접으며 엄청난 속도로 내려갔다.

여기저기 산발적인 마법 공격이 날아왔으나, 보호막을 펼칠 필요도 없이 꾸이가 곡예비행으로 모조리 피해버렸다.

철두는 착지하기 전 묠니르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산을 향해 휘둘렀더니 산이 사라졌다는 전설의 성물은 그 위력을 톡톡히 보였다.

마력 보호막이 산산이 부서지고도 여력이 남아, 그 뒤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

"끄어억."

"크아아아!"

"으윽."

기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전장의 한가운데 강철두가 착지했다. 그의 시선이 주변을 휘이 훑더니 정확히 사령관 비토 후작을 찾아냈다.

금빛으로 치장한 화려한 갑옷은 이 전장에서 가장 눈에 띄었으며, 그 주변에 포진한 호위기사들의 수준은 전장에서 가장 강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네가 우두머리냐?"

"...."

비토 후작이 굳은 얼굴로 대꾸하지 않고 있자 철두가 그를 향해 걸었다.

"멈추어라! 쿠하루 왕국의 7대 고수인 나 나렝이 상대...."

콰직!

대가리가 터져버린 동료를 보고 기사 둘이 더 나섰다.

"이런 비겁한!"

쾅!

휙 던진 궁니르가 기사를 꿰고 저만치 날아가 처박혔다.

"더는 접근하지 못한다!"

서컥!

못할 리가 없다.

"머, 멈추어라!"

콰직!

멈추지 않았다.

철두의 걸음은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았으며, 그 누구도 멈춰세우지 못했다. 지금 대가리가 터져 죽어나가는 이들의 명성이 어떠하던가?

쿠하루 왕국 내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다는 고수가 연달아 한 방에 머리가 터져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철두는 비토 후작의 앞에 다다라 있었다.

"네가 우두머리냐고 물었다."

"...."

철두가 망치를 들어올리자 비토 후작의 입술이 열렸다.

"그렇소."

규격외 괴물을 마주한 상황이다.

무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두려움과 무력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비토 후작은 수만에 이르는 왕국군의 얼굴이자 자존심이다.

대장은 패배의 순간에서조차 당당해야 한다.

"내가 쿠하루 왕국군의 총사령관 비토 후작이오."

"그렇군."

철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놈이 대장이군.

"그럼 꿇어라."

"...!"

비토 후작이 흠칫 놀라며 용기를 내 말했다.

"전장의 승패가 기울었다곤 하나, 전장에도 엄연히 예의 범절이...."

쫘악!

철두의 손바닥이 적장의 항변을 뚫고 따귀를 올려 붙였다.

따귀 한 방에 정신이 출타할 것 같다.

비릿한 피맛과 더불어, 혀 위에 구르는 이빨이 세 개나 느껴진다.

"꿇어라."

"...이, 이 무슨!"

철두는 여전히 제 처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적장을 보며 유감을 표했다.

"굳이 죽겠다면야."

지이이잉.

묠니르가 진동하자 비토 후작이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328화 포로 관리

전장은 복합적이다.

엄정한 군기, 훌륭한 보급, 관리가 잘된 병장기, 훈련 수준, 실전 경험 등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합쳐져 사기로 나타난다.

개인이 모여 부대를 이루고, 집단의 기세만으로도 대략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길지, 상대가 이길지.

전략 전술은 이런 개개인의 역량을 아울러 군대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창병 개인은 약하나, 부대를 이룬 창진은 무시무시한 기마대의 돌격도 막아내는 법이다.

용병술은 열악한 상황에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다. 아군을 독려하는 독전관을 쓰든, 모범적인 지휘관이 앞장서든 방법이야 많다.

전쟁은 역사와 함께 세월을 보냈고, 수많은 병략이 창안되고 발전되어왔다.

그런데 여기, 그런 병략을 무시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압도적인 무력.

전장을 지배하다 못해 파괴하는 압도적인 힘 앞에, 전략도 전술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항복! 항복합니다!"

"모두 꿇려라."

철두의 말에 비토 후작이 소리쳤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어라!"

"하, 하지만...."

콰직!

용감한 기사 하나가 굳이 사령관의 말에 토를 달려 하기에 투척 도끼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히익!"

가려 뽑은 정예 기사들이 기겁할 정도로 기세가 꺾였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강철두를 숨조차 가려 쉬며 보고 있다.

"...."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정도 주목에 기가 질릴 만하건만, 강철두는 담담히 그들을 둘러봤다.

강철두의 시선이 향하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촤르르륵.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리는 자들이 사령관의 진영부터 점차 옆으로 옮겨갔는데, 그 모습이 꼭 스포츠 경기장의 파도타기와 같았다.

저 멀찍이 선 기사와 병사들은 지휘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음에도 옆 동료들이 투항하니 얼른 무기를 버리고 엎드렸다.

먹구름 가득하던 하늘은 어느새 개어 있었고, 전장을 공포에 몰아넣던 번개도 멎었다. 여전히 전체를 아울러 솟아오른 토벽은 단단한 감옥이 되어있으니, 조금 전의 악몽과 같은 시간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강철두의 한마디에 시작된 투항이 길고 길었던 쿠하루 왕국과 개경 성 사이의 전투를 끝내버렸다.

투두두두두!

때마침 개경 성문이 열리며 고려의 무리들이 말을 타고 돌진해왔다. 그 수가 천여 명은 넘었는데 개경 성 최강의 무력 집단인 혁명 전사들이었다.

무리를 이끌고 온 이석개는 철두의 곁에 다다르자 말을 역소환하고는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대왕을 뵙습니다."

"아, 이석개."

"예, 대왕."

철두는 이석개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지난번 아이언헤드 성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깍듯하고 순종적이다. 하사했던 백년급 영약도 이미 흡수해 소드마스터 특유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전쟁은 끝났다. 정리해라."

"...어찌 처리하는지요?"

이석개는 무기를 버리고 엎드린 적군들을 보며 기가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외려 철두가 의아해 되물었다.

"포로 관리를 해본 적이 없나?"

"있사옵니다."

"보통 어떻게 처리했나?"

"죽여 화장했습니다."

"...."

철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로의 관리는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일이라, 괜히 식량을 축내기보다 죽여 없애는 경우가 많았다. 풀어줘 봐야 다시 창칼로 무장하여 적으로 만나거나 탈영병들이 무리를 이뤄 도적이 될 테니, 포로의 즉결처분은 흔한 일이었다.

"아깝게 잡은 포로를 왜 죽이나?"

"하, 하오면...."

이석개가 당황해 말을 얼버무렸다.

"흐음."

개경 성이 고구려의 직할령이 되었다곤 하나, 그것은 노바의 시스템적으로 이뤄진 합병이다.

이석개 홀로 아이언헤드 성을 다녀간 것 외에 아무런 교류가 없으니, 이들이 고구려군의 운용방식이나 포로 관리법에 대해 알 턱이 없다.

"알려주지."

귀찮긴 하지만 대강의 가이드라인은 잡아줄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이봐."

"히익, 네."

철두는 가장 가까이 있는 기사를 발로 툭 쳤다.

"갑옷을 벗어라."

"...지, 지금 말입니까?"

말귀가 어두운 놈이군.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

콰직!

철두가 휘두른 망치에 머리가 깨진 기사가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허억!"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놀라는 가운데, 철두가 그 옆에 녀석을 지목했다.

"여기 갑옷을 벗어라."

"예에."

기사는 순순히 플레이트 아머를 벗었다.

종자로 보이는 녀석의 도움을 받아 두꺼운 갑옷과 안에 받쳐입었던 갬비슨까지 모조리 벗었다.

"옷도 벗어라."

"예에?"

이놈도 말귀가 어두운 놈인가?

망치를 든 철두의 손이 움찔하자 기사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다, 다 벗었습니다."

반바지 형태의 속옷만 입은 기사는 모멸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게졌으나, 명예보다 목숨이 우선하는지 꿋꿋이 견뎌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다른 이가 참지 못했으니.

"이보시오! 이 전장을 지배하는 게 당신이라곤 하나, 우리는 순순히 항복한 포로들이오! 그에 걸맞은 대우를...."

콰직!

철두가 던진 투척 도끼가, 사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두개골을 쪼개주었다.

"따르기 싫으면 다시 덤벼라."

"...."

더는 항변하는 이가 없자 철두는 속옷 차림의 기사에게 다시 명했다.

"인벤토리의 것을 모조리 다 비워내라."

"...제 목숨은 어찌 보장합니까?"

눈치만 빠른 게 아니라 생존 욕구에도 충실한 놈이다.

철두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굳이 살인하는 취미는 없다. 이것은 승리에 대한 정당한 전리품일 뿐이다. 쿠하루 왕국에서 정당한 몸값을 지불하면 너는 자유다."

"...!"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사는 인벤토리의 물건을 모조리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이제 됐습니까?"

"후후, 하나 남았다."

철두가 악수하듯 손을 내밀었다.

"주화를 내게 다 넘겨라."

사내는 질린 눈으로 철두를 보았다.

정말 싹싹 털어가는구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주화 주머니가 문신된 오른손을 맞잡았다.

촤르륵.

사내의 손등 위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더니 '0'으로 변했다. 차감된 숫자만큼 철두의 손등 위 숫자가 불어났으나, 애초에 철두가 워낙 많은 주화를 가지고 있어 그 변동 폭이 미미했다.

"좋아. 너는 포로다. 저리로 가라."

"예에."

철두가 다음 기사를 지목했다.

"너."

"흥."

"포로냐 죽음이냐. 택하라."

"허, 나는 죽어 다시 부활해 네 목을...."

콰직!

철두가 말대꾸한 기사에게 투척 도끼를 하나 먹여주곤 쩌렁쩌렁 소리쳤다.

"건방진 놈들이 많구나! 나의 심기가 몹시 상하니 이대로 쿠하루 왕성에 찾아가 책임을 묻고 싶은데, 네놈들 생각은 어떠냐?"

"...!"

"기개를 가지고 대항하다 죽어 부활하면 그만인가? 부활한 뒤에 돌아갈 왕국을 건사해야 하지 않겠나?"

철두가 슬쩍 적군 사령관 비토 후작을 보았다.

"아니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비토 후작은 지금 처지를 통감했다.

그러곤 스스로 일어나 명했다.

"나의 갑옷을 벗겨라."

"가, 각하!"

"얼른!"

"예에."

부관들이 달라붙어 화려한 갑주를 벗겨냈다.

갑옷이 벗겨지는 동안 비토 후작은 수십 번 고민했다.

'인벤토리에 든 것을 진정 모두 비워야 하는가?'

수만에 이르는 왕국군 사령관의 인벤토리다.

영지 하나를 일으켜 세울 정도의 보물이 가득한데, 이것을 지키기 위해 죽느냐,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내어주느냐의 갈등이 아직도 컸다.

'나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 아니다. 왕국을 보존하는 길이다.'

이대로 강철두가 쿠하루 왕성에 날아간다는 상상을 하면 끔찍하다.

죽어서 부활하든 뭐든, 왕국은 건재해야 다시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겨우 부활해 돌아왔는데 쿠하루 왕국이 멸망하고 모든 영지와 가문이 초토화된 뒤면, 혼자 살아서 무엇 한단 말인가?

가문의 식솔들과 영민들, 나아가 왕국 전 국민을 구하는 일이다.

"모두 내놓았소."

촤르르륵.

주화까지 아낌없이 건네주자 강철두가 히죽 웃었다.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이군. 저쪽에 서라."

"알겠소."

비토 후작이 굽히고 나서자 기사들은 비통한 표정이 가득했으나 순순히 뒤따랐다.

철두가 이석개를 손짓해 불렀다.

"이렇게 해라."

"허,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말해라."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원활한 집행이...."

"후."

이석개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겨우 말했다.

부족한 개경 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매우 부끄러웠다.

개경의 무사들 수준은 상위 랭커의 정예병이 많았으나, 철두가 백년초 하나를 하사해주기 전까지는 영약 하나 구하지 못해 소드마스터는 전무했으며, 마법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철두가 마법사 무리를 향해 다가가 소리쳤다.

"너희는 포로가 될 필요가 없다."

"허어."

마법사 무리는 그래도 고급인재들이니 예우를 해주는가 보다 싶어 얼굴이 풀어졌다. 하지만 뒤이어진 말에 그들의 얼굴은 와락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나의 전리품이다."

"그, 무, 무슨 말이오?"

"차례로 나에게 충성하는 마나의 맹세를 해라."

"그, 무슨!"

콰직!

인내심이 모자란 투척 도끼가 날아가 마법사의 골통을 부쉈다.

마법사가 80명이나 된다.

이중 열만 건져도 상관없다.

"너, 할 테냐?"

"저, 저는 이미 마나의 맹세를 한 몸으로...."

콰직!

철두가 망치를 휘두르자 또 다른 마법사의 머리통이 부서지며 사라졌다.

"빨리빨리 해라. 시간 없다."

"마, 마나를 걸고 맹세합니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재촉에 눈치 보고 말 것도 없이 아직 마법사 일생 단 한 번만 할 수 있다는 마나의 맹세를 하지 않은 자들이 나섰다.

그들의 수를 세어보니 33명이었다.

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참해라."

"예?"

"두 번 말해야 하나?"

"헙, 아닙니다!"

이석개는 재빨리 창을 꺼내 들어 황망해하는 마법사들을 헤집어 놓았다.

기민한 선택으로 목숨을 건진 33명의 마법사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너희는 이제 고구려의 마법사다. 통역을 하든 아티팩트를 내어놓든 알아서 협조하라."

"예, 예에."

철두의 말에 마법사들이 서둘러 개경 성에서 나온 혁명 전사들에게 통역의 마법을 걸어주거나 소통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내어주었다.

개경 성만큼이나 그를 포위한 쿠하루 왕국군이 형성한 전선은 넓었고, 저쪽 성 너머에 무리한 자들 중에 탈영의 조짐이 보였다.

"어엇, 토벽을 넘고 있습니다."

"흥."

철두가 냉큼 내던진 궁니르가 빛과 같이 날아가 토벽을 기어오르던 자들 근처에 떨어지니.

콰아앙!

그 주변의 땅이 꺼지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버렸다.

탈영하던 이들과 그저 그 근처에 있던 이들까지 모조리 딸려 들어가 자취를 감추니 사라진 인원만 해도 수백이 되었다.

"석개."

"넵! 대왕."

"이제 마무리해라."

"옙! 알겠습니다."

"난 가서 좀 쉬지."

"헙, 대철이! 대왕님을 모시라우."

"알갔습네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의 구대철이 긴장하며 강철두를 안내했다.

"서, 성으로 모시갔습네다."

"가자."

철두가 소나따를 소환해 올라타자, 구대철은 비룡을 소환하지 않은 것에 안심하며 말을 소환해 올라타곤 개경 성으로 향했다.

곁눈질해 보니 대왕이 탄 말은 머리에 뿔을 달고 있어 일반적인 말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과연, 신과 같은 힘을 내리는 대왕은 타시는 말마저 비범하구나 싶었다.

329화 반격 준비

개경 성에 들어선 철두가 주변을 둘러보다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기 집들은 왜 이리 허물어졌나?"

"그, 그건...!"

구대철은 당황해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면전에 대고 당신이 그랬다는 이야기를 할 만큼 눈치 없진 않았다.

"나, 날림공사가 많아 그렇습네다."

"쯧, 이래서야 죄다 다시 지어야 할 판이군."

"며, 면목 없습니다."

철두는 이제 고구려 직할령이 된 개경 성의 면면을 훑어보며 걸었다. 내성으로 향하는 대로는 구불구불한 선형이었고, 여기저기 난 골목길도 난잡했다.

"싹 밀고 다시 지어야겠군."

"예, 예에?"

"걱정 마라. 도시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닌 이가 있으니."

철두는 진태를 생각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도시 건설 게임을 워낙 좋아하는 녀석이니 좋은 선물이 될 터다.

개척마을이 파괴되어 개경 성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은 훌륭한 노동력이 되어줄 것이며, 그 건설 자금 또한 저기 성 밖에 가득 쌓이고 있었다.

개경 성이 놓인 N2790 맵의 환경이나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수량이 풍부해 농업 구역으로 키우기도 좋고, 서쪽에는 쿠하루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약탈하기도 좋다.

인접한 동쪽 맵에는 이동마법진이 자리하고 있어 수도 아이언헤드와도 아주 가까운 위치다.

지형의 모양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나아가다 보니 이내 성의 중심에 다다랐다.

"여기가 관청입네다. 가장 좋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밥부터 먹자."

"헙, 넵! 즉시 준비토록 하갔습네다."

거의 단층으로 이뤄진 개경 성에서 관청은 드물게 3층 건물이었는데, 튼튼하게 지었는지 어디 기둥 하나 빠진 것 없이 온전했다.

구대철은 급히 사람들에게 식사를 내어오게 시키곤 관청의 3층으로 철두를 안내했다.

3층은 벽 없이 여덟 개의 기둥이 커다란 지붕을 받친 형태로, 이곳에서 둘러보니 사방으로 개경 성의 모든 성내가 다 보였다.

경치 구경을 하고 있으니 곧 상이 내어져 왔는데, 밥과 국 여섯 개 정도의 찬이 올려진 독상이었다.

"먹자. 너도 와서 앉아라."

"허억, 제가 어찌 감히 대왕님과 겸상을 하겠습니까. 저, 정 그러시면 따로 독상을 하나 더 내어오겠습니다."

그즈음 이석개도 관청에 도착해 3층으로 올랐다.

"벌써 끝났나?"

"아닙네다. 저 많은 포로들의 무기를 수거하고 갑옷과 옷을 벗기자면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닙니다. 대강의 틀만 잡아놓고 즉시 대왕님을 모시러 온 참입니다."

"너도 밥 먹어라."

"예에."

"허, 허면 저는 이만...."

슬쩍 빠지려는 구대철을 보며 철두의 눈썹이 꿈틀했다.

"밥을 남겨?"

"허억, 아닙네다."

구대철이 얼른 앉았고, 독상을 각자 앞에 두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굳은 말간 뭇국인데 육수에서 고기 맛이 어렴풋이 났고, 잡곡이 섞인 고봉밥에 찬으로 나온 것은 나물이 셋, 장아찌가 셋이었다.

찬이 싱거우니 알싸한 맛이 생각나 물었다.

"김치는 없나?"

"송구하옵니다. 지구와 노바의 식생이 달라 아직 배추와 비슷한 것을 구하지 못했습네다. 동치미는 있사온데...."

"술도 한잔하자."

"예에."

3층 누각의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아낙들이 서둘러 내려가 술상과 동치미를 내어왔다.

"고생했다. 석개."

"여, 영광입니다."

"너도 고생했다."

"헙, 영광입네다."

얼떨결에 동석한 구대철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으나 떠나지도 못하고 어쩌다 보니 고구려 대왕과 이석개 장군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밥을 더 내와라."

"예에."

아낙들이 바삐 오가며 식당과 3층 누각들을 들락거렸다. 비워진 상을 내어가고 음식이 가득 찬 상을 다시 올리길 반복했다.

간단한 식사가 나왔던 상에 점점 더 고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강철두는 적당한 포만감을 느꼈다.

역시 한바탕 날뛰고 난 뒤엔 역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

이석개와 구대철은 철두의 신위에 한 번 놀라고, 포로를 대하는 단호함에 두 번 놀라고, 엄청난 식성에 세 번 놀랐다.

"안주를 더 내어와라."

"예에, 장군."

아낙들이 다시 빈 상을 내어가고 다시 푸짐한 안주가 담긴 상이 올라왔는데, 상을 받치고 온 자는 다름 아닌 리종성이었다.

그는 힐끗 강철두를 보고 목례하더니, 상을 내려놓고 이석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장군, 성내의 구명 작업을 마쳤습네다."

"으음, 알겠다. 대왕이 계신 자리니 이만 물러가라."

"...."

물러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리종성을 보며 이석개가 눈알을 부라렸고, 강철두는 그를 불렀다.

"너도 한잔하고 싶거든 앉아라."

"예, 대왕."

영 불손해 보이는 말투를 듣고 있자면 잔뜩 깃을 세워 화난 꿩을 보는 것 같았다.

철두는 리종성을 보며 웃으며 물었다.

"내게 불만이 있느냐?"

"...불만은 없사옵니다."

바바리안의 직설화법도 놀랍지만, 맞받아치는 리종성의 대꾸에 이석개가 화들짝 놀랐다.

"대왕의 앞에서 무슨 무례냐!"

이석개는 진심으로 리종성이 걱정되어 나섰다.

조금만 더 무례하면 당장에 강철두의 허리춤에 달린 투척 도끼가 날아갈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재밌는 놈이군. 한잔 받아라."

"이리 귀한 술을 내려주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척하니 빈 잔을 내미는 리종성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저 염려가 될 뿐입니다."

"무엇이?"

"눈앞의 위난이 무사히 지났고, 개경은 이제 온전히 고구려에 신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종성이 탁주를 상에 내려놓고 오체투지 하듯 엎드렸다.

"이 리종성이 목숨 걸고 한마디 하렵니다."

"자, 자네!"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이석개가 나서려 하였으나 철두가 막았다.

"말해봐라."

"우두머리의 사치와 향락이 인민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우리 인민만큼 절절히 아는 사람은 없습네다."

"...."

"사치를 멈추고 인민들의 삶을 보살펴 주십시오."

철두는 씩 웃으며 탁주 그릇을 내려놓았다.

"무엇이 사치인가?"

"귀한 탁주를 동이째 드시는 것도 사치이고, 인민 수십이 배불리 먹을 양을 혼자서 드시는 것도 사치이옵니다."

"밥이야 더 지으면 되고, 술이야 또 빚으면 되는 것 아니냐?"

"전쟁 이후 부족해진 물자로 현재 모든 인민은 같은 식사를 합니다. 여기 장군들과 일반 병졸의 식사가 같았사온데, 벌써부터 이리 호화롭게 상을 차려 드시니 앞날이 걱정되어 나섰습니다."

철두는 리종성을 보며 씩 웃었다.

개경 성의 궁핍하던 상황과 강철두의 대식에 놀라 앞날이 걱정되어 나섰다고 하기에는 그 사유가 빈약하다.

강철두가 백날천날 개경 성에 먹고 자고 할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날은 아주 예외적인 날일 테니까.

"어쭙잖은 소리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하라."

"...."

리종성은 엎드린 채 그저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어서 목을 베라는 것 같아 철두는 웃었다.

"꿍한 놈이군. 죽이는 건 쉬우나 진짜 할 말도 못 하고 죽어서야 네놈이 억울하지 않겠느냐?"

엎드려있던 리종성의 눈알이 벌게졌다.

'어차피 죽기를 각오한 일이다. 차라리 잘되었다.'

리종성이 살 마음을 포기하고 말문을 열었다.

"고구려의 밑으로 우리 북조선인들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차별과 멸시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못내 한스러울 뿐입니다."

"내가 왜 차별하나?"

"남북이 분단되어 그간 갈등해왔는데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남조선 출신들이 세우고 기틀을 다진 왕국에서 우리 인민들에 대한 차별이 어찌 없겠습니까?"

"...."

"어차피 우리 인민들의 대우라 해봐야 개돼지일 것이고, 전장에 서봐야 화살받이가 될 것인데, 이 리종성이 어찌 이리 나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후후, 여기 앉아라."

철두는 탁주잔을 들어 자신의 빈 그릇에 따랐다.

리종성은 죽기 전에 탁주 한 사발이라도 먹고 죽으려는지 허리를 펴고 앉아 강철두를 보았다.

검은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아 번개를 뿌리는 그의 신위는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두렵다.

고구려의 정복 천명으로 어차피 이리 예속하게 될 일이었으나, 자신의 한목숨 바쳐 인민들에 대한 차별을 조금이라도 없애고자 뜻을 세웠다.

"너는 고구려에 와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너처럼 겪어보기도 전에 불안해하는 놈들이 몇이나 되나?"

"...많습니다."

철두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놈은 고구려 대왕의 전령으로 아이언헤드 성에 다녀와라. 너처럼 불만이 심한 놈 백 놈 정도 추려서 함께 가라."

"...?"

"가서 재상 김진태를 찾아내 말을 전해라."

"...전하겠습니다."

"성을 정비하고 안정시킬 기술자들을 이끌고 오라 해라."

열흘 전 개경 성을 대충 둘러보고 간 김진태다.

이미 머릿속에 그 개발계획이야 다 들어차 있을 것이다. 이 개경과 N2790 맵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활용할지는 김진태가 할 일이고.

"기간은...."

철두가 이석개를 돌아보며 물었다.

"병력을 정비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좋다. 일주일 후 포로들을 데리고 쿠하루 왕국의 국경으로 간다."

"허억!"

철두가 다시 리종성을 보았다.

"일주일 안에 오라고 해라. 한잔 마시고 바로 출발해라."

"...알겠습니다."

리종성은 탁주를 들이켜고 일어섰다.

'나보고 고구려의 실상을 보고 오라는 것인가?'

복잡한 마음이었으나 일단은 시키니 할 뿐이다.

리종성은 3층 누각을 내려가, 장교들 중에 특히나 남조선 출신의 고구려에 흡수 통합되는 데 불만을 품은 이들을 추렸다.

개경 성을 나서고 보니 아직도 포로 분류 작업이 한창이다. 남문 밖에는 갑옷과 무기들이 이미 산처럼 쌓였고, 그들의 진지에는 보급 식량이 가득했다.

적들에게서 노획한 것만 해도 당장 한 해 동안 농사짓지 않아도 될 엄청난 양이었다.

새삼 저 많은 병력을 굴종시킨 것이 한 사람의 무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한 것은 개경도 마찬가지다.

냅다 개경을 들어다 바친 이석개 장군의 결정에 여전히 불만이 남은 이들 100명이 이동마법진으로 향했다.

문득 대왕 강철두를 떠올리니 난 인물인 건 분명해 보였다.

'사람 부리는 데는 도가 튼 이로구나.'

홀로 이 개경에 와 모든 사람들을 제 수족처럼 부리는데, 웃긴 것은 그것이 또 위화감이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 하듯, 마땅히 따라야 하듯.

불만이 크다 여긴 리종성 스스로가 전령이 되어 이리 고구려의 수도로 향하는 것을 보니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데, 마음은 이미 그를 대왕으로 모시는 것인지도 몰랐다.

리종성은 빠르게 말을 달려 꼬박 하루 만에 N2790 맵의 동쪽 경계에 이르렀다.

사막 맵인 D333 맵에 진입해 고작 20분 말을 달리니 이동마법진과 마주했다. 모래밭에 덩그러니 놓인 제단 위에 차례로 올라가 포탈을 탔다.

좌표석이 모자랐기에 오고 가고를 반복하며 좌표석을 복제, 아까운 주화를 또 수천 낭비하게 되었다.

'고작 말을 전하고자 하면 전령 한둘만 보내도 족한데, 굳이 백이나 이끌고 가라더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있단 말인가?

역시 남조선 출신들의 사치와 과시욕은....

"내 똑똑히 보아주지."

고구려에 직접 가서 보라 했으니, 가서 보면 될 일이다.

리종성과 100인의 전령은 마침내 당도했다.

지구 출신 마을과 도시 모두에게 선전포고한 광오한 왕국 고구려의 수도 아이언헤드 성에 말이다.

330화 수도 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