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암영마교의 비밀 >
흡사 투명한 거인의 손이 먹구름의 형태를 빌려 잠시 나타난 듯했다. 그 거인은 청백색 번개의 창을 가히 유성 같은 기세로 대지에 내리꽂았다.
터져 나온 섬광과 굉음 속에서 크고 육중하던 성문이 거진 한순간에 증발하듯 녹아내리는 광경은 실로 비현실적이었다.
금속은 즉시 강렬한 붉은빛으로 달아올라 흘러내렸으며, 비금속은 그 열기를 견디지 못해 잿더미로 폭발하거나 심지어는 플라스마로까지 화해 방전현상을 일으켰다.
당연하게도.
그 펼쳐진 광경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성문 위쪽과 근처 성벽에 있던 무인들이 전부 흔적조차 없이 죽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들의 죽음과 함께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속 전의도 완전히 죽어버렸다.
유유히 허공으로 날아오른 한유진은 스스로 만들어 낸 뇌룡의 머리에 올라섰다. 그렇게 오연한 모습으로 더는 성문이라 부를 수 없는 폐허를 지나쳐 안으로 진입했다.
빠콰쾅-!
콰르르릉···!!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쳐다볼 수조차 없는 섬광과, 마찬가지로 어지간한 내공으론 귀가 상할 수밖에 없는 굉음을 두른 뇌룡이다.
하늘에서 휘몰아치는 먹구름을 동반한 채로 흉포한 으르렁거림을 토하며 천지를 압도하듯 허공을 헤엄쳐가는 뇌룡의 머리 위.
그는 느긋하게 암영마교 본단 내부를 감상했다.
정말로 하나의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한데 지금 그 넓고 화려한 규모의 본단이 자신에게 철저히 위압당하고 있다.
원래라면 줄줄이 튀어나와 방어에 나서야 했을 무인들은 전부 멍청한 모습으로 어쩔 줄 모르면서 뇌룡을 타고 움직이는 그를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각인각색이라.
이 암영마교라는 집단에 충성심이 대단하고 개인의 신념 또한 극도로 투철한 이가 아예 없진 않았다.
- 금련무존-! 멈춰라-!!
비장함 가득한 외침과 함께, 어느 화경 고수가 궁신탄영의 묘리를 발휘하며 쏘아져 왔다.
쌍수검이 꽤 인상적인지라 저절로 관련 정보가 떠오른다. 생각하며 한유진이 그를 손으로 가리키자, 허공을 유유히 헤엄쳐가던 뇌룡의 몸 곳곳에서 수십이 넘는 광포한 벼락 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세상 모든 것이 뚝뚝 끊어져 보일 만큼, 무시무시한 섬광이 짧은 간격으로 연달아 폭발하고 굉음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친다.
달려든 화경 고수는 그 번개 폭격 속에서 마치 원래부터 존재한 적 없었다는 듯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이제 그에 대한 정보를 더는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빠콰콰콰쾅-!!
그 공격을 기점으로 뇌룡은 얌전히 나아가던 모습에서 사방으로 쉴 새 없이 벼락을 쏘아내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부수고 태우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폭음과 화염이 치솟자, 계속 어쩔 줄을 모른 채 그저 구경꾼을 자처하던 암영마교 무인들이 사방으로 메뚜기처럼 도망쳤다.
가히 재앙이었다.
그 재앙을 일으키는 한유진은, 어느샌가 손에 주먹만 한 크기로 줄어든 드래곤 하트를 들고 있었다.
심경 단계 제련을 마친 것만으로도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어마어마했다. 이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아주 일부지만 끌어다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금 펼친 뇌룡출요호운 법술은 넉넉히 법혼 후기급의 위세를 떨쳐 보이는 중이었고, 그러면서 법력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젠 금련삼전만개가 아니라 원래 버전인 금련구전만개를 펼쳐도 문제없겠군.'
이 무림 세계에선 그야말로 신화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모습으로 그렇게 얼마를 나아갔을까.
마침내 그는 이 암영마교 본단의 중심부에 자리한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건물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강화된 정신력을 바탕으로 쭉쭉 뻗어나간 신식이 그 건물 전체를 휘감아 낱낱이 파악해 낸다. 동시에 한유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최정예라고 부를 수 있을 이들이 건물 안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우선 화경급 고수가 아홉이었고, 현경급 고수는 셋이 자리했으며, 교주인 암영신마 천라진으로 짐작되는 가장 강한 기척도 여지없이 느껴졌다.
'진법적 원리에 따라 건축된 건물 안에서의 매복 합공이라.'
만약 이 세계에 처음 발 디뎠던 그때 상태로 저 건물에 무방비하게 들어갔다면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생사경 고수의 신식비술이 덮쳐오는 와중 건물에 기반을 둔 튼튼한 진법이 발동하고 현경 고수 셋과 화경 고수 아홉이 합공을 가해 온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젠 아니었다.
백번 양보하여 순순히 안으로 들어가서 싸워준다고 한들 그는 도저히 질 자신이 없었다.
그냥 지금 올라타 있는 뇌룡을 폭발시키기만 해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정된 공간인 만큼 뇌전의 폭발 역시 더욱 위력적으로 작용할 테니까.
'진짜 한번 해 볼까?'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모조리 죽여 버리면 간편하긴 하겠지만, 암영신마의 신식비술이 뭔지 캐내기가 꽤 어려워질지 모른다.
하여 그는 땅으로 내려선 뒤 뇌룡의 크기를 몸에 두를 정도로 축소시켰다. 드래곤 하트를 다시 저물대에 넣으며 습관적으로 무용이를 쓰다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순순히 들어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빠콰쾅-!!
작아진 만큼 더욱 응집된 빛과 굉음을 두른 뇌룡의 입에서 벼락 줄기가 쏘아진다. 그것은 뇌전계 특유의 파법력에 힘입어 이 건물의 벽을 파고든 후 내부의 진법 축을 아주 효과적으로 망가트렸다.
퉤!
문득 무용이가 그런 뇌룡의 행동이 재밌어 보였는지 따라서 경금검기를 뱉으며 신나했다. 당연히 그 경금검기는 건물 벽에 구멍을 좀 뚫어낸 것 빼곤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이름값 하는구나."
찌직-! 찍?
"귀엽다는 뜻이야."
그렇게 진법의 축들을 훼손하면서 길고 넓은 복도를 지나, 응접실 같은 장소를 두어 번 거쳐, 건물의 중간 하늘이 보이도록 만들어진 아담한 정원마저도 지나쳐.
마침내 본채라고 부를 수 있을 건물의 문을 뇌룡의 벼락으로 날려버리며 들어섰을 때.
"기다렸다, 금련무존!"
"감히 겁도 없이 습격해 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꽤 진부한 내용의 몇 고함성과 함께 이미 신식으로 감지했던 그 고수들이 정해진 투로대로 강기를 날려 왔다. 동시에 한 명은 극독으로 짐작되는 가루를 절묘하게 흩뿌리기도 했다.
대응하여 한유진의 몸에서 작아진 뇌룡보다도 더 눈부신 자금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뇌룡 역시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여 날아드는 검강들을 수십 줄기의 벼락으로 요격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육도윤회가 떠올라 순환하기 시작했다.
이번의 것은 저번처럼 단지 눈동자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자금광휘와 뇌룡을 두르고 선 그의 뒤편에서, 주변의 온갖 눈부신 섬광들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는 기묘한 느낌의 빛을 발하며 거대한 환영처럼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빛깔을 그러모아 순백으로 빚어낸 듯한 고리 위, 여섯 감정의 세계들이 경계 불분명한 모습으로 떠올라 윤회한다.
그 육도윤회를 등지고 선 한유진의 역광에 휩싸인 모습은 이목구비를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어느 신비하고 드높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행복의 천락도.
기대의 인욕도.
슬픔의 망혼도.
분노의 야수도.
혐오의 기충도.
절망의 심연도.
신통, 육도윤회.
그것에 섞여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깨달음 섞인 모종의 의념이 거대한 범종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단지 한 번 울려 퍼진 것에서 끝나지 않고 메아리치듯 잔류하면서 대적하는 이들의 정신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장로이자 현경 고수인 한 젊고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 아마도 흑사혈녀임이 분명한 여자가 순간 미친 듯이 깔깔대더니 제 양손으로 두 눈을 찌르고 강기를 폭발시켜 자살했다.
다른 현경 고수는 눈이 터질 것처럼 충혈되더니 괴성을 내지르며 교주인 암영신마 천라진에게 돌진해 갔고, 또 한 명의 현경 고수는 세상을 다 잃어버린 표정으로 꿇어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화경 고수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몇 이들은 스스로 자결하고, 몇 이들은 분노하여 서로를 죽이려들고, 몇 이들은 완전히 만족해 버린 채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기를 내던지고, 반대로 궁극의 절망에 집어삼켜진 이들은 주변 상황을 전부 잊고서 주저앉아버린다.
오직 교주만이 비교적 평범한 인욕도에 사로잡힌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현경 장로의 공격을 멀쩡히 방어해 갔다.
- 놈의 심검이다! 다들 정신 차려라-!!
웅혼한 내공이 담긴 고함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교주와 장로의 공방으로 섬광이 번쩍이면서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그에 섞인 반짝이는 강기 파편들이 근처 무방비하게 있던 무인들을 찢어발겨 피가 뿜어져 나오고 살점이 휘날렸다.
바로 그러던 때.
웬 금색 빛줄기가 날아들어 미친놈처럼 포효하며 교주를 공격하던 현경 장로를 일시에 참수시켜 버렸다.
교주 천라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공격의 근원지인 금련무존을 쳐다봤다.
그렇게, 온통 역광으로 검게 물든 와중 섬뜩한 자색빛 광망을 품은 한 쌍의 눈을 목격했다.
직후 그가 착용하고 있던 웬 뼈 목걸이가 가루로 부스러져 내렸다.
"···응?"
예상 밖으로 허무하게 막힌 환몽심탈술에 한유진이 짧은 의문성을 내는 그때.
교주 천라진은 강호를 진동시키는 위명이 무색하게도 완전히 겁에 질려 즉각 도주를 시도했다. 인욕도의 영향이기도 했으나 그의 본성이 드러난 모습이기도 했다.
꼴에 생사경의 고수라고 빠르기는 엄청나게 빨랐다.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암영강림보(暗影降臨步)는 근처의 어둠을 기이하게 확장시키면서 그 속에 녹아들어 고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대단한 신공이다.
마치 수선자의 둔법과도 비슷했다.
"이 새끼가···?"
한유진은 즉시 대동한 뇌룡의 힘을 빌려 연속으로 뇌둔술을 펼치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빠콰쾅-! 콰르릉-!
콰광! 쾅-!
연신 터져 나오는 벽력음과 함께 빛이 번쩍이며 주변 어둠을 사정없이 찢어발긴다.
그렇게 따라잡히기 직전, 천라진은 어느 별실의 바닥을 부수면서 그대로 어두컴컴한 지하로 모습을 감췄다.
간발의 차로 벽력음과 함께 지하통로 바로 앞에서 나타난 한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내가 못 느꼈다고?'
놈이 바닥을 부수기 전까지 이 통로를 신식으로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확실히 암영마교 이놈들, 뭔가가 있긴 있구나.'
이전에 음양고를 살피면서 느꼈던 바로 그 의혹이 슬슬 정체를 드러내는 듯하다.
이미 드러나버린 통로 안쪽을 신식으로 살피는 데는 다행히 별 방해가 없었다. 그는 뇌둔술을 남발한 탓에 조금 크기가 줄어든 뇌룡을 앞세우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깊이가 상당했지만 나름 천천히 내려간다고 하면서도 순식간에 그 계단을 주파할 수 있었다.
도착한 지하 심부는 실로 불쾌한 반구형 공간이었다.
곳곳에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가득했으며 신식마저 살짝 방해받는 느낌의 질척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핏자국은 결코 장식이 아니라는 듯 지독한 혈향을 내뿜었고 깔린 어둠들에선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반구형 공간의 중심부.
암영마교라는 강대한 세력의 교주이자 당당한 생사경의 고수이기도 한 암영신마 천라진이,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엎드려 간절히 빌고 있었다.
그렇게 빌고 있는 대상은 허공의 어둠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밧줄에 목 매달린 채 아주 천천히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무언가였다.
'···인피(人皮)?'
소름 끼치게도 그건 사람 가죽이었다.
그 인피는 마치 방금까지 살아있었던 것처럼 전신으로 새빨간 피를 뚝뚝 흘려내고 있었고, 텅 비어 흐느적거리는 안쪽에선 흡사 물질화된 듯한 어둠이 함께 흘러내리다가 허공으로 번져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조사님··· 제발 저를 구해주십시오···! 저 끔찍한 자로부터 저를 구해주십시오···! 공양하겠습니다··· 연속으로 공양하겠습니다···!"
암영신마 천라진은 머리까지 쿵쿵 박으며 그 인피를 향해 연신 굴욕적인 예를 취해 보였다.
문득.
한유진은 그 인피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그냥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빼곡히 새겨진 일련의 법문법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한유진은 인피의 어둠 가득한 두 눈구멍과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하게 인피의 고개가 움직여 그를 쳐다봤다.
- 도우(道友)······.
지극히 희미하지만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심언이 들린다.
- 도우······.
오직 그것만을 말할 수 있다는 듯, 같은 내용의 심언과 함께 인피의 한쪽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71화. < 응징과 수확 >
천라진도 그 심언을 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조사(祖師)와 한유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가 곧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든 기대가 꺾인 표정이 되어선 더 이상 빌지도 못하며 입만 달싹였다.
바로 그때 인피가 문득 천라진을 내려다봤다.
콰르릉-!!
무언가를 직감한 한유진이 즉시 뇌룡을 통해 두 줄기 번개를 쏘아냈다. 하나는 천라진을 노렸고 다른 하나는 인피를 노리는 채였다.
하나 그 공격은 목표물 대신 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어둠과 충돌해 기이한 폭음만을 일으켰다. 마치 심해에서 발생한 소리를 아주 멀리서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번개를 가로막는 사이 인피가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리며 천라진을 덮쳤다.
"조, 조사···!"
극도의 두려움에 질린 외침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암영강림보를 통해 도망치려는 모습이 얼핏 보인 듯했으나, 무사히 녹아들어야 할 어둠이 되레 그를 구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구속된 천라진을 기괴하게 쩍 벌어진 인피의 커다란 입이 뒤덮어 삼켰다.
콰드득···!! 콰각-!
콰직-! 콰지지직···!!
뼈와 살이 마구잡이로 으스러지며 짓씹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장내를 울린다.
체구 강건하던 성인 남성 한 명을 통째로 씹어먹는 인피의 확장된 입과 볼의 모습이 가히 초현실적인 수준으로 끔찍하다. 한유진은 이미 늦었음을 직감하며 그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
수십 초를 더 넘게 천라진을 꼭꼭 씹어대던 인피가 몇 차례에 걸쳐 내용물을 꿀꺽꿀꺽 삼킨다. 그에 텅 비어 흐느적거리던 인피 안쪽이 조금이지만 채워지는 모습이다.
절로 속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한유진은 소모됐던 뇌룡의 힘을 보충시킴으로써 태세를 정비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치에 따라, 수선계 역시 정도(正道)와 마도(魔道)가 존재한다.
둘 다 선(仙)이 되기를 추구한다는 점은 같지만 그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판타지 식으로 치자면 정도의 수선자들은 백마법사이고 마도의 수선자들은 흑마법사인 셈이다.
하나 마도의 수선자들이 흑마법사와 다른 점이라면, 여느 판타지 속 흑마법사들이 악마와 영혼의 계약 따위를 맺으며 힘을 얻을 때.
마도의 수선자들은 처음부터 스스로 악마가 되는 길을 걷는다고 볼 수 있었다.
- 도우··· 어느 성역의 어느 천에서 오셨소?
천라진을 다 잡아먹은 인피가 어느 정도 정신이 든 것처럼, 보다 뚜렷해진 심언으로 유창하게 의사를 전해 왔다.
- 아니, 어디서 오셨는지 말할 필요 없소. 여기서··· 이 구렁텅이에서 나가는 방법을 아시오?
성역(星域)과 천(天).
대략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은 가지만 정확하진 않다. 그리고 이곳을 구렁텅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절대 원해서 온 것이 아니며 꼭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한유진은 대답 대신 상대를 가만히 살피다가 말했다.
"육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영혼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 그야 가죽뿐이니 당연하지 않겠소. 영혼 배아를 만들고는 있는데 영 쉽지가 않구려.
말하며 인피가 히죽 웃었다. 텅 빈 눈구멍과 입 안쪽에서 어둠 섞인 핏물이 흘러내리는 꼴을 한 채 말이다.
- 도우는 아무리 봐도 정도 수사인 듯하지만, 그래도 같은 수선자 아니겠소? 이곳의 선도가 뭔지도 모르는 버러지들보단 훨씬 더 가깝고 친근한 사이라 할 수 있지.
"······."
- 그러니 도우, 거래합시다. 여기서 나가는 길을 알려준다면 화신공법을 드리겠소.
화신기까지 익힐 수 있는 공법을 뜻함이다. 상대의 수준이 절대 낮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 아니지, 아니야. 그냥 지금 드리겠소이다.
그때 인피는 그렇게 말하더니 시커먼 어둠 가득한 입을 벌려 무언가를 토해냈다.
방금 전 천라진을 씹어 삼켰던 그 입구멍에서 유난히 새하얀 원통 모양의 옥간이 툭 튀어나와 허공을 날아온다. 어물술로 거리를 두며 그것을 받아 든 한유진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 흑야혼조공이라 하는데, 혹 들어본 적 있으시오?
그 순간.
콰릉-!
뇌룡에게서 뿜어져 나온 벼락이 옥간을 가루로 만들었다.
"법술로 만든 옥간은 별로 살펴보고 싶지 않군."
- ······그렇지, 그렇지.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
예전 한유진이 오행종 유적에서 살펴봤던 옥간들이 그렇듯, 옥간 제작은 아주 세밀하고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는 순수공예에 가깝다.
법술을 쓰면 더 쉽게 더 다양한 형식으로 정보를 저장할 수 있음에도 굳이 그런 방식으로 제작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법술이 들어가는 순간 정보를 저장하면서 함정을 같이 깔아놓기도 쉽기 때문이지.'
수선계에 음험한 법술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실로 당연한 이야기다. 조금 까다롭고 번거로워도 안전을 챙기는 것이 우선일 수밖에 없으니까.
- 한데, 아무리 그래도 화신공법을 살펴보지도 않고 부숴버리다니, 산수가 아니신 모양이오?
"대체 어쩌다가 여기에 그런 꼴로 떨어진 거요?"
- 허허허······.
웃음을 터뜨린 인피가 문득 한 걸음 다가왔다.
- 나도 기억이 온전치는 않아서······ 아마도 내 다른 신체가 이렇게 만든 것 같긴 한데······.
"다른 신체?"
- 열혼겁을 극복하고 있었지. 그런데······ 작은 사고가 좀 있었던 것 같소.
답해주던 인피가 다시 한 걸음 다가온다.
- 어쨌든 공법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걸로 거래합시다. 이건 어떠시오?
직후 인피의 입이 쩍 벌어지며 그 안에서 웬 새장 같은 물건이 나타났다. 흐느적거리는 두 손으로 그걸 받아 든 인피가 양쪽 입꼬리를 거의 귀까지 끌어올리며 웃었다.
- 한 번 보시겠소? 통천령보인데······.
통천령보라는 말에 한유진은 저절로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그 물건을 쳐다봤다.
바로 그렇게, 직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비어 있던 새장 안쪽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작고 뚱뚱한 인간의 형상이었고 핏빛을 띠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심연보다도 짙은 어둠이었다.
직후.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한유진이 몸을 떨었다. 멀쩡하던 눈동자가 새장 속에 자리한 무언가처럼 심연빛으로 물들더니 끝내 호흡마저 멈춰 버렸다.
- 허허허허······!
그리고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인피가 대소하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유진의 품에 안겨있던 무용이가 발버둥 치고 찍찍 크게 울면서 난리가 났지만, 여전히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또 다시 쩍 벌어진 인피의 입 안쪽에서 어둠과 혈광이 뒤섞여 만들어진 작은 아기의 형상이 튀어나온다. 한데 마치 어린아이가 대충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어설픈 모양새였다.
- 드디어 제대로 된 탈사(奪舍)를···!
그것이 격정에 찬 심언을 퍼트리는 순간.
빠콰콰쾅-!!
꽈콰쾅-!
함께 멈춰버린 상태로 무력화된 것 같았던 뇌룡이 갑작스레 벼락 폭격을 쏟아냈다. 스스로를 유지하던 힘마저 모두 방출하는 자폭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동시에 분명 두 눈이 비정상적인 어둠에 물들어 제압당했던 한유진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증발했다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멀쩡히 나타났다.
그가 드래곤 하트 제련을 시작하며 얻었던, 불과 얼마 전에서야 몽환유심(夢幻唯心)이라고 이름 붙이게 된 신통의 힘이었다.
- 무슨···!?
함정이었음을 전혀 예상치 못한 그 되다만 원영은, 미처 의문을 끝맺지도 못한 채 벼락 세례에 휩쓸렸다.
─!!!
형용하기 어려운 비명이 날카롭게 정신을 후벼파듯 울려 퍼진다. 하나 그 비명을 들은 한유진은 품속 무용이의 눈과 귀를 가려주며 단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을 뿐 멀쩡했다.
벼락 세례는 그저 한 번만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다. 되다만 원영을 꽁꽁 휘감으면서 모든 힘이 다할 때까지 족히 수십 초 이상 섬광과 굉음을 터뜨리며 위력을 투사했다.
그 모든 소란이 사그라들었을 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해치웠나?"
마법의 대사를 중얼거린 한유진은 한 손에 재차 뇌전계 법술을 그러모으면서 만일을 대비했다. 동시에 힘을 잃고 널브러진 인피와 그 근처의 새장, 그리고 장내 모든 구역을 신식으로 샅샅이 훑었다.
다행히 그 어떤 이변도 벌어지지 않았다. 새장 같은 물건 역시 비범한 느낌을 품고 있긴 했으나 직전처럼 위험한 현상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잔혼이라 말하기에도 부족한 찌꺼기 같은 존재였지만······.'
어쨌든 놈이 내뱉은 열혼겁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최소 원영기급 수사의 찌꺼기였으니 꽤 위험한 전투였다.
겉보기론 수월하게 이긴 듯하지만 실상을 되짚어보자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놈이 방심한 채 불완전한 원영을 드러낸 이유가 있었다. 그때 한유진이 당한 모습이 결코 가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짜로 당했었다.
단지 예전에 윤회성불사를 방문하기 전에도 확인했듯, 몽환유심 신통이 목숨을 구하는 데 아주 탁월한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이미 벌어진 현실마저도 미리 설정한 조건에 따라 몽환으로 대체할 수 있었으니까.
적이 가장 승리를 확신하며 방심하는 순간 상황이 꿈처럼 뒤바뀌는 것이다.
물론 만능이라고는 할 수 없고 상대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면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겠지만, 이번의 저 인피 찌꺼기는 그 정도 능력까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생각하는 사이.
여러 번에 걸쳐 위험 요소를 파악한 그가 인피를 어물술로 끌어와 허공에 펼쳤다.
볼수록 인상이 절로 찡그려지는 혐오스러운 물건이다. 무용이는 알아서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품에 얼굴을 묻으며 외면하는 행동을 보였다.
어쨌든 그 혐오스러움과는 별개로 상당히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끊임없이 피가 배어 나오던 법문법결의 흔적이 바로, 놈이 말했던 화신공법이었으니까.
심지어 대략 파악한 바에 따르자면 추후 다른 공법으로 전환하는 데도 별문제 없을 그런 최고 등급의 공법 같았다.
'역시 옥간은 함정이었겠군.'
어떤 이유로 자기 가죽에 이런 걸 새기고 다녔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공법 하나를 얻었다. 직접 배울 일이 없더라도 두고두고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법 큰 수확이다.
게다가 잘 분석한 다음 숨겨진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이걸 이원희에게 가르쳐도 될 것 같았다.
과연 마도의 공법답게 영성 깃든 어둠을 만들어 사역하는 방법이 실로 끔찍했지만, 바로 그 부분을 이원희의 각성 능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딱 거기서 그는 만족했다.
인피에 추가적인 여러 기능이 있는 듯했고, 새장도 정말로 통천령보인지 아닌지 불확실했지만.
'아무리 찌꺼기라 해도 원영기급 존재의 물건들이라면 방심할 수 없지.'
혹시 모를 일이다. 또 다른 잔혼 같은 게 숨어서는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
하여 그는 인피와 새장을 한곳으로 모아 화령조술을 펼쳤다. 나타난 커다란 불새는 두 물건의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선 가공할 열기로 그것들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과연 비범한 물건들답게 한참을 버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원래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음이 분명한 데다가, 다루는 주인마저 없는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희미한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인피가 잠시 버둥거리더니 재로 불타올랐다. 그 옆의 새장도 마구 덜컹이면서 기묘한 공명음을 내다가 끝내 쇳물로 녹아내려 완전히 망가졌다.
그 광경을 보자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아주 옅은 불안감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유진은 한참을 더 불로 그것들을 지지고, 그 위에 벼락을 몇 번이고 쏟아낸 다음, 어지술을 활용해 모든 흔적을 땅속 깊이 묻어버렸다.
이어 장내를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어지술을 크게 일으켰다.
콰르르르릉···!!
묵직한 땅울림과 함께 반구형 공간이 흙더미로 완전히 매몰되는 것을 확인하며 그는 계단을 올랐다.
이제 암영마교의 장서각과 보물고를 방문할 차례였다.
* * *
놀랍게도 저항이 있었다. 전혀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버려가며 적을 막으려는 자들이었다.
경고하는데도 비키지 않는다면 소원대로 해 줄 수밖에 없다.
한유진은 재차 만들어 낸 뇌룡을 올라탄 채로 암영마교의 본단을 한 차례 순회하며 저항하는 자들을 일망타진했다.
워낙 힘의 차이가 나는지라 그저 학살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전의 가득한 놈들을 멀쩡히 놔준다면 어떤 식으로 보복을 가하려 들지 몰랐으니 필요한 조치였다.
무림에 괜히 자비를 경계하라는 격언이 있는 게 아니다. 딱히 선하지도 않은 놈들이니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려줄 이유도 없었고.
그는 모든 저항을 분쇄하면서 몇 이들에게 환몽심탈술을 펼쳐 장서각과 비고의 위치를 파악해 냈다. 위치만 알면 터는 일이야 저물대가 있는 만큼 금방일 수밖에 없다.
해당 위치로 찾아가 보니, 눈치가 빠른 몇 소수의 인원들이 열심히 비급과 재물 등을 빼돌리고 있던 터라, 그걸 추적해서 제거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응징과 수확 챙기기를 마친 후.
그는 갈 때만큼이나 신속하게 금련장원으로 복귀했다.
이어서 하루도 쉬지 않고 다시 움직이려 했다.
드래곤 하트의 기경 단계 제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황실의 무림조정사가 암살을 사주했던 일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한데 그때 독준성이 나섰다.
"스승님, 맡겨주신다면 제가 확실히 처리해 보이겠습니다."
"네가? 어떤 식으로?"
"스승님께서 단신으로 암영마교를 거의 멸문시킨 일이 알려진다면, 제가 정도맹에서 일하던 당시의 소통구로 정치적 압박을 넣기 충분합니다."
한유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황실만큼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이 또 없습니다. 만약 스승님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물론 깔끔하게 일을 매듭지으실 수 있겠지만······."
"불필요한 충돌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렇습니다. 제가 나서는 것만으로도 책임자에 대한 확실한 처벌과 보상을 받기 충분합니다."
그렇다면야 굳이 직접 나설 이유가 없다. 한유진은 허락한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독준성은 매우 자신 있어 하며 그렇게 장원을 잠시 떠났다.
'본격적으로 소문이 퍼지면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은 대문파들도 찾아오겠지.'
이제는 정말로 거래를 마저 이어가면서 드래곤 하트 제련에만 신경 쓰면 된다.
그는 머지않아 돌아올 독준성에게 보상을 주기 위해, 그리고 잡일을 미리 처리하는 겸 암영마교에서 얻은 각종 영식들로 연단술을 펼쳤다.
슬슬 이 무림 세계에서 할 일들이 몇 남지 않았다.
72화. < 백년해로의 길 >
독준성의 일 처리는 과연 훌륭했다.
갑작스레 한 가지 소문이 무림을 살짝 소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무려 종2품 관리자인 무림조정사 도무원이 암영마교와 결탁하고서 황실의 이익을 침해한 사실이 발각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동시에 그 가족과 친척들마저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오지로 쫓겨나 버렸다.
마침 한유진이 암영마교를 단신으로 거의 멸문시켜 버린 일이 알려지면서 세인들은 도무원의 몰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뒷배가 사라진 탓에 정치적 암투에서 밀렸다는 식으로.
좀 더 정확한 사정을 아는 이들만이 황실마저 눈치를 보게 만드는 금련무존의 위세에 감탄할 뿐이었다.
실로 그럴만하긴 했다.
고금을 통틀어 암영마교처럼 강력했던 집단이 몇 없다. 한데 그 강력한 집단의 본거지에 정면으로 쳐들어가선 무슨 잡배 소굴을 털듯 완전히 박살 내버린 것이다.
소문이 점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고,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이들이 늘어나자 한유진에 대한 새로운 별호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것은 어쩌면 고금제일인일 수도 있는 이에 대한 별호였기에 거창할 수밖에 없었다.
옥한성에서 수련하며 기세만으로 모두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일, 그러면서 원력심공이라는 신공절학을 창시해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그것을 거래하였던 일 등이 더해져.
여러 후보들이 난립하다가 결국 무극지존(武極至尊)이라는 별호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지존이라는 칭호의 뜻을 고려했을 때 이렇듯 공공연하게 별호로 쓰인 것은 실로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무극이라는 칭호 역시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자칭했다면 설령 그가 생사경의 고수라 해도 광오하다며 욕이나 먹었을 터다.
혹자는 이것이 금련무존과 연을 맺은, 이제는 무극지존으로 불리게 된 한유진과 거래했던 여러 세력들이 전혀 트집을 잡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나 그것은 본질을 벗어난 해석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어느 세력도 감히 그를 화나게 해서 멀쩡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암영마교를 쳐부숨으로써 명예마저 얻었기 때문이다.
결국 실력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무림의 격언이 또 한 번 증명된 셈이었다.
한편 독준성의 출신과 이번에 황실에 정치적 압박을 넣으며 이용한 소통구가 정도맹의 것이라는 점 때문에 사도맹에서 뭔가 수작을 부릴 법도 했으나.
대체 누가 어떻게 알았고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살수 조직 극야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면서 그대로 자중지란에 빠졌다.
살수 조직은 그 특성상 같은 사파 세력들 사이에서도 많은 혐오와 증오를 받는다. 그들이 의뢰를 받으면서 딱히 정사마를 가리지 않는 탓이다.
아무리 원래 단합이 잘 되지 않고 개인과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삐걱대기 일쑤인 것이 사파라지만, 그럼에도 살수 조직은 특히 심하게 선을 넘는 경우가 허다하여 기회만 되면 쳐 없애려는 이들이 아주 많다.
그렇게 한유진은 손도 안 대고 코를 풀었다.
이미 무심겁 해결에 대한 확신을 얻은 지금, 굳이 귀찮게 놈들을 찾아가서 이런저런 실험 따위를 해 볼 필요가 없었다. 단지 두 번째 세 번째 무정살왕 같은 놈이 찾아오는 일을 막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일 년 정도가 흐르자 무극지존이라는 칭호를 모두가 받아들인 채 아무도 의문 따위를 제기하지 않게 됐다.
다시 일 년 정도가 흐르자.
이미 충분히 퍼져나간, 당시 암영마교 본단에서 벌어졌던 일과 그곳에 남은 흔적에 대한 소문이 또 다른 새로운 소문을 낳아 퍼지기 시작했다.
무극지존이 생사경 위의 새로운 더 높은 경지, 일명 '자연경'에 오른 절대고수라는 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이 하늘의 힘인 천뢰(天雷)를 자유자재로 다루겠느냐면서 말이다.
바로 그때쯤.
그가 현백파의 청류백봉 은미령과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또 한 번 강호무림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 * *
한유진은 많은 고민을 했다.
더는 애매한 거리두기를 하지 않게 되었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은미령과의 감정이 점점 더 깊어졌다.
그녀는 알면 알수록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특출났다. 동시에 항상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잔잔하지만 끊임없이 사람을 감동시키기까지 했다.
하여 저절로 간절해지는 바람과 달리.
그녀의 선도 수행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암영마교에서 얻은 영식들로 정성껏 영단을 제조해 주었음은 물론, 황실에서 선물이랍시고 보내온 수령이 천 년 넘은 영식들까지 전부 동원했음에도 그랬다.
안 그래도 재능이 부족한 상황에 영기 농도까지 희박한지라 영단 없이는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그 영단의 재료들도 이런 환경에서 자란 것들인 탓에 효능이 썩 대단치 못했다.
한유진은 이미 깨달은 상태였다.
수선계의 많은 재능 부족한 수사들처럼, 그녀 역시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법혼기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억지로 시도한들 그 결과가 좋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입문기 수사라고 칭할 정도는 되었고 영단을 많이 복용한 덕에 수명이 늘긴 했다. 원력 무공을 수련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수명 증가량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을 터다.
앞으로 대략 백 년.
현재 은미령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남은 시간이었다.
사실 그건 충분히 긴 세월이다. 본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한유진으로선 생각하기에 따라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럼에도 그는 너무나 아쉽기만 했다.
어째서 부담이라곤 전혀 없이 아쉬울 수만 있는가 하면.
본격적인 드래곤 하트 기경 단계 제련을 시작하면서 수명이 크게 증가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했을 때도 결단기에 오르지 않은 채 최소 오백 년 이상 살 수 있으리란 합리적 예측이 가능했다. 심지어 그건 마지막 체경 단계 제련을 완전히 제외하고서 계산한 것이었다.
평범한 법혼기 수사의 수명이 이백 년 정도임을 고려했을 때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다.
또한, 여기서 백 년 세월 정도는 어차피 소모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체경 단계 제련까지 완전히 마치려면 대략 그 정도가 걸릴 것 같다.'
무려 연허기급 드래곤 하트다. 이런 어마어마한 물건의 제련을 이삼십 년 만에 후딱 다 끝낼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된다.
어쨌든.
다르게 생각하자면 아직 백 년 가량이나 남은 터라, 그는 벌써부터 고민하고 걱정하기보단 좋은 것만 생각하며 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결혼을 결심했다.
거기엔 서광가후의 의견도 작은 참고가 됐다. 바로 결혼식을 통하면 아직까지도 거래하러 오지 않은, 체면에 발목 붙잡힌 여러 대문파들에게 좋은 핑계를 마련해 줄 수 있으리란 아이디어였다.
본격적인 식을 올리기 전에 필요한 약혼과 납채 등의 의례적인 절차를 거쳐.
마침내 금련장원에서 결혼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규모 자체는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으나 참여한 면면들이 엄청났다.
우선 은미령의 소속 문파인 현백파에선 무려 문주가 직접 혼주를 맡아 둘의 결합을 더없이 환영했다.
정도맹과 사도맹의 주요 인사들이 거진 다 참석하여 축하 선물과 답례품이라는 형식으로 겸사겸사 무공 거래를 완료한 것은 물론.
황실에서조차 사람을 보내 선물을 빙자한 두 번째 배상을 치렀다. 이번엔 확실하게 황실비고 입장권이 포함된 배상으로, 그것에 섞인 여러 정치 계파들 간의 복잡한 수싸움 따윈 얼마든지 무시해 버릴 수 있었다.
복잡한 의식 절차와 시끌벅적한 연회가 이어진 후.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는 한유진조차 약간의 피로를 느꼈다. 수사의 향상된 지능이 아니었다면 오늘 실수를 남발하며 하객들에게 큰웃음을 선사했을지도 모른다. 은미령이 몇 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너무 능숙하게 보이지 않으면서 창피를 느끼지도 않을 수준으로 잘 조절해 냈다.
그는 그렇게 은미령과 부부로서의 행복한 첫날밤을 보냈다.
서로에게 첫 배우자이면서 이미 깊은 사랑을 느끼는 상태에서의 교감이었던 만큼 진실로 황홀한 행복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길 가히 육도윤회 속 천락도의 행복과도 어느 정도 비견될 만했다.
하여 자연스레, 둘 다 수사이기도 한지라, 그 첫날밤이 생각보다 길게 며칠이 넘도록 이어진 것은 작은 해프닝일 뿐이었다.
* * *
구웅······!
주먹만 하게 작아진 드래곤 하트를 손에 쥔 채 앉아 수련하는 한유진으로부터, 또한 동시에 그 드래곤 하트로부터 은은하면서도 묵직한 영기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제련 도중 간간이 발생하는 조각의 과정이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한유진 본인에게서도 그러한 파장이 뿜어져 나온다는 점이었다.
현재 그는 뜨거우면서도 차갑고, 몸이 터질 것처럼 벅차면서도 그 어떤 힘으로부터도 견뎌낼 수 있을 듯한 굳건함을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제련이 완성되어 갈수록 영혼에서 만들어 내는 법력의 수준이 분명하게 향상되고 있음도 같이 느껴졌다. 이 제련 단계의 특성상 태극회원공을 본격적으로 함께 수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력이 만들어질 기미는 안 보이지만······.'
이미 변화하고 있는 법력의 특성이 여느 원력보다도 낫게 느껴지는 만큼 당연한 현상이다.
다행히 그러면서도 태극회원공에 포함된 신통 원력대수(元力大手)에 대한 감각은 조금씩 느껴지는 듯했다.
아마도 이렇게 얻게 될 신통은 원래 이름과 달리 원력을 쓰지 않게 되겠지만,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을 터다.
반나절이 넘도록 그렇게 수련한 그는 마침내 삼경조화결과 태극회원공의 운용을 마치며 눈을 떴다.
은미령과 결혼한 지 대략 서너 달 정도가 지났다.
그때 이후로 수련 시간이 변하진 않았지만 일과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으니, 거의 먹지 않던 저녁을 빠짐없이 챙기게 된 것이다.
가볍게 차림새를 정돈하며 수련실을 나선 그는 장원 한쪽의 본채로 향했다. 그러면서 혹시 무용이 녀석이 있나 주변을 살폈지만 모습이 안 보였다.
한유진이나 은미령이 수련할 때는 방해하지 않고 혼자서 잘 놀지만, 이때만 되면 둘 중 한 명에게 뽈뽈뽈 찾아가는 게 녀석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은미령 차례인 것 같다.
도착한 본채 건물의 복도를 너무나 익숙하게 지나 식당에 들어서자 과연, 여자 잡역인들과 함께 직접 움직여 식사를 준비하던 은미령을 볼 수 있었다.
무용이는 식탁 한쪽에서 제 앞의 그릇에 음식이 채워지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은미령 차례가 아니라 음식 차례였군.'
속으로 피식 웃은 그는 은미령의 손을 잡으며 잡담을 시작했다. 수련 성과에 대한 것을 가볍게 물었고, 아침에 나갔다 온다더니 무엇을 샀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 광경이 실로 화기애애하여 모범적인 부부관계의 표본이라 할만했다. 나이 어린 여자 잡역인들은 알게 모르게 곁눈질하면서 결혼에 대한 환상을 무럭무럭 키워가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이제 식사하지."
모든 준비가 끝나고 한유진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무용이는 건방지게도 이미 제 몫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중이었지만 귀여우니 용서가 됐다.
그때 불현듯.
수저를 들고 한 입 뜨려던 은미령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지며 멈칫했다. 한유진은 별생각 없었으나 법혼기 수사의 인지력으로 그 장면을 감지했고, 계속 별생각 없이 음식을 입에 넣고 씹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얼른 입속 내용물을 꿀꺽 삼켰다.
"당신 혹시······."
"아."
둘이 거의 동시에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오히려 부부 사이였기에 요즘 잘 하지 않게 된 행동을 했다. 신식으로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는 뜻이다.
그렇게 확실히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혼을 하면서 자식에 대한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 리 없다.
피임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고, 부부가 되면 당연히 자식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남들의 수군거림을 듣게 되는 것이 이 세상 문화인 만큼 더더욱.
그는 자식들 때문에 이 세상에 영원히 발 묶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다 계획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막상 은미령이 임신했음을 알게 되자 복잡해지는 심사를 미처 다스리지 못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속마음이었고 겉으로는 환하게 웃으며 티 내지 않았다.
"상공, 제가······."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에 한 손을 올리면서 굉장히 감격에 차 하는 은미령의 모습을 보면 무조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축하해."
"맞는 겁니까? 진료를··· 의원을 불러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수사가 되어놓고선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물론 입문기 때는 신식이 없으니 그렇게 확신을 얻고 싶을 법도 하다.
"당신이 원한다면 불러줄 수도 있어."
"으음··· 아니요. 상공께서 맞다고 하셨으니 분명하겠지요."
그녀는 여전히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식사하려던 차에 갑자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생각해 보니 의원을 부르긴 해야 할 것 같아."
잠시 그런 은미령을 부드럽게 웃으며 바라보던 한유진이 말했다.
"뭘 먹으면 좋고, 뭘 먹으면 안 좋고, 그런 것 정도는 알아둬야 할 테니까."
그는 즉시 소리높여 근처에 있을 잡역인 한 명을 불렀다. 그리고 얼마 전 서광가후에 의해 임명된 장원 집사를 호출했다.
객관적으로 유능한 자였으니 의원 불러오는 일을 맡겨도 전혀 문제가 없을 터였다.
* * *
그날 이후로 대략 두 달이 조금 넘게 흘러갔을 무렵.
은미령이 유산했다.
73화. < 자는 백능 >
금련장원의 분위기가 크게 침울해졌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은미령이 행복해했던 만큼이나, 한유진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인들 전부가 축하해줬던 만큼이나 큰 침체였다.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행복해했는지. 머잖아 태어날 아기를 위해 스스로의 재봉술 솜씨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일일이 되짚어 회상하는 일은 상처를 후벼파는 짓일 뿐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이라면, 부부가 모두 수선자로서 몸과 마음이 강했기에 이 슬픔이 건강 악화로 이어지진 않았으며, 또한 이 세상엔 원래 죽음이 만연한지라 조금이나마 면역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늦은 밤.
정원의 한쪽 정자에서 한유진은 연못 수면에 비친 달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은미령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온 참이었다.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일 뿐이라서는 아닐 거야.'
처음엔 그것도 원인 중 하나로 의심했지만, 날이 지날수록 점점 아니라는 생각이 짙어졌다.
오히려 그런 이유라면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이라면, 겨우 새로운 생명이 하나 태어나는 일을 구현하지 못할 리 없다.
'내가 각성 능력으로 이 세계에 온 이방인이라서?'
이건 좀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보기에 이곳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듯하지만, 아주 미세한 유전적 부분에서는 일부 차이가 있어 아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
지구의 여러 잡다한 지식들 중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무려 98.8%나 일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작 1.2%의 유전자 차이만으로 인간과 침팬지만큼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신의 유전자가 이곳 사람들과 0.1% 미만으로 차이가 나더라도, 아이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의심 가는 요소가 있었다.
'내가 드래곤 하트를 제련하고 있어서.'
정확히는 그 과정에 들어섬으로써 일정 부분 순수한 인간을 벗어났기 때문에.
우선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혼과 육체는 별개가 아니다. 여기서 영혼은 심(心)이자 기(氣)이고 육체는 체(體)이자 기(氣)다.
요컨대 심기체가 별개가 아니라는 뜻이며, 이는 삼경조화결로 드래곤 하트를 제련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것이 비록 첫 번째인 심경 단계였을지라도 기와 체에 영향을 미치며 후속 단계를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심경 단계에서부터 법력 향상과 수명 증가를 직감했겠는가?
하여 떠오르는 것은.
카사르녹스의 드래곤 하트를 얻을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중 대마법사와 그가 서로를 도발하고 조롱하기 위해 나눴던 대화 내용이었다.
'인간의 영육으로 탄생하는 놈들 주제에, 라는 말에 그저 알의 생존율을 높일 뿐이라고 답했었지.'
바꿔 말하자면 인간의 영육 없인 알의 생존율이 매우 낮다는 뜻이다.
'그것이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종족의 약점인가······.'
그리고 한유진 자신은 그런 종족의 드래곤 하트를 갖고 제련하며 동화 과정을 밟아왔다.
긍정적 영향을 받은 만큼 부정적 영향도 일부 함께 딸려왔을 수 있다. 세상사 이치가 마냥 좋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언제나 그렇듯,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나는 평범한 방식으론 자식을 갖기 힘들겠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 듯했다.
부작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설령 어떤 식으로든 얼핏 짐작했더라도 확신하진 못했을 터다. 그런 상황에서 은미령과 아이 갖는 일을 어떻게 계속 피했겠는가.
'애초에 드래곤 하트 제련을 위해 온 세상이니 그 일을 미루지도 못했겠지.'
은미령과 이런 관계로까지 발전할 것을 예상하고 계획을 짤 수도 없었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건 실수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불행한 사고였다.
그렇게 밤의 적막에 휩싸여 얼마를 조용히 있었을까.
문득,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에 그는 눈을 떴다. 다름 아닌 집사가 은미령 직속의 시비 한 명을 대동하고서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소박하게 차려진 주안상과 함께.
"······."
잠시 침묵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곧, 도착한 그들이 조용히 예를 표하며 그것을 내려놓았다.
"마음은 고맙다만 별로 먹고 싶지 않구나."
그런 한유진에게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인께서 보내셨습니다."
"···지금 말인가?"
"아닙니다. 어제 저를 불러서 당부하셨습니다."
분명히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나왔었는데, 어제나 그 이전에 문득 잠에서 깨서는 그가 밖으로 나갔음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본인이 더 힘들 상황에서 오히려 나를 챙기다니.'
필시 이 주안상에 포함된 것이 단순한 위로만은 아닐 것이다. 언제까지고 침울하게 있을 수는 없으니, 그녀 자신도 힘을 내서 이겨내겠다는 그런 의미도 담겨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물릴 수 없지. 감사 인사는 내가 직접 전하겠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집사가 시비와 함께 물러가는 모습을 보자니 불현듯, 한유진은 자신이 그들에게 거의 관심을 준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문제라기에도 애매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신과 은미령을 다방면으로 많이 도와주고 있음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신경 써줄 필요가 있을 듯했다.
되짚어 떠올려 볼수록, 그저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들이라기엔 그들의 태도에서 많은 정성이 엿보였으니까.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 * *
장원의 침울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걷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삼 년 정도가 흘렀을 때.
서광가후가 절정의 경지에 올라서며 더는 후기지수라고 칭할 수 없는 고수가 됐다. 원력심공을 통한 성취였기에 평범한 절정 고수보다 기량이 훨씬 뛰어나기도 했다.
그때쯤 한유진은 그를 무림으로 내보냈다. 그는 서광세가의 일원이었으므로 언제까지고 이곳 금련장원에 눌러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간간이 그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매우 흡족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는 동기 같은 관계였지만 이제는 사모가 된 은미령도 비슷한 기분인 듯했다.
독준성은 여전히 수련하면서 옥한성을 관리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 법혼 승화율을 보면 죽기 전에 법혼기에 오르기는 충분할 듯했다.
그는 은미령과 달리 진영근 중위권에 속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으니까.
반면 은미령은 수행에 여전히 거의 진전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별 낙심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아이를 갖는 일에도 전혀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한유진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사정을 대략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무용이의 옷을 더 자주 많이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그에 무용이도 슬슬 원주인인 한유진이 모종의 위협을 느낄 만큼 그녀와 많은 시간을 붙어있었다.
하여 날이 좋던 날.
정원에서 가볍게 다과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던 때, 그가 무심코 말했다.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무용이는 인간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을 거야."
"···예? 그게 정말인가요?"
품속 무용이와 놀아주던 은미령이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무용이 같은 짐승의 수련 경지 이름은 인간 수선자와 조금 달라."
특히 원영기를 화형기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다른데, 이는 요족 또한 마찬가지다.
이 화형기라는 뜻이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화형할 수 있다는 그 뜻이었다.
은미령은 인간으로 치자면 무려 원영기씩이나 되어야만 무용이가 화형할 수 있으리란 말에 잠시 아득해지는 듯했지만, 그것을 말한 한유진의 태도에 곧 미소를 띠었다.
"그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하시는군요?"
"그냥 시간이 문제지."
그리고 그는 시간이 아주 충분했다. 이제는 은미령도 모르지 않는 사실이었다.
"상공."
문득 그녀가 조금 엄해진 것 같은 기색으로 그를 불렀다.
"···왜?"
"무용이의 이름 뜻이, 정말로 무예와 용맹이라는 뜻의 무용(武勇)이 맞나요?"
"···맞아."
"정말로요?"
"일부는."
그에 은미령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상공께서 무용이를 매우 귀여워하고 아낀다는 걸 압니다. 하나, 그러면서 가끔 하시는 말씀이······ 쓸모가 없다고 하시니까, 나중에 인간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무용이가 그 뜻을 알게 되면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음······."
마냥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에 한유진은 조금 난처한 기색이 됐다.
"그게 나쁜 의미에서 지어준 게 아니야. 나한테 너는 전혀 쓸모가 없어도 괜찮다는 의미로 지어줬으니까."
결국 처음으로 그 진정한 의미를 입 밖에 냈다. 다행히 은미령은 예상보다 더 놀랍고 감동적이라는 반응이었으나.
아주 잠시만 그랬다.
"진의가 매우 좋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래도?"
"나중에 무용이가 사람의 모습이 되어서도 그렇게 불릴 것을 생각하니······."
"흠."
"제가 자(字)를 지어줘도 되겠습니까?"
자(字)를 쉽게 설명하자면, 본명 외에 불리는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본명에 대해 갖는 소중한 느낌 때문인지 뭔지, 이러한 관습은 지구에서도 존재한다. 당장 그 유명한 삼국지만 보더라도 모든 인물들이 자를 갖고 있다.
유비는 현덕, 관우는 운장, 장비는 익덕 같은 식으로.
한반도의 조선에서도 자를 사용했다. 그가 기억하기론 이황의 자는 경호였고 이이의 자는 숙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자를 쓰는 경우가 그만큼 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드물긴 해도 아예 없진 않다는 게 중요했다.
"생각해 둔 게 있어?"
아마도 은미령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미리 준비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능(白能)이 어떨까 싶습니다."
"백능이라······."
대략 밝고 순수한 재능과 그만큼 명확한 능력을 갖춘 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녀의 별호 청류백봉(清流白鳳)과도 뜻을 공유하는 면이 있다.
무용이라는 원래 이름과 완전히 상반되는 감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
'그 자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될 때쯤이면······ 무려 화형기인데, 명확한 능력 최소 하나쯤은 갖고 있겠지.'
만에 하나 뭐 없어도 괜찮다. 귀여움도 사실 따지자면 능력 아니겠는가? 딱 귀여움만 갖고서 생존한 동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능력이다.
"좋네. 그걸로 하자."
한유진의 수긍에 은미령은 매우 기뻐하면서 무용이를 쳐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들었니? 네 자가 정해졌단다."
찍! 찍-!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무용이는 그냥 좋다고 울면서 코를 씰룩였다.
녀석은 꼴에 그래도 영지가 아예 없진 않다는 듯, 은미령과 통명어수결로 연결된 것도 아니면서 많은 말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동하곤 했다. 가끔 엉뚱한 짓을 하기도 했지만 그게 다 웃기고 귀여워서 괜찮았다.
실로 평화롭고 행복한 한때였다.
* * *
하루하루 수련에 충실하면서 주변인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노라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렇게 대략 칠팔 년 정도가 지났을 때.
서광가후는 많은 활약을 통해 옥면검룡이 아닌 옥면검성으로 불리고 있었다. 여러 상황에서 초절정 경지에 달하는 실력을 몇 번이고 증명하며 그렇게 불리기 충분한 명성을 쌓았다.
독준성은 섬뢰검 대신 옥한청위라고 불리게 됐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무극지존을 대신해 옥한성 지역 일대를 지배하다시피 하면서 새롭게 붙은 별호였다. 더는 뇌전을 닮은 검술을 쓰지도 않았고 말이다.
또한 슬슬 무림 곳곳에서 한유진이 창시한 원력심공으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 나타나 그 위력을 떨쳐 보이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무인의 모든 경지가 반 단계씩 파워업한 느낌을 주는, 느리지만 뚜렷하게 강호무림을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그 충격의 여파가 점점 더 선명해질수록 금련장원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한유진은 이미 몇 년 전 황실비고까지 방문하여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였음에도 원력심공의 거래 기준을 딱히 높이지 않았다. 많은 부분을 고려했을 때 그것이 가장 무난한 처세였기 때문이다.
만약 높아진 안목을 그대로 기준 삼아 거래의 문턱을 높였다면 그 불만이 어떤 식으로 터져 나왔을지 모른다.
조금 더 자비롭게 군다고 하여 딱히 손해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위험이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알면서도 괜히 그런 귀찮음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한유진은 갑작스레 은미령과 여행을 가겠노라 선언했다. 며칠 정도 걸릴 짧은 여행이 아닌 강호무림 전역을 돌아보는 아주 오래 걸릴 여행의 선언이었다.
급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었고 오직 재미와 추억 쌓기를 위해서였기에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나 금련장원의 집사를 포함한 유능한 이들이 전부 달려들자 그리 복잡할 것도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초창기엔 아주 조용하게 이뤄졌다. 십 년 가까이 움직인 적 없던 무극지존이 이렇듯 갑자기 움직일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곧, 한유진이 여행을 다니면서도 드래곤 하트 제련을 멈추지 않은 탓에 그들의 행적이 아주 빠르게 소문으로 퍼졌다.
물론 단지 소문이 퍼져 조금 귀찮아졌을 뿐 위험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소문 때문에 몇 번 재밌는 사건이 벌어져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여행길을 조금이나마 풍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였다.
"무극지존-!! 나 운해파의 청운용검 태건이 비무를 신청한다-!!"
한 작은 마을의 가장 괜찮은 객잔에서 휴식을 취한 뒤 떠나려던 무렵.
웬 젊은이가 나서더니 그렇게 외치면서 검을 뽑아 겨눴다.
74화. < 흘러가는 세월 >
'또라이 한 명쯤은 만날 때도 됐지.'
가장 먼저 한유진이 한 생각이었다.
'내 활약상이 벌써 잊혀진 건 아닐 테고······.'
십 년 정도가 흘렀으니 꽤 긴 시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천지분간 못 하는 애송이의 도전을 받아야 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다르게 해석해 볼 여지가 더 컸다.
'내가 아주 대협객스러운 느낌이라도 줬나 보군.'
악명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과연 이런 도전을 받았을지 실로 궁금해진다. 원래 대부분의 또라이는 '진짜'가 아닌 법이라, 내심 이리저리 따져보고선 또라이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요컨대 눈앞의 저 태건이란 놈은 자신이 크게 다치거나 죽지 않으리라 여기면서 명성 따위를 얻어보려는 심산일 수 있었다.
그때 뒤편에 있던 집사가 한유진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일개 후기지수일 뿐이지만 소문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운해파의 실전됐던 상승무공, 청운용공의 복원에 결정적 단초를 제공해 청운용검이라는 별호를 얻었다지요."
"오, 그런가?"
단지 가소로우면서 조금 귀찮기만 하던 마음에 살짝 흥미가 동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귀하디귀한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뜻이었으니까.
"무극지존! 고작 나 따위의 도전에 무엇을 망설이는가?!"
한데 태건이라는 놈이 그 잠시를 못 참고 재차 고함쳤다.
제 딴에는 그게 용감하고 기개 넘치는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듯한데, 주변에 꽤 많이 몰려있던 사람들이 전부 얼어붙어서는 눈치만 보는 광경이 조금도 눈에 안 들어오는 것 같다.
새삼 다시 모습을 살펴보니 이제 막 스물이 넘었을까 싶었다. 동시에 오직 성공과 떠받듦만을 경험해 본 미숙함이 철철 넘쳐흘렀다.
"오냐."
그래서 한유진은 녀석이 가장 원치 않을 방식으로 상대해 주기로 했다.
"딱 3초만 버티면 네가 이겼다고 쳐주마."
직후.
그의 눈에서 자색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놈의 눈이 풀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어선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꺼이꺼이 울기 시작해서, 주변인들이 죄다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거 참 웃기는 놈일세?"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면서 비웃음을 흘리고, 또 누군가는 아주 대놓고 껄껄 웃으면서 조롱을 더했다. 자연히 장내의 분위기가 전부 그런 식으로 물들었다.
마치 이때가 아니면 언제 운해파의 떠오르는 신성을 깔아뭉개보겠느냐는 심보가 섞인 것 같았다.
그때 한유진이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들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우쳤다면, 나중에 금련장원을 찾아와라. 네 재주를 발휘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진짜로 오든 말든 큰 상관이 없다.
하여 가볍게 말하면서 마차에 오른 그는 여전히 꺼이꺼이 울기 바쁜 놈을 지나쳐 그대로 여행을 재개했다.
잠시 뒤.
거리가 조금 벌어지자 옆자리에 앉은 은미령이 물어 왔다.
"육도윤회인가요?"
"아니."
답하며 한유진은 피식 웃었다.
"환몽심탈술이었어. 하는 짓을 보니까 대략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듯해서, 원하던 명예 대신 창피를 주는 김에 겸사겸사 교훈도 줬지."
"교훈이라면, 어떤 식으로요?"
"재능도 뭣도 없는 가난한 농민으로 태어난 경험을 시켜줬달까."
법술을 펼친 시간이 매우 짧았고 크게 정성들여 펼칠 이유도 없었기에 대충대충 넘어간 부분이 많은 환상이었지만.
그래도 기본 골자는 살아있었고 육도윤회의 효과도 필요한 만큼 더해졌으니, 태건 같은 녀석이 느끼기에는 거의 실제로 그런 삶을 겪은 것만큼의 충격이었을 터다.
"찾아올까요?"
"글쎄."
별 중요하지 않은 일인지라, 관련하여 조금 더 대화를 나누던 둘은 곧 여행에 관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 * *
사실 한유진은 여행을 가자고 한 다른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명소를 둘러보고 추억을 쌓는 일도 물론 중요했지만, 중간중간 그는 혼자서 주변의 드높은 산맥이나 깊은 숲속 같은 장소를 열심히 뒤지곤 했다.
혹시 수령이 만 년 이상인 영식이나 내단을 형성했을 정도의 영수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나 아쉽게도 성과는 전혀 없었고, 뭔가 단서 따위도 전혀 없어서 무작정 시간을 쏟아붓기가 실로 애매했다. 은미령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낼 희망을 찾겠답시고 정작 지금 함께하는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도 온갖 명소들을 둘러보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으니 원래 목적은 차고 넘치도록 달성한 셈이었다.
강호무림은 절대 비좁지 않다. 일직선으로 주파하는 건 금방일지 몰라도 구석구석 살피면서 움직이려면 몇 년으로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여행은 한 번에 다 끝내버리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한 지역을 몇 달에 걸쳐 둘러보며 꼼꼼히 즐긴 다음에는 금련장원으로 돌아가 일이 년 정도 쉬었다. 그렇게 몇 년 간격으로 여행이 두세 차례 이어졌다.
당연하게도 그러는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유진과 짧은 인연이 있는, 태양문의 장로 출신이자 정도맹의 맹주였던 백화검존 한무정이 천수를 다했다. 워낙 입지 넓은 인물이었던 터라 강호무림 전체를 술렁이게 만드는 죽음이었다.
안 가도 될 정도의 사이였지만 그는 은미령과 함께 장례식에 참여했다.
정도맹과 태양문에서 매우 고마워했는데, 그 행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는 단지 각성 능력으로 방문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수명을 다해 죽는 지인이 나타났기에 그냥 마음이 움직였을 뿐, 다른 어떤 의도도 없었다.
이어서 안타깝게도.
고용된 이후부터 정성을 다해 각종 업무를 맡아와 주던 장원 집사가 돌연 병사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자는 도중 갑자기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실 이미 60대 중반의 나이였던 만큼 이 세계 상식으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집사는 딱히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고 수선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한유진이 원인을 신식으로 찾지 않았더라면 심장 문제로 죽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몰랐을 터다.
'원래 이런 것이 범인의 삶이었지······.'
건강해 보이던 60대가 심장병으로 급사하는 일은 현대 지구에서도 별로 드물지 않다. 그러니 이런 문명 수준의 세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오래 일해 온 잡역인들 중에서도 노환으로 은퇴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 장원의 안주인이자 입문기 수사인 은미령이 필요할 때마다 치유술을 베풀어주지 않았더라면 병사한 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집사의 빈자리는 곧 새로운 집사로 채워졌고 잡역인들의 자리도 그러했으나.
한유진은 원래 존재하던 이들의 빈자리가 계속 느껴지는 듯해 실로 기분이 묘했다. 특히 정원 정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예전에 은미령의 당부를 받아 주안상을 가져다주었던 그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곤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꼭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소식만이 있진 않았다.
한창 무림에서 명성을 드높이며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서광가후는. 은령설화라는 별호를 가진 서단유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했다.
당연히 그렇게 되기 전부터 그는 금련장원을 주기적으로 드나들면서 관련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한유진과 은미령은 결혼식이 열리는 날 서광세가를 방문해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다.
'벌써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다니.'
은미령과 결혼한 지 십 년도 더 지났음을 새삼 자각하며 한유진은 온갖 감정들을 느꼈다.
금련장원에 돌아와서는 자연히 독준성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게 되었는데.
그는 법혼기에 오르고 난 뒤 생각해 보겠다며 웃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는 가망이 있었고 수명이 백 년 이상 증가하게 될 터인지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어 대략 일 년 후.
서광가후와 서단유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무려 쌍둥이였고 백 일이 지나도록 건강하여 잔치가 벌어지게 됐다.
이번에 한유진과 은미령은 참가하지 않았다.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게 이 세계의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잔치가 끝난 후 서광가후가 직접 부인과 함께 아기들을 데리고 방문하여 스승에 대한 예를 표했다.
"대체 왜 미안해하는 거냐?"
"아닙니다. 저는 그저······."
육도윤회 신통으로 감정을 읽은 한유진이 웃으며 하는 말에 서광가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옆의 서단유 역시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상당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괜히 그러는 게 더 무례한 일이야. 충분히 축하받아야 할 경사이니 앞으로 더는 관련된 일로 눈치 보지 말거라."
"예······ 스승님. 제자가 무지하였습니다."
그렇게 서광가후의 경사를 함께 축하해 주었을 무렵.
결국 오지 않겠구나 싶었던 그 또라이, 운해파의 청운용검 태건이 장로 한 명과 함께 금련장원을 방문했다.
* * *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한유진은 잠시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 현재 옆에 없는 은미령도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상대의 달라진 모습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태건은 더없이 정중하고 겸손한 태도로 공수하며 허리를 숙였다.
"무극지존께 후학(後學)이 인사 올립니다."
"기색이 완전히 변했군. 거의 영혼이 바뀐 수준이야."
반쯤 놀리듯이 하는 말에 태건의 얼굴이 붉어졌다. 뒤늦게 그날의 일을 전해 들었을 운해파 장로도 꽤 창피해하는 듯했지만, 그는 태건을 대신하여 나서거나 하진 않았다.
"그날의 제 부끄러운 실수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날 무극지존께서 신묘한 수단으로 내려주신 가르침 역시 잊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하고서도 제각각 다른 것을 얻기 마련이지. 다 네 능력이자 복이니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것 없다."
그 말에 태건은 오히려 더 감명받은 기색으로 연신 자신의 잘못을 사죄했다.
한담이라 할 수 있을 그런 대화가 지나간 후, 한유진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내가 너를 찾아오라고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상승무공 복원에 단초를 제공한 적 있다면서?"
"운이 좋아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냥 운이라면 곤란한데······ 내가 원력심공을 기반으로 새로운 무공을 창시하는 중인데, 네 도움을 한번 받아볼까 싶었거든."
그 순간.
태건은 물론 그 옆의 장로마저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제, 제게 그런 대단한 기회를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생각처럼 그렇게 거창한 일은 아닐 거다. 그저 독특한 발상이 좀 필요하다는 이야기니까."
이어 한유진은 자신이 여태 짬짬이 만들어온 원력심공을 바탕으로 한 무공에 대해 간략히 논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과연 돌아오는 대답들이 전부 만족스러웠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한데 공짜로 끼워주기가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라서······."
그렇게 말하며 한유진이 장로 쪽을 쳐다봤다.
"태건을 내 무공 창시에 끼워주는 대신 운해파의 생사경 비술을 한 번 구경하고자 하는데, 가능하겠소?"
"물론 가능합니다."
의외로 장로는 고민조차 없이 바로 답했다.
"무극지존께서 무림의 온갖 비급들을 섭렵하시는 것이 새로운 무공 창시를 위해서임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 일에 저희 운해파의 미래 주역이 참여할 수 있다면, 한 번 보여드리는 일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시원하니 좋구려. 유출할 일은 없을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오."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술술 진행되며 풀리는 대화에 한유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무림에서 얻게 될 수확이 조금 더 건실해질 듯했다.
75화. < 가장 중요한 매듭 >
무극지존의 새로운 무공 창시 작업에 운해파의 태건이 끼어들게 되었다는 정보는 곧 알만한 사람들에게 전부 알려지게 됐다. 애초에 그들이 금련장원을 방문할 때부터 움직임을 딱히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아직 무극지존과 거래할 것이 남은 대문파와 명문세가들이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금련장원을 찾았다. 모두 무공 창시에 나름 재능이 있는 인물들이 포함된 채였다.
덕분에 한유진은 무림의 몇 안 되는 신식비술을 거의 다 살필 수 있었는데, 전부 육도윤회보다 낫기는커녕 간신히 신식을 깨우쳐 최소한의 공방 능력을 겨우겨우 얻는 정도였다.
그 신식을 깨우치는 일 자체도 매우 어려운 느낌이라서 영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그는 이렇든 저렇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는 처지였던지라 대가를 제시한 이들을 흔쾌히 작업에 끼워줬다.
단지 어중이떠중이를 손쉽게 걸러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했다. 객관적으로 귀중한 대가를 제시하고서 온 이들이라면 그만한 능력과 자신감을 갖췄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십 년 정도가 흘렀을 때.
황제가 노환으로 죽어 이래저래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주로 황실의 정치적 암투로 인한 파장이었는데 한유진에겐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황제의 죽음보다도 이 무림 세계에서 지내며 저절로 이름과 별호를 알게 된 많은 노고수들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또한 새로운 후기지수로서 이름을 알리는 젊은이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됐다. 강호무림이 여태 대략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 왔는지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었다.
다시 십 년 정도가 흘렀을 때.
마침내 원력심공을 기반으로 '완성'된 무공, 원력무도(元力武道)가 창시됐다.
지구에 보급할 때의 원활함을 위해 입문편과 숙달편으로 나뉘어 창시된 이 무공은, 처음 영기를 느끼고 다루는 기심공에서 시작하여 끝내 원력을 만들어 다스리면서 스스로를 자양할 수 있는 원심공으로 나아갔고, 육체만을 사용하는 격투술과 검(劍) 도(刀) 창(槍) 봉(棒) 추(錘) 등을 쓰는 무기술이 포함됐으며, 전투 중 거리를 조절하거나 위험을 피하고 기동성을 발휘할 때 쓰이는 모든 보법과 신법과 경신법이 빠지지 않았다.
부가적으로는 전음술과 귀식술 등의 유용한 기술들도 수록되어 실용성을 더했다.
'이것을 최강의 무공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터다.'
원심공에 대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특히 그렇다. 사실 그 원심공에 대한 부분 역시 이미 무림에 원력심공을 보급한 만큼 아주 우위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최선의 무공일 수는 있다. 특히 지구처럼 무공이 부재하던 세계에서는.'
실로 이 세계 강호무림의 정수를 지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 농축시켜 냈다고 볼 수 있었으니.
마침내 카르마 획득을 위한 대업 하나를 완성하고야 만 것이었다.
한유진의 그런 무공 창시를 짧지 않은 세월에 걸쳐 도왔던 운해파의 태건이라든가, 그밖에 다른 이들도 매우 만족하며 작별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이 원력무도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면서 많은 성장을 이룬 덕이었다.
그러는 사이.
독준성은 이미 법혼기 승격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 법혼 승화율 4할을 달성하고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성취를 위해 정진하고 있었다.
"욕심을 내는 건 좋지만 네 나이가 많음을 경계해라. 육체와 영혼과 정신 중 어느 하나라도 쇠락하는 느낌이 든다면 더는 늑장을 부려선 안 된다."
"예, 스승님."
그렇게 제자를 챙기면서 다른 제자인 서광가후도 챙겼다.
그는 몇 년 전 무난히 화경에 올랐고,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벌써부터 차기 무림십존으로 불리고 있었다. 쌍둥이 자식들은 어엿한 청년이 되어 둘 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무인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각각 서광유성과 서광벽운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들에게 있어 한유진은 사부(師父)였다.
어릴 때는 아주 살갑게 굴더니만, 자주 만나지 못해서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서먹해하는 것이 느껴져서 그는 괜히 살짝 섭섭해지는 게 스스로 좀 웃겼다.
이후로 오 년 정도가 지났을 때.
마침내 독준성이 성공적으로 법혼기에 올라 진정한 수사라고 불릴 자격을 얻었다.
한유진은 원래 빌려주었을 뿐인 오행검을 완전히 선물하면서 축하를 전했고,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며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독준성은 법혼기에 오르고서도 끝없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했다. 동시에 그런 가르침을 내려줄 수 있는 한유진에게 아주 크고 깊은 존경심을 새삼 다시 느끼는 모습이었다.
그때 은미령은 법혼 승화율을 1할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밖에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십 년 정도가 재차 유유히 흘러서.
마침내 드래곤 하트 제련의 두 번째 단계, 기경 제련이 끝났다.
새로운 신통이 나타났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미 법력이 액화(液化)를 이루고 고화(固化)의 단계로 접어들어 명명백백한 법혼 후기의 수사가 되었다.
특히 그렇게 고화 단계로 접어든 법력 자체의 질이 여느 법혼기 수사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뛰어나서, 마침내 드래곤 하트 외단법을 완성했을 때 대체 어디까지 향상될 수 있을지 절로 기대하게 만들었다.
실로 세월이 무상하다는 느낌이 들게도, 그때쯤 한유진보다 나이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몇 없었다. 게다가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지구에서보다 여기서 더 오래 살았구나.'
이곳이 각성 능력을 통해 방문한 세계임을 한시도 잊은 적 없지만 어떤 부분들에서는 지구보다 더 고향같이 느껴졌다.
여담으로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옥한성의 이름이 변화해 가는 것이었다.
단지 그가 머무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옥한성이 어느 순간부터 무극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원래 명칭과 혼용되고 있었지만 십 년 이십 년 정도만 더 흐르면 아예 무극성으로 굳어져 행정명까지 변하지 않을까 싶었다.
동시에 이곳이 수련을 위한 성지처럼 여겨지면서 많은 무인들이 머물게 되고, 자연스레 성의 규모가 조금씩 커지는 모습마저 보였다.
금련장원 역시 무극장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린지가 십 년도 더 넘었다. 편액을 바꾼 지는 몇 년 안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십 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은미령은 확연히 나이를 먹은 외모가 됐다. 그녀의 모습이 변해가는 것에 맞춰 한유진도 몽환유심 신통을 사용해 모습을 맞춰갔다.
오직 무용이만이 이 세계에 처음 발 디뎠던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외부적인 사건이라면 정도맹과 사도맹 사이에 벌어진 큰 싸움이 있었다. 전쟁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싸움이었는데, 옥한성 지역, 그러니까 무극성 지역에는 그 여파가 거의 밀려오지 않았다.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무인들이 많이 몰려오면서 무극성은 실로 누구나 인정하는 수련의 성지가 됐다.
그에 따라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직 죽지도 않은 한유진이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 취급받으면서 일부 장소에 사당까지 만들어지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그가 직접 나서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 유행 아닌 유행이 대체 어디까지 퍼져나갔을지 실로 모를 일이었다.
황실에서 웬 공주가 찾아오더니 부마도위가 되어달라고 부탁한 일은 별로 논할 가치가 없는 황당한 사건일 터다.
정도맹과 사도맹이 벌인 싸움의 여파가 완전히 사그라들기까진 대략 칠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바로 그 무렵.
암영마교의 몰락으로 잔뜩 위축됐었던 마도 세력이 재차 기지개를 켜며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직 한유진이 살아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용감한 건지 뭔지, 암영마교의 정통 후예임을 자처하는 혈련교라는 이름의 세력이 주축이 되어선 위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과거 암영마교의 이공자였던 자가 씨앗을 뿌려 만들어 낸 집단이었다.
'이공자라면 그놈 아니었던가?'
문득 한유진이 떠올리길, 그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시점 서광가후와 은미령을 잡으려고 온 음마고주가 이공자를 언급했었다.
서광가후는 흑사혈녀가, 은미령은 이공자가 점찍었다면서 말이다.
며칠 가볍게 고민하던 그는 역시 가볍게 움직여 그 혈련교가 자리한 강동 지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새로운 마도천하를 여는가 싶었던 자칭 암영마교의 정통 후예 혈련교가 어이없이 몰락해 버렸다.
몸소 찾아간 한유진을 기본적인 예의만 차려 대했어도 그런 참사까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우습게도,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상태였다.
모두가 전설적 존재로 취급하기에 어느새부턴가 그의 활약상마저 반쯤 전설처럼 취급받는 상황이었다.
사실 충분히 그럴만도 했다. 오십 년도 훌쩍 지난 과거의 일 아니겠는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오십 년이면 다르게 표현해서 무려 반백 년이다. 무슨 영상자료 같은 것도 없는 세계인 만큼 스스로 합리적이라 믿는 이들이 무극지존의 힘을 의심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번에 다시 증명되고야 말았다.
마치 완전히 새롭고 낯선 절대고수가 출현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 강호무림이 전율했다.
거의 모든 세력에서 새삼 무극장원을 찾아와 인사했으며 무림십존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지존'에 대한 예를 표했다.
심지어 황제마저 직접 행차하려다가 황실의 모든 대소신료들이 기를 쓰고 말려 겨우 제지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그를 대신하듯 황태자가 찾아와 매우 겸손한 태도로 인사한 후 돌아갔다.
원래도 성지로 여겨지던 무극성의 성장에 다시금 탄력이 붙는 일이었다.
독준성은 그때쯤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했고, 서광가후는 이제 손자들이 장성하여 증손자를 여럿 볼 기세였다.
한유진 개인으로서는 드래곤 하트의 마지막 체경 단계 제련이 느리지만 무난하게 아주 잘 진행되어 가는 충실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다시 십 년이 지나고.
또다시 십 년이 지나고.
계속해서 세월이 무상하고 무심하게 흘러갔다.
어느 순간부터 은미령이 더는 침상에서 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 * *
정갈하고 조용한 침실 안.
한유진은 침상에 누운 채 숨을 쌕쌕거리는 은미령의 손을 옆에서 조심히 잡아주었다. 양측 모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손이었다.
은미령은 눈이 침침한 와중에도 실로 오랜 세월 곁에서 함께해 온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부군."
대략 삼사십 년 전부터 상공 대신 쓰기 시작한 호칭이다. 아마도 늙어가는 외모와 함께 변화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말하시오. 항상 곁에 있으니."
"이제서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말과 함께 은미령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조금 흐려졌다.
"실로 부군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무엇이 미안하단 말이오? 영문을 모르겠는데."
"자식을 보지 못해서······ 제가 부족하여, 부군을 홀로 외롭게 만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끔 했더랬지요."
"전혀 아니오. 이미 몇 번이고 말해 주지 않았소."
일상처럼, 하지만 일상에서 나누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대화가 오간다.
그러다 문득 한유진이 지나가듯 물었다.
"내세를 믿으시오?"
"사후세계 말씀이십니까?"
"아니, 다음에 태어나는 삶 말이오."
"그런 게 있다면······ 그때 다시 부군 같은 이를 만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작게 웃으며 그런 은미령의 손을 토닥인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내세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소. 하나, 꼭 내세에서만 다시 만나라는 법은 없지."
"무슨 뜻이십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은미령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제가 부군께 반한 이유를 아십니까?"
"음······."
짐작하는 바가 있으면서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구명의 은혜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가후에게 보여주신 자비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렇게나 마음씨 넓은 사람이라면 함께했을 때 더없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다행히 그런 제 생각이 아주 잘 맞았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미소를 되찾았다.
"저는 정말로 이 강호의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인이었을 겁니다.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도요."
찍-! 찍!
그때, 함께 옆에서 조용히 있던 무용이가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은미령의 미소가 더욱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백능이 있어서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녀석은 지금도 은미령이 지어준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 안다는 듯 굉장히 걱정스러우면서도 침울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그런 무용이를 쓰다듬어주고 싶어 하는 듯했는데, 한유진이 그 움직임을 감지하고 도와주어서야 힘들게 가능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부군 곁에 항상 백능이 있을 테니까요."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 같소."
"저는 이 삶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또한 과분하기까지 하니, 더 이상 부군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은미령은 부드럽게 말했고 한유진은 그만 눈을 감았다. 그 와중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부군께서 그때로 돌아가 저를 다시 만난다고 하여도······ 과연 이번처럼 좋을 수 있을지 의문일 만큼, 저는 행복했습니다."
"혹여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소? 말 그대로, 이 강호무림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오."
"이제 보니 집요한 면도 있으셨군요."
희미한 웃음기 어린 타박이다.
"그런 말까지 하시다니, 원래도 알았지만 부군께선 실로 선인이십니다."
"나는 아직 그렇게 불리기에 한참 모자란 자요."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불로장생하는 진짜 선인이 되시겠지요. 그렇게 성장하시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보내실지 가늠이 되십니까?"
짧게 말을 끊은 그녀가 힘겨운 와중에도 단호하게 말했다.
"설령 부군께서 모종의 수단을 마련하신다 한들 그것이 짐이요, 그 수단으로 옆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그저 지켜만 보는 것이 또 짐이요, 앞으로 부군께서 만나시게 될 더 좋은 여인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또한 짐일 것입니다."
"그런 말 마시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지 않소."
"제 스스로 그렇게 느낄 것이란 뜻이었습니다. 제 나이가 몇인데 그 정도를 예견하지 못하겠습니까."
한유진은 나오려던 탄식을 간신히 참아냈다.
"저처럼 부족한 여인네의 곁에서 이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다정다감하게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정말로 더없이 만족합니다."
문득 피곤함을 느끼는 듯 그녀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저 더는 상공께 옷을······ 백능에게 옷을 지어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
잠시 후,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느리고 규칙적으로 변했다. 대화하는 일조차 힘겨워 그만 잠에 빠진 것이었다.
한유진은 잠든 은미령의 손을 매만지고,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이불 등을 정돈해 주면서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그가 여전히 옆에서 지켜보는 와중 은미령은 조용히 숨을 거뒀다.
* * *
장례는 거창하지 않게, 하나 필요한 모든 격식을 갖춰 엄숙하게 치러졌다.
한유진은 문상객들을 맞이하면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기이하게도 그를 마주한 모든 이가 짙은 애도를 느끼면서 저절로 더욱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게 됐다.
며칠에 걸쳐 이어진 장례를 모두 끝마친 뒤.
그는 은미령의 방에서 무용이와 함께 짐을 정리하다가 문득, 그녀가 자신에게 말도 없이 남긴 선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법 큰 상자였다.
조심히 열어보자 그 안에는 한유진 자신에게 맞춰 지어진 다양한 옷들이, 그리고 무용이의 옷들이 가득했다.
또한 알 수 없게도 어린아이의 것에서부터 어른이 되기 전까지의 이에게 맞춰 지어진 듯한 옷들이 아주 많았다. 전부 여성의 것이었고 누구의 것인지는 바로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무용이가 화형할 때를 위한 옷들임이 분명하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옷들을 쓰다듬다가, 상자 안 한쪽에 놓인 편지를 펼쳐본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76화.< 현실로 귀환 >
아직 이 강호무림에 남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은 은미령과 비슷한 나이대로서 수명 역시 비슷한 서광가후에 대한 일이었다.
녀석은 벌써 십 년도 더 전에 현경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생사경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나 그 경지에 오른다고 해서 특별히 더 건강해지진 않는 터라, 지금 와서 보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유진이 서광세가에 방문했을 때 서광가후는 이미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더는 노인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고 원래의 젊은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기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환몽심탈술을 살짝 발휘하여 서광가후에게 연락을 넣어야 했다.
잠시 뒤 후다닥 튀어나온 가문의 한 젊은이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정중하게 그를 안내했다.
서광가후는 혼자 있지 않았다. 가문의 가장 웃어른으로서 침대에 누워 거동을 거의 못 하는 상황임에도 많은 이들을 만나고 있었다. 침실이 넓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니었다면 너무 심하게 북적였을 것이다.
그때 안내를 받아서 온 한유진이 들어서자 열 명이 넘는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대체 누구이길래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렇듯 초대를 받아서 온 건가 싶은 기색이었다.
"허허허···!"
바로 그때 서광가후가 한유진을 보고는 쇠약한 상태임에도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그래."
"사모님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가지 못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무슨······ 지금 네 상황엔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 개의치 말거라."
"곧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젊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통찰이다. 한유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오가는 대화를 통해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주변인들 사이에서 조용한 난리가 일었다.
서광가후의 쌍둥이 아들 서광유성과 서광벽운은 이미 노인의 모습이었고, 손자들은 중년의 모습이었으며, 증손자들도 충분히 장성한 모습이었다.
한유진이 서광유성과 서광벽운에게 사부인 만큼 그 후손들에게는 당연히 사조가 된다. 하여 사실 여기서 무극장원을 방문해 무극지존을 만나보지 않았던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유진의 젊은 모습을 실제로 본 것은 서광유성과 서광벽운이 유일했으며, 그마저도 그들이 어릴 때의 이야기였다.
다들 상황을 받아들일수록 경악한 기색으로 변해갔다.
무극지존이 청년과 다름없는 젊음을 되찾았다는 건 실로 강호무림을 뒤집어엎기 충분한 대사건이었으니까.
하나 이어지는 대화가 더 충격적이었다.
서광가후는 다시 아이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사실, 스승님이 단순한 무인이 아니라 선인이라는 걸 주변에 많이 떠들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여태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이가 한 명도 없었는데······ 이제는 제 말이 조금도 허풍이 아니었음을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나는 선인이 아니라 그렇게 되길 바라는 수행자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네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 소문이 어찌 퍼져 나가든 굳이 정정하진 않으마."
서광가후는 다시 웃음을 흘리다가 불현듯 몇 번의 기침을 했다. 그리 격하지 않은 기침이었지만 천수가 다해가는 이의 쇠약함이 느껴졌다.
"스승님······ 저를 거듭 구해 주신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항상······ 매우 감사했습니다. 도저히 이 감사를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까지의 웃음이 무색하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어조다. 문득 한유진은 그가 엎드려 울던 그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항상 네 도움이 고마웠다. 그래서 네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구나."
말하면서 한유진은 몇 권의 서책을 꺼내 들었다.
바로 가르침의 선택지를 주었던 그때 서광가후가 선택하지 않았던, 그 수선 공법과 기초 법술들에 대한 서책들이었다.
"네게 작별 선물로 주는 것이니 어떻게 처리하든 관여치 않으마. 가문에 남겨도 좋고 무덤까지 가져가도 좋다. 원하는 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끝내 서광가후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다 늙고 쇠약한 제자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한유진은 얼른 화제를 전환했고 곧 다시 웃음이 찾아들었다.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는 그런 대화였다.
그는 너무 많은 시간을 뺏지는 않았다.
서광가후에겐 가족이 많았고 진짜 마지막 시간은 그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 마땅했으니까.
장내를 나서는 그의 뒤를 많은 이들이 따라붙어 배웅했다.
서광유성과 서광벽운처럼, 인연이 있는 이들과도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작별을 고한 그는 한순간 홀연히 구름처럼 사라져 버림으로써 모두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전적으로 서광가후가 즐거워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다음으로 찾아간 이는 독준성이었다.
사실 그와는 같은 무극성 무극장원에 머물면서 이미 많은 대화가 이뤄졌기에 긴 작별 인사가 필요치 않았다.
이 영기 농도 희박한 세상에선 이미 한계에 오른 듯했지만, 그래도 원영기까지 수련할 수 있는 태극회원공을 진즉 선물해 준 상태였다. 직접 수련하면서 깨달은 자잘한 노하우들을 더한 채로 말이다.
"마지막 부탁을 해도 되겠느냐."
"얼마든지 분부하십시오, 스승님."
"일 년 정도는 내 부인의 무덤 근처로 누구도 오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내 부인의 무덤이 가능한 한 오래 멀쩡했으면 좋겠구나."
"제자가 기필코 그 분부를 지켜내겠습니다."
놀랍게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던 독준성이 살짝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더없이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스승님의 크나큰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 강호무림에 스승님의 족적이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그리고 부디 영생대도를 이루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인사였다.
그렇게.
인연 깊은 모든 이들과 작별을 고한 한유진은, 장원 가장 안쪽에 마련된 은미령의 무덤으로 향했다.
마저 마음을 정리하고 이 세계에서의 끝맺음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무덤이 최대한 오래 보존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법을 직접 설치했고, 딱 한 발짝 남았던 드래곤 하트의 마지막 체경 단계 제련을 완수했다.
체질이 어떻게 얼마나 변했는지는 결단기에 오른 후 다시 살펴도 될 일이었다. 이미 경지가 법혼 후기의 극한에 이른 상황이었으니까.
무심겁 또한 당연하게도 이미 극복한 상태였다.
무심겁은 분명 수선자에게 있어 큰 재앙이자 시련이다. 하나 성공적으로 극복해 냈을 때의 대가 또한 분명하다.
언제나 그렇듯, 행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며 위기는 곧 기회인 법이라.
이제 그는 더 이상 시간의 흐름 따위에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없을 터였다.
청운천주의 강호무림.
이 세계에서의 마무리를 지을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그는 하루만 더 머물기로 하고는 잠시 무덤 근처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매우 드물게도 잠에 빠져서는, 아주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꿈을 꾸었다.
노을 진 하늘 아래, 처음으로 옷을 선물해 주며 얼굴을 붉히던 은미령의 젊고 아름다운, 그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오른 꿈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공교롭게도 하늘이 딱 그때처럼 예쁘게 노을 져 있었다.
"······갈 시간이다, 무용아."
정말로 마지막임을 직감한 녀석은 이미 은미령의 무덤 위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런 녀석을 품으로 데려와 토닥이고 쓰다듬으면서 그가 말했다.
″편지에 적혀 있었지 않느냐. 추억을 회상하면서 부디 애도에 젖지 말고 행복하기만 해 달라고, 그래야 본인도 기쁘지 않겠느냐고."
찍, 찍···!
마저 녀석을 달래주면서 주변을 정돈한 그는 천천히 움직여 지둔술을 발휘했다.
그렇게 은미령의 무덤 안 바로 옆자리, 만약 그가 이곳에서 죽었다면 함께 묻혔을 그런 자리에 어지술로 스스로의 관을 만들었다. 동시에 간단한 진법을 같이 구성하여 신식으로 감지되지 않게끔 만들었다.
'내가 떠난 후 이 세계가 꿈처럼 사라져 버릴지, 아니면 그저 재방문할 수 없을 뿐 계속 이어져갈지, 나는 아직 모른다.'
바로 그래서 이렇게 행동했다.
그냥 무덤 옆에서 '탈출 법술'로 떠나버린다면, 이 세계가 존속할 경우 훗날 독준성이 무덤을 관리하러 찾아왔을 때 그와 무용이의 시신을 보게 되지 않겠는가?
은미령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고, 스승의 영생대도를 기원했던 제자에게 실망을 안길 수도 없으니, 이것이 아주 약간의 후회조차 남기지 않을 최선의 조치다.
그렇게 마련한 자리에 누워 그는 자신과 무용이를 대상으로 동시에 법술을 시전했다.
실로 오랜만에.
세상이 어둠에 잠기는 감각이 찾아들었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신비롭게 떠오르는 은빛 문자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어둡지만 포근한 대기 공간.
정신을 차린 그는 묵묵히 수확물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보낸 시간이 매우 길었기에 선택할 수 있는 것들도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중 꼭 가져가야 하는 것들은 의외로 몇 없었다.
드래곤 하트 제련의 성취와 극한까지 오른 법혼 후기의 수련 성과를 수확물로 선택하는 데 가장 많은 카르마가 소모됐다.
은미령의 유품과 선물을 선택하는 데는 거의 카르마가 들지 않아 다행스러운 마음일 뿐이었다.
혹시 빠트리는 것이 없도록 두어 번 재차 확인하며 수확물 선택을 마친 그는, 문득 눈에 들어온 은미령의 편지를 다시금 펼쳐 읽어봤다.
어느 순간 저절로 깊은 한숨과 함께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벌써 다시 보고 싶구려, 부인······."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는 대기 공간을 벗어나 현실에서 깨어났다.
지구의 대균열 안, 거점요새의 숙소 침대 위였다.
* * *
꽤 오랜 시간을 지구에서의 기억을 되새기고 현실감을 일깨우는 데 써야 했다.
특히 말투나 행동거지 등에 신경 써서 교정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이곳에서 그는 능력이 뛰어나고 젊은 S급 헌터였지, 강호무림의 전설 무극지존이 아니었으니까.
'해야 할 일들이······.'
우선 카르마를 쌓는 일들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
꾸준히 괴물 사냥을 이어가면서 마나스톤을 보수로 받고, 각성초 보급을 준비하고, 진행되고 있던 지식 보급 계획에 원력무도를 더하면서 챙기면 된다.
다음으로는 이원희에 대한 일이 떠오른다.
강호무림을 갔다 오기 전엔 제자로 받을지 말지 결정을 못 했었는데, 이제 와 다시 보니 그렇게 어린 천재를 제자로 받을 수 있다는 건 실로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종말 후 지구와 관련하여 영원의 여신교에 대한 일이 있다.
이것은 당장 급히 뭔가를 행할 필요는 없고 그저 머릿속 한구석에 넣어놓으면 충분했다.
또 그 다음으로는······.
'결단기에 올라야겠지.'
자연스럽게 무용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면서 그는 이런저런 일들을 계속 떠올렸다.
해야 할 일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은.
잠시 대균열 밖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마저 현실감을 회복하면서 계획을 정비할 겸 말이다.
77화. < 한가로운 휴식 >
원래 휴가를 갔다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일에도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한데, 막상 이야기를 위해 찾아간 부단장실에서 박세룡을 마주하자 알 수 없게도 모든 일을 척척 알아서 해 줘왔던 독준성이 떠오르면서 문득 충동이 일었다.
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원력무도를 미리 한글로 정리해 둔 서책과, 각성초 씨앗 일부와 그 육성법 및 효능에 대한 한글 설명서가 적힌 상자를 꺼내 건네고 말았다.
마치 허공에서 물건들이 툭툭 튀어나와 건네지는 듯한 모습에 박세룡은 놀라면서도 일단 그것들을 받아들어야 했다.
"제가 간밤에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매우 긴 '간밤'이었고 실상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지만 한유진은 그런 식으로 운을 띄웠다.
당연히 강호무림 세계를 방문하기 직전 박세룡이 자신을 수하로 받아달라는 식으로 말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저로서도 좀 더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제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 그렇단 말씀은······."
박세룡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말을 더듬었다. 갑작스러운 상황과는 별개로, 왜인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질이 확 변한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려웠으나 이전까지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위엄 같은 게 느껴진다.
'아니······.'
위엄이라는 표현은 얼핏 비슷하지만 알맞지는 않았다.
점잖음과 엄숙함을 통한 모종의 위세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이유 없이 마땅히 공경해야 할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풍겨온다.
특히 눈을 마주칠 때가 그랬다.
그런 박세룡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유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들을 같이 보급하려고 하는데, 제 대리인으로서 일을 좀 추진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이능관리국의 사무관 오태민 씨와 의논하시면 아마도 일이 더 편할 겁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박세룡이 물었다.
"보급의 목적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저 돈 때문에 하시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음."
실로 핵심을 찌르는 중요한 질문이었기에 한유진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제 각성 능력에 대해 짐작해 보셨었지요? 그걸 좀 더 잘 활용하려면······ 제가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편이 좋겠지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터다. 아직까지 한유진 자신조차 카르마라는 에너지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했으니,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이에게 어찌 명쾌한 설명을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나 박세룡은 의문이나 의심을 표하기보단 순순히 납득하면서 알겠다고 답할 뿐이었다.
"돈도 본래 목적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많이 벌면 좋습니다. 제가 마나스톤이 필요하거든요."
"그것도 각성 능력과 연관되어서입니까?"
"네. 이 정도면 대략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성공적으로 잘 해내신다면······."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어 말했다.
"아직 보급을 결정하지 않은 지식을 알려드리지요. 그거면 일반적인 S급 헌터를 압도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선생님처럼 말씀이십니까?"
말하고서 박세룡은 호칭 때문에 아차 하는 기색이었지만, 의외로 한유진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그때 그 환상 속에서 봤던 제 능력 정도는 무리없이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확실히 기회다. 리스크조차 그리 크지 않은.
판단을 마친 박세룡은 아주 진지한 기색으로 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결과를 만들어보겠습니다."
* * *
'진영근 상위권 정도 재능에······ 나이가 좀 많지만 이미 S급 헌터로서 영기에 친숙하니, 법혼기에 오르는 건 문제없겠지.'
한유진의 박세룡에 대한 평가였다. 진영근 상위권이라면 중위권 수준이던 독준성보다도 더 나은 재능이다.
완벽축기를 이루는 건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추후 어떻게 도와주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여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각성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팍팍 성장하면서 각종 수확이 많은 만큼, 거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던 강호무림 세계에서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균열 밖으로 나온 그는 체감상 너무나 오랜만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상에 젖어야 했다.
'이런 게 무림 세계에 있었다면 사진과 동영상을 많이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법혼기 수사로서 향상된 기억력은 추억을 생생히 회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스마트폰에 쌓인 연락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읽고 처리하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만약 이능력을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연락하지 않았을 사람들을 일일이 차단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눈에 걸리는 것은 '가족'의 메시지였다.
정확히는, 평생 먹을 눈칫밥을 다 얻어먹었던 그 친척집 작은아버지의 연락이었다. 무려 아버지라는 작자의 근황이 포함된.
"허허······."
습관적으로 노인처럼 웃은 그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삭제한 후 차단했다.
메시지 내용 자체는 아주 조심스러워서 트집 잡을 데가 없었지만 시기를 따져보면 의도가 심할 정도로 뻔하다. 만나서 직접 면박을 줄 가치도 없었다.
'양심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연락하진 말았어야지.'
기분이 약간 저조해진 그는 얼른 박희원에게 연락했다. 자신에게 선협의 존재를 알려줌으로써 큰 도움을 준 그 친구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어느 인테리어 좋은 한우 전문점에서 만나게 된 녀석은, 막상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칠 때까지도 살짝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존나 뭐랄까, 세상이 나를 상대로 몰카하는 기분이야."
그러더니 밑반찬이 다 나왔을 때쯤에야 좀 정신을 차린 듯하다.
"웬 몰카?"
"내 친구가 갑자기 S급이라니, 이게 몰카가 아니면 뭐임?"
"뭘 새삼스레. 이미 연락도 했었잖아."
"너 S급인 거 밝혀지고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 아니, 근데 내가 질문 타이밍을 좀 놓치긴 했는데."
말하면서 녀석의 시선이 테이블 한쪽에 당당히 자리한 무용이를 향했다.
"쟨 뭐냐 대체? 신종 토끼야?"
"토끼 족제비라고 부르긴 해."
"처음 들어보는 동물인데, 원래 뭐 안 키우지 않았었어?"
"최근에 입양했다."
한유진은 말하면서 밑반찬 몇 종류를 무용이 몫의 앞접시에 덜어줬다. 그걸 냠냠 먹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박희원이 다시 물었다.
"여기 애완동물 출입 되긴 해?"
"몰라."
"···몰라?"
"아무도 태클 안 걸면 그만이지."
마침 고급 한우 전문점인만큼 개인실이었던 터라 남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몽환유심으로 관련없는 자들의 이목을 가리고 있는 덕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박희원은 여전히 할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밑반찬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음, 맛있네. 역시 출세한 친구 두니까 이런 데를 다 와보고, 아주 좋아. 저번에는 김치찜이나 얻어먹었었는데 씨발."
"그게 욕까지 할 정도였어?"
"감탄사야 감탄사."
가볍게 배를 채우는 사이 고기가 나온다. 고급 음식점답게 종업원이 옆에서 전부 구워주려고 했으나, 한유진이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내보냈다. 괜히 대화에 방해받는 느낌이 싫었기 때문이다.
치이익···!
고기 구워지는 소리에 무용이가 눈을 떼지 못한다. 간간이 그런 녀석을 힐끔거리던 박희원이 말했다.
"귀엽긴 한데, 뜨거운 데 갑자기 달려들면 어떻게 해?"
"똑똑해서 안 그래. 설령 그래도 괜찮고."
"괜찮다고?"
"쟤 생긴 건 저래도 A급 헌터랑 비비거든."
"···뭔 소리야?"
"보통 동물이 아니란 소리지."
말하면서 한유진은 아직 자르지 않은 고기를 집게로 들어올리며 통명어수결로 뜻을 전달했다.
퉤-!
그에 무용이가 경금검기를 뱉어냈다. 그 금색 빛줄기는 깔끔하게 고기만 자른 후 허공에서 씻은 듯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박희원의 얼빠진 표정을 본 한유진은 거의 완전히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으면서 낄낄 웃었다.
"뭐, 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겨."
"아니, 이걸 어떻게 그냥 넘기라고!"
흥분하는 녀석에게 대충 대균열 비슷한 데서 주웠노라고 둘러댔다. 그런 행위가 법적으로 가능하느냐에 대해서는 어찌어찌 뭉개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어진 대화는 자연스레 대균열에 대한 것이었다.
왜 각성하자마자 그곳으로 갔는지, 가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박희원은 궁금한 게 많은 듯했고 한유진은 소홀하지 않게 썰을 풀어줬다.
그러는 사이 고기를 두 번 정도 추가 주문했고 비싼 술도 두어 병 주문해 반 이상 마신 상태가 됐다.
'무영근······.'
몇 번을 다시 확인해 봐도 친구놈의 영근 재능은 그냥 없는 수준이었다.
각성향을 선물해 준다 한들, 그 향을 꾸준히 맡으면서 몇 년 이상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수련을 해야 하며, 그러고서도 영근 재능이 위영근으로 향상될 확률은 십분의 일에 불과하다.
'각성초와 각성향은 단지 광범위하게 보급하기 위한 물건일 뿐이야.'
지인을 위해서라면 더 나은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지금 각성향을 선물해 줘서 행여나 그 방법에 방해가 된다면 꽤나 마음이 불편할 터였다.
"쟤가 다 마신다, 다 마셔!"
접시에 담긴 술을 끊임없이 할짝거리는 무용이를 보며 취기가 도는 박희원이 낄낄댔다.
"몸집도 작은 게 저러다 탈은 안 나냐? 아, A급 헌터랑 비빈다고 했던가? 근데 그게 말이 돼?"
"진짜야. 근데, 너 선협물 말고 다른 소설은 뭐 보냐?"
"선협물 말고? 다 보는데?"
"뭐 특별히 재밌는 장르 없어?"
"쉬면서 심심하냐? S급 헌터씩이나 돼놓고선, 여친이나 만들 것이지."
아마도 한유진이 심심할 때 웹소설을 보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녀석은 피식 웃으면서도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판타지는 워낙 흔하니까 굳이 추천할 필요 없을 거고, SF 본 적 있어?"
"딱히?"
"요즘 내가 보는 선협물 중에 SF랑 섞은 게 하나 있는데, 재밌더라고."
"선협이랑 SF를? 그게 어울리나?"
"설정하기 나름이지. 근데 당연히 보통 선협물이랑은 많이 달라."
녀석은 이후 자신이 본다던 그 소설의 제목과 함께 대략적인 내용을 이야기했다. 줄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던 한유진조차 살짝 흥미가 동하는 부분이 있었다.
다음에 방문할 세상으로 한 번 시도해 볼까,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SF라면 과학기술 방면으로 카르마 수급에 좋은 뭔가가 있지 않을까······?'
물론 꼭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
기술이라는 건 그것을 뒷받침해 줄 사회적 구조, 사람들의 교육과 지식수준, 자원과 연료 공급 인프라, 문화제도적 기반 등이 마련되어야 쓸모를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요컨대 고대 시대에 갑자기 증기기관 기술을 던져준들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는 없단 뜻이다.
그래도 수확을 최소 하나쯤은 건질 수 있을 터였기에 기대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선협 요소가 뒤섞인 SF라면 더더욱.
잡담이 계속 이어지면서 고기와 술을 추가로 주문하다 보니, 박희원은 어느새 거의 만취한 수준이 됐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테이블에 엎드려서는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었다.
"뭐야, 왜?"
"나 여자친구랑 결국 헤어졌다······."
"음······."
한유진이 알기로 녀석이 무려 중학생 때부터 사귀어왔던 여자친구였다. 한데 만날 때마다 문제가 해결된 기색이 없더라니 결국 이렇게 된 것 같다.
'어쩐지 많이 마시더라니.'
엎드린 녀석의 잔에 마저 술을 따라주면서 위로를 건넸다.
"더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을 거다. 이 형님이 꼭 그렇게 만들어 줄게."
"···뭐, 소개라도 해 주려고? 헌터 여친 가능하냐 혹시?"
언제 잔뜩 침울해졌었냐는 듯 슬쩍 고개를 드는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오려 한다.
"내가 나중에 영근 하나 선물해 줄 테니까, 네가 직접 헌터 돼서 사귀든지 말든지 해라."
"···음양오행천영근?"
"미친 새끼."
결국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웃고 말았다.
* * *
만나서 회포를 풀어야 할 친구가 박희원만 있진 않았기에 그는 며칠에 걸쳐 약속을 잡았다.
고등학교 동창들도 다섯 명 만나서 크게 한턱냈고, 중학교 동창도 두 명 만나서 생전 처음 칵테일바를 방문해 사치를 좀 부렸다.
여담이지만 그에 소모된 모든 돈은 사실, 박희원을 만나기 전 은행에 들러 대출받은 것이었다. S급 헌터였기에 오히려 은행 측에서 더 빌려주지 못해 안달을 낸 터라 매우 쉬웠다.
그렇게 친하다 할 수 있는 친구들을 전부 한 번씩 만난 후.
그가 찾아간 대상은 바로 이원희였다.
원래 할머니와 함께 판자촌에 살던 아이는, 박세룡의 빠른 일 처리로 이미 서울에 임대주택을 지원받아 이사를 마친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새 아저씨로 초기화됐네. 삼촌이라니까?"
"···네, 삼촌.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네 할머니랑도 인사 좀 하자."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간 그는 임대주택 상태를 간단히 확인하면서 이원희의 할머니와도 인사를 나눴다. 여태 형편이 안 좋았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고된 인상이었다.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아낸 그는 어린 이원희의 손을 붙잡고 건물을 나섰다.
"어디 가는 거예요?"
"쇼핑하러. 전학 수속도 이쯤이면 슬슬 마쳤겠다, 이제 곧 새로운 학교에 가야 하잖아?"
"···네."
"헌터 전문학교는 여전히 가기 싫고, 그지?"
"···네."
"그러니까 쇼핑하러 가자. 옷이든 가방이든 학용품이든, 기분 전환할 겸 새로 다 사면 좋겠지?"
잠시 그런 한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이원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몇 초 정도 늦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커서 갚지 마라. 다 푼돈이니까."
"······네?"
한유진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그런 이원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내내 이원희의 까만 눈동자가 그런 한유진을 계속 힐끔거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첫 만남에서 그가 품고 있던 희미한 거리낌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78화. < 드디어 복수 >
쇼핑하는 내내.
본인은 딱히 티를 안 내려고 한 모양이지만 이원희는 분명하게 기분이 들뜬 것 같았다. 한유진이 뭔가를 보여주고 설명해 줄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실로 딱 그 나이대의 아이다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 했다.
천영근 보유자로서 오성이 평범치 않을 터인 데다가 살아온 환경도 녹록지 않다 보니, 또래보다 훨씬 더 조숙한 면이 있었지만 그래봤자 아홉 살짜리였다.
그렇게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근처 담벼락 위에 앉은 까만 고양이와 시선이 마주친 이원희가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며 저절로 걸음을 멈췄다. 자연히 한유진도 멈춰 서게 됐다.
"고양이 좋아해?"
"음, 네."
"고양이를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동물을 좋아하는 거야?"
"둘 다요."
"그러니까 동물을 좋아한다는 거지?"
"······네."
그렇게 답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고양이에 정신이 팔린 모습이다. 그 고양이가 담벼락 건너편으로 휙 모습을 감출 때까지 쭉 그랬다.
아쉬워하는 이원희를 보며 한유진이 물었다.
"한 마리 입양해 볼래?"
"아니요."
예상을 벗어나는 아주 단호한 칼답이 돌아온다.
"아니, 왜?"
애니멀 테라피의 위대함을 추종하는 한유진이 반사적으로 의문을 표했다.
"자."
그러면서 품속 무용이를 내밀자, 이원희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만 곧 조심히 녀석을 받아들어서는 품에 안았다.
찍! 찍-!
무용이가 왜 자기 허락도 없이 건네주냐는 듯 살짝 항의하는 기색이었지만 무시해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이래도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괜찮아요."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그래?"
"······네."
답하는 순간 무엇을 떠올렸는지,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서 품에 안고 있던 무용이를 돌려주려 했다.
결국 녀석을 돌려받은 한유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내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하니? 네 각성 능력을 좀 더 잘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던 거."
조금 늦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원희의 기색은 쇼핑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직 어린 네가 잘 이해할지 모르겠다만······ 세상엔 마냥 피하기만 해선 안 되는 일들이 있단다. 가령, 좀 문학적으로 쉽게 비유해서, 네가 새라고 생각해 보자."
"새요?"
"그래, 날개 달린 새. 너 새가 처음부터 막 자유롭게 날 수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젓는 아이에게 그는 간결한 설명을 덧붙였다.
새끼 새들은 둥지에서부터 날개 흔드는 연습을 하다가, 부상을 무릅쓰고 둥지 밖으로 뛰어내리는 연습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비행 연습이 무섭다고 마냥 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지. 새가 날지 못한다는 건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이고."
"하지만······."
"하지만?"
"전 새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 이 능력이······ 꼭 날개인 건 아니잖아요. 없어도 잘 사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건 네 착각이야. 세상에 날개 없이 비행 연습조차 안 하고서 잘 사는 사람은 없단다. 단지 그 사람들의 날개가 눈에 잘 안 띄는 형태일 뿐이지. 너 정말로 그 사람들이 겉보기처럼 편하게만 산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과연 그렇게 만만할까?"
잠시 생각하던 이원희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작게 답했다.
"아니요······."
"그래. 다들 고생하고 노력하고 적응하고, 그렇게 열심히 파닥거리면서 살아가는 거다. 설령 타고난 날개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말이지. 안타깝지만 너도 곧 그렇게 해야 해. 네 날개가 유난히 삐죽삐죽하고 날카로울지 몰라도, 오히려 그래서 더욱 연습이 필요한 거야. 무섭다고 계속 미루다간 언젠가 다른 사람을 넘어 스스로마저 다치게 만들지 모르니까."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아이의 머리를 한유진의 손이 자연스럽게 툭툭 두들겨 줬다.
순간 이원희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곤 어떤 환영을 본 듯했다. 동시에 알 수 없게도 긴장이 확 풀어지면서 안도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연습하면 다 괜찮아질 테니 걱정은 말고. 오히려 축복이라고 여기게 될 거다. 남들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그런 날개거든."
"······."
"가자. 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네가 안고 있어라."
다시 무용이를 넘겨준 한유진은 아이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가볍게 유지하려 애썼다.
과연 아이 돌보기는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 * *
휴가를 길게 가져갈 필요는 없을 듯했다. 며칠 안전가옥에서 뒹굴거리고 있자니, 오랜만에 게임을 하거나 커뮤니티를 돌아보거나 하는 일도 금방 질려 버리고 말았으니까.
현실감을 되살리기엔 이 정도로 충분했다.
하여 내일 아침 대균열로 복귀하기로 마음먹은 그날 밤.
'카르마가 불충분하기도 하고, 벌써 다시 이세계에서 길게 체류하고 싶진 않으니까······.'
딱히 수확을 챙기지 않으면서 가볍게 탐색하듯 방문해 볼 수 있는 세계가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문득 한 세계를 떠올렸다.
악마 추종자들의 이카파 판게아.
그 중년인을 지금 자신은 이길 수 있을까.
실용성이라곤 전혀 없는 호기심에 호승심, 그리고 복수심이었지만 바로 그래서 이런 타이밍에 시도해 보기 딱 좋다.
"후우······."
막상 시행하려고 마음먹으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때 당시 느꼈던 분노와 좌절감 등이 여전히 잉걸불처럼 남아 있다. 그러니 두근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뒈졌다고 복창해라.'
게임과 커뮤질을 통해 젊음을 되찾은 마음으로 그렇게 내심 중얼거린 그는, 무용이와 영액주 및 옥로주 등을 나눠 마시며 전의를 북돋웠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각성 능력을 발동했다. 당연히 안전가옥에는 미환진기가 설치된 상황이었다.
곧.
어둡지만 포근한 대기 장소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잠든 무용이를 확인한 후, 녀석을 놔둔 채 필요한 모든 물건을 챙겼다. 이후 천변만화하는 문에 손을 뻗어 성공적으로 형태를 고정시켰다.
기억 속 그대로의 형상이었다.
전체적으로 아치형이며 테두리는 금속으로 마감됐고 안쪽은 찬란한 색상의 수정들로 채워졌다. 중앙에 박힌 새까만 윤기 나는 금속은 흡사 거꾸로 자라는 나무를 형상화한 것 같다.
위쪽으로 떠오르는 은빛 문자들을 확인한 그가 살짝 비뚜름하게 웃으며 그 문을 과감히 밀고 넘어갔다.
통과해 나온 문이 사라지는 광경을 확인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의 숲을 가로지르는 청회색 석재 타일 도로 위였다. 몸에 걸쳐진 의복은 어느 중세 판타지 게임 속 모험가처럼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다.
그것까지 확인하는 때, 신식에 이곳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한 기척이 감지됐다.
그가 감지함과 동시에 상대도 그를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허공을 날아오던 놈은 갑작스레 발견된 낯선 이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듯 고도를 낮춰 땅에 내려섰고, 괜히 모르는 척 다른 방향을 둘러보는 한유진에게 목소리를 냈다.
"이건 또 뭐 하는 놈이야······?"
예전 그때와 같은 말이면서도 느낌이 달랐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이 확연하다. 한유진이 딱히 기세를 감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딴청을 그만두고 직시한 중년인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강퍅한 인상에 적갈색 눈동자, 곳곳에 금실이 수놓아진 고급스러운 검은색 로브.
특히 그 눈동자 속에서 얼핏 드러나는 벌레의 환영이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한유진이 태평하게 물었다. 조금 음침한 기색으로 그런 상대를 주시하던 중년인이 짧게 답했다.
"니콜라드 학센 티크라스마."
"복잡하기도 하군."
"넌 뭐냐? 정체와 용건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않으면?"
피식 웃으며 되물은 한유진이 덧붙였다.
"왜 저번처럼 힘을 원하느냐고 안 묻는지 모르겠네."
"···저번처럼?"
그 순간.
중년인의 시선이 허공 이곳저곳을 훑으면서 전신으로 기묘한 붉은빛 기운을 뿜어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퍼져있는 상태를 넘어 날카롭게 집중된 채 탐색을 시도하려던 한유진의 신식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감히 나를 상대로 간파 마법을 써?"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한 직후 눈동자 속에서 꿈틀거리던 벌레 환영들이 급격히 선명해졌다. 이어 기묘하게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 거리를 격하고 한유진의 눈 속으로 파고들려는 기세였다.
"그래, 마냥 쉽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대응하여 한유진의 눈동자 속에서 육도윤회가 떠올라 순환했다.
"이래야 나도 복수하는 맛이 좀 나겠지."
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후광처럼 빛나는, 세상의 모든 빛깔을 그러모아 순백으로 빚어낸 듯한 고리 위 여섯 감정의 세계들이 경계 불분명한 모습으로 윤회한다.
달려들던 벌레들이 그 빛무리에 닿자 극심한 저항을 느끼는 듯 더는 접근해 오지 못했다. 직후 모종의 깨달음이 섞인 의념 같은 파장이 범종 소리처럼 울려 퍼지자 갈기갈기 찢겨나가다 못해 가루로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었다.
─!!!
동시에 중년인에게서 도저히 사람이라고 여길 수 없는 포효성이 터져 나왔다.
피부가 석탄처럼 검게 물들고 눈동자는 훨씬 더 많고 선명해진 벌레들로 이뤄진 듯 변해서는, 전신으로 검붉은 기운을 불꽃처럼 피워올렸다.
- 감히 이곳 성지에서 나를 상대로 난동을 부리느냐-!!
결단 초기급 기세.
육도윤회의 역광을 받는 채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 없는 한유진의 신형이 잠시 멈칫한 듯했다.
하나 단지 그뿐이었다.
그는 육탄전이라도 벌일 기세로 달려들어오는 중년인을 향해 담담히 손을 뻗어 법술을 시전했다.
중급 법술을 기초 법술마냥 순식간에 펼쳐내는 모습이었다.
순양극염탄사(純陽極炎彈絲).
극도로 응축된 빛과 열기의 선 십여 가닥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가 달려들어오는 중년인을 덮친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중년인의 눈동자가 순간 확대되더니 그가 급히 멈춰 서며 무언가 마법을 시전했다.
푸화악-!
허공에 구멍이 뻥 뚫려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어둠으로 이뤄진 흉측한 짐승 아가리가 튀어나와 전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든다. 하나, 십여 가닥의 열선들과 마주하자 어둠이 그대로 찢어발겨지며 형체가 무너져 내렸다.
신체 곳곳에 어둠으로 이뤄진 가시와 칼날을 두른 중년인은 그 뒤편에서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덮쳐오는 법술을 마저 상대했다. 놀랍게도 소환한 어둠 짐승보다 훨씬 견고하고 예리한 모습으로 그 열선들을 전부 끊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바로 그 순간 섬광과 함께 불꽃이 폭발했다.
- 키아아아아··· 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성이 터져 나오며 화염 속에서 검은 실루엣이 요동쳤다. 이대로 죽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한유진은 두 번째 법술을 시전했다.
손바닥 위로 아담하게 떠오른 금련이 유유히 앞으로 흘러 나아가던 어느 순간,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폭발하며 무수한 경금검기를 오직 전방을 향해서만 쏟아낸다.
그 끔찍한 폭발이 한 번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해서 이어지며 무려 아홉 번까지 연결됐다.
폭발 방향이 성공적으로 통제된 금련구전만개(金蓮九轉滿開)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콱-!!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경금검기의 폭우가 목표한 지점 대지를 완전히 누더기처럼 만들다 못해 가루로 부숴 으깨버리는 듯하다. 폭발한 화염과 그 속의 칠흑빛 실루엣마저 온통 휩쓸려 제대로 된 형체가 남지 않았다.
법술의 모든 여파가 잦아들었을 때, 보이는 광경은 실로 참혹하다는 말로도 전부 표현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 하트 제련을 마친 한유진은 평범한 법혼 후기의 수사가 아니다. 적어도 펼치는 법술의 속도와 위력 면에서는 결단기급 수사라고 보기 충분하다.
그런 그와 정면 대결을 펼친 중년인은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모습이었다.
"···두 방에 죽었다고?"
시원하면서도 살짝 허무한 기분으로 그가 중얼거리는 때.
중년인의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검붉은 기운들이 혐오스럽게 꿈틀거리며 나타나 무더기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것이 점점 위쪽으로 차오르면서 인간의 형체를 이뤄가는 모습은, 실로 악마 추종자다운 불쾌한 느낌을 풍겼다.
"하하하···!"
그에 한유진은 허무함이 싹 사라진 기분으로 새로운 중급 법술을 펼쳤다.
심해한빙진옥(深海寒氷鎭獄).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흑청색 법력의 파도가 무시무시한 냉기와 중량감을 뿜어낸다. 그것이 한창 부활해 가던 중년인을 휘감아 구체의 형상을 이루고는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며 내부를 믹서기처럼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이것까지 맞고도 버틴다면 살려··· 아니, 조금 더 빡세게 놀아주마!"
말과 함께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빠콰콰쾅-!!
세상을 흑백으로 번쩍이게 만드는 벼락이 내리친다.
그것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한유진의 손과 이어진 채 연신 뇌전불꽃을 터뜨리면서 순식간에 용의 형상을 띠어갔고, 위쪽으로는 거세게 회오리치는 먹구름이 나타나며 급속도로 범위를 넓혀갔다.
직후 용의 포효성 같은 굉음이 폭발하면서 하늘의 천벌처럼 거대한 벼락의 창이 내리꽂혔다.
뇌룡출요호운(雷龍出搖呼雲).
그 벼락의 창은 회전하는 심해한빙진옥에 그대로 녹아들어 실로 형용키 힘든 파쇄음을 발생시키며 무수한 섬광을 터뜨려댔다.
79화. < 악마 추종자들의 궁전 >
두 중급 법술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만들어내는 파괴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유수계 법술 특유의 무지막지한 중량감과 차가움, 뇌전계 법술 특유의 치명적인 파법력과 집요함이 어우러진 조합이다. 설령 영기가 깃든 금속일지라도 한순간에 찢어발겨 가루로 분쇄해 버리기 충분하다.
잠시 후.
뇌전의 힘을 품은 심해한빙진옥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보이는 것은 약간의 새까만 부스러기가 힘없이 흩날려 떨어지는 광경뿐이었다.
아무리 결단기급 기세를 뿜어냈던 목숨 질긴 악마 추종자여도 이런 공격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한 듯했다.
"너무 편히 죽여준 감이 있으니까······ 나중에 다시 와서 놀아주마."
열 배까진 아니더라도 당한 만큼은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지금은 아무리 많이 쳐줘도 1할 정도만 앙갚음했을 뿐이다.
'그럼 이제······.'
생각하며 그는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그 궁전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떠올리려 했다.
그렇게 막 방향을 떠올려낸 순간, 방금 상대해 죽인 중년인과 비슷한 수준의 기세가 둘씩이나 빠르게 접근해 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흠."
지둔술과 몽환유심을 조합하면 얼마든지 숨어서 피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저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지 궁금해져서, 어차피 뭔가를 바라고 왔던 세상도 아닌지라 과감하게 싸움을 준비했다.
그는 즉시 중급 오행법술 중 여태 시전해 보지 않은 마지막 하나를 펼쳤다.
가벼운 날숨에 섞여 무수한 법문들이 빛을 발하면서 파동을 뿜어내더니 순간, 급속도로 덩치를 불리며 흰구름과 먹구름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고요하지만 강맹한 돌풍과 함께 분명한 실체를 구성해 갔다.
풍운령호진위(風雲靈虎鎭衛).
새하얀 구름을 바탕으로 검은빛 먹구름이 용맹한 줄무늬처럼 자리한, 희미한 연녹빛 돌풍을 모피 삼은 집채만 한 대형 맹수의 형상이었다.
법술 이름에 들어가는 호랑이가 지구의 그 호랑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검은색 줄무늬를 비롯하여 비슷한 부분이 몇 있긴 했으나, 과연 법술로 만들어진 형상답게 전체적으로 훨씬 더 세련되고 위엄차 보였다.
나타난 맹수는 선명한 청옥빛 번뜩이는 눈으로 한유진을 잠시 내려다봤다가, 이내 저절로 시전자와 뜻을 공유하고는 전투태세를 취했다.
딱 그때쯤 두 명의 적이 빠르게 허공을 날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너무나 혐오스럽게도 피부에 문신처럼 새겨진 수많은 핏빛 벌레들이 마구잡이로 꿈틀거리며 돌아다니는 대머리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머리에 한 쌍의 뿔인지 더듬이인지 헷갈리는 기관이 자라난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자였다.
- 대체 어디서 온 잡놈이기에 감히 우리 이카파 교단에 도전하는 거냐?
벌레 문신 대머리가 중첩되어 울리는 기묘한 목소리로 물어 온다.
당연히 한유진은 대답 대신 육도윤회를 일으켰다.
직전에 중년인을 상대할 때처럼 방어용으로만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다.
후광처럼 나타난 여섯 세계들의 윤회가 야수도의 분노를 집중적으로 끌어낸다. 그 신통을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직시한 두 악마 추종자의 표정이 같은 순간에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캬아아아아악···!!!
더듬이 악마 추종자가 별안간 찢어지는 괴성을 터뜨리며 가까이 자리한 벌레 문신 대머리를 공격해 들어간다. 대머리 역시 기다렸다는 듯 분노와 증오에 찬 포효를 터뜨리면서 마주 반격했다.
푸콰콰쾅-!!
핏빛 뒤섞인 기묘한 어둠이 서로 충돌하자 원래도 어둑어둑하던 하늘에 순간 일식이 도래한 듯했다.
기묘한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소나기처럼 흩뿌려지는 어둠 파편들이 땅에 닿는 족족 치지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상당한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
단지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이었을 뿐이던 숲이 황폐화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잠깐···!
그렇게 몇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서로 힘을 깎아 먹던 중,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린 건 먼저 분노에 휘둘렸던 더듬이 악마 추종자였다.
바로 그때 한유진의 법술로 만들어진 풍운령호가 달려들었다. 과연 바람계 법술로 만들어진 존재답게도 엄청난 속도였다.
형상이 거칠게 흐트러질 만큼 빠르게 돌진한 맹수의 앞발이 무서운 파공음을 동반하고서 휘둘린다. 그에 맞서 펼쳐진 암흑 구체 보호막이 크게 출렁이며 마구잡이로 난도질당하는 듯하다.
동시에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온 순양극염탄사의 빛줄기가 다른 방향에서 보호막을 꿰뚫고 그 내부를 화염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듬이 악마 추종자의 찢어지는 비명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 감히-!!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벌레 문신 대머리가 여전히 분노에 휘둘리는 것처럼 포효하며 한유진를 향해 돌진해 갔다. 양손에 흉악한 어둠의 발톱을 만들어낸 채로 전신의 벌레 문신이 실체를 갖추고서 일제히 튀어나오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에 대응하여 한유진이 손을 휘둘렀다.
얼핏 단순한 휘두름 같았으나 원력무도를 창시한 자로서의 묘리가 담긴 움직임이었고, 그 움직임에 가장 최근에 새로 익힌 신통이 더해졌다.
원력대수(元力大手).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거대한 손이 한유진의 손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하며 달려들던 혐오스러운 대머리를 후려쳤다.
쾅-!!
흡사 금속과 금속이 강렬하게 충돌한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달려든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튕겨 나간 대머리는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가 싶더니만 더 크게 분노하면서 핏빛 섞인 검은색 기운을 폭발하듯 피워올렸다.
그 사이 풍운령호는 더듬이 악마 추종자를 상대로 고전하는 모습이었다. 시전자인 한유진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결단 초기급 기세를 뿜어내는 적을 상대로는 밀리는 게 당연하다.
커허헝-!!
풍운령호가 터뜨린 거대한 포효에 전방 대기가 벌떼 울듯 공명하며 날아들던 어둠의 창들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간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여전히 형태를 유지한 채 쏘아져 와 구름과 바람으로 이뤄진 몸통을 크게 뜯어내고 오염시켰다.
하나 그 풍운령호를 상대하는 더듬이 악마 추종자의 상태는 이미 순양극염탄사에 한 차례 당한 일로 매우 좋지 못했다. 절반은 벌레로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길 반복하면서, 나머지 절반도 심각하게 그슬린 모습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중이었다.
'그냥 기세만 결단기였던 거로군.'
이대일로 상황을 나름 비등하게 이끌어가던 한유진이 마침내 확신했다.
놈들이 진짜 결단기급 수선자처럼 신묘한 여러 수단들, 가령 법보나 부적이나 법술 따위를 갖추고 다뤘다면 지금처럼 수월한 전투가 가능했을 리 없다.
요컨대 저놈들은 딱히 그 자신보다 더 능력 뛰어난 적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냥 힘만 좀 강할 뿐 덜떨어지는 놈들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니까 이리도 쉽게 당하지."
혀를 차듯 중얼거린 말소리가 끝난 순간.
벌레 문신 대머리는 자신이 기어코 접근하는 데 성공해선 어둠 발톱으로 찢어발긴 한유진의 신형이 그저 자색빛 꿈결처럼 흐트러지며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어 고통에 신음하던 더듬이 악마 추종자의 뒤편에서 어느새 나타난 한유진이 원력대수로 상대를 붙잡아 으스러뜨렸다.
비명이 나올 틈도 없었다.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손 형상의 기운에 신체가 완전히 으스러진 악마 추종자는 잔해들이 무수한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부활을 시도했으나, 직후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순양극염에 모조리 잿더미로 화해 흩날렸다.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대머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대일로도 못 이긴 적을 혼자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특히 마지막에 그 환상처럼 사라져 버린 수단은 그 어떤 마법적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처음 감정을 지배하여 상잔하게 만들었던 것도 그렇고, 달려들던 자신을 튕겨낸 수단도 그렇고, 이제 자신을 협공해 올 것이 분명한 바람의 환수도 그렇고.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으니 대적하는 일은 미친 짓이다.
판단을 마친 그는 즉시 몸 돌려 도주를 시도했다. 허공에 기묘한 어둠을 잔상처럼 흩날리면서 멀어져가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둔술 하면 또 한유진이었다.
빠콰쾅-!
뇌둔술의 굉음이 터져 나오고 섬광을 동반한 그의 신형이 공간이동하듯 급속도로 적을 추격해 간다. 풍운령호 역시 공격해 들어갈 때만큼 빠르게 쏘아져 나가면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 아, 안 돼···!!
결국 따라잡힌 대머리 놈이 무언가 다급하게 외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한유진은 악마를 추종하는 놈들과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펼쳐진 원력대수가 대머리를 후려쳐 튕겨 나가게 만든 그 순간, 바로 옆에서 들이닥쳐 온 풍운령호가 균형감을 잃은 상대를 덥석 물어 마구잡이로 씹어 삼켰다.
무수한 풍인(風刃)으로 이뤄진 폭풍에 휩싸인 듯 대머리 악마 추종자는 울부짖으면서 수백수천 조각으로 토막쳐져 갔다.
이번에도 다른 놈들처럼 시체 파편들이 꿈틀대며 부활을 시도했으나, 옆에 있던 한유진이 풍운령호의 몸에 손을 대고 순양극염을 더해주자 그대로 잿더미가 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후우···!"
빠르게 신식으로 주변을 훑은 그가 마침내 승리했음을 확신하며 조금 긴장을 풀었다.
별다른 위기는 없었다지만 잡병을 처리하듯 아무렇게나 임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소모된 법력은······ 2할 정도.'
온갖 신통과 중급 법술을 펑펑 사용해 가며 싸웠음에도 겨우 그 정도밖에 소모되지 않았다. 확실히 드래곤 하트 제련을 마친 그는 평범한 법혼기 수사가 아니었다.
같은 경지에서라면 온 수선계를 뒤져봐도 한 손에 꼽히는 강자일지 모른다.
잠시간 더 휴식을 취한 그는 여전히 소환을 유지하고 있는 풍운령호에게 법력을 더해 주며 상태를 처음처럼 회복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훌쩍 올라타서는 의념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르릉···!
묵직한 으르렁거림과 함께 풍운령호가 예의 엄청난 속도로 한쪽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올라타 있던 한유진은 생각보다 훨씬 더 편안한 탑승감에 살짝 놀라게 됐다.
이토록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음에도 허공을 박차며 나아가기 때문인지 흔들림이 거의 없었고, 태생이 바람을 다루는 존재인지라 불어닥쳐 오는 전면의 돌풍을 알아서 막아주기까지 했다.
그는 썩 만족한 상태로 기억 속 그 궁전으로 향할 수 있었다.
* * *
혹시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던 우려는 그저 우려에서 그쳤다.
물론 그는 이 악마 추종자들의 전체 전력이 고작 이 정도뿐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단지 이곳 성지에 주둔하고 있던 전력이 잠시 처리당했을 뿐, 여기서 시간을 끈다면 십중팔구 더 강한 적들이 많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네 영혼이 영겁토록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더 강한 적이 없다는 것이 확실했다.
콰콰콰쾅-!!
"끄악···!"
"아아아악···!"
그는 온갖 저주를 쏟아내며 겁도 없이 길을 가로막는 음침한 악마 추종자 놈들을 각종 법술로 무자비하게 쓸어버렸다.
아름답게 꾸며진 궁전의 넓은 홀과 복도가 파괴와 살육의 흔적으로 얼룩져 갔으나, 전부 정당방위였기에 일말의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볼까?'
길을 가로막고 있던 한 무리의 악마 추종자들을 쓸어버린 그가 궁전의 복잡한 구조를 신식으로 느끼면서 잠시 고민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당연하게도 그 '세례'를 받을 수 있는 홀이었다. 그곳의 중앙에 자리하던, 전체적으로 탁한 검갈색이지만 신비로운 진보랏빛 휘광을 두르고 있던 거대한 구체의 모습과 함께.
'위험하겠지.'
확인할 것도 없이 그냥 직감할 수 있었다.
공격해서 파괴한다거나 하는 짓은 매우 높은 확률로 불가능할 테고, 그런 짓을 시도하는 순간 모종의 끔찍하고 강력한 반격에 직면할 것 같다.
즉, 가볼 때 가보더라도 후순위로 미뤄야 마땅했다. 과연 이 궁전에 다른 유용한 지식이나 보물들이 얼마나 있을지를 먼저 확인해야 이득일 터다.
그는 여전히 풍운령호를 탄 채로 거침없이 움직였다.
방해하는 악마 추종자들은 사실 직접 손을 쓸 것도 없었다. 고속으로 달려나간 풍운령호가 앞발로 후려치기만 하면 상대는 십여 조각이 넘게 갈기갈기 찢겨나갔으니까.
간간이 날아드는 마법 공격을 적당히 방어하고 갚아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그는 상당히 흥미가 돋게 만드는 작은 도서관 같은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쾅-!!
풍운령호의 앞발이 아주 견고하게 보이던 금속 문을 가볍게 박살 낸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선 한유진은 곳곳으로 순양극염탄사를 쏘아내 마법진을 무력화시킨 뒤, 어물술을 발휘해 신식에 감지되는 모든 책을 끌어모았다.
이어진 것은 당연하게도 독서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음."
책의 절반 이상이 종교적 느낌 가득한 쓸모없는 것들이었고, 나머지는 도저히 익히고 싶지 않은 흑마법뿐임을 깨닫자 흥미가 급격히 식었다.
'딱히 수준이 높지도 않군.'
그 마법의 체계 역시, 도무지 세련된 구조가 안 보이는 터라 금방 실망하게 될 뿐이었다.
'피와 영혼으로 이런 짓까지 할 수 있다니······.'
그냥 역겨움만을 느끼게 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남은 책들도 전부 최소한으로만 훑고는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가자."
그리고 다시 궁전 탐사를 재개했다.
쓰레기 같은 내용의 책들을 훑느라 시간을 허비한 만큼, 언제 큰 방해가 들이닥칠지 몰라 마냥 여유롭지가 못했다.
여러 개의 홀과 방을 더 지나고,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잠시 천장이 없는 외부공간으로 나갔다가 다시 실내로 들어오기도 하는 등.
궁전은 실로 거대했으며 그만큼 복잡했다. 신식이 없었더라면 길을 잃는 수준을 넘어 방향감까지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속 탐사를 이어가던 어느 순간.
그는 유난히 견고한 마법진 결계로 보호된 거대한 문을 앞둘 수 있었다.
이 문을 지키고 있던 잡스러운 악마 추종자들은 당연히 풍운령호에 의해 모조리 죽어 나간 상태였다. 그저 포효에 맞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나가는 놈들이었으니 별 신경 쓸 것도 없다.
푸화아악-!
펼쳐진 순양극염탄사의 빛줄기들이 문 근처 곳곳을 관통해 녹이며 마법진 결계의 구조를 뒤흔든다.
그는 가진 진법술 지식을 총동원하여 결계를 끊임없이 파훼해 갔고 잠시 후, 성공적으로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콰드드득-!!
연이어 펼쳐진 원력대수가 나무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짝을 거침없이 뜯어낸다.
드러난 안쪽 광경은 조금 으스스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제단인가······?'
홀의 중심부에 자리한 원형 단상을 여러 겹으로 둘러싸듯, 은은한 핏빛으로 물든 사람 크기만 한 백여 개의 구덩이들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돼 있다.
그 원형 단상 위에는, 미라처럼 말라붙은 거대한 인간 형상의 무언가가 무릎 꿇은 채 어두운 금빛을 발하는 펜던트를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다.
펜던트를 눈에 담은 순간 한유진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희미한 속삭임을 들은 듯한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80화. < 혈령적화주병 (묘사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