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15

110화. 신을 품다

아르켄 제국은 모든 것보다 우월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황실 마차 또한 다른 마차들에 비해 절반 정도 더 넓었으며, 그 안은 구름 같은 안락함을 자랑한다.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마을 한 달 운영비가 깨지는 그 마차가 먼 길을 나섰다.

마차의 목적지는 외딴곳에 있는 새장 같이 거대한 돔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황녀님."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올리비아 아르켄.

제국의 꽃답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메마른 겨울이 아닌 파릇파릇한 봄이 담겨 있었다.

"외투를 받아 드리겠습니다."

"아뇨. 입고 가겠어요. 추울지도 모르잖아요?"

"대공님께서 정하신 드레스 코드이기에 부디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올리비아는 두꺼운 외투를 벗고, 난 길을 따라 움직였다.

대륙의 진귀한 꽃들을 애지중지 키워 놓은 화단들을 지나, 그 끝에 있는 인공 호수까지 향했다.

땅의 끝에는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황녀님."

새파란 봄의 정원과 대비되는 흰머리와 검버섯이 낀 노인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그녀를 반겼다.

아르켄 제국의 대귀족인 발데마르 골트 대공이었다.

올리비아는 능숙하게 가면을 쓰며 미소 지었다.

"골트 대공님을 뵙습니다. 과연 제국 최고의 명문답게 멋진 장소에서 풍류를 즐기시는군요."

"허허, 과찬입니다. 풍경도 좋고, 이런 곳에서 물놀이하면서 술도 마시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이곳에 앉으시지요."

발데마르가 손수 자리를 빼 주었다.

올리비아가 그 자리에 앉자, 발데마르의 손이 슬쩍 어깨에 닿았다.

"콜록, 콜록."

올리비아가 기침하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너스레 떨었다.

"먼 길을 와서 그런지 목이 너무 마르네요."

"아이고, 안에서 차도 대접하지 않고 무엇을 했습니까? 한잔드리지요."

발데마르가 음료대에 직접 움직였다.

"어떤 술을 드시겠습니까?"

"술 말인가요? 그건 좀 곤란한데...."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난색을 보이는 올리비아.

"제가 술을 못하는지라...."

"그렇다면 오늘 이참에 배워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글쎄요. 저는 걱정이 된답니다. 술을 즐기는 여자는 요녀라는 말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 요녀가 되고 싶지 않사 와요."

"군자와 함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현녀라 해야지."

"저는 평생 현녀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발데마르가 끈질기게 밀어붙이지만, 올리비아는 끝까지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따뜻한 차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그마저도 홀짝이는 시늉만 할 뿐, 마시진 않았다.

발데마르가 차린 음료와 음식에는 일절 손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눈은 발데마르와 마주치지 않았으며, 생기 또한 없다.

그런 도도한 모습이 기분 나쁠 만도 한데, 발데마르의 반달처럼 휜 두 눈은 좋다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끈적하게 들러붙은 입술이 갈라지며 감탄사를 토했다.

"스텔라가 딱 이 나이대였지요."

멈칫.

올리비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 버렸다.

"그 아이도 이때 참 아름다웠는데, 황녀는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지십니다."

올리비아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쳤다.

"호호, 어머님께서는 경국지색이라 불리시던 분인걸요. 황금의 피와 절세의 미가 합하니 당연히 아름다울 수밖에 없지 않나요?"

"허허! 그 말이 맞습니다!"

늙은 공작은 허허 웃으면서 슬쩍 손을 뻗었다.

"혼기가 찼는데도 남자가 없다고 하지요?"

올리비아가 찻잔을 잡았다.

"네. 아직은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너무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반려가 될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나이도, 외견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자신을 아껴 주는 남자, 힘이 있는 남자라면 어떻게든 잡아야만 합니다."

"그 말씀 잘 받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찾아보도록 하지요."

대화하고 있지만, 헛돌고 있었다.

올리비아도, 발데마르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상황.

질려서 나가떨어지길 바라지만, 발데마르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을 걸친 구애와 대화 끝에야 그녀를 풀어 주었다.

"아무래도 즐기는 건 이쯤에서 끝마치도록 할까요?"

"덕분에 즐겁게 즐기다가 가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있고 싶다는 말은 겉치레라도 하지 않았다.

인사치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발데마르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올리비아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나요? 갑자기 손을 내미시고."

"악수하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를 리가 없었다.

"어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올리비아가 그 손을 잡으려 했다.

"어허, 악수할 때는 서로 맨살을 잡는 게 예의입니다."

"혼기가 된 처녀가 남자와 손을 잡는 건 어색해서 부담됩니다."

"차려 놓은 음식과 술에 손대지도 않으셨고, 제 말에도 건성이셨는데, 이 손을 잡는 부탁 정도는 들어줄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협박이었다.

제국 황제에게 기분 나빴다고 깽판을 치기 전에 마지막 부탁을 들으라는 협박.

올리비아는 이 이상 거절할 흐름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이 장갑을 벗고 그 손을 잡아 짧게 악수했다.

아니 긴 악수다.

손을 슬쩍 빼려고 하면, 악력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 죽어 가는 늙은이인 주제에 손아귀 힘이 너무 강했다.

손이 아파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놓아주지 않으실까요?"

"허허,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미안합니다."

그제야 발데마르가 놓아주었다.

그녀는 가볍게 눈인사하고 온실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밖으로 가기 전, 도자기 화분을 슬쩍 보았다.

유약을 발라 겉이 반들반들하여 거울로 써도 될 정도였다.

발데마르 골트 대공의 얼굴도 훤히 보였다.

그의 눈은 음흉하게 웃고 있으며, 마주 잡았던 그 손을 탐욕스럽게 핥고 있었다.

* * *

마차로 돌아온 올리비아는 문을 닫으려던 호위 기사에게 말했다.

"향수 좀 주시겠어요?"

"예."

올리비아가 자주 쓰는 장미 향수.

그녀는 병을 따 안에 있던 내용물을 모조리 자기 오른손에 부어 버렸다.

미끈한 오일이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 바닥까지 흘렀다.

마차 안에 진한 장미 향이 가득 풍긴다.

질식할 것 같은 향기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색 자수를 박은 실크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몇 번이고 닦았다.

골트 대공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탐욕스러운 그 얼굴은 대악마, 모락스와 겹치는 듯했다.

'더러워.'

벅벅.

'더러워더러워.'

벅벅벅벅.

'더러워더러워더러워!!!'

닦고 또 닦았다.

급기야 백옥 같았던 손이 새빨갛게 물들었고, 따끔하다.

차라리 이 살갗을 벗겨 낼 수는 없을까?

발데마르와 닿았던 부위들을 모조리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골트 대공....'

그녀의 손에 쥔 손수건이 구겨졌다.

가면을 쓰는 것도 한계였다.

그녀의 도자기 가면이 깨지고, 분노로 일그러진다.

'네놈이 감히 그 이름을 언급해?'

스텔라 아르켄.

8살 더 많은 손위 누이로 누구보다 자상한 여자였다.

재색을 겸비하여, 그녀가 직접 지정한 훌륭한 약혼자까지 있었다.

어렸을 적 올리비아의 롤모델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스텔라는 변하였다.

혼약이 깨져 버린 그날부터였다.

약혼자가 반역죄로 잡혀 들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늘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꽃은 시들었고, 초췌해져 갔다.

올리비아의 마지막 기억 속에 있는 스텔라는 황금 명주실 같던 머리가 단발이 되어 있었다.

-올리비아.

갈라진 목소리.

-제국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의 몸은 테라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올리비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 그런 곳에 있으면 위험해요.

-후후, 그러니깐 언니 곁에서 물러나도록 해요, 올리비아. 오늘만큼은 그렇게 해야만 해요.

-내려오세요. 언니.

-그곳에 서서 언니 말을 잘 듣도록 해요. 올리비아는 착하니까요, 알겠죠?

-네, 언니....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포근함은 없었다.

올리비아는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우리의 몸에 흐르는 것이 뭔가요?

스텔라가 물었다.

-황금의 피요. 피가 황금색으로 흐른다고 들었어요.

-후후, 순진한 올리비아. 네가 그 순진함을 언제까지고 간직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제 꿈에서 깨야만 해요.

스텔라의 몸이 기울었다.

-부디, 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주세요.

그녀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

어린 올리비아는 그녀의 언니한테서 갑자기 날개가 돋아나 천사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천사는 없었다.

대신 바닥에 추락한 언니의 시신만이 눈에 담길 뿐.

그것은 한 송이의 꽃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짧게 자른 노란 단발머리가 꽃의 중심. 만개해 가는 붉은 꽃잎.

마침내 자유를 얻어버린....

시종이 달려와 작은 올리비아의 눈을 가릴 때까지 만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텔라는 최악의 언니였다.

어린 동생에게 보여 줄 수 없는 잔혹함.

그러나 그보다 더욱 잔혹한 아르켄 혈통의 운명과 진실을 알리는 마지막 친절이었다.

그리고 스텔라가 총애하는 시종을 통해서 그 죽음의 비밀마저 알게 되었다.

그 죽음의 원인은 골트 대공이었다.

그는 일찍이 어린 스텔라를 사모하여 그녀를 취하고 싶어 했다.

그 집념은 스텔라의 약혼자에게 누명을 씌워 잔혹하게 처형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내었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멸시켜 버리겠노라고.

그에 협력한 이는 황제.

권력에 눈이 먼 1황자와 2황자까지 제 누이를 팔아 막강한 권력을 취하려 했다.

그것이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것들의 운명이었다.

순수함이라는 것은 황녀가 취할 수 없는 사치이다.

'당신 때문에 죽었던 언니를.'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감히!

히스테리를 부리며 소리 지르고 싶었던 마음을 꾸역꾸역 다시 삼킨다.

지금 보는 눈이 없더라도 듣는 귀는 있다.

그녀가 지닌 이 순수의 가면 너머는 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

모든 남자들이 좋아하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다니겠다고.

그리고 그 가면을 뒤집어씀으로써 그들을 수족으로 부리겠다고.

'그걸론 역부족이었다.'

남자를 부리는 것은 끝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로 자유로이 날개를 펼치고만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찾아낸 돌파구는 하나였다.

'성녀.'

알테의 독실한 신자가 되어, 교황과 엇비슷한 지위를 꿰차는 것.

그것이 저주 같은 이 피의 숙명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 가능성을 품을 수 있었던 것도 올리비아가 신성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그녀가 알테의 교리를 이해하면서 깨달음을 얻었고, 신성함이 깃들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포장되기 마련이고, 실제 올리비아의 각성은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올리비아는 스텔라의 죽음을 목도한 그날,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깊게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당시에는 순진해서 몰랐으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것을 개념화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속에는 레드 서클이 돌고 있던 것이었다.

'성녀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최소 다섯 번째 깨달음.'

마법사로 치면 5서클에 올라야만 가능하다.

올리비아는 현재 세 번째 깨달음에 도달한 상태였다.

간단한 치유술과 빛 마법을 부리는 마을 순회 전도사 수준이다.

혼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교주의 도움은 안 된다.

그놈 또한 아직은 황제와 한통속이니까.

그렇기에 오도그라사도 신성국 성황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편견을 깨 준 참된 성인이었다.

올리비아는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 대답은 이러했다.

-신이 깃든다는 것은 단순히 성당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의 등 뒤에 있음을 느끼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내 주위에는 그런 놈들이 마차 한 트럭인데, 그것들은 신이었나?

맞긴 하지.

등신 새끼들.

그런 비꼬는 생각이 앞서니 신이란 존재를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좀 더 조언해 주길 요청했다.

그러자 성황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을 단순히 믿어야 하기에 힘든 것입니다. 신을 사랑하도록 해 보십시오, 황녀.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충분히 신의 부름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 사랑은 계율을 지키는 것에서 온다고 했다.

혈족들을 향한 복수의 맹세까지 마치고, 알테의 계율에 따라 움직여 몇 년을 공들였는데, 자신의 마나 회로는 미동도 없었다.

신의 부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건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사랑이라....'

사랑이라는 게 뭘까?

사랑한다면 찾아온다는데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르겠다.

시선을 보면 느껴진다는데, 그녀를 향한 눈은 언제나 가슴을 거쳐 간다.

알테신교의 교주라는 작자 또한 그러했다.

다만, 그 시선 때문에 사랑을 가슴으로 한다는 말이 가슴을 사랑한다는 건지 조금 헷갈렸다.

'사랑은 성욕으로 만들어진 종양 덩어리일 뿐이야.'

모든 남자들은 그 종양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쌓여 가는 것은 혐오뿐이었으니, 영원히 사랑이라는 걸 알지 못하겠구나 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런 생각도 부정되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문득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훤칠한 키에 회색 머리, 깊은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

염세적인 듯한 표정과 강단이 있는 행동.

'권력이 받쳐 주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실행력이 있으며, 그 주변 인물도 출중하고 덕망도 있다.

극동부가 어느 정도 안전하다는 인식이 돌면서 제국 내에서도 그곳에 일하러 떠나는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위세를 업었다고 해서 이뤄 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눈동자는 단 한 번도 정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궁금했다.

언제까지 그런 모습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유부남들도, 계율에 충실한 기사들도 조금씩은 흔들렸을 만한 일을 했는데, 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남자는 똑같다고 생각하는 그녀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바보가 맞다.

페르다는 지금 극동부를 제2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성녀가 되어 힘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자신뿐이지 않던가?

'이래서는 내가 머리가 꽃밭인 영애들과 다를 게 뭐지?'

올리비아에게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하고, 그에게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겨우 동등한 조건으로 서고 있는 조력자인데, 그가 앞서고 있는 상황이라니.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네.'

어떻게든 짜증이 나게 만든다는 점은 그러했다.

속에 담긴 짜증이 머리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기분이라도 전환하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과 겨울의 메마른 대지.

그녀의 시야 속에 제대로 잡히지 않은 가운데, 또렷하게 점 하나가 그녀의 눈에 걸렸다.

"정지."

그녀의 지시를 들은 마차가 멈춰 섰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나와 재차 확인해 보았다.

어쩌면 자신이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 남자는....'

페르다 발드로바였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발드로바의 메이드일 것이고.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머릿속에 있는 지도를 뒤져 보니 근처에 로스노바 가가 있긴 했다.

자신의 본가에 잠깐 들렸다가 저기에 앉은 걸까?

안부 인사라도 할 겸, 그를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 이상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확인한 페르다의 모습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적어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차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사람답지 않게 무력하다.

'약한 모습....'

올리비아는 그런 모습을 혐오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누군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약점을 보이는 것과 같았다.

귀족 세계에서 약점은 피 냄새 풍기는 고깃덩어리와도 같다.

피라냐 같은 귀족들은 대번에 그 상처를 물어뜯어 버린다.

귀족의 무게를 견디지 않는 자는 그녀에게 필요가 없었다.

"...가여워라."

올리비아는 스스로 말을 내뱉고도 깜짝 놀랐다.

지금 자신이 가엾다고 말한 건가?

저 남자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심함에 한숨이 나오는 대신 가슴이 아파 왔다.

'어째서?'

올리비아는 이 낯선 감정의 뜻을 찾으려 곱씹는다.

나는 저 남자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거지?

올리비아, 자신도 겁나게 했지만, 그녀는 그 감각을 놓지 않았다.

무심코 양손을 자기 가슴에 올린 채로 포개게 했다.

올리비아의 시선은 그를 잡고 있었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두었다.

그가 흘릴 눈물을 핥으며, 서러움을 음미했다.

그 마음은 점점 부풀어 올라, 이윽고 가슴에 올린 두 손은 서로 마주 겹쳐 포개어진다.

마치 기도를 올리듯이.

'내가.'

올리비아는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저 남자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다면....'

무력함에 대한 경멸이 아닌 동정을 말이다.

그때였다.

"아."

그녀의 몸속에서 묘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성녀가 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던,

독실한 신자라 스스로를 속여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던,

그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틀림없이 성황이 말했던 신을 향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이윽고 깨달았다.

'페르다....'

그가 바로 마음속에 품어야 할 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111화. 포기하고 싶지 않아

에렘발트가 한창 로스노바 가로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마차 안에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그 결별 선언이라는 선택이 옳았다고 말이다.

에르데스의 주시와 등쌀을 못 견뎌서 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던 나날들이었다.

페르다가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다는 확언을 받았으니, 이제 그와는 남남이다.

아니, 오히려 에렘발트가 피해자로 남을 일이었다.

"그 망할 망나니랑도 더 이상 엮일 일이 없겠지. 이거면 된 거야."

"무슨 망나니?"

"으헉!"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마차 안.

반대편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자리여야 할 터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10대 소녀가 앉아 있었다.

백금색 머리와 마나를 머금은 푸른 눈동자.

그녀의 이름은 에르데스 로톤.

세르데스 대륙 마법학회장이자, 살아 있는 재앙, 마법 쓰는 망나니.

"왜 그렇게 봐?"

그녀가 악동처럼 웃었다.

"방금 한 이야기나 다시 해 봐. 무슨 이야기인지 나도 궁금하니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불손하게 회장님을 욕하고—."

"그딴 시시콜콜한 호박씨 까기에 고해 성사라도 받으려고 그러는 줄 알아?"

그녀는 실제로 뒤끝이 길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에르데스는 정말로 그런 이유로 온 것이 아니었다.

"섭정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해 보라고."

"이야기는 별거 아니었습니다."

"별거 아니긴. 별거 아니면 왜 발드로바의 시종이랑 섭정이 같이 움직여서 이동하고 있어?"

에렘발트는 깜짝 놀랐다.

"어, 어디로 말입니까?"

"모르겠어. 방향을 보니깐 대충 로스노바 가 쪽인 거 같던데?"

그녀가 히죽 웃었다.

"혹시 직접 멸문이라도 시키려는 게 아닐까?"

에렘발트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에렘발트의 반응에 헛소리했던 에르데스가 역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별일... 아닙니다."

"아니긴. 그게 정답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그만큼 아주 격한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네?"

"별일 아닙니다. 저는 그저 발드로바 섭정과 이야기했고, 가문과는 더 이상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거기서 자기 혼자 과민 반응을 한 것뿐입니다."

"...뭐?"

그 말을 들은 에르데스는 히죽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에렘발트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게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다.

"말씀드렸듯이 페르다 섭정은 저희 핏줄이 흐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회색 머리를 제외하면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그런 아이라고 알렸습니다."

"음, 그래서 의절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음...."

대답을 들은 에르데스는 자신의 턱을 검지로 톡톡 치기만 했다.

이 불편한 적막을 깨려 무슨 이야기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페르다가 흑마법을 사용하는 게 확실합니다."

"...왜?"

"그놈에게 연을 끊겠다고 말하니, 흑마법을 부려서 손을 만들었더군요! 제 목을 조르려고 말입니다."

에렘발트는 끝내 눈치채지 못한 척 했다.

눈치를 채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게 틀림없으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쓱 움직였다.

"그래서 졸랐어?"

"조르지 않고... 그대로 거두긴 했습니다만...."

"참하네."

"예, 예?"

에렘발트는 그녀의 대답에 당황했다.

누구보다 흑마법을 증오하는 그녀가 흑마법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연을 끊자는 애비의 목을 조르지도 않아서 참하다고."

아니, 그것도 모자라 옹호하고 있었다.

에렘발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페르다 섭정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고 자시고 아무것도 안 할 건데?"

"흑마법으로 저를 죽이려 했는데도 말입니까?"

"응. 네가 죽는 건 나랑 X도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어린 여자의 건방진 목소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이 정도로 헛발질만 해 대니깐, 자괴감이 오지게 드는구만. 하늘이 그 애송이를 돕는구나~."

에르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질렸어. 이제 내 눈에 띄지 말도록 해. 허튼수작을 부리다가 걸리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니깐. 알겠지?"

"예, 겸손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말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벗어났다.

에렘발트의 마차 안쪽은 다시 고요함을 찾았다.

"후우...."

에렘발트는 무심코 자신의 목에 손을 얹었다.

아직 자신의 목이 아직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겐 아들을 내쳤다는 죄책감도 들었지만,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찌 됐든 이제 저 망나니와 그 불결한 것을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 * *

세르데스 마법학회장실.

동그란 게이트가 열리면서 그 안에서 에르데스가 나왔다.

학회장 자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비서, 루가 앉아서 그녀의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또 일을 내팽개치고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으로 묻는 루.

에르데스는 휙 고개를 돌려 루를 쏘아보았다.

신경질적인 표정이었다.

"극동부 기반 다져 주고 왔다, 왜?"

"그 섭정 되게 싫어하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이런 XX발. X신 짓이 따로 없어."

쌍욕을 퍼부으면서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지는 에르데스.

노동자들을 꼬드겨서 노동 조합을 만들어 대항할 세력으로 만드는 것까진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상 이상으로 막강했다.

"스테판 파스칼, 그 사람 분명 허접하지 않았나?"

"파스칼 상회 회장님 되실 분인데요?"

"뭐?"

에르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것보다 쟁쟁한 경쟁자가 두 명이나 있었을 텐데?"

"언제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장녀는 남편과 서부 마을로 잠적했고, 장남은 분리 독립하겠다 난리 치다가 용병 회사 운영권을 스테판에게 넘겼는데요?"

"왜 난 모르고 있었어?"

"그야 원래도 관심 없는 영역이셨으니까요?"

"왜 나한테 얘기 안 했는데?"

"그야 원래도 관심 없는 영역이셔서?"

에르데스가 표독하게 쏘아보았다.

맞장구치던 루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어... 그게 제 잘못입니까?"

"비서면 비서답게 알아서 잘 깔끔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관심 없다 해도 한 번만 봐주십시오. 하고 들이밀어야지."

"무슨 아기 밥 먹이는 소리를.... 아니, 알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독심 마법을 익히도록 하죠."

루는 얼탱이가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에렘발트!"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두 번째 요소.

"그놈은 그렇게 겁쟁이일 줄이야. 기사 가문의 사람이라는 놈이 고작 마법사 하나한테 쫄아?"

"쫄지 않는 것들은 회장님의 손에 죽어 나갔으니, 이해해야죠."

"암만 그래도 자기 아들을 내친다는 게 말이 돼?"

"자기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멀쩡한 두 아들도 있고요. 게다가 제물로 쓰려고 내놓을 정도인데, 지금 와서 부정을 보이는 것도 좀 그렇죠."

에르데스는 팔짱을 끼면서 못마땅한 듯이 툴툴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18년 정도 살았으면, 정이라는 게 그래도 있을 거 아냐? 나 같았으면, 그래도 같이 살았던 정이라도 있었을 텐데."

루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학회장님이 말입니까?"

"왜? 떫니? 따박따박 말대꾸하고도 살아남은 게 네 능력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아?"

깨갱거리며 물러나는 루.

"아무튼, 그래서 약점도 못 잡았어. 조금이라도 부정과 유대가 있었더라면, 그 애송이의 약점으로 만들어 협박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외려 그의 인생이 얼마나 기구한지만 알게 되었을 뿐.

에르데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블루 군."

"왜 부르십니까?"

"내가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드디어 눈을 뜨셨습니까?"

"진짜 뒤질래?"

"진지하게 말해 드리면... 좋은 편은 아니시죠."

"학회는 잘 돌아가잖아? 그건 내가 일을 잘해서 그런 건가?"

"그야 제대로 안 돌아가면 모가지부터 치시니까요. 무서우니 어떻게든 돌아가는 느낌이죠."

"음, 그런 거였군, 그런 거였어. 이참에 변화해야 하겠네."

"네. 인사 정리도 좀 하시고, 물갈이 한 번 싸악 하시죠? 저를 들였을 때처럼 말이에요."

루가 은근히 그렇게 제안하자, 에르데스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해도 종신 비서형은 절대로 안 풀어 줄 거야."

"젠장."

마법학회장의 비서, 루는 오늘도 탈주를 실패했다.

* * *

자신의 불안을 고백하고 난 후, 페르다는 다시 업무로 돌아왔다.

에렘발트가 남기고 간 상처가 어느 정도 진정됐지만, 그 후유증은 불확신이라는 형태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찌 됐든 내 힘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단순히 하나의 감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감정이 개입할 수도 있는 것은 전대미문이다.

회귀 전의 페르다였다면, 옳다구나 싶어서 어떻게든 굴려 보려고 애를 썼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레드 서클을 지닌 마법사에게 다른 감정은 제동 장치에 불과하니 말이다.

페르다는 그 균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통제를 잃는 것은 비극으로 이어진다.'

발드로바의 뜻에 반하게 될 것이며, 루리는 그녀의 시종으로서 페르다에게 죗값을 물을 것이다.

루리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틀림없이 비극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극인 건....'

자신을 죽이러 온 루리를 역으로 죽이게 되는 것이었다.

'발드로바가 믿는 하나뿐인 아이를 죽이게 된다면....'

발드로바가 느꼈던 고립의 감정이 선명하게 솟구쳤다.

용마전쟁 이후, 그녀는 죄책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150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은 있었다.

발드로바는 루리가 여전히 자신의 편에 서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전생에는 그런 그녀가 사라졌었다.

그 말은 발드로바의 인생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절망뿐이라는 것이다.

'나라면 진작에 미쳐 버렸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최후에는 자신을 증오하고 있는 페르다에게 심장을 주기까지 했다.

절망으로 이어진 자포자기가 아닌, 마지막 희생을 통한 새로운 희망.

'그런 여자를....'

어떻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아프게 할 수 있겠는가?

절망의 구덩이 속에 던졌던 밧줄이 사실 썩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그녀를 구하기는커녕 더욱 큰 상처만 남기게 할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목을 조르고 있던 그 모습처럼.

불안해하지 마.

그럴 때면 귀에는 달콤한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그런 걱정을 하는 이유가 없어.

넌 강하니까.

네가 잘하는 걸 하는 거야.

페르다는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았다.

가라앉을 때까지 무시하며 또 무시했다.

'정신을 차려야 해.'

커다란 유혹에 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페르다 발드로바.

무엇이든 답을 찾았던 남자였기에, 이번에도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마법사로서 생을 포기하면 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내게 남는 건 뭐지?'

루리는 페르다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발드로바의 격에 맞는 약혼자가 될 것.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나아지리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만 인지할 뿐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알량한 미래의 정보와 마법 지식뿐.

루리가 바라는 조건에서 그는 아웃이다.

지독한 상황이었다.

어느 한쪽을 버리는 순간 균형이 무너져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페르다 또한 그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쿠웅!

그때였다.

성을 울릴 만큼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발드로바의 혈기?'

아니다.

발을 타고 흐르는 그 진폭이 다르다.

이건 성안에서 일어나는 진동이었다.

누군가가 사고를 거하게 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만큼 진동할 정도로 커다란 실험이 있었던가?'

페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동 쪽으로 향했다.

성안은 이미 혼란스러운 사람들로 복도를 채웠다.

"무슨 소란인가?"

"그게 저희도 궁금해서 나온 참이었습니다."

"그쪽 실험장에서 일어난 폭발 아니에요?"

"저희 실험실에는 이 정도 폭발이 일어날 수가 없는데요?"

폭발의 주범이 될 수 있을 사람들은 죄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페르다조차도 당연히 버넬의 실험장에서 일어났겠거니 하고 왔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요소는 하나.

"페르다 님."

루리가 찾아와 보고했다.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위치는—."

"서재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페르다, 당신이 그랬냐는 물음이 담겼다.

"여기가 아니라면 그 정도 폭발을 일으킬 사람은 에키드나밖에 없을 테니까."

이번 주는 그녀가 모리를 담당하는 기간.

그 에키드나는 서재에서 모리를 음미하는 중일 것이다.

그렇게 루리와 함께 서재로 발을 옮겼다.

서재 문을 열자, 난장판이 된 내부가 보였다.

그곳에는 모리가 앉아 있었다.

늦가을의 낙엽처럼 쏟아진 종이들을 걷어 내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고 있었다.

거대한 폭발은 안중에도 없었다.

"모리."

자신의 이름을 듣자, 펜대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 순간마저도 순수하게 빛났다.

아니, 묘하게 개운한 듯한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모리가 대답을 종이에 적었다.

-에키드나가 소멸했습니다.

깔끔하고 담백하게 요약했으나, 그 내용은 상당히 위중했다.

112화. 호기심의 대가

때는 5분 전.

발드로바 성, 서재.

그곳에는 모리가 근무 중이었다.

그녀가 하는 업무는 헤스티아 마을에서 모은 기록들을 문서화하고 보관하는 것.

법률 조언과 기록 열람 등을 겸하기도 하였다.

없어서 영입하지 못하는 A급 인재이나, 지금의 그녀는 에키드나의 장난감 신세였다.

-에키드나 님.

"응? 왜 그러세요?"

-작업 중에 껴안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완벽하게 잡혀 있는 작업 요건에서 12% 하락률을 보입니다.

그녀를 관리할 때 한 가지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업무 효율 하락률이 15% 이상 오르게 하지 말 것.

그 경고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이라면, 적당히 필요할 때만 건드려야겠구나 하고 생각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정에 굶주린 마녀, 에키드나는 달랐다.

"그럼 아직 3%의 여유나 남아 있는 거네요?"

14.99%까지 최대한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걸치겠다는 마인드.

그러나 그마저도 제대로 됐다면 마녀가 아니다.

에키드나의 흥분은 껴안는 그 순간에도 강렬해졌고, 이윽고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외쳤다.

"크르르, 못 참겠다!"

그대로 모리의 정수리에 코를 박았다.

"흡, 흡."

-멈추시길 권고합니다.

"흐으읍...."

-멈추

"쓰으으읍!"

뻐억!

"뚫허흡!?"

정수리 냄새에 삼매경이었던 에키드나의 인중에 꽂히는 강공격.

에키드나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다 뒤로 빠졌다.

끝내 벽으로 짚었던 책들을 바닥에 쏟으며 주저앉았다.

"히에에엥... 너무해요오. 폭력을 쓸 것까진 없잖아요오...."

인중을 만지며 눈물을 흘리는 에키드나.

에키드나를 내려다보는 모리의 눈빛이 묘하게 고소하다는 듯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슥슥 써서 보였다.

-방금 전의 행동으로 무려 작업 효율이 5% 상승했습니다.

"정말인가요? 모리 양에게 사디즘의 기질이? 모리 양도 마녀가 되고 싶은 건가요? 마녀가 되는 건 허락할 수 없어요옷!"

-저는 자아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리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에키드나도 맹한 짓은 그만두고 현실로 고개를 돌린다.

바닥에 쏟아진 책과 문서.

개판이 따로 없었다.

"이잉, 뭐가 이렇게 종이들이 많담...?"

이대로 뒀다간 한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간단하게 손짓하자, 흩어졌던 책과 문서들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이 책을 제자리에 꽂고 문서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이런 책들은 누가 읽으려나... 재미도 없고...응?"

툴툴거리며 손으로도 정리하던 중, 에키드나는 책에 무언가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사각형으로 접혀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보이는 재질부터가 일반 종이와는 다르다.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마법 양피지였다.

일반 서류들 사이에 마법 양피지.

그 사실만으로도 에키드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에키드나는 그 종이를 펼쳐보았다.

"마법진...?"

의문형으로 끝나는 그녀의 말.

"맞나?"

동그란 원에 박혀 있는 상형 문자들은 그녀가 자주 보았던 마법진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마법진의 요소치고는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교과서적인 요소에서 맞지 않은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중, 묘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코 깨지는 아픔을 겪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헤실 웃으며 모리를 불렀다.

"모리 야아앙~."

사각사각

그녀가 마법진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차갑게 그러지 말고 이거 한번 봐 주세요. 이게 무슨 마법진 같아요?"

사각사각.

"페르다 섭정님이 그린 것 같은데."

사각—

또르르.

모리의 눈동자가 페르다라는 단어에 움직였다.

그녀는 마법진을 스캔하듯이 위에서 아래로 쭈욱 훑었다.

그리고 몇 분을 거친 상념.

그 끝에 모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모르겠습니다.

"역시 모리 양도 모르나요?"

-예. 제가 지니고 있는 기록들 사이에선 존재하지 않는 마법진입니다.

"모리 양이 모르는 것이라면...."

에키드나는 모리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만물을 기록하는 만상서고.

인간은 물론 세르데스 대륙에서 알려진 마법들의 대부분은 이름까지 전부 기록해 둔다.

-제가 알 수 없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르데스 대륙에서 기록되지 않은 마법

두 번째는 세르데스 대륙의 언어로는 기록할 수 없는 복잡한 마법.

세 번째는 당사자가 직접 창조해 낸 마법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유력한 것은 역시 세 번째였다.

페르다가 직접 만들어 낸 마법.

-형태나 모양을 보면 세 번째가 유력해 보입니다.

"그렇죠. 언뜻 보면 그림에 지나지 않으니까...."

쓸 수 없는 마법진을 그렇게 부른다.

기하학을 배운 마법사들은 가끔 얻어걸리란 식으로 마법진을 찍어 내는데, 무려 만 개 중에 한 개꼴로만 건져 낼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마법진이라 불릴 수도 없습니다. 기하학의 요소가 없고, 형태 또한 불분명합니다.

"그렇죠?"

그림 소리를 듣는 마법진도 잘 연구해보면 작동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드는데, 페르다의 마법진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교하고 꼼꼼한 마법진들과 다르게 이건 조잡하며, 비효율적인 형태였으니까.

-작동하지 않는 마법진을 닮은 그림일 뿐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모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에키드나는 달랐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에키드나는 룬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에는 더욱 많은 것들이 보였다.

"이건 작동하는 거예요."

이 조잡하고 비효율적인 형태를 지닌 이 마법진은 작동한다는 것을.

모리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근거가 있습니까?

"근거는... 없는데용. 직감이라서...."

-그렇다면 논해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모리는 만상서고의 내용을 바탕으로 근거를 따진다.

인간들이 지닌 직감은 논리적이지 않다.

논리적이지 않은 것에 대꾸해 봐야 시간 낭비이다.

모리는 그 마법진에 신경을 끄고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리와 하던 문답이 끝이 났다.

에키드나는 대화가 끝난 것을 아쉬워하면서 동시에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작동이 되는 거지?"

스스로 직감한 것에 의문을 품는 에키드나.

그녀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머릿속에서 굴린다.

요소들을 하나씩 맞춰 가면서 베일을 벗겨 내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벗겨 낼수록 드러나는 것은 거대한 벽이었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난제.

마치 유토피아의 존재처럼, 마나 운명론처럼 해결할 수 없는 이론 같았다.

에키드나는 눈을 반짝였다.

신비하고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흥분케 했다.

그 흥분은 에키드나를 충동으로 이끌었다.

"해체해 버리자."

호기심은 이윽고 마법진 해체라는 발상까지 이르렀다.

마법진 해체는 창시자의 동의 없이는 결코 해선 안 되는 금기 행위이다.

페르다를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마저도 무시할 만큼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조금만 건드려 보는 거야."

아주 조금만.

룬 한 개를 건드리는 정도면 상관없을 것이다.

중요도로 따지면 고작해야 톱니바퀴 하나를 잠깐 꺼내서 보는 정도일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키드나의 손가락은 중심부에 있는 룬을 건드렸다.

용지에 새겨진 마나 자국이 그녀의 손가락에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에키드나는 느낀 그 룬을 복사하여 자신의 손 위에 구현시켰다.

이제 그 룬을 뜯어서 코드를 읽어 보기만 하면 된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자신의 호기심에 대가를 치를 거란 사실을.

"어라?"

그 순간, 룬이 반응할 새도 없이 녹아 에키드나의 팔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

마나의 통로 속에서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라라?"

당황하는 에키드나.

순진한 아가씨 같은 소리를 냈지만, 그녀는 재빠르게 대응했다.

마녀이자, 능숙한 마법사답게 5위계 차단 마법으로 흡수되는 룬을 막아 낸다.

"어라라라?"

하지만 먹히지 않는다.

그녀의 차단 마법은 5위계 이하의 모든 마법 효과를 차단한다.

먹히지 않았다는 것은 룬 자체가 6위계 이상에 해당된다는 뜻.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이 만들고 다룰 수 있는 룬은 5위계가 한계니까.

"커커억!!"

에키드나는 자신의 호기심에 대가를 치렀다.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그 경위에 대해서 설명해 보거라."

모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적기 시작했다.

-에키드나가 마법진에 그려진 룬을 건드리다가 그 룬에 잠식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룬에 잠식되었단 말인가?"

-말씀하시길, 페르다 님이 그린 마법진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그린 마법진?'

페르다는 인상을 구겼다.

더러운 일이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그렇다해도 에키드나가 죽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페르다가 저장해 놓은 것이 몇 개는 있었지만, 에키드나를 죽일 위력을 구사하진 못한다.

하물며 그녀의 주 종목인 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르다는 그게 무엇인지 찾으려 시선을 바닥에 던진다.

어질러진 책들 사이에 정확하게 꽂혔다.

'이건....'

페르다는 그 마법진을 알고 있었다.

마나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때, 페르다가 그렸던 마법진.

너무나도 복잡하고 조잡해 보여서 복사해 두고 어딘가에 끼워 뒀던 그 마법진이다.

'이걸 건드려서 죽었다고?'

페르다는 그 마법진에 그려진 룬을 보았다.

룬은 총 7개로 에키드나가 건드린 건 그중 하나였다.

'고작 룬 하나로 말인가?'

상식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5서클의 마녀가.

그것도 룬 메이커라는 이름을 지닌 실력자가 페르다의 룬에 죽는다니.

"그리고? 죽는 것도 보았나?"

-그 룬을 건드리고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더니,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룬에 의해 말이냐?"

-거기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모리는 지식을 기반으로 예측한다.

마법사만이 볼 수 있는 요소는 아무래도 그녀에게 무리였다.

"서클 폭주겠군요."

루리가 그렇게 짐작한다.

페르다 또한 그렇게 납득했을지 모르는 가설이었다.

저단계 서클에서는 체감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 세계에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었다.

"그렇진 않을 거다."

"어째섭니까?"

"서클 폭주가 일어났다면, 폭발에 휘말린 모리 또한 죽었을 테니까."

서클 폭주는 말 그대로 자신이 폭탄이 되는 것과 같다.

모리를 끔찍하게 아낀다 해도 이렇게 안전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커다란 진동이 일어났으나 그 진동으로만 그친 셈.

페르다의 추측은 이러했다.

"누군가가 마법을 쓴 거다."

"마법진이 발현되었다면, 마법진이 발현되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마법진은 모리 또한 볼 수 있는 요소니까.

"하지만 필리아즈의 이름을 부여받은 마녀라면 또 다른 이야기지."

페르다의 눈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것 이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에키드나가 있었던 그 자리에는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흔적이 단순히 마나의 발현만 말하진 않았다.

페르다는 흐릿한 그 형태에 마력을 불어넣어 또렷하게 색을 입혔다.

루리가 그것을 보자 놀랐다.

그것은 장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 장미꽃 같은 게 마나의 흔적입니까?"

"고위계 마법사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마나 시그니처지."

"그렇다는 건 누구의 것인지도 알고 계십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가 없는 시그니처니까.

"루시 필리아즈."

최초의 마녀.

오직 그녀만이 이렇게 이런 시그니처를 남긴다.

그 말은 즉 에키드나를 데려가기 위해 이 성 안쪽까지 개입한 것.

그 개입을 위해서 이 성에 있는 마법진을 크게 뒤흔든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외부로부터 침입을 했단 말씀입니까? 이 성의 결계는 이 정도 마법을 부리게 놔두진 않을 텐데요?"

"몸속에 마법진을 이미 심어 둔 거다. 그걸 발현시키는 건 약간의 자극이면 충분하지."

필요한 것은 도화선에 불을 붙일 아주 작은 스파크였고, 그 스파크를 위해서 루시 필리아즈가 개입했다.

"필리아즈니깐, 그 사체를 회수하기 위해 빅 시스터가 새겨 놓은 마법진이 틀림없다."

마녀를 죽이는 것은 까다롭다.

라이프 베슬을 따로 놓거나, 분신을 이용해 본체를 안전하게 두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빅 시스터'의 가호 아래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철통같은 용의 둥지도 뚫고 들어올 정도인데, 어떤 차단 마법이 그녀의 침입을 저지할 수 있겠는가?

"에키드나는 파문당한 마녀일 텐데, 그 가호가 적용됩니까?"

에키드나는 남자들을 증오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남자를 사랑한다.

이념이 맞지 않아 파문되었을 텐데, 뭐가 좋다고 그 시체를 회수한단 말인가?

페르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머릿속에 든 건 출신을 따지지 않지."

뭐가 됐든 그녀는 대륙에 몇 안 되는 가장 귀한 장인, 룬 메이커다.

루리도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독하군요. 마녀라는 족속들은."

"비단 마녀만 그런 건 아니다."

나도 그랬으니까.

페르다는 흔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하나 있군."

"걸리는 게 있습니까?"

"너무 깔끔하게 끝났다."

남긴 것이라고는 장미 형태의 흔적.

그것을 제외하면 주변에 간섭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상한 것이다.

"마녀가 이렇게 깔끔하게 끝낼 리가 없는데...."

"겨우 침입한 수준일 텐데, 무언가를 더 남기는 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루리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페르다는 간과하려 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루리에게 물었다.

"성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나?"

"예. 내성문 앞에 겁먹은 미어캣처럼 서 있을 겁니다."

"그곳으로 가 보도록 하지."

루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들 사이에 답이라도 있단 말인가?

페르다는 계단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한가롭게 하품이나 하고 있는 제드와 페넬로페도 보였다.

"제드 스왈로우."

"예?"

페르다는 그에게 손가락을 까닥여 이리 오라 지시했다.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자네는 제비족이었지?"

"그렇죠."

"내성에 근무하는 여자들에게도 껄떡거렸겠군?"

"예?! 제가 무슨 여자 없으면 못 먹고 사는 그런 놈처럼 보이십니까?"

제드가 분개했다.

그러자 루리가 그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놈 맞잖습니까? 그쪽 방을 지나갈 때마다 망할 교성이 끊이질 않는데."

"어? 그건 아마 제제가 아니라 저 때무우읍!"

"넌 닥쳐 좀.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그래서 대답은?"

"...좀 알아보는 정도입니다."

머쓱함에 뒤통수를 긁적이는 제드.

페르다는 신경 쓰지 않고, 내성 아래에 모인 사람들 쪽으로 턱짓했다.

"저기 모여 있는 여자들 중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있나?"

"아무리 그래도 제가 내성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얼굴을 다 외우고 다니는 그런 파렴치한은 아닌, 어라?"

"왜 그러나?"

"얼굴 모르는 애가 한 명 있는데요?"

딱 한 명.

제드의 레이더에서 벗어난 외모를 지닌 여성이 있었다.

제드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평범한 여성이 서 있었다.

모든 면에서 평범한, 개성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확실한가?"

"예. 이 성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제드는 확신했고, 루리의 혐오스런 표정은 더욱 짙어졌다.

페르다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섭정님께서 내려오신다!"

"모두 예를 갖춰라!"

페르다가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들은 소리치며, 모두 무릎을 꿇었다.

페르다의 눈에는 제드가 가리킨 그 여성만이 걸려 있었다.

페르다가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 앞에 섰다.

여성은 페르다의 발이 아래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발드로바 섭정님을 뵙—."

피슝—!

여성의 인사말은 전부 잇지 못했다.

그 전에 페르다의 손가락에 만들어진 마나 구슬 하나가 그녀의 이마를 관통했다.

113화. 마녀의 정원

갑작스러운 살인.

정적도 잠시였고, 곧 패닉에 빠졌다.

"허, 허억!"

"서, 섭정님께서 살인을...!!"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거침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런 혼돈의 도가니 속에 아랑곳하지 않는 건 페르다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여성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시간 낭비가 심하군."

여성은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간을 꿰뚫렸는데,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모든 이들이 페르다의 돌발적인 행동에 주춤거릴 때,

오직, 페르다만이 침착하고 단호했다.

"쓸데없는 연기는 그만둬라, 마녀. 그렇게 널브러지는 것도 힘들 텐데."

그 순간, 모두가 죽었음을 의심하지 않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허억!"

"시, 시체가 움직인다!"

마치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마리오네트처럼 부자연스럽게 까닥거리며 그 자리에 섰다.

그것이 이마가 뚫린 채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대?"

겁에 질린 여성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쩌저적—.

잠시 후, 그 형상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허물이 벗겨지듯 살가죽이 흘려내렸고, 안에 있는 육신을 꺼내었다.

하얀 비늘로 만들어진 머리카락, 세로로 갈라진 동공, 두 마리의 뱀이 휘감긴 형상을 한 지팡이.

입에서 삐죽 튀어나와 날름거리는 뱀의 혀.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뱀의 마녀, 요르다!"

"마녀가 우리 성안으로 들어왔어!"

무릎을 꿇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물러났다.

순식간에 마녀와 페르다의 주위에는 원형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요르 필리아즈.'

페르다도 그 이름을 알고 있다.

그녀의 악명은 마녀 중에서도 손에 꼽는 마녀.

실력 있는 마녀인 만큼 마기도 진하다.

그리고 그 마기가 진한 만큼 주변을 거침없이 짓눌렀다.

마녀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레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 발드로바 섭정."

걸걸한 목소리가 아닌 카랑카랑한 하이톤.

그 속에서 악의가 진하게 느껴졌다.

"만나자마자 내 이마를 꿰뚫은 건 네가 처음이네. 공왕의 부군이면 좀 더 품위 있게 다뤄야 하는 거 아니야?"

"엄살 부리지 마라. 널 죽이려고 했으면 다른 방법을 썼을 테니까."

"어머, 용맹하기도 하셔라. 난 그런 용맹한 인간들의 심장을 뽑아 버리는 게 취미인데...."

그녀가 칼날 같은 손톱을 할짝댔다.

"그 취미에 어울려 주려고 하나 봐?"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요르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온 무언가가 그녀를 덮친 것이다.

그것은 루리였다.

그녀가 요르의 목을 발로 짓눌러 제압해 버렸다.

"그 전에 네 심장부터 뽑힐 거다, 마녀."

루리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마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는 듯이 올려다볼 뿐.

"귀여운 껌딱지 아가씨. 좀 성격을 죽이고 둥글게 살아 보렴. 그래야 어른이 되지 않겠어?"

그러고는 슬쩍 치마 아래로 시선을 던지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꽤 귀엽네."

"이 미친년이—."

"그만."

루리의 주먹이 입을 부숴 버리려던 그 찰나, 페르다가 막아섰다.

"너와 놀이할 시간이 없다, 요르 필리아즈."

페르다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쓸데없는 도발로 정보 캐는 건 그만두고, 빅시스터가 전하는 메시지만 남기고 얼른 꺼져라."

요르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과장된 몸짓을 보이던 그녀가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뭐 정보 캐는 걸 안다는 건 그렇다 치고,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에키드나가 변을 당했는데도 너무 깔끔하게 끝났으니까."

마녀와 악마.

그 두 개와 얽힌 사람들은 지독하게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녀를 죽인 인간을 영원히 쫓아서 저주하는 게 너희들의 일이지."

"흐음... 바보스러운 소리를 하네. 에키드나가 파문당한 아이라는 건 알지 않아?"

"마녀가 구실이 있으면, 뭔들 못하겠나?"

"후후, 그게 맞는 말이지."

그 순간 루리가 제압했던 요르의 형상이 수십 마리의 뱀으로 흩어졌다.

요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군중에 섞인 채로 걸어 나왔다.

"우리 섭정님은 쓸데없이 마녀에 대해서 너무 잘 아네."

그녀는 재미없다는 듯이 정색했다.

"하여간, 빅시스터의 전언을 줄게."

요르의 지팡이에 있던 뱀 하나가 꿈틀거리더니 기다란 무언가를 토해 냈다.

밀봉한 두루마리였다.

요르는 목청을 가다듬고 그 내용을 읊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당신은 필리아즈의 뿌리의 기둥이자, 마녀들의 어머니, 빅시스터인 루시 필리아즈의 초대를 받았으며, 이 초대장을 받들 의무가 있음을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바이다."

그녀는 왕의 사신을 장난스레 흉내 내다가 가져온 초대장을 페르다 쪽으로 기울였다.

"이 초대장을 펼치면, 바로 마녀의 정원에 도착할 거야."

그러고는 아차 싶어 싱긋 웃으며 한마디를 더 했다.

"함정은 없어."

페르다는 그 초대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받으시면 안 됩니다."

루리가 옆에서 그를 붙들었다.

"껌딱지 아가씨, 미안한데 이건 어른들의 이야기라서 말이야. 좀 빠져 줄래?"

"닥쳐라, 마녀."

루리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아까 전과는 차원이 다른 분노와 혐오가 보인다.

"지금 네 아가리가 찢기지 않은 건 내가 인내하고 있기 때문인 걸 알아라."

"어머 무서워라. 근데 이미 이 언니 아가리는 찢어져 있어서 말이야. 볼래?"

입 가죽이 쩌적 하고 벌어지더니 사람 머리 정도는 뒤덮을 듯한 속이 보였다.

"히이익!"

마녀의 기괴한 모습을 본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났고, 요르는 만족한 듯이 깔깔 웃었다.

페르다는 그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은 채 초대장만 내려다볼 뿐.

"내가 왜 가야 하지?"

페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요르는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에키드나는 당신이 만들어 낸 룬을 건드리다가 죽었으니까."

간단하고 이미 알고 있는 대답.

"충분하군."

"진심이십니까?"

페르다의 대답을 들은 루리가 고개를 돌렸다.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후끈한 살기가 쏙 들어갔다.

"상대는 마녀입니다. 그들 중에서 수장이고요. 남자들을 증오하고, 노리개로 삼는 것들인데 그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어머, 서운하게 말하네. 얘, 우리도 감정이라는 게 있단다?"

루리의 말에 과하게 제스처를 보이다가, 페르다를 슬쩍 보는 요르.

그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런데 나도 궁금하긴 해. 뭘 믿고 그러는 거야?"

페르다는 입을 다문 채로 그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요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지. 혼자만 오도록 해. 뭐, 어차피 혼자밖에 못 올 테지만, 헛수고하지 말라는 차원으로 말하는 거야. 그럼...."

그녀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향했다.

제드였다.

그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잘생긴 제비 총각. 잘 지내?"

"아유, 저는 잘 지내죠. 누님은 잘 지내십니까?"

"호호, 언제 봤다고 누님이래? 이렇게 잘생긴 애가 그렇게 말하니깐 기분은 좋네."

눈웃음치는 것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살기였다.

"알지? 너한테 한 품은 여자가 한 바가지란다?"

"하하, 알긴 아는데,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네요."

"그럼, 그럼. 신경 쓰지 마. 그래야 네가 방심하고 있을 때,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 테니까. 평생 그렇게 살아 주도록 하렴."

제드에게 눈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럼 아듀~."

신형이 바닥에 꺼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마녀가 남기고 간 적막에 서로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갔으나, 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페르다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가만히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가시면 안 됩니다."

루리가 재차 페르다를 막았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 아십니까?"

"마녀의 정원이겠지."

마녀의 정원.

마녀들이 탄생하여 필리아즈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모든 마녀를 위한 공간.

루시 필리아즈의 부름을 받았으니, 꼭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 마녀의 정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아시고 이러는 겁니까?"

림보.

차원과 차원 사이의 공간.

그 미세한 틈새를 거치는 시간은 찰나이기에 보통 인간들은 자각할 수 없는 곳.

최초의 마녀인 루시 필리아즈는 그 장소에 마녀들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페르다 님이 들어가시면, 돌아오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진 않을 거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자신의 구역에 정식으로 초대했으니까."

페르다는 마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으며, 마녀의 정원은 신성한 구역이다.

그 신성한 구역을 증오와 혐오의 함정으로 쓸 수는 없다.

설령 자신들이 증오하는 남자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에키드나를 돌려받아야 한다."

"그 마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루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발드로바를 위해서 살겠다는 듯이 이야기하던 그가 마녀 하나에 목숨을 거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페르다 님이 함정에 빠져 죽게 된다면, 발드로바 님은 혼자가 됩니다."

그 말에 페르다는 조금 흔들렸다.

혼자가 된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부디 당신의 위치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이어지면서 페르다는 자각했다.

내 위치.

'내 위치는....'

아직도 당신의 옆에 서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페르다는 초대장을 펼쳤다.

* * *

빨려 들어가는 감각.

몸이 분해되는 것이었다.

몸에서 덩어리로

덩어리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원자로.

그 원자마저 쪼개지는 감각.

평범한 인간은 물론이며, 마법사들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건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정식 마법사로 취급받는 4성 메이지에게도 치명적이라고 본능이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경보가 무색할 정도로 페르다의 몸은 안전하게 전송되었다.

'엄청나군.'

림보는 공간과 공간 사이에 있는 미세한 공간이다.

존재하지 않고 인지할 수 없으며, 존재하지 않기에 무한한 공간.

그 위치를 특정하여, 온전하게 전송한다는 건 페르다로선 절대로 못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림보 속에서 오래 살았으며, 이해하고, 활용해 왔다는 증거.

동시에 마녀의 존재가 해악으로 묘사되어도 세르데스 대륙에서 근절할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하다.

페르다는 눈을 떴다.

형형색색 어지러이 울렁거리는 하늘.

그 아래에 놓인 거무축축한 잔디와 오솔길.

오솔길의 끝자락에는 벽으로 만들어진 가시덤불과 흑장미가 있었다.

페르다는 난 길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앞에는 이질적인 나무 대문이 그를 반겼다.

그것이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동양의 건축물이었다.

-호오?

정원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

페르다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루시 필리아즈의 것이었다.

-초대장이 도착한 지 1시간, 아니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그걸 바로 열어 보았느냐? 참으로 성급한 놈이로군. 아니면 그만큼 제 실력을 확신하는 건가?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끼이이익—

정원 안으로 향하는 대문이 열렸다.

-어느 쪽이든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구나, 아가. 얼른 들어오거라.

대문에 막혀 보이지 않던 이질적인 양식의 건물이 보인다.

그곳을 장미누각이라고 말한다.

-어머, 진짜 왔어.

-용의 부군이라는 사람이 마녀의 구역에 들어왔어.

경박한 목소리가 마녀의 정원 전체를 울린다.

곧 다시 한번 더 중후한 목소리가 페르다를 인도했다.

-더 가까이 오거라, 아가.

페르다는 발걸음을 뗐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예의를 갖추며, 그리고 레드 드래곤의 부군으로서 권위를 지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누각에 올라 입구로 들어서자, 그를 반기는 것은 정자에 오손도손 둘러앉은 여인들이었다.

옷은 제각각이지만, 전부 검은 베일을 쓴 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녀의 정원에 속한 마녀들의 예법이었다.

그중에 오직 한 사람, 중앙에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여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실루엣만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의 체형이 루리나 모리 정도에 가깝다는 것.

나무로 만들어진 긴 의자에 걸터앉아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이가 지긋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행실이 보였다.

장미누각의 주인.

모든 마녀의 어머니.

빅시스터.

그녀가 바로 루시 필리아즈.

검은 천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고 있으나, 그녀의 시선이 페르다의 전신을 훑는 것이 느껴진다.

"용맹한 행동과는 맞지 않게 여리여리하구나."

비슷한 체구인 루리를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이었다.

"소녀의 정원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가."

페르다가 그에 답했다.

"초대해 줘서 고맙군, 빅시스터."

"어머, 우리 빅시스터 앞에서 경어를 안 쓰네?"

"저주받고 싶어서 환장했나 봐."

"이참에 내가 내려 줄까, 꼬맹아?"

마녀들의 어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닥치거라."

루시가 짧게 명령하자, 마녀들이 숨소리마저 죽였다.

"소녀가 대신 사과하지. 우리 아이들이 남자에게 얽힌 한이 많단다."

"신경 안 쓴다. 오히려 이쪽이 무례했다면 사과하지. 경어를 쓰면 되겠나?"

"그럴 필요는 없다."

베일 사이에서 새하얀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너 같은 괴물에게 경어를 듣는 건 이쪽에서 께름칙하니 말이다."

"괴물?"

"거슬렸더냐? 그래, 이제 19세밖에 되지 않은 아가에게 그런 말을 하니 무척이나 섭섭할 수밖에 없지."

끌끌하는 웃음소리와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그런데 너를 보고 있는 이 두 눈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본단다."

느껴지는 시선이 어째서 께름칙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눈은 말 그대로 페르다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오래 살다 보면서 생기는 혜안이라는 것이지. 그중에서 소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볼 수 있느니라."

루시의 머리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네 눈 속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구나."

"...."

그 말은 돌아온 시점만을 얘기하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많은 사람을 죽이긴 했지만, 그녀가 말하는 괴물이라는 단어는 지금과 어울리지 않았다.

'괴물이라....'

그래, 괴물이 맞았다.

증오를 굴리기 위해 사람들을 증오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증오받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설령 희생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커다란 후환이 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남기지 않았다.

그 시절의 페르다는 괴물이 맞았다.

'그 업보는 시간조차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인가?'

그런 마음이 시간을 돌려도 바뀌지 않기에 그런 것일까?

그래서, 페르다의 몸속에는 아직도 그 목소리가 남아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들이 떠오르는 가운데 문득 질문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내가 누굴 죽였는지도 아나?"

그 수많은 희생자 사이에 루시 필리아즈, 그녀 또한 있다는 걸 말이다.

114화. 루시 필리아즈

"누굴 죽였는가 말이냐?"

루시는 실실 웃으며, 파이프에 입을 물었다.

"흐음, 그렇게 편리한 것까지 알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구나, 아가. 이 어린 것들이 조언을 구하러 올 때면 소녀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테니."

루시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그러나 네가 최근에 죽인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

루시는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러자 정원을 뒤덮은 덩쿨을 몇 겹으로 감싼 기둥 하나가 누각 쪽으로 움직였다.

루시의 옆에 충분히 가까워지자, 덩쿨이 스르르 풀렸다.

그것은 단순한 기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크리스탈 수정이었다.

마치 호박석에 갇힌 모기처럼 투명한 수정 속에는 여인이 들어 있었다.

"아가, 저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실로 간단한 질문이었다.

"에키드나 필리아즈."

그녀는 에키드나다.

그녀는 마치 장례식을 치르기 전에 열어 놓은 관에 담긴 것처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만든 룬이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다."

루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할 말이 있다면 해 보거라."

할 말을 잘 고르라는 뉘앙스가 풍겨 왔다.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고통 없이 갔나?"

무심하기 짝이 없는 말투.

"흐."

루시의 웃음소리가 누각 전체를 울렸다.

"흐흐흐흐흐...."

그 웃음에 마녀들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요기가 뻗는다.

드래곤 피어와 맞먹을 정도로 전신을 자극했다.

"아가, 참으로, 참으로 뻔뻔하구나."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필리아즈의 아이를 죽여 놓고, 한다는 말이 고통 없이 죽었냐는 물음이냐?"

그녀가 페르다의 앞에 섰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하다.

키는 루리보다 작았다.

"마녀의 원한은 백 년 동안 서리를 내리는 것과 같다. 단순히 너만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마나가 실렸다.

그것은 페르다의 오감을 건드렸다.

단순히 협박하는 것이 아닌 그가 맞이할 미래를 보여 주는 것처럼.

"네 주변을 천천히 부수고, 스스로 자결을 택하는 것마저 막아 세우며, 너를 최후의 최후까지, 남김없이 붕괴시켜 버릴 것이니라."

실제로 그렇게 괴롭게 살다가 죽은 이들이 많았다.

기록에도 남아 있었지만, 페르다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페르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블러핑을 하고 있다는 걸.

"뻔뻔한 건 피차일반이지 않나, 누각주."

"뭐라?"

루시의 한쪽 눈썹이 승천했다.

페르다는 에키드나가 박제된 수정을 턱짓하며 말했다.

"살아 있는 녀석을 죽었다고 거짓말하면서 수정 속에 가둔 게 뻔뻔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페르다가 그렇게 말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위협하던 루시의 요기가 사그라든 것이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목소리에는 노기가 사라졌다.

"그걸 어찌 알았느냐?"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마녀의 원한은 백 년의 서리와도 같으며 대를 거쳐서 저주를 내린다고."

페르다는 수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편안해 보이는 에키드나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로 나 때문에 죽어 저주할 목적이라면, 이렇게 편한 얼굴로 둬서 대면시킬 거라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후후, 마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루시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몸을 공중에 띄웠다.

옷을 나풀거리며 날아간 곳은 에키드나가 있는 수정이었다.

"에키드나, 이 가여운 것. 남자를 사랑하면 비극밖에 없다고 그렇게 일렀건만, 고집만 피웠지."

"내쫓은 당사자가 가여워하는 건가?"

"필리아즈와 이름이 맞지 않았을 뿐이지. 소녀가 이 아이를 아끼는 것은 변치 않으니라."

모든 남자를 증오하는 마녀들의 수장답지 않은 말이었다.

루시는 그 수정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가, 네 실수로 인해 죽었으니, 이 아이는 소녀가 다시 거두도록 하마."

일방적인 통보에 페르다는 즉답했다.

"거절하지."

그러자 이번에는 마녀들 쪽에서 거슬렸던지 요기가 뿜어져 나왔다.

"웃긴다. 네가 거절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해?"

"너무 봐주니깐 기어오르려고 드는 것 같은데, 조금 쓴 맛을 보여 줘야 할까?"

깔깔 웃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리는데도 그 속에서 혐오와 분노가 느껴졌다.

"조용."

그것도 루시의 두 음절에 사라졌다.

이 악의 덩어리들을 억제시키는 것을 볼 때, 빅시스터가 얼마나 마녀들을 꽉 잡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소녀도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진 않으니까.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어야지."

흐음....

그렇게 숨소리를 노골적으로 흘리며 담배를 뻑뻑 피우던 중, 루시가 말문을 열었다.

"이건 어떻겠느냐?"

자그마한 검지에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것도 붉은색 스파크.

'역천의 번개.'

루시 필리아즈가 남긴 -매개체를 통하지 않는 한 구사가 불가능한- 순수한 힘을 아무렇지 않게 뿜어내고 있었다.

"너는 마법사고, 번개에도 자질이 있는 듯하니, 조금만 배운다면 금세 요령을 터득할 거라 생각하는데, 어떻겠나? 소녀가 특별히 알려 주도록 하마."

어떻겠냐고?

'매력적인 제안이다.'

역천의 번개는 아직도 페르다가 그 실마리를 잡지 못하는 전설의 원소이다.

그녀가 떨어트린 역천의 번개를 맞은 세계수 나뭇가지로 수없는 연구를 거듭했으나, 갈피조차 잡지 못한 것이 현황.

만들어진 스태프를 통해서 몇 번이고 연구를 했지만, 대를 거쳐도 진전이 없을 정도.

'내가 그 힘을 쥔다면....'

강해질 것이다.

대마법사가 되었던 8서클의 시절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대답했다.

"거절하지."

주춤하는 루시의 손.

적절한 보상이라 생각했던 루시 또한 그 제안을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호오, 아가. 네게는 이 아이가 그렇게 소중한가?"

"중요하다."

"역천의 번개보다 말이냐?"

페르다가 강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마법의 원소.

페르다는 늘 강해지는 것이 필요했다.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페르다에게 강해진다는 것은 두 번째의 문제였다.

"내겐 행복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페르다에게는 늘 발드로바가 1순위였으니까.

"그 사람이 행복하려면, 에키드나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용하겠다는 소리로구나, 아가. 빅시스터로서, 누각주로서 그 말을 듣고도 흘려 넘길 아둔한 년은 아니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어차피 서로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가 나를 써먹는 것처럼, 나도 그 아이를 써먹을 뿐이다."

페르다가 순진한 에키드나를 부려먹긴 하지만, 그렇다고 에키드나가 눈 뜬 채로 코 베이는 중은 아니었다.

그 증인으로 제드와 모리를 세울 수 있었다.

"그래, 그것이 사회라는 것이긴 하지."

루시는 한숨을 내쉬듯이 연기를 뿜어내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순간 투명한 수정석이 물이 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녀들이 놀란 듯 물었다.

"어머, 풀어 주시려고요?"

"매력적인 제안이라 생각했는데, 필요 없다니 어찌하겠느냐?"

마녀답지 않게 집착하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긴 했다.

루시는 페르다만을 쳐다보았다.

검은 천 아래, 슬쩍 보이는 하관은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수정은 완전히 녹아 안에 있던 내용물마저 깨웠다.

정신을 잃은 듯했지만, 용케도 두 다리로 서 있었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던 에키드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라? 대체 무슨 일이...."

그녀가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슥슥 만지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잡힌 것은 페르다였다.

증오와 혐오의 시선을 너무 받아서 그런가, 그녀의 음침한 웃음이 선녀처럼 느껴졌다.

"어머, 섭정니임. 오늘도 잘생기셨네요. 헤헤...."

그렇게 스윽 굴리더니 주변을 살폈다.

"어라? 여기는 내가 아는 곳처럼 보이는데... 어째 장미누각이랑 비슷한 느낌이...."

그 말이 딱 끊어진 것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빅시스터, 루시를 볼 때였다.

"히, 히에엥!? 비비비빅시스터!?"

에키드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릴 정도.

결례나 다름없는 반응이었으나, 루시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받아쳤다.

"오랜만이구나, 아이야. 잘 지냈느냐?"

"네네! 무무물론이죳! 잘 지내고 있었습니닷!"

"파문은 내가 하긴 했다만, 연락은 수시로 하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귓등으로 듣지 않았구나."

"그, 그게... 성안에서는 연락이 안 되는지라...."

"호오, 그렇다면 섭정 탓이라는 소리로구나? 저기, 저 섭정을 조지면 되는 것이냐?"

"네? 아뇨! 그럴 리가요옷!?"

에키드나는 고개를 휙 돌려 페르다를 보며 말했다.

"절대로 그런 의도로 말한 거 아니에요!"

그러든 말든.

"물론 내가 불편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다고 한 피를 나눈 것과 다름없는 가족인데, 목소리라도 들려줘야 하지 않겠느냐?"

"부, 불편하다뇨! 저는 결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억지로 웃으면서 말하는데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마녀들이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더니 한마디씩 내뱉었다.

"어머? 저건 거짓말이네."

"거짓말이라뇨? 언니들, 저는 그런 생각 안 했어요오...."

"얘, 솔직하게 말해 버리렴."

"어차피 파문당했는데 뭐가 문제겠어? 제아무리 빅시스터라고 해도 뭐라고 못 할 거야."

"게다가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어떨지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잖니?"

에키드나의 곁에서 조잘거리는 소리들.

페르다는 그들의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먹잇감을 홀리듯이 에키드나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것이었다.

"어...."

겁먹은 거북이처럼 움츠린 에키드나는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조금 불편하기도 하달까요?"

담뱃대를 쥔 루시의 손이 굳었다.

"소, 솔직히 제 할머니보다 더 오래 사셨던 분이 소녀라고 자칭할 때마다도 불편하다고 생각해요...."

"푸흐흡...."

"키키킥...."

부추겼던 마녀들은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막았다.

루시의 반응은 실로 간단했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수정석을 옮겼던 뿌리가 에키드나의 전신을 구속해 버렸다.

"에키드나, 우리 못난 에키드나."

분노가 섞인 목소리.

페르다에게 보였던 연기와 확연히 달랐다.

"언니에게 처맞질 않으니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남들 앞에서는 경박한 소리를 하면 안 된단다."

"아아악! 팔 떨어져요! 팔 팔!"

"걱정하지 말거라. 네 팔이 떨어지면, 다리도 섭섭하지 않게 뽑아서 장식해 주마."

"죄송해요! 언니는 작지 않아요! 아주 작은 소녀예요! 아름다운 소녀예요오오!!"

에키드나가 고문당하는 장면을 보며 깔깔 웃어 대는 마녀들.

가시덩굴로 난폭하게 그녀를 괴롭히고 나서야 겨우 놓아주었다.

산발 머리에 눈시울이 붉어진 에키드나가 부들부들 떨며 페르다에게 기어 왔다.

"으에에엥, 섭정니이임. 팔이랑 다리가 너무 아파요오. 아파서, 허그, 허그가 필요푸엑!"

"떨어져라."

페르다는 그녀의 머리를 밀쳐 냈다.

마녀들은 아예 폭소를 터트렸다.

갈 곳을 잃은 에키드나는 히잉 거리며 바닥에 시선을 떨구었다.

"저 모자란 것을 정말로 데려갈 셈이냐?"

이제는 네가 걱정된다는 듯한 말이 담긴 물음이었다.

"저런 게 결함이었다면 애초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뜻이 그렇다면 알겠느니라."

순순히 포기해 버리는 루시.

수상하리라 만치 싱겁게 끝이 나려 하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페르다는 마지막까지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돌아가거라. 에키드나. 못해도 일주일은 한 번은 반드시 연락하도록."

"네, 그럴게요. 섭정님, 돌아가실까요?"

손을 내밀려 하자, 루시가 그녀의 손을 강제로 내렸다.

"섭정은 나와 좀 더 있을 예정이니라."

"네? 여기 혼자서요?"

에키드나로선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이곳은 남자를 노리개로 삼는 마녀들의 본거지.

페르다는 무방비한 먹잇감과 마찬가지였다.

루시는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이미 한복판까지 걸어왔는데, 네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아, 그렇긴 한데...."

다가오는 폭풍우를 바라보는 프레리도그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에키드나는 슬쩍 페르다를 보았다.

페르다는 그 얼굴을 읽고 대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돌아가서 루리에게 전언이나 해다오."

"어, 어떤 전언을 하면 될까요?"

"곧 돌아가겠다고 말해라. 그거면 충분하니까."

"네, 네! 물론이죠.... "

루시의 손짓으로 에키드나의 몸은 분해되어 사라졌다.

그녀는 원래 있었던 서재로 돌아갔을 것이다.

루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페르다에게 말했다.

"조금 걷자꾸나. 이 이야기는 우리 둘만이서 하고 싶으니."

얌전하게 앉아 있는 마녀들을 뒤로한 채 그녀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렇게 장미누각을 나와 정원을 걸었다.

자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은 순수하게 루시의 의지로 만들어진 곳.

그렇기에 색깔과 형태는 자연에서 느끼던 것과 달랐다.

나뭇잎은 하늘색이오, 하늘은 보라색.

"참으로 예쁜 정원이지 않으냐?"

루시가 물었다.

"기괴하군."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그녀는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아직 완전히 미치지 않았다는 말일 테니 말이다."

미소를 머금은 그 말이 페르다를 긴장케 했다.

미소의 의미를 읽으려 하던 그때였다.

장미 덩굴 쪽에서 기척을 느꼈다.

페르다는 옷 속에 숨겨 둔 쉐도우 핸드로 자기 머리를 잡아당겼다.

머리가 있던 자리에는 무언가가 날아왔다.

후웅!

거인의 기병창.

아니, 그 수준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장미의 가시였다.

페르다는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다. 너를 공격했지."

"어째서?"

"얕은 도발이나 대화보다는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너를 직접 공격하는 것 아니겠느냐?"

즉 싸움을 유도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페르다는 그 도발에 얽히려 하지 않았다.

얽히는 것은 미친 짓이다.

비록 대마법사였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4서클 메이지.

상대는 8서클 마법사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녀들의 대장.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홈그라운드이다.

'그리고 루시는 이런 도발을 할 만큼 전투에 미친 인간은 아니다.'

그녀의 도발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무슨 속셈일까?

"내 의중이 궁금한 게냐?"

루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이다.

페르다의 생각을 읽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 것을 알기보단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겠노라."

그녀가 담뱃대로 삿대질하듯이 까닥였다.

장미의 정원 덩굴들이 가시 지렁이처럼 요동쳤다.

"내게 덤비지 않는다면, 그 기구한 도마뱀의 삶에서 너란 존재를 지워 버려 주마."

비릿한 웃음을 띠는 입.

그것 또한 속이 훤히 보이는 도발이었다.

페르다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물러설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