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0

1화 늦깍이 조교의 조교수 임용

주술의 시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은 언어는 다르지만 각자 '위대한 자(尊者)'라 불려 왔다. 그들은 역사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족장에서 시작해 영웅, 그리고 왕이 되었다. 평범한 이들은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신이한 능력, 자연의 원소를 다루는 능력은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나 '천재(天才)'들을 따라 하고 싶었던 이들이 모여 모방을 시작했고, 그 능력들이 하나씩 규명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마법사(魔法師)'라 칭했으며, 작게 시작한 모임은 마침내 '마탑(魔塔)'을 형성하였다.

결국 불의 마탑, 물의 마탑, 바람의 마탑 그리고 땅의 마탑이 완성되었을 때, 마법사들은 '주술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법의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이것으로 수업을 마칩니다."

넓은 강의실에 로브를 걸친 다섯 노인과 각 노인과 닮은 청년 수십 명이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불, 물, 바람, 땅, 연금술, 인챈트 마법학을 포함한 열두 과목에 대한 36시간짜리 공개강의가 막 끝난 참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청중들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평평하고 흐릿한 이목구비를 지닌 강사는 큰 키에 마른 몸이었다.

헐렁한 로브에 가려져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청중들의 고급 로브에 비해도 깔끔한 것이 그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강의 잘 들었네. 이만 평가를 해야 하니 김민수 군 자네는 이만 나가 있게."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문을 가리켰다. 강의를 마친 김민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문을 나섰다.

'어우 씨. 알거 다 아는 인간들이… 그냥 빨리 결과를 알려 주지 뭐 이렇게 시간을 끌어.'

강사가 신입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다.

일단 수석 마법사 자격을 갖춰야 하며, 오 년 이상의 강의 경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도교수의 강력한 추천이 있어야 한다.

자격을 갖춘 강사는 각 마탑의 학장들 앞에서 36시간짜리 연강을 시행해야 한다.

열두 과목에 대한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전공 마법에 대해선 최고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

"안녕하세요. 조교님."

"어 그래. 안녕."

강의실 문밖에서 강사는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매일 하는 강의라 해도 평가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강사에게 지나가던 학생들이 고개를 숙였다.

평소처럼 인사를 받아 준 김민수는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엿들어 보려고 해도 문의 두께가 있는 탓에 안에서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불 마법학에 비중을 더 두었어야 했나? 아냐, 불 마법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했어.'

불안한 마음에 강의 내용을 계속해서 복기해 보았지만 딱히 부족한 점은 없었다.

아니 부족한 점이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이 마탑에서 구른 세월이 몇 년인가?

지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도 4년밖에 안 걸렸던 자신이었다. 여기선 그 두 배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끼익-.

"김 조교님. 들어오시랍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김민수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면서 앳된 얼굴의 소년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소년의 말에 로브를 가다듬은 김민수가 다시 강의실 내로 들어섰다.

"크흐흠! 크흠!"

"잠시만 기다리게."

키이잉-! 이그니스 학장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금빛 휘장에 내려앉고 있었다.

자신도 쓸 줄 알고 심지어 별로 어렵지도 않은 마법이지만, 김민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꿀꺽-.

"수여는 자네가 하겠나?"

"내 제자인데 마땅히 내가 해야지."

'드디어!'

마탑의 표어를 새긴 이그니스 학장이 뱃지를 내밀자 젊은 시절을 짐작케 하는 흉터 가득한 노인이 뱃지를 집어들고 김민수에게 다가왔다.

지난 팔 년간 매일 본 사이지만, 그 분위기는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김민수. 인챈트 학파의 수석 마법사. 그대는 빛과 진리의 길을 걸으매, 오른손에는 이성의 지팡이를, 왼손에는 탐구의 오브를 놓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맹세합니다."

"김민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자. 그대는 생명과 이성의 길을 걸으매, 죽음이 그대를 막을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맹세합니다."

"마나의 권능에 고하노니. 이 땅에 영원의 탐구자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이의가 있는 자는 나서라."

단상을 옆에 두고, 서로를 마주한 엔도우 학장과 김민수를 둘러싼 수십 명의 마법사들 사이에선 숨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 두 사람을 아니꼽게 보던 이들도, 싫어하는 이들도 입을 다물고 두 손을 공손히 했다.

"인챈트 학파의 수장인 엔도우가 묻노니. 이의가 있는 자는 나서라."

뱃지를 집어 든 흉터 가득한 노인이 세 번 크게 외쳤다. 그 누구도 이의를 보이지 않았고,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엄숙한 표정으로 김민수를 바라보던 엔도우 학장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축하하네 김 교수. 지금 이 순간부터 자네는 인챈트 마탑의 정식 교수일세."

김민수는 순간 목이 메었다. 지구에서 공학박사논문 심사가 통과하자마자 차원이동 됐던 일.

몬스터가 사는 숲에 떨어진 탓에 죽을 뻔했던 일.

용병대에 들어가 밑바닥에서부터 개처럼 굴렀던 일.

운이 좋아 눈앞의 노인을 만나 마탑 생활을 시작했던 일까지….

지난 1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너털웃음을 지은 학장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거기엔 육망성이 박힌 교수 뱃지가 오묘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주변에서 의례적인, 또는 격렬한 축하의 박수가 울려 퍼졌다.

김민수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자네… 우나?"

"학장님 같으면 안 울겠습니까! 크흡!"

"허허. 자네도 나이가 들긴 들었구먼그래. 이런 일로 눈물을 다 보이고."

주변에서 박수와 격려의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두 사제에겐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다.

김민수는 그만큼 힘들게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의실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을 포함한 마법사들이 강의실을 나섰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일곱입니다. 학장님! 이 뱃지 하나를 달려고 제가… !"

"아네. 나도 알아. 나만큼 잘 아는 이가 이 대륙에 누가 있겠나? 자자. 가세. 내 주점을 통째로 빌려 두었으니."

흉터 가득한 손으로 김민수의 등을 두드려 준 학장이 김민수를 이끌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계단 아래로 사라지자 다시금 강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의 학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고작 뱃지 하나에 눈물을 보이다니. 이래서 근본도 없는 것들은!"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네만…? 자네 임용됐을 때 울던 모습을 내 똑똑히 기억하는데?"

"크흠!"

엔도우 학장만큼이나 늙은 노인들이었다.

각자 불, 물, 바람, 땅 그리고 약초를 형상화한 뱃지와 뾰족한 모자를 자랑하는 노인들이 혀를 찼다.

"30년 만의 후계자이니. 이해하자고 다들."

"난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네. 고작해야 보조 마법 아닌가? 아 물론 자네의 포션 마법을 무시한 건 아니네. 크래프톤 학장."

"크흠. 저런 쓸데없는 마법사와 비교하지 말아 주시죠. 이그니스 학장님."

십여 분 동안의 뒷담화를 나눈 교수들이 이내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이그니스 학장은 계속 툴툴거렸고, 텔루스 학장은 그런 그를 달랬다.

나머지 세 학장도 각자 제자들을 이끌고 마탑으로 복귀했다.

---*---*---

"아으 머리야."

지난밤 교수 임용을 축하하는 자리엔 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김민수가 마셔야 하는 술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연구실에 출근하니, 마찬가지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엔도우 학장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학장님."

"후… 아. 자네 왔나?"

"숙취 때문에 그러십니까? 숙취해소 마법 걸어 드려요?"

[숙취해소]

엔도우 학장의 대답 따윈 기다리지 않은 채 김민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딱-!

엄지와 중지를 튕기니 순식간에 마법식이 배열되고 마법이 발현되었다.

짜증 나는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던 엔도우 학장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크흠! 그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네만, 한결 낫군. 고맙네."

"별말씀을요. 왜 그러십니까?"

드륵-. 김민수가 로브를 옷걸이에 걸고 의자에 앉을 때까지 엔도우 학장의 찌푸려진 이마는 펴질 줄을 몰랐다.

"그게 말일세… 하."

"왜… 그러십니까?"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라는 표현처럼 김민수는 뭔가 불안한 '촉'을 느꼈다.

십 년 전 전장에서나 느꼈던 불길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자네가 직접 보는 게 낫겠군. 자."

"뭐 얼마나 심각한 일이길래... 으응? 응?"

<파견서>

지난 팔 년 동안 지겹게 봐왔던 마탑의 공문서 양식이었다.

덕분에 그 내용을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인챈트 학파의 김민수 교수를 북부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로 파견함.'

"...학장님 제가 술이 덜 깬 것 같습니다. 제가 북부로 간다는데요?"

"제대로 본 거 맞네. 하...."

"저 어제 교수 됐는데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한판하고 왔네만... 미안하네."

!!! 김민수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내질렀다.

박사 디펜스 합격 판정 직후 몬스터 숲에 떨어진 순간.

용병대에 반쯤 노예처럼 구르다 마침내 대장이 된 순간.

어찌어찌 마탑에 들어와 평마법사로 시작해 수석 마법사 자격을 따게 된 순간.

그리고 마침내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외쳤던 어젯밤까지.

"제발… 학장님… 저 교수 된 지 하루 됐습니다. 학장님!"

"미안하네."

뭉크의 절규가 현실화된다면 이런 형태일까? 안 그래도 마른 편인 김민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꿈일 거야.'

넋이 나가 버린 김민수를 차마 바라볼 수 없다는 듯 엔도우 학장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이래서 천한 출신들은!"

타오르는 불이 수놓아져 있는 로브를 거칠게 털며 이그니스 학장이 짜증을 냈다.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누르며 그는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영 껄끄럽군요."

"크흠!"

약초와 땅이 수놓아져 있는 로브를 입은 이들이 한마디씩을 보탰다.

"오늘은 좀 과하셨습니다. 이그니스 학장."

"그를 편드는 건가! 신성한 마탑의 대회의에서 큰 소리라니! 에잉!"

바람의 로브를 걸친 노부인이 이마를 찌푸렸다.

"엔도우 학장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하지요. 새로 교수를 뽑자마자 파견 나가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나만 나쁜 놈이란 건가! 그대가 이야기한 사안이야! 홀로 고고한 척하지 말게!"

노인의 말에 노부인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민수가 북부에 파견 나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그녀의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자 자. 저희끼리 큰소리 낼 필요가 있습니까? 에아 학장님도 죄책감 느낄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파견이라지만 임산부를 북부에서 출산하게 놔둘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크래프톤 학장의 말에 에아 학장의 표정이 펴졌다. 기분이 나아진 것이다.

"애당초 김 교수는 용병 출신인 만큼 잘 지낼 것입니다. 칠 년 전 동부 전쟁에서도 살아 돌아온 역전의 용사 아닙니까? 파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크래프톤 학장의 말에 다른 학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말이 김민수에게도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2화 행복 끝! 고생 시작!

"아니 용병 생활 청산한 지가 언젠데...."

에아 학장과 텔루스 학장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김민수는 어이가 없었다.

과거 뛰어난 용병이었고, 전쟁에서도 살아 왔으니 북부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이라니?

그때야 이십 대였고, 심지어 그 당시 활동하던 전쟁터는 주로 동부였다. 따뜻한 내륙지역이었다는 말이다.

거기에 자신이 임용되자마자 북부로 파견 나가는 이유가 에아 학장의 제자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어이가 없었다.

'미안하네 김 교수. 우리 애가 이번이 첫 출산이라 마탑에서 꼭 출산하고 싶다지 뭔가. 자네가 좀 이해해 주게.'

평소 나름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더 배신감이 들었다.

심지어 그 뒤에는 북부로 출발하는 날까지 얼굴도 비치지 않은 탓에 배신감은 더 커졌다.

"좋게 생각하게 김 교수. 북부는 대신에 자네 손으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지 않나?"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무렴. 마탑의 명예를 드높이고 오게!"

'에휴. 그래 까라면 까야지.'

파견 날 그래도 일말의 미안함은 있는지 호위는 빵빵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직접 마탑의 정문까지 나와 배웅했다.

그러나 이미 김민수의 삐뚤어진 시선에는, 돌아올 바람 마탑의 여자 마법사를 호위하기 위한 병력으로밖에 안 보였다.

"몸 조심히 다녀오게나."

"들어가십쇼. 할 일이 많지 않으십니까?"

마지막까지 남은 엔도우 학장이 축 처진 목소리로 김민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휴. 제 걱정은 그만하시고 들어가십쇼. 제가 재능 있는 아이들을 좀 데려오겠습니다."

"다 내 잘못이네… 제자들을 더 열심히 키웠어야 했는데...."

김민수는 코가 시큰거렸다.

보조 마법이 천대받는 시대다 보니 인챈트 학파의 마법사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었다.

배우려는 사람도 적고, 그 규모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 발언권이 클 리가 없다.

"저 김민수입니다. 보조 마법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린. 조금만 기다리십쇼."

"...다치지 말고 오게."

"출발!"

두 사제는 힘겨운 이별을 마쳤다. 마탑의 마부가 채찍질을 시작했고, 이내 북쪽을 향했다.

---*---*---

"아악!"

"습격이다!"

"지금이다! 쳐라!"

북부까지의 길은 험난하다.

단순히 길이 거칠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연의 엄혹함뿐 아니라, 도적들, 그리고 예비 도적들로 득실거린단 의미다.

때문에, 마도나 제국가도 같은 큰길을 지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병을 고용하거나 여러 사람이 몰려가곤 한다.

문제는 이 시대가 늘 그렇듯 용병대가 있다 해도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다.

"교수님! 들어가 계십쇼!"

"허-."

퍽! 퍽퍽! 습격의 시작은 십여 발의 화살이었다.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용병대 중 몇이 화살을 맞고 낙마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전투 불능이 되었다. 용병대장은 능숙하게 방패를 들어 올렸고,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살 소리와 비명 소리는 연구실에 처박혀 과거를 잊었던 조교수를 각성시키기 충분했다.

"그물이다! 모두… 응?"

푸화학!

[절삭]

시동어와 동시에 마나가 물리력을 형성하고, 삼을 꼬아 만든 그물이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지푸라기 더미가 되어 버린 그물에 놀라기도 잠시.

"으아악!"

"끄악!"

푸확! 푸화학!

용병대장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붉은 피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하기사 십 년이면, 새로운 도적 떼가 자리 잡을 만하지."

[절삭][절삭][절삭][절삭]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평온한 목소리와 동시에 흘러나오는 기이한 시동어들은 별개의 울림을 보였다.

지붕 없는 마차에 권태롭게 기대어 앉은 자세와 달리, 김민수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삼십여 명의 도적 떼를 몰살시키는 데 들어간 시간은 찰나였다.

일부 용병들은 아직 칼도 뽑지 못했다. 칼을 뽑아 든 이들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아서, 어벙한 표정으로 방패를 든 팔을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이들 중 일부가 메스꺼움을 느꼈다.

"우욱!"

민간인이 피와 죽음을 보면, 토악질을 하고, 능숙한 병사가 피와 죽음을 보면 흥분하는 차이는 뇌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아드레날린이 충분히 분비되지 않은 용병의 몸 상태는 어떨까?

민간인과 별 차이가 없다.

"흐음… 가서 수색하게. 혹시나 살아 있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예… 예! 어이! 너희들! 가서 생존자가 있는지 수색해라! 어서!"

메스꺼움은 공포와 함께 밀려왔고, 이 공포를 만들어 낸 김민수의 말에 용병대장은 큰소리로 부하들을 닦달했다.

붉은 눈의 마법으로 살핀 결과 생존자는 없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짧은 수색 후 도적들이 어떻게 죽어 나갔는지 확인한 용병대는 토악질과 동시에 바짝 긴장했다.

적어도 북쪽 아카데미에 도착할 때까지 군기가 빠질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었다.

---*---*---

"도착했습니다. 교수님."

"고생했다."

키아누. 북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는 그 자체로 거대한 요새였다.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던 이제까지의 마을들과는 달랐다.

지난 일주일간 김민수에 대한 특별한 공포와 존경심을 지니게 된 용병대장이 공손히 김민수를 깨웠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자네야말로 고생했어.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고."

별거 아닌 말이지만, 이런 대단한 마법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영광이라며 용병대장은 크게 허리를 숙였다.

용병대와 김민수를 발견한 아카데미의 위병이 창을 치켜들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인챈트 마탑에서 나왔네."

"아. 이번에 파견 나온다고 하신 마법사님이십니까?"

"그렇네."

쿡! 파앗-!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지팡이를 땅에 내려찍으니 약간의 마력이 모여 황금빛 인장을 그렸다.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용병대 분들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교수님"

미묘한 신경전을 보이며 용병대가 위병을 따라 사라졌다.

북부 아카데미의 위병들은 과연 절도가 있었다.

마탑의 용병대도 김민수 덕분에 꽤나 군기가 잡혀 있었지만, 일시적인 군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하아-.

'아직 가을일 텐데 상당히 춥군.'

새 학기가 시작되니 만큼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지만, 북부는 벌써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저거 설마 마구간이 아니라 교실이야?'

위병의 뒤를 따라가며 확인한 아카데미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병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은 넓고 깔끔했지만, 그뿐이었다.

많은 수의 건물들은 아직까지도 마구간과 사람 거주 구역이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총장실과 교수실이 있을 본부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이 층의 나무 건물은 관리가 잘되었긴 했지만 딱 봐도 낡아 보였다.

건물에 들어서니 교수들로 보이는 이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익숙한 로브도 보였다.

꾸벅.

꾸벅.

바람 마탑의 선배 교수였다. 과연 만삭인 것이 곧 출산이 가까워 보였다.

눈인사와 함께 얼굴이 빠르게 밝아지는 것이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이곳이 총장실입니다. 노크 후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꾸벅 인사를 한 위병이 물러나고, 노크를 하기도 전에 총장실의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네. 김 교수. 들어오게."

노크하는 요식행위 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총장실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데는 삼 초면 충분했다.

---*---*---

"한잔하겠나?"

"네?"

"술 한잔하겠냐고 물었네."

담소를 나눌 때, 차나 와인을 내오는 다른 지역과 달리 북부는 독한 술을 내오곤 했다.

이야기로만 듣던 북부의 대접에 김민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투박한 나무잔에 걸쭉한 꿀술이 따라졌다.

잔을 채우기 무섭게 총장이 잔을 들어 올렸다.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이게 뭔가 싶던 김민수는 그게 '건배'를 요청하는 제스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묘한 그리움을 느끼며 총장과 잔을 부딪치자, 순식간에 두 잔이 비워졌다.

꿀꺽.

"괜찮군요."

"호오. 밑엣놈치고는 잘 마시는군그래."

흐흐. 거친 외모만큼이나 거친 웃음이었다.

술맛은 그렇지 않았는데, 꿀을 발효시킨 탓에 맛과 향은 달콤했다.

"훌륭한 술입니다."

"칭찬해도 나오는 건 없네."

쪼륵-.

어느새 비어 버린 나무잔이 가득 차올랐다.

딱!

김민수는 어렵지 않게 건배 후 두 번째 잔도 비워 냈다.

그리고 그것이 총장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한 잔 따라 주게."

쪼륵-.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딱! 또다시 투박한 나무 잔이 부딪쳤다. 마탑이나 동부의 용병은 쓰지 않는 건배사가 처음엔 어색했지만, 세 잔을 넘어가니 자연스러워졌다.

"건강을 위하여!"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마치 경쟁을 하듯 잔이 채워지고 비워져 나갔다.

이미 이건 담소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환영식 겸 기선제압인 것 같았다.

김민수가 이 사실을 눈치챈 건 여섯 잔의 술을 비워 갈 무렵이었다.

'용병 놈들이랑 하는 짓이 똑같잖아.'

"끝까지."

"…끝까지."

어느새 건배사가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술병도 바뀌었다.

어느새 총장의 얼굴 표정도 바뀌었다.

"일주일 전에 임명된 신입이라고 들었네. 맞나?"

"맞습니다."

"이는 북부를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제 스승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마탑은 키아누 아카데미를 모욕할 생각이 없습니다."

"임용된 지 오 년도 더 된 마법사를 데려가고 일주일 된 병아리를 데려와 놓고는 모욕할 생각이 없다고? 자네는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취기에 붉어진 총장의 두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단순히 술 취한 늙은이라 보기엔 바로 곁에 놓여진 대검이 너무 잘 보였다.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삼키며 김민수는 자기PR을 시작했다.

"마탑은, 최소한 저희 인챈트 마탑은 키아누 아카데미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를 보낸 것이 그 증거이지요."

"하-. 자네가 르벙 교수보다 낫다고?"

"제 CV를 보셨습니까? 일백오십 개의 마법 특허. 인챈트 마탑의 수석 마법사 출신이며, 여섯 마법을 모두 다룰 줄 아는 게 접니다."

"그러나 보조 마법사 출신이지."

술은 제법 남자답게 마시지만. 등을 기대며 총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스승은 나도 알아. 제국의 마법병단 출신으로 마탑의 학장을 맡은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 인물의 유일한 제자. 그것만으로 자네 능력을 알기엔 충분하지. 하지만 자네는 보조 마법사야."

"...."

북부에 필요한 건 보조 마법사가 아니라. 당장 북부의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는 원소 마법사다.

총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장 불을 뿜고, 얼음을 쏘아내고, 바람으로 잘라 마물들을 죽여 없앨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럼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흐음?"

어느새 김민수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형의 기운이 김민수의 심장을 타고 전신으로 넘쳐흘렀다.

무형의 마력은 총장의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북부의 찬 공기와는 다른 서늘함이었다.

"아이스 트롤 토벌에 참여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제가 책임지고 원소 마법사를 모셔 오겠습니다."

"흐흐. 아이스 트롤을? 아서라. 마탑의 애송이가 상대할 녀석들이 아니다."

동부에 오크, 남부에 나가, 서부에 드워프들이 있다면 북부에는 아이스 트롤들이 있다.

동부나 남부의 트롤들과 달리 사람과 비슷한 크기인 아이스 트롤들은 북부에서 가장 위험한 대상이다.

이미 마탑의 보고서를 통해 키아누 지역은 새 학기가 시작되면 정기적으로 아이스 트롤을 사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김민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북부 제일의 용사가 홀로 삼백여섯 마리의 아이스 트롤을 잡아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조사를 많이 했군 그래? 그럼 그 용사가 누구인지도 아는가?"

김민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두 사람에게서 취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고르 세르게에비치 페트로프. 키아누 아카데미의 두 번째 총장이며, 류뤼크 대공의 후예. 페트로프 백작가의 숨은 실력자. 아닙니까?"

페트로프 총장의 굵은 턱이 웃음으로 떨렸다.

"아이스 트롤 삼백 마리 이상을 잡으면, 자네를 정식 마법 학장으로 인정해 주지. 학부 구성도 허락해 주고."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페트로프 총장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키아누 아카데미에 온 것을 환영하네 김민수 교수. 그리고 부디 죽지 말게. 자네에게는 마탑 따위보다는 북부에 어울리는 냄새가 나니 말이야."

"마탑의 배움이 북부의 추위에 못하지 않다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김민수의 오른손은 페트로프 총장에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 악력은 검을 쥐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강건했고, 언뜻 보이는 흉터들은 뼈까지 베이고도 살아남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페트로프 총장은 김민수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아이스 트롤 토벌 과정에서 김민수가 허망하게 죽지 않기를.

총장은 진심으로 바랐다.

3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조교

"…벌써 돌아갔다고?"

"네. 교수님. 출산 예정일이 지척이신지라."

총장과의 대담을 마치고 선배 교수와 가볍게 담소를 나누었다.

술이 아닌 숙취에 좋은 허브차와 함께 나눈 담소는 약간의 인수인계와 북부에 대한 험담으로 끝이 났다.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선배는 다음 날 새벽 첫닭이 울자마자 키아누를 떠났고, 김민수는 그 사실을 연구실에 출근해서야 알았다.

'나 설마 여기서 이 년 이상 지내야 하는 건가…?'

"저… 교수님?"

"어. 음. 그래. 이름이 뭐라고?"

어쩌면 기본 파견 기간인 이년을 초과하여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젖어 있으려니 북부 아카데미에서 '유일한' 선임 마법사이자 '유일한' 조교가 말을 걸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아냐 라예브나 보로비요바입니다. 김민수 교수님 맞으시죠?"

"그래 반갑다. 선임 마법사라고? 르벙 교수님께 배웠으니 바람 마법 전공이겠구나?"

백금발이 인상적인 북부 소녀가 우물거리며 답했다.

주근깨가 여기저기 박혔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북부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바람 마법은 2써클입니다."

"그러면?"

"물 마법이 4써클입니다."

마탑에서 마법사의 직위를 나눌 때 평, 선임, 책임, 수석 4가지로 나뉘게 된다.

마법사를 양성하는 책임 기관이 마탑인 만큼 모든 마법사들이 위의 분류를 따르고 있다.

물론 전쟁과 같은 실무 상황에서는 몇 써클인지가 더 중요하다.

'르벙 교수가 바람 마법 말고는 잘 못하긴 하지.'

의외의 사실이지만, 원소 마법사들은 다른 마법을 배우는 데에 인색하다.

그들 스스로는 각 마탑의 자부심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지구에서 박사까지 받아본 김민수가 보기엔 그냥 똥고집이다.

절레절레.

"실례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느 마탑에서 나오셨나요? 처음 보는 인장인지라."

고개를 젓고 있으니 라예브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전해 들은 내용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건 인챈트 학파의 인장이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외워 둬."

"네?!"

그리고 라예브나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 내용도 전하지 않는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그, 그 인챈트 학파면 보조 마법을 가르치시는?"

"후… 맞다. 난 보조 마법사다."

라예브나는 말하자면, 지방대의 지도교수가 수도권으로 대학을 옮기면서 유기된 대학원생 같은 처지가 된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기된 대학원생에게는 단 두 가지의 선택지만이 남게 된다. 기존의 지방대에서 새로운 지도교수를 찾아 주거나, 자퇴하거나.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보조 마법을 얕잡아 본 건 아닙니다! 흑! 너무 당황했을 뿐입니다!"

이미 반쯤 차오른 눈물을 애써 삼키며 말해 봤자 설득력이 있을 리 없었다.

아냐 라예브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비싼 학비를 내며 원소 마법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한순간에 지도교수에게 버림받고, 평가도 나쁜 보조 마법을 강제로 배워야 하는 처지이니만큼 더 그랬다.

북부에서 보조 마법은 수요가 적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평소 냉철한 편인 라예브나지만, 스무 살도 안 된 그녀에게 갑작스런 외력에 의한 전공 변경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김민수는 지끈거리는 눈가를 문지르며 문을 가리켰다.

"당황스럽겠지. 이해해.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고. 자세한 사항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벌컥! 탕!

몸을 돌리는 순간부터 이미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애써 가리며 라예브냐가 뛰쳐나갔다.

"…이거 설마 오해하는 놈들은 없겠지?"

뭔가 그림이 이상하긴 했다. 울며 연구실을 뛰쳐나오는 여학생. 그리고 임용된 지 얼마 안 된 남자 교수.

그러나 몰려오는 짜증에 김민수는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김민수는 마른세수를 하며, 책상에 깔끔히 정리된 서류들을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그 도주를 계획하는 솜씨만큼이나 잘 정리된 글줄들이 김민수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

"이봐 속보야 속보!"

"뭐? 속보?"

"뭔데? 뭔데?"

아카데미의 동쪽. 학생 기숙사에 딸린 어떤 창고방.

구석진 방에서 소년 소녀 셋이 모여 있었다.

"새로운 마법 교수가 왔대!"

"오! 이제 르벙 교수는 가는 거야?"

"만세!"

주먹을 쥐기도 하고, 만세를 부르던 셋은 뒤이은 소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새로 온 교수가 보조 마법사라고?"

"아 뭐야 좋다 말았네."

"그럴 거면 그냥 르벙 교수가 낫지!"

"가져온 거 봐 봐!"

이제 겨우 십 대 중반.

한창 세상일에 관심이 많을 나이인 셋은 이반이 가져온 인적 사항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민수?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김이 성이고, 민수가 이름이라 하더라고."

"저기 남동부 애들이 읽는 방법이랑 비슷하네, 그 동네 출신인가?"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전공이 뭐래? 나 보조 마법사는 처음 봐."

"인챈트 학파 마법사라는데?"

"인챈트 학파? 그건 뭐 하는 곳이야?"

어떻게 빼 왔는지 김민수의 CV까지 들고 온 이반 덕에 셋은 김민수의 전공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셋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 갔다.

"뭔가… 이상한데? 보통 이력서가 이 정도로 긴가?"

"이걸… 한 사람이 다 연구했다고? 특허만 150개인데?"

"논문도 오십 개 가까이 되는데? 뭐지? 이제 겨우 서른일곱인데?"

바로 전에 마법 교수였던 르벙도 수석 마법사다.

교수이기도 하고, 마탑에서 최소 15년은 수학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르벙 교수의 CV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논문은 세 개 정도였고, 특허는 두 개뿐이었으니 말이다.

"어? 나 이 마법 알아! 이거 칼집이나 가죽끈 없이 몸에 무기를 걸어 두는 마법이야!"

"이거 자동 화덕 마법… 이거 '빵과 과자 길드'에서 개발한 게 아니었어?"

"이걸 한 사람이 하는 게 된다고?"

세 소년 소녀는 탐구심에 불타올라 CV를 읽고 또 읽었다.

논문과 특허가 나열된 순서만으로 많은 공부가 되고 있었다.

"야. 근데. 이거 가져오면 안 되는 거 아냐?"

"에이 괜찮아. 총장님 퇴근하셨어. 내가 가서 다시 넣어두고 오면 돼"

"하긴 이반 네 은신 마법은 교수님들도 못 찾을 정도니까."

"엣햄!"

율리아의 칭찬에 콧대가 높아진 이반이 가슴을 내밀면서 뻐겨 댔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은지 표토르가 불쑥 내밀어진 이반의 배를 쳤다.

"켁!"

"잘난 척 그만하고, 뭐 더 흥미로운 거 없어?"

"아. 맞아. 아냐 누나가 울면서 뛰쳐나오는 걸 봤어."

아픈 배를 문지르며 이반이 중얼거렸다.

"아냐 누나? 조교 하고 있는?"

여느 사춘기 소년이 그렇듯 조교나 기간제교사가 첫사랑인 소년들은 꽤 된다.

그런 소년에게 첫사랑을 울린 남자라니!

그리고 표토르의 첫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상대가 성인 남자고, 아카데미의 교수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자세힌 몰라. 그대로 집에 가 버렸거든. 물어볼 틈이 없었어!"

"설마 신임 교수가 아냐 언니를!"

"이런 제기랄!"

흥분한 율리아가 방방 뛰고, 표토르가 연신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이반이 율리아를 진정시켰다.

"진정해 율리아. 내가 보기에 그런 일은 아니었을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전입 첫날부터 조교를 추행하는 미친 교수가 어딨어!"

신임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신임 교수가 파렴치한 행위를 했는지 안 했는지로 변질되었다.

특히 이반이 필사적으로 변호했는데, 자신이 괜한 소식을 전한 것 같다는 후회 때문이었다.

"아냐 누나한테 가서 물어봐! 그러면 될 거 아냐!"

"이반 너!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걸 물어볼 수가 있어!"

"그래 이반! 사내가 되어서 여인을 불편하게 하다니! 넌 최악이다!"

"이게 다 오해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여자를 불편하게 하는 게 싫으면 율리아 네가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이반의 상식적인 말에, 율리아의 반응이 조금 누그러졌다.

율리아가 누그러지자 혼자 열 내던 표토르도 잦아들게 되었다.

"그래. 내가 가서 직접 물어볼게."

"휴... 다행이다."

"하지만."

이반이 어느새 젖은 이마를 닦았다.

"만약, 이 새로 온 김민수라는 교수가 아냐 언니를 추행한 게 사실이라면. 나. 율리아 알렉세예브나 페트로바가 용서하지 않겠어!"

"나, 나 표토르 세르게이비치 나자로프도!"

북부 삼대 명문가의 적녀인 율리아의 외침에 오히려 이반은 등줄기가 더욱 축축해졌다.

'왜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뭔가,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이반이었다.

4화 어린 티가 나는 학생들

"르벙 선배… 아니 선배 새끼...."

'커리큘럼이 엉망이잖아!'

글씨는 정갈했고, 내용은 많았지만, 수업 계획서는 불쏘시개 그 자체였다.

18학점이나 되는 수업 시수 중 12학점이 실기 수업이었으며, 그나마 나머지 6학점도 '마력 감지' 수업과 '고대어 수업'이었다.

즉, 오 년을 수학해도 마법서를 혼자 읽으면 다행인 수준으로 졸업한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북부 출신 마법사들이 없지...."

놀랍게도, 북부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곳은 키아누 아카데미 한 곳뿐이다.

더 북쪽으로 가면 미개척지인 만큼, 키아누 아카데미는 북부 유일의 마법사 양성기관이란 말이 틀리지 않다.

"아니 이래 놓고, 날 무시한 거야? 총장은? 아니 아니지. 원소 마법사가 이 수준인데, 보조 마법사는 더 멍청하게 봤겠군."

실기 수업이 12학점이나 되는 이유는 마법을 배워서 곧바로 마물들을 사냥하기 위함일 거다.

충분히 예상되는 그림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초가 없이 마법을 쓰는 게 될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마탑의 정규 커리큘럼이 280학점 이수고, 그중 160학점이 실기 관련 수업이니까… 아 모르겠다.'

"이건 라예브냐가 오면 직접 물어봐야겠군. 아니 그럼 걔는 이따위 수업을 듣고 4서클이 된 거야? 그게 더 대단한데?"

순수한 놀람에 뒤이어 김민수의 입가에 탐욕이 서렸다.

아주 훌륭한 대학원생의 자질이 아닌가? 허접한 수업을 극복하고 '스스로 공부해'냈다고?

'조교가 된 이유가 있었군.'

츄릅-.

마치 과거의 자신과 같았다.

그저 공부가 좋아 학부 수업 이상을 찾아보던 자신. 연구실 선배보다 실험을 잘 해냈던 자신. 학회에 참석하고 싶어 지도교수님을 찾아갔던 자신….

"으으음! 아니지 아니야. 그만 떠올려! 안 돼!"

짝! 짝!

"악!"

너무 세게 내려쳤는지 입술이 뜯어진 것 같았다.

과연 입술을 물어보니 피맛이 났다. 건조한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쉽게 찢어지는 듯했다.

"스읍. 여긴 거울도 없냐."

방을 둘러보던 김민수는 아마 거울이 있었던 것 같은 자리를 발견했다.

"...알뜰하게도 챙겨 갔군."

거울이 있던 게 확실했다.

딱 그 자리만 색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거울은 사치품인 만큼, 그리고 여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만큼 챙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하아… 내일 다시 생각해 봐야겠군."

연구실을 나서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몇몇 교수와 학생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위병이나 급사가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과연 좀 떨어진 곳에서 위병이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오늘부터 근무하게 된 김민수 교수다. 숙소로 가려는데 안내를 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교수님. 혹시 짐이 있으십니까?"

"아마 방에 가져다 뒀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실제로 그의 짐들은 용병대가 챙겼었으니 방에 가 있을 터였다.

위병을 따라 걷고 있으니 학생들과 교수들이 힐긋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눈빛은 오랜만이군. 어이쿠 마법사 지망생들도 있네?'

전형적인 코카서스 계열인 대륙민들과 달리 김민수는 저 멀리 이방인처럼 생겼으니 당연한 시선이었다.

다만 마탑에서 지나치게 익숙해졌던 탓에 오랜만에 느끼는 그러한 시선들이 신선했다.

그 와중에 마법사 지망생인지 다른 학생보다 긴 로브와 지팡이를 허리춤에 꽂고 있는 학생들을 발견해 내심 반가움이 올라왔다.

'근데 쟤네 왜 날 노려보는 거지?'

문제는 그 마법사 지망생들의 시선이 별로 곱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눈인사라도 하려 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경멸에 찬 눈빛이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당혹감이 밀려왔지만, 어른의 능숙함으로 그런 당혹감을 표출하지 않은 채 교원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봐. 새로 오신 김민수 교수님이야. 어디로 가면 되지?"

"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302호로 가시면 됩니다. 짐은 미리 올려 두었습니다."

"고맙네."

"혹시 열쇠가 필요하십니까?"

"? 잠금 마법이 걸려 있나?"

"아뇨. 상시 잠금 마법이 걸려 있진 않습니다만, 그전 교수님들은 모두 열쇠 사용을 거절하셨거든요."

또 르벙 선배인가 생각하며, 김민수도 열쇠를 거절했다.

사소한 거긴 하지만, 르벙 교수가 열쇠 없이 생활했는데 괜히 자신이 열쇠를 받아 갔다 하면, 총장에게 또 평가가 내려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러니까 꼭 마탑에 다시 돌아온 것 같네."

낡았지만 튼튼해 보이는 침대와 침구. 낡은 나무 책상 하나와 그 위에 놓인 펜과 잉크. 그리고 튼튼해 보이는 책장이 거기 놓여 있었다.

그다지 비싸 보이지 않는 물그릇과 물병은 덤이었다.

"하아… 하숙을 할까?"

한쪽에 쌓인 옷가지를 풀어 헤치며 중얼거렸지만, 오면서 본 가정집을 떠올린 김민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이 동네는 아직도 가축을 집에서 기르는 거 같던데. 하숙이라니. 내가 미친 거지."

놀랍게도, 북부는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집이 집 안에서 돼지와 소를 길렀다.

그나마 잘사는 집만이 돼지우리와 소우리가 따로 있을 뿐이었다.

"아. 젠장. 용병 생활 때가 떠오르네."

돈도 없고, 말도 제대로 못해 용병단 막내로 구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병단 시절을 떠올려 보니 이 정도면 궁전이었다.

"에휴. 내 팔자야아아!!"

갑갑한 마음에 소리를 한 번 내지른 김민수가 몸을 돌렸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양손을 치켜들었다.

[잠금][경계][결계][강화][강화][강화][경화][경화][경화]

목조 건물인 탓에 문이 달려 있긴 하지만, 김민수의 기준으로 그 문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자신이 발길질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 문과 경첩 그리고 주변 벽을 죄다 강화한 뒤 마침내 잠금 마법과 알람 마법까지 걸고 나서야 김민수는 로브와 외투를 벗었다.

"무식한 것들… 보조 마법이 최곤데 말야."

지루한 눈으로 양손을 들어 올리자,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이 손가락을 타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내 평소 목소리와는 현저히 다른 공명하는 목소리가 시동어로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각인][보온][가습][마력 유도][집적]

경화된 벽면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 각기 두 개의 원이 그려지고, 두 원 사이의 공간에 마법식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이나 죽이는 마법이 뭐 좋다고."

흥-. 냉소적인 콧바람과 동시에 302호의 내부 온도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바닥과 창문을 타고 기하학적인 문양이 대지와 연결되었고, 마력의 흐름에 따라 미약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짐승들은 눈치챘으되 사람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흐름이었다.

나무창의 경첩에 수증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방 내부의 온도와 바깥의 기온 차가 10도 이상 나기 시작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점차 김민수의 코에서 뿜어져 나오던 입김이 사라졌다.

김민수의 붉은 눈에 바닥과 벽면을 채워가는 마력이 명확히 보였다.

"조금 약하게 틀어야겠군."

허공에서 마치 다이얼을 돌리듯 손을 돌리자 뜨거울 정도였던 온도가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체감상 24도 정도로 맞추자 훈훈한 봄 날씨 같은 공기가 방 안을 맴돌았다.

"음. 딱 좋아."

김민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

"이럴 줄 알았어! 그 개자식이 아냐 언니를!"

"봐라 이반! 그 작자가 아냐 누나를 추행한 게 틀림없어!"

세 사람은 마침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기숙사를 나선 상황이었고, 우연찮게 본부를 나서는 이방인 교수를 마주쳤다.

학교에 새로 온 교수는 특히 마법사는 한 명뿐이었으므로, 세 사람은 그 교수가 누구인지 추론할 수 있었다.

'저것 봐! 입술에 상처가!'

'저건 분명 뺨을 맞은 자국이야!'

'아니 얘들아, 조교 누나한테 물어보자니까….'

문제는 이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민수의 입술은 터진 지 얼마 안 된 듯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반이 보기에 오른손잡이인 아냐가 왼손으로 때렸을 리는 없으니 오른쪽 입술이 까져 있다는 사실을 항변했지만, 율리아의 벌레 보는 듯한 눈빛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어! 당장 오빠에게 알려야겠어!"

"나도 아버지께 말할 거야!"

"아니 얘들아! 그러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니까?! 일단 조교 누나한테 가서!"

이반의 상식적인 이야기는 율리아와 표토르의 강렬한 눈빛에 저지되었다.

두 사람은 어디서 꺼내 들었는지 고급스러운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율리아가 펍의 주인에게 소리쳤다.

"이봐 마스터! 지금도 편지를 보낼 수 있나?"

"응? 아. 페트로바 영애. 어디로 보내는 편지입니까?"

"페트로프 백작가!"

"키아누 외부로 가는 편지군요. 그건 주일이 지난 뒤에 한꺼번에 보내므로 좀 기다리셔야 합니다."

"더 빨리는 안 되나?"

"그러려면 심부름꾼을 따로 쓰셔야 합니다만...."

거의 오 일 뒤에나 보낼 수 있다는 말에 이반이 안심했었지만 뒤 이어진 율리아의 말에 이마를 쳤다.

율리아는 어떻게 해서든 저 편지를 보내고 싶은 것이리라.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들자 주인의 허리가 자동으로 굽혀졌다.

"내일 아침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아주 좋아. 아 여기 나자로프 자작가도 부탁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헤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맥주를 시켰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과도 같았다.

'이, 이건 잘못됐어. 총장님. 총장님을 찾아가자!'

귀족 자제인 둘과 달리 상인의 자제인 이반은 두 사람보다 현실적인 편이었다.

아니, 신분의 차이가 소년을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너희들은 일이 잘못되어도 질책 정도로 끝나지만 난 퇴학이라고!'

일이 잘못되면 마탑 교수를 음해한 죄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다 뒤집어쓸 판이었다.

"나, 난 먼저 들어갈게."

"뭐냐? 이반? 도망치는 거야?"

"이씨… 술 마실 돈이 없어서 그런다!"

"뭐? 돈 때문에? 짜식. 형이 사 준다. 앉아 임마!"

이반이 평소 쌓아 놓은 이미지에 발목을 잡혔다.

이반을 제법 좋아하는 율리아와 표토르는 이반의 술값 정도는 흔쾌히 내 주는 이들이다.

문제는 평소 빼지 않던 이미지 때문에 탈출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데 있었다.

'망했다! 젠장할!'

금세 나무 컵 가득 걸쭉한 맥주가 채워졌다.

이반은 이 둘을 최대한 빨리 보내 버리기로 결심했다.

총장이 잠들기 전에 말이다.

---*---*---

후릅-.

'저게 그 취하지 않는 마법사란 말이지?'

늙으면 밤잠이 없어진다.

북부인들은 더 그렇다.

날씨가 춥다 보니 새벽녘쯤 깨 버리기 때문이다.

두터운 곰 가죽을 뒤집어쓴 채 화로 앞에 앉은 총장이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인챈트 학파. 김민수. 수석 마법사.'

북부에 마법사가 적다곤 하지만, 그게 없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북부 유일의 아카데미인 만큼 페트로프 총장은 제법 상세히 교수들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민수에 대한 정보도 제법 다양하게 모았다.

'취하지 않는 마법사. 용병왕. 불패의 용병단. 대장장이 마법사. 아홉 마녀를 상대한 자. 섬뜩한 사냥꾼. 절삭자. 용 사냥꾼.'

허풍 같은 말도. 미묘하게 진실인 말도. 대놓고 사실인 말도 섞여 있었다.

북부는 거칠다. 힘을 숭상한다.

그만큼 실력이란 중요한 요소이다.

르벙 교수의 마법 수업이 인기가 없다는 사실은 총장도 이미 알고 있다.

단지 이 추운 북방에 오려고 하는 실력 있는 마법사가 없었기에 그냥 놔뒀을 뿐.

그럼에도 르벙 교수가 용납된 것은 북부 마물 토벌 기간에 확실한 1인분을 해냈기 때문이었다.

바람 마탑의 수석 마법사답게 마물 토벌 당시 홀로 백여 마리의 마물을 사냥했다.

때문에 페트로프 총장은 김민수의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용병왕'이라고 까지 불렸던 실력을 보기 위해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입에 가져가던 총장은 갑작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쾅쾅쾅!

"총장님! 총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앳되다.

끼익-.

과연 문을 열어 보니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린 학생이었다.

긴 로브가 마법사 지망생임을 보였고, 불콰한 표정과 술 냄새가 좀 전까지 술을 마시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총장의 목소리가 공기만큼이나 서늘했다.

꿀꺽.

이반은 마른침을 삼켰다.

5화 용감한 삼총사

"죄송합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른 아침 위병의 다급함 섞인 목소리에 허겁지겁 총장실에 방문하니,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 학생 세 명과 라예브냐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특히 갈색머리 소년 하나는 거의 엎드리다시피 사과하고 있었는데, 총장으로부터 내막을 전해 들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냐 라예브냐 양을 추… 행했다고 오해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걸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바로 백작가와 자작가에 알리려 했고…?"

'어쩐지 불안하다 했다.'

"…입술 상처 때문에 저희는 영락없이 교수님이 뺨을 맞으신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한테는 몰라도 라예브냐에게는 왜 안 물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어지는 학생들의 사과에 몸에 힘이 빠졌다.

"어떻게 하겠는가 김 교수? 처분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총장의 표정도 가히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오해가 있으면 총장인 자신에게 먼저 알려 주면 될 것 아닌가?

곧바로 외부 귀족가에 편지를 써 버리다니?

총장의 표정이 안 좋은 만큼 김민수의 표정도 실시간으로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일단. 사실대로 말해 줘서 고맙구나. 특히 편지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렇게 전달해 준 용기에 감사한다. 그러나."

김민수는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삼십 대도 넘어 사십을 바라보는 만큼 마구 화를 내기엔 이제 나이도 먹었다.

또 이 학생들과 향후 몇 년을 봐야 하니만큼 원수질 수는 없었다.

뭣보다. 애들 아닌가? 그리고 제 잘못을 사고가 터지기 전에 고백하고, 또 벌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용서를 구하는 것은 큰 용기다.

잘 타이르면 될 것이었다.

"너희 셋 모두 한 달간 연구실로 나와라. 마침 다음 주가 개강이니 개강 전부터 특별 수업을 실시하겠다!"

"한, 한 달이나요?! 윽!"

표토르가 소리쳤지만, 눈치 빠른 이반이 옆구리를 찔렀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이 작구나. 불만이냐?"

"아닙니다!"

후우-. 작게 한숨을 쉰 김민수가 한발 물러나니 총장이 아이들을 내보냈다.

"라예브냐 양은 남게."

"네… 총장님."

세 학생을 내보낸 뒤 총장과 김민수 교수는 약속한 것처럼 눈가를 문질렀다.

특히 새벽부터 일의 전말을 파악하고, 직접 기숙사 근처 펍까지 달려가 심부름꾼에게서 편지를 뺏어 온 총장의 피곤함은 더했다.

"저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너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니."

사과해 오는 라예브냐에게 김민수는 착잡한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나, 내 밑에 있는 게 불편하다면 지금 말해라. 내 마탑에 추천서를 써 줄 테니."

어젯밤까지 라예브냐를 탐냈던 김민수였지만, 좀 전 같은 일을 겪으니 정신적 피로감이 몰려왔다.

"비록 인챈트 학파의 추천서라 효력이 낮을 수도 있으나, 만약 용병대나 빵과 과자 길드에 취업하려 한다면 내 힘 써 주지."

"아뇨! 아뇨! 교수님 괜찮습니다!"

라예브냐야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키아누는 그녀의 고향이고 또, 김민수의 말처럼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김민수가 용병계나 길드 들 사이에 어떤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김민수에 대한 정보를 제법 많이 모은 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라예브냐 양. 김 교수의 말이 맞네. 보조 마법사의 추천서가 믿음직하지 않다면 내가 써 주겠네. 키아누 아카데미 총장의 추천서라면 마탑에서도 자네를 무시할 수 없을 걸세."

"아… 음. 그 생각해 보겠습니다."

총장의 말에 라예브냐는 결국 생각해 보겠다는 답변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김민수는 입이 썼다.

이세계에 오면서 느꼈던 막막함과 보이지 않는 벽이 다시금 느껴지는 듯했다.

"피곤하군. 그럼 자네들도 가 보게. 개강 준비를 하려면 이것저것 바쁠 것 아닌가?"

총장은 하룻밤 만에 폭삭 늙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육십이 넘으면 이 세계에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추운 북부에서는 단번에 폐렴에 걸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김민수와 라예브냐를 쫓아낸 총장은 화로에 장작을 밀어 넣고, 주전자를 올렸다.

---*---*---

"라예브냐 조교."

"예! 교수님!"

눈을 강하게 감았다 뜬 김민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아직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연구실까지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네. 교수님. 저만 믿으세요!"

김민수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주려는 배려라는 사실 정도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라예브냐가 앞장서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르벙 선배님은 어떻게 수업했는지 알려 줄 수 있나? 그리고 학업 계획서가 실제로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차가운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대화였지만 점차 유익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남들은 몰라주지만 능력 있는 편이었고, 라예브냐는 남들은 몰라주지만 재능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키아누 아카데미의 마법 수업 커리큘럼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또 고민했다.

다음 날부터 마법사 지망생 셋이 추가되었고, 연구실은 처음 어색함을 깨고 활기를 되찾았다.

"으윽... 나 암기가 너무 싫어...."

"아직도 스무 번이나 더 써야 해?!"

표토르와 율리아는 귀족 출신인 만큼 고대어에 대한 소양이 제법 있었지만, 그게 김민수를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첫날부터 고대어 필사 50번을 요구한 김민수가 차를 끓이며 말했다.

"고대어에는 세 가지가 있다. 주술 시대 이전 고어(古語), 주술 시대의 구어(舊語) 그리고 백 년 전 정립된 신어(新語)가 그것이다. 일상어로 마법식을 형성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 이반?"

"일상어로 발음하다가 마법이 발현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맞다. 고어와 구어의 경우는 그 시대에 쓰인 언어 자체이지만, 신어의 경우 마법 사용을 위해 만들어 낸 인공어에 가깝다. 그 원형이 되는 언어는 분명 있으되 마법 발현에 최적화된 방식을 발견해 낸 것이지."

딸깍. 아이들 앞에 꿀 차를 하나씩 놔주며 김민수는 라예브냐의 뒤로 이동했다.

"마법의 시대 마법 발전 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봐라. 아냐 라예브냐."

"예! 마법시대의 초기 다양한 방식의 마법 활용이 권장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써클 마법, 클래스 마법과 주문, 제도 그리고 수식과 영창의 방법이 그것입니다."

"주문, 제도 방법의 차이를 설하라."

"주문은 고대어를 활용해 정해진 언어를 내뱉음으로서 마력의 배열을 이끌어 냅니다. 언어적 표현을 강화하면, 수식, 비언어적 표현을 강화하면 영창이 됩니다.

제도는 마력이 흐르는 길을 그리는 것입니다. 고대어를 활용할 수도 있고, 직접적인 수식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기본은 원과 육망성이며, 일부 마법사들은 삼차원 이상의 다면체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라예브냐는 과연 조교답게 막힘없이 설명을 이어 갔다.

"훌륭하다. 제도 방식을 마법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각인]

치-지직-. 미약한 시동어와 동시에 연구실 벽면에 황금빛 원이 나타났다.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천천히 하나하나 원을 그리고, 두 번째 원을 그리고, 원과 원 사이를 고대어와 수식으로 채웠다.

마법진에서 따뜻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연구실이 훈훈해졌다.

"우와...."

"저게 무슨 마법이지?"

"이것은 주문이다."

[불아 타올라라, 세상을 태워라.

화염아 솟구쳐라, 사납게 일어나라.

불타오르는 너는, 나의 뜻을 따라라.]

주문이 끝나자 사람 머리통만 한 불덩이가 아이들 사이에 떠올랐다.

"그런데 교수님. 지팡이 없이도 마법을 쓸 수 있나요?"

이반의 물음이었다.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마법사는 지팡이를 사용한다.

작은 지팡이를 쓸지언정, 지팡이를 사용한다.

그러나 김민수의 손에 지팡이는커녕 반지 하나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새삼스럽다는 듯 율리아와 표토르 그리고 라예브냐도 김민수를 바라보았다.

"나에겐 '제도'가 지팡이다. 의지에 반응하여 마력이 나열되는 순간, 그 의지 담긴 마력은 나의 마법 지팡이며, 아티팩트가 된다."

말을 이어 가는 김민수의 두 눈은 미약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뭔가 멋있어!'

"와… 교수님 눈이 빛나요!"

"너희도 마법을 쓸 때 눈이 빛난단다."

"네? 르벙 교수님의 눈은 빛나지 않았는데요?"

"그건 그녀의 마력이 좀 더 투명한 색에 가깝기 때문이란다. 어두운 곳에서 보면 빛나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지."

어느새 아이들의 손이 멈추었지만, 김민수는 딱히 타박하지 않았다.

마법사 지망생이 마법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학생들이 공부를 즐거워한다면 그저 된 것이다.

"라예브냐. 마법을 써 봐라. 이왕이면 바람 마법으로."

"네? 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라예브냐는 이내 허리춤에서 참나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어떤 주문을 사용할지 고민하길 잠시.

이내 그 피부만큼이나 투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아 불어라, 삭풍을 일으켜라.

산맥의 견고함을 가르라.

마물의 머리를 베어라.

북풍의 한기에 찢기듯.]

사악-.

날카로운 바람이 촛불의 심지를 갈랐다. 정확히 노려진 삭풍이 불꽃만을 껐다.

마법이 발현되고 사라지는 그 찰나. 라예브냐의 눈이 은색으로 빛났다.

표토르가 외쳤다.

"정말이야! 아냐 누나의 눈이 빛났어!"

"정말?!"

"난 못 봤는데!"

율리아와 이반이 아쉬워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불덩이로 초에 다시 불을 붙이며 김민수는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 어떻게 4써클 마법을 사용한 건가? 자네의 바람 마법은 2써클에 불과할 텐데?"

"아. 클래스 마법을 응용했습니다. 어차피 써클 마법은 주문의 중첩이잖아요? 클래스를 쌓듯 2써클에 2써클을 한 번 더 겹쳤습니다."

'굉장한 재능이군.'

김민수는 그 재능이 기꺼웠다.

라예브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저 방법은 다면체 방식의 제도 마법을 사용할 때 활용되는 방법이다.

"르벙 교수님이 알려 주셨나?"

"…가르쳐 주긴 하셨습니다. 마탑에서 나온 최신 방법이라고요."

'그걸 아는 거하고 쓰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곧바로 지식을 퍼붓고 싶었지만, 아직 아니었다.

김민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보조 마법의 멋짐에 충분히 노출되면 그다음에 권해 보자. 그렇게 다짐했다.

"자. 너희들도 마법을 써 보자. 할 줄 아는 마법이 있니?"

김민수는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감추며 아이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표토르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저도 윈드 커터를 쓸 줄 알아요!"

"자, 잠깐만 기다려라."

대뜸 주문을 외우려는 표토르를 말리며 김민수는 빠르게 마법을 전개했다.

[생장][벽][생장][경화][경화]

"우와아...."

"이, 이것도 보조 마법인가요?!"

"이게 보조 마법이라고…?"

아이들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무로 된 벽에서 나무가 자라나더니 'ㄷ'자 형태의 공간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자라난 나무들이 빽빽해지며 순식간에 연구실 한편에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이 생성되었다.

"자. 여기에 써 봐라. 내가 봐주마."

아이들은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지만, 르벙 교수 밑에서 정식 마법사 생활을 해 본 라예브냐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게 천대받는 보조 마법사의 실력이라고…?'

혼란이 뇌리를 잠식했다.

6화 아카데미의 신고식

"교수님...."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한 김민수를 맞이한 것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성이는 라예브냐였다.

그 앞에는 웬 궤짝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양피지들이 수백 장 담겨 있었다.

"이게… 뭐야?"

"이제 곧 개강이라 개강 안내문을 써야 한다면서 좀 전에 위병들이 놓고 갔어요."

이제 곧 개강하니 귀한 여러분의 자녀들을 아카데미로 보내 달라. 뭐 그런 걸 쓰기 위한 종이라는 거다.

그런데, 마법학과의 학생은 고작 여섯. 그중 하나는 심지어 신입생이다. 그런데 상자 안의 종이는 못해도 수백 장은 되어 보였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어쩌죠 교수님?"

'이것들이 설마…?'

"혹시 학생들 명단도 담겨 있니?"

"네. 여기...."

김민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내리누르며 라예브냐가 건네준 양피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학교 학생 전체의 명단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나마 그 학생들의 소속과 학년이 적혀 있는 것이 다행이라 할 것이었다.

"이거 말고 다른 두루마리도… 아 이거군."

라예브냐에게 다른 두루마리가 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말려 있는 다른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신입생과 재학생들에게 보내야 하는 안내문 양식이 한 부 적혀 있었다.

'북부 놈들 신고식이 너무 유치하잖아… 아니지 종족이 교수들이라 그런 건가?'

"미안한데, 라예브냐 삼총사들한테 가서 오늘 수업은 한 시간만 늦게 시작한다고 전해 줄래?"

"네? 교수님… 이걸 혼자 다 쓰시게요?"

이쯤 되니 라예브냐도 알아차린 듯싶었다.

이게 신임 교수를 향한 일종의 신고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르벙 교수는 여자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소 마법사라 그랬는지 이런 일을 안 겪어 본 탓에 라예브냐는 이 상황이 어색했다.

"하지만...."

"됐다. 너도 졸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한테는 별거 아니니 염려 마라."

"아니 잠깐만요. 한 시간 뒤에 애들 공부 봐주시려고요? 그냥 하루 정도 미루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예브냐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키아누 아카데미의 학생 수가 많은 편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삼백 명은 넘는다.

삼백 장이 넘는 양피지를 채우려면 못해도 삼 일은 날밤을 새워야 할 텐데?

"흐. 걱정 말고 다녀와라. 내 그 안에 끝내 놓을 테니."

킥킥.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악동 같은 웃음에 라예브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그러나 라예브냐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김민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건 괴롭힘 축에도 못 들지.'

[부유][염동][염동][제도][제도]

김민수의 의지에 따라 수백 장의 종이들이 각 역할에 따라 나뉘었다.

재학생들에게 보낼 용도, 신입생들한테 보낼 용도. 그리고 예시문을 띄워 어떤 양식으로 써야 하는지 잠시 살폈다.

'마탑 시절이 생각나는군.'

김민수의 트레이드마크는 '제도' 마법이다.

김민수는 제도 마법의 중조요. 사실상 새로이 창조한 사람이다.

이는 그 자존심 강한 마탑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처음에 프린트기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던지.'

대륙에서 책이 비싼 가장 큰 이유는 그걸 손으로 하나하나 필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입 마법사를 괴롭히는 가장 쉬운 망법은 각 학파의 마법서를 통째로 베껴 쓰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온 김민수에게는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고, 그냥 마법을 만들어 냈다.

'오 분이면 끝나겠군.'

그래도 오탈자가 나거나 양피지를 찢어먹을 것 정도는 배려해 줘서인지 여분은 많았다.

물론 김민수에게는 별 필요 없는 배려이다.

.

….

#명단 리스트 파일 경로 정의

list_path = r'con:\Kianeu\academy\kim\list.csv

list = load_list_from_kim(list_path)

….

.

[인쇄]

어차피 양식은 정해져 있는 바.

순식간에 이름만 다른 개강 안내문 수백 부가 작성되었다.

마력이 작동되며 발생하는 소리는 어딘가 그리운 전자기음을 일으켰다.

1분당 12장씩 인쇄되는 광경은 나름 장관이었다.

수백 장의 종이가 허공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더니 글씨가 새겨졌기 때문이었다.

필체는 깔끔했고, 오탈자 하나 없었다.

"음. 좋아."

가장 먼저 인쇄된 안내문을 읽어 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인쇄 마법은 그대로 유지한채 김민수는 새로운 마법을 일으켰다.

[염동][회전][감속][감속][결박]

김민수의 인도에 따라 양피지가 살살 말리더니 붉은 끈으로 예쁘게 묶였다.

탁탁-!

금세 완성된 안내문을 손바닥으로 쳐 보니 풀리지 않았다.

"아차. 깜빡할 뻔했네."

수백 개의 양피지가 완성되었지만, 문제는 그게 누구에게 보내지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김민수는 급히 새로운 제도 마법을 일으켰다.

[인장][낙인][낙인]

허공에서 생성된 마력이 도장의 형상을 띠더니 양피지 겉표면에 이름을 새겼다.

"이런 걸로 날 엿 먹일 수 있겠느냐~♪"

절로 가락이 흘러나왔다.

아재답게 전혀 근본 없는 박자와 음정이었다.

그러나 김민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탁탁-. 착-.착-. 허공에서 안내문이 인쇄되고, 겉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진다.

가만히 있기 심심했던 김민수는 허공에서 완성된 두루마리들을 상자에 나눠 담았다.

"자. 신고식 끝!"

탁탁-. 마무리로 손바닥을 몇 번 털어 줬다.

시간을 보니 고작해야 40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어이! 아무도 없나?"

"네! 교수님!"

이왕 끝낸 거 애들 오기 전에 꿀차라도 만들어 주자 생각하며 김민수는 위병을 불러들였다.

마침 순찰 돌던 위병이 있어 김민수는 상자들을 인계할 수 있었다.

꿀 향이 참으로 달았다.

---*---*---

"이게 뭔가?"

"아. 김민수 교수가 보내왔습니다. 개강 안내문이라고 하더군요."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온 교무처장은 자신의 사무실 앞에 놓인 꿰짝에 의문을 표했다.

'어젯밤에 가져다 둔 거 같은데?'

"언제 가져왔나?"

"한… 삼십 분 정도 되었을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방 안으로 좀 들여 주겠나?"

익숙한 궤짝에 설마 하며 열어 보자 삼백이십 개의 개강 안내문이 예쁘게 묶여 있었다.

얼마나 잘 묶었는지 삼백 개가 넘는 양피지의 매듭이 찍어낸 것 같았다.

심지어 그 위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까지 찍혀 있어 누구에게 보내는지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독한 놈...."

키아누 아카데미를 나름 밝게 만들어 주던 르벙 교수가 도망치듯 북부를 떠나고 웬 시커먼 사내놈이.

그것도 음울하게 생겨선 비리비리한 사내놈이 온 것이 마음에 드는 남자 교수들은 없었다.

해서 교무처장과 일부 교수들은 신고식도 할 겸 아카데미의 모든 개강 안내문을 김민수에게 떠넘겼다.

신입 교수들은 다 한 번씩은 거치는 신고식이었으니 말이다.

"이걸 하룻밤 만에?"

대충 성이 없어 이름이 짧은 학생 것을 열어 보자 정성스럽게도 적은 안내문이 거기 있었다.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마법사 놈이라 그런가?'

교무처장 그 자신도 공부를 하긴 했지만, 본질은 전사다.

고급진 글씨체와 완벽한 문법이 좀 재수 없었다.

"크흠. 뭐. 알아서 잘했겠지."

다른 학생들 것을 열어 본 건 아니었지만, 교무처장은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 세월에 삼백이십 개나 되는 양피지를 다 열어 본단 말인가?

"아잇. 이거 왜 이리 안 묶여."

무엇보다 열어 봤으니 양피지를 다시 묶어야 하는데 이게 다른 학생들 것처럼 예쁘게 묶이지 않았다.

"크흠! 위병! 위병! 밖에 있나?"

"예! 처장님 부르셨습니까!"

대충 묶고 상자에 넣고 끝내려 했다.

그런데 거슬렸다.

완벽하게 맞춰진 삼백열아홉 개의 두루마리와 자신이 묶은 두루마리 간의 차이가 너무 컸다.

"자네. 매듭 좀 묶을 줄 아는가?"

"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위병의 손재주도 보잘것없었다.

결국 교무처장은 하녀 하나를 불러와 리본을 묶을 수밖에 없었다.

---*---*---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전날보다 한 시간 늦게 시작한 수업은 비슷한 시간에 끝났다.

전날보다 아이들의 집중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자랑이라도 하듯 마법을 퍼부었고, 그때마다 김민수는 흐뭇한 웃음과 함께 아이들의 마법을 교정해 주었다.

"그래. 어서 들어가라. 내일까지 과제는 꼭 해 오고!"

"네!"

"넵!"

품에 한 아름 과제물을 안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마법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예브냐. 너도 들어가라.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

"아닙니다. 교수님. 제가 하겠습니다!"

"으응?"

아이들과 함께 보내려 했지만, 라예브냐는 의욕적으로 자신이 뒷정리를 하겠다 했다.

김민수는 의아해하면서도 주전자를 꺼내 들었다.

따뜻한 차나 한 잔 해서 보낼 생각이었다.

[가열]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손바닥을 올렸다.

5초도 되지 않아 물 끓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보글보글.

그리고 그 모습을 라예브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니?"

결국 부담을 참지 못한 김민수가 되물었다.

"교수님.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뭘?"

"개강 안내문이요! 보니까 다 처리하신 거 같던데요?"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저 초롱초롱한 눈빛이 호기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김민수의 긴장이 풀렸다.

[제도][인쇄][염동][회전]

책상에 놓여 있는 빈 종이를 들고 와 마법을 시전했다.

황금빛 마력이 일어나며, 순식간에 종이의 한 면이 글자로 가득 찼다.

뒤이어 허공에서 돌돌 말린 종이 위로 뱀처럼 올라온 줄이 저절로 매듭을 지었다.

"짠-."

"...."

나름 장난친다고 과장된 자세로 두루마리를 넘겼으나 라예브냐는 입만 벌린 채 받을 생각을 못 했다.

"그… 한번 열어 볼래?"

"네? 네!"

자신이 너무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을 지각한 라예브냐가 허겁지겁 두루마리를 받아 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개강 안내문이 있었다.

유려한 글씨체, 완벽한 문법.

바로 눈앞에서 작성되는 것을 봤음에도 라예브냐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세상에! 교수님! 이게 뭐죠?"

"보조 마법이란다."

"보조 마법이란 건 정말 대단한 거군요!"

큼큼. 김민수는 기침으로 애써 표정을 단속했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눈은 저절로 웃고 있는데 입꼬리만 단속하고 있으니 그 표정이 우스웠지만, 라예브냐나 김민수나 거기에 신경 쓰지 못했다.

"와-! 이건 정말 대단해요 교수님!"

"아아. 별거 아니란다. 기초적인 보조 마법이지."

라예브냐의 순수한 감탄이 김민수의 어깨와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김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찻물이 다 우러나왔기 때문이었다.

"크흠. 꿀?"

꿀통의 뚜껑을 열며 물으니 라예브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허니 디퍼로 넉넉히 꿀을 넣어 주니 달콤한 향이 사방에 퍼졌다.

따뜻한 청동잔이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지만, 라예브냐나 김민수에겐 딱히 도움 되지 않았다.

"흐흠. 한번 배워 보겠니? 배워 두면 제법 쓸모가 있어."

나름 천천히 공략하려 했지만, 김민수의 입은 전두엽의 통제를 벗어났다.

7화 엉엉 우는 삼총사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그래?'

너무 급하게 권한 것 같았다.

분명 흥미로워한 것 같았는데, 보조 마법사가 되겠느냐고 물으니 곧바로 표정이 미묘해졌으니 말이다.

어색해하는 라예브냐를 얼른 보낸 뒤 김민수에게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당신이 새로 온 마법 교수요?"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북부인의 특징이라 할 만한 밝은 머리색과 험상궂은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엄청난 덩치군.'

두터운 팔뚝과 곰과 같은 덩치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켰다.

"반갑소. 전투술 교수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유린이요. 블라디미로비치라고 부르시오."

"반갑습니다. 김민수입니다."

꽈악-. 내밀어진 손을 잡으니 엄청난 악력이 손을 옥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왜 이리도 유치한지.'

속으로 투덜거린 김민수 또한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러고 십여 초를 있으니 블라디미로비치의 차가웠던 눈빛이 누그러졌다.

"크. 남쪽의 샌님인 줄 알았소만, 제법 대단하군."

"적당히 상대해 줘서 고맙습니다."

"뭣? 하하하!"

별거 아니었다는 말을 하니 블라디미로비치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뚝-.

실없이 웃는 놈은 대가리가 빈 놈이라는 북부의 말처럼 금세 웃음을 그친 블라디미로비치가 냉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이 처음만큼 딱딱하진 않았다.

"식사는 하셨소?"

"아직입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식당이 있습니까?"

김민수의 말에 블라디미로비치가 미약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잘됐군. 나와 같이 갑시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된 사이인데 다른 교수들도 소개해 드리리다. 준비할 게 있으시오?"

"이대로 가면 됩니다."

씨익. 김민수의 대답에 블라디미로비치의 입꼬리가 확연하게 올라갔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갑시다!"

쿵.쿵.쿵. 건물이 목조인 탓에 바닥이 그대로 울렸다.

체중이 최소 150은 되어 보였다. 로브를 동여매며 김민수가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여어! 이반!"

"세르게이! 식당에 가나?"

"여기 새로 온 교수가 있어서 말야. 소개도 시킬 겸 겸사겸사."

관사를 나서자마자 블라디미로비치 같은 곰들이 인사를 해 왔다.

하나같이 덩치와 표정이 비범했다. 몇몇은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갔지만, 몇몇은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새로 온 교수? 아! 그 마법사 양반인가?"

"반갑습니다. 김민수입니다."

외모만큼이나 하나같이 악력이 범상치 않았다.

"이름이 특이하군. 김민수라 부르면 되나?"

"김이 성이니, 민수라 부르시면 됩니다."

"성이 앞쪽에 있다니, 마치 저 남동부 놈들 같군!"

이반이라 불린 남자가 크게 외치자 블라디미르비치가 친구를 나무랐다.

"무례를 용서하게 민수. 이반 저놈이 좀 무식해."

"흐. 세르게이 네놈만 할까! 나는 이반 빅토르비치 옥사냐스키다. 무투술 교수를 맡고 있지."

"여-. 이반! 세르게이!"

식당 가는 길에 이야기를 나누니 점점 일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개를 하면서 걸으니 금방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술집을 겸하는 식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보르쉬 3인분!"

"맥주도!"

이미 꽉 찬 식당이었지만, 어찌어찌 엉덩이를 들이미니 자리가 났다.

곧 사람 머리통만 한 맥주잔과 양배추와 순무가 가득 든 보르시가 각자 앞에 놓여졌다.

"흐. 오늘은 감자 인심이 넉넉하군!"

"시끄럽고 잔이나 들어. 새로 온 김민수를 위하여!"

"위하여!"

밍밍한 맥주지만 김민수는 기쁜 마음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따뜻한 남쪽과 달리 추운 북부는 당연한 말이지만 맥주가 시원하기 짝이 없다.

"크아!"

"와하하! 동남부 촌놈치고는 시원하게 마시는군! 이봐! 맥주 세 잔 더!"

"김 교수 괜찮나?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피식-. 얼마나 자신을 무시하는 건지 김민수는 그냥 웃겼다. 이것도 북부 나름의 인종차별인가?

"우리 내기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

"취한 사람이 밥값내기. 어떻습니까?"

두 북부 불곰은 자신의 귀를 후볐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제대로 들은 거 맞습니다."

"흐. 주머니가 좀 무거운가 보군."

클클클. 이반 빅토르비치가 낮게 웃었다.

"사내가 돼서 이런 도전을 거부할 순 없지!"

"어이! 오크통 통째로 세 개 들고 와!"

바쁘게 주방과 홀을 왔다 갔다 하던 사장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안 그래도 한 잔씩 퍼 올리는 게 귀찮았는데, 한 번에 팔아 준다니!

"이봐! 남쪽 샌님을 상대로 너무한 거 아닌가!"

"난 저 수염 없는 덩치한테 5실버!"

"오오! 술 내기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술 좋아하는 남정네들이 이런 내기에 빠질 리 없었다. 순식간에 주변 테이블들이 밀려났고, 세 사람이 앉은 탁자 옆으로 술통들이 날라졌다.

"건강을 위하여."

"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맥주잔이 차자마자 김민수가 선창했다. 건배 선창을 빼앗긴 게 분한지 블라디미르비치와 빅토르비치의 맥주잔이 급하게 기울어졌다.

"푸하! 끄어어억-! 끕! 블라디미르비치."

"끄윽! 뭔가 민수?"

"제 이명이 뭔지 아십니까?"

"이명?"

내기가 시작되고 첫 잔, 식당에 들어와선 두 번째 잔. 순식간에 비워진 맥주잔에 세 번째 맥주를 담으며 김민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봐! 손이 멈췄잖아! 빨리 들이켜라고!"

"건강을 위하여!"

"끝나고 알려 드리죠."

"클! 기대하지!"

세 번째 잔이 비워지는 속도도 전혀 느리지 않았다.

뒷말을 삼키며 김민수가 웃었다.

'취하지 않는 마법사.'

총장이 입이 가볍진 않은가 보다 생각하며 김민수가 빙글빙글 웃었다.

물론, 북부의 남자들이 김민수의 이명을 알았다 해도 도전을 포기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오크통이 비워지는 속도만큼 구경꾼들의 목소리도 커져 갔다.

---*---*---

'저치가 취하지 않는 마법사라고?'

'동부의 그 작자?'

'어마어마하긴 하구만, 벌써 비워진 오크통만 스무 통이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전날 구경꾼들이 지껄이던 말들이 제멋대로 떠올랐다.

"우욱-."

[숙취해소][회복][대사가속][회복]

드미트리, 이반, 세르게이, 유리, 예브게이 등등 무슨 무슨 비치들이 자기소개를 하고 덤벼 왔지만, 숙취해소 마법과 주정분해 마법까지 아낌없이 사용하는 김민수를 이길 순 없었다.

분명 눈을 감았다 뜨기만 했을 뿐인데, 해가 떠 있었다.

분명 마법 덕분에 숙취가 없어야 함에도, 숙취가 느껴졌다.

"끄윽-. 죽는 줄 알았네."

연달아 마법을 사용하고 물을 한 병 마시니 좀 나았다.

자신이 이 정도이니 다른 술꾼들은 아마 오늘 돌아다니지도 못할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연구실로 향하자 어느새 익숙해진 라예브냐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좋은 아침. 뭘 보고 있니?"

"과제하고 있었어요."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가까이 가 보니 과연 자신이 어제 내 준 과제였다.

아직 배운 게 많지 않아 어설프지만 자신만의 논리로 답을 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과제하는 라예브냐 건너편에 앉아 삼총사에게 가르쳐 줄 내용을 복기하던 김민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상하네… 애들이 좀 늦는 거 같은데?"

"그러게요. 이렇게 늦을 리가 없는데...."

라예브냐가 과제를 모두 마치고, 검토를 끝낼 때까지 삼총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교수님 제가 한번 나가 볼게요."

"그래 줄래? 아니 아니지, 같이 나가 보자. 무슨 일이 발생했다면 내가 있는 게 도움이 될 거야."

두 사람은 급히 외투를 걸쳤다.

연구실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삼총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삼총사의 외모가 엉망이었다는 점이었다.

마법사임을 증명하는 망토가 찢겨 있었고, 표토르와 이반의 얼굴에는 생채기도 있었다.

율리아의 몸도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언니! 우와앙!"

"세상에! 율리아! 표토르! 이반!"

라예브냐가 얼른 뛰어가 아이들을 안았다.

율리아는 라예브냐의 품에서 펑펑 울었다.

표토르와 이반은 그나마 참고 있었지만, 라예브냐의 망토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이 퍽 처량했다.

"얘들아 무슨 일이야? 응? 세상에 얼굴에 상처 난 것 좀 봐!"

"전사학과 애들이… 전사학과 애들이 와서 괴롭혔어!"

"북부에 어울리지 않는 연놈들이라고… 마녀보다 못한 것들이 왜 도시를 돌아다니냐고...."

아이들의 말을 들을수록 김민수의 표정이 더 가라앉았다.

날카로워진 감각이 주변을 훑었다.

[탐색][탐색]

숨 쉬듯 발현된 마법이 사방 100m의 모든 생명체를 샅샅이 뒤졌다.

이내 멀찌감치 담벼락에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확실히 삼총사보다는 덩치가 커 보였다.

'으휴! 꼬라지 하곤! 부끄러움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울기나 하고 말야!'

'마녀도 못 된 반푼이들!'

킥킥. 못해도 세 명. 애들이 비웃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김민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 얘들아 일단 연구실로 가자."

"그래. 얘들아. 가자."

분노가 치솟았지만, 억누르며 김민수는 애들을 연구실로 인도했다.

그러나 김민수의 확장된 감각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누구인지, 뭘 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를 세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자 얘들아 이거라도 먹을래? 교수님. 혹시 우유에 꿀을 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염려 마라."

아이들을 소파에 앉혀 두니 더 처량해 보였다.

흙먼지 묻은 찢긴 망토나, 팔다리의 생채기에 가슴이 아팠다.

"얘들아 자. 우유에 꿀 탄 거란다."

"고맙습니다...."

훌쩍. 40도 정도로만 데웠기에 아이들은 금세 따뜻한 우유를 마실 수 있었다.

"맛있어요… 고맙습니다."

"더 마시고 싶으면 말해라. 내가 더 해 주마. 아이고. 이거 까진 거 봐."

[소독][소독][소독][회복][회복][회복]

"어머!"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려면 상처가 그대로 있는 게 좋겠지만, 김민수는 도저히 애들 피부에 상처가 남아 있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민수의 선택은 옳은 것이어서 아이들은 훌쩍이는 것도 잊고 자신들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우와...."

"교수님 이게 그 회복 마법인가요!"

"마법으로도 이게 되는구나...."

살 만큼 사는 집안인 만큼 사제들의 신성력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법으로 치유하는 건 처음 보는 아이들은 흥미와 관심을 드러냈다.

과연 예비 마법사들다웠다.

이런 훌륭한 예비 마법사들이 괴롭힘을 당했다니… 김민수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래. 얘들아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겠니?"

"아… 그게."

"제가 말씀드릴게요 교수님!"

평소와 달리 망설이는 율리아와 달리 이반이 나섰다.

아직 눈물의 흔적이 남아 붉은 눈가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 녀석들… 그러니까 라스콜니코프 놈들이 율리아와 표토르 그리고 저와 저희 가문을 모욕했습니다!"

평소 얌전했던 모습과 달리 이반이 열과 성을 다해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쏟아 냈다.

8화 훈련으로 성장하기

"어이! 꼬맹이 마녀!"

"아… 멧돼지 라스콜니코프 녀석들이야!"

"꺼져! 멧돼지 라스콜니코프!"

과제를 들고 급히 연구실로 향하던 삼총사를 부른 것은 전사학과 1학년 라스콜니코프 일행이었다.

1학년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셋이 모여 다니는 데다가, 묘하게 마법학과의 삼총사와 대비되어, 학생들 사이에선 전사학과 삼총사라 불리는 일행들이다.

"나는 마법사야! 마녀가 아니라고!"

"흥! 북부의 여자가 마녀가 아니라고? 이건 백 년도 넘게 내려온 사실이야!"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다니 반푼이 자식들!"

하나 차이가 있다면, 전사학과 삼총사는 모두 남자라는 것 정도?

거기에 허리춤에 도끼와 숏소드를 들고 다니는 삼총사는 제법 위협적이었다.

덩치도 작고, 앳되어 보이는 데다가 펑퍼짐한 로브로 몸을 가린 마법 삼총사와 달리 덩치도 크고 냉병기를 패용한 아이들은 도저히 같은 나이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 그 책은 뭐야? 비싸 보이는데?"

"아. 건드리지 마! 교수님이 시킨 과제라고."

"겐드리쥐 마아 교쉬늠이 쉬퀸 과제라구우~."

와하하하! 익살스럽게 따라 하는 라주미한의 모습에 라스콜니코프와 드라코비치가 크게 웃었다.

"으휴. 그렇게 책을 보면 뭐 마법은 쓸 줄 알아? 아이스 트롤, 아니다 너네 토끼는 잡을 줄 알아?"

"비켜!…악!"

"표토르!"

쿠당탕! 라스콜니코프를 밀쳐내고 지나가려던 표토르는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머리 하나 차이의 덩치를 이기기엔 표토르의 몸이 너무 어렸다.

"이... [바람아… ]"

이를 갈던 표토르가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자식!"

퍼억! 그러나 표토르의 마법은 미숙했고, 전사학과의 아이들은 어리지만 북부의 어린이였다.

대번에 표토르의 얼굴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시전 하던 주문이 취소되었음은 물론이었다.

"표토르! 악!"

"아… 으...."

"어? 우냐? 이 자식 설마 한 대 맞고 우는 거야?"

"서부인한테 엉덩이나 벌리는 남창 놈은 다르네!"

"이 새끼들이!"

곁에서 이반이 달려들었지만, 표토르보다도 작은 이반이 전사학과 삼총사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표토르의 눈가에 빠르게 눈물이 고였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쁜 자식!"

"악!"

퍽! 빈틈을 노린 율리아가 마법서로 라스콜니코프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년이!"

"악! 놔! 안 놔! 악!"

분노한 라스콜니코프가 율리아의 머리채를 낚아채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과제를 비롯한 책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북부에 짐덩이만 가져오는 반푼이들 따위가!"

"우리 집안은 반푼이가 아냐!"

"악! 이 새끼! 날 물었어!"

"평민 새끼가!"

상황을 지켜보던 이반이 다가와 드라코비치의 팔뚝을 물었다.

퍽퍽퍽!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의 주먹이라 다행이라 할 만큼 마법학과 삼총사는 많이 맞았다.

특히 뒷배랄 것이 없으면서 물어뜯기까지 한 이반은 더 심하게 맞았다.

그렇게 때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마법사를 상징하는 망토를 찢어 버린 것이다.

라예브냐와 김민수는 그 잠시 뒤에 도착했고 말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라예브냐는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애들한테 그런 말을!"

김민수도 화가 났지만, 아이들과 같이 화를 내고 있을 순 없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김민수는 다른 것들을 물었다.

"그 애들 이름이 뭐라고? 라스콜니코프?"

"라주미한도 있어요!"

"드라코비치도요!"

아이들이 앞다퉈 자신이 당한 일을 이르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키예프스키 가문의 사람이에요! 만날 저희 페트로프에 시비를 걸고… 저번에도 저를 조롱했어요!"

"드라코비치하고 드미트리도 있어요! 걔네는 상인 가문인데, 서부에서 밀을 수입하는 집안이에요!"

"라주미한은 별것도 없는 녀석인데 키예프스키 집안만 믿고 저희한테 함부로 해요!"

어느 정도 진정도 됐겠다.

아이들은 저마다 당한 일들을 떠들어 댔다.

김민수는 그 모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그리고...."

"걔네가 볼 때마다 괴롭혀요!"

"맞아요! 지난번에는 엄마가 보내온 과자도 마음대로 가져갔어요! 씨잉...."

그 전에 당했던 괴롭힘도 떠올랐는지 금세 아이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보아하니 이 괴롭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심지어 그게 오래되었고, 괴롭힘의 정도도 작지 않았다.

김민수의 표정이 저절로 심각해졌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알았다 얘들아.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라. 내가 좀 알아보마."

또 억울함이 올라왔는지 울먹거리는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려 준 김민수가 연구실을 나섰다.

[탐색][탐색][탐색]

문을 닫자마자 발현된 마법들이 중첩되며 범위를 넓혀 갔다.

반경 1km 내의 모든 생명체를 살피니 아까 봤던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아이들은 골목길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김민수의 관심사는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

"오! 취하지 않는 마법사! 어서 오시게."

"몸은 좀 어떠십니까 블라디미르비치?"

"하하! 북부의 남자들에게 그 정도 술은 일상이지!"

김민수가 찾아간 것은 간밤의 술자리를 통해 진해진 세르게이 블라디미르비치였다.

적당히 북부인답고, 적당히 교양인다워 말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제가 몰랐는데, 학생들 사이에 다툼이 좀 있더군요."

김민수는 천천히 삼총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블라디미르비치는 중간중간 차를 마시면서 진중하게 이야기를 모두 들어 주었다.

"해서. 혹시 키아누 아카데미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잘했소."

"네?"

김민수의 말이 끝나자 돌아온 첫 대답은 '잘했다'는 칭찬이었다.

"아직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는 걸 잘했다는 말이오."

김민수가 의아해하자 블라디미르비치는 턱을 쓰다듬었다.

"내 솔직히 말하자면 몇 대 맞았다고, 교수한테 얼른 달려가 일러바치는 게 썩 좋아 보이진 않소."

김민수는 전혀 상정하지 못한 대답에 눈만 꿈뻑거렸다.

"애들이야 싸우면서 크는 것이고, 특히 북부는 약한 놈이 맞는 게 당연한 땅이라오. 마탑에서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에 스승이 나서는 걸 딱히 좋게 보진 않는다오."

"그 말씀은...."

김민수는 자신이 마탑에 있으면서 무뎌졌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도 동부에서 이곳 대륙의 분위기가 어떤지 충분히 겪어 보지 않았던가?

"계집애가 있는데 때렸다는 건 좀 그러니 그건 나중에 내 타이르겠소. 하지만, 나머지 일들은 글쎄… 정말 자신과 가문이 모욕당했다 느낀다면 결투를 하면 그만인 일이오. 그대가 나설 필요는 없는 것이지."

"아. 예."

김민수의 대답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를 읽어냈는지 블라디미르비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정 염려되면, 애들을 강하게 키우시오. 그러면 안 맞고 다닐 것 아니오?"

"알겠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워 갑니다."

블라디미르비치의 말에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아낸 김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하며 블라디미르비치가 김민수의 등을 몇 번 두드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그 애들은 그 부모들도 그랬고, 그 조부모들도 그리 싸워 댔으니."

"그럼 딱히 처벌은 없는 겁니까?"

"죽이는 정도면 모르겠소만… 어디 하나 부러진 정도로는 별로 신경도 안 쓸 거요. 여자애는 괴롭히지 말라고 내 아이들을 좀 타이르리다."

김민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블라디미르비치의 연구실을 나섰다.

'…마탑에서 너무 편하게 지냈어. 여긴 지구가 아닌데 말야….'

머리를 이리저리 저으며 뻑적지근한 목을 풀었다.

연구실에 돌아오자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삼총사와 라예브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즐거운 분위기에 김민수가 보이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

김민수는 너희들이 직접 복수해야 한다고, 대신 자신이 마법을 가르쳐 줄 테니, 마법으로 혼내 주라 말했다.

말하면서도 김민수는 행여나 아이들이 서운해할까 염려했다.

"좋아요! 교수님 열심히 배워서 복수할게요!"

"와! 그럼 공격 마법도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어? 어. 그렇지."

'이게 아닌데…?'

그러나 김민수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들은 김민수의 제안을 잘 받아들였다.

"맨날 마법 주문 외우다가 졌는데,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이죠?"

"맞아! 교수님이 쓰는 것처럼 제도 마법을 쓰면 이길 수 있을 거야!"

너희들이 힘을 길러서 직접 복수해야 한다는 김민수의 말에 아이들의 두 눈에는 굳은 결의가 보였다.

심지어 라예브냐조차도 잘되었다며 물개박수를 쳤다.

"그래 얘들아! 앞으로 감히 덤비지 못할 정도로 혼내 주자!"

"네!"

"좋아요!"

"아자!"

아이들의 그런 열정에 부담스러워하기도 잠깐.

이내 그 열정이 학습에 대한 열정이란 것을 느낀 김민수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너희들이 이렇게 열심히 한다니 내가 일주일 안에 그 애들을 이기도록 만들어 주마!"

"와!"

"좋아요!"

"…일주일이요?"

율리아나 표토르는 일주일이란 기간에도 별생각 없이 만세를 불렀지만, 이반의 반응은 달랐다.

눈치가 빠른 것 같았다.

"이반! 일주일이면 충분한 거야!"

"맞아! 우린 하루 만에 실력이 엄청 늘었는걸!"

"아니. 얘들아 일주일 만에 걔네를 다 이긴다는 게 뭔가 이상하잖아...."

이반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김민수의 주장은 이반의 주장보다 더 타당할 것이다.

"걱정 마라 이반! 내가 보니 너희들 모두 1써클 마법 세 번은 쓸 수 있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 세 번 만에!"

"와!"

"정말… 세 번 만에 이길 수 있나요…?"

김민수의 확신에 이반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김민수를 올려다보았다.

"나만 믿어라! 그래. 마침 오늘 시간이 있으니 곧바로 시작하자!"

"좋아요!"

"기다려라 드라코비치!"

시계를 보니 평소 수업 시작에 비해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허나 충분하다.

"좋아. 그럼."

[염동][염동][염동]

"우와아아?!"

망설임 없이 시전한 마법에 따라 연구실 내의 가구 배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연구실 가운데에 공간이 생기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망토가 벗겨져 가벼운 차림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지팡이를 들어라!"

"네!"

김민수의 호령에 따라 아이들 모두 지팡이를 뽑아 들었다.

뭔지 모를 자신감이 솟구쳤다.

"자! 따라 그려라! 투척 마법!"

"투척 마법!"

평소와 달리 지팡이를 꺼내 든 김민수가 허공에 유려하게 투척 마법을 그려 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외운 투척 마법을 떠올리며, 동시에 김민수의 투척 마법을 훔쳐보며 허공에 투척 마법을 그렸다.

"다 했어요!"

"자 이제 이걸 백 번 한다!"

"네?"

"시작해라! 투척 마법!"

멈칫. 표토르가 대표로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내준 과제가 마법진 30번씩 그리기였던 게 떠올랐다.

자신들이 어젯밤에 했던 고생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동시에 어젯밤 과제하는 내내 김민수를 욕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쯤 되자 아이들은 이반의 걱정이 선견지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 이번엔 눈덩이 마법 백 번!"

9화 용기는 능력으로부터

하하호호 하며 배웠던 그 전과 달리 김민수의 수업은 스파르타 그 자체였다.

어려운 걸 시키진 않았다.

단지.

"알렉세예브나 12초 55. 세르게이비치 13초 61. 이반 14초 01. 다시."

"헉… 헉… 나 팔이 끊어질 것 같아...."

"이반? 넌 괜찮아? 어떻게 말 한마디도 없냐?"

"말 걸지 마."

허공에 떠 있는 숫자판이 늘어나다가 다시 00:00:00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수백 번 정도 반복했을 뿐이다.

"이반 13초 54. 세르게이비치 14초 20. 알렉셰에브나 14초 90. 집중해라 얘들아 집중!"

처음 보는 양식의 시계였지만, 열 번 정도 반복하자 그게 일상적으로 쓰이는 시계를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반은 김민수의 CV에서 봤던 시계 특허가 저거구나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이게 지금 몇 번째야…?"

"저기 시계 밑에 나와 있잖아 팔백사십셋… 앗!"

"알렉세예브나 13초 32. 세르게이비치 16초 54... 다시 그려라 이반!"

표토르의 질문에 답해 주던 이반의 집중이 풀리자 제도되던 마법진이 그대로 흩어졌다.

육십 번쯤 그리자 마법진을 끊기지 않고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론 김민수가 지팡이 끝에 마법을 걸어 주었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지팡이의 끝은 그 궤적을 일 분 가까이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 이제 십오 초 정도면 1써클 마법 다 그릴 수 있는데...."

"세르게이비치 13초 21. 이반 13초 23. 알렉세예브나 14초 01.

어림도 없다 얘들아. 최소 1.7초까지는 줄여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단다. 다시!"

어차피 그리기만 하면 되기에 김민수는 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아이들이 헛소리를 하면 이처럼 교정해 주었다.

1분 넘게 걸리던 제도가 15초 미만으로 내려왔지만 김민수는 만족하지 않았다.

"교수님… 저 팔이 안 올라가요...."

"그래? 그럼 휴식!"

전사학과를 향한 복수심도 천 번에 가까운 훈련에 반쯤 꺼졌다.

안쓰럽게 바라보던 라예브냐가 얼른 아이들 앞에 꿀 탄 우유와 과자를 내려주었다.

"…교수님 이러다 팔 잘못되는 거 아니에요?"

"나 다리가 너무 아파...."

"걱정 마라. 근육통은 좀 있겠지만 기능 이상은 절대 안 생긴단다."

[치유][회복][회복][회복]

이미 열기를 보는 눈으로 아이들의 염증 수치를 관찰해 온 김민수는 적절한 위치에 치유 마법과 회복 마법을 반복해서 시행했다.

당장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의 팔과 어깨는 더 튼튼해질 것이었다.

"저 교수님?"

"응?"

"쉬는 동안만이라도 저 마법진은 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예브냐가 지적한 것처럼 아이들 앞에는 황금빛 마법진이 7초에 한 번씩 그려지고 있었다.

뭔가 미묘하게 그려지는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소파에 일렬로 앉아 있는 아이들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라예브냐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염려하지 마라 라예브냐. 이건 다 검증된 방법이란다."

"그, 그런가요? 마탑은 이런 방식으로 수업하는군요."

라예브냐가 착각이라 여긴 소리는 실제로 김민수가 삽입한 백색소음이었다.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 주고, 단기기억을 장기기적으로 바꾸는 알파파가 나오도록 넣은 소음과 자신들의 작도 속도가 느리게 느껴질 만큼 딱 두 배 빠른 속도.

지구의 '쉐도잉' 기법과 뇌과학이 적절히 섞인 장치였다.

"실제로 네 속도도 빨라지지 않았니?"

"그건… 그렇지만요."

키아누 아카데미 유일의 선임 마법사답게 라예브냐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단 하루 만에 제도 마법의 시전 속도가 5초 이내에 진입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아이들을 걱정하는 라예브냐의 시선도 어느새 허공에 그려지는 마법진에 박히게 되었다.

'지성이 있는 생물한테는 반드시 통하는 방법이지. 아암!'

딱히 시작적으로 즐길거리가 없는 대륙에서 자연의 소리와 비슷한 주파수의 백색소음에 더해진 강렬한 시각적 자극은 아이들에게 거의 도파민 중독을 일으켰다.

실제로 가장 어린 알렉세예브나의 경우 아프다던 팔을 들어 마법진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자. 휴식 끝!"

짝! 박수를 치며, 아이들 눈앞에 그려지던 마법진을 지우니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쉬워하며 일어섰다.

"어…?"

'나 왜 아쉬워하는 거지…?'

아이들은 미묘하게 고양된 기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계와 그 밑에 쓰인 횟수에 집중되었다.

"자. 투척 마법이다. 시~작!"

슥-.스윽-. 아이들의 지팡이 든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근육은 뇌가 익히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마법진을 익히고 있었다.

충분한 휴식과 회복.

그리고 뇌리에 새겨진 강렬한 마법진의 이미지가 효과가 있었다.

시계를 언뜻 보니 9초대였다.

김민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알렉세예브나 9초 58. 이반 10초 23. 세르게이비치 10초 24. 다시!"

---*---*---

"아. 뭐 재밌는 일 없나?"

"그러게. 꼬맹이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기숙사 방에도 없던데 어딜 간 거지?"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유린이 전사학과 삼총사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자연스럽게 바로 옆 방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을 데리고 뭔가를 시키고 있는 김민수가 생각났다.

문득 김민수가 찾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이."

"핫! 유린 교수님!"

"그래. 잘 지내고 있나?"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율리아 일행을 괴롭히는 데는 재능을 보였지만 그래 봤자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이다.

덩치가 다섯 배쯤 차이 나는 전사학과 교수에게 개길 정도로 용기 넘치진 않는다.

"내가 들으니 여자애들을 괴롭히고 다닌다던데?"

"아닙니다 교수님! 절대 그런 적 없습니다!"

"저희는 여자애들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블라디미르비치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 알고 온 판에 부정하는 아이들이 괘씸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알아먹으리라 생각한 블라디미르비치가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그래. 북부의 전사가 되어야지. 계집애처럼 굴면 안 된다.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좋아. 시원시원해서 좋군."

퍽퍽-. 훈계를 약간 담아 아이들의 어깨를 쳐 주었다.

아이들은 그 솥뚜껑 같은 손힘에 거의 넘어질 뻔했으나 참아 내었다.

블라디미르비치는 그 모습에 흡족해하며 가던 길을 갔다.

블라디미르비치가 충분히 멀어지자 라스콜니코프가 그대로 장작더미에 주저앉았다.

"와. 죽는 줄 알았네. 뭐야? 어떤 새끼가 말한 거야?"

"몰라 젠장! 평소 신경도 안 쓰면서 왜 저래?"

"아니 그리고 왜 유린 교수야? 아닌가? 유린 교수라서 잘 넘어간 건가?"

라주미한이 헷갈린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다른 아이들도 동의했다.

옥샤나스키 교수였다면 분명 대뜸 주먹을 날렸을 것이고, 키아누스키 교수였다면 뺨을 때렸을 것이다.

"유린 교수라서 다행이네…?"

"맞네."

"이게 다 라스콜니코프 너 때문이잖아 이 멧돼지 자식아."

"지랄. 나만 했냐? 지들도 잘 놀아 놓고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라스콜니코프가 항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만 괴롭히고 놀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셋 다 골고루 괴롭혔으니 어느 하나의 책임이라 보기 어려웠다.

"아니 근데 진짜. 얘네 어디 간 거야?"

"밤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봤는데… 하루 종일 뭘 하는 거지?"

"뭘 하긴. 너희한테 복수할 준비를 한 거지."

휙-! 그 상황에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세 소년의 고개가 돌아갔다.

"야. 라주미한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쟤네 뭐냐?"

"그걸 왜 라주미한한테 물어? 멧돼지 라스콜니코프. 나 처음 봐?"

태양을 등진 채 삼총사가 턱을 들고 서 있었다.

길어진 그림자가 마법사의 고깔모자를 만나 기묘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림자가 얼굴을 반쯤 가렸고, 아이들의 손에 들린 나무 지팡이가 위협적으로 빛났다.

"아아. 꼬맹이 마녀? 뭐냐?"

"뭐긴. 너희가 그토록 찾던 율리아 알렉셰에브나 페트로바지. 나 보고 싶었지? 멧돼지 라스콜니코프?"

"ㅁ, 뭐뭐?"

라스콜니코프가 말을 더듬었다.

평소 다른 아이들의 말버릇을 기괴하게 흉내 내며 웃음거리로 만들던 라주미한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처음 마주치는 또래의 패기였기 때문이었다.

"야. 니들. 니들이 지난 한 주 동안 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시끄러 드라코비치. 누가 너한테 말해도 된다고 했지? 평소처럼 멧돼지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기나 하라고?"

드라코비치와 라주미한의 시선이 마찬가지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내려보고 있는 이반에게 향했다.

머리 하나 작은 주제에 턱을 치켜들며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몹시 거슬렸다.

"지, 지금 저 펴, 평민 자식이?"

"이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거? 아 그렇지 평소에도 애들 옹알이나 하고 다니는 자식이 그럼 그렇지 뭐."

표토르의 말에 라주미한의 가벼운 입이 그대로 닫혔다.

이 상황 변화가 믿을 수 없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하-! 자식들. 니들이 뭔갈 준비했나 본데. 그래 봤자. 어어…?"

이쯤 되면 셋 중 하나가 마법 주문을 시도할 것임을 예측한 라스콜니코프가 천천히 다가왔다.

주문이 시작됨과 동시에 바로 후려쳐 주문을 취소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 버렸다.

[염동][투척]

따-악!

미리 준비되었던 지팡이가 빠르게 원을 그렸고, 라스콜니코프가 달려들려는 순간 완성된 마법 두 개가 라스콜니코프를 그대로 날려 버렸다.

"라스콜니코프!"

"...."

"주, 죽은 거야!?!"

순간 날아든 돌멩이가 그대로 이마 정중앙에 박혀 들어갔다.

공터를 울릴 정도로 큰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고, 그대로 엎어진 라스콜니코프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 멧돼지가 멧돼지해 버렸네?"

상상만 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율리아는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수천 번 이상 상상해 온 내공이 있어 곧바로 주저앉거나 하진 않았다.

"이마 한 대 맞았다고 달려드는 꼴 하고는."

"뭐, 뭐야!"

"뭐긴 뭐야. 이마 한 대 맞은 거 보곤 쥬, 쥬거써어~! 하고 달려온 주제에?"

기절한 라스콜니코프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라주미한과 드라코비치에게 마음껏 이죽거리는 표토르와 이반이었다.

"너! 너 이 자식들!"

"어? 도망간다? 어라아~? 북부의 전사들이 적을 두고 도망을 간다고? 아! 너희들 북부의 전사가 아니었지? 맞네. 내가 깜.빡.했.네?"

"이 자식이 진짜!"

라주미한이 곧바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표토르가 빨랐다.

[절삭]

"으아악! 내 팔! 내팔이!!"

"피! 피다!"

돌멩이를 들고 위협하던 라주미한의 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표토르의 수준으로는 근육도 못 자르고 기껏해야 살갗만 찢어진 거지만, 피를 본 둘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히익! 피! 피! 흐어어...."

"라,라주미한? 라주미한! 죽으면 안 돼!"

평소 무릎 까진 것 정도는 훈장으로 여기는 북부의 아이들이었지만, 바닥을 적실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처음 본 드라코비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만해! 미, 미안해! 내가 미안해!"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엎드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는 라스콜니코프와 팔에서 피를 흘리다가 기절해 버린 라주미한의 모습이 드라코비치에게는 공포였다.

울면서 비는 드라코비치의 모습에 이반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너 이 겁쟁이 자식...."

"미, 미안해 이반! 내가! 억!"

짝!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마법을 쓸 기회를 못 얻은 이반은 그대로 다가가 드라코비치의 뺨을 내려쳤다.

짝! 짝!짝-! 그동안 맞은 기억이 떠오르며 이반은 쉴 새 없이 드라코비치의 뺨을 내려치고 올려쳤다.

문득 손이 아파 따귀 때리는 것을 멈추니 얼굴이 퉁퉁 분 채 울고 있는 드라코비치가 보였다.

"다른 애들 데리고 꺼져 드라코비치. 그리고 명심해. 넌 아무것도 아냐!"

퉤! 퍽! 침을 한 번 뱉어 준 이반이 드라코비치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힘없이 넘어간 드라코비치가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고, 삼총사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복수는 성공적이었다.

10화 꼰대도 한때는 꿈 많은 젊은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