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나의 고모할머니
"북부가 안정화된 지는 얼마 안 되었네. 기껏해야 이십 년 정도? 그전에는 야만의 시절이었지."
"차를 내오겠습니다."
총장이 뻑뻑한 눈을 짓누르며 말했다. 한숨을 내쉰 재무처장이 몸을 일으켰다. 에반젤린 또한 눈치껏 뒤로 물러났다.
"내 조부님. 그러니까 전전대 페트로프 백작께서 백작위를 받기 전, 키예프 대공이었던 사실은 알고 있지? 이 지역의 이름도 본래는 키예프였고."
"예. 그 이름은 이제 북부의 수도로 남았죠."
모든 지식의 보고답게, 마탑에서는 대륙의 역사 또한 가르친다.
김민수는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분이 서부의… 아니, 카를 대왕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보전받는 대가로 페트로프라는 성을 하사받은 것이지. 그 당시 키예프 대공께는 누이가 여럿 있었네."
"누이요?"
"그래. 누이들. 따지자면 내 고모할머니들 되시지."
"드시지요."
"고맙다. 드미트리."
뜨거운 차가 담긴 황동잔들이 내밀어졌고, 노인과 청년은 각자의 잔을 받아 들었다.
대검을 멀찍이 치워 둔 채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마시는 총장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인의 그것이었다.
"북부는 예전부터 여자들이 드셌어. 먹고살기 어려우니, 여자들이 집안에만 있기 어려웠거든."
총장의 시선을 따라가니 어느새 담요 위에 다리를 편 채로 앉아 있는 에반젤린이 보였다.
찔리는 게 있는지 앙칼지게 소리쳤다.
"왜, 왜요!"
"거기에 당시 키예프는 지금과 비교하면 야만인들이나 다름없었지. 고모할머님들도 쌍도끼와 대검을 휘두르고 다니셨거든."
"푸흡! 죄, 죄송합니다. 쿨럭쿨럭!"
왠지 그 모습이 상상돼 사레가 들려 버린 김민수가 사과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성정이 괄괄한 분들이니 구차하게 목숨을 건진 동생을 좋게 보지 않으셨고, 남자들을 믿을 수 없다며, 과부들과 딸들을 이끌고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네."
"...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네. 세례받기를 거부한 탓에 도시 내에서 살 수가 없었으니… 지금이야 덜하지만 그때의 태양교회는 정말 보수적이었거든."
후륵-. 목이 타는지 총장이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과부들과 딸들이라면… 창녀들도 포함되었겠군요."
"일부러 말하지 않았거늘… 맞네. 우리는 달의 여신을 모셨으니까. 창녀와 약초꾼 그리고 마녀들의 위세가 대단했었지."
천장을 올려다보는 총장의 모습은 마치 그때를 회상하는 듯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꽤 강한 모계사회였네. 아까 말한 여자들이 드셌다는 건 사실 순화된 표현이고, 어머니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어머니를 '대모'로 모시며 달 신앙이 내려왔지.
'전사'라는 표현도 사실은 달의 여신을 모시는 사제들을 보호하는 직업이었을 뿐이야. 가장 믿을 만한 '아들들'이 그 역할을 주로 맡았기에 다른 지역의 '전사'와 비슷해 보였지만, 실상은 좀 다른 게지."
"꽤나… 흥미롭군요."
이는 마탑의 서고에서도 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북부의 치부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태양교회의 세례를 받으면서, 북부는 '대모'를 잃어버렸네. 많은 수의 마녀들이 숲속으로 들어간 이후 키아누가 세워졌고, 달 신앙은 거의 잊혀 갔으니까. 나 같은 늙은이와 전사들이나 기억할 뿐."
총장의 뇌리에 전사들의 장례식과 뼛조각이 든 가죽 주머니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대모'에게는 몇 가지 능력이 있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이지."
회상하던 총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모는 북부의 모든 아이스 트롤들을 조종할 수 있네."
"네에?"
"그리고 자신의 피가 섞인 마녀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보고 들을 수 있고."
"그건… 마법입니까?"
"아니. 달빛의 속삭임이라는 여신의 은총일세. 달이 떠 있는 동안만 사용할 수 있지만, 덕분에 마녀들은 정신적으로 빠르게 성숙하는 데다가 순식간에 정보전달이 가능하지."
김민수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도 모두 에반젤린에 의해 대모에게 전달되었을 것 아닌가?
"그럼 저 마녀를 당장… !"
"안심하게 여긴 실내니까. 밤에 그것도 달이 떠 있을 때만 가능한 능력일세."
"아."
살기가 일어난 순간 가라앉았다. 꽤나 허탈했다.
그래도 나름 중요한 정보다.
달빛이 비추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능력이라니.
"이야기 솜씨가 제법이시네요. 총장님."
"실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뭔가?"
후릅. 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경계가 완전히 풀렸는지 총장의 모습은 친근한 이웃집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모든 아이스 트롤들을 지배한다면 어째서 이번 일이 벌어진 거죠? 보아하니 그전까지는 대모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그건...."
"제,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버둥버둥! 숨죽이고 있던 에반젤린이 몸을 버둥거렸다. 온몸이 묶여 있는 탓에 커다란 애벌레가 움직이는 듯했다.
"대모님이 노망이 났어요!"
"응?"
"뭐라?"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뺨을 너무 세게 때렸나…."
"노망… 어. 치매가 왔다…?"
"히익! 진짜예요!"
도끼까지 꺼내 드는 재무처장의 모습에 에반젤린이 기겁하며 말했다.
"대모님은 지금 백 년 전과 기억이 왔다 갔다 한다고요!"
"백 년 전... 으음… 그래서."
설득력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총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민수는 뭔가 자신이 대화를 못 따라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총장님의 고모할머니께서 대모로서 살아 계신 겁니까?"
"맞네."
"백... 살도 넘으셨을 텐데요?"
"정확히는 올해 일백이십이네."
김민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추운 북부지역에서 백 년을 넘게 살다니?
감탄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지금 대모께서는 백 년 전에도 대모였습니까?"
"그건 아닐세. 고모할머님들이 대모를 모시고 나갔으니까. 아마… 육십 년쯤 전에 대모가 되었을걸세."
"아이스 트롤을 다루는 권능은 대모 이전에도 있는 겁니까?"
김민수의 질문에 총장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답변이 늦어졌다.
"그건… 아닐세. 대모라는 '교주'에게 주어지는 권능이니까."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김민수의 시선을 따라 총장의 시선도 움직였다.
억울한 표정의 에반젤린이 거기 있었다.
"아니 정말이라고!"
"치매가 생기면 특정 시점 이후의 기억은 깨끗이 지워지지. 종종 기억이 돌아오긴 하지만 그때뿐."
치매가 가장 슬픈 질병인 이유가 무엇이었나.
점차 퇴행하며 아기 때의, 어린아이일 때의 기억만 남기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십 대의 분노를 품고, 육십 대 이후의 능력을 사용한다?
"포크질도 잊어버리는데, 육십 대 이후에나 배웠을 능력을 기억해 이토록 정밀하게 활용한다니. 말의 앞뒤가 안 맞지 않나?"
"하지만 대모님은 가능하시단 말야!"
에반젤린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 냈지만, 자신의 지식을 철통같이 믿는 김민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만, 그만하게."
결국 두 사람의 말싸움을 멈춘 것은 총장이었다.
"김 교수.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만, 저 아이의 의견도 확인해 보는 게 좋겠네."
총장의 유해진 호칭에 김민수는 불편함을 느꼈다.
직관에 의해 형성된 논리는 지식으로 정립되지 않았음에도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게 했다.
'왜 집안일이라고 했는지 알겠군. 그리고 이 문제가 백 년 넘게 해결 안 된 이유도.'
"어떻게… 확인하실지 혹시 그 방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직접 찾아가겠네."
총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물론 김민수의 마음에 들진 않았다.
"여태까지 그리 해결해 오신 겁니까…?"
"그렇네. 페트로프라는 이름을 지닌 이의 의무지."
"으음...."
"자네가 불편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네."
"다른… 분들도 내막을 알고 있습니까?"
대답은 없었지만,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총장의 조카이며, 공적으로는 키아누 아카데미의 재무처장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가 침묵하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북부의 집안일이었다.
물론 그 '집안'에는 귀족들을 제외한 이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말이다.
예외라면 마탑의 교수라는 지위를 가진 자신 정도?
'이게… 이게 북부?'
김민수는 이 상황이 재미없는 연극처럼 느껴졌다.
평생 후유증이 남은 아냐의 복수는?
이번 침략에서 죽은 이들은?
울던 삼총사들은?
"이 일은 내게 맡기고 자네는 들어가 쉬게. 피곤해 보이는군."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더 이상 피로를 참지 못한 총장의 말에 김민수는 저항 없이 일어섰다.
"뭘 봐? 히익…!"
의식이 흐르는 대로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는지 어느새 당당해져 있었다.
물론 김민수의 무기질적인 눈빛에 금세 움츠러들었다.
'그냥 그때 죽여 버릴 것을.'
병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지금까지의 당당함이 이해되었다.
끼익-. 덜컹-.
철썩-! 문을 닫자 뺨 때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그러나 이내 잠잠해졌다.
왠지 김민수는 그 창고 내의 장면을 보지 않았음에도 생생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아마 말괄량이 조카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숙부는 한숨을 내쉬며 풀어줄 것이다.
사촌오빠 앞에서 얌전해 보이는 모습을 보일 것이고….
"아… 짜증 나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 교수님. 들어가십니까?"
"음? 아 그래."
웬 병사 하나가 말을 걸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왔다.
악수조차 과도한 친밀감의 표현이라며 저어하는 북부에서 이처럼 과도한 감정 표현이 어색했다.
아마 그만큼 흥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친 곳은 없나요?"
"하핫. 교수님의 마법 덕분에 아주 건강합니다!"
동경의 눈빛이었다. 안도감. 약간의 흥분.
그러나 시원한 답변과 달리 앳되어 보이는 병사의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작은 상처가 아니었는지 붕대는 실시간으로 붉어지고 있었다.
김민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뭡니까?"
"이반 세르게이비치입니다!"
"...이리로 와 보세요."
[봉합]
평범하디 평범한 이름.
그래. 귀족이 아닌 이름.
김민수는 아직 소년에 가까운 청년을 끌어당겨 마법을 일으켰다.
"이게… 마법. 오오?! 상처가 사라졌습니다!"
피식-.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김민수는 옅게 웃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문장에 다시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아. 안 그래도 병동에 계신 에반젤린 사제님이 없어지셔서 걱정했는데, 감사합니다!"
"…병동... 말이지요."
김민수는 흥분해서 계속 말을 거는 병사를 돌려보냈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십인장에게 혼날 것이라 하니 금세 울상을 지으며 사라졌다.
"이래서 마탑을 벗어나기 싫었는데...."
하늘을 바라보니 달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동이 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김민수의 발걸음이 병동으로 향했다.
---*---*---
"으음...."
"붕대! 붕대 가져와 빨리!"
"다리가… 내 다리가!"
병동에 들어서니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에반젤린은 총장과 함께 있으니 당연히 비어 있고, 그 일을 대행해야 하는 세레나 부제도 재무처장이 데리고 갔는지 없었다.
생존술 교수라는 중늙은이 몇몇이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분명 피해를 최소화했음에도 다친 병사들과 시민들이 몰려왔다.
여자가 묘하게 적은 그 모습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흐잉… 언니…."
라예브냐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가 보니, 아이들은 이 난리통에도 침대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라예브냐에게 걸려 있는 방호 마법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김민수는 급히 붕대를 감고 있는 약초학과 교수에게 갔다.
"아! 그… 그! 마법 교수! 잘 왔네! 가서 치료 마법을 좀 사용해 주게!"
"여기! 여기일세!"
다급해 보이는 표정만큼 급하게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김민수를 발견한 다른 교수가 김민수를 불렀다.
김민수는 두말하지 않고 황금빛 마력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군.'
[소독][봉합][보온]
다른 사람한테 일을 맡겨 두면 항상 이런 꼴이 난다.
역시 핏값은 직접 받으러 가야겠다.
일단 사람들부터 구하고 나서.
"어머니...."
이내 벌어진 광경에 북부인들은 동시에 어머니를 찾았다.
21화 대마법사와 달
사망자는 극적으로 감소하였다.
애당초 사건 당일 즉사한 이들을 제외하면, 백열두 명의 중상자 중 사망한 이는 단둘뿐이었다.
영구적인 장애를 얻은 이가 열 명이나 되었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백 명의 병사와 주민들은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그 경이로운 결과에 교수들은 김민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직접 기적을 목도한 병사와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하신 분. 큰 영광 받으소서!"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마법이 있는 세계이고 중앙 교회에서는 죽은 자도 살려 낸다는 신성기적이 있다지만, 이곳은 변방.
처음 겪어 본 기적에 많은 이들이 울고 웃었다.
장애를 얻은 이들조차 김민수를 찬탄할 뿐 원망하지 못했다.
그런 주민들의 모습에 김민수는 급히 병동을 벗어났다.
주민들이 김민수를 따라가고자 했으나 마법까지 사용하며 사라진 김민수를 잡을 순 없었다.
태양교회의 축문을 읊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머니 여신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
주민들을 따돌린 김민수는 창문을 통해 관사로 돌아왔다.
'결국 라예브냐는 보지도 못했네….'
피 묻은 옷가지를 대충 던져 둔 김민수는 마법을 부렸다.
[세척][세척][건조][보온]
순식간에 피와 땀을 제거되고, 따뜻한 바람이 전신을 타고 물방울을 날렸다.
긴 밤을 보낸 김민수는 까무룩 잠들었다.
---*---*---
"사망자가… 단둘뿐이라고?"
재무처장과 함께 행정적인 업무를 대충 끝마친 총장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백 명이 넘는 중상자가 병동에 들어갔는데 단 두 명만이 죽었다.
가죽이 벗겨지는 정도는 상처로 치지도 않는 북부에서 중상자라 함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을 말한다.
"그렇습니다. 각하! 김 교수! 그자의 능력은 정말!"
"김 교수! 아니 귀하신 분께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붙으라!' 그리하니 상처가 사라지고, '돌아가라!' 하니 터져 나온 장기가 배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각하! 당장 귀하신 분을… 오오! 귀하신 분!"
어흐흑. 사제가 없는 탓에 임시로 병동을 맡은 두 교수는 반쯤 미친 것 같았다.
아니, 하나는 확실히 미친 것 같았다.
혼자 설명하다 환희에 차서 웃다가 눈물을 터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알겠네. 일단 자네들도 피로할 테니 일단 가서 쉬게나."
"각하! 마탑에 보내는 기부금을 늘려서라도 마법 인력 양성에 총력을 다해야 합니다!"
"흑흑… 내 살아생전에 '샘물의 주인'을 만나다니! 오오! 어머니께선 전사들을 버리지 않으셨노라!"
발광하는 교수를 내보낸 뒤 총장은 지친 몸을 소파에 뉘였다.
나름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한다 생각했지만, 간밤의 전투, 배반한 조카 심문하기, 행정 처리 거기에 반쯤 버서크 상태인 전사들의 상대까지….
"…성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피곤했지만, 총장은 책상 한구석에 쌓여 있던 종이 뭉치를 뒤져 CV 한 권을 꺼내 들어 찬찬히 읽었다.
"...이게 과장이 아니었단 말이지."
『태양교회의 문헌으로 살펴본 신성 마법 비교 : 정의, 역사, 활용, 효과, 제한』
『신성 마법의 기원과 발전 : 성 마지스터의 일기를 바탕으로』
『물과 대지의 융합 마법 : 육신의 손상과 수복에 대하여』
『인체의 생리적 발현과 마법을 통한 기능 회복』
『융합 마법을 통한 신성 마법의 구현 : 물 마법 재구성을 통한 회복 마법 개발』
….
…
.
총장은 몰랐지만, 하나하나가 마법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논문들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것들을 '마법서'가 아니라 논문으로 출판하여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한 정보라는 점이었다.
"마탑도 썩었군, 이런 인재를 놓치다니 말야."
혼잣말과 동시에 15년 전 방문했던 마탑을 떠올리며 총장은 혀를 찼다.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군."
십 년 넘게 이어졌던 동부 전쟁 당시 활약했던 마법사들을 떠올리니 김민수가 밀려난 것도 이해됐다.
"끄응… 결국 그 수밖에는 없는 건가?"
과도한 피로에 눈이 침침했지만, 이런 일은 생각났을 때 해치워야 한다.
금박이 입혀진 화려한 양피지를 꺼내 든 총장이 힘 있는 글씨체로 종이를 채워 나갔다.
[임명장]
---*---*---
[경화][경화][경보]
달이 사라질 때쯤. 김민수는 눈을 떴다.
길지 않은 수면이었지만, 피로는 한 줌도 남지 않았다.
마법으로 가속한 신진대사와 동시에 분비되는 고농도의 성장호르몬은 어린아이에 비견되는 회복력을 선사했으니까.
철컥-. 키아누에 도착한 이후로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캐비넷을 열었다.
"...하아."
그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지팡이'들이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하다.
주술의 시대에는 생명을 통한 마력의 유인이었고, 마법의 시대에는 매질을 통한 마력의 유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 가장 '효율'적인 유도 방법을 현대의 마법사들은 이렇게 부른다.
'지팡이'라고.
철컥. 철컥.
'아직 이천 마리가 넘는 아이스 트롤들이 도시 바깥을 돌아다닌다고 했지?'
이미 연구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효과적인 마력 유도의 기하학적 형태를 밝혀낸 김민수는 맞춤형 지팡이 수백 개를 완성해 두었다.
'무슨 전략을 짜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지와 같은 악세사리부터 근접전을 가장한 각반, 갑옷 형상까지.
'사전적 의미의 전멸이면, 너희들이 뭘 할 수 있지?'
그중 김민수가 키아누에 가지고 온 것은 건틀렛 형태의 지팡이였다.
장갑이되, 온갖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검은 건틀렛이었다.
뼈의 구조에 따라 솟아 있는 뾰족한 돌기가 피뢰침이 되어 마력을 유도해 준다.
동부의 난전에서 그 값어치를 증명한 오랜 친구이다.
"씨를 말려 주지."
끼-익. 관사의 나무창 여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탐색]
펄-럭. 넓게 퍼진 마력으로 살피건대, 독수리 따위는 없었다.
은밀히 퍼지는 마력이 바람을 만들고, 미처 부여잡지 못한 망토가 흩날렸다.
자신도 모르는 초월적인 탐색 방법이 있지 않은 이상.
키아누의 그 누구도 자신을 추적ㆍ관찰할 수 없다.
[부유][부유][부유][전환][유영]
소리 없이. 영창 없이. 제도에 따라, 육체에 가해지던 중력이 사라지고, 대류가 만들어 내는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찬찬히 떠오르는 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북부의 차가운 공기가, 특히 차가운 새벽녘의 공기가 김민수의 몸을 부드럽게, 그러나 빠른 속도로 띄웠다.
[제도]
축축한 구름이 느껴졌다.
키아누 전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대류권 끝자락에 도달한 김민수가 공명하는 목소리로 영창을 시작했다.
[제도][제도][확장][확장][탐색][체열탐색]
지팡이가 마법 활용도를 제곱수로 증가시킨다.
두 번의 연속된 영창이 네 배의 효과를, 세 번, 네 번 반복하는 영창이 여덟 배, 열여섯 배의 효과를 부여했다.
지상 8km 높이에서 관측되는 열적외선 시야에 수만 개에 달하는 붉은 점이 관측되었다.
그중 유난히 붉은 개체 수천이 보였다.
김민수가 웃었다.
이미 얼어붙기 시작한 뺨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찾았다.]
직경 16km 구역의 모든 생명체의 위치 정보를 처리하던 마법이 정리되고, 표적 삼은 아이스 트롤들의 모습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색-새액-.
잠들어 있는 아이스 트롤들의 모습은 바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털에 자란 이끼들이 이목구비와 팔다리를 가려 주니 더 그랬다.
물론 초월적인 시야로, 체온과 신진대사를 관찰하는 김민수에게는 의미 없는 의태다.
촤악-. 자꾸만 얼어붙는 팔을 활짝 펼친 김민수가 공명하는 목소리로 노래했다.
[이것은 형상 없이 작용만 있노라.]
대류권의 공기는 성층권과 달리 불안정하다.
그만큼 활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작용은 흐름을 의미하노니.]
제멋대로 움직이던 공기가 일정한 흐름을 갖춘다.
[이것은 형상을 지니니 곧 바람이라.]
모여든 공기분자가 물리력을 형성한다.
[그것은 바람을 따라 모여들며.]
공기분자를 따라 미세먼지와 수증기가 응결된다.
[이것은 고이기 시작하니 곧 물이라.]
수증기는 이내 물방울이 되고, 낮은 기온에 점차 얼음 결정을 형성한다.
[그것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아 굳으며.]
얼음 결정이 중력에 따라 흐르고, 흐른다.
[이것은 달라붙어 형성되니 곧 얼음이라.]
형상을 갖춘 얼음은 창의 그것이었다.
이내 수천 개의 사람만 한 고드름이 대류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떠 있었다.
[그것은 대지의 끌어당김을 따르니라.]
공명하는 영창을 끝으로 이천삼백 개의 고드름이 일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다중폭격]
반경 64㎦ 내의 모든 공기분자의 흐름을 계산해 낸 김민수의 마법은 점차 속력을 올리며 낙하하는 고드름의 방향을 실시간으로 조정했다.
100m씩 하강할 때마다 0.65℃씩 상승하는 온도와 가해지는 마찰열에 고드름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38, 37, 36, 35....'
그러나 8km 상공에서 지상에까지 고드름이 도달하는 시간은 불과 40여 초.
'14, 13, 12, 11, 10....'
사람만 한 고드름이 녹아 봤자 사람 몸통만 한 고드름이 남아 있었다.
'5, 4, 3, 2, 1.'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포유류에 불과한 아이스 트롤이, 심지어 잠들어 있다면?
파바바바바박!
생존은 불가능한 가정이다.
너무나 먼 거리에 마법적인 지각을 제외하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김민수의 초월적인 지각 능력은 암수를 가리지 않고 죽어 나가는 아이스 트롤들을 모두 인지하였다.
'하-.'
김민수는 만족스러운 핏값을 받아 냈다.
키아누를 포위하고 있던 일체의 아이스 트롤들이 모두 제거됨을 확인했다.
비록 핏값의 일부를 담당하는 마녀 둘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도 기회가 올 것이었다.
문득 김민수의 감각에 기이한 것이 지각되었다.
오감으로 지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좀 더 영혼이 지각하는 감각에 가까웠다.
여섯 마탑의 인정을 받은 대마법사의 등줄기를 타고 전신의 솜털이 일어섰다.
영하 40도에 달하는 냉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저 멀리 동녘에서 미약하게 솟구쳐 오르는 태양도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전신을 훑는 위압감에 급히 마법을 발현했다.
[탐색][탐색][탐색][탐색]
10m, 100m, 1,000m, 10,000m 십 배수로 확장해 가며 감각을 넓혔지만, 시선의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아이스 트롤들을 사냥하며 차올랐던 전능감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미지에서 오는 공포였다.
그러다 문득, 어떤 직감이 김민수로 하여금 시선을 서쪽으로 돌리게 하였다.
아니,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마치 초월적인 존재가 거대한 꼬리로 자신의 얼굴을 끌어당긴 것 같았다.
김민수는 구름 너머로 사라지는 달을 바라보았다.
[너.]
그런데 달이.
달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파칭! 순식간에 마법들이 깨어져 나갔다.
"커흑-!"
파칭! 파칭! 삼중 중첩되어 있던 부유 마법들이 허무하게 깨어져 나갔다.
"쿨럭!"
달과 호응하듯 대지가 내뻗는 중력이 사납게 휘감아 들었다.
깨어진 방호 마법 사이로, 지상의 추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영하 40도의 강추위가 피부와 폐부를 얼리기 시작했다.
꺼윽!
급히 숨을 참으려 했지만, 역류한 마력이 폐를 때렸고, 기침 후 찾아오는 강제적인 흡기가 폐 속 혈관을 헤집었다.
'의, 의식이….'
순간 생겨난 중력을 따라 부여되는 엄청난 중력 가속도가 혈류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했다.
콰콰콰!
엄청난 냉기가 칼날처럼 옷밖에 드러난 피부를 헤집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넓게 펼쳐진 몸과 아직 달려 있는 망토 덕분에 생긴 공기의 저항이 자유 낙하를 단 몇 초나마 늦춰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흐릿해지는 정신 사이로 키아누가 다가왔다.
아니.
나약한 몸뚱이가 대지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달의 시선은 강렬히 느껴졌다.
외려 그 강렬한 시선이 김민수의 정신을 일깨웠다.
[반전]
태양빛에 밀려나는 달이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22화 내가 학장이라니!
'그건… 뭐였지?'
추락하기 직전 중력 반전 마법을 사용한 김민수는 기적적으로 죽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가속도의 변화에 뇌진탕이 발생했지만, 제 기능하지 못하는 심장에 기절할 뻔했지만, 어쨌건 살아남았다.
반쯤 기다시피 해서 관사로 되돌아온 김민수는 날아갈 것만 같은 의식을 붙잡고 달이 사라진 서쪽 하늘을 노려보았다.
'달이… 달이 나를 볼 수 있나?'
태양과 달은 강하게 말하면 그냥 돌덩어리다.
마법과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이 세계에 태양과 달이 신으로서 모셔진다는 건 안다.
그들이 태양과 달의 이름을 부르며 초월적인 힘을 부린다는 사실도 안다.
그런데 과연 그것들에게 '인간성'이 있나?
[활성][가속][가속][회복][회복]
깨져 나간 피부를 재생시키고, 비명 지르는 오장육부를 각각 활성화시켰다.
정신적 피로는 그대로지만 적어도 육체는 최상의 상태로 만든 김민수가 각혈했다.
"쿨럭! 크윽!"
각혈하는 느낌이었다. 피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보기에는 일상적인 기침과 같았다.
이건. 육체의 손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영혼이… 손상을 입었다고?'
여섯 마탑의 모든 마법을 알고 있지만, 이런 건 없다. 이건 정형화된 기술이 아니다. 이건.
'이건 신성력을 과다 사용했을 때나… 주술!'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동부의 전장에서 마주했던 오크 주술사.
동족들의 영육을 제물 삼아 전장에 펼치던 공포.
흐릿했던 기억이 무섭도록 선명해지고, 그 당시의 경험이 '앎'으로 연결되었다.
김민수는 곧바로 결론을 추론했다.
'달의 여신!'
"마녀!"
쿨럭쿨럭! 육체는 멀쩡했지만, 무언가 결손된 느낌이 너무도 명징하게 지각되었다.
실제로 마력이 그전처럼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았다.
마치 절단된 팔에 감각이 느껴진다는 환상통이 반대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팔도 있고, 기능도 되지만, 마치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게 심장 어림에서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런 제길...."
고작 그 약간의 마력 사용임에도 과도한 피로가 몰려왔다.
김민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아냐 언니?"
"율리아!"
"언니!"
키아누 주변에서 이천이 넘는 아이스 트롤들의 시체가 발견되며 난리가 났지만, 일반인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오히려 병동에서 누워만 있던 아냐 라예브냐의 상태가 좋아지며 결국 퇴원하게 된 것이 이야깃거리였다.
옷을 갈아입는 라예브냐의 뒤로 삼총사가 뛰어왔다.
"언니 이제 다 나은 거야?"
"그럼. 다 나았지!"
"누나 그럼 이제 퇴원해요?"
와-! 병동의 거의 유일한 환자가 라예브냐였던 탓에 시끄럽게 구는 아이들을 탓할 사람은 없었다.
서류상 관리자인 에반젤린과 레나는 자리에 없었고, 실 관리자인 약초학과의 교수는 개강 준비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병동을 전세 낸 것처럼 떠들던 네 사람은 이내 밖으로 나왔다.
"후우-."
휘잉. 병동을 나서자 라예브냐는 순간 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갑갑한 병동과 달리 상쾌한 바람에서 겨울이 다가옴이 느껴졌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군데군데 보였다.
아직 입김이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긴팔이 필요한 날이 머지않았다.
'며칠이나 지난 거지?'
"…니, 언니!"
"응? 응!"
"아이참! 언니 뭐 해! 과자 먹으러 가자니까?"
신나 하는 율리아의 뒤로 초롱초롱한 눈빛의 표토르와 이반이 보였다.
아까부터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오른팔이 거슬렸지만, 애들 앞에서 티낼 정도로 라예브냐가 어리진 않았다.
라예브냐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병원에서 누워만 있었더니 배고프네!"
"이반! 앞장서! 지난번 카페 기억하지?"
곧바로 율리아가 라예브냐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휘청-! 오른손에서 올라오는 감각의 간극에 넘어질 뻔했다.
"헉?"
"어,언니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잡아당겼지?"
"…너무 오래 누워 있었나 봐. 다리에 힘이 없네."
그래. 너무 오래 누워 있던 탓이리라.
"언니 여기 쿠키 맛있지? 여기 사장님이 페트로프 백작 각하께 납품하는 쿠키를 굽던 사람의 여동생의 남편이래!"
"그 정도면… 아무 상관 없는 거 아냐?"
"흥! 표토르 네가 뭘 알아! 이 섬세한 달콤함… 이건 키예프에서 먹던 그 맛이라고!"
"뉘에 뉘에. 영애의 말씀이 맞습니다."
일행은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라예브냐도 오른팔의 불편함을 잊을 정도로 좋은 시간이었다.
라예브냐의 퇴원은 성공적이었다.
---*---*---
똑똑-.
"…흐업?"
'내, 내가 언제 잠들었지?'
노크 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머리가 멍했다.
씻지도 않고 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온몸이 엉망이었다.
급히 마법으로 외관을 단정히 한 김민수가 문을 열었다.
"…벌써 출근 준비를 다 한 건가? 자네 정말 대단하군."
"재무처장님?"
조용한 노크 소리에 병사나 다른 교수는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재무처장이 직접 방문했을 줄은 몰랐다.
"자네… 잠은 자는 건가? 아니, 아니지. 총장님의 호출일세."
고개를 내저은 재무처장이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 엄청난 일을 벌였더군."
"…가시죠."
내막을 짐작한 김민수가 재무처장을 따라나섰다.
점차 부산스러워지는 관사를 나서며 두 사람은 은밀히 총장실로 향했다.
"어서 오게 김민수 교수."
재무처장을 통해 부른 것치고는 총장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키아누 주변으로 수천이 넘는 아이스 트롤 사체가 발견되었네."
"그렇습니까?"
말을 하는 총장의 목소리가 점차 고조되었다.
"그래. 만약 한 번에 들이쳤다면, 키아누가 멸망했을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수였네."
"정말 위험했군요."
"그런데 조사를 하다 보니 아이스 트롤들이 모두 한날한시에 죽은 것 같더군. 그것도 모두 같은 방법으로!"
하하하하! 총장이 개운하다는 듯 우렁차게 웃었다.
뒤에 시립해 있는 재무처장도 소리만 내지 않을 뿐 상쾌해 보였다.
"덕분에 아이스 트롤 토벌에 사용될 예산을 모두 키아누 복원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네! 김민수 교수!"
팡팡! 결국 기쁨을 참지 못한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민수의 어깨를 내리쳤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김민수의 몸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조카 녀석한테 아이스 트롤의 규모를 듣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런데 그 문제가 이리도 깔끔하게 해결될 줄이야! 역시 '동부의 절삭자', 아니지 '용 사냥꾼'은 과연 격이 다르구만!"
에반젤린과 살아남은 마녀들의 심문 내용을 교차 검증한 결과 밝혀진 아이스 트롤들의 규모는 무려 삼천이었다.
그중 칠백 가까이를 선발대가 사살했으나 이천삼백의 아이스 트롤들이 이미 키아누에 대한 포위를 마쳤다는 소리에 수뇌부는 고뇌에 빠졌었다.
거기에 대모를 포함한 마녀들이 키아누를 적대한다면… 이는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북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키아누가 그대로 지도에서 지워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가 단 하룻밤 만에 깨끗이 해결됐다.
"과찬이십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자네는 이제부터 우리의 형제일세!"
첫 만남의 불신은 어디 가고, 총장과 재무처장의 시선에는 믿음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술도 잘 마시고, 실력도 압도적인 데다가 이리 겸손하기까지?
그러나 한참 김민수를 칭찬하던 총장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그런데 말일세. 김민수 교수. 아니 형제. 이 공을 양보해 줄 수 있겠나?"
'그러면 그렇지. 이게 본론이었군.'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이게 '귀족'의 방식이다.
여기가 그나마 중앙과 먼 북부라 미숙했을 뿐.
"자네도 알다시피 키아누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아. 기껏해야 천 마리 단위였던 아이스 트롤들이 삼천… 그것도 평년보다 한 달이나 일찍 습격해 온 탓에 북부는 현재 혼란스럽기 그지없네."
그 말 그대로였다. 개강 후 중간고사를 겸하는 북부의 축제 정도였던 아이스 트롤 사냥이 역으로 습격이 되었다.
선발대가 나서서 아이스 트롤들을 정리하려 했지만 그것은 마녀들의 농간이었고, 북부의 기득권인 전사들의 위신에 상처가 났다.
"더욱이 마녀들의 적대에 주민들의 불안이 상당히 높네. 형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는 키아누와 자네의 미래에 치명적이야."
"제 미래라 하심은…?"
김민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이야 북부의 기득권이지만, 자신은 일개 교수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임기가 평균 2년밖에 안 되는 파견직.
다 예상했다는 듯 총장이 금박을 입힌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것이 귀족들만 사용하는 양피지였다.
″마탑에는 내일 정식으로 요청이 들어갈 게야."
이게 별 영양가 없는, 그저 포장지만 화려할 뿐인 두루마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김민수는 그 두루마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네를 키아누 아카데미 마법학과의 학장(Dean)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일세."
'학장!'
끙. 김민수는 침음을 삼켰다.
이곳이 편안한 마탑 내부였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쁨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정도였다.
마탑에 있으면서 상상만 했던 기회가 그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왕국에서 말석이긴 하지만 국립 아카데미의 학장이라니?
'내가 학장이라고…?'
아카데미의 총장이 왕국의 후작급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학장은 귀족 사회에서는 백작급,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부총장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교육기관도 겸하는 마탑의 마탑주들의 공식 직함이 학장이다.
지난 이십여 년간 지구에서도, 이 마법의 대륙에서도 계속 그려 왔던 목표다.
그런 기회가 이렇게 빨리 나타나다니?
'이게… 이걸?'
"자네도 알다시피 키아누 아카데미에는 종신 교수(테뉴어)가 존재하네...."
'테뉴어까지?!'
달달달달. 김민수의 다리가 절로 떨렸다.
테뉴어는 법 바깥에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조선시대에 대간들이 왕을 비난해도, 대간불가죄(臺諫不可罪 : 대간이 어떤 말을 해도 처벌받지 않음)를 누리고,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불체포특권(不逮捕特權 :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함)으로 현역일 때는 처벌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아카데미의 종신 교수는 왕과 태양교회를 비난해도 그 비난만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김민수를 포함한 지구와 대륙의 교수들이 그토록 정교수 자리를 원하는 이유였다.
'테뉴어. 테뉴어라니!'
꾸욱. 아직 남아 있는 최후의 이성이 떨리는 다리를 내리눌렀다.
"이만하면 알아들었으리라 믿네."
"크흠. 아무것도 안 한 제가 학장 자리를 받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이스 트롤 사냥에 대한 공을 제외하면 어렵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알맞은 답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니? 아이스 트롤들의 습격에서 키아누를 구한 영웅! 그리고 병동에서 백 명의 사상자를 구해낸 '샘물의 주인'한테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김민수 그 자신에겐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그 공도 작은 게 아니었다.
'샘물의 주인? 그거 북부 민담에서 나오는 늪지 괴물이잖아.'
무슨 과정을 거쳐 자신이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됐지만, 김민수는 굳이 말을 더하지 않았다.
대신 임명장을 자신 쪽으로 약간 끌어당기는 것으로 뜻을 전했을 뿐이었다.
"무거운 소임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허! 앞으로 잘 부탁하네. 김 교수. 아니, 김 학장!"
껄껄껄. 총장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었다.
얼마나 기쁜지 술을 꺼내려는 탓에 재무처장이 급히 말렸을 정도였다.
---*---*---
김민수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학장이라니!"
서른 전후로 조교수가 되는 대륙에서 서른여덟에야 여섯 학파 중 말석인 인챈트 마탑의 조교수가 되었다.
그나마도 임신한 타 마탑의 선배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북부에 파견 나와 문자 그대로 피를 토하며 지내 왔다.
'이게 고진감래구나!'
그러나 이제 다 괜찮았다.
'어디 근본도 모르는 녀석이.'
'어머? 보조 마법사가 지금 선배 대접 받으려는 거예요? 징그럽게 생겨서는!'
'삼십 대 후반인데도 조교… 어휴. 너희는 저렇게 살지 마라.'
"으음! 아니지! 하-! 그래 봤자 너희는 평교수겠지만, 난 이제 학장이다! 조만간 테뉴어도 받을 거라고!"
자꾸만 올라오는 어둠을 따귀 몇 대로 해결한 김민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김민수는 결국 연구실로 향했다.
자신이 이렇게 한 방에 학장이 되고 정교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다 연구 덕분이다.
달칵-. 들뜸과 상쾌함이 반반 섞인 기분으로 연구실에 도착한 김민수에게 익숙한 뒷태가 보였다.
"오. 라예브냐. 퇴원했구나! 몸은 좀 어떠... 으응?"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는 라예브냐의 눈가가 붉었다.
'뭐지. 왜, 왜?'
몸을 돌리는 순간부터 이미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애써 가리며.
"자, 잠깐!"
몰려오는 기시감에 김민수가 급히 손을 내밀었다.
23화 키아누 아카데미 개강
아이들과 헤어지고 라예브냐가 향한 곳은 연구실이었다.
또래 친구도 없으니, 기숙사에 가 봤자 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피가 좀 묻은 것 외에는 멀쩡한 마법서를 들고 연구실로 갔다.
"여긴… 변한 게 없구나."
무거운 마법서를 내려놓고 연구실을 둘러보니 자신이 병동에 가기 전과 똑같았다.
아이스 트롤들의 습격 때문에 무너진 집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았음에도 연구실만큼은 조금의 파손도 없이 멀쩡했다.
사실 김민수의 강력한 마법 덕분이지만 라예브냐가 그것까지 알 방도는 없었다.
"...."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하려 했으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이 거슬렸다.
눈가가 시큰해 닦으려다 올라오지 않는 오른팔에 마침내 참아 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덜컥-.
"오. 라예브냐. 퇴원했구나! 몸은 좀 어떠... 으응?"
"아...."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김민수의 표정에 당황이 깃들었다.
"오… 어? 라, 라예브냐. 울지 말고. 아니. 울고 싶으면 울고."
"흐어어엉-."
라예브냐는 그동안의 억울함을 담아서 울었다.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 그 속도 모르고 자신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삼총사들. 애들한테는 뭐라 할 수 없지만 올라오는 분노.
"흐아아앙!"
시원하게 우는 라예브냐와는 달리 김민수는 두려웠다.
"이, 일단!"
[방호][방음][탐색]
학장까지 약속받았는데, 여제자를 울려서 짤리고 싶지 않았다.
김민수는 급히 방음 마법을 걸고 탐색 마법까지 써 가며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지 확인했다.
"크흠! 자 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여기 앉아서 울자. 응?"
김민수는 천천히 오해받지 않도록 라예브냐를 푹신한 의자로 인도했다.
이것도 김민수가 마법으로 만든 '푹신푹신'한 소파였다.
"흐어엉-. 푸켁?!"
"그 꿀물 마실래?"
별생각 없이 의자에 앉듯 앉자 몸이 그대로 잠겨 버렸고,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이 멈췄다.
대신 딸꾹질을 시작했다.
"자. 일단 꿀물 한잔하고."
온갖 마법으로 오 초도 안 되어 따뜻한 꿀물이 완성되었다.
"와… 딸꾹-!"
진정 '마법' 같은 광경에 라예브냐의 육체는 울음을 깨끗이 멈췄다.
'휴….'
"그래. 무슨 일 때문에 울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한숨 돌린 김민수가 피곤한 표정으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히끅-!"
평소와 달리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 주는 김민수를 보고 있으니, 라예브냐는 좀 전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 그게."
꿀물 한 컵이 다 비워지는 동안 나눈 대화에서 김민수는 안도했으나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다.
"…미안하다. 내가 좀 더 능력이 있었으면 완벽하게 고쳤을 텐데...."
김민수는 고개를 숙였다.
학생이 이리되었는데 자신은 고작 학장 자리 하나 얻었다고 좋아하고 있었다니….
과거 교수들의 행태를 그리 욕해 놓고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니, 부끄러웠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와주마. 지난번에 말한 추천서가 부족하다면 내가 책임지고, 내 스승인 엔도우 학장님의 추천서를 받아 주마."
생각하여 단어를 골랐다.
부담스럽거나 강제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그러나 김민수는 모르겠지만, 라예브냐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안하시면, 절 마탑의 정식 제자로 삼아 주세요."
"응? 제자?"
"네. 마탑의 정식 제자가 되고 싶어요!"
김민수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보조 마탑 출신한테 배우게 됐다고 울던 학생이 지금 자신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한 번 반문했음에도 확신 가득한 대답에 김민수는 확인차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 바람 마탑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지?"
"아뇨! 김민수 교수님! 교수님이 속한 인챈트 마탑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죄책감은 이내 만족감으로, 그리고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래."
김민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민수의 표정은 라예브냐의 표정만큼이나 밝았다.
그녀를 가르치리라.
"아냐 라예브냐 보로비요바."
"예. 교수님!"
'차라리 잘되었다.'
김민수는 어디서 꺼내 들었는지 평소 보이지 않던 화려한 지팡이를 오른손에 쥐었다.
동시에 꺼내 든 투명한 오브가 오묘하게 빛났다.
그리고 마탑에 내려오는 엄숙한 선서를 읊었다.
"그대는 빛과 진리의 길을 걸으매, 오른손에는 이성의 지팡이를, 왼손에는 탐구의 오브를 놓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너무도 갑작스러운 진행이었지만, 이미 각오한 라예브냐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외려 그 고양된 슬픔이 환희심으로 바뀌며 기대감이 솟구쳤다.
"네!"
평소의 피곤에 찌든 늙은 조교수의 얼굴이 아닌, 엄숙함이 깃든 한 명의 대마법사가 거기 있었다.
"아냐 라예브냐 보로비요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여 장애를 남기긴 하였지만, 그 장애물은 이내 디딤돌이 되어 그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 줄 것이다.
"배움의 길을 개척하는 자. 그대는 생명과 이성의 길을 걸으매, 죽음이 그대를 막을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네! 맹세합니다."
장애물을 디딤돌로 바꿔 주는 것.
"마나의 권능에 고하노니. 이 땅에 새로이 탐구자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아-."
그것의 스승의 역할이니까.
"환영한다. 아냐 라예브냐 보로비요바. 인챈트 마탑의 선임 마법사여."
황금빛 마나의 세례가 정수리를 타고 부어진다.
김민수는 기꺼워하며 웃었다.
'드디어.'
대륙에 세 번째 인챈트 마법사가 탄생하였다.
---*---*---
아이스 트롤들의 대규모 습격 이후, 키아누가 정상화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김민수 또한 술 한잔하자는 이바노프의 편지를 태우며 그를 보내 주었다.
키아누의 주민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죽은 이들을 보내 주었다.
마침내 가을걷이가 끝나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다.
상비병과 주민을 포함하여 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어찌어찌 해결하였고, 결국 키아누 아카데미는 개강을 했다.
[북부의 아들딸들이여!]
북부 전역에서 모인 오십여 명의 신입생들과 삼백여 명의 재학생들이 연병장에 앉아 있는 모습은 나름의 볼거리였다.
하나같이 북부인들이란 것을 드러내듯 밝은 머리칼과 큰 키는 어린아이들이 꽤 섞여 있음에도 위압감을 주었다.
개강 전 마법학과 학장으로 취임한 김민수는 총장과 두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대단한 북부인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굉장히 눈에 띄었다.
김민수를 모르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개강식 중간중간에 쑥덕거렸다.
"야. 저 남부 촌놈은 뭐냐?"
"마법사 같은데?"
"르벙 교수는 어디 가고?"
"근데, 저 자리 교무처장 자리 아냐? 왜 저 신입 마법사가 앉아 있지?"
인종차별하는 학생, 마법에 흥미 있는 학생, 의전 서열에 관심 있는 학생 등.
학생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드러내며 쑥덕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세 학생은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아… 결국 개강해 버렸어...."
"그… 얘들아 이렇게 불편해할 거면 그냥 가서 인사드리면 되지 않을까?"
"그치만, 솔직히 무서운걸."
김민수에게 흥미를 드러내는 대부분의 학생과 달리 율리아, 표토르 그리고 이반 삼총사는 트롤들의 습격 이후 한 번도 김민수를 찾아가지 않았다.
병동에서 몇 번 보았지만, 워낙 바쁜 탓에 대화를 하기 어려웠고, 원래 계획했던 방과 후 학습은 흐지부지되었다.
오른팔에 장애가 남은 라예브냐는 그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김민수를 따라다녔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당장 내일 마법 수업인 거 알지…?"
"으으… 어쩌지… 수강 취소할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전사학과로 가려고? 이제 와서?"
한참 떠들고 있으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개강사가 끝났다.
학생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이로써 키아누 아카데미가 개강하였음을 선포합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개강이 기쁘다기보단 지겨운 훈화 말씀이 끝났다는 사실에 더 크게 기뻐하며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런 와중이니 만큼 아이스 트롤들에게 휩쓸렸던 사제와 부제가 병동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곤.
---*---*---
"교수님. 개강도 했는데, 애들을 데리고 올까요?"
"응?"
유일한 조교이자 대학원생인 라예브냐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김민수가 반문했다.
"애들? 아. 삼총사 말이구나."
"네. 솔직히 한 달짜리 특별 수업이었는데, 일주일이나 빼먹었잖아요?"
"하하. 이제 매주 수업에서 볼 건데 뭐."
병동에서 퇴원한 라예브냐를 제자로 삼고 이 주가 지났다.
처음에는 오른팔의 장애 때문에 자주 우울해했지만, 지금 와서는 김민수가 쏟아 내는 막대한 마법 지식을 즐기느라 우울해할 틈이 없었다.
그 때문에 라예브냐의 성격은 갈수록 밝아져 갔다.
"...애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 사람 목 날아가는 꼴을 다 봤으니...."
"교수님...."
안 그래도 다크서클 가득한 비쩍 마른 얼굴로 침울해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더 무서웠다.
"교수님 솔직히 그렇게 가라앉아 있으면 더 무섭거든요?"
라예브냐의 말에 김민수는 우울감이 싹 가시는 걸 느꼈다.
"…난 북부 사람들은 죄다 차가운 줄 알았는데 말야."
"에이. 그건 낯선 사람한테나 그렇죠. 교수님하고 저는 스승과 제자 사이잖아요?"
피식-. 김민수가 웃자 라예브냐도 따라 웃었다.
가까운 사이가 되면 친근해진다.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말이지만, 워낙 딱딱하고 기계적이던 북부인들만 느껴 봤기에 김민수는 이 변화가 더 크게 와닿았다.
물론 조금 어색하기도 했는데, 라예브냐뿐만 아니라 총장이나 재무처장 그리고 다른 교수들도 밝게 웃으며 인사해 왔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곰 한 마리처럼 말이다.
"오! 북부 제일의 용사! 어디 가나?"
"이반… 당연히 수업 준비하러 가죠. 수업 안 하십니까? 당장 오늘 무투술은 OT가 있을 텐데요?"
이반 빅토르비치 옥사냐스키. 전사학과 소속이며, 무투술 교수인 그는 특히 김민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비슷한 과인 전투술 교수 세르게이가 은근히 좋아한다면, 이반은 대놓고 좋아했다.
"하하하! 전사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네! 당장 연병장의 문을 열고 뚜드려 패면 그때부터 수업이 시작하는 거야!"
"그게 수업이 되겠습니까?"
"흡!"
[방호]쿠-웅.
김민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솥뚜껑 같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몇 번 있었던 일인지라 자동반사적으로 방어 마법이 발현되었다.
김민수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당장 머리와 몸뚱아리가 분리되었을 거다.
"흐흐. 이런데 수업이 안 되겠나?"
"하아-. 이건 제가 '북부 제일의 용사'이기 때문이죠. 보통 학생들은 대비하고 있어도 못 막습니다."
"뭐, 나도 자네 수준을 원하는 건 아냐."
김민수의 '자칭'에 재밌다는 듯 한 번 웃은 이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겁쟁이들을 싫어하네. 그래서 이번 일 처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옥사냐스키라는 이름을 버리긴 쉽지 않을 텐데요?"
너도 북부의 귀족이면서 그렇게 말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흥-! 옥사냐스키는 북부 제일의 용사의 뒤만을 따른다. 아이스 트롤 오백 마리와 마녀...."
말을 하던 이반이 라예브냐를 흘깃 바라보았다.
"뭐, 그런 걸세. 늑대도 개도 되지 못하는 것들을 난 인정하지 않네. 적어도 나는 나에게 배운 학생들이 늑대가 되길 바라네."
툭툭-. 말을 마친 이반이 김민수의 어깨를 쳤다.
"적어도 자네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난 먼저 가네."
"예. 들어가세요. 이반 빅토르비치."
"저분이 저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 보네요. 교수님. 제가 입원한 동안 뭘 하고 다니신 거예요?"
교수들의 대화에 쭈그러져 있던 라예브냐가 물었다.
깨어나 보니 아이스 트롤들의 대규모 습격이 있었고, 새로 온 마법 교수가 홀로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
믿기지 않았지만, 병동에 실려 온 병사들의 증언과, 삼총사가 떠든 내용이 워낙 많았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마녀들도 잡았다고 했다.
마녀를 떠올리니 자신의 지도교수가 무섭다고 엉엉 울던 율리아가 떠올랐다.
"하아… 이렇게 허약해 보이는 분이 '북부 제일의 용사'라니."
"…나도 부끄럽다."
그 마법 실력이 대륙에서 손꼽힌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지만, 사실 와닿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친근하게 굴 수 있는 이유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아. 빨리 아이들하고 화해하세요. 교수님."
"아니,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김민수는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
아이스 트롤과 마녀들의 일이 다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결국 개강을 해 버렸다.
총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마녀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예. 총장님. 계속 감시하고 있으나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세르게이의 말에 총장이 이마를 찌푸렸다.
아이스 트롤을 지배하는 마녀들은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키아누를 습격한다.
키아누는 병사들과 아카데미의 학생들의 숙련도를 위해 정기적으로 그들을 토벌한다.
아이스 트롤들의 숫자가 과도해지면 물자가 부족한 북부는 자멸해 버린다.
이를 저어한 선대 페트로프 백작과 대모는 암묵적인 협정을 맺었고, 반백 년 가까이 내려오는 규칙이 되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협정이 일방적으로 깨졌다.
심지어 그에 대한 의사 표명도 없다.
"진정 전쟁을 하자는 것인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이번 기회에 대모를 내치시지요."
"...뭐라?"
세르게이의 말에 총장의 말문이 막혔다.
24화 더 늙은 늙은이의 꼬장
"어쩌지… 어떻게 하면...."
총장의 배려로 병동으로 돌아온 에반젤린은 불안함에 떨었다.
총장은 살아남은 마녀 둘을 숲으로 돌려보냈다.
태양교회의 세례를 받은 에반젤린만 제외하고, 대신 역할을 부여했다.
마녀들에게 총장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이것들이나 저것들이나...."
걱정하는 레나를 먼저 재운 뒤 에반젤린은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보름달이 떠올랐다.
'에반젤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보름달이 뜨자마자 강렬한 의념이 언어가 되어 머리를 때렸다.
'다른 자매들한테 들었어. 너 배신했다고? 감히 올가를 팔아먹어?!'
총장이 마녀들의 숲으로 돌려보내 준 다른 생존자들의 의념도 섞여 들며 소리가 울렸다.
"어쩔 수 없었다고! 너희도 그 녀석의 힘을 봤잖아!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야!"
'지금 변명하는 거야?'
"그리고, 올가 그 돼지가 내 경고를 무시하고 경보 마법을 켜 버린 건 왜 빼먹는데? 너네 웃긴다? 그때 경보 마법만 안 켰어도 일이 이렇게는 안 됐어!"
달빛의 속삭임이 좋은 점은, 의념으로 대화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의식이 언어화되기 전에 상대방에게 전송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반젤린의 경고를 무시하고 경보 마법을 작동시킨 올가의 모습이 곧바로 전달되었고, 생존한 마녀들의 기억도 오버랩 되면서, 일시적으로 마녀들의 의념이 모두 멎었다.
"그년 때문에 망친 거라고! 그리고 저런 괴물을 내가 어떻게 막아!"
에반젤린의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에 침묵하던 마녀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그래. 고생했다. 에반젤린. 그런데 넌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다른 자매들도 몇 살아남았던데?'
"…총장이 우릴 가둬 놨어."
'총장? 그자가 왜?'
"정보 차단이 목적이었겠지...."
'그러니까 그 정보 차단을 왜 하냐고 반푼아.'
"내가 반푼이라 하지 말랬지!"
자매들이 한참 소리 지르고 있으니 노쇠한 의념이 속삭임 전체를 장악했다.
'그만. 그만하거라.'
"대, 대모님 계셨어요?"
묵직하고, 쇠가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치고, 피로해 보였지만 명료한 목소리였다.
'말해라.'
"네?"
'이고르 그 녀석이 전하라고 한 말이 있을 거 아니냐. 헛짓거리하지 말고 말해라. 할미 피곤하다.'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의념으로 전달되는 것만으로도 엄청 피로하다는 게 느껴졌다.
"아 예. '이건 협정 위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흥-. 협정 위반이라. 그리고?'
"'대모께서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북부에는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이미 카를 왕가는 제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은 더욱 엎드릴 때입니다. 키예프의 핏줄은 아직 끊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에반젤린의 전송이 다 끝났음에도 대답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녀석과는 간만에 대화가 필요하겠구나. 기다려라. 곧 날을 잡으마.'
"그 말씀은…?"
'조만간 부르마. 너희들도 이만 나가라. 피곤하구나.'
대모의 일방적인 선언 이후 속삭임이 멎었다.
"후아...."
의외로 쉽게 끝난 대화에 에반젤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이 참으로 밝았다.
---*---*---
"숙부. 아니, 총장님. 대모님의 전언입니다."
꽉 채웠던 보름달은 목책 너머에 기거하는 자매에게 귓속말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귓속말은 총장에게 잘 전달되었다.
"'떡갈나무 아래로 와라.'라고 하십니다."
"후우. 대모님도 너무하시는군. 드미트리. 내가 없는 동안 아카데미를 잘 부탁한다."
"빅토르를 데려가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산을 두 개나 넘어야 되는 거리에 총장은 한숨부터 나왔다.
그에 재무처장이 아들을 데리고 가는 걸 권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그 약해 빠진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이냐. 걱정 마라 내 금세 다녀올 테니."
키가 190이 넘고, 애완동물로 불곰을 키우는 사촌 동생의 어디가 약해 보이냐고 답하고 싶었지만, 늘 그래 왔듯 말을 삼켰다.
"뭐 하나? 채비하지 않고?"
"네? 제가요? 왜요?"
총장의 말에 에반젤린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재무처장과 총장의 얼굴이 급격히 찌그러졌다.
"에반젤린...."
"히익!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대번 가라앉는 분위기에 에반젤린이 병동으로 달려갔다.
"고정하시지요. 숙부님."
"후우…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다니… 형님도 그렇고 나도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김민수 덕에 일이 잘 풀리긴 했지만, 총장이라고 해서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고모할머니라곤 하지만, 이미 백 년 전에 사실상 분가했고, 심지어 이번 일은 치매 때문이건 다른 이유 때문이건 협정 위반이다.
총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전사들의 불평과 젊은이들의 불만이 안 보이고 안 들릴 정도로 늙진 않았다.
"시대의 흐름을 못 따라가는 것들… 하."
총장의 혼잣말에 재무처장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저 멀리서 에반젤린이 급히 뛰어오는 게 어슴푸레 보였다.
"그냥 늙은이의 꼬장 정도면 좋겠는데...."
재무처장이 애써 총장의 한숨을 무시했다.
그도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
삐----이!
'아. 올 거면 빨리 좀 왔으면 좋겠다. 지루해.'
거대한 호수를 둘러싼 떡갈나무 숲.
분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창공에 호수 독수리로 변한 마녀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냐. 그래도 날아다니는 게, 똥 치우는 것보단 낫지.'
독수리는 대모님의 똥오줌을 치우고 있을 자매들을 떠올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몸뚱이만 한 전투도끼를 휘두르며 아이스 트롤들을 혼내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세월은 어쩔 수가 없나 봐.'
그러나 서글픔과 동시에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언니들도 미쳤지… 아무리 대모님의 명령이라지만 키아누 아카데미를 왜 공격하라 해 가지고.'
사실 이 갑작스러운 정찰 강화에는 배경이 있었다.
키아누 아카데미를 너무 과하게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마녀들 사이에서 공유되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결과라도 좋았으면 모르겠는데, 십 년 동안 아껴 가며 모아 온 아이스 트롤 삼천 마리를 한 번에 소모해 버렸다.
십 년간 가꿔 온 마을까지 버리며 진행한 일의 결과가 이리되자 마녀의 숲의 분위기는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숲속에서 살면서 가끔 들르면 되지 굳이 도시를 지배하겠다고.'
지난날 키아누 아카데미를 침공한 이들은 말하자면 마녀들 사이에서도 급진파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평소에도 남자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과거 대모가 북부를 지배하던 모계사회로 돌아가자는….
'태양교회 사제들도 그렇게 나쁘진 않던데 왜 그리 난리를 피우는지 몰라.'
정찰 중인 마녀는 말하자면 온건파다.
태어나길 마녀의 숲에서 태어났고, 태양교회의 척살대와 이단심문관을 겪어 본 적 없는 대표적인 세대이다.
'뭐… 나도 아이스 트롤들 말고 전사들이 좀 있었으면 좋겠지만… 응?'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호수 독수리의 시야에 인간의 형체가 잡혔다.
삐----이!
'남자!'
호수 독수리의 울음이 떡갈나무 숲 분지에 퍼졌다.
"오. 마중을 나왔군."
이틀 내내 달려온 키아누 아카데미의 총장. 이고르 세르게에비치 페트로프는 익숙한 울음소리에 손을 흔들었다.
곁에 에반젤린도 있어,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공격당하면 난감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독수리는 공격하지 않았고, 숲속으로 하강하더니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숲을 헤치고 총장 앞에 섰다.
"오랜만이에요. 할아버지."
"마리아! 오랜만이구나. 네 어미는 잘 있고?"
다행히 말(?)이 잘 통하는 조카손녀였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총장의 모습에 마리아가 약간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시에 배반자로 낙인찍힌 에반젤린을 노려봤다.
"어머니야 잘 계시죠. 그런데 혼자 오셨어요?"
"혼자 와야지… 대모님은? 아마 기다리고 계실 텐데?"
"확신은 못 하겠네요."
조카의 태도에 총장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에반젤린은 아예 없는 취급이었다.
"대모님이… 노망이 난 게 사실인가 보구나."
"할아버지도 조심하세요. 도끼는 못 휘두르시지만, 주술은 더 강해지셨거든요."
헛헛. 총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주술이 더 강해지셨다고?"
노망이 날 정도로 늙었음에도 죽지 않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그 정도면 김민수 교수도… 으음.'
"자매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순간 총장 자신이 겪은 김민수와 비교해 보니 침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알아요. 그냥 알고 계시라고요."
마리아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총장은 속이 쓰렸다.
젊은 것들 말처럼 완전히 정리하는 게 맞았을까?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사람만 한 닭을 타고 나타난 대모를 만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모… 님을 뵙습니다."
"간만이구나. 이고르!"
백이십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마치 시베리아 호랑이와 같았다.
백내장 때문에 완전히 하얀 눈은, 굽은 매부리코와 얼굴 전체를 뒤덮은 자글자글한 주름에 더하여 위압감을 주었다.
총장 그 자신도 육십이 넘은 노인이지만, 대모 앞에서는 아이 취급이었다.
"에잉. 왜 이리 말랐느냐?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게야?"
"예. 예. 대모님."
"일단 가자! 식사를 준비해 놨다!"
사람만 한 닭에서 뛰어내린 대모는 이고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이고르의 몸이 종이인형처럼 끌려갔다.
"일단 먹자! 먹고 이야기하자!"
집 안에 들어서니 거대한 냄비 곁에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이걸… 저 혼자 먹습니까?"
"그 정도는 충분히 먹지 않느냐? 옳아. 네가 다른 아이들 먹을 것이 없을까 봐 걱정이구나. 염려 마라. 다른 아이들 것도 있으니."
스튜용 냄비가 통째로 식탁에 올라와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지만, 대모에겐 겸양으로 들렸나 보다.
결국 이고르는 십 인분이 넘는 치킨 스튜를 다 먹은 뒤에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잘 먹는구나. 그래. 나를 보고자 했다고?"
"끄윽-. 예. 대모님. 그만두시지요."
"무얼?"
어느새 꿀에 절인 산딸기를 물에 타고 있던 대모가 반문했다.
백내장 때문에 눈도 안 보일 텐데 실수 하나 없이 움직이는 그 모습에 감탄하며 총장이 말을 이어 갔다.
"대모님. 모든 걸 대모님이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선대께서 카를에게 진 것? 있을 수 있지요.
그 복수를 하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모님. 왕국의 힘은 아직 성장기입니다. 북부는 힘을 길러야 해요!"
휘적휘적. 탕. 총장의 말에 대모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완성된 산딸기 음료를 옆에 놔주었을 뿐이다.
어디서 꺼냈는지 산딸기 박힌 과자를 접시에 담아 온 대모가 의자에 앉았다.
"이고르. 이고르 세르게에비치 키예프스키."
꿀꺽. 살면서 다섯 번도 안 불려 본 이름이 불려졌다.
총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너는 참 속도 좋다. 키예프의 정당한 지배권은 네가 장남이 아니니 놓친 게 당연하다 치자. 한데 북부 제일의 용사라는 이름도 빼앗기지 않았느냐? 네놈은 분하지도 않아?"
"그것은...."
"머저리 자식아. 태양교회의 세례를 받더니 네가 진정 서부 놈이 된 것 같으냐? 넌 북부의 아들이다. 너도 나도. 여신의 자식으로 죽을 거란 말이다!"
주름진 얼굴로 소리치는 노인의 모습이 똥고집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그 노인에겐 그 고집을 현실로 만들 힘이 있었다.
"대모님. 저는 현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진정 북부의 힘을 기르고 싶었다면 이번 습격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건 제 살 깎아먹기 아닙니까?"
"그건 솎아내기다. 나 어릴 때만 해도, 홀로 아이스 트롤 열 마리는 잡아 와야 어른으로 인정해 줬어! 그런데 지금 봐라. 계집뿐 아니라 사내놈들도 아이스 트롤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해!"
대모가 열변을 토했다.
총장은 머리가 아파 왔다.
"대모님! 그건 백 년 전 이야기 아닙니까!"
"백 년이 지났으면 백 년치만큼 더 강해져야지! 더 약해지는 게 말이나 돼!"
전사들이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식량은 풍족해졌고, 약탈은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상업은 발달하였다.
키예프를 제외하곤 도시도 없던 북부가 키아누를 포함하여 서부에 밀리지 않는 거대 도시가 여럿 생겨났다.
열 배 가까이 증가한 인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총장은 이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25화 첫 마법 강의
에반젤린은 마녀의 숲에 오기 싫다.
죽어도 싫다.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또 이곳에서 좋은 기억이라곤 단 한 톨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총장이 대모에게 끌려간 뒤 덩그러니 남게 된 에반젤린은 급히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숲에 들어오면 반드시 발생하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늦었다.
반푼이 에반젤린이 돌아오기만을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 배신자 반푼이."
"…노바."
"너 참 뻔뻔하다? 왜 왔냐?"
올가의 동복자매답게 커다란 덩치와 강렬한 눈빛이 멧돼지와 같았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면? 왜 왔는데? 네 그 잘난 숙부 앞잡이 하러 온 거야?"
"올가 일은 미안해...."
퍽! 에반젤린의 사과가 끝나기도 전에 올가의 큰 손이 에반젤린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 그렇게 잘 아는 년이 그때는 왜 그랬대? 아. 그러시겠지. 평소에 너무 보기 싫어서 그 마법사 새끼 손을 빌려서 죽여 버린 거겠지! 소름 끼치는 반푼이 새끼야!"
퍽! 퍽! 퍽! 말을 이어 갈수록 악에 받쳤는지 노바의 손찌검이 이내 발길질로 이어졌다.
반푼이라는 소리가 싫었지만 에반젤린은 그 발길질에 차여 날아갈 때까지도 아무 소리 하지 못했다.
"근본도 없이 애비 위세만 믿고 까부는 년."
퉤-! 노바가 침까지 뱉었음에도 누구 하나 에반젤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반푼이라 부르지 말라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찔끔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마녀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태양의 신성력이었다.
숙부에게 지저분해진 모습을 보이면 좋을 게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부스럭-. 누군가 다가왔다.
"네가 그 에반젤린이구나."
"…넌 뭐야? 어떻게 남자가 마녀의 숲에 있는 거지?"
그늘에 앉아 쉬고 있으니 동물 가죽을 걸친 청년이 다가왔다.
기본 표정이 웃는 표정인지 서글서글한 말투와 어우러져 좋은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됐다. 바깥에서 온 놈이지? 꺼져."
"반갑다. 난 네루구이야."
"하… 너도 내가 우스워? 딴 년들한테 밟히는 거 보니까 한번 자빠뜨리고 싶어?"
촤륵-. 어느새 꺼내 든 손톱이 네루구이의 대동맥을 찔렀다.
그러나 네루구이는 목덜미에서 피가 흐름에도 태연했다.
"아니. 난 네 그 힘에 관심이 있는 거야. 에반젤린. 다른 마녀들한테는 없는 힘에."
두근두근. 송곳과 같은 손톱 끝에서 거칠게 뒤는 박동이 느껴졌다.
그 강렬한 맥동은 아이스 트롤의 차가움이나, 자매들의 유약함과 달랐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에반젤린이 되물었다.
"...뭔데?"
---*---*---
"썩 꺼져라 어른도 몰라보는 놈!"
"대모님!"
"조상과 신앙을 팔아먹고 받은 개집이 그토록 자랑스러우더냐!"
"그럼 어린 것들이나 잡아먹고 사는 삶이 보람찹니까! 네?"
의견의 불일치로 시작한 대화는 이내 감정싸움으로 비화되었다.
"내가 네놈을 얼마나 예뻐했는데! 아이고오! 그 말라깽이 페트로프 녀석 때문에 북부가 이리되었구나!"
"감정에 호소하지 마십쇼! 저도 열 뻗치니까!"
쏟아 내는 감정에 기세가 섞이니 두 사람이 대화하던 오두막은 그 기세만으로 터져 나갔고, 두 늙은이가 외치는 소리는 온 숲에 울려 퍼졌다.
"백 살도 넘었으면 뒷방에 물러나 손녀들 재롱이나 보면 되지! 노욕을 부려서 애들이나 죽이고! 잘하는 짓입니다!"
"뭐야?! 내가 나 하나 잘되자고 그러는 것이냐! 너희 사내놈들이 아랫도리 간수 못한 거 다 받아 준 게 나다! 이 은혜도 모르는 자식아!"
싸움이 이어질수록 그 내용은 추잡스럽게 변해 갔다.
처음에야 총장에게 분노해 있던 마녀들도 그만했으면 싶었다.
듣고 있으니 부끄러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에잇! 전 가겠습니다!"
"어딜 가느냐 이놈! 우리 애들 핏값은 내놓고 가라!"
콰-앙!
기어코 늙은 마녀가 손을 썼다.
대모의 손짓을 따라 어디서 자랐는지 모를 나무뿌리가 총장의 몸을 후려쳤다.
"이익! 노망이 나도 곱게 날 것이지!"
콰앙! 쾅!
사람 몸통만 한 대검을 꺼내 든 총장이 휘둘러 오는 나무뿌리를 쳐 냈다.
마녀의 숲이 시끄러워졌다.
---*---*---
"좋은 아침이에요. 교수님."
"어서 와라. 라예브냐. 차 한잔할 테냐?"
"네. 좋아요."
개강 둘째 날, 첫 마법 수업을 위해 교보재를 만들고 있으니 라예브냐가 출근했다.
"엄청 일찍 나오셨네요?"
"일찍 일어나지더라고. 이것 좀 봐 볼래?"
자신도 꽤나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일찍 나온 김민수를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 뒤 꿀차를 마셨다.
"이건… 마법서인가요?"
"맞아. 르벙 선배의 커리큘럼은 영… 차라리 내가 교재를 따로 배포하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
"세상에...."
라예브냐는 경악과 뒤이어 찾아오는 감동에 김민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부끄러워 김민수는 머리만 긁적였다.
"이걸 설마… 그냥 주시려구요? 이 귀한 걸?"
"귀하긴… 그래 봤자 기초 마법서야. 지금이야 좋아하겠지만, 나중에는 제발 그만 달라고 빌걸?"
김민수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과제로 후배들을 골려 주는 건 항상 재밌다.
마탑에서 워낙 마법서로 당한 게 많은 탓에 김민수는 후배들이 적어도 마법서에 의한 문제는 안 겪도록 하고 싶었다.
"읽어 봐도 될까요…?"
"당연하지. 그건 네 건데. 열심히 해야 한다? 조교가 애들보다 못하면 안 되잖아?"
"네. 네! 물론이죠!"
라예브냐가 활짝 웃었다.
곧바로 표지를 넘기니 목차부터 세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이건… 처음 보는 양식이네요?"
"어떤 게? 아. 표와 그림 말하는구나. 그래도 그게 있으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니?"
"...."
지구의 양식에 익숙한 김민수는 오직 글만 있는 마탑의 마법서에 기함했더랬다.
그래서 모든 마법을 도표화, 도식화시켰고, 그 결과 마탑의 모든 마법서에는 김민수가 표준화시킨 양식이 사용된다.
"이건… 정말 엄청나네요."
"그렇지?"
김민수의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이처럼 순수한 칭찬이라니… 자신이 만든 것은 잘만 쓰면서 무시하기나 하는 마탑의 후배들한테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늘은 여기 마법의 분류와 역사 부분을 수업할 거야."
"시간이 될까요…? 이것만 해도 분량이 엄청난데요?"
라예브냐의 우려는 타당한 것이었다.
통상 하루에 열 시간 정도 진행되는 수업은 배우는 사람뿐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체력도 쏙 빼놓는다.
때문에 교수 한 명이 그 수업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서너 명이 나눠서 수업을 맡는다.
문제는 마법학과 소속 교수는 현재 김민수 하나뿐이다.
르벙 교수의 커리큘럼의 대부분이 실기로 채워진 것을 꼭 르벙 교수만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
그러나 라예브냐가 알지 못하는 사실 하나는, 마탑에서 김민수가 보조 마법사라고 무시하는 이는 있었어도 그의 능력을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교수님 저 무서운데요? 표정 좀 풀어 주시죠."
"아. 미안미안. 걱정 마. 익숙하니까. 아 그래. 잊을 뻔했네. 샌드위치를 좀 넉넉히 구해 와 줄래?"
"샌드위치를요…?"
라예브냐의 명석한 두뇌는 어떤 생각 과정을 통해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이해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라예브냐의 말에 김민수가 밝게 웃으며 답했다.
"점심 먹는다고 나가면 시간 아깝잖니. 교실에서 먹으면서 하자."
'내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
평소와 달리 해맑게 웃어 보이는 김민수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광기 그 자체였다.
"너도 들어오면 같이 앉아서 수업을 들으렴. 네 실력이 애들보다는 낫지만 아무래도 기초는 조금 부족하니까."
문득 라예브냐의 시선이 연구실 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 상자에 닿았다.
분명 어젯밤까지도 저런 상자들은 없었던 것 같은데 대체 뭘까.
"뭘 보는거… 아. 저거? 애들한테 나눠 줄 교재들이야."
김민수의 대답에 라예브냐는 참지 못하고 질문해 버렸다.
"저… 교수님 마법학과의 학생들은 고작해야 여섯 명인데요?"
"그런데?"
"하지만 저 나무 상자들은… 아무리 봐도 한두 권이 아닌 거 같은데요?"
흐음-. 김민수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탑의 도서관에는 사천 권 정도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지. 엄청나게 많아 보이지만, 마탑의 규모를 생각하면 많은 편은 아니야."
김민수는 말을 하며 연구실 한쪽 벽면에 세워진 책장을 바라보았다.
라예브냐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키아누 아카데미의 장서 보유량은 육백 권 정도? 마법사를 양성하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장서량이지."
"자,잠깐만요. 책이 늘어난 거 같은데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인지하지 못했지만, 두 개밖에 안 되던 연구실의 책장이 여섯 개가 되어 있었다.
못해도 사백 권은 되어 보였다.
"고래는 호수에서 자랄 수 없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김민수가 쌓여 있는 나무 상자 하나를 열어 보였다.
"책 한두 권으론 마법사를 교육시킬 수 없어."
이 단으로 쌓인 책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상자 하나에만 삼십여 권의 책이 있었다.
'하나, 둘, 셋... 세상에….'
"나는 키아누의 학생들을 마탑의 마법사들에 버금가게 교육할 거다."
조카뻘의 후배들에게 당했던 모욕을 김민수는 잊지 않았다.
자신이 생산한 지식들은 누리면서, 그 생산자에 대한 존중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왔다.
"지난 백 년간 마탑이 쌓아 올린 지식의 정수가 여기에 있다."
김민수가 나무 상자를 툭툭 쳤다.
마탑이 보유한 사 천권을 압축, 정리, 재생산한 천 권의 전집이다.
"그리고 그 모든 마법을 이해한 내가 있고."
툭툭. 김민수가 제 머리를 검지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웃었다.
총장이었다면 그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겠으나, 라예브냐는 너무 세상 경험이 적었다.
"으음...."
결국 침음을 삼키는 것 말고 라예브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오늘 수업을 마친다. 과제는 마법의 분류법과 주술시대 왕과 마법사들의 암기다. 그럼 내일 보자."
김민수의 첫 마법 강의가 끝났다.
OT는 가볍게라는 법칙을 비웃듯 10시간을 꽉꽉 채운 수업에 학생들은 들리지 않는 비명을 내질렀다.
"수고하셨습니다...."
볼은 더 홀쭉해졌지만, 김민수는 상쾌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섰다.
그 뒤를 라예브냐가 비틀거리며 따라 나갔고, 남은 학생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모, 목이 안 돌아가."
"이반. 나 살아 있는 거 맞지?"
"말 시키지 마… 나도 힘들어...."
노을이 길게 뻗어 나가는 마법 교실에서 전사 교실에서나 들을 법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과할까?"
"선배. 이제 와서 도끼 휘두를 수 있겠어요?"
"우리 아버진 지금도 도끼들도 불곰 사냥 다니시거든? 나도 그 아들이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이 시대의 수업은 통상 10시간 정도 진행된다.
한 과목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네 과목, 많게는 일곱 과목까지 진행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수가 충분한 전사학과와 달리 교수가 한 명뿐이었던 마법학과의 수업은 널널했고, 기존의 학생들은 전사학과와 달리 충분한 유흥을 즐겼다.
어제까진 말이다.
"…진짜 샘물의 주인인가?"
"야. 나 허리에 감각이 없어...."
"야. 너네 과제 지금 할 수 있겠냐?"
"과제고 뭐고 난 일단 좀 자야겠어… 나 먼저 들어간다."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는 선배들은 먼저 교실을 빠져나갔다.
신입생도 있었지만, 신고식을 할 기운 따위는 없었다.
친오빠인 선배가 신입생까지 업고 나가자. 결국 교실에 남은 것은 삼총사뿐이었다.
"…얘들아 우리 창고에서 과제하자...."
"좀만 더 쉬었다가 가자."
"...."
율리아가 힘겹게 말했지만, 표토르가 말렸고, 이반은 침묵으로 동조했다.
26화 바람둥이 네루구이
'또 숲에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알았어. 그러면 내가 찾아갈게.'
총장의 뒤를 따르며, 네루구이와의 대화를 상기하던 에반젤린에게 총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젤린. 에반젤린!"
"네? 네!"
대모와 총장의 전투는 마녀의 숲을 반파시킨 뒤에 끝났다.
힘을 너무 많이 끌어 쓴 대모가 유아 퇴행해 버렸고, 힘이 빠진 총장이 절뚝이며 숲을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치유를 좀 해 다오. 내 도저히 이대로는 못 가겠구나."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에반젤린을 재촉한 총장은 건물만 한 침엽수 아래에 주저앉았다.
힘겹게 가죽갑옷을 벗으니 여기저기 피멍이 들어 있었다.
"…늑골이 나갔네요. 잠시만요."
우웅-. 밝은 빛이 스며들자 멍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으음-."
통증이 사라지자 절로 긴장이 풀렸다.
한결 편안해진 몸 상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와는 다르구나."
"네?"
"평소라면 신경질을 내고, 투덜거리며 치유했을 텐데 오늘은 얌전하니 묻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터진 머리를 치유하느라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탓에 에반젤린은 지쳐 보이는 총장을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평소처럼 노바가 와서 시비 걸었던 걸 빼면요."
"노바라… 올가의 자매 말이구나. 후우-."
순식간에 치유가 끝나고, 가죽갑옷을 걸쳤다.
아무리 친조카라지만, 여자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육포 주랴?"
"괜찮아요."
긴장이 풀리니 피로가 몰려왔다.
말의 안장에서 짐을 내렸다.
가벼워진 등이 좋은지 투레질하는 말의 등을 한참 긁어 준 뒤 나무에 기대 앉았다.
질겅질겅. 눈을 감은 채 육포를 씹었다.
다른 나무에 기대앉은 에반젤린은 조금씩 물을 마셨다.
"…드루이드를 만났어요."
"드루이드?"
"네. 곰 가죽을 걸친 녀석이었죠."
잠시의 침묵 끝에 에반젤린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드루이드라… 동부로 모두 떠난 줄 알았거늘."
"아마 그게 맞을 거예요. 그 녀석도 혼자였거든요."
"다른 드루이드들은 없었다?"
질겅-질겅-. 육포를 씹는 턱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마녀의 숲은 기본적으로 금남의 구역이다.
아이스 트롤들이나, 일부 전사들이 기거하긴 하지만, 구획이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대모가 있는 심처에 드루이드가 있다? 그것도 남자가?
'그 녀석이라는 걸 보면, 또래 같은데… 곰 가죽을 쓴 어린 드루이드라….'
"그놈이 꽤나 잘생겼나 보구나. 네가 그렇게 얌전해진 걸 보니."
"…숙부님."
찌릿-. 영락없이 조카를 놀리는 삼촌과 같은 말투에 에반젤린이 총장을 흘겨봤다.
"그래서. 그 녀석이 뭐라고 했기에 네가 그리 얌전해진 게냐?"
"제가 쓰는 힘을 신기해했어요."
"네 힘?"
아직 태양이 다 지지 않았기에 에반젤린은 쉽게 태양의 힘을 일으켰다.
펼친 손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황금빛 신성력은 작은 태양과 같았다.
"…그건 네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더냐?"
에반젤린이 반푼이라 불리는 근본적인 이유.
마녀의 배에서 난 아버지와 달리, 태양교회의 세례를 받은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마녀임에도 태양의 힘과 달의 힘을 모두 쓰는 그 능력은 확실히 독특했다.
"저도 잘 모르죠. 저 말고 세례를 받은 마녀가 없으니까요."
"...그렇구나."
에반젤린의 말에 총장이 기억을 뒤적여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분명 세례를 받은 마녀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키아누에 돌아가면 한번 찾아봐야겠군. 김 학장 정도면 알려나?'
"그게 다예요. 어차피 숲이 시끄러워져서 길게 이야기하지도 못했고요."
대모와 싸우던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으니 거짓말인 게 분명했지만, 들추지 않았다.
'뭐… 젊은 애들끼리 시간 좀 보낼 수도 있지.'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총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에반젤린이 기분이 나빴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숙부님! 이상한 생각하고 계시죠! 그거 아니라니까요!"
"헐. 됐다. 녀석아. 채비나 해라. 오늘 밤 노숙하기 싫으면."
흐흐. 장난스럽게 웃은 총장이 다시금 짐들을 안장 위에 얹었다.
편히 쉬던 말이 투정을 부렸지만, 등과 목을 몇 번 긁어 주니 얌전해졌다.
"이랴!"
"하!"
두 노소가 빠른 속도로 마녀의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부스럭-.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작은 곰 하나가 둘의 뒤를 따랐다.
---*---*---
"케헥! 켈룩! 켈룩!"
"대모님. 일어나셨어요?"
"으음…? 나타샤냐?"
기절하듯 잠들었던 대모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들판이었다면 까마귀가 달려들어 뜯어먹었을 정도로 마른 몸이었지만, 백이십 살이나 먹은 노인에겐 그런 몸도 무거웠다.
"대모님 여기가 어디죠?"
"여기? 여기는 내 집이지. 베드모이 숲에 있는… 내 나이는 올해 백이십이고."
휴-. 나타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섬망 증세가 오래가는 경우도 있지만 다행히 지금은 아닌 듯했다.
"뚱뚱한 이고르는 갔느냐?"
"예. 다행히 별 탈 없이 돌아갔습니다."
"제 형과 달리 그 녀석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거늘...."
대모는 북부의 수도 키예프를 다스리는 이고르의 형, 페트로프 백작을 떠올렸다.
북부인이라기보다는 서부의 말라깽이를 더 닮은 그 형상이 떠올라 대번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고르 녀석도 이제 물들어 버린 게야.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
"이고르가 그리 당당한 것도 당연하죠. 대모님. 트롤 삼천을 한 번에 처리했으니까요."
"큼… 그래. 마탑에서 나온 녀석이 그랬다고 했지? 나참. 대마법사가 대체 북부에 왜 와서는...."
끄응-. 대모가 침음을 흘렸다.
갑자기 나타난 김민수라는 존재에 의해 대모의 계획은 모두 어그러졌다.
북부에 위협을 만들어 북부를 독립시키거나, 협상의 여지를 만들려는 계획이 모두 끝장났다.
"보조 마법사라고 얕잡아 본 게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떤 멍청한 년이 그걸 보조 마법사라고 보고한 게야! 그년은 눈깔도 없나 보지!"
키아누의 피해는 수십 명이 죽고 다치는 것으로 끝났고, 키예프에는 그냥 여느 때와 같은 트롤 토벌 정도로만 기록되었기 때문이었다.
북부를 각성시키기는커녕 숲의 10년치 공력만 허공으로 사라졌다.
"뭐, 아직 미숙함이 있던 것 같다만."
대모는 달빛으로 본 김민수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날 겪었던 이천삼백의 죽음 또한 떠올렸다.
[너.]
이천삼백에 달하는 번제물들이 대모의 의식을 달에 닿도록 하였고, 달 그 자체가 된 대모는 찰나의 순간 살육의 원인인 김민수를 찾아냈었다.
[누구냐?]
한순간에 찾아온 연속적인 죽음은 대모에게 크나큰 전능감을 줌과 동시에 분노를 일으켰다.
그 분노는 실체를 지닌 무형의 힘이 되어 대마법사의 마법을 깨트렸으나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때의 안타까움이 다시 떠올랐지만 대모가 할 수 있는 건 입맛 다시기밖에 없었다.
"쩝쩝. 그런데 네루구이가 안 보이는구나?"
"그 녀석이라면 키아누로 갔습니다."
금남의 구역인 마녀의 숲에 기어코 들어와 마녀들을 귀찮게 굴던 드루이드가 안 보였다.
대모의 물음에 나타샤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녀석이? 왜?"
"에반젤린에게 관심이 있다 하더군요."
"에반젤린? 말라깽이 페트로프의 손녀 말이냐?"
대모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워낙 주름살이 많은 탓이 티도 안났지만 말이다.
"허 참. 제 놈한테 관심 주는 처녀가 없으니 밖으로 나간 모양이구나. 어린놈이 기운도 좋아."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모님."
대모는 그저 기운찬 젊은이의 일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숲의 실무와 관리를 직접 하고 있는 나타샤의 생각은 달랐다.
"드루이드 놈의 관심이 여자가 아닌, 달빛을 노리는 것 같았습니다."
"달빛을? 킁! 아서라. 달빛은 남자들에게 허용되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데 어딜!"
나타샤의 걱정에도 대모는 코웃음만 칠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모는 달의 첫 번째 딸이다.
장녀의 역할은 부모를 대신해 자식들을 돌보는 것.
그리고 돌보는 것에는 어디까지 허용할지와 금지할지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허용하지 않았는데 제깟 놈이 감히! 암!"
적어도 지상에서, 대모가 원하지 않는데 달빛을 쓸 수 있는 자는 없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다르지 않습니까. 대모님. 그 녀석도 그걸 알고 따라갔을 수도 있고요."
"걱정 마라. 드루이드들이 이 힘을 탐낸 지가 백 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힘을 다루지 못했어!"
대모의 장담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전대 대모들도 그렇고, 지금의 대모도 그렇고, 마녀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이 힘의 독점을 포기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러나 나타샤의 걱정도 타당한 것이었다.
에반젤린이 딸이라도 낳으면 어쩔 것인가?
"에반젤린은 그리 독하지 못해! 나타샤 너도 알지 않느냐. 그 아이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태양교회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이 힘을 포기 못한 애다.
그 애가 대번에 달빛을 포기했다면 모를까.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지금이야 잠깐 불붙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힘은 사내놈들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냐."
곧바로 숨넘어갈 것 같던 노인은 어디로 가고, 점차 대모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카랑카랑 울리는 대모의 외침에 나타샤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눈은 안 보이니 동작은 크게 해도 상관없었다.
'하룻밤 불장난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십니까. 할머님.'
마녀들이 남자들을 업신여긴다 해서 그들이 모두 늙은 처녀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수는 분명 남자를 알고, 정열적인 시간을 보내 봤다.
대모는… 그 마지막 기억이 너무도 예전이라 그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만 같았다.
안 그러면 이 숲이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남자라고는 아이스 트롤 수컷들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키아누보다는 키예프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구나. 남은 트롤들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
"오백이 좀 넘습니다. 하지만 대모님. 내년을 기약하시지요. 이제 곧 겨울이 찾아옵니다."
"안 돼!"
콜록콜록-. 나타샤의 말에 대모가 소리를 내질렀다.
급하게 지른 탓에 절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너도 알지 않느냐. 나타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내가 잘못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둘 것이다."
나타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신도 도시 것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대모가 하는 일은 그저 화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특히 왕국에 편입되기 전과 후를 기억하는 나타샤는 지금이 얼마나 살기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분란을 일으키려는 대모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는 됐지만, 받아들이기 싫었다.
저건 노욕이고, 고집이다.
"키예프에 애들이 몇이나 들어가 있지?"
"상주하는 아이들은 스무 명 정도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분명 제분소와 빵집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있었지?"
"네."
대모는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을 척척 내렸다.
그 내용을 다 기억하면서도 나타샤는 가슴 깊숙이서 올라오는 저항감을 느꼈다.
이번 키아누 습격에서 죽어 시체도 못 찾은 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27화 방카르는 동부의 개다
"오."
"흐끼약?!"
"교, 교수님!"
"안녕하세요...."
연구실에서 나와 관사로 가던 길에 김민수는 삼총사를 마주쳤다.
죽으려고 하던 수업 시간 때의 모습은 어디 가고, 어느새 회복했는지 발랄하게 걸어가던 율리아의 비명을 시작으로 표토르와 이반이 인사를 해 왔다.
"아.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 이제 들어가니?"
"네. 들어가서 과제하고 자려구요."
아직 미약한 공포감을 보이는 율리아와 달리 표토르나 이반은 평이하게 김민수를 대했다.
그에 김민수가 쓰게 웃었다.
'여자애한테 못 보여 줄 꼴이긴 했지.'
현대의 지구였다면 트라우마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특히 율리아의 경우 가장 앞에서 마녀들의 목이 날아가는 꼴을 봤으니 더할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나 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차차 다시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민수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몸이 안 좋으면 쉬고. 질문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알았지?"
"네! 교수님!"
"네!"
"들어가라."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김민수가 멀어지자 율리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무서워?"
"너희들은… 그럼 안 무서워?"
"무섭긴 한데… 그렇게 안 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걸?"
"맞아. 감사해야지. 교수님 아니었으면 우리도 죽었을 수도 있어!"
아이스 트롤의 기습 당시 백 명이 넘는 사람이 병동으로 실려 갔고,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습격 다음 날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했던 셋은 그 광경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향해 썩은 이를 드러내던 아이스 트롤을 저지해 준 건, 하늘에서 날아온 김민수의 마법이었다.
김민수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날 장례식에서의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땅 위에서, 땅 속으로.
"무엇보다 그렇게 대놓고 계속 무서워하면 실례잖아 율리아. 그건 귀족답지 못하다구?"
"시끄러워 표토르.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만해. 얘들아 길거리에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떠드는 게 실례야!"
율리아와 표토르가 툭탁거리는 동안 세 사람은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숙사는 성별이 분리되어 있기에 세 사람은 늘 그래 왔듯 기숙사 뒤편의 창고로 향했다.
---*---*---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쉬지 않고 달려 밤늦게 키아누 아카데미 병동에 도착했다.
비공식적인 외출이었기에 총장과 에반젤린은 도시 밖에서 적당히 헤어졌다.
늦은 밤이었기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비대장이 문을 열어 주었고, 에반젤린은 별문제 없이 도시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에반젤린은 빠르게 병동으로 향했다.
그나마 이 세상에서 에반젤린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다.
그런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부-!"
"히익?!"
엄청난 강행군에 쉴 생각 가득하던 에반젤린은 귓가에서 들린 남자 목소리에 어린아이처럼 비명 지를 수밖에 없었다.
"너 미쳤어?! 여긴 어떻게… 아니. 언제? 아니 너 뭐야!"
히히. 경악하는 에반젤린과 달리 네루구이의 표정은 처음 봤을 때처럼 장난스러워 보였다.
"언제 숲으로 올지 모르겠다며?"
"아니. 그렇다고 해서...."
"괜찮아. 안 들켰어."
"그게 아니잖아!"
한참 짜증 내던 에반젤린이 네루구이의 몸을 밀어냈다.
"나가. 빨리 나가!"
"어…어어? 나 갈 데 없는데?"
"여기 들어온 능력으로 나가면 되잖아!"
"지금 문 닫혀서 못 나가. 나가다 들킨다?"
아무리 봐도 협박이었다.
에반젤린은 그런 네루구이의 당당함에 짜증이 났다.
뭐 저리 당당한지.
"아! 진짜! 그니까 왜 따라왔는데!"
"말했잖아. 관심 있다니까?"
끽-끼긱-. 에반젤린이 밀어내는 것을 문틀을 잡고 버티니 나무틀에서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안 그래도 늦은 밤인지라 그 소리도 굉장히 크게 울렸다.
하아-. 에반젤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능글맞은 웃음을 보니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 안 들키고 있을 수 있지?"
"물론이지."
씨익-. 네루구이의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병동에 나 말고 다른 애도 있어. 레나라고. 내 여동생이야."
"오."
"오. 좋아하네. 걔 건드리면 죽는다?"
목을 찔러 오는 손톱에 첫 만남이 오버랩되었다.
네루구이가 항복의 뜻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알아서 안 들키게 해. 들키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걱정 마. 안 들킬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달빛 아래 서 있지 마. 서 있으면...."
"속삭임 때문이지? 걱정 마 달빛에 안 띄게 돌아다닐 거니까."
"너 대체… 아니다. 다른 자매들한테 들었겠지."
바람둥이를 쏘아보듯 노려봤지만, 네루구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정도 뻔뻔함이 없었다면 마녀의 숲에서 진작에 쫓겨났을 것이다.
"…언니? 언니 왔어?"
"레나?!"
병동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부름에 에반젤린이 화들짝 놀랐다.
급히 네루구이를 숨기려고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휘적일 뿐이었다.
'뭐야? 얘 어디 갔어?'
"언니!"
"미안 시끄러웠지?"
자신이 꿈이라도 꾼 건지 네루구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겨 오는 레나를 달래며 침실로 향한 에반젤린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는 그 순간까지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잠에 드는 순간에도 에반젤린의 의식은 네루구이의 행방을 뒤쫓았다.
---*---*---
'흐응-. 대주술사라더니… 그리 강하진 않은데?'
킁킁-. 레나에게 들키지 않은 채 병동 밖으로 나온 네루구이는 그늘 아래에서 코를 벌름거렸다.
드루이드의 훈련된 코가 대지와 대기에 남은 마력의 잔향을 맡았다.
한참 짐승이 사냥감을 쫓듯 냄새를 따라간 네루구이는 다른 건물보다 약간 높은 목조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수진이 머물고 있는 키아누 아카데미의 관사였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어떻게 대지의 맥동이 건물을 타고 올라가 박혀 있는 거지?'
북부의 추운 겨울을 뚫고, 한 방의 창문에서 따뜻한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루이드의 훈련된 감각이 거미줄처럼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력의 실을 찾아냈다.
'이건… 불도마뱀의 몸에서 보이는 형태이고, 이건 골렘?'
육감이 경고하지 않았기에 가까이 다가가 마력의 선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잔향이 주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자연의 마력과 달리 인간의 몸을 거쳐 나온 마력에는 그 주인의 성격이 묻어난다.
그리고 드루이드는 향과 빛깔로 그 성격과 위험도를 판단한다.
'절삭자니 섬뜩한 사냥꾼이니 하더니만, 별거 없는데? 병든 코카투리스 같은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는 마력의 실을 자아내는 것도, 그것으로 십여 가지의 마법을 충돌 없이 직조해 내는 실력은 경이로웠지만,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이건 뭐지…?'
조화롭게 직조된 마력의 거미줄에서 이질적인 줄 세 개가 눈에 띄었다.
거미줄이나 벌집과 같이 기하학적인 완성도를 망치는 이상한 줄들이었다.
팅-. 팅팅.
'뭐지? 만들다 만 거...!!!'
챠르르르르! 사막 도마뱀이 벼슬을 펴고 위협하듯 마력의 실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얌전히 제 일을 하던 마력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그 형태를 바꾸었다.
'발톱!'
진동하는 실들이 합쳐지며, 보온과 습도 유지를 담당하던 도형이 얼음으로 된 송곳을 쏘아냈다.
핑! 피피핑! 덜컥-!
손가락만 한 송곳 수십 개가 벽면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큭!'
하나하나가 화살보다 빠르고, 고양이의 발톱만큼 날카로웠다.
그런 와중 네루구이의 감각에 인기척이 걸려들었다.
[보호][부유][탐색][탐색]
덜컹-! 나무창이 열리고 짜증 가득한 표정의 김민수가 몸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그려진 네 개의 원이 각기 다른 마법을 뽐내었고, 직경 100m의 범위 내 모든 생명체가 곤충 단위까지 탐지되었다.
"흐음...."
'이상하군. 지뢰 마법이 그렇게 쉽게 작동되는 게 아닌데… 응?'
끼잉-! 낑!
웬 황갈색 개 한 마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널부러져 있었다.
'아이고! 저 개가 그랬구나!'
"아이고. 이를 어째?"
[소독][회복][회복][접합]
하필 그 형태도 익숙한 녀석이라 김민수는 얼른 내려가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이 녀석아 그걸 왜 건드렸어?"
동부에서 주로 키우는 방카르였다.
동부 고산지대에 주로 서식하다 보니 밥도 적게 먹고, 추위에도 강한 녀석이었다.
덩치도 거의 사람만 한 녀석이라 다양한 사냥견으로도 쓰이는 유용한 품종이다.
"미안하다. 많이 놀랬지?"
낑! 끼잉!
순식간에 회복된 자신의 몸이 신기한지 방카르가 펄쩍 뛰었다가 빙글빙글 돌았다.
'누가 키우는 녀석인가? 관리가 잘되어 있네?'
뜨끈한 방카르의 몸을 쓰다듬으며 김민수가 생각에 잠겼다.
일정 이상의 마력에만 반응하는 마법이다 보니 사람만큼이나 무거운 녀석의 무게에 반응한 것 같았다.
할짝-할짝-.
대뜸 손을 핥는 걸 보니 확실했다. 사람의 손을 탄 녀석 같았다.
"어이구. 그래. 그래. 네 주인은 어딨냐? 아니 아니지. 밤이 늦었으니 일단 들어가자. 내일 주인을 찾아 주마."
왈-!
"쉬-.쉬! 짖으면 안 돼!"
갑작스러운 기상에 일어났던 분노가 눈 녹듯 사라졌다.
"읏차!"
낑! 끼잉!
"괜찮다. 괜찮아."
[부유]
팔십 킬로쯤 나가는 자신의 몸이 가볍게 들리자 방카르가 놀랐는지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놀란 개를 달래며 김민수는 평소와 달리 천천히 떠올랐다.
'이, 이게 아닌데?'
당연한 말이지만, 방카르는 순간 기지를 발휘해 변신한 네루구이였고, 창밖을 뛰쳐나온 순간 퍼진 김민수의 마력에 잔뜩 쫄아 버린 상태였다.
도망갈 새도 없이 김민수의 방에 들어온 네루구이는 진짜 개처럼 빙글빙글 돌며 냄새 맡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으오? 따뜻해?'
"엇차… 보자. 너는 좀 덥겠구나."
드르륵-. 허공에 손가락으로 동그란 물건을 쥐고 돌리듯 하자 방 안의 온도가 천천히 내려갔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무슨 짓인가 싶었겠지만, 개로 변했음에도 네루구이의 눈과 귀에는 그 광경과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와-.'
"온도는 이만하면 됐고...."
언제 켜졌는지 밤임에도 눈부시지 않은 등과 함께 방 전체를 뒤덮고 있는 마력의 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열선처럼 작동하는 실들에서 뿜어지던 열들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아무리 그래도 바닥에서 재우긴 좀 그렇고."
침대 밑에서 여분의 이불을 꺼낸 김민수는 이불을 펼친 채 오른손으로 이불을 이리저리 쓸었다.
[봉합][봉합][반탄][반탄]
"이리 와 봐라."
타닥타닥! 나무바닥과 발톱이 닿아 작은 소리가 울렸다.
쪼그려 앉은 김민수가 방카르의 뒷목을 살짝 잡았다.
눈을 마주친 채로 혀를 찼다.
"쪼쪼쪼쪼. 옳지. 가만히 있어라."
[세척][세척][살충][살충]
혹시 모를 진드기까지 싹 제거한 김민수가 옆에 만들어 둔 애견 침대를 팡팡 쳤다.
적당히 반탄력이 올라오는 것이 아주 좋아할 듯싶었다.
"여기서 자면 된다. 주인은 내일 찾아 주마."
컹-!
임시 침대였지만, 네루구이는 처음 느껴 보는 부드러움과 포근함이었다.
한참 앞발로 이불 여기저기를 눌러 본 네루구이가 엎어지자 김민수 또한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다시금 허공에서 손을 돌리자 옅게 켜 있던 등도 꺼졌다.
짐승과 마법사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28화 복실이? 복실이!
"총장님. 페트로프 백작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옛 키예프 대공가의 상징이었다가, 이제는 페트로프 백작가의 상징이 된 인장이 박힌 편지가 내밀어졌다.
간밤의 강행군에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총장이 거칠게 편지를 뜯었다.
아이스 트롤 토벌은 언제 갈 것이냐는 재촉 편지였다.
이미 자신들은 준비가 다 되어 있노라 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께는 아직 보고가 안 올라갔던가?"
"예. 습격에 대한 보고는 올라갔습니다만, 아직 아이스 트롤 이천삼백 구를 사살한 내용은 보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정신이 없었군… 편지지를 가져오게."
피곤한 눈을 주무르던 총장의 앞에 고급 양피지가 놓였다.
"혹시 간밤에 마녀의 숲에 대한 변동 사항이 있는가?"
"그대로입니다. 숲은 비어 있고, 베드모이 숲에 보낸 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북부 전역에 퍼진 건 아니지만, 대모가 북부의 도시들을 적대하기 시작한 이상 정기적인 정찰은 필수였다.
"일단 편지를 보내 놓고 내가 직접 찾아가 봐야겠어."
"총장님. 연세를 생각하시지요. 들으니 대모님과도 한판 하셨다던데, 이번엔 제가 키예프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총장이 반색을 했다.
'나도 이제 늙긴 늙었군.'
육십이 넘으니 이런 강행군이 쉽지 않았다.
베드모이 숲만큼 멀진 않지만 키예프도 반나절은 말을 타고 가야 하는 거리다.
총장은 조카를 보내기로 했다.
'형님도 간만에 아들자식 한번 보는 게 나쁘지 않겠지.'
서자긴 하지만, 북부는 적자와 서자를 크게 구별하지 않았다.
워낙 척박하다 보니 살아남는 놈이 적자라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호위는 네가 편한 만큼 데려가라. 아 그래. 에반젤린도 데려갈 테냐?"
"음… 페트로프 백작께서 딱히 좋아하실 것 같진 않습니다만."
전대 페트로프 백작의 조카며느리인 에반젤린의 어머니는 키예프에 살고 있다.
그러나 늦둥이 에반젤린을 귀엽게 보는 총장과 달리 친척오빠인 재무처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가? 아. 그래. 이번에 가는 김에 키예프에서 마법학과 지원생을 좀 모집해 오게."
"편입생을요?"
"일찍 온다면 신입생으로 받아도 될 거야."
"좋은 생각입니다 총장님. 한데, 저희야 김민수 학장의 능력을 알지만, 키예프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까?"
재무처장의 말은 타당한 것이었다.
총장과 키아누의 귀족들은 김민수의 공을 축소하는 데 동의하였고, 그 대가로 김민수에게 마법 학장 자리를 주었다.
문제는 그 결과 김민수의 이름이 북부 전체에 퍼진 것이 아니라 마법학과에 지원할 학생들이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조금 기다려 보시지요. 이제 마법학과의 학생도 무려 여섯 명이지 않습니까? 신입생도 한 명 들어왔구요."
"그 아이는 북부 태생이 아니지 않는가? 실제 북부 태생인 녀석들만 보면 고작 넷뿐일세. 그중 하나는 상인의 자제이고."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오랫동안 북부의 마법과 관련된 일은 마녀들이 꽉 잡고 있었기에 마법사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녀 명가는 있어도 마법 명가는 없는 게 그 이유 때문이었다.
"제가 한번 백작님께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정 안되면 가신들의 아이들이라도 데려오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보아하니 아직 학장은 때가 덜 묻은 것 같더군."
마법학과가 인기가 없는 것은 북부의 환경이 마법학과의 느긋한 커리큘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마법은 일단 치고받고 싸우면 실력이 느는 전사와 달리 섬세하고 또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마법 하나가 담긴 마법서만 해도 십 골드 가까이 된다.
구하기도 힘든 고급 마법서의 가치는 수만 골드까지도 치솟는다.
"우리 새 형제는 참 통도 크단 말이지."
총장은 김민수가 학생들을 위해 천 권이 넘는 책을 무료로 공개하고, 심지어 마탑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기초 마법 교재도 공짜로 주었다는 말을 아침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만 골드는 될 그 지식들을 모두 무료로 풀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혼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번에 가는 김에 적령기의 여아를 좀 찾아보게. 페트로프 가문의 아이면 더 좋고."
재무처장에게 한번 위임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덕에 미뤄뒀던 일들이나 아이디어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김민수와의 혼인 동맹도 그중 하나였다.
"혹시나 그 여학생에 관심을 가지진 않았겠지?"
"라예브냐 양 말씀이십니까? 예. 적어도 제가 볼 때, 김민수 학장이 먼저 관심을 가질 일은 없을 겁니다."
총장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런 보물이 북부로 들어왔는데 당연히 페트로프의 품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겠는가?
김민수의 능력이 별 볼 일 없으면 모를까 이제는 어림도 없었다.
"내가 딸이 있었다면 곧바로 혼인시켰을 텐데… 아쉽구만 그래."
총장이 입맛을 다셨다. 그에겐 아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무처장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 출발하려고?"
"내일모레 키예프로 가는 상단과 같이 출발하려고 합니다."
어느새 편지를 다 쓴 총장이 키아누스키의 인장을 찍어 재무처장에게 건냈다.
편지지를 품안에 갈무리한 재무처장이 나머지 보고를 이어 갔다.
이제 겨우 개강밖에 안 했는데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
"와아! 교수님 얘 뭐예요?"
연구실에 출근한 라예브냐를 맞이한 건 김민수 곁에 쭈그려 앉자 졸고 있는 커다란 황색개였다.
"아. 어젯밤에 발견한 녀석이란다. 아마 주인이 있는 녀석 같은데, 내가 실수로 상처입혀서 말이야."
"이런 귀여운 녀석을 공격했다구요?"
순간 라예브냐의 눈이 세모나게 떠졌다.
"…내가 한 게 아니라 방범 마법 때문에 다친 거야. 덩치가 크다 보니 침입자로 착각한 듯싶어."
"어? 근데 멀쩡한데요?"
"당연히 치료했지. 아 그래. 라예브냐. 어제 준 과제는 다 해 왔 니?"
방카르의 여기저기를 주물러 본 라예브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라예브냐가 주무르는 게 좋은 듯 다가와 라예브냐의 여기저기를 핥았다.
"물론이죠. 키아누 아카데미의 유일한 '선임' 마법사인 걸요? 이 녀석. 간지러워!"
왈-!
털이 길고 거친 편인 방카르가 다가와 비비자 라예브냐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저놈이…?'
"그 녀석 수컷이다. 그리고 너무 정 주지 말고."
"수컷이요? 으이구. 누나가 그렇게 좋아요?"
왕!
라예브냐가 주물러 주는게 좋은지 방카르의 꼬리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과제도 다 해 왔으면 잘됐다. 그 녀석 주인을 좀 찾아 줘라.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가 키아누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니냐?"
"주인이요? 아…아쉽네요."
끼잉-.
김민수의 말에 라에브냐와 개 모두 아쉬워했다.
그렇게 한참을 개의 볼따구를 주무르던 라예브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 만약 주인이 없으면 어쩌죠?"
"주인이 없으면…? 흠."
'아이스 트롤들 때문에 키아누 성채로 숨어든 녀석인가?'
워낙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주인이 없는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던 김민수는 잠시 고민했다.
끼잉-! 끼잉!
타다닥! 타닥! 김민수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개가 다가와 김민수의 다리에 턱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애교를 부렸다.
'내가 결정권자라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영리한 녀석이군.'
"뭐…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큼지막한 얼굴과 순박해 보이는 눈망울에 김민수는 그러자고 할 뻔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복실아 가자!"
왕-!
폴짝! 라예브냐의 뒤를 따라 나가는 방카르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웠다.
흔들리는 꼬리가 거의 날아갈 것만 같았다.
'네 잠자리는 내가 만들어 줬는데… 밥도 내가 줬고.'
김민수는 괜히 서운함을 느꼈다.
"…일이나 하자."
다시금 책상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의 완성된 쪽지시험지가 보였다.
"공부 안 하고는 못 배기게 해 주마."
김민수는 느닷없이 열정이 더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쪽지시험지는 쪽지시험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가 담겨 있었다.
백 개가 넘는 문제는 중간고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
"얜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칼에 베였다며 호들갑 떨며 찾아온 환자 하나, 배탈이 났다고 찾아온 환자 둘을 처치한 에반젤린은 한가한 병동에 앉아 있었다.
"언니. 누구 기다려?"
"응? 으응 아니. 날씨가 좋아서."
"언니! 우리 놀러 갈까!"
에반젤린의 말처럼 날씨가 좋았다.
기온 자체는 낮았지만 구름도 없었고, 햇빛도 따뜻하니 몸이 절로 노곤 노곤해졌다.
자연스레 에반젤린도 레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럴까?"
"응! 우리 도시락도 싸서 가자! 피크닉 가는 거야!"
레나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날이 좋으니 이불 빨래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지만, 에반젤린은 레나의 말을 따르는 게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불만 가득한 사촌오빠는 병동에서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만, 언제 자신이 그리 말을 잘 들었던가?
마녀의 숲에서 괴롭힘도 좀 당했겠다.
숙부를 모시느라 고생도 했겠다.
에반젤린은 자기 자신에게 선물을 좀 주기로 했다.
"그래. 나가자!"
"와! 언니 최고!"
뭣보다 여동생이 이처럼 좋아하는 만큼 에반젤린은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은 별거 없었다.
짚으로 짠 바구니에 샌드위치를 좀 넣고 우유가 든 가죽 주머니를 챙겼을 뿐이었다.
에반젤린은 병동에 나무패를 걸어 외출중임을 알렸고, 자매는 손을 잡고 병동 부지를 나섰다.
"으흐흥! 흐흥!"
"그렇게 좋아?"
"응!"
폴짝폴짝 뛰는 동생의 모습에 에반젤린의 표정도 풀어졌다.
에반젤린을 알아본 사람들 몇몇이 인사를 했다.
적당히 인사를 받아 주니 이내 태양교회 앞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시락을 풀려는 자매에게 커다란 개와 함께 늘씬한 여성 하나가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진리가 함께하길. 사제님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태양이 함께하길. 아냐 라예브냐 양. 오랜만입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와! 복실이!"
두 여성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동안 레나는 대뜸 자기보다 큰 방카르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푹신푹신해!"
"레나!"
"괜찮습니다. 사제님. 이 녀석이 생각보다 얌전하더라구요."
"그래도요. 그런데 웬 개인가요? 라예브냐 양이 개를 키운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지금 이 녀석의 주인을 찾고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어린애가 달려드는 게 귀찮을 법도 한데, 방카르는 생각보다 레나와 잘 놀아 주었다.
체중이 두 배 이상 차이 나서 그런지 레나가 아무리 거칠게 달려들어도 무리없이 받아 줄 수 있는 듯했다.
"아 라예브냐 양이 키우는 녀석이 아니었군요? 주인 없는 개라… 제가 알기로 키아누에 저런 개를 키우는 집은 없었던 거 같은데… 으음."
에반젤린이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개를 키우는 집도 제법 알고, 큰 개를 키우는 집도 제법 알지만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 저런 개를 키우는 집은 없었다.
저렇게 곰처럼 생긴 녀석이라면 분명 기억할 텐데도 그랬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없네요. 무엇보다 저 녀석 북부에서 볼 수 있는 품종이 아닌 거 같은데요? 복실아. 이리 온."
"맞아요. 저기 빵집 아저씨 말로는 동부에서 주로 키우는 녀석이라고 하더라구요."
짝짝. 에반젤린이 별생각 없이 박수 치며 개를 불렀다.
그러나 방카르는 귀만 쫑긋거릴 뿐, 레나와 노는 데 집중했다.
"이런. 저 녀석은 저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군요."
"아하하. 아마 부제님하고 노느라 그러겠죠."
에반젤린과 라예브냐가 멋쩍게 웃었다.
그런 에반젤린의 속도 모르고 레나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만 공터에 울려 퍼졌다.
"꺄하하! 간지러워!"
"사제님은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겠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가 함께하길!"
"태양이 그대의 길을 비추길! 조심히 가세요. 라예브냐 양."
"감사합니다. 복실아 가자!"
왕-!
라예브냐가 부르자 언제 레나와 재미있게 놀았냐는 듯 방카르가 몸을 휙 돌렸다.
"히잉! 복실이! 안녕!"
왕-!
그 모습에 레나가 서운했는지 살짝 울먹거렸다.
그에 방카르가 다가와 한바퀴 돌고 크게 짖었다.
마치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라예브냐가 미안해하며 개와 함께 멀어져 갔다.
입술을 삐죽이는 레나를 달래던 에반젤린의 뇌리에 가볍게 지나친 한마디가 떠올랐다.
'저기 빵집 아저씨 말로는 동부에서 주로 키우는 녀석이라고 하더라구요.'
'동부?'
휙! 에반젤린의 목이 부러질 정도로 급하게 젖혀졌다.
그러나 이미 골목길로 사라졌는지 라예브냐와 큰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앞에 레나가 있기에 얼른 표정을 고친 에반젤린이었지만 그 눈빛은 아직 사납기 그지없었다.
29화 방카르는 개목줄이 싫어!
끼잉-끼잉-.
'에반젤린한테 가 봐야 하는데 어쩌지…?'
평소라면 수업 때문에 비어 있어야 하는 김민수의 연구실에서 털복숭이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방카르로 변신해 있는 네루구이였다.
방카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짜증을 냈다.
"아니 이런 건 대체 왜 만드는 거냐고! 켁!"
챠칵.챠칵. 네루구이가 불평불만하며 자신의 목에 걸린 개목걸이를 거칠게 당겼다.
저절로 크기가 조절돼 항상 목에 딱 맞게 조정되는 마법의 목걸이였다.
'이 모습으로 에반젤린 앞에 나타나면 죽이려 들겠지…? 아. 보러 가야 하는데….'
대체 무슨 주술을 걸었는지 풀리지 않았다.
더 작은 동물로 변해 풀어 보려 했으나 자동적으로 크기가 줄어드는 탓에 결국 풀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 나갈까…?"
네루구이의 시야에 연구실의 창문이 들어왔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연구실의 모든 공간이 마법진으로 가득했다.
멋도 모르고 문을 건드렸다가 또 몸이 꿰뚫리는 경험은 사양이었다.
결국 네루구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점심시간쯤 라예브냐가 와서 밥을 챙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문이 열렸을 때 뛰쳐나가면… 라예브나한테는 미안하지만 자유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벌써 나흘 가까이 에반젤린하고 이야기를 못 했기 때문이었다.
라예브나도 좋긴 하지만, 우선순위라는 게 있지 않나.
끼익-
마침 연구실의 문이 열리면서 라예브나가 들어왔다.
손에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가 있었지만, 네루구이에겐 고기보다 그 빈틈이 중요했다.
"복실아. 밥 먹자! 어머!"
왕-!
"어어? 복실아! 안 돼! 어디 가!"
라예브나가 어떻게 말릴 틈도 없이 네루구이가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라예브나가 급히 따라 나왔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거대한 방카르를 찾을 순 없었다.
---*---*---
"원소 마법이라는 것은 결국 불, 물, 바람, 땅이 아니라…왜 그러니 라예브나?"
한참 원소 마법개론을 강의하던 김민수에게로 라예브나가 급히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교수님!'
복실이 밥 주라고 보냈더니 다급히 돌아온 것으로 보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교수님! 복실이가 뛰쳐나가 버렸어요! 어쩌죠?'
"얘들아! 잠깐 휴식! 20분 뒤에 다시 시작할 테니 화장실 다녀오고, 샌드위치도 먹어라!"
시계를 가리키며 아이들에게 휴식하라 한 뒤 강의실을 나왔다.
"너무 당황하지 말고. 볼일 보러 간 거 아니니?"
방카르 같은 크고 영리한 개들은 실내에서 용변을 보지 않는다.
"아니에요 교수님! 그냥 뛰쳐나가더니 사라졌다니까요!"
"그래?"
[추적][탐지][지도]
순식간에 그려진 황금빛 마법진들 사이로, 도면과 그 사이를 움직이는 빨간 점 하나가 떠올랐다.
"교수님 이건…?"
"그 목걸이 있지? 거기에 추적 마법을 걸어 둔 거란다. 병동 쪽으로 간 거 같은데…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거 같구나."
김민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보니 과연 그 도면이 키아누의 건물들과 도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라예브냐는 김민수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염려를 드러냈다.
"사제님께 너무 실례는 아닐까요?"
"그러진 않을 거 같은데… 그 셀레나라는 부제하고도 잘 지냈다고 하지 않았니?"
"그렇긴 해요."
"아마도 거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정 안 들어오면 수업이 끝난 뒤에 찾으러 가면 되니 마저 수업이나 하자."
"예. 교수님."
김민수는 기어코 하루 만에 원소 마법 개론을 마쳤다.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지식량에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늘 수업은 이만 하마, 다들 복습 잘하고. 아. 알렉세예브나, 세르게에비치, 이반 등은 잠시 남고."
"네?"
여느 때와 같이 엎어져서 쉬던 삼총사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너희… 개 좋아하니?"
"개요?"
"개!"
"저 개 좋아해요!"
아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묘하게 김민수를 어려워하는 율리아도 김민수의 제안에 두 눈을 반짝였다.
"교수님?"
"애들 정서 교육에 좋아. 가자 얘들아. 동부에서 주로 키우는 개를 보여 주마."
와! 시들어진 숙주나물 같던 아이들이 싱싱한 오이처럼 부활했다.
특히 율리아나 표토르는 평소 의젓한 모습 이상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라예브냐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니! 언제부터 개 키웠어?"
"얼마 안 됐어. 이제 사흘?"
"누나! 종이 뭐야?"
"방카르라고, 동부에서 주로 키우는 종이래."
"방카르? 나 그런 개는 처음 들어 봐!"
"언니! 개 이름이 뭐야?"
"복실이라고 불러. 털이 많으니까 복실이!"
뒤에서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김민수는 병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왜 하필 병동일까. 흠….'
개 때문에 병동으로 향하긴 하지만 김민수는 여전히 에반젤린이 껄끄러웠다.
그리고 김민수는 에반젤린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병동에 도착해서 알 수 있었다.
"태, 태양이 함께하길. 어쩐 일이십니까?"
"진리가 함께하길. 저희 개 때문에 왔습니다."
"개, 개요?"
힘든 일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땀투성이 사제는 개라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타닥타닥-. 왕! 병동의 문틈 사이로 커다란 황갈색 개가 머리를 드러냈다.
"와 개! 귀여워-!"
"오오! 엄청 큰데?"
"진짜 복실이야!"
헥헥거리는 방카르에게 아이들이 달려갔다.
"얘들아 잠깐!"
"너도 가서 같이 놀아라. 복실이가 애들을 물 거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예. 교수님."
순간 에반젤린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김민수의 삐뚜룸한 시선과 마주치자 금세 눈매가 둥글어졌다.
"크흠!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개가 잘 따르나 봅니다?"
"네?"
톡톡-. 김민수가 자신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침이 여기저기 묻어 있군요. 사제로서 품행을 단정히 하셔야지요."
"읏?!"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더니 땀이 아닌 액체가 묻어 나오자 에반젤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허둥지둥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는 에반젤린의 모습은 수치스러워 보였다.
'좀 과하게 부끄러워하는거 같은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지구로 치면 고등학생 수준이니 그럴 법도 하다 생각한 김민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뭔가, 문제는 없습니까?"
"네?"
"마녀들 말입니다."
김민수의 질문에 에반젤린이 입을 비죽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총장님께 가서 여쭤보시면 되지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김민수가 눈을 내리깔았다.
"모른다니까요! 하-. 참. 귀찮게 구네!"
꿈틀-. 김민수의 표정에서 살기를 읽었을 법도 했지만, 에반젤린은 팔짱을 낀 채 구시렁거렸다.
어차피 키아누에 있는 한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학장 자리까지 받았는데, 총장의 친조카인 자신을 어쩔 것인가?
김민수는 그게 아니꼬웠다.
왕-!
"어? 복실아 어디 가!"
헥헥헥헥-!
김민수와 에반젤린 사이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니면 자신이 최고 권력자인 김민수를 너무 방치했다고 느꼈는지 방카르가 달려와 김민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 녀석아. 여기가 좋아?"
왕-! 헥헥헥헥!
"그래그래."
우다다닥! 긴 털 사이로 거칠게 쓰다듬어 주자 기분이 좋은지 방카르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아마 종종 볼 거 같은데 복실이 잘 부탁합니다."
"…관사는 좁으니 여기에 두고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 그렇게 해요!"
"응?"
에반젤린이 중얼거리듯 말한 것이지만 곁에 와서 방카르를 마구 주무르던 율리아가 외쳤다.
"여기에…?"
"네!"
라예브냐에게 들으니 복실이는 지금 김민수의 관사에서 지내고 있다 했다.
관사에 있으면 자신들이 보러 가기 힘들지만 병동은 다르다.
병동은 열려 있지 않은가!
"밤에 또 몰래 나와서 보려고?"
"헤헤."
"교수님! 여기에 보내 주세요!"
피식-. 그 속셈이 뻔히 보여서 김민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요것들이….'
"사제님도 괜찮다고 했으니 그럼 그렇게 하자."
"와!"
"이제 맨날 보러 와야지!"
"아냐 누나 얜 뭘 제일 좋아해?"
왕!
붕붕붕붕-. 방카르조차도 꼬리를 엄청나게 흔드는 모습에 김민수는 문득 소외감을 느꼈다.
"…뭔가 아쉽네요."
"응? 아쉬워?"
"네. 연구실에 가면 복실이가 반겨 주는 게 제법 좋았거든요."
소외감을 느낀 건 김민수뿐이 아니었다.
적막한 관사에서 뜨근한 복실이를 쓰다듬고 있으면 밤이 그리 길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김민수는 자신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겠다 생각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복실이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아마 연구실이 답답했나 봐요."
"뭐… 그렇네."
고작 이틀밖에 안 데리고 있었지만, 빼앗기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흐흥! 그래. 레나! 이리 나와 보렴!"
"레나?"
"세레나라고, 부제란다. 내 여동생이지."
반대로 에반젤린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싱글벙글 웃으며, 부제를 부르는 모습에서 묘한 승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들과 방카르 앞에 쭈그려 앉아서 쓰다듬는 모습에서 만족감이 느껴졌다.
김민수는 흐린 눈으로 그 광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
"…애당초 들이지 말 것을."
겨울이 다가오는 만큼 해가 짧았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뒤로 하고 관사로 돌아온 김민수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관사 의자에 앉아 멍하니 물그릇만 바라보았다.
"…연구나 하자. 이게 무슨 청승이야."
챙길 대상이 없어졌으니 잘되었다.
요 사흘 동안 개랑 노느라 연구를 못 했으니 밀린 연구를 하면 된다.
자신이 학장까지 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다 연구 덕분이다.
"...."
[탐색][탐색][확장]
'탐색 마법 후속 논문을 쓸 때도 됐으니까.'
김민수는 창문을 열고 마법을 전개했다.
10m, 100m, 1,000m…
시야가 병동까지 확장되는 와중 미묘하게 거슬리는 대상이 탐색에 잡혔다.
'은신 마법인가? 뭐지?'
김민수의 탐색 마법은 마력을 넓게 방사한 뒤 발생하는 충돌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충돌이 일반적인 대상의 절반 이하로 발생했다.
의도적인 마력의 흡수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저주!"
김민수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어둡긴 하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하현달이 보였다.
반쯤 감은 눈을 연상시키는 반달에 김민수가 그대로 창문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추적][관통][관통]
머릿속에 그려진 좌표공간으로 마법을 시전하자 흐릿한 형체가 더 옅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탁! 쿠웅-!
"에그머니나!"
촤학-! 쿠당탕! 저녁에 쓸 물을 길으러 왔는지 양동이를 들고 있던 여인이 깜짝 놀라 물을 쏟았다.
"히익! 누,눈이! 여보! 여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김민수와 눈이 마주친 여인이 남편을 부르며 도망쳤다.
'우물?'
탐색으로 확인했던 흐릿한 형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저 물 긷던 여인이 그 형체인가 생각했지만, 탐색 마법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분석][정밀탐색][탐지]
다양한 보조 마법을 중첩해 보니 미묘한 반발이 느껴졌다.
'물이 좀 이상한데?'
물의 색이 자줏빛이었다.
저주였다.
30화 우물에서 저주가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