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10. 늑대와 함께 춤을 (1)

대부분의 유저에게 있어 튜토리얼은 장식물 취급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에 기본이 되는 조작법이라든지, 시스템이라든지, 게임 방식이라든지.

튜토리얼은 게임을 처음 접하는 유저가 조금이라도 쉽게 게임에 녹아들게 하기 위한 필요 장치였다.

첫 번째 튜토리얼 퀘스트 '생존'은 게임의 조작법과 전반적인 배경을 알려 주는 것이 목적.

두 번째 퀘스트인 '도움'은 비교적 안전한 상황 속에서 전투 방식을 알려 주는 것이 그 역할이었다.

이미 첫 번째 퀘스트를 통해 전투를 익힌 입장에서야 그다지 필요 없는 튜토리얼이 되어 버렸지만 나쁠 것은 없었다.

본래 퀘스트에는 보상이 있기 마련이고, 튜토리얼인 만큼 그 난이도가 높지 않을 테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난이도가 올라갈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전방에 늑대 마수 12마리 옵니다!"

"전투 준비!"

별동대를 향해 마수들이 달려온다.

별동대는 30명이 넘는 인원으로 대략 10명씩 총 3개 조로 나뉘었다.

그중 유준상이 속한 3조는 시선을 끌어 최대한 마수를 마을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역할.

쉽게 말하자면 미끼라는 소리다.

―만신전의 신들께서 돌보아 주시니 크게 다치실 리 없지 않겠습니까. 여차하면 지난번처럼 신께서 직접 권능을 보여 주실지도 모르고요.

이번 작전의 지휘관이었던 장교가 유준상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끼라니.

귀인 대접 치고는 대우가 나쁘다 생각한 유준상이었지만 병사들이나 장교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위험을 자처하는 일임에도 너나없이 유준상과 함께하고 싶어 한 것을 보자면 말이다.

"방패를 들어 올려라! 놈들의 접근을 막아, 유인이 아니라 처리한다!"

"만신전의 신께서 우리와 함께한다! 문제없어!"

본래라면 조금 더 유인해야 하건만.

그들은 정말로 신의 가호가 함께 한다면 어떤 위험에서도 무탈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웃긴 건 정작 신앙의 대상인 우리의 수호천사님께선 병사들의 위험천만한 행보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왜 저렇게 무모하게 나서냐며 걱정합니다!]

[제발 부탁이니 그냥 본래 계획대로 도망치면 안 되겠냐고 이야기합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는 게 아닌지 불안해 죽겠다고 합니다!]

지난번 벼락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상당한 힘을 소모한 수호천사였다.

그런 만큼 한동안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능하다 했는데 그 때문인지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런 수호천사의 마음도 모른 채 마수를 상대로 근접전에 들어갔다.

"지난 전투의 복수를!"

"네놈들을 처리하고 동료들을 구하겠다!"

덤벼드는 마수들을 향해 힘껏 칼과 창을 휘두른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공격할 줄 몰랐는지 당황하는 늑대들.

허를 찌르는 병사들의 행동에 늑대들이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순 없다.

숙련병도 아니고 패잔병 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병사들을 긁어모아 꾸린 별동대다.

몰아붙이는 건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

두 배 가까운 마수들을 상대로 한계가 있다.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는데 정작 구조대에서 사상자가 나와서야 본말전도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다.

유준상은 활을 들고 늑대들을 겨냥했다.

[스킬 '무기 연마 lv. 3'이 활성화됩니다.]

[궁술 숙련도가 일시적으로 증가합니다.]

[궁술 lv. 5 → 궁술 lv. 8]

게임에서 나름 활질 했던 게 반영이 되어 숙련도 5에서부터 시작하는 궁술.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는 것부터 활시위에 걸고 겨냥하는 과정까지, 동작이 밥에 숟가락을 얹듯 자연스럽다.

유준상이 활시위를 놓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던 늑대의 목이 꿰뚫린다.

곧장 화살을 걸어 몇 발을 더 쏘아 늑대를 처리.

늑대의 거친 이빨과 진한 노린내가 코앞에서 멈추니 그제야 몇몇 병사들이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시면 방어 태세로 전환하세요. 아무리 여신님이 우릴 봐주신다곤 하지만 흥분해서 좋을 거 없습니다. 여신님도 걱정하실 거예요."

실제로 우리의 수호천사님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지.

옆에서 지휘하고 있던 조장, 던컨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부 방어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리고 천천히 하나하나 처리한다!"

그의 외침에 이내 병사들이 침착함을 되찾고 옹기종기 모여 방어진을 형성한다.

이러면 적어도 크게 다치는 일은 없다.

"제가 지켜 드릴게요!"

거기다 유준상이 걱정됐는지 일행 중 그나마 얼굴이 익숙한 라엘이 큼지막한 방패를 들고 그의 앞에 섰다.

안 그래도 따로 호위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이러면 오로지 마수들을 처리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부탁드릴게요."

"네! 최선을 다할게요!"

그가 활에 화살을 거는 것과 동시에 마수들이 달려들었다.

몇몇은 진형을 갖춘 병사들을 뛰어넘어 유준상에게 곧장 이빨을 들이밀지만 라엘의 방패에 가로막히고 만다.

여러모로 위태로워 보이지만, 뛰어난 체력으로 어떻게든 접근하는 마수들을 막아 내는 그녀였다.

라엘이 분투하는데 넋 놓고 있어서야.

유준상은 그대로 활시위를 튕겼다.

파공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늑대 몸에 화살이 박혀 들고, 병사들 중 실력 좋은 이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늑대의 목숨을 거둔다.

한 마리 한 마리.

처리될 때마다 망막 위로 올라오는 알림창.

[마수 '약탈 늑대'를 제거했습니다.]

[8 GP를 획득합니다.]

[마수 '약탈 늑대'를 제거했습니다.]

[6 GP를 획득합니다.]

비록 소량이긴 하지만 GP 또한 착실히 들어온다.

유준상의 화살과 병사들의 칼에 늑대들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더 이상의 전투는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남은 마수들이 등을 돌린다.

"보내 줄 줄 알고?"

그가 화살을 쏘아 도주하는 마수들의 뒤통수를 꿰뚫는다.

그것으로 덤벼들었던 12마리의 약탈 늑대가 전부 처리된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오! 드디어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고!"

"이게 도대체 얼마만의 승리인지!"

이제 겨우 한 번 전투를 치렀을 뿐이다.

아직 환호하긴 한참 이르건만, 어지간히도 승리가 고팠던 모양이다.

병사들은 이런저런 덕담을 주고받더니 유준상에게까지 다가와 목에 팔을 걸었다.

"형씨 활약이 대단하던데? 괜히 만신전의 신이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봐?"

"괜히 우리가 미끼조에 지원했겠냐? 아무렴! 나는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고."

"아까는 목숨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전이라면 꿈도 못 꿨을 만한 관심과 감사가 쏟아졌다.

이거 엄청 부담스럽다.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지.

아니, 익숙해질 수는 있는 건가?

그래도 뭐, 사상자가 있는 것도 아니겠다.

유준상은 그들이 마음껏 지금의 승리에 취할 수 있도록 놔두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잠시 쉬고 있자니 라엘이 다가왔다.

"역시 준상 씨 대단하세요! 지난번 싸움에서도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설마 활도 이렇게 잘 쏘실 줄 몰랐어요!"

역시나 칭찬을 아끼지 않는 라엘.

그녀는 땀에 흠뻑 젖었음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미소를 띄워 보였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참 밝은 인상의 여인이다.

보고 있자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라엘 씨가 열심히 절 지켜 준 덕분이죠. 덕분에 상처 하나 없이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헤헤.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니 감사해요. 검을 휘두르는 것보단 이렇게 방패를 들고 싸우는 게 더 나은 거 같기도 하고? 저 전투술은 젬병이지만 그래도 체력은 엄청 좋아서 버티는 건 자신 있거든요!"

확실히, 지난번에 사람들을 구할 당시에도 다들 힘들고 지친 와중에서도 혼자 팔팔했지.

몸에 근육이 많아 보이지도 않은데 체력이 좋은 게 신기하다.

혹시 심장이 두 개라거나…?

현대에서 축구를 했으면 엄청난 활동량의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무릎만은 무사하길.

"그래도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에요. 사실 저는 매우 불안했거든요."

"불안하다뇨?"

다른 인간들은 전투에 들어가기 전까지 불안은커녕 다칠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사상자가 발생할 뻔했을 정도로 신이 보우한다는 믿음은 굳건했는데?

"그게…. 저는 준상 씨와 함께하시는 신께서 아까처럼 무작정 싸우는 걸 바라진 않을 것 같았거든요."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강력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라엘 씨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 줄은 몰랐네요."

"역시 준상 씨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구나! 제가 전술이나 전략에 까막눈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조심하고 신중하게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차에 준상 씨께서 방어 태세를 갖추라 말씀하셔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이대로 몇몇 죽는 게 아닌지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유준상과 의견이 같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라엘이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기뻐할 일인가 싶지만, 십인십색이라고.

라엘만의 기뻐하는 기준이 따로 있는가 보다.

라엘은 싱글벙글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썹을 추켜세우고 말했다.

"아 맞아! 내 정신 좀 봐. 이런 잡담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라엘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의 손에 올려놓는다.

"이건 준상 씨 몫이에요."

"이게 뭐죠?"

그녀가 내게 전해 준 건 푸른빛이 감도는 투명한 돌이었다.

손톱만큼 작지만 무언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돌.

라엘이 설명했다.

"마력을 품고 있는 돌이라고 그래서 마석이라 부르는 거예요. 여러 가지 쓰임이 많아 고가에 거래되는 돌인데, 마수를 처리하면 아주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죠. 운이 좋아 이번에는 꽤 많은 마석을 얻었네요."

사람들이 승리에 취해 기뻐하고 있는 사이 마수 사체를 가지고 무엇을 하나 했더니만 채굴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장문, 설명충 콘셉트의 커뮤니티 유저가 싸지른 게시글이 떠오른다.

현대의 인간이 산소를 통해 호흡하듯 램페이지 스톰의 마수들은 마력을 통해 호흡하며, 목숨을 잃으면 그 마력이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한다.

모종의 이유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마력이 마수의 체내에 남아 결정을 이루면 그것이 마석.

나름 그럴듯해서 기억하고 있던 설정이었다.

"여기 이게 준상 씨 몫이에요."

라엘은 그의 손바닥 위로 마석 조각들을 올려놓았다.

얼핏 보기엔 많지 않지만 작은 주머니의 절반이다.

그 혼자 차지하기엔 양이 많았다.

"저 혼자 이렇게나 많이 가져도 되는 건가요? 거의 절반을 제가 가져갔는데."

"당연하죠! 사실상 마수 대부분을 처리한 게 준상 씨잖아요? 다른 아저씨들이랑 오빠들도 전부 동의했네요."

마수를 처리함으로써 GP를 획득한 그였다.

거기에 마석까지 얻다니.

부담스럽긴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는 입장에서 재화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뭘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라엘이 작게 고개를 숙이니 뒤편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됐는지 조장, 던컨이 외쳤다.

"다 쉬었으면 이제 나아갑시다. 앞으로 이렇게 몇 번을 더 유인하고 처리하길 반복해야 다른 조가 쉽게 마을로 파고들 수 있을 테니."

"빨리빨리 하자고. 동료들도 구하고. 돌아가서 우리 참모장님한테 칭찬도 좀 듣고. 남아 있는 징집 기간 동안 꿀도 좀 빨고."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준비를 한다.

무기의 정비를 끝마친 유준상과 라엘도 마찬가지로 병사들과 함께 산길을 올랐다.

머지않아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들의 하울링.

"유준상, 부탁하지."

던컨의 말에 유준상은 하울링이 들려온 곳으로 화살을 쏘았다.

늑대 한 마리가 쓰러지며 근처에 있던 늑대들이 일제히 유준상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한다.

"옵니다. 이탈을."

적당히 무리를 유인했겠다. 놈들의 영역 밖으로 빠져야 할 타이밍.

좋지 않은 공기가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건 병사들과 함께 자리에 이탈하려던 순간이었다,

"음?"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됩니다.]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감각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유준상은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전 그가 화살을 쏘았던 곳을 바라보았다.

뭐지…?

"형씨, 뭐하나? 안 빠지고."

"...."

특별한 건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한순간 느껴졌던 위험한 감각 또한 빠르게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왠지 모를 불안감뿐.

무언가 있는 건 확실한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죠."

유준상은 발걸음을 돌렸다.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심하고, 만약의 상황을 준비하는 것뿐.

그는 권총을 확인했다.

장전된 6발의 총알과 주머니의 3발.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면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유준상은 입꼬리를 올렸다.

"차고 넘치지. 아무렴."

직감이 그렇게 말해 오고 있었다.

 11. 늑대와 함께 춤을 (2)

"기르디 장교님. 또 열댓 마리에 가까운 늑대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70마리째인가?"

"예.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마수들이 모여 있는 산의 맞은편.

이번 작전의 총지휘관인 기르디는 부하의 보고를 듣고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불안이 있었는데, 기우였군. 그에게 미끼 역할을 맡기는 게 정답이었어."

유준상에게 미끼 역할을 맡기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많은 마수들을 유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돌아오는 마수들이 거의 없었는데, 사실상 유인한 마수 대부분을 처리한 유준상과 3조였다.

그의 옆에 있던 병사가 마력 통신기를 통해 들어온 사항을 보고 했다.

"3조의 조장, 던컨으로부터 보고입니다. 마수들의 유인 및 처리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 이번 건을 끝으로 장기 휴식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고생했다고 전하게.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지."

3조는 어디까지나 기동성을 중시한 미끼 부대로 백병전보단 체력이 좋고 발이 빠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원을 편제했다.

그렇기에 50마리 이상 유인하면 많이 유인하는 거다 생각했었는데, 그 이상 유인했을 뿐만 아니라 처리까지 해 주었다.

유준상의 능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인가.

어쩌면 단순히 마수들이 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발렌토로를 처리하며 마수들의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 하니 그 여파가 있는 것은 분명할 터.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중갑으로 무장한 1조와 2조의 병사들만으로도 정면 돌파를 해 봄 직했다.

단순히 무장 상태만이 좋을 뿐만 아니라 나름 한 싸움한다는 이들로 조를 구성했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공을 세우게 되겠군.'

3조의 활약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한층 더 고조된 상황이다.

지금이 기회.

아직 마수가 많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마을에서 농성하고 있는 병사들이 합류한다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

"마수들의 상태는 어떻지?"

"갑작스레 동료들이 사라져서 그런지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합니다. 정처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마수들의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기회로군."

괜히 시간을 주어 새로운 무리를 만들게 놔둘 필요는 없었다.

마수들의 조직력이 한차례 무너진 지금이야말로 동료들을 구해 낼 절호의 타이밍.

기르디가 명령했다.

"2조에게 연락을. 곧장 마을 입구에 득실거리는 마수들을 뚫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부하가 마력 통신기로 신호를 보내니, 반대편 숲속에 숨어 있던 2조의 병사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르디가 속해 있는 1조 또한 맞은편 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비록 20명이 조금 넘는 소수 병력이었지만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은 이전, 로리엔 평야에서 싸웠을 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작전은 간단하다! 마을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마수 무리를 돌파, 2조는 그대로 입구를 지키고 1조는 나와 함께 고립된 병사들을 구출해 빠져나온다! 알아들었나!"

"예!"

쉽고 간단한 작전이다.

병사들은 입을 맞춰 대답하고는 함성과 함께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돌격!"

"와아아아―!"

중무장한 23명의 인원이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오니 마수 무리가 깜짝 놀라 허둥댄다.

가로막는 늑대들을 베어 가르고 순조롭게 전진하는 병사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입구인 절벽과 절벽 사이의 좁은 틈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의 입구다! 돌파할 테니 1조는 나를 따라라! 2조는 작전대로 방어 태세를!"

"옙!"

입구를 지키고 있는 늑대들의 수가 많다.

하지만 그래 봤자 약탈 늑대들.

특별히 강한 개체가 없는 한 중갑으로 무장한 그들을 늑대들이 저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좋았어! 이대로 파고든다!"

기르디가 이끄는 1조가 그대로 절벽의 틈을 가로지른다.

저 멀리 나무 방벽에 의지해 경계하고 있던 동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출하러 왔다는 사실이 기쁜 나머지 환호하며 손을 흔드는 그들.

기르디와 병사들은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끼며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은 건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돌아가! 함정이야! 함정이라고!"

함정이라니?

자세히 보니 동료들은 환호하느라 손을 흔들고 있던 게 아니었다.

서둘러 돌아가라는 뜻에서 손을 젓고 있었다.

뒤편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으아악!"

"살려 줘!"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병사들이 허겁지겁 안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중갑까지 벗어 던지며 다급히 도망치는 병사가 외쳤다.

"기르디 장교님! 마, 마수입니다! 거대한 마수가 등장했습니다!"

도망쳐 오는 2조의 뒤편으로 사람 덩치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 늑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검은 갈기에 붉은 눈동자.

언젠가 들어서 알고 있는 마수였다.

'검은 갈기늑대'

일반 마수인 약탈 늑대와 다르게 중등급으로 열이 넘는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야 간신히 처리할 수 있는 마수였다.

한 마리라면 어떻게든 병사들과 함께 잡아 볼 텐데.

지금 이곳에는 검은 갈기늑대 말고도 수십에 달하는 약탈 늑대들이 있었다.

싸움을 거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

'어째서 이런 녀석이 이곳에….'

기르디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검은 갈기늑대가 옅게 울대를 떤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한 그였다.

―멍청한 놈들.

발렌토로가 사라져서 방심하고 있었건만.

마을에 농성하고 있던 동료들은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향해 검은 갈기늑대가 천천히 다가온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이 괴물아!"

"자, 장교님!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콰직―!

병사 하나가 그대로 검은 늑대의 이빨에 목을 잃는다.

붉은 핏줄기를 쏟아 내며 바닥에 쓰러지는 시체. 약탈 늑대들이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한다.

"미친…."

"페드로가…."

병사들은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부디 다음 차례가 자신이 아니길 간절히 비는 것뿐이었다.

* * *

맑은 달이 어둠을 밝히는 야산.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병사들이 희희낙락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까 봤나? 내 도끼를 보고 질겁하는 마수들 표정?"

"착각도 유분수지. 그거 네 도끼 보고 질겁한 게 아니라 내 화려한 칼 솜씨보고 질겁한 거다."

"허, 참. 이 친구 농담이 심하네. 어디 재롱 잔치에서나 볼 법한 검술에 마수들이 질겁하겠나? 내 도끼질 정도는 되어야 똥오줌 지리지. 아니 그런가?"

"염병 떨고 있네. 내 창 덕분인데."

너 나 할 거 없이 오후에 있었던 전투에서 자신의 활약을 자랑하기 바쁜 그들.

피곤하다고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굽히고 싶지 않아 열심히 자신의 활약상을 늘어놓는 아재들이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노라면 과연 저들이 나이 삼사십 먹은 어른들인지 의문이 들 정도.

역시.

괜히 조상님들이 남자는 아무리 나이 많이 먹어도 애새끼라는 격언을 남긴 게 아니다.

유준상 또한 별문제가 없었다면 저기 껴서 은근히 잘난 척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아직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건가?"

그가 던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던컨은 저녁 식사 이후 마력 통신기를 손에 쥐고 기르디로부터 답변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답변은커녕 수신기는 묵묵부답.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마을을 공격한다는 신호 이후로 아무런 반응이 없군."

옆에서 듣고 있던 라엘이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신 범위 밖이라거나 그런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어. 통신기는 산마루 몇 개를 넘어도 통신이 가능한 전파 범위를 가지고 있거든."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통신기를 잃어버렸거나 파괴당했거나 둘 중 하나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좋지 않다.

통신기를 잃어버렸거나 파괴당했다는 말인즉슨, 그만큼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는 말.

단순히 실수로 잃어버렸다고 보기엔 1조와 2조 모두 반응이 없는 것은 이상했다.

오후에 잠깐이지만 느껴졌던 위기감이 떠올랐다.

한차례 식은땀이 흘렀던 그 느낌.

좋지 않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라엘, 지도 있나요?"

"지도요? 있긴 한데…. 잠시만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커다란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오는 라엘.

지도를 펼쳐 일대의 지형을 유심히 보고 있자니 라엘도 던컨도 의문을 품는다.

"갑자기 지도는 왜 보는 거지?"

"무언가 발견하셨나요?"

"그냥 마수 입장에서 조금 생각해 보려고요."

유준상의 말에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마수 입장에서 생각한다니요…?"

"발렌토로가 엄청 똑똑했다면서요, 놈이 쓰는 전략과 전술에 악덕 공자는 번번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발렌토로는 이미 네 손에 처리되지 않았나."

"똑똑한 마수가 발렌토로뿐일 것이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로리엔 평야에서 전투가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폐마을에 진을 치고 농성해 살아남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기사나 마술사도 아닌 일반 병사들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살려 놨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멍청한 약탈 늑대들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으니 뛰어난 개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오후에 느껴졌던 위기감은 그 개체가 보낸 살기.

지도를 보던 라엘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이야기했다.

"다시 보니 마을이 완전히 절벽에 둘러싸여 있네요. 그만큼 방어하기도 좋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입구가 막혔을 시 탈출하기도 힘들어요."

"유인당한다면 그대로 고립되겠군."

"아무리 좁은 입구를 끼고 농성한다고 한들 200마리가 넘는 약탈 늑대들이 병사들을 뚫어 내지 못할 리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살려 놓은 것이겠죠."

"그렇다는 말은 비상식량인가요…?"

"나라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쓸 것 같군."

두 사람의 말에 유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기르디 장교와 1조, 2조 병사들은 놈의 계략에 넘어가 마을에 고립되었다고 봐야겠죠."

"그 과정에서 격렬한 싸움이 있어 통신기를 분실했고 말이지."

던컨이 눈을 찌푸리고 라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럼…. 사람들이 전부 저 자그마한 마을에 갇혀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건가요?"

"아마 적당히 배고프다 싶으면 한 명씩 잡아먹지 않을까 싶네요."

"동료들이 먹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니, 끔찍하군."

"그래도 다 같이 합심해서 마수들과 싸우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살아남을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어 봤자 죽을 뿐이잖아요."

"개죽음이라 생각될 정도로 강한 개체가 있는 걸 거예요. 못해도 발렌토로 정도는 되는 마수겠죠."

미간을 좁히는 두 사람.

상황이 좋지 않다.

만약 정말로 1조와 2조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마을에 고립되었다면, 우리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서둘러 아라드 작전 참모장님께 지원을 요청하죠! 어떻게 기사님을 모셔 온다면 괜찮을 거예요! 아니라면 일단 후퇴하고 병력을 다시 꾸려서 오는 것이…."

정론을 펼치는 라엘.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더 이상 낚을 만한 인간이 없다고 판단한 마수들이 병사들을 살려 둘 리 만무했다.

미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 병사들은 그대로 마수들의 식량이 되겠지.

병사들을 살리고 싶다면 지금 이 병력으로 무슨 수를 쓰든지 해야 했다.

"우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정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는데."

"절벽 높이가 높이라 절벽을 통해 사람들을 구출한다는 건 말도 안 될 거 같고요…."

머리를 쥐어짜 내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는 둘.

후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결국 그들의 입에서 후퇴라는 말이 나오려는 찰나, 유준상이 말했다.

"조금 무리하긴 해야겠지만,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호기심에 눈을 반짝 빛냈다.

"무엇이죠…?"

"궁금하군."

원래 이런 건 단순하게 생각할수록 좋다.

"오늘했던 것처럼 유인하고 처리하는 방법으로 남아 있는 200여 마리의 약탈 늑대를 전부 처리하는 겁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벙찐다.

"오늘 해치운 마수의 3배를 더 처리하자고요…?"

"예. 그러면 입구를 지키고 있을 예의 마수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약탈 늑대들이 전부 죽기 전에 우리를 처리하러 움직이거나, 아니면 전부 처리되더라도 입구를 지키고 있거나."

잠시 생각하던 던컨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마수들의 수를 줄일 수만 있다면 뭐가 되었든 기회가 생기겠지. 병력이 줄어들면 마을 내부에서도 움직일 여지가 생길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꼼짝도 못 할 정도로 강력한 마수일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런 마수가 나서서 저희를 추격하면 저희가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요?"

타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유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위험해지는 건 그 마수일 거예요."

"네?"

"...?"

의문을 표하는 라엘.

던컨 또한 의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나 유준상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제가 처리할 거거든요."

 12. 늑대와 함께 춤을 (3)

"제기랄…."

"우리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절벽에 둘러싸인 폐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마수들을 보며 인간들이 침울한 말을 내뱉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료들이 자신들을 구해 주러 온다는 사실에 기대를 품던 인간들이다.

하나 구출하러 온 인간들은 그대로 폐마을에 같이 고립되었고, 몇몇이 한밤중에 탈출을 시도하다 갈기갈기 찢긴 탓에 그들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검은 갈기늑대는 조용히 바닥에 웅크려 앉아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음미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째서 발렌토로가 그렇게도 인간들을 골려 주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잘난 듯이 덤벼들다가도 이렇게 쭈그려서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자면 목말랐던 가학심이 해소되는 느낌이었으니.

"크르르―!"

"흐, 흐어억―!"

이렇게 살짝 이빨을 보이고 몸을 꿈틀거리기만 해도 나자빠지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다.

그때, 약탈 늑대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녀석은 눈짓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는 늑대 무리를 가리켰다.

늑대 무리는 침을 질질 흘리며 인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젯밤 도망친 인간들의 시체를 포상으로 던져 주었는데, 그것만으로는 허기가 충족되지 않은 모양이다.

몇몇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인간들에게 다가간다.

검은 갈기늑대는 크게 짖어 그런 늑대들을 뒤로 물렸다.

"크허헝―!"

대장의 호통에 늑대들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난다.

눈앞에 먹을 게 있다고 바로 먹어서야.

저 인간들은 또 다른 인간들을 낚는 미끼다.

미끼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게 아니라면 정말로 배고플 때만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마수와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으니.

그래도 한두 마리 정도야 괜찮겠지.

검은 갈기늑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움직임에 인간들이 화들짝 놀라지만 뭐 어쩌라고.

여기 인간들 중 검은 갈기늑대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히익!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아, 안돼! 왜 하필 나인데…!"

열심히 날붙이를 휘둘러 보지만, 그의 두꺼운 피부에 파고들긴 부족하다.

그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고작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두 마리의 인간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아우우우―

고깃덩이를 늑대들에게 던져 주었다.

늑대들은 기쁨의 하울링을 내며 시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검은 갈기늑대도 시체를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역시, 인간보다 맛 좋은 고기는 없다.

마수 고기는 질기기만 하고 들짐승은 역하다.

듣기론 마력을 품은 인간이 유독 그 맛이 좋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먹어 본 적이 없는 검은 갈기늑대였다.

그저 맛만 보려고 먹었을 뿐인데, 한번 먹었더니 또 먹고 싶어진다.

괜히 먹었나 싶은 찰나,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잉―

저 멀리서 날아온 화살 한 대.

근처에 있던 약탈 늑대 한 마리가 그대로 목숨을 달리했다.

고개를 돌린 곳, 반대편 산 중턱에서 인간 하나가 활을 겨누고 있었다.

어제부터 계속해 치고 빠지며 아이들을 처리하는 인간 무리.

이번에도 한 무리 늑대들이 인간들을 추격하기 위해 달려 나간다.

검은 갈기늑대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죽을 게 뻔하지만 입이 줄어서 나쁠 거 없다.

아직 늑대들의 수는 많았고, 먹이는 부족했으니.

남은 인간들은 기껏해야 열댓 명이다. 놈들이 늑대들을 처리해 봐야 얼마나 더 처리하겠는가?

하지만 검은 갈기늑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

반나절이 지난 시점.

인간들은 여전히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제보다 더욱 바쁘게 움직여 고작 반나절 만에 어제와 비슷한 숫자의 늑대들을 처리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악착같고 집요할 줄이야.

지난번처럼 마을 안쪽으로 유인하기 위해 마을 앞의 늑대들을 물리기도 했지만, 인간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화살만을 쏘아 댔고, 추격한다 싶으면 그대로 도주한다.

영악한 놈들.

검은 갈기늑대는 위기를 직감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을 제외한 전부 전멸할지도 모른다.

서둘러 저 인간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서야 입구가 비어 버리고 만다. 모아 놓은 식량들이 그대로 도망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갈등하는 찰나, 검은 갈기늑대는 활을 쏘는 궁병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 눈동자.

그 눈동자에 푸른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저 기운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검은 갈기늑대였다.

마력.

그 순간, 검은 갈기늑대는 인간 고기 맛이 떠올랐다.

다른 고기와는 차원이 다른 풍미 넘치는 맛.

그런데 마력까지 품고 있다면 더 맛있다고 했던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목청껏 울었다.

아우우우―

입구를 지킬 최소한의 늑대들만을 놔두고 검은 갈기늑대는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곧장 추격을 명령하는 그.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인간들을 향해 달려 나간다.

검은 갈기늑대는 잠깐 마을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곧 달려 나가는 약탈 늑대들의 뒤를 따랐다.

모아 둔 식량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식가이기보단 미식가이기를 택한 검은 갈기 늑대였다

* * *

"빌어먹을. 지금까지도 겁나게 힘들었는데, 몇 배나 많은 마수를 상대하라고? 형씨, 이거 맞아?"

병사들이 겁에 질린 채 유준상을 바라본다.

마을 입구에서 마흔이 넘는 마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렇게나 많은 마수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그들이었다.

지금까지 싸워 온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어쩌겠는가.

맞고 자시고 이미 저질러진 일인데.

"어제는 늑대들이 아저씨 도끼 보고 겁에 질렸었다면서요. 이번에도 겁에 질리게 만들면 되죠."

"아니, 이 양반아. 그건 그냥 자랑하려고 그런거고…."

"만신전의 신들께서 저희를 도울 겁니다. 별일 없을 거예요."

"음,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많아서야 조금 힘들지 않겠나? 뭔가 증표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증표라 함은 지난번 악덕 공자를 혼내 주었을 때처럼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린다든지 벼락이 떨어진다든지와 같은 것.

가능하려나?

유준상은 혹시 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벼락은커녕 빛줄기도 내려오지 않았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분간은 힘을 쓰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지난번엔 갑자기 머리에 피가 몰린 탓에 너무 무리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상 힘을 발휘하면 이 세상에 대한 접근 권한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듯한 맹인의 수호천사였다.

하나 문제 될 건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한 비장의 주문을 익혀 두고 있었으니.

"조금 전 만신전의 여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도망치라고? 여기서 싸우면 죽는다고 말씀하시지?"

모두가 유준상을 바라보았다.

라엘과 던컨 또한 그를 빤히 쳐다본다.

여신이 무어라 말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저기 저 거대 늑대의 피가 정력과 탈모에 매우 좋다고 말씀하시는군요."

"...?"

"!?"

"!!"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자신이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냐며 소리 지릅니다!]

곧 있으면 전투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의를 상실한 채로 싸워서야.

전의를 고취할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는가.

실제로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열의가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본래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불이 붙었을 때 기름을 부어야 하는 법이다.

유준상은 쐐기를 박기 위해 말을 더했다.

"하루 세 번."

꿀꺽―

"아침, 점심, 저녁."

꼴깍―

"사랑한다면."

말을 뱉을 때마다 들려오는 침 넘기는 소리.

유준상의 말에 라엘의 얼굴이 시뻘게지고 던컨은 어처구니없어하며 유준상을 쳐다본다.

얼굴이 시뻘게질 이유가 어디 있고, 어처구니없어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약의 복용은 어디까지나 하루 세 번이 기본이다. 탈모약과 정력증강제도 마찬가지.

절대 다른 의미는 없다.

물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건 각자 다르겠지만.

"10년 전 잃었던 머리카락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이지…."

"이번에 팔롱드가에서 돈 좀 땡기면 넷째, 다섯째 우윳값 정도는 충분히…."

차갑게 식어 가던 열의가 완전히 타올랐다.

병사들의 눈동자뿐만 아니라 무기를 쥔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병사 중 누구보다 빛나는 두피를 가진 중년이 소리쳤다.

"10마리! 아니 20마리를 잡겠네! 그러니 저 거대 늑대의 피의 2할, 아니 3할을 내게 넘겨 주게!"

그것을 시작으로 병사들은 각자의 요구 사항을 외쳐 댔다.

"나는 30마리를 잡지, 그러니 내게도 3할을!"

"내 창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진짜로 이게 먹혀들지 몰랐는지 던컨이 헛웃음을 흘리고, 라엘은 진지하게 정말로 효과가 있냐고 묻는다.

유준상은 답하지 않았다.

이런 건 상상에 맡기는 게 최고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설마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전의를 끌어올릴 줄 몰랐다며 황당해합니다.]

[자신의 사도는 진지하고 건실할 줄 알았기에 충격이라고 말합니다.]

충격까지야.

머릿수가 몇 배 많은 병력을 상대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다.

무엇을 가리겠는가.

허무맹랑하고 황당한 거짓말이라도 효과만 있으면 그만이다.

적어도 살아남는다는 것에 있어선 누구보다 진지하고 건실했다.

회사원으로서 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 있으면 따라잡힙니다. 신호에 맞춰 준비해 둔 작전을!"

"네!"

"맡겨 주게!"

유준상은 속력을 늦추어 도망치는 무리의 말미까지 내려갔다.

최대한 꼬리를 흔들어 볼 셈.

속력을 줄였다 높였다 반복하니 자신을 도발한다는 것을 깨달은 늑대들이 악착같이 유준상을 노린다.

체력 소모가 좀 크긴 하지만, 이것으로 그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오르막길을 지나 나무들이 우거진 평탄한 장소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그가 외쳤다.

"여러분 지금!"

그 말에 모두가 일제히 다리를 멈추고는 자신의 무기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내려찍은 줄 알았겠지만 아니었다.

싹둑―!

들려오는 절삭음.

그들이 바닥을 내려찍은 이유는 흙더미에 숨겨져 있던 밧줄을 자르기 위함이었다.

밧줄이 끊어지자 함정을 가리고 있던 발판이 주저앉았다.

유준상에 시선이 팔렸던 늑대들이 제때 반응하지 못해 그대로 바닥 함정에 빠졌다.

"좋았어!"

"나이스!"

시작이 좋다.

급조한 탓에 깊이가 깊지 않고 딱히 살상력 있는 함정은 아니었지만, 무려 스무 마리가 넘는 늑대들이 무력화됐다.

놈들이 함정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다른 놈들을 처리한다면 장기전으로 간다고 해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물론, 유준상은 장기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지만.

"라엘, 던컨!"

"넵!"

"말하지 않아도 갈 참이었다."

병사들이 함정 양옆으로 달려가 측면의 늑대들을 마크하고, 라엘과 던컨이 거대 늑대가 있는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한순간 두 사람에게 시선이 팔리는 늑대들.

지금이 기회였다.

유준상은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목표는 검은 갈기를 지닌 거대 늑대.

유준상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자세를 취했다.

두 발은 11자로 비스듬하게, 총을 쥐고 있는 팔을 쭉 뻗어 거총하고 조준.

방아쇠를 당긴 것은 거대 늑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타앙―!

경쾌한 총성과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

 13. 늑대와 함께 춤을 (4)

언젠가 게임 속 거대 괴물과 사투를 벌이던 도중 문득 들었던 생각이 있다.

어째서 게임사가 지정해 놓은 약점을 때려야만 유의미한 데미지가 들어가는 것인가?

아무리 강력한 개체라 한들, 몸통 내부나 안구와 같은 부분은 취약하지 않은 것인가?

단순히 코드 몇 줄을 그래픽으로 포장한 게임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냐 할 수 있지만, 개발자의 부모를 찾게 만드는 사악한 난이도에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노라면 이런 얄팍한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법이다.

어차피 물어뜯겨 죽을 거 그냥 폭탄을 가득 안고 입에서 터지면 좋을 텐데.

저 거대하고 초롱초롱한 눈을 우선 공략한다면 괴물에게 쫓기는 일 따윈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곤 했던 유준상이었다.

그렇다면 현실이 된 지금은 어떨까.

저 똘망똘망한 눈에 총알이 들이박혔을 때 늑대는 고통 어린 비명을 솟아 올릴까? 아니면 피부에 박히는 것과 같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일까.

답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장면이 그 답이었으니.

타앙―!

리볼버에서 터져 나온 총성.

불꽃과 함께 그 총성은 일대에 울려 퍼졌다.

그 뒤를 뒤따른 건 병사들의 함성도, 약탈 늑대들의 하울링도 아니었다.

거대 늑대의 비명.

"끼에에에에―!"

거대 늑대는 비명을 지르다 못해 고통에 온몸을 비틀며 울부짖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침을 질질 흘리고, 총을 맞지 않은 반대쪽 눈에선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불쌍해 살살 쏠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물을 쏟는 모습이 실로 가엽기 그지없지만, 마수는 마수.

검은 갈기늑대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음에도 유준상을 경계했다.

이런저런 측은함이 들지만, 마수를 상대로 봐줄 생각 없는 유준상이었다.

그는 재차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조준했다.

위기를 감지했는지 검은 갈기늑대는 그대로 땅을 박차 촘촘한 나무 기둥 사이로 몸을 옮겼다.

"쉽게 죽어 주진 않겠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이 이상 고통 없이 보내 주려 했는데.

사서 고생하는 녀석이다.

유준상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남은 총알은 8발.

최대한 아껴 쓰려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타이밍에 사용해야 했다.

맞추는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위력을 생각한다면, 원거리보다는 지근거리.

몸통보다는 머리.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총알만을 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준상의 특기 중 하나.

"커헝!"

검은 갈기늑대가 나무 사이를 헤집고 튀어나왔다.

날아드는 손톱.

유준상은 가볍게 몸을 뒤로 놀려 피해 냈다.

초심자의 행운이 터진 걸까.

강철 같은 놈의 발톱이 나무를 베어 가르자, 나무 기둥은 그대로 무너져 싸우고 있던 늑대들을 깔아뭉갰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나무가…?"

"뭐긴 뭐야! 여신님의 은총이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운이 좋다.

덕분에 병사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다.

어쩌면 검은 갈기늑대를 처리하는 것보다 그들이 약탈 늑대를 처리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야, 체면이 안 살지."

작전의 개요는 빠르게 거대 늑대를 처리해 약탈 늑대의 이탈을 꾀하는 것.

한데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동료들에게 부담을 늘려서야.

회사 다닐 때도 지금도 남에게 부담 주는 건 사양이다.

유준상은 권총을 들어 올렸다.

쏠 생각은 없다.

그저 검은 갈기늑대를 움직이게 하고자 하는 제스처.

의도대로 검은 갈기늑대는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번 나무 사이로 숨어들었다.

"나름 영리하긴 하다만…."

텅 빈 평지라면 모를까.

이렇게 나무가 촘촘하게 있는 곳 자체가 녀석에게 불리하다.

나무를 방패막이 삼아 총알을 막아 낼 수 있다 해도, 운신이 한정되니까.

도망친다면 곤란했을 텐데, 여러모로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늑대였다.

휘이익―

또 한 번 나무 기둥 사이로 검은 갈기늑대가 튀어나왔다.

늑대의 발톱이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을 스쳐 지나간다.

한쪽 눈만으로는 거리 감각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발톱의 깊이가 얕다.

나름대로 거리를 조절해 보려 하지만 발톱은 번번이 허공만을 가른다.

그렇다고 계속해 공세를 하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유준상은 검은 갈기늑대와 마찬가지로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녀석의 다리 관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탕, 탕―!

완전히 기동력을 없앨 작정이었는데, 꼴에 마수라고 놈은 쩔뚝거리면서도 추격한다.

이것으로 녀석에게 남은 선택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약탈 늑대들을 미끼로 지금이라도 도망치던가, 아니면 그가 실수하길 바라며 한 방 먹일 기회만을 노리거나.

검은 갈기늑대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굳이 내 손에 죽고 싶다 이거지?"

유준상은 나무 사이를 돌아 약탈 늑대들과 병사들이 전투 중인 곳에 돌아왔다.

거대한 나무 기둥이 쓰러져 있는 그곳.

유준상은 그 앞에서 멈추어 섰다.

"...?!"

검은 갈기늑대는 당황했다.

그가 다리를 멈춘 의중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던 것이다.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함정이라고 여기기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어쩌면 단순히 지쳤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지쳤기에, 자신을 지켜 줄 동료가 있는 곳까지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회가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을 끝마친 검은 갈기늑대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인간을 맛볼 생각에 한쪽 눈이 끔찍이 아프다는 것도, 거리 감각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검은 갈기늑대는 유준상을 향해 달려갔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

이윽고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갈기늑대는 유준상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발톱을 내질렀다.

유준상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그 순간.

"그럴 줄 알았지."

유준상이 한순간 땅을 밀어 옆으로 움직였다.

발톱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를 스쳐 뒤에 있던 커다란 나무 기둥에 박혀 들었다.

대처하기 위해 손톱을 재차 휘두르려 해 보지만, 발톱이 그대로 나무 기둥에 박혀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다.

발톱이 나무 기둥 깊숙이 파고든 탓.

늑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인간이 움직인 방향이 자신이 앞발을 뻗은 방향이다.

바로 옆에 먹음직스러운 인간이 있거늘.

다시 앞발을 뻗으면 닿을 것 같거늘.

아무리 발톱을 빼려 해 봐도 빠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인간을 맛보고자, 한 입이라도 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 몸을 최대한 기울여 입을 열어 보지만, 늑대의 이빨은 허공만을 베어 물뿐이었다.

유준상은 조용히 손에 쥔 권총을 치켜들었다.

"때마침 이것도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연신 허공을 베어 무는 검은 갈기늑대를 향해 유준상은 조금씩 다가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 뼘만 더 다가오면 검은 갈기늑대의 이빨이 유준상을 베어 물 수 있는 거리.

그러나 크게 입을 벌린 순간, 검은 갈기늑대의 바람은 산산이 조각났다.

타앙―!

총성과 함께 날아든 총알.

그 총알은 늑대의 입을 꿰뚫고 두개골을 빠져나왔다.

그것으로 검은 갈기늑대의 커다란 몸이 힘없이 쓰러진다.

머리와 눈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을 축축이 적신다.

"봐봐. 내 생각이 맞잖아?"

게임사 놈들.

역시 입 안에 쏘는 게 확실하다.

유준상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에 흡족히 웃었다.

* * *

[마수 '검은 갈기늑대'를 제거하였습니다.]

[50 GP를 획득했습니다.]

[두 번째 튜토리얼에서 이벤트 마수를 처리했습니다.]

[히든 업적 '무모함을 과감함으로'를 달성.]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검은 갈기늑대를 처리하기 무섭게 망막 위로 떠오르는 알림창.

검은 갈기늑대를 제거했다는 알림창뿐만 아니라 히든 업적을 달성했다는 알림창도 함께 떠올랐다.

보고 있자면 신기한 기분이다.

히든 업적이 왜 히든이겠는가.

숨겨져 있기에, 달성하기 어렵기에 히든인 것이다.

어려워야 정상인데.

어디까지나 까다로웠을 뿐 히든 치고는 충분히 할 만했다.

'무모함을 과감함으로'라는 업적명을 보자면, 첫 번째 튜토리얼의 발렌토로처럼 싸우지 말고 도망쳐야 했던 마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아무리 튜토리얼이라고는 하지만 10명으로 이렇게나 많은 마수와 싸우는 게 가당키나 하냐며 한 소리 합니다.]

[이렇게 무모한 짓만 골라 해서야 나중에 '광전사' 클래스가 뜨는 것 아닐지 진지하게 우려된다 합니다.]

설마 그럴 리가.

발렌토로 때도 이번 검은 갈기늑대 때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가능성을 검토한 뒤 덤벼든 것이다.

단지, 그 상황이 조금 하드했을 뿐이지.

광기에 몸을 맡겨 싸우는 광전사 클래스를 선택해야 하는 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음…. 오지 않겠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불안감이 들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확인해야 할 것은 남아 있는 마수들의 처리.

검은 갈기늑대가 쓰러지자 대부분 도주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마수들이 있었다.

본래 위기란 방심하는 순간 들이닥치는 법.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램페이지 스톰인 만큼 안일하게 갈 생각은 없었다.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니, 주의를."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활을 들고 마수들을 요격했다.

다들 지쳐 있던 터라 제대로 늑대들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했는데, 몇몇은 아예 검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힘을 쓴 상태였다.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크게 다치는 사람이 나왔을 테지.

나서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유준상은 연신 활을 튕겼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늑대가 그의 화살에 쓰러지자 병사들이 무기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진짜 뒈질 것 같네. 오늘 하루 나 혼자 처리한 마수만 스물이야. 이 정도면 나도 기사 수련생 될 수 있는 거 아니냐?"

"좀 조용히. 말할 힘도 없다."

"씨부레! 이제 끝난 거 맞지? 응? 던컨, 제발 끝났다고 말해 줘."

"조용히 하라니까…."

잠시 후. 조장인 던컨이 일대를 확인하고 더 이상 늑대가 남아 있지 않다 선언하는 것으로 모두가 안도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 끝났다!"

"해방이다!"

"빌어먹을! 로리엔 전투 때보다 더 힘들어!"

병사들은 무지막지한 피로감에 욕지거리해 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룩해 낸 광경을 보고 히죽 웃는데, 아무래도 저녁이 되면 또다시 자랑 파티가 열리지 않을까 싶다.

"고생하셨어요. 준상 씨!"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자니 라엘이 유준상에게 다가왔다.

반나절 내내 전투를 치른 탓에 꼴이 말이 아님에도 힘차게 웃어 보이는 라엘.

다들 뻗었는데.

진짜 체력 하나만은 대단하다.

"라엘 씨도 고생하셨어요. 던컨 조장과 함께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작전대로 거대 늑대를 처리할 수 있었네요."

"헤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뭘. 그나저나 안 힘드시나요? 생각보다 괜찮으시네? 다들 힘들어 난린데."

라엘이 바닥에 대자로 뻗은 아재들을 가리켰다.

몇몇은 아예 갑옷까지 벗어 던진 채 코까지 골고 있었다.

"저는 괜찮네요. 그러는 라엘도 좋아 보여 다행이에요."

"아하. 저야 뭐, 체력 말고는 딱히 장기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조금 아쉽네요."

"아쉽다뇨? 뭐가 말이죠?"

"저 실은 아주 조금이지만 연금술도 할 줄 알거든요. 활력 포션을 만들어 놓은 게 있어서 힘드시면 조금 드릴까 했었는데…."

연금술이라.

체력도 좋은 데다 포션 제조까지.

라엘은 생각보다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닐까?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어디까지나 저기 저 널브러진 아재들과 비교했을 때 괜찮은 거지, 피곤하고 힘든 건 매한가지였으니.

"주신다면 흔쾌히 받겠습니다. 실은 이 세상… 아니, 그라시아 제국에 와서 포션을 마시는 건 처음이거든요. 조금 호기심이 생기네요."

"아! 그렇구나! 그럼 제 포션이 처음이라는 말이죠?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최고로 좋은 거로 드릴게요. 잠시만요."

라엘은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배낭에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더니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포션을 꺼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포션은 형광색에 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포션이었다.

마치 연둣빛을 발하는 게, 방사능…?

이거 마실 수 있는 거 맞나?

"한 모금 쭉 들이켜시면 좋아질 거예요. 효과는 확실해요!"

확실하다 하는 것을 보면 임상 실험도 여러 번 거친 모양이다.

초보자의 직감이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자면 괜찮은 거겠지.

적어도 암살은 아닌 셈.

하지만 던컨이 라엘의 포션을 보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다른 아재들 또한 질겁하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역시, 먹을 것이 못 되나.

이거 많이 불안한데.

"어서 드셔 보세요. 사양하실 거 없어요! 재료만 생기면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 굳이 배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시면 분명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인데, 차마 라엘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여러 가지로 곤란하다.

괜히 마신다고 한 것 같아 후회가 인 순간, 누워 있던 아재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잠깐? 활력? 활력 하면… 정력? 탈모?"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 쓰러진 검은 갈기늑대로 향했다.

 14. 늑대와 함께 춤을 (5)

머리가 그 누구보다도 반짝였던 아재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눈빛은 가히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승냥이와도 같았는데, 그 눈빛에 걸맞은 움직임으로 검은 갈기늑대를 향해 달려간다.

늑대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수통에 담는 그.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미하일 저, 저, 저 양반!"

"빨리, 빨리! 빨리 우리도 가자고! 저 양반 욕심이 얼마나 그득한데, 저 좋은 걸 혼자 다 차지할지도 몰라!"

유준상과 라엘 그리고 던컨을 뺀 일곱 명이 우르를 몰려가니 그 모습이 어미젖 달라는 새끼 강아지 꼴이다.

물론, 실상은 퀴퀴한 땀 냄새를 풍기는 아재들이었지만.

"다들 방해하지 마! 난 분명히 사냥 전에 말했어, 3할은 내 지분이라고!"

"이 양반아, 그렇게 욕심부리니까 자네가 그 나이에 벌써 대머리 된 거야!"

"머리 있으나 없으나 차이도 없으시면서 뭐 그리 욕심을 부리십니까?"

사람들은 각자 수통을 꺼내 들고 늑대의 몸에 상처를 내 피를 받았다.

사람들의 얼굴엔 기대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탈모와 정력은 남자들의 핫한 관심사이니 당연할 수밖에.

하지만 모두가 그들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라엘과 던컨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마수의 피엔 기본적으로 독이 포함되어 있는데…."

"말려야 한다. 저 인간들 저거 마시고 그대로 쓰러지면 괜히 일만 더 만들 뿐이야."

두 사람은 황급히 다가가 사람들을 만류했다.

마수의 피에 독성이 있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상식.

두 사람의 말에 몇몇 이들이 정신을 차렸지만, 대머리 아재, 미하일의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만신전의 신께서 거짓말할 리가 없지 않나! 분명 효력이 있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거겠지! 아니면, 던컨, 혹시 자네 혼자 독차지하려고 그러는 건가!"

독차지라니?

풍성한 머리카락과 넘치는 체력을 가진 던컨이다. 탈모약이니 정력제니 그런 게 필요할까.

던컨은 유준상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만신전의 신은 거짓말하지 않지만, 그 뜻을 전하는 사도는 언제든 거짓말할 수 있는 법이다.

던컨은 로리엔 평원에서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인 유준상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맞는지 고민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은인에 대한 명예와 동료의 안전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린양을 딱하게 여깁니다.]

[유준상에게 서둘러 이실직고해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수호천사가 서둘러 거짓말임을 실토하라 이야기하지만, 유준상은 그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에이, 설마 진짜로 마시려고.

척 봐도 푸르스름한 게 마시면 드러누울 것 같은 색깔이다.

그리고 마수의 피에 독성이 들어 있다는 건 이 세계의 상식 중의 상식.

이 세계에서 아직 한 달도 살지 않은 유준상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몇몇은 라엘과 던컨의 만류에 정신을 차렸고, 마하일 아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잠깐! 미하일 아저씨! 마시면 안 된다니까요!"

"웃기지 마! 이게… 이게 내 마지막 희망이란 말이야!"

머리카락을 향한 집념 앞에선 이성과 합리 따윈 미사일 앞의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꿀꺽― 꿀꺽―

미하일 아재는 그대로 수통에 담긴 늑대의 피를 들이마셨다.

거침없는 원샷이었다.

"아이고, 저 양반, 드디어 미쳤구만!"

"저러다 큰일 나려고!"

사람들이 미하일 아재의 행동에 혀를 차고, 라엘과 던컨은 한숨을 쉬었다.

유준상조차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바라본다.

저러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늑대의 피에 곧장 쓰러질 줄 알았던 미하일은 멀쩡했다.

오히려 안색이 좋아지고 살짝 굽었던 등이 꼿꼿이 펴지는 게 누가 봐도 체력이 회복되고 있었다.

"오오…! 이 힘은…!"

몸에서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지 주먹을 강하게 그러쥐는 미하엘.

팔뚝과 손등에서 그 악력을 대변하듯 핏줄이 솟아올랐다.

그 반응을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야? 왜 저래?"

"쓰러져야 정상 아니야? 나는 당연히 들쳐 업고 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재요. 그거 뭐입니까?"

대머리에 반사된 빛이 눈이 부시다.

"뭐긴 뭐냐. 보고도 모르는 거냐."

미하일은 자신의 도끼를 들고 힘껏 나무를 내려찍었다. 평소라면 반도 박히지 않았을 도끼날은 깊숙이 나무에 들이박혔다.

그걸 본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뭐야, 진짜로 효과가 있는 거였어?"

"마수의 피에 독 들어 있다면서. 이건 예외인 건가."

"그럼 진짜로 정력과 탈모에…."

활력을 전해 주는 건 사실인 것 같지만, 탈모에까지 효과가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거늘.

"역시, 만신전의 신들이 거짓말할 리 없지! 나도 마신다!"

병사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자신이 받아 놨던 늑대의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곧이어 미하일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몸에서 힘이 느껴진다!"

"이거라면 마수 몇 마리를 더 상대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후대 걱정은 문제없겠군!"

어찌나 기운이 넘치는지 힘을 주체하지 못해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까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유준상과 던컨이 당황했다.

하지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는 라엘.

그녀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곧이어 알 수 있었다.

픽―

효과음 그대로, 누구보다 빠르게 늑대의 피를 마셨던 미하일 아재가 바닥에 쓰러진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진다.

픽, 픽, 픽, 픽―

사방에서 들려오는 '픽' 소리.

조금 전 넘치던 힘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이 신음을 흘린다.

"갑자기 몸이…."

"몸이 뜨거워. 타들어 가는 거 같아…."

"세상이 핑핑 돈다…."

서둘러 다가가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모두 하나 같이 고열과 마비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자신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한탄합니다.]

[세상에 개입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척 봐도 위험해 보이는 마수의 피를 진짜로 마실 줄 몰랐지.

아무리 위기가 방심할 때 찾아오는 법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쓰러질 줄 몰랐다.

상태를 확인하던 라엘이 말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네? 다행이라뇨?"

다들 쓰러져 버린 상황인데 다행이라니.

라엘이 안도하며 이야기했다.

"준상 씨가 아직 포션을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사실 이 포션엔 해독 효과도 있어서 이 정도의 독이라면 충분히 중화시킬 수 있을 것 같네요."

아, 그렇구나.

꽤 고성능 포션인 모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저렇게 두려움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인가. 치료해 준다는데.

반대로 라엘은 한없이 즐거워 보인다.

"그런데 7명 전부 마시기엔 양이 부족하지 않나요?"

"어쩔 수 없이 물에 희석시켜야죠. 효과는 조금 떨어지겠지만 일단 응급처치는 될 거예요."

라엘은 자신의 수통에 형광빛 포션을 조금 붓고는 열심히 흔들었다.

수통을 들고 미하일에게 다가가니 미하일이 식겁한다.

"아, 안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아저씨도 참. 그러기에 누가 그렇게 욕심부리라고 그랬나요. 제가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네 포션이 더 위험, 흐읍―!"

라엘은 두피가 비단결 같은 미하일의 입에 수통을 들이부었다.

목을 넘기기 무섭게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정신을 잃는 그.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벌벌 떤다.

"던컨, 저거 괜찮은 거 맞나. 각혈까지 하는데."

"네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가."

"...."

때마침 근처에 개울이 있겠다.

라엘은 계속해 물을 떠 사람들의 입에 희석된 포션을 부어 넣었다.

어찌 된 게 라엘의 포션을 마신 7명 중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각혈하며 정신을 잃는다.

각혈하고 기절하는 이유가 치료되는 과정인 줄 알았는데, 저 포션의 끔찍한 맛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는 유준상이었다.

"준상 씨 죄송해요. 다음에는 더 좋은 포션을 드리도록 할게요."

"아뇨. 괜찮아요. 진짜로 괜찮습니다."

그는 미하일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만약 그가 늑대의 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라엘의 포션을 마시는 건 자신이 되었을 테니까.

기절한 그의 머리에서 빛이 나는 건, 매끈한 두피 때문이 아니라 분명 그 훌륭한 희생정신 때문일 것이다.

구사일생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차, 느닷없이 알림창이 떠올랐다.

띵동―!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다섯 명 이상의 아군을 중독 상태에 빠뜨렸습니다.]

[일반 업적 '독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법'을 달성.]

[클래스 '연금술사'와 '암살자' 획득 조건(1/2)을 충족시켰습니다.]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매우.

* * *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저희는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병영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번 구조대 대장인 기르디와 병사들이 유준상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유준상이 검은 갈기늑대를 유인한 덕에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그들이었는데, 그들의 상태는 독에 중독된 사람들보다 더 좋지 않았다.

눈이 풀려 있는 것 하며 고개를 떨군 것 하며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틀 남짓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초조하게 죽음을 기다려야 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감사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합니다. 다들 여러분들을 구하기 위해 열심이었거든요."

"다들 준상 님 덕분이라며 준상 님에게 감사를 표하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유준상보다 나이 10살은 많은 기르디가 고맙다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다.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연신 고개를 꾸벅이는데,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여기 사람들은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정신 쪽 문제야 적당히 쉬면 그래도 괜찮아질 테지.

그렇게 기르디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감사를 듣고 있자니, 아라드 참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이 물러난다.

"보고에 없던 마수의 등장으로 상황이 꽤 심각하게 흘러갔다고 들었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지난번과 다름없이 예의를 갖추어 이야기하는 아라드.

유준상도 예를 갖추어 답했다.

"함께했던 동료들이 분투해 준 덕분입니다."

"물론 병사들의 활약도 있었겠죠. 하지만 기르디와 던컨은 준상 씨가 크게 활약했다고 하더군요."

아라드가 손으로 병영 안쪽을 가리켰다.

이동하며 이야기하자는 의미.

유준상이 고개를 끄덕이니 아라드가 병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정찰대가 조금 더 정찰을 꼼꼼하게 했더라면, 저희 참모부가 혹시 모를 상황을 가정했더라면, 이렇게 준상 씨께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괜찮습니다. 검은 갈기늑대는 발렌토로만큼이나 지능적인 마수였습니다. 저희도 함정에 빠졌을 때까진 눈치채지 못했죠. 정찰대가 파악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만, 죄송한 것은 어쩔 수 없군요."

병사들도 시종들도 유준상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인다. 하지만 그 호의는 대부분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부류의 호의.

아라드가 보이는 호의는 그들과 다른 종류의 호의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뛰어난 인재를 발견한 사장님의 마음이랄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냥 물어봐도 되는데 아라드는 굳이 허락을 구했다.

"말씀하시죠."

"기르디가 이끄는 병사들이 고립되었을 때, 저희 쪽에 연락을 취해 지원을 기다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준상 씨께서는 지원을 요청하는 대신 다음 날 바로 공략에 들어가셨죠."

무엇을 궁금하나 했더니만, 별것도 아닌 것을 물어오는 아라드였다.

"지원을 기다렸다면 그사이에 고립된 병사들 전부 늑대들의 먹잇감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신속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생각했고, 충분히 할 만하다고도 판단했죠."

아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는 유준상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알림창이 떠올랐으니까.

[축하드립니다!]

[참모장 아라드의 요청을 승낙하고 신뢰를 얻었습니다.]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2 '도움'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2,000 GP가 수여됩니다.]

 15. 교활한 꽃 (1)

신뢰한다는 것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일까.

아라드와 함께 들어온 지휘관실은 지난번 때와 달리 훨씬 편안했다.

"차는 지난번과 같은 걸로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약간 떫은맛에 향이 깊은 차가 테이블 위에 오른다.

차에 대해 문외한인 유준상이지만 꽤 각별한 차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피곤했는데, 나긋하면서도 따스한 찻물이 몸 안을 휘도니 긴장이 풀어진다.

풀어진 유준상의 얼굴을 보고는 아라드가 만족스레 웃었다.

"피로 회복에 좋은 차지요. 체력 증강에도 효과가 좋다며 시종들이 제게 자주 권합니다."

"설마 마수의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니지요?"

"하하. 설마 그렇겠습니까. 제가 준상 씨에게 독이 든 차를 내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늑대의 피를 마시고 중독된 병사들이 걱정되는 것이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증상이 심하지 않고 현재 치료 중이니 금방 회복될 테니까요."

아무리 탈모와 정력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설마 마수의 피를 마시다니.

라엘이 응급처치를 해서 다행이지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다.

아라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중독된 병사들을 떠올리곤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자세와 표정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잇는 그.

"실은 준상 씨의 활약을 많이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정도로만 생각했죠."

알고 있는 사항이다.

아라드가 유준상에게 바랐던 건 어디까지나 행운 토템이었으니.

"일흔이 넘는 병사들이 죽을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공훈은 마땅히 치하받아야 하는바. 나름 소소하게나마 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답이라….

일개 병사가 전투에서 활약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병사 한 명으로 사기를 고취시키고 전투력을 높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1인분 이상.

지금과 같은 유준상의 활약은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였다.

그런 만큼 그가 이렇게 보답하겠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 보답은 지난번에 주신 팔롱드가의 증패로 대신한 것 아니었나요?"

"고작 그 정도에 그칠 만한 공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가볍게 손을 드니, 시종이 큰 함 하나를 들고 왔다.

사과 상자만 한 크기의 함이었는데, 설마 여기 안에 노란색 지폐 다발이 담겨 있는 건… 절대 아니겠지.

"보고를 듣고 무엇이 좋을까 고민해 봤습니다. 부하들과 상의한 결과 이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아라드가 눈짓하자 시종이 함을 열었다.

함이 열림과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냄새.

소독약 같은 냄새를 풍기는 그것은 다름 아닌 포션이었다.

"여행하시는 데 필요하실 것 같아 이렇게 회복 포션 30병을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마음에 들다마다.

안 그래도 상점 이용이 막힌 탓에 포션을 구할 수 없었던 유준상이다.

회복 포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목숨과 직결되는 사항.

지금 그에게 있어 포션은 총알과 더불어 가장 필요했던 아이템이었다.

유준상은 포션이 담긴 병을 들어 보았다.

선명한 빨간 액체 위로 그의 얼굴이 비친다.

푸르스름했던 늑대의 피나 형광빛을 발했던 라엘의 포션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이게 포션이지 싶다.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기쁘군요."

"네. 사실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포션은 여행자들에게 필수품. 너무 무난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렇게 좋아해 주시니 고민한 보람이 있군요. 하하!"

그 무난한 선택조차 지금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니.

뭐가 되었든 그의 보상은 지금 가장 필요한 보상 중 하나였다.

신분을 보증해 주는 증패와 만약의 상황에서 목숨 줄이 되어 줄 포션.

이것도 초심자의 행운인가.

여러모로 준비가 순조롭다.

"그럼 포션은 하리에게 전달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종이 함을 챙겨 지휘관실을 나간다.

의문인 것은 호위병까지 함께 빠져나갔다는 것.

당연하다는 듯한 아라드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었나 보다.

"사실, 드리고자 하고픈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아라드는 지휘관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지휘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요청하셨던 물건입니다."

그가 꺼낸 것은 지난번에 유준상이 요청했던 총알 더미.

자그마한 함에 들어 있는 그것은 이전, 보자기에 싸여 있던 것보단 훨씬 그럴싸했다.

아라드가 함을 건네며 이야기했다.

"450 Zenobia. 제노비아 공화국에서 마수를 사냥하기 위해 제작된 총탄이라고 하더군요. 위력이 뛰어난 대신 화기의 내구성을 많이 갉아먹어 해당 총탄을 사용하는 화기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덕분에 악성 재고가 많아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쉽게 구할 수 있었지요."

마수용이었나.

확실히 인간을 상대하는 용도 치고는 크기가 크고 화력이 상당했던 총탄이었다.

하지만 의외인 것은 이 총탄을 사용하는 화기가 많지 않다는 것.

내구성을 갉아먹는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권총에 이상이 있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

유준상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구조가 간단한 싱글 액션 리볼버.

딱히 권총 내부가 마모되었다거나 하는 문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싱글 액션 리볼버가 더블 액션에 비해 내구성이 좋기는 하다.

하지만 내구성을 갉아 먹힌단 평이 나올 정도면 이상이 생겨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이 권총이 특별한 건가.

아니면 총탄에 대한 평가가 잘못된 건가.

나름 총과 관련해서 일가견이 있는 유준상인 만큼 여러 가지로 궁금증이 인다.

나중에 제노비아 공화국에 들릴 기회가 생기면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저희 병사들을 두 번이나 마수들에게서 구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정도야 응당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을 덧붙이자면 총탄의 출처는 철저히 비밀로…."

당연한 것을.

아라드가 시종과 호위까지 물려 가며 총탄을 직접 건넨 것은 자신이 총탄을 구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다.

그렇게까지 조심하는데, 아라드가 총탄을 구해줬다며 떠들어서야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철저히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길."

"감사합니다."

차도 다 마셨겠다.

유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훌륭한 차 대접에 포션과 총탄까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제 남은 건 숙소로 돌아가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는 것뿐.

그러한 생각을 하자니 오래전 군대에 있을 때가 떠오르는 유준상이었다.

삼박사일 간의 훈련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휴식은커녕 곧장 경계 근무를 나가라 해서 분노했던 적이 있었지.

이등병이었던 시절이라 눈물을 흘리며 경계 근무를 서야 했었다.

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지휘관실을 나가려는 차, 아라드가 그를 붙잡았다.

"혹시나 해서 묻겠습니다만…."

유준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설마,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준상 씨, 군인이셨던 적 있으십니까? 만약 있으시다면 저희 쪽 장교로 들어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장교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기사단에 추천서를 써 드릴 수도―"

"군인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장교든 기사든 하등 관심 없고요."

군대에 말뚝을 박으라니.

실로 끔찍한 소리를 하는 아라드였다.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 한들 바닥부터 시작할 텐데, 그것만큼은 절대 사양하고 싶은 유준상이었다.

애초에 군대 체질도 아니었고.

"그래도 조금 더 고민을―"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말씀만 기쁘게 받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유준상은 못 들은 척 걸음의 속력을 높여 지휘관실을 빠져나갔다.

아라드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직업 군인을 권유하다니.

절대 상종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 * *

"이번 구조 임무에서도 맹활약을 펼치시다니! 역시, 준상 님이십니다! 저 하리. 언젠가 기사가 되어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였느냐 묻는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유준상이란 세 글자를 언급해 준상 님의 명예를 드높이도록 하겠습니다!"

장시간의 반신욕을 마치고 푹신한 의자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고 있자니 하리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해 가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물론, 하리가 정말로 그의 활약에 감명을 받아 찬양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녀석의 입에 들어가고 있는 각종 음식 때문이었는데, 임무에서 고생했다며 아라드가 보내온 것이었다.

다만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유준상 혼자 먹을 수 없는 양이기에 지금 이렇게 하리와 먹는 중이었다.

참고로 말하는데 다른 시종들에게도 같이 먹자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차라리 죽여 달라면서 거절.

오로지 하리만이 지금 유준상의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빌헬름 전기 16장 1절에 따르면, 본래 능력이란 그 사람의 인품과 비례한다고 합니다. 인격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자만이 사건과 현상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기에 그를 통해 스스로를 관조하고 다음 단계를 위한 단초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이유입니다. 이는 곧 초대 그라시아 제국의 황제이신 빌헬름 그라시아 황제님의 수양론이지만 인재론 또한 마찬가지로 이 인재론을 통해 그라시아 제국은…."

끝이 없이 이어지는 하리의 일장 연설.

하리와 몇 주간 지내면서 느끼는 건데, 참 말이 많다.

말만 많은 것뿐만 아니라 미사여구를 쓸데없이 많이 사용하는 데다 어디서 주워들은 글귀를 자주 인용해 가끔 논지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것도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본인이.

그래서 이렇게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계속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빌헬름 황제님의 뛰어난 선견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제 이야기는 지난번에 들어서 알고 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유준상의 말에 하리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말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는 애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말이 많아졌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러합니다. 준상 님은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하시니, 필시 지금보다 더욱더 훌륭한 능력을 보여 주시리란 것, 어쩌면 기사 중에서도 으뜸가는 기사가 되리라 저 하리는 장담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주셨으니 분명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다.

속마음을 파악해 보자면.

이 정도로 아부했으니, 저 더 먹어도 되지요?

아무렴 더 먹어도 되고말고.

음식은 아직도 많이 있다.

주변에 있는 시종들이 감히 일개 기사 준비생인 페이지(Page) 주제에 준상 님과 겸상한다면서 엄청 눈치를 주지만 꿋꿋하게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하리였다.

"아, 준상 님. 혹시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이번에 하르도 공자님께서 또 사고를 치셨다고 그럽니다."

모든 업무를 아라드에게 맡기고 휴양차 도시로 향했던 하르도였다.

일도 없겠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 텐데,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인지. 여러 가지로 대단한 인물이다.

생각해 보면 회사 다닐 때도 상사 중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역시 어느 세상이나 고문관은 하나씩 있는 법이다.

"노름하다 돈을 잃어서 패싸움을 벌였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다른 권세가의 자제라고 하지 몹니까. 그 때문에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가주님께서 이곳에 감찰을 보낸다고 하십니다."

"감찰?"

"네. 하르도 님을 징계하면서 이참에 근무지까지 확실하게 조사해 볼 모양입니다. 이것저것 귀찮기야 하겠지만 잘못한 게 없는 저희야 크게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너 감찰 받아 본 적 없지?"

"예. 이번이 처음이긴 한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리의 말이 맞다.

잘못이 없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유준상의 머리에 있는 감찰이란, 잘못이 발견될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것을 뜻했다.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 잘못을 만들어 압박했고.

물론 그 끝은 언제나 징계와 협상이었다.

감찰 한 번에 조직이 휘청이는 건 일상다반사.

게임 속이니만큼 그 감찰이란 것이 유준상이 알고 있는 감찰과 다를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느낌이 좋지 않은 그였다.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됩니다.]

[미약한 위기가 감지됩니다. 주의하세요.]

유준상의 시선이 식탁 너머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총탄함으로 향했다.

괜찮겠지…?

괜찮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유준상이었다.

 16. 교활한 꽃 (2)

로리엔 주둔지로 돌아오는 하르도의 모습은 비에 젖은 생쥐 꼴처럼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은 회색빛에 푹 내리깐 고개.

말 고삐를 쥐고 검문소를 통과하는 그 모습은, 과연 그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안하무인의 악덕 공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도 검문소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병사들도 그 모습에 입을 떡하니 벌린다.

"와…. 저거 우리가 아는 그 양반 맞아?"

"사고 쳤다 하더니만 이번에 제대로 쳤나 보고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안 샐 리 없지."

"내가 저 인간 언젠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저거 다 업보야, 업보."

"이보게 목소리 낮춰, 이러다 다 듣겠네."

이미 다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쳐다보는 하르도.

날 선 그의 눈매에 사람들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하르도는 혀를 차며 그의 뒤를 따르는 마차와 기병대의 행렬을 보았다.

위풍당당 용맹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슬프게도 하르도 휘하의 병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황실의 명을 받들어 그의 근무지를 감찰하기 위해 온 병사들.

마음 같아선 자신을 욕하는 이들에게 욕지거리하고 싶은 하르도였지만, 저들이 보는 앞에서 백성들을 욕해서야 좋지 않은 이미지밖에 생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를 조금이라도 감하고 감찰을 무사히 끝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최대한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진짜 아무 잘못 없다고….'

지난 며칠간의 일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평소에 조금 망나니 같이 행동하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결백했다.

모든 것이 오해에서 시작되었고, 자신이 주먹을 휘두른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

가슴 아래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에 그의 코끝이 찡해진다.

스물이 넘은 나이에 눈물을 흘려서야, 평생 놀림감만 될 뿐.

울컥하는 마음을 간신히 가다듬은 그는 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영지의 행정을 담당하는 건물 앞에는 아라드와 참모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라드!"

언제나 제 일을 해결해 주던 아라드를 보아서였을까.

결국 하르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그대로 말에서 내려 아라드에게 달려갔다.

그의 앞에 서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아라드! 나 진짜 아무 잘못 없어! 진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저 녀석들이 막 나를…!"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 큰 오해가 있던 거겠죠."

"아라드…."

역시 아라드다.

아라드만은 자신의 결백을 믿고 있었다.

그 사실에 하르도의 어깨가 들썩이며 눈뿐만이 아니라 코와 입에서도 물이 흘렀다.

그런 그의 어깨를 아라드가 토닥였다.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뒷수습은 제가 할 테니 하르도 공자님께서는 침실로 돌아가 푹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르도는 우느라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아라드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하르도 공자님을 침실로. 조금이라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차를 내드려라."

"예."

"흐윽…. 아, 아라드… 고마워…."

"별말씀을."

병사들이 하르도를 데리고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혹시라도 고집을 부려 자신이 책임지겠다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은 하르도였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상당히 몰려 있는 그를 보며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아라드였다.

'단순 폭행 건이 아닌 건가.'

아라드는 떠나가는 하르도에게서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감찰을 나왔다고 하기엔 상당히 화려한 마차다.

혹시나 해 마차에 문장이 새겨져 있나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문장이 그에 눈에 잡혔다.

방패 틀 안에 초승달을 가로지르는 검.

북방 일대를 사수하는 군사 가문 '칼트슈베르트'의 문장이었다.

아라드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황실이 아니라 타 가문에서 감찰을 나오다니.'

잘못 돌아가고 있어도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

본디 감찰이란 황실에서 행하는 법.

특정 가문이 다른 가문을 감찰하기 위해선 마땅한 명분과 황실의 허가가 필요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황실이 절대 허가해 줄 리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생각보다 일이 크다는 말.

하르도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아라드에게 다가왔다.

"아라드 참모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하인리, 지금 이 광경을 보고 과연 누가 잘 지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째서 황실이 아닌 칼트슈베르트가문이 이곳을 감찰한단 말인가."

"생각보다 훨씬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기사 하인리가 아라드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적이었다.

유흥도시 게네호픈.

공무를 전부 아라드에게 떠넘긴 하르도가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놀러 간 도시는 유흥 도시란 이명답게 음주가무, 도박과 주색(酒色)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법과 규율이 엄격한 그라시아 제국의 유일한 탈출구.

그런 만큼 수많은 귀족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다양한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하르도 공자님께서 아리따운 영애분에게 접근했었습니다."

"그 대상이 칼트슈베르트가의 영애였던가."

"그렇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접근하고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추파를 던지거나 만남을 요구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이 귀족 영애들이었다.

사교계에선 자신의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편지의 두께가 곧 권력이고 힘이었으니, 치근덕거리는 남자는 오히려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하나의 수단이었다.

추파 정도야 문제조차 되지 않는 사항.

하나 문제가 생겼다면 선을 넘었을 경우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쉽게도 아라드 참모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술에 취한 하르도는 그대로 칼트슈베르트가의 영애를 강제로 끌고 이동.

그 과정에서 영애의 혈연에게 들켜 주먹다짐이 오갔다고 한다.

"최악이군…."

피가 마르는 아라드였다.

단순 폭행 건에 감찰까지 나온 이유가 그간 하르도가 쌓아 온 망나니짓 때문이라 생각한 아라드였다.

적당히 뒷돈을 쥐여 주고 끝낼 생각이었건만.

권세가의 귀족 영애를 건드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곧 가문의 모욕.

칼트슈베르트가는 자신들이 받은 모욕을 갚아 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부정과 비리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할 테고, 상황에 따라선 현 지역 내 팔롱드가의 이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누군가의 목숨을 요구할지도 몰랐고.

"가주님은 뭐라 하셨지…?"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시고자 합니다. 지금의 감찰도 하르도 공자님의 잘못을 덮는 대신 허락한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아들이라도 자식은 자식이다.

어떻게든 자식을 지키고자 해당 사건을 덮을 생각이었다.

그 대신으로 내놓은 것이 로리엔 영지였던 것이고.

"칼트슈베르트가의 영애라면…. 장녀는 전선에 나가 있을 테니, 삼녀인가."

"예. 율리아 칼트슈베르트입니다."

유명한 인물이다.

투명한 얼음을 보는 듯한 눈동자에 설원 같은 피부.

그 아름다움에 걸맞은 박학다식함과 그 청렴함까지.

혈기 왕성한 사내라면 열이면 열, 시선을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아가씨였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아라드였다.

하르도는 더할 나위 없이 나약하다.

어찌나 나약한지,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과의 권력 싸움에서조차 밀려 이렇게 변방까지 오게 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만큼 나약하기에 자신의 그 옹졸한 자아를 지키고자 철저히 발버둥 친다.

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을 정도로 대담한 인물이 아니건만.

그건 아라드뿐만 아니라 하인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하르도 공자님이 망나니라곤 하지만 제 분수를 모르는 인간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며 변명하는 평상시와 다르게 결백을 주장하는 것도 그렇고. 무언가 이상합니다."

"내 생각도 그렇네."

확실하진 않지만,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음험한 계략일 가능성이 크다.

그 계략에 하르도가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일 테고.

"저기 마차에 타 있는 건 율리아 영애인가."

"아닙니다. 이번 하르도 공자님과 주먹다짐을 벌인 막시밀리언 공자입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막시밀리언은 적어도 율리아만큼 명석한 인물은 아니다.

안 그래도 최근 암시장에서 총알을 구입했었기에 여러모로 위험하던 차.

그가 감찰을 행한다면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인리, 이야기 고맙네. 고생했겠군."

"고생이야 매번 하는 거죠. 부디 별일 없길 빌겠습니다. 하르도 공자님이 저 모양인 이상 저들은 분명 아라드 참모장님을 집요하게 노릴 테니."

아라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니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은발에 삐쩍 마른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막시밀리언 칼트슈베르트.

아라드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로리엔 영지까지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막시밀리언 공자님. 로리엔 영지의 영주이신 하르도 공자님을 보좌하고 있는 참모장 아라드 하이델펠드라고 합니다."

막시밀리언의 퀭한 눈이 그에게 향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라드 하이델펠드. 팔롱드가의 유능한 행정가이자 참모를 이렇게 뵙게 되어 저 또한 반갑습니다."

반갑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게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고 말투엔 귀찮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거기다 입에서 풍겨 나오는 알코올 냄새와 셔츠에 배어 있는 퀴퀴한 연초향까지.

어쩌면 자신이 너무나도 심각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아라드였다.

"맑은 공기와 푸르른 초목들. 이곳은 참으로 경치가 좋은 곳이군요. 절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먼 길을 오셔서 피곤하신 모양이시군요. 곧장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런 곳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끝내고 게네호픈으로 돌아가고 싶군요. 약속도 있고 말이죠."

그 말에 아라드와 참모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감찰이란 것은 결코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압박을 하고자 한다면 몇 날 며칠이 걸릴 지 알 수 없는 사항.

한데 빨리 끝내고 돌아가겠다니.

그 말인즉 적당히 받을 것만 받아 내고 빠지겠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적당한 것으로 책을 잡히면 만족하고 돌아가겠군.'

그렇다면 제 일을 끝마쳤다는 구실을 내주면 그만이다.

그간 하르도가 행했던 나쁜 짓 중 하나를 던져 주면 그것을 물고 돌아갈 테지.

중대한 사항인 줄 알았건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반응에 아라드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행정실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찰하신다면 일단 그간의 서류 먼저 확인하시는 것이 좋을 테죠."

"무언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감찰은 제 일이 아닙니다."

아라드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감찰이 그의 일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아라드와 참모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감찰하러 오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대한 막시밀리언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 동생인 율리아 칼트슈베르트가 할 일. 제 일은 병력을 동원해 영지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막시밀리언이 눈짓하니, 시종 하나가 서류 하나를 아라드에게 내밀었다.

그 서류를 받아 든 아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령서.

그라시아 제국 보안법에 의거.

팔롱드가의 일원 및 가문에 속한 모든 고용인은 제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제국활동가 색출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명하는바.

반제국활동가를 포함, 어떤 식으로든 해당 인물을 비호, 지원한 자를 색출하며 이에 대한 처벌과 징계를 황실의 대리인 '율리아 칼트슈베르트'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

.

.

.

.

그라시아 제국 11대 황제

지기스문트 폰 그라시아

서류의 왼쪽 하단에 위치한 황제의 친필 서명.

단순 감찰인 줄 알았건만, 반동분자의 수색을 포함하고 있는 명령서였다.

아라드와 참모진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쉽게 가는 줄 알았건만… 치밀하군….'

저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현재 로리엔 지방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인물은 하르도가 아닌 아라드.

지금 이 명령서는 그런 아라드를 노린 명령서였다.

하나, 아무리 자신을 건드린다 한들 쉽게 건수를 잡을 순 없을 터.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유준상 스파이 건으로 자신을 옭아매려 하는 것 같은데, 꼬투리 잡힐 정도로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은 아라드였다.

암시장에서 총탄을 구입한 건이 걸리긴 했지만, 자신의 심복들이 절대 입을 열 리 없었고,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딱, 하나.

자신에게 총알을 판매한 암상인을 포획하는 것이 변수였지만, 암상인이 괜히 암상인이겠는가.

쉽게 잡히지 않기에 암상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조사한다 한들 결코 책하나 잡히지 않을 자신이.

그러나 그러한 자신감은 마차 너머로 다가오는 인물에 의해 무너졌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렇게 마중도 나와 주시고. 이러한 환영에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투명한 얼음을 보는 것 같은 눈동자.

설원같이 하이얀 피부.

교양 어린 몸짓과 기품 가득한 목소리.

'율리아 칼트슈베르트'가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말 안장 뒤편에 피범벅이 된 암상인을 매달고서.

"아라드 하이데펠드 참모장님 맞으시죠? 그라시아 제국을 위협하는 스파이와 그 협조자의 색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라드의 눈 사위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17. 교활한 꽃 (3)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은 아이템으로 골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검은 갈기늑대를 처리하고 며칠이 지난 시점.

유준상은 미루어 왔던 히든 업적 추가 보상을 받기 위해 알림창을 띄웠다.

그가 이렇게까지 보상 획득을 미룬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맹인의 수호천사가 자신이 세상에 간섭할 힘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 했기 때문.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좋은 아이템과 보상은 목숨을 지키는 생명 줄이다.

그 생명 줄을 튼튼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가 있을 리가.

그 결과, 지금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카드 중 하나가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고동색 카드 가운데 혼자만 은빛을 띠고 있는 카드.

유준상이 카드를 집었다.

그러자 카드는 찬란한 빛을 발하며 그 형태를 바꾼다.

"오. 이건…."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보상이 마음에 드는지 궁금해합니다.]

뻔히 표정 보면 알 텐데, 굳이 물어보는 수호천사다.

손에 쥐어진 보상은 실로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포션과 총알이 확보된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아이템.

어떻게 조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아이템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손에 들어올 줄이야.

아이템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어쩌면 성좌의 후원이 고유능력이나 스킬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적어도 지금 유준상에게 있어 성좌의 후원보다 더 좋은 능력은 없었다.

[보상이 마음에 들어 다행이라고 합니다.]

[다음에도 기대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조력해 줄 테니, 또 히든 업적을 달성해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히든 업적 달성하느라 이쪽은 두 번이나 목숨을 걸었는데, 참으로 쉽게 이야기하는 수호천사였다.

물론,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기대받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본래 게임의 진면목은 스노우볼링이라고, 이번에 받은 보상을 잘만 활용하면 다음 퀘스트에서도 히든 업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손에 들린 보상을 보며 흐뭇해하자니,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준상 님!"

노크도 없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리.

어찌나 급했는지 하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리, 무슨 일?"

"크, 큰일 났습니다!"

그거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별일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땀을 흘리며 무턱 대고 방에 들어올 리 없었으니.

"일단 숨 먼저 고르고 이야기해."

"숨을 고를 시간도 없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감찰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준상 님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라드 참모장님께서 서둘러 준상 님에게…."

"어머, 이렇게 화려한 장소에 숨어 계셨군요? 이방인 씨."

하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뒤편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위병들과 함께 모습을 보인 이는 척 봐도 귀족 영애임을 알 수 있는 아리따운 여인.

라엘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인으로 그녀는 실로 우아하게 예를 차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북방을 지키는 칼트슈베르트가의 삼녀이자 황실을 대신에 이번 팔롱드가의 감찰과 반제국활동가의 수색을 맡게 된 율리아 칼트슈베르트라고 합니다."

몸가짐에 기품이 가득하고 목소리 또한 단정하기 그지없다.

남녀불문 열이면 열 전부 호의를 보일 만한 인물.

하지만….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저 여인의 등장이 매우 불쾌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여인에게서 잘 아는 이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주의할 것을 당부합니다.]

수호천사가 매우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준상 또한 수호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견이었다.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됩니다.]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주의하세요.]

지금 이렇게 직감이 위험을 알려 오고 있었으니.

유준상은 사무적으로 답했다.

"유준상이라고 합니다. 보다시피 북방의 유목민족 출신으로 세상을 떠돌던 차에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율리아는 유준상을 위아래로 쓰윽 보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거야 외모를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지요. 저희 그라시아 제국에 이렇게나 선명한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민족은 없으니까요. 어쨌거나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악수를 청하는 율리아.

유준상은 악수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그 손을 잡았다.

아무리 느낌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상대는 귀족 영애다.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것이 좋을 테지.

그녀가 반제국활동가의 수색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분명한 만큼 다짜고짜 적대해서야 좋을 것 없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스코트라면?"

"멋진 저택엔 멋진 정원이 함께하는 법이죠. 한번 정원을 구경하고 싶은데, 안내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네요."

실로 교태스러운 눈웃음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눈웃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혼이 빠져나갔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물론, 유준상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

"죄송합니다만 거절할 수밖에 없겠군요. 제가 산책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한 번도 정원을 산책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책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두 눈을 크게 뜨는 율리아.

"그런가요. 에스코트는 무리겠군요."

율리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탐험을 하는 건 어떠신가요? 저와 함께 정원을 탐험하는 거예요. 정원사들이 공을 들여 가꾸어 놓은 수풀들을 품평하며, 피어나는 꽃들의 꽃말을 나누면서요. 그렇게 하염없이 정원을 거닐다 저녁을 맞이하는 거죠. 생각만 해도 설레네요. 그렇지 않나요?"

적극적인 여인이다.

어떻게든 유준상을 데리고 가고 싶다는 의지가 그녀의 제안에서 느껴진다.

남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과 데이트할 수 있다는 사실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낙했겠지만, 썩 내키지 않는 유준상이었다.

그도 그럴 게 27년간의 경험에 따르자면 이쁜 여자는 유준상에게 하등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이런 곳까지 쳐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정원 산책 같이 가자는 말일 리도 없지 않은가.

이쁜 여인들이 관심을 보일 때는 유준상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

눈앞의 율리아란 여자도 마찬가지일 거라 확신한 유준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거절하기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다.

아직 상황이 온전하게 파악되지 않은 지금은 그녀에게 맞추는 것이 좋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택을 나서도록 하죠."

"기쁘네요. 이렇게 늠름하신 분과 함께라니."

"하리 안내를 부탁하지."

"아… 네,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려는 하리를 율리아가 제지했다.

"이러면 안 되죠. 탐험이잖아요? 안내자가 있어서야 탐험이라 부를 수 없지 않을까요. 저희끼리만 나가도록 해요."

그녀의 말에 하리가 어찌해야 하냐는 눈으로 유준상을 쳐다본다.

어찌하긴 뭘 어찌할까.

"하리, 여기서 대기해. 금방 다녀올 테니."

"호위 여러분들도 여기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계세요."

설마 호위를 놔두고 둘이서 움직일 생각인 건가.

율리아가 유준상을 보며 웃었다.

"지켜 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유준상은 율리아와 저택을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하리나 시종들과도 함께한 적 없는 산책길을 이런 여인과 함께할 줄이야.

율리아가 말했다.

"이쁜 정원이네요. 수풀이 너무 높지도 않고, 꽃들의 배치 간격이 일정한 것이나 바닥에 풀잎들이 널브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꾸준히 관리가 되었다는 뜻이겠죠."

"그런가요. 저는 알지 못했던 사실인데, 이런 부분에 나름 조예가 있으시군요."

"그럼요. 수많은 귀족분과 정원을 거니다 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답니다. 저택의 주인이 정원을 자주 거니면 자주 거닐수록 관리인들은 신경 써서 정원을 가꾸는 법이니까요."

그녀가 유준상을 빤히 바라본다.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의외에요."

"뭐가 말이죠?"

"설마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저랑 정원을 걷는 걸 거절할 줄 몰랐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저랑 같이 산책하고 싶어 하는데 말이죠."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다만 유준상이 율리아 같은 인간을 경계할 뿐이었다.

수호천사의 언급이나 직감 스킬이 활성화되지 않았더라도 그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제 미모에 하르도 공자님께선 저를 겁탈하려고까지 하셨는데."

"많이 놀라셨겠군요."

"엄청 놀랐죠. 만약 저희 오라버니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을지도 몰라요. 저의 가치는 땅바닥에 곤두박질쳤겠죠."

어째서 이런 여인이 감찰을 나왔는가 싶었는데,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는 유준상이었다.

"그래서 그 보복으로 이렇게 감찰을 나오신 건가요?"

"보복이 아닌 마땅한 징계에요."

"징계 겸 하르도 공자님의 세력을 빼앗으려는 의도고요."

율리아가 웃어 보인다.

조금 전과 같은 순진한 미소가 아닌 교활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유목민족 출신이라고 그래서 정치 감각이 없으실 줄 알았는데, 상당하시네요?"

"이런저런 사람과 부대껴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감각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죠."

"의외에요. 여태까지 제가 봐 왔던 유목민족들은 하나같이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거든요."

유준상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출생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시대 자체가 유준상에겐 한없이 낡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기록은 보았어요. 상당하던데요?"

"무엇이 말이죠?"

"발렌토로와 검은 갈기늑대와 같은 중등급 마수를 처리하고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병사들을 구해 낸 거요. 일개 병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활약이던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진짜요?"

"예."

진짜다.

초심자의 행운이 없었더라면, 발렌토로를 해치우는 것은 불가능했고, 발렌토로를 해치우지 못했다면 권총은 얻을 수 없었을 테니 검은 갈기늑대도 처리할 수 없었다.

율리아가 묘한 눈으로 유준상을 바라보았다.

"신기하네. 하르도, 그 돼지랑은 딴판이야, 당신. 꽤 마음에 드네요."

"...."

율리아는 정원에 피어 있는 꽃 하나를 꺾더니 그대로 밟아 짓이겼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과연 이것이 그녀의 본성임을 알게 한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이상 치근덕거려 봤자 미인계가 통할 것 같지도 않고 나름 절 재미있게 해 준 답례로 기회를 드릴게요."

그녀가 말하는 기회가 무엇인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제 밑으로 들어오세요. 저를 위해 충직히 봉사한다 맹세하면 그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드리죠."

"마치 제가 죽을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당신도 이미 감을 잡고 있을 거 아니에요. 제가 왜 이곳에 왔고 무엇을 할 것인지."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음흉하네요."

아무렴 음흉해야지.

뱀과 같은 자를 상대하려면 뱀보다 더 교활하고 음흉해야 한다.

"뭐 괜찮아요. 그런 점이 마음에 드는 거니까. 특별히 제 입으로 떠들어 드리죠. 아라드도 당신도 곧 죽어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저희 손에 사형당할 겁니다."

역시나.

"죄목은 반제국활동죄겠고요."

"역시 감을 잡고 계셨네요. 멍청한 암상인 하나가 전부 불어 준 덕분에 쉽게 아라드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 뭐예요. 하르도, 그 돼지 새끼도 상당한 공이 있죠. 술 처마시고 뭐 그리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던지. 유용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구분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당신과 아라드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지 뭐에요."

하르도, 이 멍청한 자식.

적당히 패는 게 아니라 요단강 건너기 직전까지 팼어야 했는데.

"제게 걸려 있는 스파이 혐의는 이미 해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그럼 좀 실망할 것 같은데."

"실망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이미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율리아의 눈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보이다니… 확실히…. 입맛을 돋우는 남자네요, 당신."

콩깍지라도 쓰인 걸까.

어떻게 보면 그 이야길 자신감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율리아가 말을 이었다.

"아라드가 총탄을 구매했고 그것을 당신에게 넘겨 주었다는 정황은 이미 포착했어요. 불법을 저지른 자의 보증이 효력이 있다고 보시나요? 지금 제 부하들이 열심히 당신의 저택을 뒤지고 있을 테니 그가 넘겼다는 총탄을 찾는 건 시간문제겠죠. 그것을 찾는 순간 아라드도 당신도 사실상 끝나는 거예요."

율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유준상도 걸음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유준상. 당신의 기록과 그 정체불명의 신원 그리고 알 수 없는 자신감까지. 지금의 당신은 꽤 저의 흥미를 돋워요. 그러니 제 밑으로 들어오세요. 목숨뿐만 아니라 출세 가도를 보장해 드리죠."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권유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유준상이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던 차, 전혀 예상치 못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분기점]

[설명: 낯선 세상에서 살아남은 당신. 당신은 선택의 기로 앞에 섰습니다. 율리아의 제안을 수락하고 그녀의 일원으로 움직일 것인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 나갈지. 전부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1. 수락 시: 튜토리얼 3 '차선을 위한 배신'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2. 거절 시: 튜토리얼 3 '믿음의 부응'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주의! 각 선택지는 당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난이도와 보상이 달라집니다.]

이런 타이밍에 선택지라니.

다행히도 추가 보상처럼 랜덤하게 골라지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하긴, 이런 선택지에서조차 주사위를 던져야 했으면 게임 못 해 먹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유준상은 선택지를 고르는 것과 동시에 대답했다.

"제안은 거절합니다. 제가 당신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죽는 일도 없을 거고요."

"총탄을 아주 잘 숨겨 놨나 봐요? 근데 과연 우리가 못 찾을 것 같나요? 마술사까지 동원했는데?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시끄럽고, 어디 한번 찾아보세요. 찾을 수 있는지."

그의 도발을 예상치 못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찾아보세요, 총탄. 못 찾으면, 후폭풍 꽤 심하게 맞을 것 같은데. 그쪽 얼굴 일그러지는 꼴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18. 교활한 꽃 (4)

"뭐라고요? 제가 후폭풍을 맞아?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려요?"

차가운 서릿바람과 같은 눈으로 유준상을 바라보는 율리아.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장 얼굴 위로 여유로움을 덧씌운다.

애쓰는 여인이다.

그런다고 관자놀이에 튀어나온 핏줄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벌써 이런데, 결과가 나온 다음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열심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무례하시군요. 그라시아 제국의 예법을 아직 익히지 못하셨나요? 숙녀에게 그런 언사를 비치는 건 전혀 신사답지 못하답니다."

"하르도 공자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역시 수준이 비슷하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도 비슷하나 봅니다."

율리아의 백옥 같은 얼굴이 토마토가 하이 파이브를 하자 할 정도로 붉게 물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어떻게든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데,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애꿎은 사람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워 사형시키고, 그것으로 가문의 이권을 챙기려 하는 주제에 고상한 척이라니.

하르도도 그렇고 이 세상의 귀족은 하나같이 이 모양인가?

그렇다면 램페이지 스톰의 난이도가 하드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는 곳마다 이런 녀석들이 있다면 없던 사건도 생겨날 테니까.

"고결한 자로서 미천한 당신에게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주었건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요. 분명 후회할 거예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게 누구인데.

"후회는 그쪽이 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말씀을 하셨으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오래간만에 색다른 경험을 해 보고 싶네요."

"여유로운 것도 지금뿐이에요. 준비라면 이미 되어 있으니 말이죠."

준비되어 있다고?

없는 총탄을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가짜 증거를 만들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클 텐데?

자칫 잘못하면 반제국활동죄에 엮이는 건 팔롱드가가 아닌 칼트슈베르트가가 될 수도 있다.

쉽게 예상하지 못할 방법이 있거나, 단순한 허세일 수도 있겠으나.

'하르도라면 모를까, 허세를 부릴 만한 성격처럼 보이진 않아.'

유준상은 고개를 털었다.

단순한 허세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녀가 무엇을 준비했다 한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이란 말인가.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말실수하지 않게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뿐이었다.

"...."

"...."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불편한 동행에 적막만이 그들과 함께했다.

그렇게 정원을 조금 걷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정원 출구.

율리아의 병사들과 하리를 비롯한 유준상의 시종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그들의 표정이 처음 정원을 나섰을 때와 정반대라는 사실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불안이 가득했던 하리와 시종들은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고, 자신만만하던 율리아의 병사들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병사 하나가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율리아 공녀님.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만…."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마술까지 사용해 저택 내부와 그 근처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암상인이 이야기했던 총탄은 물론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율리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다던 유준상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일 테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표정만 그대로일 뿐이었다.

"제대로 된 마술사를 고용한 것 맞나요. 분명 수색과 탐지에 능한 마술사를 고용하라고 했을 텐데요."

"맞습니다. 혹시 몰라 몇 번이고 신분을 확인하고 길드에 연락해 보증을 받았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분명 총탄이 수급되었다는 정보는 확실했을 텐데…."

다시금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솟아오르는 율리아.

율리아가 직접 마술사에게 협박을 섞어 가며 물었지만, 마술사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찾지 못했다는 말뿐이었다.

곤란할 테지.

의뢰인은 분명 총알이 있다 이야기하는데, 정작 자신의 마술에 감지되는 것은 없었을 테니까.

무리도 아니다.

지금 그들이 찾고 있는 총탄은 어지간한 마술로는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었으니.

[아공간 주머니]

종류: 보관함

등급: 고급

최대 수용량: 10

설명: 시공간이 동결된 허수 공간을 활용한 주머니입니다. 해당 공간에 수납된 아이템은 부패 및 부식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수납된 아이템 목록 (2/10)]

중급 회복포션 * 30

460 Zenobia (탄환) * 54

허리춤에 매여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

군대에서 사용하던 총탄 주머니만 한 크기였지만, '아공간'이라는 명칭답게 부피를 초월하는 수납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인벤토리'.

히든 업적 '무모함을 과감함으로'의 추가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이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아공간 주머니를 건네준 자신의 선택이 너무나도 현명했다며 콧대를 세웁니다.]

[열과 성을 다해 감사하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합니다.]

감사하고말고.

안 그래도 어떻게 포션과 총알을 들고 다녀야 하나 걱정하던 차였다.

감찰이 나오면 총알이 문제 될 거라 예측하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때마침 인벤토리가 추가 보상으로 떠 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운이 좋다.

그것도 매우.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수호천사의 호의는 가히 최고의 능력이었고, 그다음은 고유능력 '초심자의 행운'이다.

역시 사람은 운이 좋고 봐야 한다.

율리아와 병사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 것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뭐지…?'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 아까와 다름없이 이것저것 대화하고 있을 뿐인데, 기류가 조금 변한 느낌이다.

마치 연기를 하는 듯한 어색한 느낌.

이어진 알림창이 그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고유능력 '초보자의 직감'이 활성화됩니다.]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은밀한 살기가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준상은 고개를 돌려 저택 창가를 확인했다.

위험한 곳이라 판단되면 제일 먼저 저격병의 위치를 가늠하는, FPS 고인물이라면 당연하게 나오는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의 직감대로 시야에 낯선 인물 하나가 잡힌다.

저택의 3층 창가에 팔롱드가의 군복을 입은 누군가가 활을 들고 율리아를 조준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곧장 상황을 파악한 유준상이었다.

탄환은 찾지 못했다.

아라드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일반적인 감찰로는 이권을 뺏어 올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문제를 만들면 그만이다.

그것도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황실을 대신해 감찰, 수색하던 율리아 칼트 슈베르트를 팔롱드가가 공격했다.」

탄환이 있든 없든 팔롱드가를 압박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명제.

율리아는 황실의 대리자 신분으로 이곳에 왔다.

그런 그녀를 공격한다는 것은 황실에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악하기 짝이 없군.'

어찌나 영악한지 박수까지 쳐 주고 싶을 정도다.

자신이 다칠 것을 각오하고 자작극까지 펼치려 하다니.

우리의 악덕 공자 하르도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할 만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유준상의 반응은 그들이 계획을 실현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르다는 사실.

유준상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총알 세 개를 꺼내 텅 빈 약실에 집어넣는다.

아무리 리볼버가 장전에 시간이 걸린다곤 하지만 유준상의 사격술 레벨은 30.

최종 레벨까지 도달한 사격술은 장전 속도마저 압도적으로 단축시킨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장전을 끝마치고 해머를 당겨 코킹, 그대로 암살자를 조준했다.

자신이 표적이 된 사실을 깨달은 암살자가 다급히 활시위를 놓는다.

율리아를 노리며 날아가는 화살.

총성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타앙―!

날아간 탄환은 거침없이 화살촉을 깨부쉈다.

바닥에 떨어지는 화살 한 대.

"이 무슨…!"

"준상 님?! 아니, 왜 갑자기 화살이…!"

하리와 시종들이 당황한다.

허나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율리아와 병사들이었다.

유준상이 외쳤다.

"하리! 3층 창가에 암살자! 서둘러 포획해!"

"앗, 네!"

그의 외침에 하리와 시종들이 일제히 저택으로 달려간다.

아직 끝이 아니다.

유준상은 재빠르게 암살자를 조준했다.

암살은 실패했다.

하리와 시종들이 달려가고 있는 이상 도주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자결하는 것뿐.

그의 예상대로 암살자는 가슴 한편에서 검은 액체가 담긴 병 하나를 꺼냈다.

독약.

녀석은 훌륭한 정보 줄이다. 죽게 놔두어서야.

유준상은 그가 뚜껑을 여는 순간을 노려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어김없이 암살자의 손등을 꿰뚫고 독약은 바닥에 떨어진다.

혹시 몰라 남은 총탄으로 반대쪽 손까지 무력화.

암살자가 뒤늦게 창가에서 멀어져 보지만, 이미 하리와 시종들이 도착해 제압당하고 만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멋진 사격 솜씨였다고 말합니다.]

[사망자를 내지 않은 점도 매우 칭찬할 만하다 합니다!]

[성좌 '맹인의 수호천사'가 당신에게 100 GP를 하사합니다.]

이정도야 칭찬받을 만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

원숭이가 나무 잘 탄다고 칭찬받진 않지 않은가.

율리아가 다쳐서야 그녀의 의도대로 될 뿐, 암살자에게서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불게 해야 했다.

뭐, 굳이 듣지 않아도 알고 있지만, 증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니.

유준상은 율리아에게 다가갔다.

"무사하신지요."

어찌나 무섭게 노려보는지 어깨가 춤을 추려 한다.

"덕분에요. 눈먼 화살에 맞을 만큼 제가 모자라진 않는데. 나서 주셨네요."

"지켜 달라 부탁하셔서 지켜 드렸을 뿐입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괜히 화살을 맞고 어딘가 다쳐서 저나 아라드 참모장이 꾸민 짓이라 할 수 있으니."

"유쾌한 농담이군요."

유쾌하지.

아무렴 유쾌하고말고.

이렇게나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유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율리아의 부하들이 유준상에게 살기를 내비치지만, 그거야말로 유준상을 한층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곧이어 하리와 시종들이 암살자를 끌고 왔다.

"준상 님, 여기 암살자를 데려왔습니다."

하얀 피부에 밝은 머리카락.

율리아와 그 부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모의 남성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율리아를 바라보는 꼴이 누가 봐도 그녀가 명령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심문해 봤자 소득은 없을 테지.

"하리, 이 자를 아라드 참모장님께. 황실을 대신해 감찰을 나오신 율리아 님을 노린 암살자다.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주의하도록."

"알겠습니다. 평소보다 두 배 많은 호송 병력을 동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하리와 시종들이 암살자를 끌고 간다.

지금이 기회라는 듯 율리아의 부하들이 땅바닥에 떨어진 탄피를 확인하지만, 찾던 탄피가 아닌지 고개를 젓는다.

"율리아님… 저희가 찾던 탄환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겠지.

아라드에게서 받은 탄환이 아닌 수호천사에게서 받은 탄환을 사용했으니.

이것으로 체크메이트.

이 이상 율리아가 팔롱드가를 휘젓는 짓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암살자에게서 캐낸 정보를 바탕으로 팔롱드가가 칼트슈베르트가를 압박할 수 있겠지.

아라드의 정치력이 빛을 발할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놓은 순간이었다.

촤아악―!

등 뒤에서 절삭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율리아의 부하가 암살자의 목을 벴다.

"허…."

"사, 사람이…."

하리가 식겁하고 시종들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떤다.

암살자의 목을 벤 율리아의 병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얼굴에 튄 핏물을 닦았다.

유준상은 싸늘한 눈으로 율리아에게 물었다.

"율리아 공녀님. 이게 무슨 짓이죠."

이곳은 다름 아닌 팔롱드가의 영지다.

그런 곳에서 이런 혈극을 펼치다니.

아무리 황실로부터 감찰과 수색 권한을 받았다 한들, 이런 식의 혈극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치다.

율리아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당연한 거잖아요? 저를 노렸다는 뜻은 곧 칼트슈베르트가를 노렸다는 뜻. 저희 칼트슈베르트가는 결코 적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절 노린 대가로 목숨을 거두었을 뿐인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팔롱드가의 영지입니다만?"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나 한낱 잡배를 처리한 것에 불과하니 하르도 공자님께서도 크게 개의치 아니하시겠죠. 그 정도의 너그러움은 가지고 계신 분이잖아요?"

"...."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고 있다.

그 멍청한 악덕 공자가 상대이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율리아가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유준상. 저는 선약이 있기에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찰과 반제국활동가의 수색을 벌써 끝내시려는 건가요. 아직 조사해야 할 게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막시밀리안 오라버니께서 저를 대신해 감찰과 수색에 임하실 겁니다. 부득이하게 먼저 떠나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몸을 돌리는 그녀와 병사들.

그녀는 이내 마차에 올랐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그때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을 해 드리겠습니다."

잘도 헛소리를.

다음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해 갚아 주겠다는 말이면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율리아의 마차가 출발하고 병사들 또한 이동한다.

잔인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여인이다.

앞으로 칼트슈베르트가와 엮이는 일은 피하는 게 좋을 테지.

느닷없는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성좌 '밟고 올라서는 피의 여제'가 당신의 대처를 높이 평가합니다.]

[하나 또 한 번 방해한다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경고합니다.]

* * *

옅게 흔들거리는 마차 안.

율리아는 호위병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유준상이라는 남자 어떻지?"

병사 복장을 하고 있지만 율리아를 모시는 기사 중 한 명인 노이어.

그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사격술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제노비아의 용병들과 싸워 봤지만 그만큼 빠르고 정확한 사격 솜씨를 보이는 이는 없었습니다. 탄환을 숨긴 걸 보자면 추가적인 능력이 있는 것으로도 보이고요."

"그래? 그럼 역시 '신의 사도'인가?"

"정황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아라드가 괜히 뒤를 봐주고 있던 게 아니었네."

율리아는 유준상을 떠올렸다.

능력적으로 보면 신의 사도가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신의 사도들과는 분위기도 태도도 많은 면에서 달랐다.

그들의 행동과 선택에는 언제나 이해타산이 깔려 있었으며, 주변인들의 두려움을 산다.

그렇기에 열이면 열, 출세 가도와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자신의 제안을 고민도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준상은 아니었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을뿐더러, 많은 시종이 그를 따르고 병영 내에서의 평판도 좋다.

여태까지 보았던 이들과는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유준상이라…. 마음에 안 들어. 언니가 좋아할 만한 인물이라는 점이 특히나."

"처리할까요."

"지금은 아니야. 이번 실책은 꽤 뼈아프거든. 여기서 더 수작질해 봐야 팔롱드가에게 기회만 줄 뿐이겠지. 일단은 놔둬. 지금은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 먼저 처리해야 하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율리아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초목과 찬란한 태양.

그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짜증 날 정도로 이쁜 영지다.

전부 다 베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율리아는 창문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서둘러 눈이 내리는 영지로 돌아가고 싶은 그녀였다.

 19. 예상외의 선택지 (1)

"유준상!!"

해는 쨍쨍, 하늘은 푸르른 어느 날 오후.

로리엔 평야, 팔롱드가의 병영 복도에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외침이 얼마나 큰지 과연 이것이 인간이 낸 발성인지 짐승이 낸 발성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다.

분간이 힘든 건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지금 유준상의 이름을 외친 이는 다름 아닌 악덕 공자, 병사들 사이에선 '돼지'로 불리는 극 서부 대마수전선의 지휘관 하르도였으니.

"으아….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안 그래도 감찰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괜히 잘못 걸렸다가 봉변당한다."

"튀자. 이럴 땐 그냥 무시하는 게 최고야."

하르도의 모습에 복도에 있던 병사들이 서둘러 자리를 옮긴다.

마음 같아선 유준상 또한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콕 집어 부른 이상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준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엘, 던컨.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아, 네! 힘내세요, 준상 씨."

"고생이 많군. 모쪼록 행운을 빌지."

라엘과 던컨마저 서둘러 자리를 피하니 이제 복도에 남은 건 성큼성큼 걸어오는 하르도와 유준상이 전부…는 아니고 저 멀리서 아빠 미소를 하며 이곳을 지켜보는 아라드까지 세 명이었다.

어째서 아빠 미소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다.

당장 중요한 건 지금 쿵쾅거리며 다가오는 하르도였으니.

하르도는 유준상 앞에 서더니 잔뜩 찡그린 얼굴로 유준상을 쳐다본다.

보면 볼수록 언젠가 보았던 괴물 영화의 캐릭터가 떠오른다.

물론, 인간은 아니다.

"유준상…."

하르도는 유준상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한층 더 미간을 좁힌다.

최근 들어 잘못한 게 있나.

떠오르는 게 없다.

어쩌면 아직도 이전에 맞았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놈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악덕 공자이자 돼지인 하르도가 눈물을 뚝뚝 흘린 것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심지어 허리를 90도로 숙이기까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준상 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 살모사 같은 율리아를 저희 영지에서 내쫓아 주셨다고…!"

아, 율리아 건 때문이었구나.

이미 며칠 지난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래도 나름 공을 세웠으니 치하해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 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이야기를 해 올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만약 율리아가 작정하고 제 영지를 들쑤셨다면 저는 영락없이 가문에서 퇴출당했을 겁니다. 아라드도 이렇게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 네."

"이런 분에게 제가 얼마나 막돼 먹게 굴었던 건지…. 부디 어리석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군요."

깍듯이 존댓말까지 하면서 감사함을 표하고 용서를 구하는 하르도.

그의 행동이 그간의 행동과 너무 이질적이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자신의 눈앞의 인물이 지금까지 모두가 알고 있던 하르도가 맞는 것인가?

눈코에서 물을 줄줄 흘리는 그 모습이 과연 이게 현실인지 영화인지 더더욱 헷갈리게 한다.

'얘 괜찮은 거 맞나…?'

늑대의 피를 마셨다든지, 초짜 연금술사가 만든 포션을 먹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든지….

물론 라엘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비유.

하여간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가만히 하르도가 씨불이는 말을 듣고 있자니, 아라드가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했다.

"하르도 공자님께서 이렇게 감사를 표하고 용서를 구하기까지 나흘간 밤잠을 설치셨습니다. 오랜 숙고와 제 설득으로 이렇게 용기를 내신 겁니다."

"용기를 낸 건 이해하겠는데. 이게 밤잠을 설칠 만한 일인가요?"

"하르도 님이 부끄러움이 많으시거든요."

"병사들을 대할 땐 거침없던데요?"

"착한 일을 할 때 부끄러움을 많이 타십니다."

허탈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착한 일을 할 때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니.

삼류 빌런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성격이지 않은가.

장담컨대 게임에서 하르도는 초반부 플레이어를 괴롭히다 적당히 경험치로 승화하는 그런 캐릭터였을 거다.

아라드가 말을 이었다.

"많은 용기를 내신 만큼 한마디 해 주시죠."

어린애도 아니고.

새삼, 어째서 아라드가 아빠 미소를 하고 있었는지 이해된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 봤자, 저 눈물범벅의 얼굴을 계속 봐야 할 터.

유준상은 적당히 말했다.

"하르도 공자님은 장차 팔롱드가를 이끌어야 하실 분. 저 같은 것에게 고개를 숙여서야 그 권위가 살지 않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율리아의 부당한 언행에 저항하고 하르도 공자님과 아라드 참모장님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은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에서 응당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나서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은을 저버리는 행위였을 테죠. 그리고 하르도 님께서 이전에 저에게 했었던 언사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니 이렇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율리아가 날 건드리지 않았다면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번 사건은 어디까지나 칼트슈베르트가와 팔롱드가의 정치 싸움. 그 어디에도 외부인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

이번처럼 대놓고 사형시키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으…."

하르도는 유준상의 이야기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더더욱 거세게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는지, 물 부족 국가에 꼭 필요한 인재가 아닐까 싶다.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 하르도는 울다 말고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아라드, 당장 우리 팔롱드가의 귀중한 손님임을 나타내는 증패를 준비하도록! 어딜 가든 문제없도록 우리 팔롱드가의 후광이 준상 님을 지켜 주어야 한다!!"

그거라면 이미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하르도는 아라드에게 가문의 증패를 건네줄 것을 수차례 역설했다.

적당히 알겠다고 대답하는 아라드.

증패를 두 개나 받게 생겼다.

하나는 잃어버려도 걱정 없겠네.

아라드는 이내 유준상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좋은 보상을 챙겨 주겠다 눈짓한다.

조금 기대했다고는 하지만 굳이 챙겨 줄 필요까진 없는데.

기브앤 테이크가 확실한 아라드였다.

다다익선이라고 거절할 필요는 없지.

증패가 끝이 아니었는지, 하르도는 뒤이어 유준상에게 저녁 식사와 환대를 권유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아라드가 만류했다.

"아직 감찰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막시밀리안 공자가 아직 저희 영지에 남아 있는 이상 환대는 조금 자중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흥! 내가 그딴 약골의 눈치를 봐야겠느냐! 율리아가 없다면 그 녀석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또 한 번 나댄다면 내가 또다시 주먹 찜질을 해 주지!"

박수가 절로 나온다.

조금 전까지 울고불고 감사를 표하고 용서를 구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군.

이런 녀석을 옆에서 보좌해야 하는 아라드와 다른 시종들에게 존경심이 들려 한다.

아라드가 답했다.

"황실을 대신해 감찰을 나온 자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겠습니까. 하르도 공자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은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봅니다."

"확실히, 그렇겠군. 아무리 막시밀리안이 술독에 빠져 사는 한량이라지만 그래도 명문가의 자제. 은을 만들어 두면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있겠지."

확실히 하르도를 다루는 데 도가 튼 아라드였다.

어째서 이 병영이 저 막돼 먹은 지휘관 아래에서도 잘 굴러갔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저러니 율리아가 아라드를 노렸던 것이겠지.

아라드가 하르도를 어르고 달래며 이제 업무를 해야 한다 이야기하던 차.

하리가 다가왔다.

"불초 하리. 무례를 무릅쓰고 잠시 전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하르도 앞이라고 깍듯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허락을 구하는 하리였다.

대답한 건 아라드였다.

"무슨 일이지? 말하거라."

"칼트슈베르트가의 장남이자 이번 감찰 임무의 대리자인 막시밀리안 칼트슈베르트가 유준상 님이 계신 별장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설마 날 찾는 건가?"

"예. 막시밀리안 공자님께서 유준상 님과 꼭 대화해 보고 싶다며 제게 서둘러 준상 님을 모셔 올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 말에 하르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감찰이나 처할 것이지. 한량 주제에 감히 어디서 우리 준상 님을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한량인 건 하르도도 크게 다르지 않건만.

본래 자신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본인은 모르는 법이라고, 본인이 한량인지는 생각 못 하는 그였다.

유준상이 하리에게 물었다.

"날 찾는 이유가 있을 텐데. 딱히 이유를 알리거나 그러지는 않았나."

"제가 물었으나, 그저 간단한 대화를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라고 그러셨습니다."

그 말에 눈을 좁히는 아라드.

유준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위협이 되는 율리아가 사라졌다 한들, 막시밀리안 또한 칼트슈베르트가의 자제.

그가 유준상을 찾는다면 단순히 안면을 익힌다는 이유보단 정치적인 이유로 그를 불렀을 가능성이 컸다.

특히나 유준상은 귀족도 아닌 일개 여행객에 불과했으니, 그러할 소지가 다분했다.

아라드가 이야기했다.

"감찰은 사실상 막바지입니다. 막시밀리안과 그 일행들은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중으로 감찰을 끝내고 돌아갈 테죠. 접근하는 이유를 모르는 이상 굳이 그를 만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고 건수를 줄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유준상이다.

율리아는 그의 목숨을 노렸던 인물.

그녀의 오빠인 막시밀리안이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대균열 맞이 튜토리얼]

[히든 퀘스트 1: 또 다른 선택지]

['막시밀리안 칼트슈베르트'가 당신을 만나길 희망합니다.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더 많은 분기점을 만들어 보세요.]

[보상: 다음 퀘스트의 새로운 분기점, 500 GP]

아직 튜토리얼 3 '홀로서기' 퀘스트가 진행 중이건만.

새롭게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그것도 히든 퀘스트로.

아무래도 '막시밀리안 칼트슈베르트'에게 무언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퀘스트창이 뜰 리 없을 테니.

자세한 건 직접 만나 봐야 알겠지.

"안 그래도 궁금하던 것이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절 만나러 찾아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죠."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설령 제게 위험한 짓을 한다 할지라도 만신전의 신께서 저를 지켜 주실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별일 없길 기원하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아라드는 하르도를 데리고 복도를 떠났다.

"하리. 우리도 가지."

"옙!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유준상이 머무는 저택의 응접실.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술병을 비우며 시종이 이 저택의 주인을 데려오길 기다렸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진 않는다.

율리아가 중상모략으로 아라드와 그 유목민을 처리하려 했으니, 당사자인 그가 율리아의 혈육인 자신을 결코 좋게 생각할 리 없다.

감찰이야 황실에서 내려온 공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조하는 거지, 사적으로 만나는 것마저 어울려 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만남을 요청하는 게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기다리면서 술도 얻어 마실 수 있고.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생각한 대로 그가 '신의 사도'라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대로 더더욱 그를 숨 못 쉬게 옭아맬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어 봐야 천천히 질식사할 뿐이다.

자신도 자신의 다정한 부인과 금쪽 같은 자식도.

'어떠한 가면이 좋을까….'

똑똑해 보이는 척을 해 볼까.

아니면 훌륭한 교섭가인 척?

그것도 아니라면 막대한 부를 가진 후원가.

피식 웃음이 나오는 그였다.

술에 전 상태다.

이러한 상태에서야 어떤 가면을 쓴다 한들 술주정뱅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팔롱드가의 비호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어떠한 가면을 쓴다 한들 그 가면이 매혹적으로 다가올까.

'한심하군.'

어차피 그가 자신을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포도주병을 통째로 입에 불어 넣었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예상외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혼자 술이십니까? 많이 적적하셨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시종들에게 술친구라도 되어 주라 이야기해 놨을 텐데."

자신과 대조되는 어두운 머리카락과 눈동자.

마른 체형임에도 셔츠 위로 보이는 단단한 신체.

올곧음이 담긴 목소리.

"유준상입니다. 이렇게 칼트슈베르트가의 장남이신 막시밀리안 공자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구원자의 손처럼 보인 것은 분명 술을 많이 마신 탓일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20. 예상외의 선택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