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page04 ? 21세기의 오이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유곽인 요시와라 유곽의 자경단에서 시작한 시로베에는.
도망친 유녀를 다시 잡아오거나 유녀와 같이 도망친 남자를 죽이는 일을 맡았던 유곽의 해결사들이다.
유곽의 관례대로라면, 이번 일도 본래는 이들 시로베에가 맡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마담, 이번 일 저희한테 맡기신 거 아닙니까?"
"물론 너희한테 맡겼지, 하지만 그 아이의 입을 여는 건 너희보단 우리가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아이의 눈을 봐."
리츠카 마담이 호갑투를 낀 손가락으로 유녀를 가리켰다.
칼날을 바라보는 유녀의 눈은 여전히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깊은 내면에서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런 게 사랑에 빠진 눈이란다."
"······."
"우리 같은 것들한테는 다 부질없는 것이라 그리 말했도, 가끔 저런 아이들이 나온단다. 그래서 설령 네가 그 칼로 저 아이의 얼굴 가죽을 도려낸다고 해도 저 아이는 입을 열지 않을 거란다."
"음······."
광현이 침음성을 삼켰다.
회귀한 시간까지 더하면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다 자부하지만.
어린 시절 상처 때문에 남녀간의 감정에서는 늘 도망치기 바빴던 광현이기에 그녀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랑이란 가끔 생사를 가름하기도 하니까.'
결국 광현은 잡고 있던 유녀의 목덜미를 놓아주고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이란,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오이란!"
속박에서 풀려난 유녀가 황급히 바닥을 기어 리츠카 마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끌고 가."
"오이란!"
유녀가 리츠카 마담의 우치카케 자락을 움켜쥐기 직전, 시로베에들이 유녀의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거칠게 내실 밖으로 끌어냈다.
유녀는 마지막까지 애절하게 리츠카 마담을 불렀다. 하지만 리츠카 마담은 냉정하게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텐데, 어떻게 할래?"
"돌아가서 기별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건 안 되겠는데."
"네?"
"남자가 내실까지 들어와서 허리띠도 안 풀고 가는 건 우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거든. 안 그러니, 얘들아?"
"예!"
리츠카 마담의 물음에 유녀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조금 전 자신들의 동료가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갔음에도 그녀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아니, 그······."
광현이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감사합니다. 누님."
태현이 폴더 인사를 박아 버렸다.
"아니, 조금 전까지 바바라고······."
"누가? 어떤 새끼가! 이렇게 아름다우신 우리 누님한테 바바라니!!!"
구렁이가 담을 넘어도 이 정도로 능청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광현이 목구멍 까지 올라오는 '너 새끼요'라는 말을 억지로 삼키는 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입이 떡하고 벌어질 만큼 거한 술상이 차려졌다.
"편히 즐겨."
그 한마디를 남긴 리츠카 마담이 내실을 나가고.
"잘 먹겠습니다, 누님. 이쁜이들아, 한잔 따라 봐라."
번개처럼 자리를 잡고 앉은 태현은 어느새 유녀가 따라 주는 사케 한잔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고 있었다.
"자, 자. 너도 한잔해."
"예, 마십시다."
회귀 전, 두주불사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술이 약하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없고 주는 잔 받는 잔 인색하지 않던 광현이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목이 적당히 젖고 아랫배에서 기분 좋은 뜨뜻함이 느껴질 때쯤 태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광현아."
"예."
"군대에서 정말 그런 것도 가르쳐 주냐?"
"뭘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했던 그거."
"심문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예, 가르쳐 줍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귀찮았던 광현은 거짓말을 했다.
마치 밥먹었냐고 물어보면 안먹었는데, 먹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너, 예전에 헌병이 아니라 무반동총 어쩌고 하지 않았냐?"
"그건 주특기고요."
원래 거짓말이 꼬리를 무는 법이다.
"아, 그랬나. 그런 거 공짜로 배울 수 있으면 나도 한번 가볼까."
순간, 취기와 함께 장난끼가 발동한 광현이 말했다.
"남자라면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그리고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게 뭔데?"
"주특기로 꼭 80mm 박격포를 선택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오, 박격포. 뭔가 있어 보이네."
있어 보일 것이다.
요단강이.
그리고 어차피 태현은 군대에 갈수 없다.
'등판에 뇌신께서 떡 하니 자리 잡고 계신데 어떻게 군대를 갑니까.'
어디 그뿐인가?
태현의 엉덩이부터 허벅지로 이어지는 양쪽 다리에는 용과 호랑이가 용쟁호투(龍爭虎鬪)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십 년 후라면 병역 자원이 떨어져 문돼라고 불리는 이들까지 현역으로 집어넣지만, 지금 태현만큼 몸에 문신을 휘감고 신검을 받으면 잘해야 4급 공익근무요원이다.
그렇게 시답지 않은 농담들을 주거니 받거니, 태현이 기어이 유녀들을 끼고 방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광현은 혼자서 몇 잔을 더 하다가 벽에 기대 잠이 들었다.
* * *
광현이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사위가 막 어둑해지려 할 때였다.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나온 광현과 태현을 호출한 리츠카 마담이 곱상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 인쇄된 명함 한장을 내밀었다.
「오사카시 주오구 소에몬초.
Lucky.
Cupid.」
순서대로 호스트바의 주소, 가게이름, 예명이다.
"역시 소에몬초지."
태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에몬초.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도톰보리와 쇼핑천국인 신시바시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에 있는 소에몬초는.
도쿄에 가부키쵸가 있다면 오사카엔 소에몬초가 있다고 할 정도로 호스트 클럽들이 많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의뢰 조건에 한 가지 추가 할게 있어."
"어떤?"
"이 큐피라는 녀석, 적당히 두들기는 건 상관이 없으니까, 살려 데려와."
"직접 보시려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어떤 새끼인지 낯짝도 좀 제대로 보고 싶고, 무엇보다 살려주기로 약속했거든."
누구와 그런 약속을 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토비타신치를 나섰고.
신치를 나서기 무섭게.
"간만에 몸 좀 풀어 볼까."
"몸은 갑자기 왜요?."
"이 새끼 잡으러 가야지."
"소에몬초에요?"
"그럼 어디겠냐?"
카와구치카이의 영역은 남부.
반면 소에몬초는 북부, 그것도 중심가다.
그런 곳에 위치한 호스트 클럽을 뒤집는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되었건, 오사카 북부를 지배하는 스와베카이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회귀 전, 모든 조직의 신치를 뒤집어 놓은 것에 비하자면 양호하다 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그때처럼 조직의 손발이 묶일 수 있어.'
그렇게 되면 결과는 회귀 전과 같아진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광현은 당장이라도 소에몬초에 달려가려는 태현을 억지로 끌고 사무실로 복귀해 알아낸 것들을 지부장, 타츠 마츠요리에게 보고 했다.
광현의 보고를 받은 타츠 지부장은 지체없이 스와베카이에 연락했다.
"그쪽에서도 지난 한 달사이에 유녀 두명이 사라져서 찾고 있었단다."
스와베카이와 연락을 끝낸 지부장이 답답한 표정으로 광현을 불렀다.
"이사시, 네가 보기엔 이 일, 어떤 거 같냐?"
"제 생각에는 호스트가 야미킹과 배꼽 맞춰서 벌인 단순한 인신매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일본의 뒷세계에서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주로 빚을 진 채무자들이 그 대상이 되는데.
남자는 공사 현장으로, 여자는 업소로 팔려나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야미킹이라고 불리는 불법 사채업자가 있기 마련이다.
'악질 새끼들.'
야미킹의 수법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서 가장 악질은 호스트와 배꼽을 맞춰서 벌이는 벚꽃 따기다.
수법은 간단하다.
호스트를 좋아하지만 돈이 없는 젊고 어린 여자들을 호스트들로부터 소개받아 불법 자금을 대출해 주고 그 돈을 못 갚으면 여자들을 업소에 팔아 선불금을 받아먹는 것이다.
'예전에는 채권자들을 보험에 가입시키고 자살까지 시켰지.'
야미킹이 한창 기승을 부렸을 때는 야미킹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 중 25%가 자살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호스트를 통해 납치된 이들은 유곽의 유녀.
야미킹이 노릴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블랙업소로군. 그것도 고급으로 다가."
타츠 지부장이 씹어 뱉듯 말했다.
그 역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
답을 내는 것은 순식간 이었다.
고급 블랙업소는 한국의 비밀 클럽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됐다.
그런 곳에 유녀가 왜 필요할까?
답은 간단했다.
'평소라면 언감생심 고급 유녀를 안아볼 자격이 안 되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겠지.'
유녀는 중급만 돼도 손님을 가려받기 마련.
타유나 오이란은 말할 것도 없다.
예로 오이란을 만나기 위한 과정을 보자.
일단 오이란을 만나기 위해서 손님은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 까다로운 검증 과정을 거치면 손님은 드디어 오이란과 대면하게 되는데, 첫 만남에 허용되는 것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술 한 잔 마시는 것뿐이다.
비용은 200만 엔.
한화 이천만 원.
두 번째 만남은 조금 더 가까이, 세 번째 만남에 이르러서야 손님은 드디어 오이란과 말을 섞을 수 있다.
당연히 만날 때마다 들어가는 돈은 별도다.
이후에도 단골비에 만날 때마다 들어가는 화대까지 생각하면.
웬만한 부자가 아닌 이상 오이란과의 만남이란 집안 기둥뿌리 뽑아 먹기 딱 좋은 패가망신 테크다.
그리고 이 과정들 중간에 오이란의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말짱 황이다.
타유 역시 오이란만큼은 아니었지만 결코 쉽게 안아 볼 수 있는 유녀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타유급을 복잡한 절차 없이 100만 엔 정도에 바로 안을 수 있다면, 값을 치를 이는 널리고 널렸다.
'왜 그러는지, 죽었다 깨어난 지금도 이해가 안되지만.'
회귀 전에도 견습 유녀가 정식 유녀가 될 때 자신의 손녀뻘인 유녀의 머리를 올려 주겠다며(첫 경험) 수억 엔을 싸들고 토비타신치로 몰려든 이들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보니 그치들, 다들 한가락한다는 이들이었지.'
그런 이들이 악다구니와 이전투구를 벌여 얻으려는 것이 고작해야 어린 유녀의 첫날밤이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욕지기가 올라왔다.
"블랙업소면 뒤를 봐주는 조직이 있다는 거겠지."
"자세한 건 스와베 쪽에서 호스트를 잡아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타츠 지부장은 속이 타는 듯 사무실 한편에 놓인 장식장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냈다.
일본 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케를 생각하는데, 사케 못지않게 대중적으로 유명한 것이 재패니스 위스키로 알려진 일본산 위스키 였다.
딱 봐도 도수가 40도가 넘는 독한 술임에도 그는 글라스잔에 가득 채워 단번에 털어 넣었다.
'저러니······.'
속으로 혀를 찬 광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건강을 생각하셔서 술은······."
"치아라, 살 만큼 살았다. 우리 선배들은 '내 나이 스물셋, 너무 오래 살았다'라고 하셨지 않냐. 이 바닥에서 서른이 넘었으니 나 정도면 장수한거야."
"그건······."
「내 나이 스물셋, 너무 오래 살았다.」
는.
에도시대 <가부키모노> 또는 <마츠얏코>라 불리는 야쿠자의 두 기원 중 하나의 표어다.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인생 막 살다 가겠다는 말이다.
그의 음주를 막지 못한 광현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사무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왔나 보군.'
11화
page05 ? 얏카이모노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무실 밖으로 나온 지부장과 광현이 마주한 것은, 부하들과 대치하고 있는 일단의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태현과 한 사내가 있었다.
"그 하와이안 셔츠 안 춥냐? 대가리는 또 그게 뭐냐?"
"이 우츠쿠시한 퐁파드를 몰라보다니, 역시 촌놈은 어쩔 수 없다니까."
하와이안 셔츠의 태현도 태현이었지만 태현과 맞서는 사내의 복장도 만만치 않았다.
'특공복이라.'
특공복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주로 폭주족들이 입고 다니는 원피스형 코트로.
그의 코트 뒤에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도리는 법을 이기지 못하고, 법은 권위 아래에 있으며, 권위는 천하를 꺾지 못한다는 뜻으로, 일본 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 다이난공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전투 때마다 들고 다닌 문장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다이고 카즈오.
스와베카이의 차세대 에이스인 그는, 특공복이 말해 주듯 폭주족 출신으로.
모시고 있던 형님이 스와베카이의 와카가시라(부회장)에 오르면서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지부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이난공의 말년처럼 그의 말년 역시······.
'좋지 않았지.'
스와베카이가 해산되고, 그 과정에 그는······.
'수년 후이긴 하지만 스와베카이의 해산에는 우리 조직이 깊게 연관되어 있지. 그것도 우오누마가······.'
하지만 광현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서로를 향해 달려들 듯 기 싸움을 벌이는 다이고와 태현을 떨어트려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조직에 들어온 시기도 비슷하고, 관리 영역도 붙어 있어 두 사람은 앙숙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데려와."
다이고의 손짓에 스와베카이 조직원들이 만신창이가 된 사내 몇을 끌고 왔다.
그들이 누군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건과 관련된 호스트들.
"아우, 무식한 새끼들. 사람을 무슨 모찌(떡)로 만들어 놨네."
호스트들의 상태를 살펴본 태현이 혀를 찼다.
그 말대로 호스트들의 상태는 초주검 이외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특히 얼굴을 집중적으로 박살 내놔서 다시는 호스트로 활동하기 힘들 것 같았다.
"지들 세숫대야가 엉망이라고 남의 세숫대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놈들이 어디 있냐?"
"사돈 남 말하고 있네."
"나 정도면 미남이지, 이 폭주족 양아치 새끼야."
"뭐래, 생긴건 꼭 한야가 씹다 버린 삐삐같이 생긴 한국 놈이. 죽고 싶냐?"
한야는 일본 귀신이고 삐삐는 삘기, 삘구 등으로 불린 띠의 어린 이삭이다.
껍질을 까면 하얀 속살이 나오는데, 이걸 씹으면 껌같이 되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아이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많이 뽑아 먹었다.
즉, 다이고의 말은 태현이 귀신이 씹다 버린 풀떼기같이 생겼다는 말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태현이 발끈해서 카즈오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마츠요리 지부장이 적절히 나서 둘 사이를 뜯어 놓았다.
"그만, 예전이야 어쨌든 지금은 지부장이시다. 예의를 지켜 마사오카. 그리고 다이고 지부장께서도 그만하시지요."
"알겠습니다. 타츠 지부장님."
"그러죠."
결국 둘은 화장실 갔다 밑 안 닦고 온 표정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아내신 게 있습니까."
타츠 지부장의 물음에 다이고가 답했다.
"이 새끼들······."
스와베카이가 호스트를 족쳐 알아낸 것은, 대부분 광현과 타츠 지부장이 예상했던 것이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블랙업소 뒤에 있는 조직이,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 사단을 낸게 치마라는 겁니까?"
타츠 지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저도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지 뭡니까."
"도련님들이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하셨구만."
치마는 한국으로 치면 일진(一陣)과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보통 일진들은 불우한 가정 출신들, 후일 도요코 키즈로 대표되는 학교 밖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치마는 주로 상류층 자제들이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치마를 수백 년 전 에도 시대, <마츠얏코>들과 세력 싸움을 벌였던 <하타모토얏코>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츠얏코가 서민 출신인 반면, 하타모토얏코는 사무라이 집안의 두셋째들로 구성됐었으니까.
'수백 년이 지나도 비슷한 놈들이 생기는 걸 보면, 인간사 돌고 돌아 거기서 거기라는 말만큼 진리인 말이 없다니까.'
문제는 일진들이 성인이 되면 먹고 살기 위해 야쿠자, 폭주족 등으로 진화(?)하는 것과 달리 치마들은 늦으면 이십 대 중반까지도 제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사고를 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것도 그런 놈들이고.
'거기다 교토 출신들이라면 유녀들을 탐내는 것도 이해가 되지.'
공식적으로 1,2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는 아직도 옛 화족(일본 귀족) 출신 집안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들 중에 일부는 유달리 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다.
'게이샤를 첩으로 들어 앉히고, 유녀의 단골이 되는 게 무슨 자랑이고 전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전통의 계승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게이샤들의 세가 강하다 보니 유녀들 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고 그 적은 수의 유녀들로는 수요가 감당이 안 되기 마련.
근처 오사카로 오면 되지 않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오사카와 교토의 관계를 모르는 이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사카와 교토는 수백 년 동안 서로가 서로를 극혐했다.
'한국의 지역 감정은 오사카와 교토의 감정에 비하자면 귀여운 수준이지.'
그런 이유로 교토의 사내가 오사카의 유곽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오이란은 고사하고 재수 없으면 하급 유녀한테도 거절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오사카 유녀, 그것도 타유급을 안을 수 있다면.
'훈도시 바람으로 달려올 원숭이 새끼들이 차고 넘칠테지.'
다이고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아보니까, 이 새끼들 고등학생 때부터 질이 아주 안 좋기로 유명했더라고요. 집안 뒷배 믿고 이런저런 사고 치다가 결국에는 약물까지 손대서 절연까지 당한 놈들이 있질 않나, 애들 납치할 때도 아마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녀들이, 무기력하게 끌려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손님으로 있을 때야 고분고분하지, 유녀들 한 성질 하잖아요."
남들은 무서워도 말도 못 거는 조직원들에게도 서슴없이 농담을 건네고 장난을 칠 만큼 대가 센 여자들이 유녀들이다.
"그것들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면 계속해서 약물을 쓰고 있을 테니, 애들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구해야 될 겁니다. 어떻게, 저희 쪽에서 마무리할까요?"
"무슨 소리야. 마무리는 우리가 해야지. 안 그래? 이사시."
마무리를 한다는 말에 발끈하고 나선 태현이 광현을 불렀다.
광현의 입장에서야 손 안 대고 코 풀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 생각했지만, 여기서 태현의 편을 들지 않으면 뒷감당이 피곤해질 수 있었기에, 도살장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무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다이고 지부장님."
"오, 네가 이사시냐? 듣던 대로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네."
회귀 전, 광현이었다면 기생오라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고노야로(이 자식이)'부터 튀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광현의 속은 삼십 년 이상,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늙은 생강.
이런 우습지도 않은 도발은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었다.
"지부장님도 남자답게 생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타친보들이 형님을 그렇게 좋아한다지요?"
"큭."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현이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다이고가 신입 시절, 빈약한 주머니 때문에 타친보(거리 여성)를 찾아갔다가 각목 통수를 얻어맞고, 팬티를 제외한 모든 것이 털린 일은 이 바닥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입심이 장난 아니네?"
"칭찬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아무튼, 밑에 애들한테서 네 이야기가 자주 들리더라. 나중에 자리 한번 마련할 테니까, 한잔 어때? 내가 투자에 관심이 좀 있어서."
광현은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언의 거절.
"쳇, 재미없는 녀석."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다이고는 부하들과 함께 특공복을 휘날리며 멀어졌고, 그 모습을 지켜본 지부장 타츠 마츠요리는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광현을 바라보았다.
* * *
"어쨌든 애새끼들이니까, 될 수 있으면 칼질 하지 말고, 팰 때도 괜히 대가리 같은데 잘못 까면 골치 아파지니까. 팔다리 위주로 조져,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형님."
"말은. 그리고 말이야. 우리가 그래도 명색이 고쿠도(야쿠자들이 자신을 칭하는 말)인데 애새끼들한테 다쳐서······."
승합차 네 대에 조직원들을 나눠 싣고 치마 조직이 운영하는 블랙업소로 가는 길.
태현은 승합차에 탄 조직원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본인은 기강을 잡는 것이라 말하지만, 당하는 조직원들 입장에서는 요즘 말로 꼰머(꼰대)질일 뿐이었다.
'박복한 녀석들.'
재수 없이 첫 번째 차에 타는 바람에 가는 내내 태현을 상대해야 할 조직원들에게 명복을 빌어준 광현은 그 사이 핸드폰 문자로 전송된 치마 조직에 대한 정보를 숙지해 나갔다.
'원래는 태현 형님이 했어야 할 일인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광현이 처리하고 있었다.
'무슨 짬처리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녀석들이 있는 곳은 교토부 오토쿠니군 오야마자키정의 삼 층짜리 건물.
정은 한국으로 치면 읍 정도의 행정구역이라고 보면 됐다.
조직의 이름은 대일본교룡회.
'이십 대가 되고도 치유되지 않은 중2병 환자들이 지을 만한 이름이군.'
교룡은 이무기다.
아무튼 이 웃기지도 않는 이름의 치마 조직의 회장은 5대 쓰지 마사노리.
이시카화현에서 제법 탄탄한 숯 관련 기업을 운영하는 집안의 둘째.
집안의 재력 덕에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나와 교토대학에 진학했지만, 이런저런 사고를 하도 많이 쳐서 지금은 집안에서 반쯤 내놓은 자식이었다.
교룡회 다른 멤버들의 상황도 대부분 녀석과 비슷했다.
'현대판 얏카이모노들이라 이거군.'
얏카이모노(厄介者)란 원래 에도시대 사무라이 집안의 두세째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전란이 없는 평화의 시대, 재산을 상속받지 못해 일가를 이룰 수 없는 사무라이 집안의 두세째들은 없느니만 못한 존재.
그리고 이런 이들이 거리로 나와 만들어진 것이 에도시대 두 골칫거리 중 하나인 하타모토얏코였다.
그리고 작금 얏카이모노는 회사나 사회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들을 싸잡아 부르는 멸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광현이 대일본교룡회의 멤버들에 관한 정보를 살펴보고 있던 사이 그와 조직원들을 태운 승합차는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주변에 인가라고는 없는 시골 공터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삼층짜리 건물.
기습 같은 것이 가능할 리 없었고, 기습을 할 마음도 없었다.
끼이익.
흙먼지를 피워 올린 승합차가 멈춰 서기 무섭게 각목과 야구방망이 같은 각종 둔기로 무장한 조직원들이 뛰어내렸다.
건물 마당에서 경계를 서던 대일본교룡회의 멤버 서넛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손을 양복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광현은 조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자, 드가자."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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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뭐야?"
경계를 서던 대일본교룡회 멤버들이 어설프게 조직원들을 막아섰지만, 그들에게 쏟아진 것은 걸쭉한 욕설과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고쿠도다. 애송이 새끼들 죽었다고 복창해라."
"어린 놈의 새끼들이, 감히 겁도 없이 우리 구역에서 분탕질을 쳐."
퍽! 퍼퍽!
"아아악!"
"시끄러, 이 새끼야!"
순식간에 경계조를 해치운 조직원들은 건물의 현관을 거의 철거 수준으로 때려 부수며 길을 열었다.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 광현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원래는 좀 더 우아하게 제압하려고 했는데.'
원래 광현은 회귀 전 읽었던 미합중국 해군특수전개발단 SEAL 6팀, 통칭 데브그루 전역자들이 펴낸 책들을 바탕으로 꽤 그럴듯한 CQB 작전을 구상했다.
작전의 골자는 일단 광현을 중심으로 한 최정예 조직원들이 건물 뒤쪽으로 침입.
경계를 제압하고 유녀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안팎에서 적을 무너트리는 아주 정석적인 양동작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광현의 조직원들은 데브그루도 SEAL도 아니라는 것.
육체 능력도 육체 능력이었지만······.
작전을 수행할 지능마저 저열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믿고 있던 태현도.
"뒤로 습격해서 다 때려 잡으면 되는 거야?"
이러고 있었으니, 광현의 계획은 머릿속에서 자체 폐기됐다.
제갈량이 아무리 좋은 작전을 세워도 그것을 실행하는 장수가 등산왕 마속이면 답이 없기 마련이다.
결국 광현은.
'심플 이스 베스트.'
적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빠르게 치고들어가 순식간에 끝장내 버린다는 단순 무식 깔끔한 작전을 선택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회귀 전, 카와구치카이는 야쿠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교룡회와의 싸움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유는 당시 조직원을 이끌었던 태현이 바로 적을 들이치지 않고, 건물을 포위한 채 항복하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무슨 공성전 하냐고.'
태현이 왜 그랬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형님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명색이 고쿠도인데. 이제 십 대 후반, 잘해야 이십 대 초반인 애들과 드잡이질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겠지.'
하지만 애초에 말로 해서 들을 상대였다면 조직의 영역에서 유녀를 빼내겠다는 정신나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현의 행동은 교룡회가 대비할 시간만 줬고, 예상치 못한 피해를 야기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광현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 마뜩잖아하는 태현을 설득해 속전속결로 습격작전을 끝내기로 합의를 봤다.
"야쿠자다! 야쿠자 새끼들이 쳐들어왔다. 막아!"
"쓰레기 같은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갑작스러운 습격에 불붙은 꼬챙이로 쑤셔 놓은 개미집처럼, 건물 곳곳에서 교룡회 멤버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던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애새끼들이 조직원들의 상대가 될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발군은 누가 뭐라고 해도 태현이었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아 아가리 악물어라, 이빨 나간다."
태현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싸움판을 헤집고 다녔다.
덕분에 광현은 바짓단에 찔러 넣은 주먹을 꺼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종종 광현에게 달려드는 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놈들은 예외없이 중간에서 태현손에 묵사발이 났다.
교룡회 전체 멤버는 오십여 명, 그중 삼 분지 이에 가까운 마흔 명 가까이가 건물 바닥에 누기까지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반면 스물이 조금 넘는 카와구치카이의 멤버들은 대부분 멀쩡했다.
다친 조직원도 잘해야 껍질에 생긴 기스가 전부.
막말로 침 바르면 나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회귀 전, 교룡회와의 싸움 이후 병동이나 마찬가지였던 사무실을 기억하는 광현으로서는 그때 조직원을 이끌었던 태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정도는 남아서 이놈들 정리하고, 카메라 있는 놈들하고 나머지는 위로 올라가서 여자들 확인해. 아마 방마다 갇혀 있을 거야. 그리고 이상한 아저씨들 같이 있으면 사진 찍는 거 잊지 말고, 적당히 패고."
"예, 알겠습니다."
주차장에 서 있던 몇 대의 고급 승용차를 생각하면······.
'벌써 고객을 받았다는 거겠지.'
생각 같아서는 곤죽을 만들어 버리라고 지시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뒷감당이 안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조직원들이 윗층으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광현은 쓰러진 교룡회 멤버들을 훑어보았다.
교룡회의 회장 쓰지 마사노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안 보이는 군.'
하지만 쓰러진 놈들 중에 쓰지 마사노리는 보이지 않았다.
목표물이 없는 것을 확인한 광현은 대신 간부로 보이는 놈에게 다가갔다.
'오른쪽 정강뼈가 잘못됐나 보군.'
오른쪽 다리를 잡고 끙끙거리는 녀석을 잠시 내려다보던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힘껏 지르밟았다.
"악, 커허억."
부러졌든 금이 갔든, 잘못된 뼈에 충격을 주면 그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기 마련이다.
지금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리는 것뿐이었다.
잠시 뒤, 발에서 힘을 뺀 광현이 물었다.
"야, 너 지렁이회 간부지?"
"······."
"대답 안 하면 다시 밟는다."
"우, 우린 교룡······."
"교룡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들이 이무기면 장어도 용이겠다. 이 어린놈의 새끼들아."
"아악!"
광현은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을 줬다가 뺏다.
"우리가 왜 왔는지는 알 것이고, 니들 대가리 어디 있냐?"
"누구?"
"쓰지 마사노리 말이야."
"이놈, 회장님께 무슨 짓을 하려고!"
"무슨 짓은 니들이 했지, 감히 우리 영역에서 우리 보호를 받는 유녀를 납치해? 내가 그 새끼 배때기를 갈라서 간덩이가 얼마나 부었는지 직접 확인해 볼 참이니까, 테스트로 니 배때기 먼저 가르기 전에 그 새끼 어디 있는지부터 말해."
"감히 폭력단 따위가 회장님을."
"감히? 불량써클 대가리가 뭐가 잘나서감히는 감히야."
"아니야 회장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살벌한 눈으로 광현을 쏘아 보던 간부가 악다구니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회장님은 신 일본제국의 총리대신이 될 귀하신 분이시다. 감히 너희 같은 폭력단 따위가 함부로 할 분이 아니란 말이다."
"······."
생각지도 못한 악다구니의 내용에 광현은 순간 할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광현뿐만이 아니었다.
조직원 대부분이 하던 것을 멈추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 미친 게 지금 뭐라는 거냐?"
교룡회 조직원 중 하나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끌고 오던 태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저라고 알겠습니까."
광현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이 난 녀석이 마구 떠들어 댔다.
"우리는 천황폐하를 교토로 다시 모실 것이고, 신 대정봉환을 이뤄 지금의 정부와 영미귀축놈들이 불법적으로 빼앗아간 폐하의 권력을 다시 찾아드릴 것이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정부가 위임하던 권력을 천황에게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본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어디서 비슷한 소리를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그렇다.
녀석의 말은 메이지유신을 일으켰던 유신지사들이 명분으로 내걸었던 말과 똑같았다.
'그런데 정작 지금 왕 할아버지, 그거 그다지 바라시지 않으실 텐데······.'
작금 일본의 국왕은 평화를 사랑하고 일본의 우경화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친한적인 행보는 덤이고.
"니들이 무슨 유신지사냐?"
광현의 물음에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신일본제국의 새로운 유신지사 들이다."
"유녀들 납치해서, 블랙업소나 운영하는 니들이?"
"그건 대업을 위한 선거 자금과 인맥을 모으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 이었어."
"처녀가 애를 베도 변명거리가 있다더니."
"우리는······케엑."
퍼억!
"뭐 이런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어."
녀석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듣다못한 태현이 녀석의 주둥이를 싸커 킥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얼마나 세게 걷어찼는지 부서진 이빨이 한겨울 싸락눈처럼 휘날렸다.
"유신? 신 일본제국? 개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그런 게 먹히겠냐."
하지만 광현은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새로운 유신, 새로운 대정봉환.
지금이야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십 년 후에는 그렇지 않을 확률도 있었다.
대략 십여 년후.
'공용방송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당이 생긴다.
그들이 펼친 기행은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든데.
굵직한 것만 뽑아 보자면.
공영방송에 대고 당대표라는 사람이 '불륜, 노상X, (검열삭제)'를 외쳐대지 않나.
선거 광고판을 돈을 받고 팔아 먹질 않나.
그중에서도 가장 어이가 없었던 것은 당의 중진이 '자위대를 동원해 독도를 빼앗자'라는 미친 소리를 해댔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이 녀석들의 주장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정봉환이나, 메이지유신 같은 것은.
'우익들이 빨아주기도 좋지.'
그때, 이 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소란스러워졌다.
"비켜! 죽기 싫으면 비키라고, 이 야쿠자 새끼들아."
거친 고함과 함께 조직원 몇 명이 누군가에게 떠밀려 구르듯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워우."
그들의 모습을 본 광현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고 말았다.
그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먼저 흰 호텔 가운을 입은 사십 대 이상 중늙은이들은.
'유녀를 안기 위해 온 발정 난 개새끼들일 것이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검은 옷은 개새끼들이 데려온 요짐보(경호원).
문제는 맨 앞에 선 다섯 명.
딱 봐도 교룡회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그들은 하나같이 일본도라 불리는 카타나를 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아무래도 니가 볼일 있다는 애가 쟤인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형님이 대신 면담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미쳤냐? 죽어도 시신은 온전히 남기고 싶거든. 반갈죽은 사양이야."
카타나를 든 교룡회 멤버들의 중심, 그가 있었다.
대일본교룡회의 회장이자 이 사단을 일으킨 원흉.
쓰지 마사노리.
무슨 짓을 하다가 나왔는지 훈도시(일본 전통 팬티), 그것도 강렬한 붉은색의 뭇코 훈도시 하나만 딸랑 걸치고 나온 녀석의 손에는.
오오타치라 불리는 대태도가 들려 있었다.
대태도는 날길이만 1미터, 긴 것은 3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칼이다.
녀석의 것은 얼추 1미터 후반대.
훈도시만 입은 변태가 제 키보다 큰 칼을 들고 망나니 춤을 추고 있으니, 아무리 내일이 없는 인생을 사는 조직원들이라도 기겁을 할 수밖에.
그렇게 광현과 태현이 난감해하고 있는 사이.
대태도를 앞세운 쓰지 마사노리가 격노한 목소리로 핏대를 세웠다.
"이 쓰레기 같은 야쿠자 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내 친히 이 칼로 목을 베어 네놈들의 죄를 묻겠다."
녀석의 말을 들은 태현이 광현에게 속삭였다.
"여기 애들 다들 한 작대기씩 했나 봐."
"그러게요."
그 작대기가 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딱 봐도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광현이 말했다.
"야, 니가 대일본지렁인지 장어인지 하는 애들 오야붕이라는 쓰지 마사노리냐."
"대일본교룡회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난 카와구치카이 이사시 고······."
"잠깐."
녀석이 광현의 말을 자르더니 칼끝으로 광현을 가리켰다.
"네놈, 주고엔 고짓센 해 봐."
툭.
순간 광현은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끊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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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용의 목 아래 거꾸로 난 이 비닐은 용의 약점으로 건드리면 반드시 용의 화를 부른다고 전해진다.
쥬고엔 고짓센.
15엔 50전.
언뜻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이 단어는 재일교포들에게는 역린과 같은 단어였다.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후일 관동대지진이라 불릴 거대한 지진이 일본 간토 지방(사이타마, 치바, 도쿄, 가나가와)을 덮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초토화된 그곳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있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와 폭탄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너무나 악의적인 유언비어.
이 유언비어들은 곧 신문에 기사화되었고, 처참한 결과를 불러왔다.
자경단과 경찰, 군인에 의한 조선인 대학살.
그리고 이때 대학살을 벌였던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단어가.
쥬고엔 고짓센 이다.
일본어 음운에는 요음, 탁음, 반탁음, 촉음, 장음 등이 있는데.
이중 한국인은 탁음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한국어의 단어에는 성대가 떨리는 유성음인 탁음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거의 없기 때문이지.'
그리고 쥬고엔 고짓센은 대표적인 탁음으로 시작하는 단어였다.
'야 조센진 쥬고엔 고짓센 해봐.'
교포라면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더러웠던 기억.
비록 작은 악의에 불과했지만, 그 악의가 모여 어떤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교포 출신들에게 쥬고엔 고짓센이라는 단어는 역린 알 수밖에 없었다.
"너 뭐라 그랬냐? 이 섬숭이 새끼야."
가장 먼저 태현이 발끈해 나섰다.
그는 당장에라도 쓰지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역시 네놈들은 후테이센진이었어."
후 테 이센진(不逞鮮人),
불령선인, 식민지 일본에 대항하던 애국지사들을 일본이 부르던 말이다.
쥬고엔 고짓센에 이어 후테이센진까지.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유녀들 구하러 왔다가 별, 미친."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태현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스릉.
키리츠케를 뽑아든 광현이 앞으로 나서며 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님 칼 좀 빌려주시죠."
"네 것 있잖아. 그리고 뭐에 쓰게."
"저거 막고 저 자식 갈아 버리려면 한 자루 만으론 부족할 것 같아서요."
광현이 턱으로 쓰지가 들고 있는 대태도를 가리켰다.
"뭐? 너 설마 저거랑 일대일로 붙으려는건 아니지? 그냥 다구리를 놓자."
"그러다 애들 상하면요."
광현의 물음에 태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대태도는 크기가 크기인 만큼 무게 역시 만만치 않다.
그걸 들고 버틴다는 것은 적어도 힘 하나만큼은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저놈들.'
쓰지를 호위하고 있는 카타나를 든 호위들의 전투력은 한눈에 보기에도 바닥을 구르고 있는 기존의 조직원들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저런 놈들에게 시간까지 줬으니.'
회귀 전 조직의 피해가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현의 키리츠케를 넘겨받은 광현은 칼끝으로 쓰지를 가리켰다.
"야, 잔챙이들 치우고 한판 붙자."
"하 감히 후테이센진 주제에 일기토를 신청하는 건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일본에서 만든 게임 삼국지 덕분에 일기토가 중국식 표현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 일기토는 일본식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일대일 대결을 보통 '단도(單挑)', 한국에서는 '단기접전'이라 표현한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광현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광현은 그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건넸다.
"네가 이기면 우리는 유녀들만 데리고 조용히 빠진다. 근데 내가 이기면 네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알아서 생각해."
말없이 광현을 바라보던 쓰지가 답했다.
"후회하지 마라. 후테이센진."
대부분 부하들이 쓰러져 바닥을 구르고 있는 상황에서 광현이 내건 조건은 쓰지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네가 죽으면 네 동료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할 건가 후테이센진."
"이 새끼가 말끝마다 후테이센진이야. 형님."
광현이 태현을 불렀다.
"만약 제가 저놈과 싸우다 죽거나 다쳐도 약속은 지켜주십시오."
"광현아."
"형님!"
"하아, 그래 알았다. 다들 뭐해 뒤로 물러."
태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 조직원들을 뒤로 물려 두 사람이 충분히 싸울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됐지, 들어와 이 쪽발이 새끼야."
휘릭.
키리츠케 한 자루를 역수로 고쳐잡은 광현이 쓰지를 도발했다.
"시네(죽어)."
광현의 도발에 화가 난 쓰지가 양손으로 대태도를 움켜쥐고 휘둘렀다.
부웅~!
육중하고 거대한 대태도가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그 안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반으로 갈릴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설령 그것이 사람의 몸뚱이라도.
그래서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광현이 대태도의 사정권 밖으로 물러나 싸움을 이어 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광현은 오히려 키리츠케를 들어 대태도를 마주해 나갔다.
"광현아."
그 모습에 깜짝 놀란 태현이 소리쳤다.
손잡이까지 더하면 이미터가 넘는 대태도.
고작해야 삼십 센티미터 남짓의 키리츠케로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찌어찌 칼날은 부딪칠 수 있다고 쳐도.
날끼리 부딪치는 순간 전해질 대태도의 무게와 역도를 손목이 버티지 못한다면 칼이 밀리거나 막말로 깨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남은 것은······.'
"으악."
"형님."
곧 눈앞에 벌어질 끔찍한 참상에 일부는 미리 고개를 돌리거나 비명을 질렀다.
창~!
가가각!
"큭."
날과 날이 부딪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기이한 파열음과 함께 신음을 터트린 것은 광현이 아니라 쓰지였다.
"말도 안 돼."
걸리는 모든 것을 갈라버릴 것 같던 대태도가, 자신에 비하자면 이쑤시개나 다름없는 키리츠케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태도에 담긴 쓰지의 힘이 약했거나 마지막 순간 힘을 뺐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광현의 키리츠케가 대태도를 삼분지 일이나 파먹고 들어가지 못했을 테니까.
"팔심이 얼마나 센 거야."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대태도가 강도 면에서 스테인리스 스틸에 비해 무르다고 해도, 쇠가 쇠를 파먹을 정도의 힘을 한팔로 견딘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놈의 힘이.'
파르라니 깎은 쓰지의 정수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익, 고노 바캐모노가.(이 괴물이!)"
쓰지가 키리츠케에 물린 대태도를 빼내려고 했지만, 광현의 키리츠케는 마치 자물쇠라도 된 듯 대태도를 물고 놓아 주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힘이라니까.'
회귀 이후 광현의 기억력과 체력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아졌다.
회귀 전이었다면 좋아진 체력으로 태현과 같이 스프랜드 도장 깨기 같은 바보짓을 했겠지만······.'
회귀 전, 즐길만한 건 대부분 원 없이 즐겨본 광현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몇 달간 광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관찰하고 수련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또 한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격한 움직임, 예를 들어 싸움에 임하거나 과한 운동을 할 때면 마치 주변환경이 느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돌연변이 거미에 물린 할리우드영화의 주인공이 싸움에서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발달한 감각으로 아예 다른 시간을 사는 것 같은 초월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만, 광현은 남들보다 한호흡 정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광현은 날아오는 대태도를 키리츠케로 막아내는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선보였다.
"이익."
여전히 키리츠케에서 붙잡혀 있는 자신의 태도를 빼내기 위해, 용을 쓰는 쓰지를 바라보던 광현이 움직였다.
쉐엑.
순간 바람을 가르는 경쾌한 파공성과 함께 광현의 다른 손에 뻗어 나온 한줄기 푸른 선이 쓰지의 어깨를 아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내 어깨가."
대태도의 손잡이까지 놓아 버리고 어깨를 감싸 쥔 역린 알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비명만 들으면 팔이 떨어져 나간 수준.
하지만 실제 광현이 입힌 상처는 길지만 깊지 않은 가벼운 상처에 불과했다.
면도칼에 조금 깊게 베인 정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저 정도로 처절한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너 설마 칼 처음 맞아 보냐? 아니 제대로 맞아 본 적은 있어?"
광현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치마가 아무리 도련님 조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름 불량써클인데, 제대로 맞아 본 적도 없을까?
하지만 쓰지는 대답 대신 악에 받친 목소리로 악다구니를 쏟아내기 바빴다.
"아악, 이 후테이센진놈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이놈!"
그러나 그 행동은 불난 집에 부채질, 아니 가스통을 던지는 미친 짓이었다.
"오냐, 형이 네 가죽에 잊지 못할 교훈을 새겨줄게."
쉐엑.
쉬익.
쓰지가 놓아 버린 태도를 털어버린 광현이 본격적으로 두 자루 키리츠케를 놀리기 시작했다.
마치 칼춤을 추듯.
현란하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두줄기 푸른 섬광이 얼굴과 목을 제외한 쓰지의 전신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쓰지의 몸에는 붉은 혈선이 하나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반격?
온몸의 살을 면도칼로 발라내는 듯한 고통에 반격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것과.
이 고통의 시간이 제발 빨리 지나가기를 신께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크아악."
"아아아악!"
수백 개의 얇고 긴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인해 목과 얼굴을 제외한 쓰지의 전신이 입고 있는 뭇코 훈도시와 같은 색깔이 되기까지는 숨 한번 돌릴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켁."
광현이 칼을 거뒀을 때 모로 넘어진 쓰지의 몰골은 만신창이.
마치 철부지가 커터칼로 난도질해놓은 사람모양의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주, 죽은 거 아니지?"
태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쓰지의 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광현이 말했다.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습니다. 형님. 쇼크로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잖아."
"에이 이 정도로 무슨 과다출혈이에요. 거기다 이거 보세요."
광현이 처음 베었던 쓰지의 어깨를 가리켰다.
얼마나 정교하고 예리하게 칼을 썼는지, 상처는 벌써 출혈을 멈춘 상태였다.
"포를 뜬 것도 아니고 얕게 벤 거예요. 이 정도로 사람 안 죽어요."
옛 중국에는 능지처참이라고 해서 죄인을 포 떠서 죽이는 형벌이 있었다.
그때 평균 사오백 번, 어떤 이는 삼천 번 포를 뜨고도 목숨을 붙어 있었다 하니.
허망하기도 하지만 또 질기디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라 하겠다.
쓰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광현이 여전히 카타나를 세우고 있는 조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거, 안 내려 놓냐."
탱그랑.
녀석들이 카타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어서 광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샤워가운을 입고 있는 중 늙은이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호위하는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을 마뜩잖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광현이 말했다.
"뭐 하세요. 벗으세요."
14화
page05 ? 얏카이모노
"에이 씨. 더러워서 내가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때려치우고 뭐 다른 할 일은 있고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진짜 그만둔대?"
뒷정리가 한창인 교룡회의 건물 앞.
계단에 걸터앉아 품속에서 담배를 꺼낸 광현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툴툴거리는 태현에게 불붙인 담배 한 개비를 물려 주었다.
"유녀들은요?"
"상태가 좀 안 좋은 애들은 있는데, 손 못 쓸 정도로 맛이 간 애들은 없어. 마담 쪽에서 다른 신치들하고 이야기해서 재활할 수 있는 애들은 재활, 은퇴할 애들은 은퇴시킨다니까 믿고 맡겨야지."
대부분이 폐인이 되었던 회귀 전에 비하자면 준수한 성과였다.
"아저씨들은요?"
"며칠 내로 돈 가지고 오기로 했어. 돈 받으면 원본 필름하고 사진 돌려 주기로 했고."
"진짜로 돌려줄 건 아니죠?"
"미쳤냐? 에휴, 이런 폭주족들이나 할 짓 하자고 고쿠도가 된 건 아닌데."
"어쩌겠어요. 뒤탈 안 나려면 이게 제일인데. 그라비아다, 생각하시고 가끔 꺼내 보세요."
"그라비아는 니기미, 씨."
태현이 치를 떨었다.
광현이 잘 보관하라고 하는 사진은 발정난 아저씨들과 교룡회 멤버들이 벌거벗은 상태로 온갖 변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굴욕 사진이었다.
굴욕 사진은 원래 7~80년대 폭주족들이 상대 조직의 간부를 잡아다 고문하고 돈을 갈취할 때 쓰던 방법으로, 체면과 명예를 잃느니 목숨을 내놓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일본에서 뒤탈을 예방하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사진을 미끼로 돈 많은 아저씨들을 뜯어먹는 건 덤이었다.
'우리도 나름 고급 인력인데, 인건비 정도는 챙겨야지.'
소소한 문제가 있다면 원하지 않는 덜렁 쇼(?)를 구경한 태현과 조직원 몇이 한동안 PTSD에 시달릴 것이라는 것 정도······.
'이번 일로 위에서 용돈 좀 나올 테니, 그 돈으로 좋아하는 소프나 헬스 원 없이 보내주면 금방 떨쳐내겠지.'
일본에서 헬스라는 단어는 패션헬스라는 업소를 가리킨다.
몸 좀 만들었다고 일본인 친구에게.
'나 매일 헬스해.'
라고 말하면 나 매일 업소 간다고 자랑하는 미친놈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
"내가 이 바닥에 있으면서 별의별 미친놈들 다 봤지만, 이런 정신병자는 또 처음이다. 신일본제국? 신유신?"
쓰지가 했던 말이다.
"주고엔 고짓센도 모자라서 후타이센진이라니, 무슨 19세기도 아니고."
"······."
쓰지는 미친놈이자 과다망상증 환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광현은 쓰지를 단순히 미친놈으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한 지 60년.'
한세대를 30년으로 잡았을 때.
두 세대, 60년이라는 시간은.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지고, 자신들의 만행을 망각하기 충분한 시간이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은 패망 이후, 계속해서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식자들은 본격적인 일본의 우경화가 시작된 것을 1980년대 버블붕괴 이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2000년대,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뒤를 이어 전쟁의 폐허를 목격했던 세대 마저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2020년대, 결국 평화 헌법이 개정됐지.'
그렇게 일본의 우경화는 가속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쓰지 같은 인물은 계속해서 튀어나올 것이다.
'번화가에서 '한국인을 죽여라'라는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미친놈들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것은 일개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시대와 사회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2006년 무비자가 열린 이후, 내 계획대로라면······.'
그러나 광현의 상념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란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이게 다 네놈들 때문이야! 완벽한 내 계획을 망친 저열한 것들."
쓰지 마사노리.
광현의 현란한 칼놀림에 수십 곳에 자절창(刺切創)을 입고 쇼크로 정신을 잃었던 녀석이 온몸에 붕대를 감은 미라와 같은 몰골로 교룡회 회원들의 손에 들려 나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연신 고함을 질러 댔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이 무능한 새끼들, 당장 할복해서 불충을 씻지 못해!"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무능한 회원들 때문에 틀어졌다며, 회원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저 새끼 주둥아리도 잡아 째 놓지."
"그러게요."
광현은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 상황 대충 마무리된 것 같으니까, 나머지 일은 밑에 애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만 오사카로 넘어가자. 이놈의 동네는 공기부터 마음에 안들어."
"그러죠."
태현을 따라 자리를 털고 일어난 광현은 아주 잠깐 아직도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쓰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비슷해서인가? 하는 짓이 꼭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던 작전의 병신을 보는 것 같네.'
* * *
태현과 광현의 보고를 받은 타츠 지부장은 입꼬리가 천장에 걸렸다.
유녀들을 무사히 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뜻하지 않은 부수입까지 생겼으니,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지부장은 태현과 광현은 물론이고, 작전에 참여한 조직원들에게까지 두둑한 보너스를 약속.
조직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광현의 표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들려오는 소리가 온통 무엇을 사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업소의 가격이 더 저렴하고 아가씨들의 미모가 어떤가 하는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돈을 받아도 하룻밤 유흥으로 날려 버리는 미래가 없는 부나방 같은 삶.
'조직원의 삶이 그렇지 뭐.'
회귀 전이었다면 광현 역시 저들처럼 두둑해진 주머니를 어떤 업소에서 탕진할 것인가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저런 모습이 그저 안타까우면서도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한다고 바뀔 녀석들도 아니지.'
저 녀석들에게 이렇게 살다간 너희 중 열에 아홉은 20년 후쯤 '빈곤한 늙은 야쿠자의 삶'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야쿠자라는 족속들은 원래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이라는 놈은 찍먹이 안됐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놈의 슉슉 타령을 해대는 태현을 억지로 떼어낸 광현은 부하 몇을 대동하고 사무실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다이고 카즈오가 떡으로 만들어버린 호스트들이 갇혀 있었다.
그중 토비타신치에 작업을 걸었던 녀석을 끄집어내, 차에 실은 광현은 타비타신치로 향했다.
"오이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곽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반(유곽 종업원)들이 호스트를 인계받고 광현을 유곽의 후원으로 안내했다.
유곽의 후원에는 작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 한편에는 그림 같은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화려한 꽃들이 수놓인 연분홍 우치카케를 입은 리츠카 마담이 가늘고 긴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땅따단다당.
'샤미센, 아니, 월금이로군.'
일본에서 겟칸, 겟킨 등으로 불리는 월금(月琴)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베트남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현악기라 할 수 있었다.
따다다당.
하얗고 가는 섬섬옥수가 현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샤미센의 그것처럼 섬세하고 경쾌하지만, 그보다 부드럽고 묵직한 월금의 애절한 소리가 광현의 귀를 즐겁게 했다.
고풍스럽고 소담한 정자, 화려한 우치카케를 입고 월금을 연주하는 가인(佳人).
만약 회귀 전이었다면.
'달이 아름답다고 말했을지도 모르지.'
'달이 아름답다'라는 말은 근현대 일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의 학생이 번역한 영어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 정도로 번역하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사랑하다는 말이지.'
하지만 겉이야 어떻든 광현의 속은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생강.
아름다운 것에는 반드시 가시가 있어, 함부로 꺾으려 하다간 피를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따당.
월금 연주를 끝내고 한동안 그 여운을 즐기던 리츠카 마담이 입을 열었다.
"듣기 괜찮았니? 오랜만에 잡아 보는 거라."
"좋았습니다."
짧게 대답한 광현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걋퓐玟絿?대로 호스트 녀석을 데려왔습니다."
"들었어, 우리 애들 상태도 나쁘지 않고. 너, 생각보다 유능하더라."
"감사합니다. 그리고 심려를 끼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카와구치카이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속사정이야 어찌되었던 보호비를 받고 구역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이상 조직은 이번 일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조직이 만만하게 보여서 이 사단이 난 것이다.'라고 몰아붙이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일반적인 조직이었다면 한 소리 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면서, 신일본 제국? 도련님들이라서 그런지 망상의 스케일도 커. 그렇지?"
"으음."
광현은 대답 대신 침음성을 삼켰다.
교룡회를 박살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광현도 교룡회 간부를 잡고서야 듣게된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은.
'조직 내에 빨대를 박아 놨다는 거겠지.'
리츠카 마담 정도 되면 후원하고 있는 조직원 한둘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호스트 녀석은 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까?"
"그 아이한테 보여주려고."
그 아이가 누군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뭘 말입니까."
"동료들을 팔아넘기면서까지 가지고 싶었던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는 것인지 우리 멍청한 자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온 한기에 광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이후에는요."
"이후에는 뭐?"
"혹 처리하실 거라면, 저희가······."
"어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처리? 누굴?"
리츠카 마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광현을 보았다.
"너, 걔 낙적료(몸값)가 얼마인 줄 알아? 그런 애를 처리? 네가 미쳤니?"
"그럼 어떻게······."
"네가 신경 안 써도 보낼 곳은 많단다. 키타큐슈, 미야자키, 후쿠오카. 걔 정도면 어디로 보내도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어."
"······."
"뭐, 정 안 되면 와타카노시마 같은 곳으로 보내 버리지 뭐."
조금 전까지 월금을 타던 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광현의 앞에는 돈독이 오를 대로 오른 한야(일본귀신)만이 있었다.
와타카노시마는 여자가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섬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럼 호스트 녀석도······."
"얼굴이 작살난 호스트를 어디다 팔아. 그냥 가둘 거야."
"어디다 가두신다는 말씀입니까."
잠시 말이 없던 리츠카 마담이 입을 열었을 때.
그 스산함이란, 산전수전 다 겪은 광현마저 움츠러들 정도였다.
"천옥(天獄), 신이 인간을 가둔 감옥 안에 녀석을 가둘 거란다."
15화
page06 ? 경찰
"천옥이라면······."
단어만으로는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 혹시 중국 한나라의 고후 여치를 아니?"
"고후라면······."
순간 회귀 전 OTT에서 봤던 중국 드라마가 생각났다.
그 드라마는 초한쟁패(楚漢?覇)를 다룬 드라마였고, 거기서 여치는.
"한나라의 초대 황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런데 사후에 시호가 삭탈돼서 황후가 아니라 그냥 후란다."
"그렇군요."
"여치를 알면 사람 돼지도 알겠네?"
"헛."
광현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사람 돼지.
한 고제 유방 사후, 여치가 유방이 아끼던 후궁 척부인에게 했던 만행이다.
사서에는.
「태후가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돼지우리에 기거하게 하니 이를 사람 돼지라 불렀다.」
라고 전한다.
그리고 도쿠카와 막부가 지배하던 에도시대 하쿠쇼잇키(농민 봉기)에 관련된 주모자들에게 비슷한 처벌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몇 년 후 나올 <13인의 암살자>라는 영화에서 잘 표현됐지.'
사지와 혀를 자르고 눈을 파내 살아 있는 애벌레로 만드는 약식 버전으로······.
"그때의 의학 수준과 상황을 고려하면 척부인은 삼사일 내로 죽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단다."
"······."
그제야 광현은 그녀가 말하는 천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이 인간을 가둔 감옥,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육신이었다.
'팔다리를 자르고, 의학적인 방법으로 오감을 빼앗아 정신을 육체에 가두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
가히 천옥이라 불릴 만한 감옥이었다.
"잔인하다 생각하니?"
그 질문에 광현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말이다, 그 녀석이 진짜로 그 아이를 사랑했다면 난 그 아이들의 새 출발을 응원해 줄 마음도 있었단다."
"유곽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지 않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래부터 유녀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이를 정신의학적으로 자신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메시아 신드롬의 발로이거나 독특한 성적 취향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사회 밑바닥에 있는 이의 삶의 무게를 기꺼이 함께 감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그 결말 또한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남을 구원하겠다는 놈들 중에 십중팔구가 본인부터 구원받아야 할 놈들인 경우가 많으니까.'
문제는 그런 일을 방치하면 유녀들이 헛꿈을 꾸게 된다는 것.
'나에게도 진정한 사랑이 찾아와 나를 구원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은 길가에 핀 버들이자, 담장 아래 꽃인 유녀들을 좀먹는 치명적인 독이다.
그래서 유곽은 유녀들의 사랑을 철저히 엄금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도피를 선택하는 유녀들은 끊이지 않았다.
이는 유곽을 뿌리부터 흔드는 일.
그래서 유곽은 많은 돈을 드려 시로배에를 고용, 그런 유녀들을 지옥 끝까지 쫓아가 잡아 왔다.
그 과정에서 유녀와 도망친 사내는 반드시 죽였고.
하지만.
"훗, 지금은 에도시대가 아니지."
시대가 변하듯 전통도 변하기 마련.
"둘이 살림 차리고 돈 벌어서 낙적료 갚겠다면 누가 뭐라고 그럴까. 그런데 그놈은······."
으드득.
리츠카 마담이 이를 갈았다.
"순정만 가지고 놀았지. 미련한 것 같으니."
그녀의 말 속에는 안타까움과 분노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어렵군.'
아무리 광현이 회귀자라도 지금 그녀가 토해 놓는 감정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오죽하면 남자는 화성에서 오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 하겠는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유녀를 가지고 논 호스트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과, 그 호스트가 곱게 죽기는 글렀다는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이지.'
지금 광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름조차 모르는 호스트 녀석이 최대한 빨리 성불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럼,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광현을 향해 리츠카 마담이 말했다.
"이번 일 잘 해결해 줘서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애들이 수두룩하니까."
말끝을 흐렸던 리츠카 마담이 후원을 벗어나는 광현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풀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 애들이 싸게 해 줄 거야."
삐끗.
하마터면 후원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한 광현이었다.
* * *
"실패라."
다다미가 깔린 일본 저택 특유의 일자형 내실.
상석에 앉아 검에 돌가루(타분)를 바르고 있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면목 없습니다. 오야붕."
그러자 내실 좌위에 일렬로 앉아 있던 수십 명의 사내들 중 좌측 앞열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중 몇몇은 하얀 무명천을 품속에서 꺼내 머리맡에 깔아 놓기까지 했다.
"사죄드립니다."
유비츠메, 무명천은 손가락 마디를 자르는 조직 특유의 사죄 의식을 위한 준비였다.
"그만."
이맛살을 찌푸린 상석의 사내가 목소리를 높혔다.
"이 정도 일로 손가락을 자르면, 우리 계파 조직원들 중에서 손가락이 남아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차피, 만약을 대비한 일이지 지금 당장 필요한 일도 아니었잖습니까. 게다가 그 조직 우두머리란 놈도 정상이 아니었다면서요."
"예, 조금 이상한 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모두 제 불찰입니다."
쿵쿵.
유비츠메를 준비했던 사내들 중 하나가 민망한 표정으로 연신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그만하세요. 다다미 꺼집니다. 한 번의 실패는 병가상사라 하지 않습니까. 다음에 잘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이번 일로 꼬리가 잡히지는 않겠지요."
"물론입니다. 애초에 여러 번의 세탁을 거친 자금과 약입니다. 이상함을 느끼고 추적해 온다 해도 저희가 드러날 일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사내가 다시 물었다.
"어차피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토비타신치 정도의 관리권 정도는 뜯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변수라, 타츠 지부장 밑에 쓸만한 애라면 마사오카(태현)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혹 이사시 이신을 기억하십니까."
"이신?"
"왜 그 몇 년 전에 칼맞고 술 처먹다 죽은 멍청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 미친 돌아이."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들이 이사시 고토라고, 몇 년 전에 조직에 들어왔는데, 최근 타츠 지부장 밑으로 배치된 모양입니다."
"그 녀석이 이번 사건에 변수였다 이겁니까?"
"예."
고개를 숙였던 이들 중 하나가 이번 교룡회와의 싸움에서 광현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를 시작으로, 광현에 대한 모든 것을 사내에게 보고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사내가 말했다.
"이사시 고토라, 주식 투자를 한다고요."
"예, 그쪽으로 재미를 꽤 보는지 인심이 후해서 조직원들이 많이 따른다고 합니다."
사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간부들 중 하나가 사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한번 자리를······."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단, 그 투자라는 거 성과가 어떤지 좀 알아봐요."
"예,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사내는 다시 검에 타분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두면 수분이 완전히 제거되어 웬만해선 검에 녹이 슬지 않는다.
꼼꼼히 작업을 마무리한 사내는 만족한 표정으로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이사시 고토라. 재미있는 별종이 나타난 것 같군."
사내의 중얼거림이 낮게 내실 전체에 깔렸다.
* * *
세월은 쏘아 놓은 살과 같아서 옷깃 사이로 한기가 파고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봄의 전령사 매화나무 가지에 파란 새순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
광현은 회귀하고 처음으로 한 살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광현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낮에 자고 밤에 깨서 나와바리를 순찰하는 전생과 다름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질 뿐이었다.
'바뀐 게 있다면, 내 투자금이지.'
시드의 규모가 있다 보니 불과 반년 만에 광현의 자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현재는 3억 엔에 달했다.
한화 30억.
덕에 종종 증권사를 찾으면 지점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당장 일을 때려치워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긴 한데······.'
이놈의 손가락이 문제였다.
게다가.
'너무 나댔어.'
교룡회와의 싸움에서 광현이 보여준 모습으로 인해 지부의 조직원들 중 상당수가 태현 못지 않게 광현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광현이 태현을 따르니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요즘은 무슨 일만 생기면 나와 형님을 같이 부른단 말이지.'
이는 광현을 지부의 에이스 중 하나로 인정한다는 것으로 전생과는 확연히 달라진 변화였다.
마음에 안드는 건.
'자꾸 무투 쪽으로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 말이야.'
스마트한 머리를 앞세워 기업 사제로 빠지고 싶은 광현의 입장에서, 자꾸만 높아지는 무투쪽 명성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지난 교룡회와의 일전과 얼마전 신세카이에서 난동을 부리던 폭주족들을 쓰러트린 여파가 컸다.
교룡회야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폭주족들은 원래라면 태현이 해결했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태현은.
'하필 한겨울에 32를 처먹고 배탈이 나냐.'
32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스크림 체인이다.
사명은 베스킨라븐32, 하지만 풀 네임을 부르기 버거운 일본인들은 그냥 32라고 불렀다.
아무튼 배탈이 난 태현은 화장실에 살림을 차렸고, 어쩔 수 없이 도살장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출동한 광현은······.
부하들이 뭐 어떻게 하기도 전에 폭주족 일곱을 단신으로 개박살 내버렸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지.'
회귀를 하고 산전수전을 다 겪었어도. 광현의 근본은 야쿠자.
꼭지가 돌면 관서독호라 불리던 시절의 그것이 튀어나오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형님."
오늘도 구역 순찰을 돌던 광현에게 부하 조직원 중 하나가 다가와 조심 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묘한 소문이 있어서요."
"소문? 뭔데."
"여자 경찰 하나가 타친보들을 들쑤시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하의 말을 들은 광현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타친보들은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들이다.
1만 엔 정도면 쉽게 살 수 있는 그녀들은 관리도 안 되고 어중이떠중이들이 워낙 많아 야쿠자들도 웬만해서 손을 대지 않는다.
잘못 손댔다가 미성년이라도 나오면 골치가 아파질 뿐만 아니라, 막장 인생들이라 조직원들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이고가 당했던 각목 통수가 좋은 예시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경찰은.
조직원들 입장에서는 꿈에서라도 얽히고 싶지 않은 이들.
광현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형님. 최근 타친보 애들 몇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걔들 사라지는 거야 하루 이틀이니?"
말했지만, 타친보는 어중이떠중이다.
말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우, 아직 언론에 뜨진 않았는데, 사라진 타친보 애들 중 한 명이 아이린 지구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된 모양입니다. 그것도 토막으로요."
"어떤 미친놈이 화대가 안맞아서 싸우다가 죽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말을 잇던 광현의 얼굴이 굳었다.
하나의 사건이 뇌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 씨발. 그건가."
16화
page06 ? 경찰
회귀 하기 전, 있었던 일이다.
'몇 달 후에 경찰이 야쿠자 사무실들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일이 있었지.'
그때 경찰의 기세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오사카를 주름잡던 사 대 조직 전체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경찰 눈치를 봤었다.
경찰이 찾던 것은 다름 아닌 연쇄살인마.
거리의 여자들인 타친보들을 유인해 죽이던 녀석이 자신을 쫓던 여자 경찰까지 손을 대면서, 그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망할 경찰 새끼들. 대가리만 벗겨지면 전부 헤이하치야(인기 게임 철X의 캐릭터), 아주 그냥.'
무슨 일만 생기면 앞뒤 생각 없이 조직부터 들쑤시는 것이 경찰의 속성이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만 해봐도 조직이 연쇄살인 그것도 경찰을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는 이상.
그런데도 경찰들은 범인이 잡힐 때까지 계속해서 조직을 들쑤셨다.
이유?
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더 열받는 건.
타친보들이 죽어 나갈 때는 경찰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 경찰의 구역질 나는 작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오바라 조지(한국 이름 김성종) 사건이다.
'빌어먹을 자식이 재일 한국인들 얼굴에 먹칠을 제대로 해줬지.'
오바라 조지, 그는 1992년부터 2000년 10월 체포되기까지 9년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성 400여 명을 성폭행하고 2명을 살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중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무수한 신고에도 시체가 나올 때까지 일본 경찰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손을 놓았던 이유는, 성폭행 피해자 대부분이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 또는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하니까 당하는 거지. 자업자득이야.」
「수사를 해봐야 성범죄는 증거도 찾기 힘들고 귀찮기만 하지, 어차피 곧 자기 나라로 갈 테니 적당히 뭉개지 뭐.」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경찰들의 생각은 이랬을 것이다.
'저러니 업소들이 문제가 생기면 경찰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부르는 거지.'
덕분에 먹고 사는 입장에서는 감사하면서도 뒷맛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아무튼, 올해 말쯤 녀석이 잡힘으로써 조직들의 고통도 끝날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광현이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런데 잠깐만.'
생각을 정리하던 광현의 얼굴이 굳었다.
'잠깐, 그러면 이 새끼가 잡힐 때까지 몇 달 동안 조직이 제대로 못 움직인다는 거잖아.'
광현은 일본이 한국에 무비자를 실행하는 2006년을 첫 번째 사업 포인트로 잡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대로 경찰이 조직을 들쑤시면 계획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좋아진 기억력으로 이런 일을 어떻게 놓칠 수 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기억하는 것과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회귀 전, 같은 시기 광현은 사무실이 뒤집히건 말건 강 건너 불구경, 혼자서 아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사건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억을 떠올린 이후에는 필요 없는 것들까지 다 떠올랐지만 말이야.'
잠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던 광현이 조직원에게 지시했다.
"걔에 대해서 좀 알아봐."
"누구 말씀이십니까."
"타친보 애들 쑤시고 있다는 여자 경찰 말이야."
언론마저 침묵하고 있는 상태에서 타친보들을 들쑤시고 있다면, 정황상 회귀 전 살인마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경찰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여자 경찰이 연쇄살인범에게 역으로 당한 게 언제인지 정확히 몰랐기에, 자석이라도 붙여 놓을 심산으로 호구조사를 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뜻하지 않은 화를 불렀다.
* * *
"반갑다. 쓰레기 새끼들아. 여기 이사시 고토라는 개변태 새끼가 있다던데, 얼굴 좀 보자."
광현이 조직원에게 여자 경찰의 신원을 알아보라 지시한 지 이틀 후.
구역 순찰을 돌기 전 조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겸한 노가리 까먹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발로 까고 들어왔다.
평화롭던 사무실은 순식간에 불붙은 꼬챙이로 쑤셔 놓은 말벌 집이 됐다.
"뭐야? 습격이야."
"어떤 놈이야!"
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놈, 소파 뒤로 숨는 놈까지.
사무실은 순식간에 아사리판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경험 많은 조직원들은 분분히 키리츠케를 꺼내 불청객을 겨눴지만, 이내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
"뭐? 기동대야?"
"아니, 여경 혼잔데."
"지금 여경 혼자서 우리 사무실을 습격한 거야?"
모두 황당을 넘어 신기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깨부순 상대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모자, 파란색 근무복에 방검조끼와 파우치가 달린 벨트, 좌우에 찬 곤봉과 수갑.
놀랍게도 상대는 근무복을 입은 여경이었다.
그것도 혼자였다.
게다가 150을 간신히 넘을까 말까 한 아담한 키에 둥글둥글 귀여운 얼굴까지.
쉴 새 없이 쓰레기에 이놈 저놈 해대는 걸레 문 주둥이와 한 손에 잡고 있는 수갑 찬 조직원만 아니었다면 조직원 중 누군가의 조카가 경찰 코스프레를 하고 삼촌을 놀려 주기 위해 왔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이사시 고토, 나와!"
여경이 재차 소리쳤다.
"야, 이사시. 쟤가 너 나오란다. 너 무슨 짓 했냐?"
"제가 무슨 짓을 해요?"
간식으로 나온 센베이(일본 전통 과자)를 먹다가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레가 들려 켁켁거리고 있던 광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너냐? 네가 이사시 고토야?"
"예, 제가 이사시 고토인데 무슨 일이실까요, 경부보님."
여경의 계급을 확인한 광현이 말했다.
일본 경찰 계급은 순사>순사장>순사부장>경부보>경부>경시 순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여경의 나이와 계급을 매치해 보면.
'커리어가 현장 근무를 나왔군.'
커리어는 일본의 1종 공무원 시험(2012년 이후에는 종합직 시험)을 합격한 엘리트다.
보통 커리어 경찰은 4개월간의 연수와 1년간의 현장 근무를 거쳐 바로 간부 계급인 경부로 승진한다.
한국으로 치면 예비 경감인 셈이다.
"저, 그런데 무슨 일로······."
광현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광현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사시 고토! 너를 최근 일어난 타친보 여성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한다!"
"예에?"
* * *
"하하, 일단 차부터 한잔하시고."
"흥, 여기에 뭘 탔을 줄 알고? 내가 이걸 먹고 정신을 잃으면 이런저런 짓을 하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그럴 리가요. 경부보님."
"내가 본 영상에서는 그러던데?"
당장이라도 광현에게 수갑을 채워 끌고 가겠다고 날뛰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켜 자리에 앉힌 타츠 지부장은 차를 내주려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도대체 뭘 본 걸까?
그리고 이런저런 짓은 무슨 짓이란 말인가?
"혹시 보셨다는 영상물이 A로 시작되는······."
"뭐?"
"아닙니다."
타츠 지부장은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니시노 메이.
예상대로 현장 근무 중인 경부보였다.
"그러니까 경부보님 말은, 경부보님께서 최근 일어난 타친보 여성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계시는 와중에 저희 조직원이 후다, 아니, 경부보님의 정보를 알아보고 다녔다 이거네요. 그리고 그걸 지시한 게 우리 이사시고요."
"그렇지."
처음 그녀에게 잡혀 있던 조직원.
그는 다름 아닌 이틀 전 광현이 여경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던 조직원이었다.
"그게 어떻게 저희 이사시가 살인을 했다는 근거가 됩니까?"
"들어봐. 너희 같은 돌대가리들도 이런 말쯤은 들어 봤을 거 아니야. 범인은 사건 현장에 다시 온다."
"돌대······."
"으음."
야쿠자 사무실 한복판.
수십 명의 야쿠자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그녀의 언사는 거침이 없었다.
겁이 없는 건지 똘끼가 충만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러다가 내가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지. 당연히 범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이 누군지 알고 싶을 거 아니야. 그래서 부하를 붙여 내 뒤를 캔 거지. 고로 범인은 너야 이사시 고토!"
"······."
선무당과 방구석 코난이(일본의 인기 추리만화)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심지어 그 코난이 수갑에 배지까지 차고 있으면 말 다 했다.
속이 탄 타츠 지부장이 그녀에게 주려던 차를 벌컥벌컥 마신 뒤, 소리쳤다.
"이사시,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라."
그녀의 추리가 황당하긴 했지만. 야쿠자가 경찰 뒤를 판 것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상급국민(고위공직자를 부르는 말)이 될 가능성이 높은 커리어, 조직 입장에서는 척을 져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게 말입니다······."
광현은 이틀 전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린 저간의 일들을 설명했다.
"그렇게 지시한 이유는?"
"이번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상치 않다라."
"현재 발견된 타친보 여성의 시신은 한 구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자면 지난해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타친보들은 상당한 숫자입니다."
"타친보 애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게 어디 한두 번이야?"
태현이 이틀 전 광현과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광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 이틀 동안 순찰을 돌면서 타친보들의 분위기를 살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광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인생 막장들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이 바닥에서는 가장 약한 존재들입니다. 이를테면 먹이사슬의 가장 하위에 있는 초식동물이라고 할까요."
가끔 각목 통수를 치는 미친것들이 제외하면 타친보들은 공권력과 조직 어느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완전한 치안 사각지대에 놓인 존재들이었다.
"초식동물들이 다 그렇듯 대게 타친보들은 조심성이 많고,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하기 마련이죠."
지난 이틀 광현이 돌아본 결과 겉으로는 별반 달라진 것 없어 보이는 타친보들이었지만.
그녀들 사이에는 평소에 없던 묘한 김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들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것은 일종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을 노리는 포식자가 있다는 것을 게다가 그 불안감에는······."
광현의 시선이 니시노 경부보에게로 향했다.
"뭐 왜?"
"경부보님도 원인 중 하나입니다."
"뭐? 나는 그녀들을 지켜주려고······."
"그치들 입장에선 마냥 선의로 받아들이긴 힘들겠죠."
단속을 잘 안 해서 그렇지, 타친보들의 행위는 엄연히 실정법 위반.
타친보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자신들을 위한다고 해도 경찰은 야쿠자들보다도 더 달갑지 않은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저희가 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든 저희 나와바리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미친놈과 경찰이 들쑤시는 걸 손 놓고 가만히 바라볼 수만은 없는 일 아닙니까."
호흡을 가다듬은 광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경부보님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시킨 겁니다. 미친놈은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
"이만하면 해명이 됐습니까? 그리고 이유야 어찌 됐든 경보부님의 심기를 거슬린 것은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끙"
니시노 경부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광현의 설명이 나름 타당하고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17화
page06 ? 경찰
"이번엔 그냥 가지만, 너희들, 내가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그렇게 사무실을 뒤집어 놓은 작은 폭풍은 올 때처럼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반쯤 박살 난 사무실 문만을 남긴 채.
그녀가 떠난 뒤, 타츠 지부장이 광현에게 말했다.
"이사시."
"네."
"아까는 저 애가 있어서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는데, 네가 볼 때 지금 타친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어느 정도야?"
"심각합니다."
"그게 조직에 해가 될 만큼이야?"
"예."
광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녀석은 계속해서 타친보들을 해칠 겁니다. 한번 시작된 살인 충동은 죽거나 잡히기 전에 자의로는 절대 멈출 수 없으니까요."
회귀 전, 유튜브 사건 프로그램들에서 봤던 내용이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현이 끼어들었다.
"근데 들어보니 타친보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꽤 된 모양인데, 그동안 아무 이상이 없었잖아."
"그렇죠. 지금까지는요."
태현의 말에 맞장구를 쳐준 광현이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형님은 연쇄살인범이 왜 잡힌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사람 죽이다 보면 경찰한테 걸려서 잡히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하죠. 그런데 궁극적으로 연쇄살인범이 잡히는 이유는 방심해서입니다."
"방심?"
"처음 살인을 저지를 때는 꼼꼼하게 증거를 인멸했을 겁니다. 애초에 대상 선정부터 신경 썼겠죠. 사라져도 신경 쓸 가족 친지가 없는······ 이왕이면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면서 이쪽으로 흘러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애들만 노렸을 겁니다."
그래서 처음 그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는, 누구도 그녀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살인을 계속해도 자신의 신변에 아무 이상이 없으면 점점 자신감이 붙는다더군요. 어차피 날 못 잡는데 굳이 수고스럽게 뒤처리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대요."
"······."
"꼼꼼했던 뒤처리도 대충, 타겟의 선정도 대충, 시체 처리마저 대충. 그러다 잡히는 거지요."
"그것도 군에서 배운 거야?"
"······네."
강한 친구 대한육군.
이 정도면 거의 만능 치트키였다.
아무튼 냄새를 맡고 꼬리를 쫓기 시작한 경찰.
타친보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
얼마 전 발견된 토막 시신.
그 모든 것들이 녀석이 방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냉각기마저 짧아지고 있지.'
연쇄살인마는 살인을 하고 나면 일정 시간 휴식에 들어가는데, 이를 냉각기라 한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연쇄살인범은 범행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냉각기가 짧아지기 마련이다.
'보통은 이쯤에서 잡혔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는 경찰들의 안이한 태도가, 녀석의 폭주를 가속시켜 급기야 경찰에게까지 손을 대게 만들었다.
'일본 하면 많은 사람들이 치안 대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글쎄.'
2014년 아사X 신문에서 터져 나온 폭로는 간사히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내용은 오사카 경찰이 범죄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수년간 8만 건 이상의 강력 사건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를 반박하겠답시고, 한국의 경무관에 해당하는 경시장이 나와서 한다는 말이.
'우리가 감사를 해보니 은폐 의혹이 있는 사건은 8만 건이 아니라 4만 건 정도였다. 명백한 오보임으로 정정을 요청한다.'
였다.
자신들이 싼 것은 설사가 아니라 똥이니 바지를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저 난리가 났음에도 징계나 처벌을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분위기 속에서 그냥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만큼 경찰의 사건 축소와 은폐가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뭐, 미온적인 대처와 사건의 축소 은폐는 비단 이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쓴웃음을 베어 문 광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 번 토막 시체가 발견됐으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견될 겁니다."
아무리 경찰이 타친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계속해서 토막 난 인간의 신체가 발견된다면······.
"당장 언론부터 가만히 있지 않겠지."
타츠 지부장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뒤에 펼쳐질 상황은 안봐도 비디오였기 때문이다.
날뛰는 언론과 여론의 눈총에 경찰들이 애먼 밤거리를 들쑤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직은 물론이고 조직의 밥줄인 업소들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야.'
이번에는 단순 위축이 아니라 경찰이 조직 자체를 뒤집어엎을 테지만 뭐라 말해 줄 방법이 없었다.
'회귀 전에 봤어요 하고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광현이 속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때 타츠 지부장이 말했다.
"이사시."
"예, 지부장님."
"이 새끼, 잡을 방법 있냐?"
"우리가요? 왜요?"
광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태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나쁜 놈이 나보다 더 나쁜 놈을 잡겠다고 날뛰는 건 영화 속에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놈이 감히 우리 나와바리에서 개짓거리한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굳이 예상되는 소나기를 맞을 필요는 없잖아······."
타츠 지부장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걸 놓칠 태현이 아니었다.
"에이, 지부장님 혀가 너무 기시다."
"이 새끼가 그런데, 요즘 안 맞았지?"
"맞을 때 맞더라도, 진짜 이유가 뭔데요."
타츠 지부장이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걔 말이다."
"누구요. 아, 우리 사무실 문짝 박살 낸 꼬맹이."
"그래 그 녀석, 정확히는 그 녀석 아버지한테 신세를 진전이 있어. 그 녀석 아버지도 경찰이었거든."
"진짜요? 그런데 왜 아까는 몰라보셨어요?"
"너무 어릴 적에 봐 놔서 아직도 긴가민가하긴 한데, 아마 맞을 거다."
"그냥 그거 알콜성 치매······컥!"
퍽!
어째 주둥이로 매를 번다 싶더니, 기어코 타츠 지부장의 묵직한 어퍼컷이 태현의 복부를 강타.
비록 병으로 약해졌다고 하지만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타츠 지부장의 펀치는, 태현의 허리를 새우처럼 구부리기에 충분했다.
"실례가 안된다면 경부보님의 부친과 어떻게 아는 사이 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광현의 물음에 타츠 지부장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따지자면 조부 때부터 이어온 인연이지, 어렸을때 몇 번 패싸움으로 잡혀 들어갔는데 조부님과 아버지의 면을 봐서 훈방 조치해 주시더라고, 그 보답으로 신년에 겸사겸사 선물도 좀 챙기고 그랬지. 그렇다고 뭐 거창한 걸 주고받던 사이는 아니야. 적당히 주고받고 적당히 사고치고 적당히 못 본 척해주고.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그게 당연했으니까."
폭대법이 실행되기 이전, 아니, 이후에도 한동안 경찰과 폭력단 간의 유착관계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 독특한 관계의 시작은 40년대 말과 50년대 초, 이른바 <야쿠자 경찰 시기>라 불렸던 태평양전쟁 이후의 혼란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한 세대를 넘게 이어온 관계가 폭대법 실행만으로 한순간에 칼로 무 베듯 끊어질 리 없었다.
확연히 줄긴 했지만 지금도 윗선에서는 경찰과 폭력단 간의 교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타츠 지부장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폭력단에 몸담은 뼈대(?) 있는 집안.
친분을 쌓고 교류하던 경찰이 한둘쯤 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지부장님 나이를 가늠해서 십수 년 전이라면, 당시 니시노 경부보는 유아기(1~6세)나 잘해봐야 유년기(7~9세)였을 테니 기억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광현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어느새 부활에 성공한 태현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연쇄살인범이라도 저희가 나서는 걸 경찰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게다가 그 여경이 이미 수사를 하고 있잖아요."
살인범을 폭력단이 잡는다.
그것도 연쇄살인범을······.
이는 경찰의 무능을 대놓고 드러내는 일로 경찰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경찰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잡아도 문제, 안 잡아도 문제.'
태현의 입장에서는 진퇴양난,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말이다. 걔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수사를 하는 걸까?"
"아, 그러네."
타츠 지부장에 태현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벽을 쳤다.
"이제 보니 그 조막만 한 녀석, 혼자서 우리 사무실을 쳐들어왔었네요."
대부분의 경찰은 2인 1조가 기본이다.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닌고 야쿠자 사무실을 쳐들어오는데, 혼자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자기가 무슨 삼국지 장판파의 장비나 조자룡도 아니고.
다시 말해서,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니시노 경부보는 윗선의 허가 없이 독단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사시, 네가 볼 땐 걔 어때 보이던?"
"뭘 어때 보이긴 어때 보여요. 대책 없는 돌아이지."
"넌 좀 닥치고. 이사시, 네 의견을 말해봐."
잠시 니시노 경부보에 대해 생각하던 광현이 말했다.
"대책 없고 무모하지만 제대로 된 경찰인 것 같기는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가장 피곤한······."
사람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사회에서 소외된 타친보들을 위해 야쿠자 사무실을 단기로 쳐들어올 정도면 적어도 마음가짐 만큼은 제대로 된 경찰이 분명했다.
"우리, 걔 한번 밀어줘 볼까?"
"그러니까 지금 그 조막만한 녀석 똥구멍 빨아주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왜요?"
"하아."
태현의 저급을 넘어 저질스러운 표현에 광현은 한숨을 쉬었고.
타츠 지부장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우리 마사오카는 말을 참 고급지게도 해. 똥구멍이 뭐냐? 똥구멍이."
"그럼 뭐라고 그래요?"
"스폰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형님."
"야, 스폰은 그거잖아."
이제는 무섭다, 무슨 말이 나올지.
"연예인들이 돈 많은 할아버지랑 붕가붕가 슉슉하고 후원받는거 아니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그놈의 슉슉은 도대체 빠지는 곳이 없었다.
태현이 말한 그런 스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야쿠자과 경찰의 관계에서 스폰이란 대게 스폰을 받는 경찰이 맡은 사건을 야쿠자들이 대신 해결.
실적 밀어주기를 통해 스폰받는 경찰을 빠르게 고위직에 올리고 조직의 편의를 보장받는 관계를 말했다.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일부러 사고를 치고 스폰받는 경찰에게 잡히거나 자수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폭대법이 점점 강해지면서 그런 스폰 관계들도 하나둘씩 끊어지기 시작했지.'
게다가 니시노 경부보를 스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경부보 쪽에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사시, 그 개자식 잡을 수 있어, 없어?"
광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 미친놈은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빨리 치워 버리는게 맞아.'
결단을 내린 광현이 입을 열었다.
"백 프로 잡는다고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잡을 확률은 팔 할 이상입니다."
지난 이틀간, 수백 번도 넘게 생각했지만 이 사건에 대해 떠 오르는 기억은 극히 일부에 불과 했다.
구독했던 사건 채널 중 이 사건을 다룬 채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정보가 적다 보니 올라오는 정보라고 해봐야 단편적인 것들이 전부였다.
'경찰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정보를 기밀로 묶어 버렸다는 게 사건 크리에이터들의 중론이었지.'
그럼에도 광현이 팔 할을 입에 올린 것은 그의 머릿속에 단편적이긴 하지만 범인에 대한 주요 정보와 함께.
'지금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할 발전된 수사기법들이 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타츠 지부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해봐. 애들은 얼마든지 동원해도 되고, 필요하다면 다른 지부에 협조도 구해줄 테니까."
18화
page06 ? 경찰
"왜 안된다는 건데요."
"당연히 안되지,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오사카시 니시나리구 경찰서 서장 안도 마사히로 경시는 아침 댓바람부터 사무실로 쳐들어온 니시노 메이 경부보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아이린지구(일본 최대 슬럼가) 근처에서 발견된 여성의 토막 사체 때문에 언론 단속을 하느라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이 햇병아리 경부보가 한다는 말이.
'연쇄살인?'
믿을 수도 없었지만, 믿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증거라고 내미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게 어느 시점부터 거리에서 몸 파는 애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거지."
"네."
"언제든지 거리에서 안 보일 수 있는 애들이 걔들이야. 걔들 몇이 사라졌다고 그게 어떻게 살인 그것도 연쇄살인의 증거가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라도 조사를."
"우리가 그렇게 한가하고 인력이 남아도는 줄 알아!"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안도 경시가 목소리를 높였다.
"니시노 경부보."
"예."
"아직 실습기간이지?"
"네."
"그러면 실습이나 잘해, 뭣도 모르면서 강력사건에 기웃거리지 말란 말이야. 알량한 시험 좀 잘봐서 경부보를 달았다고 네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아."
"······."
고개를 숙인 니시노 경부보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린 안도 경시가 소리쳤다.
"대답."
"예."
"꺼져."
니시노 경부보에게 축객령을 내린 안도 경시는 신경질적으로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 사무실 창밖을 주시하는 안도 경시의 눈동자가 떨렸다.
'연쇄살인, 말도 안 되지.'
올 연말 오사카부 경찰은 승진이 포함된 대규모 인사이동이 예정된 상태였다.
준커리어-국가공무원시험 2종 합격자, 한국 7급 시험-인 그로서는 이번에 반드시 승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경시정.
사실상 준커리어로 승진할 수 있는 한계.
하지만 안도 경시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번에 경시정으로 승진할 경우, 은퇴 전에 경시장을 달수도 있었다.
은퇴할 때 달아주는 명예직이 아닌, 현역 경시장.
논커리어로 현역 경시장을 지내고 퇴직한다는 것은 가히 인간승리라 불러줄 만했다.
같이 경찰 서장을 시작한 논커리어들 중 한둘만이 경시장을 달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당 구역에서 살인도 아니고 연쇄살인사건이 터진다면 경시장 진급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다.
고로 그의 처지에서 연쇄살인 사건은 있어도 없어야 하는 일이었다.
* * *
서장실을 나온 니시노 경부보는 답답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녀 역시 자신의 행동이 주제넘은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메이야, 경찰이 왜 직에 투신(投身)한다는 표현을 쓰는 줄 아니? 그것은 경찰이 되는 순간 내 목숨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바친다는 의미란다.'
이년 전, 아흔셋을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신 그녀의 할아버지가 경찰을 준비하던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제국경찰로 시작해 패전 이후 오사카 경찰 재건과 치안 확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의 할아버지는 오사카부 경찰들에게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또한 오사카부 고위 경찰 출신으로 지금은 오사카시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는 아주 다른 경찰이셨지.'
어린시절 그녀의 집에는 종종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드나들었는데.
후에 그녀는 그들이 폭력단 간부들로 아버지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피고인이 자살한 엔자이(무고)사건의 책임자로 징계를 받고 경찰복을 벗었다.
그일만 없었다면 지금쯤 그녀의 아버지는 오사카부 경찰들의 수장인 경시감에 올랐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할아버지의 후광에 빗대어 시의원이 되긴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늘 경찰을 그리워했고 당신의 자식을 통해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했다.
'경찰이 될 준비를 해라.'
조치대(일본 명문대) 경영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외국계 기업에 취업이 약속되어 있던 그녀에게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명령.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경찰이 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평생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고 살았던 그녀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다행히 어릴 때부터 수제로 소문난 그녀였기에 공무원 채용 1종 시험을 통과해서 커리어조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비록 원하던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닥치면 또 열심히 하는 게 그녀의 장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를 인생 모토로 삼은 그녀는 이왕이면 할아버지 같은 존경받는 경찰이 되자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다짐은 출근 첫날 밥상머리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실습 대충하고 경부발령 받을 때 동기조 중에 쓸만한 놈 골라서 삼년 내에 결혼해라. 데릴사위로 들일 놈이니 잘 골라야 한다.'
'네?'
'어차피 네가 올라가 봐야. 경시정 이후는 힘들 것 아니냐.'
커리어의 자동 진급은 경시정까지다.
그 위인 경시장과 경시감이 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이 있어야 한다.
특히 여성의 경시장 진급은 논커리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밖에서 끌고 네가 안에서 밀면 웬만큼 바보가 아닌 이상 경시장 정도는 달겠지. 그러니 넌 잔말 말고 아비가 시키는 대로 똘똘한 놈이나 골라와. 정 못 고르겠으면 아비가 골라 줄 수도 있고.'
그날 어떻게 밥을 먹고 출근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에라도 '아버지의 꿈을 네게 강요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엄마에게 도움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모친은 서면 작약, 앉으면 모란, 걷는 모습은 백합꽃이라는 야마토 나데시코(일본판 현모양처)의 표본 같은 분이셨다.
한없이 자상하시고 현숙한 어머니, 하지만 그녀에게 아버지에게 맞설 용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적어도 수습이 끝나기 전에 이 사건만큼은 마무리하고 싶은데.'
수습 기간이 끝나 정식 발령을 받으면 내근직으로 안전한 자리나 돌면서 남편을 밀어주다가 쉰 살 전후로 퇴직.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야마토나데시코가 될 것이 뻔했다.
"하아."
그녀가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부으으.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전화가 울었다.
-아버지-
전화를 건 상대를 확인한 그녀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전화를 끊지는 못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네, 아버지 들어가세요."
긴 통화를 끝낸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시러배 잡놈의 폭력단 새끼들이."
* * *
쾅.
"이사시 고토 나와!"
부하들이 합판으로 대충 응급조치를 해놓은 사무실 문짝이 다시 한번 터져 나갔다.
사무실 문짝을 날려 버린 범인은 이전과 동일.
작달막한 키의 여경.
니시노 메이 경부보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습격인 줄 알고 온갖 호들갑을 떨었던 이전과 달리 부서진 문을 다시 고쳐야 하기에 울상이 된 하급 조직원 몇을 제외하면 조직원들의 동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부실 거라고 그랬지, 오늘 라면 네가 사는 거다."
"거참 성질 두, 그냥 열고 들어오시면 안 돼요."
"이것들이."
예상과는 너무 다른 조직원들의 반응에 그녀가 말아쥔 양손을 부들거리고 있을 때.
소란을 듣고 거리에서 안 보일 나온 광현이 그녀를 보고 반색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뇨. 그저 이 도시의 밤거리를 어지럽히는 쓰레기를 잡자는 거지요."
"그러니까. 너희가 왜!"
"일단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광현이 니시노 경부보를 지부장실로 안내해오자 타츠 지부장은 미리 준비한 차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상한 거 안 탔습니다."
"알아요. 아버지가 당신은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지한 것은 타츠지부장과 손을 잡고 연쇄살인마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실습 기간에 그 정도 실적을 올리면 나중에 정식 발령을 받았을 때 조금만 힘을 써도 내근직 중 알짜배기를 차지할 수 있다나.
'그래도 폭력단과 손을 잡으라니, 아니 애초에 이놈들이 살인마를 잡을 수 있기나 한거야.'
아버지의 명이 있었음에도 니시노 경부보의 얼굴에 떠오른 불신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대충 아버지께 설명은 들었지만, 난 아직도 왜 당신들이 살인마를 잡으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말입니다."
광현은 얼마 전 지부장과 태현에게 설명했던, 살인마가 활개를 치게 놓아두었을 때 조직이 입게 될 손해부터 녀석의 상황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광현의 설명을 들은 니시노 경부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광현을 바라보았다.
이 사건이 연쇄살인인 것은 감을 잡고 있었지만, 살인마의 상태까지는 그녀조차 몰랐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경찰, 그것도 간부라는 그녀가 그런 것도 모를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과 일본의 경찰 간부 육성시스템의 차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한국의 경찰 간부는 경찰대학에서 4년간 공들여 키워낸 최정예 들이다.
반면 일본의 경찰 간부, 커리어조의 시작이라는 경부보는 1종 시험에 합격하고 경찰대학(한국의 경찰대와는 다르다.)에서 넉 달, 그러니까 16주 연수를 받고 현장실습에 투입된 햇병아리들이다.
실습이 끝나면 다시 1개월의 연수와 경부교육이 있다고 하지만, 그 모든 기간을 다 합쳐봐야 경찰간부의 교육기간은 이년도 되지 않는다.
참고로 한국은 순경도 40주의 교육연수를 받고 나서야 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우리 광현이가 말입니다."
니시노 경부보의 당황한 모습에 신이 난 태현이, 광현의 헌병 구라설을 신나게 떠들어 댔다.
MSG를 잔뜩 첨가해서.
"2년 넘게 수사를 배웠다니, 하긴 자위대에도 그런 게 있지······."
니시노 경부는 태현의 설명을 그대로 믿었다.
자위대에도 경무대라는 헌병 비슷한 조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현의 설명이 너무나 그럴 듯 했기 때문이다.
'큭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16주짜리 병아리.
상대는 2년을 배운 독수리.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한참 우물거리던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 속에는 사무실 문을 박살 내고 들어왔던 당당함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범인 어떻게 찾을 건데요?"
"요?"
"······."
니시노 경부가 말꼬리를 잡은 태현을 죽을 듯 노려보았다.
"막히면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요."
광현이 한쪽 벽에 설치해 놓은 화이트 보드로 다가갔다.
"원점?"
"네, 녀석의 첫 사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죠."
"하지만 첫 사건은 뭔지도 모르고 아무런 단서도 없잖아요."
따지고 보면 연쇄살인 역시도 타친보들의 실종을 통해 추론한 것이지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 그거예요."
"뭐가요?"
"아무 흔적도 없는 거 그게 단서라고요."
니시노 경부보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표정으로 광현을 올려다보았다.
19화
page06 ? 경찰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프랑스의 범죄학자이자 현대 법의학의 아버지, 에드몽 로카르가 남긴 말이다.
범죄는 반드시 접촉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흔적은 어디엔가 반드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범죄자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한국의 유명한 연쇄 살인마 중 하나는 밑창을 도려낸 신발을 신고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의 전통적인 수사 기법 중 하나인 신발 족적(足跡) 수사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수사를 피했나요?"
"일반적인 족적 수사는 피했죠. 덕분에······."
"덕분에?"
"한국 경찰은 밑창이 없는 족적이 나온 모든 사건은 녀석이 저질렀다는 명확한 특징(시그니처)을 얻게 됐죠."
자승자박(自繩自縛).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다.
"범죄라는 놈이, 이게 참 X같은 놈이라 가리려고 하면 할수록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지금 고해성사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광현을 향해 니시노 경부보가 말했다.
"아무튼 녀석의 흔적이라는 건, 녀석이 자신의 범죄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 행위 그 자체라는 거군요. 그 범인의 신발 밑창처럼."
"정답, 그렇다면 완전 범죄를 위해 놈이 잘라낸 신발 밑창은 뭘까요?"
"광현아, 스무고개 그만하고 결론만 말하면 안 될까?"
성질 급한 태현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좀 더 니시노 경부보를 애간잔을 녹여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태현의 키리츠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기에 광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까지 녀석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은 건, 이쪽 지방에 연고도 신고해 줄 사람도 없는 타친보들을 노렸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거야 간단하지."
태현이 답했다.
"말 시켜 보면 되잖아, 타지 애들은 오사카벤이나 개 거지 같은 교코토바를 안 쓸 테니까."
오사카벤, 교코토바는 오사카부와 교토부에서 쓰이는 사투리다.
둘을 묶어 큰 틀에서 간사이벤이라고 하지만, 오사카든 교토든 같이 묶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기에 현지인들은 따로 구분해서 불렀다.
"그리고 남녀가 한 침대에서 한 이불 덮고 '야메떼' '기모찌'하고 나면 가끔 센치해져서 별 이야기 다 하잖아. 타친보 애들이 워낙 입벌구(입만 벌리면 구라)라 나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빨래질 당하기 딱 좋지만 말이야. 아, 경부보님은 잘 모르시려나? '야메떼' '기모찌'가 뭐냐면요······."
"죽어, 이 개변태 자식아."
진압봉으로 태현의 대가리를 깨트려 버리겠다고 날뛰는 니시노 경부보를 겨우 말린 광현이 말했다.
"표현에 다소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녀석이 타친보들의 정보를 알아낸 방법은 그것이거나 그와 유사한 방법이었을 거예요. 비록 사고파는 것이라고 해도 살을 섞은 사이란 건 어느 정도 심리적 방벽을 무너트리기도 마련이니까요."
물론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외에도 다른 무엇인가 더 동원됐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까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확실한 건 녀석이 그녀들의 과거를 캘 때 '넌 어쩌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됐냐?' 같은 상투적인 질문을 던지진 않았을 거란 거죠. 그리고 그런 평범하지 않은 일은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랜 시간 남아 있기 마련이고요."
"······."
"녀석의 타겟 선정 과정에서 탈락한 재수 좋은 타친보들. 그들이 바로 녀석의 남긴 흔적, 도려낸 신발 밑창이라는 거죠."
"그러면 당장이라도 그런 경험을 한 타친보들이 있는지 찾아가 봐야지."
니시노 경부보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광현이 뭐라 하기도 전에 태현이 핀잔을 날렸다.
"그 복장으로요? 걔들이 잘도 말하겠네요. 지난 며칠간 그렇게 삽질하고도 아직도 부족하신가 봐요."
"······."
니시노 경부보는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그림자만 봐여도 타친보들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그나마 도망가는 건 양반.
개중에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거나 영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덤비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드디어 이 몸이 나설 차례인가."
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나서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광현을 향해 태현이 예의 퐁파드 머리를 세워 보였다.
"형이 딱 거리에 나가서, 여자애들한테 오빠가 궁금한 게 있는데 한마디 하면 바로······."
"삥 뜯는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하겠지."
니시노 경부보가 광현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줬다.
"우리 경부보님, 말을 함부로 하시네, 삥을 뜯긴 누가 뜯는다고 그러세요."
"너, 생긴 것만 봐도 삥 잘 뜯게 생겼어."
타친보들 입장에서는 경찰이나 야쿠자나 도긴개긴, 얽히고 싶지 않은 존재들인건 마찬가지였다.
타츠 지부장은 필요하다면 조직원들을 얼마든지 가져다 쓰라고 했지만.
'섣불리 조직원들을 움직였다가는 안 그래도 불안해하던 타친보들이 아예 숨어 버릴 수가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먹잇감을 노리고 밤거리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놈을 자극해.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예로부터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안다고 했죠."
알 수 없는 말을 한 광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 * *
광현이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토비타신치의 리츠카 마담이었다.
최상급 유녀와 거리의 여자들인 타친보.
언뜻 극과 극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둘이지만.
'무릇 초록은 동색이라 했지.'
게다가 오사카에 활동하는 타친보들 중에는 요타카(夜鷹)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과거 요타카는 성병 등으로 유곽에서 쫓겨난 유녀들을 이르는 말 이었다.
하지만 작금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유곽을 벗어났음에도 이 바닥에서 발을 빼지 못한 이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그리고 광현의 예상대로 리츠카 마담은 그들과 끈이 있었다.
광현은 그 끈을 통해 타친보들 사이에 하나의 소문을 흘렸다.
'지난해부터 손님 중에 이상할 정도로 여자들의 과거에 대해 알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토비타신치로 제보 바람. 정보의 가치에 따라 10만 엔까지 사례금 지급.'
잘해야 이삼 일에 1~2만 엔 정도 벌어들이는 타친보들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단 하루만에 수십 명의 타친보들이 토비타신치를 찾아왔다.
개중 팔 할은 쓸모가 없거나 사례금을 받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어낸 것들이지만.
나머지 이 할 중에는······.
"이 새끼······."
일주일 후, 사무실에 다시 모인 일행의 앞에는 몇 장의 똑같은 명함이 놓여 있었다.
광현이 그중 한장을 집어 올렸다.
명함에 박힌 이름은.
-TV 간사이 시사교양국 PD 키스기 타쿠지.
TV 간사이는 오사카부, 교토부, 효고현, 시가현, 나라현, 와카야마현에 방송을 송출하는 간사이 지역 대표 공중파 방송이다.
명함은 TV 간사이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명함에 있는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면.
-이 번호는 통신이 차단된······.
이라는 안내 멘트가 나오고, 방송국으로 전화해 물어보면 시사교양국에는 그런 PD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는 것.
즉 이 명함은 정교하게 위조된 가짜라는 것이다.
"이 명함 주면서 그 새끼가 뭐라 그랬다고?"
광현이 명함과 함께 정리된 정보를 가지고 온 반(토비타신치 유곽의 일꾼)에게 물었다.
"거사(?)가 끝난 이후에 자기가 방송국 PD인데, 거리 여성들의 실상에 대해서 취재하고 있다고 짧게 인터뷰만 해주면, 만 엔을 더 주겠다고 했답니다."
"타친보들이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애들이 아닌데."
"몇몇 애들이 말하길, 그 녀석이 샤워하러 들어간 틈에 그 녀석 가방을 뒤져 봤는데, 돈 될 만한 건 없었고 사원증이랑 '간사이 지역, 성산업 실태 조사'라고 쓰인 서류 뭉치를 봤답니다."
몇몇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그것을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보여준 거네. 이 새끼."
여차하면 각목 통수를 날려대는 타친보들이랑 같이 있으면서 가방을 열어 놓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PD라는 그럴듯한 직함.
취재라는 명분.
우연히 보도록 유도한 프로젝트 파일에 한푼이 아쉬운 타친보들의 주머니 사정까지.
"함정 제대로 팠네. 개같은 짓거리 한번 해보겠다고 아주 용을 쓴다. 용을 써."
반과 광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니시노 경부보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인터뷰는 했대?"
"네, 대부분은 상투적인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나이라든가 출생지라든가 하는 것들이요. 그런데 좀 특이한 게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
"지금 누구와 살고 있는지, 가족들이랑 연락은 하는지를 꽤 집요하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겠지."
크게 고개를 끄덕인 광현이 뒷말을 이었다.
"동거인이 있다거나 연락하는 가족이 있다고 하면 급격히 태도가 변해서 쫓아내듯 인터뷰를 끝냈을 테지."
"네."
그나마 돈은 제대로 줬을 것이다.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았다면 타친보들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만난 곳이 대부분 비즈니스나 러브 호텔(모텔)이잖아. 여기서 어떻게 사람을 처리했다는 거지?"
니시노 경부보가 의문을 표했다.
그녀의 손에는 토비타신치에서 타친보들의 진술을 대충 정리해 놓은 서류가 들려 있었다.
"첫날은 그냥 보내줬을 겁니다. 인터뷰 잘해 줘서 고맙다고 약속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쥐여주면서요. 그렇게 경계심을 허물고 하루 이틀 있다가 다시 불러내는 거죠. 자신의 사냥터로······."
목이 말라진 광현은 탁자에 놓인 생수를 한모금 들이켰다.
"이 경우에는 녀석의 집일 가능성이 높죠. 명분은 추가 인터뷰. 미끼는 더 많은 보수였을 테죠."
이제 남은 건.
"이 개자식이 어디 사느냐는 건데."
"그게 말입니다."
그때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이 품속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타친보 중에 그 PD가 한 건물에 드나드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다. 나오고 들어가는 시간을 계산해 보면 아마도······."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반색하며 묻는 광현을 향해 반이 품속에서 꺼낸 쪽지 건넸다.
그리고 쪽지를 확인한 광현의 인상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여기라고?"
"어딘데 그래?"
광현이 쪽지를 태현에게 전달했다.
"이런 샹."
쪽지를 확인한 태현의 반응도 광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사카시 니시나리구 하기노차야 X초메 X-X XX아파트」
특별할 것 없는 주소.
하지만 오사카 토박이들은 이 주소를 보는 순간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아이린 지구.'
토비타신치의 위쪽.
신이마미야역 건너편부터 하기노차야역을 거쳐 텐가차야역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슬럼가.
일본 최대 우범지역.
게다가 작금의 아이린 지구는 재개발 작업이 진행되고 고령화로 노숙자 숫자가 대폭 줄어든 2010년 중후반 이후의 아이린 지구가 아닌.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본투비 인외마경으로, 밤이 되면 경찰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야쿠자인 태현과 광현이 꺼려하는 것은 좀 다른 이유였다.
"아 씨, 괜히 여기 잘못 들어갔다가 아오바카이, 그 미친 사이코 새끼들 만나면 피곤해지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