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눈을 뜨다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소."
붉은색 오망성이 새겨진 주술진.
그 위에 선 흑마법사가 읊조렸다.
"폐하께서 되살리려는 존재가 이 왕국의 첫 번째 국왕 맞소이까?"
거기에는 어떤 창백한 피부의 소년도 누워있었다.
지금부터 시작될 강령의식의 제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소년의 이름은 마테우스 윈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린 왕자.
그의 아비이자 델무아드 왕국의 국왕 안토니오 윈저는 결심했다.
"짐은 그분께서 돌아와 무너져가는 왕국을 바로잡아주길 원한다."
아들의 죽음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시한부였던 아들이 먼저 구상하고 제안한 기회 아닌가?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을 터.
"내 아들의 몸으로 다시금 눈을 뜨시어 찬란했던 영광을 되찾아주길 바란다."
어쩌면 마지막 왕이 될지도 모를 안토니오는 고민이 많았다.
안으로는 실권을 장악한 간신배 무리가, 밖으로는 전쟁과 반역이.
그 외 수많은 문제 속에서 왕은 그저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흑마법의 힘으로 선조의 혼을 깨운다는 것이 얼마나 불효이며 불충인지 잘 알고 있다. 허나, 이 나라에 깃든 망조를 몰아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국왕된 자로서 가장 끔찍한 죄악이 아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들이 제안했다.
자신이 죽으면 선조의 지혜를 빌려보자고.
흑마법으로 전설적인 성군의 혼을 불러내자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그럴 수 없노라 대답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강령술은 되살리고자 하는 망자의 혈족만이 그릇으로 쓰일 수 있소. 이를 어겼다간 우리 모두 죽은 자들의 왕께서 내리는 저주를 뒤집어쓰게 될 터. 하여 묻겠소. 이 소년이 정녕 완벽한 그릇이 맞소?"
"그 아이의 이름은 마테우스 윈저. 델무아드 왕국의 가장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서 건국 왕의 핏줄임이 명백하다. 저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지. 이만하면 충분한가?"
"훌륭하오."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의식용 단검으로 죽은 왕자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자 채 식지 못한 뜨거운 피가 흘러 붉은색 오망성을 완성시켰다.
"그럼 시작하겠소."
피로 물든 오망성.
그 위에 우뚝 선 흑마법사의 목적은 오직 하나.
허수아비 국왕 안토니오 윈저가 의뢰한 강령술을 펼치는 것.
건국 왕 아사드 윈저의 영혼을 불러와 죽은 왕자에게 빙의시키는 것.
"죽은 자들의 왕이시여! 아홉 세계 모든 망자들의 인도자시여! 당신의 종이 청하옵건대, 낙원으로 떨어진 영혼을 잠시만 이곳 종들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듣는 것만으로 불쾌함이 느껴지는 웅얼거림.
그 언령의 힘에 서서히 반응을 보이는 마법진.
오망성으로부터 핏빛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충직한······ 종이여······.]
어디 그뿐일까?
피어오른 연기가 어떤 형상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명백한 악마의 얼굴이며, 목소리였다.
[이름을······ 말하라······.]
"불경스럽게도 한때 왕이라 불렸던 자, 델무아드 왕국의 군주 하사드 윈저라는 이름의 종을······."
······잠깐.
저 흑마법사가 지금 무어라 지껄이는 것이지?
'하사드' 윈저를 살려달라고?
아사드 윈저가 아니라?
"자, 잠깐! 흑마법사!"
국왕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짐이 의뢰한 건 하사드가 아닌 아사드다! 건국 왕 아사드 윈저 말이니라! 지금 네놈이 말한 하사드 윈저는 왕국 역사를 통틀어 최악의 폭군으로 손꼽히는······!"
[하사드······ 윈저······.]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악마의 목소리가 잘못된 이름을 되새겼으니까.
전설적인 성군 아사드 윈저가 아닌, '폭군' 하사드 윈저의 이름을.
[거래는······ 성립되었다······.]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악마의 형상이 사라졌다.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쿨럭······!"
그저 되살아난 왕자가 핏물을 게워내고 있을 뿐.
또 생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을 번뜩이고 있을 뿐.
"······야, 너."
어디 눈빛만 달라졌을까?
말투와 목소리 역시 변했다.
더는 왕자라고 볼 수 없는 존재.
그가 섬뜩한 눈으로 국왕에게 말했다.
"설명해. 죽기 싫으면."
* * *
정확히 반나절.
되살아난 하사드 윈저가 상황을 인지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먼저 그는 삼백여 년 후 미래의 후손 몸에서 눈을 떴다.
녀석의 이름은 마테우스.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단다.
"······해서, 요절한 아들 몸에 강령술을 부렸다?"
"그, 그렇사옵니다. 선조시여."
"흑마법사를 왕궁까지 들여서?"
"그것이······."
"쯧, 버러지만도 못한 놈."
현 국왕 안토니오가 요절한 아들의 몸에 성군 아사드 윈저를······.
아니, 약간의 실수로 하사드 윈저를 빙의시킨 이유는 단 하나.
오랜 전성기 끝에 몰락의 길로 접어든 왕국을 되살리기 위함이란다.
왕실은 이미 실권을 장악한 귀족 파벌의 허수아비와 다를 것이 없다나 뭐라나?
"난 너 같은 놈들이 싫어."
"······."
"남 바짓가랑이나 붙잡고 늘어지는 놈들, 지 손으로 무엇 하나 해본 적 없는 놈들, 심지어 그게 왕이고 자기 아들 몸에 귀신까지 빙의시킨 놈이면 더더욱. 그게 사람이냐? 벌레지."
하사드가 혀를 끌끌 찼다.
눈빛과 말투에서 혐오가 뚝뚝 떨어졌다.
"그냥 죽여주랴?"
"······예?"
"벌레로 살 바에는 왕으로 죽는 게 낫지 않겠어?"
농담이 아니다.
하사드는 진심 어린 살의를 내뿜었다.
당장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불쾌했거든.
"······소손을 죽이고 싶으시다면 뜻대로 하시옵소서. 선조님의 말씀처럼 벌레만도 못한 놈이니 억울할 것도 없지요. 다만 소손이 죽으면 이 왕국에는 더 이상 국왕도, 후계자도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허니 소손을 죽이시거든 선조님께서 꼭 찬란했던 이 나라, 델무아드 왕국을 이끌어주시옵소서."
하나 그 살심은 의외의 반응에 조금씩 누그러졌다.
여전히 벌레보다 못한 놈이긴 하나, 그래도 나름 강단이 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 목숨을 구걸할 만큼 덜떨어진 놈은 아니잖아?
"뻔뻔한 놈."
"송구합······."
"근데 너, 괜찮겠냐?"
"어인 말씀을······?"
"내가 깨어나면서 얼핏 들었는데, 네놈은 애당초 날 원했던 게 아니었잖아?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 아사드 윈저라고 아주 그냥 소리를 벅벅 지르시던데?"
아뿔싸.
하필 그 얘기를 들었구나.
국왕 안토니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그것은······."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는 노릇.
아들 몸에 빙의한 존재가 누구던가?
역사상 최강의 폭군으로 기록된 자 아닌가?
여기서 멈칫거렸다간 정말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
순간의 변덕으로 살려줄 때 뭐라도 해봐야겠지.
"······선조님께서 들으신 것이 맞사옵니다. 소손은 분명 초대 국왕이신 아사드 윈저 님을 원하였지요. 건국 왕께서는 전설적인 성군이자, 모든 기사들의 우상으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이해가 좀 안 돼서."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지요?"
"나라 망했다며? 근데 왜 우리 아버지를 찾아? 그 양반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기사도 줄줄 읊는 거랑, 내가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면서 이미지 챙기는 거 두 개밖에 없었을 텐데?"
"그, 그것이······."
"이 왕국을 설계한 건 나야, 왕자였던 나. 전성기로 이끈 거? 그것도 나지, 왕위를 물려받은 나. 근데 왜 우리 아버지야? 벌레 짓을 해도 날 되살려서 하는 게 맞지 않아?"
"······."
하사드의 물음에 안토니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까?
'자신이 역사에 어떤 식으로 남았는지 모르는 눈치인데······.'
그런 자에게, 가뜩이나 성정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자에게 당신은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어있으니 처음부터 논외였다, 라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살고 싶다면 말이다.
"······소손의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아무래도 건국 왕께오서 워낙 전설적인 분이시다 보니······."
"쯧, 나라 살리겠단 놈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다행이다.
그냥 넘어가는 것 같다.
역시 이럴 땐 머리부터 박는 것이 최고의 선택지다.
"아무튼, 더 지껄여봐."
"예? 어떤······."
"뭘 얼마나 말아 잡쉈는데?"
"······아! 그 말씀이셨군요."
분명 델무아드 왕국의 현 상황을 묻는 것일 터.
눈치가 빨라진 국왕 안토니오가 무언가를 펼쳤다.
"잠시 여기를 봐주시겠습니까?"
"지도?"
"예, 대륙 전도입니다."
"영토가······ 줄었네?"
딱 봐도 보인다.
과거 대륙 대부분을 차지했던 델무아드 왕국의 쪼그라진 영토가.
뿐만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우후죽순 늘어난 여러 국가의 모습까지.
"조용할 날이 없겠군."
"그렇사옵니다. 작금의 정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총체적······."
"개판이다?"
"······예. 북쪽으로는 오랜 앙숙 아이언폴 제국이, 동쪽으로는 신흥 강국으로 우뚝 선 이드리사 왕국이, 서쪽으로는 여러 중소규모 국가들이 연합을 이룬 서부왕국 총연합회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모두 대륙정벌이라는 과업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말이지요."
개판, 혹은 총체적 난국.
작금의 델무아드 왕국을 정의하기에 너무나도 적절한 표현 되시겠다.
동서남북 중 바다가 펼쳐진 남쪽 끝을 제외한 모든 국경이 위태롭잖아?
"하오나 더 큰 문제는 내부에 있습니다."
"그렇겠지. 망조가 들면 흔한 구도거든. 허수아비로 전락한 왕실, 실권을 장악한 귀족들."
"예, 그중에서도 비교적 최근부터 실권을 장악한 귀족 파벌이 있습니다. 구심점은 칼버트 군터라는 자로······."
바로 그때였다.
쾅!
국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열렸다.
그것도 아주 거칠게, 참고로 여기는 왕의 집무실이다.
저런 식으로 문을 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뜻.
"폐하!"
그런데 열렸다.
심지어 누군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급히 수결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다짜고짜 수결을 해달란다.
도장부터 찍어달라는 뜻.
어떤 안건인지 설명조차 없다.
"이 새끼구나?"
아무리 상대가 허수아비 국왕일지언정 이런 수준의 무례는 아무나 저지를 수 없을 터.
그렇기에 하사드는 확신했다.
저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놈이 바로 국왕이 말한 내부의 문제.
"네가 말한 구심점이라는 놈이."
실권을 장악한 파벌의 구심점.
'칼버트 군터'가 확실하노라고.
002화. 네놈이구나?(1)
"전하? 지금 무어라······."
"군터라는 성도 그렇고, 그 누렁이 털 같은 머리카락 보니까 대충 알겠네. 레가사 군터, 그놈 후손이지?"
"뭐, 뭐요? 지금 우리 군터 가문의 시조님 함자를 그따위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평생 내 밑에서 주판이나 튕기던 놈이 가문까지 이루고, 그 후손이란 놈은 알량한 권력 좀 잡았다고 눈깔에 뵈는 것이 없어 보이니 원."
칼버트 군터가 무어라 더 지껄이든 말든.
하사드는 하고자 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후손아."
"······말씀하시옵소서."
"그래도 얘가 너보단 낫다."
"어, 어찌······ 그렇습니까?"
"자기 손으로 뭔가를 하긴 했잖아?"
"그, 그것은······."
"선조 바짓가랑이나 붙잡는 네놈보다야 훨씬 낫지. 내 말이 틀려?"
"······."
국왕은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저 말에 반박할 논리와 근거가.
"······하, 도대체 무슨 말씀들을 나누시는 겁니까?"
반면 상황파악이 부족한 칼버트 군터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국왕도 국왕이지만, 왕자 쪽은 아예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리라.
"두 분께서 사이좋게 실성이라도 하셨습니까? 저 몰래 환각초라도 구해다 드셨어요?"
아무래도 요즘 너무 편하게 해줬나 보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잡아야겠지.
왕족 기강 말이다.
"폐하, 그리고 전하, 소인 칼버트 군터이옵니다. 아무리 환각초를 드셨어도 제 얼굴은 알아보셔야지요. 두 분께서 어찌 그 자리에 멀쩡히 계시는지,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
"야, 누렁이."
"······누, 누렁이?"
"지 머리털 누런 건 인정하나 보네. 못 참고 발끈하는 거 보니."
하사드가 국왕 안토니오의 가죽장갑을 빼앗으며 말했다.
마치 본인 물건을 되돌려 받는 듯 자연스러운 강탈이었다.
"넌 좀 맞아야겠다."
참고 싶어도 참을 수가 있어야지.
아니, 사실 아까부터 참을 생각 따윈 없었다.
언제였더라? 집무실 문을 지 마음대로 열었을 때부터?
"신하라는 놈이 왕한테 말하는 본새가 영 거슬리거든."
버릇없는 탐관오리는 흠씬 두들겨 패야 제맛.
장갑을 낀 하사드가 두 주먹을 쾅 쾅 부딪쳤다.
"맞다가 죽을 것 같으면 허락받고 죽어. 알겠어?"
* * *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처음에는 그랬다.
이것들이 드디어 실성을 했구나 싶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지껄여대는 왕자도.
그런 왕자를 방관하는 국왕도 모두 미쳐버린 줄로만 알았다.
한데,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잘못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내가 밀린다고······?'
칼버트 군터는 일신의 무력에 소홀했던 여러 귀족들하고는 달랐다.
역사 속 권력가들이 건강 악화나 암살 따위로 허망하게 죽는 걸 많이 보았으니까.
'이깟 약골한테······?'
하여 권력가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꾸준히 무예를 익히고 단련했다.
말년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혹시 모를 유혈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커, 커헉······!"
그렇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기사를 했다면 단장의 자리에 올랐을 재능이라는 평가도 받아봤다.
이쯤 되면 암살자가 밤중에 찾아와도 두렵지 않노라 확신했다.
"숨 쉬어. 숨."
"허억! 허어억······!"
"얼마나 맞았다고 숨이 넘어가?"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고작 이 시한부 약골 왕자 앞에서 꼼짝을 못 하는 걸까?
분명 물주먹인데 맞고 나면 왜 근육과 뼈들이 비명을 지르는 걸까?
빠악! 빠악! 빠악!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주먹을 피할 수조차 없다.
딱히 빠르지도 않은데 말이다.
"커헉······!"
심지어 급소만 정확히 노린다.
명치, 인중, 관절, 턱, 복부, 간장.
도대체 이런 권법을 언제부터.
아니, 어디서 배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비단 이 권법뿐만 아니라, 말하는 내용하며 국왕의 반응까지 전부 수상해. 선조가 어쩌고, 후손이 어쩌고, 심지어 우리 가문의 시조까지 들먹거려? 이게 단순히 실성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칼버트는 성공한 탐관오리니만큼 머리 회전이 비상한 자다.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먼저 왕자가 단순히 미친 게 아닐 가능성.
말 그대로 사람 자체가 바뀌었을 가능성.
이쯤 되면 배제할 수 없으리라.
"어금니 꽉 깨물어. 잘못 맞으면 이빨 상한다."
"······자, 잠깐! 팰 때 패더라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하!"
가설을 세웠으니 증명할 차례.
칼버트가 재빨리 꿇어앉았다.
일단 주먹질부터 멈춰야겠다.
"소신 어리석게도 전하의 변화를 미리 살피지 못하였나이다! 허나 이제는 다르옵니다. 확실히 알겠사옵니다! 전하께서 더 이상 소신이 알던 그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옵니다!"
설령 잘못 짚었다 한들 상관없다.
정말 다른 사람이든, 단순히 실성을 했든.
어느 쪽이든 당장 이 상황만 모면하면 된다.
본격적인 반격은 상황 파악 이후의 문제니까.
"네가 알던 분이 아니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이 알고 있던 전하께서는 오랜 지병 탓에 격렬한 움직임이 매우 어려우신 것으로 알고 있옵니다. 뿐만 아니라 한평생 무예를 익혀본 적도 없으시며, 평소 언행이 그리······."
"그리?"
"······시원시원하신 편도 아니셨습니다. 조용한 분이셨지요."
하마터면 그리 더럽지 않았다고 할 뻔했네.
잘 참았다. 역시 탐관오리답게 남다른 침착함이다.
"그렇긴 하더라."
그런 칼버트의 반응이 재미있기라도 한 걸까?
왕자 몸에 깃든 하사드가 피식 웃으며 멱살을 풀었다.
"아니,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지병이 있으면 심신을 단련해서 이겨낼 생각부터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야, 누렁이, 네가 한번 대답해봐. 내 말이 틀렸냐?"
"무,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당연히,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치? 근데 그러기는커녕 여기 좀 봐라. 왼손 검지랑 엄지만 닳아있는 꼴을!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허구한 날 방에 숨어서 책만 읽었다는 뜻이야. 책만!"
"왕자 전하께서 유난히 책을 좋아하시기는 하셨습니다."
"쯧! 하여튼 간에 요즘 것들이란, 나 때 이런 놈이 왕자였으면 다리몽둥이를 그냥 콱······!"
슬슬 느낌이 온다.
아니, 이쯤 되면 확정 수준이다.
칼버트의 눈앞에서 혀를 차는 저 소년은 왕자가 아니다.
전혀 다른 존재가 확실하다.
'······가만, 설마?'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칼버트가 국왕 안토니오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왕자의 하대에도 쩔쩔매며 '선조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나?
'누가 아들한테 선조라는 호칭을 써? 그것도 극존칭까지 하면서.'
대하는 태도뿐만이 아니다.
달라진 왕자의 돌발행동에 엄청난 초조함과 불안을 느끼는 표정.
한데 정작 왕자는, 아니, 왕자의 탈을 쓴 누군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누렁이."
"······예? 아, 예! 전하!"
"눈깔 굴러가는 소리 다 들려."
"어, 어인 말씀을······."
"대가리 그만 굴리라고."
이런.
너무 뜸을 들였나 보다.
정신이 번쩍 뜬 칼버트가 재빨리 머리부터 납작 조아렸다.
"소, 송구하옵니다! 소신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의 육신에 친히 행차하시여 이토록 고강한 권법으로 가르침을 내려주신 분께서 과연 누구실까, 그것이 궁금한 까닭에 그만 눈과 머리를 굴리는 무례를 범했사옵니다!"
괜히 탐관오리가 아니다.
아첨하는 능력 역시 수준급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발휘할 기회가 흔치 않았을 뿐.
국왕이란 작자도, 왕자란 놈도.
모두 시원찮은 놈들이었잖아?
"그래?"
"예! 전하!"
"그럼 맞춰봐."
"······예?"
"생각을 해보니까, 네놈이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어지간한 힌트는 다 나왔더라. 그러니 맞춰보라고. 왕자의 육체에 친히 행차하신 내가 누구인지, 맞추면 살려줄게. 이거 진심이야."
순순히 살려주겠다?
자신이 누군지 알아내면?
칼버트로서는 가장 절실한 대가였다.
계속 여기 있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았으니까.
"······하오면, 소신이 감히 전하께서 내어주신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나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일련의 대화 속에서 힌트가 제법 나왔다.
집무실에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조금만 더 침착하게 살피면 답을 찾아낼 터.
칼버트가 머리를 조아린 채 읊조렸다.
"먼저, 소신이 처음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전하께서는 소신의 이름과 머리카락의 색을 확인하시며 저희 군터 가문의 시조이신 레가사 군터 님을 떠올리셨습니다."
"음, 그랬지."
"전하 아래에서 주판이나 튕겼다고 말씀하신 부분은 과거 저희 가문의 시조께서 재무대신으로 근무하셨던 경력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신 것이겠지요."
유머러스가 아니라 노골적인 비하였다만.
하사드는 굳이 그 부분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계속 지껄여보라는 무언의 눈빛만 쏘아댈 뿐.
"뿐만 아니라 폐하께서 전하를 선조님이라 부르고 계시는데, 이는 결코 아들을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즉 전하께서는 왕국 초창기에 활동하셨던 왕족이란 결론이 도출되옵니다."
"설마 그 개나 소나 다 할 법한 추측이 최선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칼버트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어떤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머리를 다쳐 병을 얻었다든지, 마법이나 주술에 걸렸다든지, 이 땅에서 추방당한 흑마법으로 다른 이의 영혼이 깃들었다든지. 예컨대 강령술 말이지요."
강령술.
기어코 그 이름이 나왔다.
"하온데 폐하께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조님이란 호칭을 쓰고 계시옵니다. 이는 전하께서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증거. 따라서 불러낼 영혼을 특정할 수 있는 고대 강령술의 힘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논리 정연한 설명에 하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웠다.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거든.
"내가 누구냐니까?"
과거의 왕족임을 맞춘 것도 좋고.
고대 강령술의 결과임을 맞춘 것도 좋다.
하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곁가지일 뿐, 알맹이가 나오지 않았다.
"강령술의 힘으로 왕자 몸에 깃든 그 초창기 왕족이 누구냐고. 어?"
그가 원하는 대답은 하나.
'당신께서는 델무아드 왕국의 2대 국왕, 하사드 윈저 님이십니다'.
오직 그 정답만이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할 터.
"전하께서는······."
슬슬 한계에 봉착했을까?
시종일관 막힘이 없었던 칼버트가 처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게, 어떤 왕의 이름을 말해야 할지 고민되었으니까.
'침착하게 하나씩 따져보자. 먼저 우리 가문의 시조를 자기 밑에서 주판이나 튕기던 놈이라고 무시했다. 그 말인즉 아랫사람으로 부렸다는 뜻, 헌데 시조께서는 3대 국왕 시절에 돌아가셨으니······ 시기상 1대 국왕, 2대 국왕, 그리고 3대 국왕뿐이야.'
1대 국왕 아사드 윈저.
전설적인 성군으로 칭송받는 왕.
2대 국왕 하사드 윈저.
아비와 달리 폭군으로 유명한 왕.
3대 국왕 율리우스 윈저.
딱히 업적이랄 게 없는, 평범했던 왕.
'단순히 죽어가는 아들을 되살린 것도 아니고, 금지된 흑마법까지 부려가며 누군가를 빙의시켰다. 응당 목적이 있을 수밖에. 그러니 아무나 빙의시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을 이용한 계획이다.
폭군이나 평범했던 왕보다는 전설적인 성군을 원했겠지.
델무아드 왕조의 시작, 1대 국왕 아사드 윈저가 확실하리라.
'······정말 1대 국왕일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선뜻 추론의 결과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하께선 건국 왕 폐하십니다, 라는 말 한마디가.
'역사에 기록된 건국 왕은 분명 남부 방언을 썼다. 남쪽 변방 토박이 출신이니 당연한 일이지. 헌데 이자는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어. 일국의 왕이라는 위치에 걸맞지 않을 만큼 거칠고 가볍기도 해.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처럼. 그렇다는 것은······.'
아하, 이제야 알겠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까닭을.
내놓으려던 정답이 틀렸잖아?
"······본 왕국을 건국한 윈저 가문은 전신 뮬리타 제국 시절부터 유명한 검술명가였다고 들었습니다. 작금에 와서는 그 명성이 희미해졌습니다만, 왕국 초창기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왕자분들께서 소드 마이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대단했지요."
"그래서?"
"헌데 전하께서는 완성도가 높은 권법을 구사하셨습니다. 소신도 제법 오랫동안 무예를 단련해왔사온데, 반격은커녕 피하지도 못할 만큼 고강한 경지를 뽐내셨습니다."
"그래서?"
"물론 검법을 익히면서 권법도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오나, 그 정도로 고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재능이 필수 아니겠사옵니까?"
"그래서?"
"저희 가문의 시조께서 모셨던 왕은 총 세 분, 그중 검법이 아닌 권법을 단련하셨던 분은 2대 국왕 폐하께서 유일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제 앞에 계신 전하께서는······."
잠시 숨을 고른 칼버트가 말했다.
이것이 정답이라는 확신과 함께.
"······미천한 소신이 델무아드 왕국의 진정한 설계자, 2대 국왕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003화. 네놈이구나?(2)
칼버트의 추론이 정답에 닿는 순간.
국왕 안토니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허탈하구나.'
실로 오랫동안 은밀하게 준비했다.
죽음을 앞둔 아들이 제안해왔던 계획.
오직 자신과 왕자만이 알고 있었던 계획.
전설적인 성군 아사드 윈저의 영혼을 왕자의 몸에 부르는 것.
하여 이 부패와 몰락으로 얼룩진 왕국을 하나둘씩 차근차근 바꿔나가는 것.
'고작 이름 몇 글자 실수로 이런 사태가······.'
한데 그 계획이 시작부터 삐걱댄다.
흑마법사의 실수로 되살아난 2대 국왕.
하사드 윈저라는 폭군이 일을 망치고 있다.
'칼버트 군터, 저자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당장의 비굴함은 위기모면을 위한 연기일 뿐.
여기서 나가는 즉시 모든 세력과 사병을 소집하겠지.
국법으로 금지된 흑마법, 그중에서도 강령술을 부린 미친 왕에게 책임을 묻고자.
또 이 시대에 존재해선 아니 될 최악의 폭군을 저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정답. 너 머리 좋다?"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그 좋은 머리로 한다는 게 고작 탐관오리 짓거리야? 쓰읍······."
그런 후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사드는 여전히 제멋대로 움직였다.
"역시 안 되겠어."
"어, 어인 말씀이신지······."
"병사나 잔뜩 모아서 다시 쳐들어오겠지."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
순순히 보내주겠다던 장담?
알 게 뭐야? 처음 관직에 임명될 때 누구나 맹세하는 충신의 언약도 어긴 놈한테.
"괜히 복잡하게 그러지 말고 여기서 죽자."
"폐하, 부디 소신의 말을 들어주십······."
"죄명은 불경죄. 맞아 죽기 딱 좋은 죄네."
"폐, 폐하······!"
쿵! 쿵! 쿵!
이번에는 정말 죽임을 당할 것 같아서일까?
황급함을 느낀 칼버트가 바닥에 머리를 쿵, 쿵 찧어댔다.
"소신이 병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쳐들어온다면 그것은 반역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왕족을 시해하는 그림이니까.
강령술이나 폭군 같은 키워드는 나중의 문제겠지.
"그 어떤 귀족도 소신의 행보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오히려 소신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갈 기회처럼 여길 테지요! 하온데 어찌 소신이 불경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모든 가문이 칼버트 아래에 있는 건 아니다.
그는 그저 주류 파벌의 우두머리일 뿐.
허점을 보이는 즉시 사방팔방 물어뜯길 터.
"······폐하."
잠시 멈춘 칼버트가 하사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당장 때려 죽일 기세는 아니다.
좀 더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소신이 신하로서 충절을 버리고 권력을 탐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 왕국이, 모셔야 할 왕이 바로 서지 않았다고 판단한 까닭이옵니다. 그런 나라와 왕에게 충성을 바치기보다 직접 실권을 장악하여 바로잡아보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그 말에 국왕 안토니오는 어이가 없었다.
당장에 반박하고 싶은 것을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그저 지켜볼밖에.
저 요망한 탐관오리의 세 치 혓바닥 놀림을.
"하오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 왕국의 시작과 전성기를 친히 이끄셨던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소신 따위가 권력을 탐하겠나이까?"
국왕의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칼버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신 칼버트 군터, 여태껏 주인 없는 칼의 신세로 고군분투하였으나,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철저히 폐하의 칼이 되어 이롭게 쓰이기를 바라옵니다!"
어때?
이만하면 살려줄 만하잖아?
마치 그렇게 호소하는 듯 간절한 눈빛에 하사드가 피식 웃었다.
이놈, 용쓴다. 용써.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충신이 되어보시겠다?"
"폐하께서 살려주신 목숨입니다. 덤으로 얻은 목숨 오롯이 폐하를 위하여, 폐하께서 이끌어주실 새로운 델무아드 왕국을 위하여 남김없이 불태우겠나이다!"
"그렇단 말이지."
과연 말뿐인지.
진심인 척이라도 하는지.
밑장까지 확인을 해보실까?
"증명해봐."
"증명이라 하시면······?"
하사드가 알현실 벽에 장식되어있는 보검 한 자루를 꿇어앉은 칼버트 앞으로 휙 던져줬다.
"손모가지 한쪽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손 한쪽······ 말씀이시옵니까?"
"덤으로 허락받은 목숨이라며?"
"그, 그렇기는 하온데······."
"그럼 손모가지 한쪽은 내놓아도 되잖아?"
"······."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뢰가 싹트려면 그 정도 밑거름은 뿌려줘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목을 자르라니?
칼버트가 다시금 하사드의 눈치를 살폈다.
짓궂은 농담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걸어봤다.
하지만.
'누가 봐도 진심이잖아?'
잘못 걸렸다.
정말이지 한참 잘못 걸렸어.
왜 하필 오늘 알현실에 들이닥쳤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귀족을 보냈을 텐데.
"싫어?"
"아, 아뇨, 그렇지는······."
"싫으면 다른 부위로 바꿔줄게."
"어, 어떤······?"
"손모가지 말고 그냥 모가지 어때?"
"······."
이런 제기랄.
선택지가 없다.
자르거나, 죽거나.
'이렇게는 절대 못 죽지. 실권을 장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죽어?'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다.
죽어서 권력을 잃는 것이 두렵다.
차라리 손목 하나 잃는 게 백번 낫다.
'······그래, 까짓 거 자르자.'
죽은 사람도 되살아나는 판이다.
눈앞에 저 폭군이 명백한 증거 아닌가?
분명 어딘가에는 잘려나간 손목 하나쯤 되살릴 방법도 있을 거다.
'자르고 살아남아서 훗날을 도모하자. 죽으면 다 끝이잖아?'
굳게 마음먹은 칼버트가 왕실의 보검을 잡았다.
왼쪽 팔목을 바닥에 두고, 그 위에 칼을 겨눴다.
이왕 잃을 거면 오른손보다야 왼손이 나을 터.
"후, 후우, 후우! 흐아아아아아악······!"
거의 비명에 가까운 기합.
하염없이 격동하는 눈동자.
그러나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바로 그때였다.
탱그랑 - !
날붙이가 손목에 닿기 직전.
하사드의 빠른 발이 칼 쥔 손을 힘껏 후려 찼다.
"······폐, 폐하?"
"운 좋네. 아니, 깡이 좋은 건가?"
"무, 무슨······."
"머뭇거렸으면 너 방금 전에 죽었어."
애당초 그는 이런 방식의 신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어디까지 '척'을 할 수 있나 떠보고 싶었을 뿐.
"내일부터 별궁으로 출근하도록. 시간은 아침 다섯 시 정각, 퇴근은 내가 보내주는 시간에."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이곳 별궁으로 말씀이시옵니까?"
"지켜볼 시간이 필요하거든. 설명 더 필요해?"
그냥 죽일지, 쓰임새가 있는 놈인지.
단박에 이해한 칼버트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신 칼버트 군터, 왕명을 받잡아 내일부터는 별궁으로 출근하도록 하겠나이다."
* * *
"······하."
처음에는 그랬다.
단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이건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경이롭군.'
물론 군대를 일으켜봐야 자충수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단지 오늘의 수모를 갚아줄 방법쯤이야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여겼을 뿐.
'이게 정말 사람이 남긴 기록 맞아?'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폭군이 살아생전 남긴 기록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분명 이 많은 기록 중 어딘가에 약점이 될 만한 건덕지가 남아있을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맨몸으로 백여 명 전원이 소드 마이스터인 적국 최정예 기사단을 격파, 전쟁터에서 수천이 넘는 적군을 혼자서 몰살······. 심지어 이 모든 기록이 교차검증까지 끝낸 사실이다······?'
하사드 윈저.
흔히 폭군으로 유명한 2대 국왕의 기록을 읽으면 읽을수록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약점이고 나발이고 어찌할 수 없는, 도모할 생각을 버리는 게 마땅한 괴물이었거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잖아?'
쉬이 믿기 어렵다.
그럼에도 믿을 수밖에 없다.
교차검증까지 완벽한 기록 아닌가?
'이런 괴물한테 무슨 수모를 갚아?'
갚으려면 아까 그 자리에서.
왕자의 허약한 몸뚱이가 조금이라도 유효할 때 사생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이런 괴물이 허약한 육체를 언제까지 가만두겠는가?
혹시 모를 사태에 충분한 대비를 해놓았을 터.
'······가만.'
칼버트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순간.
무언가 그의 뇌리를 번쩍, 하고 스쳐 갔다.
'이러면 오히려 나한테는······.'
기회 아닐까?
왕자 몸에 빙의한 폭군을 그 누구보다 먼저 만난 것도.
비록 첫인상은 좋지 않았으나 약간의 신뢰를 얻어낸 것도 모두 칼버트 본인이 유일하잖아?
그러니 이건 기회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전형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말이다.
'만약 이 괴물의 신임을 내가 독차지한다면······?'
저택으로 돌아와 수많은 기록을 살펴본바.
하사드 윈저는 가만히 있을 위인이 못 된다.
특히 이 망가진 나라를, 그 왕국을 망가뜨린 원인을 절대로 가만두지 아니할 터.
그 피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무엇일까?
'······이인자가 되는 것.'
지금까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철저한 이인자로 사는 거다.
표현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 말이다.
'마침 내일부터 별궁으로 출근하라 명했지. 이 말은 곧 당분간은 나를 수족처럼 부리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회일 수밖에. 곁에 붙어서 어떻게든 점수를 따낼 기회······!'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작이 참 좋다.
운이 굉장히 좋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정보로 치면 천금을 주고도 못 살 최고급 정보를 혼자서만 독식 중이랄까?
'이럴 때가 아니야.'
이왕 이인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거,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지.
"겐트너, 밖에 있는가?"
"예, 나리, 부르셨습니까."
칼버트가 군터 가문의 집사.
그러나 실상은 여러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가문의 해결사 겐트너를 불렀다.
마르고 날카로운, 마치 뱀 같은 인상의 노인이었다.
"물건을 좀 구해줘야겠어."
"어떤 물건이 필요하신지요?"
"타고난 약골을 강골로 바꿀 때 쓰임새가 있다고 알려진 것들. 예컨대 엘릭서라든지, 마도구라든지, 효과만 확실하다면 어떤 물건이든 상관없네."
자신이 하사드라면 가장 먼저 무얼 하고자 할까?
답은 간단하다. 약해빠진 육체부터 개조하겠지.
바로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주는 거다.
그가 먼저 부탁하기 전에, 눈치껏 알아서.
설령 필요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점수만 따면 그만이니까.
"즉시 움직이겠습니다."
"헌데 시간이 조금 촉박해."
칼버트가 마도공학 회중시계를 꺼내 살폈다.
기록을 살피느라 시간이 꽤 지체되었으니, 못해도 다섯 시간 내로는 준비를 끝내야 늦지 않게 출근할 수 있을 터.
"늦어도 세 시간 내로는 세팅 끝내도록."
가뜩이나 촉박한데 두 시간을 또 깎는다.
칼버트가 아랫사람을 굴리는 방식이었다.
* * *
"이곳이 왕자가 기거했던 별궁입니다."
"알아. 내가 터 잡았으니까."
칼버트 군터를 내보낸 후.
하사드는 자신이 깃든 육체의 주인.
요절한 왕자가 기거하는 별궁 침소로 향했다.
"근데 후손아."
"하문하시옵소서."
"아까부터 표정이 썩었다?"
"······송구하옵니다."
솔직히 불만스러웠다.
그만큼 칼버트 군터를 보내준 것이 불안했으니까.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치는 건 자충수이기에 할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어도 어쩔 수 없다.
이 왕국의 간신배들은 언제나 상식 밖의 행위를 서슴지 않아왔거든.
"긴말 안 한다. 표정 풀어."
"······."
"죽은 아들 몸뚱이까지 바치면서 부탁을 했으면 그냥 믿고 맡겨. 네놈 머리통으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 알아먹어?"
"······."
"마지막이야. 너 같은 놈도 후손이라고 봐주는 거."
"며, 명심하겠습니다."
"꺼져. 생각 바뀌기 전에."
"······하오면 푹 쉬십시오. 선조님."
그렇게 국왕 안토니오까지 떠난 별궁 침소.
홀로 남은 하사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쿨럭! 쿨럭······!"
어디 그뿐일까?
손바닥 위로 붉은 피까지 토해냈다.
약해빠진 육체에 과부화가 걸린 탓이었다.
하마터면 아까 그 자리에서 일이 꼬일 뻔했다.
'······아무리 시한부였어도 그렇지, 사내놈 몸뚱이가 이게 말이 되나?'
무얼 하며 살았기에 이렇게나 약해빠졌을까?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평소에는 왕자 마테우스 윈저의 대형 초상화로 가려놓았던.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노골적으로 공개되어있는 침소 벽 커다란 대륙전도.
깨알처럼 작은 글자들이 국가마다, 지형마다, 위치마다 빼곡하게 기록된 지도를 목격하는 순간, 하사드는 비로소 깨달았다.
시한부 왕자가 무얼 했는지.
어째서 몸 단련에 소홀했는지.
아니,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지.
004화. 마테우스 윈저(1)
'마냥 인생을 낭비하다가 죽은 건 아니다 이건가?'
일컫기를 '왕국이 나아갈 방향.'
대륙전도 최상단에 새겨놓은 글귀가 말해주듯, 이 몸의 주인은 결코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단지 선택과 집중을 했을 뿐.
'허약한 몸 대신 이쪽을 택했나 보군.'
타고나기를 허약했다.
심장병이라는 지병까지 달고 살았다.
운이 좋아 봐야 단명, 나쁘면 요절.
잔혹한 현실 속에서 왕자는 선택했다.
죽어가는 왕국을 되살릴 방법만 찾아내기로.
누군가한테 넘겨줄 배턴을 만들어 보기로.
'그 누군가가 나라는 뜻이고.'
보아라. 저 대륙전도를.
마치 설명을 해주는 것 같잖아?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온 하사드에게.
작금의 대륙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 중인지를.
'딴에는 치열하게 살았구나. 꼬마야.'
망가진 왕국을 보면서, 멍청한 후손을 보면서, 버릇없는 신하를 보면서 쌓였던 화가 이 대륙전도 덕분에, 정확히는 치열하게 살다간 어린 후손의 흔적 덕분에 조금은 풀렸다.
그래, 윈저 가문의 핏줄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나쁘지 않은 발버둥이었어.'
솔직히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다.
강령술이라는 흑마법으로 깨어난 자신이, 본디 이 시대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과거의 유물이 다시금 역사에 개입해도 되는 걸까? 그게 정말 옳은 일일까?
'역사란 곧 그 시대의 것이니까.'
어차피 누군가는 바꾼다.
개혁을 하든, 혁명을 일으키든.
수많은 실패를 반복하며 어떻게든 해낸다.
윈저 가문이 혁명을 일으켜 전조 뮬리타 제국을 무너뜨린 것처럼.
스스로 왕족이 되어 제국의 영토 위에 델무아드 왕국을 새웠던 것처럼.
'만약 이 왕국에 더는 왕족다운 왕족이, 신하다운 신하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어차피 곧 누군가 뒤집어엎을 나라였다면 그냥 순리대로 흘려보내는 게 맞아.'
허수아비로 전락해 강령술까지 손을 댄 무능한 국왕.
그런 왕을 쥐고 흔들며 이익만 챙기기 바쁜 귀족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왕국의 모습은 그랬다.
역사의 뒤편으로 저물어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뒤집어엎으려는 누군가가 여기 있었네?'
어린 왕자의 발버둥을 보는 순간.
하사드의 생각 역시 조금은 바뀌었다.
'끼어들지 말아야 할 판은 아니라는 건데.'
왕국을 개혁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계획의 일환으로 누군가를 되살렸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되살아난 존재 또한 시대의 일부라는 뜻이니까.
'······뭐, 나도 두 번씩이나 죽고 싶진 않으니.'
자의든 타의든 되살아났다.
그런데 여기서 또 죽음을 맞이하라고?
한 번 죽어봐서 아는데, 기분 상당히 더럽다.
'내 나라 망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웃긴 일이고.'
역사에 기록된 것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가며 건국한 나라 아닌가?
한데 그 나라가 망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라고?
하사드 성격에 그런 인내심이 가당키나 할까?
"운 좋은 줄 알아라."
하사드가 침소의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 읊조림은 거울에 비친 유약한 왕자, 혹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개혁을 추진했던 어느 강단 있는 개혁가, 마테우스 윈저를 향한 대답이기도 했다.
"당분간은 마테우스 윈저로 살아줄 테니까."
기꺼이 놀아나 주마.
네놈이 짜놓은 이 판에.
'그러려면 이 몸뚱이부터 어떻게 해야겠는데······.'
지금 당장 칼버트 군터가 마음을 바꿔먹고 쳐들어온다면?
수많은 사병을 거느린 채 왕궁으로 진격한다면?
작금의 몸으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당분간은 지름길로 가야겠군.'
천만다행으로 하사드에게는.
아니, '마테우스 윈저'에게는 방법이 여럿 있다.
이 약해빠진 몸을 그럴싸하게, 빠른 속도로 바꿀 방법이.
'그럼······.'
목표를 정한 마테우스가 정자세로 앉았다.
다리를 교차시켜 앉은 자세가 조금 특이했는데, 이는 서방 대륙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동방 대륙의 방식으로 그쪽 문화권에서 일컫기를 '가부좌'라는 자세였다.
'바로 시작해볼까?'
동방과 서방.
두 대륙의 방식을 접목해 만들어낸.
이 세상에서 오직 마테우스 윈저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호흡법.
이른바 '마나 심법'의 묘리가 왕자의 몸으로부터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나를 단숨에 퍼뜨려 순환시킨다.'
아직 육신이 채 아물지 않은 열일곱 소년의 몸뚱이다.
망가졌다고 한들 아직까지는 정화와 재정립이 가능한 수준.
당장 이 진득한 탁기와 노폐물만 제거해도 한결 나아질 터.
'오늘 밤은 탁기를 빼내는 데 집중해야겠군.'
조금씩 거칠어지는 호흡.
구석구석 휘몰아쳐 순환하는 마나.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탁기와 노폐물.
손상과 회복을 끝없이 반복하는 근육까지.
"후욱······!"
그로부터 얼마나 더 무아지경에 빠져 심법을 주천했을까?
빠져나간 노폐물로 보건대 하룻밤을 꼬박 새웠음이 분명한 그때.
"이봐, 릴리, 딸꾹······! 전하께서는 또 서책 읽으시다가 늦게 주무······ 딸꾹! 어흐, 속 아파 죽겠네. 어차피 주무시고 계실 거, 뜨끈한 수프로 해장이나 하고 올걸."
침소 바깥으로부터 어떤 소란이 들려왔다.
왕궁에서 절대 들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소란이.
"쉿! 자중하십시오! 전하의 침소 앞에서 어찌 이런 불경한 말씀을······!"
"내가 그럼 전하의 침소 앞이니까 이러지. 군터 가문이나 크리스티 가문 앞에서 이럴까?"
"산드로 경! 그만 하세요! 전하께서 들으십니다!"
"쓰읍, 이 사람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이게 다 우리 전하께서 아량이 넓으시다~ 뭐 그런 뜻이라고. 생각을 해봐. 어느 나라 왕자님께서 호위기사가 술독에 빠져 사는데 모가지 안 날리고 곁에 두시겠나? 이것 참 성은이 망극해서 몸 둘 바를······ 딸꾹! 어흐, 속이야."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니, 개소리를 들을수록 마테우스의 표정도 함께 구겨졌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일국의 왕자 아닌가?
왕족에게 호위란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존재.
그런데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호위기사라는 존재를 말이다.
'난 또 강령술 때문에 접촉을 막아놓은 건가 했더니만, 그냥 술 처먹느라 늦게 온 거였어?'
나라가 박살 난 것보다도.
왕권이 바닥을 치는 것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이게 더 충격적이다.
'왕자 호위는 기사단 내에서도 엄선된 인원으로 호위대를 구성한다. 심지어 그 왕자가 왕위계승권 1순위라면 더더욱.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냥 왕실 기사단에 주정뱅이 따윈 존재할 수가 없어.'
하사드 윈저로 살던 시절의 상식은 그랬다.
입단은커녕 테스트를 받아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터.
한데 어찌 저런 놈이 기사랍시고 주군의 침소 앞에서 술 냄새를 풍긴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망가진 거야?'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다.
정말 왕실 기사단의 기강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저 호위기사 개인의 문제일 뿐인지.
쾅!
문을 박차고 나온 마테우스가 술 취한 기사 산드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저, 전하······? 주무시는 거 아니셨······ 어억······!"
그러고는 침소 안쪽으로 끌어당겨 거칠게 넘어뜨렸다.
"시녀."
"······예? 아, 예. 전하, 말씀하시옵소서."
"일 봐. 이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선 시녀부터 보낸 뒤 침소 문까지 걸어 잠갔다.
그럼에도 술 취한 기사 산드로 루이스는 굼뜨기만 했다.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으니까.
"저, 전하······?"
이게 정말 왕실 기사가 맞을까?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명색이 기사라는 작자가 저리 굼뜨고 멍청해도 되는 거야?
오늘 몇 번 되뇌는지 모르겠는데, 이 상황이 진짜 맞아?
"갑자기······ 갑자기 왜 이러십······."
"입 다물어. 죽이고 싶어지니까."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 주먹이 울부짖었지만, 마테우스는 살면서 몇 번 발휘해본 적 없는 인내심을 모조리 긁어모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저, 전하, 도대체 왜 이러시옵니까? 어차피 안전한 왕궁에서 책만 읽으시니 너무 팍팍하게 호위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끔은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차 한잔하고 그러라고 먼저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온데 갑자기 이러시면······ 딸꾹!"
"······하."
인내심 끝.
애초에 별로 없기도 했다.
그게 많았으면 잘 참으며 살았겠지.
"그래, 쉬운 길 두고 돌아갈 필요 있나."
마침 심법을 운용한 덕분에 힘이 넘치고 가뿐하다.
거 주정뱅이 한 놈 두들겨 패기 딱 좋은 몸 상태일세.
"쥐어 터지다 보면 술도 깨겠지."
퍼억 - !
* * *
한바탕 매타작을 끝낸 뒤.
마테우스가 '주둥이 빼고 성한 곳이 없는 왕실 기사 산드로 루이스'와 함께 어디론가로 향하며 궁금증을 하나둘씩 풀어나갔다.
"그러니까 결론은, 인력이 부족하다?"
"······예, 그, 그렇습니다."
"해서 왕족 호위를 너 같은 폐급이 반나절씩 교대하면서······ 일종의 짬 처리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기사단 총원이 열 명인지라······. 그나마도 내년에는 셋이 더 은퇴할 예정입니다."
"왜지?"
"슬슬 나이가 찬 인원도 있고, 왕실에서 지원해주셨던 운영비까지 삭감되는 바람에······."
"그러니까, 망했다?"
"······."
"망했냐고, 왕실 기사단."
몇 번을 되묻는지 모르겠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지.
그도 그럴 게, 왕실 기사단이 어떤 집단인가?
왕국에서 칼 잡고 사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입단을 꿈꾸는 엘리트 기사단 아닌가?
마테우스의 기억 속 왕실 기사단은 언제나 그랬다.
분명 그랬는데.
"그, 그것이······ 입단 희망자는 없다시피 한데 은퇴자는 매년 나오다 보니······ 아마 이대로라면 조만간······."
"자연스럽게 사라질 예정이다?"
"······."
왕실 기사단은 왕실의 칼과 방패나 마찬가지다.
오직 왕실을 향한 충성심만으로 똘똘 뭉친 최상급 무력집단.
한데 그 핵심적인 집단이 망할 위기에 놓였단다.
저 주정뱅이처럼 폐급 기사들만 남아있단다.
'······하기야, 국왕이란 놈부터 허수아비 취급인데.'
왕실의 운영비는 전적으로 왕실 금고에서 나온다.
이 말인즉슨 왕실 기사단의 주체가 왕실이라는 뜻.
한데 그 왕실이 귀족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린 탓에 기사단을 포함한 여러 부속기관들마저 덩달아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니, 누굴 탓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왕실의 입지가 추락해서 기사단 운영이 어렵다?
이해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다.
하지만 그것이 근무 중에 술이나 처마셔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버러지들이 꼴에 왕실 기사랍시고 '경' 호칭을 듣고 다니는데, 이걸 어찌 가만둘 수 있을까?
마테우스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
'버르장머리를 고치든, 싹 다 내쫓고 재창단하든.'
그렇다면 먼저 확인을 해야 한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고쳐서 쓸 부분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야."
"······."
"야."
"······아, 예, 예! 전하!"
"내가 일부러 주둥이는 멀쩡하게 뒀거든? 물어볼 게 하도 많으니까. 그런데 이따위로 대답이 느리면 그냥 턱주가리까지 박살을 내버리고 싶어지잖아? 안 그래?"
한편 툭 건들면 터질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왕자의 반응에 주정뱅이 기사, 아니, 신나게 두들겨 맞은 덕에 술이 깨버린 기사 산드로 루이스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아는 그 약골 왕자 맞아?'
아무리 술과 노름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냈다 해도 자신은 엄연한 왕실의 기사다.
타고나기를 허약한 데다가 지병까지 달고 사는 왕자한테 맨손 격투로 밀릴 짬밥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데 밀렸다. 아니, 밀린 수준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를 당했다.
상대가 왕자라서, 자신이 술에 취해서 진 게 아니다.
정신은 몇 대 맞았을 때 이미 차렸으니까.
'말투는 또 왜 저 모양이고?'
어디 싸움만 잘할까?
성격과 말투까지 포악하게 변했다.
평소 그 친절했던 왕자님은 온데간데없다.
'이게 깡패지, 어떻게 왕자야?'
확실하다.
이 소년, 더는 예전의 왕자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저 깡패······.
······아니, 왕자는 정말 자신의 턱주가리를 박살 내고도 남을 위인이리라.
"시, 시정하겠사옵니다!"
"시정은 됐고."
"저, 전하, 턱주가리만은 제발······."
"아니, 그거 말고."
한참을 걷던 마테우스가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왕실 기사단의 합숙소가 보였다.
"들어가서 집합시켜."
"지, 집합 말씀이십니까?"
다짜고짜 집합이라니?
아직 다들 자고 있을 텐데?
"단장부터 막내까지 전원 연무장으로."
"다, 단장님도요?"
"단장은 왕실 기사 아니야?"
"하, 하오나 전하, 아직 시간이······."
"싫으면 마라."
"······예?"
"열 명이 나눠 맞을 거 혼자 다 맞고 싶으면."
"······!"
"동료애만큼은 내가 인정해줄게."
아, 그건 아니 될 말이지.
산드로가 재빨리 합숙소로 뛰쳐들어갔다.
어찌 되었든 일국의 왕자가 내린 명령이잖아?
까라면 까야지. 본인도, 단원들도, 단장님께서도.
"집합! 전하께서 왕실 기사단 총집합을 명령하셨다! 집하압······! 왕실 기사단 전원은 지금 즉시 연무장으로 모이도록! 단장님부터 막내까지 예외 따윈 없다! 집하아아압 - !"
올해로 27살.
수습기간 포함 12년 차 왕실 기사 산드로 루이스.
어떤 사연인지 진급과 출세를 포기한 뒤로 줄곧 술통에 빠져 살기 바빴던 그에게 아직 남아있는 재능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쩌렁쩌렁 울려대는 목청이었다.
005화. 왕실 기사단(1)
"전하, 소신 칼버트 군터이옵니다."
한편.
시간에 맞춰 모든 준비를 끝낸 칼버트 군터가 왕자의 침소 앞에 섰다.
그의 뒤로 다양한 엘릭서, 포션, 격투가용 아티팩트 따위가 담긴 커다란 궤짝이 무려 여덟 통이나 놓여있었으니, 칼버트의 어깨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전하?"
보는 눈과 귀가 많다.
폐하라는 호칭은 자중함이 옳을 터.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별궁 전속 시녀 릴리가 조심스레 다가올 뿐.
"저기, 나으리."
"오, 그래. 마침 잘 왔느니라. 전하께서는 아직 주무시는 게냐?"
"그런 것은 아니옵고, 일찍이 기침하시고는 곧장 왕실 기사단 합숙소로 향하셨습니다."
"······뭐? 벌써 일어나셨다고?"
어디 일어났다 뿐일까?
왕실 기사단의 합숙소로 향하셨단다.
한발 늦었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어째서 다른 곳도 아닌 기사단 합숙소일까?
약해빠진 체질부터 뜯어고치기 위해서겠지.
겸사겸사 수족처럼 부릴 기사단도 점검하고.
'완벽한 선물이 되겠군.'
흡족함을 느낀 그가 시녀 릴리에게 명령했다.
"포션과 엘릭서가 담긴 궤짝만 따로 추려 수레에 옮겨 실어라."
"수레를 끌 하인도 불러올까요?"
"아니, 내가 직접 끌도록 하지."
"나리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게 그림이 더 좋거든."
"······?"
그냥 왕자의 침소에 두면 되지 않느냐고?
모르는 소리, 그렇게 하면 그림이 살지 않잖아?
분위기 봐서 기사단에 몇 병 던져주면 그 또한 예술일 터.
'이왕 시작한 거, 아부의 끝을 보리라.'
그것이 어제부터 '이인자'를 목표로 설정한 남자.
왕국의 재상이자 실세, 칼버트 군터의 결의였다.
* * *
탱그랑 - !
"다음."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밤늦게까지 책만 읽기로 유명했던 왕자가 이른 아침부터 깨어나 있는 것도.
일찌감치 깨어나서 한다는 게 왕실 기사단 총집합이라는 상황도.
"커, 커헉······!"
"다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확히는 왕자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대련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왕실 기사단장 미하일 볼트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제, 제가 졌습니다."
"다음."
이건 대련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때려눕히는 쪽에 가깝다.
훈련용 검을 무슨 몽둥이처럼 휘두르고 있잖아?
"다음."
"······."
"다음 나오라고."
"······."
"아, 끝인가?"
결국 왕실 기사단장 미하일 볼트마저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이 대련이, 아니, 대련을 빙자한 일방적인 구타가 막을 내렸다.
"혹시 억울하다든지,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다든지, 그런 놈 있으면 거수."
"······."
감히 누가 손을 올릴까?
처참하게 두들겨 맞았는데.
실력 차이, 뼈저리게 느꼈다.
단지 현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
저 책벌레 왕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강했지?
"없지? 없어야 해. 이 판국에 오기가 남아있으면 그거, 지능 문제거든."
마테우스는 애당초 대단한 재능을 바라지 않았다.
이 지경인데 그런 놈이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다만 주제 파악을 하는지 못하는지가 중요하다.
주제는 아는 놈일수록 비우기도 쉬운 법이거든.
제 딴에는 열심히 쌓아 올린 모든 경험과 깨달음을.
'쓸데없는 것들만 쌓아놓았으니 원.'
몇 대 쥐어박다 보니 알겠다.
작금의 왕실 기사단이 익힌 검술, 호흡법, 수련법 등은 모조리 보급형이란 사실을.
'나 때는 수습 기사들조차 배우지 않았던,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병사들한테나 전수되던 것들을 왜······?'
궁금하다? 그럼 풀어야겠지.
참을성 없는 마테우스가 물었다.
"근데 니들, 왜 호국검법을 익혔냐?"
"······예?"
"칼 쓰는 게 딱 그 검법인데?"
호국검법은 델무아드 왕국의 전조, 뮬리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검법이다.
당시에도 구닥다리 취급을 받아 보급형 검법으로 전락했던 구시대의 유물이건만, 어째서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왕실 기사라는 것들이 그런 검법을 익히고 구사하는 걸까?
"송구하오나 전하, 저희는 오로지 왕실 비전 검법만을 전수받을 수 있습니다."
"알아, 그게 왜?"
"말씀하신 호국검법 외에 왕실 비전 검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아옵니다만······."
"······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왕실의 비전 검법이 호국검법 하나뿐이라니?
아니, 애당초 호국검법은 비전 검법조차 아닌데?
"델무아드 검법이랑 윈저 검법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기존의 호국검법을 재창조한 '델무아드 검법'.
혹은 소드 마이스터가 발에 차일 만큼 흔했던 윈저 가문의 '윈저 검법'.
이런 것들을 왕실의 비전 검법이라 부르는 거다.
왕실 기사단이 전수받는 비전 검법 말이다.
적어도 마테우스가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하지만.
"델무아드······ 검법······?"
"윈저 검법은 또 뭐야?"
"······그런 검법이 있었나?"
"선배님은 들어보셨습니까?"
"아니, 나도 처음 들어봐."
기사단원들의 반응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델무아드 검법도, 윈저 검법도 금시초문.
정말 호국검법밖에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하······."
이쯤 되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옛날 같았으면 어디 촌구석 기사단조차 입단을 장담하지 못할 만큼 수준 이하였으니까.
"단장."
"하문하시옵소서."
"니들 수준이 떨어지는 건 잘 알겠어. 근데 수준이 떨어지는 거하고 근무시간에 술이나 처먹는 기사가 있는 거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잖아. 맞지?"
"송구하옵니다. 산드로 루이스 경의 음주 문제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설마 전하를 호위하는 근무 시간에조차 술에 취해있을 거라고는······."
"그게 변명이 되냐?"
"······문제가 있는 인원임을 파악하였음에도 전하의 호위 기사로 배정한 점 또한 씻을 수 없는 대죄입니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전하."
그나마 추한 변명은 하지 않는다.
약골 왕자를 만만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이놈들, 피곤에 전 몰골 좀 봐라.
이 얼굴이야말로 2교대로 이루어지는 왕족 호위, 각종 왕실 내 의전 행사, 왕국군 검술교관 업무 등 무수히 많은 스케줄을 고작 열 명이서 감당해왔다는 증거일 터.
'그러니 저런 주정뱅이 손까지 빌려 썼겠지.'
작금의 왕국에서 왕자 호위, 솔직히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을 거다.
이미 허수아비로 전락한 왕족을 구태여 암살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한평생 방구석에서 책만 읽던 놈이 이 나라의 첫 번째 왕위 계승권자였으니까.
"······에휴."
마테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망나니 같은 놈들이기를 바랐다.
그럼 그냥 시원하게 패고 내쫓으면 그만이거든.
한데 이놈들은 딱 봐도 망나니와는 거리가 멀다.
근면성실하며,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단지 기사로서 실력이 부족할 뿐.
'아, 한 놈만 빼고.'
마테우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옛날 같았으면 이 자리에서 팔다리를 분질러도 시원찮을 주정뱅이 기사에게 말했다.
"야, 주정뱅이."
"······예? 아, 예, 전하."
"훈련용 중량장비 있지? 쇠주머니 같은 거."
"중량장비는 어찌 찾으시는지······."
"다 가져와 봐."
"저, 전부 말이옵니까?"
"자꾸 말을 여러 번 하게 만드네?"
"소, 송구하옵니다! 즉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혹여 또 맞을까 두려워 쏜살같이 달려갔던 산드로 루이스가 모래주머니, 납주머니, 쇳덩이 조끼 등 여러 훈련용 중량장비를 수레에 가득 실어 돌아왔다.
"상태 봐라. 니들 이거 안 쓰냐?"
한마디 툭 던진 마테우스가 녹과 먼지로 가득한 훈련용 중량장비를 팔, 다리, 몸통에 차곡차곡 둘렀다.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너무 낡은 방식의 훈련법인지라 지양하는 추세입니다. 아무래도 근육과 뼈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는 훈련법이라서······."
"무식한 구닥다리 훈련법이다?"
"저희 왕실 기사단 전원은 현 델무아드 왕국의 유일무이한 소드 마이스터이신 아서 크리스티 경께서 편찬한 훈련저서에 의거하여 훈련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쩌고 경께서 이런 건 무식한 구닥다리 훈련법이라 말씀하셨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하."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껏해야 소드 마이스터의 경지로 유일하다는 표현이 붙는 것도 웃긴데, 심지어 그 유일한 소드 마이스터께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양반일 줄이야.
"······그래 뭐, 일단 그렇다 치고."
몸에 두른 장비의 총합 무게가 얼마쯤 되었을까?
한참을 두르고 또 둘렀던 마테우스가 비로소 마나를 운용했다.
부족한 근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뼈마디와 근육의 손상까지 보호해줄 만큼 효율적인 운용이었으니, 이 또한 마나 심법의 효과였다.
"다들 궁금할 거야. 이 상황 자체가."
꼭두새벽부터 연무장으로 불려나와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해야 하는 까닭?
그야 당연히 궁금하다.
다짜고짜 들어본 적도 없는 왕실 비전 검법들을 늘어놓으며 아는 척하는 거?
마찬가지로 의문스럽다.
그러나 지금 단원들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를 띄우는 것은 왕자의 변화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약골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기사단 전원을 때려눕히는 약골이 어디 있어?
"너희를 납득시킬 의무 따윈 없으니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지. 하루 종일 책만 읽다가 기연을 얻었다. 앞으로 계속 강해질 예정이고, 덕분에 성격도 많이 변했어."
정말이지 성의 없는 설명.
그러나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막말로 기연을 얻은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유약했던 왕자가 하루아침에 변한단 말인가?
"근데 이 사람이라는 게 힘이 생기면 휘두르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나도 그래. 이제 책 좀 적당히 읽고 힘이나 휘두르면서 살아보게. 이를테면······ 일국의 왕자답게?"
일국의 왕자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기사들의 궁금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너희도 알다시피 작금의 왕국에는 버러지들이 참 많아. 왕실부터 시작해서 각계각층에 득시글거리지. 여기도 있잖아? 근무시간에 술이나 퍼먹는 놈."
버러지들이 많단다.
본인이 속한 왕실까지 들먹거린다.
직접적으로 지목당한 주정뱅이 기사 산드로 루이스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나는 오늘부터 이 왕국에 기생하는 버러지들을 박멸할 계획이야. 그게 왕족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릴 생각이 없어. 이 타이밍에 한 번 털고 가지 않으면 이 나라,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보거든."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이지 파격적이었다.
왕국 존립에 해가 되는 존재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척살하겠다는 뜻처럼 들렸으니 말이다.
"문제는 때려잡아야 할 버러지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나와 함께 왕국을 정화할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해볼까 해. 물론 거기에 네놈들의 자리는 없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지금 당장 네놈들의 자리는 없다.
그 말을 들은 단원들이 깨달았다.
아까의 대련이 곧 테스트였음을.
한 명도 빠짐없이 불합격했음을.
"그러니까 거기 가만히 서서 방해나 할 생각이면 그냥 내 앞에서, 아니, 이 기사단에서 꺼져. 영원히."
할 말은 모두 끝났다.
판단과 선택은 오롯이 개인의 몫.
중량장비를 잔뜩 껴입은 마테우스가 본격적인 수련에 나서려는 그때였다.
"······정말."
눈치만 살피기 바빴던 주정뱅이 기사.
산드로 루이스가 입술을 뗐다.
"그게 가능합니까?"
"질문을 똑바로 해."
"정말 이 왕국에 기생하는 버러지들을 모조리 처단할 수 있으시냐는 물음입니다."
어쭈, 이놈 봐라?
조금 전까지 하고는 눈빛부터 다르다.
"보아하니 술이나 처먹고 다니게 된 사연 같은 게 있나본데, 난 그딴 거 관심 없으니까 싸구려 감성팔이 늘어놓을 생각 말고······ 아, 마침 저기 오네."
매정한 말만 내뱉던 마테우스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떤 중년인이 약병 가득한 수레와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어제 첫 번째로 때려잡은 버러지야."
그 중년인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기사단 전체가 두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작자가 왜?
"······카, 칼버트 군터?"
델무아드 왕국의 실세.
현 왕국 권력의 실질적인 정점.
재상 칼버트 군터가 어째서 왕실 기사단 앞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전하, 앞으로의 대업에 필요하실 것 같아 소소하게나마 준비를 해봤사옵니다. 앞으로도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옵소서."
어디 모습만 드러냈을까?
마치 충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이쯤 되면 충신을 넘어서 간신배다.
듣기 좋은 말만 속삭여주는 아첨꾼 말이다.
"알았으니까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
"예, 전하. 편히 일 보시옵소서."
칼버트와 몇 마디 나눈 마테우스가 다시금 산드로를 바라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네."
006화. 왕실 기사단(2)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지금부터는 행동으로 보여줄 차례.
왕자의 행보에 가장 먼저 호응하는 쪽은 놀랍게도 질문을 던졌던 산드로 루이스였다.
"흐읍······!"
그는 비록 마테우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본인이 감당 가능한 최대치의 장비를 온몸에 겹겹이 둘렀다.
"사, 산드로 경······?"
"갑자기 왜······."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무슨 백 년 전에나 하던 훈련을······."
기사단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야말로 모두의 우려가 집중되는 순간.
"······나야 어차피 그만둘 예정이기도 했고."
심경의 변화를 느낀 산드로 루이스가 말했다.
"그냥, 대답이 너무 좋잖아."
무려 칼버트 군터라는 대답도.
그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어제 처음 사냥한 버러지에 비유하는 모습도.
하물며 그 말이 사실처럼 느껴지는 정황까지도.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중량장비를 착용한 채 묵묵히 연무장을 뛰는 왕자.
또한 그 뒤를 느리게나마 쫓아가는 주정뱅이 기사.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에 단원들이 너도나도 당혹스러운 듯 서로만 쳐다보기 바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왕실 기사단 전원 중량장비를 착용한다."
왕실 기사단장 미하일 볼트가 명령을 내렸다.
낡아빠진 중량장비를 솔선수범 착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왕실 기사단 소속으로서 왕실을 섬기고자 맹세한 몸이다. 그런 우리가 전하의 뜻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불충이며 불의. 그런 불명예까지 떠안을 순 없지."
왕실 기사단은 오직 왕실을 위하여 존재하는 집단이다.
입단과 더불어 왕실을 섬기겠노라 맹세하지 않았는가?
"명예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이니."
단장의 말이 심장을 흔들기라도 한 걸까?
결국 다른 기사들 역시 중량장비를 착용했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무거운 훈련용 중량장비가 서로 부딪치는.
지금은 다소 어색한 소리가 왕실 기사단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자그마치 백여 년 만에 들려오는, 이 연무장이란 '공간'에게는 매우 반가운 소리였다.
* * *
"허억! 허억! 허어어억······!"
그로부터 얼마 후.
정말이지 오래간만인 것 같다.
업무가 아닌 훈련으로 녹초가 되는 것은.
심지어 온종일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두 시간, 오차 범위 몇 분 남짓.
그럼에도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힘들었다.
"쯧쯧, 기사라는 놈들이."
아, 물론 기사들 이야기다
마테우스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아침운동에 불과할 뿐.
"그렇게 힘드냐?"
"아, 아닙니다!"
"힘들면 때려치워."
솔직히 기사단원 중 몇몇.
아니, 거의 대부분은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다.
가뜩이나 과중한 업무에 이런 고강도 훈련까지?
장담할 수 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할 수······ 할 수 있습니다!"
하나 그런 생각과는 달리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있었다.
'아예 시작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 번 해보고 도망칠 순 없지. 그건 너무······ 쪽팔리잖아?'
그래도 명색이 왕실 기사 아닌가?
훈련 한 번 겪어보고 도망칠 순 없다.
그건 명예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다.
예컨대 수치심이라든지, 부끄러움이라든지.
'여기서 그만둬봐야 불명예 은퇴밖에 더 돼?'
두 번째는 단장 미하일도 언급했던 명예.
다만 거기에 약간의 실리가 담긴 문제였다.
'불명예 은퇴자로 쫓겨날 바에는 훈련받다가 다쳐서 명예롭게 은퇴하고 말지. 그럼 어디 촌구석 영지 기사단에서 단장이나 고문이라도 해먹을 수 있을 거 아니야?'
불명예 은퇴가 무엇인가?
간단하다. 기록말소행이다.
10년 차 기사가 불명예 은퇴를 당할 경우 지난 10년간의 경력이 삭제된다는 뜻.
쉽게 말해 기사로 살아온 평생을 부정당하는 셈이니, 명예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인생 2막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리라.
'무엇보다······ 정말 변했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중요한 부분.
그것은 바로 약골 왕자의 놀라운 변화였다.
아까의 대련도 그렇고, 이토록 무식한 훈련을 끝냈음에도 호흡 한 번 가쁘게 쉬지 않는 강철 체력도 그렇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변화, 아니, '진화'를 이루어냈다.
이게 다 책에서 얻었다는 그 기연 덕분일 터.
'그걸 조금이라도 나눠 받을 수만 있다면······.'
지병까지 달고 태어난 약골을 하루아침에 탈바꿈해준 기연 아닌가?
한데 그런 대단한 기연의 콩고물을 본인들이 조금씩 나눠 먹는다면?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몰라.'
모든 기사의 꿈이자 목표.
소드 마이스터라는 상징적인 경지.
손가락 끝에 닿을지도 모르리라.
"진짜 할 수 있어?"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흐음."
누군가는 꿈을.
누군가는 현실적인 판단을.
저마다의 근거와 믿음으로 꿋꿋이 버티려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마테우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뭐,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든가."
버티기만 한다면야 그 과실은 제법 달콤할 거다.
다시 말하지만 '마지막'까지 버텨낸다면 말이다.
"단장."
"예, 전하."
"몇 가지 전달사항이 있다."
"하명하시옵소서."
"오늘 소화한 훈련, 아직 소화했다고 보긴 어려운데, 아무튼 지금 이게 한 세트야."
훈련용 중량장비를 착용한 채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훈련 스케줄.
예컨대 연무장 뜀박질, 마테우스가 일컫기를 전투 구보부터 기사들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배워보는 검법, 격투술, 마나 호흡법, 무지막지한 체력 훈련 등등.
이 모든 흐름이 한 세트, 즉 하나의 루틴이란 뜻일 터.
기사단원 모두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 훈련을 하루에 총 다섯 세트씩 소화하도록."
······뭐?
다섯 세트라니?
이 고된 훈련을 하루에 다섯 번이나 반복하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죽어서 은퇴할 일 있어?
"하, 하오나 전하, 물론 꾸준한 수련이 기사의 덕목임은 당연지사이옵니다만, 소장들은 훈련 이외에도 왕실의 기사로서 날마다 반드시 소화해야 할 일정들이 여럿······."
"그건 니들 사정이고."
"······예?"
"잠을 쪼개서 자든, 포션이나 엘릭서로 체력을 보충하든 니들이 알아서 감당해."
"······."
"왜, 못 해먹겠어? 그럼 때려치워. 몇 번 말하냐?"
"아, 아닙니다. 해보겠습니다."
타협의 여지 따윈 없다.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플 터.
"그리고 니들, 하루에 밥은 몇 번이나 먹냐?"
"······여태까지는 아침 식사와 점심 간식, 저녁 식사까지 포함해서 총 세 번이었습니다."
"다섯 번 먹어. 훈련 세트에 맞춰서."
"시, 식사도 다섯 번 말씀이십니까?"
"닭, 달걀, 통밀빵, 귀리죽, 채소, 생선, 물, 포션, 엘릭서. 당분간 니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술이나 간식, 시뻘건 고기 따윈 쳐다볼 생각도 하지 말고."
훈련은 다섯 번, 식사도 다섯 번.
그런데 먹을 메뉴는 한정되어있단다.
기사단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경우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정신적인 수양 차원에서······."
"배부른 소리하고 자빠졌네. 정신적인 수양이면 그냥 굶겼겠지."
"하, 하오시면······."
"해보면 알아."
식단의 중요성조차 알지 못하는 왕실 기사단이라니.
과거 올바른 식습관을 정착시키느라 온갖 고생을 다 했건만.
다시 한번 나아갈 길이 참으로 멀었음을 느끼는 마테우스였다.
"마지막으로 왕실 기사단의 전반적인 재정비를 시행할 예정이다. 낡은 장비부터 시작해서 연무장, 합숙소, 기타 시설, 인력보충 등 필요한 게 있다면 가감 없이 요구하도록."
이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게 없거든.
"······전하."
하지만 그 반가움도 잠시.
단장의 낯빛이 금방 어두워졌다.
"대단히 송구하오나,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막대한 비용이 청구되는 일입니다. 헌데 아시다시피 저희 왕실 기사단은 내년에도 절반이 기사단을 떠나야 할 만큼······."
"가난하지. 정확히는 우리 왕실이."
왕실 기사단은 왕실의 사유재산으로 운영된다.
당장 유지할 돈이 없어서 인건비를 줄이기로 통보까지 해놓고는 갑자기 뭔 재정비 타령이란 말인가?
"그래서 불러왔잖아?"
"······예?"
"누렁아, 이리 와봐."
누렁이? 누렁이가 누구지?
기사단원들의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왕자의 부름에 쏜 살처럼 달려오는 칼버트 군터.
그 왕국 실세의 머리카락이 싯누런 황금색이었으니까.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대대손손 알차게 해먹었지?"
"부정하지 않겠사옵니다."
"그럼 이제 애국 좀 하자?"
"기꺼이 그리하겠나이다."
정말이지 적응하기 힘든 구도다.
왕국의 최고 실세를 앞마당 똥개처럼 부르고 다루는 왕자라니.
아무리 봐도 이게 현실이 맞나 싶다.
"들었지? 나 말고 이놈이랑 상의해."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눈치 주면 말해. 그날이 군터 가문 멸족의 날이니까."
"아, 알겠습니다. 하오면 시급한 것들부터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그래, 그래, 자잘한 건 니들끼리 알아서 하고."
할 말을 끝낸 마테우스가 수레에서 엘릭서 한 병을 꺼내 마셨다.
그러더니 추가로 몇 병 더 꺼내 단원들을 향해서 한 병씩 던져줬다.
몇 병만 갖다 팔아도 기사단 몇 달 치 인건비가 나올 만큼 값비싼 엘릭서였다.
"수고들 해. 누렁이는 따라오고."
손을 휘휘 저으며 어디론가 향하는 왕자.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뒤쫓는 왕국의 실세.
몇 번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적응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 * *
"쟤들이 요구하는 거, 웬만하면 다 들어줘."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겸사겸사 왕궁도 고칠 데 고쳐놓고. 명색이 왕족들 사는 곳인데 상태가 이게 말이 되냐?"
"즉시 준비하도록 하겠나이다."
재상 칼버트 군터의 집무실.
국왕의 집무실과 달리 호화로운 공간에 두 남자가 앉아있었다.
왕자와 칼버트 군터, 앞으로 왕궁 내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조합이었다.
"너, 애국자 흉내가 보통이 아닌데?"
"흉내가 아닌 진심이옵니다. 애국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만 놓고 보자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왕국은 소신에게 이만한 권력과 풍족함을 안겨준 나라입니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물에 빠지면 주둥이만 둥둥 떠다닐 놈."
"과찬이시옵니다."
"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말을 지껄인다.
칼버트 군터, 다시 봐도 참신하게 미친놈다웠다.
"근데, 누렁아."
"하문하시옵소서. 전하."
"이것들은 다 뭐냐?"
마테우스가 칼버트의 책상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여러 영지나 가문의 인장이 찍힌 장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걸 왜 네놈이 먼저 받아?"
장계란 각 지역에서 왕실과 조정으로 올려보내는 일종의 보고서 내지 요청서다.
그러한 성격상 당연하게도 국왕이 가장 먼저 읽어야 하거늘, 어째서 재상의 집무실에 쌓여있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칼버트는 변명하지 않았다.
곧장 바닥에 머리부터 조아렸다.
하루 겪어보며, 그리고 그의 자서전과 여러 기록을 읽으며 깨달았거든.
이 폭군에게 변명 따윈 통하지 않는다고. 설령 그 사유가 정당해도 달라질 건 없다.
"이후부터 올라오는 모든 장계는 국왕 폐하의 집무실로 전달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재빠른 인정, 재빠른 사과.
그리고 재빠른 후속조치까지.
"아쉽네. 한 대 쥐어박을까 했는데."
입맛을 쩝 다신 마테우스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동안 각지에서 올라온 장계를 살폈다.
"국경 지키기 바쁜 변경백들이나 대영주들 불만이 상당한 것 같은데. 그걸 알면서도 진정을 시키지 못하는 건 역시 나라에 돈이 없기 때문인가?"
가뜩이나 위태로운 왕국이다.
그런 나라의 국경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일 터.
중앙 정부가 지원해주길 바라는 건 결코 욕심이 아니다.
한데 지원은커녕 방치에 가까운 대접만 받고 있으니, 국경을 지킬 맛이 나겠는가?
"아니면 나라에 도둑놈들이 많아서?"
"둘 다 아니겠사옵니까?"
"돈도 없고 도둑놈들도 많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 왕국은 저물어가는 해였습니다. 전란의 분위기 속에서 흉년은 길었고, 영토는 줄었으며, 강대국으로 망명하는 인재들이 속출했지요. 언제 망한들 이상할 게 없는 나라였기에, 제 살길을 찾으려는 백성과 귀족이 들끓는 형국이었습니다."
제 살길을 찾는다?
말 포장 한번 거창하다.
기껏해야 탐관오리 아니면 매국노지, 무슨.
"해서, 네놈의 살길은 권력을 잡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이후부터 소신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새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쪽에 가깝지요."
"척인지 노력인지는 차차 알게 될 일이고."
확실히 짚고 넘어간 마테우스가 장계를 내려놓았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대충 결심이 굳었다.
"네놈 생각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예, 전하, 하문하시옵소서."
"네 말처럼 언제 망해도 이상할 거 없는 왕국이야. 그런데 왜 아직 멀쩡한 걸까?"
일국의 패망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말 그대로 나라가 망해서 사라지거나.
어떤 강대국의 일부나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한데 델무아드 왕국은 빈약한 재정, 쪼그라든 영토, 약화된 국방력, 부패한 내부에 비하여 아직은 비교적 멀쩡한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만큼 멸망하지도, 강대국들의 침탈이 심화되지도 않았으니까.
"거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읊어봐."
"먼저 대륙의 정세가 첫 번째 요인입니다. 저희 왕국을 제외한 삼강이 백여 년간 힘을 겨루고 있으니, 비록 저희가 약소국일지언정 그 팽팽한 저울에 무게추 정도는······."
"되도 않는 비유 집어치우고, 그냥 대놓고 건드리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예, 그런 셈입니다."
델무아드 왕국의 찬란했던 전성기가 막을 내린 뒤.
그간 꾸준하게 국력을 키워온 아이언 폴 제국, 이드리사 왕국, 서부왕국 총연합의 삼파전이라는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벌써 백여 년째 끝나지 않는 전란의 시대 아닌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델무아드 왕국은 그런 시대의 흐름 덕분에 이토록 약소국으로 전락하였음에도 본격적인 침탈을 당한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에 비축해놓은 것들이 제법 됩니다. 시대를 앞서나갔던 전쟁무기라든지, 흑요석으로 쌓아 올려 마법까지 걸어놓은 성벽이라든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가치가 여전한 흔적 덕분에 저희는 생각보다 국방력이 준수한 국가입니다."
한때 델무아드 왕국은 대륙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어마어마한 전성기를 누렸다.
일찌감치 망조가 깃들고도 여기까지 망가지는 데만 백여 년이 걸렸으니, 부자는 망해도 몇 년은 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나라였다.
"또 그 찬란했던 시절의 영광을 훌륭한 장인들이 다루고 있습니다. 서쪽 국경에는 파이로 가문, 북쪽 국경에는 슈베르츠 가문, 동쪽 국경에는 스톰소드 가문. 그들은 모두 개국공신 가문으로 저마다 뛰어난 혈통과 오랜 경험을 보유한 국방의 장인들입니다."
파이로, 슈베르츠, 스톰소드.
마테우스에게는 매우 익숙한 가문들.
부패한 전조 뮬리타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웠던 대업 동지들의 가문이니까.
"요약하면?"
"삼국의 힘겨루기가 끝나지 않는 이상, 하여 저희 왕국을 아무런 부담 없이 본격적으로 침공해오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이러한 형국이 지속될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해서, 가만히 있어도 문제없으니 국경 쪽에서 올라온 요청은 모조리 기각하는 중이시다?"
"후순위에 두었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선순위는 니들 귀족 놈들이 해먹는 거고?"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소신은······."
"새사람이 되는 중이시지. 네놈 말로는."
"······."
"근데, 다른 놈들도 그럴까?"
"······."
"그놈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칼버트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이자, 무얼 하려고 갑자기 밑밥을 까는 걸까?
"왕국법 하나 만들자."
"왕국법이라 하오시면······?"
"반 백성 특별법 정도가 좋겠네."
갑자기 웬 국법을 새로 만들어?
하물며 이름은 반反 백성 특별법이란다.
"네 말이 맞아. 언제 망해도 이상할 거 없는 나라지. 근데 그런 것치고 그 나라 귀족이란 것들은 때깔들이 참 좋아. 얼마나 잘 처먹고 다니면 아주 그냥 윤기가 자르르해."
"······."
"그 잘 처먹는 음식,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저택, 몸치장에 쓰이는 비단옷, 보석, 니들 대신 청소하고 빨래하는 하인들까지. 그 비용 다 어디서 뽑아먹은 걸까?"
"그야 당연히······."
당연히 백성한테서 뽑아먹는다.
그리 말하려던 칼버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라는 표현이 거슬릴까 염려되었거든.
"당연히 백성이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괜찮아. 원래 세상 이치가 그래. 약자한테 빼앗지, 강자한테 빼앗겠어?"
아, 이거구나.
드디어 깨달았다.
무엇을 위한 밑밥이었는지.
"그 말씀은······."
"칼버트 군터, 너를 반 백성 행위자 처단을 위한 특별 조사원으로 임명한다."
"······특별 조사원 말씀이십니까?"
"반 백성 행위자 명단을 작성해오도록. 너처럼 많이 해먹은 순으로. 구체적으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해먹었는지. 또 얼마나 토해낼 수 있는지."
인즉 명분과 수단을 만들어오라는 뜻이다.
귀족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곳간에 채워 넣을 명분.
왕국 재건에 쓰일 가장 기초적인 자본을 마련할 수단.
"그놈들한테도 애국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강자' 마테우스가 '약자' 귀족들에게서 빼앗을 차례였다.
007화. 흑마법사(1)
'당분간은 힘을 되찾는 데 집중한다.'
본격적으로 반 백성 행위자 처단을 시작할 때까지는 그것이 절대적인 1순위다.
특히 왕국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뜯어내기 위해서는 더더욱 일신의 무력이 중요하다.
무언가 변하고 있음을 각인시키기에 압도적인 폭력만큼 확실한 수단이 없는 법이거든.
'누렁이 놈이 명단을 가져올 때까지 최대한.'
그리 판단한 마테우스의 일과는 단순했다.
기사단에 부과한 훈련 루틴을 본인도 함께 소화하면서 개인 수련까지 곁들였다.
하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조금 더 급진적인 성장세가 필요한 상황이잖아?
'사술을 부려서라도 말이지.'
결단을 내린 마테우스가 국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국왕 안토니오 역시 기다렸다는 듯 마테우스를 반겼다.
"흑마법사, 여기 그대로 있지?"
"예, 선조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집무실 안쪽 서재.
정확히는 책장 뒤에 숨겨진 공간이었다.
강령술이 펼쳐졌던 비밀공간 말이다.
드르르륵······!
불빛 한 점 없는 그곳에 포박당한 흑마법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왕자의 몸에서 눈을 뜬 직후 가장 먼저 행한 일이 흑마법사 제압이었거든.
강령술을 부리느라 마나와 정신력이 떨어진 틈에 재빨리 손을 썼다.
"흑마법사, 얘기 좀 하지."
마테우스가 흑마법사의 재갈을 풀어줬다.
그러자 곧 노회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나, 나는 그저 의뢰를 받았을 뿐이오."
"알아."
"초야에 묻혀 살던 나를 찾아낸 것도 그쪽 왕이고, 강령술을 의뢰한 것도 그쪽 왕이오."
"안다니까? 누가 뭐래?"
"헌데 어찌 나를 잡아두는 것이오? 이건 약속이 틀리지 않소? 처음에는 분명······!"
"아하, 그런 약속을 했구나? 조용히 보내준다고."
"그, 그렇소! 설마 일국의 왕이 왕실의 이름까지 걸고 맺은 약조를 저버리지는······."
"내가 한 약속 아닌데?"
"뭐, 뭐요?"
당혹감으로 물드는 흑마법사의 표정에 마테우스가 피식 웃었다.
"그렇잖아? 약속은 왕이 했고, 널 패서 가둔 건 나고."
"그, 그게 무슨······."
"그보다 너, 내가 누군지는 알지?"
"······왕자 전하 아니시오?"
"아니, 껍데기 말고."
"······."
"네놈이 되살렸잖아? 실수로."
"그, 그것은······."
"그러니 의뢰 실패야. 잡혀도 할 말 없다고."
"······."
"실패의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
실수로 인한 의뢰 실패.
그 대가를 지불하라.
흑마법사가 물었다.
"무, 무엇을 원하시오? 의뢰비라면 돌려 드리겠소. 다시 강령술을 진행하고 싶다면 그리하시오. 다만 새로운 강령술에는 새로운 그릇과 시간이 필요하오. 그릇은 아까 말씀드렸듯 같은 핏줄이어야 하며, 시간 역시 일 년은 기다려야 그분을 다시 뵐 수 있으니······."
"왕족 시체를 또 준비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 년이나 기다려? 너 미친놈이냐?"
"하,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그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종종 일어나는 법이야. 내가 그걸 모를까."
"그, 그러하오. 강령술이란 기본적으로 오랜 준비와 신앙심을 필요로 하는······."
"그럼 그냥 네놈이 죽는 걸로 계산 끝내자."
"무, 무슨······?"
"말했잖아? 종종 일어난다고. 어쩔 수 없는 일."
마테우스가 지체 없이 검을 뽑았다.
국왕의 집무실에서 챙겨온 보검이었다.
"인사해. 이 칼이 오늘 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 사, 살려주시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살려달라는 놈이 영 공손하지가 않네. 끝까지 이럴 것이오, 저러겠소."
"살려주십시오! 전하, 아, 아니, 폐하······!"
휘황찬란한 보검이 흑마법사의 볼과 턱을 훑었다.
괜히 보검이 아닌 듯 스치기만 해도 핏물이 맺혔다.
"다시 묻는다. 내가 누구지?"
"데, 델무아드 왕국의 2대 국왕, 하, 하사드 윈저 님이십니다!"
"그거 말고, 또?"
"예······?"
"명색이 흑마법사라면 알 거 아니야? 너희가 어쩌다 이 땅에서 지워졌는지."
건국 초창기 시절.
새로운 왕실과 조정은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거행했다.
이른바 '마도와의 전쟁'. 뒷골목 깡패부터 흑마법사에 이르기까지 왕국 내 모든 마도의 무리를 소탕하는 프로젝트로, 5왕자였던 하사드 윈저가 직접 주도하여 성공한 계획이다.
"아무리 오래됐어도 원수를 잊어버릴 만큼 멍청한 집단은 아닐 텐데?"
그래, 안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는데.
'하사드 윈저를 조심하라.'
마도와의 전쟁 이후 음지로 숨어든 흑마법사들 사이에는 아직도 그런 말이 전해진다.
윈저 가문을 조심하라.
델무아드 왕국을 조심하라.
하사드 윈저를 조심하라.
'어릴 때 하도 들어서 결국 이름까지 꼬여버렸지.'
늙은 흑마법사의 실수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조심하라는 델무아드 왕국, 그것도 윈저 가문의 의뢰를 받아서 긴장되는 와중에 하필이면 되살려야 할 이름까지 아사드 윈저란다.
하사드 윈저와 겨우 한 글자 차이잖아?
"제,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내가 왜?"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다시는, 다시는 왕국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얼씬 못하는 건 마찬가지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진심이냐?"
"······예?"
"정말 무엇이든 다 할래? 목숨 걸고?"
"무. 물론입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예!"
"그럼 나하고 일 좀 하자."
"일······ 말씀이십니까?"
"그래, 일."
마테우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겨누고 있던 칼도 거뒀다.
이제 '일'을 할 차례니까.
"보통 흑마법사 놈들 강령술이 이렇게 완벽할 수가 없어. 기껏해야 죽은 사람 되살린답시고 좀비나 만드는 수준이지. 육체는 누더기에, 정신도 온전치 못한. 근데 네놈이 되살린 날 봐. 아무리 재료 상태가 좋았어도 너무 완벽하잖아?"
마테우스는 흑마법사를 음지로 쫓아낸 장본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마음으로 누구보다 깊이 흑마법을 연구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저 흑마법사가 부린 강령술은 비현실적으로 수준 높은 경지였다.
"따라서 난 네놈이 강령술 쪽으로 특화된 7성급 이상 흑마법사라고 보는데."
"······!"
그 말에 흑마법사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이 땅에서 흑마법을 멸종시킨 자가 아니다.
강령술의 수준만 보고 경지까지 파악해내잖아?
"대답."
"······아, 네, 기존의 등급 체계로는 7성급이 맞습니다. 다만 폐하를 되살린 강령술은 기존의 강령술이 아닌, 제가 직접 창안한 강령술입니다. 조건이 까다로운 대신 온전한 모습으로 되살릴 수 있지요. 그러니 강령술 쪽으로 특화되었다는 말씀 또한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창안했다? 새로운 강령술을?"
"예, 그, 그렇습니다."
"대단한데? 가면 뒤에 얼굴은 꽤 젊어 보이는데."
"어······ 예, 예······?"
완벽한 줄 알았다.
얼굴, 목소리, 말투,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경험이 많고 노회한 흑마법사처럼 보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아니었다. 적어도 이 왕자, 아니, 왕자 몸에 깃든 존재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나 보다.
"그, 그걸 어찌······."
본모습이 탄로 나자마자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표정과 말투.
오죽하면 마법으로 바꾸어놓았던 본연의 목소리마저 슬쩍슬쩍 튀어나온다.
"알 거 없고."
그러든지 말든지.
마테우스가 흑마법사의 멱살을 잡아 세웠다.
온몸을 포박했던 사슬과 쇳덩이도 풀어줬다.
"따라와."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왕실의 지하 무덤.
역대 국왕들이 안치된, 일컫기를 왕의 안식처.
그중에서도 2대 국왕, 즉 본인의 무덤 앞이었다.
"묘하네. 내가 내 무덤 앞에 서는 거."
"가, 갑자기 무덤은 어찌······?"
"7성급이면 뼈 이식, 가능하잖아?"
순간 흑마법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것까지 안다고?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야?
"여기 묻힌 유해는 평범한 뼈가 아니야. 내 전성기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화된, 거의 오르늄에 가까운 골격이지."
다른 이가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오르늄이 어떤 광물인가?
신이 내린 광물이라고 불릴 만큼 완벽한.
모든 대장장이들이 꿈꾸는 광물이잖아?
"당연히 썩지도 않았을 거고."
문제는 그 말을 내뱉는 이가 마테우스라는 점이다.
그와 관련된 기록들, 특히 무력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면 정말 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오르늄 정돈 있어야 가능할 무용담이 참으로 많았으니까.
"그냥 묻어놓기 아깝잖아?"
"하, 하오나 폐하, 말씀하신 뼈 이식이란 흑마법이 보기보다 쉬운 술법이 아니랍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식하는 도중에 과부하가 일어날 가능성이······."
"그건 네놈이 알아서 해야지."
"······예?"
"시작해. 죽기 싫으면."
"······."
흑마법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주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냥 확 과부하를 일으켜서 죽일까?
'······아니, 아니야. 도망칠 수가 없잖아?'
뼈 이식은 고위 흑마법에 해당한다.
마나와 정신력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을 터.
그런 몸으로 왕궁을, 그리고 수도를 빠져나간다?
'몸을 회복하고 나갈 수도 없어. 근위병들이 왕자와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걸 봤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왕자 시해범만 되겠지.
'더군다나 이 사람, 왠지 과부하 따위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내 직감이 그래.'
답 나왔다. 허튼짓 말자.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시다시피 뼈 이식은 마법이라기보다 수술에 가까운 술법입니다. 동반되는 고통이 상당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진통 마법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마법을 쓴다 하여 고통을 완벽하게 다스릴 순 없다.
기껏해야 100만큼 아플 거 80으로 줄여주는 수준.
그래서일까? 마테우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거면 충분해."
대신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재갈처럼 물었다.
큰 소리라도 냈다간 근위병들이 달려올 터.
일을 괜히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법사 특유의 푸른 마나가 아닌, 마기로 가득한 검붉은 마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뼈 이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흑마법사의 두 눈이 검붉은 안광으로 번뜩였다.
동시에 커다란 비석으로 봉해졌던 2대 국왕의 무덤이 갈라지며 청아한 백색 뼛조각들이 허공으로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상태는······ 완벽하네요."
과연 마테우스가 장담한 그대로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뼈만 발라낸 것처럼 완벽한 상태.
뿐일까? 생명을 잃은 지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마나를 품고 있다.
"저희가 부리는 뼈 이식은 기본적으로 교체가 아닌 식립의 방식을 중점으로 둡니다. 이식할 뼈 일부를 마디마디 심어 기존의 뼈와 어우러질 수 있도록 촉진하는 방식이지요."
인간의 육체는 기본적으로 호환성을 띤다.
허벅지 피부를 도려내어 손상된 팔뚝 피부에 이식한다면 약간의 회복 기간만 거친 뒤 자리를 잡는데, 이것이 바로 육체의 호환성이다.
"뼛조각을 심는 방식이기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동반되는 고통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이는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점, 지극히 정상이라는 점 알아주시길."
하지만 그 호환성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구조를 가진 신체 구성물끼리의 호환성일 뿐.
수백 년 전에 존재했던 하사드와 요절한 왕자 마테우스의 신체는 엄연히 다르다.
이치를 거스르는 만큼 과부하가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겠지.
뿌득, 뿌득, 뿌드드드득······!
마침내 시작된 뼈 이식 주문.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기겁할 소리가 하염없이 뿜어져 나왔다.
"흐읍······!"
그럼에도 마테우스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대신 본인만의 특별한 마나 심법으로 급소와 정신을 보호했다.
훼손된 육체를 재빨리 치유하며 회복에 필요한 시간까지 줄였다.
'······이, 이게 가능해?'
본디 뼈 이식은 후유증이 크다.
족히 수십 일은 요양해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을 터.
한데 이 괴물은 달랐다. 듣도 보도 못한 마나 운용으로 후유증을 원천봉쇄하고 있잖아?
'지가 무슨 트롤이야 뭐야?'
아니, 이쯤 되면 트롤의 재생력조차 넘어섰다.
그야말로 괴물, 괴물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과부하고 뭐고 쓸데없는 고민이었어.'
이런 괴물의 몸뚱이에 과부하를 일으킨다?
불가능하다. 7성급 흑마법사인 그녀로서는 결단코.
'다행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괜히 그랬다가 저런 괴물의 눈 밖에 났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상상조차 하기 싫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흑마법사가 뼈 이식에 집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괴물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야겠지.
그래야 불똥 튈 일 없을 테니까.
* * *
뼈 이식 자체는 길지 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 회복의 시간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저 괴물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고작 한 시간 남짓 마나 심법 운용만으로 거의 모든 후유증을 다스렸다.
스스스스스스스······!
심법을 주천한 육체에서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슬슬 마무리 단계라는 증거였다.
"······성공적인 뼈 이식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한 자.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가 상체를 숙이며 읊조렸다.
"흑마법사."
"말씀하시옵소서."
"뼈 방패, 쓸 줄 알지?"
"뼈, 뼈 방패 주문 말씀이십니까?"
"살고 싶으면 최대 출력으로 둘러."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
보기 드물게 친절한 안내와 더불어.
"테스트 한 번 해보게."
마테우스가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었다.
쾅 - !
008화. 흑마법사(2)
마법사든, 흑마법사든.
그들 대부분은 이미지와 다르게 허약하지 않다.
온갖 마법으로 강화된 시력, 민첩성, 근력 등은 웬만한 기사들 뺨칠 만큼 우수하다.
흑마법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는 무려 7성급 고위 흑마법사 아닌가?
언제 어디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음지의 존재이니만큼 스스로한테 걸어놓는 보조 마법이 한두 종류가 아니라는 뜻.
"커, 커헉······!"
하나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언질을 받아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뼈 방패고 나발이고 비명횡사했을 터.
"허억, 허억······!"
문제는 빠르기뿐만이 아니다.
조금 전 흑마법사가 펼친 뼈 방패는 분명 최대 출력이었다.
이만하면 소드 마이스터의 깨달음이 담긴 일격에도 끄떡없으리라 자부했다.
'어, 어떻게······?'
분명 그러하거늘.
어째서 뼈 방패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걸까?
소드 마이스터의 검도 아닌, 고작 주먹 따위에?
"나쁘지 않네."
물론 흑마법사의 당혹감 따위, 마테우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다.
그저 뼈 이식을 통하여 한층 단단해진 몸을 이리저리 가늠하기 바쁠 뿐.
"한 번 더 가능하냐?"
"······예, 예?"
"뼈 방패, 가능하냐고."
"아, 안됩니다! 방금 그게 최대 출력이에요!"
"에이, 설마."
"진짜에요! 진짜라고요!"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해봐."
"아니, 한 번 더고 나발이고······!"
"혹시 알아? 위협을 느낀 네 본능이 어마어마한 뼈 방패를 만들어줄지."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왕자 마테우스 윈저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괴물.
그 존재가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으니까.
"자, 자, 잠깐······!"
"좀 더."
심지어 이번에는 왼쪽 주먹이다.
"세게 간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왼손잡이다.
콰아아아앙 - !
오른쪽 주먹보다 확실히 강하다.
맞으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다.
죽음을 직감한 흑마법사가 다시금 뼈 방패를 일으켰다.
혹시 몰라 남겨놓았던 여분의 마나는 물론 노인네 행세에 필요한 마나까지 탈탈 털어 만든 최후의 뼈 방패였으니, 이만하면 앞서 펼친 뼈 방패보다 곱절은 더 단단할 것이리라.
하지만.
"허억! 허억! 쿨럭······!"
예상과는 달리 이번에도 박살이 난 뼈 방패.
그 뒤에 숨었던 흑마법사가 피를 울컥 토했다.
"거봐, 할 수 있잖아?"
"허억! 허억! 허어억······!"
"쯧, 엄살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테우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살았으면 됐지, 엄살 부리지 말라는 표정과 함께였다.
"근데 너, 이름이 뭐냐?"
"······."
마테우스의 물음에 흑마법사가 고민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모든 변장을 지웠다.
이런 모습으로 가명을 말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칸나, 칸나 예르바인이라고 합니다."
칸나 예르바인.
그것이 음지로 밀려난 이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던, 순수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무려 수백 년 만에 탄생한 최연소 7성급 '강령술 특화' 흑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칸나 예르바인."
그 이름을 곱씹은 마테우스 윈저.
그가 피 닦을 손수건을 던져주며 말했다.
"선택지를 줄게."
"서, 선택지라 하시면······?"
"첫째, 여기서 죽는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요?"
"사형대로 끌려가서 정식으로 죽는다."
"······."
또, 또, 또······!
또 목숨으로 협박한다.
왕족이라는 자가 이래도 돼?
"······호, 혹시 세 번째도 있습니까?"
"아, 물론 있지."
마테우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세 번째가 정답인가 보다.
"이, 이게 뭡니까······?"
마테우스의 대답은 말이 아닌 행동이었다.
꿇어앉은 흑마법사 앞에 놓인 몇 가지 물건들.
순서대로 머리카락, 깨진 앞니, 피 묻은 손수건.
이는 모두 뼈 방패를 두 번 부수며 채취한 재료였다.
"네 목에 채울 목줄."
"······예? 모, 목줄이요?"
"자꾸 모르는 척을 하네? 재료만 봐도 알 거 아니야?"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누군가의 머리카락, 치아, 혈액.
이걸 재료로 쓰는 저주 계열 흑마법이 '죽음의 맹약'뿐임을 그녀가 모를 리 없을 터.
다만 그럼에도 끝까지 발뺌하고 싶었다.
저 폭군 말마따나 목줄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흑마법이거든.
오직 흑마법사 스스로에게만 걸 수 있는, 주로 다른 흑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갈 때 뒤통수를 치지 않겠다는 보증처럼 쓰이던 저주였으니까.
"그게 세 번째 선택지야. 스스로 목줄 채우는 거."
"······."
"니들이 사랑하는 죽음의 신, 그 양반 불러내서 맹세해. 나 흑마법사 칸나 예르바인은 마테우스 윈저의 심복이 되겠습니다. 그를 배신할 시 제 영혼을 죽음의 신께서 친히 거두어주시옵소서. 뭐 대충 이런 느낌으로."
"······."
굴리고, 굴리고, 또 굴렸다.
어릴 적부터 명석하기로 소문났던 머리를.
하지만 아무리 굴려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저 폭군으로 유명한 델무아드의 2대 국왕은 남을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다.
특히 그 대상이 칸나 예르바인 자신처럼 흑마법사라면 더더욱.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뼈 방패 한 번 더······."
"······하,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더 이상 무게 따위 잡지 않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
흑마법사 칸나 예르바인이 저주를 걸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거는 저주를.
"주, 죽은 자들의 왕이시여······!"
그래서일까?
저주를 시동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서글펐다.
* * *
"밖에 있나."
"부르셨사옵니까."
침소로 돌아온 마테우스의 부름에 시녀가 답했다.
별궁에서도 오직 왕자만을 모시는 전속 시녀였다.
"이름이······ 릴리였던가?"
또한 그녀는 왕자의 유모이기도 했다.
어떤 변화를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란 뜻.
"예, 그러하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할 뿐.
제 주인에게 의문을 품지 않는 참된 사용인의 자세에 마테우스가 호기심을 느꼈다.
"계속 똑같은 얼굴만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한 구역의 담당 시녀는 교대근무가 원칙이다.
그러나 릴리는 단 한 번도 교대를 하지 않았다.
왕자의 몸으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는 전하께오서······."
"시켰나 보군. 시녀는 한 명이면 족하다고."
릴리가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그 말 그대로라는 무언의 긍정이었다.
'하기야,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모조리 불태워 후임자에게 넘길 배턴을 만들고 죽은 놈이다. 입 무겁고 의심하지 않는 심부름꾼이 필요했겠지.'
그럼 어디 확인해볼까?
계속 쓸 만한 심부름꾼인지.
이 자리에서 쳐낼 애물단지인지.
"믿지는 않겠지만 일단 들어. 온종일 책만 읽다가 기연을 얻었다."
"감축 드리옵니다."
"그 여파로 기억이 가물가물해. 성격이나 몸도 꽤 변했고, 대신 예전보다 유능해졌지."
"유념하도록 하겠나이다."
"좋은 자세야. 앞으로 잘 부탁해. 릴리."
"즉시 목욕물과 의복을 준비하겠사옵니다."
그러고 보니 간밤에 노폐물을 참 많이도 뺐다.
악취가 심하건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장 해야 할 일을 빠르게 판단한다.
'보기보다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한 놈이었군.'
좀 더 지켜봐야 알겠으나, 일단은 합격점이다.
고개를 끄덕인 마테우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전에."
아까부터 침소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인.
마테우스가 그녀를 릴리 쪽으로 툭 밀치며 말했다.
"이거, 자네와 함께 내 전속 시녀로 넣을 수 있을까?"
주인의 일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오직 그 신념 하나로 낯선 여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릴리가 비로소 그녀의 행색을 살폈다. 불길함이 느껴지는 검은색 로브, 그보다 더 불길함이 느껴지는 붉은 머리칼.
단언컨대 평범한 여인은 아니리라.
"신분은 만들어줄 수 있어."
"그리만 해주신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옵니다."
"좋아. 그럼 제대로 된 시녀로 만들어서 내 앞에 데려오도록."
"빠르게 교육한 뒤 실무에 투입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좋아. 데리고 나가 봐."
그러자 세상 다 잃은 얼굴로 릴리 뒤를 따르는 칸나 예르바인이었다.
무려 7성급 흑마법사에게 시녀 교육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쩌겠나? 일단 살고는 봐야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당분간 곁에 두고 부려 먹으려면 시녀가 딱이지.'
마테우스는 딱히 흑마법사란 족속들을 증오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도와의 전쟁을 추진했던 까닭도 정치적인 쇼였으니까.
그때는 통치에 써먹었고, 지금은 힘을 되찾는 데 써먹을 뿐.
'나도 슬슬 준비해볼까?'
이제 곧 윈저 가문의 누렁이가 출근할 시간이다.
주인으로서 아랫것을 맞이할 준비 정도는 해야겠지.
목욕물과 의복으로 몸가짐을 단정히 한 마테우스가 회중시계를 살폈다.
"전하, 소신 칼버트 군터이옵니다."
정확하게 아침 5시 정각.
단 1초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철두철미함의 소유자.
칼버트 군터가 침소 문 너머에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들어와."
그러자 퀭한 얼굴에 양팔로 끌어안은 서류뭉치까지, 누가 봐도 '나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일했습니다'라고 시위하는 몰골의 칼버트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신 명단, 작성해왔습니다."
"꽤 빠르다?"
"언제까지 하라는 말씀이 없으셔서 최대한 빨리 작성했습니다."
······이 자식 봐라?
불과 며칠 전에 내렸던 명령이잖아?
한데 그걸 벌써 다 끝내버릴 줄이야.
"내용에 문제는 없겠지?"
"명단 작성에 공들인 시간이 적다는 점을 염려하신다면,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네놈 따까리들은 봐줬다거나."
"읽어보시옵소서. 분명 만족하실 것이옵니다."
"흐음, 그래?"
마테우스가 의심 어린 눈초리로 첫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다소 의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칼버트 군터]
[왕국의 재상, 군터 가문의 가주.]
[현 중앙 귀족 주류 파벌의 구심점.]
[사업권 독점, 매점매석, 뇌물수수, 불법투기, 탈세 등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함.]
[추정 은닉 재산 및 환수 가능 예상액은 해당 귀족이 보유 중인 현물과 토지의 대략적인 가치, 운영 중인 사업체의 규모와 발생하는 소득 따위를 종합하여 계산하였음.]
[칼버트 군터와 군터 가문의 은닉 재산 및 환수 가능 예상액은 총······.]
"네놈이 첫 번째네?"
"소신, 이 왕국에서 가장 많이 해먹은 순으로 명단을 작성하라 명받았습니다."
"그 첫 번째 순위가 네놈이다?"
"실세란 이름값은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걸까?
아니면 저 시꺼먼 속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어찌 되었든 웃긴 놈이다. 역시 참신하게 미친놈이야.
"근데, 이거 맞아?"
"어느 부분 말씀이신지?"
"추정 재산하고 환수 가능한 재산이 거의 똑같은데?"
"식솔들을 먹여 살릴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한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있나이다."
"일부러 축소해서 적어놓은 건 아니고?"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나중에 확인해서 여기 적혀있는 재산보다 더 나오면 1골드······ 아니지, 1실버에 한 대씩 맞는다?"
"1코퍼에 한 대씩 맞겠습니다."
"하."
말이나 못하면.
고개를 휘휘 저은 마테우스가 명단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넘길 때마다 드러나는 귀족들의 행태들.
이걸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이놈들 참······.
"······다들 알차게도 해먹었구나?"
"송구하옵니다."
"나 때였으면 모조리 참수형인데."
"송구하옵니다."
"니들 입장에선 세상 참 좋아졌어. 그치?"
"이제 좋은 세상 다 끝났지요."
"운 좋은 줄 알아. 세상 바뀐 거 먼저 알았으니."
"소신이 천운을 타고났나 봅니다."
칼버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권력 놀음에서 정보는 곧 힘이다.
하물며 이런 정보는 천금으로도 얻을 수 없는 고급 정보.
이러니 운이 좋았다고, 신께서 아직 군터 가문을 버리지 않았노라 여길 수밖에.
"음, 좋아."
마침내 모든 명단을 확인한 마테우스 윈저.
그가 책상 위로 서류뭉치를 툭 던지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고."
"하문하시옵소서. 전하."
"먼저 네가 공개적으로 환원해. 명목은 시시각각 변하는 대륙정세에 대비한 애국성금이 좋겠군."
"예, 그리하겠나이다."
"대신 다 바칠 필요는 없고, 현물이랑 토지 처분한 값의 절반만. 네놈 가문이 거느린 사업체는 일단 그대로 굴리고 있어. 때 되면 왕실 사업으로 귀속시킬 테니까."
"그리해도 되겠나이까?"
"천운을 타고났다며?"
천운.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잖아?
그런 운까지 타고났는데 응당 대우를 해줘야겠지.
"그 운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물론 말이 좋아서 천운이지.
사실상 마테우스 마음대로다.
네 운은 여기까지다, 하고 목을 치면 그만이니까.
칼버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아니할 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이해하였음을 피력했다.
"최대한 빠르게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왕국의 곳간으로 환원하도록 하겠나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개적으로, 왕국 전체가 다 알 만큼 시끌벅적하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물론이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동참하는 놈들이 있다면 내 특별히 품위 유지 비용 정도는 남겨줄 거야. 그래도 머리통이 좀 돌아간다는 뜻이니 기회 한 번 더 줄 수도 있고."
마테우스는 의외로 공평한 자다.
상 줄 놈과 벌줄 놈을 확실히 구분한다.
작금의 명령도 그러한 성향의 일환이었다.
"아, 네놈 따까리들한테 미리 귀띔해줘도 돼. 그 정도 특혜는 줘야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휘하 귀족들의 쓰임새를 판단하실 첫 번째 시험이 아니옵니까? 공정해야 할 시험에 답안지를 함부로 유출할 순 없는 노릇이지요."
"판단 좋네. 넙죽 받아먹었으면 내일부터 지옥으로 출근시킬 생각이었는데."
또한 마테우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지 않는다.
한 번 어긋났던 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언제 또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잖아?
"여태껏 편히 살았으니 앞으로는 긴장 좀 하고 살자?"
"······예, 전하.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나이다."
그야말로 매 순간이 시험의 연속일 터.
감당은 오롯이 칼버트 군터의 몫이리라.
009화. 반 백성 특별법(1)
그 이름도 유명한 델루아의 사파이어.
오래전 동방 대륙에서 건너온 '청옥 상단'이 처음 설립한 이래 수백 년간 운영 중인, 명실상부 왕국 최고의 기루.
바로 그곳에 칼버트 군터를 따르는 귀족 몇몇이 모여 지극히 사치스럽고도 향락적인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술맛이 좋구나."
"역시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어르신께서 말씀해주셨던 콜드우드산 적포도주랍니다. 정말이지 어렵게 구한 물건이온데, 이리 알아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어요."
"오, 그걸 구했느냐? 어쩐지, 뭔가 다르더라니."
주지육림이 나뒹구는 테이블 앞에서.
저마다 기루 최고의 미녀들을 양쪽으로 낀 채.
어지간한 마을에서 바치는 일 년 치 세금보다 비싼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헌데 군터 공께서는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랍니까? 애국성금이라니요?"
"글쎄, 왕실 쪽으로 자금을 옮기신 걸 보면 국가사업 관련해서 한탕 하려나 본데······."
오늘 그들이 모인 까닭은 칼버트 군터.
바로 그 왕국의 재상이자 실세가 애국성금으로 재산 절반을 쾌적했다는 소식이 왕국 전역에 파다한 까닭이었다.
물론 그가 정말 '애국'성금을 냈다고 믿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또 무언가 해먹으려나 보구나, 그 많은 재산을 절반이나 베팅할 만큼 어마어마한 비리가 터지겠구나 싶을 뿐이었으니까.
"뭐 따로 들으신 건 없으시고요?"
"항상 판을 벌이시면 나한테 먼저 언질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깜깜무소식이란 말이지."
"설마 나눠 먹기 싫을 만큼 큰 건이라든지······."
"가능성이 없진 않아. 내가 슬쩍 알아봤는데, 정말 사업체 빼고 다 정리했더군. 자네도 알겠지만 그 가문 재산이 한두 푼인가? 근데 그걸 때려 박을 정도면······. 가만, 이거 설마······?"
"어찌 그러십니까? 뭔가 떠오르신 거라도?"
또 그러한 시선은 칼버트 군터가 장악한 귀족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똘똘 뭉친 집단이니만큼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양반, 설마 드디어 팔아먹으려는 겐가?"
"예? 팔아먹다니요? 갑자기 무엇을 말입니까?"
"생각을 해보게. 그동안 우리가 팔아먹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광물, 채굴권, 식량, 병장기, 말, 노예 등등······ 전쟁이 끊이지 않는 삼국 입장에서 구미가 당길 만한 것들은 모조리 다 팔아먹었지."
"아휴, 이젠 없어서 못 팔아먹죠."
"그럼 이제 뭘 팔아야겠나?"
"음······. 글쎄요. 이 나라에 뭐가 더 남았는지······."
젊은 귀족 폴거 레만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지자, 먼저 화두를 던졌던 실질적인 이인자 안톤 크리스티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읊조렸다.
"나라."
"······예? 나라요?"
"전란의 시대야.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고 있지. 전선을 늘리기 부담스러울 테니까. 헌데 만약 무혈입성이 가능하다면? 이만한 규모의 공짜 식민지를 마다할 강대국이 어디 있겠나?"
쉽게 말해서 '매국'이다.
서로 견제하기 바쁜 삼국을 상대로 한 최후의 비즈니스.
델무아드 왕국이라는 무게 추 자체를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장사.
그것이 안톤 크리스티가 추측하는 칼버트 군터의 '마지막 한탕'이었다.
"그게 사실이면······."
"우리만 물먹는 게지. 솔직히 우리가 이 왕국에서나 실세고 귀족이지, 다른 데 가서 어디 제대로 된 대우나 받을 것 같으신가?"
"허, 허면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보통 이런 경우 몹쓸 매국노를 처단하자! 라고 의견이 모여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부패 귀족들.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예컨대.
"어쩌긴 뭘 어째? 물심양면 도와서 제값 받고 팔아먹어야지."
"아하, 그 값에 저희들의 보장된 대우도 얹으면 되겠군요?"
애국심이나 충성심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한평생 이 나라, 델무아드 왕국을 갉아먹으면서 살아왔을 뿐.
다 발라먹고 남은 뼈다귀를 팔아넘기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리라.
"이거 이럴 게 아니라 군터 공부터 뵈어야겠군. 어쩌면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 왜 그 평소에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지 않았나? 주는 것만 받아먹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주는 것만 받아먹는 인간, 자기가 직접 찾아서 해먹는 인간. 언제나 후자의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잃지 않고 대대손손 떵떵거릴 수 있다."
"맞습니다. 분명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죠."
역시 이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추론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일련의 흐름을 설명할 길이 없거든.
"어서 가세. 가서 자세한 말씀을······."
손발 척척 맞는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쾅!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여기는 기루에서도 VIP만을 모시는 특실이다.
당연히 그에 걸맞은 철저한 보안과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을 터.
한데 감히 누가 그 특실의 출입문을 때려부순단 말인가?
"웨, 웬 놈이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정말 누군가 문을 부수고 들어왔으니까.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안톤 크리스티에게 콜드우드산 포도주를 선물했던 마담 엘디아가 의복 아래 숨겨놓았던 단검을 뽑아 들며 외치자, 깜짝 놀란 귀족들이 모두 그녀의 등 뒤에 숨는 추태를 보였다.
"여기서 문제."
문을 부수고 천천히 다가오는 붉은 복면의 괴한.
그가 마담 뒤에 숨은 귀족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 주먹에 묻어있는 피가 내 것이 아닌데, 아직 네놈들 피도 아니고. 그렇다면 이 피는 도대체 누구의 피일까?"
"바, 밖에 누구 없느냐?! 잭슨! 알렉스······!"
"정답."
붉은 복면의 괴한은 숨어서 들어온 게 아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하게 모조리 때려 부수며 들어왔다.
문도, 경호원도, 특실까지 오는 길에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그러니 마담 엘디아가 어떤 경호원의 이름을 부르든 정답일 수밖에.
"두 번째 문제."
괴한이 주먹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는 복면까지 슬쩍 내리며 다시금 물었다.
"나는 누굴까?"
보기 드문 은빛 머리칼.
피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
잡티 한 점 없는 새하얀 피부.
복면 위로 드러난 미소년의 얼굴.
"······와, 왕자 전하?"
아무리 부패한 귀족일지언정.
왕국을 향한 충성심이 바닥에 가까울지언정.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얼굴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특히 저 괴한처럼 보기 드문 요소가 한데 모인 얼굴이라면 더더욱.
"정답."
"저, 전하께서 어찌······?"
왕자 마테우스 윈저.
그가 안톤 크리스티에게 다가갔다.
"머, 멈추······!"
"두 번 말하지 않아."
"······?"
"나는 귀족이 아니다, 그저 이 영업장에 고용된 인력이다, 거수."
마테우스의 말에 서로 눈치만 살피기 바빴던 기녀들이 하나둘씩 손을 올렸다.
자칫 VIP들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본능이 외쳤거든.
지금 당장 손을 들고 나가라고. 제발 저 괴한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나가. 아직 니들 차례 아니니까."
그 말에 마담을 포함한 모든 기녀가 밖으로 나갔다.
이쯤 되면 '불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일은 없으리라.
"저, 전하, 어찌 이러십······."
"내 귀를 의심했다."
"케, 케헥······!"
마테우스가 중앙 귀족 파벌의 이인자.
혹은 크리스티 가문의 가주, 안톤 크리스티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설마 귀족이란 놈들 입에서 나라를 팔아먹잔 말이 그렇게 쉬이 나올 줄이야. 이거 이쯤 되면 버러지를 넘어섰는데?"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겁만 준 뒤 선택지를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이 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안 되겠다.
계속 참았다가는 화병이 도져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것 같았으니까.
그럴 바엔 시원하게 풀고 넘어가야겠지.
"야, 비곗덩어리."
"케, 케헤엑······!"
"이제 와서 믿을 놈 하나 없겠지만, 난 사실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오죽하면 어릴 때 꿈이 화가였겠어?"
왕자의 꿈이 화가였다고?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
모두가 의아했으나, 누구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지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았거든.
"근데 너희 같은 버러지를 보고 있으면 막 울어. 누가 우는 줄 알아? 주먹이 울어. 징징징, 아주 그냥 양쪽에서 하루 종일 울어대. 이러니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냐? 어?"
지금도 마찬가지다.
두 주먹이 울부짖고 있다.
"저, 저, 전하······! 자, 잠시······!"
짜악 - !
그 순간.
안톤 크리스티는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이런 걸 두고 '귀싸대기 맞는다'라고 표현하던가?
고통과 수치심이 함께 오는, 수십 년을 살며 처음 당해보는 폭력이었다.
짜악 - !
"저, 전하, 잠시, 잠시만······."
짜악 - !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짜악 - !
"군터 공께서 절대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으······!"
짜악! 짜악! 짜악 - !
"사, 살려주십······."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안톤 크리스티가 공손해지기까지 필요한 귀싸대기 총 일곱 대.
어이없이 죽거나 기절하지 않도록 힘 조절에 집중한 결과였다.
"살고 싶어?"
"예······. 사, 살고······ 싶습니다······."
"방법이 있긴 한데."
"무엇이든······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애국성금을 내."
"애, 애국······ 성금······ 말씀이십니까?"
"니들은 괘씸하니까 전 재산의 9할."
"저, 전 재산의······ 9할······?"
아아, 그렇구나.
칼버트 군터가 재산의 절반을 내놓은 까닭.
그것은 나라를 팔아먹기 위한 투자가 아니었다.
살아남고자, 목숨을 건지고자 바친 조공이었을 뿐.
"지금껏 알뜰살뜰 해먹은 재산의 9할을 애국성금으로 토해내거나, 그게 싫으면 뇌물, 횡령, 탈세, 기타 등등으로 내일 아침 대광장에서 모가지 날아가거나. 다 귀찮다? 그럼 그냥 여기서 나한테 맞아 죽거나."
"······."
"어여 골라. 세 번째로 가기 전에."
세 번째.
그냥 여기서 맞아 죽기.
안된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내, 내겠습니다!"
중앙귀족 파벌의 이인자.
안톤 크리스티가 무너지기 무섭게.
"내겠습니다! 애, 애국성금! 예······!"
"기꺼이,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그에게 판단을 위탁했던 여러 귀족도 합류했다.
애국성금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왕자의 '삥뜯기'에.
"본 왕자는 여러분의 애국심에 감복했다."
그 훈훈한 모습에 마테우스가 멱살을 풀며 말했다.
귀족들의 넘치는 애국심에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왕족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모습 아닌가?
"기특하니 8할로 감면해주지. 아, 참고로 여기 모인 애국자 여러분의 재산 규모는 이미 다 파악해뒀으니 이 점 유의하고 애국성금 납부를 실천할 수 있도록."
그 순간.
귀족들은 직감했다.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건 어제가 마지막이었음을.
오늘부터는 하루하루가 무척 고달플 일만 남았음을.
010화. 반 백성 특별법(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