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남부 몰락지대(6)
"어쩐지, 너무 시원하게 몸뚱이를 헌납한다 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저주술사임을 단번에 알아챈 마테우스.
그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읊조렸다.
"누가 흑마법사 아니랄까 봐 뒤에 숨어서 음흉하게. 쯧."
듣는 흑마법사 귀가 두 명분이거늘.
마테우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물며 칸나조차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맞는 말이거든. 반박불가랄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네놈 정체가 무엇이지? 어디 언데드가 아니고서야······.]
"음흉한 노인네 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구나?"
[······뭐, 뭣?]
"내가 묻고 싶은 말을 어쩜 그리 잘 알까?"
이번에도 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물어도 마테우스가 물어보는 게 맞지.
누가 봐도 피해자는 마테우스, 즉 델무아드 왕국이잖아?
[네놈에게 해줄 말 따윈 아무것도 없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사람 탈을 쓰고 있을 때는 대화가 통하는 척이라고 하더니만.
골바가지에 깃들더니 뵈는 것이 없나 보다. 실제로 눈이 없기도 하고.
"흑마법사."
"저요? 아니면 쟤요?"
"쟤는 저주술사라고 부를게."
칸나는 흑마법사.
저주술사는 저주술사.
간단히 정리한 마테우스가 물었다.
"이놈, 골바가지 부숴버리면 어떻게 될까?"
"으음, 글쎄요. 아마 소멸할 가능성이 높을 거예요."
"확실해?"
"영혼이 머물 그릇 자체가 사라지는 셈이니까요."
육신에서 이탈한 영혼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는 영혼을 다루는 흑마법의 기초 중에 기초.
마테우스 역시 금방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고는 다시금 바위를 들어올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리치려는 모양새였다.
[자, 잠깐, 지금 무슨 짓을······!]
"하던 건 마저 해야지."
[그러니까 갑자기 왜······!]
"어차피 궁금한 건 저 수정구에 다 있을 것 같거든. 홀로 백여 년을 독수공방하던 노인네 입이 무거울 리가 없잖아? 마침 듣는 귀도 없겠다, 할 말 못할 말 주절주절 늘어놓았겠지."
[······.]
그 말에 저주술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적 없노라고 장담하기 어려웠거든.
기록이랍시고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잖아?
'······제기랄, 설마 일이 이딴 식으로 꼬여버릴 줄이야.'
본디 계획은 그러했다.
껍데기는 키메라의 양분으로 쓰되,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기습을 노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놈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았다.
영혼을 건드는 흑마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머리뼈마저 부서지면 나는 끝이다. 아직 그럴 순 없어.'
애지중지 키운 키메라마저 잃어버렸다.
복수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
그러니 살아남아야지. 살아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내 이름은 루드릭 보타.]
마침내 결심을 굳힌 저주술사.
아니, '루드릭 보타'의 해골이 말했다.
[그 옛날 델무아드 왕실이 펼친 학살에 가족을 잃었다. 이 정도면 답이 되는가?]
마테우스가 그 이름을 듣기 무섭게.
쿵!
기다렸다는 듯 바위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놈의 두개골을 집어 들며 물었다.
"보타? 설마 너, 데드릭 보타 후손이냐?"
[핏덩이에 불과한 네놈이 아버지의 이름을 어찌······?]
"아버지? 네놈 도대체 몇 살이야? 그놈 죽은 지가 벌써 몇백 년이······."
데드릭 보타는 마테우스가 하사드 윈저로 살던 시절 친히 목숨을 거둔 대흑마법사다.
한데 그놈의 증손자도 아니고 손자도 아닌, 무려 아들이란 놈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아아, 내 정신 좀 봐라. 너희 족속들이 원래 그렇지. 스스로 언데드 괴물이 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놈들인데, 그깟 오래 살아남는 것쯤이야 니들한테는 아무 일도 아니겠구나?"
그 말에 루드릭 보타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기껏해야 스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놈이 뭐?
어쩐지 많이 본 얼굴이라고? '그놈' 아들이었느냐고?
"그 핏줄이면 이해가 되네. 물론 제 아비가 죄 없는 백성 수만 명을 공양한 미치광이면 알아서 자중하고 사는 게 정상이긴 하겠다만, 너희 족속들한테 그런 염치를 바라면 안 되겠지."
[네놈, 어디서 당시의 기록이라도 읽어본 모양인데······.]
"시끄럽고, 다음 질문."
루드릭 보타가 불쾌함을 느끼든 말든.
마테우스는 제 할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았으니까.
"이 비싼 에너지 코어를 제공한 배후."
[······.]
"누군지 말해."
루드릭 보타의 복수심에 날개를 달아준 배후.
에너지 코어, 혹은 그걸 구하는 데 쓰인 자금의 출처.
또 다른 말로는 델무아드 왕국의 영토를 망가뜨린 공범.
[······이, 이드리사!]
"이드리사?"
[이드리사, 이드리사 왕국이다!]
이드리사 왕국을 향한 의리 따윈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팔 수 있다.
하물며 거짓말도 아니잖아?
[놈들이 먼저 날 찾아왔다! 그리고 지원을 약속했지. 강대국 간의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앞서 유사시 적진에 뿌릴 역병을 연구하자더군. 바로 너희 왕국을 실험용 쥐로 삼아서 말이다!]
흔히 마법사들의 국가로 유명한 이드리사 왕국.
저주술사 루드릭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놈들은 나에게서 역병을 통한 전략의 가능성을 봤고, 내가 연구한 모든 것을 가져갔다. 그 이후로는 연락과 지원이 모두 끊겼지. 하지만 나는 너희 델무아드 왕국에 빚이 있는 몸, 철수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마테우스가 루드릭의 말을 끊어버렸다.
더 들을 가치조차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대륙의 삼강이라 불리는 강대국들, 그놈들한테 우리 왕국은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음미할 후식 같은 나라야. 다 망한 주제에 역사만 깊어서 대륙통일이라는 위업의 피날레가 되어줄 그런 땅이지. 한데 그 땅을 역병으로 망가뜨린다? 하물며 곡창지대로 유명한 남부 영토를?"
언젠가 삼강의 힘겨루기가 끝나고, 어느 한 곳이 대륙의 새로운 주인으로 군림하는 날.
그 주인은 반드시 이곳 델무아드 왕국을, 그저 삼강이 힘을 겨루느라 방치하다시피 했을 뿐 더 이상 자력으로 살아남을 여력 따위 존재하지 않는 이 나라를 단숨에 집어삼킬 터.
한데 그 대륙통일의 마침표와도 같은 왕국을 역병으로 망가뜨릴 리 있겠는가?
"이래서 남의 나라 땅덩어리 뺏어본 적 없는 놈들하고는 대화가 안 된다니까?"
이 세상에 그런 걸 해본 자가 몇이나 되겠냐만.
정말 해본 장본인의 말이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넌 안 되겠다. 하던 일이나 마저······."
[다, 당연히 복구에 관해서도 들은 바가 있다!]
루드릭이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그는 진심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드리사 왕국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역병으로 망가진 땅을 정화할 방법! 그러니 역병을 전쟁에 활용하겠다는 발상이 가능했겠지! 일단 전쟁부터 승리해놓고 정화하면 그만이니까!]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들어야 할 것도, 물어야 할 것도.
예컨대.
"그게 뭔데?"
[······뭐?]
"이드리사 왕국이 알고 있다는 그 방법."
[······.]
"삼 초 내로 말하도록."
마테우스가 다시금 바위를 번쩍 들어올렸다.
정말 딱 3초만 기다렸다가 내리찍을 기세였다.
"삼, 이, 일."
[어, 어머니 나무······!]
"어머니 나무?"
[나, 나도 자세한 것까지는 모른다! 다만 이드리사 왕국의 대리인들이 동부 대밀림의 수만 년 묵은 거목을, 어머니 나무라는 이름의 정령을 언급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 훗날 그 존재의 씨앗으로 망가진 땅을 정화하겠다는 말까지도······!]
동부 대밀림.
바로 그 땅에서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을 주인처럼 군림해온 숲 요정 일족.
어머니 나무란 바로 그들이 모시는 신성한 나무, 다른 말로는 '정령'이었다.
'확실히······.'
선뜻 믿기 어려운 정보.
그럼에도 마테우스는 무언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 대밀림의 숲 요정 일족과 어머니 나무라면 그에게도 익숙한 존재였으니까.
'이놈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군.'
어머니 나무의 씨앗에서는 영험한 기운을 가진 묘목이 자라난다.
달여 먹으면 만병통치약이요, 조제하여 복용하면 궁극의 영약이다.
뿐일까? 묘목 근처에만 있어도 건강이 회복되는 신비로운 나무다.
예컨대 어머니 나무가 가진 권능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문제는 그 존재가 씨앗을 내어줄 리 없다는 점인데.'
물론 그만한 효험을 가진 만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특히 그 씨앗이나 묘목을 얻고자 하는 이가 인간이라면 더더욱.
'인간이란 종족 자체를 불신하거든.'
어머니 나무는 물론이거니와 그를 모시는 숲 요정 일족도 마찬가지다.
당장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오직 하사드 윈저만이 특별대우를 받았거든.
'한데 그걸 맡겨놓은 물건처럼 지껄인다? 이드리사 왕국 놈들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동부 대밀림의 수호자들.
숲 요정 일족과 어머니 나무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단 뜻일 터.
자그마치 수천 년의 고집을 꺾을 만한, 혹은 꺾일 만한 그런 크나큰 변화가.
'예감이 썩 좋지는 않네.'
약간의 고민이 더 필요했던 마테우스.
이내 그가 꾹 다문 입술을 천천히 뗐다.
"흑마법사."
"예, 전하. 말씀하셔요."
"너는 즉시 왕성으로 복귀하도록."
"왕성으로요? 저 혼자 말씀이세요?"
"동부 대밀림에 들를 생각이라서."
대밀림으로 간다는 말에 더 이상 캐묻지 않는 칸나였다.
그 고결한 요정들은 인간보다 흑마법사를 더 싫어하니까.
"싫으면 같이 가서 꼬챙이 한번 되어보든가."
"아뇨, 아뇨. 싫을 리가요? 왕명을 따라야지요."
만약 숲 요정 일족의 영역에 인간이 발을 들인다면?
당장 숲에서 나가라며 엄중한 경고를 해올 것이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그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다면?
경고 따윈 없다. 그 즉시 화살비가 쏟아지겠지.
"그럼 가서 누렁이한테 전해. 곧 남부가 정화될 예정이니 정상화할 준비를 시작하라고."
"만약 누렁······ 아, 아니, 재상께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으면 어찌 대답할까요?"
"사실 그대로 대답하면 돼. 여기서 있었던 일 전부."
그리 읊조린 마테우스가 에너지 코어를 따로 챙겼다.
반면 수정구로 가득한 자루는 칸나 앞쪽으로 툭 차며 밀었다.
스켈레톤을 시키든 직접 들든 알아서 왕성까지 가져가란 제스처였다.
"자, 그럼."
칸나에게 명령을 내린 마테우스.
그가 내려놓았던 바위를 집어 들었다.
"하던 일부터 끝내볼까?"
[왜, 왜 이러는 것이냐?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전부 말했다!]
"알지."
[한 치의 거짓도 없단 말이다!]
"안다니까?"
[그런데 왜, 어째서 또······!]
"네놈이 죽인 내 백성들 수가 몇이나 될 것 같아?"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본인이 역병에 걸려 죽었든, 역병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 죽었든, 부모가 역병으로 죽어 보살핌을 받지 못해 죽었든, 자식이 역병으로 죽어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든, 결국 그 사람들은 모두 네놈이 죽인 거야. 벌레만도 못한 네놈 아비의 복수를 한답시고 말이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저주술사가 죽인 백성의 수는 못해도 수십만 단위일 것이다.
심지어 아비인 데드릭 보타의 악행까지 합한다면 그 수가 더더욱 불어날 터.
"근데 이 나라의 왕족인 내가 네놈을 어찌 살려주겠냐?"
[자, 잠깐······! 아직 말하지 않은 정보가······!]
끝을 내려는 마테우스.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루드릭 보타.
몇 차례 반복된 구도였으나,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필요 없어."
그건 바로 마테우스의 결단이었다.
더는 협박에서 멈추지 않았으니까.
콰직!
* * *
과연 칸나의 말이 옳았다.
해골이 박살 나는 순간 허공으로 흩어지는 회색 아지랑이.
머리뼈에 깃들어있던 루드릭 보타의 영혼이 확실해 보였다.
"이게 네가 말한 그 소멸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네, 이러면 죽은 자들의 왕한테도 못가요. 단어 그대로 소멸이니까요."
"어째 목소리랑 말투에 안타까움이 섞여있다?"
"안타까움이 아니라 아쉬움이죠. 정말 그 데드릭 보타의 아들이면 보타 전승 흑마법의 계승자란 뜻이잖아요? 이 기회에 배워두면 두고두고 유익하게 써먹을 수 있었을 텐데······."
역사상 최강의 흑마법사를 논할 때마다 반드시 거론되는 데드릭 보타.
그가 혈육에게만 전수하는 흑마법이 바로 '보타 전승 흑마법'이다.
같은 흑마법사로서 욕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딱히 그렇지도 않아."
그러나 마테우스의 생각은 달랐다.
애당초 그는 보타 전승 흑마법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거기에는 세상 누구보다 원초적이면서도 확실한 근거가 존재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거든."
"······네?"
"저놈 가문 흑마법 말이야. 내가 여럿 상대해봐서 아는데, 어차피 이 주먹 한 방에 나자빠지는 건 보타고 나발이고 다 마찬가지더라고. 그러니까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어."
"······."
이쯤 되면 할 말이 없다.
보타 전승 흑마법의 창시자와 계승자를 모조리 때려죽인 장본인이잖아?
그런 존재가 별거 없다는데 풍문으로만 들어본 자신이 무슨 말을 해?
그냥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맞습니다,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그리 달래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벌어진 일.
차라리 점수라도 따자.
"전하께서는 그저 왕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셨을 뿐이니까요."
"왕이 해야만 하는 일?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하는 말이냐?"
"전하께서 저주술사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일국의 왕족이 되어 무고한 백성들의 삶을 망가뜨린 흉악범을 어찌 살려둘 수 있으시겠어요? 저 같아도 단칼에 목을 쳤을 겁니다."
"호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마테우스가 입으로 호를 그렸다.
그러더니 무척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문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까 야영지에서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개기는 거야?"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정말 진심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마법사도 그렇고, 흑마법사도 그렇고.
이 '마법'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족속들이 대개 그렇다.
끝없는 탐구심과 지식 충족 욕구를 타고난 자들이잖아?
한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내가 니들을 몰라?"
"송구합······."
"시끄럽고, 이거나 받아."
피식 웃은 마테우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두꺼운, 그리고 낡아빠진 고서 한 권이었다.
"이건······?"
"저놈 거처에서 주웠어."
고서의 정체는 보타 가문의 전승 흑마법.
바로 그 깨달음이 담긴 '흑마법서'였으니.
"먼 길 따라나선 보상이라고 해두지."
상과 벌이 확실한 군주.
굴린 만큼 보상하는 군왕.
삼백 년 전 과거나, 지금이나.
마테우스는 그런 것들을 중요시했다.
021화. 상아탑에서(1)
'정말 이드리사 놈들이 내 백성들을 역병으로 유린했을까?'
동부 대밀림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드리사 왕국의 영토를.
어쩌면 철천지원수가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땅을 가로질러야만 한다.
'만약 그 데드릭 보타의 아들놈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기에 마테우스 역시 그 영토를 거닐었다.
동부 대밀림과 가장 가까운 대도시이자 이드리사 왕국의 수도.
'그랑펠' 한복판을 유유자적.
'빠른 시일 내로 백성들의 원한을 달래줘야겠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정복왕의 피가 다시금 들끓어오를 때쯤.
마테우스의 발길이 수도 그랑펠에서도 한가운데 우뚝 솟아난 탑.
이드리사 왕국의 상징이자, 그들이 마도왕국으로 불리는 까닭.
일컫기를 상아탑 인근에서 멈췄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하면서도 효율적인 준비가 필요할 터.
마테우스 개인으로 보나, 델무아드 왕국 전체로 보나.
하여 이드리사 왕국을 지나가는 김에 겸사겸사 방문했다.
마법사들의 성지 상아탑, 여기서 되찾아갈 물건이 꽤 많거든.
'······그나저나 여긴 참, 언제 와도 놀랍단 말이지.'
저 상아탑이라는 건축물의 웅장함을 보라.
높이로는 무려 백 층에 달하여 구름을 넘어섰다.
넓이 역시 어지간한 성채를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저 꼭대기에 있는 놈이 사실상 국왕이나 마찬가지니.'
괜히 마법의 나라가 아니다.
왕실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일 뿐.
모든 권력을 저 상아탑이 쥐고 있잖아?
상아탑주가 곧 국왕이나 다름없는 국가.
그것이 바로 마도왕국, 이드리사였다.
"멈추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테우스가 상아탑을 올려다보는 그때.
탑의 정문을 지키는 근위병이 다가왔다.
"창고, 여전히 운영 중인가?"
"상아탑 창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른바 '상아탑 창고 대여 서비스'.
상아탑 특유의 마법으로 대륙에서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창고를 제공하는 사업.
'상아탑의 주요한 자금줄이었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삼백여 년 전 기준일 뿐.
작금의 상아탑과 이드리사 왕국은 어떨지 모르겠다.
"알고 계시겠지만 신규 창고 개설은 불가합니다. 이미 맡겨놓은 물건이 있으신 기존의 회원분들께서만 상아탑 창고를 계속 이용하실 수 있지요. 이 점 숙지하고 계시는지요?"
아하, 과연 그렇게 바뀌었군.
근위병의 안내만 들어도 대충 알겠다.
이제는 기존의 회원만으로 운영하는 사업이 되셨다?
'나도 기존의 회원이라면 회원이긴 한데, 문제는······.'
문제는 삼백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점.
아무래도 올라가서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다.
끄덕
마테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숙지하고 있음을 표하자.
우우우웅!
근위병이 상아탑 정문에 파여 있는 홈으로 어떤 수정구를 끼웠다.
그러자 푸른빛이 뿜어져 문에 새겨진 마법 문자를 타고 퍼져나갔다.
철커덩!
커다란 백색 문에 빼곡히 새겨진 마법 문자.
그 신비로운 글귀가 푸른빛으로 번뜩이는 순간.
쿠구구구구구구······!
굳게 닫혀있던 상아탑의 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소지품 검사나 신분 검사 따위는 없었다.
그만큼 보안과 대처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
'이드리사 왕국 최고의 권력기관이자 최강의 무력집단이니까.'
당장 이 상아탑 1층의 풍경만 봐도 그렇다.
사방팔방이 벌써부터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다.
근위병 대신 배치된 전투용 마나 골렘, 스스로 움직이며 바닥을 청소하는 빗자루.
어디론가 책을 옮기는 마법 양탄자, 자유로이 마법을 논하고 시험하는 하급 마법사들까지.
'급한 불부터 끄고 나면 마법사 양성을 시작해야겠군.'
이렇듯 마법은 단순히 전투와 전쟁, 살상만을 위한 힘이 아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을 한 단계 진일보시킬 수 있을 만큼 초월적인 권능.
마테우스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여겼고, 하여 마법사 양성에도 공을 들였었다.
'내가 예전에 해놓았던 것들은 전부 사라졌으니······.'
문제는 그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점.
하물며 국운이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는 점.
그러하건대 어찌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마법사 양성 관련 정책들이 멀쩡하겠는가?
나라에 돈이 부족할 때마다 하나둘씩 폐지되었을 것이며, 작금에 이르러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을 터. 실제로 현재 델무아드 왕실 소속 마법사의 수는 '0'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겠지.'
마테우스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을 때쯤.
두 발은 어느덧 상아탑 1층 중심부에 닿았다.
"앞에 보이시는 은빛 승강기가 20층 창고 서비스 안내 데스크까지 올라가는 승강기입니다."
그곳에는 총 아홉 개의 형형색색 원판이 높다란 상아탑을 층층마다 바쁘게 오르내렸다.
이는 '마법 승강기'라 불리는 마도공학 발명품으로서, 장장 백 층에 달하는 상아탑을 계단 대신 손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편리한 구조물이었다.
"이걸 타고 올라가셔서 데스크 담당자와 자세한 말씀 나누시지요. 그럼."
근위병의 안내는 여기까지.
마테우스가 은빛 승강기 위에 두 발을 올렸다.
그러자 탑승자를 인식한 승강기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별한 장치 없이, 오직 원판 스스로 발동시킨 부유 마법의 힘이었다.
[반갑습니다. 회원님. 상아탑 창고 서비스 안내 데스크입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승강기가 멈춘 상아탑 20층 로비에서 보랏빛 수정으로 이루어진 마나 골렘이.
앞서 근위병이 언급했던 안내 데스크 담당자가 마테우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물건을 좀 찾으려고 하는데."
그 시절 마테우스는.
아니, 하사드 윈저는 아버지이자 델무아드 왕국의 시조가 되는 아사드 윈저에게 건의했다.
혁명이 실패할지도 모르니, 대륙 각지에 다시금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놓자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곳, 이드리사 왕국 상아탑이 운영하는 창고였다.
정확히는 창고 안에 보관해놓은 자금과 물품 말이다.
[창고 개설 당시 계약서에 기재하셨던 이름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론 아버지께서는 거절했다.
수많은 대업동지들이 다 함께 목숨 걸고 행하는 거사에 혼자만 쏙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까닭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마테우스는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고작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라니? 오히려 그게 동지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일 아닌가?
"라스무스."
하여 마테우스는 독단적으로 움직였다.
아버지께서 거부하시든 말든 따로 '라스무스'라는 익명으로 창고를 개설했다.
그리고 그 안에 실패 시 가용할 자금은 물론 각종 영약까지 가득 챙겨놓았다.
혁명에 실패했을 경우 높은 확률로 육체가 만신창이일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본인 인증을 위한 영체 확인 절차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일컫기를 영체 확인.
상아탑의 특별한 마법으로 창고 이용자 고유의 혼백을 간파한 뒤.
계약 당시 수집된 혼백의 특질과 대조하여 본인 확인을 진행하는 절차다.
'상아탑 창고의 장점이자 단점이랄까.'
오직 본인만이 맡겨놓은 물건을 찾아갈 수 있는.
하물며 상아탑조차 남의 창고를 강제로 열지 못하는 구조.
그렇기에 제집 안방보다 안전하지만, 남에게 양도하기 어렵다는 문제 또한 공존했다.
'본인이 직접 찾아서 양도하는 방법 말고는 답이 없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영체 인식을 거쳐 계약된 창고는 상아탑조차 열지 못한다.
본인이 와서 영체와 관련된 모든 절차를 걸쳐야 창고 계약도 해지할 수 있다.
이러니 만약 창고 계약자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상아탑에 직접 방문하지 못할 경우, 예컨대 급사했다든지,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든지, 기타 등등의 경우에는 영원히, 상아탑이 존재하는 한 백 년이 흐르든, 이백 년이 흐르든, 감히 누구도 그 창고를 열지 못한다.
'강령술로 되살아난 나로서는 행운이지.'
만약 상아탑이 영체 인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창고 이용자를 확인했다면?
하사드가 맡긴 물건을 마테우스가 찾아가는 가능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터.
'자, 그럼 어디······.'
확인을 해보실까?
강령술로 되살아난 자신이 하사드 윈저의 창고를 열 수 있을지.
삼백 년째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창고가 멀쩡하게 보존되고 있을지.
"진행해."
[영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어지러움이나 매스꺼움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인체에 유해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지금부터 영체 확인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약간의 안내와 함께 영체 확인을 시작하는 마나 골렘.
그 피조물의 눈을 대신하는 안광에서 빛줄기가 뿜어졌다.
우우우우웅······!
마테우스의 육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빛줄기.
물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광이 약해졌으니까.
[라스무스 회원님, 112,417일 만에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이로써 큰 고비를 넘겼다.
이제 예정대로 창고를 이용하면 그만.
마나 골렘이 앞장서 마테우스를 한 층 위 창고 앞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복잡한 마법 문자와 마나 회로가 빼곡히 새겨진 문을 열어줬다.
[C-387, 라스무스 회원님의 창고입니다.]
[용무 중 문의사항이 있으신 경우 통신 수정구를 통하여 저를 불러주십시오.]
[용무가 다 끝나신 경우에는 여기 설치된 버튼으로 문을 여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있겠습니다. 모쪼록 편안히 용무 보시기를.]
쿵!
이윽고 창고 문이 닫혔다.
마나 골렘 역시 데스크로 돌아갔다.
이제 이 창고 내부는 오롯이 마테우스 혼자만의 공간.
"······정말 그대로네?"
물론 기억이 완벽할 리는 없겠지.
그러나 딱 보면 감이라는 것이 오는 법이다.
창고 절반을 가득 채운 금괴, 지금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아티팩트 급 영약들.
확실하다. 이 창고는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부식되기는커녕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이게 다 창고에 걸려있는 마법의 힘이겠지.'
예나 지금이나 언제 봐도 탐나는 힘, 마법을 뒤로한 채.
마테우스가 개별적으로 포장된 영약들을 살피며 생각했다.
'어차피 이걸 다 챙겨갈 순 없다. 짐꾼이 필요할뿐더러 영약은 더 정교한 운반법을 필요로 하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은 효과를 크게 볼 법한 영약 몇 병으로 만족할 수밖에.'
추후 만반의 준비와 함께 다시 방문하면 될 일.
그러니 오늘은 마테우스의 몸으로 상아탑 창고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아티팩트 등급의 영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예컨대······.
"이런 녀석으로."
당장 복용할 영약 선택에 신중을 기하던 마테우스가 결심을 내렸다.
황금으로 치장된 약병, 그 안에서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은색 용액.
'불꽃 심장.'
일컫기를 불꽃 심장.
작금에 이르러서는 전설적인 연금술사로 손꼽히는.
그러나 과거에는 단지 마테우스의 친구였던 어느 연금술사가 조제한 걸작이었다.
'이 녀석들도 좋겠군.'
비단 붉은 심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추가로 네 병의 영약을 더 챙긴 마테우스.
이내 그가 창고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늘은 맛보기로 다섯 병만 해치워볼까?'
일신의 무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기회.
오늘은 그 호사를 오롯이 누릴 차례였다.
* * *
"후우우우······!"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테우스가 다섯 병의 영약을 모두 다스렸다.
'막혀있던 혈이 뻥 뚫린 기분이군.'
완벽하면서 빠른 성장에는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양질의 영양소, 훌륭한 수련법, 효율적인 마나 심법.
비약이나 영약처럼 성장을 보조하는 약물에 이르기까지.
'이 몸에서는 항상 그 마지막 요소가 부족했거든.'
델무아드 왕국에서는 양질의 영약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기껏해야 돈으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영약이 전부였을 뿐.
한데 그 아쉬움을 무려 아티팩트 등급의 영약으로 달랜 셈이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네.'
그럼 왜 진즉 찾으러 오지 않았느냐고?
간단하다. 시간 투자 대비 효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삼백 년이 지난 것으로도 모자라 육체마저 바뀌었잖아?
괜히 먼 길 왔다가 허탕만 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당장 이번에도 지나가는 김에 겸사겸사 왔으니까.'
물론 이제 허탕을 칠 가능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아티팩트 등급의 영약을 다섯 병이나 복용했잖아?
여기에 남부 정화의 실마리까지 얻어간다면 금상첨화일 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데리고 올 걸 그랬나?'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인간 허수아비.
아니, 뼈 방패가 없다니 아쉽게 되었다.
'별수 없지.'
아쉬움을 삼킨 마테우스가 창고 문에 박힌 수정구를 꾹 눌렀다.
오늘 볼 일은 다 봤으니, 이제 슬슬 동부 대밀림으로 향할 차례.
쿠구구구구구······!
창고 문이 열리는 바로 그때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창고 앞에 잔뜩 모여 도열한 상아탑 마법사들.
은빛 로브 차림의 노인을 필두로 한 그들이 무릎을 꿇으며 복창했다.
"마법의 주인을 뵈옵니다!"
"마법의 주인을 뵈옵니다!"
"마법의 주인을 뵈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테우스에게.
마법의 주인이라는 호칭과 더불어.
022화. 상아탑에서(2)
'이것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자.
어째서 마법사 놈들이 마테우스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걸까?
힌트는 저들의 말 속에 있다. 저들이 복창하는 호칭 말이다.
'······설마?'
마테우스는 무려 삼백 년 묵은 창고를 열었다.
마나 골렘의 말마따나 112,417일 만에 방문했잖아?
그렇기에 보고를 받은 마법사들은 의심했을 거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닐 가능성을.'
혹은 아예 인간이 아닐 가능성까지도.
예컨대 '마법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존재.
'드래곤이라든지.'
정황이 그렇다.
저 마법사들은 삼백 년 만에 나타난 창고의 계약자를 드래곤으로 착각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인간 사회에 섞여들어 유희를 즐긴다고 알려진 용 일족 말이다.
'정정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법사란 자들은 드래곤을 숭상한다.
의심의 기저에 호의가 깔려있다는 뜻.
한데 그 의심을 다른 방향으로 바꾼다?
'굳이 호의를 적의로 바꿀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평범한 인간 행세를 하기는 글렀다.
삼백 년이란 세월은 결코 평범할 수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호의적인 의심을 사는 편이 나을 터.
"뭐냐?"
결심을 굳힌 마테우스가 읊조렸다.
매우 고압적인 태도와 목소리였다.
"니들은."
거만함이란 곧 드래곤의 상징과도 같은 것.
지금 이 순간, 마테우스는 방향성을 굳혔다.
적의보다는 호의적인 의심을 사는 방향으로.
"상아탑주 하비 메첼더, 마법의 주인께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마테우스의 거만함이 오히려 호의적인 의심을 더욱 굳혀준 걸까?
상아색 로브 차림의 마법사들 틈에서 혼자만 은빛 로브를 휘감은 노인.
스스로 소개하기를 '상아탑주' 하비 메첼더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문을 이어갔다.
"마법의 주인께서 저희 상아탑을 방문해주셨다는 소식에 무례인 줄 알면서도 이리 찾아왔습니다. 마법을 탐구하는 저희로서 어찌 귀하신 분의 방문을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확실해졌다.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마테우스를.
아니, 약 삼백 년 만에 나타난 창고 계약자 라스무스를 드래곤으로 착각했다.
일단 태어나기만 해도 7성급 마법을 구사하는 그 무지막지한 괴물 종족 말이다.
"어떻게 알았지? 내 폴리모프는 완벽할 터인데."
이미 깊은 착각에 빠진 상아탑주에게 마테우스가 다시금 물었다.
놈들이 정확히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한번 떠볼 필요가 있거든.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영체 확인 마법으로도 간파가 불가능할 만큼 완벽한 폴리모프 주문을 구사하시는 분께서 삼백 년 만에 저희 상아탑을 재방문해주셨으니 말이옵니다."
하나같이 귀한 물건을 삼백 년간 맡겨놓았던 자가 뜬금없이 나타났다.
영체 확인 마법으로는 분명 인간인데, 인간이 어찌 수백 년을 살겠는가?
분명 특별한 존재다. 영체까지 조작하여 인간 행세를 할 수 있는 능력자 말이다.
'그런 게 아무나 가능할 리 없지.'
상아탑주가 판단하기에.
그리고 휘하 마법사들이 판단하기에.
그런 일이 가능한 생명체는 이 땅에 얼마 되지 않는다.
무작정 오래 사는 종족이야 몇 있겠다만, 나머지 조건까지 충족하며 장수하는 종족은 손에 꼽힌다. 아니, 손으로 꼽을 필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일무이하거든.
'드래곤, 오직 그들뿐이다.'
설령 잘못 짚었어도 괜찮다.
그럼 애당초 문제 될 게 없으니까.
하나 드래곤일 가능성이 1%라도 있는 한 몸을 사려야 한다.
근본적으로 흉포한 데다가 변덕마저 들끓는 종족이잖아?
괜히 모른 척했다간 어떤 난동을 부릴지 모르는 일.
"그래, 인간 마법사의 왕이 보기보다 똘똘하구나."
"과찬이십니다. 마법의 인도를 따르는 자로서 마땅히······."
"그만큼 똘똘하면 내가 지금 무얼 하는 중인지도 알겠지?"
"······여, 여흥을 즐기시는 중이 아니신지요?"
"그걸 아는 놈이 이따위 소란을 떨어?"
"······아!"
드래곤에게 여흥이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사회에 스며드는 일종의 '역할극'이다.
한데 마법사란 놈들이 인사를 올리겠답시고 마법의 주인이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고 있다.
역할극의 몰입을 깨버리는, 경우에 따라 용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는 위험한 행위라는 뜻.
"송구하옵니다! 귀하신 분을 실제로 뵙는 것이 처음이라 이런 크나큰 무례를······."
"덕분에 여흥을 망쳤구나. 내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로 잊지 않으마."
무려 드래곤이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단다.
그 말 속에 가득 담긴 감정은 누가 봐도 짜증.
이대로는 아니 된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만 한다.
"어찌하면 노여움을 풀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글쎄, 화가 좀 많이 나서."
"부디 가르쳐주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정 그러면 성의를 좀 보이든가."
"성의······ 말씀이십니까?"
"노여움을 거둘 명분은 있어야지."
어째 말하면 말할수록 드래곤 행세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마테우스 윈저 본연의 말투인지 모르겠다만.
어찌 되었든 통하긴 통한다. 상아탑주의 동공지진을 보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성의를 표하라.
쉽게 말해서 무언가를 내놓아라.
너희들이 망친 유희에 쓰임새가 있을 만한 것을.
"그럼······."
잠시 고민했던 상아탑주가 미리 준비해온 무언가를 건넸다.
"부디 이것을 받아주시겠습니까?"
겉보기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가죽 주머니.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범상치가 않았다.
"뭔데?"
"아공간 주머니입니다."
일컫기를 아공간 주머니.
아공간으로 통하는 마법이 걸려 대량의 물건을 보관하고 운반하기 용이한 마도구.
무척 희귀하여 아티팩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물건을 성의 표시로 내어주겠다?
"저희 상아탑이 보유한 유물 중에서도 가장 귀한 유물입니다. 유희를 즐기시는 동안 유용하게 쓰실 수 있는 마도구이기도 하지요. 모쪼록 노여움을 푸실 작은 명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성의 표시다.
하물며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다.
아직 저 창고에 금괴와 영약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까.
"나쁘지 않군."
물론 겉으로는 건조한 태도를 유지했다.
바로 지금부터가 중요한 순간 아니겠는가?
"가서 담아."
"예? 무엇을······."
"창고에 있는 내 물건, 금괴 하나 빠짐없이."
조금 전처럼 가져갈 방법이 전무하다면 모를까.
이렇게 된 이상 굳이 머나먼 타지에 방치할 필요는 없다.
과거와는 다르게 돈 한 푼, 영약 한 병이 아쉬운 상황이잖아?
"왜, 싫어?"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상아탑주 하비 메첼더가 휘하 마법사들에게 눈짓했다.
얼른 들어가서 아공간 주머니에 물건을 담으라는 뜻.
"분부하신 대로 모든 물건을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모든 금괴와 영약을 담은 아공간 주머니가 마테우스에게 돌아왔다.
다행히도 주머니 입구보다 큰 물건은 없어 모조리 담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예, 마법의 주인이시여.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괜히 또 우르르 쫓아오지 말고. 조용히 나갈 테니까."
아공간 주머니를 가볍게 흔들어준 마테우스.
그가 승강기를 타고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한데 어째서인지 마법사들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이유는 단 하나, 아직 상아탑주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탑주님, 뒤를 쫓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네."
"하지만 아공간 주머니로 만족했다는 건······."
"그래, 드래곤이 아니라는 뜻이지. 정말 그분들이었다면 오히려 화를 냈을 터이니."
사실 상아탑주가 아공간 주머니를 성의 표시로 내민 것은 일종의 미끼였다.
그도 그럴 게, 아공간이란 본디 드래곤의 전유물과도 같은 능력이었으니까.
"조잡한 아류작 따위를 성의 표시랍시고 내놓느냐며 길길이 날뛰었을 게야."
"그럼 어찌······."
"비록 드래곤은 아닐지언정 평범한 존재가 아닐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수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주하는 내내 풍기는 기세부터 예사 인물이 아닌 것 같더군."
몇 마디를 나누면서.
상아탑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구태여 무력충돌을 일으킬 필요가 없노라고.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무엇보다 강제로 잡아둘 명분이 없지 않은가? 조용히 물건만 찾아가려던 자를 붙잡아 마법의 주인이니 뭐니 떠들어댄 건 우리니까. 허니 그냥 두게. 괜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상아탑주의 말에 모두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이 없다면 이쯤에서 해산하도록 하지. 모두 공사가 다망하지 않으신가?"
아니, 사실 수긍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만큼 이곳 상아탑에서 탑주의 권력은 막강했으니까.
* * *
'보기보다 현명한 편이로군.'
도시를 빠져나오고도 한참 더 멀어진 마테우스.
그가 아공간 주머니를 가볍게 던졌다 받으며 생각했다.
'괜히 탑주의 자리를 꿰찬 건 아니다 이건가?'
마테우스 역시 아공간 주머니에 담긴 뜻을 알고 있었다.
본디 아공간이 드래곤의 전유물이었음을 모르지 않았거든.
그 말인즉 드래곤 행세를 멈추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
한데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아공간 주머니에 만족했느냐?
'참을 수가 있어야지.'
답은 간단하다.
지금 당장 창고에 맡긴 모든 금괴와 영약을 챙겨갈 기회.
빠르면 빠를수록 효율이 극대화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차하면 힘으로 탈출해도 되니까.'
만약 상아탑주가 자신들을 속였다며 길길이 날뛰는 머저리였다면?
그땐 유혈사태를 감수하면 그만이다. 섬멸이 아닌 도주는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거든.
하나 작금의 상아탑주는 그런 머저리가 아니었다. 딱 나이를 먹은 만큼 지혜로웠다.
'덕분에 이걸 챙겼지.'
탁!
그로부터 얼마나 더 동쪽으로 나아갔을까?
마테우스가 허공에 던진 아공간 주머니를 확 낚아채 품으로 넣었다.
이제 곧 동부 대밀림, 다른 말로는 숲 요정 일족의 영역에 도착할 시간.
"······음?"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마테우스의 머릿속 동부 대밀림은 밀림이란 명칭 그대로다.
초입부터 잔뜩 우거진 수풀과 나무가 말도 안 되는 크기를 자랑하며 반겨주는 땅.
어지간한 사람은 그 대자연에 압도당하여 감히 발을 들일 생각조차 못 하는 대밀림 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그래야 하거늘.
압도적인 대자연이 펼쳐져 있어야 하거늘.
마테우스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저 앞이 정말 동부 대밀림이라고?'
더는 기억 속 대밀림의 초입이 아니다.
풍성함을 잃어버린 수풀, 잔뜩 쪼그라든 나무.
대대적인 벌목 작업으로 숲 안쪽까지 포장된 길.
저건 아무리 봐도 길이 맞다. 그러니 놀랍다는 거다.
'폐쇄적인 걸로 유명한 숲 요정 놈들 영역에?'
하물며 그냥 길도 아니다.
명백히 인간의 땅과 연결된 통로다.
이쯤 되면 정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긴 일어난 모양이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종류의 변화가.
'그게 아니고서야······.'
마테우스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그때였다.
"굼벵이 같은 새끼들!"
"빨리 빨리 움직이라고!"
대밀림 깊숙한 곳으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수레를 끄는 몇몇 무리가 숲에서 빠져나오는 형국.
"지금부터 나자빠지는 놈들은 노예로 팔아버릴 줄 알아! 처자식까지 몽땅!"
"말만 해. 내 특별히 제정신이 아닌 걸로 유명한 가문에 팔아 치워줄 테니까."
급히 몸을 숨긴 마테우스가 인기척을 주시했다.
어쩌면 저들이 모든 의문의 정답일지도 모를 터.
"알리스터 가문이 좋겠군요. 셋째 공자가 미친놈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자네도 아는구먼? 아주 그냥 이종족만 보면 눈깔이 뒤집히는 분이시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만큼 가까워져 모습이 보이는 사람들.
문제는 구성원이었다. 무려 숲 요정들이 광물로 가득한 지게를 끌고 있다.
마치 노예라도 된 것처럼, 인간 군인들의 감시와 모욕을 받아가면서.
'오늘따라 유독 놀랄 일이 많네.'
자신들의 영역에서는 소드 마이스터가 부럽지 않은 존재.
그것이 바로 숲 요정이거늘, 인간에게 노예처럼 부려진다?
이게 말이 돼? 아무리 생각의 폭을 넓혀도 비현실적인데?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겠어.'
결심을 굳힌 마테우스.
그가 수풀에 감췄던 몸을 일으켰다.
'우선 저 병사들부터······.'
팟!
어지간히 수련한 무인조차 육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
그것은 비단 이드리사 왕국의 병사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컥!"
"커헉!"
"끄윽······!"
마테우스가 방해 되는 병사들을 빠르게 기절시켰다.
족히 반나절은 이 흙바닥에 누워 깨어나지 못할 터.
"말 좀 묻지."
그러고는 광물 운송에 동원된 숲의 요정들한테 물었다.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숲 요정 일족답지가 않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보자마자 목숨부터 구걸한다.
그 옛날 긍지 높았던 숲의 요정이.
'적응 안 되네.'
복잡한 감정을 꾹 누른 마테우스.
그가 사뭇 정제된 목소리로 물었다.
"니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냐?"
023화. 숲 요정 일족(1)
"그러니까, 너희 어머니 나무께서 힘을 잃었다?"
동부 대밀림의 이변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랬다.
모든 숲 요정 일족에게 가호를 내려주던 존재, 어머니 나무.
그 대정령이 힘을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조차 없이.
"배후에 이드리사 왕국이 있고?"
"그,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광물 탐지 마법에 따르면 이곳 대밀림 아래 어마어마한 양의 금광석과 흑철광석이 매립되어있다면서, 만약 채굴을 허락해준다면 여기서 발생하는 모든 이익의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고."
숲 요정 일족이 배후를 확신하는 근거가 있었다.
먼저 어머니 나무가 힘을 잃기 며칠 전에 이드리사 왕국 쪽에서 사람이 왔다는 점.
그들이 대밀림 아래 매립된 광물 채굴권을 요구해왔고, 단칼에 거절했다는 점.
또한, 결정적으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갑작스레 힘을 잃으셨고, 그 여파로 숲 전체가 생기를 잃었습니다. 물론 저희들 역시······ 더는 숲을 지킬 수 없는 몸이 되었지요."
"대충 알겠네."
모든 것이 이드리사 왕국의 설계다.
이익의 절반을 나누어주겠단 말은 그저 미끼일 뿐.
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어머니 나무를 약화시켰을 터.
"그렇게 되자마자 우르르 몰려왔지?"
"······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쳐들어오더군요."
"어머니 나무의 축복 없이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테고."
"순식간에······ 정말이지 순식간에 당했습니다. 저항할 틈조차 없이 숲을 빼앗겼지요."
어머니 나무의 축복을 받은 숲 요정 일족은 강하다.
그렇기에 대밀림의 풍부한 자원을 깔고 앉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나 여기서 축복이 빠진다면? 과연 그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지킬 수 있을까?
'어렵지. 현실적으로.'
모든 강대국이 국력 비축에 힘을 쓰는 시대다.
이드리사 왕국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동부 대밀림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을 터.
결국 방법을 찾았고, 스스로 기회까지 만들어냈다. 다만,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냐는 점이지.'
어머니 나무는 대정령이다.
실존 여부가 확인된 극소수의 초월적인 존재.
더군다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조차 아니다.
한데 그런 영적인 존재를 어찌 약화시켰을까?
'어머니 나무를 만나봐야겠군.'
단기적인 목표를 설정한 마테우스.
그가 다시금 숲의 요정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몇 명이나 있지?"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아하니 숲에 광산을 만들어서 니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나 본데. 설마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아닐 테고, 당연히 감시하는 놈들이 있겠지. 그 머릿수가 어떻게 되느냐는 뜻이야."
"그, 그런 말씀이시라면······ 우선 감독관으로 온 마법사 한 명에 기사가 둘, 구역마다 상주하는 병사들까지 다 합쳐서 대략 서른 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광부들은?"
"광부들은 이백 명쯤 되는데, 그들은 일이 끝나면 도시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숲에 상주하며 저희를 감시하는 자들만 추릴 경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른 명 남짓이 전부입니다."
생각보다 상주하는 인원이 적다.
이는 이드리사 왕국의 수도와 가깝기에 가능한 일.
문제가 터지는 즉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까.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견적을 낸 마테우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델무아드 왕실의 신분패였다.
"나는 마테우스 윈저라고 한다."
이거,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남부 영토를 완벽하게 정화할 기회.
나아가 든든한 아군을 얻어갈 기회.
"과거 하사드 윈저가 맺은 델무아드 왕실과 숲 요정 일족 간의 맹약에 따라 너희를 도우러 왔지."
그 기회를 낚아채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요정의 어머니.
이른바 어머니 나무라는 이름의 대정령부터 만나야 할 터.
"그러니 나를 어머니 나무께서 계신 곳으로 안내하도록."
* * *
"괜히 대정령이 아니구먼그래."
동부 대밀림 광산의 총괄 감독관.
혹은 이드리사 왕국 상아탑의 고위 마법사 중 한 명.
'다보스 프라우즈'가 힘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거대한 나무.
세상 사람들이 일컫길 어머니 나무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그 모든 결계를 버텨낼 줄이야."
이드리사 왕국의 상아탑은 실로 오랫동안 준비했다.
숲 요정 일족으로부터 동부 대밀림의 실질적인 소유권을 빼앗아올 방법.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밀림 아래 묻힌 풍부한 자원의 주인이 될 방법을.
"상아탑의 계산대로라면 소멸이 되어도 진즉 되었어야 정상이건만."
그렇게 십 년이 흐르고, 오십 년이 지났으며, 백여 년에 가까워질 때쯤.
상아탑은 마침내 방법을 찾아냈다. 숲의 요정을 일당백 용사로 만들어 오랜 세월 대밀림의 주인으로 군림하게끔 만들어준 존재, 어머니 나무라는 정령의 영향력을 줄일 방법 말이다.
"아니지, 아니야.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덕분에 우리가 그 초월적인 힘을 연구할 수 있게 되지 않았소? 어머니 나무여. 꿋꿋하게 버텨주어 참으로 고맙소이다."
제 영역의 모든 생명체에게 엄청난 힘과 생기, 그리고 활력을 선사하는 어머니 나무의 권능.
만약 그 힘을 모방할 수 있다면 이드리사 왕국이 대륙을 통일하는 것도 먼 미래가 아니리라.
"그때가 오면 비로소 이루어지겠지. 진정한 상아탑의 세상이······."
"상아탑의 세상은 개뿔."
"······웨, 웬 놈이냐?!"
다시 말한다.
다보스 프라우즈는 상아탑의 고위 마법사다.
칼잡이로 치면 소드 마이스터와 동급의 강자라는 뜻.
한데 그런 그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접근이라니?
휘오오오······!
예감이 좋지 않다.
평범한 침입자가 아닐 터.
다보스의 손아귀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미리 말하는데, 네놈을 도와줄 만한 것들은 이미 다 정리해놓았어. 막사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던 기사 놈들도, 군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병사들도, 그러니까 괜히 힘 빼지 말······."
"거기로구나!"
"······에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 한숨을 내쉬는 침입자.
그런 그에게 윈드 커터를 퍼붓는 감독관 다보스.
방심이란 없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끝장을 낸다.
스걱! 스걱! 스걱 - !
마치 원판을 닮은 수십 개의 윈드 커터가 침입자를.
아니, 침입자가 있었던 위치를 무자비하게 포격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애꿎은 수풀과 나무들만 잘려나갈 뿐.
정작 후드를 뒤집어쓴 침입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쥐새끼 하나 못 잡는 마법사가 말이 많네."
"이익······!"
이드리사 왕국 상아탑의 마법사들.
아니, 이 대륙 모든 마법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일종의 우월감.
하물며 고위 마법사라면 그 자존감이 하늘을 꿰뚫고도 남을 터.
"······오냐, 정 소원이라면."
그렇기에 다보스는 참을 수 없었다.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범부 따위가 감히.
감히 쥐새끼처럼 피하면서 마법사를 모욕해?
"내 친히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살심으로 가득한 다보스의 두 눈에 푸른 안광이 은은히 피어났다.
강대한 마나를 끌어올릴 때 나타나는, 이른바 '마력 몰입' 상태였다.
화르르르륵!
이번에는 바람이 아니다.
명백한 불꽃이 다보스의 머리 위로 활활 타올랐다.
화염구 따위와는 비교조차 부끄러울 만큼 커다란 불덩이 말이다.
"숲에 불이라도 지르게?"
"쥐새끼 한 마리 못 잡는 마법사가 될 순 없지."
"벼룩 잡다가 집구석 다 태워먹을 양반이로군."
"어차피 곧 밀어버릴 숲이다. 미리 시작해서 나쁠 건 없어!"
마침내 몸집을 최대치까지 키운 불덩이가 다보스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한번 설정된 상대를 끝까지 쫓아 폭발하는 것으로 유명한 4성급 화염 마법.
'파이로 블레스트.'
상아탑의 도감에서 명명하기를 '파이로 블레스트'.
그 강력한 불덩이가 마침내 작렬하려는 순간이었다.
"한숨 자라."
"······뭣?"
빠악!
다보스의 불덩이는 표적을 불태우지 못했다.
배후로 접근한 침입자의 손에 정신을 잃었으니까.
"후우."
깊은 호흡과 더불어 후드를 내린 침입자의 정체는 마테우스 윈저.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한 그 은빛 머리 청년이 커다란 나무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어울리지 않게 정중한 말투.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무려 대정령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터.
"숲의 어머니시여."
그런 존재에게 무례를 범할 만큼 마테우스가 망나니는 아니다.
단지 누구 앞에서나 당당할 뿐, 존중이 필요할 때는 확실히 한다.
[그대는······.]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닌, 정신에서 정신으로 이어지는 목소리.
무척이나 지친 여인의 읊조림이 마테우스의 머릿속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하사드······ 윈저?]
앞서 기절한 누구 말마따나 괜히 대정령이 아니다.
힘을 잃은 와중에도 마테우스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용케도 알아보시는군요."
[내 어찌 몰라보겠는가? 숲의 영원한 귀빈을 말이니라.]
숲의 영원한 귀빈.
인간 중에서는 오직 마테우스.
아니, 하사드 윈저에게만 허락되었던 칭호.
[······헌데, 그대는 이미 오래전에 생을 마감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랬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게로군.]
"말을 못 할 것까지야 없습니다만, 우선 급한 불부터 끄시죠."
급한 불이라 함은 숲이 처한 상황을 뜻할 터.
그 뜻을 이해한 어머니 나무가 차분히 대꾸했다.
[숲의 귀빈이 하는 말이라면 언제든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느니라.]
지쳤을지언정 호의로 가득한 목소리.
오래된 인연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방금 이 마법사가 하는 말, 들으셨습니까?"
마테우스가 쓰러진 감독관을 슬쩍 가리키며 물었다.
[어차피 곧 밀어버릴 숲이라는 발언 말인가?]
"숲의 어머니께서는 그게 무슨 뜻처럼 들리십니까?"
[종국에는 나의 일족을 몰아내고, 숲을 모조리 차지하겠다는 뜻이겠지.]
"정확합니다. 그만큼 탐나는 규모의 자원이 이 아래 묻혀있으니까요."
겨우 광산 몇 개 얻자고 이런 대대적인 작업을 벌였을 리 없다.
그도 그럴 게, 인간과 숲 요정은 인류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총력전을 펼친 적이 없다.
자잘한 시도가 있었을지언정 어머니 나무의 권능에 휩쓸려 일찌감치 포기하기 일쑤였으니까.
하나 오늘날의 이드리사 왕국은 달랐다. 숲의 요정들을, 또 그들을 비호하는 어머니 나무를 완벽하게 굴복시켰다. 대밀림 아래 오랜 세월 묻혀있던 풍부한 자원을 독차지하고자 말이다.
"아마 숲의 어머니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대밀림 아래 묻힌 자원은 상상을 초월하지. 너희들이 좋아하는 전쟁, 정복, 부국강병, 문명의 발전······. 여타 그러한 것들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굉장한 이점이 될 것은 분명하다. 충분히 탐을 낼 만해.]
어머니 나무는 동부 대밀림 그 자체다.
뻗어나간 뿌리가 밀림 전체를 아우른다.
묻혀있는 자원의 규모를 모를 리가 없겠지.
"그렇죠. 지금까지는 그 탐나는 것들을 차지할 방법이 없었기에 꾹 참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겼고,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마법의 힘이겠죠."
감독관 다보스의 결계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봤을 때.
또 이드리사 왕국의 이명이 마도왕국임을 고려했을 때.
저들이 찾아낸 방법이란 십중팔구 마법임이 확실할 터.
"그래서 말인데, 방법은 있습니까?"
[······방법?]
"정체 모를 마법에 저항할 방법이든, 자원에 눈이 뒤집힌 왕국 놈들한테서 일족과 밀림을 지켜낼 방법이든, 어느 쪽이든 어머니 나무께서 어떤 묘안을 갖고 계시느냐는 뜻입니다."
[그런 것은······.]
대답하고 싶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그럼에도 어머니 나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타깝지만 방법이랄 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거든.
"없나 보군요."
[······.]
"그럼 선택지는 두 개뿐입니다."
[······그게 무엇이지?]
"여기 계속 남아서 무력하게 당하거나."
다분히 의도적으로 최악의 선택지부터 말한다.
어머니 나무라는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였다.
"아니면 저를 따라오거나."
[그대를 따라 어디로 간단 말인가?]
"당연히 델무아드 왕국이죠."
만약 어머니 나무와 숲 요정 일족을 델무아드 왕국으로.
그중에서도 오염된 남부 영토에 정착시킬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무 특유의 권능으로 남부 전체를 정화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떠올렸던 기회였다.
남부를 정화하고, 아군까지 얻어갈 기회.
물론 아직은 약간의 설득이 더 필요하겠지.
[숲을······ 버리라는 뜻인가?]
"아,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남고 싶으면 남으셔야죠. 이 숲이라는 장소가 일족 전체의 목숨보다 소중하시다면, 그리고 그 생각에 모든 요정들이 동의한다면 남는 게 맞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늘어놓는다.
그도 그럴 게, 어머니 나무가 괜히 '어머니'일까?
그만큼 숲의 요정들을 자식처럼 끔찍이 여긴다는 뜻.
마테우스는 바로 그 모성애와 흡사한 심리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한시라도 빨리 숲의 요정들을 구원하고 싶으시다면, 이 영원한 귀빈이 드리는 제안을 한번 들어나 보십시오. 장담하는데 후회하실 일 없을 겁니다."
024화. 숲 요정 일족(1)
[······정녕 그대의 왕국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주겠다고?]
"일방적인 호의는 아닙니다. 원하는 바가 명백히 존재하죠."
[오히려 좋구나. 대가를 지불해야 마음도 편해지는 법이니.]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숲 요정 모두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머니 나무는 일족의 터전을 옮길 의향이 있다.
"요구사항은 간단합니다. 이 대밀림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넉넉한 규모의 남부 땅 일부를 숲 요정 일족의 영역으로 선포하겠습니다. 대신, 문제 하나만 해결해주시면 됩니다."
[정확히 어떤 문제를 겪고 있지?]
"본디 비옥했으나 역병이 도는 바람에 오랜 세월 버려져 망가진 땅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그 일대를 정화해주십시오. 원인은 제가 직접 제거해놓았으니 재발할 일은 없을 겁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잃어버린 힘을 되찾는다면 말이지. 허나 그대도 알다시피 나의 본신을 옮긴다면 예전의 권능을 되찾는 데만 족히 수십 년은 걸릴 터인데, 괜찮겠느냐?]
쉽게 말해 수십 년은 남부 영토를 정화할 수 없다는 뜻.
어머니 나무의 현실적인 물음에 마테우스가 무언가를 꺼냈다.
녹색 기운이 안으로부터 휘몰아치는 구체, '에너지 코어'였다.
"마도공학자라는 자들이 영물의 내단을 모방하여 만든 발명품입니다. 에너지 코어라는 이름의 물건인데, 상당한 양의 힘이 응축되어있죠."
자이언트 웜 키메라를 잡고 얻은 에너지 코어.
어머니 나무의 줄기가 그 구체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안에 응축된 힘의 크기를 가늠했다.
[······경이롭구나. 너희 인간들은 이런 물건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냐?]
그 물음에 마테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대국 한정이긴 하나,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지.
왕국을 재건하다 보면 어차피 손에 넣을 기술력 아니겠는가?
"그런 물건을 지속적으로 제공해드리겠습니다. 허면 숲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수십 년이라는 세월도 유의미하게 단축할 수 있겠죠.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봅니다만."
[좋다.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럼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남부 영토의 정화가 전부인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정착하는 순간부터 숲의 요정들은 모두 왕국의 백성으로 대우받게 될 겁니다. 물론 백성이 되었다고 하여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겠으나, 기본적으로 부여되는 의무들, 예컨대 납세라든지, 유사시 징집이라든지, 기타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합니다."
남들의 눈에는 당연해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숲의 요정으로서는 쉽지 않은 요구였다.
그도 그럴 게, 단 한 번도 국가에 소속된 적이 없거든.
언제나 대밀림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왔으니까.
[우리가 아무리 인간을 불신하고 배척할지언정 은혜까지 외면할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다. 그 사실은 숲의 영원한 귀빈으로 내 앞에 선 하사드 윈저,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누구보다 잘 아는 편이죠."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우리는 우리들에게 찾아온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분명 어려운 결정이 될 거라고 예상했건만.
의외로 마테우스의 요구사항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어머니 나무의 뜻은 곧 숲 요정 일족 전체의 뜻 아니겠는가?
이제 이들이 백성으로 편입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나 마찬가지.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잠시 말문을 멈춘 마테우스가 주위를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곡괭이와 망치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놈들이 어머니 나무에게 이런저런 실험을 자행한 흔적일 터.
"······이대로 떠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다만, 지금 당장 무얼 할 수 있겠느냐?]
"왜 없습니까? 이왕 떠날 거 밥상 한번 제대로 엎어야죠."
그중 곡괭이 한 자루를 골라 집어든 마테우스.
그가 다짜고짜 어머니 나무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까앙! 까앙! 까앙 - !
어머니 나무는 분명 나무다.
단지 비정상적으로 거대할 뿐.
한데 어째서 저런 소리가 나는 걸까?
나무가 아닌 쇳덩이를 내리치는 소리 말이다.
챙그랑!
하물며 쇳덩이를 뛰어넘는다.
곡괭이 날이 먼저 박살 났으니까.
"힘은 약해졌어도."
마테우스가 부러진 곡괭이를 내려다봤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도 빼먹지 않았다.
"튼튼한 건 여전하니까요."
* * *
"으윽······!"
그로부터 얼마 후.
기절했던 감독관 다보스 프라우즈가 의식을 되찾았다.
"쿨럭! 쿨럭!"
어째서 자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까?
침입자와 전투를 벌인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어?"
침착하게 기억을 되짚어보려는 바로 그때였다.
순간 모든 사고회로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멈춰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실로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이, 이게 무슨······."
뭐가 그리 경악스러울까?
눈이 있다면 저 앞을 보아라.
어머니 나무가 솟아난 자리 말이다.
"······설마 땅을 파고든 건가?"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인다.
저 거대한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모조리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도대체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감독관님! 감독관님 계십니까?!"
다보스가 차마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그때.
멀찍이서 병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광산 일대를 순찰하는 병사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이냐?"
"······어, 어?"
분명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허겁지겁 달려왔을 터.
그런 그도 어머니 나무의 변화에 일순간 말문을 잃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아, 아! 그, 그것이, 크, 큰일입니다······!"
"······큰일?"
"지금 광산에, 광산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다보스 프라우즈.
그가 곧바로 병사의 뒤를 따라 광산 구역으로 달려갔다.
"가면서 듣지. 정확히 문제가 뭔가?"
"그, 그것이, 누군가의 기습을 받아 기절을 했사온데, 저, 저뿐만 아니라 광산을 지키던 병사들 모두 말입니다. 허, 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광산에 이상한 나무줄기가 잔뜩······."
"나무······줄기라고?"
나무줄기라는 말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조금 전 어머니 나무의 변화가 뇌리를 스쳐 갔으니까.
"예, 생긴 건 틀림없이 나무줄기입니다. 헌데······."
두 사람의 긴박한 대화가 거기까지 닿을 때쯤.
어느덧 가까워진 광산 구역으로부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집조차 나지 않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곡괭이로는 턱도 없습니다!"
"과, 광산 입구만 막힌 게 아닙니다!"
"벽을 파도, 어디를 파도 줄기와 뿌리가 빼곡합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광부들이 광산 입구를 틀어막은 거대한 나무줄기.
혹은 아직 광산이 뚫리지 않은 벽이나 바닥에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그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감독관 다보스는 마침내 확신을 품었다.
어머니 나무가 어째서 저런 꼴로 변하였는지.
이 땅 아래를 가득 채운 나무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병사, 지금 당장 요정 놈들을······."
"가, 감독관님······!"
아찔함을 느낀 다보스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그때였다.
멀찍이서 또 다른 병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감독관을 찾았다.
"너희들은······?"
달려오는 방향부터 팔뚝을 휘감은 녹색 휘장에 이르기까지.
노예로 전락한 숲의 요정들을 관리하는 병사들이 확실했다.
"마침 잘 왔다. 지금 당장 요정들을 데려와! 한 놈도 빠짐없이······."
"그, 그것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뭐라? 사라져?"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자의 습격에 병사들 모두가 당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침입자뿐만 아니라 요정 놈들까지 전부 말입니다. 간단한 짐까지 챙겨간 흔적으로 봐서는, 이것들이 계획적으로 숲을 도망친 게 분명해 보입니다."
"······."
당했다.
모든 것이 계획된 거다.
침입자부터 어머니 나무의 변화, 그리고 작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이왕 도망치는 김에 다 차린 밥상이나 뒤엎어버리겠다는 심보였을 터.
'지금이라도 추격을 해야······.'
아니, 아니다.
냉정히 판단했을 때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숲에 상주한 인원을 모조리 기절시킨 자들이 저들의 도주를 호위하지 않겠는가?
괜히 허겁지겁 뒤쫓았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는 일.
'그보다는 이 사실을 상아탑과 왕실에 알려 제대로 된 추격대를 보내는 것이 옳다.'
마찬가지로 냉정한 판단력을 뽐내는 다보스였다.
다만, 그 판단력의 결과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이 사실을 탑주님께 어찌 말씀드리지?"
그야말로 엄청난 질책과 징계가 기다리고 있을 터.
국왕보다 수십, 수백 배 더 두려운 존재, 상아탑주.
가히 이드리사 왕국 최정점 권력자의 분노 말이다.
"······."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짐을 느낀 감독관 다보스 프라우즈.
그가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 *
[조금 쉬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숲을 떠난 지 백 일째 되는 무렵.
어머니 나무가 마테우스에게 물었다.
한데 그 목소리가 예전하고는 달랐다.
[숲의 아이들이 지친 것 같구나.]
이전의 목소리가 자애롭고 따스한 여인의 목소리였다면.
지금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는 영락없는 아이와도 같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됩니다."
어째서 목소리가 변했느냐고?
그야 정말 어린아이가 되어버렸으니까.
지금 마테우스의 손에 들린 화분을 보아라.
정확히는 그 화분에 우뚝 솟아난 앙증맞은 '묘목'을.
[정말이냐? 매번 물어볼 때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고······.]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저기 저 앞에 강과 다리가 보이십니까?"
어머니 나무의 본신은 나고 자란 그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워낙 거대할뿐더러 그 뿌리가 대밀림 전역에 깊숙이 박혀있거든.
[보인다. 아름다운 강이구나.]
"저 다리만 건너면 거기부터가 바로 저희 왕국의 남부 영토입니다."
하여 이런 방법을 썼다.
자그마한 묘목을 새로 탄생시켜 정신만 옮겨갔다.
이러니 그녀에게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수밖에.
"아아, 드디어······."
"이제 쉴 수 있는 건가요?"
"더는······ 더는 못가겠습니다. 더는······."
빠른 길은 모두 이드리사 왕국을 통해야만 한다.
그들에게서 도망친 이백 명 남짓 요정들과 함께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길.
결국 느리되 안전한 길만 골라서 왔으니, 살면서 숲을 벗어난 적도, 이리 먼 길을 떠나본 적도, 하물며 어머니의 축복조차 받지 못한 요정들한테는 이런 고행길이 또 없었으리라.
[그럼 이제 내가 나설 차례로군.]
"정확하십니다."
가볍게 맞장구를 쳐준 마테우스가 요정들에게 말했다.
"잠시 여기서 쉬고 있도록."
그러고는 어머니 나무와 함께 둘이서만 다리를 건넜다.
아직 역병의 위험이 도사리는 위험천만한 땅이잖아? 정화의 권능을 지닌 어머니 나무나 강령술로 되살아난 마테우스라면 모를까, 나머지 숲의 요정들은 이쯤에서 대기하는 것이 옳을 터.
"가시죠."
그렇게 남부 영토로 진입하는 순간.
묘목에 피어난 어린 잎사귀가 파르르 떨렸다.
[대지가······ 모든 생기를 잃었구나.]
어머니 나무가 느끼기에도 이곳 남부 영토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려 백여 년을 역병으로 고통받지 않았던가?
[이게 정말 이드리사 왕국이 부린 패악이라고?]
"정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추격을 피해 우회하며 델무아드 왕국의 남부 영토로 이동하는 동안.
마테우스와 어머니 나무는 그동안 밀려있던 대화를 충분히 나눴다.
덕분에 어지간한 이야기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간악한 자들이로구나.]
이제 어머니 나무에게 이드리사 왕국은 철천지원수나 마찬가지다.
숲을 침략한 것으로도 모자라 온갖 패악까지 부린 족속들 아닌가?
[도대체 전쟁이 무엇이기에 이런 짓까지······.]
그래서일까.
어머니 나무의 앳된 목소리에서 증오가 꿈틀거렸다.
온화함, 자비로움, 본디 그녀를 설명하는 단어들이 무색할 만큼 서슬 퍼런 증오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대가?]
"남부에 살던 백성이든, 대밀림에서 온 숲의 요정이든, 델무아드의 백성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알려줄 생각입니다. 시간이 걸릴지언정 반드시 말입니다."
마테우스는 분명 조건을 걸었다.
남부 영토에 정착하는 순간부터 숲의 요정들 역시 델무아드 왕국의 백성이라고.
그 말인즉 숲 요정 일족이 이드리사 왕국에게 당한 수모 또한 델무아드의 치욕이라는 뜻.
"국가는 의무를 다한 백성을 보호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이윽고 마테우스의 발걸음이 남부 영토 어느 한곳에 멈춰 섰다.
정상화가 되었을 때도 인간의 영역으로는 쓰이지 않을 만큼 독립적인 위치.
바로 이곳이 동부 대밀림을 떠난 어머니 나무가 새롭게 뿌리를 내릴 땅이었다.
"위치는 마음에 드십니까?"
[가릴 처지더냐?]
"그렇긴 하네요."
피식 웃은 마테우스가 땅을 파냈다.
그러더니 가장 아래에는 에너지 코어를.
그 위에는 어머니 나무의 묘목을 심었다.
"뭐 더 필요하신 거라도?"
[충분하다. 잠시 물러나있거라.]
"네, 그럼."
어머니 나무의 요청대로 멀찌감치 떨어지는 그때였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마테우스의 눈앞에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분명 조그마한 화분에 들어갈 만큼 얇고 조그마한 묘목이 아니었던가?
한데 그 묘목이 에너지 코어의 양분을 빨아들이며 무서운 기세로 자라났다.
쿠구구구구구구······!
어지간한 성체 나무를 여러 그루 묶어놓은 것만큼 튼튼한 기둥.
하늘을 향하여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줄기와 가지, 푸른 나뭇잎.
메마른 남부 영토의 땅 아래 단단히 박힌 뿌리에 이르기까지.
화아아아 - !
어디 그뿐일까?
만개한 어머니 나무로부터 뿜어진 빛이 일대를 따스하게 휘감았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었던 땅에 어린 새싹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와."
실로 놀라운 광경 앞에서는 마테우스도 별수 없었다.
그저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으며 구경하기 바빴으니까.
'이게 바로 소생의 빛인가.'
이미 죽은 대자연을 되살리는 힘.
혹은 아예 새로운 대자연을 탄생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어머니 나무의 권능, '소생의 빛'이었다.
[지금은 이게 한계인 것 같구나.]
"충분합니다. 이제 시작 아닙니까?"
물론 대밀림의 본신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쪽은 산맥에 가까울 만큼 크고 방대했으니까.
다만 마테우스의 말마따나 이제부터 시작이잖아?
'주기적으로 에너지 코어를 지원해야겠군.'
에너지 코어만 꾸준히 제공한다면.
그것을 양분으로 어머니 나무가 성장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성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터.
어쩌면 남부 전역을 어머니 나무의 성역으로 만들지도 모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돌아가는 즉시 방법을 찾아야겠지.
자체적으로 에너지 코어를 생산하든.
자금을 더 크게 확보하여 수입해오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잠시 몇 가지 방법을 떠올렸던 마테우스.
이내 그가 어머니 나무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가능한 꾸준히 에너지 코어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밖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울 것이며, 이드리사 왕국이 어떤 사술을 부렸는지도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그러니 당분간은 권능을 되찾고 정착하는 일에만 집중해주십시오."
[물론이다. 혼신의 노력을 다 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아, 그리고."
마테우스가 존중을 담아 고개 숙였다.
이제 우호적인 관계를 넘어 한배를 탄 동료.
어머니 나무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함이었다.
"델무아드의 일원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025화. 붉은 까마귀단(1)
어머니 나무와 숲 요정 일족이 남부에 성공적으로 정착한다.
이는 국가적으로 총력을 기울여야할 만큼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과거의 곡창지대를 다시 되살릴 유일한 방안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쩌면 왕국의 남부 영토를 든든하게 지켜줄 최강의 방위전력까지 얻은 셈이니까.'
그렇기에 마테우스는 평소 잘 발휘하지 않던 예의까지 끌어다 쓰며 어머니 나무를 응대했다.
그 결과 남부의 문제를 사실상 해결하였으니, 어찌 귀환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아니하겠는가?
'돌아가는 즉시 처리할 일이 많아졌군. 먼저 요정들의 정착을 지원할 인력부터 뽑아서 파견하고, 에너지 코어를 수급할 방법도 찾아야겠어. 그다음에는 누렁이한테 맡긴 일들을······.'
마테우스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그때였다.
"빵하고 와인, 그리고 올리브유를 나누어준다고······?"
"그렇다니까? 왜 요즘 들어서 왕자 전하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잖아?"
"듣기야 했지. 무슨 부패한 귀족들을 때려잡고 다닌다면서 난리도 아니었다던데."
"그 소문이 진짜였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밀가루에 옥수수, 와인을 뿌리겠어? 심지어 올리브유까지! 돈 없다고 지들 기사단도 해체하니 마니 하는 마당에."
왕성 인근 자그마한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근처 마을에서 모여든 주민이었는데, 일렬로 줄을 서 무언가를 받아가는 모양새였다.
"올리브유라니, 이 귀한 것을······."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와인이야?"
"엄마, 이것 봐요! 옥수수예요! 옥수수!"
과연 마테우스의 짐작이 옳았다.
왕실이 굶주린 백성들에게 밀가루와 옥수수, 보급형 와인, 심지어 올리브유까지 한 병씩 나누어주는 구휼 활동이 왕성 빈민가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진행 중이었으니까.
'나 없다고 놀진 않았나 보네.'
마테우스가 지난 몇 개월간 홀로 고군분투했을 칼버트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역시 군터 일가는 굴려야 제맛이다. 굴리면 굴릴수록 일을 더 잘한다고나 할까?
'레가사, 당분간 네 후손 좀 굴릴게.'
잠시 칼버트의 조상 레가사 군터를 떠올렸던 마테우스.
그가 조용히 배급소 일대를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비켜 이 버러지들아!"
"쯧, 거지같은 새끼들."
"아주 신났구먼?"
지난 생도 그렇고, 이번 생도 그렇고.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다.
오직 왕실과 백성으로 이루어진 훈훈한 구휼이면 참으로 좋겠으나, 이 세상에는 그런 꼴을 눈 뜨고 못 보는, 어떻게든 숟가락을 얹어 한탕 해먹으려는 놈들이 많았거든.
"이봐, 보급관 양반."
"무, 무슨 짓이오? 줄을 서지 않고······."
"마누라 과부로 만들기 싫으면 닥치고 있수."
바로 이곳, 왕성 델루아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된 배급소만 봐도 그렇다.
저마다 오른쪽 어깨에 붉은 까마귀 문신을 새긴 깡패들이 우르르 몰려왔으니까.
"아아, 내 지금부터 딱 한 번만 얘기할 테니 다들 귓구멍 처 열고 잘 들어! 지금부터 이 배급소는 우리 붉은 까마귀단이 전적으로 관리한다! 그러니 오늘 받은 건 그대로들 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받아갈 수 있도록. 이상!"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다.
무슨 깡패한테 구휼 활동을 관리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오늘 배급된 물건들은 내려놓으라니?
"시작해!"
"예! 형님!"
물론 배급소에 모인 백성들이 당황하든 말든.
깡패들은 조직적으로 구휼 품목을 챙기기 시작했다.
"형님들! 이거 아주 노다집니다. 노다지!"
"우리도 슬쩍 챙기죠? 어차피 모를 텐데."
"우리도 남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왕성을 중심으로 시행하는 대대적인 구휼 활동이다.
왕실이 모든 배급소를 관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누구 말마따나 하이에나들은 바로 그 사각지대를 노렸다.
"멍청한 소리들 집어치워! 우리 큰형님께서 얼마나 꼼꼼하신 분인지 몰라서 그딴 헛소리를 씨불이는 거야? 어?! 괜히 뒷주머니 찼다가 걸려서 멱이 따이는 건 나라고!"
이곳 제4 배급소의 모든 물량을 회수하라 명받은 붉은 까마귀단의 십인장 프루크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게, 이놈들은 몰라도 너무 모른다. 큰 형님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 처먹었으면 물건이나 챙겨!"
"······예, 옙, 형님!"
말단 조직원들에게는 십인장 프루크조차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가 저토록 화를 내는데 어느 누가 빼돌리자는 의견을 표하겠는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미리 챙겨온 수레로 물건을 옮겨 실을 수밖에.
"가, 갑자기 와서 이게 다 무슨 소리요?!"
다짜고짜 나타나 북 치고 장구 치는 폭력배들의 모습에 결국 참다못한 백성들이 나섰다.
그들도 굶을 만큼 굶은 몸, 아무리 상대가 붉은 까마귀단이어도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당장 오늘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그냥 지금 주시오! 집에 아이들이 굶고 있소!"
"옳소! 오늘 받은 것만이라도 가져갈 수 있게 해주시오!"
사람들의 원성은 예정된바.
붉은 까마귀단도 예상하고 있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거세게 나올 것임을.
단지 명백한 해결법을 갖고 있을 뿐.
"쯧, 이래서 거지새끼들하고는 말로 하면 안 된다니까?"
십인장 프루크가 항의하는 이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퍼억 - !
가장 앞장서 나선 갈색 머리 청년의 가슴팍을 차버렸다.
명백한 해결법,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유구한 전통이잖아?
하여튼! 구걸밖에! 할 줄 모르는! 거지새끼들!"
퍼억! 퍽! 퍼억!
"일을! 해서! 밥 벌어먹고! 살든가!"
퍽! 퍼억! 퍼억! 퍼억!
본보기를 통한 공포심 조성은 이 업계에서 널리 쓰이는 방법.
바닥에 쓰러진 청년을 수차례 구타한 프루크가 이죽거렸다.
"하여튼 좋게 말하면 들어먹질 않아요.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퉷!"
폭행에 이어 침 뱉기까지.
이 정도면 완벽한 본보기다.
다들 겁에 질려 조용해졌잖아?
"야! 거기! 아까 뭐랬지? 애새끼들이 굶고 계시다고?"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내기할까? 네 애새끼가 굶어 뒈지는 게 빠를지, 네가 여기서 맞아 뒈지는 게 빠를지."
"······죄, 죄, 죄송합니다!"
"야! 거기 노인네!"
"예, 예······?"
"어차피 곧 뒤질 년이 뭘 처먹겠다고 아득바득 염병이야!?"
"······."
"그냥 오늘 죽여줘? 그편이 네 자식새끼들한테도 좋지 않겠어? 다 늙어서 밥벌이도 못 하는 노인네 죽으면 입 하나 덜었다 싶을 거 아니야? 그래, 안 그래? 내 말이 틀려?! 어?!"
"사, 살려주십시오! 나만 기다리는 손주 녀석들이 있소. 제발······!"
이제 누구도, 감히 누구도 이 부조리에 맞설 수 없었다.
다시 나섰다가는 저 깡패 놈들한테 해코지를 당할 테니까.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구먼."
일개 깡패들한테 한마디도 못 하는 배급관과 병사들.
국가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 채 벌벌 떠는 백성들.
바로 이것이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는 왕국.
델무아드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하아아······."
단지 그 익숙한 풍경 속에 낯선 그림 한 폭이 존재할 뿐.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파 속에 섞여있던 은빛 머리칼의 청년.
마테우스가 어느새 악귀 같은 얼굴로 대머리 깡패를 죽일 듯 노려봤다.
지금 당장 누군가를 잡아 족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는 표정이었다.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마테우스가 두들겨 맞던 청년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예?"
그러더니 다짜고짜 사과를 한다.
갑자기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맞기 전에 나섰어야 했는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움직일 순 있지?"
"어······ 예, 가,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저쪽으로 물러나있어. 내 저놈들한테 피해 보상 넉넉히 받아줄 테니까. 오늘 본보기로 나서서 몇 대 맞길 잘했다 싶을 만큼."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나 그럼에도 청년은 마테우스의 말을 따랐다.
두들겨 맞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거든.
"이거 가져가서 마시고."
"이, 이게 뭐죠······?"
"회복 포션이야."
"······포, 포션?"
"비싼 거니까 부담 갖고 마셔."
다소 반대가 되어버린 당부와 함께 청년을 뒤로 보낸 마테우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기행은 깡패들의 분노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너 이 새끼, 우리가 누군 줄 몰라?"
"어디서 이런 미친 새끼가 튀어나왔을까?"
"형님, 더 볼 것도 없습니다. 멱을 따버리죠."
그러나 깡패 놈들이 험상궂은 살기를 내뿜든 말든.
마테우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이언트 웜 카메라와 이드리사 왕국의 고위 마법사를 상대하고 온 몸이다. 그런 그에게 깡패 나부랭이의 살기가 먹히겠는가?
"내 생각이 짧았어."
그저 손에 낀 가죽장갑을 꽉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읊조릴 뿐.
"그동안 너무 숲만 봤던 것 같아."
요절한 후손의 몸에서 다시금 눈을 뜬 이후.
마테우스는 왕국의 재건만을 목표로 움직였다.
그러다보니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나무도 봐줬어야 했는데."
정치라든지, 영토라든지, 재정이라든지, 식량이라든지.
지금까지는 그런 넓은 의미의 숲만 바라보며 달려왔다면.
"가서 잔가지도 좀 치고, 낙엽도 싹 한번 쓸고, 들러붙어서 수액이나 빨아먹는 벌레 놈들도 때려잡고 그래야 나무도 건강해지고, 궁극적으로는 숲 전체가 울창해지는 법이거늘."
당분간은 그 숲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
예컨대 나무, 꽃, 수풀 같은 것들을 보살필 차례일 터.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실천해야겠지?"
역시 폭력은 버러지들한테 휘두를 때가 가장 맛있는 법.
마테우스의 주먹이 실로 오래간만에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쁜 인성과 행실로 차린, 정말이지 먹음직스러운 진수성찬이었다.
* * *
"사, 사여주세여······."
"제바······ 제바 하 버만······."
"차카게······ 차카게 사게흠미다······!"
깡패가 왜 깡패인가?
깡패 짓을 하기에 깡패다.
폭력만이 답이라고 믿는 족속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미개한 놈들.
"살려줄까?"
"부, 부타드임미다······!"
"싫은데?"
짜악!
그런 그들이.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만 해본 놈들이.
난생처음 본인들보다 더 깡패 같은 존재와 마주했다.
폭력이 정답인 수준을 넘어서 폭력으로 정답을 창조하는 존재.
주먹이 먼저 나가는 수준을 넘어 주먹으로 의사소통을 대신하는 존재.
마테우스 윈저라는 이름의 전무후무한 폭력 전문가를.
"다시 묻는다. 살려줄까?"
"사여······ 사여주세여······. 제발······."
"그럼 지금부터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그리 읊조린 마테우스가 프루크의 입 안에 회복 포션 한 병을 구겨 넣었다.
입 안이 다 터져 발음조차 제대로 못 하니 우선은 회복시킬 필요가 있을 터.
"니들이 뭐라고?"
"······예?"
"그 뭐야, 유치한 조직명 있잖아."
"아, 부, 붉은 까마귀단입니다······!"
"그래, 그거, 분명 어디서 들어봤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테우스.
이내 그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니들 혹시 고리대금도 하냐?"
"저희 조직의 주력 사업 중 하나입니다! 예!"
"사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죄, 죄송합니다······!"
이제야 떠올랐다.
남부로 향하기 전, 슈멜처 가문의 가주를 만나고자 향했던 환각굴.
바로 그곳에서 칼버트에게 듣지 않았던가?
'마르코 슈멜처가 돈을 빌린 곳이 붉은 까마귀단이라고.'
고리대금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암흑가 범죄조직들의 주 수입원이니까.
한데 설마하니 구휼 품목까지 빼돌릴 줄이야.
그것도 관료와 내통하여 나라의 고혈을 빨아먹어?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싹 정리할 생각이긴 했다만.'
일컫기를 마도와의 전쟁 시즌 2.
나빠진 치안을 회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이름이 뭐냐?"
"프루크라고 합니다!"
"이런 일을 진두지휘할 정도면 말단은 아니겠고."
"예! 현재 조직 내에서 십인장의 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염병하고 있네. 니들이 무슨 군인이냐?"
"죄, 죄송합니다!"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자 했던 마테우스가 꾹 참고 손을 내렸다.
팰 때 패더라도 나중에 패자. 괜히 지금 팼다가 기절하면 대답을 못 하잖아?
"고리대금도 하고, 구휼 품목도 빼돌리고, 다른 건 또 뭐 있어?"
"무얼 말씀하시는······."
"개짓거리 말이야. 네놈 말로는 주력 사업."
"······아! 그, 그것이, 아무래도 규모가 큰 조직이다 보니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합니다. 그중에서도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사업은 환각제 장사인데, 이거 한 병이면 귀족이고 나발이고······."
"나라 망치는 일은 아주 그냥 다 하는구나?"
"······예,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지요. 하, 하하."
"웃어?"
"죄, 죄송합니다!"
"하아······."
이런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니 민심과 치안이 나쁠 수밖에.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만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본거지가 어디야."
"······예?"
"니들 두목, 어디 있냐고."
"거, 거기까지는 저도 잘······."
"생각보다 맞을 만했나 보네?"
"그, 그게 아니라 정말 모릅니다!"
마테우스의 주먹에 화들짝 놀란 프루크가 머리를 조아리며 호소했다.
"워낙 은밀하게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실제로 뵐 수 있는 건 저희 조직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간부들뿐인데 어찌, 저 같은 십인장 따위가 어찌 본거지를 알겠습니까?"
"끝까지 입을 다무시겠다?"
"아,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럼 그냥 내 손에 죽자."
"제발 믿어주십쇼! 정말 모릅니다! 저희도 대리인을 통해서 명을 받는단 말입니다!"
"흐음."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랜 경험과 통찰력의 결과였다.
"좋아, 믿어줄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
"그럼 이제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봐."
"······사, 상상력 말씀이십니까?"
"그래, 상상력."
마테우스가 프루크의 매끈한 민머리를 괜히 탁, 하고 때리며 읊조렸다.
"내 조직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두목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이냐? 당장 두목님을 찾아뵙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려버린 거야."
"그, 그게 무슨······."
"이런, 세상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십인장 나부랭이한테 이런 시련을!"
"······."
"근데 어쩌겠어? 못 찾으면 죽는 병이라는데."
"······."
"찾아야지 어떻게든. 뒤지기 싫으면."
"······."
"어떻게 찾을래?"
쉽게 말해 뭐라도 찾아보라는 뜻이다.
두목이란 놈에게 접촉할 수 있는 단서를.
"잘 생각해봐. 정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을 리는 없잖아? 하다못해 그놈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간부 놈들에게 부탁한다든지, 너한테 명령을 전달한다는 대리인 놈들을 통한다든지."
"그, 그것이······ 그러니까······."
"아이고 죽겠다! 병마가 사람 잡네!"
"자,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한시름 놓은 줄 알았던 프루크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결국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단 얘기를 달리 표현했을 뿐이잖아?
'뭐라도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죽어. 이 미친놈은 진짜 나를 죽일 생각이야!'
그걸 어찌 아느냐고?
저놈 눈빛을 한 번 봐라.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눈빛을.
장담하는데 사람 한두 번 족쳐본 눈빛이 아니다.
"아이고 나 죽는다!"
"······처, 청옥 상단!"
"청옥 상단?"
이번에도 뭔가 익숙하다.
이걸 어디서 들어봤더라?
"오래전에 동방 대륙에서 넘어와 자리를 잡은 상단입니다!"
"아, 혹시 그 델루아의 사파이어였던가? 아무튼 그런 이름의 기루를 운영한다던······."
"예! 예! 맞습니다! 바로 그 상단의 대행수가 큰 형님과 가까운 관계라 소문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저희 조직에서 생산하는 환각제의 국내 유통은 전부 그 청옥 상단에서 담당하고요!"
델루아의 사파이어라면 마테우스고 잘 아는 편이다.
처음 중앙 귀족 세력의 기강을 잡고자 들이닥친 기루잖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지. 테이블 위에 환각제가 나뒹굴고 있었어.'
붉은 까마귀단, 청옥 상단, 델루아의 사파이어, 환각제.
슬슬 느낌이 온다. 앞뒤가 딱딱 들어맞기 시작하잖아?
"배급관."
생각을 끝낸 마테우스가 아까부터 가만히 지켜보던 배급관을 호출했다.
그러더니 품에서 델무아드 왕실을 상징하는 황금빛 호패를 꺼내 보여줬다.
"허, 허억······! 저, 저, 전하······?"
배급관이 크게 놀라며 조아리자, 곁에 있던 병사들과 백성들은 물론 깡패 놈들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에서 전하 소리를 들을 만한 인물은 오직 한 명밖에 없을 터.
한데 전하는 무슨 놈의 전하란 말인가?
"녹을 먹는 관료와 왕국군에 소속된 병사들이 저런 벌레만도 못한 깡패 놈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 응당 지켜야 할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모습, 잘 봤다."
"저, 전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그래도 너희를 벌하지는 않으마. 그만큼 치안과 신뢰가 무너졌단 뜻이고, 그걸 바로잡지 못한 왕실의 잘못도 크니까. 대신 지금부터는 너희들의 책무를 똑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말에 배급관이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신속히 병사들에게 임무를 배분하기 시작했다.
"너희 다섯은 지금 즉시 죄인들을 압송해라! 왕실이 시행하는 구휼활동에 훼방을 놓은 대역죄인이니만큼 각별히 주의하여 압송하도록! 그리고 나머지 셋은 나와 함께 배급을 재개한다!"
갑자기 나타나 모든 상황을 종결시킨 왕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니, 더 밉보이기 싫은 배급관의 목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026화. 붉은 까마귀단(2)
"한잔 따라봐."
"예, 전하······!"
"아니, 술 말고 홍차."
"호, 홍차 받으시옵소서!"
기루를 운영하는 청옥 상단의 대행수 윌리엄이 마담 엘리아한테 눈짓으로 명했다.
다짜고짜 들이닥친 이 망나니, 아니, 왕자가 원하는 대로 홍차를 따라 올리라는 뜻.
하지만.
"말귀 못 알아먹어?"
"어인 말씀······."
"내가 누구한테 따르라고 했냐?"
"······소,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델루아의 사파이어는 단순한 기루가 아니다.
왕국 최고위층을 상대하며 꾸준히 여러 정보를 수집하는.
하여 기루의 모체인 상단을 키워나가는 일종의 정보 수집처다.
그렇기에 대행수 윌리엄은 마테우스의 행보를 잘 알고 있었다.
'뭐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혔다간 끝장이다.'
귀족 서열 2위 안톤 크리스티를 때려죽인 자다.
그럼에도 귀족 사회가 불만조차 터뜨리지 못한다.
일개 상단이 어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뜻.
그러니 어쩌겠는가? 납작 엎드려 꼬리나 흔들밖에.
'차라리 잘되었어. 이참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아.'
최근 왕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무엇인가?
단언컨대 왕자의 변화와 행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다.
즉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나쁠 건 없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증명을 해야만 한다.
왕자의 본격적인 행보에 자신들이 쓸모가 있음을.
무조건 적대하기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점을.
쪼르르르······
대행수 윌리엄이 다소곳한 자세로 홍차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연신 마테우스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도대체 여기는 왜 또 온 걸까? 목적이 무엇일까?
우선 그것부터 파악해야 증명도 할 수 있는 법.
"이름."
"예, 전하. 청옥 상단 대행수 윌리엄이라고 하옵니다."
"청옥이 정확히 무슨 뜻이야?"
"동방 대륙의 단어로, 이곳의 사파이어를 뜻하옵니다."
"너네 상단 뿌리가 동방 대륙이라며?"
"백오십 년 전에 건너와 뿌리를 내린 상단이옵니다."
"백오십 년 전이라. 그럼 내가 모를 만도 하네."
"······."
무슨 헛소리야?
백오십 년 전이랑 당신이 모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마음 같아서는 그리 묻고 싶었으나 꾹 참는 대행수 윌리엄이었다.
"나 오늘 여기 처음 아닌 건 알지?"
"예, 전하. 일전에 방문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땐 미안했어. 평화롭게 들어오려고 했는데, 여기 경호원들이 좀 거칠더라고."
"감히 전하를 몰라뵙고 크나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소인을 포함하여 전원 죽음으로 갚아도 모자랄 대죄였지요. 혹 저희를 단죄하러 오신 것이라면 그 죗값, 달게 받을 준비가······."
"그런 말 하는 놈들 치고 진짜 준비된 놈 없더라."
"······."
그리 비아냥거린 마테우스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뜸을 들이면 들일수록 초초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포커페이스도 유지할 줄 모르는 상단 대행수라니.
안 봐도 알겠다. 그간 어떻게 장사를 해왔는지.
"대행수."
"예, 전하."
"그간 편하게 장사했을 거야. 힘 있는 귀족 놈들한테 간하고 쓸개까지 모조리 갖다 바친 대가로 이런저런 편의를 받았겠지. 사업이든, 무역이든, 그밖에 무엇이든."
"······송구하옵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이왕 장사치로 사는 거 뼛속까지 장사치가 되어야겠지. 그래야 이 상단에 딸린 아랫것들, 그리고 그 아랫것들의 가족까지 전부 다 먹여 살릴 테니까."
일국의 왕이든, 상단의 대행수든.
휘하에 딸린 식구들 굶기는 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도의적인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계산적으로도 그게 맞거든.
굶주린 이들의 배신처럼 빈번하고 무서운 것이 또 없다.
"근데 그냥 궁금해서."
"혹 무엇이 궁금하신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전에 왔을 때 보니까 아주 재미나게 노는 것 같더라고."
"······예?"
"우리 귀족 나리들 말이야. 왕자만 쏙 빼놓고 지들끼리, 쯧."
이야기가 거기까지 닿았을 때.
윌리엄은 비로소 왕자의 말뜻을 알아챘다.
'하? 어린놈이 벌써부터?'
귀족들끼리만 재미나게 노는 것 같단다.
왕자만 쏙 빼놓았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너무 쉽잖아?
"마담."
"예, 대행수."
"세팅 다시 하지. 오직 전하만을 위한 자리로."
의문이 풀린 윌리엄이 마담 엘디아에게 명령했다.
그러고는 마테우스를 바라보며 야심차게 미소 지었다.
"소인이 너무 눈치가 없었사옵니다."
"역시 그렇지?"
"예, 벌써 두 번이나 저희 기루에 행차해주셨건만, 거기 담겨있는 전하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이거야말로 대역죄가 아니겠사옵니까? 송구하옵니다. 전하!"
대행수 윌리엄은 확실했다.
이 왕자가 원하는 것이 '접대'라고.
이 왕국의 실세라는 귀족들이 즐겨왔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공을 들인 향락의 장.
"이제라도 알아채서 다행이네. 그럼 이제 기대해도 되는 거야?"
"예, 전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번 기회에 소인이 저지른 죄를 모두 씻어보겠나이다!"
그로부터 잠시 후.
마담 엘디아의 진두지휘 아래 VVIP룸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기루 최고의 미녀들, 기루에서 가장 비싼 술과 요리, 그리고 약병에 이르기까지.
과연 마테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귀족들끼리 재미나게 놀던 그때 그 세팅 그대로였다.
"이건 뭐냐?"
"황홀하기 그지없는 묘약입지요. 한번 드셔보시옵소서."
"묘약, 그러니까 환각제다?"
"예, 전하. 저희 상단이 왕국 내 독점 판매권을 얻은······."
"만드는 놈들은 따로 있단 뜻이군."
"······아, 예. 그렇사온데, 어, 어찌 그러시는지요?"
대화의 흐름에서 어딘가 묘함을 느낀 윌리엄이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판국에 환각제의 출처가 왜 궁금해?
"흐음."
하나 대행수 윌리엄이 어딘가 모를 수상함을 느끼든 말든.
마테우스는 그저 테이블에 놓인 환각제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행수야."
"마, 말씀하시옵소서."
"네 입으로 말했지?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예, 전하. 분명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대역죄는 즉참이야. 불만 없는 걸로 안다?"
태연히 읊조리며 왼쪽 주먹을 불끈 쥐는 마테우스.
그런 왕자의 달라진 태도에 윌리엄이 넙죽 엎드렸다.
"저, 저, 전하! 어, 어찌, 어찌 이러시옵니까?"
"왕자한테 술과 여자, 심지어 환각제까지 들이밀어?"
"소인은 그저 왕자 전하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너 이게 지금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냐?"
"······예?"
접대가 그냥 접대지, 거기에 무슨 뜻이 또 있어?
그런 대행수의 멍청한 표정에 마테우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접대로 편하게 장사했어도 그렇지. 이렇게나 감이 없어서야.
"쯧."
혀를 찬 마테우스가 넙죽 엎드린 윌리엄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감을 못 잡는 대행수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감히 왕실의 후궁 자리와 후사를 노려?"
"그, 그게 무슨······?"
"왕자는 술과 약을 먹여서 반 폐인으로 만들고?"
"······?"
"국정에 개입하시겠다? 일개 장사치 따위가?"
"어, 어인 말씀을······."
그 순간.
좀처럼 돌아가지 않았던 대행수 윌리엄의 머리가 비로소 팽팽하게 돌아갔다.
술, 여자, 환각제, 그리고 왕실의 후궁 자리와 후사, 반 폐인, 국정개입까지.
왕자가 언급한 모든 말의 편린이 하나로 모여 어마어마한 뜻을 이루었거든.
"히, 히익······!"
대행수 윌리엄이 기함을 토하며 다시 한번 조아렸다.
이거 아무래도 왕자가 펼쳐놓은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저, 저, 전하! 소인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의도가······."
"물론 아니겠지. 내가 설마 그걸 모를까?"
"하, 하오면 어찌······."
"어찌는 뭘 어찌야? 협박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혀, 협박 말씀이십니까?"
"그래, 협박."
그리 대답한 마테우스가 윌리엄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 지금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변명이 아니라 선택이야."
"선택······ 말씀이시옵니까?"
"불경죄에 반역, 거기다 불법 약물 취급까지 엮여서 즉결처분 당할지."
"그, 그건······!"
"아니면 약간의 정보 제공과 함께 벌금 정도로 끝낼지."
애당초 그것이 목적일 터.
약간의 정보 제공.
"정확히 어떤 정보를 제공해드리면 되겠사옵니까?"
"붉은 까마귀단에 대해서 니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
"······!"
그 말에 대행수 윌리엄이 흠칫 놀랐다.
왕자가 어찌 환각제의 출처를 아는 걸까?
하물며 그들의 꼬리를 밟는 중이라고?
"근거지가 어디인지, 두목이란 놈은 누구인지,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기타 등등 아는 것이 있다면 빼먹지 말고 얘기해. 답변이 마음에 들면 그간의 죗값은 돈으로 받도록 하지."
"그, 그것이······ 그러니까······ 부, 붉은 까마귀단은······."
"······전하, 대단히 송구하오나, 여기서부터는 소인이 말씀을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대행수 윌리엄이 우물쭈물하는 바로 그 순간.
일련의 흐름을 지켜보던 마담 엘디아가 나섰다.
"무슨 자격으로?"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소인, 델루아의 사파이어를 운영하는 루주임과 더불어 대행수의 하나뿐인 혈육으로 미미하게나마 상단 운영을 돕고 있는 부행수 엘디아라고 하옵니다."
"혈육이라면, 남매?"
"예, 그렇사옵니다."
마담이 아닌 부행수.
하물며 대행수의 친남매.
사뭇 신선한 소개에 마테우스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암만 그래도 대행수란 놈이 왜 이렇게까지 어벙하나 했더니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대행수의 멍청함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저 엘디아란 여인 역시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거든.
"왜, 저번에도 혼자 칼 꺼내 들었잖아? 오히려 실세라는 귀족 놈들이 자네 뒤로 숨었고, 그때부터 평범한 기녀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어. 칼 뽑아든 자세부터 오래 수련한 티가 나더라."
"전하의 무공에 비하면 아직 어린아이 수준이지요."
"어린 아이씩이나? 무슨 소드 마이스터라도 돼?"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갓난아기면 될까요?"
"흠, 장담하긴 어려운데, 일단 그런 셈 치자고."
"과분한 칭찬 감사히 받겠나이다. 전하."
겸손함의 겸 자도 모르는 마테우스.
그런 그를 물 흐르듯 상대하는 엘디아.
마테우스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대행수라는 멍청이보다야 훨씬 더.
"자, 그럼 이제 선수도 교체했겠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붉은 까마귀단과 관련된.
심지어 그 범죄조직의 기밀에 관하여 논하는 자리다.
저 멍청한 대행수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을 터.
"한번 읊어봐."
"예, 전하."
하여 나섰다.
청옥 상단의 실질적인 운영자.
마담으로서 고위관료들을 구워삶던 여인.
엘디아라는 이름의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가.
"이왕 장사치로 사는 거 뼛속까지 장사치가 되어라, 다른 건 몰라도 상단에 딸린 식구들 배 굶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전하께서 저희 대행수님과 청옥 상단에게 해주신 조언이옵니다."
서두는 인용이었다.
마테우스가 대행수에게 했던 말.
딱히 조언까진 아니었다만, 그리 받아들여도 상관은 없다.
"하여 소인 감히 불경스럽게도 전하 앞에서 계산이란 것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야만 상단에 딸린 식구들을 건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옵니다. 만약 이 일로 소인의 목을 치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그녀의 다소 파격적인 선언에 발언권을 빼앗겼던 대행수 윌리엄이 기겁했다.
살살 달래면서 심기를 건들지 않아도 모자랄 판에 뭐라고?
면전에서 대놓고 계산을 해보았다?
"계속해."
그러나 대행수의 우려와 달리.
마테우스는 그 당돌한 선언을 받아줬다.
"셈 똑바로 했나 보게."
대행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역시나 저쪽보단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출신과 신분, 성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거든.
"예, 하오면······."
깊이 조아린 부행수 엘디아가 잠시 말문을 멈췄다.
내뱉을 말을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고르기 위함이었다.
"전하께서는 왕국의 실세라고 여겨졌던 칼버트 군터 공을 휘하에 두셨습니다. 또 소드 마이스터 아서 크리스티 경을 왕실 기사단에 입단시키면서 전력강화를 이루셨지요. 뿐만 아니라 안톤 크리스티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크리스티 가문의 가주 자리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많은 것들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변화의 구심점이 무엇인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중앙 귀족 서열 1, 2위 가문을 휘하에 두신 전하께서는 그 힘을 바탕으로 부패한 귀족들이 쌓아 올린 사유재산을 애국성금이란 이름 아래 국고로 환수하셨습니다."
바로 눈앞에 앉아있는 왕자다.
저 왕자가 바로 폭풍의 눈이다.
"이후 몇 달간의 공백기가 있으셨지만, 분명 또 무언가를 준비 중에 있으시겠지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철저한 계획과 준비성, 그리고 행동력이 필요한 법이니 말이옵니다."
엘디아가 보기에 왕자의 행보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추락한 왕권의 강화, 재정 확보, 온갖 불의한 것들의 해소.
쉽게 말해 이 무너져가는 왕국을 바로 세워 재건하는 것.
"그런 전하께서 이제는 환각제의 출처를 원하십니다. 나라에 해악이 되는 족속들을 처단할 계획이시겠지요. 하온데 전하, 이미 아시겠지만 그 붉은 까마귀단이란 집단은 평범한 범죄조직이 아닙니다. 왕국 내 암흑가를 통째로 집어삼켜 몸집을 키운 거대 조직이지요."
그녀의 말에 마테우스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지금이나 환각제 장사는 암흑가에서도 핵심적인 돈벌이거든.
한데 그 돈줄을 손에 콱 쥐고 있는 조직이다? 그들이 곧 암흑가의 왕이리라.
"그렇기에 만약 예전의 왕실이었다면, 저희 상단은 철저한 계산에 따라 전하의 요청을 거부했을 것이옵니다. 왕실이 보유한 병사와 기사단만으로는 그들을 처단할 수 없다는 것이 소인의 계산이었으니 말이옵니다. 물론 제 살기 바쁜 귀족들 역시 도와줄 리가 만무했지요."
괜히 정보를 제공했다가 왕실의 소탕 작전이 실패한다면?
그 역풍을 고스란히 맞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청옥 상단일 터.
"하오나 작금의 왕실이라면, 그리고 그 처단의 주체가 여기 계신 전하시라면 계산이 크게 달라지옵니다. 제아무리 거대 조직일지언정 국가 단위의 칼춤을 견딜 순 없을 테니 말이옵니다."
그러나 작금의 왕실이 나선다면.
군터 가문과 크리스티 가문을 휘하에 둔.
거기다 엄청난 기연까지 손에 넣은 왕자가 나선다면?
"하여 소인은, 그리고 저희 청옥 상단은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자 하옵니다. 비단 이번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행하실 모든 행보를 말이지요."
당장 요구한 정보는 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행할 모든 계획에 도움이 되고 싶다.
"그것이 불의한 것들과 거래를 해온 저희 상단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 아니겠사옵니까?"
그녀의 말에 마테우스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 바로 사냥이다.
이 왕국을 좀먹는 온갖 버러지들을 발본색원하는 것.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는 상단 또한 예외는 아닐 터.
"살려달란 말을 예쁘게 하는 재주가 있네?"
만약 여기서 끝까지 계산이네 뭐네 하며 말장난을 했다면?
마테우스는 가차 없이 청옥 상단부터 박살을 내버렸을 거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제 파악을 못 한다는 증거니까.
"명줄이 짧진 않겠어."
하지만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주제 파악을 할 줄 아는 자였다.
이런 자가 부행수라면, 아직은 고쳐 쓸 만한 범주에 있다는 뜻.
"지금 당장 쓸모가 있음을 증명한다면 말이지."
물론 고쳐 쓰는 것도 실제 쓸모가 있을 때의 문제.
과연 청옥 상단의 정보가 그만한 가치를 지녔을까?
"전하께서 말씀하신 붉은 까마귀단은 현재 왕성 암흑가에서 시작되는 모든 돈벌이를 독식 중인 범죄 조직으로, 왼쪽 어깨에 붉은 까마귀 문신을 새긴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 그럴 것 같다.
환각제에, 고리대금에, 구휼 물자까지 빼돌리는.
표현 그대로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을 담그는 놈들이잖아?
"전무후무한 세력을 자랑하는 범죄 조직답게 그 우두머리 또한 은밀히 활동하기로 유명한 자입니다. 저희 상단과의 거래에도 얼굴 한 번 비춘 적이 없을 만큼 조심스럽지요."
"여기 대행수하고 가까운 관계라던데?"
"부풀려진 소문입니다. 아마 국내에서는 줄곧 저희 상단하고만 거래를 해와서 그런 소문이 도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정작 저희는 그자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사옵니다."
우두머리의 정체는 불명.
가깝다는 소문 역시 낭설.
마테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가까워지고 있어."
"가까워진다 하시면······?"
"너희 상단 문 닫는 날이."
"······."
더 제공할 정보가 없다면 청옥 상단과의 동행은 여기서 끝이다.
일말 쓰임새조차 없는 놈들이니, 불의한 것들과 함께 처단할 수밖에.
"전하, 조금만 더 소인의 말을 들어주시옵소서. 분명 만족감을 느끼실 것이옵니다."
"확실해?"
"자신있사옵니다."
"그럼 어디 계속 지껄여봐."
마지막 기회.
부행수 엘디아가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저희 청옥 상단은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와 거래하지 않습니다. 특히 붉은 까마귀단의 우두머리처럼 정체를 숨긴 채 거래하기를 원하는 자라면 더더욱 거래처로서 신용이 떨어지지요."
그것은 장사치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입장이다.
"다만 그 신뢰와 신용은 전적으로 저희가 판단하기에, 그간 뿌려놓은 모든 것들을 거두어들이며 아주 오랫동안 붉은 까마귀단을, 그리고 그 우두머리의 꼬리를 밟았습니다."
굳이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상관없다.
알아서 파악해놓으면 언제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저희가 파악한 붉은 까마귀단의 수장은 칼 머독이라는 남성으로, 본디 아이언폴 제국에서 환각제를 밀매하던 업자였습니다. 하지만 제국은 불법 약물 조제와 유통에 과할 만큼 민감한지라 좀처럼 사업을 확장할 수 없었지요. 하여 칼 머독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환각제 사업의 새로운 거점으로 이곳 델무아드 왕국을 선택했습니다."
어째서 칼 머독이 델무아드 왕국으로 넘어왔을까?
간단한 문제다, 제국에 비해 모든 면이 허술하니까.
치안도, 국력도, 높으신 분들의 마인드까지 전부.
쉽게 말해서 범죄자가 살기 좋은 왕국이란 뜻.
"제국에서 배워온 노하우로 조직을 빠르게 키워낸 그는 완벽한 은신처와 위장신분,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환각초를 은밀히 키울 환경이 필요했고, 나름의 조사 끝에 답을 찾았습니다."
본격적인 환각제 사업에 필요한 모든 요소.
칼 머독의 고민은 깊었고, 마침내 '빛'을 만났다.
"그는 현재······."
027화. 붉은 까마귀단(3)
"운명에 맞서는 자, 그분의 보살핌을 받으리라."
왕성 델루아 인근에 웅장히 자리 잡은 대규모 신전.
바로 그곳에서 어떤 젊은 성직자가 말씀을 이어 나갔다.
"그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자, 심판 받으리라."
가장 규모가 큰 종교 단체를 꼽으라면 대륙인 중 십중팔구는 모두 '여명회'를 언급한다.
빛의 인도자를 모시는 교단으로, 대륙인 중 절반 이상이 여명회의 신도라고 볼 수 있을 터.
"빛의 인도자시여. 오늘도 당신의 신실한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하니, 부디 이 세상에 핍박받는 모든 이들, 가진 자들의 폭정에 눈물 흘리는 모든 이들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하니 그 세력이.
여명회라는 종교단체가 지닌 힘이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각국 주요 도시에 여명회 신전을 두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모든 신전을 일종의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선포하면서 신전이 위치한 국가마저 함부로 개입하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그들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를 이겨낼 수 있도록 빛으로 인도해주시옵소서."
다만 그런 지도부의 행보와 달리 성직자들은.
정확히는 여명회에 소속되어 각 지역으로 파견된 현역 성직자들은 대체로 훌륭했다.
성직자로서 엄격한 수련을 거친 사제들이니만큼 검소함과 겸손함이 남달랐으니까.
"그들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나아갈 수 있도록 빛으로 보살펴주시옵소서."
이곳 델무아드 왕국의 수도, 델루아의 여명회 신전으로 파견된 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교로 돌아간 사제 대신 파견을 나온 젊은 성직자인데, 고작 3년 만에 왕성 델루아 내 모든 여명회 신도들 사이에서 '훌륭한 성직자의 표본'으로 칭송받을 만큼 훌륭한 청년이었다.
"당신의 아들딸이 간곡히 청하나이다."
말씀을 끝낸 사제가 두꺼운 교서를 내려놓았다.
금일 저녁 기도 일정이 모두 끝났다는 신호였다.
"오늘도 바쁘신 와중에 어려운 발걸음 해주신 형제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각자의 가정과 터전으로 돌아가시어 마땅한 소임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물론 그 길에는, 우리 신도 여러분께서 딛는 모든 곳에는 따스한 빛이 함께할 것입니다. 빛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빛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빛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마무리 기도와 더불어.
신전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신도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 사제 역시 신전 앞까지 나와 떠나는 신도들을 배웅했다.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사제님."
"별말씀을. 항상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 좀 챙겨 드시면서 하세요. 하루에 예배를 여섯 번이나······."
"아이고, 형제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다 정말 쓰러지실 것 같아서 그래요."
"사제라면 응당 기도를 통해서 극복해야지요."
"아이 참, 그래도······."
고맙단 인사는 기본에 값비싼 포션까지 쥐여주려는 신도들.
그야말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뒤로한 채.
끼이이이이······ 쿵!
마침내 모든 신도를 배웅한 젊은 사제가 신전의 백색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단상에 놓여있던 등잔과 함께 예배당을 가로질러 안쪽까지 들어갔다.
뚜벅, 뚜벅, 뚜벅
젊은 사제가 멈춰선 곳은 이곳 신전에서 가장 깊숙한 곳.
지하까지 내려와서도 한참을 더 걸어온 개인 기도실이었다.
빛을 모시는 성직자로서 더욱 깊고 신실한 기도가 필요한 걸까?
철컥!
그러나 젊은 사제의 목적은 기도가 아니었다.
지하 기도실 깊숙한 곳 액자 뒤에 숨겨져 있던 문.
은빛 열쇠로 그 문을 열어야만 통할 수 있는 비밀통로.
바로 그 너머가 젊은 사제 칼 머독의 목적지였으니까.
"오셨습니까, 큰형님!"
또 다른 기도실이라기에는 다소.
아니, 과하리만큼 널따란 지하실.
"말씀하신 대로 산하 조직 대표자들을 소집했습니다. 이제 회의를 진행하셔도······."
어디 그뿐일까?
젊은 사제 칼 머독을 큰 형님이라 일컫는 자들.
깡패라는 말이 누구보다 어울릴 만큼 험상궂은 사내들이 필요 이상으로 널따란 지하실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으니, 더 이상 이곳을 여명회의 신전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려움이 따랐다.
"형제님."
한편.
이토록 이질적인 공간이 누구보다 익숙해 보이는 젊은 사제 칼 머독.
그가 자신에게 큰 형님이라 부르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쨍그랑!
대뜸 탁자에 놓여있던 와인병으로 사내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호칭 똑바로 안 하십니까?"
그 잔혹한 손놀림은 한 번으로 끝날 생각이 없었다.
손에 잡히는 유리병이 존재하는 한 멈추지 않았으니까.
"어딜 감히."
쨍그랑!
"빛의 신전에서."
쨍그랑!
"불경스럽게."
쨍그랑!
손속에 사정? 거리낌? 망설임?
그딴 건 날 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가 죽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이것이 젊은 사제, 혹은 '붉은 까마귀단의 수장' 칼 머독의 본성이었다.
"끄, 끄으으······."
"치우세요. 보기 흉합니다."
"······예, 예! 사제님!"
다른 조직원들이 널브러진 반송장을 치우는 동안.
손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 칼 머독이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죽은 사제의 얼굴과 흑마법으로 만든 '인피면구'를 벗어던지기 위함이었다.
촤아아악 - !
깔끔하게 벗겨진 인피면구 아래로 여명회 사제가 아닌, 붉은 까마귀단의 수장 칼 머독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청년이 아닌 중년이었으며, 얼굴 곳곳이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사제님,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부하들이 쏜살처럼 다가와 인피면구를 건네받았다.
뿐만 아니라 환각초를 말아서 피우는 담배에 성냥불까지 붙여줬다.
순백의 사제복 대신 화려한 가운으로 갈아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읍, 하아아······."
환각초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칼 머독.
그가 몽롱한 표정으로 지하실을 넓게 훑었다.
한쪽에는 각 산하 조직 대표자들이 모인 탁자가.
또 한쪽에는 환각초를 빻는 기초 작업장이 보였다.
"어째 애들 상태가 영 별로입니다?"
"예, 사제님. 곧 갈아치울 예정입니다."
그중 기초 작업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 칼 머독이 말했다.
환각제를 조제하는 건 연금술사지만, 그 바탕이 될 기초 약제는 단순 노동이 만든다.
이 널따란 지하실의 절반가량을 차지한 작업장은 바로 그 단순 노동을 위한 자리였다.
"고장 난 아이들은 그냥 묻지 말고 반드시 소각하세요."
문제는 그 기초 작업장에서 환각초를 빻고 끓이는 노동자였다.
단 한 명의 어른도 없이, 많아 봐야 12살 미만의 어린아이뿐이었으니까.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눈빛과 표정으로 환각초를 빻고, 끓이며, 휘젓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환각초의 독성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누더기처럼 변한 복면이 전부였다.
"괜히 매장하겠답시고 모아뒀다가 전염병 돌면 골치 아픕니다."
어째서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를 쓰는 걸까?
간단하다. 모든 방면에서 가성비가 참 뛰어나거든.
성인보다 적게 먹고, 순종적이며, 길바닥에 넘쳐난다.
몸뚱이 역시 조그마하며 쓰임을 다한 뒤 처리하기도 쉽다.
"예, 사제님.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와 소모품처럼 쓰이는 아이들.
독성에 쓰러져도 누구 하나 신경써주지 않는 아이들.
칼 머독의 환각제 왕국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영토 각지에 숨겨놓은 환각초 농장까지 전부.
치이이이익······!
당부를 끝낸 칼 머독이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비벼 껐다.
"아, 반갑습니다. 형제님들."
그러고는 각 산하 조직 대표자들이 모인 테이블의 상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먼저 바쁘신 분들을 오가라 해서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예배가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알았으면 좀 여유롭게 모셨을 텐데, 원래 이 기도라는 게 알 수가 없거든요. 빛의 말씀을 따르다 보면 오늘처럼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는 거라서, 모쪼록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예의를 지키는 말, 그렇지 못한 말투와 행동.
칼 머독 특유의 발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러분을 소집한 이유는 몇 가지 안건 때문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왕실과 귀족 간에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중입니다. 때문에 물건의 수요도 덩달아 확 죽어버린 상황이죠. 땅이 조금만 흔들려도 겁먹은 개새끼처럼 꼬리를 말고 숨는 게 귀족 놈들 습성이니까요."
왕자가 변했다.
어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중앙 귀족 서열 1, 2위 가문을 휘하에 넣었다.
이는 사실상 중앙 귀족 가문 전체가 왕실, 정확히는 왕자의 개가 되었다는 뜻.
당분간 자중해도 모자랄 판에 환각제나 흡입하며 취해있을 귀족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 형제님들께서 박살이 난 매출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시고자 고리대금, 청부살인, 구휼 물자 빼돌리기 등 곳곳에서 고생들이 참 말이 아닙니다만, 우리 조직은 결국 환각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 사업이 괜히 핵심이겠습니까?"
돈벌이의 규모가 다르다.
그 맛을 본 이상 자잘한 수금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터.
"이 고난을 타개하려면 새로운 인도가 필요하기에, 나 칼 머독은 여명회의 사제로서 매일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계시를 받았죠. 꿈을 꿨는데, 인도자께서 수많은 백성들을 따스한 빛으로 감싸 안아주시는 꿈이었습니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참으로 다양하더군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헛소리다.
여명회의 사제도 아닐뿐더러 기도 역시 올린 적 없으니까.
인도자께서 만백성을 따스한 빛으로 감싸 안는 꿈? 방금 지어낸 이야기다.
그럼에도 칼 머독이 주절주절 지껄이는 까닭? 간단하다. 어떻게든 팔아치우고 싶거든.
"빛의 인도자께서 깨달음을 주신 겁니다. 이제 평범한 백성에게도 빛의 은혜로움을 선서할 차례임을, 실로 많은 이들의 기도가 있어야 우리 앞에 직면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음을."
여태까지는 그랬다.
환각제의 주된 수요층은 귀족과 부자였다.
박리다매보다는 고급화 전략이 더 유효했거든.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모두에게 팔아먹는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발걸음이니만큼 저 혼자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해서, 여기 계신 장로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앞에 놓인 서류를 봐주시겠습니까?"
서류의 내용은 간단했다.
각 산하 조직에서 처분할 환각제의 할당량이 적혀있었으니까.
"살펴보시고, 이의 있으면 말씀하세요."
사실상 강요나 다를 바 없는 상황.
그럼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 없었다.
여기 모인 각 조직 대표자들은 이미 봤거든.
칼 머독이 암흑가를 단숨에 집어삼킨 방식을.
그 과정에서 흘린 피와 떨어져나간 머리들을.
"말씀들이 없으시네요. 그럼 모두 받아들이신 걸로 알고······."
철저한 피와 죽음, 공포를 통한 지배.
칼 머독은 언제나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지금부터는 여기 계신 형제님들의 경험과 판단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겠습니다. 그러니 각자 선호하는 방식이나 노하우가 있으시다면 이 기회에 마음껏 발휘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은 거창하나, 결국 가서 팔아치우라는 거다.
어떻게든,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빛의 은총이 참으로 충만한 왕국 아닙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몰락하기 시작한 왕국.
치안을 유지할 힘도, 그럴 의지조차 없는 왕국.
부패한 귀족들이 뇌물을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왕국.
워낙 빈민이 들끓어 주워다 쓰고 버리기 참 쉬운 왕국.
필요하다면 굳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왕국.
"이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애국심이······."
무슨 짓을 해도 될 만큼 적당히 망가진 나라.
델무아드 왕국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칼 머독.
그가 흡족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그때였다.
쾅! 쾅! 쾅!
누군가 지하실 바깥에서 문을 두들겼다.
아니, 이쯤 되면 대형 망치로 후려치는 수준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넓은 지하실이 쩌렁쩌렁 울릴 리가.
"시몬 형제님?"
"······예, 사제님."
어느새 뱀처럼 날카로워진 칼 머독의 눈매.
그가 턱짓으로 부하 한 명에게 명령했다.
지하실 밖 불청객을 확인해보라는 뜻.
스르르릉······
머독의 명령에 문 앞에서 검을 뽑아든 조직원 시몬.
그가 지하실의 튼튼한 철문을 슬쩍 열어보려는 순간.
콰직!
다시 말하는데, 이곳 지하실의 문은 쇳덩이 그 자체다.
애당초 신전 지하를 빙자한 칼 머독의 은신처였으니까.
한데 그 육중한 철문을 누군가의 주먹이 꿰뚫고 나왔다.
뿐일까? 조직원 시몬의 목덜미까지 정확하게 낚아챘다.
"커, 커컥, 커허헉······!"
쇳덩이 문도 부수는 주먹이 목을 조른다.
마음만 먹으면 목뼈를 부러뜨리고도 남을 터.
그럼에도 손아귀의 주인은 살생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살생을 저지르지 않았다.
"야, 지금 내 손에 모가지 잡힌 놈."
"커, 커허······!"
"이름이 뭐냐?"
"케켁······!"
"그래, 케켁아.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그게 이름일 리가 만무하건만.
손아귀의 주인은 제멋대로였다.
"이 문 통째로 쇳덩이지?"
"케, 케헥······."
"근데 내가 이 문을 부수면 어떻게 되겠니?"
"사, 살려, 살려······."
"우리 케켁이는 그대로 깔려 뒈지는 거야."
"끄으으으으······!
"그러니까 얌전히 문이나 열어. 참작해줄 테니까."
도대체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여기서 죽어봐야 개죽음밖에 더 돼?
어찌 되었든 명줄부터 붙잡아야겠지.
철컥!
그리 판단한 시몬이 잠금장치를 풀었다.
목이 졸린 채로, 어떻게든 손을 뻗어서.
끼이이이이······!
그러자 약속대로 목 조른 손에 힘부터 뺀 불청객이 지하실 문을 열었다.
대륙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은빛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곱상한 얼굴.
열린 문 너머 불청객은 바로 그런 모습의 청년, 마테우스 윈저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구시기에 함부로······."
"넌 잠깐 닥치고 있어봐."
그는 지하실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한곳으로 나아갔다.
말을 걸어오는 칼 머독 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문을 열자마자 눈에 딱 들어왔거든.
"······."
마치 소모품처럼 부려지고 있는 어린 백성들이.
환각초의 독성에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누구······세요······?"
갑자기 나타나 성큼성큼 다가왔기 때문일까?
또 그 낯선 어른의 외모가 너무 화려하기 때문일까?
아이들의 죽어있던 눈동자에 아주 잠깐 생기가 맴돌았다.
"이제 그만해도 돼."
"······네?"
"내가 왔으니까."
아이 한 명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마테우스 윈저.
그가 이번에는 칼 머독과 조무래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름 칼 머독."
그러더니 다짜고짜 칼 머독의 이름을 호명했다.
물론 그 목소리는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이는 알 수 없음······이라고 적혀있는데, 얼굴 견적 보니 대충 사십 대 중반. 직업 성직자 행세를 하고 있으나 실상은 깡패 두목에 약장수. 국적 아이언폴 제국 출신으로 추정."
마테우스가 품에서 꺼낸 서류를 줄줄이 외었다.
이곳으로 향하기 전에 손수 정리해놓은 필기였다.
"사기, 폭행, 살인, 뇌물, 절도, 약탈, 불법 약물 조제 등 온갖 종류의 범죄를 숨 쉬듯 저지르며 왕국 치안에 균열을 일으켰으니, 단두대에서 모가지가 일백 번 고쳐 날아가도 모자람."
거기까지 읽은 마테우스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칼 머독의 면전으로 흩뿌렸다.
그러고는 양손에 착용한 검은색 가죽 장갑을 꽉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 얘기 맞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이 판국에 그 대사가 맞아?"
"······."
틀린 말은 아니다.
모르쇠로 일관하기에는 보이는 것이 너무 많다.
예컨대 험상궂은 부하들과 산하 조직 두목들이라든지.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벗어던진 인피면구와 사제복이라든지.
그 대신 걸쳐 입은 황금빛 가운과 입에 꼬나문 환각초 담배라든지.
그리고 무엇보다 지하실 한편에서 환각초를 가공 중인 아이들까지.
"개짓거리도 적당히 하든가."
여기까지 오면서.
마테우스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절대 흥분하지 않겠노라고, 상황을 신중히 살핀 뒤 행동하겠노라고.
청옥 상단의 말만 듣고 여명회 신전을 급습했으니 신중할 필요가 있노라고.
"이러면 내가 니들을 무슨 수로 적당히 패냐?"
하지만 그 다짐은 지하실 문을 열자마자 깔끔하게 증발해버렸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 근데 아이들까지 소모품으로 쓴다?
일국의 왕족으로서 이걸 무슨 수로 참아?
"명분이 없잖아."
일방적인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더 말할 가치가 없었으니까.
이런 놈들한테는 그저······.
"살살 때릴 명분이."
매가 약이다.
028화. 붉은 까마귀단(4)
쿠당탕 - !
그저 따귀 한 대 맞았을 뿐이다.
무기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하다못해 주먹도 아닌 뺨따귀 말이다.
한데 어째서 뭐가 자꾸만 날아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까?
"사, 살려······."
"주겠냐?"
짜악!
간단하다.
그 뺨을 날리는 존재가 다름 아닌 마테우스 윈저.
상아탑 창고에서 챙겨온 아티팩트급 영약 덕분에 강해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진 그였으니까.
'이, 이런 미친······.'
아무리 머릿수로 밀어붙여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차례차례 나가떨어지는 부하들, 그리고 산하 조직의 두목들.
그들 모두 이 바닥에서 나름 한가락 하는 자들임에도 속수무책이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버린 칼 머독.
그가 허리춤으로부터 단검 한 쌍을 뽑아 들었다.
"······누가 보냈지?"
"차차 알게 될 거야."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냐?"
"스스로 인생을 한번 돌아봐봐."
"뭐?"
"그만큼 쓰레기처럼 살았으면 준비를 했어야지."
"준비······?"
"벌 받을 준비 말이야."
짜악!
이번에는 한 방으로 끝내지 않았다.
주먹이 약해서도, 맷집이 좋아서도 아니다.
그냥 특별히 더 괴롭히고 싶었다. 이 쓰레기만도 못한 놈을.
"이, 이 새끼······!"
짜악! 짜악!
"죽여버리겠······!"
짜악! 짜악! 짜악!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칼 머독을 공손하게 만드는데 뺨따귀 다섯 대면 충분했다.
무릎은 꿇은 지 오래요, 야심차게 뽑아 들었던 단검 역시 저 멀리 내동댕이쳤다.
"뭘 기다려? 난 이제 시작인데."
"아뇨! 아닙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쓰읍, 아닌 것 같은데."
"한 번만 믿어주십쇼!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예!"
"그래?"
놈의 빠른 태세 전환에 잠시 고민했던 마테우스.
이내 그가 챙겨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 정체는 백지 몇 장과 깃펜, 그리고 잉크였다.
"그럼 적어."
"······예?"
"적으라고."
"무, 무엇을······?"
"각지에 숨겨놓은 은신처, 창고, 사업장의 위치, 조직원 명단, 기타 등등 네놈들하고 연관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빠짐없이 기록해. 너를 죽일지 살릴지는 내용 봐서 정할 테니까."
쉽게 말해서 붉은 까마귀단의 모든 정보를 넘기라는 거다.
"······아, 예, 알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
일단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겠지.
'침착해라. 칼 머독.'
칼 머독이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쓸모없는 정보부터 조금씩, 차례차례.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딴마음을 품었다.
'아직 빠져나갈 구멍은 있어.'
오늘처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재산을 여러 곳에 숨겨놓았다.
그것만 다 챙겨도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터. 그러니 우선 도망치자.
'오늘의 수모를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누가 보냈는지, 자신을 어찌 아는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그 모든 것들은 이 위기를 벗어나면 자연히 알아낼 수 있을 터.
'저, 저기······."
마음을 굳힌 칼 머독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감시하는 마테우스에게 말했다.
"조직원이 워낙 많다 보니 명부가 따로 있습니다. 회의실 쪽 어딘가에 보관 중 텐데, 그걸 좀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혹 제가 허튼짓을 할까 우려되신다면 귀하께서 직접 가져오셔도······."
"갖고 와."
됐다.
이쯤 되면 반쯤 성공했다.
급히 세운 도주 계획의 절반 말이다.
"예, 그, 그럼 잠시 실례를······."
칼 머독이 조금 전까지 회의를 진행했던 탁자 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마테우스의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는가 싶더니.
"에잇!"
그대로 방향을 틀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지하실의 출입구 쪽이 아니었다.
'어차피 저런 괴물 놈을 달리기로 따돌린 순 없다. 그렇다면······!'
나름 회의실이랍시고 꾸며놓은 공간의 반대쪽.
환각초를 가공하는 작업대가 놈의 목적지였다.
"가까이 오지 마!"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인질이다.
마침 적당한 인질이 근처에 있었다.
"이 꼬맹이 모가지 따이는 꼴 보기 싫으면!"
소모품처럼 쓰이던 아이들.
그중 삐쩍 마른 여자아이를 낚아챈 칼 머독이 소리쳤다.
숨겨놓았던 단검으로 목덜미를 겨누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네놈이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 꼬맹이는 뒤지는 거야! 알아먹어?!"
칼 머독은 똑똑히 봤다.
저 괴물 같은 놈이 지하실로 들어오자마자 무엇을 했는지.
곧장 이 꼬맹이들 쪽으로 다가와 사과부터 하지 않았던가?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충분히 도박을 걸어볼 만했다.
"······."
역시나.
괴물처럼 날뛰던 놈이 바로 얌전해졌다.
이쯤 되면 성공적인 도박이 아닐 수 없으리라.
"좋아, 잘 생각했어. 계속 그대로만 있으라고."
그리 읊조리며 살금살금.
천천히 지하실을 빠져나가는 칼 머독.
물론 인질로 낚아챈 꼬맹이 역시 함께였다.
"살려주세요. 제발······."
"오, 당연하지. 내 너는 특별히 손모가지만 잘라주마."
"······!"
"그래야 저놈이 날 쫓지 않고 너를 보살피지 않겠느냐?"
겁에 질린 아이의 귓가에 더러운 말을 쏟아내며.
끼이이이이······.
이윽고 신전 바깥으로 통하는 커다란 백색 문까지 열었다.
이제 미끼만 제대로 풀어놓으면 붙잡힐 일은 없을 터.
하지만.
"동작 그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붙잡히지 않는 미래 따윈 칼 머독의 앞날에 존재하지 않았다.
"붉은 까마귀단의 두목 칼 머독은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하늘 높이 펄럭이는 델무아드 왕국의 상징기.
그 아래 집결하여 신전을 포위 중인 삼백의 왕국군.
나아가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왕실 기사단에 이르기까지.
"이, 이게 무슨······?"
모든 희망이 처참하게 짓밟혔기 때문일까?
칼 머독의 눈빛에서 생기라는 것이 사라졌다.
그저 멍한 눈으로 포위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
"개구멍으로 튀는 성의라도 보이든가."
그런 그의 등 뒤로부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남아있는 아이들과 함께 성큼성큼 걸어오는 청년.
칼 머독의 눈에는 가히 천재지변처럼 보이는 존재, 마테우스였다.
"왜 이렇게 정직해? 법도 안 지키는 놈이."
"오, 오지 마! 가까이 오면 이 꼬맹이는······."
되도 않는 협박.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끄, 끄아아아악!"
어느새 다가온 마테우스가 칼 머독의 단검 쥔 손을 낚아챘으니까.
어디 그뿐일까? 인대가 찢어질 만큼 무자비하게 꺾어버리기도 했다.
"가까이 오면 뭐 어쩔 건데?"
"이,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쯧, 깡패 두목이라는 놈이 엄살은."
빠악!
손목 다음은 뒤통수 차례.
마테우스가 칼 머독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죽지는 않되, 혼절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하게.
"이런······ 제기랄······."
털썩!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지는 칼 머독을 뒤로한 채.
마테우스가 이곳을 급습하기에 앞서 미리 대기시켜놓은 기사단에게, 그중에서도 왕실 기사단장 미하일 볼트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단장."
"하명하시옵소서."
"앞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지?"
"왕국을 좀먹는 벌레들을 사냥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그 시작이야. 알아서 마무리할 수 있겠어?"
알아서 마무리해라.
붉은 까마귀단의 두목 칼 머독부터 저 안에 기절해있는 산하 조직 두목들까지.
그야말로 모조리 잡아다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본색원하라는 뜻.
"실망시켜드리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모조리······."
"모조리?"
"······벌레들을 모조리 소탕하겠습니다!"
"에이, 잡아 족친다고 했어야 만점인데."
"송구하옵니다."
"아니야. 단장이 묵직한 맛도 있어야지."
비속어에 약한 단장을 다독여준 마테우스.
그가 이번에는 인질로 잡혔던 소녀한테 물었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냐?"
"······제 이름이요?"
그 물음에 잠시 고민했던 소녀가 입술을 뗐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구해주신 착한 사람이잖아?
"······아닌가?"
"뭐?"
"아, 아뇨! 제 이름은······ 소피아, 소피아라고 해요."
"그래, 소피아, 하필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 고생이 많구나."
농담처럼 들리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다.
망국의 백성들은 고통받기 마련이니까.
망가진 정치, 망가진 치안, 망가진 민도.
이리저리 치이기 좋은 구조 아니겠는가?
"미안하다. 내가 대신 사과하마."
무려 사과를 하겠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테우스가 직접.
일말의 가벼움조차 느껴지지 않는 진중한 목소리로.
그래서일까? 이를 지켜보던 기사단과 병사들 전원이 크게 놀랐다.
특히나 죽기 직전까지 맞아본 아서 크리스티의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가족들이 보고 싶지?"
"······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
"금방 만날 수 있게 해주마."
"정말이요······?"
"그래, 그러니까."
물론 남들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든 말든.
마테우스는 소녀의 머리까지 쓰다듬어주며 읊조렸다.
"집에 가자."
평소와는 사뭇 다른.
따스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 * *
[소속 : 붉은 까마귀단]
[이름 : 칼 머독]
[저희는 깡패입니다.]
[극악무도한 패악질을 일삼아왔습니다.]
[심판받기에 앞서 사죄하고자 합니다.]
[부디 저희에게 돌을 던져주십시오.]
정확히 언제부터.
아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이 왜, 도대체 왜 이런 푯말을 목에 걸고 있는 걸까?
"이 더러운 깡패 새끼들!"
"니들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돌을 던집시다! 그냥 여기서 죽입시다!"
"옳소! 우리 모두 저놈들한테 돌을 던집시다!"
어디 그뿐일까?
죄수복을 입은 채, 또 두 손 두 발이 꽁꽁 묶인 채.
부하였던 놈들과 함께 왕성 한복판을 맨발로 걷는 중이다.
욕지거리를 내뱉는 구경꾼과 수시로 날아드는 돌멩이는 덤이었다.
"천벌을 받아라! 이 깡패 놈들아!"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칼 머독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당연히 피가 흘렀고, 그 충격과 출혈의 여파로 걷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죽기 싫으면 일어나."
앞장선 병사들은 백성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 맞은 깡패들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쿨럭! 쿨럭!"
그날.
신전 지하실을 급습했던 은발 머리 불청객.
눈 깜짝할 사이에 칼 머독 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전 내 모든 조직원과 산하 조직 두목들을 때려눕힌 자.
맨주먹으로 철문을 부수던 그 괴물이 글쎄 왕자였더란다.
"할 짓이······ 할 짓이 그렇게 없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왕자가 왜 직접 깡패를 족치러 다녀?
"도대체 왜······ 나한테 왜······!"
"뭐라는 거야? 계속 걷기나 해."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쓰읍, 이 깡패 새끼가 근데!"
빠악!
결국 뒤통수까지 얻어맞고 나서야.
칼 머독은 비로소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겨나갔다.
그러자 쇠사슬로 이어진 수백 명의 인원도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붉은 까마귀단에 소속되었던, 혹은 산하 조직에 몸을 담았던 조직원으로, 마테우스가 이번 작전을 통하여 남김없이 잡아들인 델무아드 왕국 암흑가의 벌레들이었다.
윗대가리를 잡아 족친 이상 그 떨거지들을 소탕하는 건 일도 아니었거든.
"아휴, 난 그냥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러게 말이야. 저 깡패 놈들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벌벌 떨며 살았어?"
"이게 나라지. 이게 나라야. 내 피 같은 세금을 뜯어갔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암흑가를 청소했다.
온갖 방법과 공포 분위기로 백성들을 괴롭혀온.
왕국 치안에 크나큰 재앙이었던 뒷골목 깡패들을.
그래서일까? 백성들의 박수와 환호가 하늘을 찔렀다.
백 년 묵은 체증이 쑥, 하고 내려가는 기분이었으니까.
"전하께서 달라지셨다더니만, 그게 진짜였나?"
"이 사람, 아직도 그 소문을 못 들었나 보네?"
"소문? 갑자기 무슨 소문 타령이야?"
"저놈들, 왕자 전하께서 혼자 다 때려잡으신 거 몰라?"
"전하께서 혼자?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이런 답답한 양반을 봤나? 저 맨 앞에 걷는 깡패 놈 보이지?"
"보이지. 저놈이 그거잖아? 그 뭐냐, 붉은 까마귀단인가 하는······."
"그래, 그래. 이 왕국 암흑가를 주름잡았던 붉은 까마귀단의 보스! 저 깡패가 글쎄 여명회 신전에 숨어있었다니까? 몇 년 전에 새로 부임한 젊은 사제 행세까지 하면서 말이야!"
"아, 그건 들었지. 무슨 흑마법으로 사제 얼굴 가죽을 벗겨서 뒤집어썼다지?"
"그럼 그 신전이 뭐겠어? 깡패 놈들 은신처였을 거 아냐?"
"아마도······ 그렇겠지?"
"거길 전하께서 혼자! 혈혈단신으로 들어가셨다는 거야!"
"혼자?"
"그렇다니까? 전하께서 직접 거기 숨어있던 깡패 놈들 모조리 잡아 족치시고! 잡아 족친 깡패 놈들 통해서 여기저기 숨어있는 잔당들까지 싹~ 다 찾아내신 게지."
하물며 깡패들을 때려잡은 장본인이 이 왕국의 유일한 왕자란다.
가뜩이나 유약한데 지병까지 타고났다던, 바로 그 책벌레 왕자 말이다.
"그, 그럼 소문이 다 사실이라는 게야······?"
"그럴 가능성이 높지. 난 거의 백 퍼센트라고 봐."
왕자가 왕실 비전의 무예서를 얻었다는 소문.
그 기연을 바탕으로 엄청난 경지에 올랐다는 소문.
소드 마이스터 아서 크리스티를 갖고 놀았다는 소문.
왕국의 실세 칼버트 군터가 왕자의 개가 되었다는 소문.
기타 등등 비현실적인 소문들이 모조리 다 사실이었다고?
"어찌 그런······."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먼."
"믿기 힘들어도 믿어야지. 눈에 다 보이잖아?"
그래, 맞는 말이다.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믿어야지.
증거가 눈앞에 버젓이 나타났잖아?
"정말 뭔가 달라지긴 달라지는 건가? 이 답도 없는 나라가······"
"힘을 얻자마자 귀족부터 단속하고 치안을 바로잡았어. 구휼도 시작하셨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무얼 하시는지는 확실하잖아? 그게 아니고서야 존귀하신 분께서 왜 사서 고생을 해?"
"으음,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긴 해."
"왕자 전하께서 정말······."
아까부터 구경꾼들 사이에서 여론을 조성해나가는 중년인.
마침 오늘 비번이었던 왕실 근위병 메디슨이 신나게 떠들었다.
호사가답게 술술 나오는 것이 흡사 물 만난 물고기와도 같았다.
"자자, 우리 이러지들 말고 만세 삼창이나 외치세.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나?"
얼마 전.
왕실 금고 앞에서 왕자 전하와 마주했을 때.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징계를 받기는커녕 포상휴가가 내려졌던 그날.
메디슨은 다짐했다. 비록 알아주시지 않을지언정 전하께 충성을 바치겠노라고.
보잘것없는 재능이나마 살려 왕자 전하의 치세를 물심양면 돕겠노라고.
"왕자 전하 만세!"
그런 다짐이 있었기 때문일까?
왕실 근위병 메디슨의 만세로부터 짙은 호소력이 느껴졌다.
주변에 모여든 백성들이 너도나도 만세삼창을 부르짖을 만큼.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어느새 양팔을 올리고 있을 만큼.
"왕자 전하 만만세!"
029화. 대청소(1)
쪼르르르······.
언제나 그렇듯.
마테우스는 홍차를 즐겼다.
행수 남매 앞에서, 청옥 상단이 들여온 최상급 홍차를.
다만 오늘은 기루 델루아의 사파이어가 아닌 왕궁이라는 점.
그리고 행수 남매가 굉장히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
"놀랐지? 갑자기 왕궁으로 불러서."
"아니옵니다. 소인들에게는 그저 영광일 뿐이지요."
"이해 좀 해줘. 왕자가 기루에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이상하잖아."
"이해가 필요한 일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명령만 내려주시옵소서."
"저번부터 느끼지만 혓바닥이 예사롭지 않아. 이쯤 되면 거의 누렁이 2호기인데?"
누렁이 2호기.
엘디아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
그럼에도 그녀는 결코 되묻지 않았다.
개인적인 의문은 철저히 궁금증에서 끝낼 뿐.
명을 따르는 자로서 완벽에 가까운 태도였다.
"아, 칼버트 군터 얘기야. 그놈이 혓바닥 놀림만큼은 소드 마이스터 급이거든."
"전하의 충신이자 명재상과 비견을 해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명재상은 개뿔, 나라 말아먹다 운 좋게 구사일생한 놈이지."
진심으로 매스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던 마테우스.
그의 눈길이 이번에는 행수 남매의 착장으로 향했다.
"근데 뭘 그렇게 힘을 줬어? 무슨 왕실 사교회라도 나온 줄 알았네."
청옥 상단의 대행수 윌리엄과 부행수 엘디아.
갑작스럽게 왕궁으로 호출된 그들의 지난밤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사치로 살면서 왕궁의 호출을 받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당연히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그들 딴에는 합당한 예우를 갖춰야만 했다.
예컨대 어느 귀족에게도 꿀리지 않는 착장이라든지, 왕궁에서 갖춰야 할 예법이라든지.
"일개 장사치가 존귀하신 분께서 기거하시는 왕궁으로 발을 들이는 일 아니겠사옵니까? 흔치 않은 일이니만큼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니, 보시기에 미흡하더라도 어여삐 여겨주시옵소서."
"으음, 아무리 봐도 누렁이 2호기야. 어디 가서 엘디아 군터라고 해도 믿겠어."
나름 유능하면서도 간신배의 혀를 갖춘 유형.
누가 보면 칼버트 군터와 친남매인 줄 알겠다.
"과찬이시옵니다."
"글쎄 과찬 아니라니까?"
"송구하옵니다."
"······하."
마테우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본인이 칭찬으로 듣겠다는데 뭐 어째?
그러려니 해야지. 긍정적이라서 좋긴 하네.
"그래 뭐, 아무튼 간에 부행수."
"예, 전하. 하문하시옵소서."
"덕분에 잘 때려잡았어. 운이 좀 따르기도 했고."
운이 좋기는 했다.
마침 산하 조직 두목들이 예쁘게 모여 있었잖아?
덕분에 아낀 시간만 몇 주에서 몇 달은 족히 넘을 터.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물론 깡패 놈들 한 번 청소한다고 이 세상이 꽃밭으로 변하지는 않겠지. 근데 그놈들도 결국 인간이라 눈치라는 게 있거든. 아, 지금 까불고 다녔다간 모가지가 날아가겠구나, 당분간은 조용히 살아야겠다 싶을 거야. 실제로 보이는 족족 잡아 족칠 예정이기도 하고."
"백성들이 체감하기로는 평화가 시작된 느낌이겠군요."
"그게 민생안정의 시작이지. 중요한 부분이야."
솔직하게 말하면 반쯤 눈속임이나 마찬가지다.
델무아드 왕국은 여전히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니까.
다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임은 확실하리라.
"전하의 치세에 도움이 되었다니 그저 기쁠 따름이옵니다."
"그 대가로 당분간 살려는 주기로 했어. 우리 청옥 상단 식구들."
마테우스와 청옥 상단의 첫 번째 협업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들에게 제공받은 정보로 왕국 암흑가를 깔끔하게 청소했거든.
따라서 환각제 판매 혐의 처벌은 약속대로 당분간 유예다.
살려는 주겠다는 말이 결코 말장난 따위가 아니라는 뜻.
"분에 넘치는 보상, 감사히 받겠나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부행수 엘디아가 진심으로 화답했다.
물론 '당분간'이란 조건이 붙은 만큼 계속 증명을 해나가야겠지.
청옥 상단이 왕자의 치세와 행보에 쓰임새가 있다는 사실을.
"앞으로도 전하께서 명하시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물심양면으로······."
"아, 그래서 말인데, 당장 해줄 일이 하나 더 있어."
"하문하시옵소서. 청옥 상단이 돕겠나이다."
"내가 구출한 아이들."
지금 왕궁에는 수백 명의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모두 붉은 까마귀단의 환각제 작업장과 농장 등 여러 곳으로부터 구출해온, 영문도 모른 채 납치당하여 소모품처럼 부려지던 아이들이었다.
"일단 부모부터 찾아줘. 고아거나 연고가 없으면 다시 왕궁으로 보내고."
"부모와의 상봉은 물론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나이다."
마테우스는 그 아이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결국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서 그런 곤욕을 겪었잖아?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마땅한 책임을 져야겠지.
"지켜본다? 뭣 모르는 애들이라고 대충 하기만 해봐."
"저희가 어찌 전하께서 내리신 명령을 가벼이 여기겠습니까?"
"부행수 쪽은 걱정이 없는데, 저기 저 썩은 동태 눈깔이 문제야."
마테우스가 턱짓으로 대행수 윌리엄을 가리켰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발언권이라는 것을 아예 빼앗겨버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왕자와 부행수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뿐.
그마저도 대행수라는 타이틀 덕분이지, 아니었으면 진즉 쫓겨났으리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나이다."
"그래, 평민이든 귀족이든 다 내 백성이잖아? 그 아이들도 내 백성이고, 너희 둘도 내 백성이지. 그러니까 결국 나 빼고 너희 모두는 형제라는 뜻이야. 형제끼리는 서로를 아껴야겠지?"
"예, 전하.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래, 말귀 알아먹었으면 가봐."
"예, 전하. 하오면······."
자리에서 일어난 엘디아가 예법에 따라 허리를 숙이자 대행수 역시 엉거주춤 따라 했다.
아무리 봐도 동생 쪽이 더 대행수 자리에 어울려 보였으나, 저들도 저들만의 사정이 있을 터.
"아, 그리고."
"더 시키실 일이라도?"
"이거나 들고 다녀."
마테우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던져준 물건의 정체.
그것은 바로 이 왕국의 왕실, 윈저 가문의 손님임을 말해주는 증표였다.
"이 귀한 물건을 어찌······?"
"가는 길에 왕궁이나 구경하라고."
"······왕궁 구경 말씀이시옵니까?"
"다 보여."
"예······?"
"눈 반짝반짝거리는 거."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다 보인다.
처음 와보는 왕궁이 무척 신기한, 그리고 설레는 표정이.
"아무 근위병이나 붙잡고 보여주면서 안내 좀 해달라고 해."
"아무 근위병이나······ 말씀이시옵니까?"
"팁은 알아서 잘 챙겨주고. 돈 많잖아?"
"······."
발언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놀랍다.
세상에 이런 왕자가 또 어디 있을까?
"왜, 싫어? 싫으면 그냥 두고 가든가."
"아, 아니옵니다! 저희 같은 장사치가 또 언제 고귀한 분들께서 기거하시는 왕궁을 구경할 수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서 내려주신 배려와 은혜,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감사히 받겠나이다."
속내를 훤히 꿰뚫려서일까?
표정은 숨길지언정 붉어진 얼굴까지는 숨기지 못한.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누렁이 2호기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 엘디아.
검고 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녀가 건네받은 증표를 꼭 쥐며 인사했다.
"이제 진짜 가봐."
"예, 전하.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그렇게 청옥 상단의 부행수와 사실상 허수아비에 가까웠던 대행수가 떠난 집무실.
한데도 마테우스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왜냐? 왕자를 알현하려는 신하가 꽤 많았으니까.
새로운 실세에게 아첨하려는 파리 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가 나라답게 변하기 시작하였음을 느낀 충직한 신하들 역시 국정운영을 상의하고자 벌떼처럼 몰려들었거든.
"전하, 재상 칼버트 군터 공께서 알현을 청하나이다."
대행수 남매의 다음 차례는 칼버트 군터.
이래저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였다.
"들어오라고 해."
오자마자 맡긴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것들의 현황보고를 위한 알현일 터.
"소신 칼버트 군터, 전하를 뵈옵니다."
"와서 앉아. 홍차 향이 아주 좋아."
마테우스가 그런 칼버트에게 홍차 한 잔을 내어줬다.
청옥 상단에서 수레째로 가져다준 최고급 홍차였다.
"시킨 일은?"
"예, 우선 남부로 이주한 숲 요정 일족과 꾸준히 소통하며 그들의 정착을 도와줄 상급 관료 한 명과 중급 관료 세 명을 남부 복원 선발대와 함께 내려보냈습니다."
"잘했네. 슈멜처 가문의 그 약쟁이 상태는 어때?"
"나날이 호전되고 있습니다. 중독자 치료에 능한 의원의 진단으로 미루어보건대, 추후 남부 복원에 추가 인력을 지원할 때쯤에는 책임자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예상되옵니다."
어머니 나무와 약속한 숲 요정 일족과의 소통 및 정착 지원.
그리고 환각굴에서 끄집어낸 영주 마르코 슈멜처의 치료까지.
하나 칼버트 군터가 진행 중인 업무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구휼 활동 중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관해서는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신이 세세한 사안까지 두루 살피지 못하여 그런 불상사가 벌어졌으니······."
"됐고, 일의 진행만 얘기해."
"······예, 전하. 우선 왕성을 중심으로 한 38개 마을과 인근의 롭슨 영지, 르바나 영지, 아작시오 영지까지는 예정된 구휼 활동이 완료되었습니다. 또한 그 밖의 영지들 역시 처음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왕실의 지원을 약속하자 구휼 활동에 적극 참여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지원만 받고 입 씻는 놈들 있으면 얘기해. 내가 직접 갈 테니까."
"전하께서 행차하실 일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나이다."
"그래, 잘 좀 해봐."
은근히 눈치를 주는 말투.
마테우스가 질문을 이어갔다.
"에너지 코어 문제는?"
"사실 그 부분에 관하여 전하께 고견을 구하고자 하옵니다."
"읊어봐."
"예, 결론부터 말씀을 올리자면 매입을 통한 수급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에너지 코어라는 기술이 아직 개발 단계이고, 차세대 전쟁 무기의 핵심이 될 자원이니만큼 각국에서 철저히 관리하는 품목입니다. 민간에 개방되지 않았으니 구매경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더군요."
마테우스가 우연한 기회에 얻었을 뿐.
에너지 코어는 아직 개발이 한창인 신기술이다.
각국에서도 기밀에 부치거늘 어찌 돈으로 사겠는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겠군."
"문제는 기술자입니다. 그만한 실력을 가진 마도공학자들은 모두 삼국이 휩쓸어간 상황인지라, 몰래 빼오지 않는 한 지금 당장 에너지 코어 개발을 착수하는 것도 무리가 따릅니다."
"해서, 당장은 불가능하다? 겨우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유일한 방법이 한 가지 있사온데, 가능성이 희박한지라······."
"뭔데? 어차피 말할 거 꾸물거리지 말고 얘기해."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말하지 않을 요량이었으면 가능성을 운운하지도 않았을 터.
"······이 대륙에는 아직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나 그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마도공학자들이 존재하옵니다. 단지, 그들 모두 저희와 같은 인간이 아닐 뿐이지요."
"혹시 노바톨리스의 노움 일족을 말하는 거냐?"
"정확하십니다."
'노바톨리스'는 왕국 서부에 존재하는 노움 종족의 자유도시다.
마법의 창시자가 용이라면, 마도공학의 시작은 노움이란 말이 있을 만큼 특화된 종족 말이다.
"물론 그들은 인간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종족입니다. 실제로 3대 강대국이 온갖 대우와 조건을 걸어가며 회유했음에도 전혀 흔들린 적이 없을 만큼 확고하지요."
그런 그들을 마도공학자로 초빙한다면 델무아드 왕국의 뒤처진 기술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을 터. 다만 이 대륙 내 모든 이종족이 그러하듯, 노움 역시 인간을 경계한다.
"그래서, 네놈이 구상한 방법은?"
"우선 접촉부터 해봐야겠지요."
"무작정 찾아가보겠다?"
"그래야 저들이 무얼 원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옵니다."
옳은 말이다.
일단 부딪혀봐야 물꼬도 트이는 법.
"한번 해봐. 변동사항 있을 때마다 보고하고."
"예, 전하. 엄선한 인재를 파견하도록 하겠나이다."
마테우스도 노움 일족은 잘 알지 못한다.
숲 요정 일족과 달리 접점 자체가 없다는 뜻.
신중하게 접근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할 얘기는 이게 전부야?"
"······예? 아, 예. 그렇사옵니다."
"그럼 나가서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해."
그 말에 칼버트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아, 그리고."
"하문하시옵소서."
"고생했다. 이래저래."
"고생······ 말씀이시옵니까?"
고생했다는 격려가 그리도 놀라웠을까?
칼버트의 반응이 어째 심상치가 않았다.
"뭐야? 눈깔을 왜 그렇게 떠?"
"아, 아니옵니다. 전하께 격려를 받게 될 줄은 차마 예상치 못한 바람에······."
"이거 말하는 꼬락서니 좀 봐라? 야, 내가 무슨 인격파탄자인 줄 알아?"
"예······ 예? 아, 아뇨,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아니었어?
진심 아니었다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참아낸 칼버트 군터.
그가 상반신을 깊숙이 숙이며 다시 한번 인사했다.
"소신은 이만 돌아가서 남은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겠나이다. 그럼."
더 있다간 어디로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
거의 도망치듯 알현실을 빠져나가는 칼버트였으니.
"······하, 말세구먼."
그 모습에 마테우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기강을 잡든가 해야지.
"전하, 델루아 제1 수용소장 왈더 카이파크 경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물론 나중의 일.
지금은 업무를 봐야 한다.
대행수 남매와 칼버트 군터에 이은 세 번째 알현 요청자.
그는 이 왕국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거대 감옥.
이른바 '델루아 제1 수용소'를 관장하는 수용소장 왈더 카이파크였다.
"들어와."
마테우스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용소장 왈더 카이파크가 집무실 안쪽으로 넘어왔다.
그는 기사 출신 수용소장이란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다부지고 듬직한 중년인이었다.
"왕자 전하를 뵈옵니다."
"폐하부터 알현하고 왔겠지?"
"전하께 상의하기를 명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다.
이 왕국의 실세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하물며 그 실세가 귀족이 아닌 왕자라는 사실을.
"합격."
그렇기에 대다수 귀족과 대소신료들은 모두 왕자의 집무실 앞으로 집결했다.
왕자가 새로운 실세니까, 그에게 잘 보이든, 그와 국정을 논하든, 무엇이 되었든 그게 옳다고 여겼으니까. 실제로 왕자가 급부상하기 직전까지는 재상 칼버트 군터의 집무실로 모였다.
"왈더 카이파크라고 했나?"
"예, 전하."
다만 극소수의 귀족과 신하들은.
예컨대 눈치가 빠르거나, 딱히 아부할 생각이 없거나.
혹은 모든 일을 절차대로 처리하는 군인이나 기사 출신의 인물들은 달랐다.
누가 실세든, 이 왕국의 권력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했다.
아마 이 남자, 델루아 제1 수용소장 왈더 카이파크 역시 후자의 경우처럼 우직한 타입일 터.
"궁금하네. 수용소장이 무슨 일로 직접 찾아왔는지."
그렇기에 마테우스는 순수한 호기심을 느꼈다.
여러 수용소의 수용소장이란 자리가 무엇이던가?
자신의 영역에서는 거의 왕처럼 군림하기로 유명하잖아?
한데 어찌 그런 자리에 앉아있는 자가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전하께서는 혹 제1 수용소에 수감 중인 흉악범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030화. 대청소(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