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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범죄와의 전쟁 (6)

"아니, 그럼 '그 순항 물건'들을 뿌리는 게, 포교가 아니라 잔반 처리 같은 거였다?"

"예, 뭐."

이태백의 질문에 김창식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면서 이 또한 교주의 뜻이라고 기어가듯 덧붙이는 꼴하곤.

누가 봐도 은근슬쩍 교주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였다. 같은 교주로서 괘씸하기 짝에 없었다. 무엄한 녀석. 감히 교주를 팔아?

'교주님, 교주님 예찬할 때는 언제고.'

김창식은 뭐라 뭐라 계속 주절거렸다. 이태백의 귀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동안의 가설들이 실시간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개발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릴리스 교단이었다. 개발자인 이태백에게조차도 굉장히 비밀스러운 집단이었다. 단순 버그로 치부하기엔 석연찮은 부분도 많았고.

그래서 상상의 나래에 살을 붙였다. 릴리스 교단이 시티의 그림자에서 암약하는. 이를테면 막후 세력일 가능성도 충분하리라 봤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의 장비가 실로 화려했으니까. 윙 슈트는 수십억을 호가하는 사이버네틱 의체였다. 의체 중 전신 의체 다음으로 가장 비싸고 희귀한 물건이었다.

그걸 한 명도 아니고 무더기로 달고 날아다니는 점에서 가설은 무게를 더했다.

메가코프와의 상관관계 또한 당연히 의심해 봄직했다. 왜냐하면 탈세 목적으로 교단을 만드는 기업은 흔하기 때문이었다.

메가코프씩이나 돼서 무슨 세금이겠냐마는, 의외로 그들은 성실 납세자였다. 목적은 사람들의 납세를 종용하기 위함이었다. 메가코프도 내는 세금을 너만 안 내? 그 어떤 홍보 문구보다 파급력이 진하지 않겠는가? 레이크 시티를 유지하는 자원은 돈 이전에 '인간'이었다. 제아무리 메가코프라도 민심과 척지면 시티에 남아날 사람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인구만큼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어쨌거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가코프와 릴리스 교단은 협력 관계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둘은 원수지간이었다.

정확히는 잠자고 있던 사자의 코털을 한쪽에서 뽑은 격이었다.

"아, 윙 슈트 말입니까? 그건 저희가 생산 공장을 습격해 탈취한 것들입니다."

윙 슈트의 출처를 물으니 대답이랍시고 내놓은 게 이거다. 미친 새끼들 아냐, 이거.

게다가 부연 설명에 의하면 이는 교주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고.

"...대체 왜 그랬냐?"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더욱 높은 곳에서 혼란을 뿌리면 낙수 효과가 발생할 거라고 봤습니다."

"내가 이해 못 하는 거 정상이지?"

김창식이 설핏 웃었다.

"정상입니다."

"진짜 정신병자 집단이구나, 너네."

"감사합니다."

"뭐라는 거야, X발."

참았던 욕이 기어코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뜬 미소가 돌아왔다.

"혼란을 위시하는 저희 교단에 그 이상의 칭찬은 없거든요. 그 어떤 혐언도 저는 웃는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쪽팔린 줄 알더니, 바로 반색하다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군.

'그래, 이게 릴리스 교단이 내세우는 바라면 이름값 제대로 하는 거지.'

이쯤 되니 섬찟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쨌든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쫓아내야겠다. 이태백은 대화의 핵심을 짚었다.

"너희 교주가 혼돈 여신의 존재를 알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교주는 내게 곧 있을 일이 끝나면 볼 수 있는 거고."

"예."

김창식은 즉답했다. 이태백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너희 교주는 천리안이라도 있는 거냐?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날지 어떻게 다 아는 건데. 릴리스가 꿈속에서 말해 준다니?"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내가 만나서 직접 물어봐야겠군."

이태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직감이 말한다. 적어도 릴리스 교단의 교주는 혼돈 여신에 대해 해 줄 이야기가 있을 것이리라.

판단이 섰다. 릴리스 교단과 손을 잡는다. 결심의 근거는 그저 감이었다.

이태백은 김창식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결연하리만치 눈동자에 흔들림이 적었다.

'인상만 보면 사기 칠 놈은 아니지만,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다만 본인의 감을 믿을 따름이었다.

이태백의 무의식은 어슴푸레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먹은 바는 반드시 현실로 구현된다는 것을.

우주의 섭리, 인과를 비틀고 조정하는 미상의 힘. 그것이 이태백이 가진 본연의 힘이었다.

또한 그가 매사에 움츠러들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원천이었다. 자각은 없지만.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는 건 좋은데 너무 두드리다가 나자빠진다.'

때론 미련할 정도의 과감함이 판세를 뒤집는다. 더 재 봤자 얻는 건 스트레스뿐이다. 더불어서 이번을 말미암아 목표였던 '혼돈 여신'을 향해 크게 한 걸음 내딛는바.

"내 쪽에서 따로 연락을 취하지."

주사위를 굴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주사위 눈은 어떻게든 6을 가리키게 되어 있다.

그의 앞길은 '말하는 대로'.

* * *

[#1 소규모] 1.8.5 패치 노트

◈ 메인 패치

• 신자들의 혼을 인도할 발키리가 필요.

→ 해당 사항이 승인 조건에 부합 〈☑〉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 * *

선객인 김창식을 축객한 후, 얼마 걸리지 않아 새로운 손님이 은코 바로 들이닥쳤다.

"이태백!"

예정대로 강현성이었다. 그는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정도로 다급한 기색이었다.

"사람 죽었냐? 물이라도 줘?"

"사람은 어제 네가 죽였잖아-!!"

"아닌데?"

"뭐...?"

이태백이 영혼 없이 대꾸했다.

"그것들 사람 아니었다고."

"얌마! 지금 말장난할 때야?! 너 본부가 지금 어떻게 난리가 났는진 알아, 어? 아주 난리가 났어. 뒤집어졌다고!"

벽력같은 노호성에 집주인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차례의 야단법석 만에. 정말 어지간히도 잠귀가 어두운 모양이었다.

"뭐야, 또 너야?"

고은이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입을 두드렸다. 사나운 눈초리가 그녀에게로 옮았다.

"고은, 너도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나한테 일언반구 없을 수가 있냐?"

"얼씨구."

그 채근에 고은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끼익.

고은이 의자를 하나 끌고 와서 강현성 앞에 앉았다. 그녀는 팔짱과 다리를 꼬았다.

"강현성, 네가 내 상사야? 겸상 좀 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 레지스탕스 아니야. 너한테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그건 맞지만...."

"저기요, 9대대장님. 우리 공과 사는 확실히 하자고요. 이참에 하나 짚고 넘어가 줘?"

순식간에 주도권이 넘어갔다. 고은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허벅지에서 곰방대를 꺼냈다.

"엄연히 따지면 난 너희 총대장이 사정사정해서 탁아소 해 준 거야. 착각하지 말라고. 강현성 네가 불같은 성격인 거? 내 알바야?"

"...."

"또 이태백한테도 태도가 그게 뭐냐. 뭐 그렇게 고압적이야?"

나? 갑자기?

이태백이 어리둥절한 가운데, 고은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론 외부 요원은 소속만 그 대대일 뿐이고, 상황에 따라선 자율적으로 행동해도 되는 걸로 아는데. 너 임마, 그거 과보호야. 그런 건 네 여친한테도 그렇게 해."

"뭐야? 너 여자 친구 있었어?"

이태백의 두 눈이 미끄러졌다. 지긋한 핀잔과 예리한 지적. 강현성은 우물쭈물하다가 끝내는 반쯤 체념한 기색이 되었다.

"미안하다. 내가 냉정하지 못했다."

"아니, 여자 친구 있었냐고."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뇌옥 탈옥 당시에 강현성, 네가 했던 말 기억 안 나냐? 어느 여자한테 고백할 건데 나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랬었지."

솔직히 아니꼬웠다. 누구는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데 대대장은 꽃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놈이 보고 한 번 안 했다고 질책하니 더 화가 났다.

"뭐, 이런저런 일도 있고 했는데 그렇게 됐다."

"...."

"서, 섭섭하단 표정 짓지 말고. 이번 일 끝나면 소개하려고 했어. 알았어. 미안해. 네가 어제 보고 안 했던 거? 다 사정이 있었겠지."

강현성이 진땀을 뺐다. 차가웠던 고은의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연기를 흘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쟤 여친 기름밥 먹는 애야. 시티에서 기름밥 먹는다는 건 엄청 돈 잘 버는 거다? 혹시 모르지. 태백이, 너 이동 수단 생겼을 때 강현성 통하면 지인 할인 들어갈지."

"이동 수단이라."

선객으로 릴리스 교단이 다녀간 뒤라 그런가. 이동 수단이란 단어가 귀에 한 번 걸린다.

더군다나 곧 있을 갱 연합과의 전면전을 떠올리니 영롱한 붉은색이 아른거린다.

'적토마.'

이태백이 어젯밤 학살한 마그노스트롬. 그들의 보스가 타고 다니는 애마의 이름이다.

세라믹 투로터의 양륜구동. 컴퓨터 제어 안티록 브레이크와, 12,000RPM의 200마력. 지상·공중 차량을 비롯해 수많은 이동 수단이 존재하는 레이컨스 안에서 최고 스펙을 자랑한다.

조금 전의 만남이 이태백에게 영감을 주었다. 릴리스 교단은 메가코프 공장을 습격해서 윙 슈트를 탈취했다. 나라고 안 될 건 뭔가?

대대장한테도 기름밥 먹는 여자 친구가 생겼겠다. 지금이야말로 적기였다.

'어차피 갱 연합과 전쟁은 못 피한다.'

이건 필경 적토마를 훔치라는 하늘의 안배다. 이 무슨 미친 소리냐고?

이태백은 진심이었다.

사이코패스(진), 날강도(진), 사이비 종교 교주. 그동안 획득한 컨셉들로 뇌가 잔뜩 저며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그의 행동 발로는 정상의 범주에서 너무나 벗어나 버렸다.

'갖고 싶다.'

그의 입매에 묘한 호선이 걸렸다. 강현성이 눈매를 좁혔다. 저 웃음, 불길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냐."

"그것까지 보고해야 돼?"

"하아, 말 한번 잘못해서 이거. 됐다, 됐어. 집주인이랑 세입자랑 짝짜꿍이 잘 맞네."

강현성은 조금 질린 목소리였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곤 본론을 말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히며.

"전쟁 날짜랑 우리 9대대의 임무가 정해졌다. 어떤 거 먼저 들을래."

"후자부터."

"실속주의라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우리 대대 임무는 갱 연합의 본거지로의 침투야. 보다 정확히는 갱 연합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갱단, '마그노스트롬'을 습격하는 거다."

"우연의 일치인가."

"나도 몰라. 총대장님만 알겠지."

"덕분에 마그노스트롬 애들이랑 해후하게 생겼군."

탄식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금세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했다.

"날짜는?"

"오늘 저녁."

"…오늘? 너무 급한 거 아니야?"

강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전쟁이라는 건 대충 윤곽만 잡아 두고 바로 들어가는 거야. 갱 연합, 이 새끼들도 급한 모양인데 우리 쪽에서 먼저 목을 쳐야지."

"도존도 참전한대."

고은이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담배 연기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당지혜한테 들었어."

"아침 연락에선 연락 두절이라며."

"두절이었지. 병원에 있었대."

생각도 못 한 뜬금없는 말에 이태백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뻐끔뻐끔 흡연 중이던 고은도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설마 입원한 거야?"

"아니. 입원시킨 거야. 설탕물 새끼를 아주 초주검을 만들어 놨다더라. 그래서 8대대는 이번 작전에서 빠지기로 했어. 그놈 그거, 업보 치른 거야. 그래도 그 일로 배신자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거 같기는 한데, 어쨌건."

강현성은 그렇게 나갈 준비를 했다. 이태백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연히 물었다.

"작전명은 뭐야."

"범죄와의 전쟁."

강현성은 문 앞에 서며 손을 내저었다.

"밤에 보자고."

* * *

[메인 퀘스트: 갱 연합 조직원 몰살]

[퀘스트 보상: 경험치와 고유 탈것]

[이름: 이태백]

Level: 16(↑4)

생명: 33 정신: 38 근력: 29

민첩: 39 마력: 31 신앙: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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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평가⌟⎯⎯⎯⎯

그런대로 우호적 /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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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포인트: 24(↑4)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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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나, 강림 (1)

시티에 살고 있노라면 간혹 이 세상은 밤낮이 역전된 게 아닌가. 그런 착각마저 들 때가 있다.

레이크 시티의 밤은 찝찔한 물비린내를 이겨 내려는 듯 환히 네온사인을 점등했다.

하나 그런 시티에서도 어둠이 드리운 구역이 있었으니. 바로 그곳에 이태백이 왔다.

차박, 차박.

발을 놀리며 주변을 살폈다.

"뭔 놈의 동네가 이렇게 캄캄해."

어둠이 빛을 빨아먹으며 고여 간다. 안력을 있는 힘껏 돋워도 암순응이 힘들었다.

차박, 차박.

사람 하나 없는 골목길. 갈라진 콘크리트 틈새를 밟을 때마다 구정물이 튀었다.

그는 발목께가 시리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이건 인적이 드물다 못해 유령 도시다.

그림자 사이를 오가는 부랑자와 무법자조차 안 보인다. 그야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야 강도짓이라도 하든 말든 할 테니까 말이다.

다만 아이러니한 건, 이 동네가 상층과 하층 구역의 경계에 위치한다는 점이었다.

'28구.'

통상 하층에서는 가장 땅값이 비싸야 정상인데, 이 동네가 이토록 극단적으로 조용한 까닭은 갱 연합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깡패들이 움트기 전까지는 하층 최고 시가지였다던가.

비교적 높은 건물들과 서구적인 가로등, 네모반듯하게 난 사잇길. 찬란했던 과거의 잔재가 드문드문 눈에 밟히기는 했다.

"이래서 님비 현상이라는 게 있는 거군."

이태백이 짧게 혀를 찼다.

"태백이, 너도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내 집 마련할 일 있으면 잘 살펴라. 주변에 깡패 새끼들이 거주지가 있는지 없는지."

중얼거림이 들렸는지 강현성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태백은 어둠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시티 집값이 얼마나 비싼데, 내 집 마련은 무슨. 대대장인 너도 집 없잖아."

"음, 그건 그렇네. 하하!"

오늘은 모처럼 단독 행동이 아니었다. 레지스탕스 전체가 움직이는 대규모 작전. 이름하여 '범죄와의 전쟁'의 거행일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로 유다희, 후미토, 록 순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어째 처음으로 9대대 전원이 모여 이동하는 것 같군.

루카켄 제약회사 적에는 도착한 뒤, 둘로 찢어져서 행동했으니까.

'우리 다섯으로 갱 연합의 본거지를 친다라.'

9대대는 소수 정예다.

대대장 강현성의 기조였다. 단원이 많아 봤자 무쓸모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실상은 단원들이 알아서 꺼리기 때문이었지만....

"히힛, 오늘은 얼마나 죽일 수 있으려나."

아까부터 히쭉거리는 후미토.

"오늘 운세에 살인은 안 된다고 했는데."

살인 운운하는 의사 유다희.

"*쉬익* *쉬익*."

다스 베이더 코스프레하는 록까지.

'이러니까 타의적 소수 정예지.'

어쨌든 이런 대대 특성상 잠입 임무는 대개 9대대 몫이었다. 그런 만큼 위험도 컸다.

다섯 명 전원이 용케도 아직 살아 있구나 싶었다. 9대대는 초창기 멤버 그대로 가는 유일한 대대였다.

'그 덕분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안도감이 드네.'

우리는 현재 갱 연합의 근거지로 발을 들이는 중이다. 상식적으로 미친 짓이다.

하지만.

'9대대가 나서면 다르다.'

조직 내 인기와는 별개로 그들에 대한 신망 자체는 두터웠다. 9대대는 이론상 불가능했던 임무들을 몇 번이고 성공했다.

대대원 전원의 개성이 강한 통에 실력이 묻히는 감이 있었다.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는 게 주된 여론이지.'

그런 그들과 함께한다. 나 제외(?) 하나같이 또라이지만 실력은 진짜였다. 이태백은 그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광해에 별빛이 가려졌어도, 빛 한 줌 없는 무저갱일지라도. 무한히 빛을 뿌리는 뭇 구역들보다도 앞길이 밝은 기분이었다.

척.

깊이 들어왔다 싶을 무렵. 선두에서 달리던 강현성이 급정지하며 주먹을 들었다.

멈춰 서라는 신호였다. 이태백과 그 일행은 그렇게 했다.

스윽.

강현성은 골목의 모퉁이로 머리만 슬쩍 내밀었다. 이 너머에 마그노스트롬의 기지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태백은 골목 내벽에 밀착했다. 호흡을 고르며 그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고오오오.

등에 닿는 콘크리트 벽의 냉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금 이 침묵만큼이나. 어디선가 불어온 실바람이 목덜미를 핥는다.

"…입구를 지키는 애가 셋, 일대를 순찰 중인 애들이 여남은 명 정도...."

강현성이 중얼거린 것도 그때였다. 그는 적의 수를 거의 정확하게 어림해 내었다.

이태백으로선 상세를 알 길이 없으나 강현성이 본 바가 맞을 거다. 왜냐면 그가 스킬 '호크아이(매의 눈)'를 지녔기 때문이다.

'기척 감지를 극으로 벼려 낸 기술.'

이는 기척 차단의 상위 경지로 시전자의 기척을 한없이 지워 낸다. 그로 하여금 상대의 기척을 부각시켜 감지하는 스킬이다.

거듭 강조하듯 기척 차단만 해도 강자라는 증명이다. 말했다시피 일반인을 상회하는 초인들만 가능한 절기다.

강현성은 그 경지를 뛰어넘은 기척 감지마저 마스터했다. 새삼스럽지만 대단하긴 대단하다. 맨날 나한테 시달려서 그렇지.

'그건 얘가 시티 주민답지 않게 사람이 좋아서 그런 거긴 해.'

비단 그만이 아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9대대 전원이 수더분한 면이 있었다. 강현성이 직접 차출한 멤버니 그와 닮아 있겠지.

"이렇게 하자."

고요히 읊조리던 강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순찰조가 생각보다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두 사람 정도가 주의를 끌어야 우리가 저 심처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도 두 팀으로 나뉘는 건가."

이태백이 불쑥 물었다.

"잠입이 목적이면 그냥 몰래 다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우리 단원 구성도 그런 쪽으로 특화되어 있고."

"그렇긴 하지. 그런데 우리 9대대 목적은 마그노스트롬의 몰살이 아니야. 정확히는 갱 연합의 수장을 납치하든가, 그 자리에서 처리한다. 그게 총대장님의 명령이다."

"듣기만 해서는 일을 굉장히 꼬아 놓은 것 같군. '굳이'란 말이 계속 맴도네."

그 말에 옆에 있던 유다희가 거들듯 설명했다. 원통형 쇳덩이를 돌리며. 이는 저격 소통에 소음기를 결착하는 과정이었다.

"최대한 출혈을 줄이려는 거야. 마그노스트롬이 단합력 하나는 최고거든. 그리고 어제 이태백, 네가 쟤네 몇 명을 아주 도륙을 내 놨다며. 그 사실이 분명 귀에 들어갔을 거고, 당연히 대비를 해 놨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도존이 합류하면 솔직히 레지스탕스가 승기를 장담하기가 어렵거든. 이긴다고 한들 사실상 총력이 반토막이 될 확률이 높아."

이름을 담는 입술이 잘게 떨렸다.

10익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생명을 징수하는 사신들이다.

"총대장님도 그걸 알기에 갱 연합의 수장만 어떻게 슥삭 하자는 거야. 갱 연합에서 도존과 커넥션은 그 인간이 유일하니까."

"근데 그게 수장만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당번의 질문자는 후미토 쇼헤이였다. 종교 관련 외에는 그 또한 세상 물정이 까막눈 수준이었다. 그때 록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쉬익*, *쉬이-이이익*."

그녀의 마스크가 옅게 발광했다. 잠시 후 후미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아, 도존은… 그러니까, 용병왕은 돈만 보고 움직이는 돈미새에다가… 후불제라서 지급자가 죽으면 거들떠도 안 본다 이거지? 또… 그 정도 거물을 움직이려면 아무리 갱 연합 수장이라도 사정사정했을 테고… 아쉬운 건 도존이 아니라 갱 연합이니까. 도존은 미련 없이 떠날 거다. 이 말이지?"

록이 뿌듯하다는 듯 허리에 두 손을 얹으며 턱을 들었다. 이태백은 기가 막혔다.

후미토는 숨소리와 마스크만으로 함의를 완벽하게 추리했다. 이 새끼 천잰가?

"설명은 대충 다 된 거 같으니까. 바로 시작해도 되겠지들?"

강현성이 한 명씩 면면을 확인했다. 입술에 난 거스러미까지 뜯어보려는 듯 우묵한 눈빛이다.

단원들도 호응하듯 눈을 치떴다.

씨익.

강현성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가 두 손바닥을 펼치더니 자세를 쑥 낮췄다.

약속한 것처럼 유다희와 후미토가 폴짝 점프했다. 그렇게 손바닥에 착지한 찰나.

흐읍-!

강현성이 숨을 집어먹으며 퍼다 올렸다.

두 사람의 신형이 초승달에 걸릴 듯이 솟구쳤다. 손바닥이 구름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소간 밤하늘을 부유하다가 이내 각각 양옆 옥상에 내려섰다.

좌 유다희, 우 후미토.

뒤이어 록이 같은 방식으로 유다희가 있는 옥상으로 합세했다.

경이로운 괴력이다. 건물은 어림잡아 4층 높이였다.

단원들의 몸놀림 역시 놀라웠다. 왜 총대장이 9대대를 편애하는지 알만 하군.

척.

유다희가 저격 소총을 옥상 난간에 거치했다. 그녀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견착하고서 망원조준경으로 눈을 가져갔다.

록은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 관자놀이를 두드리자, 허공에 홀로그램 창이 어렸다. 녹화를 시작한 것.

스르릉.

마파람에 검 울림이 실렸다.

후미토의 양손은 일본도 두 자루로 묵직했다. 밤바람이 칼날에 부딪혀 쪼개진다.

"위에 애들이 길을 열어 줄 거야. 그때 우리 둘이 최대한 조용히 잠입한다."

"속도도 생명이겠군."

"그렇지."

강현성은 그길로 입을 닫곤 손가락을 펼쳐 내게 수신호를 보냈다. 삼, 이, 일....

퉁-.

개머리판이 유다희의 가슴께를 흔들었다. 새된 신음과 함께 인영 하나가 삐걱거린다.

미쳤다. 눈만 빼꼼 내밀고 있던 이태백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사람을 선 채로 죽인 거다.'

갱 하나가 쓰러지면 주변에 있는 동료가 즉각 눈치챌 테니까. 하여간 인간 신체에 대한 이해도가 해박해서 가능한 솜씨다.

총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기다란 손가락이 노리쇠를 당겨서 빠르게 탄피를 배출한다.

짤랑.

탄피가 페인트 벗겨진 바닥에 닿는다. 다음 탄이 격발된 타이밍은 동시였다.

쐐애애애액!

후미토가 난간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그가 밟은 곳에 파편이 튀었다. 칼날에 숯 칠을 한 턱에 검광이 번뜩이지 않았다.

스겅!

검은 궤적이 짓쳐 들었다.

옥상에 있던 후미토는 어느새 갱의 뒤를 점한 채였다. 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탁.

칼날이 검집에 녹아들고, 칼뿌리가 코등이와 부딪힌 순간이었다.

"크얽...!"

떨어진 머리가 자신의 핏물에 잠겨갔다. 반경 3M 내외의 눈들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목의 분산. 빡빡했던 입구의 경계가 비었다. 강현성이 이태백에게 눈짓했다.

"지금이다."

강현성의 발밑에서 잔해가 일었다. 이태백도 발을 굴려 곧장 뒤따랐다.

바람이 불어닥쳤다.

후우우우웅...!

민첩 30을 넘어선 덕분에 주변 풍경이 선으로 늘어졌다. 소요를 느낀 갱들이 고개를 돌린다 싶으면 유다희가 저격했다.

입구로 들어서기 직전, 이태백은 후미토와 시선이 스치듯 만났다.

그 짧은 찰나 턱을 까딱여 보였다. 갱들을 묶어 준 데에 대한 감사였다.

어둠 속에서 후미토의 송곳니가 반짝였다.

그는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등은 내게 맡겨. 일본 소년만화에서 나올 법한 대사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웃긴 점은 일본인 저러니 그림이 썩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아, 빌어먹을.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는데 웃음이 실실 삐져나온다.

타다닷-!

좁다란 복도를 나아갔다. 귀퉁이 안쪽에서 꺾어 나온 갱들과 딱 마주쳤다. 불청객의 등장에 일순 대경한 기색이 방독면을 스친다.

다급히 외치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 멍청한 모습에 이태백은 내심 뇌까렸다.

'학습력 떨어지는 새끼들'

놈들이 충격 소총의 방아쇠를 깔짝였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손가락을 튕긴 뒤였다.

[냉각]

냉기가 총알의 운동 에너지를 떨어뜨렸다. 일시에 점점이 이어진 백열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급격한 온도 변화 탓이었다.

빛을 집어삼킨 어스름이 마그노스트롬에게 작렬했다. 장내는 아비규환이었다. 비명을 들으며 이태백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심장은 왜 또 두근거리고 X랄이야.'

야릇한 쾌감이 손끝까지 전해진다. 그 기꺼운 심경을 담아 개폐 버튼을 눌렀다.

짤깍-

레벨 업 할 시간이다, 이태백.

52화 나, 강림 (2)

강현성은 28구에 오기 이전 고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 너 깜짝 놀랄걸?

그런데 돌아온다는 대답이 이거였다.

- 지금의 이태백은 그러니까…. 냉정과 열정 사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상태야. 못 믿겠다고? 오늘 밤에 임무지? 그때 가서 봐 봐.

뭔 말인지 싶었다. 앞뒤 잘라 먹고 대관절 까무러칠 거라니. 눈치껏 이태백를 향한 기대를 드러냈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고은의 목소리는 보다 은근한 저의가 서려 있었다. 얘가 흰소리 할 애는 아닌데.

- 네가 놀랄 거라는 거에 소고기 건다. 배양육 아니라, 진또배기. 대신 놀라면 강현성 네가 쏴라. 약속한 거다. 안 지키면 고추 없....

강현성은 의아했다.

'쟤의 잠재력이야 내가 일찍이 알아봤어. 근데 내가 없는 사이에 뭐가 더 있었던 건가?'

그를 겪어 본 사람들은 입 모아 그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이태백은 난놈이었다. 분명 초고수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와 면식이 있는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못해도 몇 년은 걸릴 거야.'

고은이 직접 마법을 지도한다 한들, 마법의 실사용까지는 넉넉하게 일 년을 잡았다.

하늘의 축복을 받는 사람. 천재라는 부류도 응당 절차라는 걸 거치기 마련이었다.

뭐, 몇 세기에 한 번꼴로 그 절차를 무시해 버리는 자가 나타나곤 한다. 세기의 천재들을 '범부'로 전락시키는 그런 자들 말이다.

번쩍-

좁고 길게 뻗은 복도에 불이 들어오며 강현성의 상념 역시 끊겼다. 눈이 몹시 부신 탓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크게 떴다.

"허."

복도는 문자 그대로 참혹했다.

바닥과 벽은 시뻘겋게 얼룩덜룩했다. 핏물이 타일 틈을 길 삼아 뻗어 나가는 중이었다.

벽에는 살점 찌꺼기 따위가 들러붙어 있었다. 보고 있자니 안구가 빨갛게 익는 느낌이었다.

시체들이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였으며, 콧구멍에선 고드름이 내려와 있었다.

강현성은 놀란 눈으로 죽은 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이태백이 칼날을 비틀어 빼냈다.

"가자."

이태백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입김이 길게 이끌렸다. 강현성은 얼결에 끄덕였다.

"어, 어. 그래."

"냉기 마법으로 적어도 이 복도에 깔린 전선들은 다 얼었을 거야."

"...."

강현성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뇌리도 시체들처럼 하얗게 표백됐다.

냉기 마법은 세외무림이었던 홋카이 빙궁(北海氷宮)의 몰락과 함께 망실됐다.

수많은 마법사가 복원을 시도했다.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어설프게 따라 한 자들이 간간이 나오긴 했지만, 팥빙수 가게 제빙기 선에서 정리됐다.

그런데도 마법사들은 냉기 마법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 그들에게 냉기 마법은 일종의 염원이었다.

'재수 없는 마법사들이 그토록 목매는 이유.'

모든 속성을 통틀어 냉기 마법만이 CC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상력은 다른 마법들에 비하면 한참 딸린다. 사실상 없는 수준이지.

그러나 CC기를 보유한 시점에서 단점을 모조리 상쇄한다. 볼 방법이 없으니 그 사기적인 성능의 확인이 불가능했다. 하나.

이태백이 몸으로 증명했다.

적은 못 움직이게 만든다. 그를 기반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단숨에 도륙했다. 몸을 얼려 버리니 쪽도 못 쓰고 당하더라.

냉기로 발을 묶어버린 기본이요, 총알조차 날아오던 중에 막아 버렸다.

"CCTV는 한동안 작동 안 할 거야. 중앙 제어실에서 확인했을 때는 이미 우리가 나간 후일 거고."

냉기 마법만으로도 까무러칠 지경인데..., 운용의 섬세함에서 더더욱 대경했다.

전파를 마비시켰다고? 허허허, 염병. 밸런스는 어디다 갖다 팔아먹은 거냐.

"왼쪽?"

"…어."

재촉한 이태백이 걸음을 옮겼다. 강현성도 시체를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뒤따랐다.

'누가 대대장인지.'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 * *

"이번에는 나다."

넓은 복도에서 적이 튀어나올 적에는 강현성이 나섰고, 좁거나 굽이지면 이태백 차례였다.

"몇 명이야."

"둘."

"후딱 해치우자고."

일련의 과정은 이러했다. 적과 맞닥뜨리기 직전의 순간 강현성이 기척 감지로 눈짓을 준다.

이태백이 마법을 시전한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역장이 복도를 넓게 도포한다.

[냉각]

전력의 차단.

갑작스러운 어둠에 마그노스트롬은 부랴부랴 적외선 카메라를 켤 테고. 그 틈에 한 명이 갈팡질팡하는 적들을 제거한다.

후우웅!

어둠 속에서 강현성의 팔이 낭창거렸다. 팔오금과 충돌한 갱의 모가지가 회까닥 꺾인다.

"씨-바알! 어디야?! 어디-."

죽은 자의 이빨 조각이 바로 근처에 있는 갱한테 튄다. 그가 반응할 새를 주지 않으려는 듯 이태백이 블레이드를 내지른다.

[운영자의 민첩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운영자의 근력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예리함이 강현성의 귀 옆을 스친다. 칼날이 적의 경동맥을 땄다. 선혈이 솟았다.

"보, 보스에게 무전...!"

비명을 지르거나 무전을 때리려고 해?

[급냉]

이태백의 마법은 입을 틀어막으면 그만이었기에 복도가 어수선해질 새는 없었다.

빠각-! 스겅!

갱들은 부지불식간에 죽어 나갔다. 자작한 냉기가 최후의 단말마마저 모조리 빨아들였다.

이번 턴에는 20초 걸렸다. 그야말로 한순간. 이조차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이스였다."

"사람 죽이고 칭찬은 무슨. 그 갱 연합 수장 있는 데까지는 얼마나 남았어."

그 덕분에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일이 진행됐다. 그러니까, 목적지가 곧이었다.

"코너 두 번만 꺾으면 나올 거야. 록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면서 무전 보내고 있거든. 진척이 너무 빨라서 애가 놀랐나 보다. 평생 안 하던 딸꾹질을 하네."

"귀엽네, 꽤."

"록한테 전해 줄까."

"X까."

"넌 왜 얼굴값을 못하냐. 시에스타 번견들은 다 너처럼 입이 걸었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막 뱉고 보는 거지."

"핑계 한번 그럴싸하네."

"잡담은 그만하고 서두르자."

합을 맞춰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데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이 쉬웠다. 그래서 시답잖은 수다를 주고받는 거고.

이동하는 도중 강현성은 괜스레 옆을 일별했다. 이태백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속도로는 레지스탕스 내에서 1·2위를 다투는 그이건만, 이태백은 우습게 쫓아온다.

언뜻 따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살짝 자존심에 금이 가서 속도를 높여도 잠깐뿐이었다. 이태백이 사뿐히 추월한 것이었다.

'뇌옥에서 간수들한테 몽둥이찜질 당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실제로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두 달은 됐나?'

이 무슨 미친 성장 속도란 말인가. 이태백이 내달리는 기세보다 성장세가 쇼킹하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쳐다봐. 여친도 있는 새끼가. 징그럽게시리."

시선을 느낀 이태백이 한마디 던졌다. 머리칼에서 땀방울이 싱그럽게 떠나간다.

'세상 혼자 다 사는 얼굴이구만.'

실력에 외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이제는 얄밉기마저 했다. 강현성이 실소했다.

그러자 이태백이 지레 거리를 벌렸다.

"강현성, 너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난 그런 설정 넣은 적이 없으니까...."

"뭐라는 거야. 설정이 뭐 어째?"

"아니다. 여튼 뭘 그렇게 보냐고. 얼굴에 피 칠갑 좀 했다고 그런 거면 위장크림 정도라고 생각해. 우리 잠입 임무 중이잖아."

농담이랍시고 한 말인 듯한데, 썰렁했다. 이태백의 빙결 마법이 더 따뜻하리라.

"서러워서 그런다, 서러워서. 세상이 X나 불공평하다 싶어서. 이쯤 되면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태양계를 넘어서 온 우주가 널 중심으로 도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게나 말이다."

강현성은 별 뜻 없이 뱉은 투정이었다. 그에 이태백은 사뭇 진지하게 반응했다.

"요새 들어 내가 운이 너무 좋다 싶거든, 좀 과할 정도로. 어쩔 땐 내가 말하는 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 같은… 뭐 그런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그건 너무 간 생각 아니냐."

"그렇지."

이태백이 피식 미소 지었다.

"맞아. 너무 간 생각이지. 그랬으면 내가 사형수였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싱겁기는."

강현성이 눈길을 원위치시켰다. 잠깐 마가 떴다. 그러다 얼마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인데. 이번 작전, 네가 보기엔 몇 명이 죽을 거 같냐. 레지스탕스 전체로 봐서."

"X발. 그거 사망 플래그잖아."

"그러니까! 그냥 하는 말이라고!"

"농담이야, 발끈하기는."

센스가 저질이라고, 새끼야!

강현성이 사족을 달려던 차.

"질문이 잘못됐어."

이태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우리가 몇 명 죽을지가 아니라, 적이 몇 명 죽을지. 그걸 물어봤어야지."

"뭐...?"

"우린 전부 산다."

그는 확신했다.

"그럼, 적은."

"다 죽어야지."

막무가내임을 안다. 그렇지만.

"범죄와의 전쟁이잖아."

강현성은 어처구니가 없는 한편 심장 근처가 근질거렸다. 덩달아 고무된 것이다.

[운영자가 정신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운영자가 신앙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이게 다 잘난 대원 덕분이었다.

* * *

[#1 소규모] 1.8.6 패치 노트

.

.

.

* * *

목적지에 도착했다. 삼엄했던 건물 바깥과는 달리 막상 심부는 한산했다. 함정인가 싶어 강현성이 기척 감지를 펼쳤으나 정말 아무도 없었다.

"음, 인기척은 저 안에서만 느껴지네. 아마 레비랑 그 똘마니 두엇일 거다."

강현성이 문을 응시하며 말했다. 사담으로 '레비'는 갱 연합의 수장이었다. 이름은 깜찍한데 성격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여자다.

"레비는 어떤 놈이냐."

이태백이 검증 차원에서 물었다. 행여 그의 지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미친 년이지."

"그건 알아."

"사람들한테 알려진 것보다 더 미쳐 있어. 총대장님이 갱 연합이 종종 들쑤시는데 굳이 안 건드리시는 것도 어떻게 보면 순 저년 때문이야."

강현성은 쓴웃음을 흘렸다.

"전에 한 번 그러시더라. 미친개가 문다고 사람이 물면 되겠냐고. 광인 컬렉터인 총대장님이 그렇게 말하신 거면 말 다 했지. 저 새끼는 죽이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거든. X나게 독종이야."

그리 말하며 그는 슬금슬금 문을 향했다. 이태백도 따라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불상을 지키는 인왕상처럼 문의 양옆을 점유했다.

"실력은."

"사실 우리 둘까지도 필요 없긴 해. 범주로 따지면 강자보다는 광인에 속하는 인간이거든. 문제는 미쳐 있어서 파악이 안 된다는 거지.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생포는 따 놓은 당상이니까 걱정 말고."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강현성은 엄지로 문을 가리켰다. 이태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척은 차단....

삐걱-

그때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문이 나뭇결을 따라 갈라지기 시작했다.

콰앙!

폭음이 일더니 문짝이 멀리 날아갔다. 어찌나 요란한지 대기가 웅웅거릴 정도였다. 당황은 찰나였다.

쿠-르르르릉!

곧 실체를 확인했다.

뿌연 먼지를 뚫고 나오는 형체. 그 매끈한 표면 위로 두 남자가 곡률 있게 반사됐다.

갱 연합의 수장 레비와 애마 적토마였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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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 패치

• 몰살 엔딩을 확정 짓습니다.

• '신원: 갱'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53화 나, 강림 (3)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갱 연합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상상해 보라. 무법자들 가운데서 악질 중의 최악질인 족속. 그들이 바로 갱이다.

조직원들끼리도 뒤통수를 치는 일도 쌔고 쌨다. 그런 놈들이 합심하여 연합을 꾸린다? 애당초 성립이 안 되는 가정이었다.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 간에 백마 탄 초인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갱들에게는 '레비'가 그러했다. 정확히는 백마가 아니라 적토마 탄 초인이었지.

어느 날 등장한 레비는 뒷골목을 씹어 먹고 다니기 시작했다.

마주치는 갱들을 게걸스럽게 흡수. 종국에는 마그노스트롬이란 독자적인 갱단을 창설했다.

마그노스트롬은 뭇 갱과는 체제가 달랐다. 일견 갱이라기보다는 군대에 가까웠다.

갱들은 체계적인 편제를 거친 마그노스트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별안간 출몰한 여인은 반년 만에 갱단을 통일했다.

이후 연합을 만들어 구제 불능인 갱들을 한데 묶었다. 남성성을 팔아서 먹고사는 갱 전원이 한 여인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여장부의 대서사시나 다름없었다. 이 시나리오에서 흠은 주인공인 여자가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는 점이었다.

광년 레비.

이보다 그녀를 잘 수식하는 낱말은 없을 거다. 그녀를 본 자들이 전부 하는 말이었는데.

이 순간 이태백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알고 싶지 않아도 상대가 시연했기에.

'실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나와?!'

레비는 놀랄 틈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적토마의 전조등이 도둑을 비추는 조명처럼 이태백과 강현성을 가리켰다.

이태백은 관자놀이를 짚다가 퍼뜩 눈을 홉떴다. 주머니에서 재빨리 마스크를 꺼냈다.

진소방의 부하인 실눈에게서 정당히 받은 예의 것이었다. 여러모로 요긴하게 써먹는다.

치지직-.

탈착음과 함께 마스크가 입가를 넓게 감쌌다. 안에서 더운 숨이 부딪치는 걸 느꼈다. 필터링이 되니 시야 역시 맑아진다.

옆에서 메마른 기침 소리가 들린다. 강현성이 손을 휘저으며 먼지를 흩날렸다.

다행히 겉으로 보이는 부상은 없다시피 했다. 나뭇조각이 조금 들러붙은 정도였다.

부르르르릉...!

배기음이 요란했다. 후폭풍의 여파로 정신이 웅웅거리는 가운데 레비가 말문을 열였다.

"어- 너희 *딸꾹* 뭐야."

좀 이상했다. 배기음은 우렁찬데 발음이 흐리멍덩하다. 꼭 음주 운전하는 아재같이.

"밖에서 순찰 돌라고 했더니 *딸꾹* 뺑이치는 거야? 아니다, 마침 잘됐다. 혹시 너희 24시 편의점 아는 곳 있냐?"

"…뭔...."

"떨어졌어...."

레비의 목소리에 습기가 찼다. 주인을 위로하듯 적토마는 세차게 투레질을 했다.

"…술이, 떨어졌다고. 술이. 오늘같이 X같은 날에는 다음 날이 사라질 정도로 마셔 줘야 하는데.... 창고에 있는 술을 다 가져다 마셔도 취하지를 않아 *딸꾹*. 그래서 내친김에 이 주변에 있는 편의점이나 털려고. 옛날 기분도 낼 겸."

그녀가 흐느끼던 와중이었다. 강현성이 막 몸을 날리려 하던 차였다.

"못 들어 주겠군."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돌아보니 이태백이 작게 도리질하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기다려 봐.'

'뭐? 왜?'

시선이 먼지 사이로 오갔다.

'이번 임무에서 베스트가 레비, 저년을 납치하는 거라며.'

'그렇지.'

'그런데 무턱대고 초살을 내버리면. 계획이 수틀리는 거잖아. 그리고 쟤, 바이크 타고 있다. 작정하고 도망치면 못 따라잡아.'

…확실히. 인간이 암만 발이 빨라도 바이크를 쫓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적토마는 마하에 가깝게 달린다던데, 저건 뭐 제트기였다.

'가만히 있거나 퍼질러 자고 있으면 모를까. 지금 달려드는 건 하책이다.

'그러면 네 계획은 뭔데.'

'여기는 나한테 맡겨라.'

이태백은 대관절 목청을 가다듬는다. 마스크 덕분에 목소리가 자동으로 변조됐다.

"보스."

"...?!"

뭐여, 이 사람 좋은 말투는?

"오늘은 무슨 일로 그렇게 기분이 꼬롬하십니까?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안 좋지, 그럼. 너 같으면 좋겠냐?!"

"어우- 저 같은 말단이 뭘 알겠나요. 말을 해 주셔야 알죠."

강현성이 흠칫 어깨를 떨더니 쳐다보았다. 너 이렇게 싹싹하게 말할 수 있었어? 이태백은 그 눈초리를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십쇼, 보스. 제가 주변 편의점을 싹 다 털어 온 다음 같이 소주잔 기울여 드릴게요."

"너… 이 새끼...."

이 말에 레비의 눈은 가늘어졌을 것이다. 먼지 때문에 보이진 않아도 그렇게 느껴졌다.

교착이 이어질수록 강현성의 자세가 낮아졌다. 여차하면 달려들 작정이었다. 적토마의 시동은 여전히 걸려 있었지만 기회는 지금....

"…너 같은!"

"젠장!"

기어이 강현성이 욕설을 뇌까렸다. 동시에 그의 상반신도 앞으로 쏟아지려는 때.

"-충신이 우리 갱단에 있었구나!"

레비가 기껍다는 듯 외쳤다. 강현성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튀어나가려던 관성에 못 이기더니 결국 나자빠졌다.

그걸 보며 레비는 또 한 번 자지러지게 웃어젖혔다. 그녀 딴에는 부하의 재롱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강현성은 본의 아니게 이태백의 계획에 일조하게 되었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부하라는데, 이렇게 살신성인하는 부하한테는 이야기가 다르지! 기분이다! 이 보스가 오랜만에 부하들한테 아량을 베풀어 주마!"

"감사합니다, 보스."

이태백은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치는 한편 손으로는 설무를 계속해서 살포했다.

레비가 암만 술에 꽐라가 됐다 한들 시야가 잡히면 바로 들킬 거다. 두 사람의 정체를 깨달은 그녀가 달려든다? 차라리 일이 잘 풀린 거다.

'나 혼자였으면 그랬겠지.'

그러나 강현성이 함께였다. 일인천살, 그는 유명인사였다. 레비는 갱 연합 수장쯤 되는 인물이다. 그를 모를 확률은 만에 하나라도 없었다.

갱 연합이 레지스탕스한테 깝치지 못하게 원인 제공을 한 당사자. 그 두 명 중 하나가 강현성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총대장이었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혼자 잠입하는 건데. 하기야, 이 사달을 누가 예측했겠나.

'서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데까지는 가려야 해.'

여기까지가 가용 마력을 전부 끌어다 쓰면서 안개를 피우는 이유다. 빌어먹을. 이번 거 끝나면 당분간 마법은 못 쓰겠군.

어찌 됐든 간에 성공했으니 됐다. 레비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무슨 고충이 그렇게 많이 쌓였는지, 말이 쏟아졌다. 그녀의 기구했던 인생사도 짤막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별로 막 드라마틱하진 않았다.

레비가 갱의 삶을 시작한 까닭은 가정환경이 아니었다. 그녀의 폭력적인 성향 때문이었다. 믿어라, 나 캐릭터 디자이너잖아.

그래도 술 취한 사람 놀려 먹는 게 가장 재밌다고. 썩 듣는 재미가 있었다. 강현성도 마찬가지인지 어느새 귀를 기울였다.

'이참에 마그노스트롬 탄생 비화도 들으려는 수작인가. 꽤나 집중하는 걸.'

문제는 마력이 아슬아슬했다. 이태백은 이러다 혼절할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저, 보스. 이번 임무 말입니다. 꼭 도존까지 끌어들여야 했습니까? 그 양반, 몸값이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선수금도 무지막지하게 처먹고 추가 비용도 처먹잖아요.

아무리 저희가 갱 연합의 주축이라고 해도 부담이 심할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도존이랑 계약은 물리시고. 차라리 레지스탕스랑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게 어떠실는지요. 그쪽이 더 싸게 먹히지 싶습니다."

"아~ 그거~?"

레비가 시시덕거리며 술병을 입에 댔다. 호박색 액체가 갸름한 턱선을 타고 흘렀다.

"선수금이 얼마였더라. 한 50억쯤 했지, 아마? 그 돈도 우리 갱단 입장에선 어마어마한 거금이긴 한데, 그 괴물이 해 줄 일에 비하면, 뭐."

레비는 퍄, 탄성을 뱉으며 엄지로 입술을 닦았다. 먼지가 옅어져 입가의 미소가 또렷이 보였다. 불길한 미소였다.

"해 줄 일이라 하시면."

"당연히 레지스탕스를 레이크 시티에서 삭제시켜 달라는 의뢰지. 뭐, 여기까지는 너희도 아는 얘기일 테지만 특별히 너희한테만 알려 줄게."

언성을 바닥에 깔릴 듯이 내렸다. 추위가 곁들여져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건 그렇고, 너 이름이 뭐냐?"

"태- 아니. 백태입니다."

이태백의 대답이 산통을 다소 깼다만.

"백태? 뭔 이름이 그따위야."

"어머니가 아버지와 첫키스하실 때 느꼈던 감상이시랍니다, 백태."

"와우. 생물학적 어멈이 꽤나 터프한 여자인가 보네. 꼭 나처럼."

"아무렴요."

이태백은 텅 빈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는 초연함을 넘어 해탈했다.

"하여간에. 백태야, 너 오늘 출근하고 이상하지 않았어? 우리 건물 안에 깡패 새끼들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예."

"일부러 좀 치는 애들은 따로 뺀 다음에 센티널 갱 쪽으로 급파시켰거든. 레지스탕스에 심어 둔 우리 조력한테서 오늘 정보가 들어왔는데, 글쎄. 레지스탕스 그 새끼들이 오늘 우리를 친다네?"

강현성의 동공이 갈 길을 잃었다. 왜냐하면 센티널 갱의 본거지는 총대장이 직접 출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직을 와해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말이야, 그 머리를 자르는 거야. *딸꾹* 레지스탕스의 구조는 비유하자면 거미야. 다리가 여덟에서 아홉 개나 된다고.

거기서 한두 개 잘라 봤자 조금 불편할 뿐. 딱 그뿐이야. 머리를, 머리를 잘라야 해. 그런데 총대장이 보통내기야? 갱 연합 수장들 벌잔이 달려들면 모를까, 나 혼자론 쪽도 못 쓰지."

이는 여덟 대대장-원래 아홉이지만 설탕물이 입원을 하는 바람에- 중에서 강현성'만'이 비밀리에 들은 사실. 그들 가운데 쁘락치가 있다는 가정이 송두리째 뒤집힌다.

'정보원이 대대장이 아니었다는 거야!'

…결론은 하나다. 쁘락치는 총대장의 사설 부대, 0대대였던 것이다. 강현성이 파리해지는 와중에도 레비는 술을 부어라 마셔 댔다.

"하지만 그 용병왕이 상대면 이야기가 완전 달라지지. 10익이 괜히 10익이겠으며, 괜히 뒤에 거창하게 '왕'이 붙겠어? 애는 먹겠지만 총대장은 도존의 상대가 되지는 못해."

"장담하는군, 요."

이태백이 발을 바닥에서 뜯어내며 말했다. 먼지는 가시기 직전이었거니와 마력도 바닥났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진짜 장난 안 치고, X나 세더라. *꺼억* 크흠, 흠. 여튼. 지금이 10시쯤이니까… 인제 곧 조우하겠네, 총대장이랑 도존이."

"그러니까 레비, 당신이 마그노스트롬의 정예를 보낸 이유는. 총대장이랑 싸운 이후의 도존을 노리려는 의도군."

이태백은 안개를 가르며 다가갔다.

"총대장의 그 '능력'이 있으면 어쨌든 도존을 잡을 순 있을 테니까."

"고렇쥐-! 백태, 너 좀 똑똑한데? 이것도 기분이다! 술김에 너무 퍼다 주는 것 같지만, 백태 너 승진! 승진 기념으로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줄게. 술, 담배, 여자. 말만 해!!"

이태백은 이미 지척에 도착해 있었다. 귀신같은 표홀한 등장에 레비는 살짝 움찔했으나 곧장 반색하며 그에게....

"X발, 잠깐. 너 누구야."

"나?"

이태백의 얼굴을 보자마자 레비의 낯빛에서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그녀는 다른 의미로 반색했다.

"이태백이다."

뭔가가 번뜩였다. 칼날이 레비의 빗장뼈를 쪼갰다. 그녀가 새 된 신음을 지르며 기울었다.

철푸덕!

급기야 낙마했다. 그런 소란통에도 벼락처럼 고개를 들어 적토마부터 찾았다. 하지만.

"뭐, 뭔?!"

이태백이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자신의 애마, 적토마 위에 앉은 채로.

그가 손목을 주억거리자 적토마가 투레질을 했다. 레비의 얼굴에 절망이 차올랐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적토마는 제조자랑 소유주한테만 반응하는-!"

말을 잘랐다.

"그럼 조건에 맞는 거다."

그대로 방향을 틀어 입구 쪽을 향했다. 강현성은 그 뒷모습과 마주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붉은색에 올라탄, 이태백. 처음 앉아 본 거라곤 믿기지 않는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나는 가 볼게. 여기는 너한테 맡기 마."

이태백의 눈앞, 시야의 소실점이 새총처럼 쭉 뒤로, 머나먼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탄성 좋게 당겨진 지평선이 꿈틀거린 찰나. 벽력음이 터지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후미등이 꼬리처럼 이태백의 자취를 뒤쫓았다.

"...."

"...."

적토마는 그렇게 미련 없이 옛 주인을 버리고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 * *

[#1 소규모] 1.8.7 패치 노트

◈ 메인 패치

• 「카네다 바이크(Kaneda Bike)」 일명 「적토마」의 소유권이 이전되었습니다.

• 소유권이 「갱 연합 수장: 레비」 → 「운영자: 이태백」으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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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나, 강림 (4)

건물 밖은 소강상태였다. 건물 외벽을 순찰하던 마그노스트롬의 수가 크게 줄었다.

시체를 발견한 갱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냅다 도망을 치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스겅-!

맞이하는 최후는 하나였다. 반응이 어떻든 그들은 하나같이 목이 나가떨어졌다.

"으음."

후미토는 굴러다니는 머리통을 야멸차게 발로 찼다. 객쩍은지 아랫입술이 댓발 나와 있었다.

"하- 노잼."

침음이 흐른다. 마그노스트롬은 명색이 갱 연합의 머리 아닌가. 하층과 최하층에서 나름 방귀 좀 뀐다는 놈들의 군집이잖아.

요즘 매사가 지루했다. 가슴 뜨거웠던 적을 꼽으라면 한 달이나 되감아야 했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목숨을 판돈으로 내건 생사결의 연속이었는데 말이야.'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레지스탕스가 궤도에 들어선 후부터는 그런 박투가 적어졌다. 그래서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린 그다.

장정 한 달 만이었다. 기대감에 부풀어 밤잠을 설쳤다.

"수준하고는."

한데, 적의 수준이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이건 뭐 빈 쭉정이나 다름없지 않나.

실력 차이가 심각할 정도로 극명했다. 이쪽은 세 명이고 저쪽은 수십 명이었어도 힘의 역학 관계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마그노스트롬의 정예는 수장 레비가 총대장이 있는 곳으로 파견한 것도 한몫했다.

본거지에 남아 있는 갱들은 대부분이 신참들이었다. X밥들이었다. 9대대와 간합을 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인간 백정 쇼헤이는 우두커니 서서 그저 허함만을 느꼈다.

낭만, 낭만이 부족했다. 혈관이 굵어지는 그런 감각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하아."

후미토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인기척이 등허리를 두드린 건 그때였다.

툭.

인기척이 배후에서 픽 스러진 것도 동시였다. 후미토는 슬쩍 눈만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버르적거리던 갱의 움직임이 이내 멎었다. 살충제 맞은 벌레처럼.

"야."

"...."

"죽었냐?"

"...."

"죽었냐고."

"...."

가뜩이나 기분이 짜게 식는 마당이다. 기껍게도 후미토 본인의 뒤통수를 노려 주던 갱이 뒈졌다.

후미토는 화가 났다. 먹잇감을 뺏긴 짐승의 심정이 딱 이럴 거다.

"왜 허락도 없이 죽어, 코노야로-!"

그가 씩씩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잘록한 허리의 여인이 달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유다희가 저격총을 어깨에 걸치며 으쓱했다. 이렇듯 동료들이 너무 유능해도 문제였다. 그 때문에 본인은 항상 욕구 불만에 시달렸다.

후미토는 양 허리춤에 검 두 자루를 수납했다. 그러고는 입구 방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갈등으로 흔들렸다.

'이참에 그냥....'

이태백과 강현성이 본거지로 들어간 지도 벌써 십 분이 지났다.

'그 둘 실력에 실패하겠냐마는.'

혹시 또 모를 일이지. 예상보다 갱 연합의 수장이 초강자였으며, 자신의 도움을 애타게 바라고 있을는지 말이다.

"야레야레(이런이런)."

저도 모르게 모국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거, 손을 보태 주러 가 줘야겠구먼.

후미토는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히쭉히쭉 웃으며 입구를 향해 발길을 틀었다.

무전기로 록의 노발대발이 고막을 찔러 댔다. 그러나 알파메일이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는 법. 무전기는 빼 두도록 하자.

"그래, 후미토. 나는 팀원들을 도와주러 가는 거야. 민폐 끼치는 게 아니라. 나 할 일 다 했잖아? 들어가서 살짝 재미를 봐도 탓할 사람은 없어. 그렇고말고...."

걸음을 옮기며 후미토가 한창 자기합리화를 하던 중이었다.

쿠르르릉!

굉음이 어둠을 짓눌렀다. 발아래에서 자잘한 잔해 따위가 떠올랐다. 칙쇼, 뭐야?

당황과 현실 사이의 지연은 짧다. 후미토가 신음했다. 쨍한 조명이 안구를 따갑게 기습했다. 광원지는 다름 아닌 입구였다.

자연스레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힘찬 투레질에 갱들이 화색을 띠었다. 반면 이태백의 동료들은 약속했다는 듯 해쓱해졌다.

'서, 설마...!'

적토마가 내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태백과 강현성이 질 거라곤 상상조차 안 했다. 9대대원들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쳤다.

"이런 개...!"

후미토가 이를 갈아붙이며 발도했다. 그때 헤드라이트가 눈에 박힐 듯 가까워졌다.

망막이 짜릿해지려는 차에 적토마가 직각으로 꺾였다. 후미토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력을 빠득빠득 그러모았다.

고무 타는 냄새, 백탁으로 물든 시야, 혓바닥을 맵게 만드는 매연. 오감으로 갈무리한 현장 정보들을 엮어서 심상을 구성했다.

그런 다음 눈을 떠 실체를 확인했다. 직후 후미토 일행과 갱들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너… 너, 너...."

바이크가 위용을 뽐내려는 것처럼 측면으로 멈춰 섰다. 빨간 보닛 사이로 두꺼운 투과창이 보였다. 그 안에선 연둣빛 알갱이들이 부대끼며 에너지를 생성하고 있었다.

"몇 번을 부르는 거야, 정신 차려."

적토마에 탑승한 자는 이태백이었다. 그가 한쪽 다리를 뻗어 무게를 버티며 섰다.

프시이이익-!

원통형 엔진이 증기를 내뿜었다. 적토마는 잔뜩 열이 오른 모습이었다. 애단 바퀴가 전류를 튀기면서 콘크리트를 녹였다.

이태백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흡사 적토마가 뿌리는 헤드라이트의 빛처럼.

"한시가 급하니까 설명은 짧게 할게."

마스크가 좌우로 갈라지며 입술만 드러났다. 그 틈으로 입김이 흐느적거렸다.

"작전을 바꾼다. 후미토, 너는 본거지로 들어가서 강현성을 도와. 걔랑 여자랑 대치하고 있을 텐데, 여자를 생포해. 사지가 멀쩡할 필요는 없어. 대신 반드시 생포해."

"...."

마가 뜨자 이태백이 채근했다.

"얼타지 말고!"

"어, 어!!"

이어서 옥상에서 보고 있을 록한테 무전을 때렸다. 그녀의 숨소리가 엇박을 탔다.

"부탁이 하나 있다."

이태백은 말을 덧붙였다. 대답을 기다려 줄 새가 없었다. 말마따나 한시가 급했다.

"가능하겠어?"

- *쉬익*

빨아들이는 호흡을 나는 '가능'으로 받아들였다. 맞을 거다, 아니 가능해야 한다.

치이익.

마스크가 다시 중심으로 모이며 하관을 잠갔다. 곧장 적토마의 말머리를 조정했다. 좁고 길게 뻗은 고가도로를 향해서였다.

잔존한 갱들은 그제야 낌새를 눈치챘다. 적토마에 탄 자가 그들의 보스가 아님을.

"씨, X발. 너 뭔데 보스의 애마를!"

"보스가… 보스가 당한 거야? 저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한테? 따먹지는 못할 망...!"

"X발 애초에 적토마는 보스만 다를 수 있는 바이크라고! 어떻게 저 새끼가-!!"

질겁한 갱들의 얼굴을 바이크 앞 유리 너머로 응시했다. 본래 계획은 몰래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정보가 들어왔다. 0대대 내부에 배신자가 암약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총대장은 배신자를 대동한 상태로 도존과 마주칠 예정이었다.

'은밀한 잠입은 글러 먹었군.'

바로 합류하지 않으면 총대장은 도존에게 죽는다. 그건 곧 레지스탕스의 붕괴를 뜻한다.

"강현성한텐 나중에 설명해야겠네."

지금쯤이면 눈치 좋은 유다희도 알아차렸을 터다. 헤드라이트로 갱들을 비춘 저의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 라져.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유다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태백은 그걸 동료 간의 믿음쯤으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달랐다.

기척 감지였다. 기척 차단의 윗단계인 그 기척 감지가 맞다.

습득의 발로는 그가 무의식 중에 원해서였다. 운영자의 바람은 구현되기 마련이다.

이태백은 재차 시동을 걸었다. 엔진의 전율이 엉덩이를 타고 정수리까지 치달았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당면한 과제가 목숨을 판돈으로 내걸어야 할 정도로 험했음에도.

적토마를 손에 넣어서 기뻤다. 전천후의 이동 수단이지 않은가. 시티에서 최고 출력의 바이크다.

다만 그보다도 남의 것을 강탈했다는 충만함이 조금 더 컸다. 날강도(진)이 머리를 든 탓이다.

이태백은 버석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자세를 낮게 숙였다.

바퀴가 제자리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며 바닥에 깊은 고랑을 팠다.

부르르르르-!

시야가 정중앙으로 굽는다. 한 번 더 손목을 까딱거리자 지평선이 점으로 쪼그라든다.

시위에 걸린 화살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몸이 쭉 늘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파앙-!

적토마가 질주했다.

* * *

◈ 기타 패치

• 사악한 성격의 영향을 받아 ⌜마력⌟의 비례 수치가 (+12.5%)로 상승했습니다.

• 악착같은 생활력이 발동해 ⌜생명⌟의 비례 수치가 (+13.7%)로 상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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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레이크 시티의 토질은 대체로 척박했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이 퇴적되어 끈적한 석유색을 띠었다.

그런 시티의 하층 구역에서 지구의 살색을 오롯이 간직한 구역인 32구. 회반죽에 가까운 땅들 사이에서 유일한 부직토인 지대. 그곳은 센티널 갱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 기름진 땅으로 센티널 갱은 작물을 재배했다.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갱이라니. 누가 들으면 웃지도 않을 농담이었다.

작물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센티널 갱이 경작하고 추수하는 식물의 이름은 '뽀삐'. 하이옌드 갱이 복용하던 '베르세르크'의 토대가 되는 풀떼기가 그것이었다.

도심 한복판에 비닐하우스가 즐비해 있었다. 그 비좁은 틈새를 총대장과 그 예하의 부대원들이 누볐다. 흰색 도포가 비닐에 쓸릴 때마다 파슬파슬한 소리를 내었다.

스윽.

그가 나아가다 말고 수신호를 보냈다. 뒤따르던 0대대원들이 정지했다. 머릿수는 총대장을 비롯해 총 아홉 명이었다.

- 많이도 만들어 놨네.

총대장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0대대가 친히 행차한 건 상기한 이유에서였다.

시티를 좀 먹을 수도 있는 약물의 생산장을 직접 보고, 또 확인했으면 살처분하기 위함이었다.

- 나름대로 자경대 역할이나 하라고 방치해 뒀더니 이딴 모략질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

- 태백이가 알려 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 깡패 새끼들이 하층을 완전히 점거할 때까지 하수구에서 썩고 있을 뻔했지 뭐야.

기계음에서 차가운 분노가 끓었다. 전후좌우 어디를 바라보아도 풀밭이었다. 저 풀들이 자라날수록 시티는 병들어 가는 셈이다.

"총대장님께서는 그 신입을 입에 달고 사시는군요."

좌익에서 따라붙던 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살짝 가시가 돋쳐 있었다.

- 편애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긴급 대대장 회의에서 그 녀석한테 우리 부대에 입단 제안을 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말하던 중간에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부하들도 남자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우묵한 눈빛들에서는 사나이들 간의 끈끈한 전우애를 엿볼 수 있었다.

남자는 0대대의 조장이었다. 총대장의 오른팔이었고, 그 권한은 대대장들에 준했다. 총대장에게 쓴소리가 가능했다.

"주제넘은 말일 수 있습니다만.... 0대대 예속은 조직 내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인 자만이 입단하는 게 관례입니다. 물론 총대장님의 재량으로 배정시킬 수야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겠지요."

- 내부에서 도는 말은 얼추 알고는 있어. 나도 귀가 있거든.

"그 또한 저희에겐 다르게 들립니다. 저희 0대대의 존재 의의는 총대장님의 눈과 귀가 되고자 함이니까요."

- 마음은 고마운데, 너희가 사이버네틱 의체도 아니고. 나도 나만의 눈과 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말씀은 저희 외에 별도의 정보원을 두고 계신다고 들립니다."

- 불만이 있으면 네 입으로 해. 남의 입을 빌리지 말고. 이태백을 너무 편애하는 것 같다. 그래서 0대대의 사기가 저해된다.

"...."

- 네 말에도 어폐가 있다. 이태백은 엄청난 실적을 올렸다. 첫 임무 때 그만한 활약을 보여 줬는데 아무런 보상이 없다면? 걔가 우리 조직에 남아 있을 이유는 하등 없지.

총대장은 사열한 대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는 기치를 이어 갔다.

- 너희들이 내심 섭섭해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당연하고.

"예...."

- 지금 시기가 시기인지라 투정을 받아 줄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새끼는 반드시 책임진다는 거 다들 알잖아. 이번 일 끝나면 확실하게 챙겨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총대장은 끝말을 잇지 못했다. 도포 자락이 조그맣게 펄럭였다.

비닐하우스가 폐암 환자의 허파처럼 위험하게 나부끼는 찰나에 그는 몸을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서 푸른 안광이 둥둥 떠 있었다. 그것이 어둠에 녹아들기 무섭게 그 귀불의 주인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양복 차림에 이지적인 외모였는데 그 점이 위화감을 조성했다. 그도 그럴 게, 날붙이를 바닥에 끌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붙이의 정체는 참마도였다. 실사용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두껍고 길쭉했다. 길이는 어림잡아 3M, 너비는 1M에 달했다.

"…무...."

대원 하나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았다.

10익 도존.

"…무야치!"

별안간 등장한 남자의 정체다.

55화 나, 강림 (5)

소실점까지 점점이 이어진 조명의 나열. 주황색 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시뻘건 보닛 위로 두 줄기의 선을 새겼다.

부아아아아앙!

적토마가 터널을 내달렸다. 운전하는 이태백은 불라 치는 바람을 얼굴로 맞았다.

몸을 웅크렸다. 바람의 저항을 최대한 줄였다. 적토마는 그래도 태생이 일자로 뻗은 늘씬한 몸이었기에 풍압 면적이 좁았다.

그 덕분에 터널의 날카로운 마파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터널을 주파했다. 적토마의 살갗을 기어다니던 조명들도 사라졌다.

축축한 밤공기가 머리카락을 확 쓸어 넘긴다. 터널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이태백은 공간이 변함에 따라 곧장 양손잡이 사이를 흘낏 확인했다.

계기판의 화살표가 휘청거렸고 전자 기판에서는 숫자가 가파른 기세로 오른다.

시속은 300을 가뿐히 넘어섰다. 어느덧 400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체가 덜컹거릴 때면 엉덩이가 살짝 뜨며 부유감마저 느껴졌다.

속도 위반은 당연했다. 대충 시속 200km쯤 초과했다. 중간에 검문에 걸릴 뻔했지.

경찰들은 이태백을 발견하고서는 과태료를 뗄 생각에 사이렌을 울리며 열심히 쫓았다.

그러다가 제풀에 꺾여 나가떨어졌다. 일반 차량으로는 음속에 근접하게 질주하는 바이크를 잡을 재간이 없다. 혀나 내두르며 뒤꽁무니를 구경하는 수밖에.

'더 빨리.'

이태백의 시선은 한 치 앞의 계기판이 아닌, 저기 저 지평선 너머에 가 닿아 있었다.

그가 조바심을 내는 까닭은 한 인물 때문이었다. 10익의 도존. 일명 용병왕.

'무야치.'

시나리오대로라면 최후반부에 나와야 할 거물. 용병왕이란 이명에 걸맞게 돈을 받고 폭력을 판다.

그의 주 고객층은 중견기업 사장이나 메가코프 간부에 주로 포진되어 있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하층 구역까지 납셨다.

착수금 50억은 도존에게 용돈벌이 수준이다. 그거나 벌자고 갱과 쎄쎄쎄 할 리는 없고, 다른 뜻이 있다는 건데… 도통 모르겠다.

괴짜가 정상인 레이컨스 세계관에서도 도존은 독보적이었다. 한 곳에 소속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도는 낭인 생활을 고집했다.

왜냐고? 그런 설정의 캐릭터가 있으면 멋있을 거 같아서. 그게 다였다. 아무튼.

도존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용병'이다. 그의 행동 철칙은 돈. 오직 돈이었다.

'돈으로 오히려 녀석을 사 버려?'

아마 안 될 거다. 도존은 돈 앞에 비정한 남자이나, 용병으로서의 책무는 반드시 완수한다.

계약으로 묶인 그는 억만금을 줘도 돌아서지 않으리라. 사실 가능하다 해도 그만한 돈이 없다. 몸값이 최소 60억이다. '최소'.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자본력은 갱 연합만도 못하다. 거지다. 그렇기에 하수구에 터를 잡고 산다. 반박을 차단하는 기가 막힌 삼단 논법이다.

'젠장.'

실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사신의 손길이 따로 없었다.

'10익을 견제할 수 있는 건 동급의....'

중얼거리던 이태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불현듯 스친 발상에다가 줄을 그어 치웠다.

당장 떠오르는 10익은 거존 용두방주였다.

하지만 협전을 사용해 그를 판에 앉혀 봤자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협전은 법개 이하의 계제에게만 쓸모가 있었다. 거지들을 불러서 투입해 봤자 떼죽음이나 당하겠지.

게다가 그딴 식으로 협전을 썼다간 개방과 척만 지게 될 터였다. 거기에 더해서 한국인 정서상 자살 부대는 용납할 수 없었다.

생각은 거미줄처럼 넓어진다. 이 사달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태백, 상상력의 대역폭을 어떻게든 붙잡아 늘려.

"…결국 내 직접 나서야 하는군."

하나 비빌 언덕은 도존이 중립적인 성향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질서 악이다. 본인이 정한 룰에서 벗어나는 걸 싫어한다.

이태백은 그걸 노려 보고자 한다. 그걸 위해서 록에게 부탁한 것도 받아 뒀다. 노림수가 먹혀 드는 건 별개의 문제다마는....

꾸욱-.

괜히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계기판의 침이 눕듯이 모로 기울더니 속도가 급격하게 높아진다. 칼바람이 피부를 슥슥 에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무너졌겠지.'

그러나 절망은 날 무너뜨리지 못한다. 내가 어떤 놈이야, X발. 전기의자를 버텼어.

이후로도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먹구름이 낄 듯하면 뇌의 가용 자원을 모두 투입하여 기어이 묘수를 찾아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마음에 드는 부분이 딱 하나 있다. 용기를 수혈했다는 것이다.

그 스스로 놀랄 정도로 정신의 회복 탄력성이 뛰어나졌다. 빙의자의 특전인지, 수시로 정신을 버프해서 나사가 풀린 건지.

이 상황을 보스 레이드에 빗대어 생각했다.

첫 번째 준비물은 록을 통해 확보했다. 다만 이는 밑그림이다.

본 게임으로 넘어가려면 파티원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같이 돌격할 사람 말고. 포지션으로 비유하자면 '서포터'가 절실했다.

어쨌든 작전의 개요는 다 짰다. 그러니 서포터에게 연락을 넣어 보자. 그래.

"창식아."

[아, 이태백 님. 연락 기다리고 있었-.]

릴리스 교단의 간부 김창식은 말했었다.

"부탁 좀 하나 하자."

[뭐든 말씀하세요, 태백 님.]

어떤 도움이든 간에 릴리스 교단은 발 벗고 이태백에게 협조할 거라고. 그것이 본인들이 섬기는 교주의 하명이라고 말이다.

* * *

총대장과 도존. 두 거물의 대치는 일견 숙연했다. 누구 하나 나서지 않고 반석처럼 굳었다.

한 갈래로 빗질한 머리와 도톰한 넥타이. 알맞게 접힌 바지 밑단 아래로 복숭아뼈가 도드라졌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샐러리맨이었다.

하나 눈빛에서 알 수 있다. 저건 괴물이다. 이 외에 뭐라 수식할 수 있겠는가.

사포처럼 퍼석한 시선은 영혼을 갈아붙이는 듯했으며, 무심하게 든 참마도는 축 늘어뜨렸음에도 뼈를 저며 오는 것 같았다.

가장 경악스러운 건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척 차단은 자면서도 하는 총대장이 도존의 접근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것도 도존이 일부러 냈을 거다.

하도 경이로워서 도존이 나타난 경위를 추측하는 것도 잊었다. 단원은 자신이 주저앉았다는 걸 무릎으로 느끼고서야 도존과 만났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 이거, 하층에서 귀한 얼굴을 다 보네. 명성은 익히 들었는데 보는 건 처음이야.

먼저 입을 연 쪽은 총대장이었다. 그러면서 두 팔을 들어 가오리처럼 소매를 펼쳤다. 도존의 신경이 본인에게만 향하도록.

- 마실 나온 건 아닐 테고. 우리가 오는 시간에 딱 맞춰서 무기를 끌고 나왔으니 더더욱 우연이 아닐 테고.

그리 말하며 총대장은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조장이 면목 없다는 듯 눈을 떨궜다.

- 불만이 있으면 따로 말로 해 주지 그랬어. 우리가 그래도 그 정도 사이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죄송합니다."

- 시티에서 가장 실없는 게 사과야.

"…총대장님이 저희에게 조금만 더 신경을 쓰셨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변명에 총대장이 눌린 웃음을 터뜨렸다.

- 아까도 말했지만 네 자격지심을 다른 0대대원들에게까지 전가하지 마.

"저는!"

- 내가 지면 여기 있는 0대대원들은 전멸이야. 뭐, 나름 약속을 받았겠지. 나만 죽이고 얘네는 살려 주는 방향으로. 그게 순전히 동료애 때문일까?

배신은 시티에서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잇속 때문에 피붙이를 팔기도 했다. 하물며 남몰래 꽁했던 부하는 말해 무엇하랴.

- 아니잖아. 그건 그저 네 마음의 짐을 여기 있는 전원과 나누고 싶다는 이기심 아니야?

"...."

총대장이 꼬집는 바는 추잡한 위선이었다. 본인의 배신에 명분을 어떻게든 집어넣었다.

- 네가 부하들을 진정으로 신경을 썼더라면 나를 배신하더라도, 얘네의 의사를 물어봤겠지. 그런데 반응들을 보니 아닌 것 같구나.

조장은 단원들을 쳐다보았다. 경멸의 감정이 신뢰로 가득했던 눈동자를 갈음했다.

"실망입니다, 조장."

"너, 너희들-!!"

조장이 부랴부랴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볼썽사납게 나자빠졌다.

"배신자의 말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

배신자에게서 눈길을 거둔 단원들이 무기를 꺼냈다. 도존이 붕대를 풀더니 손과 검 자루를 동여 묶었다. 전투가 임박했다.

"함께하겠습니다, 총대장님. 최대한 당신의 퇴로를 확보해 보겠습니다."

"이럴 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미안하다. 다른 상대면 몰라도 10익이야. 등을 보이면 선 채로 죽는다고 생각해."

"예."

그때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줄곧 조용했던 도존이었다.

"방금 너희가 거론한 이름."

그러면서 이빨로 붕대 끈을 툭툭 당겨 매듭을 고정했다. 손과 도가 하나가 되었다.

"이태백이라고 했던가."

- 웬일이래, 대용병왕께서 남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총대장이 날 서게 대꾸했다. 도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감정 변화를 읽지 못했다.

"내가 이런 푼돈 의뢰를 수주한 게 그 녀석 때문이라 묻는 거다."

- ...뭐?

"얼마 전 우연찮게 천마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놈이 웃기는 말을 하더군. 어느 날 예지몽을 꿨는데, 웬 검은 머리 한국인한테 패하는 꿈이었다더군."

- 반신인 천마가 뭔 그런 꿈을 꾼다니. 짜치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녀석의 꿈은 대개 현실로 나타나지."

도존이 검을 앞으로 기울였다.

"궁금하더군. 그래서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 탐색은 어렵지 않았어. 최근 검은 머리 한국인이 뇌옥을 탈출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거든. 그리고 레지스탕스랑 같이 갱들을 척살하고 다닌다길래 얼굴 좀 볼까 해서 온 거야."

- 우리 태백이, 인기가 많구나, 많아. 근데 어쩌지. 너 같은 괴물 새끼랑 소개팅시켜 줄 생각은 없어.

"못 만나도 상관없다."

도존이 위험하게 웃었다.

"레지스탕스의 총대장. 몇 년 전 지존과 열 합가량을 겨뤘던 네 실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 같거든."

공기압이 바뀌었다. 도존이 살기를 발산하자 단원 둘이 침을 흘리면서 기절했다.

그마저도 힘의 사분지 일이나 될까 싶었다. 진심을 내면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까.

더 미적거렸다간 총대장만 남고 다 기절하게 생겼다. 단원 하나가 다릿심을 쥐어짜 내서 달려들었다. 동시에 도존의 어깨가 흐릿해지려는 찰나였다.

부아아아아앙!

멀리서 울리던 엔진음은 잠깐 얼을 타는 사이, 굉음으로 덮쳐온다. 0대대 단원과 도존은 공격 직전의 자세로 눈동자만 들었다.

시뻘건 형체가 비닐하우스의 곡면을 타고서 솟구쳤다. 다음 순간 충격파가 터지더니 적토마의 측면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쓸렸다.

이태백이 밤바람을 두르고 현장을 급습했다. 0대대원들의 표정이 봐줄 만했다.

도존과 총대장 두 사람만이 외면에 변화가 없다시피 했다. 살짝 놀랐다 정도?

'지금이 타이밍이다.'

스위치를 눌렀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주의를 끌더니 대화가 흘러나왔다.

=진짜 장난 안 치고, X나 세더라. *꺼억* 크흠, 흠. 여튼. 지금이 10시쯤이니까… 인제 곧 조우하겠네. 총대장이랑 도존이.=

레비의 목소리였다. 강현성의 시점으로 록이 녹취를 땄다.

=그러니까 레비, 당신이 마그노스트롬의 정예를 보낸 이유는. 총대장이랑 싸운 이후의 도존을 노리려는 의도군. 총대장의 그 '능력'이 있으면 어쨌든 도존을 잡을 순 있을 테니까.=

=고렇쥐-! 백태, 너 좀 똑똑한데? 이것도 기분이다! 술김에 너무 퍼다 주는 것 같지만, 백태 너 승진! 승진 기념으로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줄게. 술, 담배, 여자....=

'삑'. 이태백은 절단 신공을 시전했다. 들리지 않는 항의성 소음이 빗발치는 듯했다.

"도존."

그 시점에서 준비했던 대사를 내뱉었다.

"거래를 하러 왔다."

[시전자의 정신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56화 나, 강림 (6)

"거래를 하러 왔다, 도존."

이태백은 재차 말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굵직굵직했다.

"갱 연합의 수장은 네 뒤통수를 치려고 했어.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게 착수금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싶군."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실제론 냉가슴을 앓고 있다. 이건 목숨을 건 도박이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10익을 상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두고 보니 일반인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이태백은 고개를 도존을 향해 고정한 채로 눈만 살짝 굴렸다.

레지스탕스에서 엘리트로 꼽히는 0대대원 두 명이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이걸 토대로 도존과의 격차를 대리 체험했다.

'아직은 못 이긴다.'

계속 상기하지 않았나, 이태백. 용기와 객기는 분리해서 생각하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나선 것까지가 용기요, 무턱대고 칼을 내지르는 건 객기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라. 그러면 승리는 불가능해도 하다못해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이다.

"...."

도존 무야치는 목을 까닥 기울이며 이태백을 응시했다. 볼 땐 보더라도 칼은 좀 내려 줬으면 참 좋겠는데.

'도존은 내 팀원 중 하나가 디자인했지 아마.'

살벌하게도 만들어 놨군. 양복 차림에 참마도를 들고 다니는 디자인이라니. 기이한 조합에 소름이 끼친다.

그런 마당에 조용히 고개만 갸웃하니 그림으로 그린 듯한 숫제 사이코패스였다.

"네가 이태백이군."

도존이 드디어 입을 뗐다. 어째서인지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얹어진 채였다.

"상상한 이미지랑은 다르군."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하게 됐어."

이태백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방금 정신을 버프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세 싸움이라면 자신 있었다.

"좀 더 남자답게 생겼을 줄 알았다. 처음 봤을 때는 가슴 없는 여자라 생각했어."

"여자같이 생겼다는 말 좀 그만 듣고 싶다."

이태백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도존으로선 신선하게 느껴질 터.

아무렴. 고절하신 10익께 이만치 말대꾸하는 사람이 있었겠나.

통상 고개를 조아리거나 거리를 두거나 했겠지. 그것이 강자의 숙명이다. 대부분이 자신보다 약자이므로 자연스레 유리될 수밖에 없다. 자연선택에 의해 생존은 이득을 보겠으나 사회는 그를 배척한다. 같은 10익끼리는 이해관계가 얽힌 탓에 정을 쌓기 어려웠다. 요컨대 그는 외로움을 타고 있다.

'도존은 설정상 패기 넘치는 자를 좋아한다.'

도존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과묵'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제 성격은 달랐다. 그는 나름 수다를 즐기는 타입이었다. 물론 '대화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라는 전제가 붙지만.

개발자로서 도존의 성향을 알기에 가능한 도박이다. 응당 빙의자라면 적극적으로 사전 지식을 써먹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레지스탕스에 뱀이 들어갔다더니, 뱀은 아니군. 용의 꼬리쯤은 되겠어."

도존 무야치가 살기를 거두며 조소했다. 추켜올린 참마도 역시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깨를 짓누르던 공기압이 한결 가벼워졌다.

'반은 성공했다.'

쾌재를 부를 새는 없었다. 도존이 변죽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총대장과 0대대원들에게서 뜯어낸 시선을 내다 꽂았다.

"이 짓거리 하면서 가장 많이 겪는 게 뭔 줄 아나."

대관절 그런 질문을 던졌다. 이태백은 적토마에서 훌쩍 내려오며 대꾸했다.

"말해 뭐 해, 사람 죽이는 일이겠지."

"아니."

용병왕이라 불리는 자가 다가오고 있다. 총대장과 0대대원들은 시립한 상태로 얼었다. 이태백이 움직이지 말라고 수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일개 단원 주제에 총수와 그 직속 부대에게 하명하다니.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또 있을까.

'변수를 줄여야 한다.'

기껏 궁리한 계획이 어그러질 바에 차라리 징계가 낫다.

다행히 총대장은 순순히 그의 지시를 따라 주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러섰다.

그러자 부하들도 엉거주춤 현장에서 거리를 벌렸다. 도존은 그들에게 관심이 식었는지 괘념치 않았다.

"의뢰주가 뒤통수를 치는 일이야."

그가 계속 말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열에 여덟은 협잡을 꾸미더군.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니 여섯 정도로 줄었어. 더 흐르고 나니 셋. 종국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 내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아나?"

"용병은 명성이 오를수록 뒤통수가 안전해진다는 소리군."

마스크는 벗고 파라 블레이드는 손에 쥐었다.

"또한 도존, 네 뒤를 노리던 의뢰주들을 전부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정답이다."

도존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참마도를 횡으로 그었다.

■■■■■■■■■■■!

공간이 어슷하게 썰렸다.

매서운 검풍이 얼굴로 육박했다. 앞머리가 산발이 되기 무섭게 빽빽했던 비닐하우스들이 모조리 내려앉았다.

직후 도존이 기백을 뿜어냈다.

가녀리게 드러난 철골이 납작 우그러들었다. 순식간에 눈앞 시야가 말끔히 열렸다. 애초에 이 구역은 평지였다는 것처럼.

'미친.'

이태백의 동공이 쪼그라들었다. 곳곳에서 스멀스멀 피 웅덩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낮게 자란 식물들이 비닐과 잔해 따위에 깔린 고기들이 흘린 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 시체 수가 못해도 백이 넘어 보였다.

'마그노스트롬이 비닐하우스 안에 숨어 때를 기다렸던 거다.'

레비 말마따나 정예를 파견한 모양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숨어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 정예들이 전멸.

...도존이 갱단 하나를 지우는 데는 한 번의 칼질이면 충분한 것이다. 경이로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태백과 총대장, 0대대는 용케도 목숨을 보전했다. 도존이 문자 그대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와중에 그들의 목은 붙여 놓았다.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더듬더듬 매만지며, 이태백은 한 가지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경외였다.

가죽 아래로 피가 흐르는 인간이 어찌 이토록 강할 수 있는가. 도(刀)의 정점에 달했다는 평가는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검에 통달한 자.

"그쪽의 착수금은 받도록 하지."

그가 우묵하게 이태백을 보았다.

"하지만 레비한테 이미 선수금을 받았다. 50억."

"…그 계약은 이걸로 파기된 게 아니었나...?"

"계산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용병마다 신조는 다르겠지만, 나는 받은 만큼은 한다. 물론 추가 금액을 받아 내지는 못하겠지. 그래서 역으로 제안한다. 나 무야치는 칼질 한 번에 5억씩 받기로 계약했다. 그리고 미리 받은 금액은 50억. 칼질 열 번의 가격이다."

도존이 참마도를 앞으로 뻗었다.

"내 칼질 열 번을 버텨 봐라, 이태백. 그러면 네가 입에 담은 그 계약의 내용을 기꺼이 들어 보마, 무상으로."

총대장이 끼어들려고 하자 도존이 경고했다.

"용병 계약에서 제삼자의 개입은 곧 파기를 의미한다. 알고서도 끼어들 텐가?"

"알겠다."

이태백은 싸늘하게 일별하는 도존의 시선을 도로 가져왔다.

"열 합, 버텨 볼게."

"시원시원해서 좋군."

도존이 허공에 참마도를 내리치자, 바닥에 경계선이 패였다. 깊이가 성인 남성 키만 했다.

"열 합을 다 겨루기 전에 저놈들이 끼어들면 그 순간 전부 다 죽이겠다. 특히 레지스탕스의 총대장. 네가 수작질을 부리려 하면 대대장들을 찾아가 모조리 죽이겠다."

"협박은 그만하고."

이태백이 개폐 버튼을 눌렀다.

"시작하자."

* * *

도존은 참마도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섰다. 그가 검을 든 자세는 검술의 교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쪽 발을 좁은 보폭으로 내딛고 무게중심은 앞으로 치우치게 했다.

이태백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맥박에 선율이 있다면 장송곡 하나가 나오리라.

도존이 유령처럼 흔들리더니 가볍게 달려들었다. 달리면서 검을 올려 치는 모습이 이태백의 망막에 담겼다.

도존은 이태백을 아래에서 위로 쪼개 버릴 셈이었다. 돌진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도약 한 번에 지축이 흔들렸다.

이태백은 칼날을 눕히고 남은 손으로 검면을 눌렀다. 검격이 바닥에서 하늘로 솟구치며 칼날을 때렸다. 소리보다 빠른 공격이다.

쿠웅-!

시야가 새카맣다.

별이 튀는 것도 아니고 암전이었다.

뭐지? 일격에 죽은 건가? 불안이 엄습하는 그때 손이 터지는 듯한 진통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절망은 이제부터였다.

이태백은 연거푸 눈썹을 끔뻑거리며 시야를 확보하려 했다.

다음 순간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시티가 한눈에 보였다. 인간의 욕망이 뒤엉킨 불빛이 도시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다만 풍경이 거꾸로 뒤집힌 채였다. 눈이 자연스레 내려갔다. 발밑에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땅보다 하늘과 가까웠다.

중력이 그를 잡아당겼다. 위산이 역류했다. 구토기가 목젖을 시큰하게 적셨지만, 재빨리 공중제비를 돌아 똑바로 섰다.

동시에 정면에서 인기척이 불쑥 솟아났다. 도존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지반이 무너졌고 도약은 지진을 동반했다.

이게 사람 새낀가? 이건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돌파한 뭔가였다.

"첫 합은 맛보기였다."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다는 검격. 이태백은 우산과 칼을 절묘하게 교차해 막았다. 검날이 맞물리는 즉시 밀려났다.

도존의 공세는 끊기지 않았다.

그가 허공을 답보하며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점으로 보였던 참마도도 덩달아 쭉 늘어났다.

이태백이 과도하게 허리를 뒤로 젖혔다. 참마도가 콧등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코끝이 매워짐과 함께 눈앞에 거울이 놓였다.

잘 관리된 참마도의 검면이 이태백의 얼굴을 반영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그는 눈을 감았다.

[운영자의 생명 능력치가 너프됩니다.]

HP를 1만 남기고 전부 제약으로 걸었다. 상관 없다. 어차피 한 대 맞으면 죽는 파리 목숨이었다.

[운영자의 신앙 능력치가 너프됩니다.]

회복력도 저감했다. 이 또한 괜찮았다. 신앙이 암만 높아 봤자 목이 잘리면 즉사였다.

[운영자가 민첩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두 능력치를 제물로 바치는 대신, 체공 시간을 늘려 버려라. 완력 차를 메꿀 수 없다면 속도로 밀어붙인다.

눈을 뜰 시간이다, 이태백.

뇌가 야구공 크기로 수축되는 느낌이다. 능력 발동은 여러 개였으나 흐른 시간은 찰나였다.

이태백은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회전했다. 그의 발끝이 바람처럼 도존의 손목을 스쳤다.

[상대방의 생명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상대방의 신앙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상대방의 정신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상대방의 마력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전혀 예상 못 한 듯 도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태백은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도존을 상대로 승리할 가망은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실력적 낙차를 단숨에 극복하기란 무리였다.

그러나 도존이 내건 조건은 '자신에게서 승리'가 아니었다.

열 합, 어떻게든 딱 열 합을 버텨 내는 게 조건이었다.

이태백의 뇌는 곧바로 도존 공략법을 뽑아냈다. 열등한 처지에서 최선을 짜내는 행위야말로 보스 레이드의 묘미다.

그는 무수히 연역을 반복했고 답을 도출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약 발동으로 불릿타임의 효과가 60배 상승.]

나는 빠르게.

[상대방의 민첩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버프의 반동으로 너프 효력이 증가.]

[상대방의 민첩이 100배 느려집니다.]

너는 느리게.

57화 나, 강림 (7)

간신히 의식은 붙잡고 있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간당간당했다. 버프와 너프의 중첩.

거기에 더해 제약까지 몽땅 퍼부은 바람에 영혼이 벼랑 끝으로 몰린 것이었다.

'능력을 한 번에 몇 개나 시전한 거야.'

뇌압이 높아진다. 코피가 흐르며 인중이 빨갛게 물들었다. 의식은 심연으로 추락하고 무의식이 그 공백을 대체하듯 차올랐다.

도존의 동공이 미약하게 감정의 빛이 스친다.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이 흐릿해진다.

그런 와중에도 도존은 검격을 이어 치려는 듯했다. 다만 느렸다. 그의 움직임은 가위로 오려 붙인 듯 프레임 단위로 끊어졌다.

내가 불릿타임×60으로 시간을 한없이 쪼갰기 때문이다. 나는 이 창졸간을 이용해 걸레짝이 된 정신을 수복할 요량이었다.

그러려던 때였다.

- 이 대리.

목소리가 맴돈다. 음성의 주인은 이런 상황에서도 바로 식별이 된다. 왜냐하면 날 대리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

이건 뭡니까, 서 팀장님. 왜 이 타이밍에 당신 목소리가. 나는 대답하려 했으나 입술이 의지를 거부하고서 멋대로 달싹거린다.

'업무 추가면 사표 내겠습니다.'

- 아, 그런 거 아니래두!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부하 야근시키는 악덕 팀장 같잖아요!

'썩 틀린 말은 아닌....'

잠깐 반추해 봤다. 이건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 안 나는데 어쨌든 그녀와 나눴던 대화임은 확실했다.

X발. 주마등이라도 보여 주는 거냐?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이제 본 게임 시작했다고. 인제야 좀 비빌 언덕이 보이는 것 같은데!

- 과연 이 대리야. 평소에 농담할 때도 무표정해서 오해를 많이 사잖아요. 문득 궁금하네. 이 대리는 왜 표정이 그래요?

'인신 모독성 발언인데요. 노동청에 신고하겠습니다.'

- 이렇게 된 거 이왕 야근까지 쌈빡하게 해서 스택 쌓는 거 어때. 노동청이 좋아할 텐데.

'죄송함다.'

팀장님은 옅게 웃었다. 사탄이 겹쳐 보인다. 야근이란 회피 불가 필살기를 마주한 나는 잠시 잠깐 골몰하더니 말문을 뗐다.

'글쎄요… 원래부터 이러긴 했는데, 이 회사 들어오고 나서. 엄밀히는 캐릭이랑 보스 디자인팀에 합류한 뒤로 더 심해진 것 같긴 하네요.'

- 보스 디자인이랑 이 대리가 항상 식물 같은 표정인 거랑 무슨 상관인 거죠.

'이 자리에 있으면 절로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머릿속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랑 바둑을 두는 듯한 기분이랄까. 대충 그래요.'

사무실 안. 과거의 이태백은 주먹 밑면으로 팔 받침대를 툭툭 치면서 부연했다.

'보스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수싸움 설계입니다. 유저가 보스한테 처음 도전할 때는 무력감을 느끼게끔 설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공략할 실마리가 보이게 만들어야 하죠. 그렇게 계속해서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한편, 끝에 가서 보스는 유저에게 잡혀야 합니다.'

- 그럼. 그 도전 욕구를 끌어내는 게수 싸움이다?

그녀가 검지로 앙증맞게 턱을 짚었다.

'네. 피지컬로만 깨게 만들면 유저 대부분이 이탈합니다. 환불하겠죠. 하지만 파밍이 충분할수록, 보스의 패턴을 알수록 점진적으로 우세를 점하게 하면 컴 앞에서 밤새우는 거죠.'

- 수싸움이야말로 이 대리의 특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뭐, 그렇죠. 덕분에 팀장님이랑 팀원들한테 인격이 말살된 게임 기계 취급을 받지만.'

- 그 특기."

서 팀장님은 미소를 걸었다. 볼 우물이 패일 정도로 선명한 호선을.

"이번에도 발휘해 봐요."

마지막 말은 실제 음성이었다. 환각 아니었어? 눈동자가 지진계의 묘침처럼 흔들린다.

그러나 내 의문은 이내 조류에 휩쓸린다. 과거의 기억이 현실로 스며든다.

무의식이 조류에 휩쓸려 현실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표층 의식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시간이 속도를 되찾았다. 정지했던 세계가 분명한 유속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 * *

[혼돈 여신의 편애가 작용합니다.]

['나는 지지 않는다'가 발동합니다.]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 * *

구름의 차가움이 온몸을 감싼다. 이태백은 무궁한 하늘을 비행했다. 도존과 함께.

정직하게는 몸이 아래로 쑥 꺼지는 중이었지만, 어쨌건.

당황한 조짐을 보이는 듯했던 도존은 곧장 표정을 굳혔다. 온갖 수라장을 헤쳐 온 그다.

더욱이 용병 업계의 정점으로 통하는 무야치 아닌가? 용병왕이란 이명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무야치의 심계는 고절했다. 뭇 인간이라면 까무러칠 이 기현상조차 그를 공황에 빠뜨리진 못하리라.

이와 별개로 도존의 얼굴에는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항상 무심한 일자(一)를 그렸던 그의 입매가 미소를 그린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닳고 닳아 뛰는 법을 잊었던 심장이 옅게, 하지만 확실하게 약동하고 있었다. 이 얼마 만인가?

"너는 분명 나보다 약하다."

다짜고짜 도존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 음성은 바람에 부서지지 않고 고막에 직접 꽂혔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행동을 느리게 만들었군. 대충 100배쯤."

미친 새끼. 어떻게 한 번에 눈치채냐? 그것도 정확한 수치로. 게다가 입꼬리마저 올리니 이쪽이 공포에 질릴 지경이다.

"같은 검사인 줄 알았는데, 마법까지 부릴 줄이야. 천마가 마음에 들어 할 인재로군."

"...."

이태백은 대꾸하지 않았다. 기압 차이 때문에 숨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 합, 단 세 합 만에 너는 나를 즐겁게 했다."

추락하면서 도존은 어깨를 세 뼘 뒤로 뺐다. 이태백은 그 순간을 포착했다.

'원래라면 맞고 반응했겠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도존의 행동이 비교적 느려졌거니와, 이태백의 인지 능력은 벼려졌다. 감각 전체가 구토할 정도로 말이다.

다음 일격은 큰 횡 베기다. 도존이 이야기를 마친 직후 작렬할 것이다.

이태백은 몸을 펼치며 공기 저항을 넓혔다. 스카이다이빙의 자세다, 다만 낙하산이 없는. 그 일련의 과정은 아음속에 비견됐다.

"오늘 네가 내 칼에 죽어도."

도존이 말한다.

"나는 네 이름을 기억할 거다, 이태백."

도존이 뒷발을 맹렬하게 치달았다. 동시다발적으로 그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참마도가 길쭉한 빛살로 변하더니 밤하늘에 흉터를 남긴다.

파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산 원단이 기지개를 켰다. 이태백은 우산의 심지를 두 손으로 붙잡으며 파라 블레이드의 방어력을 버프했다.

'네 번째, 참격.'

파라 블레이드가 참격을 맞이했다. 또다시 이태백의 몸이 날아간다. 그는 등으로 바람을 맞으며 비행운을 찢어발겼다.

웅- 웅- 웅- 웅....

머리가 진탕 흔들린다. 무려 네 합을 지상도 아닌 상공에서 맞고 버텼다.

몸 상태가 정상일 리가 없다. 심각할 것이다. 손가락 뼈가 못해도 세 개는 부려졌다. 아무래도 통증을 담당하는 감각 기관이 망가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태백은 우산을 접었다. 막기만 해서는 승산이 없다. 장애에서 눈을 돌리지 말고 마주해라. 도전이란 그런 것이다.

파바박! 도존이 구름을 뚫고 이쪽을 향해 쇄도해 왔다. 100배 느려진 게 저 정도라니.

이태백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반격의 자세를 취했다. 속도적 우위를 이용한다.

도존이 공기를 박차며 초근거리로 들어설 무렵. 이태백은 우산을 엉치께로 수납한 뒤, 곧바로 '탁'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빙벽]

이태백의 앞으로 구름이 내장처럼 꿀렁이더니 곧 만다라 무늬를 겹겹이 만들었다. 이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마른하늘에 흩어졌다.

도존, 무야치가 어깨로 역장과 부딪치면서 이태백을 향해 다가들었다.

하지만 참마도가 희번덕거리기 무섭게 만다라가 생성되며 그를 걸고넘어졌다.

이태백은 검지와 엄지를 뜯겨 나갈 기세로 튕겼다. 만다라 역장이 그의 발아래에서 지상까지 수십 겹으로 층층이 쌓였다.

도존이 빙벽에 막힌 틈을 타 이태백은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다음 발을 굴렸다.

[중력을 버프합니다.]

깃털처럼 표표했던 몸이 일순 물이라도 먹은 것처럼 쑥 가라앉는다. 놓칠세라 도존이 참마도를 휘둘렀지만, 이미 각은 벌어진 뒤였다.

공처럼 몸을 만 이태백이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이대로면 바닥에 닿는 즉시 터져 죽는다.

얼음 그물은 이를 대한 대비책이었다. 역장이 줄지어 깨지면서 완충 작용을 한다.

살얼음판이 오십 개가량 깨질 때. 그제야 이태백의 발이 바닥을 밟을 수 있었다.

쿠우우웅!

도존 무야치 역시나 콘크리트를 움푹 주저앉히며 지상에 강림했다. 먼지 사이로 귀불 한 쌍이 흐느적거린다.

그는 완충제 없이도 건재했다. 한쪽 콧볼을 막고 킁, 하고 피를 빼낸다. 그걸로 끝이었다.

중력을 세 배쯤 버프하여 떨어지는 충격을 높였는데 코피만 쏟다니. 하여간에 괴물 새끼다.

도존 무야치가 씨익 이를 드러냈다. 코피가 대문니를 빨갛게 도포했다. 그는 넥타이로 인중을 슥슥 대충 훔쳤다.

콰아아아앙!

그러고는 재차 덤벼들었다. 제지하기 위해 마법을 시전하려는 찰나. 놈이 참마도를 옆으로 뻗더니 그대로 내리그었다.

부우우욱, 별안간 천 찢기는 소리가 났다. 칼끝이 단어 그대로 공간을 절개한 것이다. 차원의 속살은 밤보다도 진한 묵색이었다.

참마도를 쑥 쑤시듯이 집어넣는다. 입을 벌린 차원 안으로 검날의 절반이 잠겼다.

'왔구나!'

저것이 도존이 도존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그의 참마도는 차원을 찢고 예측 불가한 방향에서 참격을 쏟아 낸다.

그 말인즉슨, 도존이 진심을 냈다는 의미였다. 젠장, 사자는 쥐새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투정할 새는 없다. 어둠이 물결치더니 허공에서 참마도가 쑥 찔러 왔다. 이태백은 버프로 정신의 강도를 조정하고 대응했다.

칼을 가져다 대고 검길을 비틀었다. 금속끼리 얽혀 들며 소름 돋는 파찰음이 울렸다. 이태백의 팔뚝에는 울긋불긋 혈관이 일어섰다.

차원 참격이 잇따랐다. 이태백은 버프된 민첩으로 한발 먼저 반응하는 것으로 변화무쌍한 공세를 빗겨 쳤다, 그렇게 네 번을.

한 방 한 방이 목숨을 위협하는 검격이었다. 주변의 지형을 바꿀 정도였다.

깜빡깜빡 명멸하던 구도심의 낡은 가로등들이 갈대처럼 드러누웠고, 끊긴 전선이 바닥에 늘어져 불티를 튀겨 댔다.

쐐애애애액!

참마도를 통과시킨 이태백이 진각을 밟았다. 그의 그림자가 오색의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도존에게 날아들었다.

'앞으로 남은 건 단 한 합!'

도존의 반응은 두 박자 늦게였다. 그는 굼뜨게 검 손잡이를 당기다가, 안 되겠는지 주먹을 뻗어 냈다. 필사적이진 않은 절제된 동작.

권풍이 몰아쳤다. 강맹한 바람을 느끼며 이태백은 파이톤을 뽑아 들었다.

이번에는 도존도 살짝 황당한 모양이었다. '총도 써?'라는 눈빛이었다.

이럴 때마다 짜릿하다.

그러나 10익이나 되는 강자에게 총은 사용 가치가 없었다. 되레 실착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하면 그 용도는 뭔가.

이렇게 쓰기 위함이다.

총구를 위로 꺾은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하늘에 남아 있던 얼음 만다라가 박살 나면서 그 잔해들이 지상을 뒤덮었다.

도존도 순간 몽롱해졌다. 그는 뺨으로 차가움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마도도 툭 떨어져 콘크리트에 흠집을 냈다.

불투명한 막이 깨지자, 웬 무리가 초승달에 걸린 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는데, 월광을 맞으니 정말 무슨 천사처럼 보였다. 릴리스 교단이었다.

그들을 치장한 쇠붙이는 윙슈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손에 배수관을 들고 있었다. 하늘과 지상을 동아줄로 잇는 듯했다.

배수관의 발원지는 비닐하우스 근방이었다. 식물을 재배하려면 배수 시설이 필수였다. 릴리스 교단은 땅에서 펌프를 끄집어 낸 다음 각기 챙긴 것이었다.

행렬의 중심에는 교단의 간부인 김창식이 있었다. 이태백이 그를 향해 외쳤다.

"지금-!!"

신호를 받은 그가 부하들에게 눈짓을 줬다. 그들이 합을 맞춰 밸브를 돌렸다. 수십 개의 배수관이 물벼락을 퍼붓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그쯤 되니 도존도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스무 걸음 남짓한 곳에서 이태백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어느새 우산을 쓴 채.

지난 과정이 스쳤다.

이태백은 도존을 너프했다.

그로써 수세에 몰릴지언정 도존의 공격에서 회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태백은 중력을 강화했다.

해서 도존은 발이 묶여 릴리스 교단의 행사를 멀뚱멀뚱 구경만 해야 했다.

이태백은 역장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릴리스 교단의 존재감을 도존의 시야에서 완벽하게 지워 낸 것이었다.

- 수싸움이야말로 이 대리의 특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녀가 웃으며 했던 말.

- 그 특기, 이번에도 발휘해 봐요.

나는 행동으로 옮겼다.

[글라키에스(Glácĭes)]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시허연 동심원. 냉기의 파도가 지우개질이라도 하듯 콘크리트의 석유색을 게걸스레 빨아 먹었다.

도존의 코끝에 고드름이 맺힌 건 직후였다. 눈꼬리에는 투명한 고체가 눈물처럼 자리 잡았다.

58화 호수의 잔물결 (1)

도존 무야치의 동공에서 생기가 식었다. 그의 안구는 막이 씐 듯 투명하게 번들거렸으며, 머리와 눈썹은 그새 백발로 샜다.

배수관은 그러는 동안에도 물을 토했다. 그러다가 저장고가 기어이 바닥을 드러냈는지 이윽고 물 몇 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시릿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태백이 손에 힘을 뺐다. 부러진 손가락을 열심히도 튕겨 댔다. 인대가 너덜너덜하게 헐어서 종이 인형처럼 춤을 춘다.

확인하자마자 신앙을 버프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불구가 될 뻔했구만....

풀썩.

그가 자작거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취에서 갓 깨어난 것 같았다.

"으윽."

이만큼 버텨 낸 게 용하지. 신체나 정신이나 진즉에 다방면으로 한계를 넘어섰다.

"후우…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명치께가 눈에 띄게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이니 갈라진 결이 느껴졌다. 입 안에선 피 맛이 돌았다.

"진짜 뒤질 뻔했군."

우산을 접으려다가 관두었다. 얼음이 발린 탓에 펼쳐진 그대로 고정됐기 때문이다.

툭.

우산을 발 옆에 내려놨다. 그리고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았다.

릴리스 교단이 연못 위의 부평초처럼 레이크 시티의 밤하늘을 점유하고 있었다.

"교주한테 전해. 조만간에 찾아가겠다고."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이건만 김창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쟤도 기척 감지를 쓸 줄 아나 보다. 그는 말없이 부하들과 떠났다.

한숨 좀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안 났다. 그야 괴물이 떡하니 있었으니까.

한동안 움직일 리 없었음에도 기세는 여전했다.

'정말 간신히 버텼다.'

목숨을 건 상잔이 아닌 간합을 재는 대련이었기에 간신히 목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쟤가 중간에 진심을 내긴 했지."

비겁한 새끼.

페어플레이를 모르는 야박한 놈이다.

하나, 그전까지 그는 이태백의 기량을 가늠해 볼 요량으로 손속에 자비를 뒀다.

도존이 초장부터 차원검을 전개했으면 그길로 끝장이었다.

변수와 우연. 그리고 무엇보다 운이 따른 덕택이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따라 주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상상만 해도 오싹오싹하다.

'최 후반 보스를 파밍이 덜 된 상태로 상대하는 격이었어.'

10익은 과연 10익이었다. 상대하는 입장에서 도존 무야치는 끔찍하리만치 강했다.

공간을 열어젖히고 튀어나온 참마도가 사방에서 쪼아 댈 적의 심정을 그 누가 공감해 줄 수 있을까.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더해, 모든 공격이 즉사기나 마찬가지였다. 심리적 압박감에 구역감이 계속 쏠렸다. 사전에 정신을 버프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이런 놈이 아홉이나 더 있어."

하물며 더한 놈이 셋이나 존재했다.

칠존의 무력은 서로 비등비등하다.

그러나 묘·미·유의 삼재(三災)는 명명백백하게 칠존보다 위였다.

물론 그렇다고 칠존의 위상이 낮아지진 않는다. 삼재가 규격 외의 재앙일 뿐.

도존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본 이태백의 시선에선 인간의 탈을 쓴 킹콩이었다.

"...진짜 어찌저찌 생존했네."

말은 이렇게 해도 뇌세포는 충만함으로 잔뜩 절어졌다. 아드레날린이 정수리로 질주해 터진 입 안에서 피 맛이 돌았다.

내용이야 어떻든 이태백의 판정승임은 분명하다. 심판은 내 팔을 들어줬을 거다.

전투 도중 그 용병왕이 몇 번이고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게 참 압권이었지.

"이 맛에 보스 레이드를 한다."

이태백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달성의 짜릿함이 엄청난 희열을 선사한 것이다.

"이번 생에서 술안주 걱정은 없겠군."

이태백은 실없이 실소하며 비척비척 일어섰다. 그리고 주변을 넓게 둘러보았다.

얼음이 콘크리트를 바닥에서 싹 다 밀어내고, 이 구역을 새하얗게 장악했다.

들썩.

그때 도존의 속눈썹이 파들거렸다. 눈썹뼈, 코끝, 턱밑. 인간의 신체에서 돌출된 부위로 내려왔던 고드름이 후드득 떨어졌다.

쩌-적.

그의 전신에 칠해진 냉기의 피부에도 실금이 쫙 퍼졌다. 거미줄처럼 일은 유격 아래에서 본연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야치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린 순간. 그를 묶어 뒀던 냉기가 푸스스 증발했다. 얼어붙고서 불과 10초 지났는데 말이다.

"후우...."

무야치가 눈을 번뜩이며 이태백을 응시했다. 놓친 사냥감을 발견한 흉흉한 눈깔이었다.

전투의 고양감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하하하하하하!"

광소가 쩌렁쩌렁 울렸다. 초저주파에 흩날리던 눈발이 대번에 쫓겨났다.

휙.

도존이 눈을 부릅떴다. 그 동공에서 불길한 안광이 새어 나왔다.

'뭔가 잘못됐다.'

...그러고 보니 나 아홉 합 버텼던가? 위화감의 원인이 이거였구나, 제길.

싸울 땐 살기 위해 급급했고 후에는 충만함에 취해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X됐군.'

도존은 한 차례 으르렁거렸다. 수습하는 것도 글러 먹었다. 이태백의 땀구멍이 열렸다.

그러는 사이, 광전사의 그것이었던 도존의 표정이 이내 적적해졌다.

푹.

무야치가 참마도를 콘크리트에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칼의 혈조에 등을 기대더니 대관절 가부좌를 트는 것이었다.

이태백이 황당해하는 가운데 무야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말했다.

"호법을 서 줘라."

"뭐...?"

"이태백, 너와 겨루다가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생생할 때 내면을 관조해야 성취는 배가되는 법. 곧장 운기조식을 해야겠다."

이태백은 뜨악했다.

그리하여 되물었다.

"너, 나랑 적인 건 알지?"

"적은 무슨 적이지? 우리 사이에 계산은 끝난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계산이 아직 안 끝났다고, 이 괴물 새끼야. 그런데 도존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아직 한 합이 남았다는 건 안다. 돈으로 환산하면 5억이지. 그래서 네게 제안하는 거다. 그 5억을 탕감할 테니 호법을 서 달라고."

"뭐 그런 계산법이 다 있어."

"싫으면 말해라."

무야치가 슬쩍 한쪽 눈만 반개했다. 그리고 예기가 깃든 눈으로 이태백을 흘겼다.

"그 한 합 칼질로 청산할 테니까."

선택지가 애초에 없군.

명색에 10익이라고 해도 저건 너무 대범하지 싶었다. 무모하다는 표현이 맞다.

'대체 뭘 믿고 호법을 맡아 달라는 거지?'

내가 딴맘 품고 칼을 들이민다면 암만 도존이라도 죽는다. 운기조식하는 동안에 무방비해지는 건 애나 10익이나 똑같았다.

"...."

"부탁하지."

이태백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는데, 도존은 그걸 또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눈두덩이를 닫았다.

이태백은 튀는 호흡을 추슬렀다. 도존 무야치는 이미 운기조식에 돌입한 채였다.

그런 그를 보며 이태백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의 혈전이 꼭 지독한 악몽이었다는 것처럼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이태백도 아랫배가 근질거렸다. 그 또한 방금의 경합에서 깨달음을 얻은바. 뭐든 조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발걸음 소리가 적막을 깼다. 진원지를 쳐다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달려온다.

총대장과 0대대. 그 행렬에 임무를 마친 강현성과 9대대가 오는 중에 가세한 모양이었다.

추가로 레비가 강현성의 어깨에 들쳐 메인 채로 힘없이 덜렁거렸다. 이태백의 지시대로 9대대는 레비 생포에 성공했다.

'쟤네라면 진상을 금방 알아내겠지.'

0대대 조장과 레비. 이번 사태의 책임자들도 모였겠다. 그는 굳이 본인이 아니더라도 귀책을 찾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음."

잠깐의 고민 끝에 이태백도 좌정하고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눈을 감았다.

곧이어 우산처럼 하늘을 덮었던 얼음 그물이 입자로 화하더니 분분히 비산했다.

흩날리는 새하얀 축복 속에서 두 남자는 조금의 움직임 없이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눈이 내리고.

두 남자는 명상하며.

심상에선 벼락이 내리친다.

여름이었다.

* * *

[#1 소규모] 1.8.9 패치 노트

◈ 메인 패치

• 레이컨스의 계절이 「늦봄」 → 「여름」으로 변동됩니다. 폭염에 주의하세요.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 * *

운기조식에서 먼저 깬 자는 도존이었다.

여러 쌍의 시선이 피부를 따끔따끔 찌른다. 경계심과 의구가 반반 섞인 기색이다.

인간 다트판이 된 무야치는 좌중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그들은 일정 거리를 두면서도 이태백과 도존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된 거군."

그는 노련하게 상황을 읽어 냈다. 인간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이태백은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야치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참마도를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찌릿-

이태백의 똘마니들이 바짝 도끼눈을 걸었다. 다만 도존의 위세에 눌려 감히 덤비지는 못했다.

시선으로만 영혼을 콱콱 찍어 댔다. 저들이 치졸하다기보다는 그 앞에선 보통 그랬다.

그나마 총대장은 여유로웠다. 그 옆에서 겁먹지 않고 노려보는 남자. 기억에 있다.

일인천살. 이름이 강현성이었던가. 레이크 시티 내에서 순위권에 드는 강자다.

"웬일이야. 천하의 도존께서 의뢰 중에 타깃을 다 살려 두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같이 운기조식까지. 새로운 악취미야?"

"...."

"그래도 다행이야. 만약 태백이가 죽었으면 레지스탕스의 총력을 도존, 너를 죽이는 데 투입했을 거거든. 네게 이기는 건 몰라도 내가 있으면 양패구상 정도는 노려봄 직하잖아?"

총대장이 슬그머니 뒷짐을 풀었다. 무야치는 빤히 헬멧을 바라보다가 살살 도리질했다.

"살려 둔 게 아니다. 이태백, 그 녀석이 알아서 살아남은 거지."

도존의 말에 전원 화들짝 놀랐다. 술렁임이 부피를 갖춰 풍선처럼 떠돌았다.

"그, 그건 무슨 말-."

강현성이 한발 내디디며 끼어들었다. 도존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숨을 흘렸다.

"일인천살 강현성, 네가 이태백을 뇌옥에서 빼내 온 장본인인 맞나?"

"…그렇다."

"그런 놈이 녀석을 안 믿다니. 이 무슨 촌극이냐."

강현성이 어깨를 들썩였다.

도존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조건부이기는 하나, 이태백은 내 공격을 아홉 합 받아 냈다. 내게 유효타를 내진 못했지만, 녀석도 내 모든 공격을 흘려 냈어."

강현성이 고개를 휙 돌려서 이태백을 내려보다가 다시 옮겨왔다.

"총대장님께 대충 사정은 들었다.... 태백이랑 거래하는 조건으로 열 합을 버텨 내라고 했다지. 맞나?"

"옳다."

"왜…지...?"

"그거, 질문인가."

"…그래."

도존은 흥이 식었다. 방금 막 피가 들끓었던 차라 탈력감이 훨씬 더 심했다.

"흥미가 일었으니까. 내가 아는 한 가장 강한 자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떤지 궁금했다. 대답이 됐겠지."

"가장 강한 자라면."

"말해 무엇하나."

도존은 저 멀리 유독 우뚝 솟은 첨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케르겔 마탑이었다.

"묘(卯), 천마다."

모두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느긋했던 총대장마저 이번만큼은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메가코프가 이태백의 존재를 눈치챌 날도 머지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눈을 피하게끔 이태백을 잘 도와라. 놈들은 직접 나서는 법은 없지만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결착을 보기 위해."

무야치는 돌아섰다.

"재능을 만개한 이태백과 다시금 검을 맞부딪치기 위해서. 그런 녀석을 꺾고 싶어서다."

"…허."

"들키지 않게 조심해라. 뺏기지 않게 조심해라. 이태백이 눈에 든다면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 자(子)가 시에스타에 들어간 과정을 떠올려라. 시에스타가 그를 갖기 위해 흘렸던 피를 기억해. 그러면 체감이 확 되겠지."

그 말을 남기고 도존은 고요히 떠났다. 하나 그가 만든 파란은 그러지 못하리라.

십익의 오(午). 도존.

무야치가 던진 돌로 말미암은 잔물결은 결국 그들이 기거하는 곳까지 번질 터였다.

시티의 정점.

메가코프에게.

59화 호수의 잔물결 (2)

깡패들의 완전한 박멸은 까다로웠다. 레지스탕스가 한날한시에 치기로 한 이유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깡패들의 결속력이 약한 탓이었다. 한 갱 안에서도 점조직만 수십이었다. 왜냐면 서로를 믿지 못하기에 그때그때 이권으로만 뭉쳤기 때문이다.

감자 넝쿨처럼 줄줄이 딸려 나와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

이들을 박멸하려면 뿌리째 뽑아야 했다.

레비의 납치가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그렇다고 그녀의 포획이 작전의 성공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기했듯 갱 연합은 결속력이 약했다. 레비는 구심일 따름이고, 그녀가 사라진다고 갱연합이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으리라.

이태백은 여기서 생각했다. 그간 획득한 컨셉들이 일시에 발동해 묘안을 끌어낸 것이다.

레비를 이용하자. 정확히는 십익 도존을 등쳐 먹으려고 한 그녀를 이용하자.

"연합의 주축들을 여기로 불러라."

이태백은 레비의 귀뿌리에 칼을 들이밀었다. 경동맥과 맞닿아 쇠붙이가 맥박에 맞춰 두근거렸다.

깡패 새끼들이 다른 건 몰라도 강자에게는 약했다. 십익이면 더할 나위 없이 효과가 좋았다. 본인들의 수장이 십익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절초풍할 터였다. 까딱했다가는 십익에게 십족이 멸해질 수 있었다.

"절대, 절대 말 못 해!"

레비는 반항했다. 광년이란 멸칭답게 독한 여자였다. 머리채를 잡아도, 따귀를 올려도 칼을 쑤셔도 이를 앙다물고 버텼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실토하면 끝이었다. 그 순간 부로 자신의 쓰임이 다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악다구니가 강해 봤자 벌레 새끼가 너프를 견뎌 낼 수 있겠나? 어림없고 건방진 소리였다.

[상대방의 정신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그때부턴 일이 수월했다. 레비는 풀린 눈으로 이태백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갱 연합의 주축들은 아닌 밤중에 마그노스트롬의 아지트로 집결했으며, 레지스탕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한바탕 피바람이 일어난 후. 압도적인 무력 차이에 더불어서 레비가 한 짓거리의 진상을 알게 된 깡패 새끼들은 알아서 항복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부하들을 팔았다. 과연 깡패다운 마음가짐이었다.

총대장은 거래를 받아들였고, 곧바로 작전을 재개했다. 그렇게 점조직까지 탈탈 털리는 건 아침이 밝을 무렵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작전명이 무색하리만치 빠르게 끝이 났다. 레지스탕스는 하룻밤 만에 갱 연합을 와해시켰다.

가장 큰 공로는 세운 단원은 말할 것도 없이 이태백이었다. 도존과 아홉 합을 겨룬 것도 모자라, 레비까지 빠르게 심문했으니 말이다. 속도가 생명인 작전이었기에, 그의 활약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총대장은 크게 기꺼워하며 원하는 포상을 물었다.

이태백은 며칠 동안 생각해 보겠다고 하며 대답을 미뤘다.

"...너무 달렸다."

"아, 그렇지. 알았어. 은코 바에 돌아가서 쉬고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이태백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은 모처럼 맑은 날이다.

삼 월인데 벌써 매미가 울어 댔다. 여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며 이태백은 걸음을 옮겼다. 은코 바가 아닌 다른 곳으로.

* * *

[긴급 퀘스트 '범죄와의 전쟁'을 달성]

[운영자 점수에 3점이 가산됐습니다.]

[보상: 고유 스킬 '빙산(氷山)' 지급!]

[운영자 메뉴로 변경점을 확인하세요!]

* * *

고은이 소파에 축 엎어져 있었다. 막 일어난 그녀는 소파 바깥으로 삐져나간 손부터 더듬거렸다.

리모컨을 낚아채서 티브이를 틀자 기상 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기상캐스터는 정교하게 제작된 사이보그였다. 얼핏 봐서는 인간인지 기계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안녕하십니까, 시티의 주민 여러분.]

억지로 빚은 화창한 목소리. 캐스터는 심장 가까이에 별 모양 배지를 달았다. 별은 레이크 시티의 시 정부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방송의 편성은 대개 시 정부의 소관이라는 의미였다.

뉴스, 토픽, 기상 예보 외에 전부.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시 정부가 검수한 다음 방영했다.

획일화된 방송 분위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민원을 넣었지만 시 정부는 뭉갰다. 아니지, 한술 더 떴다.

시 정부가 불만을 성토하는 사람들의 아이피를 역추적. 납치하여 교육을 빙자한 세뇌를 한다는 괴담은 사실 확인이 된 지 오래였다.

그들은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공포감 조성은 시 정부가 원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세뇌 교육을 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산송장이 돼서 나왔다. 씩씩거렸던 사람들은 탁한 동태 눈깔을 하고서는 시 정부를 칭송했다.

몇 년 전까지는 커뮤니티 등지에서 불만 글이 올라왔었는데 요즘엔 전멸이었다. 그저 찬양 글 일색이었다.

그래도 커뮤니티 검열은 양반이었다.

저걸 보라. 공영방송에서 버젓이 시 정부 배지를 패용한 캐스터를. 그들의 권력은 방송국마저 발아래로 두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날이 더워졌습니다. 3월부터 여름이라니. 때아닌 더위에 당황하셨을 입주민께 화창한 하루가 계속되기를 바라며(...)]

캐스터의 말투가 사뭇 변했다. 그녀가 과장된 몸짓을 섞으며 말했다.

[그래서 소개합니다! 대성 그룹의 신제품을!]

단정했던 사이보그는 없었다. 눈에선 바이러스에 감염당한 AI처럼 붉은 기가 돌았다.

[가동 시, 실내 온도를 무려 영하까지 낮출 수 있는데요. 에너지 효율성은 8등급이지만, 냉동실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싸다는 점!]

공영 방송에서 상품 판매가 절찬리에 진행됐다. 이게 레이크 시티의 현실이었다.

"시 정부가 메가코프의 개인 걸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네. 저 새끼들, 쪽팔리지도 않은 건가...."

명시적으로 시티의 지도층은 시 정부였다. 그런 놈들이 저 모양이었다.

시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앞다투어 메가코프에게 한사코 충성을 맹세했다.

'아주 십상시가 따로 없지.'

고은은 중원 출신이라서 봉건제는 퍽 익숙했다. 메가코프가 황제를 참칭한다고 해도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민주주의를 도입할 바에는 차라리 신분제가 낫다는 주의였다.

강호의 몰락은 민초가 힘을 얻은 것이 화근이요, 민주주의는 강호인들이 중원에서 쫓겨난 것이 원흉이었다.

"하지만... 저것들은...."

그런 고은마저 메가코프에는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정도껏'을 몰라 '정도껏'을.

[게다가 고성능의 제습 기능까지 있는데요! 제가 사용해 본 후기로는 피까지 말라 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과연 대대성 그룹의 과학력은 세계 제에에에에에에에일입니다아아아아-! 메가코프를 칭송하라!]

메가코프는 황제 같은 게 아니다. 하늘, 아니 천외천이었다. 그들은 통치보다는 지배를 원했으며 종래에는 집단 감시 체제를 거의 완성했다.

상층 구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넷 소켓 삽입 시술이 유행이라던가. 말세였다.

[허억! 완-판! 무려 2분 만에 완판됐습니다, 여러분!]

감격에 겨웠는지 캐스터가 인공 눈물을 짜냈다. 고은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는 꽥 소리를 질렀다.

"아, 씨! 사려고 했는데!"

고은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급격하게 담배가 마려웠다.

낙담하면서도 결국에 메가코프산 제품에 눈이 돌아간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말이야. 한국산 백색 가전은 다르긴 달랐다.

고은의 고국 대륙발 에어컨은 걸핏하면 더운 바람이 나오는 데 반해, 한국산의 성능은 말해 무엇이었다. 무상 AS도 무려 1년이었다.

"여름 되기 전에 샀어야 하는데...."

3월에 여름이 올 줄 누가 알았냐고. 지구 온난화가 심각하다고들 하는데 이건 좀 심했다. 마치 미상의 '누구'가 간섭한 것처럼.

'암만 메가코프라고 해도. 날씨는 못 바꾸지. 하기야, 그게 가능하면 신이지. 아니 신보다 더한가?'

진짜 신들은 인간 세계에 개입할 수 없다. 그들은 특정 인간을 지정해 교주나 무녀로 삼고 꿈에서 나타나 복음을 전했다.

"진짜 신은 아니지만, 신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가 있긴 하지. 호모 사피엔스한테 개입도 할 수 있으니까 신 이상인가?"

고은은 머리맡의 곰방대를 주워 들었다. 담뱃잎을 대충 꾸겨 넣고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르륵.

깊게 한 모금 빨았다. 냉수가 지끈거렸던 뇌 주름의 틈새를 씻어 내는 느낌이었다.

"담배... 끊어야 하는데...."

고은은 담배 연기 너머 천장을 응시했다. 허파가 새카맣게 착색되는 만큼 비감이 차오른다.

새삼스레 사망 플래그를 꽂으려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꽂혀 있었다.

배교한 마인은 죽음으로 속죄해야 한다. 그녀의 비참한 말로는 예정되어 있었다.

다만, 의아했다.

케르겔 마탑이 고은의 처분을 지금까지도 미루고 있다. 천마가 그녀를 특히나 아끼긴 했어도 그 때문은 아닐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천마는 사실상 반신이었다. 흥미 본위만 있을 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다.

칠존만 해도 인간성이 건조된 오징어처럼 메마른 판국이었다. 삼재는 오죽할까.

"...죽이려면 차라리 빨리 죽이지."

희망 고문이 가장 잔인한 법이거늘. 문득 궐련 맛이 씁쓸했다.

띠리리리리.

전화가 울렸다. 고은은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넌 여친 놔두고 왜 자꾸 외간 여자한테 전화질이야."

- 야, 고은...!

강현성은 목소리부터 다급했다.

"이 새끼는 전화할 때마다 목소리부터 떨어, 불안하게시리. 나 지금 센치하니까 나쁜 소식이면 말하지 마."

- 얌마, 그게 아니라!

"아, 그리고 우리 집 하수인은 나한테 찾지 마라. 댓바람부터 볼일 있다고 나갔으니까. 아, 그리고 듣기로 총대장한테 듣기론 도존이랑은 잘 풀렸다며."

- 아이씨! 야, 너 티브이! 너 티브이 틀어 봐!

고은이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삐딱하게 치우친 시선은 티브이를 향한 채였다.

"이미 틀어져 있는데."

- 그럼, 채널 13번으로 가 봐.

"왜, 뭔 일인데."

-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보는 게 빠를 거다. 지금 시작한다. 저거 끝나고 다시 걸 테니까. 그때, 그때 다시 이야기해!!

고은은 툴툴거리길 잠시. 강현성이 말한 대로 채널을 돌렸고 곧이어 동공이 좌우로 열렸다.

13번 채널에서는 토크쇼가 한창이었는데 MC가 몹시 긴장한 기색이었다. 감정의 냄새가 전파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야 초대 손님이 손님이었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짐짓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채로 MC와 문답을 나누기 시작했다.

* * *

Q) 반갑습니다, 무야치 님. 설마 10익께서 저희 모닝 토크쇼에 참석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혹시 어떤 이유에서 참석을 결정하셨는지요?

A) 본 토크쇼를 선택한 데엔 별다른 이유는 없다. 심야 토크쇼는 시 정부의 입김이 세게 작용하는 데 반해 모닝 토크쇼는 그나마 자유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라서 선택하게 되었다.

Q) 그, 그… 그렇군요. 그, 그럼! 본격적으로 질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인터뷰에 앞서 저희 제작진들에게 엄청난 폭탄 발언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보고는 있지만... 이게 사실인지 눈을 의심하게 되네요.

A) 제대로 봤다. 나는 어제부로 프리랜서 용병 생활을 청산. 대성 그룹과 고용 계약서를 작성했다.

Q) 여러분들, 들으셨습니까?! 그 용병왕께서 대(大)대성 그룹과 계약을 체결하셨다고 합니다! 이 속보는 저희 SOC 채널에서만 보도되며 불펌할 시 시 정부가 당신을 추적-

A) 잡담할 시간은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라.

Q) 예.... 그럼 이걸 여쭙겠습니다. 그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고집하시던 무야치 님이십니다. 근데 무슨 연유로 대성 그룹에 들어가기로 하셨을까요? 또 메가코프 중에서 대성 그룹을 선택하신 이유가 따로 있으면 듣고 싶습니다.

A)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내 곤조는 변함없었다. 내가 돈에 된 용병일지라도 원하는 일만 맡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아 보이더라.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깊게 고민하지 않는 성격이다. 단지 그뿐이다.

Q)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요?

A) 말해 줄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근시일 내로.

Q) 그, 그렇군요. 그러면 마지막 질문입니다. 대성 그룹을 선택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최근 메가코프 사이에서도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케르겔 마탑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그곳에 묘(토끼, 卯)와 해(돼지, 亥)가 있지 않나. 해서 그들의 발언권이 정상회담에서 세진 것으로 알고 있다. 가뜩이나 자유가 억압받는 사회인데 견제 세력이 없는 메가코프의 행보는 불 보듯 뻔하지 않나? 그 점이 고까워서 대성 그룹을 택했다. 그들에겐 내가 최초의 10익이니까(...).

* * *

고은의 손에서 리모콘이 툭 이탈했다. 강현성에게 다시 전화가 온 건 동시였다.

- 봤지?

"저, 저거 뭐야."

- X발. 내가 할 말이다. 도존, 저놈 상상 이상이네. 저 새끼 나름 신비주의 아니었어?

"새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고은은 일갈한 다음으론 침음했다.

"쟤가 말하는 그 '누구'. 이태백 맞지?"

- 걔 말고 누가 있겠냐.... 그래서 전화했다. 이태백 어딨어. 이거 명령하는 게 아니라 부탁이야, 부탁. 지금 본부도 완전 난리가 났다. 아직 갱 연합 뒤처리도 마무리 안 됐는데 도존이 저 X랄을 해 놔서.

"...외출했어...."

고은은 등골이 섬뜩해지는 걸 느꼈다. 얼음덩어리가 척추를 타고 쭉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 뭐, 뭐, 뭐 외출? 하필 이 타이밍에? 어디로?!

"-교단."

그녀는 잠으로 굳었던 뇌를 쥐어짜 냈다.

"전화로 어디 교단으로 간다고 했었어.... 이름이 뭐였더라... 릴리뭐시기였던 거 같은데...."

60화 호수의 잔물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