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21

110화 시티의 풍운아 (2)

남녀 둘이 한데 있어 생긴 오해이니 두 사람이 해명해야 마땅하다. 성마른 호사가들이 군침을 질질 흘리기 전에 발 빠른 대처가 중요했다.

"아니야."

"...."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

"눈 안 깔아?"

이태백이 노기를 발산했다.

수라장을 헤치며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 요즘이었다. 기백만으로 유리창이 부르르 떨었다.

후미토와 록은 등허리에 솟는 전율을 애써 숨겼다. 그러면서 저들끼리 전음을 주고받았다.

―쟤가 시티에 초출한 지 얼마나 됐지, 록?

―반년.

―반년 만에 저게 가능해?

―불가.

―그런데 쟤는 해냈잖아.

―원인 불명. 괴이라 판단.

꿀꺽-

―일 년쯤 지나면 어떻게 될는지.

―그건 나중의 일. 눈이나 제대로 깔기를 요망. 눈 마주치면 최소 반X신.

―너 요새 전음 튼 건 좋은데 말투가 왜 그 모양이냐? 좀 바꿔. 듣는 사람이 다 오글거린다.

―정정. 후미토, 넌 그냥 X신.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대충 정리된 거 같군.'

다행히 이태백과 고은의 평소 건전한(?) 행실 덕분에 설핏 굳어졌던 공기도 부드러워졌다.

남자 측은 9대대 사이에서 알아주는 고자였고, 마법사 대부분은 욕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두 남녀가 혐의에서 벗어나고 제대로 된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물론 여전히 두 사람을 쳐다보는 시선은 데면데면했다. 빌어먹을.

"너희들이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상상의 나래는 넣어 둬. 특히 거기, 후미토. 입에 걸린 웃음은 좀 집어넣지?"

"하, 하하! 내가 웃은 적이 있었나?"

하여간 변태 새끼.

심성이 저 모양이니까 원안대로면 '인간 백정 쇼헤이'가 되는 거였다.

"…하아."

이태백이 한숨을 내쉬는 한편 고은은 뒤에서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있었다. 상황만 뜯어 놓고 보면 정말 불륜 적발의 현장 그 자체다.

'피우지 마.'

이 타이밍에 곰방대에 불붙이지 말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고은은 창틀에 걸터앉아 운치 있게 연기를 즐겼다.

9대대 차석, 유다희는 고은을 심히 못마땅한 시선으로 째려보았다. 오랜만의 해후인데 내겐 눈길 한 번이 전부.

'록은 그나마 낫네.'

여느 때처럼 새되게 호흡하면서 이태백과 고은을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흘러갈 뻔한 분위기를 강현성이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그가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고은, 너한테 걸린 주박의 발효 기간은 언제까지야?"

"얼마 안 돼."

"그러니까 얼마나."

"백골이 진토 되어도 남을 때까지?"

"얌마! 지금 농담이 나와?!"

강현성이 턱이 후들거릴 만큼 기함했다. 고은은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상황이 이런데 농이라도 해야지. 9대대원들이 이태백, 쟤랑 나랑 이상한 관계로 바람 잡고 있잖아."

사나운 눈초리가 면면을 휩쓸었다.

차석인 유다희를 제외한 두 사람이 이내 눈을 내렸다. 후미토가 특히 찔렸는지 고개를 떨어뜨리다시피 했다.

"…태백아."

이제는 내 차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를 묻지는 않을게."

고은은 전부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럴 의리도 의무도 없거니와 무려 천마와 얽히게 되었다는 사정을 알게 되면....

'진풍경이 펼쳐지겠지.'

고은은 이태백과 천마가 거래했던 사실도 죽을 때까지 안고 가려는 셈이었다. 주박을 들먹이면 강현성도 캐묻지 못하기 때문에 방패로선 더할 나위 없었다.

게다가 당사자인 이태백도 내막을 전혀 모르지 않나. 강현성이 그를 따로 추궁해도 이렇다 할 수확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고은은 거기까지 안배했다.

다만.

'강현성과 나 사이의 신뢰에 금이 갈 거야.'

지금은 허물없이 지내는 것 같아 보인다.

하나, 강현성과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보자. 그는 절대로 정에 휘둘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철책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넉살 좋게 떠들어 놓고서는, 살인을 종용한 강현성이었다. 신뢰에 금이 간 상대를 이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자식 속은 부모가 가장 모른다고.'

강현성의 창조주로서 그가 밟아 갈 거취는 훤히 내다보이나, 속내는 좀처럼 파악이 안 된다.

기실 이태백의 콘셉들이 공감 능력을 크게 저감시켜서인 것도 크게 작용했다. 최근 그는 십익이란 최강자들과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생물학적 인간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냐.'

이태백은 내심 마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정작 강현성은 고압적이긴커녕 저자세로 나왔다.

"…사실 네가 9대대긴 하지만 외부 요원이 됐을 때부터 내 손을 떠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솔직한 말로 항상 네겐 미안하면서 고맙다. 이건 진심이야. 네가 낸 성과 덕분에 우리 9대대가 레지스탕스 내에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거든."

다른 대대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한다. 대대장으로선 굉장한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태백은 편애를 받는다고 오해를 살 법한데, 강현성은 그냥 툭 까놓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동감하는 바야. 우리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막상 성과는 노력에 비해 그럭저럭이었거든. 그런데 네가 들어온 이후로 달라졌어. 그래, 너무 많은 게 달라졌지."

"왜 이래. 낯간지럽게."

금칠할 거면 따로 하든가.

강현성은 꿋꿋하게 말을 계속했다.

"네게 이따금 역정을 냈던 건, 아마 내 조바심 때문이었을 거다. 네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니까 오히려 내가 급했던 거 같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그가 말했다.

"고맙다, 태백아."

"진짜 갑자기 왜 이래.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냐? 고환암이래?"

강현성은 우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고환암은 아니라고 못 박았다.

"우리 대대뿐만 아니라, 고은 쟤를 위해서 뛰어 준 거에 대해서도 고마워."

"집주인 죽으면 세입자는 쫓겨나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다른 사적인 감정은 없어."

이태백은 괜히 객쩍게 말했다. 뒤에서 고은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은 츤데레 발언이네, 우리 세입자. 그 얼굴에 츤데레면 여자들이 줄을 서겠는데? 아, 아니지. 지금도 백백교 신도들이 너라면 껌뻑 죽긴 하지."

"닥쳐."

"응."

혀를 찬 이태백은 도로 강현성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강현성은 그늘 없이 웃고 있었다.

"태백이, 너 내가 왜 일인천살로 불렸는지 알지."

"대충은. 그거 모르면 한국에서 간첩이잖아."

속사정도 안다.

왜 강현성이 거악을 참칭하게 되었는지. 그러고는 한다는 짓이 레지스탕스 변두리 대대의 장을 맡고 있는 것인지.

강현성이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눈동자는 시티의 정경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와 뒤에서는 그의 고향인 서울을 되새겼다.

"흔한 이야기야. 가장 믿었던 것에게 배신당하고, 배신당하고, 또 배신당하고. 그러다 보니 홧김에 그렇게 된 거지. 면면부절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새 난 냉소적인 괴물이 되어 있더라."

"모두가 그렇게 살지."

"그래, 모두가 그렇지. 그런데 태백이, 너는 그렇지 않아."

내가?

이태백만이 아리송한 가운데 9대대 전원은 짐짓 진지한 기색이 되었다.

"백백교를 만들고, 릴리스 교단과 교분을 텄으며, 개방과 제휴를 맺고, 이번에는 네 집주인을 살리기 위해서 암중에 횡액을 당했지."

"그…랬지."

그 모든 행동의 발로가 강현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는 별개긴 했지만.

사건을 나열해 보니 어쨌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처럼 보이긴 한다.

"처음엔 네가 진짜 왜 그러나 싶었다. 내가 미친놈을 데려왔구나. 정작 내가 데려와 놓고 너한테 턱턱 호의를 베푸시는 총대장님이 이해가 안 될 정도였어. 그분이 워낙 현명한 분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속내를 터놓는 분은 아니시니까."

"...."

"그런데 이제 알겠다. 총대장님이 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두시는지. 그리고 왜 그분이 나랑 있을 때 태백이, 너를 왜 저항 정신의 상징이라고 부르는지."

돌아 버리겠군. 둘이 있을 때 나를 그런 낯 뜨거운 호칭으로 부른단 말이야?

푸훗.

고은이 바람 빠지는 웃음을 틀어막느라 급급하다. 그녀에 반해 9대대는 진지해서 이태백이 느끼는 수치심의 부피는 자꾸만 커졌다.

"이타심."

강현성이 말했다.

"그게 시티에 우리가 일으킬 저항 정신이다."

이태백의 입술이 벌어지려다가 닫혔다. 개발자였던 이태백이 레이컨스 유저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을, 자신의 피조물이 대신 말해 준다.

그 어떤 물질적 보상보다 울림이 컸다.

* * *

같은 시각, 시티의 최상층부에선 한바탕 파란이 일었다. 왜냐하면 케르겔 마탑의 광명좌사, 환존이 사망했다는 지라시가 돌기 때문이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메가코프 간의 무게추가 기울 터. 각 메가코프의 기획조정실은 바짝 긴장한 채로 정보를 긁었다. 주가 방어를 위해서였다.

불과 얼마 전에 '궁존 시에스타 방출 건'으로 홍역을 치른 마당 아닌가? 전초전이 시작된다.

총과 칼, 폭탄만 없지.

그 못지않은 찐득한 피비린내가 벌써부터 마천루들의 틈바구니에 흐르는 것 같았다.

대성 그룹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막 메가코프에 들어선 그들이다. 그렇기에 뭇 메가코프 이상으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장부터 그랬다. 그가 회장실을 빙글빙글 서성이자, 여비서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도존 님께 자문을 구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회장님."

"…음."

회장은 침음했다.

"이건 비즈니스야. 한데 칼잡이가 과연 내게 영양가 있는 조언을 줄지 의문이군. 자네는 알겠지만, 원래 고용주랑 피고용인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수록 좋거든."

"칼 없는 전쟁이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전쟁에 있어선 도존 님이 저희보다 전문가입니다. 그도 그럴 게, 그분은 '용병왕'이니까요."

"저번처럼 용병이 이 나를 가르치려 드는 자리는 사양이야. 난 칼을 산 거지 과외 선생을 고용한 건 아니니까...."

중얼거린 회장인 우뚝 멈춰 섰다.

"다른 메가코프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달라."

그는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여기까지 왔어."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럼 뭘 해야 할지도 알겠군."

"도존 님을 바로 부르겠습니다."

여비서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호출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실로 도존이 들어섰다. '도존은 대성 그룹의 상비 인력으로 본사에 머물러야 한다.'라는 계약 조건이 적혀 있던 탓이다.

"부르셨다고요, 회장님."

"귀한 분을 오라 가라 해서 죄송합니다."

회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반색했다.

"언제든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이렇게 대하시면 오히려 제가 더 불편합니다, 회장님."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무야치 님의 의견을 바로 반영하는 차원에서 용건부터 바로 말하겠습니다."

도존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회장이 깍지 낀 손의 엄지를 탁탁 부딪치는 통에 정신이 사나웠다.

"마탑의 좌사가 죽은 건 때문에 부르셨군요."

"바로 알아보셨군요."

"사내 기밀이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본사에 지내면서 모르기가 힘들더군요."

회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괜찮습니다. 한 식구 아닙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둘러 가지 않고 묻겠습니다. 도존 님께서는 정말 좌사가 죽었다고 보시나요?"

"죽었을 겁니다."

"확신하시는군요. 참고로 전 감보다는 근거를 좋아합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자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그 이야기가 왜 지금 나옵니까?"

도존은 무겁게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그자 손에 죽었을 테니까요."

대(大) 대성 그룹의 회장께서는 비명 비스름한 경악성이 성대를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111화 시티의 풍운아 (3)

회장의 심전도계에 이상이 생기자 여비서가 얼음물을 대령했다. 회장은 거의 쏟듯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으적으적.

얼음주머니까지 뒷덜미에 얹고서야 회장은 정신을 차렸다. 여비서가 항시 체크하는 태블릿 속 심박수도 안정권에 들어섰다. 톱날 같았던 선이 평평해진 것이다.

"죄송합니다, 무야치 님."

회장이 말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충격을 먹으면 간혹 이럴 때가 있습니다. 자,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젊은 시절에 열정적으로 산 사람들 중에서 심장이 안 좋은 사람이 많다잖습니까. 모쪼록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회장이 숨이 가빠져도 무야치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의 고용 조건은 '회장의 호위'였지 '보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존의 무덤덤함에 회장은 살짝 마뜩찮은 기색을 표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레이크 시티에선 정나미 없는 걸로는 감정 문제로 번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계약으로 통했으며 목소리가 아닌 돈으로 이야기했다.

회장은 애써 불편한 심기를 거두었다.

"나이가 젊으신데 잘 아시는군요."

"무인을 액면가대로 보면 안 되는 법이죠."

"무야치 님 나이가 혹시?"

"적지 않게 먹었습니다."

"저랑 비슷한 연배거나 그렇지는...."

"...."

무공을 익히면 노화가 늦게 온다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십익급 강자이기까지 하니 새파란 젊은이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재벌들은 젊어지겠다고 사이버네틱 의체를 달고 사는 마당에 정작 고용인인 십익은 그들보다 몇 세기는 더 살았다.

"…그런데, 잠시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회장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채 녹지 않은 얼음 조각이 입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방금 말씀하신 광명좌사를 죽였다는 인물. 전에 말씀하시기론 레이크 시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엄청 젊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맞습니다."

"젊다면 얼마나 젊은 겁니까?"

"얼추 스물 정도로 보였습니다."

회장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자도 무야치 님처럼 무공으로 노화가 늦은 재야의 고수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노화를 늦췄다 한들 장기는 늙습니다. 제가 '기척 감지'로 기도를 눈짐작해 본 결과, 그자는 그 나이가 맞습니다."

이처럼 기척 감지는 범용성이 우수하다. 이태백과 팀원들이 기척 감지를 괜히 강자의 전유물로 설정한 게 아니었다.

상대방을 정탐 가능하면 쉽게 우위를 선점한다. 메가코프가 기를 쓰고 정보를 수집하듯 무인은 적의 탐색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생각이 꼬이는군요. 그러니까, 도존 님 말씀은 '그자'는 약관이 갓 넘은 나이에 십익 한 명을 죽였다는 겁니까? 아니, 그것부터 물어봅시다. 왜 그자가 환존을 죽였다고 생각하는지 무슨 근거라도 있을 거 아닙니까."

무야치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무엇이 이 권태에 찌든 괴물을 상념에 빠뜨리는가.

그 역시 궁금했지만, 이어질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래도 좋았다. 침묵이 길어지고 회장의 인내심이 아슬아슬할 무렵 도존이 말문을 열었다.

"짚고 넘어가자면, 그 녀석이 폭력으로 압도했다는 건 아닙니다."

"추가 설명을 해 주시죠."

"녀석은 아마 환존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걸 위해서 온갖 파벌에서 그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를 자극할 만한 정보를 뿌렸을 테죠. 여러 단체를 이용해서, 주기적으로."

무야치의 추리는 예리했다.

실제로 이태백은 암중에 정보를 살포했다. 아는 집단 전부를 동원했다. 레지스탕스든, 백백교든, 릴리스 교단이나 심지어 개방까지도. 약간은 변주를 주었으나 '하나의 결과'로 결부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걸 해냈으니 녀석이 환존을 죽였을 겁니다."

"환존이 그자의 손에 죽었다는 것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단 무야치 님의 말이 맞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보를 흩뿌렸다면 저희 메가코프의 귀에도 들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시야의 차이입니다."

"시야라 하시면?"

무야치가 돌연 창밖을 눈짓했다.

"시티는 상하층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상층에선 상층에서만 통용되는 정보가, 하층에선 하층만의 정보가 도는 법이죠. 녀석은 상층이 아닌 하층 구역에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을 겁니다."

"그자의 주무대는 하층입니까?"

"함구하겠습니다."

무야치는 의안에 스치는 탐욕을 읽었다.

"…뭐, 알겠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걸 넘어서 다 무야치 님의 이야기대로 흘러갔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도 의문이 남습니다. 십익의 실력은 거의 동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십익이...."

그 싹퉁 바가지 없는 놈들이 누군가와 손을 잡을 리가 만무하다, 라는 뒷말은 구태여 내뱉지 않았다.

"…메가코프의 지령 없이 누군가와 협력할 거란 생각은 안 드는군요."

"저와 함께 뭉뚱그려 불리는 자들이라 그들의 사고방식은 저도 어느 정도는 압니다. 맞습니다. 저를 비롯한 그놈들은 누군가와 손잡는 법 없습니다. 이해가 일치해서 잠시간 같이 행동할 때가 있겠지만, 일이 끝나면 바로 저들끼리 붙는 족속이죠."

"평가가 적나라하시군요."

"회장님이 생각하는 바를 유추했습니다."

회장은 흠칫했다. 그러자 무야치는 목을 사선으로 기울였다.

"농담, 인데. 재미없었습니까?"

"…이어서 이야기하시죠...."

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거듭 튕겼다. 여비서가 추가로 얼음주머니와 얼음물을 가져오는 사이 무야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음 말에 회장은 심장이 어는 기분이었다. 여비서도 그만 쟁반을 떨어뜨렸다. 유리 조각이 신발 굽에 촘촘히 들러붙었다.

"마탑주가 환존을 죽이게끔 유도했을 겁니다."

"마, 마탑주면 케르겔 마탑주. 천마 말씀입니까? 아, 아, 아니. 그자가 어떻게?! 아니, 무엇 때문에 그자가 직접 움직인단, 아니, 아니지. 어떻게 그자를 직접 움직이게 만든단 말입니까!"

"계약을 했겠지요."

모든 길은 계약으로 통하며 목소리가 아닌 돈으로 이야기한다. 레이크 시티에 흐르는 차가운 법칙이었다.

"대체 무슨 계약이길래...."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무야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반추하고 있던 회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급한 손길을 뻗는 그에게 무야치는 등을 내보이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자를 미리 선점해 놓는 게 좋을 거라고."

"잠시만, 잠시만요!"

"지금은 늦었습니다."

그길로 회장실의 문이 닫혔다. 회장과 비서만 덩그러니 남겨지길 잠깐. 이어서 윽박과 유리 깨지는 소음이 뒤섞였다.

* * *

무야치는 문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회장의 분노가 문짝을 두드린다.

잠시간 그걸 듣다가 무야치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가 말한 대로 전했다."

[그렇군.]

"그런데 정말 이런 걸로 그때 그 '대가'를 청산하려는 건가?"

[이런 사소한 걸로 빚이 탕감된다면 그쪽이 좋은 거잖아. 왜 불만스러운 목소리인데.]

목숨을 걸고 얻어 낸 부탁을 이런 거에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야치는 용병이었다. 계산이 깔끔한 걸 좋아한다. 그 자신이 들어줘야 하는 입장에서도 그 기치를 견지했다.

[내 나름대로 타산이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해 달라고 한 거야.]

"그렇다면 알겠다."

전화를 끊기 전 무야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기대하지, 이태백."

* * *

[#2 중간 규모] 2.2.0.5 패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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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환존」를 처리하여 레이크 시티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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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저주는 저주로 끊어 내야 한다.

하지만 저주의 소유자를 찾기가 몹시 어렵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 수많은 인종이 뒤엉켜 사는 시티에서도 말이다.

찾는다 해도 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자를 찾기가 저주 보유자를 찾는 것보다 훨씬 고난이도였다. 레이크 시티에서도 단 세 명뿐이니까.

벼락 맞을 확률이라는 관용구가 있는데, 혹자는 저주 보유자 찾기는 벼락을 일곱 번 연달아, 가교 역 찾기는 백 번을 연달아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백에겐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벼락을 맞는 입장이 아닌 벼락을 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가 그렇게 여기고, 생각하고, 바라면 우주가 움직인다.

"록."

9대대를 떠나보내고 록에게만 남아 달라고 부탁했다. 강현성은 그녀의 잔류를 선선히 허락했다. 고은을 노려보는 유다희의 눈살이 폭발 직전까지 이지러진 탓이다. 여차하면 피바람이 인다.

강현성은 이태백이 '누군가'와 하던 전화가 못내 걸리긴 했다. 그런데 이제는 물심양면 믿어 주기로 한 대대장이었다. 신뢰와 포기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하여 이 자리엔 이태백, 유다희, 록 이렇게 남 하나, 여 둘이 남았다. 뻘쭘하게 서 있는 록에게 이태백이 툭 던졌다.

"너, 주언이지?"

"...!"

록이 화들짝 놀랐다. 이태백에게 그 비밀을 말해 준 적은 없을 텐데?! 후미토가 입을 싸게 놀렸다기엔 최근 이태백과 교류가 일절 없었다.

"나랑 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어디?

록이 눈으로 물었고 이태백은 답했다.

"홍등가."

록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진짜 미친놈인가?

이태백의 눈빛은 딱딱했다. 그는 여자 두 명을 데리고 진심으로 홍등가에 갈 셈이었다. 그녀들에게 시티의 저속한 풍속을 맛보게 하려는 건 물론 아니고, 그녀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태백도 빙의자 특수를 누릴 생각이었다. 저주와 저주가 충돌하면 막대한 마력이 튕겨 나온다. 마력의 빅뱅. 그걸 흡성하면 신단 열 개 분의 내공을 단전에 쌓을 수 있으리라.

"...."

"...."

이태백은 진지하고 록은 굳어 있는 와중에, 고은은 곰방대를 문 채로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주를 강호식으로 표현하면 절맥(絕脈)이었다.

112화 파렴치한 이태백 (1)

레이크 시티는 참 차등을 좋아는 도시다.

게임 개발자 입장에선 유저의 상승 욕구를 자극하려고 그렇게 설계한 거였지만, 막상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보니 기분 영 거북했다. 하여간.

이렇듯 시티는 별의별 거에 다 급을 매겼다.

풍속점마저도 '급'이 있었다.

어느 업종보다도 양극화가 심했다.

이유는 이태백도 모른다. 게임 심의상 그런 성적인 요소는 개발 단계에서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티의 홍등가는 그의 상상력 범주 바깥에서 자연히 생성된 시설이었다.

이럴 때면 정말이지 이 세계가 살아 숨 쉬는 곳임을 느낀다. 가끔씩 레이컨스는 내 무의식의 발현이 아닌 원래 있었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등가를 떠올리며 새삼 유기적인 세계임을 자각하는 스스로에 현타를 느끼는 이태백이었다.

좌우지간.

백백교 1지부가 위치한 최하층 구역. 그곳에 있는 홍등가는 소위 빈곤한 자들이 찾는 곳이었다. 간혹 돈 많은 손님들도 최하층의 홍등가를 방문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답사에 가까웠다.

'아니면 X나게 변태 취향이거나.'

부자들을 주력으로 받는 홍등가는 당연하게도 상층에 있었다. 다만 최하층의 홍등가와는 달리 공개적으로 손님을 모집하지는 않았다.

'상층은 위선자들의 모임이니까.'

상층의 홍등가는 은밀하고 까다롭게 손님을 유치한다. 철저하게 회원제로만 이루어진다. 가입을 하려면 두 명 이상의 추천인이 있어야 한다.

뭐 그렇게까지 운영하나 싶겠냐마는 상층 구역이 원래 그랬다. 철저하게 위선으로 점철된 그런 동네.

하지만 이태백이 누구던가.

하층이나 최하층은 몰라도 상층 구역은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상층 한정으로는 입체 도면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도 있었다. 상층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위치는 아는데....'

문제는 그 위장막을 어떻게 뚫어야 하냐, 이거다. 하층에선 제법 많은 꽌시를 구축한 요즘이었다. 릴리스 교단, 개방, 레지스탕스의 연줄을 십분 활용하면 적어도 하층에선 못 갈 곳이 없었다.

어쩌면 이태백은 의도치 않게 하층을 일통했을지 모른다. 정말 본의 아니게....

하지만 상층은 이야기가 달랐다.

연줄도 적을뿐더러, 인맥만으로 방범을 뚫기에는 체계가 너무나도 잘 잡혀 있었다.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스마트한 사람일 것이다. 얼굴도 물론 잘생겼을 거고.

잡설이 계속 길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등골을 찌르는 록의 눈총이 따가웠다. 그것도 그건데.

개방도가 텐트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숙덕거린다. 뭉근하게 뜬 눈은 이태백에게 꽂힌 채였다.

상층에 터를 잡은 개방도면 조직 내에서 고위층. 꽤나 강자들이다. 그러니 전음으로 대화해도 될 법하건만...

"잘생기면 잘생긴 값을 한다니까."

"여자 두 명을 데리고 다녀? 세상 말세야. 일부다처제라니...."

"그건 자네 얼굴이 못나서 못 하는 거잖나. 시티에서 도덕성을 따져서 뭐 하게? 능력 있고 얼굴 좋으면 애인을 몇을 들여도 힐난할 사람 없는 곳이 이곳이네!"

"아아,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구나."

"예끼, 이 사람아! 툭 하면 도리 타령은!"

들으라는 듯 소리 내어 낄낄 웃었다.

그렇다. 현재 이태백은 록과 유다희를 데리고서 개방도의 심부, 굴다리 밑 텐트촌을 찾아왔다.

살면서 느낄 수치심을 한꺼번에 느낄 걸 알면서도 이곳으로 걸음 한 이유.

개방의 우두머리 용두방주 홍걸개를 만나기 위해서,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였다.

"나 추천 좀 해 줘."

"...?"

이럴수록 뻔뻔해야 해.

"상층 홍등가 회원권."

주눅 들지 마라, 이태백.

* * *

록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은과 텐트촌 한구석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록의 허한 눈동자는 호수로 향해 있었다.

시티의 호수는 도시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끝없는 열망과 퇴폐가 뒤섞인 불빛들이 호수를 수놓았다. 수면은 아름다우나 수질은 맹독이나 다름없는 것이, 과연 레이크 시티를 대표하는 호수다웠다.

은은하게 요동치는 호수를 보며 그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소 때를 놓친 질문을.

'내가 왜 여기 있지?'

이태백의 첫 대사 '나랑 홍등가 좀 가자'에 얼이 나가서 '어어' 하는 새에 여기까지 따라왔다.

처음에는 진짜 홍등가로 가는 줄 알았는데 별안간 개방촌에 데려온 까닭은 뭐 때문일까? 그것도 하필 대대원 중에서 본인을 콕 꼬집어서....

'서, 서, 설마?'

귓전에 채찍 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찰싹찰싹. 이태백과 고은은 저간의 사정을 해명했다.

그러나 의심 많은 록은 의구심을 완전히 갈무리하지 않았다. 남녀 사이에 친구도 없는 법인데, 동거인끼리 아무 감정도 없다? 말이 안 된다.

짬이 생기면 침대 밑에 숨겨 둔 연애 백과를 정독하는 록이었다. 연애 감정이 메말라 가는 이 도시에서도 사랑이 싹틀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애 백과 귀퉁이에 붙은 '동그란 빨간 딱지'는 정품 마크였다.

록은 눈동자만으로 고은을 일별했다.

'이 둘은 깊은 사이야.'

연인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 특유의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감정이 결여된 그렇고 그런 사이란 의미!

'감정 없는 사랑에 지겨워져서. 또 다른 쾌락에 눈을 뜨고 만 거야. 그래서 애들 다 있는 백백교에서...!'

상상의 나래가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한다. 새하얀 머리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이태백은 임무를 빙자하여 자신과 유다희를 대동하고 상층의 홍등가로 갈 것이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금제를 해방하고 본 모습을 드러내겠지.

이태백은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이제 십익과 독대 자리를 갖는 사람이었다.

'십익급은 하나같이 다 나사가 풀려 있으며 상식으로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이는 이태백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할 터다. 그의 사회 회로는 맛이 간 지 오래며 어지간한 일로는 고무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름이 록이었지?"

그때 줄기차게 담배를 태우고 있던 고은이 말문을 열었다. 록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는 꽤 자주 봤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 거 같네. 레지스탕스 단원 중에서 대화 대부분을 강현성이나 총대장만이랑 해서."

"*쉭* *쉭*"

"너무 그렇게 적대하진 마. 그냥 네가 이태백에 대해서 이상한 착각을 하는 거 같아서 말이라도 몇 마디 얹어 주려는 거니까."

"...."

이태백을 입에 담는 고은의 만면엔 신뢰가 가득했다. 록은 신기했다.

야멸찬 이 시티에서 누군가를 저렇게 전적으로 믿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레지스탕스 단원끼리도 서로 친구로 여기는 이들은 드물었다. 이해가 불일치하면 언제든 등 돌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9대대는 뭇 대대보다 끈끈하기는 했으나 그게 영원토록 갈지는 미지수였다.

유독 반골 기질이 심한 9대대기에 오히려 틀어지면 한도 끝도 없이 틀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영합한 거지 친구에서 출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 나도 웃기네."

고은이 갑자기 실소했다.

"마법사였던 내가, 얼마 전까지 중개업자로 밥벌이했던 내가 '누군가를 믿는다.'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하다니. 진짜 누구랑 같이 살고 볼 일이다."

"...."

그녀가 슬그머니 록을 쳐다보았다. 기럭지 차이 때문에 자연스레 고은의 시선이 위를 점한다.

"뭐, 유다희나 너나 이태백이랑 이렇다 할 유대가 없지? 내 말에 공감 못 하는 거. 이해할게."

"...."

록의 고운 관자놀이에 시퍼런 십자 문양이 자리 잡혔다. 맞는 말이다. 한데 기분이 나빴다.

이태백이랑 좀 돈독하다고 깔보는 듯한 저 말투와 시선. 기껏해야 같이 사는 거 가지고 되게 그러네. 내가 걔랑 지냈으면 더 친해졌을 거거든?

"*쉬익* *쉬익*"

분기가 숨소리에 배었다. 생각해 보니 유다희는 고은 이야기만 나와도 부들부들 떨었다.

과거에 둘 사이에 모종의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몇 분 같이 있었을 뿐인 록은 귀책이 고은한테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윽.

록은 급한 대로 연애 백과와 펜을 꺼냈다. 표지에서 '빨간 딱지'가 영롱한 자태를 과시했다.

사각, 사각.

잡지에 코 박고 뭔가를 쓴다.

잠시 후, 필기를 마친 록은 호기롭게 본인의 문장을 고은에게 디밀었다.

"…슴부 좀 크다고 우쭐하지 마라?"

고은은 어이가 없었다.

「중요한 건 기술.」

그리고 문장 말미에선 이내 어이가 탈주했다.

「'그곳'에서 자웅을 겨뤄 보자.」

어째서 9대대가 레지스탕스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지 새삼 깨닫는 고은이었다. 어쩌면 그 이태백이 제일 정상인일 수 있겠다는 가정 또한....

* * *

텐트 안에선 설전이 한창이었다.

"상층 홍등가에 추천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당신도 이미 입장권 갖고 있잖아. 왜, 그게 부하들한테 그렇게 쪽팔려? 그러면 가질 말든가."

"이, 이 사람이! 그, 그건 어디까지나 정보 수급을 위해서 가는 것이네! 공맹의 도를 숙원으로 삼는 개방의 수장이 그런 저속한 곳에 사사로운 욕망 때문에 가겠나?!"

노인과 젊은이가 홍등가 추천 안건을 두고 아웅다웅하고 있는 기묘한 풍경. 누구 하나 지는 법이 없었다.

"뭔 공맹의 도야. 당황하니까 어려운 말 섞어 쓰시네."

"...."

홍걸개는 번민에 사로잡혔다. 그게 이태백의 귀에 어떻게 들어갔는지가 의문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정보를 수집하러 출입하는 거긴 하다. 그래도 그 사실을 들킨다면 개방 내에서 신망을 잃고 만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조직을 이끄는 용두방주의 위상이 나락까지 실추한다.

'짱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군.'

이태백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도 안다. 홍걸개가 사사로운 욕구를 해소하고자 홍등가에 가는 게 아님을.

홍등가만큼 영양 만점 고급 정보가 돌아다는 곳은 시티 전역을 뒤져도 전무했다.

하층에서 거지들이 발품을 판 정보가 실전 정보다. 홍걸개가 홍등가에서 취득한 정보는 개방 전체의 대사를 가른다. 개방 존속의 연장선인 거다.

'알아.'

아는데.

'나도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야.'

저주의 위력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강해진다. 록같이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기프티드 '주언'은 역치가 고정된다.

고은은 경우가 달랐다.

천마가 직접 부여한 저주였다. 조금이라도 지체됐다가는 손쓸 도리가 없어진다.

그 전에 한시라도 빨리 조처해야 한다.

그러려면 협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태백은 눈빛을 굳히며 홍걸개를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추천만 좀 해 줘."

"그게 말처럼..."

"어차피 홍걸개 당신 아바타로 입장하는 거잖아. 놀이공원에서 지배인 노릇 했던 것처럼. 어차피 얼굴 팔릴 일도 없잖아. 나'만' 입 다문다면."

"감히 나를 협박하는군...."

"미안해. 그만큼 급박하다고 봐줬으면 좋겠어. 아까 내가 데려온 두 사람, 절맥이거든."

홍걸개의 한쪽 눈썹이 들린다.

"절맥...? 두 명 다 말인가?"

"어. 평생 한두 명 볼까 말까 한 저주의 소유자들이야. 한쪽은 기프티드고, 한쪽은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흐음...."

"사람 둘 살린다고 생각해."

내 내공 증진에도 일조하고 말이지.

홍걸개는 팔짱을 낀 채로 고민에 잠겼다. 머리 위에서 저울이 시소처럼 왔다 갔다 거렸다.

그러길 얼마간.

"추천인은 두 명이 있어야 하네만."

홍걸개가 물었다.

'옳거니, 넘어왔구나.'

이태백은 회심의 미소를 입안으로 말았다. 그러고는 자약하게 대꾸했다.

"한 명은 이미 확보했지."

"…누군가?"

아까 통화하면서 이것도 같이 부탁했다.

"도존 무야치."

113화 파렴치한 이태백 (2)

십익쯤 되면 심계가 고강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다. 어지간한 일로는 그들에게 기별도 가지 않는다.

그나마 거존 홍걸개가 십익치고는 감정이 풍부한 편이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세계 최강의 인형술사가 되려면 감정을 다채롭게 탈부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었다.

"도존… 그 꼴통 새끼가...?"

그런 거존이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쩍 벌린 목구멍에선 심장이라도 튀어나올 기세였다. 말을 더듬거린 그가 힘겹게 반문했다.

"이태백, 자네 도존이랑 상잔을 했던 사람 아닌가."

"그랬었지."

"그런데 어떻게 둘이 홍등가 추천인을 해 주는 사이가 된 거지?"

"추천인을 해 주는 사이라기보다는, 그냥 거래를 했어."

거기까지만 이야기해 줬다. 거존이 이태백과 우호적인 사이라곤 하지만, 이 또한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다.'

시티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돈이 아니다. 가치와 증명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비밀이 많을수록 높아진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걸 노출한 자에게는 금세 흥미를 잃는다.

은밀할수록 더 절절맨다.

'상대를 애태워라.'

아직 이룩한 성과가 그리 많지 않다면 스스로를 적당히 숨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이태백은 '컨셉:사이코패스'로 하여금 그 점을 저도 모르는 새에 체득했다.

또한 [정신] 능력치도 버프한 상태로 말하고 있었다. 홍걸개는 지금 본인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터다.

도존과 이태백의 관계.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울지.

행여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밀접해져서 본인이, 개방이 불이득을 보지는 않을는지. 저 주름진 머릿속으로 전투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겠지.

"...."

"그렇게 보지 마. 말 못 해 주니까."

입술을 옴짝거리는 걸 보니 애간장이 타는 모양이다. 개방은 정보 집단. 시티에 떠도는 소문의 대부분을 아는 홍걸개다. 자신이 모르는 진실이 있다는 점이 그의 가슴을 간지럽히고 있을 것이었다.

"…정말이지 독니를 품고 있구먼...."

거존이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소방이나 당신이나 왜 이렇게 나를 뱀에 비유하는지 모르겠어. 나처럼 투명한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 투명하지. 과할 정도로 투명해서 문제야, 이 사람아. 조금 뒤늦은 트집이긴 한데 자네 언제까지 나한테 반말 찍찍 뱉어 댈 건가?"

"노인네가 뒤끝은."

"자네는 정말 목숨이 여러 개인 모양이야."

모르는 건 어떻게든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져주기로 했다. 이태백은 더 이상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휴전을 맺었다 할지언정 개방의 본진으로 온 것을 홍걸개는 묵과했다. 왜냐하면 이태백과 척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십익이나 돼서 할 말인가 싶은데.

'이 어린 독사 놈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를 상대하는 건 그에게도 퍽 부담스러웠다.

'잠재력의 깊이를 모르겠다.'

하루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오늘은 홍걸개가 압도적으로 고지를 점할지 몰라도, 내일은 결과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태백은 그런 자였다.

그는 느슨했던 강자들의 세계에 교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하하!'

우습게도 홍걸개는 그게 기꺼웠다. 배금주의로 얼어붙었던 시티에 파란이 일고 있으니까. 심장이 다시금 맥동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이태백을 여타 십익에게 뺏길지 모른다는 위기감. 그에게 모든 여력을 쏟아붓고 싶다는 나이 맞지 않는 치기.

"추천인을 해 주겠네."

"시원시원하네. 고마워."

"더 들어 보게."

"더 할 이야기가 있나?"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이 맞물렸다. 하여 홍걸개로선 제법 충동적인 제안을 내뱉게 만들었다.

"입장권만 있다고 될 일인가? 돈이 있어야 하지 않나, 돈이. 가서 돈 한푼 안 쓰고 그냥 나오면 거기 있는 직원들이 이상하게 볼 걸게."

"그것도 그렇네."

"그 경비를 우리 개방에서 대도록 하겠네."

"…갑자기? 파격이 너무 심해서 되레 의심이 가는데."

"두 여인의 절맥을 고치고자 하는 자네의 노력에 감복해서 그러네."

홍걸개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이 노구에게 오랜만에 의협심을 느끼게 해 준 값이라고 생각하게. 나도 더는 말 못 해 주네. 이태백, 자네에게도 비밀이 있듯이 나한테도 비밀이, 자네보다 더 많은 비밀이 있기 마련이거든."

"그래 뭐, 금액은?"

"퍽퍽하게 무슨. 신용카드일세."

"시티에서 가장 귀한 재화가 신용인데 그걸 나한테 덥석 맡긴다…라. 고맙기는 한데 너무 퍼 주면 되레 의심을 사기 쉬워요, 영감. 요즘 세상이 좀 위험해야지. 여튼 당신이나 되는 인물이 그런 걸로 사기 칠 사람은 아니니까. 고맙게 쓸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태백은 등을 돌렸다. 천막을 들추고 나가려는 그에게 홍걸개가 말했다.

"소방이를 찾아가게."

31구 분타주, 진소방.

최근 그는 30번대 구역을 주름잡는 분타주였다. 종전에 청의파 일부 세력이 물갈이된 후, 홍걸개가 그곳들을 싹 다 진소방에게 일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에는 이태백의 지분도 상당했다.

"내 미리 연락을 해 둠세."

* * *

[요, 용두방주님....]

"어. 소방이 전화했는가. 올 줄 알았네."

[…말씀하신 대로… 녀석에게 카드를 넘겼습니다.]

"고생 많았네. 오늘 저녁 내로 풍개랑 함께 오려무나. 오랜만에 식구들이랑 배에 기름칠 좀 하자고."

[....]

"걱정돼서 그러는 건가?"

[용두방주님의 결정에 의뭉을 떠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녀석이 워낙에 악독한 녀석인지라.... 걱정이 안 된다면 그게 방주님을 기만하는 행위겠지요.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몇 말씀 드리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하네."

[이무기, 그 자식의 성정이 사특하거나 그렇단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이곳은 레이크 시티지 않습니까. 그 녀석이 세 치 혀로 사람을 꾀어내는 데에 도사를 넘어서 신선이라는 건, 저 진소방이도 피부로 겪어서 알고 있습니다.

녀석은 사리사욕보다 남 챙기는 걸 더 잘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장소가 장소입니다. 시티에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무턱대고 퍼 주다가 피박 쓸 수 있다, 이거군."

[....]

"소방이, 자네 맘은 잘 알아. 청의파 중에서 자네만큼 청렴한 사람은 내 본 적이 없네. 누구보다 날 생각하는 것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이다, 소방아. 그런 시티이기에 투자할 때는 과감하게 투자해야 하는 거야. '저점 매수'라는 말 들어 봤지? 지금 우리 개방이 녀석에게 쓰는 돈은 독사의 잠재력에 비하면 싸게 먹히는 거다. 그리고, 녀석이 써 봐야 얼마나 쓰겠느...."

[…그 녀석, 벌써 2억을 썼습니다.]

"…뭐?"

[아, 지금 2억 3천만 원… 아니, 더.... 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방주님. 돈이 무슨 수도꼭지를 틀어 둔 것처럼 새어 나갑니다.]

이무기, 이놈. 거지의 간을 빼먹어? 녀석이 이곳을 떠난 지 불과 한 시간 남짓이건만 '억' 소리 나는 금액이 녹아내렸다. 아직 홍등가에는 입장도 안 했을 텐데?

[방주님. 까딱 잘못했다가 30구 일대의 가산이 거덜 날 것 같습니다. 은행에 돈이 사라지고 있습니다아아.]

"한 번 믿으면… 뚝심 있게 믿어야 한다.... 이무기가 엄한 데 돈을 썼겠느냐? 필경 필요에 의한 지출이었을 것이야...."

[옷 가게랑 보석 상점을 들렀습니다.]

"...."

[어떻게 할까요, 방주님.]

"…놈을 쫓아...."

[잘못 들었습니다?]

"당장 거지들을 풀어서 놈을 쫓아라!"

* * *

이태백 일행은 한창 채비 중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상층의 홍등가를 방문한다. 하층에서 입던 옷 그대로 가면 문자 그대로 '입구컷'이었다. 위장을 해야 순탄하게 입장할 수 있다.

일단은 고은과 록을 상층 초입에 있는 옷 가게로 데려갔다. 합리적인 가게로 유명한 곳이었다.

상층의 첨단에 위치한 스토어로 반입되는 명품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판매하거든.

'게임에 옷 가게가 웬 말이냐 반대했었는데.'

서 팀장님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넣었었지. 그 설정 덕을 보고 있는 이태백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바가지를 썼을 것이다.

"저기...."

고은이 탈의실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옆 탈의실의 가림막이 들썩거렸다. 록이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저주 치료하러 가야지."

"아니, 그러니까 난...."

고은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 좋으라고만 거기 가는 거 아니야. 나도 네 저주를 푼 다음에 내가 천마랑 대체 무슨 계약을 체결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

마탑주를 만나고 온 뒤로 그녀의 자존감은 팍 깎인 채였다. 태연한 척하지만 말투에서 예전 같은 기고만장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이겨 내야지.'

이태백이 북돋아 준들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무엇 때문에 고은이 삶을 반쯤 포기한 사람이 됐는지도 모르거니와 그런 감정 쓰레기통 짓은 사양이다.

첫 만남부터 냅다 불화살을 갈기는 집주인이 매력적이지, 핫팬츠에 크롭티 좀 입혔다고 저렇게 풀이 죽은 집주인은 매력이 없었다.

"그건 알겠는데… 옷이 좀...."

"옷이 왜."

참고로 말해 두건대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를 위해서였다. 이태백의 취향은 약간, 아주 약간만 반영되었다.

"핫팬츠가 너무 짧은 거 아닐까?"

"상층의 홍등가, 아니 살롱이 무슨 학교냐. 그 정도가 딱 좋은 거야."

"속옷이! 속옷이 보일 거 같다고!"

"그래도 안 보이잖아?"

"야, 이 변태 새끼야!"

신사적 호칭은 그냥 무시했다.

"와아아아! 진짜 예쁘세요!"

사장이 고은을 보며 감탄했다. 마침 록도 탈의실에서 나왔고 감탄성의 볼륨은 두 배로 커졌다.

마냥 공치사는 아닌 듯했다. 저렇게 입혀 놓으니 진짜 아이돌처럼 보였다.

고은은 헤비 스모커에, 록은 마스크쟁이라서 그렇지 둘 다 미모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압살하면 모를까.

'꾸미고 다니면 그 녀석보다 예쁘겠는데.'

레이컨스에는 공식 미인이 존재한다. 모두의 아이돌로 활동 중이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여자.

이렇게만 보면 만인의 첫사랑일 것 같은 그녀는 '십익'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이면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화장까지 시켜 줘."

"예예. 그런데 저기...."

이태백은 카드를 내밀었다.

"긁어, 일시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티의 좋은 점은 적어도 돈 받은 만큼은 한다는 것이었다. 사장은 열과 성을 다해서 두 여인을 치장했다.

사장이 몸을 치우자 고은과 록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게의 손님들이 숫제 경탄했다. 그녀들에게선 이루 형언하기 힘든 우아함이 있었다.

'미쳤네.'

이태백도 살짝 놀랐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던데, 이 정도면 유죄가 맞다. 이태백은 성과급을 지급했고, 사장은 넙죽넙죽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을 데리고 막 거기로 나온 차였다. 익숙한 얼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타주 진소방이었다.

"이태백, 너 진… 짜...."

고은과 록은 두 남자뿐 아니라 일대의 시선을 자연스레 빨아먹었다. 이어 가게에서처럼 입에 파리가 오갈 수 있는 터널을 뚫어 주었다.

"너, 너, 너, 이 새끼!"

어째서인지 진소방의 목소리엔 노기가 가득했다.

"마침 잘됐다."

"…뭐?"

그렇지 않아도 딱 머릿수가 부족했다. 상층의 살롱은 손님을 페어로만 받는 탓이다.

이태백은 진소방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너, 우리랑 살롱 좀 같이 가자."

* * *

살롱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반드시 회원권이 있어야 한다. 단 회원권을 지참한 손님은 별도로 세 명을 대동할 수 있다.

보안에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면서까지 그러는 까닭은 홍보였다. 굉장히 퇴폐적인 방식의 마케팅이었다.

둘째, 가면을 써야 한다. 탈은 동물을 본뜬 것들로 입장 전에 임의로 지급된다.

셋째, 살롱 내에선 호칭을 가면의 동물로 불러야 한다. 그곳에는 실명을 거론할 수 없는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이태..., 살모사 양반."

진소방, 아니 돼지가 한 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태백의 가면은 뱀이었다. 그것도 대가리가 세모꼴인 독사.

"…이거 맞아...?"

그런 말이 튀어나올 법도 했다. 그야 현세에 도래한 주지육림을 마주하면 누구든 이럴 거다.

우리의 앞은 살색의 물결이었다.

114화 동물원 (1)

레이크 시티의 법치를 정면에서 위배하는 광경에 이태백 일행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오래된 고사 중에 주지육림이란 말이 있다.

술로 이뤄진 호수와 살로 쌓아 올린 산이라는 뜻. 그 표현을 그림으로 그린 것만 같은 현장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

"...."

"...."

일행들은 침묵을 지키며 침음성만 꼴딱꼴딱 삼켰다. 이태백은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이태백은 각양각색의 컨셉들로 정신을 담금질했다. 그런 그 조차도 누런 신물이 치고 올라왔으니....

볼 거 다 보고 겪을 거 다 겪어서 닳아 빠진 이들이라 해도, 두방망이질당한 듯 띵하겠지.

강현성을 데려오지 않기를 잘했다.

'걔가 봤으면 이곳에 혈풍이 몰아쳤을 거다.'

부정, 비리에 극도로 거부감을 표하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그건 이태백도 피차 다르지 않다.

'염병.'

어쩔 수가 없었다.

고은과 록의 저주를 치유할 수 있는 자가 이곳에 있지만 않았더라면 방문하지 않았을 장소.

깨나 돈 좀 있는 진소방은 눈을 감고 도호를 외웠고, 고은은 모르고 곰방대를 툭 떨어뜨렸으며, 록은 관자놀이를 두드려 자동 녹화를 중지했다.

'나중에 편집을 해야 할 텐데, 그때도 보기 싫다는 거군.'

저마다 기색을 숨기려고 애쓰나 그들의 머리를 진탕시킨 충격을 전부 주워섬길 수는 없었다.

"크하하하! 더, 더 흔들어 봐!"

"꺄르르르르!!"

"김 사장, 돈 좀 더 쓰지 그래?!"

이태백은 소란 속 고독을 짓씹었다. 그와 함께 온 일행도 마찬가지로 고요히 동요했다.

최하층 구역의 홍등가? 상층 구역 살롱의 퇴폐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이었다.

상층의 변태들은 격이 달랐다. 차마 입에 담기도 역겨운 행동을 보고, 즐기며 시시덕거렸다.

이태백과 일행이 혼이 빠진 채로 입구를 가로막고 있자 웨이터 하나가 다가왔다.

"에스코트가 필요하십니까."

정중히 말을 거는 웨이터를 곁눈질로 훑었다. 왁스로 굳은 머리는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달걀처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가면엔 눈구멍만 덜름하게 뚫려 있었다.

"...."

"마담? 무슈?"

대답이 없자 눈구멍 밑으로 눈매가 가느스름해진다. 웨이터가 인상착의를 살피고 있음이 느껴졌다.

지나칠 정도로 옷매무새가 정돈되어 있다. 가늠컨대 평범한 웨이터는 아닌 것 같았다.

'입장 운이 나쁘면 지배인이 걸린 거일 수도 있겠는걸.'

능숙하게 비춰질 필요가 있었다.

준비해 둔 대사가 좀처럼 뱉어지지가 않는다. 나도 사람이야! 심마에 빠질 것 같단 말이다!

컨셉이 안면 근육을 점령하고 있다고 해서, 비위까지 마취해 주는 게 아니다. 말 그래도 컨셉일 뿐이지.

"혹시 입장권을 제시해 주실 수...."

웨이터의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태백 쪽에서 선수를 쳤다. 말하지만 이태백이 아니라 그의 동행인, 고은이.

철썩!

달걀 가면에 '쩍' 하고 금이 갔다.

멀치를 향해 있던 웨이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온다. 고은이 재차 따귀를 갈기며 씹어뱉었다.

"어디 웨이터 나부랭이가 먼저 입을 털어. 여기 직원 교육 제대로 안 하나 봐? 컴플레인 좀 걸어야 겠는데?"

"...."

근처를 오가던 손님들은 본 체도 안 하고 지나쳐 갔다. 이걸로 지배인 격은 아님을 확인했다.

고은도 알아챘는지 입에 걸린 걸쇠를 풀었다. 그리고 웨이터에게 예기 서린 말씨로 쏟아 냈다.

"아까부터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도 기분 나쁜데. 여기 익명 보장 아니었나? 내가 자리 비운 그사이에 뭔가 바뀌었어? 아, 하나 바뀌었네. 웨이터 싸가지가 바뀌었어."

고은은 그리 쏘아붙이면서 곰방대를 꺼냈다.

탁.

곰방대 머리에 불씨가 붙었다. 고은은 토끼 가면의 하관 부분을 엄지로 살짝 들춰서 곰방대를 머금었다.

담배 연기가 촉수처럼 스산하게 웨이터의 가면을 도포했다. 그가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삼매진화.

가장 기초적인 원소 마법. 그러나 저토록 정밀하게 조적하는 것이 셜코 쉽지 않음을 웨이터는 아는 눈치였다.

'케, 케르겔 마탑!'

케르겔 마탑은 뭇 메가코프와 별개 취급이었다. 학구적 기풍이 강해서 살롱을 찾는 법이 없었다.

정말 간혹 가다 올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중요한 용무를 보기 위해서 오는 것이었다.

여차하면 그걸 초 칠 뻔했다. 오싹오싹한 상상에 웨이터의 턱에 식은땀이 뚜껍게 고였다.

"상황 봐 가면서 하자."

"아, 아. 아...!!"

고은의 경고에 웨이터는 멍청한 탄성은 몇 번이고 터뜨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웨이터는 덜그럭거리는 가면을 정비하고는 꾸벅 허리 숙여 거의 절하듯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귀, 귀, 귀인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그럼 팁은 안 줘도 되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찌 토… 끼님께 팁을 받을까요! 저희 살롱을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하, 하나… 절차가 절차인지라 회원권 확인을..."

그 타이밍에 이태백이 치고 나갔다.

"이 이상은 우릴 귀찮게 하지 마라."

"허억...!!"

카드를 잘 보이게 내밀자 웨이터는 숫제 질식하는 소리를 내었다.

추천인 두 명 모두가 VVIP여서 웨이터가 저런 반응이었다.

추천인의 등급에 따라 신회원의 위상이 정해지거든.

그리고 이태백의 추천인은 자그마치 거존 홍걸개와 도존 무야치였다.

웨이터가 그들의 실명을 알 턱은 없어도 V자 두 개는 망막에 때려 박히고도 남을 터다.

이태백이 두 손으로 내민 카드를 무심하게 회수함과 동시에 웨이터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귀빈 여러분."

"31번 살롱을 쓰고 싶은데."

"아! 마담 셀린을 찾아오신 거군요!"

대충 그런 이름을 쓰고 있군.

"그런 셈이지."

"역시 귀인 여러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쩌죠. 지금 마담 셀린은 공무 때문에 바쁘십니다."

"공무라면."

"죄송합니다만… 규율상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웨이터는 제법 근엄하게 말했다.

직원 교육은 확실하구먼. 사실 상관없다. 마담 셀린 뭐시기의 본업이 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경매 시작은 몇 시지?"

"30분 후에 시작입니다."

이태백이 경매까지 거론하니 웨이터는 이제 완전히 의심을 거두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이 마담 셀린과 안면이 있다고 확신하는 기색이었다.

"좋아. 안내해."

"안내할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웨이터는 등을 내보이며 앞장섰다.

이태백과 일행은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웨이터를 뒤따랐다.

입구서부터 물밑작업이 탄탄했던 터라, 이태백과 일행은 소지품을 그대로 들고 반입할 수 있었다.

파라블레이드의 날카로운 냉기가 등허리를 감싼다. 허리춤에서도 파이톤도 지지 않고 건재함을 알려 왔다. 여차하면 자신들을 써 달라는 듯.

* * *

후덥지근한 공기의 결을 헤집으며 걸었다.

가는 길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너머에서 벌어지는 추태의 그림자가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쯤 되니 이태백 일행은 덤덤해졌다. 다만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대폭 낮아질 따름이었다.

땀 냄새 자욱한 복도을 가로질렀다. 교성이 여기저기서 비산했다. 언제 이 지옥이 끝나나 싶은 차.

스륵.

종점에서 웨이터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커튼을 두 치 거두면서 공손히 안쪽으로 손짓했다.

"여기입니다, 마담, 무슈."

이태백은 허리를 살짝 숙이고 안으로 진입했다. 일행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곧 넓은 공간이 그들을 반겼다.

오페라 극장을 방불케 하는 무대. 좌석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물 가면을 쓴 자들로 꽉 차 있었다.

'씨발.'

순간, 이태백은 PTSD가 왔다. 전기의자에서 지지미 당했던 그때가 바로 연상된 탓이었다.

어쩐지 오는 내내 창자가 꼬이는 기분이라더니. 어김없이 부패의 온상지가 기다리고 있었군.

'뇌옥과의 차이라면 차림새가 있겠네.'

뇌옥은 턱시도를 차려 입고 있은데 반해 이곳은 뭐랄까······. 저걸 입었다고 표현하기 민망했다.

충동이 솟구친다.

부패를 척결하고 싶다.

'참아, 차아라.'

파라블레이드와 파이톤을 대신해서 심호흡을 하고 있자니 돼지(진소방)이 슬그머니 물었다.

"이태, 아니, 살모사 괜찮냐...?"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안 괜찮아 보여서 하는 말이다. 하여간 이번 일 끝나면 이야기 좀 해. 설명 들을 게 많아."

"그래… 그러자고...."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각 좌석의 팔걸이에는 피켓이 놓여 있었는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입찰할 때 본인을 알릴 번호였다.

진소방과 록은 피켓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그들 나름대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듯했다.

얼마간 그러고 있자니,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경매장 전체가 암전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장내가 끈적끈적하게 고조되고 있었다.

파앗!

이어서 암흑이 걷혔다. 조명이 네 방향에서 무대의 정중앙에 광선을 쏘아 내고 있었다.

나비 가면을 쓴 여자가 조명의 중심에 선 건 잠시 후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성량이 쩌렁쩌렁했다. 이 넓은 공간 구석구석까지 목소리가 번져 나갔다.

나비 가면 여인은 그렇게 재치 있는 말솜씨와 마이크 하나만으로 무대 전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상층 구역에서 밥벌이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군."

바로 옆에 앉은 진소방이 중얼거렸다.

"살모사, 너도 말재주 꽤 있잖아. 이참에 여기에서 취직하는 건 어떠냐. 얼굴도 반반해서 꽤 인기 좋을 거 같은데 말이지."

"네 신용카드가 나한테 있단 걸 잊었나 보네."

"헛소리였습니다, 형님."

"오냐."

순서 설명이 끝나고 곧장 경매가 진행되었다.

경매 품목은 퍽 정상적이었다. 흔해 빠진 귀금속부터 동양의 미학이 물씬 느껴지는 도자기. 여기까지는 불쾌감을 유발하는 경매품은 없었다.

관중들도 하나둘씩 입을 두드렸다.

면면에 지루함이 물들어 가려는 순간.

나비 가면이 다시금 이목을 휘어잡았다.

"여러부운! 지루하시죠!"

야유가 환호처럼 쏟아졌다.

나비 으쓱 능청을 떨고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루함이 있어야 도파민이 더 솟구치는 법이죠! 음, 그래도 10분 경과했으니. 토끼인 여러분치고는 잘 버티셨네요!"

"하하하하하!"

"자자,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다들 허리 바짝 세우세요! 워워, 다른 거는 가만히 있으시고!"

"꺄르르르르!"

천박하기 짝이 없군.

'그래도 이제 본막 시작인가.'

이태백은 느슨했던 허리를 곧추세운 다음 피켓을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첫 번째 이벤트 품목은!"

두구두구두구.

사방에서 들려오는 타격감 넘치는 드럼 소리.

장단에 맞춰 어지럽게 움직이던 조명이 한 지점에서 뚝 멈췄다. 시선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저기 독사 가면이 첫 품목 되겠습니다!"

썩을, 드럼이 아니라 변죽을 울리는 소리였군.

"일이 쉽게 쉽게 간다 했어."

지체할 새는 없다.

이태백은 파라블레이드의 개폐 버튼을 눌렀다.

115화 동물원 (2)

마담 셀린.

그녀가 나비 가면이라는 건 등장과 동시에 알았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나비 가면을 뚫고 느껴지는 요요한 눈빛이 계속 이태백과 일행을 향해 있는 것도 말이다.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인내심이 약한 이태백은 잘 버텼는데.

정작 상대방이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담 셀린은 탐미주의자였지.'

쉽게 말해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기준에서 마음에 든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려 한다. 그 카테고리 안에 인간도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 때문에 고은과 록을 한껏 꾸미고서 이곳, 살롱을 찾아온 거였다. 그녀들이 마담 셀린의 눈에 들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수가 있었다.

마담 셀린을 간접적으로 창조한 이태백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주특기가 기출 변형이라는 사실은 뇌에 새기고 있었지만....

"저기 있는 살모사 가면이 다음 품목 되겠습니다! 입찰 시작할게요. 일단 저부터 제시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참여하는 경매라, 어떻게 돼 먹은 세상이냐 여기는. 이건 기출 변형이 아니라 과목이 다른 거 아닌가?

"저기 저 살모사 가면을 홀딱 벗겨서 제 앞에 대령하는 분께는! 그 주변에 있는 저 여자들을 무료로 증정하겠습니다!"

"오오?!"

마담 셀린이 눈도장을 찍은 사람은 고은과 록이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 이태백이었다.

"시 정부의 눈치는 볼 거 없어요. 알잖아! 우리 살롱의 뒷배가 누구인지! 자, 다들 솜씨를 발휘해 보세요!"

"쟤만 잡으면 된 다는 거지?"

마담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저 혼자 왈츠를 추듯 스텝을 밟으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저희 살롱이 책임지고 덮겠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활개 치세요! 날뛰어 보세요!"

"약속 지켜야 해, 마담. 아니면 재미없어."

"여기 계신 분들에게 거짓말할 정도로 제가 강심장은 아니랍니다?"

살롱의 주인이 직접 불안을 잠가 주자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시선이 진액처럼 끈적끈적하게 몸을 훑어 내린다. 가면 아래서 음욕이 한가득 어린 눈으로 이태백과 일행을 품평하고 있을 터였다.

'일반적인 관객이 아니었어.'

털이 부숭한 피부 위로 전자 회로가 빛을 발했다. 핏발처럼 일어선 열선은 형광빛으로 명멸하며 증기를 배출했다.

총 스무 명 정도.

그 전원이 전신 의체였다.

부지불식간에 일은 전투의 징조에 이태백 일행은 찰나 동안 어어 거리다가 의자를 박차며 기립했다. 얼을 탄다 해서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들을 위해서라지만 살롱으로 데려온 건 어쨌든 본인이었다.

저벅, 저벅.

그렇다고 당장 사과를 하기엔 상황이 좋지 못하다. 전신 의체로 무장한 일당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쯤 벗고 있는 데다 조명이 어스름해서 전신 회로가 선명하게 보였다. 굉장히 위압적이었다.

"X, X발. 저 새끼들 뭐야."

소방아, 또 놀라냐.

"상층 살롱인데 아무 새끼나 왔을까 봐? 그리고 경매잖아. 다들 시티에서 한가락 하는 놈들이 와서 음습한 욕망을 푸는 장이잖아, 돼지."

"누, 누가 돼지래! 이 마녀가!"

얼씨구, 와중에 투닥거릴 여력은 있나 보다.

집주인도 회복 탄력성이 참 좋아.

'금세 멘탈을 봉합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걸 보면.'

부득불의 상황에선 진소방 같은 반응이 정상인데.

일행 중에서 그나마 침착한 그녀에게 이태백은 스치는 듯한 말로 추가 정보를 전했다.

"커튼 뒤에 세 놈 더 숨어 있어."

"그거까지 어떻게 파악했대."

"그냥 알겠던데."

이태백의 '기척 감지'는 동 레벨대 강자들의 그것을 아득히 능가한 채였다.

패치가 적용될 적마다 비례 수치가 덩달아 올랐거니와, 그의 주변인들이 지속적으로 이태백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준 덕택이었다.

칭찬은 물개도 비보잉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운영자인 이태백도 마찬가지다. 작중 캐릭터들이 그를 호의적으로 보기 시작하니 '비례 수치 상승폭'이 저도 모르는 새에 확장되었다.

가장 크게 일조한 당사자가 짜게 혀를 찼다.

"아예 작정을 했군."

이태백도 동감하는 바였다.

잠입을 사전에 알았던 건가? 어떻게? 필시 비밀리에 왔는데? 알아봐야지.

'일단 이 빌어먹을 상황을 타개하고.'

정신이 얼른 제자리로 복귀했다.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태백은 파라블레이드를 발도하면서 씹어뱉었다.

"일부러 아무것도 안 찍어 발랐는데."

제가랄, 얼굴이 잘생겨도 탈이다.

스스로가 재수 없어지기는 처음이야.

그러는 사이.

"흐흐흐, 예뻐해 줄게."

"우리가 누군지 알면 알아서 기고 싶을걸?"

천박한 새끼들이 지척까지 접근했다. 그래도 전투 모드에 돌입한다고 옷을 좀 걸쳐 줘서 다행이었다.

스르릉.

칼날이 파라블레이드 심지를 안을 긁듯이 뽑혀 나왔다.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쇳날.

"분명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불문에 부친다고 했지."

그 얇은 칼날에 독사 가면이 아롱졌다.

[긴급 퀘스트-〈참교육〉이 발생했습니다!]

[게임의 심의를 해치는 요소를 제거하세요!]

[40,000 EXP와 운영자 포인트 20pt를 증정.]

제법 기꺼운 오산도 함께.

"다 죽여 주마."

이태백의 남은 손이 '탁' 손가락을 튕겼다.

거의 동시에 밟고 있던 의자가 허옇게 물이 들었다. 경매장에 휘도는 냉기. 열선에서 사출하는 증기가 또렷해지자 가면 밑 눈동자들에 당황의 기색이 스쳤다.

전신 의체라고 한들 뇌마저 갈아 끼우지는 않았겠지. 감정이 완전히 마비되지 않았다면 빈틈을 보이기 마련이요, 빈틈은 기회로 치환된다.

오랜 중첩의 결과물이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방법을, 이태백은 그간의 전투 경험으로 터득했다. 시티에 온 지는 연 단위도 안 됐으나 밀도가 다르단 소리다, 밀도가.

[설무.]

'탁!' 이태백은 태풍의 눈이 된 것처럼 뿌연 연무를 몸에 둘렀다. 허연 연기 안에서 세모꼴의 가면이 흔들린 때.

콰광-!!

얼어붙었던 의자가 파편으로 비산했다. 의자를 터뜨리고 달려든 이태백이 칼을 내질렀다.

새된 비명과 함께 뒷덜미에서 칼날이 삐죽 튀어나왔다. 두 손이 올라와 검을 뽑아 보려 하는 놈의 가슴을 걷어찼다. 뒤편에 바싹 붙어 있던 놈이 팔을 휘둘러 걷어 내려 했다.

시도에 그쳤다. 머리가 꿰뚫린 자와 그의 팔뚝이 하나로 체결됐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이미 아이스크림이 된 상태였고, 시체의 냉기가 산 자와 만나 달라붙었다. 전신 의체라서 시체와 산 자의 온도 차가 크지 않아서 접착은 순식간이었다.

한쪽 팔이 봉인당한 놈이 낑낑거린다. 이태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약했다, 높게.

앞 대열에 있던 다섯이 일거에 고개를 들었다. 머릴 젖히고서 올려다보는 황망한 면면. 그걸 응시하다가 이태백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운영자가 불릿 타임을 개시합니다.]

[마력과 정신을 제외한 스탯은 너프.]

[제약의 발동으로 스탯 가중치 상승.]

이태백은 파이톤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높고 연달아 울려 퍼지는 총성. 파이톤에 들어가는 총알의 수는 여덟. 천장 이곳저곳에 매달려 있는 조명의 수와 일치했다.

타앙, 타앙!

〈불릿 타임〉으로 시간의 흐름을 한없이 유보시켰으며, 〈정신〉을 버프하여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감정의 여운을 이내 싹 다 걷어 냈다.

그러니 빗나가고 싶어도 빗나갈 수가 없지 않겠는가.

탄피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명의 뿌리 부분에서 스파크가 튄다. 타닥타닥, 소음과 함께 폭삭 내려앉으며 폭발했다.

소요와 동요.

아군은 그 순간을 절묘하게 노렸다.

'탁' 한 놈의 발등에서 불씨가 올라오더니, 이어 가슴팍에 불화살이 꿰인 채로 몸부림쳤다.

전신 의체라서 불이 쉽사리 붙지는 않았는데, 고은은 타점을 좁힌다는 제약으로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비록 타깃은 한 놈밖에 지정하지 못하지만.

'한 놈은 분명하게 끝장낼 수 있지.'

게다가 바닥에 떨어진 조명의 불빛까지 마법으로 갈무리해 적들의 시야를 차단했다. 마법의 새로운 운용법.

피차 안 보여도 우리가 유리했다. 머릿수에서 차이가 났다. 저쪽은 수가 많아서 운신에 제약이 걸리지만 이쪽은 고작 네 사람이었다. 마음껏 활개 쳐도 된다.

그제야 진소방이 질주했고, 록도 나섰으며, 어느새 파라블레이드를 거꾸로 잡은 이태백이 내리꽂혔다.

켁!

칼날이 한 놈을 세로로 관통했다. 닭꼬치가 된 놈은 팔을 들어 반격을 가했다. 뇌가 손상되지 않았기에 놈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철컹-!

손목이 젖혀지며 나온 포구가 이태백의 미간을 겨누었다. 놈이 무어라 욕설을 지껄이며 씨익 웃었다. 팔 전체가 우웅 진동하며 열린 손목에서 주홍색 에너지가 이글거렸다.

"...?"

그러다가 팍 식었다. 뭔데, 뭐냐? 놈은 독사 가면을 눈앞에 두고도 눈동자를 사정없이 움직였다. 시스템에 외부 침입이 발견됐는데 그건 독사의 수작질은 아니라고 판단해서였다.

정확했다. 록의 솜씨였다. 그녀는 의자를 차폐물 삼으면서 적재적소에 마스크를 내리고 입을 벙긋했다.

"■■■."

주언. 하루에 딱 한 번 '개념' 하나를 빼앗는 능력. 록은 지금 "에너지"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에 단상 방향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기미가 느껴졌다. 저주 전문가인 마담 셀린일 터였다.

조금 이따 보자고, 아줌마.

얼마 안 걸릴 거야. 제법 잘 속였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이 정도 흉계는 오차 범위 안이었다.

그리고 원래 게임이 예상대로 가면 하는 사람으로선 짜게 식어 버린다. 맞다. 이거 게임 아니지.

"뭐, 그게 상관 있나."

눈을 내리자 마주치는 눈 한 쌍. 눈빛으로 보내는 목숨의 구걸.

이태백의 동공은 무심했다. 사이버네틱 의안보다도 훨씬 더 무감정한 검은 눈으로.

적이 전의를 잃은 눈이 된 순간 이뤄진 재빠른 장전. 애원하는 적의 미간에 구멍을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나. 내 마음을 흔들 거였으면 이런 천박한 장소에서 만났으면 안 됐지. 아니면 옷이라도 입고 있든가."

퍽퍽한 핀잔을 던지며 눈 주변을 뒤덮은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런 뒤, 눈알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사냥을 속행했다. 때론 마법을, 때론 냉병기를, 때론 중화기를 번갈아 가며 적을 학살한다.

마담 셀린은 뒷골이 송연했다.

신원불명의 강자들은 무참히 썰려 나간다. 전신 의체를 입었으면 못해도 닌자 한 명분은 한다는 소린데, 무색하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독사 가면과 그 일당은 어둠과 장비를 이용하여 본인들의 화로와 적의 사문(死門)을 뚫었다.

'뭐지?'

파리채로 벌레를 잡아도 저거보단 어려울 거 같은데? 간헐적으로 번뜩이는 장내. 리볼버가 토하는 불빛으로 어림하건대 잔당의 수는....

셋, 둘, 하나.

그렇게 그녀 자신만이 남았다.

커튼 뒤로 대기하고 있었던 그녀의 부하들의 기척도 어느새 하나만 남았다. 뒤돌아보니 언제 생겼는지 모를 탄착흔이 두 방 뚫려 있었다.

살아남은 한 놈은 콩벌레처럼 머리를 감싸고서 떨고 있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여기다가도 총알을 갈겼다고?

마담 셀린의 영육이 둘로 분리되기 직전. 예리한 파공성이 그녀의 귀걸이를 건드리고 넘어갔다.

주르륵.

흐물텅 미끄러지는 가면. 이어서 뺨을 가로지른 상처에 빨간 포말이 맺힌다.

터벅, 터벅.

이태백은 토템 같은 그녀를 무시하고 옆을 지나갔다. 비명, 잇따르는 총성.

투척한 칼을 회수한 그가 이번에는 반대편 귀걸이를 칼날로 더듬어 만졌다.

"생각해."

이태백이 더운 숨을 토해 냈다.

"네 목숨의 입찰가는 얼마인지."

116화 기연 (1)

"...10억은 하지 않을까?"

마담 셀린의 느물거리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이었다. 파라블레이드의 칼날이 경동맥 언저리를 가벼이 노크했다. 침 한 번 잘못 삼키면 피분수 쇼 개시였다.

"마담 셀린이라는 이름값이 있는데 더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살롱에서 안주인 노릇하면서 수급한 정보가 있을 텐데."

"이런 업소에서 도는 정보가 중요하다면 얼마나 중요하겠어. 내 목숨값으론 10억이 딱 적당하지."

마담 셀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태연함을 시늉하고 있었다. 가면이 쪼개져 없어졌는데도 일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과연 살롱의 안주인 노릇을 하는 여자이니 담력이 크긴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러니까 경매에 손님으로 참여한 이태백을 품목으로 올렸겠지. 다만 이태백에겐 안 통한다. '기척 감지'로 그녀의 기식을 확인해 본바, 그녀는 긴장 상태였다.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 입술이 바싹바싹 타니 저도 모르게 부스럼을 쓰는 혀끝. 사이버네틱 의체는 아닌지 피부에 일어선 솜털. 마담 셀린의 생체 징후가 이태백의 뇌리에 때려 박힌다.

사실상 그녀는 저기 관중석에서 죽어 있던 반쯤 벗은 시체들보다도 알몸에 가까웠다.

"더 써. 안 그러면 당신 죽어."

칼날을 더 들이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경고했다. 그러자 신호가 왔다.

"…이런 말, 진부하긴 한데."

마담 셀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내가 만난 놈들은 하나같이 그 대사를 했지."

이태백은 그리 말하고서 파이톤의 총구를 내렸다. 총성의 뒤를 잇는 찢어지는 비명.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구멍이 뚫린 발등을 내려다보는 마담 셀린의 눈동자가 멍해질 뿐이었다.

"내가 시티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건데, 이 과학이 지랄 맞게 발달한 도시에서는 시간이 생명이야. 그러니까 상대한테 편하게 입 털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거지."

"그게… 씹, 무슨...."

"너, 거기 구두 밑."

이태백이 발치를 눈짓했다. 뚫린 발등 아래에서 전선이 타닥타닥 전류를 튀기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격으로 목질 바닥 밑에 깔린 호출 장치를 아작냈다.

"다, 당신 어떻게. 그걸...!"

그러자 마담 셀린은 한없이 해쓱해졌다.

이 경매장에선 생명을 사고파는 일이 빈번하다. 혹시 모를 불상사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거다. 그렇기에 단상 이곳저곳에 긴급 호출 장비가 산재해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마담 셀린을 비롯한 살론의 내부인밖에 없었다.

그런 줄 알았겠지.

그런데 어쩌나. 개발자를 빼놓으면 몹시 섭섭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경매장을 만든 것도, 저 비상 호출망을 구축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태백 자신이었다.

레이컨스는 15세 이상 이용가 게임으로 개발되었다. 홍등가는 심의 때문에 상세하게 묘사는 못 하지만 경매장은 괜찮았다.

그리고 이런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경매장은 떼어 내려 해도 떼어 내기 어려운 필수 요소였다.

해서 개발자 태백 리는 '마담 셀린의 경매장'을 보스전의 무대로 기획했다. 여담으로 여기서 등장하는 보스가 바로 '인간 백정 쇼헤이'였다.

'파라블레이드를 들고 학살쇼를 부리는 건 걔나 나나 똑같네.'

이태백은 돌연 실소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마담 셀린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셔 버렸다. 그녀의 눈에 독사 가면을 쓴 이태백은 인간 백정이나 다름없었다. 이 또한 본의 아니게 원작 고증을 따라 버린 이태백이었다.

"30억...."

"더."

"32억… 이 이상은 진짜 없어."

아직은 따끈따끈한 총구가 마담 셀린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그녀는 화약 냄새 탓에 안구가 아렸다.

"35억."

"입찰 성공했다."

이태백은 칼끝과 총구를 내렸다.

"입금 관련은 저기 있는 돼지 가면이랑 상담하면 돼. 35억이라고 하면 아주 헤벌쭉 웃을 테니까. 저 인간, 생긴 거 그대로 돈미새거든."

"...."

마담 셀린은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독사 가면 일행이 시신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돼지 가면의 손속이 유별나게 거침없었다. 말마따나 진소방은 헤벌쭉 미소하며 전신 의체를 이리저리 뜯어 보았다.

성향은 오의파인 진소방이 청의파로 전향한 데엔 의체를 향한 지대한 관심이 컸다. 그는 의체라면 사족을 못 썼는데, 오죽하면 팔이 사라졌을 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정도였다.

진소방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거 좀 떼다가 릴리스 교단으로 가져가면 쓸 만하겠는데? 거기 정비사가 대성 그룹 출신이라 그런지 실력이 좋단 말이야. 이걸로 우리 식구 중에 안타깝게 팔다리 잃은 애들 재활시킬 수 있겠어!"

"맨날 나한테 마녀, 마녀거리더니 개방 분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팔다리 뜯어먹을 생각이나 하네."

"너보다는 낫지! 너 거기 손가락 떼! 여기 있는 거 싹 다 소각하려는 거지?! 이 마녀야!!"

고은과 진소방이 드잡이하는 모습.

예전의 이태백 같았으면 눈살을 찌푸렸겠지.

하나, 현재 그의 심계는 마르고 닳았다. 선 폭력 후 협상을 할 정도로 뇌 한구석이 텅 비어 버렸다. 물론....

[운영자의 '정신'을 너프합니다.]

[제약 발동. 효과가 20배 상승.]

[상대방의 '정신'을 너프합니다.]

[상대는 운영자에게 전율합니다.]

이태백이 눈길을 옮겨 왔다.

시선을 받는 마담 셀린은 폐에 가득 고였던 숨을 토해 냈다. 구토감를 달래는 그녀에게 이곳을 찾은 목적을 밝혔다.

"저주사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뭐...?"

"내가 상정한 당신의 목숨값은 40억이었는데, 8억 부족하니. 그건 저주를 해주하는 비용으로 치고."

그게 뭔 개 같은 논리란 말인가?

"자, 잠깐. 그게 무슨!"

"안 할 건가?"

이태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마담 셀린의 등줄기도 덩달아 차가워졌다. 이 독사 새끼, 자신의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을 셈이었다.

한참 의체를 갈무리하던 진소방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낄낄 웃기 시작했다. 저 여자, 상대를 봐 가면서 깝쳤어야 했다.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말을 알게 될 것이다. 진소방은 살아생전 이태백만 한 독종을 본 적이 없었다.

* * *

[긴급 퀘스트 - 〈참교육〉을 클리어했습니다!]

[사이다를 선사해 특수 경험치 추가 증정!]

[40,000EXP와 운영자 포인트 20pt를 획득!]

* * *

볼 일을 마치고 이태백과 일행은 마담 셀린을 앞세워 커튼 콜 뒤편으로 들어섰다.

마치 제집 안방 들어가는 양 자연스러운 입장. 마담 셀린은 넋이 나가는 한편 어이가 없었다. 사고의 실타래가 꼬이다 못해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마담 셀린은 생각하길 포기하며 이태백 일당을 본인의 비밀 공간으로 순순히 들였다. 황혼과 양초의 불빛이 고즈넉이 어룽거렸다. 점집을 연상케 하는 은은한 향냄새가 풍겼다.

[냉각]

이태백은 냉기 마법으로 문을 얼려 붙였다. 마력이 버텨 주는 한, 외부에서 침입은 못 할 터다.

낌새를 알아차리고 방화로 얼음을 녹이려 해도 소용없었다. 불속성 마법의 스페셜 리스트가 곁에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태백이 방석을 하나 꺼내 앉았다. 그의 일행들도 따라서 방석을 하나씩 깔았다.

"마담, 당신은 서 있어."

그렇지 않아도 발등에 구멍이 뚫린 마당에 거동이 불편한데 이태백은 서 있을 걸 명령했다.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너무하긴."

빛살처럼 뽑혀 나온 파이톤이 아가리로 불을 뿜었다. 탕, 탕, 탕. 바닥에 생긴 세 개의 탄착흔.

총성 때문인지 때마침 촛불 하나도 꺼졌다. 마담 셀린의 희망의 불씨가 사윈 것도 동시였다.

이태백이 총을 수납하며 중얼거렸다.

"이 좁은 밀실에 많이도 숨겨 뒀네."

"...."

아니나 다를까, 먼젓번과 같은 비상 호출망이 가판 아래에 숨어 있었다. 마담은 생각했다.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저 독사 놈의 정체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저주를 풀려고 왔다고...."

이태백이 가면을 벗으며 주억거렸다.

"댁이 시티 최고의 저주사잖아."

"병 주고 약 주기는."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이 좋아진 마담 셀린이었다. 독사 놈의 얼굴이 잘생긴 점도 한몫했다.

저거, 잘만 키우면 어지간한 배우들을 실직시킬 비주얼이었다. 저런 외모로 사람들을 슥삭거리던 게 아이러니긴 한데. 경매장에서 온갖 인간을 봐 온지라 금세 침착해지는 그녀였다.

"잘 찾아왔어. 내가 살롱의 안주인이자 시티 최고의 저주사인 셀린이야. 첫만남이나 꼬라지가 이렇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그렇고 나 이젠 앉아도 될까?"

"그러든가."

마담 셀린은 일순 개가 된 듯한 치욕감을 느끼며 일단 방석에 앉았다.

"그래서, 저주 보유자는 저기 저 꼬마 아가씨인가?"

록을 말하는 거였다.

"아까 보니까, 주언이던데. 내가 그래도 꽤 많은 저주를 보유자 봤다고 자부하는데 주언은 이번이 두 번째네."

"나머지 한 명은?"

"알면서 물어."

진소방의 질문에 마담이 픽 실소했다.

"십익의 '그 사람'뿐이 더 있어?"

"그 아이돌이 주언 보유자라는 게 사실이라니."

"더 많은 비밀이 있지. 알려 줄 순 없지만."

마담은 은근한 시선으로 록을 훑었다. 록은 그게 싫은지 이태백 등 뒤로 숨었다.

"한 명 더 있어."

이태백이 말했다. 진소방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록이 주언을 쓴다는 건 조금 전의 혈투로 막 알았다.

"설마 독사, 너 저주받았냐?"

"네 희망사항 말하지 말고."

이태백은 고은을 향해 턱짓했다.

"이 꼬마애랑 이 여자. 이렇게 둘이 저주 보유자야. 내가 알기론 저주를 해제하려면 저주 보유자가 두 명은 돼야 하잖아. 둘 모아 왔으니까 솜씨 좀 보자고."

마담 셀린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어마어마하네. 너 뭐 하는 놈이니?"

"내 정체에 대해선 알 필요 없고."

이태백은 회원권을 잘 보이게 내밀었다.

두 명의 추천인. 등급은 둘 다 VVIP로 최상. 평범한 웨이터는 감별할 수 없지만 안주인인 마담 셀린은 닉네임만으로 대번에 추천인들을 알아보았다.

십익 중 한 명과 교분이 있다고 은근히 으스대던 그녀였기에 더 경악한 기색으로 변했다.

"끌 거 뭐 있어. 빨리 진행시켜."

이태백은 회원권을 넣었다.

마른침을 삼킨 마담 셀린은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뇌 빼고 몸만 부지런히 움직이자.

응,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잘할 수 있어.

"저기, 근데, 요."

어느새 바뀐 말씨.

"일단 저주라는 게 이게 막 냄새처럼 휘발되거나 그런 게 아니거든요. 어떤 형태로든 치환되거든요? 대개는 내공이나 마력으로 바뀌긴 하는데..., 정말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만… 간혹 가다가 저주의 형태 그대로 전이 될 수가 있어서."

"내가 장담컨대 상황 꼬일 일 없어. 그 저주의 불순물은 내가 받아 낼 테니까. 넌 잘하는 걸 해."

"무슨 근거로...."

"내가 운이 좀 좋거든."

이태백은 편하게 앉은 자세를 풀고 가부좌를 틀었다. 진소방도 일어나 호법을 설 준비를 했다.

117화 기연 (2)

"저주는 물리를 벗어난 초상현상이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파장으로 들 수 있어."

마담 셀린의 설명이었다. 그녀는 등을 맞댄 채 세모꼴로 앉은 세 사람의 중심에서 서 있었다. 인간으로 삼망성을 그린다면 이와 흡사하리라.

그 괴이쩍은 의식의 방청객으로 초빙받은 자 진소방. 이태백과 고은, 록은 눈을 감고 있는 통에 설명을 듣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 혼자만이 마담 셀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주를 상쇄하려면 그 파장을 같은 수치로 맞춰야 해. 아주 섬세한 작업이 요구되지."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던 진소방이 삐딱하게 말을 받았다.

마담 셀린은 가자미눈으로 흘겼다가 이내 안면 근육으로 미소를 빚어내며 대꾸했다.

"힘드니까 저주 관련한 스페셜리스트가 적다고는 생각 안 해 봤어?"

"…확실히."

진소방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곧장 눈을 홉떴다. 안광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될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마담 양반."

진소방의 사이버네틱 의체가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둥그런 금속체가 알루미늄 호일처럼 무참히 구겨졌다. 폭력을 동반한 경고로는 더할 나위 굵직했다.

"그 세 사람 중에서 한 명이라도 눈을 뜨지 못하면 댁이 이 문손잡이처럼 되는 거야."

"댁네는 내게 부탁하는 입장 아니야...?"

"부탁은 저기 저 독사 놈이 한 거지. 나는 저놈에게서 호법을 서 달라는 부탁을 받은 거고."

진소방은 그리 말하며 이태백을 일별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심상을 가다듬으며 호법에 돌입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표층 의식이 가라앉았겠지. 진소방과 마담의 대화 소리가 아련히 멀게 들릴 터였다.

두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운기조식에 들어간 이상 운신은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부의 방해를 받으면 여차하면 주화입마에 빠지고 만다.

아니,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호법을 서 줘야 했으며 진소방이 맡은 역할이 그것이었다.

'마녀의 호법을 서 주는 게 내키진 않는다만.'

진소방 패거리는 고은의 거취를 줄곧 주시하고 있었다. 화련으로 불렸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케르겔 마탑을 떠났다.

이후로는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고 은코 바라는 바를 세운 다음, 그곳에 은거했다.

정마가 양립할 수 없음은 강호가 증명하는바, 진소방은 법개 서풍개의 명을 받들어 줄곧 은코 바를 감시해 왔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고은의 생활상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작금에 들어서는 더욱 그랬다.

'마교를 나와서 한다는 게 최하층 구역의 아이들에게 밥을 챙겨 주는 거라.'

진소방은 혼란했다. 그의 선입견과 그녀의 일상이 부딪히며 괴리가 발생했다. 동시에 낯이 화끈거렸다. 돈에 온 정신이 팔려 있던 스스로가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고은을 보았다.

"...."

그녀는 비지땀을 흘리며 새된 소리를 참아 내고 있었다. 운기조식에 들어갔으니 저주와 정면으로 들이받고 있겠지. 생활상을 몰랐다면 꼴 좋다며 비웃음 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고은이 저주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그녀의 봉사가 연기라고 생각하는 개방은 많았다. 위선이라고들 떠들었다.

하나 이 강철의 도시에는 그것마저 퇴색되어 가는 중이었다. 레이크 시티는 그러한 위선조차 절박한 것이 현실이었다.

고은을 힐난하는 이들 중 남에게 베풀었던 개방도는 장담컨대 한 명도 없었다.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여기며 자위를 하는 녀석들이었으니.

그러니까.

"살려라."

"...."

"저 마녀를 살려라."

"...."

"더불어 저 조그만 소녀와."

선 굵은 경고.

"…저기 있는 독사 놈이 강해지는 데에 증진해라...."

"…감동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내가 닳아빠진 어른이라서 그런지 영 낯서네. 레이크 시티에서 희생정신과 이타심을 다 볼 줄이야."

허허로운 말씨. 마냥 비아냥조는 아닌 것 같았다.

"나도 이런 축축한 감상에 빠져들 줄 몰랐어, 이 나이 먹고."

"대충 짐작은 가네."

힘 빠지게 실소한 마담은 세 사람의 머리 가마를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이태백에게서 멈추었다.

"이 기생오라비가 너희 전체한테 영향을 끼친 거잖아."

부정은 못 하겠군.

"어떻게 단박에 알았지?"

"얘 혼자만 파장이 달라. TMI긴 한데 내 기프티드가 차원안이거든. 그래서 본업이 저주 치료사인 거고. 파장을 감지할 수 있어야 저주를 잡아낼 수 있으니까."

"본업은 홍등가 포주 아니었나?"

"어머머! 이 아저씨 좀 봐! 나 아직 처녀거든?"

"...?"

진소방은 뜨악했다.

마담 셀린은 겸연쩍게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말했다.

"…댁이 그렇게 말 안 해도 난 제대로 임할 생각이었어."

협조적인 태도에 진소방은 내심 놀랐다. 으레 삼류 무뢰배처럼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얹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여기서 세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눈 안 뜨면 나 죽일 거라며. 왜, 내 예쁜 얼굴을 보니까 마음이 살랑살랑해졌어?"

"지랄."

다만 의도가 전적으로 순수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말씨하고는… 여튼, 그것도 그건데 저주에 손을 어설프게 댔다간 나한테 역풍이 올 수도 있어. 그러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드는 격통이 뒤따라."

"그렇다는 건...."

시선이 모였다, 이태백에게로.

마담 셀린이 선선히 고개를 까딱이며 부연했다.

"댁 예상이 맞아. 이 기생오라비는 이 두 여자의 진통을 저 혼자서 떠안을 셈인 거지. 처음 들었을 땐 내 귀를 의심했다니까?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있다고? 하면서."

타인을 위한 고통 분담. 그런 건 이솝 우화에서나 등장하는 개념 아니었나?

한데 총칼을 무차별 난사하던 기생오라비가 실천한다. 더군다나 평소 행실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행이 토 달지 않고 즉시 움직였다.

"…였는데 댁이 일언반구 없이 호법부터 서려는 거에서 이 기생오라비의 평소 성품이 보이네."

"...."

잘못 아는 것 같은데.

그놈 그거 사람 등쳐 먹는 악귀라고.

등골을 얼마나 야무지게 뽑아 먹었으면 홍걸개가 진소방을 급파하기까지 했겠나....

"그렇게 알고 있어라."

마담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고은과 록의 머리에 두 손을 얹었다. 지그시 누르듯이.

"이 두 사람, 갈게."

역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저주 에너지는 기생오라비한테 응집될 거야."

피아의 무용. 개발자 태백 리가 바라던 디스토피아만의 매력이자 유대의 현장이었다.

* * *

운기조식에 들어가면 이런저런 상념이 물 밀려온다. 의념을 솎아 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공 혹 마나(Mana)도 결국 추상에서 비롯된 기운이고, 현상으로 잡아끄는 데엔 명상만 한 게 없지 않을까. 내 견해로는 그렇다.

따라서 일견 쓸데없어 보이는 자문자답도 내가 강해지는 자양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천착하자, 나 자신을.

'나를 대표하는 주색은 무엇인가.'

나, 이태백의 경우에는 흰색이었다. 아련한 기억이 맞는다면 어렸을 적부터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애들이 이미 선은 잡혀 있고 색깔 칠하기에 바쁠 때, 나는 백지장에 선부터 땄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뭇 애들보다 완성도는 훨씬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부류였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꾸미는 것이 즐거웠다.

설기와도 같은 백색. 무릇 글쟁이라면 골을 띵하게 하는 그 색채는 내게 있어선 무궁한 가능성을 내포한 색깔이었다.

그 영향도 없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 마법이 냉기 마법인 것 말이다.

그거 아는가? 새하얀 설원에 발 도장을 찍는 그 기분은, 처음이라는 사실이 야속하도록 짜릿하다는 걸. 나만 경험하고 싶다는 못된 심보가 들 만큼.

그렇다.

나의 심상 세계는 설원이다.

그런데.

"...."

나만의 눈밭에 오늘은 뜻하지 않던 손님 둘이 찾아왔다. 불청객답게 행색도 기기괴괴했다.

일단 둘 다 윤곽만 잡혀 있었는데 알맹이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까만색으로 채워졌다. 보기만 해도 음울해지는 두 놈은 비척비척 눈밭을 가로질러 내게 접근했다.

잠시 후.

뽀독, 뽀독.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름대로 차이가 보였다.

한 놈은 이마에 저(詛)라는 한자를 써 붙인 채였다. 붉은 글씨로 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날카로운 예기로 살을 저미는 식으로 적힌 것이었다.

다른 놈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고 목젖 대신 주(呪)라는 글씨가 시계추처럼 대롱거렸다.

불청객들이 발산하는 음산한 기운으로 말미암아 저 둘은 나와 적이라는 판단이 빠르게 섰다. '저'라는 녀석을 볼 때면 안구가 찢어질 듯했으며, '주'라는 녀석에게 외치려 들면 불덩이가 입안을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정체는 모른다.'

심상 세계에서는 현실의 영역이 좁아진다. 여기서는 현실이 한낱 춘몽이었다. 몇 초만 지나도 현실에서의 기억이 희석된다.

그리하여 저 두 놈이 외부에서 침입한 적이라는 점 외에 아는 거라고는....

섭취해라.

...없앤 다음 흡수하라.

하면 나의 진신은 강해질 거요, 나의 세계에 가능성 또한 증폭하리라. 그 말인즉 저 흉측하게 생겨 먹은 놈들은 나의 적임과 동시에 기연이라는 의미다.

내가 웃었다. 싸한 입김이 입술 사이로 길쭉하게 빠져나왔다.

"원래 이런 거지."

기연은 우연찮게 발견되지 않는다. 자고로 투쟁을 통한 쟁취가 곧 기연이다.

흐릿한 의식의 안개가 걷힌다.

콰강!

이 세상 전체가 요철에 부딪힌 듯 크게 흔들렸다. '저'와 '주'가 발을 구르며 다가든 탓이었다.

쿠구구궁!

그러는 한편 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이 명쾌해졌다.

꾸구구우욱.

나는 주먹을 핏기가 가실 만큼 꽉 쥐었다. 손 마디마디로 청백의 입자가 알알이 맺혔다.

파앗!

손을 펼치자 입자가 바닥과 가까이, 낮게 흩뿌려졌다. 눈밭에 깔린 입자들이 세를 형성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나선의 윤무를 두 줄기 뽑아냈다.

나는.

쐐애애애액!

그 한 쌍의 회오리를 쏘아 냈다.

[설경雪景]

눈싸라기.

각이 반듯한 결정이 내 콧등에 스미려는 찰나. 눈 결정은 세상이 멎은 듯 허공에서 붙잡혔다. 내 양 눈을 후벼 팔 기세로 팔을 내지른 저주와 함께.

* * *

기상이변이 잦은 요즘이라고는 하나 한여름에 싸락눈이 내리는 건 필시 심상치 않았다.

케르겔 마탑의 광명우사는 빠른 걸음으로 복마전에 도달했다.

복마전은 천마의 개인 공간. 허락받지 못한 자는 입장하자마자 절명한다. 자격 조건은 순전히 그날그날 천마의 기분을 따라서였다.

광명우사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천마가 오늘의 그를 윤허하지 않았다면 그도 영락없이 폭사할 운명이었다.

광명우사는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뒤, 소리 죽여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안 터졌다.

기뻐할 새도 없이 그는 공손히 절을 올렸다. 통유리 창으로 하얀 세상을 오시하는 천마를 향해서.

"화련과 개방 사이에서 이무기로 불리는 자가 마담 셀린과 접선했다는 소식을 아룁니다. 저희 측 사람이 직접 셀린의 경매장까지 안내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군."

"…저."

"질문을 허락하지."

마른침을 삼킨 광명우사가 공손히 물었다.

"교주님께서 화련에게 저주를 건 것은..., 그 이무기를 위한 안배입니까?"

"...."

천마가 몸을 돌렸다. 도깨비불이 눈길을 따라 끌려왔다.

우사는 사고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너무 주제넘은 질문이었나 싶었....

"아니."

강조했다.

"아니다."

이중부정은 자고로 긍정이다.

118화 기연 (3)

과학의 영역이 확대될수록 반대급부로 신비는 설 자리를 잃어 갔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는 내공과 마나 내지는 초자연적 현상을 부르는 말이다. '저주' 역시 그 속성을 공유하니 같은 결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저주 보유자와 사용자 수가 급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불가지의 현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귀신에게 지정 좌표계를 물어보는 세상 아닌가.

'저주'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었으며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래서였다. 다양성을 자랑하는 시티에서도 저주 보유자와 사용자, 치료사가 상하층을 통틀어서 열 명도 안 되는 건. 어디까지나 상층 주민의 시야인지라 하층 구역은 상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광명우사는 하층 벌레를 취급조차 안 하기도 하고.

광명우사가 알기로는 저주 보유자는 총 여덟이었다. 개중 저주에 먹히지 않고 사용의 단계까지 끌어낸 자는 그 아이돌 년이 유일했다.

'저주를 이용해서 대중을 홀리고 기어이 십익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여자.'

사람들은 마탑의 여인들을 마녀라고 부르지만, 진짜 마녀는 그들이 열광하는 존재였다.

어쨌거나.

저주 사용자는 한 명.

그리고 저주 치료사도 한 명이었다.

'마담 셀린.'

살롱에서 포주 짓이나 하는 여자 주제에 기프티드 [차원안]을 보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본업인 포주보다 부수입인 저주 치료사로 더 벌었다.

'경매 진행자나, 포주는 그년의 여흥에 불과하지.'

광마우사는 항상 생각한다. [차원안]이라는 기프티드가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그 사기적인 능력을 돈벌이용으로만 쓰는 마담 셀린이 영 고깝게 보였다.

'개똥도 약으로 쓴다더니.'

마탑 내에서도 이따금 저주 보유자가 속출하는바, 천마를 위시한 마탑은 필요에 의해 그녀를 살려 두고 있었다.

이는 기프티드의 사기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차원안]을 잘 만나서 용케도 목숨 줄을 붙이고 있었으므로.

하나.

'세상에는 항상 돌연변이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짐작 가능한 가정이지만 치료보다도 조작이 훨씬 까다로웠다. 조작은 그야말로 저주의 원리와 인과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현대엔 사실상 망실된 거나 마찬가지인 저주를 빠삭하게 이해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가. 혹자는 이리 말할 수 있겠지만.

말하지 않았던가.

시대마다 돌연변이는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다만 하필이면 그 돌연변이가 이 시대, 아니 고금제일의 마. '인' 어쩌면 '신'을 참칭할 수 있는 괴물이라는 점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다.

"...."

광명우사는 바닥에 코를 심을 듯한 자세로 이마만 들어 올렸다.

새하얀 장삼의를 어깨에 얹은 여인이 그에게 등을 내보인 채로 시티를 망라한다.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실내건만 늘어뜨린 팔소매가 펄럭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보이는 착시였다.

천마의 윤곽을 따라 공간이 왜곡되는 거였다. 혈관을 내달리는 피가 마그마라도 된 양. 썩 틀린 비유는 아니리라. 허우대는 일개 인간일지언정 그 진신은 신이었다.

'저걸 과연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케르겔 마탑 내에서 천마와 광명우사 자신의 신분을 고하는 고작 한 단계였다. 하나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마법사 가운데 한 명도 없을 터였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격차.

넘보는 것이 무엄한 압도적인 경지.

당사자인 광명우사부터가 그리 생각할뿐더러 실제로 얼마 전 천마 본인이 몸소 보였다.

꿀꺽.

'좌사의 죽음'

대외적으론 일선에서 은퇴했다고 공표했다.

'마탑에서 그렇게 믿는 놈은 핫바지들밖에 없지.'

천마가 처분했다. 그녀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어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받들어 모신 지 바야흐로 이십 년인 광명우사였다.

자아가 비대해진 좌사와는 달리 우사는 오른팔 역에 성심성의를 다했다. 그는 보신에 진심이었으며 그렇기에 천마에게 빌붙어야 장수할 수 있다. 그녀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다고 자부했다.

"아니다."

천마가 잡아떼기 전까지는.

"그게 무슨...."

"화련에게 저주를 부여한 것은 응당 치러야 할 업보. 그러니 그것이 이무기란 자를 위한 안배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낯설었다.

교주님이 이토록 문장을 길게 잇는 건.

"…하지만 그자와 화련이 마담 셀린에게 찾아갈 것은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면 필시 저주를 해제하려 들 텐데요."

스윽.

천마가 반만 흘겼던 시선을 이내 완전히 돌려 왔다. 그녀는 냉기 가득한 대리석에 선 고운 맨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내가 건 저주다. 그게 그 포주 년이 해제할 만큼 만만할 것 같으냐. 정녕 그리 생각하더냐."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사는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좌사가 어떻게 죽었을지 오만 가지 청사진이 스쳤다.

"제, 제가 주제넘은 질문을 했습니다."

"넌 우사다. 이따금 주제넘어도 되는 위치야. 간언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어때 아첨만 늘어 가는구나."

"…마법은 원래 입으로 발성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말재간을 연습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말 하나는 청산유수구나."

천마가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꾸욱.

그러더니 맨발이 털이 부숭한 뒷덜미를 압박했다.

"열 자리 중 한 자리가 비었다."

천마가 십익을 거론했다.

"…예, 예."

"우사, 너는 그 자리가 자연히 네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

그랬다.

환존 좌사가 부재하니 응당 그 자리는 본인이 차지하리라. 당연하디당연한 명제라서 의문조차 품어 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화련에게 저주를 내린 건 이무기를 위한 안배가 아니었다. 하나-"

수십 년을 모셨기 때문일까.

보이지 않아도 그녀가 옅은 미소를 걸고 있음이 느껴졌다. 물론 상상의 영역이었다.

그야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

"가령 그자가 저주를 해제하는 데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서, 그것을 체화한다면,"

새삼 불안감과 경각심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었다.

"응당 네게 갈 거라고 생각했을 자리를 뺏기고 말 것이다."

천마의 이런 생경한 태도로 비추어 보건대. 이무기란 놈은, 그녀에게 흥미의 불씨를 지핀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신역에 들어서기 직전, 그녀에게 속세의 미련을 남긴 자가 누구인가. 그림자에 가려진 턱에 혈관이 일어섰다. 천마의 마음을 흔든 것도 모자라 질투와 본인의 자리를 탐하려는 사이한 새끼.

'죽이겠다.'

광명우사가 서서히 머리를 일으켰다. 파쇄음과 함께 주먹과 맞닿아 있던 대리석에 와자작 빗금이 퍼지기 시작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천마는 그제야 발을 치웠다. 우사가 눈을 들었을 무렵엔 왔던 길을 되돌아간 뒤였다.

"공석의 지속은 그리 길지 않을 게다."

"그 안에 눈에 띄는 성취를 이루겠습니다."

"좋다. 이만 물러나라."

"…예."

이십 년을 모셨어도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교주님의 뒷모습만 망연히 바라봐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광명우사는 천마와 그나마 대등한 층위에 설 수 있다면 뭐든 해 볼 생각이었다.

* * *

-저, 저거 괜찮은 거 맞아?

-괜…찮을 거야...!

-아니! 피를 토하잖아!

-장염일 수도 있지!!

-환장하겠네, 진짜! (....)

* * *

쩌저적ㅡ!

급냉되었던 "저"와 "주"의 피부에 유격이 일기 시작했다. 빙하 속에서 손끝이 꿈틀하더니 뒤덮은 얼음이 더욱 자잘해지며 이윽고 가루로 비산했다.

"---. ---."

"--. ----!"

해방된 두 놈은 관절을 역동적으로 뒤틀어 댔다. 아크로바틱한 움직임. 냉기를 마저 떨쳐 내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심히 불쾌한 골짜기를 건드린다.

남극에 준하는 온도로 냉각시켰다. 그런데 "주"가 소리를 내어 주언을 발동. 파장으로 내부에서부터 진동시켜 탈출한 다음 "저"를 가둔 빙하도 깨뜨렸다.

"생긴 건 석유 인간처럼 생겨서는, 지성도 갖췄는 걸."

그쯤 되니 이태백은 이 상황을 수용했다.

"호락호락 당해 주진 않는다는 거지."

눈밭의 혈전. 낭만 아재 장취엔이라면 환장할 만한 배경이 마련되었다. 적이 해면체처럼 흐물흐물해서 멋이 없어서 그렇지.

이태백은 허리를 살짝 굽혀 도약의 자세를 취했다. 여느 때처럼 한 손엔 파라블레이드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심상 세계의 전투에서도 그는 동반자였다.

파이톤도 함께였지만 눈밭이라 효용성이 다소 떨어진다. 지금은 쉬게 두었다. 대신 파이톤이 억울하지 않게 맨주먹과 마법을 알차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낌새를 느꼈는지 "저"와 "주"도 퍼뜩 무릎을 구부렸다. 그러고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곤 전투 태세를 갖췄다.

박투를 할 셈인가? 그건 그거대로 환영이었다.

보아하니 "주"의 능력은 마법의 무력화인 듯했다. 하기야, [주언]의 오리지널이니까.

또 다른 적 "저"의 능력은 아직 불명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만만찮게 까다롭겠지.

그런 놈들 상대로 순수 백병전을 벌이는 건 오히려 바라던 바다. 잡다한 거 제외하고 몸만으로 부딪치면 다구리도 버틸 만할 거다.

이태백이 혀끝으로 입술의 부스럼을 축였다. 그동안 "저"와 "주"는 그들의 언어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 ---."

"---. -----!!"

음.

인간도 아닌 놈들이 논박을 주고받는 장면은 귀하군.

'작전타임인가.'

이참에 허를 찌르는 선공을 가하려 할 때였다.

"씨--!"

"저"가 먼저 눈치챘다.

근데 저 새끼 지금 씨라고 하지 않았나?

퍼억!

놈은 눈밭에 복숭아뼈까지 발을 푹 담갔다가 퍼 올리듯 차올렸다. 돌연 나타난 검은색 꼬챙이를 낚아채 꼬나 쥐었다.

"주"는 더 가관이었다. 목을 크게 젖히더니 손을 쑥 집어넣어 곡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곡도의 칼끝에서 타액이 끈적하게 떨어졌다.

X발. 저거 어디서 많이 본 모양새인데?

"--! ----!!"

"-! ----."

두 놈은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 맹수처럼 발끝으로 무기를 세워 올렸다.

쩌억ㅡ!

눈밭을 전조도 없이 달려들었다. 폭음이 쩌렁쩌렁했다. 놈들의 뒤편으로 눈보라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선공은 창을 내지르는 "저"였다. 꼬챙이가 제 용도에 맞게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이태백은 어깨를 젖힌 후, 겨드랑이를 약간 열었다. 이어 터진 충격파에 옆구리가 따갑길 잠시, 겨드랑이를 잠궈 "저"의 후속 공격을 봉쇄했다.

징 치는 듯한 소리. 턱이 빠져라 "저"의 입술이 벌어지고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놈도 미련 없이 꼬챙이를 버리고 주먹을 뻗었다. 꼬챙이는 어느새 휘발했다.

쩌억ㅡ!

이태백이 더 빨랐다.

[운영자가 불릿 타임을 개시합니다.]

면면부절 이어지는 핏줄기가 모양 그대로 얼어붙었다. 고무공처럼 튕겨 나간 면상에 주먹을 더 먹여 주려던 순간이었다. 그림자가 이태백에게 드리웠다.

어느 틈에 위를 선점했는지 모를 "주"가 이태백을 뛰어넘으며 곡도를 찔러 왔다. 당황해서 대응이 마비됐다면 승모를 뚫고 심장에 가 닿았을 공격.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주먹의 잔상이 또렷이 눈에 담겼다. 검의 궤적, 입술의 달싹거림, "저"의 준비 동작.

곁가지를 쳐내고 최선을 한 방울로 짜냈다.

휘릭.

이태백의 남은 팔이 움직였다. 역수로 쥐어 주먹을 내지르는 용도였던 오른손에 스냅을 주었다. 이어 제자리를 찾은 파라블레이드를 끊어 치듯 짧게 휘둘렀다. 챙, 챙, 챙. 신경을 긁는 금속성이 몇 번인가 튕긴다.

아크로바틱을 시연한 놈들답게 체공 시간이 제법 길었다. 인간이라면 삼 초 만에 내려왔겠는데, "주"는 거의 십 초는 허공을 부유했다.

"저"가 질세라 시야의 사각에서 기습을 가했지만, 이태백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응수했다.

"주"는 공중에서 검합을 겨뤘으며, "저"는 다람쥐같이 잽싸게 측면을 돌아 이태백을 향해 꼬챙이를 마구 저며 갔다.

이태백은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은 피했고, 오 초가량 지나자 눈에 익어 반격을 가했다.

사방팔방 눈보라가 솟구쳤다. 뿌연 설무 사이로 검이 부딪치는 빛이 산란했다.

급기야 "주"는 중력에 못 이겨 도로 눈에 안착했고, 등을 노리려 들었다.

이태백은 과도하게 허리를 뒤로 꺾었다. 얼핏 드러난 복근은 거칠게 물결치고 있었다. 피부 아래 내용물도 같이 꺾이는 피륙음이 속을 진탕시켰다.

그러면서 "저"의 팔을 휘감은 왼팔을 크게 당겼다. "저"와 그의 너비가 한순간에 박힐 듯이 좁혀졌다. 코앞이어서 그런지 표정은 없어도 놈이 당황한 걸 느낄 수 있었다.

놈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하여 오금을 썰 요량이었던 곡도는 동료의 이마를 덮쳐갔다.

직후 "저"는 이태백에게 떨어져서 발버둥을 쳤다. 두 손으로 이마를 떺은 채 한바탕 나뒹굴던 놈이 시근덕거리며 일어섰다.

"저"가 천천히 손을 이마에서 뜯어냈다. "주"도 다친 동료에게 바싹 붙어 "저"를 돌아보았다.

보랏빛 목젖에 매달린 한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가 입이 찢어지라 벌린 탓이다.

정적 끝에 비명이 울렸다.

"----------------!!!"

설산이었다면 눈사태가 날 법하다.

119화 기연 (4)

끔찍하도록 우렁찬 포효의 끝은 눈보라였다. 새하얀 눈발이 몰아치며 이태백의 삼단 같은 머릿결을 흔들었다.

'저'와 '주'는 시커멓게 탄 달걀처럼 민둥산이었다. 눈발이 두 놈의 머리를 하얗게 그슬려 갔다.

기묘한 공명감이 맴돈다. 살을 에는 추위만큼 정신을 사각사각 좀먹는 적막이었다.

똑, 똑.

저의 이마에서 시작한 핏방울이 턱을 타고 내려왔다. 눈발에 후두둑 찍히는 검은 점에 이태백은 눈을 찡그렸다.

기분이 나빴다.

'나만의 세상을 더럽히는 느낌이다.'

슬슬 이 사달의 윤곽도 잡혀 가는 중이었다. 두 놈과 어떤 경위로 설원에서 단판 승부를 하고 있는지도 아스라이 기억났다.

'저'는 천마가 고은에게 부여한 저주였고, '주'는 록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주언이었다.

이마빡과 입안에 각기 한자를 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저'는 사념으로.

'주'는 입으로 발산된다.

저주는 머리로써, 입으로써 상대를 죽이는 기술. 그 상징을 직관적으로 나타내려 보란 듯이 한자를 써 붙인 것이었다.

"----."

'저'는 입을 악다물고 이태백을 응시했다. '주'도 엇비슷했다.

두 놈한텐 눈구멍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긋한 시선이 피부를 따갑게 두드려 왔다.

추위 때문일까. 차갑게 가라앉은 일대에 다시금 동요가 일었다. '저'의 경추에서 촉수가 세 쌍 돋아난 것이었다.

자색 촉수가 뿌연 설무 틈으로 산낙지처럼 흐느적거린다. 영혼에 두드러기가 난 것만 같은 닭살이 곤두섰다.

촉수 여섯은 마치 저마다의 자아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서로 티격태격한다고 해야 하나. 조화롭지 못하고 충돌이 빈번했다.

'저'는 못마땅한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입에 사탕을 물리듯 먼젓번처럼 꼬챙이를 생성해 촉수들에게 배분했다.

대략 정신이 멍하군.

'주'는 한술 더 떴다. 놈은 별안간 곡도를 입 안에 넣고 굴리고 상하좌우로 찢어 버렸다.

눈밭을 지저분하게 난자한 건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구토감이 치밀 만큼 징그러운 장면이었다. 제법 강해진 이태백의 비위를 무색하게 만든다.

'주'가 푹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이태백에게 시선을 두었다. 네 마디로 갈라져 너덜거리는 입 가죽. 그 안으로 呪라는 한자가 무려 네 개나 아로새겨져 있었다.

놈은 밭은기침을 여러 번 터뜨리면서 숨을 골랐다.

'저'의 촉수 중 하나가 꼬챙이로 옆구리를 찌르자, 짜증스레 치워 내기까지.

다음 순간이었다.

타닷-

놈들이 재차 질주했다. 이번에도 부채꼴의 눈보라를 동반했는데, 그 규모가 예의 것의 세 배였다. 흡사 물소 떼가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소리를 능가하는 속도. X랄 맞게도 때마침 불릿 타임의 사용 시간이 끝났다.

"맨몸으로 촉수랑 변태 새끼를 상대해야 하는 거냐."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놈은 맹렬히 치달려서 상당한 거리를 순식간에 지워 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란 말은 딱 이럴 때 하는 거군.'

고은과 록의 저주를 없애 주겠다고 데려왔는데, 아닌 밤중에 혈전을 치르고 있구나. 허탈해하기도 잠시 문득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저 두 놈을 여기서 죽이면."

그들의 힘을 취할 수 있으리라.

꾸국.

이태백은 칼자루를 감싸듯 쥐는 한편, 남은 손으로는 우산 원단을 방패처럼 내세웠다.

쐐애애애애액, 카강!

손맛이 저릿했다. 꼬챙이를 든 촉수들이 원단에 작렬하며 마구 할퀴었다. 뾰족한 질감이 원단 안감에 삐죽삐죽 돌출했다.

암만 방탄 원단이라 한들 여기서 더 가면 찢어진다. 물론, 실제로 파라블레이드가 상할 일은 없겠지만 현 전투가 패착으로 이어질 터다.

카강!

이태백은 원단을 휘둘러 촉수를 쳐올렸다.

훤히 트인 시야.

"카가가가각!"

하단을 도맡고 있던 주가 입을 쩍 벌린 순간, 네 방향으로 쪼개진 아가리에서 곡도가 출몰했다.

채챙-

칼을 낮게 휘둘러 기습을 쳐낸 다음, 검로를 위로 꺾어 상단의 총수들을 흘려 냈다.

그치지 않고 '저'와 '주'는 능숙하게 상단세와 하단세를 바꾸고서 다시금 들이쳤다. 공격의 주도권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이태백의 운신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앗아 갔다. 콰광! 콰과과과과광! 눈 먼지가 이태백의 발밑으로 길고 거칠게 늘어졌다. 그는 드르륵 밀려나면서도 복압과 각력을 끌어내 꾸준히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깨객!"

그러면 '주'가 - 문자 그대로 - 귀신같이 나타나서 후진만 할 것을 강요했다. 공세는 전적으로 본인들만의 것임을 알려 주듯이.

이 새끼.

어느새 주둥이랑 양손에 칼을 한 자루씩 쥔 채였다. '저'는 팔도류고 '주'는 삼도류였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농지거리라고 했겠는데.

'씨발, 씨발.'

실상은 저렴한 욕지거리만 씹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 대 일로 불리한 상황인데. 팔이 네 쌍, 아니 다섯 쌍. 염병, 어쨌든 늘어났으니 숫제 죽을 맛이었다.

'불릿 타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쿨타임이었다. 하기야 인생이라는 게 원래 이렇지. 항상 한 박자씩 튀곤 하지.

입술이 바싹바싹 탄다. 잇따른 파찰음 때문에 잠수한 듯 귀가 먹먹했다. 머릿속은 우리가 한창 치고받는 이 설야와 비슷했다. 심상의 백지장에 스크래치가 쭉쭉 어지러이 가 있었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수십 번의 합이 교차했다. 이태백과 저주 사이에 은빛 결계가 쳐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결계를 유지한 채로 허허벌판을 가로질렀다. '저'와 '주'는 지치지 않고 몰아쳤고, 이태백도 질세라 휘두르고, 쳐내고, 틈이 나면 반격으로 이어 갔다.

'저'와 '주'가 사람이었다면 응당 감탄을 흘렸을 테지

하나, 그들은 개념이 실체를 가진 거에 불과했다. 오히려 '저'의 촉수가 자아가 더 있어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이 새끼들 공격이 단순히 예리하기만 한 게 아니야.'

꼬챙이와 곡도에는 연둣빛 액체가 발려 있었다. 빛깔에서 짐작건대 최소 독극물이었다.

돌이켜 보니 놈들은 중간 각성(?) 단계에서부터 전략을 바꿨다. 이전까지는 '절단'이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상해'로.

이태백은 쏟아지는 칼부림 속에서 집중력을 짜냈다.

방패가 있기에 망정이지, 총칼 조합으로는 일찌감치 누더기가 됐을 거다.

조금이라도 내 살가죽에 닿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투 과정에서 액체가 닦여 나가면 무어라 중얼거려 바르고, 공격을 재개했다.

'저거 설마.'

저주는 본디 눈으로 포착이 불가하다. 마담 셀린의 차원안이 있어야 감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포착도 아니고 감지다. 세상의 단 하나 존재하는 차원안이 있어야 그나마 느낄 수 있다는 건데.

'나, 저주가 보이는 건가?'

폐가에 들렀다가 영안이 트였다는 괴담이 종종 넷상에 돌기는 한다. 그것마저도 구라라고 생각했는데, 이태백은 차원안을 초월한 무언가가 트였다.

뭐라고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쐐애액!

예상한 경로에서 살짝 벗어난 검로. 칼날이 구불구불한 통에 바람 찢기는 파공성이 더욱 신경을 긁고, 속도는 소름 돋게 빠르다. 그렇지만.

'왜 점점 보이기 시작하지?'

이태백은 어깨를 비틀어 아슬하게 곡도를 가슴께로 통과시켰다. 큰 동작이었기에 '주'의 공격에는 공백이 발생했다. 하여 발차기를 '주'의 단전에 구겨 넣었다.

놈이 피를 흩뿌리며 훌쩍 멀어졌다. '저'는 동료를 힐끗하고는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촉수는 기세를 잃지 않고 원단 여기저기를 두드려 댔다.

따다다당, 꼬챙이가 원단을 파고들려고 애를 쓴다.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불릿 타임은 채 쿨타임이 돌기 전.

[민첩]은 진즉에 제약을 활용해 버프한 터라 동체 시력이 더 좋아질 일은 없는데.

의식은 음속보다 빨랐다. 이태백은 무심코 실소했다.

"나도 각성한 거야?"

이태백의 심상 세계에서 침입자가 각성했다. 그런 고로 세계의 주인 역시 본의 아니게 각성을 하게 된 것.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으나 이태백은 운영자였다. 버그를 찾고 없애는 게 그의 주된 과업이었다. 그러니까, 심상 세계에 버그가 침입했으면 그걸 '효과적'으로 없애게끔 새로운 능력을 해방했다는 소리였다.

정작 이태백은 모르는 진실.

그래도 본인의 몸에 무슨 변화가 생겼다는 것 정도는 얼른 알아차린 그였다.

가히 파죽지세였던 공세는 한풀 꺾였다. 정확히는 꺾인 듯 보였다.

이전과 차이가 없음에도 이태백의 대처는 능숙해졌으며, '주'가 퍼뜩 가세해도 아주 잠깐 주춤거릴 뿐. 주도권이 슬슬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거.'

승리를 확신하기 전임에도 희열이 스멀스멀 머리에 들었다.

"이 새끼들 더 짜내면 나 더 각성하는 거 아니냐?"

시작은 저주와 충돌할 적에 발생하는 내공의 흡성이었다.

한데 덤이 딸려 오려는 모양이었다.

인생 호사다마라.

한 박자 엇나가다가도 우연찮게 행운으로 되돌아오는 게 또 삶 아니겠는가?

'운이 좋군.'

이 못생긴 놈들을 착즙할 생각에 이태백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참에 너희 그 촉수랑 입안에서 검 나오는 것도 배워 보자!"

'저'와 '주'가 동시에 움찔했다. 표정이 없어도 놈들이 주눅 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 *

한편, 외부에서는 마담 셀린이 분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 사람의 중심에서 분주하게 조율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다만 얼굴에는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거 왜 이래."

"뭔데?!"

안절부절못하던 진소방이 버럭 소리쳤다.

"피 토할 때는 원래 이렇다며!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거야?!"

세 사람이 울혈을 쏟아 낼 때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더랬다. 내실에는 이미 혈향이 가득했다.

"저주를 다루는 데 그럼 피 한 방울도 안 볼 줄 알았어? 원래 저주를 없애려면 과다출혈로 사망 직전까지 피를 쏟아 내야 하는 거야!"

"그러다가 주, 죽으면!"

"운이 안 좋은 거지! 애초에 저주 뜻이 뭐야. 운 나빠서 걸리는 거잖아!"

주화입마를 심심찮게 봐 온 진소방조차 코가 문드러질 듯해, 코끝을 틀어막고 있었다.

"여, 여튼. 무슨 일인지 짧게 설명해."

마담 셀린은 용케도 버텼다. 나름의 프로페셔널한 면모였다. 그녀는 목울대를 두껍게 꿀렁이고는 말했다.

"이게 저주라는 게 소멸하려면 상호 저주끼리 부딪치고 한쪽이 약해졌을 때. 마나를 주입해서 없애는 거거든?"

"쉬, 쉽게!"

"아, 씨! 그러니까 맞불 작전이라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둔 다음에 마지막에 내가 나서서 마무리 짓는 거라고!"

내공(Mana)만 떼어 놓고 보면 마담 셀린은 평범한 강호인 이하였다. 저주 하나를 진화하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내공이 요구되는데, 하물며 두 개라면 그녀의 능력으로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저주 보유자 두 명만 받는다고! 그래야 잔불을 내 선에서 진화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세 명이잖아. 그럼 더 진압하기 쉬운 거 아니야!?"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진소방과 마담 셀린은 한마음 한뜻으로 대경하고 있었다. 진소방은 사태의 심각성에. 셀린은 예기치 못한 변수 때문에 뇌 정지가 왔다.

고성이 날카롭게 맞물리던 때.

울컥!

두 여인은 일거에 핏물을 한 됫박 뱉어 냈다.

"어머, 씨발."

진소방과 마담 셀린은 그녀들을 보다가 얼마 뒤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과다 출혈까지는 한참 남았지?"

먼저 입을 연 건 진소방이었다.

"...."

"야, 인마...!"

불현듯.

등골을 타고 흐르는 냉기. 얼음덩어리가 등줄기를 쭉 내리지르는 듯 엉덩이에 힘이 들어간다.

본능에 따라 돌아간 시선은 여태 고요히 운기하던 자에게로 옮겨 갔다.

이태백. 그의 등에서 피어난 반투명한 형체 세 쌍이 아지랑이처럼 춤을 추었다.

두 사람이 뭔가 잘못됐다 생각한 순간, 이태백의 미간이 오므려지더니 이윽고 그 눈이 뜨였다.

120화 메가코프 기둥서방 (1)

침대 위로 록이 누워 있었다.

얇고 가는 팔다리는 남자로 하여금 애수를 불러일으켰으며, 조그맣게 부풀었다 낮아지는 가슴은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삐익- 삐익-

"...."

눈 주변이 씰룩이더니 이내 속눈썹이 교차했다.

살풋이 열린 남청색 눈동자는 천장을 응시했다. 기상 직후라 머리가 뻑뻑했다.

스륵.

손을 살짝 움직이자 파슬파슬한 감촉이 닿았다. 옆에서 들려오는 비프음이 주기적으로 생명 징후를 알려 왔다.

'병상이구나.'

그녀는 막 일어난 참인 데다가 이태백을 따라 살롱으로 간 다음의 기억은 완전히 단절된 채였음에도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주언을 치료해 주겠다던 이태백에게 반은 속는 심정으로 동참했는데, 중간 과정에서 이변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게 병원 신세를 지는 건 당연했을 거고.

록은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능숙한 손길로 머리맡에서 마스크를 찾았다.

취이이익.

입가에 부착하자 증기가 빠져나갔다. 이제는 피부보다 더 피부 같은 물건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입을 봉인하고 살아왔으니 올해로 어언 십삼 년째였다.

'이렇게 사는 게 나의 운명이었을진저.'

록은 쓰게 웃고 말았다.

포기했다고 여겼다. 이렇게 태어난 이상 주언 보유자로 한평생을 보내야 할 운명이라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하지만 진실한 속내는 그러지 못했다.

이 저주를 주둥이에서 떼고 싶은 열망은 항시 치고 올라왔다. 더불어 희망 역시 팝콘처럼 통통 튀어 올랐다.

촤라라락.

그때, 유백색 커튼이 젖혀졌다. 록이 깨어난 모습을 본 후미토가 함지박만 하게 웃었다.

"록! 일어났구나!"

"...."

록은 후미토에게 들리지 않게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자마자 보는 얼굴이 저 바보라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일단 후미토만 보면 지치는 록이었다. 녀석은 입이 방정맞고 듣는 사람 정신 사납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이야- 나흘을 내리 자서 그런지 피부 좋아졌다, 야."

"...."

"어? 뭔가 키도 좀 더 큰 거 같은데? 역시 잠이 보약이야, 그치?"

"...."

"사과 사 왔는데 이게 한국산 사과라서 질이 엄청..., 악!"

줄기차게 떠들던 후미토가 발라당 나자빠졌다. 곡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구르는 그를 록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V자가 매섭게 안구를 기습한 것이다.

"*후욱*(왜 네가 병문안을 온 거지.)"

"내, 내가 대표였으니까!"

"*후욱*(그러니까, 네가 왜 대표냐고.)"

차라리 이태백이었으면 눈 호강이라도 하지. 딱히 얼빠는 아니어도 미남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 성격이 사이코패스여서 그렇지, 얼굴 하나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로옥, 나 눈이 안 보이는 거 같은데?"

"...."

"거,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 줘라! 우리 사이에!"

"*후욱*(말미잘.)"

"마, 말미잘?! 차라리 병신이라고 해!"

"*후욱*(븅신.)"

난리를 치는 후미토를 무시하며 록은 생각했다.

'사이코, 패스.'

…그 가정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확신이 흐릿해졌다. 그도 그럴 게 록의 주언을 해제해 주고자 발 벗고 나섰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걸 전부 위선이라고 보기엔 이태백은 진심이었다.

사이코패스는 남의 안위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다. 반해 이태백은 방식이 평범하지는 않아도 어쨌든 주변 인물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레이크 시티에서 그런 미적지근한 사상은 몹시 위험하다. 뒤통수 맞기 딱 좋아서 호구 잡히기 십상이었다. 주변인을 챙기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무력을 요구했다.

'이태백은 그걸 서서히 갖춰 갔다.'

새삼스럽도록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이태백은 강해졌다. 뇌옥을 탈옥했을 적과 비교하면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는 악다구니만 내세운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등으로 말한다던가.

무슨 보약을 먹었는지는 몰라도, 이태백은 강해지기를 거듭하고 거듭하여 9대대를 넘어 레지스탕스의 핵심 전력으로 급부상했다. 이태백 덕분에 체면 치레한 9대대도 덩달아 발언권이 세지고 있었다.

강현성은 대대장 회의에서 돌아올 적마다 통닭을 싸 들고 온 아버지와 같은 표정이었다. 받은 임무의 질이 높아졌으며 보상의 질도 좋아졌다.

"아오, 눈 시려."

후미토가 눈을 비비면서 투덜거렸다. 록은 그를 짜게 흘기다가 침대를 옆으로 치웠다.

"야, 야! 어디가, 환자가!"

"*후욱*(입원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그리고, 병원에서 입원해 있는 것보다 그냥 내 방에서 쉬는 게 나아.)"

"…뭐, 그렇다면야."

후미토가 비록 살짝 덜떨어졌기는 해도, 록과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정신착란증을 앓고 있는 탓이었다.

'본인은 음양사 집안이라 신기가 센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신이 어딨다고.'

음, 신이 존재하기는 하나?

그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으며 이름은 이, 태....

"그런데 록, 너 왜 여전히 마스크를 끼는 거야?"

"...?"

갑자기 뭔 개소리지?

원숭이 수준의 지능이 햄스터 정도로 떨어진 건가? 그건 문제가 심각한데.

"적어도 말귀는 알아먹어야 데리고 다니든지 할 거 아닌가...."

…어?

록은 하도 놀란 나머지 숨이 턱 막혔다.

'분명 두 명뿐인데?'

그런데 왜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록의 다급한 눈길이 병실을 쭉 휩쓸어 보았다.

없다, 여자는 록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오, 생각보다 목소리 좋네."

후미토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미소를 지었다.

"축하한다, 록."

"...."

그녀의 눈꼬리에 물방울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 음. 마냥 축하할 일은 아닌가? 맨날 코 위만 화장했는데 이제는 아래도 해야 하-"

쿵!

유리창이 들썩여 창틀에 내리던 햇살이 산란했다. 어항 속 금붕어 떼가 빨빨빨 산개한 것도 동시였다.

* * *

쟈스비는 최근의 삶이 이보다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초췌한 노인의 계산기 신세였던 그녀다.

그러나 지금은 뭇 인간처럼 식사도 했고, 유대도 맺었으며, 또 잠에 들었다.

인공지능이라서 꿈이란 걸 꿔 본 적은 없지만 꿈에 그리던 삶이라는 건 필시 이런 것이리라.

그런 쟈스비에게도 한 가지 고민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만성적인 불안증세에 시달렸다.

'…나 쓸모없어지는 거 아니야?'

호모 사피엔스에 근접할수록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기껏 진종일 일만 하던 삶에서 탈출했건만, 이제는 너무 한가해서 탈이었다.

이러다 창조주님이 날 내치면 어쩌지? 식충이라고 하면서.

"사이버 사이코."

창조주님 성격상 록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면 가차 없이 내칠 터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나보다도 더 머신 같은 인간.'

다행인 점은 창조주님은 요 며칠 정양 중이었다. 록의 가치 판단이 있을 그날까지 며칠이나마 벌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내 가치를 증명하면!"

나를 내치지 못하시겠지, 후후.

'그거 하나 좋기는 한데....'

이태백의 용태가 심상치 않았다.

집주인 고은과 어디를 다녀온 뒤로는 쭉 방에 틀어박혀 운기조식만 하고 있었다. 문지방 너머에서 슬쩍슬쩍 기별하건대 이태백의 분위기가 사뭇 변했다.

전에도 칼 맞아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콕 집어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인간을 초월한 뭔가를 마주하는 느낌? 상시 초저주파를 흘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모르긴 몰라도 강해지신 건 분명해 보이는데."

숨만 쉬어도 레벨 업 하시는 분이니.

'나도 이대로 있으면 안 돼.'

증명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치 증명이 불가피했다.

쟈스비는 즉시 백백교 Ⅰ지부의 단상 위에 올랐다. 모두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시대정신을 역설했다.

"하늘 아래, 땅 위!"

"하늘 아래, 땅 위!"

그녀가 선창하면 교인들이 후창했다. 공기가 떨렸다.

"이, 태, 백. 그분만이 존재하시니! 감히 내려다보는 상층 구역을 전복시켜야 마땅할지어다!"

"백백! 백백! 백백!"

"시대에 뒤떨어지는 차별주의를 뒤집어엎을 자. 그의 이름은 이, 태, 백...."

"아아, 또 당신입니까. 대체 언제까지 빛나실 건가요… 더 이상 저희로부터 멀어지지 말아 주세요...."

"백백교 Ⅰ, Ⅱ지부만으로는 부족해! 더, 더 만들 수 있도록 교도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도록!"

"성전이다! 거룩하고도 신성한 전쟁의 서막이 시작되었어!"

광란의 현장을 바라보며 쟈스비는 음습한 미소를 흘렸다. 계획대로 되고 있군.

"후후후."

인간은 모름지기 신앙에 취약했다. 상시 숭배할 대상을 물색했으며 떡밥만 던져 주면 앞만 보고 직진하는 종이었다.

그 맥을 읽은 쟈스비는 그간 학습한 데이터를 십분 살렸다. 어린 양들을 선동하고 '그분'의 복음을 전달하는 메시아로서 기반을 다지고 있다.

하나 언제나 장애는 있기 마련.

'주인공에겐 라이벌이 있다 이건가....'

쟈스비가 지부의 한구석을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반이 아이들에게 주먹밥을 배분하고 있었다. 쟈스비의 위세가 커지거나 말거나 그는 제 할 일에 열심이었다.

"형, 진짜 주먹밥 세 개나 먹어도 되는 거야?"

"먹고 부족하면 더 가져가. 개방에서 요새 후원금을 많이 줬거든.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백백교 신도는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돼."

"*흐윽* 반 형...."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이 모든 환경을 조성해 주신 그분을 위해 기도해."

"…백백… 당신을 숭배합니다."

현 백백교는 온건파인 반 세력과 강경파인 쟈스비 세력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친 쟈스비파가 날 선 발언을 주창함에도 반은 짐짓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나보다 창조주님이랑 함께한 시간이 길다 이거지?'

순간 반과 시선이 만났다.

반은 웃었고 쟈스비는 눈을 찌푸렸다.

쯧.

혀를 찬 쟈스비는 차갑게 시선을 거두었다. 더 입지를 다져야 한다! 이 인간들을 독전해서 말마따나 성전이라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쟈스비가 설 자리가 있었다.

그래야 창조주님이 쉬이 버리지 못할 것이다!

쟈스비가 오독오독 엄지를 물어뜯었다. 그녀의 동공은 불안으로 소용돌이쳤다.

그 찰나 반이 쟈스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옷 앞섶에 손을 닦으면서 말을 걸었다.

"요새 개파조사님께서 통 모습을 안 비추시네. 몸이 그렇게 많이 안 좋으셔?"

"...."

음습하게도 쟈스비는 이태백과 같은 집에서 산다는 점에서 우월감을 느꼈다. 그녀는 살짝 턱을 들고서 대꾸했다.

"글쎄? 나야 모르죠?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찾아뵙는 게 낫지 않겠어요? 개파조사님이 만나 줄지는 모르겠지만."

"으음...."

반은 침음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직접 찾아뵈어야겠지?"

반은 그대로 등을 돌리며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고민이 됐는데 쟈스비, 네 말 들으니까 결심이 섰어. 역시 신실한 교도의 말을 들으니 믿음이 생기네."

"…어?"

한 박자 늦게 아차 싶었다.

쟈스비는 퍼뜩 반의 뒤꽁무니를 쫓아 지부를 떴다.

* * *

고은은 팔짱을 끼고서 문설주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방 한가운데서 운기조식을 하는 이태백에게 못 박힌 채였다.

"주야장천 저러고 있네."

중얼거림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살롱에서 그 일이 있은 후로 이태백은 식음을 전폐하고 줄곧 저 자세였다. 흐트러짐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저 정도면 숨 쉬는 불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눈치껏 건드리지 않는 고은이었다. 마담 셀린의 말을 빌리면 고은과 록의 체내에서 맴돌던 저주가 이태백에게로 튕겨 나갔단다.

원래는 두 저주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마력을 이태백이 흡수할 공산이었는데 틀어졌다.

'후우.'

고은의 빤한 시선에도 이태백은 미동도 없었다. 콧날과 턱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릴 따름이었다. 그걸 보니 어쩐지 애가 다는 그녀였다.

'내가 왜 이러지?'

가슴께가 퍼석퍼석했다. 두툼한 부피의 감정이 자꾸만 명치를 치고 올라왔다.

고은은 도리질했다. 그러고는 정신 환기차 소리를 죽이며 방을 빠져나왔다.

개방에서 수시로 인원을 파견해 주는지라 따로 호법은 필요 없지만, 고은은 괜히 이태백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이었다.

띵- 동-

문 너머에서 기척이 인다 싶더라니 어김없이 공허하게 초인종이 울렸다. 쟈스비가 모처럼 돌아온 모양이다.

근래 백백교 지부에서 죽치던 녀석이.

'옷감이라도 가지러 왔나?'

고은이 문을 열어 주자 남녀 한 쌍이 거기에 서 있었다. 여자는 젊었고 남자는 다소 나이가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불청객. 고은의 눈썹이 곱게 휘어지자, 여자 쪽에서 선수를 치듯 명함을 건넸다.

"대성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12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