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Day-1 (3)
메디알레. 4개의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한 여러 섬의 연합체.
대륙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섬들이 없진 않았으나, 메디알레만큼 땅의 면적이 넓고 상징적인 장소는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거점이지! 유일하게 각 대륙의 특산물을 한 곳에서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4대륙에서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화와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곳이지! 이국적인 모습이 아주 아름다워!
-섬 자체도 특이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 거대한 땅 섬과 7개의 바다 섬, 7개의 하늘 섬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마치 꿈속의 풍경 같지!
그래서 메디알레는 많은 사람이 죽기 전, 한 번쯤 보고 싶어 하는 관광 명소로도 이름이 높았다.
-에이! 그래도 메디알레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은 그거지, 그거! 세계 헌터 협회 본부!
서대륙의 도회적인 디자인으로 건축된 세계 헌터 협회 본부는 색다른 면모가 있어서 곧잘 시선을 끌곤 했으나,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기밀 지역이기 때문에,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5년 전.
-메디알레를 수호하는 분이 '그분'이라며?!
다섯 번째, 특급 헌터 '엘윈 크라이거'가 메디알레에 상주한다는 소식이 전파된 이후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물밀듯이 쏟아지고 말았다.
-호, 혹시 메디알레에 가면 그분을 뵐 수 있을까?
-과연 어떤 분이실지.... 한 번만 뵌다면 여한이 없겠는데!
-그 베일에 싸인 비밀을 밝혀 내고야 말겠어!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원래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세계 헌터 협회 본부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구경하고 싶은, 일종의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됐느냐면....
─특급 헌터는 각 대륙을 수호하는 의무가 있다.
상기 의무와 관련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특급 헌터는 한 시대당 한두 명 탄생할까 말까 할 정도로 그 수가 적었으니까.
그러나 이번 시대는 유별났다는 게 문제였다.
특급 헌터가 무려 5명이나 된 것!
-어쩌죠.... 4대륙에는 특급 헌터들이 파견되어 있으시잖아요?
이미 각 대륙에 배정된 특급 헌터는 만석.
그렇다고 한 대륙에 특급 헌터를 두 명 배정하기엔 형평성에 어긋났다.
-다른 나라에 추가로 배정한다면, 선택받지 못한 다른 대륙의 나라들에서 항의가 빗발칠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다른 방도가 있나. 현재 괴마 출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어느 대륙이지?
협회 측에서도 이래저래 심각한 논의가 계속되던 중.
-저기, 제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들어 주시겠어요?
그 논란의 장본인, 엘윈이 제의한 것이다.
-제가 메디알레에 머무는 건 어떨까요?
-메디알레에요?
-네. 물론, 평소에는 본부에 상주한다고 발표하되, 비상시 또는 예외적이거나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면 비밀리에 파견 나가는 거예요. 특급 헌터인 제가 직접.
그 말에 간부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였다!
-억제력 역할은 다른 특급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거든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는 실질적인 역할을 하고 싶어요.
'사람을 지키고 싶다'
노엘로부터 이어받은 그 신념은 엘윈에게도 자리 잡고 있었으나, 그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일반 헌터가 해결하기 난해한 건도 괜찮고. 아니면, 특수 목적을 위한 공작원으로도 좋겠네요!
그렇기에 여타 특급들처럼 한 대륙에 묶여 있는 건 곤란했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이, 그가 움직여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설득력이 필요했다.
-각 대륙의 헌터들과 연계한다면, 그리고 정보교환과 무력 지원이 제때 이뤄진다면... 굉장히 실효성 있는 대책이군요! 그렇다면 엘윈 님이 움직이실 범위는?
-물론, 4대륙에 있는 어느 나라라도 전부 포함해야죠.
이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밑 작업이었다.
-어느 대륙, 어느 나라 출신이든. 종족, 성별, 나이... 그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이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소중하지 않습니까?
-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다섯 번째, 특급 헌터 엘윈 크라이거의 중앙섬, 메디알레에 체류가 결정됐다.
간부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 건 덤이었다.
더불어 헌터들의 네트워크 사이로 '다섯 번째 특급 헌터는 사람들의 목숨을 평등하게 귀중히 여긴다'는 소문이 물밑에서 서서히 퍼져 나갔다.
맑은 물에 짙은 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
누가 알까.
그것이 고작 15살밖에 안 된 꼬마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략이란 것을.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는걸.
'...정말로 할 생각인 게냐, 엘윈.'
소파에 앉아 차를 들이켜던 판 트바론이 복잡한 눈빛으로 엘윈을 바라봤다.
엘윈은 확 트여 있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와. 저게 뭐예요? 본부 주변에 일반인들이 저렇게나 많이...?"
두 사람은 지금 세계 헌터 협회 본부, 맨 꼭대기 최상층.
판의 집무실이자 회장실에 와 있었다.
"비공선 타고 오다가 봤는데, 방청 지원한 아카데미 생도도 엄청 많더라고요? 온통 남색 물결."
루스람 아카데미의 교복 색깔이 남색이었다.
"이번에 시험 구경하려고 입섬하려는 사람도 많았죠?"
"그렇지. 어차피 수용 인원은 변동 없으니, 예년이랑 똑같지만. 쯧! 다 네 녀석 때문이 아니냐!"
차분히 말하던 판이 갑자기 성질이 난 듯, 마시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부리부리한 눈썹이 삐죽하게 휘어지는 것이 여간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닌 듯 보였다.
"엘윈, 네가 그냥 헌터도 아니고, 특급 헌터나 되면서 신비주의를 표방해서 그런 게 아니냐! 차라리 네 스승처럼 몇몇 주변인들에게라도 얼굴을 비치면 이런 각광을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
"뭐어...."
달칵.
엘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한모금 찻물을 머금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걸요."
그러곤 머쓱하게 웃었다.
"자유로운 이동이나 양방향 소통도 어려운 세계에서 이 정도로 열광적인 반향이 나올 줄은...."
"뭐? 뭔 소리야?"
"아니에요. 아무것도."
휴대폰과 비슷한 통신 도구, 넥시온이 있긴 했으나.
이는 헌터의 전유물과 다름없었고, 일반인들은 평생 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나마 상용화된 통신구나 영상구는 근거리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였고,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가격대도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이런 주목은 엘윈에게도 예상 밖이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이런 관심조차 요긴히 이용해 줄 생각이지만.'
그리 생각한 엘윈이 잔을 들어 올리며 찻물을 머금었다.
"제가 일부러 그런 거, 뻔히 아시는 분이 자꾸 그러시네."
"...."
"특급 헌터쯤 되면, 각종 범죄 조직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서로 난리일 테니까... 조심해야죠."
"엘윈."
"제가 찾아가기도 전에, 그놈들이 뒤꽁무니 치면 곤란하잖아요?"
찻잔으로 입가를 가린 엘윈이 입매를 올렸다. 금방이라도 피비린내가 날 것 같은 비릿한 미소를.
"일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고."
어느샌가 그의 눈에는 안광이 사라진 상태였다.
"파밀리아."
읊조리는 듯, 저주하는 듯한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우우우웅─!
엘윈으로부터 강렬한 기운이 퍼졌다.
콰직!
그들이 들고 있던 찻잔이 깨지며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소파는 물론이고, 책상, 액자, 방 안에 있던 가구들이 요란하게 삐걱거리며 비명을 토해 냈다.
"엘윈."
그에 판 트바론이 눈썹을 올렸다.
이제는 심지어 건물조차 흔들거리는 기미가 보일 때,
"엘윈."
"...."
"엘윈 크라이거!"
판의 노호성이 터졌다. 그러자 엘윈의 푸른 눈에 빛이 들어왔다.
"살기 줄여라. 평상시에도 방심하지 말고 주변에 신경을 쓰라고, 분명 입 아프게 말했을 텐데!"
"아... 아아앗! 죄송해요, 판! 순간적으로 주체가 안 돼서. 괜찮으세요?"
"딱 봐도 모르겠나. 문제없다."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엘윈을 보며 판은 크게 코웃음 쳤다.
"정말로 죄송해요.... 망가진 가구나 소품값은 저한테 청구해 주세요."
"됐다. 이 정도쯤은."
하지만 언뜻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판이었으나, 그의 목덜미에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저릿저릿하군.'
그 역시 한창때 현역 헌터로서 활동한 전적이 있었으나.
특급 헌터의 진심이 담긴 살기를 버틸 만큼의 재간은 갖추지 못했다.
'이 녀석. 얼굴 못 봤던 1년 사이 더욱 강해졌군. '그녀' 덕분인가.'
엘윈은 지난 1년 동안, 동대륙으로 넘어가 특훈을 하고 왔다.
그 사이사이, 임무가 들어오면 그것도 처리하곤 했지만.
'...진심인가 보군.'
당연히 알고는 있는 사실이었다.
-판. 20살이 되는 해, 시작할 거예요. 그 증오스러운 파밀리아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 겁니다.
그 여정이 가시밭길이란 걸 알기에 가능하면 판은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엘윈은 그걸 예상했는지, 은연중 본인의 성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걱정 마세요. 반드시 이길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듯이. 아마 방금 기운을 방출한 것도 그런 의도가 있었을 터다.
'못된 놈.... 노엘은 잔머리를 굴리는 편이 아니었는데.'
어디서 그리 안 좋은 버릇을 배운 건지.
판이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말했다.
"이번 시험을 마지막으로, 올해부터는 입섬을 거부하려고 한다. 그편이 네놈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기에 좋겠지?"
"활개라니.... 너무해요."
울상을 짓던 엘윈이 이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고마워요. 절 신경 써 주신 거죠?"
"크, 크흠! 좋을 대로 생각해라!"
헛기침을 뱉은 판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그, 게일이란 녀석. 꽤 괜찮은 놈 같구나."
"그렇죠?"
"너는 꽤나 노엘과 닮은 구석이 많으니, 혹시나 싶었지. 어디서 사기당하는 거 아닌가 하고."
"...저한테 그렇게 신뢰가 없어요? 전 노엘 정도는 아니에요."
만약 노엘이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 대화를 듣고 몹시 서운해했을 만큼 신속하고 단호한 부정이었다.
"엘윈. 네가 메디알레에 도착한 첫날, 나르한에게 몰래 지시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게냐?"
"어라, 판. 눈치채셨어요?"
"흥! 나를 뭐로 보고! 이래 봐도 회장직 30년이 넘어간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지."
판이 재차 콧방귀를 꼈다.
"네놈의 꿍꿍이를 모를 리가! 지난 10년간 널 기른 건 나였다."
"그랬죠."
엘윈이 푸스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별건 아니에요. 그냥, 밑밥을 깔아 놓는 용도였어요."
"밑밥?"
"설마 동료 모집을 게일로 끝낼 리 없잖아요. 고작 3명으로는 소대도 못 된다고요."
"그건 그렇지."
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왕 동료들끼리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계기를 만들어 봤어요. 이번 기회에 점 찍어 뒀던 다른 단원들도 데려올 예정이거든요."
"여기, 메디알레에 마음에 든 녀석들이 있는 게냐? 헌터 후보생들 사이에?"
"...뭐,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자고요. 어차피 곧 있으면 아실 텐데."
엘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보려는 게냐?"
"네, 슬슬 준비해 둬야죠."
엘윈이 슬쩍 입매를 올렸다.
"내일 치러질 헌터 시험의... '비밀 시험 감독관'이 될 준비요."
나중에 정체가 밝혀진 후, 그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기대가 됐다.
21화 람파스 헌터 시험 (1)
오늘은 제616기 람파스 헌터 시험의 3차시, 무력 평가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현재 시각, 오전 11시 30분.
시험까지 30분이나 남았으나, 집합 장소에는 이미 사람들이 빼곡했다.
[메디알레 중앙 경기장]
그것은 비단 수험자뿐만이 아니라, 방청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수백 명이나 수용 가능한 관람석에는 한 좌석도 빈 곳이 없었다.
"와! 나 너무 기대돼!"
"올해 기수에는 뛰어나신 선배님들이 많다며? 어떤 경기를 보여 주실까?"
"어쩌면 5년 만에, 10명 이상의 헌터가 탄생하는 황금 세대가 열릴지도!"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평가 시험.
그것이 참관 자격이 있는, 몇몇 특별히 선정된 이들에게만 공개된다는 점에서 방청객들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아! 너무 떨려!"
그들은 암암리에 공유되는 유대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본디 람파스인은 괴마라는 인류의 공통 적으로 인해 낯선 이에겐 경계가 높은 편이었다.
이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미소를 나누었다.
"하하하하!"
람파스 헌터 시험. 이는 람파스인들에게 있어서, 축제와도 같았다.
매일매일 언제 죽음이 목전으로 닥칠까, 소중한 이들의 부고가 도착하지 않을까....
불안과 공포 속에서 버티던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
"직접 볼 수 있다니.... 영광이야!"
"나도 언젠가, 헌터 시험에 응시해서 헌터가 될 거야!"
"호, 혹시 이번에 황의 헌터 님께서도 오실까?"
그들은 기대와 설렘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안고 경기장을, 곧 무대에 오를 배우들을 응시했다.
"으으, 언제 시작될까...!"
머지않아 이 람파스에 새로이 등장할, '희망'이 될 자들의 탄생을 고대하며!
반면 들뜬 분위기가 여실한 관람석과 달리, 경기장 안쪽 분위기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도, 모든 소음이 죽은 듯 침묵이 유지되고 있었다.
수험자들은 서로 거리를 둔 채, 간간이 경계 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벌써부터 견제라니.... 이거, 되게 적응 안 되네.'
그 사이에 낀 게일은 불편한 옷을 입은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다들 앞으로 시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으니, 더 그러는 거겠군.'
람파스 헌터 시험 절차는 지난 수십 년간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대강 짐작하는 것이다.
'무력 평가는... 토너먼트전.'
여기서 통과하는 건, 상위 10명 내외.
물론 그건 표준적인 숫자일 뿐이고, 어느 해에는 합격자가 단 1명만 나온 경우도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니 잊고 있던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으, 왠지 속 쓰린데.'
용병이었던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을 일이 어디 있었겠나.
아무리 노련한 게일이라도 낯선 일에는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찰싹!
게일이 본인의 뺨을 때렸다. 여기서 기죽으면 될 것도 안 된다.
그는 전날, 엘윈이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게일, 명심해요. 내일 시험장에서 절대 평정심을 잃지 마세요.
-평가 내내 수많은 시선이 지켜보는 건, 수험자 모두에게 평등한 조건. 그리고 주최자인 세계 헌터 협회는 '특별'한 사람을 헌터로 선별하길 원해요.
-그런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도 침착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눈에 띄는 법이죠.
'지금까지 열심히 굴렀잖냐, 게일. 제대로 실력 발휘 안 하면 아쉬울 거라고.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게일이 크게 심호흡하며 자기최면을 되뇌었다. 용병 일을 할 때, 늘상 하던 대로.
그러자 조금 떨렸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주변 환경 좀 눈에 익게 해 둘까.'
게일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치러질 시험장 내부를.
'거 사람들 오질나게 많네....'
모든 좌석이 꽉꽉 차 있는 관람석을 볼 때는 약간 질리는 기분에, 바로 시선을 옮겼다.
'오. 저 벽은 관람객 보호를 위해 미리 설치해 둔 건가.'
수험자들이 있는 중앙 공간은 관람석과 분리되도록, 동시에 밖의 방청객들이 안을 볼 수 있도록.
투명하지만 높다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저것도 마법 결계의 일종인가. 살다 살다 별 희귀한 것들을 다 보게 되는구만.'
그 순간이었다.
"야, 야. 저기 좀 봐 봐! 쌍검사 듀란에, 마녀 일족의 멜라사.... 천재 마법사 제라프도 있잖아!"
어디선가 다른 수험자들을 흘긋거리며, 소리 낮춰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듀란의 칼 놀림은 마치 질풍처럼 거세고 날카롭다지? 마녀 멜라사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주술을 쓴다던데!"
"제라프는 또 어떻고! 다른 마법의 성취도 뛰어나지만 특히 얼음 마법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2차시 면접을 볼 때 스치듯 보긴 했지만, 수험자들도 정식으로 서로를 마주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인지라 아닌 척 관심이 많은 이들도 꽤 있는 듯했다.
"흠흠...."
게일이 슬그머니 기척을 죽이곤 속닥이는 수험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경쟁자들의 정보를 얻는 건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인어족 창술사, 나투이아도 있어. 너도 알고 있지? 인어족들은 하나같이 창술의 대가라는 걸."
"아비토 율리. 저 애, 최연소 참가자지만 머리가 엄청 뛰어나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걸 기억한다던데?"
"오, 맙소사! 분쇄의 티무르도 있네. 단번에 거산을 갈랐다는 완력의 소유자!"
수다쟁이 수험자들이 소곤소곤 떠드는 이름 중에는 게일이 아는 사람도 있었다.
"아, 역시 저 애도 있구나...."
그들이 훔쳐보는 곳에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묶은 여자, 세르시아 오델바이스가 있었다.
"루스람 아카데미 수석 입학자이자 수석 졸업자. 재학하는 모든 학기 내내 올A로 만점."
"...저게 괴물이지. 루스람에서 모든 성적 만점이라니 가능한 일이야?"
"근데 전투 능력이 강한지는 모르겠다. 마법학과 수석인 건 알지만, 실력적으로는 은근 드러난 게 없지 않아?"
"그러게. 이론과 달리 마법 실력은 평범한 건가? 남자 편력만 높더니...."
작게 키득거리며 비웃는 웃음소리에, 게일은 콧방귀를 뀌었다.
'약하긴 무슨. 저 여자는 약한 게 아니라....'
치밀한 거다. 사방 천지에 널린 경쟁자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남기지 않으려고.
"후훗."
언뜻 게일과 눈을 마주친 그녀가 유혹적으로 눈웃음쳤다.
"으."
기분이 상한 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홱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 매스꺼웠다.
"저, 저 가식쟁이 아가씨 같으니라고."
그날, 세르시아 오델바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
게일은 그녀에게 엘윈의 전언을 전달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 녀석, 너한테 '도와줄게요'라고 전하라 했어.
-...그분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저에게... 정말로?
-거참, 이 아가씨가 속고만 살았나. 내가 목숨을 위협받는 지금 이 상황에서 거짓을 말하겠어? 하나뿐인 머리통에 총알 피어싱하게?
세르시아 오델바이스는 몹시 멍해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은 사람처럼.
-다른,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아, 맞다. 하나 더 있었네.
-무, 뭔가요!?
-'단, 먼저 증명하시길'이라고 했지.
게일이 듣기엔 의미 모를 말이었으나, 그녀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증명. 그렇군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곧이어, 그녀는 위협하던 총구를 내렸다.
-오늘, 실례했어요.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다음에 만회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됐수다! 그냥 영영 내 앞에 안 나타나 줬으면 해.
-그럼 다음에 봐요, 게일 씨.
왠지 우리 오래 보게 될 것 같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법사가 적이면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 같은데. ...그보다 다들 내 말은 듣고 흘리는 거지?'
게일이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이 기회에 누가 누구인지 기억해 놔야겠어.'
여하튼 게일은 언급된 수험자들의 이름과 외형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시험 전부터 이름을 날렸다는 것은 그들이 유력한 헌터 후보라는 의미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다들 상당한 강자로군.'
게일이 예리하게 유력 후보자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 잠시만! 저기 걸어오는 남자, 혹시 그 사람 아니야?"
"어디? ...헉! 마 맞는 것 같아!"
수다쟁이 수험자들은 누군가를 발견하고선, 숨죽여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잊은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칼릭스 투타티오 자하르트!"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간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뭐?!"
"누, 누가 왔다고?"
그 말에 서로를 경계하던 다른 수험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기대와 경계 또는 두려움을 담아서....
저벅저벅-
통로 안쪽으로부터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게일은 문득 생각했다.
'검사로군. ...아니, 기사인가.'
정규 교육을 받은 기사 특유의 발소리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정한 보폭의 걸음.
꿀꺽 누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수험자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발걸음의 주인을 기다렸다.
이윽고 통로를 통해 한 남자가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
검푸른 머리카락의 사내였다. 옷차림새는 귀족이라기엔 낡고 헤져 있었으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꼿꼿하고 우아한 어딘가 오만한 기품이 그의 혈관에 흐르는 푸른 피를 증명하는 듯했다.
'왠지 엘윈 녀석이 생각나는걸.'
본인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이따금 범접할 수 없는 기세를 풍기곤 했다.
'뭐어, 저 녀석보다야 꼬맹이 쪽이 당연 압승이겠지만.'
그렇게 게일은 새롭게 등장한 경쟁자를 흘긋 보고 넘겼다.
필연적으로 붙을 상대였으나 이는 달리 말해 그뿐이었다.
그는 왕실의 검이니 자하르트니.... 별 관심이 없었다.
'높으신 분은 질색이야, 질색.'
하지만 그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호오."
칼릭스 자하르트는 다른 수험자들의 기선 제압을 위해 본인의 마력을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폭력적인 기세로 인해 다른 수험자들은 꽁꽁 굳어 있는 와중에 오직 게일만 태연했다.
"아아, 시험 언제 시작하냐. 이제 슬슬 기다리기 지겨운데."
이는 단연코 엘윈 크라이거라는 압도적인 강자를 대면한 경험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에겐 칼릭스의 마력이 풍기는 기세는 별로 타격이 없었다.
그보다는 엘윈이 평상시에 조절 실패해 깜박하고 내보내던 기세가 강렬했다.
"...저 남자 재밌겠군."
강할 것 같다, 그리 판단한 칼릭스 자하르트의 흥미로운 시선이 일순 게일을 향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닿은 터라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다가오는 불행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편이 나았으니까.
"...어?"
심드렁하던 게일의 표정이 일변한 건 그때였다.
"어, 어어?!"
눈을 부릅뜬 게일이 황급히 두 눈을 비볐다.
경기장 안에 모인 모든 수험자의 얼어붙은 시선이 칼릭스 자하르트에게 쏠린 가운데.
"자, 잘못 본 게 아니잖아?"
홀로 그보다 뒤쪽을 바라보는 게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게일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칼릭스 자하르트 그의 뒤쪽에 숨어서 은밀히 걸어오던 한 소년을 발견한 것이다.
"홀홀홀. 다들 활기차군요~ 좋아요~ 아주 좋아."
멋스러운 콧수염을 달고 있는 앳된 얼굴의 금발 머리 소년은... 지나가며 앞구르기 하면서 보아도 엘윈이었다!
22화 람파스 헌터 시험 (2)
엘윈을 발견한 뒤로 게일은 세게 눈을 비비고 뜨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헌터를 지망하는 분들이 이렇게나 많군요~"
아무리 보아도 그가 아는 꼬맹이가 맞는데, 어쩐지 인중에는 서커스에서나 볼 법한 괴상한 콧수염이 붙어 있었고.
말투나 분위기는 꼭 수십 년은 살아온 할아버지 같았다.
어깨를 좁히고 구부정히 서 있는 자세에서부터 연륜이 느껴졌다.
"홀홀홀!"
마력 보유자들은 외형이 전성기에 고정되곤 했으니 언뜻 보면 엘윈은 젊은 외모를 가진 노인으로 보였다.
'뭐야. 뭔데 꼬맹이 연기까지 잘하는 건데.'
이제는 숫제 무서워진 게일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게 변했다.
"허허허. 열의의 찬 젊은이들은 보기 좋군요~"
"우리 모두 선의의 경쟁을 펼쳐 봅시다."
"그보다 이 늙은이를 언제까지 세워 둘 생각인지 원.... 아이고 허리야."
엘윈이 입을 열 때마다 콧수염이 씰룩거리며 흔들렸고 덩달아 게일도 몸을 떨며 흠칫거렸다.
"하하하.... 계속 헛것이 보여.... 내가 또 환상 마법에 걸린 건가? 아니면 아침에 실수로 환각 버섯이라도 주워 먹었다던가?"
그렇게 그가 아무리 부정을 하고 용을 써도 콧수염이 도드라진 금발 머리 소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진짜인가? 거짓인가? 그는 실제 여기 존재하는가 아니면 내 트라우마로 인해 발현된 환각인가....'
슈뢰딩거의 엘윈을 보면서 끙끙거리며 고뇌하던 게일이 이내 명쾌한 결론을 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특급 헌터나 되어서 뭐가 아쉽다고 시험을 다시 보겠는가?
아주 상식적인 답이지 않나.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네! 안 되지 안 돼. 곧 있으면 시험인데 일어나야지...."
찰싹찰싹!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진 게일이 갑자기 본인의 뺨을 내려쳤다.
연신 삐걱대며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고장 난 기계 같았다.
"뭐야, 미친 사람인가 봐...."
"미친 자가 헌터 시험을 통과한 걸 보니 어마어마한 강자인가 보군!"
"요주 인물이야.... 조심해야겠어."
그의 기행을 본 몇몇 수험자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의도치 않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히는 건 덤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잠이 안 깨는 거야...! 시험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꼬맹이나 집사 양반에게 살해당한다고!"
그렇게 게일은 혼란에 빠졌다!
한편, 대다수의 좌중은 여전히 한 사내를 주목하고 있었다.
"...."
칼릭스 자하르트의 짙은 청안이 장내를 무심하게 훑더니 이내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물색하는 것 같은 모습에 긴장한 좌중이 고요해졌다.
"...."
하지만 그는 벽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을 뿐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험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칼릭스 자하르트라니...! 저 사내가 진정 검술명가 자하르트의 직계가 맞겠지? 아라드 왕국의 최강의 검!"
그런 그를 보며 수험자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서로를 견제하던 것도 잊은 것인지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댔다.
"언젠가 검사로서 한 번이라도 칼을 맞대어 보고 싶군!"
"저 남자가 검성(劍聖), 젤릭스 자하르트의 아들인가.... 과연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군."
"...역시 '그' 소문은 헛소문이었나? 암 그렇지! 드래곤이 낳은 자식이 한낱 개새끼일 리 없지!"
무(武)의 길을 걷는 사람 중 세간의 유명세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드물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위뿐, 굳이 상관없는 타인에게까지 시선을 두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간혹 그들 사이에 공통된 관심사가 생겨나곤 했는데....
'어느 나라에 내려진 마녀의 저주'
'해저에 가라앉은 전설의 보물'
'전무후무한 최연소 특급 헌터'
그밖에 하나같이 신비롭고 비밀에 감춰진 듯한 들을수록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들.
그중에는... '자하르트 가문' 또한 있었다.
동대륙의 패자(霸者), 아라드 왕국.
남대륙의 아달가르비스 제국과 더불어, 세계의 패권을 양분하는 아라드 왕국은 상무적인 기조를 숭상하는 세계 최고의 기사강국이기도 했다.
─일명, 검과 기사들의 나라.
특징적이고 고유한 검술, 강력한 검사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우후죽순으로 솟아나는 곳.
수십, 수백 년의 명맥을 잇는 검술 명문가들.
그런 아라드 왕국에서도 단연코 독보적인 곳이 있었으니 바로 자하르트 가문이었다.
"아라드 건국 때부터 한 차례도 빠짐없이 세계 제일 검을 배출해 낸 가문 자하르트. 설마하니 이곳 헌터 시험장에서 자하르트의 후예를 만나게 될 줄이야...."
침통한 듯 침음을 흘리는 어느 노년의 수험자에게 그 옆에 있던 청년이 물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자하르트 출신의 헌터는 한 명도 없었네요. 선생님은 왜 그런지 알고 계신 가요?"
"그건...."
"내가 대답해 주지!"
질문받은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쪽 눈가를 크게 가로지르고 있는 흉터가 눈에 띄는 남자였다.
"나 역시 아라드 왕국 출신이라서 잘 알고 있거든."
"...당신은?"
"아. 이런 실례. 내 소개를 잊었군. 나는 자레스 헬투리오라고 한다. 별 볼 일 없는 검사지."
"헬투리오라면... 유명한 검술명가가 아니오! 별 볼 일 없다니? 겸손이 과하군."
"...뭐, 그건 내 가문의 명성이니까. 아직 내가 대단한 건 아니잖아? 난 어디 사는 누구 씨와 달리 내 실력으로만 인정받고 싶지, 가문의 휘광을 업고 싶지는 않거든."
능청스레 답하던 자레스 헬투리오가 슬쩍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칼릭스 자하르트가 있었다.
"...저 귀 밝은 놈 분명 들었을 텐데. 쳐다보지도 않는다라."
자레스는 어이없다는 투로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하지만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던가?
'...어? 눈이?'
그의 개암빛 눈동자에는 싸늘한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 질문을 던진 수험자는 문득 생각했다.
꼭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다고.
"왜 이제껏 자하르트 출신의 헌터가 없었냐면... 자하르트는 검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사도를 중시하는 기사 가문이라서 그렇소."
"음? 그게 어째서 이유가 된다는 거죠? 당신 헬투리오 가문의 자제분께서도 헌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습니까."
"헬투리오와 자하르트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거든."
자레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가문과 달리 자하르트는 아라드 개국공신이기도 하고, 하나같이 고지식할 만큼 원칙주의자라서 말이지."
"원칙주의자요?"
"기사의 정석... 같다고나 할까. 자하르트 가문의 구성원들 전부 아라드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극히 높거든. 아라드 왕가의 검이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야. 그런데...."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을 담아서.
"몇 년 전 아라드의 모두가 기함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지. 낳아 주신 아버지께 패륜을 저지르고 가출을 시도한 미친놈이 생긴 거야!"
"...."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자레스 헬투리오의 목소리에는 마치 심연 속 불길이 끓어오르는 듯 강렬함이 느껴졌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으나...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가? 자하르트의 탕아."
그에 지목당한 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청람색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칼릭스 자하르트."
"...그렇군, 있었나. 자레스 헬루티오."
모욕적인 말에도 칼릭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깊은 산속에 지어진 견고한 성채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 말만은 가만히 넘어가지 못하겠군. 패륜?"
칼릭스 자하르트는 고요했다.
보고 있자면 절로 잔잔한 물결의 호숫가가 연상될 만큼.
"하! 하, 하하하하!"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열의가 덧입혀졌다.
"웃기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건 패륜 따위가 아니야. 말하자면... 그래, 인과응보."
가라앉은 안광을 번뜩거린 칼릭스 자하르트가 말했다.
"망할 영감님이 받기에 합당한 대가였다."
"하! 너야말로 자기합리화는 그만두지 그래? 네놈 가식에는 이미 질렸거든."
주변에 있던 수험자들이 놀라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으나, 자레스는 그저 재밌다는 듯 미소했다.
"그럼 말해 봐라. 네 아버지. 자하르트 가주님께 칼을 들이댄 게 왜 패륜이 아니란 거지? 네 핏줄은 자하르트가 아닌가? 칼릭스, 자하르트."
"말해 봤자 이해는 할까 싶은데.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남의 가문에 관심이 많지? 자하르트도 아닌 부외자는 빠지실까. 자레스, 헬투리오."
"하하.... 내가 부외자라고?"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로 격렬한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물론, 착각이 아니었다.
양쪽 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마력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려고 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대련이나 해 볼까? 입만 나불대지 말고 덤벼."
"좋다. 말보다는 검으로 말하는 것이 아라드의 인간이지."
두 사람의 마력이 더욱 강렬해졌다.
금방이라도 칼을 꺼내 날 부림을 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누가 내 시험장에서 소란이지!?"
쾅!
문을 걷어차며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어딘가 건방진 분위기를 풍기는 주황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아앙?"
네모나고 새까만 선글라스에 입고 있는 정장과 묘하게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꽃무늬 와이셔츠.
길바닥 왈패 같은 입과 골목길 건달 같은 인상의 외모.
그 모든 외적 요소를 조합했을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까, 깡패!? 헌터 시험에 깡패가 왔다아아아아아!"
깜짝 놀란 수험자 중 한 사람... 게일이 경악하며 외쳤다.
"누구보고 깡패라는 거야? 아앙!?"
그러자 남자가 성질을 부리며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그 사이로 날카로운 눈매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이번 시험을 관장하는 시험 감독관이다! 상급 헌터, 아레이 오스왈드! 여기서 두 번 다시 나를 깡패라고 부르면 사유 감독관 모욕으로 즉각 실격인 줄 알아라! ...특히 너!"
아레이 오스왈드가 게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눈을 부라렸다.
"으윽! 죄삼다...."
"명심해라. 다음 기회는 없다."
째각째각. 띵-!
시험 감독관이 들고 있던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외모와 다르게 취향은 고풍스러운 모양이다.
"...12시 정각. 딱 시간 맞췄군. 그럼 이제부터 시험을 시작하지."
그가 시계를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 그전에 앞서 한 가지 공지할 것이 있다."
그리고 허공에서 기다란 지팡이를 쑤욱 꺼냈다.
마치 마술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이번 3차시 시험은 토너먼트전이 아니다! 수십 년 만에 기념비적인 시험 내용 변경이다!"
콱!
그러곤 감독관은 불시에 지팡이를 땅에 내려찍었다.
"좋아! 그럼 이번 회차 시험에 대해 발표하지. 올해 시험 주제는... '생존'이다!"
23화 미궁 속에서 (1)
쿠구구구구궁!
감독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 아래로부터 거센 진동이 일어났다.
수험자들이 제대로 서 있지 못 하고 휘청거렸다. 아예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은 이도 있었다.
"크윽...!"
"읏!"
"지진인가!?"
경기장 안에는 수십에 다다르는 수험자들이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지진에 자세를 다잡은 이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젠장! 무력 평가가 달라진다는 건 처음 들은 이야기라고! 아, 그래서 설마 꼬맹이 녀석이...!"
"수십 년 만에 시험 내용이 바뀌었는데, 그게 하필 우리 때라고? ...푸하하하! 이거 운도 지지리도 없군!"
"타무르! 지금 한가하게 웃고나 있을 때야!? 아아.... 기껏 세웠던 전략과 전술이... 전부 소용없게 됐잖아!"
"어머머, 재밌게 됐네요~"
그중에는 게일을 비롯해, 이름이 알려진 헌터 유력 후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결착의 순간은 지금이 아닌 것 같군. 패륜의 대가는 다음에 치르게 해 주지, 칼릭스."
"하! 이쪽이야말로 원하는 바다, 자레스."
"...인간족, 전사 시험, 매우 복잡. 우리 인어족, 전사들, 본인의 무위만, 증명, 충분."
"하하! 아무래도 인간과 인어는 다르, 지!"
검이나 창 등의 무기를 내려찍어 지지대로 삼든, 마법을 발현하든, 단련된 신체로 버티든....
각자가 가장 자신 있는 방법으로, 본인의 태세가 무너지는 걸 막은 것이다.
"전력으로 버텨 내...!"
그 순간, 그들의 생각은 똑같았다.
'여기서 엎어지면 실격한다!'
실격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얻긴 어려울 것이다.
아직 감독관의 목적은 모르지만... 적어도 숨겨진 의도가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호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을 바라보던 감독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번 기수에는 썩 쓸 만한 녀석들이 많다더니, 과연 그런 것 같군! 물론, 정말 그런지는 끝까지 봐야겠지만!"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은 그가 호쾌하게 소리쳤다.
"좋았어! 그럼 다음 단계로 진행이다!"
쑤욱!
그는 반 정도 땅에 깊숙이 박힌 지팡이를 빼내었다. 물건을 꺼내는 듯, 쉽게.
그러곤 능숙한 손길로 한 바퀴를 돌리며 외쳤다.
"자, 이 이상의 입씨름은 필요없겠지!?"
느슨히 내려진 선글라스 위로, 남자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실전이야말로 개인의 자격을 증명하는 법이지!"
그가 지팡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팡이로부터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콰직!
이변은 그때였다.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어디서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아?"
수험자들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신체가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게일은 다급히 그의 발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목격했다.
콰지지지직!
쩍쩍 갈라지는 지면을!
화려하게, 그리고 빠르게 금이 가는 모습은 마치 유리가 깨지는 찰나의 순간을 보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와우."
그가 빙그레 웃었다.
"×됐다."
기어코, 바닥이 완전히 무너졌다.
경기장 안에 있던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일제히 아래로 추락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사람 살려!"
"이게 무슨 짓이야...!"
수험자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다들 스스로를 증명하길 바란다! ...'미궁'에서!"
그와 대조되게 감독관의 경쾌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건투를 빌지!"
다시 한번 수험자들의 생각이 일치했다.
...저 얄미운 감독관에게 한 대 날리고 싶다고!
* * *
"흐어억, 헉! 후우!"
가까스로 땅으로 착지하는 데 성공한 게일이 숨을 몰아쉬었다.
"후! 까딱 잘못했다가 뒈질 뻔했네."
그가 무사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 덕분이었다.
전신에 마력을 얇게 두르고 있다가 지면에 가까워지는 순간...!
마력을 폭발적으로 내뿜어 떨어지는 가속도를 낮춘 것이다.
"불과 며칠 전의 나였다면."
게일이 고개를 들며 그가 떨어진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까마득한 높이였다.
"어우."
게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즉사했겠는데. 엘윈, 그 녀석...."
이렇게 될 걸 다 예상해서, 훈련 때 마력 조절을 통한 움직임을 연습시켰던 걸까?
-자고로 헌터란, 허공에서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마력의 방출을 통해 속력을 조절할 수 있답니다. 다만 이 방법은....
"이제 얼마나 남았지, 내 마력이."
-가진 마력의 양이 많아야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지만요.
"...이거 큰일 났네."
마력이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어, 어쩌지!?"
게일이 식은땀을 흘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양의 마력이 고갈될 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그때였다!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내 목소리가 들리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험 감독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소리의 출처를 따라가자 게일은 묘한 생명체를 발견했다.
"...저건?"
하늘하늘,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물고기였다.
나비나 곤충 같은 얇은 피막의 날개가 있고, 전신에서 희미한 빛을 내는.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건 하늘야광 물고기라고 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날 수도 있는 이능을 가진 희귀한 생물이지. 한 수험자당 한 마리씩 붙여 놓았다.]
[이것들을 통해 여러분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한, 수험자의 상황이 지상에 있는 나와 감독진, 방청객들에게 중계될 것이다. 보이나? 아래의 영상구가.]
그 물고기의 아가미 밑에는 동그란 눈동자 형태의 영상구가 묶여 있었는데....
깜박, 깜박.
감독관의 말에 맞춰서 눈동자가 눈꺼풀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윽, 왠지 꺼림직하군."
게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듯, 깜박이는 눈동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헌터 협회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것들이니... 물고기에 어떤 상해를 입히거나 죽인다면,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를 부여할 예정이다.]
[그러니 '전투'나 '도주' 중이라도 물고기의 위치를 면밀하게 신경 써야겠지?]
감독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게일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전투, 도주?"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어폐에 맞지 않게 느껴진 것이다.
"아까 언급했던 시험 주제는 생존, 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존이라 함은 비단 살아남는 것.
식량을 확보하고 보금자리를 구하고 하루하루 견뎌 내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더 이상 이러한 의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제임스 첼론, 일마일, 크리스틴 레프, 휴간, 로젤린다 와커....]
스스슥, 허공에 글자와 사진들이 하나씩 떠오른 것이다.
처음 메디알레에 도착했을 때 봤던 마도공학 시스템 기술이었다.
"이름과 사진...."
게일로서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허공에 뜬 사진 속 얼굴은, 방금까지 지상에 모여 있던 수험자들이었다.
어째서 그들의 얼굴이 뜬지는 곧이어 알 수 있었다.
[위 호명된 수험자들은 기준 미달로... 탈락!]
촤악!
그 사진들 위로 새빨간 엑스자가 호쾌한 선으로 덧그려졌다.
그리고 탈락자들의 얼굴은 까맣게 변해 화면에서 사라졌다.
[3차시 합격자 중에 사지 멀쩡히 미궁에 도착한 건, 총 49명.... 다행히 수험자의 반 이상이 중간에 추락해 실격 처리된 머저리는 아니군.]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너희, 49명이야말로 3차시 무력 평가 대상자가 된다. 경쟁자가 줄어서 좋겠지? 마음껏 좋아해도 된다!]
영상구 너머로 즐거워하는 듯한, 어쩌면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작 이 정도 시련도 이기지 못한 놈들은 쓰레기나 다름이 없으니, 머지않아 탈락했을 테니까!]
[아니지, 어쩌면 다행인 일이지. 꿈은 좌절되었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니.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현재 게일은 고작 감독관의 말만 들을 수 있는 상태였으나....
어쩐지 새까만 어둠 속에서 히죽, 비웃는 입매가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소름이 돋았다.
[헌터 시험에선... 수험자가 죽더라도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걸!]
단두대같이 차가운 선고가 내려온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아득한 동굴 저편에서 정체 모를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천지를 뒤흔드는 듯 우렁찬 포효에 공간이 비명을 지르듯 떨었다.
"뭐야.... 뭔데 저건!"
등골이 오싹해진 게일의 동공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의 이해치를 넘은 것이다.
게일의 감이 말하길, '저것'은 분명 인간이 아니다. 괴마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여러분은 궁금할 것이다. 헌터 지망생인 만큼 감각적으로 깨달았겠지. 저건 인간도 괴마도 아니라고...! 그렇다면, 저 울음소리의 주인은 무엇인가!]
의문에 대한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 너희가 있는 곳은 메디알레 섬 지하에 감춰져 있던, 어느 고대 문명의 미궁!]
[그곳에는 과거, 괴마의 등장으로 멸종당했다는 몬스터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한다! 강력하고, 위험한... 한때, 인류와 대적하던 악적(惡敵)들이!]
그 말을 듣자 하니 갑자기 주변 온도가 급격히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안갯속에 몸을 숨긴 채, 어수룩한 인간을 노리는 것만 같은....
그의 목숨이 노려지는 듯한, 서늘하고 묘한 감각.
[지금부터 너희, 49인의 수험자들은 협력하든, 경쟁하든 어떻게든 상관없이... 지금으로부터 3일! 총 72시간 동안 몬스터들로부터 살아남는다!]
게일이 긴장이 여실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험의 시작이란 걸 직감했다.
[메디알레 지하 미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
* * *
한편 게일이 있는 곳과 정반대에 있는 장소.
"...아, 찾았다."
거기에는 엘윈이 있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듯,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살펴보았다.
엘윈이 귓가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의 귓바퀴 안쪽에는 작은 무선기가 있었다.
"탈락자 발견. 눈에 띄는 외상은 양다리 골절, 덧붙여 내상 의심되니 신관 대기시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워프 준비됐습니다. 엘윈 님, 지금 계신 좌표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현재 좌표는... B97-4628. 워프 시작하세요."
우우웅!
그러자 탈락자의 몸에서 빛이 나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기 실격자는 이 사람으로 마지막. 저는 본래의 임무로 돌아갑니다."
엘윈은 이번 비밀 시험 감독관으로서 은밀하게 수험자들의 점수를 매기는 역할을 맡은 동시에,
기준 미달 탈락자, 또는 결격 사유가 될 만큼 심각한 상처를 입은 실격자를 회수하는 역할도 있었다.
[네, 그럼 엘윈 님. 앞으로의 시험 진행도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특급 헌터, 엘윈 크라이거의 개입.
그것은 수십 년 만에 시험이 바뀌면서, 세계 헌터 협회가 내놓은 최선이자 최고의 대안이었다.
"하하! 걱정 마세요, 아레이."
올해 기수의 수험자 중 태반은 「람파스」의 주요 인물이었다.
본디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게일의 헌터 시험 응시는 내년.
하지만 엘윈의 개입으로 인해, 그는 1년 더 빨리 출마하게 됐다.
"저도... 이번 시험, 무척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24화 미궁 속에서 (2)
모든 소리가 죽은 듯, 침묵만이 가득 찬 미궁 속.
"후욱! 우, 우욱...!"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가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체구에 비해 왜소하게 구긴 몸집이나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소리, 파랗게 질린 안색.
그런 신호들이 남자가 현재 느끼는 극도의 긴장감을 암시하는 듯했다.
"지, 진정하자. 나는 안전해. 안전하다고...."
남자가 스스로에게 말하듯 되뇌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인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천장에 달린 종유석으로부터 맺힌 물방울이 불현듯 남자의 콧잔등 위로 떨어졌다.
똑!
"으하아아악!"
그 작은 감촉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치다가 이내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아, 안 돼."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인지한 남자가 도망치기도 전에,
<찾았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순식간에, 남자의 뒤쪽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입을 쩌억 벌렸다.
그것은 실로 기괴한 형체를 띄고 있었다.
<인간발견.>
유렁처럼 온통 투명하고 허여멀건한 몸체 위로, 희미한 푸른 빛을 띠는 게 마치 시체의 낯빛을 나타내는 듯했고.
걸어 다닐 수 있는 발이라곤 전무, 눈이나 코도 없었다.
하지만 그 부족함을 채우려 했는지, 양손은 무려 6개에 다다랐고, 입은 커다랬다.
<맛있겠다.>
그런 괴물이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이다. 직감한 남자가 무기를 꺼내 들었다.
부족한 용기를 채우는 기합 소리를 내며 용맹하게도 칼을 내질렀으나....
"아?"
쑤욱!
야속하게도 칼은 괴물의 몸체를 통과하여 지나갔다.
챙그랑-!
망연한 표정의 남자가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
"사, 살려-!"
남자의 산발적인 비명과 동시에, 괴물이 끽끽거리는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아니, 언뜻 울음과 비슷하게 들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기쁨의 포효였다.
<잘 먹겠습니다-!>
꿀꺽!
한입에 남자의 상반신이 사라졌고, 이어진 두 입에 하반신까지 깔끔히 먹혔다.
와작와작. 바삭한 과자가 씹히는 듯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괴물은 스르륵,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 괴물의 정체는... 바로, 수천 년 전 멸종했다는 '몬스터'였다!
한편, 남자와 괴물이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가장자리.
그곳에는 게일을 포함한 세 사람이 숨어 있었다.
"하아, 깜짝이야. 숨넘어가는 줄. 그보다... 저 괴물, 자리를 완전히 떠난 거 맞겠지?"
"쿠찰누 맙소사.... 타무르, 생전 저런 기괴한 생명체는 한 번도 본 적 없다!"
"저것이 몬스터. 확실히 그렇군요. 괴마가 몬스터를 멸종시킨 후, 등장한 생물이다 보니... 어느 정도 괴마와 유사한 부분은 있어 보이네요."
최연소 참가자, 아비토 율리.
그리고 분쇄의 타무르.
두 사람 모두 헌터 유력 후보자로 일컬어지던 수험자였다.
"큰일인데.... 저것들이 호숫가를 점령해 버렸잖아."
"흠."
"어떻게든 방책을 마련해야겠네요. 저 몬스터들을 쫓아낼."
이 세 사람의 만남은 방금 전으로 돌아간다.
처음 게일이 미궁에 도착하고 감독관의 안내 사항을 듣고 있을 무렵.
[아차, 이걸 전해 주는 걸 깜박했군. 곧 여러분에게 아이템이 하나 도착할 것이다.]
[잘 받도록!]
파아아앗!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게일의 앞에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총?"
아니, 총이라기엔 어딘가 조잡했다. 장난감 총이나 물총처럼 아이들 놀잇감 같았다.
[이번 시험의 주제가 생존이긴 하나, 기본적으로 무력 평가인 만큼 수험자 간의 우위를 구분해야 하는 법.]
[여러분에게 지급한 그 아이템이 바로 그 대안이다.]
슈우우욱.
빛을 내던 그것이 알아서 게일의 손으로 안착했다.
"어엇."
그러자 총탄이 있을 자리에 대신 들어 있는 노란색 용액이 크게 출렁거렸다.
[방법은 간단하다. 상대를 무력화시킨 후, 그 총을 상대에게 쏘면 끝!]
[총 안에 들어 있는 특수 마법 처리된 용액에 의해 자동으로 수험자 간의 승부 데이터가 지상의 감독관들에게 전달된다.]
[그에 따라 여러분의 무력 순위가 매겨지고 차등 점수가 부여된다는 점, 기억해 두도록! 그러니 되도록 많이 겨루고 승패를 내면 좋겠지?]
"그렇단 말이지...."
게일이 묘한 표정으로 손아귀에 쥔 총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단순한 생존 말고도, 수험자 간의 경쟁도 고득점을 위한 중요 요소인 듯했다.
[흠, 이제 전달 사항은 다 말해 준 것 같군. 그럼 다시 한번... 수험자 모두들, 건투를 빈다!]
감독관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 게일은 그 즉시 조심스럽게 장소를 이동했다.
깜깜한 미궁 속이었으나 그를 따라다니는 물고기 덕분에 가까운 곳은 대낮처럼 볼 수 있었다.
"72시간, 즉 3일 동안 생존해라 이건데. 그렇다면."
용병의 판단은 빨랐다.
"가장 먼저 물을 확보해야겠어."
3일 정도라면,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
그가 허리춤에 늘 매달고 다니는 가죽 주머니를 확인했다.
"습관적으로 매고 와서 다행이지."
주머니 안에는 밀알 한 줌과 건육포 몇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나름의 수확이긴 했으나, 주머니 자체가 뜻밖의 행운이었다.
엘더 가죽으로 엮은 이 주머니는 물을 담고 보관하기에 딱 좋았다.
"이건 시험이야. 아무리 실전을 표방한다 해도, 결국 실전은 아니지."
난생처음 겪는 환경도 수험자에게 충분히 당혹스러운데,
아무런 기반도 제공하지 않고서 생존을 요구하는 건 가혹한 면이 있었다.
"미궁 곳곳에 미리 물과 식량을 숨겨 두었던가, 아니면 어딘가에 식용 가능한 식재가 있겠지."
게일은 본격적으로 미궁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벽을 가볍게 손으로 훑으며 걸었다.
지금 게일에게 보이는 건 끝없이 늘어진 암벽뿐이었으니, 그곳에 단서가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내가 또 이런 미스테리한 던전은 전문가가 아니겠어!"
용병단에 소속되지 않은 채 홀로 뛰던 게일에겐 그런 미지 탐색 의뢰가 많이 들어왔다.
그런 의뢰들은 보통 예상치 못한 위험이나 함정이 수두룩했지만....
기반이 잡힌 용병단과 달리, 게일 같은 개인 용병은 의뢰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미궁에는 힌트가 남겨져 있을 거야. 그렇다면... 인간의 평균적인 신장, 그 눈높이에서 충분히 보일 만한 구석에 단서가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겠지."
어쨌든, 그가 이런 탐험과 조사에 빠삭한 건 사실이었다.
"이야."
하지만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은근히 역사적 조예가 깊은 게일으로서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섬 지하에, 이렇게 큰 암석을 세우다니...."
메디알레 지하 미궁은 드높고 거대한 암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험한 산세로 유명한 카프라스 산이나 네베라 계곡 같은, 깎아지르는 벼랑을 보는 듯했다.
"지금보다 기술이 떨어진 고대에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미궁 암벽의 면면은 마치 석공이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다듬은 듯, 매끄럽고 반질거렸다.
탕탕!
조금 힘을 주어 두드려 보니 돌벽에서 무슨 철을 때리는 듯한 낭랑한 소리가 났다.
"어우, 강도가 장난 아니구만. 웬만한 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암벽에 작은 흠집 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게일은 다시금 감탄했다.
고대인들은 그런 단단한 암벽을 재료로 삼아, 자유롭게 깎고 갈아 내며 굽이굽이 어지럽게 길을 내어 이 미궁을 만든 것이니까.
"이거, 볼수록 이상한데."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언가, 안에 가둔 것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든 장치 같지 않나?"
그런 의문을 갖자 뒤이어 떠오른 생각은 필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헌터 협회는 메디알레 섬 아래에 있던 고대 문명의 유적지에 대해 공표하지 않았지?"
람파스에서 가장 활발한 연구 분야는 마법학도 마도공학도 아닌, 역사학과 고고학이었다.
현재, 람파스에는 괴마 등장 이전의 역사가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걸 발표만 했다면 전 세계의 학계가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야."
그 역사가 '괴마'라는 공포를 해결하는 데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예상되는바.
인류는 역사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었다.
"어차피 일반인의 출입을 면밀하게 관리하는 메디알레에서 검증받은 학자들이 떼거리로 온다고 한들, 큰 문제는 없었을 텐데. 흐으으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게일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숨겨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 학구심 넘치는 학자들이 알면 곤란해지는 일이 있던 거야!"
그리고 미궁에 관련해, 람파스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이 떠올랐다.
"과거 어느 고대 문명에서는 괴물을 미궁에 가두고, 주기적으로 그 안에 인간을 넣어 인신 공양을 했다지. 잠깐. ...설마?"
괜히 만약의 경우를 상상했다가, 소름이 쫙 올라온 게일이 부르르 떨었다.
"에이! 아니겠지!"
희게 질린 그는 애써 부정하며 보폭을 크게 하며 걷다가 갑자기 멈칫거렸다.
"아."
스윽.
그가 두드렸던 벽돌 중 어느 하나만 감촉이 다르단 걸 감지한 것이다.
"여기에만 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군. 함정 같지는 않고."
가만히 그 부분을 매만지던 게일이 이내 문양을 세게 눌렀다.
드드드득!
그러자 문양이 그려진 부근이 쑥, 안으로 들어가면서 숨겨진 문이 열렸다.
"오호?"
게일이 씩 웃었다.
"빙고."
그런데 그가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쿵!
웬일인지, 곧바로 문이 닫혔다.
"어어? 나 갇혔어?!"
게일은 순간 당황했지만, 사실 그것이 행운이었다.
그는 평상시에는 불운이 함께 했으나,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는 운이 깃드는 특이체질이었기에 발생한 행운.
왜냐하면,
<누구?>
<소리소리소리가 났어.>
<침입자다!>
게일의 신형이 사라지자마자, 1초도 안 돼서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것이다!
유령과 비슷하게 길쭉하고 투명한 마물들이 한동안 제자리를 머물며 득실거렸다.
"뭣이여. 고장 났나? 하긴 이렇게 낡았는데, 고장 날 만하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게일은 의아해하다가 이내 걸음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내가 선점하는 편이 좋겠지. 서두르자!"
그는 날아다니는 물고기로부터 나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하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게일이 도착한 곳은 거대 공동이었다.
그곳에는 그의 예상대로 수원(水源),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물이다!"
천장에 있는 종유석으로부터 떨어진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지하 호수.
게일이 신나게 호숫가로 다가가려다가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 이거.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망토 아래로 감춰진 그의 손이 슬그머니 허리춤으로 향했다.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이 그립감 좋게 잡혔다.
철컥!
"거기, 숨어 있는 녀석들 나와라.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늘진 저편을 주시하는 게일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25화 미궁 속에서 (3)
"말로 할 때 나오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몰라도 내 총은 자비심이 없거든."
잽싸게 총을 뽑아 겨눈 게일이 소리쳤다. 그의 마탄총으로 마력이 집약되며 위협적으로 빛났다.
"...아아, 잠시만요! 저희는 싸울 생각이 없어요."
터벅터벅.
그러자 그늘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하나는 컸고, 하나는 그보다 작은 그림자였다.
"하하하! 바로 들킬 줄이야. 그대도 꽤나 강한가 보군! 나와 자웅을 겨뤄 보지 않겠는가?!"
울끈불끈! 전신의 극도로 단련된 근육이 도드라지는 사내였다.
그는 대다수의 람파스인과 다르게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색적인 복장을 하고 있어, 소수민족 출신임을 쉬이 알 수 있었다.
"하아. 너는 뇌까지 근육으로 차 있는 거야? 방금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벌써부터 싸울 생각하지 마, 멍청아."
그런 그를 신랄하게 타박하는 옅은 갈색 머리 소년은 앳된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차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너희는...."
눈에 익은 얼굴들에 게일이 말을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똑바로 두 사람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 중 작은 그림자, 아비토 율리가 두 손을 들었다.
"저희는 싸울 생각 없어요. 잠시 제 얘기를 들어 주시겠어요?"
"흠? 나는 싸우고 싶다만."
"타무르! 내가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분위기 좀 읽으라고 했지!"
"으으음....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돌연 두 사람이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런 싸움조차도 익숙한 듯,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이보쇼?"
느닷없이 뒷전이 된 게일이 황당해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둘 다 상당한 실력자처럼 보이는데, 2 대 1로 싸우면 불리했을 거야.'
마력도 많이 소비한 지금, 괜한 싸움은 좋지 않았다.
"!!"
그때였다!
홱, 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게일이 이내 바락 외쳤다.
"숨어!"
두 사람은 기감이 좋은 편이었고, 그 짧은 말로도 게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접근하는 기척을 느낀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숨겼다.
"여, 여기는?"
곧이어 새로운 수험자가, 아니 수험자들이 나타났고....
"흐어헉! 저, 저게 뭐야!?"
"도, 도망쳐!!"
"밖으로 나가야 해...!"
지하 공동 안으로 몬스터도 함께 쫓아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게일과 같은 운이 따라 주지 못 한 듯싶었다.
물론 그들도 헌터 지망생, 그동안 단련한 무위를 믿고 괴물을 죽이려 달려들었으나.
"어, 어째서...?"
잘 벼려진 무기들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몸체를 스치며 허무하게 통과된 탓이다.
"무기에 마력을 입혀서 공격해도... 제대로 된 대미지가 잘 안 들어가잖아?"
"하, 하하...! 여기서 죽는 건가."
점차 그들은 절망했고, 맞서기보다는 도망치는 데 급급했다. 뭉쳐서 대항해도 모자랄망정, 따로따로 산개하여 흩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 들어온 수험자들 모두가 빠짐없이 한 입 거리 식사가 되었다.
"...."
"...."
"...."
세 사람 사이로 침묵이 맴돌았다. 수험자의 무가치한 죽음과 더불어, 그 기이한 외향의 무언가.
몬스터의 존재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정말, 진짜배기 생존이군."
게일이 생각했던 안온한 느낌의 생존이 전혀 아니었다. 물과 식량을 구하고, 야생에서 살아남는.
그보다 더 절망적이고 처절한 느낌의 생존이었다.
"아예 안 먹고선 사흘 내내 버틸 수 없겠는데."
거기서 오는 맹점이었다.
저런 몬스터들에게 쫓기면서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다가는 되레 식사가 되어 버릴 터.
"게다가 저 녀석들 눈이 없는 대신 청각이 몇 배는 예민한 모양이야. 움직일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역시.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당신은."
그때,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했던 아비토 율리가 입을 열었다.
그가 올곧은 시선으로 게일을 올려다보았다.
"저희와 동맹을 맺지 않겠습니까?"
"...엥?"
그러곤 깜박 잊었다는 듯, 아비토가 순한 눈매를 휘며 물었다.
"앗. 그런데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요? 저희 자기소개도 아직이었죠?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자기소개할까요!"
"허...."
태연하게 물어오는 소년, 아비토 율리의 말에 게일은 일순 할말을 잃었다.
"거 참나. 어이가 없네. 이름도 모르면서 동맹은 왜 제안한 건데?"
"아하하! 이름을 가르쳐 주시면 알려 드릴게요! 그래서, 이름이?"
"...게일 가리브."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게일의 표정에 아비토가 방긋 웃었다.
"저는 머리가 좋아요."
다소 뜬금없는 말에 게일이 의아하기도 전에 아비토가 이어 말했다.
"저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걸 기억하고 있어요."
"...완전 기억 능력?"
"오, 아시는구나! 람파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던데."
마법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인간 고유의 두뇌 능력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편이 아니었다.
"헌터 시험 2차시는 면접 평가. 처음으로 전 수험자들이 한데 모였던 날이었죠. 그 안에 3차시, 그리고 최종까지 함께 갈 경쟁자들이 있다는 건 당연한 추론. 그래서 저는 그날 왔던 수험자 전부를 외워 놨어요!"
"...전부?"
"물론이죠! 외우는 건 제 장기니까요."
씩 미소 지은 아비토가 검지를 펴서 본인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툭툭, 건드렸다.
여유로운 동작에서부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2차시 통과한 수험생, 총 1,197명. 이름, 성별, 외형부터 전투 방식, 마력 운용도.... 그 밖의 사소한 습관과 버릇, 특이 이력까지."
"...."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비토가 손가락을 쭉 펴선, 당황하는 게일을 가리켰다.
"2차시에 당신, 게일 가리브라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게일은 등 뒤로 땀방울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잠깐 부정이나 해 볼까 생각했으나.
'...어차피 소용없겠지.'
이미 확신한 사람에게 변명은 거짓말이 될 뿐,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쉽게 유추할 수 있었죠. 이전 절차와 상관없이, 수험자가 중간에 헌터 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사례는 단 한 가지 뿐이니까."
아비토의 예리한 눈빛이 게일을 향했다.
"당신이군요? 소문의, 특급 헌터에게 추천받은 수험자가."
"...하아."
한숨을 내쉰 게일이 착잡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잠깐 생각했다.
'나에 대한 소문이 났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치밀한 꼬맹이가 소문이 돌도록 가만 둘 리가 없었다.
조금 신경 쓰이긴 했으나, 당장 알아볼 바가 없으니 게일은 그 문제를 밀어 두기로 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내가 추천자인 거랑 너희와 무슨 상관인데?"
재차 한숨을 내쉰 게일이 이내 여유롭게 입매를 올리며 응수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티무르가 나섰다.
"우리는 다른 수험자들과 달리 아무런 뒷배가 없다. 타무르와 아비토. 둘 다 실력은 뛰어나니, 필시 헌터가 될 거라고 자부한다만."
"헌터가 된 다음... 이 문제거든요. 뒷배 없는 신입 헌터들은 오지 산간을 돌며, 험한 일을 도맡곤 하니까."
티무르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비토가 말을 이어받아 말했다.
나이도 인종도 국적도 달라 보이는 그 두 사람은 십 년지기마냥 합이 척척 맞았다.
"거 헌터들도 똑같구만. 요컨대 더러운 현실의 문제라는 거군?"
대충 감이 온 게일이 손에 얼굴을 괴며 생각했다.
그는 표정에 티가 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놀란 상태였다.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허, 참. 꼬맹이 코인이 여기서도 통한다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녀석은 이 또한 예상했을까?
여하튼, 실리주의적인 게일은 좋게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동맹을 제안했다? 추천자인 나를 통해, 특급 헌터에게 연줄을 만들기 위해?"
"가능하다면요. 게다가 특급 헌터의 추천을 받아 들어온 만큼, 인성도 실력도 보증된 사람일 테니까. 일석이조인 셈이죠."
아비토가 상쾌하게 웃었다. 게일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아하하! 저희 꿍꿍이속이 더러운가요? 너무 솔직히 말했나?"
"아니, 오히려 좋은데? 괜스레 젠체하는 샌님들보다는 훨씬 낫걸랑."
두 사람은 서로 웃음으로써 제 속내를 숨겼다.
'동맹이라. 꽤 괜찮아 보이는데.'
헌터 유력 후보자로 손꼽히는 이들이니만큼 실력도 보증된 셈이고, 낯선 상황에서의 판단도 빨라 보였다.
물론 아비토의 예상과 달리 게일과 엘윈은 고작 고용 관계일 뿐이라.
'내가 저놈들이 바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수 없겠지만.'
그러나 게일이 일부러 속인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알아서 오해한 것뿐이지 않나?
그가 꿀릴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나쁠 것 없는 제안이다.'
그리 결론을 내린 게일이 막 승낙의 말을 전하려던 찰나.
"저도 끼워 주지 않을래요?"
"...!!"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너!"
아니, 게일에겐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안녕, 자기?"
그곳에는 어느샌가 홀연히 나타난 세르시아 오델바이스가 서 있었다.
"나, 안 보고 싶었나요?"
어두운 공동, 어슴푸레한 빛무리를 등지고 있는 세르시아는 온몸에 신비로운 아우라를 휘감고 있었다.
그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분위기에 아비토와 타무르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그녀를 경계했다.
여차하면 합동하여 공격할 목적으로.
"켁! 왜 또 너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려는 순간, 게일이 그런 대치를 와장창 깨트렸다.
"...켁? 사람을 보고 그런 무례한 태도라뇨. 가정교육 독학하셨나요?"
웃는 얼굴로 독설을 날리는 그녀의 모습에 게일도 이번엔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나, 고아야."
"...."
순식간에 조용해진 세르시아에, 게일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녀를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던 아비토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 루스람 아카데미 마법학과 수석이군요?"
짧은 사이, 그는 기억하고 있던 세르시아 오델바이스의 정보를 입 밖으로 줄줄이 읊어 댔다.
그러자 그녀는 약간 떫은 얼굴로 아비토를 돌아보았다.
"저도 당신에 대해선 알고 있어요. 최연소 수험자, 아비토 율리. 머리가 너무 뛰어난 나머지... 사상 최초로, 루스람 아카데미를 1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죠."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레이디."
싱긋 웃으며 신사처럼 인사한 아비토였으나, 그는 곧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신뢰할 수 없어요."
"제 평판 때문인가요? 동료들을 배신하고 다녔다고."
"물론! 평판은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전 그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편이라서요. 저희 동맹에 들어오시려면 자격을 증명해 주셔야겠는데요."
그러자 그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또, 증명이라니."
"음? 싫으시면 말고요. 그럼 밖으로 돌아가셨으면 좋겠는데요. 아니면... 이승에서 돌아가시겠어요?"
아비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타무르가 등 뒤로 매고 있던 대검에 손을 올렸다.
느릿하게 검 자루를 매만지는 손길이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어깨를 펴며 당당히 대답했다.
"어머, 누가 싫다고 했나요? 증명? 좋아요. 얼마든지 해 드리죠!"
'내가 못 할 줄 알고?'라며 작게 중얼거린 세르시아의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
26화 동맹 성립 (1)
"...뭐, 이걸 다음을 위한 전초전으로 치겠어요. 여러분께서는 땅두더지처럼 얌전히 숨어서 지켜보시길."
찰박찰박!
홱 몸을 돌린 세르시아가 호숫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물웅덩이에 의해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봐! 어디 가는 거야! 위험하다고!"
"쉿! 저렇게 자신했으니 무슨 방도가 있을 거예요. 우린 여기서 재밌게 구경이나 해 보자고요."
"타무르, 기대된다. 저 여자.... 강자의 냄새가 난다."
그렇게 속삭이는 세 사람을 뒤로하고, 세르시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자, 어디 한번... 놀아 볼까요!"
그러곤 순식간에 우글거리며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소리가 들렸다.>
<인간?>
<잡아야 해, 바쳐야 해.>
길고 희고 기괴한 것들이 뭉텅이로 몰려오는 모습에, 공포에 질릴 법도 하건만.
"대상 좌표 확인. 범위 지정."
세르시아의 표정은 처음과 변함없이 차분했다.
입으로 주문을 쉴 새 없이 되뇌는 그녀에게서 연보랏빛 마력이 크게 일렁거렸다.
"─전송 시작!"
순식간에 마법을 인챈트한 세르시아가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외쳤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강한 풍압이 터졌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어어어?>
슉! 슈욱!
처음은 세르시아에게 가장 근접했던 몬스터였다.
그다음은 그녀를 습격하려던 놈,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러 공격하려던 놈, 바닥을 기어 오려던 놈....
공동을 가득 채우던 몬스터 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허."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던 게일이 작게 탄식했다. 역시 마법사란 종족은 인간 병기와 다름이 없었다.
"공간 마법이네요. 원래 저런 류의 마법은 인챈트까지 굉장히 오래 걸리는데 말이죠.... 확실히 그녀는 우수한 모양이에요."
"마법사와의 전투는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지!"
"...타무르, 늘 싸움으로 귀결되는 그 사고방식 좀 버려."
어쩐지 또 만담 같은 대화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 둘도 나름대로 놀라운 듯 보였다.
그들을 흘긋거린 세르시아가 말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끝은 아니랍니다. 눈에 보이는 건 옮겨서 처리했지만, 그밖에 더 있을 수 있으니까...."
척.
그녀가 좌우로 양팔을 뻗었다.
"저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치밀한 성격이거든요. 불안 요소는, 없애야죠!"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 위로 크고 작은 마법진이 펼쳐졌다.
서로 겹쳐진 세 개의 마법진.
"더블, 아니 트리플 인챈트.... 중첩 마법?"
그걸 본 아비토가 경악했다.
세 사람 중, 그는 유일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번에 두 가지 이상의 마법을 발휘하는 것이 얼마나 높은 경지의 마법 이해력를 요구하는지를....
"수십 년을 연구실에 갇혀, 마법에 몰두한 노마법사도 못 이룰 수 있는 경지인데."
그건 완벽한 재능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그녀, 세르시아 오델바이스는 그를 실천하고 있었다. 어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아주 멀쩡하게.
"천재 마법사라고 칭송받는 제라프 그나우드도 고작 더블 인챈팅으로 그렇게 불렸다지."
젊은 외양을 하고 있긴 했지만 제라프는 50살이 넘어가는 마법사였고, 그녀는 고작 22살의 신예 마법사였다.
"이거, 거물을 물었네."
아비토는 만족스러운 양 입매를 늘어뜨렸다.
불현듯 그는 이런 뜻밖의 행운이 게일,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특급 헌터 덕분에 스칠 수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음 마법의 준비를 다 마친 세르시아가 외쳤다.
"제 저력을 보여 드리죠!"
화악!
그녀가 허공을 움켜잡는 듯한 손동작을 취했다. 마법이란 허상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듯이.
쿠과아아아아아아앙!
그러자마자 고막을 뚫을 듯한 폭발음이 진동했다.
아무런 피해가 없는 걸 보니,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폭발 같았으나....
그들은 어렵지 않게 범인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지금 이거, 아가씨가 한 짓이야?"
"아까 공간 마법을 쉽게 인챈트할 수 있던 이유예요. 미리 그곳의 좌표를 찍어 놨거든요."
게일이 눈을 크게 뜨며 쳐다보자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장소를 알고 있으니 표적을 그곳으로 이전하기도, 이런 마법을 발휘하기도 편하죠. 폭발음이 그렇게 크게 났으니, 몬스터들은 그 주위로 다 몰려갔을 거예요. ...운이 없다면 불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세르시아는 마력을 발휘해, 호숫가의 물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자, 이걸로 거점 및 식수 확보 완료. 어떠신가요?"
그녀가 멍하니 있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자격은 충분하겠죠?"
"어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부탁드려요! 임시 동료분들?"
"말도르, 엘타족의 타무르다."
"후훗."
"...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수프가 되든 빵이 되든 가보자고."
그렇게 네 사람은 동맹을 체결했다.
* * *
그 시각, 미궁의 다른 장소.
챙, 챙챙-!
그곳에는 서로 맹렬하게 검을 부딪치며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지상 경기장에서부터 칼을 뽑기 직전이었던 칼릭스 자하르트와 자레스 헬투리오였다.
"하하...! 미궁에 빠졌는데도 너와 내가 이렇게 곧바로 조우한 건, 역시 펠릭스의 인도 덕분일까?"
"...."
어두운 공간임에도 철과 철이 부딪치며 생기는 검광에 사방이 번쩍거렸다.
채앵-! 카가가각!
서로의 검을 맞부딪치며 힘겨루기했다.
검날 너머로, 자레스의 눈동자에 화마 같은 불티가 틔었다.
"기분이 어때? 네가 그렇게 믿고 따르던 형을... 혈육을 죽인 살인자가 된 기분은."
"...."
"입 막혔어? 못 본 새, 겁쟁이가 다 되셨나."
이죽거리며 도발하던 자레스는 이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윽!"
검을 한 손으로 옮겨 잡은 칼릭스가 자레스의 복부에 큰 한 방을 먹인 것이다.
칼릭스가 입매를 올렸다.
"자레스, 넌 언제나 말이 많군. 듣기 싫다. 그 입 다물어라."
"...흐, 재수 없는 녀석. 형이라고 해야지? 내가, 너보다, 연상이거든! ...하앗!"
챙!
다시 한번, 두 개의 검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천장 구석.
편안하게 종유석에 다리를 감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엘윈이 있었다.
"이런 이런."
그가 할아버지 연기에 심취한 듯, 꼬장꼬장하게 혀를 찼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로세."
참고로 말하자면, 여기서 가장 어린놈은 엘윈이었다.
문득, 그가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흐으으음. 저 두 사람이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는 건 곤란한데...."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얽힌 비화에 대해 빠삭히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이면 유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말리기가 쉽지 않겠는걸. 그 사람은 언제 오려나? ...어! 왔다."
엘윈이 골머리를 앓던 그때 마침, 구원투수가 도착했다.
어디선가 뛰쳐 들어온 한 남자가 눈을 질끈 감고는 크게 외친 것이다.
"거기!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 나랑 동맹 맺지 않을래?!"
"...?"
"...하?"
멍청해진 두 사람의 표정에 엘윈은 웃음을 참느라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무, 무리수였나? 아하하...."
갑자기 등장하여 좌중을 혼란의 도가니탕으로 만든 그는 바로,
쌍검사로 유명한 듀란이었다.
* * *
한편, 지상에는.
시험 감독관, 아레이 오스왈드가 미궁의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보조 감독관들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미궁 실시간 영상을 방청객들에게 중계했다.
"하아, 이렇게 감독하기 힘든 시험은 처음이군."
그러다 문득 아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시험 초반부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홀홀홀! 갑자기 지진이라니! 이 늙은이한테는 너무 버겁구료.
힘겨운 척하며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는 사람... 엘윈 크라이거에게로.
엘윈의 정체를 알고 있는 감독관의 목울대가 절로 넘어갔다.
'죄, 죄책감이...!'
헌터로서의 자아는 당장 저 고귀한 분을 일으켜 드리곤,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외치지만.
감독관으로서의 자아는 어서 눈 깔고 외면이나 하라며 닦달했다.
다행스럽게도 고뇌의 시간은 짧았다.
"으으윽! 죄송합니다...!"
감독관으로서의 자아가 승리한 것이다. 덕분에, 그는 가까스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1초였다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이, 부감독관."
아레이는 슬쩍 눈을 굴려 중계 상황에 정신이 쏙 빠진 방청객들을 확인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작업은 잘 되어 가고 있나?"
"문제없습니다."
그러자 뽀죡한 눈을 뜬 채, 보조 감독관들을 지휘하던 부감독관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분께서는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세계 헌터 협회 본부, 총사령관.
메디알레의 수호자.
황의 특급 헌터.
그 휘황찬란한 호칭들이 가리키는 사람은, 그들이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어린 주인이었다.
"엘윈 님의 모습이, 얼굴이, 목소리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결단코 방청객들에게 드러나지 않게끔 영상 송출 주의하도록."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아레이 오스왈드, 퀸젤 마도 왕국의 저명한 마법명가의 차남.
현재, 세계 헌터 협회 본부 소속 상급 헌터.
이제껏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그였으나... 5년 전, 그는 한 사람에게 온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마, 맙소사! 여러분,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로운 특급 헌터의 탄생입니다아아─!
거기다 하필 살아 있는 전설이 탄생했을 때, 그걸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감히 시기나 질투심을 품지도 못할 정도로, 까마득히 드높은 사람이라면?
그저 동경하게 된다. 압도적인 빛의 앞에서 인간은 아주 미미한 존재로 변모할 뿐이다.
아레이 오스왈드의 경우가 그랬다.
그러다 얼마 전, 넥시온을 통해 온 엘윈의 전화.
-안녕하세요, 아레이 씨. 저 기억하고 계시나요?
-무무무무, 물론입니다!!
-하하!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감히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엘윈 님께서 처음으로 부탁하신 일. 실수 따위 용납할 수 없지. ...반드시 성공시킨다."
지하에 있을 엘윈을 향해 경배하듯 예를 차린 그는 이내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치켜올렸다.
"자, 주목!"
쉴 새 없이 바삐 일하던 감독관들의 시선이 아레이에게로 모였다.
"먼저 그것부터 확인하지. 지하에 갇혀 있는 '그' 괴수는 문제가 없나?"
"넵! 봉인 상태 양호합니다!"
"음.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신호가 온다면 언제든지 다음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도록!"
"예-!"
우렁찬 대답이 뒤따라왔다. 다시금 일에 열중하는 감독관들을 일별하며, 아레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엘윈 님. 저는 당신께서 뭘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레이는 그분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는 엘윈과 같은 헌터 기수 동기였으나, 고작 그뿐인 관계였다.
"...."
아무도 모르게 슬쩍, 뒤로 빠진 아레이가 소지하고 있던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시간을 확인하는 척, 그는 시계 안의 버튼을 눌렀다.
꾹.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 승인.]
[미궁 안의 괴수 '만티코어'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든, 당신께서는 그저 쟁취하시길."
허나, 오랜 동경은 시간을 무색하게 했으니.... 아레이 오스왈드는 기어이 결정했다.
그의 동경이 걷는 길을 가만히 뒤따르기로.
그 여로의 끝이 설령 지옥이라도.
27화 동맹 성립 (2)
'이게 이렇게도 되네?'
엘윈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천장 위 종유석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채 기척을 한계까지 줄이고 있었다.
"...좋아. 네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군."
엘윈이 바라보는 곳에는 세 남자가 있었다. 칼릭스 자하르트, 자레스 헬투리오, 그리고 듀란.
세 명, 다 검사.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뭐, 저 녀석과 결착을 못 낸 건 아쉽지만.... 그건 언제라도 낼 수 있으니까. 나도 헌터 일에 진심이라서 말이지. 이대로 탈락하는 건 곤란하거든."
검에 미친 자들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검사를 만나면, 문답무용.
일단 칼부터 빼 들고 달려들곤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검이 손이었고 대련이 대화였다.
"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부터 3차시 시험이 끝날 때까지, 한시적인 동맹을 맺지."
"나도 동의~"
하지만 여기에 모인 검사 세 명은 놀랍게도, 싸움보다 소통을 우선하고 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저 세 사람은 아직 혈기왕성한 어린 나이니까. 걱정 많았었는데... 다행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어린 건 그였다.
엘윈이 작게 웃었다.
'세르시아 씨 덕분에 의외의 조합을 보게 됐네.'
사실 저들이 이렇게 뭉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금 전 일어난 거대한 폭발음 때문이었다.
세르시아 오델바이스의 폭발 마법이 일으킨 나비효과.
그들은 불운하게도 그녀가 찍은 좌표 인근에 위치했고, 게일 일행이 어렴풋이 느꼈던 폭발에 대해 완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흐아아아악! 뭐야! 무너져? 무너지는 건가?! 아이고, 압사당한다아아아아!
듀란이 방정맞게 팔짝팔짝 뛰며 난리를 피웠다.
끊임없이 폭음을 듣자니 금방이라도 미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세 사람은 중요한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큭, 폭발?!
-...마법사인가? 제라프 그나우드의 짓?
첫 번째, 그들이 그렇게 거대한 폭음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 또는 그에 준하는 실력자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것.
-...저게 몬스터라고?
-오우. 잘못 걸리면 황천길 확정이겠는 걸.
-물리적인 공격은 통과시키는 건가. 공격하려면 무조건 마력을 입혀서. ...흠, 하지만 그것도 큰 대미지는 없는 듯하군.
두 번째, 미궁 안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의 위험성을 깨달았다는 것.
-저런 몬스터들과 대적하려면 식량과 식수가 필요하겠군.
세 번째, 3일 내내 안 먹고 안 마시고 버티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검사 셋의 우당탕탕 동맹이 성립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외골수였으나 멍청하진 않았다.
마침 이만한 실력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칼릭스, 네놈과 한배를 타게 된 건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이 구역감을 참을 수밖에."
"피차일반이다."
"너, 이 자식이...!"
"하하하! 왜들 그래. 싸우지 마. 응? 싸우지 마~"
칼릭스의 멱살을 붙잡은 자레스를 말리면서 듀란은 피눈물을 흘렸다.
'정녕 이게 맞는 건가....'
그는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두 사람을 발견했다.
보고 있으니 정말 소름 돋을 만큼 날카롭고 또 아름다운 검술이라, 감탄이 나오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은 것이다.
-저 둘과 함께 다니면 재밌겠는데?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꾸 불길한 예감만 들었다.
왠지 같이 다니는 내내, 보모처럼 저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 말리는 역할을 맡을 것 같은....
"벌써부터 위가 아파 오는 기분인데. 하아아.... 뭐, 됐다."
하지만 이미 비공선은 떠났다. 엎어진 물은 되돌릴 수 없는 법.
그는 그냥 긍정적인 인간이 되기로 했다.
"나는 듀란! 알 수도 있겠지만, 쌍검을 사용하는 검사야. 비록 임시 동료지만... 한동안 잘 부탁해!"
"자레스 헬투리오. 나 역시 만나서 반갑다. 너 같은 훌륭한 검사와 동료가 되다니 영광이군."
사회성이 좋은 두 사람은 금세 친해져 완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
그런 게 없는 칼릭스만이 외딴섬처럼 홀로 과묵히 있었다.
"그럼 제일 먼저 뭘 하면 좋을까. 역시 식량, 식수 확보?"
"글쎄다. 안전한 거점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만. 적어도 저것들을 대항하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해."
"그렇네. 언제 저런 몬스터가 습격해 올 지 모르고...."
그때,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지. 너희,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그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목소리를 낼 때면 사람들의 주목을 이끄는 묘한 힘이 있었다.
두 사람이 의아하게, 못마땅하게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동맹으로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당연히 정해져 있지 않나?"
내려앉은 어둠 속, 칼릭스의 안광이 살벌하게 빛났다.
"마법사를 죽여야지."
그걸 본 엘윈이 미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른 쪽을 살펴 볼까.'
달칵! 끼익, 끽.
엘윈이 차고 있는 팔찌를 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가 보고 있는 시점이 바뀌었다!
'오, 이쪽도 잘 되어 가는 모양이네.'
바뀐 시점의 엘윈은 게일 일행이 있는 곳에 있었다.
하필 이번에도 여전히 천장에 붙어 있었지만....
'어디 보자. 무슨 얘기를 하고 있으려나.'
그가 살며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저희가 필요한 건 식량. 그리고...."
"경쟁자 줄이기."
"이 아저씨 생각에는 우선 전자를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게일이 심드렁히 말했다.
"어차피 다들 싸울 생각은 하고 있을 테고. 식량 비축한 채로 경쟁자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확! 쓸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겠어?"
"오오, 역시 게일 씨!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응, 좋은 생각 같네요. 저도 동의해요."
"흠. 타무르는 마음껏 싸우고 싶다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알았다."
가볍게 타무르를 타박한 아비토는 돌연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말하는 게 늦었는데, 식량 문제는 걱정 없을 것 같아요!"
그는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무언가를 잔뜩 품에 안고 돌아왔다.
"이런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주로 서식하는 이끼 버섯이에요. 아까 몬스터들이 몰려왔을 때, 우연히 발견했어요. 요 주변에 군락지가 있더라고요."
게일이 눈을 빛냈다.
"아, 이거 알지. 나도 한때 많이 먹었거든. 그냥 생으로 먹으면 맛없지만, 물에 넣고 팔팔 끓여 먹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해."
"그렇군요! 소중한 정보 고마워요. 전 이론에는 빠삭하지만, 아직 그런 경험을 통해 깨쳐야 하는 부분은 모르는 게 많아서요."
순조롭게 해결된 문제에 일행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후후, 그렇다면 남은 건 경쟁자로군요?"
"이렇게 실력자들만 모였으니까. 대충 기절시키고 포박한 뒤, 총을 쏘면 되지 않을까?"
게일은 필요한 살인이 아니라면 지양하는 편이었고, 현 시험에선 굳이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누군가를 죽이고 얻는 승리보다 안 죽이고 이길 수 있다면, 그편이 더 좋지 않은가?
"네?"
하지만 세르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양, 눈썹을 휘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합법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그리고 당연한 듯 말했다.
"죽여야죠."
상냥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서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가 풍겼다.
'...닮았잖아?'
게일은 불현듯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 미소가 어딘가 엘윈과 유사하단 걸 깨달은 것이다.
"글쎄요.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움직일 수 없도록 무력화시키긴 해야겠죠."
뒤이어 아비토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덧붙였다.
"수험자들도 점수를 위해 발악할 테고. 헌터 지망생이니만큼 방심했다가 뒤통수 맞는 건 저희일 테니까."
그녀의 웃음에서 기시감을 느낀 건 게일 혼자뿐인지, 이어가는 그의 말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야 저희가 이걸 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아비토가 빵야, 손가락총으로 쏘는 시늉을 했다.
"음. 타무르, 게일의 말에 동의한다. 전사는 본인보다 약한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 쓸데없이 살생을 저지르는 건 반대다."
"결정됐네요! 찬성 하나, 중립 하나, 반대 둘. 되도록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키도록 가되, 감당 못하는 수험자만 힘 조절 없이 가는 걸로."
의견이 추합되자 그녀가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찼다.
"...칫. 알겠어요. 다수결이니 그 부분은 양보하죠."
"아하하,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논의해 볼까요?"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며, 앞으로의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엘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괜찮아 보이네. 그럼 다음은....'
엘윈이 다시금 팔찌를 돌리자, 그의 시점이 전환되었다.
지금 그는 수험자들이 있는 곳곳에 분신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이능이 가능했느냐 묻는다면, 이는 모두 특별한 아이템 덕분이라 답할 수 있겠다.
'역시 마탑제 아티팩트. 효과가 좋다니까.'
그는 비밀 시험 감독관으로서, 모든 수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관들이 물고기를 통해 지상에서 지켜보고 또 점수를 매기는 건 맞지만.
'내 점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했지.'
판의 말에 따르자면, 이번 시험에서는 엘윈이 임의로 매기는 평가와 점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특급 헌터가 헌터 시험에 개입하는 건 100년 만의 처음 있는 일이다!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 엘윈, 너도 말했었지? 너에 대해선 불문이지만, 네가 시험에 개입했다는 건 공표해도 상관없다고.
그것이 엘윈과 판이 거래한 내용 중 하나이기도 했다.
-네 말대로... 요새 빌런 조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군. 각국에서 들어온 첩보 내용을 보면, 근래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벌어질 모양이야.
이는 어쩌면 당연했다.
'여러 빌런 단체들의 난동과 범람하는 괴마들로 혼란스러운 시기.'
그게 「람파스」의 주 배경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원작까지 남은 1년 사이, 여러 사건 사고들이 물밀듯이 쏟아질 예정이었다.
-새로운 등불이 필요하겠어. 만인에 희망이 되어 줄.
그렇기에 판은 강렬하고 상징적인 신진들을 원했다.
'황의 특급 헌터가 선정한 신인 헌터들'이란 타이틀은 이에 딱 부합했다.
반면, 엘윈은....
'예상과 다른 부분도 몇 개 있었지만, 대체로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그 역시, 이번 시험을 통해 노리는 바가 있었다.
'음? 오, 타이밍이 좋네.'
마침 아레이 오스왈드로부터 '그' 괴수의 봉인 해제를 시작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고대 문명의 괴수, 만티코어.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주연배우였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면... 딱 좋네. 시험 끝나기 전,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풀리겠어.'
그리고 순조로움에 미소 짓던 엘윈은, 그 순간 발견하고 말았다.
'...저 사람은?'
괴수의 봉인진이 있는 장소에 어슬렁거리는 수상한 그림자를.
28화 동맹 성립 (3)
엘윈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불청객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
잠시 후, 일을 마친 불청객이 어둠을 틈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타닷.
엘윈은 봉인진이 있던 곳으로 내려왔다.
"흐음?"
그는 천천히 봉인진을 쓸어내렸다. 원래는 없던 수식들이 잔뜩 덧씌워져 있었다.
"하나둘.... 하하! 그 짧은 사이, 많이도 수작질 쳐 놓으셨네."
엘윈은 마법사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마법 관련 지식에 해박한 편이었다.
마법에 미쳐 있는 한 지인 덕분에.
스스스슥.
그가 수정된 수식들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자, 희미하게 마력 스파크가 튀었다.
파지이익...!
외부 접근에 반항하는 것이다.
"전부 다, 봉인 해제 속행식."
그런 그가 발견한 수식들만 세어 봐도 무려 10개가 넘었다.
"더 깊게 들어가면 아마 내가 발견 못한 식들이 더 있겠지."
게다가 이미 관리자 권한을 갖고 있는 아레이 오스왈드에 의해 봉인 해제가 진행 중이기도 했으니, 계산해 보자면....
"이런, 곧 있으면 풀리겠는걸. 원래 예정은 사흘째 저녁쯤이었는데...."
말의 의미만 보자면 낭패가 난 듯하나, 실제로 엘윈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뭐, 그것도 좋겠지."
생글거리는 목소리.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오히려 즐거운 듯했다.
"예상을 뛰어넘는다니까, 다들."
원작 「람파스」의 시작은 내년이다.
하지만 엘윈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결정한 건, 그보다 딱 1년 전인 지금.
그러니까... '제 616기 헌터 시험'부터였다.
"아하하핫!"
그 이유는 자명했다.
"역시, 이번 기수 수험자들은 특별하니 그런 걸까."
'제 616기 헌터 시험'의 수험자들.... 아니, 합격자들은 모두 「람파스」의 주역(主役).
그들은 각자 확고한 목적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선인도 악인도 될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이해관계가 철저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박쥐."
지금 여기 미궁에도 그런 박쥐들이 몇몇 섞여 들어와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은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잔뜩.
아까 봉인진에 손댄 '그 사람'처럼 말이다.
"그렇지. 이해는 해. 멍청하고 어설프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그것이 이곳, 람파스의 암묵적인 법칙이다. 속은 사람이, 배신 당한 사람이, 살해당한 사람이 잘못이 되는....
하지만 엘윈은 그런 규범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재, '그들'은 아직 타락하지 않았어. ...구할 수 있어."
아무리 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이라지만.
그렇다고 위악(僞惡)도 악이 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물론, 엘윈은 그런 '박쥐'들을 선의로서 감화시키려는 게 아니었다. 그런 건 노엘 전문이었지, 엘윈 전문이 아니었다.
노엘은 이제 없다.
그러니 엘윈은 그의 방식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굴복, 복종, 복속.
뭐, 그런 것들. 위선도 선이지 않나.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잠시 뜻대로 하게 놔둬야겠다."
엘윈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래야 철저히 깨닫겠지. 본인의 위치를."
그러니 그야말로, 진정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날고 기어 봤자, 어차피 다- 내 손바닥 안이니까."
시리게 웃은 엘윈이 마지막으로 봉인진을 슬쩍 흘기곤 이내 크게 점프했다.
그리고 그 한번의 도약과 함께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우우우웅─
엘윈마저 사라진 곳에는 거대한 봉인지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새빨갛게 번뜩이는 불길한 마력을 토하며....
* * *
3차시 시험, 이튿날 오후.
미궁 속, 어딘가.
"크아아아악!"
옹기종기 모여 있던 수험자들이 어느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공격받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그들은 손쓸 겨를도 없이, 하나둘 당하고 말았다.
"다들 조심해! 방심하지 마! ...크허억!"
주변 동료들에게 크게 소리를 지르며 경고하던 사람이 뒤이은 습격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촤아악-!
뜨거운 무언가가 얼굴에 닿았다.
[수험자 61105번, 메르딘 알론 탈락!]
쓰러진 수험자 곁을 맴돌던 빛나는 물고기가 어느샌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동료는 시험뿐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탈락당한 것이다.
"메르디이이이인! 크윽...! 누구냐, 대체 누가...!"
한 수험자는 차게 식은 동료를 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또한 머지않아, 다른 동료들과 같은 수순을 밟았다.
"오호! 이걸로 끝인 것 같은데?"
쓰러진 시체를 발로 찬 습격자가 개구지게 웃었다.
"어이, 하케. 쓸데없는 짓 말고 이리 와."
"네네~"
하케라 불린 사내는 그를 부른 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방금까지 팡팡 쏘아 댔던 활을 부여잡은 손을 느슨히 내려놓으면서.
습격자 무리, 그들의 외양은 어딘가 이상했다.
"다치신 분 있으신가요? 연고 드릴까요?"
"아, 멜라사. 혹시 마력을 보충해 주는 물약도 있나?"
"물론이죠! 자, 여기."
"고맙군."
아니, 어딘가... 달랐다.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람파스인들과 비교하자면.
"흠흠~ 이걸로 몇 점이나 득점했을까나."
쫑긋거리는 귀와 꼬리가 있거나.
"나투이아, 생각, 고득점, 확실!"
물갈퀴 같은 귀, 피부에는 비늘이 달라붙어 있기도 하고.
"멜라사 물약 효과가 좋군. 소비했던 마력이 거의 다 찼다. 이 정도면 골렘 다루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어."
인간이라기엔 몸집이 심히 거대했으며.
"하하하! 우리들, 이렇게 다 같이 싸우는 건 처음인데도 합이 척척 맞더군! 좋은 예감이 든다!"
전신에 털북숭이처럼 털이 많이 나 있었다.
"프라우는 어떤가요? 다친 곳은 없을까. 지금 말해 줘요."
그나마 외형이 보통의 람파스인에 가까운 마녀, 멜라사는 입고 있는 복식이 특이했다.
사람의 머리통보다 몇 배는 큰 뾰족한 고깔모자, 긴 로브와 망토.
왜인지 모르겠지만 들고 있는 빗자루까지.
"문제없다!"
"후후, 그래요? 다친 곳이 없다니 좋은 일이네."
이들의 외향이 남다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수인족, 그리고 소수민족 출신 수험자들만 모인 이종족(異種族) 임시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아~ 정말이지. 처음 미궁에 떨어졌을 때는 어떻게 될 줄만 알았는데! 죽음도 각오했다고."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다섯 명은 그 승리감에 취해 도란도란 대화를 시작했다.
"동의한다. 안전장치도 없이 수백 미터 지하로의 고공낙하는 참으로 살 떨리는 경험이었지."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대한 덩치의 골렘술사 바탄이 말했다.
"어찌 저찌 지하, 미궁으로 착지는 했다만 몬스터라는 괴이한 생명체가 득실거리더군. 내가 자랑하는 펀치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어."
털이 북숭한 무투가, 프라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몬스터, 고대종, 괴마, 차이 모름.... 나투이아, 대응 곤란."
서늘한 인상의 인어족 창술사, 나투이아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후훗. 여러분 걱정 말아요. 곧 있으면 대항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때, 마녀 일족의 멜라사가 나서며 말했다.
그녀는 습관인 건지, 의도한 건지 긴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였다.
"오오-! 정말인가!?"
그녀는 나붓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생 처음보는 외형과 특성.... 그래서 이지만, 어딘가 익숙하지 않아요?"
"...익숙?"
"유령형 괴마."
여전히 감을 못 잡는 모습에, 답답해진 멜라사가 답을 말했다. 그제서야 다른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닮았군.... 물리 공격을 통과하는 것도, 보통의 마력에 면역력이 있는 것도."
"으흥. 확실히, 괴마는 몬스터를 멸종시키고 탄한 생명체. 그렇다면 이전 몬스터의 특성을 괴마도 가지고 있단 것도 말이 되지."
"그렇죠? 그렇다면 대응책은 간단."
멜라사가 아공간을 열더니, 그곳에서 거대한 솥과 각종 재료를 꺼냈다.
"빛, 또는 성 속성 마력을 무기에 인챈트 해야죠."
촤라락-
큰 약초 통을 들어 올린 그녀가 내용물을 솥 안으로 쏟아부었다.
그러자 이상야릇하고 향긋한 약초 냄새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아쉽게도 여기엔 두 마력 속성을 가진 분이 없으시죠? 그러니 저는 지금 무기에 속성 부여해 주는 물약을 만들려고 해요."
"무, 물약으로 그런 것도 가능하다니?! 와아! 저 처음 봤어요!"
"멜라사, 연금학부였던가? 실력이 대단하군!"
"...후후. 연금술 같은 학문과는 다르답니다, 이건. 마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일순 씁쓸한 미소를 지은 멜라사가 수많은 재료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툭, 투두둑.
그중 몇 가지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솥안으로 붓고는, 이내 거대 주걱으로 휘적거리기 시작했다.
"완성될 때까지 5분 정도 걸릴 거예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동료들은 말없이 주변에 걸터앉으며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알았다.
'기대되는군....'
그녀의 물약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 몬스터에게 반격의 봉화를 올리는 때가 되리란 걸!
서걱서걱-
잠시간, 멜라사가 물약을 섞는 소리만이 한적한 공간을 울렸다.
"그보다 말이야. 참 신기하지 않아?"
그러다 돌연 고양이 수인이자 궁수, 하케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뭐가 말인가?"
다른 이들의 의아한 시선에 그는 짓궂게 입술을 씰룩거렸다.
"어떻게 수인족, 소수민족 출신 수험자끼리 바로 만났냐... 이거지. 생각해 봐. 이상하지 않아? 꼭 누가 우리를 한데 모이게 한 것도 같잖아."
"...? 그냥 우연이 겹친 게 아닌가."
"맞다! 우리는 인연으로 이어져 있던 게 틀림 없어! 암, 좋은 예감이다!"
"타무르, 없다, 모두, 모이진 않았다."
바탄과 프라우, 나투이아의 꾸밈없는 반응에, 하케가 픽 웃었다.
"단순하긴. ...뭐, 상관없나. 수험자 중 최약체인 나로선 너희 같은 강자들을 만난 게 천만다행이니까."
이어서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뻔하지. 다른 람파스인들은 나를 안 받아 줬을 테고.... 머지않아 사냥이나 당했겠지. 너희에겐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강한 너희와 달리, 나는 별 도움도 안 될 텐데. 이런 짐을 버리지 않고 받아 줬으니까."
"하케, 네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짐이라니... 전혀 아니야."
"하케, 친절, 위로, 도움, 된다!"
비록 함께한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강한 동료애를 느꼈다.
"크으! 좋았어! 이대로만 가자! 다섯 명 다 헌터가 되는 거야! 어쩐지 좋은 예감이다...!"
그들 사이로 화기애애한 공기가 흘렀다.
소외 계층이란 공통점에서 오는 유대감, 첫 승리가 주는 달콤함과 쾌감, 그리고 막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는 안도감.
"물약이 완성되면, 다음은 누구를 노릴까?"
그런 복합적인 감정에 도취된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쓔우우욱!
허공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모종의 그림자들을!
"다음에는... 너희야."
의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끄아악!"
허공에서 쏘아진 나이프에 적중된 하케가 비명을 질렀다.
29화 습격자들의 습격자
"하케?! 무슨 일이냐!"
"나는 괘, 괜찮... 크윽!"
"상처, 크다, 지혈, 필요, 누군가, 습격...!"
부상입은 하케를 뒤로 물리며, 바탄이 소리쳤다.
"멜라사, 우리 중 색적 능력이 가장 좋은 건 필시 너이겠지! 우리에게 '밤고양이의 눈' 능력을 공유해줄 수 있겠나?"
그러자 그녀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안절부절못했다.
"아, 그게... 미안해요. 저는, 아직 움직일 수 없어요...."
"...그런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짐작하는 바가 있던 바탄이 침음을 흘리며 수긍했다.
"이번엔 우리끼리 해결해 보겠다. 가능한 한 빨리 완성해 줘."
"네...!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마녀 일족은 일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강력한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대신에, 각자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간에....
"서로 등을 맞대라! 각자 수비하는 범위를 좁히는 거다!"
당황했던 것도 잠시, 그들은 바탄의 지시에 맞춰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물고기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그들 주변은 어둡기 그지 없었다.
"내가 빛을 밝히겠다!"
골렘술사, 바탄.
그는 '골렘'이라는 마법 생명체를 다루는데 특화되어 있는 소환술사였다.
세간에 유명한 골렘은 진흙으로 빚어진 것뿐이었으나.
"기생 골렘, 동충하초. 소환!"
실상, 골렘은 생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능력을 가진 개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아아아압!"
기합과 함께, 바탄의 손으로부터 주황색 실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골렘이었다. 얇고 긴 실 형태의 골렘을 쏘아 낸 것이다.
푸우우욱!
그에 연결된 다섯 마리의 물고기가 경렬하듯 떨더니,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몸체를 길쭉하게 늘리며 공간 이곳저곳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들이 뿜어내는 환한 야광빛이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어, 없어...?"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다섯 명, 그리고 시체뿐.
"크아아악!"
"아아악! 크읏...."
"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
그러나 불시에 쏘아지는 공격은 계속 됐다.
어떨 때는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어떨 때는 첨예한 나이프가.
투박한 짱돌이 날라 오기도 했고, 희한한 문자 형태의 공격이 던져지기도 했다.
"거기인가!"
구우우웅!
순간 기척을 잡아챈 바탄이 골렘들을 움직여, 습격자가 있으리라 예상한 곳을 포위했다.
"오오-! 거기냐!"
무투가, 프라우는 한손에 불꽃 같은 마력을 휘감으며 펀치를 내질렀다.
"나쁜 사람, 배제한다!"
어눌한 말투로 말하던 나투이아는 그간 행실이 잊혀질 정도로, 날카롭고 정교한 창솜씨로 목표물을 향해 쇄도했다.
콰앙-! 쾅쾅쾅, 콰광! 슈슈슉-!
이어서, 세 명이 합을 맞추며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됐다! 제대로 들어갔어!'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 본 그곳에는....
"...젠장! 아무도 없었다고?"
회심의 공격이라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실패한 격이었던 것이다.
허망함도 잠시, 그들은 계속 들어오는 공격을 쳐내고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세에 몰리고 몰리는 그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그러다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기지 못한 프라우가 크게 고함쳤다.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는 듯한 이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음, 뭐어... 그럼 그럴까?"
"...!"
그러자 놀랍게도, 습격자들을 습격한 이들은 순순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총 네 명.
그중 세 명은 그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타무르! 어떻게 네가, 우리를...!"
"아비토 율리... 역시 이건 네 녀석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었나."
"나투이아, 안다, 마법사, 수석, 세르시아 오델바이스."
"그럼 저 남자는... 누구죠?"
그들이 유일하게 초면인 상대, 잿빛 머리 남성이 수더분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어, 안녕하신가."
제멋대로 뻗친 잿빛 머리카락과 삐딱하게 걷는 모양, 건들거리는 품새.
겉보기만 봤을 때는 하릴없는 한량 같았지만.
"우리 초면이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몽골이 서늘해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다. 마치 위험을 감지하듯이.
'...저 남자, 만만치 않은 상대다!'
이 자리에 있던 다섯 명의 생각이 일치했다.
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고쳐 잡았다.
"이 아저씨, 꽤 궁금한데 말이야."
풍기는 투기에도 아랑곳않으며 남자, 게일은 말을 걸었다.
"습격한 뒤 습격당한 기분은 좀 어떠신가?"
게일이 심술궂게 웃었다.
"뭐, 불만은 없겠지? 똑같이 돌려받는 것뿐이니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게일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눈부신 섬광이 번쩍거렸다.
그가 노린 건 위치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창술사, 나투이아.
"...!"
차앙-!
날붙이와 날붙이가 맹렬히 부딪침을 계기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한편, 같은 시각.
게일 일행이 있는 장소와 조금 떨어진 곳.
"끄아아아악!"
그곳에도 마찬가지로 치열한 교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투의 주체는 두 개의 집단.
하나는 열댓명에 다다르는 인원이 포진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작 세 명뿐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수적 우위가 많은 쪽이 이길 거라고.
겨우 세 명 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길 수 있냐고.
"마, 말도 안 돼...."
하지만 지금 이곳의 양상은 조금 달랐다.
"하하....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같은 수험자 정도가 아니야. 저 셋은...!"
소수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단 세 명뿐인 집단의 정체는 바로 검사들끼리 연합한, 칼릭스 일행이었다.
스걱─!
서걱! 스사아악!
날카로운 검들이 적들을 스치고 지나가면, 그곳에는 주검이 된 동료들이 차갑게 쓰러져 있었다.
"...괴, 괴물이다!"
그 광경에 경악한 누군가 소리친 말에,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가 실소를 머금었다.
"실력이 차이가 난다고 괴물이라 부르다니....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 아닌가?"
"칼릭스, 자하르트으으으!"
흠뻑, 피칠갑을 한 수험자가 절규하며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나와 상대의 실력 차를 파악하는 것도 실력이다."
─서걱!
학살과도 가깝게 일방적인 유린을 하는 세 사람.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어딘가 찜찜하고 꺼림직하다는 듯 보였다.
"왜 이렇게 시시해?"
콧등을 찡그린 듀란이 말했다.
"이 녀석들, '마법사'의 동료들이라며?"
"동의한다. 하지만 약한 건 둘째치거니와...."
마지막 남은 조무래기를 처치한 칼릭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허공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철퍽-
검날에 묻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법사가 없다."
이 세 사람은 그들이 모이게끔 한 주된 원인, 폭발 마법을 일으킨 '마법사'를 노리고서 해당 집단을 습격했다.
─마법사, 제라프 그나우드.
앞으로의 시험에서 그의 존재가 가장 방해물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물론 셋이 노린 마법사와 폭발마법을 일으킨 마법사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몰랐다.
"3차시, 무력 평가의 주제는 생존. 장소는 지하미궁, 일대일로 겨루고 토너먼트가 아니야."
"하지만 그렇기에, 기회지? 전략이고."
"절대적인 수험자 수를 줄여서, 4차시까지 갈 수 후보자를 최대한 좁히는 것."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4차시, 인성 평가는... 사실상 운에 따른 것과 다름없단 걸.
시험 감독관의 재량에 따라 합격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
휘이이잉-
세 사람 사이로 돌개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구불구불한 미궁을 맴도는 바람은 날이 선 듯 매섭기 짝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 잠깐 요 주변 좀 살펴볼까?"
"그러지. 나는 이쪽으로 가겠다."
"오우! 그럼 난 저쪽으로 갈게!"
"...."
그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잠시 손을 합친 것뿐.
서로를 향한 유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유감이면 모를까....
저벅저벅.
"...."
평소처럼 무표정을 고수하며, 맡은 곳을 향해 걷던 칼릭스가 돌연 걸음을 멈춰 섰다.
그는 명문 기사가문의 적자로 태어난 몸.
"왜 따라오는 거지?"
날때부터 기사로서의 기초적인 소양이 몸에 배여 있었다.
기사도, 검을 다루는 법, 기척을 읽는 법 그리고 소리없이 걷는 법... 같은 것들.
그렇기에 칼릭스는 소리내지 않고 걷는 것이 습관이었다.
일부러 의도해서 내지 않는다면, 그의 발걸음 소리는 항상 고요했다.
"자레스 헬투리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눈치챘구나? 밉살스런 새끼."
"용건이나 말해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자레스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너랑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단 걸 인지하면, 당장이라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것만 같거든."
칼릭스는 피식 웃었다.
"말은 잘하는군.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벌이고 싶어하는 눈을 한 주제에."
유순한 말투와 달리, 자레스의 개암빛 눈동자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눈에서부터 핏물이 뚝뚝 떨어질 듯, 아주 짙은 살기가.
"...하하! 나는 지금도, 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천히 다가오는 자레스가 돌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자꾸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네?"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올리던 두 사람이었으나, 곧이어 그 대치는 예상치 못한 문제로 인해 사그라들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그 시발점은 자레스의 질문이었다. 영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한 그가 물었다.
"...너, 어떻게 헌터 시험에 응시할 수 있던 거냐?"
자레스 헬투리오가 기억하기론 칼릭스 자하르트는 루스람 아카데미의 졸업생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원자격조차 충족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네가 아카데미에 다녔다는 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만약 그가 아카데미에 다녔다면, 온 아라드에 소식이 퍼졌을 터.
아라드인들은 아라드 왕가를 사랑하는 만큼, 그를 수호하는 자하르트 가문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지금도 그날의 사건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지. 아직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그들은 자하르트 가문의 일에 민감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절대로... 가문을 잇지 않아...!
칼릭스 자하르트가 18살이 된 그해 성인식 날. 그때 일어난 처참하고 참혹하며... 애통한 어느 사건 때문이었다. 전 아라드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자하르트 가문의 비극, '피의 성인식'.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유순하고 명랑했던 칼릭스 자하르트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자하르트의 모든 영광과 업적도, 부와 명예도. 나는 필요없다! 나는, 자하르트를... 절대로 용서 못해!
이제 유일하게 '된' 적자인 그에게, 하사하듯 내려진 후계자 자리를 외면하고서 가문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자유를 찾아 떠났다.
-칼릭스 투타티오 자하르트! 네가, 네놈이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펠릭스를, 자하르트를... 버리려는 거냐!?
그리고 그것은 자레스 헬투리오에게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때 자하르트 가문의 적장자이자 후계자였던 '펠릭스 쿠스토디아 자하르트'와 절친한 친우 사이였기 때문에.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잖아...."
자레스가 몹시 혼란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자격이 없는 이가 헌터 시험에 지원할 수 있는 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30화 난전의 시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