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1화

눈을 떴다.

시간은 달이 희미하게 뜬 어두운 밤.

장소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어딘가.

검은 하늘에서는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며 지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빛 한 줄기도 닿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서 부유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을 두드리는 빗줄기에 정신이 점점 깨어날 때쯤.

문득 오른손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니다.

무게감이라기보다는 박동.

박동을 느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 불길한 느낌에 떨리는 시선이 오른손으로 향했다.

손에는 방금까지 누군가의 몸속에서 세차게 맥동했을 것이 쥐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주 조금은 맥동하고 있는.

심장.

그 순간 조각났던 기억들이 모두 짜맞춰지며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자각됐다.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또...."

입에서 자조적인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열기가 다 식어 버린 심장이 손에서 스르륵 흘러내려 바닥과 부딪히며 철퍽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간신히 참고 있던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

위장에서 나온 것이 누군가의 심장 위를 시큼하게 덮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들을 뱉어 냈다.

그 행위는 속에 든 것이 모조리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위에 든 것이 모조리 사라지고, 그것에 더해 몸에 있는 수분마저 모조리 토해 냈다 싶을 쯤에서야 몸을 등 뒤의 벽에 힘없이 기대었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이…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하...."

입에서 체념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나는 이제는 맥동을 멈춘 심장과 그 위를 덮은 나의 토사물과 함께 그곳에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혹자가 말했다.

누구나 마음 한편에는 악마를 품고 산다고.

그리고 내 안에도 악마가 산다.

* * *

나는 방금 짤렸다.

아니, 인턴 기간이 다 끝나서 나오게 되었으니, 짤렸다는 표현은 좀 그런가?

어쨌거나 간절히 바랐던 정규직 전환은 실패했고, 오늘부터 다시 백수가 되었다.

속이 좀 쓰렸다.

좀 더 노력했다면 정규직 전환에 성공했을까?

…아니겠지.

애초에 TO는 두 자리로 정해져 있었고, 같이 근무했던 인턴들 사이에서는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니까.

듣기로는 상무 조카라던가?

나머지 한 명은 스펙이 나랑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했고.

'하아… 생각해서 뭐 하냐. 집에 가서 쉬다가 다시 이력서나 써야지.'

3개월짜리 인턴 경력도 이력서에 추가하면 되겠지.

왠지 서글펐다.

띠띠띠띠. 철컥!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6평짜리 원룸.

그게 내가 가진 전부다. 심지어 월세.

당장 집세를 못 낼 정도는 아니지만, 이른 시일 내에 취업하지 못한다면 얼마 못 가서 길거리에 나앉게 되겠지.

'그래도....'

나는 옷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깔려 있는 매트리스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누운 상태로 고개만 돌리니 먼지 쌓인 플레이스테이션이 보였다.

3년 전인가?

알바비를 모아서 나에게 주는 첫 선물이랍시고 샀던 건데.

지금은 저렇게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 반년 전에 켰던 게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켜 보기나 할까? 잘 작동되면 중고로 팔 수 있을지도.'

한 푼이 아쉬운 마당이니.

타당한 생각 같았다.

나는 다리 잘린 좀비처럼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로 다리를 질질 끌며 플레이스테이션을 향해 다가갔다.

그 옆에는 한때 내가 정말 사랑했던 게임 타이틀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하나의 타이틀이 내 눈길을 끌었다.

<어비스>

'와. 이것도 반년 만이네....'

내가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했던 마지막 게임이자, 가장 열정을 쏟았던 로그라이크 게임.

더럽게 어려운 데다가 분위기도 어두운 축에 속해서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어떤 게임보다 재밌었다.

무엇보다 이 게임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는데, 바로 아무도 이 게임의 엔딩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

나 역시 몇 번을 도전해 봤지만, 후반 챕터에서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취업과 겹쳐 <어비스>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게임 타이틀 위에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 냈다.

거의 2년 가까이 이 게임에 미쳐 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랜만에 맛만 볼까?'

입맛이 동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는 까먹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여전히 기억이 났다.

나는 플레이 스테이션의 전원을 눌렀다.

우우웅!

"오...! 된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플레이스테이션의 전원이 켜졌다.

조금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지만, 분명 작동했다.

잠시 기다리니 플레이스테이션과 연결된 모니터에 빛이 들어오며 대기 화면이 나타났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어비스>의 게임 아이콘을 누르려는데, 메시지함에 무언가 있다는 알람이 눈에 들어왔다.

성격상 눈에 거슬리는 것은 못 참았기에 나는 알람을 지우기 위해 메시지함을 클릭했다.

『제목 : [안녕하십니까. 어비스 제작사 라비안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어비스의 새로운 DLC에 베타테스터로 선정되셔서 연락드립니다.

이번 새로운 DLC는 플레이어분께 지금껏 제공하지 못한 생생한 경험을 드릴 것이라 자부합니다.

DLC 다운로드는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한 적도 없는데, 베타테스터에 당첨 됐다고...?'

나는 예상외의 메시지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플레이해 보려고 했는데, 새로운 DLC의 베타테스터라니....

오히려 좋아.

'…그런데 요즘에는 DLC도 베타테스터를 뽑나?'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뭐 상관없었다.

그리 오래 즐길 것도 아니고, 그냥 어떤 DLC가 나왔는지 확인만 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조금 기대되는데?'

좋은 기억이 있던 게임이어서 그런지, 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DLC 업데이트를 클릭했다.

'용량이… 뭐야? 왜 이렇게 커?!'

나는 깜짝 놀라서 화면을 바라봤다.

87GB라고?

무슨 DLC가....

'이거 다운 받을 수나 있을까....'

일단 다운은 되고 있기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안 되면 말지 뭐....

다운로드 속도가 굉장히 느려서 오늘 안에 확인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에이… 괜히 기대했네.'

나는 다시 매트리스로 몸을 던졌다.

창밖을 보니 어둑한 그림자가 세상을 점점 덮어 가고 있었다.

'저녁은… 거를까.'

입맛도 없고, 움직이기도 귀찮았다.

오늘은 이대로 그냥 잠이나 자는 게 좋을지도.

지이잉-

진동이 울려 폰을 확인해 보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엄마

[밥은 먹었니?]

지이잉-

[내일 무슨 날인지 알지...?]

지이잉-

[…올 거니?]

"…하."

벌써 내일인가....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위로 손목을 올렸다.

오늘은 왠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

.

.

48GB…

73GB…

256GB…

863GB…

20TB…

640TB…

.

.

.

툭툭.

무언가가 몸을 건드리는 감촉에 나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막 잠들었는데, 대체 누가...!

'근데 나 집… 에 혼자 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누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어두운 밤하늘과 건물 사이로 걸려 있는 달이 잡혔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 서 있는 주홍 머리의 소녀도.

"뭐, 뭐야!"

깜짝 놀라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다 나는 벽에 부딪쳤다.

대체 이게 무슨...?!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모든 게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적어도 내 방은 아니었다.

'…여기가 대체?'

지저분한 골목이었다.

발치 너머로 반쯤 썩은 사과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각종 쓰레기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 나의 귀에 약간 불만이 있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긴 뭐야. 생명의 은인이지. 아저씨, 고마운 줄 알라고."

나는 그제야 주홍 머리 소녀의 존재를 인식했다.

소녀는 딱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꾀죄죄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귀여운 인상을 지닌 소녀였다.

특히 달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양갈래로 묶은 주홍 머리와 금색 눈동자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영악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순수함이 공존하는 그 모습.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도 소녀는 생기를 머금은 채 빛나고 있었다.

'…닮았다.'

소녀의 모습에 내가 알고 있었던 누군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내가 처한 상황은 나를 곧바로 현실로 복귀시켰다.

"누, 누구… 세요?"

내 입에서 얼빠진 질문이 튀어나왔다.

내 얼빠진 표정이 웃겼는지 소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에이미."

"그… 걸 물어본 게 아니라, 아니 그것보다...."

이 황당한 상황에 머릿속이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납치라도 당한 건가?

아니면 몰래카메라인가?

하지만 나한테 몰래카메라를 할 사람이 있을 리가....

"저기요. 내 소개를 했으면, 그쪽도 소개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니야?"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머릿속에 가득한 상념을 잘라 버리며 귀를 파고들었다.

살짝 짜증이 난 듯한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정… 수호라고 하는데."

"정수호? 굉장히 특이한 이름이네. 그런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어. 설마 카나인 대륙 사람?"

"카… 나인 대륙?"

"모르면 말고."

소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튼 아저씨,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자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야."

"나도 좋아서 여기서 자고 있는게 아니… 그것보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네가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야? …설마 이거 꿈인 건가?"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은 꿔 본 적이 없었다.

루시드 드림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아저씨, 무슨 꿈 같은 소릴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긴 이 도시의 뒷골목이구요. 여기서 자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당해서 장기가 따일 수가 있으니까 일어나라고 한 겁니다."

"…어?"

소녀의 입에서 들려온 살벌한 단어들이 내 사고를 정지시켰다.

난 벙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니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들어온 것 같은데, 아저씨 같은 어벙한 사람은 하룻밤도 못 버티니까, 자더라도 어디 딴 데 가서 자. 나한테 발견되서 다행인 줄 알라고. 난 분명히 말해 줬다?"

에이미는 그것으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돌아서려 했다.

영문 모를 살벌한 소리만 잔뜩 들은 나는 당연히 그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자, 잠깐!"

그리고 다음 순간.

내 팔을 잡아채서 꺾은 후 비수를 턱밑에 들이밀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련의 동작이 너무나도 재빨라서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 숙녀 몸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그래?"

소녀의 싸늘한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수가 목의 살갗을 미세하게 뚫고 들어간 건지 목 쪽에서 따끔한 느낌과 함께 뭔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피다.

꿀꺽.

나 지금…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는 건가?

싸늘하게 식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 현실성 없는 상황에 잠깐 정신이 출타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부여잡은 나는 일단 소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안. 실수였어."

에이미는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천천히 턱밑에서 비수를 치웠다.

나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뭔데."

에이미가 경계심을 풀지 않은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아주 잠깐, 이 위험한 소녀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이 옳은 판단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대하여 물어볼 만한 사람이 이 소녀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 깐,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에이미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움찔했지만,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아까 잘 못 들어...?!"

순간 어떤 위화감이 날 덮쳤다.

등골에서부터 서늘한 감각이 뒷골을 타고 올라왔다.

"…에이미?"

"왜?"

"이… 게 어떻게, 말도 안 돼...!"

지금 내가 무슨 언어로 말하고 있는 거지?

분명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영어도 아니었다.

내 영어 학습이 고3 이후로 끝났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영어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영어를 이렇게 유창하게 할 능력도 없었고.

"…내가 지금 무슨 언어, 아니 이게, 내 말은, 그러니까...."

내 입에서 생소하게 뱉어지는 이 언어.

"도대체...."

-찌잉.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날 덮쳤다.

치지지직-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노이즈가 울려 댔다.

"끄윽...."

난 벽을 짚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의 골목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점멸했다.

"…아저씨? 괜찮아?"

에이미가 살짝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오려 했다.

"오, 오지 마...!"

나는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어떻게 이런 낯선 곳에서, 낯선 소녀와, 낯선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가.

그것이 또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 골목을 나가야 해!'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골목을 벗어나기 위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에이미가 나를 부르며 뭐라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저 이상한 소녀 말고 제대로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조심...!"

에이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골목 반대쪽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와 부딪쳤다.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덩치였다.

평소 같았으면 쫄아서 사과부터 했겠지만,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두통에 그럴 정신조차 없었다.

머리를 마치 압착기로 짓누르는 것 같은 고통.

"크읍...! 좀 비켜...."

일단 이 장소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고통이 끝날 것 같았다.

-턱.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내 어깨를 억센 손이 붙들었다.

"이 새끼 봐라? 사람을 치고 그냥 지나가?"

"…놔. 이 시발...!"

난 손을 뿌리치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

퍽!

명치 쪽에 강력한 충격이 밀려 들어왔다.

"커- 헉!"

숨이 막히는 듯한 강렬한 통증에 배를 부여잡고 거리에 쓰러졌다. 쓰러진 내 눈앞으로 처음 보는 벌레가 사사샥! 하며 스쳐 지나갔다.

"하…. 별게 다 빡치게 하네. 안 그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웠는데 말이야."

덩치가 다가오며 소매를 걷었다.

"제이든, 살살 해."

"제그가 지금 기다리고 있다고."

제이든이라는 남자 뒤로 두 명의 일당이 골목에서 더 튀어나왔다.

"갈 때 가더라도 이 싸가지 없는 새끼한테 예의는 가르쳐 줘야지. 안 그래?"

제이든이 나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공포나 명치를 맞은 충격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머리가 너무나 아팠을 뿐.

"끄으으...."

"이 새끼 봐라? 아픈 척은 수준급이네, 아주?"

퍽! 퍽! 퍽!

몸 위로 덩치의 폭력이 쏟아졌다.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신기한 건… 맞으면 맞을수록 두통이 점점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픔 역시 희한하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제이든,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것 같은데?"

뒤에 마른 남자가 제이든을 말리자 그제야 발길질이 멈추었다.

"후우… 진짜 중요한 일만 아니었어도.... 넌 오늘 재수 좋은 줄 알아라. 알겠냐?"

퉤!

내 얼굴 위로 놈의 가래침이 떨어졌다.

죽여.

"…뭐라고? 뭐라고 했어?"

나는 깜짝 놀라서 웅크린 몸을 풀고 두리번거렸다.

방금 뭔가가 내 귓가에 속삭였… 는데?

"…허? 이거 아주 미친놈이네?"

쓰러진 나를 놔두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던 제이든이 나를 돌아봤다.

놈의 눈에는 분노와 그리고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다시 폭력이 시작됐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무자비한 폭력.

폭력은 그칠 줄은 몰랐다.

"제이든, 시간이 다 됐다. 곧 제그가 말한 시간이야."

"아! 놔 봐! 이 새끼! 오늘 쳐 죽이고 만다."

제이든은 말리는 동료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를 패는 것에 열중했다.

하지만, 나는 외부의 폭력에 대해 어떤 대응도 취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죽이라니까.

"그, 그만해...."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아까부터, 계속,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를 막아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죽여 버려!

"그만해...? 하! 이 새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제이든이 엉망진창이 된 내 멱살을 붙잡고 일으키더니 팔을 치켜들었다.

퍼-억!

강렬한 충격이 내 턱을 흔들고 지나갔다.

천천히… 시야가 암전됐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난 두려움에 떨었다.

무언가가.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

"안… 돼...."

…어둠 속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키키키키키킼킼!

어둠이 다가왔다.

.

.

.

"커- 헉! 허억!"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먹먹한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던 정신이 깨어났다.

난 여전히 그 골목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어… 어?!"

피...?!

주변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 피는 내 손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내 손에는....

식은 김을 내는… 심장이 들려 있었으니까.

"으… 아? 으아아아아악!"

방금 전까지 날 죽어라 패던 제이든이라는 양아치는 심장 부분이 뻥 뚫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심장은 자신이 방금까지 저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전히 자그맣게 박동질을 하는 중이었다.

…난 이 상황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욱."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난 그 자리에서 무릎 꿇은 채 토악질을 시작했다.

"우에에엑!"

난 경기를 일으키며 오른손에 들린 심장을 내던졌다.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벽에 부딪치며 뭉개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한번 속에 든 것을 게워 냈다.

"아, 악마...."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제이든과 같이 있던 마른 남자가 복부를 감싼 채 벽에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복부에서는 핏줄기가 주륵주륵-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3인조의 나머지 한 명 또한 목이 꺾인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날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점점 흐려졌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 이봐요! 대체 뭐가 어떻게...!"

"…아아. 살려...."

툭!

남자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떨어졌다.

죽었… 어?

죽은 거야? 장난 치는 거지?

도대체 무슨...?!

그 순간 나는 뭔가 이질감을 느꼈다.

내 시선이 천천히 피범벅이 된 오른손을 향했다.

검붉은 피부 밑으로 보이는 튀어나온 핏줄.

인간의 피부가 아닌 것 같은 거친 질감.

손가락 끝에 단검처럼 돋아난 날카로운 손톱.

백번 양보해도 사람의 팔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양.

"시발...! 시발! 뭐, 뭐야...! 이건...!"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살짝 만지니 그 거친 질감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건 절대로, 내 팔이 아니었다.

"으아아아!"

난 비명을 질렀다.

이 상황이....

내가 처한 사태가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 왜 이 남자들은 죽어 있고, 내 팔은 이렇게 변한 건지....

물론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내가 이 자들을 죽였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그럴 리가...?!

난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여전히 내 오른손을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흠씬 얻어맞아서 엉망이 된 몸을 일으켰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달… 이 두 개?"

지금까지 건물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거대한 달이.

내가 지금까지 달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것 옆에서 그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나는 말을 잊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긴… 대체...?"

뚜벅뚜벅.

그때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인영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와 참극의 현장을 번갈아 보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명이 들려서 와 봤더니...! 마의 족속이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나는 오해라고 설명하기 위해 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안 죽인 게 정말 맞나...?

실제로 남자의 심장이 내 손에 들려 있었는데?

우우웅!

그 순간 상대방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나를 겨눴다. 검에서는 희고 맑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본 내 직감이 다급하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저 빛은 위험하니 도망치라고.

나는 본능에 충실하기로 했다.

일단 도망치자! 일단은 도망치고 나중에 상황을 정리하자!

하지만.

상대방은 움직임은 내 예상을 완벽하게 뛰어넘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그 하얗고 빛나는 검이 내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잠깐...!"

서-걱!

목 언저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의식이 멀어졌다.

"주여. 부디...."

아스라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그게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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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3%]

툭툭.

뭔가가 몸을 건드리는 감촉에 나는 눈을 떴다.

2화

가물거리는 눈동자에 어두운 밤하늘과 건물 사이로 걸려 있는 달이 보였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 서 있는 주홍 머리의 소녀… 도?

"끄아아악!"

나는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목을 감쌌다.

분명 방금 검이 내 목을 가르고 지나갔...!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누군가 목에 불타는 고리를 걸어 놓은 것 같은 통증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아아아아아악! 으… 아… 하… 아아아...!"

"뭐, 뭐야! 미친 사람이었잖아...!"

목을 감싸고 고통과 싸우고 있는데, 깜짝 놀란 에이미가 나에게서 멀어지려는 기미가 보였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녀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직감이 왔다.

나는 목을 붙잡은 채 고통을 겨우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뭐, 뭐야! 다가오지 마!"

에이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멀리 떨어져서 나를 지켜봤다.

"…하아. 흡. 하나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우리 전에 본 적 있지 않아...?"

"없거든! 별 미친 사람을 다 보겠네. 정말! 괜히 깨웠어."

…전에 본 적이 없다고?

그럼 내 기억은 뭔데? 설마 꿈이라고?

그럼 이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거지?

아니, 이 상황은 대체...!

그 순간.

내 시야 한편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름 : 레브 (2)

클래스 : 데모닉

현 위치 : 부패의 도시 타라스 (남은 시간 : 3일 23시간 58분)

보유 특성

-악마화(오른팔)

-탐식

보유 결전기 : 없음

{99.93%}

"이게 뭔...."

나는 갑작스레 나타난 반투명한 창에 시선을 뺏겼다.

설마 이거....

"상태창...?"

그런데 그 내용이 기묘하게 낯이 익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난다.

꽤 오래전에....

"…어비스?"

내가 이 정체 모를 곳으로 끌려오기 전에 DLC 베타테스터로 선정된 바로 그 로그라이크 게임.

그 게임의 상태창이 바로 이렇게 생겼던 게 기억이 났다.

…그 게임에서 내가 만든 캐릭터의 이름이 바로 '레브'였다.

그리고… 그 게임의 프롤로그 챕터가 바로… 부패의 도시 타라스였고.

거의 반년 전의 일이지만, 저 상태창을 보니 똑똑히 기억이 났다.

거기까지 깨달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게임 안으로 들어왔다는 거… 야?

"이런 무슨 말도 안 되는...."

내 시선이 상태창의 한 항목에 멎었다.

'데모닉이라고...?'

물론 뭔지는 알고 있었다.

어비스에 데모닉이라는 존재가 분명 있었으니까.

마의 영향을 받아 오염된 존재.

그게 바로 데모닉이었다.

'하지만, 데모닉은 몬스터인데...?'

어비스는 시작할 때 다섯 가지 클래스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전사, 무도가, 성기사, 악마사냥꾼, 마법사.

하지만, 내 클래스란에는 데모닉이라는 단어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개같은....'

그 순간, 에이미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뭐가 말도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만 갈게. 하나 충고하자면, 여기서 오래 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카리프 놈들 구역이거든. 그럼 이만."

그 말만 하고선 에이미는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두고 몸을 돌렸다.

나는 바로 깨달았다.

저 소녀가 지금 상황에서 내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것을.

"잠깐만! 가, 같이 가!"

"…내가 왜?"

에이미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녀 입장에서는 나랑 같이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같이 가야만 했다.

게임 속에 들어오게 된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맞다면....

그리고 죽은 내가 2회차를 시작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여기 있으면.

나는… 또다시 죽게 된다.

곧 이 골목에는 세 명의 양아치가 온다.

그 양아치들에게 맞다가 나도 모르게 죽여 버리고, 뒤늦게 현장을 발견한… 성기사로 추정되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아치들 자체도 위협적이었지만, 성기사는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데모닉과 같은 악마종에게 가장 위협적인 천적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비스를 플레이할 때, 초반 부분을 가장 쉽게 클리어할 수 있는 클래스가 바로 성기사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 게임의 내용이 바로 악마에 대항하여 세계를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이곳이 정말 타라스 뒷골목이라면 나 혼자 벗어나는 것은 무리야....'

어비스의 시작.

0-1 스테이지 타라스 뒷골목.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든 사람은 이 타라스 뒷골목에서 시작하게 되고, 습격해 오는 적들을 물리치며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다.

즉, 이곳에는 아까 그 양아치들과 성기사를 제외하고서라도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

또한 이 뒷골목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뉴비 분쇄기로 유명했다.

언제 습격해 올지 모르는 적들과 더럽게 복잡한 뒷골목의 지리.

이 뒷골목에서만 수십 번을 죽고 게임을 접은 뉴비들이 허다했다.

물론, 나처럼 수없이 플레이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 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내가 게임을 한 지 반년이 넘었다는 거지….'

뒷골목의 지리가 어렴풋이 기억나기는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화면이 아닌, 실제로 서 있으니 여기가 어딘지조차 제대로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은 원래의 스타팅 장소가 아니라는 것.

'위치가 바뀌었어… 혼자서 빠져나가는 건 무리야.'

에이미를 설득해서 어떻게든 나를 데리고 나가게 해야만 했다.

문제는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금방이라도 에이미가 가 버릴 것만 같았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부, 불쌍한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데려가 주면 안 될까...?"

"…뭐?"

에이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이유.

하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있는 이 에이미라는 소녀는 쌀쌀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뒷골목에서 쓰러져 있는 나를 깨우지 않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깨워 준 것도 모자라 갑자기 괴성을 지른 사람의 질문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심성이 착하지 않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

나는 소녀의 그 인정에 호소하기로 했다.

"제발. 부탁이야. 많은 것은 안 바랄게. 이 골목에서만 좀 벗어나게 해 주면 안 될까?"

일단, 곧 위험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골목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억지로 그런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에이미의 얼굴에 난감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토, 통하나?

잠시 후, 에이미가 쯧! 하며 혀를 찬 후 입을 열었다.

"…그럼, 골목 밖까지만이야? 그 이상 따라오면 가만 안 둔다?"

"무, 물론이지!"

사, 살았다!

이 소녀를 따라가면 적어도 지금 죽지는 않아!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던 신에게 감사하다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라와. 이 이상 지체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으니까."

에이미는 그렇게 말한 후, 몸을 돌려 어둠 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를 놓칠까 봐 잽싸게 따라붙었다.

그녀는 미로 같은 골목길을 익숙한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주변을 샅샅히 살폈다.

혹시… 다음 회차가 시작된다면 그 길을 따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어두운 골목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늪 같았다.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군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실제로 여긴 그런 스테이지였으니까.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밤거리. 달빛만이 유일한 인도자였다.

21세기 서울에서 살던 나에게는 참으로 어색하고.

…또 두려운 풍경.

"아저씨는 이름이 뭐야?"

갑자기 에이미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잔뜩 긴장한 채 걸음을 옮기던 나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나는… 레브라고 해. 아저씨는 아니지만."

상태창에 나타난 내 이름.

이 세계에서는 그 이름이 이질감이 덜 들겠지.

"난 에이미야. 통성명이 늦었네, 레브 아저씨."

"…그래. 만나서 반갑다."

에이미는 내 불퉁한 표정을 흘깃 보더니 쿡쿡! 웃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다 골목에서 자고 있었던 거야?"

"음…."

…뭐라고 말해야 되지?

눈 떠 보니 게임 속으로 끌려왔다고 말하면 되나...?

"말하기 싫으면 됐어. 누구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에이미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호의적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곧 적당한 변명거리를 하나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사실… 오늘 타라스에 처음 들어왔는데 거리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기절했어. …눈 떠 보니 그 뒷골목이었어."

"…정말?"

에이미가 깜짝 놀랐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반응을 보니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응. 일어나 보니까 가진 돈이랑 물건도 아무것도 없고...."

내 말에는 상당히 진실된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상태이지 않은가.

"그렇구나. 아! 그래서 아까 머리를 잡고 그렇게 고통스러워했구나...."

에이미는 이제 이해가 됐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머리가 아니라 목이었지만, 어쨌든 오해해 주면 나야 고마울 뿐이었다.

에이미는 복잡한 골목을 아무 막힘없이 쭉쭉 나아갔다.

나는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그녀를 놓쳐 버릴 것 같아 바짝 긴장한 채 그녀를 쫓았다.

"이쪽이야.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골목에서 나갈 수 있어."

멈춰 선 에이미가 한곳을 가리켰다.

나는 골목의 지리를 떠올리며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든 한 가지 의문에 입을 열었다.

"에이미, 너는 왜 그런 골목에 들어온 거야? 웬만하면 그런 골목에 들어올 일 없지 않아?"

어째서 이 소녀는 그 골목에서 나를 깨우는 것인가.

그것이 궁금했다.

"…아. 사실… 으음."

에이미는 뭔가 말하기 곤란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그런 건 아니고. 음. 사실 나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어."

"찾고 있었다고?"

그런 뒷골목에서 대체 누구를 찾는다는 거지?

내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에 에이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응. 아델이라고, 나한테는 동생 같은 애야."

"아델...?"

처음 듣는 이름.

적어도 게임 중요 NPC의 이름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하기야 이 에이미란 소녀 역시 게임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응. 혹시 본 적 있어? 키는 요만하고 뺨에는 흉터가 있는데...."

에이미가 아델이라는 소년의 생김새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그런 아이를 본 적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미안. 본 적 없어."

"…역시 그렇구나. 뭐, 기대는 안 했어."

담담한 척했지만, 얼핏 보기에도 에이미의 얼굴에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중얼거리듯 한마디 내뱉었다.

"아델뿐만이 아니야. 요즘 타라스에서 상당한 수의 아이가 사라지는 사건이...."

"잠깐만. 뭐라고?"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나는 그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에이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델뿐만이 아니라, 상당한 수의 아이가 실종됐다고."

"…데릭 폰 아이히만."

나도 모르게 한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갑자기 남작의 이름은 왜...?

눈이 동그래진 에이미가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에이미의 의문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내 시선이 허공 한편으로 향했다.

(남은 시간 : 3일 23시간 37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달은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젠장."

왜 바로 깨닫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정말로 간단한 사실이었다.

저 시간의 의미는 바로.

이 도시의 영주인 데릭 폰 아이히만 남작이 납치한 아이들을 제물로 바쳐 금지된 의식을 치를 때까지 남은 시간이라는 것을.

3화

데릭 폰 아이히만 남작.

부패한 도시 타라스의 영주이자.

13세 이하 순결한 아이들의 심장을 바쳐 금지된 의식을 치르려는 흑마법사.

그리고 그가 바로 이 프롤로그 챕터의 보스 몬스터였다.

게임 플레이는 반년 전이 마지막이었지만, 이 정도는 똑똑히 기억이 났다.

또한 그가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막지 못하다면, 금지된 의식에서 태어난 무언가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즉, 이 프롤로그 챕터에는 제한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해지자 나는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멸망이 예견된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당장 이 뒷골목을 빠져나간다고 위기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

"당신, 뭔가 아는 게 있는 거지?"

내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를 살피던 에이미가 굳은 표정으로 물어 왔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는 거라면 당연히 있었다.

게임 스토리를 떠올려 보면 아이들이 어디 있을지도 지금 짐작 가능했다.

다만 고민되는 것은.

이 일에 연루되는 것이 과연 옳은… 아니 합리적인 것인가.

'내가 그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도의적으로 보면 옳은 일이 맞다.

하지만… 내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평범한....

"아는 게 있다면 당장 말하는 게 좋을...."

심상치 않은 기세로 내게 다가오던 에이미가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가 우릴 지켜보고 있어."

에이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바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누군지 짐작이 가?"

"조금은."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둠만이 보일 뿐, 우릴 지켜보는 시선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그때 에이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포위된 것 같아."

"포위됐다고?"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방향을 바라봤다. 나도 덩달아 그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또 만나네, 에이미?"

무리의 맨 앞에는 생글생글한 웃음을 짓고 있는 간사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에이미는 그 남자를 보더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제그...!"

"오랜만이네, 에이미."

"…길을 비켜 줘. 그냥 지나가는 길이니까."

에이미의 말에 제그는 눈썹 위를 살살 긁었다.

"그건 곤란하겠는데? 작년에 네가 날린 단검에 맞은 어깨가 여전히 잘 때마다 욱씬거리거든."

제그가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며 이죽거렸다.

"…그건! 너희들이 우리 쪽에서 난리를 피워서 생긴 일이잖아!"

"그래? 내 눈에는 지금 너도 우리 카리프의 구역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그런 억지를...!"

에이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척 보기에도 상대는 우리를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저 제그라는 놈.

내가 아는 놈이었다.

바로 이 타라스 뒷골목에서 출몰하는 정예 몬스터 중 하나.

'비열한 제그… 였나?'

'비열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놈답게 패턴이 참으로 더러웠던 게 기억이 났다.

물론 게임에서 만났을 때는 컨트롤로 손쉽게 처치할 수 있는 상대.

그러나 막상 이렇게 현실이 되니, 두려운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아저씨, 싸움 좀 잘해?"

그때 에이미가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아니."

"젠장."

초등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 봐도 누군가와 싸운 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주먹을 휘둘러 본 지가 언젠지 까마득했다.

"이거 야단났네."

에이미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제그뿐만이 아니라, 거의 열 명에 가까운 남자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에이미,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목숨은 살려 줄 수도 있는데. 물론 사과는 내 침대 위에서 해야겠지만. 흐흐...."

"개소리 마."

제그가 비열한 웃음을 터트리며 한 걸음씩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 뒤의 사내들 역시 에이미를 따라 점점 포위망을 좁혀 왔다.

나는 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어느새 그곳에도 몇 명의 사내가 우리를 보며 포악하게 웃고 있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아저씨!"

그때 에이미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강하게 불렀다. 그녀가 뭔가 결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간 끌수록 불리해. 앞쪽은 힘들 것 같고… 뒤쪽으로 한번 뚫어 볼게.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도망치는 거야."

그녀의 말에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나는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에이미가 다가오는 적들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품 안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제그가 눈쌀을 찌푸리더니 뒤에 있는 남자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잡아! 저년이 또 이상한 수작 부리기 전에!"

제그의 명령에 남자들이 우리를 향해 뛰어오려는 찰나.

에이미가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땅바닥을 향해 던지며 소리쳤다.

"지금이야!"

퍼어어엉!

검은 연막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지만, 미리 약속한 대로 뒤쪽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아아악! 내 눈!"

"파, 팔에 맞았어!"

"저년이 단검을 던진다!"

연막 속에서 각종 혼잡한 소리가 났다.

나는 허벅지에 단검이 꽂힌 채 엉거주춤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를 밀쳐 낸 후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 잡아! 놓치지 마!"

"놈들이 흩어졌어!"

뒤쪽에서 당황한 놈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미친 듯이 달리다가 어두운 귀퉁이 한곳에 몸을 숨겼다.

이곳은 놈들의 구역.

무턱대고 달리다가는 또 다른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에 일단 숨기로 한 것이다.

곧이어 내가 있는 곳 근처로 놈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다닥!

"제그! 에이미 년이랑 같이 있던 남자 놈도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남자는 내버려 둬! 에이미 그년부터 잡는다!"

쾅!

제그가 무슨 고철 같은 것을 발로 찼는지 날카로운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 그년, 여전히 도망 하나는 잘 치는군! 어제도 그렇고, 재수 한번 더럽게 없네. …시바아알!"

그 후,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성… 공한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목만 살짝 빼 골목길을 살폈다.

다행히도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일단 위기에서 벗어난 것 같긴 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뒷골목 안에 있었고,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길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에이미는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그녀는 무사하겠지?

나보다는 이 골목에 대해서 훨씬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지금 가 봤자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어....'

순간 악마화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털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그 무서운 감각에 다시 한번 내 몸을 맡긴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일단, 이 골목에서 나가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였다.

삐이이익----

"…이쪽이다!"

"그년이 이쪽으로 도망쳤다! 잡아!"

골목 안쪽에서 호각 소리와 함께 성난 남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젠장."

.

.

.

에이미는 입술을 깨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비도 두 자루가 손에 잡혔다.

'빌어먹을. 포위를 뚫느라 너무 낭비했어...!'

원래 오늘 전투할 계획 따위는 없었고, 당연히 챙겨 온 것도 많지 않았다.

그녀의 원래 실력이라면 충분히 안 들키고 빠져나갈 수 있었으나, 이상한 사람 하나를 만나 자신도 모르게 방심한 것이 문제였다.

'그 아저씨는 잘 도망갔을까?'

에이미는 고개를 빨리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 버렸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생존을 신경 써야 할 때였다.

카리프의 부두목 중 하나인 제그는 집요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자신과는 악연이 있었기에 놈들의 구역에 제 발로 들어온 자신을 결코 순순히 보내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탁탁탁!

2명의 사내가 에이미가 숨어 있는 골목으로 다가왔다. 에이미는 두 자루의 비도를 손가락에 끼운 채 조용히 놈들을 기다렸다.

그냥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놈들은 굳이 확인하기 위해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왔다.

"이쪽으로 간 거 맞아? 이번에도 놓친 건 아니겠지?"

"쥐새끼 같은 년...!"

상대는 둘.

에이미는 호흡을 가다듬고 왼손에 헝겊 주머니를 든 채 놈들이 다가오는 것을 주시했다.

'셋, 둘, 하나… 지금!'

펑!

"아악 내 눈! 끄아아악!"

"뭐, 뭐야!"

그녀만의 특별 비법 몇 가지를 첨가한 연막을 코앞에서 맞은 사내 하나가 두 눈을 붙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뒤의 사내는 운 좋게 연막의 범위에서 벗어난 듯했지만, 이미 두 자루의 비도가 그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컥!"

목에 비도가 꽂힌 남자가 피거품을 뿜으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연막에 맞은 사내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손에 든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오, 오지 마! 이 개같은 년! 죽여 버린다!"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에이미는 죽은 남자의 목과 허벅지에서 비도를 뽑아낸 뒤에 주저하지 않고 남은 남자를 향해 던졌다.

푹! 푹!

가슴과 목에 비도가 박힌 남자가 허수아비처럼 뒤로 넘어갔다.

에이미는 빠르게 비도들을 회수한 뒤, 몸을 일으켰다.

"항구 쪽으로 빠져나가는게 좋겠어...."

에이미는 지금 위치에서 가장 빠르게 골목에서 나갈 수 있는 루트를 떠올렸다.

항구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삐이이익---!

"이쪽이다! 이쪽에 있다!"

"…젠장! 벌써?!"

인상을 찌푸린 에이미는 빠르게 골목길을 달려나갔다.

이 골목은 카리프 놈들의 구역.

놈들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연막도 이제 다 썼는데...!'

"잡아! 돌아서 막아, 이 새끼들아!"

에이미는 달리면서 품에서 쇠못들을 꺼내 바닥에 흩뿌렸다.

반응은 바로 왔다.

"아아아악! 내 발! 저 개년이!"

"바닥에 함정이 있다! 조심해! 어두워서 잘 안 보여!"

이제 남아 있는 거라고는 비도 두 자루뿐.

이번 기회에 도망치지 못한다면 정말 위험했다.

'침착하자...!'

에이미는 거의 미끄러지다시피 슬라이딩해 나무 구조물 밑으로 들어간 뒤, 마지막 모퉁이를 향해 달렸다.

저 모퉁이만 넘어가면 항구.

카리프 놈들의 구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여기만 넘어가면...!'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커다란 발 하나가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퍼-억!

쿠당탕탕!

"이리 올 줄 알았다, 이 쥐새끼 같은 년아."

"…쿨럭 쿨럭!"

에이미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맞는 순간에 간신히 두 손으로 방어하긴 했지만, 충격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워 있으면 죽음뿐이란 생각이 그녀의 몸을 억지로 일어나게 했다.

"나대는 것도 오늘까지다, 이년아."

"…찰스가 널 가만둘 것 같아?"

에이미는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길 바라며 말했지만, 전혀 먹혀 들어간 것 같지 않았다.

"푸하하하! 여기에서 네가 죽으면 찰스가 그 사실을 알기나 할까?"

우드득! 우득!

제그가 두 손을 꺾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 같았다면 그 생각에 보란 듯이 침을 뱉어 줬겠지만, 오늘은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타타타닥!

뒤쪽에는 이제야 그녀를 따라잡은 제그의 부하들이 하나같이 분노에 차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달려가면서 던진 각종 암기에 단단히 약이 오른 것이 분명했다.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고 제그가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찰스가 꽤 슬퍼하겠어. 안 그래?"

"…좆 까."

"건방진 년. 크킄."

에이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제그와 근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상대는 두 주먹만으로 카리프의 부두목까지 올라간 실력자였다.

'…포기할까 보냐!'

에이미는 이를 꽉 물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갈 생각은 없었다.

"뭐 이제 남은 게 없나 봐? 있으면 더 던져 보지 그래?"

얼마든지 던져 보라는 듯 제그가 너클을 낀 두 손을 늘어트린 채 어깨를 으쓱했다.

"덤벼 봐. 재미없게 포기하는 건 아니지? 날 제끼면 살려 주마. 얘들아! 들었지?!"

제그가 뒤쪽을 포위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히죽거리며 소리쳤다. 그의 부하들이 낄낄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제그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던졌다가 실패하면 그대로 끝이야. 어떻게든 끌어들여서 빈틈을....'

잔뜩 긴장한 에이미가 두 자루의 비도를 잡고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제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기대되는군. 정말 기대돼."

두 사람의 거리가 몇 걸음 내로 가까워진 순간.

쿵쿵쿵쿵!

"뭐, 뭐야!"

갑자기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제그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에 보이는 건 딱히....

"제그! 윕니다! 위!"

"…위?"

제그는 위를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사이로 무언가가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면서 떨어져 내리는 것의 속도는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랐기에 그는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미친...!"

제그는 양팔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한 번만 견디면...!

뿌드득!

"…어?"

쾅!

제그의 몸이 그대로 거의 10m 이상 날아가서 벽에 처박힌 다음, 축 늘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골목길이 정적에 잠겼다.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그를 향해 떨어져 내린 그림자였다.

"에이미, 빨리!"

"…아저씨?"

에이미는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눈을 깜빡였다.

방금 떨어져 내린 사람은 분명 아까 만났던 레브라는 수상한 아저씨였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도망치자!"

레브가 그녀를 향해 외치며 손을 뻗었다. 에이미는 홀린 듯이 그 손을 잡았다.

4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에이미에게 가 봤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하… 시발."

…그래.

그까짓 것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데 뭐가 두렵단 말인가!

나는 뒤를 돌았다.

내 눈에 반투명한 창이 보였다.

이름 : 레브 (2)

클래스 : 데모닉

현 위치 : 부패의 도시 타라스 (남은 시간 : 3일 22시간 53분)

보유 특성

-악마화(오른팔)

-탐식

보유 결전기 : 없음

{99.93%}

내 시선이 악마화라는 항목에 꽂혔다. 이놈만 사용할 수 있어도 에이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아까 어떻게 사용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용했다기보다는, 뭐랄까… 사용되었다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순간, 무언가 내 몸을 차지한 것 같은 끔찍한 감각이 떠올라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시도라도 해 보자.'

멀리서 들려오는 호각 소리와 성난 고함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 이상 지체하면 늦어 버릴지도 모른다.

"악마화 사용."

상태창처럼 혹시 생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용히 읊조렸다.

"...."

젠장. 역시 아닌가.

보유 기술을 개뿔. 사용하고 싶을 때 사용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보유 기술이냐고.

"하아… 패드처럼 버튼이라도 있으면 누르기라도 할 텐데."

그때 무언가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른다?

나는 허공에 떠있는 반투명한 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악마화'를 눌렀다.

[악마화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ES/NO

"하하...."

이런 미친....

나는 떠오른 창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천천히 손을 올려 YES에 가져다 댔다.

악마화를 사용하는 게 물론 두려웠다.

하지만, 이걸로 그 소녀를 구할 수 있다면....

톡.

한 번의 가벼운 터치.

"에...? 왜 아무 반응도… 끄윽,"

그 순간.

심장이 따끔거렸다. 따끔거리는 느낌은 이내 누군가 심장을 칼로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격통으로 번졌다.

"끄으으...!"

신음이 절로 튀어나오며 나는 털썩 무릎 꿇었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한 고통이었다.

지끈.

욱씬.

"으으...."

나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가까스로 몸속을 관찰할 수 있었다.

관찰했다기보다는 느껴졌다는 표현이 더 옳으리라.

…심장 안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스물스물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똬리를 튼 뱀이 심장을 뚫고 천천히 기어 나오는 듯한 두렵고도 공포스러운 감각.

심장의 주변을 돌던 뱀은 이내 엄청난 속도로 오른팔을 향해 치달렸다.

"끄읍!"

고통과 함께 오른팔 피부 밖으로 검은 무언가가 슬금슬금 기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오른팔을 뒤덮었다.

실로 눈 깜짝할 새였다.

어느새 악마화된 오른팔을 보며 나는 기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심장을 괴롭히던 고통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

느끼기에는 굉장히 길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몇 초에 불과한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내 오른팔을 바라봤다. 다시 봐도 이질적이고 두려운 모습.

하지만 내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삐이이익!

다시 한번 울리는 호각 소리에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아저씨! 데모닉이었어?!"

나를 따라 뒤에서 달리던 에이미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얼른 뛰어!"

뒤쪽에서 화가 단단히 난 카리프 놈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짧게 일별한 후,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로 가야 되지?'

기세 좋게 도망가는 것은 좋았지만, 여기가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바다와 정박해 있는 배들이 보이는 것이 항구 같기는 했다.

'타라스 항구라면 0-2스테....'

"아저씨! 이쪽으로!"

그때, 에이미가 내 손목을 잡은 채 한곳으로 이끌었다.

당연히 나보다 그녀가 길을 더 잘 알 거라 생각했기에 나는 그녀가 이끄는 데로 달렸다.

"빨리!"

에이미가 멈춰선 곳은 한 하수도 앞.

그녀는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하수구의 철창을 뜯어냈다.

자세히 보니 원래 뜯어져 있던 것을 누군가 끼워 맞춰 놓은 것이었다.

에이미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간 후,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나 역시 지체없이 안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안에 들어오자마자 에이미는 들고 있던 철창을 다시 조심스레 끼워 맞춘 후, 재빨리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그와 거의 동시에 카리프 놈들이 우리가 숨어 있는 하수도 앞에 당도했다.

"분명히 이쪽으로 갔는데...!"

"시발! 빨리 찾아!"

아주 간발의 차이였다.

"이쪽에는 없습니다!"

"젠장. 쥐새끼 같은 년,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콰앙!

화가 난 남자가 하수도의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는 혹시라도 끼워 맞춘 철창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철창을 응시했다.

"멀리 못 갔을 거야! 어떻게든 찾아내!"

성난 남자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우리 두 사람은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밖의 상황을 살폈다.

"…이제 없는 것 같은데?"

마침내 에이미가 긴 한숨을 토해 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천만에."

그녀가 깨워 주지 않았다면, 내일 아침 그 골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릇.

에이미를 도울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보다 여기는 대체...?"

내 물음에 에이미가 훗! 하고 미소지었다.

"영광인 줄 알라고. 여기는 찰스도 모르는 곳이니까."

"찰스...? 그게 누군데."

"있어. 꼰대 같은 사람 하나."

에이미는 그렇게 말하며 익숙한 듯이 하수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수도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사용되지 않은 지 오래된 듯 쿰쿰한 냄새를 제외하고는 악취도 없었다.

나는 한쪽 벽에 기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제야 조금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진 건가....

이곳에서 깨어난 이후로는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잠깐이라도 나에게는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내가 게임으로 들어왔다는 건 확실하고....'

내 시선이 상태창의 한 곳에 머물렀다. 악마화라는 항목 옆에 작게 숫자가 쓰여 있었다.

[악마화 남은 유지 시간 : 04분 18초]

처음 악마화를 사용했을 때 주어진 시간은 15분.

악마화가 가진 위력을 생각하면 결코 적다고 볼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오른팔뿐만이 아니야.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모두 상승했어.'

반사 신경, 동체 시력, 근력, 민첩성 모두 악마화하기 전보다 눈에 띄게 향상된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힘은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

'분명 두 팔이 부러졌겠지....'

제그라는 놈의 가드 위에 그대로 주먹을 꽂았는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뼈가 부서지는 느낌만큼은 선명했다.

아마 당분간은 손을 사용해 밥 먹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 그 성기사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악마화한 내가 제대로 도망쳐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 팔...."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이미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에 흠칫 놀란 듯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가까이서 살펴봐도 돼?"

"…왜?"

오른팔이 징그러워서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던 나였기에 그녀의 질문은 굉장히 의외였다.

"데모닉을 본 것은 처음이거든. 그냥 궁금해서… 크흠."

그녀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봤다.

"넌 이게 안 무서워?"

"단순히 팔일 뿐인데, 뭐. 중요한 건 그걸 쓰는 사람 아닐까? 아저씨는 날 해칠 생각이야?"

"…아니."

"그럼 상관없잖아."

에이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에이미는 평범한 소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뭐, 보든가. 그런데 한 가지 말해 주자면 유지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에? 정말이야? 진작 말해야지, 그런 건!"

에이미가 후다닥 달려와 내 팔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는 정말로 순수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내 팔을 살펴보는 김에 나 역시 다시 팔을 바라봤다.

…다시 봐도 내 팔 같지가 않은 이질감만 들 뿐이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가락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와아… 이런 건 정말 처음 봐. 이게 말로만 듣던… 어! 원래대로 변했다!"

에이미의 말처럼 악마화의 유지 시간이 끝나자마자 오른팔을 감싸고 있던 악마의 피부가 검은 기운으로 변해 다시 몸속으로 빨려 들 듯이 사라졌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소름돋는 광경이었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시간 59분 55초]

즉, 이 악마화는 쿨타임이 3시간인 15분짜리 변신기라는 소리였다.

'이거 쓰레기 기술 같은데...?'

더군다나 악마화가 해제되자마자 온몸에 피로감이 몰려 들어왔다.

흡사 40km 행군을 마치고 난 것만 같은 몸 상태.

'어쩐지 기본 기술치고는 세더라니....'

나는 데친 숙주나물처럼 벽에 힘없이 기댄 채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 페널티면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

변신이 해제되고 내가 축 늘어지는 것을 본 에이미가 뭔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늘 어디 잘 데라도 있어?"

"글쎄. 마음 같아서는… 이 하수도에서라도 자고 싶은데...."

이제 와서 이 하수도에서 나가라고 하지는 않겠지?

나는 에이미의 눈치를 살짝 봤다.

에이미는 잠시 망설이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잘 만한 곳을 알려 줄까?"

"잘 만한 곳?"

"응. 아까 듣기로는 강도 당해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뭐, 내가 하루 정도 잘 곳을 소개해 줄 수 있기는 해."

"그럼 나야 고맙긴 한데… 부담되지 않겠어?"

에이미에게 딱히 부담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하수도도 하루 정도 자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벌레 몇 마리가 지나다니는 게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내 자취방이랑 별 차이도 없었다.

실제로 지금 당장 어디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전혀. 아저씨도 가 보면 알 거야."

"…그래?"

나를 보며 에이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하수도 입구 근처에 서서 한동안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나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은데."

"…뭐, 그럼 하룻밤만 신세지기로 할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땅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에이미가 소개해 주는 곳에서 자는 게 훨씬 낫겠지.

.

.

.

조심스레 하수도에서 나온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하수구의 위치는 실로 절묘해서 눈여겨 보지 않으면 여기 하수구가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

나는 하수구의 철창을 낑낑대며 끼워 맞추고 있는 에이미를 바라봤다.

"…도와줄까?"

"참나! 이게 얼마나 섬세한 작업인 줄 알아? 티 안 나게 덮으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에이미가 저리가라며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나를 몰아낸 그녀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철창을 세심하게 끼워 넣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었다.

"자. 이제 출발하자."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딘지 물어봐도 될까?"

"내가 아까 찰스라는 이름 말한 적 있지?"

찰스라면… 에이미가 꼰대 같은 아저씨라고 이야기한 그 사람 말인가?

"그 사람한테 갈 거야. 꼰대 같기는 해도 하룻밤 정도는 재워 줄 거야."

"…뭐 하는 사람인데?"

"은퇴한 용병."

"호오...."

용병이라....

어비스에서도 용병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하기는 했다.

초반 챕터에서는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플레이어를 보조해 주는 동료 같은 역할이랄까.

'후반부로 가면 대부분 쓸모가 없긴 하지만....'

하지만 몇몇 용병은 후반부에서도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타라스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존재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용병이라는 존재를 실제로 본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기대됐다.

용병은 목패부터 시작해서 동패, 은패, 금패 그리고 챔피언으로 이어지는 계급도를 가지고 있었다.

은패 용병만 되도 초반 챕터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기에, 나는 살짝 기대를 가지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은퇴하기 전 그 사람이 계급이 어떻게 됐어?"

에이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금패일걸?"

…금패라고?

5화

이 게임은 레벨이라는 시스템으로 등급을 나눈다.

1레벨부터 9레벨까지.

그중 2레벨까지는 딱히 별다른 의미가 없었고, 중요한 것은 3레벨부터였다.

마나를 이용해서 육체 강화를 할 수 있어야만 3레벨으로 인정을 해 줬기 때문이다.

뒷골목에서 만났던 제그가 바로 3레벨.

거기서 마나를 몸 밖으로 뿜어내 일부분이라도 몸을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올라가게 되면 4레벨이라 칭했다.

4레벨만 해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초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5레벨부터였다.

마나의 수발이 자유롭고 마나를 유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유형화된 마나를 허공으로 발출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

그게 바로 5레벨이었다.

그리고 금패 용병이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 바로 5레벨이기도 했다.

즉, 찰스라는 남자는 최소 5레벨의 실력자라는 소리였다.

이곳 타라스의 보스인 아이히만 남작이 4레벨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말도 안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은퇴라고는 하지만, 그런 존재가 대체 왜 여기에...?

"뭐, 지금은 여관 주인으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에이미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향해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치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여관 일을 하는데...?"

"부상 때문에 은퇴한 거거든.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에이미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솟구치는 수많은 궁금증을 참아 내고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에이미는 조용하면서도 민첩하게 골목 사이를 헤쳐 나갔다.

아까 골목에서 카리프를 만난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이번에는 이동하면서도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녀를 열심히 따라가면서 이 생소한 곳을 둘러봤다.

'부패와 타락의 도시라더니....'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노숙자와 부랑자들이 보였다.

노숙자들은 골목 어귀에서 쭈그린 채 힘없이 잠들어 있었고, 몇몇 잠들지 않은 자만이 골목을 유령처럼 스쳐 지나가는 우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눈 마주치지 마. 누구라도 강도로 돌변할 수 있으니까."

에이미의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금 더 이동한 후에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 이제 놈들의 구역은 벗어난 것 같네."

"고생했다...."

"그보다 아저씨는 오늘 타라스에 들어왔다고 했지? 도대체 이 그지 같은 도시에는 왜 온 거야?"

"...."

내가 왜 왔냐고?

…그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거였다.

눈 떠 보니 낯선 천장이 아니라 낯선 하늘인 경험은 처음 해 봤으니까.

게임DLC를 깔아서 이 세계에 오게 되었다고 하면 믿어 줄까?

애초에 게임이 뭔지 설명하는 것부터가 힘들겠지.

"…혹시 비밀이야?"

에이미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인간 정수호가 타라스에 온 이유는 없었을 지라도, 게임 캐릭터인 레브가 타라스에 온 이유는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내가 타라스에 온 이유는...."

.

.

.

"저기가 찰스가 운영하는 뻐꾸기 여관이야."

어둠 속에서 에이미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지나쳐 오면서 본 건물 중에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건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했다.

"따라와."

에이미는 뻐꾸기 여관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가더니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새벽이라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박력 있는 행동이었다.

"컥! 누, 누구야!"

카운터에서 엎드려 잠자고 있던 중년 남자 하나가 허둥지둥대며 일어났다.

얼빠진 표정이 상당히 웃겼기에 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남자의 덩치가 곰만 하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에이미가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찰스, 나 왔어."

덮수룩하게 턱수염이 난, 곰 같은 덩치를 지닌 남자.

단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리를 절뚝거린다는 것.

부상 때문에 은퇴했다더니, 다리 쪽 문제였나....

"야, 이년아! 내가 들어올 때 문, 발로 차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문 부서지겠다!"

찰스가 에이미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부상을 입었다고는 해도 남들보다 머리는 하나 더 큰 덩치 때문에 찰스라는 남자는 여전히 상당한 위압감을 자랑했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이라면 꼼짝도 못 할 상황에서도 에이미는 키득키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기다렸어?"

"…하아. 기다리긴 개뿔이...! 그리고 이년아! 시간이 몇 신데. …너는 대체 왜 이 시간까지 싸돌아댕기는 거냐. 이 시간에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예~ 예!"

에이미는 찰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찰스가 뒤따라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이 친구는?"

"내 생명의 은인. 빈털터리라니까 하루만 묵게 해 줘."

"…생명의 은인? 그게 무슨 소리야."

"카리프 놈들 구역에 갔다가 들켰거든. 이 아저씨 아니었으면 거기서 죽었을걸? 아닌가, 납치당해서 잔뜩 몹쓸 일을 당해 버렸을지도...."

"너, …너! 내가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잘 빠져나왔으면 됐지. 왜 그래?"

"…어억!"

에이미의 대답에 찰스가 뒷골을 잡았다.

부들부들 떠는 것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한동안 심호흡하던 찰스가 에이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 아델이 사라진 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

"응. 맞아."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찰스가 마른세수를 한 번 한 후 말했다.

"타라스에서 아이들 몇 명 실종되는 건 별일도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에이미, 그런 위험한 짓은 이제 그만...."

"아델이 모르는 애야?! 내 동생 같은 애라고! 찰스도 알고 있잖아!"

"하지만 벌써 이틀이나 지났...."

"그러면 포기해? 찰스는 가족을 포기하라면 포기할 수 있어?!"

에이미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소리쳤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이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도와 달라고 하지는 않을게. 그러니까 방해하지만 마."

에이미는 찰스를 노려보다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찰스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뱉고는 주변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찰스의 거구에 의자가 끼이익-소리를 냈다.

"하아...."

찰스의 한숨 소리가 텅 빈 여관 안에 울려 퍼졌다.

졸지에 찰스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이 뻘쭘한 상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찰스가 망부석처럼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 형씨가 아직 있었구려. 미안하군. 남 앞에서 아주 추태를 부렸어. 방이라면 다행히 남아 있는 방이 있으니… 어디 보자. 203호를 쓰면 될 거요."

찰스가 카운터 밑에서 방 열쇠를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는 이 어색한 상황을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호재를 부르며 열쇠를 건네받았다.

이 상황에서 딱히 그와 할 이야기도 없었기에 바로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찰스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에이미랑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요?"

"아. 강도당한 후, 뒷골목에서 기절해 있던 저를 에이미가 발견해서 깨워 줬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나는 에이미에게 말한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카리프 구역 근처였소?"

"예. 정확히 어딘지는 잘.... 오늘이 제가 타라스에 들어온 첫 날이거든요."

"…운이 좋았소. 보통은 가진 것뿐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렇군요...."

…이 도시에 치안이라는 게 존재하지가 않는다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군.

"무슨 일로 타라스에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도시에 있는 동안은 항상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어리숙한 외지인 정도는 금방 삼켜 버리거든, 이 도시는."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객실로 올라가려다 다시 돌아섰다.

찰스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기, 궁금한 게 하나 생겨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흐음. 물어보시오."

찰스는 생각보다 더 수월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이미랑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게 왜 궁금한 거요."

찰스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순간적인 위압감이 굉장했다.

이게 금패 용병의 존재감인가...?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에이미에게 듣기로는 금패 용병이셨다는데, 어떻게 그런 이력을 가진 분과 에이미가 인연이 있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다면 더 이상 묻지는 않겠습니다."

"…에이미의 아버지와 불알친구였소. 그 친구가 죽고 나서 내가 에이미를 거두게 된 거지."

"아...."

"데려온 김에 겸사겸사 용병 때 쓰던 기술 몇 개 가르쳐 줬더니, 엄청 빠르게 배우더군. 저렇게… 말을 안 들을 줄은 몰랐지만."

찰스가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금패 용병의 기술을 전수 받았다라.

어쩐지 평범하지 않더라니....

"대답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객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찰스가 나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에이미를 구해 줘서 고맙소. 내가 미쳐 감사 인사를 못 했군."

"아닙니다. 저 역시 에이미가 깨워 주지 않았으면 죽을 뻔했거든요."

나는 가볍게 웃은 후 객실로 향했다.

너무 피곤해서 일단은 좀 쉬고 싶었다.

.

.

.

…쾅! 쾅!

"뭐, 뭐야!"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레브! …일어났어?!"

"…에이미?"

그제서야 천천히 정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나는 어제 게임 세상 속에 소환되어서 한 번 죽은 후, 에이미라는 여자애와 함께 이 여관에 왔다.

그리고 죽은 듯이 잠들었다.

그에 대한 가장 뚜렷한 증거는 바로.

이름 : 레브 (2)

클래스 : 데모닉

현 위치 : 부패의 도시 타라스 (남은 시간 : 3일 12시간 53분)

보유 특성

-악마화(오른팔)

-탐식

보유 결전기 : 없음

{99.93%}

일명 상태창이라고 불리는 반투명한 창.

그렇게까지 생각이 진행되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상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9시간이나 잤다고?'

내가 마지막으로 본 '남은 시간'이 21시간 정도였으니, 생각보다도 더 많이 잔 셈이다. 느낌상으로는 방금 침대에 누운 것 같았는데....

"레브! 일어났으면 문 좀 열어 줘!"

"끄응...."

창밖을 보니 해가 거의 중천에 떠 있었다.

어찌 됐던 일어나야 할 시간은 맞았기에,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잠갔던 문고리를 풀었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에이미가 거침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그녀는 단단히 차려입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나가야지. 얼른 준비해."

에이미는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로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다.

때문에 나는 순간 에이미와 무슨 약속을 한 줄 알고 기억을 되짚어 봤다. 하지만 그런 약속을 한 기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딜 나간다는...."

"어제 레브가 말했잖아."

"…뭐를?"

"이 도시에 온 이유에 대해서."

에이미의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내가 어제 뭐라고 했지?'

나는 멍하니 서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분명....

"숭배자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다면서."

에이미가 내 생각을 대신 말했다.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왜냐하면 게임의 주인공이 타라스에 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숭배자들.

악마를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크고 작은 미친 사건에는 항상 이 집단이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들의 음모를 하나하나 저지하는 게 바로 이 게임의 주된 스토리이기도 했고.

"아저씨가 '탐색자' 중 한 명일 줄이야. 처음 들었을 때는 상당히 놀랐다고. 탐색자나 되서 거기 그렇게 쓰러져 있는게 더 놀랍기는 하지만."

"아하하...."

탐색자는 이 세계에서 숭배자들에 대적하는 비밀 결사 집단으로 게임의 모든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탐색자라는 설정이 존재했다.

"아, 맞다! 어제 그거 다시 한번 보여 주면 안 돼?"

"그거...? 아."

나는 에이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물건 하나를 꺼냈다.

내가 이 세계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단 한 가지 물건.

그것은 검은빛을 띈 동그란 휘장이었다.

탐색자들이 자신을 증명할 때 쓰는 일종의 증표로, 소위 '새벽 휘장'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와. 밝은 데서 보니까 진짜 멋있다...."

에이미가 나직한 감탄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휘장의 검은빛은 마치 밤하늘을 옮겨 놓은 것처럼 오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탐색자라는 신분이 참 편리한 게, 이 탐색자라는 집단은 잘 정리된 조직 같은 게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점조직에 가까웠다.

때문에 탐색자들끼리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마, 숭배자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겠지.'

만약 숭배자들에게 잡히더라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애초에 정보가 누설되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탐색자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실제로 새벽 휘장도 가지고 있었고.

"자 돌려줄게."

나는 에이미가 건네 주는 새벽휘장을 받아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지금 가진 재산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는데 소중히 여겨야지.

'팔면 얼마 정도 할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이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레브는 모르겠지만, 아델은 정말 내 가족 같은 애야. 오늘은 그 애가 없어진 지 사흘째고. 그런데 숭배자들이 이 도시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에이미의 강렬한 시선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델의 실종이 숭배자들의 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맞아. 그리고 나는 일단 단서를 얻은 이상 포기할 생각 없어. 적어도 아델의 시체라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레브. 제발 나를 도와줘."

에이미의 간절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6화

어비스의 프롤로그 챕터.

부패의 도시 타라스는 총 5개의 스테이지로 이루어져 있다.

0-1 타라스 뒷골목

0-2 타라스 항구

0-3 타라스 지하 하수도

0-4 남작의 성

0-5 보스전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스타트하는 곳이 바로 타라스 뒷골목.

아마 내가 그곳에서 눈을 뜨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원래 게임에서 시작하는 자리와는 좀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는 제한 시간 내에 각 스테이지를 차례대로 클리어하고 보스전까지 완료해야만 했다.

만약, 제한 시간을 넘겨 버리게 되면 그대로 게임 오버.

'하지만 여기는 게임이 아니야.'

맘만 먹으면 지금 바로 보스전으로 향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다만, 프롤로그 챕터의 보스 아이히만 남작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처음 <어비스>를 시작한 뉴비에게 아이히만 남작은 그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였으니까.

더군다나 패드로 플레이하던 것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앉아서 손가락 까닥하는 것만으로 보스전을 깰 수 있을 리가 없다.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

죽지 않고 아이히만 남작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바로 어비스에서 히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필요했다.

히든은 각종 아이템, 혹은 특전 그리고 그 외에 잡다한 것, 모두를 일컫는 말으로 이 프롤로그 챕터는 수많은 유저가 플레이한 곳답게, 가장 많은 히든이 밝혀진 곳이기도 했다.

나 역시 알려진 히든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굵직한 거 몇 개만 기억나는데...?'

<어비스>를 플레이할 때 반드시 얻어야 하는 히든들은 여전히 그 습득 방법이 또렷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은 거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더 잊어버리기 전에 어딘가 써 놓는 게 좋을지도.'

나는 한글로 일단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 내렸다.

이 세계에서 한글을 쓰는 사람은 없었으니, 누가 봐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겠지.

'그래도 다행히 이건 기억나네.'

프롤로그 챕터 부패의 도시 타라스에는 여러 가지 히든이 존재했지만, 그중 그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히든이 한 가지 있었다.

그 히든의 존재 유무로 3챕터까지의 난이도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물건.

나는 그 히든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아이히만 남작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거 앞에서는....'

"그 재수 없는 웃음은 뭐야?"

내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에이미가 어이없다는 듯 물어왔다.

"…너, 안 나가냐?"

아까 그녀의 도와 달라는 요청을 승낙한 이후로, 나가지도 않고 줄곧 저러고 있었다.

"내가? 왜?"

"...."

뻔뻔한 얼굴로 되물어 오니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이 방도 에이미가 구해 준 것이었기에 그녀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되는 게 지금의 내 신세였다.

'이게 바로 집 없는 자의 설움인가....'

한 번도 내 자취방을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근데. 아까부터 뭐 하고 있는 거야?"

뒹굴거리던 에이미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탁자 위에 내가 써 놓은 메모지를 쓰윽 훑어봤다.

나는 살짝 긴장한 채로 그녀를 살폈다.

혹시라도 그녀가 한글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서.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글자야. 생긴 게 이상해...."

"이건 위대하신...! 쯧. 아니다."

세종대왕님에 대해 말해 봤자, 그녀가 알 리가 없지.

소 귀에 경 읽기랄까.

"…뭐야, 그 표정은? 방금 내 욕했지?"

"아니. 전혀."

"부정이 너무 빠른데?"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구만.

잠깐 눈살을 찌푸렸던 에이미가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야. 밥이나 먹자."

"…그건, 좋은 생각인데?"

안 그래도 상당히 허기진 상태였다.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에이미가 먼저 말해 주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점심 정도는 사 주겠지...?

"밥 먹으러 출발!"

잔뜩 신난 에이미의 목소리가 작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금강산? 거기가 어딘데? 어디에 있는 산이야?"

에이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몰라도 돼. 그나저나 이 여관… 밤에는 몰랐는데… 사람이 엄청 많네."

점심시간보다 약간 이른 타이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관 테이블은 거의 차 있었다.

우리는 구석에서 간신히 빈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뻐꾸기 여관이 타라스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여관이라서 그래. 그 이유는 당연히 찰스 때문이고."

에이미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금패 용병이 버티고 있는 여관에서 깽판을 부릴 수 있는 놈은 없겠지.

에이미에게 듣기로는 찰스가 다리만 불편하지, 다른 건 멀쩡하다고 했으니까.

"그나저나 찰스가 안 보이네?"

에이미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 거대한 곰 같은 덩치라면 이 많은 사람 중에서도 확실히 눈에 띄었을 텐데, 그녀의 말대로 찰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흥!"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이미의 얼굴에는 약간의 그늘이 져 있었다.

새벽에 찰스와 다투었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언니, 여기!"

에이미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서빙을 하고 있는 여급을 불렀다.

주근깨 있는 귀여운 얼굴에 풍만한 몸매가 꽤 인상적인 여자였다.

"어머, 에이미. 언제 들어왔니?"

여급은 에이미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딱 봐도 서로 꽤 친근한 사이 같았다.

"새벽에."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에이미."

"예예~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언니, 나 배고파. 주방에 주문 좀 넣어 줘."

에이미가 건성건성 대답하자 셰릴은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먹던 걸로?"

"응."

"옆에 신사분 것도?"

셰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녀의 시선에서 호기심이 느껴져 나를 소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

"신사는 개뿔…, 이 아저씨도 똑같은 걸로."

에이미가 칼같이 내 말을 차단하며 주문했다. 그 모습에 셰릴은 풉! 하고 미소 지은 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아니, 왜 소개도 못 하게...."

"셰릴 언니를 아저씨 같은 부랑자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 없거든! 셰릴 언니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부랑자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럼 아니야?"

"…큼."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참나, 누가 사귄다고 했나.'

물론 향후 자식 계획까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는 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관은 그야말로 왁자지껄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활기 넘쳤다.

'이게 바로 판타지의 여관....'

그때였다.

"이러지 마세요!"

여관에 소란이 일었다. 소란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아까 인사를 나눴던 셰릴이 있었다.

"어허. 누가 만지기라도 하겠대? 술 한 잔 따라 달라는 건데. 더럽게 비싸게 구네!"

낮부터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불콰하게 붉어진 사내가 셰릴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다.

"저는 그런 일은 안 한다니까요!"

"내가 언제 떡을 치자고 했어! 뭘 했어! 어! 그냥 술 한 번만 따라 달라고!"

"이러지 마시라고요!"

에이미 역시 그 소란을 발견했는지 삽시간에 표정이 굳었다.

"찰스가 없으니까 별 잡것들이...!"

분노한 에이미가 일어나려는 찰나.

누군가 먼저 사태에 개입했다.

"거기까지만 하시지요."

언뜻 듣기에 차갑고 무정해 보이는 목소리가 후드 밑으로 울려 퍼졌다.

'여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외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로 보건대 여자가 확실했다.

셰릴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남자 역시 상대가 여자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넌 뭐야! 네가 대신 술이라도 따라 주게?!"

"그분을 놓아주십시오."

"허...? 안 놓겠다면 네가 어쩔건데! 어!"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셰릴의 손목을 잡고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무, 무슨...!"

다음 순간, 이미 로브 여인은 남자의 손목을 잡아챈 후였다.

집중하여 보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노, 놓으라고!"

남자는 당황하여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바위에라도 깔린 듯 로브 여인에게 잡힌 그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힘을 쓰던 남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로브 여인의 안면을 가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 손 역시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로브 여인에게 붙잡혔다.

"이거 안 놔!"

"그만하실겁니까?"

"미친년아! 이-거 놓으라고!"

남자는 손을 빼기 위해 연신 몸을 뒤틀었지만, 양 손목이 붙잡힌 상태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로브 여인은 미동 없이 남자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발버둥 치던 남자는 그 무거운 분위기에 기가 죽었는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그, 그만하면 될 것 아니야! 그만한다고!"

남자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에 취해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확연한 힘의 차이를 마침내 느끼게 된 것이다.

로브 여인은 군말 없이 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순순히 풀어 주었다.

"으윽!"

몸의 자유를 얻은 남자는 잡혀 있던 손목을 감싸 쥐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위의 싸늘한 시선들과 비웃음 소리에 비로소 술이 깬 그가 허겁지겁 여관 문으로 달려나갔다.

"…두고 보자!"

남자는 볼품없게도 한마디 더 외치더니 그대로 여관 문을 나서서 도망쳤다.

남자가 사라지자 여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끌벅적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지켜 보던 에이미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저 자식, 돈도 안내고!"

"그게 중요한 거였냐...."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먹고 살려면 한두 푼 들어가는 줄 알아? 돈 없으면 얼마나 서러운데!"

이 녀석....

돈에 상당히 진심이구만.

"하루에 죽 한 그릇도 못… 아! 내 정신 좀 봐! 언니! 괜찮아?"

에이미가 말을 하다 말고 셰릴을 향해 달려갔다.

나도 가만히 앉아 있기가 그래서 에이미를 따라 움직이려던 순간,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들어 본 거지?'

셰릴을 구해 준 로브 여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귀에 익숙했다.

문제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런 나에게 익숙함을 주는 목소리가 있을 리가....

그때 문득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어두운 밤.

'거기까지입니다, 마의 족속이여!'

하얗게 빛나던 칼날과 뒤따른 고통.

순간 온몸이 차디차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 여인은 나에게 첫 번째 죽음을 선사했던....

'누군지 확인을 해야...!'

간신히 공포를 이겨 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느새 로브 여인은 여관에서 사라진 후였다.

.

.

.

여관에서 식사를 마친 에이미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숭배자들을 추적하려면 준비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브 여인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해 마음이 찜찜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제한 시간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그전에 준비를 마치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잘하는 짓인가 모르겠네.'

사실 이 세계에서 남작 한 명 막지 않는다고 해서 '게임 오버'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작 보다 더한 괴물들이 수두룩한 세상이니.

다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럴 가능성이 있는 한, 남작을 잡기 위해서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프롤로그 챕터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까.'

남작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이 게임의 후반부에 나오는 괴물들에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만일 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이 게임의 클리어라면, 프롤로그 챕터의 보스 정도는 처치할 수 있어야 겠지.

"레브, 이쪽이야."

우리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잡화점이었다.

내 의지는 아니었고, 에이미의 의견이었다.

어제 도망가면서 가지고 있던 암기를 다 소모했다나 뭐라나.

딸랑-

에이미가 힘차게 잡화점 문을 열며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들어가며 잡화점 내부를 둘러봤다.

잡화점이라고 하더니 진짜 온갖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영감님! 나 왔어!"

카운터에 산 에이미가 안쪽을 향해 힘차게 외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에이미냐...?"

안쪽에서 나온 사람은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늙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에이미를 보고 반가운 듯이 웃다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오! 영감님, 역시 안 죽고 살아 있었네. 헤헤."

"예끼! 이놈아!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지 그러냐!"

노인은 기가 찬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나마 목소리에는 꽤 힘이 실려 있었다.

"농담이지, 농담! 그나저나 전에 내가 부탁한 건 다 됐어?"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준비가 되긴 했다."

"오! 지금 볼 수 있어?"

"에효… 늘그막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노인은 툴툴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꽤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져와 우리 앞에 내려놨다.

"확인해 봐라."

노인의 말에 에이미가 한 치의 지체도 없이 바로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각종 무기들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에이미는 신중한 눈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더니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금은 늘 그렇듯이 찰스한테 청구하면 돼!"

"…찰스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 악귀 같은 것에게 걸려가지고. 쯧."

노인이 짧게 혀를 찼다.

물론 노인이 혀를 차거나 말거나 에이미는 상자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품에 꽂아 넣기 시작했다.

어디에 그런 공간이 있는지 꽤 커다란 상자에 있던 물건들이 에이미의 품속으로 하나하나 사라졌다.

"자네는 누군가? 이 동네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때 노인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아. 저는 레브라고 합니다, 어르신. 타라스에는 어제 처음 방문한 거구요."

"호오. 예의가 있는 젊은이구만. 누구와는 달리 참 마음에 들어. 클클."

노인은 짧게 웃었다.

그 소리를 들은 에이미가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설마 나 말하는 거야?"

"허어. 너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내가 얼마나 예의바른데?! 나야말로 살아 있는 예의의 화신이라고!"

노인은 에이미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어쩌다 이 사악한 꼬맹이라 같이 다니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여간 영악한 게 아니거든."

"뭐, 신세를 지고 있어서요. 말씀은 감사드립니다."

"클클. 요즘 애들치고는 참 견실한 청년이구만. 좋아. 기분이네. 잡화점에서 쓸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 챙겨 가시게."

노인이 나를 향해 의외의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에이미가 나보다 먼저 반응했다.

"나는? 팔아 준 사람은 난데? 왜 딴 사람한테 서비스 주는데?!"

"시끄러, 이눔아! 내가 그것들 구하느라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아주 그냥...."

노인이 버럭하며 소리를 지르자 에이미가 살짝 기죽은 채로 불퉁거렸다.

"그래도 이눔이!"

두 사람은 그러면서 계속 티격태격했다. 참 사이가 좋은 노소였다.

나는 그 콩트를 잠시 구경하다가 잡화점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워낙 다양한 물건들이 있다 보니 노인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뭘 집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이라도 하나 가져가면 되려나....'

안 그래도 무기로 쓸 만한 게 필요하던 참이었다.

악마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쿨타임이 3시간이라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먹질은 딱히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비스>를 플레이할 때 무도가 클래스를 고른 적은 거의 없을 정도.

검을 휘둘러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맨손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 시선이 검들이 걸려 있는 곳을 향했다.

말만 잡화점이지, 무기 종류만 해도 엄청났다.

이쯤 되면 이 잡화점의 정체가 궁금해질 정도.

"아저씨, 이거 정말 좋은 기회니까 신중하게 골라. 영감님이 아무한테나 그러는 사람이 아니거든."

어느새 상자 안의 물건들을 품에 다 정리한 에이미가 내 곁에 서서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하게 무기들을 하나씩 살폈다.

그리고 엄청난 문제점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나… 무기 볼 줄 모르는데?'

내가 무기를 써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총은 제외해야겠네.

어쨌거나 잔뜩 있는 검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에이미에게 도움을 청하려던 찰나.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검들 위에 걸려져 있던 자그마한 단검이었다.

단검은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지만, 손잡이 부분에 기도하는 여자의 얼굴이 음각되어 있었다.

'…설마?'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단검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리고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참회의 단검이잖아?'

7화

어비스의 히든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가 있었다.

첫 번째는 얻는 방법이 고정되어 있는 것들, 즉 고정형 히든이었다.

원래 숨겨져 있는 자리에 가서 찾아보거나 특정 몬스터를 죽이면 반드시 획득할 수 있는 그런 것들.

게임을 몇 번을 다시 하더라도 말이다.

이 타라스에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히든 역시 고정형 히든 중 하나였다.

이런 고정형 히든과는 달리, 획득 방법이 명확하지 않은 히든도 존재했다.

유저들은 이것을 랜덤형 히든이라고 불렀는데, 이놈들이 참 골 때리는 놈들이었다.

그야말로 무작위로 아무 데서나 튀어나왔으니까.

'그야말로 랜덤....'

물론 어느 정도의 '카더라'는 있었다.

하지만, 어떤 몬스터를 잡으면 자주 나온다거나, 어떤 챕터에서 자주 등장한다 정도일 뿐이지, 랜덤형 히든의 확실한 획득 방법 따위는 없다는 것이 유저들 사이에서의 정론이었다.

'그리고 참회의 단검은 그 랜덤형 히든 중 하나.'

이 단검을 2챕터에서 몇 번 얻었던 기억이 있었다.

커뮤니티에서 2챕터에서 자주 드랍된다는 글이 쓰여 있는 걸 본 적도 있었고.

그래서 프롤로그 챕터인 타라스에서 이 단검을 볼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2챕터에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인 만큼 상당히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참회의 단검의 능력은 바로 찌른 상대방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저주의 일종으로, 꽤 강력해서 2챕터 이후에 나오는 각종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얻을 수만 있다면 더 없이 유용하다...!'

나는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 이 단검도 가능합니까?"

"물론이네. 근데 괜찮겠나? 다른 좋은 물건들도 많은데?"

노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예. 저 단검으로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놀란 것은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레브! 미쳤어? 좋은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런 고물상에서도 안 살 것 같은 단검을...."

"다시 한번 묻겠네. 그런 녹슨 단검으로 정말 괜찮겠나? 에이미의 친구이니, 장검 하나 정도는 선물로 줄 생각이었네만."

노인은 여전히 의구심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단검이 그저 녹슨 고철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눈치.

'하기야… 참회의 단검은 따로 사용 방법이 존재하니까.'

참회의 단검은 특이하게 발동 조건이 존재했다.

그냥 찌르면 평범한 단검만도 못한 그냥 녹슨 고철에 불과한 무기인 것이다.

'운 좋으면 파상풍 정도는 유도할 수 있겠지.'

하지만, 참회의 단검은 그렇게 단순하게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저주의 발동 방법은 바로 사용자의 피를 단검날에 묻히는 것.'

그 이후에 상대를 찔러야만 저주가 발휘되는 물건이었다.

게임에서는 사용할 때마다 소량의 HP가 감소하는 걸로 그 설정을 만족시켰던 걸로 기억난다.

나는 참회의 단검을 손에 쥐며 노인을 향해 대답했다.

"이걸로 만족합니다, 어르신. 그보다 이 단검이 언제부터 이 잡화점에 있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이 단검 말인가? 흐음. 한 5년 전쯤에 떠돌이에게 샀던 걸로 기억하네만."

"그렇군요. 대답 감사드립니다."

나는 무표정을 가장한 채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5년 전부터 있었던 물건이라면, 설령 내가 죽고 다시 시작하게 된다하더라도, 거의 확실하게 참회의 단검을 이곳에서 얻을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게임에서는 누군가 이 잡화점에서 단검을 사서 2챕터 지역으로 이동한 건가?'

…뭐, 이제 어찌됐든 상관없었다.

그 사람보다 내가 빨리 이 단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적어도 오늘의 낮까지는 말이다.

랜덤형 히든이 고정형 히든이 되는 순간이었다.

"레브.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영감님 잡화점에 좋은 물건 진짜 많다니까?"

에이미가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다시 물어왔지만, 난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이 이상 좋은 물건은 없을 테니까.

"…참새가 어찌 봉황의 큰 뜻을 알리오."

"뭐? 봉… 황? 그게 뭔데?! 아 씨! 나 무시하는 거 맞지?!"

에이미가 방방 뛰었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고는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혹시 동굴을 탐험할 때 쓸 만한 장비가 있을까요?"

"동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에이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봤다.

"내가 말 안 했어?"

"응.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애초에 나는 지금 어디 가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머쓱함에 콧잔등을 긁었다.

에이미에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미를 향해 말했다.

"우리가 지금 가려는 곳이 타라스의 지하 하수도거든."

내 말을 들은 에이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

.

.

게임으로 치자면 0-3스테이지라고 표기되는 곳.

그곳에 내가 노리고 있는 히든이 숨겨져 있었다.

…히든 말고도 수많은 적 역시 숨어 있다는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레브, 그거 알아? 타라스 지하 하수도가 고대의 던전을 개조해서 만든 거라는 거?"

"그래? 하기야...."

나는 에이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임 내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 봤을 때, 평범한 하수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거의 다 도착했어. 이쪽이야."

나는 에이미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게임에서야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저절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갔으니 딱히 길을 찾을 필요가 없었지만, 이곳에서의 난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이미가 없었다면, 주어진 나흘 동안 헤매기만 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직도 그 골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에이미를 따라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해안가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로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집들이....'

그야말로 간신히 비만 피할 정도의 수준의,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건물들이 사방에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여기에 지하 하수도 입구가 있다고...?"

"그렇다니까. 뭐, 하수도 오물 배출구라는 게 더 정확하긴 하겠지만.... 어쨌든간에 하수도 내부로 들어갈 수는 있어."

"…으음."

빈민촌에 다가설수록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나는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봐 왔던 타라스의 거리는 약과에 불과했다.

더러운 오물들이 굴러다니는 거리에는 헐벗은 아이들이 텅 빈 눈동자를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이들 특유의 생기라고 할 만한 것들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산다고...?"

나도 모르게 탄식에 가까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놀라지 마. 기분 나쁘니까. 나도 예전에는 이 근처에서 살았거든."

갑자기 들려온 에이미의 말에 난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찰스가 날 구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거나 창녀가 되었을지도."

에이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타라스에서는 되게 흔한 일이야. 그러고 보면 레브는 은근히 뭐랄까… 있는 집에서 자란 티가 난달까?"

"...."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비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심지어 벌레 나오던 내 반지하 자취방마저도....

"레브, 이곳에서 아이들이 주로 하는 일이 뭔 줄 알아?"

"…뭔데?"

"바로 하수도에서 떠내려오는 시체를 뒤지는 일이야. 하수구를 따라 흘러오는 시체의 주머니를 뒤져서 뭐 쓸 만한 거 없나 살피는 거지."

"시체… 가 많이 떠내려오는 거야?"

나는 겨우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바로 타라스라고, 타라스. 사람 몇 명 죽어 나가는 건 이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범죄 조직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시체 유기 방법이기도 하고."

에이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그녀가 이 광경과 상황에 무감하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불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빈민촌 안쪽으로 걸어가자, 텅 빈 눈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우리 주위에 점점 몰려들었다.

"…배고파요. 한푼만 주세요...."

"도와주세요...."

힘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지나 시야를 어지럽혔다.

보고만 있어도 죄책감이 들 정도.

그때였다.

"레브, 정신 차려. 이 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이 애들, 아저씨 생각만큼 순수한 애들은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에이미는 내 근처에 있던 한 아이의 팔을 잡아챘다.

"아악...!"

나는 깜짝 놀라 에이미를 말리려고 했지만, 아이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말을 멈췄다.

…아이의 손에는 아까 잡화점에서 외상으로 구매한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여러가지 작은 물건들을 담을 만한 게 필요했기에 일단 외상으로 사고 허리춤에 달아 놨던 물건이었다.

저걸 대체 언제...?

"얘들아, 꺼져 줄래?"

에이미는 아이의 손에서 주머니를 빼앗아 나에게 건넨 후, 주위 아이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재수 없어."

"개같은 년! 죽여 버릴 거야!"

아이들은 살벌한 욕을 내뱉으며 나와 에이미를 번갈아 쳐다봤지만, 에이미가 품에서 비수를 꺼내자 천천히 물러나 사라졌다.

살아 있는 유령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입구라서 애들밖에 없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조심해야 돼. 이제부터는 내 뒤만 따라와."

에이미는 그렇게 말하며 쓰고 있던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그걸 본 나 역시 잡화점에서 외상으로 구매한 로브를 더욱 동여맸다.

빈민촌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거리는 점점 더 지저분해졌다.

거리에는 오물들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역시 널브러져 있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간혹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골목 귀퉁이마다 거적때기를 둘러쓴 부랑자들이 보였고, 개중 일부는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만약 이런 대낮이 아닌 늦은 밤이었다면, 당장이라도 강도로 돌변하지 않았을까?

…혹은 지금 당장 돌변할지도 모르고.

"이쪽이야."

에이미의 인도를 따라 지저분한 골목을 벗어나니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 도착했다.

각종 쓰레기가 파도에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레브, 저기 보이지? 저게 하수도 입구야."

에이미가 손가락을 들어 해변 구석에 있는 반쯤 부서진 구멍을 가리켰다. 그 구멍에서는 검은 오수가 바다를 향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악취가 실려 이곳까지 닿았다.

"저기 들어가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한… 6년 만인가?"

에이미가 그곳을 바라보며 감회가 새롭다는 듯 말했다.

끊임없이 검은 오수가 흘러나오는 그늘진 구덩이는 끊어진 철창과 맞물려 마치 마수의 입처럼 보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일부러 저곳에 들어가는 일은 없겠지.

저런 곳에 자진하여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미소가 새어 나왔다.

"자. 들어가자."

멀지 않은 곳에 우리의 목적지가 있었다.

.

.

.

불빛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우리는 랜턴의 불빛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이것도 잡화점에서 외상으로 산 물건이었다.

총외상이 얼마냐니까, 음흉하게 웃던 잡화점 노인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여기서 그래도 돈 좀 벌 수 있으니까 문제… 없겠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외상을 갚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갑자기 랜턴이 꺼지지는 않겠지?"

어둠 속에서 에이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런 말 하면 실제로 발생하는 거 모르냐?"

나는 에이미에게 한 번 구박을 주며, 손에 들고 있던 랜턴을 앞으로 뻗어 보았다.

랜턴의 불빛은 멀리 가지 못하고 어둠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등유는 충분히 챙겨 왔지만, 랜턴 자체는 하나뿐이었기에 무엇보다도 랜턴의 안전에 신경을 써야 했다.

'횃불도 가져오긴 했지만....'

횃불은 랜턴과 비교했을 때 편의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랜턴을 잃게 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으… 저것들은 다시 봐도 적응되지는 않네."

에이미가 바닥을 기어다니는 구더기와 벌레들을 보며 말했다.

그 바로 근처에는 팔뚝만 한 쥐가 찍찍- 소리를 내며 뭔가를 먹고 있었다.

…인정해야겠다.

내가 이 하수도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아마 내가 비위가 좀만 더 약한 사람이었다면, 프롤로그 챕터를 영원히 깨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 하수도 양쪽으로 소로가 나 있었기 때문에 구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악취나 벌레 같은 것까지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에이미,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어딘지 알고 있다고 했지?"

"응. 딱 거기까지만 가봤어. 그 밑으로 내려간 얘들은 거의 돌아오지 못하거든."

고대의 던전을 개조한 하수도인 만큼, 지하 1층 밑으로 몇 개의 층이 더 존재했다.

1층만 하수도로 쓰이고, 그 밑은 미지의 공간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

'알고 있다고 해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

나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지하 하수도에는 사람이 아닌 몬스터라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곧 거의 확실한 확률로 그것들을 만나게 될 터였다.

'괜찮아. 진정하자. 죽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데, 뭘 두려워하는 거냐....'

캬...!

"응?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귓가를 스치는 희미한 소리에 에이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못 들었는데?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에이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도 난 쉽게 안심할 수가 없었다.

에이미는 내 표정을 보고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그래도 지하 1층에서 몬스터를 만났다는 소리는 들은 적...."

캬아아-!

"…미친."

에이미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8화

이번에는 우리 두 사람의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기 때문에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에이미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람 소리는 아니겠지?"

"사람이면 그게 더 무서울 것 같은데."

나는 짧게 대답하며 머릿속으로 지하 하수도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종류를 빠르게 떠올렸다.

지하 고블린, 거대 거미, 변형된 쥐 등등.

그중에서 저렇게 고함을 지를 수 있을 만한 개체는 역시....

'…지하 고블린인가?'

2레벨의 몬스터로, 지하 하수도 2~3층에 주로 출몰하는, 그다지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다.

힘은 당연히 성인 남자보다 약했고, 간단한 무기만 있어도 제압 가능한 수준....

'…문제는 실제로 싸워 보는 건 처음이라는 거지.'

나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장검에 손을 뻗었다.

이것만큼은 외상이 아니었다.

그런 단검으로 무슨 전투를 하냐면서 에이미가 나에게 선물해 준 검이었다.

스르릉-

나는 랜턴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에 천천히 검을 뽑았다.

긴장으로 인해 손이 땀이 찼다.

인간도 동물도 아닌 미지의 존재들과의 첫 조우.

긴장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악마화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자제해야 해.'

쿨타임이 3시간이라 남용하면 정말 위급할 때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에이미가 어느새 양손에 비도를 든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브, 검술은 할 줄… 아는 거지?"

"…아니."

"검 잡는 법 보니까, 그럴 것 같았어. 괜히 걸리적거리지 말고, 뒤에 있어."

그렇게 말하며 에이미가 앞으로 나섰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부탁한다!

나는 잽싸게 뒤로 빠졌다.

에이미의 전투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타다다닥!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내 자그마한 악귀 같은 것들이 랜턴의 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게임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지만, 저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 기묘한 혐오감이 일었다.

다행히 숫자는 3마리에 불과했다.

"후...."

에이미는 신중하게 심호흡하더니 달려오는 고블린들을 향해 손에 든 비도를 날렸다.

쉐에엑--

세 자루의 비도가 어둠을 뚫고 고블린들의 미간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고, 마치 도미노처럼 고블린들이 차례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야말로 순식간.

나는 순간적으로 궁금증이 치솟아 입을 열었다.

"에이미, 너 레벨이 몇이야?"

"레벨?"

아. 순간, 게임과 혼동해 버렸다.

이 세계에서는 레벨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에이미는 레벨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듯했다.

"…3레벨이라고 찰스가 그랬던 것 같은데. 마나가 좀만 더 쌓이면 곧 4레벨도 될 수 있을 거랬어."

에이미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자연스러운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레벨이라는 거… 실제로도 쓰는 거였어?"

"뭔 소리래? 어디 섬에서 왔어? 레벨 개념이 정립된 지 벌써 수백 년이 넘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에이미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호오....

레벨을 진짜 쓰는구나...?

이렇게 되면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기 훨씬 쉬워진다.

나는 희소식에 속으로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찰스는 몇 레벨인데?"

"찰스? 잘 모르겠어.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안 가르쳐 주더라고. 쳇."

에이미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블린들의 사체를 향해 다가갔다.

"뭐… 할려고?"

"비도 뽑아야지. 비도가 땅에서 솟아나는 줄 알아?"

궁시렁거리던 에이미가 쭈그려 앉아 고블린들의 머리에 박혀 있는 비도를 뽑기 시작했다.

살벌한 소리가 하수도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 기묘한 광경을 지켜봤다.

죽은 몬스터와 그 몬스터의 시체를 뒤적거리는 소녀.

이게 현실이라니....

참으로 비현실적이었다.

"…원래 이 위쪽에는 잘 나오지 않는 녀석들인데, 어떻게 된 걸까?"

고블린들에게서 비도를 갈무리한 에이미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아래에 저 자식들을 올라오게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겠지."

"…숭배자들을 말하는 거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의 표정이 긴장으로 살짝 굳었다. 세간에 떠도는 숭배자들에 대한 불길한 소문이라도 떠올린 모양이었다.

"쫄았냐?"

"…누, 누가 쫄았다고 그래?! 그런 자식들 한주먹 거리도 안 된다고!"

에이미는 발끈하며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는 자세가 살짝 어설픈 게 여전히 긴장한 것 같기는 했다.

'적당한 긴장은 해 두는 편이 좋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에이미가 말한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는 철창으로 막혀 있었던 듯했지만, 지금은 간신히 흔적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고, 휑하니 뚫려 있었다.

"…이 밑으로 내려가면 나도 아무것도 몰라."

에이미가 그 시커먼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커먼 구덩이는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내가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에이미가 내 어깨를 툭 건들며 입을 열었다.

"…뭐 해. 안 내려가?"

"내가 먼저 가… 야겠지?"

"그걸 말이라고...."

에이미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저씨, 몇 살?"

"스물여섯...."

"나는 몇 살일까?"

젠장. 두려움 앞에서 나이 따위는 상관없다고!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잠자코 구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이 이상 추해지는 건 사양이었다.

"그럼 입구에 밧줄을 먼저 걸고 그다음에 내려갘-!"

말을 하던 도중 나는 바닥의 진흙을 밟고 그대로 구멍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레브으으으-!"

에이미의 비명이 내 뒤를 따라 구멍 안으로 타고 들어오는 것을 들으며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

.

.

"오빠! 엄마가 밥 먹으래!"

"…5분만."

"아 진짜! 나는 말했다?!"

방문이 쾅! 하며 닫혔다.

하여튼 쟤는 살살이라는 걸 몰라.

나는 눈을 감은 채 이불의 포근함을 조금 더 즐겼다.

이 포근함이야 말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

…그래도 이제 슬슬 일어나야 겠지.

이 이상 미적거리다가는 엄마가 와서 내 등짝에 스매싱을 날릴지도 모르는 일.

"레브! 일어나!"

"…일어난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또 온 여동생을 향해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쟤는 참을성이라는 게 없는 건가?

'근데 왜 나를 레브라고...?'

눈을 뜬 순간.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에… 이미?"

내가 깨어나자 에이미의 금색 눈동자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다행이다."

그제야 나는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한 명백한 자각을 할 수 있었다.

"나 살… 았네?"

"생각보다 구멍이 그렇게 깊지는 않더라고. 목부터 떨어졌으면 아마 죽었을지도?"

"…끄응."

에이미의 살벌한 말을 들으며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순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찌저찌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은 나는 천천히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났어?"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어."

에이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램프로 주위를 비추었다.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던 하수도와는 달리 이 밑은 완전히 자연 동굴처럼 보였다.

"내가 램프를 들고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겠는데."

내려가기 위해 에이미에게 램프를 건네주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굴에서 빛 한 점 없이 움직이기란 불가능했을 테니까.

"레브, 미안하지만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레브가 일어나기 전에 근처에서 몬스터 울음소리를 들었거든. 아마 놈들이 레브가 굴러떨어질 때 난 소리를 들은 모양이야."

"젠장...."

에이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움직여야 했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소리에 예민하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후우… 읍!"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강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괜찮아...?"

"흐으.... 뭐 움직일 만하네."

에이미는 걱정된다는 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정 힘들면 올라가서 다음에 다시 오는 것도...."

"아니. 계획대로 하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 돼?"

에이미의 물음에 나는 품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다.

에이미는 호기심을 느꼈는지 가까이 다가와 내가 꺼낸 종이 뭉치를 바라봤다.

아침에 이 지하 하수도의 지형을 생각나는 대로 그려 놓은 지도였다.

이 지하 하수도 역시 타라스 뒷골목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복잡한 것으로 유명했기에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특징적인 장소 몇 곳과 그 주위의 길만큼은 똑똑히 기억이 났다.

'문제는…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다는 건데.'

아무래도 들어온 입구가 내 예상과는 다른 곳이었기에 내가 아는 장소가 나올 때까지는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출발하자. 가다보면 내가 아는 장소가 나올 거야."

"그거 맞는거… 지?"

에이미가 살짝 못 미덥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듣기에도 못 미덥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한번 믿어 봐. 반드시 그렇게 될 테니까.'

"…알았어."

나는 에이미에게 램프를 받아 든 후에 앞쪽으로 보이는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통로의 너비는 성인 3명이 나란히 서 있으면 가득찰 정도로 꽤 좁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높이가 상당히 높다는 것일까.

우리는 램프의 불빛을 최대한 약하게 한 상태로 조심조심 전진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에이미와 나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레브, 하나 물어봐도 돼?"

그때 갑자기 에미이가 정적을 깨고 나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뭔데?"

"레브는 어쩌다 탐색자가 된 거야? 그것도 데모닉이?"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어쩌다 탐색자가 됐냐고?

취업 못 하고 오랜만에 게임이나 한번 해 보려다 이곳에 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어내기로 했다.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뭐 흔한 사연이지. 가족들이 숭배자들에게 죽고, 복수하기 위해 정처없이 떠돌다가 죽어 가는 탐색자와 우연히 만나서 그 유지를 이어받게 된 거야."

"…아, 그래? 괜한 걸 물어봤네. 미안."

가족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에이미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 쓰지 마. 꽤 오래되기도 했고...."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너무 슬퍼 보이는데?"

"어? 내가?"

나는 흠칫 놀라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떠올려 버린 모양이었다.

"…내 부모님도 살해당했어."

"어...?"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에이미를 바라봤다.

그녀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타라스에서는 흔한 일이지 뭐. 그때 내가 8살이었나...? 그랬을 거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집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놈이 달려들었거든."

"…그놈?"

"어. 그 새끼.... 얼굴을 복면을 쓰고 있어서 알 수 없었지만, 그놈 목소리, 눈빛만큼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나."

에이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 안에 깃들어 있는 사무치는 원한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유는 알아?"

"글쎄. 그 당시에는 강도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요즘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더라고."

"뭔데?"

"놈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어."

"돈이… 아니었다고?"

"응. 강도라면 부모님을 죽이고 난 뒤에, 금품을 뒤지거나 했을 거야. 그런데 놈은 그러지를 않았어. 그냥 부모님을 죽인 뒤에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지."

"…너를 가만히 쳐다봤다고?"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부모님을 죽인 살인마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볼 때 대체 그녀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응. 마치 내 반응을 관찰하는 것 같았어. 분노에 떠는지,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 공포에 물들었는지 그런 걸 관찰하는 듯한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나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그대로 사라졌어."

"...."

말을 들어 보면 원한에 의한 것도, 쾌락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의 짓도 아닌 것 같았다.

관찰했다니....

도대체 무엇을 관찰했다는 말인가.

"그놈이 정확히 뭘 바라고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그놈을 만난다면…, 그때는...."

에이미의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9화

"레브… 저기 좀 봐."

어둠 속에서 한참을 이동하던 도중 에이미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희미한 불빛의 도움을 받아 살펴보니 천장에 무언가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엥? 저것들을 찾고 있었다고?"

에이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들은 바로 이 지하 하수도에서 가장 빈번하게 출몰하는 시체거미라는 몬스터이었다.

고블린과 마찬가지인 2레벨로 시체를 주식으로 삼고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놈들이었다.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시야가 굉장히 좋지 않다는 것.

다만, 내가 찾고 있던 것은 저 시체거미라기보다는 저놈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 군락지였다.

왜냐하면 내가 찾고 있는 히든이 이 군락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네.'

이대로 조용히 돌아서 가기만 하면, 순조롭게 히든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에이미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는 조그만 소음이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이 어두운 공간에서 덩치가 소형견만 한 거미 수십 마리에게 쫓기게 될 터였다.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각각의 객체로서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지금 저 천장에 붙어 있는 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소리없이 시체거미 군락지 밑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위에서 놈들이 언제든지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에이미는 나보다 훨씬 기척을 죽이는 일에 익숙한 듯, 뒤돌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 역시 저 거미들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시체거미의 군락지를 천천히 돌아 나갔다.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만큼 갑자기 뭔가를 건드리거나 하는 바보 같은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는 말이다.

"-----!"

저 먼 곳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않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키이익-

케에에에....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고개를 올려 보니 어둠에 휩싸인 동굴 천장에서 노란 안광이 수없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에이미, 도망-"

"튀자!"

에이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참 귀신같은 생존 본능이었다.

타다다다닥!

등 뒤에서 거미들이 땅바닥에 수없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나는 그 소름 끼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저만치 에이미가 뛰어가는 게 보였다.

"에이미! 그쪽이 아니야! 그쪽은 막다른 길이야! 왼쪽으로 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근처 지리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

"이런 미친! 어디서 난 소리야아아아! 누군지 모르겠지만 가만 안 둘 거야!"

에이미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조용히 하고 거기서 오른쪽!"

에이미는 내 말에 기민하게 반응을 하며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 레브! 여기 막혀 있는데?!"

"그게 맞아!"

"에? 그게 대체 무슨… 켁!"

나는 멈춰 서 있는 에이미의 뒷덜미를 낚아챈 후에 막혀 있는 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들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거기 막혀 있다니까!"

에이미가 버둥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설명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시체거미의 속도가 내 예상보다도 더 빨랐다.

나는 그대로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스르르륵!

쿠당탕!

내 몸이 벽을 투과해 그 안쪽에 나동그라졌다.

"방금 무슨 일이...."

에이미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렸다.

키이이익-!

시체거미들의 성난 울음소리가 우리가 넘어온 벽 바깥에서 쉴 새 없이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들처럼 이 벽을 통과해서 넘어오는 시체거미는 없었다.

"왜 저놈들이 여기에 못 들어오는 거야...?"

"이곳에는 인지를 방해하는 마법이 걸려 있거든. 즉, 저 벽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 못한 존재들에게 저 벽은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거지."

그 증거로 시체거미들은 벽 바깥에서 불쾌한 울음소리를 낼 뿐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통과한 벽에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벽을 통과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의 설명이 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에이미가 누가봐도 하나도 이해 못 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상관없겠지.

"레브, 그런데 여기는 대체 뭐 하는 곳이야? 평범한 장소 같지는 않은데."

"여기는...."

에이미의 말에 나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꽤 커다란 공동이었다.

공동의 한가운데에는 제단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고, 짐승 모양의 석상 하나가 그 제단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

내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

나는 에이미를 향해 말했다.

"여기는 타라미엘의 성소야."

"타라미엘의 성소...?"

"응. 이 지하 하수도에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한 비밀 장소 중 하나야."

어비스에서 히든이라 부르는 것들은 단순한 아이템들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다양한 것이 히든이라는 말에 포함되는데.

그중에는 장소도 역시 포함이 됐다.

일명 히든룸이라 불리는 숨겨진 장소들.

0-3 스테이지, 지하 하수도에 있는 히든룸이 바로 이 타라미엘의 성소였다.

"하수도 밑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에이미는 나직한 감탄을 터트리며 제단 쪽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지도에 있잖아."

나는 지도를 펴 에이미에게 타라미엘의 성소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확실히 존재하기는 했다.

"이거… 레브가 그린 거잖아."

안 속네.

나는 낮게 헛기침을 터트린 후, 입을 열었다.

"큼. 이 장소에 대한 단서를 옛날에 얻은 적이 있거든. 이 지도는 그걸 토대로 그린 거고."

"…그렇구나. 이런 장소가 존재했다니...."

에이미가 두리번거리며 안쪽으로 향했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는 그녀와는 달리 나한테는 명확한 목적지가 존재했다.

바로 공동의 중앙에 있는 제단이 내 목적지였다.

저곳에 바로 내가 노리는 히든이 숨어 있었다.

'이것만 얻으면 앞으로의 여정은....'

그그그극-

"응?"

"레… 브? 이상한 소리 못 들었어?"

"들었… 는데."

나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에이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레브… 저거 원래 움직이는 거야?"

에이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짐승의 얼굴에 천사의 날개를 가진 석상이 존재했다.

석상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젠장."

내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저 석상의 정체를 바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건...!'

"에이미! 뒤로 물러나! 가고일이야!"

나의 외침과 동시에 석상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는 갈퀴 같은 손가락으로 옆에 있던 할버드를 집어 들고 그대로 쏜살같이 에이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끄으읍!"

한바탕 폭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나와 가고일이 서 있었다.

가고일의 할버드는 에이미의 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닥에 큰 흔적을 새겨 놓은 상태였다.

악마화해서 간신히 검으로 할버드를 쳐 낸 것이다.

"레, 레브! 괜찮아?!"

등 뒤에서 깜짝 놀란 에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할버드를 뽑아내려는 놈의 움직임을 간신히 제어하며 소리쳤다.

"크윽! 빨리 저 제단으로 가서 안쪽에 있는 구슬을 꺼내...!"

그그그극-!

가고일의 힘은 악마화한 나를 능가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놈을 지금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가고일은 4레벨의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즉, 이 프롤로그 챕터의 보스인 아이히만 남작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

'저 석상이 가고일이었다고...?!'

프롤로그를 수없이 많이 했지만, 이 석상이 움직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에이미...! 빨리!"

"아, 알았어!"

뒤쪽으로 에이미가 제단을 향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본 가고일이 나를 떨쳐 내고 그녀를 쫓아가려 몸을 덜덜 떨었다.

"안 되지...!"

꾸우우욱-!

나는 가고일이 움직이지 못하게 할버드를 강하게 쥐었다.

놀랍게도 악마화한 나는 4레벨의 가고일을 붙잡아 둘 수가 있었다.

'제압할 수는 없어도 잠깐 못 움직이게 할 수는 있-!'

그때, 가고일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면서 나를 덮쳤다.

퍼억-!

최선을 다해 온몸을 비틀었지만, 오른쪽 어깨가 돌로 된 날개에 스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거의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땅바닥에 처박혔다.

"커헉...!"

하지만 아파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가고일이 자유로워진 할버드를 위로 치켜세운 후 나를 향해 내리쳤기 때문이다.

쾅! 쾅! 쾅! 쾅! 쾅!

석실 안에 먼지와 돌 파편이 연신 튀었다.

나는 자리에서 데구르르 구르며 어떻게든 피해 냈다. 내 몸이 돌가루를 뒤집어 써 금세 뿌옇게 변했다.

그워어어어어-!

가고일은 내가 죽지 않은 것에 신경질을 느꼈는지 거친 울음을 토해 냈다.

그사이에 간신히 일어난 나는 숨을 고르며 가고일을 주시했다.

그때까지도 한 가지 의문이 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저놈은 대체?'

단순한 조각상인 줄로만 알았던 석상이 사실은 가고일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말인즉,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정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후우우웅---!

가고일이 거대한 날개를 펴고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날아 자신의 할버드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

나는 납작 엎드려서 할버드를 피해 냈다. 거센 풍압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나갔다.

.

.

.

에이미는 허겁지겁 달려서 제단에 올라선 후, 제단을 살폈다.

일단, 되는 대로 아무 데나 밀어 봤지만 제단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레브! 이거 어떻게 여는 거야?!"

그녀는 갖가지 기묘한 자세로 가고일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는 레브를 향해 소리질렀다.

저런 엉망인 자세로 용케도 거센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가운데! 으헉! 문양… 이 새겨진 돌을! 젠장! 밀어 넣어!"

문양이 새겨진 돌?

에이미는 서둘러 제단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단의 중심 부분에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불룩 튀어나온 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빨리...! 나 죽는다고! 어어?!"

"아이 씨! 조금만 버텨!"

이 돌을 제외하고는 다른 특별한 곳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에이미는 가운데 튀어나온 돌을 힘껏 밀어 넣었다.

쿠우웅- 철컥!

그러자 제단 안에서 뭔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더니, 제단의 상단부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살짝 열려진 틈에서 하얀 빛이 눈부시게 뿜어져 나왔다.

에이미가 그 빛에 홀려 몽롱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때, 뒤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에이미! 놈이 그쪽으로 간다! 피해----!"

"...!"

깜짝 놀란 에이미는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가고일이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광풍을 이끌며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거대한 할버드가 제단과 그녀를 동시에 양단하려는 듯 거세게 휘둘러졌다.

쾅---!

.

.

.

나는 가고일이 내려찍은 제단을 멍하니 쳐다봤다.

먼지 구름이 피어올라 자세한 상황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만약 할버드에 맞았다면....

"…에, 에이미!"

젠장…!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우두커니 서 있는 가고일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후드드득!

가고일은 머리가 반쯤 함몰되었음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죽은 건가...?

아니 그것보다...!

"에이미! 살아 있는 거야? 살아 있으면 대답 좀 해 봐! 에이미!"

그 어떤 순간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정적이 암실에 내려앉은 순간.

"케헥! 콜록! …콜록!"

돌무더기를 해치고 손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이 에이미의 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본 나는 단숨에 달려가서 그 위에 쌓인 돌더미를 치웠다.

"에이미! 괜찮아?!"

"…그럭저럭."

돌가루를 뿌옇게 뒤집어쓴 에이미가 힘없이 대답했다.

군데군데 긁혀서 출혈이 살짝 보였지만,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에이미가 돌무더기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레브가 말한 게 이거 맞지?"

성스럽고 하얀 빛을 내뿜는 주먹만 한 구슬.

바로 이 구슬이 내가 지하 하수도에서 얻으려고 했던 히든인 타라미엘의 눈물이었다.

"…맞아."

"원하던 건 아니었어? 표정이 왜 그래?"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나를 보고 에이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타라미엘의 눈물은 이 챕터를 클리어하기 위한 필수 히든인 만큼 당연히 좋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저 빛에서.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