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에이미의 옆에는 흔한 갈색 로브를 둘러쓰고 있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 이쪽에만 앉는 것 같다?"
나는 어제와 똑같은 좌석에 앉아 있는 에이미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2회차 때도 이 자리였던 것 같은데.
"아. 여기가 내 전용석이야. 얼른 앉아. 음식은 미리 시켜 놨어."
"그래? 근데 이 화상은 왜 데리고 나온 거야."
내 말에 갈색 로브를 입고 있던 인영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그리고 로브 밑으로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나도 먹어야 살지 않겠나? 그리고 우리 이제 한배를 탔다고 볼 수도...."
로브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오른손에 보이는 심한 화상 자국.
바로 다미안이었다.
"한배를 타긴 누가 한배를 타! 도움이 안 되기만 해 봐! 지하 하수도에서 시체로 발견될 줄 알라고!"
다미안의 말에 에이미가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지금 다미안은 아스트리아에 의해 마기가 봉인되어 평범한 일반 남성만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에이미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그 봉인술이 엘라인 교단의 성기사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기본 기술이라고 들었을 때는, 나도 살짝 오싹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 마기를 봉인할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탁. 탁. 탁.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찰스가 어느샌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가 우리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응시했다.
"에이미,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다니는 거냐."
"찰스는 몰라도 돼. 어차피 도와주지도 못하잖아."
"어허! 무슨 소리를. 내가 꼴은 이래도 아직 한창이라고!"
"예예~ 됐고, 식사는 언제 나오는데? 주문한 지 한참이나 지났어."
"곧 나온다, 이년아! 됐냐!"
"빨리 줘. 배고프다고!"
"…후. 앓는니 죽지, 내가. 저런 걸 제자라 키워 놔 가지고. 아이고 내 팔자야."
찰스는 한숨을 내쉰 후 절뚝거리며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에이미, 찰스한테 도와달라고 할까?"
"응? 왜 그래야 하는데?"
에이미가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이미 찰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 회차에서도 들은 상태.
말 꺼내는 것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야, 찰스가 부상으로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금패 용병이잖아.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싫어.'
에이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살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2회차에는 이 말을 자기가 먼저 꺼냈으면서, 뭐가 바뀐 거지?'
"그 이유… 를 물어봐도 돼?"
"우리에게는 아스트리아가 있잖아. 언니가 있는데, 굳이 부상자를 데리고 가 봐야 짐만 될 뿐이야."
"그렇지만 저번...."
"저번...? 무슨 저번을 말하는 거야?"
에이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큼.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급히 실수를 수습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한 가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럼… 만약 아스트리아가 없고, 너와 나 단 둘이 이 일을 해결해야 됐다면… 도움을 청했을까?"
"흐음…. 레브랑 나 단 둘이라고? 그러면 무조건 도와 달라고 했지."
에이미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
그러니까, 내가 믿음직하지 못했다는 거네.
2회차의 최후를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기는 했다.
그때, 에이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도 찰스의 창고에서 쓸 만한 장비들은 털어 가야겠다. 히히!"
나는 에이미의 물욕에 사로잡힌 미소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찰스가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다니는지 깊이 공감했다랄까.
'어쨌든, 이번 회차에서는 어떻게든 프롤로그를 클리어한다.'
찰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건 살짝 아쉬웠지만, 아스트리아가 그 이상을 보여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프롤로그를 클리어하면 앞으로 남은 챕터가....
'까마득하네....'
어비스의 남은 챕터를 떠올리자 살짝 어지러웠다.
이제 겨우 프롤로그인데, 언제 마지막 챕터에 도달하게 될지....
물론, 그전에 내가 미쳐 버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레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분명 해낼 겁니다."
잠깐 상념에 잠긴 내 표정을 오해했는지, 아스트리아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결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
.
"레브, 저기야."
어둠 속 멀리 불이 켜져 있는 남작의 성이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남작성은 보기만 해도 스산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를 꺼릴 정도.
"이봐, 이제 네 차례야."
나는 옆에 서있는 다미안을 향해 말했다.
"…이곳에서 일이 끝나면 날 풀어 주겠다는 약속이나 잊지 마라!"
다미안은 거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그를 향해 에이미가 질문을 던졌다.
"성의 지하 감옥에 아이들이 있다고 했지?"
"그래. 내가 마지막에 봤을 때는 분명 그곳이었다."
"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당신이 죽을 거니까."
에이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려 있었다.
다미안은 뭐라 말하려 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만두었다.
"시간이 됐습니다."
아스트리아가 구름에 걸린 달의 위치를 보며 말했다.
드디어 프롤로그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나를 잘 따라와라.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다미안이 앞장서서 남작의 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뒤를 잠자코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작성의 정문이 보였다. 횃불이 걸려져 있는 정문에는 투구를 반쯤 내려 쓴 병사 하나가 서 있었다.
우리는 그 모습에 살짝 긴장했지만, 이내 그 병사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개가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구를 내려 쓴 것은 눈을 가리기 위함이었나....
"큼!"
가까이 다가간 다미안이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병사가 허겁지겁 들고 있던 창을 들어 우리를 겨누었다.
"누, 누구냐!"
"간룬의 다미안이다. 얼마 전에 본 적 있지 않나, 우리?"
간룬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집단이었다.
대륙 남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마법 학회 중 하나로 불의 마법을 깊이 탐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 마법사님!"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병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풀어졌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로...?"
"남작님을 급히 만날 일이 생겼다."
"아, 그렇다면 제가 안쪽에 먼저 알리고...."
"비밀을 요하는 일이다. 남작님께는 마법으로 미리 연락을 해 두었으니, 너는 문만 열면 된다."
"그, 그렇습니까...?"
병사의 얼굴에 머뭇거림이 떠올랐다.
평범한 도시의 경비병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겠지만, 이곳은 타라스.
곧 병사의 얼굴에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뒤의 분들은...."
"내 부하들이다."
다미안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로브를 둘러쓰고 있었기에 병사는 별다른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지?"
다미안이 짜증 섞인 어투로 말하자 병사가 깜작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 금방 열어 드리겠습니다!"
병사는 커다란 정문 옆에 난 조그만 문 앞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경비병들이나 하인들이 사용하는 문인 것 같았다.
철컹!철컹!
관리가 안 되어 있는지 열쇠를 넣고도 한참을 힘주어 돌리고 나서야 간신히 문이 열렸다.
"밤길이 어두우니 조심하십시오!"
경비병의 90도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남작의 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상보다도 더 쉬워서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미안이 앞서 걸으며 말했다.
"감옥의 위치는 내가 아니까 날 따라오도록. …그런데 아이들을 구하고 난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거지? 계획은 세워 뒀나?"
"뭐 계획은 있지만, 너한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흥. 잘되길 빌지."
내 냉정한 대답에 다미안은 혼자 뭐라고 툴툴거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군요."
아스트리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 말대로 주변에서는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의식을 앞두고 웬만한 것들은 다 내보낸 거겠지. 사소한 실수라도 치명적으로 작용하니까."
다미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확실히 하인들 앞에서 그런 의식을 치를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감옥은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곳에도 병사 몇이 지키고 있을 테지만, 너희들이라면 문제없겠지."
다미안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마따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다. 입구가 보이는군."
그곳에는 세 명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정문의 경비보다는 삼엄해 보였다.
"어떻게 할 거지?"
다미안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까와 같은 방법이 통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아마 통한다고 해도 무조건 남작에게 한 명은 알리러 가겠지."
지금 이 지하 감옥은 남작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경비를 허투루 할 리가 없었다.
"…모두 제압하겠습니다. 아스트리아,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당연하다는 듯한 아스트리아의 목소리는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일단 다미안, 아까처럼 접근한다. 거리가 나오면 바로 그녀가 제압할 거다."
"…알았다."
다미안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세 사람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나자 경비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을 향했다.
"누구십니까."
외부인이라고 생각 안 했는지 경비병의 음성은 날이 서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를 충분히 경계하고 있음은 느껴졌다.
"나. 간룬의 다미안이다. 남작님에게 명령 못 들었나?"
다행히 조장으로 보이는 병사가 다미안의 얼굴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명령 말입니까?"
"지금 안의 것들에게 문제점이 발견되서 급히 온 것이다. 남작님에게 아무 말도 못 들었다니 이상하군."
"그렇습니까...?"
조장으로 보이는 병사의 얼굴에 긴가민가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니 남작님에게 전령을 보내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러도록 하게. 서둘러 줬으면 좋겠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조장이 말을 끝맺으려던 찰나, 아스트리아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이게 무슨...!"
퍽!
검집에 관자놀이를 강타당한 조장의 눈동자에서 빛이 흩어지며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아스트리아는 당황한 병사들이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섬광처럼 움직였다.
"컥!"
"켁!"
뒤통수와 턱을 얻어맞은 병사들이 마치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며 차례대로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병사들이 정신을 잃은 것이다.
"…와."
에이미의 짤막한 감탄사가 허공을 잠시 맴돌다 사라졌다.
아스트리아는 기절해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들은 결박해 놓고, 후에 이 일에 얼마나 가담했는지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을 정도면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겠지.
나는 조장으로 보이는 병사의 품을 뒤져 열쇠 다발을 꺼냈다.
열쇠가 상당히 많았지만, 감옥의 문을 여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쓰러진 병사들을 끌고 지하 감옥을 향해 내려갔다.
다행히 감옥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어두운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좁은 통로가 나왔다.
양쪽으로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는 철창들.
"이쪽이다."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다미안이 거침없이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조그마한 눈빛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겁먹은 눈빛들.
잡혀 간 아이들이었다.
대략 10명 정도의 아이들이 한곳에 갇혀 있었다.
"후앙...."
"쉿. 울면 또 때릴지도 몰라."
"개같은 새끼들...."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에 걸려들었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에이미를 힐긋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에이미의 고개가 휙휙 움직이고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그녀의 고개가 이내 한곳에 멎었다.
"레… 브, 찾았어."
그곳에는 콧잔등에 흉터가 있는 사나운 눈빛의 꼬마가 한명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얼굴에는 상당히 상처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기세가 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델! 아델! 나야! 에이미!"
에이미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젖히며 철창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아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 이미 누나?"
"그래 나야! 내가 구하러 왔어!"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델의 눈에 곧 물기가 차올랐다.
지금까지 눈에 품고 있던 독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다.
"누나! 흐아아앙...!"
꼬마가 철창 맞은편에서 에이미를 향해 덥석 안겨 들었다.
"에이미, 맞는 열쇠 찾아서 애들 좀 꺼내 줘."
내 말에 에이미가 후다닥 열쇠를 가지고 가 이것저것 끼워 넣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얘들아. 내가 다 구해 줄게!"
철컹철컹!
끼이익--
"저, 저희를 구해 주러 오신 거예요?!"
"고맙습니다. 흐어엉-"
갇혀 있던 아이들이 봇물 터지듯 뛰쳐나왔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어떻게든 첫 단추는 잘 끼워 맞춘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남작인가.'
"아스트리아, 저와 같이 바로 남작의 저택으로 출발하시죠."
우리는 아이들이 있던 감방에 위쪽에서 제압한 병사 셋을 집어넣은 후에 위쪽을 향했다.
지금부터는 신속함이 생명이다.
빠르게 남작을 처치해야만 불필요한 피해를 줄일 수가 있었다.
낡은 지하 감옥의 입구를 빠져나오던 순간.
아스트리아가 나를 밀치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무슨...?!"
챙!
동시에 울려 퍼진 뭔가 부딪치는 소리.
나는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상황을 살폈다.
어느새 검을 빼들고 있는 아스트리아와 바닥에 떨어진 화살 한 발.
만약 아스트리아가 아니었다면....
"쳇. 한 놈 죽이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비열한 목소리.
곧이어, 누군가 수풀 속에서 걸어나왔다.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별헤다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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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껄렁껄렁하게 걸어나오는 한 남자.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오는 수많은 발자국 소리.
성의 병사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에이미가 분노에 휩싸여 다미안의 멱살을 틀어쥐고 비수를 들이밀었다.
"너, 너 너! 배신한 거야?!"
"아니다!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진짜다!"
나 역시 다미안이 배신한 거라고 생각은 안 했다.
그랬다면 태연하게 우리 옆에 서 있기 전에 어떻게든 도망쳤겠지.
"어이, 쥐새끼들. 이 밤중에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실까? 어디 얼굴 좀 보여 주시지."
병사들의 맨 앞에 서 있던 갑주를 걸친 남자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침음을 흘렸다.
"기사 데온...."
"오. 날 알고 있나?"
껄렁껄렁한 남자가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정뱅이 기사. 맞지?"
"아앙?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 안 되지?"
"…오늘은 술을 안 마셨나 보군?"
"당연히 마셨… 이 아니라! 네놈들의 정체가 뭐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상대는 기사 데온을 포함해서 약 30명 정도의 병력.
아스트리아와 나만 탈출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뒤에는 10명의 아이들이 존재했다.
흘깃 돌아보니 아이들은 벌써 겁에 질려 있었다.
길을 뚫는다 해도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외통수인가....'
아무리 막장에 몰렸어도 궁금증은 해결해야 했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여기 침입한 것은 어떻게 알았지?"
"남작님이 갑자기 부르셔서 감옥 쪽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하셨다. 네놈들같이 허접한 도둑들이 함부로 드나들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거지."
'알람 마법 같은 건가? 다음에는 주의해야겠어. 그것보다 어쩔까....'
외통수라고는 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스트리아와 둘이서 여기 있는 전부를 쓰러트리는 것.
하지만, 전투 도중에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남작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는 점.
게임처럼 남작이 자신의 저택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남작은 다미안과는 달리 뛰어난 흑마법사로,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직은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곧 남작에게 소식이 갈 거야. 그럼 탈출도 힘들어질 수 있어.'
그때였다.
"레브."
검을 들고 지하 감옥의 입구를 단단히 막고 서 있던 아스트리아가 나를 불렀다.
"예. 듣고 있습니다."
"남작을 혼자 상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아스트리아의 갑작스런 물음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남작에게 가십시오."
아스트리아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성기사라는 걸 밝히면 저들은 함부로 덤비지 않을 겁니다. 만일 덤벼든다 해도 레브보다는 제가 이곳을 지키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이 조그만 입구 하나만 방어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으니까요."
아스트리아의 말이 맞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30명의 병사들을 상대로 아이들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예, 레브. 그대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스트리아는 쓰고 있던 로브를 내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찬란한 광채가 어둠을 뚫고 남작성을 밝혔다.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신성한 빛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외곽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라 하더라도 눈만 있다면 이 광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서, 성기사님이다!"
"아아- 엘라인이시여!"
몇 명의 병사가 동요해서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성기사란 존재가 이 세계에서 갖는 권위였다.
"멍청한 놈들! 저 여자는 이 성에 무단으로 들어온 침입자에 불과하다! 성의 재화를 노리고 침입한 도둑일 뿐이야! 성기사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데온의 외침에 병사들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그들이 생각하는 성기사의 이미지와 전혀 매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빛은...."
"마법 같은 걸로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속지 마라!"
그때, 아스트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제 이름은 아스트리아 란 데 바할. 엘라인 교단의 성기사입니다! 저는 이곳 타라스에서 숭배자들과 관련된 심각한 이단 행위를 발견했고 그 행위가 아이히만 남작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러니 이 일에 관련되지 않은 분들은 뒤로 물러나십시오!"
"거짓말이다! 저자는 근거없는 헛소문으로 남작님을 모함하고 있어! 남작님이 그런 행위를 한 걸 본 사람이 있나! 그런 자가 있다면 당장 앞으로 나서라!"
혼란에 빠진 병사들의 얼굴을 본 데온이 다시금 외쳤다.
"그리고! 저 자가 진정으로 남작님께서 이단 행위에 가담하였다는 증거를 갖고 있었으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정문으로 정정당당하게 들어왔겠지. 하지만 봐라! 야음을 틈타, 성에 침입한 걸 너희들로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화,확실히!"
"남작님께서 그러셨을 리가...."
데온의 거듭된 설득에 몇 명의 병사들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병사가 망설이고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남작의 일을 모르고 있구나.'
지금 이곳에 있는 병사들 중 남작의 일을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사 데온과 그의 주변에 있는 병사들 몇 명만이 남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냐! 당장 저 여자를 잡아! 겉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에 불과하단 말이다."
"하, 하지만… 커억!"
털썩.
"무슨… 짓입니까?"
아스트리아가 분노하여 외쳤다.
데온이 망설이는 병사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흐흐! 더 궁금한 놈이 있으면 나서라! 명령에 따르지 않는 놈들은 필요 없으니까!"
"엘라인께서 당신을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흥. 사기꾼 주제에 신을 들먹이지 마라! 뭣들 하고 있는 거냐! 어서 저 여자를 잡으라니까!"
데온이 검을 빼 든 채로 주위의 병사들을 향해 윽박질렀다.
그제야 병사들이 마지못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스트리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에이미, 아이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있으세요."
"언니. 내가 도와...."
"다미안을 감시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스트리아의 짤막한 대답에 에이미는 잠깐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조심해요!"
"걱정 마십시오. 엘라인께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니. 어떤 어둠도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할 겁니다."
아스트리아는 짧게 성호를 긋고는 어둠 속을 바라봤다.
자신이 나서서 시선을 끌 때, 레브가 몰래 빠져나간 방향이었다.
'엘라인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
.
.
나는 달리는 몸에 힘을 줬다.
일이 좀 꼬이긴 했지만, 아스트리아라면 능히 버텨 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작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곳에서 병사들을 쓰러트리고 도망가는 판단을 내렸겠지.
(남은 유지 시간 : 17분 03초)
바크만을 죽인 이후로, 악마화의 유지 시간이 18분으로 늘어난 상태였지만, 남작을 처치하기에 충분한 시간인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죽을 각오로 해 봐야겠지.'
어차피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작을 처치해야만 했다.
다행히 남작의 저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저택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 무언가가 내 발길을 잡아끌었다.
'피 냄새....'
악마화로 인해 향상된 내 후각에 저택 안에 자욱하게 퍼져 있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자욱한 어둠.
그 순간.
머리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무언가.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뒤로 젖혀 그것을 피해 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피로 이루어진 화살 한 대가 벽에 꽂혀 있었다.
'역시… 벌써 준비를 한 건가?'
이윽고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지나가자 저택 안의 참경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 홀에는 저택의 시종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한데 모여들어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저 기하학적인 문양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블러드 문(Blood moon).
사람들의 피를 원천으로 하는 피의 구체를 소환하는 마법진.
그 모습이 마치 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달 같다고 하여 생긴 명칭이었다.
보스전에서 남작은 항상 저 마법을 사용하여 플레이어들을 맞이하곤 했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래서 몰래 오고 싶었는데.'
게임에서는 시스템상 몰래 오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현실이 된 지금이라면 블러드 문을 사용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하 감옥에서 들켜 버린 순간.
나는 이 광경을 직감했을지도 모르겠다.
터벅터벅!
그때,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남자 한 명.
"아이히만...."
우리 둘 사이에 짧은 대치가 끝나고 남작이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누구지?"
"레브라고 하는데."
"…모르는 이름이군."
남작이 나를 스윽- 훑어 내리다가 로브 사이로 삐쭉 튀어나온 내 오른팔을 발견했다.
"…데모닉? 데모닉이 어째서 나를 방해하는 거지?"
"음… 네가 나쁜 놈이니까?"
"하...! 본 남작을 우롱하는 건가, 지금?"
"그럴 리가. 나쁜 짓 하고 있던 거 맞잖아."
나는 주위에 널려 있는 시체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죽어 있었다.
남작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내뱉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희생이란 건 그럴 때 쓰는 단어가 아닐 텐데."
나는 악마화한 손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서로 간에 이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겠지.
남작 역시 그것을 깨달은 듯, 손을 휘둘렀다.
손짓에 이끌린 피들이 중앙으로 모여들어 구체를 형성하려 했다.
'지금!'
나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몸에 익숙하게 밴 타이밍이었다.
남작이 피의 구체가 떠오르길 기다리며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처럼 나도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놈!"
당황한 남작이 뒤로 물러나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반지가 빛나며 그의 앞에 피로 이루어진 막이 떠올랐다.
나는 무리하게 부딪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 박자 쉬고....'
남작이 사용한 마법은 정면에서 오는 공격을 흡수하는 피웅덩이라는 방어 마법.
초반 단계의 웬만한 공격으로는 저 마법을 뚫어 낼 수 없다.
하지만....
"안 부딪치면 그만이야!"
나는 바로 피웅덩이의 권역을 따라 옆으로 달려나갔다.
내 움직임에 놀란 남작이 황급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블러드문이 형성되는 것보다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바로 이 순간이 내가 원하던 타이밍.
피의 구체가 바닥에서 허공에 완전히 떠오르기 전까지 남작에게는 피의 웅덩이를 제외한 다른 방어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샤아악!
강하게 휘두른 내 검이 남작의 목을 향해 섬전처럼 뻗어 나갔다.
남작의 당황한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스-걱!
내 검에 잘린 무언가가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얕았나....'
"크아아아악!"
남작이 자신의 왼쪽 손목을 붙들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원래 있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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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2화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남작이 결정적인 순간, 손을 뻗어 내 검의 진로를 방해한 것이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대노한 남작이 나를 보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어느새 완전히 허공에 떠오른 블러드 문에서 피의 화살 여러 발이 튀어나와 나를 겨냥했다.
"죽여 버리겠어—-!"
팍! 파파팍!
나는 쉬지 않고 달리며 피의 화살들을 피해 냈다.
블러드문이 완성된 이후, 위력이 상승한 피의 화살들은 저택의 벽에 큼지막한 구멍을 뚫어 내고 있었다.
달리는 와중에도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한 방 맞으면 그냥 죽는 거 아니야?'
게임에서 저 화살들을 맞으면 HP가 감소할 뿐이었다.
물론 한 발, 한 발이 강력해서 세 방 정도 맞으면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이 정도 위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반드시 네놈을 잡아…서 살아 있는 채로 온몸의 혈액을 빼내 주마!"
"그거 참 무섭네."
"언제까지 그렇게 떠들 수 있을지 두고 보지!"
남작의 손짓에 따라 블러드문에서 대량의 혈액이 뽑혀 나왔다.
"가라! 찢어 죽여!"
남작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날아드는 피의 칼날.
피의 화살보다 한 단계 더 강한 혈마법이었다.
콰콰쾅—!
'이건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
나는 쉬지 않고 달렸다.
잠깐이라도 멈춘다면 그곳에 피의 칼날이 들이닥쳤으니까.
하지만, 훈련받지 않은 어설픈 몸놀림으로 피해 내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젠장...!'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각도로 날아오는 피의 칼날을 향해 나는 온몸에 힘을 끌어모아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흐읍!"
콰-앙!
강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몸이 붕 떠 그대로 뒤쪽에 있던 장식장에 처박혔다.
콰직!
후드드득!
장식장이 부서지며 그 위에 있던 것들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크하하하! 쥐새끼 같은 놈! 드디어 잡았다!"
남작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크흡… 쿨럭."
억눌려 있던 공기가 기침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위에 쌓인 각종 물건들을 헤치며 몸을 일으켰다.
'죽지는 않았네....'
어째선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어...? 미친 건가?"
"아니. 그것보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지?"
"왜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더 공격하지 않았지?"
내 물음에 남작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버러지같이 바닥에서 뒹구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지."
"그래? 내 생각은 다른데."
나는 뻐근한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무… 슨 헛소리지?"
남작의 의아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피의 칼날은 한 번에 최대 8연격. 그 이상은 사용이 불가능해. 그렇지 않아?"
"네놈이 그것을 어떻게...."
"그야. 네가 항상 8번까지만 썼으니까."
"…그게 무슨?"
다른 것은 몰라도 남작의 공격 패턴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진행한 프롤로그 챕터만 수십 번인데, 그것을 잊어버렸겠는가.
"원래는 마지막까지 피하고 공격 타이밍이었는데, 좀 아쉽네."
내 말에 남작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 너 따위가 이 마법에 대해 뭘 안… 다고!"
"너보다는 잘 알걸? 적어도 네가 쓸 수 있는 혈마법이 다섯 가지도 안 된다는 건 알지."
"...!"
남작의 경악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히만, 오늘 너의 죄 많은 인생을 끝내 주마. 기대하라고."
"건방진… 놈! 피의 칼날 말고도 네놈을 죽일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남작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블러드문이 꿀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뿜어져 나오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잠시 바닥에서 꿈틀거리더니 이내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몸통은 평범한 개와 비슷한데 대가리만 그 두 배 가까이 큰 괴상한 존재.
딱딱거리는 입 사이로 톱니 같은 이빨들이 무수히 솟아나 있었다.
'붉은 개. 나왔네.'
어비스를 플레이할 때도 악명이 자자한 놈이었다.
오죽하면 남작의 본체는 붉은 개라는 소리까지 나왔겠는가.
카캌카카캌?
딱. 딱. 딱딱!
붉은 개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더니 하늘을 보며 이빨을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해서 기분 좋은 건가?'
2회차 때 샤닐에게 산 채로 잡아먹혔을 때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샤닐에 비하면 저건 그냥 개일 뿐이다.
그냥 개치고는 입이 조금 크긴 하지만....
나는 긴장한 몸을 심호흡하며 다스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악마화의 영향 때문인지 공포감이 그리 크지는 않다는 것.
찹찹찹찹!
붉은 개는 바닥 주변에 떨어져 있던 살점을 핥아먹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화면 너머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역겨운 놈이었다....
남작은 그 개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나를 가리켜 외쳤다.
"자! 붉은 개여! 저 반푼이 악마를 갈갈이 찢어 죽여라!"
크르르르--!
잠시 나를 보며 으르렁거리던 붉은 개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 남작이 사용했던 피의 칼날보다도 더 빠른 속도.
심지어 이건 유도였다!
"흐읍!"
나는 손에 쥔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직선적이고 단순하지만 빠르고 강한 일격이 붉은 개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
'어디...?!'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붉은 개의 위치를 찾다가 뭔가가 위쪽에서 떨어져 내리는 기척에 몸을 옆으로 날렸다.
콰지직!
나는 붉은 개의 입 모양대로 찢겨져 나간 소파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정말 간발의 차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붉은 개가 입 안에 들어온 솜뭉치들을 퉤! 하고 뱉어 냈다.
아무거나 다 먹을 것처럼 생겨서는 저건 못 먹나 보지?
하지만 한가롭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일전에 보았던 피의 화살들이 줄지어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남작을 상대할 때 무서운 점.
선봉으로 붉은 개를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마법으로 견제를 하니 초보들은 제대로 대응 한 번 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슈슉! 캉!
두 발의 화살을 몸을 움직여 피해 내고 마지막 한 발은 검을 이용해 쳐 냈다.
기술 따위는 없었지만, 향상된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피의 칼날과는 다르게 화살에 담긴 힘은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카아아악!
화살을 막으면서 잠시 경직된 틈을 타 붉은 개가 내 오른발을 노리고 입을 쩌억 벌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붉은 개의 아가리가 시야에 확대되어 들어왔다.
나는 몸을 허공으로 띄워 간신히 붉은 개의 주둥이를 피해 냈다.
바닥을 스치듯 지나가는 붉은 개와 나의 시선이 교차했다.
붉은 개는 멈추려는 듯 발바닥으로 땅을 긁었지만, 관성에 의해 뒤로 조금 밀려났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퍼-억!
께갱-
온 힘을 다해 주둥이를 걷어차니 진짜 개 같은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물론 한 번 걷어찬 것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순 없었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목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붉은 개가 나가떨어진 틈을 타 남작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내가 가만히 당해 줄 성싶으냐!"
남작이 나를 보며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블러드문은 꿈틀거릴 뿐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 어째서?!"
남작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달려가는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작을 공략하는 방법은....'
바로.
붉은 개를 소환하게 하는 것.
블러드문이라는 혈마법은 한정된 피를 이용하는 마법.
즉, 남작이 사용할 수 있는 피의 용량은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붉은 개를 소환한 남작은 연속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물론 그 시간이 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부서진 테이블을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남작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으로 이미 가속도가 붙어 달려들고 있는 나를 떨쳐 낼 리가 없었다.
남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작의 눈동자는 두려움과 당황함이 섞여 흔들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뒤쪽에서 붉은 개가 광분하여 달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놈이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하더라도 나를 막아 세울 수는 없었다.
내 검은 이미 남작의 목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핏!
남작이 어떻게든 날 막아 보려는지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막아 줄 손이 하나 부족했다.
내 검은 수월하게 남작의 손 사이를 빠져나가 남작의 목을 깔끔하게 가르고 지나갔다.
툭! 데구르르!
남작의 머리가 허무한 소리를 내며 서재 바닥에 떨어졌다.
체력이란 것이 있는 어비스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목이나 심장 같은 급소를 베면 그대로 끝이니까.
"이제 감옥에 가서 남작의 죽음을 알리면...."
우우웅--
…뭐지?
나는 귀를 울리는 이명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주인을 잃은 블러드문이 아직 형채를 유지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머리가 떨어져 나간 남작의 몸에서 새어 나온 피 역시 꿀렁거리며 마법진 중앙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거 설마...?'
나는 불길한 예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프롤로그 챕터에서 남작은 대부분의 경우 보스 몬스터로 나온다.
하지만, 아주 가끔 남작의 죽음에도 챕터가 끝나지 않는 특수한 경우가 발생한다.
즉, 히든 보스 이벤트가 발생했다는 뜻.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우우우웅!
그 순간 홀 중앙에 떠 있던 블러드문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로 엄청난 속도로 주변에 널려져 있던 시체들을 빨아들였다.
쿠드득! 꽈드득!
뼈와 근육들이 압축되고 찌부러지는 기분 나쁘고 역한 소리가 블러드문에서 울려 퍼졌다.
'프롤로그부터 일라나드에 히든 보스까지… 대체 재수가 얼마나 옴 붙은 거지?'
블러드문은 마지막으로 남작의 시체까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더니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블러드문의 내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마치 심장 박동을 연상케 했다.
블러드문이 하나의 심장이 된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지… 공격해야 하나?'
하지만 내 직감이 강력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저것의 근처에 다가가지 말라고.
(남은 유지 시간 : 2분 31초)
'…젠장.'
…아마 나는 저것을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저 심장에서 곧 태어날 존재는.
5레벨의 마물이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천천히 박동 소리를 내던 블러드문이 돌연 바닥에 툭 떨어지더니 흐물흐물 풀어져 중앙홀에 넓은 피웅덩이를 생성했다.
이윽고 피웅덩이 안에서 피를 흠뻑 머금은 무언가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의 외형은 마치 어린 소년처럼 생겼지만, 피와 살점이 꿈틀거리는 것이 도저히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 보였다.
놈은 마치 태아처럼 피웅덩이 한가운데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아아---
낮고 끓는 듯한 음성이 내 귀로 들려왔다.
나는 긴장한 채 그것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희귀한 확률로 남작의 블러드문에서 탄생하는 저 존재의 이름은 굴레의 아이.
무슨 조건으로 탄생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명실공히 프롤로그 챕터의 지배자이자, 학살자였다.
'저걸 이대로 내버려 두면 타라스는 완전히 끝장나.'
게임을 플레이할 때 저 굴레의 아이에게 죽으면 엔딩 컷신을 볼 수 있다.
정신을 차린 굴레의 아이가 타라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말이다.
지금은 저놈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살을 흡수하기 시작하면 막을 가능성은 없어지게 된다.
태어났을 때는 5레벨이지만, 시간이 지나 힘을 얻게 되면 6레벨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괴물.
단, 지금은 놈이 아직 불완전하다.
제대로 된 이지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
그럼에도, 방어 기제 하나만큼은 뛰어나서 공격해도 타격을 입힐 수 없을 게 분명하겠지만....
'아스트리아라면....'
지금의 아스트리아는 4레벨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손에 타라미엘의 눈물이 있다면 말은 또 달라진다.
'챙겨오길 잘했네.'
지하 하수도에서 나올 때, 아스트리아에게 따로 성소의 위치를 말한 후, 회수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을 위해.
물론,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 주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에이미가 성물과 접촉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 물건을 챙겨 온 이유가 바로 저 굴레의 아이 때문 아닌가.
이제 저놈을 아스트리아에게 유인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바로 도망치지 않고, 놈이 정신차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도망쳤다가, 굴레의 아이가 성밖을 벗어나 버리면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아아…' 하며 작은 울음소리를 내는 '굴레의 아이'를 바라봤다.
슬슬, 깨어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아....
곧 놈과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도 몸이 으스스 떨려 왔다.
마치 사신이 칼날을 목 앞에 들이밀고 있는 기분.
놈의 입에서 피로 이루어진 침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더니 웅크리고 있던 몸을 풀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용썼다.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단지, 배우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시선이 마주친 순간, 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먹이.'
놈은 지금 엄청난 허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아?
완전히 일어선 놈의 고개가 까닥까닥 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반갑다, 괴물아."
캬아아아아아!
귀를 찢을 듯한 고함 소리와 함께 놈이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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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3화
나는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괴성을 들으며 바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콰콰쾅!
굉음에 뒤를 살짝 돌아보니 굴레의 아이가 저택 벽을 그대로 부수면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는 놈의 시선.
아아아아!
나를 발견한 놈의 눈가가 길쭉하게 찢어졌다.
미친… 저거 지금 웃고 있는 건가?
나를 포착한 놈이 괴상한 자세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려 본 것 같은 몸놀림.
하지만, 그 속도 하나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미친 듯이 달렸다.
피로 된 침을 뚝뚝 흘리면서 달려오는 놈의 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손톱이 돋아나 있었다.
도중에 악마화가 끝나기라도 한다면… 난 그 자리에서 바로 죽는다!
(남은 유지 시간 : 29초)
다행히 남작의 저택과 지하 감옥의 입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에 저놈의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이 많다는 건데....'
얼마 가지 않아 멀리 감옥의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스트리아가 여전히 감옥의 입구에 굳건히 기대어 서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 몇 명의 병사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스트리아!"
"레브, 남작을 제압하신...?!"
나를 보며 반갑게 맞이하려던 아스트리아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한 후 굳어졌다.
자세한 건 모를 테지만, 대충 봐도 사악한 무언가라는 것은 깨달은 모양이다.
"살고 싶으면 다 도망쳐! 남작이 소환한 악마다!"
나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질렀다.
그제야 병사들의 시선이 내 뒤에 있는 굴레의 아이를 향했다.
"악, 악마다! 정말로 악마가 있었어!"
"으아아악!"
아스트리아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굴레의 아이를 보더니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나는 혼란에 휩싸인 병사들을 그대로 지나쳐 아스트리아의 앞에 도달했다.
"레브…! 저것은 대체?!"
"저놈이 사람을 죽이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놈은 사람을 먹으면 강해져요!"
내가 말하는 순간 이미 굴레의 아이는 그 현장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춰 내 악마화도 풀렸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가장 먼저 제물이 된 것은 굴레의 아이와 제일 가까이에 있던 횃불을 든 병사였다.
"오, 오지 마! 저리가아아아!"
훅-! 훅-!
병사가 횃불을 몇 번 휘두르기도 전에 굴레의 아이의 입이 쩌어억! 소리를 내며 엄청난 크기로 벌어지더니 병사의 상반신을 통째로 삼켰다.
"-----!"
병사의 하반신이 몇 번 발버둥 치다가 이내 움직임이 멎었다.
현장에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콰직! 콰득! 우드득!
"아...! 으아...! 으아아아!"
"괴물이다! 악마야!"
아주 짧은 정적 후, 패닉에 빠진 병사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굴레의 아이가 그것을 보고 병사들을 쫓기 위해서 움직이려 했으나, 하얀 섬광이 그것을 제지했다.
"사악한 마물아!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아스트리아의 검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어둠을 밝혔다.
그 빛에 굴레의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본능적으로 아스트리아의 위험성을 눈치챈 굴레의 아이가 훌쩍 뒤로 물러나 검을 피했다.
성력이 자신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은 것이다.
나는 아스트리아를 향해 소리질렀다.
"아스트리아! 저놈이 인간을 더 섭취하면 얼마나 강해질지 예상조차 안 갑니다! 성물을 사용하세요!"
"성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아스트리아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화아아악-
성스러운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타라스의 밤하늘을 밝혔다.
"갸아아아!"
굴레의 아이가 그걸 보고 경계심 가득한 울음소리를 토해 내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저거 방금 태어난 거 맞아?
자신에게 위험을 끼칠 수 있는 것은 귀신같이 파악하는 그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절대로 도망가게 둬서는 안 됩니다. 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걱정 마십시오!"
아스트리아는 왼손에는 타라미엘의 눈물을, 오른손에는 순백색의 검을 들고 굴레의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레브! 괜찮아?"
감옥 안쪽에서 달려온 에이미가 내 온몸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남작의 혈마법 때문에 피가 묻은 것일 뿐, 딱히 부상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는 내가 태연한 표정을 짓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괴물은 뭐야? 진짜 남작이 악마를 소환한 거야?"
"그래. 저건...."
"굴레의 아이로군!"
내가 말하기도 전에 어느새 튀어나온 다미안이 괴물을 가리키며 흥분에 차 외쳤다.
"남작이 굴레의 아이를 만들고 있었던 거였어!"
"…뭐야, 굴레의 아이가 뭔지 알고 있어?"
"당연하지. 저건 혈마법의 정수나 마찬가지다! 남작이 저 정도의 조예를 지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단, 완벽한 상태는 아닌 것 같군."
다미안이 굴레의 아이의 몸에서 녹아서 뚝뚝 떨어지는 살점들을 가리켰다.
"진화를 완성하지 못해서 스스로 붕괴하고 있어. 안타까울 노릇이군. 여기서 조금만 더 인간을 섭취하면 진화를 완성할 수도...."
빠-악!
"커억!"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듣고 있던 에이미가 다미안의 뒤통수를 갈기며 소리쳤다.
다미안은 눈알을 부라리며 에이미를 쳐다봤지만, 그녀의 서슬 퍼런 눈빛에 바로 깨갱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레브, 언니가 이길 수 있는 거 맞는 거지?"
에이미가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전투 현장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굴레의 아이는 타라미엘의 눈물을 꺼내 들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 아스트리아와 거의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
"걱정하지 마. 시간만 끌어도 아스트리아가 이길 수 있을 거야. 저 자식 말처럼 저 괴물은 불완전하거든."
프롤로그 챕터에서 뉴비가 히든 보스로 등장한 굴레의 아이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굴레의 아이가 스스로 붕괴하기를 기다리는 것.
다만, 남작의 저택에서 굴레의 아이가 탈출하면 미션 실패이기에 계속해서 굴레의 아이의 어그로를 끌어줘야 했다.
그 좁디좁은 저택 안에서 굴레의 아이와 술레잡기를 하는 그 기분이란....
웬만한 고인물이 아니고서야 성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성공한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스트리아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지금의 나는 저 괴물을 상대로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굴레의 아이가 밀리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아스트리아가 무난히 승리를 쟁취하는 그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스트리아는 신중한 태도로 굴레의 아이를 살폈다.
방금 자신이 가슴에 찔러 넣은 일격이 치명적이었는지, 굴레의 아이는 성화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키에엑! 카아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지금 다가가서 마무리하였을 테지만, 그녀의 직감은 지금 다가가면 오히려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런 예감은 그녀를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었기에 아스트리아는 검을 겨눈 채 신중히 굴레의 아이를 응시했다.
푸스스스...!
그 순간, 굴레의 아이를 휘감고 있던 성화가 갑작스레 꺼졌다.
마물이 천천히 일어섰다. 부상을 입은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놈의 눈동자에는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함정이었나...!'
아스트리아는 단단히 내딛은 발을 천천히 앞으로 옮겼다. 그러자 굴레의 아이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 성물의 사정권만큼 물러난다.'
아스트리아는 놀랍도록 정확한 마물의 기감에 오싹함을 느꼈다.
'이 정도로 영악하다니....'
레브의 말대로였다. 저것이 살아서 이곳을 나가게 놔둬서는 안 된다.
"하압!"
아스트리아는 기합을 넣고는 빠르게 질주했다.
그녀의 검 주위로 성화가 타올랐다.
굴레의 아이가 뒤로 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굳게 마음먹은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성광검
3식
고난의 수레바퀴
강력한 수평 베기가 굴레의 아이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타라미엘의 눈물에 의해 약화된 상태였음에도 굴레의 아이는 그것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해 냈다.
그 본능적인 움직임에 아스트리아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고난의 수레바퀴는 1격이 끝이 아니었으니까.
검의 궤적을 뒤늦게 따라온 성광이 굴레의 아이의 목을 노리며 빛을 뿜어 냈다.
이것이 바로 성광검이 자랑하는 기술 중 하나인 고난의 수레바퀴의 무서운 점.
콰콰카캌!
검의 궤적에 남은 성광이 수차례 회전하면서 상대를 몰아붙인다.
모르는 사람은 당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연격.
키아아앜!
성광에 의해 목에 상처를 입은 굴레의 아이가 목을 감싸 쥔 채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얕았나!'
아니다. 그녀는 제대로 휘둘렀다.
저 마물이 그 찰나의 순간에 목을 길게 늘여 피해 낸 것이었다.
아아아앜...!
굴레의 아이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공포가 동시에 어려 있었다.
이제 깨달은 것이다.
저 이상한 구슬이 있는 한 위험한 빛을 뿜어내는 생명체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돌연 굴레의 아이가 괴성을 터트리더니 몸에서 피 안개를 미친 듯이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피 안개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아스트리아가 살짝 물러난 찰나 굴레의 아이가 번개같이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런...!"
아스트리아는 급히 굴레의 아이의 뒤를 쫓았다.
부상을 입은 몸임에도 마물의 순간적인 속력은 무섭도록 빨랐다.
'잘못하면 놓칠 수도...!'
입술을 깨문 그녀가 한층 더 발에 힘을 준 순간,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레브...?"
굴레의 아이가 도망치고 있는 방향에 레브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째서...?! 방금 전까지 감옥 입구에 있었잖아! 이대로는 위험...!'
그녀가 급히 외쳤다.
"레브! 피하십시오! 거기서 나오세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레브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남작과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것일까.
재회했을 때, 목소리가 멀쩡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마물이 도주할 걸 예상하고 그걸 막기 위해서?'
아스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책이었다.
자신이 멍청하게 놓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아아앜!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레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듯, 저 마물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녀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발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늦는다...!'
아무리 발에 힘을 더해도 마물이 레브에게 당도하기 전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아아아아!
마물이 레브를 향해 흉험한 손톱을 뻗었고, 칼날 같은 손톱이 레브의 배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그녀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레브으으으!"
아스트리아의 입에서 비명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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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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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커헉...."
나는 밑을 내려다봤다.
굴레의 아이의 손톱이 내 배를 관통해 있었다.
"존… 나 아프네."
나는 고통을 참아 내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미친 듯이 뛰고 있던 심장 하나가 내 오른손에 의해 짓이겨졌다.
"쿨럭...!"
역시 너무 도박이었나....
그래도.
성공했다.
복부를 내주는 대신 내 오른손은 놈의 심장을 부숴 놓았으니까.
그리고 천천히 무언가 내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아스트리아가 충분히 놈을 쫓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놈을 내가 막아선 이유는 바로.
굴레의 아이의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아스트리아가 굴레의 아이와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굴레의 아이도 내가 직접 죽이면 능력을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늑대 인간을 죽이고 회복력을 얻게 된 것처럼, 굴레의 아이를 죽이면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될 수도 있었다.
어떤 능력을 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굴레의 아이의 흉성을 생각해 봤을 때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굴레의 아이는 히든 보스였기에 언제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굴레의 아이의 능력을 얻으려면 지금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침, 나는 굴레의 아이가 궁지에 몰리면 피 안개를 뿜어낸 후 도망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빠르게 주변을 살핀 후, 놈이 이쪽으로 도망칠 거라 확신하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치명상은 피했나....'
놈을 확실히 죽일 기회를 잡기 위해 끈질긴 회복력을 믿고 몸을 내주는 선택을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리 상처 입었다 해도, 굴레의 아이를 한 번에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레브! 레브! 괜찮습니까?!"
내 앞에 도달한 아스트리아의 눈이 잘게 떨렸다.
"괘, 괜찮...."
굴레의 아이의 손톱에 폐라도 관통당한 건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레브! 괜찮아?! 이게 대체… 헙!"
뒤늦게 달려온 에이미가 굴레의 아이에 손톱에 관통당해 있는 나를 보며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나는 고통을 간신히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그나마 악마화한 상태라 고통이 조금 덜 느껴지는 것도 도움이 됐다.
이번 회차에서도 지하 하수도에서 호라문의 반지를 잊지 않고 챙겨온 보람이 있었다.
"나, 남작… 의 서재."
"남작의 서재? 서재가 뭐 어떻다는 거야?!"
"포… 션."
"…남작의 서재에 회복 포션이 있다고? 그런 뜻이야?! 맞지?!"
끄덕.
나는 더 이상 말할 힘도 없어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을 본 에이미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남작의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에이미라면 아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딱히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니까.
포션이 만능은 아니지만, 끈질긴 회복력과 함께라면 충분히 나을 수 있겠지.
"레브… 어째서 그런 위험한 선택을...."
아스트리아는 여전히 내 복부를 관통한 굴레의 아이의 손톱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쿨럭!"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피를 토해 내는 상황 때문에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에이미가 빨리 안 오면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벌어집니다! 레...! 정신… 차...!"
예? 뭐라고 하는 겁니까?
눈앞이 흐릿했다.
아스트리아가 나를 붙잡고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가 않았다.
점점 고통도 사라져 갔다.
뭐야… 이대로 다시… 회귀하는 건가?
겨우 프롤로그도 깼는데 조금 아까운데.
그래도 이번 회차에서의 죽음은 생각보다 고통이 크지는 않....
치이이익---!
"끄아아악!"
나는 몸이 불타는 듯한 격통에 정신을 차렸다.
"에이미. 그렇게 한 번에 환부에 부으면 쇼크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떡해요! 지금 저승길 건너기 직전이잖아요!"
어느새 달려온 에이미가 내 상처에 포션을 들이붓고 있었다.
지금껏 겪어 온 어떤 고통보다 이게 더 아팠다.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레브. 마물의 손톱을 빼내겠습니다!"
"자, 잠깐...!"
드드드득!
아스트리아가 단번에 마물의 손톱을 뽑아냈다.
내장이 그대로 딸려 가는 듯한 고통에 나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에이미, 환부에 다시 포션을!"
"레브, 조금만 참아!"
치이익--!
"끄에에엑!"
이 여자들이 나를 지금 고문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편했을지도.
"후우… 레브의 회복력이 뛰어나서 다행입니다. 환부가 조금씩 아물고 있습니다."
"하아… 하아...! 다행이다...."
눈을 떠 보니 두 여자가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려 준 것을 뭐라 할 수도 없고....
나는 관통당한 복부를 흘깃 내려다봤다.
포션과 끈질긴 회복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복부가 천천히 아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죽을 위기는 벗어난 것 같은데...?'
굴레의 아이를 잡기 위해 몸을 던진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끔찍한 고통을 겪기는 했지만.
누운 채로 주변을 둘러보니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이곳에는 아이들도 있는 상태.
나는 고통을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에이미."
"…어?"
"너는 아이들을 데리고 뻐꾸기 여관으로 가. 여기 계속 있기에는… 뭔 말인지 알지?"
"알았어! 나만 믿어!"
에이미가 당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3회차까지의 그녀의 모습 중 가장 밝았다.
에이미의 웃는 얼굴을 보니 드디어 뭔가 해결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악의 꽃은 아직 해결 못했지만… 방법이 있겠지.'
아직 악의 꽃 개화 시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전까지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면 되겠지.
"아스트리아는… 힘들겠지만 이곳의 뒷정리를 좀 부탁합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스트리아가 내 손을 붙잡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움직이시죠. 저는 여기서 조금 회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가 아이들을 인솔하여 성을 떠나고, 아스트리아가 남작을 대신할 성의 책임자를 찾아내고 있는 사이.
나는 슬쩍 상태창을 켜 바뀐 걸 확인했다.
이름 : 레브 (3)
클래스 : 데모닉
현 위치 : 부패의 도시 타라스
보유 특성
-악마화(오른팔)(악마화 남은 유지 시간 : 6분 03초)
-탐식
-끈질길 회복
-마기 변형
보유 결전기 : 없음
{99.38%}
일단, 남은 시간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챕터를 클리어했다는 더 없이 확실한 증거.
그걸 확인하니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새로운 게 하나 생겼군.'
마기 변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특성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굴레의 아이를 죽이고 획득한 특성.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획득한 순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심장에서 마기를 끌어올린 후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마기가 몽글몽글 솟아오르더니 검지 손가락 길이의 단도 하나를 만들어 냈다.
'마기를 변형시켜 뭔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인가.'
아마 굴레의 아이가 쓰던 칼날 같던 손톱이 바로 마기 변형의 능력인 모양.
나는 마기를 끌어올려 여러 가지 물체를 만들어 내 봤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이상의 크기를 가진 물건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마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아. 여러가지로 써먹을 수 있겠어.'
나는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것에 만족하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제 몸이 움직일 정도로 회복된 상태.
'그럼 슬슬 가 볼까?'
보스몹을 잡았으면 뭐다?
아이템을 파밍할 시간이었다.
.
.
.
예로부터, 보스몹을 잡으면 좋은 아이템을 획득한다는 건 지구의 유서 깊은 전통이었다.
때문에 나는 아스트리아가 성에 남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동안 몰래 다시 남작의 저택을 향해 이동했다.
노력의 대가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 있더라?"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며, 남작의 저택을 천천히 뒤졌다.
'돈은 좀 챙겨 두는 게....'
지금까지야 아스트리아와 에이미 덕분에 어떻게든 안 굶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마 혼자 다니게 될 텐데.
돈은 필수였다.
'…그런데 뭔가, 누가 이미 털어 간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1층이야 남작과 나의 전투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다고 해도, 3층까지 이미 누가 샅샅이 뒤진 듯한 느낌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도대체 누가… 설마 에이미?'
아까 포션을 가져다 달라고 했던 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기야, 내가 자세한 위치를 알려 준 것도 아니고, 포션을 찾기 위해 이 서재를 이 잡듯이 뒤진 게 분명했다.
…그러다 도중에 챙길 만한 게 있으면 좀 챙기고.
"모래 거울도 없고, 쿠엔샤의 지팡이도 없고… 저주받은 토끼도… 없네?"
…뭐 이렇게 싹 털어 갔어.
어쩐지 싱글벙글하더라니 이것 때문이었던 거냐고!
에이미가 가져간 히든들은 나중에 잘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결전기.
이 게임 어비스에는 특별한 시스템이 하나 존재했다.
결전기決戰技라고 불리는 매우 특수한 기술이 바로 그것.
결전기란, 단순한 전투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법칙을 빌려오는 기술-이라는 게 게임에서 나온 설명이었다.
의지와 마나를 통해 세계의 법칙을 내 손 안에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결전기의 힘이었다.
어비스는 이 결전기를 이용해서 플레이하는 게임이라고 해도 될만큼, 결전기는 중요하다 못해 거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그 결전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이곳, 남작의 저택이었다.
나는 서재 뒤쪽으로 다가가 먼지에 뒤덮여 있는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천으로 감싸져 있는 기다란 막대기.
탁탁!
나는 대충 손으로 먼지를 털어 낸 다음, 낡은 천을 풀어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낡고 문양도 없이 밋밋한 검 한 자루.
다만, 피처럼 붉은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혈령검."
바로 이 검이 플레이어로 하여금 결전기를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일명 '마키나'라고 불리는 히든들 중에 하나였다.
모종의 방법을 통해 '마키나'라고 불리는 이 히든을 각성시키면, 결전기를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이 제각각 달랐기 때문에 내가 모든 '마키나'를 각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혈령검은 플레이어가 처음 얻을 수 있는 '마키나'이다 보니 내가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각성시켜 본 물건 아닌가.
'혈령검을 각성시키는 방법은 바로....'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혈령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그리고 흐르는 피를 혈령검 위에 떨어지게 했다.
주르륵, 주르륵.
툭툭툭.
그렇게 한참을 피를 떨어트리고 있는 도중,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언제까지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 이 검을 각성시키면 HP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져 있지 않았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 나중에 다시 할까?'
지금 간신히 움직일 수 있다뿐이지, 부상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피를 뽑아 대다가 급사할 수도 있는 노릇.
기껏 프롤로그 챕터를 다 깨 놓고, 피가 부족해서 죽으면 그것만큼 꼴불견이 또 없었다.
다음에 만전일 상태에서 해도 늦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한 나는 혈령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혈령검이 내 피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미, 미친...!"
나는 서둘러 검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혈령검은 마치 본드라도 바른 것처럼 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현기증이 나를 덮쳤다.
"이런 개같은...."
휘청.
나는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별헤다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5화
"뭐야, 여긴...."
낡은 방.
…방금 전까지 있던 남작의 저택과는 전혀 다른 곳.
정신을 차린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이 장소에 나 외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
처음 보는 노인이 방 가운데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든 듯 가만히 앉아 있던 늙은 남자가 돌연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일어났는가?"
"…아. 예. 그런데 누구신지?"
"이 집의 주인이라네. 남작의 저택에서 기절한 자네를 데리고 온 것도 나일세."
"아. 저를 치료해 주신 거군요? 감사합니다! 어이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허허.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항상 조심해야지. 그렇지 않은가?"
"맞는 말이네요. 하하하."
늙은 남자는 거동이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가서 부축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 동료들은 주위에 없었나요?"
"아. 내가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네. 매정한 동료들이군."
"아… 그런가요."
"다른 인간을 믿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지. 수십 년 동안 친구라고 생각했던 자도 언젠가는 내 등에 칼의 꽂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네. 자네보다 조금 오래 산 사람의 충고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군."
"으음."
노인은 내가 부축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자 뭐라고 투덜거렸다.
아마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어… 뭐 이런 소리인 것 같았다.
"혹시 저 주전자 좀 가져다주겠나? 목이 몹시 마르군."
노인이 탁자 위에 놓인 컵을 집으며 나에게 말했다.
주전자는 노인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다만 조금 위에 있어서 노인이 꺼내기에는 살짝 힘들어 보였다.
"그럼요. 절 구해 주신 분인데."
"고맙군. 아주 고마워."
"별말씀을."
나는 성큼성큼 걸어 주전자를 향해 다가간 후, 선반 위에 있는 주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맞나요?"
"그래. 그거라네."
"근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뭔가?"
기분 탓인지 노인의 목소리는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간신히 치솟는 짜증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목소리.
"이 주전자 안에는 뭐가 들었나요?"
"…물이지. 뭐겠나?"
"흐음. 그래요?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 좀 뭔가 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비… 린내라니? …물이 상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뒤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적이 낡은 방안을 집어 삼켰다.
"아뇨. 피비린내요."
덜컥!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어딘가에 숨겨둔 단검을 빼 들고 나를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작이 너무나 느렸다.
푸욱-!
마기 변형으로 만들어낸 단도가 노인의 심장에 꽂혔다.
"…어, 어떻게?"
"야.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잖아. 장난하냐?"
"젠장...."
노인이 힘없이 쓰러지자, 방 안의 모습이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장소.
여전히 나는 남작의 서재 안에 있었던 것이다.
밖을 보니 아직 시간도 얼마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아… 어이없이 죽을 뻔 했네."
그 노인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그 주전자를 그에게 줬다면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상태창을 켜 바뀐 점을 확인했다.
이름 : 레브 (3)
클래스 : 데모닉
현재 챕터 : 부패의 도시 타라스
보유 특성
-악마화(오른팔) (재사용 대기 시간 : 2시간 24분)
-탐식
-끈질길 회복력
-마기 변형
보유 결전기 : 혈령검
{99.38%}
'드디어 첫 번째 결전기인가....'
상태창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바로 결전기 목록에 생성된 '혈령검'이라는 이름.
'다행히 나한테도 적용되네.'
사실, 조금 걱정했다.
'마키나'를 통해서 결전기를 배울 수 없을까 봐.
물론'마키나' 말고도 결전기를 익힐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각종 단체나 개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세상의 법칙과 마키나를 연구한 끝에 만들어 낸 결전기들이 바로 그것.
아스트리아가 익히고 있는 성광검 역시 엘라인 교단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그러한 결전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결전기들은 비전 중의 비전이었기에 내가 알려 달라고 해서 쉽게 알려 줄 리가 없었고.
혹여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익히기 위해서는 빛나는 재능과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당장, 챕터를 클리어해 나가야 하는 나에게는 힘든 일.
그래서 나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결전기, 즉 '마키나'를 통해서 익힐 수 있는 결전기가 필요했다.
'혈령검만 있어도 초반은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다.'
혈령검은 총 3개의 식으로 구성된 결전기로.
초반 챕터에서는 이만한 위력을 가진 결전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렇게 쓰는 건가...?"
나는 떠오르는 대로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둘렀다.
혈령검
1식
비혈
검의 궤적을 따라 핏방울들이 비산하더니 그대로 날아가 벽에 구멍을 숭숭 뚫어 냈다.
그렇게 강력한 위력은 아니지만, 다수를 상대할 때 좋은 기술.
'그럼 다음 식을 써 볼....'
2식을 쓰기 위해 자세를 잡는 순간,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1식이 한계인가.'
<어비스>에서 혈령검 2식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5레벨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도 결전기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만족이었다.
"그럼, 남작의 저택은 끝인가?"
이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서재를 나와 중앙 1층 홀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조금 쉬고 싶었다.
그렇게 저택을 나가기 위해 터덜터덜 걸어가던 도중.
"…음?"
남작이 블러드문을 소환하기 위해 그려놓은 마법진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저건...."
.
.
.
"아니! 이건 내가 가져온 거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걸 네가 다 가지는 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될 건 뭔데!"
"쪼끄만 한 게 욕심만 드럽게 많아가지고!"
"하! 원래 떨어진 물건은 줍는 사람이 임자랬거든?"
"누가 그래?! 누가!"
"우리 아빠가!"
"너희 아빠는...."
젠장!
죽은 아버지까지 입에 올리다니.
이래선 할 말이 없잖아!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부터 에이미와 대판 싸우는 중이었다.
솔직히 프롤로그 챕터에 나오는 히든이라 크게 쓸 만한 물건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에이미, 반띵 어때? 솔직히 내 덕분에 네 아는 동생도 구했잖아?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에이미가 드디어 한발 물러서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스트리아의 목소리였다.
크흠. 아침부터 그녀에게 못 볼 꼴을 보였군.
"언니, 들어와요! 안 그래도 이 불한당 같은 남자랑 같이 있으려니 불안하던 참이었으니까!"
궁지에 몰린 에이미가 잽싸게 문을 열며 아스트리아를 맞이했다.
나는 이를 갈며 에이미를 노려봤다.
베----
눈을 내리깔며 혀를 내미는 에이미의 모습에 잠시 순간적으로 혈압이 치솟았지만,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나는 평정을 유지하고자 아스트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스트리아, 한숨도 안 잔 겁니까?"
아스트리아의 복장은 어제 남작 성에 침투했을 때의 전투 복장 그대로였다.
심지어 갑주에 묻은 피도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다.
"…네, 생각보다 처리할 것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래도 급한 불은 어느 정도 껐습니다."
"크흠...."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고생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괜히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다.
…아니,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냐고!
아스트리아는 나를 보고 설핏 웃더니 말을 이었다.
"교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감찰단이 이곳 타라스에 도착할 겁니다. 저는 그때까지 이곳을 지키라 명 받았구요."
성에 존재하는 통신용 아티팩트로 연락을 취한 모양이었다.
감찰단이 온다는 건....
"제가 떠나야 하겠네요."
엘라인 교단의 감찰단이 아스트리아처럼 자비로울 리가 없었다.
나를 보는 즉시, 처단하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스트리아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타라스를 떠나야만 해.'
교단이 그녀가 데모닉과 함께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스트리아에게도 좋지 않을 게 뻔했다.
아스트리아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지금 바로 떠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감찰단이 도착하려면 아직 며칠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고마워요, 아스트리아. 신세만 지는 것 같네요."
"신세라니요.... 저야말로 레브, 그대가 아니었다면 결코 남작의 흉계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제가 은혜를 입은 거지요."
아스트리아가 그런 소리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우리 모습을 뚱하니 지켜보고 있던 에이미가 입을 열었다.
"근데, 다미안 그 자식은 어떻게 된 거야? 어제부터 보이질 않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다미안에 대해 아예 잊고 있었네.
나와 에이미의 시선이 아스트리아를 향했다.
"그는… 약속대로 풀어 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에이미가 놀라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풀어 줘도 되는 거예요? 놈이 또 나쁜 짓을 저지르면 어떻게 하려고."
"그는 저에게 더 이상 숭배자들과 관련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는 그 맹세를 믿습니다."
"...."
그녀가 믿는다니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다미안의 생사야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고.
그때, 에이미가 갑자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레브, 타라스를 떠나면 어디로 갈 거야?"
"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당황했지만, 사실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프롤로그 챕터를 클리어했으니, 이제 1챕터의 무대를 향해 가야 할 때였다.
"…나는 해적군도로 갈 거야."
<어비스> 1챕터.
해적군도.
수많은 해적들의 고향.
그곳에서 두 번째 보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대답에 아스트리아와 에이미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곳을...."
"레브, 미쳤어?!"
두 사람의 놀란 음성에 나는 머쓱해져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레브,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제국의 법 따위는 통하지 않는 무법 지대입니다. 어째서 그런 위험한 곳에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맞아! 거길 대체 왜 간다는 거야?"
게임을 클리어하려고 간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나는 궁색한 변명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꼭 가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드리기는 좀… 힘들군요."
내 대답에 아스트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니 말려도 듣지 않으실 생각이시군요."
"…크흠."
나는 아스트리아의 눈동자를 슬며시 외면했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저는 이제 일어나 볼까 합니다."
어째서인지 아스트리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에이미가 급하게 붙잡았다.
"언니! 잠깐 쉬었다 가세요! 어제의 회포도 아직 못 풀었잖아요.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에이미,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습니다. 회포는 저녁에 풀도록 하죠."
아스트리아는 에이미를 한 번 따뜻하게 안아 준 후 밖으로 나갔다.
"…멋있어."
에이미가 그녀가 나간 문을 보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에이미를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에이미, 그래서 네가 가져간 물건들은...."
"멋없어."
"...."
.
.
.
"남작이 죽었다고?"
호화롭게 장식된 파티장에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이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외눈의 중년인이 짧게 대답했다.
"흐응. 재밌네. 그렇지 않아?"
"...."
"쟝. 너는 다 좋은데 재미가 없는 게 흠이란 말이야. 재미가 없다구… 재미가."
여인은 따분하다는 듯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그 너머에는 광활한 대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해적군도를 지배하는 여섯 도주 중 한 명인 여인은 색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바다는 끝없이 넓고 평화로웠지만, 그녀의 눈은 그 너머에서 불어올 폭풍이라도 예감한 듯 기대를 품고 반짝이는 중이었다.
"곧 태풍이 불겠네."
여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바다 위를 떠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별헤다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6화
"호르헤섬에 가고 싶다고? 자네 미쳤나?"
"시간도 없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저리 꺼져!"
"죽고 싶으면 다른 자살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떤가? 쯧.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데. 정신을 놨나 보군."
나는 항구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어비스 1챕터, 해적군도는 6개의 커다란 섬과 수십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
그중 내가 지금 가려고 하는 곳은 6개의 커다란 섬 중 하나이자, 1-1 스테이지의 무대인 호르헤섬이었다.
'도대체 게임에서는 어떻게 해적군도에 간 거지....'
게임에서야 그냥 타라스를 클리어하면, 다음 챕터인 해적군도에서 시작했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달랐다.
직접 호르헤섬까지 갈 배를 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호르헤섬을 향해 배를 몰겠다는 미친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미쳤다고 저 사람들이 해적군도에 가려고 하겠어?"
"…너는 도대체 왜 따라온 건데."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이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심심해서."
"…그래."
"레브, 아마 호르헤섬에 갈 배를 구하는 건 불가능할걸?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거기를 제발로 가려고 할 리가 없잖아."
"그건 나도 이제 알겠어."
내가 호르헤섬에 갈 수 있냐고 물어보자 선원들은 각기 다르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일관된 어떤 감정들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두려움과 적개심.
아마 그들뿐만이 아니라, 타라스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일관된 반응일 것이다.
타라스라는 지역은 해적군도와 가장 인접한 내륙 지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마 타라스가 이런 꼴이 된 것에는 해적들도 한몫을 했겠지.
그만큼 이 지역은 오랫동안 해적들에 의해 시달려 왔다.
그런 사람들을 설득해서 호르헤섬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어찌할지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고 있는데, 에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내가 그런 미친놈 하나를 알고 있긴 해."
"…미친놈?"
나는 에이미를 바라봤다.
에이미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눈쌀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지, 그 웃음은?"
"뭐, 뭐가? 안 웃었는데?"
"…됐고. 누군데, 그 미친놈이란 사람은."
"히히. 따라와. 안내해 줄 테니까."
에이미가 다시 불길하게 웃으며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찜찜한 마음을 감추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항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점이었다.
"주점? 여기 있다고?"
"아마 있을걸?"
에이미가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갔다.
겉에서 봤을 때 이미 알았지만, 선원들을 대상으로 싸구려 술을 파는 그런 곳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에이미는 그런 사람들을 요리조리 헤치고 지나가 주점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잔뜩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는 남자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금발에 가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
나는 불길한 느낌에 입을 열었다.
"에이미, 혹시 저 사람이...."
"응. 맞아. 어휴, 술 냄새. 도대체 얼마나 퍼먹은 거야."
에이미는 코를 틀어쥐면서 발로 남자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남자는 잠시 뒤척일 뿐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코멜! 코멜! 일어나 봐!"
"으으음… 아아...."
에이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깨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카운터로 가서 물이 든 양동이를 얻어 왔다.
부탁을 해야 하는데, 저 방법… 맞는 건가?
"에이미, 그냥 나중에 이 사람 깨어 있을 때 찾아오는 게...."
"안 돼. 코멜은 제정신일 때가 없거든."
짤막하게 대꾸한 에이미가 자비 없이 양동이에 든 물을 코멜이라는 남자의 얼굴에 그대로 부었다.
촤아아악-!
"허어업! 어푸푸푸! 뭐, 뭐야! 쿨럭! 쿨럭! 에, 에이미?!"
허둥지둥 일어난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에이미와 물 양동이를 발견하더니 눈을 치켜떴다.
그런 그를 향해 에이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 코멜."
"이, 이… 미친년아아아-!"
코멜은 에이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얼마나 술에 꼴아 있던지 몇 걸음 채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에이미는 그런 남자 곁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코멜,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
"…꺼져, 들을 생각 없으니까."
코멜이 말할 힘도 없다는 듯 손을 대충 내저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들으면 분명 구미가 당길 텐데."
"뭐가 됐든, 들을 생각 없다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제발 꺼져! 날 좀 내버려 두라고오오오오!"
코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미, 너무 술에 취해 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이렇게 술에 취한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가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내가 입을 열 찰나, 에이미가 다시 코멜을 향해 말을 걸었다.
"오늘 술값 내줄게."
"…한번 들어는 보지."
에이미가 나를 보며 윙크를 찡긋 날렸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구나.
"레브, 뭐 해? 계산 안 하고?"
"…어? 내가?"
"그럼 누가 해?"
젠장.
그러면 그렇지.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카운터로 향했다.
싸구려 독주만 파는 주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에 나는 다시 한번 어지러움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나 퍼마신거지?
'아까워 하지 말자. 어차피… 원래 내 돈도 아니잖아.'
남작의 저택에서 가져온 돈으로 이정도야 충분히-
잠깐만.
전리품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노력해서 얻은 정당한 재화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주정뱅이의 술값을 내준다는 생각에 더욱 가슴이 아려 왔다.
"두 사람은 처음 보지? 여긴 코멜. 그리고 이쪽은 레브라고 해."
에이미의 소개에 나는 코멜이라는 남자를 바라봤다.
내가 계산을 하고 온 사이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눈빛이 꽤 돌아와 있었다.
덥수룩한 금발 머리도 뒤로 질끈 묶으니 한결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생각보다 훨씬 젊었다.
거의 청년에 가까운… 나보다도 어려 보였다.
"아… 반갑습니다."
코멜이 머쓱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 왔다.
나는 코멜의 손을 맞잡았다.
거친 손바닥을 통해 강한 악력이 전해져 왔다.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곁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지켜보던 에이미가 말했다.
"레브는 잘 모르겠지만, 코멜의 항해술은 타라스에서도 꽤 유명해. 진짜 바다 사나이라고 볼 수 있지."
"뭘 또 그렇게까지… 하하."
코멜이 겸연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렇게 웃으니 좀 순박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향해 에이미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술에 미친 놈이야."
"...."
"술 때문에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배도 팔아먹고, 살던 집도 팔아먹었거든."
"너… 나 놀리러 왔냐?"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주정뱅이나 놀리러 다니게."
"...."
잠시 말이 없던, 코멜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온 용건이나 말해. 내 귀한 시간 축내지 말고."
"그럴까? 내가 너한테 온 용건은 바로...."
"자, 잠깐만!"
나는 급히 에이미를 제지했다.
에이미가 왜 그러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에이미 네 말은 지금 이 술주정뱅이한테, 아, 초면에 실례. 항해를 맡기라는 거야?"
"그런 셈이지."
에이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꾸욱 눌렀다.
왜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숙취가 오는 것 같지?
"에이미, 미안하지만, 나 지금 진지하게 사람 구하고 있는 중이야. 장난이라면 여기서 그만...."
그때 에이미가 내 말을 중도에 끊더니 코멜을 향해 말했다.
"코멜, 해적군도 몇 번이나 가 봤다고 했더라?"
"5번 정도?"
…이런 주정뱅이가 해적군도에 가 봤다고?
나는 믿기지가 않아 코멜을 바라봤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코멜은 우리의 대화에서 뭔가 눈치를 챈 듯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목적지가 해적군도입니까? 그럼 안 갑니다."
그런 그를 향해 에이미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가는 동안 술 무료 제공."
"생각해 볼 만할지도...."
"배도 한 척 사 줄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코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이미를 향해 경례를 했다.
나는 그 촌극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에이미,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난 그 정도 돈이 없거든?"
남작의 저택에서 집히는 대로 집어왔지만, 배를 사기에 충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보다 앞서 누가 먼저 털어 갔기 때문이다.
그때 에이미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그 돈은 내가 낼 테니까."
"에? 네가 왜...?"
"왜냐니? 나도 갈 거니까."
"…뭐?"
멍하니 되물은 나를 향해 에이미가 선언하듯 말했다.
"나도 해적군도에 갈 거야."
.
.
.
에이미를 해적군도에 데려가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무도한 해적들이 득실거리는 무법지에 어린 소녀를 데려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에이미를 데리고 다시 뻐꾸기 여관으로 돌아왔다.
"너, 혹시 뭐 잘못 먹었냐?"
"아니, 정상인데?"
"...."
에이미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 입을 열었다.
"누구 마음대로? 난 허락해 줄 생각 없어."
"참나. 그럼 해적군도에 갈 방법은 있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지금까지 항구 근처를 돌아다니며 탐문한 결과, 해적군도에 가는 배를 구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에이미를 데려가는 건 말이 안 됐다.
"찾다보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너를 데려갈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
"그래? 그러면 알아서 잘 가 보든가."
에이미는 말 다 끝났으면 나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띠꺼운 표정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따라오겠다는 건데? 여기가 네 고향이잖아. 찰스도 여기 있고, 친동생처럼 여기는 아델이라는 꼬마도 여기 있는데."
"...."
에이미는 내 질문에 잠깐 침묵을 지켰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결심한 듯 그녀는 입을 열었다.
"레브, 내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어? 아… 니?"
순간 '알아'라고 말할 뻔했지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지?
"내 부모님은 강도한테 돌아가셨어."
"…안타까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날 따라올-"
"이번에 숭배자들을 상대하면서 느낀 건데, 내 부모님을 죽인 강도가 사실 숭배자들 중 하나일지도 몰라."
"…뭐라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숭배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강도나...."
거기까지 말한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에이미가 저번 회차에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실제로 에이미의 몸속에는 악의 꽃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잠들어 있었다.
'설마....'
내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에이미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복장이라든가,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비슷했어. 이건 확실해."
"…그래서?"
"나는 범인을 반드시 찾아낼 생각이야. 하지만, 이 답답한 타라스에 갇혀 있으면 언제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수가 있겠어?"
"그거랑 나를 따라오는 거랑 뭔 상관인데?"
"레브가 해적군도에 가려는 이유가 숭배자들 때문 아니야?"
"...."
내 짧은 침묵에 에이미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이야기할 때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즉, 레브는 숭배자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해적군도로 가는 거고, 레브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숭배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소리지."
이미 부정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노선을 변경했다.
"에이미, 너는… 그런 위험한 곳에 가기엔 너무 어려."
"나 성인인데?"
아… 맞다.
이 세계는 16살부터 성인이지. 내가 에이미를 어리게 보고 있을 뿐이었지, 지구와는 달리 이 세계에서 그녀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에이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레브를 따라가면, 무조건 부모님의 원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무슨 근거로?"
"근거 따위는 없어. 그냥 예감이야.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어."
에이미의 눈빛은 더없이 확고하고 단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오히려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 에이미가 내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레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절대 짐이 될 일이 없게 할게. 날… 좀 데려가 줘. 부탁이야."
"하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회귀할 때마다 날 깨우는 사람이 에이미이고, 에이미의 몸속에는 악의 꽃이 잠들어 있으며, 그녀의 부모님을 죽인 존재가 숭배자들이라고?
내가 여기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옳은 것일까.
…옳은 결정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에이미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리고! 레브같이 어벙한 사람이 해적군도에 가면 눈뜨고 코 베일 게 뻔한데, 나같이 착한 사람이 어떻게 두고만 볼 수 있겠어?"
"면전에 두고 어벙하다는 건 좀...."
"그리고 또! 나 같은 미소녀가 같이 가 준다고 하면 감사히 여겨야지! 고민할 게 아니잖아!"
자신의 말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지 에이미는 당당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뻔뻔하면, 그것도 재능 아닐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지금 하는 선택이 과연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나에게 기회란 것은 한 번이 아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여러 가지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으니까.
"…좋아. 가자, 해적군도로 같이."
"야호! 좋았어!"
에이미가 기쁨에 차 나를 덥석 안았다.
"그런데… 잠깐만. 설득된 이유가 내가 초미소녀라는 것 때문? 역시 내가 초미소녀라는 걸 인정...."
딱-
"왜 때려!"
에이미가 딱밤을 맞은 머리를 움켜쥐고 울상을 지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그런데 찰스한테 말은 한 거야?"
"어? 아니."
에이미가 잠시 내 눈치를 보며 눈알을 살살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말은 하고 가야겠지?"
"장난하냐!"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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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가도 좋다."
찰스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허락했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에이미가 오히려 열을 냈다.
"에? 이렇게 쉽게? 찰스! 뭐 잘못 먹었어?"
"보내 준대도 지랄이야! 이년아!"
"너무 쉽게 허락하니까 그렇지!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됐어?"
"아이고 머리야… 보내 준대도 난리네. 난리야."
찰스는 관자놀이를 솥뚜껑 같은 손으로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이미. 내가 허락 안 하면 안 갈 거냐?"
"아니? 갈 건데."
"거봐. 이러니까 그냥 보내 주는 수밖에 없지. 다 큰 성인이 떠난다는 걸 내가 무슨 수로 막아. 여관에 묶어 놓을 수도 없고. 언제 한 번이라도 내 말을 들은 적이 있어야지."
찰스의 말에 에이미는 찔리는 게 있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그래도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좋았잖아...!"
"어쩌라는 건지...."
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해적군도라고 했소?"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목적지는 호르헤섬이겠군."
"아마도요."
"호르헤섬에 내 친구 하나가 있소. 편지를 써 줄 테니 가져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요. 괴팍하긴 하지만… 내 소개로 온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친구는 아니니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찰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감이 있었는데, 이 정도 도움이면 감지덕지였다.
"이제 그만 가라, 장사에 방해되니까."
찰스가 에이미를 향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에이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따로 할 말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에이미는… 내 딸 같은 아이요."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뒤를 돌아 찰스를 바라봤다.
찰스의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했다.
그는 나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를 잘 부탁하오."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녀에게 해가 갈 일은 없을 겁니다."
나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찰스가 피식-웃으며 말했다.
"괜한 말을 한 것 같군. 나가 보시오."
나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찰스의 방을 빠져나왔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이라...."
어떤 이에게는 죽음을 각오한 결의를 나타내는 말.
나에게도 그 정도의 결의가 담긴 말일까?
나는 내가 내뱉었던 말이 왠지 허망하게 들려 쓴웃음을 지었다.
.
.
.
"검을 내리칠 때는 무엇보다 하체의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아스트리아가 보라는 듯 검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검의 궤적.
몇 번을 휘둘러야 저런 궤적을 그릴 수 있는 걸까.
"레브는 특히 악… 변했을 때 좌우의 불균형이 심하기 때문에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힘에 취해 휘두르는 검은 자기 자신까지도 다치게 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런 의미에서 알려 드린 기본 동작들을 삼백 번씩만 더 해 보겠습니다."
"에?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수련에 끝이란 없습니다."
아스트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크윽.
왠지 해적군도로 간다고 말한 이후부터 수련의 강도가 높아진 것 같은 기분이....
"레브, 수련 중에 잡생각은 금물입니다."
아스트리아가 단호한 어투로 나를 꾸짖었다.
찔끔한 나는 서둘러 다시 자세를 잡았다.
수련의 강도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스트리아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나에게 투자하고 있었다.
이 시간만큼은 집중하는 게 그녀에 대한 예의겠지.
후욱-!
후우욱!
"레브, 자세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무너진 자세는 카운트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아직 웃을 정신이 있나 보군요. 100회 추가입니다."
"...."
나는 입을 다물고 검을 휘두르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팔이 더 이상 들어 올려지지 않을 때 쯤에야 나는 간신히 수련을 마칠 수 있었다.
"레브, 고생하셨습니다."
"헉. 헉."
나는 말할 힘도 없어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수련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슬슬 이 세계에 여름이 다가와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 수건입니다."
아스트리아가 나를 향해 수건을 건네주며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고는 땀을 닦아 냈다.
"고맙습니다, 아스트리아."
"…레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해적군도로는 언제 떠나실 예정입니까?"
아스트리아의 물음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글쎄요? 배를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아서...."
에이미가 코멜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크게 진전은 없어 보였다.
뭐 당장 급한 건 아니었기에 그들을 딱히 재촉할 생각도 없었다.
…그 주정뱅이가 모는 배에 타는 시일을 하루라도 늦추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작용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설마?"
"…오늘 새벽에, 교단에서 보낸 감찰단이 나흘 후에 도착한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아스트리아가 미안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스트리아가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배를 구하는 일에는 조금 박차를 가해야겠네요. 나흘이라...."
이렇게 되면, 조금 웃돈을 얹어 주더라도 배를 빠르게 구할 필요가 있었다.
남작성에서 가져온 돈이니 그렇게 아까울 것까지도 없었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스트리아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에이미 양도 같이 떠난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미리 말해 두지만, 저는 적극적으로 말렸습니다. 걔가 따라오겠다고 한 거예요."
"…그렇군요. 에이미 양도 충분히 한 사람의 몫을 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시니, 분명 여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다만...."
아스트리아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분명히 레브, 그대의 여정 중에 '그 힘'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망설이지 말고 사용하십시오."
"…예?"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놀라서 아스트리아를 바라봤다.
성기사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 가?
내 당황한 눈초리를 받은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한데...."
"물론 남발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저 레브, 그대가 중요한 순간에 제 말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드린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아스트리아 쓸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까 합니다. 레브, 떠나는 날에는 꼭 연락 주십시오. 배웅하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이미 동료 아닙니까."
"동료...."
아스트리아는 동료라는 단어를 잠시 중얼거리더니 싱긋 웃었다.
"맞습니다. 저희는 동료이니까요."
.
.
.
하지만, 아스트리아와의 작별은 내 생각보다도 더 빨리 찾아왔다.
"레브! 레브! 일어나! 큰일났어!"
"어… 엉? 뭐, 뭐야!"
나를 깨우는 에이미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리치는 번개에 비친 에이미의 표정을 보니 장난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엘라인 교단의 감찰단이 타라스에 도착했대!"
"…이틀 후에나 도착하는 거 아니었어?"
"나도 잘 모르겠어… 언니가 자던 나를 깨우더니 빨리 레브한테 가 보라고 해서...."
에이미가 울상을 지었다.
머리가 부스스한 것이 에이미 역시 방금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아스트리아는?"
"언니는 성문으로 갔어. 곧 이 여관으로 성기사들이 올 거래!"
"뭐라고?! 왜? 굳이 여기에?!"
"나도 몰라!"
…하기야 에이미가 알 턱이 없지!
나는 잠이 덜 깬 머릿속을 서둘러 정리했다.
지금 성기사들이 예정보다 일찍 타라스에 도착한 상태.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여관으로 오고 있었다.
…내가 위험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성기사들 중에는 마물에 반응하는 성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당연히 그 마물 중에는 데모닉도 포함이 됐고.
'일단 여관에서 벗어나자. 가장 좋은 건 출항하는 건데....'
다행히 배는 어제 구했다. 항해를 대비한 물자도 이미 배에 챙겨 뒀고.
출항만 남겨 두고 있었다.
"에이미! 지금 코멜은 어디 있어?"
"내가 자기 전까지는 아래에서 술 마시고 있었는데...."
"젠장. 그 자식, 배는 몰 수 있는 거야?"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폭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밤에 술 취한 사람이 모는 배는 대체 얼마나 위험할까?
나는 두통이 몰려옴을 느꼈다.
"일단 에이미, 네 장비부터 챙겨. 나는 코멜을 찾아볼 테니까."
"응!"
내 말에 에이미가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나는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장비를 챙긴 뒤 방을 나섰다.
우르르릉. 쾅! 콰쾅!
쏴아아아아!
한밤중에 울리는 뇌우의 소리가 두개골을 울렸다.
이런 날씨에 출항이라고?
이건 아무리 봐도 자살행위인데....
차라리 발각되는 편이 살 가능성이 더 있어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 빌어먹을 코멜부터 찾자고...!"
다행히 코멜은 여관 구석에 처박혀 잠들어 있었다.
술 냄새가 지독한 것을 보니 역시 한두 잔 마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인사불성의 상태.
"코멜! 코멜! 일어나 봐!"
"으음.... 시뤄어… 시뤄...."
어떻게 하지?
그냥 깨워서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콰쾅! 우르르르르!
이런 천둥소리에도 안 깨고 자고 있는 게 용할 지경.
쏴아아아아아! 쏴아!
"어쩔 수 없나...."
나는 코멜을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여관 문을 향해 다가갔다.
빗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잠든 사람을 억지로 깨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나는 그대로 코멜을 비가 내리는 거리에 내려놨다.
코멜이 정신을 차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호, 홍수다! 피해! 아아! 살려 줘! 푸하--!"
코멜은 누운 채로 지랄발광을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휙휙 돌려 상황 파악을 하더니 문 안쪽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예?! 아무리 고용주라도 이런 건 용납 못 합...!"
"코멜, 지금 배 띄울 수 있어?"
내 질문에 코멜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내 표정이 진지한 걸 알아채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미쳤습니까? 자살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아예 불가능한 거야?"
그렇다면 큰일이다. 비가 언제 그칠지 모르는 노릇.
"불가능이라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 역시 이런 날씨에는 무리입니다."
굳이 코멜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이런 날씨에 출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일단, 도시 밖에 몸을 숨긴 후, 날씨가 가라앉으면 떠나야 하-.
'잠깐만….'
그때, 한 가지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코멜! 일단 에이미가 나오면 에이미와 같이 항구로 가서 배가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준비 좀 해 줘!"
"예? 무슨 일인지 상황을 좀 설명해 주셔야...!"
"그건 에이미한테 들어! 나는 급한 볼 일이 있어서! 배에서 기다려!"
나는 폭우 속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각이 났다.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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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8화
프롤로그의 두 번째 스테이지.
0-2 타라스 항구는 어비스를 플레이한 많은 유저에게 그냥 스쳐 지나가는 스테이지 정도로만 인식되는 곳이다.
하지만, 타라스 항구에도 히든이 숨겨져 있기는 했다.
"게임 플레이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쏴아아아!
우르르릉--! 쾅!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으며 항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여관에서 항구로 가는 길은 해적군도로 갈 준비를 하며 몇 번이나 오간 적이 있어서 밤중에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미친...!"
항구에 도착하니 바다가 금방이라도 주변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괴물을 연상시켜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였더라...?"
지금 내가 찾고 있는 히든은 게임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것이었다.
나 역시 첫 번째로 플레이할 때 흥미로 해 본 것 말고는 이 히든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몰아치는 태풍 때문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항구.
덕분에 히든을 찾는 데 방해되는 건 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말고는.
"어두워서 뭐가 뭔지 보여야 찾든가 하지...."
나는 눈으로 흘러드는 빗물을 훔쳐 내며 항구를 탐색해 나갔다.
기억상으로는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그때 낡은 석상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존재했는지 석상은 굉장히 낡아 있었다.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
"찾았다...!"
나는 빠르게 달려 석상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어떤 여인의 모습이라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바다의 여신 칼리파...."
바로 이 세계에서 바다를 주관한다는 신인 칼리파의 석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세계에서 잊혀진 옛 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세월의 흐름에 의해 잊혀진 신을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여신상은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여신상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이 여신상이 아주 조금이라고 하더라도 옛 신의 힘이 담겨져 있는 '신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특별한 주문을 통해 '신기'에 담겨져 있는 힘을 깨울 수 있었다.
'근데 뭐였더라...?'
게임을 한 지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다 보니, 주문의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칼리파. 잊혀진 바다의 신… 아. 미치겠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것이 진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이 신기에 담겨져 있는 힘은 바로 바다를 진정시키는 것.
즉, 이 신기를 발동할 수 있다면 출항할 수 있다는 소리.
"그 다음이 뭐였지? 태고의… 어쩌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때였다.
"레브… 씨? 레브 씨 아닙니까?"
빗소리를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멜? 여기는 왜 왔어? 에이미는?"
빗속을 뚫고 나타난 남자는 코멜이었다. 코멜은 술이 다 깼는지 눈빛이 아주 또렷해져 있었다.
"에이미는 배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혹시 몰라서 칼리파 여신께 기도를 올리러 온 거구요."
"너… 칼리파 여신을 알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라 코멜을 바라봤다.
"당연하죠. 뱃사람이라면 칼리파 여신을 모시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 래? 칼리파 여신은 사람들에게 다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거야, 어디 근본 없는 놈들이나 그런거죠. 저희 가문처럼 뼈대 있는 집안은 대대로 칼리파 여신을 모십니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있는 코멜의 입에서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하지만, 칼리파 여신을 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너 혹시… 이 조각상과 관련해서 뭐 아는 거 있어? 아무거나 좋아."
"글… 쎄요? 칼리파 여신의 조각상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아!"
코멜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도 할아버지한테 들은 건데, 이 여신상에는 폭풍우를 잠재우는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신상이 그 기도를 들어줄지도 모른다고요. 뭐, 전설일 뿐이겠지만요."
코멜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코멜, 혹시 그 기도… 특정한 기도문이 존재하지 않아?"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기도문 당장 좀 알려 줄래?!"
"예? 하지만, 백날천날 외워 봤자 효과는 없었는데요."
"잔말 말고 빨리!"
나는 코멜을 다그쳤다.
당황한 코멜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넵! 그러니까 아마도… '칼리파, 잊혀진 바다의 신이시여. 긴 잠에서 깨어나 태고부터 이어 온 맹약을 이행하소서....' 였던 것 같은데요."
"그래. 그거였어. 고맙다, 코멜!"
나는 서둘러 칼리파 여신상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사실 코멜이 백날천날 저 주문을 외쳐 봤자, 효과가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나는 주머니에서 새벽 휘장을 꺼낸 후 양손으로 감쌌다.
"에? 레브 씨, 그건 뭡니까?"
"코멜, 네가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라는 것은 인정할게. 잘 지켜봐."
그 후. 나는 나직하게 주문을 외웠다.
"칼리파, 잊혀진 바다의 신이시여."
그 순간, 내 양손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새벽 휘장이 빛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무슨...?!"
경악한 코멜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남아 있는 주문을 마저 외웠다.
"긴 잠에서 깨어나 태고부터 이어 온 맹약을 이행하소서."
주문을 끝마치자마자, 새벽 휘장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칼리파 여신상을 서서히 감싸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억수처럼 내리는 폭우 속에서 빛에 감싸여 있는 여신상은 몽환적이면서도 굉장히 신비로워서 나는 넋을 잃고 빛을 움직임을 바라봤다.
여신상을 감싸던 새벽 휘장의 빛은 여신상의 머리 위로 점점 모여들더니 이윽고, 허공에 원형의 파문을 일으킨 후 사라졌다.
"뭐, 뭡니까, 방금 그건...!"
"칼리파 여신의 힘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증거지."
그렇게 말한 후,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투툭- 툭!
"레, 레브 씨! 비가! 비가 멈추고 있어요!"
신기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증거.
바다에 매섭게 일던 파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실시간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출항할 수 있는 거지?"
"무, 물론입니다. 밤이라서 조심은 해야겠지만, 아까와 비교하면 식은 죽 먹기죠."
"좋아. 배로 가자."
"옙, 선장!"
기합이 잔뜩 들어간 코멜이 나를 보며 대답했다.
선장이라....
어감이 나쁘지 않았다.
.
.
.
"아스트리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포든 경."
아스트리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포든 경이라 불린 남자가 자신의 금발 머리를 쓰윽 쓸어 넘기더니 말을 이었다.
"흐음. 이상하군요. 제 펜듈럼이 분명 이쪽을 향해 반응을 했는데."
아스트리아는 포든의 손에 들린 펜듈럼을 바라봤다.
정식 명칭은 마를 가리키는 검지.
사용자에게서 가장 가까운 마의 존재를 가리키는 성물이었다.
'저 물건까지 들고 올 줄이야....'
만약 레브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남자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남자의 이름은 포든 데 밀리크.
이번 감찰단의 단장이자… 무려 7레벨의 초월자였다.
교단 최고 무력인 집행관 중 한 명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8레벨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는 천재 중의 천재이기도 했다.
즉, 자신같이 이제 막 순례기에 든 성기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계의 성기사라는 소리였다.
"아스트리아, 혹시 이곳에 지내면서 다른 마의 존재에 대해 느낀 적은 없었습니까?"
"…예."
"그렇습니까? 이상하군. 이상해… 분명히 이곳일 텐데."
포든 경이 천천히 뻐꾸기 여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찰스를 향해 다가갔다.
"주인장, 한마디 여쭙겠습니다."
"…물어보시오."
"여관에 묵고 있던 인원 중 갑자기 사라진 인원이 있습니까?"
찰스는 남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시선이...!'
마치 마음속을 속속들이 헤집는 듯한 눈빛.
금패 용병으로 한창 활동했을 당시에도 집행관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들보다도 뭔가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성기사를 보고 위험하다고 느끼다니....'
찰스의 시선이 포든의 뒤에 서 있던 아스트리아를 향했다.
그녀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소만."
"하긴… 범인이 마의 존재를 쉽게 알아차리긴 힘들겠지."
포든이 찰스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성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폭우를 뚫고 오느라 다들 피곤할 테지만, 마를 제거하는 건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일. 지금 이 시간부로 도시의 모든 출입을 통제한다."
"예!"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십여 명의 성기사들이 지체 없이 여관 밖으로 사라졌다.
아스트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스트리아, 남작 성으로 안내를 부탁합니다. 바로 가서 흔적을 보고 싶군요."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포든 경."
"아참! 알렉시스 추기경께서 그대의 안부를 궁금해 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이름에 아스트리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렇습니까?"
"예. 이 기회에 추기경께 안부를 전해 드리는 것 어떻습니까? 이곳에서 아주 큰 공을 세웠으니 추기경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순례기 때 행한 모든 일은 공을 논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맞는 말입니다만...."
"원칙대로 하고 싶습니다."
"뭐,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포든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여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스트리아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반응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직 수양이 부족해....'
"아스트리아 씨, 잠시."
아스트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찰스가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찰스? 무슨 일입니까?"
"레브가 작별 선물이라고 주라고 하더이다."
찰스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 든 아스트리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성력을 내뿜는 자그마한 구슬.
타라미엘의 눈물이었다.
굴레의 아이를 잡을 때까지 쓰고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레브에게 돌려준 물건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어 봤자 쓰지도 못한다면서 잘 써 줬으면 좋겠다고 전해 달라 부탁받았소."
"…그렇군요."
아스트리아는 타라미엘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에이미가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고 반드시 말해 달라 했소. 전하지 않으면 날 죽여 버릴 기세더군."
"저도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스트리아를 보며 작게 미소 지은 찰스가 여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폭풍우가 쳐서 걱정이 많았는데, 귀신같이 잦아들다니 원… 이래서야 떠나는 걸 말릴 명분도 없군."
"섭섭하십니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모든 부모는 언젠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이 떠나는 걸 지켜봐야 할 때가 오는 법 아니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아스트리아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진 밤하늘을 바라봤다.
떠나는 그들의 여정을 엘라인께서 축복이라도 해 주신 것일까.
밤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은 걷히고 은하수가 별 사이를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밖에서 포든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트리아, 아직 멀었습니까?"
"아닙니다, 포든 경! 지금 나가겠습니다."
헤어짐의 아쉬움은 뒤로하고 지금부터는 다시 본분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짧은 기도를 뒤로 하고 여관 밖으로 향했다.
'엘라인께서 그들의 앞날을 지켜봐 주시길....'
게임 속 악마는 회귀한다 (연재)
지은이 │ 별헤다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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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우에엑!"
나는 바다를 향해 연신 토를 하고 있는 에이미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너는 바닷가 출신이 뱃멀미를 하냐?"
"나, 나도 하고 싶어서… 우읍!"
에이미가 다시 뱃전에 달라 붙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작은 돛단배로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크기가 매우 조그마했다.
더 큰 배를 사 봤자, 운용할 인원이 없어서 이게 최선이긴 했다.
덕분에 흔들림이 좀 심하긴 했지만.
조타를 잡고 있던 코멜이 나를 향해 말했다.
"선장은 뱃멀미를 안 하네요?"
"뭐, 원래 안 하는 체질인가 봐."
지구에서도 딱히 멀미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원래 그런 체질이 아닐까 싶었다.
"…치사해. 레브도 이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어."
뱃전에 축- 늘어져 있던 에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허. 기쁨은 나누고, 고통은 혼자 감내하도록."
"…진짜 얄밉다."
에이미는 더 말할 힘도 없는지 시체처럼 늘어졌다.
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코멜에게 말을 걸었다.
"호르헤섬까지는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별일 없으면 5일이면 도착합니다, 선장."
"5일...."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망망대해에서 보내려니 왠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나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의 무대를 눈에 담았다.
하늘과 바다에 동시에 별들이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장, 눈이라도 붙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코멜의 목소리는 꽤나 사근사근했다.
아까 내가 칼리파 여신상을 이용해 보여 준 기적을 목도하고 나서부터 왠지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그렇게 생각해도 나쁠 건 없겠지.'
말을 잘 들으면 좋은 거니까.
신기를 깨우는 두 가지 조건인 주문과 새벽 휘장이 모두 갖춰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기를 깨우는 주문은 앞부분만 조금 다르고, 뒤는 동일해.'
즉, 나는 칼리파 여신상 말고도 다른 신기들을 작동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게 된 셈이었다.
이번에 코멜에게 완전한 주문을 들어 둘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칼리파 여신상을 이렇게 유용하게 활용할 줄이야....'
비를 그치고 바다를 잠잠하게 해 주는 효과는 대단한 효과이기는 했지만, 플레이어들보다는 타라스에 터를 잡고 생활하는 어부들에게 더 도움이 될 만한 힘.
이번에 큰 도움을 받긴 했지만, 사실 칼리파 여신상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신기'나 마찬가지였다.
게임 플레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챕터에 나오는 신기는 달라.'
1챕터 클리어를 위해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신기가 1-1 스테이지인 호르헤 섬에 존재했다.
그 물건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1챕터 클리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해적군도라...."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변방의 조그마한 영지인 타라스에서 진행된 프롤로그 챕터와는 달리, 해적군도는 그 무대가 군도 전체로 넓어진다.
고려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름 : 레브 (3)
클래스 : 데모닉
현 위치 : 타라스 외해
보유 특성
-악마화(오른팔)
-탐식
-끈질길 회복력
-마기 변형
보유 결전기
-혈령검
{99.38%}
'타라스 외해라....'
위치라고 표시된 것을 보고 짐작하기는 했지만, 정식 챕터가 아닌 지역도 표시를 해 주는 모양.
'길 잃을 걱정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뱃멀미에 지쳐 잠이 든 에이미에게 담요를 덮어 주기 위해서였다.
스윽-
에이미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있는데, 코멜이 내 옆으로 다가오며 술병을 흔들었다.
"선장, 한잔하시렵니까?"
"…지금? 괜찮은 거야?"
"북서풍이 불고 있으니, 아마 밤 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아마...?"
…이 알콜 중독자를 고용한 게 과연 잘한 일일까?
이미 출항을 해 버려서 해고할 수도 없었다.
"나는 안 마실 거니까, 혼자 마시든가 해."
그를 고용하는 조건에 항해 중 술을 마셔도 된다는 것을 넣었기 때문에 말릴 명분도 없었다.
"이 별이 가득한 밤바다를 안주 삼아 술 마시는 진귀한 경험을 놓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해가 안 되는군. 이해가 안 돼...."
쏟아질 것 같은 별들 아래서 배를 타고 술을 마신다라....
확실히 내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참지 못 했을것 같긴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별로 술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봐, 코멜. 언제부터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된 거야?"
코멜은 놀랍게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이었다.
이 세계의 성년이 16살부터라는 것을 감안해도 알콜 중독자가 되기에는 너무 빠른 나이.
"아. 술 말입니까? 언제였더라… 마시기는 8살 때부터 마신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젠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크으...."
코멜이 병나발을 불며 대답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봐 럼주 병을 입에 대고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참 꼴불견이었다.
"8살? 아무리 뱃사람이라도 술 마시기에는 너무 빠른 나이 아니야?"
"저는 말입니다, 8살 때 아버지가 찬장 속에 소중히 숨겨 놓은 럼주를 호기심에 입에 댄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을요. 술에는! 온몸을 전율시키는 감동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니 뭐라고 하기도 뭐했다.
부디 항해 동안 별일 없기를 빌 수밖에.
그나저나 코멜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 자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코멜이 나를 보며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선장님, 지금까지는 경황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아까 그 빛은 대체...?"
"글쎄...."
나는 품에서 새벽 휘장을 꺼냈다.
아까 발생했던 신비한 빛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장식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새벽 휘장이 어째서 잊혀진 옛 신들을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게임에서도 딱히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선장님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잘 알겠습니다. 아마 이번 항해는 뭔가 심상치 않을 것 같네요."
"술은 죽도록 마시게 해 줄 테니까, 끝까지 부탁 좀 할게."
"크으...! 그거면 충분하죠!"
코멜은 손에 들고 있던 럼주를 다시 들이켜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성이 꽤 착한 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저번에 에이미에게 들은 소리로는 해적군도까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는데, 사실이야?"
"물론이죠. 타라스 사람 중에 저보다 해적군도에 많이 가 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쩌다 가게 된 건데?"
"뭐...."
코멜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끝내주는 술이 경매에 나온다고 해서...."
이 자식은 대체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 거냐고....
코멜은 엣헴- 하며 헛기침을 터트리더니 말을 이었다.
"호르헤섬에서는 해적들이 약탈한 각종 물건들이 경매에 올라옵니다. 각종 귀중품들은 물론, 오가시아 대륙의 물건들까지 구할 수 있어서 아는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엄청납니다. 제국의 귀족들도 몰래 온다고 하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코멜이 손가락을 들어 뭔가 셈하는 듯하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얼마 후면 호르헤섬 최대의 경매인 달 없는 밤이 열릴 겁니다. 3년에 한 번 열리는 거대한 경매로 없는 물건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달 없는 밤 경매는 한 번도 못 가 봤거든요."
달 없는 밤.
나 역시 코멜에게 듣기 전에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해적군도의 스토리는 이 달 없는 밤이라는 경매부터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번 경매에 신기가 올라온다.'
즉, 호르헤섬에서 열리는 달 없는 밤 경매회에 참가해서 '신기'를 획득하는 것이 바로 1챕터에서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경매에 나올 다른 물건들도 살 수 있으면 그 이상 좋을 수는 없겠지.
"뭐, 하여튼 그렇게 몇 번 드나들다 보니까 이제는 해적 놈들과도 제법 안면이 있다랄까요? 알고 보면 꽤 괜찮은 놈도 몇 있습니다."
"그… 래?"
해적군도도 사람 사는 곳이긴 하니까....
내가 알던 NPC들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기대가 아니라 두려움일지도.
해적군도에서 내 예상과 벗어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지.
.
.
.
5일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간에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어찌저찌 호르헤섬 인근 해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건 코멜 덕분이다.'
밤낮없이 술을 들이켜는 것과는 별개로 코멜은 대단히 뛰어난 항해사였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해적선들을 능숙하게 피해 내는가 하면, 어떨 때는 오히려 해적선에 다가가 능숙하게 교섭을 해 길을 열기도 했다.
'코멜이 없었다면, 이미 다른 해적선들에게 걸린 후 물고기밥이 된 지 오래였겠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상황이 좀 달랐다.
왜냐하면.
"무슨 해적들이 물고기보다 많은 것 같은데? 코멜, 여기 원래 이래?"
"이 정도는 아닌데… 확실히 이번 경매는 뭔가 다른가 본데."
코멜 역시 질렸다는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바다 위로 수많은 해적선이 각자의 해골기를 단 채 떠다니고 있었고, 그 사이에 들어온 우리 배는 그냥 장난감처럼 보일 뿐이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코멜이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서는 해적 놈들도 무턱대고 덤벼들지는 않을 겁니다. 놈들 사이에도 최소한의 룰 정도는...."
"어이! 비키라고! 죽고 싶냐!"
"이런 좆만 한 배는 생전 처음 보는군. 킬킬! 차라리 침몰시켜 줄까?"
"…있거든요."
"...."
코멜의 말처럼 해적들이 우리를 습격해 오는 일은 없었지만, 비난과 조롱은 감내해야만 했다.
"저, 저 자식들이! 육지에서 만나기만 해 봐! 비수를 등짝에 꽂아 줄 테니까!"
에이미가 주변에서 들려오는 조롱에 부들부들 떨면서 해적들의 얼굴에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나는 괜한 우려에 그녀에게 한마디 건넸다.
"에이미, 섬에서 소동 일으키면 안 된다?"
"나, 나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거든?! 참나!"
에이미가 흠칫 놀라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자식… 분명히 무슨 일을 벌일 작정이잖아!
원하는 바를 반드시 얻어 내고야 마는 저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섬에서 뭔가 저지를 작정이라는 건 확실했다.
'나도 모르겠다....'
해적 놈들의 비아냥을 듣기 힘든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솔직히 나도 몇 놈 눈여겨봐 두기는 했다.
에이미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코멜을 향해 말했다.
"코멜, 언제 도착해… 빨리 땅을 밟아야 좀 살 것 같은데."
"앞으로 10분 정도면 도착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됐다. 말해 봐야 입만 아프지."
코멜이 술이 고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배에서 내리면 일단 주점부터 갈 생각이 분명했다.
'이것들을 데리고 앞날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왠지 두통이 느껴지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짚었다.
"선장, 제가 이 정도 크기의 배를 숨길 만한 장소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코멜의 말에 따르면 섬에서 해적들 사이에 서로의 배를 건드리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지만, 그건 어느 정도 세력이 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었고, 우리처럼 작은 배들은 섬 곳곳의 암초 사이에 배를 숨겨 둔다고 했다.
끼익- 끼익-
코멜은 절묘하게 해적선들 사이를 빠져나가 외진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암초들이 지형을 형성하고 있어서 웬만한 크기 이상의 배들은 들어오지도 못하는 곳.
코멜은 아주 능숙하게 그 암초들 사이를 지나 절묘하게 가려진 곳에 배를 정박했다.
"아~~~! 살겠다! 그리웠다고!"
제대로 정박이 완료되기도 전에 땅을 향해 날듯이 뛰어내린 에이미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소리질렀다.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호르헤섬에 발을 내디뎠다.
흔들리지 않는 바닥에 순간 낯선 것도 잠시, 땅에 발을 붙였다는 안정감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름 : 레브 (3)
클래스 : 데모닉
현 위치 : 해적군도 – 호르헤섬
보유 특성
-악마화(오른팔)
-탐식
-끈질길 회복력
-마기 변형
보유 결전기
-혈령검
{99.38%}
나는 바뀐 현 위치를 확인한 후 미소지었다.
'시작인가....'
이제 프롤로그는 끝났다.
1챕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