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

70화

저벅. 저벅. 저벅.

놈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전장을 바라봤다.

버질과 후드웍은 갑작스럽게 변한 전세에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버질과 기사단은 한층 강해진 압박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 기대에 보답하듯 작은 빈틈마다 날아든 화살이 기사단을 도왔다.

'나쁘진 않지만....'

당장 스물이 넘는 병사 중 실제로 활을 쏘는 건 다섯이 채 안 됐다.

그만큼의 부담을 기사가 대신해야 하니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기사 중에서 사상자가 나올 터.

그 한 명의 간격을 메우지 못해 결국 대열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나라면 기사를 뒤로 물리면서 병사를 움직여 초근접 사격을 명령했겠지.'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전멸보다는 나으니까.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둘러봤다.

기사가 된 지 얼마 안 됐다던 테일이 오크와 원수라도 진 듯 검을 휘두르고, 이름도 모르는 병사가 다른 이들을 독려하며 후드웍의 지휘를 돕고 있었다.

그 얼굴을 머릿속에 쑤셔 넣으며 아직 발견하지 못한 원석을 찾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개인의 역량이 절실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한참을 돌아보고 난 뒤에야 밀려오는 오크를 바라봤다. 시체를 방패처럼 치켜들고 전진하는 군단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기사단은 시체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눈에 띄게 지쳐 가는 게 보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

* * *

전선의 좌우를 돌아보고, 더 가까운 왼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르릉.

언제나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따라붙은 레이나의 철퇴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조심해."

"네. 최선을 다할게요."

그녀도, 나도 알고 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게 오크 따위가 아님을.

전선의 광기가,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가, 피부를 찌르는 적의와 끓어오르는 살의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흐릿하게 눈앞을 가린 메시지를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모든 특성이 깨어나 눈앞의 적을 지워 버리라고 요란하게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그 살의를 간신히 억누르며 전선을 빙 돌아 군단의 옆을 노렸다.

그리고 시체를 치켜든 오크가 보인 순간, 옆으로 붉은 광기가 달려 나갔다.

"젠장."

최선을 다한다더니.

아니, 여기까지 참았으면 최선을 다한 건가?

앞서 달려 나가는 레이나를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높이며 소리쳤다.

"레이나! 다리!"

내 외침을 들었는지, 레이나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철퇴를 휘둘렀다.

콰드드드득!

투투투투툭

-크아아아악!

순식간에 십여 개의 다리가 허공을 날고, 다섯 마리의 오크와 그들이 들고 있던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구르며 발작하는 오크와 시체 때문에 그 뒤를 따르던 군단이 넘어지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씨익.

자신이 한 일이 꽤나 마음에 든 듯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린 레이나의 적안이 번쩍였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흉흉한 기세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아, 버질 데려올걸.

* * *

"계속 달려!"

계속 달리며 뒤뚱거리며 전진하는 오크의 다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서걱.

비전도, 스킬도 아닌 단순한 찌르기가 오크의 다리를 가르고 지나가자, 진득한 녹색 피를 뿌린 다리 한 짝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아아아악!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뒤로하고 계속 검을 내질렀다.

서걱, 서걱, 서걱.

-크아아아악!

두 손으로 오크 시체를 들어 올린 놈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이후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비릿한 화음을 즐기며 계속 검을 내지르며 달렸다.

서걱, 서걱, 서걱.

바닥에 널브러진 오크가 늘어날 때마다 그 뒤를 따르던 오크들이 걸려 넘어지거나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크아아아악!

쓰러진 오크들은 뒤따르는 오크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댔고, 그럴 때마다 더 많은 오크가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사방에서 울리는 오크의 비명과 고함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달렸다.

쓰러진 놈 중 몸을 일으키는 놈들이 있더라도 척후대가 마무리할 터.

군단장이 진형을 바꾸기 전에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놈들을 최대한 많이 죽여 놔야 한다.

* * *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아니, 죽인 놈보다 죽은 놈을 더 많이 베었나.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버질은 검을 멈추지 않았다. 혼자서 수십의 오크를 상대하는 그가 멈춰 서면 기사단이 무너질 것이기에.

오크의 공세는 지독할 정도로 집요했다. 다리를 자르면 도끼가 날아들고, 팔을 자르면 이를 들이밀며 으르렁대니 몸에 튄 피만큼 지쳐 갔다.

"단장!"

테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조금만 더 버텨라!"

버티기만 하면 된다.

검을 움켜쥔 손을 한층 더 빠르게 휘두르며 속으로 백작가의 가훈을 되새겼다.

'결국 모너는 승리한다.'

평생을 이해할 수 없었던 가훈이 이제야 이해됐다. 기사의 피가 흐르는 가문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가훈은 없었으리라.

그건 모너의 승리를 바라는 주문 따위가 아니었다.

검을 바친 주군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자, 그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되어 기어코 승리를 바치겠다는 맹세.

그러니까 검을 바친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결국 모너는 승리한다.'

아니, 적어도 내 주군만큼은.

* * *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던 버질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과 시야를 가득 메운 오크들, 그러나 뭔가 변했다.

'줄었어.'

기사들의 움직임에는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고 끝없이 전진하는 뒷 행렬 때문에 전진할 수밖에 없던 오크의 압박이 줄어든 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떻게....'

그제야 머리 위를 날아가는 화살과 고통에 찬 오크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이안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순간 그 옆에 서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앞을 가로막은 연녹색의 파도를 넘어 어린 주군에게 당신의 검이 왔노라 외치고 싶었다.

삐죽삐죽 솟는 욕심을 가지고 전장을 바라봤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시체를 든 놈들을 한 번에 베어 넘기는 데는 두 배가 넘는 힘과 그만큼 큰 동작이 필요하니 기사단을 움직이더라도 뚫지 못할 터.

'젠장. 고작 오크 따위한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무력함에 한탄하고 있을 때, 손에 쥔 방패가 눈에 들어왔다.

투기를 두른 도끼에 이곳저곳 패였을 뿐, 처음과 같이 단단한 방패가.

'굳이 꿰뚫을 필요는 없는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적들을 바라봤다.

대해처럼 몰아치던 군단을 밀쳐 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 기세가 약해진 지금이라면....

결정을 내린 버질이 방패를 턱 끝까지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기사단 전원 방패를 들어라!"

전선에서 한두 걸음 물러선 기사들이 동시에 방패를 치켜들었다.

"전진!"

버질의 명령과 함께 움직인 은색의 방벽이 암녹색 대해와 부딪쳤다.

"멈추지 말고 끝까지 몰아붙여라!"

착, 착, 착.

군홧발이 대지를 박차는 소리가 전장을 메웠다.

-크아아악!

캉! 캉! 캉!

갑자기 달려든 기사단에 흥분한 오크들이 시체를 던지고 도끼를 휘둘렀지만, 기사단은 방패로 공격을 흘려넘기며 묵묵히 전진했다.

마침내 오크의 턱 끝까지 방패를 치켜든 기사단이 군단과 부딪쳤다.

* * *

아무렇게나 솟은 이빨에서 위협적인 악취가 풍겼다.

광기와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을 보지 않아도,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에 눈앞의 오크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그래, 그렇게.

단장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랐지만, 도끼도 못 휘두르고 어금니를 들이밀며 고함을 지르는 놈들의 꼴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가 시체를 베어 넘기며 느꼈던 무력감을 눈앞의 오크가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방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아아아!"

내가 답답했던 만큼, 딱 그만큼만 돌려주겠다는 의지로 방패를 밀어붙였다.

-크아아아아아악!

어깨로 어떻게든 방패를 떨쳐 내려는 오크와 두 손으로 방패를 쥔 테일의 힘 싸움이 벌어졌다.

그건 버질을 포함한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제대로 싸우지 못한 분을 풀려는 듯 마나를 줄줄이 풀어 땅을 박차 오크를 몰아붙이고, 함성을 질러 댔다.

"으아아아아!"

마침내 버질이 밀어붙이던 오크 네 마리가 넘어졌다.

그 뒤로 바로 옆에 있던 한 마리가.

그 뒤에 있던 한 마리가,

곧이어 선두에 있던 수십의 오크가 무너져 내렸다.

"쓰러진 적은 신경 쓰지 마라! 이대로 끝까지 밀어낸다!"

바닥을 구르는 오크를 보고 급히 검에 손을 뻗었던 기사들이 다시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그 대열의 선두를 달리던 버질의 입에서 기사의 결의(決意)가 흘러나왔다.

"모너에게 승리를."

그 작은 울림을 들은 이름 모를 기사가 소리 높여 복창했다.

"모너에게 승리를!"

작은 울림은 격동이 되고, 투박한 진군가(進軍歌)가 되어 전장의 온갖 소리를 뒤덮는 함성으로 변해 갔다.

"모너에게 승리를!"

* * *

척후대는 정말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첫 임무를 함께했던 소수의 척후대를 뽑아 이안을 지원했고, 나머지 전원이 기사단이 쓰러뜨린 적을 정리했다.

그 중앙에서 척후대를 지휘하던 후드웍은 그야말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저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질러 대며 황소같이 전진하는 기사들이나 적진의 중앙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이안이나 그 어떤 것도 믿기 어려웠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면.

저들이 쓰러뜨린 오크를 스스로 정리하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검을 집어넣고 두 손으로 방패를 내지르며 있는 대로 악을 쓰는 기사라니.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그 물음에 근처에 있던 병사 하나가 화살을 날리며 답했다.

"'모너에게 승리를!'이라는데요?"

평소라면 기사랑 귀족들은 하나같이 유치하다며 쉰 소리를 했겠지만, 지금만큼은 입을 악다물고 전장을 노려봤다.

막을 방도가 없어 보이던 암녹색 파도가 부서지고 조각나 역류하는 광경에, 활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성벽 하나 없이 군단을 막아 냈다.

세상 모두가 입 모아 불가능하다 소리칠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한마디밖에 안 되는 구호를 노래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는 기사들의 절절한 감정이 닿을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우리 없었으면 쪽도 못 썼을 거면서."

흘러나오듯 내뱉은 푸념에 정신없이 활을 쏘던 척후대가 맞다며 왁 하고 소리쳤다.

누가 뭐래도 이번 전투에서 척후대보다 오크를 더 많이 죽인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하던 기사단 보다도, 저기 저 형형색색의 마나를 터트리며 길을 뚫어 내는 소공작보다도 훨씬 많은 적이 활 아래 죽었다.

기사들은 아예 검조차 들지 않았으니, 척후대 중에 기사보다 적게 죽인 이는 없으리라.

그제야 입에서 한참이나 맴돌던 감정이 선명해졌다. 저도 모르게 벌린 입에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 괴물들한테 모너를 똑똑히 보여 줘라!"

이미 수백 번은 더 당긴 시위를 따라 붉은 피가 방울져 떨어졌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우리가 모너다!"

그 외침에 병사들이 소리 높여 함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이 오크에게까지 닿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함성을 담은 활만큼은 놈들의 머리통을 꿰뚫을 테니.

71화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듯, 현실이 분간되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게임 속 광경인지 아니면 내 손에 느껴지는 이 희미한 촉감이 정말로 피륙을 뚫고 뼈를 잘라 내는 감각인지 알 수 없었다.

비릿한 혈향과 사방을 가득 메운 오크들의 악취에 코는 마비된 지 오래고, 끝없이 들리는 비명과 고함에 검을 휘두르는 소리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저 전장이 주는 광기에 몸을 맡기고 군단을 돌파하고 있으니 저 멀리서 괴성이 들렸다.

-크아아아아!

온몸이 떨릴 정도로 날카로운 살기에 고개를 돌리니, 살아남은 대전사 중 한 마리가 시뻘건 투기와 살기를 줄줄 흘리며 서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놈이 으르렁거렸다. 당장 검을 맞대고 누가 더 뛰어난 전사인지 겨뤄 보자는 듯 제 어금니를 드러내 웃으면서.

시체로 몸을 가린 오크들 사이에서 오연히 선 모습만 봐도 얼마나 뛰어난 전사인지 알 수 있었지만.

"미쳤냐?"

내가 오크도 아니고 군단의 중심에서 대전사랑 일기토를 벌이는 미친놈이 어딨....

쾅!

놈을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철퇴가 놈의 창과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아...."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군단의 중심에서 대전사와 싸울 정도로 광기에 젖은 인간이.

쾅! 쾅! 쾅!

타오르듯 빛나는 적안(赤眼)에서는 전투의 광기가 넘실거렸고, 머리칼을 타고 흐르는 녹색 피로 본래의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든 그녀가.

대전사를 향해 흰 이를 내보이며 연신 철퇴를 내리치고 있었다.

"저렇게 웃는 건 반칙인데...."

마치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보니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멀뚱히 서서 철퇴를 휘두르는 모습조차 아름다울 수 있음에 감탄할 뿐.

"크아아아아!"

흥분을 감추지 못한 대전사가 창을 내지를 때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창을 피하고 철퇴를 휘둘렀다.

춤추는 듯한 그 유려한 몸짓에 철퇴가 흔들거릴 때마다 대전사의 창이 흔들리고, 튕겨 나간 철퇴는 꼭 하나의 오크를 짓이기고 나서야 멈췄다.

단신으로 몬스터 군단 하나를 지워 버렸다던 영웅의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마나에 맞서, 대전사의 시뻘건 투기(鬪氣)가 번쩍였다.

"크아아아아!"

수없는 죽음의 경계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격을 이룬 오크의 울부짖음에, 그조차 질 수 없다는 듯 레이나가 악써 가며 화답했다.

"으아아아!"

누가 진정한 전사인지, 그 자격을 겨루자는 듯.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정확히는 저 멀리서 반짝이는 나이트 슬레이어의 화살촉을.

"저것들은 또 안 쏘고 뭐 하는 거야?"

검을 바로잡으며 궁시렁댔다.

아직 절박하지 않아서 그렇다.

전투에 명예니, 긍지니 하는 애새끼 같은 감상이나 따지고 있는 건.

죽음에 달린 무게가 고작 한 사람분의 목숨값일 거라 생각하는 건.

게임 속 인류도 그랬다.

종(種)의 멸망을 앞두고서야 한 사람의 죽음이 수백, 수천의 죽음을 가져올 수 있음을, 그 어떤 명예나 긍지도 그 흐드러지는 죽음 앞에서 헛될 뿐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싸움은 다구리로, 전투는 얍삽하게, 전쟁은 야비하게."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의 사람들도 손자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할 텐데.

귀왕의 호흡법에 따라 기척과 살기를 죽이고 들끓는 마나를 검에 죽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나와 투기가 부딪치는 곳을 향해 달렸다.

쾅! 쾅! 쾅!

대전사는 오랜만에 만난 적수에 흥이 올라 연신 콧김을 뿜어 대며 창을 휘둘렀다.

쾅! 콰쾅!

그 힘을 견디지 못한 레이나가 연신 뒤로 밀려났다가도, 다시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레이나를 향해 놈이 창을 내지른 순간, 레이나의 옷깃을 잡아 뒤로 던진 이안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겨드랑이 사이로 창을 받았다.

콰드득!

제대로 받지 못했는지 겨드랑이 사이로 격통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계속 달려 검을 내뻗었다.

[암검(暗劍) 제1식 일점(一點) ─ 사(死)]

서걱.

창을 회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놈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기 무섭게, 흑광이 번쩍이며 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툭─

당황과 분노로 가득 찬 놈의 대가리를 멀리 찬 뒤 재빨리 품에서 스팀팩을 꺼내 뼈가 반쯤 보이는 겨드랑이에 부었다.

"큭...!"

격통과 함께 진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피할걸.

이상하네, 분명 게임에서는 먹혔는데.

아, 창날이 아니라 창대를 잡는 거였나?

* * *

"아, 아...."

어느새 달려온 레이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만졌다.

금세 울상이 된 그녀의 눈에서 적안이 사그라드는 걸 보고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그녀가 여기까지 오며 죽인 오크의 수가 적어도 수십은 될 텐데, 군단 한복판에서 지금껏 쌓아 온 광기를 잃을 수는 없다.

누가 뭐래도 이번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녀니까.

더없이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에게 가볍게 웃으며 어느새 모여들고 있는 군단을 가리켰다.

"아직 죽여야 할 놈들이 널렸는걸."

그 말에 희미해져 가던 광기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시뻘건 광망을 번뜩인 그녀가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오크를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동시에 내 몸에 올린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슬픔과 비탄이 흥분과 설렘으로.

걱정과 염려가 타오르는 듯한 갈증으로.

혈귀(血鬼)의 특성이 주는 그 채울 수 없는 욕구를 모를 리가 없기에, 그녀의 등을 살짝 밀며 귀에 속삭였다.

"가."

내 허락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나선 그녀가 녹색 물결을 부수고 조각내며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 * *

군단의 네 번째 도끼 흘륜데어가 인상을 구긴 채 성난 숨을 내쉬었다.

-취익, 취익....

이 전투는 패배했다.

저 하등한 종족이 가진 건 조금 날카로운 활과 몇몇 뛰어난 전사뿐이라 생각했으나,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저들의 활이나 검이 아니다.

주제도 모르고 군단을 헤집고 있는 수컷의 검은 가장 약한 대전사의 도끼보다도 약했고, 인간 전사들은 검조차 들지 않았으니.

-왕이 옳다.

저들은 위험하다.

도끼와 팔을 동시에 가르는 검이 아니라 방패 진을 뚫는 단호함과 결단력이.

오크 전사의 팔과 두개골을 꿰뚫는 화살촉이 아니라 무기를 버리고 방패를 집어 든 전사들의 결의가.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상황을 만들어 낸 놈들의 머리가.

흘륜데어가 저 멀리 후드웍을 노려보며 도끼를 만지작거렸다.

가장 뒤에서 인간 전사와 활쟁이들을 이끄는 저놈이야말로 이들의 머리일 터.

놈들의 머리가 언제고 군단을 막아설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당장이라도 놈의 두개골을 부숴 왕께 바치고 싶었다.

-운이 좋은 놈이구나.

도끼 자루를 으스러지도록 움켜쥔 흘륜데어가 중얼거렸다.

악착같이 군단의 뒤를 쫓는 빌어먹을 오우거만 없었다면 직접 도끼를 집어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놈이 살아 있는 한 위험을 감수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한낱 전사보다도 약한 인간 따위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언제든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대신 네 전사를 데려가마.

결정을 내린 흘륜데어가 입을 쩍 벌리자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이 튀어나왔다.

「전사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감히 군단을 막아선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시체를 집어 던지고 도끼를 꺼내 드는 오크를 보며 흘륜데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곳의 모든 오크가 죽는대도, 군단을 파고든 두 인간만큼은 결코 살아 나가지 못하리라.

* * *

-크아아아악!

투기가 섞인 군단장의 외침에 레이나와 함께 군단을 돌파하던 이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벌써?"

단 한 번의 외침에 군단이 움직였다.

-카아아악!

방어를 포기하고 도끼를 쳐든 오크들이 사방에서 소리를 질러 댔다.

기다렸다는 듯 날아든 척후대의 화살에 쓰러지는 놈들이 늘었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쓰러진 놈들의 머리마저 짓밟고 서서 날 노려봤다.

"이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투기로 몸을 감싼 놈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좀 너무한데?"

오크의 언어 따위 단 한 마디도 모르지만, 놈의 명령만큼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변의 모든 오크가 나와 레이나를 향해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으니까.

"쯧, 아무리 그래도 근처까지는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돌려 군단장의 외침이 들려왔던 곳을 바라봤다.

고작 인간 두 명에 전투를 포기하다니.

우리가 아무리 대열을 흔들어 봐야 고작 둘로는 결국 시간 벌기에 불과했을 터. 버티기만 하면 승리가 확실한 전투 아닌가.

"뭐, 상관없나."

진다고 생각하건, 이긴다고 생각하건 놈의 생각이나 전력은 중요하지 않다.

이쪽은 넘치도록 준비해 왔으니까.

* * *

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 데 가장 필요한 건 뭘까.

단신으로 군단을 막아서는 능력이 필요했다면 세상을 유랑하면서 특성을 모았을 것이다.

영웅이 필요했다면 아직 꽃조차 피지 않은 영웅을 찾아가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겠지.

"으아아아!"

콰드드득!

레아나가 휘두른 철퇴에 곤죽이 되어 날아가는 오크를 바라봤다.

돕고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은 있었지만, 내가 다친 뒤로 한층 더 매서워진 그녀의 간격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고작 직선밖에 그리지 못하는 내 검보다야 그녀의 철퇴가 훨씬 효율적이기도 하고.

콰드드득!

쉴 새 없이 철퇴를 휘두르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을 이었다.

정답은 눈치다.

무슨 개소리냐고 하겠지만, 전쟁의 구 할은 눈치 싸움이다.

전쟁의 목표는 언제나 승리고, 둘 중 하나는 승리를 확신해서 벌어지는 싸움이니, 내가 아니다 싶으면 튀는 게 상책이다.

그러니까 싸움을 계획할 때는 언제나 두 가지 중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언제든 큰 피해 없이 도망갈 수 있다는 확신.

-서걱.

어느새 접근한 오크의 목을 베어 넘기자, 다른 오크가 창을 들이민 창이 코끝을 스쳤다.

그놈의 배를 걷어차 넘어뜨리자, 어느새 다가온 오크가 넘어진 놈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콰직!

불과 한 호흡도 채 내뱉기 전에, 바닥에 시체 두 구가 늘었다.

바닥을 가득 메운 시체 중 인간의 것은 없다.

처음부터 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건 나와 레이나, 둘뿐.

당장이라도 후퇴하려고 마음먹는다면 나머지는 큰 피해 없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으아아아!"

콰드드득!

레이나의 목소리가 숲을 울릴 때마다 그녀의 마나가 불처럼 피어오르고, 새빨간 적안(赤眼)이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수십 걸음은 떨어졌는데도 그녀의 뜨거운 마나가 느껴졌다.

더 많은 피를 위해 멈추지 않고 철퇴를 움직이던 그녀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서 숲의 한편을 바라봤다.

나조차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느낀 듯, 흥분과 초조, 열망으로 일렁거리는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간 순간.

-□□□□□□!

영혼을 울리는 오우거의 외침이 전장의 모두를 멈춰 세웠다.

격이 다른 존재의 분노에 찬 외침에 쓰러지는 오크를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저기 내 두 번째 확신이 오고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지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72화

그게 언제였더라.

새롭게 시작한 게임에서 트리미아를 따라다니기로 한 건, 반쯤은 장난이었다.

그때만 해도 트리미아는 좀 특이한 엑스트라에 불과했으니까.

특성도, 땅도, 백성도 없는 자칭 왕.

가진 거라곤 산적밖에 없는 용병단 하나.

트리미아에게 광군(狂君)이라는 별명이 생겼던 것도 그때였다.

"도망가자."

왕이라는 놈이 동네 좀도둑보다도 도망에 능숙했고.

"우리보고 싸우라고? 왜? 발헤임 놈들이 안 오면 우리도 안 가."

도망이 아니면 다른 놈을 부르기 일쑤였으니까.

'미친놈.'

승률 20%에, 생환율 90%.

그런 주제에 미친 왕은 버릇처럼 말했다.

"자기가 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싸우는 놈은 없어. 그건 싸움이 아니라 자살이지."

그래서 질 것 같은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다.

이길 거라고 생각한 전투에서조차 상대가 너무 자신만만해 보이면 일단 도망부터 쳤다.

누가 악을 쓰며 승리를 확신해도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저놈들은 진다고 확신하고 저기 앉아 있대? 승리를 확신해서 뭐 해? 진짜 필요한 건 무슨 짓을 해도 지지 않는다는 확신이지."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그의 철학은 그런 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는 않겠다 싶을 때, 그때 딱 목숨의 반만 거는 거야."

제 백성을 끔찍이도 아끼던 왕은 노예 검사로 데려온 이안에게조차 그리 말했다.

"뒤지면 전부 소용없으니까."

불합리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보다 좋은 조언이 또 있을까.

* * *

-□□□□□□!

영혼을 찢을 듯한 포효가 울리고.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런 식인가.'

유전자에 각인된 공포가, 세대를 넘어 전해져 내려온 생존 의지가 소리쳤다.

당장 몸을 낮추고 모습을 숨기라고.

숲의 지배자가 왔으니 엎드려 자비를 구하라고.

툭, 투툭.

실제로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오크들이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가렸다.

'지금.'

피어가 지속되는 시간은 3분.

군단장이라면 30초 안에 정신을 차릴 터.

입속 가득 머금고 있던 피를 꿀꺽 삼키자 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읏- 짜"

내 몸이 아닌 듯 어색한 몸을 삐걱거리며 레이나를 들쳐 멨다.

"…아?"

당황한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새된 소리를 냈지만, 그걸 즐길 시간이 없었다.

"미안, 지금 당장 도망가야 돼."

땅을 박차면서 말을 이었다.

"제 새끼를 잃은 맹수만큼 무서운 건 없거든."

하물며 그 맹수가 어지간한 산을 지배한다는 오우거임에야,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다.

* * *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시체를 밟고 뛰어넘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산으로 분주했다.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가?'

꼬리를 만 일반 전사들과 달리 살아남은 대전사와 군단장이라면 피어를 견뎌 냈을 터.

투기를 일으켜 혼란에 빠진 군단을 움직일 수 있음에도 군단장은 조용했다.

하긴, 오우거와의 전면전을 즐길 만한 변태라면 함정을 파기 전에 놈과 결판을 지었겠지.

'그럼 이쪽도 다행이고.'

어떻게든 계획대로 흘러갔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걸 성공으로 볼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 그냥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어.'

분명 최악을 가정한 전투였다.

싸워서 이길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오우거를 불러 군단과 싸우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놈이 피어를 내지른 순간 바로 빠졌어야 했다.

'3초.'

당연히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피어에 몸이 굳어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3초가 아니라 단 1초였다고 하더라도 군단장이 근처에 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으드득.

스스로가 한심해 다문 입 사이로 피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분에 맞지도 않는 적을 만나고도 살아남아서?

하나도 과분한 특성을 몇 개나 가지고 있어서?

아니, 그냥 안일함이고 자만이다.

피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 아티팩트를, 최소한 솜과 가죽은 구해 내 귀는 틀어막았어야 했다.

그것도 레이나를 건 전투에서, 감히 그녀를 한낱 패로 사용했으면서.

"병신 새끼."

참을 수 없는 혐오에 욕지거리를 내뱉자, 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둘러멘 레이나가 날 걱정하고 있음을.

그녀의 손짓에 화끈거리는 볼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후웅!

바람을 가르는 도끼 소리가 들렸다.

"젠장!"

다급히 레이나를 던지고 바닥을 굴러 몸을 피했다.

콰드득!

등 뒤로 땅을 가르는 도끼 소리와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륵, 운이 좋구나, 너도."

몸을 일으키고 뒤를 돌아보자, 지금쯤 오우거를 피해 도망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군단장이 땅에 박힌 도끼를 집어 들며 웃고 있었다.

"안 됐지만, 넌 죽는다."

그 선고가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듯.

놈의 등 뒤로 흉흉한 투기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 * *

검이 두려움을 모르듯 기사는 두려움 모른다.

요새에서 나고 자라 죽음을 벗으로 삼은 버질조차 그렇게 믿었다.

수백의 전우를 떠나보내고, 수천의 몬스터를 그 곁으로 보내면서도, 버질은 두려움을 몰랐다.

검을 든 매 순간 죽음을 각오했기에 그의 목숨은 언제나 여신의 것이었고, 그의 생존 또한 여신의 자비라 여겼다.

고블린의 왕 테헤키를 마주한 그날 밤까지는 그랬다.

'도망쳐.'

테헤키를 만난 그날.

어색한 손놀림으로 도망가라고 명령하는 소공작의 뒷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항거(抗拒)할 수 없는 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끝내 검이 되지 못한 스스로의 나약함에.

그리고 그의 검이 되었다.

-□□□□□□!

귀를 찢는 듯한 울림에 심장이 멈춰 서고, 어둠이 시야를 집어삼켰으나 검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카드득.

비록 오우거의 투기에 팔과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사지 중 단 하나도 그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나, 의심하지 않았다.

-카드드득.

부라린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가고 악다문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떨어지는 핏물 사이로 실낱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저 초록 물결 넘어 어딘가에 있을 어린 주인을 떠올리자 꿈쩍도 안 하던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을 잡은 순간부터 연습한 백작가의 호흡법에 절로 움직인 마나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두근.

다시금 밝아진 시야에 오크가 보였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놈.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은 놈.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경기를 일으키는 놈.

그걸 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달싹였다.

"─모너는 승리한다."

그 실낱같은 선언에 기사단의 비전이 반응했다.

목소리를 타고 퍼져 나간 마나가 같은 비전을 가진 기사들의 심장을 움켜쥐고 박동을 대신했다.

-두근, 두근, 두근.

서른 개의 심장이 동시에 울리자, 머릿속을 헤집던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어둠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곧이어 처음 느껴 보는 고양감이 온몸을 자극했다.

-두근, 두근, 두근!

서른이되 하나 된 박동 소리가, 심장을 움켜쥔 마나가 그들을 종용했다.

어서 검을 들어 마땅한 승리를 바치라고.

방패를 고쳐 쥔 버질이 땅을 박찼다.

그 뒤를 기사단이 따랐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전장을 달리는 모두가 들었다.

-모너에게 승리를!

전장에 울리는 쩌렁쩌렁한 외침을.

* * *

땅을 짓밟고 오연히 선 군단장과 눈이 마주친 순간,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흘륜데어냐."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흘륜데어가 반응했다.

"날 아나, 인간?"

"잘 알지. 기사 사냥꾼, 흘륜데어. 기사만 보면 환장하는 놈."

흘륜데어는 그 이명만큼이나 특이한 놈이다.

잠재력 있는 기사만 보면 성을 뛰어넘어서라도 죽이고 보는 불합리 그 자체니까.

군단장씩이나 되는 놈이 기사 한 명을 노리고 움직이면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

그나마 차선책은 사냥을 끝낸 놈을 노리는 거랄까.

"이거, 직접 경험해 보니까, 기분이 영 개 같은데."

퉤, 침을 뱉은 뒤 검을 움켜쥐자, 놈이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기다려라, 인간."

긴장을 풀지 않고 놈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놈이 쥐고 있는 도끼를.

'왜 아직도 입을 나불거리지?'

내가 아는 놈은 자제력과 거리가 멀다.

애초에 피지도 않은 꽃을 꺾으려고 적진에 침투하는 놈의 참을성이야 뻔하니까.

놈과 나의 실력 차라면 머리를 벤 다음 도망갈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놈이 물었다.

"네 주인은 누구지?"

"아?"

순간 말문이 막혀 헛바람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결국 말하게 될 것이다."

도끼를 치켜든 놈은 제 말에 확신하는 듯했다.

물론 저 크기의 도끼라면 협상 아이템으로 나쁘지 않을 테지만....

"도대체 무슨 개소린데?"

내 주인이 누구냐니.

질문의 의도조차 모르겠다.

우리 엄마? 아빠? 아니면, 공작?

아니, 이 새낀 호구조사를 왜 전장 한복판에서 하지?

* * *

매섭게 내려치는 도끼를 피해 바닥을 굴렀다.

쾅!

"아, 쫌!"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놈의 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후웅!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도끼가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매서운 속도로 엄습해 왔다.

탕!

발에 모아 둔 마나를 터트려 뒤로 구르자, 투기를 두른 도끼가 내리꽂혔다.

"말하게 해 준다며!"

이래서 오크 새끼들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휘두르던 도끼가 점점 매서워지고 있다.

놈의 얼굴에 걸린 미소도 점점 짙어지고 있고.

"야!"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치면서도 연신 뒤로 도망쳤다.

놈이 나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을 때, 레이나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려면 한 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

콰득!

분명 피했는데, 팔이 깊게 베였다.

단 한 번도 검을 맞대지 않고 피하기만 했는데 상처가 늘어 간다.

'괜찮아.'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피를 흘리는 건 괜찮다. 게걸스러운『피의 욕망(慾望)』은 적아를 가리지 않으니까.

죽지만 않으면 도망칠 수 있다.

더 멀리 도망치면 레이나는 살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오우거를 끌어들여야 돼.'

도대체 뭐에 집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내게 원하는 게 있을 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빈말이라도 내 주인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므로,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다시 외쳤다.

"내가 주인이라고!"

동시에 마나를 잔뜩 때려 박으며 땅을 박찼다.

여태까지와 같은 반응이라면.

콰콰쾅!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한 무식한 새끼가 힘 조절에 실패할 테니까.

"야! 힘 조절, 힘 조절!"

놈에게 애원하듯 말하면서도 생로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물컹거리는 오크, 엎드린 오크, 오크 팔, 오크 다리, 오크 몸뚱이.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암녹색 종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씨발."

도저히 도망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원하는 정보가 있어 살려 두고 있을 뿐, 놈이 괴성을 지르는 순간 저 모든 암녹색 일족이 일어나 도끼를 들이밀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알아낼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순간, 놈의 도끼가 내 목을 가르겠지.

"뭔지나 알고 죽으면 덜 억울하려나?"

내 주인이라니.

나 말고 내 주인이 있을 리가.

백작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지만 내가 주인....

"야!"

순간 멍청한 새끼가 주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인물이 떠올라 소리쳤다.

"후드웍!"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놈의 도끼가 나를 쪼개듯 날아들었다.

'양심 없는 새끼.'

그렇게 알고 싶어 하던 걸 알려 줬는데, 살려 주지는 못할망정 사람을 둘로 쪼개려고 하다니.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도끼를 노려보며 숫자를 셌다.

'하나, 둘....'

놈의 도끼가 내 머리를 쪼개기 직전, 어디선가 나타난 방패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콰카칵! 텅!

도끼와 방패가 부딪히며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검이 아닌 방패가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 죽을지도 모르니까.

"이 새끼야, 내가 주인이라고 했지?"

여기 내 검.

아니.

방패가 왔다.

73화

이안은 이 상황 중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멍청한 녹색 덩어리가 후드웍에 집착하는지도.

오우거는 소리만 냅다 지르고 어디로 갔는지도.

전방에서 척후대를 지키고 있어야 할 기사단이 왜 적진 한복판에 나타났는지도.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그 잠깐 사이에 기사단 전원이 특성을 얻을 수 있었는지도.

'그래. 이 세계가 그렇지 뭐.'

드래곤이 날아다니고, 트롤이 제국의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세상이다.

성당에 마족이 살고, 한낯 기습에 일족의 왕이 움직이는 세계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지만, 딱 하나만큼은 그러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방패를 쳐들고 있는 건데?"

그 물음에 내 첫 번째 검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막는 것들이 있길래 밀어 버리고 왔습니다."

...?

…베어 버리는 게 아니라?

…좋은 검 두고, 왜?

괜히 물어서 궁금증만 늘었다.

버질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뭐라 더 묻기도 뭐했다.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어."

누가 뭐래도 내 목숨을 구해 준 건 사실이고, 저 무식한 도끼를 막을 수만 있다면 검이든 방패든 아무 상관 없으니까.

* * *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발짝 물러서자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전장을 훑었다.

씩씩거리며 물러선 흘륜데어의 상태, 사방에 널브러진 오크들을 차례로 눈에 담으며 머릿속으로 승산을 점친다.

'여전히 0%.'

변한 건 없다.

전장도, 상대도 변하지 않았다.

오크 군단장은 고작 일개 기사단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 도망은?'

기사단을 반쯤 버리면 도망갈 수 있지 않을까.

남은 기사단이 목숨을 걸고 놈을 막는다면 몇 명의 몸을 뺄 시간쯤이야 충분히 벌 수 있지 않을까.

가능성을 따져 보며 소리에 집중했다.

-쿵, 쿵, 쿵.

규칙적인 걸음 소리 너머로, 오우거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놈은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다.

터무니없이 느린 속도로.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나?'

고작 기사단 하나로?

그건 또 얼마나 죽을까?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벌써 왔어야 할 오우거는 없고.

있지 말아야 할 군단장이 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답답함이.

성마른 물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그때, 옆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주군이 원하시는 대로."

아무런 의심도 후회도 느껴지지 않는 여상한 목소리에 놀라 옆을 바라보자, 버질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날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이라....'

순간 치켜든 의문에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왜 계획이 실패했는지.

상대의 계획은 뭐였는지.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그러다 문뜩, 이안의 시선이 흘륜데어를 향했다.

의문에 찬 눈으로 잠시 놈을 바라보던 이안의 입가에 천천히,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야."

버질과 기사단을 노려보던 흘륜데어의 눈알이 뒤룩 굴러 이안을 향하고, 놈의 기세가 쏟아져 나온다.

수천의 오크 위에 선 군단장의 기세가, 살기가, 투기가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며 날을 세워 위협한다.

그 살 떨리는 위협을 마주한 이안의 입술에서,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도망가면 봐줄께."

난 절대 지지 않는다.

* * *

"크륵?"

당황한 놈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난 무슨 짓을 해도 안 져."

그런 확신이었고, 그런 계획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몇 가지 예상이 빗나가 생긴 위협에 지레 겁먹었을 뿐, 적도 전장도 바뀌지 않았다.

"크륵, 확인해 볼 테냐?"

도끼를 움켜쥔 놈이 으르렁거렸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

잘 벼려진 무기를 두고 혀를 굴리는 오크를 보고 있자니, 없던 확신도 생길 지경이었으니까.

'확실해.'

오크가 도끼 대신 혀를 굴린다.

돌진 대신 함정을 준비하고, 전투가 아닌 전략을 짜내고, 군단을 소비했다.

놈은 싸울 생각이 없다.

아니, 싸우지 못한다.

"해 봐."

이안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자, 그 뒤를 기사단이 따랐다.

흘륜데어의 눈동자가 이안과 기사단을 차례로 훑었다.

"크륵, 방금 전까지 겁먹어 소리치던 놈이 자신이 과하구나. 군단의 네 번째 도끼가 고작 비루한 검 몇 자루를 뚫지 못할 것 같으냐?"

말하는 놈의 기세가 한층 더 강렬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위협적인 살기와 투기를 뿜어 대자, 몇몇 기사가 긴장한 듯 방패를 그러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흘륜데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이안만큼은 놈의 기세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까 기사단이 오는 거 너도 알았지? 그래서 투기까지 써 가면서 달려든 거지?"

내가 기사단의 접근을 느꼈다면, 놈도 기사단의 접근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때부터 놈은 이성을 잃은 척, 날 죽이려 들었다.

'도대체 왜?'

군단장이 그런 연기를 할까.

그보다 먼저, 놈이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후에야 보였다.

붉게 타오르는 투기 뒤에 숨겨진 상처가.

그러자 궁금했던 싸움의 결과가 눈에 그려졌다.

왜 놈이 후드웍이 아니라 나에게 왔는지도.

"처음에는 네가 오우거랑 싸우는 동안 군단이 대피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 반대였어."

여전히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덜덜 떨고 있는 오크들을 흘겨봤다.

3분이 훌쩍 지나 피어의 영향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공포에 젖어 움직이지 못하는 전사들을.

"네가 도망가는 동안 군단이 시간을 번 거야."

오우거와의 싸움에서 놈은 참패(慘敗)했고, 군단을 방패 삼아 도망쳤다.

상처를 입은 놈은 전장에 나설 수 없었고, 오우거를 만날까 두려워 후드웍을 죽이러 가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우거가 어지간히 무서웠나 봐?"

그 말과 동시에 놈이 입을 열었다.

"네가 진짜 머리였구나."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붉은 눈을 번쩍거리면서.

* * *

-크아아아악!

쾅!

포효와 동시에 땅을 박찬 놈의 거체가 하늘을 나는가 싶더니, 이안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쳤다.

"막지 말고 물러서!"

공격을 막으려 방패를 치켜들었던 기사단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쾅!

모래바람 사이로 기사단의 한가운데 선 놈의 눈동자가 이안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섯부른 모략가의 모습은 어딜 갔는지, 제 투기만큼이나 시뻘건 살의로 가득찬 전사의 얼굴이 보였다.

낭창한 창처럼 예리하던 놈의 기세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수천의 오크를 집어삼킨 뭉툭한 도끼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위험한 인간이다.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괴성이었으나, 그 뜻만큼은 명확했다.

나에게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와 그 안에 이글거리는 열망을 보건데.

놈이 원하는 건 내 목이었으므로.

"죽는다."

그건 이중적인 선언이었다.

상처 입은 군단장은 이곳에서 죽음을 결심했고, 그 대가로 인간 하나의 목을 가져가겠다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방패 뒤에 숨은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수십 번도 넘게 그를 죽여 본 경험이 있는 사냥꾼이라는걸.

성공을 확신한 사냥꾼이 입꼬리를 찢으며 말했다.

"응. 넌 죽어."

* * *

놈이 움직이는 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놈의 발이 움직인 순간 본능적으로 허리를 틀었을 뿐이다.

훙!

시퍼런 도끼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허공이 아니라 머리를 갈랐으리라.

재빨리 거리를 벌리면서, 검집에 손을 올린 버질을 보고 소리쳤다.

"방진을 굳힌다! 트롤 사냥 대형으로!"

죽기 직전까지 끝없이 상처를 재생하는 트롤을 상대할 때는 검을 쓰지 않는다.

대신 방진을 굳혀 트롤이 지칠 때까지 몰아세운다.

-크아아아!

자신을 포위하는 기사가 불쾌하다는 듯, 왼편을 막아선 기사를 향해 놈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쾅!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놈의 괴력에 버티면 무너질 뿐이다.

방진의 핵심은 놈을 지치게 하는데 있지, 힘 싸움에 있는 게 아니다.

"버티지 마! 흘리지 못하면 물러나!"

외침을 들은 기사가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그 사이를 헤집으며 나서려는 놈을 향해 다른 기사가 들러붙었다.

-크워어어!

쿵!

분노한 놈이 다시 한번 도끼를 길게 휘둘러 기사들을 물리고, 땅을 박찼다.

"흐앗!"

놈이 허공을 날 듯 뛰어올랐을 때, 나는 버질을 향해 전력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놈이 누굴 노리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콰콰쾅!

역시나, 내가 서 있던 땅을 부수며 내려선 놈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목표를 정한 기사 사냥꾼의 집념은 집착에 가깝다.

"버질!"

놈의 도끼가 움직이기도 전에 달려온 믿음직한 방패가 내 앞을 가렸다.

콰쾅!

도저히 방패와 도끼가 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을 뒤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놈이 나만 노린다면, 내가 도망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이기는 싸움이니까.

-크워어어어어!

도망가는 날 발견한 군단장의 분노에 가득찬 고함이 들려왔다.

"어디, 따라와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지만, 놈이라면 분명 들었을 것이다.

쾅! 쾅! 쾅!

포기를 모르고 따라오는 놈과 단 한 걸음이라도 늦추려는 기사단의 힘겨루는 소리가 끊임없이 전장을 울려 댔다.

* * *

이안은 오우거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렸다.

그러면서도 연신 뒤를 확인했다.

한번 사냥감을 정한 기사 사냥꾼은 사냥감과 사냥꾼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사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뒤를 돌아 놈을 확인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오우거를 발견했을 때.

"아...."

놈은 울고 있었다.

초록색 피로 뒤덮여 본래의 모습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거체가 찢어지는 비탄을 담은 눈으로 소리없이 울어 댔다.

-콰직, 콰득, 콰득.

바닥에 엎드린 오크를 하나씩 짓밟고, 터트리고, 짓씹으면서도 절절히 느껴지는 분노와 슬픔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쿵, 쿵, 쿵!

그러니 놈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감히 제 새끼를 욕보인 족속을 단 하나도 살려 둘 수 없었기에.

그 슬픈 눈으로 분주히 주변을 살피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엎드린 오크들을 짖누르고, 부수고, 찢고, 짓씹어 죽였다.

쿵, 쿵, 쿵!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찝찝하게.'

봤으니 알 수 있다.

저 학살이 죽은 제 새끼를 위한 진혼제(鎭魂祭)임을.

이 숲의 모든 오크를 죽여도 풀리지 않을 깊은 원한이 놈을 움직이고 있음을.

그런 놈에게 암녹색 일족의 군단장은 썩 괜찮은 선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흘륜데어를 찾으니, 어딘가 조급한 흘륜데어와 그를 막아선 기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젠장.'

놈이, 눈앞의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냥꾼이 귀찮다는 듯 도끼를 휘두르자, 그 사이로 기사가 방패를 들이밀었다.

카카카칵!

불똥을 피우며 방패를 타고 미끄러지던 도끼가 불현듯 멈춰 선다.

사냥꾼의 눈이 호선을 그리는 순간에도, 사냥감은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걸 몰랐다.

본능적으로 땅을 박차며 소리쳤다.

"멍청한 새끼야! 눈깔 제대로 안 떠?!"

동시에 뒤에서 피부를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끊임없이 쿵쿵거리던 오우거의 손과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74화

테일은 긴장한 얼굴로 저 멀리 펼쳐진 모래바람을 바라봤다.

"방패 들어!"

-착.

선임 기사의 외침에 기사들이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 가운데 선 테일의 시선이 자연스레 치켜든 방패로 향했다.

여기저기 우그러지고 부셔져 걸레짝이 된 방패를 보고 있자니, 문뜩 이게 전부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건 꿈이다. 그것도 질 나쁜 꿈.

생각해 보면 망나니라고 불리던 소공작이 나타났을 때부터 현실감이 없었다.

나이트 슬레이어를 맨손으로 쓰는 병사들이나, 영웅담의 한 편에 나올 것 같은 소공작이나, 거기에 빠져 검을 바친 단장이나, 전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이다.

기사 둘과 하녀 한 명이 일백에 가까운 오크를 막아 내다니, 그런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이 있으면 밥을 얻어먹기는커녕 밤길을 조심해야 할 터였다.

그중 가장 말도 안 되는 건....

"뛴다에 삼 골드."

옆에서 미친 소리가 들렸다.

"박는다에 오 골드."

그 미친 소리에 답하는 미친놈이 있었다.

"미친 새끼, 앞에서 뛰는 거 못 봤냐?"

"쫄리면 뒤지시던가."

"씨벌, 콜. 저 괴물이 박으면 넌 어차피 뒤져, 새꺄."

전투 중에, 그것도 군단장과의 전투 중에 도박이라니.

아무리 개판 직전인 기사단이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하나뿐인 직장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재수 없는 소리는. 야, 병아리. 넌 안 거냐?"

그래서 무시했다.

"어? 병아리가 하늘 같은 선배를 무시하네?"

"씨벌, 나 때는 상상도 못 했는데."

후환이 두려웠지만 꾹 참고 무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

방패 사이로 보이는 먼지바람이 가까워질 때마다 불안함이 점점 커지더니, 결국 속마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마물의 숲 한가운데서 방패병 일일 체험이라니, 그럼, 그럴 리가 없지. 이건 꿈이야. 꿈이 분명해. 오크 군단장이라니 상상력도 좋지."

하고 말하니 왼쪽 끝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오크 학살자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소인은 오크 학살자님만 믿고 전장에 나섰는데요?!"

씨발.

단장과 일백의 오크를 막아 내고 요새에 귀환했던 그날.

영웅심에 취한 병아리는 어지간히도 삐약댔고, 오크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더랬다.

그래서 테일은 이 순간이 꿈이길 진심으로 바랐다. 꿈이 아니라면 죽은 후에도 저 소리를 들어야 할 테니까.

저 빌어먹을 인간들이라면 비석에 이름 대신 이명을 적어 놓을지도 모른다.

"아, 쫌! 선배! 제가 잘못했다고 몇 번이나...!"

아쉽게도 테일의 푸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방패!"

최선임 기사의 외침에 히히덕거리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방패를 치켜든 기사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다.

앞서 달려간 기사단이 바리케이드를 치면, 오크 군단장은 뛰어넘는다.

속도가 느려진 군단장에게 기사단이 엉겨 붙고, 그사이 두 팀을 미리 보내서 바리케이드를 친다.

쾅, 쾅, 쾅!

군단장이 땅을 박찰 때마다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놈은 빨랐다.

뭐든 빠를수록 강하다는 건 상식이다.

"뛰어라, 뛰어라, 뛰어라...."

아무리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는 테일이라도 저런 괴물한테 치이는 건 사양이다.

죽지는 않겠지만 분명 죽을 만큼 아플 테니까.

"뛰어라, 뛰어라, 뛰어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느새 몇 발자국 앞까지 짓쳐들어온 놈이 몸을 틀었다.

'젠장.'

선임 기사가 소리쳤다.

"막지 말고 흘려라!"

인간 바리케이드의 목적은 놈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

잔뜩 힘을 주고 버티면 놈을 더 늦출 수 있겠지만, 그러면 필연적으로 몸이 상한다.

놈의 어깨가 기사단이 치켜든 방패를 치기 직전, 테일이 몸을 살짝 띄웠다.

쾅!

"커헉!"

순간 눈앞이 컴컴해질 정도의 충격과 함께 기사들이 하늘을 날았다.

* * *

공중에 붕 떠 하늘을 날면서도, 테일은 흘륜데어를 노려봤다.

'방금 날 본 거 같은데...?'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스쳤지만, 우연일 것이다.

이 기괴한 달리기가 시작된 후로 놈은 단 한 번도 소공작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방향조차 틀지 않았으니까.

"보고! 하나!"

한참 멀리서 들린 선배의 목소리에 하나, 둘, 셋 하는 소리가 여섯까지 이어졌다.

'아니야, 아니겠지.'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충돌하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마주친 광기 어린 눈동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일곱! 꼬리! 지원!"

일곱 번째 기사, 테일.

상대가 쫓아오고 있으니 지원 요청.

외친 순간 후회가 몰려왔다.

군단장이 자신을 노릴 리가 없다.

소공작을 쫓을 시간이 아까워 기사단을 돌파하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뭣하러 자신을 노릴까.

'진짜' 기사도 아닌 자신을.

"일곱! 무시!"

방금 전의 답은 무시해라 외쳤지만.

"...."

답이 없다.

그래, 처음부터 무시했겠지.

자신과 선배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경험의 차이가 있으니까, 이 정도 상황 파악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매정한 인간들."

그렇게 뇌까리며 방패를 바로잡았다.

가뜩이나 한계에 가까웠던 방패가 좀전의 충돌로 덜렁거렸지만,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후...."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 숨을 내셨다.

당장 뛰어가 본대에 합류하거나 다음 바리게이드로 달려야 한다. 그럼에도 괴물의 눈깔이 뇌리에 남아 불안감을 더했다.

"그 새끼 속도면 벌써 와서 죽였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병아리, 뒤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쾅!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도끼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씨벌."

기사에게 안 어울린다며 겨우 끊은 욕이 절로 나왔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방금 전의 공격은 보지도 못했으니,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몸이 둘로 나뉘었을 것이다.

바닥을 파헤친 도끼를 따라 눈이 움직였다.

"비켜!"

그사이 자신을 구한 선배가 뛰쳐나가 놈을 막아섰다.

-크륵!

카카카카캉!

얼굴을 구긴 놈이 귀찮다는 듯 휘두른 도끼가 방패면을 따라 흘러내린다.

-크륵! 크륵!

애꿎은 땅을 다시 한번 파헤친 놈의 숨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그때까지도 테일은 군단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뭔....'

군단장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향해서 도끼를 휘둘렀는데.

착각인가? 그냥 재수 없게 앞을 막아섰던 건가?

"병아리! 언제까지 멍 때릴 건데?!"

"아, 거, 병아리라고 그만 부르라니까!"

자신을 구한 선배의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대거리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놈의 공격을 두 번 연속으로 막는 건 무리니, 선배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여전히 소공작이 도망친 곳을 바라보고 있던 흘륜데어가 다가오는 테일을 향해 귀찮다는 듯 도끼를 휘둘렀다.

흐느적거리며 다가온 도끼를 향해 방패를 밀어넣는다.

카카카칵!

눈앞에서 튀어오르는 불꽃을 본 뒤에야 의문이 생겼다.

군단장이 멈춰 선 지금, 놈을 막아설 필요가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놈은 왜 멈춰 선 거지?

"멍청한 새끼야! 눈깔 제대로 안 떠?!"

누군가의 서슬 퍼런 외침에 정신을 차린 순간.

"어?"

-뒤룩.

살의와 분노로 번들거리는 붉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 *

"뒤로 굴러!"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채,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도끼를 좇았다.

후웅!

허공을 베어 낸 도끼가 빙글 돌더니 목표를 좇는 독사처럼 방향을 틀었다.

"방패 들고 마나 실드!"

명령에 따라 방패를 들었다.

마나 실드가 뭔지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마나를 있는 대로 방패에 때려 박았다. 푸른 막으로 감싸진 방패 위로 도끼가 내리쳤다.

카카카캉!

아쉽게도 제대로 구조조차 잡지 못한 급조한 마나로는 군단장의 일격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방패를 감싼 수십 겹의 마나가 설탕 과자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쾅!

"커억!"

걸레짝이나 다름없던 방패가 조각남과 동시에 몸이 허공을 날았다.

-삐이이이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이명을 무시하고 재빨리 일어나 주변을 훑었다.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 따위는 없었다.

분명 시선을 뗀 적이 없었는데, 군단장이 어느새 시선에서 사라져 있었으니까.

'어디지?'

공격을 막아 낼 방패가 없다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검집에 손을 올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일단 물러나야....'

적이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도끼가 자신의 목을 앗아 갈 거라는 불안감이 테일을 점차 잠식했다.

-스릉.

결국 반쯤 검을 뽑아 든 순간.

등 뒤에서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야! 병아리! 검 집어넣어! 어그로 끌린다고!"

동시에 등 뒤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앞으로 쏘아지듯 날아가는가 싶더니,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검이 도끼를 막아 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카카카캉!

저 도끼가 어디서 나왔는지.

누가 자신을 구했는지 궁금해할 시간도 없었다.

"엎드려!"

날 선 목소리를 따라 땅에 배를 대고 바짝 엎드린 순간.

쿠콰콰콰콰쾅!

숲이 요동쳤다.

* * *

등이 시큰거린다.

가죽 갑옷과 등가죽이 통째로 찢겨졌는지 쌀쌀한 바람이 느껴질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따라왔다.

도끼를 막은 팔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한계까지 혹사시킨 다리 근육은 마나 없이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흘륜데어가 나타난 순간부터 쉬지 않고 도망다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쉬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드니, 일직선으로 곧게 난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땅이 뒤집어지고 철보다 단단하다던 고목마저 부러져 그 사이로 들어선 햇빛이 길을 밝혔다.

그리고 길의 끝에 보이는 뿌리째 뽑힌 나무 한 그루.

'예상은 했다만....'

흘륜데어를 발견한 오우거는 숲의 나무를 뽑아 '던졌다'.

아쉽게도 흘륜데어를 처리하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지만.

길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투기를 확인하자마자 품 안에서 마지막 남은 신호탄을 꺼내 던졌다.

신호탄의 검은색 연기를 본 병력은 미리 계획한 대로 공터까지 전력으로 퇴각할 터.

이곳까지 오는 길에 벌써 네 개의 신호탄을 썼으니 이미 척후대의 대부분이 안전하게 빠져나갔을 것이다.

남은 건 여기서 살아남는 것뿐.

"뛰어!"

외침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그 뒤로 테일이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고래 두 마리를 엮었으니 새우의 역할을 끝났다.

남은 건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

* * *

"흐음...."

멀어지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헤키의 시선이 흘륜데어에게로 향했다.

투기를 일으켜 오우거가 던진 고목을 막아 낸 오크가 광기 어린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마 사라진 사냥감을 찾고 있으리라.

"대단한 집념이군."

영악한 오크는 사냥감이 오우거와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닫고 덫을 놓아 유인했다.

모너의 어린 주인이 제 기사를 얼마나 아끼는지 더 빨리 깨달았다면 놈은 사냥에 성공했을 것이다.

제 종족조차 아끼지 않는 놈으로선 생각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슬슬 돌아가 볼까."

여전히 성난 숨을 내쉬는 오크가 남아 있지만, 테헤키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제 왕국으로 향했다.

오우거를 적으로 둔 오크 따위,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기에.

"클클클, 그냥 뒀어도 며칠 내로 죽었을 것을."

모너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테헤키는 숲의 주민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았고, 심부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성도 지성도 낮은 오우거가 심부의 주민으로 인정받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오우거는 숲의 가장 매서운 마수고, 그들은 절대 적을 잊지 않는다.

-그워어어어어!

하물며 '어미'의 분노를 사다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잠도 들지 못했으리라.

"폭군(暴君)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인간들은 오크가 요새를 공격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오크는 만들어서는 안 될 적을 만들어 버렸고 그 적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것뿐이다.

테헤키는 오래전에 본 오크의 왕을 떠올렸다.

폭군(暴君)이라는 이명과 달리 그 어떤 왕보다 계산적이고 철저한 군주가 아무 이유 없이 종족의 명운을 걸었을리가 없다.

"숲이 들썩이는구나."

이것 또한 숲의 저주일까 생각하던 테헤키의 시선이 요새로 향했다.

요새에 그를 부르는 표식이 여럿 남겨져 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그는 그 어떤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인간들은 오크를 막아 낼 힘이 없고, 요새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제와서 인간을 도울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저 오크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인간의 시체를 밟고 나서면 될 뿐.

'고블린 왕'은 아직 둘 중 누구의 편도 들 생각이 없었다.

75화

레임 왕국의 헤이트리 자작가는 귀족파와 국왕파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대대로 중립을 지켜 왔다.

중립을 지키고 싶었다기보단 지방의 군소 영지에 관심을 가진 세력이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였지만, 헤이트리 자작은 가문의 전통에 감사했다.

중앙 정계에 나가고자 하는 욕심도, 별다른 야망도 없는 자작으로선 자신이 왕인 작은 영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아무 욕심 없이 가늘고 길게.

그건 자작가의 자랑스러운 가훈이자, 현 자작의 인생 목표였다. 절대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인생 목표.

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다.

"...."

자작이 눈이 식탁 위에 놓인 두 발을 향했다.

식탁 위에 발을 올려놓다니.

잘라 달라는 걸까, 썰어 달라는 걸까.

기사를 불러 확 잘라 버리고 싶지만 그럼 가늘었던 인생도 끝나 버리겠지.

"뭐 불편한 일이라도 있나, 자작?"

발을 올린 남자의 부름에 번뜩 정신을 차린 자작이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닙니다. 왕자님."

그래, 의자가 불편하면 발을 올릴 수도 있지.

식탁이 뭐 대순가.

식탁에 발을 올려놓는 것도, 불량한 자세로 식기를 집어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이해할 수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왕자니까.

그것도 지방에 처박혀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조차 들어 본 미친 왕자, 트리미아.

"그...."

자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어쩐 일로 오셨는지...."

떨리는 눈으로 영지 밖을 바라봤다.

오늘 아침, 수백의 병사가 영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병사를 이끈 존재가 트리미아라는 걸 들었을 때 정말 몇 초간 멈췄고.

사랑하는 부인이 정신 차리라며 명치를 치지 않았다면 심장마비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끄응....'

불안한 남작의 시선이 창가에서 왕자에게로 향했다.

둘째 왕자가 지방의 영지에 볼일이 뭐가 있겠나.

분명 계승 싸움에 참가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을 터.

'절대, 절대 안 돼.'

왕위 계승전에 이름을 올릴 생각도 없었고 둘째 왕자를 지지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설령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가늘고 긴 삶을 지켜 내리라.

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순간 눈이 마주친 왕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네.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린 거지."

"예? 아, 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지만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상대는 미친 왕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어딜 가는 길이십니까?"

"모너에 가는 길이네."

"모너요? 모너… 아! 영웅의 공작가 말씀이시군요!"

방문의 목적까지 확인하고 나자 숨통이 틔었다.

일단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니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라면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호기심.

"거기까지는 무슨 일로...?"

그 물음에 왕자가 거만하게 올려 둔 발을 내리고, 상체를 주욱 내밀어 자작의 눈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 자작은 몰랐던 모양이군. 모너에서 도움을 요청했네. 왕국의 존망(存亡)이 걸린 일이지."

먹이를 탐하는 뱀처럼 다가오는 트리미아의 모습에 자작이 겁을 집어먹고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예? 그게 무슨...."

"글쎄 모너로 오크가 쳐들어온다지 뭔가? 자작, 자네는 오크를 본 적 있나?"

그럴 리가.

영지 주변 산맥에서야 오크가 좀 나오고 매년 봄마다 병사를 보내 청소하지만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인 자작은 단 한 번도 직접 퇴치에 나선 적이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자작의 표정에서 이를 알아차린 왕자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오크는 탐욕스러운 존재지. 인간과 절대 공생할 수 없는 괴물이랄까. 몸은 인간의 서너 배 이상 크고 자네 얼굴만 한 어금니로 인간을 씹어 먹지."

아니다.

오크는 어금니는 신분과 강함을 나타내는 증표에 가깝고, 전투 중에 들이박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사슴의 뿔처럼 먹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도구다.

물론 순수하고 무지한 자작은 이를 알 리 없었지만.

"그런...."

"그뿐인가 도끼를 휘둘러 인간을 조각내고 그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는다지."

역시 아니다.

대륙의 몬스터들은 인간을 먹이로 보곤 하지만, 마물의 숲에 있는 몬스터들은 다르다.

마물의 숲에 들어오는 인간은 모너의 병사와 기사뿐이니 잡기는 힘들고 잡아 봐야 근육으로 가득한 인간은 질기고 텁텁하다.

인간을 탐하는 건 해 봐야 숲에서 밀려난 고블린뿐이랄까.

그러나 트리미아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거짓을 더해 갔다.

자작은 며칠 전 자신의 병사들이 오크를 죽였다는 보고조차 잊은 채 트리미아의 설명에 집중했다.

"…숨소리만으로 쇳소리와 유황불을 일으키며 아녀자를 취해 억지로 새끼를 낳는 족속들이지."

왕자의 설명 속 오크는 전설 속 마족을 적당히 섞은 희대의 마수였지만, 진지한 왕족의 얼굴을 마주한 자작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들었겠지만, 내가 모너에 갔을 때 직접 본 바에 의하면...."

왕족이, 그것도 왕자가 저리도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직접 본 괴수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의 설명이 끝날 무렵, 자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 그, 그런 악마 같은 존재가 왕국에 풀려나면 어쩐단 말입니까?!"

왕자에게 속지 않겠다며 굳게 걸어 잠궜던 팔짱은 어느새 풀려 자작은 두 손을 기도하듯 움켜쥐었다. 그렇게 희게 질려 절박해진 자작을 본 트리미아가 더없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가는 걸세."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광증(狂症)을 연기하며 정계의 뱀들을 속여 온 왕자다.

정계에 발가락도 담가 보지 않은 순진한 자작은 한입 거리도 되지 않는다.

"형님과 국왕 폐하가 직접 가시고자 했지만, 제국이 호시탐탐 왕국을 노리고 있어 그럴 수 없었네. 왕국의 기사단과 병사들은 제국을 경계해야 하니. 나라도 목숨을 걸고 왕국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트리미아가 이어 모너가 왕국의 유일한 희망이며 나라의 마지막 방벽이라고 역설하자, 낚싯줄에 걸린 자작이 몸을 부르르 떨어 대며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얼핏 들었던 트리미아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왕자가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에 감격받았을 뿐.

"그래서 말일세...."

그래서 자작은 이어지는 왕자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병사 좀 지원해 주지 않겠나?"

"예, 예! 물론 그래야지요! 비록 왕가의 정예병보다는 부족하겠지만 제 기사가 직접 훈련시킨 병사들이 있습니다!"

자작의 대답에 왕자는 만족한 듯 조용히 미소 지었고, 그 모습에 자작의 오해는 깊어져 갔다.

'과연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구나!'

* * *

헤이트리 자작가를 나선 트리미아는 다른 중소 규모의 영지를 돌며 점점 크기를 키워 갔다.

왕자의 연기를 간파한 영주들도 적지 않게 있었으나 왕자의 명분이 너무 명확한 터라 중소 영주들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왕자에게 그들은 협상이나 회유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왕국을 구하려고 하는데 도울 수 없다고?

-간첩인가?

-아, 아니면 제국에 아는 사람이 있나? 제국의 녹봉을 받나? 제국에 건물이 있나?

-이 새끼 간첩이네!

이렇게 나오니 울며 겨자 먹기로 민병대라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냥 받지도 않았다.

급조한 병력을 보내려고 하면.

-가 봤자 모너에게 짐밖에 안 될 것 같군. 아무래도 왕국이 망하길 바라는 세력이 있는 모양이야.

하며 간첩이니 사상 검증이니 들먹여 귀족들은 눈물을 머금고 정예 병력의 일부를 내줬다.

왕자는 그럴 때마다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실제로 광견한테 물린 영주들은 몸을 부르르 떨고 그가 떠난 밤 눈물을 감추지 못했지만,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자의 기세는 날로 커져만 갔다.

그렇게 무려 천이백의 병력을 이끌게 된 트리미아는 국왕파의 거두(巨頭)라 불리는 드미트리 후작의 응접실에서 후작을 마주했다.

"왕자님."

왕자의 시선이 후작에게 닿기도 잠시,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왕자가 귀를 후볐다.

"왕자님."

빠직, 하고 후작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지만 왕자는 그런 후작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왜?"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후작의 이성도 뚝 끊기기 직전이었다.

후작은 왕자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도, 뭘 원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놈이 부풀린 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모너를 구해야 한다는 상소와 탄원이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왕자가 지원을 요구하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모은 병력을 돌려보내라고 압박할 생각이었다.

'저, 저 개 같은 새끼가!'

후작은 몰랐다.

압박을 하든 협박을 하든 어르고 달래든, 일단 말이 통해야 할 수 있고 곱게 미친 왕이라 불리던 트리미아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걸.

대화를 할 생각이 없으니 대화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자리를 피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렇게 시간을 내어 이 늙은이를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영지에 일이 많아서...."

후작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하자 왕자가 고개를 돌려 후작을 힐끗 바라보고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내가 바쁜 사람을 괴롭힌 건가? 이거 미안해."

그러니까 트리미아는 자기가 후작을 괴롭히고 있는 중이라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드러누운 후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어떻게, 날 밟고서라도 가 보겠나?"

'이, 이, 이!'

분노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훑은 후작은 차분히 소파로 돌아가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확히 말하자면 왕자의 등장부터였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반론과 날카로운 혀로 멋모르는 왕자의 콧대를 누를 생각이었는데, 왕자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문 앞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며 마음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맑군."

"오늘은 비가 올 모양이야."

"오늘따라 별이 밝아."

"허허, 저 구름 좀 보게, 꼭 마물 타조를 닮지 않았나?"

후작은 왕자의 광증이 재발한 건지, 아니면 광증을 연기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필요도 없었다. 광증을 연기하고 있든, 실제로 미친 것이든 기사나 시종을 부려 왕자를 움직이려 드는 순간 피를 볼 테니까.

그럼 누가 나서서 그 패악을 연기라 칭하겠나.

그저 미친놈이 미친 짓했다 여기겠지.

'광증을 패로 쓰다니....'

순간 왕자가 사실은 정상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배를 까고 드러누운 모습을 보니 그런 의심이 쏙 들어갔다.

저건 미쳐도 제대로 미친놈이다.

상놈 중에도 개쌍놈이고.

"후...."

바닥에 드러누워 헛소리를 하는 미친놈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걸 들은 왕자가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걱정하듯 말했다.

"후작, 피곤하면 가서 자."

그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들자 트리미아의 얼굴에 걸린 얄미운 미소가 그를 반겼다.

왕자가 손을 슬쩍 움직여 뽀얀 제 뱃살을 가리킨다.

"날 밟고."

굳게 쥔 후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참자, 참자, 참자....'

왕가의 굳건한 지지자로 수백 년을 군림한 후작가의 주인은 그 어느 날보다 하늘이 맑았던 그날, 심각하게 반역을 고민했다.

76화

후작은 긴 한숨을 내쉬며 기적적으로 분노를 다스렸다.

그는 그 유명한 드미트리가(家)의 주인이다.

철설(鐵舌)의 드미트리.

철과 같은 혀를 가진 이들은 쉽게 흥분하지 않고 기다린다. 원하는 것을 집어삼킬 때까지.

'참자, 참으면 된다. 머지않아 왕궁의 기사단이 올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그만이다.'

이미 시종을 부려 왕궁에 연락을 전했으니 누가 오든 오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내 왕께 개처럼 비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을 별관에 가둬 놓겠다!'

그리 다짐하니, 이 일도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 이 한 몸 희생해서 왕국의 미친개에게 목줄을 걸어 놓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왕자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후작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친놈과 대화하는 건 지성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 미친놈이 때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왕자라면 더더욱.

"흠...."

드러누운 왕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노려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 혼자 말하지 뭐. 그냥 혼잣말이라고 생각해."

후작은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광인(狂人)의 입에서 나올 말이나, 개소리나, 가치 없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그리 생각하며 이어지는 왕자의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곧 있으면 기사단이 올 테지? 그럼 난 기사단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갈 테고 말이야."

후작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함께 돌아가는 게 아니라 끌려가는 거겠지!'

그때도 저런 패악질을 부리다 몇 대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오늘은 꿀 같은 잠을 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는 찰나, 왕자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남은 병사들 좀 잘 부탁해."

'응?'

개소리가 제법 위협적이라고 생각한 후작이 고개를 치켜들자, 왕자가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말했다.

"총 12개의 영지에서 천이백의 병력을 양도받았지. 다들 그 병력이 모너로 향할 거라 철썩같이 믿고 있고."

저 미친 새끼가… 설마?

천이백의 병력을 먹이고 재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후작가의 곳간이야 티도 나지 않겠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거기다 귀족파 세력이 이 상황을 곱게 볼 리가 없다. 나라를 위해 모은 병력이 후작가에 주둔하는 건 필시 이유가 있을 거라며 거품을 물고 달려들겠지.

결국 얼굴을 잔뜩 찌푸린 후작이 입을 열었다.

"돌려보내면 그만입니다."

"돌려보내 봐. 그럼 모너가 무너진 순간 내 뒤에 12명의 귀족이 설 테니까. 왕과 태자를 의심하면서 말이야. 아니지, 이 소식을 들은 귀족파 중 절반은 내 뒤에 서지 않을까?"

까드드득!

후작은 왕자에 대한 판단을 바꿨다.

미친놈에서 왕국을 말아먹을 정도의 미친놈으로.

어디 저 병력이 곱게 모은 병력인가.

"왕자님, 요즘 왕궁에 하루가 멀다 하고 탄원서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악마의 뿔과 지옥의 유황을 뿌리는 오크를 막아 달라면서요."

거짓과 선동으로 모은 병력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왕자의 선동에 마물의 숲에는 '오르크'라는 이름의 마물이 있다는 보고가 심심치 않게 올라올 지경이다.

그러나 왕자는 후작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악마의 뿔이 있던 없던 오크의 도끼는 날카롭고, 지옥의 유황이 없어도 놈들이 사는 땅에는 인간이 살 수 없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거짓과 선동으로 모았지만 트리미아는 당당했다.

"난 그저 광인(狂人)아닌가."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는 데에는 이유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맞다.

광인이 헛것을 봤다 하여 그를 욕할 자가 누가 있을까.

그는 실제로 모너에 갔던 것은 사실이다.

오크가 모너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

결국 종족 전쟁이 일어나면 오크의 모습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다.

중요한 건 날개나 유황불의 유무가 아니라 왕국의 영토를 노리는 적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므로.

'미친놈이 악독하게도 미쳤구나.'

그러니 오크가 모너를 넘어서면 귀족파는 핏대를 세워 왕가의 우둔함을 지적할 것이다.

악마의 형상을 보고도 오크를 막아서려던 왕자를 치켜세우고 두둔하면서.

"…왕자께서는 왕국의 분열을 바라십니까?"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후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물음에 왕자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하! 무슨 소리인가! 난 그저 왕가의 안녕을 바랄 뿐이네."

잠시 눈을 감은 후작이 속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한평생을 왕가에 헌신했건만 그 보답으로 광견에게 물릴줄이야.

굳게 쥔 손에서 피가 베어 나오는 것도 모르는 채, 결심을 내린 후작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모너는 삼킬 수 없는 독입니다."

후작은 모너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왕가의 전언이 아니라도 세계수와 소공작을 본 그날, 모너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그러나 왕자는 그런 후작을 비웃을 뿐이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집 지키는 개를 삶아 버리려는 이 왕국이 미친 것 같은데 말이야. 주인을 몰라보는 것도 아니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먹을 것도 아니면서 삶아 '버린다니'. 자네는 정말 그게 옳다고 생각하나?"

왕자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후작을 향했다.

"...."

후작은 그 시선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왕이 전한 세계수의 예언은 모너가 망해야 왕국이 흥할 것이라 전했고 후작은 지금도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마물의 숲을 누가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지금, 모너가 무너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선 그조차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눈앞의 미친개는 자신의 불신에 대한 좋은 변명거리가 되지 않을까.

한동안 이어진 침묵 속에서 왕자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원하는 걸 말하시죠."

결국 후작은 이번 한 번만, 아주 살짝, 모너를 돕기로 정했다.

왕자가 아무리 기를 쓴다 한들 오합지졸에 불과한 병력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므로.

설령 모너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껍데기만 남을 테니, 다음 번견을 구할 때까지만 모너가 버텨 준다면 그 또한 기꺼운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왕자가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소리쳤다.

"아이고! 좀만 더 버텼으면 여기서 지릴 뻔했네!"

그리곤 갔다 와서 협상을 다시 하자는 말과 함께 응접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

두 손을 모은 채 왕자가 뛰쳐 나간 자리를 보던 후작은 왕자가 만들어 낸 오르크가 왕자를 잡아가길, 간절히 기도했다.

* * *

트리미아가 드러누워 왕족파를 협박하고 있을 무렵.

개활지에 도착한 이안은 모처럼 간이 천막까지 설치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끄으윽...!"

휴식을 가질 시간은 없었지만, 등가죽이 벗겨진 채 걸어다니는 건 이안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레이나! 좀만 살살!"

"예, 도련님."

냉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한 레이나가 가차 없이 스팀팩을 뿌렸다.

촤르륵!

"끄아아악!"

이건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닦아 낸 이안이 힐끗 레이나를 흘겨봤다.

"레이나, 뭔가 감정이 실린 것 같은데."

"실수였습니다. 팔이 미끄러졌네요."

촤르륵!

"끄으으윽!"

"아, 죄송합니다. 손에 땀이 차서."

눈에 뻔히 보이는 복수였지만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사지나 다름없는 곳에 들어가 목숨만 간신히 건져 돌아왔으니 이 정도의 복수로 마음이 풀린다면 감사할 뿐이다.

'그나저나....'

시선을 돌려 시야 한편에 자리 잡은 메시지 창을 바라봤다.

[업적 달성! - 미약한 소문(비범)]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오우거를 구한 인간에 대한 소문이 숲에 퍼졌습니다!

인간이 마물 다람쥐보다 착하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퍼지고 있습니다!

- 인간이 마물 다람쥐보다 아주 조금 강하다는 소문이 함께 퍼졌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주민은 이 소문을 믿지 않습니다.

- 숲의 주민들 사이에 인간족에 대한 평가가 미약하게 상승했습니다.

- 마물 다람쥐가 인간족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

이건 대체 뭘까.

『로스트 크로니클』의 업적은 단 한번만 얻을 수 있는 달성 과제다.

일반, 비범, 영웅, 신화, 전설 등으로 나뉘지만 업적에 큰 관심을 가지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괴랄하게 높은 달성 난이도에 비해 보다시피 보상이 전무하니까.

"레이나, 마물 다람쥐라고 알아?"

"네."

순수한 궁금증에 짧고 차가운 단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대화 의사가 없는 것 같은....

-촤르륵!

"끕!"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일그러진 이안의 얼굴을 흘겨본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마물 다람쥐는 귀엽습니다. 그냥 큰 다람쥐 같아요. 종종 나무를 타고 돌아다니는 걸 봤는데… 음, 그냥 귀여워요."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본 질문에 내 생각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내가 아는 한 마물 다람쥐는 특별할 것 없는 마수다. 마수 주제에 초식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크기만 한 다람쥐랄까.

그 귀여움이 무기가 아닐까 하는, 죽여도 얻을 것 없는 종족.

'그럼 여태까지 인간이 다람쥐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아무래도 숲의 주민들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박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업적을 무시했다.

마물 다람쥐가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운이 좋으면 근처에 큰 도토리라도 두고 가려나.

-그워어어어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오우거의 외침을 자장가 삼아 쉬고 있으니, 천막 앞에서 누군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공, 아니 공작… 아니, 어...."

도대체 아직도 호칭을 못 정한 멍청한 새끼가 누굴까 하는 생각도 잠시.

고개를 돌리기도 귀찮아 그냥 답을 알려 줬다.

"대장."

"예! 대장, 대장!"

그러고는 '대장, 대장, 대장....' 하고 속삭이듯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그렇게 외워야 할 정도로 어려운 호칭은 아닌 것 같은데.

'대장 같지 않다고 돌려 까는 건가...?'

이쯤 되니 궁금증이 들어 천막 입구를 바라보니, 걸어 들어오는 테일이 보였다.

"아, 병아리."

첫인상만큼이나 멍청한 모양인데.

"병, 병아리라뇨! 제가 기사단에 입단한 지 벌써...!"

별명이 불리자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려던 테일이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뭔가 했더니. 그거였나.

"딱히 네가 이뻐서 구한 건 아니고."

'응, 그래 가 봐.'

"예...?!"

아, 속마음과 말이 반대로 나와 버렸다.

상처받은 듯 축 처진 병아리를 향해 변명하듯 말했다.

"아,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구했을 거라고. 병사든, 기사든. 모너의 이름 아래 있다면 그 누구라도."

인력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자원이니까.

태어나서 6개월이면 도끼를 드는 오크와 달리, 인간은 한 명의 병사를 만드는 데 16년이 걸린다.

그 병사가 몇 개의 전투에서 살아남아 그럴듯한 경험을 쌓는 데는 그런 병사가 수십은 필요할 테고.

그러니 기사쯤 되면 천운의 영역이다.

천 명 중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한 무재(武才)를 가진 인간이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축복받은 환경에서 태어나 20년을 오롯이 무예에 매진한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다.

뭐, 모너의 기사들은 경우가 조금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귀중한 병력인 건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허리춤에 덜렁 메인 검 한 자루가 눈에 밟혔다.

'그런 고급 인력을 검에만 묶어 두다니.'

답답한 모습에 눈물이 찔끔 나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루라도 빨리 무기를 주렁주렁 들고 다니는 '진짜 기사'들을 만들어야 할 텐데....'

저것도 다 살 만하니까 저러는 거다.

멸망을 앞두고 매일 죽어 가는 동료들을 봐야 '아, 만병지왕(萬兵之王)이고 자존심이고 일단 살아야겠구나.' 하고 활이랑 창을 주워 들지.

검의 극의(極意)에 달한 마스터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기사라면 하나라도 더 많은 무기를 다루는 게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다.

* * *

아쉽게도 테일은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러니 이안의 눈가에 자리 잡은 한 방울의 눈물을 보고 생각했다.

아, 모너의 소공작은 진심으로 병사들을 아끼는구나.

전장에서 누구보다 앞장서는 저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모너를 아끼는구나.

그 모습에 진심으로 감복한 테일이 부대로 돌아가 이안의 진심에 대해 삐약대기 시작했지만, 이안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였다.

* * *

다음 날 아침.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이안이 거무죽죽한 얼굴로 버질과 후드웍을 찾았다.

"대장, 진짜 괜찮으십니까?"

"몇 번이나 말해, 괜찮다니까."

"지금 얼굴색이 딱 언데드인데...."

두 사람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걱정이 담긴 시선에 미간을 구겼다.

"걱정받자고 온 거 아니니까 보고나 해."

이안이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오크를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 되니까."

77화

인상을 잔뜩 쓴 아지요그가 불쾌함이 잔뜩 담긴 얼굴로 사방을 훑으며 읇조렸다.

"빌어먹을...."

순혈(純血)의 마족이자 최초의 마족 중 하나인 그는 생각했다.

마계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아, 좀! 저리 좀 비키세요!"

뒤에서 들려온 날 선 목소리에 놀라 자리를 피하니, 어린 마족이 구시렁거리며 지나갔다.

"촌놈 티 내는 것도 아니고, 게이트가 제 꺼야? 그걸 왜 막아서?"

아지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붉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허....'

자신이 '양치기'를 수행하기 위해 나가 있던 지난 300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전부 보고받은 내용이기는 했다.

마계에 돌아갈 일이 없다고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을 뿐.

조금 전 있었던 '입계 심사'도 그렇다.

마계에 출입하는 데 심사를 강화할 예정이라길래,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나 하급 마족을 갈아 버리는 그런 심사를 기대했다.

그래서 굳이 찾아가기도 했고.

그 '심사'가 방문 목적과 신분 따위를 확인하기 위함이고, 무려 한 달이나 걸리는 쓸데없는 짓인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터였다.

'바알....'

이게 네가 원한 마계(魔界)였나?

'시(始), 바알(Baël)....'

시군주(始君主) 바알.

지옥 최초의 왕이자 가장 위대한 마족.

그가 서열 71위의 마왕 '학자 단탈리온'을 총무로 부린 후부터 마계가 변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그 변화가 마족의 멸족(滅族)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아지요그의 시선이 낯선 건물들 위에 자리 잡은 명패를 훑었다.

[마족 관리 사무소]

[중간계 출장 지원 사무소]

[약탈자 교육소]

[출장 마족 지원 사무소]

[초보 마족 보육원]

[타락 영혼 배급소]

[중간계 소환 대기소]

그러나 피비린내 진동하던 아늑한 고향 대신 자리 잡은 무언가를 보고 있자니.

'허… 이래서야 누가 침략자인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계에 보육원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나 때는...."

어느새 훌쩍 늙어 버린 듯한 아지요그의 입에서 푸념인지 한탄인지 모를 무언가가 나오기 직전,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아, 쫌! 거기 길 좀 막지 말고 비켜요!"

아. 한 걸음 더 물러나자, 어린 마족들이 저들끼리 히히거리고 웃어 대며 떠들면서 옆을 지나갔다.

"옷은 아주 그냥, 제가 무슨 왕이여?"

"키키킥. 야, 우리 증조할머니도 저렇게는 안 입는다. 요즘에는 마왕님들도 얼마나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데."

"맞아, 저번에 멀리서 그레모리 님을 봤는데 얼마나 아름다우시던지...!"

그 이야기를 들은 아지요그가 제 옷을 슬쩍 내려다봤다.

중간계에 가기 직전, 친우가 입고 가라며 준 내 투박한 마계의 전투복이자 당시 마계에서 가장 유행하던 정복.

'음....'

고개를 들어 자신을 지나친 어린 마족들을 보니, 아슬아슬하게 주요 부위를 가리거나 몸에 딱 맞게 떨어진 멋들어진 예복이 눈에 띄었다.

'음....'

지성체를 유혹해 정기를 빨아먹는 인큐버스와 서큐버스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 준비된 사냥꾼들은 사냥을 위해서 복장과 사소한 손동작마저 연습하는 치밀한 족속이니까.

그러나.

아지요그의 시선이 세 마족의 머리 위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뿔을 보며 생각했다.

'작고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전투 마족의 뿔인데… 그나저나 왕이 뭐에 신경을 쓴다고? 패션?'

패도(霸道)나 패악(悖惡)을 잘못 들은 건가?

'거기다 증조 대의 마족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허!'

살아온 시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만큼 길게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의 마계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전투 마족들이 전투복 대신 예복을 입고, 대가 이어지는 마족이라니.

만약 그가 살았던 시대였다면, 저들은 함부로 숨을 쉬었다는 이유로 죽었을 것이다.

"아이야."

그런데도 아직 단 한 마리의 마족도 죽이지 않은 것은 '협약'을 맺기 전, 그 시기를 잊지 못해서였다.

수천, 수만의 마족들이 굶어 죽어 가고, 영웅이니 용사니 하는 가당치 않은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에게 수없이 많은 동족을 잃어 가며 잠깐의 허기를 달래던 그 시기를.

마족이 '전쟁'이 아닌 '양식'을 선택하고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차원이 사라졌던가.

태초의 마족 중 하나인 아지요그는 그 악착스러운 시기 동안 피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동족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태초의 마족 중 한 명인 그가 왕위에 도전하지 않고 한 차원의 '양치기'를 자처할 만큼.

아지요그가 제 말을 무시하고 나아가는 어린 마족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야."

약육강식이 아닌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난 어린 마족들은 그 작은 몸짓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를 무시한 채 킬킬거리며 나아갔다.

"아이야."

아지요그의 입에서 같은 단어가 세 번 반복된 순간.

"끄아아아악!"

"꺄아아악!"

압도적으로 짙고 깊은 마기가 그들을 감싸고 짓눌렀다.

-위이이잉!

알 수 없는 경보가 울렸지만 아지요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는 건, 그로서는 인고의 인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가 가볍게 손을 당기자, 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마리 마족의 머리가 찢겨져 그의 손 앞으로 날아왔다.

"허, 이리도 연약하다니...."

아지요그는 분명 몸을 잡아당겼는데 마력을 버티지 못한 몸이 찢긴 것이다.

'내 차원의 중간계에서는 적지 않은 영혼을 수확하고 있거늘… 아직도 허기와 싸우는 마족들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한 순간 세 마족 중 한 마리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 당신! 내 아빠가 누군지 알아?"

아지요그가 묻지도 않은 정보를 제공하려는 가녀린 마족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런 게 마족이지.

살기 위해서라면 무릇 자식도, 가족도 파는 존재가 마족 아닌가.

머리가 찢겨서도 포기하지 않고 아득바득 살아 있는 걸 보니 그저 배곯은 마족이었던 모양이다.

가진 게 없는 마족이라면 자신의 전투복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가 입은 전투복은 다름 아닌 마족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 낸 작품이니까.

"허, 그리 굶었는데도 생명력은 멀쩡하구나."

"뭐?! 당신 죽었어! 아빠한테 말해서 경비대에 처넣고 굶어 죽게 만들 거야!"

....

...?

"…네가 아니라?"

"뭐?"

"마족이라면 제 복수는 제 손으로...."

"이 미친 변태 새끼가 뭐래! 우리 아빠가 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 거라고!"

음....

머리가 찢기고도 제 아빠를 들먹이며 소리치는 마족을 본 아지요그는 확신했다.

마계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 * *

"하하하하하!"

아지요그의 맞은편에 앉아 식당이 무너져라 웃어 대는 마족은 몇 번의 침략 전쟁을 함께한 이었다.

얼굴을 몇 번이고 뜯어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그리 중요한 마족은 아닌 것 같지만.

듣자 하니, 무슨 무슨 유명한 장관으로 자기가 마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다고 했지만 아지요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진바 무력이 아닌 단어로 된 권력 따위는 마족에게 고블린의 태명만큼이나 쓸모없는 것이니까.

"흐흐흐… 흡, 흐흑...."

웃음을 참지 못해 거의 울다시피 하는 그를 보던 아지요그가 차분히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눈앞의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으음...!'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는 고기와 영혼의 풍미를 보니, 과연 마왕이나 먹을 법한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다.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인 수도승의 영혼을 고아 만들었다던가?'

고기를 입에 넣을 때마다 절망감과 증오, 분노가 딱 알맞게 톡톡 튀는 게 식사나 음식 자체를 덜떨어진 마족들의 허영이라고 생각하던 그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미(珍味)였다.

'과연 지난 300년간 이런 변화도 있었던가.'

몇 번이나 요리를 배워 보라 종용하던 마족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사이, 드디어 숨을 고른 마족이 입을 열었다.

"크큽,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나?"

"심사장에 가서 마기를 퍼트리니, 어린 마족이 나와 공공장소에서 그러지 말라며 면박을 주더군."

"끕...! 그래서? 죽였나?"

"아니, 바알이 만든 절차라고 하니 잠자코 따랐지… 기록에 없는 마족이라며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마족의 이름을 대라길래, 바알과 가미긴, 아몬을 대자 그리 화를 내더군."

가미긴과 아몬은 각각 서열 4위와 7위의 마왕이다.

"크흐흑, 입계 심사에서 왕의 이름을 댔다고?"

"내가 아는 마족이 별로 없어서...."

만약 그들에게 연락이 닿았다면 일이 훨씬 쉬워졌겠지만, 심사장의 마족들은 한낱 미친 마족의 말을 왕에게 전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애초에 마왕의 친우가 입계 심사장에 올 리도 없을 테니까.

"큭, 크큭...! 전쟁 영웅이 심사장에서...!"

다시 고개를 접시에 밖고 울듯 웃어 대는 마족을 보며 아지요그는 씁쓸히 웃었다.

"그래서, 그다음은?"

"실수로 배곯은 마족의 머리를 뽑았더니, 제 아비가 오더군."

다행히도 어린 마족의 부모에게는 '상식'이 있었고, 격이 다른 마기를 본 순간 상부에 이를 보고했다.

그 보고가 팀장, 실장, 부장을 거슬러 올라 마침내 '차원 집행부'의 장관 벨리키아의 귀에 닿았을 때, 그가 기억해 낸 것이다.

마계의 전쟁 영웅이자 학살자라 불리던 아지요그의 이름을.

"으하하! 그 '배곯은 마족'은 이 도시에서 한 손에 들 정도로 명망 높은 가문의 자식이네. 큭큭...."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고인 눈가를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벨리키아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저런 규격 외의 괴물이 날뛰기 시작하면 마왕이 아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래, 설명은 이만하면 됐고. 무슨 일로 왔나?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 도와주고 마왕을 만나고 싶다면 직접 주선해 주지."

차원 집행부 장관 벨리키아는 단 한 번도 찾은 적 없던 마신에게 처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눈앞의 괴물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게 해 달라고.

마왕 중 한 명에게 직접 연락을 넣는 건 장관인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괴물은 응당 괴물끼리 놀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음...."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실시간으로 쪼그라드는 벨리키아의 심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지요그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눈앞의 만찬을 정성스레 음미하며 생각했다.

'고작 이런 일에 마왕을 붙잡고 부탁하는 것도 우습고....'

아지요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생각지도 못한 만족스러운 식사를 제공한 마족을 바라봤다.

'누구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침략 전쟁을 한 데다 이 정도의 음식을 준비할 정도라면....'

벨리키아의 평가가 '기억할 가치가 없는 마족'에서 '멋진 음식을 대접하는 쓸 만한 마족'으로 바뀌었을 무렵, 식사를 끝낸 아지요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데...."

물론, 조금 전까지 어떤 마왕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벨리키아는 그런 괴물의 평가에 절망했지만.

'저 괴물이 '부탁'이라니....'

아마 자신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무언가일 터.

벨리키아는 기억 속에서 아지요그가 담당하고 있는 중간계를 떠올렸다.

'최초의 농장이자 열리지 않은 차원....'

베리키아의 머리에 문뜩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보고서가 떠올랐다.

여러 차원의 '농장'이 돌연 멸망하고 있으며 그 배후로 원주신(原住神)과 아신(亞神)이 의심된다는 보고.

'설마 아신(亞神)이 그 차원에도 있는 건가? 그래서 전쟁을 벌이려고...!'

벨리키아가 경악한 얼굴로 아지요그를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꿀꺽.

벨리키아는 화끈거리는 침략 전쟁 때의 상처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의 입을 바라봤다.

"…잘 아는 악몽(惡夢)족의 아이가 있나? 내가 워낙 오래 중간계에 있다 보니...."

그 부탁에 벨리키아가 고개를 부러져라 끄덕였다. 이제는 나이트메어라고 불리는 종족이지만, 악몽이든 나이트메어든 마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었다.

"그, 그럼! 내가 직접 쓸 만한 악몽을 찾아보겠네!"

"음...."

"아, 아니, 내 가장 아끼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장 유능한 악몽을 찾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아지요그는 사소한 일에 유난을 떠는 벨리키아를 보고 의아해했지만, 아끼는 영혼까지 팔아 찾아 준다니 고마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생각보다 쓸모 있는 마족이었어. 이리 친절하게 도와주다니 성격도 좋은 것 같고....'

벨리키아가 절대 원치 않을 관계는 한동안 지속될 예정이었다.

78화

개활지에 야영한 다음 날 아침.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이안이 거무죽죽한 얼굴로 버질과 후드웍을 찾았다.

"대장, 진짜 괜찮으십니까?"

"몇 번이나 말해, 괜찮다니까."

"지금 얼굴색이 딱 언데드인데...."

"걱정받자고 온 거 아니니까 보고나 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걱정이 담긴 두 사람의 시선에 미간을 구기고 말하자 재빨리 말을 멈춘 후드웍이 진지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대원 중 부상자는 총 12명입니다. 크게 다친 놈은 없고요. 십인대 두 조가 행방불명입니다만, 둘 다 조장이 똑똑한 놈들이라 곧 찾아올 것 같습니다."

"아마 안 돌아올 거야. 흘륜데어가 나타나자마자 도망쳤으니까."

당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후드웍은 신경 쓰지 못했지만, 두 조 모두 흘륜데어가 나타난 순간 어수선한 틈을 타 대열에서 이탈했다.

"예?! 그럴 리가...!"

있다.

갑작스러운 모너의 태동을 불쾌하게 여길 만한 세력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뭐, 운 좋게 흘러들어 온 첩자겠지."

"그럼 당장 잡아야...."

긴장한 후드웍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고작 첩자 몇 명 잡겠다고 저 숲을 뒤지자고? 그놈들을 찾으려면 여기 있는 병력을 전부 나눠야 하는데, 리스크가 너무 커. 거기다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면 그건 그거대로 고마운 일이고."

이번엔 버질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슨 짓을 벌이면요?"

"우리가 여기서 죽을 거라고 확신하고 도망친 모양인데, 우린 살았잖아?"

잡을 수 있다면 잡는 게 좋겠지만, 이미 도망간 놈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일단 그 십인대 두 조는 신경 쓰지 말고 입단속이나 잘해. 첩자가 있었다는 걸 알면 기껏 높여 놓은 사기가 흔들릴 테니."

병사 쪽은 이 정도면 됐다.

후방에 있느라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깊숙이 이동하지도 않아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으니까.

고개를 돌려 버질을 바라보자 그가 반듯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기사 단원도 전원 복귀했습니다. 대부분 중상이었지만 주군께서 주신 치료제가 있어 당장 복귀해야 하는 기사는 없습니다."

음, 이 정도면 기사단도 멀쩡하다.

상상도 못 한 압승에 부대 전체적인 사기 또한 나쁘지 않고.

아니, 오우거라는 강적을 만나 도망친 부대라는 걸 생각하면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셈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게 다야?"

"예? 뭐 더 필요하신 거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질에게 물었지만, 역시나 원하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아직도 전투가 끝나지 않은 건.

나뿐인 모양이다.

* * *

당초의 계획과 달리, 이안은 기사단의 치료와 퇴각 시 두고 온 보급품 회수를 위해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주군, 원하신다면 기사단은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눈치 없는 버질이 이 정도의 상처는 걷다 보면 낫는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스팀팩은 만능 포션이 아니야. 당장 쌓인 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까, 쉴 수 있을 때 쉬라고 해."

이안이 당장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에 억지로 힘을 주며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척후대는 그동안 숲을 정찰하면서 보급품이나 화살을 회수하고. 오우거가 잠잠해지면 그때부터 시작하면 될 거야."

"예."

"그럼 둘 다 나가 봐. 난 피곤해서 좀 쉴 테니까."

피로가 뚝뚝 묻어나는 이안의 말에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염려를 표하고는 조심스럽게 천막을 나갔다.

전장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 움직인 만큼 피로가 상당하리라 생각하면서.

* * *

두 사람이 나간 걸 확인한 뒤,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 내기 위해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 고생을 하고도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 몸은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눈꺼풀은 철근이라도 매단 것처럼 한없이 무거웠다.

한동안 심각한 얼굴로 수마(睡魔)와 씨름하던 이안이 잠에 든 순간, 빌어먹을 전투가 다시 시작됬다.

* * *

시작은 순간의 실수였다.

- 감히 별것도 아닌 것들이!

전투의 초반, 명령을 무시한 기사 몇 명이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 빈틈으로 들어선 오크 몇 무리가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소수 병력만 움직이면...!'

급박한 상황에 후드웍을 찾아 소리쳤지만, 꽉 막힌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기사단이 뚫렸다!

- 저 새끼들 먼저 죽여!

기사단을 뚫고 들어선 오크 무리에 당황한 척후대가 겁을 집어먹고 화살을 돌린 순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대열이 무너졌다.

기사단은 척후대의 지원 없이 밀려오는 군단을 감당할 수 없었고, 방벽이 없는 병사들은 활을 든 고깃덩어리나 다름없었으므로.

눈앞에서 일방적인 학살이 펼쳐졌다.

- 으아아악!

- 내 팔! 내 팔!

- 안 돼, 안 돼!

병사들이 허무히 죽어 나간다.

'아....'

물리고, 찢기고, 짓이겨진 병사들이 분노와 증오로 얼룩진 눈으로 자신을 죽게 만든 원흉을 찾아 죽일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 너, 너!

- 빌어먹을 망나니 새끼! 내가 왜 너 때문에 죽어야 되는데!

- 너는 왜 살아 있는데!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너는 왜!

─그게 이 빌어먹을 꿈의 시작이었다.

기사단을 '사냥감'으로 삼은 흘륜데어의 도끼에 기사단이 전멸하는 장면이.

기사단을 잃고 도망친 척후대가 군단의 추격을 떨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짓밟히는 장면이 연달아 펼쳐졌다.

"...."

기사단과 병사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죽어 가는 이들을 그저 말없이 응시했다.

"...."

그렇게 죽어 가는 이들의 중심에 서 있자, 저 멀리서 어딘가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

영혼을 옥죄는 듯한 울음소리에 몸이 굳은 순간 깨달았다.

이건 전부 일어나지 않은 '최악의 상황'들이고, 앞으로 다음에 벌어질 건....

-크르륵! 이번엔 운이 없었구나.

비웃음이 가득 담긴 흘륜데어의 목소리와 함께 무딘 도끼가 시야를 가렸다.

우드드득!

시야가 점멸하고, 하늘과 땅이 몇 번이고 자리를 바꾸는 와중에도 눈을 감으려 애썼지만, 몸을 떠난 머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시야의 끝에 레이나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무딘 도끼가 보였다.

콰드득!

"...."

죽음.

죽음.

죽음.

쉼 없이 떠오르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악귀 같은 표정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죽어 갔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최악의 상황'들은 날을 세워 소리쳤다.

- '지지 않을 확신'이라며?

-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 '이안'도 아닌 네가 정말 이들을 이끌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네가?

"…하."

악몽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이 점점 더 깊게 침잠(沈潛)했다.

* * *

얼마나 많은 장면과 죽음이 지나갔을까.

시간의 감각을 잊은 뒤 죽은 자의 수를 세었으나, 그 또한 어느 순간 놓쳐 버렸다.

광장에 묶여 말라 죽은 이름 모를 관리가.

갑자기 사라진 치료사 말로푀유 남작이.

부패한 성직자들과 관리들이.

내 손에 죽었던 모든 이들이.

악에 받쳐 소리치며 저주했고 이안은 그런 그들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봤다.

이유 없는 비난과 증오를 받아 내는 건, 최소한 이 몸에게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 악몽에 들어온 순간부터 몸을 옥죄던 두려움에 비하면, 타인의 죽음 따위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

때문에 이안은 조용히 죽음을 관망했다.

죽어 마땅한 이들의 모습에 조소하고 죽지 않은 이들의 절규를 찬사라 여기면서.

그러다 익숙한 방이 보였다.

어둠에 잠긴 방은 그 형태조차 알 수 없었으나, 잊을 수 없는 10평짜리 방.

"아."

이안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상상의 일부였으므로.

'안 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익숙한 책상 위의 모니터가 희미한 빛을 밝히고, 그 위로 채팅이 떠올랐다.

- 네가 뭐라도 된 거라고 생각했어?

- '그렇게'라도 엔딩을 보고 싶었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자 했지만,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작은 발악을 비웃기라도 하듯, 화면 속 채팅이 멈추지 않고 올라왔다.

- 봐, 네가 무슨 발악을 하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지고, 천장에 매달린 '공략왕'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손을 벌려 이안을 반기며 말했다.

"─이게 현실이야."

킬킬거리며 대롱거리던 시체가 소리쳤다.

한층 더 거세진 두려움이 몸을 억죄기 시작했다.

'이건 환각이다. 이건 환각이다. 이건 환각이다....'

인상을 찡그린 이안을 재밌다는 듯 바라본 '공략왕'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조롱을 가득 담은 그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이거 억울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날' 무시하다니."

얼굴을 감싼 두 손 사이로 흘러나오던 그의 웃음소리가 멎어 갔다.

킥킥킥, 킥킥....

어느새 어둠에 자리한 침묵 사이로 두 손을 내린 그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감히 네가! 네가! 날 보고 환상이라고! 날 죽이고도 부족해서 내 죽음조차 욕보이겠다고!"

이안의 몸 위로 환영처럼 가방과 검집이 떠올랐다.

"─죽어!"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들으며 초점을 잃은 이안의 시선이 가방을 향했다.

* * *

이안이 초점 풀린 눈으로 자기 가방을 뒤적거리시는 걸 본 뒤에야 리하르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이 나이를 먹어서도 손해를 볼 줄이야...."

손해를 면하려면 '부탁'받은 영혼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돌아갔어야 했다.

이 땅은 마족들의 첫 번째 농장인 동시에 빌어먹을 새대가리들의 둥지이고, 본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마기를 소모하는 땅이니까.

그러나 고작 별 볼 일 없는 영혼 하나였다.

영혼이 풍기는 단내를 보니, 어지간한 악행은 다 저질러 온 영혼이었고, 그만큼 마기에 취약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 전에 마계의 백작이자 악몽(惡夢)의 군주라 불리는 리하르탄은 자신이 있었을 뿐이다.

목표물을 '부탁'받았던 내용대로 죽이고 영혼을 수확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쯧, 내 악몽에 이리도 저항할 줄 알았다면 그냥 돌아갔을 것을."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었다.

이 차원에서 소모된 마기는 회복할 수도 없는데 차원을 찢고 넘어서면서 적지 않은 마기를 사용했고, 저 보잘것없는 영혼에 하룻밤이 넘도록 마기를 쏟아부었으니.

그렇다고 장관에게 생색을 내자니 도대체 뭐라고 생색을 낼지도 마땅치 않았다.

죽은 영혼을 찾았는데 살아 있어서 친히 죽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보잘것없는 인간 하나의 정신을 침식하는 데 어마어마한 마기가 소모됐다고?

"영웅이나 용사의 영혼이었다면 모를까, 이건 뭐...."

하다못해 들었던 대로 숭고한 희생을 한 성인의 영혼이었다면 그럴듯한 변명이라 생각했겠지만, 저 단내 나는 영혼에는 어지간한 마족의 뺨을 후려칠 정도의 악의가 묻어 있었다.

"하아...."

뭐, 장관이 섭섭하지 않은 보상을 약속한 데다 '휴가'를 준다 했으니, 거기서 시간을 좀 보내며 회복하면 될 터.

"반항하지 말고 어서 죽거라."

영혼이 숨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을 들추고 현실로 만드는 그의 악몽 속에 들어간 이상 절대 나올 수 없을 테니까.

마침, 가방을 주섬거리던 인간이 검은색 병을 꺼내 들었다.

"이런, 독약인가?"

귀찮은 일이지만 '부탁'받은 영혼은 단검으로 자살했다 했으니, 최소한 비슷한 모습은 만들어 주기 위해 리하르탄이 손을 휘저어 마기를 움직였다.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마침내, 검과 비슷한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낸 인간이 조용히 읇조렸다.

"에라이 씨...."

그리곤 터벅터벅 걸어와 리하르탄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 무슨?'

여전히 초점이 풀린 이안의 눈을 확인한 리하르탄이 악몽 속 움직임이라 생각하고 안심한 순간.

리하르탄의 바로 앞에 선 이안이 성국의 상징을 들고 비릿하게 웃었다.

"지옥으로 꺼져라, 이 악귀야!"

79화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죽은 '공략왕'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걸 맨정신으로 봤으면 진짜 미쳤겠는데.'

- 카드드드득!

그 생각에 동의하듯 굉음과 함께 나타난 시스템 창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스틸 하트가 ■■■■■에 저항합니다] 따위의 메시지가 보였으니, 저 소리와 메시지는 '스틸 하트'가 부러졌다는 뜻일 터.

'하. 씨발 진짜.'

저것도 좋은 소식이라면 좋은 소식이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날' 보고도 아직은 미치지 않은 모양이니.

나쁜 소식은 특성을 무시할 정도의 적이 있다는 뜻이고.

'역시 마족이겠지?'

적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공격할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몰랐으나, 적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존재는 손에 꼽으니까.

준비라도 할 생각에 가방을 주섬거렸다.

'분명 여기 어디 뒀는데....'

성녀가 무려 12시간을 축성한 고농축 성수를 성력을 숨기는 병에 담고 검은 가죽으로 동여맨 '응급 탈출 포션'을 꺼내 들자 공략왕이 몸을 흔들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설마 독이야...? 독으로 죽는다고? 하! 날 이 꼴로 만들어 놓고도 넌 편하게 죽고 싶다고?!"

이윽고,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공략왕이 몸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환상에서조차 비겁하게 도망치겠다고?!"

바닥을 향해 목이 늘어진 '자신'의 모습에 두려움이라기보단 본능적 혐오감에 구역질이 차올랐지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성수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던 반발력에 집중했다.

과연, 성녀를 12시간 가둬 성수를 축성하면 간이 마족 탐지기가 만들어지는 건가.

"검, 최소한 검을 들어, 이 비겁한 새끼야!"

목이 부러져 덜렁거리는 얼굴로 공략왕이 소리치자 위압감보단 위화감이 더 강하게 들었다.

처음엔 그럴듯했는데 점점 연극인 게 티 나는 기분이랄까.

잘 보니, 멀리서 볼 때는 그럴듯했던 얼굴도 가까이에서 보니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다.

'내가 가진 두려움의 일부를 이용하는 방식인가?'

사실 일반적인 인간이었다면 이 정도만 해도 무의식 속의 두려움에 집어삼켜져 이성을 잃었겠지만, 이쪽은 정신계 특성이 두 개나 있는 터라....

"검! 검을 들라고!"

뭐,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반발력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면서, 가방 속에서 얇고 날카로운 나무 조각을 꺼내 들었다.

자신을 보고 구마문을 외던 릭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뺏어 낸 성국의 상징에 성녀의 축성을 얹은 간이 성물.

얇은 말뚝을 보자니, 이쪽 신도 어지간히 기구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만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거야! 더 늦기 전에, 내 꼴이 나기 전에 어서!"

하고 외치는 '날' 지나쳐 마기가 느껴졌던 곳으로 흐느적거리며 걸어가 손을 휘적이자 단단한 무언가가 잡혔다.

'여기다.'

고작 두세 걸음 뒤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이안의 얼굴이 전에 없이 굳었고, 그걸 본 시체가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그래! 죽어! 그만 포기하고 그냥 죽으라고!"

그 말을 따라 말뚝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내가 뒤통수를 후려칠 때 릭이 뭐라고 했더라....'

성국의 성서에 나오는 유서 깊은 구자문은 이렇게 끝난다.

"─지옥으로 꺼져라, 이 악귀야!"

그리곤 온 힘을 실어, 내 손 위에 말뚝을 쑤셔 박았다.

근데, 악마에게 지옥으로 꺼지라는 건 그냥 집에 가라는 거 아닌가...?

* * *

콰드득!

뼈와 가죽을 짓뭉개는 소리와 함께 예상보다도 훨씬 큰 고통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크윽!"

손을 타고 느껴지는 통증과 동시에 공략왕과 방이 흘러내리고 새로운 환각이 시작됐다.

약을 구걸하며 섭정관 앞에서 노예처럼 엎드려 있던 이안이, 날 향해 고개를 돌리곤 악귀처럼 외쳤다.

─ 이게 현실이라고! 이제 그만 정신 차려!

그걸 시작으로 오랜 시간 동안 품어 왔던 의심과 불안이 차례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힘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넌 미쳤다고,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마주하라고.

'집중....'

정신이 흐려질 때마다 손에 흐르는 피의 온기에 집중하면서, 한 손으로 '응급 탈출 포션'을 치켜들었다.

'통할까?'

이름에서 보듯 '응급 탈출 포션'은 진짜 응급 탈출용이다.

아지요그의 살벌한 협박과 섭정관의 갑작스러운 개종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쉔델자르를 닦달해 만든 비싼 포션.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굴이나 스벤한테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한 포션이었는데....

'악마 같은 새끼들.'

이걸 쓰는 건 최소한 모너를 얻은 뒤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쓰러지기 직전의 모너에 딱 봐도 후반 보스 같은 마족이 찾아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성국의 이단 심판관이 눈에 불을 켜고 악마를 찾고 있는 지금, 마물의 숲 한가운데서 마족이 찾아올 줄이야.

'성능 시험이라고 생각하자, 성능 시험....'

목숨을 건 성능 시험이랄까.

시간이 잔뜩 늘어진 환각 속에서 성수를 든 손을 있는 힘껏 내리치자, "-쨍그랑!"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성수 특유의 청량하고 맑은 향기가 퍼져 나갔다.

* * *

"캬아아악!"

그 존재조차 잊어버렸던 통증에 소리를 내지른 리하르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멍하니 바라봤다.

'상처...?'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차원을 넘어 대부분의 마기가 억압당하고 남은 미약한 마기조차 악몽을 구현하느라 써 버렸다고 한들, 자신이 누군가.

마계의 백작이자 악몽의 군주다.

용사나 성녀라면, 아니 최소한 영웅이라고 불릴 만한 '격'을 갖춘 존재라면 모를까, 고작해야 하급 몽마보다도 약해 보이는 하등종한테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리하르탄은 붉은 피와 뒤섞여 흐르는 끈적한 검은색 피와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현실을 직시했다.

'돌아간다.'

하급 몽마로 태어난 리하르탄은 더 뛰어난 마족이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백작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건 전부 죽는다.'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던 새대가리들의 화신도, 용사도, 영웅도, 목과 심장 깊숙이 마기를 찔러 넣으면 피가 흘렀고, 걸린 시간이 달랐을 뿐 결국 죽었다.

그건 마족도 마찬가지였다.

기어코 지옥의 왕이 될 거라 믿었던 마족들조차, 열등하기 그지없는 미개한 종족의 손에 찢기고 잘리는 걸 몇 번이고 목격했다.

그러니까─

리하르탄은 어깨에서 흐른 피가 땅에 닿기도 전에 도망을 결심하고 마기를 움직였지만, 어깨에 박힌 말뚝이 마기의 흐름을 막았다.

"커억!"

분출되지 못하고 내부를 휘젓는 마기에 피를 토한 리하르탄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성, 성물이라고?!"

왜?

어째서?

어떻게 저런 보잘것없는 인간이 성물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보다 성물을 무기로 쓰는 미친놈이 있다고?

어지러운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검은색 약병을 치켜든 인간이 보였다.

'독인가? 마계의 독이 아니니까, 독, 독은 괜찮다. 우선 이 빌어먹을 성물부터 빼내야...!'

다급한 리하르탄이 말뚝을 빼내기 위해 몸을 움직인 순간.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재수 없는 새똥 냄새가 풍겼다.

'어...?'

리하르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찬란히 빛나는 물을 보고 잔잔히 떨렸다.

마족의 백작이자 악몽의 군주가 직접 만들어 낸 공간에는 빛 한 점 들지 않거늘, 저리 찬란히 자체 발광 하는 용액이라니.

냄새도, 새 같은 효과도.

'저건 꼭....'

"끄아아아아악!"

리하르탄은 영혼을 찢어발기는 통증에 소리쳤다.

성수라니, 빌어먹을 성수라니!

마족인 내가 성물을 몸에 박고 성수로 샤워하다니!

"끼야야아아아악!"

리하르탄은 마족 사망 원인 1, 2위를 한 몸에 받아 내고 고통 속에서 절규하면서도 어떻게든 악몽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마기를 움직일 수 없는 지금, 가축이 악몽에서 벗어난다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제발, 제발, 제발!'

리하르탄은 애타게 마신을 찾으며 생각했다.

이런 결말은 인정할 수 없다.

'전장'도 '전쟁터'도 아닌 '농장'에서, 그것도 인간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고.

불법 침입을 위해 현신한 지금 죽으면 존재 자체가 소멸할 터.

위대하고 고결한 죽음은 아니더라도, 새 죽음만큼은 안 된다.

'인간, 인간을 노려야 한다!'

다행히도 눈앞의 가축은 인간이고, 하급 몽마 출신인 리하르탄은 그 누구보다 인간을 잘 알았다.

태초부터 악마 소환율 1위를 당당히 기록하고 있는 입지전적인 멍청함과 악의를 타고난 종족.

누구는 악마가 되지 못한 불운한 종족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악마보다 악(惡)해서 새 대가리들에게조차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그 인간이라면.

그것도 영혼이 악의와 적의로 점철된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악마의 속삭임을 견딜 수 없으리라.

사력을 다해 흐트러지려는 악몽을 유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인간! 나는… 마계의 백작… 리하르탄이다!"

당장이라도 임프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단어와 고통을 동시에 씹어 삼키며, 리하르탄이 말을 이었다.

* * *

성수가 깨진 순간, 자신이 현실이라 외치며 악의로 가득 찬 저주를 내뱉던 수십 명의 '내'가 돌연 멈춰 섰다.

'또 뭘 하려고....'

다른 모습의 이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 순간, 주변을 둘러싼 모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인간, 난 마계의 백작 리하르탄이다."""""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여유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쉔델자르....'

제대로 맞출 수만 있으면 어지간한 마족은 움직이지도 못할 거라더니.

교단의 상징인 십자 모양의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성수를 뿌렸는데도 멀쩡한 걸 보니 과장 광고에 당한 게 확실했다.

"백작이라고?"

내가 반문하자, 수십 개의 환각 중 '레이나에게 버림받은 이안'이 여유롭게 걸어 나와 말했다.

"그렇다. 이 몸이 바로 마계의 백작이자 위대한 악몽의 군주지."

"아...."

이 환각이 놈이 만들어 낸 악몽이라면 저 모습은 내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이리라.

"개 같은 게임이 진짜...."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정말 참을 만큼 참았다.

모너가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숲에서 고블린 왕이 나왔을 때도 참았고, 오크 군단장이 함정을 파고 기다릴 때도 참았다.

심지어 뜬금없이 오우거가 튀어나와도 그러려니 했다.

마물의 숲이니까.

마물의 숲의 주인은 몬스터니까.

근데....

"마족? 그것도 백작이라고?!"

최소한.

최소한, 종족은 몬스터여야 되는 거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마족도 몬스터라고 치자.

그럼 양치기 다음은 농부나 마구간 지기나 농장주 같은 만만하고 푸근한 놈이 나와야지, 백작이 나온다고?

"하...."

들끓는 짜증을 식히려 한숨을 내뱉자 놈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인간. 내 악몽을 견뎌 낸 너에게 흥미가 생겼으니─"

방금까지 머리를 어지럽히던 두통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이어졌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그 무엇이든 이뤄 주겠다."

사탕이 굴러가는 속삭임을 듣는 순간, 조금 전 봤었던 10평 남짓한 방이 떠올랐다.

놈에게 부탁하면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잊고 지구도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악몽을 꾼 것처럼, 찌뿌둥한 몸을 풀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방송을 키고, 새 게임을 시작할 수 있겠지....

"그것을 원하느냐?"

내 생각을 읽은 듯 낮게 웃은 놈이 묻자, 나는 구겨진 인상을 한 번 더 찌푸렸다.

마음속 깊숙이 숨겨 둔 두려움을 마음대로 꺼내 놨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사생활을 존중할 줄 모르는 새끼다.

백작쯤 되면 배울 만큼 배웠을 텐데, 마계는 가정교육이 독학인가.

"아, 소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입을 열자 즐거운 듯 클클거리는 놈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말뚝 박힌 내 손을 멀뚱히 바라봤다.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