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00

90화

백작과의 대화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오크에 대한 정보만 전할 수 있었다면 빨랐겠지만,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일투성이구나."

"못 믿겠으면 버질을 불러다 물어보시죠."

"흥, 네놈에게 검을 바친 그놈을 내가 믿을까."

백작이 어딘가 아쉬움과 후련함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수고했다. 네가 얻은 정보 덕분에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구나."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말없이 탁자를 톡톡 치던 백작이 문뜩 물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요새는 네 것이다."

그건 날 인정한다는 뜻이었지만,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내 안에 있는 망나니가 대신 대답했다.

"원래부터 내 것이었는데, 새삼스럽네요."

"하? 하하하! 그렇지, 원래부터 네 것이었지! 하하하!"

한참이나 웃던 백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처럼 이 요새의 주인은 모너다.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전 공작에게 자신의 검을 바쳤던 백작은 그저 사실을 말한다는 듯 덤덤했으나,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무거웠다.

"넌 앞으로 네가 모너라는 걸 증명해야 할 것이다."

'여태껏 모너가 아니었으니.'

백작이 그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가 내 자질을 의심하고, 내 능력에 의문을 품고 있다.

굳건한 성벽과 같은 '모너'라는 이름과 달리, 내가 가진 거라곤 더러운 악명밖에 없으니까.

그런데도 난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폭군(暴君)이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 주 남짓.

그 전에 전쟁은 시작된다.

"모너가의 신화가 제 이름 아래 다시 새겨질 거라는걸."

"…부디 그렇게 되길 바라마."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끝낸 뒤 방으로 향해 기절하듯 잠을 청했다.

* * *

똑, 똑, 똑.

"으으으으."

똑, 똑, 똑.

이상하다.

분명히 방금 누운 것 같은데.

똑, 똑, 똑.

아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방금 누웠다. 이제 행복한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몸을 눕힌 참이었으니까.

똑, 똑, 똑.

아무래도 밖에 있는 인간은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들어와!"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치자 낯익은 병사가 들어왔다.

이름이 더르쿠였던가?

후드웍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했던 냉정한 병사였다.

"실, 실례합니다! 충, 충성!"

"무슨 일이지?"

"그, 백작님이 회의에 참여하시라고...."

설마.

"나 방금 들어왔는데?"

"예, 예, 그… 백작님도 아직 안 주무셨다고… 지, 지휘관은 언제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범은 개뿔."

잔뜩 짜증을 내며 천 근 같은 몸을 일으켰다.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백작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내가 회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지난밤의 소동이나 척후대에 대한 헛소문은 완전히 사라질 테니까.

만약 내가 모너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이 요새의 지휘관이랑 하루라도 더 빨리 친해지라는 뜻도 있을 테고.

모르긴 몰라도 날 찾는 연락이나 압박도 많았을 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인기인의 무게라고 생각하며 더르쿠를 따라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후드웍을 그렇게 싫어한다며?"

"아, 아닙니다!"

"후드웍이 자기가 애정과 사랑으로 돌봐 줬는데 보답을 구마문으로 한다고 거품을 물던데."

"저, 절대 아닙니다!"

"선배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며?"

"그야 말도 안 되는 말을 자꾸 하니까...! 아, 아니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반응이 찰진 신입을 괴롭히면서.

* * *

회의실에 도착하자 스벤 백작이 날 차가운 목소리로 반겼다.

"늦었군."

도저히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것 같아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양심 없는 인간 같으니.

어떻게 저런 인간이 격을 넘어서 6성에 도달한 거지?

"다들 보다시피 척후대는 무사히 귀환했다. 소문과 달리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었지."

백작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회의실에 모인 지휘관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뱉었다.

"허...."

"어떻게...."

"자, 자. 척후대장은 임무를 마치고 아직 쉬지 못했으니 설명은 나중에 따로 하기로 하고, 급한 안건부터 먼저 처리하겠네."

아무래도 멀쩡한 내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목표였던 듯 백작은 빠르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하긴, 있었던 일을 전부 풀어내자면 한두 시간으로는 부족했을 테니까.

"먼저, 북부 귀족들의 지원 건부터 시작하지."

백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휘관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정도로 양보했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장 전투를 앞둔 시점 아닙니까?"

"기름때 잔뜩 낀 기사들이 요새에 들어온다고 한들 저희 뜻대로 움직여 주겠습니까? 차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차후에 지원한다는 보장이 있다면 그렇겠지요. 귀족들은 승산이 없어 보인다면 당장 발을 빼고 지원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새에 독을 들이잔 말이요? 막말로 지휘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 것이요? 군법을 들어 다른 가문의 기사를 벌할 건가?"

"그럼 차선책으로 병사라도 들여야...."

"저들은 훈련병이라고 하나 그게 훈련병인지 징집병인지 오기 전엔 모르는 거 아뇨! 어중이떠중이들이 식량이나 축낼 바에야 요새의 뛰어난 정병(淨甁)에게 줄 보급을 늘려야 하오!"

양쪽의 의견은 팽팽했다.

북부 귀족의 지원은 달콤했지만 단결되지 못한 연합군은 오합지졸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최선의 선택은 귀족의 지원 병력을 수용한 뒤 성벽별로 각 귀족가의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겠지만, 만약 한쪽 성벽이 무너질 경우 요새 전체가 무너질 터.

시끄러운 회의가 한동안 지속되던 중, 고민을 계속하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척후대장은 어떻게 생각하지?"

동시에 회의장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날 향했다.

이글거리는 눈들이 제 생각이 맞다며 소리치는 것 같았으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거절해야 합니다."

"척후대장! 지금 요새에 얼마나 병력이 부족한데...!"

"조용. 아직 척후대장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에 의심과 불신이 담기기 시작했지만, 게임 속에서 귀족만 수백이 넘도록 상대했던 난 확신했다.

귀족이 움직였다면 그게 자신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귀족들은 절대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저들의 제안은 필시 모너를 지원하는 게 그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터."

심지어 백작이 거절의 의사를 표했음에도 다시 한번 파병을 제안했다면 그 의미는 간단했다.

"우리가 다시 한번 거절하고 무리한 부탁을 해도 그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거라 믿고 지원의 폭을 늘릴 수도 있겠군요."

이기는 전쟁에 어떻게든 숟가락을 더 얹어서 명예와 실권을 챙기려는 귀족들의 생리는 바뀐 적이 없으니까.

"흥미로운 말이군. 그럼 우리가 뭘 더 요청할 수 있겠나?"

"전시 중의 명령권과 각 병력이 사용할 식량을 비롯한 모든 전쟁 물자. 그리고 책임자의 판단에 따라 병력을 회군시킬 수 있음을 명시하시면 됩니다."

내 말에 회의장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면 귀족 가문이 다시 생각을 바꿀 수도 있을 테니까.

다시 논쟁이 시작될 것 같은 모습에 회의를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 말을 더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시죠. 명령권과 식량이 없으면 줘도 못 쓸 군대입니다. 또한 식량만 축내는 병사를 받고도 회군시키지 못한다면 짐을 떠맡는 거나 다름없죠."

무례하면서도 모너에서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요구.

"흠… 그도 그렇군."

백작이 의견을 찾기 위해 회의장을 둘러보았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동의한다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중앙에서 연락이 왔는데...."

회의는 몇 시간이나 계속됐다.

다람쥐가 전해 준 적의 규모나 속도에 대한 정보는 일절 거론하지 않았음에도 전쟁이 가까워지자 크고 작은 문제가 쌓였기 때문이다.

백작은 논쟁이 생길 때마다 내 의견을 물었고, 이의가 없는 경우 내 의견에 동의했다.

회의가 지속될수록 잠도 재우지 않고 날 불러온 백작의 의도가 선명해졌다.

'눈빛이 변했어.'

그저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는 것만으로도 의심과 불신으로 번쩍이던 지휘관들의 눈빛이 변했으니까.

지휘관들의 눈빛 속 의심과 불신이 완전히 거둬지고 궁금증과 호기심이 그 자리를 대신할 무렵, 백작이 회의의 끝을 알렸다.

"오전 회의는 여기까지만 하지. 척후대장의 귀환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줄을 서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직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못한 탓에 백작을 바라봤으나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유가 있나? 다람쥐가 가져다준 정보라고 너무 솔직히 말해서 그런가?'

여러 생각이 들었으나, 백작이 힘들게 가져다준 정보를 무시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 * *

트리미아와 중앙에 소식을 전할까 하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방으로 향했다.

계속된 행군의 피로도 피로였지만, 마족이 나타난 뒤로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으니.

끼이익.

- 너무 늦었다, 인간!

내 방에 들어선 순간 방 한편에 놓인 쿠션에 드러누운 칼루아가 소리쳤다.

"넌 왜 여깄냐."

- 멍청한 인간이 날 여기로 옮겼다! 여기로 옮길 때까지 멍청한 놈들을 깨물었지!

순간 악몽 같은 그림이 머리를 지나갔다.

"만약에 드레이크한테 물려서 손을 잃은 병사가 나오면...."

서슬 퍼런 목소리에 칼루아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 아, 아니다! 살짝 물었다! 피는 조금 났겠지만 안 먹었다!

"그럼 다행이고."

밀려드는 안도감과 동시에 침대에 몸을 눕혔다.

"진짜 피곤하니까, 저녁까지 깨우지 마. 배고프면 레이나를 찾아가고."

- 그 암컷이 벌써 몇 번이나 왔다가 돌아갔다! 널 걱정하고 있는데!

"아, 걱정하지 말라고도 전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력한 수마가 날 덮쳐 왔다.

* * *

[시스템 패치 중... 32%]

* * *

오크들의 왕, 폭군, 위대한 전사.

그린 스킨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를 지칭하는 말은 많으나, 그 어떤 호칭도 진정으로 '그'를 담아 내진 못했다.

그를 부르는 호칭 중 '플레이어'는 없었으니까.

어렵다 못해 괴랄한 난이도로 플레이어를 잃어 가던 『로스트 크로니클』은 대대적인 업데이트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군주 모드'와 달리 게임 속 이종족이 되어 세상을 탐험하는 '이종족 모드'나 유명 NPC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목표를 이루는 '아카데미 모드' 같은 다양한 모드를 통해 게이머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이 세계에 온 뒤 셀 수 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도미넌트'도 게임을 즐겼던 수많은 플레이어 중의 하나였다.

그것도 이종족 '오크'로 대륙 통일이라는 업적을 이뤄 낸 세계 최초의 플레이어.

"…일이 꼬여도 개같이 꼬였어."

여덟 명의 대전사가 이끄는 왕좌는 승리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으나, 그 왕좌에 앉은 도미넌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계수, 그 씹어 먹을 년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히든 피스나 특전이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로스트 크로니클』이 그렇게 친절할 리가 없는데.

"쯧,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소용없겠지. 일단 요새를 먹고 다음 계획을 생각해 봐야겠어."

프론트 홀드라면 분명 적당한 적들이 수두룩하게 있을 터.

"거기 있는 인간만 다 죽여도 레벨업 할 경험치는 충분하겠지. 아니면 그 땅에 왕국을 세워도 좋고."

애초에 계획에 실패하면 숲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심부의 괴물들과 달리 무서워서 숲에도 못 들어오는 종족 따위, 다 찢어 죽일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숲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야. 위대한 전사는 적을 두고 도망가지 않으니까. 이건… 그래, 정벌(征伐). 도망이 아니라 정벌이지."

전쟁을 앞둔 폭군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91화

"끄응...."

벽돌을 올려놓은 듯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혀 부스스 눈을 뜨자, 아이 머리만 한 도마뱀이 날 반겼다.

- 인간? 인간!

아, 도마뱀이 아니라 드래곤이.

"비켜...."

- 일어날 시간인데! 다른 인간들은 벌써 다 일어났다!

'그놈들은 보고랑 회의에 연속으로 끌려가지 않았겠지....'

시끄러운 도마뱀을 던질까 하다가 그냥 몸을 일으켰다.

"잠깐, 레이나는?"

- 그 암컷이 더 자야 하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아, 그래서 내 가슴 위로 올라온 건가.

어떻게든 조용히 깨워 볼려고?

"더 자야 하니까 괴롭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고?"

내 질문에 드래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그래서 여기 조용히 있었다!

대놓고 칭찬해 달라는 듯 꼬리를 탁탁 치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정교육부터 글러 먹은 드래곤한테 아침부터 화내 봐야, 결국 내 손해였으니까.

"자, 외출 준비하고 올 동안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침대에서 벗어난 순간, 찌잉 하고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잠깐, 내가 굳이 널 데리고 외출할 필요가 있나?"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들고 다녀야 하는 저 무거운 놈을?

- ...?!

아니, 배신당한 비운의 여주인공 같은 눈으로 날 바라봐도....

- 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에 한숨을 내쉬고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혹시라도 울다가 브레스라도 나오면 곤란할 테니.

'왠지 당한 것 같은데....'

방에서 나오는 길, 기어코 머리 위에 올라선 놈이 신나서 꼬리를 움직였다.

- 가자! 밥! 밥! 밥!

음. 방에 있던 토스트를 물고 있던 나는 식당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

전날 못 한 통화를 위해 통신실을 방문했으나, 턱 끝까지 다크써클이 내려앉은 통신 담당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임관한 뒤로 이렇게 많은 연락을 받은 건 처음입니다. 북부의 모든 귀족 가문에서 연락이 오는 터라...."

전화가 오는 도중 전화를 걸 수 없듯, 통신구도 비슷한 모양이다.

지난 일주일간 두 시간도 못 잤다는 통신관이 결연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부터 모든 연락을 무시하면 오늘 저녁에는 전화를 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발 그러자는 듯 애처로운 목소리 였지만, 아무 이유 없이 연락을 거절하면 쫌생이 같은 귀족들은 입을 모아 모너의 무례를 욕할 터.

과로에 시달리는 직원의 간절한 시선을 슬쩍 피한 뒤 말했다.

"혹시라도 중요한 연락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럴 수는 없지. 대신 내가 말하는 곳에서 연락이 오면 내 말을 전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전할 말을 정리한 뒤, 통신실에서 나오는 길.

머리 위에 앉은 칼루아가 재밌다는 듯 소리쳤다.

- 인간이 운다! 인간이 울렸다!

음. 요새에 하나밖에 없는 통신관이 과로로 죽기 전에, 통신관부터 데려와야겠다.

* * *

통신실을 나선 뒤 백작의 집무실로 향하자, 마침 집무실에서 나오던 총관이 나를 반겼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안 그래도 백작님께서 찾으셔서 지금 막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잘됐군,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지금 들어가면 되나?"

"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흐뭇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 준 총관에게 작게 고개를 움직여 감사를 표한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와 같은 자세로 서류와 씨름하고 있는 백작이 보였다.

"빨리도 왔군."

총관과의 대화가 들렸는지, 백작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바쁘니까 간단히 말하지. 전쟁에 대비해서 군을 개편하는 중이다. 지원받을 병력까지 생각하면 지휘관이 턱없이 부족해. 병아리 손이라도 빌려야 될 만큼."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고개를 든 백작이, 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말을 삼켰다.

"...."

더 할 말이 있던 게 아니었나 싶어 백작을 가만 보니, 몇 번 눈을 깜빡이며 내 머리 위를 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너를 정규군에 배정해 봤자 내 머리만 더 아플 것 같더군."

음. 백작의 날카로운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뭘 시키던 마음대로 움직일 생각이었으니까.

역시, 괜히 마스터가 아닌 건가.

"그렇다고 다른 귀족가의 병력을 맡기자니, 적과 싸우기도 전에 아군 손에 죽는 사상자가 나올 것 같고."

백작의 말에 발끈해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내가 생각해도 군기를 잡으려면 염라대왕이랑 면담시키는 게 최선이었으니까.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저 양반 바빠서 간단히 말한다고 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서론이 길지?

"그래서 척무대를 그대로 맡기기로 했다. 이름은 척후대 대신 특수 임무 부대로 하는 게 좋겠군."

"아… 감사합니다."

백산의 얼굴에서 보이는 뿌듯함과 기대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대충 답하니, 피식 웃은 그가 말했다.

"어디 한번 마음껏 날뛰어 보거라. 아직도 의심하는 놈들이 적지 않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 줘야지. 모너의 이름을 잇는 이가 누구인지."

작게 고개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의 말처럼 반대하는 가신과 지휘관들이 적지 않았을 거고, 그들을 설득해 실력조차 확인되지 않은 망나니에게 병력을 맡기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까.

'여차하면 회의실을 뒤집을까 했는데, 잘됐군.'

물론 고작 부대 하나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서류로 눈길을 주면서 백작이 말했다.

"할 말은 그게 전부 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그제야 집무실을 찾아온 이유가 생각나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알려 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 * *

백작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부터 할 일은 백작이 알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마탑을 치울까 합니다."

순간 떨리는 눈으로 창문 밖 희미하게 보이는 마탑을 바라본 백작이 다시 물었다.

"…잘 있는 마탑을? 왜?"

이유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모너를 상대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나, 당장 전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법사 하나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나, 영지에 별 도움은 안 되면서 금싸라기 같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나, 굳이 말하자면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걸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백작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에게 도움 되지 않는 존재니까요. 만약 저들이 이 땅 위에 있고자 한다면, 마땅한 대가를 내놔야 할 것입니다."

"마법사는 존재만으로 도움이...."

"요새가 무너진다 한들 저들의 마법이 적을 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확신할 수 있다.

이 세계의 마법은 학문에 가깝고, 책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마법사는 전투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니까.

100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전투 마법사라면 모를까, 마탑에 있는 마법사는 절대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

"제 말을 들어 보시죠...."

가볍게 통보나 하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빤히 날 쳐다보는 백작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지루한 설명을 시작했다.

* * *

이안이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집무실을 나선 뒤, 기계적으로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던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다른 지휘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부대와 직위를 맡겼을 때만 해도, 이게 옳은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백작이 총관을 향해 힘없이 물었다.

"그 새끼는 진짜 왜 드레이크를 모자처럼 쓰고 돌아다니는 거지? 자네가 보기엔 불만을 표현한 것 같나 아니면 한번 해 보자는 것 같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드레이크가 다친 터라 혼자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품에 안든가 손으로 들고 다닐 것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놈은 자신의 성질을 긁기 위해 드레이크를 데려온 게 분명했다.

"도대체 잘 있는 마탑은 왜 들쑤시겠다는 건지...."

"백작님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믿었던 총관의 배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통보하러 온 놈한테 허락을 무슨!"

자신이 도대체 언제 허락을 했단 말인가. 재수 없는 핏줄을 이은 놈이 어차피 자기 거라며 마음대로 하겠다고 말하고 나간 거지.

"공작이 없어졌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놈 아들한테 당할 줄이야...."

자기 문제가 아니라며 옆에서 허허 웃는 총관을 노려본 뒤,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쯧, 좋든 싫든 영지의 주인이 될 놈이니, 그놈 뜻대로 해 줘야겠지. 이왕 털기로 한 거 놈들이 영지에 숨겨 둔 재산이나 땅을 모조리 확인해 보게."

마탑은 백작도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저 아직은 건드릴 이유가 없었을 뿐.

"마탑에서 일하는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탑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은 놈들이랑 직원, 가족, 친척까지 전부."

"작정하고 움직이면 중앙 마탑의 반발이 심할 텐데요?"

총관의 염려에 백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영지의 주인이 말하지 않았나, 간이나 보는 놈들은 모너에 필요 없다고."

* * *

"생각보다 대화가 통하는 인간이었어."

- ...?

"절대 건들지 말라고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칼루아는 가만있는 마탑은 건들지 말라며 소리치던 백작을 잠깐 떠올렸다.

'…악마한테 의견을 전하려면 그것보다 훨씬 더 크게 소리쳐야 하는 건가?'

아무래도 위대한 드래곤인 자신이 아직도 밥을 못 먹은 건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던 칼루아가 숨을 잔뜩 들이쉰 뒤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 인간! 나 배고프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 밥 먹으러 가자."

- ...!

악마의 대화법을 뒤늦게 이해한 드래곤이 눈을 반짝였다.

'설마 악마가 귀가 안 좋았을 줄이야!'

어쩐지 듣고 싶은 것만 듣더라니!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낸 칼루아가 다시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신 뒤 소리쳤다.

- 고기! 맛있는 고기 먹자!

촉촉한 드래곤은 이번에도 먹힐 거라 확신했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탁!

콧등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과 함께 악마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편식하면 못 써. 그리고 한 번만 더 소리 지르면 레이나한테 맡길 거야."

짧은 두 팔을 쭉 뻗어 콧등을 움켜진 칼루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위대한 드래곤도 가끔은 실수하는 법이고.

악마는 귀가 안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성격이 안 좋은 것 같다고.

* * *

시끄러운 드래곤을 이끌고 요새의 한편에 위치한 식당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다니까!"

"이 친구가 아침부터 술을 처먹었나...."

"아니, 다른 놈들한테 물어보라고! 어디를 봐도 오크밖에 안 보이는 그 순간에 다리가 탁 하고 풀리는데, 저 멀리서 함성 소리가 들리는 거야!"

어딘가 익숙한 스토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임무 도중 몇 번 봤던 병사가 보였다.

'돌아가면 친구들한테 자랑하겠다더니.'

기회만 생기면 있는 대로 플래그를 꽂던 놈이 꿈을 이루는 중이었다.

- 인간! 고기다, 고기! 빨리 가자!

인사나 할까 하다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피식 웃은 뒤 배식을 담당하는 병사에게 물었다.

"여기, 고기 말고 이끼는 없나?"

"예… 에?"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이끼는 없는 모양이다.

있었으면 시끄러운 도마뱀을 교육할 좋은 교보재가 됐을 텐데.

92화

시끄러운 드래곤을 데리고 대충 식사를 마친 뒤 기사단 내부에 있는 훈련장으로 향하자, 아침부터 땀에 흠뻑 젖은 버질과 기사단이 보였다.

"주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할 일이 있으니까 준비해. 테일 너는 가서 후드웍이랑 척후대를 불러오고."

"예? 벌써 다음 임무입니까?"

"임무까진 아니고, 그 전에 몸풀기 정도? 아, 기사단은 전부 두꺼운 갑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전하고, 방패도 제일 두꺼운 걸로 준비해 놔."

"몸풀기에 방패는 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테일이 버질과 눈이 마주치자 당장 병사들을 데려오겠다며 급히 뛰어나갔다.

"나머지는 잘 들어."

원래 망나니짓을 하는 데에는 계획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

아무리 겁과 이지를 상실한 마법사라도 검을 반쯤 뽑고 침을 찍찍 뱉는 기사를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두 손을 공손히 모을 테니까.

거기다 『로스트 크로니클』에서 온갖 귀족과 왕족들, 마법사를 상대하면서 익힌 비장의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지금부터...."

이안의 설명을 듣던 기사단은 조용히 서로의 얼굴만 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마탑 앞.

오늘 아침에 '특무대'로 전입한 더르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석궁을 움켜잡은 채 후드웍에게 말을 걸었다.

"저… 조장."

"왜 배신자."

"아!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미안하면 다냐, 인마? 내 외침을 그렇게 무시해 놓고?"

"그야 꼼짝없이 언데드인 줄 알았으니… 아, 됐으니까… 지금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갑작스러운 신입의 질문에 후드웍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조장이든 백인대장이든 후드웍은 일개 병사일 뿐이었고, 누가 '마탑을 포위하고 석궁으로 위협하는 게 괜찮냐'라고 물으면 '미친놈이 새로운 자살 방법을 찾고 있구나. 그럼 꽤 괜찮은 방법이다.'라고 말할 테니.

한참을 고민하던 후드웍은 단순한 판단을 내렸다.

'대장이 나섰으니까 괜찮겠지.'

마법사의 손에 병사 한둘쯤은 개구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대장이라면 잘 키워 주지 않을까.

"음… 글쎄."

"예?!"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멍청아."

어딘가 그럴듯해 보이는 대답으로 넘어가려 했더니, 더르쿠가 속지 않고 반박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부대 대장이 내린 명령인데 당연히 괜찮아야지?!"

"쯧, 이래서 예리한 것들은...."

그렇게 말한 후드웍은 손에 든 나이트 슬레이어를 고쳐 잡고 마탑을 노려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무기나 제대로 들어라. 나중에 문제가 되건 안 되건, 우리 임무는 여기서 아무도 못 나가게 하는 거니까."

"거, 더럽게 안심되는 말이네요."

선임을 따라 마탑을 노려보던 더르쿠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진짜 이 부대로 와도 되는 거 맞아요?"

다른 질문은 몰라도 이 질문만큼은 확실히 답할 수 있었다.

오크가 쳐들어오고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안전한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장의 근처뿐이다.

물론 동시에 제일 위험한 곳이겠지만.

"…살고 싶으면."

"씨벌… 첫 번째 임무가 마탑을 포위하는 거라니, 딱 봐도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더르쿠는 무기를 고쳐 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전 조장은 병사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칠 사람은 아니었으니.

4급 마법사 제레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따분한 얼굴로 접수대에 앉아 하품했다.

"심심해."

무식한 투구 걸이나 화살받이밖에 없는 프론트 홀드에서 마탑을 찾아올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끽해야 백작가의 하인이 해독 포션이나 치료 포션을 구하기 위해 방문하는 게 다였으니까.

"시이이임시이이임해애애애."

차라리 연구나 공부라도 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탑의 꼰대는 접수대를 지키는 동안 다른 짓을 하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심심하다고 노래 부르며 불만을 표출하거나, 손가락 끝에 불꽃을 일으켜 구경하는 것뿐.

노래를 부르다 문뜩 어수선한 요새의 상황을 떠올린 그가 낙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는데...."

뇌 대신 슬라임이 들어 있는 게 분명한 인간들이 가끔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러 온다는 점만 빼면, 이곳 프론트 홀드는 마법사들의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경쟁이 치열한 다른 마탑과 달리 연구비도, 마석도 넉넉하게 지원받으면서 위험수당도 따로 나오는 꿀보직 중의 꿀보직.

괜히 이곳을 프론트 홀드의 마탑을 '테러베어의 보물 창고'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진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이곳에서는 운만 좋으면 살아 있는 테러베어도 받아 볼 수 있으니.

"에이, 아무리 그래도 며칠 싸우다 말겠지."

요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제레미는 요새의 병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저 무식한 기사들이라면 나뭇가지 치듯 휙휙 썰어 댈 터.

마탑은 당장 대피하라느니, 전투가 벌어지면 즉시 패닉룸으로 이동하라느니 난리였지만 그렇게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이 무너질 정도라면 어딜 가도 위험할 거고.'

심지어 탑의 꼰대도 조금 더 남아서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 인간은 그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기 귀찮아서 그러는 것 같지만… 뭐, 정 위험하면 게이트로 이동하면 되니까.'

제레미는 그래도 되도록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륙을 샅샅이 뒤져도 이곳보다 좋은 연구 환경은 찾을 수 없을 테니.

"…하아. 그래도 접수대를 지키는 건 진짜 심심하단 말이야."

그렇게 지루함에 못 이겨 손가락에 차례로 불꽃을 일으키면서 더 재밌는 놀이를 생각하고 있을 때,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잘생긴 도련님이 들어왔다.

…그것도 머리에 처음 보는 희귀 동물을 올린 채로.

'귀족이군.'

이름을 듣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귀족들의 문화는 대개 그런 식이었으니.

대놓고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대놓고 보여 주면서 알아주길 바라고, 그걸 못 알아주면 눈이 낮거나 무식하다고 매도하는 비이성적인 족속들이랄까.

'머리 위에 희귀 동물을 얹어 놓는 건 그래도 좀 새롭네. 재력과 지배력을 자랑하는 방식인가?'

더 비싸고 희귀한 동물일수록 가문의 재력을 과시할 수 있고 머리에 얹음으로써 동물조차 지배하는 카리스마를 증명하다니.

'확실히 세련되고 품위 있는 방식이야. 제국에서 시작된 건가 보군. 그나저나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곳의 귀족들은 자제부터 하인까지 전부 다 알고 있던 그가 처음 보는 얼굴에 갸웃거리면서도 기계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진리를 추구하는 마탑, 레임-프론트 홀드 지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면서도 속으로 귀족 도련님이 방문한 목적을 추측했다.

'음… 다른 곳이면 무조건 최음제였을 텐데, 여긴 남자밖에 없으니… 수면제? 상급 치료 포션? 아, 당연히 희귀 동물을 구하려고 왔으려나?'

생각을 마친 그가 자연스럽게 적당한 마도구를 꺼내려던 찰나, 귓가에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아! 마탑 레임-프론트홀드 지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 아? 어?"

척, 척, 척.

종소리에 기계적으로 인사를 건네던 제레미가 어느새 1층을 가득 메운 기사단에 압도되어 숨을 헐떡였다.

'기사단?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 영지전이라도 벌어졌나? 아니야, 모너를 노리는 미친놈이 있을 리가.'

제레미의 두뇌가 승급 시험을 볼 때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심지어 검도 반쯤 뽑았잖아! 어떤 멍청이가 기사를 속이고 들킨 게 분명해!'

마법사가 기사를 속여 먹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정정하겠다. 마법사가 누구를 속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속는 놈이 잘못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반면 무식한 기사들은 다르다.

막내 기사한테 '수면 포션'을 '밤에 좋은 포션'이라고 속여 팔았다가 기사단 전체가 마탑에 쳐들어온 일화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속이되 걸리지 말라.'라는 격언을 만들 만큼.

"호, 혹시, 누구를 찾아오셨는지...."

일생에 용기를 다해 묻자, 귀족 도련님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할 말이 있어서."

평소였다면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귀족 놈 따위 사정도 듣지 않고 내쫓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문제를 풀고 해답을 찾아온 마법사의 감각이 이 문제에는 해답이 없다고 요란하게 아우성을 쳐 댔으니.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4급 마법사인 제레미는 이 감각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예, 예. 마, 말씀하시죠."

보통, 이런 감각이 들 때 마법사들은 말한다.

"아, 별건 아니고...."

꿀꺽.

"방 빼."

'좆 됐다'라고.

* * *

제레미는 순간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너무도 당당한 남자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예, 예 방을… 방… 방? 도련님, 죄송하지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다시 묻자, 귀족 도련님이 싱긋 웃으며 친절히 설명했다.

"내 땅에서, 꺼져."

스르릉! 콰득!

검을 뽑아 마탑의 바닥에 박아 넣으면서.

'히이이익! 검, 검이다!'

달칵, 달칵, 달칵.

'이 꼰대는 뭐 하는데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

불길한 감각을 느낀 순간부터 탑주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탑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친 영감이라면 분명히 실험에 실패해서 취해 있거나, 성공해서 취해 있으리라.

'제레미, 정신 차려. 오우거 앞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들 하잖아? 저놈은 미친놈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을 걸어 보자. 그래, 저 기… 기....'

기사와 대화를 시도하려던 제레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도련님을 바라봤다.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슬라임보다는 대화가 통할 거라 굳게 믿으면서.

'후, 후… 미친놈이라고 쫄 거 없어. 제레미, 넌 마탑의 마법사다! 당당하게 나가!'

숨을 힘껏 들이마신 그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이곳은 이 요새의 주인이자 북부를 지키는 수호자, 스벤 백작님께서 인정하신 정식 마탑입니다."

귀족들의 전두엽은 평상시에는 숙면을 취하다가도 고위 귀족의 이름을 들으면 번쩍 일어난다.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백작의 이름을 들으면 정신을 차릴 터.

'어때!'

제레미는 미친놈의 잠든 전두엽이 이성을 불러오길 기도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아, 백작이랑 만나서 허락받고 오는 길이야."

"예에?!"

"아, 허락이 아니라 통보인가?"

제레미는 당당하게 개소리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귀족에게 더 놀라야 할지, 자고 있다고 생각한 희귀 동물이 꼬리를 움직여 귀족의 머리를 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마법사답게 이 세계의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섰을 뿐.

이 세상에는 정도를 넘어서 미친놈들이 널려 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하필이면 선배들이 전부 휴가 나간 날....'

눈앞의 폭탄을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그가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단 저희 탑주님을 만나 보시죠."

제레미는 천 근 같은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오르며 마법의 시조(始祖)이자 종주(宗主)인 전설 속의 모든 드래곤과 용신(龍神)에게 기도했다.

제발. 기적과도 같은 마법이 있어, 오늘은 꼰대가 탑에 있기를.

93화

의지가 배반한 몸이란 이런 것일까.

제레미는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움직여 탑주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그와 동시에 부탑주 특유의 끈적한 마나가 느껴졌다.

'세상에, 용신(龍神)이여! 일 년에 하루도 없는 저 인간이 오늘 마탑에 있을 줄이야!'

제레미는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닥 말을 내뱉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 부탑주님이 여기 계셨군요! 도련님, 저분이 저희 부탑주님이십니다. 정확한 문의는 부탑주님과 하시고, 저는 이만 바쁜 일이 있어서 내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라며 다음에 또… 다음...."

그 모습에 작게 감탄한 이안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오.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저러는 건가? 똑똑한데? 혹시 누구 하나를 지원해 준다고 하면 저 마법사를 데려와야겠어. 눈치도 빠르고, 똑똑해 보이는 데다, 책임감도 있고.'

후에 어둠 속의 현자라 불릴, 모너의 전속 마법사가 결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탑주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정말 마법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뚱뚱한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이거, 이거,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군요. 안녕하십니까, 레임-프론트 홀드 지부의 부탑주 바릭이 모너의 작은 주인을 뵙습니다."

그는 탑의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퍽 신기한 능력이었지만 부탑주가 '기적'을 이뤄 내는 마법사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 스벤 백작만 하더라도 집무실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 테니.

"아, 내가 누군지 알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혹시 아래서 한 말도 들었나?"

"예, 들었습니다. 한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부탑주가 말을 늘렸지만, 그리 궁금하지 않아서 내 할 말만 전했다.

"그럼, 오늘 내로 탑을 비워 줬으면 좋겠는데."

부탑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했다.

"이 탑은 마탑의 소유물입니다. 어찌 그 권리를 소공작께서 논하십니까?"

바릭의 논리는 꽤 그럴듯했다.

모든 마탑은 마법사들의 모임인 '지혜의 별'과 대륙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마탑 본관'의 소유물이고, 누군가 마탑을 마음대로 움직이려 들면 마법사 전체나 다름없는 두 단체와 척을 지게 된다.

'척진다고 무력적인 보복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각종 스크롤과 포션을 비롯한 마도구를 구하지 못하게 되니 그 타격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적국에 더 많은 마도구를 푼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복수를 하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언제나 합리적으로 '갑'의 위치를 지켜 내는 마법사다운 방식이었다. 모든 마탑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전력이나 금전적인 손해 없이 원하는 걸 얻어 내고 있으니까.

이 세계의 마법사는 항상 '갑'인 만큼 갑질에 능숙하다.

'쯧, 그게 다 '을'한테 당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데.'

갑질이 통하기 위해선 상대가 '을'을 자처해야 한다.

물론,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고.

내가 곤란해한다고 생각했는지, 부탑주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탑은 마탑의 소유이나, 백작님과 소공작님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요."

"아, 미안하네. 잠깐 또라이의 전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느라."

역시 마법사한테는 배울 점이 많다.

나중에 트리미아한테도 알려 줘야지.

"그, 이 탑 말인데...."

다시 말하지만, 갑질이 통하기 위해선 을이 아쉬운 위치에 있어야 한다.

성벽에 마포(魔砲)라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든가, 스크롤이라도 잔뜩 있다든가, 쓸 만한 마도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든가, 하다못해 포션이라도 성직자가 필요 없을 만큼 넉넉하게 제공했다든가.

만약 저 중 하나라도 해당했다면, 마석 거래에서 손해를 좀 보더라도 마탑을 내버려 뒀을 것이다.

'하다못해 마포를 서너 문(門)만 달아 줬어도 아까워서 참았을 텐데.'

아쉽게도, 마법사는 도를 넘어서 욕심을 부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마탑이 모너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어."

마탑이 마탑이라기보다 날강도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그러니 탑을 마법으로 옮기든 벽돌을 뽑아 하나씩 옮기든 자네 마음대로 하게. 자네 말마따나 이 탑은 마탑의 것이니까 말이야."

잠깐 차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하네. 무슨 방법을 쓰든, 그저 내일까지만 이 땅을 비워 주게."

그러니까, 입장을 돌려 놓고 생각해 보면 아쉬운 건 저쪽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아니면 마석은 어디서 구할 건데?'

갑질하는 놈들한테 을질 하기.

이게 바로, 게임 속 무수한 귀족들과 왕족들을 상대하면서 얻어 낸 비장의 비기.

망나니술(術) 제1식(式) 을갑둔갑술(乙甲遁甲術)이다.

* * *

"…예?"

비기(祕技)에 당한 충격이 적지 않았는지 부탑주의 입에 거품이 맺혔다.

음, 어쩌면 감정에 호소해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는 걸 수도 있고.

역시 마법사를 상대할 땐 긴장을 풀 수가 없다니까.

"큼, 큼. 부탑주는 책상에서 글만 읽느라 대화가 익숙치 않은가? 간단한 말일세. 마법사와 마탑은 이 영지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니, 이 땅을 비워 주게."

"소공작님, 이 노인은 모너의 작은 주인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말이 길어진다는 건 보통 쫄린다는 뜻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부드럽게 말해서 이해를 못 했던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탑주가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히 말해 줬다.

"아, 됐고. 이 탑 가지고 꺼지라고."

당당한 '갑'은 힘들게 씨불일 필요가 없다.

"아니, 타, 탑을 어떻게...."

설득될 필요도, 논리나 이성으로 설득할 필요도 없다. 그저 묵묵히 원하는 바를 요구할 뿐.

"여기. 내 땅. 꺼져."

그럼 상대가 알아서 미끼를 물기 마련이다.

* * *

오늘은 더없이 기분 좋은 날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본 탑의 관리자들이 오지에서 분골쇄신(粉骨碎身)하고 있는 자신의 노력을 알아보고 '탑주'의 자리를 제안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래서였다.

하루도 있기 싫은 이 지긋지긋한 마탑에 찾아온 건.

사사건건 마법으로 자신을 깔보던 탑주에게 자랑이나 할 생각에 왔을 뿐인데.

"허어어억. 컥, 컥."

바릭은 너무 화가 나면 숨이 멈춘다는 걸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여기. 이 차라도 마시게."

모너의 망나니가 준 찻잔을 들어 올리자, 텅 빈 찻잔이 보였다.

'이… 이 잔악무도한 망나니가!'

망나니라는 소문은 과소평가였다.

저건 아무리 봐도 망나니가 아니라 악마였으니.

재빨리 물을 들이켠 뒤에야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아무리 소공작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뭐가 말인가? 아… 잔이 빈 줄은 정말 몰랐네. 자, 자, 여기...."

차를 다시 따르려는 소공작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마법과 지식의 보고이자 종주나 다름없는 마탑과 척을 지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빈 찻잔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 모습을 보니 들끓던 분노가 오히려 사그라들었다.

'그래, 마법이라면 몰라도 이런 거래라면 내가 탑주보다 나을 터. 차라리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다행이야. 건방진 놈이 제멋대로 씹어뱉는다고 그 말이 다 진실인 것도 아닐 테고.'

이곳은 프론트 홀드.

모너의 모든 병력이 몬스터를 막아 내기 위해 싸우는 전장이다.

아무리 모너의 피를 이은 망나니라고 할지라도, 이곳에서 경거망동할 수는 없을 터.

'백작이 놈에게 시킨 게 분명해. 과연, 아무리 기사라도 마스터는 다르다는 건가? 평정심을 흔들기 위해 이런 놈을 보낼 정도의 심계(深計)라니....'

생각을 정리한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공작님, 장난은 이쯤 하시지요."

"음?"

"저희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는 건, 잘 이해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책상 위에서 글만 읽는다고 한들, 귀를 닫지 않은 이상 밖의 소식을 모를 리가 없지요."

그래, 전쟁이다. 전쟁에 대비해 마탑에 지원을 요청하려는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요 몇 주간 오크니, 돌연변이 오크니 하면서 난리가 아니었던가.

'흥, 네까짓 놈이 아무리 발악해 봤자, 우로보로스의 혀라고 칭송받는 이 바릭 님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이상, 이 설전(舌戰)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법.

"죄송하지만, 이곳은 작은 지부라 전쟁과 같이 큰일에 도움이 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저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공작가와 백작님의 은혜를 무시할 수도 없는 법."

바릭은 기적이라 불리는 6서클의 마법을 현현(顯現)하려는 마법사처럼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강경하게 나오는 무식한 놈들에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면서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을 찾기 위해.

그리도 불가능을 이뤄 낸 대마법사만큼이나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상급 포션 100개와 해독 포션 100개, 하급 화염 공격 마법이 담긴 스크롤 30개를 드리겠습니다. 거기다!"

바릭은 마법사의 재능이란 상대의 '욕망'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원하는 바를 마나와 마법으로 이뤄 내는 것. 그것이 마법이 가진 본질적인 힘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오르크'라는 괴물과 싸워야 하는 요새에 가장 필요한 건....'

"화염 저항 스크롤 100장! 그것도 하급, 중급, 상급별로 각각 백 장을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재고가 넘치는 화염 저항 스크롤로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면서 상대를 만족시키는 이 기술이야말로, 마법 아니겠는가!

"어떻습니까, 소공작님?!"

정해진 답을 기다리던 그 순간.

"…자네, 혹시 미쳤나?"

듣기 좋은 극찬이 귀를 간지럽혔다.

* * *

"걱정하지 마십시오. 화염 저항 스크롤이 한두 푼 하는 건 아니지만, 대륙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는 요새에 그걸 못 드리겠습니까! 제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이안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릭을 응시했다.

'쯧, 마법사랑 대화를 선택한 내 잘못이지.'

오크를 상대로 해독 포션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또 고작 포션 백 개를 받아 봐야 뭐하고.

그 악랄한 게임 속에서도 인당 포션 3개는 들려 줬는데, 100개면 십인대에서 하나씩 써야 할 판이었다.

애초에 스팀팩이 있으니 굳이 포션을 받을 필요도 없었고.

이 형편없는 제안의 화룡점정은 바로 '화염 저항' 스크롤.

나도 모르는 사이 오크가 차력을 배워 불을 뿜는 게 아닌 이상, 화염 방지 스크롤은 쓸데가 없다.

그야말로 '계륵'을 한가득 골라 담은 계륵뿐인 제안이었다.

상대를 어지간히 무시하지 않는다면 절대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적인 제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까드득.

이 새끼들이, 모너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는 모양이다.

'모너나 백작은 그럴 수 있지. 그 오랜 시간 호구처럼 당하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날 무시하는 건 못 참는다.

아니, 혹시라도 그럴까 봐 내가 시장에서 관리도 썰고, 성직자도 썰고, 마족도 썰고, 귀족도 썰고, 오크도 썰고, 심지어 군단장도 발가락 하나 정도는 썰었는데.

아직도 날 무시한다고?

"마법사는 전부 리치와 공통점이 있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가 보군."

정색한 얼굴로 으르렁거리자, 당황한 부탑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마법사는 모두 죽어서도 진리의 탐구를 열망하는...."

"아니─"

부탑주의 말을 자른 이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전부 목숨을 여벌로 가지고 다니나 봐."

94화

스르릉!

검집을 떠난 검이 마탑의 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네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모너는 마법사도, 마탑도 필요하지 않다고."

"소, 소공작님, 부디 진정하시고...."

바릭은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탑의 부탑주로서 이런 상황을 상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가 눈을 깜빡인 순간, 목에 닿아 있는 차디찬 검날과 그 검날을 따라 흐르는 옅은 핏방울이 보였다.

"히이이익!"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무시하는 건, 자네의 의지인가 아니면 마탑의 의지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절대 소공작님을 무시한 적이...."

발끈해 소리치면서도 바릭은 방어 마법이 담긴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는 걸 잊지 않았다.

'일단 실드, 실드부터!'

마침내, 퍼져 나간 마나 실드는 검에 닿는 순간 설탕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는 마법의 배신에 놀란 그가 다급히 다른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반지에 담긴 마법은 다중 실드를 구성해 적의 공격을 막는 '마나 배리어'.

기사의 오러도 막아 낼 수 있는 배리어라면, 이 상황에서도 몸을 지킬 수 있을 터.

지이이잉!

두꺼운 마나가 몸을 감싸는 게 눈에 보이자, 안도감과 동시에 분노가 솟구쳤다.

'감히 망나니가 내게 검을 들이밀다니!'

어떤 문제는 냉정하게 판단하기로 소문난 그였다면 5서클 마법인 배리어의 시전이 터무니없이 늦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목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냉기를 느꼈을 터.

그러나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빌어먹을 놈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어디 한번 당해 봐라!'

마나를 움직여 저주 술식을 구성하며 그가 소리쳤다.

"소공작!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 넘어갈 수는...!"

지지지직!

목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내리자, 바스러지고 있는 배리어가 보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배리어가!"

당황한 그의 귓가에, 소공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당장 술식을 멈추지 않으면, 내가 대신 멈춰 주마."

저주 마법을 구성하는 것보다 목이 떨어지는 게 더 빠를 거라는 걸 직감한 부탑주는 술식을 구성하던 마나를 거둬들이고 주저앉았다.

"대체 어떻게 배리어를...."

* * *

이성을 상실한 듯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바릭을 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없어도 그렇지,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마탑의 부탑주가 약했던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마도구만 여섯 개가 넘었고, 마법을 캐스팅하던 속도만 봐도 5급을 넘어선 숙련 마법사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저 상식과 경험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뿐.

검이 신체에 닿아 있는 상태에서 방어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게임 속 3급 전투 마법사도 알고 있던 기초적인 상식.

'쯧.'

의지를 상실한 부탑주의 모습에 검을 거둬들였다. 아무래도 마법사를 죽이는 건 득보다 실이 많으니까.

재수 없으면 본 탑에서 전투 마법사를 보내 물리력을 행사할지도 모르고.

"가, 감사합니다!"

"한 번만 더 거슬리면 죽는 게 나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주지."

"아닙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검을 거둬들이자 부탑주가 울기 직전의 감격한 얼굴로 연신 감사를 표했다.

"이제야 대화가 좀 통하는군."

"저… 그럼 혹시 화염 저항 스크롤을 각각 2백 장씩 준비하면...."

....

근데 이 새끼가?

* * *

원래 계획은 마법사들을 쫓아내고 이 탑을 '약초학 길드'로 쓸 생각이었다.

다른 게이머들은 잘 쓰지 않지만 '약초학 길드'야말로 골드 투입 대비 효과가 가장 좋은 건물 중 하나고, 후반으로 갈수록 빛을 발하는 테크니까.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반면,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부탁하는 부탑주를 보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답이 없다지만 한 번쯤은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쯧, 마음이 여린 게 죄지, 죄야.'

- …인간?

방금 전까지 칼 뽑고 설치지 않았느냐며 칼루아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가볍게 무시한 뒤 자리에 편히 앉아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앉아 보게."

"예, 예."

부탑주가 자리에 앉은 뒤, 그를 보며 세상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쉽게도 이건 내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야.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지."

- 인간! 아까 백작은 절대 그러지 말라고...!

내일부턴 이 시끄러운 도마뱀을 우리에 가두든가 레이나한테 맡기든가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을 이었다.

"크흠! 자네도 알다시피, 오크가 요새를 노린다는 소식에 다들 신경이 날카롭네."

날 힐끔 본 바릭이 비굴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예, 누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요새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침도 안 바르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오다니. '마법사는 클래스가 다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건가.

"흠, 흠. 아무튼, 그런 와중에 회의에서 마탑에 대한 말이 나왔네."

바릭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대비하는 영지라면 어디든 마탑의 지원을 원할 테니까.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건 프론트 홀드의 태도였다. 저 말이 맞다면 지원을 받으러 나와서 부탑주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는 뜻 아닌가.

"총관이 말하길 마탑은 모너가의 요청에 응한 적이 없다더군."

순간 바릭이 몸을 떨었다.

그 요청을 거절한 건 부탑주인 자신이었으니까.

"그, 그건...."

"아, 오해하지 말게. 나야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의 선택을 이해하고 있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이안이 싱긋 웃으며 차를 음미했다.

"아쉽게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네. 마법사들이 힘을 가졌으면서도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예, 예. 백번 맞는 말씀입니다. 마학이란 본디...."

"아, 내게 설명할 필요 없네. 어차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중요한 건 내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 이안이 다시 차를 홀짝인 뒤, 몸을 죽 내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주 난리야. 총관도, 백작도 눈에 불을 켜고 소리치고 있어."

"뭐… 뭐라고...."

"우리는 마탑을 가족처럼 여기고 그간 몬스터의 사체나 마석을 거저 줬는데, 막상 우리가 도움을 구할 땐 아무것도 돕지 않는다면서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호구 당했을 뿐이지만, 무슨 일이든 포장하기 나름이다.

"그러더니 대뜸 마법사고 마탑이고 다 필요 없다고 난리지 뭔가?"

"세, 세상에...."

나는 마법사를 이해한다고 밑밥을 깔아 놓은 만큼, 바릭은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주억거렸다.

"결국 회의 결과가 그렇게 나왔네. 마탑이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필요할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동맹도 아니라면, 차라리 없는 게 더 낫다고."

"이런...."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버릭이 문뜩 물었다.

"그럼 설마 프론트 홀드가 마탑과 거래를 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뭐, 우리야 마탑에 팔든 보따리상한테 팔든 차이가 없으니까 말일세."

물론 거짓말이다.

백 개 단위의 고블린 가죽이나, 오크 창자를 사려는 상인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프론트 홀드가 마탑의 손에 꼽는 공급자 중 하나라는 건, 다시 말하면 마탑이 프론트 홀드의 손에 꼽는 소비자 중 하나라는 뜻이다.

마탑이 프론트 홀드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도 더 아쉬운 쪽이 가난한 프론트 홀드였기 때문이고.

"여하튼 안타깝게 됬네. 어쩌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부탑주가 다급히 몸을 날려 막았다.

"소공작님, 소공작님께서 한 번만 나서 주신다면...."

울듯 말하는 부탑주의 간절한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안이 탄식을 흘렸다.

"물론 나야 진리 너머를 탐구하는 마법사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네. 하지만 단단히 화난 가신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나도 뭔가 할 말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예? 아, 예! 혹시 어떤...."

"그러니까...."

* * *

폭풍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바릭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한 채 멍하니 휴게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마석 가격을 다섯 배 가까이 올리고, 몬스터 사체와 부산물 가격도 대여섯 배 가까이 올렸다.

그래도 시작 가격보다는 저렴했지만 당장 본탑에 어마어마한 손실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다 무상으로 주기로 한 스크롤까지 포함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큰 손해였다.

그나마 설득하는 데 성공한 건 천문학적인 비용을 자랑하는 마포 대신 '제레미'라는 마법사를 대여한 것뿐.

"으흑, 흑. 흐윽...."

밀려오는 슬픔과 억울함에 울음이 터진 찰나.

"쯧, 쯧, 쯧… 멍청한 놈."

방의 한구석에서 탑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놀란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허공에서 나타난 탑주가 끌끌거리며 말했다.

"못난 놈, 왜 아주 그냥 마탑을 줘 버리지?"

"그게 무슨…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던 겁니까?!"

"당연히 처음부터 있었지. 애초에 내 방 아니냐?"

바릭은 탑주의 말에 흔들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바로잡았다.

"그, 그럼 놈이 검을 들이밀었을 땐...!"

"당연히 있었지. 용케 안 지렸구나. 그거 하나는 잘했다."

"이 미친 인간이!"

분노에 눈이 먼 바릭이 주문을 외우려던 찰나, 탑주가 손을 움직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그래.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멍청했지만 일단 수고했다. 이제 좀 쉬거라."

동시에 수마(睡魔)가 밀려와 허물어지듯 잠에 빠졌다.

* * *

레임-프론트 홀드의 탑주이자, 6서클 마법사 가리우스는 쓰러져 자고 있는 부탑주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쓸데라곤 입 털 때밖에 없는 놈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방금 그건 협상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소공작은 원하는 걸 모두 가져가고 마탑은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했으니 그걸 어떻게 협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나섰어야 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대신 나섰어도 다를 건 없었을 것 같았다.

놈은 처음부터 협상할 생각이 없었는데 누가 나선다고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끌끌, 말이 통할 것 같은 놈이었으면 마탑을 봉쇄하기 전에 말이라도 한마디 먼저 했겠지."

병사를 시켜 마탑을 봉쇄하고, 완전무장 한 기사단을 대동한 것만 봐도, 마탑을 치우겠다는 놈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다고 모너의 작은 주인한테 무력을 행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모너가의 두 마스터를 상대로도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놈은 무력으로 위협해도 꺾이지 않을 놈이었다.

무식하게 두꺼운 방패나 갑옷은 마법사의 싸움에 대비한 게 분명했으니.

"허, 호부 아래 견자는 없다더니,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구나."

끌끌거리던 탑주는 다시 한번 모너의 요구를 되짚었다.

"다른 건 다 아깝지 않은데, 제레미 그놈은 아깝구나. 멍청한 놈 같으니. 제 자질이 미천해, 재능 있는 마법사가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에잉, 쯧."

괜히 부탑주를 한번 걷어찬 그가 걸음을 옮겼다.

모너가 더 이상 마탑을 두고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만큼, 본 탑도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쩌면 책상을 떠나는 헛똑똑이들이 몇 명은 더 늘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가리우스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95화

- 인간! 인간!

마탑을 본 순간부터 신난 칼루아는 쉬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 너는 모르겠지만, 아까 그 뚱뚱한 인간이 쓰려고 했던 건 저주였다! 몸을 아주 피곤하게 만드는 마법이지!

- 아, 걱정하지 말아라! 만약에 그 뚱뚱한 인간이 마법을 썼으면 내가 막으려고 했으니까!

드래곤은 드래곤인지 마탑에 있던 마도구부터 시작해서 마탑에 있던 모든 것에 대해 재잘대는 통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마탑에서는 조용히 하겠다는 약속을 잘 지켜 준 터라 꾹 참았다.

- 그리고 아까 받은 반지는 불량품이다! 마법이 반만 담겼으니까!

의외로 중요한 정보를 전해 주기도 했고.

'반지?'

- 뚱뚱한 인간한테 뺏은 파란색 반지!

뺏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어디까지나 정당한 거래를 끝내고, 감격한 부탑주가 감사하다며 선물로 준 걸 받았을 뿐이다.

'이따 방에 가서 봐 줄 수 있어?'

- 당연하지! 난 위대한 드래곤이니까!

갑자기 더 신난 칼루아가 세 배쯤 더 빠른 속도로 꼬리를 움직이며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미친놈밖에 없는 곳이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저기...."

"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귀한 전리품이 보였다.

"아, 전리품… 아니, 제레미."

"방금 절 전리품이라고...."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전리품이 축 처져서 웅얼거렸다.

"그… 혹시 제가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시면...."

"뭐라고?"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에 이해하지 못해 되묻자, 사색이 된 그가 두 손을 휘저으며 급히 덧붙였다.

"아니, 다른 뜻이 있는 건 절대, 절대 아닙니다. 제가 워낙 별 볼 일 없고 부족한 게 많은 마법사라… 에… 또, 가끔 마법사가 엄청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고용주분들도 있으시고...."

두서없는 말이 한참이나 이어졌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짧게 말해서 전투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거 아니야."

"아니, 못 한다는 건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전장에서 마법을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 달라는...."

제레미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마법의 일면만 보고 마법사를 불태우고 파괴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는 전투 마법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는 것.

'현명한 선택이지. 만약 모든 마법사가 전투 마법을 익혔다면 이 땅의 권력자들은 어떻게든 마법사를 써먹으려고 들었을 테니.'

그래서 게임에서도 마법사는 인기가 없었다.

성벽 위에서만 움직여도 스태미나가 부족했고, 비싼 돈 주고 고용한 마법사도 톡 치면 죽기 십상이었으니까.

'그런 놈들을 어떻게든 굴리고 지켜서 마법을 발동했는데 실패라도 뜨면....'

그 약골들을 24시간 밀착 경호하면서 며칠에 걸쳐 시전한 대마법이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절로 마법사에 대한 혐오가 생기기 마련이다.

"알아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물론 모든 문제에는 해결법이 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로. 그럼 내일부터는 나랑 같이 훈련하자고."

체력이 문제면 기사들이랑 같이 훈련을 시키면 그만이고 전장에서 집중하지 못하는 게 문제면 집중할 때까지 전장에 던져 놓으면 다 해결된다.

"예? 훈련이요? 소공작님? 무슨, 무슨 훈련입니까!"

길바닥에 멈춰서 애타게 나를 부르는 전리품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 훈련 말씀하시는 거죠? 맞죠?!"

지금이야 조금 힘들지 몰라도, 눈앞에서 도끼가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아, 훈련하길 잘했다.' 싶겠지, 뭐.

* * *

북부 귀족 모임, '시가 피는 신사들'에서는 한창 토론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지휘권도 다 가져가겠다는 건 공을 나누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보급품은 각 가문에서 보급하라니요. 너희가 먹을 건 알아서 가져오라는 말 아닙니까!"

토론이라기보단 성토에 가까웠지만.

"자, 자, 다들 조금만 진정을...."

주최자인 도트란 자작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지만, 들끓는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자작님!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내가 내 병사를 내어 주면서 굽신거리게 생겼습니다, 지금!"

"저는 저희 기사단장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지휘권 하나 가져오지 않고 말처럼 쓰겠다는데 그걸 보고도 뭐라 할 말이 없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습니다!"

성난 귀족들을 보면서 자작은 쓴웃음을 참지 못했다.

'결국 나보고 나서라는 거군.'

정말로 기분이 상했다면 지원을 안 하면 그만이다.

저들이 여기까지 와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건 대표로 좀 움직여서 뭐라고 말 좀 해 보라는 뜻일 터.

평소였다면 자작도 못 이긴 척 나서서 입을 열었을 것이다.

거기에 여기 있는 다른 귀족들이 동조하면 그게 바로 여론이 되는 거고.

'근데 이번엔 모너가 너무 강경하단 말이야....'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괜히 먼저 나섰다가 공작가의 미움이라도 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란 말이지.'

무엇보다 왕가가 밀어줄 2왕자와 연관된 일 아닌가.

그런 큰일에서 괜히 욕심을 부리다간 가진 것도 잃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이놈들이 날 무시할 것 같고.'

옵솔 백작이 죽고 리트와 머천 백작가가 칩거를 시작한 뒤로 정처 없이 흔들리던 북부 귀족가가 자작 아래서 뭉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자작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북부 귀족가는 다시 산산조각이 날 터.

모두를 진정시킬 만한 방법을 찾던 도중, 디에즈 남작이 눈에 띄었다.

수도에서 일하는 남작이라면 북부 토박이인 자작보다 더 많은 정보를 들어 봤을 터.

의견을 구하는 척 공을 넘기기에는 최고의 상대였다.

"큼, 큼. 디에즈, 자네 생각은 어떤가?"

"…흥미로운 일입니다."

"흥미롭다?"

그 말에 몇몇 귀족이 다시 역정을 냈다.

대놓고 모욕을 당한 거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서 어디가 흥미롭단 말인가.

"아, 다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 * *

모너의 서신을 받은 순간 디에즈는 전율을 느꼈다.

'과연 모너인가!'

주는 병력도 마다하겠다는 태도는 승리를 확신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짧고 간결한 서신을 수십 번도 더 읽은 디에즈는 확신했다.

"여러분, 왕가가 작정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먼저 저는, 기사 여섯과 삼백의 병사를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대부분의 귀족이 작게 놀랐다.

기사 여섯과 삼백의 병사라면 남작이 가진 병력의 절반이 넘었으니.

"그런데도 여러분과 같은 편지를 받았지요. 모너는 마치 기사 여섯이나 병사 삼백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요."

"허어...."

디에즈는 천천히 북부의 귀족들 면면을 훑었다.

"처음에는 엄청난 자신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없는 전투로 단련된 병력과 두 마스터가 있는 모너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고.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하더군요. 그리 자신이 있다면 병력을 안 받으면 그만인데, 안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받겠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라니."

정보부에서 일한 경험을 총동원해 추론한 결론은 하나였다.

"모너는 이미 왕가의 지원을 받아들인 게 분명합니다. 그것도 최소 근위기사단급의 지원을요."

그 말에 놀란 귀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정말이오?!"

"제가 내린 결론은 그렇습니다. 이미 외부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으니, 저희의 도움을 냉정히 거절하지는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지휘권은...."

"근위기사단이 있는데 저희끼리 지휘권을 나눈들 아무 소용 없겠지요. 모너도 저희에게 지휘권을 나눠 주느니 근위기사단이 외부 병력을 통솔하길 원할 테고요."

"허어...."

"과연...."

귀족들은 심각한 얼굴로 남작의 말을 경청했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기사단이라면 충분히 지원 병력에 대한 총지휘권을 가질 만했으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적었겠습니까?"

의심을 떨치지 못한 누군가 물었지만, 그건 디에즈도 생각했던 바였다.

"그야 간단합니다. 근위기사단이 움직인다는 건 후계를 확실히 하겠다는 뜻. 기사단이 움직이기 전에는 비밀로 하려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런 이유가...."

"그럼, 경이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만약 근위기사단이 출정한다면 우리가 도와 봐야 티도 안 날 것 같은데...."

뚱뚱한 귀족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정리한 디에즈가 말했다.

"대신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저는 열둘의 기사와 오백의 병사를 지원할까 합니다."

"허어...!"

"전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말이오?"

"전장에서 몇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위험한 판단인 것 같소만...."

디에즈가 아무 생각도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정보부의 중간 관리자로서 허락된 모든 정보를 열람하고 심지어 허락되지 않은 정보까지 뒤적거렸으니.

'이미 세 백작가는 전 병력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은 힘을 잃었다지만, 북부를 주름잡던 세 가문이 동시에 전 병력을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건 확실해.'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당장 칩거하고 있는 세 백작가의 동향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건 왕가의 정보부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히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

대신 몇 마디 말을 더한 뒤 자리에 앉아 시가를 피웠다.

* * *

다음 날 저녁.

서류와 씨름하고 있던 스벤에게 총관이 찾아왔다.

"백작님, 북부 귀족가에서 보낸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아, 빠르기도 하지."

이리도 빨리 답신을 보낸 걸 보면 귀족들이 어지간히도 화난 모양이었다.

당연히 서신 중 대부분은 짜증이나 욕설로 가득 차 있을 테고.

힐끗 서신을 훑어본 백작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한번 읽어 보고 버리게."

굳이 아직도 지원 의사가 있는 가문을 찾아보라고도 하지 않았다.

소공작의 판단은 그럴듯했지만, 귀족의 명예와 자긍심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설령 혈맹이 공격받는 상황에서도 그런 요구를 받으면 침부터 뱉을 터.

"아, 그리고 소공작한테는 말하지 말게. 그놈 말마따나 어차피 있어도 독이 될 놈들이야."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서류를 처리하려는데, 총관이 물어왔다.

"그럼, 아직도 지원하겠다는 서신에는 어떻게 답변하는 게 좋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백작이 고개를 들어 총관을 바라봤다.

"그런 서신이 있나?"

"예."

"미친놈이군. 거절해. 다른 의도가 있을 테니까. 오크랑 뒹굴었거나 오크한테 뒷돈이라도 받았겠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지만, 요구를 전부 들어주겠다는 놈들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지원병과 물자를 받은 뒤 지원병만 돌려보내면 어쩔 생각이란 말인가?

요새의 병력을 아끼기 위해 지원병을 최전선에 배치하는 건 또 어떻게 막고?

모르긴 몰라도 첩자보다도 위험한 놈이 분명했다. 아니면 병력이 썩어 나거나.

"놈이 아니라 놈'들'입니다."

"뭐?"

"북부 귀족 전체가 지원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가문에서 아예 지원 규모를 늘리고 싶다고 알려 왔습니다."

백작은 총관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한참이나 그를 바라봤다.

"…왜?"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무 말 없이 펜을 굴리며 생각을 거듭하던 백작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요새에 흑마법에 대한 책이 있던가?"

아무래도 소공작이 흑마법을 배웠다는 소문이....

"백작님, 소공작은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나도 알고 있네."

총관이 작게 끄덕이는 백작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설령 흑마법사라고 하더라도, 만나지도 않은 존재를 세뇌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백작은 속으로 북부 귀족이 한날 한 시에 미치는 것도 불가능하기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했으나,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저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을 뿐, 소공작을 정말로 의심한 건 아니었으니까.

대신 어이없다는 듯 작게 탄식할 뿐이었다.

"정말 천재는, 천재인 모양이야."

도대체 이걸 어떻게 예상하고 계획했단 말인가.

96화

똑똑똑.

잠결에 낯선 노크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탑에서 노크라니.'

그럴 리가 없다며 다시 잠을 청하려던 찰나, 천천히 지난밤의 악몽이 떠올랐다.

'드레이크를 머리에 얹은 소공작이라니. 개꿈이네.'

개꿈인 주제에 얼마나 현실적인지, 그 어린 소공작 앞에서 벌벌 떨던 부탑주가 몇 달만 고생하라며 자신을 넘겼을 땐, 가슴이 철렁했다.

꿈속에서 백작성의 침대 안에 숨어 눈물 젖은 사직서를 썼을 정도로.

"크크크, 마탑에서 떠나면 마법을 포기하는 건데, 내가 마법을 포기할 리가 없지."

밀려오는 안도감에 피식 웃은 찰나.

똑, 똑, 똑.

낯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헉!"

번쩍 뜬 눈에 보인 건, 노크 소리만큼이나 낯선 방이었다.

시험용 플라스크도, 어지럽게 놓인 마법서도, 마법 용액 특유의 비릿한 냄새도 나지 않는 정갈한 방은 마치....

- 오늘부터 이곳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제레미 님.

어젯밤 자신을 안내한 하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아, 안 돼!"

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자기 전 손에 꽉 쥐고 있던 눅눅한 사직서가 바닥에 떨어지고.

드르륵.

처음 보는 붉은 머리의 여인이 싱긋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아, 이제 일어나셨나요? 도련님이 부르시니 서둘러서 준비하셔야 해요."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부터 새벽 훈련에 함께하시기로 하셨잖아요."

제레미의 악몽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세계에서 날 놀라게 할 만한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떻게든 날 엿 먹이려는 세계의 의지가 계속 날 방해하는 탓에 여러 번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만큼 진심으로 놀란 적은 없었다.

"허억… 허억… 허억...."

"음...."

"소, 소공작님, 잠시만, 잠시만 휴식을...."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애원하는 제레미를 보고 있으니 의문이 절로 들었다.

"…너 방금 도착했잖아."

성에서 훈련장까지 고작 15분을 걸어왔을 뿐인데, 어떻게 저 상태가 될 수 있지?

혹시나 오는 길에 다른 훈련이라도 한 건가 싶어 레이나를 바라보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헉, 소공작, 님. 흐읍...."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제레미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어제 심하게 무리한 탓에 저녁 내내 잠을 못 잤고, 오늘도 이렇게 무리하면 골병이 들 거라고.

"…어제?"

어제는 마탑에서 성까지 약 2시간을 이동했다.

그것도 걸어서 이동한 시간은 15분 정도뿐, 할 일을 마친 뒤에는 바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마법사가 마탑에서 나오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비오듯 땀을 흘리며 하소연을 시작한 제레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욱, 후욱…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마법사는 병사나 기사만큼 체력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 15분 걷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면 병사가 아니라 환자랑 비교를 해야 할 것 같다만.

"무릎뼈가 빠진 스켈레톤도 너보다는 잘 걸을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나온 볼멘소리를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제레미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소공작님.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

진심으로 이 세계에 날 놀라게 할 일들이 많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던 나조차 제레미를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레이나의 표정에 작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 제레미가 당당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일 새벽 훈련 때 뵙겠습니다."

정말 이 세상엔 놀라운 일이 많다.

* * *

반쯤 울며 훈련장을 걷고, 아니 기고 있는 제레미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봐도 저걸 써먹기는 그른 것 같은데...."

잘 키워서 앞으로의 전투에 써먹어 볼까 했더니, 바닥을 기는 슬라임에서 이족 보행을 배우는 데만 한 달은 넘게 걸릴 것 같다.

전리품인 줄 알았는데 불량품이었다니.

"하… 불쌍하다 진짜."

어쩌면 이렇게 뽑기 운도 없을까 하며 한탄하자 오늘은 여기가 좋겠다며 아침부터 내 어깨에 올라와 있던 칼루아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동조했다.

- 인간, 불쌍하다!

"크흡, 너도 내가 불쌍해 보여?"

날지도 못하는 드래곤한테 위안받자 가슴이 뭉클했다.

가정교육은 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

- …네가 왜 불쌍하냐? 울고 있는 건 마법산데?

이 은혜도 모르는 도마뱀 새끼.

"너 이제 걸을 수 있잖아, 내려가."

칼루아를 대충 바닥에 던지려던 찰나.

"뭐지?"

어딘가 이질적인 기운이 훈련장에 들어서,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고...?'

잘못 느낀 건가 싶어 눈을 감고 마나를 흩뿌리니, 작고 희미하면서 동시에 무거운 이질적인 마나가 느껴졌다.

'정체를 숨기려고 마나를 가린 건가?'

기운의 주인이 누구든 정체를 숨긴 인물이 훈련장까지 걸어 들어왔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이 훈련장을 쓰는 사람들은 전부 내 사람들이었으니까.

'일단 모르는 척 접근해서 기습을....'

그때 내려가기 싫다고 발을 동동 구르던 칼루아가 입구를 보고 소리쳤다.

- 어!? 그때 그 늙은 마법사다!

'늙은 마법사?'

- 응! 저 마법사는 매일 숨어 있다! 그때도 숨어 있었다!

가리우스는 소공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 느껴진 살벌한 살의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어… 조금만 당황했어도 들켰겠군.'

저 젊은 공작가의 도련님이 자신을 발견한 건 아닐 터였다.

몸을 숨기기 위해 몸에 두른 마법만 해도 일곱 개였고, 거기다 마나를 압축시켜 숨겨 주는 아티팩트까지 준비했으니.

'마나에 대한 기감이 엄청나군. 마법사가 되고자 했으면 6개의 고리는 무난히 이뤘겠어.'

가리우스 자신이 6서클 마법사인 만큼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마나 친화력이 낮아 마나가 부족한 것 같지만 저 정도의 기감이라면 적은 마나로도 능히 고위 마법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

'그나저나, 저 몬스터는....'

수많은 몬스터를 해부하고 연구한 그조차 처음 보는 희귀한 몬스터에 이곳을 찾은 이유도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이번과 드레이크의 잡종인가? 아니, 머리를 보면 바실리스크와 드레이크의 잡종인 것 같기도 한데.'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저 몬스터가 호흡할 때마다 마나가 요동치고 있다는 것.

'꼭 '마나의 축복'을 보는 것 같군. 하이 엘프나 가질 만한 축복이 고작 미물에 깃들다니.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겠어.'

미물의 검은색 눈을 마주한 순간, 가리우스는 저 미물이 수십 년간 자신을 옭아맨 벽을 넘어설 유일한 기회라고 확신이 들었다.

아니, 저 미물을 잡아다 연구할 수만 있다면 그가 마주한 벽뿐만이 아니라 마법계 전체에 격동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소공작에게는 아무 사감(私感) 없지만, 어쩔 수 없겠어. 어떤 방법을 써야....'

그가 머릿속으로 훈련장의 모두를 무력화시킬 만한 마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오오오! 소공작님, 저 죽습니다아아아!"

애제자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캐스팅을 준비하던 가리우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정신을 차린 가리우스가 즉시 정신 방벽을 세우고 저주 해제 마법과 저항계 마법을 연달아 시전했다.

'눈을 마주친 적에게 혼돈을 주는 몬스터인가!'

6개의 고리를 이룬 자신이 반응조차 못 한 저주가 있다는 건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위의 정신계 공격이 아니었다면, 마스터인 백작과 백에 달하는 기사가 있는 프론트 홀드에서 마법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터.

놀라운 건, 정신 방벽을 세운 지금조차 '어쩌면....' 하는 생각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고작 몬스터 한 마리로 무너질 벽이었다면 수십 년간 넘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리우스야, 가리우스야. 룬어 한 자 모르는 인간들이 널 대마법사라고 추켜세우니, 네가 정말 대단한 줄 알았느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래, 고작 미물보다도 못한 정신머리로 무슨 벽을 넘고, 무슨 성취를 이룰까.'

그 오랜 시간 자신을 막아섰던 건 벽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한 제레미에게 윽박지르는 소공작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마법사는 그럴 수 없다니, 마법사는 전부 다리가 없나?! 마법사도 걷고 뛸 수 있다!"

"안 해서 그래, 안 해서! 못 걷겠으면 기어!"

"숨이 차서 마법을 못 쓰겠다고? 넌 숨이 차면 못 걷… 넌 숨이 안 차도 제대로 못 걷는군. 빌어먹을 마법사 같으니라고. 여하튼! 숨이 찬다고 못 쓰면 어떻게 능력이야!"

"힘들어서 마법을 못 쓰겠다고? 당장 뒤지기 직전에도 그런 말이 나올까?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제발 시전되길 빌지 않을까?"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매서운 말이었지만, 듣고 있자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소공작의 말이 맞다. 마법사라 하여 걷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고, 달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조금 숨이 차고 조금 불편하다 하여 쓰지 못하는 마법이 어찌 내 것이겠나.'

가리우스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훈련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변종이라 불리는 그도 결국은 마법사였다.

그래서 당연히 마법사는 다르다고 생각해 왔다.

여인의 힘이 사내의 힘과 다르고.

성인의 지혜가 갓난아이의 지혜와 다르듯.

마법사와 마법사가 아닌 인간은 다르다고.

'아니야. 마법사가 다른 건 그 번뜩이는 오성(五性)이지 신체 능력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니다.'

가리우스가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감자, 희미한 7번째 고리가 심장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 * *

이안은 폭풍 치듯 휘몰아치는 마나를 바라보며 무심히 생각했다.

'대체 저 양반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 신기하다! 신기하다! 마나가 기뻐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숨만 쉬다가 레벨업을 할 수 있지?'

손에 들고 있던 마나석을 내팽개치듯 던지자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

누구는 몸의 여섯 배가 넘는 무게로 단련해도 성장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데, 마법사는 숨만 쉬어도 기연이 알아서 찾아온다.

아니, 깨달음을 얻을 거면 마법사답게 틀어박혀서 조용히 얻던가.

남의 훈련장에서 매너 없게 뭐 하는 짓이람?

'쯧. 아니꼬워도 착한 내가 참아야지.'

깨달음을 얻었으니만큼 양심이 있으면 요새에 스크롤 하나라도 던져 줄 터.

마나의 양만 봐서는 7성에 발가락 하나쯤은 담근 것 같았다.

모너에 있는 두 마스터가 6성이고 레임 왕국에 6성을 넘어선 강자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저 노인이 최강자의 반열에 든 셈이다.

제레미를 보자니 6성이든 6성의 극이든 영 쓸데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냥 보고 있으니까 배가 너무 아픈데.'

솟구치는 짜증에 고개를 돌려 구석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제레미에게 소리쳤다.

"제레미! 쉬지 말고 기라고! 못 움직이겠으면 약 먹어! 굴러! 기어! 걸어! 뛰어!"

갑작스러운 외침에 제레미가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첫날부터 훈련을 빠지려던 놈이 입을 열어?!"

"으악! 구, 구르겠습니다!"

"필요 없어! 기어!"

97화

깨달음을 정리한 가리우스가 눈을 뜬 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사이 제레미는 다섯 병의 스팀팩을 마셨고, 품에 숨겨 놓은 사직서를 꺼내 들었다가 이안에게 뺏겼으며, 다시 울면서 걷고 기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기절한 참이었다.

기절하는 순간 유언을 뱉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 할아버지가 마중을....'이라고 속삭였지만, 이안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기사들과의 훈련을 시작했다.

"하앗! 하앗! 하아아앗!"

기사단과 이안의 훈련을 한참이나 구경하던 가리우스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제레미를 잠깐 바라본 뒤 말없이 밖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선명한 적의와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백작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허허허허...! 이걸 도대체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연신 웃음만 나왔지만.

* * *

이안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훈련장의 문을 노려봤다.

빌어먹을 마법사들.

양심 없는 마법사들!

"주군, 무슨 문제라도...?"

"어떻게 사람이 고마움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갑작스러운 이안의 외침에 기사들이 몸을 떨었지만, 마법사가 훈련장에서 기연을 얻고도 아무 말 없이 훈련장을 나섰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귀한 깨달음을 얻었으면 금화 하나, 포션 하나, 스크롤 한 장, 마포 한 문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물론, 마법사가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다.

'아니지! 들어오자마자 들켰는데 내가 모른 척해 준 거 아냐! 마나로 폭풍을 일으켰는데도 모른 척해 줬는데!'

심지어 마법사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칼루아가 탑주의 집무실에서 숨어 있는 걸 봤다고 하는 걸 보면 탑주가 분명했으니.

그게 아니더라도, 프론트 홀드에 6서클 마법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깨달음을 방해하지 않은 것도 '내가 굳이 모른 척할 테니까 떡이라도 하나 더 주십쇼.' 하는 마음이 더 컸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마땅히 감사를 표할 줄 알아야지! 배울 만큼 배웠다는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일 수가...!"

억울한 이안의 외침이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 * *

버질은 처음 느껴 보는 주군의 살벌한 분노에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아! 그렇게 많은 걸 배웠으면서 감사를 잊다니!'

그의 주군은 병사에게도, 기사에게도, 심지어 마법사에게도 평등하게 가르침을 내렸다.

그건 5급 기사인 버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고 해결법을 제시하는 주군의 말은 금과옥조나 다름없었으니.

모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주군은 남들보다 수십 배가 넘는 노력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 잘못이 진정으로 크구나!'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주군이 물질적인 보답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감사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단 말인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버질이 주군 앞에 깊게 숙였다.

* * *

"죄송합니다, 주군."

뜬금없는 버질의 사과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 뒤로 레이나와 기사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도련님… 정말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한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뭐야?'

…훈련하기 싫다고 반항하는 건가?

쯧,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마법사한테 물들다니. 이래서 질 나쁜 것들이랑 같이 놀면 안 된다.

"안 돼. 돌아가. 훈련 빼 줄 생각 없어."

냉정하게 몸을 돌렸음에도, 등 뒤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아, 오늘은 한 시간 빨리 끝내 줄 테니까 빨리 돌아가서 훈련해!"

술수를 부리는 놈들에게 으르렁거리며 소리치자, 이번에는 다들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하다고 난리였다.

심지어 레이나는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거의 통곡을 하는 터라 달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훈련이 그렇게 힘든가?'

흠… 전보다 훈련 강도가 올라가긴 했지만 따라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봐 각자의 한계에 맞춰서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칼루아, 혹시 아까 그 늙은 마법사가 마법 쓰고 갔나?'

- 아니?

칼루아는 아니라고 했지만,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기사들을 나태하게 만들어 제레미가 더 쉴 수 있도록 만들려는 탑주의 악독한 속셈이 분명했다.

* * *

정신없는 새벽 훈련이 끝나고 훈련장을 나서자, 총관이 백작이 기다리고 있다며 날 집무실로 안내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드레이크가 보이지 않는군요."

"아, 레이나가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면서 데려갔어."

깨끗하게 씻겨 오겠다며 데려갔는데, 사실 아직도 그게 어떻게 내게 보답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가만있던 도마뱀만 노난 거지.

요즘엔 무슨 일인지 레이나도 굉장히 바빠서 나도 얼굴 볼 시간이 별로 없다. 그저 옆에만 조금 더 있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습니까? 혹시 먹이나 필요한 게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총관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센트럴 홀드의 하녀들도 종종 저런 표정을 했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아! 몰래 고양이들 밥 줄 때!'

…설마 그 도마뱀이 마음에 든 건가?

"병사들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은데 먹이는 무슨. 남는 거 있으면 병사들이나 더 먹여. 그놈은 좀 굶어도 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떠보니, 사색이 된 총관이 드레이크같이 귀한 몬스터가 야위면 자기가 욕먹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매사에 진지하고 일만 하는 양반이라 취미가 일인 줄 알았더니, 총관은 파충류가 취향인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뜩이나 버릇없는 도마뱀한테 귀한 먹이를 제공할 생각은 없었다.

제레미보다도 걷는 걸 싫어하는 놈한테 먹이는 무슨.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는 총관을 어떻게 포기하게 할까 하다가 입을 열었다.

"드레이크는 아무래도, 말을 좋아하지."

총관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먹고 죽으래도 없는 말을 드레이크 먹이로 줄 수는 없으니까.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총관이라면 불쌍한 당나귀라도 구해다 바칠지 모르는 일이니까.

"입 또한 고급이라 그중에서도 제일 비싼 전마(戰馬)를 제일 좋아한다고 하더군."

언제나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던 총관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총관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양이지만, 말이 어디 한두 푼인가. 제대로 훈련된 전마를 살 돈이면 병사 수백 명을 더 먹일 수 있는데.

총관이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걷던 와중,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숲 서북쪽에서 켄타우로스가 발견됐다던데...."

"미친! 제정신이야?!"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는 놀랍게도 말이 통하는 종족 중의 하나다.

잘하면 동맹을 맺을 수도 있는 종족을 도마뱀한테 먹이로 주려고 사냥하겠다고?

심지어 말도 하는 말을?

"전마를 좋아하면 반인반마는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내가 이 요새의 광기를 얕본 모양이다.

기사와 병사 틈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총관은 마법사만큼이나 정신 상태가 위험한 인간이었다.

"켄타우로스는 절대 안 돼. 그리고 그놈은 돌연변이라 오크를 제일 좋아해. 말이 아니라, 오크. 그린 스킨. 알지?"

"호오, 다행이군요. 마침 오크 사체는 넘치도록 있으니 최선을 다해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총관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그 드레이크가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말하면서 총관이 발 도장이 여러 개 찍힌 코트의 끝자락을 보여 줬다.

"이 자식이...."

저건 칼루아 식 영역 표시다.

아니, 영역 표시라기보단 호감도 표시에 더 가깝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앙증맞은 발로 도장을 꽝꽝 찍어 대니까.

"후… 내가 교육에 실패해서 그래. 마나로 남긴 족적(足跡)이라 아무리 닦아도 안 지워지니까 그냥 내버려 둬. 정보기 싫으면 나한테 가져오고."

장담하건대, 저걸 지우는 방법은 칼루아한테 가져가서 당장 지우지 않으면 밥을 굶기겠다고 협박하는 것뿐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온몸에 새겨진 수십 개의 발 도장을 지우려 별의별 짓을 해 본 만큼 확신할 수 있다.

"아, 아닙니다. 싫다는 건 아니고 혹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해서 여쭤봤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한테만 남기는 것 같아. 어린애들이 자기 장난감에 침 묻히는 것처럼."

그 말에 찰나였지만 얼음장 같던 총관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음… 켄타우로스가 아니면 페가수스나 유니콘이라도...."

미친놈과 오래 대화하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오랜 격언에 따라, 총관을 무시하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백작의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앙상한 노인이 보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딘가 익숙한 얼굴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아, 소공작이 드디어 왔군. 이쪽은...."

톡 치면 부러질 듯한 앙상한 몸, 딱 봐도 고집이 묻어나는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자로 잰 듯 곧은 자세까지.

게임에서 봤던 일러스트와는 조금 다르지만....

'…가리우스?'

"처음 뵙겠습니다, 소공작님. 편히 가리우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집무실에 앉아 있는 건.

A급 영웅이자 만능 서포터라 불리던 마법사, 가리우스였다.

* * *

게임 속 영웅을 마주한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그가 여기 있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가리우스가 이곳 마탑의 탑주였나.'

칼루아가 아니라도 가리우스가 마탑의 탑주라는 데 제레미의 오전 훈련을 걸 수 있다.

저렇게 무식한 마나를 가진 인간이 이곳에 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레벨 업했다고 아주 동네방네 자랑했으니, 염탐하러 온 것도 백작한테 들킨 모양인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내성에 무단으로 잠입해 기사단의 훈련장을 엿봤으니 누가 봐도 눈치를 봐야 하는 건 가리우스인데, 인상을 구기고 있는 건 백작이라니.

'…설마, 어제 계약을 무르러 온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마탑은 전투 마법사를 제외한 일반 마법사를 거의 파견하지 않으니까.

유적의 조사나 던전 연구도 아닌 몬스터와의 전쟁을 대비해 요새에 일반 마법사를 파견 보낸 게 영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리우스라도 사기 매물을 뺏길 수는 없지. 그건 내 껀데.'

순간 아랫배에 힘이 빡 하고 들어갔다.

탑주가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걸 호락호락하게 넘겨줄 생각은 절대 없었다.

남의 훈련을 훔쳐보다가 깨달음을 얻은 주제에 보답도 하지 않은 탑주에게는 더더욱.

심지어 우리 집 도마뱀도 자기 꺼에는 꽝꽝 도장을 찍어 놓는데, 주인인 내가 내 걸 뺏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98화

"…이안?"

백작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능글맞게 웃고 있던 가리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가리우스 경. 드디어 보게 된 귀한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봤네."

게임 속 영웅은 별개 아니다.

그저 '고용 가능한 캐릭터'일 뿐이지.

즉, 게임 속 영웅이 무조건 모너의 편도 아니고, 영웅이라고 무조건 선하거나 영웅심에 고취된 멍청이들도 아니다.

오히려 영웅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냉정했다.

'게임 속에서 영웅이라고 불린다는 건, 어쨌든 멸망하는 세계에서 남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뜻이니.'

결국, 상대가 영웅이라고 해서 굳이 숙이고 가거나 호감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고.

"그리 얼굴을 숨기길래 무슨 죽을병이라도 있나 했지. 멀쩡해 보여 다행이네."

백작과 탑주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굳어 갔다.

"소공작! 가리우스 경은 그리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다른 사람과 혼동했다고 생각했는지 백작이 기겁해서 소리치던 중, 가리우스가 끌끌 웃으며 물었다.

"이 노구가 드디어 죽을 날이 다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를 어디서 보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언뜻 정중해 보이는 물음이었지만, 내가 가리우스를 못 알아봤을 거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가리우스가 가진 마나의 양만 보고 탑주일 거라 추측한 것도 사실이고.

물론, 칼루아가 있었다면 내 추측이 맞다고 말해 줬겠지만, 굳이 아쉬워할 필요도 없었다.

가리우스의 로브 끝자락에 남아 있는 앙증맞은 발자국은 드래곤표 보증이나 다름없으니까.

'도대체 저기다 발자국은 언제 찍어 놓은 거지?'

어떻게 저 정도 강자에게 들키지 않고 발자국을 남긴 건지 정말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의자에 앉은 뒤, 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여유가 넘치던 마법사의 얼굴이 굳어 가는 걸 한껏 즐기면서.

"탑주."

* * *

가리우스는 떨리는 눈으로 소공작의 입을 바라봤다.

"어제도 보고, 오늘 새벽에도 보지 않았나? 심지어 백작까지 찾아왔다니, 이거 우연이라고 볼 수도 없겠어."

"허허...."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리우스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어제도 봤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걸 알고도 부탑주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는 것 아닌가.

거기다 오늘 새벽에도 봤다는 건 소공작이 자신의 마법과 아티팩트를 전부 꿰뚫어 봤다는 뜻일 테고.

그러나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그래서, 기연을 얻고도 은혜도 모르는 마법사가 날 왜 보고 싶어 했을까?"

소공작은 자신이 한 발자국 내디뎠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도 모르면, 내 눈에 달린 게 눈이 아니라 옹이구멍이겠지."

그 말에 놀란 가리우스가 백작을 바라보자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그게 그렇게 쉽게 느낄 수 있는 겁니까?

- 그냥, 이놈이 이상한 거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도 요란했다면 백작에게 향하기도 전에 기사단이 먼저 막아서지 않았겠는가.

"허허허… 소공작께서는 겸손하시군요."

가리우스는 소공작이 엄청난 재능을 가졌거나, 백작에게조차 실력을 숨기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6개의 고리를 가진 대마법사가 작정하고 몸을 숨겼는데도 그를 꿰뚫어 봤을 리가 없으니까.

물론 마탑에서 그를 발견한 것도, 그의 마법을 꿰뚫어 본 것도 전부 드래곤인 칼루아였지만.

"백작님께 인사드리기 전에 모너의 작은 주인께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이 노부가 어리석어 실례를 범했습니다."

가리우스가 일어서 진중하게 사과를 건네자, 이안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그래. 그래서 마탑의 탑주라는 것도 속이고 날 보고자 한 이유가 뭐지?"

순간 당황한 가리우스가 백작을 바라보자, 소공작이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에게 용무가 있는 게 아니면 날 보고 내게 말하게. 그게 아니라면 이 만남은 이쯤 하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말투에 한숨을 내쉰 가리우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거 곤란하게 됐군요…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가리우스는 어제저녁, 본 탑에 소공작과 있었던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만약 지금 모너를 돕지 않으면 모너가 영영 마법사를 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이에, 본 탑에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했고, 본 탑과 '지혜의 별'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 탑은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공작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게 되면 마법사에 대해 더 실망하게 될까 싶어, 이 늙은이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지금의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다.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기연을 얻은 뒤 백작을 만나 자신의 경솔함을 진중하게 사과했고, 혹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 물었다.

"그랬더니, 그런 건 소공작님께서 더 잘 알 거라며 만나 보라 권하시더군요."

이안이 백작을 바라보자 백작이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하튼, 실례를 범하게 되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가리우스가 대놓고 저자세로 나오니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알려 줄 수 있겠나?"

적의가 완전히 사라졌는지, 앞으로 몸을 죽 내밀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 이안의 모습에 가리우스가 끌끌거리며 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마탑이 전장에 서는 걸 싫어하는 건 알고 있는데, 왜 그런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가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고위 마법사를 제외하면, 이제 와서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이야기였으니까.

"혹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나?"

"큼, 큼. 짧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 마법사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부탁하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가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 * *

지금은 잊힌 시절, 한 위대한 흑마법사가 막강한 마법으로 마법사를 위한 왕국을 세웠다.

그는 힘을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왕 아래 기적을 일궈 내는 마법사들은 영광을 누렸다.

대륙의 모든 생명체가 왕을 경배하고, 흑마법을 숭배했던 시기였다.

"최소한 그 위대한 흑마법사가 돌연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문제는 그의 실종 이후 왕위를 이을 만한 마법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기록은 그를 대신할 만큼 강한 마법사가 없었다고 하지만, 글쎄요."

말을 멈추고 차를 호로록 마신 그가 클클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다들 귀찮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내 연구할 시간도 없는데 왕좌라니!' 하면서요. 그러던 중, 왕을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대륙의 각지에서 신의 피를 이었다는 이들이 일어나 소리쳤다.

자신이야말로 신이 내린 왕이며 인간을 이끌 진정한 군주라고.

"몇몇 흑마법사가 그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왕이 생기면 시끄러운 일도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마법사라면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었다.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 한 누가 왕이 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흑마법사만 움직인 걸 보면 그랬을 확률이 높습니다. 왕국의 신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왕위에 앉으라며 압박하는 와중에 대안이 생긴 셈이니까요."

빨리 왕위에 앉으라며 재촉하는 마법사 왕국의 신하들보다 자기가 대신 왕위를 짊어지겠다는 인간이 더 끌렸을 터.

"그들은 결국 전쟁에 나섰고, 그 시기의 흑마법사들은 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흑마법사는 신의 자식을 자처하던 이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언자였고 동시에 강력한 무기였다.

그렇게 흑마법사를 앞세워 왕좌에 앉은 이들에게 흑마법사는 불편한 존재였다.

"전쟁이 끝나자 애지중지하던 무기가 무서웠을 겁니다. 다음번에 그 무기를 휘두를 사람이 자기가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수없이 많은 왕이 앞다퉈 흑마법을 금지하고 기록을 은폐하기 시작했다.

흑마법사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선택받은 마법사는 언제나 소수였고, 왕과 신하들은 자신을 보낸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소리쳤다.

"그렇게 순식간에 죽은 자를 위로하고 사후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던 흑마법사는 신을 능멸하는 사악한 존재로 기록되고, 죽었습니다. 흑마법사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마법사가 흑마법사로 몰려 죽던 시기였죠."

남겨진 12명의 마법사가 모여 '지혜의 별'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최초의 마탑을 세웠다.

그리고 후학(後學)을 잇는 마법사들에게 경고를 남겼다.

'마법사가 힘을 보이는 순간, 모두가 마법사를 인간이 아닌 무기로 여길 것이다. 그러니, 진리를 탐하되 힘을 숨겨라. 파괴가 아닌 창조를 위해 매진하라.'

그렇게 '본 탑'의 첫 번째 방침이 정해졌다.

'마법사는 전장에 서지 않는다.'

이제 와 마법사들은 책상에 앉아 '마법사들은 서지 않는다.'라며 낄낄 웃을 뿐이지만.

* * *

"…이야기는 이게 끝입니다."

쉬지 않고 말을 하느라 지친 듯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 덕분에 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귀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고위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고위 마법사가 헛짓거리할까 무서운가 보군."

"클클클, 정확합니다. 고리를 다섯 개쯤 이루고 나면 자기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을 법도 하지요."

아마 그냥 이야기만 가르치는 건 아닐 거다.

전래동화나 다름없는 이야기로 인간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 정신을 뒤흔들 정도의 무언가가 있겠지.

잠깐 의자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고 이야기의 여운을 즐겼다.

'『로스트 크로니클』에서 제일 좋아했던 부분이 이런 사소한 이야기였지.'

로크 속, 아니 이 세계의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마법사들의 생각과 행동 원리를 유추할 수 있으니.

거기다 이런 정보는 대부분 히든 피스와 이어진다.

'위대한 흑마법사라....'

대놓고 히든 피스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이름처럼.

'일단 기억만 해 두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흑마법사는 게임 속에서도 나오지 않는 직업이다. 그럼 작정하고 움직여도 힌트 하나를 찾는 데 일 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

거기다 이 이야기에는 더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다른 생각을 가진 마법사들도 많은 모양이야."

당장 눈앞의 탑주만 하더라도 본 탑에 모너를 지원하라 요청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제레미를 훈련하는 걸 본 뒤에도 말없이 물러난 걸 보면 마법사가 전장에 서는 것에도 반감이 크지 않은 모양이고.

'그렇다면....'

잘만 구슬리면 가리우스를 고용할 수 있지 않을까?

꿀꺽 침을 삼킨 뒤, 최대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본 탑의 방침은 강제력이 없거나, 강제력을 잃는 중인가?"

어쩌면 제레미가 사기 매물이 아니라 1+1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안이 눈을 번쩍였다.

99화

가리우스는 말없이 소공작을 바라봤다.

"만약 본 탑의 방침이 절대적이었다면, 부탑주가 제레미를 팔아넘겼을 때 나섰겠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던 그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군. 처음부터 강제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소공작은 단순히 오성이 뛰어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저서클의 마법사는 백금을 준다고 해도 연구실을 떠나지 않을 테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마법사는 방금 그 전설을 전해 듣고 몸을 사릴 테니까. 거기에 작은 금제를 더 하겠군."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소공작은 금제의 존재를 확신했다.

"자네가 직접 본 탑에 원조를 요청한 걸 보면 강력한 금제는 아니겠어. 그저 감정을 자극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해 냈는지 머리를 열고 확인해 보고 싶은 정도였다.

적지 않은 오랜 시간 동안 마법사로 살아온 가리우스조차 저런 인간은 본 적 없었으니까.

한순간에 정리를 끝낸 소공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힘을 가지고도 쓰지 않는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지. 아무리 마탑이 단합된 집단이라고 해도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야. 아, 그중 일부가 전투 마법사가 되거나 전투 마법사를 가르치는 식인가?"

그제야 가리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 줌의 정보로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전투 마법사의 존재마저 추측하는 모습에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하하! 소공작님의 말씀이 전부 맞습니다. 하하하! 죽을 날이 가까워질수록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몇 번이나 놀라게 하십니다!"

그 말에 소공작이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래, 10년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을 양반이."

"클클클, 제 몸을 보십시오. 가죽밖에 남지 않은 이 몸으로 어찌 10년을 더 살아가겠습니까?"

"내가 장담하는데, 영감은 10년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걸어 다닐 거야."

그 말에 가리우스는 그저 허허 웃었다.

차갑고 냉철한 소공작조차 늙고 병든 자신에게는 저런 허언도 해 주는구나 싶어서.

물론 이안은 그저 가리우스가 10년 뒤 게임에서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여하튼, 아까 할 수 있는 건 뭐든 한다고 말했지?"

"예, 제 여력이 닿는 데까지는 돕겠습니다."

가리우스가 한결 가벼운 얼굴로 말하자 이안이 미간을 좁히고 중얼거렸다.

"남의 땅에서 훈련을 염탐하다 기연을 얻었으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지. 무슨 생색이야?"

"하하하! 그도 그렇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용할 수 있는 포션이나 스크롤 따위를 계산하던 그의 귓가에, 심드렁한 소공작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잘됐네. 그럼 내일부터 출근해."

"...?"

"백작, 여기 영지 전속 마법사 가리우스 경입니다. 알아서 인사하시고, 계약하시고, 도장 찍으시고,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어… 예?"

놀란 가리우스와 백작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소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뭘 쳐다보냐는 듯 말을 시작했다.

"힘이 닿는 대로 돕겠다며. 힘이 닿는 대로 일단 다 해. 내가 마탑의 탑주가 공짜로 돕겠다는데 막을 수는 없지."

벌써 고용이 확정된 듯 이안의 말투가 훨씬 가벼워졌다.

"아니, 탑주인 제가 영지 전속 마법사를 어떻게...."

"임시야, 임시. 누가 죽을 때까지 영지에 있으래? 영감 탑주잖아? 레임-프론트 홀드 지부 탑주. 여기에 탑이 있어야 탑주도 탑주지, 탑이 없으면 그냥 마법사라니까? 그 나이 먹고 평마법사 하고 싶어? 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그럴듯했다. 난해한 정신계 마법의 주술 같기도 한 말을 듣고 있으니 고개가 절로 움직였다.

"그렇다고 다른 탑주한테 가서 내가 더 늙었으니까 비키라고 할 꺼야? 양심이 있으면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탑이 있을 때 지켜야지. 탑을 지키는 김에 우리 공작가도 좀 지켜 주고. 응? 하는 김에 백작이랑 불쌍한 기사랑 병사들도 지켜 주고. 그러다 보면 정도 들고...."

탑주는 홀린 듯한 눈으로 이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어차피 돕기로 한 거 제대로 돕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었으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마탑은 출근 개념도 없지? 그럼 내일부터 출근하는 걸로 알고 있겠네."

그러고는 재빨리 가리우스의 두 손을 잡더니, 어려울 때 이렇게 큰 도움을 줘서 정말 고맙다며 단 한 톨의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

"...."

이안이 나선 문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 사람이 어색하게 시선을 나눴다.

"그… 가능하시겠습니까?"

"예… 뭐. 소공작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탑은 직장이 개념이 아니니...."

"크흠! 그럼, 내일부터는 어떻게...."

"이, 일단은 나와 보겠습니다. 어딘가 이 노구가 도울 일이 있겠지요."

6서클 마스터이자 7서클의 실마리를 거머쥔 마법사가 할 일이야 수도 없이 많았다.

그라면 요새의 수많은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이걸 먼저 봐 주시면...."

예상치도 못한 사이에 고용된 가리우스가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분명 오늘은 애제자의 얼굴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 * *

"흐흐흐...."

게임이었다면 지금쯤

[A급 영웅 가리우스가 합류했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떴겠지?

아니지, 7서클에 발가락 하나는 담갔으니까 S(-)급이라고 떴으려나?

여기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시스템이 패치 중이라 그런지 아무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S급 노… 아니 오~ 예!"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오전 훈련 시간이었다.

"지금쯤이면 제레미가 다 회복됐으려나?"

오늘 새벽에 쓴 마법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가리우스는 전형적인 서포터형 마법사다.

만능 서포터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유틸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공격 마법은 하나도 없는, 서포팅에 몰빵한 캐릭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리우스의 금제는 '공격 마법을 쓰지 말 것' 따위일 확률이 높았다.

"괜찮아. 제레미를 전투 올인 마법사로 키우면 되니까."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주는 이 관계야말로 가장 완벽한 1+1의 모습이 아닐까.

"후후후...."

지나가던 병사들이 날 보고 몸을 피했지만, 그조차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아 그들에게 싱긋 웃어 줬다.

"히이이익!"

"죄송합니다!"

웃는 얼굴을 보고, 불이라도 난 듯 도망가는 병사를 보며 다짐했다.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성의 기강을 제대로 다지겠다고.

* * *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도 제히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뭘 말인가?"

그러면서도 안내자를 따라 바삐 걸음을 옮겼다.

"장난이지? 진짜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토마스는 기사 중에서도 특히나 겁이 많은 편이라는 걸 잘 아는 제히르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안내자는 내가 놓치지 않고 따라갈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

토마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자 안내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어서 사과하게."

"도대체 무슨...!"

"안내자께서 출발하기 전에 마물의 숲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제히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토마스를 타일렀지만, 그가 여전히 구겨진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자네는 정말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쯤 되니 제히르도 친우가 답답했다.

아무리 겁이 많다지만, 마물의 숲에서 저리 시끄럽게 떠들다니.

안내자에게 작게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한 뒤, 그가 토마스를 데리고 길에서 벗어나 물었다.

"백작님의 밀명을 따르는 데 도대체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정말로 이상한 게 없다고?"

"백작님께서 안내자를 따라 적의 규모를 확인하고 오라고 하셨지."

심각한 친우의 얼굴에 곰곰이 생각하던 제히르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딱, 치며 말했다.

"아! 자네 말대로 적을 아직 안 만난 건 조금 이상하군. 한데 그야 안내자께서 안전한 길을 알려 주셨기 때문 아니겠는가?"

토마스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제히르와 백작이 말한 '안내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다람쥐를 따라서 이동하고 있는 게 진짜 안 이상하다고...?'

백작이 다람쥐를 따라 이동하라는 밀명을 내렸을 때만 해도 그게 자신이 모르는 암호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물의 숲으로 향하는 길에도 몇 번이나 제히르에게 안내자의 행색이나 주의할 점에 대해 물었고, 그 답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석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조금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는지 두 뺨에 공기를 잔뜩 넣은 다람쥐가 짧은 발로 땅을 찼다.

"일단은 계속 이동하세. 안내자의 심기 좀 그만 어지럽히고. 마물의 숲에서 길을 잃으면 답도 없다는 걸 모르나?"

"아니, 그게 지금 다람쥐가… 후...."

토마스는 그저 답답한 마음에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짜 내가 이상한 건가? 원래 다람쥐가 사람 말을 알아듣고 길도 알려 주고 그러는 건가?'

그렇게 한참을 묵묵히 이동하던 도중.

찌이이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멈춰 선 다람쥐가 왼쪽을 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 어?!"

놀란 토마스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지만, 다람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자가 없어졌다!"

레인저의 표식을 따라 이동한 것도 아니고 다람쥐를 따라 움직였는데 이제 와서 길을 잃어버리면....

사색이 되어 바닥을 뒤지려던 그의 귓가에 제히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좀 하게. 위험하니 안내자께서 조용히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

누가 뭐라고 했다고?

갑자기 다람쥐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만큼이나 놀란 토마스가 설명하라는 듯 제히르를 바라보자,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털썩 자리에 앉았다.

"여태까지 계속 이동만 했으니 안내자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좀 쉬지."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게 보던 토마스가 뇌까렸다.

"기사 훈련소 때부터 널 볼 때마다 그리도 가슴이 답답했지. 저게 진짜 인간이 맞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까 알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조용히 해라. 나 아니면 친구도 없을 금수 같은 놈아."

친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히르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토마스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진짜 진지하게 묻는데, 다람쥐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 거냐?"

그러자 제히르가 그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사람이 다람쥐 말을 어떻게 알아듣겠나?"

"…그럼 안내자가 한 말은?"

"그야, 친절히 몸짓으로 설명해 주셨으니까 알 수 있었지."

그제야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읇조렸다.

"난 네가 가끔 정말 싫어."

"오늘따라 자네 기분이 유독 안 좋은 것 같네. 부디 내일은 기분이 좋기를 바라지."

이 꽉 막히고 대화도 잘 안 통하는 기사가 가장 소중한 자기 벗이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가슴 아픈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