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20

110화

트리미아를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에 들어선 백작을 기다리고 있던 건, 제법 잘생긴 낭인(浪人)이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형편없었지만, 단단한 기세를 보고 있으니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베테랑이 분명했다.

'마침 잘됐군. 백작가의 주인이 손님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여기서 시간을 좀 죽여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낭인에게 다가간 찰나, 낭인이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 드디어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트리미아라고 합니다."

마주 웃으며 걸어가던 백작이 발걸음을 멈추고, 낭인의 모습을 훑었다.

기능성만을 중시한 가죽 갑옷과 뛰기 편한 가죽 신발, 며칠은 못 씻은 듯 산발한 머리까지.

"하하하!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백작님을, 이런 몰골로 만나 뵙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이안이 요새에 오기 전에 몬스터를 사냥하고 오라지 않겠습니까?"

"…예?"

백작은 자신이 왕자의 인사를 아직 받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반문했다.

아무리 이안 그놈이 망나니라고 하더라도 일국의 왕자한테 명령을 내릴 수는 없을 테니까.

설령 이안이 명령을 내렸다고 한들, 세상에 어떤 왕족이 직접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설 리도 없었다.

"왕궁을 나와 병사를 모으겠다고 했을 때부터 신신당부하더군요.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최소한 전투는 경험하고 와야 한다고."

스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귀족들에게 병사를 빌리기 전에 그 근처의 몬스터를 먼저 사냥하라고 했습니다."

"호오...."

백작은 이안의 심계(深計)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귀족가가 처리하지 못하던 몬스터를 처리함으로써 몬스터를 걱정하던 귀족들을 회유하면서도 무력을 드러내게 되어 암중으로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오합지졸의 모임인 왕자의 군대가 단기간에 정병(淨甁)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오합지졸을 모아 단기간에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면, 좋은 방법이군. 한데 몬스터와의 사냥 경험이 적은 이들이라면....'

곰곰이 생각하던 백작이 얼굴을 굳혔다.

오합지졸의 모임으로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부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한다.

사상자가 늘어갈수록 지휘관은 죽음에 무감각해지거나 감정을 속이기 마련이고.

그가 생각하는 최악의 지휘관이 병사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부류였다.

"병사들은 어떻습니까?"

백작의 물음에 싱긋 웃은 트리미아가 말을 낮춰 달라고 청했다.

"어찌 왕국의 백작이 왕자님께...."

"백작가가 왕가가 아니라 모너가에 충성한다는 건 시골의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국왕 폐하께서 진정으로 모너를 돕는다면 저를 폐위한다고 엄포하셨으니, 고작해야 시한부 왕자일 뿐입니다."

트리미아의 솔직한 말에 백작이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 모너를 위하는 척하는 왕족의 기만술(欺瞞術)에 당하기에 자신은 너무 많은 전장을 거쳤으니.

어린 왕자를 윽박지르는 대신, 백작이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병사들은 괜찮습니까? 몬스터와의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으니 부상자가 많을 것입니다."

설령 왕자의 심기를 거스른 질문이라 하더라도, 치료받지 못해 신음하는 병사는 있을 수 없었다.

그 무거운 표정을 이해한 트리미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부상자나 사상자가 있을까 봐 걱정도 많았지만, 성국의 지원도 있었고 이안의 조언대로 후작의 곳간을 털어 힐링 포션을 구했더니 여유가 있었습니다. 황금 고블린 상단을 통해 '스팀팩'이라는 영약도 많이 받았고요."

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스벤을 도발했다.

"아무래도 백작님의 생각을 바꾸려면 잠깐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시간을 좀 내어 주시겠습니까?"

백작은 왕자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응접실을 나가 총관을 찾았다.

"왕자의 군에 병사를 보내 상태를 확인해 보게. 혹시 다친 사람이 있는지, 오는 길에 얼마나 죽었는지."

"오는 길에 전투가 있었습니까?"

총관의 물음에 잠깐 고민하던 백작이 사실대로 말했다.

"몬스터를 사냥했다는군."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총관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희한하군.'

백작은 멀어지는 총관을 잠시 바라본 뒤, 다시 응접실로 들어섰다.

'의심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주다니.'

얼굴만 비췄으니 급하다고 쳐 내면 그만이었다.

북부 귀족들을 부르거나 총관을 시켜 안내를 맡겨도 됬을 터.

의심이 풀리지 않았음에도 시간을 내주겠다고 말한 건,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맑고 올곧은 눈빛.

'적당히 미친 게 이안 그놈을 닮은 것 같기도....'

피식 웃은 백작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왕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고작 몇 시간 만에 변할 리야 없겠다만, 앞으로 몇 주간 얼굴을 봐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친해지는 게 좋을 테니까.

* * *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레임에 사람이 태어났구나!"

"백작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그 더러운 왕가에서 멀쩡한 사람이 태어났다며 광소를 터트리는 백작의 모습에 트리미아가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라고 레임의 피를 잇고 싶었겠습니까. 아픈 상처를 들춰 내시다니...."

"하하하! 맞네, 내가 잘못했어!"

호쾌히 웃은 백작의 시선이 트리미아를 향했다.

'이놈이 진짜 왕자가 맞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눈앞의 왕자가 백작보다도 왕가를 더 혐오했으니까.

분명히 어디선가 미친 왕자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은데, 왕자는 그가 봐 온 어떤 왕족보다도 사람다웠다.

"뭐라? 소공작이 그리 말했다고?"

"예, 눈을 마주친 순간 저를 보고 정광군(正狂君)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워낙 막 나가는 놈이라 그런 것이니, 자네가 이해하게."

"아, 아닙니다. 이안이 그렇게 불렀다는 건, 제가 왕의 재목(材木)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릇 왕위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광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니, 정광군(正狂君)이란 성군(聖君)만큼이나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당황했던 이안이 아무렇게나 했던 변명이었지만, 트리미아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도 맞는 말이구나. 왕 중 미치지 않은 놈이 없으니, 옳게 미친 왕은 성왕일 터!"

백작과 대화하며 기회를 노리던 트리미아가 말을 이었다.

"제가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전투와 경험의 중요성을 말하던 이안은 가능하면 북부의 귀족들도 전투를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물론 이안이 바란 건 성벽 위에서의 수성전 정도였지만....

"몬스터를 죽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몬스터의 피와 살이 비산하고, 병사들의 고함과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지휘관이라 자처하면서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습니다."

스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를 죽이는 경험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몬스터와의 전투는 인간과의 전쟁과 다르지 않고.

전장의 광기에 압도된 지휘관들은 종종 정신을 잃곤 한다.

"그렇지. 힘들었겠지만 미리 경험을 쌓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처음 마주한 전장이 이곳이라면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을 테니."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작을 향해 트리미아가 몸을 죽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북부의 귀족들도 이 귀한 경험을 함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왕자가 오고 3일이 지난 뒤.

오크가 침공한다는 소식이 퍼진 후 항상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했던 요새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오늘은 누가 이길 것 같나?"

"당연히 왕자님이지."

"디에즈 남작을 무시하지 말게! 저번에는 고블린을 세 마리도 넘게 잡아 오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왕자님을 이기긴 힘들지."

가문의 병력을 대동한 귀족들이 앞다퉈 몬스터 사냥을 시도했고, 그날의 승자가 그날 밤 연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혼자서도 고블린을 잡아 대는 요새의 병사들조차 귀족이 사냥하는 걸 구경하는 건 재밌는 일이었으니.

"오늘은 디에즈 남작에게 걸겠네."

"당연히 왕자님이 이기신다니까!"

"아니, 그렇다고 왜 짜증을 내지? 수상한데...? 왕가의 첩자가 판을 친다더니...!"

"레임왕은 거지발싸개보다 못해도 왕자님은 좋은 분이라고, 이 멍청아!"

병사들은 풀어진 분위기에서 귀족들의 경쟁을 즐겼고, 귀족들은 마물의 숲의 어둠과 몬스터와의 전투에 익숙해져 갔다.

"어? 어! 저기 누가 온다!"

"오오! 저 문양은 도트란 자작가? 뭐야, 저거 홉고블린 아니야?"

"오오오!"

오크의 대이동 때문에 몬스터의 수가 적어져 그동안 사냥에 실패했던 도트란 자작이 마침내 홉고블린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이건 좀 어렵겠는데? 홉고블린은 고블린 몇 마리로 쳐야 하나...?"

"세 마리?"

"에이, 홉고블린이 고블린 세 마리 보단 세지 않나?"

성벽에 모여 구경하던 병사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는 동안, 디에즈 남작이 숲에서 나타났다.

"디에즈 남작이다! 남작님!"

남작에게 돈을 건 병사가 시끄럽게 외쳐 대자, 저 밑에서 디에즈 남작이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어? 저거 설마...."

"트, 트롤...?!"

"새끼 트롤이다!"

귀한 트롤을 발견한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왕자님도 트롤은 무리지!"

"오우거를 잡아 오시지 않는 이상 어떻게 트롤을 이겨!"

곧 왕자가 홉고블린 한 마리와 고블린 여섯 마리를 끌고 나왔으나 디에즈를 본 순간 졌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아!"

"디에즈! 디에즈! 디에즈!"

* * *

"축하하네. 아무리 새끼라지만 트롤을 잡다니. 정말 훌륭하군."

트리미아의 말에 디에즈의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트롤을 처음 마주한 순간에는 죽음을 각오했던 만큼, 이번 사냥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만, 다행히 가문의 기사들이 훌륭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런가? 훌륭한 기사들을 둔 모양이야. 남작가의 미래가 밝네."

화사한 왕자의 미소에 디에즈가 작게 감탄했다.

선의의 경쟁이라곤 하나 저렇게 훌륭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작디작은 남작가를 치켜세워 주시다니....

왕자는 승자뿐 아니라 사냥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럴수록 디에즈와 북부 귀족들은 2왕자를 지지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누가 뭐래도 트리미아는 둘도 없는 성군의 자질을 갖춘 왕족이었으니까.

"자, 그럼 정말 수고했네. 디에즈 남작! 승자의 권리를 맘껏 즐기게!"

그 말과 함께 디에즈와 병사들이 성문을 향해 걸어 나가자,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모너의 병사들에게 인정받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그 여운을 즐기던 와중,

데엥! 데엥! 데엥!

갑작스러운 종소리와 함께 요새에서 튀어나온 기사단이 재빨리 귀족들을 둘러싸고 소리쳤다.

"즉시 대피하십시오!"

대형 몬스터가 출몰했다며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과 비명에 사색이 된 디에즈가 다른 귀족들과 함께 요새로 대피하던 찰나.

""""""우와아아아아아!!!""""""

전에 없을 만큼 커다란 함성이 요새에서 터져 나왔다.

""""""특임대! 특임대! 특임대!""""""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서펀트 킹의 사체를 이끈 특임대의 화려한 복귀에, 요새가 전율했다.

111화

특임대를 향해 쏟아지던 환호는 특임대가 가까워질수록 점차 줄어들었다.

드르르륵.

비현실적일 정도로 거대한 순백의 서번트가 고작 일백의 병사에 의해 땅에 끌렸다.

드르르륵.

그제야 성벽 위의 병사들 미동도 없이 굳은 얼굴로 움직이는 특임대의 모습에 심각함을 느꼈다.

저렇게 큰 몬스터를 사냥했다면 우쭐대고 도움을 요청할 만도 하건만,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요새를 향해 움직이는 특임대의 이질적인 모습이 경종을 울린 것이다.

"…저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가까워질수록 분명히 보이는 특임대의 모습은 훈련에서 복귀한 병사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찢기고 헤진 가죽 갑옷을 두른 병사들이나, 사슬 갑옷만 덜렁 입고 있는 기사들이나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훈련 중에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사이, 몇몇 병사가 웅성거렸다.

"특임 대장장이랑… 기사도 몇 명 안 보이는데? 설마 기사들이 당한 건가?"

"저기, 뒤에 있는 병사들이 누굴 엎고 있다!"

"누가 빨리 가서 사령관님 좀 불러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요새의 반응에도 특임대는 묵묵히 시체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후드웍, 괜찮나?!"

"후드웍 조장! 단장은, 버질 단장님은 괜찮으십니까?!"

아는 얼굴을 발견한 기사들의 물음에도, 후드웍과 특임대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특임대를 바라본 북부 귀족들조차 소스라칠 정도로 깊게 가라앉은 특임대의 시선에 눈을 피할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인간이 저런 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특임대는 성문 앞에 다다른 다음에야 멈춰 섰다.

다른 성문보다 두껍고 거대한 요새의 성문이라 할지라도, 저 거대한 서펀트가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

요새의 성문을 보던 후드웍의 입에서 사막처럼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했다."

그 말과 함께 후드웍과 특임대의 몸이 차례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젠장! 후드웍!"

"무슨 일이야! 포션, 포션 있는 사람 없나?"

"내, 내가 조금 가지고 있소!"

갑작스럽게 쓰러진 특임대를 향해 사색이 되어 뛰어온 귀족들은 깨달았다.

"…자, 자는 것 같은데?"

"여, 여기도 잠에 든 것 같은데?"

특임대는 그저 과로로 쓰러졌을 뿐이라는걸.

* * *

"뭐라...?"

보고를 들은 백작은 두 손으로 미간을 짓눌렀다.

"그래서 그놈은?"

"특임대장을 비롯한 특임대 전원이 과로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과로로?"

백작이 고개를 돌리자, 성벽 너머에 있는 거대한 서펀트의 사체가 보였다.

"그래, 저런 걸 잡았으면 힘들 만하지."

뭔지는 몰라도 특임대가 사냥한 저 서펀트가 일반적인 서펀트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어찌나 거대한지 서펀트가 아니라 레비아탄의 새끼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거기다 저 무거운 몬스터를 오로지 힘으로 끌고 왔으니, 특임대가 멀쩡했다면 더 놀랐을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피곤하면 자면 그만 아닌가?"

들어보니 특임대가 도착했을 때 놈은 다른 병사들에게 엎혀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놈이 직접 걸을 기력조차 없었다는 뜻일 터.

'…왜?'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잠깐의 휴식조차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숲이 위험했다고?'

현재 요새와 접하고 있는 숲은 비어 있다.

소형 마물부터 테러베어에 이르는 거대한 마물까지, 오크의 이동을 두려워한 마수들이 전부 깊은 모습을 숨기거나 터전을 옮겼으니까.

어쩌면 새로운 마수가 모습을 드러낸 건지도 몰랐다.

숲의 외각을 자신의 영토로 여긴 놈이라면 거대한 몬스터의 사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특임대가 불쾌했을 테니.

'그게 아니라면....'

귀환한 특임대에 마법사가 없다는 것도 불안했다.

마탑과의 관계는 협박으로 시작된 관계니 만큼, 마법사들이 배신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다행히 특임대에는 부상자도, 사상자도 없었다.

만약 다친 사람이 있었다면 마탑을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사라진 두 마법사를 먼저 찾아냈을 것이다.

"특임대의 누가 일어나든 내게 먼저 보내라고 전하게. 사라진 두 마법사가 모습을 보여도 즉시 내게 알리라고 전하고."

"예, 알겠습니다."

"특히, 소공작이랑 버질은 일어나자마자 내게 오라고 전하게. 아니, 아예 둘 다 지금 당장 옆 방으로 옮기게."

"예? 백작님 옆방은...."

옆 방은 백작부인과 사별한 후 아무도 쓰지 않고 있던 방이었다.

그 안의 물건 하나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각별하게 여기면서도 부인이 떠난 후로 단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한 장소.

"어서!"

"알겠습니다."

백작의 노호성에 총관이 옅은 미소와 함께 방을 나섰다.

* * *

특임대가 귀환하기 하루 전.

* * *

처음엔 내 계획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화염 마법 저항을 두르고도 후끈하게 느껴지는 동굴의 열기나, 놈의 목 아래로 쏟아지는 핏물만 봐도, 다 잡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 샤아아아아악!

"징그러운 새끼."

이틀간 계속된 전투에도 멀쩡한 놈을 보고 있으니, 공략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아주 작은 의심이 생겼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나간다고 하면 안 보내 줄 거지?"

- 샤아아아악!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놈이 고개를 치켜들고 입을 벌렸다.

"그거 안 통한다니까."

벌써 수십 번은 반복된 패턴에 재빨리 몸을 구르자, 그 뒤로 떨어진 독액이 바닥을 녹였다.

-샤아아아악!

독 뿌리기 다음 이어지는 공격은 거대한 몸을 이용한 몸통 박치기. 벽을 따라 놈의 공격을 피한 순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저항 마법이 끝나 간다! 교대!"

재빨리 견제사격을 하고 있던 기사들을 보낸 후, 품에서 화염 저항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돌아가면 꼭 부탑주한테 고맙다고 전해야지.'

정말 쓸데없다고 생각한 화염 저항 스크롤이 이렇게 유용할 줄이야.

부탑주는 마법사답게 선견지명을 가진 게 분명헀다.

'남은 건… 10장 정도인가.'

장당 2시간씩 지속되는 마법이니, 20시간.

스크롤이 부족할 일은 없다.

어차피 나도 20시간은 버틸 수 없으니까.

- 샤아아악!

놈이 들이민 이빨을 방패로 힘껏 후려친 뒤, 충격을 이용해 몸을 뒤로 날렸다.

"네가 멍청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조금이라도 지성이 있는 몬스터였다면 전투를 계속하는 대신 동굴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면 사냥에 실패하고 요새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을 졸였겠지.

'이렇게는 끝이 없겠는데.'

이미 목에서 흐르던 피는 멎었고, 동굴의 공기는 화염 저항을 걸치고도 숨쉬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다.

직접 놈을 공격하고 싶어도, 일점사가 아니면 저놈의 비늘을 뚫을 수가 없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참살은 놈이 멈춰 주지 않는 이상 써먹을 수가 없고.

한참을 놈과 씨름하고 있으니 저 멀리서 경박한 발걸음과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대장! 저 왔습니다!"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히죽 웃었다.

벌써 이틀이나 버틴 놈이다. 만약 공략이 먹혔다면 훨씬 전에 죽었을 터.

한참 전에 제레미에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했고, 후드웍이 저렇게 신난 걸 보면 방법을 찾은 게 분명했다.

"오래도 걸렸다! 방법은?"

단발성의 화염 계열 마법으로는 안 된다.

고열을 유지해 동굴 전체의 공기를 덥힐 수 있는 마법이 필요하다.

"앞으로 10분 뒤부터 온도가 올라갑니다! 대장, 지금부터 진짜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리우스조차 특임대의 화염 저항 마법을 유지하면서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즉, 지금부터 이 동굴에 남아 있는 건 서펀트 킹과 나뿐.

- 샤아아아악!

"웃지 마, 정들어."

이제야 귀찮은 견제가 사라졌다는 듯 혀를 날름거린 놈이 날 향해 쇄도했다.

카카캉!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던 지금까지와 달리 방패로 놈의 공격을 막아 내자 놈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후....'

이제 입구를 틀어막고 놈을 견제하던 특임대가 없다.

지금까지처럼 공격을 피하면 더 쉬운 사냥감을 찾아 입구를 향해 도망칠지도 모른다.

'놈의 시선을 묶어 두려면 더 매력적인 사냥감이 되어 줘야겠지.'

잘 자고 있던 서펀트 킹의 둥지를 더럽히고 목을 베어 낸 망나니가, 구멍이 숭숭 난 방패를 집어 던지고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지금부터 다 몸으로 때워 줄게, 와 봐."

- 캬아아아아악!

검을 든 이안을 보고 괴성을 터트린 서펀트 킹이 이안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

"더, 더, 더!"

옆에서 들리는 고함에 제레미가 인상을 구겼다.

이 무식한 인간들은 옆에서 소리를 지르면 마법이 더 강해질 거라고 믿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저 자신을 방해하기 위해서거나.

"조용히 좀 하시오!"

"제레미 경! 더 뜨겁게 하란 말이오, 더 뜨겁게!"

눈을 희번덕이는 광인(狂人)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제히르가 보였다.

원리, 원칙에 극도로 엄격한 그라면 마법사의 고충을 이해할 터.

"제히르 경, 경이 좀 설명을...."

그러나 상대는 머릿속에 슬라임이 돌아다닌다는 기사였다.

"마나를 더 불어넣으면 뜨거워지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으신 것 같은데...."

"여유가 있다고?! 지금 우리 대장이 안에서 그 괴물한테 죽어 가는데 마법사가 여유를?!"

괜히 입을 열었다 본전도 못 찾은 제레미가 재빨리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하시오! 집중이 깨져서 마법이 취소되면 당신들 대장이 위험하잖소?"

그 말에 드디어 침묵이 찾아왔다.

'멍청한 인간들! 마법에 집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대마법사도 아닌 자신이 이 상황에서 마법을 쓰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늪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 동굴까지 올 수 있는 마법사도 없겠지만, 누가 왔다고 하더라도 이런 환경에서 마법을 쓸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주변의 무식한 병사들을 욕하고 있던 제레미의 귀에 무시할 수 없는 대화가 들려왔다.

"들었어? 당신들 대장이라는데?"

"뭐야? 제레미 경도 특임대 아니었어?"

'내가 언제! 마법사가 군대에 속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설마… 배신인가?"

"마법사 놈들이 감히...!"

'배신을 하려면 믿음을 준 적이 있어야지, 이 무식한 놈들아!'

마법에 집중하던 제레미는 속으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특임대에 닿지는 않았다.

"마법에 집중해라."

가리우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제레미가 얇은 마나막을 둘러 스스로를 격리하고 마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도하려는 마법은 발화 마법의 일종인 '인화(燐火)'.

일반적인 불로 녹일 수 없는 금속을 녹이기 위해 사용하는 상위 마법이었다.

물론, 동굴 전체로 뒤덮는 인화(燐火)는 제레미 혼자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대마법에 더 가까웠지만.

"거의, 거의 다 됐다."

가리우스가 구성한 마법진을 따라 마나를 이동할수록 제레미의 얼굴이 경외와 존경으로 뒤덮이고, 두 마법사의 마나가 요동쳤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의 안쪽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성공이다!"

"됐다!"

대마법을 성공하고 환희에 젖은 두 마법사가 동시에 소리친 순간, 그들의 등 뒤에서 끈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네, 너희."

서른 둘의 기사도, 일 백의 병사도, 6성을 넘어선 마법사조차 느끼지 못한 존재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재밌고, 맛있겠어."

거대한 모자와 검은색 로브로 몸을 가린 여자가 입을 열자 달콤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데 내 동굴 앞에서 뭐 해?"

112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가리우스는 그 안에 담긴 마력을 감지하고 제레미에게 소리쳤다.

- 제레미! 마법에 집중해라!

설령 저 존재가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인다고 한들, 죽기 직전까지는 마법을 유지해야 했다.

저 안에 소공작이 있었으니까.

'…불합리한 이유군.'

마법사인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이유였다.

당장 마법을 멈추고 블링크 스크롤을 찢어 도망간다고 해도, 그 누구도 자신을 욕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작은 깨달음을 얻은 후 마나를 더 민감하게 느끼게 된 그는 확신했다.

모너의 전력이 있다고 해도, 눈앞의 존재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걸.

'하물며 목소리에도 마나를 담아 정신을 뒤흔들 정도의 강자다.'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고 해도 저 여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터였다.

"…무시하는 거야?"

서늘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가리우스가 제레미에게 마법을 유지하라고 전한 뒤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탑 레임-프론트 홀드 지부의 탑주 가리우스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탑을 꺼냈다.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마탑 전체의 적의를 두는 건 아주 조금은 불편할 테니까.

그러나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자의 대답은 그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마탑? 그게 뭐지?"

가리우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어떤 왕국의 오지에 가도 모든 마법사의 고향이자 지식의 첨탑인 마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거대한 모자 아래 보이는 눈에 담긴 호기심은 진심이 분명했다.

"마탑은 모든 마법사의 고향이자, 지식의 첨탑입니다."

"마법사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마법사가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리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작게 놀라며 소리쳤다.

"어! 너 설마 인간이야?"

가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주위로 거대한 마나가 몰려들었다.

"넌 벽 너머를 본 것 같은데… 어떻게 인간이 벽 너머를 봤지? 너 정말 인간 맞아?"

"벽 너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인간이 맞습니다."

"우와, 진짜 신기한데?"

그녀가 즐거운 듯 빙긋 웃었지만, 가리우스는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닌 게 분명했고, 그는 그녀의 사고나 감정을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엄청난 마나를 움직여 버질 단장과 특임대 전체를 묶어 두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도, 제레미가 마법을 유지하는 것도 전부 그녀가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

"그래서 내 동굴에서는 뭐 하는 건데?"

그녀의 질문에 가리우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대답해야 그녀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지 감도 잡을 수 없었으니까.

서번트 킹이 있던 동굴을 '내 동굴'이라고 불렀으니, 최악의 경우 그녀가 서번트 킹의 주인일지도 몰랐다.

꿀꺽 침을 삼킨 가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미처 이 동굴에 주인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당연하지. 이 동굴을 아는 인간은 없으니까."

달콤한 목소리와 달리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눈동자가 그를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이야. 여긴 존재를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곳인데, 너희는 어떻게 여길 찾은 거지?"

'존재를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여길 찾은 건 특임대의 병사였으니까.

순간 서펀트가 숨을 만한 장소를 찾으라고 명령했던 소공작이 머리를 스쳤지만, 여길 찾은 건 그가 아니라 더르쿠라는 이름의 병사였다.

"서펀트를 찾아 이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우연히 찾았습니다."

"이상한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여기는 그 큰 뱀들을 잡으러 온 거야? 왜?"

"말하자면 길지만...."

"아하하! 난 너희랑 다르게 시간이 많으니까 괜찮아. 천천히 말해 봐."

속으로 한숨을 내쉰 가리우스가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 * *

"아하하하! 그러니까, 그 돼지들이 못 먹게 하려고 잡은 거라고?"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지만, 요약하자면 그랬다.

가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꺄르르 웃으며 물었다.

"저 동굴에도 큰 뱀을 잡으러 들어간 거고?"

방금전과 같이 웃음기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마나가 전보다 몇 배는 더 짙어졌을 뿐.

"…예."

그녀의 시선이 이곳에 모인 인간을 천천히 훑었다.

"너희로는 안 돼."

조롱이나 멸시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가 수백이 모여도 안 돼. 이 안에도 인간이 있으면 빼 줄까?"

순간 가리우스의 시선이 제레미와 동굴을 불태우고 있는 푸른 불꽃으로 향했다.

"아, 저 불은 대단하지만, 저걸로도 안 돼. 그 뱀은 불에 내성이 있거든."

그렇게 말한 그녀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근데 그 뱀이 아무리 멍청해도 저렇게 뜨거운 불 위로는 안 지나갈 것 같은데?"

푸른 불꽃을 바라보는 가리우스의 시선이 떨렸다.

'저 말은 사실이 분명하다.'

저토록 강한 존재는 거짓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애초에 대기의 온도만으로 서펀트 킹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소공작의 말 때문이었다.

마법사도, 학자도, 기사도 아닌 그저 어린 귀족가 영식의 말.

"어때, 꺼내 줄까?"

소공작이 틀린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그의 말을 믿은 게 더 이상했다.

맹목적인 기사들이라면 모를까, 마법사인 자신이 그리 쉽게 남을 믿다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발화 마법을 그리던 제레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럴 때일수록 마법사인 저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아찔할 정도로 농밀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마법사의 이지(理智)를 흔들 정도로 농밀한 마력을 밀어낸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후우…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정말? 조금 더 있으면 그 뱀한테 잡아먹힐 텐데?"

이를 악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먼저, 저 존재는 이 동굴의 주인이 아니다.'

들어가는 데 상대의 허락을 구하는 주인은 없으니까. 만약 정말 그녀의 동굴이었다면, 여기 있는 모두를 무시하고 들어갔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알 수 없는 '제약'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까부터 계속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걸 보면 그녀에게는 어떤 제약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저 정도의 강자는 그 무엇도 제안할 필요가 없다.

설령 그녀가 소공작을 죽이기 위해서 동굴에 들어간다 해도,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그녀는 제약에 반하는 행동을 하길 원한다.'

특임대를 압도할 때도, 마나로 정신을 흔들려고 할 때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는 건, 그 두 행동이 제약에 반하지 않는다는 뜻.

그녀가 동굴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허락을 요구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돕는다는 뜻이 나와 다를 수 있겠군.'

결정을 내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정말?"

이게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었다.

소공작이 실제로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고, 그녀의 도움 없이는 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가리우스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하지만 관대한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서번트 킹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눈앞의 여자만큼 강할 리는 없었으니까.

"...."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에 가리우스는 조용히 마나를 끌어 올리고 곧 닥쳐 올 고통에 대비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한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으니.

그가 '전투 마법' 전체에 금제를 건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던 찰나, 여자가 침묵을 깨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다람쥐 말이 맞았어! 너희는 진짜 재밌구나! 내 '숨'을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재밌었는지 손뼉까지 치며 웃어 대던 그녀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럼 이건 알려 줘. 저 불은 왜 피운 거야?"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려 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대신 답을 강요했다. 다시 말해, 답을 구하는 건 그녀의 제약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

잠깐 고민하던 가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단단한 비늘과 뼈를 가진 서펀트 킹이라고 한들, 다른 서펀트처럼 허파는 단 하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흐응...? 그 뱀은 불에 내성이 있는데?"

"분명 서펀트 킹의 비늘은 불에 내성이 있습니다만, 허파와 내장까지 내성을 얻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없이 가리우스를 응시했다.

"...."

사실은,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내가 아니라 소공작의 확신이었을 뿐.'

소공작은 서번트 킹을 보기도 전에 서번트 킹의 비늘이 높은 화염 저항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말했고, 화살 한 발 쏴 보기도 전에 물리 공격을 포기했다.

거기다 놈의 독은 치료할 수 없다는 이유로 특임대의 그 누구에게도 접근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서번트 킹을 수십 번은 잡아 본 것처럼.

'뭔지는 모르겠지만, 소공작이 숨기는 게 있다.'

태생이 마법사인 가리우스는 소공작이 전설 속의 마도서를 얻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고 주인이 원하는 정보를 보여 준다는 마도서라면, 위화감이 느껴지던 소공작의 모습도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는 대신, 사냥법을 생각해 낸 게 전부 그의 생각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정말?"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여자가 입을 연 순간, 농밀한 마나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주변의 마나가 공기를 짓누르고 숨을 조였다.

"커, 커억."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가리우스는 제레미와 특임대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설령 거짓이 들켜 죽는다 해도 죽는 건 자신뿐이라고 확신한 그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커허어억, 정, 정말입니다."

폐부를 찢듯 공기를 내뱉으며 말하자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봐줄게."

"허어어어억! 헉, 헉, 헉!"

마침내 허락된 공기를 들이마시던 가리우스는 안도보다 공포감을 먼저 느꼈다.

'얼마나,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마탑의 탑주라는 직위도, 대마법사라는 칭호도, 그가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마학(魔學)조차 눈앞의 존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차라리 죽였다면 모를까.

그녀는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고, 방금처럼 원하는 만큼 죽음을 경험시킬 수도 있었다.

점점 정신을 잠식하는 두려움에 몸을 떨던 찰나,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질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 안에 있는 인간도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냥 너로 만족해야겠다."

대마법사라 불리던 노인은 그 어떤 때보다 조심스럽게 마나를 움직였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에게 사로잡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될 바에는 차라리 마나 서클을 터트려 죽는 게 나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인 마나가 심장을 둘러싼 마나 써클을 두드리려던 찰나, 짜증이 가득 베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뭐야?"

113화

밖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서둘러 입구로 올라온 순간, 푸른 불꽃 너머로 언뜻 거대한 모자가 보였다.

"하...."

챙으로 온몸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모자를 가진 캐릭터는 딱 하나밖에 없다.

'마녀.'

마녀는 특이한 의상과 귀여운 대사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던 캐릭터지만, 마녀를 만나는 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벤트 중의 하나였다.

중립인 주제에 상황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아군이 되기도 하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공략에 방해가 됐으니까.

거기다 적으로 나타날 때는 서너 개의 왕국을 아무렇지 않게 부수면서 도와줄 때는 아이템이나 스킬 하나 주는 게 다인, 그야말로 최악의 이벤트.

'조건이 안 됐을 텐데?'

그녀를 동료로 영입하기 위해 수십 번도 넘게 노력했지만, '성향'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서도 마녀는 반반의 확률로 적의를 가지거나 작은 도움을 줬으니까.

대신, 마녀를 만나는 조건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를 만나는 조건은 총 5개.

같은 장소에서 5일 동안 있을 것.

팀원 중 한 명 이상이 인간 여성일 것.

팀원 중 마법사가 있을 것.

팀원 내에 엘프와 성직자가 없을 것.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 마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보다 쉬운 조건이라는 게 문제지만....'

엘프는 처음부터 영입하기 어려운 종족이고, 어지간히 돈이 썩어 나지 않으면 게임 속에서 성직자를 영입하는 건 어려웠다.

팀에 성별이 섞이는 것도, 마법사를 집어넣는 것도 흔했다.

사실상 진짜 조건은 '같은 장소에서 5일 이상 있지 말 것.' 하나뿐.

그래서 이번 훈련을 계획했을 때도 레이나를 두고 왔다.

그녀만 있으면 저 조건을 전부 만족할 테니까.

'근데 왜 나타난 거지?'

몸을 드러내는 대신 몸을 회복하면서 가리우스와 마녀의 대화를 엿들으며 고민했다.

'마녀를 잡을 수 있을까?'

게임 속에서는 시도해 본 적 없다.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캐릭터가 행동 불능으로 변했으니까.

'나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은신을 이용하면 공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다가 포기했다.

그녀가 게임 속에서 멸망시킨 국가 중에는 S급 영웅인 귀왕이 살던 왕국도 있었으니까.

암습이 통하는 존재였다면 게임 속 귀왕이 죽였을 터.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면서 간을 보는 수밖에.

그렇게 결심하고 아껴 뒀던 화염 저항 포션과 스크롤을 사용하고 푸른 불꽃을 향해 걸어가던 찰나.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안에 있는 인간도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냥 너로 만족해야겠다."

…저게 미쳤나?

내 최초이자 유일하고 하나뿐인 영웅을 탐내는 목소리에 머릿속의 계획이 백지장으로 변하고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다.

이름하여 플랜 F.

"누구 A급한테 꼬리를 쳐?"

절대 내 영웅은 못 준다.

* * *

"…어?"

마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모자 아래 인간이 맞나 싶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당황과 놀람으로 물들었다.

'일러스트를 봤을 때도 인간이 맞나 싶었지, 진짜.'

당연한 일이다. 마녀는 인간이 아니니까.

"지금 나한테 말한 거야?"

그녀가 입을 열자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만약 게임 속이었다면 저 마나에 닿는 순간 행동 불능 상태로 변하고 미혹에 걸렸을 터.

하지만 정신 방어계 특성을 2개나 가지고 있는 난 숨이 조금 갑갑해졌을 뿐이다.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는데?"

설마 그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는 듯, 마녀가 가리우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

내가 멀쩡하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점점 더 많은 마나를 움직였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야."

"…이상하다?"

미간을 힘껏 구긴 마녀가 내게 다가와 갸웃거렸다.

"…너도 인간이야?"

"그럼 인간이지."

절대 그럴 리 없다면서 고개를 흔들더니, 번뜩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아! 드래곤! 숲에서 나던 드래곤 냄새가 너였구나! 너 찾으러 온 거였는데!"

"…드래곤을 찾으러 왔다고?"

"응! 드래곤은 한 번도 본 적 없거든! 생각보다 건강하구나?"

순간 요새에 있을 검은색 도마뱀이 떠올랐다.

마녀가 드래곤을 찾아오다니, 원래 게임에서도 그런 스토리가 있었을까?

그럼 게임 속 칼루아는 왜 죽은 거지?

잠깐 고민하다가 숨이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마나에 답이 떠올랐다.

'마녀의 사고방식이 인간과 같을 리가 없지.'

그녀는 말 그대로 드래곤을 '찾으러' 왔을 뿐.

칼루아를 만난 마녀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도와주지 않은 건 확실했다.

"…드래곤은 왜 찾았는데?"

"말했잖아, 드래곤은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대답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놓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건강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칼루아가 고통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리고 고통받던 칼루아가 자리를 벗어나자 드래곤을 확인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

마녀의 눈동자는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칼루아를 데리고 있다는 걸 알면,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걸.

"아, 저 사람은 이름이 가리우스래. 넌 이름이 뭐야?"

투명한 눈동자는 반짝거리며 묻는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야."

"...?"

"난 내 마법사도, 도마뱀도 줄 생각 없으니까, 꺼져."

동시에 검을 잡는 척,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떨어뜨렸다.

"아하하하! 뭐?"

마녀 주변의 마나가 끓어올랐다.

방금 전까지도 무해한 순수를 가장하던 눈동자는 어느새 분노로 이글거렸다.

"난 내 건 절대 포기 못 하니까, 꺼지라고."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당연히 알지만, 말하는 대신 되물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알아?"

난 아는데 넌 모르거든.

정보를 선점한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법이니까.

"숲의 마녀, 맹약과 계약으로 묶인 불쌍한 인형아,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너 그걸 어떻게...!"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지르밟자, 반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강한 마나 폭풍이 반지에서 터져 나왔다.

부탑주가 '선물'한 반지에 숨겨져 있던 마법, 코어스(Coercere).

칼루아는 코어스가 상대가 계약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마법이라고 말했다.

가리우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마법이라고 말했고.

'쓰기 전에 연구라도 해 볼 생각이었는데....'

반지가 부서진 자리에서 튀어나온 검은색 구체가 마녀를 감쌌다.

"잠깐, 잠깐!"

역시, 생각했던 대로 그녀가 다급히 날 불렀다.

"너, 너는 그 드래곤이 아니지?!"

"처음부터 말했다, 난 인간이라고."

"거짓말하지 마!"

그녀가 소리칠수록 코어스가 그녀의 마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저항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그 대가를 무시할 수 없을 터.

"넌 도대체 뭐야? 너, 너 설마 새로운 '관리자'인가?"

잠깐 무슨 생각을 하던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어! 너, 말해 봐! 내가 어떤 맹세를 어겼는데!"

당연히 모른다.

그저 뭔가 하나는 어겼을 거라고 짐작했을 뿐.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그녀가 출현 조건을 어기고 나타났다는 것.

"그야, 그야...!"

맹렬히 고개를 움직여 흑임대를 바라보던 그녀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백 명이 넘는 인간 중에 여자가 한 명도 없다고?"

응.

그럴 것 같아서 이번에는 오지 말라고 했거든.

혹시나 재수 없이 마주칠까 봐 다음부터는 성직자랑 엘프도 데려올 거란다.

"이건 반칙이야!"

그렇게 소리친 그녀가 머뭇거리더니 두 손을 치켜들었다.

"좋아! 계약을 어긴 건 내 잘못이니까! 하지만 장담하건대, 난 '그녀'의 눈을 피했어. 너도 관리자 중 한 명이라면 알겠지."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마나를 삼키던 코어스가 멈췄다.

저 말이 계약에 따라 진실이라는 뜻.

'관리자? 그녀?'

마녀는 나를 관리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동시에 관리자는 '그녀'의 눈을 피해서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고.

생각을 굳히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건 그녀의 눈을 피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잖아? 난 그녀의 눈을 피했으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계약을 어긴 건 아니야."

이 상황에서 그녀가 풀려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관리자'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지도 모르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떻게 마녀를 속일지를 고민하면서 가리우스를 바라보자, 그녀가 대뜸 소리쳤다.

"관리자가 맞았어! 너, 딱 봐도 신입 같은데 선배한테 이럴 수 있는 거야?!"

눈물을 글썽이는 마녀를 보니 왠지 관리자에는 선후배가 없을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내 마법사를 마음대로 데려가려고 온 주제에."

"뭐?! 난 여기 관리자가 있는지도 몰랐어! 드래곤의 냄새가 동굴까지 이어져서 확인하려고 온 거지! 맞다, 그 드래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드래곤에 대해 말하는 순간,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혹시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관리자'라 불리는 마녀는 드래곤을 찾아 이 자리에 나왔고, 날 드래곤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드래곤을 찾길 원했다.

코어스에게 반 이상 집어삼켜질 정도로 어긴 맹세가 있고.

어쩌면, 관리자의 역할은 그 이름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그걸 관리하는 게 네 일이었을 텐데."

도박 수를 던지자,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에이 씨! 그거까지 알고 있었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내가 졌어!"

그녀가 손을 움직이자 코어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이건 네 꺼니까, 부탁을 들어줄게.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

음....

마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만.

"널 어떻게 믿고?"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였을 수가 있지? 인간이라 그런가?"

"마녀, 넌 내 마법사를 훔쳐 가려고 했다."

"아니 그러니까, 주인이 있는지 몰랐다고! 알았어, 나야 좋지. '대화'를 하자. 너와 나는 사실만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간 마나가 그녀와 나를 동시에 감쌌다.

"자, 이제 됐지? 어차피 알고 있을 테니까 나 먼저 할게. 내 부탁은 간단해. 그 드래곤을 찾아 줘."

갑작스럽게 진행된 상황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생사는?"

"당연히 살아 있어야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자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살아 있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나? 그러면 왜 칼루아를 내버려 뒀지?'

오히려 복잡해진 생각을 뒤로하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모습을 숨긴 드래곤을 찾는 건 어렵다. 대신 생사만 알아내는 거라면 어렵지 않지."

내 말에 풀썩 고개 숙인 마녀가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힝… 그럼 안전한 곳에 있는지만 확인할 수는 없을까?"

'연기인가?'

"그...."

그 드래곤은 위험한 곳에 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마법이 존재하는 한, 서로에게는 사실만 전할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건 어렵지 않지."

"정말? 정말?! 저번에 '그녀'한테 걸려서 호되게 당했는데, 아직 괜찮을까?"

순간 묻고 싶은 게 많아졌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칼루아를 구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으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패한 게 확실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녀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내 안에 있던 망나니가 입을 달싹였다.

"근데 너에게 뭘 부탁해야 할지를 모르겠군."

"어...?"

"난 그 드래곤의 생사도, 안전도 확인할 수 있다.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찾을 수도 있겠지."

'관리자'는 그녀만큼이나 강한 존재가 분명하다. 날 보고 '신입'이라고 부르거나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내가 약하기 때문일 터.

지금은 내 능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기에, 그녀조차 찾을 수 없는 드래곤을 찾을 수 있다며 거드럭대면서 말을 마무리했다.

"근데, 넌 할 수 있는 게 뭐지?"

게임 속 무수한 상인들과 영웅들을 상대하면서 얻어 낸 비장의 비기.

망나니 술(術) 제2식(式) 선제시요(先提示要).

당황한 마녀의 떨리는 시선이 내게 향했다.

114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마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걸 말해 봐. 나한테 불가능한 일은...."

당당한 그녀의 목소리에 재빨리 대답했다.

"오크를 치워 줬으면 좋겠군."

"…없지는 않지.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 신이잖아?"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에 차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손을 허리에 올리며 소리쳤다.

"너, 인간이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지! 10만의 생명을 죽이는 게...."

"먼저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한 건 너였다만."

"그거 말고! 다른 거!"

흠....

게임 속 마녀는 둘 중 하나였다.

아이템 하나 적선하듯 넘겨주면서 유세를 떨거나, 잊을 만하면 적으로 나타나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거나.

마녀의 능력에 대해서 모르니 뭘 부탁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원하는 걸 다 말해 보는 수밖에.

"대륙 정벌?"

"고작 드래곤 하나 가지고 바라는 게 너무 크잖아!"

"안 된다는 건가, 못한다는 건가?"

"당연히 못 하지!"

마녀는 생각보다 쓸데가 없었다.

"여간 당당한 게 아니길래 기대했건만… 쯧."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작게 벌린 마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혹시 왕국 몇 개라면...."

"안 돼! 못 해! 안 해!"

쳇. 나중에 문제가 될 왕국을 미리 치울 기회였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무능력하군."

"네가 양심이 없는 거야!"

마녀가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가리우스와 제레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후… 저 바보들한테 마법을 가르쳐 줄게."

별로 끌리는 제안은 아니었다.

가리우스는 혼자서 6서클에 들어섰고 7서클의 실마리를 잡아 쥔 영웅이다.

제레미는 마법 훈련보다 육체 훈련이 더 급한 상태고.

무엇보다, 언제 오크가 나타날지 모른다.

지금 둘밖에 없는 마법사를 보내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말없이 마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강한 건 확실한데....'

마녀는 괴물이 우글거리는 게임 속에서도 손꼽히게 강했다.

단신으로 영웅이 속한 왕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캐릭터는 게임 속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니까.

그녀의 마법이라면 오크를 전부 집어삼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역시 힘을 아끼려는 건가?'

어쩌면 이 시기의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약한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조금 긁어 볼까?'

대놓고 스승을 자처한 걸 보면 마법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게 분명했다.

"흠...."

"무슨 대답이 그래! 너 나한테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역시 오크도 처리 못 하는 마법사는 좀...."

천천히 고개를 젓자, 진심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당황한 마녀가 멍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뭐, 두 사람한테는 다른 좋은 기회가 있겠지. 살면서 한 번쯤은 '위대한 마법사'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너, 너, 너...!"

고장 난 듯 버벅대는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 걱정하지 마. 드래곤은 내가 잘 확인해 볼게. 난 누구처럼 말만 앞서는 타입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고 마녀를 지나치려는 순간, 마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야! 나라고! 이 대륙에 나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어!"

'대화'가 유지되고 있는 지금 저렇게 소리칠 수 있다는 건, 마녀가 진심으로 자신이 최고의 마법사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마법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하다는 뜻이고.

"…그래.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보내 주면 안 될까?"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니 마녀가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너! 지금 눈깔이 하나도 안 믿는 눈깔이잖아! 야, 마법사! 네가 대답해 봐!"

"알았어. 네가 최고의 마법사인 건 잘 알았으니까─."

"이게 근데 끝까지이익!"

얼굴을 붉게 물들인 마녀가 대뜸 소리쳤다.

"좋아! 저 두 사람을 가르치게 해 주면, 앞으로 일주일 동안 오크를 숲에 묶어 줄게."

"음."

달콤한 제안에 군침이 돌았다.

물론, 첫 번째 제안을 덥석 무는 건 하수다.

"이, 이 주?"

불안한 듯 모자를 들썩이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 마법사는 얼마나 데리고 있을 생각이지?"

"음… 둘 다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한 십 년쯤?"

차게 식은 내 눈을 마주한 마녀의 모자가 재빨리 펄럭였다.

"아니, 구, 팔, 음… 오 년?"

"...."

"그럼, 삼, 삼 년? 그치만 고작 삼 년 동안 뭘 가르치지? 기초도 못 배울 텐데...."

"...."

"삼 년도 안 된다고? 말도 안 돼! 그럼 얼마나 가능한데?"

답은 간단했다.

"네가 오크를 묶어 둘 수 있을 때까지."

뭐, 정 가르치고 싶으면 힘 좀 써 보던가.

* * *

한참이나 고민하던 마녀는 오크를 묶어 두는 건 두 달이 최대라고 말했다.

난 흔쾌히 마법사를 빌려주는 데 동의했고.

"내가 가르쳐 주는 건데...?"

"내가 빌려주는 거다. 언제고 너만큼이나 위대해질 수 있는 마법사를 가르칠 기회를 주는 거지."

큰 눈을 껌뻑이던 그녀가 샐쭉한 얼굴로 두 마법사를 흘겨봤다.

"쟤들이?"

"고작 두 달 만에 저들이 진리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워진다면, 대륙의 모두가 위대한 마법사라며 숲의 마녀를 칭송하겠지."

"그런가...?"

"그렇지. 숲에만 있던 네게 이런 기회는 천운이나 다름없으니 조금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도록."

곰곰이 생각하던 마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내 끄덕였다.

칭송받는다는 부분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마녀가 말을 이었다.

"좋아! 고마워! 내가 힘내 볼게!"

힘차게 파닥이는 모자를 보며 난 피식 웃었다.

'숲에만 있어서 그런가....'

그녀는 순수했다.

그게 연기인지, 숲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랐지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건 많은데....'

지금은 이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나를 '관리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니까.

최소한 이 세계의 마녀가 아군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거리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아. 드래곤은 건강하게 살아 있다."

원하는 걸 주고받는 딱 그 정도의 관계.

"어! 진짜?"

그 말을 끝으로 특임대로 돌아가려는 순간, 마녀가 소리쳤다.

"잠깐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나만 더 대답해 줘! 너 진짜 드래곤 아니야?"

모자를 펄럭이며 달려오는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뒤, 마력에서 벗어난 특임대에게로 향했다.

"서펀트 킹의 사체를 가지고 돌아간다."

원래는 부산물만 수거해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마녀는 사체에서 비늘을 뽑는 순간 비늘의 품질이 떨어진다며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통째로 가져가야 한다며 직접 경량화 마법을 걸어 줄 정도로 진심이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끌고 가기로 했다.

'중간에 정 무거우면 그때 가서 루팅 하면 되니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미레스카는 멀어지는 인간들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정색하고 드래곤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대화' 중에는 드래곤이 아니라고 안 했잖아?"

그가 드래곤이라면 모든 궁금증이 해결된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드래곤의 생사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대화' 중에 드래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 것도.

그렇게 약한 인간이 '관리자'가 되었다는 것도.

그가 존재를 숨기고 있는 드래곤이라면 전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처음에 드래곤이 아니라고 했던 건, 종족의 규칙 때문일 거야."

유희에 나선 드래곤들이 철저하게 존재를 숨긴다는 건 유명했다.

드래곤을 기억하는 존재가 거의 없기는 했지만.

"음. 음. 드래곤이라면 내 미혹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가 드래곤이라고 확신한 가장 큰 이유는 미혹이었다.

요정 중에서도 특별한 그녀의 미혹은 한낱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위대한 요정 여왕의 딸이자,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고 불리는 자신이 마물의 숲에 처박히게 된 것도 이 미혹을 조절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역시, 드래곤이 분명해."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날, 날 버렸어...."

그녀가 가는 눈으로 제레미를 바라보자, 옆에 있던 가리우스가 복잡한 얼굴로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 드래곤이 소공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드래곤이라면 정말 많은 게...."

"그렇다니까! 아하하하! 이 미레스카 님을 보고도 놀라지 않더니, 그놈은 분명히 로드일 거야!"

난제를 해결한 그녀가 한참을 깔깔거리던 중, 불현듯 드래곤이 가져간 뱀이 떠올랐다.

"아, 가는 길에 조심하라고 했어야 하는데...."

지성이 없다고 해도 군주종의 사체다.

사체가 풍기는 아찔할 정도의 냄새와 자극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온갖 몬스터가 인간들을 향해 달려들 터.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와줘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두 마법사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저 마법사들을 가르칠 시간도 부족한데....'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그 커다란 뱀을 요새까지 옮기려면 하루는 꼬박 걸릴 터.

거기다 오크의 걸음을 묶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뭐, 저쪽은 드래곤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드래곤은 위험할 때마다 깨달음이라도 얻은 척 힘을 조금씩 늘리니까, 고작 몬스터에 당하진 않을 터였다.

"좋아, 그럼 가자!"

허공에 뜬 제레미와 가리우스를 향해 그녀가 손을 움직인 순간, 세 사람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움직여! 발을 멈추지 마라!"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리친 이안의 검이 홉고블린의 머리를 갈랐다.

"단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빨리 움직여! 여기서 죽고 싶은 거냐!"

늪을 벗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전투는 벌써 여덟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영역을 이루던 고위 몬스터는 없었지만, 문제는 물량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솟아난 건지 요새에서 나고 자란 후드웍조차 이렇게 많은 고블린은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절대 포기 못 해.'

서펀트 킹만 포기하면 안전하게 요새로 돌아갈 수 있다.

서펀트 킹만 포기하면.

'내 갑옷, 내 무기, 내 장비!'

서펀트 킹의 사체만 있으면 특임대와 흑귀대 전원에게 새 장비를 맞춰 줄 수 있다.

저놈의 뼈를 섞으면 최소한 최상급의 화살과 중상급의 검을 만들 수 있을 테고.

"대장! 후방에 고블린 한 무리가 더 나타났습니다!"

"전방에 마물 늑대입니다!"

"발을 멈추지 마라! 저놈들은 내가 잡는다!"

검을 움켜쥐고 전방에서 나타난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 크르르르르....

줄줄 흐르는 침을 보니, 너도 내 것을 탐내는 것 같다만....

"난, 내 것은 절대 양보 안 해."

무기나 방어구가 아니라 서펀트 뱀술을 담가 먹는 한이 있어도 저건 내 것이다.

- 크아아아아앙!

달려드는 늑대를 향해 마주 달리며 소리쳤다.

"내꺼라고─!"

그렇게 소리친 이안은, 몬스터의 피로 마녀에게 느낀 두려움과 공포를 씻어 내려는 듯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숲의 끝자락에 다다라, 요새가 보일 때까지도.

115화

스벤의 게슴츠레한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그러니까, 저걸 이용해 갑옷을 만들어 달라?"

"에이, 소재를 하나밖에 안 쓰면 안 되죠. 당연히 다른 가죽을 섞어서요."

26시간.

장장 26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놈이 새벽부터 찾아와서 이 난리였다.

"저만한 비늘에 잡스러운 게 섞이면 오히려 독일 게다."

"아껴 둔 재료 좀 꺼내시죠. 그동안 모아 둔 재료도 많을 텐데."

물론 많기야 했다.

숲에 위험한 놈들이 나타날 때마다 백작이 직접 나서서 처리했고, 재료로 쓸 만한 것들은 마탑에 파는 대신 창고에 보관해 뒀으니.

다만.

"하, 누가 보면 맡겨 놓은 줄 알겠구나."

"에이, 요새가 모너고 모너가 모너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제 욕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당당히 집무실에 들어와 대장장이 좀 빌리겠다고 말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포장한 이안의 뒤편에, 처음 보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껏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들을 연달아 이뤄 내고, 훈련을 나간다더니 서펀트 킹을 잡아 온 놈이.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을 찾아왔다.

"특임대 중에 네가 가장 먼저 일어나 아직 보고를 듣지 못했다. 지금껏 그저 고위 몬스터 사냥에 성공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만...."

요새의 모두가 특임대장이 또 특이한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을 뿐,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특임대의 기행이야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다들 특임대가 일어나 모험담을 떠벌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이구나."

말도 안 되는 사냥에 성공했다며 으스대고 있어야 할 소공작의 시선이, 작게 흔들렸다.

* * *

눈치 빠른 인간 같으니라고.

난 있었던 일을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제레미와 가리우스는 마녀와 함께 훈련을 위해 이동했습니다."

"...."

보고가 끝날 때까지도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바라봤다.

"특임대가 쓰러진 건 제 욕심 때문입니다. 서펀트 킹의 사체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거든요."

부끄러운 기분에 슬쩍 시선을 피하자, 백작이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서투르구나."

"...?"

"그래서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이냐? 네 놈의 힘으로도, 모너의 전력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강자를 만나서?"

백작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아닙니다."

내가 만난 마족들이나, 세계수만 해도....

"그 강자가 네가 아닌 네 사람을 노려서?"

"...."

"회의장에서 고드만 자작이 후드웍을 주축으로 레인저 부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넌 죽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불같이 화냈지."

클클 웃던 백작이 말을 이었다.

"그걸 본 지휘관들은 네가 아직도 미쳤다고 생각한다. 네가 이룬 모든 신뢰와 평가를 흔들 정도로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후드웍보다 새로운 레인저 부대에 잘 어울리는 병사는 없었고, 지휘부의 판단은 합당했으니까.

후드웍을 뺏기지 않으려면 억지라도 부려야 했다.

"그런 네놈은 절대 두 마법사를 마녀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을 게다. 그런 강자가 두 마법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밀려오는 무력감에 두 손을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마녀가 네가 말한 것처럼 강한 존재라면 자기 말을 쉬이 어길 수 없을 테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입술을 비집고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제 것을 뺏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 조급한 것이냐? 마녀가 두 마법사를 요구할까 봐?"

마녀의 마나를 처음 감지한 순간.

난 특임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마녀를 제외한 그 누구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두려운 건.

"전부 두렵습니다."

후드웍이, 버질이, 제레미가, 테일이.

특임대 전원의 죽음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시간을 벌기 위해 마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도, 그렇게라도 가리우스와 제레미가 강해지길 바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만큼 강해질 수 있다면.

더 준비하고 더 좋은 장비를 구할 수 있다면.

그만큼 이번 전쟁에서 잃는 대원들이 줄어들 테니까.

누군가를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에야 깨달았다.

난 사실 그 누구도 잃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걸.

* * *

스벤은 말없이 이안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만약 특임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왕가의 반발이 극심할 것입니다."

총관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북부 귀족을 돌려보내라고 지랄하고 있는데, 두 달이나 더 기다리라고 하면 거품을 물겠지."

"이미 왕도에서는 오크의 침략이 모너의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총관의 보고에 백작이 미간을 구겼다.

"벌써? 너무 빠른데?"

모너는 착실히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

당장 요새에서도 소공작이 말한 소규모 전투를 위한 전술 훈련을 매일 하고 있고, 귀족들도 사냥을 핑계로 실전 훈련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왕가라도 언제 전투가 시작될지 모르는 지금 퍼트리기에는 악의적인 소문이었다.

"예, 왕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정말 두 달 넘게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이상했다.

북부 귀족의 영지라면 모를까, 왕도에서부터 시작된 소문이라니.

설령 남부 전체에 퍼진다고 해도 요새에 있는 북부 귀족들은 듣지 못할 터.

"아무래도 왕가는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왕도에서 시작된 소문은 북부의 귀족들을 움직이기 위한 소문이 아니다.

'그럼… 다른 지원 병력을 막으려는 건가?'

그렇다고 보기에도 이상했다.

이제와 모너를 지원할 가문은 없으니까.

"…왕가가 아니라면 말이지. 센트럴 홀드에 연락을 해 봐야겠어."

얼굴을 구긴 백작이 통신실로 향했다.

* * *

국무회의에 참석한 드미트리 후작은 피곤한 얼굴로 서류를 살폈다.

"다음 안건입니다. 모너가에서 다시 한번 지원군을...."

누군가 모너에 도움이 필요한 이유를 역설하려던 순간.

"저리 비켜라! 감히 누구 앞을 막아서는 것이냐!"

밖에서 들려온 고함에 회의장에 들어선 귀족들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저 목소리는 1왕자가 아닌가?'

'1왕자가 왜 여길....'

'왕께서 독대를 허락하지 않았다던데....'

귀족들의 시선이 동시에 왕에게로 향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자 하는 게 잘못이란 말이냐! 당장 놓지 않으면 다시는 이 궁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1왕자의 고함이 커질수록 국왕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가고, 귀족이 숨을 죽이고 국왕의 반응을 기다렸다.

'최악이군.'

숨을 죽인 후작이 회의장의 면면을 훑으며 생각했다.

'하필이면 왕국의 대신들이 전부 모인 오늘이라니.'

국왕파의 얼굴에 피어난 당황과 난처함보다도 귀족파 귀족들의 얼굴에 떠오른 호기심이 더 문제였다.

저들이 왕궁을 나서는 순간, 1왕자가 제정신을 잃고 국무회의에서 날뛰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갈 테니.

이대로 두면 중도를 지키며 침묵하고 있던 귀족들도, 귀족파도 1왕자의 자질을 의심할 터였다.

'밖에 있는 기사들은 뭐 하는 거야! 기절이라도 시켜서 끌고 가야 할 것 아냐!'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었다.

"비켜! 비키라고! 왕께서 바쁘시다면 내 후작이라도 봐야겠다!"

자신을 찾는 1왕자의 목소리에 움찔한 후작이 급히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왕이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라."

동시에 문이 열리고, 들어선 왕자가 소리쳤다.

"아버님!"

그 모습을 보던 후작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대신들 앞에서 폐하께 아버님이라니!'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설령 1왕자가 왕위를 잇더라도 귀족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각오를 다진 후작이 뭐라 소리치려던 순간, 왕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분노도, 짜증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듣던 귀족들이 정말 1왕자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의심할 정도로.

"아, 아버님! 폐하의 엄명을 어기고 아직도 회군하지 않은 트리미아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벌써 수십 수백 번도 더 했던 말이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국왕이 왕자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벌이라...."

그러나 국왕은 충신의 간언이라도 들은 듯 깊이 고민했다.

"아무렴, 내 명령을 어겼다는 건 그 자체로 반역이다. 그렇지 않나?"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들아, 트리미아는 왕국과 백성을 위해 직접 마물의 숲으로 향했다. 내가 트리미아를 벌한다면 왕국의 모두가 내 판단을 욕하지 않겠느냐?"

"아버님은 이 왕궁의 유일무이한 주인이십니다. 반역자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아버님의 판단을 의심한단 말입니까!"

순간 회의장의 귀족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몇몇 남부 귀족의 노력으로 모너의 지원에 대한 안건이 올라온 오늘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결코 우연일 리가 없었으니까.

"네 말이 맞다. 내 말이 곧 법이지."

순간 왕의 시선이 후작을 향했다.

모너의 안건이 기어코 국무회의까지 올라온 데 네 입김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이곳의 누구도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일을 꿈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결코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당황한 왕자가 뭐라 소리치려던 순간, 국왕이 말을 이었다.

"또한, 난 네가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걸 허락한 적이 없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왕자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나타난 근위기사단이 왕자를 끌고 나갔다.

당황한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던 찰나, 국왕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다들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저놈이 제 동생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국왕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 사실 모너를 침략하려는 적이 없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니 깜짝 놀라서 달려온 게지. 부디 왕자가 부족한 모습을 보였더라도 이해해 주게."

벙쪄 있던 귀족들이 서로를 보는 사이, 누군가 입을 열었다.

"폐하, 그저 뜬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잘 짜여진 연극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얻어 낸 사이테 백작이 말을 이었다.

"모너의 요청은 일반적인 주장일 뿐. 모너가 아닌 그 누구도 적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마물의 숲에 있는 적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모너뿐이니까.

"어쩌면 그 모든 게 모너의 계략일지도 모릅니다. 저들이 북부 귀족을 한데 모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면 왕국군을 요청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트리미아에게 병력을 내준 귀족이 소리치자, 백작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1왕자님의 말대로 반역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악명 높은 프론트 홀드만큼 지원군을 잡아먹기 쉬운 곳은 없을 테니."

누군가는 당황한 표정으로, 누군가는 황당한 표정으로 사이테 백작을 바라본 귀족들의 시선이 국왕에게로 닿았다.

국왕의 오랜 충신인 사이테 백작은 체스 말일 뿐, 그를 움직인 건 국왕일 테니까.

"흠… 모너가 그럴 리는 없지만, 백작의 충고도 무시할 수는 없겠군."

그 상황을 지켜보던 후작은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조악한 연극으로 국왕은 귀족들의 머리에 '모너를 도우려다간 반역자로 몰릴지도 모른다.'라는 의심을 남기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러나 모너의 위험을 보고도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이지. 세 백작가에 왕국군을 주둔시키고 적의 습격이 시작되면 모너를 지원하겠네."

그 말을 들은 후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결국 모너를 버리는 것인가....'

침략이 시작되면 왕국군은 모너를 지원하는 대신 세 백작가를 틀어막고 소문을 잠재울 터였다.

전쟁이 끝나거나, 모너가 무너질 때까지.

116화

트리미아는 난감한 얼굴로 백작과 이안을 바라봤다.

"병력을 복귀시켜 달라는 남부 귀족들의 요구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트리미아가 병력을 빌린 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병력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영지에 갑자기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이들부터 영지전을 준비해야 된다는 이들까지.

"왕가가 개입했다."

스벤 백작이 입을 열었다.

"모너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왕도에서 퍼졌다. 모너를 침략하려는 오크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면서."

피식 웃은 백작이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지만, 그걸 왕이 입에 담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왕가의 위신을 끔찍히 생각하는 아버님께서 소문을 입에 담으실 리가...."

"이럴 때를 위해 쌓아 온 위신이고, 권위다. 왕은 절대 소문을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쌓아 온 권위에 빗대어 다른 귀족들이 믿도록 만들었겠지."

"하지만 터무니없는 소문입니다. 당장 오크가 나타나면 소문의 진위가 드러날 텐데요."

백작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이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사실이 퍼지는 걸 막을 방법이 있다는 뜻이겠지."

말이 퍼지는 걸 막는다고?

어떻게?

얼굴을 찡그리고 고민하던 트리미아의 표정이 점점 희게 질려 갔다.

말이 퍼지는 걸 막을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죽이겠다고? 모너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버님이 모너의 멸문을 바라신다 해도 어떻게 이곳에 모인 북부 귀족을 전부...!"

급하게 외치던 트리미아가 불현듯 깨달았다.

모너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린 건, 어쩌면 모너를 압박하기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북부 귀족들은 대대로 중앙 정계와 떨어져 독자적인 세력을 꾸려 왔지. 그 귀족들이 너를 지지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고."

"귀족을 죽이는 데 반역자라는 꼬리표보다 좋은 건 없겠지요."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북쪽에서 남하하는 오크만큼이나 남쪽의 왕국군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

백작이 거무죽죽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안을 바라봤다.

'아직 피로도 가시지 않은 널 불러서 미안하다만....'

왕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소처럼 항의나 무력 시위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왕가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반역 행위로 몰아갈 수 있을 테니.

백작과 트리미아가 이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냥 무시해."

* * *

아직도 피로가 풀리지 않은 탓에 이마를 주무르며 말했다.

"왕가는 세 백작가에 왕국군을 주둔시킬 계획이야."

옵솔의 백작인 나타샤로 부터 왕가의 계획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오크가 나타나면, 왕국군을 이용해 세 백작가를 틀어막고 소문이 퍼지는 걸 억제할 생각이겠지."

처음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작 귀족 몇 명의 혀를 자르는 걸로는 절대 소문이 퍼지는 걸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모너에서 나오는 건 전부 죽일 생각이야.'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모너의 모든 백성을 죽일 계획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계획이니까.

'우리가 요새에 틀어박혀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겠지. 뒤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당했을 거야.'

실제로 옵솔의 나타샤와 황금 고블린 상단이 아니였다면 왕가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심각한 거 아닌가? 차라리 이렇게 된 거 내가 일부 병력을 복귀시키면...."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굳은 얼굴의 트리미아에게 태연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당할 생각은 없으니까."

"방법이 있겠느냐? 남부 귀족들의 성화를 잠재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희는 변명도, 회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시하시면 됩니다."

백작이 난처한 얼굴로 트리미아를 바라봤다.

자신의 병력을 돌려 달라고 아우성인 귀족들의 요구를 무시하면 트리미아의 군이 가진 정당성이 흔들릴 테니.

"그건...."

백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트리미아가 덤덤히 말했다.

"이안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욕먹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요."

"귀족들의 요구를 묵살했다는 게 알려지면...."

"병력을 차출한 모든 귀족을 적으로 두게 되겠지요."

트리미아는 진심으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령 왕국의 모든 귀족을 적으로 둔다고 해도, 이안을 위해서라면 정말 상관없습니다."

백작이 모호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트리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이 왕국에 제 편은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적이 몇 늘어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겠습니까."

트리미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동안 대화를 나눠 본바.

북부 귀족들이 모인 건 왕이 암중에 지지하고 있는 왕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오해 때문이었다.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은 혈통을 앞세운 협박과 세 치 혀로 모은 것이고.

그중 진심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백작과 트리미아의 대화를 듣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저들이 소문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니까."

"어떻게?"

"적이 없는 게 문제라면 적을 보여 주면 그만이지."

오크를 눈앞에다 가져다 놔도 왕국군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겠지만, 속 타는 다른 귀족들도 그럴까?

"모너가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내가 호구로 보였나 본데."

『로스트 크로니클』의 기본은 정정당당하게 날조와 선동으로 승부하기다.

이안의 모습을 철저히 숨기고 소문과 선동으로 다른 영웅들을 움직이는 것.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왕가뿐만이 아니거든."

비틀린 미소를 머금은 입과 달리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안이 짓씹듯 말했다.

"감히 모너의 백성을 노렸다는 건, 그만한 각오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 * *

다음 날.

이안은 칼루아와 함께 마물의 숲으로 향했다.

- 뱀고기! 뱀고기!

이번 일을 끝내고 나면 서펀트 킹을 먹어도 된다는 말에 신난 칼루아의 꼬리가 세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 그렇게 꼬리 흔들 거면 머리에서 내려오랬지."

- 싫다!

칼루아는 인간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사납다니까."

- 으악, 인간 치사하다!

징징거리는 칼루아를 어깨에서 내려놓자, 칼루아가 두 발을 번쩍 들고 날개를 펄럭였다.

"…안아 달라고?"

- 핫!

재빨리 시선을 피하면서도 날개를 펄럭이는 게 안아 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이상한 버릇이 생긴 것 같은데....'

귀찮은 얼굴로 칼루아를 안아 들자, 칼루아의 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냥 흔들어."

- 응? 아닌데? 괜찮다!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흔들리고 있다만.

- 아니, 뭐 이건 마나를 호흡하는 것처럼 당연한....

궁색한 얼굴로 변명하는 칼루아의 콧등을 살짝 누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인간,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앞으로 한 네 시간?"

- 레이나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배은망덕한 도마뱀을 노려봤다.

"뭐?"

-레이나도 왔으면 좋았을 거다. 레이나도 인간을 보고 싶어 했으니까.

아니, 그건 듣기 좋은 말이지만.

이 도마뱀 새끼가 근데...?

"왜 난 인간이고 레이나는 레이나지?"

움찔.

"목숨도 구해 주고, 밥도 주고, 재워 주는 것으론 부족했나?"

움찔.

- 이, 인간은 다르니까!

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칼루아를 노려보자, 꼬리와 날개를 동시에 축 늘어트린 칼루아가 소심하게 외쳤다.

- 인간은 다르다!

그러니까 뭐가.

뭔가 애완동물한테 배신당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에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찌익!

- 아, 다람쥐다 다람쥐!

저 멀리서 마물 다람쥐의 울음소리를 들은 칼루아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본 것처럼 꼬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 인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놓치면 안 되는데!

속이 뻔히 보이는 다급한 외침에 피식 웃은 후 다람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찌익!

반갑게 손을 흔드는 다람쥐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뒤 칼루아를 다람쥐 옆에 내려놨다.

찌익! 찍! 찍!

- 안녕, 작은 종족아! 맞아, 맞아 나도 보고 싶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는 듯 칼루아의 코를 툭툭 치는 다람쥐의 모습에 웃음을 삼켰다.

'저 정도면 진짜 도마뱀이 아닐까?'

마물 다람쥐가 살갑게 인사하는 드래곤이라니.

- 뭐? 살이 찐 게 아니라 건강해진 거다!

찌익?

- 그렇지! 건강해진 거지!

포동포동한 몸집으로 고개를 쳐들고 당당히 말하는 도마뱀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다람쥐를 향해 말했다.

"자, 인사는 이쯤하고. 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만."

찍?

칼루아의 번역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준비한 자루를 풀었다.

서번트의 씨를 말리면서 얻어 낸 마석들이 자루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대륙에 있는 서번트와 늪의 서번트의 식성이 같다면....'

대륙에 있는 서번트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 바로 마물 다람쥐다.

숲의 주민인 다람쥐와는 전혀 다른 종족에 가깝겠지만, 오크 마석도 좋아하던 다람쥐라면 서펀트의 마석도 좋아할 터.

찍! 찍! 찍!

두 손을 뺨에 댄 채 펄쩍 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다.

"이걸로 한동안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찌이이익?

- 어디로 가고 싶냐는데?

마물 다람쥐보다 숲에 해박한 종족은 손에 꼽을 것이다.

숲의 그 어떤 종족보다 많은 동족과 정보를 교환하고, 때에 따라 동족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오는 길에 보니, 숲의 길이 바뀌었더군요."

짐짓 모른 척 말하니, 두 손을 허리에 올린 다람쥐가 성난 목소리로 찍찍거렸다.

- …음?! 요정이 미쳐서 숲을 헤집어 놨데! 외각에 숨겨 둔 마석을 전부 잃어버려서 엄청 속상하다는데!

역시.

숲에 들어섰을 때부터, 미묘하게 바뀐 표식의 위치에 짐작하고 있었다.

마녀가 오크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숲을 움직이고 있다고.

'그걸 다람쥐가 좋아할 리도 없고.'

다람쥐는 나와 마녀의 관계를 모른다.

만약 나와 마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저 작은 손을 휘두르며 항의했을 테니까.

입술에 기름을 두르듯, 침을 바른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숲을 벗어나는 걸 숲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찌익?!

- 정말?!

당연히 뻥이다.

숲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나무의 길을 바꿀 수 있을 리가.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인간한테 호의적이진 않겠지.'

하지만 다람쥐는 다르다.

다람쥐는 좋은 거래 파트너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크를 싫어하던 다람쥐가, 오크 때문에 숲이 화났다고 생각한다면....

찍! 찍! 찍!

새끼손가락만 한 발로 나무에 구멍을 낸 다람쥐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 작은 종족이 못된 오크한테는 언제든 데려다줄 수 있대! 나쁜 놈들! 먹을 걸 빼앗다니!

아니, 먹을 걸 빼앗은 게 아니라 그냥 잃어버린....

찍! 찍! 찍!

- 맞아! 남의 식량을 뺏는 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못된 놈들이지!

'역시 마녀랑 거래를 했다는 건 숨기길 잘했어.'

원수를 욕하는 것처럼 성난 두 마리의 동물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건...."

킬킬 웃은 이안이 다람쥐 앞에 쪼그려 앉아 악당 같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 인간, 역시 인간은 악마가 확실하다!

가끔씩 대드는 도마뱀의 콧등을 때리면서.

* * *

두 달 동안 훈련장에서 훈련이나 할 생각은 없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오크가 요새에 다가오지 못하는 시간'일 뿐, 우리가 공격할 수 없는 시간은 아닐 테니까.

'숲과 지형이 바뀌면 분명 낙오되거나 고립되는 오크들이 생길 거야.'

그놈들을 노린다.

숲의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을 이보다 안전하게 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니까.

'역시 제일 좋은 전략은 나 혼자 하는 전쟁이지.'

앞으로 두 달.

그 후에는 오크를 두려워하는 병사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크도 없을 테고.

"승률이 조금은 더 올랐어."

- 응?

"이제 반반은 훨씬 넘었으니까."

이날.

모너의 전쟁이 시작됐다.

117화

"전방에 오크 무리입니다."

"수는?"

피곤이 묻어나는 트리미아의 목소리에 미간을 좁힌 기사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 숲에 들어선 지도 벌써 이 주가 지났습니다. 이제 돌아가도...."

트리미아는 몰려오는 잠을 쫓기 위해 눈가를 주물렀다.

'진짜 피곤하긴 하네.'

이 지긋지긋한 숲에 들어선 지도 벌써 이 주가 지났다.

그동안 스무 번이 넘는 전투를 벌였으니, 하루에 두 번꼴로 싸운 셈이다.

지치는 건 당연했다.

병사들도, 기사들도, 자신도.

그건 숲에 있을 모든 부대가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한 달 반 동안, 특임대는 훈련을 명목으로 숲에서 살 생각입니다.]

이안이 말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마물의 숲은 단 일주일을 버티기도 어려운 곳이었으니까.

[안전하게 소규모 전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병사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트리미아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군대를 바라봤다.

각자의 병장기를 관리하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한 치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수십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저들이 익힌 건, 이 숲속에서의 전투뿐만이 아니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

천이 넘는 오크를 죽이면서, 저들은 사냥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크가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수는?"

"이백이 넘지 않습니다."

"잘됬네. 빨리 끝내고 좀 쉬자고."

천 근 같은 몸을 일으킨 트리미아가 옆에 놓인 회백색의 활을 집어 들었다.

서번트 킹의 인대와 뼈로 만든 활 유티크 급의 활 [오크 학살자].

일반 서번트를 이용해 만든 [오크 사냥꾼]에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멋진 활이었다.

이안의 처참한 네이밍 센스에 이 역작을 만든 대장장이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는 걸 제외하면.

'어울리는 이름인데.'

트리미아는 이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가자! 사냥 시간이다!"

"우! 우!"

지금 이 순간.

그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테니까.

* * *

- 크르륵?

대전사 하이푼이 눈을 비볐다.

- 크륵?

군단이 없어졌다.

위대한 왕의 깃발도, 위대한 전사들의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자신의 분대뿐.

- 전부 일어나라!

그가 소리치자 사방의 텐트에서 오크들이 기어 나왔다.

- 크륵?

- 본대가 없다!

- 길이 없어졌다!

그나마 똑똑한 그의 부하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 숲의 저주다!

하이푼은 그 즉시 도끼를 휘둘러 저주를 입에 담은 놈의 머리를 자르고 몸을 던졌다.

- 먹어라.

- 크르르륵!

저주라는 말에 당황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죽은 오크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 내 것!

- 꺼져라! 내가 먹는다!

- 나도 배고프다!

시끄러워진 분대를 본 하이푼이 익숙한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 너, 너, 너. 주변을 탐색해라.

- 크륵?

그가 가리킨 병사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죽은 오크와 하이푼을 번갈아 쳐다봤다.

- 오늘 저녁이 되고 싶지 않으면.

- 아, 알았다!

무기도 두고 달려가려는 병사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뒤, 그가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해.'

숲이 분노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멍청한 주술사가 뭔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늘 저녁은 배부르게 먹겠다며 웃어넘겼고.

'진짜 숲이 노한 건가?'

분명히 앞에 있던 길이 없어지고, 군단이 사라졌다.

'그러면 왜 난 혼자 남았지?'

순간 오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특별하니까.'

다른 멍청한 것들과는 달랐다.

그는 위대한 왕이 최전방에 배치할 정도로 위대한 전사였으니까.

저녁 배식에 오크 고기가 들어갔다는 걸 제일 먼저 깨달은 대전사도 그였고, '식사'를 준비할 권한을 얻은 것도 그였다.

순간 오래전 주술사가 왕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심부에 들어가기 위해선 숲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가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아직도 군단은 보이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던 오크도, 수백 개의 깃발도,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던 횃불도.

'숲이 그들을 벌하고, 나는 살려 줬다.'

두근.

'숲은 지배자를 인정한다.'

두근.

'숲이 날 인정했다.'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 크륵, 순찰 나간 놈들이 돌아오면 심부로 가야겠다.

왕이 명령했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을 뿐.

그는 숲을 벗어나기 싫었다.

외각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의 공기가 얼마나 더럽고 불쾌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 크륵, 멍청한 왕이 죽었다.

왕을 따르던 군대장들도 죽은 게 분명했다.

이곳에 남은 가장 위대한 전사는.

-크륵.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하이푼이 광오한 웃음을 뱉으려던 순간.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눈앞에 보였다.

- 크르륵?!

재빨리 몸을 움직여 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오크들은 아니었다

- 크르륵!

- 크아아악!

자신의 분대가 죽어 가고 있었다.

아니지.

이제 난 왕이니까.

내 백성이 죽어 가고 있다.

- 크르르륵! 이놈들이 감히!

커다란 도끼를 움켜쥔 그가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저건 또 뭐야?"

"한두 번 보냐? 눈 벌건 거 봐라. 미친놈이지."

피식 웃은 병사가 시위를 당겼다.

기이이익.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오크 사냥꾼]이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당겨졌다.

"저놈 저거 설마 군단장 아니야?"

"군단장이었으면 벌써 도망쳤지. 저번에 못 봤냐? 탈리가 그놈이랑 눈 마주치고 지렸잖아."

병사가 당당히 달려오는 오크를 보고 불안한 듯 읇조리자, 조장이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조장, 아무리 오크라도 맨몸으로 사로(射路)에 뛰어들 정도로 멍청할까?"

순간 킬킬거리던 조장이 웃음을 멈추고 왕자의 깃발을 바라봤다.

"괜찮아, 괜찮아."

조장은 그 어떤 장군이나 지휘관보다 왕자를 더 신임했다.

'왕군'에 처음 들어와 남부 중소 영지의 몬스터를 소탕할 때만 해도 전투 횟수만큼이나 퇴각 횟수가 많았으니까.

왕자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전투의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위험하면 도망쳤겠지."

"뭐, 그렇지."

어깨를 으쓱인 병사들이 다시 맹렬하게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활을 겨눴다.

"발사!"

뒤에서 들려온 지휘관의 외침에 화살이 시위를 떠난 순간.

"크륵? 크르륵!"

맹렬한 기세로 하이푼의 눈에 수십 개의 화살이 보였다.

급히 도끼를 움직여 몸을 보호했지만, 아무리 대전사인 그라도, 끊임없이 날아오는 화살을 전부 막는 건 불가능했다.

쿠드드득!

뚫린 목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하이푼은 희미한 의식을 부여잡고 생각했다.

'왕, 왕이 되어야 하는데!'

* * *

"회수를 시작한다!"

싱거운 전투가 끝나고 바삐 움직이는 지휘관을 바라보던 트리미아의 곁으로 부관이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왕자님."

"그놈의 왕자 소리 좀 그만해."

요새에서는 이안을 '특임대장'이라고 불렀다.

특임대도 이안을 소공작이 아닌 '대장'이라고 불렀고.

"알겠습니다, 군(君)."

트리미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부관을 노려봤다.

그를 대장이 아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거지.'

어디까지나 빌려서 만든 병사들일 뿐, 자기 병사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라는 것.

드미트리 후작이 붙여 둔 부관답게 이런 데서 철저했다. 그렇다고 내치자니 후작군이 이탈할 테고.

'어쩔 수 없지 뭐.'

차라리 병사가 아니라 돈을 뜯어서 용병을 고용할걸, 하고 혀를 찬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마음대로 불러. 부상자는?"

"없습니다."

당연했다.

검을 뽑기도 전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으니.

"부산물 회수가 끝나는 대로 내일 아침까지 쉬라고 해. 기사들만 몇 명 뽑아서 나랑 같이 이동하고."

부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에도 부산물은 전부 모을까요?"

저건 '오크의 부산물은 쓸데도 없는데 마석만 채취하고 버리자'라는 뜻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건 회의 때마다 기사들이 그 부산물을 옮겼기 때문이고.

부관에 대한 사소한 복수로, 짐을 옮기는 건 기사 중에서도 드미트리 후작가의 기사들이 전담했다.

"당연히 전부 회수해야지. 이안이 쓸 데가 있다고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기사들을 떠올린 부관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하자, 트리미아가 싱긋 웃었다.

"말 안 듣는 놈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전시에 명령을 무시한 놈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을 잘라 줄 테니까."

후작가의 기사들이 반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였다.

벌써 몇 번이고 다른 기사단과 문제를 일으키고, 작전을 무시하고 날뛰었으니.

만약 기사단이 짐꾼 역할을 거절하면 트리미아는 웃으면서 검을 뽑을 생각이었다.

'쓸 수 없는 말은 일찍 치워 버리는 게 더 나으니까.'

삐뚜름한 미소를 본 부관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에 감히 왕자님의 명령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부관을 보며 트리미아는 피식 웃었다.

* * *

그날 밤.

군에게 휴식을 명한 뒤, 다람쥐를 따라 이동하자 익숙한 천막이 보였다.

"혹시 내가 제일 늦었나?"

밖에 쌓인 부산물 자루들을 보고 물으니, 다람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소리 듣겠네."

트리미아가 뒤에 선 기사들을 흘겨봤다.

"면목이 없습니다."

"당연히 없어야지. 기사가 돼 가지고 병사보다 걸음이 느리다는 뜻이니까."

실제로 걸음이 느린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천천히 걸었을 뿐.

그를 따라온 세 명의 기사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벌하기 어려운 일로 귀찮게 만들고 사과한다.

기사가 직접 고개를 숙였으니 사과를 받지 않을 수도 없다.

명령을 어긴 것도 아니고, 그저 '걸음이 늦었을 뿐'이니까.

트리미아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천막에서 나온 이안이 건들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 후작가의 기사단이 병사보다 못한 게 너희 잘못은 아니니까."

그리곤 기사단의 어깨를 토닥이며 힘들겠지만 어쩌겠냐는 듯 트리미아를 보며 말했다.

"기사들은 주군이랑 비슷해지더라고."

너희가 병신인 건 후작이 병신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옆의 두 기사가 주먹을 불끈 쥔 것을 본 단장이 재빨리 전음을 날렸다.

- 정신 차려라! 소공작이 후작님을 욕했느냐! 모너의 소공작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지 않았나!

전음을 들은 두 기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화를 삭이기 위해 숨을 들이쉰 순간, 트리미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안이 태연히 말했다.

"왕자님, 전쟁이 끝나도 절대 잊지 마셔야 합니다."

"뭐를...?"

갑작스러운 존대와 호칭에 눈을 동그랗게 뜬 트리미아에게 이안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셋의 주군이 왕국의 재상 아닙니까? 폐하께 엎드려 고해야지요. 재상의 능력이 심히 의심된다고."

눈에 살기가 서린 단장이 검집에 손을 올리는 걸 보고서도, 이안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주군의 명예를 욕보인 것만으로 저들은 기사가 아니고. 부끄러움도, 명예도, 신의도 모르는 개만도 못한 것들을 기사랍시고 서임했으니."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이안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실로 무능력하거나...."

버질과 테일이 세 기사 뒤에서 나타났다.

"후작은 처음부터 오크가 왕국의 영토를 침략하길 바랐거나."

천막에서 나온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자, 단장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이안이 웃으며 단장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역모? 항명? 역시 네 주인은 웨어울프의 아종이었나?"

으드득!

굳은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을 때, 트리미아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핫! 웨어울프 아종? 후작을 개새끼라고 부른 거야?"

한참을 꺽꺽거리며 웃던 트리미아가 세 기사에게 턱짓했다.

"됐으니까, 자루만 거기다 두고 먼저 돌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안을 무시하고 세 기사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빨리. 여기 있어 봤자 좋은 꼴은 못 본다니까? 명령이니까 어서 돌아가."

단장과 두 기사들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봤다.

118화

트리미아와 천막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모굴이 우리 둘의 표정을 확인했다.

"잘 안 풀렸나 보군."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자, 트리미아가 난처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거, 다들 알고 계셨습니까?"

설마 지금까지 몰랐을까.

자리에 있던 리나와 모굴, 심지어 칼루아와 안내를 맡은 다람쥐들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이거 부끄럽네요. 제 손에 있는 군도 제대로 못 다루는 멍청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는데."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하는 트리미아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역도, 주인도 다른 오합지졸로 이 정도까지 하는 게 기적이지."

제대로 된 지휘 경험이 전무했던 트리미아가 마구잡이로 섞인 군대를 이끌고 승전보를 올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모굴과 리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지역도, 주인도 다른 병사들을 저렇게 훌륭히 부리는 건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내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백작이 먼저 말했다.

"하나, 병사들과 기사들은 다르다. 고위 귀족가의 기사라면 더더욱."

모굴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바친 기사는 주인이 아닌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설령 주군의 명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사는 부리기 힘들다.

기사를 설득하느니, 버리는 패로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기사를 회유하는 건 어려워."

트리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전장에 서야 하는 아군들에게는 위험하고."

오늘 끼어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벌서 2주가 지났는데도 후작가의 기사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전장에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지휘관인 트리미아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그건...."

트리미아가 뭐라 말하기 전에, 단호히 말했다.

"회의마다 1시간을 늦었어. 우리가 매일 전투를 벌인다는 걸 알고 있는 놈들이 의도적으로."

난 트리미아를 믿는다.

내가 게임 속에서 가장 좋아했던 지휘관이 트리미아였으니까.

그라면 분명히 기사들을 포용할 수 있다.

오합지졸을 모아 '저항군 심법'을 익힌 내 군대만큼이나 강한 군단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과정이 문제다.

"그놈들은 고작 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근데, 그 한 시간은 우리가 본대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야. 내 군대뿐만이 아니라, 우리 전부가 가장 약해져 있을 시간."

심지어 각 군에 안내자도 없는, 가장 위험한 시간이었다.

"이번 기회에 말하자면, 난 후작가의 기사단 전체보다 내 병사 한 명이 더 중요해."

덤덤히,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지금은 넘어가지만, 그놈들 때문에 내가 병사를 잃는 날이 오면. 그때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

후작이 정말 우리 임무를 방해하라고 명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사는 그 어떤 적보다 위험하고, 위협 요소는 싹이 나기 전에 자른다.

이건 트리미아가 내게 가르쳐 준 전략이었다.

* * *

"자, 심각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번 주 귀환은 모굴 백작님이 해 주십시오."

백작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난 아직 괜찮다."

"누가 안 괜찮을 거라 했습니까? 마스터가 멀쩡한 건 당연하지."

"…왕자의 군대를 보내지. 휴식이 필요한 건 그들이니까."

모굴의 말에 슬쩍 트리미아를 바라보자 어느새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트리미아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저희 군이 가장 경험이 부족하니 제가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병사들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렁뱅이였던 놈들이다."

"뛰어난 지휘관이 있으니, 경험이 중요하겠습니까?"

"그 재수 없는 귀족들의 병사들을 그럴듯하게 만든 왕자만 할까."

이쯤 되니 여유가 넘치던 트리미아의 얼굴에도 난처함이 서렸다.

"아니, 백작님, 백작님은 마스터인데...?"

누가 봐도 더 많은 전투 경험이 필요한 건 자신인데 왜 자기를 보내려고 하냐는 듯한 시선에 모굴이 당당히 말했다.

"돌아가기 싫다."

* * *

돌아가면 스벤과 역할을 바꿔야 한다.

즉, 스벤 놈이 숲에서 하하호호 뛰어노는 동안 자신은 요새를 지키면서 요새의 업무를 봐야 한다는 뜻.

모굴은 회의장에 오기 전, 베인의 간곡한 부탁을 잊지 않았다.

'백작님!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셔서는 안 됩니다. 프론트 홀드의 업무량은 센트럴 홀드의 세 배가 넘는답니다!'

반쯤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허허 웃은 베인이 보였던 그 결연한 얼굴까지도.

'만약에 저 혼자 요새의 업무를 보게 된다면, 전 무슨 일이 있어도 탈영할 겁니다.'

사직서는 찢으면 되지만 탈영은 곤란했다.

그러니 스벤과 정한 최대 기한인 한 달을 꽉 채운 뒤에 고민할 생각이었다.

"...?"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놈들을 향해 백작은 다시 한번 분명히 말했다.

"돌아가기 싫다."

일하기 싫어서 돌아가기 싫다고.

* * *

가기 싫다고 때를 쓰고 있는 두 사람을 한심하게 보고 있으니, 리나가 날 바라봤다.

"흑귀대는 남아."

비교적 오래 훈련한 데다 특성까지 가지고 있는 흑귀대는 휴식보다 경험이 더 필요하다.

그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눈앞의 두 사람이었다.

'트리미아는 자기와 군대가 전부 지쳤을 테고, 전투 경험이 없던 백작의 군대는 지금쯤 기어 다니고 있을 텐데....'

- 인간! 우리가 가자! 우리가!

테이블 위에 있던 칼루아가 신나서 소리쳤지만, 다른 세 부대를 다 합쳐도 특임대만큼의 성과는 못 낸다.

훈련만큼이나 적의 수를 죽이는 것도 중요하니 특임대는 빠질 수 없다.

'흠....'

나도 빠지긴 싫었는데.

어쩔 수 없지.

슬슬 해야 할 일도 있고.

"그럼 이번 귀환은 제가 하겠습니다. 대신 백작님의 병력을 데려가죠."

전투 경험이 전무하던 백작의 중앙군은 휴식이 필요했다.

백작도 그걸 알고 있을 테고.

"끄응… 그동안 네 분대를 내가 맡으란 뜻이냐?"

"예. 뭐, 특임대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딱히 백작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인 뒤, 고개를 돌렸다.

"트리미아도 각 가문에서 5명 정도의 인원을 빼 주고."

잠깐 눈썹을 좁혔던 트리미아가 이내 이유도 묻지 않고 답했다.

"음. 그러지."

"좋아. 대신, 중앙군이나 특임대에서 멀쩡한 애들을 붙여 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수가 줄었을 때를 대비한 훈련이라 생각하지."

트리미아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세 사람이 준비한 자료를 확인했다.

"2주 동안 모은 마석은 5천이네요."

다시 말하면 2주 동안 사냥한 오크가 5천이라는 뜻이다.

네 부대에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저 놀라운 전과였다.

기대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제 다들 전투에는 익숙해진 것 같으니, 좀 더 큰 목표를 노려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각 분대가 동떨어진 소규모 오크들만 노렸다.

당연히 사냥 시간보다 이동 시간이 더 긴 경우도 빈번했고.

"남은 2주 동안은 되도록 큰 규모의 적들과 싸워 보시죠. 안내자한테는 제가 전해 두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큰 규모의 적들을?"

"남은 시간 동안 최소한 2만 5천은 더 줄여야 하니까요."

순간 백작의 시선이 트리미아에게로 향했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트리미아의 분대에게는 무리일 거라는 뜻이었다.

"괜찮습니다. 그것까지 고려해서 말할 테니까요. 거기다 트리미아는 싸우지 않아야 할 전장을 파악할 수 있으니."

"금칠은 무슨, 그냥 겁이 많은 거지."

백작의 시선을 마주한 피식 웃은 트리미아가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트리미아의 판단은 특성이나 다름없다.

"자, 일단 그렇게 아시고 저는 오늘 중앙군과 복귀하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중앙군은 요새에 가서도 쉴 수 있으니까요."

한 분대가 비는 시간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 다들 다음 회의 때 뵙겠습니다."

* * *

"후작님, 긴급 보고입니다."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은 눈으로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와 씨름하던 후작이 시종장이 건넨 보고서를 받아들였다.

[긴급 - 모너 동향 보고]

아직도 정체를 들키지 않은 왕국의 세작들과 세 백작가에 상주하고 있는 부장군의 보고는 짧았다.

"쯧, 아직도 변한 건 없나."

저번 주와 변한 게 없었으니까.

네 개의 분대가 실전 훈련을 위해 숲에 들어갔고, 요새에서는 전쟁에 대비한 훈련과 공사가 한창이다.

특이점이 있다면, 실전 훈련이 시작된 뒤 요새에는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악수(惡手)인지 묘수(妙手)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렇게 말했지만, 후작의 심정은 달랐다.

2왕자의 회군을 요구하는 귀족들을 철저히 무시한 건, 볼 것도 없는 악수였다.

훈련을 명목으로 숲에 들어간 건 나쁘지 않은 계략이었지만, 그 결과가 나빴다.

'요새가 안전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열흘이 넘도록 요새를 공격한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없다는 소식이 퍼지자, '모너를 노리는 적은 없다'라는 소문에 점점 더 무게가 실렸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귀족들조차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이미 병력을 내준 귀족들의 불안이 한계에 달했다. 몸이 단 놈들은 벌써 세 백작가로 향했을 테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국왕이 쉬지 않고 세 백작가에 주둔 중인 왕국군을 입에 담은 만큼, 불안에 떨고 있던 귀족들은 세 백작가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반역과 무관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왕국군을 증인으로 삼아 모너에게 요구할 것이다.

'적을 보여 주든가, 병사를 돌려 달라고.'

보여 줄 오크는 없다.

병사를 돌려줄 수도 없고.

'모너는 다시 한번 무시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럼 왕은 '반역'을 들먹이며 모너를 물 샐 틈 없이 포위할 것이다.

모너와 오크,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이게 정말 옳은 선택인가...."

잠깐 고민하던 백작이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어.'

왕가파인 자기 말이라면 다른 귀족들도 알아먹을 터.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 모너를 위해 국왕의 진노를 살 생각도 없고.'

그가 원하는 최고의 그림은 모너와 오크의 상잔이었다.

그럼 불필요한 백성의 피가 흐를 일은 없을 테니.

'딱 그 정도만 움직이는 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한 후작이 몸을 일으켜 집사를 찾았다.

가문을 이끄는 귀족으로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는 없었지만, 왕국의 신민으로서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

* * *

"…해서, 말씀하신 대로 옵솔에 귀족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릴리아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여론전으로 모너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론이 아니라, 모너를 포위할 명분을 얻기 위해서겠지요."

아마 그럴 것이다.

모너가 포위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건 진심으로 놀랍지만.

"나라면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돌릴 텐데 말이지."

릴리아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었다.

'농담 아닌데.'

내가 모너를 포기해도 두 백작과 모너의 백성 중 대부분이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남아 있을 뿐.

왕국군이 모너를 포위하면 강제로라도 전군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두 백작을 감금하거나 모너의 백성을 전부 납치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부 좋잖아. 땅도 비옥하고 농사도 잘되고 자원도 풍부하고."

영지의 가치만 비교해도 범접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물론 그러시겠죠. 공작님이라면 분명 숲의 몬스터가 대륙을 넘보는 걸 무시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릴리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지만, 달처럼 휜 눈이나 조롱이 가득한 목소리를 보니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진짠데. 난 우리 가문이 독박을 쓰고 있는 게 굉장히 불만인 사람이야."

"예, 예, 남부의 변경백도 비슷한 소리를 달고 산다고 들었습니다."

그 인간은 뼛속까지 기사다.

왕국의 영토를 지키기는 변경백의 가문에서 태어난 걸 영광으로 아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기사.

'날 좋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난 그렇게 착한 인간이 아니다.

몇 번 입을 달싹이다, 말을 돌렸다.

내가 나쁘다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도 웃기니까.

"아까 후작이 움직였댔지?"

"예. 황궁의 게이트를 통해 이동한다고 했으니,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래. 후작이 도착하는 대로 전해. 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놈들은 적을 보길 원하고, 마침 나한테는 오크 머리가 5천 개나 있다.

"우리 투자자님들께서, 오크 대가리를 보고 싶다는데 그 정도야 원 없이 보여 줘야지."

물론 공짜로 보여 줄 생각은 없었지만.

119화

불안한 얼굴을 한 헤이트리 자작은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손톱을 씹었다.

'후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멋들어진 조각상을 볼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가늘고 길게.'

자랑스러운 가훈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자작의 바람은 소박했다.

죽기 전까지 작고 소중한 그의 영지를 떠나지 않는 것.

- 아버님도, 할아버님도 그랬어.

모든 문제는 욕심에서 시작되고 욕심만 버리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자작은 그 가르침을 뼛속 깊이 아로새겼다.

영지에 가끔 오는 공자들과 공녀들을 볼 때마다, 그들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자작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의 자녀들조차 사교계와 정계에 발을 들인 순간 불행의 늪에 빠졌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린 자작은 두 손을 불끈 쥐고 다짐했었다.

- 난 절대, 절대, 영지를 벗어나지 않을 거야.

자작의 다짐은 지금껏 흔들린 적이 없었다.

'2왕자와 모너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후....'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떨쳐 내기 위해 심호흡을 하던 그의 눈동자에 크리스털로 만든 샹들리에가 담겼다.

항상 허리띠를 조여 매고 있는 자작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치품.

북부의 세 백작가 중 가장 부유한 가문이라는 걸 드러내듯, 옵솔에는 저런 사치품이 걸음마다 널려 있었다.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영주님."

옆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린 그가 잘근잘근 씹어 대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으, 응...?"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저기 다른 귀족분들도 많잖아요."

순간 샹들리에 밑으로 시선을 힐끗 내렸던 자작이 재빨리 시선을 위로 돌렸다.

"…영주님?"

"...."

"샹들리에가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아니!"

"그러면 왜 샹들리에를 그렇게...."

연회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샹들리에를 보고 있으니 눈이 따갑고 뒷목이 당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라가 그랬잖아...."

영지에서 가장 현명하고 착한 사라가 단호하게 말했으니까.

"바닥만 보고 있으면 영지고 뭐고 도망칠 거라고...."

사라가 차게 식은 표정으로 자작을 바라봤다.

백작가에 들어온 후로 허리를 반쯤 접고 다니길래 한마디 했을 뿐이다.

"천장을 보라는 뜻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우스꽝스럽게 천장을 보고 있는 자작의 모습에 사라가 주먹을 작게 쥐고 말했다.

"자, 영주님. 절 보세요."

"으, 응."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동공을 본 사라는 화를 내려다가도 피식 웃음을 삼켰다.

헤이트리 자작은 절대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다. 따지자면, 재능이 넘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지난 오 년간, 영지민을 위하는 선정(善政)을 펼치면서도 그의 영지를 두 배 이상 성장시킬 정도로 뛰어났으니.

아주 사소한 단점이 있다면, 영지를 벗어나는 순간 겁먹은 거북이처럼 움츠러든다는 것과 귀가 얇다는 것 정도.

"자작님, 천장만 보고 있으면 눈 아프지 않으세요?"

"아, 아니, 괜찮아. 다른 귀족들은 샹들리에보다 번쩍이는걸."

멍청한 소리에 순간 두 주먹을 움켜쥔 그녀가 빠르게 되뇌었다.

'…사소해, 사소해. 우리 영주님이잖아.'

애초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그녀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였다. 2왕자의 요구에 식량 대신 병력을 내어 준 건 그녀의 선택이었으니까.

만약 자신이 결사코 반대했다면, 왕손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작은 병력을 내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 미친놈이 아직도 영지에 있었겠지.'

* * *

사라는 그날을 떠올렸다.

왕자가 영지를 방문하고 자작이 얇은 귀를 펄럭이며 자신을 찾아왔던 그날.

- 사라! 사라! 큰일이야!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누가 또 자작에게 사기 쳤다는걸.

-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라는 미간을 좁혔다.

그날 영주성에 있는 손님은 왕자밖에 없었으니까.

- 사라! 이번만큼은 내 말 좀 들어 봐, 이건 정말 큰일이라니까!

격양된 얼굴을 보자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자작은 자기가 잘 속는다는 걸 알고 있고, 본인의 생각보다 사라를 더 믿는다.

그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뒷돈을 챙기던 시녀장과 선대의 임종 후 영지를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들던 집사를 해고했을 정도로.

자신이 반대하는 일에 자작이 저렇게 열을 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왕자님이 오셨는데, 글쎄 뭐라고 하셨냐면....

영지민을 지키기 위해서.

숨소리만으로 쇳소리와 유황불을 일으키고 아녀자를 취해 새끼를 낳는 몬스터는 절대 영지의 병력만으로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걸 믿는다고...?'

그녀가 손에 있던 서류를 확인했다.

[영지 남동부 오크 토벌 계획서]

영지에도 있는 오크를 자작이 모를 리가 없다.

자작은 귀가 얇은 거지, 멍청한 게 아니다.

'왕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왕족의 말이라면, 그것도 왕자의 말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왕족이 사기를 쳤다는 게 드러나면 왕가의 명예가 흔들릴 테니까.

무엇보다 왕족이 고작 자작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정말 사실인가?'

설령 그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모너를 노리고 있다고 해도, 2왕자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왕가가 제국을 견제하느라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왕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받아 오면 그만이다.

'명령서도 필요 없지.'

외부에 끈 하나 없는 헤이트리 자작가가 왕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자작이 직접 병력을 내어 주길 바란다는 건.'

처음에는 왕자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오크가 그런 괴물이라는 걸 믿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주변의 웃음거리가 되겠지.

문제는 대상이 헤이트리 자작이라는 것.

'우리 영주님은 성 밖으로도 잘 안 나가는데?'

놀리고 싶어도 놀릴 수가 없다.

설령 웃음거리가 된다고 해도, 자작은 꿈쩍도 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려면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데, 자작은 둘 다 없었다.

그의 자존심은 '영지에서 내가 최고'라는 데 있고, 그의 자부심은 '내가 영지민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라는 데 있다.

'그럼 뭐지? 왕가에서 자작가를 압박하려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방법이다.

차라리 후작이나 백작 같은 왕가파의 고위 귀족을 보냈겠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내린 결정은 간단했다.

'뭐든 상관없어.'

몇 번을 봐도 그림이 이상하다.

그럼 그림을 고칠 게 아니라, 시선을 돌리면 그만이다.

'거절하자.'

혹시라도 그걸 빌미로 자작가를 벌할까, 그녀는 왕자를 직접 찾아갔다.

'만약에라도 내가 죽으면, 영주님은 절대 왕자를 돕지 않을 거야.'

굳은 얼굴로 트리미아의 방에 찾아갔을 때.

그의 방문이 열리고, 눈을 마주친 순간 그가 말했다.

"아, 거절은 거절할게."

참담한 심경으로 무릎이라도 꿇으려던 그녀의 어깨를 잡은 왕자가, 새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네가 뭘 하던, 병력을 주기 전까지 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 웃음과 눈동자에 담긴 광기(狂氣)를 읽은 사라는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

"왕국의 안녕을 위해 병력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눈앞의 왕자는 처음부터 허락을 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허락을 표하는 것만을 허락했을 뿐.

'미친놈.'

트리미아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 * *

"어, 어...?!"

자작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그녀가 자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에 둘러싸인 귀족이 보였다.

'누구지?'

백발을 단정히 넘긴 노인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고위 귀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노인을 바라보던 자작이 비명처럼 읇조렸다.

"후, 후작님?"

'후작?'

순간 사라의 눈이 빛났다.

'설마 후작도 병력을 지원한 건가?'

가까이 가서 귀동냥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자작이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자작은 후작을 본 것만으로도 기절하기 직전이었으니까.

"사, 사라, 어떡하지? 후, 후작께서 여기까지 오신 건...."

"쉿."

자작을 조용히 만든 사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후작님이… 모너도… 어쩔 수 없을 것...."

연주 소리와 웃음소리에 묻혀 듣기 어려웠지만, 후작은 모너를 압박하기 위해 온 게 맞는 것 같았다.

"자작님."

"으, 응?"

"설마 후작님도 왕자님께 지원하신 병력이 있으신가요?"

"음… 글쎄...?"

게이트도, 마탑도 없는 자작가가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편지와 전령을 이용해야 했다.

"아직 편지를 받아 보질 못해서...."

"그러니까 제가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라고 몇 번을...!"

미간을 좁힌 사라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작을 노려본 순간, 사라의 눈동자에 뒤에 있는 미남이 보였다.

'응?'

연회장의 구석에 쭈그려 있는 자작보다 더 구석에 있는 인간이라니.

'완벽해!'

얼굴이 급이 다르긴 하지만, 자작의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자작님, 저기 뒤에 저분 보여요?"

"음...?"

"계속 천장만 보고 있으면 진짜 눈을 뽑아 버린다, 헤이트리."

"보여, 보여. 잘 보여, 사라."

히끅거리며 답한 자작을 보며 사라가 고혹적이게 웃었다.

"가 봐요."

"...?"

자작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응, 네가.'

'내가 어떻게...?'

절박한 눈빛을 본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작을 달랬다.

"자, 봐요. 저분도 저기 어둠에 삼켜져 있죠? 딱 봐도 같은 과인 게 보이죠? 저분도 억울하게 오해를 받고 있겠죠?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랑 말 한마디 못 섞고 슬퍼하는 게 보이죠? 보기만 해도 답답해 뒤질 것 같죠? 딱 보니까,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동족이라니까요?"

자작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답답했나...?'

지금의 사라는 평소 칭찬만 하던 사라와는 너무 달랐다.

바닥을 보면 영지를 떠나고, 천장을 보면 눈을 뽑아 버린다고 했으니까.

"자, 자. 출발! 가서 얼마나 지원했는지, 지원한 다른 귀족 가문은 몇 개인지, 후작도 지원했는지. 뭐가 됐든 뭐 하나라도 알아 와요!"

떠밀리듯 나선 자작은 순간 모르는 귀족을 만날 생각에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귀족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럼 저 사람도 다른 귀족에 대해선 모르지 않을까?

* * *

나라를 잃은 얼굴로 떠밀려 오는 귀족을 보던 이안의 입꼬리가 주욱 올랐다.

"진짜 봤네."

『암제(暗帝)』를 극성으로 끌어 올려 마나도, 기척도 완전히 지웠다.

- 인간! 들켰다! 들켰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칼루아처럼 마법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귀족만 들어올 수 있고 이 연회장에서 어둠에 숨은 자신을 감지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었으니까.

- 인간! 지금이라도 숨어라! 내가 숨겨 줄까?!

내 계획을 들었던 칼루아의 다급한 외침에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어쩌면 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있던 거거든."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귀족은 흑마법사 '헤이트리'가 분명했다.

사랑하던 모든 걸 잃은 뒤, 복수를 위해 몬스터 편에 섰던 빌런.

'그럼 그 뒤에 있는 저 여자가....'

헤이트리가 부렸던 유일한 언데드, '사라'.

사라가 분명했다.

"아, 아, 안녕하시오."

언제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치던 헤이트리와 전혀 다른 어수룩한 목소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녕."

갑작스러운 반말에 헤이트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시청자들이 이걸 봤으면 좋아했을 텐데.'

"아, 아, 안녕...."

화를 낼까, 짜증을 낼까 고민하던 자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짧아진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