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가씨!"
셀레나는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로잘린의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만, 말 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라. 아가씨."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계속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는 로잘린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셀레나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의문을 품었겠지만, 그녀는 티끌만큼도 여유가 없었다.
"아가씨, 고개를 들어보세요."
"…."
셀레나는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상태로 로잘린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아가씨. 비토 남작님께서는 무사하세요!"
소리치는 로잘린을 보면서 셀레나는 드디어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아버님께서 무사하시다니? 분명 침공이 시작됐다고 했는데?"
그녀 역시 주변의 소식통을 통해서 최대한 영지의 이야기를 모으는 중이었기에 비토 남작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홀연히 나타난 자유 기사 한 명이 억울한 남작님을 위해 볼리도 남작의 기사들을 모두 물리치고 홀연히 사라졌대요."
"아…!"
그녀는 어디서 홀연히 나타난 자유기사라는 대목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칼 경이시겠죠?"
"…."
그녀는 울먹이면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수도원에 도착하고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던 그녀의 몸은 한 눈에도 차이가 보일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칼 경께서는 그럼 영지에 머물고 계실까?"
"전투가 끝나고 곧장 떠나 버리셨다네요…."
"아…."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칼에게 어떤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만 마음 깊이 감사를 기도할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하! 이럇!"
말발굽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2기의 기마는 빠른 속도로 달려 테네시 성에 도착했다. 그는 일단 영주성을 향했다. 중간에 어쩐지 자신감 넘쳐 보이는 경비병의 검문이 있었지만, 비토 남작과의 만남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성전 기사단의 조장이 방문했는데 홀대하는 영주는 없었다.
"테네시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드프리 경."
"로드 비토 남작님의 앞날에 신의 영광이 깃들기를."
고드프리의 인사에 비토 남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공교롭기도 하고, 재밌기도 합니다, 고드프리 경."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얼마 전에 비슷한 인사를 하는 기사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
고드프리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비토 남작은 그런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 먼 변두리 시골 영지까지 위대한 성전기사께서 방문하신 이유를 한 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단지 얼마 전에 자유기사 일곱 명이 살해당한 사건을 조사하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볼리도 남작을 도우러 온 북풍의 기사단일 겁니다. 맞습니까?"
"음… 맞습니다."
"그들은 영지전 과정에서 우리 측 기사의 손에 죽었습니다."
고드프리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그의 겉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려 7명이나 되는 기사와 13명의 기병을 단신으로 죽인 실력자.]
[성전기사단의 기술을 사용하며, 동대륙에서 서대륙으로 넘어온 자.]
[칼리도 백작과는 사이가 좋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
모든 요소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이 많으신가 봅니다? 식사부터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보아하니 이곳까지 오는 동안 쉬지도 못하신 듯합니다만."
꼬르르륵.
비토 남작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고드프리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비토 남작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우릴 도운 이는 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유 기사였습니다. 저는 그 이름밖에 듣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행보에 대해서는 식사를 하면서 얘기 드릴 수 있겠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비토 남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고드프리는 동대륙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 사람을 계속 떠올렸다.
그 남자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슈발리에라는 사막이었다. 그곳은 동대륙의 이교도 전사들이 밀집된 지역이었고 성전의 깃발 아래 바다를 넘어온 서대륙의 군사들과 동대륙의 병사들이 가장 치열한 전투들을 벌이는 곳이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연일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노팍이라는 남작이 병사들을 이끌고 독자적인 작전을 진행하던 중 적의 매복에 당해 전멸할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다.
이름도 출신도 알려지지 않은 남자가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 이교도들의 공격대형을 유린했다.
소문은 살아남아 흩어진 이교도들의 입을 통해 번져나갔으며 슈발리에의 유령이라는 이름이 붙어 떠돌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보이면서 전설이 됐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해졌군.'
***
테네시 성의 전투가 끝이 나고 임무 완료 알림을 받은 칼은 그 이후로 다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진행률 0.5%]
칼은 눈에 보이는 0.5%라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았다. 15년을 0%로 살아왔던 그였기에 조바심을 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칼이 있는 곳은 중부 수도를 중심으로 보면 상당히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렇게 테네시 같은 작은 영지들을 지나 북상하면서 칼이 도착한 곳은 딘스턴이었다.
앞선 영지보다는 더 큰 영지로, 사람도 더 많고 돈도 더 많으니 방어 시설 역시 더 충실했다.
해자 너머로 외성벽과 내성벽이 있는 구조는 첫 번째 방벽이 무너져도 다음 성벽에 의지해 방어를 이어나가기 위해 고안된 형태였다.
도개교를 지나서 외성안으로 들어서자 활발하게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서쪽 지역 중에서도 북부와 남부 사이 중간 정도 위치에 해당하는 딘스턴 영지였기에 영지를 넘나들며 교역하는 상인들 다수가 거쳐 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드나드는 곳에 파리들이 꼬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인 듯 했다.
"이거 안 놔!? 놔! 놓으라고!"
"거기 서!"
오래 걸은 것도 아닌데 웬 보따리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과 좌판에서 커다란 빵을 훔쳐 도망가는 도둑이 보였다.
"묵을 곳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저희 '여행자의 숲' 여관으로 오세요! 멋진 기사님에게 딱 어울리는 숙소라니까요!"
점잖지 못한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질 즈음 웬 꼬마 아이가 칼의 옆에 따라붙더니 나무판에 조악하게 이름을 새겨 명함처럼 만든 물건을 건넸다.
'호….'
칼은 아이의 참신한 시도에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꼬마의 안내를 따라 말을 몰아갔다. 외성에서도 꽤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꽤 그럴싸한 여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여인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의자며 탁자가 여러 번 수리한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아 이곳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 세계의 다른 여관과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제일 깨끗한 방 하나, 따뜻한 목욕물도."
칼은 품 안에서 실버를 넉넉히 건넸다.
"레비! 어서 이 귀한 손님을 2층 끝방으로 모셔 드리렴."
올라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앉아 있는 이들 전원이 허리춤에 칼이며 도끼, 프레일 같은 무기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시선이 새롭게 들어온 칼을 향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목욕을 해서 깔끔한 모습으로 1층으로 내려온 칼은 아무 자리에나 자리를 잡았다.
"뭘로 드릴까요?"
"잘하는 걸로 적당히 내오지. 시원한 맥주도 하나."
칼의 말에 주인장이 금세 주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음식 몇 가지를 내어왔다.
하지만 맥주는 미지근했다.
"자네 들었나? 스튜어트 패거리가 또 보호비를 올리겠다고 했다는군."
"무슨 소린가? 분명 지난달에도 보호비를 인상하지 않았나?"
"스튜어트 패거리야 그저 마을 건달이라 치더라도, 그 위에서 달튼 기사단이 압력을 넣는 것 아니겠나."
"기사는 무슨, 갑옷 입고 칼 찬 건달 개새끼들 집단이지…."
"이 사람, 조용히 하게. 그런 말이 그들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목이 달아날지도 몰라."
"자유민인 나를 그놈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 세계에는 영지 안에 자유민이 드물었다. 대부분이 농노였고 자기 소유의 토지를 일구는 자유농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을 자유민이라 칭하며 당당하게 소리치는 남자는 이 영지 내에서는 제법 부를 거머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영주에게 의무를 다하며, 동시에 영주에게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그를 기사라고 함부로 죽일 수 있겠냐는 소리였지만 눈동자는 불안하게 주변을 스윽 훑었다.
그러던 중에 그의 눈이 칼과 마주쳤을 때 누가 봐도 기사로 보이는 칼의 시선을 회피한 그가 눈을 반대로 돌려 버렸다.
"이 친구, 농사만 잘 지었지 소문엔 깜깜이군. 아직도 못 들었나? 달튼 기사단이 영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 달튼 기사단보다 위로 가면 알칸타라 기사단까지 연관이 되어 있다는군. 영주님 역시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일세."
"하수인의 하수인의 하수인이라고? 웃기지도 않는구먼…."
과연 돈 좀 만질법한 자유민 두 사람의 대화라 농노들의 대화보다는 영양가가 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칼은 맥주잔을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듣고 계신 건가요?"
여관 주인인 젊은 여인이 칼의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글쎄, 세상사는 얘기."
"이곳 얘기는 그리 재미가 없을 텐데요. 다들 먹고살기 힘들단 얘기뿐이라."
"높은 쪽 횡포가 심한 모양이군."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달튼 기사단이라는 놈들이 이곳에 나타나기 전까지는요."
이만한 여관의 주인치고 너무 젊은 여인은 앉은 김에 얘기를 시작했다.
#11화
마치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림 문파들처럼 이 세상에는 여러 기사단이 산재해 있었다.
황제 사후 찾아온 혼란에서 이익을 위해 뭉친 그들은 때로 한 곳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깡패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30명 정도 되는 기사단이 이곳에 정착했었죠. 그들이 처음부터 이상했던 건 아니었어요. 성벽 바깥의 농지를 넘보는 도적들을 퇴치해줬고 때때로 상행을 보호하는 일도 하면서 공생 관계에 가까웠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본색을 드러냈어요. 보호비를 걷기 시작한 거죠. 그들이 받은 보호비는 이곳의 영주와 그 유명한 알칸타라 기사단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기사단이라니 처음부터 그랬지만 이젠 더더욱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불평하기 어려워졌어요."
그녀가 입에 담은 알칸타라 기사단은 성전기사단만큼이나 큰 대형 기사단이었다. 그들의 규모는 기사만 해도 1,000명 이상이었고, 각 지역의 군소 기사단을 규합해서 자신들이 왕처럼 행세하는 중이었다.
보통 이곳 서쪽 지역은 성전기사단과 알칸타라 기사단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남부는 성전기사단이 서북부는 알칸타라 기사단의 영향권에 있었다.
알칸타라 기사단은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더 많은 부, 더 높은 지위,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증가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알칸타라 기사단의 영향력은 최근 10년 새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요. 결국 그 사이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만 죽어나는거죠."
그녀는 가져온 술을 잔에 가득 담아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 거지?"
"그냥요. 당신은 기사같아 보이지만 그들과 한 편은 아닌 것 같아서. 한 번 얘기해봐요. 왜 그러는 거죠? 기사라는 작자들이? 당신들은 기사도라는 것을 지키겠다 서약하지 않나요?"
"최근엔 기사 서임이 간결한 모양이더군.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나?"
칼의 이야기에 식당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많이 읽었죠. 기품있는 레이디와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기사가 악에 맞서 싸워 이기는 그런 이야기요."
"글을 읽을 줄 아나?"
"…."
"그런 건 현실에는 없지. 옛날에도 실제로 그런 사례는 드물었을 거야."
"…냉정하시네요."
칼의 이야기에 그녀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20대 중반 정도 됐을 그녀는 이 세상에서 15년을 방랑한 칼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주변에 그녀를 흠모하는듯한 이들도 많아 보였고, 칼을 시기하는 시선도 여럿 느껴졌다.
"힘이 드나 보군."
"맞아요, 힘들죠. 남편은 여기까지 도착도 못하고 길에서 죽었고, 여자 혼자 돈주머니 하나 들고 2년 전에 흘러들어와 이 여관을 인수했는데 이 꼴이니…."
"왜 내게 그런 얘길 하나?"
"당신은 묘한 매력이 있네요."
"잘생겼단 이야기군."
"그걸 안다니 짜증 나네요."
그렇게 잔을 주고받던 칼은 먼저 일어나서 방으로 올라갔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여관 주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에게 자리를 넘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앤이라고 해요."
"칼."
통성명 이후로도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음날 아침, 칼은 잠들 때 까지 곁에 있던 앤이 옆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칼은 간단한 훈련을 할 생각으로 검을 챙겨서 1층으로 내려갔다.
"그건 말이 안 된다고요! 갑자기 10%나 인상하는 법이 어딨어요! 그럼 우린 뭘 먹고 살라고!"
"앤, 네 얼굴 때문에 여기 들락이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야? 그놈들이 허튼짓 못하게 보호를 해줬으면 그 값을 내야지."
달튼 기사단의 하수인이라는 건달들인 듯 했다.
"개소리! 그저께만 해도 여기서 용병 놈들이 칼부림을 했어! 먹고 죽으려 해도 없어!"
"쯧, 보호비를 못 내면 이렇게 되는 거지."
그나마 멀쩡한 나무 의자 하나를 집어 든 남자가 힘껏 바닥에 내리쳐 박살냈다. 못과 나무 조각이 튀었다.
"의자값 1 실버."
앤은 확실히 혼자 이곳에서 살아남은 여인답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때 패거리 중 하나가 앤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큰 소리와 함께 입술이 터진 그녀가 쓰러졌다. 아무리 강단 있는 여인이라지만 먹고사는 재주가 폭력인 폭한의 폭력 앞에서 두 발로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미쳤어? 달튼 기사단 기사가 얼굴은 건드리지 말랬잖아. 단장인가 누군가가 신경 쓴다고."
"오냐오냐 했더니 하는 꼬라지를 보라고. 수틀리면 그냥 묶어서 던져 주면 될 거 아냐!"
저들끼리 쳐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터라 쓰러진 앤의 손끝이 조용히 소매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나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인연이 있었기에 칼은 천천히 걸어나갔다.
"또 뭐야?"
칼이 자연스럽게 앤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자, 다섯 건달들이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분수도 모르는 자유 기사 나으리 같은데, 우리 뒤에 달튼 기사단이, 또 그 뒤에는 알칸타라 기사단이 있으니까 잘 잤으면 조용히 갈 길 가쇼."
그들도 기사와는 마찰을 피하고 싶은지 밑바닥 인생 최대의 예의를 갖추고 이야기했다.
"싫다."
"미쳤소? 방금 한 말 못 들었나? 알칸타라 기사단이라고. 알칸타라."
피식.
칼의 비웃음에 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기사 나으리, 지금 웃었어?"
"동네 건달 푼돈 수금하면서 알칸타라 기사단까지 들먹이는데 웃지, 우나?"
적나라한 그의 말에 맞고 쓰러져 있던 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가 봐줄랬더- 커억!"
칼의 주먹이 그대로 남자의 복부에 꽂혀 들어갔다.
제대로 들어간 주먹에 복부를 맞은 이가 그대로 어젯밤 먹은 음식까지 게워내고 숨을 쉬지 못한 채 쓰러졌다.
나머지 건달들은 자신들이 수습할 상황이 아니라고 느꼈는지 빠르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쳐버렸다.
"칼, 실수한 거예요. 당신은 그냥 못 본 척 했어야 해요."
"그런가? 이미 늦었군."
칼의 대답에 그녀는 걱정이 되면서도 좋은지 웃음을 지었다.
"이제 도망가요. 조금 있으면 저것들이 달튼 기사단을 데려올 거에요. 그들은 정말 알칸타라와 줄이 닿아 있는 이들이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맥주 좀 줄 수 있나? 돼지구이도. 어제 먹어보니 냄새를 잘 잡았더군."
칼의 태연한 대답에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음식을 만들러 갔다.
"아, 그리고 이거."
칼이 그녀를 향해 작은 함 같은 것을 던졌다.
"얼굴에 바르도록. 효과가 괜찮은 약이니까. 쓰고 돌려주고."
무심한 말투였지만 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줄 거면 그냥 주지 다시 달라는 건 뭐람."
그녀는 겉으로는 툴툴거리면서 음식을 만들러 갔다. 그렇게 돼지고기와 미지근하지만 먹을 만 한 맥주가 칼의 앞에 놓이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말발굽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콰앙!
곧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일단의 기사 무리들이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곧장 칼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너냐?"
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돼지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씹으면서 한 모금 남은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몰려온 기사 열 명이 칼을 둘러싸고 있고 그 가운데서 칼은 여전히 음식에 집중하는 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이 세상에 오고 나서 칼이 세운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않는다.
이곳은 그가 살던 시대의 한국처럼 안전하고 배부른 세상이 아니었다.
인연에 걸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목숨이었다.
칼은 어지간하면 자신이 세운 원칙을 어기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제외하고.
"원칙대로만 살아지지 않는군…."
마지막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다 털어낸 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 뭘 중얼거리는 거냐?"
달튼 기사단의 3조장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일어나는 칼을 보면서 인상을 확 구겼다.
"없다 이거지."
칼의 손이 검으로 간다 싶던 그 순간 3조장의 손목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끼고 있던 건틀렛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어…?"
3조장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출혈에 멍하니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현실을 자각하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조장님!?"
기사랍시고 자칭하던 녀석들이 조장이 당했는데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건달이라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검을 휘둘러 본 이들이라면 칼이 보여준 한 수가 얼마나 대단한 검격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악! 쳐! 죽여! 죽이라고!"
피가 쏟아지기 시작한 손목을 어떻게든 그려 쥔 마커스가 부하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음에도 그들은 자리에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누가 먼저 뛰어들 것인지 눈치를 보는 그 모습에 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사라더니 스튜어트 패거리인가 하는 날건달들과 다른 게 없군."
그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자칭 달튼 기사단의 자랑스러운 기사인 그들은 굳어버린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셋을 세면 다 같이 가자!"
개중에 용기 있는 녀석이 셋을 외쳤다. 그리고 9명의 가사가 동시에 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은 그래도 9명이나 되는 자신들 중 하나는 칼의 뒤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칼이 그들을 향해 마중을 나왔다.
"뭐…!?"
당연히 9명이 달려드는 상황이면 뒤로 몸을 뺄 거란 생각과 달리 칼은 그대로 더 빠르게 접근해서 선두에서 달려오던 기사 하나의 발목 뒤를 베어냈다.
솟구치는 피와 함께 첫 기사가 무력화된 그 순간 칼의 검은 다음 상대를 향해서 하늘 방향으로 솟구쳤다.
"헙!"
순간적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본 달튼 기사단원은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렸다. 검을 피했다고 안도한 기사단원이 몸을 일으키려는 그 순간 뒤에 있던 다른 단원의 가슴팍에서 피가 뿜어졌다.
비명을 휘장처럼 두르고 오직 앞으로 전진한 칼은 어느새 포위망의 밖에 서있었다.
한 번의 격돌이 이루어진 찰나에 무려 3명의 기사가 무력화됐다.
그렇게 칼이 만들어낸 놀라운 광경에 집중할 때 유일하게 여관의 주인인 앤만이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어째서 저렇게 공허할까…?'
앤은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을 처음 봤다.
어느새 2명의 기사가 더 바닥에 쓰러지고 남은 다섯 명의 기사는 하나씩 부상자를 챙겨서 여관을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 칼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와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맥주 한 잔 더."
칼의 주문에 정신을 번쩍 차린 그녀가 어느새 맥주를 가지고 나와서 그의 앞에 내려뒀다.
단순한 맥주 한 잔일 뿐인데도 칼의 공허하기 그지없던 눈에서 잠시 생기가 생겨났다.
"맛있어요?"
"모처럼 괜찮은 에일이야."
칼을 보고 있던 그녀는 그 모습을 더 오래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자고 가나요?"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뒤, 두 사람은 전날 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 있으라 그럼 있을 건가요?"
"아니, 알고 있을 텐데."
"알죠, 그래도 그냥 한 번 물어봤어요."
그녀의 이야기에 칼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목걸이는 사연이 있는 물건인가?"
은근히 반짝이는 목걸이가 눈에 띄어 칼이 물었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목걸이에요, 제가 누구였는지 기억하게 해주는 거죠."
목걸이를 좀 더 쳐다보던 칼은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았다.
칼은 어느새 잠든 앤의 옆에서 몸을 살짝 일으켜서 침대에 몸을 기댔다.
[글로스터 황실의 목걸이 : 제국을 건국한 황제가 당대 최고의 세공사를 찾아 오직 33개만 제작, 황실의 직계에게만 상속과 착용을 허락했다. 과시나 치장을 위한 목걸이가 아니기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의미에 비해 겉으로 보이는 외양은 수수하다.]
아마 앤이 얘기한 과거는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 이외에는 모두 거짓일 터였다. 이름 역시 부모에게 물려받은 본명은 아닐 것이다.
감각의 경계 언저리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던 의도를 알 수 없는 인물, 혹은 인물들의 존재감도 있었다.
그게 유감스럽진 않았다. 다만 지금의 인연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
눈을 뜬 앤은 문득 옆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앤은 지난 삼일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라진 칼이 편력기사 이야기 속 주인공 같다고도 생각했다. 살랑이는 바람이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잠깐 이야기의 한 장면 같던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 형상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그 순간, 풋풋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름다운 시골 여관 주인은 사라졌다.
"칼이라는 자유 기사에 대해서 알아봐. 가문, 이력, 경지, 행동원리, 목표, 인간관계, 그밖에 모든 것을."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에 부복한 검은 그림자가 물러났다. 그림자가 사라진 방에는 따뜻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죽지 말아요, 방랑하는 자유 기사님."
#12화
"…그러니까 3조가 통째로 몰려가서 팔다리 힘줄 하나씩 그냥 팔아먹고 왔다고?"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최소 엑스퍼트 상… 상급, 어쩌면 슈페리어일지도 모릅니다!"
"헛소리! 알칸타라 기사단에도 흔치 않은 슈페리어가 미쳤다고 방랑기사 흉내를 내나!"
"정말입니다…."
애초에 3조가 잡스럽고 지저분한 일이나 시킬 목적으로 길바닥이나 여관에서 영입한 놈들을 모아 만든 조기는 했다. 1, 2조에 비해 실력이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달튼이 1, 2조와는 공유하는 커다란 목표도 공유해주지 않았다.
그저 수금원, 문지기, 잡역부, 야간 보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썩어 문드러져도 기사라고 자처할 만한 실력의 최저기준은 넘는 놈들이었고 사슬 갑옷을 기본으로 군데군데 판금 방어구도 비교적 충실히 입고 있었다.
말에 탄 3조만으로도 잡다한 농노병 일 이백 즈음은 손쉽게 박살 낼 수 있다는 것은 단장인 달튼이 가장 잘 알았다.
"대체 어디서 갑자기 그런 놈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돌출된 입과 뻐드렁니가 시선을 끌었다. 그 모습이 영 우스꽝스러웠지만, 자리에 있는 부하들은 전혀 웃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알겠다. 3조는 조장 이하 전원 야간 보초 투입해라."
"예…."
3조장이 고개 숙이고 물러나자 잠깐 더 뜸을 들인 달튼이 남은 두 조장에게 물었다.
"이번 달 요구치는 채웠나?"
"…요즘 실종이다 뭐다 해서 영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전반적으로 영지를 이용하는 외부인들도 많이 줄었습니다. 흉흉한 시절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맞춰 보겠습니다."
"열흘 안에 어떻게든 숫자는 맞춰라."
"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돈이 아니었다.
달튼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달튼이 부하들을 천천히 훑었다.
"우리가 이 시골 변두리까지 온 이유가 뭔지 잊지 마라. 돈을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었으면 이곳에 올 이유도 없었다. 목적을 잊지 말란 말이다."
부하들은 밖으로 튀어나온 뻐드렁니의 달튼을 보면서,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나가봐."
달튼의 축객령에 기사들이 모두 나가고 그만 홀로 집무실에 남았다. 홀로 남은 집무실에 남은 달튼이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30일. 100명. 덴버]
조그마한 쪽지를 다시 한번 훑은 그는 그것을 구겨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갈수록 구해야 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는군.'
처음과 달리 점점 본단에서 요구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끝까지 가는 수밖에…."
달튼은 잡혀간 아이들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털었다. 이제 와서 돌아갈 길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앙!
"…."
생각에 잠긴 그의 귀에 들린 건 갑작스러운 폭발음이었다.
"단장님! 웬 놈의 습격입니다!"
달튼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서 벽에 걸려있던 검을 들고 부단장과 함께 저택의 정문을 향했다.
***
칼은 새벽의 어둠을 뚫고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갔다. 새벽 달리기가 마음에 안 드는지 칼의 말인 실버의 투레질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끝나면 삶아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물을 먹여주마."
그렇게 말을 달래고 칼이 멈춰선 곳은 저택 앞이었다. 수도의 고위 귀족 저택 정도는 아니어도 수십 명이 머물기엔 충분한 규모의 저택을 담장이 감싸고 있었다.
칼은 편안한 걸음으로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갔다.
"웬 놈이냐!"
검을 꺼내 들고 접근하는 칼을 향해서 소리친 3조 보초들은 수 시간 전에 봤던 칼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충격파에 휘말려 튕겨 나갔다.
콰아아아앙!
칼이 가속도를 붙여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정문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결과는 마치 거대한 충차가 문을 들이받은 것과도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단순한 충차는 충격파로 주변에 있던 기사들을 쓰러트리지 못하니까.
***
달튼이 정문까지 나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널브러진 3조 단원 5명과 걸레짝처럼 부서져 나뒹구는 정문의 파편들이었다.
'저게 나무긴 한데.'
분명 정문은 나무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기사단의 위엄을 위해 일부러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 끼운 문이였다. 저렇게 칼질 한 방에 날아갈 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검이 아니라 뭔가 다른 걸로 때려 박은 건가?'
저게 검으로 만들어낸 결과라면 눈앞의 남자는 최소 슈페리어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달튼은 눈앞의 남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런 시간에 터무니없는 무례로군."
비틀어진 뻐드렁니를 환하게 드러낸 달튼의 말에도 눈앞에 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에 부하들이 신세를 진 모양인데, 그 일 때문에 오셨나?"
칼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자신감을 가질만한 실력이란 건 알겠는데, 우리 뒤에 알칸타라 기사단이 있다는 건 아시고?"
"헛소리."
"…!"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달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너희가 다 죽어도 알칸타라가 움직일 일은 없다."
차분한 칼의 목소리에 달튼의 미간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확신하는 모양이군."
"단언하지. 알칸타라 기사단은 내가 더 잘 안다."
"…뭐? 아니, 궁금한 건 묶어놓고 물어보지."
찝찝한 의문을 접어둔 채 달튼이 한 손을 들자 그의 뒤에 도열한 20명의 기사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펼쳤다.
펼쳐진 포위망이 다시 점점 좁혀지다 충분히 가까워졌다 싶은 순간, 달튼 기사단원 몇이 땅을 박찼다.
서걱!
가장 먼저 달려들던 기사 한 명의 목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떨어졌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한 명의 목이 떨어지고 불과 5분.
20명의 기사 중에 절반이 넘는 이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칼은 같은 기사단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생각했지만, 실력 역시 여관에서 봤던 놈들보다 최소 한 수 이상 나았다.
'게다가 전혀 도망칠 생각이 없군.'
절반이 넘게 죽었는데도 녀석들은 전혀 도망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약자에게나 잔인한, 반쯤 건달이나 다름없는 기사라기에는 태도가 이상했다.
대개 삼류 기사들은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도망을 쳐서라도 목숨 부지할 생각을 먼저 하기 마련이었다. 그게 실제 삼류 기사단의 현주소였다.
하지만 이들의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서는 기이한 열기와 결의를 읽을 수 있었다. 동시에 야수적인 광기도 엿보였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
"…."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다시 한번 달려든 기사들이 어느새 바닥에 모두 쓰러지고 칼은 달튼과 둘만 남아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이…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왔군. 잡부나 다름없는 3조였지만 조장을 시킬만한 깜냥은 되어서 조장을 시켰었다는 걸 내가 잊고 있었어."
달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갑자기 그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쓰러트린 기사들의 눈에서 엿보이던 그 야수적인 광기였다.
"음?"
지금까지 무표정을 지키던 칼이 처음으로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 평범한 기사 정도의 체격이던 달튼의 몸이 어느 순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지."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그리고 동대륙에서 다시 서대륙으로, 이 세계의 두 대륙을 넘나들며 15년을 살았고 10년의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칼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인간의 근육이 풍선처럼 급속도로 부풀고 털이 온몸을 뒤덮는 모습이라니.
이 세상이 지구의 중세와는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 15년을 통틀어 마법다운 마법도 한 번 본 적이 없는 판이었다.
기가 분명히 존재하고, 희소성이 대단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는 마법 물품을 몇 번 본적이 있어 분명히 지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하지만 칼은 검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검을 고쳐 쥐었다.
"놀란 모양이군. 그래. 지금의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슈페리어건 뭐건 내 앞에선 소용없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 달튼이 솟구치는 짐승의 본능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위협적인 실루엣과 소리였지만 칼은 문득 생각난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그 뻐드렁니는 변신을 해도 해결이 안 되나 보군."
칼의 말에 야수화한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그 역시 뻐드렁니가 콤플렉스였는지 괴물로 변한 상태에서도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육안에 담길 정도였다.
"혹시 그 상태로 거울 본 적 있나?"
가뜩이나 컸던 뻐드렁니는 야수화가 끝나자 두 배로 커져서 털과 함께 보면 그야말로 두 발로 선 거대한 쥐 같기도 했다.
"…."
야수화한 달튼의 거대한 손이 칼을 향해서 빠르게 휘둘러졌다.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는데 어지간한 슈발리에급 검사보다 속도면에서는 훨씬 빨랐다.
칼은 기묘한 보법을 밟으며 물 흐르듯 상대의 손톱을 피해냈다.
"너야말로 피하는 것 하나만은 쥐새끼처럼 하는구나!"
빈틈 없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공격을 모두 피해낸 칼은 어느 순간 몸을 뒤로 날려서 달튼과 거리를 벌렸다.
제법 거리가 벌어진 상태에서 칼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검을 검집에 넣은 상태로 달려오는 달튼 방향으로 섰다.
"그건 또 무슨 흉내냐!"
허리춤에 납도를 하고 눈을 감은 칼은 그야말로 죽으려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칼의 코앞까지 날듯이 달려온 달튼이 체중을 실어 힘껏 손톱을 휘둘렀다.
번쩍!
"커어어억!"
분명 손톱이 칼의 목을 꿰뚫는다고 확신한 순간이었다. 한 줄기 섬광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차가운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배를 가로로 길게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과 땅이 몇 번이고 뒤집혔다.
달튼은 바닥에 쓰러져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다.
'뭐, 뭐지?'
붉은 눈에 가득 찼던 야수의 광기를 뚫고 당혹감이 흘러나왔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거리를 벌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배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쿠웅!
상반신을 잃은 달튼의 하반신은 저 멀리서 지금 막 홀로 쓰러지고 있었으니까.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의 상반신은 야수화가 부분적으로 풀려서 동물의 몸통에 사람의 얼굴을 한 상태로 바닥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어떻게… 왜…."
야수화의 영향으로 달튼은 쉽사리 죽지 않고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칼을 들었으니까."
"하긴…."
달튼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약했다면 칼이 죽었을 거다.
"하지만… 너 역시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주목을 받게 될 테니."
전에 없이 선명한 목소리로 칼에게 한 마디를 남긴 달튼이 눈을 감았다.
칼은 그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 볼 뿐이었다.
[숨겨진 임무를 달성했습니다. 근력, 체력 수치가 증가합니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명성 수치가 올라갑니다.]
[강제 진행 임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13화
칼은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새로운 안내 창이 우후죽순처럼 튀어 올라왔다. 갑자기 눈앞에 뜬 창은 그를 현실에서 조금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눈에 띄게 늘었나?'
매일같이 단련을 이어온 칼이었기에, 자신의 신체 능력에 대한 감각이 범인을 아득히 초월한 상태였다.
조금 전의 메시지 창에 나온 스탯의 증가가 육신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것이 느껴졌다.
칼은 몸을 이리저리 풀면서 향상된 신체 능력을 점검했다.
"좋군."
올라간 능력치에 따른 고양감이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칼은 다음 안내 창을 살폈다.
[임무: 대륙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을 확인.(연계형 임무, 최초 연계 임무 완료시 진행률 5% 달성]
강제 임무건 뭐건 칼로서는 진행률 5%를 달성할 수 있다니 나쁠 것 없었다. 이런 임무를 20개만 하면 100% 아닌가.
'그나저나 짐승으로 변하는 인간이라.'
칼 역시 비슷한 것조차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서대륙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달튼이 죽기 전에 한 말을 곱씹어보면 짐승으로 변하는 놈들이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니 달성률 5%를 마냥 즐겁게 볼 수 없었다.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납도를 하는 동안 주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 들어가!"
요란함이 가득하게 장원으로 들어온 이들은 한눈에 봐도 영지군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
기사는 피와 시신이 낭자한 장원을 훑어보다가 칼과 시선이 마주했다.
꿀꺽.
영지의 기사는 달튼 기사단원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눈앞에 선 기사 한 명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도.
"당신 혼자 다 죽였소?"
끄덕.
칼의 끄덕임에 기사는 다시 한번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데려온 병사의 숫자는 20명. 개중에 기사는 자신 하나.
하지만 달튼 기사단을 혼자 상대한 눈앞의 남자.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나는 딘스턴의 선임기사 조셉 볼튼이오. 신분을 밝히…시오."
"칼. 자유 기사요."
담백한 자기소개가 오히려 조셉의 등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만들었다.
"저들은 모두 죽었소?"
"그런 모양이오."
"…왜 이런 거요?"
"저들이 날 죽이려 했으니까."
담백한 그 대답에 조셉이 침음을 삼켰다.
"달튼은?"
"죽었소. 괴물로 변하더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서 달튼을 가리킨 칼의 시야를 따라가자 정말 회색 털로 뒤덮여 괴물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시체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를 따라와 줄 수 있겠소? 영지내에서 자유 기사와 기사단 간에 벌어진 사건이고, 달튼의 시신은… 끔찍하군. 신이시여, 저게 대체 뭐란 말이오? 교황청에도 신고해야 할 사안으로 보이오."
이번에는 칼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조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일단은 해야 할 말을 던졌다.
"협조해주시오. 아니면 체, 체포하겠소."
"무슨 명분으로?"
"달튼은 영지민이기도 한 자였소, 한 자유 기사단의 수장이기도 했지. 저 꼴을 보니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싶지만… 알칸타라 기사단과도 연이 있기도 하고. 우리도 여러 가지로 입장이 난처하니 부탁드리겠소."
"그럽시다."
칼은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뭉개고 갈 사안은 아니었다. 특히 저 괴물로 변했던 달튼이.
영지의 고위층과 얘기해보면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협조에 감사하오, 최대한 불편함 없도록 하겠소."
조셉은 영지병 전체로 눈앞의 남자와 싸우더라도 어쩌면 자신들이 도륙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
그는 성으로 돌아가는 대로 이 건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5년 전에 영지에 새로 영입된 기사 조셉이 영주성에서 행정 능력까지 가장 우수한 판이었다.
예전엔 우수한 가신들이 있었으나 수 년 전, 동대륙의 성전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귀로 들었을 뿐이었다.
'칼? 칼이라고? 처음 듣는다. 하지만 무명일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조셉은 칼을 데리고 영주성을 향해서 이동을 시작했다.
***
꽤나 돈이 도는 영지답게 영주의 집무실은 크고 고풍스러웠다.
그 안에서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의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시종일관 가만있지 못 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
그는 뒷짐을 지었다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앉았다가 섰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체 그런 위험인물을 왜 영주성으로 들여온 것인가!"
"…영주님, 생각해보십시오. 알칸타라와 연을 자랑하던 달튼입니다. 그가 죽었는데 그런 인물을 그냥 보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지어 제가 본 달튼의 시체는 반인반수의 흉물이었습니다. 그런 삿된 것을 영주성까지 들이기는 꺼림칙해 수레에 실어 일단 근처에 두었습니다. 영주님께서도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발견되었으니 교단의 이단심문관이나 성기사단이 파견될지도 모르는데 그때 가서 뭐라고 하려 하십니까?"
"그래 그것도 문제야…! 아이고 머리야, 달튼 기사단 놈들이 내 땅에 찾아온 뒤로는 머리 아픈 일 투성이야!"
조셉은 머리를 싸매고 있는 영주의 뒷통수에 대고 눈을 찌푸렸다.
'영지민들에게서 수탈한 돈과 출처도 불명인 수상한 선물에 껄껄 웃을 때는 언제고….'
노팍 딘스턴 남작은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뭐 할 말 있나?"
"…없습니다."
"그래, 그… 그 괴물의 시체는 일단 병사들을 시켜서 잘 지키도록 하고… 그래서 그 자유 기사라는 자는 어떻게 하고 있나?"
"손님용 객실을 내어주었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한 놈을 내 손님용 객실에 넣었단 말인가?"
"그럼, 감옥이 옳았겠습니까? 방금 기사 30명을 도륙 내고 온 인물을…."
"그럴 순 없지… 암… 그럴 순 없고말고."
남작이 찔끔하면서 물러서자 조셉은 조금 통쾌했다.
"알칸타라 기사단과 교회에 보낼 서신을 작성해 뒀습니다. 허가하시면 바로 보내겠습니다."
"잘했군, 역시 우리 영지의 선임 기사다운 조치였네."
사실 영지내의 대부분의 중요사안은 남작이 아니라 조셉에 의해서 진행됐다. 남작이 하는 일이라고는 조셉의 의견에 승인을 하고 사냥과 연회를 즐기는 것 뿐이었다.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남작님. 그가 어딘가의 대형 기사단에서 파견된 존재라거나 암행 중인 이단심문관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조셉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남작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그가 만약 이단심문관이라면 괴물과 한통속으로 엮여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신이시여, 어찌 저를 시험하시나이까…."
"…."
그의 옆에 선 조셉은 남작을 보면서 한차례 침음을 삼키고는 말했다.
"슬슬 식사를 하러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식사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영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침 식사를 같이 하겠다고… 들어오자마자 준비하라 명하셨습니다. 벌써 잊으신 겁니까?"
"내가 그랬나…? 아이고 무슨 생각으로…."
노팍의 표정을 보니 그가 또 조셉의 말을 띄엄띄엄 듣고 생각 없이 식사 이야기를 주워섬긴 게 분명했다.
"…참석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둘러는 대겠습니다만.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요."
조셉은 노팍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험험…! 누가 가지 않겠다고 했나. 감세, 가야지. 아무렴 가야 하고 말고…."
노팍 남작은 울상으로 식당을 향했다. 그렇게 식당의 문이 열리고 그는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면서 식당 안으로 이동했다.
'사람을 얼마나 죽였을지 알 수 없다고 했던가.'
조금 전에 조셉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눈을 들여다보건대 사람을 아무 감정 없이 죽일 수 있는 자의 눈이었다고.
스윽.
식당 안에는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고개가 올라오고 눈을 마주친 노팍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꿀꺽.
노팍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목에 가져다 뎄다.
"영주님,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평소와 다른 모습의 남작을 본 조셉이 얼른 그의 상태를 걱정했다.
"아… 물론이지… 물론 괜찮고말고. 반갑소. 노팍 딘스턴 남작이오."
"환대해 주어 감사합니다. 칼. 자유 기사입니다."
그래도 영주를 상대하는 자리이니 칼도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지만, 그의 짧은 인사가 끝나고서도 노팍은 시종일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칼 경, 우리 어디서 본적이 있지 않소?"
노팍의 이야기에 칼의 무심한 눈이 그와 다시 한번 마주쳤다. 그리고 노팍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의 한 부분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당신이 어찌 여기에…."
모기 소리보다 작은 그의 중얼거림을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칼만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검지가 조용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노팍 남작님, 더는 무리입니다. 물이 다 떨어져 갑니다.]
[이미 본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 지역에 바글거리는 이교도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지금 회군해야 합니다! 놈들의 기동성을 고려해봐도, 마주치면 이미 늦습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장면이 노팍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아 보입니다."
눈치 빠른 조셉이 노팍의 변화를 읽어냈다.
"괜찮네."
안 괜찮다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만했다.
"몸이 좋지 않으시면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음, 그게 좋겠군. 손님을 초대해놓고 민망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서… 식사는 편하게 하시오."
노팍은 손도 대지 않은 고기를 접시 위에 그대로 올려두고는 몸을 일으켜서 자리를 벗어났다.
[으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이건 다 당신 때문이요! 내가 몇 번을 경고했잖소! 왜 귀담아듣지 않았소! 왜!]
귓가에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 했다.
원망의 목소리 역시 그의 뇌리를 관통했고 그는 걸어가는 동안 생긴 극심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직 못 벗어났나 보군."
그때 그의 뒤편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팍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죽기 전까진 벗어나지 못할 거요…."
"욕심은 여전한 듯 한데. 왜 갑자기 죄책감을 느끼는 거지?"
"돈을 좋아하는 것뿐이지, 내 잘못으로 죽어간 수많은 목숨의 비명을 즐기는 미치광이는 아니니까."
다소 경박해 보이던 노팍의 모습과 지금의 노팍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그날, 모래 언덕 위에서 나는 인접한 지휘관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소. 위험을 경고하던 경험 많은 부관도 있었지. 군사라곤 쥐뿔도 모르는 나 같은 인물이 공명심에 눈이 멀어선 안 됐어."
"…."
칼은 침묵했고 노팍은 회한을 늘어놨다.
"그날 당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날 따라오던 100명의 목숨은 모두 스러져 버렸겠지. 나 역시."
칼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날도 당신은 나를 죄인 취급하지 않았지. 고맙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얘기하시오. 내 손에 있는 것이라면 뭐든 주겠소."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었소. 하지만… 일단은 좀 쉬지."
"…."
칼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침실로 걸어가는 노팍의 머릿속에는 사막의 모래바람과 말을 달려오던 이교도 기마대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짓밟혀서 비명을 지르던 부하들의 모습도.
#14화
연무장에 나와 검을 들어 올린 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진흙탕처럼 범벅된 지난 기억이 늘 악몽처럼 그를 괴롭힐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칼은 언제나 검을 휘둘렀다.
후웅.
흔들리던 검 끝에서 흔들림이 사라졌다.
어느 날인가 지금은 죽어 없어진 스승 중 한 명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소드 마스터라는 존재는 단순히 검을 잘 휘두르는 이가 아니라 마음이 검을 들어 올리는 경지에 도달한 이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오직 살상을 위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에 집착하는 기사들은 그래서 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했던 스승 본인도 마스터에 이르지 못했으니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었나 싶다.
경지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정체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칼은 늘 자유기사라 소개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기사인가.
'웃기는 소리군.'
그가 어렴풋이 생각하는 기사라는 건 여러 현대적 매체 속에서 지구의 역사적 사실과 픽션이 뒤섞여 묘사된 것이었다.
지구의 역사 기준으로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 '기사'의 정의가 달랐다는 걸 어설프게 알 뿐 제대로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기사라 불리는 이들은 그것과도 다른 듯 했다.
오죽하면 이름 있는 용병단이 어설픈 자유 기사들보다 더 신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실력 있다는 기사들은 죄다 기사단이랍시고 이합집산 세력을 형성하기 바빠서 기사라는 것이 이제는 무엇인지조차 헷갈리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노팍 영주는 그 반인반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노팍 영주와의 인연이나 그의 태도를 생각해본다면 그가 칼에게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훈련을 마친 칼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그때 말발굽 소리가 딘스턴 영지 끝자락에 울려 퍼졌다.
***
두 기의 말이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딘스턴의 관도를 질주하면서 먼저 간 이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조장, 여기서부터는 미미하다고 해도 알칸타라 기사단의 영역입니다. 더는 추격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기사단이 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겨우 둘이니 위협으로 받아들이진 않을 거다. 경계는 할지도 모르지만."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고드프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향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우리 영지에서 괴물이 나왔다지 뭔가?"
"괴물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린가?"
"달튼 기사단의 달튼이 지난밤에 털복숭이 괴물로 변했다는군. 자유 기사 하나가 혼자서 쳐들어가 달튼 기사단을 모조리 도륙을 냈는데, 그 때 괴물로 변해서 죽었다는구먼."
"뭐? 괴물은 뭐고 누가 혼자 기사단에 쳐들어갔다니 그건 또 뭔가?"
고드프리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괴물 이야기는 나도 귀로만 들은 얘기지만, 생각해보니 전날 앤의 여관에서 싸움이 있었지 않았나, 그때 그 자유 기사가 달튼 기사단원 10명을 박살을 냈다고 하던데."
"그, 그건 그렇지. 그건 내가 봐서 알지."
고드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이 지금까지 추적해온 이라고 확신했다.
"그 여관으로 가보자. 거기로 가면 무슨 단서가 있겠지."
"네 조장."
그렇게 우스터와 고드프리는 여행자들의 숲이라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여행자들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침 딱 한 자리가 남았는데 운이 좋으시네요!"
문을 열자마자 7~8살로 보이는 어린 꼬마 아이 하나가 신이 나서 간신히 마지막 남은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젊은 여인이 그들의 앞에 서기에 고드프리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시오? 앤이라는 이 가게의 주인을 찾고 있소."
"저예요."
"궁금한 것이 있어 왔소."
"뭐가 궁금하시죠?"
"오는 길에 재밌는 소문을 들었소, 여관 주인을 위해 괴물들의 소굴을 찾아간 자유 기사에 대한 이야기지."
앤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고드프리는 아주 찰나에 지나간 그것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가 당신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우리는 그 자유 기사를 해치려는 게 아니고… 뭐, 굳이 어느 쪽이냐 하면 아군에 가까우니 경계하지 마시오. 물을 게 좀 있소."
앤은 그와 대화를 나눌 준비를 이미 마쳤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결정하죠."
그녀의 당돌한 모습에 고드프리는 웃음을 흘리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앤의 입을 여는 데 성공한 그는 곧 딘스턴의 영주성을 향해서 출발했다.
***
칼은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밤하늘을 이불보다 더 많이 덮은 그는 이틀째 손님 방에 머물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칼은 영주성의 정원에서 오랜만에 차를 마시는 중이었고, 노팍 남작의 배려로 붙여준 사용인들의 얼굴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전기사단의 고드프리라고 합니다."
진중한 목소리, 큰 키와 균형 잡힌 체격,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시간 검을 수련한 것으로 보이는 손과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고드프리가 상당한 실력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칼 경, 저는 단지 한 가지 조사를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니까요."
"내 이름을 아는군."
게다가 성전기사단의 고드프리라는 이름. 동대륙에서 칼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들어 본 관계인 것이다.
칼의 목소리에 고드프리는 그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갔다.
변방의 작은 두 영지 간의 영지전에 직접 개입하진 않더라도 영지전의 경과와 결과를 확인하고 보고하여 교단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범상치 않은 흔적을 발견하고 따라왔다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동대륙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칼은 반응하지 않았다.
고드프리는 칼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칼은 마주한 그 눈을 피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오랜만입니다, 고드프리 경.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그 기사분과 급히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터라."
"이사벨…?"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건 두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 어디선가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였다.
#15화
정원으로 들어선 여인은 반짝이는 갑옷 위로 교단의 상징이 수놓인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커다란 메이스가 매달려 있었다. 보통의 메이스가 한 손 용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메이스는 양손으로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손잡이가 충분히 컸다.
다만, 메이스의 머리 부분에 강철 가시는 붙어 있지 않았다.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달리 살벌한 크기의 메이스와 하얀 옷 위에 걸친 갑주가 그녀를 더 눈에 띄게 했다.
"오랜만입니다, 고드프리 경."
"…당신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저 역시. 아무튼, 고드프리 경. 거기 칼 경은 교단에서 확인할 사안이 있어 제가 잠시 모셔가야 할 것 같군요."
정작 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와중에 고드프리와 이사벨은 서로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았다. 이사벨이라는 여인은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마치 기계처럼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먼저 이야기 중이었소."
"교단의 공적 용무를 띠고 나왔습니다. 고드프리 경께서 더 중요한 용무를 가지고 계신 게 아니라면 교단의 일을 불필요하게 지체시키고 계신 겁니다."
그녀의 기계적인 말투와 논리에 고드프리 역시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 듯했다.
"당사자는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중간에 들어온 칼의 말에 얼어붙어 있던 이사벨의 표정이 잠깐 풀어졌다. 순간 아차 하는 기색이 읽혀 그 부분은 재미있었다.
"교단의 이단심문관 이사벨입니다."
서대륙은 지구의 중세 유럽처럼 유일신을 믿는 하나의 교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교황이나 주교 같은 성직자 이외에도 교단은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들을 지켜주고 필요할 때는 외부로도 투사할 수 있는 무력을 원했는데 이르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이 성기사단이었다.
성기사들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된 교단이 활동의 영역을 더 넓히며 만든 제도가 이단심문관, 다른 말로는 종교재판관이었다.
완전무학자들이 대부분인 변방에서 사회적 도덕을 계도하거나, 민심이 흉흉하고 혼란스러운 곳에서 종교적 권위에 기대 질서를 회복시키는데 더해, 배교자나 악마숭배자들을 심문하고 재판하고 처분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이단심문관은 평시엔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필요하다면 인근의 성기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평시에 혼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일신의 무력들이 충분히 출중하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칼에게 얕게 목례했다.
칼 역시 몇몇 이단심문관들을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이 이사벨이라는 이단심문관 정도면 개중에서는 제법 점잖은 편에 들었다.
"칼 경께서는 어떻게 하시고 싶으십니까?"
그녀의 질문에 칼은 작게 미소짓고는 고드프리 쪽으로 슬쩍 몸을 돌렸다.
"공무가 급하다니 잠깐 협조하지."
칼의 이야기에 고드프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물러났다.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사벨을 따라나서는 칼의 등 뒤로 고드프리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이사벨 역시 놓치지 않았다.
단순히 마수화(魔獸化)와 관련된 조사를 하러 나왔던 그녀는 성기사단의 조장 고드프리가 자유 기사 칼에게 극진히 예의를 차리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그 장면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반인반수의 괴물 이야기가 궁금해서 온 거라면, 나 역시 아는 바는 많지 않소."
걸어가는 동안 들린 칼의 무심한 목소리에 이사벨이 고개를 돌렸다.
"아는 만큼만 얘기하십시오."
딱딱한 그녀의 말에 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걸음을 옮긴 이사벨은 칼과 함께 영주성의 객실 중 하나로 들어갔다. 이미 영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온 모양인지 그곳에는 다과가 이미 준비 되어 있었다.
또르르륵.
차 내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차향이 가득 퍼졌다.
대단히 신중한 표정으로 찻물을 따른 이사벨이 눈까지 감고 잠깐 차향을 음미하더니 도저히 말 안 하고는 못 베기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좋은 차입니다."
"?"
이어서 조심스레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있다 삼킨 이사벨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질문을 시작했다.
"마수화 한 인간을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까?"
"반인반수의 괴물을 그리 부른다면, 그렇소."
"교단에서는 그들이 반인반수의 괴물로 변하는 것을 일컬어 마수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신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흉물들로, 저들이 야수로 변하는 혐오스러운 능력을 얻으려면 인간을 제물로 바치며 사특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파악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그들을 마수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렇군."
칼은 무표정했고 이사벨 역시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칼 경은 성전기사단의 고드프리 경을 어떻게 아십니까?"
"잘 아는 건 아니오. 서로 이름이나 들어봤지. 그건 고드프리 경에게 물어봐도 같을 거요."
두어 가지 잡다한 질문이 오간 후 이사벨이 원래 다루려던 주제를 꺼냈다.
"…마수화되는 자들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마주치게 된 경위를 처음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몇 가지 질문이라더니 심문이군."
차가운 이사벨의 눈동자가 칼을 향했다. 칼은 그녀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했다. 무심한 눈과 차가운 눈 두 눈이 서로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예. 심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말만으로는 의심을 걷어낼 수 없습니다. 나는 이단심문관으로서 당신이 그 저주받은 괴물들과 연관이 있는지 의심하고 있으며, 의심을 벗으려면 다음 작전에 동행해주십시오."
본색을 드러냈군.
"내가 교단의 일을 거들 의무는 없소."
"싸워달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동행해 달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그럴 이유는 없소."
"…교단의 권위에 도전하지 마십시오."
[임무: 대륙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을 확인.(연계형 임무, 최조 연계 임무 완료시 진행률 5% 달성]
칼의 시선이 시야 한쪽에 자리한 임무 창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면에 도사린 어둠'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이었지만 이 어둠이라는 게 이사벨이 한 얘기와 닿아 있음은 정황상 분명했다.
이 망겜이 제시한 임무를 위해서라도 이사벨과 동행하는 것이 좋은 칼이었지만,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에게 강요할 권한이 없소. 교단이 내게 신세를 졌다는 증표로 이걸 건넨 것 아니오?"
팅!
칼의 손에서 프레드릭에게 받았던 징표가 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이사벨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걸… 어디서…?"
"프레드릭 수도원장이 주더군."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이사벨의 눈이 다시 가늘어지고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프레드릭 원장이 이 징표를 넘긴 이유는 당신을 지켜보겠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권리로?"
"신의 권위에 기대서."
그녀의 목소리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정말 중세스럽군.'
마수화를 퍼뜨리고 다니는 모종의 세력과 교단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사실 칼은 지금까지 교단 자체와는 크게 엮일 일이 많지는 않았다. 다만, 중세의 십자군처럼 신의 뜻을 실현하겠다고 동대륙으로 출병한 정벌군인 성전기사단과 활동하면서 간접적으로 교단의 인사들과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었다.
'재수 없게 걸렸군….'
그렇다고 세력도 없이 홀로 다니는 칼이 이 서대륙의 권력을 양분하는 교단과 척을 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물론, 값을 받아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막무가내로 반목할 때는 아니었다.
"설명이 됐을 테니 다음 임무에는 동행하는 걸-."
"그 징표, 교단에 부탁할 때 사용할 수 있다지?"
"?"
"그 징표를 반환할 테니 내게 관심을 끄시오. 그게 내가 원하는 바이니."
"…!"
이사벨의 얼굴이 처음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이건 소원권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건 모르겠고, 돌려줄 테니 나한테 관심을 끄라는 말이오."
"…."
이사벨은 눈앞의 남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내심 인정했다.
하지만 이사벨 역시 다양한 의미를 담아 '눈 먼 지혜의 별'이라 불리는 이단심문관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징표의 가치가 모자라단 거요?"
"물론, 징표는 교황 성하라도 함부로 하지 못할 약속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지만 이단심문관 또한 필요하다면 교황 성하까지 조사할 권한이 있습니다."
조금 그녀를 골려줄 작정으로 떠본 칼이었지만, 덕분에 눈앞의 여인이 반쯤 광인이라는 사실만 더 확실히 알게 됐다.
"대체 왜 날 의심하는 거지? 나는 그 마수화 된 달튼이란 자를 벴는데?"
"예.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출로 교단 내에 첩자를 만드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이미 몇 번 사용된 수법입니다."
인간을 마수화 시키는 조직과 교단의 싸움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교단에 들어갈 생각이 없소."
"하지만, 당신은 프레드릭 수도원장으로부터 징표를 받았고. 언제든 교단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지요."
"억지로군."
이사벨은 전혀 칼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시야 한 구석에 떠올라 있는 창을 다시 한 번 슬쩍 본 칼이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나는 동행만 하면 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싸움은 성기사들이 할 테니."
이사벨의 고집스러운 눈동자를 보면서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칼은 한숨 대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위 임무: 동굴 속의 어둠을 밝혀라.]
이사벨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칼은 이들과 동행을 해야했다. 손대지 않고 코를 풀 게 된 격이니 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
뒤돌아서 멀어지는 칼의 모습을 보면서 이사벨은 징표를 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이사벨이 칼과 함께 떠나고 정원에 남은 우스터는 고드프리에게 말을 걸었다.
"…조장님, 대체 그는 누구입니까?"
"칼. 동대륙에선 슈발리에의 유령이라 불리던 남자지."
"동, 동대륙이요?"
아무리 성전기사단이라지만 새파란 신참인 우스터는 아직 동대륙 땅을 밟은 적도 없었다.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른다."
"예? 확인 했으면 복귀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전기사단 본단으로부터의 명령이다. 슈발리에의 유령임이 확인된다면 후속 관찰을 하라는."
"…."
방금 조용히 나타나서 봉투 하나만 건네고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우스터는 고드프리의 손에 들린 종이와 그곳에 찍힌 직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드프리의 시선은 조금 전 이사벨과 칼이 떠난 방향을 향해 있었다.
'눈 먼 지혜의 별이라는 이사벨이… 하긴, 마수화 사건이라면 서대륙에선 교단이 가장 학을 떼는 사안이니….'
마수화라는 건 동대륙에서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은 고드프리 역시 비밀스럽게 교단의 사람을 통해서나 들어본 일이었다.
***
칼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여전히 두 개의 달이 빛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조용히 눈을 감은 칼은 미간을 한 번 찌푸린 다음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서대륙으로 넘어오면 전쟁 중인 동대륙에서보다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때 작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들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습니다."
"성기사단의 파견 병력은 어떻게 됐소?"
"곧 도착할 겁니다."
마수 놈들의 은신처는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딘스턴이라면 그래도 꽤 큰 도시인데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걸 보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나저나 역시 교단은 교단이군.'
이사벨이 이곳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흔적을 금방 발견했다는 것은 인상 깊었다.
"찾자면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는데 왜 숨어들면 찾지 못하는 거지?"
"대륙이 지나치게 넓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그 점에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튼이라는 자가 마수였다는 사실을 칼 경이 밝혀낸 덕분에 제가 빨리 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사벨은 순수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잠시 후에 출발할 겁니다."
"준비하지."
이사벨이 자리를 뜨고 칼은 장비를 좀 챙길 겸 영주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팍 남작이 본인 수중에 있는 것은 뭐든 주겠다고 했으니 무기고를 들러봐야 할 것 같았다.
#16화
영주 노팍이 얼굴에 피로가 새겨진 것 같은 얼굴로 칼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사벨 이단심문관님과 중요한 일을 하러 간다고 들었소."
"뭐, 그렇게 됐군."
"필요한 것이 있는 것 같소만."
"안 그래도 요청하러 온 참이야."
"조셉에게 이미 언질을 해뒀소, 조셉과 함께 가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충분히 챙겨가시오."
"고맙게 받지."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조셉이 그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노팍은 적당히 부패했고 그 대가로 돈만은 꽤 만진 인물이라 그의 창고에 들어서자 질 좋은 물건들이 많이 보였다.
"상당하군."
"영주님께서 모두 챙겨가도 괜찮다고 하셨으니 고르셔도 됩니다."
조셉은 칼과 노팍 영주가 공유하는 과거에 대해서는 질문 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충분히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눈치는 어느 조직에서나 필요한 재능이었으니까.
칼은 천천히 노팍의 창고를 둘러봤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재밌는 물건이군."
"투척용 무기라고 들었습니다. 어느 옛 암살자가 썼던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이름까지 있는데, 달그림자라고 하더군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물건은 열 자루의 단검 모양의 비도가 꽂혀 있었는데 허리춤과 어깨에 띠처럼 감아 두르면 서코트 밖으로는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은폐되게끔 디자인된 모양인데, 그렇게 위장이 됐음에도 단검을 빼내기는 굉장히 편하게 되어 있었다. 단검은 일반적인 동양의 비도와는 다르게 아주 작은 칼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걸로 하지."
칼은 비도를 챙겨서 몸에 착용하고 흡족한 표정이 됐다. 이곳에 와서 사실 비도술과 투척술을 꽤 오랜 시간 연습했다. 특히 동대륙 전쟁 중에 요긴하게 사용한 것이 투척술이었다.
전쟁 중에는 주로 죽인 상대방의 무기를 뺏어서 투척하곤 했는데 따로 단검을 여러 개 지니기는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워서 장비를 일부러 맞추지는 않았다.
서대륙에서는 그렇게 대단위 전투에 참가할 일이 없었으니 비도를 회수하기도 용이할 터였다.
사실 이 비도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특수하게 제작된 이 비도 수납 벨트였다.
10개의 비도를 보관하도록 설계된 이 벨트의 재질은 칼 역시 처음 보는 가죽이었다. 가죽은 서코트 아래에서 적절하게 심장과 복부를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실험 삼아 검을 뽑아서 베어 보았는데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 역시 칼의 마음에 쏙들었다.
[달그림자: 투척 무기를 보관하는 벨트로, 투척술 정확도를 2배 증가시킨다.]
아이템 기능이 개방되면서 네임드를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이 꽤나 기분 좋게 작용했다.
"덕분에 재밌는 물건을 얻었군."
"만족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물건을 얻게 됐으니까."
칼은 비도를 착용하고 연무장으로 걸어나갔다. 그곳에서 칼은 어느 나무에서 10미터 가량 떨어져서 섰다. 표적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검을 아주 정확하게 던지기엔 꽤 멀어 보였다.
칼은 그곳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표적을 응시했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눈 깜짝 할 사이에 몇 개의 단검이 하늘을 날아서 파공음을 일으켰다.
파파팍!
그렇게 한 호흡에 4개의 단검이 정확한 사각형을 그리고 꽂혀 있었다. 단검의 날도 상당한지 단단한 나무에 칼자루까지 깊게 박혀있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확실히 물건을 착용하고 나자 감각이 더 날카로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 투척술도 하실 줄 아셨습니까?"
"잡기술이지만, 살아남는 데는 도움이 되지."
칼의 대답에도 조셉은 그의 투척술을 잡기술이라 부를 수 없었다. 당장 자신 역시 기습을 당한다면 저 단검을 막아낼 수 없을 거라 확신했으니까.
"노팍 영주님께서는 대여가 아니라 선물이라 했으니 가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생각이었지."
평대를 하던 칼이 어느새 하대를 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평대를 하던 조셉은 칼을 향해 어느새 존대를 하고 있었다.
"창고는 더 둘러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굳이 그럴 필욘 없어 보이는군."
연무장에서 몇 번 더 단검을 테스트해본 칼과 조셉은 식량창고에 들러 물자와 식량을 넉넉하게 챙기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영주성 앞에는 25명의 기사들이 완전 무장을 갖춘 채 말 위에 올라 있었다.
그중에는 칼과 이사벨은 물론 고드프리와 우스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
짧고 간단 명료한 이사벨의 말에 일행이 출발하고 칼 역시 실버의 말안장을 바로 툭툭 치면서 앞을 향해 출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교단의 제 5 성기사단 소속 켈빈 마노프라고 합니다."
"칼, 자유기사요."
칼은 동대륙에서 교단의 성기사들을 꽤 자주 만났었다. 대략 20명의 성기사들을 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장급인 듯 한데, 동대륙에서와 기준이 같다면 익스퍼트 중급에서 상급 정도의 실력을 가진 기사라는 의미였다.
고드프리와 비교하면 조금 떨어지는 실력이지만, 그래도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었다.
"칼 경께서 상당한 실력자란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소문에 불과하오."
"소문이라기에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보여주신 활약들이 너무 인상적이더군요."
켈빈이라는 기사는 이사벨과 달리 언동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거기에 얼굴이 족제비처럼 생겨서 빈말로도 좋은 인상이라 하긴 어려웠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엔 칼 역시 성기사라고 하면 모두 자신이 믿는 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헌신하는 고결한 자들이라는 막연한 인상이 있었다.
물론 그런 성기사도 있었지만, 여기서 본 몇몇 성기사단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사설 기사단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저 소속이 교단일 뿐이랄까.
"언제 기회가 되면 꼭 가르침을 청하고 싶네요."
표현 자체는 무례하지 않았지만 말투나 표정이 경박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칼의 실력이 거품이라는 듯한 그의 말은 충분히 주변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칼은 전혀 개의치 않고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이사벨은 켈빈을 제지하려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걱정해야 할 정도로 칼이 어수룩하지 않다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사벨 이단심문관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게 얼마 만인지. 제가 이사벨님을 평소에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대륙 남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사벨 님의…."
켈빈은 느끼한 표정에 부담스러운 칭송의 말을 골라가며 이사벨의 옆에 붙어 말을 몰고 있었다.
고드프리 역시 신중한 성격에 쓸데없이 나서는 편은 아니었던데다가, 교단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켈빈 경."
한참을 떠들던 켈빈을 향해 이사벨이 짧게 그를 불렀다.
"네, 이사벨 님. 그 목소리를 더 들려주시길 청합니다."
"시끄럽습니다."
"네?"
이사벨의 짧은 한 마디에 순간 말을 몰아가는 일행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사벨 님?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들었습니다. 시끄럽다 했습니다."
말투는 사무적이고 딱딱했지만 그 냉막한 표정에서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경멸이 새어 나왔다.
"으윽…."
일그러지는 켈빈의 얼굴과 함께 그렇게 일행들은 어느새 배교자들이 숨었다는 곳 근처까지 도달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숲이었지만 기분 때문인지 초입에서부터 스산한 공기가 감도는 듯 했다.
"조장님, 조장님은 그 마수인이라는 것과 싸워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직 없지."
"칼 경은 정말 특이한 경우입니다. 이단심문관이 일부러 찾아다녀도 쉽게 잡기 어려운 게 마수인입니다."
이사벨이 우스터에게 대신 대답했다.
"이사벨 이단심문관, 대체 그 마수인이란 건 정확히 뭡니까?"
고드프리 역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성기사였지만 야수로 변하는 인간은 본적이 없었다.
"배교자들이 그들의 믿는 악마의 힘을 빌어 짐승으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그들을 마수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짐승의 힘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댓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만, 주술적 행위를 위해서 제물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물이 필요하다? 설마 사라진 아이들을 제물로 쓰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가능성이 높다 보고 있습니다."
말에 올라 주변을 살피고 있던 칼이 의문을 표했다.
"그런 이상한 놈들 치고는 달튼이란 놈은 너무 쉽게 적발될 만한 곳에 있었던 것 아닌가?"
"원래 그들은 음지에서만 활동하던 자들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에 조금씩 양지에 발을 들이밀기 시작했지만 말이죠."
그녀의 이야기에 고드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달튼 역시 칼 경에게 목숨을 잃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수인은 보통의 기사보다 훨씬 강하니까요."
이사벨의 말처럼 마수인이 어디서 객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회복력이라면 엄청난 실력자를 만나도 도망쳐야 할지언정 생존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 달튼이라는 자의 시체를 부검해본 결과와, 과거 적발되어 정화된 마수인들의 기록을 대조해보면… 달튼은 마수인 중에서 평균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추측됩니다. 기록에는 익스퍼트 상급의 성기사가 그 정도의 마수인을 홀로 상대하는데 큰 곤란을 겪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 정도란 말이오?"
이사벨과 칼의 대화에 켈빈이 끼어들었다.
"그 정도지요. 그런데 칼 경께서는 그런 마수인에 더해서 달튼 기사단이라는 놈들까지 한 자리에서 잡으셨다니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켈빈의 말투와 목소리에는 이미 칼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켈빈 경, 예의를 지키십시오."
"쯧, 미안합니다."
켈빈이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이사벨을 향하는 목소리가 불퉁한 것이 속 좁기가 딱 생긴대로였다.
#17화
성기사단의 조장인 고드프리조차 여기 합류하기 전까진 마수인의 존재를 몰랐기에 궁금증이 많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마수인이라는 놈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가 관건이겠구려. 그런 사특한 것들이 숫자까지 많다면…."
"아직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저만한 마수인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걸로 보였어요."
"그렇겠지. 정도가 아닌 사도라 하나, 그만한 위력을 내기가 쉬울 리 없지."
고드프리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옆을 슬쩍 훑었다. 그곳에는 그렇게 강한 마수인을 상처 하나 없이 죽이고도 태연하게 말 위에 누워 머리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칼이 있었다.
"조금 더 속도를 내야겠습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다간 놈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혼자 여유가 넘치는 칼을 의식한 건지 이사벨이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칼은 그녀가 뭐라고 하건 그저 팔짱을 낀 채 말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핏 그 모습이 쉬워 보여도 말 위에서 눕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기예였다.
"저 멀리 어디서 듣길,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더군."
"처음 듣습니다."
타협의 여지를 내주지 않는 이사벨을 보면서 칼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몸을 슬쩍 일으켰다. 그리고 한 무리의 기마가 듬성듬성한 숲속에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지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벨의 손이 올라갔다.
조금씩 빽빽해지기 시작한 숲에 더해 슬슬 산이 험해지기 시작해 말을 타고 가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말을 묶어두고 걸어서 이동합니다."
"너는 여기 남아서 말을 지켜라."
기사단의 기사 하나를 남겨 두고 대략 25명의 일행이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사벨은 품 안에서 나침반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서 일행을 인도했다.
이사벨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침반이 멈춘 자리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주변과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곳에서 이사벨과 일행들은 한참 동안 주변을 맴돌았다.
"무언가 문제가 있소?"
고드프리가 뭐라고 하건 이사벨은 나침반과 사방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뒷짐을 지고 상황을 지켜보던 칼이 설렁설렁한 걸음으로 이사벨의 옆을 지나쳤다.
"잠시 비켜보시겠소?"
"뭘 하시려는 겁니까?"
"시험."
칼은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왼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의 칼은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전방을 잠깐 노려보다가 검을 휘둘렀다.
'갑자기 허공에 왜…?'
쩌저저적.
분명 주변과 똑같은 숲으로 보였는데 칼이 휘두른 검에 의해서 공간이 찢겨나가는 듯 보이더니 검은 동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도 짐승의 힘을 빌어 쓰는 판인데 이런 눈속임이 가능한 것도 어색하지 않겠지."
칼의 한 마디에 이사벨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겠습니다."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도 칼은 다시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일행의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동굴 내부로 들어선 일행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고 사방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내부로 진입했다.
"으음…."
고드프리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처럼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다른 일행들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불경한 상징물들 투성이군요."
장정 셋이 어깨를 대고 서면 꽉 찰 너비의 동굴 좌우로 괴이한 모양으로 조각된 석상들이 즐비했다. 그건 마치 야수 같기도 하고 악마 같기도 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음침한 분위기에 일행들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 한마디 없이 발소리도 최대한 죽여 가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던 일행은 너비를 가늠하기 힘든 캄캄한 동공에 들어섰고, 이내 뭔가 잘못됐단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함정이었던 모양이군."
칼의 한 마디가 동공에 울리기 무섭게 사방이 기이하고 요사한, 그리고 수많은 불빛으로 가득 찼다. 언뜻 불빛으로 보인 그것들은 모두 눈동자였다.
노랗고, 파랗고 마치 도깨비불처럼 번쩍이는, 짐승의 눈동자.
횃불이 밝히는 범위 아슬아슬한 밖에서 눈동자만이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이내 거기에 야생의 살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일행은 각자의 무기를 빼어들고 빠르게 접근해오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컹컹!"
형형색색의 눈을 빛내며 야수들이 달려들었다. 칼은 짐승이 튀어나오는 상황에서도 뒤에 서서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단순한 동행자로 이 여정에 참여하도록 협의가 된 사람이었다. 굳이 먼저 나서서 움직일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당신은 대체 왜 안 싸우는 겁니까!?"
켈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칼을 향해 소리쳤다. 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커억…!"
분명 성기사들의 실력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야수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놈들 때에 일행들의 부상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달려드는 놈들도 강했고 무리를 지어서 한 번에 덤벼드니 성취가 떨어지는 성기사들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부웅, 퍼어억!
뭔가를 보고 분석하는 듯 하던 이사벨이 등 뒤에 메여있던 거대한 메이스를 휘두르면서 야수 하나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신께서 나와 함께하시니 내가 가는 길이 곧 빛이라."
그녀의 입에서 나온 중얼거림과 함께 주변이 환하게 밝혀지고 어린아이 키만큼 커다란 메이스에 빛이 집중됐다.
'신성력인가.'
메이스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가일층 응축된다는 생각이 들던 그 순간 그녀의 메이스가 야수들의 무리를 쓸고 지나갔다.
퍼퍼퍼퍼퍽!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사방이 야수들의 살점으로 뒤덮였다.
메이스를 휘둘러 야수들을 짓이기며 기도문을 읊조리는 이사벨의 모습은 신의 경건한 수족이라기보다는 도살자 같은 인상마저 풍겼다.
"합!"
메이스는 달려드는 짐승을 멈춤 없이 짓이겼다.
그렇게 이사벨의 합류로 상황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던 그때 한 무더기의 야수들이 더 등장하면서 이사벨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에서부터 성기사들이 계속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나설 작정인 겁니까!? 우리가 모두 죽으면 당신이라고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습-!"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켈빈을 무시하고 칼이 몸 안의 기를 돌리면서 야수들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
조용히 눈을 감고 몸속에서 파도치는 기의 파동을 관찰하던 칼의 눈이 번쩍 떠진 순간, 그의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되기 시작했다.
칼의 검이 순식간에 앞으로 쭉 뻗어 나간다 싶은 순간 다수의 야수가 죽어 나갔다. 칼은 자리에 서서 조용히 몸의 기운을 갈무리하면서 야수들과 대치했다.
"말도 안 돼…!"
켈빈은 눈앞에서 벌어진, 보는 것 만으로도 압도되는 모습에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가, 이내 자존심이 상하는지 몸을 획하고 돌렸다.
여전히 야수들과 대치 중인 칼은 주변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몸의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칼의 눈으로 보기에 세상은 기의 운용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굉장히 무식하다고 할 수 있었다.
쌓인 힘을 그대로 밖을 향해 뿜어내는 것이 그들이 기를 운용하는 방법의 전부였다.
이 세계에 있는 극소수의 마스터라는 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깨달음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다.
어찌됐건 칼은 평범한 기사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기의 운용 부분을 열심히 연구했다.
지난 세상에서 자주 보던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서 묘사된 기의 활용법을 떠올려 보는 것 만으로도 도전 과제는 수없이 많았다.
검으로 막을 만들어낸다거나 기로 물건을 밀어내거나 멀리 있는 것들을 맞추는 것 등 할 수만 있다면 도전할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그렇게 다양한 노력을 통해 칼은 지금 짙은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됐다.
몇 번의 절삭음이 나고 동굴 속에 고요가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 일행들을 괴롭히던 야수들은 어느새 시체가 되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칼의 압도적인 신위를 본 나머지 일행들의 얼굴에는 경악이라는 단어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군요…."
우스터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머지 일행들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고 유일하게 켈빈만이 독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지금이라도 왔던 길로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군. 느낌이 좋지 않아."
처음 동굴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지던 직감적인 불길함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간 칼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날 선 감각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자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한 번 부딪혀 보니 무서워졌나 봅니다?"
켈빈의 무가치한 도발을 무시한 칼은 오직 한 방향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칼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 켈빈은 그 자리에서 앞을 향해 나아가면서 동굴 안으로 더 들어가고자 했다.
그는 여태껏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남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교단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마노프 가문의 지원 아래 성기사단이 밀어주는 차세대 실력자로 이름을 날려왔다.
이사벨 앞에서 무시를 당했던 것도 그렇고 칼로 인해서 그의 체면이 이래저래 말이 아니게 구겨진 만큼 그는 지금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비키는 게 좋겠군."
"켈빈 경, 물러나세요."
"이사벨님,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성기사단의 책임자로서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켈빈은 그의 외침이 꽤나 시기적절했다고 생각했다. 도망치자는 칼과 그런 상황에서도 의기 넘치게 앞을 향해 전진하자고 외치는 자신. 상처 입은 체면을 회복하기에 적절하지 않은가.
빠아아악.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온 거대한 곰.
크기도, 기이하고 흉측한 형상도, 붉은 안광도 평범한 곰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 곰이 그의 뒤에서 앞발을 휘둘렀다. 켈빈이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몸은 한참을 날아서 동굴 구석을 향하고 있었다.
잠깐 경련하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멈췄다.
켈빈이 의식을 잃은 직후, 맹수의 울부짖음이 동굴 전체를 메웠다.
[히든 보스가 출현했습니다.]
#18화
지금까지 15년간 도통 도움이 된 적 없던 시스템 창이 최근에는 꽤 자주 뜨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마수 곰의 기척이 느껴지기 꽤 전부터 알림창이 칼의 앞에 올라온 상태였다.
"이사벨 경, 저건 내가 전에 봤던 괴물과는 또 다른 것 같은데 맞소?"
끄덕.
이사벨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졌다.
"저놈은 왜 말을 못 하는 거지? 내가 지난번에 본 그 쥐머리는 분명 말을 했는데?"
"말을 안 한 거지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칼의 목소리를 들은 곰의 입에서 유창한 말이 튀어나왔다. 자리에 모여 있던 이들은 그 괴이한 광경에 신기함과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눈앞의 괴수 곰은 맹수의 포효와 달리 전혀 흥분하지 않고 있었다. 녀석의 붉은 눈은 놀랍도록 섬뜩하고 침착했다.
"신과 세상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는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족히 사람 세배는 될 법한 흉측한 괴물 앞에서도 놀랍도록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이사벨의 모습은 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세상의 섭리? 네놈들이 항상 뜻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그 헛소리로군. 세상에 대체 달리 무슨 섭리란 것이 있다는 말이냐? 네놈들도 똑같이 약자 위에 군림하고 착취하는 것은 똑같지 않더냐?"
짧은 그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었다.
"네놈들이 먹는 음식, 입는 옷, 자는 장소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힘없는 자들을 착취한 결과다. 우리와 뭐가 다르지? 차라리 우리는 그저 모두가 자유와 힘을 추구한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살고 싶으면 사는 순수한 자연 그대로로 우리는 돌아가고자 할 뿐이야."
짧은 말이지만 칼은 저 치들의 이념을 엿볼 수 있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하지만 말초적 욕망대로만 산다면 그건 자연상태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칼은 저들이 짐승의 형상을 한 이유가 어쩌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감히 우리 앞을 막아서지 마라!"
곰은 이사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메이스가 곰의 머리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메이스와 곰의 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두 사람의 첫 충돌 결과는 곰의 우세였다. 이사벨은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고 아직 진동하는 메이스 만큼이나 그녀의 손 역시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곰은 승기를 잡고 그대로 이사벨을 향해 재차 공격을 이어갔다. 앞발이 순식간에 양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휘둘러지는 순간 이사벨은 두 공격을 모두 막지 못할 거라는 걸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합류하겠소!"
그때 고드프리의 검이 날아드는 일격 중 하나를 막아냈다. 그리고 이사벨의 메이스가 나머지 하나를 막아낸 순간 곰이 육중한 몸으로 두 사람과 그대로 충돌했다.
"크윽…!"
짧은 거리였지만, 폭발적으로 지면을 차면서 부딪힌 육중한 곰의 질량 공격에 두 사람 모두 몇 바퀴를 굴러서 벽에 부딪혔다.
전투 가능한 성기사가 5명가량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의 전투 상황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인원이었고,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곰과 전투를 이어갔다.
일격이 교환 될 때마다 서로 피해가 누적되고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상식 밖의 회복력을 자랑하는 곰이었다.
"…이거 쉽지 않겠군."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칼 경이 조금만 도와줘도…."
고드프리는 뒤에서 방관자처럼 바라보고 있는 칼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 경은 단순 동행하기로 협의했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검을 이미 두 번이나 빌렸으니, 더는 말 할 것이 없습니다."
아쉬워하는 고드프리와 달리 이사벨은 깔끔하게 상황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때, 곰이 다시 한번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왼쪽…!"
곰은 오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가 마치 토끼 같은 몸놀림으로 왼쪽 대각선으로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너무 빠른 속도에 순간적으로 곰을 놓친 두 사람의 앞에 어느새 곰이 접근했고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하고 곰과 충돌하면서 벽을 향해 날아갔다.
"…왼팔이 부러진 것 같소."
"저도 갈비뼈가 몇 대 나간 것 같습니다."
둘 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달튼을 죽였다는 자가 너인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선 두 사람의 앞에 언제 나타났는지 무심한 표정의 칼이 서 있었다.
'막타나 쳐볼까 했더니.'
이사벨이나 고드프리 정도면 꽤 실력자라 두 사람이 협공하면 이기진 못해도 큰 피해를 강요할 순 있을 줄 알았더니 상성이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이사벨의 메이스 공격은 저 크고 단단한 뼈대와 괴물 같은 회복력 앞에서 무뎌졌고, 아직 슈페리어에 닿지 못한 고드프리의 검은 곰의 질긴 가죽을 뚫어내지 못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교단의 사람도 아닌 이가 어째서 우리의 행사를 방해하는 거지?"
"그렇게 됐군."
"…그렇다면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겠군."
대화가 끝나고 짧은 침묵이 느껴진다 싶은 그 순간 곰의 커다란 몸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칼을 향해 쏘아져 나왔다.
"위험…!"
두 사람과 상대할 때보다 더 빨라진 곰의 속도에 이사벨이 경고를 보내는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동굴 한쪽이 패이면서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충격이 꽤 컸는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는 마수인이 있었다.
몸을 일으킨 녀석은 이빨을 드러내고 짐승의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땅이 패일 정도의 힘과 함께 곰이 다시 한번 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마치 하나의 선처럼 쭈욱 이어지는 마수인의 안광 앞에 놓인 칼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칼은 간단한 움직임으로 마수인의 공격을 흘려냈다.
그리고 마수인의 왼쪽 옆구리 앞에 선 칼의 주먹이 그대로 틀어박혔다.
커다란 타격음도 없었고, 마수인의 몸이 튕겨 나가지도 않았지만, 칼의 주먹은 이전보다 훨씬 깊게 곰의 옆구리에 박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곰의 몸이 서서히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커어어억!"
쓰러진 곰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달튼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몸은 마수화 되기 전으로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이건…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이군…."
피를 쏟아내면서도 곰은 말을 하고 있었다. 회복과 죽음 사이에서 녀석은 눈빛이 꺼졌다 살아났다를 반복했다.
"칼 경, 정보를 얻으려면 녀석을 살려야 합니다."
"못살려."
"…?"
이사벨은 아무런 외상도 보이지 않는 곰을 살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상한… 기술이군… 쿨럭…."
녀석에게 꽂은 주먹은 무협소설에서는 내가중수법이라 하는 기술과 비슷했다. 회전시키며 꽂은 주먹이 신체에 닿는 순간 응집된 기운을 몸속에 밀어 넣고, 회전력의 결대로 기가 회전하면서 상대의 내부 장기를 손상시키는 원리였다.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이던 겁니까? 아이들은 왜 데려갔죠?"
이사벨의 차가운 목소리에 놈이 끌끌거리면서 웃어댔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얘길 하나?"
누가 봐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향해서 이사벨의 메이스가 그대로 내리쳐졌다. 마수화가 대부분 풀려버린 녀석의 머리통은 그리 단단하지 못했고 그녀의 메이스는 곰의 머리를 그대로 짓이겼다.
[히든 보스를 처치했습니다. 보너스로 민첩성, 체력, 지력 수치가 소폭 증가합니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명성 수치가 올라갑니다.]
지난번에 나왔던 강제 연계 임무는 완료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아직 이 동굴에서 찾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더니?"
"저런 자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오랜 시간 이단심문관 생활을 해온 경력자였다. 한눈에 보면 저들이 정보를 더 뱉어낼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거다.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지."
어차피 임무를 완료하려면 동굴 안을 뒤져야 하는 참이었다. 혼자보다야 여럿이 나았다. 켈빈을 비롯한 부상자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기사 한 명을 남긴 채 동굴 안으로 좀 더 들어갔다.
동굴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부분과 인위적으로 깎인 부분이 혼합돼 있었다.
"일 이년 준비해서 만들 공간이 아니군. 이사벨 경 대체 이들은 누구요?"
"굳이 말하자면 할라의 후예들입니다."
"할라라고 하면?"
"옛 악신들의 후손들이지요."
"음…."
"처음에는 옛 악신들의 후손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들은 이 대륙의 체제에 반하는 집단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이사벨의 말을 종합해보면 대충 이 시대의 폭동 내지는 혁명단체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은데 녀석들의 의도가 어찌 됐건 어린아이들을 잡아가는 녀석들이 제대로 된 놈들은 아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동굴 내부에 방 같은 공간들을 여러 개 만들어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물건은 모두 치웠는지 무엇에 사용하던 공간이었는지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동굴을 이 잡듯이 뒤지다 보니 처음 수색을 시작한 곳으로 모여 있었다.
"아쉽게도 별다른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쯤에서 수색은 마치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사벨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더 건질 것은 없다고 판단한 듯 했다.
"먼저 나가 있지. 조금만 더 둘러보고 갈 테니."
"…?"
일행들은 더 둘러보고 나가겠다는 칼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시종일관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던 그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수색을 더 혼자 더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런 눈으로들 보는 거지?"
"…머리를 혹시 잘못 맞으셨는지…?"
칼은 손을 들어 더 이상의 말을 막았다.
"더 둘러보신다니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더 나올 건 없어 보입니다."
일행들이 떠나고 칼은 천천히 동굴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직 완료창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뭔가 남겨진 단서가 있었다. 신중하게 동굴을 훑어보던 칼의 눈이 다시 한 번 동굴 여기저기를 훑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쯤 칼은 안력이 아무리 좋고 주의력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충분히 놓칠 법한 아주 미세한 구멍들이 여기저기 뚫려 있는 벽 하나를 발견했다.
밖에서 가볍게 두드려 봤을 때는 안이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말인즉 이 벽 자체는 진짜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칼은 주변 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눌러보고 만져보기를 몇 번을 반복해가던 그때였다.
달칵… 두드드드득.
한참을 더듬어가던 벽면의 한 공간에 손이 걸렸을 때 벽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더니 벽 하나가 통째로 옆으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19화
벽이 열리고 나온 공간은 다른 곳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칼은 오른손을 검에 얹고 천천히 동굴 내부로 들어섰다.
기관이나 함정 같은 것들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끝에 칼은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
툭, 데구르르.
칼이 새로운 공간의 문을 열고 마주한 건 조그마한 해골로 가득 찬 무덤이었다.
"이게 대체…."
넓은 공간에 가득 들어차 있는 건 잡혀갔던 아이들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들이었다. 족히 한눈에 보기에도 수백은 될 법한, 미처 다 크지 못한 해골 더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칼에게도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칼은 해골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살피기 시작했다.
"아…! 에수스시여!"
"이건…!"
"…!"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칼을 찾아서 다시 들어온 일행들은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던 걸까요?"
우스터의 얇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행들은 칼과 마찬가지로 공간 여기저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여기 좀 보십시오!"
한참을 여기저기를 뒤지던 일행들을 향해서 우스터가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해골 무덤의 가장 밑 바닥이었다. 동굴 바닥에는 기이하게 그려진 문양들이 가득했다.
"이건…!"
이단심문관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이사벨은 바닥에 있는 하나의 표식 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굴베이그."
아주 깊게 느껴지는 한 마디가 동굴 내부에 울린 순간 이사벨의 고개가 순식간에 칼을 향해 돌아갔다.
"칼 경께서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교단에만 고대의 지식이 들어 있는 건 아니지."
칼은 실제로 이 표식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최초로 이 세계에 넘어왔을 때부터 칼은 이 세계의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굴베이그의 표식을 발견했습니다. 강제연계 임무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굴베이그는 황금과 욕망, 소원의 마녀이자 악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들은 무언가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굴베이그에게 제물을 바치는 중이었을 겁니다."
"이상하군, 굴베이그는 신이 아니었나. 신에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고?"
칼의 이야기에 이사벨이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칼 경께서는… 잘못 알고 계셨군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서대륙엔 예로부터 수 많은 악신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수의 사람들이 에수스를 믿고 있긴 했지만요. 최초의 통일 황제께서는 국가의 통일과 함께 종교적 통합을 원하셨습니다. 각자의 신에 따라 흩어지길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에 황제께서는 이 땅에 자리하던 수많은 종교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시작했죠. 덕분에 황제 폐하의 정치적 통일 전쟁은 우리 교단의 종교적 통일 전쟁과 결을 같이 했습니다."
역사서를 열심히 읽었던 칼이었기에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금방 이해했다.
"시간이 흘러 황제께서 서대륙을 일통하면서 종교 역시 에수스의 가르침 아래 있게 됐습니다. 표면적으로는요."
"무력으로 통일이 완성됐다 해서 모든 것이 통일 된 건 아니었겠군."
"그렇습니다. 제국의 국교는 에수스교가 되었고, 다른 악신들은 마녀가 되고 악마가 되었습니다."
"굴베이그는 고대의 신이었다고 읽었다. 신이 교단의 정의에 따라 진짜 마녀가 되는 건 아닐 텐데?"
"진짜 마녀가 되었습니다."
이사벨이 다음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마녀가 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인간의 역사에 잊힌 신으로 잠들어 있었을 뿐이죠. 그러던 어느 날, 도시 하나가 몰살당했습니다."
이사벨은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에수스를 거부한 이들은 땅을 뺏기고 재산을 뺏기고 가족을 잃은 이들이었죠. 더 잃을 것이 없어진 그들은 악마를 몸에 받아들였습니다."
이사벨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고드프리나 우스터 역시 침을 꿀꺽 삼키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느 누구도 에수스의 현신을 보지는 못 했으나 그분의 힘인 신성력이 우리와 함께하듯이, 그들 역시 목숨을 걸고 자신을 제물로 승화시키면서 힘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 힘은 결코 이 세상에 이로운 힘은 아니었습니다. 시체가 걸어 다니고, 산 사람의 몸을 썩게 만들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멀쩡하던 인간이 목내이가 되는 끔찍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도 그렇게 몰살됐겠군."
"네, 이상하게도 그들은 어느 순간 감쪽같이 흔적을 감추고 이 대륙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대략 1년 전부터 이 땅에서 다시 흔적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 칼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럴리는… 없겠지….'
지난 7년간 멈춰 있던 임무, 그리고 서대륙으로 돌아온 칼과 돌아가기 시작한 시스템까지.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칼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칼은 고개를 털어내고 아이들의 해골 무덤을 바라봤다. 자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아이들도 죽지 않았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파도에서 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경께서는 대체 누구십니까?"
이사벨의 무심한 듯 차가운 눈동자가 비슷한 눈을 가진 칼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칼, 자유기사지."
그는 기계처럼 수없이 읊었던 자신에 대한 소개를 끝으로 몸을 돌려서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진행률 1%]
그래 어쩌면 이 모든 일이 끝이 나면 그때는 알 수 있을 거다.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
"대체 칼 경은 뭐하는 사람일까요?"
"확실한 건 그가 배교자니 이단이니 하는 이는 아니라는 거요."
"어째서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런 이가 무려 7년간이나 동대륙에서 성전에 참전했을 리가 없으니까."
고드프리의 이야기에 이사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교단에서 칼 경을 잘 지켜보라는 말은 했었지만, 감시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둘은 다르죠."
"한눈에 보기에도 칼 경께서 배교자라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세 사람은 서로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빨리 나가봐야 하는 것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어째서요?"
"켈빈 그 머저리가 또 주제넘은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설마."
"…켈빈 경이 충분히 지적이지 못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도… 엄연한 성전기사단의… 쯧. 빨리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사벨은 켈빈을 변호하려다가 포기한 듯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빠른 걸음으로 동굴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고드프리와 우스터가 얼른 쫓아가기 시작했다.
***
"이노옴! 모두가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팔짱을 끼고 구경이나 하던 놈이 감히!"
"조장님! 아닙니다! 그가 우리 모두를 구했습-커억!"
기절했다가 이제 깨어난 켈빈은 칼을 향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가 어떤 신위를 펼쳤는지 봤던 다른 성기사들이 그를 급하게 뜯어 말렸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켈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성기사들 역시 그를 말리는 걸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자 켈빈은 더 안하무인이 돼서 칼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당신만 도왔다면 내가 이꼴이 되지 않아도 됐었다!"
"한심하군."
짧은 한마디.
너무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그 단어에 순간적으로 켈빈의 몸이 정지했다.
"지금 한심하다고?"
"제대로 들었군."
"이노오오오옴! 더는 용서하지 못한다!"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켈빈이 검을 뽑고 칼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가 켈빈이 칼에게 깨지는 모습을 연상하던 그때였다.
짜아아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켈빈의 고개가 돌아갔다. 손찌검에 정신이 번쩍 돌아온 켈빈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선 여인의 모습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켈빈경. 칼 경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 자리에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녀의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에 켈빈이 고개를 떨궜다. 부들거리는 손을 보니 뭔가 억울하긴 한 듯 했는데,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뺨까지 후려 맞은 다음이라 그 역시 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의 틈에 칼은 무신경하게 말했다.
"먼저 가보도록 하지. 이번 일에 대한 빚은 나중에 교단에서 받으면 되겠지."
"감사했습니다."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는 칼을 향해서 이사벨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길로 딘스턴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동굴에서 성으로 돌아온 칼은 여관을 향해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그 끝에 마주한 것은 반갑지 않은 현판 하나였다.
[폐업. 재개업 미정.]
'떠났나 보군.'
칼은 얼마 전 그녀의 목에서 발견됐던 황실의 목걸이를 기억했다. 그녀 역시 이곳에 오래 머물 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기회가 되면 또 볼일이 있겠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칼은 몸을 돌렸다. 오늘은 노팍 영주의 술창고나 털어야 할 모양이었다.
***
"그러니까, 달튼이 괴물로 변했다는 겁니까? 거기다가 이단 심문관까지 나오고. 그런데 또 공교롭게 성전기사단의 고드프리가 찾아왔단 말이고요."
"그렇소."
"영주님, 영주님께서 그간 우리 기사단에 보여준 성의는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그 이야기들을 저보고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믿지 않으면 어쩌겠단 말이오. 나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오."
노팍 영주는 검은색 갑옷을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남자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은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알칸타라 기사단의 문양이었다.
"물론 영주님께서 이곳 딘스턴의 적법한 지배자인 건 분명 하지만… 우리 역시…."
마치 뱀처럼 동공이 얇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입으로는 예의를 차리면서도 기세를 일으켜 노팍 영주를 압박하고 있었다. 노쇠한 노팍 영주는 그의 기세에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지금 영주성에는 제대로 된 기사가 없는 상태였다.
"나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소."
"고드프리는… 성전기사단 내에서도 입지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이가 이런 변방 영지까지 온 것이 정말 우연이라는 겁니까?"
"…그렇소."
노팍 영주는 자신이 아는 대로 말하고 있었지만, 상대방은 역시나 믿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 영주의 집무실 문이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
영주의 집무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하는 찰나 노팍 영주의 옆으로 남자 하나가 술병을 들고 털썩 주저앉았다.
알칸타라 기사단의 조장 헥터는 갑자기 나타나서는 뜬금없이 그의 앞에 앉은 상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옛 전우와 술 한 잔이 하고 싶어 들렸는데, 보아하니 그쪽은 노팍 영주에게 불편한 객인 듯싶으니 슬슬 자리를 비워주겠나."
"누가 감히…!"
제 집에 찾아온 듯한 남자에게 칼을 뽑으려던 헥터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대체 내 몸이 왜…? 저자의 실력이 나보다 까마득히 윗줄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헥터는 눈앞에서 몸을 뒤로 젖힌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기세가 이 공간을 모두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틀림없다. 저자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자유기사로군.'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그리고 헥터는 개인의 무위가 기사단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남자였다. 언제고 칼에게 이 수모를 갚을 날이 올 테니 지금 상한 자존심은 그때 회복하면 됐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노팍 영주님. 칼 경도 조만간 다시 뵐 일이 있을 것 같군요."
노팍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킨 그의 시선이 칼을 향해 돌아갔다.
"…."
칼의 소리 없는 축객령을 끝으로 헥터가 방을 나섰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그의 시선은 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괜… 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칼은 그렇게 노팍 영주의 앞에 그의 술 창고에서 꺼낸 술을 내려놓았다.
"…이게 얼마 짜린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이름은 알지. 예술작품처럼 따로 진열해 뒀더군. 맛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나."
칼은 지체없이 마개를 땄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