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1화. 황제를 죽였다.

어라? 잠깐 졸았나?

주위가 어둡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한 아저씨가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빨갛고 노란 데다가 반짝이는 장식이 잔뜩 달린 촌스러운 옷에다 머리에 왕관 같은 것까지 쓰고 있는 모습이 의자와 퍽 어울렸다.

그렇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힘없이 늘어진 몸뚱이에서 붉은 액체가 줄줄 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피?

아저씨의 배에는 기다란 검이 꽂힌 상태였다.

검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내 손이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검?

누가 보면 내가 이 아저씨를 찌른 것으로 오해할 상황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천장이 높은 방이었다.

이래저래 화려한 장식들이 많은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조명이랄 것이 없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쓰러진 사람들이 많았다.

의자에 앉은 아저씨 못지않게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에, 다들 피를 흘리고 있다.

"꿈...이지?"

현실감 없는 광경.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도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꿈이다.

벌컥 문이 열리고,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손에 각각 검이나 창 따위를 든 모습이 섬뜩했다.

더구나 그것들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참, 별난 꿈도 다 있네.

현실에 없을 광경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꿈이 분명하지만 꿈 같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얼굴들이 무섭다.

"저놈이 황제 폐하를...!"

"제압해!!"

날붙이들이 나를 향해 쇄도하는 것을 인지한 직후,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을 차린 순간 옆으로 보이는 창문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회피 행동이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내장이 들려 올라가는 메스꺼운 감각을 느끼며 족히 10미터는 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중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지면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주 잠깐이었다.

쿠웅.

의외로 안정적인 자세로 착지.

어쩐지 비슷한 일이 몇 번인가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꿈속에서 떨어지면 잠에서 깨지 않나...."

평범한 꿈이었다면 몇 번이고 놀라서 깨어났어야 할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여전히 꿈에서 깨어날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욱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발목의 통증으로 몸이 기울었다.

역시, 저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충격이 없을 수는 없겠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말이다.

"...왜, 아픈 거야?"

이상했다.

꿈이라기엔 모든 감각이 너무도 생생했다.

아니, 단순히 깨어 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을 넘어 훨씬 더 예민해진 것 같기까지 했다.

유리창을 깨고 몸을 던지며 베인 상처가 아리다.

짓밟힌 풀의 냄새가 느껴지고 입 안에서 희미하게 피의 맛이 올라온다.

저 멀리서 나를 찾기 위해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 악몽이었다.

악몽이어야 한다.

* * *

"하아. 하...."

숨이 가빠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내 몸이 내게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게 현실이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죽어 있던 남자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어떻게 보더라도 살인 현장 그 자체였다.

모든 인간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는 것을 보면, 나를 살인범으로 생각하는 거겠지.

도망까지 쳤으니 그 오해는 풀릴 일 없으리라.

물론 솔직히 사정을 설명하려 했어도 대화가 통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이쪽이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포위해!"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땅을 박찼다.

지금은 도망쳐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곳은 낯선 장소였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직감에 몸을 맡긴 채 달린다.

몇 번이고 벽을 만났고, 그럴 때마다 추적자들의 발소리가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황제 폐하를 해친 놈이다!"

"절대 도망치게 둬선 안 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추적자들의 목소리에서 유달리 '황제'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황제라니.

죽어 있던 그 아저씨가?

어처구니가 없다.

민주공화국의 주민으로서 황제 같은 건 세계사 교과서에서나 본 것이 전부지만, 국가 원수의 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 정도는 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황제가 죽었다.

그리고 내가 유력한 용의자다.

잡혔다간 아마 편히 죽지도 못하겠지.

이게 꿈이라면 깨고 끝나겠지만, 꿈이 아니라면?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진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건데...!?'

사방에서 몰려드는 추적자들로 인해 멈췄다가 움직이다가를 반복.

가까스로 잡히진 않고 있지만 추격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무엇보다, 어스름한 달빛만으로는 주위가 잘 보이지도 않는 탓에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질 않았다.

계속 비슷한 곳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하던 찰나.

"성벽...?"

유적에서나 볼 법한 육중한 성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단 내가 눈을 떴던 건물과는 멀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벽으로 나뉜 건너편으로는 추적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가능성도 높았다.

'일단 성벽을 넘어갈 수만 있다면 말이지.'

성벽의 높이는 2층이나 3층 건물 정도밖에 안 됐지만, 좌우로 둘러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성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사다리가 있을 법도 한데, 불행히도 근처에선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길을 찾아보는 편이 낫나.'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에도 나를 쫓고 있는 인간들이 있을 터다.

벽을 넘을 방법을 찾겠답시고 한 자리에서 오래 머무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길을 내가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제길,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급해진다.

여유를 잃은 만큼 머리가 굳어, 결론을 좀처럼 떠올리질 못한다.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여기 있었구나."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여기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

큰 소리를 내는 건 자살행위였다.

"누구, 십니까...?"

고개를 돌려 보니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새하얀 수염이 특징적이었다.

"스승의 얼굴도 못 알아보는 것이냐, 제자야."

"예?"

스승이라니…?

* * *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총 16년간,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은 많았다.

솔직히 얼굴을 잘 못 외우는 편이라 기억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 노인네가 내 은사 중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인생에 좋은 선생님도 나쁜 선생님도 겪어보았지만, '검을 든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거든.

"일단 그 흉흉한 물건은 내려놓고 이야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은데...."

노인의 손에는 날의 길이가 1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검이 들려 있었다.

겉보기엔 지팡이를 짚고 골골대야 할 노인네가 커다란 검을 쥐고 있으니 기괴하기만 했다.

"제자야. 사랑하는 내 제자야. 어째서 황제를 죽였느냐."

노인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검을 겨눴다.

스승이네 어쩌네, 정신 나간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노인에게선 무시할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잠시만요. 저는 당신 제자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요."

나는 뒷걸음질 치며 노인을 설득하려 했다.

"네가 내 제자로서 일말의 긍지가 남아 있다면 당당하게 끝을 받아들이도록 해라."

"전 정말 억울하거든요? 제 말을 들으시면 분명 이해하실 겁니다...!"

"스승으로서 마지막 자비로,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마."

"제 말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설득이 통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아예 내 말을 듣질 않고 있다.

전혀, 조금도.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면 노인이 한 걸음 다가온다.

거리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툭.

등이 성벽에 닿았다.

이제는 물러나지도 못한다.

"루크. 너는, 내 최고의 제자이자, 최악의 제자였다."

아무래도 이 노인네는 나를 '루크'라는 인간과 나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이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검이 공간을 미끄러졌다.

찰나를 쪼개어 내 목을 노리고 다가온다.

그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앗.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라기엔 너무도 가벼운 소음이 귀를 간질였다.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간 검.

그대로 있었다면 목이 잘렸을 것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어서.

콰드득.

노인의 검이 성벽을 갈랐다.

머리 위에서 돌 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검으로 성벽을...?"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돌을 쌓아 만든 성벽 아닌가.

단단하기로는 바위와 별로 차이도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힘으로 검을 휘두른들, 긁힌 자국이나 남으면 다행일 텐데.

수명이 끝나가는 늙은이인 줄 알았더니 괴물이 따로 없었다.

"피하지 마라."

"그럼 죽잖습니까!"

"그래. 죽으라는 말이다."

노인이 연달아 검을 내질렀다.

살벌한 검의 날이 달빛을 받아 번득였다.

"제기랄, 정신 나간 늙은이 같으니. 진짜 사람을 죽이려고 드네...!"

마음 놓고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여 어떻게든 피해내긴 했으나 팔다리에 얕게 베인 상처 몇 개가 생겨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균형을 잃어 흙바닥을 구르는 꼴이 되었다.

"흐엑. 헥...."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심장이 몸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못 해 먹겠네, 진짜.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불합리한 일들의 연속에 욕지거리가 턱밑까지 치밀었다.

문득, 노인이 공격을 멈췄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일어설 힘도 없어 지면에 납작 엎드린 채 눈만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지?"

노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애정과 분노, 슬픔이 뒤섞여 복잡했던 시선이 올곧은 적의로 가득했다.

"예?"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

노인이 내게 일갈했다.

당장 검을 멈춰준 덕에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진짜 노망이라도 나셨나...."

여전히 노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고, 지친 기색도 전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게 검을 꽂을 수 있으리라.

이제는 피하지도 못할 상태였다.

"그 몸은, 내 제자의 것이거늘! 썩 나가거라!"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시면 안 되나요?"

몸이 뭐가 어쨌다고?

뭐랄까, 무당이 귀신 들린 인간에게 할 법한 대사였다.

노인네가 이제 헛것까지 보이나.

"멍청한 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몰랐던 게로군."

노인은 한심하다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나쁜 시선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반항심을 담은 눈으로 노인을 올려다보는 것뿐이었다.

"직접 봐라."

잠시 고민하던 노인이 내 앞에 검을 꽂았다.

잘 관리되어 거울처럼 반짝이는 검의 옆면에 내 모습이 비쳤다.

"대체 뭘 보라고...."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옅은 금발과 깊고 푸른 눈동자.

내가 얼굴 곳곳을 움직이자 검에 비친 얼굴도 똑같이 따라 했다.

"아하하. 뭐야, 역시 꿈이었나 보네. 아하. 하하핫...."

어느샌가,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짓은 현실 부정에 불과하다.

"...제기랄."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것 같다.

2화. 도망쳤다.

설상가상으로 멀리서 추적자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다가는 저들에게 붙잡혀 험한 꼴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눈앞의 노인이 내 도주를 가만 지켜볼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자니, 노인이 대뜸 예상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여기선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겠군. 따라와라."

"예?"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한 거지?

"저놈들에게 잡혀가고 싶은 게냐?"

"아, 아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방금까지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던 인간이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다소 당혹스럽긴 하다만, 이대로 목이 잘리거나 추격자들에게 붙잡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노인을 뒤따랐다.

노인이 나를 이끈 곳은 어두컴컴하고 냄새나는 하수도였다.

마음에 드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불평할 처지가 못 됐다.

우리는 미약한 횃불에 의지해 하수도로 들어갔다.

* * *

"네 이름은?"

"유승재라고 합니다."

이름을 밝히는 것이 뭐라고, 목소리가 떨렸다.

당장 날 죽일 수 있는 인간 앞이니까.

말을 조심해야지.

"특이한 이름이군."

그런가?

뒤늦게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언어 역시 한국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정신없이 도망 다니느라 주위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지만, 어쨌든 대충 봐도 한국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지금 내 모습도 서양인에 가깝고, 눈앞의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외국? 아니....'

한번 위화감을 느끼자 걸리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를 쫓아오던 사람들은 총이 아니라 창과 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고, 하수도에 들어오면서 손전등 대신 횃불을 쓴다.

게다가 계속해서 들려오던 '황제'라는 말까지도.

"대체 여긴 어딥니까...?"

"어디긴, 하수도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만...."

어떻게 물어야 노인이 내 질문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

철퍽-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물에 흠뻑 젖은 신발을 신고 걸음을 옮기는 듯한 소리였다.

'추적자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잔뜩 긴장한 채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위험할 것 같으면 냄새나는 똥물에라도 뛰어들 각오를 다졌지만 다행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그건, 쥐들이었다.

"저, 저건 뭡니까?!"

"그냥 쥐새끼 아닌가. 하수도에 쥐가 돌아다니는 게 별일이라고."

"'그냥' 쥐요...?"

사람만큼 커다란 덩치에 뒷다리로 이족보행을 하는 저걸, 쥐라는 한마디로 넘어가도 되는 일인가?

심지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우글거리는 쥐들의 눈이 소름 끼쳤다.

"쥐를 처음 보기라도 하는 건가?"

"제가 아는 쥐는 저렇지 않거든요?! 거의 괴물 아닙니까?!"

"쥐들이 통통하게 살이 올랐긴 하군.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용병들을 투입해 청소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용병 놈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하는 모양이야."

노인은 짜증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마치 길거리에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공무원을 욕하는 느낌.

찌이이이-!! 찌이-!!

갑작스럽게 쥐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하수도 안에 날카로운 소음이 메아리쳤다.

"저놈들,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닐 거다. 저건 겁을 먹은 반응이야."

나는 저것들을 처음 본다.

노인의 말을 믿는 수밖에.

하지만 좀 이상했다.

저놈들이 겁을 먹었다고? '무엇'에게?

의문을 입에 담을 필요도 없었다.

'답'이 눈앞에 튀어나왔다.

푸화악-

갑자기 하수도의 오수가 솟아올랐다.

아니다.

솟아오른 것은 수로에 숨을 죽이고 있던 무언가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

갈라진 혓바닥.

거대한 뱀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아나콘다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머리통만 해도 경차 크기에 가깝다.

게다가 날카로운 뿔이 머리 곳곳에 튀어나와 흉흉함이 배가되었다.

'위험-'

노인의 검에 겨눠졌을 때처럼 죽음의 예감이 차올랐다.

서걱.

엥.

잘린 뱀의 목이 수로에 떨어져 가라앉았다.

머리를 잃은 뱀의 몸이 날뛰며 더러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위협적인 모습과 달리 허무한 퇴장이었다.

"심지어 뱀까지? 하수도도 황도(皇都)의 일부건만. 관리 상태가 엉망이로군."

뱀의 목을 베어버린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그래, 뱀도 처음 본다고 할 테냐?"

"...."

뿔 달린 거대 뱀 같은 건 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다.

적어도 지구상엔 존재하지 않는 괴물들이었다.

다른 증거들도 많았지만 기괴한 모습의 쥐와 뱀을 보니 확실해졌다.

여긴, 지구가 아니다.

"처음. 봅니다."

"허어? 뱀도 쥐도 처음 본다? 어디 저택에 갇혀 살기라도 했던 게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믿기 힘드실 테지만, 저는 원래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세계라고?"

"네. 저런 괴물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요."

"그런가."

의외로 노인은 간단히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미친 늙은이인 줄 알았더니. 나이를 허투루 먹진 않은 모양이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군."

아니. 그냥 미친 늙은이가 맞았다.

"중요한 이야기죠! 다른 세계에서 왔다니까요?!"

"네가 어디서 왔든, 어떤 인간이든, 심지어 인간이 아니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황제를 시해했는데. 사지의 힘줄을 끊고 목줄을 채워 황도 열두 바퀴를 끌고 다닌 후에 성문에 매달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본보기로 삼겠지."

노인은 끔찍한 소릴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듣고 보니 노인이 내 출신지가 의미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라고 말해 봐야 나를 살려줄 상황이 아니었다.

분노에 찬 이들은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지도 않으리라.

"그보다는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가 훨씬 중요해. 하필, 정확히 황제를 죽인 시점에 네가 그 몸을 차지했다는 건 우연이라고 보기 힘드니까."

묘한 침묵이 흘렀다.

노인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모양이었고, 가끔 침음을 흘리며 검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이런 게 가능한 건 흑마법뿐이다만, 흑마법은 의외로 제약이 많다. 영혼을 뒤바꾸는 것이 간단한 마법일 리가 없지. 황성에 침입해 날뛰는 놈에게 억지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해."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노인의 머릿속에선 상황이 대충 정리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겐 흑마법이 뭐 어쨌다고 말해도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그 몸을 버린 거라고 봐야겠군.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이 말이야."

"에. 음. 몸을 버린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네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건 말이 되고?"

그건 그러네.

완벽한 논리에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새로운 몸을 준비해 두었을 거다. 원래의 몸뚱이가 범인으로서 사형당한 후에 본인은 황제 암살과 무관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활동할 생각이었겠지."

노인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네 영혼이 그 몸에 들어간 것까지 의도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군. 영혼을 다른 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일일 수도, 아니면 그저 단순한 사고였을 수도 있고, 시간을 끌기 위한 희생양이었을 가능성도 있지."

"...마지막이 제일 그럴듯하네요."

도마뱀의 꼬리는 끊어지더라도 제법 긴 시간 꿈틀거린다고 한다.

뒤쫓는 포식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말이다.

몸을 갈아치울 정도로 준비한 일이라면, 남겨진 몸뚱이까지 알뜰하게 써먹도록 준비해 뒀겠지.

"이건 좀, 화나는데요."

사람을 죽이고는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서 빠져나간다.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발상이다.

극한 상황에 몰려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계획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죄질이 나쁘다.

"그럼 어쩔 거냐? 네가 뭘 할 수 있지? 이대로 밖을 돌아다니다가 붙잡혀 죽을 걱정이나 해야 하는 놈이."

"...."

망할 영감탱이.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하다니.

"그 축복받은 몸뚱이가 이런 멍청한 놈의 것이 되다니."

내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노인은 끌끌 혀를 찼다.

화가 나는 건 나는 거고,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는 건 사실이다.

당장 목숨을 부지하는 걸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걸.

"...그런데, 저희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하수도에 들어선 지도 한참 지났다.

이야기할 장소를 찾는다더니 노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도의 바깥."

"네?"

"이 하수도는 황도 밖까지 이어져 있다. 이쪽이라면 걸리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 거다."

노인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지금... 날 보내주겠다는 이야기인가?

"괜찮은, 겁니까?"

아무리 내가 이쪽 사정을 잘 모른다지만, 황제의 죽음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 범인을 도망치게 도왔다간 노인도 공범으로 몰려 고초를 겪을 것이 뻔했다.

"안 괜찮지. 꽤 곤란해질 거야."

노인이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어차피 황제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이 나에게 돌아오는 건 정해져 있으니. 범인을 놓쳤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다."

"...."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말로 나빠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나약한 인간이라,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에 안도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노인을 차마 만류하지 못했다.

"제자를 잘못 가르친 벌을 받는 것이야.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내 제자가 저지른 짓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노인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올곧은 사고방식이었다.

'루크'인지 하는, 다른 사람을 도구처럼 쓰려고 드는 제자와는 딴판이다.

말만 좀 예쁘게 해주면 좋겠는데.

"차라리 함께 도망치시는 게...."

"그럴 순 없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

나름대로 쥐어 짜낸 대안이었지만 노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 * *

"도착했군."

어느새 하수도 끝에 도착했다.

강으로 흘러 나가는 물길.

노인이 말했던 대로 이 주변엔 지켜보는 눈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보내주는데 허무하게 붙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노인의 말투는 쌀쌀맞았지만 나를 생각해 하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치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 같기도 했다.

원래부터 모두에게 정이 많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내가 노인의 제자의 몸에 들어와 있어서 제자를 대하는 마음이 나오는 걸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이 든 주머니까지 내게 쥐여준 후에, 노인은 어서 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무사하시길 바란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노인이 곤란해질 것을 알고 있으니까. 모른 척하고 도망치는 주제에 그런 말은 기만일 뿐이었다.

"오냐. 얼른 가라."

노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노인을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3화. 강도를 만났다.

"스승님. 이게 무슨 꼴이랍니까. 제국의 검성이 옥살이라뇨."

금발의 청년이 분한 듯이 말했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은 노인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제자를 잘못 가르친 게지."

"루크 아이버스, 그 자식이 잘못한 거잖습니까!"

황제 시해범인 루크 아이버스.

노인의 제자이자 청년에게는 사제에 해당했다.

노인과 루크, 양쪽을 알고 있기에 청년의 분노는 더욱 컸다.

"언젠가 사고 칠 놈이라고 제가 예전부터 말씀드렸건만!"

"그야, 그놈의 성정을 생각하면 뻔한 일이긴 했지."

물론 이 정도까지 크게 저지를 줄은 몰랐다.

어떤 의미로는 기대를 뛰어넘은 셈이었다.

"이건 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륙 전역에 혼란이 끊이지 않을 거라고요."

제국은 부정할 수 없는 대륙의 중심이다.

이번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정도인가?"

"스승님!"

"훌륭한 황제를 잃긴 했지만, 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구멍가게더냐? 충격이야 있어도 이겨내지 못할 수준은 아니야. 그리 호들갑 떨 것 없다."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야기해도 노인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청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놓아주셨습니까? 황제 폐하를 죽인 놈을...."

아무리 제자라지만, 편을 들어줄 일이 따로 있다.

황제 시해를 막지 못했다는 것과 범인을 놓쳤다는 것으로 황궁은 발칵 뒤집어졌다.

범인이 하필이면 노인의 제자였다는 점 때문에 노인이 범인을 도주하도록 방관했다는 의혹까지 더해져 극단적인 이들은 노인을 사형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 노인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면 실현 가능성이 낮지만,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노인은 못 들은 척 청년의 시선을 피했다.

"너까지 나를 못 믿는 것이냐? 놓아준 것이 아니다. 놓친 것이지."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스승님께서 진심으로 그놈을 잡으려 했다면 놓치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스승의 대답은 청년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스승님!"

"그 대단한 스승님에게 소리나 빽빽 질러대고. 성질 좀 죽여라."

노인은 가볍게 투덜거리곤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상황이 이래선 내가 만나러 가긴 글렀군."

"누굴 만나시려고요? 필요하다면 여기로 부르셔도 되잖습니까."

청년은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감옥에 갇혔다고 해도 '검성'이다.

노인의 부름을 거부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새 제자."

"예? 루크 그놈에게 데이시고도 또 새로 제자를 들이셨습니까?! 어떤 놈입니까?! 제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혹여 그놈도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할 놈이라면...!"

쏟아지는 잔소리에 노인은 귀를 막았다.

잡혔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제대로 도망치긴 한 모양.

'그 몸뚱이를 썩히게 둘 수는 없지.'

하늘이 내린 축복받은 육체.

비록 루크는 비틀린 정신을 가진 탓에 끝내 문제가 되고 말았지만, 다른 영혼이 깃든 지금... 새롭게 제자로 삼는 건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 * *

"갑자기 오한이...."

나는 문득 몸을 떨었다.

감기라도 들었나?

결국 잘 곳을 찾지 못해 노숙을 해버렸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빌어먹게 좋은 아침이로군."

하늘이 맑다.

도망자로 살아야 하는 내 인생은 어둡다.

잠들 때까지도 깨어나면 푹신한 침대 위일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오늘도 열심히 도망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씻지도 못했고, 벌레에 물렸는지 몸 곳곳이 가렵지만.

일단 목숨은 붙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수험을 조지고, 겨우 취직한 회사가 망하고, 친구에게 사기당하고도 꾸역꾸역 버텨낸 나다.

살아남는다. 반드시.

"루크라고 했나? 그 망할 놈.... 언젠가 찾으면 가만 안 둬."

멀쩡히 잘 살아가던 사람을 이 상황에 처박아 두고 그놈은 발 뻗고 자고 있겠지?

이제 겨우 살만해졌다 싶던 차에 이런 일에 휘말려 부아가 치밀었다.

당한 만큼 돌려준다는 것이 내 신조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그놈에게도 이 감정을 느끼게 해줄 테다.

"끄응."

펄쩍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낙엽을 덮고 잠깐 눈을 붙인 것이 전부임에도 몸 상태는 굉장히 좋았다.

어지간히도 튼튼한 몸뚱이다.

지금 보니 근육도 탄탄하고, 상당히 단련된 느낌이었다.

괴물 뱀을 가볍게 처치하는 노인네의 제자라고 했으니,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루크'도 비슷하게 검을 휘두르던 인간이었던 거겠지.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잠들기 전에 분명 방향을 확인해 두긴 했는데, 어두울 때와 밝을 때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적당히 기억을 더듬어 걸음을 옮겼다.

일단 길부터 찾아야 한다.

잡히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가 사람 사는 곳을 찾지 못해 굶어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일단 가장 위험한 황도(皇都)만 피해, 사람 사는 동네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좋아. 일단 길은 찾았고."

제법 헤맨 끝에 길에 닿았다.

길이라고 해 봐야 넓지도 않고, 제대로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흙길이었지만 어쨌든 길은 길이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길가에 모여선 사람들이 보였다.

다소 지저분한 옷차림의 남자들.

남자들은 피곤한 얼굴로 무언가 떠들고 있었다.

어쨌든 그리 바쁜 것 같진 않고, 길 안내 정도는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말씀 좀 묻겠습니...."

내가 다가가자 남자들이 우르르 무기를 꺼냈다.

망치, 낫 같은 공구부터 활, 단검 같은 노골적인 흉기까지.

이 세계에선 환영의 의미로 무기를 보여주는 문화가 있다거나... 그럴 리는 없겠지.

젠장.

일이 안 풀리려니까 끝이 없네.

* * *

"운이 좋군. 아침부터 사냥감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오고."

수염이 북슬북슬한 남자가 나에게 낫을 들이밀며 말했다.

나머지 인간들이 슬금슬금 움직여 나를 둘러쌌다.

"죄송한데, 저 그냥 가면 안 될까요?"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해 억지로 웃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재빨리 강도의 수를 세었다.

...열둘? 열두 명이나 된다고?

"되겠냐?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여기 와서 엎드려라."

남자는 살벌하게 낫을 까딱였다.

누군들 살면서 강도를 자주 만나겠냐만, 적어도 열둘이나 되는 강도에게 둘러싸이는 경험은 흔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제는 추격전에, 쥐, 뱀.

오늘은 강도.

내일은 어떤 불행이 찾아올지 벌써 걱정스럽다.

"돈이라면 드리겠습니다."

나는 품에서 어젯밤 노인이 줬던 돈주머니를 꺼냈다.

한 푼도 못 쓰고 뺏기는 것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다.

"뭐야, 돈도 있었어? 정말 끝내주게 운이 좋은걸."

"돈이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하핫! 잡아다 노예로 팔려고 그랬지!"

남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몸이 목적이었다니.

차라리 돈이 목적이었으면 돈을 내고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좀 곤란한데요...."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 자체도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내 정체가 들통날 가능성이 더 큰 문제였다.

곧바로 예쁘게 포장되어 사형대에 올라가는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말이 많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내 등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적당한 고통으로 공포를 심어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인 듯했다.

'응?'

부웅.

느긋하게 허공을 가르는 몽둥이.

"어쭈. 피해?"

남자가 이번에는 좀 더 힘을 줘서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 모습이 똑똑히 눈에 보였다.

일부러 맞아주기도 뭐해서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가볍게 비틀자 남자의 손에서 몽둥이가 떨어졌다.

"어억?!"

남자의 비명이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몽둥이마저 잃어버린 남자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내가 손목을 놓자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이 자식! 반항하지 마!"

활을 가진 남자가 재빨리 나를 겨누고 시위를 놓았다.

나를 노리고 뻗어오는 화살.

'느린데?'

체감상, 가볍게 던진 종이비행기 정도였다.

눈앞에 다가온 화살을 손으로 잡아채는 것도 간단했다.

'그 노인네가 휘두르던 검은 엄청나게 빨랐는데.'

어두워서 잘 안 보였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분명 이보다 훨씬 빨랐다.

몸을 던져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긴, 어떻게 봐도 보통 늙은이는 아니었으니까.

"화살을 잡았어...?"

강도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반응으로 봐선 이 세계에서도 화살을 잡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겁먹지 마! 저놈은 혼자야! 맨손이고!"

"그냥 콱 죽여 버려."

"맞아. 돈만 챙겨도 이득이라고!"

내가 방금 행동을 되새김질하는 사이 나를 둘러싼 남자들이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 왔다.

내 배를 향해 다가오는 단검을 쳐냈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망치는 고개를 숙여 피하고, 낫을 쥔 남자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린다.

가까운 강도를 어깨로 들이받자 강도의 몸이 장난감처럼 굴러갔다.

그 뒤를 따라오던 다른 강도들까지 볼링핀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뭐, 뭐야?!"

"조심해! 보통 놈이 아냐!"

강도들은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여유가 사라진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반대였다.

'나, 좀 잘 싸우는데?'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이 몸뚱이가 잘 싸우는 거겠지만.

강도들의 움직임이 똑똑히 보였다.

무기의 유무나 머릿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질 것 같지 않았다.

"축복받은 몸뚱이라더니."

노인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싸움 따위는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 내가 적당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강도들이 손조차 대지 못한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추격자들이 찾아와도 어지간하면 따돌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착각하지 말자.'

나는 끓어오른 흥분을 가라앉혔다.

당장 어제 노인네에게 죽을 뻔한 걸 잊으면 안 된다.

이 몸뚱이가 무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강한 게 아니라 이놈들이 약한 거야.'

강도들이 범행을 시도하다 피해자에게 역공당해서 체포당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 않았던가.

강도란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무기를 들었을 뿐인 민간인에 가깝다.

전문 훈련을 받은 병사들만 되어도 이렇게 간단히 제압할 수는 없으리라.

노인네처럼 강한 인간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테고.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한 번에 덮쳐!!"

"조져!!"

* * *

강도들이 이를 악물고 덤벼든다.

적당히 받아치기만 해도 강도들은 붕붕 하늘을 날았다.

열둘이나 되던 강도들은 금방 대부분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무기를 놓친 채 신음하는 모습이 딱할 지경이었다.

"벌써 끝이야?"

기세 좋게 덤벼들던 강도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고 나자 주춤거리며 공격을 망설였다.

이렇게 사람을 두들겨 패도 되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한편으론 게임이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좀 즐거웠다.

어쨌거나 지금은 강자의 기분을 즐길 기회였다.

"어, 어이!!"

낫을 든 남자가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돈만 내놓으면 그냥 보내줄게!"

나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건 포기한 건가.

그래도 이놈은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강도들의 대장 역할인 것도 그런 이유인 듯하고.

하지만 욕심이 너무 많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강도 중 한 명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돈은 무슨 돈이야.

제발 그냥 가달라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어야지.

내가 몸을 풀며 다가가자 낫을 든 남자는 겁먹은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뭐, 뭘 원하는 거냐!?"

"오. 아직도 반말이 나오네."

그래도 부하들 앞이라고 자존심을 못 버리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설득'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떨어져 있던 몽둥이를 집어 들자, 남자는 낫을 내려놓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뭘... 원하십니까?"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길 좀 물어보려고 했더니 강도질하려고 들고. 야박하게 말이야."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해졌다.

"몇 가지 좀 물어볼 테니까, 성심성의껏 대답하도록 해."

길도 길이지만, 지금 나에겐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다.

이대로면 어딜 가든 입을 열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못 배워먹은 범죄자들이라도 기초 상식을 가르쳐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뭐든 물어보십쇼!"

내 말에 강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4화. 도시에 도착했다.

"돈 벌어 먹고산다는 게 참 쉽지 않아."

'생존'은 장기적으로 보아야 하는 문제다.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만 하더라도 허공에서 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장 도주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금전적인 부분이 해결이 되어야 한다.

노인에게 받은 돈이 있긴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 금액인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언젠가는 한계가 온다.

어떻게든 돈을 벌 방법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안 그래?"

"예?"

내 말에 강도가 멍청하게 눈을 꿈뻑였다.

"내 말 안 듣고 있었어?"

"듣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봐도 듣고 있던 사람의 반응이 아닌데.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네.

그렇지만 이놈들이 듣고 있었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강도들의 성실한 질의응답 덕분에, 이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은 감을 잡았다.

기술 발전 정도는 흔히 말하는 중세 정도.

마법과 여러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가까웠다.

"용병이 되는 길밖에 없나."

"맞습니다! 확실합니다! 분명 천 년에 한 번 나올 대단한 용병이 되실 겁니다!"

이곳에는 무기를 휘두르는 것으로 먹고 사는 놈들이 많다고 했다.

깡패나 도적 같은 범죄자 놈들이 아니더라도, 기사, 병사, 사냥꾼처럼 그럴듯한 직업이 존재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이 동네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었다.

정규직들은 각각의 직업으로 불리지만 비정규직은 한 묶음으로 불렸다.

바로 '용병'.

돈만 주면 기사 노릇이든, 사냥이든 다 하는 놈들.

"거지 같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동네는 신원 확인이 그다지 철저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다간 결국 꼬리가 잡히기 마련이다.

안정적인 직장은 꿈꿀 수도 없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나는 정규직이 될 수 없었다.

지구에서도, 여기에서도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이 다소 우울했다.

"...저희는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강도들이 내 눈치를 보며 굽실거렸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무식한 소리가 이곳에선 진리나 다름없다.

그것도 그냥 멀다는 수준이 아니라, 서울과 부산만큼이나 멀었다.

고작 몇 대 얻어맞았다고, 살벌하게 달려들던 강도들이 순한 양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 살펴 가라."

나는 손을 내저었다.

항복한 놈들을 계속 괴롭히는 것은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옷이랑 검은 고맙다. 잘 쓸게."

강도질이나 하던 놈들이 가진 것들이 썩 좋은 물건이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름대로 위장 효과도 있을 테고.

겸사겸사 치렁치렁한 장발을 잘라냈다.

색까지 바꾸진 못했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인상은 꽤 달라지리라.

"옙."

강도들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슬금슬금 멀어졌다.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으려나."

강도들이 모두 자리를 뜬 후.

나도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에 도착했다.

앞서 만났던 강도들에게 이 주변에 대해 들었다.

왼쪽 길은 도시로 이어진다고 했다.

사람이 많이 살아가는 만큼 일자리도 많을 것이다.

대신에, 나를 잡으러 돌아다니는 놈들을 마주칠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진다.

오른쪽 길은 비교적 작은 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외부와 교류가 적은 닫힌 사회.

무기까지 지닌 이방인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을 테고, 용병으로서 받을 수 있는 일거리도 많지 않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일 꼬이면 도망치면 그만이지."

어쨌거나 돈을 벌지 못하면 오래 버틸 수 없다.

나는 왼쪽 길을 선택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야트막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는 몇 개인가 출입문이 있었고, 그마다 출입을 관리하는 경비병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길 원하는 경비병들에게 동전 몇 닢을 쥐여주고 문을 통과하는 형식이었다.

"어디서 왔지?"

"황도에서 왔습니다."

내 앞에 선 청년이 기가 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분명 통행세를 냈는데 왜 붙잡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흐음, 황도라."

경비병이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젯밤,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다. 황도에서 왔다면 알고 있겠지?"

"그, 그렇죠."

질문을 받은 청년보다 더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벌써 여기까지 알려졌다고?

아무리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중세엔 옆 동네에 편지를 전하는 것에만 며칠씩 걸리고 그랬던 것 아니었냐고.

'나, 여기서 붙잡히는 건가?'

간담이 서늘했다.

하지만 지금 대열을 이탈하는 것은 더 의심스럽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당장은 경비병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 범인이 도망쳤다던데. 딱 자네랑 비슷한 나이대일 거란 말이지."

경비병은 건들거리며 청년의 몸 이곳저곳을 툭툭 건드렸다.

진지하게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단순한 트집.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보이는 얄팍한 수작질이었다.

"아이고, 그거 큰일이군요! 세상이 흉흉하니, 경비 업무도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인지 청년이 주섬주섬 동전 몇 개를 더 꺼내 경비병의 손에 얹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경비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청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길을 비켰다.

"또 팔팔한 청년이로군.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재빨리 동전을 경비병에게 건넸다.

"도르그 마을에서 왔습니다."

나는 재빨리 강도들에게 들었던 마을 중 하나의 이름을 댔다.

"도르그 마을에서 데종까지? 자네도 꽤 멀리서 왔구먼."

경비병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병이 되려고 왔나?"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경비병의 말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보기보다 눈치가 빨랐다.

달리 말하자면 내 정체를 알아챌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냥 다른 도시를 향하는 것이 좋을까.

그렇지만 통행세를 내고서 도시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의심스러운 행동이다.

긴장감에 손이 저절로 검 손잡이로 향했다.

"시골 동네에서 힘 좀 쓴다는 놈들은 한 번은 용병 일에 관심을 가지는 법이지. 싸구려 검 하나 차고 도시에 가면 대단한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경비병이 피식 웃었다.

강도들에게 빼앗은 옷과 검이 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헛된 꿈을 품고 도시로 올라온 촌뜨기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하하.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어찌 들으면 무시하는 듯한 말을 흘려넘겼다.

나는 도망자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소한 부분에서 굳이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덩치도 있고, 몸이 아주 탄탄하군. 자네, 용병보다는 경비대에서 일해보는 건 어떤가. 내가 그 정도 권한은 있는데."

예상하지 못한 정규직 제안이었다.

경비병을 이런 식으로 채용해도 되나.

신원 확인부터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마운 말씀이지만 저는 사정이 있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 황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못했다.

정착하기에는 위치가 좋지 않았다.

"그래, 그럴 때지."

의외로 경비병은 쉽게 물러났다.

지나칠 정도로 공감해 주는 것을 보면, 비슷한 이유로 도시에 왔다가 눌러앉은 것이 아닐까.

"직접 겪어보고 마음이 바뀌면 나를 찾아오게나. 나는 빌일세."

경비병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며 길을 열어주었다.

부담스러웠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데 불평할 수는 없었다.

"저는...."

"이름은 나중에 경비대에 들어오고 싶어졌을 때 알려주게. 이름을 아는 이가 죽으면 기분이 안 좋거든."

경비병은 손을 내저었다.

용병 일이 워낙 위험하니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기껏 가명을 만들었는데,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의 분위기는 묘했다.

아무래도 입구에서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황제의 죽음이 원인이었다.

* * *

"이야기 들었나?"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네.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다니...."

"대체 어떤 나쁜 놈이 황제 폐하를...."

지나가면서 들리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황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조금, 아니 상당히 의외였다.

일반적으로 왕이니 뭐니 하는 높으신 분들은 서민들의 관심 밖의 존재일 텐데.

"루크 아이버스라는 놈이라더군. '검성'의 제자라지."

"검성이 범인을 놓치다니. 역시 제자라서...."

이 몸뚱이의 이름도 계속 언급되었다.

'루크 아이버스'. 기억해 두자.

그날 만났던 노인은 '검성'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황제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확실한걸.'

암살한 상대가 폭군이었다면 그나마 대중에게는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테지만 황제의 죽음을 대하는 분위기로 봐선 성군에 가까운 듯했다.

하여간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황제를 죽이는 것이 어려운 일인 만큼 대단한 이유가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건 '루크 아이버스'에게나 중요한 일이고.

나는 내 일이 더 급했다.

'며칠 정도는 쉬고, 정보를 수집한 후에 시작하고 싶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추격자들에게 붙잡힐 위험이 커진다.

게다가 추레한 꼴로 일도 하지 않고 며칠씩 돌아다니는 모습은 의심을 사기 딱 좋다.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건 나름의 위장도 된다.

도망친 황제 시해범이 성실하게 일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어휴."

한숨을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병들이 일하는 방식은 용병 길드라고 하는 인력소 비슷한 곳에 가서, 쌓여 있는 일감 중에 하나를 받아 움직이는 식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인력소로 출근해야 한다니....

"보통 용병 길드는 도시의 출입구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

용병에게 주어지는 일은 호위, 마물 사냥, 탐색 등 도시 외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

길드 건물을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건물 외벽에 커다란 괴물의 두개골이 걸려 있었다.

생전의 모습을 추측하기 어려운 꼴이었지만 일단 뿔이 많다는 건 알았다.

저런 흉물스러운 건물 디자인의 건물이 용병 길드가 아니면 뭐겠는가.

삐걱.

잘 관리되지 않은 문은 힘주어 밀어야 열렸다.

창문이 작은 탓에 한낮인데도 안은 어두컴컴했다.

용병 길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반쯤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조명을 어둡게 해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게임이나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의뢰 내용이 붙어 있는 게시판 같은 것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이 세계의 문맹률은 상당히 높은 편인듯했다.

용병 같은 무식한 직업을 선택하는 놈들은 더 심할 것이 분명했다.

써놓는다고 읽을 수 있는 놈들이 없으니 게시판은 있으나 마나다.

'그럼 대체 어떻게 운영되는 거지?'

안쪽에 접수처처럼 보이는 장소가 있긴 했는데, 잘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티 내고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쪽팔리는 건 둘째 치고 어떻게든 등쳐먹으려는 놈들이 꼬일 확률이 높았다.

"...."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 제일이다.

나는 말없이 슬쩍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무언가 정보라도 있을까 싶어 용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결국 황제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벌컥.

한 소녀가 위풍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갈색으로 탄 앳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고블린 사냥! 은화 3닢! 세 명!"

소녀가 의뢰 내용을 외쳤다.

의뢰 내용, 비용, 인원.

용병에게 의뢰하는 형식인 모양이었다.

'고블린이라.'

게임으로 익숙한 이름.

보통은 게임 시작하자마자 상대하는 허접한 몬스터로 자주 등장한다.

초보자에게 적당한 의뢰일 것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신중하게 주위 용병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5화. 용병이 됐다.

"후음...."

소녀의 등장에 잠깐 몸을 일으켰던 용병들이 다시 가라앉았다.

그 반응으로 저 의뢰가 그다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은화 3닢.

이제까지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이곳의 화폐 가치를 어느 정도 파악해 두었다.

은화 하나면 고기가 들어간 빵 하나를 살 수 있다.

고기 빵은 제법 호화로운 식사에 속하는 모양이었지만, 어쨌거나 한 끼 식사였다.

고블린 사냥의 대가로 식대가 전부인 셈.

흥미가 생기지 않을 만도 했다.

"일해주실 용병 없으신가요!?"

소녀가 다시 외쳤다.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용병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질문."

내가 손을 들며 입을 열자, 소녀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혼자면 은화 9닢을 다 줍니까?"

3인분의 보상을 다 받는다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조건이다.

"어이, 그만둬. 고블린 사냥 같은 귀찮은 일을 그런 푼돈 받고 해주면 버릇 나빠져."

"다른 사람들에게도 민폐라고."

"맞아. 고블린 같은 건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용병한테 무슨 고블린 사냥을 시켜."

내가 의뢰를 받아들이려는 것으로 보였는지, 주변에서 만류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의뢰자가 제 취향이라서요."

나는 생각해 둔 핑계를 말했다.

잠시 조용해졌던 길드 안에 폭소가 터졌다.

적당히 시도해 본 농담이었는데, 제법 잘 먹혔다.

"으에...?"

소녀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가시죠. 의뢰자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력이 증명되지 않은 내가 받을 수 있는 의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가능하면 도시에 머무르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나로서는 언제 들어올지 모를 다른 의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쓸데없이 어두컴컴하게 분위기나 잡고 말이야.'

용병 길드를 빠져나오자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후, 일하기 딱 좋은 날씨군.

"의뢰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못 들었는데요."

나는 아직도 용병 길드 앞에서 굳어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아? 의뢰?"

소녀가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의뢰를 맡기기 위해서 용병 길드까지 와서는, 의뢰에 대해서 잊어버린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 그렇죠! 의뢰를 받아주신다는 거죠?!"

"네. 보수만 약속해 주신다면요."

이걸 꼭 명확하게 말해야 알아들을 일인가.

이렇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서 괜찮을까 싶다.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정신을 차린 소녀가 어색한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 * *

"제 이름은 닐리아고요. 저기 보이는 케조크 산 아래, 메르봉 마을에 살고 있어요. 밀 농사를 짓는 평범한 마을인데요, 최근에 고블린들이 자꾸만 산에서 내려와서 곤란한 상태예요. 밭 근처에 둥지를 틀어선, 농사를 지으러 갈 수가 없다니까요."

지명은 흘려들었다.

어차피 두 번 방문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내용은 딱 하나.

밭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는 것.

산보다는 밭에 있는 놈들이 상대하긴 편하려나.

약한 몬스터에 유리한 지형까지.

초보 용병을 위한 배려가 넘쳤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은...."

닐리아가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어떤 말을 말씀하시는 거죠?"

나는 짐작 가는 말이 없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 되물었다.

"왜, 제가 취향이라고...."

용병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닐리아에게는 무례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첫 의뢰자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줄 수는 없지.

"농담이었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잘못에 대한 빠른 인정과 사죄.

사회생활을 위한 기초 수칙이다.

"아, 농담."

소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역시 지나쳤던 것이 분명했다.

성문 앞에 이를 때까지 소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닐리아? 금방 나왔네?"

여전히 도시 출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빌이 소녀에게 아는 체를 했다.

"고블린을 퇴치하겠다는 용병은 찾았어?"

닐리아의 의뢰 내용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제법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네!"

닐리아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에이, 설마. 그 가격에? 어디 그런 호구가...."

닐리아의 말을 비웃던 빌은 닐리아의 뒤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눈을 찡그렸다.

"또 뵙습니다."

나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바로 조금 전에 도시에 들어갔는데, 경비병들이 교대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끼리끼리 모였구먼."

빌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첫 의뢰라면, 그렇게 나쁘지 않지. 금액보다는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립다. 나도 고블린부터 시작했었는데."

역시나 선배님이셨다.

그렇지만 경비병으로 전직했다는 것은 용병으로는 실패했다는 뜻이니, 존경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잠깐. 첫 의뢰요?"

소녀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물었다.

"몰랐냐? 이 친구, 아침에 도시에 입성한 따끈따끈한 신입 용병이라고."

빌의 말에 소녀의 표정이 굳었다.

푼돈으로 용병을 고용하려고 했던 주제에 내가 초보자라니까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자신이 없긴 했다.

이제까지 쥐 한 마리도 죽여본 적이 없는 내가 고블린을 사냥할 수 있을지.

그래도 이 든든한 몸뚱이에 검까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이런 초보자 퀘스트도 깨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서 살아갈 길은 요원하다.

"딱 보면 견적이 나오잖아."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저 장비 꼴 보면 몰라?"

"어두워서 몰랐죠. 그냥 착한 사람인 줄 알고...."

"세상에 착한 용병이 어딨어?"

"있을 수도 있죠!"

"네가 용병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착한 용병은 죽었거나 죽을 예정이야."

빌과 닐리아가 툭탁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부녀처럼 보였다.

어쩐지 나만 소외된 느낌이 들어서 시선을 돌렸다.

"가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세요!"

한참 동안 빌에게 구박받은 닐리아가 씩씩거리며 내게 삿대질했다.

살벌하다.

내가 의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용병 길드에 신고라도 넣을 기세였다.

그런다고 용병 길드가 무언가 들은 척이나 할까 싶긴 한데, 무시당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별로였다.

"이왕 의뢰를 받았으면 제대로 처리해 줘라. 부탁한다, 용병."

빌이 은화 한 닢을 내게 던져주었다.

역시 용병으로서의 경험이 있는 빌이 용병을 다룰 줄 안다.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에게 의욕을 불어넣으려면 돈을 더 주는 것이 최고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나는 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의뢰자는 저라고요!"

닐리아가 발끈해서 나를 잡고 흔들었다.

"당신은 아직 돈을 안 냈잖아요."

나는 용병답게 돈을 따르는 것뿐이다.

"으...!!"

닐리아는 빌처럼 선뜻 돈을 내어줄 능력은 없는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몸을 떨었다.

그야, 그럴 돈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의뢰 비용을 높게 잡았겠지.

"빨리 움직이기나 하세요!"

고작 은화 9닢으로, 까탈스러운 의뢰자였다.

* * *

멀찍이 마을이 보였다.

그렇지만 길을 안내하던 닐리아는 중간에 방향을 틀었다.

마을을 들르지 않고 곧장 밭으로 향하려는 듯했는데.

마음이 썩 급한 모양이었다.

"거기, 자네. 못 보던 총각이로군."

길을 따라 한참 걷던 중에 노인에게 붙잡혔다.

삐쩍 마른 노인의 눈에는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 세계도 시골 마을 특유의 배타적인 분위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제가 데려온 용병이에요!"

닐리아가 노인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설명했다.

"용병?"

노인의 입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튀어나왔다.

용병을 불러온 이 상황이 불만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고블린들 때문에 밭에 갈 수가 없잖아요. 이 용병 아저씨가 처리해 주실 거예요."

닐리아는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아저씨라니.'

확실히 닐리아는 앳된 얼굴이었다.

나보다 어린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좀 너무하지 않나.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용병을 불렀어. 우리끼리 해 본다니까는."

노인이 닐리아를 타박했다.

이곳의 고블린들은 농부들에게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만만한 생물인 모양이다.

의뢰에 대한 부담감이 한층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윌슨 아저씨가 허리를 삐끗해서 누워있으시잖아요! 이런 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요."

전문가라는 말을 하는 순간 닐리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첫 의뢰를 받은 용병을 전문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전문가는 무슨. 어디서 산적 같은 놈을 데려와선."

노인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구시렁댔다.

노인의 표현이 날카로웠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허리에 찬 검은 강도들에게서 선물 받은 물건.

범죄자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군. 이대로 돌려보내려고 했다간 칼부림이 날 수도 있으니, 고블린 사냥은 맡기겠네."

말에 가시가 있었다.

검을 가진 용병이다.

헛걸음을 시켰다는 이유로 날뛰면 농부들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아남은 노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밭에는 나도 함께 가지."

끙.

노인은 크게 신음하며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는 왜요?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돌아다니시는 분이 고블린이 나오는 곳에 가서 어쩌시려고요? 그냥 집에 가서 쉬고 계세요."

닐리아가 노인을 만류했다.

내가 보기에도 노인은 거동이 불편했다.

뛰기는커녕 걷기도 불편한 몸으로 마물이 나오는 곳에 가겠다는 것은 무모했다.

"내가 고블린 사냥에 도움은 안 돼도! 저놈이 밀밭을 망쳐놓지는 않는지 지켜봐야 할 것 아니냐!"

내게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 꼬장꼬장한 늙은이는 한 푼이라도 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다 들리도록 말하는 건 경고의 의미인 듯했다.

내가 슬쩍 검 손잡이를 두드리며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는 내가 검을 빼 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소름 끼치는 노인네."

나도 성격이 좋은 인간이 아니라서, 노인의 뒤통수에 한 마디 던졌다.

노인은 용병들의 민감한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금전적인 손해에 대해서는 은화 한두 개에도 난리를 피운다.

하지만, 원활한 교섭을 위해서 일부러 포악한 성격을 연기하기도 하는 용병들에게 불한당 취급은 제대로 된 용병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노인도 용병 선배님이신가.'

강도들도 용병이 되려다 잘 안돼서 강도가 됐다고 했었다.

이 세계에선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가는 직업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동행하는 인원이 늘었다.

노인의 걸음걸이에 맞추느라 움직이는 속도는 느려졌다.

* * *

얼마간 더 걸었을까.

닐리아가 말했던, 고블린이 자리를 잡은 밭에 도착했다.

밭은 상태가 심각했다.

노인은 내가 밭을 망치는 것을 걱정했지만, 밭은 더 망칠 곳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에라이, 튀겨 죽일 놈들...!"

노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안 그래도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저기예요."

닐리아가 밭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움집 같은 것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고블린의 둥지.

초록색 몸뚱이들이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수는 적게 잡아도 수십이었다.

저 숫자면 토끼라도 쉽게 처리할 수 없다.

저걸 푼돈으로 고용한 용병들로 처리하려고 했다니.

도둑놈 심보가 따로 없었다.

6화. 고블린과 싸웠다.

"겁먹었나?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가."

노인은 나를 놀리듯 말했다.

겁먹긴 무슨.

맨손으로 강도들도 때려잡은 이 몸이시다.

지금은 무기도 있겠다, 승산이 훨씬 높다.

...아마도.

"두 분은 여기 계십시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시간이 아깝다.

경험을 쌓는 겸, 검을 휘둘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크르륵…!?

내가 다가가자 고블린들이 화들짝 놀라 무기를 들었다.

이곳의 고블린들은 내 편견 속의 고블린들과는 제법 차이가 나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매부리코도 아니고, 귀가 뾰족한 것도 아니며, 이빨이 날카롭게 삐죽거리지도 않았다.

토끼처럼 동그란 눈에 리트리버처럼 축 처진 귀, 돼지를 닮은 코와 입.

'조금 귀여운가...?'

잠시 고민한 후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전혀 귀엽지 않다.

몸뚱이가 털 없는 원숭이처럼 생겼다.

머리랑 몸이 어울리지 않아 전체적으로 기괴한 형상이었다.

내 골반 정도 되는 키로,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잘 걷고 뛴다.

그 움직임이 더욱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인간이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도록 일부러 만들어진 생물 같았다.

이것이, 마물. 이것이, 고블린.

"이런 놈들이라면 죽여도 별로 죄책감이 안 들겠네."

나, 유승재.

지구에선 집 안에 들어온 나방이 스스로 나갈 때까지 이불 속에서 기다릴 정도의 동물애호가였지만, 이 세계에선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거둬야 한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검을 쥐었다.

고블린이라고 불리는 초록색 생물체들이 다가온다.

'하나, 둘, 셋, 넷....'

이리저리 움직여 숫자를 세기도 어렵다.

손에 날카롭게 쪼개진 돌을 들고 덤벼오는 모습이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도 도망가진 않는 것이 어디인가 싶다.

쫓아다니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피곤할 테니.

"흡-"

힘껏 휘두른 검에 달려오던 고블린의 몸이 갈라졌다.

마물 사냥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별것 아니었다.

초록색 피가 튀었다.

벌레 내장이 터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으아, 기분 나빠."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고블린들이 달려들고 있었기에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고블린을 발로 차 버리고, 이어서 점프하는 놈은 몸을 틀어 피했다.

일단 되는대로 검을 휘둘러댔는데, 몇 마리나 죽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고블린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를 상대하는 사이 다섯은 전진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팔에, 다리에.

고블린들이 들러붙어 돌도끼를 휘둘러댔다.

"꺄아악-!!"

내가 고블린 무리에 삼켜지는 것을 본 닐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저는 괜찮습니다! 진정하세요!"

나는 팔에 매달린 고블린을 털어내며 외쳤다.

갑옷다운 갑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고블린의 돌도끼는 아프지도 않았다.

유치원생이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내 몸이 단단해서 그런 건지, 고블린들의 근력이 형편없는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게 타격은 없었다.

'다른 용병들이 왜 이 일을 맡고 싶지 않아 했는지도 알 것 같네.'

검을 휘두르면 체액이 튀고, 이상할 정도로 끈질기게 달려든다.

귀찮다, 정말로.

이래서 세 명은 데려오려고 했구나.

현명한 생각이었다.

돈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지.

어딜 가나 이렇게 예산이 문제다.

* * *

"뭐 하고 있냐! 용병이라는 놈이 고작 고블린 몇 마리한테!"

노인네가 뒤에서 닦달했다.

본인이 싸우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 많다.

"몇 마리라뇨! 몇십 마리거든요?"

성과를 깎아 내려는 노인네의 더러운 수작을 빠르게 제지했다.

제대로 세진 않았지만, 적어도 열 마리는 잡았다.

여전히 내 주변엔 고블린들이 가득이었다.

초록색 무언가를 아무리 베어도 끝이 없다는 점에서, 사냥이라기보다도 제초에 더 가까웠다.

그르륵-

고블린들은 동족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이,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으랴!"

기합을 넣으며 양손으로 검을 잡고 휘둘렀다.

고블린 두 마리가 한 번에 뒤로 넘어갔다.

손맛이 있었다.

나름의 박자를 타며 검을 내지르다 보니 이제는 조금 재밌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 용병이 제법 적성에 맞을지도?'

물론 용병의 일이 마물 사냥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고! 저, 저 무식한 놈! 네 손에 들린 그건 몽둥이가 아니야!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노인의 목소리로 귀가 따갑다.

돈이라도 주고 뭐라고 할 것이지, 돈도 안 되는 인간이 시끄럽기만 했다.

노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지팡이로 검을 휘두르는 흉내를 내고 있었는데,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치고는 봐주기 힘든 꼴이었다.

"고블린들을 다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요."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고블린들이 달려오고, 나는 선 자리에서 검을 휘두른다.

전후좌우 모든 방향이 고블린에게 가로막힌 상태에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고블린의 수는 착실히 줄어들고 있다.

나는 상처 하나 없고, 체력도 남아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승리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다.

'음, 그래도 저 노인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

고블린이 상대니까 이렇게 싸울 수 있지, 강한 마물이나 제대로 훈련받은 인간이 상대라면 전투 기술의 유무는 승패와 직결된다.

확실히, 검술도 배워두면 살아남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검성이었다.

그 노인네, 엄청 강한 것 같았으니까.

문제는 검성이 황도에 있고, 내가 황도로 향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점이다.

헤어지기 전에 검술 교본이라도 한 권 받았으면 좋았을걸.

"멈춰라! 물러나!"

갑자기 노인이 빽 소리를 질렀다.

생각에 빠져 기계적으로 고블린을 베어 넘기던 나는 조금 반응이 늦었다.

"예? 고블린도 거의 다 잡았는데...."

그때.

크르르.

고블린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닌 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늑대처럼 생긴 동물의 무리가 고블린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늑대가 아니라 늑대처럼 생긴 동물인 이유는, 늑대는 보통 눈알이 세 개가 아니고 뿔이 달려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척 보기에도, 이놈들은 마물이었다.

"...다른 마물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케조크 산 계곡에 사는 혼드 울프다! 고블린들의 피 냄새를 맡고 온 거야!"

노인이 멀리서 소리쳤다.

그 옆에 있던 닐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나에게는 겁도 없이 달려들던 고블린들이 이 혼드 울프라는 놈들이 나타나자 잔뜩 움츠러들었다.

고블린보다 강한 마물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놈들은 하수도에서 봤던 '쥐'들보다도 강해 보였다.

그나마 그 '뱀'보단 약한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초보자용 퀘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가만히 있어라! 혼드 울프는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적은 마물! 네가 공격하지만 않으면 고블린을 먼저 노릴 테니...! 고블린들의 수가 줄어들었을 때 빠져나와!"

노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강함과는 별개로 인간에게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마물.

인간의 위험성을 안다는 뜻이고, 상대적으로 지능이 높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혼드 울프 무리 안에 유달리 큰 개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거든.

고블린과 엉겨 붙어 싸우는 동안, 고블린의 피로 온몸이 더럽혀졌다.

저놈들에겐 나도 고블린과 똑같이 보일 확률이 높았다.

고블린 무리 중심에 있는 유달리 큰 고블린....

'내가 고블린 대장인가?'

별로 기쁘지 않다.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의뢰를 찾아볼걸 그랬다는 후회가 자꾸만 고개를 든다.

"혼드 울프는 진짜 용병들이나 상대할 수 있는 마물이야! 허튼 생각 하지 마라!"

"그 얘기는 저놈들에게나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노인의 말마따나 혼드 울프는 위험해 보였다.

덩치만 보면 동물원에서 보았던 사자나 호랑이에 버금간다.

발톱이며 이빨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뿔로 들이받으면 철판도 뚫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런 놈들이 무려 열 마리.

"어떻게, 방법이...."

침착을 잃은 노인과 닐리아는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쓸모없는 인간들 같으니.

몸을 쓰는 것만도 바빠 죽겠는데 머리 쓰는 일까지 나에게 떠넘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유능한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법인 것을.

* * *

"...."

다행히도 혼드 울프는 곧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마물 주제에 신중하다.

혼드 울프가 인간을 공격하는 일은 드물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별할 수 있는 지능이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쪽이 강하게 보이면 도리어 겁을 먹고 물러날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나 도와줄 사람을 불러와 주세요! 영감님은 어디 숨어계시든지 하고!"

나는 닐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노인은 거동이 불편하니 닐리아가 움직여야 한다.

"아, 알겠어요! 금방 올게요!"

내 말을 들은 닐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다.

"에이잇...!"

노인도 움직이는 방향은 같았다.

그렇지만 늙은 몸뚱이는 달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분한 듯, 노인은 신음하며 걸음을 옮겼다.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틴다면...."

마을까지 왕복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없다.

금방이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그리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니.

혼자 남겨진 나는 검을 고쳐 쥐고 마음을 다잡았다.

엄밀히 말해, 혼자는 아니었다.

내 옆에는 고블린들이 있으니까.

방금까지 나에게 매달려서 돌도끼를 휘둘러댔던 이 멍청이들은 혼드 울프에 정신이 팔려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면 나보다는 혼드 울프를 공격할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후우."

검을 잡은 손에 땀이 찼다.

계속해서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거대한 개체.

"빌어먹을."

무리의 우두머리가 유력했다.

우두머리답게, 고블린들의 우두머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고블린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들어주지 않겠지.

대장 고블린 취급받고 죽는 것보다는 황제 시해범으로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잠시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 구석으로 처박았다.

안 죽으면 된다.

혼드 울프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아우우우-!

울부짖는 소리는 내가 아는 늑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우우-! 아우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겹치고 겹쳤다.

혼드 울프의 공격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카르르- 컹!!

역시나, 우두머리는 나를 노리고 돌진해 왔다.

캉!!

쩍 벌린 주둥이로 달려드는 것을, 검을 들어 막았다.

칼날로 받아냈으나, 혼드 울프의 두꺼운 가죽과 무딘 검의 합작으로 우두머리의 주둥이에는 긁힌 상처밖에 남지 않았다.

고블린들이 왜 저렇게 겁에 질렸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음.'

돌도끼 따위로 혼드 울프를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 한 마리의 혼드 울프에게도 고블린 수십 마리가 당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할 만한데."

고블린 상대로 무쌍을 펼칠 수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루크 아이버스의 몸뚱이는 훌륭했다.

우두머리 혼드 울프의 돌격을 받아내고도 조금 밀려나는 것이 전부.

우두머리 혼드 울프는 곧바로 나를 밀쳐내고 거리를 벌렸다.

그르르-

경계심이 많은 놈이다.

고블린이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는지 의아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고블린이 아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혼드 울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두머리 혼드 울프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방금은 직선으로 돌격해 왔었으나, 이번에는 내 주위를 크게 돌며 공격하는 타이밍을 숨겼다.

언제고 공격에 반응할 수 있도록, 우두머리 혼드 울프를 따라서 몸을 돌렸다.

마침내 우두머리 혼드 울프가 돌진해 왔다.

"흡!"

나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여러 고블린을 황천길로 보내준 일격.

훙.

검은 허공을 갈랐다.

우두머리 혼드 울프가 순간적으로 몸을 낮춘 탓이었다.

크르렁!!

납작 엎드렸던 우두머리 혼드 울프가 튀어 올랐다.

내 목을 노리고 주둥이가 벌어진다.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자세가 무너진 상태.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판단을 내렸다.

검을 휘두른 그대로, 어깨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땅을 박차고 어깨로 부딪친다.

혼드 울프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튕겨 나갔다.

"으랴앗-!!"

비슷한 흐름이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우두머리 혼드 울프의 공격도 내 공격도,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시간 끌기라는 목표는 어느 정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생각보다 빠르게 고블린들의 수가 줄고 있었다.

7화.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고블린들이 다 죽고 나면 다른 혼드 울프들도 나에게 덤벼들 것이다.

지원을 부르러 간 닐리아는 아직 소식이 없다.

'2대1, 가능한가?.'

우두머리 혼드 울프만으로도 버거운 상태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참 고블린을 물어뜯던 혼드 울프 한 마리가 내 쪽을 보았다.

'젠장. 이건 정말 조졌네.'

이제 내 상대는 혼드 울프 두 마리.

양쪽을 동시에 경계하며 뒷걸음질 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이미 혼드 울프가 코앞까지 닥쳐온 상태였다.

동시에 내 앞에 있던 혼드 울프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어떻게?'

찰나의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움직여야 하는 몸뚱이에,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

놀랍게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단 한 호흡.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도 없었다.

미끄러지듯, 검이 흘렀다.

푸쉿.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혼드 울프의 머리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방금, 뭐였지?"

마물답게 초록색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혼드 울프.

내가 한 일이지만, 어떻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르르그르-

혼드 울프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주위의 고블린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본다.

아홉 마리의 혼드 울프.

27개의 눈에서 타오르는 증오.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위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검이 흐르는,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뿐.

그때였다.

"이야아아아!! 저리 가!!"

닐리아가 횃불을 들고 달려왔다.

그 뒤로 이 동네 농부들인지 각종 농기구를 집어 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혼드 울프들은 불을 보고선 머뭇거리다가 돌아서 도망쳤다.

우두머리 혼드 울프가 끝까지 나를 돌아보았지만, 다시 달려들지는 않았다.

"괜찮으신가요?!"

닐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검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낯설었다.

일순간 펼쳐낸 검은 내가 아닌, 루크 아이버스의 것.

그건 몸에 새겨진 기억이었다.

이놈의 몸뚱이.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지.

"다행이네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닐리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닐리아의 치맛자락은 나뭇가지와 풀잎 따위로 엉망이었다.

"운이 좋았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반사적으로 지껄였다.

닐리아가 아예 일찍 왔거나 차라리 늦게 왔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흥이 나려는 시점에 끼어드는 바람에 불완전연소가 된 상태다.

"어... 어쨌든 고블린 사냥을 마쳤으니까, 보수를 드릴게요."

닐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보수요."

그래, 나는 용병.

여기에는 의뢰로 왔다.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혼드 울프가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도 못 해서...."

닐리아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한참 조물거렸다.

상황이 상황이라 돈을 더 내야겠는데, 주머니 사정이 다소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

나는 가만히 닐리아의 선택을 기다렸다.

"이게 제가 가진 돈 전부니까요! 부디 이걸로 선처를...!"

닐리아는 반쯤 울면서 주머니를 통째로 내게 넘겼다.

모양새가 좋지 않다.

누가 보면 내가 강도인 줄 알 것이다.

"...."

닐리아를 따라 달려온 농부들의 표정만 봐도 그랬다.

"약속하신 금액만 받죠."

은화 9개만 챙기고 주머니를 돌려주었다.

애초에 돈이 엄청 많이 들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드 울프들이 도망친 건 마을 사람들이 와준 덕분이기도 하니까.

"감사합니다! 용병 아저씨!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그 아저씨라는 말은 좀 빼주면 안 되나.

* * *

밭에서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해가 졌다.

일몰 후에는 도시의 출입문이 닫힌다.

도시로 들어갈 수 없게 된 나는 닐리아의 마을로 향했다.

마을 근처에서 아직도 마을 안에 들어가지 못한 노인을 마주쳤다.

슬프도록 느린 걸음이었다.

여전히 내 눈치를 보는 닐리아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방과 저녁 식사까지 제공해 주었다.

닐리라가 차려준 저녁상은 가난이 뚝뚝 묻어났다.

이런 사람에게 돈을 받는 것에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고블린의 피로 엉망이 된 내 옷을 보자 그런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세탁으로 해결이 되려나? 색이 안 빠지면... 옷을 새로 사는 것에 의뢰비가 그대로 나가겠는데.'

이런 의뢰, 정말로 받는 쪽이 호구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가볍게 몸을 씻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어 갔다.

용병으로서 첫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이 몸뚱이에 대해서 알게 된 부분이 더 신경 쓰였다.

이 몸뚱이에 루크 아이버스가 쌓아 올린 기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무의식중에 튀어나왔지만, 의도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면 이 몸 하나를 지키기엔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계속 용병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정체를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 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투구만 쓰더라도 알아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용병이 투구를 쓰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이곳이 황도와 가깝긴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오히려 가까이 숨어 있는 편이 안전할 수도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황제가 죽었는지도 몰랐던 것 같았지....'

오늘 도시에 나갔다가 돌아온 닐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놀라는 반응이었다.

적어도 여기선 마음을 놓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계속 도망 다니는 것도 힘든 일이고....'

몸뚱이가 튼튼하다고 피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몸에서 눈을 뜨고 이제까지 휴식이라곤 흙바닥에서 웅크리고 눈을 붙인 것이 전부였다.

마음을 놓고 쉴 수 있게 되자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

....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깐 졸았다.

그대로 푹 잠들어도 상관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깨어버렸다.

"으음...?"

몸을 뒤척이던 중에, 방 바깥이 조금 소란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나는 살며시 일어나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현관.

횃불을 들고 있는 누군가가 닐리아와 노인을 앞에 두고 무언가 떠들고 있었다.

* * *

'제국 병사?'

입고 있는 갑옷이 낯익었다.

황성에서 마주쳤던 병사들이 입고 있던 바로 그 갑옷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국 병사가 어째서 여기에 와 있단 말인가.

'나를 쫓아온 건가?'

불길하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 폐하를 암살한 범인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병사가 주위에 들릴까 걱정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할아버지!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데종이 완전 난리가 났다고!"

닐리아가 노인을 타박했다.

역시 아직 모든 곳에 소식이 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시간 문제겠지.

조만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촌구석에 그 암살범을 찾으러 왔다고?"

노인은 닐리아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이 귀를 후비며 병사에게 물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모두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병사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도시에 들렀던 청년 말입니다. 의뢰를 받고 이 마을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혹시 아직 이 마을에 있습니까?"

병사의 질문에 나는 숨을 삼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제를 시해한 것이니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명확한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 시기에 도시에 온 외지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외진 마을까지 쫓아올 줄이야.

'도시 안에 있었다면 위험했겠군.'

결과적으로 닐리아의 의뢰를 받은 것은 잘한 일이 되었다.

곧바로 붙잡혀서 심문을 당하고 있거나 추격전을 벌이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 그놈이라면 저 안에 있지."

노인이 내가 있는 방을 돌아보았다.

내가 황제 시해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노인은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확인해 봐야겠군요."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병사가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병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문에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날 못 알아볼 가능성은... 없겠지.'

범인을 찾을 수단이 있으니까 혼자서 여기까지 수색을 나온 걸 테니.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도망치거나 숨었다간 내가 범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병사를 죽이더라도 마찬가지.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순식간에 추격대가 불어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위험하다.

이 상황을 무난하게 넘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검을 들었지만, 부디 휘두를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했다.

"확인은 무슨. 저놈은 볼 필요도 없네."

"조사를 거부하시는 겁니까?"

노인의 제지에 병사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조사를 방해하는 것 역시 범인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사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병사를 제지해 준 것은 고맙지만,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병사가 나를 확인도 하지 않고 돌아갈 가능성은 낮았다.

'도망치나 싸우나 똑같다면 도망치는 편이 낫지.'

괜히 힘을 뺄 필요가 없다.

다행히도 이 방에는 창문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서 하는 말일세. 고블린이랑 사투를 벌이는 놈이 황제 폐하를 어떻게 암살하겠나?"

내가 창문을 넘으려던 찰나, 노인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고블린이요?"

병사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고블린 사냥을 의뢰했는데, 그 몇 마리밖에 안 되는 고블린을 제대로 처리하질 못해서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시간이 너무 끌리는 바람에 혼드 울프까지 몰려와서 큰일이 날 뻔했어."

몇 마리가 아니라 몇십 마리였는데.

저 영감탱이, 사람을 바보 만드는군.

"우리 손녀가 횃불을 들고 가서 구해줬지. 농부에게 구해지는 용병이라니! 용병들을 망신시키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나!"

껄껄 웃는 노인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보수는 보수대로 챙기고, 밥까지 얻어먹고는 저리 널브러져 자고 있군. 내가 참, 기가 막혀서. 꼴에 용병이랍시고 성질은 얼마나 더러운지, 깨웠다간 아주 귀찮아질 걸세."

노인은 내 귀를 의식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래 봐야 조용한 집 안에선 전혀 소용이 없었다.

"어우."

나를 폐급으로 몰아가는 노인의 묘사가 어찌나 출중한지, 병사가 기겁했다.

"하긴, 용병들을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죠."

병사가 찾는 것은 황제를 죽인 암살범이지, 고블린을 죽이는 것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얼간이 용병이 아니었다.

내가 있는 방의 문 앞까지 다가왔던 병사는 발소리도 줄인 채 살금살금 물러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시게나."

병사를 돌려보내고, 노인과 닐리아는 본인들의 방으로 돌아간 듯했다.

비로소 나는 검을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분명, 심각한 위기를 넘겼는데....

썩 기쁘지 않았다.

8화. 별명이 붙었다.

"오. 좋은 아침일세. 고블린들은 다 처리하고 오는 건가?"

도시 출입문 앞에서 빌이 살갑게 나를 맞이했다.

하필이면.

이 동네 경비병들은 교대도 하지 않는 건가.

"네. 그렇죠."

나는 빌의 시선을 피했다.

고블린의 피에 절었던 옷은 물에 헹구는 정도로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군데군데 찢어지기까지 해서 처참한 꼴이었다.

그나마 고블린의 귀와 혼드 울프의 뿔은 챙길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고블린의 귀는 길드에 제출하면 용병으로서의 실적으로 인정되고, 혼드 울프의 뿔은 마법 재료로 팔면 어느 정도 값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젠장. 생각보다 재능이 있었군."

빌이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함께 있던 경비병에게 던져주었다.

"고마워, 친구. 나는 믿고 있었다고."

실실 웃으며 은화를 받은 경비병이 친한 척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이 둘은 내 의뢰의 성패를 걸고 내기했던 모양이었다.

빌은, 내가 실패하는 쪽에 걸었고.

내가 의뢰를 받고 나올 때 줬던 은화는 팁이 아니라 위로금이었나.

"고생한 친구에게까지 통행세를 받을 수는 없지. 들어가 보라고."

돈을 따서 기분이 좋은 경비병이 내 등을 밀었다.

나로서는 동전 하나가 아까운 상황이라 통행세를 아꼈다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다.

데종 안으로 들어가자 시선이 느껴졌다.

"저거 뭐야? 마물의 피지?"

"오우, 제법 격렬한 밤을 보냈나 본데."

"위험한 사람이야. 눈 마주치지 마."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온 것이 분명한 모습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모양이었다.

붉은색은 아니지만, 피범벅인 인간이 돌아다니면 누구라도 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

'빨리 옷부터 사야지.'

애초에 산적에게 빼앗은 옷은 오래 입을만한 품질이 아니었다.

애초에 샀어야 하는 물건을 산다고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 않은 일 같기도 했다.

다만 이 세계의 물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해, 의뢰 보수로 받은 은화 몇 개로 옷을 살 수 있을지는 확신이 안 섰다.

'그리고 기왕 산다면 제대로 된 옷을 사고 싶고.'

일단 돈을 많이 쥐고 있어야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용병 길드부터 들러서 혼드 울프의 뿔을 팔아서 예산을 확보하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적어도 용병들은 이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지.'

용병들은 마물과 싸우는 것이 일이니까, 이 정도는 용병들에겐 흔히 있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용병 길드로 향했다.

삐걱.

용병 길드의 문은 여전히 뻑뻑했다.

힘겹게 문을 열고, 길드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와 거의 똑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축 늘어진 용병들로 가득한 후줄근한 공간.

"...."

내가 길드에 들어섰어도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걸었다.

내가 접수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풉."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제까지 참고 있었던 듯 이쪽저쪽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얼마 안 가 용병 길드의 모두가 무릎이며 탁자를 두드려 대며 신명 나게 웃어댔다.

"꼴이 그게 뭐냐!"

"어이! 고블린들에게 된통 당하고 온 거야?"

"아주 파릇파릇해졌구먼!"

"아이고, 갈아입을 옷도 없었나?"

일반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관심이 쏟아졌다.

"거봐, 내가 실패하고 돌아올 거라고 했지?"

"에라이! 고블린 몇 놈을 못 잡아?!"

이쪽에서도 내기를 벌인 놈들이 있는지 은화가 공중을 오갔다.

현대 지구에 비해 놀잇거리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곳이라서인지, 남의 일에 돈을 걸고 내기하는 것이 일생의 낙인 듯했다.

"의뢰는 완수하고 온 겁니다."

나는 용병들의 오해를 정정했다.

고블린들을 사냥하는 것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이후에 혼드 울프라는 변수가 튀어나온 것이 문제지.

"뭐야. 패잔병 같은 꼴로 나타나선 의뢰는 완수했다고?"

"그럼 내가 내기 이긴 거잖아! 내 은화 내놔!"

"임무를 완수했다는 증거 있냐?! 증거 가져와!"

"딴소리하지 말고, 돈!"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역시나 내기를 벌였던 쪽이었다.

저 도박쟁이들은 그냥 다 죽어버리면 안 되나.

* * *

"웃어서 미안하게 됐네."

턱수염이 북슬북슬한 중년 용병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우리는 당연히 의뢰에 실패해서 새 의뢰를 받으러 온 건 줄 알았지. 자네 모습이... 좀 좋지 않으니까 말이야."

덩치가 그리 큰 것이 아닌데도 묘한 압박감을 지닌 남자였다.

단단한 팔뚝에 새겨진 흉터들이 그가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괜찮습니다. 오해하실 수도 있죠."

본인만 웃은 것이 아닌데도 나서서 사과하는 것이 의외였다.

더 이상한 것은 주위의 반응이었다.

이곳의 용병들을 대표하는 듯한 남자의 말에 누구도 반론하지 않았다.

남자가 이 지역의 용병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새로운 의뢰를 받으러 왔나? 아니면... 무언가 팔 수 있는 전리품이라도 얻었나?"

남자의 말에 갑작스럽게 용병 길드 안이 조용해졌다.

고블린에게서는 돈이 될 만한 것을 무엇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돈이 될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은 고블린이 아닌 다른 마물을 사냥했다는 뜻이다.

"그게 말이 돼? 신입이면 고블린만 쓰러뜨려도 재능 있는 편인데."

"첫 의뢰부터 전리품이 나올 정도의 마물을 잡았다고?"

용병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수군거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남자의 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대단한 통찰력 같은 건 아니야. 용병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길드로 달려올 일이라는 건 보통 돈 문제거든. 의뢰는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하니, 당장 돈이 없어서 온 것은 아닐 테고... 부수입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지 않겠나?"

남자는 씨익 웃으며 설명했다.

듣고 보니, 내 행동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상당한 통찰력이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고블린들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다른 마물을 한 마리 처리했거든요."

나는 품에 넣어두었던 혼드 울프의 뿔을 꺼내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호오."

남자는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건, 혼드 울프의 뿔이군. 그것도 제법 커다란 개체.... 아주 상태가 훌륭해. 확실히 잘라낸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뿔이야."

어두컴컴한 길드 안인데도 남자는 곧바로 알아보았다.

"혼드 울프?"

"저런 장비로 혼드 울프를 잡았단 말이야?"

용병 길드 안이 술렁였다.

"혼드 울프는 무리를 지어서 다닐 텐데."

"무리에서 떨어진 개체였던 건가?"

그저 귀찮기만 한 고블린과는 달리 혼드 울프는 제대로 된 마물로 치는 모양이다.

방금까지 나를 무시하던 용병들은 내가 혼드 울프를 쓰러뜨렸다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혼드 울프를 단신으로 쓰러뜨린 신인의 등장이라."

남자는 씨익 웃었다.

나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별것 아녔습니다."

나는 사회생활로 다져진 미소로 대답했다.

지나치게 관심을 끄는 것은 피해야 하지만, 거친 용병들 사이에서 지나친 겸양은 무시를 불러올 뿐이다.

혼드 울프를 쓰러뜨렸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이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벤입니다."

남자의 물음에 나는 미리 정해두었던 가명을 댔다.

"벤. 벤이라. 혼드 울프를 쓰러뜨릴 정도면 제대로 된 용병이지. 별명이 필요하겠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별명.

검성처럼, 이곳에선 본명보다 별명이 더 유명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특히나 용병에게는 상표나 다름없는 것으로, 별명이 있어야 제대로 된 용병이라고.

별명이 있으면 의뢰를 받기도 쉽고, 다른 곳에 가서도 소개하기 편하다.

하지만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 생각이 없는 내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자네는...."

특징을 잡으려는 듯이 남자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초록색이니까, 이제부터 자네를 '초록'이라 부르겠네."

"예?"

성의 없는 별명에 나는 눈을 꿈뻑였다.

* * *

초록색.

분명 초록색이긴 했다.

고블린 피에 절어 있는 옷을 입고 있으니까.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초록! 초록 벤!!"""

용병 길드 안의 용병들이 합창했다.

'초록'을 내 별명으로 인정하겠다는 의사 표명인 것 같았다.

"초록이라니...."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별명이다.

아니, 멋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데종의 용병 길드, 쏜 실드의 길드 마스터인 내가 붙여주는 칭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아닙니다...."

이 인간이 이곳 길드 마스터였나.

길드 꼴 참 잘 돌아간다.

"원래는 별명을 받은 용병이 술을 한 잔씩 돌리는 것이 관례지만, 자네 꼴을 보니 그걸 기대하긴 힘들겠군."

길드 마스터가 낄낄 웃었다.

사람한테 이상한 별명을 붙여 놓곤 지금 웃음이 나와?

"어쩔 수 없지."

"대신 마스터가 쏘시는 게 어떻습니까!"

"술! 술 가져와!"

용병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댔다.

누가 보면 축제라도 열린 줄 알겠다.

'당장 여길 떠야겠어.'

돈도 얼마 못 벌고, 이상한 별명이나 붙고.

이곳에서 의뢰 몇 개는 수행하고 활동 자금을 번 후에 떠날 생각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다른 도시로 가자.

가서 새롭게 시작하자.

"시끄러워, 이놈들아! 너희 줄 술은 없다! 일이나 하러 가!"

"우우. 폭정이다!"

"우우우. 악덕 마스터다!"

길드 마스터의 외침에 용병들의 야유가 돌아왔다.

좋게 말하면 수평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개판이었다.

"빨리 혼드 울프의 뿔 매입부터 진행해 주시겠습니까? 갈아입을 옷을 사러 가고 싶거든요."

이 꼴로는 다른 도시에 갈 수도 없다.

일단 새 옷을 사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러자면 돈이 필요하다.

이 자리를 도망치고 싶어도 환금이 끝나기 전까진 그럴 수가 없다.

"아, 그래. 혼드 울프의 뿔."

길드 마스터는 내게서 뿔을 받아선 접수대의 직원에게 건넸다.

금방 돈이 든 주머니가 전달되었고, 내 손에 들어왔다.

"자네."

길드 마스터의 목소리가 길드를 빠져나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용병패는 어떻게 할 텐가?"

"그게 바로 발급되는 겁니까?"

용병패는 용병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이다.

용병패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길드 마스터가 해당 용병의 실력을 보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어디서든 등급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만큼, 실적이 어느 정도 쌓인 후에나 받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원래 별명이 정해졌을 때 따라오는 물건이니까. 물론 발급까지 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해서 당장 내주진 못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바로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지."

용병패가 있다면 편해지긴 할 것이다.

일단 신분을 의심당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 테고, 다른 도시에 가더라도 고블린 토벌 같은 돈이 안 되는 일 대신 제대로 된 의뢰를 받을 수 있다.

생존에 여러 의미로 도움이 될 물건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길드 마스터가 나에게 호의적이어서 먼저 제안해 주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런 행운이 찾아오리란 보장은 없었다.

용병패가 지급될 때까지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되더라도 인내할 가치가 있었다.

"좋아. '초록' 벤이라고 확실하게 적어주겠네."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9화. 절차였다.

나는 데종에서 용병패가 발급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언제 다시 루크 아이버스를 쫓는 손길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만, 대대적인 수색이 한 차례 지나간 만큼 한동안은 잠잠할 가능성이 높다.

그사이에 '용병 벤'의 신분을 좀 더 확실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다.

혼드 울프의 뿔을 팔아치운 다음 날.

나는 심호흡을 하고 용병 길드의 문을 열었다.

"오, 초록."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용병 하나가 인사했다.

창백한 얼굴의 이 여성은 어제도 이 자리에 있었던 용병 중 하나였다.

이 인간은 의뢰도 안 받나?

왜 계속 여기에 있는 거지?

"보세요. 초록색 아닙니다."

나는 새로 산 옷을 펄럭였다.

옷을 살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색깔이었다.

이곳은 염료가 귀해, 옷도 칙칙한 누런색이나 갈색이 대부분이었다.

거기다 그 안에는 어렴풋한 초록색이 섞여 있곤 해서, 초록이라는 별명에 도리어 쐐기를 박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이 선명한 붉은색 갑옷이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값도 비쌌지만, 고블린 피에 젖어 초록이라는 안타까운 별명을 지우기 위해서는 아깝지 않은 투자였다.

"하지만 넌 초록이잖아. 쏜 실드의 길드 마스터가 인정한 초록. 본인의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여성은 낄낄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빌어먹을. 왜 하필 초록인데?

빨강이나 검정, 그 외에 많은 색이 있다.

어딘가 의미심장하고 멋진 색들.

그렇지만 초록은, 정말 초록은 아니다.

길에 널린 풀들이 초록색이고, 고여서 썩어가는 물웅덩이가 초록색이고, 날벌레들이 초록색이다.

무엇보다 고블린이 초록색이었다.

"초록. 길드 마스터가 좀 보자는데."

길드 안쪽에서 반쯤 취해 늘어져 있던 지저분한 얼굴의 남자가 말했다.

"왜요?"

길드 마스터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게 초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선물해 준 것이 바로 길드 마스터다.

그래 놓고 왜 부르는 건지.

"나야 모르지. 너 오면 말 좀 전해달라고 그랬으니까 전해주는 것뿐이야."

꼬인 발음으로 웅얼거리던 남자는 흐물흐물 무너졌다.

저 꼴로 지금까지 깨어 있었던 것이 용했다.

"흠."

일단 길드 마스터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으니, 따로 불러서 할 이야기라는 것이 나에게 나쁜 일일 것 같진 않다.

용병패 발급에 관련된 일일 수도 있고.

"돈 되는 일이면 좋겠는데...."

괜히 비싼 옷을 사는 바람에 주머니 사정은 의뢰를 받기 전보다 더 나빠졌다.

이 사태의 원흉인 길드 마스터가 보상해 주길 바라는 것이 욕심은 아닐 것이다.

* * *

용병 길드 건물의 구조는 간단했다.

용병들이 모여서 대기할 수 있는 넓은 홀, 그 안쪽으로 길드 직원이 대기하고 있는 접수대.

계단으로 연결된 2층에는 각종 마물의 소재와 자료들을 보관하는 창고와 더불어 길드 마스터의 방이 있다.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노크를 생략하고 곧장 길드 마스터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초록 벤."

길드 마스터가 빙긋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기껏 초록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왜 빨간 옷을 입었나?"

"색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옷은 기능이 우선이죠."

초록이라고 불리는 게 싫어서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좋은 자세로군. 요즘 용병이라는 놈들은 겉멋만 들어서 장비를 살 때도 색이니 모양이니 하는 것을 따지더라고."

길드 마스터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구차한 변명이 오히려 길드 마스터의 호감을 샀다.

피곤한 인간이었다.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길드 마스터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 그렇지. 자네에게 맡기고 싶은 의뢰가 있거든."

길드 마스터는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예?"

예상 밖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자네에게 딱 적당한 의뢰라서 말이지. 물론 자네 혼자 맡는 것은 아니고, 다른 용병들도 함께 수행하는 의뢰일세."

길드 마스터는 찾던 자료를 찾았는지, 종이를 내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어째서 저죠?"

용병 길드에서 다루는 의뢰는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닐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의뢰자가 직접 용병을 고용하는 형태의 의뢰.

길드의 역할은 용병들을 모아두는 것이 전부.

길드의 수익은 전리품 거래의 수수료 정도로, 보통 그다지 돈이 되지 않는 의뢰다.

다른 하나는, 의뢰자가 길드에 처리를 일임하는 형태의 의뢰.

길드에서 완수를 보장하는 대신에 보수의 일부를 길드가 가져가는, 길드의 주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의뢰다.

길드의 신뢰도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길드에서도 의뢰를 수행할 용병들을 선별하는 것에 신중한 편이다.

길드 마스터가 전달한다는 것은 후자 쪽이라는 의미.

데종에 도착한 것이며 용병 길드에 발을 들인 것도 이제 겨우 삼 일째에 불과한 나에게 의뢰를 연결해 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용병패를 지급하기 위한 간단한 테스트야."

길드 마스터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테스트요?"

"용병 길드를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나?"

길드 마스터는 내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글쎄요. 돈 되는 의뢰를 따오는 영업능력이요?"

나는 적당히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길드 운영이라니.

그런 걸 내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영업능력도 물론 필요하지.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말이야, 이 지역 용병들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거야."

길드 마스터는 비법을 전수해 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용병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아. 용병 길드를 운영하게 되면 용병 놈들이 죽어버리는 꼴을 끝도 없이 보게 되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일.

변수가 많은 전투에서 항상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다.

패배는, 대개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능력을 벗어난 의뢰를 연결해 줬다가 의뢰에 실패하고 죽어버리는 거야. 그런 일이 발생하면 길드의 신뢰도가 깎여나가는 데다가 내가 죽여버린 것 같아서 꿈자리도 사납다고."

길드 마스터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혀를 찼다.

용병들의 수준을 정확히 알아야, 의뢰에 맞춰 용병들을 연결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의뢰에 실패하고 용병은 죽어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피한다.

그것이 이 사람, 쏜 실드의 길드 마스터가 길드를 운영하는 방식.

"뭐, 어디까지나 길드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걸세. 용병들이야 어떻게 뒈지든 다 똑같다고 하겠지."

길드 마스터는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말마따나, 용병들은 본인이 죽는 마당에 길드가 어쨌다느니 하는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진 않을 것이다.

내 안에서 길드 마스터의 평가가 조금 올라갔다.

길드를 위해서라지만 용병들의 안전을 생각해 준다는 점에서 나쁜 인간은 아니라고 봐도 좋았다.

파멸적인 네이밍 센스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그런 걸세. 자네가 혼드 울프를 사냥했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능력을 증명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물을 상대로의 능력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 이번 의뢰는 자네가 어떤 수준인지 확인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네."

길드 마스터가 충분한 설명이 되었냐고 묻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대충 이해했습니다."

마물 사냥 외의 능력이라.

이번 의뢰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 모양이다.

"그런데, 테스트라는 건 비밀로 하는 편이 좋지 않았습니까?"

길드 입장에서는 안전을 위한 확인 과정이라지만, 용병들은 다르게 받아들일 소지가 컸다.

자신의 능력 이상의 평가를 받기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놈이 나올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용병 중에는 괴팍한 인간들이 많다.

자신을 시험한다는 판단이 들면 격렬하게 반발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비밀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길드 마스터는 낄낄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무슨 의뢰인지 일단 알려주시죠. 의뢰를 수락할지 말지는 그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나는 눈으로 길드 마스터가 들고 있는 종이를 쫓았다.

하지만 그가 종이를 장난감처럼 계속 흔들고 있는 바람에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테스트를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랬다간 용병패가 지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길드 마스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어떻습니까."

나는 허세를 부렸다.

지금처럼 용병패를 인질로 휘두르려는 걸 방지하려면 용병패에 집착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다.

"자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용병이라면 모름지기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원석이 굴러들어 왔을까."

길드 마스터가 내 말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모르겠지만,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 의뢰 내용을 설명해 주겠네."

길드 마스터는 정신 사납게 흔들어 대던 종이를 천천히 소리내서 읽었다.

내가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직접 읽게 해달라고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나는 시골 출신으로 되어 있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의심만 살 뿐이다.

일단은, 까막눈인 걸로 해두자.

* * *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도시를 지키는 육중한 성벽 위에서, 나는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길드 마스터가 전달해 준 의뢰는 도시의 경비 업무였다.

황제가 죽은 뒤로 이래저래 날뛰는 인간들이 많아져, 경비 인원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일시적인 현상 때문에 경비대를 증원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도시 측에선 용병을 고용해 경비 인력을 때운다는 발상을 해냈다는, 유쾌한 이야기다.

"저는 '작은 눈' 피니스, 이쪽은 '초록' 벤입니다."

함께 온 용병이 내 소개까지 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다 아는 얼굴이로구먼."

인수인계를 맡은 경비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빌어먹을 빌이 또 여기에 있었다.

이 도시에 경비병이 몇 명인데 어째서 계속 빌과 엮이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출입구 검문은 우리가 그대로 할 걸세. 자네들은 시간마다 성벽 위를 순찰해 주기만 하면 돼. 그러다가, 성벽을 넘으려는 놈이 있으면 처리해 줘."

빌이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죽여버려도 상관없다는 것 같은데.

이런 무식한 방법이 맞나 싶다가도, 출입구를 두고 성벽을 넘는 놈이 멀쩡한 놈일 리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죽음을 각오하고 시도한 일일 테니, 그 마음에 보답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여길 안 들키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있습니까?"

함께 배치된 피니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성벽이 그다지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것도 아니다.

수 미터를 기어오르는 동안 딱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곳도 없으니 들키기도 쉽다.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빌은 징글징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부탁하네."

고작 이런 일로 돈을 받는다니, 생각보다 훨씬 좋은 의뢰였다.

"그럼 가볼까."

피니스가 앞장섰다.

이번 일은 잘못될 여지가 거의 없다.

어쩌다가, 루크 아이버스를 아는 인간이 성벽을 넘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이상에야.

에이, 설마.

나는 머리를 흔들어 불길한 생각을 떨쳐냈다.

10화. 아는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