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1화 프롤로그

주여. 당신께 맹세합니다.

내 검이 그 예기를 잃고 부러지지 않는 한 나는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고, 주군의 적을 베기 위한 검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내 두 다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는 한 나는 주군을 뒤로하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며, 주군의 등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 주군을 수호하겠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를 존중하며 위로는 경의를, 아래로는 친절을 품겠습니다. 그것이 기사의 역할이라면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니 주여.

앞서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나는.

주군의 기사인 나는.

당신을, 베겠습니다.

* * *

세상은 불공평하다.

왕족은 귀족보다 우월하고, 귀족은 평민보다 우월하며, 평민은 또한 천민보다 우월하다. 가지고 태어난 신분에 의해서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공평의 증명과도 같은 일이지.

물론, 이가 세상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신분이 천하더라도 재능 따라, 능력 따라 위로 치고 올라가는 케이스는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니까. 그러나 반례가 존재한다고 세상이 공평해지는가?

"그럴 리가 있나."

재능이라는 것도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노력으로 재능의 벽을 뚫어 낸다는 것도, 어쩌면 타고나야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노력을 잘못하여 팔 병신 다리 병신이 되는 기사가 얼마나 많던가.

세상은 더럽게도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꽤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적어도 제 재능과 주제는 파악하면서 살아가는 놈이 나라는 놈이었으니까.

"씨이발, 기분 째지네!"

꺼어억!

술 냄새를 머금은 트림이 입에서 나왔다가 하얗게 공기 중으로 흩어져 퍼져 나간다. 춥다 못해 차가운 날씨에 얼어붙는 몸.

전신이 욱신거린다. 두들겨 맞은 몸 여기저기에서 통증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낄낄거리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제지할 생각은 하지 않지.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 나는.

지크 영지의 소문난 망나니이자 지크 자작의 첫째 아들. 레이 지크였으니까.

"개가튼 인생~!"

어릴 적에는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영지의 가신들은 내가 영지를 이을 거라고 떠들고 다녔고, 주변 영지의 자제들도 내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하인들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내 손짓 한 번에 벌벌 떨었으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조리 눈앞에 대령하고는 했지.

뭐, 그래도 거기에 취해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 같은 망나니와는 다르게 지크 자작가는 나름 명문이었고, 자식 교육 정도는 확실하게 시킬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날, 나보다 네 살은 어린 어느 백작가의 영애에게 검술로 패배했을 때.

나는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았다.

"적당히 패지. 개자식들. 이래 봬도 귀족인데... 흐흐."

욱신거리는 통증에 옅은 웃음을 흘리며 쓰레기더미에서 몸을 일으켜 상태를 점검했다.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는 몸뚱이.

뒷골목의 왈패들에게 집단으로 두들겨 맞은 상처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모습이 내 몸이지만 참으로 한심하다.

억울하지는 않다. 선빵은 내가 쳤으니까. 날 꼬나보면서 실실 쪼개는 그 낯짝이 얼마나 화딱지 나고 역겹던지, 시원하게 한 방 갈겨 주지 않으면 내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

"아프더라도 마음은 시원하니, 이만한 이득이 없지."

돌아가자.

킬킬거리면서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영주성으로 향했다. 대로를 따라 쭉 걸으니 곧 나오는 영주성.

"참, 우리 집 커~다랗다!"

웅장한 영주성의 자태에 휘파람을 불며 정문으로 다가가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나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어어. 제임스. 로튼. 나야. 문 열어."

"어디서 그렇게 또 맞고 오신 겁니까...."

"좀 싸웠지. 알잖아? 내가 검술은 못해도!"

쉭쉭.

"요 박투는 좀 치니까. 흐하하."

하나 둘.

주먹을 내뻗으며 바람 소리를 내자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경비병들이 인상을 굳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선임 경비병 제임스.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뭐?"

"공자님께서 술에 취해 돌아오신다면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자작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공자님. 송구합니다만...."

"또?"

"예."

"허어."

제임스의 말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젠 대수롭지도 않은 처벌.

"아버지도 참 징하시지. 그런다고 내가 달라지나."

하기야 장자라는 놈이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이면 꼴 보기가 싫으실 것이다. 그냥 눈에 들어오지 않기를 원하시겠지.

그렇다면 별수 있는가, 아들 된 도리로서 아버지 눈에 들어가지 않는 수밖에.

"오늘도 여관에서 대충 숙식할 테니까 그리 알아. 제임스. 나 찾는 사람 있으면 말해 주고. 그럼 간다!"

"...."

휘청거리며 손을 흔들자 제임스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흘러나오는,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 오는 말.

"...공자님. 이제는 그만하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그만? 들여보내 줘야 여관을 전전하질 않지. 내가 여관에서 묵고 싶어서 묵나? 이거 참, 제임스도 농담을 참 잘해."

"그게 아닙니다. 이제는... 좀 건실하게 사셨으면 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아, 그 얘기."

익숙한 어조에 벽에 기대며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니까 그쯤 해 둬. 건실하게 살아서 뭐 하나. 쓸모도 없는데."

"...아닙니다. 공자님께서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뛰어나질 가능성이 있는데, 어째서...."

"그만하라니까."

"공자님께서는 우리 영지의 자랑이셨던 분 아닙니까. 왜 이렇게 방황하십니까. 마음을 부여잡으면 충분히."

"하."

무언가 할 말이 잔뜩 차 있다는 표정을 한 제임스를 보면서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곧 나를 바라보는 제임스.

"충분히?"

"...."

"충분히 뭐. 충분히 소드마스터라도 되시겠다? 아니면 뭐, 대마법사라도 될까? 내가 능력을 키워서 우리 자작가를 백작으로 승작시키면, 아니면 공작이라도 되어야 만족할까. 씨발-!!!"

"공자님...."

"네가 뭘 알아?"

인간은 불합리하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겨우 검을 잡은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여아에게 패배했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재능이 없는 나 따위만 봐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게 세상이라고.

"네가 뭘 아냐고."

세상이 불합리해서 나라도 합리적이 되고자 했다.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까.

어차피 일등이 될 수 없다면 즐긴다. 즐겁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영지는 내가 아니더라도 내 동생이 이을 수 있다. 나는 적당히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서 눈을 돌리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결정했다.

합리적으로.

"우리 제임스. 에릭이랑 동기지?"

"...그렇습니다."

"같이 들어온 에릭은 이제 기사인데, 제임스는 아직도 경비병이네. 왜 그럴까? 병신이라서?"

"...."

"아니, 제임스는 병신이 아니지. 병신은 나 같은 새끼한테나 하는 말이니까. 제임스가 노력하는 모습 아주 보기 좋아. 귀감이 될 만해."

"공자님."

"그런데 말이야."

취한 채 제임스의 멱살을 잡고 휘청거리며 제임스를 흔들었다. 분명히 나보다 힘도 훨씬 셀 텐데, 속절없이 흔들리는 제임스의 몸뚱이.

"나를 설득하려면 그런 모습으로는 안 돼. 제임스가 에릭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 줬어야지. 씨팔. 노력으로 재능을 극복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줬어야지-!!!"

"...."

몇 년이 지난 지금조차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 꼬맹이의 검이.

힘도, 속도도 나보다 부족하면서 귀신같은 감각과 재능만으로 내 허를 찔러 오던, 아직도 채 떨쳐 내지 못한 그 녀석의 검이.

"왜 자꾸 나를 힘들게 만들어. 응?"

말을 마치고 멱살을 툭 놓자 제임스의 거구가 살짝 흔들리다가 원위치로 안착했다. 내 뜻대로 흔들리다가 이제는 나를 슬픈 눈으로 보고 있는 제임스의 모습.

"뭘 그렇게 애인 보듯 빤히 봐. 내가 그렇게 예쁘장하게 생겼나?"

"...시정하겠습니다."

"아니? 시정하지 마. 내가 X같은 새끼인 건 맞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봐야지. 그래도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

실실 웃으며 뒤로 돌아 손을 뒤로 휘적휘적 흔들었다.

"붙잡지 마. 망나니는 술이나 진탕 퍼마시다가 취해 엎어져 잘 거니까."

"...몸조심하십시오."

"그래. 그래. 나를 지극히 생각하는 우리 제임스 말이잖아? 얼마나 조심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심은 해 볼게. 조심은."

말문을 열지 못하는 제임스를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가도를 따라 다시 영주성에서 멀어졌다. 이제는 홍등가의 불마저 꺼져 가는 시점.

"여관이, 여관이 어디... 빌어먹을."

주머니를 뒤지다가 문득 주머니가 허한 것을 알아채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느새 아래로 뚫려 있는 주머니.

"아까 맞을 때 뚫렸나."

왈패들한테 맞았을 때 뚫린 모양이다. 아니면 소매치기가 훔쳐 간 것인지도 모르고.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당장 확실한 건 여관에 묵을 돈이 없다는 것.

"오늘 재수 한번 제대로 옴 붙었네."

내 얼굴을 보고 하룻밤 묵게 해 줄 사람도 없을 거고.

어떻게 해야 할까.

탁탁탁!

고민하던 사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갑옷을 입은 채로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제임스.

"헉, 헉, 공자님...!"

"뭐 또 대거리할 게 남아 있다고 쫓아와?"

"그런 게 아니라. 후우."

꽤 먼 거리를 전력 질주했는지 잠깐 숨을 고른 제임스가 제 호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같이 근무 서던 로튼이 공자님 주머니 터진 걸 봤다고 해서 달려왔습니다. 돈 없으시지 않습니까."

"...이건 뭔데."

"빌린 돈입니다."

"내가 언제 제임스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저희 노모가 아프셨을 때 빌려주셨지요. 백 년 뒤에 백배로 갚으라고."

굳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임스를 보면서 혀를 찼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니까.

"이자 정도는 먼저 내겠습니다."

"...누가 이자 먼저 내래? 백 년 뒤에 백배로 갚으라니까. 봉급도 쥐꼬리만 한 주제에. 그거 나한테 주면 제임스는 이번 달 뭐 먹고 살고?"

"괜찮...."

"헛소리하지 말고 굶지나 마. 안 가? 근무지 이탈로 경비대장한테 이른다?"

"...."

"얼른 가. 난 친구 집에서 자면 되니까. 훠이."

"어느 친구...."

"아, 좀 가라! 내가 누구랑 친구 하는지까지 제임스한테 보고해야겠어?"

내가 연신 등을 밀어 대자 잠시 망설이던 제임스가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제 근무지로 돌아갔다. 그 고지식한 뒷모습을 보면서 절로 흘러나오는 쓴웃음.

"내가 뭐 그리 잘해 준 게 있다고... 시팔."

이게 맞다. 내 잘못의 대가는 내가 치러야지, 불쌍한 제임스가 치러서는 안 된다. 그거야말로 엄한 데서 뺨 맞고 화풀이하는 것 아닌가.

이미 화풀이도 한 번 받아 줬는데, 두 번 받아 달라고 하는 건 사람 새끼가 아니지.

"더럽게, 춥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 어귀.

앉으니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에 벌벌 떨면서 눈을 감자 조금 전에 보았던 제임스의 안타까운 표정이 눈앞에 떠오른다. 아버지의 슬픔에 잠긴 눈도, 동생의 원독 어린 눈도 함께.

"뭐. 어쩌라고."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어쩔 건데.

내가 부응할 수 있는 기대라면 그렇게 해 주겠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그 검격을 넘어설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다. 나는 기껏 해 봐야 이 주변에서나 조금 이름을 들어 볼 만한 수준이었다면, 녀석은 제국 전체, 나아가 대륙 전체에서 한 손에 꼽을 만한 재능이었을 테니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한 순간 내 다리는 멈추었다. 벽을 넘어설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설 방법만 있다면."

나도. 나라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대상 npc - 레이 지크]

[빙의 조건 충족 완료. 빙의합니다.]

"뭐?"

알 수 없는 문자와 함께 빛이 내 몸을 감쌌고.

다음 순간.

"...레이 지크인가?"

내가.

아니.

내 몸을 점령한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타팅으로 나쁘지는 않겠어."

2화 빙의 (1)

『1회차 시작.

자다가 눈을 뜨니 내가 하던 게임 속에 떨어져 있었다.

몸의 주인은 들어 본 적 없는 엑스트라였다. 이름은 오드리.

소설에서나 보던 전개다. 두근거린다. 앞으로 나는 어떤 모험을 하게 될까?』

『2회차 시작.

'엔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눈을 떠 보니 다른 이의 몸이었다.

이번엔 나도 아는 사람이다. 게임 조연의 몸으로 빙의했으니까.

저번과는 다르다. 시작이 나쁘지 않다. 저번에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3회차 시작.

또 지키지 못했다.

저번 회차보다는 더 깊게 갔지만, 아직 에피소드를 깰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1회차에서 만난 사람들을 두 번째 회차에서도 만났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의 모습에 방 안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나는 정말로 이 게임을 완결까지 이끌 수 있을까?

두려워진다. 이번 생에는 제발, 되돌아가지 않기를.』

...

...…

『8회차.

이번 생은 귀족의 몸이다. 이번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귀족 스타팅은 초반에 치고 나가기가 편하니까.

게임 속에 들어온 지도 햇수로 오십 년이 넘어간다. 계속 같은 시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내가 몇 살인지조차 잊어버리고 있다.

일곱 번을 회귀한 나는 스물한 살의 청년인가, 아니면 일흔이 넘은 노인인가.

점차 정체성을 잡을 수 없게 되고 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클리어하기를.』

『15회차.

살리는 게 아니었다.

동정심에 살려 놓았던 '마녀'가 모든 것을 망쳤다. 그 난관만 넘었어도 어쩌면 종막에 다다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효율이 좋지 않다. 제대로 살려 두면 분명 좋은 아군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효율을 생각하면 버려야 한다.』

『21회차.

처음으로 여자의 몸에 빙의했다. 나는 그동안 운이 정말 좋은 편이었다는 걸 자각했다.

신체의 구조가 다르니 전투 방식을 익히는 데도 고생했다. 이 몸은 꽤 반반한 편이었기에, 접근하는 놈들을 물리치느라 가면을 쓰기로 했다.

스타팅이 좋지 않다.

이번 생은 발판이다. 그렇게 결정했다.

다음 생을 위해서 준비할 것이 많다.』

『28회차.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모자라다.

그런 결론이 나왔다.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한계는 찾아온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재능이 있는 자들을 추려야 한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써서라도 최강의 드림 팀을 만들어 내야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어디 한번 해 보자.』

『37회차.

다시 인정에 묶여 일을 그르쳤다.

재능이 없는 것들은 빨리 잘라 내자고 결심했다. 나는 괜찮지만, 내가 준비하는 '것들'은 멘탈이 약하다.

멘탈에 대미지를 줄 만한 것들을 사전에 제거해 두면 향후가 편해질 듯하다.』

『49회차.

이 게임에 빙의한 지 삼백 년이 흘렀다.

...아니, 어쩌면 사백 년인지도 모른다. 예전의 기억이 흐릿해진다.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지구에서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서 이 빌어먹을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추신.

이젠 동료가 죽는 걸 봐도 마음이 아프지 않다.』

『86회차.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각성이다. 동료들의 각성을 유도하면 된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각성이 비슷하게 이루어진다는 걸 알아냈다. 가령 기사 에릭의 경우엔, 사고로 외팔이가 되면 저 자신에 대한 고찰을 거친 후에 경지를 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각성은 극한 상황에서 일어나니.

한번, 이것저것 시도해 볼까.』

『142회차.

대부분의 등장인물에 대한 각성 조건을 알아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팀의 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너무 오래 살아온 탓인가, 정신 방벽이 지극히 약해졌다. 인간성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과연, 나는 아직 인간이기는 한가?

...아니, 애당초 엔딩을 보는 데 인간성 따위가 필요하긴 할까.』

『151회차.

이번엔 레이 지크의 몸으로 빙의했다.

이번에야말로 엔딩을.』

[n회차 빙의자의 기억.]

'하아.'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놓인 책을 덮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기이한 광경.

"죄송합니다. 아버지. 정신 차리겠습니다."

눈앞에서 내 몸을 한 빙의자가 가족들에게 사과를 건네고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음, 그러니까.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아무래도 내 몸은, 누군가에게 빙의당한 모양이었다.

* * *

이 세계는 그 끝이 정해진, 멸망이 예정된 세계다.

빙의당해 영혼이 된 내 눈앞에 나타난 '빙의자의 n회차 기억'이라는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 세상이 '판게아'라는 게임이고 자신은 그 게임 속에 빠진 플레이어라고.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진 않았다. 게임이라든지, 플레이어라든지, n회차라든지, 나름 신문물을 발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부하는 열린 마인드의 나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으니까.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있었다.

이 책에 적혀 있는 건 전부 진실이고.

이 세상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며.

빙의자라는 놈은 그걸 막기 위해 수백 번이나 시간을 되돌려 가며 남의 몸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에는 그 몸으로 내 몸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레이 지크. 지크 자작가의 망나니 장남."

영지 안의 내 방.

빙의자가 종이를 펜으로 톡톡 두드리며 내 신상을 정리하는 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돌렸다. 분명 술과 널브러진 옷가지 따위로 엉망진창이었을 방이 깔끔해져 있는 모습.

"망나니는 관계를 맺는 데 너무 제약이 많다. 이미지를 개선해야 해."

당장 내 몸에 빙의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놈이 한 짓이 이런 것이었다. 내 주변을 정돈하거나, 혹은 그동안의 실수를 사과하러 다니는, 그런 것들 말이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미안하다며, 앞으로는 다를 거라며 주변에 말하고 다녔지.

물론, 그건 놈의 오산이었지만.

'내가 뭘 실수했다고?'

나?

망나니다. 그 부분은 인정한다.

다른 집 망나니들처럼 여자를 밝히거나 약에 쩔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쌈박질을 일삼고 다니긴 했다. 도박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아주 가끔 한 번씩 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래도 행패는 안 부렸지.'

아무리 삶에 낙담했어도 가족한테 화풀이하는 미친놈은 아니었다. 사용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짓은 더더욱 하지 않았지. 술에 취해 시종장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인들을 휴가 보낸 게 행패라면 행패일까.

그냥 나쁜 사람은 아닌데 가까이하기는 껄끄러운 사람. 뭔가 근처에 있으면 피 볼 것 같은 사람.

그게 내 이미지다. 그렇기에 당연히 사과할 이유도 없다. 잘못한 게 없으니.

즉, 놈은 내 몸으로 개뻘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지 개선이 끝나면... 훈련인가."

훈련.

딴생각을 하다가 주제가 넘어가자 다시금 시선을 돌려 빙의자가 적고 있는 종이에 고정했다. 위에 내 이름을 적어 놓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는 빙의자.

"레이 지크의 재능은... A+급. 전 회차에서 최고 고점은 황실기사단장. 딱 그 정도였지."

어? 황실기사단의 단장을 했다고? 누가. 내가?

매우 흥미로운 주제에 얼굴을 들이밀어 빙의자가 적고 있는 것을 눈에 담았다. 그러나 내가 보이지 않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내용을 적어 내리는 빙의자.

"다른 회차에선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변수가 없으면 그냥 망나니로 살다가 죽을 운명."

"하지만 고점 자체는 나쁘지 않아."

고점이 낮지 않다.... 음.

안목이 좀 있는 놈인가?

거듭된 칭찬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영혼 상태로 빙의자의 뒤통수를 탁 때렸다. 짜식, 보는 눈이 좀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망나니라는 이미지에 갇혔지만, 외형적인 부분이나 목소리도 준수하다. 못생기면 상대조차 해 주지 않는 이들이 많지. 이건 좋아."

"원래 애주가였다는 것 역시 플러스요소다. 술독에 빠져 사는 이를 싫어하는 이는 많지만, 술을 취미로써 즐기는 이는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으니. 고상한 취미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고."

과연, 백오십 번이나 회귀하고, 수백 수천 년을 넘는 세월을 보내면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현자의 눈을 가지게 되는 모양이다.

실시간으로 상승... 제자리를 찾아가는 내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뜻으로 윤기 나는 빙의자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빙의자의 독백.

"최고점은 아니지만, 성장 고점은 매우 높고 사교 활동에도 메리트가 있다. 이번 회차는 '버리는 회차'로는 사용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렇다면 어떻게 클리어해야 할까...."

어떻게.

상념에 잠긴 빙의자를 보며 나 역시 생각에 잠겼다. 남의 이야기 보듯 보고 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떻게 몸을 되찾지?'

빙의자에게 빙의당한 지 하루째.

아직까진 내가 행하고 있는 게 항상 하는 기행의 일종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빙의자의 기억을 뒤져 보면 이 빙의가 자연스럽게 풀리는 경우는 없다. 죽을 때까지 빙의 상태를 유지할 터.

즉, 나는 놈이 죽을 때까지 내 몸으로 내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것을 구경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랑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쓸쓸하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솔직히 상관없을 것 같은데.'

유령 상태로 살다 보면 그야 심심하겠지. 하지만 내가 내 몸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백오십 번을 회귀한 빙의자와는 달리, 나는 그냥 망나니다. 몸에 돌아가지 않아도 망나니고, 돌아가도 망나니.

앞으로 세상이 멸망한다?

그것도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다시 검을 잡을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 검을 꺾은 그 꼬맹이는 더 잘할 수 있겠지.

내가 내 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여태까지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망나니로 살아가는 것. 술독에 빠져 살다가 멸망이 찾아오면 죽는 것. 그게 예정된 미래.

그렇게 살 바엔 이 녀석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마음을 다잡은 '레이 지크'가 망나니 '레이 지크'보다 낫지 않을까.

...그편이, 내 가족들에게도 좋지 않을까.

"이번에는 반드시 멸망을 막아 내야만 한다."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는 빙의자를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도 불쌍한 녀석이지.

뭔지도 모를 세상에 끌려와서 세상을 구하는 것을 강요받고, 세상을 구할 때까지 끝없는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간다. 타인의 삶을 빼앗아서 살아가지만, 그것도 자의는 아니지 않은가.

남은 것은 멸망을 막아 내야 한다는 목표밖에 없다. 자신이 누군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저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그런 놈에게 굳이 빙의의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을까.

'...뭐.'

몸을 되찾을 방법도 안 보이고. 사례도 없고. 되찾는다고 해도 종말이 예정되어 있고.

그렇다면 이대로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루할 때도 있겠지만, 세상을 구하는 것을 옆에서 직관한다는 건 나름 재미있는 경험일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허공에 드러누웠다.

"멸망을 막아 내기 위해선."

빙의자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진.

"레이 지크의 가족부터 죽여야겠군."

...이 개새끼. 선 넘네?

3화 빙의 (2)

빙의자가 내 몸에 빙의한 지 나흘째.

나는 그동안 밤낮으로 빙의자의 기억을 탐독했다.

"후우우."

오늘도 온종일 여기저기 사과하러 다닌 뒤, 잠을 청하고 있는 빙의자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리고 눈앞에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활짝 펼쳐져 그 내용을 드러내고 있는 빙의자의 기억.

『111회차.

'얼어붙은 리나'.

지크 자작가의 두 자제 중 막내인 리나 지크의 각성 조건을 확인했다. 키워드는 가족애.

리나 지크의 경우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으나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해 제 가문이 멸문당하면 본격적으로 능력을 각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회차에선 마지막으로 연명하고 있던 레이 지크의 사망으로 인해 각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태생이 정에 약한 탓에 주변 인물로 빙의한다면 어렵지 않게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을 듯하다. 지크가를 멸문시켜 강제로 각성시키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후략)』

'이거였나.'

빙의자의 기억을 확인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 빙의자가 했던 '가족부터 죽여야 한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칭호를 받았단 말이지. 그 리나가.'

예로부터 정말 뛰어난 기사나 마법사들에게는 황실, 또는 왕실에서 내려 주는 칭호가 붙는다. 가령 지금 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건 '마법의 총애를 받는' 루렌실과 '홀로 일군을 대적할' 아가룬이지.

마법과 기사, 양쪽에서 정점을 찍은 그 둘만큼은 아니더라도 주변에도 칭호를 받은 이는 있다. 당장 우리 가문의 전대 가주인 내 조부만 해도 현역 때는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사로 활동하면서 '부러지지 않는'의 칭호를 받았지 않던가.

'보통이 아니고선 받기 힘든 게 칭호지.'

진짜 뛰어난 업적을 세우거나, 혹은 정말로 괴물 같은 힘을 발휘하거나.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충족되지 않는 이상 받을 수 없는 것이 칭호다. 심지어 '얼어붙은'처럼 그 이미지가 명확하고, 강해 보이는 칭호는 정말 제국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강자가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받기 힘들 거고.

그런 의미에서 내 동생에게 칭호를 받을 잠재력이 있다는 건 고무할 만한 일이지.

하지만.

'걔가 가족애가 강하다고? 아니, 그보다.'

내 여동생이 각성하려면 우리 가문이 멸문당해야 한다고? 그것도 한 명도 남김없이?

'시팔. 이럼 나가리잖아.'

심각한 상황에 턱을 매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자의 생각이 뭔지는 대강 알 것 같았으니까.

'놈은 아마 내 몸뚱어리만 남겨 두고, 가문을 멸문시킬 생각이겠지. 리나의 각성을 위해서.'

111회차까지밖에 읽지 못했고, 그것도 지크 가문에 관한 것만 찾느라 거의 휙휙 넘겨 가면서 읽었지만, 그럼에도 놈이 생각하는 게 뭔지는 대강 알 수 있다. 놈은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뛰어난 인재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걸 원하니까.

내가 죽어야 리나가 각성을 하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 채로 각성을 시킬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에게 뭔가 생각이 있으니 당장 가문을 멸문시키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터.

놈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가문은 멸문당할 것이다. 내 몸을 가지고 있다면 특히나 더 쉽게 멸문시킬 수 있겠지. 그러니 어떻게든 몸을 되찾긴 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놈이 내 몸을 가지고 가문을 멸문시키든, 아버지 앞에서 원치도 않는 사과를 하든, 나체로 길거리에 나가 코끼리코를 돌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놈을 욕하고 때리고 분통을 터트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 몸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까.

'뭐라도 해 보자.'

이렇게 영혼만 남은 상태로 놈을 때려 봤자 뭐가 될 것 같진 않으니, 일단.

놈의 기억부터 좀 뒤져 볼까.

* * *

빙의자가 빙의한 지 엿새째.

『1회차』

'이건 안 된다.'

책을 집어 던지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저히 상황이 진전되지 않았으니까.

'너무 방대해...!'

사람의 인생을 책으로 정리하면 그 분량이 얼마나 나올까.

자서전이나 회고록 같은 것을 보면 굵직한 사건만 정리하는데도 불구하고 못해도 한 권 이상, 좀 분량이 되는 것들은 두 권, 세 권, 어쩌면 다섯 권을 넘어서기도 한다. 심지어 이 책은 놈의 기억을 통째로 정리한 것.

흐릿한 기억은 대강 적혀 있다 치더라도 선명한 기억들은 다 남아 있다. 놈이 빙의 첫날밤에 뭘 마셨는지도 다 적혀 있단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이거 하나하나 살펴보려면 삼 년 내내 살펴도 모자라다.'

놈의 기억이 일, 이년 정도로는 도무지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하다는 것.

'원하는 내용만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마도서 중에서 그런 기능이 있는 마도서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에 그런 기능은 없다. 애당초 왜 있는지도 모를 책 아닌가.

도무지 전부 읽을 수 없다. 놈이 언제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빠르게 무슨 방안을 취해야 하는데.

"으음."

'어떻게 해야 할까.'

침음을 흘리며 잠꼬대를 하는 빙의자를 노려보고서 팔짱을 꼈다.

어떻게 해야 할까가 아니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지.

시도해 볼 수 있는 건 모두 시도해 보자.

* * *

빙의자가 빙의한 지 이레째.

[151회차]

'이래도 안 돼?'

반쯤 접어 구겨 놓은 책의 151회차 부분을 노려보면서 이빨을 갈았다. 눈앞에서 편안히 내원을 산책하고 있는 빙의자.

"아, 공자님...! 저번에 말씀해 주셨던 게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별거 아니야.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

안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내가 개과천선한 행세를 하고 있는 빙의자의 모습에 주먹을 꽉 쥐고 책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상황을 바꿀 변수 같아 보였으니까.

'이 책이 놈의 기억이라면 정신과 연결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정신과 연결된 것이라면 파괴하면 놈의 정신도 파괴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책을 찢어 보려고 한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이다. 그리고 그 뒤의 상황이 지금 상황.

'도무지 찢어지질 않는단 말이지.'

힘을 주어서 책을 찢어 보려고 해도 찢어지지 않는다.

펜을 만질 수 없으니 내용을 수정하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책을 불에 태울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책에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

'구긴다고 무슨 이상이 생기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애당초 제대로 구겨지기는 하는 걸까.

펴 보니 구겨진 흔적조차 남지 않은 책을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고 책을 펼쳤다. 도대체 몇 페이지가 있는 건지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넘어가는 책.

촤르르르륵-!

'끝도 없구만.'

'끝도 없구만.'

이걸 읽으려면 몇 년이 걸릴까.

끊임없이 넘어가는 종이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이제 무슨 시도를 해 볼지 고민하던 찰나.

'...어?'

책을 넘기던 내 눈에 묘한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가.

[151회차의 기억]

[151회차의 기억]

'백지라고?'

어느새 끝까지 넘어간 종이를 다시 앞으로 넘긴다. 내가 알기로 빙의자의 지금 회차는 151회차.

151회차의 뒷쪽으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니까. 적혀 있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닌가. 하지만.

'그 앞... 150회차에 빙의자가 죽고 난 뒤. 이 부분이 백지인 건 이상하지 않나?'

그래.

그 앞인 150회차에서 백지인 건 이상하다. 왜냐하면 백지가 시작되기 직전 문장은 '150회차는 끝을 맞이했다'니까. 150회차가 끝났으면 백지가 아닌 151회차가 이어져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이거다.'

내 직감이 소리친다. 이 백지를 파 보면 뭔가 나올 듯싶다고. 십 년이고 책을 보면서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면 이 백지로 뭐든 해 봐야 한다고.

사륵.

이건 나를 죽일 비수인가. 아니면 상황을 바꿀 역전패인가.

조심스럽게 백지로 손을 가져다 대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내가 눈을 딱 감고 호흡을 정돈한 채로 백지를 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찌지직-!!!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Error.][Error.][Error.][Error.][Error.]

[Error.][Error.][Error.][Error.][Error.]

'뭐야. 뭐야!'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시스템 중추에 강력한 손상을 확인.]

[수복을 시도합니다.]

[수복을 시도합니다.]

[수복을 시도... 실패. 실패. 실패.]

떠오르는 반투명한 창.

바라보는 세상이 회색으로 물든다. 시계가 그 빛을 잃어 가고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져 간다. 그 사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

──!

깨진 목소리들이 파편처럼 흘러들어온다. 회색 세상 너머에서 수많은 형상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어딘가 익숙한, 그러나 낯선 형상들.

-너는 나를 ■■이라 불렀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다르다. 레이. 너야말로 ■■이다.

...내가 뭐라고?

[수복을 실패했습니다.]

[긴급 체제로 전환. '윤회'하지 않은 혼Œ∮㎯ψ...]

글자가 뭉개지고 세계가 재편된다. 텅 빈 회색의 방. 수십 개의 문이 달려 있는, 그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방.

[150회차 빙의자의 사후, 레이 지크의 기억]

"뭐의 기억?"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했다가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나오고 있었으니까.

"뭐야, 빙의가 풀렸...."

"그건 아니다."

나직한 목소리.

소름 돋을 정도로 나와 동일한 목소리에 시선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방의 끄트머리,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놈의 모습.

그러나 알 수 있다. 저 행동거지. 목소리. 움직이는 방식. 이레라는 시간 동안 놈을 관찰해 온 나는 알 수 있다.

놈은 또 하나의 내가 아니다. 레이 지크의 모습을 빌린.

빙의자일뿐.

"레이 지크. 맞나?"

"...맞다. 이 호로새끼야."

"150회차에서 너와 마찰을 빚은 적은 없었는데. 욕부터 하는 걸 보면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나 보군. 소멸하지 않은 채로."

어째서.

그런 말을 짧게 중얼거린 빙의자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찡그려지는 놈의 표정.

"...내 사후의 기억, 이라."

"왜, 대단하신 빙의자님도 백오십 번 빙의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나 보지?"

"처음이다.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킨 것도 처음. 빙의한 대상의 혼이 사라지지 않은 것도 처음...."

"그러시겠지."

"네가 한 짓인가?"

"내가 했다면?"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 너를 죽여야겠지."

"내가 하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다."

"그럼 왜 물어봐. 시발아."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면서 박투자세를 잡자 빙의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질문.

"뭐 하는 건가?"

"뭐 하긴, 안 보여?"

"...."

"빙의당하고 몸 되찾을 방법은 안 보이고. 그래서 참아 주려고 했는데, 선을 제대로 넘더라고? 뭐, 가문을 멸문시켜?"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됐다. 어쨌든 여기가 정신세계라는 거잖아?"

정신세계에서의 싸움은 원래 정신력이 강한 쪽이 이기는 것이 정석 아닌가. 그리고 놈은 백오십 번이나 다른 몸에 빙의하면서 정신이 닳아 빠진 상태고.

"한판 붙자. 개새끼야."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둘 다 무기가 없다면 나쁘지 않다. 박투는 자신 있으니까.

놈을 때려눕히고, 내 몸을 되찾는다. 그런 생각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고.

"원한다면."

채앵!

다음 순간.

"이런 시발."

놈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솟아오른 검을 뽑아 드는 것을 본 순간.

"형님 우리 말로 합시다."

나는 두 손을 들었다.

4화 빙의 (3)

도망쳤다.

'불리하다고 생각하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는군. 역시 망나니인가.'

판단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자존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시스템의 내부를 정신세계라고 착각하는 것을 보면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문을 열고 도망친 레이의 뒷모습을 상기한 빙의자가 검을 다시 공간에 집어넣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문틀을 매만졌다. 문 위에 방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모습.

[150회차 빙의자의 사후, 레이 지크의 기억]

"내 사후의 기억이... 존재한다고?"

방의 이름을 살핀 빙의자가 조용히 읊조렸다. 원래라면 이런 공간은 있을 수 없는 공간이었으니까.

단순히 자신의 기억이 아닌 다른 이의 기억이 남았다는 것에 놀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빙의자는 수십 회차도 전에 진리의 탑에 올라 이 문제를 물어보지 않았던가.

평행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빙의자는 실패하면 평행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빙의자가 죽은 뒤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구해야 하는 세계는 하나뿐이다. 그렇기에 몇 번이고 회차를 '버릴 수' 있다. 잘못을 수정할 수 있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그랬을 터인데.

'어째서 남아 있는 거지?'

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은 혼. 존재해서는 안 될 150회차의 기록. 그리고 깨져 버린 시스템.

모든 게 처음 보는 것투성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있다면 역시.

'레이 지크.'

그자 때문이겠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빙의자가 입을 열었다.

"상태창."

『STATUS

이름:레이 지크(19, 남)

갈래:없음

근력:6(소질:중상)

체력:5(소질:상)

감각:9(소질:최상)

마력:0(소질:중상)

내구:11(소질:최상)

매력:5(소질:상)

재능:

무재(상)

이 재능을 지닌 이는 '무학'의 영역에 있는 모든 행위에 큰 보정을 받습니다.

새로 접한 무학을 빠른 속도로 익힙니다.

'사교(중)'

이 재능을 지닌 이는 타인에게 호의를 보다 쉽게 얻습니다.

()

.

.

특수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빙의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레이 지크의 세 재능 중에서 암막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마지막 재능.

변수가 있었다면 이것이다.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시스템에 오류를 일으켰으리라.

"일단, 레이 지크를 쫓아야겠군."

빙의자는 알고 있다. 이 상황을 그 망나니가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쯤.

아마 망나니는 제가 어떤 상황에 휘말렸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터. 그런 의미에서 망나니를 심문하는 건 고통만 주는 무의미한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생각할 수는 없다. 시스템에 오류가 생기면, 그래서 '다음 빙의'가 사라진다면 빙의자는 세계를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잡는다. 잡아서 모든 것을 캐낸다.'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되도록 오래 살려 놓아야겠지.

감정이 죽은 눈을 한 빙의자가 천천히 문턱을 밟았다. 그리고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

빙의자의 몸이 회색빛으로 묻혀 사라졌다.

* * *

[150회차 레이 지크의 기억]

"허어억. 뒈질 뻔했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외진 곳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오래 달려 본 건지 턱 끝까지 차오른 숨.

"그 새끼, 쫓아오지는 않나...?"

쉽게 죽이진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싸움을 걸었는데, 칼을 뽑을 줄은....

아니, 만나서 싸우게 된 것까진 좋았다고 쳐도 갑자기 시퍼런 날붙이부터 뽑아 드는 건 초면에 예의가 아니지 않나?

빙의자가 들으면 기가 찰 만한 불평을 잔뜩 늘어놓고선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여긴 어디야."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 끝을 모르고 들어차 있는 책장.

아무것도 없이 삭막한 빙의자의 방과는 다르게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으로 뒤덮여 있는 장서고의 모습에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책의 이름.

"150회차 레이 지크의 기억...."

다시 보고 눈을 비비고 봐도 빙의자의 기억이 아니라 내 기억이다. 지크 자작가 최초 아웃풋. 개망나니 레이 지크.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 빙의자의 정신세계인지 뭔지 하는 곳 아니었나?

의문을 품으면서 앞에서 한 권을 펼쳐 보았다. 그러자 맨 위에 적혀 있는 문구.

[나는 비열한 자식이었고, 열등한 장남이었다.]

'어?'

읽는 순간 글자가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책에 적혀 있던 글자가 내게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고.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기어들어 오신 겁니까.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전 당신이 경멸스럽습니다. 오라버니.

낯선 여자가 내 눈앞에서 경멸하는 눈을 하고 나에게 말을 건다. 내 여동생을 닮은, 내 여동생이 십 년쯤 자라면 저런 얼굴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은 여자.

리나?

[경멸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리나의 입장에서 나는 비겁자니까. 가문을 버리고 도망쳐 온 도망자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독백에 눈을 깜빡였다. 이번엔 또 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가신들도 함께 옥쇄하고, 영지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스러져 갔습니다.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최선을 다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 보십시오.

[비애에 잠긴 여동생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싸우려 들었다. 하지만 검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제임스가 기절시켜 왕도에 후송시켰노라고, 그렇게 말한들 믿어 주기는 할까.]

[여동생이 믿어도 나는, 그 변명을 납득할 수 있을까. 정말 싸우려고 들었다면, 검을 잡을 수 있었다면.]

-또, 그런 식이십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 미래의 리나가 등을 돌린다. 그리고.

-꼴도 보기 싫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리나의 말이 끝나고 다음 순간.

"허어어억...!"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뭐야. 대체...!"

당장이라도 책장을 부숴 버리고 싶은 슬픔과 절망. 그리고 분함.

그런 감정들이 명치 부근을 아른거리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아마 150회차의 내 기억일 터.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 아니라고."

이건 아마 '전 회차'의 내가 겪었을 뿐인 일이다. 그걸 체험했을 뿐이고.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단 말인가. 내가 직접 그 일을 겪은 것도 아닌데.

"...후우, 후우."

후우우.

깊게 심호흡하고 애써 감정을 가라앉힌 뒤 책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감이 잡히는 책장의 용도.

"...말 그대로 내 기억을 정리해 놓은 책장인가?"

아직도 솔직히 모르겠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여기에 있는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이 기이한 세계에 이게 있다는 건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는 것. 그리고 내가 빙의자를 조금이라도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기억을 읽는 것뿐이라는 걸.

"좋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자고.

호흡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결코 기억에 휘말리지 않도록. 나를 단단히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책장의 다음 책을 집어 펴드는 순간.

[나는 제 주군 하나 지켜내지 못한 부러진 검이었고.]

[지켜야 할 이에게 반대로 지켜진 비겁한 방패였다.]

다시금.

기억이 펼쳐졌다.

* * *

철컥! 철컥!

"레이. 나는 말이다. 자네가 부럽다."

"...말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벌어질 겁니다."

갑옷을 입은 채로 등 뒤에 매달린 사내의 무게를 느낀 레이 지크가 전력을 다해 질주하며 이를 악물었다. 후방 병영까지는 멀고 먼 거리.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현명하고,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상황은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스스로 자책한 레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의 종말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왜....'

어느 날을 기점으로 세상은 점점 망해 가기 시작했다.

세상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망한 것은 아니다. 세상을 피로 물들이겠다는 암흑교단이 있던 것도 아니고, 암약하던 비밀결사가 야욕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그저 '끝'에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세가 몰려오기 시작했을 뿐.

지크 가문이 멸망하고, 군세를 막아서려는 황실 역시 그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그렇게 인류가 끝없이 패퇴하고, 후퇴하고 있을 때 '끝'의 군세가 몰려왔다. 종착지는 양보할 수 없는 전략요충지.

-이곳을 함락당하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레이와 레이의 주군, 총사령관은 남는 것을 선택했다. 모두가 후방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말할 때도 남아 끝의 군세를 맞이했다. 이 뒤로 후퇴한다면 늦느냐 빠르냐의 문제지, 멸망으로 직행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 레이의 주군은 죽어 가고 있었다.

감히 '끝'의 앞을 막아선 대가로. 인류를 살리고자 했던 대가로써.

"쿨럭!"

"주군!"

"괜찮다."

피를 한 움큼 토해 내고서 손을 내저은 주군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자네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쓰레기끼리 잘해 보자고."

"...."

"맞다. 나는 쓰레기였지. 자네도 쓰레기였다. 황실의 망나니 삼황자. 지크 자작가의 망나니 장남. 어느 누구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멍청한 놈들...."

쿡쿡 웃은 주군이 말을 잇는다.

"지크 자작가가 멸망하고, 내 위의 형님들이 전부 죽어 나가고...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전선 끝으로 떠밀렸다. 쓰레기들이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었어.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다."

"...어떤 쓰레기가 세상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칩니까?"

"글쎄,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쓰레기가 아닌 모양이지. 자네 역시. 쿨럭!"

"주군!"

"흐흐.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웃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한 주군이 힘없이 손을 내저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레이. 내 충직한 기사. 하나뿐인 친우여."

"...."

"나를 버려라."

"어떤 기사가 주군을...."

"주군이기에 앞서 나는 자네의 친우다. 레이. 나는 가망이 없다. 자네가 가망이 없는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는 것도 원치 않아."

"...."

"항명을 밥 먹듯이 하고, 제 주군 알기를 개같이 아는 자네지만... 이 명령만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버려라."

거듭된 주군의 목소리에 달리다가 서서히 멈춰 선 레이가 어깨를 떨었다. 사실 자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항명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좀 참으면 안 되나?"

"...적어도 양지바른 곳에 내려 드리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축축한 늪지를 슥 둘러본 주군이 피식 웃고 레이의 등을 토닥였다. 이곳에 내리라는 그 동작에 이를 악물고 천천히 무릎을 굽히는 레이.

"그래. 나무 등치에 기대게. 좋다."

아이를 타이르듯 입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웃은 주군이 나무 등치에 기대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방금 자네에게 부럽다고 했었지."

"...예."

"사실이다. 고난과 역경에 점차 꺾여 가는 나와는 다르게 자네는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 겪을수록 찬란하게 빛나곤 했으니까."

"...."

"위기가 올 때마다 자네는 더욱 빛났다."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위기를 극복한 것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여태까지는 그랬지.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있나?"

"그건...."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인류의 희망이다. 이렇게 다 죽어가는 무능한 지휘관과 다르게."

건틀릿 너머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내 손을 꽉 잡은 주군이 말을 잇는다.

"레이. 부탁을 하나만 하겠다."

"...뭡니까?"

"세상을 구해라."

"...."

"놈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마저도 앗아 가려 들고 있지. 자네의 가족을 죽이고, 여동생을 죽이고, 내 아버지, 어머니, 형님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서 이젠 돌아갈 고향마저 죽이려 들고 있다."

그건 소통 없는 포악이고 학살이다. 인류사의 그 어느 학살자도 저들보다 잔인하고 끔찍하지 않을 터.

"저들을 막아 주어라. 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에라도."

"...다음 생이라면 주군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나? 하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우리 둘 다 또 망나니인 상태로 만나는 건가."

힘없이 웃음을 터트린 주군이 손을 놓고 눈을 깜빡였다. 바이저 너머로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

"만약 그렇게 만난다면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뭡니까."

"자네가 먼저 좀 정신 차려서 나를 정신 차리게 해 줬으면 좋겠다. 불경죄로 다스리지 않을 테니."

"제가 다스린다고 다스려질 놈도 아닙니다."

"그것도 그렇군. 그렇다면."

믿고 맡기도록 할까.

작은 웃음과 함께 조용히 꺼지는 눈동자의 빛을 바라본 레이 지크가 입술을 깨물고 바이저를 올렸다. 그저 웃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주군의 모습.

"...눈은 감겨 드리지 않겠습니다."

서서히 일어선 레이가 등을 돌렸다.

"안식을 얻기엔 아직 이르십니다."

눈을 감기지 않을 테니, 그곳에서 보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당신의 기사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할 건지.

천천히 걸어간 레이가 능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울리는 기이한 음색의 전쟁 나팔.

시야 끝.

종말이 넘어오고 있었다.

"...."

점차 사라지는 기억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아직도 심장 속에 도사리고 있는 차가운 분노.

"...그런가."

비열한 자식. 비겁한 장남. 부러진 검에, 지키지 못하는 방패.

150회차의 나 역시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은 없었다. 고난과 역경을 겪고, 몇 번이고 부딪치고 부서져서 단련된 검.

"...남 얘기가 아니었네."

빙의자의 기억을 읽었을 때랑은 다르다. 기억이, 감정이 흘러들어 온다. 150회차의 내가 느꼈었던 감정이.

종말이 단순히 남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은 뼈저리게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수는 없지 않은가.

"후우우."

마지막.

[150회차 레이 지크의 마지막 기억]

어느새 텅 빈 채 한 권 남은 마지막 책을 책장에서 뽑아 손에 들었다. 밀려오는 후회와 회한.

"내가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렸더라면."

내가 좀 더 철이 들었다면, 적어도 검을 다시 들기 위해, 벽을 뚫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 보았다면.

이 상황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을까.

"일단... 지금 상황부터 타파하자."

생각은 나중이다. 지금은 빙의자를 이길 카드가 필요하니까.

나는 심호흡을 하며 책을 펴들었다. 그리고.

책의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세상의 검이었다.]

[만 번을 두드려 겨우 완성에 다다른, 너무나도 늦게 완성된 검.]

5화 빙의 (4)

[150회차 레이 지크의 기억]

복잡하다.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저기 무너져 있는 서가를 탐방하며 결론을 내린 빙의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책장은 수도 없이 많은데, 책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은 장서고의 모습.

'어디로 간 거지?'

이곳은 시스템의 내부.

평범한 망나니에 불과한 레이 지크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을 리는 없다. 아무리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장서고라도 시스템에 엮여 있지 않다면 평생 들어와 볼 기회도 없을 곳이 이곳이니까.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겠군.'

레이 지크가 들어왔을 땐 정돈된 장서고였을 것이다. 책들도 꽉 들어차 있었을 것이고, 무너진 서가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무너진 이유는 하나. 더 이상 장서고가 그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레이 지크가 서고의 책을 읽고서 150번째 회차의 기억을 계승했기 때문에.

'시스템의 문제는 이번 회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저번 회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무너진 서가를 넘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빙의자가 판단을 내렸다. 150번째 회차의 기억이 이곳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시스템의 오류는 그 150번째 회차에서 비롯된 것일 터.

'내 사후의 기억.'

그것이 계속 걸린다. 빙의자가 알고 있는 것으로 자신이 죽으면 곧바로 세계가 되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곧 세계의 회귀를 뜻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죽어도 시간은 흘러간다.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그리고 세상이 멸망하면 다시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세상은 반드시 멸망을 향해 치달을 테니.

'놈은 150번째 회차의 기억을 계승했다. 그렇다면 내 사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고 있겠지.'

차라리 잘되었다. 그간 모르고 있었던 세계의 비밀이 풀리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수 있으니까.

깊게 대화할 것이다. 끝이 정해져 있더라도, 구태여 고문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더라면 그편이 좋지 않겠는가.

'저기 있군.'

어느새 서가의 끝에 도달한 빙의자가 저 멀리서 벽을 본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레이를 발견했다. 무언가에 충격을 받기라도 한 모양인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

"도망치는 건 이제 포기했나?"

"...."

"기억을 계승했겠지. 레이 지크. 너도 그 '끝'을 보지 않았나. 그렇다면 내게 협조해라.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네 지식이 필요하다."

"...."

무언.

대답조차 하지 않는 레이를 보면서 한숨을 내쉰 빙의자가 말을 이었다.

"정 네 가문이 걱정되는 것이라면 협상할 여지도 있다. 리나 지크를 각성시키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다른 이들도 많으니까. 네 가문은 멀쩡하게...."

"내 지식이, 필요하다?"

"이제 좀 대화할 생각이 드나?"

과연 리나도 그렇더니, 레이 역시 제 가족이 관련되면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

"혼란스러운 것은 알고 있다. 레이 지크. 너를 살려 주겠다는 뻔한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맹세하지. 네 지식은 네 가족을 살리는 데 사용될 것이며, 이 세계를 구원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

"내 기억을 읽었으면 알고 있지 않나.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왔다. 그것 말고는 내게 남은 것조차 없다."

빙의자는 기억한다.

150번째 회차의 레이 지크는 거칠긴 했어도 충직한 기사였다. 그런 기사를 상대로 가식이나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 온전히 진심을 내보이는 것이 최선이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레이 지크. 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뭐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살아왔다. 친우도, 연인도, 감정도, 하다못해 내 자신마저도.

"...도움."

진심을 내보이는 빙의자의 모습에 삐뚜름하게 고개를 꺾은 레이 지크가 빙의자를 바라보더니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 일견하기에 비웃음 같기도, 자조 같기도 한 웃음.

"빙의자. 넌 끝이 알고 싶냐?"

"알고 싶다. 끝에 대해 알고 있나?"

"알지. 잘 알아. 방금 보고 왔거든."

"...."

"세상에는 끝이 있어. 어느 순간부터 그 끝에서 군세가 넘어오고, 끝에서 넘어온 군세가 땅을 점령하면 그 끝은 넘어오지."

반구형 세상의 끝을 두르고 있는 거꾸로 떨어지는 빛의 폭포.

그 폭포는 군세를 따라 다가온다. 저들이 점령한 땅을 마치 제 구역이라는 듯 경계 그어 인류가 범접할 수 없게 만든다.

"물리쳐도, 물리쳐도 군세는 계속 와. 하물며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하기도 해. 그러면 정말 끝은 언제일까?"

"...."

"너는 진짜 이 세상이 끝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냐?"

그렇지 않다. 빙의자는 끝을 본 적이 없다. 항상 그 끝에 도달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나는 봤다. 세상의 끝을."

"그건...."

"그건 땅이 아니다. 순간도 아니었어. 그저 검이었다. 몇 번이고 부러졌다가 다시 붙인, 그렇기에 다시는 부러지지 않을 검."

쓴웃음을 지은 레이 지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 위에서 파스스 흩어지는 무언가. 그리고 바닥에서 뽑혀 나오는 기다란 검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다고 했었지."

"...."

"그런 너한테 이 세상을 맡길 수는 없다."

무언가를 포기하는 순간 종말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종말을 막기 위해선 아무것도 포기해서는 안 돼."

일단 지금 이 순간부터.

"와라. 빙의자."

대가리에 구멍을 뚫어 줄 테니까.

선언한 레이 지크가 어설프게 씩 웃었다. 그리고.

"...설득의 시간을 거쳐야겠군."

빙의자 역시.

검을 뽑았다.

* * *

카아앙-!!!

'보여.'

세상을 부술 듯 짓쳐들어오는 빙의자의 검격을 흘려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

빙의자의 검격이 받아 내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내 속이 더부룩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냥.

그냥 내 자신이 너무나 추하게 느껴졌을 뿐.

-...오라버니는 우는 모습이 추합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검을 잡지 못하는 나를 구한 대가로 생명의 불꽃을 점차 꺼트려 가던 여동생의 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멍청아, 도망가라는 뜻이야.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나를 후퇴시키기 위해 나선 약혼자의 뒷모습.

-살아남으십시오. 공자님. 반드시 살아남으셔야만 합니다.

언제고 갚겠다고 품속에 지니고 있던 돈주머니를 내게 건네주며 당부하던 제임스의 억센 손아귀.

-세상을 구해라.

주군이었던 삼황자의 마지막 목소리까지.

기억을 되찾으니 알 수 있었다. 전생의 '레이 지크'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이의 호의 속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끝에서 뭘 봤지?"

"...."

"대답해라. 레이 지크!"

빙의자의 검격을 받아 내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끝에서 뭘 봤느냐라.

"간단하지."

"...."

"끝에는 내 인생이 적혀 있었다. 비루하고 비겁한 기사의 일생이."

나는 비겁한 놈이었다.

망나니처럼 살았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 같았다.

...그렇게 살았어도 가문에서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못난 아들이 언젠가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며, 그저 지켜보았지.

하지만 망나니에게 있어 세상은 가문만큼 안온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끝'에서 군세가 넘어오기 시작했으니까.

-도망치십시오. 공자님.

끝의 군세에 가문이 멸문당하고, 제임스가 목숨을 바쳐 나를 대피시키고 난 뒤.

나는 폐인이 되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가족과 가솔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목도하고서도 제정신으로 남아 있을 정도로 나는 강하지 않았다.

여동생에게 경멸당하고, 변명하지 못한 채 숨어들었다. 술로 밤을 지새웠다. 여태까지 그저 망나니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면 폐인이 된 나는 망나니조차 되지 못한 쓰레기였다.

-리나 지크가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공자.

여동생의 전선행을 듣기 전까지.

"나는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검을 잡았다."

"그게 무슨...."

"야. 너는 검사가 십 년 넘게 검을 잡지 않으면 어떤 느낌인지 아냐?"

두려웠다. 검의 무게가, 서늘한 감촉이, 그 예기가.

전부 극복하지 못한 채 전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동생을 찾기 위해 최전선 부대에 지원하고. 여동생에게 목숨을 구함받고.

여동생이, 죽었다.

"여동생이 죽고 나서야 나는 겨우 검사가 됐다."

"...."

검사가 되고 나서.

나는 복수에 미쳤다. 끝의 군세를 베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삼황자도 그때 만났다. 나처럼 끝으로 내몰린 남자.

"둘 다 미친놈마냥 전선을 떠돌았지. 주군은 지휘관으로, 나는 기사로."

광인은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포위당했다. 마지막 남은 황실의 혈통. 죽으면 끝이었다. 나는 옥쇄를 각오했고, 주군을 탈출시켰다. 거기서 내 명은 끝인 줄 알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바보야. 여긴 나한테 맡기고 도망가라는 뜻이야.

하지만 아니었다.

"내 가족이 전부 죽고 내가 위기에 빠지니, 이번엔 내 약혼녀가 날 살려 줬다. 착해빠져서는."

명줄이 길다.

그렇게 전선을 후퇴했다. 복수에 미쳐서 잃은 것을 되돌아보았고, 후회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지를 알았다.

그때 인류는 이미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최후의 전선을 함락당하면 남는 것은 마지막 요새뿐.

"거길 함락당하면 끝이었지."

삼황자와 나는 결의했다. 이 최후의 전선을 지켜 내기로.

그리고 지켜 내지 못했다. 적은 너무나도 많고 강대했으니까.

"죽을 때가 되니까 주군도 나보고 살라고 말하더라. 그렇게 망나니였던 인간이."

"...."

"죄다 나보고 살라고 말했어. 모두가."

최후의 요새.

거기선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 사면에서 끝이 다가왔다.

비명이 난무했다. 내가 일백의 적을, 일천의 적을 베어도 일만, 십만의 적이 다시 튀어나왔다.

"미친 듯이 싸웠지."

천 명.

백 명.

열 명.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린아이 하나라도 살려 보겠다고 업고 싸우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알았다.

이 세상에 살아남은 인류가 나 하나뿐이고.

사면은 모두 '끝'의 폭포로 둘러싸였고.

내게 남은 건, 한 뼘의 땅뿐이라는 걸.

"지켜 낼 것은 이미 아무것도 없었지. 내가 너무나도 늦었으니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내가 조금 더 검을 빨리 잡고, 빨리 자신의 검을 찾았더라면.

"그렇다고 한들 검을 놓지는 않았다."

세상을 구해라.

구할 세상은 이미 없었다. 하지만 아직 지킬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내 검. 모두가 지키고자 했던, 나의 의지.

"부러지지 않은 내 검이 곧 세상의 끝이었으며, 의지였다."

나는, 세상의 검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백 번의 밤을 지새우고. 백번의 낮을 베어 내고.

"내 검은."

내 일격은.

-시스템 에러.

-시스템 중추에 막대한 손상을 확인. 시스템으로 측정할 수 없는 무력을 확인했습니다.

-레이 지크의 숨겨진 재능을 확인.

-초월급 재능. '역경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시스템에 등재합니다!

세상을 베었다.

"그게 대체 어쨌단 말이냐."

카가가각!

싸늘하게 말을 꺼낸 빙의자가 검을 내질렀다. 검신을 긁으며 시야 가득 튀는 불꽃.

"너는 150번째 회차의 레이 지크가 아니다. 전생의 기억을 읽었다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

"아니, 결코 아니다. 네가 나보다 낫다고 해도 네 한 번이 내 백오십 번보다 나을 수 없다. 지금처럼 어렴풋하게 기억을 계승 받은 입장이라면 더욱!"

"알아. 빙의자. 지금 나는 150번째 회차의 나는 아니지. 기억도 완전하지 않고, 그 경험도 온전하게 이어받지 못했고."

"...."

"하지만 이건 알 것 같다."

네 방식은 틀렸다. 그렇게는 수백 번을 회귀하고 빙의해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손에서 놓지 않고, 탐욕스럽게, 망나니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번 회차가 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헛소리...!"

수백, 어쩌면 수천 년을 살아왔을 빙의자의 검격이 목을 노려온다. 베고, 찌르고, 부수고, 파고들고.

아득한 경지. 아득한 기교. 빙의자는 분명 뛰어난 검사일 것이다. 세계를 전부 뒤져 보아도 그보다 뛰어난 검사가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내게는 중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빙의자의 검은 세상을 가르지 못했고.

내 검은.

──!!!

세상을 갈랐으니까.

"너도 그만하면 열심히 했다. 이제 쉬어라."

"...."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손끝에 걸리는 감촉.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파고드는 듯한 감촉에 검을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다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여는 빙의자.

"묻겠다."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회차를 이끌어 갈 수 있겠나?"

"비합리적으로, 최대한 비효율적으로 할 수는 있지. 난 그런 게 특기거든."

"잘라내야 할 이를 주저 없이 잘라 낼 수 있겠나?"

"정신머리가 썩어 빠진 놈이라면 모르겠지만, 글쎄,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잘라 내려고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잘할 수 있겠나?"

"뭐, 너보단?"

"그런가."

조용히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본 빙의자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군."

"...."

"여기까지인 거군. 내 차례는."

빙의자의 심장에 내 검이 박혀 있었다.

6화 망나니의 방식 (1)

일공자가 달라졌다!

최근 지크 자작가를 떠도는 소문은 으레 그렇게 시작하고는 했다. 지크가의 망나니 일공자가 드디어 개심해서 개과천선할 조짐을 보인다고.

귀신 같은 재능을 가진 백작가의 영애에게 패배하고 수년. 그간 얼마나 방탕한 삶을 살아오며 지크 자작의 속을 썩였던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제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지크 자작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일수록 그런 기색을 보이곤 했지.

그러나.

세상 만사에는 예외가 있고, 그건 이런 기사(奇事)라고 해도 마찬가지인 법.

전 기사지망생. 현 경비대 조장 제임스는 그 망나니 일공자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평생을 일공자를 모시는 데 바쳤던 그에게 있어, 일공자가 행하는 작금의 행동은 퍽 작위적으로 보였으니까.

"...후우."

이른 아침.

훈련을 마치고 땀을 닦은 뒤 세안할 물을 대야에 받아 일공자의 문 앞에 선 제임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머릿속.

'이번엔 또 어떤 기행을 보이실지.'

그제는 그동안 저지른 포악에 대해 사과하고, 어제는 이렇게 시중을 들게 만든 자신의 부덕함에 대해 사과했다. 그동안의 일공자와는 전혀 다른 작태.

다른 이들이라면 좋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지식한 제임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임스가 아는 일공자는, 입이나 행동거지는 험한 척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였으니까.

'방탕하게 사셨어도, 자신의 아픔을 남에게 전가할 줄은 모르시는 분이다.'

재능의 한계에 부딪힌 이는 보통 세상 탓을 하기 마련.

그러나 일공자 레이는 마음의 껍질을 닫아 버리면서도 그것을 결코 남의 탓으로 돌리진 않았다. 온전히 자신의 탓으로 간주하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을 뿐이었지.

그 역경을 극복하고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려 드는 것이라면 제임스 역시 두 손 들어 환영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이 하지 않은 것까지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는 건 또 하나의 자기학대가 아닌가.

'제임스. 오늘은 공자님을 말리는 거다.'

오늘만큼은.

똑똑!

굳게 결심한 제임스가 굳게 마음을 먹고 방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들어와."

"...드, 들어가겠습니다?"

짙은 짜증과 피곤함이 섞인 목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고 들어간 제임스가 방금 잠에서 깬 듯 더러운 레이의 눈매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 며칠 이상했던 일공자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도, 돌아오셨군요...!"

망나니였던 그 모습으로.

* * *

"그럼,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왜 저래.

활기차게 대답하며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가는 제임스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리고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요 며칠간 빙의자가 어지간히 험하게 굴렸는지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몸뚱어리.

"아이고, 내 모가지야."

얼마나 많이 고개를 숙이고 다녔으면 목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냐.

마치 철 덩어리처럼 묵직하게 뭉친 목과 어깨 근육을 주무르면서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상태창."

『SATS

이름:레 지(19, )

갈래:없

근력:6(소질:상)

체력:5(질:상)

감:9(소질:최)

마력:0(질:중)

내구:1(:최상)

매력:5(소질:)

재능:

무재(상)

이 을 지닌 이는 ''의 역에 있는 모든 행위에 큰 보을 받습니.

새로 무학을 빠른 속도 익힙.

'사교(중)'

이 재 지닌 이는 타인에게 호의 보다 쉽게 얻니다.

역경 속에 피어나는 꽃(초월)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이 재능을 지닌 이는 을 겪고 견뎌낼 때마다 재능을 더욱 더 개화합니다.

특수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인이 존재하지 않습.』

역시 신나게 깨졌구만.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라도 있는 게 다행인 건가.

빙의자에게서 내게로 건너오며 반쯤 망가져 버린 상태창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예상했던 사태가 그대로 벌어졌으니까.

-상태창이 넘어갈 거다.

-뭐?

빙의자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직후.

빙의자는 그렇게 말했다. 상태창이 내게 넘어올 것이라고.

-상태창이라는 것은 세계의 의지다. 이 세상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세계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부탁받은, 말하자면 용사와 같다.

-용사님. 자기보고 스스로 용사라고 말하면 안 쪽팔리냐?

내 말을 씹은 빙의자는 계속 꿋꿋하게 제 할 말만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 시스템 속에서 네게 패배했다. 네 검격이 시스템을 베었다면, 그래서 내 정신체가 더 이상 보존되어 과거로 회귀할 수 없다면 시스템은 너를 주인으로 삼아 세상을 구하고자 하겠지.

-어, 그러니까, 중고 시스템을 나한테 떠넘기시겠다?

-가지고 있으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다. 시스템은 제약을 거는 일이 없으니까. 망가진 시스템이 얼마나 제대로 작동할지는 모르겠지만....

장서고는 무너졌다. 회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용할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이용해 봐라.

모든 걸 이용해서, 세계를 구해 봐라.

그렇게 말하고 빙의자는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는 내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세계를 구하란 말이지. 이 손으로."

거창하기 짝이 없는 목표.

확 와닿지 않는 목표에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받친 뒤 의자 등받이를 젖혔다. 빙의자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그럴 생각이긴 했으니까.

"구하긴 해야지."

여동생. 약혼자. 가족. 주군.

뭐, 그런 이들이 아니더라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인연을 맺은 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내가 오지랖이 넓은 성격인 만큼 맺은 관계도 많고, 죽지 않았으면 하는 인물들도 많으니. 그런 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 나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내가 강해지는 게 첫 번째."

이게 최우선 순위.

사실 강해지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알고 있다. 전부 넘어온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세상의 검'이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으니까. 수천 년을 살아온 빙의자마저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도달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 루트를 따라가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 이건 차치해 두고.

"나 혼자만으로는 안 돼. 다른 놈들도 강하게 단련해야지."

지금은 황립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있을 여동생이나 혹은 수도 마탑에서 수행하고 있을 약혼자. 또는 전생에 만났던 이런저런 놈들.

그놈들도 종말에 대비해서 그 재능을 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내가 강해져도 몸은 하나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종말의 군대를 홀몸으로 전부 막아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건 그거다. 나는 내가 강해지는 법은 알고 있어도 남이 강해지는 법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게 바로 이거다.

[n회차 빙의자의 기억]

[회차]

"이야, 이게 진짜 안 사라졌네."

내 눈에만 보이는 책을 팔랑팔랑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51회차 이후는 완전히 깨져 버려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전까지는 제대로 보존된 내용.

내용이 워낙 방대해 대충이라도 훑어보는 데만 몇 년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빙의자의 기억이다. 아마 이걸 정독하다 보면 다른 녀석들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 같은 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남은 건 유망주들을 만나는 것. 접점을 만드는 것 정도인데.

"사교계에 진출해야 한단 말이지...."

진짜 문제는 이쪽이다. 이 제국의 유망주 대부분은 저 위쪽 수도에 다 몰려 있다는 것.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책을 덮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애들은 일단 됐고."

몇 년쯤 지나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기엔 실력도, 명성도 모자라다. 입학하기엔 나이도 너무 많고.

황립 아카데미에 있는 인재들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일선으로 나올 테니, 그때를 기다려도 될 것이다. 아니면 아카데미 밖에서 후원자의 포지션을 취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수도로 가야겠지."

그게 문제란 말이야.

망나니 장남이 며칠 개심하는 척 연기를 하더니, 갑자기 수도로 보내 달라고 떼를 쓴다?

옳다구나 한 아버지가 나를 가문의 문적에서 파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어렴풋한 기억을 되짚어 보면 아버지는 나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지만, 그거랑 신뢰하는 거랑은 다른 이야기지 않은가.

아버지 머릿속에서 지금 나는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망나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실제로 여태까지 그랬고.

그러니만큼 어지간한 일로 수도행을 허락하진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저지르는 병신 짓은 영지 내에서만 돌겠지만, 수도까지 가서 병신 짓을 하고 다니면 가문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는 꼴이 될 테니까. 눈이 닿는 곳에 두고 싶어 하시겠지.

"수도로 가려면, 우선 아버지한테 신뢰를 얻어야 해."

이대로라면 수도행을 허락받는 일은 요원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몸을 차지했던 빙의자처럼 그냥 용서해 달라고 몇 날 며칠 고개를 박고 있을까?

아니.

"그건 나다운 행동이 아니지."

그동안 아무것도 못 하니 효율도 떨어지고, 용서받는 데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니 이건 기각.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차갑게 얼어붙은 아버지의 심장을 녹이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 할까?

"고민이 되는구만."

이대로 가면 검 실력이야 일취월장할 수 있겠지만, 글쎄... 그것만으로 잃어버린 아버지의 신뢰를 근시일 내에 되찾기는 힘들 테고.

어떡한다. 흠.

쿠당탕탕!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 공자님."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다가 내 말에 반응하는 제임스.

"아무래도 귀빈이 온다는 모양이라 그 준비로 분주한 듯합니다."

"귀빈? 누구, 귀족?"

"아뇨. 요즘 떠오르는 신흥 상단의 상단주인데, 아무래도 거대한 매장량의 은 광산을 발견했다고... 개발 비용을 투자받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거대한 매장량의 은 광산?"

...전생에 그런 게 있었던가?

"마침 저기 오고 있군요."

묘하게 흐릿한 기억에 인상을 찡그리자 제임스가 내 방에 들어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자작저의 정문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는 말쑥한 인상의 중년인.

"저 사람입니다."

"은 광산을 가진 사람이 저 사람이라고?"

"예. 듣기로 젊었을 적 자작님께 은혜를 입어 이번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잘된 일 아닙니까?"

"그런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뭐, 아버지 인망이 뛰어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그런 일이 있었나 보지.

제임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 덧붙는 제임스의 설명.

"이걸로 우리 자작가가 길리 상단과 연을 맺을 수 있다면 크게 도약할 거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참 좋은 일이지요."

"그래. 참 좋은 일...?"

잠깐.

"무슨 상단?"

"예? 길리 상단입니다만."

"...길리 상단?"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

"아."

기묘한 기시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리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제임스 몰래 작은 손짓으로 빙의자의 기억을 들췄다. 1회차의 기억 부분에 적혀 있는 작은 글귀.

『1회차.

오늘 제국이 뒤집혔다.』

"...저 새끼."

기억났다. 길리 상단의 상단주, 길리온.

"저 새끼 사기꾼이잖아."

7화 망나니의 방식 (2)

사기꾼 길리온.

영혼 상태로 둥둥 떠다닐 때 빙의자의 기억에서 읽은 적이 있다. 제국을 뒤집고 귀족의 삼분지 일을 털어먹었던 미친 사기꾼.

기억을 읽으면서도 기가 찼던 기억이 난다. 빙의자의 기억을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저 녀석이 사용한 사기 수법은 얼핏 보기엔 정말 간단한 수법이었으니까.

-은 광산을 발견했습니다!

놈이 사용한 수법이 그것이었다. 자신을 광산의 귀재라고 속이는 것이지.

-혹시 투자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첫 번째로 적당히 욕심이 많고, 인망이 괜찮은 귀족 하나를 찾아가 매장량이 괜찮은 광산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은인지, 구리인지, 철인지, 금인지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중요한 건 매장량이 나쁘지 않은 광산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귀족에게 광산을 개발할 돈을 지원해 주면 그만큼 광산의 채굴량에서 퍼센티지를 떼어 준다고 말하고 돈을 받아 챙긴다.

보통 일반적인 사기꾼이라면 여기서 돈을 먹고 날라서 잠적하든, 덜미를 붙잡히든 둘 중 하나를 택하곤 한다. 그러나 이 사기꾼 길리온 놈은 달랐다. 왜냐하면.

놈은 진짜로 돈을 받고서 투자한 귀족에게 캔 광물을 정산해 주었으니까.

'미친놈이 따로 없지.'

광산을 개발했더니 광물이 나왔다. 그렇다면 사기꾼은 아니지 않은가?

-내 투자도 받아 주시오!

-아니, 투자금은 이미 충분한데, 그건 좀....

-다른 광산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굉장히 솔깃한 수익률. 뛰어난 신뢰도. 주는 돈도 거절하는 소탈함.

이 과정을 본 귀족들은 앞다투어 길리온에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길리온에게 투자하는 귀족은 점점 늘어났지. 길리온이 그들에게 정산해 주는 광물이나 자금 역시 늘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길리온이 광산 산업의 선두까지 차지하면서 귀족들의 관심사를 끌어모았을 무렵.

불현듯 길리온은 잠적했고, 직후 놈의 사기 수법이 밝혀졌다.

그래.

이 미친 사기꾼 놈은 투자받은 돈으로 몰래 광물을 사서 정산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적당한 광산 하나를 사서 위장하고, 그 광산 하나를 수십 명도 넘는 귀족한테 팔아먹고.'

정산일이 돌아오면 의심받지 않게 뒤에 투자받은 돈을 빼서 앞에 투자한 이에게 넘겨주면 그만이다. 손해를 보려야 볼 수가 없는 구조.

그렇게 놈은 점차 덩치를 불리다가 잠적했다. 속은 귀족의 숫자만 최소 수백. 제국의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지. 빙의자는 이걸 '폰지사기'라고 칭하던데, 아마 빙의자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

어쨌든 중요한 건 하나다. 빙의자의 기억에 적혀 있던 희대의 사기꾼 놈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

그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자작가에 사기를 치려고 하고 있다는 것.

"하아."

"왜 그렇게 한숨을 쉬십니까? 땅이라도 꺼지겠습니다."

"제임스는 속이 편해서 좋겠다. 난 지금 복잡해 죽겠는데."

기분이 꾸리꾸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하자 흠칫한 제임스가 언제 챙겨 왔는지 품속에서 단 냄새가 풍기는 과자 따위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조심스럽게 부연 설명을 하는 제임스.

"제가 들었는데, 기분이 안 좋을 땐 단것을 먹으면 좋다고 그랬습니다. 이거라도 드시면서 기분을 푸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건 또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예? 내성 하녀인 캠벨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과자도 캠벨한테서 받았고? 혹시 요즘 안 좋은 일 있냐고 상냥하게 물으면서 주디?"

"아, 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에라이 화상아. 상식적으로 그걸 나한테 주냐? 너나 많이 먹어라. 에휴."

그걸 내가 홀라당 처먹어 버리면 아마 캠벨이 내게 품은 적의가 한 오십 배 정도로 증폭될 거다. 어떻게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캠벨의 이루어지지 못할 연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창틀에 몸을 늘어트렸다. 좀처럼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으니까.

'저거 분명 사기꾼인데.'

길리온은 사기꾼이다.

검증할 필요도 없이 그건 사실이다. 어제 슬쩍 알아본 바에 따르면 길리온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빙의자의 기억과 똑같았기 때문.

그나마 다행인 건 흐릿한 기억을 뒤져 봤을 때 가문이 돈 문제로 휘청거렸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지간히 신중한 사람이니 투자를 하지 않았거나, 혹은 투자를 해도 가문의 여윳돈만을 융통했겠지.

놈의 사기는 가문에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예전의 역사에서도 그랬다. 그렇다면 구태여 귀찮게 놈을 잡지 않고 이대로 놔두어도 문제는 없을...?

"잠깐만."

"예?"

"제임스. 내가 아버지한테 나를 수도로 보내 달라고 하면 어떤 답변이 올까?"

"그야... 방에 가둬 버리실 겁니다."

"그렇겠지? 아버지랑 가신들이랑 관료들이 한통속이 되어서 자작령 넘버원 망나니를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

"아니, 왜 말씀을 그렇게...."

"대답."

"...예."

"하지만 여기서 변수가 끼어든다면?"

"예?"

"가령 영지를 털어먹으려는 사기꾼을 잡는다거나, 혹은 협상 과정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그거 한 번으로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태껏 낭비한 세월이 몇 년이고 저지른 일이 몇 갠데, 염치가 있으면 그걸 바라서도 안 된다. 하지만.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전폭적인 신뢰가 아닌 계기다. 나를 믿을 수 있게 만드는 한 발자국.

"정했다."

"예? 뭘 말씀이십니까?"

"잠깐 나갔다 올게. 그리고 돈 좀 빌려줘. 갔다 와서 갚을 테니까."

"예? 아니, 무슨...."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제 돈주머니를 내미는 제임스의 손에서 돈을 빼앗아 들고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내가 돈 가지고 갈 곳은 한 곳뿐이지."

"...설마."

자작령 외곽. 빛이 닿지 않는 허름한 술집에 모이는 자들이 있다. 전생의 흐릿한 기억으로도, 현생의 선명한 기억으로도 안면이 있는 자들.

"술집 다녀온다."

내가 진심이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 주마.

* * *

세상에 돈 싫어하는 용병이 어디에 있을까 싶지만, 카야는 개중에서도 특출나게 돈을 좋아했다.

사치를 위해 돈을 모으는 다른 용병과는 다르게 카야는 구태여 사치와 향락 따위를 즐기진 않는다. 돈이 줄어드니까. 반반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연애도 하지 않는다. 코가 꿰이기라도 하면 돈 나갈 일이 많으니까. 남이 주는 선물은 받지만 그뿐.

남몰래 후원하고 있는 고아원이 있다거나, 혹은 돈을 모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거나, 그런 숭고한 이유는 아니다.

카야는 그저 쌓이는 금화가 좋았고, 돈 소리만 들어도 행복했다. 암살, 호위, 약탈, 납치, 소탕 등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렇게 카야가 돈을 버는 소일거리 중에서 특히나 짭짤한 것이 이런 것이었다.

"이야, 우리 도련님. 샌님인 줄 알았는데, 잘 치시네? 허세에 진짜 당할 뻔했지 뭐야."

가령, 술집에 죽치고 도박하러 나온 부잣집 도련님들을 도박으로 털어 내는 것.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도련님들을 꾀어내 테이블에 앉히는 것.

"너, 너 여기에 그대로 있어라. 다시 돈을 가져올 테니 꼼짝 말고 기다려!"

"나야 항상 여기 있지. 그래도 가지고 올 수 있을까 모르겠네? 도련님 잃은 돈도 많잖아. 상단주님한테 혼나는 거 아냐?"

"아버지가 뭐 어쨌다고! 내가 아버지 눈치를 보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냐!"

"아,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나야 도련님이 걱정돼서 그렇지."

별 의도는 없었다는 듯 두 손을 흔들어 보이는 카야의 모습을 보고 씩씩거리며 나가는 중견 상단의 못난 망나니 후계자를 확인한 술집 주인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매를 슬그머니 좁혔다. 그러자 그 눈빛을 받고 흠칫 몸을 떠는 카야.

"뭔데? 마스터. 나 그렇게 봐도 뭐 안 나오는데...?"

"적당히 털어먹어라. 카야. 주점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어, 음. 오늘은 많이 안 털어먹었어."

"일부러 자잘자잘하게 털어먹고 있지 않느냐. 다시 올 수 있게. 그동안 네가 저 샌님한테 털어먹은 돈을 합치면 어지간한 상가 하나를 매입할 수 있을 거다. 들키기 전에 적당히 해."

"에이... 뭐 얼마나 털었다고...."

늙수그레한 술집 주인의 목소리에 회피하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 카야가 피식 웃었다. 그 말대로 꽤 많이 털어먹었다는 자각이 있긴 했으니까.

돈을 버는 데 있어 리스크 관리는 중요하다. 카야같이 도박으로 남을 구슬려 돈을 벌 때는 특히나 더 그렇다.

성질 더러운 귀족을 도박으로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으면 다음 날 거처에 기사들이 들이닥친다. 심성이 남을 위협할 수 없는 이라고 해도 영혼까지 털어내면서 도박에 빠트리면 평판이 내려가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렇기에 다른 도박사는 몰라도 카야는 어지간해서는 정도를 지켰다. 당장 용병으로 버는 돈이 도박사로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은데, 잠깐 용돈 좀 벌어 보겠다고 도박으로 다 털어먹었다가 용병으로서의 제 평판마저 깎아 먹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적당히 조절하지 뭐. 마스터. 그보다 요즘 의뢰는 안 들어와?"

"똑같다. 암살, 납치, 위협, 이런 것들밖에 없어."

"단가는?"

"페이가 꽤 괜찮긴 하지만, 네 기준엔 안 맞아. 너는 그런 종류는 어지간히 비싸게 받지 않냐. 약초 채집 의뢰라도 할 테냐?"

"아니, 됐어. 그런 거 해 봤자 푼돈도 안 벌리지. 여기서 도련님들이나 털어먹는 게 훨씬 나아."

킬킬거린 카야가 탁자에 턱을 괴며 방금 나간 샌님을 떠올렸다. 자기는 안 들켰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음흉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샌님을.

'슬슬 자리를 바꿀 때가 됐나.'

반반한 얼굴은 용병에게 있어 이득이 될 수도 있지만, 흠이 될 수도 있다. 특히나 카야같이 뭐든지 하는 용병에게는 더 그렇지.

제 첩으로 들어오라는 귀족은 어딜 가나 한 무더기씩 쏟아져 나오고, 얼마를 줄 테니 한 번 대 달라는 놈들도 썩어 넘친다. 심지어는 기사도를 배웠다는 기사라는 작자들마저도 추파를 던지는 경우가 부지기수.

그나마 아까의 샌님 같은 경우엔 낫다. 적어도 티를 낼지언정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으니까. 오히려 그걸 이용해서 돈을 벌어먹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질척거리는 놈들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떨어진다고 해도 앙금을 남기고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얌전한 저 샌님도 눈이 돌아가면 언제 그렇게 변할지 모를 터.

"마스터, 여기 계산."

슬슬 본거지를 바꿀 때가 됐다. 그렇게 판단한 카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열리는 문.

"아직 계산하지 말고 좀 더 있지? 카야. 모처럼 왔는데."

"...뭐야?"

나직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카야가 안면에 화색을 띠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에서 들어온 이의 안면이 낯익었으니까.

"내 술친구! 망나니 레이 도련님 오셨잖아? 오늘도 마시러 오셨어? 안 그래도 좋은 술이 들어왔거든. 독한 놈으로다가."

"술 좋지. 하지만 지금은 술 마시러 온 건 아니야."

"그럼 뭔데? 내 얼굴 구경하러 오셨나?"

"설마."

씩 웃은 레이가 탁자에 앉는 것을 보면서 카야가 피식 웃었다. 제 얼굴에 눈이라도 한 번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편하단 말이지.'

레이 지크. 지크 자작가의 망나니.

세간 사람들은 그를 망나니라곤 하지만, 카야는 그 의견에 완전히 찬동할 수는 없었다. 카야가 겪어 본 바로 레이는 다른 망나니들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으니까.

일단, 제 반반한 얼굴을 보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애써 감추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관심이 없다. 여기서 벌써 가산점. 그뿐인가?

같이 마시면 술을 사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추태를 보이진 않는다. 흔히들 망나니들은 세상에 대해 한탄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레이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세상 이야기나 들으면서 술을 홀짝이는, 말 그대로 대작하기 좋은 상대라고 해야 할까.

"술 마시러 온 게 아니면 뭐야. 나한테 호구 잡혀 주려고 오셨나?"

"호구 잡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그건 이상한 말이지. 내가 호구 잡으려고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도련님은 나한테 호구 잡히는 게 아니라 잡혀 주는 거잖아? 가지고 온 돈 다 잃을 때까지 일어나지도 않으면서."

특히나 레이가 특이한 점이 그거다. 별 욕심이 없다는 것.

도박에 빠진 이들은 보통 따기 위해 도박을 한다. 애당초 도박이란 것이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레이는 가끔 도박을 할 때마다 적은 돈만을 가져와 다 잃을 때까지 적당히 도박을 즐기다가 끝낸다. 따도 별로 기뻐하지 않고, 크게 따더라도 다 잃을 때까지 다시 배팅한다. 그리고 전부 잃고 끝.

카야도 한두 번은 적당히 맞춰 주면서 털어먹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술 따위를 써 가면서 상대를 속이지 않아도 어차피 전부 잃을 때까지 패를 돌리기 때문이다. 다 따더라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고, 행패도 부리지 않는 대상.

술친구로 이만한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 왜 온 건데?"

"겜블. 오백만 벨."

"오백? 오늘은 크게 쏘네. 항상 오십 단위로 자잘자잘하게 하더니. 이야기 길게 하고 싶은가 봐?"

"아니, 말 그대로 오늘은 겜블이다. 너 털어먹을 때까지 할 거야."

"네. 네. 그러시겠죠."

촤르륵!

피식 웃으면서 탁자에 패를 흩뿌린 카야가 빠르게 패를 섞고서 돌렸다. 어차피 저렇게 말하더라도 분명 잃을 때까지 패를 돌릴 터.

그렇다면 적당히 말 상대를 해 주면서 털어먹으면 된다. 오백만 벨이나 들고 온 것을 보니, 꽤 오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니까.

'요즘 소문이 안 좋았지. 적당히 따고 돌려보내야겠어.'

백만 벨.

나름 큰돈이지만, 귀족에게 있어서는 푼돈이나 마찬가지다. 어쨌든 레이는 나름 괜찮은 술친구가 아닌가.

적당히 손속에 사정을 둬서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따자.

그렇게 생각한 카야가 패를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소리.

"올인."

"...?"

"올인이라고."

촤르륵!

탁자 위에 쏟아지는 은화들을 바라본 카야가 멍한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왜, 쫄려?"

레이가 웃고 있었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카야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득한 미소를 머금고서.

8화 망나니의 방식 (3)

-에라이, 시팔. 재수 옴 붙었네. 돈에 눈이 멀어가지고 이런 의뢰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도련님만 살려 놓고 나는 꼼짝없이 뒈지게 생겼구만.

-뭐? 왜 도망 안 가냐고? 죽는 게 무섭지 않냐고? 시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신이 의뢰주면 받은 돈 다 토해내고 도망가겠지.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은 알거든?

-그런데 당신 살려서 후방 요새로 운반해 달라고 의뢰한 의뢰주가 당신 약혼녀잖아. 일주일 전에 전방 요새랑 함께 폭사한 당신 약혼녀!

-이대로 있으면 내가 뒈지는 거 누가 몰라? 용병이 의뢰를 포기하려면 위약금을 줘야지. 그런데 위약금을 돌려줄 의뢰주가 뒈졌잖아?

-시발, 한두 푼 받은 것도 아니고. 돈을 받았으면 받은 만큼은 일해야지. 의뢰주가 뒈졌든, 내가 의뢰를 받은 걸 아무도 모르든, 심지어 이렇게 세상이 망해 가고 있는 지금도 말이야!

-나한테 금값은 하늘이거든.

* * *

나는 도박을 썩 즐기지 않는다.

현생의 나는 그렇지만, 전생의 나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문이 무너지고 실의에 빠져 술에 절어 있는 동안 전생의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향락에 빠져들었었으니까.

고통을 잊기 위해서 몇 병이고 토할 때까지 술을 위장에 들이부었고, 약에 전 상태로 여자를 안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도박에 손을 대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왈패들의 패싸움에 끼어들어서 왈패들을 팔 병신 다리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지.

물론, 그때의 기억은 흐릿하고 모호하다. 당시의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데다가 중요한 기억도 아니었기에 정말 편린 정도만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달까.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 이런 시골의, 그것도 전문 도박사도 아닌 용병을 털어먹는 것쯤은 쉬운 일이지. 왜냐면.

나는 이런 종류의 '승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촤르륵!

'기사, 여왕.'

손에 들어온 패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겜블에서는 꽤 높은, 말하자면 질 확률이 적은 패.

그 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수작질이 눈에 뻔히 보였으니까.

"죽는다."

"...자, 잠깐, 정말 죽는다고? 도련님. 나 낮은데?"

"안 속아. 죽어."

"시팔...."

욕지거리를 내뱉은 카야가 내던지는 패를 보고 씩 웃었다. 아직 단련되지 않은 내 눈은 카야의 손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야의 수작을 간파할 수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

'슬슬 수작질을 부리나.'

탁자 위에 쌓여 크게 불어난 원금을 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삼천만 벨. 빙의자의 화폐로 치환하자면 대충 삼천만 원 정도 되는 돈.

이 정도면 귀족인 나와 상당히 잘 버는 축에 속하는 용병인 카야에게 있어 그렇게까지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들고 온 원금이 겨우 오백만 벨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여섯 배나 불어난 셈이지.

도박으로 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은 그야말로 순조롭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슬슬 긴장해야겠어.'

카야는 어지간하면 나와 겜블을 할 때는 수작질을 부리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그건 내가 겜블에서 이기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껏 잃기 위한 겜블을 했고, 카야도 그걸 알고 있었지.

그렇기 때문에 카야는 겜블 자체를 대화 시간의 일종으로 여기고, 내가 전부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하는 장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다르다. 나는 카야를 이겨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게는 아직 카야를 살 돈이 없으니까.

'황금광, 돈에 미친 카야.'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용병. 그러나 결코 돈을 배반하지는 않는 용병.

그것이 카야다. 비싸고, 성깔 더럽고, 손버릇도 나쁘지만 돈을 지불하고 맡긴 의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하지 않는다.

목숨이 위험할 것 같으면 의뢰 중간에 위약금을 내고 그만두는 경우는 물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카야는 결코 '신뢰'를 저버리고 의뢰주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자기가 버는 돈에 대한 존중이라고 여기기에.

세계가 끝나기 직전까지 살아남을 정도로 유능하면서, 그럼에도 절대 배신하지 않는 인재.

적어도 수십, 수백억, 많게는 수천억 단위의 금액이 오가는 이번 일을 맡기기에 이만한 인재는 없다. 그리고 그런 카야를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려면 적어도 억 단위의 의뢰금이 필요하다.

나는 그 의뢰금을 다른 누구도 아닌 카야에게서 벌어들일 생각이고.

"카야. 슬슬 제대로 해 보지?"

"...이 도련님은 또 무슨 소리래."

돈을 잃어서 기분이 잔뜩 나빠진 카야가 나를 노려보는 것을 보고 씩 웃으면서 대놓고 카드에서 밑 장을 뺐다.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야.

"수작질이든 뭐든 다 해 보라고. 밑 장을 빼도 되고, 카드를 바꿔 쳐도 돼. 들키지만 않으면 용인해 줄 테니까."

"...뭐라고?"

"어차피 내 용인이 없어도 슬슬 수작질하겠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해 보라고. 무슨 소린지 몰라?"

"하. 이 도련님 좀 봐?"

내 당당한 선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 카야가 코웃음을 치더니 손부채로 제 목덜미에 맺힌 땀을 식혔다.

"도련님. 내가 어떤 여자인지 몰라? 나 카야야. 여기 와서 한 번도 털려 본 적 없는 도박사 카야."

"용병으론 일류지만, 도박사로는 촌구석 삼류지. 수도에 가면 탈탈 털릴걸."

"...용병으로서의 수완을 인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겜블도 그렇게 못하진 않거든? 같은 용병끼리 해도 내가 거의 다 이기는...!"

"그건 네 성격이 더러워서 돈 잃으면 날뛰니까 져 주는 거고."

용병 카야를 알고 있고 생각이라는 걸 하는 도박사라면 카야에게서 돈을 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잘 때도 누가 훔쳐 갈 새라 전낭을 제 가슴팍에 넣어 놓고 자는 수전노에게서 수작질로 돈을 따면 어떻게 될지 누가 모르겠는가. 그건 바보 천치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한테 잃은 삼천만 벨. 안 아깝나? 이거면 그래도 어지간한 용병 반년 생활비 정도는 될 텐데. 다시 따가야지?"

"...저거 가지고 반년 생활비라고? 그 말은 간과할 수 없겠는데."

"아, 카야는 잘 버니까 이거 가지고 반년 못 버티나. 그럼 삼 개월...."

"난 그걸로 오 년은 버틸 수 있어! 돈만 보면 풀만 씹어도 행복하니까!"

"...."

야, 노예도 그렇게 빈궁하게는 안 살겠다.

"그래서 안 할 거야? 이거 내가 다 따가도 되나? 따고 튀어 버릴까?"

"...."

촤르륵!

내 말에 씩씩거리면서 분노를 삭인 카야가 다시금 품에서 금화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좋다 이거야.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

"제대로 하라고 한 건 도련님이야. 알겠어? 나중에 울며불며 매달리지나 말라고."

울며불며 매달린다라.

으르렁거리며 패를 섞는 카야를 보고서 피식 웃었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으니까.

"카야, 내가 아까 말한 거 기억하나?"

"...뭘 말하는 건데?"

"너는 수도의 도박사들한테 걸리면 탈탈 털린다는 말."

그건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다. 세상의 중심. 제국 수도의 도박사들은 그 어떤 곳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체험이나 해 봐. 수도 도박사들이 어떤 수준인지."

비록 기억은 흐릿하더라도 나는 알고 있다. 정신을 놓고 폐인처럼 지냈을 때조차 나는 수도 도박사들에게 털려 본 적이 없다는 것.

"이게 진짜 도박사야."

촌놈은 눈뜨고 코 베인다는 게 뭔 이야긴지 보여 주지.

* * *

"오픈."

결과부터 말하자면, 카야는 열일곱 번을 내리 졌다.

"오억이나 벌어 버렸네."

"...어떻게."

짤랑짤랑!

망연자실하게 앉아 몸을 부들부들 떨던 카야가 눈을 부릅뜨고 금화 주머니를 흔드는 레이를 보았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뭐가?"

"내가 황제를 뽑았잖아...! 분명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황제'. 모든 패 중 가장 강한 패.

손기술로 그 패를 들여오면서 카야는 승리를 확신했다. 왜냐하면 한 게임에 황제는 둘 있을 수 없었으니까.

황제를 이길 수 있는 패는 단 하나. 황제를 저격할 수 있는 '노예'를 완성시키는 것뿐.

그러나 노예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패는 자신이 이미 빼돌렸다. 그렇다면 황제를 이길 수 있는 패는 존재하지 않아야 정상이었지.

...레이의 손에서 자신의 손에 있어야 할 카드가 나오기 전까지는 카야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이 이겼다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카드 뭉치에 손을 대었는가?

그건 아니다. 레이는 카드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나를 사용했는가?

그렇지도 않다.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레이는 그저 카야가 카드를 섞는 것을 보고, 빼돌리는 것을 그저 구경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손에 있던 패가 저쪽에 넘어가 있었다. 말 그대로 귀신의 소행이라고 해도 될 수준.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어?"

"...아, 알고 싶어."

"안 알랴줌."

"이익."

"푸흡."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는 카야를 보고 박장대소를 터트린 레이가 금화 주머니를 살랑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상황을 파악하고 빛의 속도로 바닥에 엎드리는 카야.

"도련님. 한 번만 봐줘!"

"뭘?"

"도련님이 그 정도 도박사인 줄 몰랐다고... 응? 우리 술친구잖아. 그거 내가 피땀 흘려가면서 모은 돈이야! 어떻게 제발 한 번만...! 나 그 돈 없으면 죽어!"

"피땀 흘려가면서 남의 돈을 털었겠지. 여기서 도박으로 턴 돈이 대충 이 정도 되지 않나?"

"...."

"그동안 의뢰금 모아서 은행 예금 구좌에 오십억 벨 정도 예치해 둔 것도 다 알고. 이 정도 지출이면 뼈아프기야 하겠지만, 죽지는 않잖아?"

"아니, 나는 진짜 죽어...."

생살을 뜯겨 나가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린 카야가 머리를 주점 바닥에 받으며 자비를 구걸했다. 동시에 불현듯 드는 생각.

'시발....'

하지 말걸. 그냥 삼천만 벨 잃었을 때 탁 털고 나올걸.

"제발 돌려주세요. 위대하신 도련님!"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카야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 레이.

"왜 갑자기 돈을 따려고 했는지는 안 물어보나?"

"...응?"

"잃으려고 치던 놈이 갑자기 돌변해서 다 따 버렸잖아. 보통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그야... 뭐, 도련님도 돈이 벌고 싶어졌나 싶었는데."

"왜?"

"돈은 갖고 있기만 해도 좋은 거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세상의 진리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카야를 보면서 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카야처럼 돈에 환장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아쉽게 됐어."

"...그럼, 왜 따려고 했는데? 아니, 돈에 환장하지 않으면 돌려줄 수 있잖아."

"그야, 널 사는 데 필요했거든."

"...뭐?"

"이 돈으로 널 사겠다고."

"...나를?"

'아?'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카야가 주점 한구석에 놓인 더러운 거울을 슬쩍 바라보았다. 눈물 콧물에 범벅이 되어 볼품없어 보이지만, 어쨌든 외모 하나는 봐 줄 만한 자신의 모습을.

"아하, 그런 거구나?"

"?"

그래. 이 여자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망나니도 결국 남자 아닌가. 그것도 성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야말로 혈기왕성한 남자.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신한 카야가 엎드려 있던 몸을 꼿꼿하게 펴고 의자에 앉아 매혹적으로 다리를 꼬았다. 곧이어 거만하게 치켜세워지는 목.

"그런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도련님. 오억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해. 단가가~ 안 맞는데~?"

"오억이 모자라다고?"

"그럼."

잠시 안 보이게 눈물과 콧물을 닦고서 헛기침을 한 카야가 짐짓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레이를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그렇긴 한데 말이야? 나는 아직 남자랑 사귀어 본 적이 없거든? 단순히 몸만 그런 게 아니라, 아예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야."

"...?"

"뭐, 돈이면 다 된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전도유망한 용병 카야의 첫 연인 자리를 가져가는 거잖아. 오억 가지고는 턱도 없지. 한 삼백억 벨 정도는 있어야 생각해 볼 만한데~"

"그건 또 뭔."

"아, 물론 그건 모르는 사람 가격이고, 도련님 정도면 뭐, 얼굴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괜찮고, 나름 호감형이고? 한 사십억 정도로 깎아 줘도 괜찮긴 해? 나도 첫 기억은 좋게 가져가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입술을 우- 내밀면서 자칭 매혹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는 카야의 모습에 레이가 이마를 짚었다. 이어지는 답변.

"네 연인 자리를 사십억 벨에 팔겠다고? 나한테?"

"아, 누구나 그런 가격이라고 생각하진 마? 내 오랜 술친구 도련님이니까 특별히 그런 거야. 최저가야. 최저가. 내 마음에 안 들면 삼백억 벨이라도 안 팔아."

"내가 왜 그걸 사야 하는데?"

"...? 날 산다며."

"용병 카야를 산다고 했지."

"어?"

"의뢰할 게 있다고. 이건 의뢰금이고."

"어? 어...? 나를 노리는 게 아니라?"

싸늘한 눈빛.

마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세상무엇보다도서늘하고냉정한눈빛으로자신을바라보는 레이의 모습에 카야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오, 오해 좀 할 수도 있지...왜 그렇게 봐...."

"됐고."

짤랑!

딱 잘라 카야의 망상을 도려낸 레이가 돈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쏟았다. 우르르 무너지는 금화들.

촤르륵!

"이게 선수금. 의뢰를 제대로 완수했을 시엔 받고 십억 벨. 어때?"

"자, 잠깐."

탁자 위에 쏟아진 금화를 번쩍 뜬 눈으로 바라본 카야가 눈을 깜빡였다. 레이가 자신한테 딴 돈 전부를 탁자 위에 뿌렸으니까.

"의뢰 한 번에 십오억을 주겠다고? 정말로?"

"부족한가?"

"아, 아니,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 도대체 뭘 시키려고...."

"네게 어려운 일은 아닐걸. 사기꾼 하나 잡으려고 하는 거니까."

"사기꾼?"

"길리 상단이라고 아나?"

길리 상단.

"광산의 귀재?"

잠시 고개를 까딱이며 기억을 떠올린 카야가 기억의 한 구석에서 묵혀 둔 이름을 꺼내 두었다. 최근 들어서 확 떠오르고 있는 신흥 상단의 이름 아니었던가.

"길리 상단은 사기꾼이다. 있지도 않은 광산을 팔아먹고 있지."

"아니, 잠깐만, 하지만 그거 실제로 광물을 정산받은 사람들이 있잖아? 실물이 없으면 그게 가능하진...."

"받은 돈으로 광물을 사서 주고 있는 거야. 먼저 투자한 사람의 돈이 다 떨어지면 뒤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정산해 주고 있는 거고."

"...."

"나는 놈이 어디서 광물을 거래하는지, 그리고 어느 곳을 위장광산으로 삼았는지도 전부 알고 있어. 카야, 네게 맡길 의뢰는 영상 기록구를 가지고 가서 그 광산의 실태를 찍어 오는 거고. 어때. 어렵지 않은 일이지?"

"...."

경계가 삼엄하긴 할 것이다. 들키면 분명 죽겠지. 그러나.

용병 중에서도 머리 쓰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한 것이 카야다. 뒷배 없는 사기꾼이 고용한 용병의 수준은 카야에 비하면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할 터.

"할 수는 있는데...."

으음.

잠시 생각한 카야가 탁자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도련님 말은 이거지? 길리 상단의 부정을 영상 기록구에 담아서 가져오라는 거."

"그래."

"도련님 생각대로는 안 될걸? 도련님은 사례금 같은 걸 모아서 나한테 의뢰금으로 지불할 생각인 모양인데...."

나름 그럴듯한 생각이긴 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너무 무른 생각 아닌가.

"어쨌든, 그 자식이 사기꾼이라면 이미 돈은 꽤 쓴 거잖아. 그 사실을 까발리면 투자할 예정이었던 사람들은 도련님한테 환호할지 몰라도, 이미 투자한 사람들은 도련님을 손가락질할걸. 왜 하필이면 내가 투자했을 때 까발렸냐고, 정산받기도 전에 까발렸냐고 말이야."

"...."

"도련님은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그냥 선한 일을 하면 다 도련님한테 호의를 가지는 줄 아나 본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

표면적으로 어쨌든 사기 피해를 축소시킨 레이에게 피해 보상금을 요구하진 않겠지. 귀족가들도 체면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그러나 사례금을 받을 리도 없다. 지크 자작가에서 나서서 의뢰금을 대신 내줄 리도 없는 이상 잔금을 받는 건 요원한 일.

"그 말대로라면 도련님은 나한테 잔금을 못 줄 것 같거든?"

"...."

"뭐, 오억 정도면 위험도에 비해 페이가 나쁜 것도 아니니까 받아 줄 만한데, 지금이라도 의뢰금을 낮추는 게 어때?"

그래도 제 한 몸 바쳐서 착한 일 좀 해 보겠다는 게 갸륵하지 않은가. 이 정도면 참작해 줄 만하다. 그런 의뢰를 해결하면 자신의 평판도 올라갈 테고.

선심 쓰듯 의뢰금을 대폭 낮춘 카야가 대답을 기다리며 생글생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누가 까발린대?"

"...뭐라고?"

"뭐 하러 까발려? 돈을 그렇게 많이 투자받았는데, 까발리면 손해만 보잖아."

"...서, 설마?"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는 레이의 모습에 경악한 카야가 눈을 크게 떴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설마 그 사기꾼 놈을 협박해서 돈을 다 빼앗으려고...!"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응? 그것도 아니야?"

"그 정도 자금이 흘러가면 어차피 반드시 잡혀. 만약 자금을 잘 세탁하더라도 나중에 사기가 들통날 때 우리 이름이 나오겠지."

사기꾼인 게 들통나면 그냥 잠적해 버리면 되는 길리온과는 다르게 레이는 잃을 것이 많다. 레이가 몸을 숨기더라도 당장 사기의 피해액을 지크가가 다 보상해 주어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지크가는 반드시 파산하고 말 터.

"그럼, 대체 뭘 하려고...."

약점을 잡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까발리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뭘 한단 말인가.

"간단한 얘기지."

도무지 예상조차 가지 않는 의도에 카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이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점차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놈이 사기 친 돈을 우리가 못 쓰는 이유가 뭐지?"

"그야 사기인 게 들통나면 큰일 나니까...."

"그럼, 그게 만약 사기가 아니게 만든다면?"

"...응?"

"카야. 돈 좋아하지?"

익살스러운 미소.

"나랑 일 하나만 하자. 돈은 원 없이 벌게 해 줄 테니까."

여태껏 본 적 없는 진득한 미소를 만면에 띄운 레이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언.

"역사에 남을 정도의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 보자고."

9화 망나니의 방식 (4)

저택으로 돌아오고 난 뒤.

"다행입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내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다가와서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소리치는 제임스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두 주먹을 꽉 쥐는 제임스.

"술 냄새가 안 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도련님이 또 술을 마시러 가신 줄 알았습니다!"

"술? 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임스를 보면서 목덜미를 긁적였다. 내가 주점에 간다고 말했으니, 혹시라도 다시 술에 손을 대려던 게 아닌가 걱정했던 모양.

"술 마시고 싸웠다는 이유로 자작님께 쫓겨난 게 바로 일주일 전 이야기 아닙니까. 만약 이번에도 술을 마시고 돌아오셨다면...."

"아버지 성격상 내 방엔 발도 못 붙였겠지. 알고 있어. 술은 안 마셨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건 뭐, 예... 그런데 주점은 왜 다녀오신 겁니까?"

"아, 잠깐 도박 좀 하려고."

"아, 도박 말입니까? 도박 좋지요... 예? 그럼 제 돈은."

"홀라당 다 잃었는데?"

"예에에?"

말과 함께 주머니를 건네주자 황급히 주머니를 받아든 제임스가 안쪽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나라를 잃은 기사나 지을 법한 표정.

"내 두 달 치 월급이...!"

"어차피 나한테 줄 돈이라면서, 그게 아깝냐?"

"그건 맞습니다만... 그래도 좀 더 유용한 곳에 써 주셨으면 했습니다...."

"어. 사실 구라야. 하나도 안 잃었어."

"예?"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임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다른 곳에 담아 두었던 금화 주머니를 다시금 제임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할 말을 잃고 어버버거리는 제임스.

"나 들어간다."

"예? 아니, 어, 추, 충!"

"충성은 나 말고 우리 아버지께 하시고. 뺑이쳐라."

격려의 의미로 제임스의 어깨를 두드리고 저택 안쪽의 내 방으로 들어와 긴장으로 뻐근해진 목을 돌렸다. 상황이 꽤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이 의뢰, 받아들이긴 무리야.

내 제안을 듣고 난 뒤.

황금광 카야는 그렇게 말했다. 이 의뢰를 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돈이 부족하다거나, 아니면 위험하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야. 시간이 모자라. 도련님도 알잖아?

-알지.

-만약 그 폐광산이 진짜로 도련님이 말해 준 곳에 있다면 왕복으로 한 달은 걸려. 물론 밤낮 안 가리고 이동하면서 지름길로 이동한다면 어떻게 삼 주 정도까진 줄여 볼 수 있겠지.

삼 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보통 중요한 협상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까지 걸릴 때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사실 적당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놈이 사기꾼이라면 그렇게까지 기다릴 리가 없잖아?

-....

-도련님의 말이 맞다면 그놈이 치는 사기의 핵심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야. 한 귀족한테 오랜 시간을 쓰진 않을 거야. 삼 주나 걸리면 시간이 한참 모자라.

문제는 그것이었다. 카야가 전속력으로 갔다 온다고 해도 늦는다는 것.

-뭐야. 그럼 간단하네. 경로를 이렇게 짜.

-어? 아니, 내 말 못 들은 거야? 최단거리 지름길로 가도 삼 주는....

-아니? 단언하겠다. 카야. 네 길은 쓰레기야! 내가 너를 일주일 만에 폐광산에 갔다 올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아니, 일주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 어? 어어?

'빙의자의 기억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단축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주일.

빙의자의 기억을 뒤져서 극한까지 길을 좁혀도 길리온이 숨겨 놓은 폐광산까지 길을 왕복하는 것에 그 정도 시간은 걸릴 것이다.

만약 카야가 길을 헤매거나 혹은 중간에 휴식을 취하게 된다면 더욱더 시간이 늘어나게 될 터.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길리온이 우리 저택에 머무른 지도 벌써 이틀 차.

아직 길리온이 본론을 꺼내진 않은 모양이지만, 사기꾼인 놈은 분명 오늘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투자 얘기를 꺼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사에 단호한 아버지는 투자 요청을 거절하고 끝날 것이고.

'어떻게 한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오던 얘기를 유야무야시키고 시간을 버는 것?

'간단하잖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이들에게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망나니. 무엇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

그렇다면 그 입장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 해 보자고."

일주일 버티기.

다소 편법을 쓴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범생이들에게는 어려운 임무겠지만.

"제임스!"

"예! 공자님. 부르셨습니까!"

"어."

나는 영지에 소문난 망나니고.

"나와 함께 캠벨을 좀 만나러 가야겠다."

"...예?"

망나니에겐 망나니의 방식이 있는 법이니까.

* * *

귀족가의 내정에 가장 밝은 이는 누구인가?

귀족가의 생리에 대해 모르는 이는 곧바로 해당 가문의 가주를 꼽겠지만, 귀족가의 생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대부분 시종장이나 총관을 꼽는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모름지기 가주의 역할은 가문이 나아갈 방향성을 정하고, 대사를 결정하는 것이니까. 큰 가문의 가주가 작은 일에 하나하나 관여하고 있자면 끝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대부분의 귀족가는 시종장이나 총관이 가문 내부의 대소사를 정리하고 가주에게 결재를 올린다. 귀족 가문의 내부 정보를 가장 세세하게 알 수 있는 이가 시종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지크 자작가의 노년 시종장인 칼튼은 그 누구보다 유능한 시종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가문 내에서 그의 눈과 손을 피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로써 오늘 업무 배분을 마치겠네. 모두 자신이 지크가의 시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예!"

아침. 시종 관리실.

"시종장님."

"무슨 일인가."

시종들의 일감을 배분하고 관리 감독을 위해 자리를 뜨려던 백발의 시종장 칼튼에게 말을 건 시종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제 레이 공자님이 또 주점에 다녀오셨던 모양입니다."

"공자님이?"

"예. 술은 마시지 않으신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도박을 하던 것을 목격하던 이가 있다고."

"...음. 일단 알았네."

시종의 보고에 침음을 흘린 칼튼이 알았다는 듯 손을 내저어 보이자 시종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제 일을 하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상념에 잠기는 칼튼.

'레이 공자님.'

지크가의 일공자이자 옛 지크가의 자랑. 그리고 현 지크가의 둘도 없는 망나니.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이십니까.'

잠시 레이에 대해 생각하던 칼튼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최근 들어 잠시 기행을 하는가 싶더니 다시금 망나니의 행동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칼튼. 미안해.

-아버지. 죄송합니다.

일주일 전.

술을 먹고 돌아온 탓에 자작저에서 쫓겨났던 레이는 돌아와 가솔들에게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태도로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망나니였던 자신의 행동에 크게 반성했노라고. 이제 건실하게 살아 보려 한다고.

물론, 그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 레이가 망나니로 지내 온 세월이 몇 년이며, 저지른 기행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이번 역시 그런 기행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 태도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은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수년 전의 지크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있어 일공자 레이는 자랑스러운 지크가의 후계자였으니까.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칼튼 역시 그런 마음을 품었다. 어릴 적에는 과하게 쾌활한 면이 있더라도 망나니가 되리라곤 상상치도 못할 정도로 올바르던 레이가 아니었던가.

비록 여태까지 방황했지만 이번만은, 이번만큼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방금 그 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하나 도박에 손을 대었다. 행패를 부렸다는 이야기는 없어도... 시간문제겠지.'

레이의 행동은 모두 가주 선까지 보고가 올라가게 되어 있다. 지크가의 후계자인 레이가 무언가를 저지른다면 그 하나하나가 가문의 위신과 직결되기 마련이기 때문. 그러나.

'가주님은 공자님으로 하여금 그동안 너무나 많은 마음고생을 하셨다.'

현 가주를 넘어 전대 가주 때부터 지크 가문을 모셔 온 칼튼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당대의 가주가 철인과 같은 체력과 심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한 사람의 가장이며 아버지라는 것을.

마흔을 넘긴 나이라고는 하나 현 가주 카인은 칼튼의 입장에서 아직 젊은 나이다. 아비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서툴기 짝이 없는 이.

전대 가주 때부터 잔정은 많은 주제에 쓸데없이 그걸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 유전인 집안이다. 내색은 않겠지만, 분명 이번 소식도 가주의 귓가에 들어가면 큰 상처가 될 터.

'골치가 아픈 문제로구나.'

당장 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할 일을 먼저 마쳐 둘까.

깊게 한숨을 내쉰 칼튼이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전에는... 평소와 같나."

저택의 청소나 정돈. 식사. 그 외에도 평시에 이루어지는 숱한 일들.

이런 것들은 구태여 칼튼이 손을 댈 필요가 없다. 자작저는 넓고 사용인은 많은 데다가 모두 경력도 뒤떨어지지 않으니, 칼튼이 손을 대지 않더라도 각 장이 알아서 잘할 터.

시종장인 칼튼이 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은 가주와 가문의 일정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오전에는 별다른 일이 없는 상황.

"점검만 해 두면 되겠어."

오전에 일이 없다고 해도 오후에는 길리온 상단주라는 귀빈을 접대하는 업무가 있다. 정무에 바쁜 가주를 대신하여 귀빈을 접대하는 것도 시종장의 일이니까.

"시작해야겠군."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칼튼이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며 근무 현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처리되는 일들.

"확인하러 왔네. 무슨 일 있나?"

"아, 시종장님. 아무 일도 없습니다."

"요리는 제대로 나오는 거겠지? 저번처럼 갑자기 채소가 시들어 버린다거나."

"하하하! 그건 제가 없었을 때 아닙니까. 단단히 확인했습니다."

정원과 식당을 확인하고.

"시종장님. 오셨습니까요?"

"말들 상태는 어떤가?"

"아주 좋습죠.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이 녀석들도 기운이 넘칩니다요."

마구간에 들려 군마들의 상태도 확인하고.

"앗, 시종장님 오셨습니까! 근무 중 이상 무!"

"로튼. 근무하느라 수고가 많군. 이상은 있나? 결원이라든가."

"아, 제임스 조장이 휴가를 냈습니다."

"제임스가?"

"예. 무슨 간병을 해야 한다고...."

"노모가 아픈 모양이군. 보양식이라도 보내야겠어."

경비대에 들러 근무 현황을 확인하고.

"남은 건 객빈관뿐인가."

쉴 틈도 없이 오전의 업무를 끝내고 시간을 확인한 칼튼이 길리온 상단주를 접대하기 위해 객빈관으로 들어서며 멀찍이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객빈관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레이의 방.

'무언가 일을 치시려면 벌써 터졌을 텐데, 다행히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시려는 모양이군.'

그래. 한 번의 일탈이라면 구태여 보고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어쩌면 레이도 이 일주일 동안 너무 많이 참아서 잠깐 방황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구태여 가주에게 보고해 심려를 끼칠 필요는 없을 터.

'조금 더 지켜보아도 되겠어.'

오전의 일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 칼튼이 상쾌해진 기분으로 객빈관의 문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길리온 상단주님. 약속드린 대로 자작령을 안내해 드리러 왔습니다."

"음, 안 그래도 나갈 생각이었는데, 시종장께서 먼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천천히.

문이 열리고 길리온 상단주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웃고 있던 칼튼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종장님께서 새로 보내 주신 하인이 굉장히 예의가 바릅니다. 예법에도 빠삭하고. 지크가의 하인이 아니었다면 상단 직원으로 고용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길리온 상단주의 뒤편. 칼튼이 익히 아는 얼굴.

일공자 레이가 마치 길리온의 시중을 들듯이 서 있었다.

"하하하. 별말씀을요."

지크가 하인의 옷을 껴입은 채로.

무언가를 저지를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10화 망나니의 방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