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30화 타임어택 (2)

노아 루미너스.

현 광휘마탑주의 제자이자 머지않은 미래에 빛의 마법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혼약자에 대한 내 기억은, 그 찬란한 수식어와는 다르게 그다지 많지 않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생에서 만난 건 장장 8년 전... 내가 11살이고, 녀석이 9살이었을 때 만난 게 마지막이고, 그렇다고 전생... 150회차에 녀석과 깊이 얽힌 것도 아니었으니까.

-바보야.

-어서 도망가라는 뜻이야.

말만 약혼자고 실제로는 서로 얼굴도 잘 모르는 사이.

150회차에서는 십수 년 동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며 지내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구하고 사라졌다. 알고 있는 건 그것뿐.

어째서 녀석이 나를 구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건 녀석이 단순히 내게 일말의 호의를 품고 있다는 것뿐.

'그거면 충분해.'

접점이 없는 것보단 낫다. 뛰어난 마법사 중에서 정상인은 드물고, 그 드문 정상인 중에서 내게 호의를 품을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는 사람은 노아뿐이었으니까.

가능성이 있다면 설득할 수 있다. 아니, 설득해야만 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시련에 들어왔다. 훗날의 대마법사를 섭외하기 위해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설마 반려가 본 공녀를 도우러 이 시련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내가 본 미래의 모습이 틀림없다면,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꼬락서니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 역시 운명의 이끌림일 터... 역시 본 공녀와 함께 삼천 년에 걸친 맹약을 나눈 반려로다. 후후후."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개소리야."

"우리는 읽는다."

"...뭘?"

"이 시련의 배경."

아니. 조금 더 제대로 표현하자면.

"세계관."

"...."

"우리는 시련에 한 번 도전해서 실패하면서 이 시련의 세계관을 읽는다."

옛 스승이 내게 말했었지. '시련'은 생각하는 순간 실패한다고. 한계는 생각하면서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세 번까지 갈 필요도 없어."

그 말이 옳다. 왜냐면.

"두 번째 도전에 우리는 이 시련을 돌파한다."

신중하고 깊게 생각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시련도 아니잖아?

...이 정신 나간 말을 지껄이고 있는 녀석은 대체 뭐냔 말이다.

"본 공녀에 대한 취급이 박하구나. 반려여!"

수호탑이 부서진 뒤, 온통 백색으로 점철된 시련의 대기실.

내가 시련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전해 듣고 현 상황을 파악한 노아가 어깨를 쭉 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노아의 옷차림.

'얜 광휘마탑 소속이 왜 이렇게 시커메?'

인상이 시커멓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애당초 노아의 핏줄인 루미너스 백작가의 특징 중 하나가 잡티 하나 없는 금발과 푸른 눈이고, 직계인 노아는 그 특징을 그대로 이어서 꽤 밝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시커멓다는 것은 인상이 아니라 옷차림에 관한 이야기.

광휘마탑의 특징인 백색 로브는 어디다 가져다 팔아먹었는지 때가 타도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거무칙칙한 로브를 입고 있고, 허리춤에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마법서를 매달아 놓은 데다가 심지어 왼쪽 눈은 안대를 끼고 있는 모습.

'눈이 아픈 건가?'

아니,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다. 애당초 원래 맹인인 것이 아니라면 이 시련 속에서 모든 부상은 치료될 터.

그렇다면 저 안대는 대체 왜 끼고 있는 거란 말인가. 거추장스러운 마법서는 대체 왜 들고 다니고?

잠시 행색을 살펴보는 사이 어깨를 곧게 편 노아가 엣헴 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노아의 말.

"결국, 본 공녀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냐? 반려에게는 이 천재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본 공녀는 방금 대마법도 하나 성공시켰다. 드디어 상위 마법사의 반열에 들었다는 뜻이다...! 후후. 이 나이에 이 정도 성취를 보이는 천재 마법사는 달리 없을 터!"

대마법을 성공시켰다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틀린 말이 아니긴 하다. 노아의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열일곱. 그 나이대에 대마법을 성공한 마법사는 근 백 년 동안은 '그' 루렌실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아쉬운 쪽은 반려다! 내가 갑이고 반려는 을! 이건 정해진 사항! 반려는 좀 더 본 공녀에게 경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오, 정말?"

지금 갑질하겠다고? 나를 상대로?

안 될 텐데.

"혹시 그거 알고 있냐?"

"...무엇이냐?"

"나 여기 들어오면서 난이도 설정 최상으로 해 놨다."

"...?"

"알지? 시련 난이도는 합산인 거."

"그게 대체 무슨... 아?"

잠시간의 침묵.

내 말에 멍때리는 표정이 된 노아가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곧이어 덜덜 떨리는 손.

"저, 정말이냐...?"

"정말이지."

시련의 난이도가 합산이다. 그리고 이 시련은 시련을 받는 자들의 수준에 맞춰서 그 난이도를 조절한다.

물론, 나는 시련에 대해서 완벽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아마 상급은 한계의 극한을, 최상급은 한계 너머까지 도달해야만 깰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을 터.

하급이라면 모를까 중급, 상급, 혹은 최상급, 그런 난이도의 시련을 타인이 대신 깨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자, 이게 누가 갑이지?"

"그런...!"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 상황에서 무슨 짓을 해도 노아 혼자서는 절대로 시련을 깰 수 없다는 뜻이지.

"...."

잠시 자신의 상황을 가늠하던 노아가 의기양양하던 어깨를 조금 좁히다가 이윽고 유리병에 들어가는 문어처럼 쪼그라들었다. 이윽고 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미, 미안하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반려에게 본 공녀가 갑질한 것을 사과하겠다! 그러니 제발 성실하게 일해 다오...! 본 공녀 혼자 일하게 두지 말아 다오!"

"그래. 한 번 더 갑질하려고 하면 그때는 어? 일 안 하고 눕는 거야. 알겠어?"

"알았다! 알았으니까 제발! 일만 해 다오!"

음, 미묘하게 백수가 된 기분이군.

마치 인질범과 협상하는 협상가가 된 것처럼 처절하게 울부짖는 노아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거리고 씨익 웃었다.

"잘하자. 네가 잘해야 나도 안 눕는 거야."

"알았다...."

뭐, 서로 잘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보다 일단 이야기부터 해보자고. 노아. 그래서 좀 어때?"

"음?"

"시련 말이야. 얼마나 진행했어? 보아하니 상대의 수호탑을 부수면 되는 것 같던데."

"음...."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노아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아군의 수호탑이 부서지면 시련을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니."

"다른 건 알아낸 거 없냐? 추가적인 목표가 있다거나."

"그런 건 딱히 보지 못했느니라! 다만 공략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해 둔 것이 있다."

"뭔데?"

"아군을 도와서 적을 전부 섬멸하거나, 아니면 아군이 돌파당하기 전에 먼저 잠입해서 수호탑만 부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건 꽤 정석적인 방법이지. 그 외에는?"

"시련이 시작하면 적의 습격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생긴다. 매번 적의 배치나 구성이 달라지니, 그 한 시간 동안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구상해 두는 편이 좋다."

"그렇단 말이지."

정리하자면 이렇게 되는 건가.

"열세인 아군을 도와서 적을 통째로 물리치느냐, 아니면 일점돌파해서 수호탑을 부수느냐, 양자택일이라는 거구만."

"그렇다."

전투에서 승리하느냐, 아니면 목표만을 이루느냐의 문제인가.

'원래라면 일점돌파가 가장 쉽겠지.'

수정탑을 대강 암살해야 하는 상대 지휘관이라고 가정해 보자.

원래 전투에서 지휘관의 암살은 이기기 위한 방안의 하나일 뿐이지 필수가 아니다. 적 지휘관을 암살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투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반대로 전투에서 이기면 적 지휘관을 참살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적 지휘부를 타격해서 지휘관을 쳐 내는 것이 전투 자체를 승리로 이끄는 것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이쪽이 몇 명이나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하지만, 이 시련이 그렇게 간단하게 되어 있을까?

"지휘권은?"

"음?"

"지휘권은 어떻게 됐어. 병사들이 네 명령을 따르나?"

"...으음, 그렇지는 않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노아가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우리 쪽에도 지휘관이 따로 있다. 반려도 겪어 봤으니 알겠지만, 시련 내부의 사람들은 모두 자의를 가지고 있지 않더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그래서?"

"수정탑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지휘관이 따로 있다. 그때그때 이름과 얼굴은 바뀌지만.... 병사들은 그 지휘관의 명령을 받는 것이니라."

"그렇단 말이지. 네가 아예 지휘할 수는 없는 거고."

"그렇다. 소규모 분대라면 가끔 지휘관이 내게 맡길 때도 있긴 하다만."

"흠."

전략 입안자가 따로 있는 상황이라.

이런 상황이라면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사용해서 일직선으로 길을 뚫는 건 힘들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병사들의 자의도 있는 데다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지도 못하는 도박수를 지휘관이 용납할 리가 없으니까.

'목표는 하나, 상대 수호탑을 부수는 것.'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지? 무기는? 이쪽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무엇이 있나.

'노아의 마법은 강력하지만, 판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다.'

대마법을 막 성공시켰다면 수준은 짐작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상위 마법사의 턱걸이 수준. 실전 경험이 부족한 근위 기사단의 견습 기사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될 터.

한 방 한 방의 위력은 강하지만, 그걸로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는 없다. 심지어 내가 얼핏 본 바로는 몬스터 측에도 마법사와 대비되는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내가 더해진다면?

'가능성은 올라간다.'

비록 기억에 불과하지만, 실전 경험 자체는 아득하게 많은 상황.

검술의 수준도 그다지 낮지는 않다. 무엇보다 나는 알고 있다. 전장의 흐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지.

'개인의 실력 같은 건 크게 중요치 않아.'

목적. 투지. 전략. 그리고 군기(軍氣).

이 네 가지가 갖추어진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전투라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십수 년간 전장을 떠돌면서 체득한 방법.

"좋아. 대강 방법이 떠올랐다."

"벌써... 말이냐? 상대의 배치나 우리 군의 전력이 어떤지도 알 수 없는데."

"알아봤자 의미 없어. 어차피 열세야. 우리가 한계를 넘어서면 겨우 이길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있겠지."

고대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경지를 읽어 낼 수는 있어도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경험과 잠재력까지 모조리 읽어 내기란 건 불가능한 일.

노아는 마법사. 나는 전사.

시련은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난이도도 거기에 맞추겠지. 교전의 승리를 전투의 승리로, 전투의 승리를 전장의 승리로 이끌어 나가는 방식을 강요할 터.

하지만.

우리가 굳이 거기에 따라 줄 필요는 않나?

"들어가면 한 시간 동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지?"

"어? 어, 그렇다만... 무슨 생각이 있느냐?"

"그럼."

한 시간이다.

한 시간 동안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몬스터들은 공격해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우리는 시련을 한 번 실패한다."

"...배치나 그런 건 알아봤자 의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매번 달라진다고...."

"아니."

이 '시련'에 랜덤성은 없다. 어디까지나 도전자, 이 경우에는 노아의 심층의식을 읽어 내어 만드는 것이니까.

지휘관이나 배치가 달라진다면 그건 노아의 심층 의식이 '응당 그러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

31화 타임어택 (3)

카야는 지금 레이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일단 생각하기 전에 지르고 보라.'라고...?"

"예. 옙."

"레이 지크가 내게 그렇게 남겼단 말인가."

"그렇, 그렇습니다... 헤헤."

'시련'의 유적 앞.

저도 모르게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싹싹 비비던 카야가 잔뜩 굳은 상대의 모습을 보다가 호위 기사의 서늘한 눈빛에 몸을 황급히 낮췄다. 머리 위로 쏘아지는 근위 기사의 시선.

'레이 지크. 이 개자식...!'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들었을 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뭐 욕설을 퍼부으라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말을 전해 달라는 것뿐이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한 서너 시간 정도 기다리다 보면 누군가 올 테고, 그 사람에게 말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업무.

레이는 카야의 물주고, 모름지기 돈 좋아하는 용병은 물주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카야는 이 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련'에 방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귀족일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황자가 온다는 말은 안 하지 않았던가!

"화, 황자님을 뵙게 되어 일생의 영광입니다. 부디 이 미천한 용병의 인사를 받으시옵고...."

"예법도 잘 모르면서 굳이 예를 취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용병에게 과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히이익. 죄, 죄송합니다!"

"과례를 취할 필요는 없다니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제 목숨이 저울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카야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저은 진이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유적의 모습을 보고 팔짱을 꼈다. 노아 루미너스와 레이 지크를 삼키고서도 평온하게 돌아가고 있는 고대 유적의 모습.

'레이 지크는 나를 시련 내부로 불렀다.'

레이는 편지를 보내 진에게 말했다. 시련을 구경하러 오라고.

그게 시련 밖에서 시련이 돌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외부인은 시련 내부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고, 내부의 모습을 보려면 시련 안쪽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필연적으로 시련의 기회를 사용하게 되겠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장 진은 전사도, 마법사도 아니며 시련에 들어갈 계획도 없었으니, 기회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

"일단 지르고 보라...?"

하지만 그렇다면 이 전언은 무엇이란 말인가?

"테로트 경. 경은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주저하지 말고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럴까."

"제가 생각하기론 그렇습니다."

테로트의 말처럼 단순히 자신의 발을 재촉하기 위해 남긴 전언인가?

'아닐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전에 봤던 레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적어도 진이 판단하기에 레이라는 남자는 무의미한 강조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지르라, 일단 지르라... 대체 뭘 지르란 말이지?"

생각하지 말고 지르라는 말은, 결단하라는 말. 그러나 이 시련에 자신이 결단할 게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난이도... 아닐까요?"

"...?"

고민하다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카야의 목소리에 진이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카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황급히 부연설명을 하는 카야.

"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만...!"

"괜찮다. 용병. 말해 보거라. 추측이라도 상관없으니."

"그... 레이 도련님은 정신이 어딘가 회까닥 돌아 있는 사람이니까, 난이도를 높여서 들어오라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뜻 아닐까...."

"설마 그럴 리가. 본인도 최상급으로 들어갔으면서 나까지 난이도를 높인다는 게 말이...."

말이 안 되지 않나.

'아니지.'

잠시 그렇게 말하려던 진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으니까.

"테로트 경."

"하문하십시오."

"내가 지금 최상급 난이도를 설정해서 들어가면, 과연 받을 시련의 난이도가 어떻게 될까?"

"그야... 굉장히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니, 나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경을 기준으로 삼도록 하게."

"예? 저를 말입니까?"

"그래. 내가 받을 시련을 경이 함께 받는다고 하면 어려울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근위기사 테로트의 무력은 삼황자 지니스보다 훨씬 윗선에 있고, 지니스는 애초에 전사도, 마법사도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높은 난이도라면 거기에 한 줌 정도 더해진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편법 아니겠습니까? 애당초 그렇게 한다면 황자님이 얻는 게 없습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고, 당연히 레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다. 시련을 동시에 들어갈 수 있으니 더더욱.

그러나 개중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은 이는 없다. '시련'은 시련자들의 참여도를 분석해서 참여도가 낮거나 없는 이에게 보상을 주지 않으니까. 기회만 날리는 셈일 터.

하지만.

"난이도를 더 올리고 싶다는 뜻이겠지."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레이가 진의 난이도까지 더해서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상도 그만큼 조금이나마 더 좋은 것을 받지 않겠는가.

"정말 광오한 자로군요."

"모르지.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지도."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아무리 광오한 자라고 해도 방법 없이 난이도를 이렇게까지 올리지는 않는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어서 난이도를 이만치 올리려고 한 것일 터.

"하실 겁니까?"

"해야지. 원한다면."

"...."

"걱정 말게. 테로트 경. 오래 기다릴 생각은 없네."

일주일.

그 안에 클리어할 각이 보이지 않는다면 진은 주저 없이 시련을 포기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어차피 보상에 흥미도 없는 데다가 그 이상 걸리면 십종제 준비는 물 건너간 셈이니까.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봐야지.'

보는 것이라면 어렵지 않다. 과연 그 망나니는 어떤 기발한 방법을 준비해서 이 난관을 돌파할 것인가.

'큰소리칠 만큼의 실력이 있는지 봐 주어야겠지.'

현실의 벽은 높다. 아무리 면밀한 계획을 짜 놓아도 십중팔구는 실패할 터.

그때 가서 말할 것이다. 결국 너도 같지 않느냐고. 현실의 벽에 무너지지 않았느냐고.

"최상급으로 설정해 주게."

"아, 알겠습니다."

우우웅!

고대 마법을 지키는 마법사에게 설정을 명한 뒤, 마법진 위에 오른 진이 작은 숨을 내쉬며 몸을 감싸는 빛에 순응했다. 그리고.

──!!!

빛이 몸을 전부 삼키고, 배경이 전장으로 바뀌었을 무렵.

"이제야 오셨구만."

"...?"

멍하니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본 진이 눈을 깜빡였다.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진."

"무엄하다. 레이 지크. 황족에게 반말은 귀족이라고 해도 죄.... 아니, 그보다, 뭐 하나?"

"뭘 물어봐."

칼을 뽑은 레이가 탑 위에 놓인 수정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지휘권 협상하는 중이지."

마치, 인질극을 벌이는 것처럼.

* * *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때. 노아. 뭐 좀 알아냈냐?"

"으음...!"

시련 개시 후 삼십 분.

내 물음에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노아가 할 말을 짜내듯 미간을 좁히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나, 날씨가 안 좋다."

"...그 외에는?"

"그 외, 그 외...? 아! 할마튼이라는 병사는 이 전투가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서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 새끼 잡아 와."

전투에 패배한 건 다 그놈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안하다, 반려여. 그,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어, 큰 기대 안 했어. 네 스승님도 너 사교성 떨어진다고 하더라."

"무슨...! 터무니없는 음해다! 본 공녀는 사교성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노라!"

"오, 그럼 친한 친구 이름 셋만 대 봐."

"...레이!"

"너 나랑 친하냐?"

"...."

"농담이다."

울상이 되어 가는 노아를 보면서 피식 웃고 팔짱을 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노아와는 다르게 나는 알아낸 것이 꽤 많았으니까.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어. 일단 우리 소속."

"소속?"

"이 전장에 우리가 섞여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는 이유 말이야. 보아하니 여긴 연합군인 것 같다."

"연합군이라니,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긴, 우리가 저 몬스터 군단에 대항하는 연합군이라는 뜻이지."

대륙 각 국가에서 모인 몬스터 대항 연합군.

삼십 분 동안 내가 알아본 이 전장의 세계관은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온갖 군대와 용병대, 그리고 의용군 따위가 모여서 만들어진 군대가 바로 이 군대라는 뜻.

"총사령관이 매번 바뀐다고 했지?"

"그렇다. 열 번 정도 확인했었는데, 그동안은 항상 달랐다."

"당연한 결과야. 보니까 패배가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거든."

"그건 또 무슨...?"

"지난 전장의 결과가 여기에도 반영이 된다는 뜻이지."

내가 병사들에게 캐물어 들은 정보대로라면, 밀려오는 몬스터 군단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연합군은 다섯 번의 패배를 겪었다는 모양.

개중 네 번은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지 못하고 총사령관이 전사하는 등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고 했었음에도 몬스터군단을 막아 내는 것에 실패했다. 여기까진 뭐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다섯 번째 전투야. 다섯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

"무엇이냐?"

"적의 첩자가 침투해서 수정탑을 부쉈다. 검으로."

"...?"

"내가 들어오자마자 저지른 일이지."

확실하다. 내가 저지른 일이 역사로 남은 것 아닌가.

"이곳 전장에서 수정탑은 전선을 유지시켜 주는 아티팩트야."

"전선을 유지시켜 주는...?"

"정확한 내용은 나도 몰라. 다만 수정탑이 부서지면 인류의 명운이 끝나 버린다고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반대로 몬스터들의 수정탑을 부수면 몬스터들을 격퇴할 수 있고."

"...음!"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를 보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이 전장의 군대가 도망가지 않는 이유는 하나야. 도망가면 그 순간 인류가 몬스터들에게 잠식당하고 말 테니까."

인류 최후의 전선. 미지의 존재에 대항하는 군단.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끝'의 군세에 대항하던 인류와 같다. 얼마나 두렵든 이를 악물고 창을 부여잡는 병사들의 모습도 그렇고, 피폐해진 지휘관의 모습마저도 그렇지.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일단, 지휘권을 틀어쥐어야 해."

"지휘권을... 어떻게 틀어쥐는가?"

"지휘관을 설득해야지. 지휘권을 넘기라고."

"본 공녀는 전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게 가능한가?"

"불가능하지. 일반적인 전장이라면 말이야."

지휘관이 생판 모르는 남에게 지휘권을 넘긴다는 것.

일반적인 전장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잘 아는 상대에게도 지휘권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은데, 하물며 모르는 상대에게 지휘권을 넘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시작하자마자 당장 첩자 의심부터 할 것이고, 첩자가 아니라고 판명이 나더라도 지휘권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군대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것이 아니라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전장의 이야기.

"이 전장은 좀 달라."

사람 목숨보다 수정탑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지금 이 상황이라면 다르다.

"노아. 그거 아냐?"

"뭐... 말이냐?"

"사람은 생각보다 휩쓸리기 쉬운 동물이야."

자신이 숭고한 목적을 대행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릴 결심을 했을 때.

그럴 때 사람은 바보가 된다. 스스로의 목숨조차 도외시하고 아주 조막만 한 확률을 기대하고는 한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은 손익을 판단하지 않아."

활활 타는 집 안으로 자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부모, 혹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는 투사.

"그러니 우리가 지휘권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다."

"그게 무엇이냐...?"

"상대가 가장 원하는 하나를 저울에 올려 주는 것."

이 전장에서는 인류의 수호. 그들이 믿고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

"지휘관에게서 지휘권을 빼앗아 오는 건 간단해."

우리는 수호탑을.

인류를 인질로 잡는다.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거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럼, 그다음엔 어떻게 하는가?"

"음?"

갑작스럽게 물어오는 노아의 모습에 반문을 던지자 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다음은 어떻게 하느냐는 뜻이니라! 분명 이 상황을 돌파할 전략이 있어서 지휘권을 넘겨받으려는 것 아니냐?"

"아, 전략. 있지. 있지."

"그러니까 그 전략이 무엇인지...."

"가 보면 알아."

알 수밖에 없다.

내 말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계획에 협조를 결의했다. 그리고.

...

...…

다시금 두어 시간이 지나, 내 '전략'이 도착했다.

"그렇게 됐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지휘해라. 진."

"...그대는 혹시 정신이 나갔나?"

"안 나갔어."

해 줘.

32화 타임어택 (4)

"하아."

전투가 시작되었음에도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수정탑의 주변.

- 저자들은 대체 뭔가!

- 모,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오러를 내뿜더니 수정탑을 점거했...!

경악과 분노가 서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지휘부를 훑어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꾹 누르는 진을 보고 살짝 움츠러든 노아가 내 뒤로 숨었다. 곧이어 진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이는 노아.

"반려여. 반려여."

"왜."

"정말 괜찮은 것이냐? 황자님께 지휘를 맡겨도...."

"당연히 안 괜찮지."

"엩, 그게 무슨...?"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저 자식 말고는 맡길 놈이 없어."

진...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가 어떤 인간인가.

인류 최후의 지휘관이 될 인간이요, 일황자와 이황자가 전사하고 난 뒤, 제국을 지휘해서 수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 낸 맹장이다. 최후의 작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인류 전체를 통틀어도 저만한 지휘관은 찾기 힘들 정도.

물론, 지금의 진은 절대로 그 정도는 아니다. 군략이라는 것은 재능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전장을 떠돌면서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 수준의 군략을 바란다고 정말 그런 지휘를 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아직 개화하지 못한 수준으로도 충분하다.

녀석의 재능은 그 정도로 하찮지 않으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지크 공자."

"레이라고 불러라."

"그러니까 반말은 중죄...! 후,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겠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린 진이 나를 노려보았다.

"루미너스 영애와 레이 공자. 그대들이 군략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군대를 지휘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지. 나는 분명 구경을 하러 이곳에 온 것으로 안다만."

"구경은 참여하면서도 할 수 있지."

"...그게 무슨 궤변."

"하물며 단순히 구경만 하라고 부른 것도 아니잖아. 편지 잘 안 읽어 봤냐? 너만 오면 풀파티라고 했잖아."

무릇 파티라는 것은 서로 도움이 되는 존재들을 말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식충이가 파티에 껴 있다면 그 결말은 지극히 간단하다. '너는 파티에서 추방이다'를 당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이야기.

물론, 나는 그런 파티를 만들 생각은 없다. 내가 원하는 파티는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파티니까.

"파티에 참가하고 싶으면 네 능력을 보여야지. 진."

"...대체 언제 봤다고 아까부터 나를 계속 진이라고 부르는 거냐? 심지어 나이도 내가 더 많을...."

"설명하긴 복잡한데, 꽤 오래 봤지."

"그건 대체 무슨... 하아."

머리가 아프다는 듯 다시금 미간을 꾹꾹 누른 진이 답했다.

"나는 지휘하지 않는다."

"괜찮겠어?"

"무슨 소리지? 레이 공자.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나는 이 시련을 굳이 돌파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아니, 그거 말고. 이렇게 구경할 기회를 놓쳐도 되겠냐고."

"...뭐라고?"

"너 궁금하잖아."

레이 지크란 놈은 대체 뭔 생각이 있어서 자신에게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네 정체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엉겨 붙는지, 궁금하지 않냐?"

"...."

"이건 기회지. 내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기회."

지휘관은 전장을 조율하는 자.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누군가의 역량을 가장 시험하기 좋은 자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의 한계를 보려면 거기에 맞는 환경을 주어야 하고, 지휘관이라는 자리는 그 환경을 주기에 특화된 자리니까.

"이런 좋은 기회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움직일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겠지."

"...."

"무서운 거 아니냐?"

진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훗날 인류 최고의 군왕이 될 인간이 '재능이 모자란' 인간일 수 있는가?

그럴 수가 없다. 애당초 진의 군재는 이황자도 알고 있다. 그런 천재가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한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어떤 머저리 망나니 놈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의 기억에 짓눌려 지휘를 잡을 수 없기에.

"...그만."

"확신이 깨지는 순간 사람은 무너지지."

나는 내 나이 또래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했고, 네 살 어린 녀석에게 깨져서 사 년 동안 빌빌 기었다. 그렇다면 녀석은, 진은 어떤가?

놈은 나보다 더하다. 자신의 실수로 친어머니처럼 믿고 따르던 사람을 잃었으니까. 자신이 믿고 있던 스스로의 재능에 아주 크게 배반당했으니까.

"노력으로 재능을 이길 수 있다... 뭐 그딴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을 거야. 진. 나도 이 세상은 더럽게 불공평한 구조라고 생각하거든."

"...."

"하지만 단언할 수 있다. 진. 너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단순히 겁이 많아서 회피할 뿐이지."

"네놈 따위가 뭘 안다고...!"

"나니까 아는 거지. 내가 왜 알겠냐?"

내 반문에 차마 답하지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본 진이 이를 꽉 물었다. 이윽고 억눌린 목소리로 튀어나오는 말.

"...나를 도발하려는 생각이었다면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고 싶군. 레이 지크."

"별로 도발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지휘를 잡을 생각은 없다."

"왜?"

"내가 나설 이유가 없으니까!"

이를 빠득 갈아붙이며 말을 내뱉은 진이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서라면 너는 역량을 최대로 발휘해야 한다. 그렇지 않나?"

"뭐, 그렇게 되겠지."

"역량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나설 이유가 없다. 지휘를 피하느냐, 피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이득이 없으니 굳이 지휘를 잡지 않으시겠다?"

"그래."

"간단한 문제네. 그럼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되지."

"...?"

"아까 물어봤잖아. 내가 어떻게 네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피식 웃으며 눈에 힘을 주고 진을 바라보자 지지 않겠다는 듯 놈이 내게 시선을 쏘아 보냈다. 자존심 하나만큼은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놈의 모습.

'야. 이 새끼야.'

너랑 같이 전장에서 구른 게 십수 년이다. 친우를 넘어서 전우(戰友)로 살아온 것이 십수 년이란 말이다.

"내기하자고."

너는 이 전장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미 빠질 수 없다. 빠지고 싶더라도 그렇게 두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번에 지휘를 맡으라고 하진 않는다. 너도 나와 노아의 역량에 대해 판단할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

"...."

"이번 시련을 실패하고 난 뒤에 지휘관 자리를 맡아라. 한 번만 해도 돼. 두 번 시도 안 할 거니까."

"내기 내용은?"

"시련에 클리어하면 내가 이기는 거고, 실패한다면 네가 이기는 거다. 만약 네가 이기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해 주지."

"...상당히 내게 호의적인 조건이군. 내가 일부러 실패한다면 어쩔 생각이지? 설마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든가, 그런 소리로...."

"그래 보든가."

"...?"

"어차피 넌 못해."

적은 기만하고 속여도 아군은 기만하지 못하는 것이 너고, 만민이 패배를 부르짖어도 민중의 멱살을 잡고 승리를 추구하는 것이 너다.

비록 지금은 패배감에 찌들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친애하고 섬겼던 주군의 편린이, 인류 최후의 군왕이 가지고 있던 그 모습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터.

"받을 거야. 말 거야? 슬슬 시간이 촉박한데."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 무리를 보면서 말하자 어금니를 악문 채 입을 다물고 있던 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답변.

"...받지."

"그래야지."

그럴 줄 알았다.

캉!

-뭐, 뭣 하는 것이냐!

-당장 내려오지 못할까! 비열한 첩자 놈들!

"안 그래도 내려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지."

내기를 받겠다고 선언하는 진의 모습을 보고 수정탑 토대를 한 번 칼로 때린 뒤 노아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와 진의 앞에 섰다. 그러자 인상을 찡그리는 진.

"이번 시련에서는 역량을 보여 준다고 했었지. 어떻게 보여 줄 생각이지?"

"군략 같은 복잡한 건 내 스타일 아니니까 단순하게 가자고."

"...?"

"수정탑까지 일직선으로 쭉."

"제정신...이냐?"

"할 수 있으니 한다고 하는 것뿐인데. 뭘."

가 볼까.

"갔다 온다. 전략 짜 놔라."

"...잠깐!"

진의 어깨를 툭 치고 손을 흔들며 전장으로 향하자 잠시 나를 노려보던 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생각해 보니 네가 이겼을 때의 조건을 듣지 못했군. 레이 지크. 네가 이기면 나는 뭘 대가로 지불해야 하지?"

"아, 그건 내가 생각해 놨지."

"...?"

"반말 까기. 황족한테 반말은 중죄라며?"

"...그걸로 충분하다고?"

"어."

그 이상은 필요하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다. 어차피 넌 날 도울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우우웅!

"잘 봐 둬. 네 파티원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피식 웃고선 창백한 빛을 검신에 흘렸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너도 긴장해라. 노아. 이제부턴 실전이다."

──!!!!!

전장이 닥쳐왔다.

* * *

전투에 돌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노아는 레이의 실력에 대해 크게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가 아무리 천재라도 노아가 알고 있는 그는 사 년 동안 검을 놓았던 상황이었으니까.

신문은 항상 몰락한 천재에 대해 떠들어 대었고, 호사가들은 검을 놓은 레이가 얼마나 밑바닥까지 추락했는지 뒷말하기를 좋아했다.

퇴물. 그저 조금 빠르게 치고 나갔을 뿐,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 날개 꺾인 새.

자신의 단 하나뿐인 친구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는 것을 노아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사 년이라는 시간 동안 검을 놓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검을 잡고 시련에 들어왔을 때 의식적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피한 것도 그것 때문이다. 검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트라우마는 극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한들 사 년의 공백을 메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으니까.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호들갑을 떨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바, 반려! 조금 천천히, 히에에에에엑! [스며드는 빛]-!!!"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카가가가강-!!!

쳐 낸다.

"주문 쉬지 마-!!!"

전장 한복판.

광기 어린 병사들의 함성을 찍어 누르듯 큰 목소리로 노아에게 고함친 레이가 백색의 오러를 뽑아 검을 휘둘렀다. 마치 반월처럼 잔상을 남기면서 닥쳐 들어오는 몬스터들의 발을 잘라 내는 검극.

괴수의 호흡이 가깝다. 날붙이가 앞에서 날아다니고, 탁하게 노란 눈동자가 눈앞에 닥쳐온다.

한 달 동안 수많은 격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겪어 본 적 없는 진짜배기 실전에 노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떨어 마법을 지연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빈틈을 발견하고 몰려드는 몬스터들.

"쯧."

한 호흡.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내디딘 레이가 검을 뿌리며 앞으로 쇄도해 몬스터들을 베었다. 울리는 목울대. 당겨진 팔뚝의 근육.

찢고, 찍고, 쳐 내며, 베고, 부수며 나아가는 창백한 빛.

마치 전장에 떨어진 유성이 있다면 이런 광경일까.

"정신 차려-!!!"

창백한 빛이 핏물에 반사되어 산란하는 것을 본 노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한 달간의 단련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었는지 정신을 차리자마자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마법.

"스, 스쳐 가는 빛조차 의지가 깃들면 나의 무구가 되어 찌르리라...! [튀어 오르는 은광]!"

한순간, 전장에 공백이 생겼다.

"다음!"

"햐아아악!"

자신이 내지른 마법의 여파를 확인하기도 전에 자신을 들쳐 업고 이동하는 레이의 모습에 노아가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도 시선을 내려 레이의 눈을 직시했다. 아까까지의 건들거리는 태도는 어디로 가고, 더없이 진지하게 적을 노려보고 있는 레이의 모습.

'이게, 어찌 사 년이나 검을 놓은 자의 몸놀림이란 말이냐...?'

마법사인 노아는 검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들 상식적인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한 번 어떤 것에서 멀어진 자는 다시 돌아오더라도 예전과 같은 폼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

검사도 그렇고,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다. 포기한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정녕 레이가 검을 놓고 실의했다면, 그만큼 퇴보해야 하는 것이 정상.

하지만.

'전혀 퇴보하지 않았어...!'

아니, 퇴보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지 않았는가.

이건 포기한 자의 검이 아니다. 사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검기를 보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숨어서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검을 잡지 못함에도 결국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난과 역경을 딛고 결국 다시 재기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역시 반려도 약속을 잊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 이름을 남긴 전사가 될 테니, 너는 내게 어울리는 마법사가 되라고.

자신을 마법사의 길로 이끌었던 어릴 적 레이의 모습을 기억한 노아가 얼굴을 스치는 강풍을 느끼면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이어지는 외침.

"반려여! 이기자꾸나!"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본 공녀는 아직 여유가 있다! 좀 더 위험한 곳으로 가도 괜찮다-!!!"

"떨리는 손이나 넣고 말하지?"

"흥. 누가 떨었다는 것이냐!"

이게 맞다.

"저쪽으로 간다!"

"물론이다! 준비됐...!"

돌아온 레이의 답변에 고개를 돌리며 기쁘게 답하던 노아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

"바, 반려여?"

"왜!"

"설마 저걸 잡으러 가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렇지?"

아무리 레이가 강해도 이 둘이서 아룡을, 드레이크를 잡으러 갈 생각은 아니지 않겠는가.

-?

그렇게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노아의 시야에 드레이크의 커다란 호박색 눈알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레이의 답변.

"잡아야지! 저거 못 잡으면 우리 못 이겨!"

"...미, 미쳤는가! 저걸 어떻게 잡느냐! 도, 돌려다오!"

"내리기엔 늦었어! 저 자식 입 벌린다! 마법 준비!"

"히에에에엑-!!!"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33화 시련 (1)

진은 지금 경악하고 있었다.

"저길 들어간다고... 아니, 저걸...?"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레이와 노아.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몬스터 너덧 마리가 스러지고, 노아가 수인을 맺을 때마다 전장에 구멍이 뻥뻥 뚫리는 모습을 본 진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파괴되는 상식.

"무슨, 말도 안 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레이나 노아의 수준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레이는 기껏 해봐야 열아홉이고, 노아 역시 열일곱밖에 되지 않으니까.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그들의 무력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지금 보여 주는 무력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동 나이대에서는 상대할 이가 많지 않겠지만, 반대로 윗 나이대... 정규 기사들과 비교해 보자면 어렵지 않게 비교할 만한 이들을 찾을 수 있을 터.

날고 기어 봤자 초인이 되지 못한 일개 기사와 마법사다. 혼자서 전장의 판도를 바꿀 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상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그럴 터인데.

'그럼 저건 뭐냐...?'

아군이 위험할 때마다 거기에 항상 레이가 있고, 적군이 밀고 들어올 때마다 측면을 쳐서 끊어 먹으며, 심지어 거대한 몬스터가 날뛸 때마다 그 옆에서 검광을 번뜩였다.

전투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장의 흐름을 하늘 위에서 관조하듯 전장을 제집처럼 누비는 모습.

'뛰어난 전략가는 한 명의 기사로 열 명의 힘을 내지.'

그래. 한 명의 기사로 열 명의 힘을 내는 것은 전략의 영역이다. 그러나.

전장을 보면 가끔 기사 한 명이 열 명을 넘어 백 명, 천 명, 만 명의 일을 할 때가 있다. 단 한 명이 그 모두를 압도할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서인가?

'아니다.'

적재적소에 힘을 투사하는 자. 적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자.

한 걸음의 전진과 후퇴가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아는 자들만이 그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 자신이 가진 전투력을 극한까지 활용해 상대를 압박하는 이들.

──!

-피해라! 드레이크가 쓰러진다-!!!

쿠우우웅-!!!

황실 근위 기사도 혼자서는 잡기 힘든 아룡을 병사들과 합세해서 거꾸러트리는 레이의 모습에 진이 침묵했다. 계속해서 흘러가는 전장의 상황.

'달라지진 않았다.'

전장은 이미 기세가 너무나 기울었다.

레이와 노아가 합류한 본대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 애초부터 밀리고 있었던 좌익과 우익은 거의 궤멸 직전인 상황.

아무리 레이가 활약한다고 한들 희망은 없었다. 이 전투는 이미 패배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진이 문득 진형을 바라보았다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

분명 전선을 형성하면서 싸우고 있었을 본대의 모습이, 어느새 돌파를 위한 쐐기형으로 바뀌고 있었으니까.

"무슨...?!"

-머저리 새끼들아. 이대로 뚫려서 뒈지기 전에 발악이라도 해 보자-!!!

-와아아아아악-!!!!!

고함과 악.

-방패 들어! 뒈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창을 찌르고 뒈져!

지휘관도 아닌 레이의 말을 전선을 형성한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따르며 악다구니를 썼다. 병사 하나하나의 눈앞에 일렁이는 무언가.

다르다.

-편하고 싶냐?

-쓰러지면 너희만 뒈지는 게 아니야. 이 새끼들아! 이놈들을 우리 뒤로 보내면 어떻게 되겠냐고!

쫘아아악!

뱀처럼 생긴 몬스터의 주둥이를 양팔로 잡아 찢어 버린 레이가 피를 뒤집어쓰면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레이의 모습.

-네놈들 동생도, 자식도, 부모도 모조리 산채로 씹어 먹힐 거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게 될 거란 말이다!

-무기 들어, 개자식들아!

-무섭다고? 살아 돌아갈 생각을 하니까 무서운 거야! 어차피 너희 개자식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놈도 빠짐없이 죽어!

-차이점은 하나다. 한 마리라도 저 개 같은 새끼들을 길동무로 데려갈지, 아니면 그냥 혼자 뒈질지!

기이할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가 전장을 가를 때마다 병사들의 눈에 독기가 차오르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마치 마법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자신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그 목소리가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라는 것을 저 병사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중요치 않다.'

그래.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나이가 어떠니, 실력이 어떠니 하는 것은 저들의 눈에 이미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몸을 움직이는 건 아주 단순한 것.

최전선에서 피 칠갑을 하면서,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도 적을 돌파해 가는 레이의 뒷모습이었다.

'...대체 뭘 위해서?'

어차피 시련의 환상일 뿐.

이 전장은 그저 하나의 환영일 뿐이다. 시련이 끝나면 스러질, 존재하지도 않을 전장.

여기서 아무리 날뛴다고 한들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몬스터를 몇백 마리 베어도 결국 끝나 버리면 허무하게 스러질 게 분명할 터.

'이길 확률조차 없다.'

갑자기 여기서 레이의 실력이 두세 단계쯤 폭증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답이 없었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밀-어-붙-여-!!!

분명 그럴 터인데, 어째서 저자는 저렇게 악착같이 앞을 향해 나아간단 말인가.

"...."

하나. 둘.

몬스터에게 구멍이 뚫린 전선들이 침범당했다. 멀었던 비명과 괴성, 악에 찬 외침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적의 수정탑까지 삼분지 일.

그 정도 거리를 남기고 점차 스러지는 쐐기의 모습에 잠시 침묵을 지킨 진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곧이어 뇌리에 울려 퍼지는 소리.

[아군의 수호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전장을 초기화합니다.]

어두 칙칙했던 눈꺼풀 너머가 밝은 빛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진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누가 쥐고 있는 것처럼 옥죄어 오는 심장.

'내가, 지휘를 잡아야 한다고...?'

눈이 있으면 레이의 역량을 부정할 수 없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앞서 호언장담한 대로 레이는 분명 자신의 역량을 충분하리만치 증명해 보였다. 더 이상 검을 놓고 나락에 처박혀 있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지.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것에 응해야만 한다. 저 일련의 행동이, 결심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진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정녕 그게 가능한 일인가.

레이 지크가 다시 검을 잡았던 것처럼, 자신이 정말 지휘대를 잡을 수 있는가.

"하, 아깝네. 조금 더 진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냐! 이 정도만 해도 역대 최고 신기록이다! 반려여!"

"그건 네가 못 싸워서 그런 거잖아."

"...힝."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

"...레이 지크."

전장이 완전히 초기화된 것을 느끼고서 눈을 뜬 진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다가온 자신의 차례.

"수고...했다."

"봤냐?"

"...."

"봤냐고. 이 자식아. 말이 없어."

"...봤다."

"어때."

씩 웃으며 묻는 레이의 모습에 진이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인정.

"...역량이 꽤 뛰어나더군."

"그렇겠지. 보는 눈이 있으면 그렇게 대답해야지."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그럼, 누가 봐도 잘 싸웠다 소리 나올 정도로 싸워 놓고 '아이, 뭐 제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할까? 그게 더 재수 없겠구만."

"그건... 그렇겠군."

마지못해 인정하는 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레이가 웃음기를 천천히 지운 후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두 시간."

"...."

"노아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가 다시 감각에 날을 세울 때까지 대강 두 시간이다. 두 시간 뒤에는 두 번째 시련을 개시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끝내 놔라."

"...이길 전략을 준비해 놓으란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거."

각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겠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퉁퉁 소리 나도록 두드린 레이가 노아를 붙잡고 명상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며 진이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내려다본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지휘봉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 * *

두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반려여."

"왜."

"정말 괜찮은 것이냐? 본 공녀가 보기엔 삼황자님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는데."

"그렇겠지."

노아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곁눈질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내 말을 들은 이후로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진의 모습.

"들어가면 나아지는 것이냐...?"

"아니, 안 나아질걸?"

"그럼... 큰일 난 것 아니냐!"

"괜찮아. 예상한 거니까."

삼황자,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는 지휘를 하는 것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어째서인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녀석은 어릴 적 교외에서 지휘 연습을 하다가 습격을 받아 호위 기사들과 자신이 친모처럼 믿고 따르던 이황비, 세프리 황비를 잃었으니까.

녀석이 겨우 아홉 살 때 벌어진 습격이다. 당연히 제정신이라면 지휘 책임 문제로 진을 탓할 수 없고, 귀족이나 황족 그 누구도 황비와 근위 기사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진에게 묻지 않았다. 수준급의 군략가가 오더라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내가 조금 더 침착했더라면...!

모두가 살 수 있는 가능성.

제국에서 손꼽히는 군략가 중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때, 군략에 대해서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진만큼은 장고 끝에 자신이 도달할 수 있었던 미래에 대해서 알아차려 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녀석은 지휘봉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하루 이틀 만에 극복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가 아니지. 억지로 시킨다고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좀 달라. 저 자식은 지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 지휘가 잘못될까 봐, 잘못된 지휘를 해서 사람들이 죽을까 봐 무서운 거거든."

내가 검을 무서워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패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검을 잡고 휘두르다 보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될 벽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나는 검을 잡지 못했지.

검술 자체를 두려워했다. 정진하는 것을 무서워했고.

그렇기에 나는 검을 잡지 못했다. 검을 휘두른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막혀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다르다.

"녀석의 두려움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서 비롯되는 거야."

지휘가 잘못되어 사람들이 피해를 볼 것이 두렵다.

그렇다면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는 환경을 조성해 주면 그만이다. 지휘를 실패해도 그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는 환경.

시련.

"반려는 들어오기 전부터 이 시련이 전장일 거라 생각했느냐? 어떻게 그걸 알고...."

"당연히 몰랐지. 하지만 상관없었어."

"...?"

"시련이라는 게 사람의 재능과 심리를 읽는 거라면 저 녀석의 시련으로는 반드시 지휘가 나올 거라고 믿었거든."

다른 게 나올 리가 없다. 녀석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뭐, 예상대로 나왔으니 된 거 아니겠냐?"

"...."

내 말에 잠시 미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노아가 후다닥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묻는 노아.

"반려여. 혹시... 취향이 그쪽이냐?"

"취향? 그쪽이 어느 쪽인데."

"이상하지 않느냐. 반려는 삼황자님과 만난 적이 별로 없을 터인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삼황자님을 위하는지.... 본 공녀가 듣기로 이 세상에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들었다만...."

이런 시발.

"진짜 뒤지고 싶냐?"

"히에엑."

누굴 남색가로 몰고 있는 거야?

노아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쥐어박은 뒤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노아를 바라본 뒤 피식 웃고선 답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

"친구한테 부탁을 받았거든. 저 자식 정신 좀 차리게 해 달라고."

"...어, 어떤 친구냐? 혹시 본 공녀보다 더 친하더냐?"

"너 나랑 친하냐?"

"...왜, 왜왜 말을 그렇게 하는가! 반려와 나는 영혼을 나눈 단짝 아니더냐...!"

"이상하다. 나는 그런 기억 없는데. 어쨌든 친하냐라...."

내 말에 기겁하면서 소매를 붙잡고 늘어지는 노아를 꾹 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친하지."

그래. 나름 친하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두들겨 패 줄 정도로는 말이야.

"슬슬 시간인가?"

아까부터 가다듬던 감각이 점차 선명하게 날이 서는 것이 느껴지자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의 모습.

"준비해라. 노아."

"으, 음?"

"시련 시간이다."

두 번은 없다.

이번 기회로 시련을 끝낸다.

34화 시련 (2)

인류 연합군의 사령관, 하디 엑슬러는 지금 굉장히 머리가 아팠다.

"사령관님! 급보입니다!"

"또 급보군. 시팔. 급보, 또 지긋지긋한 급보야. 빌어 처먹을 급보!"

쾅!

"...."

돌입하는 병사를 목격하자마자 탁상을 소리 나도록 후려치는 사령관의 모습에 부관과 참모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눈을 굴리며 사령관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빠득 갈아붙이는 하디.

"뭐냐. 병사. 이번에는 또 어떤 놈들이 나타났지? 오거? 거인? 아니면 아룡이라도 더 나타났나?"

"그, 그게... 적군의 군영에 죽음의 기사가 합류한 것이 확인되었습...."

"허, 드레이크도 모자라서 이젠 데스나이트라고!"

깊은 탄식을 내뱉은 하디가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잡고 탁상에 고개를 떨구었다. 도무지 보이지 않는 돌파구.

"왜, 왜 이렇게 된 거냐... 왜 이렇게 된 거냐고...."

나직한 자신의 중얼거림에도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것을 느끼며 하디가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황이 참담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 몬스터들이 습격해 온다!

몇 달 전부터 갑작스럽게 대륙 전역에서 준동하기 시작한 몬스터.

그 몬스터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인류는 대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몬스터의 진입을 막는 수호탑이라는 것을 만들고 몬스터들의 진격을 막아 내었다.

처음에는 그 방법이 아주 성공적인 줄 알았다. 대마법사가 요새 이곳저곳을 돌면서 건설한 수호탑은, 수호탑 자체가 건재한 이상 절대로 인간의 영역에 몬스터의 진입을 허가하지 않았으니까.

아인종과는 다르게 강력하더라도 지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 몬스터다. 그러니 얼마나 오던 대마법사가 직접 조직한 수호탑을 깨부수고 인류를 침범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다.

적어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몬스터 군대에 의해 최전방 요새의 수호탑이 부서지기 전까지는.

"여섯 번이다."

"...."

"여섯 번의 전투로 벌써 여섯 명의 지휘관이 죽었고 팔백의 기사, 일만 이천의 병사가 죽었다...!"

요새 여섯 개가 부서진 상황.

평생 지휘권이라고는 잡을 예정이 없었던 하디에게 지휘권이 넘어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내로라하는 명장들은 전부 앞선 전투로 전방 요새에서 폭사하고, 남은 것은 그저 인망 높은 것이 전부인 하디뿐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절망적인 전력 차. 군을 휘감고 있는 열패감.

군략에 그다지 밝지 않은 하디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 군대가 이길 요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병력의 질도, 사기도, 지형도, 날씨도, 심지어 숫자조차도 모자란 상황.

'싸우다, 죽어야 하는가....'

이곳에 모인 이천 남짓의 군대를 전부 소모품으로 사용해서, 그저 하루 정도 종말을 늦추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를 까득 깨문 하디가 서서히 손에 쥔 힘을 풀면서 탄식했다.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

우직!

"...? 이건 무슨 소리."

콰아아앙-!!!

갑작스럽게 일어난 폭발.

스르릉!

"조용히. 한 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이놈 목숨은 없다."

의문을 차마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목덜미에 드리워진 칼날의 서슬 퍼런 감촉에 하디가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배후를 점한 자를 노려보았다. 스물 전후의, 누가 보아도 아직 어리다고 할 만한 애송이 기사의 모습.

"웬... 웬 놈이냐!"

"어. 나는 레이고, 저쪽은 노아. 그리고 여기는 지니스."

갑작스럽게 돌아온 대답에 잠시 멍해진 하디가 고개를 크게 털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물음.

"이름 따위를 물은 게 아니다...! 무슨 일로 이런 짓을 벌이느냐는 것이다!"

침입한 기사도, 마법사도, 하다못해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청년도 인간이다. 아인종의 피가 섞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아군인 것이 분명한 순수한 인간.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어째서 아군의 사령관을 인질로 잡는단 말인가?

"목적을 밝혀라!"

"목적? 아──."

잠시 왜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청년, 레이가 씨익 웃고선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서슬 퍼런 검신의 위로 차갑게 흐르는 달빛.

"당연한 걸 왜 묻냐?"

"...당연하다니, 대체 무슨."

"이곳에 있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류 연합군 제장들은 들어라."

피식 웃음을 터트린 레이가 검신을 조금 더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이제부터 이 지휘부는 우리가 접수한다."

* * *

대략 삼십 분 전.

"...수호탑을 점거해서는 안 된다."

"뭐?"

침중한 얼굴로 시련에 들어온 진은 내게 말했다. 이기고 싶으면 수호탑을 점거해서는 안 된다고.

"이 전장의 설정상 수호탑은 인류의 존망을 결정하는 기물이지."

"어."

"수호탑을 인질로 잡는다는 건 인류의 목숨을 인질로 잡는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뭘 의미하는데?"

"수호탑을 잡는 순간 우리의 명령은 강제가 된다는 것이다. 레이 지크."

말을 내뱉은 진이 부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본디 인간은 복잡한 짐승이다. 정녕 따라야만 하는 명령이라도 이행하는 자의 마음에 따라서 그 능률은 크게 차이나지. 알고 있나?"

"군의 사기에 대한 말이라면 대충은. 억지로 사람을 따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아니냐?"

"맞다. 명령이라는 것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라도 병사가 그걸 납득하고 있는가, 납득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차이가 지극히 거대하다. 군 전체의 사기에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지."

"...."

"수호탑을 인질로 잡는 순간 아군은 우리의 지휘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사기가 떨어진다?"

"정답이다."

고개를 끄덕인 진은 적진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이 군대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떻지?"

"그야... 그냥 부대에 소속된 기사와 마법사지."

"그렇다. 한낱 병사, 혹은 고급 병종에 불과하지. 군에서 환영받을 수는 있지만, 지휘권은 없다. 딱 거기까지."

"그렇지."

"하지만 만약 우리가 수정탑을 습격하게 되면 이런 인식에서도 벗어나 우리는 이 군대에서 '잠재적인 적'이 된다."

"...."

"저들에게 있어 우리의 명령은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으로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최악이나, 차악이나 나쁜 선택인 것은 매한가지.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나쁜 선택을 할 때 결코 적극적일 수 없다. 그 결말이 나쁠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는 것처럼 허망한 건 없으니까.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어. 최대치의 힘을 내기 위해서는 수호탑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구만."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수호탑을 인질로 잡지 않으면 지휘를 잡을 수 없지 않나? 우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던 게 아니잖아."

"으음."

내 이야기에 잠시 침음을 흘리던 진이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이윽고 나직하게 말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법?"

"일단, 이것부터 확실하게 하지. 레이 지크. 이 세계에 여태껏 벌어졌던 전투의 결과가 이어지는 것이 맞나?"

"어, 그 부분은 확인했지."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요컨대 지휘권을 넘겨받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휘권의 이양.

그건 굳이 인질극 같은 멍청한 짓일 이유가 없다. 결국, 병사들이 명령에 진심으로 따르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아군이 전멸해 버린 전투의 결과가 전해진다는 건 그 전투를 목격한 자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

잠시 뜸을 들인 진이 확고하게 말했고.

"우리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 * *

──그렇게.

"나는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 모인 병사들은 들어라."

무너진 천막.

인질로 잡은 지휘관들을 밖으로 꺼내 군영의 중심에 세운 진이 아연실색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치 시를 읊듯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진.

"최초에 몬스터의 습격이 있고서 대륙을 뒤덮은 여섯 개의 왕국과 두 개의 제국은 연합군을 조직했다."

"라플, 제람, 알로스, 트레밀라, 코르텟, 하라크, 잘벤, 오르페."

"이것이 그대들을 이곳에 보내온 단체의 이름이다. 맞는가?"

그간 우리가 알아 온 이 환상 속의 국가들.

그 이름을 쭉 읊는 진의 모습에 병사 중 몇몇이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젓는 진.

"아니다."

"...?"

"그대들을 보낸 것은 왕국과 제국이 아니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병사들을 쭉 둘러본 진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여섯 번."

"몬스터의 습격이 있고 나서 여섯 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일만 이천의 병사가 죽었다. 몬스터의 병력은 최초에 비해서는 줄었으나 결코 그 질이 떨어지지 않았지."

"아마도 이곳에 있는 그대들도 십중팔구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사들이여. 그럼에도 그대들은 이곳에 서 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이 오합지졸 군대의 군율인가? 여기, 우리의 앞에 묶여 고개를 떨구고 있는 지휘관들이 그대들을 이곳에 묶어 놓은 것인가?"

"──아니, 그것조차 틀렸다. 그대들을 얽어맨 말뚝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둘씩.

경계와 적의를 보내던 병사들이 멍하니 진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한다. 명백히 누그러진 적의.

"어제 갓 태어난 젖먹이 막내."

"십수 년을 함께하며 결혼을 약속한 여인. 등골 빠지도록 다섯 자식을 키워 낸 부모. 제 동생을 기사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험한 일을 하다가 팔이 잘린 용병."

"그대들을 얽어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해야만 설 수 있는 이 전장에 서 있는 그대들이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 죽어야만 하는 까닭은 군대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군율 따위가 아니라, 그대들이 지켜야 할 것들의 무게 때문이다."

"병사들이여. 이쯤에서 그대들의 호칭을 다시 정의하겠다."

"그대들은 라플, 제람, 알로스, 트레밀라와 코르텟, 하라크로 정의되는 여섯 왕국의 병사가 아니다."

"그대들은 또한 잘벤과 오르페 제국의 병사들도 아니다. 죽음이 확정된 이 전장에 선 이상 그대들은 죽은 자일 뿐. 살아생전의 경계 따위는 무용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대들을 이렇게 정의하고자 한다."

"인류의 수호병이라고. 그대들이야말로 국경과 인종,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인류를 수호하는 자들이라고!"

물 흐르듯 이어진 진의 외침이 병사들을 덮쳤다.

"여태까지 인류는 몇 번이고 패주했다. 훌륭한 명장도, 제국을 주름잡았던 기사들도 몬스터들이 밀어낸 토사에 묻혀 버렸다. 어째서인가?"

"그들은 살아생전의 이해득실을 따졌기 때문이다. 죽은 자로서 전장에 서지 않았고, 살아남기 위해 전장에 섰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이기기도 전에 스스로의 군대를 온존하고자 방책을 내는 자들.

선봉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자들.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어떻게 되었나!"

전부 죽었다.

"그대들은 인류의 현황을 알고 싶은가?"

"알고 싶다면 알려 주겠다. 우리 인류에게 남은 장벽은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곳이 마지막이다!"

"이곳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를 지키고 있었던 대마법사의 법기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인류를 덮치고 말 것이다!"

"장래에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어린 동생도, 몇 푼 안 되는 돈을 모아 따뜻한 빵을 자식에게 들려주며 나는 따뜻한 빵을 싫어한다고 손사래 치는 노파도, 후방에서 제 연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여식들도!"

"모조리 죽는다. 노예로라도 살아남는 경우는 없다. 내장 한 조각까지 뜯어 먹힐 것이다! 놈들은 인간을 전쟁의 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먹잇감으로 보니까!"

까득 이를 갈아붙이며 외친 진이 목을 긁어 대었다.

"나, 인간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는 오늘 반란을 일으켰다. 어째서인가?"

"그건 우리의 지휘부가 결코 악마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이 잘못했는가? 아니다. 저들은 그저 인간을 갈아 넣어 하나의 화살로 정제할 수 없었을 뿐이다!"

"수호병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허언하지 않겠다. 나는 앞서 죽은 자들보다 유능하지 않다. 그대들을 살려서 돌아간다는 약속 따위는 결코 할 수 없다!"

"수호병들이여!"

"그러나 나는 다시 약속하겠다. 그대들의 갈비뼈 하나, 심장 하나까지도 남기지 않고 몬스터의 목을 찌르는 화살의 촉으로 제련하여 사용하겠노라고! 인정 따위는 모조리 저 버리고, 이곳에서 악귀가 되어 그대들을 이끌겠노라고!"

"우리에게 뒤는 없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자는 어차피 없다. 그렇다면 저 침범자들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

"수호병들이여!"

"그대들의 죽음은 가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대의 따위를 말하지는 않겠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무게를 감당하고자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니까!"

"수호병들이여. 죽어서 나라를 수호하는 자들이여!"

"검과 창을 들어라! 이제부터는 국경도, 나이도, 언어도, 인종도 상관없다!"

이어지는 마지막 선언.

"우리는 오늘, 우리 죽음의 값을 챙긴다-!!!"

절절하게 외친 진이 짧은 말과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함성.

──!!!!!

진의 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합군 전부가 무기를 들어 올리며 고함을 내지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뒷목을 긁었다.

"...."

어.

좀, 너무 몰입하는 거 아닌가?

35화 시련 (3)

"그, 반려여. 황자님이 너무 몰입하신 것 아닌가...?"

"그러게."

환상이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설마 싶어서 급조된 연단 위에서 내려오는 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진이 시선을 느끼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곧이어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진.

"일단, 이걸로 첫 번째 작업은 끝났다. 이제 지휘권을 이양받아도 병사들이 우리 말을 따를 것이다."

"...이양받아도? 아직 이양받은 게 아니라는 뜻이냐?"

"그렇다. 지휘관들이 살아 있지 않나. 이들이 살아 있고, 지휘권의 이양 의사를 밝히지 않은 이상, 우리가 저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럼 죽여야 하는 건가? 아무리 환상이라도 그건 좀 그런데.

"씁. 별수 없지."

스르릉!

"...지금 뭐 하나?"

"어? 죽여야 지휘권을 이양받을 수 있다며."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밧줄로 꽁꽁 묶여 무릎 꿇고 있는 사령관 하디의 목에 칼날을 가까이 들이대며 사령관을 처리할 준비를 하자 눈을 크게 뜬 진이 황급히 나를 뜯어말렸다. 곧이어 말하는 진.

"멍청한 놈! 이곳에 있는 병사만 이천 명이다!"

"...아는데?"

"그걸 아는 자가 그런 짓을 저지르려고 하나! 그 어떤 군대에도 이천 명의 인간을 혼자서 통솔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

"...후우. 쉽게 말해서 병사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지휘관들의 마음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레이 지크."

한숨을 내쉰 진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군대라는 것은 원래 부대와 부대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연합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그야, 뭐."

"이 정도 규모가 되면 사람 한 명이 집단을 전부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군대가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그걸 이행할 수 있는 건 사령관의 명령을 각 부대로 전달하는 부관과 하급 지휘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알고 있나?"

"그것도 뭐, 알지."

"그럼, 여기서 문제다. 갑자기 최상위 명령권자와 상위 명령권자 여럿을 갈아치우면 명령 체계가 어떻게 되겠나? 심지어 그 갈아치운 인력을 대체할 사람도 충분치 않다면?"

"...기분 끝내주겠지?"

"너는 전투가 벌어지면 전장에서 십수 년을 굴러먹은 기사처럼 날뛰더니, 정작 전략의 수준까지 들어오면 얼간이가 되는군. 답은 하나다.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지."

작게 인상을 찡그린 진이 팔짱을 끼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어지는 설명.

"레이 지크. 너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쿠데타로 지휘관을 죽이고 지휘권을 넘겨받는 것은 역사에서 흔한 일인데, 왜 이 경우에만 예외가 되느냐고."

"아니, 별생각 없었는데?"

"...본디 쿠데타라는 것은 이인자, 혹은 삼인자가 일인자를 제치기 위해서 일으키는 것이다. 당연히 주동자는 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이기에 그 구조에 대해서 빠삭하고, 그들이 일인자를 제치고 일인자의 파벌을 숙청한다고 하더라도 대체할 인력 정도는 얼마든지 박아 넣을 수 있다는 말이지. 네 생각처럼 말이다."

"별생각 없었다니까."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다르다. 우리는 이 군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어. 일주일, 어쩌면 보름을 줘도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마당에 삼십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내에 지휘 체계를 바꾼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음, 어떻게 하냐면."

"답은 기존 지휘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 자식, 내 말 들을 생각이 없구만.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지휘관들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이겠지만, 우리의 목적은 권력을 잡는 게 아니다. 우리의 전략을 군 전체에 피로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지휘관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죽여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지휘 체계가 유지될 테니."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풀어라."

"괜찮겠어?"

"괜찮다. 풀어라."

진의 말에 슬쩍 밧줄과 마법으로 묶여 있는 지휘관들을 보다가 노아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곧바로 구속을 푸는 노아.

"네 말대로 풀었다. 교섭은 네가 알아서 해라."

"충분하다."

고개를 끄덕인 진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하고 뒤로 물러섰다. 빤히 진을 바라보던 총사령관 하디가 조용히 일어서고 있었으니까.

"지니스라고 했나."

"그렇소."

"민감한 이야기를 눈앞에서 하더군. 마치 들으라는 듯이 말이야."

"들으라고 한 것이 맞소. 우리가 지휘부를 점령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름을 들으니 귀족인 듯한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경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군. 경의 말을 따라서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지휘권을 무조건 넘겨야만 한다고 말이야."

"그렇소."

"우리가 그리해야 할 이유가 있나?"

썩어도 준치라고, 군략에 밝지 못하더라도 하디는 인망만으로 총사령관으로 추대된 인물.

"있소."

하디의 눈가 어림에서 느껴지는 굳건한 의지에 지니스가 잠시 울적한 눈으로 하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말.

"왜냐하면, 당신들은 이길 전략을 짜낼 수 없기 때문이오."

"...."

도발.

갑작스럽게 면전에서 '너희는 무능하다'라는 말을 내뱉는 진의 모습에 침음을 흘린 하디가 말을 잊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 선 말을 이어 나가는 진.

"전략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수립되는 것이 아니오. 병사들에게 있어 전쟁은 실시간으로 치르는 것이지만, 지휘관들에게 있어 전쟁은 실시간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

"하나 내가 이 군대를 둘러본 바에 따르면 이 군대는 몬스터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소. 그저 인간의 군대를 상대하듯 창의 날을 세우고, 닥쳐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

"당신들은 저 몬스터 무리를 물리칠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소. 내 말이 틀렸소?"

차마 답하지 못하는 하디를 보면서 진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낫소. 이 간단한 이야기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겠지."

"...정론이군."

깊게 한숨을 내쉰 하디가 진의 말을 긍정하고서 나섰다. 곧이어 씁쓸하게 읊조리는 하디.

"그래. 경의 말이 맞다."

"...."

"우리는 패주하고 지쳤지. 우리보다 숱한 전장을 헤치고 지나 온 명장들도 패배한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감조차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알고 있소."

"하지만."

축 늘어졌던 어깨를 바로 세우고 다시금 눈에 힘을 준 하디가 진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병사들을 경의 손아귀에 맡겨도 된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렇지 않나?"

"...."

"실적도 없고, 경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 그저 앞으로 돌격하라는 명령만 내려서 전군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을 신뢰해야 하는가?"

"후."

"...?"

왜. 뭐.

작은 웃음을 흘린 진이 나를 슬쩍 바라보는 모습에 고개를 까딱거리자 알았다는 듯 진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속셈인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진의 모습.

"나도 얼간이는 아니오. 보여 준 것 없이 그대들에게서 지휘권을 빼앗아 갈 생각은 없소."

"...보여 준 것이 있단 말인가?"

"저번 전투. 여섯 번째 전투."

"...?"

"앞의 여섯 번과는 다르게 최초로 수호탑 근처까지 진출한 부대가 있었소. 알고 있소?"

"그야 듣기는 들었... 설마?"

"여기 있는 자가 그 주역이오. 그리고 그 전략을 짜낸 건 나지."

"...음?"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진의 모습에 눈을 깜빡이자 진이 차갑게 웃었다.

"비록 전력이 모자라서 중간에 스러지긴 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확인했소. 지휘권을 넘겨받으면 저 몬스터들의 수호탑까지도 충분히 닿을 가능성이 있소. 이 정도면 충분한 실적 아니오?"

"...믿을 수 없다. 그 격전 중에 살아서 돌아왔다고?"

"믿을 수 없겠지. 그러니 확인해 보아도 좋소. 그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는 우리뿐만이 아닐 텐데."

진의 이야기에 잠시 인상을 찡그리던 하디가 부하를 시켜 병사를 불러왔다. 곧이어 내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

"마, 맞는 것 같습니다! 저분이 그 기사님이 맞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런가."

진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하디가 깊은 숨을 내쉬자 진이 조용히 하디를 직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제대로 된 전략이 없는 것을 알고 있소."

"...으음."

"그대들에게 무언가 전략이 남아 있다면, 저들을 물리칠 전략이 입안되고 있노라면 우리는 여기서 물러나겠소. 그러나."

"...."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전략도 없이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터벅!

앞으로 한 걸음.

상대를 위압하듯 나선 진이 일직선상에 선 하디의 눈을 곧게 바라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지휘권을 넘겨주시오. 우리에겐 아직 시도해 볼 방책이 남아 있으니까."

"...."

잠시간의 정적.

그 정적 끝에 진과 눈싸움을 하듯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던 하디가 한 걸음을 물러서며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퀭한 눈 사이로 돋보이는 체념.

"...젠장. 빌어 처먹을 상황이군."

"...."

"좋아. 지휘권을 넘기겠다. 경을 총사령관 직위에 올리고, 내가 부사령관으로 내려가지."

"사령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조용히!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거냐!"

묶여 있다가 하디의 선언에 풀려난 지휘관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서자 하디가 단호하게 소리쳐 지휘관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서 나직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젊은 지휘관의 말이 맞다."

"...."

"우리는 방법이 없다. 의지도 꺾였지. 우리가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뿐이다. 빠르게 죽느냐, 천천히 죽어 가느냐."

"...그런."

"지휘권을 전부 넘긴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책 같은 것은 이 짧은 시간으로 준비할 수 없어."

삼십 분. 아니, 이십오 분.

그사이에 준비할 수 있는 계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겨루게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야전술(野戰術)의 영역.

"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그 한정적인 전장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모른다."

1%의 확률이라도, 0.1%의 확률이라도 상관없다.

바꾸었을 때 이길 가능성이 실낱만큼이나마 있다면 그에 따라야 한다. 다행히 조금 전의 연설로 병사들의 마음을 다잡고 사기를 끌어 올린 지휘관들이 눈앞에 있다.

"하는 것이 좋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

으르렁거리듯 이를 악물고 선언한 하디가 자신의 어깨에 놓인 총사령관의 견장을 잡아 뜯었다. 곧이어 너덜너덜해진 견장을 진의 어깨에 얹어 주는 하디.

"나, 인류 연합군의 마지막 사령관 하디 엑슬러는 사령관 자리를 사퇴하겠소. 자."

한 호흡을 멈춘 하디가 허리춤에 매달린 지휘봉을 들어 내밀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경이 총사령관이오."

"...."

"새로운 사령관이여. 명령을."

조용히.

지휘봉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진이 눈을 감고 잠시간을 침묵하다가 다시금 눈을 날카롭게 뜨고 지휘봉을 받았다. 그리고.

진이 다시금 입을 여는 순간.

"전군, 현황을 보고하라."

비로소,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년 전 멈추었던 녀석의 투쟁이.

36화 시련 (4)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쪽, 조금 더 구덩이를 파 놔라! 뭐 하나, 공병들!"

"정렬! 정렬!!! 열 맞춰서 못 서나. 얼간이 자식들아-!!!"

"반려여. 반려여."

"음?"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을 어르고 격려하는 하급 장교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한창 준비를 도와주다가 이제야 완료했는지 내게 다가와 눈을 깜빡이는 노아의 모습.

"다 끝났냐? 이것저것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만."

"어려운 건 아니라서 금방 끝났다!"

"그래?"

"그렇다. 그보다 반려여."

"음?"

"황자님이 가지고 있는 비책이라는 게 무엇이냐?"

"비책?"

"그렇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 말을 했었지."

"본 공녀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말이다. 도대체 황자님은 어떤 기발한 방법으로 적을 물리치려는 것이냐?"

어떤 기발한 방법을 사용해서 적을 물리치느냐라.

"음...."

잠시 아까 보았던 진의 표정을 떠올리고선 쓴웃음을 머금었다. 군략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그런 표정을 짓는 녀석의 머릿속이 어떤지는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

"없어."

"...뭐라?"

"없다고. 방책 같은 거."

내가 아는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어떤 방책을 가지고 있더라도 불안에 떠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구 할의 승률을 점칠 수 있더라도 일 할의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건 나도 그렇고, 진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녀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고하게 답했다. 우리에게 방책이 있노라고. 확신이 있는 태도로 답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녀석은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녀석이 배운 대로라면,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누구보다도 확고한 존재여야만 하니까."

계책의 성공률이 의심스럽더라도 일단 한번 시작한 이상, 그 계책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지휘관은 만병(萬兵)의 의지를 대표하며 대행하는 존재이니 스스로의 움직임에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배웠노라 말했던 것이 과거의 녀석이다. 그렇기에 녀석은 이길 확률이 낮은 전투일수록 이긴다고 확신하고는 했지.

그건 일종의 자기 최면에 가까웠다.

우리는 이긴다. 이겨야만 한다. 총사령관이 스스로의 방법에 확신을 갖지 않으면, 병사들도 불안에 떨고 말 테니까.

"방책 같은 게 있다면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할 리가 없지. 그러니까 비책 같은 건 없을 거다. 아마도."

"...그럼, 큰일 난 것 아닌가?"

"뭐,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아."

사색이 된 노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저 멀리 지휘부에 서 있는 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흩날리는 깃발 옆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진.

"저 자식은 천재다."

"...천재?"

"그래. 너와 나보다도 아득히 천재야. 어쩌면 이 인류 전체에서 가장 으뜸가는 천재."

아군 이천 대 적군 삼천? 상대 병력의 질이 우리 아군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가. 150회차의 놈은 삼백의 병사로 사만 명의 적군을 거꾸러트린 적도 있다.

끝의 군세를 맞이해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기를 382번, 그중 승리한 전투는 330번. 그리고, 목표를 이룬 전투는 382번.

물론, 단순히 전술의 영역뿐만이 아니라 전략의 영역까지 조정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녀석의 재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놈은 군략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니까.

"일단 들어가면 어떻게든 된다."

"...정말인가?"

"그래. 애당초 이건 진짜 전장이 아니라 '시련'이잖아. 절대로 깰 수 없는 전력 차이는 만들어지지 않는...?"

번뜩!

말하다가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에 눈을 깜빡였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

"...뭐지?"

"뭐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아니, 방금 뭔가가."

시련. 깰 수 없는 전력 차이. 만들다....

몇 개의 키워드가 머릿속을 떠돈다. 마치 간과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듯 계속 뇌리를 두드리는 무언가.

뭐지. 뭘 놓치고 있지?

"병사들은 모두 진형을 잡아라!"

"아, 드디어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반려여. 우리도 이동해야 한다!"

"...."

"그래도 반려와 함께 싸우니 마음이 편하다. 요 한 달간은 혼자 싸우느라 외로웠...."

"함께...!"

"음?"

"젠장. 그거였어!"

그래.

뭔가 이상할 수밖에 없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으니까.

"...적군의 병력이 달라지지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냐?"

"너 혼자 싸울 때와 내가 들어오고 난 후, 녀석이 들어오고 난 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적 병력 삼천. 우리 병력은 이천.

달라진 것은 없다. 여기서 더 줄어들지도 않았고 더 늘어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병력의 질이 압도적으로 높아진 것도 아니다.

'그건... 말이 안 돼.'

시련의 난이도는 합산이다.

누군가 외부에서 들어왔다면 그만큼 난이도는 늘어난다. 그럼에도 병력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추가된 것은 있다.'

병력 이외의 무언가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추가되었다.

"젠장."

알려 주어야 한다.

"바, 반려여!"

"노아. 잠깐 놔 봐. 진 그 자식한테 말해 줄 게 있어서...."

"그, 그게 아니다!"

욕지거리를 내뱉고 몸을 돌리자 갑작스럽게 노아가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앞을 가리키는 노아의 모습.

"저, 저걸 보아라...!"

"뭘 보라는...."

전방을 가리키는 노아의 손에 나는 조용히 눈을 올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목격하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륵. 그르륵. 그르르륵.

여태껏 어떤 정련된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몬스터 군단이.

"이런 시발...."

오와 열을 맞추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반려여!"

"빌어먹을."

저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몬스터들에게 형과 식이 깃들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지휘관.

단순히 폭력과 공포로 몬스터 군단을 어르는 잔챙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지성을 갖춘... 인간의 지휘관과 같은, '전략'을 구사하는 지휘관.

"돌아가서 전할 필요도 없겠군."

지금쯤 녀석도 깨달았으리라. 이 전장이 결코 우리가 상상하던 것만큼 모호하고 애매하게 돌아가지는 않으리라고.

'진.'

해낼 수 있냐?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지휘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지휘부 앞에 서 있는 진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

녀석이 웃고 있었다.

마치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듯, 아주 진득하게.

* * *

탁 트인 시야.

'누굴 물로 보는 거냐. 레이 지크.'

코끝을 스치는 금속과 흙먼지의 냄새에 저도 모르게 코끝을 찡그린 진이 적군이 몰려오는 전장을 직시했다. 이전의 전장과는 다르게 오와 열을 맞추어 확연하게 군대식 편제를 갖추고 있는 모습들.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알고 있었다.

레이는 지금 눈치챈 모양이지만, 이 전장에 변수가 있으리란 것쯤은 진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변수를 놓쳐서는 좋은 지휘관이 될 수 없으니까.

'노아 루미너스는 마법사고, 레이 지크는 검사다. 그리고 나는... 한 명의 지휘관으로 이 자리에 서 있지.'

한 명의 지휘관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

그것은 이 시련에서 시험받는 것이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임을 뜻한다. 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 적과 전략을 겨루고, 승리해 내야만 이 시련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

'두려워할 것은 없다.'

사실은 승리까지도 필요치 않다.

단 한 번만 비수를 찔러 적의 심부에 닿을 수 있다면 아군이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쪽의 승리로 끝마칠 수 있을 터.

목표가 명확한 싸움.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적.

그만큼 까다로운 것은 없다. 불확실한 것만큼 대응하기 어려운 것은 없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지금 깨졌다. 왜냐하면.

얼굴도, 하물며 손조차도 없이 체스 말을 움직이던 체스판 위에 상대가 올라왔으니까!

"좌익, 궁병을 앞세워 적의 돌격을 유도하라."

"우익. 기사들을 필두로 멀리 돌아라. 혹여 주력이 빠지면 즉시 적의 심부를 꿰뚫을 준비를 하도록."

깃발이 펄럭였다.

'빠르군.'

말을 전하기가 무섭게 명령을 전군으로 전파하는 장교들의 모습을 보고 진이 평가를 내린 뒤 시선을 앞으로 내려 레이와 노아를 바라보았다. 전투 준비를 한 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

'저 둘은... 큰 틀만 잡아 준다.'

저번의 전투를 본 바로, 레이 지크는 전장의 흐름을 피부로 읽는 타입의 기사.

그런 자들은 하나하나 명령을 지정하는 것이 오히려 그 역량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디에서 싸우든 자유롭게 싸우게 하되, 활약할 방향을 지정해 주는 것이 최선일 터.

'목표는 수정탑이다. 굳이 전쟁에서 이길 필요는 없어.'

주군(主軍)은 레이가 위치한 중앙군.

그 중앙을 일직선으로 돌파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펼쳐진 좌익과 우익이 적의 시선을 한없이 끌어 주어야 할 터.

'던져 준다.'

적이 우책이라고 생각할 만한 진영을 던져 줌으로써 행동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이쪽은 중심을 파고든다.

"좌익을 좀 더 펼쳐라. 적 기병대의 먹잇감이 되기 쉽도록."

"예? 하지만...."

"펼쳐라. 죽음의 기사들이 본진에 합류하면 뚫어 내기 힘들다. 잠깐이라도 기병대의 발을 묶는 게 중요하겠지."

전장의 행동 원리를 정한 진이 곧바로 명령을 내리자 머뭇거리던 장교들이 이윽고 명령을 하달했다.

"산개하라-!"

"산개! 산개하라!"

펄럭.

'얼마 남지 않았다.'

짐승의 누린내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천천히, 그러나 군율 있게.

'지금.'

장교들이 휘두르는 깃발 사이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던 진이 타이밍을 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달리기 시작하는 아군과 적군.

-와아아아아아악-!!!!!

-그아아아아아아아-!!!!!

함성과 괴성. 인간과 몬스터.

양쪽이 내지르는 소음이 철극보다 먼저 충돌하고, 내쏜 화살이 서로의 몸통을 꿰뚫었다. 그리고.

'걸렸다!'

이윽고 적군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준 좌익에 죽음의 기사들이 충돌하는 걸 보며 진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됐다! 우익은 지금 당장...!"

죽음의 기사들이 흩어진 좌익을 덮쳤다.

콰득!

우드득!

부서지고, 찢어지는 소리.

"끄아아아악!"

"사, 살려...!"

비명, 목숨 구걸. 그리고 금속음.

"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당장 움직이라고 외치는 이성.

'이건 시련이다.'

환상이다.

'저들은 정말 죽는 것이 아니다. 애당초 실존하지조차 않는 인물이다.'

꿈 같은 것이다. 저들 중 누구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저들이 이곳에서 죽는다고 한들 정말 죽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다.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인데, 분명 버림 패로 사용해도 문제없을 것인데.

어째서.

"우, 우익은...!"

적을 찌르라고 할 수 없는가. 중앙군을 도와 길을 뚫으라고, 그 간단한 말을 할 수 없는가.

"사령관! 어서 지휘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하디의 모습에 멍하니 전장을 바라본 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우익은...."

이 모든 것이 가짜임을 알아도.

"아, 아군을... 구하라...."

진은 아직, 버림을 명할 수 없었다.

37화 대마불사 (1)

이상하다.

-컹! 컹!

"반려, 앞!"

촤아아악!

"경고 안 해 줘도 돼. 마법 시전에 집중해!!!"

"알겠다!"

살갗을 에는 삭풍.

노아를 노리고 앞으로 달려드는 늑대 몬스터를 베어 버리고서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채 호흡을 가다듬고 전장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치열하게 싸우는 병사들과 몬스터들.

-와아아아악!!!

-그르르륵-!!!

아래에서 보기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 그저 평소의, 기억 속에서 봐 왔던 전장과 같다. 그러나.

'길이... 트이지 않아?'

우리의 작전 목표를 생각해 보면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의 수호탑을 찌르는 임무를 맡은 우리가 보는 광경이 평소의 전장과 같아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완성되었다! 반려! 물러나거라! [찬송하는 오로라]!"

콰아앙-!!!

-캬아아아악!!!

마치 물리력을 가진 듯 하늘에서 처박힌 빛의 장벽에 몬스터들이 터져 죽는 것을 일견하고서 슬쩍 뒤로 물러서 노아에게 다가섰다. 재빠르게 수인을 맺느라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노아의 모습.

"노아. 상황이 이상하다."

대강 정리된 주변 전장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노아에게 말을 걸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노아가 눈을 크게 뜨면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어지는 반문.

"무, 무엇이 말이냐?"

"작전대로 되어 가지 않고 있어."

진은 전투에 들어서기 전 노아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투는 오래 끌면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한 전투라고.

시작하자마자 총알같이 우리를 쏘아 내 적의 수호탑에 다다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어떤가?

"계획이 틀어졌다."

길은 열리지 않고, 우리가 속한 본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아는 진의 역량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길을 뚫어 내고 말았을 테니까. 어떤 희생을 감내해서라도 결국 상대의 수정탑까지 향하는 길을 내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변수를 살펴야겠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상황이 긴박한 전장.

지금 지휘부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판단을 마치고 노아를 향해 시선을 보내자 녀석이 내게 의아한 표정을 내보였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이냐? 무슨 할 말이라도...."

"노아, 혹시 나를 하늘 위로 띄울 수 있냐? 전장의 전세를 살피고 싶은데."

"음? 앗, 부유 마법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노아가 고개를 젓고서 빠르게 다다다 말을 쏘아 내었다.

"보, 본 공녀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유 마법은 아직 어렵다! 애초에 학파가 다르고, 광휘마탑은 부유 마법을 조금 나중에 익히는 편이라...!"

"된다, 안 된다만 빠르게!"

"안 된다!"

"빌어먹을. 별수 없군."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현 전황을 제대로 살필 수 있을까.

"쓰으읍."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내 모습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노아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이윽고 내게 묻는 노아.

"...위로 띄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응?"

"반려를 하늘 위로 띄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고 말했다!"

"어, 되긴 하는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부유 마법을 제외하고도 나를 하늘 위로 띄울 방법이 있다고? 이 혼란한 전장 속에서?

"성공률은?"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다. 반, 반 정도...."

"그럼 해."

"반려가 다칠 수도 있는데...."

"괜찮아. 나는 네가 뭔 짓을 해도 안 다칠 테니까, 해."

"...믿겠다."

내 말에 확신을 얻은 듯 깊게 심호흡한 노아가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 땅에 손을 얹었다. 순식간에 수인을 맺으며 마법을 완성해 가는 노아의 모습.

구구구구궁-!!!

마나가 떨렸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진언.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이 빠르게 그려지는 법진.

상궤를 벗어난 마법의 행사에 마나가 쏠리며 허공이 공백으로 메워졌다. 수많은 생명의 사멸로 인해 풍부해진 마나가 수인으로 빨려 들어가 공허를 만들고, 다시금 들어찬 마나가 소용돌이처럼 노아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이런 전조 증상을 보이는 마법은 흔치 않았다. 그리고 개중에서 노아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단 하나.

"대마법."

[밀라의 망치].

'이 상황에서?'

[밀라의 망치]는 전장을 초토화시키는 대마법.

명칭답게 그 마법에는 사람을 띄우는 효과 따윈 없었다. 적을 잘 압축된 육포로 만들어 버리는 효과라면 모를까, 사람을 띄우는 마법으로 사용하긴 힘들 터.

잘못된 선택이다. 노아에 대해서 모르는 누구나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

나는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아는 척을 할 생각도 없다.

노아가 그렇다고 했으면 그런 것이다. 나는 그저 준비만 갖추고 있으면 될 터.

"준비하거라. 반려여!"

[밀라의 망치]!

외침. 마법의 전조.

그 소리가 귓가를 찢기 전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기겁하면서 다리에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역전개(逆展開)-!!!"

노아가 수인을 강하게 비튼 다음 순간, 생겨난 망치가 내 몸을 후려갈겼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

"잠깐, 이런 십...!"

땅속에서, 하늘로.

콰아아아아앙-!!!!!

치솟는다.

다리에 두른 오러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마법의 충격이 나를 전장의 수십 미터 상공으로 띄워 올렸다. 뇌가 뒤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

까득!

'먼저 말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를 악물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시야를 아래로 내렸다. 떨어지는 건 나중의 일이다. 일단 지금은 전장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때.

치솟는 몸이 바람의 저항을 받아 서서히 멈췄다.

'지금!'

여력을 모두 해소해 버린 뒤 정점에 도달하는 즉시 전장의 상황을 바라보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전장의 광경.

"...아."

그런가.

...결국, 그렇게 된 건가.

쐐애애애액!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몸.

콰아앙-!!! 쿠당탕탕!

기묘한 부유감 속에서 오러를 끌어 올려 다가오는 지면을 향해 후려쳐 힘을 상쇄하고서 흙먼지와 함께 지면을 굴렀다. 곧바로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노아.

"반려! 괜찮은가!"

"...야. 그런 식으로 띄울 거면 말이라도 좀 해 줬으면 어디가 덧나냐?"

"아! 그, 그게. 깜빡했다...."

"그래. 뭐, 결과가 좋으니까 넘어가자."

온몸이 욱신거리고, 내장이 뒤흔들리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이런 충격이야 전장을 떠돌다 보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그것보다 중요한 건 하나다. 내가 위에 올라가서 보았던 것.

"병력이 너무 많아."

"...적 병력이 말인가?"

"아니."

우리 병력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게 뭔가 문제가 되는 것인가?"

"문제가 되지."

전투가 개시된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천 명의 군세가 삼천 명의 군세와 맞붙었다. 그것도 공성전이나 지형의 이점을 발휘한 전투가 아니라 평야에서.

결코 피해가 없을 수 없는 환경이다. 수호탑까지의 길을 뚫으려면 그만큼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야만 하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면 또다시 병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소모된 병력이 적다. 혹은 없다. 그게 뭘 의미하겠냐?"

"...싸우지 않았다?"

"그래."

싸움을 최소화하고 있다. 방어적으로, 그저 시간을 버티고 있다.

'어째서?'

그건 애초 계획처럼 적극적으로 싸우는 환경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시간을 버틸수록 우리는 불리해지고, 전투를 피할수록 안 좋은 국면에서 싸우게 되니까.

'어째서.'

어째서 진은 이런 악수를 두었는가. 스스로 말한 것을 행하지 못하고, 그저 전투를 피하는 것에 급급한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짐작할 수 있다. 나도 그와 같았으니까.

한낱 환상 따위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경험이 있으니까.

"노아. 위에서 본 바로 우리 군은 스스로 뒤로 물러나고 있다."

"...이곳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

"그래. 본대는 정상적으로 싸우고 있으니까. 하지만 좌익과 우익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상황이야."

두 날개가 충돌을 피하고 있다.

전선이 천천히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대로 가면 부담은 점차 중앙에 가중되고, 이윽고 뚫려 버리고 말겠지.

원래라면 그렇게 되기 전에 좌익과 우익을 소모해서라도 어떻게든 길을 뚫어야만 한다. 하지만.

"짐작이지만, 아마도 지금의 저 녀석에게는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버림 패를 사용하지 못한다.

이것이 환상임을 이성으로 알고 있음에도 녀석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자신의 전략으로 인해 단 한 명이라도 죽는 것이 두려워 뒤로 물러서는 데 급급할 뿐.

"우리가 해야 한다."

"뭘... 말이냐?"

"이 상황을 뒤집는 것."

저 얼간이 자식이 주저앉아 있는 동안, 노아와 나.

우리 둘이서 해내야만 했다.

"노아. 혹시 성량 증폭 마법은 배웠냐?"

"그야 배우긴 배웠다. 하지만 증폭 마법이 필요하겠느냐? 반려는 오러를 사용해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않느냐."

"필요해. 그걸로는 모자라니까."

딱 한 번.

한마디면 족했다.

"말할 게 있어."

수천 명이 내뱉는 함성, 수천 마리가 내뱉는 괴성.

전장을 메우는 금속성과 파육음을 뚫고 다시 수백, 수천 미터의 거리를 넘어 나는 전해야만 한다. 무엇도 극복하지 못한 녀석에게도 아직 하나의 방법이 남아 있음을.

"걸어 줘."

촤아아악!

"...알았다."

어느새 전열을 뚫고 도달한 몬스터 하나를 베며 말하자 긴장한 모양인지 목울대를 꿀꺽 하고 넘긴 노아가 잠시 진언을 중얼중얼 읊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노아의 손끝에서 흘러나와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싸는 마나의 움직임.

"[천상의 전언]."

마법이 자리를 잡자.

"아, 아."

난 잠깐 목소리를 내어 성량을 감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만으로는 모자라지만, 오러까지 더한다면 어떻게든 가능할 터.

"노아. 귀 막아."

"알겠다!"

스으읍. 하고.

들이쉰 호흡이 폐부로 들이차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수호탑 근처 어딘가에서 손을 떨면서 지휘를 하고 있을 겁쟁이를 향해. 그리고.

"...아군의 지휘를 잡고 있는 얼간이는 들어라-!!!"

다음. 내가 폐부에 담긴 공기를 그대로 내뱉는 순간.

"여기다!"

소음이 전장을 찢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잠깐의 정적.

전장을 가로질러 전달한 메시지에 충격에 대비한 채 귀를 마력으로 보호하고 있던 노아가 몸을 휘청였다. 곧이어 마법을 해제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노아.

"...반려여. 갑자기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냐니?"

"무슨 전략을 논하고자 하는 것 아니었느냐? 이 상황에서 갑자기 이상한 말을...."

"전략은 내놓았어."

"...음?"

아마 전해졌을 것이다. 천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도 놈에게 직관적으로 닿을 만한 한마디였을 테니까.

스르릉!

"됐어."

방법은 제시했다. 이제 남은 건 역할을 다하는 것뿐.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아를 보고 피식 웃은 뒤 검을 뽑고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죽을 각오로 버텨 보자."

살갗을 저미는 듯한 피 냄새.

전장이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38화 대마불사 (2)

'안 돼.'

안 된다.

'안 돼....'

이래서는 안 된다.

──!!!

함성.

귓가가 먹먹하도록 소리를 지르며 깃발을 휘둘러 대는 장교들의 모습에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 진이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축 늘어져 끄트머리를 부르르 떨고 있는 지휘봉의 모습.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들림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 ──!"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기계적으로 명령을 내린 진이 눈앞에 펼쳐진 전장을 바라보면서 흠칫 몸을 떨었다. 끔찍한 기억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니까.

-진. 공부는 잘되어 가니?

-아, 작은 어머님!

그건 먼 옛적. 진이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적의 기억.

-이제 실전도 겪어 봐야지?

피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진을 제 자식처럼 아꼈던 이황비, 세프리 황비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진에게 제의했다. 몬스터 토벌을 지휘해 볼 생각이 없냐고.

아홉 살 먹은 아이에게 지휘를 맡기는 것.

원래라면 말도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상황이 굉장히 공교로웠다. 수도 인근에서 발생한 몬스터 무리의 규모는 제대로 전력을 갖춘다면 누가 지휘하든 피해를 입을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해 볼래요!

-그럼, 같이 가자.

모든 것이 빠르게 준비되었다.

제4 근위 기사단의 정예들. 그리고 한때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 신분이었던 세프리 황비의 동행.

황자 간의 대우에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황제의 엄명이 있었던 만큼 제국의 상층부는 진의 경험을 쌓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혹시라도 더 있을지 모르는 몬스터들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고위 마법사를 동행시켰고, 그 지형에 빠삭한 길잡이를 붙여 주어 지형의 파악을 용이하게 했다.

실패할 리가 없는 토벌.

아홉 살이라지만, 애당초 군략에 재능을 보이고 있었던 진은 당연하게도 어렵지 않게 몬스터 무리를 토벌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아... 안타깝습니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요.

-네? 프레디온 경. 무슨 시간을 말하시는....

-별건 아니고, 이런 겁니다. [프레디온의 지옥화염].

돌아오는 길에 황궁에서부터 동행했던 고위 마법사가, 아군에게 대마법을 갈기기 전까지는.

-끄아아아악-!!!

대마법이 밀어닥쳐 채 대응하지 못한 제4 근위 기사단의 절반을 녹였다.

대응에 성공한 절반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오러를 뽑아내며 들이닥쳤으니까.

-황자를 죽여라!

-황자님을 살려야 한다-!!!

벌어진 추격전. 몇 번이나 따라잡힌 아군.

-삼황자님, 제가 목숨을 바쳐 길을 열겠습니다!

-아, 안 돼...! 가면 죽어요! 로클 경! 안 돼요!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황자님! 저희 모두가 죽더라도 당신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저를 버림 패로 쓰십시오!

막다른 길에 몰릴 때마다 버림패를 자처하고 나서는 기사들.

한번 앞으로 나선 기사는 다음번 적군과의 조우에 몸을 잃고 머리만 남아 아군에게 돌아왔고,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기사들은 버림 패를 자처했다. 그들에게 있어 황자의 목숨은 기사단 전체와도 맞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피로써 연 길에 절규로 걸음을 내디딘다.

한 명, 두 명, 세 명.

-황자님. 명령을.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열 명이 죽고, 쉰 명이 죽어 나가고, 채 황비를 포함해 채 다섯 명도 되지 않는 기사가 남았다. 그리고 그때 도착한 원군.

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악몽 같은 한때가 지나갔노라고, 그렇게 여겼다.

-진-!!!

푸우우욱-!!!

...진을 쭉 호위하던 호위 기사가 검을 제 주군에게 찌르고.

그 검을 황비가 대신 맞아 숨을 거둘 때까지만.

-작은어머님! 어머님...!!!

훗날.

밝혀진 전말에서 진은 세프리 황비의 죽음이 계획에 없었음을 알았다. 계획을 획책하고 마법사와 기사를 잠입시켰던 적국은 황비를 살리고 황자를 죽임으로써 제국의 분열을 노렸고, 그 시나리오에서 죽어야만 하는 것은 황자뿐이었으니까.

자신이 먼저 죽었더라면.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더라면.

그렇다면 거기에 있는 어떤 기사도 죽을 일은 없었으리라. 제국은 분열할지언정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죽지 않았을 터.

-나 때문에... 모두 죽었다고...?

훗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당장 사람의 목숨을 내던진다.

"수비 대형으로... 수비 대형으로...!"

환상임에도 버림 패를 명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자신의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죽는다.'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죽는다.

'죽는다.'

기사들처럼 목만 돌아올지도 모르고, 육편이 되어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전부, 죽는다.'

필요불가결한 희생.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할 일.

그것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반드시 죽고 말리란 것을 알기 때문에.

'안 돼.'

방어 태세로. 방어 태세로. 방어 태세로.

'이대로라면 패배한다.'

파멸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저 당장의 피해를 막아 내기 위해 소극적으로 명령을 내린 진이 닥쳐오는 미래를 느끼곤 자괴감에 지휘봉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전군."

이윽고.

"퇴각 준비를...."

자포자기한 진이 지휘봉을 늘어트린 채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아군의 지휘를 잡고 있는 얼간이는 들어라-!!!"

전장을 가로지르고서.

익숙한 목소리가 진의 귀청을 때렸다.

"여기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침묵.

잠시간 전장을 메운 거대한 고함에 싸움이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병사들.

"방금 그 목소리는... 아까 그 청년인가?"

"...."

"무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아니다.

하디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부정한 진이 눈을 부릅떴다. 전장의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레이의 말을, 진만큼은 이해했으니까.

'시련은 거짓이며 환상이다.'

이들에게 있어 시련은 실제와 같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시련은 거짓.

'시련을 실패하는 조건은 둘이다.'

수정탑을 파괴당하거나, 혹은 도저히 죽음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시련을 실패할 경우, 해당 시련은 리셋된다.'

리셋.

시련 안에서 입은 어떤 부상도 유지되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더욱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

시련자, 레이와 노아.

"...있다."

"음? 방금 뭐라고 하였...."

"있다...!"

있다. 명령을 내려도, 어떤 전장을 구성하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버림 패가.

그건 희미한 가능성이다. 퇴로밖에 없는 절벽에 매달린 다 끊어지기 직전의 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을 논하고자 한다면 멍청한 짓이라고 말할 것이고, 전술을 논하고자 한다면 얼간이 같은 책략이라고 할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책으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의 피해는 최대화하는 것이 전략 아닌가.

그러나.

'이 길밖에 없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다가, 이제 막 하나의 패가 생겼다.

그렇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전략을 수정해야만 한다.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 봐야만 한다.

쾅!

"무, 무엇인가!"

갑작스럽게 탁상을 주먹으로 후려치는 진의 행태에 깜짝 놀란 하디가 진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하는 진.

"시간."

"...시간?"

"3분만 대신 지휘하며 시간을 벌어 주시오. 하디 사령관."

생각하자.

"아니, 그게 무슨...!"

"부탁하겠소!"

"이런 빌어먹을...! 장교! 우군을...!"

하디에게 강제로 지휘권을 떠맡기고 생각에 몰입한 진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희박한 가능성을 잡아 내기 위해서.

'목표 과제는 하나다. 적의 수호탑까지 도달하는 것.'

전력의 비율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열세에 있는 상황.

사전 준비 시간이 없었던 이상, 이 상황에서 적을 전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호탑을 파괴하는 것만이 방법일 터.

'어떤 부대든, 수호탑까지 거리를 뚫으려면 희생이 불가피하다.'

누군가 나서서 이목을 끌어 주어야만 한다. 버림 패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꺼낼 수 있는 패는 하나.

이것만을 사용해서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만 한다.

'어떻게?'

머릿속에서 명멸하는 수백 가지의 계책.

소거법으로 사용할 수 없는 계책들이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지워져 나가는 것에 진이 이를 악물었다. 성공률이 높은 것부터 낮은 것까지, 가리지 않고 모든 계책이 흩어져 가는 모습.

'안 된다.'

이 계책도, 저 계책도 가능성이 없다.

'이 수밖에 없나....'

변수 투성이.

모든 가능성을 지우고 남은 단 하나의 계책에 진이 헛웃음을 터트리고 조용히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되었소. 이제 내가 다시 지휘하겠소."

"...무슨 계책이 있긴 한 것인가! 아까부터 계속 물러서기만...!"

"이제는 그럴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끄응!"

담담하게 말하는 진의 모습에 잠깐 인상을 찡그린 하디가 지휘권을 넘겼다. 그리고 지휘권을 넘겨받는 순간 지휘를 시작하는 진.

"좌익에 전달하라, 수비 태세로."

"아직도 수비 태세를...!"

"적의 공세를 막아 내며 좌측으로 퍼진다."

"...?"

"우익. 좌익을 돕는 것을 관두고 적의 공격을 피해 산개하라."

상궤를 벗어난 전략.

"...제정신인가?"

"지극히 제정신이오. 이행하시오."

본대와 붙어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양군을 떼어 내 본대의 고립을 유도하는 진을 보면서 하디가 이를 빠득 갈아붙였다. 그러나 그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똑바로 전장을 직시하는 진.

'도박수밖에 없다.'

전략가로서 가장 멍청한 짓은 무엇인가.

그건 변수에 기대고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군단의 힘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일개인의 힘을 믿고 전략을 짜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짓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원래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겠지.'

과거의 진은 그랬다. 변수를 잘라 내고, 승리의 결과만을 남기는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전략의 기본조차 트라우마로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은 어떤 놈인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무능한 지휘관이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장교보다도, 그 어떤 지휘관보다도 무능한 자.

그리고 이 세상에는 그런 지휘관이 쓸 수 있는 전략도 존재했다.

단지 믿는 것.

상대가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지는, 단 하나의 수.

"기사, 레이 지크의 부대를 제외한 중군 전체에 고한다."

"...."

전투가 개시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중앙군에 명령을 하달하려는 사령관의 모습에 장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면서 진이 억지로 담담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길을."

다음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얼어붙었다. 왜냐하면.

"아군의 수호탑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라."

진이 적에게 내던진 미끼의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했으니까.

39화 대마불사 (3)

무릇 전략이나 전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청야전술이나 전면전, 혹은 다른 여타 전략 등.

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적의 피해를 강요하는 전략은 그 효과가 높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아무래도 피해까지 입어 가면서 입안하는 전략의 효과가 높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니까.

그러나 세상만사는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

가끔 전장을 휘돌다 보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것을 넘어, 뼈를 주고 뼈를 취해야만 할 때가 있다. 마치 지금과 같은 상황처럼. 그리고.

나는 비록 기억에 불과하지만, 그 국면을 이 세상 누구보다 많이 겪어 온 인간이다.

"스으으읍."

...즉, 이 상황을 나보다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지.

"반려! 병사들이...!"

"진정해. 전략이니까."

"전략?"

명령을 받고 썰물처럼 빠지는 병사들을 바라본 노아가 황급히 나를 향해 소리치는 것을 느끼고서 손을 뻗어 노아의 목덜미를 쿡 찔렀다. 마치 달팽이가 사람의 손에 닿은 것처럼 움찔하고 움츠러드는 노아.

"갑자기 길을 트는 것이 무슨 전략이라는 말이냐? 본 공녀는 잘 모르겠다...."

"간단한 이야기지. 적의 목표는 뭐냐?"

"...목표? 그야, 인간을 전부 죽이는 것 아닌가."

"그래. 원래라면 그렇지. 상대는 몬스터니까."

몬스터 군단이 진군하는 이유.

그건 인간들을 제 먹이로 삼기 위해서고, 이 대륙에서 인간을 지워 버리기 위함이었다. 수정탑을 부수는 건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일 뿐.

시련의 등장인물인 저들에게 있어 이건 환상이 아닌 현실이고, 현실이기에 몬스터들은 눈앞의 인간을 덮치지 않고 수정탑을 습격하는 일 따위 벌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지휘를 받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지."

"...지휘?"

"그래. 이번에는 전과 조금 다르잖아."

적에게 지휘관이 있다. 그리고 그 지휘관은 전략을 수행할 정도로 지성이 뛰어난 존재고.

그런 존재가 수정탑의 가치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인간들이 수정탑을 왜 지키고자 하고, 수정탑이 부서지는 순간 인간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를 리가 없을 터.

"지금 저들의 최우선 목표는 인간을 몰살시키는 게 아니라 수정탑을 파괴하는 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냐?"

"...뭘 의미하는 것이냐?"

"반대로 우리 수정탑을 드러내면 최고의 미끼로 써먹을 수 있다는 뜻이지."

수정탑만 부수면 이긴다. 그런데 수정탑의 방어가 취약하다?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유인책이다. 전략에 밝지 않은 나까지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파악하기 쉬운 유인책.

적의 지휘관은 고민하겠지. 저것이 함정임을 알면서도 들어가야만 하는가. 중앙을 노려야만 하는가.

하지만.

"결국엔 물 수밖에 없어."

상대가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걸려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걸 수 있는 수작질이 얼마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말하자면 진은 적의 지휘관에게 이렇게 제안한 거야. '너희가 패배할 수 있는 조막만 한 확률을 걱정해서 이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놓칠 거냐?'라고."

"그, 그게 좋은 전략인가?"

"아니. 쓰레기 같은 전략이지."

"...쓰레기?"

"그래."

이건 오로지 옅은 방어선의 역량에 따라 좌우되는 전략.

적에게 '비었다'라는 생각을 심어 주려면 방어선이 두터워서는 안 됐다. 이 얇은 방어선을 적에게 뚫리지 않도록 버텨야만 했다.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우리 쪽의 승률은 올라간다. 하지만 오래 버티기 힘들 정도의 전력을 유지해야 해. 정말 쓰레기 같은 전략 아니냐?"

"...그럼, 큰일 난 것 아닌가!"

"아니."

쓰레기 같은 전략이라도 일단 전략이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해 봐야지."

버림 패로 쓰라고 자신 있게 말했으니, 그 정도 역량은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준비해. 슬슬 저쪽에서도 파악한 것 같다."

쿵!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하는 부대.

갑작스럽게 빠진 부대의 움직임에 함정일까 들어오는 것을 망설이던 몬스터들이 명령을 받고 이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것을 모조리 부숴 버리겠다는 듯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들.

"저걸 둘이서 막는 건가...?!"

"설마."

아무리 그래도 최소 수백의 몬스터 무리를 둘이서 막을 수는 없지.

'슬슬 때가 됐는데.'

캬아아아악!

사색이 된 노아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검을 앞으로 내밀자 어느덧 눈앞까지 닥쳐온 몬스터들이 이빨과 손톱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울려 퍼지는 둔중한 파열음.

꾸드드득!

고개를 든 고블린이 지면에 처박히고, 재생력 높은 트롤의 몸체가 반쪽으로 갈라졌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몬스터들의 전열이 그대로 뭉개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느새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모습.

"제2 연합 기사단장 파로스 외 49명, 명을 받아 수호탑의 수호를 위해 왔다. 귀관의 지휘를 바란다."

오십 명의 기사라. 기사 전력의 절반인가.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런 애송이 기사의 지휘를 받으셔도."

"자존심이나 의심 따위가 필요한가? 전쟁에 나선 기사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따를 뿐."

충직하기 짝이 없는 기사의 대답에 피식 웃고선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내밀어 오러를 뽑아내었다. 붉은 달의 빛을 받아 창백하면서도 교교하게 흐르는 오러의 빛.

"목표 과제는 하나입니다. 이곳에 있는 아군과 적군이 뼛조각 한 점 남김없이 죽을 때까지 버티는 것."

"...어떻게 싸우라는 말은 없나?"

"적이 단 하나라도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알아서 잘."

합을 맞추어 본 경험은 없었다. 이들에게 내가 싸우는 방식에 따라오라고 해도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원 없이 싸울 수 있게 해 드릴 테니."

내가 맞춘다.

나는 만 가지 전투 방식에 모조리 대응할 수 있으니까.

"...알았다. 기사단! 전투 준비!"

흠.

'역량은 근위 기사단 이하. 귀족의 개인 기사단 정도...?'

아무리 환상이라지만 명색이 인류 최후의 기사단인데, 그런 것치고는 좀 너무 약하지 않나.

'상관없겠지.'

뭐, 버틸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오오오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대형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나는 조용히 검을 늘어트렸다. 동시에 검신을 타고 흐르는 오러.

"노아. 마법 준비해 놔라."

"알겠다!"

퉁! 촤아아악!

한 번의 도약으로 적의 선두에서 맹렬히 달려오는 몬스터의 다리를 잘라 내면서 빙긋 웃었다.

"어디 한번 뒈질 때까지 버텨 보자고."

이제, 일할 시간이었다.

* * *

부사령관 하디는 지금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사령관."

"왜 부르시오."

"정녕 저자의 나이가 열아홉이 맞는가?"

열아홉치고는 지나치게 잘 싸우지 않는가.

"틀림없는 열아홉이오."

본대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시선을 못 박고서 움직이지 못하는 하디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머금은 진이 하디의 시선 끝을 바라보았다. 검에서 오러를 줄줄이 뿜은 레이가 날뛰고 있었으니까.

'몰락한 천재라고 했던가.'

진짜 천재에게 패배한 가짜 천재. 몰락해 버린 천재.

그런 수식어가 레이에게 붙어 있었던 것을 진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유명하기도 했고, 비슷한 처지라서 기억에 더 잘 남았기 때문일까.

한때 제국을 주름잡았던 천재는 작은 검귀라고 불리는 소녀에게 패배하고 나서 그 빛을 잃고 4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검을 놓았다. 그 탓에 제국 사교계 누구도 레이를 주목하지 않았지.

돌아온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검을 다시 잡는다고 한들, 이제는 뒤쳐져 버렸을 뿐이다.

오랜 시간을 낭비한 레이에게 제국이 내린 평가는 그랬고, 진 역시 레이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장으로 보내야 할 어린 시절의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디메리트였고, 레이의 재능은 그 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하진 않은 듯했으니까.

그러나.

정녕 4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이 그렇게 거대하다면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놀랍군...."

저돌적으로 몰아쳤다가 낙엽처럼 흩어지고, 폭풍처럼 들이닥쳤다가 안개비처럼 무너진다.

마치 한 사람의 몸에 수십 명의 검사가 들어가 있는 듯했다. 그 하나하나의 경지가 압도적으로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모든 검술을 적재적소에 때려 박는 모습.

무력적으로는 기사단장보다 낮을 레이의 몸이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판도를 바꿔 갔다.

그건 사람을 살리는 검일 때도 있고, 적을 베어 내는 검일 때도 있었다. 튕겨 내고 흘리는가 하면. 찢어 내고, 부수고, 가르며 밀어내는 레이의 검.

"저것이, 재능인가...?"

"재능 따위라고 폄하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저건 재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아마 저것은 흔적이리라.

이 검이라면, 이런 검이라면 다시 검을 잡고 벽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숱한 고민의 흔적.

'강인하기 짝이 없군.'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자신의 기억과 마주하지 못해 이런 편법을 사용해야 하는 자신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어, 어어...!"

진이 스스로 자조하는 사이 전장을 지켜보고 있던 하급 장교들이 점차 바뀌는 전장의 판세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이어 터져 나오는 외침.

"뚫렸다!"

중앙을 제외하고 적군으로 가득 메워져 있던 시야가 탁 트이는 것을 확인하면서 하디가 탄성을 내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일제히 중앙으로 몰려들고 있는 적군의 모습.

"사령관. 정말 버틸 수 있나?"

"버틸 수 없으면 어떻게 하겠소. 지금이라도 군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건 그렇군."

"버틸 것이오."

버텨야만 하니까. 버틸 것이다.

그렇게 되뇐 진이 전장의 상황을 눈으로 직시하면서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적 지휘관이 자신의 계획대로 미끼를 물어 준 이상, 무슨 짓을 해서든 적의 수호탑을 뚫어 내야만 했으니까.

'적의 수호탑을 뚫어 내야 한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남은 기사전력과 기마병들을 이용해 일점돌파하여 적의 수비를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수호탑을 향해 뚫어 내는 방법.

성공할 수 있는 경우 시간이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적의 지휘관도 머저리가 아니다. 아마 이쪽의 의도는 읽고 있을 터.'

아무리 큰 미끼를 던졌더라도 수호탑의 수비 병력까지 모조리 빼내서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견고한 상대의 수비를 생각해 보면 확률은 지극히 낮겠지.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인가.'

보병과 기병을 섞어서 천천히 상대를 압박하고, 야전술로 승부를 보는 것.

"보병 먼저 전진시키겠소."

"...괜찮겠나? 늦을 수도 있네만...."

"애써 벌어 준 시간이오. 조급하게 나갔다가 말아먹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소."

승부를 던졌다면 나머지 선에서는 변수를 계속 줄여 나가야 했다.

"확실하게 나가겠소. 일단 보병부터...."

그렇게 판단한 진이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전장의 땅이 들썩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보고.

"전방에 새로운 적 부대 출현-!!!"

"...병종은?"

"벼, 병종은!"

시력이 좋은 병사가 적병을 바라보다가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다.

"거인병! 거인병입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세계관인가.

"거인족은 몬스터도 아니지 않나...."

이곳에서 나가면 노아 루미너스에게 상식 공부를 권해야겠다.

"믿기로 했으면, 끝까지 믿는 수밖에 없겠지."

잘 버텨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한숨을 깊게 내쉬며 전장을 바라보던 진이 조용히 눈빛을 가라앉혔다.

"작전 변경은 없다. 속행하도록."

이젠 더 이상 바꿀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