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대마불사 (4)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여긴, 제정신이 아니다.
"노아! 넌 나가면 상식 교육이다!!!"
"보, 본 공녀의 상식이 어떻다고 그러는 것이냐!"
"지금 선량한 거인족을 몬스터로 등장시켜 놓고 그걸 말이라고 해! 여기 네 상상이 만든 공간이잖아!!!"
거인족이 몬스터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이런 광경이 나온단 말인가!
'나름 제 사회를 가지고 있는 트롤이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카아앙-!!!
발끈하는 노아의 목소리에 대답하면서 내 허리만 한 두께의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인족의 공격을 흘려 낸 뒤 녀석의 오금을 베었다. 오러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를 반쯤 가르다가 멈추는 공격.
"반려여! 위험하다!"
"알고 있어-!!!"
까득.
이를 악물고 오러를 한계까지 끌어내 거인족의 오금에 박힌 검을 빼낸 뒤 몸을 굴리자 곧바로 내가 있던 곳에 공격이 떨어졌다. 한 치도 방심할 수 없는 전장의 모습.
'거인족은 강하다.'
인간이 커다래진 모습을 하고 있는 종족. 거인족.
거대화한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 특성이 인간과 같지는 않았다. 말도 통하고 인간종과 나름 잘 지냈으나 육체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니까.
선천적으로 마나에 대한 저항력이 온몸에 깃들어 있는 거인족은 오러나 마법 따위를 사용하지는 못하는 대신, 막대한 항마력을 바탕으로 기사와 마법사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 내고도 멀쩡한 몸뚱이를 가졌다. 어디 그뿐인가?
맨손으로도 바위를 뽑아 던질 수 있는 근력. 좀처럼 지치지 않는 지구력. 선천적으로 고통에 둔감한 종족 특성까지.
거인족은 전사로서 살기 위해 태어난 종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150회차에선 거인족 병사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
전장에서 아군으로 맞이하고 싶은 종족을 꼽으면 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거인족이었다. 그 든든함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중요한 건, 그 든든한 존재가 지금 적군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오오오-!!!
까아앙-!!!
"크윽...!"
"머리 숙여!"
무너지는 일각.
거인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 낸 기사가 충격에 휘청이는 것을 보고 곧바로 도약해 검신을 뻗었다. 동시에 검신에 깃드는 황금색의 마나.
"[갈래빛의 강타]-!!!"
노아의 부여에 의해 검에 깃든 빛이 물리력을 가지고 거인을 밀어낸다. 거대한 힘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균형을 무너트리는 한 방.
-그오오오오! 그아아아아!
"마무리는 우리가 하겠네!"
엉덩방아를 찧고 짐승처럼 울부짖은 거인족이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사냥당하는 것을 지켜보고서 뒤로 물러섰다. 두 명의 거인병을 처리했지만, 아직도 거인병은 이십 채 넘게 남아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반려여. 상황은 좀 어떤가!"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래도 대답해 주자면 최악이지."
"최악...."
"어. 아주 최악이야."
아군의 현황은 나와 함께 남은 우리 부대 병사 이백 명과 기사 오십 명. 몰려든 몬스터는 대강 잡아도 한 천오백 마리 정도 될까.
252명 대 1,500마리.
딱 봐도 야전에서 막아 내는 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병력 차이를 어떻게든 기사단과 노아, 그리고 내 분전으로 틀어막고 있었던 상황인데, 상대에게 고급 병종이 추가된 상황이다. 하물며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건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죽음의 기사가 분명할 터.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원래 데스나이트도 몬스터는 아닌데...."
"나,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네크로맨시 학파의 마법을 듣지는 않았지만, 결코 사악한 학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노라! 본 공녀를 너무 바보로 아는 것 아니냐!"
"그런데 왜 저게 적군에 있어!"
"그야... 그게 멋있...지 않나...."
"넌 나가면 진짜 뒤졌다."
"히에엑."
눈매를 좁히며 으름장을 놓자 졸아드는 노아를 보고서 뻐근한 목을 풀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
'아군은 열세. 적군의 선두는 거인병....'
솔직히 말해서 거인병이 우직하게 밀고 들어오면 답이 없는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어지간한 기사는 일대일로 거인병을 상대하지 못할 것이고, 만약 일대일로 상대한다고 해도 이십 명의 기사가 한꺼번에 전장에서 이탈하는 꼴이니까.
'정상적으로 싸워서 답이 없다는 건, 정상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된다는 이야기긴 하지.'
다행히 상황은 난전이고, 거인병은 튼튼한 대신 둔하다. 그렇다면 저들의 이목이 쏠리기 전에 먼저 내가 나가서 중심을 헤집고 기사들에게 방어를 굳히게 한다면...?
"바, 반려여...!"
"뭔데? 생각 중이야."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저걸 봐라!"
"그러니까 뭘...."
뭘 보라는 거냐.
떨리는 노아의 목소리에 시선을 올리다가 문득 보이는 광경에 눈을 깜빡였다. 고블린 하나를 손에 쥐고 팔을 붕붕 돌리고 있는 거인의 모습.
"...잠깐, 시발."
저거 설마.
-끼에에에엑!
쐐애액! 퍼어억-!!!
하늘을 날던 고블린이 땅에 처박혀서 즉사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몬스터를 집어 드는 거인병들.
"...이거 맞냐?"
거인병이 몬스터 투석기로 진화하는 순간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놈들의 투척 방향은 우리의 방어선을 아득히 넘은 뒤편.
'놔두면 끝이다!'
십중팔구는 지면에 처박히는 순간 뒈지거나 전투 불능이 되겠지만, 몬스터들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뛰어나다. 한 열 마리만 방어선 뒤편에서 돌진하더라도 수비 병력까지 공격에 끌어다 쓴 본진은 초토화될 것이 분명하니까.
저 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버티려면 수비를 굳힐 수밖에 없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
...고민할 필요도 없나.
"노아."
"으, 음?"
"5분 정도면 되는데, 혹시 시간을 벌 수 있나?"
"시간...? 뭐에게서 말이냐?"
"저 짓거리."
계속 투척할 몬스터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거인병들을 가리키자 잠시 고민하던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성공률이...."
"낮아도 상관없어. 해 봐."
"시간을 벌고 나면 본 공녀는 아예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만...?"
전장 이탈이라.
"그래도 괜찮아. 해."
감각이 말하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고. 지금 해야만 한다고.
"알았다."
내 말에 잠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기사들을 보다가 무언가를 굳게 결의한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노아가 양손을 펼치고서 손가락을 허공에 그었다. 동시에 이어지는 주언.
"[병렬사고], [가속], [이중전개]."
각기 다른 법진이 허공을 수놓았다.
"[다중복제]."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 여덟에서 열여섯.
식은땀을 흘리며 고도의 집중력으로 수인을 그려 내던 노아가 법진을 완성하고 주먹을 내리치며 마나를 쏟아부었다. 동시에 완성되는 마법.
"[일루의 수호-다중 전개]-!!!"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반투명한 막 같은 것이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되, 되었다...!"
마치 눈처럼 쌓인 수백의 마법.
그 하나하나는 대단치 않았다. [일루의 수호]는 광휘마탑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기초 마법이었으니까. 아마 오러를 담아 베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마법도 수백이 모이면 어떤 공격도 틀어막을 만큼 강력한 결계가 된다. 저 거인족 중 그 누구도 이만큼이나 마나를 진하게 먹은 수백 개의 방어 마법을 쉽사리 깨부술 수는 없겠지.
"시간은 벌었다. 반려여!"
"그래."
자, 그럼.
이젠 내 차례인가.
"스으읍."
-그윽. 그오오오!
자신들의 투척을 차단한 방어막을 몽둥이로 두들기는 거인병들을 보면서 호흡을 들이쉬었다. 입안에 감도는 피 맛.
'실패하면 다음번 기회는 없다.'
이곳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기에 가능한 단 하나의 기술.
그건 검술의 절대자가 가지고 있던 비전도, 혹은 깊은 뜻을 담은 오의도 아니다. 지닌바 감각과 재능, 경험에 의지해야 하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기술.
'이것만큼은 연습할 방법이 없었지.'
혼자서 하기엔 위험했다.
제대로 다루어 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150회차의 나에게 기억을 물려받은 것이지 무의식적인 경험과 감각까지 모조리 물려받은 것이 아니니까. 수백, 수천 번의 전장을 돌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재단했던 그 시절의 경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150회차에서도 함부로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잘못하다간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기술.
그렇기에 지금이다.
'해 보자.'
나는 조용히 검을 뻗은 뒤 눈을 감고 검신을 흐르는 오러를 직관했다. 그리고.
다음, 올올이 풀린 오러에 내 의지가 닿는 순간.
"구현."
무언가가 내 심상에 틀어박혔다.
"일검식(一劍式)."
특색도, 문양도 없는.
작은 기둥 하나가.
* * *
한편 그 시각. 지휘부.
"어찌 그리 담담할 수 있나?"
"...?"
전장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돌리자 보이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는 하디의 모습.
"거인병들이 출현하고 방어선이 뚫리기 직전이네. 알고 있는 건가?"
"물론 알고 있소."
"저 방어선이 뚫린다면 그대로 인류는 멸망이야. 그것도 알고 있는 건가?"
"충분히 알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가?"
"담담하지 않소만."
"...뭐라?"
"보이는 것처럼 담담하지 않다고 말했소."
심장이 뛰고 피가 전신을 휘도는 감각.
한 번 심장이 뛸 때마다 불안과 초조함, 걱정 따위가 쌓여 목 언저리를 턱 막는 느낌이다. 호흡이 잘되지 않을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은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척을 해야만 했다.
"꽤 무섭소. 저 방어선이 뚫릴까 봐."
진은 총사령관이었으니까.
"이런 말을 알고 있소?"
"...무슨 말이지?"
"한 명이 산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믿으면 바보가 되지만, 천 명이 산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믿으면 그건 사실이 된다는 것."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군."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은 강력한 힘을 지니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제 역량 이상의 힘을 발휘할 정도로."
"...."
"그리고 총사령관은 병사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하는 자리지."
전쟁에 나선 병사는 누구나 생각한다.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패배를 직감한 병사들의 힘은 약하고, 창날은 무디기 짝이 없다. 사기를 잃은 군대만큼 무너트리기 쉬운 것이 있을까.
"한 치 앞도 모르는 채 불안해하는 병사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야말로 총사령관의 역할이오. 그런데 총사령관이 전황을 보며 불안해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군대가 무너지겠군."
"그렇소. 그래서 나는 절대로 병사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소.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말하지."
승리하면 원래 이리될 줄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패배하면 이것도 전략의 일부라고 논한다.
총사령관을 교체할 것이 아니라면 그 위엄만큼은 철저히 유지되어야 한다. 아군이 명령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군대는 분열하고, 분열한 군대는 먹잇감에 지나지 않으니까.
"전략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내색하지 말아야만 하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 불안해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그런가. 하지만 이미 의미가 없지 않나?"
"의미가 없다?"
"그렇네."
갑작스럽게 어깨에 힘을 빼고 울적하게 읊조리는 하디의 모습에 진이 눈매를 좁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전장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을 잇는 하디.
"저기를 봐라. 죽음의 기사들이 거의 도착했다."
"...."
"저들이 도착하면 끝이야."
일백 기에 달하는 죽음의 기사.
그 하나하나의 역량은 결코 연합기사단의 기사들에 비해 모자라지 않다. 이십 체의 거인병과 저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겨우 오십밖에 없는 기사들은 분명 돌파당하고 말 터.
"이젠 무슨 짓을 해도 막아 낼 수 없어."
끝이다.
"아직이오."
"...?"
"부딪쳐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제정신인가?"
최후를 받아들인 하디가 눈을 감으며 말하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이어지는 하디의 말.
"거인병이 이십에 죽음의 기사가 일백일세. 그 뒤를 따르는 몬스터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
"알고 있소."
"기사 전력만 최소 두 배 이상의 차이고, 일반 병사들까지 가면 열 배 가까운 차이가 나네. 그런데도 저 부대가 막아 내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잠깐만 막아 내면 되오. 아군의 기병대가 슬슬 적진에 도착할 때이니까."
"말장난 같은 이야기 아닌가! 현실을 직시하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건 그대가 아니오?"
"...뭐라?"
"병사들이 지켜 내겠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소?"
레이는 자신에게 말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고.
이 전장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는 지극히 명백하다. 자신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테니, 자신을 버림 패로 써서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라는 뜻일 터.
"스스로 무너지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것을 믿을 뿐이오."
"그게 말이 되나. 저런 전력 차이가...!"
"말이 안 되면, 믿으면 안 되오?"
"...."
"어차피 우리는 이제 믿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믿음직스럽기에, 정녕 그리되리라 생각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다. 단지 믿고 싶을 뿐.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이오."
알고 있다. 자신이 한 걸음조차 내딛지 못했음을. 이 시련을 통과하기엔 자격이 없음을.
트라우마는 극복하지 못했고,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하급이나 중급, 상급의 시련이라도 모자라는데, 최상급 시련의 합격점을 기대하기엔 너무나도 낮은 성과.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소. 나도, 그자도. 그러니."
마지막까지 믿을 수밖에 없다. 의심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게 지금 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참 희망적인 관측이지만, 이제는 끝났군."
두두두두!
지면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죽음의 기사들이 유령마를 타고서 닥쳐드는 것을 본 하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서 깊은 숨을 내쉬고 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어지는 발언.
"수고했네."
"...."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내가 나서는 것보단 훨씬 나은 작전이었네. 적어도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테니까."
"...."
"지옥에서 만나면 한잔하지."
"...."
"...왜 말이 없나? 사람 무안하게."
"...."
"사령관?"
"저게 대체, 무슨...."
농지거리를 내뱉다가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진의 모습에 잠시 눈을 깜빡인 하디가 진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넋이 나간 채로 그저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진의 모습.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러나."
"...직접 보시오."
"그러니까, 뭘 보라는 건가."
대체 뭘 보라는 것인가. 눈을 돌려봤자 죽음의 기사들에게 아군이 도륙당하는 광경밖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
"역시 직접 보니 충격을 받은 게...?"
진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장을 바라본 하디가 문득 시야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광경에 잠시 눈을 비볐다.
"...아?"
맹렬하게 달려들던 죽음의 기사들의 반절이 날아가 있었다.
마치 지면째로 도려낸 듯, 거대한 크레이터를 남긴 형태로.
41화 대마불사 (5)
모름지기 검술이라는 건 목표를 위해 차근차근 쌓아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검사는 검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일단 목표를 정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건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다. 바위를 베기 위해서 일단 검으로 바위를 내려쳐도 부러지지 않을 기술을 쌓고, 바위를 벨 정도의 근력을 쌓으며 바위의 결을 읽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이 세상 거의 모든 검술은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것이 정도(正道)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이 세상에는 가끔 그런 정도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자들이 존재하고, 그건 검술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기에 검술의 역사에는 극악무도한 방식의 검이 하나 탄생하고 말았지.
일단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그 대가를 나중에 치르는.
말 그대로 제 몸을 갈아서 펼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검술이.
우드드득!
"끄으으읍...!"
"괘, 괜찮은가. 반려!"
전신이 뒤틀린다.
온몸의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지고, 뼈가 남김없이 부러진 듯한 감각에 선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마나를 모조리 써 반쯤 탈진한 상태에서도 나를 향해 다가와 상태를 살피는 노아.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방금 무슨 일이...."
"...그, 그만."
"뭐라고 하였느냐? 잘 안 들린다!"
"붙잡지 말라고... 조금만 자극 와도 뒈질 것 같으니까...."
"아, 알았다!"
다 쉬어서 쇳소리가 나는 내 목소리에 황급히 떨어지는 노아를 보고 몸 상태를 점검한 뒤 이를 빠득 갈았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싶게 만드는 고통.
"적의, 피해는, 얼마나...."
"죽음의 기사 절반이 날아갔다! 적들도 반려의 위용에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니라!"
"...절반. 절반이라고."
부족하다.
노아의 브리핑에 눈살을 찌푸리고서 몸 상태를 점검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위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 계산대로라면 이렇게 몸 상태가 심각해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완벽하게 다루어 내지 못했어.'
검식을 펼치기 전.
위력과 거기에 따르는 반동을 생각하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경종을 울렸지만, 내가 계승한 기억의 깨달음을 종합하면 어떻게든 전투 불능에 빠지지 않고 한 번 정도 더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근거는 있었다. 아무리 경험을 그대로 얻은 것은 아니라고 하나 내게는 150회차의 기억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나와 같은 몸 상태로 싸워도 군단 하나를 통째로 쓸어 버릴 수 있던 것이 150회차의 나다. 그 기억을 얻었으니 완전히 비슷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는 통제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오만이었다는 걸 지금 깨달은 게 문제지만.
'시련 밖에서 사용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군.'
방금 내가 행한 검술, 무형검식(無形劍式)은 말 그대로 감각과 재능만으로 자신의 한계선을 정확하게 재단하고 있어야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검술.
이게 어마어마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사도 취급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제 한계선조차 제대로 재지 못하고 사용하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폭사해 버리는 이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무형검식의 첫 사용에 폭사해서 죽는 자의 비율이 90%가 넘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전신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져 수년 넘게 재활해야 하는 정도는 꽤 선방했다고 볼 수 있겠지. 더군다나 시련 밖으로 나가면 부상은 전부 회복될 테니까 문제없지 않겠는가.
...물론, 어디까지나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긴 하겠지만.
"노아. 혹시 광화(狂化) 마법을 사용할 수 있냐?"
"광화는 네크로맨시지 않은가... 본 공녀는 네크로맨시는 모른다...."
"젠장.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데."
당장은 통증을 견디고 서 있을 만하다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전신 근육이 모조리 끊어지는 건 보통 사람의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아마 쇼크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의식이 통증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시련'의 보호기재가 발동해 내 통증을 누그러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어느 쪽이든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지.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몰려올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는 그 통증을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염동."
"...음?"
"염동을, 써. 노아."
내장을 다쳤는지 목울대를 넘어오는 피를 억지로 꿀꺽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지금 놈들이 달려들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겁을 먹은 거."
"...."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걸 들키는 순간 놈들은 달려들 거야."
일격에 죽음의 기사 반절을 날렸다.
반절을 날렸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반절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범위 밖에 있어서 내 일격을 피한 죽음의 기사 오십. 그리고 아직 멀쩡한 거인병 이십에다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몬스터 부대.
"절대 못 막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전투 불능 상태고, 회복될 수도 없다. 붙으면 반드시 질 터.
하지만.
"우리의 승리조건은 적을 섬멸하는 게 아니야. 버티는 거지."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들킬 경우 패배할 수밖에 없다면, 멀쩡하다고 속이면 된다.
인간이든 몬스터든 개죽음이 뻔한 전장에 달려드는 얼간이는 흔치 않다. 내가 멀쩡한 모습을 보인다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을 터.
"염동으로 나를 인형처럼 조종해. 멀쩡하게 보이게 하는 거다."
"하지만, 마나가...."
"믿는다. 노아."
이젠 표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어떻게든 해 봐라.
"...알았다."
그런 의미를 담아 노아를 향해 말하자 노아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곧이어 작게 속삭이는 노아.
"[염동]."
내가 서 있는 것을 지지하듯, 전신에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평소의 노아 수준이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초 마법.
그러나 마나 탈진 상태에서 마법을 사용한 반동은 컸다. 곧바로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려 바닥에 주저앉는 노아.
"지속시간은... 길지는 않다... 오 분 정도가 한계...."
"충분해. 쉬어라."
"...조금만 쉬겠다...."
푹 쉬어도 된다. 넌 할 만큼 했으니까.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노아를 보고 기사를 향해 눈짓해 노아를 한구석에 눕혀놓고서 시선을 앞으로 밀자 숨죽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몬스터들이 흠칫 떨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목을 치고 올라오는 고함.
"기사들은 뒤로 물러서라! 내가 처리하겠다!"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처리 못 하니까.
"뭐하나! 길을 트라니까! 저놈들이 돌아가서 수호탑의 수비에 전념하게 되면 우리 군의 막대한 손해다!"
음, 제발 돌아가 주면 좋겠다.
어차피 저놈들이 돌아갈 때쯤이면 상황이 끝나있을 테고, 앞으로 뚫으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 아닌가.
"기사단! 길을 터라! 저놈들을 모조리 도륙 내야겠다!"
"...."
절대로!
길 트지 마라. 트면 다 같이 그대로 뒈지는 거야. 당연히 알겠지?
내 성화에 잠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기사단이 곧바로 내 앞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외침.
"한낱 애송이 기사에게 군공을 떠넘길 수는 없지! 우리가 앞을 막는다!"
딱딱하게 대사 읊듯이 외치는 기사단장을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고 곧바로 대사를 받았다. 어쨌든 시간은 벌어야 했으니까.
"...군공에 눈이 멀었나!"
"네놈이 나설 차례는 없다! 크하하하. 우리가 군공을 모조리 독식해 주마!"
"...비열한 놈들!"
어린아이를 시켜도 저것보단 연기를 잘하겠군.
"...이제부터는 저희가 막아 보겠습니다. 레이 경. 서 있기만 해 주십시오."
연기를 마친 뒤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작게 말하는 기사단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답했다. 전신을 찌르르 울리는 고통.
"하던 대로 하시지 갑자기 왜 존댓말을... 그보다, 할 수 있어요?"
"솔직한 말로는 힘듭니다만...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앉아서 뒈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불안과 초조로 떨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말하는 기사단장의 모습에 잠시 고통을 잊고 피식 웃었다. 실로 옳은 말이었으니까.
"뚫리지 마요. 단장 아저씨. 나 못 움직이니까."
"이래 봬도 저희가 인류 최고의 기사단입니다."
"그래요?"
"예. 이 세계에 기사단이라곤 저희밖에 안 남았으니 말입니다."
"...."
그거참 믿음직스럽군.
"오는군요."
돌아가지는 않는다.
주춤거리면서도 다시금 천천히 이쪽을 향해 무기를 들이미는 적군의 모습에 애써 딱딱한 연기를 하고 있던 기사단원들이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결연한 눈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각자의 검신에 타오르는 오러.
"...전 기사단원은 들어라."
"충!"
스르릉!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기사단원들의 모습을 슥 둘러본 기사단장이 제 검을 뽑아 앞으로 그어 내었다. 동시에 기사단의 뒤편에 그어지는 빗금.
"이 선이다."
"...."
"이 선을 목숨같이 사수하라."
한 마리라도 뒤로 보내는 순간 끝이다.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거인병과 죽음의 기사들, 그리고 천마리가 넘는 몬스터 떼들이 닥쳐올 터.
"사명을 다하라. 기사단."
"복명-!!!"
"한 놈도 뒤로 보내지 마라! 적은 앞에 있다!"
서걱-!!!
거센 외침과 함께 기사단장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시작되는 전투.
──!
거친 철성(鐵聲)이 울려 퍼지고, 고함이 하늘을 갈랐다.
──!!!
장벽과 맞닥뜨린 몬스터들이 인간처럼 뜨겁고 붉은 피를 흩뿌린다. 피로 물드는 은빛 장벽.
무모한 돌진처럼 보이나 저 장벽은 견고하지 않다. 끝없이 몰려오는 해일과도 같은 몬스터들을 모조리 막아 낼 수는 없을 터.
그러나 그것을 앎에도 장벽은, 기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마지막 남은 장벽임을 알고 있기에.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사상자가 나오고 구멍이 생긴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무너졌을 장벽은 스스로 사상자를 솎아 낸다. 동료의 죽음에도 슬퍼할 시간조차 없이, 그런 여유 따위는 없다는 듯 스스로 소모품이 되어 장벽의 구멍에 몸을 던지는 이들.
쉰 명에서 마흔 명, 마흔 명에서 서른 명, 스물다섯, 스물, 열다섯.
천천히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물러서지 마라... 기사들, 죽을 때까지 싸워라!"
이윽고, 기사단장을 포함해 남은 기사가 채 다섯이 되지 않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적의 수호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세계가.
[전장을 초기화합니다.]
부서졌다.
파아앙-!!!!!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경쾌한 소리가 세계를 울리는 것을 보고 시선을 앞으로 쏘아 내었다. 마치 그림처럼 움직이던 그대로 박제된 세상의 풍경.
'환상, 이라.'
거짓된 세계. 시련에 의해 구축된 가짜 세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게 가짜라는 걸 혼동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저들을 단순히 가짜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이것이 단순히 노아의 심상에 의거해 만들어진 세계라고 해도, 저들의 의지는 진짜배기다.
아마 빙의자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경들의 분투에 찬사를."
어느새 완전히 회복되어 버린 몸을 일으키면서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최고 난이도를 완료했습니다.]
[시련자들은 모여 주십시오.]
이제, 시련에서 나갈 시간이었다.
42화 대마불사 (6)
시련을 클리어하고 난 직후.
"이걸, 정말 클리어할 줄은...."
중앙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며 중얼거리고 있는 진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리자 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윽고 잠시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떨구는 진.
"...미안하군. 레이 지크."
"뭐가 미안한데?"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네게 부담을 끼치고 말았다. 내 역량 부족이다."
"흠."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며 말하는 진의 모습에 잠시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참 녀석답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원래 한 번에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식아."
"...?"
"네 트라우마가 이런 거 한 번으로 날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와 진의 트라우마는 그 깊이가 차원이 다르다. 나는 스스로 절망해 무너진 것뿐이지만, 진은 믿고 따르던 사람과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을 눈앞에서 전부 잃었으니까.
굳이 그 트라우마를 마주하여 극복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잔혹하고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이만큼이나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전진일 터.
"너는 네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는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어. 그것뿐이지."
"...."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나는 시련을 통과했고 내기에서도 이겼으니까. 이제 내가 너한테 무슨 막말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지. 그렇지 않냐? 이 못난 황자 놈아."
"...정말 어지간하군."
내 건들거리는 태도에 쓴웃음을 지은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곧바로 저 멀리서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불쑥 고개를 내미는 노아.
"황자님과 반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이제 시련도 끝났는데 푹 쉬지 않고."
"시련의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시련의 보상!"
내 이야기에 눈을 반짝인 노아가 내 소매를 꽉 쥐고서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이야기에 끼고 싶다! 보상은 뭘 받는 것이냐?"
"글쎄?"
"...모르는 것이냐? 반려라면 알 줄 알았는데."
"내가 예언자도 아니고 어떻게 알겠냐. 애당초 시련의 보상이라는 건 정해진 게 없어."
'시련'의 보상 시스템은 굉장히 직관적이다. 시련을 통과하는 것에 기여한 만큼 기여도를 산정해 거기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는 것.
그 보상은 무구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으며 조언일 수도 있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대 마법은 여태까지 수많은 시련의 통과자를 배출했고, 그때마다 각기 다른 보상을 내뱉었다. 시련을 받는 사람에 따라,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만큼 아무리 내가 과거의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여기서 무슨 보상을 받을지만큼은 알 수 없다는 뜻.
"본 공녀는 네크로노미콘을 받을 것이 틀림없느니라!"
"그게 뭔데."
"각종 금지된 마법들이 쓰여져 있는 사악한 금단의 마법서다!"
"금지된 마법 같은 게 있나? 모든 마법은 상아탑 학회에서 관리해서 승인만 받으면 배울 수 있는 거로 안다만."
"물론 없다!"
"...?"
"하지만 멋있지 않느냐! 협회에서 꽁꽁 숨겨 둔 금단의 마법서. 그런 것이 있다면 얼마나 강하고 뛰어난 마법일지... 후, 후후후...."
제정신 아니군.
새삼 나가면 노아의 상식 교육을 다시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서 고개를 끄덕인 뒤 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내 시선을 받고 눈을 깜빡이는 진.
"왜... 그렇게 보지?"
"아니, 너는 뭐 받을까 싶어서."
"받아 봤자 별 볼 일 없는 것이겠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기여도가 낮다."
"그렇긴 해. 지휘 개못하더라 진짜."
"...."
"전장에서 그렇게 우유부단하고 멍청한 지휘관이 내 앞에 있었으면 그냥 뒤통수를 콱 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긴. 자식아. 어쨌든... 뭐, 나름 괜찮은 걸 받겠지."
내가 예상하는 진의 시련 기여도는 아마 중급에서 상급 정도.
그 정도라면 상당히 쓸 만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상급이라면 보통 마법사나 기사는 평생 쓸 수 있는 무기 종류를 받기도 하고, 중급도 나름 괜찮은 걸 받으니까.
그에 상응하는 조언이나 지식을 얻더라도 나쁘지 않다. 기여도 산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겠지만 나쁘지는 않을 터.
"너는 어떻지?"
"음? 나?"
"그래. 기여도가 적어도 최상급으로 붙을 텐데, 그러면 어지간히 좋은 걸 기대해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뭐, 그렇긴 한데...별생각은 없어서."
내가 지금 뭐가 필요하겠는가. 무기? 아니면 지식?
솔직히 말하자면 시련이 줄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내게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검술의 지식이라면 한낱 고대마법이 나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리 없고, 무기는 아예 얻으려고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까.
"필요한 걸 골라준다니 알아서 주겠지. 못 쓸 걸 주진 않을 거 아냐?"
"...남에게는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자신의 보상에는 별 관심이 없군. 보통 반대 아닌가?"
"난 원래 오지랖이 넓어."
"그래 보인다. 심각할 정도로."
이젠 좀 내가 편해졌는지 나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리는 진의 모습에 슬쩍 인상을 구기자 진이 내 주먹의 사정거리 밖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시련의 완료를 확인했습니다.]
[보상의 정산을 시작합니다.]
"오."
슬슬 시작되는 건가.
목소리를 듣고 셋이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적당히 정렬하자 목소리가 차례차례 우리의 이름을 호명한다. 가장 먼저 불리는 건 노아의 이름.
[노아 루미너스. 설정 난이도 상급. 기여도 상.]
[상급 보상을 획득합니다.]
[별하늘의 장막.]
사락!
"오, 오오...."
밤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 자신의 어깨에 걸쳐져 별빛으로 반짝이는 망토의 모습에 눈을 반짝인 노아가 조심스럽게 망토를 매만졌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탄식.
"이, 이건...!"
"왜, 무슨 효과가 느껴져?"
"엄청... 멋있다!"
"...."
기대한 내가 바보지.
스윽.
"히에엑."
"진정해라."
슬쩍 노아에게 꿀밤을 먹이려고 손을 들어 올리자 쓴웃음을 지은 진이 고개를 젓고 나를 만류했다.
"효과는 어차피 감정받기 전엔 모르는 거 아닌가. 마탑에 가서 잘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노아를 커버치는 진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아마 다음 차례일 진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이어지는 진의 차례.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 설정 난이도 최상급. 기여도 중급.]
[중급 보상을 획득합니다.]
"...음."
잠시간.
말이 끝나고 무언가를 듣는 듯 멍해진 진이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제자리로 돌았다. 묘하게 내게 머무르는 시선.
"뭔데. 뭐 받았냐?"
"조언을 받았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무슨 조언인데?"
"...그걸 꼭 알려 줘야 하나?"
"아니, 뭐 알려 줄 필요는 없긴 한데. 궁금하잖아."
"나중에 알려 주지."
"...."
수상한데. 혹시 뭐 내 약점 같은 거라도 알려 준 거 아니겠지?
[레이 지크.]
"네 차례군. 앞을 봐라. 레이 지크."
"알아."
말을 돌리는 진의 모습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슬쩍 앞으로 돌아서자 목소리가 내 기여도 현황을 쭉 읊었다. 흡족하기 짝이 없는 내용.
[설정 난이도. 최상급.]
[기여도. 최상급....]
역시 최상급인가.
'뭐, 가장 높은 거니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목소리를 기다리자 갑자기 내 현황을 알리던 목소리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수정되는 내용.
[...오류 사항을 확인.]
[기여도의 상한을 돌파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여도. 기여도 판정을 최상급이 아닌 불가해(不可解)로 조정.]
...응?
[불가해급 보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상급 보상을 복수 지급하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첫 번째 보상. 봉마석(封魔石).]
달그락!
"봉마석?"
"...."
내 손 위로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자 눈을 깜빡인 노아가 자신의 어깨에 걸린 망토와 봉마석을 번갈아 보다가 내게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곧이어 상냥하게 말을 잇는 노아.
"으음. 초라한 보상에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반려여. 비록 본 공녀의 것이긴 하지만 반려가 원한다면 이 망토를 가끔 빌려주겠다."
"...너 이게 뭔지 알고 말하는 거냐?"
"알고 있다! 돌멩이 아니냐."
"맞긴 한데."
마나와 오러를 무한정 흡수하는 돌. 봉마석.
이건 돌멩이는 맞지만, 단순한 돌은 아니다. 이 돌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지만, 적어도 그 아는 사람들은 이걸 '여분의 목숨'이라고 부르며 귀중히 여기니까.
이 대륙 전체를 뒤져도 열 개도 안 나오는 물건이다. 설마 이게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마는....
'있으면 좋긴 하지.'
긴히 쓸 일이 있으리라.
"자주 빌려주진 않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너무 짧은가. 보름... 한 달에 한 번...?"
"나와 봐라. 좀."
연신 제 망토를 자랑하려고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노아의 머리통을 짓눌러 주고 다음 보상을 받기 위해 섰다. 그러나 침묵을 지키는 '시련'.
"...저기요?"
[보상을 산정 중입니다.]
[보상을 산정 중입니다.]
[보상을 산정 중...■■■]
왜 이래.
[...산정을 완료했습니다.]
갑자기 노이즈가 끼기 시작하는 목소리에 눈을 깜빡이고 있자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시련'이 이윽고 보상을 정했다. 그리고 곧이어 내 뇌리로 파고드는 목소리.
[귀환 즉시 ──하십시오.]
"...잠깐, 뭐라고?"
방금, 대체 무슨 말을.
[보상의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5초 뒤 귀환합니다.]
[5, 4, 3, 2, 1]
"야, 잠깐...!"
파아아앗!
"어, 도련님?"
제동을 걸 새도 없이 빠르게 숫자를 세는 '시련'의 목소리에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가 닥쳐오는 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뜨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곧바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뭐야. 시련을 포기하고 나온 거야?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깼어."
"역시 그렇지? 못 깼... 잠깐, 뭐라고?"
"깼다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방금 내가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며 인상을 구기자 내게서 묘한 심각함을 느낀 것인지 대기하고 있던 카야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는 진.
"레이 지크. 이 건은...."
"노아가 상급 시련을 통과했다는 건 전하셔도 됩니다. 그 외에는 밝히지 말아 주십시오. 황자님."
"...이해했다."
"그럼,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연락할 겁니다. 노아, 너도 일단 탑으로 돌아가라. 나중에 데리러 갈 테니까."
"음? 어... 알겠다. 반려여."
"반려...?"
"가자."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노아를 보는 카야를 뒤로하고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의 위에 올랐다.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상태창.'
『S�AT�S
이름:레� 지�(19, �)
갈래:없�
근력:9(소질:�상)
체력:10(�질:상)
감�:11(소질:최�)
마력:0(�질:중�)
내구:11(��:최상)
매력:5(소질:�)
재능:
무재(상)
이 ��을 지닌 이는 '��'의 �역에 있는 모든 행위에 큰 보�을 받습니�.
새로 �� 무학을 빠른 속도� 익힙��.
'사교(중)'
이 재�� 지닌 이는 타인에게 호의� 보다 쉽게 얻�니다.
역경 속에� 피어나는 꽃(초월)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이 재능을 지닌 이는 ��을 겪고 견뎌 낼 때마다 재능을 더욱 더 개화합니다.
특수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인이 존재하지 않습��.』
항상 봐 오던 모습.
그러나 내가 보고자 했던 것은 이게 아니다. '시련'은 내게 이것을 보라고 하지 않았다.
시련이 보라고 했던 것은 하나.
[귀환하는 즉시 '빙의자의 n회차 기억'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펼쳐 보십시오.]
조언이었는가, 아니면 도움이었는가.
그것이 중요치는 않다.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은 하나.
나는 곧바로 '빙의자의 n회차 기억'을 소환해서 마지막까지 펼쳤다. 그리고.
봤다.
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내가 펼쳐 보았을 때보다 더 늘어난,
깨져서 알아볼 수 없는 '151회차'의 페이지를.
"시발...."
그래.
이건 이 순간 무엇보다 내게 필요한 조언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나중에 아는 것보다는 지금 아는 게 나았을 터.
"진짜냐고."
갑갑한 감정이 속에서 꽉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틀어박히는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짐작에 불과하다. 짐작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이 맞다면.
"...진짜, 질긴 놈이네."
빙의자가 살아 있다.
어쩌면, 내 안에.
43화 인재 모집 (1)
사람들은 말한다. 예로부터 지성체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그 말은 틀리지 않다. 실제로 사람들이 미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이고,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 역시 그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기에 그런 것이니까.
알 수 없는 것. 불확실한 것.
그런 것에 적의를 가지지 않은 인간은 전부 도태되었고, 살아남은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두려워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지금 내가 일말의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아."
...그도 그럴 게, 이렇게 가다가는 내 몸을 다시 빼앗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끙."
시련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시각, 수도에 위치한 지크 저택의 내 방.
[빙의자의 n회차 기억]
앞에 펼쳐 놓은 책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책을 펼쳐 보기 전까지만 해도 의심에 그치던 의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감각.
'원래보다 분량이 늘어났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누르고서 책을 덮은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생각대로라면 이 책은 더 이상 분량이 늘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빙의자의 n회차 기억]은 빙의자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애초에 제목부터 빙의자의 기억 아닌가. 그 안에 담기는 것이 빙의자 본인이 보고 들은 것, 겪은 것, 그리고 생각했던 것으로 한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기에 시스템 안에서 빙의자가 죽음을 맞이한 지금, 원론적으로라면 빙의자의 기억은 늘어나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기억을 추가할 주체가 없으니까. 일기장을 쓰는 사람이 세상을 떴으니까.
그러나.
'빙의자의 기억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원래라면 기록을 멈췄어야 할 빙의자의 기억이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다. 어째서인가? 나를 빙의자로 인식해서?
그건 너무나 편의주의적인 생각이다. 높은 확률로 빙의자는 살아 있을 것이다. 시스템이 떠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빙의자가 내 몸에 빙의했을 때 내가 겪었던 상태로 살아 있겠지.
내가 몸을 빼앗을 수 있었다면 빙의자 역시 똑같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어떤 수를 써서든 빙의자를 내 몸에서 쫓아내는 것. 아예 소멸을 시키든, 아니면 다른 몸에 정착을 시키든 다시 빙의될 일이 없게 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래. 그게 내 할 일이긴 한데.
"말이 쉽지. 에휴."
그런 방법이 뚝딱 나오면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깊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조금 더 굴려 보기로 했다. 어쨌든 방법을 찾아보긴 해야 하니까.
'시스템에 대한 단서는 바깥을 돌아다닌다고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간 열심히 빙의자의 기억을 탐독한 바로 이 세상에서 시스템에 대해 알고 있는 존재는 없다.
'존재'가 없다고 말하는 건 '존재'가 아닌 것들은 알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내게 빙의자의 생존에 대해 조언해 준 것은 고대 마법인 '시련'이 아니던가.
비록 '시련'은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다른 고대 마법은 내게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건 역시 탑 끝에 오르면 뭐든지 대답해 준다는 '진리의 탑'의 열쇠를 얻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열쇠라는 게 얻기 쉬운 물건이 아니니까 문제지.'
진리의 탑을 여는 열쇠는 물질이 아니라 일종의 자격 같은 것.
그 자격을 얻으려면 지금의 힘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내가 아는 방법으로 자격을 얻으려면 전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근위기사단의 단장급은 되어야 가능한 일.
'방법이 있었다면....'
차라리 시스템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텐데.
"에휴."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무언가.
[절박한 ■■에 시스■이 반응합■다.]
[퀘■■ 발생.]
"...퀘, 뭐?"
이게 뭐야.
잠시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다가 내용물을 읽어 보았다. 군데군데 깨져 있지만 읽는 데 큰 지장이 느껴지지 않는 내용.
『퀘■트 : 해방
당신은 빙의자가 ■■있을 확률을 인지했■며, 이를 차단■ 방법을 알기 위해 ■■템에 대해 조금 더 깊■ 알■야 할 필요■을 느꼈습니다.
비록 시스템은 ■■져 산산■각이 났으나 그 ■■은 아직 일부 남아 있는 상황.
주어진 ■■■를 수행하여 ■■■의 권능을 수집하십시오.
현재 ■■할 수 있는 퀘스트 : 1』
'퀘스트? 해방?'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생소한 단어에 눈을 깜빡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빙의자의 기억을 펼쳐 보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저런 단어를 본 기억이 있었으니까.
'있다.'
『2회차.
드디어 퀘스트의 발동 조건을 알아내었다!
아무래도 퀘스트는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모양이다.
세상을 구할 힘을 얻고 싶다고 간절하게 빌었더니 힘을 키우는 퀘스트가 나타났다. 이 퀘스트를 수행하면 어쩌면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 몸은 재능이 나쁘지 않다. 여기에 퀘스트의 도움까지 합쳐진다면 나는 끝없이 강해질 수 있다.
힘내보자. 이번에는 지켜야 한다!』
'초반이라 풋풋하네.'
내가 만났을 때는 거의 썩은 동태눈깔을 하고 있었던 빙의자이지만, 2회차 때는 아직 꿈과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퀘스트. 퀘스트라.
"시스템이 내게 주는 의뢰...? 아니, 의뢰보단 과제 같은 느낌인가."
무슨 목적을 이루고 싶다면 내주는 과제를 완수해라. 그러면 내가 그 목적을 이루어 주겠다.
비록 자율의지를 가지지 않은 시스템이지만, 내게는 이 퀘스트라는 것이 그렇게 보인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받는 숙제 같은 것이라고.
'내가 바라는 건 내 몸을 빙의자가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건데.'
내 몸을 빙의자가 차지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을 찾을 때 귀신같이 시스템의 발전을 재촉하는 퀘스트가 나왔다. 그건 아마 이 상황의 열쇠가 시스템 자체에 있다는 뜻일 터.
'함정일 가능성은... 없나? 빙의자도 시스템을 지배하는 건 아니니까.'
해 볼 수밖에 없다.
'퀘스트를 받는 방법은....'
"퀘스트를 수주하겠다."
빙의자의 기억을 들춰 조작법을 알아내고선 입을 열어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곧바로 눈앞을 가득 메우는 불안정한 창.
[퀘스트 : 해방을 수주했습니다.]
[현 상황을 판단하여 시스템 사용자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퀘스트를 도출합니다.]
[도출 완료.]
[퀘스트 목표를 지정합니다.]
[퀘스트 목표 : 십종제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십시오.]
[퀘스트를 수주함으로써 목표 과제의 난이도가 올라갑니다.]
"...뭐?"
...난이도가 올라간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번엔 비교적 멀쩡하게 나온 창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붙은 이상한 이야기에 눈매를 좁혔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
쿵쿵쿵쿵! 쾅!
"반려여! 큰일이다!"
"노아?"
아니, 왜 여기에?
"시, 십종제 말이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내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던 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언.
"황자님이...!"
"황자님? 진 말하는 거냐?"
"아니, 삼황자님이 아니다...! 이황자님이 참가하시기로 결정되었다!"
음. 어.
아니.
...진짜로?
"...와."
나는 노아가 가져온 소식에 잠시 생각하다가 빙긋 웃었다.
"이 시발."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시스템이 내게 엿을 먹인 모양이다.
그것도 아주 끝내주게 거대한 엿을.
* * *
십종제. 아카데미의 문화제에서 벌어지는 열 가지 종류의 대회.
이 행사는 귀족이나 황족들이 뛰어난 인재를 물색하는 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장이기도 하다. 본디 구경거리가 많은 십종제에는 수많은 가문의 요인들이 참석하기 마련이고, 그 요인들 앞에서 가문의 이름을 꺼낸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명예가 드높아지는 일이니까.
굳이 본인 가문의 인물이 아니더라도 좋다. 자신이 후원하는 이들을 십종제에 내보내 좋은 성과를 거두게 하면 그만큼 뛰어난 인재들이 자신들 가문의 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홍보가 될 터.
공작가. 후작가. 백작가. 아니면 기사단.
인재를 필요로 하는 어느 단체든 자신들이 후원하는 이들이 성적을 더 높게 받길 원한다. 그리고.
그건 제3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인 그레이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방금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뜻이다.
"십종제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그레이스 부단장."
"...."
여느때처럼 집무를 처리하다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낸 이황자 루이스의 모습에 잠시 뇌 정지가 온 그레이스가 눈알을 도르륵 굴려 옆에 시립해 있는 단장을 바라보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는 듯 눈에 힘을 주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단장의 모습.
"...외람되오나, 전하. 십종제의 참가 연령 제한은 스물다섯입니다만...."
"내가 직접 나가는 것이 아니다. 후원자를 꾸릴 생각일 뿐."
"후원자... 말입니까?"
"그래."
말을 마치고서 피곤한 눈을 꾹 누른 이황자가 고개를 젓고 목을 늘어트렸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풀리는 목 근육.
"여태까지 십종제의 후원자 명단에는 황족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째서인 줄 아나?"
"형평성을 위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후원자 명단에 황족이 들어가는 순간 인재들은 그 아래쪽으로 전부 몰릴 테니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이유... 말입니까?"
"그래. 그럴 이유."
제국의 귀족은 황족에게 거역할 수 없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귀족의 전력이 곧 황족의 전력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황권이 확고한 지금, 정말 몇몇 가문을 제외하고는 황족의 수발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대숙청이 일어난 지 아직 이백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
"그건 현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의 혈판장에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확언할 수는 없으나 형님과 나의 대까지는 귀족들의 충성이 쭉 이어질 터."
황족의 명예가 이미 너무 드높다. 그러니 더 이상 명예를 드높일 필요가 없다.
황가가 구태여 인재 색출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이니까. 앞장서서 구애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어째서... 입니까?"
"지니스. 놈의 수하 십종제에 참여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레이 지크. 이황자 본인에게 자리를 빼앗아 주겠다고 호언장담한 그자.
그자가 십종제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말은 자신의 우승으로 하여금 삼황자의 이름값 자체를 끌어올리겠다는 뜻일 터.
비록 가진 것도, 세력도 없는 삼황자이지만 진은 황위계승권을 가진 황자다. 만약 황자가 후원하는 자가 십종제에서 우승을 거둔다면?
"녀석의 명예는 올라가고, 나와 형님의 명예는 비교적 실추되겠지."
"...."
정당한 결과라면.
제대로 맞붙어서 패배한 것이라면 거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궁지에 몰린 쥐도 고양이를 물 수 있는 법이니까. 한 번도 지지 않는다는 가정 따위는 없을 터.
그러나 이건 정당한 결과 따위가 아니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패배했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관습 따위를 신경 쓰고 있다가 빌미를 내어 줄 생각은 없다."
"그러면, 어찌하면...."
"내 이름을 내걸어 대대적으로 후원자를 모집하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레이 지크가 아무리 유능해도 상관없다.
십종제의 우승은 혼자만의 능력으로 독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 가지 대회에 한 명이 전부 참가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팀을 얼마나 잘 구성하는지가 중요할 터.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만, 혹여 눈여겨봐 둔 인재가 있으십니까? 있으시다면 먼저 그 인재를 섭외해 두겠...."
"샤엘."
"...샤엘이라면, 혹여 샤엘 키르나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은 작은 검귀라고 불리는 소녀. 그리고, 4년 전 천재라는 호칭을 달고 있던 레이 지크를 패퇴시킨 괴물.
"먼저 그자부터 섭외하도록 하지."
자신을 패배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그 포부는 기껍다. 그러나.
그것이 기껍다고 하여 쉬이 패배해 주는 것은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서 부딪쳐 봐라. 진. 그리고 레이 지크.'
벽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깨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리라.
"이왕 나서는 것, 압도적으로 짓눌러 버리도록."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황자가 결재 도장을 찍었다.
이제 벽을 세울 시간이었다.
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벽을.
44화 인재 모집 (2)
- 남겠습니다. 단장. 뒤를 부탁드립니다.
- 후방에 전할 말 말입니까?
-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만 전해 주십시오.
- ...녹스 디트레인이 디트레인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싸우다 죽었노라고.
- 디트레인 공작가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노라고.
- 그렇게만, 전해 주십시오.
* * *
이황자의 개입이 있고서 하루가 지나, 지크 가의 저택.
"이야. 이건 제대로 씨가 말랐구만."
테라스에 앉아서 카야에게 부탁해 입수한 십종제의 참가자 명단을 보고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싹 다 털렸다.'
영입 대기자 목록. 없음. 삼황자에게 후원을 신청한 신청자. 없음.
이것이 처참한 우리의 현 상황이다. 나와 노아 말고는 아무도 파티원 후보에 들어오지 않은 상황.
"도련님. 이 상황으로 정말 십종제에서 상 탈 수 있는 거야?"
"아니."
절대 못 타지.
카야의 말에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십종제에서 상 타는 건 물 건너간 셈이었으니까.
아카데미 문화제. 십종제에서 상을 휩쓸어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가장 필요한 것은 우수한 동료다. 십종제의 대회 열 개 중 혼자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는 대회는 네 개밖에 안 되고, 심지어 그 모든 대회의 분야가 전부 다 다르니까.
아무리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마법이나 마공학을 겨루는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거머쥘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기에 그런 대회에는 나 대신 다른 이를 내보내 우승을 쟁취해 내야만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십종제에는 아예 여러 명이 참가하는 대회도 있고 하니, 우수한 동료의 참여는 필수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된 동료를 모아 와야만 우승을 노릴 수 있고, 그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150회차의 기억, 그리고 빙의자가 남긴 기록이 있으니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재들을 휩쓸어 오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황자가 참가하고 나서 모든 게 어그러졌다.'
후원자로 이황자가 참가하는 순간 모든 예상이 깨졌다. 왜냐하면.
후원자로 제국의 실세인 이황자 대신 삼황자인 진을 고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반려여.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것이냐?"
"안 좋냐고?"
"그렇다."
"좋아.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엿이 됐는지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알려 주마."
"...."
어느새 저택에 방문한 것인지 슬쩍 고개를 들이미는 노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문을 열었다. 같은 파티원인 만큼 노아도 현 상황에 대해 알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일단, 우리가 모집하려고 했던 추가 파티원은 두 명이야. 각각 레인저와 마공학자이지."
"두 명? 결원은 세 명이 아니더냐?"
"맞아. 현재 확정된 파티원은 두 명이지. 나랑 너. 검사와 마법사."
지금 우리에게는 전위가 한 명 있고 마법사가 한 명 있는 상황.
한 파티의 구성인원이 다섯 명인 것을 생각해 보면 노아의 말마따나 세 명이 비는 것이 맞다. 다섯 명에서 두 명을 빼면 세 명이 남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니.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한 자리는 이미 반쯤 내정자가 있으니까.
"한 자리는 아마도 여동생이 올 거야."
"여동생이라면... 리나 말이냐?"
"그래. 내가 전위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전위는 아니거든."
현재 내가 익히고 있는 검술은 상당히 공격적인 성향의 검술.
치고 나가는 데는 능하지만 무언가를 지키는 데는 썩 좋은 검술이 아니다. 물론 수준과 쌓아 올린 경험 자체가 다르니 어지간한 전위보다야 당연히 지키는 능력이 뛰어나겠지만, 아무래도 파고들어 헤집는 능력보다는 조금 포텐셜이 떨어진다는 뜻.
"전위가 한 명이라고 가정해 봐. 만약 파티끼리 싸우는 도중에 내가 파고들면 어떻게 되겠냐?"
"...뒤를 지킬 사람이 없어지는가?"
"그래. 뒤가 완전히 뻥 뚫리게 되겠지. 그래서 필요한 게 리나 그 녀석이다. 걔는 나랑 성향이 완전 정반대니까."
리나 지크. 내 여동생이자 지크가에 내려오는 검술의 정통 계승자.
녀석의 성향은 나와 완전히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반드시 적을 뚫어 버리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면 녀석은 닥쳐오는 모든 위협을 봉쇄해 버리기 위해 검과 방패를 들기 때문.
"내가 파고들어 휘저으면 적도 무작정 후열을 타격하기 위해 전력을 빼긴 힘들어. 그렇게 빼낸 전력이 있더라도 리나가 막아 낼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전열은 사실 문제가 없지. 후열도 뭐... 네가 있으니까 화력에서 밀릴 일은 좀처럼 없겠고."
"음! 본 공녀만 믿거라!"
자기만 믿으라는 듯 작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통통 치는 노아의 모습에 피식 웃고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보면 전투적으로는 밸런스가 나쁘지 않긴 한데, 전투 말고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있단 말이지."
"...문제 말이냐?"
"그래.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파티는 화력만 뛰어나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십종제 중에서 우리가 개인이 아니라 파티를 꾸려서 참가하게 될 종목은 총 두 가지다. 바로 던전 탐색과 난제 해독.
"변수가 많은 던전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레인저와 동행하는 게 좋아. 자물쇠를 해제하고, 바람을 읽어서 출구를 찾고, 적을 탐색하고, 숨겨져 있는 함정을 간파하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우리 셋이서 힘을 합쳐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겠지.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잖냐."
나도 어느 정도 척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인 레인저의 능력보다는 훨씬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녀석들은 남들이 남긴 발자국만 보고도 인원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몇 시간 전에 이곳을 지나갔는지까지 알아채는 녀석들이니.
"난제 해독에서는 아예 마공학자를 파티에 넣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되는 수준이지. 여기저기에 남겨져 있는 마공학 장치의 암호를 해독해서 정답에 근접해 가는 방식이니까."
"그러면...."
"둘 다 수준급의 역량이 필요하지. 우리 파티의 전반적인 수준하고 맞추려면 더더욱."
"...."
"이젠 다 말아먹었지만."
카야가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지금 내가 원래 노리고 있던 레인저와 마공학자들은 하나같이 이황자 쪽으로 넘어간 상황이다. 1순위뿐만이 아니라 2순위, 3순위까지 그렇지.
그 뒤에도 영입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실력도 떨어지는 데다가 끌어들일 수 있을 확률 자체가 적다. 우리 편에 선다는 건 곧 이황자의 반대편에 선다는 것이고, 이 제국에서 이황자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인간은 거의 없으니까.
이기는 건 두 번째 문제다. 일단 파티원을 모으는 것부터가 문제.
"으음...."
내 말에 침음을 흘리던 노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에 잠겼다. 이윽고 튀어나오는 한마디.
"반려여."
"왜."
"원래부터 이황자님과 사이가 나쁜 사람을 영입하면 되지 않겠느냐?"
"없어."
"...응?"
"이황자와 반목하는 세력 중에서 우리 쪽에 와줄 수준급의 레인저와 마공학자가 없다고."
노아의 말을 가볍게 부정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쁜 생각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모름지기 덩치가 크면 적도 많은 법.
이황자의 세력은 물론 크고, 그 반대 세력 역시 만만치 않게 크긴 하다. 당장 이황자는 친 귀족파의 수장격이고, 그 반대편에는 일황자를 필두로 한 친 황제파가 있기 때문.
본디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세력이 크고 이황자와 대립하고 있는 만큼 일황자를 차기 황제로 밀고 있는 친황제 파벌 역시 이황자를 견제하는 것 자체에는 반감을 가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높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쪽 체급이 괜찮았을 때의 이야기지."
"...."
"상식적으로 게네들이 뭐 하러 우리 파티한테 인재를 보내 주겠어? 자기들만으로 한 파티 구성하면 그만인데."
몇 년 동안 검을 잡지 않은 검사와 이제 막 아카데미 2학년이 된 전위. 그리고 아무것도 증명된 게 없는 마법사.
외부에서 봤을 때 우리의 평가는 딱 그 정도다. 우승 후보는커녕 우승 후보 언저리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자기 파벌의 귀중한 인재를 내어 줄 사람은 없다. 만약 참가자 본인의 의지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애당초 참가자들이 우리 파티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터.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구나."
"그렇지."
"으음."
오독!
의견을 격퇴당한 노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쿠키를 오독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갑자기 레인저나 마공학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러게 말이다. 파티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면 참 좋긴 하겠... 잠깐, 지금 뭐라고?"
"음?"
말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무언가에 몸을 굳혔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파티원이?
"잠깐...."
순간적으로 노아의 말을 듣고 뇌리를 스치는 계획에 머리를 굴려 보았다. 곧이어 순식간에 뽑히는 견적.
"어쩌면 될지도 모르겠다."
"뭐가... 말이냐?"
"파티원. 어쩌면 하늘에서 뚝 떨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제대로 된 레인저와 마공학자는 우리 파티에 들어올 생각이 없고 우리 파티에 들어올 만한 레인저와 마공학자는 못 미더운 상황.
'생각해 보자.'
방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녀석은, 우리 파티에 들어올 만한 녀석인가?
'녀석 정도면 들어올 만해.'
녀석의 배경은 어느 파벌에도 속해 있지 않은 데다가 어느 파벌에나 배척받는 상황이다. 개인 참가 종목 제외하고서 파티를 꾸려서 참가하는 일은 없을 터.
그러면 남은 하나.
녀석은 레인저나 마공학자, 둘의 역할 중 하나를 해낼 수 있는가?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있다.
"가자. 노아."
"음? 어디를 말이냐?"
"아카데미."
그래. 방법은 있다.
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면서 입꼬리를 씨익 추켜올렸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선언.
"마공학자는 모르겠지만, 레인저는 방법이 있어."
"방법이라면...."
"레인저가 없으니까, 만든다."
녹스 디트레인. 디트레인 공작가의 적자이자 현재는 2학년 '기사'과의 차석인 녀석. 그리고.
150회차에서는 내 휘하에 척후병으로 배속되어 있었던, 내 기사단의 첫 번째 조장.
'아직 기사 커리큘럼밖에 안 받았지만, 놈이라면 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자신할 수 있다. 레인저는 지식도 지식이지만, 감각이 가장 중요한 직업이고, 녀석의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작전명은...."
벼락치기 레인저.
"도박 한번 해 보자고."
십종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며칠 남짓 남았을 터.
그동안 우리는 기사 한 명을 레인저로 전향시킨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완벽한 실력의 레인저로.
45화 인재 모집 (3)
본디 귀족의 권력과 평판은 작위를 따라가는 법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모든 귀족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같은 작위 내에서도 귀족의 권력은 차이가 있으니까.
그동안 지나온 역사. 가진 영지의 크기. 비옥함. 정치적 위치. 맡은 책무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조건이 겹치면 후작이라고 하여도 공작보다 높은 권세를 누릴 수 있고, 백작이라 하여도 자작보다 못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조건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무리 몰락한 귀족이라도 작위에 따라 응당 누리는 권세가 있고, 거기에서 오는 권위가 있으니까. 한 나라의 공작이 자국의 자작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는 기괴한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법.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도 제국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공작가 중, 디트레인 공작가는 다른 귀족들 모두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죄송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디트레인 공자."
──디트레인 공작가는 이 제국에서 유일하게.
반역에 가담하고도 살아남은 단 하나의 귀족 가문이었으니까.
"안 된다."
"예."
"어째서지?"
황립 아카데미 내부. 사람들이 파티 모집을 위해 모이는 광장.
"구인 조건은 만족했을 텐데."
게시판에 있던 파티의 전위 구인글을 떼어 온 디트레인 공작가의 적자. 녹스 디트레인이 손에 들린 종이를 아래로 내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자 곧바로 받아치는 상대방.
"물론, 녹스 공자님의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학년 검술부의 차석이신데, 당연히 알고 있지요."
"그렇다."
"하지만 파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소통입니다. 디트레인 공자님께서 저희 파티에 가입하시면 아무래도 서로 소통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된다면 괜찮다. 누가 파티장이 되든 명령은...."
"아뇨, 저희가 불편합니다."
"...그런가."
딱 잘라 내는 상대방의 태도에 조용히 답한 녹스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몸을 돌렸다. 이윽고 녹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알았다. 건승을 빌지."
"예. 살펴 가십시오."
-무슨 낯짝으로 파티에 넣어 달라고 한 건지 모르겠네. 반역자의 자손 주제에.
등 뒤에서 들리는 키득거리는 소리에 강하게 주먹을 쥔 녹스가 차마 구인지를 버리지 못하고 걸음을 옮겨 광장 입구의 게시판에 붙은 구인지들을 바라보고선 눈매를 굳혔다. 이 게시판에 있는 거의 모든 파티에서 거절당한 자신의 처지가 암담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 제국에 다섯 개밖에 없는 공작가들은 원래 모두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이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공작 가문 중 하나가 더 이상 개국공신 가문 취급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한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
다섯 가문 중 북부를 지키고 있던 디트레인 공작가는 유배된 황자를 복권시키기 위해 반역의 깃발을 들었고, 참담하게 패배했다.
원래라면 그 시점에서 가문이 풍비박산 났어야 정상이다. 세상 모든 나라의 그 어느 역사를 뒤져보아도 반역을 일으킨 귀족을 그대로 놔두는 일은 없으니까. 적어도 공작 작위를 유지하지는 못했을 터.
그러나.
-황가는 디트레인 공작가에 오랜 빚이 있지.
단 한 번.
건국 황제가 디트레인 공작가에만 내렸던, '황제를 시해하지 않은 한 그 어떤 죄라도 단 한 번은 용서한다'라는 사면권을 사용한 디트레인 공작가는 대숙청의 칼날에서 아주 조금 비껴갈 수 있었고, 결국 살아남았다.
모든 이권과 권력을 빼앗기고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황권의 상징물이 된 채로, 참람하고 참담하게.
"...."
반란으로부터, 숙청으로부터 근 이백 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회복하지 못한 가문의 명예.
그 명예를 살리기 위해서 녹스는 뭐든 해 왔다. 이번 십종제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것 역시 그 일환.
그러나.
"별수 없는가."
이미 모든 파티에서 거절당한 참이다. 개인전이면 모를까, 단체전에서 귀족의 배반자 취급을 받는 디트레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이는 없을 터.
'십종제는 개인전만 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단체전에 나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담담하게 현 상황을 직시한 녹스가 가지고 있던 지원서를 두 손으로 잡고 북 찢어 쓰레기통에 던지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찢어진 지원서를 채가는 손.
"종이 아깝게 뭐하러 찢어서 버리나? 이면지로 쓰면 되는데."
"...."
"파티 찾는 모양이지?"
껄렁하지만, 묘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 허리에 찬 검. 검은색 머리카락.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녹스가 자신을 부른 이를 바라보고서 눈매를 좁혔다. 분명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묘하게 익숙한 모습이었으니까.
"너는...."
"내가 누군지는 뭐, 천천히 알아 가고."
턱!
빠른 걸음으로 다가선 청년이 녹스의 어깨를 꽉 붙잡으면서 씨익 웃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말.
"보아하니 갈 데가 없는 모양인데."
"...."
"좋~은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디트레인 공자님."
* * *
전생.
150회차에서 수많은 인물과 엮였지만, 기억에 남는 이는 한정되어있다. 아무리 내가 많은 경험을 했더라도 만난 사람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얼굴을 많이 보고 많이 엮인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기억에 더 많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것은 전장에서 함께 지냈던 동료들이지.
물론, 전장을 함께 굴렀다고 해서 모두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나 존재감이 부족한 이들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흐릿한 기억 속에서 남은 이들은 몇 되지 않았으니.
부족한 이들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기억에 남은 이들은 유능한 이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150회차를 보았을 때,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은 지극히 유능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녀석의 강점과 버릇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정식으로 다시 소개해야겠지? 나는 레이 지크다."
"...."
황립 아카데미 안의 작고 조용한 카페.
의자에 앉은 채로 내 말에 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녹스의 모습에 씩 웃었다.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지 무표정하게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는 녹스의 모습.
"녹스 디트레인. 아무래도 십종제에 참가할 파티를 찾고 있는 모양이던데."
"...찾고 있다."
"찾기 쉽지 않은 모양이지?"
"그렇다."
담담하지만, 살짝 침울하게 답하는 녹스의 모습을 보고서 씨익 웃고 슬쩍 종이를 내밀었다. 내 생각대로였으니까.
"이건?"
"파티 가입 신청서. 마침 우리도 파티원이 모자란 참이거든."
"참가 종목은?"
"파티가 필요한 종목 전부."
"...."
내 말에 잠시 신청서를 바라보던 녹스가 투명한 눈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이윽고 이어지는 물음.
"왜 나지?"
"음, 어떤 의미에서 묻는 거냐?"
"말 그대로의 의미다. 레이 지크. 보아하니 전위가 모자란 것 같지는 않은데."
"...."
"나는 꽤 뛰어난 전위지만, 그래도 널리고 널린 것이 전위다. 네게는 메리트가 없지 않나... 디트레인 공작가의 이름을 얹을 메리트가."
슬쩍 내 허리춤에 달린 검을 바라보며 말하는 녹스의 모습에 피식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통찰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
"네 말이 맞다. 우리 파티에는 전위가 모자라지 않아. 디트레인 공작가의 이름을 얹는 걸 감수하면서 뽑을 정도로 전위에 목마르진 않지."
"그럼."
"하지만 난 너를 전위로 뽑는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 파티에 부족한 건 둘이거든. 마공학자, 그리고 척후."
"...그렇다면, 설마."
"그래. 그 설마가 맞다. 나는 너를 척후 역할로."
"나를 마공학자로 뽑겠다는 뜻인가?"
"결론이 왜 그렇게 되냐?"
"음. 그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똑똑하니까."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지?
"척후, 척후인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녹스의 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자 녹스가 제 턱을 쓰다듬더니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나오는 답.
"나는 척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알아."
"활은 다뤄 본 적도 없고, 자물쇠를 따거나 함정을 해체하는 방법 따위는 알지도 못한다."
"그것도 알고."
"그걸 알면서도 나를 섭외하겠다는 건가. 길을 가는 레인저 누구를 데려와도 나보다 유능할 텐데."
"아니, 그건 아니야."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나."
"녹스. 너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으니까."
척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발로 뛰면서 몸에 새긴 경험? 아니면 지식?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척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척후로서 가장 최적의 재능일 터.
"네 지식이 얼마나 모자란지, 아니면 경험이 얼마나 부족한지 따위는 상관없어. 기대도 안 하고."
"...."
"내가 믿는 건 네 철두철미한 성격과 감각뿐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감각이 있으면 함정을 해체하지는 못해도 감지할 수는 있을 테니까."
너는 검사보다 궁수가 어울려. 이 전쟁이 끝나면 전위할 거야. 전위는 나한테 맡기고 가라.
설득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말을 싹 폐기하고 씨익 웃으며 고민하는 녹스를 직시했다. 내게는 아직 설득할 카드가 하나 더 남아 있었기 때문.
"네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고 싶냐?"
"...."
"그럼, 우리 파티로 와라. 그 누구보다 우리 파티에서 우승했을 때 효과가 클 테니까."
"어째서지?"
"우리의 후원자가 황족, 삼황자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기 때문이야."
"...!"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고 했다. 공작가 정도면 어마어마한 부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가인 디트레인 가문이 명예와 실권을 잃어 어지간한 백작가만도 못한 수준으로 추락한 이유는 하나다. 그건 다름 아닌 황가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라도 진의 후광을 등으로 업는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허수아비 삼황자라도 진은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황위 경쟁을 하는 중인 황자고, 자신의 아래에 들어온 이들을 보호할 권리 정도는 있지.
"네 실력이 문제가 된다면 내게도 생각은 있어. 전위에서 척후로 포지션 변경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단기간 안에 너를 그럴듯한 척후로 만들 만한 사람이 있으니까."
"...왜."
"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나는 아직 보여 준 게 아무것도 없다."
친분은커녕 면식도 없고, 그렇다고 보여 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까지 나를 파티에 넣어 주려는 이유가 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파티에서 넣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묻는 녹스의 모습에 나는 빙긋 웃으며 준비한 대답을 내뱉었다.
"여동생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네 여동생이라면, 리나 지크 말인가?"
"그래."
리나는 2학년 검술부의 수석, 이 녀석은 차석.
둘은 분명 면식이 있을 것이다. 그 점을 노리고 슬쩍 이야기를 내뱉자 녹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
"알았다. 파티에는 가입하지. 하지만...."
"응?"
"광견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이상하군. 그녀는 나를 싫어할 텐데."
"그래. 광견... 어? 뭐라고?"
"몰랐나? 네 동생, 리나 지크는 아카데미에서 광견이라고 불린다."
"...."
광견.
미친개? 리나가?
"마침 저기 오는군."
카페 벽에 나 있는 창문 너머.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실루엣에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현듯 목덜미를 스치는 미래 예지.
-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집을 떠나고 몇 년.
실로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이 나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한번 도망가기만 해 보십시오. 오라버니."
...갑옷과 방패, 검을 들고서.
완전무장한 채로, 살기를 뿜으며.
46화 인재 모집 (4)
레이가 수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보내고 일주일 넘게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때, 리나는 침묵했다. 원래 레이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레이가 갑작스럽게 이황자의 호출로 사교회에 불려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리나는 침묵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도 황립 아카데미 재학생은 아카데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다시 레이가 편지로 자신을 십종제 파티에 강제 참가시키겠다고 선언했을 때 역시, 리나는 침묵했다. 만나지도 않은 인간을 쥐어 팰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갑작스럽게 제 오라비가 디트레인 공작가의 자제를 파티에 영입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더 이상 리나를 위해 항의해 줄 인물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새끼야."
...칼을 든 리나에게는 대신 항의해 줄 사람이 필요치 않았으니까.
"내가 개새끼면 너도 개새끼인데, 왜 갑자기 우리 부모님을 견공으로 만드냐...."
"닥치십시오. 오라버니. 말을 잘 골라야 할 겁니다. 제가 어제 온종일 갈아 둔 칼날의 맛이 어떤지 느끼고 싶지 않다면."
눈에서 안광을 뿜어내며 이를 빠득 갈아붙인 리나가 멋쩍게 웃고 있는 레이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오늘 갑자기 소식을 전해 듣고 뭔 개소리인가 싶었습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와 제가 십종제에 참가한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야, 말 그대로의 의미지. 너 원래 파티전에는 나갈 예정 없었다면서."
"없습니다. 지금도 없고요."
"그걸 어떻게 해 달라는 소리지."
"굉장히 당당하십니다.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알잖아. 뻔뻔한 게 내 장기인 거."
"예. 압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4년이라는 세월 동안 검을 놓았던 레이가 갑작스럽게 십종제에 참가하려고 한다는 것.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검을 다시 잡은 만큼 자신의 부활을 알리고 싶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현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무뎌진 감각을 끌어 올리는 데는 실전만 한 것이 없고, 십종제는 레이와 리나 또래의 검사 중에서 수위에 꼽히는 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행사다. 패배를 괘념치 않는다면 이만큼 좋은 행사도 없을 터.
하지만.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을, 그것도 삼황자를 후원자로 두고 참가하려고 한다니. 제정신이십니까?"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지크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귀족, 혹은 황족의 이름을 짊어지고 참가한다는 것.
그건 레이가 단순히 실력을 검증하는 것을 넘어 파벌싸움에 한 발을 담그려 한다는 것과 같다. 아무리 삼황자가 허수아비에 가까워도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자인 만큼, 절대로 가볍게 볼 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
"삼황자를 후원자로 들이고, 노아와 저를 끌어들이고... 심지어 이제는 디트레인 공작가와 얽힌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겠네."
"대체 무슨 속셈입니까? 본인 인생을 말아먹으시더니 이젠 전향적으로 가문까지 함께 말아 드시려고 결심하신 겁니까?"
"설마."
"그럼, 대체 무슨...."
"필요한 일이라서."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말한 레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파벌싸움에 가문을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어. 필요하니까 하는 거지."
"뭐에 필요하다는 겁니까?"
"말해 주긴 힘들어. 말해 준다고 해서 이해할 리도 없고."
"...그게 대체 말이 되는."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해. 내가 다시 검을 잡아야만 한다는 거. 이게 그 이유라는 거."
본디 사람이 걷는 이유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기 때문.
목적지를 잃은 이는 걷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까.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그저 막막하게 주변을 둘러볼 뿐.
"나도 염치가 있어. 너한테 신세를 많이 졌다는 것도 알고. 그러니까 오래 도와달라고는 말 안 한다. 리나."
진지한 눈빛을 한 레이가 리나의 시선을 직시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이번 십종제만 좀 도와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이제는 흐릿한 기억 너머에 있는 레이의 선명한 눈빛.
'이 작자는 도대체가.'
옅은 숨을 내쉬고서 이를 빠득 갈아붙인 리나가 주먹에 힘을 주었다가 서서히 풀었다. 자신이 어떻게 대답할지는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주는 건 아닙니다. 오라버니."
"...."
"오라버니가 검을 다시 놓으시면 슬퍼할 가신들과 아버님, 어머님의 모습을 생각해서 조금 도와드리는 것뿐입니다. 알겠습니까?"
"그 말은 혹시?"
"파티원으로 참가하겠습니다."
"고맙...!"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다시 사람 구실을 하게 된 오라비의 의지를 꺾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건 별개의 문제.
"저 남자. 녹스 디트레인은 이 파티에서 제외하십시오."
"...아니, 왜? 그냥 싫어서 그런 거면."
"물론, 저는 저자가 싫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디트레인 공작가와 얽히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명예에 흠집이 갈 수 있으니까요."
디트레인 공작가는 반역자 가문.
지크 자작가가 아무리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고는 하나 반역자 가문과 얽혀서 좋은 소리를 들을 확률은 없다. 어쩌면 유유상종이라며 사교계의 평판이 추락할 수도 있는 노릇.
"십종제에서 우승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저 남자를 받아들이면 전위만 세 명입니다. 밸런스를 감안해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 디메리트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저 남자를 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십종제에서 우승할 능력이 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구만?"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럼 문제없어. 납득시켜 줄 테니까."
일주일.
피식 웃음을 터트린 레이가 입꼬리를 씨익 치켜올렸다.
"일주일 안에 저 녀석을, 너를 납득시킬 정도의 레인저로 만들어 주지."
* * *
제3 근위기사단장 에드윈은 생각했다.
"레이 지크, 그자가 녀석을 후원자로 등록하고 십종제에 참가했다고."
"그렇습니다."
최근 들어 제 주군의 기분이 꽤 좋은 것 같다고.
"흠."
이황자궁. 황자의 집무실.
비스듬하게 앉은 채로 손에 들린 서류를 꼼꼼히 눈으로 훑던 이황자가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고서 일견 차갑게 느껴지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상당히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
"십종제에 나올 것은 알고 있었다만, 구성원이 꽤 별나군."
레이와 만난 이후, 레이 지크의 동향은 계속해서 보고받고 있었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 의도가 이황자를 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 레이 지크는 이황자 자신을 적대하겠다고 선언한 적수니까.
자신과 만나고 난 후 모종의 방법으로 진과 접촉했음도 인지했고, 동시에 '시련'에 들어갔다 나온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또한 노아 루미너스를 동료로 끌어들인 것도 정보로 들어왔었던 상황.
레이의 모든 움직임, 그리고 정황이 십종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황자가 구태여 별 관심도 없던 십종제에 참가 의사를 밝힌 것은 그 때문이다. 가만히 놔둬도 고꾸러질 것 같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들을 올리면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했으니까.
그런데.
『파티 현황.
가드-레이 지크
가드-리나 지크
레인저-녹스 디트레인
메이지-노아 루미너스
공석(모집 중)』
"티 멤버로 제 여동생과 디트레인 공작가의 영식을 섭외했다?"
"마공학자는 구하는 중이라고 합니다만... 그 여동생 되는 자의 교우관계에 뛰어난 마공학자 한 명이 있어 금방 채워질 듯 합니다."
"구색은 갖추었군. 어디까지나 구색뿐이지만 말이야."
"그렇습니다."
녹스 디트레인은 검사며, 전위다. 레인저는 척후고.
전위와 척후는 둘 다 몸으로 직접 때우는 일이라 비슷해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 보면 하는 일이 어마어마하게 달랐다. 애당초 맡는 역할부터가 다르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어째서 녹스 디트레인이지?'
아무리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서 유능한 척후들의 씨가 말랐다고는 하나 전위를 척후로 쓸 정도로 척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레이 역시 무슨 생각이 있어서 녹스를 섭외한 것일 터.
'기대되는군.'
한때의 여흥이라.
마치 아직 열어 보지 않은 선물상자를 받은 듯하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느낌.
"파티원을 전부 모집한 것 같으니 이쪽은 신경을 끄도록 하지. 그보다, 우리쪽 파티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황궁의 암투에 비해서는 비교적 그 규모가 작다고는 하나 이것 역시 승부다. 느슨하게 임하다가 패배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으음."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 파벌의 파티 현황을 묻는 이황자의 모습에 에드윈이 주섬주섬 품속에 놓았던 보고서를 꺼내 들어 읽고 답했다.
"저희 휘하로는 일단 열 파티 정도가 결성되어 있습니다."
"많군."
"예. 하지만 모두 뛰어난 이들입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밖에서도 우수한 인재가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형님의 파벌은."
"일황자님께서는 이번 십종제에 참가를 표명하지 않으셨으니, 그 휘하 귀족들이 후원하는 파티로 통계가 나오겠습니다만... 스무 파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질은 이쪽에 비해 꽤나 떨어집니다. 귀족들의 기준에 맞춘 터라."
"그런가."
그럴 수밖에 없다. 제후국들을 돌며 외교를 하고 있는 일황자가 갑작스럽게 돌아와 참가하지 않는 이상 우위에 있는 것은 자신일 터.
입꼬리를 조용히 치켜올린 이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백하게 자신이 당초 예상했던 모습대로 흘러가는 상황.
"이쪽에서 가장 뛰어난 파티는 누구지?"
"두 파티입니다. 하나는 스물넷의 정규 기사. 아이넨 경을 파티장으로 결성된 곳입니다. 서로 손발을 맞추어 본 경험이 많으니, 아마 상당히 좋은 성과를 보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그게."
잠시 뜸을 들이며 망설이던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른 하나는 팀의 전력 자체는 월등히 높습니다만, 아무래도 개개인의 개성이 너무 강한 터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구성이 어떻게 되나?"
"전위 하나에 척후 하나, 후열 둘, 마공학자 한 명입니다. 파티장은 꽤나 숙련된 레인저 마르스가 맡고 있습니다만, 나머지 파티원들이."
"파티원들이?"
"...작은 검귀와 덴버가의 악몽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주 끝내주는 구성이군."
열한 살에 정규 기사와 싸워서 이긴 괴물,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마공학계가 술렁인다는 괴짜 천재.
이황자는 후원자 목록에 이름을 올려놓기만 할 뿐 구경 갈 생각까지는 없었다. 거기에 가서 시간을 낭비하기에 이황자는 너무나 바쁜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나.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겠어."
이 정도 판을 놓칠 수는 없었다.
"뭘 들고 올지 기대가 되는군."
부딪치는 것은 확정되어 있다. 남은 것은 어느 쪽이 부러지는지 겨루는 것뿐.
"선물을 준비해 두도록."
"선물... 말입니까?"
"그래."
고난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
"이기는 게 누구든, 관람료는 내야 하지 않겠나."
조용히 시선을 내린 이황자가 저 멀리 보이는 별궁의 모습에 눈매를 좁혔다.
항상 어두웠던 삼황자궁이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 보였다.
47화 준비 (1)
한 파티를 구성하는 데 있어 개개인의 역량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파티의 단합.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파티는 개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고, 자신보다 급이 떨어지는 파티에도 밀린다는 것이 세간의 정설이다. 나 역시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파티의 결속을 끌어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을 서로 함께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이 최고.
그건 반대로 말하자면 급조한 파티가 서로 결속되어 있을 리는 적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나는 파티 구성원이 전부 정해지는 순간 곧바로 단합회를 하기로 결정했다.
"뭘 자꾸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눈알을 파버리기 전에 눈을 돌리십시오."
"네 너머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자의식 과잉이군. 리나 지크."
...그게 이런 광경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하아."
황립 아카데미 내부. 녹스와 접견했던 카페.
"쟤네는 원래 저러냐?"
"아, 네. 원래 저래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 있는 녹스와 리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슬쩍 묻자 정면에서 빨대로 음료를 쪽쪽 빨아 먹고 있던 밝은 인상의 붉은 머리카락 소녀가 방실 웃으며 내 말에 긍정했다. 더불어 부연 설명까지 붙이는 소녀.
"평소에도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거든요. 정확히는 리나가 녹스 공자를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쪽에 가깝긴 하지만...."
"왜? 리나가 가문 때문에 사람을 가리고 그런 녀석은 아닌데."
"가문 때문이 아니라 그냥 싫다던데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요. 녹스 공자가 끈덕지게 대련해 달라고 달라붙어서 그런 거일 수도 있고...."
"아, 밟아 놔도 기가 안 죽으니까 싫어하는 거다?"
"가능성 있는 가설이에요. 선배님."
"...언제 그렇게 친해져서는, 둘이서 뭘 그렇게 속닥거리고 있는 겁니까? 클로에. 오라버니."
"아무것도?"
리나의 질문에 빙긋 웃은 마공학자 소녀, 클로에가 뒤로 몸을 빼는 것을 보면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참 공교로운 상황이었으니까.
-오라버니. 이쪽은 제 학우인 클로에입니다.
파티에 마공학자 자리가 비어 있다고 들은 리나가 자신의 친구를 소개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미 유능한 마공학자는 거의 다 쓸어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나마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레인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마공학자는 정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힘들다. 그 희소성이 마법사보다 더하다고 할 정도이니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원래는 대충 용병을 구해서 끼워 넣을 생각이었던 상황.
그러니 리나가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었을 때도 별생각은 안 했다. 안 했는데.
- 클로에는 마공학부의 2학년 수석입니다.
- 수석이에요~
이런 복덩이를 데리고 올 줄은.
"자, 자. 슬슬 그만 싸우고 서로 자기소개나 해 보자."
"...알겠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아무 진행도 되지 않을 테니까요. 저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리나부터."
"예."
내 중재에 슬쩍 내 옆에 앉아 있는 녹스를 째려본 리나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지는 소개.
"리나 지크입니다. 포지션은 전위, 그중에서도 메인 탱커입니다."
"메, 메인 탱커...가 무엇이냐?"
"쉽게 설명하자면 적의 공격이 후열에 닿지 않도록 막아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노아."
"아...."
아는 사람이 나와 리나밖에 없어서 구석에서 음료수만 쪽쪽 빨던 노아의 질문에 리나가 부드럽게 답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순서를 지키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클로에.
"천재 마공학자 클로에 덴버 등장! 포지션은 서포터고, 어지간한 회로는 해독, 탈취 양쪽 모두 가능해요. 어느 정도 전투 지원도 할 수 있고요."
"지원이라면?"
"이런 거죠."
촤르르륵!
말과 함께 클로에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곧바로 등 어림에서 퍼져 나온 마법 금속이 클로에의 오른팔을 덮었다. 순식간에 완성되는 거대한 기계 팔.
"제가 개인 제작한 마공학 물품들과 골렘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지원은 가능해요. 물론 제대로 된 기사나 마법사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도움 정도는 충분히 될걸요?"
"...스펙이 높네."
"저 이래 봬도 수석이거든요. 선배님."
기대 이상으로 높은 스펙.
뛰어난 인재의 합류에 기쁨의 박수를 치자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클로에가 만족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금 자리에 앉고 자기 옆에 앉은 노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살짝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는 노아.
"본 공녀는 노아 루미너스. 금지된 마법의 진전을 이은 자...!"
"네? 금지된 마법? 노아 님. 광휘마탑의 마법사 아니셨나요?"
"흐엑?"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평소처럼 헛소리를 하려던 노아에게 클로에가 악의 없이 딴죽을 걸었다. 그러자 곧바로 당혹으로 물드는 노아의 표정.
"그건...! 단지 현세에서의 모습일 뿐. 실제로는 금단의 지식을 추구하는...."
"와. 구체적으로 어떤 지식을 추구하는 건가요? 금단의 지식이라고 하니까 저도 흥미가 좀 생기는데."
"...부, 불사라든가. 세계 정복이라든가...?"
"마법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나요? 정복하려면 염두에 둬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닌데, 혹시 식량을 폭증시키는 마법이라거나!"
"바, 반려어...."
"에휴."
사춘기의 열병은 겪어 본 적이 없는 듯 무자비한 팩트로 노아를 공격하는 클로에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노아를 앉히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대신 설명해야 할 분위기였으니까.
"이 녀석은 노아 루미너스. 광휘마탑 출신 마법사고, 광휘 마법과 공용 마법 전반. 그리고 대마법까지 사용 가능해."
"대마법...! 벌써 그렇게 마법을 갈고닦으셨습니까. 노아!"
"그렇다. 반려의 말대로다. 본 공녀는 대단한 사람이니라."
"머리가 아파서 방금처럼 맛 간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헛소리니까 귀담아듣지 말고."
"...헛소리가 아니다! 유언비어를 퍼트리지 말거라!"
"그래. 그래."
그럼, 이번엔 녹스 차례인가.
발끈하는 노아를 진정시키고서 시선을 주자 녹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묵직하게 자기소개를 내뱉는 녹스.
"녹스 디트레인. 이 파티에서는 일단 척후를 맡고 있다. 척후로서의 특기는 아직 없군."
"와, 척후... 네? 척후요? 녹스 공자가?"
"그렇다. 척후에 별 조예는 없지만, 열심히 할 생각이다."
"...그게 대체 무슨."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클로에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생각이 많겠지만, 금방 바뀔 터였으니까.
"아직 초짜지만, 녀석의 재능은 확실하다. 그건 내가 보장해. 아마 일주일 뒤까지는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척후로 완성이 되어 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설명하긴 복잡하고, 누구 조언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인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보는 사람이 있어서."
"인재를 잘 보는 사람이요?"
"어. 그런 사람이 있었어. 지금은 못 만나겠지만."
모르지. 한 회차 정도 거슬러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 클로에를 보면서 피식 웃고서 손을 탁자에 짚었다. 이제 내가 자기소개할 차례였으니까.
"레이 지크. 포지션은 전위고, 그중에서도 어태커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파티장도 겸임하지. 이력이야 뭐, 다들 알고 있는 눈치고."
"신문에 많이 나오셨으니까요."
"그래. 우리 목표는 단 하나다. 가능한 한 십종제의 우승을 싸그리 긁어모으는 거."
"...싸그리요?"
"어."
마도, 체술, 통합 전투, 마공학, 던전 탐색, 종합 전술, 사냥, 상술, 난제 해독, 기숙사 대항전.
이 중에서 개인이나 일개 파티가 관여할 수 없는 기숙사 대항전을 제외하면 이 팀원이 개인으로든, 단체로든 참가할 수 있는 종목은 아홉 개다. 내 목표는 이 중에서 과반의 우승을 차지하는 것.
"마도에는 노아."
"체술에는 나와 리나, 녹스."
"마공학에는 클로에."
"그리고 나머지엔 파티 전원이 참가한다. 이 중에서 다섯 종목 이상 우승을 차지하면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다섯 종목... 가능할까요?"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개개인의 역량을 비교해 봤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파티의 역량은 다른 파티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편은 아니다. 이 대회는 스물다섯까지 참가가 가능하고, 이 파티는 열아홉인 나를 제외하고 전부 열일곱 살이니까.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연령대 자체가 젊은 만큼 전반적인 역량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지닌바 경험도, 실력도 나를 제외한다면 최상위권에 달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방법은 있어."
"방법이라면...."
"선택과 집중. 가능성이 있는 거에 모조리 투자하는 거지."
십종제의 아홉 종목.
그중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것에만 투자한다. 이게 내 전략.
"우리가 우승을 따올 종목은 총 다섯 개다."
"뭔가요?"
"체술. 통합 전투. 던전 탐색. 난제 해독. 그리고 사냥."
체술과 통합 전투를 제외하면 모두 팀전이다. 그리고 개중에서 던전 탐색은 척후, 난제 해독은 서포터의 역할이 중요한 종목.
"체술과 통합 전투는 한 명이 동시에 신청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나눈다."
"나눈다면?"
"체술엔 리나가, 통합 전투에는 내가 나간다."
"...그게 대체 무슨!"
가만히 듣고 있던 리나가 내 말에 놀라서 황급히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외침.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오라버니. 알고 있는 겁니까? 통합 전투에는 아마...!"
"알고 있어. 그 녀석이 나온다는 거."
작은 검귀. 샤엘 키르나.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주제에 과거의 오만했던 나를 거꾸러트린 진짜배기 괴물.
"...열한 살에 정규 기사를 이긴 괴물입니다. 4년이나 지난 지금은 얼마나 강해졌을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굳이...."
굳이 다시 검을 잡은 지금, 다시 부딪쳐서 깨져야만 하는가.
"...버림 패를 쓰려는 것이라면 재고해 주십시오. 오라버니. 차라리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니."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삼키고 다시 말을 골라서 하는 리나의 모습에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는 건 알고 있어. 괜찮아."
"하지만...!"
"부딪쳐서 깨지더라도 무너질 일 없어. 한낱 재능 차이로 무너지기엔 이번 십종제에 걸린 게 너무 많으니까. 그리고... 생각은 있어."
확신은 없다. 그 녀석은 괴물이니까. 아무리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짧은 순간에 녀석을 능가했으리라곤 확신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도해야만 한다. 녀석을 이길 가능성이 한 줌이라도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마도에 노아. 마공학에는 클로에. 체술에는 리나와 녹스, 통합 전투에는 내가 나간다. 물론 개인 종목에 나간다고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거기서 우승하지 못한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거든."
"...반론의 여지는 없는 겁니까?"
"없어."
단호하게 딱 잘라 말을 내뱉는 내 모습에 잠시 입술을 짓씹던 리나가 깊은 숨을 내쉬고 침묵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수긍하는 눈초리.
"나머지는...."
"던전 탐색. 난제 해독. 사냥."
"대비한다면 뭘 하는 건가요? 던전 탐색이야 근교의 던전을 모의로 한 번씩 돌아본다고 쳐도, 나머지 두 개는 대비할 수 있는 게...."
"좋은 질문이야. 꼼수를 쓸 거야."
"...네?"
"쉽게 말하자면 기출문제에서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거지. 난제 해독과 사냥 같은 경우엔 출제자가 매년 같으니까."
문제를 출제하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경향성을 읽는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여기서는 정말 꼼수를 쓸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빙의자의 기억을 뒤져 보면 이번 십종제에서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거 안 쓸 이유는 없지. 예상되는 문제를 골라서 집중적으로 연습한다."
"아, 네."
"그리고 마지막. 녹스를 제대로 된 레인저로 만드는 방법 말인데."
가장 중요한 부분.
"반려여. 대체 무슨 비책이 있는 것이냐? 일주일 만에 포지션 변경이라니...."
"숨겨둔 비장의 수가 있지. 그걸 위해서는 하나를 알아야만 해."
"...?"
"녹스. 너...."
"뭐지."
잠시 뜸을 들이면서 녹스를 지긋이 쳐다보자 멍하니 내 시선을 마주하는 녹스를 보고 씨익 웃었다.
이 맹한 녀석을 단시간 안에 레인저로 키워 내는 방법.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그 기적을 가능케 하는 단 하나.
"너 돈 좀 있냐?"
"...파티에 받아 주는 조건으로 나에게서 상납금을 갈취할 생각인가?"
"...수강료로 낼 돈 있냐고. 이 새끼야."
카야를 붙인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충-분한 돈을 덧붙여서.
48화 준비 (2)
광장 벤치에 앉아 있던 소녀, 샤엘 키르나는 생각했다.
자신이 기대했던 아카데미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다지 재미있는 곳은 아니라고.
"약해."
"...뭐?"
아카데미 내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가 갑자기 한 마디를 툭 내던지는 샤엘의 모습에 파티장, 마르스가 귓구멍을 후비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마르스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샤엘.
"너무 약해. 여기 있는 애들."
"...갑자기?"
"강한 애들이 있다고 해서 왔어."
"...십종제가 시작되려면 아직 며칠은 더."
"강한 애들이 있다고 해서 왔어."
"에휴."
꼬맹이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젓는 마르스를 보면서 뚱한 표정을 지은 샤엘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매만졌다. 벌써 며칠이고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해서 좀이 쑤셨으니까.
나이 열하나에 십 대의 쟁쟁한 검사들을 모두 꺾고 작은 검귀라는 별명을 얻었을 때.
샤엘은 자신이 조금 더 강한 검사들과 싸울 수 있을 줄 알았다. 여태까지는 항상 그래 왔으니까.
누군가를 이기면 그보다 강한 이가 와서 싸우고, 싸우면 그 검술을 보고 더욱 강해질 수 있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샤엘은 그 과정을 즐겼었고, 그 덕택에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열아홉 살까지의 검사를 모두 거꾸러트렸다. 하지만.
- ...천재가 꺾였다.
- 지크가의 천재가 꺾였다! 이걸로 전승이야!
자신보다 먼저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을 꺾고 나서는 그럴 일이 없게 되었다. 십대, 하물며 이십 대에 달하는 완숙한 검사들조차 자신과 맞붙는 것을 꺼렸으니까.
자신의 인생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느낌에 검사들은 샤엘과 맞붙는 것을 기피했고, 샤엘은 열한 살 이후로 대련다운 대련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지금 샤엘이 대련에 목마른 것은 당연했다.
"싸울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아니, 그러니까 지금은 못... 에휴. 애랑 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불만 가득한 샤엘의 표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파티장 마르스가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눈빛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곧바로 앞으로 나서는 부드러운 인상의 여성 마법사.
"후후. 샤엘. 지금은 못 싸워요."
"왜."
"그야 아직 십종제 기간이 아니니까요. 당신은 십종제에 참가하려고 여기 왔다는 거, 알고 있죠?"
"...."
"여기서 고집을 부린다고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요. 친선전을 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십종제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랑 친선전을 해 줄 파티는 없으니까요."
"...응."
조곤조곤 옳은 말을 하는 마법사의 이야기에 미간을 오므리고 있던 샤엘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마법사의 이야기.
"후후. 그래도."
"...?"
"싸우진 못하겠지만, 우리가 적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죠. 지금쯤이면 참가 파티가 거의 다 확정되었을 무렵이니까요."
"...!"
"보실래요? 아까 명단 받아 왔답니다."
"볼래."
과연, 어떤 이들이 적수로 나오게 될까.
말을 마치자마자 마법사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든 샤엘이 서류에 눈을 박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마르스가 슬쩍 등 뒤에서 서류를 훔쳐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명한 이름이 주르륵 박혀 있는 참가자 명단.
"이야. 잘난 사람 많네. 방랑 기사 오르트에 근위기사단 입단 예정자? 에레인. 이거 어느 종목 참가 명단이야?"
"종목이 아니라 파티 참가 명단이에요. 직종이 다 각양각색이잖아요?"
"그렇긴 하네."
서류를 가져온 마법사, 에레인의 말에 마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서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렸다. 우습게 볼 만한 이름들이 아니었으니까.
정규 기사 아이넨. 방랑 기사 오르트. 전방을 떠도는 전쟁 마법사 펠로스에 전쟁 사제로 이름 높은 마리아나 사제까지.
이번 들어서 특히나 커진 십종제의 규모 탓일까, 평소였으면 유력한 우승 후보였을 파티들이 대여섯 개씩 포진하고 있다. 강자를 상대하려는 목적이라면 이만큼 좋은 상황은 없을 터.
"주의할 만한 파티가 있나?"
"역시 아이넨 경의 파티겠죠. 아이넨 경을 제외하면 개개인의 밸류는 떨어지겠지만... 아시잖아요? 파티는 합이 맞는 게 최우선이라는 거."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아이넨 경의 파티는 밸런스가 좋아요. 이미 몇 년이나 합을 맞춰 온 이상 서로 호흡도 잘 맞을 테고요."
개개인의 실력 자체는 엄청나게 특출난 게 아니지만, 파티 단위의 전투력은 손에 꼽히는 것이 아이넨 파티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하고 합을 맞춘 시간도 짧아 호흡이 거의 맞지 않는 마르스 파티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
"파티의 단합력이 좋고, 더군다나 아이넨 경의 개인 기량 자체가 높아요. 전위에서 일대일로 꺾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겨."
"...."
"내가 이겨. 그 사람."
마치 사실을 말한다는 듯 단정적으로 할 말을 내뱉은 샤엘이 다시금 서류를 읽다가 눈매를 좁혔다. 익숙한 이름이 있었으니까.
"이 사람은...."
"왜, 누구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도 있어?"
"...."
"누군데. 어디 보자. 레이 지크... 레이 지크? 몰락한 천재?"
이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검을 놓았다고 들었는데. 다시 검을 잡았나 본데?"
"...."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지 않나? 4년 전에도 네가 이겼잖아."
"몰라."
"뭐?"
"이길 수 있을지, 몰라."
걱정할 거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마르스의 태도에 고개를 저은 샤엘이 이름을 노려보았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자신의 검기(劍技)는 레이 지크를 넘었다.
샤엘은 그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실제로 4년 전, 자신은 레이 지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으니까.
최근에는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검을 오랫동안 잡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열한 살에도 열다섯의 레이 지크를 꺾었으니, 아마 순수한 실력 자체는 자신이 레이보다 훨씬 뛰어날 터.
열 번 싸워 열 번 이길 것이고, 백 번 싸워도 아흔아홉 번 이길 것이다. 어쩌면 백 번 모두 이길 수도 있다. 단순히 검술로만 싸웠던 그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오러와 체력도 붙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열다섯 살의 레이 지크와 대련하고, 레이 지크를 꺾기 직전까지 갔을 때.
그때 느꼈던 위협을 샤엘은 아직 잊지 못한다. 모든 퇴로를 막고 차근차근 압박해 나가며,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리기 직전 느꼈던 그 감각.
단순히 검술의 영역이 아니다. 본능, 어쩌면 그 저변에 묻혀 있는 무언가.
'조금이라도 그게 더 빨리 나왔으면....'
자신이 졌을지도 모른다. 손도 쓰지 못하고, 압도적인 차이로.
"레이 지크가 그 정도로 강한가? 아이넨 경보다도?"
"몰라. 아마 아니야."
"...그런데 아이넨 경은 이긴다고 자신하면서, 레이 지크는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
"검술 실력의 문제가 아니야."
"그렇단 말이지. 흠."
그 정도로 특별한 게 레이 지크에게 있단 말인가.
잠시 턱을 쓰다듬던 마르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그럼, 조금 더 재미있게 해 볼까."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샤엘의 반문에 고개를 저은 마르스가 조용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경쟁자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괜찮은 계획이 생각났으니까.
* * *
파티의 단합회를 가지고 난 다음 날.
우리 파티는 곧바로 훈련에 착수했다.
"반려여!"
"어, 노아. 왔냐."
아카데미 내부. 파티 명의로 대여한 연무장.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노아의 모습에 연무장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착실한 성격답게 집합 30분 전에 정확히 도착한 노아의 모습.
"오늘 훈련을 한다고 들어서 왔다만, 무슨 훈련을 하는 것이냐?"
"전투 훈련."
"전투 훈련?"
"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아의 반문에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여러 명이서 전투할 때는 합을 맞춰 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전투력이 나오기 힘드니까."
파티는 무엇인가.
파티라는 건 각자 서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이들을 모아 놓은 집단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각자 다른 직업군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 파티지.
그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본적으로 파티원들은 서로의 역량이 어떤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검사가 마법에 대해서 모르고, 척후가 마공학에 대해서 모르는 것처럼.
"파티를 구성할 때 서로 역량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어. 당장 전위가 막을 수 없는 공격이 날아오고 있는데, 네가 시전에 시간이 드는 마법을 시전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아."
"그것뿐만이 아니지. 앞에서 충분히 걷어 낼 수 있는 공격에 굳이 대응하거나, 혹은 시전하는 마법의 범위를 몰라서 휘말리거나. 합이 안 맞아서 생기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대부분의 상급 마법은 전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컨트롤이 미숙한 마법사들은 아군을 다치게 하는 경우도 종종 보이고.
물론, 노아는 마법을 상당히 잘 컨트롤하는 축에 속하므로 아군에게 오인 사격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마법의 영향 범위를 파티원들이 자세히 알고 있다면 더욱 효율적인 전투가 가능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서로 뭘 할 수 있는지를 알아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런 셈이지."
말하다가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시선을 돌리고 상대를 확인했다. 연무장 입구에서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클로에와 리나.
"왔냐?"
"네. 리나도 같이 왔어요. 선배님."
"왔습니다."
"지각자는 없어서 좋구만. 아직 집합 시간까지 꽤 시간이 남았는데."
"첫날부터 지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내 말에 배시시 웃으며 마공학 기계가 달린 팔로 머리카락을 한 바퀴 꼰 클로에가 헛기침을 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휑한 연무장.
"선배님. 저희가 오면서 듣기로는 전투 훈련을 하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
"파티의 합을 맞추기 위한 거잖아요? 녹스 공자는 없어도 될까요?"
"없어도 돼. 있는 편이 좋기야 하겠지만."
"어째서인가요?"
"척후가 그런 직업군이니까."
척후의 역할을 정리해 보자면 크게 네 개로 나누어진다. 길잡이. 색적. 함정 해제. 그리고 후방 지원.
"척후의 능력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앞의 세 가지지. 원거리 지원은 잘되면 좋지만, 잘 안돼도 상관없어. 아예 전투에 합류하지 않는 척후도 있을 정도니까 말할 필요도 없지."
"그런가요?"
"그래. 물론 녹스 녀석이 못 싸우는 타입의 척후는 아니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십종제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녹스는 레인저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서 카야에게 보낸 상황.
지금 팀의 합을 맞춰 보겠다고 녹스를 이 훈련에 불렀다가는 녹스가 레인저 훈련을 받을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녀석에게 제대로 된 척후 역할을 기대하려면 최대한 시간을 확보해 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녹스 공자는 개인 훈련을 받느라 빠진다는 것 아닙니까. 오라버니. 그 부분은 대충 알겠습니다. 그런데."
못마땅하다는 듯 잠시 빈 자리를 째려본 리나가 헛기침을 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이어지는 물음.
"전투 훈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
"훈련은 어떻게 진행하실 예정이십니까? 합을 맞춰 보려면 역시 상대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던전을 탐색한다거나...."
"척후가 없는데, 무슨 던전을 탐색해?"
"그러면...."
"상대는 이미 와 있어."
"네?"
"여기 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스르릉!
내 말에 무슨 농담을 하냐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리나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뒤 검을 뽑았다. 간단한 이야기였으니까.
"요컨대 서로 역량을 알아보면 되는 문제잖아?"
"...."
"그러면 간단하지. 서로 붙어 보면 되지 않겠어?"
파티를 단합시키는 방법.
그건 지극히 간단하다. 외부의 적, 혹은 목표를 만들어 주는 것.
"일대 삼."
"...."
"상대는 나다. 너희 셋이 나를 상대로 삼십 분 이상 버티면 이 훈련은 끝이야."
"그게 대체 무슨...."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이지."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리나를 보면서 나는 씨익 웃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3분."
다음, 내가 내뱉은 선언에 파티원 모두가 얼굴을 굳혔다.
"이번 대련에서 너희가 3분이라도 버티면 해 달라는 건 뭐든지 해 준다."
49화 준비 (3)
남부에, 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천재가 있다.
레이가 샤엘에게 패배하기 전에는 제국에 그런 말이 떠돌고는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슷한 연령대에서 레이를 이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열다섯에 황립 아카데미의 졸업예정자들을 전부 깨부수고, 정규 기사가 되기 직전 수련 기사의 끝자락에 있는 이들을 해치우고, 심지어는 근위기사단의 예비 단원 자리가 예정되어 있는 천재.
그것이 과거의 레이였으니만큼 리나 역시 어느 정도 각오를 다지긴 했다. 아무리 4년 동안 검을 놓았더라도 제 오라비가 강하단 사실 자체는 의심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리나는 지금의 자신이 레이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레이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 역시 재능이 있었으니까. 검술부의 수석 자리는 딱지치기로 딴 것이 아니었으니까.
해볼 만하다. 심지어 삼 대 일로 싸운다면 지는 게 이상하다.
레이가 훈련의 내용을 입에 올렸을 때까지만 해도 리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작금에 와서 그 생각은 산산조각이 나 버린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다들 일어나라. 언제까지 자빠져 있을 거냐? 훈련 아직 안 끝났다."
"윽...!"
그도 그럴 것이, 삼 대 일로 대련하는 한 시간 동안 레이는 혼자서 다섯 번도 넘게 자신들을 거꾸러트렸으니까.
"막아."
날아온다.
타앙-!!!
레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시야 아래쪽에서 치솟는 무언가에 리나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 내었다. 방패를 울리는 묵직한 감촉.
'묵직하다?'
둔탁하다. 방패에 가려진 시야지만 확신할 수 있다. 이건 검신과 방패의 충돌이 아니다.
"느려."
판단을 마친 리나가 반사적으로 앞으로 방패를 밀었지만, 레이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곧바로 파고든 레이가 발을 안쪽에 걸어서 당겼으니까.
콰아앙-!!!
"커헉!"
"커다란 방패의 약점은 총 세 가지야. 첫 번째는 한 손이 완전히 봉쇄된다는 것."
담담하게 말하며 리나를 등부터 바닥에 처박은 레이가 그대로 방패 위를 짓밟았다. 방패만큼 장단점이 명확한 무기도 없었으니까.
압도적인 방어력. 그리고 둔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중량.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검사들이 방패를 드는 것을 주력으로 삼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 손을 봉쇄함으로써 투로가 한정된다는 것.
방패 검사가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검을 들었다면 당연하게도 공격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올 수밖에 없다. 버클러 같은 소형 방패라면 그런 일은 없겠지만, 아군을 지키기 위해 대형 방패를 드는 이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
"두 번째는 방패 쪽의 시야가 원천 차단된다는 거지. 아무리 커다란 방패라도 방금같이 파고드는 공격에는 약해질 수밖에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할아범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던 말이니까. 그러면 마지막도 아냐?"
"마지막...."
"그런 대형 방패는 그냥 검사보다도 기동성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거."
콰앙-!!!
입술을 짓씹는 리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레이가 방패를 밟고 있던 발에 힘을 주어 리나를 제쳤다. 그 모습을 보고 황급하게 일어났지만, 이미 리나가 지키고 있던 후열에 도달한 레이.
"고, 골렘! 방어...!"
"대응이 늦어."
파고든다.
공중에서 전개된 뭉툭한 돌골렘이 아래로 주먹을 내려찍기가 무섭게 앞으로 파고든 레이가 클로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터져 나오는 빛무리.
"[일루의 수호], [갈래빛의 강타]!"
더블캐스팅. 순식간에 구성되는 두 개의 마법.
"대응 좋고!"
클로에의 몸을 희미한 빛이 감싸는 것과 동시에 적을 강하게 밀어내는 마법을 쏘아 내는 노아를 보면서 레이가 진득하게 웃음을 머금고 클로에를 놓은 채 몸을 낮추었다. 동시에 레이가 있는 자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마법.
파앙! 파아앙! 파아앙-!!!
허공이 터져 나갔다.
"어서 다음 수를 준비하거라!"
"응? 아, 응!"
살상력을 염두에 두지 않고 상대를 밀어내는 것에 집중한 노아가 진땀을 흘리며 외치자 클로에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러나 곧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지금 뭐 찾냐? 이거?"
"...아?"
"포격 딜레이 3초. 실행."
우우웅-!!!
"이런 건 많이 써 봤지."
[포격 모드 실행.]
허공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레이가 클로에에게서 탈취한 마공학 장치가 전개됐다.
"...!"
어느새 빛을 머금고 있는 마공학 장치의 모습에 대경실색한 노아가 황급히 수인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빠르게 노아의 위로 장치를 던지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레이.
파삭!
내딛는 걸음이 둔중하게 지면을 밟았다가, 다시 질풍이 되어 앞서간다.
"이, [일루의 수호]...!"
"이 대응도 좋아. 하지만."
앞과 위, 두 국면에서 닥치는 공격에 반사적으로 대응한 노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방어 마법을 양방향에 모두 전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아의 앞에 도착하는 레이.
"급하게 만든 마법은 강도가 약하지."
퍼석!
부서진다.
키이이잉-! 카가가각-!!!!!
"아, 아으...."
방어 마법을 산산 조각낸 레이의 오러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마공학 장치의 포격을 갈기갈기 찢어 내는 것을 보고 노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느낀 죽음의 위기 앞에서 새하얗게 질린 노아의 표정.
"흠."
전열 돌파까지 10초. 파티 전멸까지 20초.
걸린 시간을 가늠한 레이가 오러를 머금은 검을 한 번 털어내고서 검집에 납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익살스러운 물음.
"이번에도 내가 이겼네?"
"...."
"시작하기 전에 뭐라고 했더라? 나보고 오만하다고 했었나?"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레이의 모습에 리나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계산으로는 이렇게까지 밀릴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체 왜 그렇게 강한 겁니까?"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강한 게 아니야. 너희가 약한 거지."
"...."
"아직도 왜 졌는지 모르겠냐?"
분하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리나를 슬쩍 바라본 레이가 피식 웃고서 집중하라는 듯 바닥을 검집으로 툭툭 쳤다. 이어지는 설명.
"파티전의 기본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거다. 이건 알고 있겠지?"
"...예."
"일 더하기 일은 이지. 일 더하기 일 더하기 일은 삼이야.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람 세 명은 사람 한 명보다 세 배 강하다. 그게 파티의 기본이야."
"...."
"하지만 실제로는 달라. 너희같이 파티전에 익숙하지 않으면 오히려 서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음. 좀 더 쉽게 설명해 볼까."
옅게 웃은 레이가 말을 이었다.
"일대일 상황이었다고 가정했을 때, 아마도 나는 리나를 일 분 안에 쓰러트릴 수 없을 거야."
"네? 하지만 선배님. 방금은 10초 만에...."
"그건 어디까지나 리나를 '따돌린' 거지. 리나 같은 방패 검사는 넘어진 상황에서도 충분히 상대의 공격을 버티면서 다시 회복할 수 있어. 눕혔다고 끝이 아닌 거지."
넘어질 경우 손해를 보겠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손해를 보진 않는다.
리나가 다소 쉽게 넘어진 것 역시 그런 이유다. 일대일 상황에서 넘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진 않으니까.
일방적으로 얻어맞긴 해도 버틸 수 있다. 넘어졌을 때 싸우는 방법 역시 잘 알고 있다. 눕는 순간 방패가 방어해야 하는 면적은 상당히 좁아지고, 그대로 싸웠다면 충분히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터.
일대일 상황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레이가 리나를 마무리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리나가 넘어지는 것을 절박하게 피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일대일 상황이라면 그렇다는 이야기.
"파티전에 익숙하질 않으니 자기가 넘어지면 뒤가 뻥 뚫린다는 걸 모르지."
"...윽."
"후열, 특히 클로에는 리나가 그런 상황에 빠질 거라고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까 내가 곧바로 닥쳐올 걸 대비하지도 못한 거고."
수호골렘의 전개가 1초만 더 빨랐어도 레이는 막혔을 것이고, 그 후속타로 노아가 준비하고 있던 마법이 레이를 강타했을 터.
물론 거기에서 레이가 무너지지는 않았겠으나,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속전속결로 끝나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골렘을 상대하는 동안 회복한 리나가 뒤로 붙으면 다시 처음부터 국면을 짜 들어가야 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대응이 좋았어. 클로에가 잡힌 걸 보자마자 시전하던 마법을 취소하고 클로에를 구할 방법을 찾았으니까."
"...본 공녀는 잘했는가?"
"셋 중에선. 그래도 미비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야. 의사소통이 부족했어."
만약 노아가 더블캐스팅에 이어 마법의 종류를 알려 주었다면?
방어 마법도 있는 만큼 폭발의 여파를 역이용한 클로에가 상당히 거리를 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었으면 당연히 노아에게 향하는 레이의 뒤통수를 마공학 장치로 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낯가림이 심한 노아의 성격이 발목을 잡은 셈.
"너희 셋의 기량은 십종제 참가자 중에서도 꽤 우수한 편이야. 상위권, 최상위권이라고 봐도 되고. 하지만 셋을 합쳤을 때의 기량은... 지금으로선 일반 파티 이하지. 왜?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까."
"...."
"십종제는 경험과 실력이 풍부한 파티가 많이 나온다. 방금 내가 한 걸 단독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 못해도 셋은 더 있을 거야. 그런 사람들 상대로 이렇게 해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듯 말을 늘어놓은 레이가 쪼그려 앉으며 말을 이었다.
"개개인의 역량을 따져 봐도 최고가 아니고, 그렇다고 파티의 단합이 좋은 것도 아니지. 이대로 가면 우리는 우승은커녕 4강도 보기 힘들어."
"...선배님이 파티에 합류하고 나면."
"그래도 마찬가지야. 방금 말했잖아? 나 같은 포텐셜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셋은 더 있을 거라고. 나는 꽤 잘난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혼자서 다 하긴 힘들거든."
숙련된 파티는 파티원 개개인의 역량을 더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 법.
"너희보고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말 하는지 알 정도가 되라고는 안 해."
"...."
"서로 전투력을 깎아 먹지 않는 수준. 그 정도만 되면 충분해. 잠재력은 충분히 있으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쉽지는 않지. 그러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 거고."
유대감,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건 역시 같은 고난을 함께하는 것.
"몇 번 해 봤는데, 역시 굴리는 게 효율이 좋더라고."
토 나올 때까지 구르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휴식 시간은 없나요?"
"물론 주지."
"언제쯤...."
"너희가 잘하면."
"여, 역시 녹스 공자가 와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끼리만 합을 맞추는 것도!"
"아, 걘 걱정 안 해도 돼. 너희보다 훨씬 빨리 적응할걸?"
세상의 끝에 던져 놔도 적응할 녀석이니까.
씨익 웃은 레이가 사색이 된 세 소녀를 보고서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다.
"죽도록 해 보자고."
병사는 굴려야 제구실을 한다는 옛 스승의 말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