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

50화 준비 (4)

거액의 의뢰금에 낚여 레이에게 떠넘기듯 녹스의 훈련을 넘겨받은 지 나흘.

카야는 생각했다.

'이게... 맞나?'

뭔가가 잘못됐다고.

카강-!!!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

잘 보이지 않도록 위장되어 있던 발목 함정이 튀어 오르며 상대의 발목이 있을 만한 부분을 콱하고 물어 젖혔다. 그러나 정작 함정의 이빨 부분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모습.

'어지간한 레인저도 걸릴 만큼 제대로 위장해 놓은 함정인데... 이게, 나흘 만에 된다고?'

발목을 자를 정도로 강하게 설치해 놓진 않았지만, 제대로 위장해 놓았다. 초짜 레인저라면 당연히 걸릴 함정이기에 포션도 준비해 놓은 상황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준비가 무색하게 만드는 녹스의 담담한 표정을 보면서 카야가 입을 다물었다.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저 애송이를 레인저로 만들어 달라고? 겨우 일주일 만에?

-그래.

-도련님. 혹시 뭐 어디에 머리 부딪쳤어?

나흘 전.

녹스와 함께 자신을 찾아온 레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카야는 레이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니까.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 말이 전부 옳지는 않더라도, 무슨 직업이든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천재라도 배우지 않은 것을 알 수는 없고, 그 '하나'를 알려 주는 데 상당한 시간이 들어가기 마련이니.

일주일 안에는 불가능하다. 함정에 국한해 가르치더라도 모자란대 심지어 색적과 추적까지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불가능하다. 전투 능력을 제외하면 현 레인저 업계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카야도 그렇게 빨리 기술을 익히진 못했으니까.

카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러므로 레이에게 이 의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 아니.

그 직후 레이는 웃었다. 해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 내가 말해 주는 방법대로 한다면 충분히 가능해.

그 결과는 지금 눈앞에 있었다.

실제로 가능했으니까.

"...와, 진짜 세상 불공평하네?"

한탄한 카야가 자신이 준비한 코스를 돌파해 가는 녹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마침 함정 하나를 부수고 있는 녹스의 모습.

철컥! 쿠드득!

녹스의 눈매가 좁혀질 때마다 숨겨져 있던 함정이 발동하고 남아 있던 흔적들이 파헤쳐졌다. 우스운 것은 저 중 어느 것도 카야가 녹스에게 설명해 준 적이 없다는 것.

본디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라고 하였다.

숨겨져 있는 함정을 찾고, 안전하게 해제하려면 적어도 그 함정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설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해제하는 방법도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직감으로 함정을 찾아내고... 발동시키고 있어.'

발동시켜서 위험한 건 부수고, 한 번 발동시켜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돌이나 나뭇가지 따위를 이용해서 발동시키고.

함정을 설치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해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로지 직감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함정을 간파해 내고 있는 모습.

저 모습을 보고 누가 녹스를 레인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감이 특출나게 뛰어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후각. 청력. 시력. 혹은 촉각이나 미각까지.

레인저 중에서 그런 재능을 가진 이가 없는 건 아니다. 뛰어난 레인저 중에서는 수인이나 엘프도 있으니.

하지만 카야가 본 녹스는 그런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렇게 오감이 뛰어났으면 처음부터 회피했을 함정도 첫 번째에는 으레 걸려들고 말았으니까. 다만.

'한 번 걸려들면 다음번엔 절대 안 걸려들어.'

무의식의 영역인지, 의식의 영역인지는 몰라도 한 번 걸려든 함정에는 다시 걸려들지 않는다. 누구든 쉽게 흘려 넘길 만한 정보를 모두 저장하며 분석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콰드득!

"...거기까지!"

마지막 함정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상념에서 깨어난 카야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바위에서 내려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는 있지만, 비교적 멀쩡한 몰골로 서서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녹스의 모습.

"함정 코스는 여기서 끝이야. 더 이상 익힐 건 없어."

"벌써 끝인가."

"그래. 그리고 내가 말할 땐 '다나까'로 대답하라고 했지? 돈 받고 가르치는 거라지만, 어쨌든 네 스승 같은 건데 예의를 좀 갖춰."

"알았다."

"듣자듣자 하니까 이 자식이."

저도 모르게 등에 멘 활대를 매만진 카야가 미간을 찡그리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 며칠 지켜본 바로 녹스의 인성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다소 정신이 나가 있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색적도 어느 정도는 끝났고. 다음에 배울 건 흔적 읽기랑 색적, 추적인데...."

"뭔가 외울 게 있나?"

"아니, 훈련은 이번하고 비슷한 방식대로 할 거야."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혼자서 읽는 방법을 습득하게 만드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직감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녹스에게는 백 마디 언어보다 그런 훈련 방식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일단 한번 굴려 보라는 레이의 조언이 옳았던 셈.

"약속 시간까지 사흘 남았는데... 남은 시간 안에 기초적인 건 전부 떼고 가야겠어. 십종제 예선도 있으니까."

"알았다."

레인저의 기초를 떼는 데 사흘.

결코 길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녹스의 재능은 이미 확인했다. 만약 그 직감이 이번에도 발휘된다면 사흘 안에 정말 모든 것을 익혀 낼지도 모르는 일.

'아직 장담은 못 하겠지만... 사흘 안에 나머지 것들을 전부 익혀 내는 게 가능하다면.'

레이가 여태껏 보여 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쩌면.

잠시 십종제의 우승에 대해 생각했던 카야가 고개를 휘휘 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쉬었지? 슬슬 다음 스텝 넘어가자."

"알았다."

"말투 좀 고치고."

"알았노라."

"에휴."

청개구리마냥 존대를 하지 않는 녹스를 바라본 카야가 고개를 휘휘 젓고 등을 돌렸다.

이제, 다시 훈련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 * *

파티원들의 훈련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으헥!"

쿵!

"오늘은 여기까지."

내 업어치기에 숨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는 노아를 보고서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엎어져 있는 리나와 클로에.

"많이 늘었네. 이렇게만 하자."

"...뭐가 많이 늘었다는 겁니까. 아직도 한 명한테 무너지는 상황인데...."

"그걸 감안해도 많이 늘었다는 거야."

내게 당해서 누워 있다가 내 말을 듣고 분하다는 듯 방패를 내팽개치는 리나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리나의 말과는 다르게 녀석들의 실력은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몰라보게 늘었으니까.

훈련을 시작한 지 5일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녀석들에게 훈련시킨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서로가 가진 역량을 깨닫게 하는 것.

우리 파티의 역량은 이미 충분하리만치 높고 부족한 건 협조성과 서로의 역량을 파악하는 능력뿐.

그렇다면 이 능력은 함께 숱하게 전투하는 것으로 보충할 수 있다. 이게 내가 녀석들을 훈련시키는 데 중점으로 생각한 부분이었고, 실제로 이 방식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당장 후열과 전위의 연계가 치밀해져 처음 싸웠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시간을 써야만 돌파가 가능한 수준까지 왔으니까.

우리 파티의 역량은 순조롭게 상승하고 있다. 이대로 계속 순조롭게 흘러간다면 종국에는 우승 후보에 이름이 올라 있는 파티들과도 충분히 일전을 겨뤄 볼 만한 역량을 지닐 수 있을 터.

"오늘은 26분 버텼지. 어제는 20분 버텼고."

"...."

"내일쯤이면 30분도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지. 그다음 날이면 어쩌면 나를 쓰러트릴 수 있을 수도 있고."

이 정도면 나를 제외하고 이번 십종제에서 단독으로 이 파티의 방어를 깨부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단기간에는 밀리지 않을 역량.

"조금 더 해야겠지만, 이 정도면 연습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이제부턴 슬슬 실전으로 돌입할 때야."

"네? 선배님. 실전이요?"

"그래. 알잖아? 오늘이 예선 발표일이라는 거."

클로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깥의 게시판을 가리켰다. 오후 6시 정각이 되면 저곳에 예선 대진표가 붙을 예정이었으니까.

"십종제의 일정은 간단해. 예선은 한꺼번에 치른다."

십종제가 치러지는 기간은 2주.

황립 아카데미는 그 첫날과 둘째 날에 기숙사 대항전과 종합 전술을 제외한 8개 종목의 예선을 전부 치른다. 물론 본선에 비하면 비교적 간단한 과제들.

"첫날 낮에는 개인 종목들의 예선이 치러지지. 마도, 체술, 통합 전투, 마공학."

이 네 가지 종목이 끝나고 나면 다음은 비교적 오래 걸리는 파티 종목들의 예선을 치른다. 우리가 모여야 할 때는 바로 그때.

"상술은 어차피 우리가 참가할 게 아니니까 제쳐 두고, 첫날에 치를 파티 종목은 하나다. 뭔지 아는 사람?"

내가 질문을 던지자 노아가 곧바로 시의적절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터져 나오는 대답.

"본 공녀가 알고 있다! 사냥 아니냐!"

"정답. 사냥이야."

가장 가치 있는 포획물을 잡아 오는 파티가 본선에 진출하는 종목.

"예선은 네 블록으로 나누고 한 블록당 참가하는 팀은 8팀. 올라가는 팀은 2팀이지."

"160명 중 40명만 올라가는 셈이네요?"

"그래. 우리는 이 40명 안에 들어가면 된다. 쉽겠지?"

"네, 뭐... 40명 안에 드는 정도라면."

"우리 수준을 생각하면 쉽긴 하겠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쉬울지는 생각해 봐야 해."

"네?"

"우리는 파벌싸움의 한가운데에 있으니까."

지금 십종제의 구도는 삼파전이다. 최대 파벌인 일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이황자의 파벌. 그리고 진을 지지하는 우리 삼황자 파벌로 나뉘어 있는 상황.

물론, 일황자 파벌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삼황자 파벌에 아무 생각도 가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시시콜콜한 일로 지시를 내리지 않는 이황자의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황자 파벌 역시 우리를 크게 의식하진 않을 거고. 하지만.

"파벌은 파벌끼리 뭉칠 거야. 우리는 우리 파티로만 대응해야 하고."

"...그럼."

"다소 강한 견제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한 블록에 배치되는 예선 여덟 팀 중 올라갈 수 있는 건 겨우 두 팀뿐.

각 파벌은 자기 파벌에서 한 파티라도 넣기 위해서 용을 쓸 것이다.

물론 대놓고 연합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럼, 여기서 문제. 파벌싸움이 한창일 때 우리가 할 일은?"

"각 파벌이 싸우는 동안... 이득을 취하는 겁니까?"

"정답."

리나의 말에 동의하고서 말을 이었다.

"짐작이지만, 일황자 파벌과 이황자 파벌은 우리를 얕보고 있을 거고, 두 번째 예선이라면 몰라도 처음 예선에는 우리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겠지."

우리 역량이 그간의 훈련으로 상당히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파벌 전체와 싸워서 이길 정도는 아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더라도 첫 실전 정도는 최대한 안전하게 가는 것이 옳을 터.

"예선에서는 일황자와 이황자 간의 파벌싸움이 한창일 때 이득을 취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취할 방식이다.

쿠당탕!

"고, 공자님! 급보입니다!"

"...?"

말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열리는 훈련장의 문에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훈련장 문 너머, 사색이 된 표정으로 신문을 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제임스의 모습.

"이황자님이, 이황자님이...!"

"...."

솟구치는 불안감.

숨이 차서인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제임스의 손에서 신문을 건네받고 눈을 박았다. 그리고 곧이어 터져 나오는 탄식.

"...역시 쉽게 가긴 힘들겠구만."

신문 헤드라인에 이황자의 인터뷰가 박혀 있었다.

[황자 루이스. 이번 십종제에서 가장 주목하는 파티는 '레이 지크' 파티.]

...우리 파티를 저격하는 인터뷰가.

51화 사냥(진) (1)

이황자, 루이스 폰 지그하르트는 목적을 이루는 데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건 굳이 비밀까지 갈 것도 없이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황자 본인부터가 스스로 이미지를 그렇게 조성했으니까.

피 대신 철과 얼음이 흐르는 자. 제국의 상권 절반을 손에 쥐고 있는 자.

한없이 냉정하고 냉철하며 일 처리에 절대로 사감 따위는 넣지 않는, 적대자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자가 바로 이황자였다. 말 그대로 철혈의 황자라고 불러도 무색할 정도.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빈틈이 없는 자. '싸우기 전에 먼저 이긴다'라는 원칙을 가장 제대로 지키는 이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이황자가 십종제의 상대로 나온 만큼 삼황자인 진 역시 어느 정도 정치공작을 각오하긴 했다. 그럴 가능성은 적었지만, 파티원들의 가문에 압박이 들어가지 않는지 주시하고, 또한 파티원들 개인에게 이황자가 접촉하지 않는지 눈여겨보고는 했었지. 하지만.

"...젠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자가 인터뷰에서 레이 파티를 언급하는 이런 상황은 상정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황자는 본인의 말을 천금처럼 여기는 인물이었으니까.

단지 상대를 방해하기 위해서, 불확실한 상황에 입을 여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한 방 먹었군."

삼황자궁.

근위 기사 테로트가 가져오는 신문과 갖가지 소식들을 앉은 채로 검토하고 있던 진이 깊은 숨을 내쉬면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는 이황자의 인터뷰.

『어제자 후원자 인터뷰에서 제국의 이황자, 루이스 전하께서는 이번 십종제에서 누구를 가장 주목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레이 지크'를 파티장으로 삼고 결성된 파티를 입에 올리신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파티의 이력으로는....』

"후우."

구구절절 파티장인 레이가 과거에 얼마나 천재였는지, 그 파티원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설명하는 신문기사를 바라보던 삼황자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신문을 접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공격받은 것치고는 타격이 너무나 컸으니까.

"황자님. 이게 그렇게 문제가 될 만한 일입니까? 비하하거나 비난한 것도 아니고 칭찬한 것 아닙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큰 문제가 되겠지. 적어도 우리에게는."

신문 기사를 다시 한번 읽고서 깊게 한숨을 내쉬는 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테로트가 질문을 던지자 진이 울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테로트 경은 지금 십종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가?"

"...음, 이황자님 파벌이 우세하다는 것만 아는 정도입니다."

"그렇지.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루이스 형님과 아그람 형님의 파벌이 서로 겨루고 있는 형태다. 이황자 파벌이 조금 더 우위에 있는 양강구도라고 해야 할까."

현 십종제의 파벌은 총 네 개로 나눌 수 있다. 이황자를 중심으로 결집한 이황자 파벌과 일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로 뭉친 일황자 파벌.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는 중립 파벌. 마지막으로 진을 지지하는 삼황자 파벌.

이황자를 중심으로 결집한 파벌은 강력하고, 일황자 파벌 역시 질은 비교적 떨어지더라도 그 숫자 자체가 많아 한 축을 충분히 자처할 만했다. 그에 비하면 중립 파벌이나 삼황자 파벌의 전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황자 파벌과 일황자 파벌에 있어 가장 큰 적은 기본적으로 중립 파벌과 삼황자 파벌이 아닌, 양대 파벌이라는 뜻이다.

삼황자인 자신이 참가했다고 하지만 거느리고 있는 파티는 한 파티뿐이고, 심지어 평균 연령대도 상당히 낮은 검증되지 않은 파티.

파벌이 빈약한 만큼 견제받을 일 따위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적어도 예선 중에는 남들의 방심을 틈타 수월하게 경험을 쌓으면서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파티 경험이 모자란 레이 파티에게 있어 그건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을 터.

그러나.

"이 한마디로 모든 판이 뒤집혔지."

"...어째서입니까?"

"우리 파티가 수면 위로 떠올랐으니까."

이황자가 진을 극도로 싫어하는 만큼 당연하게도 이황자 파벌은 레이 파티를 적대할 터. 여기까지 보면 레이 파티의 우군은 없다. 그러나.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지."

일황자 파벌과 이황자 파벌이 적대하고, 이황자 파벌과 레이 파티가 적대한다.

그런 구도로 판이 짜여지면 당연하게도 일황자 파벌은 레이 파티와 연수할 수 있게 된다. 우승은 한 자리밖에 없으니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전까지는 분명 서로 어느 정도 도우면서 이황자 파벌을 견제할 수 있다는 뜻.

분명 원래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형님께서는 그 길을 아예 막아 버린 것이다. 이 한마디로."

가장 기대되는 파티를 레이 파티로 찍으면서 레이 파티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황자 파벌에게 레이 파티와 자신이 같은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하다. 아무리 일황자 아그람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지 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황자 파벌 역시 무능한 자들은 아니니까. 이런 간단한 정치적 수사 하나 간파하지 못할 리는 없을 터.

간파당함을 알면서도 말을 꺼냈다. 심지어 평소에는 허언하지 않는 이황자가 이 건에 대해서 말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형님께서 이렇게 해서까지 견제해야 할 정도로 레이 파티는 위협적이다.... 일황자 파벌은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스 형님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말을 할 수는 있어도 허언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형님께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면 그만큼 레이 파티의 잠재력을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일 터."

"...."

"범을 몰아내기 위해 늑대를 불러들이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범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없지. 싸움이 끝난 후 자신을 잡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일황자 파벌과 이황자 파벌의 이파전 양상에서 레이 파티까지 낀 삼파전 양상으로 판을 바꾸는 것. 그렇게 해서 서로 상호견제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황자가 노리는 바다. 그리고 그 노림수는 아주 정확하게 적중했고.

"판을 바꿔서 레이 파티를 시선 위에 끌어들였다."

"...."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예선에서 떨어질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십종제의 우승이란 고작 이 정도 견제로 무너질 파티에게 주어질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만큼 본선에서 보여 줄 무기를 먼저 꺼내야 한다는 문제가 있겠지."

레이가 이 정도 수작질에 무너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압도적으로 불리한 '시련' 안에서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냈던 레이니까. 분명 무슨 묘책이 있긴 하겠지. 하지만.

모름지기 사람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장 자신의 성향에 맞게 움직이는 법.

이대로 계속 일이 진행된다면 파티의 역량도, 성향도 모조리 저쪽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저쪽은 패를 아무것도 까지 않은 상황인데, 이쪽의 패만 까는 꼴이 될 터.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루이스 형님은 말 한마디로 판도를 좌우하거늘."

신문을 구긴 진이 가볍게 자조했다. 이렇게 앉아 있는 자신이 퍽 무력하게 느껴지는 상황.

'무능하기 짝이 없구나. 진.'

자신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권력도, 능력도, 하다못해 재력도 부족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은 있겠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잠시 생각하던 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테로트 경. 아무래도 잠깐 외출을 해야겠다."

"외출, 말입니까?"

"그래. 아무리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자조 어린 웃음을 흘린 진이 주먹을 꽉 쥐고 이황자궁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짓씹듯이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면서.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걸 알려 주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 말씀은...."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버리고 호소해 보는 수밖에."

지금 진에게는 이황자를 견제할 만한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일황자 아그람은 다르다. 가장 많은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아그람이니까.

"루이스 형님과 다르게 아그람 형님은 내게 아직 동정을 품고 있다. 첫째 형님께 무릎이라도 꿇으며 호소한다면 일방적으로 견제받는 일은 없겠지."

담담하게 자신의 체면을 바닥에 버리겠다는 선언을 스스로 하는 진을 보고 테로트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 파티는 황자님이 직접 꾸리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원하지도 않는 일에 무릎을 꿇을 필요는...."

"경의 말이 맞다. 나는 명예 따위에 연연하지는 않아."

"그렇다면."

"하지만, 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다."

진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던 4기사단과 세프리 황비도 그랬다.

진이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것이 진을 위한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목숨을 내던졌다.

"종국에는 그 기대에 보답하지 못할지라도... 가만히 앉아서 똑같은 꼴을 보는 건 사절하고 싶군."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진의 모습을 본 테로트가 입을 다물었다. 진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오랫동안 진을 보필해 온 테로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채비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작은 목소리로 답하는 진을 보면서 이를 악문 테로트가 진의 외출준비를 도울 시종을 부르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방문 앞으로 다가오는 노년의 시종장.

"아, 시종장. 마침 잘되었습니다. 황자님의 외출 준비를...."

"외출 준비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이걸."

"...이건?"

"황자님께 온 서신입니다."

"내게 온 서신이라."

발신인에 '레이 지크'라고 적혀있는 편지를 본 진이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곧이어 밀봉을 뜯고 내용을 읽다가 눈이 커지는 진.

"...하."

"황자님?"

"하하. 하하하! 이 자는 정말...!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박장대소를 터트리던 진이 편지를 찢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테로트 경. 시종장. 외출 준비는 취소하도록."

"갑자기... 말입니까?"

"그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웃음을 터트린 진이 촛불에 서신을 불태우고서 깊은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렸다. 레이가 보낸 서신의 마지막에 적혀 있었던 말.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제대로 주제에 맞게 놀아 보자...."

정말 그 말대로군.

상쾌한 미소를 머금은 진이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외출은 내일로 미뤄야 할 듯싶었다.

십종제의 예선 첫날.

'사냥' 종목의 예선이 시작되는 날로.

52화 사냥(진) (2)

기사와 마법사, 레인저와 사제. 누가 가장 강할 것인가.

예로부터 끊이지 않던 논쟁은 온갖 조건을 바꿔가면서 이어져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내 직업이야말로 우월하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니까.

지형을 활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레인저가 유리하고, 충분히 시간을 들일 수 있거나 혹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마법사가 유리하며, 붙을 수 있는 근접전에서는 기사가 유리하고, 파티 규모가 아닌 수십 명 단위의 집단전에서는 사제와 몽크들이 유리하다. 이것이 여태껏 통용되고 있는 정설.

하지만 그런 정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녕 일대일의 최강자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온갖 분야의 유망주들이 모이는 십종제에는 그 모든 이들을 아울러 한 무대에 몰아넣는 종목이 존재한다.

'통합 전투'라는 이름의 각축장이.

"허억, 허억...!"

십종제 종목. 통합 전투 예선 회장.

"괴물, 괴물이야...!"

숨을 몰아쉬면서 헐레벌떡 도망친 마법사가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턱 끝까지 차올라 경종을 울리는 위기감.

"어떻게 저런 괴물이...."

상궤를 벗어났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머리를 감싸 쥐고 어둠 속에 숨은 마법사가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방금 보았던 장면이 도저히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으니까.

-통합 전투 예선의 통과 조건을 고지하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제한시간 내에 참가자 1인당 각자 배부된 패를 5개 모아올 것.

예선 통과 조건을 들었을 때.

마법사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대지 학파 마법사인 자신에게 유리한 판이 깔렸기 때문.

대지 학파의 마법사는 마법 진지를 구축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학파.

움직이면서 상대를 노리기는 쉽지 않지만, 함정을 파놓고 상대를 기다리는 데는 상당히 뛰어난 전투력을 보인다. 이렇게 서로서로 찾아다니는 상황에서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볼 수 있을 터.

조무래기 다섯 명을 처리해도 좋고, 운이 좋으면 강자 한 명을 처리하는 것으로 패를 다섯 개 모두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강한 이들은 다른 이들을 처치해서 패를 여러 개 들고 다닐 테니까.

기습한다면 우승 후보라도 거꾸러트릴 수 있다. 대지 학파에서도 상당히 촉망받는 마법사인 사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뭐야 이건.

까드드득!

──세 번째로 함정에 들어온 상대가 맨손으로 마법을 잡아채 찢어 버리기 전까지는.

'혹시 몰라서 도주로를 파 두길 잘했다...!'

상대가 완전히 사각지대에서 쏘아진 마법을 한 손으로 잡아채 뭉개 버리는 것을 본 순간 미리 파 둔 땅굴로 몸을 던졌고, 심지어 땅굴에서 나오자마자 마법을 발동시켜 땅굴을 메워 버렸다. 이 정도면 추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그 정도로 강하면 주변을 돌면서 다른 사람을 노리는 게 효율이 훨씬 좋을 거다. 고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나를 쫓아올 리는 없어...!'

운이 없었던 것이다. 시간도 아직 남아 있으니, 다시 진지를 파두면 합격선은 충분히 넘을 수 있으리라.

"다시, 다시 하...."

"잡았다."

턱!

"...흐아아아악!"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법사가 마법으로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뒤에서 뻗어 나와 마법사의 손을 잡아채는 억센 손아귀.

"때리고 도망치기 있나?"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

"다, 다 드리겠습니다! 항복! 가져가십시오!"

밀려드는 공포감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마법사가 반사적으로 생존을 위해 허리춤에 있는 패를 뿌렸다. 그리고.

"필요 없어."

다음 순간, 청년이 내뱉은 말에 마법사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미 다 모았으니까."

"아니, 그럼 왜...!"

"꼴 받잖아."

빠아아악-!!!

* * *

개인 종목의 예선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예선 돌파했습니다."

"쉽게 이기고 왔느니라!"

"음."

십종제. 사냥 종목의 예선전 회장 앞.

"체술, 마공학, 마도, 통합 전투까지... 이걸로 모두 수월하게 통과했네요?"

개인 종목 예선을 마치고 손을 흔들며 합류하는 리나와 노아를 바라보고서 고개를 끄덕이자 잘됐다는 듯 손뼉을 친 클로에가 빙긋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예선 통과도 쉬운 일은 아닌데, 파티원 전원이 개인 종목의 예선 통과라니... 대단한 거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클로에 너도 쉽게 통과했잖아."

"저야 뭐...."

"비슷한 거야. 여기서 개인 역량으로 뒤떨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일주일 동안 파티 훈련을 진행했다고는 하나 우리는 아직 파티로서는 초짜다. 반대로 개인 역량으로서는 상당히 상위권이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상 파티 종목보다는 개인 종목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특히나 가능성이 큰 건 상위권들이 통합 전투로 빠지는 마도와 체술일 터.

"본 공녀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뜻이구나! 반려는 본 공녀의 활약에 기대하는 것인가!"

"아니, 별 기대는 안 해."

"뭣."

"정확히는 기대를 안 한다기보다 그걸 전제로 계획을 짜지 않는다는 거에 가깝지. 굳이 쓸데없는 부담을 줄 수 있으니까."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노아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설명을 이었다.

"우리가 노리는 목표 우승 수가 몇이지?"

"그야... 다섯 아닌가?"

"그래. 다섯이지. 그럼, 여기서 파티 종목으로 참가할 수 있는 건?"

"음, 사냥과 난제 해독, 던전 탐색... 셋?"

"그렇지. 셋이야. 확보할 수 있는 우승이 셋이나 된다는 뜻이지."

파티 종목에서 세 개. 그리고 내가 참가하는 통합 전투에서 하나.

그렇게 우승을 차지한다면 나머지 하나만 개인종목에서 메꾸면 된다.

클로에가 참가한 마공학과 리나가 참가한 체술, 그리고 노아가 참가한 마도까지, 세 개 중 하나만 우승해도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굳이 과한 부담을 안겨 줄 수는 없을 터.

"너희가 모두 우승하지 못해도 남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기숙사 대항전은 내가 외부인이니까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상술이나 종합 전술은 비벼 볼 구석이 있지."

"그렇...습니까? 전혀 그럴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만."

"있어. 다만 번거롭기도 하고, 일종의 반칙 같은 거라서 별로 하고 싶지 않을 뿐."

빙의자가 가진 백수십 회차의 미래 지식은 비대칭 전력.

나는 이번 십종제의 상술 종목에서 돌풍을 일으킬 사람을 알고 있다. 비록 지금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십종제가 종료되는 마지막 날쯤 되면 그자의 판매량은 하늘을 뚫게 될 터.

"하려면 할 수는 있어. 다만 우리가 '운으로' 우승했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을 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지?"

"...누구도 반론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입니까."

"그래."

리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알았다는 듯 입을 다물던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대충 앞으로의 계획은 알겠습니다만, 결국 파티 종목 세 개에서 모두 우승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

"...저희는 당장 이번 예선부터 어떻게 할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라버니께서는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있지?"

"어째서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파티원이 다 모여야 설명을 해 주지. 우리 파티원 한 명 더 있잖아."

"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저기 오는구만."

일주일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던 녹스를 그제야 떠올린 모양인지 리나가 인상을 찡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묘한 복장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녹스의 모습.

"오랜만이군. 파티장. 그리고 파티원들."

"그래. 오랜만이다. 그보다... 그 차림은 뭐냐? 해괴한데."

"임시 스승이 이게 더 나을 거라고 하더군."

아, 그런 건가.

레인저의 상징인 활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검을 다섯 개나 등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녹스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카야의 생각을 알 것도 같았으니까.

"체술 종목은?"

"포기했다. 시간에 못 맞춰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서, 성과는 좀 있었나?"

"아마도."

아마도라.

담담하게 답하는 녹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언은 안 하는 이 녀석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저 말은 허세나 거짓이 아닐 터.

"좋아. 그럼 준비는 다 됐다고 생각하고... 우리 계획을 설명해 주지."

"계획?"

"이번 종목을 이기는 방법 말이다. 이황자 때문에 상태가 좀 골치 아프게 되었거든."

일주일 동안 산골에 처박혀 있었을 녹스를 위해서 현 상황을 대강 풀어서 설명해 주자 이야기를 듣던 녹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파벌끼리 뭉쳐서 우리가 고립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파티장."

"정확하게 이해했어."

"대강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정면돌파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나?"

"일반적이라면 그렇겠지."

"...일반적이라면?"

"그래. 일반적이라면 서로 파벌끼리 뭉치는 이 상황에서 돌파할 구석이 없다고. 하지만 이건 달라."

"그게 무슨 소리냐?"

"이건 서로 겨루는 게 아니라 '사냥물'을 많이 잡아 온 쪽이 이기는 종목이니까."

십종제 종목인 사냥의 규칙은 다른 종목과 비교해도 지극히 간단하다. 바로 다음과 같지.

"첫째, 이미 포획한 남의 사냥물을 빼앗지 않을 것."

"무차별적으로 전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칙이군."

"그렇지. 그렇게 되면 사냥 실력과는 무관하게 승패가 갈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

녹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이었다.

"둘째, 제한시간 내에 사냥을 완수할 것. 이때 완수의 기준은 파티원 전원이 의식을 유지하고 시작지점으로 돌아와서 사냥감을 제출했을 때를 기준으로 하고."

"어째서 그런 규칙이 있는 건가요?"

"괜히 자기들 역량보다 훨씬 어려운 사냥감을 잡다가 다치지 말라는 의미야. 예전엔 객기부리는 사람들이 참 많았으니까."

비록 예선 회장에는 그렇게 강한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지만, 본선 회장에는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온갖 몬스터가 돌아다닌다. 개중에서는 정규 기사도 일대일로는 상대하지 않는 몬스터들도 다수 존재할 정도.

과거에는 이런 몬스터를 잡겠다고 객기를 부리다가 파티원을 몇 명이나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그런 걸 막기 위한 규칙이지.

"마지막 세 번째. 위 두 규칙을 지킨 파티를 대상으로 잡아 온 사냥감의 수와 질을 판단해서 종합 순위를 판정한다. 이게 사냥 종목의 규칙이지."

"합당하네요. 저희한테는 썩 좋은 조건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파벌끼리 서로 협력해서 몰래 몰아 주기를 하려고 한다면, 개인 참가인 우리는 질에서는 밀리지 않더라도 숫자에서 밀릴 수밖에 없을 테니. 하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 녀석들의 계획대로 돌아갔을 때 이야기잖아?"

파벌이 문제다. 사냥감의 숫자로 밀릴 수밖에 없다. 질을 높여도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답은 간단하다. 이 판 자체를 깨버리는 것. 완전히 구도를 뒤틀어 버리는 것.

"이번 예선에서 우리가 사냥할 건 이미 정해져 있다."

"...그게 뭔가요?"

"우리를 제외한 전부."

예외는 없다.

설령 그것이 인간이라도.

53화 사냥(진) (3)

십종제가 비록 제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무대라고는 하나, 그 모든 것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종제는 대회가 열 개나 있으니까.

각 종목의 결승전을 치르는 것만 봐도 열 번의 무대를 봐야 할 것이고, 심지어 십종제를 제외하더라도 아카데미 문화제 자체는 볼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나오는 노점. 출품되는 연구 결과.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구경할 거리가 지극히 많다는 뜻.

예전부터 인기가 많은 통합 전투와 종합 전술, 그리고 기숙사 대항전 정도를 제외하면 십종제의 예선까지 전부 챙겨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심지어 귀족으로 좁히면 그 숫자는 더 적고.

그리고.

"아니, 저분은...."

"저, 저분이 왜 이런 경기를 보러 오신단 말입니까?"

그렇기에, 십종제 '사냥' 종목의 예선전에 나타난 사람을 본 관중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지, 지니스 전하!"

본선도 아닌 예선 회장에 제국의 황자가 직접 나타나리라곤 그 누구도 추측하지 못했으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로 왕림을...!"

예선 회장.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진의 모습에 관람자들에게 자리를 배정해 주고 있던 담당자가 진땀을 흘리며 허리를 굽혔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죄,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왕림하실 것을 알지 못하여 제대로 된 자리를 준비하지를 못했...."

"상관없다. 빈자리는 있는가?"

"예? 아, 그렇습니다!"

"적당히 알아서 배정해 주게."

"여, 영광입니다!"

제 혀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황급히 대답한 담당자가 맨 앞자리에 자리를 배정해 주는 것을 보고 진이 피식 웃은 뒤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대중의 시선이 닿는 장소에 외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유쾌한 기분이었으니까.

-뭘 하려는지 짐작은 가는데, 그거 하지 마라. 진.

전날, 일황자궁으로 걸음을 결정했을 때 왔던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려는 걸 하지 말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는 것은 좋으나 불필요한 손해를 볼 필요는 없다. 손해만 있고 이득은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하지 말라.

그렇게 서두를 연 레이의 편지는 진의 행동을 만류했고, 이윽고 자신이 진을 만류한 이유를 밝혔다.

아주 간단한 이유.

-나는 이 판을 이용할 생각이야.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굳이 증명하는 방법으로 십종제를 고른 이유는 하나다. 네 지명도를 올리기 위해서지.

일황자와 이황자와는 다르게 지금 삼황자인 진의 인지도는 최악을 달리고 있는 상황.

어떤 실적도 존재하지 않고 제대로 된 소문 따위도 돌지 않는다. 세간에 퍼져 있는 건 그저 삼황자 지니스가 한량처럼 지내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형제들에 비해 무능하다는 소문뿐.

-원래라면 이 십종제에서 우승하는 거로 지명도를 올린 다음에, 추가로 이것저것 해야 할 게 있었겠지.

십종제에서 우승하는 파티가 삼황자의 후원을 받는다. 그게 어떤 큰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다. 단순히 암막 뒤에 있었던 진을 앞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을 뿐.

-지금은 아니야.

그러나 이 상황이라면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십종제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황자 간의 경쟁이 되어 버린 상황이니까.

-이황자가 참가한 순간부터 이목은 쏠리기 시작했다. 네가 만약 여기서 이긴다면 너는 단순히 '우승 파티에 후원하고 있는 황자'가 아니라,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황자에게 한 방 먹인 삼황자'가 되는 거야.

난이도?

물론 높아질 것이다. 단순히 '십종제를 우승하는 것'을 목표로 보았을 때 이황자의 언급과 개입은 크나큰 악재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 뒤까지 바라본다면. 정녕 이루어야 할 목표가 그다음, '삼황자 지니스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라는 것에 있다면.

-계 탄 거지.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밟아야 할 단계를 몇 단계나 건너뛸 수 있을 테니.

-네가 할 일은 지금 남에게 숙이는 일 따위가 아니야. 내가 벌어 온 영향력을 어떻게 낭비하지 않고 유효하게 쓸까를 고민하는 거지.

방법은 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 판을 어떻게 더 키울지나 생각해라.

'네 말대로 하지. 레이 지크.'

편지는 그런 내용으로 끝을 맺었고, 그 말대로 진은 조금 더 이목을 끌기 위해서 예선 회장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현 상황에 이른 상황.

"곧 시작할 모양입니다."

"그런가."

정말 가능할 것인가.

'아니, 아니다.'

테로트의 말에 잠시간 빠져 있던 상념에서 빠져나온 진이 문득 의문을 가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의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자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한 편이 아니었던가.

레이 지크가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하다. 반드시 그리되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성은 있다. 가능성도 보지 않은 채 가부를 입에 올릴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고민해야 하는 건 다른 문제.

'너는, 어째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벽을 넘는 방법.

둔재가 천재를 이기는 방법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그때는 단순히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이 본 레이는 다혈질이어도 비이성적인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너는 한낱 동정 따위로 움직일 자는 아니다. 레이 지크.'

군신 관계를 포함하더라도 이 세상에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생각하는 것이 있기에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 것일 터.

-곧 예선을 시작하겠습니다!

'내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냐.'

멀리 퍼져 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를 보면서 조용히 의자에 몸을 묻은 진이 예선 회장 전역을 비추는 마공학 장치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번 예선에는 누가 올라갈까?"

"그야 이황자님이 후원하고 있는 파티들이 올라가지 않겠나. 다른 파티를 폄훼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수준 차이가...."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속닥거리는데도 묘하게 귓가로 들어오는 소리에 피식 헛웃음을 터트린 진이 내심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감았다. 불현듯 떠오르는 예상.

'이번 예선전에서 올라가는 건 여덟 파티 중 두 파티.'

원래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다.

-한번 십종제의 마왕이 되어 보자고.

규칙을 급하게 변경하지 않는 한, 이번 예선전에서 올라가는 파티는 한 파티밖에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가 편지로 말한 방법이 정말 실현된다면.

곧, 이곳에 마왕이 강림할 테니까.

* * *

십종제는 매년 하는 행사고, 명예를 얻기에 좋은 행사다.

이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드는 이유는 십종제에 매년 고정적으로 참가하는 파티가 복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행사인 십종제는 본선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경력이 되곤 하니까.

참가 연령 제한이 스물다섯 살까지인 만큼 십수 번씩 참가할 수는 없지만, 전도유망한 용병이나 기사 지망생들, 혹은 마법사나 마공학자들은 시간이 비면 어지간해서는 십종제에 참가해서 본선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으음."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지금 사냥 예선을 치르고 있는 브랜든 파티는 그런 중고 신인 중에서도 꽤 베테랑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랜든 파티는 이미 사냥 종목에 네 번이나 참가해 두 번 이상 본선에 올라간 경험이 있었으니까.

"운이 좋구만."

십종제. 사냥 종목 시작 직후.

집결지에서 흩어져 어느 정도 포인트 안쪽까지 들어온 파티장, 척후 브랜든이 기꺼운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명하게 어깨를 훑는 바람.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대진운이 좋아."

"대진운이?"

"그래. 들어오기 전에 대진표를 봤잖냐. 압도적인 파티가 없어."

쿡쿡하며 숨죽여 웃음을 터트린 브랜든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얼마나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인지 파티원들 또한 알아야 했으니.

'사냥'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척후의 능력이 뛰어나야만 했다.

생각해 보면 그건 지극히 당연했다. 아무리 어려운 사냥감과 싸워 이길 역량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 사냥감을 찾아야 성립이 되는 것이니까.

오거나 그리폰처럼 아예 산의 주인 행세를 하는 몇몇 몬스터나 환수급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몬스터는 영역 표시를 할지언정 자신의 흔적을 대놓고 뿌리고 다니지는 않는 법이고, 이런 몬스터들의 흔적을 색출해 내기 위해서는 뛰어난 척후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곧 척후 능력이 좋은 파티가 좋은 사냥감을 선점할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나 사냥 종목은 남의 사냥물을 강탈할 수 없게 막는 조항이 있는 만큼 이 선점이 굉장히 효과적인 편.

"전투력 자체는 꽤 준수한 파티가 몇몇 있지만... 이쪽에 배정된 녀석들은 전부 척후가 풋내기들이야. 경험이 풍부한 척후는 손에 꼽고, 그마저도 사람을 상대로 하는 녀석들이지."

"그게 무슨 의미인데? 파티장."

"무슨 의미긴, 우리 파티가 손쉽게 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브랜든 파티의 전투력은 높지 않지만, 사냥 종목의 배점은 단순히 강한 몬스터를 잡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물이 얼마나 희귀한가. 얼마나 찾아내기 어려운가.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포획하기 어려운가. 얼마나 많이 잡아 왔는가.

그런 것을 모두 종합해서 하는 것이 사냥 종목의 배점이었다. 상당히 척후의 경험이 풍부한 브랜든 파티에 있어서는 굉장히 유리한 종목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자, 슬슬 시작해 보자고."

"슬슬 찾아보려고?"

"그래야지. 늦지 않으려면."

슬쩍 태양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한 브랜든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비록 이번 예선에 뛰어난 척후가 드물다고는 하나 소란이 벌어지면 각종 파티가 사냥감을 가로채려 몰려들 터.

'규칙상, 잡고 난 뒤에는 강탈이 안 되지만, 잡기 전에는 가로챌 수 있다.'

파티의 전투력이 낮은 편인 브랜든 파티가 그런 일을 막으려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란을 피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가거나, 아니면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약하지만 희귀한 사냥감을 잡거나.

"좀 둘러보고 와야겠다. 베이스캠프는 설치해 놨으니까 다들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뭘 찾으려고?"

"요정 계열 환수. 아니면 적당히 감 좋은 놈으로 한둘쯤 골라잡아도 괜찮겠지."

희귀한 거로 두엇 정도. 안정권을 원하면 세 마리 이상.

그 정도면 예선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을 마친 브랜든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숲 깊숙한 곳으로 진입하는 브랜든.

"어디 보자...."

곳곳에 남아 있는 사냥감들의 흔적과 그 사냥감을 추적하고 있는 이들의 흔적.

'초짜가 실수한 모양이구만... 음?'

사슴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급하게 도망친 흔적을 발견하고서 브랜든이 피식 웃음을 흘린 뒤 흔적을 살피다가 눈을 좁혔다. 남겨진 흔적 사이사이로 보이는 발자취가 꽤 묘했으니까.

"이건...."

아무리 초짜라도 사냥에 나서면 거동에 주의하기 마련이거늘, 이 발자국엔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사슴을 사냥할 생각조차 없었던 게 아닌가.

"그럼 뭘 사냥하려고 한 거지?"

"알려 드릴까요?"

"...?"

혼잣말을 흘리다가 갑작스럽게 돌아온 대답에 흠칫 몸을 떤 브랜든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나무 위에 걸터앉아 웃으며 브랜든을 보고 있는 사내.

"뭘 사냥하려고 했는지, 궁금하십니까?"

"...그렇소. 궁금하군."

숨을 죽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다못해 들개조차도 낯선 사람에게 경계를 가지기 마련이거늘.

"대체 뭘 사냥하려고 한 거요? 이렇게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이 있나."

순수하게 치밀어오른 의문에 브랜든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

"있죠. 이미 잡았는데."

"...?"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나?"

브랜든의 질문에 씨익 웃은 레이가 나무에서 뛰어내려 뒤를 점했다. 그리고.

다음 말이 이어지는 순간.

"너 납치된 거야."

"아니, 그게 무슨 헛...."

"얘들아. 모셔라. 귀중한 인질이시다."

"예! 선배님!"

브랜든의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마공학 장치로 만들어 낸 '목줄'이.

54화 사냥(진) (4)

규율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보통 그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배식받을 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줄을 세우고, 악의를 품고 잠입하는 자를 걸러내기 위해 성문에서 검문을 하는 등, 대부분 규율은 어떤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규율도 필요치 않으니까.

그러나.

문제가 일어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규율로 정해 놓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있었다. 가령 맨몸으로 맹수에게 달려들면 안 된다는 법이 없는 것과 같은 일.

자신의 손해가 확실한 것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그걸 굳이 규율로 정해 놓을 필요는 없고.

이 사냥 종목에 '타 파티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율이 없는 것 역시 그런 이유였다.

"저... 저!"

따져 보면 너무나 손해가 큰 일이었으니까.

"저 파티,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십종제의 하나. 사냥제의 관중석.

아직 사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초반인지라 느슨하게 앉은 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황자 측 중년 귀족 한 명이 마공학 장치에 떠오른 화상을 보고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귀족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한 감정.

"어째서 저런 짓을... 어찌 의미도 없이 분탕질을 치는 게야!"

역정을 내는 중년 귀족의 모습을 보고 앉아 있던 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종목이라면 모를까 사냥제에서 저런 짓은 의미가 없었으니까.

사냥제는 사냥 실력을 겨루는 대회고, 뛰어난 척후들이 많이 참가한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남겨진 전투의 흔적을 읽어 내고, 서로 소통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았다.

파벌이 다르고, 서로 노리는 바가 달라 소통하지 않을 뿐, 사냥제 안의 파티들은 얼마든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의사소통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상위 파티 몇몇은 서로 암구호 따위를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사냥 구역을 나누는 경우도 종종 보일 정도.

그런 상황에 한 파티의 구성원이 습격을 당했다. 그래서 탈락할 예정이다?

'그 순간 나머지 여섯 팀을 전부 적으로 돌리는 꼴이군.'

대회인 이상 사람을 완전히 처리하진 못하니 다른 팀에게 흔적을 읽힐 가능성이 크고, 심지어 납치당한 파티는 그 즉시 실격이 아닌 만큼 복수를 하러 올 확률이 높을 터.

'분탕질이라고 할 만해.'

승리를 위해서는 의미가 없는 행위다. 파벌 단위로 대신 사냥감을 잡아 주는 파티가 있다면 모를까, 십종제 전체 규율로 의도적인 연합 행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아무런 이득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일 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범인의 생각이다.'

생각하는 구조가 다른 이들은 연합하지 말라는 규칙을 이렇게 바라본다.

그럼, 의도적인 연합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냐고.

"대체 무슨 생각이지...?"

술렁거리는 장내.

화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눈을 크게 뜨고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덩달아 진의 옆에서 눈을 크게 뜨는 테로트.

"무, 무슨 생각일까요?"

"뭐가 말인가?"

"가는 방향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쪽으로 가면... 그."

"브랜든 파티와 마주친다?"

"예. 파티장이 잡혔다는 걸 알면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방해하러 올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한 명을 제거했으면 도망쳐서 다른 파티를 노리는 게 낫지. 어째서 저런."

"그게 아니라면?"

"...예?"

"아군을 맞이하러 가는 움직임이라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아군... 말입니까?"

"그래."

테로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이 조용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사냥제의 예선에는 여덟 파티가 참여하고, 그중에서 본선에 올라가는 것은 두 파티다. 레이 파티를 제외하고도 한 파티가 남는다는 뜻이지."

물론, 이대로 가면 브랜든 파티는 탈락이다. 한 명이라도 기절하는 순간 그 파티는 탈락 처리되니까. 하지만.

"레이 지크는 브랜든을 기절시키지 않았다. 하물며 유폐시키지도 않았고.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가?"

"...설마!"

"그래."

브랜든 파티에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상황을 단정 지은 진이 나직하게 화상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테로트 경.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잃을 게 많은 사람은 무섭지 않다는 이야기와 같다."

희망을 인질로 잡고 있다면 상대를 조종할 수 있는 법.

물론, 이 정도로는 상대를 조종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러니 추가적인 방법이 필요할 터.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이 국면을 헤쳐 나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 그러나 테로트 경.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무엇입니까?"

"레이 지크는 떨어지지 않아."

일이 조금 틀어져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레이에게 있어 이 예선은 '노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앉아서 지켜보다가 막이 내리면 손뼉을 치는 것뿐이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것이 사전에 짜여진 판이라.

말을 내뱉은 진이 조용히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면서 턱을 괴었다.

슬슬, 화상 속에서 레이 파티가 브랜든 파티와 마주하고 있었다.

* * *

사냥제. 브랜든 파티의 베이스 캠프.

"...뭐라고?"

"어, 그러니까."

상대의 반문에 잠시 내가 알려 준 말을 기억에 떠올리던 노아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너희 파티장은 우리에게 인질로 잡혔다. 전부 투항하거라!"

"그게 뭔 개 같은 소리... 파티장?"

헛웃음을 치며 답하던 브랜든 파티의 덩치 큰 전위가 문득 시선을 돌려 노아의 뒤편, 이쪽으로 향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노아의 말마따나 브랜든이 우리에게 잡힌 채로 두 손을 들고 있었으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뭐 하는 짓이긴. 방금 우리 마법사가 말했잖아? 너희 파티장을 인질로 잡았다고."

"그게 대체 무슨...."

"인질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우리 요구를 이행하라는 뜻이지."

귀를 후비적거리면서 슬쩍 브랜든을 앞으로 내밀고 말을 이었다.

"사냥제의 규칙 두 번째. 사냥은 제한시간 내에 완수해야 하며, 완수의 기준은 파티원 전원이 시작 지점으로 돌아와 사냥감을 제출했을 때를 기준으로 한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반대로 말하면 이 뜻이지. 한 명이라도 빠지면 너희는 반드시 탈락한다. 파티원 전원이 시작 지점으로 돌아간다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니까."

참가는 했으나 사냥감을 제출하지 못했다.

이대로 우리가 브랜든을 계속 붙잡고 있게 된다면 브랜든 파티의 실격 사유는 그런 식으로 쓰여질 것이다. 기준 미달로 인한 탈락이라고.

"우리가 요구하는 건 뭐, 몇 개 없어. 우리 편에 서서 함께 싸워 달라는 것뿐이지."

"그게 무슨... 가능할 것 같으냐? 연합은 금지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의도적인 연합이 금지지. 연합은 금지가 아니야."

상대 전위의 말을 받아치면서 빙긋 웃고 설명을 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

십종제의 규칙 하나. 의도적인 연합을 금지한다.

이 규칙에 굳이 '의도적인'이라는 게 들어가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의도적이지 않은 연합까지 판단기준에 넣어 버리면 너무나 많은 행위가 연합 행위로 잡혀 버리기 때문.

어떤 종목에서든 연합 금지라는 것 자체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해석될 수 있는 조항이기에 연합 행위는 명백하게 '사전에 의도된 행위'라는 것이 판명되지 않는 이상 잡혀가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

"파티원 한 명이 인질로 잡혀서 강제로 명령을 따르는 건데, 이걸 의도된 연합 행위라고 보는 사람은 없지 않겠어?"

"...으윽."

"그리고 맨입으로 하라는 것도 아니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듯, 차마 반론하지 못하는 전위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너희에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일 거다."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의 의미지. 우리는 너희와 연합해서 더 많은 파티의 구성원들을 납치할 생각이다."

"...우리 같은 놈들을 더 늘리겠다고?"

"그래."

내 계획은 하나였다. 사냥감을 거의 잡지 않고 모든 파티를 탈락시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

우리 파티의 척후가 아직 추적이나 함정계의 숙련도가 많이 올라오지 않은 녹스인 만큼,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다른 파티에 비해서 뒤처질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이런 계획을 세웠지. 하지만.

"이 계획에는 맹점이 있지. 뭔지 아나?"

"...뭐냐?"

"우리 파티 하나로는 아무리 강해도 여섯 파티나 떨어트리기 힘들다는 거야."

의도적이지 않은 연합이 가능하다는 건 이쪽의 이야기뿐이 아니라 상대 쪽에도 해당된다.

한 파티가 다른 파티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면 금방 연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가정해도 세 배 이상의 인원수를 상대로 대거리를 해야 한다는 뜻.

"그 연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최대한 숫자를 불려 놓는다면 저쪽도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우리를 본선으로 올라가는 남은 한 자리에 끼워 넣어 주겠다는 건가? 아니면, 남은 일곱 파티 중에서 경쟁을...."

"둘 다 아니야. 앞으로 잡힐 놈들에게도 미끼는 필요하니까."

여덟 파티 중 두 파티가 올라가는데, 한 자리를 우리가 먹으면 남는 건 한 자리뿐.

여기까지만 보면 일곱 파티가 경쟁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굳이 일곱 파티 전부를 인질로 잡을 필요도 없이 우리를 포함해 다섯 파티까지만 연합시키면 나머지 세 파티는 전부 숫자의 우위를 토대로 거꾸러트릴 수 있으니까.

"네 파티."

"...."

"너희는 너희를 포함해 네 파티끼리 한 자리를 경쟁하게 될 거다. 더군다나...."

"더군다나?"

"여러 파티를 잡다 보면 필연적으로 너희를 풀어줄 시간은 일이 모두 끝난 후, 그러니까 사냥제가 끝나기 직전이 되겠지."

"그건...!"

"그래."

뭐라도 한 마리 잡으면 이기는 상황에서는 강적을 잡기 위해 힘쓰기가 힘든 법.

"같은 조건이라도 척후가 뛰어난 너희가 유리한 고지에 선다."

"...."

"어쩔래?"

모름지기 상대에게 무언가를 강요했을 때 거부감을 가장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상대가 그걸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법이라.

"이 정도면 우리랑 함께할 만하지 않나?"

"그 정도면...."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선택지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나 이 선택지는 합리적이고 본인들이 그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전 회차에서 진에게 배웠던 방법을 그대로 써먹고서 고민에 잠긴 브랜든 파티를 웃는 낯으로 조용히 바라보았다. 곧이어 돌아오는 대답.

"...결정했다."

돌아올 대답은 애당초 하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정도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납득은 끝난 셈이니까.

55화 사냥(진) (5)

십종제의 예선전에서는 좀처럼 후원자들이 오지 않는 법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예선전에 참가하는 파티에 대한 정보는 원하니까.

시간이 부족해서 예선전에 올 수 없는 본인들 대신 대부분 귀족은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대리인을 보내 적의 전력을 분석하고는 한다. 그 수가 얼마나 많으면 '인기 없는 종목의 인기 없는 대진 예선에는 귀족들의 대리인이 일반 참가자보다 많다'라는 이야기가 떠돌겠는가.

예선에서 벌어진 일은 본선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본선에 아주 관심이 많다.

그렇기에 지금 벌어지는 일은 사냥제에 참가하는 파티를 후원하고 있는 후원자 대리인들의 경악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여파를 지니고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그도 그럴 것이, 사냥제 예선이 시작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레이 파티가 벌써 네 개의 파티를 규합하고 있었으니까.

"심판! 심판-!!!"

"무, 무슨 일이오?"

사태를 황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일황자 측 대리인 하나가 심판을 목소리 높여 부르자 당황한 표정으로 진행되는 양상을 지켜보고 있던 심판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성난 기색으로 말을 이어 나가는 대리인.

"무슨 일이냐? 지금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당연히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성토하기 위한 것 아니겠소!"

"...."

"보시오! 저들의 행태를! 저걸 보고도 그냥 방관하고 있단 말이오!"

말과 함께 화상에 떠올라 있는 광경을 삿대질한 대리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러 대었다. 화상 안쪽에서 총합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기 때문.

"십종제의 규율에 의하면 의도적인 연합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소!"

"...그래서?"

"저들이 행하는 작태를 보시오! 저건 연합이 아니오! 사냥제의 본질은 누가 얼마나 사냥을 잘해 오는가 하는 것이거늘, 저들은 대회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억지를 쓰고 있소!!!"

"...크흠."

불같은 대리인의 성토에 헛기침한 심판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답했다. 대리인의 말이 틀리진 않았으니까.

"흠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물론 나 역시 알고 있소. 다만 이 경우엔 그것이, 대회의 취지와는 맞지 않소만 규칙을 어긴 부분은 없으니, 아직 제재를 가하기엔 근거가 좀...."

"어찌 저걸 보고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고 지껄이는 것이오! 그러고도 그대가 심판인가!"

"뭣...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 못 들어 주겠군! 그대가 심판인 나보다 이 십종제의 규칙을 잘 아시오!"

"지, 지금 말 다 했소!"

"다 못 했소! 그렇게 규칙에 대해 잘 알면 그대가 심판을 하지 그러셨소? 편파판정으로 당장 내일쯤 형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이, 이...!"

"두 분 다 진정하시지요. 제재는 심판의 권한이거늘 말이 심하셨습니다. 라우프 경."

성을 버럭버럭 내며 싸우는 대리인과 심판을 바라본 이황자 측 대리인이 두 손을 들어 둘을 진정시키자 씩씩거리던 일황자 측 대리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말을 잇는 이황자 측 대리인.

"그러나 저 역시 이 사태를 그저 관망하고 넘어갈 수는 없겠습니다. 심판. 저들은 이 대회의 취지를 망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저들이 명백하게 규율을 어긴 것은 없소. 그러니 제재할 근거도 없는 것이...."

"제재할 근거는 충분합니다. 저들이 이 십종제라는 틀 자체를 망치고 있다는 것."

내뱉은 말과 함께 차갑게 미소를 머금은 대리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만약 수준급의 검사가 마법을 개발하여 검에 마법을 씌운 채 마도 종목에 나가 우승을 거머쥔다면, 그건 마도 종목의 취지에 맞는 것입니까?"

"그건...."

"규율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건 대회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냥제는 어디까지나 사냥 실력을 겨루는 대회이니 말입니다."

파격(破格)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파국(破局)은 문제가 된다.

레이 지크가 벌인 일 역시 그것과 같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그들은 한낱 토끼 한 마리를 잡는 것으로 사냥제의 본선에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사냥 실력을 겨루는 사냥제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일.

"물론,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저들을 실격 처리하는 것은 너무나도 불공정한 일입니다. 저들은 어쨌거나 규율을 지켜 대회에 참가했으니까요. 그러니."

"그러니?"

"더 상황이 진행되기 전에 잠시 진행을 멈추고 저들을 해방한 뒤에 다시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레이 파티의 실격처리 없이, 그저 판을 새로 갈아 끼운다.

"으음, 그 정도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나름 합리적인 방안에 저도 모르게 혹한 심판이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고민하는 것을 보고, 이황자 측 대리인의 눈매가 웃는 낯으로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누구나 예상과 다른 일로 책임지는 것은 싫어하고, 이 상황에서 예상과 다른 것은 레이였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황자 측, 이황자 측. 그리고 중립 측.

황족이 직접 참관하기도 하는 본선의 심판이라면 모를까, 자신들에게 가능성이 있었다고 믿는 모두의 항의를 뚫어 내고서 제 의견을 견지할 정도로 저 심판은 굳세지 않다. 논리와 근거로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으니 분명 책임을 회피하려고 들 터.

'받아들여라.'

논리는 틀리지 않았고, 위세 있는 자들 역시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군략으로 치면 상대를 포위하고 항복만 기다리고 있는 꼴.

조용히 심판의 재경기 판정을 기다리면서 이황자의 대리인이 진행되고 있는 경기를 힐끔 곁눈질했다. 곧 저 양상이 뒤집힐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러면 재경기를...."

"그건 안 되겠군."

다음, 심판이 판정을 내리려는 순간.

대리인은 자신의 계산이 빗나갔음을 문득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내가 보기엔 불공정한 처사 같아."

"저, 전하."

이곳에서는 권위라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인물이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으니까.

"루이스 형님을 대신해 이곳에 온 그대. 으음, 이름이?"

"...로버펠트 준남작입니다. 전하."

"그래. 로버펠트 경. 경의 의견은 잘 들었다. 사냥제는 사냥의 실력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

"...그렇습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럼 반대로 물어보지. 사냥제가 사냥의 실력을 겨루기 위한 것이라면 십종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

"지극히 간단하다.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갈 동량들을 선별하고, 나아가 그 동량들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행사... 제국의 발전을 위한 행사가 이 십종제다."

나직하고 담담하게 말을 내뱉은 진이 말을 이어 나갔다.

"모름지기 십종제의 열 종목은 각각의 목적을 지니고 개최된다. 그렇다면 사냥제의 목적이 무엇인가?"

"사냥을 잘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함...."

"아니다. 제국은 이미 사냥이나 수렵 따위로 연명해야 할 단계를 수백 년 전에 지났으니. 고로 어떤 상황에서도 적을 찾아내고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을 길러 내기 위한 것이야말로 사냥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나?"

"...."

"파티 단위로 척후 활동을 수행하고 주변 지형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가. 그게 사냥제를 처음 개최하게 된 이유지."

비단 사냥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십종제의 종목이 그렇다.

개인 종목인 체술, 마도, 마공학이나 통합전투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목적이 분명하고, 상술이나 난제 해독, 던전 탐색, 심지어 종합 전술마저도 목적은 지극히 분명하다. 제국에 도움이 될 인재를 가려 내는 것. 그리하여 제국에 등용하는 것.

"만물은 가만히 있으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날아가는 것처럼 점차 뒤로 퇴보하고 말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발전이라는 것은, 시대가 쌓아 올린 거센 풍랑을 맞이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거센 저항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

"그것이 두려워 내딛는 것을 막아선다면 제국의 미래에 영광이 있겠는가? 시도하기 전에 '틀린 길이다'라고 단정 지어 못 박아 버린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아, 아니...."

"애당초!"

그럴듯한 진의 궤변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여는 로버펠트의 모습을 보고 진이 곧바로 말을 끊은 뒤 나직하게 말했다.

"모든 법과 규율은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그 효력을 발휘하는 법."

"...."

"기존의 규칙으로 저들을 억제하지 못한다고 이 상황에서 경기를 중단시키는 것은 주최 측의 부덕이다. 주최 측의 부덕을 수습하기 위하여 저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 맞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해졌군."

유려한 언변과 압도적인 지위로 상대를 찍어누른 진이 다시금 자리에 앉아 심판을 향해 경기를 속행하라는 듯 눈짓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수군거리는 대중들.

-별 소문이 없어 한낱 한량인 줄 알았거늘... 삼황자 전하도 만만히 볼 만한 분은 아니군.

-저 정도로 언변이 뛰어난 분이셨단 말인가? 어째서 저 정도 능력을 가지고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신 건지....

-그야 일황자 전하나 이황자 전하께서 너무 뛰어난 탓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군. 과연 황가의 핏줄을 진하게 이어받은 듯해.

'제대로 이목을 모았군.'

전부 계획대로다.

쏠린 시선을 느낀 진이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앞을 응시하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다른 이들이 제동을 걸어올 것 역시 레이의 예상대로였으니.

-이번 십종제는 네가 전면에 나서기엔 가장 좋은 기회일 거다. 진.

계획도 순행하게 만들고, 파티의 지명도도 끌어올리며 여태껏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진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한 번을 움직여 세 가지 장점을 취한다.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고, 움직이지 않아서도 안 될 터.

'이쪽은 역할을 다했다.'

이황자의 행사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

여기서부터 소문은 퍼져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게 이황자 본인이 아니라 대리인이라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삼황자인 자신이 이황자 파벌의 의견에 반대를 표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까.

'이젠 네가 해내야만 한다. 레이 지크.'

준비는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도화선을 당겨 불꽃을 터트리는 것.

'잘 해낼 수 있는가.'

과연 뜻대로 될 것인가.

저도 모르게 잠시 염려 섞인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린 진이 곧이어 이어지는 광경에 헛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목표 달성. 시간도 다 되어 가는 것 같고... 폭동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이제 슬슬 잡힌 파티들을 해방해야겠는데.

-그러면....

-2페이즈로 이행해야지. 준비해라. 클로에. 노아.

-네!

-알겠다!

화면 안쪽에서 레이 파티가 마지막 불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모두가 입을 떡 벌리는 것을 보면서 진이 눈을 감았다.

다음에 올 광경은.

볼 필요도 없이 명백한 것이었으니까.

56화 사냥(진) (6)

사냥제 예선 회장. 심사장에서 멀지 않은 곳.

"설마 진짜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풀어 줄 줄이야."

세 파티를 처리하고 난 뒤 제 목에 달린 장치를 풀어내고서 목을 매만지던 브랜든이 내뱉은 목소리에 파티원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레이 파티가 아무 조건도 없이 인질로 잡았던 이들을 풀어 주었기 때문.

"의외야. 나는 풀어 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풀어 주지 않는 건 애당초 선택지에 없었지."

"그런가?"

"그래. 풀어 주지 않는 순간 나머지 네 파티의 잔존인원 전부가 레이 파티를 적대하게 될 테니까."

레이 파티가 이용했던 사냥제의 규칙이 무엇인가.

그건 '심사에 다섯 명 모두가 참석해야 할 것'이었다. 심사할 때 한 명이라도 부재하게 된다면 반드시 탈락 처리된다는 규칙으로 인해 네 파티는 레이 파티에 목줄이 잡혀서 이용당한 셈.

"심사에 다섯 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탈락 처리된다는 건, 반대로 심사가 시작될 때까지는 한 명이 의식을 잃어도 탈락 처리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무슨 의미인지 알겠냐?"

"대강은... 인질들을 전부 숙청해 버리면 우리가 레이 파티를 가만두지 않을 거란 소리잖아?"

"그래."

목에 달린 '목줄'을 이용해서 인질들을 전부 기절시킨다고 해도 상대해야 하는 건 16명의 파티다. 심지어 잡은 인질들은 대다수가 전투에 큰 기여가 없는 척후 직업군.

레이 파티 5명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숫자이니, 풀어 줄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슨 조건을 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안 좋은 건가?"

"아니, 좀 찜찜할 뿐이지 우리한테는 나쁘지 않은 일이야."

별다른 대가도 없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는데, 안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브랜든이 고개를 휘휘 젓고 미리 입수해 둔 지도를 펼쳐 두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움직이려면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자, 이제 일해야지. 네 파티 중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뭘 잡으려고?"

"글쎄, 시간이 부족하니까 멀리 가는 건 힘들고... 근처에서 찾으려면 위장을 잘하는 놈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

"요정종 같은 것들?"

"그래."

모습을 잘 드러내고, 근방에 있는 것들은 이미 다른 파티가 사냥하고 있을 확률이 높을 터.

우위를 점하려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브랜든이 움직이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귓가를 파고드는 파티원의 작은 목소리.

"──을까?"

"...잠깐, 방금 뭐라고 했냐?"

"어?"

"너 방금 뭐라고 말했냐고."

"아니, 레이 파티는 뭘 잡았을까 하고... 게네는 안 움직였잖아. 이미 잡았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이미 잡았다고? 사냥감을?"

이상하다.

불현듯 치밀어오른 위화감에 브랜든이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왜 남은 한 자리를 두고 네 파티끼리 경쟁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브랜든이 레이 파티에게 포획당한 시점은 사냥제가 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

그 시점에서 레이 파티가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을 게 뻔했다. 레이 파티의 척후는 애송이고, 설령 애송이가 아니라 베테랑이더라도 시간 탓에 한계가 있기 때문.

'이렇게 우리에게 시간을 준다면 레이 파티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레이 파티는 우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해방했다. 어째서?'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본선에 진출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다른 파티와 경쟁해서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 그건 불안정하다. 실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그렇게 불확실한 길을 갈 필요가 없다.

'관점을 다르게 봐야겠지.'

레이 파티는 인정으로 그들을 아무 조건 없이 해방한 게 아니다.

──조건 없이 해방해야만 할 이유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무슨 일이야?!"

"짐 챙겨! 당장! 여길 떠야 한다!"

콰아아앙-!!!

브랜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폭음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서 파티원들이 눈을 크게 떴다. 몬스터와 사람 간의 전투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투로 벌어지는 소음이 숲을 가로질렀기에.

"저건... 레이 파티?"

"아니야! 다른 파티다!"

"다른 파티?"

"함정에 걸린 거라고!"

브랜든 파티가 포함된 사냥제의 예선 블록은 다들 척후가 경험이 모자라고, 비교적 전투 능력이 뛰어났다.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부족하고 척후의 능력은 모자란 상황이라는 걸.

남은 파티는 넷. 남은 자리는 한 자리.

이걸 인지하고 있다면 전투력이 뛰어난 파티들이 취할 수단은 명백했다. 그 예를 레이 파티가 보여 주었으니까.

"놈들은 사냥감을 사냥하지 않을 거다...! 우리를 사냥하려고 들 거야!"

네 파티 간의 경쟁.

그들이 그렇게 여긴 순간 이미 이 구도는 확정되었다. 만약 레이 파티가 함께 사냥에 나섰다면 그들은 레이 파티를 집중 견제했겠지.

그러나 레이 파티는 사냥에 나서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레이 파티를 본능적으로 경쟁자에서 '제외'했다. 어째서?

'이미 이긴 자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레이 파티가 잡아놓은 사냥감이 아직 아무것도 없다면?

그렇다면 레이 파티가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심사장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들이 노리는 것은.

'간단해. 너무나도 간단해!'

변수의 차단.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파티의 탈락.

"심사장으로 가야 해...!"

닥쳐오는 마법의 열기에 반사적으로 외친 브랜든이 베이스캠프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던져 버리고 앞으로 뛰자 어안이 벙벙한 파티원들이 브랜든을 따라서 앞으로 뛰었다. 순식간에 숲길을 가로질러 심사장으로 향하는 브랜든 파티.

"빨리!"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제발...!"

모든 능력을 발휘해서 바람과 같이 내달린 브랜든이 심사장에 도착했다. 이윽고 보이는 광경에 허탈한 목소리를 흘리는 브랜든.

"허...."

누가 그랬던가. 전투에 있어 충분한 시간을 들일 수 있다면 마법사만 한 직종이 없다고.

"당했나...."

그곳에 요새가 있었다.

완벽하게 구축된 마법 진지. 더불어 진지와 호응하여 가득 활성화되어 있는 마공학 기물들.

짧은 시간 안에 거의 제 구색을 갖추어 가는 진지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린 브랜든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이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생각보다 빨리 들켰네?"

허탈하게 고개를 돌린 브랜든이 조용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검을 든 레이가 삐딱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것처럼.

* * *

처음, 이황자의 인터뷰를 봤을 무렵.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야 해.

이황자의 개입으로 인해 앞으로의 행동거지가 대강 정해졌을 때 나는 그 과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십종제에서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인물들은 우리 파티를 제외하고도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모두가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십종제에서 처음부터 눈에 띄는 방법은 명확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거나, 혹은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파격적인 길을 보여 주는 것.

실력으로 찍어누르는 건 아예 불가능하진 않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일단 내 밑천을 전부 드러낸다는 점에서 위험부담이 클뿐더러, 그렇게 한다고 해도 대중의 이목이 이쪽에 쏠린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그러니 나는 방법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파격적이며, 동시에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길.

안정성을 버린 채, 우리 파티를 제외하고 '모든 파티를' 떨어트리는 길을.

"[튀어오르는 은광]!"

콰아아앙-!!!

"끄아아악!"

무너진다.

"흐에에에엑!"

마지막으로 심사장 앞에 당도한 파티의 전위가 노아의 마법 포격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즉시 앞으로 튀어 나가자 기겁한 상대 마공학자가 마공학 장치들을 일제히 발동시켰다. 그러나 곧바로 물이라도 먹은 것처럼 반응이 뭉개지는 마공학 장치들.

"잠, 잠깐. 신호 회로를 이렇게 빨리 탈취하는 건 반칙...!"

"그치만, 회로가 너무 단순한데요?"

피식 웃음을 흘린 클로에가 손가락을 내리자 곧바로 신호가 꺼지는 마공학 장치들의 모습에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 적 파티를 쓰러트린 뒤 몸을 돌렸다. 시간을 가늠해 보니 슬슬 사냥감을 제출할 시간이었으니까.

"사냥감 제출하러 왔습니다."

"...진짜 말도 안 되는군."

"뭐가 말입니까?"

"몰라서 묻는가? 이 판을 짜놓고서?"

여기저기 널브러져 기절해 있는 다른 파티들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린 심사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말을 이었다. 경탄과 경악이 반반쯤 섞인 목소리.

"파티들을 이간질시켜 그 힘을 줄이고,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목적지 앞에서 진지를 구축한 뒤에 모든 파티를 섬멸하는 계획이라니... 파격적이기 짝이 없어."

"무슨 문제가 됩니까?"

"문제... 문제는 되지 않겠지. 자네가 규칙을 어긴 것은 없으니. 하지만 위험하지 않았나?"

"위험?"

"혹시나 저들이 자네의 계획을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네 파티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도박을 한 게 아니냐고.

그렇게 묻는 듯한 심사관의 표정을 보면서 피식 웃고 고개를 저었다. 간단한 이야기 아닌가.

"이루어지지 않을 일입니다."

"어째서?"

"십종제 규칙. '의도적인 연합을 금지한다'."

"...아."

만약 저들이 이 계획을 빠르게 알아차렸다면, 그래서 우리의 의도를 파악했다면?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저들은 진지를 뚫어야 하고, 동시에 연합해서는 안 된다. 우리 파티가 구축해 둔 진지를 뚫기 위해 연합하는 순간 저들은 탈락 처리될 테니.

"다른 파티가 저희와 싸우는 동안 진지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정도라면 가능하겠습니다만, 그걸 싸우는 파티들이 납득하겠습니까? 자기 파티를 희생해서 남의 파티를 본선에 올리는 걸 말입니다."

"...어차피 못 올라간다면 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 사람이란 짐승이 원래 그렇습니다."

애당초 그렇게 판단이 빠른 이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판단이 빠르다고 해도 문제없다.

그나마 차륜전으로 힘을 빼 놓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 방법 역시 불가능했다. 우리는 일부러 빡빡한 시간에 나머지 파티를 풀어놓았으니까.

결국, 계획은 내 생각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서로 싸우느라 지친 파티들은 하나씩 우리 진지에 싸움을 걸어 무너졌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

우리 파티를 제외한 모든 파티가 전멸했다.

"...놀라울 따름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은 아니지만... 그래. 놀라긴 했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놀라움을 표시하던 심사관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말.

"이제 사냥물을 제출할 시간이군."

"예."

"아무리 다른 파티가 전부 탈락했더라도 사냥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자네 파티가 잡은 사냥물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잡아 뒀습니다. 노아?"

"걱정하지 말거라! 아주 튼실한 녀석으로 잡아 두었으니!"

내 부름에 씩씩하게 답한 노아가 자기 소매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사냥물을 보고 심사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오랫동안 심사관을 해 왔지만, 이런 걸 사냥물로 제출받은 건 난생처음이군."

그날.

우리는 사냥제가 생긴 이래로, 최초로 장수풍뎅이를 제출하고 본선에 진출한 파티가 되었고.

이건, 다음 날 배포된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박혔다.

[황자 지니스. 우리 파티는 자연재해. 치이기 싫으면 비켜 가라 발언.]

...과격하기 짝이 없는 진의 인터뷰와 함께.

57화 찾아온 악몽 (1)

삼황자가 이황자에게 싸움을 걸었다!

첫날 벌어진 사냥제 예선의 결과는 신문을 통해 곧바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며 그런 이야기를 퍼트렸다. 은인자중하고 있던 삼황자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었노라고.

한량으로 유명한 삼황자가 천적과도 같은 이황자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소리를 들은 제국의 호사가들은 이 주제에 대해 떠들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보통이라면 어떤 자들이 두각을 드러내었는지에 대해 떠들썩할 십종제 첫날은 이 이슈로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 이슈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이황자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미있군."

상황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호전적이지 않나."

이황자궁. 황자의 집무실.

"...지니스 황자님 말입니까?"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느끼다가 신문을 읽으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황자의 모습에 잠시 눈을 굴리던 제3 근위 기사단장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이황자.

"그 천치 놈 말고 누가 있겠나."

전일, 인터뷰를 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레이 파티에 모았을 때.

이황자는 진이 자존심을 내던진 채 일황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의 성향이 그러했으니까.

진은 옛 기억으로 인해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걸 견디지 못했으니까.

자신으로 인한 정치 싸움에 의해 한 파티의 미래가 박살 날 위기에 처한다면 반드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방식은 전면에 나서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서고 굴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

만약 제 동생이, 진이 정녕 다시 한번 더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이황자는 이번에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를 다해서 레이 파티를 쳐부술 생각이었다. 주인이 싸울 생각이 없는 이상, 도구는 의미가 없으니까.

분명히 그랬을 터인데, 상황이 달라졌다.

레이 파티의 기행으로 인해서.

"도구가 아니었군."

"...."

"그자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자가 아니었어."

"도통 무슨 말씀인지...."

"레이 지크, 그자가 천치 놈의 행동을 유도했다는 뜻이다."

본디 수하는 군주의 수족과 같아서, 군주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나 마찬가지다.

원론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으나 모든 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군주보다 역량이 뛰어난 수하는 반드시 나오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군주가 모든 부분에서 우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놈이 이렇게 호전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레이 지크가 놈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굳이 굽히지 않아도 자신들이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까?"

"비슷하지만 다르다. 레이 지크는 놈의 동행자이며 조언자가 되어 있는 거다."

만약 레이 지크가 도구에 불과했다면 어떠한가.

명백하다. 레이가 지금과 같은 결과를 창출해 낼 수 있음을 알아도 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이 살아온 관성이 진의 발걸음을 막았을 테니까. 그러나.

이번의 인터뷰로 미루어 보았을 때 진은 예전처럼 싸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보여 준 것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에 나서서 싸울 것을 결의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레이 지크는 놈을 바꾸고 있다."

평생을 살아왔던 관성의 방향마저 틀어 버릴 정도로, 레이 지크라는 자가 주변을 휘말려 들게 하고 있다는 것.

"시시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상황이 재미있어졌군."

상황은 아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파벌에 비하면 레이 파티는 약소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파티원 전체의 역량은 마르스 파티에 밀리고, 파티의 결속은 아이넨 파티에 밀리며, 지원하는 규모, 인원의 수,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서늘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자의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이번의 기행을 우연으로 치부하지 말라고. 절대로 방심하지 말라고.

"에드윈."

"하명하십시오."

"이번에 얻은 정보를 전부 취합해서 유력 파티에 넘기도록. 더불어 레이 파티에 사람을 붙여라. 다른 파티보다 조금 더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성이 있으니."

"즉각 시행하겠습니다."

"남은 예선 종목이 무엇이지?"

"던전 탐색과 난제 해독입니다. 종합 전술과 상술, 기숙사 대항전은 예선이 없으니 말입니다. 각각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치러지는 것으로 압니다."

"무난히 통과하겠군."

사냥제에서 보여 준 역량의 편린.

그 역량으로 미루어 보면 한낱 예선에서 레이 파티가 떨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성질머리를 주변에 보여 주면서 위협한 것도 있는 만큼, 굳이 레이 파티를 건드리려는 간큰 자들은 없을 터.

"이렇게 되면 레이 파티가 어지간한 종목의 본선에 전부 올라오는 셈인가...."

마도, 체술, 마공학, 통합 전투, 사냥, 던전 탐색, 난제 해독.

레이 파티가 출전할 수 있는 종목을 머릿속에 떠올린 이황자가 잠시 신문을 접어 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에드윈. 만약 놈에게 내가 일곱 개의 종목 중에서 세 개 이상 우승을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역량도 모두 이쪽이 위...."

"있다고 가정하도록."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호사가들은 사실상 이황자님께서 패배한 것이라고 떠들 겁니다."

"그렇겠지."

작금의 이황자와 진의 세력 차이는 어른과 아이에 비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본디 어른과 어른이 싸워 둘 다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결과가 가려진다면 사람들은 이긴 쪽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른과 아이가 싸워 아이가 어른을 상대로 분전했다면?

'이겼다고 볼 수 없겠지.'

누가 보아도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번의 우승도 높게 쳐주는 것일 터.

"십종제에 참가하는 모든 파티에 전달하도록."

"어떤 것을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가장 많은 우승을 가져오는 파티의 파티원들에게는 내게 무엇이든 한 가지를 요구할 기회를 주겠노라고."

"예. 휘하 파티에 전달...."

"휘하 파티가 아니다. '모든' 파티다."

"...예?"

"전에 말하지 않았나. 선물을 주어야겠다고."

이겨 낼 수만 있으면 그건 무엇보다 크나큰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독이 든 성배지."

모순적이게도, 이 조치로 인해 레이 파티는 선물을 받을 가능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악몽이 날뛸 테니까.

"이토록 즐거운 날이 벌써 5일밖에 남지 않았다니, 참으로 안타깝군."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이렇게 즐겁단 말인가.

모처럼 산뜻한 미소를 머금은 이황자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금 미소를 지우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에서 시선을 떼어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잔뜩 쌓여 있는 정무.

"일을 빨리 끝마쳐야겠어."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하려면, 처리할 일이 많았다.

아주 많이.

* * *

둘째 날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생각보다 쉽네요."

황립 아카데미 외부. 지크 저택.

"사냥제에 비하면 너무 무난하게 흘러가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인데요?"

"무난한 게 좋지."

오후에 치러진 던전 탐색 예선을 마치고 돌아와 입을 여는 클로에의 모습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팀의 호흡도 꽤 잘 맞았고, 더불어 개개인의 능력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놀랐습니다. 녹스 공자."

"뭘 말하는 거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쓸데가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는 뜻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함정 하나는 기가 막히게 파악하더군요. 함정 하나만."

"칭찬 고맙군."

"이게 칭찬으로 들립니까? 도대체 함정은 그렇게 잘 찾는 주제에 길 찾는 능력은 왜 그 모양인 겁니까. 미로에서 헤맨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음. 알았다. 시간이 남는데 대련하지."

"이런 개... 사람 말을 좀 들으십시오!"

"싸, 싸우지 말거라! 본 공녀가 명할지어다!"

"대련 안 하나? 그럼 파티장이랑 해야겠군."

"개판이구만."

둘 사이에 껴서 허둥지둥하는 노아를 보면서 피식 웃고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클로에가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 이틀 동안 지긋지긋하게 봐 온 광경이었으니까.

"무난한 게 좋은 건 맞지만... 다른 사람들한테서 견제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아무 방해도 하지 않은 걸까요?"

"못 한 거야."

"네?"

"견제를 못 한 거라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잖아. 우리가 어제 뭔 짓을 했는지."

"아...."

"딱 봐도 물 것같이 생긴 개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

건드리면 문다.

어제 우리가 한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렇게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우리 만만한 놈들 아니라고. 건드릴 거면 제대로 물릴 각오 하고 물라고.

이러나저러나 우리 파티의 역량은 정상급은 아니어도 꽤 상위권에 있고, 예선부터 우리와 척을 지고 싶어 하는 파티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선이라면 우승의 자리가 하나밖에 없으니 결과적으로 충돌하게 되겠지만, 그 전부터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은 이들은 없을 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깽판 친 게 아니었어요...?"

"넌 날 뭐로 보는 거냐."

"...수틀리면 일단 엎고 보는 사람?"

"설마. 나만큼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 없는데."

"으, 으음. 으으음...."

차마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면서 난처한 웃음을 흘리던 클로에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활발하게 말하는 클로에.

"어쨌든 그렇게 사람들이 저희와 충돌하기를 싫어한다면 앞으로도 견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저희한테 물리기 싫을 테니까요."

"아니. 그건 아니야."

"네?"

"개인 파티들은 우리한테 물리기 싫겠지만, 개인 파티만 우리를 견제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다른 파티원? 아니면, 우리 자신의 역량?

그 무엇도 아니다. 이 십종제는 우리 삼황자 파벌과 이황자 파벌의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니까.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샤엘 키르나도 아니고, 정규 기사 아이넨도 아니다. 견제를 하려 한다면 그 두 파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올 터.

"예상이지만, 이황자는 곧 움직일 거다."

"이황자님이...."

"그래."

오늘, 내일, 어쩌면 그다음 날.

이황자 루이스는 반드시 우리를 방해하러 올 것이다. 우리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과 맞대결을 펼친다는 생각일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진이 앞서서 나서 주었다는 거지.'

150회차에서 내가 진에게 들었던 이황자의 성격이라면 아마도 진이 소극적으로 나오는 순간 모든 암수를 써서 우리 파티를 부숴 버리려 했을 터.

그렇게 되었으면 사실상 5명을 모으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황자가 각 가문에 정치나 자금적인 압력을 넣어 버리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황자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긴장하고 있는 편이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똑똑!

"공자님!"

"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이 시기에?

말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온 제임스의 이야기에 눈을 깜빡였다. 일단 이 시기에 찾아올 손님이 없다는 건 둘째 치고, 지크가는 현재 방문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건, 돌려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예. 들으니까 클로에 아가씨의 가족분이라고 하셔서."

"가족이요?"

"예. 이름이."

잠시간 생각하던 제임스가 생각났다는 듯 건틀릿을 자기 이마에 퉁 하고 부딪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아, 플로라! 플로라 덴버 아가씨라고 하셨습니다."

"플로라 덴버?"

"예. 분명 그런 이름이었습니다만."

"흠, 플로라 덴버라."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그래. 뭐, 비도 오는데, 일단 안으로 들이...."

"왜."

묘한 기시감을 털어내고, 일단 안으로 들이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언니가 왜. 여기에...?"

클로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자신의 머리맡에 사신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58화 찾아온 악몽 (2)

아카데미 밖, 마르스 파티의 숙소.

"플로라가 지크 저택을 찾아갔다고?"

"네."

밥을 먹다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식에 마르스가 입을 우물거리며 소식을 가져온 에레인을 바라보았다. 걱정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에레인의 모습.

"찾아간 거면 찾아간 거지. 왜 그렇게 좌불안석이야? 불안할 게 뭐 있다고."

"...불안한 게 정상이지 않나요? 왜 찾아간 걸까요?"

"가족 보러 갔겠지."

"그 사람이요? 가족은커녕 십종제의 우승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분이었는데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별 관심이 없는 게 맞아."

"네?"

"그 아가씨는 십종제의 우승에 관심이 없다고. 십종제 개인종목에 5번이나 참가하고도 우승을 거머쥔 건 한 번뿐이었거든."

말과 함께 식사를 마친 마르스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끌어들이긴 했지만, 플로라 덴버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기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기이한 인간이었으니까.

"플로라는... 천재지."

올해 스물두 살인 플로라 덴버라는 인물을 표현하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불세출의 천재. 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아카데미 재학 중에 겨우 열여덟의 나이로 자신을 가르치던 교수의 회로를 탈취해 압도해 버렸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마공학 이론을 학회에 공표해 크나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행보 하나하나가 마공학계의 판도를 바꾼다고 해도 무방한 괴물이 플로라 덴버였다. 오죽 뛰어나면 아직 정식 칭호를 받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마공학자들이 '덴버가의 악몽'이라는 칭호를 공공연하게 붙여서 부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플로라 덴버는 천재면서, 동시에 괴짜야."

명예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플로라 덴버에게 있어 세상은 두 가지로 나뉠 뿐이었다. 자신의 마공학에 도움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것.

"그 아가씨가 여태껏 십종제에 나왔던 이유는 단 하나야. 자기가 개발한 마공학 장치를 실험하기 위해서."

처음 한 번을 제외하고 플로라가 십종제에서 전력을 발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당히 본선에 올라 스스로 개발한 장치를 실험하고, 만족할 만큼의 표본을 거둔 뒤 기권하고 내려가는 것.

그런 행동을 반복해 온 것이 플로라 덴버였다. 사실 이번 십종제에서 파티 종목에 참가하기로 한 것만으로도 이변이라고 할 만큼의 변화일 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득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적을 격멸하지 않더라도 플로라 덴버의 수준은 다른 마공학자를 압도한다. 현역 마공학 교수가 와도 플로라는 눈 아래로 깔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마르스는 플로라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여태까지는 그랬다는 것이다.

"이번에 이황자님이 새로운 조건을 내거셨던데."

"그... 십종제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파티의 요청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래. 그거. 아마 플로라는 그것 때문에 찾아갔을 거야."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걸까요? 여태껏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던 사람인데...."

"반대지. 원하지 않는 게 있거든."

"네?"

"그 동생이 이황자님께 요청할 기회를 얻는 걸 그 아가씨는 원하지 않는다고."

플로라 덴버의 동생. 클로에 덴버.

비록 플로라 앞에서는 그 재능이 빛이 바래지만, 그녀 역시 상당한 수재로 드높고, 심지어 그 파티도 꽤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이름이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우승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

"만약 클로에 덴버가 우승하게 되면 클로에 덴버는 반드시 한 가지를 이황자님께 요구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건 플로라의 심기를 아주 크게 건드리는 이야기이지."

"...그게 대체 뭐기에."

"예전에 수사가 종결된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재조사."

플로라와 클로에의 숙부. 그리고 클로에의 옛 스승이자, 덴버가가 숙청해 버린 비운의 천재.

'마이오스 덴버'가 연관된 사건에 대한 재조사.

"그게 어째서 플로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거죠?"

"나도 자세하게는 잘 몰라. 애당초 마이오스 덴버가 왜 죽었는지도 소문만 무성한 상태고. 하지만."

만약 자신이 들었던 소문이 사실이라면 '마이오스 덴버'는 플로라가 추구하는 마공학의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플로라 덴버는 마이오스 덴버의 흔적을 역사 속으로 묻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거다."

클로에 덴버에겐 안된 일이지만, 자신들에게는 호재였다. 그만큼 유능한 마공학자가 전력을 다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이야기이니까.

"부디 이야기가 잘 안 되길 바라야겠는걸. 우리 파티의 전력 증대를 위해서."

"...당신이 계획한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니지."

"...."

"나는 단지 입이 조금 가벼울 뿐이야."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주군은 그런 말을 조금도 놓치지 않을 뿐이고.

"그쪽 파티장. 저번에는 아주 좋은 대응을 하던데...."

피식 웃음을 흘린 마르스가 조용히 식기를 얹고서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건 옛 신문 기사에서 찾아낸 한 소년의 모습.

'이번 수에는 어떻게 나올 거지? 레이 지크.'

기대가 솟아오른다.

몸을 메우는 나른하고도 묘한 감각에 킬킬거리는 웃음을 터트린 마르스가 기지개를 쭉 켰다.

곧 찾아올 답지에 적힌 답이 무엇일지 기대하면서.

* * *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앞으로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 강자들의 이름을 거의 전부 외우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했다. 앞으로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 강자들은 필연적으로 '끝'의 군세가 몰려올 때 최전선에 서는 이들일 것이 분명하고, 그 말은 곧 150회차의 나와 전우 관계였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으니까.

굳이 같은 검사가 아니더라도 뛰어난 이들은 인류의 위기 상황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나는 주로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과 함께 전선에 섰다. 고로, 현 대륙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 대부분의 미래를 나는 알고 있지.

분명 그럴 터인데.

"실례하겠어요. 레이 공자. 플로라 덴버랍니다."

"...레이 지크입니다. 플로라 영애."

그렇다면, 어째서 백 년에 한 번 나올 마공학의 천재라고 불리는 플로라 덴버의 이름은 내 기억 속에 없는가.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플로라의 얼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익숙한가.

"갑자기 찾아와서 결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지크 저택.

응접실 의자에 앉아 살짝 물기에 젖은 자신의 적색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꼰 플로라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꺼내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플로라의 표정.

"어째서 저택에 방문하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본론부터 들어가는 건가요? 레이 공자께서는 귀족답지 않으시네요. 소문처럼."

"예. 제가 소문처럼 좀 성격이 급합니다. 하지만 플로라 영애께서도 비효율적인 허례를 좋아하시지는 않는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저희 마공학자만큼 '비효율'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없으니까요."

얼른 목적이나 밝히라고 돌려 말하는 내 말에 입을 가리고 옅게 웃으며 응대한 플로라가 말을 이어 나갔다.

"찾아온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제 동생... 클로에에 관한 건 때문에 왔답니다."

"그럼 아쉬운 일입니다. 클로에는 조금 전에 돌아갔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그 아이가 아니라 공자니까요."

"...저 말입니까?"

"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싱긋 웃은 플로라가 손을 들어 자신의 앞에 놓인 따끈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 것을 보고 조금 전 클로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상황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으니까.

-아마 언니는... 절 찾아온 게 아닐 거예요.

-널 찾아온 게 아니라고?

-네.

플로라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클로에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플로라는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이유에 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남의 가정사를 캐묻는 게 예의가 아님은 둘째 치더라도, 객으로 찾아온 플로라를 계속해서 밖에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나.

-...모르겠어요. 언니가 뭘 원하는지. 하지만 언니가 무언가 생각하고 찾아왔다면 그건....

아마도 자신을 파티에서 제외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플로라 덴버는 그런 인물이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묻자 눈매를 좁히며 내 표정을 잠시 관찰하는가 싶던 플로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

"소식은 들으셨나요?"

"소식?"

"이황자님이 공표한 사실이요. 이쪽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네요."

"...무슨?"

"조금 전에 이황자님께서 공언하셨어요. '이번 십종제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는 파티의 구성원들에게 무엇이든 하나,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라고."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네. 이황자님 본인 파벌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파티에 적용되는 이야기로."

"...."

그건 대체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잠시 눈을 깜빡이고 있자 플로라가 깊은 숨을 내쉬고서 말을 이었다.

"이 제국에서 이황자님의 발언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하다못해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도, 이황자 전하의 상언(上言)을 무시하지 않으시지요."

"...."

"원래라면 저도 전면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답니다. 십종제는 후학을 위한 행사고, 외람되지만 저는 '후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입장이니까요. 적당히 실력을 발휘하는 수준으로, 그 정도로 끝마칠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아이... 클로에에게 그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리하여 그 아이가 분에 넘치는 것을 원하게 된다면."

자신이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클로에를 우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제가 조금... 진심으로 임할 수밖에 없을 거랍니다."

선전 포고.

오만하게 말한 플로라가 조용히 다리를 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공자께 손해만 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만약 클로에를 파티에서 제외해 주신다면 그쪽의 우승을 제가 최대한 도울 수도 있으니까요."

"...음."

"다른 우수한 마공학자를 추천해 줄 수도 있고, 정 아니면 모종의 수를 써서 제가 그 파티에 대신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클로에를 파티에서 제외한다면."

"...났다."

"네?"

"아니, 뭐, 좀 생각난 게 있어서."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플로라를 직시하자 플로라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

처음부터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있었다.

아무리 내가 마공학이라는 것에 잘 모른다고 해도 저 정도의 천재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훗날 반드시 두각을 드러낼 것이고, 만약 그 전에 사고가 있어서 죽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언급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미래에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어째서?

'간단해.'

플로라 덴버. 덴버가의 악몽. 천재 마공학자.

지금의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은 이렇지만, 훗날의 그녀를 나는 이렇게 불렀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죄수 번호 28403.

내 기억 속에서 그녀는 항상 죄수의 고리를 차고 있었다.

인류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만이 차는, 그런 고리를.

59화 찾아온 악몽 (3)

-어머, 제가 죄수치고는 썩 멀쩡해 보이신다고 말하셨나요?

-맞답니다. 저는 지극히 정상이에요. 다만 이 세상이 제 기준에 맞추지 못했을 뿐.

-당신과 총사령관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수 있겠지만, 저는 반대였을 뿐이랍니다.

-어디까지나 제 것을 위해서 세상조차도 던져 버릴 수 있는.

-단지,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에요.

* * *

거절당했다.

'꽤 좋은 줄을 골라잡았네요. 클로에.'

숙소로 돌아가는 마차의 내부.

의자에 앉은 채로 창틀에 팔을 괸 플로라가 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록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림수는 있었으니까.

'클로에, 당신은 마음이 약해요.'

플로라 덴버는 클로에 덴버라는 인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비단 클로에가 플로라의 동생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단지 클로에가 가려는 방향성이 플로라가 원하는 방향의 완전히 정반대에 있었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길 원치 않기 때문이지.

'당신을 파티에서 제외하는 건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이 방문으로 인해 심리적인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답니다. 당신은 그런 아이니까요.'

결코 독선적이지 못하다. 주변을 전부 찍어 누르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

무엇보다 독선적이어야 할 마공학자로서는 완성되지 않은 존재가 클로에 덴버였다. 아마 이번 방문으로 인해 심리적인 압박을 수도 없이 받을 것이고,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을 터.

'당신은 제 그늘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답니다. 클로에.'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아왔고, 수십 년을 그렇게 더 살아야 한다. 숨을 죽이고, 몸을 바짝 낮추고, 있는 듯 없는 듯이.

클로에의 스승이자 제 옛 스승이었던 마이오스 덴버는 그걸 하지 못했고 죽음을 맞이했다. 주제를 모르고 과한 것을 탐해, 결국 정해진 선로에서 벗어나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클로에 덴버는?

'당신은 아직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그 길로 발을 들이지 않으면 된다. 역린을 건들지 않으면 용은 날뛰지 않으니까.

'레이 지크라....'

처음 만나 본, 그렇지만 묘한 느낌을 주는 소년.

자신이 받은 느낌대로라면 잠재력은 확실히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 알면서도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그 모습을 보면 분명 염두에 두고 있는 계획도 있을 터.

'하지만, 거기까지죠.'

십종제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이 지크가 어떤 비범한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도 역량으로 압살해 버리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플로라에게는 그럴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이 있었으니까.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걸 이번 기회에 다시 각인시켜 드려야겠네요.'

부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싱그러운 웃음을 흘린 플로라가 조용히 창문을 닫고 팔뚝을 매만졌다. 마차 내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

마나를 잔뜩 받은 마나 회로가 빛나고 있었다.

그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찬 마나 회로가.

* * *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빙의자가 내 몸에 빙의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빙의자의 기억을 모두 알지 못했다.

그건 비단 내가 바빠서, 빙의자의 기억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애당초 빙의자의 기억 자체가 너무나도 방대했기 때문.

150회차에 걸친 빙의자의 기억을 전부 들여다보려면 워낙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렇기에 나는 여태까지 빙의자의 기억을 천천히 읽으면서 내 기억을 토대로 일을 진행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내가 플로라 덴버의 이름을 모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검색 기능을 사용합니다.]

[플로라 덴버에 대한 검색 결과가 '1,487건' 확인되었습니다.]

플로라 덴버는 150번째 회차에서는 그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빙의자의 기억에서도 후반부에나 나오는 인물이었으니까.

『87회차.

오늘, '선두를 이끄는' 플로라 덴버를 만났다.』

"...괴물이네."

야심한 밤.

빙의자의 기억을 읽고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기억 내내 표현되어 있는 플로라의 뛰어남.

"괴물 마공학자, 마공학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

빙의자가 내린 플로라 덴버의 평가였다. 그리고 150번의 인생을 살아온 빙의자가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는 건, 그게 굉장히 객관적인 사실일 확률이 높다는 뜻.

클로에는 물론이고, 현직 마공학 교수와 맞붙어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강자의 출현이었다. 내 계획에 압도적인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의 등장이고, 상대의 동향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목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검색 기능을 사용합니다.]

[클로에 덴버에 대한 검색 결과가 '3건' 확인되었습니다.]

바로, 플로라가 아닌 클로에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다는 것.

...결코 재능이 모자라지 않은 클로에의 기록이 이상할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플로라 덴버가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는... 빙의자의 기억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가지."

빙의자의 기억에 플로라 덴버를 검색해서 읽어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플로라 덴버가 제 스승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다'라고.

중요한 건 그게 빙의 초반부, 그러니까 현재 시점하고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부분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소문은 단순히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도 진행 중인 소문이라는 뜻.

'플로라 덴버의 옛 스승은 클로에의 스승이자 자기 숙부였던 마이오스 덴버지.'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플로라가 자신의 옛 스승을 죽인 게 맞다면?

그렇다면 플로라가 클로에의 우승을 막으려는 것 역시 이해가 갔다. 클로에가 만약 자기 스승의 죽음에 얽힌 비사를 풀고자 한다면, 그 끝에 걸리는 건 플로라 덴버의 목일 테니까. 훗날 범죄자가 되는 것도 그게 밝혀져서 그랬다면 이해가 가지.

하지만.

'그렇다기엔 뭔가 이상해.'

내가 만난 플로라 덴버, 죄수 번호 28403은 이름을 잃고 최전선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그 조치는 인류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중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조치.

'자기 스승을 살해한 건 물론 중범죄야. 하지만.'

그게 '인류에 해악을 끼치는 중범죄'로 판단될 여지가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훗날의 플로라 덴버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애당초, 방금 본 그 눈이 사람을 죽여 본 적 있는 자의 눈은 아닌 것 같은데.'

직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직 플로라 덴버에게서는 피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똑똑.

"...선배님. 아직 일어나 계세요?"

"음?"

상념을 거듭하다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눈을 깜빡이고선 문을 열어 주었다. 어두운 복도에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는 클로에의 모습.

"아, 아직 일어나 계셨네요...."

"잠깐 생각할 게 있었거든. 무슨 일인데?"

"그, 밖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안쪽에서 해도 될까요?"

"이 시간에?"

아무리 열일곱밖에 안 된 꼬맹이라고는 하지만, 다 큰 여자가 남자의 방에 들어올 만한 시간은 아니지 않나.

"아니, 여동생 친구한테 뭔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선배님."

그런 표정을 하고 클로에를 바라보자 작게 헛웃음을 터트린 클로에가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치고 말을 이었다.

"...언니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파티에도 관련되는 이야기라...."

"플로라 덴버?"

"네. 안 될까요?"

"안 될 거 없지. 들어와라."

"실례할게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안쪽으로 들어온 클로에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문 앞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간이 의자를 끌어다 내가 앉아 있던 책상 의자 앞에 놓았다. 곧이어 의자에 앉는 클로에.

"아까, 언니가 무슨 말을 했죠?"

"널 잘 부탁한다던데."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닌데요?"

"맞아. 사실 승부 조작 논의를 하고 갔지. 우리가 이기는 쪽에 돈을 다 걸어서 만나면 무조건 져 주겠다더라."

"그런 사람도 아니거든요.... 대충 짐작은 가요. 절 파티에서 내쫓으라고 말했겠죠?"

"...."

"들었어요. 이황자님의 선언이요. 우승하는 파티의 구성원에게는 뭐든 한 가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후, 하고.

떨리는 듯 심호흡을 크게 한 클로에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 나를 직시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포기할게요."

"아, 그건 이미 거절했어. 널 파티에서 빼는 건...."

"아뇨.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이야기예요."

"뭐?"

"언니가 저희 파티를 적대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을 테니까요."

플로라 덴버가 막고 싶은 건 클로에의 우승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우승하게 됨으로써 권리를 얻는 것이지.

"제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면 언니는 납득할 거예요. 그러면 저희의 우승 확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갈 거고요."

"...."

"애당초 원래 염두에도 두지 않은 권리였어요. 이걸 바라고 파티에 참여한 것도 아니니까요. 인제 와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죠?"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클로에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클로에가 권리를 포기하게 된다면 편해지긴 하겠지.'

원래 없었던 권리였다. 그러니 반환하는 데 주저함도 없었다.

클로에의 논리는 흠잡을 데 없었다. 원래 가지지 않았던 권리를 포기할 뿐이다. 그게 무슨 큰 희생이 되는 건 아닐 터.

하지만.

'아니야.'

비록 감에 불과하지만.

"아니."

육감이 말하고 있다. 이걸 이렇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굳이 포기할 필요 없어."

"네. 저도 그렇게 생각... 네?"

"포기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가는 건, 결코 정답이 아니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잠깐."

생각을 좀 해 보자.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클로에를 잠시 제지한 뒤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수도 없이 많이 나오는 미심쩍은 부분.

'플로라 덴버는 훗날 범죄자가 된다.'

그리고 그건 결코 지금 떠도는 소문이 진실이라서가 아니다. 소문이 진실이라고 한들, 이름을 잃고 죄수로 복역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플로라 덴버는 '앞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뜻이겠지.'

인류에 크나큰 해악이 될 만한 범죄.

나는 그런 경우를 몇 가지 알고 있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마녀'가 그랬으니까.

'흔해 빠진 사교도들처럼 인류를 배반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죄수의 고리를 채워서 전장에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고리를 채워서 목숨을 쥐고 있다고는 해도 제 목숨을 바쳐서 인류를 배반할 만한 사람이면 전장에 내보내지 않으니.

'클로에에 대한 기록은 이상할 정도로 없지. 그리고 플로라 덴버는 어떤 회차에선 범죄자가 되지 않고, 어떤 회차에서는 범죄자가 된다.'

내가 만난 플로라 덴버는 '자신의 것'을 위해서라면 세상조차 던져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자신의 것'이야말로 그 범죄의 키포인트.

'아직은 감이야.'

겨우 감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떠오르는 건 있었다. 유능한 마공학자였던 마이오스 덴버의 죽음. 그리고 그 둘의 제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는, 그런 주제에 '전선에 내보내도 위험하지 않다고 판정된' 범죄자.

"네 권리는 그대로 놔둔다. 클로에."

"아니, 안 된다니까요. 언니는 괴물이에요...! 만약 언니가 저희를 적대하기 시작하면 저희는...."

"아니, 최악의 경우라도 우리가 이겨."

"네?"

"방법이 있다고."

지금 상황은 하나의 겜블이다. 그저 저쪽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판돈을 가지고 있을 뿐.

판돈을 올리면 올릴수록 내가 패배할 확률은 늘어난다. 가진 자본의 수가 백 배 이상 차이가 나면, 분명 내가 질 확률도 끝없이 올라가겠지. 하지만.

'이긴다면.'

이기기만 하면.

그렇다면 올라간 판돈에 비례해서 보상은 돌아온다. 도박수를 던지더라도 가져와야 하는 보상이.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그래. 네가 권리를 행사하는 건 괜찮아. 아마 네 스승님의 죽음과 관련된 거겠지."

"...네."

"그 권리를 행사해도 좋아. 대신."

"...대신?"

"나도 낀다."

"네?"

"나도 낀다고."

조사해라. 마음껏 조사하고.

너희가 조사한 걸 나에게도 보여 줘라.

"이렇게 된 거 어디 한번 같이 파헤쳐 보자."

플로라 덴버와 클로에 덴버.

천재로 이름 높은 마공학자 둘을 전부 내 손안에 넣을 수 있도록.

60화 본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