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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화

기간테폴리스의 청소부들에게 강력 범죄의 현장은 늘 기피되는 곳이었다.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곳은 보통 인간의 피나 살점, 훼손된 기계 부품 따위의 것들로 엉망진창 오염되어 있었으니까.

[사람이 죽었어. 아마도 변질자 짓인 것 같은데, 꽤나 화려하게 저질러 놓아서 말이야. 좀 치워줄 수 있겠나?]

눌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한 융해제.

이곳저곳 튄 피를 지우기 위한 세제.

부패한 고기 특유의 악취를 지워줄 탈취제.

당장 일반적인 청소 현장과는 달리 필요한 준비물만 이 정도다.

하지만, 정작 청소 회사에서는 그러한 청소 용품들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평범한 현장들에 비해 아주 조금 더 주어지는 작업비 내에서 전부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역시 이쪽도 거절인가. 알겠다. 다른 청소 회사를 알아보지.]

"답이 늦어서 미안하게 됐어. 에너지 블록을 우물거리고 있었거든. 살인 현장 청소 의뢰라고 했나? 그거, 우리가 할게."

게다가 끔찍한 악취나, 시신에 박혀 있었던 기계 부품이 오작동을 일으켜 폭발 따위의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까지 있었으니.

조사를 마친 경관들이 끔찍한 현장을 청소해 줄 업체를 수소문해도 십중팔구는 거절.

그런 현장을 좋아하는 청소 회사나 청소부는 아무도 없었다.

[거절하지 않는 건가? 게다가 반색까지… 특이한 회사로군.]

"우리 회사엔 그런 데만 찾아다니는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이상한 놈이 있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가 맞을 것이다.

얼마 전, 특이하게도 그런 강력 범죄의 현장만을 찾아다니는 청소부가 이곳 기간테폴리스에 나타났으니까.

"어이, 케이스! 짭새 놈들한테서 연락이다! 또 사건 터졌단다! 현장 나갈 준비해!"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사내가 경관과의 통화가 한창이던 전화기의 마이크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죠."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현장으로 나설 준비를 시작한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이 사내야말로 모두가 사색이 되 어 떠넘기려 드는 강력 범죄의 현장만을 나가려 드는 이상한 신입 청소부, 케이스였다.

"몸만 힘들고 돈도 안 되는 현장엘 왜 저렇게 열심히 나가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참… 이해하기가 힘든 놈이야."

어느덧 제 청소 도구를 전부 챙겨 사무실을 나서기 시작한 케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청소부들은 수군거렸다.

돈이 전부인 이 기간테폴리스에서 달리 돈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몸만 힘들 뿐인 강력 범죄 현장의 청소를 자진해서 나가는 꼴이라니.

벌써 한 달 가까이 매일같이 봐온 풍경이었지만, 여전히 그들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중얼거림을 들은 케이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물론 케이스라고 좋아서 그런 현장만을 골라서 다니는 건 절대 아니었다.

케이스에게도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벌써 삐걱거리는 게 슬슬 갈아야겠어. 얼마나 됐다고....'

생존,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그 무엇보다도 간절하고도 강력한 동기가.

* * *

성한 데를 찾기 힘든 일인승의 청소차에 청소 도구들을 억지로 쑤셔넣은 케이스는, 쾅 소리가 온 주차장에 울려퍼질 정도로 세게 그 트렁크를 닫았다.

"후우...."

케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갔건만, 아직도 완전히 적응하기까지는 많이 먼 것 같았다.

'그간 플레이해온 게임이 몇 갠데, 하필이면 이 게임에....'

케이스는 이방인이었다.

다만 평범한 이방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나라, 다른 나라에서 온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저 우주의 외행성 콜로니에서 온 것도 아니었다.

케이스는 이 세상이 게임일 뿐이었던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 빙의자였다.

'빙의했다고 해봤자 건질 거라고는 기반 설정 몇 개밖에 안 되는 이 게임에 빙의할 게 뭐냐고....'

하지만 여타 매체들에 등장하는 평범한 빙의자들과는 달리, 케이스에게는 빙의자로써의 메리트랄 게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세상의 원형이 되는 게임,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매 회차마다 용어나 아이템 따위의 기반 설정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바뀌는 시스템의 게임이었으니까.

'하다 못 해 제대로 된 특전이라도 좀 주던가.'

그런 케이스에게도 특전이라 할 만한 게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게 제대로 된 구실을 하기는커녕 생명을 위협하는 리스크라는 거지만.

"후우우...."

케이스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기에 선택한 시체청소부였다.

살면서 시체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볼일이 없던 케이스 자신이 구역질을 참으며 청소하는 건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갈 때 가더라도 후회할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 * *

홀로그램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몇 분인가 청소차를 몬 끝에, 케이스는 마침내 목적지인 사건의 현장에 도착했다.

비좁은 골목 끝에는 홀로그램 폴리스 라인이 푸른색 빛을 발하고 있었고, 기간테폴리스 경찰국을 뜻하는 'GPPD'의 알파벳이 적힌 군청색 경관복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짭새인가… 귀찮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청소 도구들을 잔뜩 쌓아올린 카트를 끌고서 현장으로 진입하려던 케이스는, 경관의 모습을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청소부를 호출했다는 건 곧 사건 현장의 조사가 끝났다는 말.

할 일이 끝났는데도 구태여 현장에 죽치고 앉아있는 경관들의 십중팔구는 음흉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가령 현장을 치우러 오는 청소부들에게 귀찮은 확인 절차를 들먹이며 뇌물을 요구한다던가.

"거기 누구야?"

"청소부입니다. 연락을 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온 걸까요?"

"아, 그러고 보니 청소 회사에 연락을 돌렸다고 들었던 것도 같은데…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여 들어가 봐."

다만 이번 경관은 케이스가 떠올렸던 그런 경관들과는 경우가 다른 듯했다.

케이스의 모습을 보고도 형형색색의 스프링클 캔디가 잔뜩 뿌려진 싸구려 도넛을 우물거릴 뿐, 다른 용건을 꺼내며 붙잡지는 않았으니까.

"청소부를 호출하신 걸 보니 조사들은 끝내신 것 같은데… 경관님께서는 왜 여기 남아계신 겁니까?"

그렇다면 눈앞의 저 경관은 어째서 조사도 끝났을 이 현장에 남아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걸까.

눈에 보이는 모습이나, 행동거지로 보아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것 같이 생기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궁금해진 케이스는 조심스레 도넛에 이어 초코 시럽과 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를 홀짝이고 있는 경관에게 물었다.

"요 99번 지구 근처에서만 벌써 다섯 명째인가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거든. 그것도 되게 비슷한 방식으로. 그래서 경계 근무를 서는 중이야. 범인은 반드시 범행 현장에 돌아오는 법이라나 뭐라나…"

"그렇군요…"

"그렇다고 겁먹진 말라구. 이몸께서 여길 이렇게 든든히 지키고 있잖아. GPPD는 민중의 지팡이. 그 범인이란 놈이 나타나도 내가 한 방에 무찔러 줄 테니 말이야."

"여러 모로 고생 많으십니다, 경관님. 그럼 저는 이만 청소하러 들어가 보죠."

그의 물음에 너스레를 떨며 답한 경관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케이스는, 홀로그램 폴리스 라인을 넘어 사건의 현장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고 보니 이 인근에서 현장을 청소한 것도 벌써 네 번째는 되는 것 같은데.'

하수구 냄새와 섞여 더더욱 역해진 혈액 특유의 비릿한 냄새.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겼지만, 분명 사람이었던 것.

사방에 눌어붙은 검붉은 색의 혈흔.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니 생각나는 현장들이 몇 개 있었다.

전부 이와 비슷할 정도의 잔혹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고.

전부 이곳, 99번 지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현장들이었다.

'그 꼴들이 하나같이 말이 아니었지. 보통의 현장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이곳 기간테폴리스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건 평범한 일이었지만, 시신이 참혹한 꼴로 훼손당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숨통을 끊어야 그 속을 헤집어 장기나 쓸 만한 임플란트 따위를 끄집어낼 수 있을 테니까.

한데 케이스가 99번 지구의 언저리에서 치웠던 현장들에 있었던 시신들은, 하나같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꼴들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장기 같은 부속품 따위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앗는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듯.

'오늘은 뭔가 쓸모 있는 걸 건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도 케이스는 담담히 생각을 이어갔다.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그가 이리도 태연할 수 있었던 건, 게임의 시스템이 그의 성격을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게 뒤바꿔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빙의한 이번 회차의 주인공, 케이스의 성정에 걸맞도록.

'그나저나 범인은 반드시 범행 현장으로 돌아온다, 라… 적어도 내가 청소하고 있을 때는 피해서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

케이스는 카트에서 제 청소 도구들을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참혹한 현장을 몇 번이고 만들어낸 범인이면 분명 목숨에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일 터.

만약 범인이 경관의 말대로 다시 자신의 범행 현장을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적어도 케이스 자신이 이곳을 청소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을 피해주길 염원하면서.

'적응이 안 돼… 적응이…'

눌어붙은 살점을 녹여줄 융해제를 사방에 튄 고깃조각들에 조금씩 떨어뜨리고.

혈흔을 깔끔하게 지워줄 특수 세제를 스폰지에 펴바르고.

부패한 시신과 하수구의 악취가 합쳐져 자아내는 역한 하모니를 조금이나마 약화시켜줄 탈취제를 뿌렸다.

생리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한창 청소를 진행하던 케이스의 귀에,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아악! 이게 대체 무슨-"

골목 입구 쪽에서 들려온 비명소리는 싸구려 도넛을 우물거리던 경관의 것이었다.

경관은 아주 두렵고 끔찍한 것이라도 본 듯 필사적인 비명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탕-! 탕-!

이어지는 두 발의 총성.

후에는 그 어떤 비명도,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홀로그램 폴리스 라인 너머, 골목의 깊은 곳에 있는 케이스로써는 저 멀리 골목 입구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케이스에게 있어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리라는 것.

'일단 확인부터 해보자.'

케이스는 손에 들고 있었던 청소 도구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골목 입구 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내밀어 그 너머를 확인했다.

'…망할.'

그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은 케이스는 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구겼다.

경관의 육중한 몸체는 그가 우물거리고 있었던 도넛에 검붉은 시럽을 토핑하며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경관을 그렇게 만든 범인으로 보이는 탁한 눈의 사내가 골목의 안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청소하고 있을 때만큼은 찾아오지 말라니까, 대체 왜....'

저 사내가 케이스가 청소하고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의 범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긴 막다른 길. 퇴로는 없어. 경관도 죽어버린 마당에 달리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없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찰박, 찰박.

어느덧 사내의 발소리가 케이스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공황하던 케이스는 마침내 그 마음을 다잡았다.

'…늘 죽는 것보단 뭐라도 시도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잖아. 이번에도 크게 다를 거 없어.'

센서의 역할도 겸하는 듯 붉게 번뜩이는 눈동자, 한 눈에 봐도 꽤나 증강된 것 같아보이는 전신의 근육들, 팔뚝의 첨예한 칼날, 가슴깨에서 삐져나온 총신.

경관을 살해한 사내가 무기고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던 데 반해, 케이스의 몸뚱이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케이스가 승리할 확률은 한 없이 낮아 보였다.

하나 케이스의 얼굴 위에는 비장함만이 감돌 뿐, 패색 따위는 존재치도 않았다.

'저런 괴물이 상대라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케이스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었던 '그 특성'이라면, 분명 승산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어이, 밥벌레.'

케이스는 주머니에서 다 헤진 칩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 목덜미의 소켓에 그 칩을 꽂아넣었다.

'일할 시간이다.'

케이스 자신을 좀먹을 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었던 그의 특성을 일하게 만들 시간이었다.

[특성 : 개조광]

[상세 : 체질 - 과잉적합자를 획득합니다.

과잉적합자 : 임플란트, 프로세서 등 모든 종류의 기계 이식물을 아무런 부작용 없이 이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식한 기계 이식물을 본래의 성능 이상으로 운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 특성의 효과 아래 놓인 기계 이식물의 수명은 극도로 짧아집니다.]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시대, 몸에 이식된 기계의 수명을 극단적으로 줄여 보유자를 사지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어드밴티지만 보자면 이 첨단과 비인간의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특성, '개조광'을.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2화

케이스가 제 목덜미에 소켓에 꽂아넣은 칩은, 군용 프로세서 칩이었다.

당연히 멀쩡한 물건은 아니었다.

고작 밑바닥 청소부 따위인 케이스로서는 그런 불법적인 구매 루트를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있다고 한들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정상적인 군용 제품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으니까.

[이거? 절대 못 써. 이런 고물만도 못한 폐품을 소켓에 집어넣었다간 뇌가 죄다 타버릴 걸? 괜한 생각 말고, 곱게 갖다 버리는 편이 좋을 거야.]

방금 케이스가 제 소켓에 삽입한 군용 프로세서 칩은 시체든 이 세상의 인간들조차 이건 다시 쓸 수 없다며 회생 불가 판정을 단언한 고물이었다.

'됐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

하지만 케이스라면 가능했다.

실제로 지금, 폐품에 불과했을 터인 군용 프로세서 칩은 아주 멀쩡히 동작하고 있었다.

코어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심각한 손상을 입어 수리는커녕 전원을 공급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였을 터였는데도 말이다.

[시스템 부팅 중… 적과 교전 중임을 확인, 조속히 전투 프로세스를 실행합니다. 프로세스 실행 :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프로세스 실행 : 신체 균형 보조, 프로세스 실행 : 육탄전 보조용 알고리즘…]

[부품의 내구도가 현저히 낮은 상태입니다. 작동에 오류가 발생하거나, 작동이 중지될 수 있습니다.]

케이스의 시야 위로 프로세서 칩이 본격적인 작동을 개시했음을 알리듯 디지털 텍스트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이전 세상에서부터 지금 세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수준의 활력이 온몸에 감돌기 시작했고.

예전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지금은 밑바닥의 청소부였기에 배울 일이 없었던 '전투'에 대한 지식들이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 각인되어갔다.

'밥벌레, 네가 드디어 밥값을 하는구나.'

제아무리 기성품과는 비교하는 게 실례인 수준의 높은 성능을 지닌 군용 임플란트라고 할지라도, 다른 부품들도 없이 오직 프로세서 칩만으로 이런 극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오롯이 케이스의 특성 '개조광'이 칩의 기능을 원본 이상으로 발휘하게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당연하게도… 변질자인가.'

케이스가 목덜미에 칩을 삽입해 넣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관을 끔찍이 살해한 범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술의 연마, 마법의 탐구, 기계를 통한 증강 등등....

자신이 추구하던 강함의 길에 잡아먹혀 인간성을 잃어버린 자들의 말로, 변질자.

빙의 이전의 케이스가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플레이하며 몇 번이고 만나온 익숙한 존재였다.

"우우… 우...."

변질자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고는 기분 나쁜 걸 넘어 기이하게까지 느껴지는 중저음의 신음소리를 내며 붉은 안광의 사이버네틱 의안을 굴려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쉴 새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변질자의 기계 눈알은 한 곳에 고정됐다.

케이스가 숨을 죽이고 서있었던 그곳을 향해서였다.

"...썩을!"

나름 잘 숨었다고 생각했건만, 들켜버렸나.

케이스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물러나는 순간, 변질자의 팔등에서 돌출돼 나온 예리한 칼날이 그가 서 있던 모퉁이를 갈랐다.

아주 조금이라도 대처가 늦었더라면 몸이 양분됐을 터였다.

하지만....

'피했…다고?'

어째서인지 방금 목숨이 날아갈 뻔했는데도, 케이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공포'의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한 상황임에도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대고 있었다.

'피했어. 진짜 피했다고.'

케이스와 눈앞의 변질자 사이에는 분명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기계로 비유하자면 계산기와 컴퓨터였고, 대중적인 일화에 빗대자면 다윗과 골리앗, 동물로 치면 쥐와 고양이 정도의 간극이.

'그것도 그저 그런 요행이 아니라 내 두 눈으로 공격을 보고, 내 몸뚱이를 움직여서 피했어.'

그 차이는 고작 군용 프로세서 하나를 삽입한다고 해서 메꿔질 만한 게 아니었지만.

지금 케이스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변질자의 참격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 나아가 오른쪽 귀 끄트머리라는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회피해내기까지 했고 말이다.

'생각보다 잘 해주고 있어. 이 정도라면....'

살아남을 방도가 생길지도 모른다.

칼날을 거둬들이고, 다음 공세를 준비하는 변질자를 보며 케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0에 수렴하던 생존률이 조금씩이나마 올라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변질자가 칼날을 휘두르면, 케이스는 침착하게 그것을 피해낸다.

이 단순해 보이지만 살 떨리는 공방은 몇 번이나 계속됐다.

얼핏 팽팽한 접전처럼도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비등비등해 보이는 접전은 사실 케이스의 처참한 열세였다.

'군용 프로세서와 개조광으로 어떻게든 버텨보고 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차이가 너무 커.'

날아드는 변질자의 칼날을 겨우 피해내며, 케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물만도 못한 폐품과 양품....'

케이스의 몸은 그 대부분이 생체, 혹은 임플란트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고물들로 되어 있었다.

반면 케이스와 맞서고 있는 기계 덩어리인 변질자의 몸은 기계에 문외한인 이라 할지라도 제법 성능이 괜찮으리란 걸 알아볼 수 있을 양질의 부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조광의 효과를 받아 몸에 이식된 고물 부품들의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케이스였지만 그럼에도 그 차이는 극명.

'공격을 피했다고 해서 기뻐할 게 아니었어. 방어나 회피 정도는 어찌어찌 가능하면 뭐 해. 내 쪽에선 타격을 입힐 수단이 아예 없어.'

공격을 보고 피하는 것, 미리 대비해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이를 테면 변질자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다든가, 아예 이 상황에서 도망간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이대로 가다간 진다.'

단 한 번의 반격도 없이 무의미한 방어와 회피만이 계속되는 상황.

지금처럼 소모전의 양상이 계속된다면 누가 승리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겠어.'

케이스는 표정을 굳혔다.

늪에 빠진 채로 가만히 있다간 결국 그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게 되는 법.

케이스는 변질자의 공격을 피하며 재빨리 주변을 흝어보았다.

'저거라면....'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하지만 이후로도 전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전보다 더더욱 나빠지기만 해 갔다.

무언가의 '계획'을 실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날아드는 변질자의 공격들을 받아내고 있었던 케이스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방어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듯 점점 밀려나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누가 봐도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케이스는 흔들림이 없었다.

막다른 벽을 향해 밀려나고 있으면서도 그 눈빛만큼은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그것과 같았다.

"으어어-!"

변질자는 괴성을 내지르며 양쪽 팔등에서 돌출된 칼날들을 케이스를 향해 휘둘렀다.

개조광의 효과로 성능이 극대화된 부품들의 힘을 빌어 어찌어찌 변질자의 공격들에 대응해오고 있었던 케이스.

그런 그로서도 이번에는 별다른 수가 없어 보였다.

가뜩이나 움직이기 힘든 좁은 곳에서 막다른 벽으로 몰리기까지 한 지금의 케이스는, 그야말로 체크메이트 직전이었다.

"푸핫."

한데 어째서일까.

궁지에 몰린 케이스는, 자신이 처해 있는 최악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그 입가에 떠올리고 있었다.

실성해서 짓는 헛웃음 따위가 아니라 '진짜 웃음'이었다.

'걸려들었구나.'

화끈한 통증이 어깨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칼날 중 하나가 케이스의 어깨를 꿰뚫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까가강-!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변질자가 휘두른 두 개의 칼날이 불티를 튀기며 멈춰 섰다.

'그렇게 기다란 걸 이렇게 좁아터진 곳에서 언제까지나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냐?'

변질자의 팔등에서 돌출돼 나온 칼날들은 코등이만 없을 뿐이지, 카타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변질자의 칼날을 이 길목에서도 유별나게 좁은 모퉁이 쪽에서 휘두른다면 분명 벽에 걸리거나, 박히는 등의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케이스가 팽팽하던 구도를 포기하고 일부러 밀리기 시작한 이유이자, 그의 노림수였다.

'살 수만 있다면… 어깨 하나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내주지.'

케이스는 자신의 어깨를 꿰뚫고 벽에 박힌 변질자의 칼날에서 제 어깨를 빼내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투둑, 툭 하는 힘줄과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케이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끄윽, 끄아아악!"

그와 동시에 고통이 케이스를 엄습해왔다.

군용 프로세서의 작용으로 아드레날린, 엔도르핀 따위의 신경 물질들이 정도를 모르고 분비되고 있는 지금의 케이스조차 비명을 내지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정도도 원본에 비하면 많이 순화된 고통이었다.

만약 신경 물질로 고통이 무뎌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쇼크사하거나, 정신을 잃어버려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으니 말이다.

"끄윽, 끄으으윽...."

어깨가 사실상 끊어지다시피 해 축 늘어진 오른팔을 붙잡고, 케이스는 발을 뗐다.

벽에 칼날들이 걸린 변질자는 유유히 모퉁이에서 빠져나가는 케이스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발을 묶어둔 사냥감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할 때였다.

"체크메이트다. 이 괴물 자식아."

케이스가 변질자에게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간 곳은 축 늘어진 비대한 경관의 시신 옆.

그곳에 도달한 케이스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경관이 변질자에게 당하며 떨어뜨린 경찰용의 블래스터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블래스터를 벽에 박힌 칼날을 빼내려 애를 쓰는 변질자에게 겨누곤-

중얼이며 방아쇠에 얹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으, 어, 으...."

타앙-! 케이스가 격발한 탄환이 과녁인 변질자의 미간에 정통으로 명중하고.

곧이어 힘없는 괴성과 함께, 발악하던 변질자의 몸은 축 늘어졌다.

'이긴… 건가....'

케이스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제멋대로 주저앉기 시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실감이 나진 않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끝내 승리했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말이다.

* * *

자리에서 흐느적거리며 일어난 케이스는, 몸을 추수르곤 근처에 널브러진 두 시신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칼을 꺼내 딱딱한 고깃덩이가 된 그것들에서 기계 부품들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욱, 우욱...."

두 고깃덩이들에서 기계인 부분들만을 떼어내는 케이스의 솜씨는 이젠 꽤 능숙했다.

입으로는 역겹다는 듯 구역질을 해대고 있었지만서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짓이 시체 해체라니. 인생 한 번 기구하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대의 인간이었던 케이스가 이리도 익숙한 듯 시신들을 뒤적거릴 수 있었던 건, 이게 그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기간테폴리스에서 몸에 기계를 심지 않은 인간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건 케이스가 빙의한 이 게임 캐릭터인 케이스의 몸에도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다만, 케이스의 몸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개조광]

이 미친 특성은 신체에 이식된 기계의 성능을 한껏 끌어 올려주지만, 대신 기계의 수명을 잔뜩 깎아 먹어 순식간에 고철로 만들어버리는 양날의 검.

아직 부품들을 끌어모을 돈도 뭣도 없는 케이스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살인현장을 전전하며 폐기 직전의 부품들이나마 주워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런 것들이라도 없으면… 당장 내일조차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솟구쳐 오르는 구역질을 참아가며, 케이스는 두 시신들에서 쓸 만한 기계 부품들을 솎아내길 계속했다.

고통스러운 삶이었고, 기구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케이스는 여전히 살고 싶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3화

이곳은 인간 이하 무언가 취급을 받는 이들만이 모여있는 이 도시의 시궁창, 99지구.

현장을 그대로 두고 간다 한들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었지만, 케이스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조차 열어두고 싶지 않았다.

곧 케이스는 쓸 만한 부품들도 발라내어 이제는 완전히 무가치한 고깃덩이가 돼버린 시체 두 구의 뒤처리를 시작했다.

…그가 늘 상 현장의 청소를 할 때 사용하던 독한 약품들을 이용해서였다.

"욱, 우욱...."

한 달 가까이 이 세상에서 구르며 단련된 비위로도 참아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과정이 이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 구역질을 해대게 됐고, 토사물은 제멋대로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두 명의 사람이었던 것들은 아주 자그마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완벽히 지워졌다.

'이걸로 증거 인멸은 끝… 경찰 쪽에서 꼬리를 물고 쫓아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고작 99지구 경관 나부랭이를 위해서 이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진 않을 테니까.'

이어서 현장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었던 홀로그램 폴리스 라인, 경관이 먹고 있었던 도넛과 그것들이 담겨 있던 상자 등등.

비교적 중요도가 덜했던 증거들까지도 완벽히 인멸해낸 케이스는 현장 저 너머에 주차돼있을 좁아터진 청소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평범한 현대인이 이런 일을 겪고도 나처럼 멀쩡할 수 있을까.'

온몸에는 잔상처가 한가득이었고, 오른쪽 팔은 어깨의 근육과 뼈가 변질자의 칼날에 뭉텅 잘려나가 몸에 겨우 '붙어만' 있는 수준.

한 달 전의 갑작스러운 빙의부터 시작해서 지금 변질자와의 교전에서 입은 부상에 이르기까지, 케이스가 처한 상황들은 평범한 현대인의 정신 상태로 버틸 수 있을 만한 상황들이 아니었다.

'…아니겠지. 당장 나만 해도 그 설정값들이 아니었더라면 진즉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케이스는 그런 상황들 속에 있으면서도 크게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가 만들었으며 빙의한 이 케이스라는 캐릭터가 지닌 '냉정'과 '침착'이라는 성격의 설정값에 그의 감정이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의 설정값에 감정을 조절당하는 기분....'

극한의 고통과 위기 속에서도 케이스의 사고는 늘 그가 빙의한 이 몸의 설정값에 따라 최선의 선택지를 찾아 움직였다.

딱히 디메리트 같은 건 아니었지만 원래의 자신이었더라면 놀라 까무러치고도 남았을 상황에서도 침착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벌써 몇 번씩이나 이런 상황에 놓여봤음에도 감회가 새로웠다.

'항상 묘한 기분이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불만은 없다만, 자신의 감정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 썩 달갑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 * *

골치 아픈 일에 엮여 다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구비해 두었던 피부용 접착제와 해독수로 어깨를 어떻게든 처치해낸 케이스는 청소 회사의 사무실을 향해 청소차를 몰았다.

"케이스, 너 안색이...."

"현장에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역대급으로 끔찍한 현장을 본 모양이구만. 내 그 역겨운 현장들만 골라서 나갈 때부터 알아봤다. 미련한 자식...."

그렇게 도착한 청소 회사의 사무실.

그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청소부들을 뒤로하고서 케이스는 사무실의 인사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품에서 봉투를 꺼내 인사과의 직원을 향해 건넸다.

"이건...."

"사직서입니다. 청소부 일, 오늘부로 그만두려고요."

케이스가 인사과 직원에게 건넨 봉투 안에는 언제 쓸 일이 있을지 몰라 늘상 품에 간직하고 있었던 사직서가 들어있었다.

"혹시… 급여 인상을 원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업무 환경에 불만 사항이 있으시다든지 하신 건? 사장님께서 따로 말씀도 해두셨으니 뭐든 말씀만 해주시면...."

회사 입장에서 케이스는 '쓸모가 큰 톱니바퀴'였다.

다른 청소부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기피하기만 하는 살인 따위의 강력 범죄 현장에도 서슴없이 출동해주는 거의 유일한 인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유용한 부품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사측에서 미리 언질이 있었던 모양인지, 케이스의 사직서를 받은 인사과 직원은 곧바로 난색을 표하며 협상 테이블을 펼치려 들었다.

"사측의 배려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제 결정을 번복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일단 조건이라도 끝까지...."

"괜찮습니다. 애초에 하루이틀 고민하고 결정한 일도 아닌 터라."

하지만 케이스에게는 저가 내뱉은 말을 철회할 생각이 아주 조금도 없었다.

인사과 직원이 협상 테이블 위에 올릴 조건들을 제시하기도 전에 그 말을 잘라먹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청소부 일에… 어지간히도 환멸을 느끼고 계신 모양이네요. 하긴, 그 험한 현장들만 골라서 다니셨으니...."

"딱히 환멸을 느끼고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겠네요. 처음에는 마냥 귀찮게만 느껴졌던 이 일에 이제는 정까지 들려 하고 있으니까요."

케이스는 지금 하고 있는 청소부 일이 싫지 않았다.

박봉이긴 했지만, 이 세계의 일치고는 위험부담이 적은 편이었고, 슬슬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요령도 생겨가고 있는 와중이었으니까.

"그럼 어째서...."

"이 일을 그만두고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거든요."

여기에 사측에서 제시할 몇몇 협상 조건들까지 합쳐진다면 청소부 일은 분명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터였지만, 케이스의 답은 여전히 거절이었다.

케이스가 청소부 일을 그만두려는 건 마침내 찾아온 '때'로 인한 사실상의 불가항력이었으니까.

"더 이상은 이야기를 나눠봤자 비슷한 이야기들만 빙빙 돌게 될 것 같네요. 사직서도 전했으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입을 달싹이는 인사과 직원을 향해 작게 목례한 케이스는 절뚝이며 청소 회사의 사무실을 나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 *

눈에 잔상을 남길 정도로 밝은 빛을 내는 각양각색의 네온 사인, 현대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독특한 복식으로 차려입은 사람들, 향은 달라도 하나같이 매캐한 합성 연초의 냄새, 자극적인 형상의 홀로그램.

케이스는 그런 풍경들로 가득한 99지구의 번화가를 지나 어느 허름한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던 반짝거리는 풍경들과는 거리가 먼 이 낡은 건물은 케이스가 지금 거주하고 있는 원룸의 빌라였다.

케이스는 입주한지 한 달째 '수리중'이라 적힌 종이가 붙어있을 뿐 단 한 번도 제대로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었던 엘리베이터를 지나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네 개의 층을 오르고, 퀘퀘한 냄새와 깜빡거리는 조명 따위의 것들로 음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긴 복도를 지나 그의 자취방까지 나아갔다.

'저 쓰레기 같은 매트리스가 저렇게 아늑해 보이기는 또 처음이네.'

제 자취방 안에 들어선 케이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방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싸구려 매트리스였다.

신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피곤한 탓인지, 지금 케이스의 눈엔 이곳에 살게 된 이래 단 한 번도 편안한 잠자리가 되어주지 못했던 저 매트리스가 천국으로 가는 문처럼 비추어지고 있었다.

'충분한 휴식도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당장에라도 매트리스에 누워 눈을 감고 싶은 케이스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매트리스 코앞의 싸구려 간이 의자에 앉은 케이스는 겨우 팔이 닿는 위치에 있는 냉장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점성이 있는 푸른색의 액체로 가득한 병을 꺼내 들었다.

병의 내용물은 이식된 신체에서 떨어져 나와 기능을 정지하기 시작한 기계 부품들의 풍화를 막아주는 보존액이었다.

'스마트 렌즈, 블레이드 암즈, 신경 증강기, 신체 능력 강화용 호르몬 조절기, 거기에 인공 근육까지… 힘겹기는 했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은 것 같네.'

케이스는 제 가방에서 이번 현장을 통해 얻은 임플란트 따위의 기계 부품들을 끄집어내 보존액으로 가득한 병 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막 죽은 시체에서 발라낸 것이라 그런지 평소에 얻을 수 있었던 부패된 시체 따위의 것들에서 발라낸 부품들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그만큼이나 괜찮은 품질임에도 얻은 부품의 수 역시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그럼 뭐 하나. 결국 밑 빠진 독인데.'

하나 케이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지금의 케이스 자신은 밑 빠진 독과도 같은 존재.

상황이 괜찮아졌다고 한들 결국 아주 잠깐의 여유에 불과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상태가 썩 괜찮은 부품들을 얻어냈다곤 하지만… 그래봤자 이대로는 얼마 못 가겠지. 이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식한 부품들은 열심히 수명을 다해가고 있을 테니까.'

그가 지닌 특성, 개조광의 영향으로 케이스의 몸에 이식된 기계 부품들은 시시각각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아까 전의 전투처럼 격한 상황이 아니라, 지금처럼 마냥 일상적이기만 한 상황에서조차 말이다.

'청소부 일을 하면서 얻는 부품들만으로는 이 빌어먹을 몸의 템포에 맞출 수 없어.'

그게 케이스가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던 청소부라는 일을 그만둔 이유였다.

청소부 일로 얻는 부품만으로는 제 몸의 상태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고, 이제야 겨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조건'이 갖춰진 상태였으니까.

마침 변질자와 경관의 몸에서 얻은 유용한 부품들은 아주 오래는 못 쓸지라도 몇 번의 전투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청소부로는 무리야.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해.'

케이스가 떨어진 이 세계의 원형이 되는 게임,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기본적으로 펑크 장르를 표방하고 있는 게임이었다.

케이스야 전투에도 능숙하지도 않았고 당장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생긴 상황이었기에 일단 급한 대로 청소 회사의 청소부로 취직하고 보긴 했지만.

여타 펑크 장르의 작품들과 비슷하게 주인공이 용병, 해결사 따위로 일하며 기업 혹은 개인에게서 의뢰를 수주받아 해결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 게임이라는 말이다.

'펑크 장르의 스테레오 타입.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꽃, 알파이자 오메가인 그곳.'

케이스가 나아가고자 하는 다음 단계란, 그런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가히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해결사들의 사회로.'

일확천금의 기회가 천지에 널려 있지만 반대로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곳.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강자들이 길가의 쓰레기처럼 널려있는 곳.

그리고 충분한 돈만 있다면 그런 강자들조차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수 있는 곳.

해결사들의 사회.

그게 케이스가 나아갈 다음 스테이지의 이름이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4화

우중충한 흑색의 스모그 사이로 붉은 태양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끝나고, 새 하루가 밝았다.

'…닥터한테 가자.'

케이스는 어제 얻은 부품들과 보존액으로 가득 찬 병을 챙겨서 자취방을 나섰다.

이어서 그가 그간 청소부로 일하며 아득바득 긁어모은 크레딧을 현금으로 인출해 뒷골목의 불법 메디컬 클리닉으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먼저 만전을 기하는 게 좋을 테니까. 응급 처치만 해둔 어깨도 겸사겸사 치료받긴 해야 하고.'

어지간한 부상은 해독수와 피부용 접착제로 끝.

부품 관련 문제도 최대한 제 손으로 해결했던 평소의 케이스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런 케이스라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마침내 그가 해결사들의 사회로 첫 발걸음을 떼는 날.

평소처럼 효율, 절약 따위의 단어들을 되뇌이며 자원을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어디가 고장나서 오셨나?"

"말로 해선 입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

"온 몸이 엉망진창이다 이거구만. 그럼 여기 앉아나 봐. 얼마나 엉망인지 어디 한 번 보자고."

"진찰은 사양하겠어. 당신 자문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의뢰할 게 있어서 온 거니까."

말을 끝마친 케이스는 매고 있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주섬주섬 그가 챙겨온 기계 부품들과 보존액이 든 병을 꺼내들었다.

"이야, 많이도 모았구만. 게다가 중고치곤 상태들도 좋은 것 같은데… 혹시 이것들을 팔러 온 건가?"

"아니."

"그럼 대체 왜 이것들을 보여주는 건데?"

"그야 이것들이 당신한테 할 부탁에 관련된 물건들이니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클리닉의 의사를 향해 케이스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이 병 안의 부품들을 내게 이식해 줘."

"…전부?"

"그래, 전부."

그 입에서는 온갖 광기 넘치는 인간군상들을 보아온 의사조차 당황하게 만들 정도의 경악스러운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

"웃자고 꺼낸 얘긴 아닌데."

의사는 케이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케이스가 가져온 병 안에 있는 부품들은 하나하나가 뇌에 적지 않은 부담을 가하는 전투용의 부품들이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한두 개를 장착하는 것으로 한계에 부딪힐 터였고, 적성이 높은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서너 개가 한계일 터였다.

그리고 케이스가 가져온 병 안 부품들의 수는 그런 숫자를 가볍게 넘어있었다.

한데 병 안의 저 부품들을 전부 자신의 몸 안에 이식해 달라니.

'이 또라이가....'

눈앞의 케이스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의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혹시 저 말 속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구만.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나?"

"무슨 소리긴. 당신이 들은 그대로지. 내가 가져온 부품들을 전부 내게 이식해 줬으면 좋겠다. 그뿐이야."

케이스는 진심으로 정신 나간 말을 제 입밖으로 뱉어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내가 거절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겠구만. 그렇게 된다면 아무 말 없이 시술을 해줄 다른 클리닉을 찾아갈 테니까. 그렇지?"

"그렇겠지."

"그럼 뭐… 까짓 거 그쪽 말대로 한 번 해보자고."

의사의 눈에 비추어지는 케이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남지 않은 확고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거절한다면 분명 다른 클리닉을 찾아갈 거고, 재수 없는 놈에게 걸린다면 이식은커녕 있던 장기조차 빼 먹힐 거다.

의사 역시 시궁창의 밑바닥에서 하루하루 겨우 벌어먹고 사는 처지였기에 남을 신경 쓸 여유까지는 없었지만, 그런 꼴을 생각하자면 벌써부터 잠자리가 뒤숭숭해지는 것 같았다.

괜히 그렇게 찝찝한 감정을 안느니 죽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이식을 해주는 편이 낫겠지.

"융통성이 없는 인간은 아니라 다행이네. 여기 수술비."

"액수가… 뭔가 이상한데?"

체념한 표정으로 케이스에게서 현금 다발을 받아든 의사는 곧 그 얼굴 위로 당혹감을 띠었다.

케이스가 건넨 현금은 수술을 위한 최소 액수였다.

즉, 마취 따위의 자재들까지 감안 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라는 말이었다.

"설마… 마취 없이 진행하기라도 할 셈이냐?"

케이스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는 지끈거리는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케이스의 정신 나간 짓에 동참하기로 한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후회되기 시작한 의사였다.

* * *

의사는 멍한 표정으로 합성 연초를 입에 물었다.

매캐한 연기가 폐를 헤집은 후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몇 시간 사이에 십 년은 늙은 것 같네....'

의사는 몇 시간 전 클리닉을 방문한 케이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임플란트 따위의 기계 부품들을 몸에 이식하는 건 아주 기초적인 시술이었지만, 케이스가 가져온 부품들의 수는 이미 기초적인 시술의 선을 한참 넘기고 있었다.

십수 개의 인플란트는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적성 수용치를 아득히 상회했고, 무엇보다 이 미친놈은 그것을 한 번에 마취조차 없이 부품들을 이식받겠다고 했다.

'눈빛이 어지간히 확신에 차 있길래 눈 딱 감고 하자는 대로 해주긴 했는데… 솔직히 시체를 치우게 될 거라고 확신했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되는 케이스의 정신이 나가버린 듯한 주문들에 의사는 사실상 케이스의 비참한 끝을 확신했다.

'누가 알았겠어? 설마 그걸 진짜 맨정신으로 버텨낼 거라고....'

하지만 그런 의사의 예상과는 달리, 케이스는 그 고위험의 시술을 성공적으로 마쳐냈다.

수건을 한 장 가져다 달라더니 그걸 입에 물고서 그 온 몸을 찢고, 째서 인공물을 삽입하는 극악한 수술을 버텨냈다.

그것도 두 손의 손가락들을 전부 써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계 부품들을 그 안으로 쑤셔넣는 내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별종들이 몇 있었지.'

상식선을 한참 넘어선 수술을 받고도 멀쩡하게 일어난 케이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면, 같이 떠오르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이따금씩 나타나곤 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지독한 시궁창, 99지구를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드는 '별종'들.

의사가 케이스를 보고서 떠올린 건 그런 '별종'들이었다.

'별종들의 대부분은 의미없이 죽어버리고 말지만… 왜인지 이번에는 다를 것 같단 말이지.'

의사가 지금껏 봐온 별종들의 끝은 크게 두 가지였다.

수렁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제 명도 다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거나, 이 도시의 저 위까지 기어오르거나.

대부분은 죽어버리는 쪽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케이스를 떠올리고 있자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질 않았다.

'이거 원… 어쩌 내가 새로운 거물의 첫 걸음을 목격한 걸지도 모르겠군.'

명확한 근거 같은 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 *

클리닉을 나온 케이스의 다음 행선지는 99지구 한켠에 위치해 있는 어느 거리였다.

거리는 분명 기간테폴리스 최악의 수렁, 시궁창 따위로 불리는 99지구의 영내에 있었지만 그곳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99지구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싸구려 술집뿐만이 아니라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술집까지도 몇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해결사들의 사회....'

해결사들의 사회는 생각보다 그 구조가 간단했다.

돈을 지불해 사건을 의뢰하는 의뢰인.

응당한 대가를 받고 의뢰를 수주해 해결하는 해결사.

그리고 둘 사이에서 각자의 요구사항들을 조율하는 중개인과 그 중개인이 접선 장소로 운영하는 술집.

그런 것들 모두가 있는 이 거리 전체가 해결사들의 사회였으니까.

'99지구라는 시궁창에 아주 잘 어울리는 싸구려 술집들,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분위기의 술집들.'

해결사들의 사회는 분명 99지구에 위치해 있었지만, 낮은 등급 지구의 사람들만이 왕래하는 곳은 아니었다.

'시궁창 해결사라는 단어가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들, 그리고 멋들어진 양복을 빼입은 저 위의 해결사들과 물주들.'

이곳은 '해결사들의 사회'라는 이름 그대로 이 기간테폴리스에서 가장 촘촘한 해결사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장소.

높은 등급 지구에서 거주하는 의뢰인이라 할지라도.

해결사로 일하며 번 돈으로 이 시궁창을 탈출한 이름이 난 해결사라 할지라도.

결국 해결사로 일을 할 때만큼은 이곳을 들러야 했으니 말이다.

'디테일한 부분은 달라도 대략적인 건 내가 아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네.'

잠시 멈춰서서 거리의 풍경을 눈에 담던 케이스는 다시금 발걸음을 뗐다.

'처음에는 질이 조금 떨어지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겠지.'

싸구려 술집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의 허름한 심부를 향해서였다.

'저 허름한 술집들의 중개인들이 고급스러운 술집들의 중개인들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건 나도 아주 잘 알지만....'

낮은 등급 지구의 조무래기들과 높은 등급 지구의 베테랑들이 한 데 모일 수 있는 장소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취급에 아예 차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싸구려 술집의 중개인은 주로 보수도 적고 신용도 거의 없는 수준 낮은 의뢰를.

99지구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인 고급 술집의 중개인은 신용도, 보수도 확실한 높은 수준의 의뢰를 알선했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검증된 게 없는 생 초짜를 알짜배기 의뢰인과 이어주려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케이스였지만, 그걸 알아도 싸구려 술집이 줄을 지어 서있는 으슥한 골목을 향해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중개인들의 눈에 비추어질 케이스는 결국 이제 막 이 세계에 발을 내딛은 초짜 해결사일 뿐.

이런 행색으로 수준 높은 중개인이 있는 고급 술집에 가봤자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능력 있는 해결사들만 한 트럭은 알고 있을 인간들이 왜 이 세계에 막 기어 들어온 머저리를 쓰겠어.'

그 따위 생각을 하며 거리의 더,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던 케이스는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멈춰선 그의 앞에는 '시궁쥐들의 요람'이라 적힌 간판이 매달려 있는 허름한 술집이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가.'

케이스는 낡은 탓인지 삐그덕대는 소리가 나는 그 문을 밀고서 술집 안으로 그 몸을 들이밀었다.

여태껏 그가 겪어왔던 일들은 매체로 치면 프롤로그, 오페라로 치면 서곡에 해당하는 별 볼일 없는 이야기들.

이 술집에, 해결사들의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앞으로의 여정의 진짜 시작이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5화

술집에 들어선 케이스는 몇 번이고 이곳에 들러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그 중앙에 비치된 디지털 게시판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화면 위를 빼곡하게 채운 의뢰의 내용과 보수를 적은 텍스트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의뢰라....'

케이스는 이 세계의 원형이 되는 게임인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수 회차, 아니 수십 회차에 걸쳐 클리어한 고인물.

그리고 회차가 바뀔 때마다 거의 모든 것들이 바뀔지라도 게임을 플레이하고 또 플레이하며 파악한 이 세계관의 근간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즉, 어떤 의뢰가 괜찮은 의뢰인지쯤은 어렵잖게 구분이 가능하리라는 말이었다.

'이게 좋겠는데.'

그렇게 첫 의뢰를 정한 케이스.

그가 술집의 바에서 평범한 바텐더들처럼 해결사들을 응대하는 중개인에게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웬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 그리고 어깨에 닿은 묵직한 손길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거기 형씨, 나 좀 보자고."

고개를 돌려보니 온몸을 기계로 강화한 웬 거한이 그의 기계 의수를 케이스의 어깨에 올려놓은 채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형씨가 수주하려고 하는 그 의뢰 말이야. 우리가 먼저 눈여겨 보고 있었던 거거든."

"그래서?"

"수주를 포기해줬으면 해서 말이야. 파티가 만원이 아니었더라면 형씨랑 같이 가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파티는 네 명으로 다 차버렸거든."

거한의 말에 케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케이스에게 말을 붙였을 때부터 그 입가에 떠올리고 있었던 음흉한 웃음부터 시작해서 뚫린 입이라고 나불거리는 궤변까지.

거한의 의도가 너무나도 투명하게 보이고 있었으니까.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의뢰였다고?'

중개인을 사이에 두고 의뢰인과 직접 만나 조건을 조율하며 계약을 진행해야 하는 '큰 건수'의 의뢰들과 달리, 게시판의 의뢰들은 마음에 든 이라면 누구나 수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거한의 말마따나 케이스가 택한 이 의뢰가 그가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었다면 케이스보다 먼저 중개인을 찾아가 수주하면 그만인 일이었을 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데 케이스가 이 의뢰를 택하기 전까진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자신이 먼저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의뢰이니 양보해 달라며 이죽거리는 꼴이라니.

시비를 걸기 위해 꺼낸 말이 틀림없었다.

"양보하기 싫다면?"

"양보하기 싫다라… 형씨, 말 한 번 싸가지 없게 하는구만. 오늘 여기 처음 기어 들어온 신참 주제에 말이야."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날 붙잡은 건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신참이라… 피차 시궁창 밑바닥에서 빌빌거리고 있는 판에 그런 게 의미가 있나? 아, 내세울 게 이 판에 먼저 발을 들인 것밖에 없는 건가? 정곡을 찔렸다면 미안하게 됐어."

"...."

케이스가 이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던 걸까.

거한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케이스를 바라봤다.

그러기도 잠시, 거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뚜두둑 소리를 내어 꺾었다.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더니만… 이거 안 되겠구만. 좋아. 결정이다. 싹수도 노랗고, 주제 파악도 못 하는 건방진 형씨에게 선배로서 가르침을 하나 주도록 하지."

말로는 기분이 나쁘다 말하고 있었지만, 말하는 내용을 제외한 목소리만 들어서는 한껏 흥이 오른 것처럼만 들리고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이런 상황이 되길 바라고 케이스를 자극했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첫째, 약해 빠졌으면 주제를 알고 조용히 찌그러져 살 것."

거한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케이스를 향해 그 주먹을 휘둘렀다.

거한이 케이스에게 생억지를 부리는 것도 케이스의 시건방진 말을 참아준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약해 보이는 데다 목이 뻣뻣하기까지 한 신참을 망가뜨리는 건 거한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으니까.

"또 시작됐군."

"신참도 안타깝게 됐네. 하필 저 악질한테 걸려서는...."

"저쪽은 신경 끄고, 우리 할 일이나 하자고. 괜히 나섰다간 어떻게 되는지 알잖냐."

술집의 다른 해결사들은 케이스에게 펼쳐질 어두운 미래에 혀를 찰 뿐, 상황을 중재하러 나서려는 이는 누구 하나 없었다.

거한은 적어도 이 싸구려 술집 안에서는 적수가 없는 인물.

케이스가 불쌍하다고 해서 나섰다간 험한 꼴을 보게 될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

그때였다.

술집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광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가르침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이래서야 아무것도 배워 가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이, 이 자식이...."

꼼짝없이 거한의 장난감이 되어 그의 악취미에 어울리게 될 거라 생각됐던 신참, 케이스가 자신을 향해 날아든 거한의 주먹을 잡아낸 것이다.

"물론 받은 건 없지만… 남한테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한 기특한 마음을 생각해서 나도 가르침을 하나 주지."

거한의 주먹을 움켜쥔 제 손아귀에 점점 힘을 주며, 케이스는 거한에게 말했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났어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사는 게 좋을 거야."

"끄윽, 끄으윽!"

"그렇게 추잡한 짐승처럼 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짜 짐승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싶어지거든. 지금처럼 말이야."

말을 끝마친 케이스는 있는 힘껏 거한의 주먹을 움켜쥐어 으스러뜨렸다.

그리고 손이 엉망진창이 된 탓인지 정신을 못 차리고 흐느끼는 거한의 얼굴에 있는 힘껏 주먹을 박아넣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거한의 육중한 몸체가 바닥으로 엎어지고, 케이스는 고개를 돌려 거한의 뒤에 서 있었던 그의 동료들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도 덤빌 건가? 원한다면 말만 하지. 동료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케이스와 시선을 마주친 모두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 거한의 복수를 하겠다며 케이스의 앞으로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거한의 동료들은 혼절해버린 그를 데리고 술집을 빠져나갔고, 눈에 띄는 행동으로 케이스에게 집중됐던 이목도 점차 시들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렇게 일단락되기 시작한 상황에 케이스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티가 나진 않았겠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거한의 위협이라는 돌발상황에 침착히 잘 대처한 것처럼만 보이겠지만, 사실 케이스는 이 갑작스런 상황에 상당히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이 세계에도 슬슬 적응이 되고 있었고, 바로 어제 변질자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기까지 했지만 케이스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현대인.

분쟁이 일어나면 최대한 대화로 풀려 하는 경향이 있는 문명 사회에서 나고 자라왔던 케이스에게는 그에게 일어난 이런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긴 일부러 손까지 부숴버렸는데, 누가 겁먹었다고 생각하겠어.'

케이스는 느닷없이 닥쳐온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대처가 썩 괜찮았으리라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거한의 주먹을 엉망진창으로 부수다시피 한 건 다소 가혹한 처사였으나, 케이스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싸구려 술집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 안의 해결사들은 병약한 모습을 보이는 케이스를 얕보고 있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선 적절한 본보기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이곳은 비열과 잔혹의 도시 기간테폴리스.

작은 틈이라도 보였다간 언제 등에 칼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게시판의 의뢰를 수주하고 싶은데."

그렇게 잠시 제자리에 서서 생각을 정리하던 케이스는 다시금 술집의 바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싸구려 술집이라는 배경과 한껏 어울리는 경박한 분위기의 중개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야? 못생기고 흉폭한 고릴라놈의 손아귀에서 우리 시궁쥐들의 요람을 구원해 주신 구세주 아니신가!"

케이스의 부름에 한창 다른 해결사들과 웃고 떠들고 있던 중개인이 고개를 돌렸다.

케이스와 거한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는지, 그는 첫 말부터 아까 전 그 일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재밌자고 한 말인데, 아무런 말도 없는 걸 보니까 별로 재미도 없었나 보네. 그럼 본론으로나 들어가자고. 의뢰를 수주하고 싶다고 했나?"

"그래. 의뢰 내용도, 보수도 자세히는 말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던 무제의 의뢰. 그 의뢰를 수주하고 싶어."

"그딴 의뢰를… 수주하고 싶다고?"

케이스의 말을 들은 중개인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케이스가 수주하겠다 말하고 있는 '무제의 의뢰'란 보통은 굳이 선택하지 않는 유형의 의뢰였으니까.

일단 정당한 중개 수수료를 지불한 의뢰이니 게시판에 게시해놓긴 하지만 자세한 내용도, 보수도 명시된 게 없다.

그렇기에 중개인조차 미심쩍게 여기고 있는 유형의 의뢰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괜찮은 의뢰들도 많이 남아있었던 걸로 아는데… 굳이 왜 그딴 의뢰를 수주하려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케이스를 향해, 중개인은 다시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물론 무제의 의뢰를 수주해 현장에 다녀온 해결사들이 대부분 그 의뢰에 대해 만족감을 표하긴 했다.

다만 그래도 이런 의뢰가 리스크를 안고 있는 의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의뢰의 내용을, 보수를 모른다는 건 곧 의뢰를 수행하다 어떤 식의 위기에 직면하든 대처하기 쉽지 않아지리란 말이었으니까.

중개인으로서는 케이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리스크를 지고 있는 의뢰를 수주하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직감…이라고 말해 둘까."

직감이라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케이스는 오직 감으로만 이 무제의 의뢰를 제 첫 의뢰로 택한 것이 아니었다.

케이스는 말마따나 이 세상의 원형이 되는 게임,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고인물.

그의 선택은 분명 수천 시간에 달하는 플레이 타임을 통해 얻은 '근거'에 의거한 선택이었다.

'무제의 의뢰....'

상세한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무런 내용도 쓰여있지 않은 무제의 의뢰.

이런 의뢰는 캐릭터가 갓 해결사들의 사회에 입문한 시점인 싸구려 술집에서만 받을 수 있었다.

케이스 또한 처음에는 이 의뢰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리스크 투성이 일 뿐이니 굳이 건드리지 말자고 무시했지만, 클릭 미스로 그를 수주하게 됐었고.

곧 이 무제의 의뢰들이 케이스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리스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보상도 그만큼이나 큰 유형의 의뢰지.'

무제의 의뢰를 수주함으로써 수행하게 되는 의뢰의 종류는 분명 랜덤이었다.

하지만 케이스의 경험상 특정 유형이 당첨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머릿수 채우기'가 바로 이 무제의 의뢰의 유형들 중 압도적인 당첨 확률을 지닌 유형이었으니 말이다.

'머릿수를 채울 인원만이 필요할 뿐인 인간들이 주된 의뢰인이라 매번 돈은 돈대로 받고, 몸은 몸대로 편하고, 단점이랄 게 하나도 없는 버스가 당첨되곤 했으니까.'

스스로의 실력에 확신이 있으나 의뢰주가 내건 인원 제한에 발목이 붙잡혀버린 상위의 해결사.

자신과 동급의 해결사를 데려가 공정히 몫을 나누는 것보단 값싼 병풍들을 사는 게 낫겠다 판단을 내린 그들이 이런 무제의 의뢰를 의뢰하는 주된 의뢰인들이었으니 말이다.

"나 원, 이해할 수가 없네… 뭐, 알겠어. 판단을 바꿀 생각도 없어 보이니 일단 수주했다고 처리는 해둘게."

의뢰서에 체크를 하던 중개인은 뒤늦게 뭔가 생각난 듯 운을 뗐다.

"아 참, 그 의뢰인으로부터의 전언이야. 의뢰를 수주한 날 저녁, 여기 이 주소로 오라더군."

중개인으로부터 한 장의 메모지를 받아든 케이스는 작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는 유유히 싸구려 술집을 떠나갔다.

'…빌어먹게 긴 하루구만.'

해결사들의 사회.

그곳에서의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6화

길거리의 네온사인들이 한층 더 요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초저녁.

술집을 나선 케이스는 신원 미상의 의뢰인이 남긴 메모지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65지구라… 99지구를 벗어나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의뢰인이 정한 접선지는 케이스가 머무는 99지구와는 물리적 거리도, 사회적 거리도 많이 먼 65지구의 어느 국숫집이었다.

그렇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버스와 전철을 몇 번이고 갈아탄 끝에 겨우 65지구에 도착한 케이스.

'…이렇게까지 멀 줄은 몰랐는데. 잠깐, 경관은 또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그런 케이스를 제일 먼저 반긴 건 험상궂은 경관의 격한 인사였다.

"거기 너, 신원을 조회해 보니까 99지구 출신으로 나오는데. 시궁창 쥐새끼가 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왔지? 좀도둑질이라도 할 셈이냐?"

너무나도 불합리한 언사였지만, 케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케이스는 이번에 맡은 의뢰와 같은 '특수한 계기'가 없으면 65지구와는 엮일 일이 전혀 없는 99지구의 인간, 수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으니까.

"오해입니다, 경관님."

그런 울분은 그저 속으로 삼키며 최대한 선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오해라 호소할 뿐이었다.

"오해? 99지구 쥐새끼가 감히 이 65지구까지 쳐 기어 들어왔는데, 오해라고?"

"예,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일을 하러 왔을 뿐입니다. 자, 여기 임시 통행증도 있지 않습니까."

케이스는 품속에서 의뢰인이 접선지를 적은 메모지와 함께 남겨 둔 '임시 통행증'을 꺼내 경관에게 보였다.

"줘 봐."

케이스에게서 신경질적으로 임시 통행증을 뺏어가다시피 받아간 경관은 몇 초간 빤히 그것을 응시하더니, 이내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케이스에게 말했다.

"쳇…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네게 통행증을 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 동네는 너 같은 시궁창 밑바닥의 쥐새끼를 반기지 않을 테니까."

케이스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경관이 건네는 임시 통행증을 받아들었다.

"…조심하죠."

이 이상은 이런 성가신 경험을 하게 되지 않길 바라는 답을 하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케이스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이, 거기 너. 잠시 이리로 와보겠나?"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가난의 냄새라고 해야 할까, 케이스는 그 자신이 보기에도 빈민가인 90번대 지구 이상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탓인지 케이스는 접선을 약속한 장소로 향하기까지 몇 번이고 경관들에게 붙들리게 됐다.

"거기 너, 저 아래에서 온 것 같은데… 통행증은 있나? 없다면 서까지 동행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 전에 먼저… 적절한 계도 조치도 필요할 것 같고. …아, 임시 통행증. 이거 원, 실례했군."

신원 미상의 의뢰인이 메모지와 함께 남긴 임시 통행증이 없었더라면 아마 진즉 험한 꼴을 보고 연행당했을 거라는 확신이 다 들 정도였다.

'새삼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피부에 와닿는 것 같네.'

피곤한 정신으로 어떻게든 접선지인 65번 지구의 어느 국숫집 앞까지 도착한 케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이어졌던 케이스를 향한 경관들의 그칠 줄을 모르는 검문부터 시작해서 평화로운 65지구의 풍경까지.

이 세상이 그저 게임이었을 때에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던 숫자가 높은 지구와 낮은 지구의 차이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역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사력을 다해 위로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겠어.'

다시 한번 목표를 곱씹은 케이스는 국숫집의 가림막을 걷어내고 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서 옵쇼… 응?"

케이스가 국숫집에 들어서자,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사내가 그를 반겼다.

정확히는 반기려다 말았다, 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케이스에게 인사를 건네다 말고 굳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케이스는 어렵잖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 자신이 지금 풍기고 있는 '99지구의 냄새' 때문이겠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주인장.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내가 부른 손님일 테니까."

그렇게 어안이 벙벙해 있는 국숫집 주인의 어깨너머에서 청량감이 있는 장난스럽고도 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스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짧게 자른 흑발, 마찬가지로 별다른 화장 같은 걸 하지도 않았음에도 눈에 띄는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그리고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조금 올라간 눈매의 밤하늘색 눈동자와 오똑한 코, 자그마한 입술을 가진 여자였다.

"시궁쥐들의 요람에서 왔지? 시온 굿윈이야. 당신과 마찬가지로 해결사고, 당신이 받은 그 이름 없는 의뢰의 의뢰인이기도 하지."

여자의 이름은 시온 굿윈.

케이스가 시궁쥐들의 요람에서 수주한 그 무제 의뢰의 의뢰인.

동시에 케이스 자신과 액면가가 별반 차이나지 않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노련함마저 느껴지는 해결사였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내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인 것 같네. 한 배를 타게 된 기념으로 악수나 한 번 할까?"

"케이스입니다. 이번 건이 진행되는 동안 모쪼록 잘 부탁드리도록 하죠."

"나도 잘 부탁할게, 케이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시온의 오른손을 잡아 흔들며, 케이스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얼굴을 보아하니 생각이 영 많아 보이는데, 뭐든 마음 놓고 편하게 해. 내가 몸도, 보수도 안전히 챙겨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자, 그럼 악수."

그도 그럴 게 아마 의뢰인 측의 인원 제한을 맞추기 위해 케이스 자신을 위시한 수준 낮은 해결사들을 불렀을 무제 의뢰의 의뢰인, 시온의 수준이 케이스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높아 보였으니까.

그 태도 역시도 케이스가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플레이하며 봐왔던 뭇 해결사들답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주인장, 여기 케이스한테도 국수 한 그릇 말아줄래?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아, 응."

시온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케이스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서 제 몫의 국수를 주문하는 시온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레벨은 적어도 8 이상이겠네.'

케이스는 지금 시온과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질적일 정도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스가 알기로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시스템상 이러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건 대상과의 레벨 차가 8개 이상 벌어져 있을 때의 경우.

케이스 자신의 레벨이 0 혹은 1에 불과할 것을 감안하면 시온의 레벨은 최소 8 이상일 터였다.

'8… 레벨이 0부터 21까지 있다는 걸 감안하면 낮게 보일 수도 있는 숫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제대로 안 해본 애매한 놈들이나 지껄일 소리지.'

이 세상의 원형이 되는 게임인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레벨 상한은 21 레벨이었다.

때문에 누군가는 레벨 상한인 21보다 한참 낮은 레벨 8 따위가 뭐가 대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게임의 고인물이었던 케이스는 8이라는 레벨이 지닌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레벨을 올리기만 해도 적지 않은 보상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가끔씩 그런 평소보다도 많은 보상을 주는 레벨들도 있었지.'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게임의 방대한 볼륨에 비해 적은, 스물 두 단계의 레벨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벨을 하나만 올리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됐고 당연히 레벨업에 따른 스펙 업도 상당한 편이었는데.

특정 레벨마다 그 수준이 크게 뛰어오르는 구간이 있었다.

'…경지.'

또한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기본적으로 레벨을 통해 캐릭터들의 강함을 나눴지만, 그것 말고도 또다른 분류의 기준이 존재했다.

평범하게 살아가기만 해도 닿을 수 있는 [인간의 경지].

수련을 거듭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초인의 경지].

그런 초인의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위에 도달할 정도로 강해진 이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도전의 경지].

마지막으로 레벨 상한인 21레벨과 동일시되는, 이름 그대로의 뜻을 지닌 [신위].

시온이 도달했을 8레벨은 그런 4개의 경지들 중 초인의 경지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레벨이었다.

즉, 시온은 일단 범인의 범주를 뛰어넘은 강자일 터였다.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적어. 평생을 해결사로 일선에서 굴러도 초인의 경지에 한 번을 닿지 못하고 죽는 인간들도 있으니까.'

어떤 경지에든 도달했다는 것은 곧 부푼 꿈만 가지고서 이 바닥에 뛰어든 머저리 해결사는 아니리라는 말이기도 하다.

'초인의 경지… 낮은 번호의 지구에선 아예 적수가 없겠지.'

케이스가 살던 99지구보단 훨씬 높은 곳이라지만 65지구 역시 기간테폴리스의 저층 구간에 해당하는 곳.

시온에게 적수가 될 수 있을 만한 강자와 조우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요컨대 나는 방해되지 않게 구석에 박혀서 승차감 좋은 버스만 타면 된다, 이거군.'

국숫집의 주인과 넉살 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온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케이스는 그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 * *

케이스가 시온이 주문해 준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을 때쯤, 그녀가 고용한 나머지 보충 인원들이 접선지인 국숫집에 도착했다.

"왔구나. 당신들도 출발하기 전에 국수 한 그릇씩 들어. 내가 살 테니까. 괜히 끼니를 걸렀다간 원래 할 수 있는 일조차 실패하게 되는 법이거든."

두 사람의 후발 주자들에게까지 국수를 주문해 준 시온은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의뢰지로 출발할 채비를 했다.

"당신들은 어디까지나 의뢰인 측의 인원 제한을 맞추기 위한 구색 맞추기용 보충 인원들. 의뢰지에 가서 딱히 뭔가를 하게 되지는 않을 거야."

의뢰지로 향하는 내내, 시온은 자신을 뒤따르는 케이스를 위시한 보충 인원들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말을 붙였다.

"그래도 한 배를 탄 건 탄 거니까… 짧게나마 브리핑하고 넘어갈게. 이번 의뢰는 간단한 경비 의뢰야. 65지구 외곽지에 있는 의뢰인의 금고를 습격을 예고한 습격자 놈들로부터 지키는 게 목표지."

"대놓고 예고를 할 정도면 저쪽도 준비 단단히 하고 쳐들어올 것 같은데, 그쪽 혼자서 감당 가능한 거 맞아?"

"걱정하지 마. 습격자라 해봤자 별 볼일 없을 테니까. 윗동네 나으리의 금고라고 해봤자 65지구에 있는 건데, 대단한 물건이나 들어 있겠어?"

"납득했어. 일리 있는 말이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 상황을 좋아하기만 하고 있었던 케이스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금 불만이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말을 주고받는 시온과 보충인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라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세상에서 이 정도의 순조로움이라....'

케이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모난 데가 없으며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는 의뢰인과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 의뢰의 내용까지.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불안한데.'

다른 세계에서라면 몰라도 어디에서나 위협이 도사리는 이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세상에서 이런 평온하기만 한 상황은 대부분의 경우 폭풍 전의 고요였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7화

65지구 외곽지의 어느 주택의 앞.

호위의 대상인 높으신 분의 금고가 있다는 그곳에 도착한 케이스는 아까보다도 한층 더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리 이외에는 배치된 인원이 아예 없는 건가.'

현장에 가면 마찬가지로 의뢰를 받고 온 다른 해결사나 기업의 현장 요원 같은 추가 지원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건만.

케이스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그림과는 달리 지원은커녕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수상하단 말이지.'

기업의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도 계산에 능한 인간들이었다.

그렇기에 해결사를 고용하고도 그들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현장 요원들을 배치한다든가, 유사시에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줄 감시원들을 배치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나 케이스가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그런 '보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온의 말마따나 하찮은 의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오히려 문제가 생길 확률보다는, 그녀의 말대로 같잖은 의뢰일 확률이 훨씬 높다.

케이스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이성으론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쉽다는 난이도에 비해 높게 책정된 보수.'

의뢰의 보수.

'아무런 디테일도 없이 높으신 분의 사적인 물건이라며 뭉뚱그러진 호위 대상의 정체.'

그 대상.

'그리고 의뢰해놓고도 아주 작은 보험조차 들어두지 않은 기업.'

의뢰주.

'…정황들이 하나같이 수상하단 말이지.'

하나라면 모를까, 애매하게 꺼림칙한 조건들이 중복되니 한 가지 경우 수가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애초부터 우린 버리는 말로 쓰이기 위해 고용된 걸지도 모르겠어.'

최악의 가정을 곱씹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케이스는 머릿속을 가득 메운 복잡한 생각들을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케이스에게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괜한 불안에 떨기보단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뭐가 됐든 좋아.'

케이스는 이 세상이 싫었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다.

하지만.

'여기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그렇다고 해서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았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 * *

시온은 케이스를 위시한 보충 인원들에게 소형 이어폰을 나눠주며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까지 찢어져서 주변을 순찰하다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바로 나한테 연락을 취해주면 돼. 절대 먼저 접근하거나 응전하려 하지 말고."

어려울 거 없는 간단한 일이었다.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그걸로 끝이야. 어때, 어려울 거 없지?"

호위의 대상인 높으신 분의 금고가 안에 있다는 이 주택 주위를 순찰하다 수상한 사람이 보인다면 시온에게 보고, 그것뿐인 일이었으니 말이다.

'…괜한 걱정이었나.'

막상 의뢰를 수행하기 시작하니 케이스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주택의 주변을 몇 바퀴씩이나 꼼꼼히 순찰했음에도 상상했던 악재 같은 건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고.

나아가 처음엔 두렵기만 하던 주변의 적막도, 이젠 익숙해져 가는 참이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이 끝나면 좋으련만.'

케이스는 그저 부디 자신의 감이 빗나가길, 동틀 녘까지 이 적막과 평화가 계속되길 기도할 뿐이었다.

[시온 씨, 듣고 있습니까? 수, 수상한 놈이-]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자정이 막 넘어가기 시작한 그때였다.

이어폰 너머에서 보충인원들 중 한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있어. 아마 당신한테 배정된 구역이… 주택 입구 쪽이지? 어떻게 해서든 조금만 버텨줘. 내가 금방 갈 테니까.]

즉각적인 시온의 대답에도 다급한 목소리를 냈던 보충인원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급해 보이던 목소리, 직후 끊겨버린 연락.

정황들로 보아 그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건 기정사실로 보였다.

"…썩을."

케이스는 중얼거리며 주택의 입구 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이쪽으로 오지 말고 제자리에 있어줘.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알겠지?]

자리를 지켜달라는 시온의 부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케이스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간 시온이 패배했을 땐 그대로 개죽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소란스러운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거기 당신, 이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아, 거기 그분 말입니까. 조용히 넘어가려 했건만 자꾸 난동을 부리시길래… 하는 수 없이 조용하게 만들어드렸답니다."

도착한 주택의 입구 쪽에는 분노한 듯한 얼굴의 시온, 그리고 마치 사제를 연상케 하는 검은 옷을 입은 창백하고 빼빼 마른 사내가 대치하고 서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부디 순순히 비켜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당신께서 막아서고 있는 금고 안의 물건. 그것만 가져가게 해주신다면 이 이상의 유혈 사태는 없을 겁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당신이 죽인 이 사람들, 만난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일단은 내 동료였거든. 의뢰주한테 여길 지켜달라고 돈도 두둑하게 받았고 말이야. 복수도, 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맞서 싸우실 생각인 거군요. 유감입니다만, 알겠습니다."

빼빼 마른 사내는 시온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직전까지는 그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살기.

아직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케이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나를 제외한 보충 인원들은… 전부 죽어버렸나.'

처음에 시온에게 수상한 이가 나타났다 보고했던 다급한 목소리의 보충 인원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근처에 웬 고깃덩이 같은 게 나뒹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것이 그 보충 인원의 말로인 모양이었다.

그것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짓이겨진 육편은 또 다른 보충인원인 것 같았고 말이다.

'최악이야.'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은 케이스의 얼굴은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가 상정했던 최악의 경우가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으니까.

'시온정도 실력이면 65지구에선 적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벨 1인 케이스가 시온에게 느낀 압박감을 생각하면 시온은 최소 8레벨 이상이다.

그리고 의뢰지인 65지구는 8레벨 이상, 아니 8레벨의 인간들조차 내려올 일이 잦지 않은 비교적 하층의 지구.

그렇기에 케이스는 불안함을 품고서도 어지간해선 시온이, 그리고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가정이라기보단 정론이었지. 저 시온보다도 강한 누군가가 여기 내려왔을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말이야.'

만에 하나의 가능성.

65지구에선 적수가 없을 저 시온보다도 강한 이가 상층의 지구에서 내려오기라도 하지 않는 한 이러한 정론이 깨질 일은 없었다.

'설마 그 최악의 가능성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하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정론은 지금 금이 가다 못해 와장창 깨져버리고 있었다.

케이스가 느끼고 있었던 막연한 불안함, 그가 상정하고 있었던 최악의 경우의 수.

그것이 현실이 되어 그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확실해. 저 남자… 그 시온보다도 강해.'

케이스는 불쾌감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창백하고, 말라비틀어진 검은 옷의 사내.

저 사내는 시온보다 '확실히' 강했다.

'게다가 이미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네.'

지금 당장은 눈앞의 시온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사내는 먼발치에서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는 케이스의 존재조차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시온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 기분 나쁜 눈동자를 굴려 그녀 다음 차례는 너라는 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케이스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온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시온이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버렸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최선이 아닐 것 같았다.

케이스가 사내를 보고 느낀 불쾌감, 그리고 압도감은 시온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짙었고.

그 말은 곧 시온이 사내를 상대로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기업 쪽은 처음부터 도움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공권력의 도움을 바라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이 일을 의뢰한 기업의 경우 애당초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고.

운좋게 경관을 불러온다 한들 지금 사내와 대치하고 있는 시온보다도 못한 수준일 그들이 사내를 상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줄 가능성은 희박했으니까.

'…다른 길은 없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케이스는 몸을 움직일 채비를 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도움을 기대하는 게 가능한 상황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스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시온이 쓰러지기 전에 힘을 합쳐 어떻게든 저 남자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 * *

시온을 도와 사내를 쓰러뜨리는 것만이 유일한 타개책이라 판단한 케이스가 그 직후 취하기 시작한 행동은 다소 의아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시온과 사내가 싸우고 있는 전장에 개입하는 대신 그 뒤, 금고가 있는 주택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온 씨, 한창 싸우고 계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요. 지금부터 저는 주택 안으로 들어가 금고 안의 물건을 끄집어낼 겁니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일단 들어주세요. 지금 시온 씨께서 싸우고 계신 그 남자의 목적은 금고 안의 물건. 이걸 가지고 나간다면 협상의 빌미로 삼든 뭘 하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부디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케이스의 생각은 간단했다.

사내의 목표인 금고 안의 물건을 끄집어내 협상을 유도한다든가, 시선을 잡아끈다든가 하는 식으로 판도를 뒤집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케이스 자신이 시온과 사내의 접전에 개입한다 한들 유의미한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

그러니 싸움에 직접 끼어들기보단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생각이었다.

[…알겠어. 어떻게든 버텨볼게.]

[부탁드릴게요.]

의뢰를 망치는 짓이라 생각될 수도 있었지만, 시온은 별다른 반발 없이 케이스의 말을 받아들였다.

'시온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네. 하긴, 모르는 게 이상한가.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하니까.'

거의 만사에 보험을 들어두곤 하는 기업의 인간들이 별다른 장치를 준비해두지 않은 것, 그리고 그런 현장에 타이밍 나쁘게도 예상치 못한 강적이 나타난 것.

어쩌면 이건 기업 측에서 불법적인 거래를 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꾸며놓은 연극일지도 몰랐다.

시온과 다른 해결사들은 그 연극의 희생양이었고 말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비밀번호를 찾아내는 건 무리야. 이것도 마찬가지로 어렵겠지만… 역시 부수는 수밖에 없어.'

주택의 안으로 들어서 금고를 발견한 케이스는 곧바로 그것을 때려부술 준비를 했다.

금고에 어떤 장치가 되어있을지 모르니만큼 신중히 접근하는 편이 정석적이겠지만 케이스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금고 안의 내용물을 끄집어내는 것, 그것만이 시온과 맞붙고 있는 강적의 사내에게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요소였으니까.

'설마 이걸 하루만에 내다 버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쓴 침을 삼키며, 케이스는 양 팔에 이식한 임플란트들에 최대의 출력을 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쾅! 쾅! 쾅! 쾅!

그렇게 출력을 끌어올린 양 팔로 사력을 다해 눈앞의 금고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케이스의 필사적인 내려침에도 금고는 흠집 하나 없이 견고했다.

하나 케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케이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길은 사실상 금고 안의 내용물을 끄집어내는 것뿐.

죽고 싶지 않았기에, 살아남고 싶었기에 몇 번이고 온 힘을 다해 금고를 내려치길 반복했다.

쾅! 쾅! 쾅! 쾅!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마냥 타격이 없는 것 같았던 금고도 누적되는 충격에 점점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고.

조금씩 부서지던 금고는 마침내 두꺼운 금속 외벽으로 꽁꽁 감싸고 있던 그 내용물을 드러냈다.

'이거라면....'

드러난 내용물의 모습에,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었던 케이스는 천천히 그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희망이 있어.'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8화

단순히 빼빼 마른 걸 넘어 기괴하게 뒤틀리기까지 한 몸뚱이, 사제복을 닮은 검은색의 옷, 먼발치서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느껴지는 가죽제 커버의 책.

시온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내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케이스는 어렵잖게 사내의 정체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빼빼 마른 체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힘. 묘한 신념이 느껴지는 말투와 온몸에서 느껴지는 종교적인 색채… 사제인가.'

이능을 사용하는 마법사의 한 분파로 분류되며 저 하늘로 승천한 '신'들에게서 신앙과 재미를 대가로 힘을 빌려 사용하는 그들의 수족, 사제였다.

'사제는 까다로운 상대지. 대가를 치른다고는 하지만 이 세상의 존재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신들의 힘을 빌려 쓰니까.'

그리고 그런 사제는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고이고 고인 썩은 물이었던 폐인 시절의 케이스조차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성가신 상대였다.

놈들은 신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은총을 받은 거라는 명목하에 레벨에 맞지 않는 위력적인 기술들을 난사하곤 했으니까.

'레벨도 높은데 하필이면 사제라… 엎친 데 덮친 격이네.'

사내는 시온보다 레벨이 높았다.

거기다 레벨에 비해 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사제라니.

설상가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케이스의 표정은 그런 위기를 맞닥뜨린 것치고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이게 있다면....'

그도 그럴 게 마침 적절한 대응책이 금고 안에 들어있었으니까.

'아주 답이 없는 상황은 아니야.'

케이스는 모습을 드러낸 금고 안의 내용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고 안에는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금속제의 의수가 있었는데, 이는 케이스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단심문관의 의수라. 이런 상황에 이게 튀어나와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지.'

단순한 접촉만으로 대상이 힘을 빌리고 있는 상위 존재와의 연결을 끊어버리기에 신이나 이계의 존재와 계약을 맺어 힘을 융통하는 워락, 사제 따위의 직업들에 있어선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임플란트, 이단심문관의 의수.

그것이 이 물건의 이름이었다.

'다른 신을 믿는 사제들과의 충돌을 대비해 손에 넣으려 했던 건가.'

사제들이 자신이 믿는 신과 대립하는 다른 신의 사제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잦다는 걸 생각해보면, 놈이 왜 이 물건을 탐하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러면 평범하게 거래하면 될 걸 굳이 우릴 고용해서 판을 짠 이유도 이해가 되네.'

그리 생각해보니 기업이 평범하게 거래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사고'로 위장해 거래를 진행하려 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이단심문관의 의수는 팽팽한 사제들간의 균형을 깰 만한 물건. 사제 입장에서도, 기업 입장에서도 그런 물건을 들켜서 다른 신을 믿는 사제들과도 척을 지긴 싫을 테니까.'

이단심문관의 의수는 가뜩이나 분쟁이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을 종교 사회의 균형을 깨버릴 수 있는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물건.

'그럼 어쩌겠어. 자연스럽게 이걸 토스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을 만드는 수밖에 없겠지.'

그런 물건을 평범하게 넘겼다가는 질타를 맞게 될 게 뻔하니 해결사라는 눈속임을 배치해 우린 약탈자에게 뺏긴 것뿐이다, 하는 식의 핑계를 댈 심산이겠지.

[시온 씨, 바깥 상황은 어떻죠?]

케이스는 바깥에서 사내와 맞서 싸우고 있을 시온에게 무전을 쳤다.

[그럭저럭 버틸만 해. …아직까지는.]

[곧 나가겠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목소리가 괜찮은 걸 보면 금고 안에 뭐 대단한 물건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네. 접수했어. 케이스, 당신이 거기서 나올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볼게.]

[부탁하겠습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듯했지만, 시온은 슬슬 사내를 상대하는 게 버거운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시온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건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상대, 그것도 다른 직군들에 비해 레벨의 효과를 잘 받는 사제였으니까.

"...."

시온과의 무전을 끊은 케이스는 말없이 부서진 금고 안에서 끄집어낸 이단심문관의 의수와 자신의 오른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술을 집도해 줄 의사는 없어. 마찬가지로 수술을 진행하기 위한 마땅한 설비 같은 것도 없고.'

기계 부품을 몸에 이식하는 건 꽤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하나 이곳엔 수술을 집도해 줄 의사도, 하다 못해 수술을 진행하는 데 사용할 변변찮은 설비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단심문관의 의수는 생체에 이식돼야만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물건.

'…끔찍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지금 몸에 달려있는 손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쑤셔 박는다는, 다소 과격한 방식을 써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빙의한 몸의 성격에 영향을 받아 냉정, 침착한 마음을 항시 유지하고 있었던 케이스였지만, 이번만큼은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신체의 일부를 뜯어내고 그걸 부품으로 대체하는 건 현대인, 아니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도 평범한 일이 아니었고, 제정신으로 할 수 있을 만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뭐가 할 수 있을까야. 해야만 해. 무슨 수를 써서든 해야만 한다고.'

케이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과,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사면초가인 현실을 다시금 되새김질하고 나니 케이스 자신이 방금 전까지 하고 있었던 건 배부른 고민에 불과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해내지 못하면 나도, 나만 믿고 시간을 끌고 있을 시온도 다 죽는 거야.'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억지로 이식하는 것 역시도 위험천만한 짓이었지만, 적어도 그 행위엔 가능성이라는 게 있었다.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에는 그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긴 게임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세이브도, 로드도, 치트도 뭣도 없는 현실.'

만약 이 세상이 게임이었더라면 세이브 파일을 로드해서 보다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시점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리스크가 얼마나 크든간에 일말의 가능성이나마 있는 쪽에 모든 걸 걸어봐야 했다.

'…하는 수밖에 없어.'

결정을 내린 케이스는 왼팔에 이식돼있는 기계 부품들에게 한계치까지 근력을 끌어올리란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껏 힘을 집중한 왼손을 자신의 오른손을 향해 내리쳤다.

우득, 우드득.

뼈와 근육, 살점 따위가 짓이겨지며 듣기 싫은 파열음을 연주했고, 동시에 빙의 이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막대한 고통이 그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끄윽… 끄으윽...."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케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잘려나간 제 오른손의 단면에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가져다 대고 아귀가 맞아떨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절단면을 헤집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회의감 속에서도 케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이 세상이 고통뿐인 생지옥일지라도 케이스는 여전히 살고 싶었다.

* * *

시간을 끌어달라는 케이스의 말에 따라 어떻게든 버티면서도, 시온은 반신반의하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시온이 지금 상대하고 있는 눈앞의 기분 나쁜 사내는 65지구보다 훨씬 위험천만한 전장들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수준의 강자였다.

그에 반해 케이스는 어딘가 묘한 느낌이 든다지만 이제 갓 해결사들의 사회에 입문한 초심자에 불과한 존재였으니, 그가 뾰족한 해결책을 가져오진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럼에도 시온이 케이스에게 협조하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그런 케이스에게라도 손을 벌리지 않으면 아예 희망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강적이었으니까.

'…지금의 성장세만 유지한다면 저 위의 해결사들을 따라잡는 건 시간 문제라 생각했어.'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시온은 제법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그 재능을 꽃피울 비료인 노력과 근성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평균적으로 50번대 지구에서 의뢰를 수행하는 촉망받는 해결사가 될 수 있었고, 그 가파른 성장세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10년 정도만 더 이 바닥에서 구르다 보면 한 자릿수대 지구에서 의뢰를 수행하는 해결사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 위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기분 나쁜 사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게다가 저 쪽은 후위, 나는 전위인 기사… 상성까지 따라주니 시간을 끄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아마도 기분 나쁜 사내는 마법, 혹은 사술을 사용하는 후위 계열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보통 후위의 근접전 능력은 최악, 제아무리 시온보다 강한 사내라 할지라도 접근해서 전투를 진행한다면 시간을 끄는 것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수준 차이가 날 줄은… 나는 그저… 우물 안의 한 마리 개구리에 불과했던 건가....'

시온의 그런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압도적인 수준 차이 앞에서 애초에 상성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제대로 세공되지도 않았는데 제법 빛이 나는 원석이군요."

시온의 혼신을 다한 검격들을 정면에서 받아내고도 사내는 아무런 타격도 없이 멀쩡해 보였다.

"부디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말아 달라는 저쪽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세례를 내려 그분의 품 안에서 함께하게 했을 텐데 말이죠."

이깟 공격 따위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그간 시온이 쌓아올린 모든 걸 '아직 채 꽃피우지도 못한 쓸모 있는 원석' 정도로 치부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난 대체… 어떻게 해야....'

죽고 싶지 않다.

시온 자신이 자신만만하게 '무사히 돌아가게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던 두 보충 인원의 원수를 갚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서 사내와의 전투에 임했던 시온의 마음은 이제 처음의 의지를 잃고 꺾여가고 있었다.

시온의 눈에 비추어지는 눈앞의 사내는 흡사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벽.

무슨 짓을 해도 그 벽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압도감이 스멀스멀 뇌리를 물들인 탓이다.

[시온 씨, 아직 살아계시죠?]

그렇게 자포자기하려던 순간, 시온의 귓가에 기대하지 않았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스는 진짜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처럼 희망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

시온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싸움이라기보단 아이와 어른의 놀이에 가까울 근 몇 분간의 교전에 마음이 꺾여버리고 말았으니까.

[수신이 되는 걸 보면 아직 살아는 계신 모양이네요. 말씀드렸던 거, 준비 끝났어요. 바로 나가겠습니다.]

케이스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도 시온의 부러진 마음이 다시 서는 일은 없었다.

'뭐가 됐든… 소용 없을 거야.'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 일단 믿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케이스가 나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케이스보다 한참 강한 시온 자신조차 스크래치 하나 내지 못한 눈앞의 압도적인 강적에게 생채기나 줄 수 있을까?

전부 헛된 일이다.

눈앞의 사내는 시온에게 예정된 운명적인 죽음 같은 것.

'이젠… 포기하는 수밖에....'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빠져나갈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시온이 쥐고 있던 제 검을 놓아버리려는 찰나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이 무슨…!"

난공불락의 벽이라 생각했던 기분 나쁜 사내의 얼굴에, 케이스의 주먹이 정통으로 쳐박히고 있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9화

이단심문관의 의수가 저 바깥에 있는 사제와의 전투에서 유용한 카드가 되어주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화력이 부족했다.

'장비가 주는 스텟은 대부분 적응형… 아무리 수준 높은 장비를 장착한다 해도 착용자의 레벨이 낮으면 말짱 꽝이니까.'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장비들은 대부분 착용자의 레벨에 따라 아이템의 성능이 달라지는 적응형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시온보다도 강할 저 바깥의 사제에게는 그가 운용하는 이단심문관의 의수로는 유효타를 넣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물론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고인물, 아니 썩은물인 케이스는 그런 상황 역시 상정해 두고 있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해결책 역시도 진즉에 구상을 끝마친 상태였다.

기계 이식물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케이스 자신의 특성, 과잉적합자와 '그 방법'을 사용한다면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수준인 케이스라 할지라도 사제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터였다.

'위험하긴 하지만… 충분히 먹히겠지. 맹약이라면.'

맹약.

그것은 세계와 하는 약속.

목숨, 혹은 그에 준하는 소중한 것을 대가로 거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손에 넣게 해주는 행위였다.

'…나, 케이스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세계에 맹약하겠다.'

케이스가 막무가내로 '이식'한 이단심문관의 의수는 어떻게든 끼워맞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케이스의 오른손이 있었던 곳에 덜렁 매달려 있었다.

과잉적합자의 효과로 어떻게든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그뿐, 이를 실행한 케이스 본인조차 이게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의문일 정도였다.

아마 의수 자체에 깃든 종교적 색채의 힘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오른손에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기워붙인 여파를 추수를 새도 없이, 케이스는 맹약을 준비했다.

'내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강적, 저 바깥의 사제를 쓰러뜨릴 힘을 잠시나마 얻는 대신-'

맹약이란 등가교환의 약속.

맹약자가 큰 대가를 지불할수록 세계 역시 큰 힘을 줬다.

그리고 케이스가 시온을 도와 상대해야 할 사제는 본디 절대 승리할 수 없는 상대.

그만큼 커다란 대가를 지불해야만 놈과 대적할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이를 테면.

'미래의 가능성이라던가.'

케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맹약을 소리내어 마무리했다.

"난 앞으로 모든 자연적인 스킬의 습득을 영구히 포기하겠다."

일시적으로 힘을 얻는 대신 지불하기로 한 맹약의 대가는 자연적인 스킬 습득의 영구적인 포기.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한 회차라도 플레이해본 사람이 이런 케이스의 판단을 봤다면 눈을 까뒤집고 '쟤 미친 거 아니야?' 따위의 소리를 해댔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자유도가 높아 수도 없이 많은 방법들로 수많은 스킬들을 습득해낼 수 있는 게임이었고.

저 말은 곧 그렇게 얻어낼 수 있는 미래의 스킬들을 전부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 많은 스킬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상관없어. 스킬은 임플란트를 통해 얻으면 그만이니까.'

케이스라고 아무 생각 없이 이토록 큰 대가를 맹약의 대가로 지불한 건 아니었다.

케이스는 수많은 임플란트들을 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과잉적합자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임플란트들 중에서는 지금 이 이단심문관의 의수처럼 자체적으로 스킬을 탑재하고 있는 물건들도 있었다.

게다가 레벨 업, 경지의 상승은 깨달음에 좌우된다.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스킬과 임플란트 사이에 껴서 갈팡질팡하는 것보단 임플란트라는 하나의 힘만에 집중하는 편이 장기적인 성장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터였다.

그것이 케이스가 스스럼없이 스킬의 자연 습득을 포기한 이유였다.

[맹약은 맺어졌다. 계약은 곧 이행될지니. 그대, 대가를 잊지 말지어다.]

케이스가 맹약을 선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릿속에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더 나아가 인간인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케이스의 온몸으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경험이었지만, 케이스는 단박에 이것의 의미를 이해했다.

맹약의 '보상'이 지급된 것이었다.

"후우...."

케이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그의 말대로 시간을 끌어주고 있는 모양으로 보이는 시온에게 무전을 쳐 이제야 그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준비 끝났어요. 바로 나가겠습니다."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시온과의 무전을 끊은 케이스는 곧장 주택의 입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맹약으로 힘을 얻었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사제가 강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그에게 주어진 모든 패들을 조금의 낭비도 없이 전부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가령 사제는 케이스 자신이 이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는 지금 이 상황 같은 하찮은 패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주택을 빠져나온 케이스는 멈추지 않고 곧바로, 사제와 시온이 대치하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전히 케이스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건지 음흉한 표정으로 시온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는 사제의 얼굴에-

있는 힘껏 오른손의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쳐박았다.

"이, 이 무슨…!"

곧, 사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고.

"...어?"

슬슬 마음이 꺾여가고 있었던 시온의 얼굴 위로 희망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형국의 전환.

두 번째 라운드의 시작이었다.

* * *

사제의 레벨은 12.

본래대로라면 이제 갓 초인의 경지에 다다른 시온, 그리고 아예 이 세계에 갓 발을 내디딘 하찮은 존재일 케이스 따위가 힘을 합친다고 해서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보통의 경우 레벨의 차이는 절대적. 그 차이를 넘어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이 내가… 진다고? 이 따위 버러지들한테?'

하지만 지금, 사제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그런 풋내기들한테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분명 사제 자신과 대치하고 있었던 여기사보다도 약할, 수준을 논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하찮은 존재 하나의 참전으로 형국이 크게 뒤바뀌고 있었으니까.

'이단심문관의 의수....'

사제는 이를 악물며 물러나 상대의 오른팔을 살폈다.

놈의 팔에 달린 것은 사제가 이곳에 가지러 온 물건이자, 사제들의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신과의 연결을 일시적으로나마 완전히 끊어버리는 물건.

이단심문관의 의수였다.

'이단심문관의 의수가 우리 사제들한테 치명적인 물건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난....'

이런 상황에 대비해 일신상의 무력 또한 단련해왔을 터였다.

이단심문관의 의수로 인해 신과의 연결이 잠시 끊어졌다고 해서 저 따위 머저리들에게 당할 리가 없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명백한 수치상의 차이가 무색하게 사제는 지금, 케이스와 시온의 합공에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내가 밀리는 느낌이 드는 거지?'

케이스가 이단심문관의 의수로 사제에게 접촉해 그의 능력을 무효로 만들면, 시온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공세를 퍼붓는다.

처음에는 경전을 든 사제의 손 따위를 노리던 둘이다.

하지만 어느새 그 공세가 점점 치열해저 이제는 사제의 목, 심장부 같은 치명적인 약점들을 노려오고 있었다.

접전 초기에는 분명 그렇게 위협적인 수준이 못 됐던 그들이 이제는 사제의 숨통까지 조여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 역시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제가 일신상의 무력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지만...이대로 가다간 진짜 위험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군.'

이대로 전황이 길어진다면 진짜 위험한 상황이 돼버릴지도 모른다.

하여 사제는 이단심문관의 의수의 1분 남짓 되는 짧은 효과가 끝날 때를 노려보려고도 했지만 허사였다.

효과가 사라져 힘을 되찾을 때 즈음 정확하게 케이스가 다시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휘둘러 왔으니까.

사제가 신에게서 하사받은 권능 다음으로 자신하던 단련된 육체는 눈앞의 두 애송이들에게 파훼당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남은 건 권능뿐이었건만, 권능은 이단심문관의 의수의 효과에 묶여서 쓸 수가 없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었지만, 사제는 지금 눈앞의 두 사람에게 밀리고 있었다.

마치 병기도 없이 전장에 내던져진 병사가 돼버린 기분이었다.

'역시 무리해서라도 둘 중 하나를 먼저 쓰러뜨리는 편이 낫겠어.'

성가신 건 어디까지나 이단심문관의 의수의 효과에서 기사의 근접전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협공.

개별의 역량은 사제 자신에 비해 한참 모자랄 두 사람 중 하나를 먼저 쓰러뜨리면 연계가 깨져 수세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수 역시 실패였다.

하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려 들 때마다 집요한 방해가 따라붙었던 탓이었다.

그런 방해를 무시하고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시온과 케이스 개개인의 역량도 크게 뒤지지는 않기도 했고 말이다.

"케이스 당신… 분명 실전은 처음이라고 했었지? 이 바닥에 발을 들인지도 얼마 안 됐고?"

"네, 그렇죠.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전투랑은 하등 상관없는 얘기 같은데요."

"신기하잖아. 그런 당신이 벌써 몇 년은 이 바닥에서 굴러온 나보다도 훨씬 노련한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게 말이야."

"…지금 이런 상황이랑 비슷한 상황들을 경험해 볼 일이 많이 있었거든요.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긴 하지만요."

보통 케이스보다 강하고, 경력도 오래된 시온이 이 전투를 이끌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전투를 리드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케이스였다.

케이스는 맹약을 맺어 일시적으로나마 강화된 신체 능력과 이단심문관의 의수의 스킬을 이용해 사제가 신의 힘을 빌려 발휘하는 스킬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고.

그렇게 전투의 큰 부분을 담당하면서도 시온에게 공격과 방어를 어찌 배분하면 좋을지, 언제 회피하면 좋을지 등, 전황의 브리핑 역시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제 갓 해결사들의 사회에 입문했다고 말했던 걸 똑똑히 들었건만, 그것만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일류 해결사가 정체와 힘을 숨기고 초심자인 척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다 들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번에 끝을 보죠."

케이스가 이제는 희망을 되찾았다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는 시온에게 말했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됐던 전투에서 의외로 선전하는 걸로도 모자라 승기까지 잡고 있는 상황.

신이 나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든 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그들의 상대인 사제는 지금은 수세에 몰려있다지만 분명 상당한 저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괜히 기회가 될 만한 시간을 줘서는 안 됐다.

"알겠어."

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고쳐쥐었다.

케이스 역시 깊게 숨을 들이쉬며 페이스를 점검했다.

'생존'이라는 고지가 그들의 코앞에 있었다.

반면 사제에게는 패배, 그리고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저것들은 평범한 애송이들이 아니야. 사력을 다해야 하는 강적이지.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죽을힘을 다해 상대하는 수밖에 없어.'

그간 누적된 대미지로 몸도, 정신도 만신창이였지만 사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제 자신의 오만을 인정하고 이제라도 전력, 그 이상의 사력을 내서 싸울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기량을 한껏 끌어올린 셋의 싸움은 그야말로 용호상박, 누가 이기고 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치열했다.

케이스와 시온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 그것도 초인의 경지에 갓 들어선 이와 아예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붙인 이의 조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호흡으로 사제를 몰아붙였고.

사제는 케이스의 이단심문관의 의수로 인해 주력 스킬들을 봉인당하고도 마치 애초부터 무투가 주력이었다고 믿을 만큼 훌륭하게 공격을 받아치며, 두 사람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세 사람의 치열한 접전은 이 교전이 시작됐을 즈음의 시커먼 하늘이 떠오르는 태양으로 붉게 물들 즈음에서야 끝이 났다.

최후에 서 있었던 건 단 두 사람뿐이었다.

"…이겼다."

시온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 이겼네요."

"응, 이겼네."

케이스 역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같지 않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두 사람이 가진 모든 패를 쏟아붓는다 해도 승산이 보장되지 않았던 강적 중의 강적.

사실 현실의 자신은 죽어가고 있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뇌가 망가져 불러일으킨 착각이라는 게 더 그럴듯했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들이 승리했다는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시온은 그제야 기쁨에 겨워 소리치며 케이스를 얼싸안았다.

마치 필름이 끊겨버린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할 때처럼 상황에 비해 한 박자 느린 행동이었다.

"진짜 살아남았네요.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시온의 행동을 보고 나서야 케이스 역시 이 승리가 착각 따위가 아님을 확신했고, 곧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 얼굴 위로 환한 빛을 떠올렸다.

값진 승리를 거두고도 몇 분이나 늦게, 그것도 겨우 승리를 확신하는 꼴이라니 퍽이나 우스운 촌극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따윈 개의치 않을 정도로 환희에 차 있었다.

그들보다 훨씬 강한 강적으로부터의 생존.

불가능할 거라 생각됐던 그 목표를 이루어냈으니까.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