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축 늘어진 사제의 몸뚱이를 뒤로하고, 케이스와 시온은 서둘러 의뢰의 현장을 벗어났다.
잔뜩 지쳐 당장에라도 길바닥에 코를 박고 곯아떨어질 것만 같은 상태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러진 사제의 동료가 이곳을 방문할 가능성도 있었고, 일이 꼬였음을 눈치챈 기업 측에서 두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을 보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답지 않게 맑아 보이네.'
그렇게 의뢰 현장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온 하늘을 뒤덮은 검은 스모그 사이로 내리쬐는 한 줄기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스모그 층 탓에 낮이라 할지라도 햇빛을 보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건만,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마치 살아남은 걸 축하받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케이스는 피식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 케이스, 이제부턴 어쩔 생각이야?"
잠시 감상에 젖어있던 케이스의 귀에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생각이긴요. 이 일이나 계속해야죠. 저 같은 밑바닥 인생한테 해결사 말고 달리 선택지가 어디 있겠어요."
"다행이네. 혹시나 그만둔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해결사를 관두면 내가 지금부터 주려고 하는 선물이 그냥 종이 쪼가리가 돼버릴 테니까."
"선물이요?"
말꼬리를 흐리며 묻는 케이스를 향해 시온은 제 자켓의 안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한 장 꺼내 케이스에게 건넸다.
"아, 많이 구겨졌네. 그래도 잘 보면 알아볼만은 할 거야. 자, 여기 받아."
"명함 맞죠?"
케이스는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기 구겨진 종이를 펴 그 정체를 확인했다.
훼손이 심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시온이 그에게 건넨 종이는 '명함'인 것 같았다.
"응, 맞아. 나한테 스카우트를 제의했던 중개인의 명함이야. 나야 지금 전속으로 거래하고 있는 중개인이 있어서 거절하긴 했는데… 그럼 일하다 괜찮은 해결사를 찾거든 소개해 달라고 부탁받았거든. 케이스 당신 정도면 그래도 좋을 것 같아서."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그것까진 몰라. 그래도 듣기로는 꽤나 수완이 괜찮은 것 같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이제 막 이 판에 발을 들여서 해결사들을 모으고 있는 모양이던데, 창립 멤버면 대우도 좀 더 좋지 않을까?"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아직 시온이 건넨 이 명함의 주인을 만나본 건 아니었지만, 명함만 보더라도 이 중개인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푸른 나비의 도로시 마리포사라. 명함만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중개인 본인의 이름과 그녀가 운영하는 술집의 주소가 쓰인 명함은 고급품인 듯 꽤나 부드러운 질감의 종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첨단의 디스토피아에서 주로 쓰이는 종이는 쓰레기들을 뭉쳐 만든 까끌까끌한 촉감의 재생지.
이런 종이는 쉬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고급품의 종이를 이래저래 배부할 일이 많은 명함 따위를 만드는데 사용하다니, 이것만 봐도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선물은 감사히 받을게요, 시온."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케이스는 고개를 작게 숙여 시온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물론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이제 막 이 해결사들의 사회에 발을 들인 케이스에게 있어 유능한 중개인과 연결될 기회는 천금보다 귀한 것이었다.
그냥 종이 쪼가리 한 장처럼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케이스에겐 꽤나 큰 의미가 있는 선물이었다.
"아차차, 피곤할 텐데 너무 오래 붙잡았네. 이만 어서 들어가 봐. 의뢰 보수는 바로 송금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래저래 고생 많았어, 케이스."
"시온도 고생 많았어요. 근데… 이 팔, 제가 그냥 가져도 되는 거에요?"
시온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떠나려던 케이스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멈칫,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제 오른손이 있었던 위치에 이식된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은색 의수, 그러니까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 팔? 그냥 콱 가져가 버려. 내가 허락할 테니까."
"거래가 꼬이진 않을까요?"
"괜찮아. 어차피 보수도 선불로 받아서 저쪽이랑은 더 볼 일도 없거든. 게다가 저쪽도 그 소름 끼치는 인간이랑 거래하기 위한 버림패로 우릴 쓰려고 했잖아."
"그래도 이 물건의 가치를 생각하면…"
"물건의 가치? 물론 저쪽에서도 아깝긴 하겠지만… 굳이 지들이 더러운 거래를 하려 들었단 걸 온 세상에 까발리면서까지 우릴 건드리려 들진 않을 거야. 종교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야 그냥 물건 자체를 버려버리는 편이 편하지 않겠어?"
이 세상이 보통의 게임을 원류로 하고 있었다면 별반 상관 없었겠지만, 이 세상의 원형인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길에 떨어진 물건 하나만 잘못 주워도 꼬일대로 꼬인 상황과 엮여버리기도 하는 게임이었다.
그렇기에 몇 번이고 시온에게 되물은 케이스는 괜찮을 거라는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고 말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맘 편히 가져가도 되겠네요. 다시 한 번 고생 많았어요, 시온."
"응, 조심히 들어가."
어딘가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시온을 뒤로하고, 케이스는 터벅터벅 99지구의 제 자취방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이 소모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 나가는 오퍼레이션 메가시티의 세계....'
빙의한 캐릭터의 성격과 특성 덕에 당시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지만, 케이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처참하게 망가진 해결사들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던 그들이 시체, 아니 그보다 못한 고기반죽이 돼 길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이 말이다.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도, 죽어버린 그들에게 명복을 비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케이스의 머릿속엔 그보다 다른 생각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어디 떨어진 건지 실감이 나네.'
이제 이것으로 프롤로그는 끝, 첨단의 기술과 비인간적인 잔혹함이 넘치는 이 세계에서의 서장이 막 시작되었다는 실감이.
그리고 죽어버린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케이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들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가 바로 그것이었다.
* * *
자취방으로 돌아온 케이스는 어김없이 클리닉에 들러 자신의 몸을 보수하고 딱딱한 싸구려 매트리스에 몸을 뉘었다.
느닷없이 이 세계에 떨어지고 막 이 방을 구했을 때는 딱딱한 돌처럼만 느껴졌던 매트리스였지만, 그럭저럭 적응 과정을 거쳤고 지치기까지 한 지금은 이 딱딱하디 딱딱한 매트리스가 어지간한 고급 침대보다도 푹신하게 느껴졌다.
'밖이 밝네.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던 건가.'
그런 매트리스에 몸을 맡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이상하게 개운하네.'
몇시간 잔 것 치고는 너무 개운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시계를 보니 날짜가 달랐다.
하루가 넘게 골아떨어진 거다.
그나저나.
'푸른 나비의 도로시 마리포사라....'
매트리스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케이스는 기지개를 켜며 그 옆의 작은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던 명함을 바라보았다.
'한 번 만나러 가볼까.'
지금 케이스의 몸은 보수 과정과 휴식을 취했다곤 하지만 성치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도무지 의뢰를 수행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에 명함의 주인공에게나 한 번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자취방을 나선 케이스는 요란한 네온사인들 앞에 초라하게 서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낡아빠진 버스에 올랐다.
형편이 넉넉지 못했기에 평소에는 도보로 이동하는 걸 선호하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싶었다.
'...내 계좌 잔고가 원래 이렇게 많았던가?'
손목의 생체 칩을 버스의 단말기에 태그한 케이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단말기에 떠오른 계좌의 잔고가…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챙겨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나 챙겨줄 줄은 몰랐네.'
케이스가 청소부로 일하며 몰래 주워모은 부품들을 이식하느라 0이 되어 있었던 그의 계좌에는, 100만 크레딧이나 되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그가 청소부로 한 달간 일하며 벌었으며 수술을 위해 지불한 금액이 10만 크레딧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는 숫자가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이 갈 정도의 액수였다.
고생했으니 몫을 조금 더 떼어준다더니 이 정도나 챙겨줄 줄은.
머릿속에 떠오른 시온의 얼굴에 케이스는 피식, 작게 웃음을 지었다.
'...꽤 깊은 곳에 있네.'
몇 분인가의 이동 끝에 버스에서 내린 케이스는 중개인들이 운영하는 술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거리로 걸어 들어갔다.
명함 속의 술집, 푸른 나비가 거리의 꽤나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버스에서 내리고도 몇 분인가를 내리 걸어야만 했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네.'
명함에 적힌 주소에는 거리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앤틱한 문이 있었다.
문 위에 매달린 '푸른 나비'라 적힌 간판과 이름처럼 온통 푸른빛으로 꾸며진 걸 보면 명함 속 장소를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딸랑-
케이스는 푸른색의 문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깥과 마찬가지로 온통 푸른색에 앤틱한 분위기를 한 술집의 내부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중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각종 글래스와 술병들이 즐비한 술집의 바 앞으로 걸어간 케이스는 꾸깃꾸깃한 명함을 그 위로 내밀며 운을 뗐다.
술집에서는 시온한테서 느꼈던 압박감 이상으로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굽히고 들어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케이스 자신이 깍듯이 대했던 시온은 그에게 대가를 주고 고용한 명백한 '상급자'였지만 이 술집의 중개인은 일감을 주고받는 동등한 선상의 '거래 대상'에 불과했으니까.
기싸움에서 밀려 괜히 불공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일 같은 건 사양이었다.
"케이스 씨 맞죠? 시온 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곳 푸른 나비의 중개인, 도로시 마리포사라고 해요."
술집의 바 안에 있었던 두 사람 중 여자 쪽이 케이스가 건넨 꾸깃꾸깃한 종이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답했다.
여자는 곱슬기가 있는 금발의 머리카락과 이국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둥근 눈매의 푸른 눈, 유리처럼 투명감이 느껴지는 새하얀 피부와 인형처럼 잘 빚어진 이목구비라는 특징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외모보다도 케이스의 신경을 쓰이게 했던 건 그런 도로시가 휠체어에 앉아있다는 것과, 소싯적에 직접 해결사로 뛰기라도 했던 건지 그 시온과 사제에게서 느꼈던 것보다도 깊이감이 있는 연륜이었다.
"바텐더인 니콜라스 초퍼야. 편하게 닉이라 불러줘."
도로시의 옆에서 자신을 소개한 경박한 말투의 안드로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민간용 부품을 덧대고 있었지만 케이스의 눈은 못 속였다.
싸구려 부품들 사이로 보이는 저 택티컬한 부품들은, 분명 군용의 부품들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경로로는 구할 수 없을 희소한 것들 말이다.
'은퇴의 원인은 역시 도로시 쪽의 다리 부상인가? 뭐, 이쯤 살펴봤으면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나.'
시온의 '막 중개인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하는 말을 듣고 내심 불안했던 케이스였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고 나니 더 이상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케이스가 생각하기에 아마 이 술집, 푸른 나비를 운영하는 두 사람은 전직 해결사.
사정상 정체를 감추고 싶어하는 것 같기는 했다만 그것도 꽤나 수준이 높은 해결사였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수준 높은 해결사였다면 필시 이 사회 전반에 이런저런 연줄을 대뒀을 터.
인맥이 곧 재산이 되는 중개인으로써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여기다.'
그렇게 명함 속의 중개인, 푸른 나비의 도로시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케이스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저… 케이스 씨, 저희와 함께 일하기엔 레벨이 조금 모자라신 것 같은데요."
다만 케이스의 의사와 저들 푸른 나비의 중개인들이 케이스를 써주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변질자, 사제라는 강적들과의 사투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긴 했어도 케이스의 레벨은 5를 채 넘기지 못했다.
아직 확실한 수치를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근간이 되는 게임,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강적 몇 명 쓰러뜨린다고 극적인 성장을 이루게 해 줄 만큼 만만한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그쪽 형씨한텐 미안하지만 레벨 4 정도로는 무리야. 지금은 레벨 10 이상의 노련한 해결사들부터 모집하고 있거든. 포텐이 터지길 기다려야 하는 초짜들을 쓰기엔 우리도 상황이 영 넉넉지가 못해서 말이야."
도로시의 말을 거드는 닉의 말을 잠자코 듣던 케이스는 계산을 끝냈다.
계좌 잔고가 그대로였다면 애매했겠지만 시온 덕에 어느 정도 채워진 지금이라면 해볼 만도 했다.
"그렇다면 증명하도록 하죠."
케이스는 곤란하다는 듯 말하던 눈앞의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입을 뗐다.
"증명?"
"당신들이 지정한 레벨 10 이상의 의뢰를 성공시켜 보이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증명이 되지 않을까요?"
레벨 4의 몸으로 레벨 10의 의뢰를 수행한다.
분명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케이스는 진심이었다.
푸른 나비의 중개인들은 거래의 물꼬를 터놓는다면 그의 목적인 생존에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 만한 인물들.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를 사지로 던져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1화
"…이봐 형씨. 그런 무모한 짓은 관둬."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벼운 분위기로 케이스를 대했던 닉이 그 목소리에서 웃음기를 지우고서 말했다.
"의욕이 앞서는 건 알겠지만 레벨의 차이는 절대적이고, 목숨은 하나뿐이야."
케이스가 어떻게 생각할련지는 모르겠지만, 닉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였다.
"아무리 눈앞의 과실이 달콤해 보여도 챙길 건 챙겨야지. 그리고 난… 우린 사람을 불나방으로 만드는 취미는 없어."
당장 눈앞의 보상을 쫓아 불나방처럼 무리한 짓을 일삼는 초보 해결사들을 많이 봤고, 그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 역시도 몇 번이고 봐왔으니까.
"…그런 말을 들으신다고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아 보이시는데, 오히려 기회를 드려보는 건 어떨까요?"
하나 케이스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하는 닉과는 달리, 그 옆의 도로시는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케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시!"
"케이스 씨,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을 증명할 기회를 드릴게요."
도로시는 바로 옆에서 소리를 쳐대는 닉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케이스를 향한 말을 이어갔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을 뿐인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실력이라는 근거를 갖추고 있는 숨은 실력자인가.
도로시는 케이스가 둘 중 어느 쪽일지 궁금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이렇게 나와줄 줄 알고 있었지.'
나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막 던진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소 무모한 도전을 하겠다는 케이스의 말은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온 것이었다.
'평범한 중개인이면 몰라도 전직 해결사라면 오는 도전을 마다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야.'
보통의 중개인들은 이런 정신 나간 말을 지껄인다 한들 무시로 일관했다.
시험한답시고 의뢰를 내줬다가 의뢰인에게 해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이런 말을 꺼내는 이들의 십중팔구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이럴 뿐이었으니까.
'그야 해결사들은 도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족속들이잖아?'
하나 도로시와 닉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현장에서 굴러봤던 전직 해결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그렇기에 케이스는 도박수를 던진 것이었다.
해결사들은 대부분 도박사 기질이 있는 인간들, 평범한 중개인이라면 몰라도 해결사로 직접 굴러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모험을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이걸 한 번 읽어봐 주시겠어요?"
도로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케이스의 시야에는 어떤 인물에 대한 정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파일이 떠올랐다.
이곳 푸른 나비는 케이스가 처음 의뢰를 수주했던 시궁쥐들의 요람과는 수준 차이가 많이 큰 중개소.
디지털화 됐다고는 하나 일일이 단말기를 조작할 필요가 있었던 그곳과는 달리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정보를 전달하는 게 가능할 정도인 걸 보면 운용하는 기술도 그 수준차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모양이었다.
"당신이 말한 그 '기회'의 타겟인가?"
그렇게 도로시에게서 파일을 전송받은 케이스는 유심히 그의 시야에 떠오른 그것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문서는 '에두아르도 랑고스타'란 사내에 대한 것이었는데, 어렵잖게 이 파일을 케이스 자신에게 건넨 이유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이 에두아르도란 사내를 암살,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하는 게 도로시가 말한 '기회'의 조건인 것 같았다.
"눈치가 빠르니 좋네요. 맞아요. 케이스 씨가 방금 말한 대로에요. 제가 케이스 씨한테 전송해 드린 이 파일의 주인공, 에두아르도 랑고스타를 제거하는 게 제가 케이스 씨한테 기회를 드리는 조건이에요. 어때요. 가능하시겠어요?"
파일의 주인공인 에두아르도 랑고스타는 84지구에서 점점 세를 불려나가고 있는 갱단, 살타몬테스의 보스였다.
그리고 에두아르도가 이끄는 갱단, 살타몬테스는 초인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낮은 지구의 갱단치고는 이례적으로 레벨 8 이상의 병력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본인은 무려 레벨이 10이 넘어가는 수준 이상의 강자였고 말이다.
"가능합니다."
수치상으로만 보자면 지난번에 공투했던 시온 정도의 강자를 열 명 가까이 상대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케이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로시의 제안을 승낙했다.
어지간한 고인물들도 '이걸 왜?'하는 의문을 표했으리라 생각이 들 정도로 경악스러운 판단이었다.
"기한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난이도가 있는 의뢰이니만큼 조금 널널하게 드릴게요. 그래, 한 달 정도면 괜찮을까요?"
"일주일."
"네? 일주일이요?"
"예,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케이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에두아르도 랑고스타의 숨통을 끊고 푸른 나비라는 좋은 거래처 역시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기사나 마법사라면 모를까. 온 몸에 기계를 떡칠한 놈들을 상대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지.'
에두아르도 랑고스타와 그가 이끄는 갱단, 살타몬테스는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임플란트를 위시한 이런저런 기계들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집단.
그리고 케이스는 그런 기계들을 사용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데에 아주 도가 터 있었으니까.
* * *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로 푸른 나비와의 교섭을 끝마친 케이스는 술집을 나서 곧장 의뢰의 타겟인 에두아르도 랑고스타가 있는 84지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당장 계획을 실행할 건 아니었지만 남은 기한은 일주일이라는 촉박한 시간뿐이었으니 사전 답사라도 미리 해볼 생각이었다.
'폐공장들이 많네. 일이 생각보다 더 쉽게 풀리겠어.'
보통 암살 의뢰를 받은 해결사라면 교전 시 몸을 숨길 엄폐물이나 기습하기에 좋은 장소 따위를 중점적으로 보겠지만, 케이스는 이상하게도 그곳의 공장들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것도 멀쩡히 가동하고 있는 공장도 아니라 전력이 끊겨 폐허처럼 되어버린 폐공장들에 말이다.
'분위기는 어떻지?'
첫째로 84지구의 폐공장들의 위치를 체크한 케이스는 다음으로 당 지구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만약 84지구가 충돌을 좌시하지 않는,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지구라면 조금 소란을 피우게 되는 당초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꽝이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본 거긴 했지만, 84지구의 경찰들은 역시나 그 역할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당 지구에 암세포처럼 퍼진 갱단들과 결탁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너, 방금 그 눈 뭐야. 나 꼬나본 거지?"
"제가 그쪽을 언제 쳐다봤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이거 안 되겠네.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면 봐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넌 좀 맞자."
"겨, 경관님! 이상한 사람이 쫓아와요!"
"등신. 저기 경관이 니들 편 같냐? 우리한테 받아먹은 게 얼만데."
백주대낮에 갱단원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며 행인을 마구 구타해대는 걸 보고도 아무런 대처도 없이 그저 지켜보거나, 눈을 돌려대는 걸 보면 말이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애초에 경찰력이 제대로 움직이는 지구였더라면 갱단들이 이렇게까지 증식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폐공장의 위치와 경찰력의 정상 여부, 대략적인 분위기… 확인하려고 했던 건 전부 확인한 것 같네. 슬슬 다시 움직여 볼까.'
84지구에 딱히 제 계획의 발목을 잡을 건 없다고 판단을 내린 케이스는 다시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만 이번에 탄 버스는 케이스 자신의 자취방이 있는 99지구로 향하는 버스는 아니었다.
케이스 자신의 레벨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낮은 수의 지구들 중 가장 원활히 부품을 수급할 수 있는 95지구가 그 버스의 목적지였다.
'내 특성이 과잉적합자가 아니었더라면 돈이 꽤나 깨졌겠지. 이런 폐품들을 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물론 낮은 수의 지구이니만큼 그곳에서 유통되는 기계 부품들의 질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 태반이 이미 부품이라기보단 폐기물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진 것들이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문제 될 건 없었다.
케이스에게는 그런 하급품의 부품들이라 할지라도 너끈히 작동시켜 보일 수 있는 과잉적합자라는 특성이 있었으니까.
'폐공장의 기계들에 전력을 공급해 줄 배터리, 그곳에 있는 전자 부품들의 훼손을 수복해 줄 복원제, 작동하던 부품들에 충격을 가해줄 아날로그식 시한폭탄, 마지막으로 내게 공장에 관련된 지식들을 주입해 줄 공학자용 매뉴얼 칩까지. 준비는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95지구의 거래 구역, 통칭 '벼룩시장'에 입성한 케이스는 제 계획의 진행에 필요한 각종 준비물들을 구매했다.
'과잉적합자… 양날의 검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도 이득이 되는 부분보다는 리스크가 더 큰 양날의 검이라고 말이야.'
처음 빙의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케이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과잉적합자란 특성이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물건이라 생각했다.
신체의 능력을 증강시켜주는 온갖 기계 부품들을 리스크 없이 쓸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지만 신체에 이식된 기계들이 보통 인간들에 비해 배는 빠르게 노화되어 잦은 유지 보수가 없다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치명적인 단점 역시도 있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이런 생각을 다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케이스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양날의 검 같이만 느껴졌던 과잉적합자가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기특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케이스가 구매한 준비물들은 과잉적합자라는 특성들이 없었더라면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을 폐품에 가까운 물건들.
사실상 과잉적합자가 새 것을 샀더라면 10만 크레딧은 족히 넘었을 준비물들을 겨우 1만 크레딧 남짓의 파격적인 가격으로 해결하게 해준 셈이었으니 말이다.
"…거기 손님, 그것들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손님한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긴 한데, 그런 폐품들을 그렇게나 많이 사가는 손님은 그쪽이 처음이라서 말이야. 고물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필요한 물품들의 구매를 끝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벼룩시장을 떠나려는 케이스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발목을 붙잡은 건 아까 그가 배터리, 매뉴얼 칩 따위의 '준비물'들을 구매했던 벼룩시장의 상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벼룩시장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그때그때 필요한 물품들을 급히 수급하는 장소.
그런 곳에서 대량의 물품들을 구매한 케이스의 행적에 의문이 든 모양이었다.
"…사냥에 필요해서요."
답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눈앞의 상인이 아까 부품들을 대량으로 구매해줘서 고맙다며 서비스 부품들을 몇 개 챙겨줬던 기억이 났기에 케이스는 자신이 이런 물품들을 구매한 이유를 상인에게 말했다.
"사냥…?"
상인은 케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케이스가 구매한 배터리나 공학자용 매뉴얼 칩, 복원제, 조잡한 시한폭탄 따위의 물건들은 어떤 식으로 연관을 지어도 '사냥'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었으니 말이다.
동물 사냥, 낚시, 인간 사냥, 그 어떤 종류의 사냥과도 말이다.
"잠깐, 설마…!"
케이스가 제 앞에서 떠나간 줄도 모르고 그가 말한 '사냥'의 의미를 생각하던 상인은 늦은 저녁이 돼서야 그 속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EMP…?"
기계에 동력을 공급하려는 용도로 보이는 배터리, 레이더 따위의 색적 장치로 포착하기 어려운 아날로그식의 시한폭탄.
케이스가 구매한 물건들의 목록을 되짚던 상인의 머릿속에는 어떠한 트랩이 떠올랐다.
기계 장치들은 멀쩡히 살아있으나 전력이 끊겨버린 폐공장 따위의 장소에 배터리를 연결해 전원을 공급하고, 레이더로 찾아내기 힘든 아날로그 시한폭탄으로 그렇게 작동을 시작한 기계에 충격을 가해 전자기 펄스를 발생시킨다.
그런 일련의 공정을 통해 그 장소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EMP 폭탄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노련한 해결사들의 트랩이었다.
"…아니겠지."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렸던 상인은 곧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러한 트랩은 어지간히 노련한 해결사가 아니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할뿐더러 그러한 상황을 세팅하는 것도 고난도였다.
나름 귀가 밝다 자신하는 상인 자신조차 '노련한 해결사들 중에서는 그런 미친 짓이 가능한 인간도 있다.' 정도로 알고 있는 게 고작이었는데, 아직 초심자 티를 채 벗지 못한 케이스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건 상인의 오산이었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케이스에게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으니까.
몸뚱이는 약해빠졌을지라도 머릿속에 든 것만큼은 그 어떤 노련한 해결사에게도 꿇리지 않는 썩은물 빙의자라는 특이점이.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2화
일주일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마침내 결행일이 찾아왔다.
케이스는 이른 아침부터 타겟인 에두아르도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어줄 도발적인 내용의 편지를 갱단 살타몬테스의 본거지로 보냈다.
그러고는 일주일 간의 대공사를 통해 '완벽한 자신만의 사냥터'로 탈바꿈한 폐공장의 낡아빠진 소파에 누워 사냥감들이 몰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나."
그러던 케이스는 천천히 뉘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공장 바깥의 사방에서 요란한 경적 소리, 배기음 따위의 소음들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슬 그가 불러들인 사냥감들이 행차하신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케이스는 폐공장 바깥의 CCTV에 접속해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신의 예측이 빗나갈 가능성은 낮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변수는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것.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날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함이었다.
"보스, 진짜 들어가실 겁니까? 아무리 봐도 뭔가 수상쩍은데요."
"말했잖냐. 저 안에 있는 놈은 내 손으로 직접 찢어죽여야 적성이 풀릴 것 같다고."
"그냥 바깥에서 총알을 쏟아붓는 편이...."
그런 심정으로 CCTV에 접속하긴 했다만,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내게 그 편지를 보낸 그 놈, 저 안에 있을 그 놈의 면상을 보고, 찢어발겨야 속이 시원할 것 같으니까."
케이스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서 쓴 온갖 모멸감 드는 도발로 가득한 편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타겟인 에두아르도가 부하들의 만류에도 폐공장 안으로 진입하겠다며 노발대발하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으로는 여기 기어들어오는 것보다는 포위하고 총알을 퍼붓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사실 케이스의 계획은 케이스를 잡으러 온 저 바깥의 갱단원들이 폐공장 안으로 진입하기보다 바깥에서 포화를 퍼붓는 걸 택하기만 해도 완벽하게 파훼돼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갱들은 욕망에 솔직하고,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려대지.'
케이스가 제아무리 폐공장 안을 천혜의 요새처럼 조성해둔다 한들 정작 사냥감인 그들이 진입해주지 않는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케이스가 그런 리스크를 가진 이 방법을 택한 건 그의 낮은 레벨로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뿐이라서도 있었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갱'이란 족속들의 생태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을 건들면 눈앞에 있는 게 함정인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역시 갱들은 하나같이 다루기가 쉽다니까.'
갱들이란 대개 생존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 자존심에 죽고 못 사는 머저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었고, 케이스의 목표물인 에두아르도 역시 그런 갱이었다.
게다가 다혈질이라는 소문까지 있었으니 일은 더욱 수월했다.
에두아르도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기만 한다면 그를 케이스 자신의 그림에 끌어들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케이스라고 했나? 썩 나와라! 여기 이 몸이 네가 원하는 대로 행차해 주셨으니까!"
곧 CCTV의 시야에서 에두아르도와 그의 갱단원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성난 고함 소리가 폐공장에 울려 퍼졌다.
사냥감들도 사냥터에 기어들어와 주셨으니, 이제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사냥의 시간이었다.
* * *
비록 케이스의 온갖 모멸적인 표현이 담긴 편지에 이성을 반쯤 놓아버린 상태긴 했지만.
에두아르도는 무식하고 야만적인 족속들이 대부분인 갱들 중에선 굉장히 머리를 잘 쓰는 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인지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케이스를 직접 찢어 죽이러 폐공장에 진입해서도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편지를 보낸 케이스란 작자가 에두아르도 자신을 이 폐공장으로 불러낸 건 분명 이곳에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터.
화가 나 사지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함정 같은 변수에 대비하려는 생각이었다.
"함정 같은 건 없냐?"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아무런 낌새도 안 느껴져요, 보스."
"…일단은 알겠다. 그래도 조심히 나아가도록 하지. 그 케이스란 놈이 아무 생각도 없이 날 여기로 불러들이진 않았을 테니까. 분명 뭔가 있을 거다."
하지만 에두아르도의 생각과는 달리, 혹시 모를 함정 같은 건 존재치도 않았다.
폐공장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기까지 했다.
마치 에두아르도 자신에게 보내졌던 그 편지가 질 나쁜 장난에 불과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생명 반응은, 여전하냐?"
"예, 여전히 이 폐공장 최심부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있기는 있다는 거지? 그럼 됐다. 계속 나아간다."
놈이 있는 이상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근데 이 찝찝함은 뭐지....'
에두아르도는 왜인지 자꾸만 떠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폐공장의 더욱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에두아르도를 위시한 살타몬테스의 갱단원들이 목표 지점이었던 폐공장의 최심부에 도착하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젊은 사내가 그들을 반겼다.
"반가워. 그쪽이 에두아르도 랑고스타, 맞지?"
폐공장 중앙에 새하얀 욕조를 등지고 선 사내는 마치 그들이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히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내 이름을 그렇게 정겨운 목소리로 부르는 걸 보면… 네놈이 내게 그 편지를 보냈던 그 케이스라는 놈인 모양이구만."
사내의 등장에 에두아르도는 오늘 아침 자신에게 보내졌던 그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이 모멸적인 말들로 가득했던 편지를 떠올렸다.
저 반응, 눈앞의 저 사내가 에두아르도에게 그런 편지를 보냈던 그 케이스라는 발신인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짓을 벌였다는 건 살타몬테스의 보스에게 무례를 범한 대가를 치를 각오 역시 돼 있다는 걸로 봐도 되겠지?"
에두아르도는 이를 갈며 케이스에게 말했다.
"쉽게 죽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마라.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니."
대체 뭘 숨기고 있길래 저리도 자신만만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 에두아르도 자신에게 그런 모욕감을 준 대가를 치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대가라...."
하지만 에두아르도의 그런 살기등등한 협박에도 케이스가 제 입가의 비웃음을 지우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그걸 징수할 채권자도 곧 죽을 텐데, 내가 그딴 걸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케이스에게서 그 대가를 징수할 채권자, 즉 에두아르도 랑고스타가 오늘 이 폐공장을 살아서 나가는 일은 없을 터였으니까.
"단순한 블러핑일 뿐이다! 겁먹지 마라! 누구든 놈을 잡아온다면 큰 상을 내리겠다!"
그런 케이스의 생각을 까맣게 모르는 에두아르도는 자신에게 감히 그런 모욕적이고 오만방자한 편지를 보냈던 케이스를 찢어 죽일 생각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삐- 삐- 삐-
방금 전, 케이스를 맞딱뜨린 이후부터 일정 간격마다 주변에서 들려오고 있는 이 소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보스, 여길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잔뜩 흥분한 에두아르도의 귓가에 떨리는 갱단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잖냐. 블러핑일 뿐일 거라고. 괜히 겁먹지 말고 저놈이나 잡아오란 말이다!"
에두아르도는 갱단원들이 케이스의 불길한 말에 지레 겁을 먹은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괜한 볼멘소리를 내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시한폭탄 아닙니까?"
갱단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곳에는 똑, 딱, 똑, 딱, 마치 시곗바늘이 도는 듯한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몸체는 은색 테이프로 감겨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런 실루엣만으로도 이 물건의 정체를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의 화면에 표기된 숫자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물건의 정체는 시한폭탄이었다.
"난 또 뭐라고. 호들갑 떨지 마라. 이런 조잡한 폭탄 따위에 당할 우리가 아니잖냐."
갱단원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불안요소의 정체를 확인한 에두아르도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폭발을 온 몸으로 받아낸다 한들 팔다리 한두 개쯤이 끝이고, 그 이전에 갱단원들 대다수가 이식 받은 수준의 방어 모듈이라면 아무런 타격도 없이 막아낼 수 있을 만한 이런 조잡한 폭탄에 왜 겁을 먹은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쵸… 시한폭탄이죠… 그럼… 그럼 이 시한폭탄 뒤에 있는 건 뭐, 뭐죠?"
하지만 에두아르도에게 머리를 얻어맞고도 지레 겁을 먹고 있었던 갱단원은 태도를 고쳐먹는 법이 없었다.
어차피 에두아르도를 위시한 갱단원들의 몸에 그렇다 할 흠집조차 입히지 못할 시한폭탄의 시계가 줄어들 때마다 임종을 코앞에 둔 환자처럼 목소리를 떨어댈 뿐이었다.
"…요란하게 작동 중인 기계?"
겁을 먹은 갱단원의 말에 따라 시한폭탄의 주변을 살핀 에두아르도는 그제서야 갱단원이 겁을 집어먹은 이유를 깨닫게 됐다.
시한폭탄의 뒤에는 언제부터 작동했는지도 모를 폐공장의 설비들이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작동하고 있었고.
그렇게 과부하된 기계와 저 시한폭탄들이 일으킬 폭발이 만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EMP."
기계의 천적.
그렇기에 기계로 온 몸을 증강한 에두아르도와 그 휘하의 살타몬테스를 사냥하기에 최적의 무기라 할 수 있는 현상.
전자기 펄스, EMP의 발생.
"그래서 욕조를…!"
에두아르도는 그제야 케이스가 물이 담긴 욕조를 등지고 서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케이스 역시 에두아르도와 그의 갱단원들과 마찬가지로 기계로 신체를 증강한 몸.
시한폭탄의 폭발로 만들어질 EMP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그 영향력이 적은 물을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시한폭탄의 타이머에 남은 시간은 이제 앞으로 10초 남짓.
케이스를 붙잡고 그 뒤의 욕조를 빼앗기에도 터무니 없이 짧은 시간이었고,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 이 폐공장을 빠져나가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
사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고 한들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겁먹은 갱단원이 가리켰던 자리에 있었던 시한폭탄과 기계만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길목마다 배치된 시한폭탄과 한창 작동하고 있는 그 뒤의 기계의 모습이 그 시야에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썩을...."
곧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0을 가리키고.
에두아르도가 나지막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케이스가 폐공장의 곳곳에 설치해 두었던 시한폭탄들의 폭발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런 폭발은 근처에서 열심히 작동 중이던 기계와 연쇄 반응을 일으켜 강렬한 전자기 펄스, EMP를 방출해냈다.
"도망ㅊ...."
몸에 이식한 기계를 주로 운용하는 살타몬테스의 갱단원들 자신들과 상성이 최악인 현상이 발생하고야 말았다는 걸 깨달은 몇몇 갱단원들은 아우성을 치며 폐공장을 빠져나가려도 해봤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도망치라는 한 마디를 채 끝내기도 전에 신체 능력의 증강을 위해 이식한 기계들이 작동을 멈춰 그대로 고꾸라져 버리고야 말았으니까.
이제 이 전장의 승자와 패자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갈려 있었다.
케이스의 체크메이트, 완승이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3화
몇 분인가의 시간이 지나가고, 시한폭탄이 일으킨 폭발과의 연쇄 반응으로 강력한 전자기 펄스를 뿜어대던 폐공장의 기계들도 하나둘씩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깥이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하자, 무언가가 파문을 일으키며 욕좃물의 수면을 뚫고 나왔다.
그 안에서 휴대용 호흡기로 숨을 들이내쉬고 있던 케이스였다.
"후우...."
입에 물고 있었던 용량이 다 된 호흡기를 뱉어낸 케이스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가 태반이고 살아있는 것들도 산 송장이 돼버린 걸 보면 아주 제대로 휩쓸고 가준 모양이네.'
기세등등하게 공장에 쳐들어왔던 에두아르도 휘하의 갱단원들은 그 태반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에두아르도를 위시한 갱단의 간부진으로 보이는 인원들도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부하들처럼 아예 숨이 끊어져 버리지는 않았지만 신체에 이식한 온갖 기계들에 오류가 발생해 산 송장과도 같은 꼴로 누워들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몸뚱이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주제에 별다른 차폐 수단도 갖추지 않고 있는 수준 낮은 놈들한테는 늘 EMP가 약이었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에두아르도와 그의 갱단인 살타몬테스의 갱단원들은 육안만으로도 몸의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신체를 증강한 상태였고, 어떤 식으로든 급소와도 기계가 연동되고 있을 그들에게 EMP는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까.
높은 지구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대비해 EMP에 대한 대비책을 몸에 갖추고 있었지만, 그 말은 반대로 말해 높은 지구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갖추지 못할 정도로 EMP의 대비책이 값비싸다는 말도 됐다.
고작 84지구의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신흥 갱단에 불과한 에두아르도의 살타몬테스가 그런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을 리는 없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기에 다 저런 꼴이 돼버린 것이기도 했고.
"하혀… 하혀후헤효...."
그렇게 몸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며 전황을 살피던 케이스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두아르도 랑고스타.'
발음기관이 심하게 망가진 듯 흐리멍덩한 발음에 공기가 새어나가는 소리가 나는 이 처량한 목소리의 주인은 에두아르도였다.
다른 산 송장들은 살아는 있어도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걸 보면 꼴에 한 조직의 보스라고, EMP에 직격해도 의식 정도는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차폐 수단을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혀, 하혀후헤효… 호흐 해흐히 헤히하...."
케이스가 가까이 다가가자, 에두아르도는 더욱 격렬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발음이 워낙 처참했기에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혹하게 망가진 에두아르도의 꼴을 보면 대충 뭐든 할 테니 살려달라는 얘기인 것 같았다.
"...."
에두아르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으면서도, 케이스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몇 번을 저울질 해봐도 에두아르도를 살려서 얻는 이득이 푸른 나비와 거래를 터서 얻는 이득보다 큰 경우의 수는 나오지를 않았으니까.
"하혀, 하혀하햐호! 하혀호!"
에두아르도가 아까보다도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해왔지만 케이스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갱단원들 중 한 사람이 흘린 걸로 보이는 마체테를 주워들어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산송장'들을 처리할 채비를 할 뿐이었다.
'불쌍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에두아르도와 그의 갱단원들은 신체의 기계들이 EMP에 노출돼 오작동을 일으킨 탓에 바닥에 고꾸라져 개거품을 물고 있었다.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정심이 들 정도로 처참한 꼴들이었다.
비록 빙의한 이 '케이스'라는 몸의 성격 설정값 탓에 이러한 상황도 무덤덤하게 넘길 수 있긴 했지만,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그렇기에 현대인의 도덕관을 지닌 인물.
뇌리 한편에는 이렇게까지 처참한 모습이 된 에두아르도와 그 휘하의 갱단원들을 굳이 죽이기까지 해야하냐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관두자.'
그러나 케이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에 든 마체테를 떨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세상에서 괜한 자비는 독이 되는 법이니까.'
이 세상은 무언가를 베풀면 오히려 등에 칼을 맞는 잔혹하고도 차가운 회색의 세상.
감정에 휩쓸려 후환을 남기는 짓을 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하혀, 하혀효!"
케이스는 마체테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애원하는 에두아르도를 향해 내려찍었다.
으적, 하는 기분 나쁜 파열음이 들려왔고, 어떻게든 살고자 버둥거리던 에두아르도의 몸뚱이는 생명을 잃고 축 늘어졌다.
이걸로 푸른 나비의 중개인들이 제시한 '증명'의 조건은 충족됐다.
남은 건 푸른 나비에 들러 그들에게 케이스 자신이 그들의 시험을 통과했음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기는 했다.
'내가 무슨 하이에나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건지.'
케이스 자신이 청소부였던 빙의 직후의 시절부터 이런 현장을 보면 꼭 하곤 했던 관례 같은 행동.
즉, 시체들을 헤집어 케이스 자신의 몸에 쓸 부품들을 찾아낸다는 과정이 남아있었으니까.
"우욱...."
밀려 올라오는 구역질을 다시 속으로 밀어 넣으며, 케이스는 폐공장 어디에나 널브러져 있다시피 한 갱단원들의 시체에 칼을 댔다.
정신은 슬슬 이 짓거리에 익숙해져 가고도 있었건만, 생리적으로 아직 무리인 듯 했다.
* * *
푸른 나비의 전속 해결사 감으로 눈여겨보고 있었던 시온이 제법 괜찮은 인재라며 소개한 레벨 4의 신출내기 해결사, 케이스가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의뢰를 받아간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갔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네. 그 케이스인지 뭔지 하는 녀석, 다시 오려나."
케이스가 의뢰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기간이라며 요구한 건 일주일.
만약 케이스가 내빼지 않고 의뢰를 수행했으며, 살아서 완수하기까지 했다면 오늘이 그가 다시 방문하는 날이 될 터였다.
택티컬한 전신 기계 의체라는 외형과는 어울리지 않게 턱시도를 입고 바의 글래스를 닦고 있던 푸른 나비의 바텐더, 닉은 문득 일주일 전의 그런 기억을 떠올렸다.
"야, 도로시. 혹시 그 녀석 기억나냐?"
"그 녀석이요?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아, 혹시 어제 면접을 보고 가셨던 그 해결사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뭐, 별 거 아니야."
닉은 전혀 짚이는 데가 없다는 듯 얼굴 위에 물음표를 띄운 도로시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패기롭게 자신을 증명하겠다 나선 그 케이스란 초보 해결사는 고작 레벨이 4였고, 그에 반해 도로시가 제시한 의뢰의 대상은 레벨이 10이나 됐다.
뿐만 아니라 휘하에 하나하나가 케이스를 상회하는 레벨을 지닌 실력자들로 구성된 살타몬테스란 갱단까지도 거느리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레벨의 차이는 절대적, 케이스가 의뢰를 완수하고 약속된 기한인 오늘 푸른 나비에 다시 방문할 가능성은 사실상 0에 수렴했기에 굳이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 생각한 것이었다.
의뢰를 수행하기로 했다면 죽었을 터였고, 그게 아니라면 목숨이 아까워 의뢰를 포기했을 테니까.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말을 흐린 닉은 다시 글래스를 닦아 걸이에 걸며 도로시를 보았다.
대체 무얼 기다리는 건지도, 왜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도로시는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술집의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다."
도로시의 말에 닉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 술집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오늘로 딱 일주일째, 맞죠?"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닉으로써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제 '증명'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왔는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객기를 부리다 죽어버렸거나,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거나.
예외 없이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던 신출내기 해결사, 케이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바로 그였다.
"어서 오세요, 케이스 씨. 마침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늦어서 죄송하게 됐네요. 현장에서 조금 처리할 일이 있었거든요."
"도로시, 너...."
분명 케이스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던 도로시는 마치 처음부터 케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화색을 띠고서 그를 반겼다.
닉은 그런 도로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기라기엔 너무나도 진심 같았고, 그렇다고 눈앞의 이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아까 보였던 반응이 걸렸으니까.
그런 시선을 눈치챈걸까.
도로시는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입을 뗐다.
"니콜라스, 혹시 아까 '기억하고 있냐?'고 여쭈셨던 분이 케이스 씨를 말씀하신 거였나요?"
"그래, 인마. 기억 안 난다는 것처럼 말했잖냐."
"푸흐흐."
도로시는 의아함을 표하는 닉이 썩 우습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스 씨를 말씀하신 건 줄은 몰랐죠. 당연히 기억해 마땅한 분을 혹시 기억하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도 그럴 게 도로시는 닉과 달리 케이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닉의 별 대수롭지는 않은 누군가를 기억하냐는 질문에 케이스를 떠올리지조차 못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제가 의뢰를 완수했다는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을 챙겨오긴 했는데… 비위를 상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어서요. 그래도 한 번 보시겠어요?"
그러는 사이 케이스가 술집 중앙의 바 위에 무언가가 담긴 투박한 아이스박스를 올려놓으며 운을 뗐다.
"…어디 한 번 보자."
닉은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로 케이스가 바 위에 올려놓은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닉은 케이스가 찾아온 지금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닉의 머리로는 고작 레벨 4의 신출내기 해결사인 케이스가 당 의뢰의 타겟, 10레벨의 에두아르도를 성공적으로 암살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기껏 해봐야 의뢰를 포기하러 왔거나, 가짜 증거품 같은 걸 위조해 왔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아이스박스가 열리며 드러난 그 '증거품'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건...."
아이스박스의 안에는 처량한 표정의 잘린 목이 있었다.
닉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케이스가 자신을 증명하겠다고 수주한 의뢰의 타겟, 에두아르도의 것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케이스 씨는 당첨 복권이었던 모양이네요."
휠체어를 끌고 와 닉과 함께 아이스박스의 내용물을 함께 확인한 도로시가 그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첫 만남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지만 에두아르도의 목을 들고 온 지금에 와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케이스, 눈앞의 이 남자는 분명 거물이 될 거라고.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4화
케이스가 가져온 아이스박스 안의 머리는 틀림없는 에두아르도의 머리였다.
레벨 4의 신출내기 해결사 하나가 10레벨에 달하는 갱단의 우두머리를 사냥한다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할 터였던 '증명'을 해낸 것이었다.
도로시는 이런 일을 해낸 초짜들이 훗날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케이스라면 분명 영웅, 괴물, 천외천 같은 수식어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거물이 될 터였다.
"…케이스 씨, 저희 푸른 나비랑 전속으로 계약하시는 건 어떨까요?"
케이스의 가능성에는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린 도로시는 다소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혹할 만한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수익의 배분은 케이스 씨가 7, 저희가 3을 가져가는 식의 7대3으로 나눌 거고요. 의뢰를 수행할 때 필요한 작전 비용의 지원도 있을 거에요. 어때요. 제법 괜찮은 조건이죠?"
도로시가 제시한 조건을 끝까지 경청한 케이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일개 초보 해결사인 자신 따위에게 제시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후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플레이한 수십 회차들 중 초반부터 이런 조건을 제시받았던 건 단 한 번도 없으며, 이러한 조건이 제시된 건 대부분 그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해결사로서 자리를 잡고 난 이후였다는 것만 봐도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장난을 치는 건 아닌 것 같네.'
혹시 뭔가 허튼 수작질이라도 부리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도로시의 얼굴을 살피기도 했지만 수상한 기색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도로시는 진심으로 케이스 자신에게 이러한 조건을 제안한 것 같았다.
'전속으로 계약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케이스는 어느 한 중개소에 묶여 전속 해결사로 일하는 걸 선호하진 않았다.
한 중개소에 묶여버린다는 건 곧 해결사로서의 활동에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것, 플레이에 이래저래 제약이 생기고 말았으니까.
'그래도 이런 조건을 거절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겠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아무리 전속 계약이 내키지 않아도 이런 좋은 조건을 거절하는 건 머저리 같은 짓이었으니까.
"…받아들이죠."
케이스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도로시의 오른손을 잡아 악수하며 말했다.
전속 계약이라고는 하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니.
상상치도 못하고 있었던 큰 수확이었다.
* * *
돌처럼 딱딱한 매트리스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폐공장의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침대의 구색을 갖추고 있는 것 위에서 잠을 청한 케이스는 오랜만에 상쾌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흐읍."
기지개를 켠 케이스는 자취방을 나설 준비를 했다.
일주일간 자취방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폐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보냈기에 조금 쉬고도 싶었지만, 그래도 나가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도 벌었겠다. 고물을 몸에 쑤셔 박는 짓도 슬슬 그만둬야겠어. 과잉적합자가 있다고는 해도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고물을 주력으로 쓸 이유가 없잖아.
그 효과로 성능이 향상되는 건 새 부품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케이스의 몸뚱이에 이식된 부품들은 대부분이 좋게 말해 중고품, 직설적으로 말해 고물이었기에 수명도 짧았고, 과잉적합자의 효과로 성능이 향상되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게까지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난 번, 시온과의 의뢰에서 얻어 이식하게 된 이단심문관의 의수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 자신의 몸에 이식된 부품들 중 썩 마음에 드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케이스는 시온에게서 의뢰의 보수로 받은 100만 크레딧부터 시작해서 에두아르도의 목을 가져온 대가로 받은 50만 남짓의 크레딧까지, 며칠 사이에 급속도로 두둑해진 잔고의 계좌와 함께 쇼핑에 나설 생각이었다.
'블랙 마켓… 이쯤이려나.'
쇼핑을 위해 일명 '상업 지구'로 불리는 68지구로 향한 케이스는 무슨 일인지 그에게 필요한 부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 으슥한 뒷골목들만을 순회하고 있었다.
평범한 가게에서 구매할 수 있는 기성품들도 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바깥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불법적이고 희귀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상업 지구의 블랙 마켓으로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이번 회차의 도시, 기간테폴리스는 어떨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회차에서는 상업 지구의 으슥한 뒷골목에서 블랙 마켓으로 가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썩 꺼져. 여긴 너 같은 놈이 올 곳이 아니니까."
그렇게 여러 골목들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케이스는 마침내 아마도 블랙 마켓으로 통할 것으로 보이는 수상쩍은 계단을 발견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머리를 삭발한 험상궂은 거한이 케이스가 더 이상 지하로 내려가는 그 계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 앞을 막아섰다는 것이었다.
'…이걸 어째야 할까.'
케이스는 그저 그런 쇼핑이나 하자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상업 지구까지 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만큼 순순히 거한의 제지에 따라줄 생각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거한이 막아선 계단 아래의 장소, 블랙 마켓에 가야만 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너 같은 놈이라… 요즘 블랙 마켓에서는 고객 응대를 이런 식으로 하나 보네요. 앞에서는 무엇보다도 고객의 신용과 만족이 제일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뒤에선 이러는 꼴이라니. 윗선에서 참도 좋아하겠어요. 그쵸?"
"하지만 증표가…"
"이런 상황에서도 증표 타령이라. 직업 정신 한 번 투철하시군요. 뭐, 됐습니다. 곧 그 잘난 직업 정신도 쓸모가 없게 될 테니."
"그게 무슨…"
"그거야 두고 보면 차차 알게 되겠죠.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잠시 거한을 비키게 만들 방법을 고민하던 케이스는 무언가 타개책을 떠올렸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가 떠올린 그 타개책의 첫 번째 단계를 밟았다.
"죄, 죄송합니다. 이 무례를 어찌해야 할지...."
곧 싸늘하기만 했던 거한의 쩔쩔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스의 노림수가 제대로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당연히 저렇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 블랙 마켓은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입장조차 할 수 없는 장소.'
게임 밖의 유저들은 공공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 블랙 마켓은 대외적으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유저들 역시도 공략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초인의 경지, 그러니까 최소 레벨 8에 이르러서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장소였고.
'수준 미달로밖에 안 보일 내가 그런 블랙 마켓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저 인간 입장에선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그런데 블랙 마켓에 들어갈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약해빠진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을 케이스 자신이 그런 블랙 마켓의 존재를 언급한다?
'게다가 안에 연줄이 있다는 것처럼 압박까지 줬으니 저렇게 나오지 않고서야 배길 수가 없겠지.'
그것도 마치 안에 연줄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로 강하게 압박까지 해오면서?
확신컨대 지금, 거한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꽤나 복잡해져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수준 이하의 약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고객 정도로 케이스 자신을 착각하고 있을 테니까.
'이제 몇 마디만 더 잘 구슬리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
케이스는 거한의 눈치를 살폈다.
거한은 한풀, 아니 완전히 기가 꺾여버린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몇 마디만 더 잘 하면 별 마찰 없이 블랙 마켓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생판 처음 보는 남한테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쇼핑을 할 수 있을 만큼 머릿속이 꽃밭은 아니라서요."
거한에게 건낼 멘트를 고심하던 케이스는 천천히 입을 열어 나름의 고민 끝에 결정한 대사를 읊었다.
최대한 이 상황이 어이가 없고, 짜증난다는 느낌을 살려 연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
거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얼굴 위로 X됐다는 감정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이, 일단 들어가시죠. 뭔가 조금이라도 더 고객님의 편의를 봐주십사 하고 제가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 단단히 일러 두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그러니 부디…"
잔뜩 굳은 얼굴로 침묵하던 거한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케이스가 바라 못지않던 블랙 마켓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와도 같은 내용의 말이었다.
"뭐,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내키지 않지만 정성을 봐서 넘어가 주겠다는 듯 생색을 내는 목소리를 연기해 답한 케이스는 여전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거한을 넘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제멋대로 입가에 떠오르려는 웃음을 겨우 참은 채였다.
* * *
어찌어찌 블랙 마켓까지 들어오긴 했지만, 사실 케이스가 살 수 있는 품목은 그리 다양하진 못했다.
지금 케이스의 입장에선 분명 거금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의 계좌에 있는 150만 크레딧이란 액수는 그리 큰 돈은 못 됐으니까.
그 전부를 하나의 물건을 사는 데 소모하더라도 대단한 물건을 살 수는 없을 터였다.
'잠깐, 방금 저 여자....'
그렇기에 제 분수에 맞는 소소한 물건들만을 둘러보고 있었던 케이스는 방금 그를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기척에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암시장이라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기사였지?'
여자에게서는 시온에게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힘의 편린이 느껴지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허리춤에 검까지 차고 있었다.
뭐 하는 인간인지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기사임이 틀림 없었으니까.
'어째서 기사가 여기에....'
어느 계열의 힘을 다루는 인간들이 가장 미쳐있냐고 묻는다면 쉬이 대답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면 어느 쪽이 가장 정상이냐는 질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무투 계열의 인간들, 그중에서도 기사가 단연 가장 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케이스가 기사였던 여자의 모습에 의문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다른 계열의 인간들보다 정신적 수양에 시간을 쏟는 무투 계열의 인간들, 그중에서도 기사도라는 명목 하에 가장 도덕적인 기준을 지켜가며 정신을 수행하는 기사들은 대부분이 이런 음지를 혐오하다시피 했으니까.
보통 경찰에 지원하는 특기 인력들 중 8할 이상이 기사일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아 보였었지?'
간혹 가다 밑바닥에 깔린 본성부터 악한 것들과 상성이 좋아 기사도를 갈고닦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음지를 활보하는 기사들도 드물게 있었으나 아까의 그 여자는 그런 경우는 아닌 듯했다.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 팔고, 윤리 따윈 개나 줘버린 온갖 잔혹하고도 불법적인 흉물들을 거래하는 이 블랙 마켓의 풍경이 익숙치 않고, 또 혐오스럽다는 듯 당장에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잠입한 경찰…인 건가.'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나가던 케이스는 아까 그를 스쳐 지나갔던 그 여자 기사의 정체를 결론지었다.
여자는 암세포처럼 세를 키워 나가고 있었을 이 블랙 마켓을 처리하기 위해 잠입해 온 경찰의 기사일 것 같았다.
'경찰력의 행차라… 분명 큰 난동이 벌어지겠지.'
그 기사는 시온과 비슷한 힘의 편린, 그러니까 오러의 편린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힘은 시온을 '따위'로 취급할 수 있을 만큼 강대했다.
시온과 함께 겨우 쓰러뜨렸던 그 사제 또한 여자의 적수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짧게 스쳐 지나간 게 전부였지만 감히 확신해 보일 수 있었다.
상업 지구에 암암리에 성황 중일 여러 블랙 마켓들 중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아 보이는 이곳의 경비력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아마 여자가 정체를 드러내고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한다면 큰 난동이 일어날 테고, 몇 시간 걸리지 않아 이 블랙 마켓은 소탕되고야 말 터였다.
'이거 원, 날이 좋은데.'
케이스 역시 블랙 마켓을 이용한 손님이니만큼 함께 잡혀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위험 부담이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블랙 마켓에 큰 소동이 벌어진다라.
그럴 때만 할 수 있는 아주 재미난 일이 있었으니까.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5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블랙 마켓은 심각한 수준의 범법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장소였다.
범죄를 저질러 취득한 장물이 평범한 물건처럼 돌아다니는 곳이었고, 아름다운 외모 따위를 이유로 유괴당한 인간들이 노예로 사고 팔아지는 곳이었으니까.
"자! 다양한 취향을 위한 개조 시술까지 거친 최고급품의 노예가 단돈 이만 크레딧! 한 번 보고들 가십쇼, 고객님들!"
때문에 경찰들 역시도 이러한 블랙 마켓들을 예의 주시하며 일망타진의 기회를 노리곤 했는데,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면 케이스가 꼭 하는 행동이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블랙 마켓을 날로 먹어보겠어.'
바로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블랙 마켓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곳의 값비싼 경매품을 훔쳐내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삼엄한 경비 탓에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경찰이 들이닥쳐 온 신경이 그쪽에 팔려버린 시점이라면 들킬 가능성이나 후환 따윌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많은 해결사 분들이 바라셨을 물건이죠! 고대의 로스트 테크놀로지로 벼려진 전설 등급의 바텐더, 미스터 인세인을 소개합니다!"
그렇게 경찰일 터인 여자가 적당한 난동을 피워주기 시작할 때까지 빼돌릴 물건을 물색하던 케이스의 앞에, 마침 괜찮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일의 메인 경매품인 전설 등급의 바텐더, 미스터 인세인이었다.
'바텐더....'
바텐더란 신체 전반의 운용에 영향을 주는 운영 체제 임플란트의 일종이었다.
기계 부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바텐더란 이름은 그것의 특이성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는데, 누구라도 그것의 설명을 듣고 나면 그 이름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이었다.
내분비계에 자극을 가해 여러 가지 도핑성 약물들이 칵테일이라는 이름의 이런저런 유용한 효과를 지닌 인공적인 호르몬들을 분비하게 하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미스터 인세인이라....'
그리고 지금 이 블랙 마켓의 메인 경매품으로 출품된 '미스터 인세인'이란 명칭의 바텐더는 그런 바텐더 중에서도 최상품의 물건이었다.
다른 바텐더들의 칵테일과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압도적인 효능을 지닌 칵테일들을 대접해 주는 물건이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등급만으로도 그 유용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제와의 전투에서 수준 이상의 성능을 보여줬으며 지금 케이스의 오른손을 대신하고 있는 이단심문관의 의수가 영웅 등급이었고, 미스터 인세인은 그보다 한 단계 무려 전설 등급의 임플란트였으니 말이다.
'상상 이상의 월척인 걸.'
그 성능이 얼마나 뛰어나냐면, 미스터 인세인을 이식한 캐릭터로 자신보다 레벨이 3이나 높은 적을 쓰러뜨린 적이 있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비록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칵테일을 투여받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절대적으로 취급되는 레벨의 차이를 이겨낼 정도의 성능이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신체에 이식한 기계 부품의 성능을 한계치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케이스 자신의 특성, 과잉적합자까지 더해진다면?
분명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임이 틀림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옛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네.'
케이스는 그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하필이면 케이스가 블랙 마켓에 방문한 오늘 잠입을 나온 경찰의 기사부터 시작해서 하필이면 오늘 메인 경매품으로 출품된 전설 등급의 임플란트, 미스터 인세인까지.
웃음을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그림이었다.
* * *
대략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케이스가 바라던 그런 상황이 시작됐다.
아까 스쳐 지나갔던 그 여자- 경찰의 기사가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장내에 계신 손님 분들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몰래 잠입해 온 경찰의 기사가 장내를 헤집어 놓으며 난동을 피우고 있으니, 이 안내 방송을 듣는 대로 손님 분들께서는 가까운 비상구로 안내에 따라 탈출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 심각한 내용의 안내 방송에, 블랙 마켓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의 갑작스런 단속이야 블랙 마켓에서 흔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빌어먹을, 짭새라고? 대체 여긴 검열을 어떤 식으로 하길래 망할 놈의 짭새까지 기어 들어오는 거야!"
"그냥 짭새도 아니고 기사라니… 여기도 오늘로 끝이겠구만."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이번만큼은 여태까지 있었던 평범한 단속들과 결이 달랐으니까.
경찰의 기사는 어지간한 큰 일이 아니고서야 나서지 않는 그들의 특기 전력.
GPPD에서 그런 기사를 파견했다는 건 곧 오늘부로 이곳을 상업 지구의 지도상에서 지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 녀석… 반대로 가잖아? 비상구는 저쪽인데. 야, 거기 너! 비상구는 여기라고!"
"…들은 채도 안 하는 걸 보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머저리인가 본데. 놔두고 그냥 가자. 이 정도 말해줬으면 할 만큼 한 거야."
그렇게 모두가 앞다투어 비상구로 달려나가는 가운데, 누군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나갈 방향을 잘못 알고 있어 저러는 건가 싶어 말을 건네 봐도 남자는 아무런 답도 없이 걸음을 계속할 뿐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때가 왔네.'
아수라장 속을 유유히 걷고 있는 남자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케이스였다.
그가 경찰 측의 기사가 활동을 개시했다는 큰 소동이 벌어졌음에도 느긋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이 소동이야말로 케이스가 그토록 바라고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전설 등급의 바텐더 임플란트, 미스터 인세인을 이 난리통 속에서 챙길 오늘의 수확으로 점찍어 뒀던 케이스는 경매품을 소개하고 있었던 블랙 마켓 중앙의 무대로 향했다.
'선객이 있었나.'
대체로 수준이 높은 경찰의 기사 중에서도 혈혈단신으로 블랙 마켓을 소탕하라 지시를 받을 만큼 강력한 기사가 파견돼 왔으니 다들 도망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대 위에는 불청객이 있었다.
아마도 경찰의 기사에게 당했을 블랙 마켓 직원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경매품들을 챙기고 있는 걸로 보아 어지간히도 탐욕스러운 성격인 것 같았다.
'아마 정체는… 이 블랙 마켓의 운영진인 것 같네.'
탐욕스러운 인상을 한 남자는 제법 큰 사이즈의 양복을 입었음에도 꽉 끼일 정도로 잔뜩 살이 올라 있었는데.
블랙 마켓의 직원들처럼 오른쪽 가슴팍에 명찰을 달고 있으나 평범한 직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심상치 않은 압박감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이곳의 중책쯤 되는 모양이었다.
'이거 원, 일이 성가시게 됐는데.'
기사가 소동을 피워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사이 목표인 미스터 인세인만을 챙겨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케이스에게 있어 무대 위의 값비싼 경매품들을 허겁지겁 챙기고 있는 무대 위의 저 남자는 크나큰 변수였다.
여긴 지난 번처럼 EMP를 급조해낼 만한 재료도 없었고, 그렇다고 함께 강적과 맞서 싸워줄 시온 같은 동료도 없었다.
기용할 수 있는 패는 무대 위의 남자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의 케이스 자신뿐, 사실 판단력이 정상적이라면 여기서 계획을 포기하는 게 맞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어.'
하지만 케이스는 눈앞에 있는 고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미스터 인세인은 무려 전설 등급씩이나 되는 초고성능의 임플란트.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생존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게 될 터였다.
'보통 게임 중반 이후에나 파밍이 가능한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이렇게 초반에 접하게 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중후반에도 마냥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그리고 이번 기회를 날린다면 또 언제 전설 등급의 임플란트를 접할 기회가 올지는 미지수인 일.
케이스는 운 좋게 찾아온 이 귀중한 기회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설령 이 판단이 위험한 도박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이, 거기 돼지!"
결단을 내린 케이스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경매품들을 가방에 담고 있는 살이 찐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남자가 그의 목표물인 미스터 인세인을 가방에 챙겨넣기 전에 발목을 붙잡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이런 도발로 시선을 끌기라도 하지 않으면 케이스 자신을 무시하고 경매품들을 챙겨 이 자리를 뜨려 들 게 뻔했으니까.
"…넌 뭐냐?"
"불청객."
남자의 물음에 영혼 없이 대답한 케이스는 곧장 품 속에서 만에 하나를 대비해 챙겨왔던 연막탄을 꺼내 남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던졌다.
이어서 오른눈에 이식한 의안의 기능을 활성화해 연막 속에서도 미스터 인세인이 있는 위치를 확인했고, 팔과 다리, 아니 전신에 배치된 부품들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내 그곳으로 내달렸다.
"어딜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려고!"
연막이 아주 조금의 시간 벌이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의 방해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케이스가 달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남자가 있었던 방향에서 총탄들이 날아오기 시작했으니까.
'슬슬 한계인 모양이네.'
남자의 총알 세례를 피하려 나름대로 회피를 시도했던 케이스였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과잉적합자의 효과로 성능의 강화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케이스의 몸에 이식된 부품들의 대다수는 고물이었다.
게다가 그런 고물의 성능을 더더욱 끌어내기 위해 과부하까지 시키고 있었으니 총알이 스치기만 해도 어떻게 될지는 그림이 뻔했다.
피탄된 부위들은 살갗이 찢어졌고, 부품들은 총탄에 꿰뚫린 채 스파크를 튀기며 제 상태가 나쁘다는 걸 온몸으로 어필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영웅 등급의 임플란트인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이식한 오른손이나 탄환으로 인한 타격이 적었던 왼손과는 달리 몇 발인가의 탄환에 명중당한 양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
"빌어먹을… 연막 탓에 앞이 잘 안 보이잖아. 아까 그 놈은 죽었나? 발소리도 뭣도 더는 안 들리는 걸 보면 뒈진 것도 같은데… 아, 몰라. 확인사살까진 할 시간도 없어. 늦기 전에 미스터 인세인이나 챙겨야겠군."
한바탕 총알 세례를 퍼붓던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혼잣말하며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케이스가 못 움직이고 있는 건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케이스는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온 몸에 이식한 부품들의 성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린다면 분명 저 뒤룩뒤룩 살이 오른 남자보다 빨리 미스터 인세인에게 도달할 수야 있겠지.'
사력을 다한다면 살찐 남자보다 먼저 무대 위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위의 미스터 인세인은 아마도 관리자의 인증이 있어야만 열 수 있을 것 같이 생긴 투명한 상자 안에 밀폐돼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잠금을 풀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 돼버릴 텐데.'
무대 위에서 경매품들을 챙기고 있던 그 살찐 남자보다 빠르게 달려 가로챈다고 한들 헛된 짓이 돼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 처참하게 패배해 주자고 생각했지. 승리를 확신한다면 분명 미스터 인세인이 든 그 상자의 잠금을 해제할 테니까.'
때문에 케이스는 생각을 바꾸었다.
살이 오른 남자가 미스터 인세인이 든 투명한 상자의 잠금을 해제할 수밖에 없을 달콤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때 자신이 그걸 낚아채자고 말이다.
'빙고.'
케이스가 살아있고 남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며, 그런 상태로 미스터 인세인이 든 투명 상자의 잠금이 풀리려 하고 있는 상태.
상황은 케이스가 계획한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정작 작전의 구상자인 케이스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이대로는 꼼짝도 못 하겠는 걸.'
과잉적합자가 있다고는 하나 고물 부품으로 무리한 기동을 거듭한 데다가 총알 세례까지 맞아 온몸의 부품들이 수명이 다했으니 쉬게 해달라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케이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래도 문제는 없어. 방법이야 있으니까.'
케이스에게는 부품들의 고장으로 팔다리가 묶여버린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경찰의 기사가 날뛰어준 덕분에 주변에 널린 것이 몸에 기계를 박아넣은 사람들의 시체였다.
비록 조금 많이 고통스럽겠지만, 고장난 부품을 즉석에서 갈아끼우면 그만이었다.
결단을 내린 케이스는 곧바로 사방에 널린 블랙 마켓 직원들의 시체로 기어갔다.
이어서 품 속에서 나이프를 꺼내들고 그 고깃덩이들을 헤집어 잘 움직이지 않는 팔과 다리에 당장 힘이 돼줄 수 있을 만한 부품을 찾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그렇게 손에 넣은 부품들을 이식된 기계 부품들의 오작동으로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제 양 다리에 쑤셔박았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오른손에 이단심문관의 의수를 억지로 기워붙였을 때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케이스는 아주 작은 비명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를 꽉 악물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한 시라도 빨리 이 다리가 움직이길 염원하고, 또 염원할 뿐이었다.
'…됐다.'
케이스에게는 수 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졌던 1분이 지나가고, 새로이 이식된 부품들에 적응을 마친 양 다리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속력으로 그의 목표, 전설 등급의 바텐더인 미스터 인세인을 향해 내달렸다.
"너, 너…!"
케이스가 연막을 뚫고 무대 위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이제 막 미스터 인세인이 보관되고 있었던 투명 상자의 잠금을 풀고 그걸 챙기려던 살찐 남자의 경악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적잖아 당황한 모양, 이번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한 케이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서 남자에게로 뛰어들었다.
살이 오른 남자 역시도 그제야 케이스가 자신이 방금 상자 안에서 꺼낸 미스터 인세인을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는 힘껏 그걸 붙잡았다.
"잠깐, 이 망할 놈이!"
두 사람의 교차로 상황이 일단락되고, 먼저 입을 연 건 살이 찐 남자 쪽이었다.
남자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케이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꽉 붙잡고 있었던 최중요 경매품, 전설 등급의 바텐더인 미스터 인세인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난 상태였으니까.
"잔뜩 기대했을 텐데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걱정마."
몸에 덕지덕지 붙은 살덩이만큼이나 화가 난 듯한 남자를 향해, 케이스는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 써 줄테니."
지금 막 케이스의 손에 들어온 전설 등급의 바텐더 임플란트, 미스터 인세인.
그 크나큰 전력 증강의 결과를 확인할 때가 왔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6화
그 탐욕스러운 성정만큼이나 살이 오른 남자, 가엘 푸에르코는 지금 화가 나 있었다.
금일의 경매품들 중 가장 값이 나가는 물건인 미스터 인세인을 남의 손에 가로채진 채였으니 말이다.
다만 화가 날 뿐, 이 뒤의 일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미스터 인세인을 그의 손에서 가로챈 건 아무리 잘 쳐줘봐야 가엘 자신의 레벨의 절반, 5레벨 정도에 불과할 명명백백한 약자.
시간이 조금 지체될 뿐, 놈이 가엘의 앞에 무릎꿇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한편, 케이스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그 입가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가엘의 생각을 가히 완벽에 가깝게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부품을 손에 넣는다고 한들 별도의 이식 수술 없이 운용하지는 못하니까. 미스터 인세인을 빼앗겼다고 해도 변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야.'
미스터 인세인 같은 전설 등급의 임플란트들은 분명 여타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압도적인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성능이 성능이니만큼 그런 성능을 끌어내기까지의 과정 역시도 복잡했다.
적합도가 맞지 않는다면 이식 수술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한들 호환되는 부품 없이는 제 성능을 내지 못했으니까.
'정석적인 발상이었지만… 상대가 나빴어.'
가엘의 생각대로 5레벨에 불과한 해결사는 변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스는 그 모든 조건들을 싸그리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과잉적합자라는 특성을 지닌 존재.
케이스에게 있어 그런 문제들은 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소한 문제들에 불과했다.
"…경매품에 괜한 스크래치를 남기고 싶진 않아. 그러니 지금이라도 얌전히 내게 그걸 넘기고 떠나."
"싫은데."
"…말은 끝까지 듣지. 그렇게 한다면 노잣돈이라도 조금은 챙겨 주도록 할 테니. 괜찮은 제안이지 않나?"
"아니, 싫다니까."
"원래대로라면 죽여도 시원찮았을 걸 돈까지 챙겨주겠다고 말하고 있잖냐. 경찰의 기사 놈도 오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답하는 게 좋을 거다."
"귀머거리야? 싫다고 몇 번을 말하게 만드는 거야."
가엘의 말에 몇 번이고 단호하게 답한 케이스는 제 손에 들린 미스터 인세인을 곧장 자신의 목덜미에 박아 넣었다.
"…?"
그런 케이스의 모습에 가엘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호환되지도 않을 소켓에 임플란트를 막무가내로 박아넣다니.
범인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느낌인가.'
하지만 당연하게도 케이스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신의 몸에 미스터 인세인을 박아넣은 게 아니었다.
제 특성, 과잉적합자의 백업을 받은 케이스는 순식간에 몇 년이고 미스터 인세인을 운용해 왔던 숙련자처럼 이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좋아. 적응 끝. 제대로 시작해 볼까."
가볍게 손뼉을 친 케이스는 황당한 표정의 가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은… 이게 좋겠네."
그리고 이제는 케이스 자신의 몸에 완벽히 정착한 듯한 바텐더 임플란트, 미스터 인세인에게 '칵테일'을 주문했다.
틱- 타탁-
케이스가 뇌내에서 내린 명령에 미스터 인세인은 기계음을 내며 본격적인 작동을 개시했다.
이윽고 오버맨, 컨템플레이트, 리젠, 스틸 스킨, 새비지, 오버도즈의 여섯 종의 칵테일 중 케이스가 처음으로 주문한 오버맨이 그의 육신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곧 머저리가 아니라면 알 수밖에 없을 정도의 가시적인 변화가 케이스에게 일어났다.
온 몸의 혈관이 부풀어 올라 도드라졌고, 생존을 위해 단련했다고는 하나 썩 티가 나는 수준은 못 됐던 근육 조직들은 눈에 띌 정도로 증강됐다.
'초인'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그 이름의 뜻에 걸맞게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지닌 첫 번째 칵테일, 오버맨의 효과로 인한 것이었다.
"너, 설마 미스터 인세인을 사용하고 있는 거냐? 대체 어떻게…!"
그런 케이스의 모습을 본 가엘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미스터 인세인은 보통 수술 없이는 운용할 수 없는 임플란트, 그중에서도 사용자의 적합성까지 따져 대는 까다롭지 그지없는 전설 등급의 임플란트였다.
한데 그걸 아무런 과정도 없이 목덜미의 소켓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는 것만으로 작동을 가능케 하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알 거 없고."
가엘의 말에 짤막하게 답한 케이스는 곧장 몸을 움직여 눈앞의 적을 향해 돌진했다.
미스터 인세인이라는 걸출한 카드가 손에 들어왔으며,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력 상승이 이루어졌어도 여전히 눈앞의 적과의 격차는 컸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빈틈이라도 놓칠 수는 없었다.
"크윽...."
가엘을 향해 돌진한 케이스가 노린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입이었다.
제 입에 정통으로 꽂힌 케이스의 주먹에 가엘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왜 하필 입을… 설마 내 비밀을 눈치챈 건가?'
가엘은 케이스의 이러한 판단이 의아했다.
방금 전의 가엘은 케이스에게 일어난 기현상으로 인한 놀라움 탓에 완전히 무방비했던 상태.
입보다도 더 중요한 급소를 노려졌어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을 케이스는 굳이 입을 노려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가엘 자신이 숨기고 있었던 그의 '비밀'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겠지.'
하지만 가엘은 곧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지워냈다.
미스터 인세인을 별다른 과정 없이 운용한다는 기이하기 그지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긴 했지만, 그 이외에는 별 볼 일 없는 뜨내기에 불과했다.
임플란트를 저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운용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특이한 특성으로 인한 것일 터.
저런 초짜 따위가 가엘 자신의 비밀을 꿰뚫어 봤을 리가 없다는 확신에서였다.
"그럼… 두 번째 칵테일을 써 보실까."
가엘이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스는 첫 번째 칵테일이었던 오버맨에 이어 두 번째 칵테일의 투여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칵테일은 사고와 신경의 반응 속도를 가속해 전장에서의 판단을 좋은 쪽으로 극대화 시키는 컨템플레이트라는 이름의 칵테일이었다.
"큭… 또 입을…!"
오버맨에 이어 컨템플레이트까지 투여받은 케이스는 그 효과에 취해있을 틈도 없이 다시 한 번 가엘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도 케이스가 노린 곳은 의표를 찔렀던 첫 번째 기습과 같은 가엘의 입이었다.
"이번에도 입이라고…?"
신체의 재생 능력을 강화하는 세 번째 칵테일, 리젠을 투여해 더욱더 과감한 공격이 가능케 됐을 때도 케이스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엘의 거센 저항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꾸역꾸역, 또다시 그의 입을 노릴 뿐이었다.
"자, 네 번째 갑니다."
근육과 피부 조직을 경화해 방어력을 향상하는 네 번째 칵테일, 스틸 스킨을 투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다섯 번째."
고통의 감각을 쾌감으로 뒤바꾸어 정상적인 통각을 지닌 인간이라면 시도도 못 할 일을 하게 해주는 다섯 번째 칵테일, 새비지를 투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에오… 이으…"
케이스는 자신의 몸이 상하든 말든 꿋꿋이 가엘의 '입'만을 노리고 있었다.
몸을 조금도 사리지 않고 오롯이 가엘의 안면, 그것도 입 한 점만을 노린 공격에 그의 입은 삽시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찌나 심하게 상했는지 이제는 발음기관으로써의 기능을 거의 잃어버리고 멍청한 신음만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말을 하기 힘들어지긴 했지만@... 문제 없어. 이대로만 가면 분명 경찰의 기사 놈이 오기 전에 저 놈을 쓰러뜨리고 자리를 뜰 수 있어.'
가엘은 케이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당한 입만이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케이스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처참했다.
가엘의 입을 무리하게 노린 탓에 방어는 뒷전이었으니까.
덕분에 케이스의 팔, 다리는 미스터 인세인의 칵테일 덕에 겨우 움직이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는 넝마나 다름없었다.
누가 봐도 가엘이 유리해만 보이는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가엘 역시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근데 저 놈, 어째서 웃고 있는 거지? 그것도 저렇게 확신에 차서?'
하지만, 케이스는 어째서인지 그 입가에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웃음은 자포자기의 웃음이 아니었고, 정신이 나가 터뜨리는 실성의 웃음은 더더욱 아니었다.
코너에 몰릴 대로 몰린 자신의 이런 상황조차 의도한 것,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의 웃음이었다.
'지금의 내 레벨은 4.'
케이스는 지금껏 총 세 번의 레벨 업을 거쳤다.
아마도 빙의 한 달째, 청소부로 일하던 도중 만난 변질자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아 레벨 2로 나아갔을 터였고.
그 다음, 시온과의 공투에서 압도적인 강자였던 사제를 쓰러뜨림으로써 두 개의 레벨을 건너뛰어 한 번에 레벨 4가 되었을 터였다.
케이스 자신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할 수 있는 상태창 같은 수단은 없었지만, 레벨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푸른 나비의 도로시와 닉에게 네 레벨은 4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확실했다.
큰 전투가 있었던 직후면 왠지 강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아마 에두아르도를 비롯한 랑고스타의 갱단원들을 처리하며 레벨 5의 턱 끝까지 경험치가 차올랐겠지.'
하지만 푸른 나비에서 의뢰를 받아 갱단 랑고스타의 갱단원들과 그들의 리더, 에두아르도를 처치했음에도 케이스는 여느 때와 같은 '강해지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난이도나 상황만 따지자면 일전까지의 사건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케이스는 자신의 경험치가 5레벨이 되기 직전까지 누적되어 있을 거라 감히 확신하고 있었다.
'저 돼지 같은 놈이 승리를 확신한 순간, 레벨 업으로 인한 스펙 상승과 미스터 인세인의 여섯 번째 칵테일로 허를 찌르는 거야. 그거라면 이 정도의 격차라도 어떻게든 좁힐 수 있어.'
그것이 케이스가 레벨이 두 배 이상 차이나는 가엘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건다는 무리에 가까운 수를 던진 이유였다.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는 적의 목숨을 앗는 것뿐 아니라 전투라는 행위 자체에서도 경험치를 얻어낼 수 있는 게임.
전투에서 얻을 경험치로 아마도 상한에 거의 다다랐을 경험치를 채워 레벨을 상승시킨다.
그에 이어 가파른 전력 상승이 가능한 미스터 인세인의 여섯 번째 칵테일까지 곁들인다.
일련의 과정을 따른다면 자신보다 레벨이 두 배 이상 높은 가엘이라 할지라도 허를 찌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왔다.'
곧 케이스가 예상한 그대로 고됐던 전투들이 끝날 때면 어김없이 느껴졌던 그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이에 케이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 입가에 떠올렸다.
"…뭔가 있는 건가 했더니만, 그냥 실성한 거였구만. 그렇다면 그만 뒈져라,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버러지야!"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눈앞의 살찐 돼지에게 큰 한 방을 먹여줄 시간이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7화
보통 바텐더 임플란트의 칵테일에는 투여 개수에 제한이 걸려 있었다.
나름 제한이 풀려 있다는 고등급의 바텐더 임플란트들의 칵테일이라 해도 마찬가지.
기껏 해봐야 두세 개가 한계였고, 그마저도 하루 투여량에는 제한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미스터 인세인은 그런 평범한 바텐더 임플란트들과는 달랐다.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이름의 의미에 걸맞게 한꺼번에 투여 가능한 칵테일의 개수에도, 하루 동안 투여 가능한 총량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칵테일의 남용을 권유하기라도 하듯 앞선 다섯 개의 칵테일을 전부 투여하고 있어야만 효과가 극대화되는 칵테일까지도 있었다.
'여섯 번째 칵테일, 오버도즈.'
과잉 복용이라는 의미를 지닌 '오버도즈'라는 이름을 지닌 여섯 번째 칵테일.
미스터 인세인으로 투여된 칵테일들의 효과를 배로 하고, 그 흉악한 성능으로 사실상 미스터 인세인의 꽃이라고까지 불렸던 그 여섯 번째 칵테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효과만큼이나 부작용 역시도 큰 칵테일이지만… 가끔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여섯 번째 칵테일을 투여했을 경우, 그 효과를 받아 강화된 1부터 5번까지의 칵테일들의 성능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물론 그런 강력한 효과만큼이나 부작용 역시 컸지만, 케이스에겐 그런 걸 생각할 여유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쓰지 않으면 죽는다.
그렇다면 리스크고 뭐고 간에 일단 쓰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제 2라운드 시작이다. 뇌까지 살찐 돼지 새끼야."
가엘과의 격전 도중, 레벨 업이 진행됐을 때 특유의 그 묘한 느낌을 느낀 케이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스터 인세인에게 주문을 넣었다.
첫 번째 칵테일부터 다섯 번째 칵테일까지, 기반은 갖춰졌으니 이제 하이라이트인 여섯 번째 칵테일을 내어 달라고 말이다.
당하기만 하던 첫 번째 라운드는 끝, 반격의 두 번째 라운드를 개시할 때가 온 것이었다.
'…확실히 보여.'
첫 번째 칵테일인 오버맨의 신체 강화에 이어 두 번째 칵테일, 컨템플레이트의 사고 가속 효과까지 받고 있었음에도 케이스는 가엘의 공격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방어나 회피 따위는 아예 포기해버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가엘의 입을 집요하게 망가뜨리면서 그런 것들까지 신경쓸 여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랬던 그때와 그림이 완전히 달랐다.
레벨의 상승에 이어 오버도즈를 투여받은 케이스의 눈에는 가엘이 공격해오는 궤도가 확실히 보이고 있었다.
'몸도 반응하는 속도를 따라와 주고 있고.'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엘과의 격전을 막 시작했을 때 즈음의 케이스로서는 지금처럼 그의 공격이 보인다고 한들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레벨 4와 레벨 10이라는 크나큰 간극이 존재했으니까.
그건 어지간한 수로는, 아니 사실상 절대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하지만 레벨 업에 이어 여섯 번째 칵테일, 오버도즈의 효과까지 받아 수준 이상의 스펙 업을 이룬 지금, 케이스의 몸은 가엘의 공격을 너무나도 매끄럽게 흘리고 있었다.
마치 레벨 업과 오버도즈, 이 두 가지 수로 일전보다 배는 강해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전설 등급의 임플란트를 손에 넣을 기회는 많지 않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가엘과의 격전을 시작한 케이스였지만 그 마음 한 편에는 분명 두려움이 있었다.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플레이하며 쌓아 올린 데이터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던져볼 만한 도박수라는 판단을 내리긴 했지만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도박수'였다.
낮은 확률이라지만 실패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케이스의 두려움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랬던 도박수가 이렇게나 보기 좋게 성공했으니까.
"분명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너, 이게 대체 무슨...."
"말했잖냐. 2라운드 시작이라고."
케이스는 당황 그 이상, 경악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가엘을 보며 웃음 지었다.
죽음이 두려워 가늘게 떨리던 몸은 여전히 떨려왔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의 떨림과는 그 종류가 달랐다.
이번에는 환희에 찬 떨림이었으니 말이다.
* * *
레벨 5로의 레벨 업에 이어 미스터 인세인의 여섯 번째 칵테일, 오버도즈의 효과까지.
순식간에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의 스펙 업을 이룬 케이스는 기세를 타고 가엘을 몰아붙였다.
"큭… 무슨 이런 괴물 같은 게...."
"말했잖아. 두 번째 라운드 시작이라고. 새 라운드도 시작했는데 그대로면 싱겁잖아?"
케이스가 상당한 스펙 업을 거쳤다지만 그래도 레벨 5와 레벨 10 사이의 간극은 커다랬다.
근접전이 주특기인 적을 상대로였더라면 지금의 케이스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우세를 점하는 건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나 온갖 임플란트로 한껏 증강한 모습 탓에 주변에선 그런 기계 부품과 몸뚱이를 이용해 싸우는 무투파라 오해를 사곤 했어도 가엘은 사실 거리를 벌리고 싸우는 쪽에 좀 더 능한 인물이었다.
서로간의 스펙 차이조차 좁아진 지금, 뼛속까지 근접전에 능한 케이스를 그런 가엘이 능히 상대해낼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경찰의 기사가 근처에 있지만 상관없어. 아니, 별다른 수가 없어. 이건…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죽는다.'
가엘의 주력 기술은 흑마법.
께름칙한 것으로 취급되는 마법중에서도 사람, 동물 따위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고 실행했기에 금술로 지정된 아주 악질적인 종류의 마법이었다.
때문에 위장용으로 임플란트까지 잔뜩 이식해가며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숨기려 들었던 가엘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별다른 수가 없어 보였다.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그칠 줄 모르고 매 순간 날아드는 케이스의 첨예한 일격들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야, 내가 그렇게 두겠냐?"
케이스는 그런 가엘의 생각에 답하듯 말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레벨 업과 오버도즈라는 수단을 통해 가엘과 정면승부가 가능케 된 직후부터는 전혀 노리지 않고 있었던 그의 입을 향해서였다.
'이 새끼, 설마...!'
아까부터 누적됐던 타격에 이어 방금 전의 일격까지.
기껏 말할 수 있게 된 입을 다시 못 쓰게 된 가엘은 그제야 케이스가 아까 그의 '입'만을 집요하게 노려댔던 진의를 깨달았다.
"이제야 눈치챘어?"
케이스는 그런 가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입 그거, 영창 못 하게 하려고 작살낸 거야."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할 때에는 주문을 영창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주문을 입 밖으로 내 주변의 마력에게 명령을 내림으로써 상식적으론 불가능한 신비를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 마법이었으니까.
가끔 가다 아무런 영창도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괴물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최고위의 마법사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케이스가 지금껏 가엘의 입을 중점적으로 노려왔고, 또 방금 있는 힘껏 휘두른 주먹을 또다시 박아넣은 이유였다.
"마법사나 흑마법사나 입을 작살내서 영창을 못하게 하는 편이 제일 효율이 좋거든."
"어예우어… 우이으 애오 이어어 어야…?"
"언제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냐고? 물론 처음부터지."
머저리 같은 말소리로 묻는 가엘을 향해, 케이스는 웃으며 답했다.
가엘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케이스는 그가 흑마법사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마력 감응이 뛰어난 마법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법사를 판별하는 임플란트 같은 걸 장착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네 턱에 있는 그 문신, 흑마법사들 표식이잖아."
가엘의 한껏 살찐 턱에 케이스가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플레이하며 몇 번이고 봤던, 금술의 사용자이기에 배척되는 흑마법사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새기는 '표식'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떤 몸 쓰는 놈이 자기보다 레벨도 한참 낮은 놈 하나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질질 끌려다니냐? 흑마법사 표식에 이어서 형편없는 근접전 실력까지. 견적 딱 나오잖아. 정체를 숨기고 있는 흑마법사라고."
표식만 해도 가엘을 흑마법사로 결론 지을 근거는 충분했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레벨 4에 불과한 케이스를 상대로도 압도하지 못했던 돼지의 처참한 근접전 실력이 바로 그 결정적 근거였다.
당장 레벨 8 정도일 시온만 생각해 봐도 케이스 자신이 그녀를 이길 그림이 전혀 그려지질 않았다.
그런데 그런 시온보다 강한 위압감을 내뿜었던 저 돼지가 케이스 자신을 압살하지 못한다?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돼지의 정체가 근접전에 능한 척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흑마법사라도 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이어… 어으…!"
밑천을 까발려진 데다가 제 주력인 흑마법의 영창에 필요한 입까지 박살이 나버린 가엘은 어눌한 발음으로 '이런 썩을!'이라 소리치며 그 육중한 몸을 돌렸다.
도저히 헤쳐나갈 길이 보이질 않는 상황, 그렇기에 케이스에게서 도망칠 생각이었으나 케이스는 순순히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어딜."
"커헉...."
비대한 몸뚱이와 매치되지 않는 재빠른 속도로 자리를 이탈하려는 가엘을 붙잡은 케이스는 곧장 두터운 지방층으로 뒤덮인 그의 명치에 있는 힘껏 주먹을 꽂아 넣었다.
'…망할.'
입은 흑마법의 주문을 영창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몸으로 승부를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강해진 저 애송이와의 정면승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가엘 자신은,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이건… 답이 없잖아…'
흉부를 엄습한 아찔한 고통에 정신이 멀어져 가는 가운데, 가엘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도저히 파훼할 수가 보이질 않는 체크메이트였다.
* * *
케이스가 가엘의 숨통을 끊음과 거의 동시에, 그의 몸을 강화하고 있었던 미스터 인세인의 칵테일들의 효과가 끝났다.
칵테일의 작용으로 무뎌져 있었던 감각이 돌아오자, 곧 케이스에게 그간 누적돼 있었던 고통들이 한꺼번에 엄습하기 시작했다.
'부품 수거는… 관둘까.'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몸을 덮은 살갗이 당장에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거의 자동적으로 진행하곤 했던 부품 수거까지도 이번만큼은 하고 말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일단 자리를 뜨자. 곧 경찰의 기사가 들이닥칠 테니까.'
그만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앉아서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케이스가 이런 무모한 수를 던질 수 있게끔 해준 일등공신, 경찰 측에서 파견된 기사.
스쳐 지나가며 봤던 그녀가 곧 이곳까지 마수를 뻗쳐올 것 같았으니까.
콩밥을 먹거나, 심한 경우 죽기까지 하고 싶지 않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경매장 발견. 진입하겠습니다."
그렇게 케이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전장이었던 블랙 마켓의 경매장을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침착하고도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가 경매장의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
이에 케이스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존재와의 조우.
그 최악의 경우의 수가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8화
진입하겠다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매장의 문이 열렸다.
곧 모습을 드러낸 건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헬멧을 쓰고 금속제의 장검을 든 여자였다.
'저 여자, 위험해.'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케이스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시온, 그리고 시온과 공투해 겨우 쓰러뜨렸던 사제는 물론, 방금 어떻게든 쓰러뜨린 돼지에 이르기까지.
지금 눈앞의 저 여자는 그간 마주해왔던 그 어떤 강자보다도 강한 존재.
피로한 탓에 흐려졌던 판단력이 온 힘을 다해 경고를 속삭였다.
그녀를 적대했다간 '반드시' 죽을 거라고 말이다.
'…썩을.'
일단 급한 대로 경매장의 탁자 뒤로 숨은 케이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지만, 안타깝게도 탈출로는 여자가 방금 진입해 온 저 문 말고는 달리 없어 보였다.
맞붙게 된다면 죽는다, 그렇다고 도망가자니 퇴로가 없다.
이가 절로 갈리는 엿 같은 상황이었다.
"여기 있는 이 쓰레기, 당신이 죽인 건가?"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케이스의 귓가에,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정체는 틀림없는 경찰 측의 기사.
이 블랙마켓의 운영진뿐만 아니라 손님까지도 체포, 심하면 몰살하러 왔을 게 뻔했지만 어째서인지 여자의 목소리에선 적의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오히려 뭐랄까, 호감에 가까운 감정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대화로 이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케이스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목소리에서 감정을 지우고서 답했다.
"당신 입장에선 의아하기만 하겠지만… 일단 감사부터 표하도록 하지."
"…?"
이어서 여자에게서 돌아온 건 케이스로서는 전혀 예상하고 있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 돼지는 내 작은 친구의 원수였다. 한 떨기 꽃 같았던 자그마한 아이를 납치해 탐욕스런 위쪽 지구의 역겨운 인간들에게 팔아넘겼거든."
여자는 케이스가 쓰러뜨린 돼지 같은 사내에 맹렬히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시체가 된 돼지와 원래부터 상당한 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팔려간 아이는 당연히 죽었고, 그렇기에 나는 꼭 내 손으로 저 멱을 따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부에선 놈만은 꼭 성히 살려서 생포해 오라고 하더군."
"...놈에게 원하는게 있었던 거군요."
금세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돼지는 여자의 친구의 원수였으나, 경찰의 이해관계 상 돼지를 직접 처리하진 못하는 입장이었다.
"그래, 뻔한 이야기다. 거물들의 약점을 잡아 더 위로 올라가려는 거겠지.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라는 작자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말이야."
"…이해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신이 이렇게 일을 벌여준 거지. 내가 당신에게 초면부터 감사를 표한 이유는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 것 같군."
그런 와중에 케이스 자신이 돼지를 대신 처리해줬으니, 저리 나오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이어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몇 분 정도 시간을 줄 테니, 여길 떠나라."
"…!"
"놀랄 것 없다. 말했잖나. 당신은 내 친구의 원수의 멱을 따 준 은인이라고. 못 본 척 정도야 일도 아니다."
거짓말을 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여자는 진심으로 케이스 자신을 살려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서 활로가 트인 것이었다.
'이런 행운이 따라줄 줄은....'
앞으로의 나날들에 분명 큰 힘이 돼줄 전설 등급의 임플란트, 미스터 인세인을 손에 넣기 위해 쓰러뜨린 장애물에 불과했건만 이런 식으로 또 도움이 돼줄 줄이야.
예상 외의 행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케이스는 탁자 뒤에 숨겼던 몸을 일으켰다.
행운의 여신께서는 아무래도 아직 케이스를 버리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았다.
* * *
어찌어찌 블랙 마켓의 경매장을 빠져나온 케이스는 경찰의 추적이 더 이상 닿지 않겠다 싶은 인근의 쓰레기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후에 다시 정신을 차리자, 익숙한 푸른 천장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온통 푸른 인테리어와 첨단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앤틱한 가구들, 케이스는 이 장소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전속 계약을 맺은 중개소, 푸른 나비가 틀림없었다.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물이라도 한잔 마실래요?"
푸른 나비의 중개인, 도로시가 휠체어 바퀴 소리를 내며 그에게로 다가와 말을 붙였다.
"부탁드립니다."
"자, 여기요."
도대체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목이 미친 듯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기에, 일단 케이스는 도로시에게서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우...."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나자 정신이 조금은 맑아진 것 같았다.
"도로시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이래저래 물을 게 잔뜩이었기에, 케이스는 곧바로 휠체어에 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도로시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긴. 사지에서 끄집어내 온 거지.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네가 전화했었어. 여기 상업 지구 쓰레기장인데, 혼자서는 도저히 못 돌아갈 것 같다고."
"제가… 그랬었군요."
"그 말이 끝나곤 바로 전화가 끊어져 버려서 곧장 찾으러 갔지. 그리고 네 말마따나 상업 지구의 쓰레기장들 중 하나에서 널 찾아냈고, 그 길로 여기로 데려온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짭새들도 쫙 깔려 있어서 빼내기도 힘들었다고."
도로시를 대신해 닉이 케이스의 물음에 답했다.
한계에 달한 몸 상태로 정신을 잃기 전 케이스가 푸른 나비에 전화를 걸었고, 연락을 받은 도로시와 닉이 의식불명 상태인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모양이었다.
"…몸 이곳저곳의 보수나 치료도 대신 해주신 모양이네요. 감사드려요."
그 말을 들은 케이스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시체에서 부품을 떼어내 쑤셔 박는 둥 과격한 응급처치 없이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던 몸에 이식된 부품들은 깔끔한 새것으로 교체돼 있었다.
기계가 아니라 생체인 부분들도 마찬가지, 붕대나 거즈 따위로 꼼꼼하게 싸매져 있었고 말이다.
애초에 이런 걸로 거짓말을 칠 이유도 없겠지만, 진짜로 케이스 자신을 구해내 정성스레 간호해 줬다는 게 실감 됐다.
"케이스 씨는 저희 푸른 나비의 소중한 비즈니스 파트너잖아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걸요."
"그래. 미우나 고우나 너는 우리 푸른 나비의 전속 해결사니까. 중개소 자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녀석을 그냥 죽게 둘 수는 없잖냐."
케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도로시와 닉에게 재차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때 케이스의 몸은 이미 한계의 한계까지 몰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처참했던 상태.
어찌어찌 블랙 마켓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두 사람이 구조하러 와주지 않았더라면 필시 죽거나, 그에 준하는 끔찍한 몰골이 되고야 말았을 터였으니까.
'몸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건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로시와 닉은 만신창이의 상태인 케이스를 데려와 이렇게 멀쩡히 일어날 수 있을 정도까지 치료해 줬다.
그 과정에서 필시 케이스의 몸에 이식된 평범하지 않은 수의 기계 부품들을 목격했을 터였고, 당연히 케이스의 기이한 체질 역시도 눈치챘을 테지만 그에 대해서는 언질 한 번 없었다.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네.'
사지에서 케이스 자신을 구원해오는 데 이어 딱히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의 엄수까지.
첫 만남에서부터 느꼈던 대로 푸른 나비의 중개인들, 도로시와 닉은 역시 신용할 수 있을 만한 인간들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케이스 씨,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론 정신이 돌아오신 거죠?"
"네, 충분히 돌아왔어요."
"안 그래도 의뢰 때문에 한 번 연락드리려던 참이었거든요. 막 깨어나셔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죄송하지만, 일 얘기도 조금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괜찮겠죠?"
도로시의 말에 케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 의뢰는 기업 쪽에서 들어온 의뢰에요. 기업이랑 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시죠?"
"예,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조건이 제법 괜찮답니다."
"그러죠."
케이스는 답하며 도로시가 자신에게로 건넨 어떤 파일이 실행된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기업은 케이스가 오퍼레이션 메가시티를 플레이하며 수도 없는 거래를 해온 최대의 거래 세력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도 없이 그의 뒤통수를 때려온 최악의 적성 세력이기도 했다.
때문에 케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태도로 도로시가 건넨 태블릿 속 파일의 의뢰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건...."
의뢰의 내용을 읽던 케이스는 불쾌한 감정으로 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의뢰의 보수나 조건은 분명 여태껏 받아왔던 그 어떤 의뢰보다도 구미가 당겼지만, 정작 그 내용이 역겹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보고 기업의 뒤나 닦아주는 개새끼가 되라는 겁니까?"
의뢰의 내용은 빈민가의 사람들을 납치해 잔혹한 방식을 써 인위적인 초능력자로 양성하는 어느 기업의 자칭 '복지 시설'을 반대파 기업의 습격에서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존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는 케이스이긴 했지만, 그런 그라도 이런 의뢰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케이스가 말하는 '생존'은 목숨의 보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가지고 살아남는 걸 뜻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뢰는 사람의 마음, 인륜을 져버리는 것.
생존이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의 선을 넘지는 말자고 케이스로써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나오실 줄 알고 있었어요. 케이스 씨는 마냥 냉철해만 보여도 꽤나 좋은 사람인 것 같았거든요."
"그럼...."
"이번 의뢰의 상대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들인지 먼저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자, 이쪽이 진짜 의뢰에요."
케이스에게서 슬며시 태블릿을 가져간 도로시는 몇 차례의 터치를 거친 후 다시 케이스에게로 태블릿을 건넸다.
아까와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확실히 다른 의뢰가 태블릿 위에 떠올라 있었다.
전의 의뢰가 역겨운 기업 놈들을 도와 복지 시설의 탈을 쓴 인체실험기관을 지키는 것이었다면, 이번 의뢰는 그보다는 나은 기업의 인간들을 도와 그런 시설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받아들이죠."
이쪽 역시 기업의 의뢰이니만큼 보수는 꽤나 훌륭했지만, 복지시설의 탈을 쓴 그 끔찍한 곳을 지켜달라는 아까의 그 의뢰보다는 덜했다.
하지만 케이스는 그런 건 그다지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자신의 기분을 더럽게 한 것들을 처리하고 보수까지 받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조금의 차이는 딱히 신경 쓸 것도 못 됐으니까.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19화
신생 제약 기업, 아스클레피오스가 세운 92지구의 복지 시설.
복지 시설의 탈을 쓴 인체실험기관인 그곳에는 92지구의 수준을 넘어선 강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90번대 지구의 인간들 대다수가 초인의 경지는커녕 레벨 5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 복지 시설의 경비 인력들은 말단조차 레벨이 5, 경비대장의 경우엔 레벨이 8까지 뛰기도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도로시 씨, 이게 맞는 겁니까?"
그렇기에 그 복지 시설에 파괴 공작을 벌여 달라는 의뢰를 한 의뢰인, 마틴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길길이 날뛰어 대고 있었다.
[어떤 게 문제일까요?]
"…처음 의뢰할 때부터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커리어가 달린 아주 중요한 의뢰라고요."
아스클레피오스 사의 경쟁사이자 중견 제약 기업, 카두케우스 사의 중간 관리직인 마틴은 상부로부터 요새 당사에 위협이 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아스클레피오스 사를 견제하라는 명을 받았다.
일개 중간 관리직에 불과한 마틴 자신에게 제아무리 신생이라지만 하나의 기업을 상대하라니, 무리한 요구였지만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월급쟁이 주제에 상부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건 곧 그를 해고해 달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실패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정보를 안 드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92지구에 아스클레피오스 놈들이 설치한 복지 시설, 거기가 사실 놈들의 신체실험기관이고 경비 병력은 대략 5레벨부터 8레벨까지 정도로 보인다. 상세한 정보까지 다 드렸잖습니까."
마틴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아스클레피오스가 92지구에 설치한 복지 기관을 통해 불법적인 신체 실험을 자행, 그를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어서 그간 그들이 수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인 복지 시설을 파괴해 달라 나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중개인에게 그곳을 파괴해줄 것을 의뢰했건만, 그 중개인이 터무니없는 짓을 벌여버리고 만 것.
이것이 마틴이 지금 통화의 상대이자 그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중개인, 도로시에게 얼굴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고작 하나, 그것도 5레벨 해결사라뇨. 이건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마틴이 일을 맡긴 중개인, 도로시가 의뢰를 맡을 해결사랍시고 파일을 보내온 건 웬 5레벨의 해결사였다.
처음에는 다른 해결사의 보조인가도 싶어 메일의 첨부 파일 란은 괜히 몇 번이나 뒤적거리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도로시가 보내온 건 마치 이번 의뢰는 그 혼자서 진행할 거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그 5레벨 해결사의 프로필, 단 하나였으니까.
"후우...."
상부의 말도 안 되는 요구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뭣 같은 상황까지.
쌓일 대로 쌓인 울분을 랩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뱉어낸 마틴은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의 도로시의 답을 기다렸다.
이 정도 말했으면 슬슬 마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마틴 씨, 제가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이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진심으로 케이스 씨가 이번 의뢰에 적임자라 생각해서 추천드린 거에요.]
하지만 이어진 말에 마틴은 말문이 막혀 숨이 넘어갈 뻔했다.
이 세계에서 레벨의 차이는 절대적이건만, 레벨 5에 불과한 그 케이스라는 해결사가 5레벨부터 8레벨까지의 적이 널린 마틴의 의뢰에 적합하다는 개소리를 장황하게 지껄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틴 씨, 랑고스타라고 기억하세요?]
"약물의 유통 루트에도 훼방을 놓았어서 알고는 있습니다. 낮은 지구의 갱단치고 강한 놈들이었죠. 지금은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지만요. 근데, 갑자기 그것들 얘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비즈니스 얘기를...."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 랑고스타를 혈혈단신으로 처리하신 게 케이스 씨에요.]
"그걸 말이라고...."
[증빙 자료를 보내죠. 한 번 열어 보세요.]
할 말은 많았지만, 마틴은 일단 도로시가 전송한 웬 영상 파일을 실행해 감상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진실이라도 된다는 양 확신에 차 행동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오기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이건 또 뭔...."
그리고 그 영상을 재생한 마틴은 곧 자신이 도로시와 통화 중이었다는 것도 잊고서 욕지거리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화면 너머에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이게… 5레벨이 벌인 짓이라고요?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화면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은 이상했지만 심플했다.
마틴이 프로필을 받은 케이스라는 이름의 5레벨 해결사.
그가 웬 폐공장에서 혈혈단신으로 갱단 랑고스타의 수 많은 갱단원들을 맞이하고, 잠시 뒤 상처 하나 없이 성한 모습으로 멀쩡히 걸어 나온다는 내용 자체만으론 단순한 영상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단순한 내용과는 별개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고작 5레벨에 불과할 케이스가 조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보다 강할 랑고스타를 홀로 섬멸하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으니까.
[예, 보시다시피요. 게다가 이 의뢰를 진행하고 계실 때는 4레벨이셨어요.]
정정, 5레벨도 아니라 4레벨이었단다.
이어진 도로시의 말에 이 영상을 더 믿기 힘들어진 마틴이었지만, 쉬이 입장을 굳히기도 어려웠다.
만약 이 영상이 가짜라면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겠지만, 영상이 촬영된 일자로 보이는 우측 상단의 일자부터 낮은 지구에 활개를 치고 다니던 랑고스타의 갱단원들이 하나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절묘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상식 외의 일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이 영상이 진짜라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후우...."
몇 번이고 도로시가 보내온 케이스의 영상을 돌려보던 마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그의 얼굴은 큰 결심을 한 듯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믿고 맡겨보겠습니다. 이 케이스 씨라는 해결사분 그대로 가시죠."
훗날 마틴은 이 날의 이 선택을 이렇게 회자하게 된다.
그 자신이 여태껏 해왔던 선택들 중 단언컨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 * *
케이스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홀로그램들이 살랑거리고 있는 환락의 거리를 지나 그의 자취방이 있는 99지구의 외곽지로 걸어 들어갔다.
매일같이 일이라 쓰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 읽는 짓을 해댄 탓일까.
바로 어제도 여기서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렇게 자취방으로 돌아온 케이스는 제 상의를 벗어 소파에 걸쳐놓고서는 세면대의 거울 앞으로 향했다.
거울 너머로는 이제는 두 달 즈음 전, 갓 기간테폴리스에 떨어졌을 즈음의 그와는 몰라보게 달라진 케이스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꽤 징그럽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두 눈이 있었던 곳에는 생기 없는 푸른 눈 대신 의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목덜미 뒤에는 이제 갓 손에 넣은 미스터 인세인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신의 피부는 경미한 참격이나 위력이 약한 총격 따위를 막아내 줄 얇은 코팅이 씌워져 있었으며, 손목이나 손톱 아래에는 매복형 칼날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오른손의 경우는 아예 원형도 없이 이단심문관의 의수로 대체돼 있었고 말이다.
신체의 수도 없이 많은 부분을 기계로 대체했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변화였지만, 케이스는 이러한 자신의 변화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결국 도태될 테니까.'
과잉적합자의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최소 전신을 전설, 혹은 그에 준하는 고등급의 임플란트로 도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식 밖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준 이상의 무력이 필수불가결, 이 수많은 부품들이야말로 케이스의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사람으로 있을 수 있을까.'
다만 무조건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몸을 점점 기계로 바꿔나가고 있자면 한 가지 고뇌가 자꾸만 뇌리를 침범했으니까.
이 첨단과 비인간의 도시, 기간테폴리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그 고뇌의 주제였다.
'여기 처음 떨어진 그 날, 맹세했지. 죽기는 싫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자고. 차가운 도시에 잡아먹히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가진 채로 말이야.'
이 세상에 떨어진 이래 케이스의 제일의 목표는 언제나 '생존'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생존에는 몸 성히 살아남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조건이 존재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난 과연… 아직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케이스는 살기 위해서였다곤 하나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고, 빙의한 몸의 성격에 잡아먹혀서라곤 하나 점점 그러한 지독한 행위에 익숙해져만 갔다.
그런 행동은 몸의 기계인 부분을 점점 늘려나갈 때마다 심해져만 가서, 마치 기계들에 사람의 마음을 뜯어먹히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위이잉-!
그렇게 케이스가 착잡한 감정에 빠져들려는 순간,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도로시로부터 보내져 온 것이었는데, 내용물은 아까 그가 수주한 의뢰의 목표물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체실험기관에 대한 상세한 정보들이 담긴 파일이었다.
'추악한 짐승은 남의 눈에 사람으로 비추어지지 않아. 사람이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할 것에 반응하지도 않고.'
그런 메시지를 보니 이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케이스, 너는 제법 괜찮은 녀석이야.'라며 웃으며 말했던 시온의 모습이 떠올랐고.
'케이스 씨는 마냥 냉철해만 보여도 꽤나 좋은 사람인 것 같았거든요.'하고 기분 좋은 듯 말했던 도로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생체실험들을 자행하던 아스클레피오스의 복지 시설에 대한 자료를 보고 조용하게나마 분노했던 케이스 자신의 모습을 상기했다.
'…그래.'
이곳은 첨단과 비인간, 광기의 도시, 기간테폴리스.
이 정신 나간 곳에서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케이스 자신 역시도 언젠가는 사람의 마음을 잃은 괴물이 돼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사람이야.'
감정이 무뎌졌을지라도 끔찍한 광경을 보고 분노했고, 남들의 눈에도 '사람'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런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람이란 말인가.
'앞으로도 그럴 거고.'
이 세상에 떨어진 첫날에 이어 케이스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죽기는 싫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남겠다.
이 비정의 도시에 잡아먹히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서.
퓨전 펑크의
개조광이 되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