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근 (1)
불꽃이 타오르는 마을.
강렬한 화마가 모든 걸 휩쓰는 와중에 마을 사람들 중 홀로 살아남은 아인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강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십 번의 폭발이 연거푸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귓가가 찢어질 만한 굉음이 들려온다.
그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오간다.
범인의 눈으로는 쫓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의 전투.
'이단자.'
그 단어를 곱씹으며 아인은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를 이단자라고 말하며 찾아온 인간은 경전 속에 나오는 악마와 같았다.
아니, 악마도 이걸 본다면 고개를 내저을 거다.
놈은 맹수도 악마도 살인마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잠깐의 장난감과 같았다. 혹은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와 같을지도 몰랐다.
이단자는 잠깐의 여흥과 심심함을 달랠 용도로 마을 사람들을 죽여나갔다.
검을 휘둘러 직접 죽이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그는 걸핏하면 가족끼리 죽이기를 강요하거나 친구끼리 억지로 생사를 건 결투를 하게 만들었다.
일주일간의 지옥.
그곳에서 살아남은 건 아인 하나뿐이었다.
그런 아인의 눈에는 이단자와 싸우고 있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단심문관.
천천히 이단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것을 보며 아인은 다짐했다. 자신도 그리되겠다고.
이단심문관이 되어 이단자란 이단자는 모조리 찢어버리겠다고.
한때는 그리 생각했을 터였다.
* * *
'젠장.'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한참 잘만 잠을 자고 있던 아인은 갑작스러운 호출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로 교단의 내부를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불운한 일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업과 야근이 끝나고 퇴근한 날이었다.
그런데 퇴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출근을 하게 되었다.
"오셨습니까."
교단의 구석에 놓여있는 작은 방.
그 앞으로 아인이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아인은 반쯤 죽은 눈으로 방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또 나타났나?"
"네."
"어디서?"
"항상 잡히던 그 나무 앞에서 잡혔습니다."
"하, 그놈의 나무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무슨."
"그랬다가는 즉시 본부로 끌려갈 겁니다."
사제는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인에게는 그 힘겨운 미소를 지을 기운도 없었다.
이번 해에만 몇 번째인지.
아인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인내해냈다.
"놈은?"
"안에 있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잠시 쉬고... 아니 대기하고 있도록."
사제에게 손을 내저은 아인은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깜깜한 내부의 중앙에는 탁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조금 전 잡혀 온 남성은 의자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아인은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네 담당자인 아인이다."
"...."
"특별한 반항 없이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들었다. 우선 그 점에는 감사하지."
그리 말하며 아인은 가방을 연 다음에 서류 몇 장을 꺼내 올린 다음에, 그 옆에 네모난 아티팩트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단자, 네 이름은?"
"...."
대답은 없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려던 아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손에서 흘러나온 빛이 방안을 밝혔다. 얼굴이 드러난 상대는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자고 있었다.
"자냐? 누구 때문에 이 시간에 나왔는데 이런...."
아인은 망설이지 않고 탁자를 내리쳤다.
퍽!
거친 소리가 좁은 방을 크게 울렸다.
"와... 이래도 자네. 놀라운데."
맞은 편에 앉은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아인이 올려놓은 아티팩트가 빛을 내더니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빠빠빠빠빰~ 빠빠라빠빠!
"으아악!"
그러자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차린 남성.
아인은 자신의 앞에 놓은 서류에다가 짧게 글을 적었다.
"익숙한 패턴이군, 출신지는... 한국이겠어."
탁.
가볍게 아티팩트를 건드리자 소리가 꺼졌다.
아인은 숨을 거칠게 쉬고 있는 남성을 보며 말했다.
"이단자."
"네, 네?"
"이름은?"
"루, 루드발크입니다."
"루드발크라."
이어서 이름 부분에 루드발크라는 글자를 적은 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여, 여기는 어디입니까."
"화합과 불꽃을 상징하는 여신 헤르트 님을 모시는 교단의 세브리온 지부다. 너는 이단 행위를 하다 적발되어 붙잡혀 왔지."
이단.
그 말에 루드발크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오, 오해십니다. 저는 그냥 나무 하나를 보러 갔을 뿐입니다."
"아, 시발."
협조적인가 했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었나.
'올 때 교육담당자를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아인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고, 덕분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가 약간 흐트러졌다.
"네가 건든 나무는 교단에서 지정한 성물 중 하나야. 즉 너는 교단의 성물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이고."
"그럴 리가, 내가 알기론...."
"손을 대면 플레이어의 체력 수치를 올려주고 랜덤으로 스킬 하나를 준다. 히든피스라고 하던가?"
"어...."
"내가 너 같은 놈을 수 없이 봤는데, 잡히면 다 그런 변명을 하더라. 그래도 넌 운이 좋은 거야. 실행하기 전에 잡혔으니까."
운이 좋은 게 맞는 걸까?
루드발크는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문득 익숙한 소리가 났던 네모난 도구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그 아인 씨?"
"말하도록."
"복무신조?"
아인은 힐끔 고개를 들더니 루드발크를 보았다.
"우리의 결의."
"와, 역시! 혹시 한국 어디에 사시...."
"난 여기 대륙에서 태어나 대륙에서 자랐다. 지구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온 게 아니라."
"네? 그럼 복무신조는 어ㄸ...."
탁!
탁자 위로 펜이 내리꽂히고 루드발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단자, 본 심문관은 이단자가 하는 것에 따라 사제님이 될 수도 있고 마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겠나?"
"네, 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인이 맞는 거 같은데?
루드발크는 의심 어린 시선으로 아인을 바라보았다.
"뭘 보냐?"
"...아닙니다."
"내 말 이해했으면 우선 내 업무에 협조하도록. ...혹시 쇠꼬챙이에 몸이 찔리거나 묶인 채로 불타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
아인의 몸에서 치솟은 기세에 소름이 돋은 루드발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이렇게 힘을 써야 말을 듣네.
"우선 어떻게 이 세계로 왔지?"
"게임을 하다가...."
"그 게임의 이름은?"
"세브링가 사가입니다."
아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머리를 꾹꾹 눌러대었다.
"세브링가 사가?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밖에 아직 있나?"
문이 열리면서 하급 사제가 황급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말씀하시지요, 아인 님."
"가서 세브링가 사가인가 뭔가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사제가 들어온 것의 몇 배나 되는 속도나 달려 나가고, 아인과 루드발크의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다음으로 이어서, 이명은?"
"...네?"
"이단자들은 이명... 아, 닉네임이었나? 그걸로 서로를 구분하잖아."
"그... 꼭 말해야만 하는 겁니까?"
"장난하는 거 같냐?"
루드발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을 만큼 말하기 싫었으나 진짜 죽어도 좋다는 건 아니다.
"'개고기탕후루냠냠'입니다."
"개고기탕후루냠냠이라. 이름에서 악의가 느껴지네."
"아, 이게 전에 하던 게임의 게임사가 운영을 개같이 하기에...."
"조용하도록."
"넵."
이름 밑에 있는 이명 칸에 기어코 '개고기탕후루냠냠'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혹시 널 상대하는 데 유의할 사항이 있나?"
"네?"
"뭐, 예를 들면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거나 그런 거."
"딱히 없습니다."
"좋아."
어리바리하지만 성격이 모난 부분은 없다. 말을 하는 걸 보니 조심성도 있고, 협조성도 있는 편.
즉... 일이 빨리 끝날 각이 보인다는 거다.
아인이 담당자 의견란에다가 루드발크에 대한 판단을 적어 내려가던 사이에 다시금 문이 열리며 사제가 들어왔다.
그는 한 뭉텅이 되는 서류들을 아인의 앞에 내려놓았고, 아인은 대충 서류를 훑었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서 행동을 멈췄다.
'세브랑가 사가, 배경은 제국력 564년에서 601년 사이인가.'
현재가 제국력 755년이니 무려 150년에서 200년 사이의 일이었다.
아인은 '시간'이라는 칸 옆에다가 간략하게 한마디를 적었다.
「미래 예지 위험 없음.」
오랜 경험이 말해주는 건데, 이 정도까지 적으면 답이 나온다.
'위험성은 극도로 낮다.'
그리 생각한 아인은 슬쩍 하나밖에 없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구름이 많이 껴서 달빛이 옅었다. 바깥은 주변의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여신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 눈을 감아주는 것 같네.'
고통받는 이단심문관을 위한 여신님의 세심한 배려가 아닐까.
그리 생각한 아인은 다시금 서류를 내다보고는 나머지 사항을 대충 체크 했다.
남은 항목은 두 개.
"네 능력은 어떻게 되지?"
그런데 여태까지 협조적이었던 루드발크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까지 말해야 합니까?"
이빨을 세운 맹수처럼 사나워지는 얼굴. 하지만 그조차 이미 익숙할 뿐이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축소하고 싶으면 축소해도 되고, 거짓말을 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네?"
"다만 그 책임은 네가 지는 거다?"
아인은 손에 쥔 펜을 휙휙 굴리며 말했다.
"아까 말한 거 기억해?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데 말하지 않은 놈이 있었다는 거."
"네, 네."
"그런데 놈이 어느 날 갑자기 돼지고기를 먹더니 발작하기 시작하더라. 결국 제 몸에 불을 지르더니 교단 본부 내부에서 테러를 감행했지."
"그걸 왜 저한테...."
"놈이 어떻게 되었을 거 같아?"
아인의 물음에 루드발크는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죽었습니까?"
"아니? 죽긴 왜 죽어? 놈은 멀쩡히 살아있어. ...정확히는 죽어가던 걸 살렸지."
"...그다음에 지하에 있는 감옥에 처넣었어. 그리고 지금도 놈에게 지급되는 두 끼 중 한 끼의 식사에는 무조건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저는 불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는 검을 쓰고... 또...."
더듬거리면서도 이어 나가는 루드발크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은 아인은 마지막 부분에 한마디를 적었다.
「위험도 최하.」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이 정도면 교육담당자한테 넘기기만 하면 되겠어.'
잘만 하면 해 뜰 때쯤에는 퇴근할 수 있겠는데?
"아, 마지막으로 특이사항 같은 거 있나?"
"특이사항이요?"
"그래, 별다른 게 없다면 딱히 말할 필요는 없고."
뭐 이제와서 특별할 게 있나.
아인이 그대로 펜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아, 대단한 건 아닌데... 제 손에 용이 있습니다."
"...용?"
"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한 번씩 팔에서부터 튀어나오려고 하죠. 크윽."
아인은 힐끔 루드발크의 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용족 특유의 불길한 마나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즉....
"지랄한다."
거짓말이다.
"저, 정말입니다!"
억울해하는 루드발크를 보던 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병이 있는 게 죄는 아니지.
아인은 내려놓으려던 펜을 다시 잡고는 평가서의 가장 밑에 적어둔 '최하'라는 위험도를 '중하'로 바꾸고 한마디를 추가로 적었다.
「빙의자 특유의 정신병이 있음.」
계획은 변경이다.
정신병이 있는 걸 확인했으니 해가 뜰 때 퇴근하는 건 불가능하겠네.
'제발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는 퇴근하게 해주세요.'
모처럼의 휴일에 이건 아니잖아.
아인은 진심으로 기도했다.
2화 야근 (2)
완성된 서류를 둔 채로 나무로 된 가방을 열어 펜을 집어넣은 뒤 아인은 몸을 일으켰다.
"가지."
"저, 저기. 심문관님? 그으, 일이 끝나면 질문을 받아주신다고...."
"그냥 질문 안 하고 따라오면 안 되나?"
"...."
"빨리, 간단히 해."
"이제부터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교육담당자한테 물어보도록.
그 말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걸 참은 아인은 다시 한번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처음의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가 이제는 난잡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개고기탕후루냠냠,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그 이름으로 좀 부르지 않으시면 안 됩니까."
바라는 것도 많네.
"네게는 크게 위험한 요소가 없으니 사회화 교육만 제대로 이수하면 자유를 얻을 거야."
"다, 다행입니다. 이단자라고 해서 고문 같은 걸 당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한때는 그런 시절도 있었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는 그때 나름의 장점이 있었는데.
이단자라면 일단 죽이거나 잡아서 가두던 시절. 교단과 제국이 연합하여 이단자와 싸우던 시절이 그렇게까지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아쉽게도.'
마녀에게 빙의한 이단자 루나리아가 가장 악명 높은 빙의자 다섯 중 셋을 찢어 죽이면서 교단에 손을 내민 순간.
모든 게 뒤바뀌게 되었다.
제국은 검을 거두고 민심을 다스렸으며, 세 개의 교단은 각종 교화책과 이단자의 복지를 맡게 되었다.
'정말 끔찍한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인은 무뚝뚝하게 가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지. 결국 이단자도 인간이니."
"하하, 그렇죠. 다행입니다."
"그럼 빨리 좀 움직이자."
빨리 퇴근 좀 하고 싶다.
* * *
붙잡아 온 이단자를 상대로 신상정보와 위험도를 측정하면, 그 이후로는 뺑뺑이를 돌면 된다.
주교를 찾아가서 서류를 제출하고, 허가받고, 각종 신체검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교육 담당 교원에게 이단자를 넘기면 되는 것.
절차를 떠올리다가 슬슬 감겨오는 눈을 비비며 아인은 중얼거렸다.
"에반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절차를 모두 밟았다가는 제시간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퇴근도 아니지 않나. 원래라면 오늘은 쉬는 날인데.'
결국 선택해야만 했다.
주교에게 서류를 내고 허가를 받는 일? 이단자의 신체검사?
까짓거 순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했다.
"저기, 심문관님. 혹시 자유를 얻는다는 게 어떤 건지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해가 뜨고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하는 교단 지부의 복도를 걷던 도중, 침묵이 계속되는 게 불편했던 루드발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원래 몸... 그러니까 루드발크의 기억은 남아있어?"
"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
하나는 정식으로 루드발크의 기억이 있음을 입증받고 루드발크의 삶을 사는 것.
다른 하나는 루드발크로서의 인연을 끊고서 교단의 안전 수칙을 따르는 선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마지막 하나는 교단에 들어오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건 교단은 존중하니 편하게 결정해라. 다만 교단에 남아있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거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이 드는 건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루드발크를 보며 아인은 슬쩍 속도를 높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단에서 몇 안 되는 화려한 느낌이 드는 문 앞에 도착했다.
쿵쿵.
"루루실 상급 사제, 안에 있어?"
가볍게 문을 두드린 아인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잠깐 후, 방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와."
문고리를 돌리고 밀자 부드럽게 문이 열리며 개인 업무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꽤 넓은 방에는 각종 화분이나 책이 빽빽이 꽂혀 있는 고급진 책장과 책상 등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눈에 띄는 건 책상 앞에 가지런히 앉은 채로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제국 내에서도 상당히 희귀한 어깨까지 내려오는 백금발과 옅은 느낌의 연녹색의 눈을 지닌 여성은 약간 수수한 느낌이 드는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수수한 복장조차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만들 만큼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정말 더럽게 화려하네.'
이단심문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둡고 칙칙해진 자신의 영역과 정반대의 느낌이다.
뭐 사비로 자기 방을 꾸민다는데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오."
그때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루드발크가 약간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또 시작이네.
"이단자를 인계하러 왔는데."
"아, 이쪽이 새벽에 성물 앞에서 붙잡혔다는 분?"
"루드발크라고 합니다."
"저는 이단자 사회화 교육 담당인 루루시리피아린트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네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리숙하게 고개를 숙여대는 루드발크를 보며 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글렀네.'
당장이라도 교단에 들어올 기세다.
기껏 오는 길에 세 가지 길이 있음을 알려주었는데, 그게 다 소용없게 되었다.
'어차피 자기 인생이니 알 바 아니긴 하지.'
좀 하다가 때려치울 게 뻔하기도 하고.
"이 뒤는 잘 부탁하지."
아인이 건넨 서류를 받은 루루실은 천천히 내용을 살피다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주교님의 허가 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데?"
"거기에 안 들렀다가 왔으니까."
"...그럼 신체검사 기록지는 어디에 있어?"
"아직 신체검사를 진행하지 않았지."
"에라이."
루루실이 서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혹시 작성한 서류를 주교께 확인받고, 이단자를 데리고 신체검사를 받는 것까지 이단심문관의 일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지?"
"그쪽 사제들이 출근하려면 아직 멀었잖아. 부탁 좀 하자고.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니면?"
"진작에 퇴근했어야 할 사람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루루실은 아인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인은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를 뒤적거려 시계를 꺼낸 다음 시간을 확인했다.
"부탁 좀 하자?"
루루실은 서류 위로 눈만 드러낸 채로 고민했다.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 괜히 루드발크가 안타까워할 때 루루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번만이야. ...그리고 서류는 주교께 직접 제출해."
아인은 잽싸게 서류를 회수했다.
신체검사를 대신 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주교에게 서류를 제출하고 허락을 받는 건, 신체검사 뺑뺑이를 돌리는 것에 비하면 쉬운 일이니까.
'정오 퇴근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인은 루드발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본다."
"아, 잠시만요. 심문관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루드발크가 다급히 아인을 잡았다.
뭔데?
"사실 갑자기 이곳에 떨어진 이후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 도시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후로는 막막했거든요."
루드발크는 고개를 숙이며 아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심문관님 같은 좋은 분을 만난 것 같네요."
"나야말로 성실히 협조해 줘서 고마웠어."
사실 오늘 말고 내일 나타났다면 정말 고마웠겠지만 말이다.
덜컹.
"어...."
제 할 말만 하고선 떠나가는 아인을 보며 어색하게 서 있던 루드발크는 손을 회수했다.
그 모습을 보던 루루실은 상황이 더 어색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신체검사부터 하러 가시죠."
"네네."
앞서 걸어가기 시작하는 루루실을 루드발크는 황급히 따랐다.
"저... 그러니까 루루시...."
"루루시리피아린트에요."
"네. 루루시...."
말을 이어 나가려던 루드발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방금 들었던 거 같은데 말로 하려고 하면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았다.
그 전에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루루실은 익숙하다는 듯이 슬쩍 웃었다.
"제 이름이 발음하기 좀 어렵죠? 다들 처음에는 그러더라고요."
"네네. 그러네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루드발크는 문득 아인이 루루실을 짧게 불렀던 걸 기억했다.
아마 이름이 워낙 부르기 어려워서 다들 그리 부르는 듯 보였다.
루드발크는 힐끔 루루실의 가슴께를 쳐다보았다. 부정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가슴께에는 흔히 말하는 사원증 같은 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화 교육 담당 루루실」
심지어 그곳에도 루루실이라는 이름 석 자만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럼 제가 무어라 부르면 될까요."
"네? 아아."
루드발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성을 부르지 말라고 한다거나, 반대로 성과 직급만으로 불러달라거나, 혹은 영어 이름 따위로 말해달라고 한다거나 말이다.
즉 짧게 부르는 것 역시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괜히 긴장되는 건 슬쩍 눈동자만 굴려도 들어오는 수려한 미모는 물론이고,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특별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건지 루루실은 딱 잘라 말했다.
"될 때까지 노력하면 되죠."
"네?"
"그래도 일주일 정도 헤매면 어느 정도 외우긴 하더라고요."
철벽 그 자체인 대처에 루드발크는 어버버 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애초에 자신은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다급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심문관님은 원래 저리 바쁘십니까?"
"네?"
"새벽부터 일하러 나오시기도 하고, 들어보니 오늘은 원래 휴일인 데다가 어제도 밤늦게까지 일하셨다고 들어서요."
"유능하지만 운이 없었죠."
짤막하게 말을 꺼낸 루루실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제국과 교단이 이단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기도 했거든요."
루드발크는 아까 전 아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아인은 그때도 이단심문관이었죠. 여신님께 성물을 하사받을 정도로요."
"정말입니까?"
게임으로 이 세계를 겪었던 루드발크는 성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네. ...뭐 결국 사도에 들지는 못했죠. 안타깝게도요."
루루실은 가볍게 혀를 찼다.
성물을 하사받는다는 건... 의무를 짊어지는 것이다. 반면 사도라는 칭호는 그만한 권력을 갖게 되지만.
즉 지금 아인은 권력은 주어지지 않은 채 의무만 지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이단자의 위험도를 판단하는 건 이단심문관의 일이라 어쩔 수 없던 거니까요. 아마 주교께 서류만 제출하고 난 다음 퇴근하겠죠."
"하하, 그렇군요."
"뭐, 그것도 쉽지는 않겠지만요."
"어째서죠?"
"아까 보아하니 아인 심문관이 서류를 좀 대충 작성했더라고요."
루드발크는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심문받던 그가 보기에도 뭔가 대충인 감이 있었다.
"아마 주교께서 그 서류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걸요."
루드발크는 슬슬 아인이라는 인간의 삶이 그려지는 거 같았다.
그는 비록 이단자로서는 막 이 세계에 떨어진 청년이지만, 원래 세계에서는 나름 대기업의 과장을 달뻔한 대리로서 사회의 맛을 씹고 뜯고 맛보았다.
그런 그가 보기에 아인은 의욕은 없으나 능력은 좋은 과장.
딱 그런 느낌이었다.
밑에서는 대리와 사원들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고, 위에서는 꼰대 같은 부장에게 시달린다.
하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퇴사는 못 해서 하루하루 야근과 피로로 찌들어가는 삶.
'지금쯤 갈궈지고 있겠네.'
루드발크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던 아인에게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주교란 분은 많이 까다롭나요?"
"까다로운 것도 있고요."
"있고?"
"아인보다 어린 것도 있고요."
"맙소사!"
루드발크는 말없이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자신보다 어린 상사는 언제나 최악이었다.
그도 대기업 시절 회장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상사를 데리고 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에서도 하지 않았던 기도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불꽃과 화합을 상징하는 여신이시여, 부디 아인이라는 이단심문관을 가엽게 여겨주시길.'
* * *
"아아, 여신이시여 제발 저 좀 구원해주시옵소서!"
주교실 안에서 여신을 찾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배님, 일 좀 제대로 해주십쇼! 제가 선배님 하는 일을 방해합니까, 아니면 업무 외의 일을 지시합니까. 하는 일만 똑바로 하자는 거 아닙니까."
"...."
"저한테 서류 확인받고 신체검사하는 거 지켜본 다음 교육 담당관한테 인수인계하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처절하기 그지없는 외침과 함께 은근슬쩍 어깨로 올라오는 손.
어딜.
아인은 제 어깨에 올라간 손을 내리쳐버렸다.
"내 업무가 그것만 있다 생각하냐."
"그래도 선배님은 여신께 성물까지 하사받으신 분 아닙니까. 책임감 좀 가져 주십쇼."
"무슨 성물 받으면 몸이 두 개로 늘어나나? 그렇다면 어디 내 걸 줄 테니 해보던가. 어?"
당장이라도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을 기세에 주교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직책상으로는 주교는 이단심문관보다 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칙이다.
'차라리 내가 밑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다.'
주교는 자신이 주교란 사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3화 야근 다음에는 특근 (1)
"이번 한 번만입니다."
결국 먼저 접고 들어가는 건 언제나처럼 주교였다.
한참의 입씨름 끝에 그는 언제나처럼 깨달은 것이다. 입씨름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한참을 더할 수 있다는걸.
"그래도 서류는 선배께서 다음에 루루실 상급 사제에게 가져다주시죠. 순서를 반대로 한 건 선배님이시니까요."
쾅, 하고 확인 인장을 찍은 뒤 주교는 서류를 건네었고, 아인은 그걸 받은 다음에 들고 다니는 목제 가방에 쑤셔 넣었다.
물론 서류는 직접 루루실에게 건넬 생각이다.
다만 그게 오늘은 아닐 뿐.
'내일 줘도 큰 문제는 없으니.'
굳게 닫은 가방을 들어 올리는 아인을 주교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대로 퇴근하십니까."
"그래, 나도 좀 쉬어야지 않겠나?. 쉬는 날 새벽에 나온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잖아. 이놈의 교단은 왜 이따위로 운영되는 거래."
역시 사람이 적으면 할 일이 몰리는 법이다.
"이래서 지부는 안 된다니까. 본부로 갔어야 하는데."
"본부로 가면 귀찮게 하는 놈 많다고 지부로 온 건 선배님이잖습니까."
"내가 진짜 은퇴하든가 해야지."
아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주교실을 벗어났다.
순식간에 홀로 남게 된 주교, 브라운은 아인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몸을 기대었다.
"좀 쉬기는 무슨."
오랜 시간을 같이해온 만큼 그는 아인이란 인간을 잘 알았다.
단순히 쉬고 싶어서 일을 대충 한다?
그런 일은 주교가 아는 아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정보나 캐러 갔겠군.'
아인의 사정을 나름 잘 아는 주교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기도했다.
부디 이번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기를 말이다.
* * *
"이게 자유지."
건물을 나서자마자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에 아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머리 위로 올렸다.
불꽃과 화합의 여신이 내리는 축복이 가장 활발한 정오.
드디어 퇴근했다.
세브리온 지부 건물을 나온 그는 곧장 나 있는 길을 따라서 걸었다. 하지만 집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아쉽게도 휴일은 노는 날이 아니다. 교단의 일 외의 일을 하는 날일 뿐.
며칠 전부터 쉬는 날 할 일을 정해두었던 아인으로서는 새벽에 일을 좀 했다고 잠을 자러 갈 수는 없었다.
휴일이라고 해도 해야 할 일은 있는 법이기에.
"안녕하세요, 사제님."
"오늘도 날씨가 좋습니다."
"그... 여신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단 앞 거리를 걸으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아인은 능숙하게 행동헀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받거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거나.
"여신님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혹은 가볍게 말을 받아주거나.
그렇게 번화가를 벗어난 아인은 로브를 둘러쓰고 외곽 쪽으로 향했다.
얼굴을 가린 채로 외각 거리를 걸은 그는 이내 하나의 술집 앞에 도착하였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꽤 오랜만에 온 거 같은데 변한 게 없군.'
겉보기에는 그냥 술집으로 보이는 이곳은, 용병들에게 간단한 일거리를 제공하거나 반대로 그들에게 정보를 팔기도 하는 등의 여러 역할을 하는 복합 시설이었다.
아인은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곧장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직원과 마주할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늘어진 곳으로 다가가, 정확히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어서 오십쇼, 손님.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직원의 물음에 아인은 우선 주머니에서 은화 두 개와 동화 다섯 개를 꺼내었다.
"맥주 두 잔과 비프 수프 한 그릇, 그리고 주인장 추천메뉴로."
"거스름 돈은 어떻게 할까요."
"팁으로 주지. ...밀란, 나는 내가 왜 이 짓을 매번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아인의 말에 갈색 머리를 단정히 묶은 여성 밀란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게 마스터가 정한 룰이라서요. 그보다 죄송한데, 현재 마스터께서는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남긴 말은 없나?"
"열심히 찾고는 있으나, 아직 제대로 된 정보는 없다고 합니다."
아직 정보가 없다라.
아인은 잠시 눈앞에 자신이 꺼낸 은화와 동화를 보다가 손짓을 했다. 밀란은 그제야 제 앞에 놓인 돈을 회수해갔다.
'이번 달에도 허탕이군.'
아인은 오래전부터 쫓는 이단자가 하나 있었다.
메이비스.
회귀니 빙의니 아무튼 이단자가 판을 치는 시대에서 가장 먼 미래를 보고 왔다는 자. 아인이 그를 쫓는 이유는 물어볼 게 있어서다.
제국과 교단의 미래.
'제국이 무너지고 세 개의 교단이 하나로 흡수된다라.'
전쟁이 끝이 다가오는 시기에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
물론 이단자와의 전쟁이 끝난 후 제국과 세 교단은 점점 더 탄탄해지고 있기에 헛소리에 가까웠으나....
'무시하기에는 너무 거물급에게 들었던 이야기란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제국과 교단이 무너질 기색이 보인다면.
'...에라, 모르겠다.'
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두 가지의 일만 끝내면 이 빌어먹을 교단을 뜰 생각이었다.
하나가 바로 메이비스와 관련된 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것.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으나, 처음부터 거기서 태어난 건 아니었다.
갓난아기 때 시골 마을에 버려졌고, 자신을 주워준 노부부의 밑에서 자란 것.
'날 버린 게 누구인지는 알아내야지.'
그걸 찾기 위한 방법이 교단에 있으니까.
어쨌건 아인은 그 외에는 더 이상 미련도 뭣도 없다.
다 끝나면 은퇴라도 해야지.
'생각해보면 이단자들과의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버렸단 말이지.'
덕분에 평화가 찾아왔으나, 이단자를 닥치는 대로 조질 수가 없으니 정보를 얻기가 많이 불편해졌다.
아인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괴며 물었다.
"다른 소식은 없나?"
"아, 최근 놈들의 활동이 세브리온 부근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 같답니다."
"놈들?"
"이단자들을 후원하여 무차별적으로 범죄를 일으키는 놈들 말입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할 거면 직접 하지, 괜한 놈들을 붙잡고 난리를 피우다니.
"...그럼 주문을 좀 하고 싶은데."
"네. 무엇을 드릴까요."
아인의 말에 직원이 사근사근하게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몇몇 인간들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아인은 말없이 사람들을 훑었다. 경박한 자세나 나름 떡 벌어진 어깨들, 피 냄새가 흐릿하게 나는 모습과 이곳의 위치 등등.
'용병이군.'
딱히 용병과 접점이 있는 건 아니니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아인이 밀란에게 손짓했다.
"다른 직원을 불러와."
귀찮은 일에 끼어들 마음은 없다.
아인의 행동에 고개를 숙인 밀란이 슬쩍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오니까 가려고 하네? 뭐야 밀란, 내가 작업 걸 때는 개무시하더니, 이딴 샌님하고 놀아나고 있어?"
짜증을 부리며 소리치는 사내는 이미 취할 대로 취한 듯 보였다.
"취했나. 말이 통하지는 않겠네."
"그래서 뭐?"
"지금 가면 그냥 보내줄 테니 얌전히 숙소로 돌아가는 게 어때?"
"죽고 싶나 보군."
침착한 아인의 말에 도리어 분노한 사내가 주먹을 들어 올려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쾅!
돌연 사내의 머리가 테이블 위로 처박혔다.
아인은 자신의 손에 머리가 붙잡힌 채로 처박힌 사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남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쾅!
그리고 다시 처박았다.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고, 아인은 그제야 그를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남자의 몸이 자연스럽게 바닥을 구르자 뒤에 있던 용병들의 손이 각자의 무기로 향했다.
아인은 그 모습을 보다가 넌지시 말했다.
"무기를 꺼내면 후회할 텐데. 안 그래도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그냥 그놈이나 데리고 꺼져."
"후회? 후회는 네놈이 할 일이고. 야! 다들 일어나!"
용병 중 하나의 말과 동시에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인은 그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기나 해 볼래? 네가 무릎 꿇고 사죄를 하게 되면 내가 이기는 거고, 아니면 네놈들이 이기는 거지. 뭐... 금액은 각자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어때?"
"각자 주머니의 돈을 걸고 내기해보자고?"
갑작스러운 말.
사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은화와 동화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돈 좀 있는 놈이겠군.'
어차피 그냥 뺏어도 되는 것이지만, 사내는 즐기자는 마음으로 자신 있게 손짓했다.
"어디 한 번 해보ㄷ... 헉."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코앞에 와 있는 주먹.
믿을 수 없는 속도가 사내의 몸이 뒤로 주춤했으나, 아인은 그대로 사내를 후려치는 대신에 손을 가만히 폈다.
아인의 손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따사로운 빛을 받은 사내는 취기가 순식간에 날아가는 걸 느끼고는. 얼굴이 시퍼레졌다.
"어, 어어어!"
그는 저도 모르게 어버버거렸다.
신성력을 몸으로 느낀 후에야 자신이 누구에게 시비를 걸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야, 갑자기 왜 그래?"
"사, 사제. 사제님! 죄송합니다!"
다급히 소리친 사내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몇몇은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반대로 눈치 빠른 사내들은 동료의 어깨를 잡아끌며 소리쳤다.
"누가 사제한테 시비를 건 거야?!"
"죄송합니다... 뭐해! 빨리 고개 안 숙이고!"
이럴 거면 무슨 자신감으로 시비를 걸었던 건지.
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물었다.
"아까의 패기는 어디 가고?"
"죄송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내는 바들바들 떨어댔다.
한낱 용병질이나 하며 살고 있었지만, 기본적인 상식은 있었다.
'기도를 올리지 않고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다는 건 못해도 상급 사제다!'
교단의 지부가 떡하니 있는 세브리온 같은 곳에서 상급 사제는 귀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디...."
바들바들 떨며 말하는 남자를 보며 아인은 손을 까닥였다.
놈들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 묶어서 끌고 가는 방법도 있고, 더한 방법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뒤처리가 귀찮아서다.
교단의 지부와 도시를 지배하는 백작급 귀족이 함께 있는 이곳에서 일을 벌이면, 이단자 하나 받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일이 늘어나고 만다.
'이깟 놈들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날려 먹을 수는 없지.'
그래서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좋아, 자비를 베풀지."
"감사합니다!"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사내.
그때 아인이 말했다.
"그럼 내기는 내가 이긴 거 같네."
"네?"
"내기. 조금 전 직접 한 말도 기억 못 하는 머저리였냐?"
"아,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눈치챈 사내는 즉시 일어나 자신의 돈주머니를 아인의 앞에 내려다 놓았다.
"나머지는?"
"...네"
"무기를 뽑은 놈, 호응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놈. 모두 이 내기에 참여한 거 아니었어?"
"저, 저희는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뭐?"
한 번 노려보자 눈 깜빡할 사이에 돈주머니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돈을 내민 용병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인의 시선이 문득 가게 내부에 있는 음식들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새벽부터 눈을 떠서 아직까지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네.
"저녁 거리랑 술 좀 주지."
"알겠습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미리 만들어두기라도 한 것인지 빠르게 만들어져 나오는 요리, 그보다 빠르게 나오는 맥주.
잔을 든 김에 한 번에 들이켠 아인은 해가 서서히 지려고 하는 밖을 보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큰일 없이 지나가네.'
원래 새로운 이단자를 상대하는 건 첫날이 가장 고달픈 법이다. 특히 사회적 지식이 부족한 이단자일 경우 더 그러했다.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를 자신만의 규칙이나 사상을 마치 대륙의 상식처럼 늘어놓으며 설득하려는 걸 보고 있으면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루드발크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신체검사를 대신 부탁하긴 했으나, 한 번은 가서 확인해야 했다. 능력의 제어라던가 다른 문제가 없는지 확인도 해봐야 하고.
이렇듯 이단자 한 명이 나타나면 생기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생각을 그만두자.'
어차피 오늘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 아인은 음식을 입에 넣고서 새로 나온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간이 흐르며 하나둘 잔이 쌓여가자 아인은 취기를 살짝 느꼈고, 그 사이에 밖은 어두워졌다.
눈앞에 약간 남은 요리를 보며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 하면 좋을 거 같은데.'
아니면 그걸 참는 대신 조금 더 멀쩡한 정신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좋다.
매력적인 선택지 사이에서 아인의 고민이 깊어질 때쯤이었다.
콰아아앙!
순간 폭발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터졌나 보군."
"그러게. 어디 조직끼리 싸움이라도 일어난 거 아닌가 걱정되네요."
걱정스러운 밀란의 말에도 아인은 무덤덤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어차피 휴일이고, 이런 일은 그의 담당도 아니었으니까.
"한 잔 더."
"사제님, 내일 또 일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인은 말없이 손짓했다.
그러자 밀란은 어색하게 웃고서는 즉시 새로운 술잔을 아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인이 마지막 잔을 손에 쥔 순간이었다.
쾅!
방금 전 폭발음에 버금가는 소리를 내며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황급히 들어왔다.
"기, 기사?!"
"그냥 기사가 아니야. 성기사다."
"누굴 잡으러 온 거 아니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성기사를 보며 가게 안에 있던 용병들의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점점 커지는 소란 속에서도 들어온 성기사는 개의치 않은 듯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서며 소리쳤다.
"아인 님!"
"...젠장."
아인이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려놓는 것과 성기사가 그를 발견한 건 동시였다.
"무슨 일이야?"
"큰일 났습니다, 이단자가 폭주를 시작했습니다."
하, 이러니 욕을 안 하래야 안 할 수가 없다.
* * *
불꽃이 피어오르고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몇몇 사제들이 필사적으로 보호막을 펼치고 있었으나, 딱 봐도 역부족으로 보였다.
높게 치솟은 불꽃은 당장이라도 주변을 흔적도 없이 태울 기색이었고, 그 중심에는 루드발크가 서 있었다.
"진짜 폭주하고 앉았네."
아인은 오늘만 몇 번째인 모를 한숨을 내쉰 다음, 가볍게 바닥을 박차 다음 불길 사이로 뛰어들었다.
본능만 남은 루드발크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동시에 아인이 휘두른 나무 가방이 그의 얼굴에 처박혔다.
퍼억!
몸이 붕 뜬 루드발크의 몸이 바닥을 몇 바퀴가 구른 뒤에야 멈췄다.
그 사이에 아인은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손을 가져다 대다가 멈칫했다.
결국 양손을 모으고 잠깐 눈을 감았는데, 문득 새벽에 루드발크가 한 말이 떠올랐다.
"팔에 용이 깃들어 있다고 했지? 용은 모르겠는데 불꽃은 있네."
그것도 꽤 강렬한 것으로.
"루드발크. 잘 들어라, 지금부터 정화 의식을 시작할 거야."
아인의 전신에서 신성력 뿜어져 나오나 싶더니 이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부디 의식이 끝나기 전에 제정신을 찾기를 바란다."
한대라도 덜 처맞고 싶으면 말이다.
4화 야근 다음에는 특근 (2)
어둑해진 도시.
시뻘건 불기둥이 연신 하늘로 치솟으며 주변을 밝힌다.
닿기만 해도 몸이 녹을 것만 같은 불길 사이를 가로지른 아인은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루드발크의 몸이 바닥을 굴렀으나, 즉시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빛냈다.
루드발크에서 손에서 뻗어 나온 화염이 그물처럼 쏟아졌다.
그걸 양손으로 잡아 뜯은 아인은 루드발크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정신 계열 마법은 결국 뇌를 건드는 거다.'
즉 정신 공격에 당한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도 뇌를 건들 필요가 있다.
아인은 언젠가 만났던 빙의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퍼퍽!
연달아 휘둘러진 주먹이 연달아 루드발크의 턱과 머리를 강타했다.
"크악, 으악!"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루드발크가 거칠게 손을 휘두르자, 불길이 따라서 치솟는다.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의 화력.
슬쩍 뒤로 빠져 불길의 밖으로 나간 아인은 힘이 살짝 약해지자마자 안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루드발크의 손가락이 아인에게로 향한다.
'왼쪽 어깨?'
아인은 재빨리 상체를 비틀었고, 한발 늦게 폭발이 일어났다.
'능력의 활용도도 좋고, 위력도 나쁘지 않고. 이단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다더니 거짓말인가?'
불길은 점점 거세졌으나 아인은 차분하게 움직였다.
능숙하게 거리를 좁혀나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거세지는 불꽃에 비하면 초라한 움직임이었으나,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엄청난 불길이네요."
신성력을 일으켜 보호막을 펼친 채로 불길이 퍼지는 걸 막아서던 중급 사제는 흐르는 땀을 간신히 닦아내며 말했다.
사제의 수가 점점 늘어나 거의 여덟 명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확산하는 불길을 막는 것만도 벅찬 상황.
"루루시리피아 상급 사제님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런 불길을 어떠한 노력도 없이 일으킬 수 있다니."
"저들이 괜히 이단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요."
루루실은 보호막 안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며 말했다.
남의 몸을 빼앗고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이 이단자라는 존재에 대한 경계와 적개심을 가지게 했다면, 기나긴 전쟁을 일으킨 건 이단자들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심지어 이단자들은 강대한 힘을 지녔음에도 다루는 법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심문관님이 걱정되네요. 저런 괴물과 홀로 싸우시다니."
이어진 말에 루루실은 중급 사제를 살폈다. 자신보다 어린 사제의 표정에는 진심으로 걱정이 가득해 있었다.
"아인 심문관이라면 걱정할 거 없어요."
"하지만 불길이 이렇게 거센데요."
"이 불길이 아무리 거세다 하여도, 그가 싸웠던 자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니까요."
루루실은 아인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순간 땅이 흔들리며 불꽃이 터져 나왔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했다.
불꽃은 하늘에 높이서 폭발하더니 비처럼 사방으로 쏟아지다가, 이내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며 한곳으로 떨어졌다.
타타탓!
물방울이 튀듯 터지는 작은 폭발들. 그 경로에 선 아인은 힐끔 불꽃의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더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을 나뒹굴던 나무 가방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아인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아인은 그걸 냅다 던졌다.
가방은 무의식 상태에서 양팔을 벌리고 불꽃을 조종하던 루드발크의 머리를 강타했다.
루드발크의 몸이 흔들리며 제어력을 잃은 불꽃이 떨어진다.
아인은 오른발을 뒤로 쭉 밀며 신성력을 다리에 모았다.
팟!
바닥을 박차 수십 걸음의 거리를 좁힌다.
연달아 주먹을 휘두른 다음 오른손으로 쓰러지려는 루드발크의 머리를 꽉 쥐었다.
동시에 왼손은 가슴께에 올라갔다.
"화합의 여신이시여. 부디 어리석은 자를 위해 자비를 베푸소서."
아인의 가슴께에서 흘러나온 빛이 손을 타고 루드발크의 머리로 파고 들어갔다.
"컥, 커억!"
신성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머리를 쥔 무지막지한 악력 때문인지 몰라도 몸을 비틀거리며 비명을 지르던 루드발크는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인은 잠깐 기다렸다가, 불꽃이 기세를 잃고 서서히 사그라드는 걸 본 뒤에야 루드발크를 잡은 손을 놓았다.
한참 보호막을 펼치던 사제들이 다급히 아인에게 달려왔다.
"심문관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이, 이단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압했어. 구속은 하되 우선 교단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하도록."
"알겠습니다."
사제들은 아인을 찾아왔던 성기사의 도움을 받아 루드발크를 붙잡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자, 같이 왔던 루루실이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보다 큰일 났는데. 새로 나타난 이단자가 첫날부터 폭주했으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게 있다면, 앞으로 존나게 바빠질 예정이라는 것과....
'그 일의 대부분이 내 몫이라는 점이네.'
...탈주할까?
아인은 순간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상황부터 정리해야겠네."
어느새 세브리온의 시민들이 끌어온 물로 불을 끄고 있었다.
게다가 영주의 저택에서부터 강한 마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최근 자랑하는 마법사 놈인가? 이걸 이제야 움직이네.'
어쨌든 마법사가 움직였으니 불길은 머지않아 잡힐 것이다.
아인은 루루실에게 말했다.
"혹시 화재에 휘말린 사람이 있나 찾아보자."
"알았어. 나는 저쪽으로 갈게."
루루실은 남아있는 사제 몇에게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아인 역시 잠깐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금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순간 구경을 나온 사람들 사이가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그 인파를 뚫고 나온 주교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말했다.
"심문관, 잠깐 나 좀 보지."
* * *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주교 브라운은 흘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많이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주교 브라운은 잠시 밖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 책상 앞에 서 있는 아인을 돌아보았다.
이단자가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대형 사고가 터져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속에 담긴 분노를 지랄같이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는 본능대로 지랄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이번 일이 루드발크라는 이단자가 악의를 가지고 벌인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대처도 빨랐으니 뭐라 하기도 뭐했다.
절대, 절대로 나이 많은 부하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선배, 쉽게 묻힐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남들하고 있을 때는 저기, 심문관 따위로 부르다가도 둘이 있으면 귀신같이 존댓말을 해온다.
아인은 일찍 출세한 후배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물었다.
"아니면 ...설마?"
"네. 아무래도 원격으로나마 징계위원회가 열릴 거 같습니다."
"젠장."
그놈의 징계위원회는 틈만 나면 열리네.
"안 그래도 저쪽에서도 항상 우리를 벼르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진행될 거 같냐?"
"아마 이단자의 위험 등급이 두 단계는 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피해는 크지 않지만 불길은 확실히 강력했고, 한 번 폭주한 사람이니 재차 폭주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겠죠."
하긴 그게 놈들의 방식이긴 했다.
"같은 식구끼리 잘 좀 지내면 덧나나. 맨날 시비네."
순간 주교 브라운의 시선이 아인에게로 향했다. 맨날 시비를 거는 이유 중 하나가 그였기 때문이다.
"두 단계면...."
"위험 등급 중상입니다."
교단은 체계적인 관리 체계를 가지고 이단자를 받았으나, 그게 무조건적으로 이단자들에게 친절한 건 아니었다.
최상부터 최하까지.
일곱 단계로 상세히 나눈 위험 등급은 교단이 이단자들에게 가지는 경계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상이면 본부로 소환되겠지?"
"네. 아무래도 소환은 피하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귀찮게 됐네."
사회화 교육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본부로 끌려갔다간 험한 꼴을 당할 게 분명하다.
'물론 이렇게 된 마당에 그놈이 끌려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그때 브라운이 아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선배님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뭐 이미 사건이 터졌는데 별수 있냐. 최선을 다해서 수습해야지."
"이번 일을 빌미로 새로운 주교급이 올 수도 있을 텐데요?"
"아... 젠장."
순간 아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러니저러니 불평불만이 많아도, 세브리온 지부는 꿀이 흐르는 곳이다.
일단 자신에게 지랄하는 사람이 없다.
'유일하게 뭐라 하는 게 브라운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내 후배지.'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길 수 있는 수준.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세브리온에 새로운 주교급이 온다?
'그 꼴은 내가 죽기 전까지는 두고 볼 수 없지.'
아인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괜히 루드발크에게 위험도 중하를 박은 게 아니었다.
그런 놈이 갑자기 폭주했다고?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하다.
"만약에 이번 일에 외부의 손이 간섭되어 있다면?"
"네? 갑자기 외부의 손이라뇨."
"자세한 건 확인해봐야겠지만, 자연적으로 일어난 폭주라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거든."
"그럼 제 생각에는 항상 그랬듯이 둘 중 한 놈들 같은데,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단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놈들과 반대로 이단자들의 척살을 주장하는 단체.
양쪽 다 입으로 말하는 사정은 그럴듯하지만, 정작 현실은 무력으로 해결을 보려고 하는 위험한 놈들이다.
"어느 쪽이어도 이상하지 않지?"
"뭐... 아무튼 증거가 있다면야, 징계위원회에서 이야기를 꺼내 볼 만하긴 하겠네요."
"그럼 다시 한번 이단자의 몸을 검사해보자. 자세히 알고 싶은 부분이 있거든."
"선배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벌써부터 본부 사람들에게 시달릴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네요."
"어차피 같이 들어가는 처지인데 무슨."
"그렇죠, 참."
답답함이 좀 가셨는지 웃으며 말하는 주교를 보다가 아인은 몸을 돌렸다.
아인은 주교실을 나선 다음 빠르게 복도를 걸어 한 장소에 도착했다.
이단자의 검사 겸, 거금을 내고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장소.
즉 헤르트 교단 세브리온 지부의 돈줄과 같은 곳인 자비의 실이었다.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이단자는 어딨어?"
"안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검사 기록을 좀 보고 싶은데. 주교께 허락은 받아왔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단자와 면담할 생각이니 그쪽으로 가져와."
"알겠습니다."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제를 뒤로한 채 아인은 루드발크가 있는 방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벌써 몇 시간이나 잠을 못 잔 건지?'
서서히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니, 타이밍 좋게 루드발크 역시 정신을 차리고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긴?"
"팔자가 좋네. 누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는데, 사고를 그렇게 거하게 친 놈은 잘만 잔다?"
"시, 심문관님?!"
당혹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루드발크에게 다가간 아인은 기록을 위해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들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들어가자고. 우선 어디까지 기억이 나나."
"네?"
"시간이 없다는 말 못 들었어?"
루드발크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걸 본 아인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루드발크는 갑자기 턱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통증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까지 기억합니다. 거기에 저항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했는데, 그럴수록 뇌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더군요."
"음, 이단자들은 원래 세계에선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냐?"
"맞습니다."
"혹시 원래부터 능력에 부작용이 있었어? 당시에도 능력이 폭주하는 경우가 있었다거나."
"제 능력이 원래 각을 보는 게... 그러니까 위력을 조절하는 게 약간 어렵긴 한데, 정신을 잃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이단자가 되면서 능력이 갑자기 강해졌다거나?"
"그것도 아닙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아인은 나무로 된 가방을 연 다음에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책상을 끌고 와 그 위에 올리며 말했다.
"누굴 만났는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모조리 말해."
한 번 입을 열기가 어려운 거지, 두 번부터는 쉬웠다. 루드발크는 아인이 물어보는 족족 착실하게 대답했다.
아인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들은 모조리 받아적었다.
몇십 분 동안 계속되던 지루한 작업이 돌연 멈춘 건 루드발크가 야영 중에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잠깐."
"네?"
"다른 이단자를 만났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놈들이 이런 걸 가지고 있었냐?"
아인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네모난 패 하나를 꺼냈다. 나무로 만든 듯한 그것에는 불꽃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꼭 문양이 이러진 않아도 돼. 어쨌든 중앙 부분에 이름과 너희가 말하는 닉네임이 적혀져 있을 거거든?"
꺼낸 것은 일종의 신분패이다.
신성력이 깃든 나무를 잘라 만든 목패는 신성력으로만 글자를 새길 수 있다.
"네네, 있었습니다."
"이름은?"
루드발크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으나, 아쉽게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확실해진 것도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사이에 또 다른 이단자들을 만났다는 것.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어?"
"별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거였죠,"
"안부?"
"네. 그들은 저보다 일 년은 더 먼저 이곳에 왔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사이에 고향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해줬죠."
"별 이야기는 아니겠네."
아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을 보니 거짓을 고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검증을....
"그 보답으로 그들이 제게 정보를 알려줬습니다. 히든피스, 그러니까 여기 말로는 뭐라 말해야 하지?"
"됐고, 놈들이 네게 히든피스에 대해 알려줬다고?"
"네, 네."
"뭐야, 그놈들이네."
그는 많은 이단자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세계를 배웠다.
히든피스는 이단자들 사이에서는 지고의 보물로 통한다. 아무리 많이 알려졌다고 해도 그 값이 어마어마한 것.
그걸 고향 이야기 따위의 대가로 가르쳐줬다고?
"처음부터 다시, 자세히 말해보도록."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5화 야근 다음에는 특근 (3)
개고기탕후루냠냠.
아니, 한지욱은 다른 이단자들이 그러했듯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서 눈을 떴다.
오 남매 중 하나인 평민 집안의 셋째 루드발크로 말이다. 더러운 집안과 냄새나는 공간에서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야, 이 멍청한 자식아, 일어났으면 일 좀 도와주러 나와야 할 거 아니야!"
갑자기 문을 열고 들이닥친 남자는 빽 소리치며 루드발크를 한 번 노려보더니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동시에 루드발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뛰어난 인지능력과 상황판단이 가능해서는 아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루드발크라는 사람의 기억이 파고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을 순식간에 알게 된 한지욱은 한참 동안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한지욱인가 아니면 루드발크인가. 그것도 아니면....
"게임 캐릭터인가."
루드발크는 어느새인가 타오르는 팔을 보면서 고민했다. 한지욱은 초능력자 따위가 아니었고, 루드발크 역시 마법 따위는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루드발크는 저도 모르게 집을 뛰쳐나왔다.
* * *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더군요. 그저 두려움만 들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루드발크라는 인간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제가 진짜 루드발크 같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루드발크."
"네, 네?"
"내가 언제 이단자가 된 이야기 듣고 싶다고 했냐?"
"처음부터 다시 자세히 다 말하라고 해서...."
"다른 이단자를 만났을 때의 정황을 말하라고."
잠시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는 루드발크.
그를 보던 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들어. 넌 이미 한 번 폭주했고, 그로 인해 교단의 본부는 자네를 위험하게 취급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폭주가 자네의 불안정함이 아닌 외부의 개입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본부로 끌려간다는 거야."
"혹시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운이 좋고 말을 잘 들으면 위험 분자 취급을 받으면서 교단의 험한 일을 하는 거고, 운이 나쁘면 지정봉인을 당하겠지."
지정봉인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루드발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간만에 아는 단어였다.
그가 하던 게임에서도 종종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정봉인이 뭔지 아나 보네?"
"그... 사실상 그냥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여버리는 거 아닙니까. 여러모로."
이제야 좀 말이 잘 통하는 기색이다.
두려움이 드러나는 루드발크의 말에 아인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이나 이단자.
그러니까 남의 몸에 영혼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의 유일한 약점은 몸과 영혼이 잘 고정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정봉인은 이를 이용한 걸로, 이단자의 혼을 사물이나 동물 따위에 넣고서 잔혹한 사회 경험을 시켜 회개시키는 형벌이다.
"안다면 이야기가 빠르네."
루드발크의 말이 두 배는 빨라졌다.
* * *
아무런 목적도 방향도 없이, 집을 뛰쳐나온 루드발크는 그대로 마을을 벗어나 길을 떠돌았다.
준비 따위는 전혀 되지 않은 채로 떠도는 루드발크는 당장 죽어도 위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멀쩡히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불꽃.
불을 다루는 그의 힘은 다가오려던 짐승과 몬스터를 내쫓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한 끼의 양식을 제공했다.
또한 밤의 쌀쌀한 추위에서도 그를 지켜주었으니, 커다란 행운이었다.
아무튼 그가 며칠이나 길을 헤매던 어느 날이었다.
"불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언제나처럼 불을 피우고 휴식을 취하던 때었다.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두 남자는 정중히 루드발크에게 불을 빌려달라 요청했고, 루드발크는 흔쾌히 수락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며칠 동안 불꽃을 다루는데 익숙해진 루드발크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허튼수작을 부리더라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
그렇게 시작된 동석은 불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던 사이에 따듯하게 녹아내렸고, 각자의 이야기도 조금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 루드발크 씨도 빙의자였습니까?"
"네?"
"저돕니다. 저는 일본에서 온 나카무라 슌입니다. 비록 고향은 달라도 같은 지구 사람을 보니 반갑네요."
"정말입니까?"
"네, 이곳에 온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죠."
같은 세계에서 왔다는 말.
그것만으로도 친해지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혹시 요즘 지구는 어떤지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보답은 하겠습니다."
"보답이요?"
"네. 그... 히든피스에 관심 있지 않습니까? 지구의 이야기를 해드린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히든피스를요? 괜찮으십니까?"
"아, 사실 빙의자들 사이에서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야 뭐...."
루드발크의 이야기는 해가 뜨기 시작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나카무라 슌은 약속대로 히든피스에 대한 정보를 남긴 채로 떠나갔다.
"그래서 세브리온으로 왔다는 거군."
"네. 아무래도 히든피스에 관심이 가서 말이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어색한 미소를 짓는 루드발크.
아인은 자신이 적은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다가 물었다.
"혹시 놈이 신목 말고 다른 히든피스에 대해 말한 게 있나?"
"네. 영지성에 있는 보물이라던가, 아니면 교단 지부 깊숙한 곳에 있는 영역이라던가...."
루드발크는 몇몇 가지의 히든피스에 대해서 다 토해냈다. 다행히 아인도 들었던 것들이고, 덕분에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모두 세브리온에 있는 것들이네?"
"그렇다면...."
"그래. 아마 처음부터 널 이곳으로 오게 만들 생각이었겠지."
서서히 윤곽이 잡혔다.
교단에 큰 불만을 가진 이단자가 있고, 그놈이 세브리온을 공격하기 위해 루드발크를 히든피스로 꾀어내 보낸 거겠지.
아마 폭주를 유도한 것도 나카무라 슌인가 뭔가 하는 이단자일 것이다.
'이 정도면 폭주가 타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해볼 만하겠는데?'
이제 결정적인 무언가만 있으면 사건을 봉합할 수 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사제 하나가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바로 루드발크의 신체검사 기록지.
그걸 받아 꼼꼼히 확인한 아인이 물었다.
"기록지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네."
"맞습니다."
"주교께는 이미 말씀드려놨으니, 다시 한번 검사를 부탁하지."
"검사를 하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만...."
"내가 보기엔 이단자 루드발크의 폭주는 외부 요인의 개입으로 보이거든? 아마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발동되는 정신 마법을 게 아닐까 싶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머리 위주로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그렇지. 부탁 좀 하자고."
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제를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이, 이리로 오시죠."
등 뒤로 들려오는 사제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루드발크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아인은 한 번도 피웠던 적 없는 연초를 간절히 찾으며 복도를 걸으려다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발견했다.
"루루실 상급 사제."
"상황은 어떻게 되었어?"
"일단 수상한 점은 발견했어. 이 일을 일으킨 범인으로 보이는 자도 알아냈고."
아인은 방금 전 들었던 내용과 자신의 추론을 루루실에게 말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던 루루실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대충 상황은 파악되긴 하는데, 결정적인 게 부족하네."
"그래서 지금부터 그걸 찾을 생각이야. 그 나카무라인가 뭔가 하는 자를 잡아야지."
범인의 증언.
그거면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 충분하리라.
"하지만 루드발크 씨가 범인과 만난 건 며칠 전 이야기 아니야? 아직도 거기 있다고는 보기 어려운데."
"그 자리에는 없겠지만, 아직 세브리온 인근에 있을 거야. 작정하고 세브리온을 노린 게 분명해."
심지어 이단자들이 원하는 세브리온의 히든피스라는 것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준비했다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싶겠지."
일단 세브리온 주변에 있기만 하다면, 찾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영주의 마법사에게 잠시 도움을 요청해야겠네."
"그쪽에서 과연 마법사를 빌려줄까?"
"빌려줄 수밖에 없을걸? 애초에 세브리온이 이리 융성한 것도 세브리온 교단 지부가 있어서잖아. 저쪽으로서도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마침 세브리온 영주가 얼마 전에 뛰어난 마법사를 영입한 상황.
그를 빌려 세브리온 주변을 싹 다 조사하여 이단자를 잡아버린다.
그뿐이었다.
* * *
나카무라 슌은 세브리온의 주변을 돌며 어슬렁거렸다. 그는 예전부터 세브리온을 노렸었다.
다만 그가 세브리온을 노리는 이유는 이단자들의 권리 향상이나, 아니면 교단에 뿌리 깊은 원한이 있거나 그래서는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간단했다.
히든피스.
그는 꽤 오래전부터 세브리온에 생각보다 많은 히든피스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들을 다 얻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의 능력도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질 것이다. 적어도 원주민 따위는 자신을 건들지도 못 하리라.
"그렇게만 된다면 내 세상이다!"
나카무라는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자신에게 기적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런 사회의 부품으로만 살아가다 오게 된 세계. 당시에만 해도 그는 이곳이 자신을 위한 곳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빙의자는 자신 말고도 넘쳐났고, 심지어 한낱 NPC에 지나지 않은 원주민까지 자신을 방해해대었다.
"루드발크인가 그 한국 놈이 잘했으려나."
그는 루드발크를 본 순간 그의 능력이 보통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를 이용해 세브리온에 혼란을 일으킬 계획을 짰다.
그 결과가 슬슬 전해져올 시간이었다.
"그보다 마크, 그 자식은 언제 오는 거야?"
나카무라는 자신 대신에 세브리온으로 상황을 보러 간 마크를 생각하며 약속된 장소로 걸어갔다.
그런데 약속된 장소에서는 누군가 먼저 온 것인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크?'
먼저 도착해서 야영을 준비하고 있던 건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그가 마크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크라기에는 주변이 너무 밝히는 불길이 너무 거셌다.
그러면 누구지?
나카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용히 접근했을 때, 그곳에는 로브를 쓴 사내가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로브를 쓴 사내가 흠칫하더니 말했다.
"나카무라 씨?"
약간 맛이 간 목소리.
나카무라가 미간을 찌푸릴 때, 상대가 다시 소리를 내었다.
"저입니다. 루드발크."
"루드발크?"
"아, 닉네임이 더 편하시나요? 개고기탕후루냠냠이요."
"아하. 어떻게 여기를."
"나카무라 씨의 말대로 히든피스를 얻었거든요."
히든피스를 얻었다고?
순간 나카무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자신이 챙겨야 할 히든피스를 얻었다니.
하지만 그도 잠시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루드발크 상, 혹시 신목에 접촉하는 데 성공했습니까?"
"신목에 접근하는 데도 성공했죠."
"하는 데도라 하심은...."
"제가 신목에 접근하니까 누군가가 절 잡으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놀라서 능력을 써버렸는데, 하필 그게 신목에 맞아서...."
"신목이 불탔다는 겁니까?!"
나카무라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라렸다. 신목은 일단 접촉만 하면 누구든 얻을 수 있는 히든피스다.
하지만 나카무라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지난번 시도를 했다가 신목을 지키는 성기사들에게 붙잡힐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도망쳤지만 실패했다.
'젠장, 내가 얻을 히든피스 중 하나가!'
차오르는 분노.
하지만 나카무라의 그 분노는 이어진 말에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아닙니다. 다행히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불길을 끄더군요.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덕분에 교단 내부가 빈 사이에 안쪽 깊숙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교단의 안쪽!
"그, 그렇다면 설마 안쪽에 있는 또 다른 히든피스를?"
"네, 얻었습니다."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려오면 흥분과 희열이 가득 찼다. 교단 내부 깊숙한 신비한 장소와 그곳에 있다는 히든피스.
나카무라도 정확히 그 정체까지는 몰랐으나, 그곳에 엄청난 히든피스가 있다는 건 이단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걸 노리는 사람들 역시 많았는데, 틈이 없다 보니 욕망이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 히든피스를 얻었다니!
"그, 그게 어떤 것이었습니까."
"목걸이더군요."
"목걸이?"
"네."
심지어 얻으면 흡수가 되는 능력이 아니라 물건이라고 한다.
즉....
'마지막에 손에 쥔 자가 주인이라는 말이렷다.'
나카무라는 탐욕이 어린 눈을 빛내며 천천히 다가섰다.
"저기 그... 루드발크 상, 혹시 히든피스를 제게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절대, 저얼대 아닙니다. 다만 순수한 호기심입니다."
순간 불길을 쐬던 손이 멈칫했다.
동시에 나카무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루드발크의 불꽃은 생각보다 더 강했다.
그가 처음 루드발크를 만났을 때 처리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물론 나카무라도 승산 없이 일을 벌이는 건 아니었다.
'접근해서 능력을 먼저 쓰면 된다.'
그의 능력은 상대의 정신을 조종하는 거다. 심지어 잘만 쓴다면 상대는 당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잠깐 멈춰선 채로 극도로 긴장을 유지할 때, 다시금 상대의 입이 열렸다.
"보는 것 정도라면 얼마든지요."
그러면서 등을 진 사내는 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목걸이였는데, 품에서 꺼내자마자 강력한 신성력이 주변을 장악했다.
'이 정도면 진짜 히든피스다!'
나카무라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계획은 간단했다. 등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상대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능력을 사용한다.
그럼 상대는 자연스럽게 능력에 걸려 히든피스를 건네겠지.
'크크,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바로 뒤까지 도착한 나카무라는 계획대로 손을 뻗었다.
툭.
순간 로브를 쓴 루드발크의 고개가 돌아가고, 동시에 나카무라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요사스럽게 빛났다.
"자, 그 목걸이를 내놓아라!"
나카무라의 욕망 가득한 말에 상대는 히든피스를 쥔 손을 뻗었다.
퍽!
물건 대신 꽉 쥔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해버렸다.
"잘 걸렸다, 이단자 새끼야."
이어서 들려온 말에 나카무라는 화들짝 놀란 정신을 차리며 상대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푸른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은 절대 루드발크가 아니었다.
당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카무라는 아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개 같은 원주민 자식이! 뒈져라!"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보랏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카무라는 상대가 곧 병신처럼 제 목을 졸라 뒈질 걸 생각하며 킬킬대었다. 하지만 상대는 황금색 눈을 잠깐 빛내더니 나카무라에게 다가왔다.
"네가 정신을 간섭하는 능력을 쓴다는 건 루드발크에게 들었다."
"어, 어째서 내 능력이?"
나카무라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아인의 손이 나카무라의 머리를 붙잡았다.
무지막지한 악력에 나카무라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퍽!
주먹이 턱을 강타하고, 잠깐 눈앞이 핑그르르 돈 나카무라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뭐였더라. 너희 말로는 정신 공격 면역이라더라."
6화 징계위원회 (1)
제국이 제국은커녕 나라조차 이루지 못했을 당시부터 존재하던 세 신은 오래전부터 필요에 따라 자신의 힘 일부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특히 신들은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자들에게는 조금 큰 힘을 주었는데, 그게 바로 권능이다.
신들이 내리는 권능은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했다.
예를 들어 여신 헤르트의 경우는 화합과 불꽃을 상징하지만, 그녀가 내리는 힘이 두 가지에만 있는 건 아니다.
불꽃의 경우 아래로는 폭발, 화상, 정화 등 수많은 갈래가 있고, 위로는 태양과 같은 커다란 상징이 있다. 또한 옆으로는 분노 따위도 있고.
신이라는 건 셀 수 없이 많은 상징을 지니고 있고, 그중 하나하나를 자신의 뜻을 행할 만한 인간에게 내린다.
"그중 여신님께서 내게 내리신 게 화합이다. 덕분에 어떤 정신 공격도 내게는 통하지 않지."
솔직히 좋다는 느낌은 없었다.
왜냐면 사제나 성기사들은 기본적으로 정신 공격에 강하기 때문이다.
"권능을 줄 거면 좀 더 대단한 걸 주면 좋았을 텐데."
예를 들면 폭발 같은 거.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자신의 위상도 지금과는 또 다르리라.
아인은 혀를 차다가 나카무라를 내려다보았다.
"깨어있다는 거 안다."
"...."
아직도 기절한 척을 하네?
순간 휘두른 아인의 주먹이 그대로 나카무라의 명치를 후벼팠다.
"컥, 커억!"
온몸이 구속당한 그는 눈까지 가려진 채로 비틀거리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네놈 때문에 문제가 생겼거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 증언이 필요하고."
"빌어먹을 원주민 새끼야, 내가 원주민 따위에게 말하겠냐?"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뭐?"
"근데 금방 말하고 싶어질걸? 내기를 해도 좋아."
덤덤한 아인의 목소리에 나카무라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 잠깐."
"뭐지?"
"마, 말하면 뭘 해줄 수 있지?"
"...."
"말이 통하면 거래를 못 할 것도 없잖아. 아, 안 그래?"
"거래라, 좋지."
오는 거래는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래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쉽게 갈 수 있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좋아, 내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준다면."
"대답해주면?"
"심문이 끝난 후 네게 편안한 죽음을 주도록 하지."
나카무라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제대로 들었다는 걸 깨닫고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개 같은 자식이! 그딴 제안을 누가 받아들여!"
아인은 몸이 묶인 채로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나카무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대가 지랄한다고 같이 지랄하는 건 삼류지.'
왜냐고?
힘든 건 어디까지나 본인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격한 움직임은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약해졌다.
아인은 상대가 지칠 대로 지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루드발크는 네가 이곳에 온 지 일 년이 지났다고 하던데."
"어쩌라고."
"거짓말을 했구나?"
"뭐?"
"일 년이나 이곳에서 살아남았다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편안한 죽음이라는 게 얼마나 자비로운 건지."
아인은 나카무라의 양어깨를 잡은 다음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게 만든 다음 가볍게 툭 쳤다.
그뿐이지만, 시야가 봉인된 상태의 나카무라는 발작하듯 몸부림을 치더니 다시금 소리쳤다.
"내, 내 동료가 가까이 있다."
"그래서, 놈의 정보라도 팔게? 나쁘지 않은 제안인데?"
"팔기는 무슨. 마크가 오면 네놈은 죽은 목숨이야!"
"이단자, 그런 정보는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한심한 자식.
아인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가방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가방이 열리고 아인은 챙겨온 물건을 하나하나 꺼냈다.
"그럼 간단한 내기를 해 볼까?"
"무, 뭐?"
"지금부터 난 필요한 진술을 듣기 위해 심문을 시작할 거야. 넌 네 동료란 놈이 찾아올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지."
"내, 내가 이긴다면...."
"그렇다면 네 잘난 동료가 날 죽이고 널 구해주겠지?"
나카무라는 아인의 제안이 저에게 더없이 불합리하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 악물고 잘 참아라. 내가 이단심문관 하고 처음 배운 게 마족과 마족에게 혼을 판 흑마법사. 두 놈들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이거든."
아인은 꺼내든 길고 얇은 칼날을 나카무라의 가슴에 밀어 넣었다.
칼날이 파고든 고통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컥, 커억!"
"마나가 마음대로 안 움직이냐? 별건 아니고, 네 몸속 마나의 움직임을 내 힘으로 멈춘 거야."
마나를 멈춰?
"그리고 지금부터는 내 뜻에 따라 움직일 거고."
나카무라는 아인이 하려는 행동을 눈치챘다.
"대다수의 이단자들은 주문도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대신, 마나의 움직임이 제약되어 있다더군. 그걸 벗어나려고 하면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말이야."
"자, 잠깐만 멈춰!"
다급한 외침에 아인은 나카무라를 바라보다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내가 그걸 까먹을 뻔했네."
아인은 나카무라의 입을 벌리고 혀를 붙잡았다. 그러자 신성력이 그의 혀로 스며들었다.
"이걸로 혀를 깨무는 일은 없을 거야. 좋지?"
미친놈.
나카무라는 커다란 공포를 느끼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시작한다?"
이내 비명 소리가 숲속을 가득 메웠다.
* * *
"크아아악! ...컥, 커억. 이, 이게 전부입니다. 모든 건 세브리온에 있는 히든피스가 탐나서 저지른 일입니다. 루드발크의 폭주는 그걸 위해 제가 능력을 건 거고요. 하라는 대로 다 말했으니 제발...."
고통에 찬 얼굴로 이제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나카무라.
"내기는 내가 이겼네?"
"마, 맞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사정사정하는 나카무라를 내려다보던 아인은 허공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다 끝났으니 모습을 드러내도 돼."
그러자 커다란 나무 뒤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가는 눈을 뜨며 다가선 그는 정신이 나간 듯 같은 말만을 반복하는 나카무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자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약속한 대로 편안한 죽음을 선사할 겁니까?"
"약속은 처음 내가 한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나 가능한 거고. 지금은 아니지."
"하긴 그렇군요. 그보다 마크라는 자는 어쩔 겁니까."
"그놈은 포기한다."
"정말입니까?"
놀라서 묻는 상대를 보며 아인은 즉답했다.
"어차피 그놈은 진즉에 도망쳤을걸?"
아인은 덤덤히 말하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마법사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 나카무라라는 놈은 하는 말과 다르게 이단자가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이만한 정보를 알 리 수가 없지."
"음, 그래서요?"
"그렇다면 그에게 정보를 준 놈이 따로 있다는 건데, 정황상 마크란 자일 가능성이 높거든?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조금 전 내기라는 말로 나카무라를 도발한 것도,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지 않은 것도 모두 마크란 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인이 앞으로 나서서 시선을 끄는 동안, 영주의 마법사는 몰래 숨어 탐지 마법을 쓰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산 전체를 대상으로 말이다.
"실제로 탐지 마법에도 아무 반응이 없던 거 아니야? 그래서 바로 나온 거고."
"네, 맞습니다."
"애초에 일이 그른 거야. 내 생각이지만 마크란 놈은 그냥 버림패로 나카무라를 써먹을 거 같아."
아인은 머리를 쓸어 넘겼고, 정돈된 머리가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세브리온에서 화재가 일어난 순간부터 도망칠 준비를 했겠지."
쏟아지는 아인의 말을 듣던 영주의 마법사는 이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그럴듯하군요. 그렇다면 돌아가는 대로 영주님께 말씀을 드려 이자에게 들은 걸 토대로 마크라는 자를 수소문해보겠습니다."
"글쎄...."
대규모 수색을 한다면 모를까, 수소문 따위로 제대로 된 정보다 나올 거 같진 않았다.
아인은 가방에 진술을 기록한 아티팩트를 넣고서, 나카무라의 몸을 들쳐 올렸다.
"아무튼 여러모로 신세 좀 졌다. 마법이 아니었다면 이놈을 잡는 건 꿈도 못 꿨을 테니."
"아닙니다. 아인 님이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영주의 마법사는 겸손하게 말했다.
실제로 아인이 루드발크의 머리를 집중 검사해 집요하게 마나의 흔적을 발견하고, 루드발크가 나카무라에게 받았던 여비인 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상대의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려웠을 거다.
추적 마법이란 상대의 소지품과 마력의 흔적. 두 가지가 모두 있어야만 가능한 법이니까.
"또한 이 자가 세브리온 주변에 있을 거란 사실을 밝혀낸 것도 심문관님 아닙니까."
이놈은 왜 이렇게 얼굴에 금칠을 한데?
부담스럽게.
보통 이런 건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깔고 가는 말이다. 이걸 막아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산 전체를 탐지할 마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바로 맞칭찬.
아인은 재빨리 입을 열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후 영주의 마법사는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넘겼다.
"영주님께서는 가급적이면 아인 심문관님에게 협조하라 하셨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세브리온 지부가 아닌 내게 협조하라. 그 말의 뜻을 아인도 모르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자. 지금 당장 움직여야 징계위원회에 늦지 않을 테니."
"그러시죠. 아, 운반하기 편하게 저자에게 간단한 마법을 걸겠습니다."
순간 나카무라의 몸이 가벼워졌다.
직접 도와주지는 않고 마법을 딸깍하고 거는 상대에게 아인은 감사를 표했다.
"아주 고오오맙다."
* * *
"아무튼 이번 일은 고마웠다. 영주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잘 좀 전달해주고."
"알겠습니다. 영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급해서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까먹었네."
"아, 저는 제이드라고 합니다."
"앞으로 종종 잘 부탁한다. 나는...."
"괜찮습니다. 아인 심문관을 모르는 분이 세브리온에 설마 있을까요."
세브리온 지부의 앞에서 제이드와 헤어진 아인은 재빨리 지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가 오기를 기다리던 인원들이 다급히 다가왔다.
"심문관님, 어떻게 되셨습니까."
"범인은 잡았다. 진술 역시 확보해두었고. 그보다 징계위원회는 언제부터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빨리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인원은?"
"심문관님과 주교님, 그리고 루루실 상급 사제 세 분입니다."
사실상 일할 수 있는 사람 중 계급이 제일 높은 셋이 들어가게 되네.
"그보다 들쳐메고 계신 분은 무엇입니까."
"이번 사건의 진범. 징계위원회가 끝나면 본부에 요청해 이송할 예정이니까 그때까지 가둬둬."
"지, 진범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놈의 구속을 풀어주어선 안 돼. 특히 눈을 통해 사특한 마법을 쓰니 이 점은 명심하고."
사제와 성기사들이 나카무라를 압송해가는 모습을 보던 아인은 말없이 벽에 몸을 기대었다.
이제는 징계위원회에 참석해 상황을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이짓도 끝이 보이네."
문제는 마지막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인이 잠시 가만히 서 있을 때였다.
"심문관님."
"...무슨 일이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꽤 앳되 보이는 얼굴의 사제가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심문관님께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찾는 사람이 계셨습니다."
"주교님? 아니면 루루실 상급 사제?"
"두 분 다 아닙니다."
그 사제는 잠시 아인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뒤니아 님께서 찾으셨습니다."
"뒤니아?"
순간 아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넘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네. 이번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하시고 싶다던데요."
"젠장, 소문 참 빠르군."
당사자도, 그렇다고 본부에 처박혀 사는 놈도 아닌데 진즉에 소문을 들었다니.
아찔했다.
"시간이 지나긴 했으나, 아무래도 사도께서 찾으신 일이다 보니...."
"연락온 게 언제였어?"
"이틀 전이었습니다."
"어차피 지난 일이네."
찾은 이유라고 해봤자 징계위원회에 관련된 일일 게 뻔했다. 그런데 이미 징계위원회가 코앞에 다가왔다.
이미 늦어버린 상황.
아인은 그냥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징계위원회라고 해도 특별히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누군가가 세브리온 지부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미리 준비된 성법을 통해 징계위원회에 참여하는 인원이 있는 교단의 본부와 수많은 지부가 연결된다.
"도착하셨습니까, 선배님?"
"일은 어떻게 되었어?"
아인은 자신이 나타나자마자 어미를 기다리던 아기새처럼 달려오는 둘을 보며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범인은 잡았고, 필요한 진술을 확보한 다음 가둬두었어."
"그렇다면!"
"징계위원회에 들어가 말만 잘하면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함께 넘어왔던 루루실과 주교는, 확신에 찬 아인을 보며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셋은 함께 징계위원회가 열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개털렸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징계위원회가 시작되자마자 본부를 대표해 참석한 자들은 가장 먼저 루드발크의 폭주가 위험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에 아인은 루드발크의 검사 기록과 나카무라의 증언을 증거를 이용해 반박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했을 때, 위험도 중상은 너무 과하다고 봅니다. 루드발크의 폭주는 외부에 의한 것이고, 본인은 여신님께서 만든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를 내밀며 철벽을 쳐대자, 세브리온 지부를 공격하러 온 자들도 별 방법이 없었다.
딱 여기까지는 좋았다.
본부에서 나온 남자의 환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중상까지는 갈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 하지만 중하 역시 맞지 않다고 본다만.]
[제가 보더라도, 라하드 대주교님의 말대로 이단자 개고기탕후루냠냠의 위험도가 중은 되어 보입니다. 아인 심문관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대주교의 말에 다른 지부에서 참석한 남성이 아인에게 물어왔다.
아인은 버릇처럼 머리에 손을 올리려다가, 자리가 자리다 보니 참았다.
"비록 자의가 아니었으나 폭주 상태의 힘은 직접 상대한 저도 느꼈으니, 위험도 중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다만, 별개로 폭주 사건은 이단자 개고기탕후루냠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인은 몇 번이고 폭주는 루드발크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위험 등급이 오르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중상이 아닌 중에서 그쳤으니 다행일 따름. 중요한 건 폭주가 루드발크의 본의와 무관하다는 판결을 받는 거다.
그래야 본부로 끌려가거나 지정봉인을 당하지 않는다.
'세브리온 지부도 아무런 일 없이 무사하게 넘어가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아인 심문관의 판단에 동의한다.]
순순히 인정하는 말에 아인을 포함한 세브리온 지부의 세 사람이 안도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세브리온 지부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겠군.]
아, 미쳐버리겠네.
곱게 끝나려나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불가피한 사고입니다. 그러니...."
[그건 아네.]
세브리온 지부 주교의 말을 단번에 잘라낸 본부 소속의 대주교 리하드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세브리온 지부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그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겠네. 다만 상황이 좋지 못하다면 개선해야 하지 않나.]
한발 물러나는 척하던 라하드 대주교는 곧장 이빨을 드러내었다.
[세브리온 지부에 현재 구조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는 만큼, 이번 일을 기회로 내부 구성을 바꾸는 것도 좋다 생각되는군.]
쉽게 말해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는 거였다.
대주교의 덤덤한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참석자들이 비난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할 거 같네요."
"괜찮겠어?"
"어쩔 수 없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루루실과 주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네?]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아인은 멈칫했다. 일반적인 말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뇌에서 울리는 듯했다.
누군가가 신성력을 이용해 남몰래 말을 걸고 있었다.
엄연히 따지면 주교와 루루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확연하게 전달되는 목소리.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런 걸 할 수 있는 자는 징계위원회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하나뿐이었다.
사도.
[왜 말 겁니까. 바쁜 거 안보입니까?]
[자자, 진정하고. 어때, 나와 거래하는 건? 내 일을 좀 도와준다고 하면 이번 일은 내가 막아줄 수 있는데.]
이것 봐라?
이 상황에서 제안을 해?
'그러고 보면 분명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전에도 나한테 연락했었다 했었지.'
아마 지금과 같은 제안을 하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징계위원회가 시작하기 전에 제안하는 것과 도중에 제안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미 대주교가 내뱉은 말들이 있으니까.
즉, 그만큼 급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왜요?]
이야기가 다르지.
7화 징계위원회 (2)
사도.
이단심문관으로서도 상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이단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
인간의 몸으로 두 개 이상의 권능을 부여받고도 살아있는 그들은 각 교단을 대표하는 무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도 중 하나가 자신에게 제안하는 이유가.
[왜요?]
아인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상황은 점점 세브리온 지부에 불리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인은 초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도 중 하나인 뒤니아가 이리 나왔다는 건, 저쪽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리라.
[일단 이 상황을 해결해 준다면 이야기를 들어보죠.]
[이 일부터 해결해달라고?]
[다른 자를 찾아가도 좋고요.]
뒤니아는 고민하는 듯 한참 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돌연 환상으로 만들어진 회의장의 한쪽에서 누군가가 일어났다.
[우선 세브리온 전체의 상황을 파악할만한 인원을 보내는 걸로....]
[잠깐.]
별것 아닌 움직임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하나의 행동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말하던 걸 멈추고 주목했다.
[뒤, 뒤니아 님. 어쩐 일로?]
회의를 진행하던 대주교 라하드가 놀라 말했다.
본래라면 회의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사람의 발언. 심지어 그 대상은 이 자리의 누구도 절대 무시할 수 없기에 단번에 흐름이 끊겨버렸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환영 속의 사내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잠깐 생각해봤는데, 이건 세브리온 지부에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환영 속 남성 뒤니아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을 뿐이다. 그 속에는 어떠한 질책 같은 것도 없었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달랐다.
[하오나....]
징계위원회를 진행하는 라하드 대주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사이에 다른 인원들이 앞다투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조금 너무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 하긴. 아인 심문관이 있는데도 일이 벌어졌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자신을 물어뜯으려던 자들이 잠깐 사이에 태도를 바꿔 자신을 방패 삼아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어이없는 상황.
아인은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미 이 징계위원회는 끝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징계위원회는 사도 하나의 참견으로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럼 결론을 내리도록 하지.]
징계위원회을 연 대주교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세브리온 지부에 대한 후속 처치는 없던 일로 하도록 하지. 다만 아인 이단심문관은 여신의 이름 아래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한다.]
[책임이라면?]
[세브리온을 노리는 집단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들에 대한 수색을 하도록.]
나카무라는 별놈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여한 이단자들이 모두 만만하지는 않으리라. 오히려 위험한 놈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인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이단자 개고기탕후루냠냠의 관리는 세브리온 지부에게 맡긴다. 이단자의 선택권은 유지하되, 자유를 선택하더라도 증명이 끝날 때까지는 세브리온 지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이해했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징계위원회는 마치겠도록 하겠다. 아인 심문관. 여신님은, 그리고 교단은 언제나 자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네. 부디 자네에게 화합이 내려진 이유를 잊지 말게.]
'지랄도 풍년이네.'
아인은 속으로 대주교와 징계위원회에 참석한 자들을 씹었다.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말하도록. 지부보다는 본단 쪽이 낫지 않겠나.]
방금까지 쥐잡듯이 잡더니 무슨.
일이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를 바꿔온다.
아인이 속으로 콧방귀를 뀔 때, 라하드 대주교는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어서 빠르게 환영이 사라져갔다.
세브리온 지부를 대표에 회의에 참석한 주교 브라운 역시 나가려다가 문득 가만히 자리에 서 있는 아인을 보고 물었다.
"안 가나?"
"먼저 가라. 난 날 찾는 사람이 있어서."
세브리온에서 참여한 인원들을 내보낸 아인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대부분의 사람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뒤니아.
조금 전 그와 거래를 청했던 인물이 환영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래에 응해줘서 고맙네.]
"...부탁할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나 들어보죠."
아인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에 뒤니아는 웃으며 말했다.
[새로 나타난 이단자가 있어.]
"그렇다면 그쪽의 인원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이단심문관도 많을 텐데."
[그렇긴 한데,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 우리 애들을 보내기에는....]
"아깝나 보군요."
[하하, 그럴 리가. ...사실, 다른 사람을 보내기에는 별로 미덥지가 않아서 그래. 사실 내가 직접 가야 하나 고민했단 말이지.]
직접 간다?
아인은 어이가 없어서 웃을 뻔했다. 이단자 중에서도 손에 꼽을 괴물들을 상대하는 전력이 사도다.
그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순간 제국의 모든 눈과 귀가 바빠지기 마련.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다.
[그런 면에서는 자네가 좀 부럽기도 하군. 나도 사도 같은 거 하지 말고 이단심문관으로 남아있을 걸 그랬어.]
급기야 킬킬거리며 웃는 그를 보며 아인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뒤니아는 한참을 웃은 뒤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러던 도중에 징계위원회가 열려서 참석했는데, 이게 뭔가. 마침 자네가 보이더군. 딱 믿고 맡길만한 인물이.]
"...뭘 믿고요?"
[여신께서 화합의 권능을 내린 심문관이 아니면 누굴 믿겠나.]
다시금 터져 나오는 웃음에 아인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새로운 이단자에 대해 확인해 보면 됩니까? 특이사항은?"
[이단자의 가족한테서 연락이 왔어.]
"같이 있기 더럽다고 하답니까."
사실 이단자의 가족 눈에 이단자가 꺼림칙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인의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아니. 더 심각한 이야기지. 이단자가 마족을 부린다고 하더군.]
"마족이라. 확실히 마족이 연관되어 있다면...."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만하지? 부탁 좀 하세. 물론 여러 인원을 보내면 될 일이지만, 이단자의 가족이 인원을 최소한으로 해달라 하더군.]
이단자들이 나타남으로 인해 우선순위가 한참 밀렸긴 했으나, 마족은 여전히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다.
"그러죠, 그래서 위치는 어딥니까."
[세브리온의 남쪽에 있는 엔드로 자작가.]
"귀족의 의뢰입니까?"
[맞아. 그래서 골치 아픈 일이지.]
단순한 이단자 문제가 아니라, 귀족의 의뢰이다. 게다가 마족까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다른 것보다도 마족과의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데 인원을 줄여야 한다?
굳이 징계위원회 도중에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에반데.'
서로 윈윈의 거래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대가 부탁을 하는 입장이다?
'뭐, 거래를 그냥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으니 상관없나.'
아인은 뒤니아의 환영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뒤니아 경께서 세브리온 주변의 이단자들에 대해서 조사를 해주시죠?"
[그건 좀 곤란한데? 점점 요구하는 게 늘어나잖아.]
"마족에다가 귀족까지 연관된 일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사실상 혼자 가서 해결해달라는 거고요."
고민에 빠진 듯 잠시 말이 없어진 뒤니아를 보며 아인은 벽에 몸을 기대며 여유롭게 기다렸다.
어차피 상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알겠어, 이쪽에서 한 번 조사해보도록 하지.]
돌아온 건 예상대로의 대답.
어차피 이럴 거면서 왜 고민하는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 * *
"...그런 이유로 한동안 지부를 비워야 할 거 같다."
"그분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주교의 말에 아인은 쓰게 웃었다.
"아무튼 난 엔드로 자작가로 가봐야겠다. 어차피 멀지도 않으니 말이지."
"그곳이라면 2주 정도면 되겠군요. 지부는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다녀오십쇼."
그리 말하는 주교는 집무실 책상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열쇠 하나를 꺼내었다.
"여기. 가기 전에 안쪽에 들르실 거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님이 나가는 일이니."
휙 던진 열쇠를 낚아채듯 받아낸 아인은 그것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 전에 좀 주무시고요.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잔 적이 없지 않습니까."
"네가 새벽에 부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왜 제 탓을 합니까?"
주교의 말에 아인은 피식 웃고는 제 손에 들어온 열쇠를 들어 보였다.
"이거까지만 끝내고."
아인은 주교실의 문을 열고 나왔는데, 마침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둘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루드발크였다.
그는 아인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루루시리피아 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에 아인은 힐끔 뒤에 있는 루루실을 보았다. 루루실의 표정은 평온할 뿐이었다.
'또 포기했나 보네.'
그녀의 본명은 루루시리피아린트이지만, 사실상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만 급해지면 다들 이름을 틀리기 일쑤다 보니 대게 루루시리피아까지만 잘라 부르기 마련이다.
"감사할 건 없다. 결국 본부로 가는 건 면했으나, 위험도가 오른 건 마찬가지거든."
"아인 님께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그 나카무라 새끼를 잡으러 다녔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충분합니다."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란.
루드발크의 감사 어린 말에 아인은 미간을 찌푸리고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 파악 좀 해라. 위험도가 중에 이르렀다는 건, 너의 선택에 제약이 따른다는 거야. 자유를 선택해도 감시가 붙고, 위험하지 않다는 걸 긴 시간 동안 증명해야만 세브리온을 벗어날 수 있지."
"그건 괜찮습니다."
괜찮다?
아인은 눈앞의 이단자가 제 말을 제대로 이해나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루드발크는 진지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결정한 건데, 저, 헤르트 교단에 입교하려고 합니다. 마침 헤르트 교단에서는 이단자도 받아준다고 해서요."
"...뭐라고?"
아인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교단에 들어오겠다기엔 루드발크에겐 신에 대한 존중도 경건함도 없었으니까.
"물론 심문관님께서 보기엔 부족하겠지만, 교리에 대해서는 열심히 배울 생각입니다."
루드발크는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그걸 보니 아인도 더 할 말은 없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배우면서 진정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거니까.
무엇보다 교단으로 들어온다면 아인으로서도 여러모로 편했다.
"하겠다면 제대로 해라. 우선 말투와 행동부터 고쳐야 할 거다. 그래야 이단자가 아니라 사제가 될 수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심문관님."
갑자기 왜 이런데?
자동으로 숙여지는 루드발크의 머리를 보던 아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드발크는 연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단심문관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
간신히 루드발크를 돌려보낸 후 아인은 루루실과 함께 지부 내부를 걸었다.
"뭐?"
"이번 일로 느낀 게 많다던데. 이곳에 자신 같은 이단자에게 얼마나 힘든 곳인지도 알겠다고."
"그래서?"
"너 같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더라. 앞으로 이 세계로 올 이단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 걸음 뒤에서 걸어오는 루루실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좋은 방향 아니겠어? 이단자가 이단심문관이 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네 일도 줄어들 수도 있고."
아인은 말없이 속도를 높였으나 따라오는 루루실의 입은 멈출 줄 몰랐다.
"외부에서 새로운 이단심문관이 지원되지는 않을 테니, 내부에서 새로운 사람을 키워야지. 마침 능력도 있고."
현재에 이르러 이단심문관의 가장 큰 덕목은 힘과 의지다. 그런 의미에서 루드발크는 최소한 힘은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불꽃을 다루는 훈련만 된다면 기본은 하겠지."
"그렇지?"
"그러니 잘 부탁한다, 사회화 교육 담당관."
"네가 엔드로 자작가에 갔다 올 동안 최선을 다해봐야지. 이번에 분위기를 보아하니 또 무슨 일이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 거 같으니까. ...어휴, 왜 여기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몰라."
그 이유 중 하나가 자신 때문이란 걸 모르는 걸까.
물론 진짜 이유는 세브리온 지부에는 지부치고는 너무 많은 게 있다는 거였다.
지부의 크기와 영향력도, 안에 있는 성물도, 심지어 사람까지도.
'모든 게 다른 지부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긴 하지.'
아인이 고개를 끄덕일 때,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루루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흘끔 아인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 아니면 같이 갈까?"
"갑자기 무슨 말이래."
"자작을 만나야 한다며. 귀족을 상대하는 일은 내가 하는 게 낫잖아?"
귀족을 상대하는 건 이단심문관인 자신보다는 루루실이 낫긴 했다.
'이쪽은 귀족을 상대하는 법을 제대로 교육을 받았으니.'
다만 아인에게는 엔드로 자작가로 가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세브리온에서는 얻지 못한 이단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것. 괜히 일행이 생기면 귀찮아지기만 할 거 같았다.
"둘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게 말이 되냐?"
"하긴, 주교의 입장이 불편하겠지?"
"게다가 루드발크의 사회화 교육도 진행해야 하고."
둘은 사람 하나 지나지 않은 복도를 한참이나 더 걸으며 시시한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잡담은 세브리온 지부의 가장 안쪽에 도착하는 순간 뚝 그쳤다.
"다 왔네. 난 이만 갈게."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문.
그곳 앞에서 아인은 문 쪽으로 다가섰고, 루루실은 몸을 돌렸다.
이곳에 오기까지 시답잖은 이야기를 끝없이 한 것과 다르게 막상 거대한 문 앞에 서자 둘은 굳은 얼굴로 짧은 말만 하고 헤어졌다.
"후우."
긴장한 표정으로 낮게 숨을 내뱉은 아인은 주먹을 쥐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곤 귀를 활짝 연 채로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대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거의 일 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내부에서 툭툭하고,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고, 아인은 그제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는 밖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실내 정원이 있었다.
특별한 처리를 한 것도 아님에도 온실과 같이 따듯한 내부는 온갖 꽃과 나무들이 사계절의 구분을 잃어버린 채로 활짝 펴있었다.
비정상적이며 동시에 특별한 장소.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거대한 분사 앞에는 귀가 뾰족한 여성이 아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금속으로 된 수갑을 차고 있는 그녀는 아인을 보곤 반가운 듯 옅게 미소를 지었으나,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끼이익.
이내 아인이 지난 문이 닫히고, 아인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아인은 주교에게 받은 열쇠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수갑 사이에 열쇠를 끼워 넣고 돌리자, 팔이 자유로워진 여성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인. 잘 지냈나요?"
"저야 언제나 그렇죠."
아인은 제가 낼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것이 어린 시절 마을과 그의 세계 불타버린 날, 자신을 구해주었던 자에게 보이는 성의였다.
* * *
"뒤니아 님."
헤르트 교단의 일곱 사도 중 하나. 뒤니아는 자신을 부르는 부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외람된 말이오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는 부하의 말에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불만을 가질 필요는 없어, 너희가 미덥지 못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니."
"아인 심문관에게 일을 맡긴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거야 뒤니아 님께서 뜻이 있어서 그러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부하의 말은 아첨하는 기색도, 굽신거리는 기색도 없었다.
끝없는 신뢰.
뒤니아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아낌없이 보이는 부하를 보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왜 다들 세브리온 지부를 견제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미 힘을 빼놓을 만큼 빼놓지 않았습니까."
세브리온 지부에 대한 견제는 예전부터 이어져 왔다.
다른 지부에는 못해도 서넛씩 되는 이단심문관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도, 하나는 있어야 할 대주교급이 없다는 것도 모두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기회가 있다 싶으면 견제가 끊이지 않은 이유가 없진 않았다.
"여신님의 뜻을 따르는 주제에 권력에 욕심이 많은 놈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뒤, 뒤니아 님!"
다급히 소리치는 제 부하의 말에 뒤니아는 킬킬 웃어대었다.
"뭐, 우리밖에 없는데 어때? 아무튼 그런 놈들에게는 그냥 아인, 그자가 세브리온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어째섭니까?"
부하의 물음에 뒤니아는 슬쩍 눈을 감았다. 겨우 칠팔 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이미 사도를 앞에 둔 뒤니아는 기억했다.
"그들이 여신님의 뜻을 거스르고, 아인 심문관이 사도가 되는 걸 막았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아인, 그자가 이단심문관으로 남은 덕분에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두 인물이 한곳에 있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견제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겠지."
부하는 술 한잔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취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뒤니아를 어색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뒤니아의 웃음을 멈추지 않고 한참이나 이어졌다.
8화 사도 필리야
불꽃이 마을을 뒤덮은 날.
커다란 싸움이 벌어졌다.
이단자로 이루어진 범죄 조직과 헤르트 교단 소속의 사도 간의 싸움.
사도는 막강한 힘으로 범죄 조직을 밀어붙였으나, 끝끝내 놈들을 죽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괜찮니?
마지막 순간에 적의 목숨을 끊는 대신 유일한 생존자를 구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필리야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미안하구나.
소년은 자신을 끌어안은 하프엘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러니?
생각보다 강한 아이였다.
필리야는 절로 드는 안쓰러움에 끌어안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려고 했다.
―언젠가 제 손으로 죽여버릴 수 있게 된 거니까요.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소년을 보았다.
말을 하는 소년의 눈은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나 차가웠다.
그걸 보며 필리야는 알아차렸다. 그에게는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음을. 그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가겠니?
―좋아요.
소년는 망설임 없이 저를 구해준 사람의 손을 잡고서 교단으로 들어섰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그리고 복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 * *
필리야는 슬쩍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인을 보았다.
의자의 끝에 걸터앉은 채로 몸을 기댄 채로 능숙하게 지루함을 숨기는 얼굴.
하지만 그녀가 보기엔 여러모로 티가 나긴 했다.
무엇보다 그나마 자신의 앞이라 예의를 차리는 거란 사실을 필리야는 모르지 않았다.
이곳을 나가지 않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뿐더러, 가끔 세브리온의 주교가 찾아와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리된 건지....'
한때는 복수귀라는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던 아이였다. 사나우면서도 위태로웠고 한치의 앞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보는 엘프가 더 불안할 정도였다.
그런데 돌연 복수를 다 마치기도 전에 손을 털어내었다.
당시 필리야는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었으나, 당시의 아인은 복수로 인해 나머지를 모두 포기한 채로 달렸었으니까.
그녀로선 아인이 복수에 미치지만 않는다면 뭘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될 줄은 몰랐다.
"왜 그리 보십니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니까요. 반가워서요."
그 말에 아인은 필리야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도 필리야.
헤르트 교단에 일곱밖에 없는 사도인 그녀는 언제나 세브리온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한때는 강력한 사도로서 수많은 이단자를 쓰러뜨리며 전쟁 시대를 헤쳐 나갔으나, 전쟁이 끝나고 이단자들이 사회에 받아들여지며 변했다.
강력한 권능과 깊은 신앙심. 그리고 오랜 경험. 무엇보다 같은 사도가 보기에도 위험한 힘까지.
교단은 필리야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필리야는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해 가만히 있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그 결과가 이 꼴이지.'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은 오히려 악이 되었다. 괴물이 저항하지 않는다고 본 걸 수도 있다.
교단에서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만든 수갑을 차고, 세 개의 권능 중 두 개를 제한당하게 된 것.
아인의 시선이 중앙에 있는 커다란 분수로 향했다.
그 안에는 성물 중 하나, 이타샤의 철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전보다 꽃이 더 다양해졌군요."
"여기에 있으면 새로운 꽃을 가꾸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거든요."
필리야는 수줍게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직 피지 않은 몇몇 꽃들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다.
"아인이 있으니 좀 편하네요."
수갑을 벗어 간만에 자유를 찾은 손목을 보이며 말하는 필리야.
그녀의 힘이 위험하다고 판단을 한 교단의 조치였기에, 수갑을 벗을 수 있을 때는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수습이 가능하다고 볼 때뿐.
즉 아인이 있을 때만이다.
'진짜 별 지랄을 다 하는군.'
물론 아인도 필리야의 능력이 막강하다는 건 알았다.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사도가 그녀 하나뿐인 것도 아니다. 당장 뒤니아 놈은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니까.
"그래서 요즘 지부는 어떤가요."
필리야는 아인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최근 새로운 이단자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아인, 이번에도 거기에서 붙잡은 건가요?"
"네. 언제나처럼 신목 앞에서였습니다. 남들이 없는 시간에 접근했더군요."
"그럼 고생이 많았겠네요."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입이 열리고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차분한 말투에서는 어른스러움이 느껴졌으나, 여전히 필리야의 눈에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자신의 옆에 앉아 이야기를 조잘거리던 아이는 벌써 나이가 서른에 다다랐다.
이제는 옆자리 대신 앞자리에 앉은 반가운 손님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잠깐 못 본 사이에 얼굴이 좀 변한 거 같은데.'
오래간만의 만남인 만큼, 반가움 마음이 컸고, 덕분에 절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상대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결국... 필리야 님?"
"아,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냐고."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못 보던 사이에 얼굴이 변했네요."
"겨우 2개월만입니다. 늙은 게 아니라 피곤해서 그런 거고요."
아인의 말에 필리야는 별말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그녀는 하프이지만 엘프이고, 아인은 인간이었다.
보는 시선이 서로 다르니 더 이야기해봤자 이해하지 못 하리라.
"그래요? 그보다 새로운 이단자는 어땠나요."
"이단자치고는 괜찮은 자더라고요."
아인은 폭주 사건이 일어난 것과 그걸 해결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고, 필리야는 짧은 감탄이나 호응을 곁들이며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루드발크는 결국 교단에 들어오고 싶다 하더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잘 적응할 거 같네요. 잘만 성장해준다면 일을 나눌 수도 있겠고요."
동의를 표하는 필리야를 바라보다가 아인은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입니다. 뒤니아, 그자와의 약속 때문에 한동안 세브리온을 떠나야 할 거 같습니다. 2주 정도요."
대부분의 일은 주교의 선에서 처리되지만, 일단 이 지부의 담당자는 필리야였다. 커다란 일을 결정하는 건 그녀인 셈.
물론 필리야는 그 결정조차 거의 주교에게 넘긴 상태였으나, 아인이 움직이는 일은 예외였다.
"일이 생겼다면 갔다 오면 되죠."
"괜찮겠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필리야를 보며 아인이 물었다.
"...세브리온은 걱정할 거 없어요, 아인."
필리야는 세브리온의 가장 안쪽에 있으나, 세브리온의 전체를 감시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세 개의 권능 중 하나인 교감.
그중 유일하게 제재를 받지 않은 권능은, 세브리온에 있는 수많은 꽃과 나무를 통해 멀리서도 그녀가 도시 내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영주성 정도를 제외한다면 권능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동안은 말이다.
그나마 자신이 시간이 날 때마다 도와서 부담을 줄여줬는데, 엔드로로 자작가에 갔다 와야만 했다.
"하나의 권능만 쓰다 보니 점점 능숙해지더군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니 제 걱정은 말고 원하는 대로 하세요."
필리야는 여유롭게 웃었다.
"저는 언제나 아인의 선택을 존중하니까요."
이후로도 아인은 한참이나 이야기를 더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만큼 할 이야기는 끊임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한참이나 기쁘게 들어주던 필리야는 어느 순간 아인의 목소리가 뚝 끊긴 걸 느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니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며칠간 잠을 안 잤다고 했던가요."
나무에 기댄 채로 약간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아인을 바라보던 필리야는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그를 깨우는 대신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내부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고, 그에 따라 점점 흐트러지는 아인의 얼굴을 필리야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해가 지고 다시 다음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아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필리야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로 주교에게서 받았던 열쇠였다.
열쇠를 챙긴 아인은 그대로 주교실로 향하여 열쇠를 반납한 뒤,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출발한 길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운이 좋은데?'
아인은 힐끔 반대편을 보았다.
거기에는 상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때마침 세브리온에서 나름 규모가 있는 상단을 운행하던 상인이 엔드로 영지로 향하고 있었고, 그 소식을 들은 아인은 상단에 동행을 부탁했다.
대신 말 많은 상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지만, 나름 참을 만했다.
"사제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솔직히 엔드로 자작가 주변이 요즘 말이 많다 보니 두려워서 이걸 가야 하나 걱정도 많이 했거든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까? ...그게 나타난다더군요."
"그게 뭔데? 강도?"
게라든은 냅다 고개를 내저었다.
"강도 따위로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나온다고 해도 걱정 없습니다."
실제로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 두어 번 강도단을 만났으나,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단의 기세에 눌려 오히려 도망쳐버렸다.
"제 생에 이토록 용맹하게 싸우는 용병단은 처음입니다. 다 사제님 덕입니다."
"내 덕이랄 게 있나? 싸운 건 용병들인데."
"하지만 사제님이 있으니 다들 두려움 없이 나서는 거 아니겠습니까."
상단 호위에 언제나 용병은 애매한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강도나 몬스터 따위를 만날 때마다 수당이 붙기에 전투가 일어나는 걸 바라면서도, 목숨이 걸린 일이다 보니 한편으로는 아무 일 없이 도착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인이 함께 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바뀌었다.
게라든이 출발할 때부터 용병들에게 사제가 함께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상을 입은 용병을 몇 치료해 줬더니 용병들은 수당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온다는 게 뭔데?"
"그...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마수가 나온다더군요."
"마수?"
"네. 뭐, 요즘 시대에 진짜 마수가 나타나진 않겠죠. 아마 몬스터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수란 몬스터나 산짐승이 마기에 대량으로 노출되면 생겨나는 것들이다.
일종의 방치된 마족의 애완동물인 셈.
그렇기에 게라든은 마수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으나, 그 말을 들은 아인은 표정을 굳혔다.
당장 뒤니아와의 거래에서 들은 이야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엔드로 가문에 자제로 빙의한 이단자가 흑마법으로 마족을 부린다고 했던가?'
갑자기 침묵하는 아인을 보며 상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려는 그때, 마차의 창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십니까."
"엔드로 주변에 마수가 나온다는 소문에 관해 말하고 있었네. 용병 단장, 그보다 팔은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사제님 덕분이죠."
용병 단장은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엔드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으십쇼. 그리고 마수는... 뭐, 별일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반쯤 잘렸던 팔이 순식간에 붙는 광경을 본 용병 단장은 자신감이 넘쳤다.
"놈들이 나타나더라도 사제님은 저희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용병 단장의 말에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걸 아인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일하겠다는데, 굳이 초를 칠 필요는 없지.
"잘 부탁한다."
"맡겨만 주십쇼."
다시금 창문을 닫고 앞서 나가는 용병을 보던 아인은 조용히 마차에 등을 기대었다.
'엔드로에 도착하면 마수에 관한 것부터 수소문해보는 게 좋겠네.'
아인이 엔드로에서 할 일은 엔드로 자작가에 나타난 이단자가 마족을 소환한 게 진짜냐다.
마수가 정말 있다면 그것만으로 마족의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조사고 뭐고 필요 없게 되지.'
이단자라고 모조리 붙잡아 끌고 가는 시대는 지났으나,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대표적인 게 흑마법이다.
물론 모든 흑마법이 불법인 건 아니다. 하지만 시체를 되살리는 네크로맨시와 마족 소환만큼은 예외였다.
네크로맨시는 이유 불문하고 불법이고, 마족 소환은 엄격한 관리하에 지정된 곳에서만 가능하게 되어있다.
'...설마 아니겠지. 막 나타난 이단자들도 교단이 마족에 관해서는 민감하다는 걸 아니.'
병신이 아닌 이상 마족을 소환해도 조용히 하지, 마수가 만들어질 정도로 요란을 떨지는 않을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휴식의 취할 때, 아인은 코끝으로 맡아지는 구린내에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한 악취와는 차원이 다른, 그러면서도 잊히지 않는 특유의 냄새.
"왜, 왜 그러십니까?"
게라든의 말에도 아인은 대답 없이 마차의 문에 손을 올렸다.
"저, 적이다!"
동시에 밖에서 방금 전 용병 단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늦췄고, 아인은 재빠르게 마차의 문을 열며 뛰어내렸다.
어느새 용병단은 긴장한 얼굴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 사제님?!"
"몬스터입니다. 위험하니 안에 계시죠."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말에서 내리며 무기를 뽑아 드는 용병들은 다가오는 적을 보며 빠르게 대형을 갖추었다. 그 속도가 용병들의 경력이 길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내 정찰을 나갔던 자가 돌아오면서 소리쳤다.
"오크다!"
"숫자는?"
"다섯입니다!"
그 말에 용병 단장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다섯이면 충분히 해볼 만한 숫자다!"
"대장, 다섯 좀 힘들지...."
"어휴, 머저리 놈아, 사제님이 계시잖냐."
"아, 그랬지!"
"다들 머리는 조심해라. 아무리 사제님이라 해도 대가리 깨져 뒈지면 어떻게 못 해주시니까."
순식간에 사기가 충만해진 용병 단원들은 도리어 오크들을 도발하듯 함성까지 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네 마리의 오크가 수풀을 해치며 달려 나왔고, 용병들은 넷씩 모여서 오크들을 상대했다.
'이 정도면 알아서 잘하겠는데? 괜히 나왔네.'
도움?
물론 아인이 나서면 빨리 끝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용병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진다.
돈을 벌려고 나온 건데 자신이 오크를 잡으면 그들이 벌 돈이 줄어드니까.
그냥 마차 안에 있을 걸 그랬다.
그렇다고 전투 중에 마차 안으로 기어들어 가기도 뭣하기에 아인은 멀뚱히 서서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때 용병들 중 하나가 대열에서 이탈하며 유독 신이 나 소리쳤다.
분명 조금 전에 다섯 마리는 위험하다고 말하던 놈이었다.
"돼지 새끼들, 별거 아니잖아!"
"방심하지 마라!"
"사제님이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에 이단자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클리셰라고 했던가? 저렇게 나대는 놈이 먼저 죽는다고 하던데.'
그때 마지막 한 마리의 오크가 튀어나왔다.
크워어어!
흉포한 소리를 내지른 놈이 홀로 있는 용병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본 용병은 방패를 들었으나....
파앙!
오크의 주먹질에 방패째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정말이네."
죽지는 않았지만.
잠시 피떡이 되어 쓰러진 용병을 보던 아인은 고개를 들었다.
많은 용병 중에서 딱 이놈이 당했다는 건 놀라웠으나, 진짜 중요한 건 처맞은 용병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나타난 오크.
놈은 전신이 시꺼멨다. 딱 보더라도 이질적인 검은색.
"와, 설마 했는데 이게 여기서 왜 나와?"
마수였다.
9화 엔드로 자작가
검은색의 오크와 한 방에 피떡이 되어버린 부하.
그걸 본 용병 대장이 황급히 소리쳤다.
"요닉, 펜디악! 너희 둘은 나와 함께한다. 다른 놈들은 마수를 건들지 마!"
그러곤 즉각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장 위험한 놈은 내가 상대한다.'
각오를 다진 용병 대장이 앞으로 달려 나갔고, 그 뒤로 두 명의 부하들이 따랐다.
용병 대장의 부하인 요닉과 펜디악이 좌우로 갈라지고, 용병 대장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크워어어!
동시에 사나운 비명을 내지른 마수가 용병 대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협적으로 휘둘러지는 주먹을 본 용병 대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피해냈다. 이어 훤히 드러나는 옆구리를 향해 검을 밀어 넣었다.
푸욱.
"죽어라!"
검은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용맹하게 소리친 용병 대장은 그대로 검을 뽑으려고 했다.
"어, 어?"
하지만 뽑히지 않았고, 안간힘을 쓰던 용병 대장은 순간 마수와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었다.
"위험해!"
그걸 본 요닉이 창을 꼬나쥐고 다급히 달려들었다.
용병 대장에게 한 눈이 팔린 마수를 향해 달려든 요닉은 목을 노렸다.
하지만 창이 닿기 직전 마수는 시선을 요닉에게 돌리더니 두꺼운 팔을 휘둘렀다.
퍼억!
팔에 얻어맞은 요닉이 십여 미터를 날았다가 바닥에 떨어졌고, 이어서 마수의 주먹이 용병 대장의 몸도 강타했다.
"커헉!"
전신이 뒤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밀려나는 용병 대장은 다시금 주먹을 들어 올리는 마수를 보며 생각했다.
죽는다.
휘둘러지는 주먹을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콰앙!
이어서 들려오는 강렬한 타격음.
하지만 느껴지지 않은 고통에 조심스럽게 눈을 떴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인을 발견했다.
"부하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
"하, 하지만...."
"물러나라고."
위험하다.
그 말을 하려던 용병 대장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인가 네 마리의 오크가 머리가 깨진 채로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부하들은 멀쩡한 걸 넘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동시에 아인이 마수에게 달려들었다. 고개를 숙여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안쪽으로 파고든다.
"불꽃과 화합의 여신 헤르트이시여."
자그마한 목소리와 함께 휘둘러지는 주먹.
퍽!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주먹에서부터 터져 나온 빛이 그대로 마수를 관통했다.
크워어어!
자신이 공격했을 때와는 다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트는 마수는 이어진 아인의 발길질에 다리가 부러지며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그 위로 아인의 손이 향했다.
빛이 모여 푸른 불꽃이 되고, 그것이 마수를 뒤덮는다.
마수는 몸을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뒹굴었으나, 그럴수록 푸른 불꽃은 힘을 더해갔다.
그러다 마수는 숨을 거두었다.
너무나 허무한 죽음.
'이게 무슨 일이래.'
한 방만 맞아도 뼈가 부서지는 느낌이었는데, 이리 쉽게 상대하다니.
"부상자를 데려와."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용병 대장은 아인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친 놈 있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용병 대장 본인과 처음 달려들었던 요닉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너무나 멀쩡했기 때문이다.
"빨리 요닉을 데려와!"
눈으로 확인한 용병 대장의 외침에 몇몇이 요닉을 데려왔다.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오크를 공격하려 할 때, 갑자기 사제님이 나서더니 한 방에 한 마리씩 오크를 사냥했습니다."
"뭐?"
"너무 손쉽게 사냥해서 놀랄 정도였습니다."
성기사도 아니고 사제가 한 방에 하나씩 처리한다?
믿기 어려운 말에 용병 대장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아인은 요닉의 중상은 가볍게 치료해내었다.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상인은 숨을 거둔 마수를 바라보다가 아인에게 물었다.
"이, 이놈은 설마... 마수입니까."
"알아보냐?"
"그, 설명하기 좀 어렵지만 뭔가 악취가 난다고 해야 한달까요. 물론 오크 자체가 악취가 나긴 하지만요."
"평소 신앙심이 투철했나 보네."
"하하, 제가 시간 나면 기도도 드리려 가고 그랬습니다."
"됐고."
아인은 가까이 용병에게 손짓했다.
"안 쓰는 칼 있으면 좀 빌려줘 봐."
"네?"
"혹시 모르니 목을 챙겨 둬야겠어."
마수가 나타났다는 증거이니, 쓸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순간 용병의 시선이 아인의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향했다.
'왜 자기 검 놔두고 검을 빌려달라는 거지.'
생각과 달리 물어볼 용기가 나지는 않아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인 모를 검을 건네었다.
아인은 용병이 건넨 검을 들고 휘둘러 단칼에 마수의 목을 베어냈다. 그러자 말로 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용병 대장은 코가 마비될 거 같은 악취에 왜 검을 달라고 한 건지 알아차렸다.
그때 마찬가지로 냄새를 맡은 상인이 황급히 소리쳤다.
"아, 제게 빈 상자가 있습니다. 그걸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상인은 빠르게 짐마차로 달려갔다.
'하, 마수가 나타났으니 일이 상당히 귀찮아지겠네.'
아인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엔드로 영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수가 나타났다는 건 마족이 있음을 확신해주는 말이었다. 동시에 마족이 나타난 지 시간이 꽤 되었다는 말도 되었다.
또한 마족을 부른 이단자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뜻도 되고.
"사제님, 상자 여기 있습니다."
그 사이 상인이 상자를 가져왔고, 아인은 베어낸 마수의 머리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용병들과 상인이 놀라며 소리쳤다.
"사제님은 쉬시죠. 그런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맞습니다. 피를 묻히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방금 전 활약을 보아서인지, 아부하듯 말하는 그들을 보며 아인은 손을 내저었다.
"마수의 피는 잘못 손대었다가는 위험한데? 손이 썩어도 좋다면 말리지는 않지만."
상인과 용병들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 * *
한 차례 마수와의 조우가 끝난 후.
더 이상의 전투 없이 아인과 상단은 엔드로 자작의 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멈춰라!"
문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줄줄이 들어서던 마차가 하나둘 멈춰 섰다.
처음보다 더더욱 아인의 눈치를 보게 된 상인이 재빨리 말해왔다.
"흔히 있는 검사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일일이 설명할 거 없어. 나 역시도 여러 곳을 다녀보았으니까."
"하하, 그러십니까? 아, 엔드로 자작가로 가시면 그다음의 일정은 어찌 되십니까."
"우선 영지 내에 있는 지부에 들를 생각이야. 듣기로는 이곳에 전부터 와있던 사제와 성기사가 몇 있다고 하니, 만나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그다음에는 영주님을 만나실 예정입니까?"
상인은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영주에게 볼일이 있나?"
"사실, 몇몇 영주께 보여드리고 싶은 귀중품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사제님이 같이 가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아인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영지가 좀 낙후되었어도 귀족은 귀족. 돈은 있고 사치는 해야 하는 데, 그걸 파는 곳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이런 발전 덜 된 영지의 경우, 상인들이 직접 귀중품이나 보석 따위를 들고 찾아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상인은 큰돈이 오가는 거래를 할 수 있고, 귀족은 사치를 위해 다른 영지까지 갈 필요가 없어서 서로 이득인 셈.
"함께 가는 건 상관없어. 다만...."
"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신께 맹세컨데 사기 같은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해도 돼."
"네?"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지금 발언까지 묶어서 처리해버리면 되니까.
게라든은 아인의 말에 잠시 멀뚱히 그를 보다가 말했다.
"사실... 그보다는...."
"무슨 일인데?"
"사제님도 일이 끝나면 세브리온으로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괜찮으시다면 돌아갈 때도 동행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의도인가 했더니.
아마 조금 전 본 마수가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네.
뭐, 이쪽도 편히 갈 수 있으면 좋은 거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시간이 서로 맞는다면."
"그거면 충분합니다."
짧게 대답한 아인은 아직 마차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보다 오래 걸리네."
"무슨 일이 있나? 잠시만 기다리시죠.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그리 말한 게라든이 마차의 문을 연 순간 짜증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장 짐을 모두 내려라!"
"...요즘에는 문지기 대신에 강도가 문을 지키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차 밖으로 내리니, 문지기가 창을 겨눈 채로 용병들을 위협하는 모습이었다.
아인은 용병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모든 짐들을 검사하라는 영주님의 명이 있다고 합니다. 저흰 원래 몇 번 이곳에 왔었는데도 들여보내 주지 않는군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보이고 있었다.
'벌써부터 개 같군.'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오기 전에 들었던, 뒤니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단자고 뭐고 영주의 자식이 마족을 소환한 거니.
일단 단속을 강화하고 본 것이리라.
"시간이 좀 걸리겠네."
"그렇다면 먼저 들어가시겠습니까? 검문이 끝난 뒤에 말씀하신 성당에서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자고."
냉큼 묻는 게라든에게 아인이 대답하자, 게라든은 재빨리 마수의 목이 담긴 상자를 가져와 건네었다.
그걸 받아든 아인은 성큼성큼 걸어서 성문 앞으로 다가섰다.
"멈춰라."
단호한 말에 아인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직접 문을 지키고 있는 자가 단순한 경비가 아니라 기사임을 알아봐서다.
아인은 간단하게 복장을 정리한 다음 말했다.
"불꽃과 화합의 여신 헤르트 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사제십니까?"
"그렇다."
아인은 대답과 함께 손끝으로 약간의 신성력을 일으켰다.
"일이 바빠서 그런데 먼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나?"
"기다려야 합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그건 알려줄 수 없습니다. 상급자에게 연락을 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수 때문이군.
그로 인해 영지의 경계가 강화된 것이 분명했다.
'마수를 두려워해서보다는 소문을 두려워하는 거겠지만.'
마수가 나타난 원인이 영주의 자식으로 추정되는 상황.
그렇다면 사제를 막아서는 것도 짐작이 되었다. 사제란 당연히 마기에 민감하기 마련이니까.
평소라면 환대받는 게 당연한 사제가 지금은 경계의 대상인 것도 이해가 됐다.
따라서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결정권자라는 놈이 나타나기를.
'그런데 이건 아니지 않나.'
성문 앞에 가만히 선 아인의 미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찌푸려졌다.
기다림을 예상하긴 했으나, 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벌써 아까 전에 시작한 마차의 검사가 절반 이상 진행되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넘게 지난 것.
그럼에도 가로막힌 길 너머에서는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심지어 죄송하다는 말 따위조차 없는 상황.
'한 시간이면 충분히 기다렸지. 여기서 더 가만히 기다리면 호구가 되는 거고.'
판단을 내린 아인은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를 본 예의 기사가 황급히 나서며 말했다.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요."
"언제까지?"
"곧 안에서...."
"그게 언제냐고. 대륙 어디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제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 자네가 여신의 종인 나를 조롱한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데."
아까 전과는 다르게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에 기사는 눈앞의 너저분한 옷을 입은 사제가 보통은 아님을 알아차렸다.
"말해.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벤 경입니다."
"그럼 그를 불러오도록. 네가 직접."
"그, 그건...."
"못 불러오나? 영주께서 벤이라는 자에게 성문을 지키라 명했는데, 자리에 없을뿐더러 부르지도 못한다고? 일이 장난이야?"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경비병을 보며 아인은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되도 않는 상황이래?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네. 영주께 가서 허락을 받아오도록. 지금 당장!"
차디찬 목소리에 성문을 지키던 기사는 눈앞의 사제가 미쳤나 생각했다.
아무리 사제라 해도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인의 질타가 다시금 이어졌다.
"나는 뒤니아 님을 대신해 영주님의 청을 받고 해결하기 위해 왔다. 그런데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청을 받고 왔다. 그 말에 기사의 얼굴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만약 진짜면 보통 사고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있는 일은 영주께 꼭 전해져야 할 거야. 내 입으로 전하게 된다면 후폭풍이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
직접 영주를 만나서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답을 받아오라.
이미 사고가 크게 터짐을 알아차린 기사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윽, 말을 준비해라!"
* * *
'일이 또 꼬였군.'
아인은 단순히 기사를 압박하기 위해서 일을 벌였을 뿐이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그런데 일이 이상한 데에서 커져 버렸다.
말을 타고 내달린 기사는 얼마나 빠르게 다녀온 것인지 아인이 기다리던 시간의 절반도 안 되는 사이에 돌아왔고, 그대로 영주성으로 초대되었다.
'영지에 있는 지부에 들러야 했는데....'
영주가 직접 달려온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영주성으로 오게 되었다.
아인은 눈앞에 차려진 엄청난 만찬을 보다가 손을 뻗어 포도 하나를 들어 입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엔드로 자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냐 고생 많았네."
"원래라면 영지 내에 있는 지부에 먼저 들를 예정이었습니다만."
"하하, 미안하네. 다만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엔드로 자작은 미안한 티를 내면서도 눈으로는 빠르게 아인을 살폈다.
"성문에서 있던 일은 내가 사과하겠네. 고의는 아니었다네. 다만...."
엔드로 자작은 아인과 함께 딸려온 게라든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서 이해해주리라 믿네만,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네."
동시에 자작의 옆에 있던 기사가 허리가 부러져라 고개를 숙였다. 성 앞에서 그를 대기시켰던 기사다.
아인은 그 기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뿐, 저자는 역할을 다한 것이니 저도 책임을 묻고 싶진 않네요."
"이해해주니 다행이네."
"하지만 벤이라 하는 상급자는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물론이네. 당장 죄를 묻도록 하겠네."
엔드로 자작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한 다음 아인의 눈치를 살폈다.
사도라는 것은 귀족이라고 해도 쉬운 상대는 아니라서, 그는 정말 어렵사리 사도 뒤니아에게 부탁해 사제로 위장한 이단심문관 하나를 청하였다.
그래서 온 게 눈앞의 남자였다.
이십 대 중반에서, 많이 쳐줘야 서른 정도로 보이는 외형.
'일단 이단심문관이 맞다곤 했으니, 사칭은 아닐 텐데.'
영주는 조금 더 나이가 많은, 흰머리가 자라기 시작한 이단심문관이 올 거라 생각했었다.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아인입니다."
"아, 아인?!"
엔드로 자작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비록 구석진 곳의 귀족이지만 엔드로 자작도 기본적인 흐름은 알았다.
눈앞의 심문관은 자신이 사도 뒤니아에게 부탁하여 온 자다.
'설마 그 미친 이단심문관일 리는 없겠지.'
우연히 이름이 같은 것이리라.
"좋은 이름이군."
"네? 뭐.... 감사합니다. 그보다 이왕 바로 저택으로 오게 되었으니, 우선 부탁받은 일을 할까 합니다."
원래는 교단의 지부로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작의 저택에 와버렸으니 빨리빨리 일을 끝내는 게 나으리라.
"바, 바로 말인가?"
그런데 엔드로 자작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먼 길을 왔을 텐데 조금 쉬는 게 어떻겠나."
"전 괜찮으니 바로 해도 됩니다. 오는 길이 어렵진 않았으니까요."
"아닐세. 뒤니아 님께서 보낸 자이니 믿긴 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보니 확실하게 했으면 하네."
이걸 굳이 거절한다?
아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빠르게 일을 진행하고 싶긴 했지만, 영주의 제안을 대놓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아인은 세브리온의 이단심문관이 아닌, 뒤니아의 부하로서 이곳에 왔다.
"아니면 다른 볼일이 있는 듯싶으니 그것부터 처리하는 게 어떤가."
그리 말한 엔드로 자작의 시선이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얼떨결에 아인과 함께 오게 된 게라든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앉아 있었다.
10화 누가 마족을 불렀는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