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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화

마법 폭탄이 빗발치고 하늘에서는 마법 미사일이 쉴 틈 없이 내리꽂힌다.

폭음과 굉음으로 이미 고막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

방금도 옆에 떨어진 포탄으로 왼쪽 팔이 병신이 되었다.

"―――!"

옆에선 장교가 무어라 소리치지만 이미 기능을 상실한 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입만 벙긋거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틈도, 한숨 돌릴 틈도 없다.

도망치는 병사들이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나를 중심으로 구축한 탐지 공간 안에 미사일이 들어온 걸 느꼈다.

속도를 보아하니 막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근막이 찢어진 오른팔을 겨우 들어 미사일을 정지시키자 속에서 피가 울컥하고 역류했다.

"우에에에엑!"

탈수로 인해 피가 끈적해진 상황에서 피까지 토하니 현기증이 몰려오며 중심이 무너져 내렸다.

쓰러지는 날 누군가가 부축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방금의 부작용으로 시력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괜찮냐?"

"차라리 죽여줘, 시발…."

"다행히 안 죽었네."

들릴 리 없는 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며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보이지 않던 시야와 탈수로 인해 타들어 가던 목이 멀쩡했던 상태로 돌아오니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종군 마법사로 상당히 유명한 친구이자 나보다 더 병신같은 머저리 새끼.

"넌 괜찮냐?"

"나야, 뭐."

녀석도 몸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비틀거렸고, 나는 그런 녀석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쌩쌩해진 체력과 멀쩡한 오감은 이능의 발현을 더욱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근처에 도움이 필요한 병사들을 도우며 친구를 옆에 앉혔다.

"상황은."

"안 좋아. 제국은 고사하고 3세력까지 끼어들어서 말이야."

"3세력? 어디의 어떤 쌍놈들이?"

"몰라. 물량은 적은데 각성자들이 너무 많아. 삼파전은 무슨… 우리부터 없애려고 하는 것 같더라."

일어나 탐지 범위를 앞으로 확장하니 확실히 새롭게 느껴지는 각성자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늘어난 건 늘어난 건데, 친구 녀석의 말처럼 제국 놈들과 함께 밀고 들어오는 모습에 우리부터 없애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또한 감지되는 기척이 각성자라고 하기보다는 약간… 마법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걸 보니 각성자는 확실했지만 느껴지는 기척이 마법사라니….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제국 – 연방 – 제3세력.

제국과 연방은 언제나 늘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바빴고. 제3세력이 제국을 돕는 걸 보니 어린이가 봐도 저건 제국의 우방임에 틀림이 없었다.

연방인 우리 진영의 열세가 명백한 상황.

"도망가자."

"안 가."

"미쳤냐!? 연방이 얼마나 좆 같은지 제일 잘 아는 새끼가 전장에서 죽겠다고? 연합을 위해서?"

"너야말로 미쳤냐? 이 사람들 버리고 도망가자고?"

창백한 얼굴빛으로 눈을 부라리는 친구 녀석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입술을 짓이고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눈치를 바라보는 이들만 어림잡아 수십은 되어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끔찍했던 녀석이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읊조렸다.

"연방은 안 바뀌어. 이 미친놈들은 지들 위해서라면 우리도 팔아먹을 새끼들이야. 그리고 얘네들은 그런 연방의 병사들이고."

"우리도 연방이고. 이들 중 대다수는 전쟁에 끌려온 징집병이야. 이들 중 대다수가 한 가족의 가장이고 아빠야. 그 사람들이 죽으면 우리 같은 전쟁고아가 또 생겨난다고."

"그렇다고 저들을 지키다가 죽겠다고? 안 죽는다는 병신같은 소리하지 마라. 머리 하난 똑똑한 새끼가 그거 하나 파악 못 하진 않을 거 아니야…."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적들뿐.

이미 영관급 이상의 장교들은 도망간 지 오래고 후방에 있던 본진도 후퇴한 것처럼 아무런 소식이 없다.

뒷빵을 아주 제대로 맞아 눈이 뒤집혀버린 제국은 우리를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테고 제3세력은 툭하면 폭탄으로 테러나 하는 연합국 병사들을 살려놓진 않을 거다.

남아있는 초인이라고 해봤자 나와 얘, 그리고 녀석을 따르는 몇몇 종군 각성자들.

병사들이야 탄약이 부족한 상황인지라 있으나 마나 한 상황.

시발….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다.

"가자. 너 죽으면 티우센티아는? 힐리그라드에 있는 고아원의 꼬맹이들은."

"…친구야."

"부르지 마. 난 갈 거니까."

"…비겁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자."

"티우센티아를 지켜달라느니, 꼬맹이들 돌봐달라느니… 좆까. 네가 직접 해."

핼쑥한 얼굴로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일어난 녀석은 등을 돌린 내 어깨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나도 원장님 때문에 살았잖아. 원장님 유언 정도는 마지막으로 들어줘라. 응?"

아주 뭣 같은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린 원장.

길거리에서 아사하기 직전인 우리를 거두어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준 남자이자 솔직히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의지하던 남자.

하지만 연방의 추종자이자 뼛속까지 혁명을 부르짖던 극성 급진 개혁파였던 미친놈.

연방을 싫어하는 이 녀석을 지금까지 연합에 남아있게 한 존재이자 나의 스승이기도 한 남자.

"...."

"대장님!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녀석을 부르는 한 각성자의 외침에 내 어깨를 툭툭 치고 가는 친구.

동시에 쏟아지는 포탄과 미사일.

저장해 놓은 위치의 좌표를 떠올리고 이동하기 직전. 친구 녀석이 믿고 데리고 다니던 동료 각성자가 기어코 병신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미친 새끼가!!"

칼침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친구의 모습에 도망이고 뭐고 다 버리고 달렸다.

친구를 찌른 각성자의 옆을 팽창시켜 날려버리고, 떨어지는 포탄과 미사일을 전부 멈춰 세웠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친구의 곁으로 이동해 상처를 살폈다.

"야… 이 씨발…! 의무병 없어?! 의무병!!"

마법 처리가 된 칼로 찔렀는지 심장이 깔끔하게 관통됐다.

피를 토하는 녀석은 나를 말리듯 내 옷깃을 붙잡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나는 죽어가는 녀석을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나, 나 말―읅! 나 말고. 나 말고 저들을 도와… 욻!"

"닥쳐봐, 좀! 씨발 의무병!!"

땅에 굴러다니는 응급 키트를 옆으로 가져와 빠르게 지혈제를 뿌리며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이능으로 피가 나오는 구멍을 막으며, 살면서 배웠던 지식을 최대한 동원하면서.

"씨발 급진 개혁파 미친 새끼들…."

날려버렸던 각성자가 팔뚝에 완장을 차더니 본격적으로 주변 연방 측 병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일부 완장 찬 미친놈들이 혁명을 부르짖으며 난리를 치자, 일반 연방 측 병사들의 수가 빠르게 줄었다.

미친놈들은 제국과 제3세력에 붙잡히기 전 몸을 폭사시켜 적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끼쳤고.

녀석들의 수가 줄면 줄수록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제국 병사들의 수가 많아졌다.

"친구야…."

"입 좀 다물어봐. 여기서 살아나가고 나면 귀에 피딱지가 생길 때까지 들어줄 테니까. 씨발!"

"야…."

"살아서 돌아가면 급진 개혁파 씹새들부터 모조리 쳐 죽여버릴 거니까. 너도 동참해라.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가."

친구를 들쳐업고 촘촘한 포위망을 뚫고 달렸다.

녀석의 피로 인해 축축해지는 등을 애써 무시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심장이 옥죌 때까지 이능을 쥐어짰고 과부하 때문에 피를 토하면서까지 포위망을 뚫고 뚫고 또 뚫었다.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흐르는 피 때문에 추격자가 찾아오는 건 시간문제.

친구를 땅에 내려놓으니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얼굴로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웃지 마, 미친놈아…."

"우… 냐?"

"처맞을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친구 녀석의 죽음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녀석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까닭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후회와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울지 말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라."

"뭔데."

"내 심장… 네가 먹어라."

마법사의 심장은 보물로 여겨질 만큼 귀중하고 또 귀중했다. 마법사 본인에게는 생명의 근원 중 하나였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마법사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보물이자 연구원들에게는 마법이란 기적의 힘을 연구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

연방의 군종 마법사이자 대표하는 시간의 마법사, 최강은 아니지만, 최고의 능력을 지닌 진정한 의미의 마법사.

"…진짜 개소리 마. 미쳤냐, 진짜?"

"제발…."

친구의 늘어지는 숨소리에 고민하고 있을 때.

탐지용 공간에 기척이 걸렸다.

"시간의 마법사여! 우리 연방을 위해 심장을 바치시오!!"

"어떤 미친놈이 심장을 찔렀어?!"

"해룡(海龍) 각성자는 심장을 보존할 얼음을 만들어 놓으라!"

뿌드득….

우르르 몰려드는 급진 개혁파 씹새들.

자연스럽게 이가 갈리고 주먹이 쥐어진다.

와도 저딴 벌레 새끼들이 오는지, 만약 제국이었다면 투항이라도 할 생각이었건만.

"시간 없다…."

와중에 시간 없다며 나를 보채는 친구까지….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더 하자."

"...."

들고 있던 단검으로 친구의 가슴을 가르고 갈비뼈를 부수며 녀석의 마지막 유언을 들었다.

"약자를 돕고 선행을 베풀… 어"

약자를 돕고 선행을 베풀며 살아라.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미친놈이었던 놈의 유언과 똑같은 유언.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친구의 시신 앞에서 눈물과 함께 녀석의 심장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치밀어 오르는 역함에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친구의 마지막이자 모든 것을 넘겨줄 순 없기에 모두 삼켰다.

"저, 저, 저 미친놈이!!"

"귀중한 연구 사료를!!!"

어느새 가까워진 급진 개혁파 미친놈들의 말을 들으며 녀석들을 바라봤다.

"고맙다. 이 씹새들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허탈함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에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눈앞의 저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 있을까에 관한 고민을 이어가던 도중.

뒤늦게 도착한 제국의 추격자들.

그들은 같은 편이 대치하는 상황을 보고 잠시 멈춰 섰고, 급진 개혁파 놈들 역시 제국의 눈치를 보며 나를 연신 흘겼다.

"...!"

심장을 삼킨 경험이 처음이기도 하고, 관련 서적은 읽지도 않아서 갑자기 느껴지는 어지럼증과 질식에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휘청였다.

내 이상을 감지했는지 금진 개혁파 쪽의 각성자 한 명이 검을 들고 나에게 쇄도했고.

푹―

나는 이능을 쓰지 못한 채 가슴을 꿰뚫렸다.

"잡아!!!"

"막아!!!"

제국, 연방 할 것 없이 나에게 쇄도하는 모두를 바라보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씨발… 나도 연방 출신이긴 한가보다…."

가슴을 찌른 각성자의 품속에서 소시지처럼 엮인 폭탄을 꺼내 안전핀과 클립을 제거했다.

주변에 모인 씹새들이 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공간을 분리했다.

"여, 열어줘!!"

"저저저, 저! 미친놈이!!"

"저 새끼를 죽여! 공간 이능을 가진 건 여기서 2부국장뿐이야!!"

급진 개혁파의 안대 낀 미친놈이 종종 내게 말했었다.

예술은 폭발이라고. 아니, 그 반대인가?

폭사하기 전, 급진 개혁파 놈들이 판을 치게 될 때쯤인 20년 후로 이동했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람과 욕망을 담아 친구에게 빌었다.

친구야 다음 생이 있다면 바라건대, 넌 전쟁이 없는 곳에서 태어나라.

난 여기 분리수거 좀 하고 뒤따라갈 테니까.

그렇게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며 폭발했다.

#002화

눈이 무겁다. 아니, 눈이 안 떠진다.

눈꺼풀을 움직이려 했지만, 무언가 꽉 막힌 듯 눈두덩이를 붙잡고 놔누지 않은 듯했다.

팔을 들어 눈가를 훔치려 했지만 팔이 병신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

시발 하다하다 목소리까지 안 나오네.

허탈한 마음을 달래고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했지만 헛수고.

압박감이 없는 걸 보니 구속되거나 감금된 것 같지는 않은데, 온몸에 힘이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히바…."

힘 빠진 시발 소리가 마법 주문이었는지 부드러운 경첩 소리가 들리더니 사박거리는 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기척에 온몸을 비틀고 온갖 욕이란 욕지거리는 다 뱉었지만, 방금의 쉰 소리는 기적이었는지 아무런 신호를 줄 수 없었다.

이내 누군가가 움직이지 못하는 내 상체를 일으키더니 상의를 벗기고 등을 닦기 시작했다.

"에휴.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 귀찮게…."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풋, 누가? 5황자 전하께서? 쓰러지신 지 벌써 5년이야, 5년. 그동안 폐하는커녕 의사들도 마저 진찰을 안 했는데 일어나기야 하겠어?"

"얘! 말 좀 가려서 해!"

"소문에는 멀쩡하셨을 때, 1황자 전하한테 찍혀서 그 흔한 진료 한 번을 못 받는다고 하더라."

재잘거리며 떠드는 두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몇 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나. 나는 현재 제국의 황자라는 점.

둘. 앞서 도출된 황자라는 점에 의거하여 나는 서방 최강이자 최고의 나라. 오트론 제국의 직계라는 점.

대륙을 통틀어 황(皇)의 칭호가 붙는 나라는 오트론 제국이 유일했기에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다만, 의심해야 할 점은 내가 죽고 난 20년 후의 미래이기에 그사이에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여성들이 시대를 알만한 단서라도 던져줬으면 좋으련만….

"그나저나 그거 들었어?"

"뭐를?"

"이번 아카데미 96기 수석 수료생이 3황자 전하 밑으로 들어간다던데?"

"3황자 전하? 그… 그래? 그런데 3황자 전하는 하반신 마비시잖아…?"

"하반신 마비는 4황자 전하셔, 그런데, 어머~ 이 기집애 보소? 방금까지는 5황자 전하 앞에서는 무례하게 굴면 안 되고, 4황자 전하는 이렇게 뒷담으로 욕해도 돼?"

"아냐아냐! 내, 내, 내가 언제!!"

엉덩이를 닦아주는 손길을 하얗게 잊어버릴 만큼의 충격이 나를 덮쳤다.

자, 잠깐…. 아 시발, 제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뭐? 아카데미 96기 수료?! 반신불수인 4황자?!

"끄…. 끄으윽."

"꺄아아악!!"

"화, 황자님께서!! 5황자님께서!!"

"히바…."

친구의 심장을 삼키며 폭사했을 당시의 제국 황립 아카데미의 수료 기수는 116기.

그 당시의 황제가 아직은 황자였던 시절, 이복동생인 4황자는 평생 휠체어를 탄 하반신 마비.

위와 같은 사실을 나열해 보면….

즉, 나는 20년 전인 과거로 회귀함과 동시에 침상에서 쓸쓸히 죽어갔다고 알려진 오트론 제국의 5황자의 몸에 빙의하게 됐다.

이십 년… 이십 년 후! 이십 년 전이 아니고, 이십 년 후! 이 병신같은 마법 새끼야…!

***

"별 이상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근육이 많이 수축한 것 이외에는 건강하십니다."

"하하! 그런가요? 정말 다행이군요!"

"저, 그럼. 저는 이만."

"아, 넵! 제가 얼른 전하를 뵈러 가야 해서 배웅은 이분께서 해드릴 겁니다!"

의사를 보낸 집사장 파몬드의 생기 있는 미소가 순식간에 빛이 바랬다.

황자가 머무는 방문 앞에서 옅게 한숨을 내쉰 파몬드는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았으나 이내 곧 손을 떨어뜨렸다.

5황자.

제국 황실의 유일한 적통이며 모든 대신의 지지와 온 백성들의 보살핌 아래 커온 완벽한 황자.

차기 황태자 자리는 누가 봐도 5황자였고, 그가 황좌에 오르면 치세와 제국의 홍복은 당연지사인 것처럼 느껴졌다.

황제를 닮은 올곧고 강직한 성격과 돌아가신 황후를 닮아 자애롭고 자비심까지 넘치는 현군의 성품을 가졌었으나….

끼이이익.

"전하! 신, 파몬드 전하를 배알하옵나이다!"

"...."

"전하! 신이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까!"

"...."

"전―"

"쉿."

5년간의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탓인지 초점 잃은 잿빛의 눈동자와 열린 입 사이로 흐르는 침.

파몬드가 알던 5황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의 소견이 정상이라는 걸 보니 건강상에 이상은 없다는 소리일 텐데….

"오늘이 몇 년도지?"

"제국력 320년입니다."

"320년."

현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 어언 20년.

제국력 315년에 쓰러진 5황자였으니 당연히 물어볼 거라 예상했지만….

황자의 눈에서 이는 파동을 보고는 말없이 방을 나갔다.

아무리 파몬드일지라도 나라 망한 표정을 짓는 황자 앞에서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

"씨발."

전속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나가자마자 반사적으로 욕을 뱉었다.

"아, 시발이래. 욕은 좀 위험해."

근데 지금 내가 욕을 안 하게 생겼냐?

뭐? 제국력 320년?

하, 시발. 내가 활동하던 당시, 즉 서방 왕국과 연방의 전쟁이 파국으로 치닫던 시기는 340년.

또한, 전쟁은 335년에 일어났다.

앞으로 15년 남았다는 소리.

차기 황제가 되는 자는 지금 황제의 첫째 아들.

그는 온갖 연방 발 프로파간다는 물론이고 테러 또는 연방에서 심어 놓은 간첩들의 파업 및 태업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효율적인 군제 개편으로 꽤 큰 효과를 봤고 그 효과는 연방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대외적인 모습을 봤을 때 그는 훌륭한 정치가임과 동시에 빼어난 군인이었으며.

전쟁만 아니었으면 두고두고 회자하는 훌륭한 성군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 상황에 그만큼 칭송받는 것도 능력이야. 하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와 별개로 1황자의 성격과 성품은 도저히 성인군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싸이코에 정신병자였다.

"그 싸이코 새끼가 피붙이라고?"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별개로 당시 황제, 즉 현재 1황자의 황실 내부 이미지는 쓰레기 그 자체였다.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 웬만한 권력이 황제에게 위임되었고.

때문에, 언론마저 정부에게 억압받는 상황이었던지라 실체는 까발려지지 못하였으나 나는 알고 있다.

1황자 씹쓰레기 새끼가 5황자 암살의 미수범임과 동시에 전쟁을 발발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회귀 전, 연방 총통 직속 기관인 연방보안회 2총국의 부국장까지 올라갔던 나였기에 알 수 있는 정보.

대외 첩보 및 해외 파견 임무는 1총국의 역할이었지만 타국의 부국장 정도면 웬만한 기밀은 다 접근이 가능했다.

"인생. 좀 순탄하게 흘러가나 했더니."

20년 전의 다른 몸으로 돌아온 것도 뭣 같은데, 암살로 추정되는 인물이라니.

인생 2회차도 개같이 구를 생각에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

5황자가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은 곧 전국적, 아니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대륙의 싸움 1짱이자 경찰과 은행 및 아무튼 이것저것을 자처하는 제국 황실에서의 일이니 어찌 조용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밖이 시끄럽고 조용하건 나는 요 며칠 동안 뼈가 시리고 닳게 재활에 힘쓰고 있었다.

암살당한 게 확실치는 않지만, 연방의 정보력 또한 제국에 뒤지지 않으므로 1총국이 그랬다면 거의 확정이나 다름이 없다.

"허억, 허억. 너무 힘든데?"

"힘내셔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오버하지 말고."

"합죽이!"

"합죽이는…."

파몬드의 지랄에 반사적으로 쌍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울컥 치솟는 화를 참았으며, 미소짓는 집사장, 파몬드를 바라봤다.

5년간의 의식불명으로 인해 예산이 감축된 5황자궁에서 유일하게 5년 동안 자리를 지킨 자칭 충신인 머저리.

허구한 날 배시시 웃는 얼굴로 멍청한 짓을 처하지 않나.

한번 말하면 똑바로 알아들어야 할 것을 서너 번은 기본이오.

두 번 만에 알아들으면 외려 장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 정도로 멍청하다.

"저기."

"히끅!"

"이리로."

"예옙! 황자 전하!"

"지팡이."

"여, 여기 있습니다!"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내게 목발용 지팡이를 건네는 여성 사용인.

내 몸을 구석구석 닦으며 본의 아니게 앞 담을 뒤지게 까버린 운도 없는 여자다.

아직 5황자의 말투와 성정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최대한 단답을 사용하려고 해서 그런지.

이 여자는 내게 너무 쫄아 버렸다.

"물."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조신이 고개를 조아리는 다른 여성 사용인.

옆에서 파들파들 떠는 사용인과 다르게 나를 변호하고 4황자의 호박씨를 깠던 여자.

물로 입안을 헹구고 물병을 넘긴 다음 파몬드를 바라봤다.

"황ㅈ, 아니. 폐하는?"

"폐하께서는 오늘도 별다른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흠… 그래?"

이놈의 집안은 콩가루인가?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황자궁이라 읽고 저택이라 쓰는 집에 들어왔다.

조용한 저택 내를 걸으며 방에 도착하니 열린 창문 사이로 찬 바람이 솔솔 불어 들었다.

발코니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 석양을 바라봤다.

피와 같은 검붉은 하늘.

언뜻 보기에 흉조로 보일 수 있지만,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그라데이션으로 물든 구름은 요리 봐도, 조리 봐도 흉조였다.

"뭘 어디서부터 어떡할지도 모르겠다, 친구야."

메아리 없는 혼잣말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까.

왜 나는 20년 전으로 돌아왔을까.

내가 20년 후를 바랐던 것은 급진 개혁파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연방.

그리고 전쟁의 피해로 피폐해진 서방.

그 어수선한 시대가 복수하기에 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20년 전….

다짐했던 것처럼 복수를 해야 할까?

그렇기에 지금 나 '5황자'는 너무 연약하고 힘이 없다..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한다?

그건 있을 수 없다. 지금도 연방이 나와 친구 녀석한테 저지른 패악질만 떠올려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하아."

"죄, 죄송합니다!"

내 한숨에 반응한 예의 여성 사용인.

청소하려고 들어오려던 찰나에 놀랐는지 문고리를 잡고 다시 나가려는 듯 보였다.

"할 일 해."

"예…. 전하."

청소로 인해 발생한 백색소음을 배경으로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피처럼 검붉은 하늘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늘에 불이라도 났나."

내 중얼거림에 청소하던 사용인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엔킷 님의 외도를 리시드 님이 알아차리면…. 오늘 같은 붉은 노을이 진다고… 합니다."

"그 말을 믿어?"

"미,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앙이 널리 퍼져있으니까요…!"

"그럼 믿는 거네."

"제가요!? 제가 언제요!"

아 시끄러, 시발.

뒤에서 갸릉갸릉 거리는 사용인을 무시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불의 여신 리시드.

하늘의 신 엔킷.

둘은 남매이며 동시에 연인이고 동시에 부부란다.

어지러운 신화 속 설정은 둘째치자, 옛 신화가 다 그렇지 않은가.

하늘의 신이자 자유의 신인 엔킷은 가장 많은 이들이 섬기면서 동시에 가장 여인의 원망 대상이다.

자유라고 포장되어 있지만, 그 실상은 외도.

그런 외도신의 아내인 리시드.

불의 여신이자 동시에 복수를 관장하기도 하는 그녀.

불은 인류에 있어… 이것도 넘어가고 중점은 복수.

그녀의 신도들은 복수는 당연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끊임없는 은원(恩怨)이 세상을 굴러가게 만든단다.

이건 또 뭔 개소리람.

복수의 신 리시드.

"복수라…."

하고 싶다.

미치도록 하고 싶어.

그런데 어디서 뭐부터 할지 도무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003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 그 느낌이 생생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물리적인 시간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친구의 갈비뼈를 부수던 그때의 느낌.

혈관을 잘라 꺼내 들 때도 느껴지던 심장의 박동.

비릿한 피 냄새를 무시하고 심장을 베어 물었을 때의 형용할 수 없는 그 맛까지.

그렇게 녀석은 한겨울철 불씨만큼 허무하게 꺼졌다.

허나, 20년 전으로 돌아온 지금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원이 아예 없는 지금, 나는 복수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한다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

"복수의 여신이라…."

평생을 친구를 위해 살아왔다.

삶의 목적이 불분명한 내게, 녀석의 선행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었으며, 녀석의 정의감은 불가해한 무언가였다.

하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만하라고 뜯어말려도 기어코 일어나는 친구 녀석의 태도에 나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응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위해 연방에 복수한다고 하면 너는 내게 뭐라고 말할까.

- 그런 거 할 바에 선행이나 베풀지 그래?

뻔하디 뻔한 그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여간, 병신같은 새끼."

"예? 저요?!"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안에 있던 사용인이 나를 획 바라보며 덜덜 떨었다.

여기도 너 같은 병신이 있다, 친구야.

"아니. 청소 다 했으면 가."

"...."

손을 훠이훠이 내젓자 사용인이 우물쭈물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리시드 신앙의 복음에 따르면 복수는 꼭 피를 봐야 하는 건 아니라고 적혀있어요. 복수의 대상이 부자라면 그 이상의 부자가 되는 것. 복수의 대상이 공직자라면 그보다 높은 공직자가 되는 것."

기도하듯 읊조리는 사용인의 모습을 말없이 빤히 바라봤다.

"즉, 상대방보다 본인이 더 값어치 있고, 중요한 사람이라 느껴지는 순간 역시 복수라 명시하고 있어요."

저 어울리지도 않는 성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신 승리로 자위하라는 거지? 무슨 그딴 신앙이 있냐."

나도 모르게 예전 말투가 나갔지만, 사용인은 그게 중요한지 아닌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녜요! 복수에 얽매이되 복수에 빠져 자신을 해치지 말라는 소리라구요!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복수의 대상마저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완전한 복수라구요!"

"아멘."

"캬아아악!"

"훠이~ 훠이~ 썩 물러꺼라."

다시금 손을 내젓자 씩씩거리던 사용인이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야."

"예? 아, 예! 전하."

"어울리지도 않는 예절은 남 앞에서만 하고."

"예? 아, 예…?"

"이름이 뭐냐, 너."

"에, 에트릴이라고 합니다."

5황자가 아닌 전생의 내 말투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녀석은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사용인, 아니 에트릴은 아는 걸 줄줄이 읊었을 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덕분에 마음 한편이 편해진 탓에 나오는 진심이었다.

"됐어. 나가봐."

"예? 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아, 그리고 오늘 수고했다, 에트릴."

"…가, 감사합니다?"

"걤섀햽늬댸? 의문문? 하여간, 젊은 것들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아오."

적막해진 방안, 그 사이 세상은 황혼이 마지막 힘을 짜내었지만 결국은 어둠을 이기지 못했다.

옛 신화에 따르면 리시드의 분노에 겁에 질린 엔킷이 저 반대편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그리고 리시드가 엔킷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 주기에 엔킷이 다시금 찾아와 여명이 온단다.

"자위, 거. 내가 또 한 따까리 하는데 말이야."

용서와 이해, 관용은 내게 있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양지에 있기에는 음지에 너무 오래 있었다.

나는 연방을 용서치 않으리라, 연방의 하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기에.

그러니까 나는 무구한 피해자가 나오는 전쟁을 막는다, 연방이 하는 일을 엿 먹이고 친구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개인적인 친구 녀석의 복수는… 그 이후에 또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으리라.

***

복수? 중요하지.

그런데 복수 이전에 내 목숨이 더 중요해, 흑흑

일단 생각을 해봐야 할 건 내가, 즉 5황자가 어떻게 죽었냐는 것이다.

암살인 건 기정사실인 상황.

그렇다면 암살의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는 소리.

암살자가 찾아와 찔러 죽였나?

아니면 몸을 닦는 척하면서 소량의 독을 매일같이 몸에 도포했나? 등등

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는 병약한 막내 황자일 뿐.

저택의 사용인들이 내게 뭔 짓을 하려 해도 당할 수밖에 없다.

만약 암살자가 찾아온다면 사망 확정이다.

내가 당장 취할 수 있는 건, 3명 밖에 없는 저택에 내 편을 만드는 것.

하지만 이 3명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나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내 편을 만들려고 한다.

똑똑.

"황자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들어온 첫 번째 손님.

저택의 유일한 집사인 집사장, 파몬드.

파몬드는 앉기도 전에 차를 끓이기 위해 움직이려 하였으나, 내가 그를 제지했다.

"그냥 앉아."

"넵!"

"할 얘기가 있다."

"옙!"

평소와 같은 해맑은 얼굴로 힘 있게 대답하는 파몬드.

하지만 이내, 곧 내가 묻는 질문에 녀석의 가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너 정보국 소속이지?"

"…무, 무슨 소리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반 박자 늦은 대답.

세 명의 사용인 모두에게 물어보려던 질문.

썩어도 준치라고.

이 몸은 이래 봬도 황자의 몸이다.

이곳에 제국의 눈과 귀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첫 입질에 대어를 낚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자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정보국 소속이라뇨! 어찌 제 충심을 의심하십나이까!"

"하긴. 그냥 물어본 거였어."

그럼 그렇지 뭐.

라고 작게 말하니 파몬드의 가면이 더욱 단단해졌다.

요즘이 중세 시대도 아니고 비둘기나 매로 전서를 주고받진 않는다.

제국도 연방과 마찬가지로 통신기기로 연락을 할 테고, 그 주기가 얼마만큼의 간격을 가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지켜봐야 한다.

파몬드의 반응은 내게 행운.

더 이상 몰아붙여봤자, 상대는 조심하기만 할 뿐이다.

지금 내가 녀석에게 보일 태도는 살짝의 비웃음이면 충분했다.

진실은 거짓말과 태도로 잠깐 그럴듯하게 구색을 갖추어지기 때문에.

깔보는 눈빛 하나로 파몬드의 머리는 타들어 갈 것이다.

"오늘은 운동 안 하십니까?"

"왜."

"오늘도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상대의 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상부에 제대로 된 보고를 할 수 없다.

당연하지. 내가 삐약이 시절에 대충 알아낸 것만 보고했다가 사실 확인 안 된 문제로 조인트를 얼마나 많이 까여봤는데, 시발.

아마 파몬드는 당분간 보고는커녕 신분이 들켰을까 걱정돼, 몸을 사릴 것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다른 황자… 형님들은 요즘 뭐해."

"본론이신가요?! 제가 상세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황태자에 먼 인물부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황자 전하께서 제일 뒷순위십니다. 5년 전 원인 불명으로 의식을 잃으시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전하의 후원자들과 지지자들은 등을 돌린 지 오래고 현재 전하의 지지 세력은 전무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5년이나 안 깨어났으면, 다른 노선을 타는 게 당연.

5년 동안 의리를 지킨다?

돈이 썩어 넘치는 병신이거나 아니면 정치를 할 줄 모르는 머저리 새끼일 게 분명하다.

"허나. 단 한 분 계십니다."

"음?"

"현 총리 각하이신 일러미레 공작께서 암묵적으로 전하를 지지하고 계십니다."

"…일러미레? 일러미레, 일러미레, 일러미… 레!"

기억났다.

현 1황자가 황제에 즉위했을 당시 몰락의 길을 걸었던 공작가.

공작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건 여간 일이 아니었지만, 전쟁이 막 일어나던 시기라 잠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이 나십니까!?"

"무슨."

"각하께서는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이후 유일한 피붙이인 전하를 언제나 늘 보살펴 주셨습니다! 다만 다른 황자 전하의 후원자들의 노골적인 견제로 현재까지는 별다른 행동은 취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 그래?"

병신과 머저리… 주워 담고.

5황자의 외척이 일러미레 공작가였다니.

1총국 씹새끼들 하여간 일은 존나게 대충해요.

이 중요한 정보를 왜 안 캐오고 지랄이야, 지랄은.

얼굴에 침 뱉은 것 같잖아.

그리고 이어지는 파몬드의 설명은 이러했다.

태어난 순서대로 현재 황태자위에 가장 가깝다고.

의식불명인 5황자, 다리 병신인 4황자, 대외활동 안 하는 3황자.

이렇게 3황자 이하 찌끄래기들은 2황자 선에서 컷.

현재 황태자 대결 구도는 1황자 vs 2황자이지만 대세는 이미 1황자로 기울었다는 게 정배.

2황자 이하 모든 황자가 힘을 합쳐도 1황자의 파벌은 넘볼 수 없다는 것은 파몬드의 사견.

사견 이지랄. 정보국도 그렇게 예측하고 있나 보네.

"외할아버지한테 연락해."

"무어라 하면 되겠습니까?"

"손주가 할아버지 보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예.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파몬드가 지랄을 떨며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일러미레 공작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빽도 능력인 세상.

능력이 있으면 사용해야지.

어라? 그런데 빽이 실질적 제국의 1인자네?

일단 능력이 있으면 효과가 좋은지 안 좋은지 사용은 해봐야겠지?

***

늦은 밤.

총리 관저에 연락을 넣은 파몬드는 속을 비집고 기어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하아…."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아니 뭐가 뭔지도 정말 모르겠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5년 만에 깨어난 황자가 일주일이 채 안 되더니 갑자기 정보국이냐 캐묻는다?

이건 상식선에서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온갖 상황별 대처 방법을 배우고 학습했을지라도 그건 전부 상식 안에서의 상황이었다.

"하아…."

윗선에 연락한다?

믿어줄 리가 없다.

자신이 반대로 보고 받는 입장이라도 무슨 개같은 소리냐며 뒤지게 팼을 거다.

"하아…."

거기다 피부로 느껴지는 여유로운 눈빛.

다 안다는 듯한 5황자의 눈빛에 파몬드는 정신을 빠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

정보국에 연락을 취할 수도, 그렇다고 대놓고 캐물을 수도 없다.

황자의 성품이 예전과 바뀐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오로지 심증일 뿐.

이 심증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총리 관저에 총리 각하의 대리인을 요청했다.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

파몬드는 나지막하게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아가씨…."

***

파몬드가 떠난 집사장의 집무실.

기름칠한 경첩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닫혔다.

딸깍.

"후우…."

파몬드의 한숨과 결이 다른 심호흡.

그녀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집사장의 집무실을 구석구석 훑었다.

잠금장치로 굳게 닫힌 수납장과 금고를 발견하고 조용히 그 모습을 본떠 그렸다.

5황자의 '부탁'대로 자물쇠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길게만 느껴지는 몇 분이 흘렀다.

빠진 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여인은 왔을 때와 같이 조용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부드러운 경첩이 소리 없이 열리고 이내.

딸깍.

문이 닫혔다.

#004화.

다음 날 점심.

점심 먹기 전, 재활 운동을 끝내고 침실 내 위치한 책상에 앉아 에트릴이 건넨 자물쇠 그림을 바라봤다.

"발로 그렸나?"

마도구로 이루어진 잠금장치가 아닌 이상 푸는 건 쉬었기에 자물쇠를 본 따 그림을 그려오라 시켰건만….

이건 그냥 지나가는 동네 개한테 시키는 게 더 나을 거 같다는 후회가 막심했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황자 전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에트릴을 제외한 유일한 여성 사용인인 아델 비오히스 양.

헤픈 웃음 가면을 쓰고 있는 파몬드.

눈은 이제 좀 마주치지만 찔리는 게 있는지 알아서 기는 에트릴.

그 둘에 비하면 아델 비오히스라는 여성 사용인은 침착했다.

아니, 침착 수준인가?

또렷하게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

묻기 전에는 열리지 않는 입.

그녀는 질문 대신 나를 또렷히 바라봤다.

- 무슨 볼일이라도?

그러한 의미가 느껴저 나도 말 대신 의자를 바라봤다.

- 여 앉지?

그제야 뚜벅뚜벅 걸어 의자에 착석한 아델 비오히스 양.

"비오히스 양?"

"편하게 부르세요."

"아델. 나랑 독대는 처음. 그렇지?"

"그렇습니다만. 에트릴 양과는 독대가 잦으시더군요."

새로롬하게 눈을 뜨는 그녀의 표정에 헛기침을 했다.

요년 봐라? 저 표정은 무슨 의미?

"그만. 하나만 묻자."

"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대답하는 아델의 모습에 피식 웃곤 책상 위로 자물쇠 그림을 던졌다.

팔랑거리며 아무렇게나 놓인 그림을 든 아델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말이 없네.

"뭘까, 그건."

"이게 뭐죠?"

"퀴즈."

"으으음…. 자물쇠?"

"정답. 자, 선물."

서랍을 열어 알사탕을 꺼내 던지자, 아델은 사탕을 받고는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커다란 알사탕 때문에 볼 한쪽이 기하학적으로 부푼 아델은 그림을 다시금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물었다.

"끝인가요?"

"끝."

"그럼 이 그림은요?"

"그냥 봐 두라고."

그림을 빤히 바라본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나가라는 손짓에 아델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나도 알사탕 하나를 까 입에 넣었다.

"음~ 유색 무취 무미. 존나게 익숙하네, 시발련."

퉤. 역시 나는 개성이 존재하는 자유가 좋았다.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파몬드는 겉으론 의심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나에 대해 열심히 대가리를 굴리고 있을 테니까.

파몬드의 집무실에서 별 쓰잘데기 없는 것만 가져오는 에트릴은 점점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아델은 평소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내 재활을 도왔다.

"그나저나, 아델."

"네?"

"몇 살?"

"올해 스물한 살이에요."

연방이 자랑하는 첩보 기관인 연방보안회는 서방 왕국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 두었다.

그리고 그들은 임무에 투입되기 전 일괄적으로 동일한 교육을 받는다.

"아카데미 졸업은?"

"지방 사립 아카데미를 졸업했어요."

교육은 임무에 투입되었을 때 돌발상황에 대비한 것들을 실시한다.

개중 가장 유명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가짜 신분에 대한 출신이다.

"지방? 어디 출신?"

"저는 베-모노시(市) 출신이에요."

대부분 남들이 잘 모르는 실존 지명을 예로 든다.

너무 대도시 혹은 번화가 출신이라면 그곳에 살았던 인물에 의해 임무가 방해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남쪽?"

"아뇨, 북쪽이에요. 대고원이랑 가까워서 유목민들이 많아요."

한결같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델.

여전히 심증이지만, 이 맛없고 재미없는 향기는 내게 너무 익숙했다.

스파이 교육은 철저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너무 완벽한 배경 지식은 외려 독이 될 수도 있기에 실제 거주민들과 비슷한 정도의 정보만 취득한다.

"근처에 어떤 부족이 있는데?"

"음…. 유목민 거리에 많이 안 가서 자세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아델의 대답은 연방에서 배우는 교육과정의 모범 답안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큰 부족이 뭔데?"

"아…. 그것까지 자세하게는 잘 모르는데요."

"그래."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잘 한번 생각해보자.

정보가 곧 힘이 되는 세상이다.

적대국에 세작을 심어 넣고 정보를 취합하는 건 거의 아침 식사와 같은 자연스러운 행동.

아델이 스파이란 걸 확신할 순 없지만, 대화할수록 전생에 배운 세작 교육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위와 같은 교육과정은 제국에서 모르는 기밀 사항.

하지만 직접 몸으로 배우고 겪었던 나는 소름 끼치도록 익숙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델에게 물었다.

"꿈이 뭐야?"

"평범하게 사는 거요. 좋은 사람 만나서 아이 낳고…. 평범하죠?"

미취학 아동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스파이에게 꿈은 없다.

그저 배운 대로 대답할 뿐.

"다른 건 없어?"

"글쎄요…. 평범하게 사는 거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네요."

지금의 대답 역시 매뉴얼 그대로.

심증이 확실시되자 괜히 머리가 아파왔다.

"하…."

"힘드세요?"

"쉬자, 조금만."

제국정보국, 종교쟁이, 쥐새끼.

게다가 회귀해버린 나까지.

아, 어지러워.

일단, 그녀가 스파이라는 심증이 있으니, 물증을 찾아야 한다.

이 이야기를 괜히 입 밖으로 내뱉어봤자 독이다.

파몬드에게 이 정보를 슬쩍 흘려야 하나?

에트릴더러 짐을 뒤져보라 시켜야 하나?

어느 것 하나 좋은 선택지가 없다.

막막해 오는 미래에 한숨을 내쉬며, 내 이마를 닦는 아델을 흘겼다.

"궁금하신 게 더 있으신가요?"

"아냐."

일단,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이제 곧 그녀는 그림의 자물쇠를 찾아 움직일 거다.

그리고 그 자물쇠가 파몬드의 집무실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거고.

그 자물쇠를 그린 사람이 에트릴 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지며 의심할 거다.

어째서 에트릴을 의심하겠느냐고?

어떤 놈이 본인 자물쇠를 본따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그렇다고 내가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그림을 본인에게 보여줬는지 이해가 안 되겠지.

스파이들은 상식 밖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교육받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제국의 정보국과 비슷하다, 당연하지.

같은 성격의 기관인데 말이야.

그렇다면 이제 아델은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 터.

어째서 자물쇠를 그렸는지, 그리고 그 자물쇠 그림은 왜 나한테 있는지, 그렇다면 어째서 파몬드의 자물쇠를 그렸는지.

짱구 한번 열심히 굴려봐라.

골 머리 좀 썩힐 아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파몬드에게 에트릴이 수상하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사이클이 완성될 테니까.

물론 이 방법은 임시방편에 불과하지만, 잠깐의 자유가 생긴다.

지금 자력의 힘으로 암살자 혹은 암살의 방법을 피하기에는 객관적으로 힘들다.

자유 시간에 과거의 힘을 조금이라도 되찾아야 했다.

결정적으로 이 몸의 외할아버지인 총리와 접촉도 필수였다.

파몬드의 말을 얼마만큼 신뢰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사실이라면 무조건 내게 득이다.

"후."

"물 드릴까요?"

"응."

"네, 잠시만요."

아델이 물을 가지러 자리를 이탈했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 썩을 놈의 몸둥아리로 힘을 되찾을 수나 있긴 있나?

아니 애초에 내 몸이 아닌데 그때의 힘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시발.

지금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힘을 되찾는다.

우군을 만든다.

암살을 피한다.

시나리오처럼 되지 않으면 죽는다.

***

"부르셨나요?"

"앉아."

"네…."

문을 열고 들어온 에트릴이 눈치를 살피며 앞에 앉았다.

"하는 일은 어때."

"아…. 네! 집사장님도 친절하시고, 아델도 있고. 조용해서 심심하기는 하지만—"

"아니. 그걸 말고. 이거."

웃으며 재잘거리는 에트릴의 말을 자르고 자물쇠 그림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에트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어진 침묵.

곧 그녀가 힘겹게, 하지만 약간의 울분을 담아 물었다.

"정말…. 정말 집사장님이 연방의 스파이인가요…?"

"확실하진 않대도. 하지만 그날 내가 창문으로 본 건 확실하고 그 시간에 저택에 없던 건 파몬드뿐이야."

"...."

파몬드가 5황자궁인 이 저택을 나간 지금.

저택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위해 밑작업을 공사 중이었다.

"이번에 총리 각하랑 만나면 이 자물쇠를 보여주면서 얘기할 거야. 그러므로 너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

"하지만, 전하…. 저는, 저는…."

"에트릴. 증거를 찾아. 그리고 아델에게는 비밀로 하는 거 잊지 말고. 비밀은 아는 이가 많을수록 비밀이 아니게 돼."

"네, 전하…."

얼굴이 잿빛이 된 에트릴이 방을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려다보니, 빨랫감을 널고 있는 아델이 보였다.

- 아델이 그렇게 좋냐?

- 그럼요! 친한 친구인걸요!

- 아델은 그렇게 안 생각하면?

- 그, 그럴 리 없어요!! 아델이 얼마나 저를 챙겨주는데요!

- 나도 할래, 아델이랑 친구. 아델 예쁘잖아. 나도 껴줘.

- 시, 싫어요! 제 아델이에요! 전하는 집사장님이랑 지내시면 되잖아요!

언젠가 에트릴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에트릴. 네 생각대로 움직여라.

아델이 그렇게 중요한 친구라면, 고민을 공유하고 방안을 모색해.

곧이어, 빨래를 너는 아델의 옆에 에트릴이 나타났다.

고민이 가득한 얼굴에 아델이 빨래를 놓고 에트릴을 안아줬고.

에트릴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였다.

아무런 죄 없는 에트릴.

운 없이 나를 만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힘겹겠지만.

힘없는 자의 운명은 때로는 불쌍하고 안타까울 만큼 잔인하다.

그게 현실이다.

***

늦은 밤.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림자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침실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잠깐의 망설임.

하지만 이내 그림자는 긴 호흡과 함께 침실로 스며들었다.

달콤한 향이 배어 있는 침실 안.

뒤척이는 5황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림자는 품에서 주섬주섬 양초를 꺼내 들었다.

양초를 5황자의 머리맡에 두고 라이터를 켜는 순간.

"진짜 왔네?"

"!!!"

"근데…. 그게 너일 줄은 몰랐다, 에트릴."

시야에 들어온 5황자의 당황 섞인 미소에 그림자, 에트릴이 황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저, 전하! 저는 그저 전하의 잠자리가 걱정되어 숙면을 취하게 도와주는—"

"아가리 여물고. 대화 좀 하자."

"...."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이내 허리를 숙였다.

"뭐냐, 너. 의심한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저는 정말 전하의 잠자리가 걱정되어―"

"여태껏 이런 적 없잖아. 정말 걱정되면 깨우던가. 아니면 밤시중이라도 들러 왔냐?"

"전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는 에트릴.

그런 그녀의 태도에 5황자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그만 빼고 우리 좀 편하게 대화하자, 편하게."

"어, 어떤…."

계속 어물쩍거리는 에트릴의 모습에 짜증이 난 5황자가 불퉁하게 말했다.

"너 암살자잖아. 나 죽이려고 온 거고. 아니야? 아니면 시발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거리야."

"예…? 저, 저는 정말 전하의 잠자리가 걱정되어 온 겁니다…."

"…?"

일부러 짜증 내며 살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5황자였지만.

그 흔한 독침 하나 날아오지 않는 이 상황에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일반적인 암살자라면 틈이 보이는 즉시 살해하려고 들 터인데.

지금 에트릴의 행동은 그러지 않았다.

그제야 보이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과 벌벌 떨리는 두 손.

당황한 5황자가 에트릴이 침입했을 때를 떠올렸다.

인기척을 냈던 발걸음과 고르지 못했던 호흡.

이 말인즉슨….

에트릴은 본인을 죽이러 온 암살자가 아니라는 것.

'잘못 짚었나?'

살짝 경계를 누그러뜨린 5황자가 한숨을 내쉬며 에트릴에게 다가갔다.

벌벌 떠는 에트릴의 어깨를 토닥인 황자가 바닥에 떨어진 양초를 줍는 순간.

에트릴의 신형이 5황자를 덮쳤다.

푸욱—

"꺅! 전하!!"

"이 개같은 년…!"

단검을 꺼내든 에트릴이 5황자를 급습했다.

본인도 놀라 입을 틀어막은 에트릴.

그러나 그녀의 손속엔 자비란 없었다.

사고와 행동이 마치 정반대되는 상황.

"씨발련이…."

5황자는 몸을 돌려 단검을 막으려 하였으나, 환자의 몸은 반응이 느렸다.

복부를 찔린 5황자가 에트릴을 향해 양초를 휘둘렀다.

유려하게 피한 에트릴이 단검을 뽑고 역수로 쥐어 전투 자세를 취했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얼굴.

연신 죄송하다며 사죄하는 입술.

그에 반해 완벽한 자세.

"길레자드 암살단이구나, 너."

5황자의 말에 길레자드의 암살자(Crying Assassin)가 5황자에게 쇄도했다.

#005화

길레자드 암살단.

개개인의 무력은 낮으나, 암살 성공률 80%에 가까운 암살자 집단.

초인이라 불리는 각성자는 적지만, 가장 암살스러운 방법으로 알고 있다.

남녀노소.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면 모두가 용의자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이 암살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다, 어느 순간 자각하고 칼을 들이민다.

암살자로 돌변하는 트리거가 무엇인지 정체가 파악되진 않았지만, 연방보안회에선 세뇌 마법이라 상정했다.

"피하세요!"

에트릴의 외쳤다.

한 호흡에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단검을 쥔 손을 밀치려 했지만 느껴지는 복부 통증에 방향만 겨우 틀었다.

옆구리가 베이자 외려 에트릴의 표정이 더욱 엉망이 됐다.

옆구리를 긁은 단검을 겨드랑이로 잡고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전하…!"

주먹을 막은 에트릴이 애타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손을 치우고 이마로 그녀의 코를 들이받았다.

그녀가 뒤로 주춤하는 사이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낚아챘다.

"저, 전하…. 얼른 피하세요!"

하지만 단검으로 머리칼을 잘라낸 그녀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얼른 소리치세요! 파몬드 님뿐만 아니라 아델—"

퍼억!

소리치는 에트릴을 무시했다.

무릎을 들어 안면을 가격하자, 그녀가 뒤로 넘어가며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하, 하아…."

"으으윽…."

체력도 근력도 환자 수준인 몸에 칼침까지 맞았으니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정신력으로 몸을 이끌어 단검을 발로 찼다.

괜히 들고 협박했다가 빼앗기기라도 하면 나가리다.

길이가 달라진 그녀의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잡아 올렸다.

"생각도 못 했다…."

"으윽, 전하…!"

"길레자드 암살단이라니, 시발…."

"흐윽!"

다시 무릎으로 안면을 찍었다.

꺽꺽거리는 암살자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렀다.

세뇌에 잠식돼 움직이는 길레자드의 암살자들은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

그들의 강점은 어제 웃던 친구, 연인, 동료가 오늘 갑자기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그런 무방비함 상태에서 나오는 치명적인 순간이 무기였다.

즉, 나 같은 환자도 여성 암살자 정도는 잡을—

푹—

"으윽!"

치마 속에서 송곳을 꺼낸 암살자가 내 허벅지를 찔렀다.

"전하! 빨리 누군가 부르세요!"

역전된 자세.

위에 올라탄 암살자가 양손으로 송곳을 움켜쥐곤 내 얼굴을 찌르려 했다.

양손으로 막아도 내 몸은 이미 만신창이.

안간힘을 다해 눌러오는 그녀의 양손을 막을 수 없었다.

"퉤!"

암살자의 눈을 향해 피를 뱉었다.

그러나 튀건 말건, 암살자는 여전히 있는 힘껏 송곳을 눌렀다.

"1황자냐, 에트릴…!"

"저도 몰라요! 저도 모른다구요! 왜 갑자기 이러는지! 전 전하를 죽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에트릴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렀다.

"상황 참…. 시발이네."

욕과 동시에 침실 문이 부서지고 파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몬드가 곧바로 암살자를 걷어찼다.

벽으로 날아간 암살자를 노려보곤, 이내 나를 살피며 이를 갈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냐. 약이나 갖고 와. 뒤질 거 같으니까."

암살자는 방금의 충격으로 기절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품속에서 구급키트를 꺼낸 파몬드가 진통제를 주사하며 물었다.

"에트릴은. 암살자는 어떻게 할까요."

"...."

피범벅이 된 얼굴로 눈을 감은 암살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황자의 암살이라면 암살단 내부에서도 간부급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모른다고 외치는 그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믿고 싶었다.

또다시 길레자드의 암살자 놈들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죽여."

"예, 전하. 기사단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에 넘어가면 곱게 못 죽는다.

그리고 난 그걸 원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라고."

"예? 하오나."

옆에 떨어진 송곳을 주어 에트릴에게 던졌지만, 손잡이 부분이 그녀의 어깨에 맞고 힘없이 떨어졌다.

"다시 말하게 하지 마라. 죽여, 지금."

"…예. 전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길레자드 암살단의 암살자들은 자신이 배우고 자란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암살 대상이 누구인지 의뢰인이 누구인지 의뢰 비용은 얼마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냥 죽여주는 게 짧았던 관계에 대한 예의랄까.

그렇게 오늘 5황자궁의 사용인이 한 명 줄었다.

***

"얼마나 걸려?"

"30분이면 갑니다."

"가깝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파몬드가 쾌활하게 답을 하고, 조수석에 앉은 아델이 내게 서류철을 넘겼다.

"총리 관저 조직도랑 주요 인사 인적 사항이에요."

"어."

서류철을 대충 넘기니 아는 얼굴이 몇 나왔다.

회귀 전에 주시하고 있던 인물들이었고, 개중엔 1황자의 사람이라 알려진 인물도 있었다.

"관저에 있는 사람은 전부 외할아버지 쪽 사람인가?"

질문에 아델이 파몬드를 바라봤고, 파몬드가 대신 답했다.

"웬만하면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총리님을 보좌하시는 분들이죠! 전하께서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분도 계실 겁니다. 하하!"

"...."

"베, 베르토 웨라이버그 남작님. 기억 안 나십니까, 하하!"

"잊을 리가."

베르토 웨라이버그 남작.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남자의 사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문뜩 지나치는 차량과 마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시기에 연방은 마차가 대부분일 텐데.

차를 타고 싶다며 어렸을 때부터 찡찡거리던 친구 녀석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너보다 내가 먼저 탔다, 새끼야.

에휴, 연방 촌놈 새끼.

지금은 코찔찔이 시절일 친구를 떠올리니 마냥 즐거웠다.

나고 자란, 연방 힐리그라드의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들.

같은 고아들끼리 사고만 치고 다니던 철없던 시절의—

끼익— 쾅!

"괜찮으십니까, 전하!"

"아니 운전 하나 똑바로…."

띵한 머리로 창밖을 바라보니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차를 포위하고 있었다.

인상을 쓰며 창밖을 바라보자, 정신을 차린 파몬드가 소리쳤다.

"전하! 안에 계십쇼! 제가 나가서 무슨 일인지—"

"폐하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수도기사단장, 에일스가 명한다!"

말을 탄 기사가 천천히 다가와 차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죄인 5황자를 구속하라!"

"아니, 이게 무슨!"

문짝을 뜯어낸 기사들이 나를 붙잡고 차 밖으로 끄집어냈다.

파몬드와 아델 역시 처우가 다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에일스 기사단장! 전하께 죄를 묻고자 하거든 적합한 절차와 형식을 갖추고 물으시오!"

파몬드가 얼굴이 붉힌 채 기사단장에게 무어라 소리쳤지만, 그는 일절 무시한 채 말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무릎이 꿇린 채 고개를 쳐들어 기사단장을 봤다.

지금 이게 도통 무슨 일인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감정을 숨기고 눈을 치켜떴다.

"지금 하는 일에 후회는 없냐?"

"죄인이 말이 많구나."

"죄인? 지랄도 유분수지.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데 갑자기 지랄이야!"

아 자꾸 성격 나오게 하네?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기사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트릴."

"그년은 왜 불러."

"흠. 죄목이 하나 더 늘었군. 살인청부, 공문서위조, 사기. 그리고—"

"사기? 뭐 사기?"

눈에 불을 켜고 기사단장을 노려보자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려 아델을 바라봤다.

왜 아델을 바라봐.

…설마?

곧장 파몬드를 노려보니 녀석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인 듯, 떨리는 눈동자로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 갑자기 왜 저를 쳐다보시죠? 기사단장님?"

모두의 이목이 쏟아지자 당황한 아델이 물었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음? 난 그저 그대가 아름다워 쳐다본 것뿐이라오. 참, 그리고 포상금은 일주일 내로 지급될 것이오."

"그, 그게 무슨! 이런 약속은 없었잖아요!"

아델의 외침에 기사는 귓구멍을 후빌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아델의 뒤통수에 정신이 나가버릴 뻔했지만, 파몬드의 외침에 정신을 붙잡았다.

"무슨 소리오! 전하께서는 피해자이심이 정황상 확실하오! 에트릴이란 여성은 밤중 전하의 목숨을 노리고 침입하였소!"

기사단이 대동 되고 수도 한복판에서 사건이 일어났기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몬드의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고, 녀석은 나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정당방위오! 이미 기사단의 조사 결과는 그것으로 끝이 난 것 아니었소?"

파몬드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콧방귀를 뀐 기사단장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중요한 걸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더군요, 황자님."

"방금 내 집사장 얘기 못 들었어? 전부 다 말하고 정당방위까지 받았다고, 시발!"

"아뇨아뇨. 황자님. 이 사건은 재수사가 필요합니다."

일처리는 똑바로 했다.

정보국에서 일하는 파몬드의 일처리가 어수룩하진 않을 테니 그건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아델이 나를 찌르면서 무언가 소스를 흘렸다는 건데….

그게 아니라면, 혹시 모를 파몬드의 배신.

그 이외에 무언가 있나…?

"황자님께서는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치명상을 당하셨죠."

이외의 정보라고 하면…. 파몬드를 첩자라고 에트릴에게 귀띔한 것과.

에트릴이 그걸 아델에게 말한 것뿐.

"그리고 부상에서 암살자를 쓰러뜨리고 목숨을 건지셨죠."

여기서 아델이 찌른 이유를 알 필요는 없다.

필요한 건 무엇을 가지고 나를 찔렀느냐가 중요하다.

"당시 암살자는 목숨이 붙어 있었고, 그걸 황자님께서 파몬드 경에게 죽이라고 명하셨죠, 틀립니까?"

"그 무슨 억측이시오! 전하의 반격에 암살자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소!"

파몬드의 외침에 기사단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이! 게다가 당시 암살자가 연방의 첩자라는 걸 알고 계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뭐?"

고개를 돌려 아델을 바라보자, 아델은 평소의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잔잔한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감정은….

무색무취무미의 그것이었다.

에트릴의 죽음에도 한결같은 냉랭한 태도.

그리고 지금 일어난 내부고발의 현장.

아델이 연방보안회의 스파이라는 게 더욱 또렷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이는 황족도 피할 수 없습니다."

조졌다.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외통수였다.

"귀한 분이시다, 안전하게 모셔라."

기사들이 수갑과 족갑을 채우곤 얼굴에 검은망을 덮었다.

아니, 이게 귀한 분을 대하는 태도냐?

"전하! 좀만 기다리십쇼! 제가 꺼내드리겠습니다!"

부르짖는 파몬드를 뒤로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감옥에 간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예로부터 악명이 자자한 곳이기에 두려운 마음이 컸으나, 무죄를 자신했다.

"똑바로 걸으십쇼."

"...."

후달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제국군정보사령부.

매국이나 산업 및 방위 스파이 짓 등

제국의 반란분자들을 잡아넣어 개과천선시키는 곳.

개중 가장 지하 안쪽.

연방의 첩자라 의심되는 이들을 역류한 곳에서 나는 거꾸로 매달려 있다.

"야, 의자란 좋은 건 왜 안 쓰고, 돼지마냥 매달아 놓냐?"

"의자 드릴까요?"

"이거나 풀어."

"앉으세요, 그럼."

드르륵.

군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내 밑으로 접이식 의자를 발로 찼다.

나도 회귀 전에 이런 인성 짓은 안 했다, 시발롬아.

"야야, 높으신 분께 이게 무슨 무례냐. 다시 드려."

"예, 죄송합니다!"

그 옆에 앉아 손톱 때를 빼던 군인이 말하니 예의 군인이 다가와 의자를 폈다.

물론 나를 매달아 놓은 채로.

"하, 의자 얘기는 됐고. 증거라도 있냐?"

"...."

질문에 답 없이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군인 둘.

곧 웃음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한 명은 자지러진 채 꺽꺽거리고 다른 한 명은 벽을 치며 끅끅거린다.

"하아, 하아…. 아! 너무 웃었다. 시발 존나 웃기네?"

"아, 침 나옵니다, 스읍…. 높으신 분께서 다른 간첩들이랑 똑같은 말을 하십니다."

아니, 사람이 잡혀 왔으면 뭐 때문에 잡혀 왔는진 알아야지, 시발!

후…. 회귀 전에 일단 조지고 봤던 내 스스로가 반성된다.

"그래서 니 상관은 언제 오는데. 너희가 수사할 건 아니잖아."

내 말에 상급자로 보이는 군인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문이 열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자님. 정보사 특임대 1팀장, 자디아 제로-티라입니다."

#006화

본인을 자디아 제로-티라라고 소개한 남자는 군복 대신 정장을 입고 있었다.

계급도 없고…. 뭐라 불러야 돼?

"1팀장이라 부르면 되나?"

"편하게 부르십쇼."

"어, 그럼 이것 좀 풀어. 앉아서 대화하게."

"풀어드려."

자디아의 말에 두 군인이 빠릿하게 움직였다.

밧줄을 풀며 나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수갑과 족갑은 그대로였지만 땅에 발이 붙어 있어 안도감이 돌았다.

"너흰 나가있어."

"잘못슴다?"

"독대할 거니까 나가 있어."

"하지만 대장님께서—"

"내가 책임질 테니까 나가."

"…충성."

군인이 나가자 한숨을 내쉰 자디아는 안경을 벗고는 나를 바라봤다.

"고생 많으십니다."

"알면 좀 풀지?"

"죄송합니다만, 나흘은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풀어주기엔 눈치가 보여서 말입니다."

"…?"

얘네 지금 알력다툼 하나?

근데 그걸 나 가지고?

설마의 가능성을 가지고 지다아에게 물었다.

"지금 나 가지고 노냐?"

"아닙니다…. 다만."

"다만?"

"에일스 경이 1황자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에. 확실치 않은 증거로 황자님을 구속시켰습니다…."

자디아는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1황자? 형님?"

"예. 수도기시단장은 공공연한 1황자님 파벌입니다. 그런데 5황자님을 구속해 버렸으니…. 저희 정보사에서 먼저 풀어주기엔 1황자님 눈치가 보여서 말입니다."

알곤 있었지만, 제국도 어마무시한 관료주의였다.

"그런데 왜 날 풀어줘? 형님은 날 싫어할 텐데? 오히려 잘 보이려고 어떻게든 날 족쳐야 하는 거 아닌가?"

"어? 어…. 아, 그게…."

신랄한 말투 때문이었을까.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던 자디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살폈다.

"편하게 말해, 편하게."

"얘기하자면 좀 복잡합니다만."

"그럼 짧게 줄여서 해."

"총리 각하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진짜 짧게 하네, 이새끼.

너무 축약된 문장에 헛웃으며 물었다.

"누가?"

"1황자님입니다."

"그래서 꼬리 자르고 나를 풀어주겠다, 뭐 그런 건가?"

"예. 사실 정보사령관도 1황자님 파벌입니다."

"아 그래?"

머릿속에서 제국군 조직도를 그려봤다.

정보사령부 상급부대가 제국군 정보본부였나? 그럴 테니….

그러면 그 위까지. 즉 제국군은 전부 1황자 편에 섰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응? 근데 너 이런 거 말해도 되냐? 군은 특히 혼자 튀는 사람 보기 싫어할 텐데."

"예, 맞습니다."

수직관계 조직은 원래 '니캉내캉 형제 아인교!' 가 대부분이라 혼자 '네? 형제라뇨…. 저흰 엄밀히 남인데요?' 라고 말하면 눈에 튀기 마련이다.

"제가 대고원 출신이라서 팀장 자리에 앉은 것도 기적인 수준입니다."

"흠. 너 성이 제로-티라라고?"

"예, 그렇습니다."

그제서야 자디아의 피부색이 눈에 띄었다.

누런 빛깔에 작은 눈, 낮은 코.

그러자 그제야 자디아란 인물의 프로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회귀 전, 대고원을 일통(一統)한 부족의 지낭(智囊).

그가 참모에 오르고 일개 중소 부족이 대고원을 통일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을까?

아마 제국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귀향한거겠지, 뭐.

"너 내 밑에서 일해라."

"예?"

"예에?"

되묻는 자디아에게 고개를 틀며 묻자 녀석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자, 잘못 들었습니다?"

"내가 봤을 때 너 팀장이 한계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순순히 시인하는 자디아에게 말을 이었다.

"내가 황제가 되면 너 해."

"무엇을 말씀입니까?"

"제국군 합참의장."

"예?"

"예에?"

그 작은 눈이 달만 해졌다.

"왜, 싫으냐?"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의장까지…."

"야, 그 정도 깡은 가지고 있어야지. 놀라지 말고 이것 좀 풀어봐."

"예…."

초점이 나간 채 수갑을 푼 자디아는 합창의장을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아 근데 합참의장은 좀 그렇다."

"맞습니다…. 제가 어찌—"

"그냥 총리 해."

"푸웁—!"

말이 끝나자 자디아가 순식간에 침을 뱉었다.

"아, 시발…. 드럽게."

"죄, 죄송합니다!"

자켓을 벗어준 자디아의 배려를 무시하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사실 총리는 무리겠지만 합참의장은 가능할 듯싶다.

"나흘 준다 그랬지? 나도 나흘 준다. 내 밑에 올 건지, 아니면 탱탱볼처럼 치이면서 살 건지."

"...."

"그리고 상식이 있으면 생각을 해라, 쫌. 내가 1황, 형님 제치고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겠냐?"

"없을 것 같습니다."

"시발?"

자디아의 머리를 때리고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매만지며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자디아를 바라봤다.

상식이라.

상식? 내가 상식선에서 행동한 적이 있었나, 없었지.

게다가 대고원에서 나와 지금 자리까지 오른 자디아 역시 상식이 박혀있는 놈 같진 않다.

대고원은 전통을 고수하는 곳이라 그곳을 떠났다는 건 자살과 다름없다.

그런 씨족 문화를 벗어나 홀로 독립한 것 자체가 정상인은 아니란 말씀.

"난 할 말 끝났는데, 더 할 말 있냐."

"없습니다…."

"그럼 나가봐."

"나가보겠습니다, 충성."

"어, 충성."

손을 까딱하곤 바닥에 드러누웠다.

문고리를 잡은 자디아가 제자리에 서, 나를 불렀다.

"황자님."

"왜."

"정말 황제가 될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이전과 다르게 진지해진 목소리.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난 꼭 되어야 한다.

"안 되면 죽어, 새끼야. 난 목숨을 걸고 배팅한 거라고."

"허…. 알겠습니다, 충성."

"웃지 말고 밥이나 갖고 와. 밥은 제대로 주지?"

대답을 듣고 옅게 웃은 자디아가 절도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오냐."

"편히 쉬십쇼."

"올 때 매트리스도."

과연 내 말을 들을까?

믿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정보국과 다른 정보가 필요할 때도 있을 테고, 내가 해줄 건 금전적인 지원이면 충분할 듯하다.

알아서 클 녀석이니까.

"이런게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거지, 암!"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

"괜찮으십니까, 전하!"

"호들갑은."

몸에 손을 대지 못한 채 안절부절 거리는 파몬드를 무시하고 뒤를 봤다.

"잘 버티고 있어라."

"걱정 마십쇼. 제가 10년을 버텼습니다. 설마 고작 몇 년을 더 못 기다릴까요. 하하."

"10년이 더 지나면?"

"노, 농이 지나치십니다, 황자님."

그곳엔 밝은 미소로 대답하는 자디아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파몬드가 자디아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손을 건넸다.

"대위님께서 전하를 보살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전 5황자궁의 파몬드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계급도 몰랐네.

아니 근데 어디에 계급장이 붙어 있는 거야.

"예."

"하하."

나흘 전에 봤던 그 엘리트 모습.

군인 두 명을 대하던 예의 차가운 모습에 파몬드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아, 얘. 사회설 결여인가?

그런 생각을 품으며 두 사람의 신경전을 끊어냈다.

"가자."

"잠깐, 전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입만 웃은 가면으로 자디아를 보던 파몬드가 호다닥 뛰어와 차의 뒷문을 열었다.

뒷자석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자디아를 바라봤다.

차량이 출발하자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전쟁 당시 이름을 떨쳤던 수많은 전쟁영웅들.

아직은 원석에 불과한 놈들을 찾을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전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아델은?"

아델이란 단어에 파몬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종적을 감췄습니다. 모든 기록도 전부 없어졌습니다."

"5황자궁에 연방의 쥐새끼가 들어와 있었는데 제국은 몰랐던 거네."

"아, 그게….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끝날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잠깐 정차한 뒤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인 파몬드를 무시했다.

"가기나 해. 총리 관저에 연락은 했어?"

"옙. 내일 점심에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가자. 좀 씻고 기름진 음식 좀 먹자."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천천히 지나가는 풍경.

그 속에서 환하게 웃고 떠들며 오후의 햇볕을 즐기는 시민들.

"전하."

"왜."

평화로운 풍경에 나를 부르는 파몬드의 물음.

내가 묻자, 녀석이 뜸을 들이고 답했다.

"아델의 정체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백미러로 눈을 마주친 파몬드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왜. 알면 뭐. 가서 꼰지르게?"

"…아닙니다. 그저. 어디까지 알고 계시나…. 정신 차리신 지 한 달밖에 안 되시는 분께서…."

파몬드는 계속 말을 흐리며 침을 삼켰다.

저 감정은 걱정인지 아니면 의심인지.

이 헷갈리는 감정도 한낱 가면에 불과할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지만, 파몬드는 나를 아낀다, 5황자인 나를.

"몰라, 나도."

"...."

"말마따나 정신 차린 지, 한 달밖에 안 된 내가 무슨 수로 그 모든 걸 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추궁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인 녀석의 모습에 연방 시절에 알고 지냈던 부하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 넌 인복이 참 많아.

- 인복? 인복은 지랄. 어디가서 칼이나 더 안 맞았으면 좋겠다, 씨부랄.

- 인복 없었으면 나랑 얘기도 못했을 걸?

- 아유, 아휴. 예~ 지랄 또 도지셨습니까~ 엿이나 먹고, 꺼져 빨리. 애들이 너 불편해해.

부하들을 보며 언제나 같은 소리를 하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인복? 참 나, 별…."

"예?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앞에나 봐."

인복? 그런 허무맹랑한 건 믿지 않는다.

믿는 건 내 몸뚱아리뿐.

조금 범위를 넓히면 친구 새끼와 고아원 인연들 정도?

인복이 많아 감사하다고 기도드릴 시간에 팔굽혀펴기 한 번이라도 더 하리라.

***

총리 관저 접객실.

눈부신 샹들리에와 맹수의 가죽이 깔린 바닥.

박제한 동물들의 대가리가 장식된 벽.

"저런 건 사낭꾼 오두막에 어울리는 거 아니냐?"

"좀…. 수가 많긴 한 것 같습니다."

드물게 파몬드가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두 개면 몰라. 무슨 기둥마다 대가리가 다 걸려있어?

어이가 없네.

"내 취미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노인이 대뜸 말했다.

때가 묻은 헌팅 자켓엔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드물게 보였고.

거뭇한 손톱, 그리고 느껴지는 화약 냄새.

"할애비를 보고 인사도 안 하는 건 제 아비랑 판박이구나."

"안녕하십니까."

해질 대로 해진 베레모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노인은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똑같군.

내가 봤던 일러미레 공작의 사진과 똑같다.

산만한 덩치.

솥뚜껑만한 손.

깊게 팬 주름은 그의 성격이 대쪽이란 걸 대변했다.

"그래. 정보사에 잡혀 들어갔다고."

"덕분에 쉽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고얀…. 쯧."

무언가 못마땅해 보인 총리는 시가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내 쪽에 있던 파몬드가 조용하게 다가가 토치 라이터를 열었다.

자연스러운 행동.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총리 뒤에 시립하는 파몬드.

뭔가 나한테 호의적이다 했는데….

이거 저 노인네 손바닥 위에서 노닐었던 거네?

표정에 감정이 담긴 걸까.

총리가 연기를 내뿜으며 내게 말했다.

"너무 배신감을 느끼진 말거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대답 대신 자욱한 연기가 접객실에 퍼졌다.

독한 냄새에 면역이 없어 기침을 하자 파몬드가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했다.

배신감이라….

그런 감정을 느낄 만큼 말랑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총리도 별 대답을 하지 않았기에 나 역시 입을 다물었다.

"재미가 없군."

"그 나이에 재미 보자고 어린 손자를 괴롭히십니까."

"말본새하고는…. 지 애비랑 똑닮았어."

다시 한번 연기가 자욱하게 깔리고서 총리와 눈을 마주쳤다.

못난, 어딘가 아픈 손가락인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닌 계산적인….

정치인 같은 눈동자였다.

"하나만 묻지."

"예."

"누구인가, 자넨."

"...."

총리의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대답 역시 않았다.

노인의 고요한 눈빛 너머에 일렁이는 불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일렁거렸다.

"내 손자의 몸에 들어온 자네는 누구냐고 묻는 걸세."

#007화

의심일까. 확인일까.

그것이 문제로다.

지금 총리가 묻는 말의 저의가 무엇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짓말은 패착이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해야 할까?

그 또한 위험부담이 크다.

5황자 몸으로 들어온 이유를 모르는데 설득이라니?

혀 깨물고 자살이 낫지.

그렇다면 남은 건 총리의 의중을 추측해 대답하는 도박밖에 없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내가 먼저 물었다."

"…제 물음에 먼저 답해주시면 군말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가를 물고 빤히 바라보던 총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선 제국이 우선입니까, 가족이 우선입니까."

"제국."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

그러나…. 모르겠다.

하,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정말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일흔이 넘도록 제국의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노룡(老龍)의 의중을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입 아프게 하지 말게. 자네는 누구인가."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제국이란 대답.

나는 그것을 믿고 입을 열었다.

"저는 제국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묻는 건―"

"또한,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절대 실이 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끊었지만, 총리는 별다른 호통 없이 시가를 내려놓았다.

짙은 연기가 방안을 채우기도 전에 창밖에서 쌀쌀한 바람이 연기를 모두 앗아갔다.

"그 말은 내 손주 몸뚱아리에 있는 네 녀석은 내 손주가 아니란 말인가."

쌀쌀한 공기가 노인의 으르렁 소리에 부리나케 도망갔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 속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렀다.

심호흡하려 했지만, 온몸이 잘게 떨려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총리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전…. 이전의 저보다 제국을 흥하게 할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말입니다."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눈초리에 정신이 이만 아득해지기 직전.

눈동자의 노기가 일순 흩어지며 총리가 입을 열었다.

"나가라. 안내받은 방에서 기다리면 사람이 갈 것이다."

"예. 실례했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가자 사용인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용인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저기 미안한데 부축 좀."

"예? 아, 예!"

돌아가면 하체 운동 좀 해야겠다는 마음가짐 속.

체중을 사용인에게 조금 더 실었다.

***

불이 꺼져가는 시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당차구나. 그만큼 닮기도 닮았어…."

들으라고 한 건지, 혼잣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으나 뒤에 있는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태어났을 적 바랐다, 이 늙은이가 핏덩이의 앞날을 방해하진 말아야겠다고…."

노인은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넋두리를 이어갔다.

"딸아이가 내게 성을 내던 것이 기억이 난다. 본인이 가문을 잇겠다며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내며 말이지."

남자가 눈을 감고 이제는 흐릿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가씨라 부르며 믿고 따르던 노인의 하나뿐인 딸을.

"그 아이는 장부였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세상을 휘어잡을. 허나, 나는 딸아이의 성품을 알았기에 평범한 사람과 조용하게 결혼하고 살길 바랐다."

칼자루를 쥐고 목이 터져라. 승전가를 부르는 사내같은 모습.

수습기사들과 치고받던 여성의 모습이 남자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강인한 성격에 비해 그러지 못한 마음씨.

"아직도 그날이 생생해…. 허허, 황제의 손을 잡고 관저에 찾아와 애를 뱄다며 웃던 딸아이의 모습이."

노인의 입가에도 남자의 입가에도 따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당시 당황해 말도 못 하던 노인과 덩달아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

결국,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손자가 태어났으나 몇 년 후 딸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손주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뜻이 약했지. 제 어미의 치마폭 속에서 벗어나질 않았으니."

대외적으로 알려진 5황자의 모습.

황제와 황후의 각 장점을 빼다 박은 그 모습은 사실이었으면서도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살아생전 황후의 조기교육에 의젓해진 모습을 보이며 차기 황태자 소리까지 들었다.

허나, 알만한 사람들은 전부 아는 5황자의 유약하고 연약한 모습.

"딸아이가 죽고 나서 손주는 망가졌고. 나라의 기틀은 흔들렸다. 그때 내가 무엇을 바랐는지 아느냐, 파몬드여."

남자는 갑작스런 물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무엇입니까."

가늘어진 시가의 연기 너머 노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손주가…. 5황자의 모습이 진정 그러하였으면 어떠했을까. 제 어미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황실의 화초가 아닌. 황실의 떠오르는 태양이었으면 어떠했을까."

"각하…."

남자의 탄식 같은 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읊조림은 계속됐다.

그러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흔들리지 않은 눈동자라…. 당차지 않은가…. 당장 스물의 나이에 말이야. 스물의 1황자? 아니 황제조차 내 앞에서 내 눈을 직시하지 못하였다."

노인이 클클 거리며 웃자, 남자가 눈치를 살폈다.

노인은 연신 클클 거리며 웃다가 짧게 숨을 내쉬고 시선을 위로 했다.

"딸아이와 닮은 얼굴로 딸아이처럼 말하는 5황자라…. 그 속이 다를지언정 어찌 내 손주가 아니겠느냐."

노인은 이제 클클을 넘어 껄껄거리며 눈을 가린 채 웃었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곡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멎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말했지. 손주가 태어났을 적 바랐다고. 녀석의 앞날에 이 늙은이가 방해되지 않겠다고."

노인의 말은 다짐이었으며 선포였으며 명령이었다.

"손주…. 아니, 5황자의 요구가 그 얼마나 부당할지라도 따르거라. 단, 그 의지가 제국에 반한다면 가차없이 처분하라."

"…따르겠습니다."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답을 하고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노인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창밖의 구름을 바라봤다.

권력투쟁에서 아내를 잃었다.

권력을 지키려다 딸을 잃었다.

손주마저 암살로 잃을 뻔했고, 다른 의미로 잃어버렸다.

"덧없구나. 덧없어."

이제 노인의 손에 남은 건 권력이라는 무형의 힘.

그리고 제국이란 거함.

이제는 이 함선을 지킬 힘도 없었고, 지키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싹수 노란 1황자보단 손주의 몸을 차지한 싸가지가 더 믿을 만했다.

시가를 바라보니 시가의 연기가 희끄무레 지며 꺼져가고 있었다.

***

아, 시발.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

차를 여덟 잔을 마시고, 커피도 네 잔을 마셨다.

이뇨작용이 뛰어난 음료만 주구장창 마신 탓에 화장실을 몇 번이나 다녀온 건지 셀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문이 한 박자 빠르게 열렸다.

"어어?"

"어잌후!"

몸이 앞으로 기울었으나 풍채 좋은 아저씨가 나를 부축했다.

힘이 좋은 건지 내가 가벼운 건지, 한 팔로 나를 지탱한 아저씨가 호탕한 웃음소리로 시끄럽게 외쳤다.

"험험! 어딜 그리 급하게 하십니까!"

"화장실이요, 화장실! 지금 몇 분 동안 여기 있었는지 알긴 알아요?"

총리한테 내 정체가 5황자가 아니란 것도 걸렸겠다, 나도 이제 캥길 것도 없다, 이거야.

"죄송합니다, 황자님. 화장실 가면서 말씀 나누실까요?"

"저 남자랑 화장실 가면 무조건 크로스가 기본인데?"

"크로스요?"

"한 변기에 같이 누는 거."

"허, 험험! 좋습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요. 총리가 저 잡아 오랍니까?"

지지 않고 답한 아저씨에게 묻자, 아재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뇨아뇨. 그런 큰일 날 소릴! 입에 담지도 마십쇼! 험험!"

넉살 좋게 다가와 옆에 선 아재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시답잖은 잡담이 대부분이었고 알맹이는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은 당연히 나 혼자 들어갔다.

다시 나오니 아재 옆에 몇 명의 남녀가 늘어나 있었다.

"대가리 수 가지고 압박 주는 거. 그런 거 싫어하는데."

"압박이라뇨! 관저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입니다. 믿을 만한 친구들이니 소개해드릴 겸 불렀습니다."

아 그래요? 일단 방으로 돌아가죠.

"뭔 소개를 화장실 앞에서 해."

"예…?"

"…?"

아 생각이랑 말이랑 헛나왔다.

"조크조크. 장난장난!"

"허, 험험! 허허허! 장난도 너무 재밌으십니다!"

호탕하게 웃는 아재를 보며 따라 웃었다.

총리가 허락한 선이 과연 어디까지일까.

일단 아직 살아있는 걸 보니, 총리는 나에 대해서 긍정적이라 판단한 것 같았다.

옆에서 건치를 꺼내 웃는 아재를 보며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통성명도 안 했네요."

"소개가 늦었군요! 베르토 웨라이버그 남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아. 사진이랑은 많이 다르시네요?"

저번에 봤던 인물 수첩의 얼굴과 달랐다.

사진이 조금 더 마르게 나온 건가?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인데?

표정에 의아함이 가득했는지 남작이 웃으며 의문을 풀어줬다.

"아마 몇 년 전 사진을 보셨을 겁니다. 요새 일이 바빠서, 의자에서 통 일어나질 못하니 살이 찌더군요. 험험."

"아. 그래요?"

말 같잖은 소리.

50kg 정도 차이 나 보이는 사진과 실물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잡담하며 내가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오니 온갖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베르토 아재한테 물어보니.

"황자님께 보고 드릴 내용입니다. 국내의 전반적인 정세를 간략하게 추렸습니다."

진짜 기밀을 제외한 어지간한 정보는 다 공유한다는 건가?

"일단 앉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무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건치를 자랑하며 웃는 베르토 아재는 커피? 아니면 차? 라 물으며 질문했다.

차가 나오는 사이 산더미 같던 서류가 정갈해졌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쇼."

"그 전에 하나만 물읍시다."

어깨를 으쓱하며 긍정한 베르토 아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잘 해주세요?"

"그야. 총리 각하—"

"에이. 그런 진부한 거 말고.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군말 없이 총리 말을 따르냐고."

손가락으로 베르토 아재를 콕찝어 묻자 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었다.

베르토 웨라이버그 남작.

회귀 전 기억 속엔 1황자의 고문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노골적인 적대감에 남작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야. 제가 각하의 사람이기 때문이죠. 저는 황자님의 어머니 되시는 황후 폐하의 선생을 시작으로 일러미레 공작가에 충성을 해왔습니다."

"...."

"황자님께서 어렸을 적, 공작가의 영지에 방문하실 때면 제가 황자님을 돌봐드리기도 하였지요?"

파몬드도 내가 어렸을 때 봤던 사람으로 이 자를 꼽았다.

남작이 1황자 밑으로 가는 건 나중에 일어날 일.

그렇다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나를 존중하는지.

베르토 아재가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환기했지만, 다시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날 도와주는 이유가 고작 내 몸 속에 흐르는 피가 일러미레 공작가의 핏줄이라 그러는 건가?"

내 질문에 조용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 남작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깍지를 꼈다.

"인원을 물려도 되겠습니까."

"편한 대로."

"잠시 나가있게."

남작의 손짓에 수많은 인원이 방을 나갔다.

우리만 남게 되자 남작이 내게 서류철을 하나 밀었다.

"1황자 전하십니다. 심성이 악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이지요. 본인을 감추는 데 도가 텄으며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십니다."

서류만 보고 별말 안 하고 있자, 두 번째 서류철을 건넸다.

"2황자 전하십니다. 아랫사람을 손찌검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시고 여성편력이 심하며 자존감이 무척이나 낮으십니다.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지요. 사람 됨됨이가 못났습니다."

노골적인 편애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1황자 밑으로 갈 때가 머지않았었나 보네?

"그래서, 할 말이?"

"이 두 분의 공통점은 딱 한 가집니다. 욕심."

"욕심?"

"예. 권력에 대한 욕심…. 왜 제가 총리 각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지금껏 보필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별다른 대답이 없었지만, 베르토 아재는 말을 이었다.

"각하의 곁에서 닮고,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총리가 되는 법을요. 정확하겐 권력을 쟁취하는 법이겠죠."

남작의 눈에 찐득하고 퀴퀴한 욕망이 맺혔다.

그 탁한 기운은 연방에서 자주 보던, 권력에 미친 아귀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008화

"황후께서 서거하시고, 황자님마저 쓰러지신 후 각하께선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남작의 말은 평온했으나,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울분에 차 있었다.

"예전과는 달라지셨습니다. 눈에는 독기가 사라지셨고 무심함이 자리 잡았습니다. 국정 운영에 차질은 없다만 의사당에서 싸우던 예전의 총리님은 더 이상 안 계십니다."

"그래서. 어? 그래서 어쩌잔 거예요."

"예?"

억울하고 답답하면 뭐 어쩌겠는가.

수도원이 싫으면 수도승이 떠나야지.

"본인의 선택으로 총리 라인을 탔으면서. 권력이란 권력은 다 빨아 재꼈으면서. 이제 끈 떨어지니까 옮겨 타려고?"

남작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지만, 내가 본 아귀 같은 녀석들은 책임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족속이었다.

"아까 말하는 본새 보니까 2황자보단 1황자 쪽이 끌리나 본데, 가고 싶으면 가. 가는 사람 안 붙잡아. 내가 총리한테 잘 전달해 놓을게."

"예? 제, 제 말은 그저—"

"그게 아니었어? 그럼 뭔데. 그쪽이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뭔데 나한테 이런 걸 들이밀며 내 할아버지 욕을 하냐고."

서류철을 툭툭 치며 묻자 남작의 입이 닫혔다.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

책임감? 기대도 안 했어.

그런데 말이야, 내 앞에서까지 이러면 안 되지.

당황과 황당이 뒤섞인 남작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갑자기 총리가 나 지지한다 해서 내 주식 맛 좀 보려는 거지?"

"결코 아닙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부인했지만.

진심은 커녕 흔들리는 볼살이 더욱 화를 부추겼다.

원래 권력에 미친놈들은 찌라시만 들리면 곧바로 찔러보는 족속이다.

"세 다리 걸치다가 어디 하나 터지면 거기로 갈 거잖아. 아니야?"

"결단코 그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은 1황자로 기울였고, 가는 건 시간문제였을 터.

그런데 갑자기 총리가 떡 하니 나타난 5황자를 두둔하네?

혹시나 하면서 맛만이라도 어디 봐볼까~ 하는 거 누가 몰라?

다 경험담이다, 경험담.

쾅!

책상을 치며 남작을 바라봤다.

옛날 기억에 화가 난 게 아니다.

여기저기 빨 때 꽂는 남작의 모습에 화가 난 거다.

"오늘 보고는 그대로 진행하되 선택해라."

"예?"

"총리 빽 가진 내 밑에서 열심히 굴러 차기 총리가 되든지, 1황자 밑에 들어가서 장관의 일 석이라도 얻을까 눈치 보며 발버둥질 칠 건지."

아, 너무 중소상회 사장 같았다.

그래서 남작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싹 다 들어와!"

밖에서 대기하던 인원이 우루루 밀려 들어왔다.

벙찐 베르토 아재를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시작하죠? 하려던 거."

"예? 예…. 일단 국내 정세입니다."

베르토 아재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 여자가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경제조정실 금융정책관입니다.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

아 배고파.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보고를 끝내자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겨 있었다.

아직 몸도 회복이 덜 됐는데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것은 꽤 고역이었다.

베르토 아재에게 줄 잘 서라고 언급한 뒤 방을 나오자 파몬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전하."

"오늘은 여기서 자자. 집까지 언제 가."

"그러실 줄 알고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파몬드를 따라 새벽의 조용한 복도를 거닐었다.

휘영청 한 달빛과 조용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관저 내 정원에 반딧불이가 별처럼 반짝였다.

"우리도 집에 정원 좀 가꾸자."

"정원…. 말씀이십니까?"

"반딧불이도 좀 풀고. 밤에 노상도 좀 까고."

"그럼 정원사를 수배해 보겠습니다."

"수배는 무슨. 걍 니가 해."

시답잖은 이야기.

평소와 다름없는 둘 사이의 거리.

하지만 느껴지는 어색한 공기.

"할 말 있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할 말 있냐."

답이 없는 파몬드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파몬드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뭐가."

"전부…. 전부 죄송합니다."

"답답한 새끼. 총리도 너 같은 부하를 둬서 걱정이 이만저만삼만이겠어, 아주."

눈썹을 긁적이며 무릎을 꿇은 파몬드와 눈높이를 맞췄다.

"야."

"...."

"야!"

"...."

"어쭈, 대답 안 하지? 대답 안 하면 1초에 한 대다?"

"예!"

빡!

고개를 든 파몬드의 머리를 때리자 녀석의 고개가 저항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보원인 새끼가 정보 빼돌릴 대상한테 감정 이입해서 일을 그르쳐?"

"예? 저, 저는…!"

"저, 저는…! 이지랄. 넌 한 대 더 맞아야 돼."

다시 한번 뒤통수를 때리고 무릎을 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파몬드가 멍청하게 올려봤다.

"뭐가 죄송해. 넌 시킨 일을 한 거고, 정작 미안해 할 노친네는 잠이나 처자고 있을 텐데. 얼른 일어나."

"저, 전하…!"

당황환 파몬드가 황급히 일어나 주변을 살폈지만 내 목소리가 워낙 컸어야지, 응?

이미 귀에 들어갔어, 인마.

내일 아침 회의 때 제1안건으로 바로 올라온다.

"꼬봉은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하면 돼. 책임은 시킨 사람의 몫인 거지. 뭐, 시발 죄송하다~ 미안하다~ 무릎까지 꿇고 별 지랄을, 아주. 아오."

다시금 손을 들어 머리를 때리려 하자, 파몬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에 김이 빠져 손을 내렸다.

파몬드 역시 진지하게 사과한 것이 부끄러운지 머쓱하게 웃었다.

"이 새끼 웃네?"

"죄, 죄송합니다!"

"조용히 대답 안 해? 자는 사람들 다 깨울래?"

"죄, 죄송합니다아아…!"

"말끝 흐리지 말고 다시."

"죄송함닷."

가벼워진 분위기에 우리는 다시 복도를 걸었다.

풀벌레 울음소리와 시답잖은 파몬드의 이야기.

환기차 열어 놓은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

문득 내가 제법 나답게 행동할 수 있음에 감사를 표했다.

잠자고 있을 총리에게 마음속으로.

"총리는 날 어떻게 한 대냐."

"각하께선 전하를 지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제국에 반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전부를 지원하라 명하셨습니다."

스케일이 달라도 다르긴 달랐다.

파몬드의 대답에 피식 웃고는 녀석에게 따져 물었다.

"그나저나 너 내 일거수일투족 전부 일러바쳤냐?"

"아, 아닙니다! 전하께서 제 정체를 알고 계시는 것 같다고는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않은 거야, 못한 거야."

"그, 그게 무슨 차이인지…."

"푸하하."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파몬드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었다.

여태껏 쓰던 가면은 엿 바꿔 먹었냐.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이쪽이 훨씬 잘 어울린다.

생긴 것도 띨빵해가지고.

"아이, 씹! 현장 뛰는 새끼가 그거 하나 파악 못 해?"

"아, 아않…. 아니 모, 못했…."

대답하지 못하는 파몬드를 일갈했다.

"내일까지 답변 준비해 와. 그래서 여기가 침실?"

"예? 예. 맞긴 합니다만…."

"뭐! 말을 할 거면 끝까지 제대로! 또박또박! 하라고! 맞는데 뭐?"

어벙 거리는 파몬드를 뒤로하고 문고리를 잡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편안한 밤 되십쇼, 전하."

평소와 같은 저녁 인사말.

"오냐."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됐어. 다른 분이 깨워주겠지."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십쇼."

평소와 다른 말투와 행동.

평소 같지만, 평소 같지 않은 하루.

오늘 밤은 편하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삐비비빅! 삐비비빅!

"아흑…!"

서기관이 기지개를 켰다.

철야를 하느라 휴게실에서 잠을 청한 탓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꺼지지 않는 알림을 끄려 안경을 집는 순간.

"야. 너 내가 밤샘할 때 알람 끄라고 했어, 안 했어."

"아, 죄송합니다…."

"너 오늘 끝나고 남아."

"예? 저 오늘 저녁에 약속—"

"약속이고 나발이고! 남으라면 남으라고!"

건너편 소파에서 자고 있던 서기관의 상사, 금융정책관의 신경질에 그녀는 풀이 죽은 채 서둘러 휴게실을 나갔다.

옆 휴게실에서 동료 서기관들이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는 말없이 눈을 비비며 그 좀비 무리에 합류했다.

좀비 때는 옥상 흡연장에 도착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인생…."

"왜, 일어나자마자."

동료의 쇳소리에 그녀가 한숨과 담배 연기를 동시에 내뱉었다.

"아니 어제 휴가인 사람 불러다 철야시키면서 미안하다고 한 년이 누군데? 오늘 저녁에 약속 있다고 말하니까 무조건 보내주겠다고 한 건 어디의 누구고? 그리고 알람을 끄라고!? 저번에 안 켜서 일어나라고 깨워주니까 키라 그러고, 키니까 왜 켰냐고 지랄이고, 그럼 다 같이 지각하고 실장님한테 닦이던가!!"

입에서 불을 뿜는 그녀의 모습에 옆에 있던 동료들이 박장대소하며 쓰러졌다.

그녀의 욕을 시작으로 동료들의 입에서도 봇물 터지듯 불만과 욕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너희도 그래?"

"너희도? 이거 신고 못 하냐? 조의금을 월급에서 까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해? 얼굴도 모르는 남인데."

누구는 서로의 억울함을 공감했고.

"난 다 좋은데 제발 방귀 좀 그만 뀌셨으면 좋겠다…. 진짜 같은 점심 먹는 거 맞냐?"

"내가 말했지? 그 양반 장 안 좋다니까? 내가 거짓말 안 하고 백만 번은 병원 가보라고 했는데, 안 가."

누구는 서로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들이 이렇게 대놓고 상사 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옥상엔 상급자들이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옥상은 성역이었으며 불가침의 공간이었고 약속의 땅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기 전까지.

끼이익….

"아, 뭐야. 여긴 금연구역 없나."

소가 핥은 머리.

눈곱을 떼며 하품하는 모습.

"누, 누구세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옥상에서 서기관들은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누구야? 신입?'

'겠냐고요.'

'높으신 분 아냐? 정책관들이 날이 서 있는 이유랑, 휴가자들 다 불러 모으기도 했고!'

'많이 쳐봐야 이십 대 중반인데?'

빠르게 지나간 눈치 회의 결과 막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 여긴 관계자 이외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요."

하품하던 거수자는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관계자니까 여기 있겠죠."

거수자가 하품을 하며 막내를 지나쳤다.

'아, 저 폐급….'

'기사들 눈 피해서 여기 들어 왔겠냐고!'

'쟤 어디 부서냐?'

스트레칭을 하며 난간에 기댄 남자가 밑을 바라봤다.

이내 한 곳을 가리키더니 올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이 어찌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부사수의 똥을 치우기 위해 사수가 달려가 거수가에게 물었고, 거수자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실례네요."

"아, 예, 죄송합니다…."

'죄송?'

'쟤네 진짜 어디 부서냐.'

이제 모두가 그 윗 기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차장님!!"""

남자가 들어오는 순간.

모두의 허리가 꺾임과 동시에 담배와 커피를 버리는 기예가 펼쳐졌다.

장엄하리만큼 웅장한 모습에 멀뚱히 서 있던 거수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여기가 군대요? 뭔 기강을 이렇게 잡아."

그 말에 세상이 잠시 멈췄다.

총리 곁에서 제국의 정무를 보좌하는 국무조정실의 실세이자 차기 국무조정실장으로 내정된 차장에게 저런 껄렁한 모습이라니!

그러나 국무1차장, 베르토 웨라이버그 남작은 건치를 보이며 외려 아양을 떨었다.

"험험! 앞으로 인사하지 말라 타이르겠습니다."

"그냥 한 소리 가지고 인사하지 말라니…. 여기가 연방이에요? 이거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네."

"농입니다, 농!"

남작과 거수자의 대화에 공기가 다시 한번 얼었다.

그리고 거수자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리고 누가 온다고 하면 공지 좀 해요."

"예, 예! 꼭 공지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뭐냐. 누구 온다고 휴가자 불러들이지 마시고, 일 년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 좀 받게 해요. 그리고 월급에서 경조금 빼가는 거. 불법 아닌가?"

"네?"

순식간에 쏟아진 말에 차관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차관의 멍했던 얼굴이 단단해지고 눈초리가 서기관에게 향했다.

온 서기관들이 숨을 죽인 채 눈을 질끈 감았으나 정체 모를 거수자가 그사이에 껴들며 말했다.

"그냥 생각나서 말한 겁니다? 담에 왔을 때 여기 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없으면 쟤네 위로 제 밑으로 다 집합이에요."

"여, 염려 마십쇼! 여부가 있겠습니까, 허허!"

식은땀을 흘리는 차관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거수자가 옥상을 나가고 뒤따라 가던 차관이 잠깐 뒤를 돌아 서기관들을 쳐다봤지만.

"아, 뭐 해요! 나 배고파!"

"지, 지금 갑니다!"

차관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렇게 우두커니 남은 서기관들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걔네 어디 부서야."

#009화

"결정은 하셨어요?"

아침을 간단하게 해치우고 어제 보고를 받았던 방으로 걸어가던 도중 물었다.

"예?"

"예? 말고. 다 알면서."

뻔뻔한 베르토 아재의 말에 웃으며 말하자, 아재의 입에서 한숨이 폭 나왔다.

"이걸 고민한다고? 줄만 잘 서면 원하는 권력 다 가질 수 있는 이 기회를?"

"…황자님."

힘없이 나를 불러 세우는 베르토 아재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게 죽은 얼굴의 베르토 아재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황자님과 함께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왜 몰라요."

"황자님의 제안은 분명 매력적입니다만…. 아무래도 소스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소스가."

뭘 보여주고 나서 그런 소리를 하란 소리렷다.

"전 가정이 있는 몸입니다. 곰같은 처와 하이에나 같은 새끼들이 저만을 기다리지요."

"절망적인데…."

"최근에 2황자님께서 아픈 아내 앞으로 홍삼을 보내주셨습니다."

"아, 예."

거무죽죽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말투.

"1황자님께서는 막내의 공부 선생을 수배해 주셨지요. 아! 유명한 명사로 말이죠."

"아, 그렇군요."

지금 몸값 올리는 소리가 얼마나 크냐면, 나를 호위하던 기사 두 명의 표정도 일그러질 정도였다.

총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국정 운영에 손을 반쯤은 뗐을 테니, 굳이 제지하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 드시다 탈 나요."

"험험."

"알만한 양반이….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전, 그냥 제 가족에 대한 걱정을 말했을 뿐입니다, 허허!"

아오, 약 올라.

탈 날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받아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받아 처먹었네.

안 그러면 저 기름진 손과 항아리만 한 배가 설명 안 될 테니까.

"전 차장님 가족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아유아유아유! 그냥 한 소립니다. 황자님의 제안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만…! 전 제 가족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몸이란 걸 알아주십사…. 하고 한 소립니다."

뭔가 상쾌해 보이는 베르토 아재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족같은 소리 하고 있네.

***

어제의 보고회 이후 오늘도 회의가 진행됐다.

회의의 목적은 앞으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 그에 따른 공작가의 방향—

"이런 거 말고. 좀 건설적인 대화 좀 합시다."

말하던 조연1이 입을 다물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여기 정보국에서 나오신 분 계신가요."

"...."

"아니면 뭐 겸직이나 그러신 분."

"...."

"아니 서로 감추는 거야, 아니면 진짜 없는 거야? 할아버지한테 물어볼까."

총리란 단어에 몇몇 인원들이 몸을 잘게 떨었다.

"제국정보국이 총리 직속 기관인 거 모르는 사람? 없죠. 세 살배기 아가도 아는 건데, 그죠?"

다시금 묻는 말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뒤에 서 있는 파몬드를 내 옆으로 불렀다.

"여기 정보국 소속 요원들 있지."

"예? 아…. 예, 있습니다."

파몬드의 말이 트리거가 됐을까.

몇몇이 눈에 띄게 한숨을 내쉬었고 몇몇은 억울한 눈빛으로 파몬드를 흘겼다.

"30분 휴식. 30분 뒤에 이 방엔 정보국과 관련된 인물들만 앉아 있어야 할 거야. 아니, 할 겁니다~"

말을 마치고 나가자, 파몬드가 바로 뒤에 붙었다.

할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묻지 않고 묵묵히 수행하는 녀석에게 너무 걱정 말라며 위로했다.

고작 말 한마디가 위로일지 모르겠지만.

30분 후, 방에 돌아왔을 때 사람으로 빽빽하던 회의실이 널찍하기 그지없었다.

오전에 옥상에서 봤던 인물도 드문드문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긴말하는 걸 싫어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온 시선이 내게 향했고,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만 찾죠."

"사람요?"

누군가의 대답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원들의 인상이 순식간에 찡그려졌다.

"인상들 피시고. 최근까지 저희 집에서 일하던 사용인입니다. 이름은 아델 비오히스. 띄울 만한 사진 있냐?"

"넵! 바로 띄우겠습니다."

파몬드가 사진을 영사기 같은 물건에 대자 벽에 아델의 얼굴이 크게 비쳤다.

"이쁘죠? 프로필 읊어봐."

"나이는 스물하나. 고아이며, 제국 북쪽의 대고원과 인접한 베-모노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베-모노시의 사립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년 후 5황자궁에 취직했습니다."

파몬드의 짧은 브리핑이 끝나자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연방의 스파이로 의심이 되는 인물이죠. 시발련…. 나를 수도기사단에 찌르고 가?"

"저, 전하…."

파몬드가 눈을 가리며 조용히 성호를 긋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들었다.

"지원국의 게리 포트 1급 요원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아델 비오히스는 정보국에서도 스파이로 추정하여 쫓는 인물입니다. 분석국 소속인 파몬드 요원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아직 정보국은 스파이의 은신처를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하긴 아직 이 시기는 첩보 활동이 전쟁 시기만큼 성행한 것도 아니고, 그만큼 잡을 수 있는 스파이도 없기에 정보가 부족할 거다.

"지도 띄워봐, 수도권. 아니. 일단 수도 한정으로."

"옙."

제국의 수도가 화면에 띄워졌다.

크게 십자로 구분된 대로를 중심으로 총리 관저는 4사분면에 위치해 있었다.

어디보자…. 분명 총리 관저랑 가까웠던 거 같은데.

"관저 근처에 말괄량이 에일이라고 술집 있지 않냐? 술집이랑 잡화점이랑 같이 하는 곳이었던 거 같은데."

"엥?"

저 멀리 여성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해당 여성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이목이 쏠린 탓에 기어가는 목소리로 여성이 조용히 말했다.

"제, 제가 자주 가는 술집이… 에요."

아이고…. 넌 일 끝나면 사상검증 한다고 욕 좀 보겠구나.

"거기가 연방의 은신첩니다. 4사분면, 그러니까 행정구역 쪽의."

내 말이 끝나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몇 초 후 게리 포트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그 말씀은…. 다른 구역에도 연방의 은신처가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당연하죠. 이 넓은 수도에서 여기뿐일까요. 물론 다 아는 건 아니라 금쪽같은 쥐새끼들을 잡아다 캐내야겠죠. 설마, 제가 그것까지 해줘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살짝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 내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수도권 지도."

"예? 아, 옙!"

수도만 보여주던 지도가 외곽까지 넓혀졌다.

기억 속 말괄량이 에일의 지하와 연결된 통로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술집과 연결된 통로가 있을 거예요. 술집이랑 통로를 동시에 급습해야 한 번에 잡을 수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황자 전하."

게리 포트가 나를 불렀지만, 그의 말을 일축했다.

"그럼 하지 마세요."

"예?"

지도에 손가락을 대고 쭉 그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 궁금해서 그렇죠?"

"예,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냥 하세요."

"네?"

"내가 시켰으면 그냥 하라고."

총리는 나를 지지한다.

반역은 당연히 안 되고, 제국에 해만 끼치지 않으면 이 지지는 철회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총리 직속 기관인 제국정보국 역시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물론 반발은 있겠지만 까라면 까야지.

"불만 있으면 국장한테 말하거나 깡 있으시면 총리한테 직접 찾아가세요. 소개장은 써드릴 수 있습니다."

"...."

빤히 바라보는 눈과 다물어진 입.

이의는 없었다.

"그럼 없는 거로~"

수도 남쪽에 흐르는 강 건너편에 있는 도시, 누빌나르.

누빌나르 외곽. 한 곳에 X로 체크하고 뒤를 돌았다.

"작전명은 따로 없습니다. 그냥 구서(驅鼠)작업이라 생각하세요. 쥐새끼들 잡는데, 군대는 필요 없잖아요?"

이번 작전은 철저하게 정보국 인원들로만 움직여야 한다.

군의 통수권자는 황제이고, 그 군대 내부 인사는 1황자에게 거의 넘어간 상황.

"쥐잡기는 정보국 내부에서 진행합니다. 작업 실행은 금일 자정."

내 말 뜻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제국정보국장 들어오라 해. 아니다, 내가 들어갈 테니 연락해. 그럼, 해산. 퍼뜩퍼뜩 움직입시다."

멍한 얼굴들이었지만,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파몬드는 곧바로 제국정보국 본부에 연락을 넣었다.

게리 포드 요원 또한 다른 요원들과 함께 먼저 본부로 향했다.

"연락했어?"

"예. 이번 작전을 작전국에서 총괄할지, 아니면 TF를 꾸릴지 전하께 여쭙습니다."

"작전국에서 알아서 하라 그래. 난 그냥 구경."

"넵! 전달하겠습니다."

지금 시각은 12시.

간단하게 점심이나 먹고 제국정보국 본부로 출발하면 되지 싶었다.

"밥 먹고 가자."

"준비하겠습니다."

밖으로 정보가 샐지 안 샐지… 모르겠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

빠르게 움직여 빠르게 소탕해야 이번 쥐잡이의 성과가 나올 거다.

***

오후 3시경.

텔가 스너티스칼리는 선배와 함께 제국정보국 본부의 복도를 열심히 뛰었다.

"하아, 2주만의 오픈데."

"내 저녁 약속…. 내 맞선!"

복도의 모든 경고등이 비상상황임을 나타냈다.

뛰지 않는 요원이 없었다.

분석국 소속인 두 3급 요원은 이번 구서 작업에 지원국으로 임시로 소속을 옮겨 현장에 투입될 요원들을 서포—

"어어! 야, 너희 잠깐 와봐."

"예!"

간부로 보이는 인물이 둘을 불러 세웠다.

이내 간부는 현금을 쥐여 주며 말했다.

"애들 몇 명 더 데리고, 커피 좀 사와."

"…몇 잔이면 되겠습니까."

"최대한 많이 사와, 최대한. 그리고 중앙통제실 청소가 어디지?"

"지원국 3팀입니다."

"아, 그러면 3팀장한테 치약 쓰지 말고 매직 블록으로 닦으라 그래. 치약은 냄새나서 안 된다고, 알아들었지?"

"…옙, 알겠습니다."

뒤에서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텔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치약 세 번째 박스던데….'

차마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한 텔가는 그대로 선배와 함께 중앙통제실로 향했다.

"사표 쓸까…."

"안 돼요!! 선배 퇴직하면 저는 누가 돌봐주는데요…."

"아, 진짜 못해먹겠다."

무서운 장난과 함께 중앙통제실에 도착해 3팀장에게 간부의 말을 전하자 되돌아오는 한마디.

- 와서 직접 하라 그래, 씨발.

고무장갑을 벗어 던진 3팀장을 어르고 달래며 원래의 목적지인 1팀 회의실에 도착하니.

- 뭐 하다 이제 와. 지원 왔다고 벌써부터 뺑끼치냐?

사정을 설명하고 커피를 사러 간다는 말에 1팀 1조장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 커피, 시발.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그렇게 1팀 인원과 함께 커피를 사러 이동 중.

중앙계단이 통제돼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작전 발의자가 5황자님이시라고?"

"네? 아, 네."

선배의 말에 텔가가 대답을 하자 다른 선배들이 저마다 한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뭔 스파이여."

"아니 스파이는 그렇다 쳐도 은신처를 지가 어케 암?"

"근데 5황자궁 사용인은 스파이가 확실해? 증거도 없잖아."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뭐 어쩌겠냐. 이런 놀이도 한두 번이겠지. 좀만 참자."

험담을 들으며 뒤에서 조용히 선배를 쫓던 텔가는 3시간 전에 총리 관저에서 있던 회의를 떠올렸다.

'자신감이 좀 과하긴… 했지?'

스스로의 말에 확신이 흘러넘치며 말하던 5황자.

지원국 2팀장이신 게리 포트 요원의 말을 자르고 그냥 시키면 하라며 조용히 찍어 누르던 모습.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가늠이 되진 않았지만 일단 그건 확실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일 거란 것.

지금은 커피 셔틀이나 하지만, 원래 이런 건 막내의 몫이기에 텔가는 별 불만이 없었다.

'불만이라면 오늘 저녁 약속이지…. 어떻게 잡은 맞선인데에에에!'

"근데 선배. 저희 위장직은 어떡해요? 서기관 명함 좋았는데…. 금융정책관 그 아줌마 히스테리는 별로였지만."

"물갈이되겠지. 이거 끝나면 난 작전국에 지원하려고."

"엥? 작전국이요? 선배 각성했어요?!"

선배의 말에 텔가를 비롯한 다른 요원들이 전부 놀라 물었지만 텔가의 직속 선배는 확고했다.

"내가 여기 청소하러 들어온 건 아니니까. 난 제국을 위해 일하고 싶어."

"이새끼 뭐 잘못 먹었나. 도대체 뭘 먹으면 너처럼 애국심이 투철해지냐."

"그 애국심으로 군대를 들어가지 그랬냐. 왜 정보국에 들어와서…."

동료들의 말에 텔가의 선배는 옅게 미소짓고는 카페 점원을 불렀다.

"에스프레스 1리터 통에 주세요. 한 통 말고 재고 있는 만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