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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솔플러

#0. 프롤로그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하고, 취직은 못했고.

나와 비슷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방구석에서 배만 벅벅 긁는 사람이 그렇게 드물지는 않을 거다.

분명 이딴 식으로 살다간 언젠가 인생이 망해버리겠지, 나도 안다.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니다.

나는 그저, 흙수저로 태어난 인생을 역전할 찬스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 나이 스물일곱, 마침내 그 찬스가 찾아왔다. 세상의 천지개벽과 함께 생겨난 흙수저의 희망이.

[도전자여, 시련의 탑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뒤바꿀 역전의 찬스, 꿈에서도 보았던 초대장이 마침내 내게 날아온 순간...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만년 등골 브레이커 신세에서 벗어나, 당당한 한 명의 헌터로 재탄생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인생은 좆망했다.

설마 그 미친 탑에 혼자 떨어질 줄은 몰랐거든.

#1. 시련의 탑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지구는 말 그대로 천지개벽을 일으켰다.

세계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습격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정체불명의 탑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탑은 둘째치고, 쏟아지는 괴물은 인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 되었다.

지상 최강의 동물이라는 코끼리가 우습게 느껴질 만큼 위협적인 생물이 수백 수천씩 쏟아지니, 감당할 재간이 있나.

물론 총화기가 뿜어내는 인류의 화력은 어지간한 괴물 따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었지만, 진짜 문제는 어지간하지 않은 괴물도 있었다는 점이다.

총화기가 듣지 않는 괴물, 괴상한 능력을 사용하는 괴물, 그냥 더럽게 크고 존나게 센 괴물 등등등.

세계의 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류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인적인 힘으로 괴물을 제압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통칭으로는 각성자, 현재에 이르러서는 헌터. 세계 곳곳에 자라난 탑이 그런 존재를 뱉어낸 것이다.

그들의 정체는 '시련의 탑'에서 보낸 초대장을 받아들인 이들이었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탑을 클리어해 '헌터'가 되었다.

물론, 그것도 전부 옛일이다.

돌연 나타난 1세대 헌터들에 의해 세계는 퍽 안전해졌고, 주기적으로 사람을 납치하는 초대장은 나 같은 사람들의 인생 역전 찬스가 되었다.

초창기 시련의 탑은 정말로 목숨을 걸고 공략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곳이었지만, 각 층의 공략법이 확립된 지금은 그렇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시련의 탑에 장기 체류하는 이른바 '랭커'들도 있어서, 안전하게 100층까지 소위 말하는 '버스'를 타는 것도 가능하다.

그게 집구석을 뒹굴던 개백수인 내가 망설임 없이 '시련의 탑'에 들어온 이유였다.

굳이 위험하게 목숨을 걸 것도 없이, 랭커 버스를 타서 날먹으로 클리어해도 일단은 저등급 헌터가 될 수 있으니까.

저등급 헌터로서 드문드문 약한 괴수들만 처치해도 벌이는 꽤 쏠쏠하며, 헌터로서의 신체능력을 가지고 노가다만 뛰어도 굉장히 잘 번다고 하니.

그러다가 우연히 히든 요소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진짜 인생 역전이고. 확률 높고 안전한 도박을 안 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근데 씨발, 이게 대체 뭐냐고.

[시련의 탑#2661 (1/1)]

이 푸른 인터페이스는 시련의 탑 각각에 딸려 있는 채팅 채널이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와 거주 지역을 기반으로 가까운 거리의 탑으로 전송된다. 저 2661이라는 번호는 내가 전송된 탑의 고유 번호, 주소 같은 거다.

그럼 그 옆의 (1/1)은 뭐냐, 채팅 채널에 접속한 사람들의 숫자를 의미한다. 접속자는 나 한 명, 총원도 나 한 명.

그러니까, 나는 2661번 시련의 탑에 혼자 있다는 뜻이다. 나를 버스 태워줄 랭커도, 함께 싸울 동료도 없는...완전한 혼자.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채팅 채널을 포함한 인터페이스를 한참동안 조작해 가며 다른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모든 시련의 탑 이용자들이 공유하는 오픈 커뮤니티에 물어봐도, 2661번 탑의 도전자는 달리 나오지 않았다.

1세대 헌터들이 목숨 바쳐 도전했던 그 탑에, 오롯이 나 혼자뿐.

내 인생은 좆망했다.

**

시련의 탑은 이름만 탑이지, 실제로는 거대한 이세계에 가깝다.

각 층마다 하나의 세계, 도합 백 층의 탑이니 백 층의 세계, 그리고 층마다 여러 개의 던전과 마을이 존재한다.

도전자는 층마다 존재하는 던전과 사냥터를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레벨을 올려 스킬과 스탯을 얻으며 강해진다.

아주 직관적인 RPG 게임 형식이다. 당연히 내게도 흔히 말하는 '상태창'이 달려 있다.

"상태창."

굳이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지만, 보는 사람도 없겠다 괜히 중얼거리며 상태창을 불러냈다.

서진혁 Lv.1 (무직)

HP : 100/100

MP : 100/100

근력 : 1

민첩 : 1

내구 : 1

지능 : 1

모든 스탯이 군더더기 없는 최저치, 이건 모든 도전자들이 마찬가지다.

시련의 탑에 들어오기 전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근력 수치는 1이고, 마찬가지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지능은 1이다.

그러니까 지능이 1이라고 해서 내가 멍청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거다. 애초에 이 지능 수치는 진짜 지능이랑은 아무 상관 없는 스탯이다.

레벨 옆에 붙은 (무직)이라는 표시도 마찬가지, 내가 무직 백수라 그런 게 아니라 전직하기 전에는 모두가 무직이다.

근력 수치가 올라가면 힘이 세지고, 민첩 수치가 올라가면 더 빨라지고, 내구 수치가 올라가면 더 단단해지고.

이곳에서 얻은 모든 스탯은 내 기존의 능력에 그대로 합산해 적용된다.

스탯 수치가 1인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현재 나는 시련의 탑에 들어오기 전보다 스탯1만큼 더 힘세지고 민첩해졌다.

사실 아무 체감도 안 되긴 하지만, 다른 도전자들이 알아낸 바로는 그렇다고 한다.

오픈 커뮤니티에 적힌 정보 상으로도, 시련의 탑에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굳이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본 이유는, 혹시 무언가 남다른 특전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씨발, 에픽 클래스라도 달아주면 어디 덧나나."

혹시 탑에 나 혼자라는 점이 뭔가 이득을 주지 않으려나 싶었는데, 역시 그딴 건 없는 모양이다.

정말로 나 혼자서, 아무것도 없는 1레벨 허접쓰레기의 몸으로, 이 탑을 혼자서 클리어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당하게 헌터가 되어서 고생한 엄마를 호강시켜주겠다는 계획은 벌써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그래, 흙수저로 태어난 나는 헌터로서도 흙수저였다.

내 인생은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좆망인 걸까.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상사 모든 일은 해보기 나름인 법.

혹시 모르잖아, 내게 숨겨진 굉장한 재능이 있어서 정말 혼자서 탑을 클리어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위한 히든피스가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설마 정말로 인생이 좆망 뿐이겠어.

그래서, 나는 마을을 떠나 사냥터로 향했다. 일단 아무 몬스터나 잡아보자는 생각으로.

"어...저게 뿔토끼 맞겠지."

나는 들판 맵에서 돌아다니는 커다란 흰토끼를 보며 오른손의 목검을 꾹 쥐었다.

시련의 탑 공개 커뮤니티에는 뉴비 도전자들을 위한 초반 육성법과 공략법이 잘 정리되어 있다.

1레벨때는 미궁 지역에 들어가지 말고, 들판 쪽으로 나가서 뿔토끼를 잡으며 3레벨까지 올리는 게 안전하고 좋다고 한다.

3레벨 아래로는 랭커들한테 쩔을 받으러 다니더라도, 자칫 실족이라도 하면 죽을 수 있다나.

-뿅뿅.

뿔토끼는 말 그대로 뿔이 달린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덩치가 거의 대형견 수준이었다.

호주에 사는 커다란 토끼처럼 징그럽게 생기지도 않았고, 아주 앙증맞은 외형이지만 그냥 무식하게 크기만 하다.

그리고 덩치에 맞게 점프력도 굉장하다. 내 머리 높이 이상으로 뛰어오른다.

-뿅뿅.

뛰어다니는 모습만 봐도 굉장히 위협적이지만, 1레벨도 잡을 수 있는 최약 몬스터라니까...잡을 수 있겠지.

나는 기본 장비인 목검을 들고 천천히 뿔토끼에게 접근했다.

뿔토끼는 공격당하지 않으면 그냥 뛰어다니기만 하는 비선공형 몹. 그러니 첫 번째 일격은 있는 힘껏 때려 박을 수 있다.

"으랴압!"

나는 뿅뿅거리는 뿔토끼의 이마를 목검으로 내려찍었다. 힘 스탯 1이 도움되긴 한 건지, 생각보다 힘있게 휘둘러졌다.

-삐약!

이마를 얻어맞은 뿔토끼는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나는 쓰러진 뿔토끼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검을 휘둘렀다.

-툭, 툭, 툭!

이렇게 세게 후려치면 좀 더 큰 소리가 나야 하지 않나 싶은데, 털가죽 때문인지 무슨 베개 때리는 소리만 난다.

하지만 그래도 데미지는 제대로 들어가는 것 같다. 뿔토끼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내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끼이잉...

그렇게 몇 대를 때렸을까, 뿔토끼는 조금 다른 비명을 내며 빛이 되어 사라졌다.

[뿔토끼의 가죽]

전리품이 인벤토리에 들어왔다. 아무리 1레벨이라고 해도 뿔토끼 한 마리로 레벨이 오르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할만하다. 저만한 짐승을 목검 한 자루로 패 죽이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그래도 스탯 보정이 있어서 어떻게든 되는 모양이다.

목검을 꽤 많이 휘둘렀음에도 숨도 차지 않는 걸 보니, 단순히 힘뿐만이 아니라 체력 쪽에도 보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정도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이후로 나는 뿔토끼 여덟 마리를 더 쓰러트렸다.

비선공형 몹이라 한 마리만 붙잡고 계속 때려대면, 반격당할 것 없이 잡을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레벨도 올랐다. 이걸로 2레벨, 스탯도 다 1씩 올라서, 이제 모든 스탯이 2가 되었다.

올스탯 1일 때에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올스탯 2가 되니까 확실히 힘이 좀 더 세졌다는 게 느껴진다.

성장의 체감이라고 해야 하나, 백수...취준생으로 집 안을 뒹굴거릴 때는 느끼지 못한 뿌듯함도 느껴졌다.

"오케이, 한 마리만 더 잡고 마을로 돌아가 볼까..."

나는 모처럼이니 열 마리를 채울 셈으로, 뿅뿅거리며 돌아다니는 하얀 뿔토끼 한 마리를 더 점찍었다.

"으랴압!"

힘찬 기합과 함께 뿔토끼의 머리를 후려깐다. 기본 장비인 목검의 공격력으로는 열한 대 정도 때리면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

-삑! 삐익! 삐이이익...!

가소롭게 울부짖는 뿔토끼를 계속해서 두들겼다. 그렇게 이제 거의 다 잡았다 싶은 순간, 목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빠직.

무기의 내구도가 다 된 것이다. 뿔토끼에게 마지막 한 방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빠직, 뿔토끼가 쓰러지고 전리품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목검이 박살 났다.

"딱 열 마리 잡았는데 부서지냐."

나는 부러진 목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혀를 차며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 멀리서 이상한 게 보였다. 내가 방금 쓰러트린 뿔토끼와 똑 닮은 다른 뿔토끼였다.

특이한 점은 털이 까만색이라는 것이다. 이상하다, 뿔토끼는 다 하얀색이 아니었나.

-뿅뿅뿅!

검은 뿔토끼는 흰토끼들과 다르게 뜀박질 속도가 좀 더 빨랐다. 뛰어오른다기보다는 질주한다는 느낌이다.

공략집에 저런 게 있었나 싶어서 커뮤니티를 열어보는데, 멀리 보이던 검은 뿔토끼가 어느새 가까워졌다.

아니, 다르다.

단순히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저 검은 뿔토끼는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씨발."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재빠르게 거리를 좁힌 뿔토끼는 나를 향해 온몸을 날려왔다.

"컥!"

#2. 금수저 스타팅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검은 뿔토끼는 거의 총알처럼 보였다.

"뭐야!"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엉거주춤한 자세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뿔토끼의 이마가 팔을 밀어내고, 내 명치에 굵은 뿔을 처박았다.

"어억!"

대형견 수준의 덩치를 자랑하는 뿔토끼가 힘차게 들이받으니, 몸은 자연스레 뒤로 넘어갔다.

씨발, 선제공격을 하는 뿔토끼라고? 저런 몬스터는 공략글에는 안 나와 있었는데?

아니, 그런 것보다. 나 죽어!

"윽, 허억!"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뿔토끼에게 들이받힌 몸을 황급히 더듬었다.

그러나 상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한 힘과 속도로 찔렸는데, 완전히 멀쩡했다.

몸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상태창을 떠올렸다.

HP : 91/100

표시되는 HP가 줄어 있었다. 방금 그 박치기로 9만큼 까인 것이다.

'아, 맞다.'

나는 이번에도 뒤늦게 시련의 탑의 기본 시스템을 떠올렸다.

이 시련의 탑에서는 게임과 매우 유사한 시스템이 적용된다. 스탯이나 스킬, 그리고 HP까지.

적에게 공격당하면 HP가 줄어들고, HP가 다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 치명상을 입지 않는다. 보호막 같은 개념이다.

이 정도는 시련의 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너무 당황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 일어섰다.

나를 들이받았던 검은 뿔토끼는 더 이상 뿅뿅거리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몸통박치기를 날릴 기회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그렇게 둘 것 같냐.

"이 새끼가!"

검은 뿔토끼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 그대로 싸커킥을 갈겼다.

-삐익!

목검이 부서져서 되는대로 때려 본건데, 생각보다 먹히는 것 같다. 이게 힘 스탯 2의 차이인가.

나는 싸커킥에 이어서 계속해서 발길질을 날렸다. 검은 뿔토끼는 삐익거리며 계속해서 얻어맞았다.

데미지 표시가 없으니 잘 먹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검은 뿔토끼의 눈이 살짝 빛나는 것 같더니 다시금 몸통박치기를 날려왔다.

"억!"

멀리서 달려올 때도 그대로 맞았는데, 가까이서 뛰어드니 피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뒤로 크게 나동그라졌지만, HP가 조금 줄었을 뿐 이번에도 상처는 없었다.

"으랴압!"

곧바로 일어나서 다시금 싸커킥! 그리고 다시 삐익거리는 검은 뿔토끼!

갑자기 뿔에 찔렸을때는 놀랐지만, 막상 제대로 싸워보니 다른 뿔토끼랑 다를 것도 없다.

어차피 쪼렙 몬스터라 이거겠지. 얌전히 내 경험치가 되어라.

-삐익! 삐익! 삐이익...!

그렇게 한참을 두들겨 팼더니, 검은 뿔토끼도 결국 쓰러졌다.

[검은 뿔토끼의 가죽]

[뿔토끼의 뿔]

뿔토끼는 두 가지의 아이템을 드랍했다. 나는 전리품을 확인할 것도 없이 바로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검은 뿔토끼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

-시련의 탑 오픈 커뮤니티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시련의 탑 뉴비를 위한 1층 가이드 Ver.진짜최종]

[1층 지역 출현 몬스터 정보(개정)]

[필독! 뉴비 도전자들을 위한 기초 가이드 1편]

[인터페이스 기본 사용법]

오픈 커뮤니티에 정리되어있는 각종 초반 공략글을 싹 뒤져보아도, 검은 뿔토끼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방구석에서 배를 긁으며 인터넷에 빠져 산 기간이 제법 되는 내 검색능력은 제대로 정보를 찾아내었다.

몇 차례에 걸쳐서 개정된 공략글이 아닌, 한참 전에 묻혀버린 과거의 공략글에서.

[1층 지역 출현 몬스터 정보(구버전)]

[검은 뿔토끼 : 평원 지역에서 10마리 이상의 뿔토끼 연속 처치시 출현, HP는 기본 뿔토끼의 두 배, 선공형 몬스터, 뿔 확정 드랍.]

어째서 최신 공략글에는 검은 뿔토끼에 관한 정보가 실려 있지 않았던건지, 그 이유는 댓글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7년 2월 17일자로 현존하는 모든 시련의 탑에서 스폰되지 않는 것을 확인.]

그랬다. 검은 뿔토끼는 이제 다른 시련의 탑에서는 스폰되지 않는 멸종된 몬스터였던 거다.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몬스터와 자원들은 유한하다.

좋은 사냥터, 좋은 퀘스트, 좋은 아이템은 이미 천지개벽이 일어났던 혼란기의 1세대 헌터들이 모두 선점하여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 2661번 탑의 도전자는 나 혼자뿐이니, 그런 유한한 자원들이 아직 넘치도록 많이 남아있는 거다.

이거, 굉장한 거 아닌가?

미궁 지역의 보물이나 한정된 수량의 희귀 아이템, 그런 걸 나 혼자 독점할 수 있다는 거잖아.

어쩌면 내 인생, 그렇게 좆망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안녕히 가십쇼!"

무기점 NPC의 무기질한 인사를 받으며 바깥으로 나왔다.

내 손에는 새로 산 목검이 들려 있었다. 상점에다 뿔토끼 가죽을 팔고 받은 돈으로 산 [튼튼한 목검]이다.

원래는 그냥 일반 목검을 사려고 했는데, 검은 뿔토끼의 가죽이 꽤 비싼 아이템이어서 생각보다 돈이 많이 벌렸다.

일반 목검의 두 배 가격이지만 내구도는 두 배가 넘으므로, 살 수만 있으면 당연히 튼튼한 목검을 사는 게 맞았다.

다른 시련의 탑 뉴비들은 이런 목검 같은 건 아예 안 사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배가 아프진 않다.

나는 앞으로 다른 도전자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테니까, 이 정도 지출을 아까워할 이유가 없지.

"음, 마음에 들어."

비싼 목검이라 그런지 손에 더 착 감기는 느낌이다. 뿔토끼를 얼마나 찰지게 팰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

나는 다시 들판으로 나와, 뿔토끼 사냥을 재개했다.

오픈 커뮤니티의 공략글에 따르면 마을 NPC가 주는 뿔토끼 관련 퀘스트만 다 깨도 5레벨까지는 금방이라고 한다.

게다가 나는 다른 시련의 탑에서는 받을 수 없는 검은 뿔토끼 관련 퀘스트도 받았다.

시련의 탑의 한정 요소는 몬스터와 아이템만이 아니라 퀘스트에도 적용된다.

일정 횟수 이상 진행하고 나면 더는 수주할 수 없는 한정 퀘스트가 몇 개씩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퀘스트의 보상은 대체로 좋은 편이라고 한다.

실제로 오픈 커뮤니티를 뒤져 퀘스트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검은 뿔토끼 사냥 퀘스트는 다른 퀘스트에 비해 보상이 센 편이었다.

목검을 사느라 쓴 돈을 메꾸고 한참 남을 정도, 동레벨의 다른 도전자들보다 훨씬 사정이 나으리라.

미궁 지역에 들어가는 건 3레벨을 찍은 다음에 하라고 하던데, 이대로라면 3레벨은 여유롭게 달성할 거다.

처음 초대장을 받았을 때는 당연히 랭커 버스를 타서 저등급 헌터가 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초반에 한정 자원을 잔뜩 선점해 성장한다면, S급이나 A급은 몰라도 B급 헌터까진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히든피스를 발견해서 S급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도?

"으랴압!"

나는 행복회로를 활활 불태우며 뿔토끼 사냥에 임했다.

**

넘치는 의욕에 힘입어 순식간에 뿔토끼 퀘스트를 모두 깨버렸다.

이제 들판에서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는 하루에 한 번 깰 수 있는 반복 퀘스트만 남았다.

그래서 퀘스트를 깨서 얻은 게 무엇이냐 하면, 쨔잔.

"상태창."

나는 바로 한껏 화려해진 내 상태창을 띄웠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와는 몰라보게 레벨이 올라 있었다.

서진혁 Lv.8 (무직)

HP : 200/200

MP : 140/140

근력 : 10 (8+2)

민첩 : 10 (8+2)

내구 : 8

지능 : 8

무려 8레벨이다, 8레벨!

오픈 커뮤니티에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지만, 서버에서 최초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추가 보상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뿔토끼 관련 퀘스트를 모조리 최초 클리어한 보너스 덕분에, 처음 예상한 것보다 레벨이 크게 올랐다.

거기에 내 오른팔에 달려 있는 방패- 처럼 두꺼운 책 한 개.

뿔토끼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확률적으로 받을 수 있는 [세계의 토끼도감]이라는 장비 아이템이다.

오픈 커뮤니티의 통계로는 이걸 받을 수 있는 확률은 10%라는데, 최초 클리어자인 나는 보상을 직접 선택해서 받을 수 있었다.

장비 옵션으로 힘과 민첩 스탯이 2씩, HP가 20 올라가는 초반 꿀 아이템. 거기에 상당한 양의 G(골드)까지.

"크으...존나 금수저 스타팅이네."

오픈 커뮤니티에서 흔히 말하는 '인맥' 있는 도전자나 갖출 수 있는 초반 세팅이다.

나는 그대로 상점에 방문해, 하루 동안 얻은 돈을 싹싹 털어서 방어구까지 풀 세팅으로 맞추었다.

그리고 오픈 커뮤니티에 접속해, [사진 첨부]기능으로 내 장비와 상태창을 공개한 채 글 하나를 썼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시련의탑 1일차 뉴비 스펙 ㅁㅌㅊ?]

(사진)

ㅈㄱㄴ

- ㅈㄹㄴ

- 1일차에 8렙 어케했노?

- 장비도 상점제 풀템이네 ㅋㅋㅋㅋㅋㅋㅋ

- 2661이면 어디 탑임?

- ㄴ 그러네 2661처음보는데

- ㄴ ??진짜네 2661뭐임?

- ㅁㅌㅊ 이러고있네 당연히 ㅆㅅㅌㅊ지 씹놈아

- 토끼도감 비틱 ㅅㅂㅋㅋㅋㅋ

- ㄴ 에밀리씹년 나만빼고다도감주네

- 방어구살돈으로 도감 강화나하지

하루만에 올렸다고는 믿기지 않는 내 스펙에 모두가 감탄을 표했다. 나는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커뮤니티를 닫았다.

"여기서 제일 비싼 방으로."

그리고 마을 여관에서 방 하나를 잡고, 침대에 드러누워 다시 한참 동안 커뮤질을 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오픈 커뮤니티의 열화와 같은 반응은 내게 단잠을 선물해 주었다.

#3. 양민학살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시간은 벌써 오후 2시 근처였다.

시련의 탑에는 아침밥을 먹으라고 두들겨 깨우는 엄마가 없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잤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오픈 커뮤니티와 채팅 채널을 열었다. 시련의 탑#2661 채팅창 옆에 붙은 (1/1)은 그대로다.

하루쯤 지나면 다른 도전자가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탑에는 여전히 나 혼자라는 뜻이다.

좋은 거다. 내가 자원을 더 오래 독점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어제는 나 혼자 100층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무척 초조해했지만, 돌이켜 보니 무척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나 말고 다른 도전자들도 들어올 거 아닌가. 도전자가 많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클리어하면 그만인 것을.

랭커 버스를 못 타는 건 아쉽게 됐지만, 이렇게 초반에 자원을 독점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다.

오픈 커뮤니티의 다른 도전자들만 해도 하루 만에 8레벨을 찍은 내 성장 속도에 깜짝 놀라지 않았나.

어떻게든 저등급 헌터만 되어도 인생 역전이었는데, 이대로 가면 손쉽게 고등급 헌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려면 독점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

-철컥!

인벤토리를 조작해 어제 샀던 방어구 세트를 착용하고, 기운찬 걸음으로 여관을 나섰다.

**

뿔토끼가 스폰되는 들판은 보통 3레벨, 늦어도 5레벨에는 졸업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 이상 레벨에서는 뿔토끼를 잡는다고 딱히 얻어갈 게 없기 때문이라나.

물론 그건 단물 다 빠진 다른 탑을 오르는 뉴비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고, 나는 들판 지역 퀘스트만 깼는데도 8레벨이긴 하다.

어쨌든 나도 들판 지역은 이제 졸업, 드디어 본격적인 사냥터인 미궁 지역에 들어갈 차례다.

미궁은 이 시련의 탑을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로, 일종의 메인 컨텐츠 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바깥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력한 몬스터와 위험한 함정,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관문인 보스룸 등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희귀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보물상자가 이곳저곳에 숨겨져 있다.

이 보물상자 역시 유한한 자원이라, 오래전에 정복된 다른 시련의 탑에선 아주 보기 힘들다곤 하지만...나하곤 아무 관계 없지.

희귀한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는 전직의 서라, 탑마다 하나씩밖에 나오지 않는 유니크 아이템.

쉽사리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온갖 보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도전자여, 시련의 탑이 그대를 부르고 있습니다.]

미궁 입구의 NPC를 지나치고 안으로 들어오니, 주변 공기가 음산하게 변하며 입장을 알리는 문구가 떴다.

인터페이스에 딸려 있는 미니맵은 [탐사 진행도 0%] 라는 글자와 함께,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미궁 지역은 직접 탐사한 부분만 지도가 표시된다. 그래서 1세대 헌터들은 층마다 진행도를 채우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100층까지의 공략이 깔끔하게 정리된 지금은, 오픈 커뮤니티에서 '딸깍' 한 번으로 도전자들이 작성한 지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완전판 지도에는 당연히 이제까지 발견된 함정과 보물의 위치가 총망라되어있기까지 하다.

물론 이미 옛날에 소진된 보물의 위치까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것도 검색 몇 번이면 금방 알아낼 수 있다.

나는 지금부터, 이 미궁에 존재하는 모든 보물상자를 털 것이다.

**

첫 번째 보물상자가 있는 곳은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다.

상자의 내용물은 포션 몇 종류와 단순한 재료 아이템이라고 하지만, 2일 차 뉴비가 쉽게 얻을만한 물건들은 아니다.

특히나 생명과 직결되는 포션은 아무리 쌓아놔도 부족하다고 하니까, 무시할 건 못 된다.

게다가 입구 근처의 보물상자는 나 말고 다른 도전자가 들어오면 금세 털릴 게 분명하니까, 아직 아무도 없을 때 미리미리 먹어 둬야 한다.

그렇게 지도를 보며 천천히 전진하고 있을 때, 보물상자 다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케륵!

뾰족한 귀와 녹색 피부, 그리고 대단히 커다란 코를 가진 어린아이 덩치의 괴물.

1층 미궁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몬스터이자, 가장 약한 몬스터인 고블린이었다.

보물상자도 보물상자지만, 나는 몬스터가 나타나는 것도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고? 뿔토끼가 아닌 몬스터를 상대로 8레벨의 힘을 제대로 시험해보고 싶었으니까.

-스릉.

나는 상점에서 산 [강철 직검]을 뽑아들었다. 이제 내 무기는 더 이상 목검이 아니다.

사실, 내가 진짜로 시험해 보고 싶은 건 8레벨의 힘이 아니라 이 검이다. 생긴 게 너무 멋있어서 빨리 써보고 싶었거든.

간지가 철철 흐르는 장검을 들고, 케륵거리는 고블린에게 힘차게 달려들었다.

"으럅!"

-퍽!

검을 쓰는 법을 아는 것도 아니고, 아직 익힌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벤다기보다는 도끼로 찍는 감각에 가까웠다.

힘차게 휘두른 검은 빨간 이펙트와 함께 고블린의 쇄골을 가르고 깊이 박혔다. 생각한 것보다 화끈하게 꽂혀서 좀 놀랐다.

-케에엑...

깊숙히 꽂힌 일격이 그대로 치명상이었는지, 고블린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빛으로 화했다.

아까 그 빨간 이펙트는 아마 크리티컬일거다. 급소를 맞추면 추가 데미지가 들어가는 시스템.

하지만 크리티컬이 박혔다고 해도 한방 컷이라니, 역시 레벨과 아이템의 힘은 대단하다.

"크으...이거지."

뭐라고 해야 하나, 손맛이 장난이 아니다. 솔직히 내심 잘 싸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징그러운 몬스터를 한 방에 처치한다는 쾌감은 생각보다 짜릿했다. 아드레날린? 엔돌핀? 그런 게 팍팍 도는 느낌?

예전에 봤던 만화에서 압도적인 강함은 시시하다느니 뭐니 하던데, 이게 어떻게 시시할 수가 있지?

"좋아, 폭업 각이다."

나는 그대로 전진해서 노리고 있던 보물상자를 획득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주친 고블린 세 마리를 사냥했다.

한번에 세 마리를 상대하게 됐지만, 고블린의 몽둥이 공격은 내 방어구에 막혀 HP를 거의 깎지 못했다.

고작해야 1데미지에서 2데미지, 시스템의 보호 기능이 적용되니 솜뭉치에 맞은 느낌이었다.

"으랴압!"

완전히 양민 학살, 나는 압도적인 강함의 짜릿함을 느끼며 하루 종일 미궁을 누볐다.

**

첫 번째 미궁 탐험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다른 도전자들은 하나만 먹어도 대박이라는 중형 보물상자만 혼자서 6개를 먹었다.

오고 가며 쓰러트린 고블린의 숫자도 상당해서 레벨도 쭉쭉 올랐고, 전리품을 상점에 팔고 나니 골드가 어마어마하게 모였다.

이미 1일차에 다른 뉴비들이 열흘은 뺑뺑이를 돌아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골드를 모았지만, 오늘은 아예 자릿수가 달랐다.

거기에 장비 강화용 재료도 말도 안 되게 많이 얻었다. 사냥과 퀘스트로는 거의 2주가량을 태워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내가 아닌 오픈 커뮤니티의 망령들이 설명해 줄 것이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시련의탑 2일차 뉴비 수익 ㅁㅌㅊ?]

(사진)

ㅈㄱㄴ

- 2일차 ㅇㅈㄹ 2달차겠지

- 이새기 어제 그 새긴데 1일차뉴비라고 어그로끌던

- 뭔 시발 2일차에 ㅋㅋㅋ 핵썼음?

- ㄴ 게이는 이게 진짜 게임으로 보이노...

- 비틱질 ㅅㅂ 인맥빨로 지원받아놓고 수익이러고있네 수익은 니가번돈이 수익이고

- ㄴ 근데 글쓴게이 서버가2661인데 누가지원해줌?

- ㄴ 2661은 어느 나라 서버임? 한국은 아닌데

어그로성 다분한 글에 격렬하게 반응해주는 커뮤니티의 망령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내 서버 태그인 #2661을 보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과연 언제쯤 진실을 알아차릴까.

이 독점 체제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그때까지는 이렇게 실컷 즐겨 둘 생각이다.

"크흐, 좋구만."

나는 어제 이용했던 여관을 다시 한번 빌리고, 널찍한 침대에 몸을 내던진 뒤 커뮤니티 눈팅을 이어나갔다.

어제처럼 그냥 시간을 때우려는 건 아니고,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렇다.

[시련의 탑 클래스 종류 정리해준다]

나는 고등급 헌터를 노리고 탑에 체류 중이라는 어떤 랭커의 글을 찾아 열었다.

시련의 탑 도전자는 10레벨부터 클래스를 선택해 전직하고 스킬을 배울 수 있다.

RPG게임에서 많이 나오는 전사, 궁수, 도적,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어떤 클래스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싸우는 방식이 크게 달라진다.

- 서진혁 Lv.14 (무직)

오늘 14레벨을 달성한 나는 이미 일반 클래스의 전직 조건을 모두 만족한 상태.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클래스로 전직할 수는 없다. 나중에 들어오는 도전자들과 파티를 짜야 할 테니까.

아니면, 아예 유니크나 에픽 클래스를 바라보고 무직 상태로 남는다는 선택지도 있긴 하다.

"음...모르겠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새벽이 늦을 때까지도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른 도전자가 들어오거나 진행이 막히기 전까지 전직을 보류하기로 하고, 늦은 잠에 들었다.

[시련의 탑#2661 (1/1)]

그리고, 다음 날에도 다른 도전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4. 강화

오늘도 늘어지게 자다가 평소처럼 오후에 일어났다.

[시련의 탑#2661 (1/1)]

그래도 사흘 차쯤 되면 한 명은 들어올 줄 알았는데, 오늘도 탑에는 나 혼자다.

아직까진 딱히 파티가 필요한 일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괜찮지만, 뉴비는 원래 잘 안 오는 편인가.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다른 서버는 뉴비가 얼마나 들어오는지 찾아보았다. 아무래도 서버마다 편차가 심한 것 같다.

많이 들어올때는 하루에 백 명이 넘는 뉴비가 던져졌던 적도 있다고 하는데, 안 들어올 때는 거의 한 달간 소식이 없었다고도 한다.

우리 나라는 탑의 숫자에 비해 인구수가 많은 편이라, 그런 공백기는 잘 없었다는 모양인데.

사흘쯤 아무도 안 들어오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때가 되면 어련히 들어오겠지.

"그럼 오늘은...일단 강화부터."

나는 여관에서 200G짜리 아침 식사를 주문해 끼니를 때운 뒤, 마을의 대장장이를 찾아갔다.

시련의 탑은 전체적으로 RPG 게임과 비슷한 구조다. 재료를 써서 무기와 방어구를 강화하는 시스템도 게임과 비슷하다.

[강철 직검]

공격력 + 35 (참격)

치명타 피해 : x 2.0

내구도 200/20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5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강철 직검]의 스탯이다. 상점제 무기인 만큼 착용 제한은 따로 없다.

공격력은 무기의 기본적인 위력을 나타내고, 그 옆의 (참격)이라는 표시는 무기의 공격 타입을 나타낸다.

참격 타입은 베기 공격을 해야만 공격력이 온전히 적용된다는 의미다, 이게 검이 아니라 망치였으면 (타격)이라고 되어 있었겠지.

이런 공격 타입은 종류에 따라 부가 효과도 달리는데, 참격 타입은 확률적으로 출혈 피해를 입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의 치명타 피해는, 어제 고블린을 잡을 때처럼 크리티컬이 터졌을 때 데미지가 증폭되는 배율을 나타낸다.

2.0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대충 두 배가 들어간다는 뜻이겠지만, 오픈 커뮤니티에서는 표기 수치를 너무 믿으면 안 된다고 한다.

같은 치명타도 어떤 부위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나. 물론 수치가 높으면 무조건 더 좋은 건 맞다.

내구도는 굳이 설명할 것 없겠지. 제로가 되면 강철이고 미스릴이고 평등하게 뚝 부러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치가 바로 맨 밑의 강화 시행 가능 횟수.

모든 무기는 이 수치가 허용하는 횟수만큼만 무기를 강화할 수 있다.

"어서 옵쇼~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대사를 치는 대장장이에게 다가가 [강철 직검]을 내밀었다.

상점제 무기인 [강철 직검]의 강화 시행 가능 횟수는 5회, 실패해도 횟수는 깎이니까 곧이곧대로 5강을 하긴 쉽지 않다.

기본 강화 성공 확률은 딱 50%니까, 5번을 모두 성공할 확률은 고작 3% 남짓. 나는 살면서 이런 확률을 뚫어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괜찮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어제 모아둔 어마어마한 양의 강화재료가 있으니까.

강화 시행 시에 재료를 추가로 사용하면 성공 확률도 그에 따라서 증가한다. 재료를 상한치까지 집어넣었을 때의 확률은 90%.

어지간히 운이 나쁜 게 아니라면 무조건 4회 이상 성공한다. 나는 재료를 투입하고 강화 버튼을 눌렀다.

옵션은 당연히 공격력을 높여주는 [예리]로 선택, 그리고 결과는 당연히...

[+5 강철 직검]

공격력 + 65 (참격)

치명타 피해 : x 2.0

내구도 200/20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0회

...깔끔한 5강, 상점제 무기인데도 어지간한 보스 드랍 아이템 이상의 성능이 되었다.

이러고도 아직 강화 재료는 넘치게 남아있다. 나는 곧바로 방어구들도 모두 최대 횟수까지 강화해주었다.

서진혁 Lv.14 (무직)

HP : 260/260

MP : 175/175

근력 : 20 (14+6)

민첩 : 16 (14+2)

내구 : 20 (14+6)

지능 : 14

장비 강화만으로 스탯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스탯창에 표시되지 않는 공격력까지 합하면 내 실질적인 레벨은 20 이상.

당연히 사흘 차에 달성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나는 장비창과 스탯창을 캡쳐해 바로 오픈 커뮤니티에 올렸다.

"흐, 난리 났네."

커뮤니티 망령들의 격렬한 반응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하지만 아직 내 사흘차는 시작도 안 했다는 사실.

강화까지 마쳤으니, 이제 다시 미궁에서 레벨을 올려야겠지?

**

전직하지 않아서 스킬 같은 건 하나도 없지만, 미궁 사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제만 해도 일반 고블린들을 상대로 양민 학살이 가능했으니, 오늘은 고블린 병사와 고블린 십인대장 같은 상위 몹을 상대해 봤다.

상위 몹답게 움직임부터 일반 고블린들과는 많이 달랐지만, 움직임이 빠르고 날렵해서 뭐 어쩌란 건가.

"으랴압!"

-촤악!

예리 5강이 붙은 [강철 직검]이 한번 휘둘러지자, 고블린 병사 한 마리의 목이 뎅겅 날아갔다.

후방에 있던 고블린 병사 두 마리가 케륵거리며 창을 내질렀지만, 내가 앞으로 내세운 방패-[세계의 토끼도감]에 가볍게 막혔다.

사실 굳이 방패를 내세울 필요는 없었다. 방어구와 방패의 옵션은 상시 적용되고 있으니까.

무기 공격력이 강화를 통해 두 배 이상 오른 것처럼, 방어구를 부위별로 강화해준 지금 내 방어력은 기존의 네 배.

-퍽!

병사들의 뒤에 서 있던 고블린 십인대장이 총알처럼 달려나와 도끼를 휘둘렀지만, 그냥 베개에 맞은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뭐해, 덤벼봐!"

나는 고블린들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몸통박치기 한번에 고블린 두 마리가 거꾸러진다.

그대로 쓰러진 고블린들을 검으로 팍팍 내리치니, 곧바로 숨통이 끊어지며 경험치가 들어온다.

고블린 십인대장은 겉으로 보면 일반 고블린과 똑같이 생겼지만, 전투 능력은 훨씬 높은 탓에 뉴비들의 천적으로 불린다고 한다.

뭣 모르는 1층 뉴비 도전자들의 사망 원인 과반수가 이 녀석이라고 할 정도니, 정말로 위험한 몬스터겠지만.

"좆밥새끼!"

고작 사흘 차 뉴비인 나는 그런 십인대장을 비웃어주며 처치하고 있었다. 압도적이다.

이게 다 2661탑의 자원을 나 혼자 독점할 수 있었던 덕이다.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에는 헌터로서도 흙수저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나 꿈꾸던 완벽한 금수저의 위치를 얻었다.

아, 이게 인생 역전이지.

**

오늘도 미궁 사냥은 달달했다.

레벨업도 레벨업이지만 오늘은 보물상자를 특히 더 많이 먹었다. 중형 상자만 무려 8개.

거기에 대형 상자도 2개를 먹었다. 미궁의 대형 보물상자는 다른 서버의 랭커들도 거의 못 먹어봤다던데, 나는 그걸 벌써 두 개나 해치운 거다.

대형 상자에서 나온 아이템은 이미 넘쳐나는 강화 재료와 대량의 골드, 그리고 고유 옵션이 붙은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흡혈마귀의 반지]

방어력 +5

지능 + 2

적 처치시 20% 확률로 HP의 5% 회복.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2회

1층에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반지 장신구, 그것도 스탯과 고유 옵션이 달린 강화 가능 반지다.

방어력 외의 기본 스탯이 붙어 있는 반지는 많지 않고, 강화 횟수가 붙어 있는 반지도 얼마 없다.

거기다가 이런 고유 옵션이 달린 장신구는 반지가 아니라도 많이 없다. 엄청난 레어 아이템이다.

"캬...이건 진짜 대박이다."

당장은 방법이 없지만, 나중에 랭커나 고등급 헌터를 지망하는 도전자들에게 팔 수 있으면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이 밖에도 상점제 아이템보다 좋은 방어구도 몇 개 얻었고, 퀘스트도 몇 개 클리어해서 짭짤한 보상을 얻었다.

하나하나가 다른 탑의 뉴비들이라면 환장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탑 하나를 독점하고 있는 내겐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다.

"이게 인생이지."

시련의 탑에 들어온 이후, 매 순간순간이 도파민의 절정이다.

별볼일없는 흙수저 인생을 마냥 이어나갔으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자극과 쾌감에 중독될 것만 같다.

그리고 이 도파민의 종착지는 역시, 오픈 커뮤니티에 시전하는 비틱질이지.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시련의탑 3일차 뉴비 스펙 ㅁㅌㅊ?]

(사진)

나는 어제와 같이 가장 비싼 숙소를 빌리고, 곧장 침대에 드러누워 커뮤질을 시작했다.

어떻게 3일 만에 이 스펙이 될 수 있느냐며, 이제는 조작이라고까지 주장하는 댓글들을 보는 건 정말 즐거웠다.

그렇게 나는 또 새벽까지 커뮤니티에 열중하다 잠들었고, 다음 날에도 오후가 다 되어서 일어났다.

[시련의 탑#2661 (1/1)]

오늘도 마찬가지로 다른 도전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탑에는 나 혼자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마냥 즐겁기만 했던 것은 이날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 미친 탑에 혼자 떨어진 그날에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그래, 내 인생은 좆망했다.

#5. 도파민 부족

평소처럼 오후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곧바로 사냥에 나섰다.

[도전자여, 시련의 탑이 그대를 부르고 있습니다.]

미궁에 들어오면 항상 떠오르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오픈 커뮤니티에 망라된 지도를 보며 곧바로 전진했다.

어제의 사냥으로 18레벨에 도달하고, 장비를 한 번 교체하며 더욱 강해진 내게 고블린들은 모조리 잡몹에 불과했다.

일반 고블린은 물론이요, 그보다 강한 고블린 십인대장 같은 몬스터도 죄다 한 방 컷.

엘리트 몬스터인 고블린 백인대장 정도만이 내 공격을 두 대까지 버틸 수 있었다.

물론 고블린 백인대장의 공격은 나한테 생채기 하나도 못 냈고.

그렇게 압도적인 힘으로 몬스터를 처치해 가며 레벨을 올리던 중,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서진혁 Lv.20 (무직)

HP : 320/320

MP : 220/220

근력 : 28 (20+8)

민첩 : 22 (20+2)

내구 : 26 (20+6)

지능 : 22 (20+2)

이게 지금의 내 스펙이다. 사냥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20레벨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20레벨을 달성한 이후로 꽤 많은 고블린을 사냥했는데도 레벨이 오를 생각을 하질 않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1층에서는 20레벨 이상으로 올릴 수 없다거나 그런 건가?

나는 곧바로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서 레벨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렙차 경험치 반감 배율표(연구중)]

"아, 시발."

내가 생각했던게 맞았다. 1층에서는 이 이상 레벨을 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란다.

몬스터와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획득하는 경험치 양이 반감되는 시스템이 있었던 거다.

물론 반감될 뿐이지 아예 못 얻는 건 아니기에, 단순하게 엄청난 양의 몬스터를 잡으면 결국 오르기는 할 거다.

하지만 효율은 엄청 나쁘겠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스펙업에 제동이 걸렸다. 하여튼 생각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다.

물론 이건 내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탓에 생긴 일이라,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스펙업에 제동이 걸린 것도 아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도전자들은 해봐야 10레벨 정도밖에 안 될거다. 하지만 나는 아이템 빨까지 합하면 실질적으론 거의 30레벨.

애초에 스펙업 수단이 레벨업만 있는 것도 아니고, 템빨이건 뭐건 스탯만 높일 수 있으면 그게 스펙업이니까.

그리고, 탑을 통째로 독점하고 있는 나는 보물상자 파밍에만 열중해도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는...닥치고 보물상자 파밍인가."

오픈 커뮤니티를 다시 열어, 보물상자 위치를 망라한 지도를 펼쳤다.

그동안 꽤 많은 보물상자를 챙겼지만, 아직도 상당한 양의 보물이 미궁 지역에 남아 있다.

1세대 헌터들이 습득해 이곳에 기록되지 않은 보물상자도 분명 있을 거다. 그것까지 합하면 아직 얻어갈 건 한참 남았다.

앞으로는 사냥 말고 퀘스트와 상자 파밍에 집중해 보자.

**

하루 종일 보물상자 파밍에 집중한 결과는 쏠쏠했다.

골드와 재료 아이템이 나오는 소형 상자는 11개, 대량의 골드와 아이템이 나오는 중형 상자는 6개를 먹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형 상자는 오늘도 2개를 먹었는데, 누가 대형 아니랄까봐 보상이 아주 쏠쏠했다.

[왕국 기사의 직검]

공격력 + 52 (참격)

치명타 피해 : x 1.5

내구도 250/25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7회

내 주무기인 [강철 직검]을 훨씬 웃도는 레어 무기가 나왔다.

강화 시행 가능 횟수가 무려 두 번이나 더 많으며, 기본 공격력도 훨씬 우월하다.

치명타 피해 배수는 조금 낮게 잡혀있지만, 강화 횟수가 더 많으니 [예리]강화를 붙여주면 될 일이다.

오픈 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유니크 무기를 제외하면 1층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제일 좋은 무기라고 한다.

레벨은 20에서 멈춰버렸지만, 스펙 증가량을 생각하면 5레벨은 더 오른 셈이다.

당장 상태창에 나오는 스탯 수치가 달라지지 않아 만족감은 좀 덜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성과지.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님들 저 뉴비인데 이거 좋은건가요?]

(사진)

보물상자 하나 먹었더니 1트에나오던데 쓸만한가요?

- ㄴㄴ좆구데기니까 걍 상점에파셈

- 1층에서 먹은거임?? 어디섭인데 1층에 상자가 남아있음?

- 하 시발 2661이 ㅅㄲ비틱질은 알아줘야함 ㅋㅋㅋ

- ㅇㄱㅈㅉㅇㅇ?

- 왕기검이면 1층에선 제일 좋은 직검입니다~ 공2상옵이니까 강화 조금만 하시면 4층까진 쓰시겠네요.

- ㄴ 저새끼 몰라서 물어보는거 아님

오늘도 오픈 커뮤니티에 시원하게 기만질을 갈겨주고,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뒤로한 채 숙소를 잡았다.

레벨업도 막혔으니 슬슬 다른 도전자가 들어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직도 2661탑 채팅 채널의 숫자는 1/1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평소처럼 새벽까지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다 잠에 들었다.

**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대장장이를 찾아가 무기를 새로 강화했다.

이번에도 소재를 최대치로 넣었지만 운이 좀 나빴는지, 결과는 실패 한 번으로 6강에 그쳤다.

그래도 기존에 쓰던 5강짜리 강철 직검보다 훨씬 좋으니 불만은 갖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강철 직검으로도 고블린들은 거의 다 한방이었다 보니, 당장 급하게 공격력을 올릴 필요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강화가 끝난 후에는 여관에서 아침 식사 정식을 먹어치우고, 곧바로 미궁으로 향했다.

중형 보물상자는 스폰되는 횟수가 제한되어있고, 대형 보물상자는 누군가 한 번 먹으면 다시는 스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먹을 수 있는 보물상자의 갯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늘은 미궁의 꽤 깊숙한 지역까지 들어가 봤지만, 끝까지 대형 상자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

결국 이날은 무기 강화 외에는 별다른 성장을 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시련의 탑#2661 (1/1)]

그리고 다음 날, 여전히 새 도전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똑같이 아침을 먹고 미궁으로 향했다.

보물상자를 찾아다니다가 고블린이 대량으로 스폰되는 장소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대충 칼질 몇 번을 하니 레벨이 하나 올랐다.

무려 이틀만의 레벨업이었다. 이걸로 21레벨이 되었지만, 스탯 상승량은 당연히 쥐꼬리만 했다.

그리고 대형 보물상자 하나를 더 먹었는데, 나온 아이템은 [미스릴 완드]였다. 마법사 클래스가 쓰는 무기다.

1층에서 나온 아이템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성능을 갖고 있긴 했지만, 내가 마법사로 전직하지 않는 한은 아무 쓸모가 없다.

탑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면 경매에 부쳐서 팔 수라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내겐 그냥 튼튼한 쇠막대기일 뿐이다.

그리고 또 다음 날, 부지런히 보물상자 파밍에 열중했지만 결과는 나빴다.

대형 상자는 이번에도 못 먹었고, 중형에서 장비 아이템이 몇 개 나왔지만 이미 모두 풀강으로 장착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상자가 잘 발견되지 않는게 짜증나서 화풀이 겸 사냥도 해 봤지만, 레벨은 오르지 않았다.

[시련의 탑#2661 (1/1)]

새 도전자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나 혼자다.

그리고 다음날, 다다음날, 다다다음날에도 대단한 성과는 없었다. 골드나 강화 재화를 많이 벌긴 했는데, 결국 그뿐이다.

그로부터 며칠쯤 지나, 나는 22레벨을 찍었다. 매일같이 반복한 일일 퀘스트의 성과였다.

그렇게, 내가 시련의 탑에 들어온 뒤 2주째가 되었을 때.

"씨발, 못 해먹겠네."

내 스펙은 완전히 정체되어 버렸다.

**

소설이나 만화 같은 걸 보면 한 번쯤 그런 장면이 꼭 나온다.

주인공은 이렇게 매일매일 특훈을 해서 엄청나게 세졌습니다, 하면서 정작 어떻게 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 장면.

쉬지 않고 습관적으로 매일매일 무언가를 한다는 건 더럽게 어려운 일인데도, 별 게 아니라는 듯 과정은 그냥 흘려보내 버린다.

좀 묻고 싶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매일 지루한 짓거리를 견뎌내고 강해질 수 있었는지.

서진혁 Lv.22 (무직)

HP : 340/340

MP : 230/230

근력 : 30 (22+8)

민첩 : 24 (22+2)

내구 : 28 (22+6)

지능 : 24 (22+2)

22레벨을 찍은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레벨이 오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미궁의 보물 상자란 보물 상자는 거의 다 뒤진 것 같은데도, 획득하는 아이템은 전부 중복뿐이었다.

사냥도 파밍도 전부 눈에 보이는 리턴이 없는 반복작업으로 전락했다. 이제 극적으로 강해질 방법은 전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전직은 안 된다. 지금 노말 클래스로 전직해버리면 나중에 고층에서 유니크나 에픽 클래스로 전직할 때 손해가 되니까.

물론 내가 그런 히든피스를 발견한다는 보장은 없긴 하지만, 아무튼 아까워서 안 된다.

그리고 전직으로 강해지면 그다음은 또 어쩌라고, 결국 2층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스펙업이 막히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이대로 뻘짓 수준의 노가다를 반복해서 꾸역꾸역 레벨을 올리거나.

혼자서 보스몹을 클리어하고 2층으로 올라가거나.

"여기구만."

내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고, 그렇게 나는 굳게 닫힌 1층 보스룸 앞에 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등신 같은 선택이었다.

#6. 보스전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보스룸 안의 전경이 드러났다.

대충 보기엔 여태껏 지나온 미궁 지역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딱 하나의 차이점으로 '넓다'는 것이 있었다.

오픈 커뮤니티의 정보글에서 볼 때는 이렇게까지 큰 줄 몰랐는데, 내가 전역한 부대의 연병장보다 더 넓은 것 같다.

-화륵, 화륵, 화륵.

한 발짝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어둠에 잠겼던 보스룸의 좌우 벽에서 횃불이 타오르며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악랄함 외에는 모든 것이 덜떨어진 소귀 사이에서도, 지배자의 풍모를 갖춘 군주는 태어나기 마련.]

메시지는 곧 사라지고, 광원이 생겨나며 한결 밝아진 보스룸 중앙에 위치한 옥좌에서 그것이 몸을 일으켰다.

"그아아아아아아-!!"

2미터를 훌쩍 넘기는 신장, 우락부락한 근육이 가득 들어찬 체형, 삐쭉 솟아있는 거대한 송곳니.

이렇게 설명하면 오크라도 나타난 것 같지만, 저 근육덩어리 괴물도 일단은 고블린이다.

[BOSS- 고블린 로드 그락사르]

보스 몬스터의 머리 위에 나타난 콘솔과 이름표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여태껏 잡아온 고블린보다 세 배는 커다랗다. 아마 나란히 놓고 보면 동네 초등학생이랑 최홍만 수준으로 차이가 날 거다.

덩치 외의 특징으로는 뼈로 만든 어깨장식과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고, 무기로 중식도를 연상시키는 형태의 뼈 대검 같은걸 들고 있다는 것.

보스룸에 들어오기 전에 간략하게 속독한 공략글에 따르면, 처음에는 저 뼈 대검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뼈 도끼로 무장을 바꾼다고 했다.

매우 흉악해 보이는 무장이지만, 내 높은 방어력을 생각하면 아마 막을 수 있을거다.

-쿵! 쿵! 쿵!

고블린 로드가 뼈 대검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보스룸의 양 옆에 위치한 작은 통로에서 갑옷을 입은 고블린들이 튀어나왔다.

로드가 소환하는 엘리트 몬스터, 고블린 친위대였다.

패턴은 고블린 백인대장과 비슷하지만 기본 스펙과 장비가 우월하다고 들었다. 나타나는 숫자는 세 마리 고정.

들고 나오는 무기는 완전 랜덤이라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창병 둘에 석궁병 하나 조합이다.

공략에 따르면 방해되는 친위대를 먼저 쓰러트리고, 그 다음에 보스를 일점사하는게 정석이라고 한다.

"간다!"

나는 힘차게 소리치며, 우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석궁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22나 되는 민첩 스탯 덕분에, 내 달리기 속도는 우사인볼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아지고, 석궁병이 첫 번째 화살을 쏘는 것보다 빠르게 내 검이 휘둘러졌다.

-까앙!

윽, 갑옷을 그대로 내리쳤더니 손이 저릿하다. 내 공격력이라면 갑옷채로 부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스탯이 높아도 참격 무기로 방어구 파괴를 노리는 건 무리였나보다.

나는 재빨리 반대쪽 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팔에 묶여있는 방패, [세계의 토끼도감]으로 고블린의 머리를 후려쳤다.

머리를 맞은 고블린은 그대로 땅에 엎어졌다. 갑옷 틈새를 노리고 힘차게 검을 찔러넣었다.

-푹!

뭔가 손맛이 다르다. 원래라면 빨간 크리티컬 이펙트가 떠야 하는데, 칼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

꼴에 엘리트 몹이라고 방어력이 높은 편인 것 같다. 고블린 백인대장보다 스펙이 높다더니 진짠가보다.

나는 검을 한번 더 들어올려서 다시 같은 자리를 내려찍었다.

-푹!

크게 터지는 붉은 이펙트, 이번에는 크리티컬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엎어져 있던 고블린이 내 발목을 꽉 붙잡았다. 크리티컬까지 터졌는데 살아있다니.

나는 다시 검을 치켜들어 제대로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으나, 철컥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다른 고블린 두 마리가 달려들어왔다.

항상 강제로 솔플을 하다 보니, 이런 상황에는 익숙하다. 창을 들고 맨 앞에서 달려오는 고블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까앙!

힘 스탯의 차이가 압도적인지라, 창을 든 고블린은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창을 내밀고 달려드는 다른 고블린이 하나 더. 이번에는 대충 방패를 내밀어 공격을 막았다.

그런데, 평소에 고블린의 공격을 막을 때랑은 느낌이 좀 달랐다.

"어?"

농구공 정도의 물체로 맞은 감각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기울어지는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내 발목을 꽉 붙들고 있는 다른 고블린 때문에 그대로 균형이 무너졌다.

돌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방어력이 높아서 아프진 않았지만, 내 위로 순식간에 고블린이 올라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콱! 콱!

마운트를 잡은 고블린은 창을 짧게 잡고 내 얼굴을 찌르려 들었다.

방패를 들어서 쉽게 막을 수 있었지만, 자꾸 팔에 충격이 왔다. 아까 넘어진 이유를 알았다.

이 자식이 생각보다 힘이 센 거였다. 그래봤자 고블린이지만.

"꺼져!"

누운 자세에서 방패를 휘둘러 마운트를 잡은 고블린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켜 발로 걷어차버렸다.

그러고 보니 순식간에 고블린 세마리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아까 그 석궁병은 피를 흘리면서도 살아 있었다.

피통이 얼마나 많길래 아직도 살아 있는거야. 저 자식은.

-쿵! 쿵! 쿵!

그때, 유별나게 힘차고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 마리 고블린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고블린 로드가 대검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속도가, 뭐가 저렇게 빨라- 라고 생각한 순간.

-콰직!

"억."

거대한 대검이 내 상반신을 찍어버렸다.

**

시야가 천장을 향한다. 양 발이 모두 땅에 닿질 않는다.

나는 잠시뿐이지만 날고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딱딱한 땅이 나를 반겨주었다.

-쿵!

삐이이- 하는 이명이 귀에서 들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맞아서 날아온 건가?

역시 보스는 보스라 이건가, 힘이 장난 아니게 세다. 체감상 몇 미터는 족히 날아온 것 같은데.

파티원이 없어서 보스 어그로가 그대로 끌린 거구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어쨌든 일어나자. 이러다가 또 둘러싸이겠어.

"억, 허억...!"

어라, 뭐야. 숨이 안, 뭐지, 왜 이러지.

천장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머리가 어지럽다. 뭐야, 진짜로,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나를 깨운 것은 시야에 들어온 커다란 그림자였다.

머리에 빠직- 하고 불꽃이 튀기는 감각과 함께 나는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건, 대검을 들고 높이 뛰어오른 고블린 로드였다.

어, 뛰어올라?

-콰직!

"꺼헉!"

무시무시한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그작- 이어지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답답해졌다.

방어구의 흉갑 부분이 우그러지는 소리였다. 커다란 뼈 대검에 두 번이나 정통으로 얻어맞은 영향이었다.

그리고 몸 안쪽이 쿡쿡 찔리는 감각, 갈비뼈나 그런 게 부러졌나? 숨을 들이쉬기만 해도 아프, 아파, 미친.

"끄으아아아아악!!"

가슴, 어깨,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감각이 이상하다. 저릿거린다. 그리고, 이건 뭐야, 피?

고개를 돌려 보니 어디서 흐르기 시작한 것인지 모를 피가 보였다. 고블린의 것은 아니다. 그럼, 내 거잖아.

나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이제야 상황이 제대로 보인다.

"그르륵!"

흉측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고블린 로드, 그 뒤로 따라붙는 고블린 두 마리.

대검에 찍혀서 형편없이 망가진 [+5 강철 플레이트 상의], 그 사이로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는게 보였다.

"으, 으어, 어억..."

HP : 145/340

가슴을 찌르는 통증 속에서 상태창을 열어 보니, HP가 절반이 넘게 사라져 있었다.

내 방어력보다 고블린 로드의 공격력이 월등히 높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이건 안 된다. 보스를 너무 우습게 봤다. 도망쳐야 한다.

"끕, 흐읍."

박살이 난 흉갑 부위를 부여잡고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흉측하게 웃고 있던 고블린 로드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 조금 전의 끔찍한 통증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묵직한 발소리.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보스룸의 입구, 지금은 출구, 시발, 뭐가 저렇게 멀어.

쓸데없이 넓은 보스룸을 향해 속으로 불만을 토하며 무작정 달렸다. 내 민첩 스탯은 높다. 그러니까, 충분히.

-우당탕!

시발, 발이 꼬였다. 넘어졌다. 아프지는 않은데, 안 돼, 죽는다. 시발, 시발!

생존본능을 따라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마찬가지로 본능에 따라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고블린 로드가 대검을 뒤로 당기고 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보였다. 기억에 있는 자세다.

그러니까, 오픈 커뮤니티의 공략글에서 봤던 것 같은데. 저게 뭐더라, 아, 그거.

횡베기 패턴.

-후웅!

뼈 대검이 크게 옆으로 휘둘러지고, 나는 급히 방패와 팔을 들어올렸다. 틀린 판단이었다.

고블린 로드의 횡베기가 '맞으면 안 되는' 패턴이라는 것 까지는 바로 떠올리지 못한 탓이었다.

-쾅!

예전에, 언제더라, 중학생 때 쯤...그래, 중학교 2학년때쯤이었다. PC방에 가다가 차에 치였던 적이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나서 잊고 있었는데, 그게 딱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부러지고, 깨지고.

"어, 걱, 컥!"

방패 위로 횡베기에 맞아 날아간 나는 물수제비처럼 땅바닥 위에서 두 번을 튕겼다. 갑옷 몇 부위가 부서져 떨어져나갔다.

아프다. 죽도록 아프다. 사람은 크게 다치면 아드레날린인가 뭔가 때문에 오히려 안 아프다고 들었는데, 존나 아프다.

이게 어디서 들은 얘기더라, 쇼츠, 씨발, 개 좆같은 쇼츠, 죄다 구라였어.

"욱, 후욱…후욱…"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나 다쳤는데 신기하게 몸은 움직여진다.

아, HP가 다 깎이기 전까지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래서 움직여지는건가.

아니, 그럼 이게 치명상이 아니라는 건가, 아닌데, 존나 치명적인데. 지랄하고 있네.

-쿵! 쿵! 쿵!

출구를 향해 움직이던 중 다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땅바닥을 굴렀다.

"씨! 빨!"

고블린 로드이 대검이 1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찍어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저거에 그대로 맞았으면, 그러면.

아니, 이럴 때가 아니잖아. 뛰어!

출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달렸다. 금세 출구 코앞까지 왔다.

-푹!

"아악!"

갑옷이 부서져 드러났던 발목에 뭔가 박혔다. 화살, 화살이었다.

어느새 저 멀리에 고블린 친위대 다섯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섯? 왜 다섯, 그리고 분명 석궁병은 해치웠, 아니, 다시 나온 거구나.

그 사이에 친위대 소환 패턴의 쿨타임이 돌아온 거다. 그 중에 석궁병이 있었던거고.

"아으으…으윽!"

나는 화살을 맞은 그대로 출구, 내가 들어왔던 보스룸 입구의 문을 있는 힘껏 밀어서 열었다.

보스룸 바깥으로 나자빠지며 나가자, 나를 추격하던 고블린 로드와 친위대는 걸음을 돌려 돌아갔다.

HP : 22/340

HP는 최소 수치만을 남기고 있었다.

죽기 직전이었다.

"윽, 욱, 우욱..."

땅바닥에 버러지처럼 엎어진 내 뺨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7. 썩은 근성

크게 다치면 아드레날린인가 뭔가 때문에 안 아프다는 말은 진짜였다.

보스룸에서 나와 땅바닥에 엎어지고 나니 뒤늦게 발목이 아파져 왔다. 아니, 원래도 아팠는데 이젠 존나 아프다.

무슨 달군 쇠막대를 발목에 꽂아놓은 것 같다. 다친 부분이 타는 것 같다. 속성 공격인가?

"억, 흐윽, 시바, 알..."

열심히 버르적거리며 발목을 살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냥 화살에 맞으면 원래 이렇게 아픈 것 같다.

타오르는 것처럼 아파오던 통증은 시간이 지나자 쥐어짜이는 듯한 통증으로 바뀌었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것 같다.

화살, 화살을 뽑아야 하는데, 이거 어떻게 뽑아야 하지? 그냥 잡아당기면 뽑히나?

-꾸득.

가쁘게 숨을 내쉬며 화살을 부여잡았으나, 화살촉이 틀어지며 짜릿한 고통이 뇌에 닥쳤다.

"아아악!"

이런 병신새끼, 딱 봐도 그냥 잡아 뽑는다고 뽑히는 게 아니잖아! 화살촉을 일단 어떻게든 해야 할 거 아니야!

별 상관없는 팔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오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맞다, 나 이쪽도 다쳤지. 갈비가 부러졌나? 여기에 갈비 말고 다른 뼈가 있던가?

HP : 19/340

멍청한 생각을 하는 중, HP 게이지가 조금씩 줄어드는 게 보였다. 출혈 데미지다. 이러고 있다간 좆된다.

"후, 후우…씨발, 후우..."

힘겹게 심호흡하며 검을 쥐었다. 발목에 푹 박힌 화살의 촉 부분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예리 6강의 칼날은 화살촉을 쉽게 잘라냈다.

이제 화살대를 뽑아내야 하는데, 씨발, 이번에는 뽑히겠지. 제발 한 번에 뽑혀라.

높은 힘 스탯 덕분인지, 깃 부분을 잡고 힘껏 당기자 화살은 매끄럽게 주르륵- 하고 뽑혀 나왔다. 그리고 존나게 아팠다.

"으, 끅!"

화살대에 전기라도 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처 부위를 타고 쭈욱 뽑혀 나가는 순간 전신이 경련했다.

턱 끝까지, 아니, 턱은 왜 떨리는 거야. 씨발, 씨바알, 씨발. 그리고 피, 피는 시발 왜 안 멈춰.

HP : 17/340

HP가 계속해서 떨어진다. 조금 전까지 번갯불이 번쩍이던 시야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잠이 온다.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데 잠이 올 리가 없다. 이건 그거다, 그, 죽으려는 거다.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출혈을 멈추지 못하면 죽는다. 나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발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또 눈앞에 빛이 튀었다.

"끅, 으, 으아...!"

제발 멈춰, 그만 나와, 죽기 싫어, 엄마, 씨발, 왜 나는 이딴 병신 흙수저 인생으로 살다가 이따위로 뒤져야, 좀 멈추라고 씨발!

발목을 아무리 움켜쥐어도 틈새로 자꾸만 피가 샌다. 상태창에 표시되는 HP가 점점 줄어들며 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이제 관통된 발목이 아니라 상태창을 붙잡고 있었다. 제발 이 염병할 HP가 줄어드는 것 좀 멈춰달라고.

-띠리링.

그러다, 상태창을 조작하던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인벤토리 창이 열렸다.

[빨간 포션]

사용 시, 소량의 HP를 천천히 회복합니다.

상처 부위에 뿌리면 회복이 빨라집니다.

나는 그제야 포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씨발, 병신새끼..."

**

시련의 탑은 게임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진짜 게임은 아니다.

포션을 마신다고 HP가 단번에 차오르지 않기 때문에, 오픈 커뮤니티의 도전자들은 포션을 너무 믿지 말라고 한다.

거기에 HP 게이지가 다 떨어져도 죽는 것은 아니고, HP가 빵빵하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니까, 상황에 따라 잘 판단하라고.

나는 그걸 못 했다. 병신같이 포션을 한가득 쌓아놓고도 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패닉에 빠지면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한다던데, 설마 나도 그렇게 될 줄이야. 그런 건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다.

"아, 썅, 쪽팔려..."

포션 세 병을 단숨에 들이키고, 화살에 맞은 부위에 한 병을 더 들이부었더니, 몸은 다시 쌩쌩해졌다.

아직도 그 뜨거운 건지 뭔지 모를 고통이 느껴지는 듯하지만,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나면 환상이었다는걸 깨닫는다.

-끼익, 깡!

고블린 로드의 공격에 걸레짝이 되어버린 갑옷 상의를 떼어냈다. 이건 이제 못 쓴다.

지금 시점에서 맞출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방어구였는데, 고블린 로드의 공격 몇 번에 쓰레기가 되다니.

방어력 강화만 할 게 아니라 내구도 강화를 해야 했나. 아니, 그러면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른다.

포션 덕분에 치유되긴 했지만, 갑옷채로 가슴뼈가 작살이 났던 것 같다. 그냥 보스의 공격력이 너무 셌다.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여벌 갑옷으로 장비를 교체하고 다시 한번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여전히 보스룸의 문은 바로 앞에 있다. 다시 도전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생각이 들질 않는다.

저건 나 혼자서는 절대로 못 깬다. 이미 이 층에서 얻을만한 건 모두 얻었는데도 뒈질 뻔했다.

내가 솔플 도전자인 이상,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아직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너무 지쳤다.

나는 마을로 돌아와서 갈아입을 옷만 사고, 곧바로 평소에 쓰던 여관으로 직행했다.

갑옷 아래에 받쳐입던 옷이 피범벅이 되었고,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바지에 오줌도 쌌더라. 그럴만했지.

아무튼 쓸데없이 비싼 평상복을 사서 갈아입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버릇처럼 오픈 커뮤니티를 열었다.

[버스 없이 깨는 1층 보스 정석 공략(초보자용).txt]

커뮤니티 공지글에 주르륵 나열되어있는 계층별 보스 공략이 마침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보스룸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훑어본 것도 이거다. 이걸 볼 때까지만 해도 할만할 줄 알았다.

공략글의 대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보스룸에 입장하자마자 탱커가 보스의 어그로를 끌고, 딜러진은 고블린 친위대를 빠르게 컷한다.

처음 소환되는 친위대를 전부 빠르게 처치하면 다음 소환까지는 딜레이가 제법 기니까, 그동안 보스를 점사해서 1페이즈를 넘긴다.

나는 스펙이 높으니까 친위대 세 마리를 빠르게 죽이고 보스를 상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막상 붙어 보니 전혀 아니었다.

혼자였던 나에겐 처음부터 보스의 어그로가 고정으로 박혀 있었고, 고블린 친위대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끈질겼다.

덕분에 순식간에 다굴 상황에 몰렸고, 두 번째 친위대 소환 패턴이 빠르게 돌아온 탓에 마지막에는 아예 6대1이었다.

친위대가 입고 있는 갑옷, 그게 가장 문제다.

다른 고블린이랑 다르게 중갑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데미지를 넣으려면 틈새를 노려 찌르거나 갑옷째로 파괴해야 한다.

전자는 그냥 어렵고, 후자는 둔기 같은 걸로 무기를 바꿔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바꾼다고 될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검색을 통해 1층 보스전 관련 자료를 몇 개 더 찾아봤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클리어 기록이었다.

랭커 버스를 제외한 여러 클리어 기록 중에서, 가장 적은 숫자의 인원으로 격파했던 건 7인 파티였다. 해당 파티원의 평균 레벨은 18 정도.

시기를 보면 이때도 이미 공략은 상당히 확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18레벨가량의 도전자 7명이 필요했다.

22레벨을 찍고 모든 장비를 거의 최고 수치로 맞춘 나는 이 도전자들보다 훨씬 강할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7배씩이나 강하진 않다.

전직을 통해 지금보다 조금 더 강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당장 전직을 해도 스킬 숙련도와 레벨은 그렇게 쉽게 오르지 않고, 혼자서는 기존의 공략법을 참고해 도전할 수도 없다.

"시발, 당연히 못 하지..."

구구절절 이유를 대고는 있지만, 이미 결론은 진작에 내린 상태였다. 그냥 안 된다고.

또 다시 그 끔찍한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오픈 커뮤니티에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써 올렸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뉴비 좆됐다]

(사진)

오늘 솔플로 보스 잡아보려다 뒤질뻔했다 ㅅㅂ

여긴 어느 지역 탑이길래 사람이 아무도 안들어오냐?

다른 도전자 오기 전에는 걍 아무것도 못하는데 ㅋㅋ

- ㅋㅋ 병신 그걸왜 솔플로하노

- ㄴ 파티가 없으니까 그렇지 씨발아

- ㄴ 찐따새끼노 ㅋㅋㅋㅋ 돈내고 버스나 타라 ㅋㅋㅋㅋㅋ

- ㄴ 버스는 있을것같냐?

- ㄴ ? 뭐임 2661은 어디탑임?

- 맨날 비틱글만 올리더니 꼴이좋아 ㅋㅋ

- 채팅 1/1뭐임? 어느나라임?

그렇잖아도 #2661이라는 서버 태그에 의문을 가지던 사람들이 진짜로 혼자냐며 마구 댓글을 달아댔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다. 나는 2661 서버에 대해 궁금해하는 댓글 하나하나에 답을 달아주었다.

지난 며칠간 했던 비틱질 때문일까, 나를 동정하기보다는 탑의 독점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보스전에 막혀 1층에 칩거하게 된 신세라지만, 결국 나중에 다른 도전자들이 들어오면 해결되는 일이니까.

솔직히, 말이 신세 한탄이지 결국 이것도 비틱질이다.

아무튼, 이날도 나는 이렇게 하루 종일 커뮤질을 하다가 밤늦게 잠에 들었다. 어차피 달리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도 다른 도전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르고 흘러서-

[시련의 탑#2661 (1/1)]

-어느새, 반년이 지나있었다.

#8. 학습된 무기력

나는 더 이상 사냥에 나가지 않았다.

미궁에서 보물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퀘스트를 깨지도 않았다.

보스룸에서 꽁지가 빠지게 도망친 이후, 새 도전자가 들어오기만을 바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반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도전자는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련의 탑#2661 (1/1)]

시련의 탑은 기본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지만, 그래도 새로 들어오는 도전자들을 통해 사회의 근황 정도는 들을 수 있다.

오픈 커뮤니티에는 그런 뉴비들이 전해주는 바깥의 소식을 정리한 신문 비슷한 것도 연재되고 있다. 나도 꾸준히 보고 있다.

그 신문의 내용에 따르면, 내가 혼자 갇혀 있는 2661시련의 탑은 경기도 양평군의 촌구석에 솟아난 탑이라고 한다.

정확한 주소도 듣긴 했는데, 나랑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이다. 가본 적은 커녕 들은 적도 없는 곳이다.

초대장을 받은 도전자는 보통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탑에 전송된다고 들었는데, 왜 나는 이런 곳으로 보내진 걸까.

가까운 탑에 전송된다는 법칙에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그렇다던데.

"씨발."

기분이 나빠져 괜히 욕을 뱉었다. 혼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지니, 이제 욕 말고는 소리를 내 말하는 말이 별로 없었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도 백수...아니, 취준생이었다보니 사람과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엄마가 있었으니까.

마을의 NPC들은 기계처럼 정해진 대사만 말하다 보니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대화가 제대로 성립되는 일도 없다.

-터벅, 터벅.

숙소에서 나와 마을의 식당으로 향했다. 음식은 종업원 NPC가 주문을 받자마자 나왔다.

[치즈돈까스 도시락]

경양식당 토끼정의 대표 메뉴, 쭉 늘어나는 치즈가 일품이다.

아주 맛있지만 가격이 조금 비싸다. 주머니 사정 넉넉한 모험가를 위한 특식!

먹으면 허기가 많이 채워진다.

여관의 식사는 매일같이 먹다 보니 질린 지 오래였다. 어차피 골드는 많으니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고 있다.

이 치즈돈까스 도시락은 나보다 더 긴 시간을 탑에 처박혀 지내는 랭커들도 추천하는 음식이라던데, 확실히 먹을만하다.

물론 그 랭커들은 행운 수치 버프 때문에 매일같이 화이트롤만 처먹는 미친 새끼들이긴 하지만.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오늘 아침 ㅁㅌㅊ?]

(사진)

이것도 슬슬 질리는데 다른거 추천좀

- 치돈이 질려? 이새끼 싸이코패스임?

- 이 ㅅㄲ는 1층에만 처박혀있는데 뭔 돈으로 저걸 사먹노

- ㄴ 어 골드 존나많아 써도써도 안줄어 부럽냐?

- ㄴ 겠냐 ㅋㅋ

- ㄴ 씨발좆같은새끼

- 진혁게이야 너도 그냥 화이트롤이나 처먹어라 행운올라가면 뉴비 들어올수도있잖음

- ㄴ 그런다고 들어올거면 ㅅㅂ 진작에 들어왔어 애미뒤진새끼야

- ㄴ 워워 오늘따라 왤케 톡식해

- 얜 글댓합이 왜이럼?? 사냥안하고 커뮤만함?

- ㄴ 진혁이를 모르네 뉴비임?

치즈돈까스 도시락의 사진을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자 또 빠르게 댓글이 달린다.

뻘글이지만 내 글은 언제나 반응이 좋다. 그동안 오픈 커뮤니티에서 랭커 못지않은 네임드가 된 탓이다.

보스전에서의 패배 이후, 나는 매일같이 숙소에 처박혀서 커뮤니티 활동에만 시간을 써 왔다.

지금의 나는 완벽한 커뮤 망령이다.

**

시련의 탑에 들어오기 전에도 나는 매일같이 커뮤질을 해 댔었다.

주로 활동하는 곳은 사회 정치 등의 이슈를 다루는 렉카 계열 유머 커뮤니티였다. 그런 곳에는 소위 말하는 엠생들이 많거든.

서른 넘게 처먹고 종일 커뮤질만 해대는 진짜배기 인생 실패자들을 보며 위안을 얻기도 하고, 흙수저 신세를 한탄하며 사회를 욕하기도 좋은 곳.

익명의 그늘에 숨어 갈 곳 없는 한탄을 내뱉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취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흙수저 출신, 인생 역전 찬스인줄 알았던 초대장은 함정카드, 반 년간의 강제 칩거 생활.

한탄할 거리만이 가득한 좆망 인생이었고, 오픈 커뮤니티의 유저들은 그런 내 한탄을 곧이곧대로 잘 받아주었다.

헌터로서 인생 역전이 예약된 다른 도전자들이 보기에 내 신세는 정말 처량하기 그지없었으니까.

[병신아 그렇다고 맨날 방구석에서 커뮤질만하냐? 똥글만 쳐싸지말고 사냥이건 뭐건 노력이라도 하던가]

물론, 가끔 이렇게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놈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내겐 반박할 소재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네가 1층에서 반년동안 지내 봤냐, 사람이랑 대화 한번 없이 혼자서 있어 봤냐, 이미 솔플로 보스 깨려다가 뒤질뻔했다 등등.

누구도 처해본 적 없는 전무후무한 상황 덕분에, 이런 내 반박을 온전히 받아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강제로 시간 빌게이츠가 되어버린 나를 상대로 키배를 이길 놈이 어디 있겠어.

"좆같은 새끼."

나는 치즈돈까스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시비를 걸어온 도전자에게 갖은 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맨날 커뮤에다가 징징글만 쳐올릴시간에 뭐라도 하라고 ㅄ아 맨날 서버탓뉴비탓만 하니까 아직도1층이지]

내 레벨에서 고블린을 암만 잡아봐야 경험치는 쥐꼬리만큼 오르는데, 이 새끼는 뭘 안다고 지랄이지.

노력한다고 이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줄 아나? 1층에서 그까짓 사냥 좀 한다고 혼자서 보스를 깰 수 있을 줄 아나?

애초에 노력의 효율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자기가 나랑 똑같이 1층에 처박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탑에 들어오기 전에 종종 보았던, 흙수저를 욕하는 금수저랑 다를 게 없다.

자기가 놓인 환경이 얼마나 좋은지 자각조차 못 하고, 가난한 사람을 노력부족에 의지박약으로 몰아세우지.

나는 이런 스타팅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취준생 생활 내내 탑의 초대장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하나뿐인 인생 역전 찬스, 그게 흙수저 태생인 내가 엄마에게 효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에휴 그래 병신아 평생 그렇게 살아라]

시비를 걸던 도전자는 결국 논리로 승리하지 못하고 튀어버렸다. 치즈돈까스가 더 맛있어졌군.

"..."

기분이 좋은 것은 잠깐뿐이었다.

**

1층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한 달이 더 지났다.

일부러 탑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는 랭커가 아니라면, 모든 도전자는 결국 언젠가 떠난다.

평생 커뮤니티에 붙어 있을 것으로 보이던 망령들도 딱히 다를 건 없다. 오늘도 그런 망령 중 하나가 탑을 떠났다.

[작성자 : 김민형#1451]

[제목 : ㅈㅇ)함께해서 좆같았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사진)

나도 이제 나간다 B급일지 A급일지 애매한데 걍 나가기로함 ㅋㅋ

우리 파티원 용주 민혁이랑 성철이형님까지 다 고생많았고

그동안 응원해준 댓글도 다 잊지 않겟음

특히 나 50층에 막혀있을때 팁 알려준 1247박민석은 나오면 연락하셈 내가 밥한끼산다

이제 진짜 감 ㅅㄱ들해라~~~

- 이 ㅅㄲ도 졸업임? 요즘 많이 나가네

- 졸업추

- 졸업추

- ㅈㅇㅊ

- 니도 수고많았다

- 백퍼 B급따리 ㅋㅋ

1451서버의 김민형은 A급 헌터를 목표로 준 랭커 생활을 하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폐관 수련 n 년 차니 어쩌니 하는 꾸준글을 올리는 커뮤니티 망령이기도 했다.

이런 랭커급 도전자의 졸업이 있으면 오픈 커뮤니티는 한동안 그 주제로 시끄러워진다. 딸각, 커뮤니티 창을 닫는다.

졸업과 관련한 이야기는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졸업자가 뿌린 아이템이며 바깥에 전할 소식이며, 나한테는 모두 상관없는 이야기다.

서버 통합 이벤트가 열린다면 또 모르겠지만, 우편과 경매장 시스템이 다른 서버와 통합되지 않는 한 내가 졸업자의 아이템을 받을 방법은 없다.

바깥에 전할 소식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엄마에게 전할 수 있는 소식은 다 전했다.

시련의 탑 1층에 혼자 갇혀서 못 나가고 있다고.

내 소식을 전해 들은 엄마는 정부 관계자와 헌터들을 찾아가 어떻게든 해달라며 애원하곤 했다던데, 요즘은 뭘 하고 있을까.

어쨌든, 앞으로 소식을 전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둘 중 하나다. 이 탑에 뉴비가 들어왔거나, 아니면 내가 뒤져버렸거나.

"좆같네."

기분이 나빠진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종일 낮잠을 잤다.

**

며칠 뒤, 어김없이 새벽까지 커뮤질을 하다 잠든 나는 띠링거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닫지 않은 오픈 커뮤니티 창에서 나를 호출하는 알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썅...뭐야."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쪽지를 확인하라는 글에 나를 호출하는 태그가 잔뜩 박혀 있었다.

오픈 커뮤니티를 닫고 쪽지 화면을 열었다.

쪽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눈에 익었다. 몇 번인가 졸업자들과 나를 중개해서 엄마에게 소식을 전해 줬던 사람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세 줄 요약을 좋아하는 내가 읽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한 내용이었지만, 결론은 단순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인가. 잘 모르겠다.

스스로 내린 결론이 물 흐르듯 뇌를 빠져나가 흘러내렸다.

#9. 서진혁 : 프롤로그

눈동자는 활자를 쫓았지만 읽어낸 내용은 머리로 들어오지 않는다.

쪽지 화면을 닫고 터덜터덜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에는 환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매일 새벽까지 커뮤질을 하다가 잠드는 내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침 햇살이었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언제나 보는 NPC가 딱딱한 인사로 나를 환영했다.

메뉴판의 가장 위에 있는 음식을 주문하고, 습관적으로 커뮤니티 창을 열었다. 조금 전에 닫았던 쪽지 화면이 함께 열렸다.

[故 이명숙 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이제야 첫 번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명숙은 우리 엄마 이름이다.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달그락.

그렇게 첫 문장을 제대로 읽고 나자 눈앞에 접시가 놓였다. 이 식당에서는 주문과 동시에 음식이 나온다. 내가 뭘 시켰더라.

[베이컨 달갈프라이 정식]

경양식당 토끼정의 아침 메뉴, 노릇한 베이컨이 일품이다.

가격에 비해 양이 많으며 아주 든든하다. 주머니 사정이 시원찮은 모험가를 위한 메뉴.

먹으면 허기가 많이 채워진다.

여관에서 먹을 수 있는 아침 식사와 비슷한 구성을 한 정식 메뉴였다.

두꺼운 베이컨과 반숙 달걀후라이에 으깬 감자와 갈색 소스가 올라가 있다. 나는 포크로 계란 노른자를 쿡 찔렀다.

엄마는 이렇게 덜 익은 계란을 싫어했다. 맛이 비리다고 했던가, 계란 냄새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가.

하지만 우리 집의 달걀후라이는 항상 반숙이었다. 내가 그걸 좋아했으니까.

-지익.

노른자를 터트려 베이컨에 칠하고, 두꺼운 베이컨을 대충 포크로 찍어 입가로 가져갔다.

특별히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았다. 아무 감흥도 없는 맛이다. 음식은 아무렇지 않게 잘만 입으로 들어갔다.

[장례는 상주 부재로 ○○-○○-○○ 경 무연고 장례로 진행되었으며, 절차에 따라 추모의 집에 안치되었습니다.]

몇 줄을 건너뛰어 다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에겐 친척이 없어, 연고자라고는 탑에 들어와 있는 나 한 명 뿐이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편부모 가정이었지만, 엄마는 내가 기죽지 않도록 아빠의 몫까지 해내고자 했다.

-꿀꺽.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수였지만, 사레가 들리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접시는 깨끗이 비어있었다. 처치된 몬스터가 사라지는 것처럼 접시는 빛의 입자로 변해 흩어졌다.

식당을 나와서 잠시 걸었다.

매일같이 숙소에만 처박혀 있는 것도 못할 짓이라서, 나는 가끔 이렇게 산책을 하곤 했다. 정말 가끔이지만.

좀 걷다 보니 빵집에 도착했다. 진지하게 공략에 임하는 도전자들은 이런 빵집에서 빵을 한 아름 사서 갖고 다닌다고 한다.

더 이상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나는 가끔 간식이 내킬 때에나 찾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빵집 NPC의 인사도 마찬가지로 무기질하다. 높은 층에서 만날 수 있는 엘리트 NPC들은 훨씬 사람처럼 느껴진다는데, 진짜일까.

갓 구웠을 리가 없는데도 풍겨오는 갓 구운 빵의 냄새를 맡았다. 띄워 놓은 커뮤니티 창이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고인의 사망 원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입니다.]

몇 번째 줄인지 헷갈리는 위치의 문장 하나가 이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급성 심근경색, 심장마비, 급사.

흔들거리는 쪽지 인터페이스의 아래쪽에는 심근경색의 원인을 과로로 추정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툭.

나는 그것에서 시선을 돌린 채, 느긋하게 빵을 골랐다.

평소처럼, 아무 변함 없이.

**

빵집에서 판매하는 화이트롤은 시련의 탑 랭커들의 주식으로 꼽힌다.

설탕이 잔뜩 들어간 덕분에 빠르게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고, 높은 레벨의 행운 버프 효과가 달려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행운 버프는 화이트롤 이외의 디저트류에도 붙어 있긴 하지만, 다른 디저트류는 가격이 비싸고 버프 지속시간의 효율이 낮아 선호되지 않는다.

버프의 등급과 지속시간이 모두 적절하게 붙어 있는 화이트롤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음식 아이템이라나.

나는 그 화이트롤을 포함해 몇 개의 빵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관 2층의 가장 비싼 방이 내 아지트다.

"맛있네."

밥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화이트롤은 잘만 들어갔다.

랭커들은 매일같이 먹어대는 탓에 보기만 해도 토가 쏠린다는 사람도 있던데, 나한테는 평범하게 맛있는 빵일 뿐이다.

화이트롤의 단맛이 입안을 칠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다시 열었다.

쪽지 화면은 한쪽으로 치워두고, 커뮤니티의 유머 게시판을 열었다. 내가 온종일 들여다보는 곳이다.

"큭, 흐흐흐."

유머글 몇 개를 주르륵 읽다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비식거리며 페이지를 계속 내리고 또 내렸다.

어느새 화이트롤은 입에 모두 욱여넣은 뒤였다. 다른 빵을 집어들어 느긋하게 먹으며 커뮤질을 계속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흘려보내자, 끼니때가 됐다고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나는 여관에서 나와 늘 가던 식당을 찾았다. 아침에는 대충 아무거나 주문해 먹었지만, 이번에는 좀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저번에 맛있게 먹었던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주문했다. 바삭바삭한 돈까스와 쭉 늘어나는 치즈의 고소함은 여전히 훌륭하다.

특별히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았던 베이컨과 계란후라이처럼, 이 치즈돈까스의 맛 역시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평소처럼, 변함없이. 변함없이...

**

시간은 흐르고 또 흘러서 벌써 밤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가장 비싼 방답게 이 침대는 무척 편하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몸이 빨려 들어간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우리 집의 침대보다 훨씬 낫다. 내 침대는 몇 년이 지나 매트리스가 다 망가져 푹신한 맛이 전혀 없었다. 엄마의 침대는 아예 딱딱한 수준이었다.

대부분이 잠드는 늦은 밤이지만 내 눈은 아직 똘망똘망하다. 오픈 커뮤니티를 열고 언제나처럼 글과 댓글을 배설한다.

-두근, 두근.

무언가 견디기 힘든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장문의 글을 작성했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어머니 돌아가셨다]

살면서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는 호칭으로 엄마를 칭하며, 나는 내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커뮤니티에 올렸다.

편부모 가정, 흙수저, 어머니의 죽음. 취준생 시절 간혹 쓰곤 했던 그것보다 더 많은 불행을 채워 넣은 한탄의 글이었다.

오늘은 커뮤니티에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다른 망령들은 무슨 일이 있나 싶었을 거다.

커뮤니티 망령들의 댓글과 반응은 실로 격렬했다. 순식간에 댓글창이 페이지를 넘어가고, 요란한 알림이 울렸다.

- 힘내라

- 너무 나쁜 생각만 하지 말고 기운 차려라, 지나고 보면 다 잠깐이다

- 다 읽었다. 힘내란 말밖에 해줄게 없네

- 상나도 부모님 장례식 못 챙겼다 남일같지않네

- 명복을 빕니다 어머니께선 꼭 좋은 곳에 가셨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쓰던 비틱글은 물론이요, 최근에 쓰던 일기나 다름없는 글과는 반응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평소에 하나나 둘쯤 반드시 끼어있던 분탕 목적의 댓글도 전혀 없었다. 그만큼 내 상황이 심각하게 보인다는 거겠지.

나는 줄줄이 달리는 댓글에 묘한 뿌듯함을 느끼며, 새벽이 되도록 커뮤니티를 쳐다보다 잠들었다.

평소처럼, 변함없이.

**

오늘도 오후가 되어서야 눈이 떠졌다. 나는 열어두었던 커뮤니티 창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대충 식사를 주문한 뒤, 다시 습관처럼 커뮤니티를 열었다. 그리고 식사를 대충 입안에 욱여넣었다.

엄마가 죽었다. 어제, 그저께,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사인은 과로로 말미암은 급성 심부전, 장례는 무연고로 치러졌고, 나는 그동안.

그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커뮤니티에 똥글이나 싸고 있었다.

-쾅!

의식적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무의식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일부러 내리쳤다.

엄마가 죽었다. 그런데 나는 평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밥은 멀쩡히 목구멍으로 넘어갔고, 꼴에 입이라고 맛있는 걸 찾아다 처먹었고, 웃긴 글을 보며 시간을 날렸다.

편한 자세로 침대에 드러누워 낄낄거리는 것으로는 만족이 덜 됐는지, 불행을 주제로 댓글을 받아먹으며 뿌듯해했다.

특별히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아니, 슬퍼하는 와중에도 현실을 외면하고 병신같이 처박혀 있기나 했다.

"씨발."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모든 것의 원인, 탑의 초대장을 기다리며 지껄여 댔던 헛소리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나는 기회를 노리는 거라고. 흙수저로 태어난 내가 엄마에게 효도할 수 있는 유일한 찬스, 인생 역전을 기다리는 거라고.

시련의 탑에 들어가기만 하면 헌터가 되어 돌아와, 엄마를 호강시켜주겠다고.

아주 지랄을, 세상 대단한 효자 납셨다.

그렇게 엄마를 생각한다는 놈이 아직도 방구석에 처박혀 커뮤질이나 하고 있나.

나는 병신이다. 자기합리화로 똘똘 뭉쳐서, 인생을 날먹하고 싶어하는 앰창인생 개백수 병신새끼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안 기분이다.

"씨발."

초대장을 기다리며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대로 살면 인생이 망할 거라고, 하지만 흙수저인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반은 맞는 말이었다. 그대로 살면 인생이 망할 것이라는 부분, 딱 그 부분만 맞았다. 후반은 그냥 합리화였지.

흙수저여서 어쩔 수 없다고? 흙수저는 노력해봤자 흙수저라고? 노력의 효율이 다르다고?

그래,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흙수저가 아니었다. 남들보다 아주 살짝 가난했을지언정, 흙수저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씨발."

엄마는 항상 열심히 일했다. 내가 기죽는 게 싫다고 남들보다 두 배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과로로 죽고 말았다.

그동안 나는 뭘 했지?

취업 준비를 핑계로 집구석에 처박혀 시간을 버렸다. 흙수저라는 핑계로 아무 노력 없이, 초대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초대장을 받은 후엔 랭커 버스를 타서 저등급 헌터가 될 생각을 했다. 그게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인생이 좆망이라 지껄여댔다.

탑의 자원을 독식하며 손쉽게 고등급 헌터가 될 생각을 했다. 그게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역시 내 인생은 좆망이라 지껄여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을 날로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엄마가 죽는 날까지.

"씨발."

천천히 손을 움직여 커뮤니티 창을 조작했다. 어제 받았던 쪽지를 다시 열었다.

엄마의 죽음에 대해 적힌 짧은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머릿속에 억지로 처박았다.

그렇게 한참을 읽고 이해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이제서야, 이제서야.

**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병신새끼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질질 짜기만 한다면 병신만도 못한 새끼가 될 거다.

나는 무작정 여관 밖으로 나왔다. 인벤토리를 열어 반년을 넘게 썩혀두었던 장비를 착용했다. 그리고 상점으로 향했다.

포션을 잔뜩 사서 인벤토리에 채워넣었다. 그러고는 빵집을 찾아 화이트롤을 있는 대로 사들였다.

나는 살면서 노력이란걸 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노력하는 방법도 모른다.

아마 이 시련의 탑이 아니었다면, 나는 엄마를 잃고 나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는 채로 질질 짜기나 했을 거다.

하지만 이 탑 안에는 알기 쉬운 노력의 척도가 존재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하다.

[전사의 석상이 당신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노멀 클래스 - 전사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석상에 손을 대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멀 클래스, 전사로 전직했습니다.]

[스킬 시스템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소모해 스킬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전사 기본 스킬 : 소드 마스터리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숙련도를 쌓아 스킬 레벨을 높일 수 있습니다.]

[소드 마스터리에 포함된 액티브 스킬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요란하게 떠오르는 전직 메시지를 모두 치워버리고, 곧장 미궁 입구로 향했다.

[도전자여, 시련의 탑이 그대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를 지나쳐 미궁 안쪽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녹색의 고블린이 나를 맞아주었다.

소드 마스터리 1레벨에 찍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스킬, 브랜디쉬의 시전 자세를 취했다.

검이 빛나며 몸에 힘이 깃든다.

곧, 동영상을 빨리감기하듯 멋대로 몸이 쏘아졌다. 거세게 휘둘러진 검이 고블린의 머리를 깨끗하게 양단했다.

-콰직!

선두에 선 고블린이 쓰러지자, 그 뒤에 있던 고블린 병사들이 일제히 덤벼들어 왔다.발길질과 함께 앞으로 나선다.

한 번의 발길질에 고블린 여럿이 넘어지고, 한 번의 몸통박치기에 고블린이 우수수 흩어진다.

그렇게 1분 남짓한 짧은 시간 만에 고블린 여섯을 처치했다.

레벨에 따른 반감 탓에 경험치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들어오지 않는 건 아니다.

게임을 연상시키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세계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뻔하지 않나. 아주 쉽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반복한다. 나 혼자서 보스를 쓰러트릴 수 있는 스펙이 될 때까지.

-쿵!

미궁 한쪽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서, 보물상자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이건 보물로 위장한 함정이다.

건드리면 강력한 몬스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도전자를 포위하는 종류의 함정.

"다 덤벼 씨발!"

순식간에 나를 에워싸는 고블린 병사단을 향해 소리치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무수한 몬스터의 무리를 뚫고 무기를 휘둘러대고, 전부 쓰러지면 다른 함정을 찾아서 작동시킨다.

몸이 지치면 포션과 화이트롤을 있는 대로 처먹고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으아아아아!!"

밤을 지나고 새벽을 넘어서, 아침이 될 때까지.

#10. 노력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