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전생 검귀
네크로맨서란 죽은 자를 다스리는 자이기에.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나아갈 수 없다.
언제나 죽음이 함께한다는 건, 결국 그만한 각오가 필요하다는 거니까.
마현에게 그런 각오야 대수롭지 않았다.
어느새 탑의 끝.
수없이 전장을 구르며 닳고 닳은 그였으니까.
다만 그런 자신에게도 바라는 건 있었다.
‘만약 죽는 순간이 온다면…….’
이 지옥 같은 전장을 함께 헤쳐 온 동료들이 있었다.
그저 세상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친.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동료 말이다.
‘저놈들을 구하는 순간이 좋겠군.’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이 오글거리지만.
그 정도면 제법 의미 있는 마지막이리라.
물론 다 함께 살아가는 것만큼 바라는 건 없지만.
나의 최후는 모두를 위한 순간이길 바랐다.
인류의 구원자라 불리는 놈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진!
푸욱!
[‘절망의 검’의 효과로 성좌와의 연결이 차단됩니다.]
[‘절망의 검’의 효과로 마력이 봉인됩니다.]
[‘절망의 검’의 효과로 행동이 제약됩니다.]
“쿨럭, 네가 왜…….”
검성, 그레이.
세인트 길드의 수장으로서 언제나 최전선에서 던전을 공략하던 구원자.
놈의 칼이 나를 꿰뚫었다.
우습게도 이런 순간에도 놈의 배신이 믿기지 않았다.
함께 헤쳐 온 고비가 얼만데.
우린 서로를 구해 줬었다.
“어떻게 네가, 네가……! 쿨럭!”
혼미한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동료들이었다.
녀석들은 쓰러져 가는 나를 멀찍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어떠한 동요도 없이 나의 죽음을 관망하는 그들.
이 상황은 약속된 순간인 것이다.
“마현, 너는 정말 훌륭한 헌터였어. 덕분에 수월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하지만, 더 이상은 네가 필요하지 않아.”
세인트 길드의 2인자 김새롬.
그녀의 눈꼬리가 가증스럽게 휘어졌다.
내가 필요하지 않다니.
나는 전장을 누빌수록 강해지는 네크로맨서다.
여기까지 오며 거둬들인 암령들은 이 공략대에서 빠져선 안 될 필수 자원이 되었다.
그러니 김새롬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탑의 공략이 목적이 아니었거든.”
더 이해할 수 없다.
공략이 아니라면 굳이 여기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오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게 무슨…….”
“마현, 너도 알겠지만, 이 탑은 인류를 성장시켜 마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존재하지.”
마물의 침략과 함께 등장한 이 탑은 수 세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
동시에 나타난 성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은 외계 성운의 침략을 받고 있음을 들어 왔다.
즉, 이 탑은 인류가 외계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자 마물의 침략을 약화시키는 방화벽이었다.
“그리고 탑의 최정점에 오를수록 마물의 힘은 강해져, 즉, 외계 성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후후, 마현. 너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놓이면 어떻게 살아남을래?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 끝에서 편하게 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 설마.”
김새롬의 말뜻을 깨달았다.
저놈은.
아니, 이놈들은…….
“처음부터 세상을 팔아넘길 셈이었던 거냐!”
외계의 성좌에 기대어 이 세상의 위에 군림할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앞잡이가 되어 권세를 쥐기 위한 탑 등반이었던 것이다.
김새롬이 살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후후, 덕분에 수월했어, 마현. 이만 꺼져.”
촤악!
김새롬에 의해 절망의 검이 우악스럽게 뽑혔고 마현의 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쓰러지는 와중에 보이는 건 무감정하게 내려다보는 그레이의 붉은 눈빛이었다.
“크윽…… 그레이, 김새롬! 그리고 네놈들……!”
이 개 같은 새끼들!
네놈들만큼은 믿었는데!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마!”
어떻게 해서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을 끝까지 저주하겠다!
그러나 나를 등지고 가는 놈들에게 나의 저주는 그저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해 보든지.”
젠장!
제아무리 후회하고 분노한들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컸다.
검에 꿰뚫린 상처에서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나는 천천히 건너선 안 될 강을 건너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 역겨운 시간을 견뎌 왔는데……!
가문에서 겪었던 수모들과.
간신히 헌터가 되었지만, 힘이 약해 당했던 치욕들.
뒤늦게 깨달은 소중한 인연들.
죽을 때가 되니 한심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점점 더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을 때는 반가운 어머니의 얼굴도 보였다.
어릴 때 여의었지만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었지.
기억은 계속해서 더 먼 시간을 비추었다.
이젠 떠올릴 수조차 없는 과거의 일들도 보였다.
마침내 모든 기억이 정리되었을 때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깨달았다.
‘……죽은 거구나.’
네크로맨서가 죽으면 다스리던 암령들이 마중 나온다더니.
거짓말이었던가.
꽤 좋아했던 이야기였는데.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 얼마나 있었을까.
거친 물살에 휘말리듯이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 것은 그때였다.
다음 순간 나는 웬 낯선 곳에 떨어졌다.
‘여기가 저승인가?’
하늘도 땅도 온통 피처럼 붉은 세상이다.
그곳에 검붉은 무복을 입은 긴 생머리의 사내가 명상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섬뜩했고, 존재 자체가 죽음과 비슷한 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에게 일말의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 강했다.
‘누구지?’
의문을 가진 그때 사내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다음 순간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고.
무언가 강하게 이어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영혼의 연결.
끊을 수 없는 기다란 영혼의 줄기가 나와 사내를 잇고 있었다.
‘너는…….’
[……그렇군.]
그제야 서로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의 심상이 크게 반응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의미심장하게 웃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전생의 나였다.
[그대, 반갑네. 나는 진무극. 이곳은 나의 심상이야.]
심상.
이 살풍경한 장소는 진무극의 마음속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이해할 필요는 없네. 그저 내가 문득 강한 영감을 받았고, 그대와 연결되었을 뿐이니.]
그렇군. 믿기지 않지만 지금 이 상황이 진무극에 의해 일어난 일이란 건 알았다.
아무래도 진무극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듯했으니까.
그에게서 느껴지는 신묘한 기운으로 보아, 실제로 성좌를 만나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신기한 것은 진무극도 마찬가지였을까.
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대의 운명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구나. 부모를 여의고 아픈 몸을 이끌며 살았어. 다만 결과는 다르게 그대는 파멸에 이르렀군.]
진무극은 나를 완벽히 꿰뚫어 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단순히 영혼이 연결됐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를 이곳에 불러낸 것도 그렇고, 어쩌면 이런 영적인 능력이 진무극의 힘인 것 같았다.
[자네에게 시간이 없으니, 말보단 보여 주는 게 좋겠지.]
‘시간?’
스윽.
진무극의 작은 손짓에 나는 어느새 그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대는 나의 환생이니 그대도 나를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
다음 순간, 진무극의 두 손가락 끝이 나의 이마에 닿았고.
나와 진무극의 영혼이 푸르게 빛나며 공명했다.
영혼의 줄기가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였다.
비로소 나는 진무극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삶.
언제나 피와 살로 뒤덮인 생애.
돌고 도는 은원의 고리에 의해 검귀가 될 수밖에 없던 운명.
‘진무극…….’
[그대, 보았는가.]
찰나 간 하나가 되었을 뿐이기에 모든 것을 볼 수 없었지만.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진무극, 그에겐 죽음이란 바람처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은 많은 것이 나와 비슷했는데, 다만 결과는 언제나 정반대로 흘렀다.
그는 결국 살아남아 중원 무림을 평정한 구천신교의 교주가 되었고.
구천마제라 불리게 되었으니까.
‘진무극, 너는…… 삶이 죽음이었구나.’
[숙명이었지. 그리고 그건 그대 역시도 마찬가지다. 타고나기를 그렇지 않았나.]
맞다. 죽여야 사는 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각성한 힘도 죽은 자를 다스리는 네크로맨서였으니까.
[뭐, 나는 그런 것만을 말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슬슬 때가 다 와 가는군.]
진무극의 눈빛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때가 다가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건가?’
[지옥이라…… 생각하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군.]
진무극은 훗 웃으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내 몸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있었던 일이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이야?’
[머잖아 알겠지.]
진무극 이 녀석의 단점이 있다면.
말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 점이다!
[그대, 또 보세.]
진무극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마현의 영혼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한국의 팔대 명가인 암천마가.
그들은 타고나기를 흑마법에 특출난 스킬을 각성하게 되어 있다.
대대로 순혈을 이어 와 혈통을 강화해 온 이들이었으니 그 힘은 잡종들보다 순도 높고 강력했다.
덕분에 평범한 이들과는 출발선부터가 달랐다.
마물의 침략 이후 강한 힘이 가장 중요한 세상이다.
암천마가가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순혈을 위한 일족의 단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그들에게 순혈이란 날 때부터 지켜야 할 의무이자 규율.
그런 이들에게 남편이 누군지도 모를 피가 섞인 사생아의 존재란 그 자체로 가문의 오점이자 균열이었다.
가문에서 아니꼽게 보기 충분했다.
“천한 놈이, 숨도 쉬지 말라고!”
“이 창녀 새끼야! 가문에서 나가!”
“너네 모자 때문에 우리 가문이 욕먹잖아!”
어려서부터 들어 온 차별과 핍박.
사생아라는 이유로 당해야 했던 괴롭힘.
당연하게도 내가 참아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
“어쩌라고.”
퍼억!
뿌각!
“으악! 내 코!”
“내 손가락을 꺾었어!”
“두 번 다시는 우리 엄마를 욕하지 마라.”
어릴 때 한 성깔 했었지.
몇 놈이 덤벼도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선천적인 질병 탓에 일족에게 힘과 재능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마저 돌아간 이후로는 구제 불능 쓰레기로 치부되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렇게 그 당시의 나는 술에 의지하며 빌어먹을 인생을 욕하다 하루를 보내게 됐다.
그러다 해가 중천에 뜨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며 다시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끄응, 머리야.”
웬일로 어린 시절이 꿈에 나왔군.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지, 어머니도 계셨고…….
라고 생각하며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잠의 여운을 즐겼다.
‘잠깐. 여기 어디지?!’
정신이 바짝 든 것은 그때였다.
나 분명…… 죽었지 않나?
그레이에게 찔렸고, 진무극을 만났었는데?
알 수 없는 현상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진무극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때가 다가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건가?’
[지옥이라…… 생각하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군.]
일단 느낌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그래,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
그딴 생각이나 하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여기는…….”
어두운 암실이었다.
다만 바깥은 해가 중천에 떴는지 강한 햇살이 암막 커튼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방 안에 기다란 선을 남겼다.
술과 위스키가 있는 유리 진열장에 반사된 빛이 은은하게 암실을 밝혔다.
“……내 방이잖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다.
여기는 암천마가에서 내가 지냈던 방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야, 암천마가는 한참 예전에 멸망했으니까.
“크윽…….”
그때 몸이 욱신거렸다.
지독한 타박상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없어…….”
그레이의 절망의 검에 꿰뚫렸던 상처가 없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내가 겪어 온 모든 일들이.
가문이 망하고 탑의 최상층에서 배신당하고 전생의 나를 만났던 그 모든 일들이.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것.
……그게 꿈일 리가 없어.
지금도 그 모든 개고생이 생생하니까.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상태창”
각성자의 힘을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 준다는 상태창.
그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상태창───
이름: 마현
레벨: 1
업적: ―
은총: ―
특성: 구음절맥
스킬: 적령 소환
───종합 능력치───
[체력: 4], [근력: 4], [민첩: 4], [마력: 6]
확실한 증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왔다.”
개고생 끝에 얻은 힘 모두 없었던 일이 되었다.
진무극…… 생각하기에 따라 지옥일 수도 있다고 했나.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너는 숨통을 쥐어 오는 모든 결과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겨 냈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지옥일 수밖에.
하지만.
나는 아니었어.
결국 일어서서 끝내 힘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 많은 것을 놓치고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지.
내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했고.
뻔히 다가오는 불행에는 힘이 없어 맞서 싸우지 못했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레이.
김새롬.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그놈들에게 파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었지.
그리고 나는 누가 어떤 속내를 가졌는지 알고 있다.
씨익.
“후회하게 해 준다 했지.”
이번엔 내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 주마.
벌써부터 놈들을 박살 내고 싶어 근질근질하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선 좀 먼일인데.”
[특성: 구음절맥.]
내가 앓고 있는 선천적인 질병은 구음절맥이다.
이 질병은 돈이 있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생에는 신의를 만난 덕에 고칠 수 있었지만.
그건 너무나도 먼 시점의 일이며 지금은 그의 행방조차 알 수 없다.
암담한 현실.
그럼에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있었던 일이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
한순간 진무극과 하나가 됐었다.
그렇게 진무극의 생애를 들여다보았고.
그의 생각과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진무극도 구음절맥을 앓았지.
하지만 그는 신의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구천마제 신공을 얻었고 오히려 구음절맥을 이용해 힘을 키웠다.
즉, 구천마제 신공.
그 중원을 평정했던 검귀의 무공이 지금 내 머릿속에 있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진무극.’
죽일수록 강해지는 검귀.
죽은 자를 다스리는 네크로맨서.
“궁합이 좋군.”
2화. 구천마제 신공
어릴 때는 모두가 공평하게 연약했기에 일족의 핍박에도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성장기에 이르면서 구음절맥으로 인해 점점 힘의 격차가 벌어졌지.
구음절맥은 지독한 음기 체질로 인해 경맥이 막히는 질환.
경맥이 막히니 격렬한 운동도 마력의 운용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내가 허송세월 살게 한 가장 큰 원흉이지.
체력 단련이나 흑마법 수련이든 간에 모든 게 불가능했으니까.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구천마제 신공.’
그걸 익히고 검귀가 되어 주겠다.
나는 진무극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가 처음 구천마제 신공을 각성하게 된 순간이다.
― 꼬맹이가 제법 담대하구나. 아니면 죽음이 익숙한가.
― ……누구십니까.
혈겁에 피바다가 된 마을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년 진무극에게 웬 여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무림공적이었으며 멸망한 천마신교의 후예인 천여령이었다.
― 따라와라. 내겐 즐거움이 필요하다.
― 가면 어떻게 됩니까?
― 어떻게 되냐고? 훗.
그녀는 진무극에게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타고난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게 해주지.
― 운명…… 이 빌어먹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 그래, 오직 너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 따라오겠느냐?
진무극은 고개를 끄덕였고 결연한 눈빛을 띠었다.
― 따르겠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진무극의 운명은 바뀌게 되었다.
그 첫 번째는 구음절맥이었다.
― 구음절맥을 고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니라. 극양의 기운을 활용할 수 있는 신의를 만나거나. 타고난 기질을 극한으로 활용하거나.
구천마제 신공은 후자였다.
타고난 음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공.
― 음에는 다양한 속성의 기운이 혼재되어 있지. 하지만 네가 익힐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다.
― 그게 무엇입니까?
― 죽음. 그것이 너의 운명이지 않으냐.
구천마제 신공은 음기에서도 죽음의 속성을 다룬다.
죽음을 극복하려거든 죽음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 또한 정해진 운명이었다.
다만 진무극은 받아들였고 구천마제 신공은 그에게 전수되었다.
― 구천마제 신공은 심상을 다루는 무공. 너의 마음에 구천을 이룩해야 한다.
진무극은 그녀가 읊는 구절을 따라 체내의 기운을 다스렸다.
머리의 상단전에 한평생을 지독하게 가로막았던 음기들이 집결했고.
그것을 진무극의 마음이 구천마제 신공의 구결대로 주물렀다.
그렇게 상단전이 만들어졌고 다음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중단전과 하단전의 기틀을 잡았다.
중단전과 하단전은 상단전의 힘을 떠받들게 되었다.
이로써 완성된 구천마제 신공.
진무극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한평생 나를 억눌렀던 기운이…… 오히려 나를 돕는다.’
그런 진무극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 바로 그거다. 진무극.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현 역시 따라 웃을 수 있었다.
진무극과 하나 된 경험은 이 모든 기억을 직접 보고 느낀 것처럼 생생했고.
덕분에 자신도 구천마제 신공 역시 이룩할 수 있었으니까!
“완성했다.”
머리에 있는 상단전에 음기의 힘이 집결되었다.
나 역시 심상에 구천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검귀의 무공.
죽은 자의 영혼을 자신의 구천에 담아 낸다.
그렇게 담아 낸 영혼이 많아질수록 구천이 확장되며 검귀 자신이 강해지는 무공인 것이다.
죽일수록 강해진다니.
제대로 다룰 수만 있게 되면 전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겠어!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몸을 풀었다.
“확실히 다르다.”
상단전을 활용하는 무공답게 오감이 명료해졌다.
시각은 어두운 구석구석도 잘 볼 수 있었고.
청각은 바깥의 바람 소리도 잡아냈다.
‘피가 흐르는 것도 느껴져.’
이건 좀 흥분해서인 것 같다.
이어서 구음절맥으로 인해서 하지 못했던 운동을 해 봤다.
“허억, 허억……!”
털썩!
버피 테스트 10회.
머리가 핑 돌아 쓰러졌다.
“크크크…….”
구음절맥 때문이 아니라 저질 체력 때문이었다.
즉, 구음절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진무극. 고맙다.
덕분에 많은 게 달라질 것 같다!
물론, 구천마제 신공에 대한 과제는 아직 많이 남았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이룩한 구천은 진무극에 비하면 완성도가 떨어졌다.
진무극은 천여령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껀 아직은 껍데기에 불과해.
고작해야 구음절맥의 한계를 해결한 정도.
물론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본격적으로 검귀가 되려면 하루빨리 완전한 1성에 도달해야겠어.
아니, 도달해야만 한다.
1성을 넘어 그 이상의 경지에 닿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새삼 돌아온 내 방을 둘러보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멸망한 뒤로는 돌아올 수 없었던 이곳이니까.
“마재헌, 그 새끼가 일을 치르기 전에 강해져야 해.”
마재헌.
암천마가 후계자 중 한 명.
그놈에 의해 암천마가가 멸망했다.
그레이와 김새롬보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놈이다.
애당초 세인트 길드에 복수하기 이전에 힘을 키워야 한다.
지금으론 턱도 없으니까.
그리고 가문이 건재해야 수월하게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가문의 지원이며 명예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니까.
무엇보다 어머니와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다.
일족들이 내게 적대적이었다 해도 완전히 쓰레기들만 있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이곳에도 소중한 인연은 있었다.
“지금 시기가 언제쯤이지?”
가문의 멸망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일단 내가 술을 마시던 시기인 만큼 어머니가 돌아간 시점인 건 확실했다.
거기에 이 몸의 상태…….
왠지 모르겠지만 타박상과 멍으로 몸 구석구석이 아팠다.
하지만 가문 멸망 직전의 상태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누구지?’
의문이 들었을 때 문이 열리고 웬 여인이 도각도각, 걸어 들어왔다.
“아, 웬일로 일찍 일어나 계셨군요?”
그녀는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방에 들어와 암막 커튼을 걷었다.
촤르륵. 정오의 햇빛이 방안을 완전히 밝혔다.
나는 순간적인 밝음에 눈을 찡그렸고.
그런 시야로 햇빛에 밝게 빛나는 그녀를 보았다.
“어둠의 아이도 아니고 불 좀 켜고 살죠?”
“너…….”
“음, 너무 식상한 농담이었나?”
머리를 긁적이는 그녀.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크크크.”
“오, 웃었네요.”
그녀의 이름은 한라.
암천마가의 일족을 보좌하는 비서관 중 한 명으로 내 전속 비서였다.
“한라.”
“네?”
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어딘가 무뚝뚝한 얼굴을 보니 괜히 가슴이 저릿했다.
이 감정은 그러니까…….
그래, 희열에 가깝다.
나는 그녀를 통해 돌아온 기쁨을 느낀 것이다.
“괜히 반갑네.”
그도 그럴 게, 한라는 가문이 멸망하던 날.
아직 힘이 약한 내가 도망치도록 몸을 던져 준 은인이니까.
그녀가 있었기에 탑의 최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흐음……?”
한라는 내게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아, 술 냄새. 약 먹었을 때는 술 드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요. 어쩐지 대낮부터 헛소리하더라니.”
“약? 뭔 약을 먹었지?”
“어라? 그것도 기억 안 나세요?”
한라는 그럴 수가 있나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승철, 마기헌 도련님들께 엄청나게 맞고 오셨잖아요. 어젠 그렇게 노발대발하시더니 그걸 잊어요?”
뭐라?
마승철…… 마기헌?!
그 두 놈도 잊을 수 없는 놈이다.
내 또래의 일족으로 어린 시절부터 내 어머니를 욕하고 나를 괴롭히던 두 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타박상과 멍이 그놈들 때문이었어……?”
“……정말 기억 못 하세요?”
한라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에 걱정이 묻어 나왔다.
어떻게 처맞은 걸 기억 못 하지??
“술을 그렇게 마시더니, 젊은 나이에 벌써…… 이건 알코올성 치매가 의심되는데요.”
“그러게, 앞으론 마시면 안 되겠어.”
“네 제가 다 처분할게요.”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술이고 뭐고 이젠 중요하지 않다.
마승철, 마기헌 두 놈을 어떻게 조질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과.
살아생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한라와의 대화가 중요했으니까.
“네……? 진심이세요?”
“팔아서 너 용돈 해.”
그런 내 말들이 믿기지 않는지 한라는 정말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놈…… 아니, 그 도련님들에게 머리를 크게 다치셨나 봐요.”
“그럴지도 모르겠어. 지금 왠지 기분이 좋거든.”
“에이…… 장난은 그만하세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제야 한라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상처나 보여 주세요. 흉 지지 않아야 하니까 확인하러 온 거든요.”
“그래.”
나는 상의를 벗었고 한라는 준비해 온 치료 도구로 내 몸에 난 상처들을 토닥토닥 다루었다.
알싸한 고통이 괜히 기분이 좋았다.
왠지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어서.
“하지만 도련님.”
“왜?”
“슬슬, 술은 그만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신관 시험이 한 달 남았잖아요.”
“사신관……?”
정신이 벌떡 들었다.
사신관 시험.
그것은 암천마가의 일족에게 후계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이다.
중요한 건 단순한 후계 자격만을 위한 시험이 아니었다.
암천마가는 대대로 강한 스킬을 타고나는 가문인 만큼 혈통부터가 재능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성좌들이 눈독을 들인다.
성좌들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를 제 화신으로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신관 시험은 수많은 성좌가 지켜보는 별자리 연회 속에서 진행되는 시험이다.
‘한 달밖에 안 남았다고?’
성좌와의 계약은 필수 불가결하다.
계약으로 성좌의 은총을 받으면 화신은 내재되어 있던 힘을 각성할 수 있으니까.
나의 경우에는 그래.
네크로맨서의 힘을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전생에는 한참 후에야 각성할 수 있었지.
그놈의 구음절맥 때문에 사신관 시험을 망쳤고 성좌와 접선하지 못했다.
“도련님의 체질이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몸을 관리하세요. 죽을 수도 있잖아요.”
확실히 죽을 수도 있다.
일족과의 치열한 경쟁도 있지만.
사신관 시험은 애초에 일족에게 강한 잠재성이 있는지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도축장에 끌려가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겐 구천마제 신공이 있으니까!
‘한 달 안에 구천마제 신공을 완전한 1성으로 만들어야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릇이 될 육체를 단련할 필요가 있었다.
진무극과 다르게 지금의 내 몸은 쓰레기니까.
씨익.
‘앞으로 바빠지겠어.’
구음절맥의 제약에서 벗어난 이상 더는 나를 가로막을 건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된다.
쉴 틈 없이 달려 주지.
“한라, 내게 바라는 게 있어? 그동안 네가 좀 고생한 것 같아서.”
“오, 제 노고를 알아보시는군요. 감동이네요.”
“나는 진심이다?’
한라는 픽 웃었다.
“뭐, 그렇다면. 저는 도련님이 좀 성실해지셨으면 좋겠네요.”
“성실……? 고작?”
“고작이요? 도련님처럼 성실과 거리가 먼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할걸요?”
뭐?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
그런 게 어딨어!
“나를 못 믿네.”
한라는 부정하지 않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한라에게 절대 질 수 없는 내기를 제안했다.
“사신관 시험에서 내가 개쩌는 활약을 하면 넌 내가 말하는 게 뭐든 들어줘야 할 거야.”
“좋네요. 저도 소원을 빌죠. 연봉 두 배.”
한라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좋아. 후회하지 마라.”
“앗싸, 연봉 두 배다.”
나는 씩 웃었다.
세상을 한 번 살아 보면서 느낀 게 있다.
은(恩)과 원(怨).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방향이 된다.
나는 원한을 갖고 회귀했지만.
복수에 미쳐 살지 않을 거다.
그야 이렇게 소중한 인연이 버젓이 살아났는데 복수에만 미칠쏘냐.
그러니 후회 없도록 살자.
두 번 다시 잃는 일이 없도록 달려 보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방해되는 놈들은 다 두들겨 패 주지.’
3화. 달라지는 도련님
한라는 마현의 침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어딘가 뚱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나?’
마치 앞으로 자신은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듯 내기까지 하자고 했다.
술기운에 한 말일 테지만 제법 진심이 담긴 것 같았다.
사람이 그렇게 대뜸 달라질 리가 없는데…….
방금 본 마현은 뭐랄까 그동안과는 달랐다.
뭐랄까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평소에는 반쯤 자포자기한 채 살던 도련님이었는데.
아까는 꽤 의욕적이었다.
“정말 머리를 맞아서 그런 건 아니겠지?”
으음, 모르겠다 모르겠어.
좀 더 지켜보고 이상하면 정신과 의사를 불러야겠어.
사실 한라는 마현의 달라진 태도도 걱정이었지만.
더 큰 걱정은 따로 있었다.
사신관 시험.
아무리 봐도 마현의 현 상태로 봤을 때 어떠한 가망도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준비하겠다는 건 분명 좋은 생각이야.
다만.
“왜, 수련용 검을 준비해 달라고 한 거지?”
물론, 암천마가에서 검술을 익힐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혈통 재능이 있을 흑마법을 수련하는 편이 맞지 않나?
그것도 한평생 검을 잡아 본 적도 없는 분이라면 더더욱.
음, 구음절맥으로 어느 쪽도 애매하긴 한데…….
골똘히 생각할수록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현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은근 별난 면이 있긴 하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적어도 자신이 아는 마현은 그랬다.
그러니 지금은 믿고 지켜보기로 했다.
“부디, 살아 돌아오면 좋겠네.”
내기했던 것처럼 좋은 성과를 내면 더 좋고.
그래야 자신도 바라는 것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 * *
스킬을 얻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중에는 학습을 통한 방법도 있다.
으레 명가라 불리기 위해서는 일족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혈통이 있는 가문은 제 일족의 재능을 최대한 키워 내려고 혈안이었다.
암천마가라면 흑마법.
흑마법 하면 암천마가.
그런 의미에서 암천마가 일족들은 어릴 적부터 부지런히 흑마법을 수련했다.
‘나도 열심히 하던 때가 있었지.’
덕분에 아주 기초적이지만 ‘적령 소환’ 스킬을 얻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구음절맥 탓에 흑마법 연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맞다. 그때부터 손 놨다.
연습하려 해도 피를 토하게 되니까.
그래서 암천마가 일족임에도 다룰 수 있는 흑마법이 거의 없었다.
‘상관없어.’
그런데도 탑의 최상층에 올랐다.
굳이 학습에 얽매이지 않아도 스킬을 얻는 방법은 많이 알고 있다.
애초에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스킬 하나 얻자고 파고드는 건 수지가 안 맞지.
지금은 한 가지에 몰두해야 할 때다.
이를테면 구천마제 신공이랄까.
선택과 집중!
한 달 안에 1성에 도달하기로 정한 순간부터 나는 체력 단련을 강행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체가 받쳐 줘야 했고.
이때부터 매일 달리기, 팔굽혀펴기, 턱걸이, 스쿼트,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를 루틴에 넣고 운동하기로 했다.
“후우…….”
그렇게 입에 단내 나도록 몸을 몰아붙인 후에는 검을 쥐었다.
검.
익숙하지 않은 무기다.
네크로맨서로 살았던 내가 검을 쥘 일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괜찮다.
내겐 진무극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차분히 눈을 감고 진무극이 구천마제 검결을 익히는 순간을 떠올렸다.
푸욱!
― 진무극 자세가 흐트러졌다. 집중의 끈을 놓지 마라.
― 크으윽…….
진무극은 천여령에게 거둬진 후로 그녀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녀는 그런 진무극을 엄하게 가르쳤다.
검로에 빈틈이 있으면 언제든 봐주지 않고 그 틈을 찔렀고.
진무극은 몇 번이고 쓰러졌다.
― 가혹하다고 생각하나?
― 하아, 하아…….
― 하지만 죽고 나면 기회는 없다.
맞다. 수없이 봐 오지 않았던가.
죽고 나면 제아무리 깊은 분노와 원한을 지녔더라도 이룰 수 없다.
진무극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천여령에 맞서 검을 단단히 쥐었다.
― 훗, 그 눈빛이다.
― 흐읍, 다시 가겠습니다.
진무극은 검을 베어 가며 빠르게 쇄도했다.
한걸음에 천여령의 바로 앞에 도착했고.
휘둘러진 검이 그녀의 허리를 노렸다.
샥―
신기에 이른 거리 조절인지 천여령은 스치듯 피했고 오히려 가까워진 거리를 이용해 진무극을 몰아붙였다.
천여령의 나뭇가지가 찰나에 여덟 번 베어 왔고.
진무극은 세 갈래는 몸을 던져 피하고, 세 갈래는 막았다.
남은 두 갈래는…….
― 호오.
다시 피했다.
천여령을 따라 순간적으로 거리를 조절한 것이다.
진무극은 처음으로 생각대로 움직인 자신에 놀라 씩 웃었다.
― 드디어 살았군요.
따악!
― 컥!
― 다시 죽었구나.
천여령은 ‘방심은 금물이다. 진무극’이라며 냉엄한 눈초리를 보냈다.
― 이건 좀 너무하…….
쐐액!
그때 다시 한번 천여령의 나뭇가지가 진무극에 휘둘러졌다.
그 기습적인 움직임에 진무극은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슈칵!
하지만 왠지 고통이 뒤따르지 않았다.
― 이제 제법 쓸 만하구나.
반사적으로 휘둘린 진무극의 검이 나뭇가지를 베어 낸 것이다.
죽음에 저항하고자 펼쳐진 그 일격은 여태 펼친 검초 중에서 가장 완벽했다.
슬그머니 눈을 뜬 진무극.
그의 눈에는 뒷짐을 쥔 채 앞서 걷는 천여령의 뒷모습이 보였다.
힐끗 자신을 돌아본 그녀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 오늘 수련은 이것으로 끝이니라.
마현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진무극과 하나가 됐었기 때문인가?
마현은 진무극이 펼쳤던 동작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쐐액!
“됐다!”
나의 검이 흔들림 없이 펼쳐졌다.
진무극이 마지막에 펼쳐낸 검초였다.
‘하나가 됐던 순간 덕이군.’
단순 기억을 넘어 감각이 흐릿하게나마 몸에 남아 있다.
원래라면 보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터인 검술이 지금은 쉬웠으니까!
거기에.
[근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하였습니다.]
[체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무아지경으로 검술을 펼치던 중에 능력치가 올랐다.
씨익.
순조롭구만!
여전히 진무극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이대로라면 사신관 시험 전에 구천마제 신공 1성 정도는 무조건 완성할 수 있을 테지!
그런 생각이 들수록 마음이 들끓었다.
구천을 하루빨리 완성하고 싶어.
그런고로 이미 쉴 생각은 사라졌다.
나는 다시 한번 단단히 검을 잡았고.
눈을 감고 진무극의 기억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한편, 그런 마현의 단련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암천마가 흑검대.
가문의 일족을 호위하는 부대의 인원이었다.
“팀장님 저분은 처음 뵙는데, 누구십니까?”
“신입은 처음 보나? 저분이 마현 도련님이다.”
흑검대 팀장 고동석은 1년 차 신입인 김세창에게 설명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분이 수련장에 계시는 거지?
알 사람은 다 안다.
마현이 암천마가에서 어떤 처지며 어떤 상황인지.
‘천성이 게으르고 술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거기에 구음절맥을 앓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격렬한 몸짓을 보면 그 소문이 와전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족 간의 경쟁이 치열한 암천마가이니 정보를 숨기거나 거짓된 정보를 알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아~ 마현 도련님이구나.”
김세창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에라이, 똥차네 똥차.’
암천마가 내에서 승진 가도를 밟고 싶다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인물.
끈 떨어진 연, 구제불능의 짐 덩어리.
그것이 김세창이 알고 있는 마현이었다.
“근데, 마현 님은 왜 검술을 다루는 거죠? 취미로 하고 계신 겁니까?”
“나도 마현 님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아마, 시기상으로 보면 사신관 시험에 대비하려는 거겠지.”
“사신관 시험…….”
김세창은 대충 마현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뭐 흑마법으론 어려울 것 같으니 검술로 해 보겠다는 건가?
풉, 웃기네. 검은 뭐 쉬운 줄 아는 건지.
김세창은 10년 가까이 검에 시간을 쏟아부었다.
검을 우습게 보다가 나가떨어지는 녀석을 이미 한 트럭 보았다.
“검이 더 어려울 텐데. 마현 님이 검에 대해 잘 모르나 봅니다.”
“아마, 오래 안 갈지도 모른다.”
고동석은 김세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으르고 한평생 단련한 적도 없는 마현이 격렬한 수행을 동반해야 하는 검술을 끈덕지게 붙잡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내가 아는 마현 님이 맞다면 말이야.’
그때, 마현이 지쳐 버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며 김세창이 조소했다.
“크크, 팀장님.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제가 마현 님을 삼 초 안에 꺾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빠르면 일 초?”
“……김세창.”
“크크, 네?”
김세창은 고동석을 바라보았다.
고동석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제넘지 마라. 그래도 가문의 일족이시다.”
“아, 네, 죄송합니다.”
씨발.
태생이 암천마가 가신 가문이라 그런가 노예 근성 미쳤네.
물론, 김세창의 표정은 그런 생각이 드러나지 않게 울상이었다.
“두 번 다신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봐주십쇼.”
“알았다. 순찰을 계속하지.”
하, 빨리 이딴 말단 흑검대에서 탈출해야지.
김세창은 조만간 있을 마기헌 도련님의 호위 임무가 간절히 기다려졌다.
* * *
마현의 하루는 쳇바퀴처럼 굴러갔다.
그 쳇바퀴는 도통 쉬는 일 없이 팽팽하게 돌아갔다.
한라는 그런 마현의 모습에 점점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솔직히 언제 포기할지에 관심 있었다.
‘흐음, 도련님이 얼마나 오래 가나 볼까?’
그렇게 3일이 지나고.
‘웬일로 생각보다 열심히 하시네?’
가끔 일하다 수련장을 지나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마현이 있었다.
해가 뜰 때는 달리거나 쇳덩이를 짊어지고 움직였고.
해가 질 때는 자신이 건네준 수련용 검으로 검술을 수련했다.
‘검을 처음 잡는 거로 아는데…….’
한라는 마현의 움직임이 제법 가닥 잡힌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봐도 똑같이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좀 잘하는 것 같았다.
“물 드세요. 휴식도 운동의 일환이라고 합니다. 알고 계시죠?”
“허억, 허억…… 한라. 고마워.”
무슨 땀이 이렇게 흐르지?
마현의 몸에 땀이 홍수처럼 흘렀고 막 운동이 끝난 직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 드릴 때였다.
손바닥에 마현의 등이 닿았는데. 아니, 글쎄 화상 입는 줄 알았다.
사람이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구나…….
처음 알았네?
한라는 몇 년간 곁에서 지켜보았던 조금 한심하고 안타까웠던 도련님이 새삼 이렇게 열심히 사니 괜히 자신이 뿌듯했다.
근데, 마현이 도통 쉬지를 않았다.
어느새 일주일.
마현의 하루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운동의 중량이었다.
“무, 무리하지 마세요……!”
“하아, 하아…… 한라.”
“네?”
“너도 같이해.”
‘무슨 맥락이 그렇게 돼?’
그렇게 그날은 마현 도련님과 함께 운동했다.
죽는 줄 알았네…….
그 후로는 감히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다.
한라는 점점 다부져 가는 마현의 몸을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어때? 건강을 되찾은 나.”
“와아…… 훌륭합니다.”
마현이 달라지기로 한 것은 진심이었다는 걸.
그나저나 뭔가 잊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아…… 구음절맥!
마현 님은 원래 타고난 질병 때문에 운동을 포기했던 거였는데……?
“구음절맥은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으신가요?”
“빨리도 묻네.”
“아하하…… 그게. 그러게요.”
너무 갑작스럽게 달라진 마현에 순간 잊었다.
볼을 긁적이는 한라.
마현은 피식 웃었다.
“그거, 해결했어.”
“진짜요? 어떻게?”
“어…… 뭐, 그냥 적응해 냈어. 버틸 만하더라. 참고로 비밀이다?”
구음절맥이…… 적응할 수 있는 거였던가?
마현이 설명하기 어려워 대충 말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속 비서인 만큼 이런 건 눈치껏 함구하기로 했다.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
이 변화는 단순한 변덕이 아닌 어쩌면 큰 각오에 기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강행군을 할 수 없을 테니까.
흐음, 그렇다면…….
그즈음 한라는 한 가지 큰 결심을 내렸다.
마현이 달라진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변화를 맞이하려는 때이다.
‘그러니 나도 발맞춰 가는 게 좋겠지!’
한라에겐 마현을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는 계획이 있었다.
4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마현의 강행군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없었다.
‘하루빨리 진무극을 따라잡고 싶어.’
진무극이 걸었던 길을 빠르게 주파하고 싶었으니까.
그런 타오르는 욕심에 전혀 쉬지 않는 것이다.
[근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체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하였습니다.]
[근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체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하였습니다.]
.
.
.
덕분에 날이 갈수록 마현의 신체는 달라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범인들은 꿈도 꿀 수 없다.
마현의 가혹한 단련이 계속될 수 있는 이유는 타고난 혈통이 있기에 가능한 거니까.
이 점이 나와 진무극의 큰 차이겠지.
기본적으로 세대를 거치며 계량된 혈통은 일반인 이상의 신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암천마가가 무가 혈통은 아니라서 사실 좀 많이 피곤에 절어 있지만.
그 정도는 참아야지?
애도 아니고 이 정도로 찡얼거릴 순 없는 것이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마현
레벨: 1
업적: ―
은총: ―
특성: 구음절맥
스킬: 적령 소환
───종합 능력치───
[체력: 9], [근력: 9], [민첩: 9], [마력: 11]
음. 역시 꽤 올랐어.
어디까지나 처음에 비해서지만 말이다.
사신관 시험 전에 출발선에 들 정도는 되겠지.
다만, 조금 아쉽다.
마음만큼은 하루빨리 강해지고 싶은 나이다.
그런 욕심이 가득하지만, 막 운동을 시작할 때와 달리 점점 상승 곡선이 완만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한 거지만…… 좀 빡치는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들 수 있는 한계 중량이 있으니까.
“그런고로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어? 고동석 팀장.”
가문 내 호위를 담당하는 흑검대의 팀장 고동석.
특유의 곰탱이 같은 몸을 보면 운동을 잘 아는 이임이 틀림없다.
분명 그가 보조해 준다면 더 강도를 높일 수 있을 테지.
“오전 순찰 임무 중입니다만…….”
“아는데?”
“그럼 어째서…….”
“좀만 도와줘 봐. 그 정돈 어렵지 않잖아.”
고동석은 영 탐탁지 않았다.
마현과는 크게 접점도 없었던 데에다 자신이 들어온 마현에 대한 말들이 있으니까.
다만, 최근 들어 수련장을 지나칠 때마다 마현을 보았다.
조금은 소문과 달리 열심인 모습이었다.
“하…… 그럼 조금만입니다.”
어디까지 암천마가의 가신 가문인 입장으로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동석은 조금 마현의 운동을 보조했다.
째깍째깍.
“됐어, 이제 가 봐.”
“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현은 검을 쥐고 검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고동석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수련장 밖으로 향했다.
‘마현 님이라…… 아무리 암천마가 일족이시라지만, 조금 경우가 없군.’
조금 막가파적인 면이 있었다.
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훗 웃으며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는 고동석.
그렇게 수련장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고동석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해가 지고 있어?”
붉은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다고?!
미친, 하루를 그냥 날려 버렸다!
저 자신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마현이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저곳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라도 한단 말인가?’
제기랄. 언제나 FM대로 업무를 수행하던 자신이 이런 일탈을 하게 되다니.
어쩐지 보조를 맞추는 게 제법 즐겁더라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마현에게는 뭐랄까 흡입력이 있었다.
남자의 무언가를 자극한달까, 그가 의욕을 불태우며 운동하니 괜히 자신도 덩달아 의욕적으로 도왔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현 님이라…… 조심해야겠어.”
아무래도 마현에게 당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고동석.
서둘러 복귀하는 그의 발걸음은 왠지 가벼웠다.
* * *
암천마가는 순혈을 추구하는 가문.
그렇기에 친인척 간의 혼인을 방지하고자 전략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따라서 암천마가는 가문 내에 수많은 방파가 존재했다.
방파별로 규모도 추구하는 흑마법도 제각각.
이런 면에서 보면 암천마가는 대가족이라기보단 거대한 교단에 가까웠다.
“마기헌 도련님, 그쪽으로 갑니다!”
특히, 마기헌이 속한 방파는 대대로 가주 직을 두고 경쟁하던 나름 성골에 속하는 암익파다.
그는 부유한 암익파의 지원 아래 자랐고 지금에서는 차기 후계자 중 하나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
마기헌은 암흑의 활로 타오르는 어둠을 쏘았다.
날아간 흑마법은 달려들던 거대한 개 형상의 마수를 꿰뚫었다.
커엉―!
“도련님 나이스!”
김세창이 방긋 웃으며 마기헌에게 달려갔다.
마기헌의 마수 사냥 스포츠에서 호위를 맡은 그다.
오늘의 임무는 마기헌을 위한 기쁨조.
김세창은 그 역할을 확실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야, 암천마가의 흑마법은 역시 언제 봐도 대단합니다. 슈욱, 파악! 저 같은 천민은 평생 다룰 수도 없겠죠?”
“훗, 당연하지. 넌 노력해도 안 되니 꿈도 꾸지 마라.”
“아잇, 물론입죠. 그나저나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유독 마기헌 도련님 흑마법이 더 정교한 것 같습니다?”
“뭐, 보는 안목은 있네. 1년간 몇 번 데리고 다닌 보람이 있어.”
김세창은 마기헌의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암천마가 흑검대 입사 이후 마기헌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던 그였다.
요즘 들어 부쩍 그 관계에 물이 올랐다.
그때, 둘의 뒤편으로 다른 일행이 다가왔다.
“아, 이런. 이번에도 졌구만!”
“좀 더 분발해라. 마승철.”
“참 나 열심히 하고 있거든?”
마승철과 그 호위였다.
얼마나 많은 마수를 사냥하는지에 대한 내기였는데.
김세창이 몰이질을 잘해서 마기헌이 이겼다.
“이야, 김세창 또 너야? 징글징글하다. 여기 오기 전에 몰이질만 했냐?”
“하하, 그저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크크크, 다음엔 내 쪽에서 몰이질 해라. 알았지?”
“물론입죠. 불러만 주십쇼.”
지랄. 내가 왜 너랑 해.
김세창은 마기헌의 곁에 꼭 붙어 다닐 생각이었다.
그야, 마승철의 방파는 마기헌의 암익파에 흡수된 약소 방파.
둘이 함께 자라 친구처럼 지낸다지만 엄연히 결이 달랐다.
윗물과 아랫물 뭐 그런 거지.
물론, 마승철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 없으니 최선을 다해 방긋방긋 웃었다.
“김세창 마승철에게 갈 거냐?”
“아, 물론, 저의 0순위는 마기헌 도련님이랄까요?”
“뭐야? 나를 두고 마기헌한테 가겠다는 거냐?”
“아아, 물론 마승철 도련님도 0순위입니다.”
“말장난하네?”
시발. 그만해 개새끼들아.
마승철 너는 좀 그만 꼽사리 끼라고.
어찌 됐든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기에 김세창은 노련하게 상황을 웃겨 넘길 수 있었다.
톡. 토옥.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아, 예보에는 비가 없다고 들었는데…….”
제길 우산을 챙겼으면 점수 딸 수 있었는데 놓쳤잖아.
하는 수 없이 마기헌을 위해 외투를 벗으려 했다.
“어라? 알고 계셨습니까?”
하지만 마기헌과 마승철은 우산이 있었다.
“뭐, 우리 정도 되면 알고 있지.”
“어떻게……?”
김세창의 물음에 마기헌과 마승철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승철은 코를 부여잡았고.
마기헌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릴 적 마현에게 코가 부러지고 손가락이 꺾였던 둘은 비가 오는 날이면 시려왔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마현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분노는.
“신경 꺼, 새꺄. 우산이나 들어라.”
“넵……!”
“그나저나, 마현 그놈이 요즘 다시 나댄다고 들었는데.”
마기헌의 눈빛이 달라졌다.
김세창은 거기서 신경질적인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마현을 싫어하셨지.’
“아, 요즘 주제넘게 검술 수련을 하던데요?”
“검술 수련……? 그놈이?”
“네, 제가 전에 순찰하면서 우연히 봤었습니다.”
“그럴 리가. 그놈은 구음절맥이다.”
마기헌은 확신했다.
구음절맥 진단을 내린 의사에게 돈을 주고 직접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마법 수련을 하다 피를 토하거나, 점점 약해지기도 했지.
“아, 구음절맥이셨구나. 어쩐지 좀 뭐랄까 여러모로 허접했습니다.”
“아, 마기헌. 그거네 그거. 사신관 시험!”
사신관 시험.
후계자격을 결정하는 그 시험이 어느덧 2주도 남지 않았다.
“그렇군. 발등에 불 떨어진 거였나.”
“하하, 그런 것 같습니다. 아주 발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크크, 어지간히도 살고 싶나 보군.”
상상하니 제법 꼴이 웃겼다.
그 싸가지 없던 녀석의 속마음이 어떨지 궁금할 정도.
분명 죽기 싫어서 계집애처럼 울고 있겠지.
죽어라 고생해 봐라 마현.
그래 봤자 사신관 시험에서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뭐, 죽기 싫으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만 말이야.
마기헌이 비릿하게 웃었다.
김세창은 그가 기분이 좋은 지금이 타이밍이라 여겼다.
“저, 그나저나 마기헌 도련님.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지만, 저 어떻습니까?”
먼저 걷던 마기헌의 걸음이 우뚝 섰다.
고개를 돌려 김세창을 돌아봤다.
“너? 네가 뭔데.”
“저는 암천대 검술 학부 삼석 졸업에 던전도 5번 이상 돌아 본 헌터였습니다. 저는 도련님의 앞길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후계 자격을 얻으면 내 밑으로 오고 싶다는 건가?”
마기헌의 고개가 거만한 각도로 올라갔다.
김세창은 마른 입술을 한번 핥았다.
“흠, 자리가 없는데 말이야.”
“아앗, 그러지 마시고 도련님…….”
“크크, 김세창.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알고 있나 봐?”
“헤헤, 저도 도련님이 최고지 말입니다.”
마기헌은 피식 웃었다.
김세창, 웃기는 놈이다.
그 케케묵은 속내는 감춘다고 숨길 수 없는 거였으니까.
‘뭐, 하지만 이런 녀석도 좋지.’
기본적으로 머리가 잘 굴러간다.
10년간 검을 잡았다고 하니 잘 키우면 쓸 만한 말이 되어 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내게 충의를 보여라.”
“물론입니다! 말씀하시는 게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나이스!
차기 유력 후계자인 마기헌에 줄을 댈 수 있다니!
이렇게 되면 몇 년 안에 고동석 그 새끼보다 윗줄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땐 내가 부려 먹어 주마.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해, 사신관 시험 전에 재밌는 소식을 가져와.”
“재밌는 소식이라면…….”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설마 구음절맥 따위에 지겠어?”
구음절맥. 그것은 마현을 가리키는 것.
마현에 대한 앙금이 있는 마기헌이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명확했다.
한번 작살 내 보라는 건가?
김세창은 비열하게 웃었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죠.”
학창 시절부터 티 나지 않게 사람 조지는 법 하나는 완벽하게 숙지한 자신이었으니까!
하물며 가문의 오점인 사생아라면.
‘완전 여유롭구만.’
5화. 내가 달라지니 세상도 변한다
그날 이후로 고동석과 마현의 접점이 늘었다.
운동 메이트가 필요했던 마현에게 고동석은 과연 그 덩칫값을 했다.
제법 운동을 잘해. 덕분에 한계 중량 이상으로 단련을 할 수 있었다.
“어, 왔냐?”
“정말, 조금만입니다.”
“알았다니까.”
이 녀석은 매번 조금만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끝나면.
“아악! 젠장! 시간이 벌써……!”
제 머리를 쥐어뜯는 것이다.
음, 고동석.
은근히 욕망에 충실한 녀석인가.
농땡이 치는 걸 좋아하는 타입 같구먼.
그렇게 계속 날이 지났다.
“오늘은 일 안 하냐?”
“조, 조금만 도와드리다 가겠습니다.”
“그러든가.”
뭐, 고동석이 일을 하든 안 하든 내 알 바는 아니다.
솔직히 암천마가가 고동석 하나 일 안 한다고 해서 문제 되지는 않으니까.
저 녀석도 사실은 땀 흘리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고동석과 단련하고 검술 수련하고 나면 해가 져 있었다.
해가 지면 자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과가 또 있었다.
그건 바로 운기조식이다.
내 안의 구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해.
구천을 만든다는 건 상단전의 심상을 재구성한다는 것.
이는 비유하자면 황무지를 개간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았다.
지금 나의 상태는 구천마제 신공 구결이라는 설계도면 대로 적당히 땅 파고 철근을 박은 정도에 불과해.
그런 의미에서 육체 단련은 건물을 올릴 인력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동안 해 온 운기조식은 건물을 구성할 자재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사신관 시험까지 벌써 1주일도 안 남았군.’
순조롭다면 순조롭다.
충분히 그 안에 구천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최근 들어 너무 의욕적이게 되었는지 감지덕지한 상황임에도 욕심이 앞서고 있었다.
“하루가 고작 24시간이라니.”
모자라다. 모자라!
마음 같아선 잠도 자고 싶지 않지만.
그래선 성장에 역효과이니 쯧.
사실 암천마가 일족이라면 이런 일로 고생할 일은 없었다.
명가의 일족은 으레 가문의 넘치는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다만, 마현에겐 예외였다.
어머니가 사생아를 낳은 대가였다.
명문 세가란 율법의 기강이 바로 서야 존재할 수 있기에 위법한 어머니의 행동은 곧 처벌로 이어졌다.
그것은 내가 속한 방파의 재산이 가문 공동의 재산으로 몰수되는 것이었고.
나는 당당히 후계자가 되기 전까지 생활 지원을 제하면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뭐, 원래라면 더한 처벌이었겠지만.
예를 들면 낙태, 신생아 살해 등등이랄까.
그래도 한때 어머니가 가문에서 특출난 인재였고.
암천마가 가주가 할아버지였으니 이 정도로 끝난 거다.
뭐, 상관없어.
이미 그렇게 한세월을 살아 봤으니 익숙할 만하잖아?
그리고 늘 그렇듯.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갈 뿐이다.
운기조식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수련장에 찾아온 이는 한라였다.
한라…….
전에 나와 운동하고 나서는 그저 멀찍이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차까지 냈는데 오늘 돌아왔나 보다.
“다시 운동할 마음 생겼어?”
“윽, 그런 거 아니거든요.”
한라가 질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냥, 연차 잘 쓰고 왔다고 보고하러 온 거예요.”
“그러냐, 근데 웬일로 연차를 썼대?”
솔직히 조금 궁금했다.
전생의 한라는 연차를 거의 쓰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내 전속 비서는 크게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간의 내 일과는 술 먹고 자는 것의 반복이었으니까.
“삭신이 쑤셔서 쓴 건 아니구요. 그냥 뭐, 저도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나고 놀다 왔어요.”
“어디 갔는데.”
“서울 뭐, 이곳저곳이랄까요?”
“여행인가? 그렇다면 내 선물도 사 왔겠지?”
“네? 참나 뭘 그렇게 당연하게 요구하시지……?”
한라는 어이가 없다며 실소를 지었다.
마현은 당황해하는 한라를 따라 피식했다.
그런데 한라는 씩 웃으며 제 핸드백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웬 작은 목갑을 건넸다.
“자요, 선물.”
“어? 장난이었는데.”
“저는 진심이에요.”
뭐야.
전생에 이런 적 없었잖아.
한라가 나를 위해 목숨을 던졌지만.
그 일을 제하면 서로 크게 주고받는 것 없는.
그저 무탈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건…….”
“짠, 도련님이 구음절맥에 적응하셨다니, 이건 제 선물이랍니다.”
어딘가 귀해 보이는 목갑을 열어 보니 영약이 있었다.
어때? 감동했지?
한라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은 사신관 시험에서 다른 분들에 비하면 준비가 많이 부족하시잖아요. 솔직히 검을 잡게 된 게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제가 해야 할 건 도련님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는 거겠죠.”
“한라…….”
과연 한라의 기대대로 나는 제법 당황했다.
거기에 이 영약.
자신도 전생에 먹어 본 적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영약 중 효과가 뛰어난 녀석 중 하나다.
물론 그건 한두 푼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생활 지원이나 받아 쓰는 처지인 지금 나로선 꿈도 꿀 수 없었다.
한라에게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분명 제 연봉의 반 이상은 할 터였다.
이건 좀 감동인데.
흐뭇한 마음으로 한라에게 말했다.
“한라, 내가 밖에서 들은 말이 있어.”
“네?”
“선심은 돼지고기까지고 소고기부터는 흑심이라는 말이야. 그런데 감히 영약을?”
나는 킬킬 웃었다.
“크크, 너, 나를 너무 좋아하는군.”
“예? 지금 뭐라는…….”
“하지만 안타깝게 됐어. 왜냐하면…….”
가문의 율법이 어쩌고저쩌고.
어머니가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내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마현이 재잘재잘 떠드는 동안 한라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갔다.
“미쳤군요. 안 되겠다. 돌려주세요.”
“훗, 그건 안 될 말씀이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한라.
나는 한라흑심환인지 뭔지를 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너의 흑심이 뭔지 몰라도 받아 주마.”
“아니, 그걸 여기서 먹어요?!”
“괜찮아. 호법이나 서 줘.”
한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래 좀 별난 면이 있는 도련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 몸이 좋아지면서 그간 억눌렸던 끼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 그건 똘끼였다.
사르륵─
입 안에서 녹은 영약의 기운.
그것이 마현의 체내를 돌았고 이윽고 하단전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으로 향했다.
한라흑심환으로 심상 재구성에 필요한 마력이 모두 모였다.
더 기다려서 무엇하리.
마현은 당장에 완전한 구천을 만들기로 했다.
한라.
전생의 너는 그저 가까운 사람에 지나지 않았지.
그러나 지금 이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는 분명 내가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달라지니 세상도 변한다라.’
씨익.
마음에 드는군.
얼마든지 바꿔 주마.
‘한라, 네가 나를 믿는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보여 줄게.’
괜히 가슴이 저릿한 기분.
누군가의 믿음을 얻었다는 건 제법 좋은 기분이었다.
불끈.
영약의 기운에 감응한 육체가 바짝 긴장했다.
지금부터 구천의 형성이 시작된다.
영약으로 인해 강해진 힘과 흐름이 상단전에 모이니 잠들어 있던 구천마제 신공 구결이 살아났다.
기틀만 잡혔던 나의 구천이 완전한 1성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구천이란 영혼의 안식처.
앞으로 내가 죽이는 모든 것들은 이곳에 안치된다.
그리고 그 총량만큼 나는 강해질 것이다.
사아아―
다음 순간, 나는 수련장에 있지 않았다.
‘여기는…….’
그렇군.
이곳이 나의 구천인가.
하늘과 땅을 이을 정도로 거대한 구천의 문이 있었다.
진무극처럼 살풍경하진 않았다.
나의 구천은 그가 완성한 구천에 비하면 이제 막 시작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저 문을 제하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마치 내가 처음 죽었을 때 얼마간 있었던 곳처럼.
이제부터 시작이다.
비로소 준비가 끝난 것이다.
내 전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들을 잡아넣을 준비가!
가까운 시일에는 가문을 멸망시키는 데에 일조했던 마재헌 일당을.
나중에는 그레이, 김새롬. 그리고 네놈들의 동료까지.
‘싸그리 잡아 처넣어 주지!’
하지만 나의 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때는 심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마력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뭣?!”
갑작스럽게 몸 안의 마력이 급증했다.
영약 때문인가?
아니다, 이건…….
‘구음절맥 중 하나가 완치됐어!’
그 놀라운 변화에 입이 벌어졌으나,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진무극과 천여령이 한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구음절맥을 극한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기틀이 잡히기 전 구음절맥은 사용할 수 없는 경맥이었다.
기틀이 잡힌 후에는 음기만 통할 수 있는 경맥이었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쌓여있던 음기를 모조리 흡수했고, 전보다 더 강한 경맥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네? 도련님 뭐가 잘못됐나요?”
“아, 아니 그게 아니야.”
눈을 동그랗게 뜬 한라를 진정시켰다.
“내가 너무 잘나지고 있어……!”
“……”
……뭐야 그게.
한라의 표정이 무덤덤해졌다.
* * *
어느덧 사신관 시험이 하루 남았다.
철컹―
육중한 쇳덩이가 땅에 떨어졌고.
그 위로 땀이 비처럼 내렸다.
“후우……”
상의를 벗은 마현의 몸.
그것은 한 달 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탄탄한 대흉근과 갈라진 복근이 땀에 반질반질 빛났다.
강력해진 하체로 입는 옷마다 건강미가 묻어났다.
[근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체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하였습니다.]
보람찬 한 달이었다.
사신관 시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다 박살 낼 수 있겠어!
씨익.
근자감.
근육 가득한 자신감이라는 뜻이라고 들었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마현
레벨: 1
업적: ―
은총: ―
특성: 팔음절맥
스킬: 적령 소환
───종합 능력치───
[체력: 19], [근력: 19], [민첩: 19], [마력: 31]
당초 목표했던 건 출발선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출발선?
이 정도면 부숴 버렸다고 할 수 있지.
원했던 평균 능력치 15를 넘어섰으니까.
‘육체 수준은 대동소이하겠군.’
원래 기준으로 삼았던 건 운동 시작 전의 마현 자신이었지만.
이제는 놈들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상태창에서 달라진 건 이뿐이 아니었다.
구음절맥이 팔음절맥으로 바뀌었지.
이는 구천마제 신공 덕이었고.
덕분에 강해진 마력으로 나는 더 강한 중량으로 단련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구천마제 신공이 특성에 남지 않았다.’
보통 심법이나 무공을 익히게 되면 시스템에 의해 상태창에 남았다.
그렇게 한 번 익힌 특성이나 스킬은 보다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이 점으로 나는 한동안 생각에 빠졌었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그런가.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난 엄연히 1성에 올랐으니까.
그건 나의 구천이 완성된 시점에서 확실했다.
결국, 남은 답은 하나였다.
‘구천마제 신공은 시스템으로 규정할 수 없는 힘이다.’
실제로 구천마제 신공은 내공이나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최초로 구천을 형성할 때를 제하면 필요 없는 힘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영력을 다루는 힘이니까.
상태창에는 영력이 없지.
그렇다는 건.
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는 걸까?
잘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공상의 영역이었으니까.
아무튼, 진무극 고마워! 천여령 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라. 넌 최고야.
힘의 정체보단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하는 게 도리다.
짝짝짝!
그때 고동석이 손뼉을 쳤다.
‘훗, 녀석…….’
“마현 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동석은 결국 사신관 시험이 하루 남은 오늘까지도 내 수련을 도왔다.
물론 그 말은 매일 같이 땡땡이쳤다는 뜻이었다.
“너는 일 안 하냐?”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 괜찮습니다.”
가문의 월급이 땅에 떨어지는군.
뭐, 내 알 바 아니지만.
고동석은 그런 마현을 조금은 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니꼬운 마음이었던 그였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인생을 불태우는 마현을 보니 괜히 자신도 감화되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오래 가지 않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마현은 소문처럼 게으르지도 쓰레기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원래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동석은 마현의 변화를 봐왔다.
그 야위고 초라했던 마현의 몸이 탄탄하게 되는 과정을 함께 한 것이다.
‘저 몸의 반은 내가 만든 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뿌듯한 마음이 컸다.
이게 인생을 살아가는 맛이란 거겠지?
“솔직히 저는 마현 님이 별로였습니다.”
“은근 돌직구구나.”
“하지만 지금은 암천마가에서 가장 기대되는 분입니다.”
고동석이 미소 지었다.
이렇게 건실한 사람의 미래가 궁금했다.
“고맙다. 기대해도 좋을 거야.”
“저, 근데 궁금합니다.”
“뭐가.”
“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겁니까?”
곁에서 계속 지켜봐 온 고동석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마현의 강행군은 도저히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고동석은 어떠한 강력한 계기가 있더라도 마현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달라지는 데 이유가 필요해?”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까.”
마현은 슬쩍 미소 지었다.
이유.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야 전생의 나의 삶 전체가 이유였으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부끄럽게 그걸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어딨어.”
그 말에 고동석은 스스로 답을 얻었다.
“부끄럽다라.”
가혹한 단련을 해 왔던 마현이 한 말이라서 그런가.
왠지 묵묵히 뜻을 품고 정진하는 남자의 말 같았다.
“사내답군요.”
“그래, 나도 달려 있어.”
둘은 서로 피식 웃었다.
‘마현 님. 역시, 내가 알던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생각보다 사려 깊고 뛰어난 면이 많아.
물론 여전히 암천마가 일족들에 비하면 떨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마현 님이 사신관 시험에서 후계 자격을 얻는다면.’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를 위해 움직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건실한 사람이 문제 많을 리 없으니까.
“아, 고동석 팀장님 여기 계셨습니까?”
불쑥 수련장에 찾아온 이는 흑검대 신입 김세창이었다.
“고동석 팀장님 요즘 부쩍 잘 안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설마 땡땡…….”
“시, 신경 쓰지 마라. 어련히 잘하고 있으니까.”
제길, 최근 순찰을 너무 게을리하긴 했다.
“근데, 두 분이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 마현 님의 단련을 보…… 아니, 단련하시던 중에 나도 이곳에 들린 거다.”
“아~ 그렇군요. 단련 좋지요. 확실히 몸이 좀 다부져지신 것 같습니다. 도련님!”
“그래, 보는 눈이 있구나.”
김세창이 히죽 웃었다.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마현을 보니 계획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물론, 그 계획은 사신관 시험 직전에 실수를 가장해 마현의 자신감을 박살 내고 정신을 흔들어 주는 것이다.
‘녀석은 그런 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뭐, 모르는 편이 나을 거야.
좀 아플지도 모르거든.
“오, 그나저나 검을 준비하십니까? 검 하면 또 접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네가 날 도와?”
“제가 또 검을 10년 넘게 잡았습니다. 단순 기량으로는 흑검대에서도 상위일 겁니다.”
마현의 눈짓에 고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하는 녀석이긴 합니다.”
“그래? 그럼 네가 뭘 할 수 있지?”
“육체 단련도 좋지만, 검은 또 감각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특히 실전 감각 말입니다.”
“실전 감각?”
음, 정말 중요한 요소긴 하지.
김세창의 말은 사실이었다.
과연 10년 차 검객이랄까. 뭐가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다만. 김세창이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김세창. 약간 앞잡이 같은 놈이었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놈이 암익파 마기헌의 측근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후에 가문이 멸망하는 날.
김세창은 가장 배신에 앞장서던 놈이라는 걸.
“실전 감각 좋네. 대련이라도 해 주려나?”
“앗, 괜찮으시다면 제가 마현 님의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김세창은 사근사근 웃었다.
마치 마현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웃기는 녀석이야.
제 놈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속이 뻔히 보이거든.
“좋지. 마침 나도 내 수준이 궁금했거든.”
그리고 검귀의 무공이 어느 정도 일지도 말이야.
마현의 웃는 눈매가 서늘하게 빛났다.
6화. 처맞기 좋은 계획
김세창에게 누군가를 은근슬쩍 엿 먹인다는 건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그야, 한평생을 그런 식으로 경쟁자들을 제쳐 왔던 그였으니까.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니까.’
제아무리 명가의 일족이라도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고.
자신을 위하겠다는 사람을 마냥 내칠 수는 없다.
하물며 친절하게 도움을 주겠다는데 안 받을 수가 있을까?
마현에게 갑작스러운 대련임에도 성사가 된 건 다 이런 심리 덕분이다.
히죽.
‘하지만 그게 실수라는 거지. 멍청한 마현 님아.’
거지도 아니고 주는 대로 넙죽 받으면 쓰나 이 말이야.
김세창이 세운 계획은 간단하고도 확실했다.
도와주려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
도움을 주는 척!
가르침을 주는 척!
호감을 쌓다가 더 수준을 높여도 되겠다는 칭찬과 함께 강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적당히 치열해지면……!
‘아이고! 이런, 그만 실수를 저질러 버렸네?’
도련님의 실력이 생각 이상이어서 이것도 막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크크.
감히 도움을 주려던 은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법.
지독한 고통과 낭패감에 휩싸이면서도 차마 괜찮다고밖에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여태 실패한 적이 없었다.
김세창은 마주 선 마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마현 님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또 오랫동안 검을 든 입장이니 안전하게 감각을 이끌어 드리겠습니다!”
“뭐, 기대할게.”
“김세창, 혹시라도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
“하핫, 걱정하지 마십쇼!”
고동석은 지금 상황이 영 탐탁지 않았다.
김세창은 늘 어딘가 구린내가 나는 녀석이기도 했고.
알게 모르게 흑검대원들 간의 결속을 뒤흔드는 낌새가 있었으니까.
‘일단은 마현 님의 허락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순수 기량을 겨누는 자리로 날이 없는 검에 마력도 쓰지 않는다.
고동석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끼어들 수 있도록 준비했고.
그렇게 대련이 시작됐다.
“시작은 우선 가볍게 해 보겠습니다.”
김세창은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고 검을 휘둘렀다.
아주 뻔하디뻔한 궤적으로.
집중만 하면 처음 검을 쥔 이도 막아 낼 수 있게끔.
휙! 휘익!
마현은 대충 피해 냈다.
그리고 불쑥 검을 찔렀다.
캉!
‘뭐야, 시발.’
김세창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만큼 마현의 찌르기는 꽤 날카로웠으니까.
물론, 막아 내긴 했다만 평생 검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치고는 빈틈을 확실하게 잡았다.
“너무 가볍게 할 필요는 없을 듯해.”
“아, 하하! 역시 마현 도련님. 한 달도 안 됐는데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데요?”
마현은 자신의 칭찬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시큰둥했다.
하찮은 새끼가 기고만장해 가지고.
그럼, 원하시는 대로 수준을 올려 드려야지.
다음 순간, 김세창의 자세는 보다 정교해졌다.
펼쳐지는 검의 궤적은 좀 더 변칙적으로 되었다.
슉, 쐐액!
어떨 때는 느리게 베어 오다가 급격히 빨라졌고.
때로는 순간적인 전진 보법으로 허를 찌르기 시작했다.
크크, 한 달 차에게는 조금 벅차려나?
뭐,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살짝 봐주면서 해 주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왜인지 마현은 도통 틈을 내주지 않았으니까.
김세창의 심기가 뒤틀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 새끼…… 눈이 제법 좋은데?’
한 달을 거의 독학 한 거로 안다.
딱히 대련 상대도 없이 홀로 검을 휘둘렀던 것도 알았다.
그래서 좀 애먹을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녀석은 오히려 자신의 검극에 여유롭게 반응했다!
어디 이것도 반응하냐?
그렇다면 이건 어떤데!
아니, 시발 뭐야!
시간이 갈수록 김세창의 안색은 딱딱해졌다.
사샥, 쐑! 스핏!
왜, 왜 안 맞는 거지??
김세창이 만드는 궤적은 점차 현란해졌다.
어느 순간 당초 예상했던 50% 전력 이상의 수준으로 상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현은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진무극의 기억을 되새기며 검을 수련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천여령과 매일 같이 대련을 했다는 의미다.
천마신교의 후예의 검을 셀 수 없이 눈으로 좇았는데.
이제 와서 김세창의 검?
‘존나 느리다.’
단련된 것은 검술만이 아닌 안목도 함께였으니까!
“으극……!”
김세창이 경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
어느 순간 자신의 궤적은 모조리 읽히고 있었다.
검으로 막기보단 피하고 흘리는 것이다.
거기에.
캉! 카각!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마현과 자신의 검이 맞부딪히며 불꽃이 일었다.
이어지는 마현의 검은 흐름을 그대로 이어 가 자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0년간 검을 수련했던 자신을 고작 한 달밖에 수련 안 한 녀석이 압도하는 것이다!
‘내가, 내가 기량에서 밀린다고?’
인정할 수 없어!
검을 쥔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그때.
“크악!”
마현의 검이 김세창의 빈손을 친 것이다.
“실전이었다면 손이 떨어졌겠는데?”
“크으…….”
김세창은 보았다.
손목을 부여잡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현을.
그 눈빛에 담긴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을.
“조금 지루한데. 이게 최선이야?”
“아, 아닙니다. 하하, 생각보다 대단하신데요? 저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젠장, 생각보다 마현의 실력이 나쁘지 않잖아.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번에 반드시 마기헌에게 잘 보여야 했으니까.
‘그래, 오히려 좋아…… 더 치열하게 가면 더 그럴싸할 테니까!’
“10년을 했다며. 놀면서 했나? 고작 이 정도였으면 여기서 그만하지.”
고작 한 달 배운 녀석이…….
‘건방 떨지 마, 새끼야……!’
실전이 뭔지 제대로 보여 주마.
“도련님 기술이 제법 뛰어나십니다. 하지만 아직 전 제 실력의 반도 안 꺼냈습니다. 하하.”
“더 할 수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부디 제 실력을 더 보여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래라 그럼.”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마현이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때부터 김세창의 눈빛은 돌변했다.
그의 몸짓도 움직임도 더는 단순하지 않았다.
격렬한 실전 경험을 통해 누적된 동작들이었다.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수싸움을 걸어오는 심리전이었다.
무려 자신의 70%의 실력.
평상시 자신이 전투할 때 발휘하는 수준이었다.
즉, 진심으로 검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헌터 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지.
‘자기가 가진 실력의 30%는 숨겨라.’
그것이 자신을 살리거나 혹은.
상대를 죽일 비장의 수이니까.
김세창은 실수인 척 진심 전력을 드러낼 순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반드시 마현의 콧대를 박살 내고 싶었으니까.
카가각!
‘이거 더 이상 대련이라 볼 수 있을까?’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고동석.
어느새 찰나에 수십 번 검을 부딪치는 둘을 보며 말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말리기엔 도련님이 너무나도 여유롭다.
오히려 김세창 저놈이 밀리는 것 같기도 한데.
혼란스럽구만.
도련님이 이렇게나 검을 잘 다뤘다는 게.
‘설마 그동안 보이지 않게 침실에서 수련한 거 아니야?’
마현만이 알 일이었다.
카가각!
“김세창, 네 덕분에 좀 알 것 같다.”
“뭐, 뭐가 말입니까?”
“내가 제법 뛰어나다는 거?”
정확히는 검귀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이다.
10년 묵은 김세창에게 기술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니까.
“아니면 네가 못하는 건가?”
빠드득!
그 말이 치욕스럽게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김세창이 이를 악물었다.
눈에 살기 도는 거 보소.
너무 무섭구만.
캉! 카앙!
시발시발시발!
저 기고만장한 사생아 새끼. 창녀 새끼가!
김세창은 더 이상 대련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었다.
가문에서도 쓰레기 취급받는 새끼한테 어떻게든 일격을 먹여야 했다.
모든 생각은 그 뒤의 일이었다.
‘지금이다!’
마침내 바라던 순간이었다.
그럴싸한 허초를 내질렀고.
마현의 시선과 어깨가 미끼를 문 것이다.
‘애새끼처럼 울게 해 주마!’
[스킬 ‘회천’을 사용합니다.]
허초를 막기 위해 출수하는 마현의 공격을 완벽히 흘렸다.
동시에 그 흐름을 살려 찰나에 몸을 회전한 김세창의 검극이 마현의 머리를 향했다.
쐐액!
“김세창!”
고동석이 놀라 소리쳤다.
저건 김세창의 스킬이었으니까.
즉, 마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대련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가!’
막을 수 없는 그 일격이 마현에게 펼쳐졌다.
하지만.
“뭣?!”
김세창은 스킬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경악했다.
다음 순간 보인 마현의 움직임은 가히 신기에 가까운 거리 조절.
즉, 천여령의 움직임이었으니까.
스핏.
스치듯 피해 낸 마현.
둘의 거리가 지극히 좁혀졌다.
“으아아!”
김세창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스킬 ‘작섬’을 사용합니다.]
이젠 실수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세창은 멈출 수 없었다.
슈아악!
푸른 마력을 머금은 검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캉!
“…….”
땡그랑.
그보다 더 빠른 건 마현의 검.
진무극이 펼쳤던 검초였다.
대련을 중지시키러 달려오던 고동석도.
흥분했던 김세창도 모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모든 순간이 예상 밖이다.
처음과 중간 급변했던 마지막까지.
둘은 보고 겪었음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수련장에는 오직 정적만이 흘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마현뿐이었다.
“김세창.”
“네, 네?”
김세창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흥분했던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맹수 앞에 놓인 벌레가 된 것 같았다.
“너, 스킬을 사용하던데. 이 대련에서 마력 사용은 금지가 아니었나?”
“그, 그게…….”
김세창은 원래 준비했던 말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무척이나 그럴싸했었고.
여태껏 한 번도 안 통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덜덜덜.
눈앞의 마현에게는 도저히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왜인지 숨을 조여 오는 이 긴장감에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사, 살려 주십쇼!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죄송합니다!”
김세창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댔다.
그런 김세창을 내려다보는 마현의 눈빛은 사형대의 서늘한 칼날 같았다.
‘무슨 사람의 눈빛이…….’
그 살벌함에 고동석은 손에 땀이 흘렀다.
“마, 마현 도련님…….?”
“푸하하!”
마현이 배를 잡고 웃은 것은 그때였다.
“야, 김세창. 내가 널 죽인다고 했냐? 왜 그렇게 쫄아.”
그러고는 피식 웃는 것이다.
김세창의 꼴이 웃겼다는 듯이.
“덕분에 내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오히려 사신관 시험에 앞서 자신감을 얻었달까?”
“하, 하핫! 다, 다행입니다! 저, 그러면…… 봐주시는 겁니까?”
“너 나이가 몇이지?”
갑작스러운 나이 물음이었지만.
김세창은 의문을 표할 수 없었다.
“스, 스물일곱입니다.”
“스물일곱!”
고개를 주억거리는 마현.
“다 큰 어른이잖아. 애새끼도 아니고.”
“예, 예?!”
“그럼 책임질 줄도 알아야지!”
방긋 웃는 마현의 어깨 너머로 주먹이 반짝였다.
빠아악!
“꺽…….”
전력이 담긴 정권에 김세창은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7화. 사신관 시험일
“고동석, 이놈 어떻게 할 거야?”
하얗게 뜬 눈으로 기절한 김세창.
마현은 근처에 떨어진 누군가의 이빨들을 대충 발로 치웠다.
“원래 좀 껄끄러운 놈이었습니다.”
“그러냐, 잘됐네.”
김세창은 이번 기회에 자르기로 했다.
가문에 백해무익한 암 덩어리 같은 놈이니 잘됐네, 잘됐어!
분명 녀석이 믿는 구석이 있었을 테지만.
모든 일은 놈이 기절한 사이에 처리될 것이다.
손 쓸 틈도 없이.
“그럼 부탁할게.”
“네, 확실히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도련님.”
“왜?”
돌아본 마현의 눈엔 허리 숙인 고동석이 있었다.
“흑검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아닙니다. 이번 일은 팀장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고개 들어 고동석.”
마현은 고동석에 다가갔다.
“그저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였을 뿐이다. 네 탓은 없어.”
“……도련님.”
“난 그보다.”
툭.
마현의 주먹이 고동석의 가슴에 닿았다.
“네가 완전한 내 편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고동석은 생긴 대로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녀석이다.
가문을 향한 충의는 전생의 내가 보증하는바.
‘지금 내 곁에는 한라뿐이다.’
하지만 암천마가에서 높이 올라가려면 지지자들이 필요하지.
그래야 더 많은 정보와 때로는 힘을 끌어 쓸 수 있다.
내 곁엔 믿음직한 녀석들이 필요해.
그런 점에서 고동석은 마음에 들었다.
틀림없이 중요할 때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다.
“마현 도련님…….”
가슴에 닿은 마현의 주먹.
고동석은 왠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 우러나왔다.
사실 마현 님과는 별다른 일이 없었지.
알게 된 지도 고작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함께한 일도 단순한 운동에 불과했고.
다만, 그 시간은 고동석에게 있어 마현이란 사람을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마현은 진심을 다해 살아갔다.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 모르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저 모습을 보면 괜히 함께하고 싶어졌다.
그러니 이 뜨거움은 아마 마현 님을 향한 충의일 것이다.
고동석에게 고민은 없었다.
“물론입니다. 도련님이라면 좋습니다.”
“결정이 빠르네.”
“제가 좀 빠릅니다. 생각이 단순해서.”
마현은 피식 웃었다.
“더 좋네.”
그렇게 시험 전날 김세창의 대련이 끝났다.
* * *
두 시간 전 마기헌은 문자를 하나 받았다.
「똘마니 김세창: 마기헌 도련님! 곧 재밌는 소식이 갈 겁니다! 기대하십쇼!」
피식.
시험 전날 마현에게 작업을 한다라.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아는군.’
김세창. 하여간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런 점이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욱씬.
마기헌의 인상이 찌푸려진 건 그때였다.
어린 시절 마현을 괴롭히다 역으로 꺾였던 손가락이 통증을 호소했다.
하여간 조금만 그놈을 생각하면 손가락이 아파 온다니까.
이러니 마현을 안 조질 수 있겠어?
이 통증은 신기하게 마현을 주기적으로 패 주면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소식이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너무 안달 볶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때였다.
똑똑!
― 도련님 김세창 건으로 왔습니다.
“들어와.”
훗, 늦지 않게 왔군.
과연 어떻게 일을 처리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비서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자, 말해봐. 김세창이 어떻게 했는지.”
“그, 그게…….”
비서는 저 자신도 믿기지 않는 투로 말했다.
“김세창이 잘렸습니다.”
“그래…… 아니, 뭐?!”
뭐라고?
갑자기 김세창이 잘렸다고?
“뭔 개소리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 그게,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아니, 그게 사실? 허허! 이런, 미친!”
쾅! 쨍그랑!
시발! 김세창!
이 병신 새끼가 대체 뭘 한 거야!
뭘 했길래 지가 잘리는 거냐고!
‘설마 재밌는 소식이란 게 이런 거였나?!’
퍽도 재밌다 천한 새끼가!
비서는 박살 나는 물건들을 피하며 브리핑을 계속했다.
“김세창이 한 시간 전에 흑검대에서 잘리고 추방되었습니다. 사유는 일족 상해 미수로 인한 퇴직이랍니다.”
“상해미수? 상해도 아니고?”
“예…… 대상이었던 마현 님은 아무런 상처가 없던 거로.”
“뭐? 그럼 김세창이 그냥 처 발렸다는 거잖아.”
크크크.
마기헌은 헛웃음이 나왔다.
김세창이 상상 이상으로 병신이었으니까.
‘어떻게 구음절맥인 녀석한테 처 발린 거야?’
그게 더 궁금해 미치기 시작했다.
“아마 곁에 있던 고동석 팀장이 김세창을 막아 세운 게 아닐지요.”
“아, 그 고지식한 놈이 곁에 있었어?”
흠, 그러면 아주 납득 못 할 건 아니지만.
근데, 아무리 고동석이 곁에 있다고 해도 미수로 끝났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됐든 확실한 건 김세창은 쓸모없었고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단 거다.
“하…… 가지가지 하는군.”
“도련님…….”
“가 봐. 애들 불러서 깨진 거 청소시키고.”
비서가 나가자, 마기헌은 차분히 호흡을 정돈하며 이를 갈았다.
욱씬거리는 손가락을 보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방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검은 립글로스의 여인.
자신의 어머니 마지영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아, 어머니. 괜찮습니다. 웬 멍청한 게 기분을 언짢게 했을 뿐입니다.”
“아랫것들은 그게 문제긴 하지. 뭔가 믿고 맡길 수가 없단다.”
“하, 그러게 말입니다.”
마지영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자신을 쏙 빼닮아서 영특한 것이 귀여웠으니까.
“사신관 시험 준비는 괜찮고?”
“네, 물론입니다. 그 정도 시험은 뭐, 아무것도 아니죠. 아시잖아요. 제 실력.”
“그래, 그래야 암익파의 후예라 할 수 있지. 일단 후계자가 되렴. 그럼 네 형이 길을 깔아 줄 테니.”
마기헌의 형 마재헌이 후계자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언젠가 소가주가 되어 암천마가를 암익마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암천파의 집권이 끝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어.
그때가 오면 암익파가 다시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중추에는 자신의 두 귀여운 아들이 활약할 테고.
‘결국 가문의 운명은 내 손에 따라 움직이게 되겠지.’
모든 것이 더없이 순조로운 상황이다.
다만.
“그나저나 그 더러운 계집년의 아이도 시험에 참가한다던데.”
“아, 마현 그놈이라면 맞습니다.”
“아들…….”
어딘가 서글픈 얼굴로 마기헌의 얼굴을 쓰다듬는 마지영의 손.
다정한 행동과 달리 마기헌은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의수.
마지영의 한쪽 팔은 의수였다.
마지영은 어린 시절 참가했던 사신관 시험에서 마현의 어머니에 의해 팔이 잘렸기 때문이다.
“어머니, 제가 그 더러운 놈들과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겠습니다.”
“그래, 너밖에 없구나.”
살갑게 웃는 마지영.
마기헌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반드시 마현을 끝장내겠다는 듯이.
‘마현. 너 따위가 시험에서 활약하거나 후계자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사신관 시험에서는 경쟁이 치열해 많은 것이 묵과되지.
경우에 따라서는 우발적인 살인까지도 말이야.
그러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마현!
* * *
사신관 시험 당일.
암천마가의 수많은 방파가 사신관이 있는 암흑산 입구 앞에 모였다.
그 모습은 어딘가 천민들이 보는 수능 시험장 앞의 모습과 비슷했다.
암천마가의 사용인들이 북치고 장구 치며 마가 일족의 시험을 응원했고.
각 방파의 형제나 부모는 제 자식을 독려했다.
나에겐 부모도 형제도 없었다.
하지만.
“도련님.”
“한라, 영약 값하고 올게.”
“치, 이상한 말 마시고 죽지나 마세요.”
내게는 한라가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내 안위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안 죽어 걱정 마.”
전생에서도 안 죽었거든.
대신, 무지 수치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리고 내게는 고동석도 있었다.
남사스럽게도 녀석은 제 흑검대원들을 끌고 왔다.
“아자아자, 흑검대 일동은 마현 도련님을 응원합니다!”
“야야, 그러지들 말아라.”
에잇,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고동석이 웃으며 다가와 손을 건넸다.
“도련님.”
“고동석, 네 덕분에 한 달이 보람찼다.”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잊지 마십쇼. 적어도 마현 님 몸의 30%는 제 지분입니다.”
“뭐라는 거야.”
“다치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피식.
왜 이렇게 내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면 들어 줘야 하는 게 도리다.
“그래, 죽지도 다치지도 않을게!”
이 귀여운 녀석들을 보니 꼭 그래야겠다.
그때 시험 감독관이 다가왔다.
“마현 님, 잠시 후 사신관에 입장할 차례이니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려 성좌들도 지켜보는 시험인 만큼 입장식이 있었다.
각 방파의 자제들을 순서대로 보여 주는 것.
마현은 감독관을 따라 대기석으로 향했다.
가기 전에 한마디 정돈 괜찮겠지.
마현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둘에게 말했다.
“오히려 기대해도 좋을 거야.”
내 목표는 고작 생환이 아니라.
이 시험에서 전생과 달리 많은 걸 바꿔 내는 거니까!
마현이 암흑산으로 사라졌다.
한라와 고동석만이 남았다.
“갔네요.”
“가 버렸군요.”
“…….”
“…….”
어색, 어색.
둘은 면식은 있었으나 서로 접점은 없었다.
그저 누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 뿐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헤어지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고동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저, 한 비서님은 마현 님에 대해 잘 아십니까?”
“아, 네. 나름 전속 비서니까요?”
눈을 빛내는 고동석.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있었다.
“저, 사실은 최근에 마현 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잘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아, 혹시…… 마현 님을 따르고 싶으신 건가요?”
“맞습니다. 그러려 합니다.”
“네?!”
아니, 진짜로? 마현 님을?
한라는 조금 믿기지 않았다.
그저 친한 운동 메이트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걸 넘어서 마음을 얻어 냈다니!
현재 마현의 방파는 세력이 전무했다.
그러니 후에 가문에서 입지를 다지고 싶다면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내야 했다.
그런데 근 며칠 사이에 흑검대 팀장을 품은 것이다!
‘하…… 미친, 뿌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쓰럽기만 했던 우리 마현 도련님이 이렇게나 성장하다니!
음음, 이 맛에 비서 하는 거지. 아아, 마현 님…….
한라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훗,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세요.”
선배로서 친절하게 말해 줄 테니까.
“저, 그럼. 마현 님의 어릴 적 면모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셨기에 자신이 알던 면과 완전히 반대되는 소문이 난 건지 궁금했던 것.
“어릴 적이라…… 마현 님은 뭐랄까요.”
한라는 제법 오랫동안 마현을 보좌했으나 이 질문에 떠오르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어머니를 엄청나게 닮으신 거로 알아요.”
“어, 어머니라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암천마가에서 마현의 어머니.
‘마하윤’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까.
현 마가의 가주 직을 승계한 암천파의 후예이자,
차기 소가주로 점쳐질 정도의 실력자였으나.
일말의 자비도 없는 면모와 저돌적인 성격으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암천파와 손절하고 자신만의 방파를 만들었고.
나아가 사생아까지 낳았으니.
암천마가에서 마하윤이란 악몽이었다.
어, 어쩐지 마현 님의 얼굴이 누굴 닮았나 했건만…….
마하윤을 쏙 빼닮았던 것.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어떤 게 말입니까?”
“마하윤 님의 아버님이 사신관에 계실 테니까요.”
고동석은 반사적으로 사신관이 자리한 암흑산을 보았다.
마하윤의 아버님이라면…….
암천마가의 가주였으니까!
‘그럼 가주님께서는…… 손절한 딸의 자식을 보시게 되는 건가?’
고동석은 왜인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암천마가주는 규율을 중요시하던 분.
규율의 오류 그 자체인 마현을 어떻게 볼지는 너무나 뻔했으니까!
그 시각 사신관에서는.
“암성파 마현 입장!”
마현의 입장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란한 북소리를 들으며 사신관에 들어섰다.
그러자 마현을 맞이한 것은 드높은 단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문의 중진들이었다.
“저 아이가…….”
“마하윤의 아들이로군.”
“사생아, 가문의 오점이 감히 어딜…….”
사생아의 출현에 단상의 분위기가 전과 달리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그들의 중심에는 가장 차갑고 깊은 눈을 지닌 이가 있었다.
암천마가주 마휼.
그의 냉엄하고도 지독한 살기가 사신관에 광풍처럼 몰아쳤다.
‘오랜만이네요. 할아버지.’
마현과 마휼의 시선이 교차했다.
8화. 속 썩이는 것도 유전인가
띵!
[별자리 연회가 진행 중입니다!]
[성좌들이 사신관 시험을 지켜봅니다!]
[현재 참석자 수: 412]
사신관에 입장하자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수백의 성좌들이 이 시험을 지켜보는 것이다.
과연 사신관의 천장에 어두운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그 하늘에 수 놓인 수백의 별들이 각각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물론, 입장식을 하는 수험자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이 턱 막혀 오는 긴장감에 두리번거릴 수 있는 용기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살을 찌르는 듯한 기운을 여유롭게 받아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 아는 얼굴이군.’
사신관의 모든 이들이 오직 나만을 주시하고 있다.
누군가는 가문 오점의 출현에 딱딱하게 굳었고.
누군가는 악몽 같던 지난날의 마하윤이 떠올라 질색했다.
누군가는 깊은 앙금에 이를 갈았다.
적지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느낌.
그래, 전생에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지.
당시의 나는 바짝 굳고 말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 불온한 공기 속에서 나는 씩 웃었다.
너희가 나를 그렇게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지금의 난, 너희가 알던 사람이 아니니까!’
쿠구궁─
그때, 온몸을 쥐어뜯는 듯한 기운이 장내에 몰아쳤다.
무척이나 강한 존재가 내뿜는 기운!
당연하게도 나는 그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암천마가주 마휼.
그의 눈빛이 나를 꿰뚫을 것만 같다.
씨익.
할아버지.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돼.
천천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다 박살 내고, 당당히 곁으로 가 줄 테니까!’
* * *
마휼은 입장식을 거행하는 마현을 보았다.
그의 진한 눈빛에는 오만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
‘마현…… 저 녀석만 없었다면.’
제 어미를 갉아 먹은 저놈만 없었다면…….
모든 것이 순탄했을 터였다.
차기 소가주도, 암천파도, 마하윤도.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뒤틀렸다.
저 마현의 존재로 인해서.
‘제길, 마하윤…… 이 고얀 놈.’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속만 썩이다가는 구나.
정말이지 악몽 같은 나날이었다.
‘저 빌어먹을 놈이 마현인가.’
마현의 등장에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문제아였던 딸이 낳은 문제아.
문제 덩어리 그 자체였으니까.
“어머, 척 봐도 품위가 떨어지는 것 같은데.”
“뭐, 없이 자랐으니 별수 있겠어?”
“하여간 가문의 규율을 어기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인 건지.”
마휼에게는 갓난아기 이후로 처음 보는 마현이었다.
가문의 규율을 어긴 마하윤과는 연을 끊어야 했기에.
‘마현, 네놈도 나를 싫어하겠지.’
제아무리 혈연이라고 해도, 제 어미의 죽음을 방조했으며, 일족들의 차별에도 눈길 하나 안 준 자신이다.
그러니 마휼은 마현과 앙숙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마휼은 눈을 의심했다.
‘웃어……?’
마현이…… 자신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 모진 핍박과 굴욕을 인내해 왔기에 자신을 숙적이라 여길 줄 알았던 그 녀석이.
조금도 개의치 않다는 듯이 웃어 보인 것이다.
“…….”
피는 어디로 가지 않는 건가.
닮았구나. 마하윤의 환생이라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저 못난 놈을 보면 볼수록 가슴이 시큰거렸다.
하여간 속 썩이는 것도 유전인가 보다.
마휼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그림자에 숨어 있던 비서장이 나타났다.
비서장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직접 키워 낸 믿을 수 있는 손발.
마휼은 아무도 들리지 않게 전음으로 말했다.
― 신의의 행방은 어떻게 됐지?
― 그게, 최대한 알아보고는 있지만, 아직입니다.
― 쯧…… 알았다.
신의라 불리는 것들은 왜 하나같이 쥐새끼처럼 숨어 사는지 모르겠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만큼 쓸모없는 건 없거늘.
도대체 무얼 위해 의사가 된 건지 모를 개자식들이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구나!’
마휼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살기가 되어 표출되었다.
“가주님께서 마현을 무척이나 증오하시나 봐요.”
“저 표정을 보라고. 오늘은 함부로 입 열지 말자고.”
“모두, 가주님의 신경을 건들지 않도록 해요.”
저 머저리들은 자꾸 개소리나 한다.
화가 나는구나! 화가 나……!
가문에 제대로 된 이는 없는가!
마휼은 속으로 점점 깊어지는 분노를 다스렸다.
한편, 단상 아래에서는 사신관주가 시험에 앞서 수험자들을 한 곳으로 불렀다.
“입장한 순서대로 서라!”
그 한마디에 백 명이 넘는 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신관 시험에는 마가 혈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가에 헌신하는 여러 가신 일족 모두 참여해야 했다.
‘여기가 내 자리군.’
마현이 제 위치로 가서 어수선한 일대가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퍽!
웬 미친놈이 어깨를 친 것이다.
익숙한 얼굴인데.
“아, 미안 거기 있었냐?”
마승철. 그놈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나를 패 버리고 싶다는 듯이 주먹을 치켜들면서.
마승철, 결국 네놈도 만나게 되는군.
전생에서부터 참 질긴 인연이었다.
가문의 배신에 앞장섰으며 이후로도 사사건건 내 앞길을 막았던 놈이었다.
‘이번에는 길게 볼 일은 없을 거다.’
“벌써, 노안이 온 거냐? 죽어도 별 탈 없겠군.”
“허, 이 새끼가?”
내 말이 우스운지 마승철이 헛웃음 지었다.
하지만 밖에서처럼 덤비진 못하겠지.
여기는 모두가 지켜보는 사신관이니까.
그나저나 마승철이 여기 있다는 건 마기헌 그놈도 있다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놈이 바로 옆을 지나고 있었다.
마기헌의 눈빛이 살기등등했다.
“눈빛이 매섭네.”
“마현, 너는 죽을지도 몰라. 각오는 했겠지?”
“그런가? 너는 어떤데?”
“하, 내가 너 따위에 그런 게 왜 필요하지?”
“네가 알던 내가 아니라서?”
“킥, 지랄은.”
마기헌은 제 자리에 서며 말했다.
“최대한 도망이나 쳐라, 그럼 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여유롭게 웃으며 마현의 썩은 얼굴을 기대하고 돌아봤는데.
마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빠드득.
“하, 저 미친 새끼가…….”
하여간 천한 놈들은 하나같이……!
그래, 정 원한다면 찾아가 죽여 주마.
“정숙!”
사신관주의 말이 울린 것은 그때.
본격적으로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사신관주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사신관 시험에 관해 설명하겠다. 수험자들은 시험에 앞서 본 관주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앞으로 진행될 시험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경고에 가까운 통보에 일대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살면서 사신관 시험에 대한 주의를 듣고 자라온 이들이지만.
시험을 앞두고 듣는 것은 다른 수준의 긴장감이었다.
곳곳에서 꿀꺽이는 소리가 들렸다.
“훗,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본 사신관에서는 수험자들의 생환에 힘쓰도록 할 테니까. 물론, 그 전에 죽어 버리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말에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도 위험해지고 싶지도 않은 겁쟁이들의 울음.
그 흐느낌에 사신관주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흐음, 귀여운 녀석들.’
사신관주는 저런 흐느낌이 좋았다.
저렇게 겁 많던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고 나면 울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거나.
죽어 버리거나 해서.
“다들 알고 있겠지만, 앞으로 있을 세 번의 시험 결과에 따라 너희들의 운명이 정해진다. 가문 내에서의 직위, 역할, 가치가 이 시험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특히, 마가 일족의 경우에는 후계 자격이 결정되는 시험이지!”
재능, 잠재력의 유무로 그 대상의 가능성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
이것이 사신관 시험의 본 의의이자, 가문 내의 모든 일원이 시험을 치르는 이유다.
“물론, 이 시험에 리스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수한 성적을 지닌 이들에게는 암천마가에서 영약 암천단을 줄 것이다. 거기에 혹여나 성좌님과 계약하여 재능을 개화한 이들에게는 ‘1급 금고’에서 원하는 아이템을 고를 수 있다!”
암천단과 1급 금고!
그 두 보상의 언급에 침울했던 장내에 활기가 돌았다.
“아, 암천단?!”
“우리 아버지가 그거 드셨었는데, 경지가 한 단계 높아지셨대!”
“진짜? 1급 금고는?”
“1, 1급 금고는…… 나도 잘 몰라.”
음, 모를 수밖에.
암천단의 경우 가문의 임의 판단으로 줄 수 있는 보상이었지만.
1급 금고 보상의 경우 성좌의 선택이 필요한 보상이었다.
그렇기에 장내의 수험자들 대부분과 연이 없었다.
‘물론, 마가 일족의 경우에는 다르지.’
사신관주는 이번 기수의 마가 일족들을 보았다.
열 명이 넘는 녀석 중에 가능성 있어 보이는 건 세 녀석 정도일까.
‘암익파가 후예 양성에 칼을 갈았군.’
마승철 그리고 마기헌.
두 녀석에게서 제법 출중한 기운이 느껴졌다.
특히, 마기헌에게는 제 형인 마재헌 못지않은 재능이 보였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마현.
‘솔직히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괜히 기대된달까?’
느껴지는 기운은 평이했다.
딱 평균. 나쁘지 않은 정도?
다만, 오랜 시간 동안 사신관 시험을 맡았던 자신에겐 인상 깊은 기억이 있었다.
마하윤.
그녀는 사신관 시험에서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 일족들을 가차 없이 죽였었지.
암익파의 마지영만이 먼저 덤볐다가 가까스로 생환했다.
‘그 아이가 제 자식을 못나게 키웠을 것 같진 않으니.’
후훗, 이번 사신관 기수도 기대가 되는걸?
‘뭐, 뭐야.’
마현은 어디선가 자신을 핥는 듯한 시선에 몸서리쳤다.
사신관주의 눈빛이 이상해.
조심해야겠어.
“이제부터 혈통 증명식이 있겠다. 마가 일족은 모두 앞으로 나오도록.”
혈통 증명식.
‘드디어 때가 왔군.’
마현을 포함한 마가 일족들은 증명식을 위해 앞으로 나갔다.
본 시험 시작 전에 거행하는 이 증명식은 말 그대로 마가 혈통임을 증명하는 의식이었다.
마가 혈통이란 결국 흑마법 특화 혈통이란 것이며,
마가 일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적령 소환’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물론, 증명이란 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지.
사실상, 이 의식은 마가 일족을 위한 특혜였다.
가문의 중진들과 성좌들에게 단독으로 재능을 보여 주는 자리였으니까.
이제부터다
전생과 내 행보가 달라지는 지점은……!
혈통 증명식은 한 명씩 차례로 진행되었다.
시작은 어느 약소 방파의 소년부터였다.
“구천을 떠도는 망자야 내 부름에 응하라!”
[스킬 ‘적령 소환’을 사용합니다.]
다음 순간, 손을 뻗은 소년에게서 마력이 방출되었다.
퍼져나간 마력은 음산한 안개가 되었고, 점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그 농무는 찰나가 지나자 다시 옅어지기 시작했는데.
전에 없던 거대한 그림자가 소년의 뒤로 걸어 나왔다.
‘데스나이트인가.’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붉은빛으로 물든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적령 소환이란 떠도는 망령을 소환하는 스킬이다.
소년의 소환에 수험자들은 경악했다.
“저게 마가 일족만이 다룰 수 있다던…….”
“데스나이트. 엄청 강해 보여!”
“이게 혈통이라는 거구나…….”
하지만 가문 중진들의 표정은 못마땅했다.
“저 아이가 흑미파 마찬영이라 했나? 수준이 왜 이러지?”
“그래도 저 정도면 저번 기수의 평균점은 되지요.”
“저번 기수는 폭망이었네, 이 사람아.”
데스나이트 정도로는 마가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마찬영의 얼굴도 핼쑥해졌다.
그 이후로도 혈통 증명식은 계속되었다.
“나의 부름에 응하라!”
“구천을 떠도는…….”
“내 곁에 현현하라.”
[스킬 ‘적령 소환’을 사용합니다.]
차례로 진행된 증명식에 하나둘 적령들이 늘어났다.
인간형 언데드부터 오크 나이트, 웨어울프 등 내로라하는 마물 적령들도 등장했고.
이에 따라 반응도 점점 나아졌다.
쿠아아!
특히, 마승철이 리틀 오우거를 소환했을 때.
수험자 중 일부는 놀라 넘어졌고.
가문의 중진들도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정점은 마기헌 때였다.
“망령이여 내 곁으로.”
[스킬 ‘적령 소환’을 사용합니다.]
파스스─
전에 없던 거대한 마력의 방출.
한순간 일대를 뒤덮는 짙은 농무가 발생했고.
다음 순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날갯짓에 농무가 날아갔다.
키아아!
“저, 저건……!”
적령의 정체에 놀라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수험자도 사신관주도 가문의 중진들도 놀랐다.
마기헌의 뒤로 제 몸보다 큰 익룡이 나타난 것이다!
“데스와이번!”
“암익파가 이번에 일을 내려는가 보구나!”
“정말 오랜만의 인재네요.”
“성체가 아니긴 해도, 고작 저 나이에 이 정도라니…….”
어쩌면 차기 소가주 자질이라는 말.
훗날 마가를 이끌 인재라는 말들이 뒤따랐다.
“훗.”
마기헌은 내게 비릿한 웃음을 남겼다.
마치 자신과의 격의 차이를 느끼라는 듯이.
“마지막으로 암성파 마현의 차례다.”
후…….
내 차례로군.
새삼, 이 순간이 오니 수치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의 나는 이 혈통 증명식에서 구음절맥으로 피를 토해 가며 적령을 소환했다.
시전한 스킬에서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앙상한 스켈레톤.
사신관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날 비웃지 않던 자가 없었지.
그야, 우스웠을 것이다.
피를 토해 가며 최선을 다한 결과가 고작 최하급 언데드였으니까.
거기에 마승철이 나서서 내 스켈레톤을 박살 내기까지 했으니.
나는 그야말로 완벽한 구제 불능으로 치부되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손을 뻗었다.
“와라.”
파스스─!
몸속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령 소환은 전생에 자주 사용했던 스킬이자 기초적인 흑마법.
그렇기에 회귀했더라도 이제 와서 별다른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아아─
‘뭐, 뭐지?’
마력이 방출되지 않았다.
오히려 체내의 경맥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
그 흐름은 내게 무척이나 익숙했다.
구천마제 신공.
그 구결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영력이 아닌 마력에도 호환이 되는 건가?!
의문은 가속되었다.
‘내 안의 구천이 반응하고 있어?’
마력이 상단전으로 향했을 때.
닫혀있던 나의 구천이 개방되었고.
그 안에서 ‘무언가’ 흘러나왔다.
[스킬 ‘적령 소환’을 사용합니다.]
쿠구구─
다음 순간, 나의 그림자가 확장되었다.
그 중심에서 한없이 짙은 칠흑이 소용돌이쳤다.
“뭐, 뭐 하는 거냐. 마현!”
마승철이 놀라 소리쳤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 마현이 저지르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적령 소환이라 할 수 없었으니까!
다르다!
평범한 적령 소환이 아니다!
처억.
칠흑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이 손이 나타나 땅을 짚었다.
‘이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음산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스켈레톤이었다.
‘뭐지…… 스켈레톤?’
내 한 달의 노력은 사실 별거 아니었던가?
그럴 리가 없다!
이는 내 상태창이 보증할 터였다.
그럼 이 스켈레톤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검흔.’
소환된 스켈레톤의 뼈에는 기다란 검흔이 있었다.
그것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순간.
잠들어 있던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에 잿더미가 되어 무너지고 있는 기루.
진무극이 울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무릎 꿇은 사내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 그대. 실력은 출중하나 임자를 잘못 만났군.
― 사, 살려 주…….
― 죽을 짓을 했는데. 살려 달라니.
진무극은 싱긋 웃었다.
― 어불성설이군.
서걱!
찰나에 번쩍인 칼날에 사내의 목이 떨어졌다.
‘그런 거였나.’
나는 내게 포권을 취하는 스켈레톤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스켈레톤은…….
진무극이 죽였던 무인이다.
9화. 마승철, 똑같이 할 수 있겠어?
스켈레톤이란 최하급 마물이다.
갓 각성한 사람들도 몇 마리가 몰려오든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하디약한 마물이었다.
거기에 암천마가는 흑마법으로 강자 반열에 이른 가문.
자연스레 강한 마물을 소환하는 것이 훌륭한 자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적령 소환으로 스켈레톤을 소환했다는 건 낙인이 찍히는 것과도 같았다.
구제 불능.
답 없는 쓰레기.
이런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이다.
그래서 전생에 무척 당황했다.
지금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이 스켈레톤의 정체 때문에 당황했다.
‘어째서 진무극이 죽인 무인이 소환된 거지……?’
구천마제 신공은 죽인 대상의 영혼을 상단전의 구천에 모으는 무공.
그렇게 영혼이 쌓이면 영력이 강화되고.
이는 곧 힘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내 구천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텅 비어 있었다.
한데,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진무극이 지니고 있던 영혼이.
‘그렇다는 건, 진무극의 구천과 연결되어 있다는 건가?’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진무극의 영혼이 하나가 된 적이 있었으니까.
전생, 영혼의 일체화, 같은 무공…….
거기에 반응한 시스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서의 연결 고리.
이에 파생되는 수많은 가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의 생각은 공상의 영역이야.
지금은…….
나는 최약의 마물, 스켈레톤의 등장에 소곤거리는 장내를 느끼며 내게 포권을 취하고 있는 스켈레톤을 바라보았다.
다르다, 분명 평범한 스켈레톤이 아니야.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이 순간을 즐기는 것뿐이다!
‘진무극, 고맙다.’
덕분에 두 번째 삶이 지루하지 않겠어!
마기헌의 데스와이번의 등장으로 고양되었던 사신관이 마현의 스켈레톤으로 차갑게 식었다.
가문의 중진들은 처참한 마현의 수준에 너무나 어이가 없어, 오히려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마휼의 미간이 찌푸려질 뿐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기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상한데.’
제깟 놈의 수준이야 별 볼 일 없는 건 원래 알고 있었다.
스켈레톤이라, 천한 놈과 잘 어울리는군.
다만, 마기헌은 영 탐탁지 않았다.
그야, 마현이 구음절맥을 앓고 있는 거로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생각한 상황이 아니야.’
피를 토하거나 기절할 줄 알았다.
그것이 구음절맥의 증상이니까.
이상하군.
그 정보가 틀릴 리가 없는데.
보고 들어온 것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은.
마현이 그저 일시적으로 구음절맥의 부작용을 막아 냈다는 결론이었다.
그 방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고작 스켈레톤 따위로 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쓰레기가 조금 나아 봤자, 냄새가 덜 날 뿐인 쓰레기인 거지.’
그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승철. 녀석이 마현의 스켈레톤을 보며 킬킬 웃고 있었다.
“너무 하찮아서 웃기잖아!”
“훗, 천한 놈이 발버둥 쳐 봤자 별 볼 일 없다는 거지.”
“크크크! 아, 마기헌. 좋은 생각이 났다.”
“음? 뭔갈 하려는 거냐?”
“그래, 내가 재밌는 걸 보여 줄게. 크크크.”
마승철의 눈꼬리가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변했다.
곧 자신을 향할 스포트라이트를 생각하며 진한 웃음을 지었다.
한편, 나는 주변의 비웃음과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의 스켈레톤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이름이 흑랑이었군.’
진무극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와 대립하게 된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진영에서 의뢰를 받아.
지키는 자와 죽이는 자로서 만나게 된 둘.
노련한 암살자였던 그는 진무극과 호각을 이루는 듯했지만.
결말은 아이를 지키는 진무극의 승리였다.
이상한 건 그의 출신이다.
‘암살자…….’
보통 죽은 것을 다루는 스킬이 그러하듯.
‘적령 소환’ 역시 생전에 비하면 많이 약화된 상태다.
그냥 힘이 약하다는 수준이 아니다.
갓 각성한 사람도 여러 스켈레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스켈레톤의 지능이 현저하게 낫기 때문이다.
죽어서 스켈레톤이 된 것들은 생전의 움직임을 재현할 수 없었다.
그저 죽지 못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맹목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한데, 이 스켈레톤은 다르다.
‘죽기 전의 움직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확신할 수 없지만 짐작할 수 있다.
소환 즉시 내게 포권을 취했던 것이며.
그가 편하게 서 있는 자세는 진무극의 기억에서와 완전히 똑같은 것이 바로 그 증거!
‘흑랑. 난 당신이 좀 기대가 되기 시작했어.’
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크하하! 고작, 고작 스켈레토온?”
광소하는 마승철이었다.
놈이 무척이나 웃기고 수치스럽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너는 얼마나 우리 마가의 수준을 떨어뜨릴 셈이냐!”
그렇군.
전생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때도 놈은 나의 스켈레톤을 비웃었고.
끝내는 박살 냈었지.
그 모든 이유는 내가 스켈레톤을 소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자리는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
즉, 녀석은 나를 짓밟고서 저 자신을 빛낸 것이다!
씨익.
‘이번에는 어떨까?’
마승철.
똑같이 할 수 있겠어?
“마현, 이따위로 할 거면 그만 네 잘난 엄마 따라 자살해라! 크크, 네놈이 살아 숨 쉴수록 우리 마가가 감수해야 할 짐이 느는 걸 자각해 달라고!”
“그 짐을 네가 드나?”
“뭐라? 지금 이 상황이 어떤지 자각은 하고 말하는 거냐?”
“알지, 네가 행패를 부리고 있지 않냐.”
“푸하하! 행패?”
가문과 저 하늘이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고작 스켈레톤 따위나 소환해 대는 놈이!
누가 누굴 보고 행패라는 거냐!
“멍청한 스켈레톤을 소환하더니 네 머리도 같이 멍청해졌냐!”
“뭐, 그렇다면?”
“그래, 고작 이깟 스켈레톤을 믿고 뻗대는 거라면…….”
마승철이 있는 힘껏 웃었다.
“내가 부숴 버려 주지!”
푸른 마력이 마승철의 주먹을 휘감았고.
당겨진 그 주먹이 스켈레톤을 향해 쇄도했다.
아주 산산조각 내 주마!
평범한 스켈레톤이라면 맞는 순간 뼈째로 박살 날 정도의 공격!
그것이 스켈레톤을 향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투욱.
일격의 쇄도에도 스켈레톤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전혀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그저 왼손을 들어 주먹을 밀쳐 낼 뿐이었다.
그러자 마승철의 주먹이 휘어져 허공을 갈랐다.
“뭣……?”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이 커진 마승철.
관성에 앞으로 쏠리는 무게 중심.
그런 와중에 보이는 건.
스켈레톤의 주먹이었다!
뻐억!
“쿨럭!”
물 흐르는 듯이 진행된 흑랑의 일격.
그것이 마승철의 명치를 꿰뚫었다.
씨익.
나는 웃었다.
드디어 달라졌다!
전생에 내 숨통을 쥐어 오던 순간이!
이번에는 나의 승리로 바뀌는 것이다!
* * *
마승철을 따라 마현을 비웃던 사신관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그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봤으니까.
그것도 암익파의 뛰어난 후예로 여겨졌던 마승철이 한낱 스켈레톤에 처맞는 장면을!
“저, 저 녀석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단상 위에서 지켜보던 암익파의 원로 마광익이 어이없는 상황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혹에 물든 것은 그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고.
마기헌도 마찬가지였다.
‘재밌는 걸 보여 준다더니…… 이딴 거였어?’
저 병신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마승철일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스켈레톤이란.
느리고, 약하고, 멍청한!
그저 각성자들의 샌드백만도 못한 그런 허접쓰레기였으니까!
그렇기에 마현의 스켈레톤을 박살 내면서 사신관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독차지할 셈이었는데!
퍼억!
“커헉!”
정확히 명치에 처박힌 주먹이 너무나도 아프다!
거기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어 버렸다.
숨통이 쥐어져서 입가에 침이 뚝뚝 떨어졌다.
물론, 마승철은 그 순간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왜 이런 실수가……!’
그야, 저런 스켈레톤이 존재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간신히 숨이 쉬어졌을 때.
마승철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스켈레톤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거만한 각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씹새끼가!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자극하는 건 그 너머의 녀석이었다.
‘마현!’
마현이 비릿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 새끼가 지금 감히 나를 비웃어?!’
기다려라, 이깟 스켈레톤 박살 내고 네놈한테도 한 방 처먹여 주겠다!
그렇게 마승철은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감히 스켈레톤 따위가!”
푸른 마력의 주먹이 스켈레톤에 쇄도했다.
직선적인 궤적으로 빠르게 뻗어 나가는 주먹.
흑랑은 이번엔 손도 쓰지 않았다.
스핏.
“!”
또다시 피해?!
마승철의 눈은 본능적으로 흑랑의 등 뒤로 당겨진 주먹으로 향했다.
퍼억!
“끄억!”
또다시 명치!
맞았던 곳에 흑랑의 주먹이 작렬했다!
이, 이건 아니야!
그래도 암익파의 후예다.
똑같은 수에 당하지 않는다는 듯 간신히 비켜 맞았고 덕분에 주저앉진 않았다.
고통을 이 악물며.
마승철은 다시 한번 한 걸음 내디디며 주먹을 날렸다.
쐐액!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스핏! 퍽!
“커억!”
이번엔 코를 맞아 버렸다.
마승철에게 코는 약점이었다.
마현에게 한 번 부러졌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부러진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그때부터 마승철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이거, 평범한 스켈레톤이 아닌 건가……!
그도 그럴 게 스켈레톤 따위가 제법 잘 싸웠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웅성웅성.
― 저거 지금 무슨 상황이야?
― 마승철 도련님이 지금…… 스켈레톤 따위에 지는 거야?
― 흑마법 명가라지만 체술을 안 배우진 않았을 텐데…….
― 내가 해도 저것보단 잘 싸우겠다.
씨이바알!
이건 아니야!
이대로 물러서면 나의 체면은 그야말로 똥통에 떨어져 버린다.
그야 가문의 모두와 하늘이 주시하고 있으니까!
‘무조건 스켈레톤만큼은 박살 내야 해!’
이제 와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스켈레톤보다는 낫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
당장엔 체면을 좀 구기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있을 시험에서 활약하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으니까!
“가라, 리틀 오우거!”
크아아!
잠자코 있던 리틀 오우거가 포효했다.
그 거대한 울음에 마승철을 두고 비웃던 이들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래, 마승철을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격투는 좀 못해도, 리틀 오우거를 소환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쿠웅쿠웅!
리틀 오우거가 흑랑에 달려들었다.
3배 이상 나는 체급 차!
승부는 불 보듯 뻔해 보였다.
그 시각.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사신관주는 생각했다.
‘흠, 마승철이 예상외로 멍청한 것도 있지만, 저 스켈레톤도 제법 특별하네.’
어떻게 저런 스켈레톤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이 솟긴 했지만, 자신이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은 사신관 시험을 조율하는 것이 임무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승철의 일은 적당히 용인될만했다.
시험이긴 해도, 가문의 중진들과 성좌들이 지켜보는 일종의 콘텐츠였으니까.
즉, 마승철의 일은 매 시험마다 한 번쯤 일어나는 해프닝이었다.
‘후후, 상황이 다르게 흐르고 있지만.’
하지만 문제는 그 흐름이다.
해프닝이 용인된다고 하나 시험의 흐름과 분위기를 박살 낼 정도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
“교관, 중재해.”
“넵!”
이에 사신관 교관이 마승철과 마현을 향해 날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사신관주는 이변을 만들고 있는 마현을 보았다.
“흐음, 귀여워.”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마현.
이번 사신관 시험은 마하윤 때처럼 재밌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네.
사신관주는 기대감에 몸서리쳤다.
10화. 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