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저 새끼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어!
키야아악!
충인족들이 마현을 향해 포효했고.
붉은 안광을 빛내는 자폭충들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마현과 마물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삐비빅!
십수 마리의 자폭충들이 일제히 대지를 박찼다.
시야를 가득 메운 자폭충들의 돌진!
누구든 이에 맞서는 자는 폭사할 거라 의심치 않았다.
마물들도 본능적으로 이를 알았고.
뒤에서 지켜보던 조시혁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는 10레벨의 헌터.
어떠한 방어구도 없이 오직 검 하나만 들고 온 그였으니까.
그러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할 터였다.
마현이…….
쩌엉―
자세를 취하기 전까진!
【구천마검 이 초식 변천】
촤좌좌좡!
찰나에 생겨난 잔상에 움직임이 겹칠 정도의 극쾌검!
거미줄처럼 그어지는 검격에 그의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터져 버렸다.
퍼버버버버벙!
“무, 무슨……!”
키에엣?!
“…….”
그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조시혁 일행은 경악했고.
충인족들은 얼어붙었으며.
마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스스로도 놀란 것이다.
몰라보게 달라진 자신의 힘에!
‘이것이 구천마제 신공 3성에 오른 힘인가?’
2성일 때와는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나도 몰랐던 한계를 넘어선 듯한 기분.
그야말로 허물을 벗은 것 같았다.
손끝에 담기는 힘이 전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씨익.
‘마음에 드는데!’
역시 강해지는 건 최고다.
이다음의 내가 어떻게 변할지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
물론, 성취가 높아질수록, 필요한 수고는 점점 많아지기 마련이다.
단기간에 3성에 오른 것도 별자리 연회장에서의 기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그렇기에 4성에 오르는 건 나중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훗, 상관없다.
이 정도 됐으면 알잖아.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런 건…….
‘하다 보면 되게 돼 있으니까!’
중요한 건 성실함!
즉, 강해지고 싶은 만큼, 죽이고 또 죽이면 되는 일이다!
촤좌좌좌좡!
마현의 검 궤적이 멈출 줄을 모르고 그어졌고.
키, 키에엑!
삐비비빅!
그에게 다가서는 마물들은 하나같이 도륙이 나 죽어 버렸다.
이에 태생부터 공포의 감정이 거세된 채 태어난 벌레들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가 자신들의 ‘천적’이라는 것을.
놈의 곁에 가는 순간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캬아아앗!
그럼에도 이 던전의 주인은 자신들이었다.
결코, 물러설 수 없기에 하늘 높이 포효하며 두려움을 떨쳐 냈고.
마현에게 거센 공격을 강행했다.
쐐액―!
충인족이 던진 자폭충.
그것이 투석기의 돌처럼 맹렬하게 날아왔다.
그마저도 마현은 단칼에 베어 버렸지만.
던져진 건 고작 한두 마리가 아니다.
그렇게 사방에서 닥쳐 오는 자폭충들.
그리고 멀리서 급속도로 쏘아진 자폭충들까지.
필살의 의지를 가진 그것들이 붉은빛으로 명멸했다.
그럴수록 마현의 검이 쉬지 않고 강풍처럼 몰아치지만.
삐비비빅!
자폭충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한 참격을 뚫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퍼버버벙!
삐비빅!
점차 형세가 기울어져 가는 마현의 모습.
그제야 충인족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캿캿캿!
인간치고 제법이었지만.
과연 연쇄 폭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충인족들의 더듬이가 좌우로 흔들렸다.
어림없는 소리다.
자폭충은 스스로의 목숨을 대가로 자폭 마법을 펼쳐 내는 동포들.
그 파괴력은 헌터를 반으로 찢을 수 있는 자신들조차 버틸 수 없는 수준이며.
18레벨 미만의 헌터가 이 자폭의 힘을 버텨 낸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즉, 살아남는다는 건, 놈이 사람 새끼가 아니라는 소리인 것이다!
캬아앗!
때가 되었다.
터질 듯이 붉은빛으로 명멸하는 자폭충들이 사방에서 마현을 옥죄였고.
강속으로 던져진 자폭충들이 그 틈을 노렸다.
마침내 바라던 순간이 도래했고, 다음 순간…….
콰과과광!
마현을 중심으로 대지를 울리는 연쇄 폭발이 터져 나왔다!
동포들의 숭고한 희생이 완벽한 죽음의 포위망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선지 폭발 직전에 청아한 소리가 울렸고, 곧 엄청난 풍압이 터져 나왔다.
순간, 몸의 균형이 흔들릴 정도의 힘.
잘 모르지만, 자폭충의 폭발에 의한 건 아니었다.
캿캿캿!
그러든 말든 충인족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뭐, 영문을 알 수 없긴 하지만. 그게 대수인가?
어차피 그놈은 뒤졌다.
여태 이 연쇄 폭발을 직격으로 맞고 살아남은 인간은 없었으니까!
즉, 더 이상 자신들을 가로막을 인간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폭연이 가라앉으면서 시야가 선명해질 즈음.
충인족들은 어딘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후드득 쏟아지는 피의 비.
폭사한 동포들의 사체가 떨어지고 있다.
동포들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영광의 상처.
원래라면 그 참혹한 환경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할 터였지만.
!
무언가 서 있었다.
가만히 선 채 피의 비를 맞고 있는 그것.
그 정체를 알아보았을 때, 충인족들은 경기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키에엣?!
그놈.
수십 마리의 자폭충들과 장렬히 죽었어야 할 그놈이었으니까!
어떻게 살 수 있던 거지?
이 정도면 죽어 주는 것이 예의다!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자폭충들이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어이없게도 그놈은 딱히 피해를 입지 않은 모양이다.
사지가 멀쩡히 달려 있으니까.
하물며 놈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마치, 동포들의 희생을 비웃듯이 찐한 미소를 짓는 그놈.
정말이지 간악하고도 악랄한 자식인 것이다!
치를 떠는 충인족들.
사실, 마현으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크흐흐, 오늘 아주 날인데!”
― 레벨이 올랐으니까!
꽈악.
마현은 자신의 힘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주먹을 쥐었다.
‘이것이 발산의 묘리인가.’
영력의 발산.
1성과 2성의 힘은 대상의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3성의 경우에는 반대다.
구천의 문안에 쌓아 두었던 영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놈들의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전력으로 모든 영력을 발산했다.
그러자 나를 중심으로 기운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즉, 기운을 터트려 폭발을 막아 낸 것이다!
원래라면 구천마검 삼 초식 현천의 구결대로 검을 통해 발산의 묘리를 펼쳐야 하지만.
묘리의 핵심을 응용하여 온몸으로 펼쳐 냈다.
이는 분명, 이제 막 3성에 오른 내가 펼칠 수 없는 심오한 응용법이었으나…….
‘하, 진무극, 이 못 말리는 녀석!’
― 진무극의 감각이 있는 내겐 아주 당연한 기술이었다!
정말이지 언제 한번 밥을 사주고 싶군.
이 은혜를 어떻게든 갚고 싶은데, 갚아 줄 방법이 없다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하지만 풍선은 바람이 빠지면 홀쭉해지듯이.
발산의 힘으로, 내 안의 영력이 빠져나가게 되면 힘이 약해진다.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마기헌과의 대전 때에도 조금이지만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내 힘은 구천의 문 안에 담긴 영혼의 총량에 비롯된다.
즉, 하수인을 소환하거나 방금처럼 영력을 발산하면 힘이 빠지는 것이다.
물론, 발산된 영력은 소모되지 않고 그대로 내 근처에 머물고 있다.
한번 구천의 문에 삼켜진 영혼은 내게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즉, 언제든 넣었다 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에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군.”
눈앞에는 여전히 자폭충들과 충인족들이 버티고 있다.
아직 죽여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좋은데.”
씨익.
“나는 아직 배가 고프거든.”
키, 키야앗!
그 끝없는 욕망에 어린 탐욕의 눈빛.
검을 늘어뜨린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마현의 모습에 충인족들은 몸서리쳤다.
* * *
“이, 이게 무슨…….”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라고?!’
송유리는 눈앞에서 벌어진 장면들에 넋이 나갔다.
어떠한 보호구도 없이 오로지 검만으로 일당백의 기개를 보이는 마현.
오직 그 한 사람의 힘에 자신들을 압도하던 마물들의 진격이 저지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필살의 각오로 수십의 자폭충이 한 번에 몸을 날린 것.
그 순간만큼은 송유리도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왜 도망을 안 가서……!’
약하지만 끝까지 자신을 지켜 주겠다며 남아 준 그였다.
하물며, 시간을 끌어주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마물에 맞서기까지 했다.
그런 헌신적인 그의 죽음이라니.
‘절대 보고 싶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다음 순간.
콰과과광!
던전을 뒤흔들 정도의 폭발이 있었고.
싸늘하고 짙은 혈향이 그녀에게 도달했을 때.
감히 그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마현이…….
“크흐흐, 오늘 아주 날인데!”
상쾌한 웃음을 터트리기 전까지!
‘사, 살아 있어?!’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입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벌어졌다.
피의 비가 내리며, 마물의 육신이 흩날리는 가운데.
그가 서 있었다.
씨익.
짜릿한 미소를 지은 채!
“마현……!”
새삼 반가운 그 모습에 그녀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하지만 금세 의문에 휩싸였다.
그, 근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방금의 폭발은 자폭충 하나도 아닌 십수 마리의 연쇄 폭발로 조시혁의 보호막도 버티지 못했다.
그런데 그 정도의 화력을 맨몸으로 버텨 내다니?
‘설마…… 10레벨이란 거, 거짓말이었어?’
지금 그가 보여 주는 움직임은 도저히 10레벨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수준.
하지만 그렇기에 이상하다.
이 던전의 레벨 제한은 18레벨로 마현이 아무리 높아도 그 제한을 넘어설 수 없다.
그 정도로는 결코 자폭충의 폭발에서 무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거다.
마현이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마현에게 자신이…….
― 거기 당신, 누나가 딱 한마디 할게. 그냥 내 뒤에만 딱 붙어 있어.
― 당신이 앞에서 싸우면 사망 확률은 90%야.
― 이래 봬도 나는 헌터 협회에서 제법 분석이 뛰어난 에이전트로 평가받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왔다는 것이다!
으아아아!
화끈―
창백했던 그녀의 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 난 잘못 없어.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었잖아.’
그리고 난 다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라고!
“크읏…… 나만 바보 같잖아.”
이 부끄러운 기억을 덜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지이잉―
서둘러 전투에 복귀하는 것!
마침, 마현 덕분에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었고 그녀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타앙!
쏘아진 마탄이 자폭충을 던지려던 충인족의 머리를 관통했다.
이에 슬쩍 고개를 돌린 마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송유리?”
“나도 끼겠어.”
그 말에 마현이 눈을 빛냈다.
찰나였지만 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한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대로.”
이에 송유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고.
지잉―
타앙!
그녀의 마총이 빛을 뿜었다.
한편, 조시혁들 역시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형님.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맞습니까?”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오, 오빠들 저거 어떻게 한 거예요?”
방금까지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그들이었으나.
눈앞의 광경은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조시혁 역시 마찬가지.
“저 새끼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어!”
틀림없다.
눈으로 좇기 힘든 마현의 움직임.
폭발 속에서도 버젓이 살아 나오는 모습.
그것들은 도저히 10레벨이 보여 줄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으니까.
빠드득!
‘도대체 왜 그런 장난 같지도 않은 짓을 한 거지?’
조시혁은 이가 갈렸다.
놈이 레벨을 숨겨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욱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 왔다.
심지어 오억짜리 아티팩트가 크게 손상되었다.
물론, 자신들은 놈이 앞에 나서려 할 때마다 거칠게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약한 마현을 위해 하는 말이었다!
‘설마, 놈의 손아귀에 놀아난 건가?’
확실하다.
놈이 계속 잠자코 있던 건.
우리들의 힘이 약해질 때를 기다린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순위───
1위. 조시혁(21%)
2위. 마현(19%)
────────
중요한 순간에 기여도를 쓸어 담기 위함이니까!
이 비열한 새끼! 감히, 말 같지도 않은 짓을 해가면서 방해하려 들다니!
날카롭게 빛나는 조시혁의 눈.
그 시선의 끝이 마현에게 향했다.
‘결코, 네놈이 포인트를 쓸어 가게 두지 않겠다!’
“전투 개시!”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66화. 균열의 저울
하아, 하아…….
마총의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천천히 총구를 내리는 송유리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기쁨의 미소가 피어났다.
“으……! 살았다!”
살아남았다.
그것도 수십 마리의 자폭충을 끌고 온 충인족들로부터 한 명도 죽지 않고 생존한 것이다!
“으아…… 죽는 줄 알았네!”
“하아. 이게 A+급 난이도라고?”
“으아앙, 오빠들 진짜 나 죽는 줄 알고…… 히끅.”
마침내 이 전투가 끝났음을 확신한 공략대는 하나둘 털썩 주저앉았다.
송유리 역시 마총에 의지해 상체를 세우고 있을 뿐,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어앉았다.
‘정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송유리의 시선이 한 청년을 향했다.
마현.
그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공략대 전원이 이 웨이브에서 생존할 수 있었고.
자폭 마법의 카운터 스킬이라도 있는지.
동귀어진을 노리는 자폭충들이 허무하게 자살하는 꼴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의 활약으로 이번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마현의 활약들도 좋았지만.
송유리에겐 다른 순간이 더욱 각별했다.
삐비비빅!
지금도 방금의 악몽이 생생하다.
자신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오는 자폭충.
터질 듯 말 듯 붉은빛으로 명멸하는 그것이 슬로 모션처럼 다가오는 순간이.
그리고…….
촤악―!
단칼에 자폭충을 양단하고.
― 지켜야 할 사람이 있잖아.
아무렇지 않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그 녀석.
‘아, 왠지, 조금 덥다…….’
그녀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물론, 이건 전투의 여파로 힘들어서 그런 거다.
그 뭐, 격렬한 운동을 하면 얼굴이 벌겋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는 딱히 움직이지 않는 원거리 딜러이긴 하지만…….
아무튼…….
자세히 알 필요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당장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도, 이제 막 공략의 초반부를 넘어서는 시점.
시작부터 이런 난항을 겪고 있으니 당연히 앞으로도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
이런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현이라…….’
그를 보고 있으면 왠지, 안심되고 힘이 나니까.
그와 함께라면 이 던전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앞으로 유명해질지도 모르겠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씨익.
그건 마현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또 올랐으니까!
‘흐흐!’
아주, 순조롭군.
이대로 간다면 계획대로 15레벨을 달성할 수 있겠어!
물론, 이건 당연한 결과다.
노력한 만큼 레벨은 오르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사실, 레벨이 올랐다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 목표했던 수준까지 달성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입가에 미소가 떨어지지 않는 진짜 이유는…….
마현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그러자 보이기 시작한다.
광활한 심상 세계.
그 중심에 선 거대한 구천의 문.
그리고 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수십 마리의 자폭충들!
레벨로 그 힘을 정의할 수 없다는 마물.
한때, 인류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주범.
그놈들이…….
나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나 이래도 되는 건가?’
어떻게 한 사람이 수십 개의 폭탄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너무나도 위험해져 버린 나.
세상은 내가 착한 사람이라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내가 악에 미친 놈이라면.
마구 터트리고 다닐 테니까.
물론, 그딴 생각과 달리 마음은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었다.
벌써부터 자폭충들을 어떻게 쓰게 될지 궁금한 것이다!
‘후우, 나도 참 애도 아니고. 진정하자.’
하지만 마음이 도통 진정될 줄을 몰랐다.
그만큼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 욕구인 것이다.
그야, 그렇게 바라던 특별한 하수인이지 않은가?
원래라면 구할 수 없는 놈들…….
그런데 폭발까지 한다니!
이거 완전…….
‘최고잖아!’
빨리 터트려 보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마현은 최선을 다해 앞선 전투에서 활약했다.
가능한 많은 마물을 죽이고 그 영혼을 취하기 위해서.
그 결과.
───순위───
1위. 마현(27%)
2위. 조시혁(15%)
─────────
압도적인 차이로 공략 기여 순위 1등을 찬탈했다.
이 결과에 누구도 이의를 제시할 수는 없다.
시스템이 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빠드득!
‘내, 오천 포인트가!’
조시혁만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완벽히 무너져 버린 오천 포인트 독식의 꿈.
마현과 함께 그 포인트를 쪼개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까.
심지어 마현이 제일 많이 가져가게 생겼다.
물론, 마현의 활약으로 상황이 역전된 건 맞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놈이…….
“마현! 감히, 우리들을 속여?”
우리들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네놈이 이딴 식으로 장난치지만 않았어도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조시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분노에 찬 그의 외침에 호위들도 입을 열었다.
“새끼, 약한 척하면서 우릴 위험하게 만들었어!”
“네놈의 트롤짓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손해 봤는지 알아? 자그마치 오억이다 오억!”
“아휴, 오빠들, 어린놈이 싸가지가 너무 없다 그치.”
물론, 마현이 은근슬쩍 나서려고 할 때마다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라고 말하긴 했지만,
거기에 기여도를 독점하기 위해 자신들이 더 열심히 한 것도 있지만,
그 모든 이유는 놈이 10레벨이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적당히 하고, 상황이 위급해졌으면 알아서 눈치껏 나섰어야지!”
이 새끼는 오억짜리 보호막이 손상될 때까지 나서지 않았다.
평소 말을 얼마나 잘 듣는 녀석이었는지 몰라도.
나서야 할 때는, 시발 알아서 나섰어야지!
“넌 팀원에 대한 예우는커녕, 대의도 없는 쓰레기다!”
짓씹듯 일갈하는 조시혁.
쌓였던 분노를 토하듯 그의 기세가 사납게 일렁거렸다.
“아아, 미안하다.”
다음 순간, 마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자신들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난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
놈이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희가 이렇게까지 약해 빠졌을 줄은.”
뭐, 뭐라고?
지금 설마 우리 탓을 하고 있어?
태연자약한 태도부터 자신들을 하찮게 바라보는 마현의 눈빛까지.
그 싸가지 없는 모습의 연속에 조시혁은 순간 참을 수 없었다.
“이 새끼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는 순간.
어째서인지 조시혁의 손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주저하는 듯이 손이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그 검. 뽑을 거냐?”
뽑을 테면 뽑아보라는 듯한 말투.
서릿발처럼 차가운 마현의 눈동자.
그 순간 조시혁은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이 느낌은…….’
비슷한 기분이 든 적이 있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강력한 마물의 표적이 되었을 때.
발을 잘못 디뎌 함정에 떨어질 뻔했을 때.
죽음의 벼랑 끝에 선 순간에 들었던 기분.
그 기분을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설마 지금……?’
그때.
“형님, 일단 참으시죠.”
“싸가지 없긴 해도. 일단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잖슴까.”
“더러워도 공략부터 하고 봅시다.”
“아! 좀 놔 봐. 저 새끼는 손 좀 봐야 해!”
“에이, 형니임…….”
엉겨 붙으며 만류하는 호위들. 검을 뽑으려는 조시혁.
그 와중에도 마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 쓰레기 같은 놈. 퉤!”
결국, 조시혁은 이번 한 번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죽여 봤자 자신들만 손해다.
분위기는 더 박살 날 테고.
어찌 됐든, 놈은 전력으로 쓸 만하니까.
‘그러니 지금은 넘어가 주마.’
돌아서는 조시혁에 숭달여가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 정말 충격이로구나…….
‘뭐가?’
― 저 녀석들이 머리를 뭐 하러 들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질어질하다는 숭달여.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원래 이 바닥이 그래.’
힘이 제일인 곳이라 어딘가 이상한 놈들이 많지.
그리고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결국, 어디가 깨지고 부서져 봐야 배우더라고.
머리가 깨지기 전에 배우면 천재고.
머리가 부서진 후에 배우면…….
‘뭐, 유감이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다.
* * *
한차례 언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공략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한데, 직전의 전투가 이 던전의 총력전이었던 건지.
나타나는 마물들의 수는 적었고.
그마저도 조시혁들이 나서기도 전에…….
촤좌좡!
키르륵…….
― 마현이 싹 쓸어 죽였다.
조시혁들의 요청대로 더 이상 참지 않고 힘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결과.
───순위───
1위. 마현(33%)
2위. 조시혁(13%)
─────────
기여도 순위의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빠드득!
‘젠장, 이 미친놈이!’
설마, 자신들이 뭐라고 했다고, 빡쳐서 지가 다 쓸어 먹는 건가!?
이가 갈리지만 조시혁은 차마 건들 수 없었다.
공략의 일환으로 마물을 사냥하겠다는데, 이걸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형님, 아까부터 우리가 저놈한테 끌려가는 것 같지 않슴까?”
호위의 말대로다.
원래, 이 공략대의 주도권을 꽉 쥐고 있던 건 자신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놈의 움직임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제길, 아주 엉망진창이야.
마음에 들지 않아.
“형님,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가면 저놈이 포인트를 절반 넘게 가져갈 판입니다.”
그 말에 조시혁은 이를 악물었다.
점점 줄어드는 자신들의 몫.
이대로 가면 호위의 말대로 반 가까이 놈이 가져가게 된다.
‘아니, 어쩌면…….’
저놈 혼자 독식할 수도 있어!
아직, 그 경우에 도달하려면 멀었지만.
이 추세로 가다가는…….
분명, 가능성이 있다.
“…….”
그 가능성을 인지했을 때.
조시혁의 눈이 순간 살기로 번뜩였다.
자신들이 뭐 하러 위기를 무릅쓰고 이 자리에 왔던가.
적어도 빈손으로 돌아가기 위함은 아니었다.
하물며 백서연을 가지기 위해서는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놈은 자신의 대업을 방해하려 들고 있다.
“후우…….”
“형님?”
“거슬리네.”
너무 많이 거슬려.
눈앞에 날아다니는 날파리처럼.
짓이겨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건.
놈을 죽이기 위해 다 같이 덤벼도.
자신 중 누군가는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마현의 실력은 이상하리만치 강했으니까.
‘어떻게 방법이 없나?’
저 빌어먹을 놈을 편하게 죽일 방법이?
공략대가 우뚝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형님.”
“오빠들 여긴…….”
그곳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눈부시게 밝은 햇빛으로 가득한 ‘광굴’.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한 ‘암굴’.
갈림길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띵!
[경고: 던전의 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빛과 어둠의 갈림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두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과, 관문?”
시스템 알림에 공략대는 순간 얼어붙었다.
관문.
시스템이 게이트를 봉쇄해 마물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마물들은 관문을 통해 헌터들의 진입을 막았다.
보스방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인 만큼.
그곳에는 정예 마물들이 도사리고 있거나, 치명적인 함정이 숨겨져 있다.
혹은 알 수 없는 이계의 힘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 관문이다.
즉, 관문이란 오로지 헌터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장치인 것이다.
스으으―
두 동굴로부터 무시할 수 없는 강한 마물들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
방금까지 맞서왔던 충인족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들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공략대의 분위기.
그 속에서 조시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피식.
‘이거, 재밌게 됐는데.’
한편, 마현은 웬일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착잡하고 불안이 깃든 표정.
숭달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무슨 일이느냐? 설마, 화장실이라도 급한 것이냐?
‘그런 건 아니고. 생각보다 레벨 업이 더뎌서 그래.’
지금 이곳은 던전의 중반부.
여기까지 오는데 모든 마물을 거의 다 자신이 죽이다시피 했지만.
결과는 정체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한 번은 더 레벨 업을 해야 했는데 말이야.’
― 흠, 주로 죽인 마물들이 자폭충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그 말대로다.
자신이 가장 많이 죽인 것은 자폭충들.
하지만 녀석들은 레벨이 낮았다.
충인족들을 그만큼 잡았다면 몰랐을 텐데.
대신 녀석들의 수는 자폭충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
즉, 더 강하고 더 많은 마물들을 쓸어 죽여야 목표 레벨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황이 조금 아쉽게 됐어.’
두 갈림길 관문.
상식적으로 안전을 위해서라면,
공략대 전원이 한쪽 관문을 먼저 공략하는 게 방법일 테지만.
관문이란 헌터를 죽이기 위한 장치.
결코, 그렇게 쉽고 편한 길을 가게 두지 않는다.
[이능. ‘균열의 저울’이 발동 중입니다.]
이능, 균열의 저울.
그 이계의 힘이 눈앞의 관문에 발동 중이다.
보통 저울이라 하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쪽이 가라앉고 가벼운 쪽이 떠오른다.
하지만 균열의 저울은 반대다.
많은 쪽이 적은 리스크를 가지며.
적은 쪽이 큰 리스크를 가지게 된다.
요컨대, 인원수에 반비례하여 관문 내의 마물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공략대 전원이 한쪽 관문을 먼저 공략하게 되면.
다음 관문을 공략할 때 지옥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기에 정석대로라면 인원을 반씩 쪼개고는 했는데…….
‘어찌 됐든, 사람이 많아지면 내 몫이 준다.’
관문에 입장하면 절대 나 혼자 마물을 쓸어 잡는 상황이 나오지 않는다.
즉, 쪼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의 레벨 업의 꿈은…….
한 발짝 멀어지는 것이다!
그때였다.
어딘가 당혹 어린 송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게 어딨어? 당연히 반으로 나눠야지!”
“아,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야. 우리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러니.
조시혁이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우리들은 광굴로 가겠다. 너는 저기 마현이랑 둘이서 암굴로 가라.”
조시혁과 그의 호위들.
그리고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노혜민까지.
도합 여섯명이 한 관문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뭐, 무서우면 가만히 있던가. 우리가 광굴을 클리어하고 돌아올 테니까.”
“그, 그게 무슨…… 설마, 당신들 기여도 때문에 이딴 짓을 하는 거야?”
“말했잖아, 이건 그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스스로도 개소리라는 걸 아는 조시혁이었지만.
알 바 아니다.
그야, 이 기회에 저 둘을 싸잡아 없애면…….
오천 포인트.
‘그거 완전 내 것이 되는 거거든!’
좌절되었던 독식의 꿈, 그것이 다시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뼈저리게 느낀 바지만.
조시혁들은 이미 계산이 섰다.
이 던전의 난이도가 A+인 이유는 아까와 같은 자폭충 웨이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지.
이후로 나타난 마물들도 하나같이 비실하고 약한 녀석들.
이제부터는 그동안 자신들이 공략해 왔던 평범한 던전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즉, 자신들을 막아 세울 마물은 더 이상 이 던전에 없다는 판단이다!
‘자, 마현. 과연 네놈이 저 계집과 둘이서 관문을 돌파할 수 있을까?’
뭐, 되겠냐?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그게 가능했다는 놈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크크.
조시혁이 씩 웃었다.
“아무튼,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않길 바라.”
우리가 광굴을 클리어하고 돌아왔을 때.
“죽어 있으면 내심 미안해질 테니까.”
그 말을 남긴 채 일행들에게 돌아가는 조시혁.
이제 보니 그의 호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띄우고 있었고.
노혜민은 그들 틈에 파고들어 득의양양하게 혀를 내밀었다.
“무슨 사람이…….”
송유리는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따위로 썩어 빠졌단 말인가.
지독한 혐오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에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나를 두고 도망가던 게.
정말,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을 때.
그녀의 눈에 마현이 들어왔다.
“마, 마현.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마현.
여전히 그에 대해 아는 건 잘 없지만.
적어도 그만큼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충격이었다.
“왜?”
‘왜? 어떻게 지금 왜냐는 말이 나오지?!’
송유리는 오히려 그 대답이 더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뭐라 말을 덧붙이려고 했는데.
“어, 어째서…….”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왜냐하면.
마현이…….
아니, 이 미친놈이……!
씨익.
짜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흐흐, 아주, 마음에 드는데!’
숨길 수 없는 기대감.
그것이 마현의 미소로 새어 나왔다.
67화. 진짜 바보 같아
“우린 간다. 살아서 보자.”
“너무 애쓰진 말고! 괜히, 죽으면 슬퍼질 테니 말이야.”
“정 뭣하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든가. 푸하하!”
조소하며 광굴로 향하는 조시혁들.
노혜민도 그들의 곁에 딱 붙어 여우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망연자실한 송유리를 비웃었다.
“어째서…….”
이건 미친 짓이잖아.
송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던전의 공략에 힘을 합쳐야 하는 때다.
그런데 기여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신들을 위험에 빠트리려 하다니.
‘절대 하면 안 되는 짓이잖아……!’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업계인 만큼, 유독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자들이 많긴 했지만.
어떻게 이런 위험한 던전에서도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믿어 왔던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그녀는 충격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렇게 조시혁들이 광굴에 들어가고.
송유리가 인류애를 상실한 이 때에.
마현은 암굴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스으으―
캄캄한 어둠.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곳.
숨 막힐 정도로 음울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제법 강한 놈들이 많이 있나 보군.’
거기에 이능. 균열의 저울의 효과로 그 힘이 증폭되었다.
그렇기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관문이지만.
딱 좋군.
이곳이라면 할 수 있겠어.
‘레벨 업을 말이야!’
강한 마물을 많이 사냥할수록 레벨은 빨리 오르는 법이니까.
계획은 간단하다.
‘이 관문의 마물을 독식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몰래 움직이는 편이 좋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개인의 독단적인 움직임은 게이트 공략 시 금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공략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상, 이런 독단적인 움직임을 취하는 건 금물이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 있더라도 ‘개인’이 불러일으킨 파장에 공략대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까.
‘잘 지켜지는 꼴을 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이런 모습이 남들에게 보여지면 신고를 먹게 되고.
그 신고가 누적되면 결국, 게이트 공략 지원에 제재를 받게 된다.
꼬우면 개인이 아니어야 한다.
조시혁 일행처럼 단체로 개짓거리를 하면 대체로 용인된다.
공략대를 주도하는 쪽은 대체로 단체에 속한 자니까.
뭐, 이건 송유리가 알아서 해 주겠지.
그녀는 헌터 협회 직원이고.
조시혁의 만행을 두 눈으로 봤으니까.
둘째는 내 전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실력의 삼 할은 숨겨라.’
헌터 업계의 유구한 전통.
누구나 비장의 수는 숨겨 두는 법.
나 역시 검귀의 힘 삼 할은 숨기고 있다.
구천마검 삼 초식은 아직 쓰지도 않았지.
여기에 네크로맨서의 아예 감추고 있으니 나는…….
약 삼 할 오 푼의 힘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미쳤군!’
나는 실력의 칠 할을 숨기고 있었어!
아니, 그러고도 이 정도의 던전을 주파하고 있다니!
생각보다 내가 더 대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새삼 세상 살맛이 났다.
역시 강해진다는 건 최고인 것이다!
‘물론, 칼은 보이지 않을 때가 가장 날카로운 법!’
힘은 감출수록 좋다.
소문이 빛보다 빠른 헌터 업계이니.
가능한 나에 대한 정보는 최소화하는 것이 상식이다.
비록 언젠가 내 힘이 드러나게 될 테지만.
내가 세인트와 암익파 등을 적으로 두고 있는 이상.
계속해서 강해지고 힘을 숨겨야 하는 것이다.
즉, 요점은 이거다.
관문의 마물을 독식하려거든 나 역시 각오해야 한다.
독단적인 행동의 대가로 신고를 당할 수 있음을.
그리고 나의 힘이 빠르게 드러날 수 있음을.
하지만 그런 각오.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씨익.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마현의 그림자가 암굴의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 않은 지금.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와라.”
사아아―
검은 잉크가 번지듯 퍼져 가는 마현의 그림자.
그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로 빚어진 하수인들이 일어선다.
[스킬 ‘암령 소환’을 사용합니다.]
다음 순간, 마현의 앞에 일곱 마리의 작은 흑마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할짝할짝!
“하하, 녀석!”
녹터니가 나타났다!
하수인들의 등장.
하지만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다.
일부러 보이지 않게 캄캄한 암굴 속에서 불러낸 거니까.
흑마견들은 짖지도 어슬렁거리지도 않았다.
소환될 때부터 마현의 의도를 알고 있는 것이다.
‘똑똑하군.’
과연, 진각성.
그동안 알던 하수인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눈치가 있어.
할짝!
‘왠지 감정도 생생하고 말이지.’
아무튼 하수인들을 불러낸 이유는 단 하나다.
“조용히 쓸어 버려.”
암굴의 마물들을 쓸어 죽이는 것.
정확히는, 남몰래 이 관문의 마물들을 독차지하기 위함인 것이다!
살기 가득한 시퍼런 안광을 빛낸 녹턴과 흑마견들이 어둠 깊숙이 사라졌다.
‘좋아, 이걸로 레벨 업은 문제없겠어!’
흑마견들이라면 충분히 관문의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까다로운 녀석이 있긴 하겠다만은, 우리 녹터니라면 충분하겠지.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조시혁들의 행동으로 뜻밖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
바라던 레벨 업의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까.
― 물론, 놈들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닐 테지만 말이다.
숭달여의 말대로다.
분명, 뒤틀린 속셈이 있겠지.
‘뭐, 그건 그것대로 나중에 갚아 주면 될 일.’
의도와 달리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지만.
지금까지 보여 준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다.
― 호오, 그럼 더는 참지 않겠다는 게냐?
‘그래.’
선을 넘었다면, 응당 그 값을 치러야지.
그게 세상 이치 아니던가.
‘그럼 어디까지 넘는지 보자고.’
계산하기 편하게 말이야.
그나저나.
“송유리, 상실감이 큰가 본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는 송유리.
텅 빈 동공으로 그녀의 감정이 엿보인다.
마현은 그런 그녀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흑마견들이 마물들을 토벌하는 동안 넋이 나간 그녀와 천천히 시간을 때울 셈이었다.
“……이건 해선 안 되는 짓이잖아.”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뗀 그녀.
무척이나 실망이 큰 듯이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시혁이 좀 쓰레기 같긴 해.”
“……보통 쓰레기가 아니야, 이건……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라고.”
“노민혜라고 했나? 걔도 좀 쎄하던데. 네 친구 아니야?”
“친구는 무슨! 내가 걔 때문에 얼마나. 하! 진짜!”
이 상황의 원흉인 놈들을 지목하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문이 트였다.
조시혁들과 노민혜를 욕하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어쩐지 처음부터 느낌이 쎄했다는 둥.
조시혁과 관련된 소문.
믿음 조가와 관련된 꾸릿꾸릿한 말들.
노민혜가 자신에게 저질러 왔던 파렴치한 일들.
위험을 무릅쓰게 된 송유리는 이 불합리한 상황만큼 조시혁과 노민혜를 향한 쌓였던 불만이 속속히 튀어나왔다.
그렇게 얼마간 저 더러운 녀석들에 대해 말했을까.
마현은 하수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까다로운 녀석을 만난 건가?’
갑자기 마력이 뭉텅뭉텅 깎이기 시작했다.
하수인들이 상처를 입고 회복되는 과정에 마력이 소모되는 것이다.
이는 필시 관문의 수문장을 만났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분명, 저 녀석들 기여도 조작하려고 이런 짓을…….”
[레벨이 올랐습니다.]
“……내심 우리들이 죽기 바라고 있겠지…….”
씨익.
‘아아, 해 버렸나.’
결국, 레벨 업을 해 버린 것이다!
남은 건 2레벨.
이건 보스를 잡으면 해결될 거란 예상이 들었다.
‘아주, 순조롭군.’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당신, 내 말 듣고 있어?”
“아.”
“안 듣고 있었지!”
뭐, 그렇긴 하지만.
애초에 들을 필요가 없었지.
다 아는 이야기니까.
조시혁이 쓰레기고, 노혜민이 불여시란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거겠지.’
송유리로서는 이 상황 자체가 사지에 내몰린 느낌일 터다.
누구라도 고작 둘이서 균열의 저울로 강해진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테니까.
‘뭐, 암굴은 이미 내가 해치웠지만!’
아무튼, 그녀는 그렇게 느낄 터이니.
대충 해 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걱정돼? 죽을까 봐?”
그 말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걱정 돼. 죽을 게 뻔하잖아. 넌 안 그래?”
애당초 난이도가 높은 던전이었고.
심지어 정예 마물들로 가득한 관문이다.
균열의 저울로 그 힘이 강화되기까지 했으니.
고작 둘이서 이곳에 들어간다는 건.
사망 확률이 100%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송유리는 제아무리 마현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현이 말을 이었을 때.
그녀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별걱정을 다하네. 넌 절대 안 죽어.”
씨익.
“내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까.”
오글거렸으니까!
끼야아…….
“너, 너……!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야?”
“훗.”
“은근 즐기고 있지!”
“흐흐, 이 짜릿한 느낌 좋지 않아?”
말하는 당사자도 오글거렸는지 부르르 떨었다.
뭐, 짜릿해서 좋지 않냐고?
아, 진짜 어떡하지?
이 녀석 너무 미친놈 같아!
그런데 어째서일까.
“푸흐흐.”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이 불합리한 상황에 절벽 앞에 놓인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아무렴 상관없어졌다.
오히려 실실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진짜 바보 같아.’
저 미친놈도 걱정하던 자신도 다 바보 같아졌다.
“하, 도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거야? 헌터 협회에도 날고 기는 사람은 많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봐.”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는 송유리.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에 마현이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원래대로 돌아왔군.’
내가 워낙 우중충한 분위기를 싫어한다.
비가 오면 신발이 젖어 발걸음이 무거워지듯.
괜히 축 처진달까.
아무튼, 지금의 그녀는 원래의 당찬 모습이 되었다.
텅 비었던 동공에 생기가 가득했다.
‘그나저나. 헌터 협회라…….’
전생에 이렇다 할 인연이 없었지.
문득, 헌터 협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팔 대 명가쯤 되면 협회의 권한 없이도 활동할 수 있으니 엮일 일이 전혀 없었으니까.
‘이렇게 에이전트와 대화할 일도 없었지.’
그렇기에 대충 헌터 협회가 뭔지는 알지만.
아는 거라곤 주워들은 것들뿐이었다.
“헌터 협회에서는 늘 이런 위험한 공략에 투입되나?”
“응? 아, 궁금해? 좀 고리타분한 이야긴데.”
“난 고리타분한 거 좋아해.”
“그, 그래? 뭐 그렇다면야…….”
어째선지 조금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헌터 협회.
팔 대 명가, 오대 길드와 더불어 국내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조직이다.
삼대 세력 중 가장 많은 헌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태생부터 특별한 명가나 자본으로 키워내는 길드의 인재들에 비해선 전반적인 수준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막강한 권한과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다.
마치 정부 조직도를 그대로 본떠 만든 듯한 체계적인 부서들을 운영하며,
부서별로 독자적인 승급 제도를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특히, 송유리가 속한 방위부의 경우.
범죄자 헌터를 잡는 헌병대 일부터 마물을 잡는 공략대 일까지.
국가의 안전과 관련된 모든 시험에서 상위 10% 이내의 인재만이 속할 수 있다고 한다.
“흠흠.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즉, 에이전트라고 하면 협회의 정예 요원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호오, 그럼 너도 십 퍼센트에 든 거구나.”
“아니.”
그녀 씩 웃으며 검지를 치켜세웠다.
“일 퍼센트야. 이래 봬도 협회 내에서 장래가 유망한 우수 요원이거든.”
송유리는 기수 내에서도 손꼽히는 성적으로 입사한 것이다.
그렇게 2년 동안 죽기 살기로 노력하여, 마침내 마총을 다루는 요원이 되었지만.
뭐, 보다시피 지금은 이렇게 됐다.
“흐음, 협회의 일 퍼센트 우수 요원이라…… 내가 죽을 확률이 구십 퍼센트가 넘는다고 했지?”
“앗, 아니. 그거는……!”
“시원하게 틀렸잖아?”
이러면 헌터 협회 수준이……?
빙글 웃는 마현에 송유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뭐라 말하려 해도 할 말이 없었는지.
이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 확률은 틀리지 않았어.”
“호오……?”
“진짜야. 이번 건 그저…….”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마현, 네가 대단했을 뿐이지.”
칭찬받았다.
“흠, 왠지 기분이 좋군.”
“아, 몰라! 그런 줄 알아. 난 틀리지 않았어.”
“그래, 그럼 이번 확률은 어떤데?”
관문을 통과할 확률.
사실, 이미 답은 도출되었지만.
과연 그녀가 자랑하는 분석력이 신빙성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구십 퍼센트 이상.”
“통과 확률이?”
“……사망 확률이야. 난 거짓말 안 해. 이것도 좋게 쳐준 거고.”
― 아아…….
듣고 있던 숭달여도 탄식할 정도의 분석력.
뭐, 송유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일 테지만.
“접어라, 분석. 쓸모가 없군.”
“뭐라고? 나는 데이터 분석 대회에서도 차석을……!”
“됐고, 하나만 묻자.”
“우으, 진짠데…….”
조금 침울해진 그녀에게 이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분명, 송유리는 방위부에 소속되었다고 했지.
그리고 방위부에서는 범죄 헌터를 잡는 헌병대의 일도 맡는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신원 조회 권한이 있는 건가?’
만약, 헌터의 신원 조회가 가능하다면.
어쩌면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아직 랭킹에 등재되지 않은, 세인트 길드 녀석들의 정보를 말이다!
그렇게 되면, 고동석의 잠입 수사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을 터.
여러모로 물밑 조사에 도움이 되는 단서를 구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뭐, 가능은 하지?”
가능하다!
물론, 직급에 따라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하지만.
일부 정보는 그녀의 권한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근데, 당신, 눈이 음흉한데.”
“무슨! 아니야. 절대 아니야.”
크흠, 이런, 티가 나 버렸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처지였는데.
그 해결책이 떡하니 나타났으니까!
‘송유리라.’
갑자기 다르게 보여.
조금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일단, 가까워져야겠어.’
상위 1% 유능한 에이전트 인맥.
갖고 싶어졌다.
“슬슬, 우리도 움직이자.”
그때, 송유리가 먼저 일어섰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나?”
울상이었던 처음과 달리 완벽하게 차분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하, 왠지 당신이랑 대화하다 보니까. 아무렴 상관없어졌어.”
흠, 나 덕분이라?
“그거, 좋네.”
우리는 서로 마주 웃었다.
송유리와 친해지기.
왠지 쉬울 것 같다.
68화. 나와라
송유리는 사실 내심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야, 아무렴 상관없어졌다고 말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상의 문제가 그렇다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암굴을 단둘이서 공략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으니까.
‘조시혁 놈들을 기다리는 것도 그래.’
이 정도로 트롤짓을 했다는 건 의도가 분명하다.
은근 자신들의 죽음을 바라는 거겠지.
그러니 그들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기에 마현에게는 애써 괜찮은 척, 불안을 감추고 암굴에 발을 들인 거였는데…….
서거겅―
촤좌좌좡!
키에엑!
“무슨……!”
하지만 어째서인지 상당히 수월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이 어두운 암굴에서도 마현의 검술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관문의 최정예 마물을 상대로도 이 정도 실력이라고?’
관문의 마물은 앞서 상대해 왔던 충인족과 자폭충의 레벨을 넘어선다.
이 던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마물들이 포진해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균열의 저울의 효과로 강해졌으니.
분명 압도적인 힘을 보여왔던 마현일지라도 어려울 줄 알았는데……!
“쉽군.”
쉽다는 것이다!
‘뭐야, 이 사람?’
뭔데 진짜!
처음 암굴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차가운 공기와, 음울한 기운, 90%가 넘는 사망 확률에 마치, 겨울 바다에 몸을 담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호흡이 안정되고 진정되어갔다.
점점 따듯한 기운이 깃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나 안도하고 있어?”
안심이 되는 것이다!
어느새 입가에 절로 희망의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긴장이 놓인 상황.
그만큼 마현의 뒤를 따라 걷는 것이 아늑했다.
“내 버스 어때?”
“……바, 방심하지 마. 헌터들의 사망 요인 1순위가 방심인 거 몰라?”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너무 좋았다.
죽다 살아난 기분인데 뭐가 싫겠는가.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 암굴의 마물들…… 시체를 남기지 않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죽으면 스르륵 사라졌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그 육신들이 하나같이 그림자로 만들어진 것처럼 어둡게 일렁거리는 것이다.
‘이 현상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기분이……?’
그때였다.
크롸아!
마물의 포효가 암굴에 진동했다.
그 힘에 절로 뒷걸음질 쳤을 정도다.
‘무, 무슨 기운이……!’
느껴지는 힘이 가히 던전의 보스급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관문의 문지기가 이 정도 힘이라니.
과연 A+ 난이도라는 건가!
“물러서.”
그 마현도 조금 긴장한 기색이다.
방금까지 안도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질 정도로 두렵기 짝이 없었다.
철컥!
서둘러 마총을 겨누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푸른 안광을 빛내는 그 녀석에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늑대?”
아니 개인가?
관문 문지기의 정체가 이상한 것이다!
겉보기엔 거대한 대왕 지네의 사체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분명 네 발로 걷고 있어!
아니, 애초에 대왕 지네가 크롸아 하면서 울던가?
‘던전이랑 안 어울리잖아.’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놈이 휘두르는 일격에 암굴의 바닥이 터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접었다.
콰과광!
‘……역시 A+급 던전. 방심은 금물인 거야.’
사소한 것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애초에 마물이란 인간의 이해에서 벗어나는 존재.
뭐가 나타나도 이상할 건 없다.
다 부질없는 생각인 것이다.
콰앙!
카가강!
그동안 상대했던 마물과는 다른 양상.
일검에 마물들을 죽여 왔던 그 마현이 밀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다.
타앙! 타앙! 타앙!
쉬지 않고 번뜩이는 마총의 불빛.
하지만 마탄은 마물을 꿰뚫지 못했다.
강하다.
마총의 힘으로 죽일 수 없을 정도로……!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크르릉― 컹!
“송유리!”
순간 마물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이 자신을 향해 쇄도했다.
타앙! 타앙!
거대한 덩치로 번개 같은 움직임.
지그재그로 피한 그 녀석이 찰나의 순간 자신의 앞에 당도했다.
“어……?”
거대한 앞발이 들어 올려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은은하게 빛났다.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꿀꺽.
새하얗게 질린 그녀.
두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위로 마물의 앞발이 내리쳐지는 그 순간.
두근.
죽는 줄로만 알았다.
카아앙―!
“!”
“내가 말했잖아. 넌 절대 안 죽어.”
“마현……!”
이런 상황에서도 마현은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사람의 마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지키고 있으니까.”
……참 짓궂은 사람이다.
카가가강!
발톱을 막아 세운 마현의 검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내 그가 힘껏 검을 휘두르자.
그 거대한 덩치의 마물이 일순간 밀려났다.
숨겨왔던 힘이라도 있던 건가?
그 후로 양상이 급변했다.
마현이 어느새 팽팽하게 놈과 겨루는 것이다.
‘지켜지고 있어.’
자신이 보호받고 있음을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마현의 뒷모습으로 왠지 잊고 지내던 것이 떠올랐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켜 오고.
헌터로서 사람을 구해 오던 그 사람.
‘아버지.’
자신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내가 헌터가 되기로 한 이유…….
나는 아버지처럼…….
그리고.
‘이 사람처럼 누군가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그렇기에 헌터 협회에 입사했던 자신이지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바쁜 사회의 톱니바퀴로 마모되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일들로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떠올랐다.
크롸아……!
쿠웅!
마현의 검에 쓰러지는 마물.
그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괜찮아?”
자신에게 건네진 그의 손.
그 손을 따라 올려다볼수록 그가 커다랗게 보였다.
‘마현은 어린 나이에 내 꿈을 이루며 살고 있구나.’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빛날 수 있지?
잊었던 꿈을 되찾았지만, 이젠 알고 있다.
자신은 마현처럼 될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척.
송유리는 그가 건넨 손을 맞잡았다.
“응!”
이 손을 잡고 일어서고 싶었으니까.
다시 나아가고 싶었으니까.
비록 마현처럼 되지 못할지라도.
자신은 자신대로 꿈을 펼치고 싶은 것이다.
‘이대로는 아쉬워.’
이 우연으로 시작된 관계가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만큼 그녀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송유리?”
마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송유리. 이걸로 관문은 끝났다.”
“응? 아, 아? 아!”
황급히 손을 놓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갑자기 훅 들어오는 현실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딘가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괜찮아? 상태 이상한 거 아니지?”
“아, 아니야. 그냥 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다행이군.”
씩 웃는 마현에 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이제 나가자.”
“그, 그래요.”
송유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가 처음과 180도 달라졌음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마현의 자작극이라는 사실도!
‘흐흐, 반응이 좋은데!’
― 진짜 징하구나…….
숭달여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사기극!
송유리는 그저 마현과 녹턴의 WWE에 감명받은 것이다.
― 내 화신이 사기꾼에 소질이 있을 줄은 처음 알았다.
‘훗, 네크로맨서의 기본 소양이지.’
뭐가 됐든 이건 어쩔 수 없는 수였다.
그야, 암굴의 마물은 내 하수인이 다 죽인 참이었으니.
어떻게든 꾸며야 했던 거니까.
그 과정에 msg를 살짝 더했을 뿐이다.
그리고 뭐.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지.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영락없이 사기꾼이나 할 법한 말을 숨 쉬듯 하는 마현.
숭달여는 제 화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혼돈 그 자체로구나…….’
하지만 그런 점이 또 묘하게 중독적이었으니.
숭달여는 점점 깊게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 * *
하아, 하아…….
조시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어느새 광굴의 끝.
자신들은 관문의 문지기인 불나방 마물과 전투 중이다.
키이잇!
화르르륵!
날갯짓을 할 때마다 화염을 쏟아 내는 놈.
‘제법 끈질기군.’
균열의 저울로 약화된 이곳이었으나.
그럼에도 관문의 문지기라는 건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할 만해.’
조금 위험하긴 했어도.
아직 자신들 중에 부상자는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딱 좋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이 정도로 고생한다는 건…….
씨익.
암굴로 가야 하는 마현과 송유리는 그야말로 죽음일 테니까!
‘지금쯤 그 둘은 뭐 하고 있으려나?’
손잡고 지옥에 떨어졌으려나? 크흐흐.
아마 그럴 것이다.
마현 그놈은 어딘가 기고만장했으니까.
꼭 주제 파악 못 하는 멍청이처럼 말이야.
분명 놈이라면 공략을 시도했을 터.
송유리는 그런 마현을 혼자 보낼 수 없어서 따라갔을 테고.
그렇게.
‘정말 슬프게도 둘 다 죽어 버린 거지!’
흐흐, 사실 슬프지 않다.
오히려 정말 그래 주면 좋겠다.
왜냐하면.
기여도 순위 1위인 마현과 4위인 송유리가 사라져야.
5,000포인트가 자신의 것이 되니까!
그리고 그때가 바로.
‘백서연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눈을 번뜩인 조시혁이 관문의 문지기를 향해 쇄도했다.
호위들이 놈의 발을 묶어 놨다.
남은 건……!
자신의 일격뿐!
촤악!
키요옷……!
쿠웅!
쓰러지는 불나방 마물.
그리고.
[관문을 통과하였습니다.]
시스템의 확정 통보!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오빠, 너무 멋있었어요!”
“이제 보스방만 남았군요.”
“아니지 인마, 반대쪽도 있어.”
그렇다. 보스방을 열기 위해서는 두 관문을 모두 클리어해야만 했다.
그리고 남은 관문은 암굴.
균열의 저울 효과로 분명, 자신들이 클리어한 이곳보다 수준이 높을 것이다.
“일단 나가서 한번 정비한 후에 진행한다.”
“예, 형님!”
뭐, 그래봤자 더 이상 자신들을 막을 존재는 없다.
균열의 저울로 강해졌다고 해도.
충분히 휴식만 취하면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인 것이다.
드드드드.
조시혁에 의해 열리는 거대한 석문.
마침내 결계로 봉인된 보스방이 눈에 들어왔을 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눈앞에 그 끝이 보인다.
돌아가서 남은 관문을 통과해야 하긴 하지만.
이젠 정말 마지막에 가까워진 것이다.
‘얼마 안 남았어.’
후계자가 되는 것도.
백서연을 얻는 것도!
모든 것이 저 보스방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흐흐흐!’
조시혁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희망찬 미래가 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니까!
그렇게 마침내 조시혁들이 석문을 열고 나왔을 때였다.
“늦었군.”
“정말, 하품이 나올 정도야.”
응? 잠깐, 이 목소리는……?
순간 조시혁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그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서.
마침내 그 정체를 알아봤을 때.
“네, 네놈들은……?!”
두 눈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놈들은…….
쓰레기와 송유리였으니까!
“네, 네놈들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공동.
놈들이 이곳에 있으려면 반드시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송유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게 무슨 문제라도?”
“당연히 문제다! 균열의 저울로 강해진 관문을 네놈들 따위가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저놈들이 이상한 수를 썼으리란 믿음이 강하게 들 무렵이었다.
“조시혁, 오히려 나야말로 궁금하군.”
자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놈.
마현.
그 쓰레기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들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그야, 그거는……!
어?
잠깐…….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조시혁 일행은 여섯이서 관문에 입장했다.
그것도 균열의 저울로 약해진 관문이었다.
그럼에도 늦게 나왔다는 건……!
“그저 네놈들이 병신인 거잖아.”
자신들이 병신이 되는 것이다!
‘형님……!’
‘저 새끼 나불거리는 수준이 다릅니다!’
‘저놈 입놀림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크으윽!
치욕에 몸이 떨렸다.
“하! 송유리 대리는 뭐가 그렇게 당당해? 누가 보면 아주 제가 다 한 줄 알겠어?”
보다 못한 노혜민이 한발 앞서 나온 것은 그때였다.
‘흥! 분명, 저 마현이라는 사람이 대부분 다 해치웠겠지.’
평소 협회에서 자신을 숟가락 거머리라 모욕하던 송유리다.
껌딱지처럼 남이 해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는 거머리라고 말이다.
근데 지금 상황은 그녀가 자신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기에 송유리에게 너도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말을 했는데.
돌아온 말이 충격이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데 뭐 어쩌라는 거죠?”
“뭐?”
“그쪽 기여도가 지금 얼만지는 알고 따지는 건가요?”
기여도.
송유리는 6위였고.
노혜민은 꼴찌였다.
같은 하위권이라기엔 약 두 배 이상의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서른 살 넘도록 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폐급인 당신과 이십 대 초반에 우수 사원인 제가 왜 계속 비교가 되는 거죠?”
“자, 잠깐……!”
“그리고 당신은 이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아줌마면서 왜 자꾸, 오빠, 오빠라고 씨불이는 거죠?”
응?
그 말에 조시혁의 호위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 중에서 서른을 넘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
“뭐야, 내가 동생이었어?”
“혜민 동생…… 아니 혜민 누님?”
“아, 아니에요. 오빠들! 저거 다 거짓말이야!”
하지만 노혜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송유리의 말에 신빙성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때 조시혁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깐.’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마현이 죽을 줄로만 알았기에 깜빡 잊고 있던 그것.
기여도.
저 둘이 죽었더라면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멀쩡히 눈앞에 살아 있다.
그것도 둘이서 균열의 저울로 강화된 관문의 마물을 독차지한 채.
‘설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들어맞았다.
───순위───
1위. 마현(66%)
2위. 조시혁(9%)
─────────
육, 육십육 퍼센트?!
“아, 안 돼!”
“혀, 형님?!”
“오빠?!”
저 새끼 얼마나 쳐 죽인 거야!
이 정도면 혼자서 관문의 마물을 쓸어 잡은 수준이다.
아니, 송유리가 한 마리라도 잡긴 한 건가?!
제길,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면…….
‘놈이 독식하게 돼 버린다고!’
70%다.
지금처럼 소규모 공략대의 경우.
한 명이 70% 이상의 기여율을 달성하면.
그 한 명이 모든 포인트를 독식한다!
남은 건 고작 4%.
놈이라면 분명 70%를 넘길 것이다!
그때였다.
쿠구궁!
[보스룸 개방 조건 달성.]
[두 관문이 모두 통과되었습니다.]
[보스룸을 지키던 결계가 해제되었습니다.]
[잠시 후, 보스룸이 개방됩니다.]
보스방의 결계가 해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빠드득.
이제 이 던전도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자신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마현이 5,000포인트를 가져가게 되고.
마현을 죽이면.
‘내가 5,000포인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기회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조시혁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진득한 살기가 스멀스멀 끓어올랐다.
‘반드시 죽여 주마 마현!’
하지만 다음 순간, 보스룸이 열리고.
내부의 전경이 조시혁의 눈에 들어왔을 때.
“미친……!”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키기긱 더러운 인간…… 결국, 이곳까지 왔는가.
높은 단상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거대한 충인족.
그 곁엔 관문의 문지기들이 호위무사처럼 지켜 섰다.
― 우리들의 숭고한 자살 병단 전략이 통하지 않았다니 키릭, 그것은…… 무척 의외.
놈은 그동안 만나 온 충인족들과 달리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제사장처럼 치렁치렁한 복장을.
― 하지만 전혀 상관없음이다. 그야, 키힛, 이곳은 ‘부화의 전당’.
거대한 원통 안에 발을 디딘 것처럼 까마득히 높은 천장.
― 키기깃. 준비된 병사는 넘치니까.
모든 벽면에 수백 개의 거대한 알이 붙어 있다.
그리고.
쩌적―
쩌저저적!
모든 것이 깨어난다!
“제, 제기랄!”
저 알 하나하나가 다 충인족들인 건가?!
이건 애초에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잖아!
절대 이건 A+ 난이도 수준이 아니었다.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던전이었으니까!
[경고: 던전의 수준이 격상됩니다.]
[확인되지 않은 마물들이 감지되었습니다.]
[경고: 던전의 수준이 격상됩니다.]
[확인되지 않은 마물들이 감지되었습니다.]
“이, 이건……!”
던전 난이도 격상.
시스템마저 이 상황이 비상식적임을 인정했다.
거기에 A+난이도에서 올라간다는 건……!
[난이도 S급.]
절대 자신들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펑! 퍼벙!
알 껍질이 폭발한다.
그리고.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잠들어 있던 충인족들이.
케르르륵!
키이얏!
“도, 도망쳐라!”
[던전 난이도가 격상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보상이 상향됩니다.]
[클리어 성공 시, 공적치 50,000포인트를 나눠 갖습니다.]
[※공적치는 기여도를 산정하여 분배됩니다.]
시발, 오천이고, 오만이고!
죽게 생겼는데 눈에 들어오겠냐!
일단 살아야 했다.
그러니.
파앗!
다음 순간, 거미줄처럼 금이 간 보호막이 펼쳐졌다.
오억짜리 보호막 아티팩트였다.
통로를 가득 메운 그것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형님! 나이스!”
“빨리 뛰어!”
어차피, 보스방은 개방되었으니 이제 게이트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대로 나갈 수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보호막이 오래 버텨 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 생각이 있었다.
“이, 이건!”
경악한 송유리의 외마디가 들려왔다.
그녀와 마현이 보호막 건너편에 있는 것!
“시간 좀 벌어 줘라!”
즉, 조시혁은 둘을 제물로 시간을 번 셈이었다.
타앙! 타앙! 타앙!
“이, 이 무슨……!”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던 보호막이지만.
마총의 충격에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허…….”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망연자실한 송유리.
점점 많아지는 마물들의 때에 점점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때.
키이잉―
서늘한 검명.
그리고 이어지는…….
쩌엉―
청아한 소리.
검을 뽑은 마현으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그가 팽팽하게 몸을 당겼고.
다음 순간 쏜살처럼 검을 내질렀을 때.
【구천마검 일 초식 균천】
마총에도 꿈쩍도 않던 보호막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콰아앙!
“무, 무슨…….”
이 사람 대체 얼마나 힘을 숨기고 있는 거야?!
하지만 놀랄 틈은 없었다.
곧 마물들이 덮쳐 올 테니까.
그렇게 부리나케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마현?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곳은 관문의 출구.
그러니까 보스룸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 곳.
그런데 마현이…….
쿠구구궁…….
문을 닫고 있다.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은 채.
즉, 마현은 여전히 싸울 생각인 것이다!
“이, 이건 아니야! 도망쳐야지!”
“송유리. 지켜 주는 건 여기까지다.”
“그게 무슨……!”
“도망쳐라. 여긴…….”
씨익.
여전한 미소를 짓는 마현.
다음에 이어지는 말도 여전했다.
“내가 먹을 테니까.”
쿠웅!
굳게 닫힌 석문.
“마, 마현……!”
하지만 송유리는 도통 발을 뗄 수 없었다.
분명 그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벌어 준 만큼, 그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지만.
어떻게…….
이런 사람을 두고 떠난단 말인가!
“막긴 뭘 막아!”
“도망쳐야지!”
“같이 도망치자고!”
쾅쾅쾅!
그녀의 손이 석문을 두드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계속해서 구해 준 사람이지 않은가.
“아니면 차라리 나도…….”
자신을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흐윽, 나도 같이 싸우게 해 줘!”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석문은 열리지 않았다.
* * *
‘미안, 송유리.’
너와는 함께 싸울 수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송유리가 정말 위험해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씨익.
나 정말 너무 써 보고 싶었거든.
‘내 안에 꿈틀거리는 수십 마리의 그 녀석들을 말이야.’
― 키리릿 인간…… 객기를 부리는군.
부화의 전당의 주인이자 던전의 보스인 ‘코퀴케스’가 관문의 출구 앞을 지키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곁에는 갓 태어난 수십 마리의 충인족들이 포위하고 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남자는 전혀 두려움에 빠지는 기색 없이 실실 웃고 있었으니까.
실성한 듯했지만,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짜릿했으니까.
― 미친 건가?
가끔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개체.
뭐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 인간, 마지막으로 할 말은?
아무튼, 용기가 가상하니 유언이라도 들어볼까 싶었다.
그렇게 놈이 말했다.
“나와라.”
그 순간.
사아아―
진득하게 퍼져 나가는 죽음의 향기.
먹물처럼 번져 가는 그의 그림자.
그 속에서 하수인들이 천천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침내 그것들의 형체가 완전해졌을 때.
― 잠깐, 이건……?!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죽음의 숙명을 타고난 자신들의 숭고한 자살 병사들이…….
삐비비빅?
놈의 더러운 하수인이 되었음을!
69화. 준비된 마물은 충분한가
인간의 앞에 나타난 하수인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 코카케스는 충격에 부르르 떨었다.
― 키, 키릿……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그 하수인들의 정체가…….
바로 자신의 병사들이었으니까!
우리 충인계 마물들은 태어날 때 두 가지가 결정된다.
‘역할’ 그리고 ‘충성’.
개미들이 태어날 때, 일개미, 병정개미, 여왕개미 등으로 나뉘는 것처럼.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양한 병과의 충인족들이 생겨나며.
거기에는 눈앞의 저들도 있었다.
자살 병사. 자폭충.
날 때부터 오직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병사들.
종족의 안위와 적의 섬멸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그들이었지만.
누구도 이러한 타고난 역할에 저항하지 않는다.
유전자에 새겨진 강력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 종족적 기질이 오직 그 역할에 충실하도록 하니까.
즉, 벌레의 성질을 타고난다는 건.
유전자에 각인된 ‘역할’과 ‘충성’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병사들이 더러운 인간의 편에 섰다는 것이!
‘분명, 무슨 수를 썼음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자신의 병사들을 되찾아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폭충들이…….
삐삣! 삐잇―
부비부비.
“하하! 이 녀석들!”
놈의 다리에 몸을 비비기 전까진!
― 키엣! 무, 뭐냐. 어째서……? 아니, 그보다 저 표정은 뭐지?!
그건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마치. 놈에게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말이다!
‘어째서 나의 병사들이 저놈에게 아양을 떠는 거지?!’
도대체 저 덜떨어진 모습은 뭐란 말인가.
예전의 그 자랑스러운 패기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기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리숙한 모습.
그 처음 보는 풋풋함에 어딘가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자신에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으니까.
‘부, 분명, 놈이 내 병사들의 마음을 굴복시킨 것이다!’
― 키아앗! 더러운 놈! 나의 병사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떻게 했길래.
저 죽음조차 불사하는 자신의 병사들이…….
이렇게 멍청하게 됐냔 말이다!
“흐음, 이 친구들 말인가?”
그 물음에 마현이 자폭충 한 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듯이.
“정말 별로 어렵지 않았어. 이 친구들이 말하길 평소 처우가 개판이었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둥.
수명도 짧고 생긴 것도 작고 하찮다는 둥.
다양한 이유로 이 친구들에 대한 대우가 최악이었다고 한다.
즉, 평소에 잘해 주지 않은 코카케스의 탓인 것이다!
― 뭐, 뭣이? 그런 적 없다!
분명 자신은 평등하게…….
아니…… 그랬었나?
근데 어차피 죽을 목숨인 건 맞지 않은가.
상급자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것도 맞고…….
‘……그럼 왜 잘 챙겨 줘야 하지?’
아, 아니 어쨌든, 이건 어디까지나 효율의 문제였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섭리가……!
“말이 길군, 결국, 결론은 이거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코카케스를 가리키는 마현.
그의 눈빛에는 승리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
“네놈은 이 친구들을 단순히 도구로만 여겼지.”
엄연히 살아 숨 쉬며.
무엇보다 종족을 위해 제 한 몸 불 싸지를 수 있는 이들이었지만.
결국, 네놈들에겐 도구에 불과했다.
즉, 너는 이 친구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친구들이 내게 넘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폭충들이 그 말에 동의하듯 반복적으로 한쪽 팔을 접었다 내질렀다.
삐이잇!
삐잇― 삐잇―
― 키잇……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참히 일그러진 코카케스의 표정.
딱딱하게 굳은 채 치를 떠는 그 모습에 마현의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갔다.
왜냐하면…….
구라였으니까!
자폭충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보스 녀석과 말이 통하길래 해 본 소리였다.
대화가 된다는 건.
속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래도 내가 네크로맨서인 걸 인지하지 못한 모양인데.’
그러니 이 사달이 난 거겠지.
평범한 네크로맨서처럼 하수인이 시체의 형상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원본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놈은 그저 배신당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 이건 뭐…… 말이 안 나오는구나.
‘하하, 과찬이야.’
아무튼 통했다.
그리고.
코카케스는 이성을 잃었다!
― 키이잇!! 인정할 수 없다. 더는 네놈의 쓰레기 같은 입놀림에 놀아나지 않겠다! 가라! 더러운 인간을 죽여라!
두두두두.
그의 말에 백이 넘는 충인족들이 마현과 배신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어차피 자살 병사의 수는 열 마리.’
넘치는 물량으로 압살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콰과과과광!
한 차례 연쇄 폭발이 있었고.
순식간에 앞서 돌진하던 충인족들이 폭사하여 사라졌다.
하지만 그 뒤로 또다시 충인족들이 달려들었다.
더 이상 놈을 지킬 것은 없음이다!
― 킷킷킷, 거기 더러운 주둥아리. 남아 있는 자폭충의 수는 충분한가?
코카케스는 혼자가 된 마현을 비웃었다.
하지만.
“물론이지!”
……충분하다고?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삐이잇!
자폭충들이 충원되는 모습을!
‘이 더러운 인간 놈! 설마, 이게 끝이 아니었던 건가!’
그저 최대 열 마리를 불러낼 수 있었던 모양.
그렇기에 배신한 자살 병사의 수는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됐든 상관없다.
― 죽여라! 저 더러운 인간을!
이쪽의 수는 자그마치 수백에 이른다.
놈에게 넘어간 배신자가 얼마가 됐든.
이미 승부는 이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콰과과광!
콰아아앙!
쾅쾅콰아앙!
그렇게 몇 번의 연쇄 폭발이 있었다.
매번 열 마리의 자폭충이 충원되는 것이다.
‘도, 도대체 얼마나 많이 회유한 거지?’
이 던전에 있던 자살 병사는 약 백 마리에 육박한다.
하지만 저 더러운 인간은 벌써 오십 마리 가까이 소환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자살 병사들이……!
그때.
‘설마…….’
코카케스는 보고 말았다.
씨익.
마현의 썩어 빠진 미소를 말이다!
그리고 저 자신만만한 태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
놈이 자살 병단의 대부분을 회유했음을!
‘더러운 놈……!’
코카케스는 부르르 떨었다.
살면서 저렇게 치졸하고 더러운 인간은 처음 본 것이다.
아무튼 문제다.
자살 병단 전체가 넘어갔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진을 시킨다면 피해가 너무 컸으니까.
― 키이잇! 장군들이여, 저 더러운 놈의 주둥이를 잘라서 내 앞에 갖다 놓아라!
그렇기에 더 피해가 커지기 전에 자랑스러운 대왕 지네 장군과 불나방 장군으로 놈을 무찌를 생각인 것이다.
코카케스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두 장군과 충인족들의 눈이 붉게 타올랐고.
마현을 향해 지독할 살기를 내뿜으며 쇄도했다.
조금 피해를 입긴 했지만.
자신의 호위인 두 장군까지 합세한 이상.
저 인간 한 놈을 잡는 것 따윈 시간문제다.
즉, 이 전투는 자신의 승리인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키, 키잇…….
그 많던 충인족들이 반파되고.
샤아아앗……!
대왕지네 장군의 수십 개의 팔이 모두 사라지며.
피이잇……!
불나방 장군의 날개가 떨어지기 전까진!
― 어, 어떻게……?
분명, 이 부화의 전당에 배치된 자살 병사의 수는 백 마리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백 번도 넘게 소환되는 것이지?!’
뭔가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놈은……!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즐기고 있었다.
“훗, 이상함을 눈치챘나 보군.”
― 캬아앗! 더러운 자식!
코카케스가 분노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짐작한 대로 자폭충은 이미 백 번도 넘게 소환되었으니까.
하지만 놈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실제 자폭충은 죽으면 끝이지만.”
내 하수인은…….
“죽어도 죽는 게 아니거든!”
영혼만 있다면.
언제든 리필이 가능하니까!
흐흐, 이것이 진네크로맨서의 힘!
시체 따위가 아닌 영혼을 다루는 네크로맨서의 진정한 힘이다.
그 사실에 코카케스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마,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자살 병사가 아니지 않은가.
자살을 대가로 단 한 번 강력한 폭발을 할 수 있던 것인데.
무한히 폭발할 수 있다니……!
― 더러운 녀석! 이건 사기다!!
코카케스는 깨달았다.
이 전투는…….
결코 놈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놈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크크, 준비된 마물은 충분한가?”
씨익.
“난 충분한데.”
― 캬아앗! 쓰레기만도 못한 인가안!!
이 벌레만도 못한 놈!
파리보다 더러운 놈!
반드시…….
반드시 네놈만큼은…….
― 내가 네놈을 죽이겠노라! 키야앗!
코카케스가 진득한 살기를 내뿜으며 전력으로 내달렸다.
자신과 종족을 우롱한.
저 더러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게.
.
.
.
띵.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지이잉―
블랙 게이트가 거칠게 일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흐아악!”
“하, 하하…… 살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오빠들 다행이다 그치…….”
“누나, 고생했어요.”
거친 숨을 내쉬는 조시혁들.
마현과 송유리를 제물로 바친 덕분인가?
다행히 제때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빠드득.
‘제길 내 오천 포인트가……!’
이대로는 결국 손해만 본 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긴 하지만.
눈앞에서 모든 것을 놓쳤으니, 치가 떨렸다.
“형님, 일단 살았으니, 다음을 기약하시죠.”
“개똥밭을 구르더라도 이승이라잖슴까.”
“아니면, 다시 공략하기 전에 용병을 구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용병이라.
확실히 그것도 괜찮을 것 같네.
게이트야 다시 들어갈 수 있고.
S급이긴 해도 이 던전은 그 압도적인 물량 때문에 그런 거니까.
즉, 살아 돌아왔으니, 채비를 다시 갖추고.
이 던전에 딱 맞는 강한 용병을 구해 재공략하면 되는 것이다.
‘용병에게 포인트를 조금 양보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몇천 포인트는 자신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아아! 살아 돌아오셨군요!”
그때였다.
헌터들을 향해 아니, 정확히는 조시혁을 향해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이들은 가문과 연결된 방송 언론사 기자들.
믿음 조가와 자신의 긍정적이고 영웅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존재하는 꼭두각시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고생 많으셨네요. 진짜.”
“도련님 무사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이대로 사진 한 번 찍겠습니다!”
찰칵!
“이대로 인터뷰 진행할까요? 그림 좋습니다.”
사실 인터뷰고 뭐고 간에 다 부숴 버리고 싶었다.
피곤하고 짜증나는데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하긴 이래서 놈들이 천박한 서민으로 사는 거지.
하지만 아무튼 놈들의 말대로 그림은 좋다.
무사 귀환한 영웅의 모습.
그리고 그 영웅이 밝히는 블랙 게이트의 비밀은 단번에 화재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이참에 이쪽으로 사람을 구해 봐야겠어.’
블랙 게이트 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자신들뿐.
정보의 권한을 쥐고 있으니, 쓸 만한 사람을 꼬드기기 참 좋은 기회다.
그럼, 내 말에 개처럼 따를 수 있는 녀석을 찾아 보는 거야.
카메라가 켜지고 마이크가 쥐어졌을 때.
조시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저희는…… 겨우겨우 블랙 게이트에서 탈출했습니다. 보스룸까지 도달했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엔 공포에 질린 듯한 연기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해서……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리면 온몸이 떨립니다.”
그가 손을 들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마치 그 기억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듯이.
“정말 두려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던전보다도 위험했어요. 그렇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고개를 숙이는 조시혁.
카메라는 그의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소중한 친구 두 명을 잃었습니다. 그렇기에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제가 살아 돌아온 이상…… 반드시 그들의 희생에 보답해야 합니다.”
그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기자들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그래서, 용기 있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저와 함께…… 이 던전을 공략하고, 우리가 잃은 것들을 되찾아 주실 분을 찾습니다.”
조시혁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인터뷰는 완벽했다.
이제 저 기레기 새끼들이 나의 조각 같은 얼굴과 감성 가득한 말을 편집해서 세상에 알릴 테니까.
그럼 이제 바보 같은 녀석을 잘 꿰어 내면 오천 포인트를 다시 노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혁 님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은 건 마무리 멘트뿐.
이 마지막 말이 중요하다.
멍청한 대중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나는 미지근한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부디…… 저의 두 친구를 위해……!”
“이 개자식드을!!”
응?
갑자기 뒤가 소란스럽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는 순간.
빠악!
“커억!”
웬 주먹이 조시혁의 턱을 갈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조시혁의 눈은 믿기지 않는 듯이 크게 떠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 주먹의 주인이…….
“누가 네 친구야!!”
송유리였으니까!
‘이 녀석이 어떻게?!’
송유리는 자신이 넘어진 사이 마이크를 빼앗았다.
“이 새끼가 범인이에요! 이 새끼 때문에! 저의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고요!”
그녀의 소중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현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백이 넘는 충인족들에 맞서 싸운 그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녀뿐이다.
“이 새끼가 저희를 배신하고 죽이려고 했다고요!”
하지만 그녀가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시, 시혁 님?”
“하아, 시발, 카메라 꺼.”
“넵!”
그 말에 일사불란하게 철수하는 기자들.
송유리가 쥐고 있던 마이크마저 뺏어 갔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녀는 순간 혼란에 빠졌고.
그리고 그 틈에.
퍼억!
“아흑!”
복부에 주먹이 꽂혔다.
무릎을 꿇은 그녀에게로 조시혁의 호위무사들이 둘러쌌다.
노혜민은 순간 어쩔 줄 모르며 눈치를 보다가 슬슬 이곳에서 도망쳤다.
“저 노괴는 어떻게 할까요?”
“후…… 일단 냅둬. 저런 새끼는 돈 주면 닥치니까.”
“오히려 좋아하겠네요.”
오랜 경험이었다.
“하아, 그나저나 이년이 문젠데. 어떻게 살아 온 거지?”
아직 이곳에 인적이 드물지만, 점차 사람이 많아질 터였다.
소란이 생기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흠.”
명치를 맞아 숨쉬기도 어려울 텐데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살기등등하다.
이런 독종은 참 방법이 없다.
돈을 줘도 뭔 짓을 해도 굽히는 법이 없거든.
백서연처럼.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송유리는 백서연도 아니고, 그녀처럼 든든한 뒷배도 없다.
헌터 협회 소속이면 뭐하나?
동료는 그 꼬라지에 에이전트는 원래 자주 뒤져서 조사도 잘 안 나오는데.
그때.
퉤!
“쓰레기!”
하, 앙칼지네.
세상 쓴맛을 못 봤나 보다.
“애들아, 비켜라. 처리하고 올 테니까.”
“예, 다녀오십쇼!”
“이거 놔! 끄윽!”
조시혁은 송유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끌었다.
블랙 게이트로 향하는 것이다.
한 번 블랙 게이트를 개방한 적이 있는 자는 몇 번이고 오갈 수 있다.
즉, 그곳에서 처리할 생각이다.
“넌 이 바닥 섭리를 잘 모르나 보다.”
가는 김에 그녀가 잘 몰랐던 것 같아서 말해주기로 했다.
이미 늦었지만 말이다.
“여긴 힘이 제일인 곳이라 적당히 까불어야 해, 인마.”
송유리가 연신 “이 손 놔!”라고 말하지만.
육체 능력치가 압도적으로 높은 조시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실이고 뭐고 힘이 약하면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고. 반듯하게 산다고 다가 아니야.”
이 바닥은 힘이 최고다.
오직 그것 하나로 많은 것이 정리된다.
“이 중요한 사실을 머리가 깨지기 전에 배우면 천재고. 머리가 부서진 후에 배우면 너처럼 되는 거지.”
많은 헌터들이 죽었다.
대부분은 마물에게 죽지만.
아마 두 번째로는 같은 사람에게 죽었을 것이다.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다.
“알겠어, 송유리?”
“닥쳐.”
“하하하!”
짜악!
휘두른 따귀에 송유리의 고개가 획 꺾였다.
그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즈음에 도착했다.
불길한 어둠의 빛으로 일렁거리는 블랙 게이트 앞에.
“조용히 입 다물고 생각이나 해라. 게이트 안에서 내 손에 뒤질지. 아니면 마현 그 새끼처럼 마물의 먹이가 될지 말이야.”
“……나, 나쁜 놈.”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는 송유리.
피식.
진짜 너무 가소롭다.
이젠 좀 궁금할 지경이다.
이렇게 하층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길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뭐, 내 알 바 아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조시혁은 송유리를 비웃으며 게이트에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그 순간.
터억―
조시혁은 얼어붙었다.
무언가 자신의 머리통을 움켜쥐었으니까.
‘뭐, 뭐지……?!’
뭐냐…… 이 손은!
자신의 머리통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은…….
블랙 게이트 안에서부터 뻗어 나온 것이었다!
‘게, 게이트 안에서 사람이 나오고 있다고?’
그의 두 눈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온몸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게이트 안에 있을 사람은…….
“설마…….”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그 새끼뿐이니까!
지이잉―
거칠게 일렁거린다.
마침내 자신의 머리통을 움켜쥔 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 그 설마가 맞다.”
씨익.
빛나는 그의 미소.
그 웃음 뒤로 빛살처럼 빠르게 무언가 튀어나왔다.
주먹이었다.
“처맞는 말이야.”
콰앙!
70화. 게이트가…… 붕괴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