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장호연은 말을 탈 줄 몰랐다.
하지만 운총마를 타고 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장호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운총마는 그가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스스로 속도와 보폭을 조절하며 영리하게 움직였다.
장호연 역시 수도자의 뛰어난 육체 능력으로 운총마의 움직임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운총마는 놀랄 만큼 뛰어난 힘과 지구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기를 두 시간 후.
어느덧 일행은 운암방시에서 삼백 리 이상 떨어진 곳에 다다랐다.
이곳부터는 운암방시의 영역을 벗어난 지역으로 사실상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장천명과 장운기는 주변을 예의주시하며 경계를 강화했다.
이와 달리 장호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치를 즐겼다.
탁 트인 시야 너머로 완만한 구릉과 낮은 산들이 드문드문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맑은 강줄기가 굽이쳐 흘렀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과 푸른 초목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
장호연이 이처럼 여유를 부릴 수 있던 이유는 모두 하늘에서 비행 중인 금령 덕분이었다.
금령은 뛰어난 영각을 지닌 덕분에 미세한 영기의 흐름까지도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축기기 수준의 은신술이 아닌 이상 금령의 날카로운 감각을 피하기란 어려웠다.
장호연과 금령은 혼계로 심령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신식 범위를 벗어나도 간단한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금령에게서는 드넓은 하늘을 마음껏 누비는 만족감 이외에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세 시간쯤 달렸을까.
어느덧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산맥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중림산맥은 울창한 수목과 풍부한 영기로 이름난 요산(妖山)이다.
산맥에는 2계 요장(妖將)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곳곳에 존재하며, 심지어 3계 요왕(妖王)이 서식한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산자락 아래 도착하자 장천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족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중림산맥을 넘어서 조금만 더 가면 백월호가 보일 게다. 간혹 위장이 뛰어난 요물들이 있으니 주의하거라."
눈앞에 펼쳐진 산맥은 중림산맥에서 뻗어 나온 작은 산줄기였다.
이곳은 운암방시에서 생활하는 엽요사나 채약사(採藥師)들이 사냥이나 채집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장호연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높은 산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머릿속으로 여중보가 중림산맥에서 겁수와 마주쳤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얼마 후, 일행은 산길에 들어섰다.
비록 요물들이 서식하는 산이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는 수백 년에 걸쳐 다져진 길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요물들은 대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생활하는 습성을 지녔다.
놈들 역시 인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기에,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요물들의 영역은 일정하지 않았다.
언제 요물들이 인간들이 다니는 곳으로 이주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요물들은 영역을 중시하는 만큼 침입자에게는 무자비한 공격성을 보였다.
또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요물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들의 영역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주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2계 요물이 나타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1계 후기 요물이 출몰하는 경우는 흔히 있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산길 주변에는 백 미터는 족히 될 법한 거목들이 가득했다.
산을 올라갈수록 나뭇잎이 무성해지며 하늘이 점차 어두워졌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가지들이 서로 뒤엉켜, 금령이 비행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했다.
게다가 산 전체에 거칠게 요동치는 영기의 흐름은 금령의 감지력을 떨어뜨렸다.
일행이 산맥 중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지며, 무성한 수풀 속에서 푸른 영광을 두른 망치와 도끼, 단창이 일행을 향해 날아왔다.
장천명과 장운기는 재빨리 법기를 꺼내 방어에 나섰다.
장천명이 던진 식칼 법기가 망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장운기의 고리 법기는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도끼와 단창을 연달아 튕겨냈다.
장천명은 운총마를 멈춰 세우며 땅으로 뛰어내렸다.
이어서 장운기와 장호연이 그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위험을 감지한 운총마들은 알아서 숲속으로 숨었다.
"누가 감히 백월장가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장천명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일행은 백월장가를 상징하는 하얀 장포를 입고 있었기에, 적들 역시 그들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백월장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큰소리를 치는 거지?"
낯선 목소리와 함께 숲의 어둠 속에서 세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겁수들은 흉흉한 기세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적들의 경지는 모두 연기기 후기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장호연은 적들의 얼굴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변형술로 외모를 바꾼 듯 보였다.
그때, 가운데 서 있던 겁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주름이 깊게 파인 노인으로 변했다.
이어서 양옆에 있는 이들도 변형술을 해제하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였다.
남자는 기골이 장대했고, 여자는 날렵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적들의 진면목을 본 장천명이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분노 섞인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관융천. 가문을 버리고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했으면 평생 숨어 살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났느냐?"
여남군에는 운암방시가 있는 고양진과 구절방시(九折坊市)가 있는 심곡진(深谷鎭), 두 개의 진이 있다.
과거 구절방시는 연기한문인 애뢰산(哀牢山) 비가(費家)와 황죽봉(黃竹峰) 관가(關家)에 의해 관리되었다.
비가와 관가는 더 큰 이익을 얻고자 운암삼가와 전쟁을 벌였다.
당시 비가는 연기기 원만의 고수를 다섯 명 보유하고 있었다.
운암삼가는 고수의 부족으로 전쟁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천봉염가의 지원 덕분에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천봉염가가 운암삼가를 지원한 이유는 간단했다.
비가가 연기기 원만의 고수를 다섯 명이나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천봉염가와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축기세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천봉염가는 축기노조(築基老祖) 중 한 명을 파견하여 비가와 관가의 정예들을 쓸어버렸다.
수도계의 모든 관계는 이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비가와 관가를 지원하던 축기세가는 천봉염가와 직접적인 전쟁을 원치 않았기에 그들을 버렸다.
만약 비가와 관가가 천봉염가에 들키지 않고 운암방시를 장악했다면 암암리에 지원을 계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 그들에게서 더 이상의 이득을 기대할 수 없었다.
"닥쳐라! 네놈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하늘이 돕는구나. 백월장가의 장로가 죽으면 과연 운암방시가 제대로 운영될는지 궁금하군."
"운암삼가를 공격한 게 네놈들이었나?"
"그렇다."
관융천은 증오에 찬 눈으로 장천명을 바라봤다.
장천명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떤 놈들이 운암삼가를 공격하나 했더니, 이제 보니 관가의 쥐새끼들이었군. 가문조차 사라진 패잔병 따위가 운암삼가의 행사를 방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운암삼가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네놈들이 곧 죽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
"가문이 망하더니 실성을 했나 보군. 어디 남은 잔당이라도 더 있나 보지? 하지만 네놈들이 뭘 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전쟁에서 밀렸던 건 비가의 족로(族老)들 때문이지, 너희 관가 때문이 아니었다. 비가 덕에 호가호위하던 놈들이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장천명은 당당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저놈들은 네 명이 함께 움직인다고 했는데, 나머지 한 놈은 어디 간 거지?'
장호연은 함께 싸울 동료가 아닌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를 감안했을 때, 눈앞의 셋만 상대한다면 승리는 어렵더라도 도주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하지만 적이 하나 더 늘어난다면 싸움은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장천명,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십 년 전의 원한을 갚아주마!"
그 순간, 관가 무리가 동시에 몸을 날려 장호연 일행을 에워쌌다.
관융천은 은색 영광을 두른 망치를 날려 장천명을 공격했다.
다른 두 겁수 역시 비검과 단창을 운용해 공격에 나섰다.
다섯 사람은 법기를 운용하는 동시에 부적을 꺼내 들었다.
법기들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번쩍이는 빛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장운기가 장호연에게 날아가는 단창을 막아내며 의식을 전해왔다.
[호연아, 내 뒤로 와라!]
장호연은 장천명과 장운기의 가운데로 이동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봤다.
비록 숫자는 부족했지만, 장천명이 중심을 단단히 잡고 있었고 장운기가 적재적소에 적들의 공격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당장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결국 영력이 부족해져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만약 장호연이 돕는다면 적들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신식이 연기기 후기 수준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된다.
선도에 오른 지 고작 1년 만에 연기기 후기에 오르는 건 금단대종에서 전력으로 육성하는 도종들이나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장호연은 엘릭서의 비밀을 가족에게도 숨기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장천명과 장운기는 단순한 혈족이 아닌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가족이었다.
장호연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가족의 위험을 외면해야 할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야 할지 갈등했다.
'모르겠다. 일단 도와주고 운암방시를 떠나든가 하자. 금령이 있으니 조금만 조심하면 다른 방시로 무사히 갈 수 있을 거야.'
장호연은 가족들이 자신의 비밀을 굳이 들추려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만사, 그중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예측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장생과 법열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수도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장호연은 혹시라도 가족들에게 배신당하는 끔찍한 상황만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결심을 굳히고 저물대에 손을 가져가던 그때.
장천명이 그에게 의식을 전해왔다.
[호연아. 우리가 놈들을 붙잡아 둘 테니, 그 사이에 먼저 가문으로 가서 지원을 요청하거라.]
장천명은 장호연을 보호하면서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장호연이 없다면 운신의 폭이 더욱 넓어질 터.
적을 이기지는 못해도 도주하는 데는 문제 없었다.
이어서 장운기가 부적 한 장을 꺼내 장호연에게 날려 보냈다.
[신행부(神行符)다. 운총마에 사용하면 잠시 동안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을 게다.]
'신행부!'
신행부는 장운기가 수행을 위해 산수로 활동하던 시절 우연히 얻은 귀보(貴寶)였다.
장호연이 부적을 쥐고 가만히 서 있자 장운기가 재차 의식을 전해왔다.
[네가 늦을수록 상황이 더 어려워지니 어서 떠나라!]
장운기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수풀 속에서 운총마 한 마리가 튀어나와 장호연에게 다가왔다.
장호연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수도자는 신식 범위 내의 모든 기운을 감지할 수 있기에, 상대가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거나 강한 공격이 아닌 한 동급의 수도자를 처치하기는 어려웠다.
지금처럼 공방이 이어진다면 한동안 위험할 일은 없을 터였다.
자신이 무사히 도주에 성공한다면 겁수들 역시 두려움을 느껴 물러날 가능성이 높았다.
최고의 상황은 적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었다.
장호연은 결연한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조부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즉시 가문에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는 일부러 적들의 주의를 끌며 운총마에 올라탔다.
동시에 신행부를 발동시켜 운총마의 몸에 부착했다.
부적의 힘을 받은 운총마는 쏜살같이 산길을 내달렸다.
가족들을 뒤로 한 그의 눈에는 어느새인가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놓치면 안 된다! 영월, 놈을 쫓아라!"
장호연이 도주하자 관융천이 다급히 소리쳤다.
관융천의 지시에 중년 여인이 장호연을 뒤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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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장천명은 관영월의 날렵한 몸놀림을 보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이동 속도는 운총마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다.
'이런!'
장천명은 장호연을 구하려던 계획이 오히려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하지만 눈앞에 적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쪽에 마음을 쏟을 여유는 없었다.
'호연이가 산길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따라잡힐 일은 없을 것이야.'
운총마는 달리기 위해 태어난 영물이다.
관영월의 운신술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지구력 면에서는 운총마를 따라가지 못할 터였다.
장천명은 제발 장호연이 무사하길 빌었다.
장호연은 관영월이 쫓아오는 것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적 한 명을 유인해 냈으니 가족의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었다.
운총마를 타고 도주한 지 얼마 후.
장호연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숲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은 커다란 나무가 빽빽이 자라 있고 수풀이 우거졌다.
큰 덩치의 운총마가 달리기에는 절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길도 없는 숲속으로 숨다니. 경험도 부족하고 어리석기까지 하군.'
그 모습을 본 관영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평탄한 길로 계속 달렸다면 운총마를 따라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호연의 선택은 스스로 함정으로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관영월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추격전이 시작된 지 어느덧 20여 분이 흘렀다.
운총마는 사방이 나무로 가득한 산속에서도 놀라운 속도로 질주했다.
무성한 수풀과 가파른 언덕이 나타나도 운총마는 주저 없이 돌파해 나갔다.
하지만 무성한 나무들이 우거진 지형적인 제약으로 인해 운총마는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관영월은 경신술과 비행술을 번갈아 펼치며 장호연을 맹렬히 쫓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줄어들어 어느새 30여 미터까지 좁혀졌다.
곧이어 그들은 나무가 적고 바위가 많은 지형에 도착했다.
'여기서 끝내주마!'
관영월은 독사 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저물대에서 부적 한 장을 꺼냈다.
푸른 영광에 휩싸인 부적은 이내 회색빛의 날카로운 영기 바늘로 변해 전방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1계 상품 부적인 은침부(隱針符)는 공격력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속도만큼은 여느 부적보다 월등히 빨랐다.
"히이잉!"
회색 바늘이 운총마의 뒷다리에 깊숙이 박히며 음유한 기운이 전신을 헤집었다.
영력을 운용할 수 없게 된 운총마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거칠게 나뒹굴었다.
운총마는 그대로 목이 꺾여 죽음을 맞이했다.
장호연은 재빨리 등자를 박차고 운총마에서 뛰어내렸다.
땅으로 착지한 그는 쓰러져 있는 운총마를 바라봤다.
'망할!'
마침 그도 운총마를 보내고 관영월과 싸울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지 않았다.
칠살검을 꺼내 든 그는 빠르게 접근 중인 관영월을 서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곧이어 관영월이 장호연의 10여 미터 전방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녀는 장호연을 훑어보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생긴 건 곱상한 놈이 그래도 강단은 있구나. 하지만 연기기 초기 주제에 네 놈이 뭘 할 수 있겠느냐?"
비웃음과 함께 그녀의 손에 있던 단창이 번개처럼 장호연에게 쇄도했다.
그 순간 칠살검에서 푸른 영광이 번뜩였다.
모검에서 분리된 여섯 개의 자검이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며 단창을 막아섰다.
채채챙!
지난 한 달간, 장호연은 칠살검에 익숙해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칠살검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자유롭게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칠살검의 단단하고 예리한 검날은 백련정강도 두부처럼 베어 버릴 만큼 날카로웠다.
하지만 관영월의 단창 역시 상품 법기였기에 칠살검의 공격에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관영월은 장호연이 칠살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칠살검에서는 상품 법기 특유의 강렬한 영기 파동이 느껴졌다.
상품 법기를 저토록 능숙하게 다루려면 최소 연기기 중기 수준의 신식이 필요했다.
"어린놈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신식과 영력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마치 실과 바늘처럼, 영력을 운용하려면 반드시 신식의 힘이 필요했다.
연기기 수사의 영력은 1층이나 9층이나 그 양에 차이가 있을 뿐 질적으로는 동일하다.
그러나 신식이 강해질수록 영력의 응집력이 높아져, 결과적으로 간접적인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신식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대결은 같은 무게의 나무공과 쇠공이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장호연은 관영월의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를 통해 관영월은 장호연이 연기기 후기 수사임을 확신했다.
'백월장가에 저런 천재가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 없는데. 설마 양안단(養顔丹)을 복용하거나 주안술(駐顔術)을 익힌 건가?'
양안단과 주안술 모두 젊은 외모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보물이었다.
관영월은 방심을 거두고 신중하게 공격을 이어갔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의 실력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험의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장호연에게 이번 전투는 난생처음 겪는 실전이었다.
반면 관영월은 겁수로 활동하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다.
관영월의 노련한 공격에 장호연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장호연의 상황이 그리 위험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슷한 수준의 외물과 신식을 지닌 수사끼리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매우 어려웠다.
장호연은 안정적으로 관영월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전투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장호연은 답답한 국면을 타개하고자 오행술을 펼치며 관영월의 허점을 노렸다.
그가 손을 뻗자 금속성을 띤 날카로운 영기 칼날이 쏘아져 나갔다.
연이어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물줄기가 관영월을 덮쳤다.
하지만 관영월은 노련하게 대처했다.
그녀는 전면에 두터운 흙벽을 만들어 영기 칼날을 막았다.
흙벽이 무너지는 사이, 나무 갑옷을 둘러 물줄기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공방이 이어지며 수십 분이 훌쩍 지나갔다.
칠살검을 과도하게 운용한 탓에, 장호연의 신식이 빠르게 소진되며 인당혈에 옅은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영력은 장시간 운용이 가능하나 한번 소진되면 회복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신식은 정신력과 같아서 회복 속도는 비교적 빨랐다.
하지만 과로한 사람이 갑자기 기절하듯, 신식을 한계 이상으로 소모하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장호연은 연기기 후기의 신식을 지녔지만, 운용할 수 있는 영력의 양은 연기기 4층 수준에 불과했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한 건 그였다.
하지만 장호연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그는 자신이 지닌 전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않은 상태.
찰나지간, 그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장호연은 칠살검을 하나로 합쳐 장검의 형태로 만들었다.
금강부를 발동하자 금빛 광채가 번쩍이며 농밀한 영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이어서 을목양장결을 운용한 그는 망설임 없이 관영월을 향해 돌진했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장호연의 모습은 질주하는 성난 황소를 연상케 했다.
관영월은 장호연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그가 연체술을 수련했음을 단번에 알아봤다.
'법체쌍수! 백월장가에서 어떻게 저런 인재를 키운 거지!'
관영월은 장호연 같은 인물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장호연이 주안술을 익힌 것이 아니라면, 그의 성취는 축기세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는 핵심 자제에게서나 볼 법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호연의 실전 경험이 미천하고, 연체술이 아직 1계 초기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관영월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장호연을 비웃었다.
그녀는 장호연이 금강부까지 사용하며 달려드는 것을 보고 긴장한 탓에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생각했다.
장호연이 방어 태세를 유지하며 그녀의 영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 편이 연체술을 수련한 그에게 더 유리했을 테니 말이다.
'어리석은 놈. 전투를 빠르게 끝내려는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네놈은 돌진이 아니라 도주를 택했어야 했다!'
관영월은 승리를 확신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계 초기 수준의 연체술로는 상품 법기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장호연을 견제하며 금강부의 효과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관영월은 경신술을 펼쳐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단창을 날려 장호연의 진로를 방해하는 동시에 부적을 꺼내 손에 쥐었다.
금강부의 효과가 끝나는 즉시 부적을 날려 공격할 속셈이었다.
바로 그 순간.
금색 빛줄기가 벼락처럼 관영월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장호연의 지시를 받은 금령이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관영월은 자신의 신식 범위 안에 금령이 들어온 즉시 그 존재를 감지했다.
그러나 인지하는 것과 반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관영월의 신식 범위는 대략 40여 미터.
그러나 금령의 순간 낙하 속도는 초당 수백 미터에 달했다.
설령 미리 접근을 감지했다고 해도 피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금령의 날카로운 부리가 관영월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맹렬했던 기세가 순식간에 잦아들며 관영월의 몸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영월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수도자의 근본은 영근에 있다.
설령 심장이 파괴되더라도, 영력으로 몸을 지탱하며 치료 영단을 복용하면 회복이 가능했다.
그러나 머리가 부서지고 영기의 통로인 인당혈이 부서진 이상.
연기기 수사가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장호연은 비행술을 펼쳐 빠르게 나아가던 몸을 멈춰 세웠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관영월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장호연은 처음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처참하게 죽은 관영월의 시체를 보고도 냉정을 유지했다.
전생에 그는 몬스터나 빌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숱하게 보고 자랐다.
현생에도 방시에서 소란을 일으키다 서로를 죽이거나 집법대에게 처단되는 이들이 있었기에 죽음은 그에게 매우 익숙했다.
게다가 관영월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었다.
적의 죽음을 보며 슬퍼할 만큼 장호연은 유약하지 않았다.
장호연은 관영월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봤다.
추격전을 벌이며 방향을 정하지 않고 달린 탓에 현재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장호연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자 금령이 날아와 그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영력을 몸에 두르고 있던 금령의 깃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금령을 쓰다듬어 주며 의식을 전했다.
[금령, 조부님께서 괜찮으신지 확인해 보고 알려줘.]
장호연의 부탁을 받은 금령은 하늘로 솟구치며 숲 너머로 날아갔다.
금령이 떠난 사이.
장호연은 구원결을 운용하여 소모한 영력과 신식을 회복했다.
10분쯤 지나자 심령을 통해 금령이 가까이 온 것이 느껴졌다.
장호연은 공법의 운용을 멈추고 떠날 준비를 했다.
곧이어 높은 나무 위로 금령의 모습이 보였다.
장호연은 금령이 앉을 수 있도록 팔을 앞으로 뻗었다.
금령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에게 날아왔다.
'뭐지?'
지척까지 날아온 금령의 발에는 하얀색 물체가 들려 있었다.
금령은 발에 쥐고 있던 물체를 떨어뜨리고 그의 팔에 착지했다.
장호연은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무심코 바라봤다.
때마침 동그랗게 뭉쳐있던 털 뭉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진서(搜珍鼠)?"
장호연은 영물에 관한 정보를 꾸준히 수집해 왔기에 털 뭉치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금령이 물어온 것은 1계 중기에 오른 수진서로, 하얀 털에 커다란 눈, 짧은 꼬리를 가진 설치류 요수였다.
수진서는 영광과 영초를 먹이로 삼는 요수로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적었다.
귀여운 외모에 영특하기까지 한 수진서는 애완 영수로 인기가 높았다.
게다가 뛰어난 후각과 영각 덕분에 보물이나 약초를 찾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1계 수진서를 구매하려면 영석 수천 개는 필요했다.
장호연이 수진서를 바라보자 금령이 뿌듯해하는 의지를 전해왔다.
그는 금령을 칭찬해 준 뒤 가족들의 상황을 물어봤다.
아직까지 다친 사람 없이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예상대로네. 다행이다.'
장호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그의 저물대에는 위장이 필요한 상황을 대비해 여러 벌의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장호연은 빠르게 환복한 뒤 변형술을 펼쳐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으로 변신했다.
준비를 마친 그는 수진서를 바라봤다.
수진서는 잔뜩 겁에 질린 채 금령의 눈치를 살피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장호연과 눈이 마주친 수진서가 입을 벌리더니 은빛을 발하는 광석 조각을 뱉어냈다.
'정은(精銀)?'
정은은 정금의 1할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
수진서는 마치 아첨이라도 하듯이 앞발을 비비며 장호연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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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수진서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활동적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물건이나 장소를 탐색하며 보물을 모으기를 좋아했다.
이에 걸맞게 저물대처럼 뱃속에 물건을 보관하는 천부신통(天賦神通)을 지니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던 장호연은 정은 광석을 끌어와 저물대에 넣었다.
그는 수진서와 영계를 맺은 뒤 정은에 대해 차차 알아볼 생각이었다.
수진서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지 상당히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장호연은 영계를 맺는 도중 수진서의 혈맥을 감별해 봤다.
수진서는 털이 하얄수록 혈맥의 품등이 높았다.
처음 하얀색 털 뭉치로 착각했을 만큼 수진서는 순백에 가까운 털을 지니고 있었다.
'중품 혈맥.'
수진서의 혈맥은 상품에 가까운 중품 혈맥이었다.
하지만 물의 온도가 백 도가 되지 않으면 끓지 않듯, 상품에 오르지 못한 혈맥은 결국 중품 혈맥일 뿐이었다.
장호연은 중품 혈맥의 영수를 얻었음에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수진서의 전투력은 동급 중 최하위에 속했다.
보물이나 영약을 찾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생존력이 약해 조금만 방심해도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설치류 특유의 빠른 번식력이 아니었다면 진작 멸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계를 맺은 장호연은 수진서를 영수대로 들여보냈다.
이어서 관영월의 법기와 저물대, 운총마의 사체를 챙겨 곧장 이동에 나섰다.
장호연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가족들과 헤어진 뒤 운총마를 타고 한참을 이동했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비행술을 펼쳐서 날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연기기 수사의 비행술은 평범한 말이 달리는 속도에 불과한 데다 신식과 영력의 소모도 컸다.
전투를 앞두고 비행술을 펼치는 건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장호연이 바람처럼 숲속을 달리던 그때.
소매 안에서 미약한 영기 파동이 전해졌다.
파동의 발원지는 관영월의 저물대였다.
장호연은 신식으로 저물대를 확인한 후 영기 파동을 발하는 검은색 원반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원반 표면에는 기하학적인 도형과 진문이 새겨져 있었고, 은은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진반(陣盤)?'
진반은 진법을 설치하고 제어하는 데 사용하는 법기로, 다수의 진기를 운용하는 고급 진법에 사용되곤 했다.
장호연은 진반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신식을 주입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진반과 공명하는 영기가 미약하게 느껴졌다.
그때, 금령이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수진서를 잡은 곳이 이 근처라고 알려왔다.
장호연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금령이 말하는 방향을 바라봤다.
우연히도 그곳은 진반이 가리키고 있는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장호연은 진반을 저물대에 집어넣고 길을 재촉했다.
진반의 용도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족들이 있는 곳은 진반이 반응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5분 정도를 더 달려가자 관가 무리와 싸우고 있는 가족들이 보였다.
장호연은 칠살검을 소환하며 전투 중인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장호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가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서로 상대편의 지원군이 아닌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바로 그때, 칠살검의 자검이 관가의 중년인을 향해 날아갔다.
여섯 자루의 날카로운 비검은 두 갈래로 나뉘어, 중년인의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노렸다.
그 모습을 본 관융천이 영력을 끌어올려 고함을 질렀다.
"웬 놈이냐!"
장천명과 장운기는 빠르게 의식을 교환한 후 법기를 조종해 중년인을 공격했다.
관융천은 중년인을 돕기 위해 1계 극품 폭염부(爆炎符)를 발동했다.
폭염부는 순식간에 거대한 불줄기로 변해 맹렬한 기세로 장천명과 장운기를 덮쳤다.
장천명과 장운기 또한 즉시 부적을 발동했다.
장천명이 던진 풍인부(風刃符)는 날카로운 바람 칼날 수십 개로 변해 붉은 화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바람 칼날과 불줄기가 충돌하자, 뜨거운 염화(炎火)와 날카로운 음풍(陰風)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관융천의 도움 덕분에 중년인은 칠살검을 막아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중년인의 비검 법기가 손잡이를 중심으로 팽이처럼 회전하며 반경 일장에 달하는 검막을 형성했다.
콰콰쾅!
칠살검이 검막을 연달아 때리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젠장할!'
중년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칠살검을 막는 데 집중하는 사이.
장운기가 발동한 빙백부(氷魄符)가 날카로운 얼음 조각으로 변해 중년인의 등 뒤를 맹렬하게 덮쳐오고 있었다.
중년인은 신식을 집중해 사고를 가속했다.
그는 칠살검보다 장운기의 고리 법기와 빙백부의 공격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중년인은 얼음 조각을 향해 수류부(水流符)를 발동함과 동시에 남색 도자기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도자기는 맹렬한 기세로 냉기를 뿜어냈다.
주변의 온도가 급격하게 낮아지며 고리 법기의 움직임이 절반 가까이 둔화되었다.
여유가 생긴 중년인은 허리춤의 저물대를 두드려 부적 한 장을 새로 꺼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금강부를 발동한 장호연이 빠르게 가속하며 비검 법기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약간 말라 보이던 장호연의 몸은 어느새 근육질로 부풀어 있었다.
'연체사!'
연기기 수사가 법체쌍수의 길을 걷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중년인은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콰콰쾅!
중년인의 비검이 장호연의 몸을 때리자 금강부의 금빛 광채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장호연은 비검을 몸으로 튕겨 내며 순식간에 중년인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중년인은 비호처럼 달려드는 장호연의 모습에 기겁했다.
연기기 후기 수사가 다룰 수 있는 상품 법기의 숫자는 최대 두 개.
그는 법기를 운용하는 데 신식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부적을 발동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장호연은 중년인의 목을 향해 칠살검 모검을 휘둘렀다.
비수를 막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비수는 중년인의 팔을 거침없이 가르며 그의 목을 베어냈다.
"이놈들!"
중년인이 죽자 관융천이 절규하듯 외쳤다.
그는 당장이라도 장호연의 몸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장천명에게 발이 묶여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중년인이 쓰러지자 장호연과 장운기는 곧장 관융천을 공격했다.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관융천은 부적 세 장을 연달아 발동하며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협공을 버텨내지 못하고 미간에 식칼이 박힌 채 죽음을 맞이했다.
관융천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증오에 찬 눈으로 장호연을 노려봤다.
장호연은 코웃음을 치며 자연스럽게 중년인의 법기와 저물대를 공물술로 끌어왔다.
수도계에서는 이유 없는 호의를 베푸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경계하게 만들었기에 한 행동이었다.
"도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빈도(貧道)는 백월장가의 장천명이라고 합니다. 운암방시의 백월선당을 찾아주시면 오늘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관융천의 죽음을 확인한 장천명이 장호연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장호연은 변형술로 목소리를 변조한 후 말했다.
"저도 이 겁수 무리와는 악연이 있습니다. 서로 이득을 본 일이니 사례는 따로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귀가의 자제분은 무사하니 안심하십시오."
장천명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호연이를 만나신 겁니까? 호연이는 어떻습니까? 괜찮은 겁니까?"
"여러분을 돕기 위해 급히 움직인 터라 자세한 상황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외관상 다친 곳은 없어 보였습니다."
장천명은 이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안면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도운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장호연을 만나서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호연이가 귀인 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럼 그 여수(女修)는 어떻게 되었는지요?"
"이미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모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럼 호연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산길이 있는 방향을 알려주었으니 별일 없으면 곧 찾아올 수 있을 겁니다. 서로 찾다가는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이곳에서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장호연이 몸을 돌리던 그때였다.
"은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천명은 관융천의 물품들을 모아 장호연에게 건넸다.
"손자를 구해 주신 은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꼭 백월선당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장천명은 눈앞의 사내가 장호연을 구해 준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만약 거짓말이었다면 굳이 장호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도계에는 상식을 벗어난 정신이상자들이 즐비했다.
눈앞의 사내가 장호연을 해치고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 본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장천명은 일단 관융천의 물품을 건네주고, 나중에 그가 백월선당을 찾아오면 그때 제대로 사례를 할 생각이었다.
"이건 자제분을 구해준 대가로 생각하겠습니다."
장호연은 가볍게 목례하며 물품을 받았다.
여기서 장천명의 호의를 거절하면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일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경신술을 펼쳐 언덕으로 달려갔다.
장호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장운기가 말했다.
"재물에도 큰 욕심이 없는 것 같고. 수도자가 아니라 마치 강호의 대협을 보는 것 같습니다. 수도계에 저런 인물이 있다니, 신기한 일이군요."
"아까 보니 연체술을 수련했더구나. 어쩌면 무림 고수가 뒤늦게 수도계에 뛰어든 것일 수도 있지. 저런 인재라면 가문의 객경으로 삼아도 좋을 텐데 말이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신분을 밝힐 생각이었다면 내 소개를 할 때 함께 소개했을 게다. 외모를 감춘 걸 보면 조심성이 많고 은원을 맺지 않으려는 성격으로 짐작되는구나.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지 않겠느냐."
장운기는 긍정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는 장호연이 나타났던 숲 쪽을 바라봤다.
"장로님, 호연이를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장천명은 고개를 저었다.
"은인을 믿기로 했으니 일단 기다려 보자. 잘못하면 길이 엇갈려 더 곤란해질 수도 있다. 그보다 운기야, 내가 호법을 설 테니 어서 영력을 회복하거라. 싸우는 소리를 듣고 요물이나 다른 겁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네, 장로님."
장천명이 있던 곳에서 수 킬로미터를 벗어난 장호연은 다시 울창한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가족들을 무사히 구출했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그는 진반이 반응했던 곳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몰라.'
장호연은 진반이 반응하는 곳에 관가 무리의 은신처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약 그곳에 쓸 만한 보물이 있다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진법만 챙겨와도 큰 이득이었다.
얼마 후, 장호연은 진반이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다.
그의 눈앞에는 축축한 이끼로 뒤덮인 바위 절벽이 우뚝 솟아있었다.
절벽 주변으로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잡풀들이 무성했다.
인공적인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진반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모습이었다.
장호연은 진반에 신식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진반을 조작할 수 있는 일종의 스위치 같은 것이 느껴지며 대략적인 사용방법을 알 수 있었다.
진법의 품계는 1계 극품으로, 기운을 차단하는 기능과 함께 토속성 영기를 사용하여 범위 내의 흙과 바위를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반이 있으면 진법 내부의 기운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장호연은 진반과의 감응을 통해 진법의 구조를 파악했다.
진법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눈앞의 절벽을 중심으로 직경 2백 미터에 지하 50미터 정도였다.
진법 내부에서는 생명체로 보이는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다만, 특이하게도 진법 가장 깊숙한 곳에 짙은 영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진반을 통해서는 기운의 유무와 크기만 파악할 수 있기에, 영기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직접 확인해 보는 방법뿐이었다.
곧이어 그는 영력을 주입해 진반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바위 절벽의 한 부분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어두운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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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장호연은 금령에게 주변을 경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어서 칠살검을 머리 위에 띄운 뒤 동굴로 걸어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선 그는 진반을 작동해 입구를 가렸다.
그는 칠살검의 자검 한 자루를 앞으로 날려 보내 시야를 확보했다.
비수가 발하는 영광은 미약했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장호연에게는 주변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밝기였다.
신식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세밀하고 광범위했다.
하지만 시각으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있었기에, 장호연은 두 감각을 함께 활용하여 주변을 살폈다.
장호연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파허술을 시전한 채 이동했다.
관가 무리는 총 네 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연기기 중기였기에 만약 적이 매복하고 있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동굴을 따라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호연은 진법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벽에서는 축축한 냉기와 함께 금속성의 광택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금속의 정체를 확인한 장호연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은 광맥?"
영맥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수도계에는 영맥을 추적하고 다룰 수 있는 심룡술(尋龍術)이라는 기예가 존재했다.
심룡사는 광맥을 탐사하기도 하는데, 이는 영광 광맥이 대부분 영맥의 이동에 의해 생성되기 때문이었다.
장호연은 신식을 집중해 광맥의 규모를 가늠해 봤다.
광맥은 그가 있는 곳을 기점으로 지하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의 지식으로는 광맥의 정확한 가치를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관가 무리가 진법까지 사용하여 광맥을 숨긴 것을 보면, 그 가치가 결코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장호연은 광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깊이 고심했다.
가장 큰 문제는 관가 무리 중 한 명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
그자가 광맥을 이대로 방치할 리는 만무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중림산맥은 엽요사와 채약사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곳이다.
그들은 산행 중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파허술을 사용하거나, 기운을 감지하는 법기를 휴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굴을 가리는 환진의 성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언제 정체가 탄로 날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광맥 바로 근처에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산길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광맥의 위치가 노출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설령 수도자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광맥에는 반드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수진서가 정은을 발견했듯이, 보물을 먹이로 삼는 요수들은 영광이나 영초의 위치를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다.
최악의 경우 2계 요수가 나타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광맥을 혼자 차지하려는 건 욕심이야.'
장호연은 아직 보물을 지킬 힘이 없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 광맥의 존재가 알려지기라도 하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한동안 고심한 그는 가문에 광맥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줄 것이라 판단했다.
가문에 광맥을 알리면 그에 따른 공헌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헌도로 필요한 보물을 교환하면 광맥을 차지하기 위해 힘들게 노력할 필요도, 채굴한 정은을 어떻게 수련 자원으로 바꿀지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장호연은 즉시 동굴을 빠져나왔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옷을 적당히 더럽힌 뒤 장천명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얼마 후, 그는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장천명을 만날 수 있었다.
"호연아!"
장천명은 반가운 얼굴로 장호연의 이름을 불렀다.
“조부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장호연이 걱정스럽게 묻자 장천명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가의 패잔병 따위에게 당할 내가 아니다. 그보다 너는 어떠냐?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저는 무사합니다. 마침 지나가던 고인께서 그 요녀를 처치해 주셨습니다."
"그래, 그 은인께서 우리 역시 도와주셨다. 혹시 그분의 신상에 대해 들은 것은 있느냐?"
장천명의 질문에 장호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조부님께서 위험하다고 말씀을 드리니 곧장 떠나셔서 미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알겠다.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뵐 기회가 있다면 은혜를 잊지 말고 예를 다하도록 하거라."
"예, 조부님.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조부님, 제가 오는 길에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장호연은 관영월의 저물대를 꺼내 장천명에게 건넸다.
"고인께서 떠나시고 그 요녀에게서 챙겨온 저물대입니다. 그 안에 진반이 있는데, 오는 길에 진반에서 영기 파동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이 근처에 겁수들의 은신처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은신처라···."
장천명은 관가 무리가 총 네 명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혹시 나머지 한 놈이 그곳에 숨어 있는 건가?'
그 순간, 장천명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수도계에서는 가문과 종문의 결속과 유대감을 극도로 중요시 했다.
하지만 이것은 혈족과 동문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는 방증과도 같았다.
관가 무리는 운암삼가를 적으로 삼고 방시의 운영을 방해했다.
수도계에서 화근을 남겨 놓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그는 관가의 씨를 말려버릴 생각이었다.
"잘했다, 호연아. 잠시 후에 함께 가보도록 하자."
장천명은 진반을 따로 챙긴 후 장호연에게 저물대를 돌려줬다.
30분쯤 지나자 운공을 마친 장운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서 장천명이 운공에 들어갔다.
영력을 5할까지 회복한 그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잔당을 처치하기 위해 움직였다.
얼마 후, 일행은 바위 절벽 앞에 도착했다.
진반을 작동한 장천명은 동굴 내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동굴 지하에서 느껴지는 농밀한 영기에 눈을 번뜩였다.
장천명을 필두로 일행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진법의 바닥에 도착한 장천명과 장운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은!"
"장로님, 정은 광맥입니다!"
장호연 역시 놀란 척 연기하며 호응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장천명이 장호연에게 말했다.
"정말 잘했다, 호연아. 네가 큰 공을 세웠구나. 심룡사를 불러 확인해 봐야겠지만, 지표 가까이에 이 정도의 은 함량을 지닌 광맥이라면 분명 채산성이 높을 것이다."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부님, 관가의 잔당이 광맥을 외부에 발설하면 어떻게 합니까?"
장천명은 무언가 생각을 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 지역은 우리 백월장가와 가장 가까운 곳이니, 소유권을 따지자면 당연히 우리가 가장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철광이라면 모를까, 정은 광맥을 우리 가문 혼자 독식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천봉염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장호연은 빠르게 수긍했다.
백월장가도 결국 수도계에서는 미약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관가 놈들도 이 광맥을 독차지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게다. 아마 지금 없는 한 놈이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라진 걸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니 즉시 가문으로 돌아간 뒤 천봉염가에 광맥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
일행은 서둘러 동굴을 빠져나왔다.
***
장호연 일행이 족지로 향하던 시각.
관진악은 적령군(赤嶺郡)의 경계에 발을 들였다.
"드디어 도착했군! 이제 구가(丘家)에 가는 일만 남았다."
관진악은 관융천의 친손자로 가문이 재기할 수 있는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구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영학산(靈鶴山) 구가는 적령군을 다스리는 축기세가였다.
10여 년 전, 관가는 비가와 함께 운암삼가를 몰아내고 고양진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하지만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에 천봉염가에게 꼬리가 밟혀 가문이 멸문되다시피 했다.
관진악은 삼영근을 지닌 인재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관가는 가문의 희망을 남기고자 관융천에게 관진악을 맡긴 후 피신시켰다.
관가 무리는 가문을 다시 일으킬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재물도 기반도 없이 떠도는 처지라 자신들의 안위조차 지키기 어려웠다.
결국 당당한 수도가문이라는 명분을 내려놓은 그들은 무도한 겁수의 길을 걷기로 했다.
관가 무리는 운암삼가에 대한 복수와 재물 축적을 동시에 도모하고자 고양진으로 향했다.
그들이 고양진을 택한 또 다른 이유는 인근에 중림산맥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림산맥은 유사시 도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수도계에서 재물을 가장 빠르게 쌓는 방법은 사람을 죽이고 그들이 평생 일군 결실을 강탈하는 것이다.
관가 무리는 채 1년도 되지 않아 놀라운 수준의 재물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되는 법.
결국, 운암삼가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자 위협을 느낀 그들은 중림산맥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은신처를 찾아 헤매던 그들에게 뜻밖의 기연이 찾아왔다.
바로 정은 광맥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관가 무리는 자신들의 역량으로는 정은 광맥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은 광맥을 영학구가에 바치고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했다.
영학구가와 천봉염가는 오랜 세월 앙숙 관계였다.
10여 년 전 고양진에서 벌어졌던 전쟁도 모두 영학구가가 천봉염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하지만 관가는 영학구가의 기대를 저버렸고, 결국 버려졌다.
그렇지만 관가는 다시 영학구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천봉염가에서는 관가와 비가의 혈통을 모두 뿌리 뽑겠다고 공언했다.
정은 광맥을 바쳐봐야 재물만 빼앗기고 죽임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영학구가와는 여전히 거래할 수 있었다.
10여 년 전의 실패는 관가와 비가의 무능함 때문이지, 영학구가는 애초에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만약 정은 광맥이 높은 채산성을 지녔다면, 영학구가는 천봉염가와 전쟁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운암삼가는 필연적으로 횡액을 맞이할 테고, 관가의 복수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었다.
전쟁의 향방은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정은 광맥의 길목에 있는 백월장가는 멸문을 면치 못할 터였다.
"조부님께서는 별일 없으시겠지?"
관가의 흥망은 모두 정은 광맥에 달려 있었기에, 관진악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광맥을 지키기로 했다.
연기기 6층에 불과한 관진악의 실력으로 혼자서 영학구가까지 가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그래서 관융천은 가문의 가장 귀한 보물인 준2계 괴뢰(傀儡)를 관진악에게 넘겨주었다.
괴뢰는 술자가 조종하는 일종의 인형 형태 법기로, 다양한 재료와 술법을 통해 만들어진다.
괴뢰의 재료에는 목재, 금속, 보석, 뼈 등이 주를 이루며, 사체나 살아 있는 생명의 영혼을 제압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준2계 괴뢰는 관가의 무력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관진악이 괴뢰를 가져갔으니, 다른 가족들은 그만큼 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관진악은 얼마 전부터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길을 재촉했다.
'정은 광맥만 바치면 분명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도 축기에 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고.'
본래 관진악은 관가가 고양진을 차지하면 구가의 여식과 혼인하고, 구가로부터 축기기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
중림산맥을 내려온 지 두 시간 후.
장호연은 백월장가의 영역에 도착했다.
백월장가의 족지는 백월호를 중심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수려한 산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월호 전면에는 비옥한 평야가 완만하게 펼쳐져 있었고, 평야를 가로지르는 맑은 강이 흘렀다.
장호연은 족지를 둘러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한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 여겼건만.
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렇게 다시 발을 들이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장호연은 낯설지만 익숙한 길을 따라 백월장가로 들어섰다.
장천명을 마주친 백월장가의 사람들이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삼장로님!"
"삼장로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삼장로님."
그때, 장호연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서 놀라움과 감탄이 뒤섞인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호연이 맞지?"
"인물이 더 훤해졌네."
"호연이가 팔영근 아니었어?"
"어떻게 선도에 오른 거지? 심력이 정말 남다른가 본데?"
장호연 일행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곧장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곧이어 그들은 가주 장운경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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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장운경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권위적인 모습보다는 편안하고 믿음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항렬상 장호연의 숙부 뻘이었지만, 나이는 백월선당의 숙부들보다 수십 살이나 많았다.
일반적으로 가주는 중간 배분에서 맡고, 나중에 가주에서 내려오면 장로직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주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장호연은 정중한 자세로 장운경에게 인사했다.
장운경은 연기기 원만의 고수로, 어수공법을 익혀 신식이 동급 수사보다 조금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자신의 진짜 실력이 드러날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장운경이 장호연의 실력을 간파하려면 극품 파허술을 펼쳐야 한다.
이유 없이 파허술을 펼치는 건 다짜고짜 뺨을 날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런 무례를 범할 리는 만무했다.
"선도에 오른 걸 축하한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구나."
"감사합니다. 가주님."
세 사람은 집무실에 마련된 탁자에 둘러앉았다.
탁자에 앉자마자, 장천명은 장운경에게 중림산맥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전했다.
장운경은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중림산맥에서 관가의 잔당들과 마주쳤는데, 호연이가 우연히 정은 광맥을 발견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관가의 잔당이 아직 한 명 남았고, 그자가 광맥의 존재를 외부에 알릴 수도 있다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저희만의 힘으로는 이 광맥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서 천봉염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즉시 천봉염가에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요."
장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방사우가 놓인 책상으로 향했다.
한동안 편지를 작성한 그는 시종을 불러 편지를 건넸다.
시종은 장운경으로부터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전해 들은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장운경이 장천명을 보며 말했다.
"늦어도 글피면 전서응(傳書鷹)이 돌아올 겁니다."
백월장가에서 천봉염가까지는 거의 만 리에 달하는 거리라서, 전서응이 편지를 전달하는 데만 하루가 걸렸다.
장천명은 이제야 편안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가주. 그보다 호연이가 이토록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래야지요."
장운경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장호연을 바라봤다.
"호연아, 네 덕이 정말 크다. 수고 많았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수도계에서는 기연을 얻는 것 또한 그 사람의 역량인 법이다."
장운경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네게 지급할 공헌 점수는 천봉염가에서 조사단을 파견한 후에 장로들과 상의하여 결정하마. 심룡사가 정은 매장량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대로 공헌 점수를 책정하고, 추후 매장량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지면 그에 상응하는 공헌 점수를 추가로 지급하겠다.
천봉염가에서 비행 영수나 비주(飛舟)를 이용하면 사나흘 안에 도착하겠지만, 영마를 타고 온다면 열흘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광맥 조사가 완료되려면 길게는 열흘 이상 소요될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족지에 머무르며 편히 쉬도록 하거라. 입보식은 이틀 후에 치를 것이다."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장운경은 시종에게 장호연이 머물 거처를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장호연이 시종을 따라 집무실을 나서는 사이.
장운경과 장천명은 심각한 얼굴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호연이 배정받은 거처는 한적한 곳에 자리한 단아한 가옥이었다.
뜰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고, 연못가에는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고목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방은 총 다섯 개로 침실, 연공실, 응접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가옥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혈족에게나 지급될 텐데.'
그가 받은 대우는 일반적인 가문의 자제들보다 훨씬 좋았다.
아직 정은 광맥의 채산성이 판별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파격적인 대우였다.
시종은 가옥의 구조를 자세히 설명한 후 돌아갔다.
장호연은 집 안을 한번 둘러본 뒤 연공실로 들어갔다.
연공실에는 외부의 방해를 차단하기 위한 간단한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결계를 작동시킨 후 보안을 위해 상품 결계진까지 추가로 설치했다.
장호연은 신식을 뻗어 집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관가 무리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모두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세 개의 저물대 안에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보물이 들어 있었다.
관가 무리가 사용하던 은색 망치와 단창, 도끼를 포함하여 상품 법기만 여덟 개나 되었다.
영석은 수만 개에 달했으며, 하품부터 상품까지 다양한 부적과 영단, 영재가 가득했다.
보물들의 등급이 잡다한 것을 통해, 관가 무리가 겁수로 활동하며 모은 재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영석 십만 개는 그냥 넘겠는데?"
영석 10만 개는 연기기 초기 산수가 평생을 노력해도 모으기 어려운 거금이었다.
그런데 관가 무리는 고작 1년 남짓한 겁수 활동으로 그만한 재물을 얻었다.
하지만 탐욕은 결국 화를 부르는 법.
관가 무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힘들게 모은 재물을 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장호연은 영석과 부적, 영단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법기들을 살펴볼 때는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법기는 피 묻은 장물이기에 함부로 사용하다가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운암방시에서 팔 수도 없는 터라 한동안은 처치가 곤란한 짐에 불과했다.
장호연은 보물들을 종류와 활용도에 따라 잘 정리해 두었다.
특히 부적은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소매 안의 저물대에 보관했다.
'부적이 이렇게 많은데 쓰지도 못하고 죽었군.'
만약 관가 무리가 처음부터 부적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장호연은 재물을 아끼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보물이 아무리 많아도 사용하지 못하면 결국 있으나 마나야. 역시 연체술을 익히고 영물을 키우는 것만큼 안전한 건 없어.'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신식과 영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주인의 신식이나 영력 소모 없이 스스로 판단하여 싸울 수 있는 영물이나 괴뢰, 강시 등은 가치가 매우 높았다.
또한 뛰어난 연체술을 지녔다면 신식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회를 만들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
다음 날.
장호연은 족지를 돌아다니며 예전에 알고 지냈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장호연이 선도에 오른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게다가 부당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일인 양 기뻐하며 그를 격려했다.
수도세력은 크게 종문과 가문으로 나뉘었다.
종문의 제자들은 서로에게 대놓고 악의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문 내에서 더 많은 자원을 얻기 위해 파벌 간 경쟁이 치열했고, 같은 파벌 안에서도 각자도생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가문은 달랐다.
뛰어난 인물 하나가 나오면 가문 전체가 덕을 보는 구조였기에, 서로 질투하거나 시기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였다.
입보식이 열리는 날.
장호연은 아침 일찍 족지 내에 있는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은 가문에 큰 공을 쌓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웅장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당에는 침입을 막는 결계가 설치되어 있어 허가받지 않은 자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장호연은 사당 앞에서 장운경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배꽃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여인은 수도자가 아닌 범인이었다.
앳된 얼굴에 맑고 큰 눈망울을 가진 아이는 많아야 열 살을 넘지 않아 보였다.
장호연은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장호연이라고 합니다."
"호연 도련님이셨군요. 저는 유설이라고 해요."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유설은 장호연의 숙모 뻘 되는 항렬로, 장호연이 족지를 떠난 후에 백월장가로 들어왔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숙모님."
장호연은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후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장호연을 올려다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장청란이라고 해요."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하고 귀여운 말투였다.
"그래, 안녕."
"호연 오라버니, 정말 잘생기셨어요!"
장청란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청란이 너도 참 예쁘구나."
"그런데 혹시 오라버니도 입보식을 치르러 오신 거예요?"
"그렇단다."
"오라버니는 몇 살인데요?"
"올해로 열아홉."
"에? 왜 이렇게 늦게 입보식을 치르러 오신 거예요?"
장청란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작년에 선도에 입문했거든."
장호연의 말에 장청란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늦게요? 열두 살이 넘어도 수도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청란아, 그런 말은 실례란다."
유설이 조심스럽게 주의를 주었다.
장청란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장호연은 개의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숙모님. 수련이 늦은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단다. 청란이는 몇 살이니?"
"저는 일곱 살이에요!"
"그런데 벌써 선도에 입문한 거야? 자질이 정말 뛰어난가 보구나?"
"저는 삼영근이에요."
"정말 대단한걸? 이러다가 우리 가문에 축기진인(築基眞人)이 나올 수도 있겠다."
거의 대다수의 수도자는 오영근 이하의 자질을 타고난다.
삼영근은 수도자 중 천 명에 하나 볼까 말까 한 뛰어난 자질로, 자원만 있다면 금단기에 오를 가능성도 충분했다.
"저는 앞으로 금단종사가 될 거예요!"
장청란은 자랑하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금단종사가 되려면 옥현종으로 가야 해요. 옥현종에 가면 연기기 칠층이 되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대요. 엄마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
장호연은 장청란의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연기한문인 백월장가에서는 삼영근의 천재가 태어나도 축기기로 키우기 어려웠다.
장청란의 자질을 온전히 꽃피우려면 옥현종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장청란이 금단기에 오른다면 백월장가는 최소 축기세가로 거듭나 천봉염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터였다.
장호연은 장청란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청란이는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응원하마."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제가 들었는데 선도에 늦게 입문하면 경지를 높이기 어렵대요. 하지만 청란이가 금단기에 올라서 오라버니를 보호해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장청란의 당찬 포부에 장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다."
자질은 선도를 수련하기 위한 기본 조건에 불과했다.
회양부에서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대부분 옥현종으로 몰렸다.
옥현종 같은 금단 대종에서는 삼영근도 그리 희귀한 편은 아니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금단도종(金丹道種)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을 통해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만 했다.
백월장가는 연기한문에 불과했기에 마땅한 지원도 제대로 해주기 어려울 터였다.
장호연은 장청란이 험난한 수도계에서 좌절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를 기원했다.
장호연이 장청란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입보식을 치르기 위해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사당에 도착했다.
올해 입보식을 치르는 사람은 장호연을 포함해 모두 네 명이었다.
한 시간쯤 더 지나자 마침내 장운경이 도착했다.
사당 입구에 다가간 장운경은 영패를 꺼내 결계를 해제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투명한 막이 푸른 영광을 발하며 물결치더니, 이내 사당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장운경을 따라 사당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하면서도 정갈한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는 가문에 공헌한 조상들의 위패가 층층이 모셔져 있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은은한 향냄새가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장운경은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제단 앞에 서서 향을 피우고 예를 갖춰 제사를 올렸다.
"백월장가의 후손들이 조상님들의 가호를 받아 선도의 길을 굳건히 걸어가기를···."
입보식을 치르는 이들은 장운경의 뒤에 나란히 섰다.
장호연은 자신의 허리춤에 오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서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제사를 마친 장운경은 제단 아래에 놓인 옥함을 열어 서책을 꺼냈다.
옥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표지에는 가문의 문양이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제부터 입보식을 시작하겠다. 호연이 먼저 나오도록 하거라."
장운경은 영력을 운용하여 허공에 족보를 펼쳐 보였다.
족보에는 선도에 오른 혈족의 이름이 그들의 진원과 정혈(精血)로 기록되어 있었다.
장호연은 자신의 정혈에 진원을 담아 족보에 이름을 써넣었다.
수도계에는 기이하고 사이한 비술이 많아, 타인의 신식 파동까지 모조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진원과 정혈의 기운은 흉내 내기 어려웠다.
족보에 남긴 이름은 신분을 증명하고 첩자를 가려내는 수단이 되었으며, 망기술(望氣術)을 통해 생사와 길흉을 확인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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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입보식을 마친 장호연은 구원결과 오행술을 수련하며 거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천명은 광맥 문제로 분주한 탓인지 첫날 이후로는 만날 수 없었다.
천봉염가에서 조사단이 다녀갔는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아마도 광맥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는 은밀히 움직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거처에 머무른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장호연은 장운경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장천명도 함께 있었다.
"가주님과 삼장로님을 뵙습니다."
장운경이 말했다.
"너에게 해줄 말이 있으니 이리 와 앉거라."
장호연은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장운경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봉염가에서 조사단이 다녀갔다. 네가 가장 먼저 광맥을 발견했으니 당연히 그 결과를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조사 결과 광맥의 품위가 높고 매장량 또한 풍부하다고 판명이 났다. 적어도 수백 년 이상 채굴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하더구나."
장호연은 광맥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다는 것인지 뚜렷하게 와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장운경이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광맥에서 나오는 이익의 팔 할은 천봉염가에서 가져가기로 했다. 나머지 이 할은 운암삼가에 배분되는데, 그중 절반이 우리 백월장가의 실질적인 몫이다. 아직 정확한 채굴량을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현재까지 확인된 매장량만으로도 이미 가문의 모든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아! 그렇게나 많은가요?"
마침내 장호연이 놀란 반응을 보이자 장운경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 그래서 급히 장로회의를 열어 네게 가문의 보고(寶庫)를 완전 개방해 주기로 결정했다."
"가문의 보고를요?"
장운경의 말에 장호연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문에 큰 공을 세웠으니 상당한 보상이 주어지리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보고를 완전히 개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는 가족을 아끼는 수도 가문의 전통 때문일 터.
만약 장호연이 종문에 속해 있었다면 이 정도의 파격적인 보상은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네가 정은 광맥을 발견한 공은 그만큼 크다. 그러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도록 하거라."
"감사합니다. 가주님."
진심으로 기뻤던 장호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까지 그는 재물이 있어도 마음껏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면 이러한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터였다.
"호연아, 네가 부도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들었다. 앞으로 가문은 네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제부술을 연마하고 연기기 중기에 오르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도록 하거라. 그리하면 언젠가 부당의 장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주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호연의 진중한 태도에 장운경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의 문을 열려면 가주의 영패와 더불어 장로 한 명이 동행해야 하는 것이 가칙이다. 그러니 삼장로님을 따라가거라."
장호연은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장천명을 따라 가문의 보고로 향했다.
길을 걷던 중, 장천명은 보고에 대한 정보를 소상히 알려주었다.
"···. 이것 외에도 보고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진귀한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공법, 기예, 영약, 법기 등 종류도 다양하지. 다만,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결국 신외지물에 불과할 뿐이다. 보물에 현혹되지 말고 수련에 정진하도록 하거라."
장천명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어느덧 보고 근처에 도착했다.
보고는 족지의 가장 깊숙한 곳,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절벽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이끼 낀 바위들이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었다.
절벽 곳곳에 새겨진 진문에서는 신식을 자극하는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보고의 관리는 가문의 재정을 담당하는 진보당(珍寶堂)에서 맡았다.
보고 앞에는 연기기 후기 고수 두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천명이 다가가자 그를 알아본 경비 무사들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삼장로님, 오셨습니까?"
두 사람 모두 장호연의 숙부뻘이었기에 장호연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사이 장천명이 저물대에서 영패 두 개를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가주님의 명으로 보고의 문을 열고자 한다."
보고의 문을 열려면 가주의 영패와 장로의 영패가 필요했다.
경비 무사 중 한 명이 영패를 받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영패에 저장된 장운경의 신식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영패도 확인했다.
이윽고 가주의 영패와 장로의 영패, 그리고 경비 무사가 지니고 있던 영패까지.
세 개의 영패에서 동시에 영기가 뿜어져 나오며 보고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러자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듯, 허공에서 푸른 영광이 일렁이며 파동을 일었다.
장호연은 순간 수백 개가 넘는 진기(陣旗)의 기운을 느꼈다.
보고에는 다수의 진기를 운용하는 1계 극품 금제가 설치되어 있었다.
축기기 수사가 온다 해도 단번에 결계를 뚫고 들어가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장호연이 결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을 때. 장천명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공법과 기예 전승은 모두 네게 열람이 허락된다. 다만, 법기나 영약 등은 당장 사용할 만큼만 가져가도록 하거라. 필요할 때는 언제든 다시 와서 가져가면 된다."
장호연에게 보고가 완전히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보물을 전부 들고 가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았다.
가문에는 자신 외에도 법기나 수련 자원이 필요한 이들이 많을 터였다.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서 당연한 조치였다.
"보고에는 장로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둘러보고 나오거라."
"네, 장로님."
장호연은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보고 내부는 화려하면서도 위엄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천장에는 정교한 조각과 함께 영롱한 빛깔의 보석들이 박혀 있었고, 벽면에는 가문의 역사를 나타내는 거대한 족자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바닥은 매끄럽게 닦인 온옥(溫玉)으로 되어 있어, 밟을 때마다 따스한 기운이 은은하게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보고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연기기 8층의 노인이 장호연을 맞이했다.
노인은 장호연의 조부 항렬이자 보고를 관리하는 장보감(掌寶監)이었다.
장호연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가문의 행사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장호연은 공손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장보감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호연아. 네 소식은 장로회의에서 들어 알고 있다. 가문을 위해 큰 공을 세웠더구나."
"과찬이십니다."
"너에게는 보고의 모든 것을 열람하고 사용할 자격이 있다. 대신 공법이나 기예 등을 습득할 시, 가문의 허락 없이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이계 혼서(魂誓)를 체결해야 한다. 만약 동의한다면 혼서부를 확인해 본 뒤 발동하거라."
장보감은 백옥으로 만든 넓적하고 동그란 옥편을 건넸다.
장호연은 혼서부에 신식을 주입했다.
그러자 자신이 맺어야 하는 혼서의 계약 내용이 또렷하게 전해졌다.
계약은 가문에서 비전으로 분류되는 공법과 기예를 허락 없이 외부에 전수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2계 혼서를 안전하게 제거하려면 금단기 수사 중에서도 금제에 조예가 깊은 이가 나서야 했기에, 가문의 비전이 새어 나갈 염려는 없었다.
장호연은 계약 내용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혼서부를 발동했다.
혼서부에서 흘러나온 영기가 그의 영혼으로 스며들어 그 위에 신비로운 도문을 새겨 넣었다.
혼서가 체결되자 장보감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보고 내부는 도장관(道藏館), 기예관(技藝館), 영약관(靈藥館), 기물관(器物館), 재화관(才華館) 등 구역별로 정리되어 있다. 각 구역에는 보물에 대한 정보가 담긴 옥간이 비치되어 있으니, 원하는 물품을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게다. 혹여나 찾기 힘들거나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에게 묻도록 하거라."
장호연은 가장 먼저 도장관으로 향했다.
진열대에는 수많은 옥간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말과 글로는 도법(道法)을 온전히 전하기 어렵기에 옥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도법은 옥간으로도 그 진의를 담아내기 어려웠다.
장호연은 연기공법에 관한 정보가 담긴 옥간을 먼저 확인했다.
그는 옥간의 정보를 꼼꼼하게 살펴보며 자신에게 필요한 공법을 신중하게 골랐다.
원래 장호연은 운암방시에 머물면서 상품 공법을 구해 익힐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수련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이상, 공법 수련에 시간을 쏟는 건 손해라는 생각에 경지가 퇴보하지 않게 구원결만 수련해 왔다.
장호연이 이런 선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연기공법의 특성 때문이었다.
다른 계열의 공법을 익히면 진원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백월장가의 가전 공법 중 하나인 삼원결을 익혔다면, 후속 공법으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구원결을 익히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이는 마치 나무의 뿌리와 가지처럼, 공법 간에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손실이라 해도 그동안 힘들게 쌓아 올린 진원을 낭비하는 것은 장호연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진원의 손실은 곧 수명의 낭비와 같았기에 작은 손실이라도 피하는 것이 좋았다.
보고에는 2계 공법도 있었지만 상품 등급에 불과했다.
결국 장호연이 선택한 것은 1계 극품 공법인 오원진결(五元眞訣)이었다.
오원진결은 구원결의 상위 공법으로, 다섯 가지 속성의 기운을 조화롭게 운용하여 진원의 순도와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공법의 품위는 수련 속도와 직결되었다.
어차피 2계에 오르기 전까지는 1계 극품 공법으로 수련하는 것이 더 빠른 성취를 기대할 수 있었다.
장호연은 단순히 높은 단계의 공법을 찾기보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최적의 공법을 선택했다.
'역시 연기 한문이라서 어쩔 수 없나. 일단 공법은 개인적으로 따로 구해봐야겠어.'
축기기에 오른 뒤 수련을 이어 나가려면 오원진결만으로는 부족했다.
백월장가에는 장호연의 마음에 차는 공법이 없었다.
결국 수행을 위해서는 백월장가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장호연은 옥간을 미간에 댄 상태로 계속해서 정보를 살펴봤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구련금신결(九鍊金身訣).'
3계 연체공법인 구련금신결은 총 9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문이 보관하고 있는 건 5층까지였다.
구련금신결의 잔본은 2계 극품으로 분류되며, 대성할 시 2계 중기 요수 수준의 육체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보신 능력이 탁월하여 방어력만큼은 2계 후기 요수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구련금신결을 발견한 장호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체공법은 자원 투자량에 따라 수련 속도가 정해진다.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게 된 만큼, 이제 장호연은 떳떳하게 연체술의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연기 공법과 달리 연체공법은 공법을 교체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을목양장결을 수련하면 1계 후기 요수 중 뛰어난 회복력을 지니게 되지만, 2계에 올라가면 육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을목양장결의 회복력이 무의미해졌다.
그러니 연체공법은 높은 품계를 골라 익히는 것이 좋았다.
다만 연체공법을 수련할 때도 주의할 점이 있었다.
비전으로 전해지는 연체공법 중에는 진원 외에도 속성기(屬性氣)를 축기하여 술법과 유사한 비술을 펼쳤다.
그렇기에 고계 연체공법을 수련할 때는 어떤 속성을 익힐지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장호연은 구련금신결을 머릿속에 새겨두고 계속해서 옥간을 살펴봤다.
그는 공법에 이어 다양한 술법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익힐 만한 것들을 기억에 담았다.
가문의 역량이 부족한 탓에 보관하고 있는 술법은 대부분 1계였고, 2계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 후, 옥간을 내려놓은 장호연은 미간을 찡그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그는 도장관을 나와 장보감에게 향했다.
"장보감님, 혹시 양혼결은 없습니까?"
장보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양혼결은 축기세가에서도 비전으로 전해지는 보물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가문에는 양혼결이 없구나. 하지만 신식을 잠시 강화할 수 있는 술법은 몇 가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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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혼(魂)의 성장은 신식과 심력을 강화한다.
이는 공법과 기예를 더욱 쉽게 익힐 수 있게 도와줄 뿐만 아니라, 부족한 도심을 굳건히 해 경지를 돌파하는 데 유리했다.
이처럼 놀라운 신통을 지닌 양혼결은 영맥과 마찬가지로 수도세력의 힘과 위상을 나타내는 귀보(貴寶)였다.
'역시나 없구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경지가 높아진다면 언젠가 양혼결을 구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거야. 지금은 수위를 높이고 무력을 강화하는 일에 집중하자.'
양혼결은 수련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품계가 높을수록 수련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사람마다 키가 제각각이듯 영혼의 성장 한계는 개인의 자질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양혼결이 있어도 재능이 없으면 큰 이득을 보기 어려웠다.
장호연은 양혼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에게 양혼결은 신포도와 같았다.
"그러면 신식을 강화해 주는 술법 중에 추천해 주실 만한 게 있습니까?"
"신식 강화술은 자칫하면 영혼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장보감은 몇 가지 술법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장호연은 다시 도장관으로 돌아가 기억해 둔 공법과 술법을 하나씩 열람했다.
술법 중에는 극품 염식술과 파허술 같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비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서 장호연은 기물관으로 향했다.
그의 저물대에는 이미 충분한 숫자의 법기와 부적이 들어 있었기에, 공격이나 방어에 사용할 보물은 딱히 필요치 않았다.
기물관에 대한 정보가 담긴 옥간을 확인하던 그는 순간 눈을 반짝였다.
'은폐 법기!'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신식을 가려주는 법기인 장신주(藏神珠)였다.
준2계 법기인 장신주는 염식술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연기기 후기 수사가 사용할 시 축기기 초기의 파허술까지 방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장호연은 장신주를 챙겼다.
장신주는 메추리알만 한 크기의 둥근 옥구슬로 표면에는 신비로운 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어서 그는 금제와 은폐 능력을 지닌 1계 극품 진법과 공법 수련에 도움을 주는 취령반(聚靈盤)을 챙긴 뒤 기예관으로 향했다.
백월장가의 주 수입원은 영어 양식이다.
그런 만큼 어수술에 관한 뛰어난 전승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2계 어수공법은 어류 영수를 육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것뿐이었기에, 장호연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호연은 2계 어수 전승과 제부 전승을 비롯해, 1계 진법과 연기, 연단 전승까지 열람했다.
제부술을 익히며 경험했듯이, 기예는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기예를 연마하려면 곁에서 지도해줄 사부나 동료가 필요했다.
장호연은 지금 당장 모든 기예를 수련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리 정보를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영약관이었다.
장호연은 영단이나 안신향 같은 수련에 도움이 되는 보물들을 챙겼다.
연체술을 수련할 천재지보를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오행정수보다 못한 것들뿐이었다.
한동안 보고를 둘러보던 장호연은 마지막으로 귀한 서적과 각종 정보가 보관된 보문관(寶文館)을 찾아갔다.
수도계는 상하가 뚜렷한 계층 구조였다.
상위 경지의 정보는 사소한 것이라도 접하기조차 어려웠다.
현재 장호연은 영물에 관한 정보를 찾고 있었다.
금령의 능력을 정확히 알기 위해 상업 구역을 오가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앞으로 다른 영물도 사육할 계획이었기에 영물에 관한 지식은 알아둘수록 좋았다.
장호연은 2계 이상의 영물에 관한 정보가 담긴 옥간을 열람했다.
시중에 떠도는 일반적인 내용과 달리, 옥간에는 지품 혈맥 영물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영물의 종류가 많지 않았고, 용종(龍種) 영수와 같이 귀한 영물은 다루지 않았다.
옥간을 확인하던 그는 수진서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 흥미로운 기색을 드러냈다.
'지품 혈맥을 지닌 수진서는 수납, 은신, 토둔(土遁)에 능하여 염탐이나 절도에 유용하다. 또한, 영초를 잘 찾고 토속성과 목속성을 지녀 영초 재배에도 뛰어난 효율을 보인다.'
수진서는 육체는 약했지만, 머리가 영리하여 토계(土系) 술법에 뛰어났다.
2계로 진화하면 은신술을, 3계에는 토둔술을 펼칠 수 있어 생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삼계 수진서는 주인을 데리고 도주할 수도 있다. 은신술과 토둔술의 상승 효과로 추격에 능하지 않은 원영기 수사를 따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3계 요왕으로 진화한 수진서의 능력은 가히 놀라웠다.
그러나 수진서를 3계로 키우기란 매우 어려웠고, 자연 상태에서 3계 수진서를 발견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수도자들은 전투력이 부족한 수진서를 기를 바에 뛰어난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지닌 다른 영물을 선호했다.
하지만 엘릭서가 있는 장호연에게 수진서를 진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수진서를 성장시키기 가장 좋은 건 영초였지만, 정금은 효율이 조금 떨어질 뿐이지 성장을 촉진하기에 충분했다.
생존을 중시하는 그에게 수진서의 능력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수진서를 삼계로 진화시키면 생존력을 크게 높일 수 있겠어.'
장호연은 금령을 2계로 진화시킨 후 수진서를 성장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후, 장호연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보고를 빠져나왔다.
그는 보고를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영석 1만 개를 챙겼다.
실질적으로 그가 취한 보물은 많지 않았다.
만약 보고가 다른 가문의 것이었다면 저물대가 터지도록 보물을 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보고를 찾을 수 있는 만큼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들만 골라 담았다.
보고를 나서는 장호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장천명은 그런 장호연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구나. 필요한 것은 다 얻었느냐?"
"네, 장로님."
"보고에 있는 보물들은 대략 파악했을 테니, 나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진보당에 요청하거라."
장호연은 장천명과 대화를 나누며 거처로 향했다.
거처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보고에서 얻은 보물들과 앞으로의 수련 계획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거처로 돌아온 장호연은 곧장 연공실로 향했다.
포단(蒲團) 위에 좌정한 그는 정신을 집중해 보고에서 얻은 정보들을 정리했다.
오늘 그가 열람한 정보의 양은 실로 방대했다.
하지만 수도자는 단순히 머리로 정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닌, 신식을 통해 영혼에 정보를 새겨서 저장했다.
신식은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고, 심력은 집중력을 높여 정보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동안 정보들을 정리한 그는 다음으로 오원진결의 구결을 떠올렸다.
술법과 기예를 연마하고 영수를 육성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수도자의 근간은 누가 뭐라 해도 본신의 경지에 있었다.
가문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공법 수련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본래 수도자들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자원을 모으는 데 쓰고 나머지 시간을 수련에 할애해야 했다.
하지만 장호연은 엘릭서 외에도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오로지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반나절 후, 오원진결의 운용 원리를 파악한 장호연은 즉시 수련에 들어갔다.
구결을 읊으며 신식을 집중하자 영근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영력이 인당혈로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기공법은 인당혈 내부에 영기를 끌어모으는 취령진(聚靈陣)을 펼치는 것과 유사했다.
하지만 진법처럼 주변 환경과의 조화가 아닌, 수도자의 영근과 영혼, 진원에 맞게 수련해야 했다.
처음에는 미약하게 일렁이던 영력이 점차 응집되며 별들이 명멸하는 듯한 빛무리를 만들었다.
장호연은 섬세하게 영력을 조절해 도문을 그려나갔다.
극품 공법답게 오원진결을 수련하는 건 녹록지 않았다.
구결 암송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도문이 흩어졌고, 미세한 영력 조절에 실패하면 빛무리가 사라졌다.
장호연은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공법을 수련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뒤.
마침내 인당혈 내부에 도문이 그려진 빛의 장막이 완성되었다.
그 순간, 천지 영기가 그의 인당혈로 빠르게 밀려들었다.
두 시간 후.
오원진결의 수련을 마친 장호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품 영맥이 흐르는 족지의 영기 농도는 운암방시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 덕분에 진원이 연화되는 속도가 운암방시에 있을 때보다 반 배는 더 빨라졌다.
하지만 육영근 수준의 자질로는 수련 속도가 빠르지 않아, 그래 봐야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단순히 현재의 수련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상품 영맥이 흐르는 동부를 빌려 자원을 마음껏 사용하며 수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이라면 그의 재능을 더욱 빠르고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을 터였다.
'십 년이면 연기기 중기까지 경지를 높여도 이상하게 보지 않겠지.'
진원을 배양하는 건 근육을 단련하는 것과 유사했다.
처음에는 영기를 빠르게 연화해 진원을 배양할 수 있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소경계는 시간과 자원만 충분하면 누구나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경계부터는 상황에 따라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
병목 현상은 기본적으로 자질의 부족에 의해 나타났다.
그러나 자질뿐만 아니라 여러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언제든 병목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근기가 아무리 풍부해도 도심이 약하거나 흔들리면 수련에 병목이 찾아왔다.
도심은 자신의 신념과 양심, 도를 향한 향상심과 굳건한 의지를 포괄했다.
흔히들 선도를 길고도 험난한 여정으로 표현한다.
수행은 천지와 도를 겨루며 천지의 기운을 강탈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기나긴 싸움이다.
이는 마치 쥐가 곡식을 갉아 먹고 자기 배를 불리듯, 자신의 대도를 위해 천지의 영기를 빼앗는 일이었다.
수도자의 경지는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높아지지 않았다.
돈오나 대오각성으로 인한 경지의 상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꾸준한 수련을 통해서만 경지를 높일 수 있었다.
'나는 근기가 풍부하니까 병목 현상이 발생할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장호연은 허망한 죽음을 겪고 다시 태어났다.
장생을 향한 그의 열망은 그 무엇보다 강렬했기에 도심 또한 흔들릴 일이 없었다.
경지 돌파에 필요한 시간은 병목 현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대략적으로 추정이 가능했다.
장호연은 병목 현상이 없다는 가정하에 축기기에 오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해 봤다.
일영근의 천재가 외력의 도움 없이 장가연수결 같은 기초 공법으로 수련할 경우, 축기기까지 대략 60년이 걸렸다.
육영근의 자질을 지닌 장호연은 2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좌도공법(左道功法) 중에는 진원을 강탈하거나 정혈을 흡수해 수위를 빠르게 높이는 공법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러한 공법들은 진원을 오염시켜 병목을 일으키거나, 흉살기가 쌓여 마성에 빠지게 만들었다.
장생대도를 목표로 한다면 그러한 사공(邪功)은 멀리하는 것이 옳았다.
장호연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계획했다.
천부적인 영근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자질을 향상시키고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양혼결 또는 영근 속성에 맞는 공법을 수련하거나 후천도체(後天道體)를 얻는 방법이 있었다.
보다 질 좋은 영맥에서 영약과 기물을 사용해 수련 속도를 보조하는 건 기본적인 일이었다.
현재 그의 실력과 위치에서 양혼결이나 후천도체를 얻을 방법은 사실상 전무했다.
하지만 영근 속성에 맞는 공법이라면 재물을 들여 충분히 구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런 공법을 얻기 위해서는 운암방시를 떠나 금단대종이 관리하는 대방시를 찾아가야 했다.
***
장호연이 거처에 머문 지 닷새 후.
그가 정은 광맥을 발견한 일이 가문 전체에 공표되었다.
백월장가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정은 광맥의 발견은 가문의 운명을 바꿀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족지 곳곳에는 흥겨운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장로들은 정은 광산의 채굴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천봉염가와의 협의 끝에, 백월장가를 주축으로 동화오가와 연운벽가가 협력하여 정은 채굴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정은 광산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면 재물을 탐하는 이리 떼들이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일.
이에 따라 운암삼가는 주변 경비와 경계 강화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실제 정은 채굴 작업에는 산수들을 대규모로 모집하여 투입할 예정이며, 운암삼가에서는 소수의 정예 인원을 파견해 감독과 관리 역할만 수행하기로 했다.
광산 개발은 운암삼가에게 간접적인 이득 또한 안겨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정은 채굴을 위한 산수 모집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운암방시를 드나들 것이고, 이는 상권의 활성화와 운암방시의 수입 증가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장호연의 거처에는 그의 공훈을 치하하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장천명이 찾아왔다.
장천명은 희소식이 있다는 말과 함께 격려하듯 장호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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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장호연은 영차를 우려 장천명에게 대접했다.
찻잔을 든 장천명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었겠구나."
"예.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습니다."
"네 덕분에 우리 가문이 고양진 최고의 수도세력이 될 거라며 모두들 기뻐하고 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도록 하거라."
"가문에 보탬이 될 수 있어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장천명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얼마 전 장로회의 중에 너를 가문의 정예 인력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앞으로 가문은 네 수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족지에 머물며 수련에 전념하거라."
장천명의 말에 장호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오로지 수련에만 집중하는 것은 모든 수도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족지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족지에서의 수련은 분명 매력적이었으나 여러모로 행동에 제약이 따를 터였다.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을 지닌 그에게는 방시에서 생활하는 편이 나았다.
"가문의 배려에는 깊이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방시로 돌아가겠습니다."
장천명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째서냐? 정예 인력이 되면 족지의 극품 영맥에서 수련할 수 있지 않느냐."
"수련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제부술에 더 집중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정식 제부사가 될 때까지, 십 년 정도는 은소 고모님께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방시에도 상품 동부가 있으니 자원만 충분하면 수련에 지장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천명은 장호연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방시에서 수련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조치를 해주마. 앞으로 방시의 모든 사업체는 너를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
며칠 후, 장호연은 가문 사람들과 함께 운암방시로 향했다.
주변에는 정은 광산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인원들과 운암방시로 향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족지로 향할 때는 겁수와 요물의 습격을 대비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는 동행이 수십 명에 달했기에, 모두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렀다.
정은 광맥 근처에 이르자 가문 사람들 상당수가 무리에서 갈라졌다.
이후 남은 10여 명의 사람들이 운암방시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몇 시간을 더 이동했을까.
저 멀리 흰 구름으로 모자를 쓰고 있는 운암산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자, 장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후, 장호연은 거의 모든 시간을 운암방시에서 보냈다.
그는 마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방시에 도착한 사람들은 다시 두 무리로 나뉘었다.
장호연 일행은 백월선당으로 향했고, 가문에서 나온 다른 이들은 채굴 작업에 필요한 산수들을 모집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백월선당의 입구에는 휴업을 알리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장운백과 장운천이 아이들과 함께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삼장로님,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호연아, 어서 오너라! 족지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전해 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장운백은 장호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평소 엄격한 모습을 보이던 그였지만, 이례적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숙부들은 장호연이 오는 시간에 맞춰 미리 식사를 준비해 둔 상태였다.
백월선당 식구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영어탕과 영계백숙, 싱싱한 채소와 버섯볶음, 따뜻한 영미밥에서는 군침 도는 향기가 풍겼다.
한창 식사가 이어지던 중.
장운기는 장호연의 활약을 마치 자기 일처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저물대를 챙기고, 절묘하게 광맥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
장운기의 말에 따라 다시 한번 그를 칭찬하는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장호연은 우연히 얻은 성과를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업적처럼 치켜세우는 분위기가 여전히 낯설었다.
그러나 이 세계 사람들은 업과 윤회, 운명을 믿었기에, 이러한 상황 역시 자연스러운 섭리로 받아들였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장호연은 백월선당을 나와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오늘 할 일들을 떠올렸다.
'우선 짐을 챙겨서 고급 주거 구역으로 이사한 다음에 금령에게 정금을 먹이고···.'
족지에 머무는 동안 각성 능력의 사용 횟수가 1회 늘어났다.
하지만 족지에는 외부 침입이나 기운의 이상을 감지하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그는 운암방시에 올 때까지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기다렸다.
즐거운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도착했다.
거처가 있는 골목에 들어선 장호연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지?'
장호연의 이웃인 여중보의 집 문 앞에는 흰 종이로 만든 백등과 고인을 애도하는 글귀가 적힌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채 여중보의 집으로 다가갔다.
대문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쪽이 열려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장호연은 여중보의 아내 강휘령을 마주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한 그녀는 딸 여진희와 함께 상복을 입고 힘없이 앉아 있었다.
강휘령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뺨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장호연은 강휘령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형수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장호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강휘령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장 공자··· 부군께서, 사냥 중에 변을 당하셨어요."
강휘령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변을 당하다니요?"
"살아 돌아온 동료분이 말씀하시길 요수에게 당하셨다고, 그래서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강휘령은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장호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 형. 내게 조심하라 이르더니, 어쩌다 이런 봉변을.'
따지고 보면 장호연과 여중보의 관계는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여중보는 그가 처음으로 교우한 수도자이자 가까운 이웃이었다.
무뚝뚝한 듯 보여도 은근히 정이 많았던 여중보는 장호연에게 먼저 살갑게 말을 걸어왔고 소소한 인정을 베풀기도 했다.
둘은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인간적으로 잘 되기를 빌어줄 만한 그런 사이였다.
장호연은 여중보의 딸 여진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싹싹한 여중보의 성격을 닮아 붙임성이 좋았던 아이는 평소 그를 볼 때마다 배꼽인사를 하며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올해 일곱 살이 된 여진희는 죽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나이였다.
장호연은 두 번의 삶 동안 모두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었다.
그는 여진희가 느꼈을 충격이 얼마나 클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형수님. 힘드시겠지만 진희를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셔야 합니다."
장호연은 강휘령을 위로하며 조의금으로 영석 백 개를 건넸다.
강휘령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건 너무 많습니다. 받을 수 없어요."
"형님과의 우정을 생각해서 드리는 것이니 받아주십시오."
장호연은 강휘령의 손에 영석을 쥐여준 뒤 위패 앞으로 걸어가 향을 피웠다.
분향을 마친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여중보의 집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장호연은 집 안에 들여놓았던 세간살이를 모두 저물대에 담았다.
그는 1년 동안 정들었던 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대문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오자 여중보의 집 앞에 걸린 백등이 다시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백월거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호연이 백월선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이.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은 정은 광산에서 일할 산수들을 모으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새 방시 곳곳에는 광부를 모집하는 방문이 붙어 있었다.
장호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방문을 살펴봤다.
'숙식 제공, 급여 오 할 인상, 삼원결 수련자 우대.'
1계 하품 연기공법인 삼원결은 백월장가의 가전공법이다.
그러나 영석 백 개만 있으면 누구나 백월장가의 상점에서 삼원결을 구매할 수 있었다.
영석 백 개는 연기기 1층 수사가 1년 정도만 노력하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1계 하품 공법의 가격이 이처럼 낮은 이유는, 그것이 산수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상품이기 때문이었다.
삼원결로 수련한 진원을 온전히 보전하려면 중품 공법인 구원결을 익혀야 한다.
구원결을 구매하려면 수천 개의 영석이 필요했다.
이는 연기기 1층 수사가 10년을 노력해도 벌기 어려운 거금이었다.
가문이나 종문에서는 산수들을 외원 소속이나 외문 제자로 받아들인 후 중품 공법을 전수해 주었다.
연기기 1층 산수가 백월장가의 외원에 소속된다면 구원결을 무료로 얻어 10년 이상의 세월을 절약하게 되는 셈이었다.
결국, 수도세력이 하품 공법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건 그들을 대신해 궂은일을 해줄 산수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큰 나무 기대어 안정을 찾고 싶은 산수들과 인력이 필요한 수도세력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였다.
장호연이 방문을 살펴보고 있을 때.
그의 뒤에 있던 두 명의 수사가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급여도 넉넉하고, 장기간 근무하면 외원 소속이 될 수 있다라. 이거 아주 경사로구만."
"삼원결을 익힌 사람들을 우대한다니까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지."
"그런데 광산을 개발하는 거면 수익이 장난 아니겠는데?"
"내가 예전에 백월호를 한 번 지나가다 봤는데, 호수에 영험한 기운이 감돌더라고. 그때부터 백월장가가 크게 흥하겠구나 싶었지."
방문을 보고 기뻐하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고수익의 안전한 일거리가 생겼다는 소식에 들뜬 분위기였다.
조금 전 여중보의 죽음에 애통함을 느꼈던 그는 광부 모집으로 활기를 띠는 방시의 모습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백월거원에 도착한 장호연은 원장인 장운철을 찾아가 먼저 인사를 올렸다.
장운철은 장호연이 정은 광맥을 발견한 것을 크게 칭찬하며, 장호준에게 그가 집을 구하는 것을 도와주도록 지시했다.
고급 주택은 장호연이 족지에서 머물던 가옥보다 더 큰 규모로, 혼자 살기에는 과하게 훌륭한 곳이었다.
그는 상업 구역과 가까운 집을 골라 계약을 체결했다.
비용은 당연히 무료였다.
장호연은 원래 머물던 집의 거주 영패를 반납하고 새로운 영패를 받았다.
계약을 마치자 장호준이 말했다.
"호연아, 혹시 일할 사람이 필요하면 내가 사람을 좀 알아봐 줄까? 집이 넓으니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 할 거야. 이 구역에 사는 사람 중에 하인이나 시녀를 두지 않은 사람은 없을걸?"
"하인이요?"
"응. 범인을 들일 거면 두세 명은 필요할 테고, 아니면 산수 중에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던가. 너는 자금에 여유가 있으니까 가능하면 수도자를 들이는 게 좋을 거야. 범인은 청소하는 것도 영 미덥지 않고, 영차도 하나 못 끓이잖아. 가장 좋은 건 약선술을 익힌 아름다운 여수를 시녀로 들이는 거지. 그러면 맛있는 밥도 먹고, 밤에 적적할 일도 없을 테고."
약선술이라는 말에 장호연은 문득 강휘령이 떠올랐다.
강휘령은 음식 솜씨가 뛰어나며 여중보의 벌이가 넉넉지 않음에도 살림을 알뜰하게 꾸렸다.
어차피 사람을 쓸 거라면 낯선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좋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마침 지인 중에 적당한 분이 있어서 소개는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장호연은 장호준과 헤어진 뒤 곧장 강휘령을 찾아갔다.
강휘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온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호연은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장호연은 자신이 고급 주거 구역으로 이사할 것이며,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만약 형수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월급으로 영석 서른 개를 드리겠습니다."
강휘령은 너무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영석 30개는 그녀가 일해서 벌 수 있는 평균적인 금액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의 제안은 숙식이 제공될 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도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고급 주거 구역은 상품 영맥이 흐르기에 딸의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장 공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강휘령은 남편을 잃은 슬픔과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한 막막함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장호연은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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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장호연은 강휘령의 동의를 얻은 뒤 새집으로 돌아갔다.
강휘령은 여중보의 장례를 마친 후에 그를 찾아오기로 했다.
새집에 도착한 장호연은 가장 먼저 이전에 사용하던 세간살이들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집이 워낙 넓은 탓에 휑한 기운이 감돌았다.
'집안 살림은 형수님에게 맡기면 되겠지.'
그는 강휘령에게 일정량의 영석을 주고 집안을 알아서 관리하게 할 생각이었다.
살림에 관심 없는 자신이 나서는 것보다 강휘령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장호연은 주택의 결계를 작동하고 연공실로 향했다.
연공실에 들어선 그는 두 개의 은폐진을 설치한 뒤 한쪽에 놓인 포단 위에 앉았다.
그의 손이 영수대를 스치자 영광이 번뜩이며 금령과 수진서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금령은 기쁜 감정을 전하며 장호연의 옆으로 다가왔다.
수진서는 금령을 보고 겁에 질린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장호연은 잠시 금령을 쓰다듬으며 교감을 나누었다.
이어서 그는 엘릭서를 생성해 정철을 정금으로 변환시켰다.
정금의 기운을 느낀 금령은 기쁜 감정을 전하며 맑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때.
금령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이어서 상대를 위협하듯 날개를 활짝 펼치며 목덜미 깃털을 세웠다.
금령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수진서가 넋을 잃은 듯 입을 벌린 채 천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수진서는 영광보다 영초를 선호했다.
하지만 정금은 금은보화를 먹고 성장하는 요물들에게 호불호가 없는 귀한 보물이었다.
장호연은 금령을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내 날개를 접은 금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진서를 노려봤다.
영력이 실린 금령의 울음소리에 수진서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떨며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동시에 수진서는 입안에서 작은 정은 광석을 뱉어내더니, 아첨하듯 앞발을 비비며 짧은 꼬리를 흔들었다.
장호연은 수진서의 행동이 우스워서 뭘 어떻게 더 할지 조용히 지켜봤다.
그러자 수진서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정은 광석 한 조각을 또 꺼냈다.
"이 녀석, 뱃속에 뭘 그렇게 많이 숨겨 놓은 거야?"
장호연은 수진서를 본격적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말을 가르칠 생각으로 신식을 통해 의식을 전하며 입으로도 소리 내어 말했다.
수진서는 장호연이 또 정은을 달라고 하는 줄 알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됐다. 네 곳간을 털어갈 생각은 없으니까 정은은 넣어둬."
장호연의 말에 수진서는 기쁜 얼굴로 정은을 도로 삼켰다.
수진서의 천부신통은 혈맥의 발현도와 경지에 따라 달라졌다.
중품 혈맥의 1계 중기 수진서가 보관할 수 있는 물품의 양은 자기 몸보다 조금 큰 정도일 것이다.
엘릭서의 연금 능력에 가문의 지원까지 받게 된 장호연은 더 이상 재물이 부족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물에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정 급한 상황이라면 수진서의 주머니를 열어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도 이름을 지어줘야 할 텐데."
장호연은 수진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수진서는 긴장한 듯 앞발을 핥으며 꼼꼼하게 털을 골랐다.
곧이어 장호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앞으로 너를 백호(白毫)라 부르마."
백호는 희고 부드러운 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름의 의미를 이해한 백호는 만족스러운 감정을 전해왔다.
백호를 안심시킨 장호연은 금령에게 정금을 하나씩 먹이기 시작했다.
경지가 높아진 금령은 이전보다 정금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몇 배로 늘어났다.
얼마 후, 정금 열여섯 냥을 먹은 금령은 졸린 듯 고개를 떨구며 잠에 빠져 들었다.
장호연은 금령을 영수대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백호가 신이 난 듯 장호연에게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정금을 얻어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금령을 2계로 진화시키려면 새로 만든 정금의 대부분을 사용해야 했기에 백호에게는 줄 것이 없었다.
장호연은 백호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신식으로 전달했다.
영특한 백호는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뜻은 알아들었다.
곧이어 장호연은 백호마저 영수대로 들여보낸 뒤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저물대를 두드리자 극품 안신향이 꽂혀 있는 향로와 검은색 영목(靈木)으로 만들어진 원반이 나타났다.
원반 표면에는 정금으로 그려 넣은 복잡한 진문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원반은 그가 보고에서 가져온 취령반으로, 주변의 영기를 끌어모아 수련 속도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취령반의 기보(器譜)는 매우 귀하게 여겨지며, 금단대종 같은 상위 세력에서나 비전으로 전해졌다.
보고에 있던 취령반은 1계 하품 법기로, 영기의 연화 속도를 본래보다 5할 높여줬다.
장호연은 오행술을 응용해 안신향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취령반을 작동시키자 은은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의 영기가 소용돌이치듯 모여들었다.
***
새집으로 이사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되었다.
장호연은 새벽부터 연공실에 들어가 오원진결과 구련금신결을 수련했다.
수련을 마친 그는 진법을 거둬들인 후 포단에서 일어났다.
고급 주택답게 연공실에는 외부의 신식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일정한 방어력을 지닌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매번 잊지 않고 자신이 보유한 진법을 설치한 후 수련에 임했다.
연공실을 나선 장호연은 천천히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강휘령에게 다른 곳은 괜찮지만 연공실 주변에는 가까이 오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수련할 때 진법을 설치할 것이기에 큰 상관은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미리 주의를 준 것이었다.
그래서 연공실 주변에는 강휘령과 여진희 모두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동안 장호연은 새집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그는 수련 이외에 다른 곳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강휘령에게 따로 영석을 주고 자신이 먹을 식재료나 수련에 필요한 자원 등을 구매해 오게 시켰다.
영미나 요수 고기, 안신향 같은 것들은 가격이 일정하게 형성되어 있었기에 강휘령에게 맡겨도 문제없었다.
강휘령이 청소와 음식, 정원 관리까지 잡다한 일을 모두 해주는 덕분에 그는 더없이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장호연은 강휘령을 고용한 것에 매우 만족했다.
정원에 들어서자 한쪽에 연잎을 띄운 연못과 아담한 정자가 눈에 띄었다.
가산(假山)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줄기는 청량한 소리를 내며 연못으로 이어졌다.
담벼락을 따라 심어진 나무들이 외부 시선을 차단해 아늑함을 더했다.
연못가에는 여진희가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며 놀고 있었다.
"숙부님!"
여진희는 장호연을 발견하고 해맑은 얼굴로 그에게 달려왔다.
장호연은 연공실에서 수련을 마친 후 정원에 나와 술법을 연습하곤 했다.
그때마다 여진희는 정원에서 그를 기다렸다.
"진희야. 오늘도 잉어 구경을 하고 있었구나."
"네, 숙부님. 잉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저도 나중에 수도자가 되면 꼭 잉어처럼 헤엄쳐 보고 싶어요."
몸이 약하고 체온이 낮은 여진희는 태어나서 한 번도 수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 네 자질이면 머지않아 선도에 오를 수 있을 거야."
장호연은 부드럽게 여진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진희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장호연을 올려다봤다.
장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백호를 꺼내 여진희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숙부님!"
여진희는 백호를 품에 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수진서는 나름 귀한 영수이긴 하지만 밖에 내놓아도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더욱이 백호가 2계로 진화하면 은신 신통을 각성할 터라 진짜 경지가 들킬 위험도 매우 적었다.
그래서 장호연은 미리 백호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익숙해지도록 할 생각이었다.
장호연은 여진희와 백호가 노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원의 넓이는 수백 평에 달했기에 술법을 연습할 공간은 충분했다.
장호연은 정신을 집중해 오행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오행술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연기기 수사의 무력은 대부분 법기와 부적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법은 보조적인 역할, 또는 제한적인 상황에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범용성이 높고 시전 속도가 빠른 오행술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행술과 오행부를 함께 연습하면 상승작용을 일으켜 수련 효율을 더욱 높일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장호연이 손을 뻗자 붉은 불꽃이 피어올라 허공으로 솟구쳤다.
불꽃은 맹렬한 기세를 품은 작은 화구로 변했다.
그가 다시 손을 휘젓자 이번에는 투명한 물줄기가 화살이 되어 화구로 날아갔다.
쿠쿵!
화구와 수전이 충돌했지만 폭발은 그리 크지 않았다.
술법 연습의 목적은 숙련도를 높이는 데 있었기에, 그는 원래 위력의 1할도 되지 않는 힘으로 술법을 펼치고 있었다.
장호연이 술법 연습에 매진하는 사이.
여진희는 백호를 품에 안고 멀찍이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장호연은 세상 그 누구보다 멋지고 듬직한 존재였다.
'역시 장 숙부님! 정말 대단하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여진희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여진희는 아버지가 그토록 자주 사냥을 나갔던 이유가 자신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은 어린 여진희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컸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혀 마음의 문을 닫은 여진희는 장호연과 살게 되면서 빠르게 예전 모습을 되찾아 갔다.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던 강휘령은 더는 슬퍼하지 않고, 여진희를 보살피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강휘령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여진희는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 문득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그러나 든든한 장호연과 귀여운 백호 덕분에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강휘령은 여진희에게 장호연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연일 당부했다.
원래 아픈 상처를 겪은 아이일수록 철이 빨리 드는 법이다.
여진희는 굳이 강휘령이 말하지 않아도 장호연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자신이 수도자가 되면 많은 영석을 벌어서 장호연에게 더 크고 좋은 집과 맛있는 음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장호연이 수련하는 사이 어느덧 해가 중천에 이르렀다.
수련을 마친 그는 여진희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장 소야(少爺)."
강휘령은 장호연의 집에서 일하게 된 후로 공경의 의미를 담아 그를 소야라 불렀다.
"형수님 덕분에 요즘 식사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음식이 입에 맞으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강휘령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장호연을 바라봤다.
일찌감치 수련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택한 그녀는 연기기 1층에 불과한 실력에 이렇다 할 재주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흔한 약초를 다루고 간단한 영선을 조리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선도에 욕심이 없다면 속세로 나가 살아도 되지만 그녀에게는 아픈 딸이 있었다.
딸의 건강과 미래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방시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수도계에서는 가족이나 동문이 아니면 정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장호연과의 인연은 옆집에 살며 몇 번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크나큰 은혜를 입게 되자 강휘령은 뭐라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곧이어 셋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장호연의 앞에는 요수 고기와 그 외 다양한 요리가, 강휘령 모녀의 앞에는 그에 비해 소박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장호연이 먹는 음식 재료들은 영석 수십 개를 호가하는 귀한 것들이었다.
그에 비해 모녀의 음식은 질이 상당히 떨어졌다.
하지만 여진희는 반찬을 집어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이 버섯볶음 완전 맛있어!"
"우리 딸, 많이 먹어."
장호연은 소박한 음식에도 저리 행복해하는 모녀를 보니 잠시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녀에게 충분한 호의를 베푼 터였다.
인연이 닿아 함께 생활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결국 가족이 아닌 고용주와 고용인이었다.
평생을 책임질 생각이 아닌 이상,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휘령 모녀가 먹는 음식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는 건 장호연이 주는 월급으로도 충분했다.
거기에 더해 장호연은 영미밥만큼은 함께 지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귀한 영미밥을 매일 두 끼씩 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족한 삶이었다.
* * *
식사를 마친 장호연은 집을 나섰다.
그는 현재 가문의 운영과 관련된 아무런 업무도 맡고 있지 않았다.
정예 인력의 업무는 오로지 수련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장은소에게 제부술을 배우기 위해 며칠에 한 번씩은 꾸준히 부당을 찾아갔다.
상업 구역에 도착한 장호연은 방문을 붙이는 벽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정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광경을 종종 보았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2계 제부사가 운암방시로 온단 말이오?"
"석 달 후에 제자를 뽑는 시험을 치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제부술을 몰라도 재능만 있으면 제자로 받아준다고 하니, 우리 같은 산수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장호연은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벽에 붙은 방문을 확인했다.
첫 문장은 제부대사(制符大師) 고장풍이 여생을 보내고자 이곳 운암방시에 터를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뒤에 이어지는 시험에 관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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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석 달 뒤, 고장풍의 관문제자(關門弟子)를 뽑는 시험이 열릴 예정이었다.
나이가 마흔 살 미만이고 좌도수사(左道修士)만 아니면, 신분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시험에 참여가 가능했다.
다만 이는 인연을 찾는 일이었기에, 적합한 인재를 만나지 못하면 제자를 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장호연이 방문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었다.
"허허, 제부대사라니! 내가 젊었을 적 영석만 충분했어도 부도를 수련해 한자리 차지했을 텐데. 고 대사께서 이십 년만 일찍 오셨으면 좋았으련만. 큰 기회를 놓쳤구만."
"흥! 최 형, 되지도 않을 소리 그만하시게. 정식 제부사가 영석만 있다고 되는 줄 아시오?"
"운암방시는 그저 소방시에 불과한데 제부대사가 머물기로 했다니. 놀라운 일일세."
"그러게 말이오. 정은 광산이 발견된 것도 그렇고. 이러다가 고양진에 용맥(龍脈)이라도 드리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장호연 역시 설레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현재 백월장가에는 2계 제부사가 없었다.
오장로 장천수가 2계 하품 부적을 제작할 수는 있었지만, 성공률이 5할에도 미치지 못해 부적을 만들 때마다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제부술 전승마저 그리 특출나지 않았다.
가문의 2계 고위 부적은 옥순부(玉盾符), 벽전부(霹電符), 빙침부(氷針符)가 전부였으며, 이들의 가치는 고위 부적 중 중간 정도에 머물렀다.
'제부대사라면 분명 뛰어난 전승을 지녔겠지? 게다가 인맥도 상당할 테고.'
선도는 결코 홀로 걸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지녔다 한들 든든한 인맥이나 배경이 없다면 귀한 보물을 구하기는커녕 가진 것마저 빼앗길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제부대사라면 그 인맥이 결코 적지 않을 터.
만약 고장풍의 관문제자가 될 수 있다면 훗날 자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장호연은 방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눈에 새긴 후 부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당에 도착한 그는 손님을 응대 중인 장소설과 눈인사를 한 후 사택으로 향했다.
그는 장은소를 만난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제부대사에 관해 물었다.
"고모님, 혹시 들으셨습니까? 방금 방문을 보고 오는 길인데, 고장풍이라는 제부대사께서 방시에 정착하신다고 합니다."
장은소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방문이 붙은 터라 이미 알고 있단다."
"그분의 고향이 이곳이라던데.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고 부사께서는 나보다 한 배분 위의 선배님이라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다만, 오장로님께 듣기로 백 년 전 회양부를 떠들썩하게 했던 분이라고 하시더구나."
장은소는 차분한 목소리로 고장풍의 과거에 관해 설명했다.
"산수 출신인 고 부사께서는 부도에 천부적인 재능은 물론이고, 수련 재능 또한 뛰어나 백 살이 되기 전에 축기기에 오르셨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고 부사께서 머지않아 삼계 제부사가 될 것이라 입을 모았다더구나.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회양부를 넘어서까지 전해질 정도였다지."
고장풍이 축기기에 오르고 한창 명성을 떨치던 그때.
불행히도 그는 금단대종인 삼라종의 진전제자와 악연으로 얽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산수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대종문의 진전제자를 어찌 당해낼 수 있었겠느냐. 결국 그 싸움으로 인해 영근이 크게 손상되었고, 애써 쌓아 올린 축기기의 기반마저 무너져 연기기로 경지가 떨어지고 말았다."
도기(道基)가 무너진 후, 고장풍은 예전의 경지를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손상된 도기를 다시 세우려면 적어도 의술에 정통한 금단기 고수가 나서야 한다.
배경도 없는 산수가 무슨 방법으로 금단기 고수의 도움을 구할 수 있겠는가.
"너도 알다시피 축기진인의 수명은 오백 년에 달한다. 그런데 아직 삼백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여생을 보낼 곳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는 건, 아마도 도기가 무너지면서 근기까지 크게 손실되었다는 뜻이겠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안타깝게 됐네요."
연기기 수도자의 영혼은 영근에 안착한 상태이다.
축기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정(精), 기(氣), 신(神)에 해당하는 영근, 진원, 영혼을 합일해 도기를 구축해야 한다.
도기를 만들고 금단을 응축하는 것처럼 대경계를 돌파하는 행위는 단순히 기존의 기반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확장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기반이 아무리 두텁다 하더라도 경지 돌파의 촉매가 되어줄 영약의 도움이 필요했다.
축기기 돌파의 주약(主藥)인 축기단(築基丹)은 금단대종 이상의 대세력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배경이 없는 산수가 축기기에 오르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도 고장풍은 큰 기연을 얻어 축기기에 오를 수 있었을 터.
그런 인물이 금단대종 제자의 눈 밖에 나 선도의 길이 끊어지게 되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장생대도를 이루려면 대세력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방법뿐인가?'
고장풍의 재능을 감안할 때.
만약 그가 금단대종의 제자였다면 부상을 회복하고 다시 한번 대도를 걸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그렇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대세력끼리는 서로의 체면을 봐주는 것이 관례이니 말이다.
장호연은 상념을 멈추고 진지한 목소리로 장은소에게 질문했다.
"고모님, 그런데 저도 그 시험에 참여해 보려 합니다. 혹시 제가 고 부사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가문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요?"
장은소는 화색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가문에 속한 것과 별도로 사부를 모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니 걱정할 것 없다. 이계 이상의 전승은 문외불출의 비전으로 여겨지기에, 만약 사부가 다른 수도세력에 속해 있다면 조금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고 부사께서는 산수 출신이시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장은소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실은 오장로님과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문에서도 고 부사님을 객경(客卿)으로 모시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네가 제자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인연을 빌어 고 부사님을 가문의 객경 장로로 모실 수도 있지 않겠느냐. 가문 차원에서도 큰 경사라 할 수 있지."
장호연은 가문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풍은 수도계에 별다른 연고가 없다.
그를 객경으로 모셔 정성을 다한다면 그의 제부 전승이 자연스레 백월장가의 것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장은소가 그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면 2계 제부사에 오를 확률이 또한 대폭 상승할 터였다.
"가문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호연이 너의 재능은 나보다 뛰어나다. 너라면 고 부사님의 제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니 자신감을 가지거라. 듣자 하니 호문이와 소설이도 참여할 생각이라고 하더구나. 함께 열심히 해보거라."
장은소는 장호연을 격려했다.
장호연은 겸손하게 미소 지은 뒤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시험은 어떻게 치러질까요?"
고장풍이 제자를 뽑는 기준은 제부술 실력이 아닌 부도에 대한 재능이었다.
"재능을 확인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일반적이다. 첫 번째는 부문에 담긴 영력의 변화를 얼마나 감지해 내는지를 보는 것이지.
네가 처음 오장로님을 찾아갔을 때 소명부의 영력 변화를 시험했던 것을 기억할 게다. 이를 보통 영기변별이라 부르는데, 같은 경지라 할지라도 타고난 영각의 예리함에 따라 감지할 수 있는 변화의 수가 달라진단다."
"그런 방식이면 경지에 관계없이 재능을 확인해 볼 수 있겠네요."
"그렇지. 하지만 영기변별만으로는 재능의 일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영각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결국 대도법칙을 이해하는 오성이 부족하면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지. 그래서 오성을 확인하기 위해 부문이 품고 있는 기운의 진의와 특성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지를 시험하는데, 이를 진의통찰이라 부른다."
장은소는 예를 들어 설명해 주었다.
"같은 수속성 기운을 품은 부문이라도, 거칠게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격류의 수기와 조용히 생명을 적시는 이슬의 수기는 그 본질적인 성질과 운용이 전혀 다르지 않겠느냐? 오성이 뛰어난 이들은 이러한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그 진의를 꿰뚫어 볼 수 있단다. 사실 진의통찰이야말로 고계 제부사의 자질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지."
부적의 품계가 높아질수록 재료의 가치는 급격히 상승하고 구하기 또한 어려워진다.
연습으로 부족한 오성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는 있지만, 값비싼 재료를 계속 소모해야 하므로 재물이 무한하지 않다면 결국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었다.
결국 대도법칙을 꿰뚫는 오성이야말로 제부사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은소의 설명을 들은 장호연은 내심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강력한 신식 덕분에 영기변별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오성에 있어서 스스로 평범한 수준이라 여겼기에 진의통찰에는 큰 자신이 없었다.
물론 연기기 후기 수준의 신식을 지닌 만큼, 실제로는 같은 경지의 수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오성을 지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천재로 보일 수준은 아닐 터였다.
'영기변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다면, 진의통찰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좋게 봐주지 않을까.'
장호연은 시험이 치러지기 전까지 무엇보다 제부술을 수련하는 데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어서 두 사람은 제부술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장호연의 날카로운 견해를 들은 장은소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최근 들어 부문에 대한 이해가 부쩍 늘었구나. 정말이지 이 속도라면, 삼십 년 안에 상품 제부사가 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단순히 재능만 놓고 보면 너는 천재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일반적으로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상품 제부사가 되기까지 20년 정도가 걸렸다.
장은소는 열 살에 선도에 올라 40여 년을 노력한 끝에 상품 제부사가 되었다.
그녀의 성장 속도는 수재로 불리는 수준이었다.
"전부 고모님의 가르침과 가문의 지원 덕분입니다."
최근 장호연은 가문으로부터 다량의 제부 도구를 지원받아 밤낮없이 제부술 연습에 매진했다.
값비싼 제부 도구를 사용해 연습하는 것은 평범한 문구로 연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련 효율이 높았다.
거기에 제부술에 조예가 깊은 장은소의 맞춤 지도까지 더해지니, 그의 실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 중이었다.
"가문의 지원도 무시할 수 없지만, 너처럼 빠르게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결국 타고난 재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금강부의 제작 성공률마저 이 할을 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정말 놀라운 속도다."
현재 장호연은 오행부뿐만 아니라 금강부를 포함하여 1계 부적 중에서도 상급 난이도로 분류되는 여러 고위 부적들까지 연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부에는 금강부의 제작 성공률을 2할이라고 알렸지만, 실제로는 3할을 넘어 4할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오행부의 경우 오행술과 병행하여 꾸준히 연습한 덕분에 제작 성공률이 8할에 육박했다.
이는 부도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이들보다도 빠른 성장 속도였다.
다음날, 장호연은 오행부를 비롯해 팔대속성에 속하는 소뢰부(小雷符)와 풍격부(風格符), 빙벽부(氷壁符)를 함께 연습했다.
이 여덟 가지 부적은 팔대속성을 대표하는 기초적인 부적으로, 대도법칙의 진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장호연이 수련에 매진하는 사이.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새 석 달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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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